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제120호)
김기태의 즐거운 시민들
세계의 규칙을 다시 묻는 전환기의 화자들
김기태의 화자들은 사회문화적 권력에 민감하면서도 동시에 둔감하다. 그들은 규범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예민하게 파악하고 의문을 품는다는 점에 서 예민하지만, 그 규범과 불화하며 이탈하기보다는 이질감을 품고서도 그 미시 적 중력장 안에서 살아가는 데 어느 정도 적응했다는 점에서 무던하기도 하다. 「전조등」은 제목처럼 김기태의 인물들이 선 출발선을 비추고 있다. “더러운 것을 함부로 만지면 안 된다는 부모의 말을 떠올”(81쪽)리듯 그들은 규범과의 거리 감 각을 통해 자기를 인식한다. 농협 창구원과 공무원인 부모에게 절대 “남들에게 흉을 잡힐 만한 일”(82쪽)을 하면 안 된다는 교육을 받으며 자랐기에, 어린 시절 부터 “이미 그는 주의해야 할 일들이 적힌 긴 목록을 갖고 있었다”(81쪽). 그렇다 고 소설이 부권적 금기에 저항하면서 뒤틀리는 욕망의 파토스에 관심을 두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규범을 당연한 환경으로 간주하며 자랐으면서 도, 그 물리적 조건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해내는 거리 감각이 출현한다는 역설 이다. 그는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성실히 공부해 중상위권 대학에 들어가고 대 기업에서 무난한 직장생활을 유지하고 결혼 적령기에 결혼하는 인물이다. 그런 데 소설의 화자로서 그가 주로 하는 일은 자기 삶에 대한 주변의 평가를 ‘수집’ 하는 일이다. 그는 자신을 주변과 비교하고 동료의 평가를 귀담아들은 덕분에 표준적인 중산계급 가족 모델에 충실하게 살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하지 만 그때마다 어떤 생각을 자꾸 밀어낸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자기다운 게 뭔 지 생각하다 자기답게 사는 게 지겨워졌다.”(90쪽) 자동차 전조등에 알 수 없는 무엇인가 부딪히는 소설 속 파열음처럼, 표준적 규범이 주는 안정감과 자기다운 삶에 대한 궁금증 사이의 충돌이 김기태의 소설에 메아리친다.
「세상 모든 바다」의 화자도 규범적 남성의 성장 모델과 재일 조선인 남성 청소년인 자신의 현 위치를 면밀하게 비교하고 사회문화적 취향을 조정하면서 성장한다. 「롤링 선더 러브」의 화자는 연애와 결혼의 표준적 모델을 형성하며 여 성 청년의 조바심을 부추기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복판으로 뛰어들어가 작은 소동을 벌인다. 이처럼 규범적 삶에 대한 적응-의혹을 오가는 양가적 태도야말 로 김기태 소설 속 초점 화자의 공통점이다. 한국(혹은 동아시아)사회 특유의 계 급적, 이성애-젠더적, 가족주의적 생애 규범이 주조하는 주체의 형상을 정확하 게 탐지하는 그들은 기성 규범이 자신을 포함한 세대적·젠더적 집단의 현실을 더는 충분히 포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지만, 그렇다고 이를 갱신할 새로운 시대/계급 의식을 정초하지는 못한다. 소설적 정념과 자아도취로 이 규 범을 내파할 예술가형 인물형도 아니기에 그들은 그 중력장에서 완전히 탈주하 지는 못한 채로 다만 어느 정도 서술적 거리를 두고 공전한다. 그래서 소설은 액 자식 구성으로 규범과 그에 대한 의혹 사이의 괴리를 고스란히 담곤 한다. 역사 적 변화를 감지하는 데 특화된 사적유물론적 비평을 새삼스럽게 환기하자면, (지성에 따른) 행동과 (감성이 주조한) 내면의 괴리로부터 시대정신의 잉여/균열 을 드러내는 전환기의 인간형을 떠올리기 어렵지 않다. 1)
공통 언어가 없는 시대의 앎의 원리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간극이 생긴 것이란 말인가. 「팍스 아토미 카」는 합리적 개인의 이성으로는 더는 감당할 수 없이 복잡해진 세계를 그 원 인으로 짚고 있다. 이제 인간은 지구를 이차원적 평면인 지각地殼으로 생각하며 안심하고 딛고 서 있을 수 없다. 자신이 속한 세계를 (기후, 물류, 경제, 정치, 무기, 핵-원자 에너지……의 출렁임이 모든 공간적 경계는 물론 시간까지 넘나드는) 중층적 ‘네트워크’로 이해해야 하는 인류세의 지각知覺 구조 때문이다. 언뜻 보기에 소 설은 주변 세계가 언제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지 모른다는 강박 때문에 주변의 모든 정보를 재확인해야만 일상을 가까스로 살 수 있는 경증 망상장애 환자의 일지처럼 보인다. 그의 불안은 단순히 문단속을 수십 번 확인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매일 밤 “위키피디아의 링크를 타고 다”(284쪽)니면서 종말에 대한 파편적인 정보들을 수집하는 데 여념이 없다. 지구 종말을 경고하는 과학자들 의 시계는 자정 구십 초 전을 가리키고, 민주주의의 최정상에 있다는 미국에서 는 트럼프가 재선을 앞두고 있고, 핵전쟁을 막기 위한 과학자들의 노력이 허무 하게도 전쟁이 반복되는 이 세계에 대한 정보를 ‘연결’하면서 그는 동시대를 이 렇게 정의한다.
상호확증파괴 원리에 따라 핵무기를 보유한 강대국 그리고 그들의 동맹국 사이 에 전면적인 무력 충돌은 극히 어려워졌다. 물론 수단, 예멘, 아프가니스탄…… 또 는 레반트 지역의 사정은 다르지만, 혹자는 지난 만 년 동안 인간은 모두 전사거 나 전사의 유족으로 살았고, 20세기 전반에는 두 번의 총력전으로 팔천오백만 명 이상이 사망했음을 상기시킨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 ‘문명국가’의 다수 시민은 화 요일 밤에는 실시간 중계되는 가자 지구의 화염을 보고 목요일 정오에는 총기 난 사범의 프로필을 듣더라도 일요일 오전에는 애인에게 단검이 아니라 커피와 토스 트를 건넬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차세계대전을 끝낸 폭발 이후 현재까지의 시대를 핵에 의한 평화, 즉 ‘팍스 아토미카Pax Atomica’라 부르기도 한다.(292쪽)
과잉 연결(하이퍼링크)되었기에 도리어 과소하게 연결된 인류는 평화로운 전시戰時라는 역설적 조합을 아무렇지 않게 동시대(성)의 기본값으로 삼는다. 지 구상의 모든 정보를 수집, 저장함으로써 근대적 교양의 표준 규범을 구축했던 ‘백과전서파’를 본받는 화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제 지식은 그저 다른 링크 로 미끄러져 사라질 뿐이다. 그러니 “원인을 지목하는 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275쪽). 아니 그전에, 가능은 한가.
서로 못 본 체하면서도 와글거리는 것들 사이에 비어 있는 곳, 공중에 이어진 거미 줄, 가로등 불빛에 반짝인 한 토막의 실선을 봤다. 걷다보면 살갗에 감겼다. 눈을 크게 뜨면 거미줄의 무늬가 보일 듯했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 점과 점, 선과 선의 패턴을 포착할 수 없었다. 포착할 수 없다면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손을 뻗어 휘저으면, 아무것도 없었다.(290쪽)
앎의 매체와 앎의 형식을 모두 붙잡을 수 없는 세계에서 (기존처럼) “정 상적인 사고라는 말은 무섭다”(269쪽). 자신이 어떤 거대한 연결-네트워크를 보 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 정체를 파악할 수도 자신과의 관계를 제대로 설명할 수도 없다는 외경심은 김기태의 화자가 반복적으로 마주하는 감정이다. 이는 세계와 자신 사이의 간극과 괴리를 종합하고 지양함으로써 지적으로, 윤 리적으로 도약하던 근대적 앎의 체계가 더는 불가능하다는 발견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두려움에 압도되지 않는 김기태의 화자들은 비약적 상상력이나 멋부 린 허무주의로 향하지 않고 세계와 자기 사이를 매개할 언어를 성실히 찾는다. 다만 세계를 붙잡아 고정하는 근대적 합리성으로는 언어를 확보할 수 없기에, 구체적으로 실감할 수 있는 무언가를 통한 연결에 집착한다. 「팍스 아토미카」에 서 그것은 ‘주문’이다. “내 뇌에 나의 의지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주문을 읊 는 일은 상당히 합리적이다. 주문은 미신도 비유도 아니다. 과학이다.”(280쪽) 눈 에 보이는 사물마다 자신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중얼거리는 주문은 일견 병리 적 증상처럼 보이지만, 자신만의 수행으로 개별적인 의미를 획득하는 언어 형식 이자 존재 형식이기도 하다.
내가 연구한바, 결정적 주문은 최소한 다음 조건을 요구한다. 첫째, 내가 만든 나만의 주문이어야 한다. 둘째, 나만의 주문이지만 나에 관한 것만은 아니며, 나보다 더 크고 넓고 깊고 오 래된 진실을 담고 있어야 한다. 셋째, 그것은 하나의 문장 또는 충분히 외울 수 있을 만한 개수의 문장들로 구성 되어야 한다. 이런 주문을 발견한다면 나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자유가 무엇인지 의심할 필요 도 없이 자유를 참칭하는 소음들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289~290쪽)
다시 말해, 세계의 진실을 담고 있고 세계와 ‘나’를 연결할 수 있으면서도 그 연결됨을 개인이 실감할 수 있는 규모의 언어를 통해 자유를 찾을 수 있다는 기대다. ‘주문’을 ‘연애’ 혹은 ‘관계’, ‘교양’이나 ‘취미(덕질)’로 바꾼다면, 이 조건은 김기태의 다른 화자들도 꾸준히 추구하는 목표다. 세계와 자신을 연결할 시대 정신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선험적 자신감을 잃어버린 복잡계 네트워크 시대의 인물들은 자기 형성을 위한 언어를 스스로 만들고 탐색해야 한다는 절박감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팍스 아토미카」가 ‘앎에 대한 앎’의 근대적 형식이 무너져버린 시대의 사 변적 인식론을 다룬다면, 「보편 교양」은 앎의 실천윤리를 재생산하는 데 실패하 는 주체를 발견한다. 고등학교 국어 교사 ‘곽’은 획일적·정량적 줄 세우기에 몰 두하는 공교육에 염증이 난 차에, 학생의 자기 주도성을 강조하는 교육정책의 변화에 힘입어 인문학 고전 독서 수업을 개설한다. “현실과 괴리된, 정체된, 그래 서 화자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 속 “늙 은 교수”(148쪽) 같은 지식 상인을 경계하는 곽은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교육 을 추구한다. 곽의 교육목표는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보편적인 교양과 바람직 한 인성을 형성하며, 학문이나 직업 활동에 필요한 문제 해결 능력을 갖”(152쪽) 춘 학생의 양성이다.
여기서 전문적 학문·직업 교육 과정을 통해 (지배계급에 복무하라는 원래 목표와 달리) 보편적 인간을 향한 진보적 가치관을 함양할 수 있다는 사르트르 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과 같은 지식인 역할론을 어렵지 않게 연상할 수 있다. 전위적 인텔리겐치아의 역할론을 화이트칼라 직종이 확대되고 현대적 대학 교 육 제도가 확충된 후기산업사회에 재적용한 사르트르식의 논의는 한국 지식인 운동에도 주요한 모델이 된 바 있다. 가령, 평론가 김현은 이 ‘전문지식의 보편성’ 이라는 항에 ‘무용하기 때문에 보편적인 문학’을 대입하여 한국문학의 자의식 을 정립했으며, 2) 평론가 백낙청은 민족·민중이 성글게 선취한 ‘민족적 시민의식’ 을 독려하는 보편 교양을 작가·지식인이 가르쳐 “시민다운 시민” 3)을 만들자는 문학론을 세웠다. 지배계급에 편입·복무하기 위한 교육제도를 통과하면서 획득 한 지식(문학)은 중간계급으로서 지식인(특수)의 자기모순을 발견하게 하고, 그 모순이 곧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과 같다는 것을 깨달으며 주체화된 지식인 독자 가 (계급을 초월한) 시민 독자를 이끌어 시민 연대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지식인의 재생산 모델에 따라 특수한 위치와 보편적 앎 사 이의 모순을 넘는 변증법적 자기 지양의 계기를 마련해주려던 곽의 노력은 싱 겁게 끝난다. 소설의 위기는 수업을 열심히 듣던 모범생 ‘은재’의 아버지에게 『자 본론』이 교재에 포함되었다는 민원을 받는 장면이다. “‘사상의 자유’를 위협하 는 민원”(163쪽)에 곽은 도리어 “낯설고 활기찬 감정”(162쪽)을 느낀다. 자신의 수 업이 규범적 체제에 균열을 내리라는 기대가 은밀히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곽 은 계급적 이익을 초월한 보편적 지식에 도달하도록 돕는 교육자의 본분에 따 라 학부모를 설득하고 학교 당국에 저항할 마음의 준비를 마치지만, 이는 해프 닝으로 끝난다. 은재의 입시 컨설턴트가 아버지에게 마르크스도 입시에 도움이 된다고 하자 곧바로 민원을 철회하고 사과까지 한데다, 과연 그 말대로 은재가 서울대 입시에 성공한 것이다. “이제 애들 다 『공산당 선언』 읽히고, 머리에 빨간 띠도 매줘야 되는 거 아냐? 하하하.”(173쪽) 3학년 부장 교사의 농담 섞인 격려 를 들으며 곽은 “사람을 전혀 파괴하지 않고도 패배시킬 수 있는 달콤함”(176쪽) 을 맛본다. 입시에 성공하고 교육에 실패하는 역설적 서사 구조는 급진적 사회 비평마저 계급 세습을 위한 문화 자본으로 흡수한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종합 적, 교양주의적 지성이 처한 종국적 한계를 부조한다.4) 그러니 곽은 인문학 서적 이 가득한 책장을 아무리 둘러봐도 “그 불만족을 해석할 언어를 구성할 수 없 었다”(같은 쪽). 이 결말은 세계와 괴리된 자기(특수)를 발견하고 이를 변증법적으 로 지양하는 지성적 훈련이 곧 시민 연대(보편)로 연결된다는 한국 (인)문학의 주체 재생산 양식이 무너졌다는 발견이기도 하다.
대신 김기태 소설은 다른 방식으로 세계와 관계 맺는 개인(성)을 탐색하 며, 개별 시민들이 어떻게 해야 서로 시민적 정동을 나눌 수 있을지를 질문한다. 이것이 김기림이나 김수영이 그랬듯 변증법적 종합력을 상실한 자신을 반성(하 면서 실은 사랑)하는 ‘지식인=소시민 문학’의 계보가 아님은 물론이다. 김기태 소 설은 유독 (사적 친소 관계로 한정되는 우정이나 성적 친밀성을 전제하는 사랑이 아 니라) 만난 지 오래지 않은 옆 사람과 연결되는 순간에 도래하는 우애라는 정동 에 주목한다. “오와 열 따위는 없이 털썩 앉거나 서성거리거나 제각각이지만 아 주 흩어지지는 않는 사람들. 그 모든 것 사이에서 위태로운 우애를 담아 말한 다./“나는 활주로 위에 있다.”/(……)/“확실히 그렇네요.””(「팍스 아토미카」, 299쪽) 자기의 위치를 어떻게든 파악하려는 간절한 ‘주문’을 듣고 그 고유한 언어의 역 능을 확인해주는 옆 사람의 응답으로부터, 김기태의 인물들은 우애를 발견한다.
덕질과 취미의 파동 에너지
근작 「일렉트릭 픽션」은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 에 “사람은 전기로 산다”(115쪽)라고 대답하며 시작한다. 다소 엉뚱한 선문답 같 은 이 서두는 소설의 기획을 압축하고 있다. ‘전기 소설’이라는 제목처럼 화자는 ‘전기’라는 나름의 주문/언어를 통해 물질적인 복잡계 네트워크와 인간의 존재 형식을 통합하여 세계와 정신을 다시 연결하는 ‘통일장 이론’을 만들려고 한다. 소설에서 전기는 전자기력이라는 우주의 근본적 힘인 동시에 “콘센트와 플러그 로 결박된 현대적 관성”(같은 쪽)이라는 역사적·사회적 물질성을 의미하며, 감 각기관과 근육을 거쳐 신경세포가 주고받는 인간 신체의 전기신호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물리적-사회적 세계와 물리적(-사회적) 인간을 연결하는 공식에서 빈칸으로 남은 것은 ‘사회적 인간’이라는 항이다. 당연히 그 공백을 채 우는 것이 화자의 과업이다.
한국에는 스무 개가 넘는 에너지 공기업이 있다. 대표적이라 할 만한 한국전력공 사의 총자산은 235조에 달하며, 약 2만 4000명가량이 본사를 포함하여 250군데 가 넘는 지역 본부 및 사업소 등지에서 근무한다. (……) 석탄에서 출발했든 원자 에서 출발했든, 눈앞의 벽에 박힌 220볼트 콘센트에 전기가 도달하기까지 얼마 나 많은 인력과 기술과 자본이 필요한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따지자면 그도 길고 복잡한 과정의 일부였지만 전기에 대하여는 아는 바가 없었고 알 필요도 없었다. 한번쯤 자신이 건전지라는 생각을 한 적은 있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117쪽)
노동과정과 노동 생산물로부터 소외된 노동자라는 자의식이 어렴풋하 게 보이지만 노동자의 각성과 결집에 대한 기대가 싹트진 않는다. 사회적 연결 에 대한 나열적 서술은 오히려 그 복잡한 네트워크 전체를 가늠하기 어렵고 따 라서 알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동시대 청년의 단절된 세계 인식을 강조한다. 그는 매일 정해진 시각에 출퇴근하며 성실하게 일하지만, 사무실에서 투명 인간 취급을 받는 계약직이다. 그 모욕에 화를 내지도 않는다. 그는 타인과 분리된 집 안에서만 자유를 느끼기 때문이다. “진짜 삶이라 부를 만한 것은 문안에 있다고 느”낄 뿐, “문밖의 일은 문안의 삶을 위하여 수행하는, 견디는 무엇이었다”(116쪽). 그렇게 문안에서 자신을 성실하게 돌보던 어느 날 “전기신호가 그의 두 팔을 들 어올렸”(119쪽)고, 그는 그 내적 신호를 따라 전기기타를 배우기로 한다.
그런데 혼자 즐겁게 연습을 하던 중 소음에 항의하는 메모가 붙고, 그는 문밖의 타인과 연결되고 싶지 않은 관성에 따라 기타를 처분하기 위해 ‘재니스 음악 학원’을 방문한다. 그러나 정작 기타는 팔지 못하고, 엉겁결에 재니스가 시 키는 대로 코드를 배운다. 어느새 “옥수수나 고구마 따위를 나눠 먹고 있던 나 이 지긋한” 할머니들과 기묘한 합주를 연습하게 된 그는 “손가락들이 자유로워 짐을 느”(127쪽)끼고 전기가 사람 사이에도 흐른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엘 리베이터 벽에 자신은 전기기타를 좋아하며, 아홉시 이후에는 연주하지 않겠지 만 그래도 불편하면 연락을 달라는 메시지를 붙인다. “익명이 되려고 서로 최선 을 다하는 이곳에서 자신이 505호, ‘여기’에 있다고 고백한 사람”(128쪽)으로 변 한 것이다. 그 쪽지는 쪽지를 읽은 501호 주민으로 하여금 옆집의 “아기가 울고 싶을 때 우렁차게 울기를 바”(같은 쪽)라게 한다. “내 안에도 전기가 있”고 “그 녀 석의 안에도 전기가 있”음을 깨달으며, 그는 “알지 못할 전기장치로 작동하는 엘 리베이터” 안에서 “가벼운 상승감”(같은 쪽)을 느낀다. 그리고 이 상승감은 다시 연결을 인식 가능한 범주로 돌려놓아 이웃을 향한 인사와 감사, 호의를 표하는 (역시 일종의 ‘주문’일) 문장을 큰 소리로 연습하게 한다. “Hei kaikki, 모두들 안 녕하세요. Kiitos, 감사합니다. pidän sinusta, 저는 당신이 좋아요.”(129쪽)
「일렉트릭 픽션」은 복잡계 네트워크 속에서 고립된 동시대 청년들의 사 회경제적 조건을 충분히 검토하면서도, 타인과 연결되는 감각을 어떻게 다시 회 복할 수 있을지 탐색한다. ‘오타쿠’와 ‘빠순이’에 대한 기존 담론이나 최근 화제 인 ‘MZ 오피스’ 등의 재현이 청년 세대는 공적 노동의 관행과 공동체에 대한 책 임에 무관심하고 사적 취미생활에만 몰두하며 고립되어간다는 비난을 (정의로 운 풍자인 양) 휘두르는 것을 상기하면, 사적 취미판단을 연결할 수 있는 계기와 그로부터 생겨날 수 있는 우애의 정동에 주목하는 김기태 소설은 그와는 정반 대 방향에서 접근하는 셈이다. 이처럼 대상에 대한 조건 없는 원천적 판단인 미 학적 감수성이 시민적 관계 맺음의 기초일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우 애의 감각을 회복하는 사건을 상상하는 것은 김기태 소설이 일찍부터 매진해온 작업이다.
이 계열에서 「세상 모든 바다」는 지금 대중문화의 미감이 형성중인 거시 적, 미시적 관계성을 두루 관찰한다. 다양한 국적의 케이팝 여성 아이돌 그룹 ‘세상 모든 바다’는 전 지구적 기후 위기와 인종·젠더·기아 등의 사회문제, 민주 주의 운동에 목소리를 내고, 청년 팬덤 역시 이에 호응하며 국가 단위의 기성 정치를 넘어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 설정은 동시대 케이팝 아티스트와 팬덤이 수행하는 지구 단위의 문화정치(에 대한 기대)를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5)
그런데 소설의 후반부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이러한 거시적 정동 네트워 크가 일군 정치적 성과보다는 그 근간이 되는 미시적 네트워크다. 서로 다른 타 인이 연결되면서 정동 네트워크가 발생하는 최초의 계기는 무엇일까.
백영록이라는 이름의 16세 소년이 사망한 사정에 대해, 군청 앞에서 행인에게 말 을 거는 아주머니의 사정에 대해, 그 사정에서 나의 몫에 대해 무언가를 생각해내 려 했으나 잘되지 않았다. 큼지막한 파도 하나가 방파제에 부딪쳤다. 하얀 물보라 가 세차게 튀어올랐다. 얼굴에 와닿는 차가운 물방울의 감각. 실제로 닿았을까 느 낌뿐이었을까. 분명한 건 내가 뒷걸음질을 쳤다는 것이다.(36쪽)
지금은 펼치지 않고도 떠올릴 수 있는 그 세계지도에서, 세상의 모든 바다는 분명 이어져 있다. 이제 나는 그 사실이 다소 무섭다. 바다를 등지고 아무리 멀리 가도, 반드시 세상 어떤 바다와 다시 마주치게 될 테니까. 그 불편한 예감에 시달릴 때 마다 이상하게도 오래전 지하 소극장에서 본 오타쿠들이 떠오른다. (……) 그것 도 사랑이라면, 나는 어쩐지 그 근시의 사랑이 조금 그립다.(37쪽)
‘세상 모든 바다’와 팬덤의 원전 건설 반대 캠페인을 비롯해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의지”(22쪽)에 대해 무지했던 영록을 화자는 ‘얼빠’거 나 “음습한 움짤이나 모으는 녀석”(17쪽)으로 치부했다. 그런데도 영록은 같은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처음 본 낯선 외국인에게 서슴없이 말 을 걸고 선물을 건네며 진심으로 반가워했다. 화자에겐 그의 즐거움이야말로 너무도 낯선 것이었다. 지금의 복잡한 네트워크에서는 바다 건너의 보편적 가치 를 떠올리는 것보다 당장 닿는 물방울의 감각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낯설고 두렵다. 그러니 우리 시대의 가장 근본적인 정동 정치는 우선 용감하게 눈앞의 타인을 온전히 보는 감성적 즐거움, ‘근시의 사랑’일 것이다.6)
기실 이런 근시의 사랑을 갑작스레 마주하는 당혹감은 김기태 소설이 자 주 반복하는 구도이기도 하다. (「보편 교양」처럼) 보편적인 가치에 공감한다는 자 신감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람을 마주하고는 뒷걸음질칠 수밖 에 없고, 그래서 (「팍스 아토미카」처럼) 기존의 언어로는 거대한 연결-네트워크를 충분히 파악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어 무서워진다. 이런 서사 구조는 예상과 달 리 단절된 자신을 발견하고, 반대로 예상과 달리 연결된 자신을 발견하는 힘을 부조한다. 개별적인 인간-입자들이 연결되어 거대하고 복잡한 네트워크를 이루 고 있다는 점은 확실하지만, 정작 자신이 어떻게 그 네트워크에 연결되(어야 하) 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작은 물방울의 집합에 불과한 바다에 어떻게 거대한 파도가 일렁이는 것 일까. 김기태 소설은 유독 전기, 음파, 파도, 빛 혹은 중고 거래 앱과 SNS 같은 매개를 통해 전달되는 파동 에너지에 주목한다. 하나의 입자가 곁에 있는 다른 입자로부터 운동에너지를 전달받고 이를 다시 전달하면서 파동이 생겨난다. 물 론 인간-입자를 떨리게 하는 운동에너지는 감정일 것이다. 이웃에게 폐를 끼치 거나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독립적 주체로 살라는 규범의 명령은 모두를 개별 적인 입자로 남게 한다. 하지만 김기태 소설은 인물로 하여금 그 강박과 조바심 을 버리고 자신에게 (이미) 영향을 미치고 있던 감정 에너지의 파동을 목격하게 한다.
용기로 연결되는 즐거움의 공동체
그동안 입자들을 멈춰 세우던 관성을 이겨내고 진동하기 위해서는 그 단 차만큼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파동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내보내겠다는 결심, 용 기가 그 에너지다. 대개 김기태의 남성 인물이 거대한 파동에 대한 외경심과 관 성을 벗어나는 두려움을 가시화하는 역할이라면, 여성 인물은 기꺼이 연결될 용기를 품고 먼저 그 현장으로 뛰어든다. 「롤링 선더 러브」의 ‘맹희’도 일렉트릭 기타의 멜로디를 흥얼거리고 연애 예능과 밈을 모두 챙겨보면서 동시대 대중문 화를 적극적으로 향유하고 이를 자기만의 주문으로 바꾸는 인물이다. 서둘러 결혼 시장에 뛰어들기를 종용하는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과 연애가 정말 “투자와 수익의 문제일까”(43쪽) 묻는 맹희에게는, 친구 ‘리아’가 조언한 “연애는 옵션이거나 그조차도 못 되므로 질척거리지 말고 단독자로서 산뜻한 연대의 가 능성을 모색”(47쪽)하는 방향도 마뜩잖다. 자신을 거래하고 싶지도 않지만, 누군 가와 친밀하게 연결되고 싶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걷잡을 수 없는 정열일 까, 견고한 파트너십일까”(51쪽) 자문자답을 반복하던 맹희는 그 해답을 직접 알 아보고자 결심한다. 동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사랑의 재현물인 연애 예능 ‘솔로 농장’에 용감하게 참가해 그 한복판에서 “시원하게 굴러보”(52쪽)려는 것이다.
낭만적 성애와 경제적 부조라는 상호 모순적 규범으로 구성된 이성 연애 의 형식, 이성혼 제도 자체를 전시하는 연애 예능은 기성의 이성애적 젠더 규범 과 관계 모델을 강화하지만, 그 담론을 응시의 대상으로 메타화하여 일종의 소 격 효과를 일으키기도 한다.
사람들은 나이와 직업과 외모를 초월한 사랑이 더 진실하다 여기면서도 정말 그 것들을 초월하려고 시도하면 자격을 물었다. 인생을 반도 안 산 사람에게 어떻게 ‘도태’되었다는 표현을 할 수 있는지, 596명이나 거기에 추천을 누르는 세상은 어 떤 세상인지 의아했다.(70쪽)
‘솔로농장’에서 맹희가 실제로 만난 이들은 서로를 경쟁과 쟁취의 대상으 로 한정하고 감정을 투자 수단으로 만드는 환경에서도 나름대로 성실하게 눈앞 의 관계성을 일구어가는 사람들이었다. 촬영이 끝난 후에도 악플과 조롱을 받 는 서로를 위로해주고 등을 두드려주는 성실한 사람들이 보여준 친밀성에 비하 면, 규범에 갇힌 채 평가만 일삼는 사람들은 “사랑할 용기도 없는 놈들!”(73쪽) 에 불과하다. 맹희는 이성애적 규범이 여성 청년에게 강요하는 수치심과 조바심 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 마주한 감정을 정직하고 솔직하게 알고자 한다. “맹희는 앞으로도 맹신과 망신 사이에서 여러 번 길을 잃을 것임을 예감했다. 많은 노래 에 기대며. 많은 노래에 속으며.”(76쪽)7)
김기태는 동시대 문화정치의 가장 세속적인 현장으로 직접 들어가, 좌절 도 분노도 하지 않고 전혀 다른 맥락의 친밀성에 주목한다. 「로나, 우리의 별」의 여성 아이돌 ‘로나’는 자신의 음악과 팬덤이 퍼뜨리는 문화정치적 힘을 확인하 고, 이를 바탕으로 현실 제도 정치를 변혁하는 방법을 찾아 나선다. 그렇다고 로 나라는 인물의 성공담(성장)에 주목하는 것은 아니다. 부제 같은 첫 문장 “우리는 가능하다”(181쪽)가 암시하듯, 로나를 포함한 팬덤, 시민을 포괄하여 ‘우리’라 는 복수 시점을 취하는 점이 이 소설의 특징이다. “로나의 동지가 되려 하는 사 람들”(205쪽)(이 사용하는 온라인 아이디)로 서술 시점을 계속해서 옮겨가는 소설 은 그 서술 시점적-인물 관계적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취향이 정치로 전이될 수 있는 방법을 탐색하는 사회적 참여 실험을 벌인다.
그 출발선이 현재까지도 파급력이 강한 대국민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는 점은 중요한 설정이다. “선출직 스타”(183쪽)인 셈인 로나에게 투표한 사람들은 로나에 대한 친근감뿐만 아니라 로나의 행보를 비판하거나 동참할 의무를 지니 게 되기 때문이다. 로나는 성실하게 음악을 발표하는 한편, 재생지를 활용해 앨 범을 만들고 기후 재난이 생길 때마다 억대의 기부도 한다. 팬들 역시 친환경 앨 범을 구매하거나 기부에 동참하며 “로나가 추구하는 가치에 동의한다는 의사표 시”(188쪽)를 한다. 엔터테인먼트 자본이 투표라는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상품) 를 도입하자 뜻하지 않게 어떤 관계성이 생성되고, 이것이 욕망의 방향을 전환 해버리는 것이다. “자본은 때때로 자신이 무엇을 잉태하는지도 모르고 질주한 다.”(185쪽) 물신과 대상화의 극단에 있는 아이돌로 하여금 그 욕망의 회로를 반 전하게 하면서, 소설은 역사 속 혁명가들 역시 삶의 욕망 회로를 바꾸는 라이프 스타일 아이콘이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진부한 악과 싸우는 일보다는 감춰진 위선을 폭로하는 일이 자 극적”(189쪽)이기 때문에, 로나의 진정성은 계속 의심받는다. 로나가 광고한 “상 품의 생산과정과 음악적 동료들의 언행과 신곡 가사의 함의를 따”(190쪽)지는 팬덤의 검증을 받게 된 것이다. 이후 로나는 IT 기업을 운영하는 ‘데릭’과 함께 제3세계의 사회 기반시설과 빈민을 위한 사회적 금융 사업을 시작하지만, 이는 그나마 있던 기업의 사회 공헌 책임을 (간접적 금융 투자 이윤을 얻는) 새로운 투 자 영역으로 바꾸는 것에 가깝다. 인간의 근본적 욕망을 방해하지 않아 지속 가능하다는 대안 자본주의 담론은 기실 복잡계 네트워크를 거쳐 자본을 세탁 하는 “절도-기부 모델”(193쪽)일 수 있다. 이는 지속 가능한 소비, 가치 소비 같 은 자본주의적 적선을 최대한의 문화정치로 간주하는 동시대 상상력의 한계를 보여준다.
로나 역시 변하지 않는 세계에 좌절해, 늘 연주하던 기타 ‘붉은 도브’를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주고 잠적한다. 이때 작가의 세계에 대한 전망, 다시 말해 소설적 우연성이 개입한다. 로나의 팬덤들이 중고 마켓에서 붉은 도브를 발견하고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다시 로나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공동의 선물 을 통해 경제적 효율성을 넘어서는 다른 지평을 마주하는 이 일화는 대중이 로 나가 말하는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수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 자신이 메 시지를 발신하는 정치적 집단으로 변할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로나는 “창 당 선언”(202쪽)으로 그에 화답한다.
대의제 민주주의(적 형식/제도)를 상품으로 흡수한 자본을 재전유하는 전략이 실패로 돌아갔음에도 로나와 팬덤은 아예 더 멀리 나아간다. 선한 자본 을 선별해 투표하는 소비 주권자의 대의제적 전유에 한계가 있다면, 시급한 것 은 욕망의 형식이 아닌 내용 자체를 전환하는 직접민주주의다. 로나는 두루뭉 술한 선의와 인류애에 기대는 문화적 전통에 대한 파업을 선언하고, 그의 팬덤 과 함께 정당을 만들어 직접 발화하고자 한다. 그들은 「보편 교양」의 화자가 한 번도 묻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모두’가 아니므로 당신의 하루를 모른 다. 하지만 알고 싶다.”(205쪽) ‘나’들이 원하는 하루를 지금 요구하는 단상壇上을 만드는 일이야말로 가장 원래적인 정치일 수 있다. 문화/경제/정치라는 각각의 영역을 분리하면서 “허락된 자리에 머물러야만 보존되는 ‘순수함’에 우리는 동 의하지 않는다”(204쪽). 노조의 ‘정치 파업’이나 예술인의 정치적 발언은 ‘불순’ 하다는 통념을 넘어, ‘우리’라는 급진적인 연결을 상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노동 분업을 물신화함으로써 정치를 여타의 영역과 분리하고 계급을 고착하는 대의제도(정치 전문가의 선의에 호소하는 온정주의)에 갇히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우리의 별, 로나가 예고한 대로” “붉은 도브의 연주에 맞춰” 다 함께 부를 “그 노 래의 제목은 ‘우리는 가능하다’이다”(205쪽). 급진 좌파 정당의 여러 코드를 연상 시키는 소설의 결말에 도착하면, ‘우리’의 가능성은 취향의 공동체를 일상적 정 치 공동체로 세속화할 용기를 의미하게 된다. ‘나’들이 모인 네트워크 속에서 정 치 미학적 공통 감각이 창발하는 동시대적 조건과, 이를 시민적 우애의 단초로 전환하는 감성적 조건을 보는 것이다.
김기태는 자본(이 제공하는 대중적 즐거움의 경험)의 축적이 양질 전화를 일으키는 순간을 날카롭게 전유해낸다. 인신을 가장 세속적으로 대상화(아이돌 물신화와 관계의 예능화)하는 매체로부터, 자기를 파괴할 기반을 스스로 생산하 는 자본주의적 전회를 예감하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김기태의 소설은 사적유 물론을 다시 소설의 무대로 불러들이고 있다.
평균의 감정과 밈의 즐거운 분노
그렇게 사적유물론을 다시 불러들인 소설이라면 표제작 「두 사람의 인터 내셔널」을 빼놓을 수 없다. 소설은 경제적 토대로부터 문화양식이 생성된다는 (물론 도식적인 통념이지만) 사적유물론의 방향을 반대로 바꾸어 문화적 언어야 말로 경제적 토대에 대한 이해를 바꾸는 방법임을 서사화한다. “두 사람의 역사 는 길다”(111쪽)라는 첫 문장은 ‘권진주’와 ‘김니콜라이’의 운명을 예언하는 수미 상관적 장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비롯한 ‘두 사람’들이 만들어온 역사를 계보적으로 살피는 ‘코드’가 된다. 소설의 서두는 ‘두 사람’들 을 ‘기호화’하여 (형식적으로) 유사한 사건을 나열하면서 역사적 인과에 대한 엄 밀한 분석 대신 ‘두 사람’의 관계성과 시민적 결속의 계보들을 환유적 유사성으 로 연결한다. 그럼으로써 혁명과 테러는 역사 속에 고정된 신성한 사건의 자리 에서 내려오고, 전쟁과 디아스포라는 위대한 영웅이나 선량한 희생자의 에피소 드에서 내려온다. 이러한 역사의 세속화는 과거를 기준으로 그 인과를 반추하 며 현재를 반성하는 지성적 기술이 아니라,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와의 유사성 을 찾아내는 즐거움에 기반한 밈meme의 화법에 가깝다.
진주와 니콜라이 두 사람은 교무실에 따로 불려가 “내야 할 어떤 돈을 내 지 않았다는 안내문”을 받는 아이들이니 “둘이 친하게 지내”(114쪽)라는 말을 들 으며 처음 만난다. 이 ‘조언’은 가난을 극복하고 한국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서로 도와가며 더 노력하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계급적 수치심을 내면화하도록 유도 하는 다정한 교사의 목표가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작문 시간에 두 사 람은 진로나 꿈 같은 단어가 포함된 상투적인 에세이를 제출”하면서 “……니까 열심히 노력해야겠다”(116쪽)는 똑같은 문장으로 마무리한다. 니콜라이는 한국 에 정착하기 위해 열심히 기술을 배우며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일하고, 진주는 공무원 시험을 위해 노력하며 마트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서 “자신도 그럭저럭 평범한 이십대로 살고 있는 듯”(128쪽)하다고 아주 잠깐 느 끼기도 하지만, 평균적인 한국인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니콜라이가 한국에 계속 살기 위해서는 복잡한 과정이 남아 있다. “전년 도 한국인 평균 이상을 벌어야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는데, “그건 연봉 삼천팔 백만원 정도”(125쪽)다. 두 사람은 아무리 일해도 한국인 평균이라는 그 금액에 도달하지 못할 것 같다. “‘스물일곱 살 인생 평가 좀’ 같은 제목의 글에 사람들이 쏟아놓는 댓글을 보면 가끔 뭘 잘못한 것 같”(134쪽)은 자괴감까지 든다. “남들 다 자리잡을 때 어리바리하고 게을렀던”(같은 쪽) 잘못이라고 질책하는 것이 너 무 당연한 사회에서 평균이 되지 못한 두 사람은 묻는다. 결석 한 번 안 했고 법 을 어긴 적도 없는데, “우리가 그렇게 잘못 살았냐?”(같은 쪽) 평균에 비추어 인 생을 평가하고 산출된 값을 부풀려 전시하거나 평균에 미달하는 자기를 혐오 하는 것이 유일한 삶의 형태처럼 보이는 시대이기에, 청년들은 서로를 견주며 질투와 수치심을 느낀다. 평균 이상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장을 멈추지 않고 노력해야 한다는 열망과 패배하면 홀로 낙오되어 고립된다는 수치심. 이를 널리 퍼뜨리기 위해서 한국사회는 (최소한) 경제적 공공재에 가까운 통신망에 접속 할 권리는 남겨둔 셈이다. 역설적으로 그 덕에 통신망은 (아직은) 정치적 공공재 이기도 하다. 물론 서로를 평균의 감정으로 대하는 공간이면서도 드립과 짤, 유 머와 밈이 난입하여 평균의 연결을 방해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퇴근길에 지쳐 커뮤니티 게시판을 스크롤하는 진주와 니콜라이는 자신의 삶을 다른 이십대와 비교하면서 주눅들다가도 댓글에 달린 밈을 보면서 웃음을 터뜨리곤 한다.
16세의 봉제공 엠마 리스는 여전히 현장실습생과 제빵사, 택배 기사와 대학 청소 노동자 등에 관한 게시글에 나타났다. 누가 칼 들고 협박한 건 아니지만 아무도 알 바 아닌 일을 하다 무시당하고 위협받고 쫓겨나고 심지어 죽은 이들을 조롱하 는 댓글 속에서도 엠마는 늘 같은 표정으로 같은 말을 외쳤다. 때로는 한국 치킨 으로 신세계를 맛본 영국인이나 데드리프트가 3대 운동 중 최고인 이유, 다이어 트할 때 기립성저혈압 조심해 같은 제목의 게시물에도 끼어들었다. 금발의 양 갈 래 소녀는 인터넷 세계를 떠돌며 가끔 길을 잃기도 하는 꼬마 유령처럼 보였다. 또 는 태엽이 풀릴 때까지 아장아장 걸으며 오직 한 문장만 되풀이하는 인형.
“기립하시오 당신도!”
어쨌든 태엽을 감아주는 사람들은 계속 있었다.(136~137쪽)
엠마 리스의 일화는 브레히트의 시에서 유래하여 한국에서 <인터내셔널 가>를 부르기 전에 선창하는 구호가 되었고 다시 웹상의 밈으로 정착했다. 물 론 이 밈이 노동자의 전 세계적 연대를 직접 말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게시 글 과 대화의 맥락을 단절하거나 변환하면서 현재 ‘나’를 위한 맥락으로 전환하는 화용론적 수행을 반복하기 쉽게 코드화한 언어를 제공해준다. 진주와 니콜라이는 정직원이 아니라서 “돈을 주고 사야 하는 유니폼이나 형편없는 구내식당 메 뉴, 덥고 춥고 좁은 휴게실 따위에 대해 소식을 전하며 “이거는 기립이네, 기립해 야겠네” 같은 농담을 주고받”(138쪽)는다. 노력하지 못한 자신이 아니라 다른 것 에 대해서 분노해야 한다는 것을 순식간에 알아차리고 이를 서로에게 전하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서로를 대신해 분노해주는 밈을 공유함으로써 서로를 돌보 고 있다. 여러 직업의 세계를 견학하는 유아교육용 캐릭터이면서도 어른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펭수, 슬픈 표정이지만 어떤 상황에도 체념하지 않고 불만족 을 표시하는 개구리 페페 같은 밈들도 마찬가지로 청년 세대의 분노를 유희 속 에 담아내고 있다. 이는 바람직한 미래를 위해 현재를 축적하게 만드는 미래주 의적 삶의 규범, 성장을 청년기의 당연하고 유일한 목표로 자연화하는 ‘잔인한 낙관주의’8)를 비웃고 풍자하는 언어적 틈을 만들어낸다. 그 틈에서 마구 돋아 나는 밈은 새로운 즐거움을 통해 생존경쟁이 만들어내는 우울과 자기혐오를 멈 춰 세우는 ’다정한 비관주의’9)를 싹틔운다. 이 웃음은 긴말을 하기 어려울 만큼 지쳐버린 출퇴근길에서조차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고, 당신도 기립하라고 고 집스럽게 외친다. 성장의 명령에 복종하거나, 좌절하고 수치를 느끼라는 회유에 따를 생각이 없다고 현재를 정지하는 함축적이고 단호한 주문이다.10)
밈을 인용하며 대화하는 진주와 니콜라이는 자신과 이웃 사이의 친밀감 에도 다른 별명을 붙인다. 누구의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그저 마음에 따라 동 거를 시작한 두 사람은 자신들을 연인이나 부부 혹은 가족이나 친구 그 무엇이 라고 정의하지 않기로 한다. “우리는 친한 사이야.”(142쪽)11) “이제는 저렴한 각본으로 사랑하느니 다른 이름을 붙이고 싶었”(같은 쪽)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두 사람은 산업재해를 당해 잠적한 친구와 인플루언서를 꿈꾸다 사라진 친구에 게도 친한 사이가 되기 위한 마음을 전하고, “우리 오늘 이웃이랑 친한 사이 해 버림”(143쪽)이라는 짧은 문장이 암시하듯, 집회중인 노동자와 이주노동자 가족 과도 관계를 맺는다. 정주민·내국인/이성애자/유자녀 가족을 기본 주체로 상정 하는 이웃간의 관계에도, 대단한 각오가 필요할 것 같던 계급적 연대에도 그렇 게 친밀하고 즐거운 새 이름이 붙는다. 가난한 집 아이들끼리 친하게 지내라는 교사의 조언이 끝내 이상한 방식으로 실현된 것처럼 과거의 혁명사가 엉뚱한 밈 의 형태로, 기필코 고집스럽게 귀환한다. 친밀성의 이름을 다시 쓰면서. 국가-시 민의 관계가 아니라 시민-시민의 관계로 관점을 전환하면서.
그렇게 김기태 소설은 고립의 위기에 처한 청년들을 경제/구조의 증상으 로 환원하지 않고, 도태된 시민(경제 동물, N포 세대)으로의 퇴화와 고립을 강조 하지 않는다. 반대로 규범적 정동이 되어버린 우울한 자기 비하 속에서도 청년 들이 찾아내는 즐거움에 주목한다. 이 즐거움은 ‘살 만한 삶’12)을 상상하게 한 다. 이는 한국문학사에서 익숙한, 선험적 집단(계급, 민족)의 미래를 위해 금욕하 고 희생하는 지식인의 지적 종합력(양심, 의식)을 재생산하지 않으면서도 시민 들이 서로 만날 수 있는 정동적 조건을 탐문한다. 규범적 생애 서사에 근접하도 록 자기를 경영하라는 명령으로부터 좋은 삶, 살 만한 삶을 분리하고 재정의한 다. 이로써 각자가 즐거운 느낌의 연결체로, 다시 새로운 시민적 정동-관계로 향 하게 한다. 이것은 본래 정치 미학이 하던 일이기도 하다. 혁명이 통치 집단의 변 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양식을 재정의하는 것이라면, 지금 눈앞의 관계 에 다른 이름을 붙이고 싶다는 욕망으로부터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그런 즐거 움의 연결이야말로 혁명의 선결 조건이다. 김기태는 이 조건을 정직하게 모으고 있다.
- 1) 임화는 전환기 문학의 인식/감성 구조를 이렇게 정리한 바 있다. “문학이란 감성적 형식을 빌지 않으면 안 되는 지적 활동의 영역”으로 “감성적 세계 가운데 지성은 자기를 용해(溶解)함으로써만 형성되는 독자(獨自)의 세계다.”(「의도와 작품의 낙차(落差)와 비평—특히 비평의 기능을 중 심으로 한 감상」(1938), 『문학의 논리—임화문학예술전집 3』, 소명출판, 2009, 561쪽) 대상/세계와 직접 대면한 감성이 먼저 영향을 받은 다 음에야 지성은 영향을 받으므로 “지성 가운데 의미된 내용은 이미 과거의 것으로 소멸된 감성계가—직관은 항상 순간적이고 그것이 지속적 의 미를 취득하는 곳이 지성이다—가져온 낡은 세계이고, 감성계는 늘 지성 가운데 정착한 낡은 세계와는 판이한 생성이 신세계로 형성되”므로 “지 성과 감성의 갈등이 의미하는 신과 구는 실상 낡은 세계와 새 세계의 대립이다”(같은 글, 564쪽).
- 2) 김현,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문학과지성』 1975년 겨울호.
- 3) 백낙청, 「시민문학론」, 『창작과비평』 1969년 여름호, 477쪽.
- 4) 김건형, 「촛불 이후의 정치라는 단상(斷想·單相·壇上)」, 『문학동네』 2024년 봄호 참조. 박서양과 이희우는 곽이 이상(보편)과 현실(특수) 을 종합하는 메타적 반성력을 발현했으나 동시대 교육 현장의 한계 때문에 실패했다고 읽으며, 그럼에도 고뇌하는 교육자이자 평범한 인간으로 서 그가 지닌 최소한의 진정성(직업윤리)을 애도한다(박서양, 「이토록 달콤한 멜랑콜리」, 『2024 제1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4; 이희우, 「평범한 자는 들어오라」,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해설). 반대로 홍성희는 결말 이후에도 곽이 변하지 않고 “균형감각”을 유지했 으리라 전망하면서 ‘균열’을 미학화하는 데서 그치는 문학은 때로 안전한 공간에 머무르는 것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홍성희, 「안전의 방향 (1)」, 문장웹진 2023년 10월호). 한편 임세화는 민주화 세대도 아니고 그 이후의 새로운 담론도 없는 “끼인 세대”로 곽을 읽는다. 동시대의 교양을 탐 구하지 않고 이전 세대의 진정성을 시대착오적으로 추구했기에 “자신의 비어 있음과 대면”했다는 것이다. 주도권 한 번 지니지 못한 채 늙은 세대 라는 독해는 문학사적으로 흥미롭지만, 김기태의 다른 소설과 연결해서 읽을 때 드러나는 혁명/주체 자체의 갱신 가능성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 다(임세화, 「혁명 이후를 살아간다는 것」, 문장웹진 2024년 7월호).
- 5) 미얀마, 태국, 홍콩 등 아시아의 권위주의 정부에 저항하는 청년들이 케이팝과 팬덤 문화를 민주화 운동의 코드로 활용하고 연대의 매개로 삼 았던 사례를 상기해볼 수 있다. 가령 서울퀴어문화축제의 오랜 애창곡이자 촛불집회(의 효시였던 이화여대의 2016년 집회부터)에서도 불렸던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는 2020년 태국 민주화 집회 현장에서도 합창되었다. 이는 홍콩, 대만의 반권위주의 ‘밀크티 동맹’과 결합하며 케 이팝 팬덤의 연대를 상징했다. 2019년 산티아고 반정부 집회 배후에 케이팝 팬덤이 있다는 칠레 정부 보고서는 당시 한심한 책임 회피로 치부되 었지만, 근본적으로는 핵심을 찌른 셈이다.
- 6) 김건형, 「가족도 미래도 없이 친밀하게」, 『문학동네』 2022년 겨울호, 136쪽.
- 7) 김건형, 「연애 예능과 프랜차이즈 자아의 시대를 굴러가는 ‘나’의 이야기」, 『2024 올해의 문제소설』, 푸른사상, 2024 참조.
- 8) 욕망하는 대상이 오히려 더 나은 삶의 걸림돌이 된다는 ‘잔인한 낙관주의’는 나중에 도래할 성공적 미래를 애착의 대상으로 만들어 잔혹한 현 재에 적응하고 인내하게 한다. 이는 당면한 모든 문제를 개인의 긍정적 태도와 자기 계발의 노력이라는 ‘합리적 선택’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며 개 인화하는 감정 통치술이다. 로런 벌랜트, 『잔인한 낙관』, 박미선·윤조원 옮김, 후마니타스, 2024.
- 9) 마크 피셔에 따르면, 후기 자본주의 사회는 “광범위한 스트레스의 개인화를 수용”하게 해 불안을 개인이 ‘치료’하도록 하는 의료적 시스템·담 론을 자연화한다. 그런데 “특히 그토록 많은 청년이 아프다는 사실을 어떻게 용인할 수 있게 되었는가? 자본주의사회에서 ‘정신건강 질환’이 유 행한다는 사실은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유일한 사회 체계이기는커녕 내재적으로 고장나 있으며, 그것이 잘 작동하는 듯이 보이도록 만드 는 비용이 아주 크다는 것을 시사한다”. 특히 포스트포드주의는 청년을 취업과 실업을 번갈아 사는 비정규직 프레카리아트 상태로 몰아 양극성 장애라는 자본주의의 고유한 정신질환을 유포하며, 가족을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약물을 제외하면) 대안적 미래로 상상하게 한다. 이는 우울과 불안, “정신질환을 재정치화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임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미래에 대한 낙관을 정지하는 비관이야말로 서로를 돌보는 다정함 일 수 있다.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대안은 없는가』, 박진철 옮김, 리시올, 2024, 68~69쪽, 97쪽.
- 10) 밈과 같은 ‘대항 소음’은 정치적 목표나 실용적인 목적보다는 “연대 자체를 몸으로 만들어가는 과정”(로런 벌랜트, 같은 책, 465쪽)이다. “감 각 능력, 집중, 다시 한번 함께 모이는 즐거움의 코믹한 의미를 수반하는 민주적-존재-되기 속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정치적인 것 속에 존재하기 위해서 “정치를 한다.””(같은 쪽) 그러므로 “잠재성이 긍정되는 장소인 ‘지금’에 수행을 통해 소속되는, 농밀한 감각적 활동”(466쪽)에서 시민권 이 작동한다. 이렇게 “주변 분위기로 형성되는 시민성의 정치적인 강도”는 미약해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이 “거부의 철학으로 헤게모니적 이데올 로기에 맞서지 않기 때문”(464쪽)이다. 하지만 이는 대의제의 대표자(와 그 환상)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면서 생긴 만성적인 정치적 우울에서 벗 어나 친밀한 사회성과 소속의 느낌을 생성하며, “정치에 의해 마모되지 않는 것을 정치적 행위로 가치 있게 여기면서 정치적 행동을 다시 활성화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467쪽).
- 11) 이희우는 ““친한 사이”는 동등한 둘의 우애와 협력, 공생의 형식으로서 시험중인 사랑”을 의미한다며 이를 “최소한의 코뮤니즘”으로 명명한다. 우애의 정치성을 담은 적실한 명명이지만 본고에서는 동등한 둘 바깥으로, 옛 친구와 이주민 이웃과 우연히 만난 노동 집회로 ‘친한 사이들’이 확장되는 장면에 좀더 주목해보려 한다.
- 11) 이희우는 ““친한 사이”는 동등한 둘의 우애와 협력, 공생의 형식으로서 시험중인 사랑”을 의미한다며 이를 “최소한의 코뮤니즘”으로 명명한다(이희우, 같은 글, 329쪽). 우애의 정치성을 담은 적실한 명명이지만 본고에서는 동등한 둘 바깥으로, 옛 친구와 이주민 이웃과 우연히 만난 노동 집회로 ‘친한 사이들’이 확장되는 장면에 좀더 주목해보려 한다.
- 12) 주디스 버틀러는 안정적 정체성을 만들기 위해 동성애적 정동을 비가시화하는 ‘이성애적 우울’의 문화적 제도화를 지적(『젠더 트러블』)하 면서 권력이 삶을 (불)가능하게 하는 사회성의 영역을 결정해왔음을 짚는다. 규범은 바깥으로 주변화된 사람을 ‘살 만한 삶’에서 배제하며 모두 가 취약한 신체로 구성되어 있음을 적극적으로 망각하게 한다. 살 만한 삶은 사회계약론의 형식적 개인주의를 넘어 타인(과 나)의 취약한 신체를 지킬 때만 비로소 모두에게 도래한다(『비폭력의 힘』). ‘애도할 만한 삶’에서 ‘살 만한 삶’에 대한 사유로의 궤적은 윤조원, 「“살 만한 삶”을 향해— 『젠더 트러블』에서 『비폭력의 힘』까지」,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40권 4호, 202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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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또 같이 열어가는 염려의 공간 ―2025년 봄의 시 “이름이 있지만 이름이 지워진 것들의 목록을 골똘히 떠올렸고” (이은규, 「귤락」, 『딩아돌하』 2025년 봄호) 황선희 2025년 봄은 정치에 대한 논의가 어느 때보다도 풍성한 계절이었다. 민의를 등진 기득권 카르텔이 우리 사회를 얼마나 속속들이 장악해 왔는지 매번 확인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위기의식이 나날이 팽창했다. 부풀 대로 부푼 담론의 장에서 광장이라는 공간을 의미화하려는 시도는 지금도 지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계간지들은 발 빠르게 ‘역사적 사건과 시, 그리고 지금’(『딩아돌하』), ‘내란, 광장정치’(『문화/과학』), ‘탄핵-일지’(『문학과사회 하이픈』), ‘K민주주의의 약진’(『창작과비평』), ‘12․3 내란일지’(『문학동네』) 등의 특집을 꾸리며, 광장정치의 한가운데에서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의 가치를 구체화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 계절의 시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었다. 광장정치가 현실의 중심에서 요동치는 가운데, 이 계절의 시들은 다시 열린 광장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더디고 조심스럽게, 말해지지 못했던 것들의 감정과 기억을 불러내고 있었다. ‘귤락’의 이름을 떠올리는 이은규의 시적 주체처럼, 이번 봄의 시들은 사라진 이름과 묻힌 말들, 소리 없는 침묵의 감정을 발굴하고 목록화하려는 시도를 보여 주었다. 특히 나희덕의 「광장의 재발견」과 진은영의 「광장」은 이와 같은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 두 편의 시는 단순한 정치적 입장 표명의 소산이 아니라 광장을 구성하는 감각의 지형과 그 속의 관계, 윤리를 되묻는 섬세한 언어의 실험이다. 4.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이 선포되던 날 TV 앞에서 밤을 꼬박 새우고 다음날 아침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만났다 다행히 계엄령은 몇 시간 만에 해제되었지만 모두들 충혈된 눈으로 두려움과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여의도로 달려갔다 인파를 헤치고 서둘러 깃발을 찾아가다가 도로 경계턱에 발을 헛디뎌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누워서 꼼짝도 못하는 내 몸을 경찰 두 명이 일으켜주었다 부축을 받으며 뒷골목에서 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통증과 오한이 심해진 나에게 경찰은 제복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건넸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핫팩이었다 아들보다도 어린 그의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여의도에서의 또다른 발견이었다 5. 정치는 길을 잃고 나는 발을 헛딛고 말과 입김은 무성하게 흩어졌지만 오래 잠들어 있던 여의도는 목소리들에 의해 깨어났다 공원은 다시 광장이 되었다 ―나희덕, 「광장의 재발견」(『문화/과학』 2025년 봄호) 1) 부분 월계수 잎 같은 여자들이었지 승리의 화관으로 엮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지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 모여들었지 ―진은영, 「광장」(『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나희덕의 시는 ‘여의도’의 공간적 변화를 사유하는 일로 시작한다. 과거 광장의 정치가 활발하게 일어나던 여의도는 시민공원으로 조성되며 비정치적 공간으로 탈바꿈했지만, 12‧3 계엄이라는 사건을 통해 다시 ‘광장’으로 재소환된다. 신작 시집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에 엮이기도 한 위의 시에서 시적 주체는 여의도의 장소성을 복원함으로써 광장이라는 물리적 장소가 시대적 맥락에 따라 어떻게 재의미화되는지 보여 준다. 그는 12‧3 계엄 이후 여의도를 찾았다가 “발을 헛디뎌 바닥에 나뒹굴고” 만다. 그런 그의 곁에 다가와 ‘나’를 일으켜준 건 다름 아닌 두 명의 경찰이었다. 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핫팩”을 건넨 경찰의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하다. 경찰이 건넨 온기는 광장에서 대립하고 있는 존재들 사이에 잠깐 열린 ‘틈’, 공동체적 감각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 광장에서 공원으로, 다시 광장으로 ‘재발견’된 여의도에서 시적 주체는 시민과 대치하고 있던 경찰 또한 이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또다른 발견’을 한다. 결국 이 시는 광장이 단지 단선적인 대립의 공간이나 정치적 목소리의 공간이 아니라, 말할 수 없었던 감정과 책임이 교차하는 장소로 다시 의미화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광장은 발을 헛디딘 ‘나’의 자리인 동시에 미안한 눈빛의 타자가 건넨 온기의 장소이기도 하다. 정치의 격랑 속에서 시는 감각의 정치, 윤리의 광장을 다시금 상상하고 있다. 진은영의 시는 여성의 존재와 연대를 ‘광장’이라는 장소에 다시 위치시킨다. “월계수 잎 같은 여자들이었지/승리의 화관으로 엮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지”라는 전반부에서 시는 ‘승리’와 영웅서사에서 배제된 여성들에 주목한다. 그들은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모여들었”지만, 완결된 공동체를 이루지 않는다. 이 느슨한 집합은 강고한 상징 체계에 포섭되지 않으면서도 공동의 장소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앞서 살펴본 나희덕의 시가 광장으로서의 여의도를 재맥락화하고 대치 속 ‘틈’과 ‘온기’를 발견했다면, 진은영의 이 시는 각기 다른 삶의 조건을 가진 존재들이 느슨하게 모여드는 연대의 장을 상상하게 한다. 시적 주체는 ‘화관으로 엮이지 못한 잎사귀들’이 모여드는 장소로 여성적 광장을 가리킨다. 그곳에는 “연대는 아름다운 침범”2)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 있다. 이때 광장은 전투나 외침의 장소라기보다는 잠정적이고 열려 있는 연대의 공간으로 다시 그려진다. 함께 잠을 자고 아이들을 기르고 함께 숲속에서 나무 열매들을 줍고 함께 사냥 하며 음식을 나눠 먹던 사람들이 따로 잠을 자고 따로 아이들을 기르고 따로 집을 짓고 숲과 강가에 경계선을 그었다 함께 도끼, 창, 칼을 만들던 사람들이 함께 총, 대포, 핵폭탄을 만들던 사람들이 따로 정복자가 되고 노예가 되고 따로 부유한 사람이 되고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함께 책을 읽고 사상을 발명하고 꿈을 꾸던 사람들이 따로 나라를 세우고 따로 혁명과 전쟁을 일으키고 따로 친구가 되고 적이 되었다 함께 나를 매혹시켰던 말들이 따로 나를 조롱하며 떠나갔듯이 그렇게 함께 그렇게 따로 세계는 낡아갔다 ―이경임, 「그렇게 함께 따로」(『문학인』 2025년 봄호) 이경임의 시는 광장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공동체의 기원과 해체, 연대의 형성과 파괴를 장구한 인류사적 스펙트럼 속에서 되묻는다는 점에서 앞선 시들과 공명한다. 시는 반복되는 구절 “함께”와 “따로”를 통해, 인류가 공유했던 감각의 원형에서 점점 분절되고 분열된 세계로 이행해 온 과정을 간결하면서도 묵직하게 서술한다. 첫 연에서 사람들은 “함께 잠을 자고 아이들을 기르고/함께 숲속에서 나무 열매들을 줍고/함께 사냥 하며 음식을 나눠 먹던” 존재들로 그려진다. 그러나 2연에서 시는 경계선을 긋고 “따로” 살게 된 공동체의 붕괴를 포착한다. 이와 같은 전환은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라기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감각을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에게 던지는 윤리적 질문이라 할 수 있다. “함께 도끼, 창, 칼을 만들던 사람들이/함께 총, 대포, 핵폭탄을 만들던 사람들이”라는 구절은 인간의 기술과 협력의 진보가 어떻게 파괴의 도구로 전도되어 왔는지를 드러낸다. 여기서 “함께”는 더 이상 긍정의 언어가 아니라, 공동의 폭력과 파괴를 가능케 한 이율배반적 형식으로 작용한다. 마지막 연 “그렇게 함께/그렇게 따로/세계는 낡아갔다”는 반복과 퇴행, 분열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겨진 감정적 유산을 응축하고 있다. 이 시는 지금의 정치적 현실뿐 아니라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의 감정 윤리와 공동체적 감각을 이야기하며 그것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운다. 인간이 ‘함께’라는 말 아래 어떻게 ‘따로’가 되었는지 되묻고, 그로 인해 낡아가는 세계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여 준다. 이로써 감정의 정치학을 역사적, 존재론적 차원으로까지 확장한다. 매년 11월이 돌아오면 페루 사람들은 죽은 자의 넋을 기린다 고인이 생전에 즐기던 음식을 장만하고 온 가족이 이틀간 죽은 자들과 함께 산다 산 자들은 아파트형 묘지를 찾아 꽃을 바치고 담배를 피워 악귀를 물리치고 브라스밴드에 맞춰 노래하고 춤춘다 매년 11월 초하루 페루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난다 한날한시에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방문한다 죽은 자의 사진이 없으면 죽은 자가 살아생전 살던 집을 찾지 못한대서 산 자가 죽은 자의 얼굴 사진을 고이 모신다 먼저 떠난 자와 나중에 따라갈 자가 같은 날 흥겨운 잔치를 벌이는 나라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페루 사람들의 애국가 제목은 이러하다 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 ―이문재, 「죽은 자의 날―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이문재의 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하는 축제를 통해 공동체의 가장 깊은 층위라 할 수 있는 정동과 기억의 공동체를 회복하고 있다. 특히 ‘함께’라는 말이 자연스러웠던 공동체적 감각이 ‘따로’로 분열되어 온 이경임의 시와 나란히 놓을 때, 이문재의 시는 또 다른 방향의 회복 서사를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시는 페루의 11월, ‘죽은 자의 날’을 배경으로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문화를 묘사한다. 영화 <코코>(2018)로도 잘 알려진 이 축제는 흥겨운 춤과 노래의 감각으로 구성된다. 위의 시에서 망자의 넋을 기리는 것은 “한날한시에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방문”하는 적극적 실천으로 의미화된다. 특히 “죽은 자의 사진이 없으면/죽은 자가 살아생전 살던 집을 찾지 못한대서”라는 구절은, 기억과 이미지, 감각의 윤리가 어떻게 공동체 구성에 실질적으로 작동하는지를 드러낸다. 마지막 연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페루 사람들의 애국가 제목은 이러하다/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는 시 전체의 윤리적 핵심을 밝힌다. ‘자유’는 더 이상 개인주의적 해방이나 정치적 권리의 언어가 아니라 타자, 그것도 이미 죽은 자의 존재조차 공동체 속에 포섭할 수 있는 연대의 감각으로 재정의된다. 그렇다면 이 시는 2025년 봄, 광장에서 실종된 감정의 언어와 윤리적 상상력을 되찾으려는 시적 실천으로도 읽힐 수 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같은 날 흥겨운 잔치’를 벌이는 나라의 이미지야말로, 기억의 연대, 감정의 공공성, 존재의 환대를 담보하는 미래의 광장을 예비하는 것이 아닐까. 한 달 동안 비워둔 내 방, 급히 잘라서 꽂아놓고 나온 구석의 파란 몬스테라가 유리 물병 속에서 잘 크고 있는지 걱정이다 지난번 쓴 시가 마지막 작품은 아닌지 끄적거리고 있는 이 시를 완성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어머니 칠십에 처음으로 집주인이 된 낡은 일층 빌라가 걱정이다 길 건너 천변이 보이고 가을 되면 불어난 냇물 소리가 들릴 거라고 좋아하셨는데 지구온난화가 초가속화되어 부모님 생전에 집이 물에 잠기면 어쩌지? 마요네즈 범벅의 감자샐러드를 좋아해서 걱정이다 달고 진한 카페라테를 좋아해서, 비건이 못 되어서, 국회의사당에 검은 헬기가 날아오던 그 밤이 안 끝날까봐, 역사가 건망증 환자일까봐서 걱정이다 오늘밤 별이 지는데 한 사람을 죽여달라고 기도했다 내가 정말 걱정이다 몬스테라잎과 고콜레스테롤 혈증과 내란과 두번째 대홍수의 날들에 천변 옆 낡은 빌라와 팔레스타인의 팔다리 없는 아이와, 숲을 따라 릴레이 선수처럼 달려가는 산불을 역사와 어머니의 심해져가는 건망증을 즐겨 쓰는 필기구의 단종 여부와 부활절 달걀들을 까맣게 칠하는 나의 증오심을 걱정하는 나여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그러니 나는 무수한 걱정, 무수한 불안, 무수한 죽음, 무수한 증오의 소유자다 그 밤의 일이, 두붓값 오르는 일이 일조지환인지 종신지우인지 분간 안 가는 걱정 속에서 단호한 비일관성과 일관성을 동시에 지닌 삶, 삶, 삶이여 슬픔이여 부드러운 두부와 맹목의 탱크여 나의 소유자다 ―진은영, 「걱정의 소유자」(『문학동네』 2025년 봄호) 진은영의 「걱정의 소유자」는 앞서 논의한 시들과 달리, 어떤 특정한 공동체적 장면이나 외부적 사건을 서사화하지 않는다. 대신 시적 주체는 “몬스테라잎과 고콜레스테롤 혈증과 내란과”라는 다종다양한 걱정의 목록을 나열하며 오늘날 주체 내부에 축적된 정동의 무게를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드러낸다. 여기서 ‘걱정’은 단지 사소한 불안의 나열이 아니라, 세계의 모순을 감각하는 자의 정서적 앎의 형식이다. 이 시에서 주목할 것은 시적 주체가 스스로를 “무수한 걱정,/무수한 불안,/무수한 죽음,/무수한 증오의 소유자”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시적 주체는 단일한 정체성이나 확고한 윤리적 기준이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감정들의 복합체로 존재한다. 나날의 무력감 속에서도 살아남은 감각은 바로 이러한 ‘걱정’이다. 그것은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몬스테라 잎처럼 작고 사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내란과 전쟁과 기후위기를 잇는 감정의 사슬을 만들어 낸다. 진은영의 시는 그래서 말미에 이르러 이중의 역설을 던진다. “단호한 비일관성과 일관성을 동시에 지닌/삶, 삶, 삶이여/슬픔이여/부드러운 두부와 맹목의 탱크여//나의 소유자다”. 삶과 슬픔, 부드러움과 파괴가 공존하는 이 정서는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단순한 개인적 고백이 아님을 보여 준다. 걱정의 감각이 곧 윤리이고 정치이며 이 세계를 살아가는 감정적 실존이라는 점에서, 이 시는 오늘의 시가 가닿을 수 있는 가장 내밀한 광장의 모습을 보여 준다.이로써 2025년 봄의 시들이 어떻게 저마다의 방식으로 시적 공간을 재구성하고 있는지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직접적인 구호나 선언이 아니라 정동과 감정, 회복과 연대, 슬픔과 불안의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광장의 내부화’이며, 이러한 시적 언어야말로 이 계절의 시가 갖는 윤리적 실천의 장이 된다. 살펴본 시들은 외치기보다 감각하고, 선동하기보다 기억하며, 하나의 목소리가 되기보다는 염려하며 서로 다른 말들의 숨결로 존재한다. 말해지지 못한 것을 끝내 붙잡고 부서진 감정 위에 느슨한 연대를 상상했던 이 시들은, 정동의 언어로 광장을 다시 열어젖혔다. 시가 도달한 가장 조용하고도 가장 정치적인 자리, 그곳에서 또다시 ‘함께’와 ‘따로’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1) 『문화/과학』 봄호에는 새로 시작한 꼭지 ‘옥상의 시선’에 나희덕과 진은영의 시가 두 편씩 묶였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지상과는 다른 높이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예술가의 이야기”(「121호를 내며―12‧3 내란 이후 광장정치의 부상하는 주체와 그 함의」, 『문화/과학』 2025년 봄호, 7쪽)를 담은 것인데, 첫 필자로 두 시인이 섭외되었다. 2) “현장에 나가서 활동가분들 만나면서 연대라는 것 자체가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좋은 의미로 침범을 하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최나현‧양소영‧김세희, 「연대는 아름다운 침범」, 『백날 지워봐라, 우리가 사라지나』, 오월의봄, 2025, 37쪽)
‘니’와 인간의 공동체 김해자의 시를 중심으로 황규관(黃圭官) 1 2025년 4월 4일 11시 22분,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광장에서 들었다. 친위쿠데타를 획책한 대통령의 파면을 ‘함께’ 느끼고 싶어서 부러 광장으로 달려간 것이다. 윤석열이 일으킨 쿠데타는 대한민국 사회에 꽤 긴 감정의 침전상태를 초래할 정도로 심한 ‘사회적 스트레스’를 가져다주었으며 그것이 아직 끝난 것도 아니다. 쿠데타 주도세력을 통해 그동안 은폐된 채 현존해 있던 충격적인 우리 사회의 일면이 드러난 사태는, ‘윤석열의 시간’이 ‘박근혜의 시간’과도 또다르다는 것을 우리에게 깊게 각인시켰다. 생각했던 것보다 반동의 그림자가 넓고 깊었다는 사실 앞에서 적잖은 당황과 새로운 감정이 비구름처럼 몰려오기도 했다. 예컨대 현실로 존재하는 윤석열 지지세력 혹은 극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받아들여야 할지를 물으면서 적대시를 경계하고 ‘대화’나 ‘공존’을 주장한 글들1)과 그에 대한 비판은 바로 이 당황과 새로운 감정이 갈피없이 치솟아오른 실례가 된다. 이것이 ‘박근혜 때’와 다른 지점이다. ‘박근혜 때’는 나름대로 한뜻을 모아 사태를 종결시킬 수 있었지만, ‘윤석열 때’는 아직도 진행 중인 것이다. 현상적으로는 ‘중국인’이나 ‘이재명’이라는 적대적 타자를 만들어 나타나는 착시 같지만, 아마도 이번 현상의 뿌리는 깊은 것이며 만약 그렇다면 현상이라는 이파리는 쉬 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 쿠데타와 동시에 떠오른 현상에 대한 상당한 지적 분석과 그 역사적 계보와 관념의 토대를 찾아나서는 정신적 노고를 감당해야 할지 모른다. 달리 생각해보면 지금껏 우리 현실에 대한 심층적인 공부와 실천들이 부족했기에 이런 사태와 현상이 터졌을 수도 있고, 만약 그렇다면 윤석열의 친위쿠데타는 우리의 자세와 수련에 따라 천우신조의 ‘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예술이 그렇지만, 특히 시는 인간의 감정을 일차적인 출발지이자 도착지로 하는 장르인바 ‘사회적 감정’의 출렁임에 예민할 수밖에 있다. 이렇게 말하면 인간의 감정이 개인의 것만은 아니라는 전제가 어느새 성립된다. 그런데 여기서 감정이란 무엇일까? 스피노자(B. Spinoza)는 『에티카』(1677)에서 감정을 48가지로 분류한 다음 “정서의 형상을 구성하는 관념은 신체 자체나 신체의 어떤 부분이 가지는 활동력이나 존재력”에 따라 좌우된다고 했다.2)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신이나 정서에 대한 신체(몸)의 우선성이다. 즉, 감정이란 것은 신체에 의존적이다. 하이데거(M. Heidegger)는 칸트를 읽으며 ‘직관’과 ‘사유’를 인식의 요소로 파악하면서 사유는 직관에 의존한다고 말한다.3) 직관의 능력은 마음이 가지는데 사유가 마음의 작용으로서의 감정에 의존적이라는 하이데거의 지적은 스피노자처럼 그 중간에 신체가 개념적으로 자리잡지 않아서 그렇지 인간에게 있어 감정, 즉 마음의 작용을 우선시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공동체라는 것이 몸과 몸의 연결이라는 차원을 갖는다면, 마음 차원에서도 그 연결을 유추하는 일에 논리적 하자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클리셰나 혹은 지적 나태로 읽힐 수 있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말은 그렇게 간단하게 논파당할 수 없다. 이미 우리는 윤석열‘들’이 기도한 쿠데타로 인해 깊은 감정의 공동체를 경험하지 않았는가? 물론 ‘감정의 공동체’라는 말은 모두가 갖는 감정이 동일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공동체’는 무차별적인 동일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무차별적인 동일성이야말로 전체주의적인 강압이 일으킨 환영일 뿐이며, 민주적인 공동체를 상상할 때는 도리어 비추는 빛에 따라 반사되는 빛이 다른, 즉 내적 구조와 밀도가 다른 구슬들이 한데 모여 통일된 색조를 띠는 것 같은 이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연합적인 조화를 건강한 민주주의에 대한 비유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당연히 이 조화는 부단히 해체되려는 힘과 서로 곁이 되려는 힘이 공존하는 관계양식을 말한다. 여기서 ‘구슬’이 환기하는 것에는 감정이 제외될 수도, 제외될 리도 없다. 새로운 민주주의를 향한 여정에서 집단의 감정을 재구성하는 시의 역량과 책무가 결코 만만하지 않다. 물론 시의 역량과 책무가 어떻게 발현되고 또 발현되어야 하는지는 구체적인 현실이라는 냉정한 조건을 통해서 이야기되어야 한다. 설령 현실적 조건이 시의 역량과 책무를 축소시키거나 은폐한다 하더라도 자동적으로 시 자체의 위의와 본질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현실적 조건의 변화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변할수록 시가 공동체의 감정에 대해 져야 할 십자가는 무거워진다고 봐야 옳다. 하지만 작품의 현실성은 어디까지나 시인 개인의 감정에서 시작되어 개인인 독자의 감정을 변화시킨다는 평범한 진리를 놓쳐서도 안 된다. 2 김해자의 여섯번째 시집 『니들의 시간』(창비 2023)은 사람의 삶에서 사람 아닌 존재의 삶까지, 구체적인 생활의 세목에서 역사적 상황과 우주적 영역까지 포함하고 있다. 김해자의 시에 독자의 감정이 움직이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시인의 감정의 동요가 고스란히 작품에 전이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감정의 동요라는 것이 좋은 시에서는 항용 그렇듯 단순히 개인의 심리적 동요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도리어 김해자의 시에는 집단적인 감정이 담겨 있는데, 여기서 집단적인 감정이란 추상적이고 평균화된 전체의 감정이 아니라 시인의 감정 자체가 집단적인 관계를 통해 형성된 감정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김해자의 시는 어쩔 수 없이 복수인 그 감정‘들’을 담고 있는 그릇이 된다. 다음의 시를 보자. 물은 안 되겄고, 눈 감고 뛰어내리믄 괜찮을 거 같어 저짝에 옥상 꼭대기로 허리 붙잡고 올라가는디 죽을 맛이더라고. 이제 죽으나 저제 죽으나 죽을라고 올라가는디, 허리가 아파 죽겄어. 나는 모르겄지만 흉한 꼴 볼 사람들 떠올리니께 도저히 못 뛰어내리겄데. 별이 저리 많아도 달 하나 못 구하나 별이 아무리 여럿이 박힜어도 달 하나만 못혀 하이고야, 저 하늘 좀 봐 목화송이마냥 훤혀 물에 처박힜다 꽃이 되었구마 저승길 밟은 맴으로 살아보자, 어디까정 갈지 모르겄지만 살다보믄 무슨 수가 있겄지. 그냥 살기로 혔어. 아프다 아프다 해도 죽게 아프지는 않으니께 살아야지. 나 죽네 나 죽네 하믄서도 세상은 돌아가잖여. 야아 달이 살아났네 저기 좀 봐 달이 나오잖여 나 달이다, 허고 일어났잖여 —「월식」 부분 인용 부분(4~7연)은 작품의 후반부에 해당한다. 여기서 시의 화자는 “자식 놓쳐불고 죽을라고” 했던 여인이다. 작품은 전체가 화자의 입말로 구성되어 있는데 1, 3, 5, 7연은 제목인 ‘월식’에 걸맞게 달이 사라졌다 다시 부활하는 과정을 화자가 혼잣말처럼 내뱉고 있지만 청자가 숨어 있는 구조를 취하는 서정시의 형식이다. 반면 그 사이의 2, 4, 6연은 행의 구분 없이 화자에게 실제 있었던 사건을 진술하는 이야기시의 형식이다. 이렇게 이야기의 특성을 활용하여 서정시의 깊이를 확보하고 그 외연을 넓히는 방식은 김해자 시인이 자주 활용하는 형식구조다. 이는 아마도 이야기와 노래 둘 다 포기하지 않으려는 시인의 의도인 것처럼 보인다. 이 시는 자발적으로 죽음 가까이 다가갔다가 서서히 삶의 영역 쪽으로 옮겨오는 화자의 마음에 대한 것이다. 자식을 앞세운 여인이 처음에는 자살의 장소로 강을 택했다가 “맴만 젖”고 만다. 물이 “허리까지 차니께 몸이 붕 뜨”고 말아서 죽으러 갔다가 도리어 삶의 부력을 몸으로 느낀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죽어야겠다는 마음이다. 그래서 “옥상 꼭대기로 허리 붙잡고 올라가는디” 역설적이게도 몸의 고통을 통해서 삶을 느끼게 된다. 결정적으로 남에게 자신이 죽어서 보일 “흉한 꼴”을 포기함으로써 “저승길 밟은 맴으로 살아보자”며 죽음으로 난 쪽문을 닫아버린다. 이 시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몸의 역할이다. 2연에서는 물에 들어간 몸이 수면 위로 붕 뜨고, 4연에서는 아픈 허리를 붙잡고 옥상 꼭대기로 올라가는 게 “죽을 맛”이다. 몸이 고단해진 것이다. 그 몸의 실감을 통해 “아프다 아프다 해도 죽게 아프지는 않”다는 구체적 진실을 깨달으면서 삶의 방향 쪽으로 감정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른바 ‘객관적인 눈’은 화자의 증언에서 과장을 읽을 수도 있겠지만, 화자의 증언을 작품으로 빚어내면서 녹아 들어간 시인의 진실한 마음이—설령 화자의 증언이 과장일지라도 그것마저 넘어선—삶의 의지를 부활시키고 있다. 1, 3, 5, 7연은 달의 사라짐(죽음)에서 다시 나타남(부활)까지 노래의 형식으로 독자의 감정에 물결침으로써 더욱더 화자의 증언이 진실임을 밀어올린다. 특히나 마지막 7연의 “야아 달이 살아났네 / 저기 좀 봐 달이 나오잖여 / 나 달이다, 허고 일어났잖여”는 개인의 경험을 훌쩍 넘어서는 자연의 본질, 즉 은폐와 생성(poiesis)의 반복이라는 진리의 영역에 해당된다. 이 진리의 영역이 가능했던 것은 화자의 변화하는 마음과 몸의 작용을 시인이 세밀하게, 하지만 과잉되지 않게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보여주는 화자의 마음 변화, 즉 죽음에 기울었던 비탄에서 삶을 향한 자기보존(혹은 극복)의 감정으로 전환하는 운동은 일면 화자 개인의 것인 듯하지만, 이 시의 이면에 흐르는 것은 개인의 고통과는 무관하게 운동하는 자연을 통해 얻은 깨달음, 다시 말해 자신의 삶을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는 민중의 마음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런데 김해자가 파악한 민중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관념적인 자의식을 벗어나 자신의 몸이 다른 몸과 연결돼 있다는 실감을 통해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임으로써 도달하게 된 긍정의 감정이다. 달이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월식현상을 어떤 부활로 노래하는 짝수 연은 홀수 연에서 도드라지는 이야기에 숨을 불어넣는, 고대 그리스 비극양식에 비유하자면 디티람보스(dithyrambos)의 역할을 한다. 디티람보스는 본래 고대 아테네의 디오니소스 축제기간 중 마지막 행사로 벌이는 비극 경연대회에서 각 부족 대표로 참가하는 민중 합창단을 뜻하지만, 니체(F. Nietzsche)는 디티람보스가 비극 전체에서 “자연의 가장 숭고한 표현, 즉 자연의 디오니소스적 표현”이라고 해석한다. 즉 디티람보스는 “함께 고통을 겪는 자로서 동시에 현자이며, 세상의 심장으로부터 널리 진리를 전하는 자다.”4) 기억해야 할 것은 단수의 목소리라 하더라도 그 목소리에 복수의 감정이 들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한 사람의 개별자라 하더라도 감정은 복수의 갈래가 뒤엉켜 있다는 게 진실에 가까운데, 이는 앞에서 말했듯 개인의 감정은 집단적 관계를 통해 형성된다는 것에 의해 입증되기도 하지만 감정이 의존하는 몸 자체가 이해(利害)를 떠난 여러 생명의 복합체라는 과학적 사실에 의해서도 지지를 받는다. 민중의 아픔과 설움을 “대신 울어주러”(「버버리 곡꾼」, 『집에 가자』, 삶창 2023) 온 경우에서 보듯, 김해자의 시는 시인 자신의 감정과 민중의 감정이 동시적으로 울리는 특징을 가진다. 이는 그의 시세계에서 예외적인 게 아니라 일반적인 경향이다. 한 몸에서 한 감정의 노래만 흘러나오는 전통적인 서정시나 혹은 단수의 감정인데 복수의 목소리인 것처럼 ‘기획’하는 이른바 현대시의 ‘다성성’은 몸과 마음의 관계망이 존재론적으로 앞선다는 차원에서 비판적 검토가 필요한 대목이다. 「월식」이 시적 화자의 삶을 통해 민중의 삶에 대한 긍정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면 「니들의 시간」은 한참 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차원을 확장하고 있는 작품이다. 시인 자신의 몸이 귀속돼 있는 시간과 공간과 차원에 그것을 초월하는 상상력이 들어오면서 시의 선형적 구조는 흐트러지고 만다. 즉 작품에 다른 기(氣)가 내유(內有)함으로써 「월식」보다 복잡한 구조를 갖는다. 3 1 연해주 사는 우데게족은 사람 동물 귀신 구분하지 않고도 모두 ‘니’라 부른다는군요 과거와 현재와 미래 안에 깃든 모든 영혼을 니로 섬긴대요 삵이 마을을 어슬렁거린다는 소문 밤 창문을 닫으려다 흠칫 놀랐어요 누군가 여태껏 훔쳐보기라도 한 듯 뻣뻣한 털들이 돋아난 유리창은 거대한 눈, 그 앞에 서기만 해도 찔릴 것 같았지요 수상쩍은 날들이 이어졌어요 이상스러운 생물체가 출몰한다는 소문이 퍼졌죠 봄이 오긴 온 건가요 안전 안내 문자를 받으면 안전해지긴 할까요 이끼 낀 계단이 노려보았어요 맘만 먹으면 어디서든 넘어뜨릴 수 있다는 듯 모서리가 너무 많아요 2 비늘구름 속에서 미사일이 날아다녔어요 인형 속에 인형, 탄두 속에 탄두, 아이 손에서 터지는 탄두 속 작은 집속탄, 밀밭은 보고 있었죠 무너진 담벼락과 흩어진 살점들, 폭격에 쓰러진 나무가 가리키고 있었죠 크라마토르스크 기차역에 떨어진 토치카-U 로켓에 쓰인 흰 글씨, ‘어린이를 위해서’ 겨우내 참았던 씨앗이 버럭 솟구친 것처럼 맥락도 없이 튀어나오는 울화 남몰래 사그라진 화장장의 연기는 지구를 몇 바퀴나 돌아 여기까지 왔을까요 살아도 죽어도 제로가 되는 수치 한낮에도 귀신이 출몰한다는군요 소금을 바가지로 뿌려대다 영구 엄니는 옥수수밭에 서 있는 발 없는 귀신들에게 넙죽 절했다죠 한잔 받으시오, 고수레 술 가득 부어, 고수레 삭삭 빌었다죠 손가락 넣고 휘휘 저어 석 잔 대접하고야 놓여났다죠 발 붙들고 놓지 않는 산 그림자 (…) 5 니들이 부서지고 있습니다 산산이 공들여 ✕자를 붙였어도 태풍에 깨져버린 창문처럼 창에 비치던 너와 나의 얼굴 우린 어쩌다 먹어치워버렸을까요 앞으로 올 니들을 니들의 시간을 —「니들의 시간」 부분 먼저 “연해주 사는 우데게족”이 부른다는 “니”에 당연히 주목해야 한다. 우데게족에게 ‘니’는 형체가 있든 없든 모든 존재자들을 부르는 명칭이면서 과거, 현재, 미래라는 분절된 시간을 초월해 “깃든 모든 영혼”이다. 그러니까 ‘니’는 시간과 공간, 유형과 무형을 떠나서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면서 시인은 지금 자신도 그런 ‘니’에 둘러싸여 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니들의 세계’는 이미 깨어졌다. 1절에서 그런 징후를 드러내다가 2, 3, 4절에서 시인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니’가 사라진 세계 또는 ‘니’의 의미가 타락한 현실에 대해 마치 “고수레”하듯 읊조린다. 그런데 ‘고수레’의 의미와도 연관되는 것이지만, 마치 혼자만의 넋들임을 하고 있는 느낌이다. 전체 작품의 복판격인 2절과 3절의 마지막 부분에서 반복적으로 ‘고수레’ 장면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2절 1연의 (우끄라이나)전쟁 상황과 2연의 원망과 미움에 가득 찬 현실은 이어져 있는 인과관계라고도 볼 수 있지만, 시인은 어디까지나 조각보를 기우는 듯한 방식을 쓰고 있기에 전쟁과 미움의 연관관계는 읽는 독자마다 다르게 경험되기도 한다. 그 뒤 이어지는 3절 2연에서도 역시 원망과 미움으로 가득 찬 현실이 지금 시인의 마음을 치고 있음이 충분히 느껴진다. “니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든가 “니는 대체 왜 그래”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숱하게 뱉어내고 또 듣는 말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런 원망의 언어 “없이” “니라 부르면 니가 나처럼 느껴질까요”라고 묻지만, 이미 현실에서는 “연해주에 사는 우데게족”의 “니”는 다 파괴되었다. 물론 우데게족의 ‘니’와 한국어 ‘니’의 실제 의미는 다르지만 소리를 빌려와 동일한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은 시가 가진 특권의 문제이며 시인은 그것을 근사하게 해냈다. 그런데 “니가 나와 섞”이지 못하는 현실과 ‘니’를 향한 원망과 미움은 막연한 심리적 뒤틀림이 아니라 우리의 근대가 차곡차곡 쌓아온 업(karma)에 다름 아니다. 4절 2연의 “니가 깎여 나가는 동안 허리가 묶인 물고기들처럼 / 아무리 헤엄쳐 가도 헤어지지 못하는 사이(우리는 우리가 아니야)”에서 그 일면을 제시하면서 시인은 그 업에 무릎 꿇고 비는 대속(代贖)행위를 한다. 누구에게? “한낮에도” 출몰하는 귀신—다름 아닌 ‘니’들—에게. 우리는 지금 귀신마저 원망에 차 “안전 안내 문자”처럼 출몰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지만 그게 귀신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 귀신의 목소리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아니,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인이 대신 빌고 있는 것이다. 근대가 자신의 업을 고쳐보겠다고 더 쌓고야 만 업을 시인은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시인 자신의 “고수레”도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 마지막 절인 5절에서 다시 무너지듯 내뱉는 탄식은 그런 느낌을 주고도 남는다. 우린 어쩌다 앞으로 올 존재들과 그들의 시간을 다 먹어치워버렸나. 그렇다면 ‘고수레의 마음’은 죽었다 살아나는 달(「월식」) 같은 자기치유와 닮은 마음 아닐까. 귀신에게 비는 마음이 일종의 ‘향아설위(向我設位, 제사 지낼 때 조상의 신위를 벽이 아니라 ‘나’로 향하게 함)’라면 결국 자기 마음에 비는 행위와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월식」과 「니들의 시간」은 그려내는 시공간의 폭이나 그 형식은 다른 작품이지만,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민중의 자기치유를 통한 삶에 대한 긍정적인 자기통치만이 결국 ‘니’(타자)에 대한 성찰과 ‘니’(귀신)에 대한 기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시적 실례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죽임과 좌절, 원망과 혐오로 얼룩진 우리의 세계가 나아가야 할 근원을 가리키지 않는가? 동학의 교조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가 경신년(1860) 4월 종교체험을 할 때 들은 첫 말은 “내 마음이 곧 너의 마음이다(吾心卽汝心)”였다. 최제우는 가뜩이나 세상이 어지럽고 민심이 좋지 않아 사람들의 마음이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상황에서 서양 제국주의가 괴이한 언어(기독교)를 앞장세워 무력까지도 불사하며 밀어닥치고 있는 게 두렵기까지 했다. 이런 현실을 넘어서려는 바람과 기도가 깊고도 깊었던 것일까. 급기야 신다전한(身多戰寒), 즉 몸이 심하게 떨리고 춥더니 새로운 기운이 느껴지면서 순간적인 깨달음인 확연대오(廓然大悟)가 찾아왔다. 이때 들려온 말이 “내 마음이 너의 마음이다”였고, 이어서 “사람들이 천지는 알아도 귀신은 알지 못한다(知天地而無知鬼神)”는 말이 들려왔다. 여기서 ‘귀신’은 도올 김용옥의 번역으로는 “천지의 또 다른 영묘한 이름”이라 했거니와 최제우가 몸으로 접한 새로운 기운(接靈之氣, 신령과 맞닿아 합일하는 기운)을 일컬을 것이다.5) 그런데 최제우의 ‘귀신’은 “연해주 사는 우데게족”의 “니”와 의미상 어떤 차이가 있을까? 김해자의 시는 ‘니’로서의 ‘귀신’이 “태풍에 깨져버린 창문처럼” 산산이 부서지면 “안전 안내 문자”같은 악귀(惡鬼)로 돌아온다고 말한다. 동아시아 사유에서 기(氣)는 뭉쳤다 흩어졌다 하면서 영원회귀하는 실체로서, 그 기의 운동에 괴변이 생기면 기에 감응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몸과 마음도 헝클어지고 만다. “인간 안에 있는 것은 신령이요 인간 밖에는 기의 운동”(「동학론」, 『동경대전』)이라는 말은, 기(氣)와 영(靈)은 내재적으로 같은 것이며 그래서 함께 운동하고 함께 변화하는데 그중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영은 신령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최제우는 인간을 일러 최령자(最靈者, 가장 신령한 존재)라고 했던가. 따라서 우주 전체 혹은 우리가 사는 지구나 지역의 기에 문제가 생기면 그 안의 모든 생명·사물에 깃든 영에도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며 인간 안에 모셔져 있는 ‘신령’도 위태로워진다. 최제우가 ‘시천주(侍天主)’를 강조한 것은 이런 상태일수록 우리 안의 신령을 배신 혹은 불신하지 말고 마음을 닦고 기를 바로 하라는(修心正氣) 바람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언어의 타락과 타자를 혐오하는 영혼이 절정에 달해 있는 오늘날에 비춰 볼 때, 기의 운동 변화에 심대한 차질이 생겼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것은 일단 기후변화로 나타나고 있으며 당연히 기후변화는 근대 자본주의 문명이 생태계를 교란·파괴한 탓이라는 것에 이제 다른 토를 달 수가 없게 됐다. 생태계의 교란·파괴라는 것은 결국 “니들의 시간을” 먹어치워버린 것과 같은 의미다. 다른 사물과 타자 또한 기의 형체이고 그 안에도 우리가 모르는 영, 즉 ‘니’가 깃들어 있는데 그것들을, 아니 “앞으로 올 니들”까지 먹어치웠으니 그 ‘니’가 다른 기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게 바로 ‘악귀’이고 그 악귀의 파토스는 원한과 혐오이며, 그 파토스의 로고스 형태가 언어의 타락인 것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하이데거)이라고 하지 않던가. 하이데거의 말처럼 인간은 ‘존재의 목자’이고 시인이 ‘언어의 파수꾼’이라면, 김해자의 「니들의 시간」은 목자의 역할과 파수꾼의 임무에 응하고 있는 작품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4 오늘날 ‘민주주의’는 너무도 지당한 상식이 되어버렸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맥락은 점점 더럽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독재자도 자본가도 관료들도 그리고 파시스트도 민주주의라는 ‘말’을 차마 버리지 못한다. 어찌 보면 현대세계를 살아가는 존재증명 방식 같기도 하다. 본질적으로 민주주의는 주인된 민중이 스스로 정치의 방식을 계발해 나아가면서 그 방식에 따라 스스로 정치를 하는 체제를 말한다. 하지만 근대 자본주의체제가 과연 ‘주인된 민중’을 어떻게 괴롭혀왔는지에 대해서는 묻기를 주저하곤 한다. 그리고 그러한 주저는 자연과 신성(神聖)의 파괴와 동시적으로 일어났다. 자연과 신성이 곧 민중의 삶의 거처이며 존재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신성을 파괴하면서 자연과 사물을 지배받아야 할 대상으로 격하시킨 근대의 세계관은, 자연과 사물은 상품생산을 위한 원료창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본주의적 경제관념을 제공했으며, 이 비도덕적 경제관념이 수탈과 식민, 착취와 파괴를 정당화하는 제국주의 논리로 이어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역사적 진실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 역사는 과거지사일 뿐이고 식민지 경험이 있는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집단무의식이 혹 형성되었던 것일까. 그래서 웬만한 신생독립국은 흉내도 낼 수 없는 경제발전을 이루면서 그 반대쪽의 암흑은 모르쇠해왔는지도 모른다. 스피노자의 말대로 감정의 형상을 구성하는 관념이 신체의 상태, 즉 여타의 활동력과 존재력에 따른 것이라면, 다른 신체로서의 사물, 그리고 그것들의 연합이자 존재 근거인 자연상태가 변질되면서 우리의 신체와 감정에도 비례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사실은 현대의 여러 병증(病症)을 통해 충분히 유추 가능하다. 이런 상황이 우리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뒤틀린 감정을 만들었을지 모르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 ‘주인된 민중의 자기통치’로서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타락한 교의와 정치이념에 맹종하는 노예의 감정을 퍼뜨렸을 것이다. 시가 감정의 변화 속에서 시작돼 다른 감정을 변화시키는 것이라 해서 감정에 직접 호소하는 계몽에 몰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것은 한편으로 자기 감정을 절대시하는 감정의 독재를 낳을 수도 있다. 먼저 우리 시대의 감정‘들’의 결을 섬세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으며 그것의 연원을 제대로 사유하는 일의 동시적인 수행이 필요하다. 현대의 철학적 경향에는 대체적으로 인간의 몸과 마음을 또다른 기계로 보려는 관점이 강한데 이 또한 역사적인 관점의 결여를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에 대한 사유 자체가 ‘근대인’에 한정돼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이 역사의 국면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말하기 전에 인간의 본성을 보는 ‘관점’이 역사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은 우리가 품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 근대 민주주의가 어떻게 역사적으로 전개되어왔으며 시대적 국면과 어떻게 조응해왔는지 종합적인 인식이 이루어진 바탕 위에서 새로운 민주주의에 대한 직관도 풍성해질 것이다. 이는 사유와 인식이 직관에 의존한다는 하이데거의 말을 뒤집는 게 아니다. 인식의 새로움은 다시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고 그것은 다시 자유로운 사유의 촉발로 되먹임된다. 따라서 몸과 마음과 정신은 삼위일체이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가 새로워진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몸과 마음과 정신이라는 구분법은 인간이 가진 언어의 한계에 따른 것이며, 어쩌면 한계 자체가 인간 존재의 본질에 해당될지 모른다. 다만 민주주의에 대한 랑씨에르(J. Rancière)의 말마따나 시가 꿈꾸는 민주주의가 “행태들을 갱신하는” 일이나 “주체의 새로운 출현”6) 등에 머문다면 어딘가 미진해 보인다. 주체의 ‘분할’이나 감성의 ‘분배’ 같은 것에 치중하는, 인간 ‘주체’로 꽉 찬 민주주의는 기계적 평등과 존재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권리의 횡행을 가능케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는 인간 ‘주체’의 범람으로 ‘니들’의 세계인 이천식천(以天食天, 하늘로써 하늘을 먹이다)의 공동체, 인간만이 아닌 모든 존재들이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몸과 마음의 공동체가 깨진 상태다. 근대적 주체, 곧 ‘나’는 서구의 근대 정신사에서 신과 ‘능산적 자연’(스피노자)을 지배의 대상으로 삼은 관념의 토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근대적 주체로서의 ‘나’의 강조가 인간을 위하는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주체 개념을 다른 존재자에게까지 확장하는 현대의 철학적 경향은 사실 인간 아닌 존재를 의인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 인간중심주의의 변종에 가깝다. 인간 존재의 고귀함이 점점 납작해져가는 상황은 인간이 ‘니들’을 먹어치운 상황과 절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시가, ‘니’의 회복을 어떻게, 얼마만큼 감당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당연히 그 감당을 회피하기 위함도 아니고 회피를 위한 알리바이로 작용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시는 주어진 현실을 통과하며 넘어서기 위한 ‘신다전한(身多戰寒)’의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신다전한이란 결국 자기 시대의 토양, 공기, 귀신, 욕망, 꿈과 한몸이 되면서 맞는 고통일 것이다. 시에 가르침의 임무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보다 먼저 시가 ‘니’와 한몸이 되어야 할지 모른다. 그런 몸에서 나온 작품이 현실의 집단감정에 동요를 일으키면서 다른 세계에 대한 감정이 생성되는 창조적 순간을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이런 순간의 다중공유가 가능해진다면, 이때를 새로운 시운(時運)이라 부르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1)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글들이 있다. 박권일 「윤석열의 지지자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한겨레 2025.3.24; 정희진 「내전과 공존」, 경향신문 2025.3.18. 2) B. 스피노자 『에티카』, 강영계 옮김, 서광사 1990, 202~203면. 3) 마르틴 하이데거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 이선일 옮김, 한길사 2001, 127면. 4)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05, 74면. 니체는 이 책에서 고대 그리스 비극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부정하지만 역설적으로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중우화(衆愚化)되면서 비극이 몰락하는 계기가 됨을 자신도 모르게 드러낸다. 니체는 에우리피데스와 소크라테스를 비극을 몰락시킨 구체적인 인물로 지목하며 ‘그리스의 명랑성’(“어려운 것을 책임지지 않고 원대한 꿈을 추구하지 않으며, 지나간 것이나 미래에 올 것을 현재 있는 것보다 높이 평가하지 않는 노예들의 명랑성”, 92면)에 대한 부박함을 비판한다. 이때는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그 건강성을 잃은 시기이기도 했다. 신화와 음악으로 이루어진 그리스 비극이 합리적 이성이 지배적이었던 아테네 민주정 시기에 번성했던 것은 인간의 합리적 이성으로도 어쩔 수 없는 비합리의 세계(운명, moira)에 대한 의식이 아테네 시민들의 시민적 덕성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민주주의가 확보해준 문화가 토양이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민주주의와 예술의 상관관계를 유추해볼 수 있다. 그리스 비극에 기대 말하자면, 예술이 종교(철학)와 정치를 이어주는 동시에 그 둘을 통합하는 교각이 되어 시민들의 마음과 정신을 (오늘날의 경우 자본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고, 그 시민들의 마음과 정신이 다시 예술이 샘물이 되는 역동적인 관계를 말이다. 5) 이상 원문과 번역은 도올 김용옥 『동경대전 2』, 통나무 2021, 118~19면 참조. 6) 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길 2013, 110~11면.
말을 잃은 아버지들 이미상 성혜령 예소연의 소설을 중심으로 하혁진(河赫進) 1985, 2005, 그리고 2025 여기, 두 명의 아비가 있다. 첫 번째 아비는 허수아비를 만들고 있다. 낡고 녹슨 재료로 고작 허수아비를 만들면서도 그 태도는 사뭇 진지하다. 아비는 자신이 만든 "넝마들"을 향해 준엄하게 명령한다. "황산벌에 계백 장군 임하시듯 / 늠름하게 쫓아뿌라, 잉". 그러나 허수아비를 만드는 아비는 정작 자신이 허수아비라는 사실은 모른다. "그 뒤편에 전쟁보다 더 무서운 / 입 다물고 귀 막은 적막강산이 / 호올로 큰 눈 뜨고 있다"는 사실을 아비는 알지 못한다. 철 지난 권력과 남성성에 취해 있는 아비. 화자의 눈에 그런 아비의 모습은 "장검 대신 깡통 차고" 있는 늙은 남자, "홀로 남아 나이롱 저고리 입고"(김혜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 지성사 1985) 있는 우스운 남자일 뿐이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 아비는 쉴 새 없이 달리고 있다. "아버지가 되기 전날 집을 나가 그후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김애란 『달려라 아비』, 창비 2005, 14면)은 무책임한 아비는 '나'의 상상 속에서 쉬지 않고 달린다. 어떻게든 어머니를 꾀어내기 위해 거리를 전력질주했던 아비는 지질한 그 모습 그대로 박제되어 있다. "아버지는 달리기를 하러 집을 나갔다."(15면) 가족을 버린 아비의 그림자에 갇히지 않기 위해 '나'는 그렇게 믿어버린다. 어느 날 느닷없이 도착한 한 통의 편지가 아비의 죽음을 알렸을 때도, '나'는 "입맞춤을 기다리는 소년 같"(29면)은 철없는 아비의 시신 위에 검은 선글라스를 씌우는 장면을 상상할 뿐이다. '겨우' 아비일 뿐인 아비는 '나'의 명랑에 상처 입히지 못한다. 요컨대 전자의 아비는 '너무 있는 것'(현존)이 문제였고, 후자의 아비는 '너무 없는 것'(부재)이 문제였다. 그래서 전자의 딸은 아비와 허수아비를 겹쳐놓음으로써 아비가 가진 (혹은 가졌다고 여겨지는) 권력을 허상으로 만들고, 후자의 딸은 아비를 소년으로 그림으로써 아비를 나를 책임질 사람이 아니라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으로 만든다. 각각의 시대를 대표하는 두 여성작가가 20년의 시차를 두고 만들어낸 형상은 "'나이 든 아버지'와 '젊은 딸'의 관계"를 통해 "세대-젠더의 역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통쾌하다. "세대는 몰젠더적이지 않고 젠더는 초세대적이지 않다"1)는 적실한 지적처럼,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부녀관계 형상화는 세대·젠더 문제를 둘러싼 현실의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양상들을 묘파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아비의 권력을 해체한 김혜순의 시도, 부재하는 아비의 영향력을 거부한 김애란의 소설도 작금의 딸들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다시 20년이 흐른 지금, 늙은 아비와 젊은 딸의 세대·젠더 역전은 더이상 딸들의 '상상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12·3 내란사태 이후 광장을 가득 채운 여성(들)의 목소리는 남성만이 역사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세대론의 무의식적 위계를 '늘 그랬듯이'2) 전복하며, 공통의 기억과 사건을 경유한 정치적 주체로서의 여성(들)이 어떻게 '알 수 없는 미래와 벽'(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 너머의 세계를 제시하고 나아가는지 보여줬다. 그렇다면 여성(들)의 목소리를 예비하고 재현해온 문학작품 속에서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을까. 아버지는 여전히 거부와 해체의 대상일까. 혹은 아버지와 딸이라는 세대·젠더의 구분을 넘어 함께 미래를 도모할 수 있는 새로운 관계, 즉 '동료 시민'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을까. 아비의 자백: 이미상 「하긴」 발화자가 자신이 저지른 죄를 모를 때, 그가 하는 말은 대개 자백이 된다. 이때의 핵심은 그가 하다못해 묵비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인데, 그가 가진 가장 큰 결함은 무슨 말이라도 '하긴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하긴」(이미상 『이중 작가 초롱』, 문학동네 2022)의 화자 '김'이 그렇다. 그는 누구인가. 한때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그는 이른바 '86세대' 남성들의 부정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젊은 시절 목숨을 걸고 외쳤던 "대의명분이 대입명분으로 수렴"(28면)되어버린 지 오래인 그에게, 남겨진 유일한 전선(戰線)은 딸 '보미나래'의 입시전쟁뿐이다. 그러나 "서로의 발이 닿을 만큼 작은 소반에 앉아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전수하는 것"(9면)을 꿈꾸었던 김의 부녀상(像)은 아동발달센터에서 듣게 된 "지능검사 한번 받아보시겠어요?"(11면)라는 말과 함께 산산이 부서진다. 그런 와중에도 김은 "지능은 유전 아닌가?"라고 말하며 아내가 의심스럽다고 덧붙이는데,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 거"(12면)라며 은근슬쩍 청자의 동의까지 구하는 그의 내면에 끔찍한 위선과 이중성, 엘리트주의가 자리잡고 있음은 두말할 것 없이 명백하다. 그러나 김이 어쩌다 온갖 차별과 혐오에 찌든 속물이 됐는지 그 경로를 폭로하고 비판하는 것은 그다지 새로운 독법이 아니다.3) 내용보다 중요한 건 형식이다. 이 소설이 김의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였다는 것은 그 자체로 거대한 메시지인데, 김이 단순한 속물을 넘어서 거의 괴물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가 지독한 나르시시스트라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이 "나도 정(正)이 되고 싶었다. 부정당함으로써 아래 세대를 고양하는 발판으로서의 정, 그런 내 짝으로서의 딸, 내 딸의 자격, 나의 딸감"(21면)이라고 아무 부끄러움 없이 말할 때, 그는 그렇게라도 자신의 존재와 위상을 인정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무능한 아비임을 '스스로' 드러낸다. 김이 "자기 언어를 가진"(20~21면)4) 그래서 "아비와 아비의 친구와 아비의 세대를 쌩"(21면)깔 수 있는 '문'의 딸 '초롱'을 자신의 이상으로 삼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는 학원을 운영하는 문과의 입시 상담에서 "대가리파, 노력파, 명분파"(14면) 운운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기실 명분만 남은 것은 보미나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더이상 시대를 선도할 능력도 없고, 변화의 흐름을 따라갈 노력도 하지 않는 김에게 남은 것은 정의를 위해 청춘을 다 바쳤다는, 이미 오래전에 단물이 다 빠진 '명분'뿐이다. 이렇듯 작가는 인물의 자백을 통해 그를 고발한다. 여기에 이야기 사이사이 김이 쓰는 칼럼까지 더해지면5) 그의 죄목은 차라리 다변(多辯)이 아닐까 싶어질 정도다. 아비는 죄가 많은데, 그걸 숨기기엔 말도 너무 많다. 김은 자랑스러운 과거와 전락한 현재의 낙차를 말로써 메우려 하지만, 그럴수록 초라해진 자신의 처지만 드러날 뿐이다. "대상화의 프레임 속에서만"(20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다는 뒤틀린 남성성과 그렇게라도 스스로의 가치를 확인해야만 하는 끔찍한 자기애적 자의식 말이다. 그러나 「하긴」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끝끝내 뒤처진 의식을 갱신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는 아버지 세대를 풍자하는 후일담 소설에 그치지 않는다. 결말부에 등장하는 보미나래의 행위가 그러한 규정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대입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미국에 있는 에코공동체에 보내졌던 보미나래가 임신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자, 김과 아내는 원치 않은 임신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 딸이, 그럴 주제나 돼?"(37면)라고 말하는 아내의 모습은 자식세대를 온전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부모세대의 왜곡과 집착을 보여주는데, 그들은 딸이 임신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고 여기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억압과 폭력이 트라우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임테기 천사. 다들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임테기 천사는 늘 한강공원 공중화장실에 있다. 임테기 천사는 임신 테스트기가 필요한 사람에게 임신 테스트기를 건네고 문밖에서 휘파람을 분다.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편지를 쓴 이는 다행히 한 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울었을까. 왜 칸 속에서 나오지도 않고 한참을 울었을까. 우는 내내 임테기 천사는 휘파람을 불었다. 잘 불지 못하면서도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휘파람 소리. 노크도 않고, 괜찮냐고 묻지도 않았다. 울음을 그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가고 없었다.(40~41면) 한편 아이를 출산한 보미나래는 한강공원의 '임테기 천사'가 된다. 김과 아내가 트라우마의 원인을 찾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사이, 소설 내내 단 한 번도 제 스스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던 보미나래는 처음으로 자신이 직접 선택한 행위를 한다. 임신테스트기가 필요한 여성들에게 조용히 그것을 쥐어주고 휘파람을 불며 "곁에 옅게, 있어주"(41면)는 보미나래의 행위는 아버지 세대의 인식을 초과하는 행위로써, 그녀가 수평적 관계 속에서 돌봄의 가치를 실천하는 여성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물론 이를 "서로에게 조력자가 되어주는 여성들의 연대"로 곧장 의미화하는 것은 성급하다. 그러한 이해는 "구원자 여성의 이미지가 관념화되"6)는 비약의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보미나래의 트라우마가 발현된 결과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손쉽게 소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러한 행위가 말 많던 아비의 입을 다물게 한다는 것이다. 시종일관 혀가 길던 김은 젊은 시절 아내가 갖고 있던 묘한 습관, "말을 하다 말고 짧고 긴 숨을 쉬"(41면)는 습관을 떠올리는 것을 끝으로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기어코 무슨 말이라도 '하긴 하는' 아비가 말문을 닫는 것으로 끝나는 소설은, 아버지 세대의 무능과 위선을 고발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딸 세대의 새로운 주체성, 즉 각자가 가진 취약함이 서로를 연결하는 조건이 되는 관계 지향적인 주체성을 예비하는 지점까지 나아간다. 딸의 심판: 성혜령 「버섯 농장」 자백하는 아비가 있으니 심판하는 딸도 있을 법하다. 다만 말 많은 아비의 무능과 위선을 현실의 법으로 처벌할 수는 없으니, 이 심판 역시 어딘가 어긋난 방식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어둡고 음습한 「버섯 농장」(성혜령 『버섯 농장』, 창비 2024)으로 가보자. 학창시절 만나서 친해진 '진화'와 '기진'은 요양병원으로 향하고 있다. 그들이 요양병원에 가게 된 복잡한 사연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진화는 전 남자친구의 아는 동생을 통해 휴대폰을 바꿨는데, 헤어지고 나서야 자신의 명의로 개통된 휴대폰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설상가상 그 앞으로 적지 않은 금액의 빚과 이자가 쌓이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어 뒤늦게 남자애에게 문자를 보내보지만, 뜬금없게도 답장을 보내온 것은 남자애의 아버지다. "아들과는 자신도 연락이 되지 않으며, 자신은 노모가 위독해서 낮부터 밤까지 요양병원에 있다고, 자기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더는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남자의 뻔뻔한 답장에 화가 난 진화는 "그에게 자식이 저지른 일의 책임을 상기시켜줄 필요가 있어 보(16면)"인다며 기진과 함께 요양병원으로 가게 된 것이다. 이 방문의 표면적인 목적은 돈을 받는 것에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책임'이라는 말이다. 책임이라는 단어를 둘러싼 서로 다른 용례가 이 서사를 추동하는 핵심적인 동력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버섯 농장」은 '부녀관계'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젊은 여성이 느끼는 책임과 중년 남성이 느끼는 책임을 마주 세움으로써, 세대·젠더를 둘러싼 권력 불평등과 책임 분배의 문제를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그런데 남자에게 아들의 빚을 대신 갚아야 할 책임이 있는 걸까. 진화와 남자의 "채무자-채권자" 관계는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타협이 난망해 보이는 것은 그 빚이 채무자의 책임으로만 돌리기 어렵기 때문"7)인데, 엄밀히 말하자면 빚을 갚을 책임이 있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 그의 아들이다. 진화에게는 자식이 저지른 일의 책임을 상기시켜주겠다는 명분이 있지만, 그 책임을 대신하라고 강제할 정도의 명분은 없다. 그럼에도 진화는 남자의 채무를 훌쩍 뛰어넘는 행위로 갚아주는데, 그러한 '비등가교환'의 빈칸을 채우는 것이 「버섯 농장」을 읽는 주요한 독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진화는 어째서 남자의 머리를 내려쳤을까. 이번에도 아비의 '긴 혀'가 문제다. 남자는 자신을 찾아온 진화에게 "내가 아가씨한테 할 말이 없어야 하는데"(22면)라고 말하면서도 너무 많은 말을 덧붙인다. 그는 감당하기 힘든 빚이 쌓였다는 진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화의 입장에서는 사치일 뿐인 자기변호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자신은 성실하게 살았으며 한때 노조위원장도 했고 지금은 집을 팔아 노모를 모시고 있다고 말하는 그는, 장광설 끝에 "내 책임을 다하고도 남았"다고 말함으로써 진화를 자극한다. 그뿐 아니라 "억울한 이야기를 들어줄 여력이 없"(23면)다고 덧붙임으로써 진화의 고통과 불행을 너무 쉽게 '나머지'로 치부해버린다. 흥미로운 것은 남자가 한 말과 비슷한 내용의 문자를 진화 역시 보내려고 했다는 점이다. 공연히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보내지 않았던 메시지에서 진화는 명의를 도용한 남자애에게 "인생을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15면) 충고하며, 자신은 자기 몫의 생활뿐만 아니라 난데없이 떠안은 부모의 빚까지 책임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진화와 남자는 똑같이 '책임'을 말하고 있지만, 그 방향과 무게는 전혀 다르다. 진화가 선택하지 않은, 할 수 없는 부모의 빚까지 책임지고 있는 반면, 남자는 마치 물건을 고르듯 자신의 책임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8) 이렇듯 모든 책임의 화살표가 위로만 향할 때, 계급 피라미드의 가장 아래에 있는 '젊은 여성' 진화를 책임지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아비는 무책임하게 빚을 안기거나(진화의 아버지), 후안무치한 민낯을 드러낸다(남자애의 아버지). 그러니 "십오억"(23면) 부동산 운운하는 남자의 말들이, 저렴한 월세 때문에 옆집의 오줌 싸는 소리까지 감수하며 살아가고 있는 진화에게 지당하게 들렸을 리 만무하다. 일상의 사소한 책임 문제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진화는 그러한 '비등가'를 재빠르게 눈치챈다. 그리고 남자를 쫓아 그의 집으로 향한다. 남자가 빚이 이자를 불리듯이 쓸데없는 말과 행동으로 자신의 죄를 불렸기 때문이다. 소설의 결말로 가보자. 값비싼 차와 비닐하우스, 달마도와 실내용 골프대 사이에서 남자의 진실은 끝까지 비밀로 남는다. 그는 특유의 위압적인 말투와 태도로 진화를 조롱할 뿐이다. 남자가 빚을 갚을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밝히지 않는 결말은, 성혜령 소설 특유의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를 강화하는 동시에 빚을 받겠다는 애초의 목적과는 무관하게 이뤄지는 진화의 심판을 강조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라도 진화가 유리해질 수는 없을"(27면) 것 같았던 상황을 진화는 '한방'에 역전해버린다. 문제의 마지막 장면, 기진이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남자는 죽어 있고 진화는 골프채를 들고 있다. 여기서 남자의 사인(死因)보다 중요한 것은 진화의 다음 행동이다. "진화가 골프채를 들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폼을 잡더니 남자의 머리를 가볍게 쳤다."(33면) 진화는 그냥 한번 쳐보고 싶었다며 덧붙인다. "근데 쓰러진 폼이 꼭 자위하려던 거 같지 않아?"(34면) 어떤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없을 땐, 그 사건으로 인해 알게 된 것들을 살피는 게 도움이 된다. '혀'로 자신의 무능과 위선을 '자위'했던 남자는 결국 죽었다. 진화가 그를 죽인 것이든, 이미 죽은 그의 시체를 훼손한 것이든 그러한 행위는 '자기 몫의 책임'을 낳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생각해보면 그전까지 진화가 책임지고 있던 것은 하나같이 선택 밖의 문제였다. 아버지의 빚도, 남자애의 빚도, 젊은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감당해야 했던 미시적인 폭력들도 전부 진화가 선택하지 않은,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정리하자. 세상이 죄 없는 자에게 과도한 책임을 지워서, 죄 없는 자가 스스로 죄를 지어 그 불균형에 부응했다고. 물론 이것은 정의로운 해결이 아니라 '왜곡된 균형'일 뿐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하는 것은 이 소설의 부조리한 결말과 부조리한 현실이 분리할 수 없는 한쌍이라는 사실이다. 이 비극의 원인이 불평등한 현실에 있다는 것을 간과하는 독자에게 진화는 되물을 것이다. "너 어딘가 잘못된 거 아냐?"(35면) 딸과 아버지의 동모(同謀): 예소연 「그 개와 혁명」 이쯤에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딸과 아버지가 '동거'하는 관계라는 점이다. 이때의 동거란 단순히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얽히고설킨 일상 속에서 서로의 닮음과 다름을 지속적으로 공유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래서 '집'은 때때로 "모순된 지향들이 부딪혀 역동하는 장소"9) 즉 '광장'이 된다. 한 지붕 아래 만들어지는 기묘한 광장의 역학은 서로가 서로의 일면만 볼 수 없다는 점에서 까다롭고 복잡하다. 예컨대 「그 개와 혁명」(예소연 『사랑과 결함』, 문학동네 2024)에서 '수민'의 집에는 'NL'(민족해방파)인 엄마와 'PD'(인민민주파)인 아빠가, "민주85"(221면)인 부모세대와 "요즘 여자들"인 자식세대가 함께 살고 있다. 화자인 수민은 아버지인 '태수씨'가 "메갈이 어쩌고 한국 여자들이 어쩌고" 하면서도 정작 "내가 요즘 여자들 중 한 명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226면)는다는 사실에 답답해하고, "유연한 노동 문제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불가산인 가사 노동 시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226~27면)는다는 사실에 짜증을 느낀다. 그렇다면 태수씨 역시 앞서 살펴본 아버지들처럼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의와 책임만 취하는 이중적인 인물인 걸까. 마냥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딸이 아버지의 '이면의 이면'까지 보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수민의 '돌봄'은 태수씨와 함께 "죽음을 도모하며 삶을 버티는 행위"(246면)인 동시에 아버지의 역사를 단선적인 이해로부터 구출하기 위한 딸의 안간힘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주도하는 것은 남성이 상주가 되어야 한다는 "불필요한 인습"(220면)을 깨고 완장을 찬 수민이다. 그녀는 우선 투쟁이나 혁명 같은 거대한 단어 뒤에 감춰져 있던 아버지의 삶을 듣는다. 특히 이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표상되는데, 한평생 '형주'라는 이름을 썼던 아버지는 암 진단 이후 태수라는 이름을 쓰게 된다. 형주라는 이름이 수민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그러나 세상을 대하는 확고한 기준이 있다는 점에서 부럽기도 했던 아버지의 공적 삶을 상징한다면, 태수라는 이름은 수민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고 듣고 느낀 아픈 몸의 서사, 즉 아버지의 사적 삶을 상징한다. 이렇듯 아버지가 살아낸 두개의 삶은 그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직조하는데, 돌봄이라는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 그 이야기를 기록하는 수민은 "어쩌면 한 사람의 역사를 알면 그 사람을 쉬이 미워하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227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수민은 "도대체 태수씨가 뭐라고 우리는 그토록 태수씨를 사랑한단 말인가?"(226면)라는 자문에, 불완전한 태수씨를 "그래도" 사랑한다고, 특정한 단어로 간단하게 요약할 수 없는 복잡한 역사를 가진 "태수씨 정도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227면)이라고 스스로 대답한 셈이다. 이 능동적인 귀 기울임이 대상이 가진 '결함'을 애정의 조건으로 만들어내는 예소연식 '사랑'의 핵심이다. 한편 수민은 아버지의 목소리로 말하기도 한다. 수민은 장례식장을 찾은 조문객들에게 "태수씨의 마지막 지령"(249면)을 전달하는데, 이러한 행위는 삶과 죽음의 경계뿐 아니라 딸과 아버지의 경계까지 흐려놓는다. 장례식장이라는 무대 위에서 아버지라는 배역을 수행하는 딸의 연기는, 그의 목소리로 그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메소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연기가 성공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두가지 조건이 선결되어야 한다. 우선 수민에게 태수씨가 되어보려는 '동기'가 있어야 한다. 다행히 수민은 태수씨의 삶을 궁금해한다. 아버지가 자신이 태어나자마자 혁명을 그만두고 식구들을 먹여살려야겠다고 다짐한 마음이 궁금하다. 죽음의 문턱에 이를 때까지 출퇴근을 계속할 수 있었던 동력이 무엇이었는지, 삐라를 뿌리고 화염병을 던졌던 모습 뒤에 숨겨진 두려움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그뿐 아니라 수민은 "당연한 걸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는 태수씨의 모습을 좋아했었"(220면)다며 "나도 태수씨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237면)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렇듯 수민의 동기에는 태수씨를 향한 애정과 선망, 호기심이 뒤섞여 있는데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딸의 아버지 '되기'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 사이의 '공통감정'을 끌어낼 만한 '공통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닮은 듯 다른 두 사람, 뜨거웠던 '혁명'과 '투쟁'의 시대를 살아온 아버지와 미적지근한 '뜻'과 '의지'의 시대를 살아가는 딸은 공통의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있다. 요양병원 꼭대기 층에 나란히 앉아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던 두 사람은 처음으로 '함께' 운다. "있잖아, 수민아. 그냥 죽고 싶은 마음과 절대 죽고 싶지 않은 마음이 매일매일 속을 아프게 해. 그런데 더 무서운 게 뭔지 알아? 그런 내 마음을 어떻게 알고 온갖 것들이 나를 다 살리는 방식으로 죽인다는 거야. 나는 너희들이 걱정돼.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돈이 더 많이 들어서." 나와 태수씨는 그때 처음으로 함께 울었다.(239~40면) 수민은 "전 대통령 추모제 때" 말고는 본 적이 없었던 태수씨의 눈물을 본다. 그때 하염없이 우는 아버지의 모습이 낯설고 무서웠다는 수민에게 태수씨는 "정말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이었거든"(239면)이라고 말해주는데, 그 말인즉슨 삶의 마지막을 앞둔 이 순간 수민과 함께 울고 있는 태수씨가 '정말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두 딸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게 사랑이라는 공통의 경험으로 묶인 딸과 아버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모한 혁명은 성공적으로 완수된다. 이 소동극의 하이라이트는 태수씨가 유독 아꼈던 반려견 '유자'를 데려와 장례식장에 풀어놓는 장면인데, 말이 통하지 않는 존재인 유자가 장례식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모든 일에 훼방을 놓고야 마는 사람"(238면)이었던 아버지의 죽음은 잠시나마 유예된다. 그런데 말 그대로 한바탕 소동에 불과한 딸과 아버지의 동모에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아버지 세대가 "세상의 중심을 논하는 방식"(241면)이었던 혁명의 구호들, 그 빈자리를 메우기에 이 사랑은 너무 작지 않은가.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사랑은 혁명의 최솟값이라고, 사랑 없는 혁명은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한다 하더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따라서 이 사랑은 작지 않은 게 아니라 작지만 사소하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사랑의 재발명을 동반하지 않는 세계의 재발명이란 재발명이라 할 수 없다."10) 기어코 발명된 이 사랑은 저물어가는 혁명의 종착지가 아니라, 끝끝내 저물지 않는 혁명의 출발지다.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시간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최근 문학작품 속에서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달라진 딸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딸들은 자신이 직접 목격한 아버지 세대의 한계를 초과하고, 심판하고, 심지어 사랑한다. 이러한 변화가 '페미니즘 리부트'로 명명되는 공통의 기억과 사건을 공유한 여성들의 현실을 반영한 결과임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물결이 된 딸들의 목소리에 아버지 세대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동기'와 '공통경험'의 측면에서 살펴보자. 우선 아버지 세대에게는 딸들의 목소리에 응답해야 할 동기가 당위와 현실, 두가지 측면에서 모두 존재한다. 먼저 당위적인 측면에서 아버지 세대는 그들이 이뤄낸 민주주의의 제도와 체제를 갱신할 책임이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극심해지고 고착화되는 양극화의 양상과 여전히 끊이지 않는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아버지 세대에게 익숙한 민주주의의 가치가 여러모로 한계에 봉착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더 큰 진전을 위해서는 새로운 광장의 정치적 투쟁을 주도하고 있는 딸들과의 연대가 필연적이다. 또한 현실적인 측면에서 아버지 세대는 그들이 목숨을 걸고 외쳤던 민주주의를 극우 반(反)민주세력으로부터 지켜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전세계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극우 반민주집단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반여성·반퀴어·반이주민 등인데, 그러한 백래시와 맞서 싸우는 최전선에는 언제나 여성들이 있었다. 다시 말해 여성운동이 축적한 교훈과 지혜 없이는 극우 반민주세력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킬 수 없다는 점에서 딸들과의 연대는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아버지 세대는 딸들의 목소리에 공감하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만한 공통경험을 갖고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세대 정체성'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세대 정체성은 단순한 생몰년도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비롯했는지를 함께 기억하고, 현재 어디에 있는지를 함께 가늠하고, 앞으로 어디로 향할지를 함께 기대"11)하는 과정을 통해서 구성된다. 따라서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가진 아버지와 딸도 과거의 사건을 어떻게 의미화할 것인지, 현재의 쟁점과 미래의 방향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따라 얼마든지 공통의 경험을 만들어갈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12월 21~22일 남태령에서 그러한 장면을 이미 목격한 바 있다. 그곳에는 "우리는 기특하지도, 장하지도 않고, 미안하다는 사과를 듣고 싶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소녀라기보다도 딸이라기보다도 동료 시민이다"12)라고 목소리 높이는 이들이 있었고, 서로가 하는 말을 잘 몰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넌 뭐니? 네 얘기도 좀 들어보자"13)라고 귀 기울이는 이들이 있었다. 요컨대 이제는 말을 잃은 아비가 대답할 차례다. 특히 차별금지법을 비롯해 2030 여성들이 외치고 있는 주요한 의제들을 현실정치의 결과로 만들어내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그러한 노력 없이 '빛의 혁명'이 성취한 열매만 취해선 안 된다. '다시 만날 세계'에 대한 충분한 공감과 이해 없이 「다시 만난 세계」의 노랫말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미덥지 못하다.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시간은 그럼에도 아직 조금, 남아 있다. 이제 문학은 아버지를 해체하거나 거부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는다. 작금의 문학은 아버지 세대를 일방적인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넘어서 그들이 가진 '동료시민'으로서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서사로 나아가고 있다. 이미상 성혜령 예소연의 소설은 각기 다른 결말을 향하지만, 공통적으로 '딸의 주체성'을 통해 아버지 세대와의 관계성을 재사유하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는 문학이 세대·젠더 간의 불평등한 권력과 책임 문제를 고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것인가'라는 공동체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딸들은 아버지 없이도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새롭고 강력한 주체로 자리잡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를 완전히 배제한 채 새로운 세계를 설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문학의 과제 중 하나는 이념이나 상징으로 가려졌던 아버지의 삶을 구체적이고 다층적인 이야기로 복원하는 동시에, 딸들의 말과 몸짓, 돌봄과 분노가 민주주의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필수적인 동력이자 실천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증명하는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문학의 가장 강력한 정치성은 '나'와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데 있다. '우리'에게는 아직 서로에게 더 들어야 할 이야기가 남아 있다. * 지면의 한계와 능력의 부족으로 인해 다루지는 못했지만, 자전적 다큐멘터리 영화 「애국소녀」(남아름 연출, 2023)는 이 글의 기획과 구성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85학번 캠퍼스커플 부모 아래서 쌍둥이 자매로 태어난 '아름'은 공무원이 된 아버지와 페미니스트 활동가 어머니와 함께 살며 세대와 젠더를 둘러싼 여러 딜레마와 마주한다. 특히 세월호참사 당시 해양수산부의 고위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딸의 복합적인 감정은 "한국 현대사에 지워져서는 안 되는 사건의 담당 공무원인 아빠에게 힘내시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끊임없이 죄의식을 가지고 자책하십시오"라는, 직접 쓴 편지의 내용으로 핍진하게 드러난다. 이렇듯 영화는 부모세대에 대한 비판적인 문제의식을 벼리면서도, 시종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아버지 죽이기를 해야 나의 주체성을 쟁취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아버지의 딜레마를 이해하는 게 나의 성장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딸의 영화에 대해 말하며, 아버지의 문장을 덧붙이는 것이 감독과 작품에 대한 무례는 아니리라 믿는다. 아버지는 "자신을 향한 비판을 이해하고 감당할 수 있는 어른이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한다(「'애국 소녀', 진보 엘리트 부모에 반기를 들다」 한겨레 2024.8.22.). 실제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핑계로 세월호참사에 대한 입장을 아끼는 아버지가, 매년 4월 딸과 함께 화랑유원지를 찾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다. 갑작스러운 부탁에도 흔쾌히 영화를 볼 수 있게 허락해주신 남아름 감독에게 다시 한번 마음 깊이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1) 손유경 「젠더화된 세대교체 서사를 패러디하기」, 『한국현대문학연구』 제58집, 2019, 365면. 2) 이와 관련해 김영옥은 여성들의 역사성과 주체성을 지워버리는 논의들을 비판하며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여성들의 행위가 매번 처음인 양, 즉 앞선 여성들의 모험과 시도, 사유, 업적 등을 전혀 알지 못하거나 또는 그 결과를 이어받지 못한 채" 의미화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김영옥 「여성주의 관점에서 본 촛불집회와 여성의 정치적 주체성」, 『아시아여성연구』 제48권 2호, 2009, 9면). 또한 정고은은 응원봉 집회를 향한 찬사가 자신에게 "미묘한 불편함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고 고백하며, 여성들은 "대형 광장 외에도 학교, 가정, 일터 등에서 저마다의 치열한 광장을 만들어 싸워왔다"고 강조한다(정고은 「'휀걸'과 '말벌'」, 『문화과학』 2025년 봄호 119면). 3) 이에 대해 김은하는 이미상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86세대 비판은 "차별의 기본값으로 존재하는 여성들의 현실을 볼 수 있도록 세대를 젠더링하는 서사"라고 말하며, 그러한 비판은 "흔한 만큼 진부하게 읽힐 수 있지만, 여성들이 민주주의의 광장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라고 덧붙인다. 김은하 「페미니즘 이후의 문학」, 『문학동네』 2023년 봄호 62면. 4) 소설 속에서 초롱이 가진 언어는 "이름 튀어봐야 뭐가 좋아? 몰카 영상 뜨면 찾기 쉽기나 하지. 자식 이름으로 운동하는 것들은 싹 다 죽어야 돼"(20면)라는 SNS 게시글로 표상된다. 5) 김이 연재하는 칼럼의 제목은 '하긴 하는 남자'인데, 그의 언행과 배치되는 칼럼의 내용은 그가 얼마나 이중적인 인물인지 보여주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를테면 아내에 대해 여성혐오적인 언행을 일삼는 김이 칼럼 안에서는 그녀를 절절히 사랑하는 로맨티스트로 둔갑하는 식이다 6) 이미상·조연정 인터뷰 『소설 보다: 겨울 2020』, 문학과지성사 2020, 62~63면. 7) 이지은 「심장-농장, 어린 심장을 길들이는 것」, 『문학과사회』 2024년 가을호 311면. 8) 이에 대해 전청림은 "책임의 불평등"이라고 명명하며, 남자가 "덜고 담는 책임은 다소 시혜적이고 자의적"이라고, "삶의 균형에 위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선택적으로 책임을 맞이"한다고 설명한다. 전청림 해설 「책임은 법보다 강하다」, 성혜령 「버섯 농장」, 『2023 제1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3, 143면. 9) 이희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가을호 72면. 10) 스레츠코 호르바트 『사랑의 급진성』, 변진경 옮김, 오월의봄 2017, 28면. 11) 전상진 『세대 게임』, 문학과지성사 2018, 148면. 12) 「"우리 사회가 '남태령' 같으면 좋겠어요"…'기특한 소녀' 아닌 '동료 시민'의 연대」, 여성신문 2024.12.30. 13) 「'남태령 대첩' 참가자 15명이 그날 밤 겪은 '희한한' 일」, 오마이뉴스 2024.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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