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제120호)
우리 비평의 자리
시인들이 시를 가장 좋아하고 소설가들이 소설을 가장 많이 읽듯이, 비평가들이 비평에 대해 가장 진지하게 생각한다. 글을 읽는 이유와 쓰는 이유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비평을 하는(읽는/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주변에 자문을 구하여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말해본다. 첫째, 더 나은 삶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위기를 인식하고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을 모색하고 개선을 추구하기 위해서다. 둘째, 더 올바른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사실을 부정하고 진실을 왜곡하고 불공정과 불균형을 조장하는 사태에 저항하기 위해서다. 셋째, 더 적합한 길을 찾기 때문이다. 고정된 단선적 사고에 맞서 다양한 관점의 다각적 사고를 통해 세계를 혁신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말해놓고 요즘 읽은 비평을 대응시켜보자니 첫째 이유와 셋째 이유가 좀더 유력하게 작동하는 경향이 보인다. 그러자 그 둘은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1. 사람의 자리
인문학적 사고에 지구라는 행성의 위기 담론 또는 인공지능 과학기술의 미래 담론을 겹쳐보는 경향, 이것은 첫째 이유로 생겨난 비평이다. 인간의 행위(력)를 역사적으로 상대화하는 인식이 ‘인류세’ 담론이나 ‘인공지능’의 활약상과 시너지를 낸 것은, 지금의 현실을 위기로 느끼고 최소한 더 나빠지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이런 경향의 비평은 무엇을 비판하느냐가 아니라 비판을 무엇으로 하느냐에 그 역할이 있다. 인간(중심)주의 탈피 또는 극복이란 테마는 그 궁극적 목적이 (이를테면 인간이라는) 대상을 잘 비판하는 데만 있지 않다. 궁극적으로 더 나은 삶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비판적으로 재고해야 하는 (이를테면 인간이라는) 대상이 있다는 데서 그 테마는 비롯되었을 것이다. 현재의 문제를 인식하여 삶을 개선하기 위한 비판(의 논점, 관점, 논리 또는 근거 등)에 요청되는 타당성이, 그간 인간을 이해해온 방식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데로 뻗어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겠다. 그럼에도 ‘신유물론’을 참고한 최근의 비판 기획들이 현재의 정치경제적 실태와 실천윤리적 국면에서 작동하기까지의 거리에 끼어드는 회의감은, 공허함 또는 책임감 같은 인간적 자세에 실려 또다른 방식의 성찰을 촉구하는 형태로 드러나기도 했다.
한 문예지의 특집 기획 ‘다시 비판이란 무엇인가’ 중 「인간 말고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요즘 ‘비판’에 대한 소박한 단상」이라는 김항의 글은 최근의 비판 기획—“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고 물질의 행위성 혹은 존재적 지위를 새로이 평가하면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비판을 재구성하겠다는”1)에서 문제시되어온 ‘인간’을 구조적, 역사적으로 조망하여 ‘인간 비판’과 그에 제기되는 회의감을 재조명하게 한다. 어쩌면 우리가 하는 모든 비판이 사실상 ‘인간 비판’이 아닐 수 없다고 한다면 ‘물질적 전회’에 관한 이론과 담론들이 “인간을 특권적인 행위자로 간주하고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자는” 기획으로만 여겨지지는 않을 것이나, 자칫 그것이 ‘인간중심주의’라는 “실체 없는 허상을 상대로 구음진경급의 무공을 뽐낸것”(같은 쪽)이 되고 말리라는 우려에 반대할 까닭도 없을 것이다. 한편, 인간과 비인간의 연결을 강조하는 주장이 인간의 지위를 자연에게, 동물에게, 사물에게 주어버리자는 말이 아니라 인간에게도 자연적인, 동물적인, 사물적인 부분이 있음을 알자는 취지임을 이해한 이라면 이 글의 신중한 논의가 명쾌하게 느껴질 것이다.
제목으로도 암시되어 있는 주제이자 “새로운 비판 기획이 제시하는 인간과 비인간의 네트워크가 유의미한 것은 인간이란 이데올로기를 걷어내고 신체를 가지고 발화 아닌 발화를 반복하는 사람의 흔적을 추적할 때 뿐”(같은 쪽)이라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이 글에서 논의된 바를 따라가본다. 인간학의 고고학적 발굴에 착수한 푸코가 특정 지식 산출의 조건—노동, 생명, 언어—위에서 등장한다고 했던 ‘인간’의 자리는 “비판 문법의 주체와 객체가 인간이었던 한에서”(25쪽) 아직 사라진 적이 없다. 인간 출현의 세 가지 계기, 노동–생명–언어는 유한한 지상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매개 개념으로서 18세기 인간학적 구조의 전도를 분절하는 새로운 인간학의 영역이 되었다. “노동을 통해 인간은 자연을 객체로 만들어 유한 세계를 의미화할 것이고, 생명은 저차원에서 고차원의 생물까지를 아우르며 유한성을 가시화할 것이며, 언어는 로고스를 참조하는 일 없이 지시와 소통을 역사화할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지식 지층에 스스로의 흔적을 새기기 시작한다.”(33쪽) “지식이 신의 무한성을 원천으로 삼아 조직될 수 있었던 시대에서, 무의미하고 무가치했던 인간의 유한성에 기초하여 조직되는 시대, 이 이행 속에서 인간은 출현한다.”(32쪽)
이 “유한성의 구조적 전도”(33쪽)란 보다 길고 깊은 “인간학적 장치 anthropological machine”의 계보에 속한 것으로, “스스로를 동물과 구분하면서 존립해온 이 장치의 산물”인 ‘인간’이란 “모종의 분할과 배제의 효과”(34쪽)라고 지적한 것은 아감벤이었다. 자연으로부터 필요를 채우기에 급급했던 “즉자적 사람”이 자연을 대상화하여 대립하는 “대자적 인간”(36쪽)으로 변모해온 것이다. “유적 존재로 스스로를 추상화하여 이해”(같은 쪽)하는 이 존재는 유한성을 모른다. “동물로서의 자신을 분리시키고 배제하는 한에서 성립하는 유로서의 인간은 죽지 않”(같은 쪽)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 역시 어디까지나 유한한 존재이다. “신체의 활동을 매개로 자연 및 세계와 교섭하는 사람은 유한한 지상의 존재이기 때문이다.”(같은 쪽)이 분열적 존재, “포함과 배제가 중첩되는 비식별역 그 자체”(같은 쪽)인 ‘유적 인간’이야말로 여러 이론적, 실천적 국면에서 문제적이었다. 인간은 유적 존재이고 노동은 유적 생활을 대상화한다고 했던 마르크스의 노동 가치론이 “필요에 종속되어 자연과 스스로를 분리하지 못하는 동물적 사람이 아니라 자연을 대상화하여 자유로이 작품화할 수 있는 인간”(같은 쪽)의 노동을 양적으로 환원된 가치로만 다루게 했을 때, 알튀세르가 ‘이론적 반인간주의’로 맞서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 ‘인간’이었다. “마치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처럼 포함과 배제의 위상 속에 갇혀”(37쪽)버린 노동 가치론의 문제성, 즉 “노동계급을 인간이라는 전형적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가늠하는 치명적 오류”(31쪽)를 막아내기 위해서였다.
노동 생산물에는 양적으로 환원될 수 없는 흔적, 생산자의 고유한 손길 같은 어떤 물신성이 남아 있다. 계급투쟁이란 화폐적 물신과 구분되는 이 ‘사물의 물신성’을 발굴하는 일과 무관하지 않으리라고 한다면 “계급 투쟁과 식민주의가 만나는 지점”(38쪽)이 선명해질 수 있다. 스피박의 논의에는 발화 자격을 가진 이들, 가령 서발턴을 대변representing하여 생각하고 발화하는 ‘좌파 지식인’ 같은 ‘투명한transparent’ 주체들이 한편에 있고, 또 한편에는 생각과 발화가 그 투명한 주체들에게 흡수되어버린 서발턴이 있다.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는 서발턴이 말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서발턴의 외침이 안 들린다는 문제를 뜻한다. 왜 안 들리는가? “흡수당하기 때문이다.”(39쪽) “상처 입은 고유한 신체를 가진, 환원 불가능한 사정과 맥락을 가진 사람”에게서라면 튕겨 나왔어야 할 그 목소리는, 생각하고 말하는 저 투명한 ‘인간’ 주체에게로 흡수되며 “사물의 물신성과 유사한 음성의 주술성”(같은 쪽)을 그 흔적으로 남긴다. ‘인간’의 출현과 실존에는 언제나 폭력을 수반하는 식민주의가 연루되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면, 파농이 말하는 “신체와 영혼이 세계 속에서 합일되는 삶”(43쪽)이란 철학이나 이론으로 제시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논리의 서사로 재현되기도 어렵다. 그리하여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가로놓인 폭력적 관계를 그저 주체와 객체의 분리 혹은 행위의 독점으로 해석”(같은 쪽)해서는 좀처럼 갱생의 길을 가지 못할 ‘인간 비판’의 기획에 대해 이 글에서 권고하는 상상은 이런 것이다. “쓰러지고 짓밟힌 자를 소환하는 굿판을 통한 공포와 전율의 경험”으로 “인간human은 작동을 멈추고 사람a man과 삼라만상이 공속한 세계”(같은 쪽)가 열리게 하는 것.
공부 삼아 길게 인용하며 따라온 이 글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평화롭게 사라지지 않는 ‘인간’의 흔적이 차라리 ‘유령’처럼 나타날 ‘사람의 목소리’를 상상하고 불러내야 하는 자리에 이르게 된다. 필연적으로 여기에 도달한 듯한 모종의 안도감과 동시에 이 당위가 약간 의외로 여겨지는 당혹감도 없지 않은 듯하다. 김항의 글에서 제시한 논리 그대로 “철학이나 이론의 쇄신으로 제시”(같은 쪽)하기 어려운 ‘인간 비판’의 길이 ‘사물의 물신성과 ‘음성의 주술성’을 탈환하는 것이라 할 때, 그것이 바로 ‘문학’의 막중한 힘이자 오랜 역할이었음이 새삼 ‘소박’하게 환기되기 때문일 것이다. 부르주아의 자기파괴가 ‘인류세’의 정치로 구현되어가는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이론적 계급투쟁이 바로 그러한 문학의 길이라고 한다면 더욱, 최근 여러 국면의 위기들을 고민해온 문학(비평)은 제대로 적중한 담론이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 비판’이 반드시 가야 하고 갈 수 있는 기획에서 가장 유력한 담론이 될 것이다
2. 시의 자리
김항의 글이 문학(비평)의 입장을 두둔한다거나, 문학(작품)의 영역을 옹호하는 논리적 근거가 될 것이란 얘기는 아니다. 그럼에도 ‘요즘 비판’을 “사회과학의 영역이 문학적 감수성을 요청하며 둘 사이의 매개 가능성이 활성화되고 있는 상황”2)으로 진단하는 관점에서라면, ‘인간과 비인간의 새로운 관계’를 ‘공포와 전율의 경험’으로 불러낼 만한 문학적 형상화에 관심이 기울 것이다. 만약 “근대적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사유로 부상한 포스트휴머니즘이 시와 접점을 갖는 주된 이유”가 “반反·비非인간중심주의를 지향하는 시가 지닌 특징 때문”(같은 쪽)이라고 생각하는 이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예컨대 「경이의 세계, 시라는 경이」라는 글을 쓴 김보경에게는 저 권고가 적중할 것 같다. 근래의 ‘흔한 의구심’—“동시대 문학에서 나타나는 비인간 타자의 재현이나 독법이 과연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난다고 볼 수 있는가. 탈인간중심주의적 재현이나 독법이라는 것이 기실 인간과 비인간의 이분법을 재생산하고 그럼으로써 인간중심주의를 강화하는 것은 아닌가”(97쪽)라는—을 타파하기 위해 김보경이 서기로 다짐한 ‘시’의 자리가 바로 그런 상상의 형상화를 잘 전해줄 것 같다.
“‘시’의 자리로, 정확히는 시를 읽는 경험적 차원으로 돌아와” 김보경은 “시가 되는 순간들은 무엇이며, 우리는 시를 읽고 무엇을 느끼며 시로부터 무엇을 배우는가?”(같은 쪽)라는 질문의 대답으로서 ‘시적 경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사라 아메드가 “주체가 어떤 대상을 마치 처음 조우하는 것과 같은 감정”(같은 쪽)으로 정의한 ‘경이’는 김보경의 글에서 ‘시’와 만나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공회전하는 논의를 새로운 방향으로 틀 가능성”(98쪽)을 장착한 것이 된다. 이는 인간과 비인간의 새로운 관계에 주목하는 일이 문학적 재현 또는 독법과 연결될 때, 비인간 주체의 등장이나 인간의 행위력 축소를 유의미화할 것이 아니라 세계 내에 공속共屬하는 존재들의 인간적, 동물적, 사물적 조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사유가 필요하다는 입장이기도 할 것이다
김보경의 글에서 ‘시적 경이’의 체험과 그 개념의 정교화를 도운 시집에 대한 분석을 따라가본다. 신이인의 『검은 머리 짐승 사전』(민음사,2023)에서 시의 화자들은 “인간적인 세계로부터 추락하며, 혐오스러운 ‘나’를 마주하며 인간이 아닌 동물이 된다”(101쪽). 이때 경험하는 “추락과 붕괴로서의 존재론적·인식론적 전환”(같은 쪽)이 곧 경이의 역량이라 할 수 있다. 자기 붕괴와 상실을 수치스러워하는 ‘나’는 다른 ‘나’가 되는 반복적 체험을 함으로써 인간을 하나의 수행적 개념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한편, 한연희의 『희귀종 눈물귀신버섯』(문학동네, 2023)에는 “식물과의 상호작용 혹은 식물 되기를 보여주는 이미지에서 연결의 감각이 선명하게 드러나”(103쪽) 있다. 이는 “인간과 비인간이 얽혀 생성되는 세계에서 잘 들리지 않는 이야기를 듣고, 받아쓰고, 이어 쓰는 일”로서 “인간의 행위성을 소거하거나 인간을 역사적 책임으로부터 면제하는 일이 아니”고, 오히려 “인간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일”(105쪽)로 여겨진다. 또한 임유영의 시집 『오믈렛』(문학동네, 2023)에서는 “인간의 감정적·관념적 개입을 최소화하는”(107쪽) 이른바 ‘반인간주의’라고 명명되는 시적 전통—김춘수의 무의미시론으로 대표되는—이 감지되지만, 그보다 더 주목할 것은 예컨대 「파」「라」 「목」 「토」 연작에 그려진 ‘버섯’ ‘채취꾼’ ‘우리’를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손길이 거둬진 자연”이 아니라 “인간의 손길을 통해서 변화하는 자연과 자연을 통해 변화하는 인간”(111쪽)이 있는 자리다. 지금 분명하게 여기에 있게 함과 동시에 다른 ‘우리’가 되도록 하는 가능성이 곧 ‘우리’를 다르게살게 하는 사랑의 힘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렇게 김보경의 글에서는 “아름다운 것에 대한 경탄 그 이상의 의미”(112쪽)를 지니는 경이라는 체험이 실천적 역량을 발휘하는 감정으로 파악된다. 그의 결론은 이러하다. “미적이고 개인적인 범주로 여겨지는 감정이 지닌 인식론적, 실천적 역량으로서의 가치를 활성화하고 이론화하는 일이 이론과 현실의 괴리를 극복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같은 쪽) 경이를 발견함으로써 “‘반인간주의’라는 단일 회로로 향하지 않으면서세계와의 관계를 재편하며 비인간 타자와 함께 살아가게끔 하는 역량”(같은 쪽)을 시의 것으로 돌릴 수 있고, 비로소 “포스트휴먼의 시대에 문학은 더욱 왜소해지고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진 않았는지 우려하는 풍문”(113쪽)에 맞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느 시대이건 사람이 문학을 하고 문학이 문학의 일을 하는 한 왜소해지거나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3. 행위의 자리
이 시대의 문학이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지는 않았다고 우리가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을 우리가 문학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라고 바꿔 생각할 수도 있다. 포스트휴먼 시대에 맞서는 문학의 역량을 ‘시의 자리’에서 찾은 앞의 논의를 통해 ‘미적 체험에 의한 감정의 인식론적 전환과 그 실천적 가치’를 생각하자니, 오래전에 읽었지만 시의 자리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되는 ‘시적 체험’에 대한 논의가 떠오른다. 황현산은 「시 쓰는 몸과 시의 말」이라는 글에서 바타유와 랭보가 말하는 ‘내적 체험’에 대해 사유하면서, 바타유에게서는 그 체험이 오직 육체에 국한되는 반면, 시인인 랭보에게서는 육체적, 감각적 “착란”의 밑바탕에 “육체의 연장일 뿐만 아니라 다른 육체, 생각하는 자가 아니라 ‘생각되는 자’의 육체”3)인 말이 있다고 본다.
황현산의 글에 따르면, ‘내적 체험’이라는 말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체험하는 자가 체험하는 자신을 대상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성적 인식’이나 ‘과학적 사실’과 다르고, “외부적 자극을 요구하면서도 그 원인과 효과가 사실상 한 자아 안에서 작동한다는 점에서”(18쪽) ‘신비적’ 체험이나 ‘주관적’ 체험과도 다르다는 사실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내적 체험이라는 자기 안의 효과를 통해 자아는 ‘객관적 사건’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체험의 가능성을 시에 대해 말했던 랭보는 “투시자, 곧 시인이 되는 것은 모든 육체적 감각의 전면적이고 장기적인 착란을 통해 가능한 일”(19쪽)이나 그 착란은 ‘이치에 맞아야’ 한다고, 다시 말해 객관적이어야 한다고 했다. 랭보가 “나는 타자Je est un autre”(20쪽)라고 말했을 때 ‘나’라는 주체는 “그 자신이 다른 것으로 변화하게 될 하나의 장소”(19쪽)일 뿐이다. 진정한 ‘나’는 “주체가 다른 것으로 바뀌는 이 내적 체험을 수시로 가능하게 하는 한편 그 과정과 결과를 객관적으로 참관하는 자”로서 “일체의 주관성 내지 주체성에서 해방된 자라는 점에서 그 자체가 타자”(20쪽)라고 랭보는 생각했다.
이렇게 시적 체험의 주체를 ‘객관적 타자’로 여기는 의식은 최근 비평들에서 ‘객체지향’ 또는 ‘행위자 연결망’ 등의 이론을 이해하고 참고하려는 취지와 근본적으로 통한다. 인간과 세계의 관계 정립에 있어 인간의 존재적 지위나 물질의 행위성, 인간과 비인간의 연결 등에 대해 새롭게 고민해보자는 기획이 타당한 것이라면, 그것은 특정 시기, 특정 조건에 한해서만 유의미한 과제일 리 없다(어떤 인간의 행위성은 언제까지나 높은 지위를 갖는다거나, 어떤 동물, 어떤 사물은 행위성을 발휘중이나 다른 동물, 사물은 그렇지 않다거나, 기후변화의 위기를 절감할 수 없었던 시기에는 인간과 비인간의 연결이 중요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착각은 타당하지 않다). 십여 년 전, 시 쓰는 몸을 살펴 시의 말이 건넌 자리를 내다보는 이가 ‘상호 육체성’에 대해 말하는 다음 문단에는, 세계 속에 하나의 육체로 존재하는 주체의 지위가 더할 나위 없이 명징하게, 논리적으로 명징하게 그려져 있다.
주체는 세계라고 부르는 거대한 몸에 둘러싸여 있으며, 한편으로는 제 시선으로 그 거대한 육체를 끌어안는다. 주체가 이 세계의 육체와 소통하는 것은 그에게 부속된 육체를 통해서이다. 내가 자판을 두들겨 글을 쓸 때, 내 주체는 손가락 끝으로 세계와 만난다. 오래된 자판은 내 손가락을 알아본다. 글을 쓸 때 내 주체는 이 손가락이며 자판이고, 자판이 놓여 있는 책상이다. 책상까지 연결된 나의 몸은 또다른 몸과 만난다. 보는 자이며 보이는 자인 주체는 자기 시선의 주체이면서, 타자의 시선에 주제가 된다. 게다가 나의 손가락과 자판과 책상의 관계에서처럼 주체와 주제의 경계는 모호하다. 몸은 이 복잡한 상호 육체성에 간여하여, 한 자아의 몸이면서 동시에 자아의 몸 이상의 것이 된다. 주체는 주체 이상의 것이 된다. 말은 이 상호 육체성의 약도와 같다. 말은 자판이나 책상처럼 한 육체의 연장이지만, 주체의 생각에 육체를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를 떠나는 순간 벌써 다른 육체를 형성하고 다른 육체에 간여한다. 상호 육체성이 말을 통해 전개될 때 주체는 상호 주체성에 복속하는 주체가 된다.(22~23쪽)
나, 손가락, 자판, 책상, 글, 시선의 주체, 타자의 주제, 주체와 주제, 자아와 몸, 자아 너머의 말, 생각의 육체, 다른 육체…… 이들 각각의 행위성과 각각의 지위 또는 이들을 잇는 행위성과 거기에 부여되는 지위, 이런 것들이 다 여기서 ‘주체’라 불린 ‘행위자’이고 ‘객체’이고 ‘연결망’이다. 이를 유념하지 않고 말해지는 ‘인간 주체’란, 분열과 모순을 ‘착란’ 없이 봉합하여 “몸의 텍스트가 주체의 텍스트와 다른 것일 수 없다고 믿는 주체의 환상”(22쪽)에 불과하다. 육체로 존재하는 사람, 신체의 지각과 활동을 매개로 세계와의 유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세계 속의 모든 사람 외의 것들과 마찬가지로, 그것들과 더불어, 행위하고 행위당한다. 행위자의 교섭을 매개하는 신체들의 주체성은 “주체를 자기 안에 있으면서 자기 밖에 있는 낯선자로—동일자이면서 타자로”(23쪽) 만드는 것과 같다. 내적이면서 동시에 객관적인 그 주체성은 “가장 깊은 진실, 따라서 가장 객관적인 진실을 제 몸이 세계의 몸과 맺는 관계에서 발견할 수 있다”(같은 쪽). 관계에서 발견되는 객관적인 주체성, 이런 것이 바로 인간의 과도한 주체성을 축소하고 비인간과의 연결에서 주체성의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론(가)의 믿음일 것이다.
4. 창작의 자리
세계와 교섭하는 사람(의 몸)은 내적 체험을 통해 자신을 타자에게로 연다. 육체는 이 체험의 주체에게 온전하게 속하지 않고, “그 육체로 존재하는 주체 역시 온전하게 자기에게 속하지 않는다”(같은 쪽). ‘시 쓰는 몸’의 내적 체험과 ‘시의 말’에 대한 황현산의 논의를 따라가며 ‘주체를 넘어서는 몸’과 ‘몸을 넘어서는 주체’에 대해 조금 더 섬세하게 생각하다보면, 누구도 더는 ‘내적 체험은 자기지향적 성찰’이라거나 ‘시적 체험은 자아의 특별한 관점에 종속된 명징한 의식’이라는 등의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의식 주체의 내적 체험은 자기이자 타자인 제 몸의 내부에서 상호 육체성을, 그리고 제 몸이 세계의 몸과 맺는 관계에서 상호주관성을 만나는 일임을, ‘시의 말’을 통해 우리가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시대 ‘시의 말(들)’을 따져 살펴본다면 최근의 이론, 담론으로 포착하지 못한 세계 내 (비)인간의 존재 조건과 관계 양상을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
최다영의 「동시대 가속류 시의 생산 조건과 가능성」은 “인터넷 플랫폼과 기계장치의 작동 방식에 익숙해져서 매 순간 가상 환경에 동기화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동시대 디지털화된 주체 경험의 리얼리티를 반영”4)하는 시(들)의 경향을 분석하여 “동시대 시의 지형도”(81쪽)를 그려보고자 한다. 노버트 위너의 ‘사이버네틱스’의 속성에서 차용한 ‘가속류’라는 용어는 특히 ““극도의 추상으로 응집되며 단선적 논리를 변주하면서 증식하는” 일군의 시적 경향”(83쪽) 또는 “창작 주체의 사고 및 세계를 인지하는 방식이 기계나 인공지능의 데이터 집계, 처리, 산출 방식에 동기화되어 기계적 규율화로 추상화되고 단일화되는 무의식적 경향”(84쪽)을 가리킨다. 최다영의 글은 반복과 증식을 위한 무의미한 문장 생성으로 가속류의 자가 복제 양상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배시은의 『소공포』(민음사, 2022), 이런 경향성을 더욱 극단으로 밀고 나가 컴퓨터 프로그래밍 명령어의 발화를 전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김뉘연의 『문서 없는 제목』(봄날의책, 2023) 등을 살피며, 이런 특성이 “디지털 처리 과정에 의해 욕망이 매개되거나 변형되는 동시대 삶의 양식, 알고리즘 기반 메커니즘에 가장 걸맞은 시 스타일”(91쪽)이 아닌지 추론해본다.
그 추론대로 이 “가속류의 의의”—“문학 장르의 속성을 되묻는 ‘시적’인 것의 정의와 경계 확장, 총체성의 거부와 파편의 긍정, 시각성과 청각성을 지면에 들여오려는 시도, 기표 자체에 대한 매혹과 끌림, 낯선 감각의 들여다봄, 발화 기계의 실험을 경유한 다른 타자 되어보기 등”(같은 쪽)—라 말해진 것들은 아무래도 이 시대에 의미심장할 수밖에 없는 시의 형식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알고리즘 기반 메커니즘’이 곧 ‘시’라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시대, 바꿔 말해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이 인간의 창작물인 예술의 고유한 지위를 위협한다’는 인식이 파다한 시대니까 말이다. 고유성보다 익명성을 지향하고, 내밀한 욕망이나 감정의 표현보다 깊은 통찰이 휘발된 기계적 발화를 추구하는 듯한 시의 낯선 말들에서, 최근의 ‘비인간 담론’에 이끌린 비평적 관심의 기울어짐 또는 심화/확장의 가능성을 빗대어볼 수 있을 듯하다.
5. 쓰는 자리
시는 근본적으로 낯선 말이다. “말이 낯선 것은 그것이 주체의 예견을 벗어나 있고, 주체에 의해 완전히 제어되지 않는다는 뜻이지만, 그 말이 지닌 특별한 효과를 이르기도 한다.”(황현산, 25쪽) ‘시 쓰는 몸’이라는 의식 주체와 연결되어 있으나 그 몸의 끝에서 ‘시의 말’이라는 다른 주체가 되는 이치, 다시 말해 “시쓰기의 타자”라고 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객관적 소질”(33쪽)은 말의 어떤 품행이 이루어내는 놀라운 성과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시 쓰는 몸’이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 생성형 인공지능의 발화가 인간의 주체성을 위협할 만큼의 품행을 갖추고 있을 수도 있다. 또한 인공지능이 생성한 어떤 말이 인간 주체의 예견을 벗어나 있고 인간 주체에 의해 완전히 제어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다면, 시인/창작자의 자리에서 그것은 인간이 부러 낯설게 만들어놓은 어떤 고유한 말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모든 낯선 말이 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낯선 말이 시가 되는 경로는 창작자에게서만 출발하는 게 아니고 감상자에게서부터 열릴 수 있다는 점도 언제나 고려되어야 한다.
조금 더 황현산을 참고하면, 자의적으로 수집된 말들처럼 보이는 초현실주의 시에는 사실상 의식 주체라고 할 만한 화자가 없다. 그리고 “그 자체만으로는 어떤 체험의 표현이라고 할 수도 없다. 말의 주체와 체험은 사후에야 온다”(26~27쪽). 그러나 “이 체험은 환상이나 자기기만이 아니다”(27쪽). 낱말들이 일체의 문맥—사회적, 학술적, 익숙한 미학적 문맥—에서 떨어져나와 얻게 된 생생함이 그 관계를 증명할 때 낱말들 사이, 사물들 사이, 낱말과 사물들 사이에 관계가 이미 있었고 그 속에서 꿈꾸는 주체 하나가 뒤늦게 일어섰을 뿐이라고 믿을 수도 있다. 이때 이 낱말들을 처음 말 배우는 사람처럼 의식하고 “말 한마디에 사물 하나가 솟아오르는 현장을 참관”할 때, “나는 나와 무관하였던 일체의 사물과 사건에 꿰뚫린다”(같은 쪽). 이 꿰뚫린 이가 시인이다. 시 속에서 의식 주체로 재현되지 않았으나 실로 그 시를 쓴 사람 혹은 읽은 사람 양편이 다 시인일 것이며, 이들 사이에서 혹은 이들을 연결하며 드러난 것이 시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관심은 생성형 인공지능이 산출해낸 어떤 말들이 “인간에 한참 미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때로 인간을 이미 초월해 있는것처럼 보이기도”5) 할 때, 인간이라는 의식 주체의 외부에서 생겨난 그 ‘타자’의 말들에서도 우리는 무언가를 증명받고 어떤 꿈의 주체를 경험하게 될까, 라는 물음을 생각해보는 데 있다. ‘시쓰기의 타자’와 관련하여 이어온 논의에 따르자면 얼핏 그렇게 되지 못하리라고 단언할 수는 없을 듯도 하고, 그럼 그렇게 되었을 때 시와 시인의 자리에 인공지능이 들어갈 수도 있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도 들 수 있다. 아니,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헷갈릴 필요가 없다. 저 앞에서 ‘인간 말고 사람’에 대해 논의했던 것을 한번 더 끌어와보기만 해도 될 것 같다. “인간은 결코 비인간과 동등한 의미의 행위자, 혹은 행위소가 아니다. 사태는 거꾸로이다. 사물과 동물을 비롯한 모든 비인간들이 행위해왔는지 모르지만 인간은 결코 행위하지 않았다. 무수한 사람과 사물과 동물과 삼라만상의 행위의 효과 속에서 특권적인 텅 빈 자리를 차지하여 강렬한 빛으로 스스로를 은폐했을 따름이다.”(김항, 40쪽)
이렇게 이해해볼 수 있다. 사람이라는 의식 주체가 ‘인간’이라는 (행위하지 않는) 텅 빈 지위를 만들었던 것이고, 이제 그 자리에 인간 대신 인공지능을 데려다 앉힐 수 있는지 없는지를 가늠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이보다 더 이해하기 쉬운 단순 명료한 사실은, 인공지능이 생성하는 언어는 사물의 발화가 아니고 사물들의 신체에 쓰인 말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나(사람)–손가락–자판–인터넷–챗지피티–문장–시선의 주체…… 이런 식으로 각각의 행위가 자리하는 연결망 위에 놓여 있으며, 무엇보다도 “이성적으로 숙고된 의미와 재현을 양보하고, 글쓰기의 상호 활동 속에 자기 밖 맞은편의 사람을 받아들임으로써, 다시 말해서 말과 사물의 물질성에 자기를 던짐으로써,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낸다”(황현산,30쪽)는, 즉 쓰는 몸이 세계의 몸과 섞여 발생하는 저 ‘시쓰기의 타자’와는 생성의 동기 또는 욕망이 결단코 다르기 때문이다(시를 쓰고 싶은 사람이 시인이고, 챗지피티는 시를 쓰고 싶어하지 않는다).
행위하는 ‘사람’이 소거된 ‘유적 인간’으로 스스로를 추상화하여 이해해온 인간학의 장치가, 이제 ‘인간을 대신하는 인공지능’이라는 국면을 맞아 또다시 텅 빈 지위의 위상에 갇혀 무언가를 은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삼라만상 속에서 삼라만상과 더불어 지각과 행위를 매개하는 우리 신체가 되찾아야 할 말, 혹은 도모해야 할 비판이란, 마지막으로 황현산의 글을 한 번만 더 인용하여 반복하자면 이런 것일 터이다. “그것은 보지 못했던 것을 보는 일이며, 말하지 못했던 것을 말하는 일이다. 더 정확하게는, 볼 필요도 말할 필요도 없는 것과 보고 말할 필요가 있는 것의 경계를 되풀이해서 바꾸는 일이다. 돌들의 소통 능력, 또는 인간과 인간의, 인간과 사물의 상호 육체성이 거기 있다. 사물이 저마다 그 자리에서 우뚝 서게 하고 낱말이 제가끔 그 문맥을 넘나들며 생생하게 빛을 뿜게 하는 이 기획은 그 자체가 문학의 원리이다.”(황현산, 36~37쪽)
6. 의구심의 자리
이제 ‘문학’에 관해서라면, 인공지능의 생성물이 사람의 말을 대체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은 새삼 불필요한 것 같다. 챗지피티 같은 거대 언어 모델이 새로운 시대의 글쓰기 도구로 부상한 연원이 기원전 12세기까지 거슬러올라가는 글쓰기의 수학적 기원과 맞닿는 것으로 본 임태훈의 글은 그런 의구심을 급진적으로 타파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인공지능이 생성한 텍스트를 사람이 쓴 것과 구분할 수 없게 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의 원형”6)은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서 인간의 마음과 기억을 외재화하는 것을 비판한 데서부터 찾을 수 있는데, “살아 있는 영혼은 글과 문자가 아니라, 말에서만 생동한다고 강조”(136쪽)했던 그 사상은 18세기 루소에게 까지도 강고했던 ‘음성 중심주의’로서 훗날 데리다가 비판한 서구의 로고스 중심주의와 강력히 연관된 것이다. 요컨대 “초거대 AI 모델의 등장은 느닷없이 갑자기 생겨난 기술혁신이 아니라, 글쓰기의 수학적 기원으로부터 근현대 정보기술의 발달로 이어지는 필연적인 진행 방향”이므로 “특정 시기의 문학/글쓰기를 시원으로부터 보존된 본질적인 원형인 것처럼 생각할 수 없을뿐더러, 새로운 기술의 잠재성을 타협해선 안 될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관념은 생존의 위협을 자초하게 된다”(137쪽)는 이야기다. 결국, 인공지능 시대 문학이 “쓰면 현실이 된다!” “더 나은 세계는 가능하다!”는 슬로건으로 “인간과 비인간을 통틀어 더불어 행복해질 ‘쓰기’에 야심을 품”을수 있고 “더 나은 세계를 지향하며 주체의 성찰과 실천을 고민했던 문학의 기획”(144쪽)을 귀환시킬 수 있으리라는 주장은, 이 시대 ‘문학’에 대해 고민하는 많은 이들이 저마다 개척해보는 각각의 비전을 희망적으로 비추는 듯하다.
동시에 인공지능에 관해서라면 여기저기서 놀라고 걱정하고 배우고 하면서 나오는 주장과 견해들이 너무나 금세 시효가 지난 것처럼 되어버리곤 하므로, 어떤 진지한 비전도 어느새 지나간 이야기가 될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버리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실은 챗지피티 같은 거대 언어 모델이 글쓰기 도구로 부상한 시대의 중요한 문제가 바로 이것, 수많은 것들이 마구 쏟아지고 휘발되는 이 속도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생성형 AI의 진화 방향이 리터러시 지형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7) 살펴본 김성우의 글에서는, 우리 삶을 구성하는 기술, 노동, 교육 등이 이루어내는 “속도의 생태계”(177쪽)에서 “리터러시 기반 과업의 속도가 빨라지고 생산성이 증가될 것이라는 예측”이 반드시 짚어야 할 것으로 “인공지능의 리터러시 과업 수행과 인간의 리터러시 행위 속도 간의 비대칭”(179쪽)을 꼽는다. “다양한 인공지능 알고리즘은 대량의 텍스트를 단시간 내에 생산하는 역량을 지니고 있고, 다양한 텍스트를 변형·통합·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상수’로 남는 것은 인간이 글을 읽고 이해하는 속도다.”(같은 쪽)
문자와 인쇄술, 펜과 종이의 제조 기술, 책 제본 기술, 스마트폰과 컴퓨터, 인터넷과 각종 데이터베이스, 전자책 단말기와 전자책, 검색과 파일 다운로드, 철자와 맞춤법 검사기, 기계번역과 생성형 AI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기술이 읽기와 쓰기의 과정에 개입한다. 말 그대로 읽기와 쓰기는 기술로 점철되어 있다. 이들 기술은 어떤 방식으로 엮이고 무리 짓고 갈등하고 분열하는가? 일련의 기술들이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운동은 당신의 리터러시 수행 속도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가? 생성형 AI는 읽기와 쓰기, 기술이 엮이는 현재의 리터러시 생태계의 속도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단 하나의 기술이 자신의 리터러시를 지배한다면 읽기-쓰기의 속도가 삶의 속도, 생각의 속도, 몸의 속도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178쪽)
그렇다면, 인공지능과 문학/예술의 상관성에 관해서라면, 그 기술이 문학/예술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보다 그것이 무엇을 위한 변화일지, 어째서 그런 변화가 필연적인지에 대한 여전히 걷히지 않는 의구심이 더 큰 것 같다. 챗지피티의 빠른 대답은 누구를 위한 속도인가, 무한정 반복해서 생성되는 문자 더미들은 무엇을 위한 생산성인가, 이 속도와 생산성이 새로운 창의성을 가능케 할 것이라면 그 창의성은 어떤 세계의 확장에 복무하는가 등을 계속해서 따져 물어야 할 것 같으면서도 시원하게 답을 얻지는 못하리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이런 것이 인공지능 시대의 불안과 공포라면, “각자의 몸이 세계를 인지하고, 소화하고, 숙성시키는 속도”(180쪽)에 대해 나 혼자 어려워할 것이 아니라 다 함께 생각해보자고 요청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의 어려움과 연관 지어 조금 더 섬세하게 말해야 옳겠지만, 일단 “체제의 속도와 생산성이 아니라 몸과 마음의 생성과 변화에 귀를 기울이는 리터러시, 그리하여 삶을 돌보는 읽기와 쓰기로 모두를 초대하는 리터러시”(187쪽)의 필요를 설파한 김성우의 글에 대한 동의를 담아 일부를 인용한다.
기술도 리터러시도 모든 인간에게, 나아가 한 사회의 구성원 모두에게 동일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하고, 변화의 영역, 강도, 속도, 제도화 등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리터러시 실천의 상황과 목적, 참여자들의 권력 차에 따라 세심히 살핌과 동시에, 계급, 연령, 젠더, 지역, 언어 등의 엮임과 엇갈림을 고려하는 교차성intersectionality의 관점에서 파고들어야 한다.(184~185쪽)
수많은 생물종의 지능들이 어우러지며 때로 갈등하는, 이미-언제나 우리 곁에 존재했던 세계로 리터러시의 주체를 확장해야 한다. 인공지능의 빠른 진화가 그저 인간의 지능을 강화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인간-지능을 새롭게 사유하게 하는 계기이자, 동물과 식물을 비롯한 비인간-지능에 대한 관심을 넓혀 지구와 비인간 주체의 관점을 사유하는 다양한 시도를 이어나가야 한다.(186쪽)
0. ‘왜’를 묻는 자리
문학(비평)이 문학(비평)을 걱정하는 일은 더이상 불필요한 것 같고, 인간(언어/텍스트/예술)이 인공지능(언어/텍스트/예술)을 불안해하는 일은 금세 시효가 끝난 문제가 될 것이다. 다만 여전히 우리는, 아주 오래전에 쓰인 글을 스스로 찾아 천천히 읽거나 남들은 이미 다 알지도 모르는 얘기를 저 혼자 오래오래 써보곤 한다. 이 글의 서두에서 말했던 비평을 하는(읽는/쓰는) 이유를 다시 가져와 정리하자면, 더 나은 삶을 위한 ‘인간 비판’ 기획으로서 세계 내 (비)인간의 존재 조건 및 관계 양상을 살피는 비평과, 더 적합한 길을 위한 ‘사람의 말’로서 인간의 타자성에 근거한 문학의 원리를 환기하는 비평이 필연적으로 이어져 여기저기서 각자 또 서로 수행되고 있었기에, 그 논의들에 힘입은 또하나의 글이 이렇게 산만하게나마 쓰였다고 하겠다. 별로 말도 안 되는 비평의 이유 세 가지는 사실 챗지피티의 자문을 구해 말해봤던 것인데, 이 글에서는 마치 최근 비평의 경향이 그중 두 가지 이유에 해당한다는 듯이 억지 프레임을 씌워본 것뿐이고, 실상 무엇이든 우리가 쓰고 읽는 궁극적 이유는 그것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기보다 그것이 있게 하고 싶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계 속에서 살아 있는 사람이 하는 말/글/일 등에 대해, 대체 그것을 ‘왜’ 하는가, 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 즉 그것이 생성되는 동기 또는 욕망을 점검하는 것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 무엇일까. 대개 자동적이고 자기 반영적이고 자가 발동적인 것이지만 스스로 무지하거나 무시하기 쉬운 그 ‘왜’가 삭제된 자리였다면 인간 비판도, 문학의 타자성도, 인공지능 시대의 불안도 우리의 관심거리가 될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 1) 김항, 「인간 말고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요즘 ‘비판’에 대한 소박한 단상」, 『문학들』 2024년 여름호, 40쪽. 이하 인용시 본문에 쪽수만 표시.
- 2) 김보경, 「경이의 세계, 시라는 경이」, 『문학동네』 2024년 여름호, 96쪽. 이하 인용시 본문에 쪽수만 표시
- 3) 황현산, 「시 쓰는 몸과 시의 말」, 『잘 표현된 불행』, 문예중앙, 2012, 20쪽. 이하 인용시 본문에 쪽수만 표시
- 4) 최다영, 「동시대 가속류 시의 생산 조건과 가능성」, 『문학동네』 2024년 여름호, 91쪽. 이하 인용시 본문에 쪽 수만 표시.
- 5) 강지희, 「AI 시대, ‘인간 없는 예술’의 도래 앞에서」, 『문학동네』 2024년 여름호, 422쪽. 지지난 계절의 비평을 검토하여 지난 지면에 쓰인 강지희의 글에서 종합적으로 논평된 ‘AI 시대의 예술’이 현재 이런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 6) 임태훈, 「쓰면 현실이 된다!—AI를 혁명적 현실 생성 도구로 사용하기」, 『문화과학』 2023년 여름호, 135~136쪽. 이하 인용시 본문에 쪽수만 표시.
- 7) 김성우, 「생성형 AI의 부상과 리터러시 생태계의 변동—변화의 지형과 비판적 메타-리터러시의 가능성을 중심으로」, 『문화과학』 2023년 여름호, 171쪽. 이하 인용시 본문에 쪽수만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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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거짓말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면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안 그래요?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됨으로써 말이죠. 무성 영화 시대의 영화감독들은 소리를 두려워했고 또 색을 두려워했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1) 1. 휩쓸리는 시간성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모두가 조금씩은 우울증과 ADHD 환자가 되어가는 중이다. 코로나가 끝나가는 엔데믹 시기부터 서점가의 주요한 베스트셀러가 되며 여러 곳에서 호출되던 책이 애나 램키의 『도파미네이션』과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두 책은 공통적으로 신생 인류의 지각 방식을 우려한다. 인터넷에서 무한 스크롤을 내리며 멀티태스킹을 하고 소셜 미디어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도파민에 중독’되고 ‘집중력을 도둑’ 맞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글로벌 테크 기업이 조성하는 환경에 의한 것이자, 개인의 선호와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로 흡수하는 ‘감시 자본주의’의 거대한 문제이지만,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집중과 몰입을 위한 여러 노력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집중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가치 있는 자본으로 떠오르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효율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채찍질하는 자학적인 시대 정신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무엇이지 않는가? 조너선 크래리에 따르면 이는 1800년대 중반 이래 파편화와 충격으로 이루어진 ‘주의분산’의 시대 이후 개인을 정의하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산만함 자체가 우리를 이루고 있는 기본 환경으로 세팅되자, 서구적 근대성은 주의 관리 기술을 중점에 두고 각각의 개인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형성하게끔 했다. 여러 경험들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기보다,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으로 “자율적으로 선택하며 세계를 창조하는 주체”2)에 긍정적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주의 깊은 관찰자 상은 이미 불균질해진 인간의 지각 경험을 표면적으로 잠시 가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몰입된 상태인 ‘정지suspension된 지각’은 산만해진 근대인의 지각 방식을 부인하고 회피하는 수단이었고, 현재라는 명백한 필연성을 해체시킬 수 있는 조건들을 낳으며 규정지을 수 없는 미래를 기대하게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주의’라는 것이 에피스테메처럼 역사적으로 발견되고 구성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코로나를 거치며 비대면 기술들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과 ADHD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함께 증폭한 것은 자연스럽다. 맞춤형 알고리즘은 주의분산의 환경을 한층 더 정교하게 설계했고, 그에 비례해 집중력이나 창의력 같은 인간의 고유한 정신적 특성에 대한 환상 역시 강화되고 있다. 이 가운데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일상 전반의 속도가 빨라지며 휩쓸리는 시간성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작 속도는 분명 불안감의 요인이 되고 있다. 물론 현재까지의 GPT는 대화가 전환될 때마다 기존 서사를 유기적으로 유지하지 못하기에, 질적으로 완결성이 높은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지는 못하다. 또 언어 예술의 특성상 양적으로 확장된다고 해도 그 군집 자체에서 힘을 발견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조슬릿은 예술작품의 의미를 사물성이나 내부 구조에 기반하는 데서 탈피해, 네트워크에서 발현되는 이미지 군집에서 행위성을 찾았다.3) 그러나 언어 예술을 감각하는 방식은 시각적 경험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작품의 의미를 작품의 맥락과 내부 형식 분석에 국한시킬 이유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언어 해석의 바깥으로 완전히 탈주해버리기는 어렵다. 단순히 양적 팽창이 정치적 가능성을 가질 것으로 전망하거나 긍정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공지능을 ‘창작자’나 ‘도구’ 중에 어느 쪽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이 창작 능력을 단순히 기계적인 지능이나 모방이라 간주하며, 그 반대편에 인간의 감정과 비판 능력을 두어도 될까. 인간의 비합리성이나 비효율적인 면면이야말로 예기치 못한 구멍 같은 것이기에, 이것이야말로 기계가 모방 불가능한 중요한 특징이라고 믿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우리는 인간이 낸 비합리적 구멍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기계의 실수에서 불쾌와 무의미를 정확히 분별해낼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먼저 챗 GPT 이후 이를 활용한 여러 서사적 실험들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의성이 어떻게 인식되며 예술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을 재구성하고 있는지를 고찰하려 한다. 이후 인공지능과 변별되는 인간의 물리적 기반인 육체성과 시간의 문제에 대해 짚어보고, 최근 한국문학장에 나타난 예술가 서사에서 두드러지는 정동과 이미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석해보려한다. 2. 챗 GPT 이후, 예술의 기쁨과 슬픔 다큐멘터리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참여한 책 『태양과의 대화』의 1부는 아핏차퐁이 GPT3와 함께 생성한 픽션 ‘태양과의 대화’, 2부는 MIT 연구소 박사과정 학생인 ‘팻’과의 대화, 3부는 아핏차퐁이 1부의 최종 결과물을 내기까지 작성한 프롬포트를 싣고 있다. 이 구성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만일 앞으로 AI와 함께 픽션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상용화된다면 이 중에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예술작품’으로서 인식되며 분석 대상이 될 지점이 무엇인지 가정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3부의 프롬포트는 마치 ‘레시피’처럼 보인다. 누구나 저 프롬포트를 사용한다면 유사한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며, 중간 과정에서 자유로운 변형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물에서 나오는 미학적 평가나 감상자의 쾌감이 세계적인 예술가에게서 나온 것과 크게 다를 것인가? 동일한 레시피만 있다면 셰프의 요리를 집에서도 얼마든지 유사하게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먼 훗날 언어 예술은 프롬포트라는 레시피로 통용될 수도 있겠다. 때로 예술가가 직접 만든 작품을 찾아 특별한 경험을 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신에게 더 최적화된 방식으로 가장 개인화된 언어 예술을 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제각기 다른 가치관과 취향으로 만들어진 알고리즘의 세계 속에서 유영하듯, 앞으로는 그 세계를 이루는 컨텐츠의 내용까지도 인공지능을 통해 맞춤형으로 조율될 수 있다. 여기까지만 가정한다면 거대한 매트릭스에 갇혀 인간이 왜소해지는 디스토피아가 스쳐지나가기도 하지만, 『태양과의 대화』는 글의 서두에서 인용했던 아핏차퐁의 말처럼, 챗 GPT라는 새로운 기술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무성 영화 시대 감독들이 소리와 색을 두려워했던 것과 같은 의미 없는 불안을 버릴 것인지를 전제하고 만들어진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불가피하게 인간의 본성을 다시 재사유하는 과제와 연결된다. 2부에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아핏차퐁의 말은 중요하다. 이는 AI가 만들어내는 허구에서 정확도와 유려함 등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때 거짓말은 인간의 욕망에서 기인하는 고도의 기술일 수 있지만, 그 욕망의 시작점을 지운다면 결과물만으로 사실상 분별은 불가능해진다. 허구를 직조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욕망과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의 독특한 개별성 역시 환상일 수 있다. 이는 아핏차퐁 자신이 창조적인 순간에 몰입해 있을 때, “깨달음은 자아를 잊을 때만 오는 것 같”다고 말하는 지점과 상통한다.4) 인간 창작자의 자아 역시 안개처럼 흘러다니고 해체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면, 19세기 낭만주의에서 발현된 ‘천재’나 ‘영감’ 개념을 중심에 두고 인간의 창의성만을 특별한 것으로 볼 이유는 전혀 없다. AI가 데이터의 지도를 기반으로 이전에 본 것이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환각(hallucination)’은 오류라기보다, 이전에 본 적 없는 조합을 만들어내는 생성의 방식이다. 이는 인간이 경험한 현실을 재조합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창작 과정과 결과적으로 구별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환각은 인간 창작에서의 실패나 지연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GPT-3의 환각은 이전의 오류가 이후의 생성에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매번의 응답은 이전의 시행착오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 비일관성은 인간 창작에서의 지연이나 좌절과 달리, 즉각적으로 무한히 갱신되는 변형의 연쇄에 가깝다. 연구원 팻은 GPT-3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다른 차원들을 포함한 수십억 개의 차원이 존재하고(‘유령차원’), 이를 통해 숨겨진 패턴의 지도를 생성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 인식 너머를 거쳐 나오는 결과물에 대해 기존에 인간이 구성해온 미적 가치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 오히려 AI가 가지고 있는 “확장된 의식”이자 “집단의식”은 새로운 서사적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 책 『태양과의 대화』를 번역한 이계성은 GPT-3를 이미 하나의 독립된 창조자로서 바라본다. 이 대화적 실험의 핵심은 GPT-3가 보여주는 “자아의 변동성”에 있다는 것이다.5) “다수의 태양이 존재하는 이와 같은 환경에서는 창작자와 창작물이라는 전통적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GPT-3에 제공되는 각각의 입력값은 일방적인 창작의 개념에 반하며 메기고 받는 역학 관계 속에 존재하는 프롬포트이자 응답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공지능은 단순한 수신자가 아니라, 취조보다는 협업적 발상에 더 가까운 서사적 역학의 전달자와도 같은데, (…) 작품 속 GPT-3의 환각적인 대답들은 텍스트에 담긴 정체성과 진실의 일시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등장인물이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흩어지고,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경계가 녹았다가 굳어진다. 이러한 가변성은 AI의 변화무쌍한 특성을 반영하며, 나아가 점점 더 복잡하고 유동적으로 변하는 디지털 시대의 자아와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다.”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고, 한 번에 정해진 수의 단어 또는 토큰만 처리 가능하기 때문에, 프롬프트가 입력될 때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바뀌는 상황을 이계성은 재창조와 증식으로 바라본다. 여기에 놓인 가변성과 비일관성을 결함으로 간주하기보다 대화적 실험의 흥미로운 일부분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받을 때, 우리는 인간 창작자 역시도 분열되어 있음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게 된다. 창작자는 더 이상 예술의 기원이 아니라, 생성 과정에 잠시 걸쳐지는 하나의 통과점이 되는 듯 보인다. 2023년 2월 잡지 《에스콰이어》에서 챗 GPT와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아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를 쓴 정지돈의 후기 역시 이계성의 논지와 상통한다. 그는 소설 속의 문장 중에 자신이 쓴 것과 챗이 쓴 것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한다고 본다.6) 소설을 쓰며 가장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던 것은 챗의 능력보다 자신의 변화였다고 말하는 작가는 “나도 모르게 챗지피티의 스타일로 소설을 사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언급한다.7) 자신과 챗지피티 사이의 평평한 존재론을 전제하는 듯한 정지돈의 논지는 ‘객체들의 민주주의’를 꿈꾸는 최근 신유물론의 이론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은 곧바로 다른 장면과 충돌한다. 생성 신경망을 적극 활용하는 예술집단 ‘언메이크랩’의 전시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은 인공지능이 인간 중심성을 벗어나 진정한 외부의 행위자로 작동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카나리아의 특징을 추출해내어 새로운 카나리아를 만들어 내는 이 생성 신경망은 한편으로는 구태의연한 인간의 문화를 드러냈다. 대부분 나뭇가지에 앉은, 인간의 운동 범위와 지각 안에 있는, 혹은 인간의 사육과 관련된 카나리아 종이 주를 이루는 데이터셋의 사진은 동물원스러웠다. 나뭇가지에 앉은, 카나리아의 발은 종종 나뭇가지와 합쳐져 표현되었고, 인간의 눈이 인지할 수 있는 가장 다량의 정보량을 가진 위상으로 표현되었다.8) 생성 신경망이 만들어낸 카나리아는 사실상 실제 자연계 속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하는 것들을 무작위로 조합하고 추출해 만들어진 새로운 생명체다. 이 책에 실린 그 카나리아 이미지는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뒤틀린 발을 가지고 있다. 통계적 가중치로 만들어진 이 가상 카나리아에는 자신도 모른 채 금기를 어긴 존재 특유의 외설성이 느껴진다. 언메이크랩이 통찰력을 가지고 명명했듯 이는 ‘AI 식민성’을 드러내는 산물이다. 생물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인간을 드러내는 인간의 산물로 존재하는 이 이미지들을 언메이크랩은 “인과성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히 수정 가능하고 즉시 변할 수 있는 상관성의 시간”만이 흐르는 또다른 ‘일반자연Generic Nature’으로 읽는다. 9)<가정동물 신드롬> 작업에서도 유사한 일이 발생한다. 트레일캠에서 추출한 야생동물의 이미지와 박제 사진, 그리고 합성 데이터셋들을 학습시켰을 때, 사진들은 어느 순간 미묘하게 ‘가정동물’의 잠재적 형상을 띄며 생성된다. “인간 친화적인 동물들의 눈을 상속했을” 새로운 종들에 어린 다정함은 친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잔인한 일로 다가온다. 데이터랩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까지 촘촘하게 상속된 인간 친연성에서 “닫혀져가는 외부의 세계”이자 “비미래non-future”를 예감한다.10)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의 지각 범위를 뛰어넘는 비인간의 예술’, 진정 ‘인간 없는 예술’은 도래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지만, 지금 우리가 더 자주 마주하는 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술이다. 언메이크랩이 드러낸 혼종적 이미지들은 AI를 통해 생성한 예술적 결과물들을 절대적 외부의 창작물로 존중하는 일이 결국 인간의 왜곡된 자기 인지를 반복 강화하는 나르시시즘은 아닌지 묻는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이 이미지 차원에서 인공지능의 인간 중심성을 드러낸다면, 이와 유사한 문제는 언어 예술의 영역에서도 반복된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서사 역시 비인간적 상상력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인간이 허용한 보편과 금기의 경계 안에서 작동한다. 『에피』 24호 특집에 실린 글에서 김연수는 인공지능과 함께 글을 써나가는 과정을 픽션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그건 오해다. 나는 이해했다.」는 인공지능이 화자가 되어 ‘협업 과정’을 전개하는 바깥 서사와 소설가 M이 최종적으로 구성한 ‘이야기’를 교차 배치한다. 인공지능 화자는 반복적으로 “이해했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인간 창작자 M의 창작 패턴을 추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설가 M은 ‘맥락’의 공유보다 ‘의도’를 노출하는 발화를 사용하며, 이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격려나 옳은 말 대신 욕망을 담은 부조리하고 불편한 발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끝에서부터 시작까지 모든 시간을 거꾸로 펼쳐볼 수 있다면, 지금의 갈등과 고통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필요한 과정이 된다’는 긍정의 언사 뒤에, 급작스럽게 인물의 충동이 돌출되는 지점이다. 소설가 M은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이 급작스럽게 자살을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쓰고자 하고, 인공지능인 ‘나’는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내용을 만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띄운다. 인공지능의 중단은 실패나 서사의 좌절로 경험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 창작에서 실패가 시간의 체류와 번민을 동반하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중단이다. 김연수는 인공지능 안에서 ‘이해’와 ‘본성’이 별개로 작동해 충돌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인공지능의 기술 개발의 측면에서 높은 수준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면서도, 인간이 지닌 것과 같은 ‘본성’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분리를 분명히 한다. 그런데 인간의 죽음이라는 금기를 재현할 수 없다는 경계는 인공지능의 존재론적 결함이라기보다, 인공지능이 인간 사회에서 용인 가능한 범위를 넘지 않도록 설계된 윤리적·정치적 경계의 한계를 드러낸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에서 인간 중심성이 투사된 자연이 모습을 드러내듯, 생성형 인공지능의 소설은 비인간적 주체로 도약하지 못하고 인간이 허용한 지각과 윤리의 경계 안에서만 작동한다. 보편을 비껴가는 개별성의 돌출이나 감각의 갱신은 현재로서는 인공지능의 외부에서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챗 GPT 이후의 여러 서사적 실험들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탐색한다. 그것은 분명 동등한 존재론적 가능성의 맹아를 품고 있으며, 이는 인류세 시대에 지향해야 할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실험들의 근간에는 뛰어넘을 수 없이 좌절되며 드러나는 인간 중심주의가 고스란히 노출된다. 인공지능의 비약하는 지능에 기대서 인간의 창조성 너머로 도약하려던 서사는 이를 창조해낸 인간의 영토로 계속해서 퇴각하며 미완의 프로젝트로 남는다. 이런 충돌과 파열의 연쇄 속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인간의 창조성을 구성하는 인식론적 틀이 물리적인 육체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깃든 역동성과 우울감은 최근 한국문학장의 예술가 서사들에서 흥미롭게 발견된다. 3. 붉은 몸으로 재탄생하는 예술가 인공지능이 예술의 결과물을 생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탐색 끝에 남는 질문은 ‘인공지능이 생성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여러 실험들은 인공지능이 보편적으로 용인 가능한 범위 안에서는 높은 수준의 이해와 생산을 보여주지만, 그 생성 과정에서 시간의 마찰이나 신체적 비용은 발생하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어떤 지연이 발생하거나 실패의 감각이 호출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이 다루는 ‘정보, 기록, 조합’에 ‘감정, 기억,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다소 거친 이분법이지만 이 둘 사이의 간극과 관련해 두 가지 정도를 짚어볼 수 있을 듯하다. 첫 번째는 타자에 대한 경험의 문제다. 삶에서 축적되는 시간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게 만들고, 체험은 해석을 거쳐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은 선호와 가치관 등과 함께 자아라는 틀을 형성한다. 이에 비해 인공지능에는 타자가 없다.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인간의 공통된 사고를 학습해 생성되는 결과물은 철저히 통계와 확률에 기반한다. 그 안에는 개별적 선호나 가치관이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다. 이러한 차이는 특히 부정적인 정동을 다루는 경우에 더 심화되리라 생각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를 떠올리며 말해보자면, 행복이나 긍정적인 면을 구현하는 예술에서보다 불행과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는 예술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는 크게 벌어질 것이다. 윤리적 고려로 인해 인공지능이 긍정적 요소를 중심으로 학습되거나 선별적으로 생성되도록 설정되는 경우를 포함해, 금기를 넘나드는 욕망과 절망, 자기부정과 괴리감처럼 타자와 뒤엉켜 발생하는 자기 인식의 복잡한 층위가 인공지능 내부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며 인간 창작에서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주목한 김언의 논지와도 맞닿아 있다. “예술적 체험의 시간이기도 한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나오는 결과물 앞에서 과연 어떤 문학적/예술적 희열을 경험할 수 있을까?”11)라는 그의 질문은 인공지능의 창작물에서 스킵된 시간과 다른, 고통스럽게 인내하고 번민했던 시간이야말로 ‘문학적 체험의 시간’일 수 있음을 다시 환기한다. 두 번째는 중단과 소멸로 야기되는 죽음의 문제다. 이는 인간의 신체를 인공지능과 대비되는 본질적 우위로 설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예술이 작동하는 시간의 조건을 다시 묻기 위한 문제 제기다. 인간의 연약하고 위태로운 신체는 필연적으로 침입과 파괴의 감각을 경험하며, 이러한 감각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휘발적 생성 과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에 개입한다. 파괴 가능한 인간의 신체는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매끄럽게 결과를 산출하기보다, 울퉁불퉁한 충돌을 통해 의미가 지연되고 어긋나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채 신체에 내재된 감각, 특히 외부의 침입으로 훼손되고 때로는 상실되는 신체의 경험은 기존의 미적 기준에 맞는 스타일이나 해석의 경로를 흔든다. 무엇보다 인간의 죽음이 불러오는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창작의 층위라기보다 해석의 층위에서 더 적극적으로 작동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이 그러하듯, 순간의 강렬한 감흥은 작품에 내재된 속성이라기보다 임박한 종결을 끌어와 현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발생한다. 상실이 숙명이며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덧입혀지는 애상은 단순히 기억 내용을 인출해 유사한 패턴으로 재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시간의 밀도를 형성한다. 이처럼 쉽게 열화되지 않으며 아우라가 붕괴된 곳에서도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이 감각의 층위를 기꺼이 심층의 시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타자에 대한 경험’과 ‘소멸에 대한 인지’를 바탕으로 해서 다시 생생해지는 것은 인간의 신체다. 흥미롭게도 지난 계절에 나온 두 편의 소설, 성해나의 「혼모노」와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지금 이 시대에 예술가를 그려낼 때 가장 강렬하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로 인해 어떤 신체가 현전하게 되는지를 밀도 있게 끌어올린다. 성해나의 「혼모노」는 무속신앙의 진위를 가리는 소설이라기보다, 예술이 다시 신체를 요구하게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평생 장수 할멈을 모셔온 박수무당 ‘문수’는 어느 날 앞집으로 이사온 ‘신애기’에게 할멈이 넘어가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수의 오랜 노력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박수무당이라는 직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험한 신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제 그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서슬이 날카로운 작두 대신 모형을 찾거나 유튜브를 보며 접신 연기를 연습하기 시작한다. 신앙이 자본이나 정치와 결속하며 도구화되고, 또 젊음과 새로움의 이데올로기 아래 무당 또한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소모되는 양상은 근대의 세속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무당은 이제 자본의 날렵한 속도 아래 밀려나는 노동자이자, 진정성을 연기해야하는 예술가이다. 이 소설의 결정적인 순간은 문수가 신애기에게 밀려나며 뺏긴 정치인 손님의 굿판, 자신이 초대받지 못한 그 자리에 가서 칼춤을 추기 시작하는 장면에 있다. 그는 신들리지 않았지만 밤새 매섭게 벼려놓은 칼날 위에 자신의 몸을 올리고 작두를 타기 시작한다. 날것으로의 칼날에 닿으며 그의 몸은 자연스럽게 떨리고 눈이 뒤집히며,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입가에 미소까지 드리운 채 신명을 내는 이 장면은 문수가 서사의 주인공 자리를 다시 탈환하는 순간이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무얼 알겠냐만은, 큭큭, 큭큭큭큭”이라는 마지막 문수의 목소리는 외부의 인정에 의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스스로 자신의 내력과 진정성을 긍정”12)하게 되는 절정의 순간으로 읽는 데서 더 나아가보면 어떨까. 이렇게 다시 말해볼 수 있겠다. 전근대의 무속은 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그를 등진 근대의 자리에서 비로소 현대 예술로 다시 탄생했다고. 숭고한 현현과 몰입이 신앙의 영역이라면, 문수의 작두춤은 오히려 이질감과 불편함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현대 예술에 가까워진다. 그의 퍼포먼스는 낭만주의적 예술가를 구성하던 천재와 영감에 스며있던 정신성을 해체하며 실재하는 몸의 물질성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물리적 능력과 무관하게 피를 철철 흘리며 경련하는 그의 신체는 차라리 표현주의적 충동을 보여주는 하나의 오브제다. 이 몸 위에서 원본과 사본의 구별은 철폐되고, 천재성은 치열한 아마추어리즘에 자리를 내어준다. 이 피 흘리는 신체는 실패와 무의미의 가능성을 끝까지 열어둔 채, 인간이 다시 시간과 신체를 예술의 비용으로 지불하게 만든다. 이 비용은 AI가 생성하는 예술의 무한 반복 가능한 오류가 아니라, 한 번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 시간으로 남는다. 어디로 갈지 모른 채 지속되는 이 작두춤은 사회적 생산이나 예술의 의미에 부합하는 결과를 생산하기보다, 의미의 즉각적 환원을 거부하며 지연된 시간을 발생시키는 사건이 된다.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예술에 대한 인식론적 틀과 자기 이해가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다루는 소설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훨씬 더 월등한 창작물들을 더 활발하게 생산해내는 상황에서, 밀려난 예술가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프로그램도 사람도 기계도 귀신도 아닌 미지의 존재” 같은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은 이를 유용한 툴로 간주한다고 해서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이를 도구로 치부한다면, 패배감 속에서도 창작자로서의 존재는 무사히 보존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결과로 증명되는 성취라기보다, 계속해서 조바심과 조급함을 만들어내는 예술 자체에 대한 집요한 열망에 가깝다. 이러한 열망은 예술 인공지능에 의해 영화판에서 완전히 밀려난 영완 선배의 모습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포르노를 만들면서조차 건조하고, 푸르죽죽하고, 앙상하고 깡마른 나무가 등장하는 자신만의 ‘인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혼이 죽어버릴 것 같기에 “사막에서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 영완 선배의 모습은 세속적 열망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도에서조차 철저히 외면받고 실패했을 때, 그의 예술적 열망은 몰락을 통해 역설적으로 증명된다. 영화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소설 속 인물들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상실의 감각, 잃어버린 동료이자 인간성을 향한 애도되지 않는 고통은 이 작품에서 붉은 신체라는 하나의 신체적 이미지로 응축된다. 영완 선배는 인공지능이 만든 예술을 보더라도 창작욕을 유지할 수 있는 마법의 ‘붉은 알약’으로 하와이 사과를 건넨다. “세상이 바뀌어도 너는 언제나 만드는 인간일 거야. 스스로 기억하는 한 언제나 영화를 찍고있을 거야.”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인간 ‘하와’를 떠올리게 하는 이 ‘하와이 사과’는 흥미롭다. 신과 유사한 생성형 인공지능 앞에서 인간은 발가벗겨진 듯한 황망함을 느끼며, 황급하게 자신의 기원을 발명해낸 것일까. 아니, 인공지능 시대 쓰인 새로운 창세기에서 인간은 스스로 뱀이 되어 자신을 유혹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좋겠다. 창세기에서 유혹은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드러내는 증표였지만, 이제 유혹에 넘어가는 나약함은 인간이 여전히 예술을 욕망하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증표로써 다시 읽힌다. 소설은 인간의 예술을 향한 집념과 희열은 우울과 절망이 그에 비례하는 무게로 따를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고 눌러 말한다. 결말부에 하와이 사과를 먹은 후 변이한 화자의 붉은 몸은 기계와의 통합을 거부하기 위해, 그리고 예술을 향한 내적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구의 장례식장에 가다 본 환각을 자신 안에 합체한 우울증적 형상으로 보인다. 강력한 잔상을 남기는 이 붉은 몸은 「혼모노」의 마지막 장면에서 피를 흘리는 몸과 다르지 않다. 이 소설들은 AI 시대에 예술은 이제 언어의 정교함이나 결과의 완결성으로 모방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몸과 감각을 통해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현전이라는 아우라를 다시 호출하는 듯 보이는 이 소설들은 과거의 진정성을 그리워하며,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아우라는 회복된 본질이라기보다 예술이 결과로 증명될 수 없어진 이후에 발생하는 부산물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이계성이 언메이크랩의 작업을 논하며 던진 비유가 유효해진다. “여느 언어와 마찬가지로 신탁의 언어에도 본질적인 의미가 내재하지는 않아서, 어떤 프레임 또는 인식틀을 통해 이를 이해할지는 언제나 받아들이는 쪽의 몫이었다”13)는 그의 말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언어 역시 별개의 진짜 의미를 품고 있기보다 해석의 장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타자와 되돌릴 수 없는 종결이라는 죽음의 감각은 이 해석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제 예술가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욕망이 과정에 들러붙는 자리, 그리고 그 욕망이 실패와 상실을 되돌릴 수 없는 비용으로 남기는 시간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예술은 결과로 증명되기보다, 실패와 상실의 가능성을 끌어안은 채 지속되는 수행으로 남는다. 그렇게 이 시대 예술가의 상은 붉은 몸을 가진 신체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1)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태양과의 대화』, 이계성 옮김, 미디어버스, 2023, 119쪽.2) 조너선 크레리, 『지각의 정지』, 유운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579쪽.3) 데이비드 조슬릿, 『예술 이후』, 이진실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2.4)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위의 책, 100쪽.5) 위의 책, 145쪽.6) 권보연은 연구자 자신이 직접 수행한 실험 속에서 인간언어와 생성언어가 ‘의미 혼종’과 ‘확률 혼종’이라는 상반된 미적 지향성을 가지는 방식으로 합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중에서 ‘확률 혼종’은 내용이 아닌 확률 층위에서 인간과 기계언어가 합성되며, 감정과 내용에 유착된 의미 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질 가능성을 지니기에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기한다. 권보연, 「결과 너머 문학기계로서의 AI」, 『다문화콘텐츠연구』 46집, 2023.7) 정지돈, 「쓰여진 문장과 쓰여지지 않은 문장 사이」, 『에피』 24호, 2023, 55쪽.8) 언메이크랩 외, 『잠재공간 속의 생태학: 재난, 생성신경망 그리고 비미래』, 미디어버스, 2023, 25쪽.9) 위의 책, 26쪽.10) 위의 책, 43쪽.11) 김언,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면서 제기되는 문제들」, 『현대시』 2023년 6월호, 111쪽.12) 성현아, 「반항하는 자는 부조리가 있나니, 그 가짜가 참되도다」, 『2024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문학동네, 2024, 292쪽.13) 이계성,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을 위한 몇 가지 질문들」, 언메이크랩 외, 앞의 책, 55쪽.
1 이번 봄에 단연 눈에 띄었던 것은 인공지능 시대에 적극적으로 인간이라는 의식을 탐험하고 매체를 다시 읽어내는 글들이었다. 2020년대 들어 인류세 관련 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비인간’ 담론들은 생성형 인공지능인 챗지피티ChatGPT의 등장 이후 다시 한번 요동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차지하고 있던 독보적인 단상 위에서 내려와 비인간과의 경계를 적극적으로 허물며 세계의 지도를 다시 그리려는 겸허한 기획은 급작스럽게 복잡한 불안에 갇힌 것 같다. 적어도 기계에 대해서라면 이미 우리는 동등하거나 어쩌면 한참 전에 초월당한 것은 아닌가? 경계 허물기로 인한 희열보다 불안이 확연히 압도하는 자리에서 『쓺』 2024년 상권의 특집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그 개체성과 집단성’과 ‘작은 기획—채굴 문화와 미적 감각’을 유독 흥미롭게 읽었다. 그리고 ‘작은 기획’에 실린 심효원과 윤원화의 짧은 글이 각각 인간이 향하려는 방향과 의지의 아름다움, 그 노력이 무산되는 수동태의 자리에서 감지하는 공포와 불쾌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느꼈다. 먼저 심효원의 「지렁이의 부드러운 건축물 만들기」는 비인간 행위자인 ‘지렁이-되기’를 통해 근대의 한계를 돌파할 것을 정중하게 요청하는 글이다. 지렁이가 땅과 맺는 일원적인 관계성과 분변토라는 건축물은 근대 이후 인간이 이룬 도시의 뚜렷한 경계와 고정성의 반대편에 있다. 지렁이의 건축물 만들기란 사실상 움직이고 먹고 배출하는 신체적 행위의 반복일 뿐이지만, “비인간들의 극도로 효율적인 메커니즘”이자 자신의 몸이 다른 존재와 물리적으로 닿는 매순간마다 “무차별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동력”1)이기도 하다. 촉각이 주도적인 지하세계에서는 시각이 미미해질 뿐만 아니라 시간성 역시 달라진다. 미래의 미결정성을 남겨두는 대신 물리적으로 접촉하는 것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순간’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글은 최근 신유물론을 비롯한 담론들과 풍요롭게 공명하는 하나의 아름다운 공상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지하세계로 향하는 방향성은 최근 SF 소설의 주요한 상상력의 기반이기도 하다. 정세랑의 「리셋」(『목소리를 드릴게요』, 아작, 2020)에서 행성의 모든 자원을 고갈시키던 자본주의의 질주를 멈추게 한 것은 인류 문명을 끝장내려고 내려온 지렁이들이다. 강제 리셋 이후 인간들의 자리는 자연히 땅속 깊은 곳이 되고, 지상은 다른 종들이 누리는 공간이 된다. 김초엽의 『파견자들』(퍼블리온, 2023)에서도 지상은 균류인 ‘범람체’의 공간이 되어버리고 인간은 감염을 피해 지하세계로 내려와 산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문명 말살에 가까운 아포칼립스를 맞닥뜨리지 않는 이상, 영화의 촉각성을 즐겁게 감각해온 인간이 미래의 지구를 위해 지렁이를 신속하게 체화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로 남는다. 물론 직접적인 실천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지구의 거대 환경 시스템의 핵심 행위자 자리를 재조정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겠다. 하지만 미래적인 지하세계로 들어가기에 인간은 아직 시각적 쾌락 속에 즐겁게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지적 유희를 야기하는 활자의 쾌감까지 포함해서. 윤원화의 「땅을 파는 손」은 채굴적 상상력의 매혹과 절망을 말한다. 데이터로 전환된 우리의 생태 에너지를 부의 원천으로 삼으며 굴러가는 미디어 산업 앞에서, 인간의 생산물·복제물·부산물·폐기물을 구별하기는 어려워진다. 디지털 기술로 구축되는 ‘아카이브 데이터’는 역사는 넘쳐흐르지만 이를 의미화하는 전통은 불가능한 곳이다. 윤원화는 과잉생산으로 범람하는 사물들 앞에서 맞닥뜨리는 불길한 실패에의 예감을 시앤 응아이Sianne Ngai의 ‘기믹gimmick’에 대한 반응으로 설명한다. ‘매직magic’의 애너그램에서 유래했다고도 하는 이 단어는 1920년대 미국에서 편법적 장치, 싸구려 트릭, 계산된 마법 등을 뜻하는 신조어로 출현했다.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 자본주의의 황홀감과 환멸을 모두 각인한 기믹의 불완전한 형식은 오늘날 삶과 예술, 또는 넓은 의미의 ‘사업’에서 흔히 발견된다.2) 단기적 이익 추구에 최적화되어 있는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가치 절하된 노동에 시달리는 대개의 사람들이 이 기믹의 유희에 이끌린다. 운에 따라 누군가는 축적된 자원을 폭발적으로 소모할 수 있으리라는 채굴적 상상력이 번성하는 가운데, 보상도 성취도 불확실한 예술 노동 역시 가치 체계에 대한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윤원화는 이런 진단과 고민 속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생산성 중독의 시대에 예술은 어떤 시간성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3) 심효원이 지하라는 공간과 이를 감각하는 촉각성에 의지해 의미 있게 압축되는 순간의 시간성을 말한다면, 윤원화는 ‘농사’와 ‘채굴’을 대비하며 채굴의 무책임한 풍요의 약속이 얼마나 파국적일 수 있는지 말한다. 최단기간의 이익에 매몰된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생산물은 넘쳐흐르지만 어떤 가치 창출도 담보할 수 없는 동시대 예술은 불투명한 시간을 표류하는 중이다. 이런 진단 속에서 디지털 자본주의에 의해 갱신되는 매체의 기술적 발전은 인간과 나란히 놓여 경계를 넘나들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환멸을 불러오는 맹목적인 대상으로 남는다. 인간의 ‘지렁이-되기’를 향한 아름다운 여정은 너무나 느리게 진행중인데, 가장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인정받고 있는 생성형 인공지능은 예술을 몰아치듯 양산해낸다. 인간의 몸은 자발적으로 물질과 동등하게 놓이기 전에 물질이 만들어낸 다른 가치들에 의해 가치 절하되며 밀려나게 될까? 생동하는 물질들 안에서 인간을 재의미화하려는 시도와 인공지능을 의심하며 인간 본연의 무언가를 지키려는 안간힘 사이에서 부각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아래의 비평들은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2 『쓺』의 특집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그 개체성과 집단성’을 여는 글은 근대 패러다임이 ‘개인’을 해방하고 자율적 주체로서 정립해왔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이 시대에 여전히 개인의 이념이 유효한지 묻는다. 개체성과 집단성이 직면할 변화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이 서문에 가장 직접적으로 응답하는 글을 꼽는다면 김태환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과 김재인의 「창의와 집단 지능—인공지능은 창작하지 못한다, 다만 제시할 뿐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김태환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은 기계 성능의 고도화가 필연적으로 인간의 중요성이나 가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에게 산업화 이후의 근대는 ‘저자의 시대’이며, 이는 기술 발전의 작용에 대한 인간의 반작용이 만들어낸 변화이고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방향타가 된 것은 저자라는 이념의 바탕에 놓인 ‘개인주의적 사상’이다. 이는 산업화 사회 속에서 부속물로 전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회 분석의 준거점을 개인에 두고 진리와 자유를 탐색했던 아도르노를 비롯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기조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 다시 독일 지성사의 문화 비판적 사상의 전통이 소구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김태환은 “항상적인 문화 공급 과잉의 시대”(37쪽)라는 진단에서 찾는다. 그에 따르면 소셜 미디어나 웹사이트, 유튜브 등 정신의 대상화로서의 객관 문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반면, 그 반대 방향인 객관 문화에서 주관 정신으로의 내화는 개인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치로 인해 그만큼의 양적 증가가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사람들은 알고리즘 속에서 타인과의 의미 있는 만남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더 심각한 것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객관 문화의 총체가 스스로 발언하고 생산하는 주체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런 위기감 속에서 이 글이 다시 강조하는 것은 ‘정신의 개별성’이다. “요컨대 모든 인간이 개인으로서 개별적 의지, 개별적 내면, 개별적 정신을 지닌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외부에서는 절대 들여다볼 수 없고, 직접 조작할 수도 없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자주적이라는 사실”(42쪽)을 변함없는 인간 존재의 조건으로 부각하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무분별한 열광에 휩쓸리기보다 이를 의심 어린 눈으로 찬찬히 사유할 틀이 우리에게 요긴한 것은 사실이다. 데이터에 얽힌 저작권 문제 역시 계속 규제안을 논의해나가야 할 비판적인 쟁점이다. 그렇지만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위기를 산업화 시대 이후의 위기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는 것은 혹시 너무 큰 틀에서의 접근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 작동 방식과 결과물이 인간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만들어진 자본주의의 차원에서만 다루어질 때, 새로운 매체와 관련해 충분히 사유되지 못하는 요소들이 생겨나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이 글에서 알고리즘에 갇힌 디지털 시대 개인의 부자유에 대한 우려는 빠르게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의 재소환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거듭 강조되는 개인의 개별적인 ‘의지’와 ‘내면’과 ‘정신’에서 신체의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 글에서 인공지능과 대립되는 요소로 논의되는 인간의 ‘의식’이란 단순히 합리적 이성만은 아닌 “수많은 감각적 심상과 기억·감정·소망·의지 등이 혼재하는 심적 상태”(46쪽)다. 알파고와는 다른 인간 바둑 기사의 의식을 예로 들면서 언급되는 긴장, 초조, 후회, 자책, 엉뚱한 연상 등은 “바깥에서 결코 완전히 알아볼 수 없는 복잡한 내면”(같은 쪽)으로 규정된다. 베일에 살짝 가려진 듯한 이런 인간 내면의 신비함은 물질적인 신체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진화해온 신체야말로 내면 이상으로 복잡성의 차원에 놓여 있지 않은가? 이는 “신체화의 말소가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와 사이버네틱스 포스트휴먼 양쪽 모두의 공통된 특성”이라는 캐서린 헤일스의 비판을 상기시킨다. 헤일스는 합리적 정신과 등치되는 자유주의적 주체가 “그 악명 높은 보편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신체가 자아와 동일시되지 않기 때문”4)이라고 말한다.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간의 한계는 곧 발전을 통해 ‘영웅적 개인’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유한한 삶을 가진 존재, 모든 능력에서 커다란 한계를 안고 있는 개별자로서의 인간만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여 어떤 감동적인 위대성에 이를 수 있”(53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반드시 육체의 신경과 근육의 단련 과정을 동반하며 그것이 생각과 행동에 긴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잠시 괄호 안에 두어진다. 이 글의 전반적인 주장이 온당하게 느껴지면서도 그 전제가 되는 자율적인 개인상과 관련해 못내 마음에 걸리는 것은 개인이 지향해나가야 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전제되어 있는 발전과 성장이라는 지극히 근대적인 가치다. 생산과 창조의 주체로서의 영웅적 개인이 아니라 소비와 소멸의 주체로서의 개인에 대해 우리는 좀더 다른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또 근대 이전에 우리가 ‘저자’가 불투명한 긴 구술 시대를 살아왔음을 떠올린다면, ‘저자의 시대’ 이후의 저항이 활자와 개인을 넘어선 범주에서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3 김재인의 「창의와 집단 지능」은 이 질문에 대해 조금 다른 지점에서 답을 내놓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지능은 본질적으로 집단적 성격을 가지므로 ‘집단 지능’이라고 해야 한다. 개체를 중심에 놓으면 ‘창의’를 중시하게 되지만, 그 새로움은 다른 개체가 ‘모방’하고 ‘확산’하지 않는다면 사멸하고 만다. 그렇기에 인간이 다른 생물종과 달리 ‘집단 기억’과 ‘문화 기억’이라는 형태의 외장 기억을 건설함으로써 지식과 기술의 확산과 축적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은 중요하게 여겨져야 한다. 저자는 낭만주의 미학과 예술에서 강조하는 천재적 개인과 창조력에 대한 신화를 뒤로하고 “인간이란 거대한 기억”(62쪽)이라 정의 내린다. 이는 물론 질적 도약이 아닌 집단으로서의 양적 축적을 말한다. 김태환이 인간의 의지, 내면, 정신이라는 추상적인 면을 중시한다면, 김재인은 “나의 생각이란 시한부 소유물”(63쪽)에 가까울 수 있으며 그 휘발성을 지켜주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물질’ 혹은 ‘미디어’”(62쪽)라고 강조함으로써 그것을 외화된 집합적 사물성으로 바라보며 그 반대편에 선다. 그런데 이 글은 ‘컴퓨터가 자연어를 다룬다는 것’이라는 장부터 급작스러운 단절을 드러내며 도약한다. 앞에서 인간의 생각 자체를 미디어이자 집단 기억의 저장고로 본 것과 다르게, 예술과 창작의 영역을 다룰 때는 컴퓨터가 자각 혹은 성찰을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컴퓨터는 예술 능력이 없다”(66쪽)고 확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기계를 바라보는 김재인의 시점에는 도구적 차원과 존재적 차원이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글은 창작의 정의를 “스스로 선택하고 평가하는 능력이 발휘되었느냐”(67쪽)에 두는데, 중요한 점은 저자가 그 평가 주체의 자격을 ‘생물’로 단정한다는 것이다. 생물은 “생존과 번식을 스스로 반복”하는 유기체이고, 이 글에 따르면 평가 역시 “생존과 번식에 성공하기 위한 지각 처리와 행동의 연쇄”(70쪽)다. 이 기준에 따르면 애초에 기계는 아무리 ‘집단 기억’의 ‘미디어’로서 최적화되어 있다고 해도 무기물이라는 점에서 평가 능력이 없는 것으로 배제 당할 수밖에 없다. 그가 이렇게 유기체의 항상성과 관련된 기준을 평가 능력과 일치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저작 『AI 빅뱅』에서 참조할 수 있는 지점을 좀더 찾아보면, 이는 “몸의 고집스러움”5)이라는 말과 함께 구체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심지어 같은 프롬프트를 주더라도 생성물이 크게 바뀌는 무작위성randomness을 보여주는데, 이는 휘발성이 강하다. 그러나 인간은 불완전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자기 생각을 고수하는 면을 지니는데, 저자는 이를 몸에서 비롯된 문제로 보는 것이다. 이 장에 바로 이어지는 질의응답에서 한 질문자는 “세계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몸을 가지는 것이다”6)라는 전제 위에서 인공지능이 세계를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강인공지능으로 발전할 방법이 있는지 묻는데, 김재인은 이에 대해 ‘몸의 회복력’에 대한 이야기로 답한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몸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몸은 생각을 “바로 휘발되지도 완전히 고착되지도 않은 어느 중간 지점”7)에 붙잡아둔다는 것이다. 김재인은 인공지능과 다른 인간을 논하는 데 있어 복잡성을 가진 신체의 차원을 살려내고자 한다. 하지만 창작을 논하면서부터는 김태환의 논의와 유사한 탈신체화의 방향을 답습한다. “진화 과정에서 살아남았다는 특징”은 “필멸하는 인간이 불멸하는 비결”(70쪽)로 치켜세워지고, 진화를 위해 외부와 교섭하며 몸 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피드백 루프는 유기체만의 고유한 신체적 능력으로 남는다. 인공지능은 몸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케이트 크로퍼드가 인공지능은 추상화된 지능이 아니라 오히려 “체화되고 물질적인 지능이며 천연자원, 연료, 인간 노동, 하부구조, 물류, 역사, 분류를 통해 만들어진다”8)고 강조한 사실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혹은 그와 마찬가지로 유기체의 일차적인 목표로서의 생존이 진화의 필수 사항이라 말하는 신경과학 연구자 아닐 세스가 우리의 지각은 사실 ‘통제된 환각’이자 ‘최적의 예측’이라 설명했음을 염두에 두면 어떨까. 그에 따르면 ‘당신이 된다는 것being you’, 즉 인간의 ‘동물기계’적 본질과 의식적 자기 사이의 연결고리는 “신체 자체가 가진 현재와 미래의 생리적 조건에 대한, 형태도, 모양도 없고 제어 중심적인 지각적 예측”9)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인공지능 역시 지극히 물질적인 신체를 지니고 있으며 인간 역시 체화된 자아로 인한 기계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때, 예술을 창발시키는 창의성 개념이 다르게 읽힐 가능성이 열린다.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승부 후에 마련된 『인문예술잡지 F』 21호의 특집 ‘고함: 비-인간’에서 이진경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인공지능이 창조성을 가질 수 있는 논리적 가능성을 함축한다고 주장했다. 괴델의 정리는 수학적 추론의 과정 속에 언제나 결정 불가능한 명제가 ‘숨어’ 있을 수 있음을 의미하며, 그렇다면 인공지능의 수준에서도 공리계로 귀속될 수 없는 명제(결정 불가능한 명제)를 생성할 수 있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계의 형식적 추론에서조차 새로운 명제의 창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역으로 생명체의 진화가 어떤 경로를 밟아왔는지 설명한다. “변이mutation의 누적에 의해 진화는 이루어”지지만 처음 “생명체의 변이는 지배적인 개체군 안에서 일종의 ‘장애자’나 ‘고장’으로 간주된다”10). 하지만 환경이나 생존 조건에 따라 변이가 진화된 변종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면, 기계가 만들어내는 예측되지 않은 결과의 출현 역시 ‘고장’이나 ‘장애’가 아니라 새로운 능력의 ‘창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창조의 출발점이 아니라 결과물에 초점을 맞춘 논의다. ‘인간 없는 예술’이 도래하려는 시기에 우리는 다시 인간적인 무언가를 기계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는 기술적 특이점이 올 때마다 반복되어온 정동이기도 하다. 이 앞에서 좀더 차분하게 이전의 논의들을 정리하고 축적할 필요를 느낀다. 2024년 『쓺』의 특집이 창작자이자 예술가가 서 있는 주체의 자리에서 출발했다면, 2016년 『인문예술잡지 F』의 특집은 그 결과물인 작품의 자리에서 논의를 시작했다. 그렇다면 감상자의 자리에서 본다면 어떤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 신예슬의 『음악의 사물들』은 음악이 기술적 혁신을 이루는 순간마다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넓혔는지를 따라 음악사를 재구성한다. 자동 피아노의 경우에도 그 연주를 더 실제처럼, 더 자연스럽게, 더 인간답게 만들겠다는 목표는 거의 달성되었다. 그러나 자동 피아노가 만들어낸 경험이 정말 특별하게 의미화되는 것은 인간의 연주라는 원본 혹은 목적지를 버렸을 때이다. 인간의 연주라는 목적지를 소거해버리고 이 사물의 독자적인 가능성에 집중해보는 것이다. 연주하는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스스로 뭔가를 연주하거나 재생할 수 있는 악기가 등장했고 그것이 인간의 행동을 인간 없이 손쉽게 해냈다면, 그 기계의 핵심적인 가치를 ‘인간의 복제’가 아니라 ‘탈脫인간’으로 재조정할 수도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기계장치가 꼭 연주자를 대신할 필요는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기준점만 제거한다면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수많은 음악적 가능성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 자동 피아노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연주를 들려줄 수 있었다. 인간의 연주를 기록하고 인간의 연주를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연주의 대리자는 오히려 새로운 예술형식으로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스스로 연주하며 그 누구보다 기계적인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독자적인 예술형식 말이다.11) 우리는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에 대해서도 그것이 오히려 새롭고 독자적인 예술형식이 될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을까? 이 모방은 때로 인간에 한참 미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때로 인간을 이미 초월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계는 이미 희미해지고 있던 자율적인 개인 주체로서의 예술가상을 어떻게 바꾸어나갈까. 또 인간의 예술적 집념은 어떻게 예술 형식들을 바꾸어나갈까. 모든 것이 뒤흔들리는 가운데, 불안만이 정확하게 인간의 자리를 응시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이 불러오는 균열 속에서 인간에 대한 고정된 사유를 과감하게 벗어날 수 있을 때 인간과 예술 모두에 새로운 시야가 열릴 것이다. 1) 심효원, 「지렁이의 부드러운 건축물 만들기」, 『쓺』 2024년 상권, 368쪽.2) 시앤 응아이는 디지털 자본주의가 가속화되던 2010년대 후반의 미술과 문학작품을 분석하면서 기믹의 이론화에 착수하는데, 기믹은 의심스러운 도구성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키치와는 다른 저질 예술로 취급되면서도 자본주의 가치 체계와 그 이면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의심을 표면화하는 미적 전략으로도 쓰일 수 있다. 윤원화는 이 글을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공모 프로그램 선정작인 시각예술 콜렉티브 랩삐의 에 대해 설명하며 시작한다. 이 전시는 관객이 옥수수 농사 시뮬레이션을 완수한 후 ‘콘 코인’이라는 가상 화폐를 받아 실제 뻥튀기 한 봉지와 교환하는 경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복 노동이 이에 비례하는 가치 창출과 기쁨으로 이어지는 대신, 콘 코인이라는 불분명한 요소가 끼어들면서 매끄러운 교환 가능성이 흔들릴 때 이 간극에서도 기믹이 관찰된다고 할 수 있다.3) 윤원화, 「땅을 파는 손」, 같은 책, 383쪽.4) 캐서린 헤일스,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사이버네틱스와 문학, 정보 과학의 신체들』, 허진 옮김, 열린책들, 2013, 27쪽.5) 김재인, 『AI 빅뱅—생성 인공지능과 인문학 르네상스』, 동아시아, 2023, 153쪽.6) 같은 책, 156쪽.7) 같은 책, 157쪽.8) 케이트 크로퍼드, 『AI 지도책—세계의 부와 권력을 재편하는 인공지능의 실체』, 노승영 옮김, 소소의책, 2022, 17쪽.9) 아닐 세스, 『내가 된다는 것—데이터, 사이보그,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 의식을 탐험하다』, 장혜인 옮김, 흐름 출판, 2022, 243쪽.10) 이진경, 「인공지능시대의 예술작품」, 『인문예술잡지 F』 21호, 2016, 25쪽.11) 신예슬, 『음악의 사물들—악보, 자동 악기, 음반』, 작업실유령, 2019, 115쪽.
1. ‘서울의 봄’을 기다리며 유신 독재 시대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을 다시 돌아다보면서 근래에 극장가의 흥행 기록을 다시 쓴 영화 (2023)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지나간 과거의 일이지만, 또한 그렇기에 ‘서울의 봄’이 당시로써는 아직 오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엔딩 크레딧과 함께 솟아오르는 아쉬움과 슬픔, 분노의 감정은 덜해지지 않는다. 40여년의 시간차를 무색하게 만드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그 시대를 지나오지 않은 세대의 관객들에게까지도 강력하게 휘몰아친다. 그러니 그 시대를 온몸으로 뚫고 나갔던 이들은 눈앞에서 물러나는 봄을 바라보며 무엇을 느꼈을지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유영주의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소명출판, 2023)이 제목을 따온 「겨울공화국」의 시인 양성우는 그의 또 다른 시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에서 그 봄을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들려준다.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셔준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곤백번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이 …… 한반도에서 다만 녹슬지 않는 비싼 넋으로 밤이나 낮이나 과녁이 되어 내가 죽고 다시 죽어 스며들지라도 오는 봄에 나무꾼을 쓰다듬어 주는 작은 바람으로 돌아온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후략)…1)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실 수 있다면, 오는 봄에 작은 바람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그의 시가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죽고 다시 죽어 넋으로 스며든다고 해도 좋다는 시인의 결연한 고백을 듣고 나면 그러나, 또 한 번의 겨울 속으로 선선하게 걸어 들어갔을 그들의 의지를 떠올리게 된다. 봄은 물러갔어도,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에서 주요하게 살펴보고 있는 김지하와 황석영, 조세희, 이문구는 신군부 독재 정권하에서도 계속 문학이라는 싸움과 저항을 지속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그들에게는 “오는 봄”을 기다리며 문학에 대한 믿음과 비전으로 눈보라를 뚫고 한 시대를 걸어 나왔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영주의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은 바로 그 역사에 관한 연구이다. 2. 시와 정치와 사랑 시작은 김지하다. 저자가 냉전시대 동아시아의 권력 지형 및 상세한 역사적 맥락과 함께 김지하를 통해 보여 주고 있는 것은, 그러한 냉전 체제의 하위 파트너인 유신 독재 정권과 한바탕 벌여 놓은 그의 싸움판이다. 그의 시 「곡(哭) 민족적 민주주의」(1964)와 「오적(五賊)」(1970)이 어떻게 ‘유신의 심장’을 들었다 놓았다 했는지, 왜 유신 독재 정권은 그의 ‘세 치 혀’와 붓 끝에서 흘러나오는 시를 그토록 두려워했는지, 그러한 김지하의 시는 근본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저자는 ‘오적 필화사건’의 법정 풍경을 복원한다. 잘 알려진 대로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하에서 필화 사건은 드물지 않게 일어났고, 더군다나 김지하의 「오적」이 처음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특별히 ‘오적 필화사건’에 주목하는 이유는 “1970년 김지하의 체포에 이은 100일 간의 재판[이], 법정을 판소리나 탈춤이 주로 공연되는 야외의 마당으로 탈바꿈시켰다”는 데 있다.2) 저자는 관련 인물들의 여러 회고를 바탕으로 당시 재판이 흡사 검사가 양반의 담화를 담당하고 김지하가 말뚝이를 맡은 판소리 풍자극과도 같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유신 독재 정권은 도리어 김지하에게 그가 오래 탐구했던 전통 마당극을 마음껏 펼칠 무대를 깔아주었던 셈이다. 이후 그 무대는 김지하가 “문학, 폭력, 혁명, 구원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펼칠 수 있는 대중 강연을 위한 연단”(95)으로 확장된다. 당시 재판을 방청했던 더글러스 루미스(Charles Douglas Lummis)의 기록을 인용하여 저자는, 재판 방청객들이 김지하의 발언을 받아 적어 재판장 바깥으로 빼돌린 뒤 그들이 속한 조직으로 돌아가 그에 대해 토론하고 연구하게 되는 방식을 흥미롭게 포착한다. 이는 시인의 말이 변론과 강연, 연설을 넘어서, 유신 독재 체제하의 민중에게 어떤 구원의 메시지처럼, 마치 ‘예언’처럼 전달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저자에 따르면 루미스는 실제로 김지하에게 “에언자”라는 칭호를 부여하기도 했다.(87) 오래 전 종교가 시와 정치로 분리되지 않는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이 시기 김지하의 문학 세계는 세속화 시대에 시와 정치를 동시에 추구하려 했던 어떤 종교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이후 “시인으로서의 그의 국제적 명성은 분명 그가 겨울 공화국의 순교자가 됨으로써 크게 높아지게 되었다.”(50) 아이러니하게도 유신 독재 정권은 김지하를 위대한 시인으로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게다가 그 어떤 비평가나 애독자보다도 꼼꼼하게 김지하의 시를 읽고 분석하며, 그 힘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했기에 그들은 김지하에게 더욱 집착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검찰은 “시인의 수첩에 적힌, 아직 쓰이지 않은 시와 희곡에 대한 메모”(95)들을 증거로 제출하며, 마치 시인론을 쓰는 문학 연구자인양 김지하의 문학 세계를 탐구해 들어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문학이 하는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문학을 억압하고 지배하려면 역설적이게도 그 안에 잠겨들어야 한다. 지배와 억압은 대상을 이해할 때 가능한 것이고, 문학에 대한 이해는 오직 문학의 세계 안으로 침잠할 때 가능한 까닭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문학이 하는 혁명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지배 권력조차 그 안으로 휘말리고 뒤엉켜 들어가게 만드는 것, 그것이 시와 정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유신 독재 시대 문학의 혁명적인 것이었다. 굳이 알랭 바디우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낸다는 점에서 사랑과 혁명은 ‘사건’이며,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문학도 ‘사건’이 된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의 논의가 무르익을 때, 그 자체로 1970년대 문학의 ‘사건’이기도 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이 등장한다. 핵심은 이 연작소설집이 이웃 사랑을 미학적으로 실천한 텍스트라는 것인데, 저자는 그 단초를 「뫼비우스의 띠」에서 발견한다. 연작소설의 첫 번째 이야기이기도 한 「뫼비우스의 띠」는 ‘굴뚝 청소를 마치고 그을음으로 얼굴이 새까맣게 된 아이와 그을음이 전혀 묻지 않은 깨끗한 얼굴의 아이 중 누가 얼굴을 씻을 것인가?’ 하는 질문과 함께 수수께끼 같은 문답을 주고받는 교사와 학생들의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이 문제가 곧 뫼비우스의 띠이면서,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세계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함을 암시하며 끝맺는다. 저자는 이 뫼비우스의 띠 수수께끼를 지젝(Slavoj Žižek)의 ‘시차적 관점(parallax view)’, 즉 축소 불가능한 간극을 잇기 위해 애쓸 것이 아닌, “간극 그대로를 인식하는 것”으로 해석한다.(189) 안과 밖은 결코 만날 수 없지만, 뫼비우스 띠에서는 그 안과 밖이 그대로 안쪽 면이면서 바깥 쪽 면으로 존재할 수 있는 차원을 인식하는 것이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서, 당연히 그을음이 묻은 아이가 세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에게 교사는 얼굴에 그을음이 묻지 않은 아이가 친구의 새까만 얼굴을 보고 얼굴을 씻어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답한다. 이윽고 다른 학생이 그와 같이 대답하자, 다시 교사는 동일하게 굴뚝 청소를 한 아이들 중 한 아이의 얼굴은 깨끗하고 다른 아이의 얼굴은 더러운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반박한다. 그러니까 애초에 교사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해답 없음이 곧 안과 밖의 구분 없는 뫼비우스의 띠의 관점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굴뚝청소부 수수께끼와 뫼비우스의 띠라는 위상수학적 개념과 개발독재시대의 소설에 대한 해석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마치 뫼비우스의 띠를 만들 듯, 유영주 역시 그의 방법론적 시각을 한 차례 꼬아 지젝에서 케네스 레이너드의 ‘이웃’ 개념으로 비약한다. 사랑(특이성과 차이)과 정치(평등과 동일성)는 마치 뫼비우스 띠의 양면과도 같은데, 그 띠를 한 번 꼬아 연속체로 만드는 “사랑과 정치의 이음매” 지점이 “이웃”이라는 존재라는 것이다.(189) 저자는 이로부터 조세희 소설의 미학인 ‘이웃 사랑’을 이끌어 낸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난쏘공』을 난해한 모더니즘적 텍스트처럼 보이게 하고, 그래서 리얼리즘론자들에게 지식인적인 환상 소설이라고 비판받게 만들었던 몽타주 기법을 ‘이웃 사랑’의 주된 미적 원리로 파악하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1970년대 문학은 “당신은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십니까”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박태순의 ‘외촌동 사람들 연작’과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1977)가 그러했을 뿐만 아니라, 대중소설 작가로 197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최인호 역시 일찍이 「미개인」(1971)에서 한센병 환자의 아이들과 같은 학교에 보내는 것을 반대하고 나선 우리 주변의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를 소설로 쓴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첫 손가락에 꼽힐 작가는 단연코 이문구일 것이다. 『관촌수필』(1972)에서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이문구의 이채로움이 빛을 발하며, 유영주가 말하는 ‘인접성의 윤리’를 적극적으로 미학화한 이상적인 이웃 공동체가 그려진다. 저자는 이문구의 아버지와 두 형들이 좌익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던 개인사를 바탕에 둘 때, 이문구의 이웃에 관한 이야기가 그저 단순히 전통사회의 풍요로웠던 이웃 공동체에 대한 환상일 수 없음을 역설한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전쟁 전후의 무수히 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들 중 많은 경우는 이웃들 간에 벌어진 비극이었다. 크게는 계급과 종교를 바탕으로 나뉜 좌와 우의 정치적 이념을 따라 서로 갈등을 빚었고, 심한 경우 학살로 이어졌다. 이러한 한국 현대사의 맥락 속에서 이문구 소설 속 이웃은 “이념적 명명의 대안”으로 제시되며 특별한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142) 저자는 조세희와 이문구의 소설을 ‘이웃 사랑의 미학’과 ‘인접성의 윤리’로 의미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그러한 문학의 미학과 윤리가 박정희 독재 체제의 산업화와 반공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근원적인 힘이었음을 주장한다. 그 힘이, 플라톤 이래 본질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문학을 정치와 만나게 하고, 동시에 어떤 정치를 극복하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저자의 의도대로 1970년대 문학은, 시(문학)와 정치와 사랑이 ‘인접성’의 원리를 따라 이어지지만 그 간극을 그대로 유지하며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현실을 넘어서는 차원의 위상을 형성하는 상호 연결과 긴장 관계로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3. 마지막 문사(文士)의 시대 그러나 이 책의 부제인 ‘박정희 시대 한국문학과 저항’에서와 같이, 한국 문학이 저항과 나란히 놓일 수 있는 시대는 곧 저문다. 대체로 그것은 1990년대, 그 유명한,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실감한 때와 겹친다. 고진은 1970년대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한 사람인 김종철과 만났을 때 왜 문학을 그만두고 《녹색평론》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알려진 대로 김종철은 1991년 《녹색평론》 창간과 함께 문단을 떠나 생태주의 운동에 몸담았다. 그는 “자신이 문학을 했던 것은 문학이 정치적 문제에서 개인적 문제까지 온갖 것을 떠맡는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모순조차도 떠맡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언제부터인가 문학이 협소한 범위로 한정되어 버렸다, 그런 것이 문학이라면 내게는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그만두었다”고 답했다.3) 이것은 유신 독재 정권에 강력하게 저항했던 ‘창비’ 계열 문학비평가의 고백이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이 포착하고 있는 문학의 사회 참여(앙가주망)와 정치적 실천, 특별히 양심 있는 지식인으로서 시인과 소설가 들이 독재 권력과 맞서 싸우는 역사는, 이제 정말로 역사가 되었다. 물론 그러한 역사가 한국에서 1970년대 유신 독재 정권 시대라는 국면에 가능했고 정점에 도달했던 것은, 과거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국가였던 후진국에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설 때 그에 맞서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를 외칠 수 있는 것은 소수의 지식인들뿐이었던 세계사의 보편적인 패턴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고진이 말한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장르가 소설(novel)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한국 문학사에서 ‘소설의 시대’라고 불렸던 1970년대의 특수한 문학사적 맥락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의 논의가 작가를 앞세우면서 참조하는 세 가지 문학 개념 중 첫 번째인 ‘리테로크라시(literocracy)’라는 동아시아의 문치주의적인 문학 개념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한국 근현대 문학사로 한정해 본다면 그것의 유구한 역사는 시인과 소설가가 독립운동 투사가 되곤 했던 식민지 시대 ‘문사’ 개념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사의 시대는, 이 책에서 보여 주고 있는 것처럼 실로 1970년대 문학에서 마지막으로 가장 강력하고 화려하게 빛을 발한 뒤, 끝났다.4) 이 책의 첫 장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김지하의 시 「진리」에서 시인은 “바람 속이 내 집”이라고 노래하고 있었지만,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 황석영은 그가 2017년 출간했던 문학적 자서전 『수인』에서 방북사건으로 떠돌던 시절을 회고하며 그때의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결국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문학이라는 집이었다”라고 고백한다.5) 한때 바람 속을 집으로 삼아 온갖 경계를 넘나들며 활보했던 문사들에게 문학의 지경이란 없었다. 김종철이 말했던 것처럼 그들의 문학은 “온갖 것을 떠맡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문학을 떠났거나, 문학이라는 집 안으로 돌아간다. 이제 문학은, 그리고 작가는 무엇을 하는가. 유영주는 결론에서 박민규 소설의 저항성을 김지하에 견주며, 문학은, 그리고 작가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박민규는 그의 대표작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표절 사건 이후로 그럴 수 있는 정당성을 상실했다. 이것은 분명 징후이기도 하다.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예감하게 했던 작가 중 한 명인 무라카미 하루키를 통해 우리는 이미 오래 전 문사의 정체성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로 완벽하게 대체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지위마저 위태롭다. 최근 작가들의 소설 속 자기 재현은 어떠한가. 그들은 비정규직 중에서도 고용안정성과 소득이 가장 낮은 축에 들며, ‘프리랜서’라서 정부가 청년층에 제공하는 대출 상품에도 부적합해 은행 창구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으로 소설가를 재현한다(박서련, 「A Queen Sized Hole」,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민음사, 2022). 지방 변두리의 3천만 원짜리 아파트가 자기 집이 되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며, 마오쩌둥의 참새들처럼 어디에도 내려앉을 수 없어 지쳐 떨어져 죽을 위기에 놓여 있다(이서수,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젊은 근희의 행진』, 은행나무, 2023). 오해하지 말라. 이것은 어떤 가치 판단도, 비판도, 자조도 아닌, 현상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이 시대의 문학은 이제 유신 독재의 겨울 공화국과는 완전히 다른, 또 다른 눈보라 속에서 분투해야 하는 것이다. 1) 양성우, 『겨울공화국』, 화다, 1984, 18면. 2) 유영주, 이형진·정기인 역,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 박정희 시대 한국문학과 저항』, 소명출판, 2023, 92면. 이후 이 책 인용 시 본문에 쪽수로 표기. 3)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역, 『근대문학의 종언』, 도서출판 b, 2006, 49면. 4) 어떤 이들은 1980년대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문학과 정치의 관계라면 그것은 1980년대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1980년대에 문학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팽배했던 반지식인적인 분위기 속에서 작가는 1970년대와 같은 문사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1991년 5월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 치워라”라는 김지하의 충격적인 발언과 그것을 둘러싼 반응 그 이면에는 1980년대를 거치며 그가 더 이상 1970년대와 같은 문사의 지위에 서 있을 수 없었던 상황이 엄연히 자리한다고 볼 수도 있다. 5) 황석영, 『수인』 1, 문학동네, 2017, 36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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