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과사회 2024년 가을호(제147호)
슬픈 육체와 별들의 심포지엄 ― 최인훈의 『화두』 다시 읽기
1.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슬픈 육체를 가진 짐승이 별들이 토론하는 소리를 낼 수 있다니.”1) 1992년 가을, 러시아 여행길 마지막 밤에 작가 최인훈은 이런 감회에 젖는다. 모스크바에 유학 중인 제자로부터 포석 조명희의 최후와 관련된 문건을 전해 받고, 밤새 몇 번이고 되풀이 읽은 터였다. “상징적으로 투명한 저항의 궤적을 그려준 운명을 맡은”(2:280) 포석은 “자아 탐구와 우주론적 허무주의를 거쳐, 마침내 화두의 매듭을 사회혁명에서 찾고, 그 철저한 실천을 위해 세계혁명의 요새로 찾아”(2:287) 갔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제 첩자로 몰려 숙청되고 만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최후 사연을 탐문하는 것이야말로 1992년 가을 최인훈의 핵심 관심사이자 평생 화두의 심연으로 내려가는 의미심장한 단초였다. 최인훈 문학 역정의 상징적 출항지가 바로 포석의 「낙동강」이었기 때문이다. 최후의 문건에는 “인간의 연대성에 바탕을 둔 사회로 바꾸어놓고 있는 중”(2:548)이라는 믿음이 바탕 의식을 형성하고 있었고, 당시의 소비에트 현실에 대한 이성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성찰들로 넘쳐났다. 사회주의 혁명의 미래를 신뢰하면서도 효과적인 신경제정책을 위해 고려해야 할 요인들에 대한 면밀한 탐색을 보이면서도 “위대한 공동체가 되자면, 당은 위대한 선택을 거치지 않으면 안”(2:551) 된다는 신념 등을 복합적으로 아로새기고 있었다. 비록 포석을 단일 저자로 특정할 확증은 없지만, 포석‘들’의 중층적 목소리를 확인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문장이었다. 그 목소리들을 들으며 최인훈은 “이 세기의 새벽 무렵에 저 성 안에서 인간의 운명을 놓고 신들과 언쟁하고 신들에 상관 없이 할 일을 시작한”(2:552) 곡절들을 추체험하게 된다. 슬픈 육체를 지닌 인간들이 슬픈 육체를 초극한 하늘의 별들과 진지하면서도 당당하게 심포지엄을 벌이고 있는 형국이어서, 더욱 몰입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지난 세기초에 “인간의 운명을 놓고 신들과 언쟁하고 신들에 상관 없이 할 일을 시작한”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한 사람인 레닌의 최후와 관련한 기사를, 최인훈은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읽게 된다. 「신의 죽음」이라는 제하에, 레닌이 1922년 뇌일혈로 쓰러져 사망하기까지 마지막 나날을 기록한 기사였다. 참혹한 언어장애 속에서 고작 ‘어머니’ ‘간다’ 등 몇 단어만 구사할 수 있는 레닌과 『제국주의론』의 저자였던 레닌은 같은 인물일 수 있을까. “당사자의 의지”나 이성과 상관없이 붕괴된 “레닌구성체”(2:580)는 슬픈 육체의 역사적 표상으로 다가온다. 기억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슬픈 육체를 보며 질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레닌은 도대체 어디에 존재하는가? 최후 문건의 심연에서 포석은 교감처럼 이런 메시지를 전했다. “자기를 빼앗기지 마라. 너 자신의 주인이 돼라”(2:564). 톨스토이도 환상처럼 최인훈에게 속삭였다. “빛이 있을 때 빛 속을 걸어라”(2:565). 러시아 여정을 마치고 귀국한 지 보름 후 미국에 거주하는 아버지의 전화를 받는다. 부친 또한 잔일이 얼마 안 남은 듯한 슬픈 육체의 운명이었다.
포석, 레닌, 아버지와 함께, 중학생 때 자신을 자아비판회에 내세웠던 지도원 선생님과 고등학교 시절 조명희의 「낙동강」에 대한 독후감을 보고 훌륭한 작가가 될 것이라는 최상의 예언을 해준 작문 선생님을 떠올린다. 모두 이제는 제대로 말할 수 없는 슬픈 육체들이다.
이에 작가는 그 슬픈 육체들과 관련된 “기억의 밀림” 속으로 들어가 기억의 “맥락”과 “연대”를 형성하면서 말할 수 있는 이야기 지평을 형성하고자 한다. “나 자신의 주인일 수 있을 때 써둬야지. 아니 주인이 되기 위해 써야 한다. 기억의 밀림 속에 옳은 맥락을 찾아내어 그 맥락이 기억들 사이에 옳은 연대를 만들어내게 함으로써만 나는 나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겠다. 그 맥락, 그것이 ‘나’다. 주인이 된 나다”(2:586). 오에 겐자부로를 비롯한 여러 작가들이 ‘만년의 양식’을 찾아 성찰하고 글을 썼던 것처럼, 최인훈 역시 나름대로 구안한 만년의 양식으로 “기억의 밀림” 혹은 “기억의 얼음바다”2) 속에서 옭은 맥락과 연대를 형성하기를 시도한다. 그것이 밀림이든 얼음바다든 그 작업은 결코 만만치 않다. 많은 것이 말할 수 없는 곡절들과 연루된 까닭이다. 여기서 말할 수 없는 것이란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이다. 하나는 최인훈이 『엣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에서 다루었고 『화두』에서도 되짚어본 ‘아기장수’의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아기와 그 부모처럼 구조적으로 ‘서발턴’의 운명에 처한 이들이 있다.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에서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이 논의한 바 타자화된 채 인식론적 폭력에 시달리며 억압당하는 주변부 사람들 말이다. 조명희의 「낙동강」에서 박성운이나 로사가 주목했던 것도 그런 처지에서 침묵당한 이들의 목소리다. 고등학교 시절 「낙동강」을 읽고 소설같은 감상문을 쓸 때도 그랬지만, 최인훈은 박성운이나 로사의 길, 그 낙동강의 흐름을 따라가며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애쓴다. 때로는 『광장』에서처럼 체제론적 시각으로 성찰하기도 한다. 또 하나는 체제론적 시각을 넘어서는 일이다. 체제의 억압으로 말할 수 없는 서발턴의 강요당한 침묵이 조성되기도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그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제대로 인식하거나 성찰하지 못해, 혹은 상상하지 못해 말하지 못하는 것, 미처 발명하지 못해 내놓지 못하는 것, 이것 역시 체제의 억압 못지않은 무게로 다가왔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작가 입장에서 말이다. 그러니까 최인훈 필생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는 『화두』는 인간으로서 슬픈 육체를 넘어서 하늘의 별들과 토론하고자 한 역동적 담론의 심포지엄이라는 점, 별들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새로운 말하기의 양식을 발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리라는 점, 등을 되새기게 한다. 인생의 화두 풀기가 참으로 지난한 과업이듯이, 최인훈의 『화두』 읽기 또한 그에 버금가는 일이 될 수도 있겠다. 작가가 자기 인생 전체를 걸고 쓴 작품이겠기 때문이다.

같은 감상문을 쓸 때도 그랬지만, 최인훈은 박성운이나 로사의 길, 그 낙동강의 흐름을 따라가며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애쓴다. 때로는 『광장』에서처럼 체제론적 시각으로 성찰하기도 한다. 또 하나는 체제론적 시각을 넘어서는 일이다. 체제의 억압으로 말할 수 없는 서발턴의 강요당한 침묵이 조성되기도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그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제대로 인식하거나 성찰하지 못해, 혹은 상상하지 못해 말하지 못하는 것, 미처 발명하지 못해 내놓지 못하는 것, 이것 역시 체제의 억압 못지않은 무게로 다가왔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작가 입장에서 말이다. 그러니까 최인훈 필생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는 『화두』는 인간으로서 슬픈 육체를 넘어서 하늘의 별들과 토론하고자 한 역동적 담론의 심포지엄이라는 점, 별들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새로운 말하기의 양식을 발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리라는 점, 등을 되새기게 한다. 인생의 화두 풀기가 참으로 지난한 과업이듯이, 최인훈의 『화두』 읽기 또한 그에 버금가는 일이 될 수도 있겠다. 작가가 자기 인생 전체를 걸고 쓴 작품이겠기 때문이다.
2. 원초적 장면과 대조의 거울, 20세기라는 복잡계
『화두』는 우선 한반도의 북쪽에서 태어나 전쟁 와중에 남쪽으로 이주해 글을 쓰게 된 ‘남북조시대’(김우창)의 작가가 20세기와 맞대결한 작품으로 읽힌다. 최인훈이 20세기와 대결하면서 세계인들에게 오로지 한반도 출신 작가만이 내놓을 수 있는 심원한 성찰의 담론을 제출한 소설이다. 작중에서 여러 차례 반복되는 것처럼 ‘노예철학자’의 처지와 비전, 현실과 상상을 가로지르며 별들과 토론하려 한 이야기다. 먼저 주목되는 질문.: “우리는 20세기를 살았는가. 나는 20세기를 살았는가. 우리는 20세기에 동원되었다고 말해야 옳은가. 나는 20세기에 동원되었다고 해야 하는가”(2:481). 이렇게 질문한 다음 작가는 바로 “아마, 아마” 동원되었다고 하는 게 진실에 더 가깝다고 답한다. 왜 주도적으로 살았다기보다 동원되었다는 느낌에 이끌리는 것일까. 동원되었다면 20세기의 무엇에 동원되었다는 느낌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작가의 20세기를 구성한 두 가지 대조적인 장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화두』에서 집요하게 되풀이 소환되는 기억이기에 생의 원초적 장면이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앞에서도 스치듯 언급했거니와, 해방 후 북한에서 겪은 혹독한 재판과도 같았던 ‘자아비판회’의 기억과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을 받은 ‘작문’ 시간의 기억이 마주한 거울처럼 대조의 형상을 이룬다. 자아비판회에서 어린 주인공은 혁명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단죄되고 그의 자아는 모조리 부정된다. “강철의 혁명전사”답지 못하다며 비판받은 이 사건을 주인공은 오랫동안 잊지 못한다. “정부가 시민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고 시민 스스로가 자기의 모든 것을 드러내기를 바라는”(1:70) 북쪽의 상황에서 어린 주인공은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처지는커녕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하고 싶지 않은 말을 강요당하는 형국이었다. 학교의 선생님이 지도원으로서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을 피고석에 세운 채 재판하는 이 사건에서, 주인공은 벽보 주필의 자리에서 쫓겨난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그게 끝인지 추가적인 처벌이 어디까지 일지 알 수가 없다. “유예된 처형의 시간을 산다는 것은 현재의 확실한 평화를 갉아먹는다”(1:80)라는 문장이 전경화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생애 내내 줄곧 이 재판의 피고석으로 소환되는 불안의 늪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심지어 그 자아비판회의 억압과 불안은 1992년 가을 러시아 여행 도중에도 환상적으로 상연된다. “유예된 처형의 시간”이 최인훈을 끌고 간 한 축이라고 보아도 좋겠다. 고통과 불안은 자아비판회 그 자리에서만 경험되는 것이 아니었다. 기억 속에서 평생 두고두고 경험되는 반복의 사건이었다. “유예된 처형의 시간”은 주인공에게 일종의 코뚜레였다.
‘작문’ 시간은 긍정적인 사건이다. 사회주의적 운동을 추구하는 내용의 소설인 조명희의 「낙동강」에 대한 감상문을 주인공이 썼는데, 작문 교사는 주인공에서 큰 축복을 내린다. 그는 “이 작문은 작문의 수준을 넘어섰으며 이것은 이미 유망한 신진 소설가의 ‘소설’이라고 선언”(1:102)한다. 이어 주인공은 교사로부터 “동무는 훌륭한 작가가 될 거요”라는 “치명적인 예언”(2:91)을 듣게 된다. 여기서 주인공은 승화된 혁명 이데올로기 형태인 심미적 이성에 의해 축복받고, 그의 자아는 승인받게 된다. 이것이 원초적인 형태의 두 가지 기억이다. 주인공은 비슷한 생각에서 벽보를 쓰고, 작문을 했는데, 한쪽에서는 단죄되고 다른 쪽에서는 축복을 받았다.
이 축복된 소명의 의식과 위협적인 재판의 전과 사이의 모순이 나의 생애를 두고 나의 무의식과 나의 이성의 공간, 나의 의식의 모두를 지배하려고 싸운다. 한 장면은 피고로서의 나를 확보하려 한다. 다른 장면은 가치 있는 재능으로서의 나를 축복해준다. 게다가 이 두 장면에서 단죄하고 축복하는 이유가, 죄의 증거와 축복의 원인이 같은 사물이다. 같은 것을 놓고 한편에서는 탄핵하고 다른 쪽은 축복한다.(2: 92)
이런 대조의 기억이 그로 하여금 양항대립 속에서 변증법적인 추론을 계속하며, 전면적 진실을 탐문하게 한다. 『광장』에서 선명하게 보여주었던 그리스도교/볼셰비즘, 남한/북한의 대립항도 여기서 변형 생성된 것으로 보이며, 『화두』에서는 『광장』에서의 그것을 감싸안으면서 북간도/양간도, 러시아/미국, 공산주의/자본주의라는 체제론적 시각으로 확대한다.
『화두』의 주인공의 이력은 실제 작가의 역정과 비슷하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월남한 주인공은 4·19, 5·16, 10월 유신, 광주항쟁 등 민족사적 격랑과 스페인 내전, 중국 공산화, 미·중공 간 국교 수립에서 1990년 독일 통일이나 동구 몰락, 1991년 소련 해체 등 세계사적 지각변동을 직접 간접으로 체험한다. 이런 체험을 ‘북한―남한―미국―남한―미국―남한―러시아―남한’ 등의 공간 경로에 실어 횡단의 상상력으로 형상화한다. 횡단할수록 주인공의 의식 지평도 넓어지고 깊어진다. 『광장』이 남한과 북한이라는 한반도의 양쪽 공간 탐색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진 소설이었다면, 『화두』는 『광장』의 공간 의식을 포월하면서 미국과 러시아, 중국 등 전지구적으로 확대된 인식론적 탐색의 횡단기라는 성격을 갖는다.
그런 과정에서 작가는 20세기의 가능성과 한계를 성찰한다. 때로는 천사의 얼굴을 띠고 때로는 악마의 얼굴을 한 20세기의 두 얼굴에 대한 성찰의 시선은 매우 주밀하다. 그만큼 작문시간과 자아비판회 사건이라는 두 대조의 기억이 원초적으로 각인된 까닭이다. 최인훈에게 “마음속의 재판과 축복의 의식”은 뜨거우면서도 서늘한 “생애의 상징”이다. 나아가 “20세기의 지구 규모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의 드라마의 미니어처라는 형식”(2:95~96)이었다. 『화두』에서도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듯 20세기는 실로 격랑의 시기였다. 그 소용돌이를 투시하면서 작가는 바다 밑의 지형을 면밀히 성찰하고자 했다. “역사의 힘의 주박(呪縛)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느”끼면서도 그 주박에서 비켜난 흐름을 성찰하고자 했다. “나를 추방한 사람들을 의심하는 것처럼 그 추방이 부당했다고 선뜻 말해주는 사람들도 의심할 수 있는 데까지 의심하”면서 “능력이 닿는 데까지 찬찬히 샅샅이 밝혀보고 싶”(1:132)었다는 진술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최인훈은 20세기에 동원되면서도 자신이 20세기를 동원하며 대결하고자 했다. 비록 자아비판회 사건에서는 “유형수(流刑囚)”였지만 작문 시간에는 복잡한 방정식의 돛대를 세우며 20세기 기록을 남길 수 있는 항해자였다. 「낙동강」에서 출발한 최인훈의 20세기 항해는 결국 『화두』에 이르게 되었다. 그 항해가 가능했던 것은 아마도 “현실의 세계시민”은 될 수 없을지언정 “관념의 세계시민”(1: 140) 내지 ‘상상과 발명의 세계시민’은 될 수 있다는 믿음 덕분이었을 터이다. 작가 최인훈이 대결하고자 한 20세기도 복잡계였지만, 관념과 상상과 발명의 세계시민이고자 했던 작가의 의지로 인하여 그의 소설 특히 『화두』는 복잡계의 형식을 띠고 있다. 대조의 기억이 서로의 거울을 반사하거나 삼투하는 가운데 이야기 요소들은 다양하게 굴절되면서 새로운 의미 지평으로 미끄러진다.
3. 디아스포라 횡단의 상상력, 기억과 성찰의 삼투압
함경도 회령에서 태어난 최인훈은 해방 후 원산으로 이주해 중·고등학교를 다니다 전쟁 중 미군함정을 타고 부산으로 내려왔다가 목포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부산에서 전시대학을 다니다가 환도 후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한다. 그리고 대구에서 군대 생활을 거쳐 작가가 되었고, 가족들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그의 역정은 정주민의 저편으로 탈주하듯 노마드처럼 전개되었다. 분단 상황으로 인해 본인이나 가족의 의지나 선호와 상관없이 고향으로부터 뿌리뽑힌 디아스포라였기에 횡단의 여정은 거의 필수적이었던 것 같다. 피난 길을 떠도는 디아스포라는 좀처럼 편안한 존재의 둥지를 만들기 쉽지 않다. 임시 거처는 존재를 불안하게 하고 우수에 젖게 한다. 뿌리내리기 어려운 처지는 행복하고 편안한 토포필리아의 감각을 종종 마비시킨다. 최인훈의 피난 길이 그랬다. 그는 평생 ‘전쟁고아’ 의식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려웠다.
인생은 심술궂었다. 온 가족의 미국 이주는 그래서 아버지 편에서나 내 편에서나 달리 더 좋은 궁리도 있을 것 같지 않고 말릴 형편도 되지 않았다. H에서 시작한 피난길을 끝까지 가서 마지막 항구에 닿은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까지 내가 한국말로 쌓아놓은 돌탑에 대해서 선무당이 자기 신통력을 과신하듯 거기서 손을 놓아버리기가 아쉬웠다. 살던 집을 버리고 가듯 그렇게 떼어놓을 수 없는 그것은 ‘나 자신’이었다. [……] 가족들이 미국으로 떠나고 나서 나는 H역에서 시작된 그 피난 대열에서 나 홀로 남겨진 전쟁고아처럼 느꼈다. 부모님이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내가 부모님을 버렸다고 느꼈다.(1: 121)
피난 길에 내쳐진 전쟁고아는 디아스포라의 비극적 역사를 돌올하게 환기한다. 더욱이 한반도에서 문학을 해야겠다는 작가 의식으로 인해 가족과도 이산을 한 상태여서, 그 디아스포라의 처지는 더 처연하고 역설적으로 결연하다. 고향과 가족으로부터 문학으로의 망명, 이것이 디아스포라 작가 최인훈의 핵심이다. 고향은 어쩔 수 없이 잃었지만, 가족과는 자의식을 지닌 상태에서 이산했는데, 그 이유가 바로 ‘한반도에서 문학하기’로 망명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작가로서 여정의 출항지가 「낙동강」이었던 최인훈이, 『화두』에서 러시아 여정을 조명희 최후의 에피소드로 마무리한 것도 그의 디아스포라 의식과 겹친다. 조명희는 자발적으로 디아스포라의 여정을 떠난 경우였다. 「낙동강」의 주인공 박성운처럼 자기의 현실적 자아와 이상적 자아를 일체화시켜 운명을 현실에서 열어가고자 했던 선배 문인이다. 현실의 “야만한 어둠”을 뚫고 “사회혁명”을 일으키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도 혼돈스러운 역사의 과오로 인해 매우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선배 문인이자 선배 디아스포라 조명희는 최인훈의 문학적 스승이자 20세기 성찰을 위한 반면교사다. 조명희가 의심하지 않았거나 의심할 수 없었던 것까지 낱낱이 회의하고 탐문하는 디아스포라가 바로 최인훈이다. 그런 까닭에 『화두』에서 횡단의 상상력은 자연스럽게 전개된다. 20세기 세계 체제의 주요 장소들을 넘나들고, 역사적 시간을 오르내리면서 존재의 근원 문제와 관련한 ‘화두’ 풀이를 시도한다. 이런 디아스포라 횡단의 상상력은 승화되어, “이 세계의 실체는 ‘변화’이며 ‘운동’이다, 라는 관찰의 감각적 표현”(2: 365)에 이르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최인훈은 감각과 기억과 성찰의 상호작용 혹은 삼투압에 몰입한다. 감각 현상과 성찰의 관념 사이의 삼투압, 기억의 세목과 이성적 추론 사이의 상호작용, 그리고 서로 연결될 것 같지 않은 요소나 영역들을 가로지르고 연결하며 그 상호작용을 추적하려 한 것 또한 최인훈식 디아스포라 서사 전략의 독특한 문법에 속한다. 가령 인공신경과 생물신경의 관계 및 상호작용을 통해 인식론의 심연을 성찰한 대목도 그렇다. 구체적인 내용을 따라가기보다, 인간과 세계의 존재 방식에 대한 성찰의 전면성 혹은 진정성에 주목해 보자. 그는 유물론과 유심론을 넘어서고, 이원론이나 섣부른 절충론도 초극하고 싶어 한다. 전면적 성찰의 윤리는 어쩌면 ‘작은 인간’의 한계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데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최인훈은 무엇보다 인공신경과 생물신경이 스미고 짜이는 상호작용(↔)에 관심을 집중한다.
↔에 초점을 맞추면 진상에 그 중 가깝기는 하지만, 이 입장은 항상적인 발생부전(發生不全), 자기동일성 불안의 긴장 속에 있어야 하는데, 왼쪽과 오른쪽의 결합이 유기체에서처럼 부드럽게 완전할 수 없는 데 대한 자각이 있는 데서 오는 위기의식이다. 이 입장에서 말하면 어떤 시대도 자신의 총량을 내면화한 인간 개체를 기대할 수 없거나, 어떤 인간 개체도 자기가 사는 시대의 총체에 대해서 물질적이고 기계적인 의미에서 일체화되지 못한다. 그러나 좌와 우, 어느 한쪽으로 기운 주물(呪物) 숭배에 빠지지 않자면 이 길밖에 없다.(2: 348)
그러니까 자기도 세계도 완전할 수 없다. 자신의 총량을 내면화한 개체도 기대하기 어렵고, 시대의 총량을 일체화하기도 난망이다. 그러기에 차선적으로 상호작용(↔)에 몰입하여 성찰의 전면성에 다가서는 게 좋다는 생각이다. 그래야 “현실의 세계시민”은 될 수 없어도, “관념의 세계시민”(1:140)은 될 수 있다. 이는 ‘노예철학자’의 태도이기도 하다. 예술이나 문학의 길 또한 그렇다. 이런 맥락에서 작가의 성찰에 따르면, 역사는 희생자들을 보상할 길이 없다. 희생자들의 생명이나 몫을 되돌이킬 수 없다. 그러나 “예술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2:361)라고 최인훈은 적는다. 예술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죽은 이들을 “영원히 살아 있”(2:361)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헛된 기억 속의 놀이”에서 그치지 않는다. “거기에는 대수(大數)의 법칙과 소수(小數)의 법칙 사이의 삼투(滲透) 현상이 일어난다. ‘역사’와 ‘인생’의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그리운 이의 기억을 위해서 보상 없는 줄 알고 난 다음에도 ‘역사’를 ‘예술’처럼 살겠다는 마음과 실지로 그렇게 사는 ‘인생’이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역사’와 ‘인생’이 하나가 된 생애를 우리는 목격하게 된다(2:361). 다른 자리에서는 이렇게 정리된다. “‘생물 구성체’로서의 자기와 ‘문명 구성체’로서의 자기 사이에 유기적 통합을 지닌 상태를 만들어내는 것—그것이 이들[=위대한 작가들]의 평생 과제였다”(2:562). 디아스포라로 횡단하면서 기억과 성찰의 삼투압을 통해 작가 최인훈이 평생 견지하고자 한 문학적 과제는 그토록 긴장감 넘치는 형상이었다.
4. 도서관과 우주선의 강강수월래
예의 상호작용이나 삼투 현상은 직관적으로 성찰되는 게 아니다. 경험과 기억의 올바른 맥락을 잡아줄 사유와 논리의 체계가 필요하다. 도서관에서 그것이 형성될 수 있다고 최인훈은 생각한다. 『화두』를 통해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르헨티나의 보르헤스가 그러했듯이, 최인훈이야말로 진정한 ‘도서관 작가’라는 점이다. 그의 도서관 작가 선언은 매우 뚜렷하다. “도서관에서 나는 무엇인가가 되기 위해서 태어나고 있었다. 도서관은 큰 책이다.”(1:62). 어린 시절부터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천문학과 생물학과 더불어 손을 잡은 강강수월래”(1:62)를 즐기며 작가로 태어나고 있었던 것이다.『화두』의 본문에서는 이렇게 정리된다.
책-도서관-우주선-지구기지-아기집[胎]. 이들은 모두 같은 것들이다. 아기집[胎]에도 ‘어머니’라는 서고(書庫)가 연결되어 있어서 거기서 아기는 DNA라는 책을 빌려다가 열 달 동안의 독서 계획에 따라 읽으면서 자기를 조립해나간다. 그런데 책읽기에 재미를 붙인 ‘인류’는 이 독서만으로는 부족해서 어머니의 아기집을 떠나서도 겉모습만은 어엿한 어른이 되고서도 ‘의붓 아기집’인 책을 만들어서 읽게 되었고 낱 책권만으로는 모자라기 때문에 도서관이라는 큰 책을 만들게 되었고 그래서 도서관은 아기집이다. 사람은 그래도 모자라서 더 큰 아기집인 우주선을 만들어야 했고 그 아기집을 타고 가면서 ‘우주’라는 책을 읽어가는 중이다. 이것은 물론 W시에서의 그때 생각이 아니라 지금의 나의 생각이다. 그때는 아직 사람을 나타내는 구조식에서의 ‘빠진 고리’인 DNA라는 책이 발견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도서관에서, 그리고 이동도서관인 책 속에서 하고 있는 일이 천문학과 생물학과 더불어 손을 잡은 강강수월래라는 것을 알 수는 없었지만 내 힘보다도 더 큰 힘이 시키는 일이고 보면 도서관 창가에서의 만족은 마땅히 그럴 만한 일이었다.(1: 62~63)
“책-도서관-우주선-지구기지-아기집[胎]”이 모두 같은 것이라고 했거니와, 그것은 생명을 잉태하고 낳는 생생력(生生力)의 거푸집이다. 아기집이 책으로, 도서관으로, 지구기지로, 우주선으로 확장되고 승화된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책에 대한 존중과 애호의 감각을 여실히 확인하게 된다. 세상의 지식과 정보의 중심이 책이었던 시절에 나고 자란 세대의 작가 중에서도 아주 각별한 인식이다. 이런 진술도 그런 최인훈의 책-중심주의를 되새기게 한다. “책을 읽는다는 일은 머릿속에다 이 세상 어떤 극장도 따르지 못한다는 극장을 지어놓고 아낌없이 제작비를 들여서 만든 영화를 상영한다는 일이었다. 현실의 어떤 영화도 그렇게는 만들지 못하지 않는가.”(1:63). 그러니까 책은 엄청난 우주다. 살아있는 생명이다. 책 속에 있는 사람들이 책밖의 사람들의 탁본(拓本)에 불과한 게 아니다. 책 바깥 사람들에 못지 않은 힘과 권리를 가지고 살아 있는 사람으로 알고 싶어 한 ‘책환상’과 ‘말나라’의 시민(1:67)에 대한 환대와 존중의 감각을 통해 최인훈은 책의 세계를 넓고 깊게 받아들이며 작가 수업시대를 거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무작정 책에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책은 도서관에만 있지도 않았고 책방에만 있지도 않았다”(1:65). 이를테면 역 광장에서 벌어지는 군중대회의 연설도 듣는 대상이라기보다 읽기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들의 연설의 특징대로 인류 역사가 다시 되풀이되고 있다.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되풀이한다는 생물학의 법칙을 인간의 문명발달사뿐만 아니라 의식과 지각의 성립에도 적용하게 된 뒷날의 나의 생각은 아마 그들의 연설 방법에서 영감을 얻은 듯하다”(1:65). 어쨌거나 최인훈에게 있어, “책은 사람이고 사람은 책이다”(1:67). 조명희의 「낙동강」에서 소설의 저자 조명희와 소설 속의 인물 박성운을 똑같이 존중하면서 그들의 세계로 입사하고 맥락을 잡는다. 저자 조명희가 처한 현실과 소설 속 서사 세계에서 박성운이 처한 현실을 면밀하게 숙독하면서 나름의 숙론을 모색한다. 그러다보니 “‘현실’과 ‘책읽기’와 ‘글쓰기’ 사이를 잇는 실핏줄이 생겨나는 움직임 비슷한 일”(1:91)을 경험하게 된다. 그 움직임에 몰입했을 때 결과적으로 “이 작문은 작문의 수준을 넘어섰으며 이것은 이미 신진 소설가의 ‘소설’이라”는 “선언”(1:102)을 듣게 된다. 분단시대의 새로운 문학을 발명하고자 했던 작가의 탄생은 그렇게 예비된다. 인공신경과 생물신경, 문명 구성체와 생물 구성체, 계통발생과 개체발생, 대수(大數)의 법칙과 소수(小數)의 법칙 사이의 삼투(滲透) 현상 및 역사와 인생의 상호작용을 예민하게 성찰하고자 했던 최인훈은, 도서관과 우주선이 어울려 강강수월래하는 형상으로 상상하고 새로운 문학을 발명하고자 했던 작가다.
5. 자기 이야기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하여
도서관과 우주선 사이를 환상적으로 왕복하면서 최인훈은 남달리 의미 성찰의 본능 혹은 의미 성찰의 근육을 키워왔던 것으로 보인다. 모방하거나 소통하고자 하는 이야기 본능도 의미 성찰의 본능으로 수렴될 수 있겠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의미 성찰의 본능으로 새로운 문학의 발명을 모색했다. 사실들의 늪 혹은 실제의 파편에 얽매이기보다 그것을 넘어서 가치 있는 존재의 비전을 환상적으로 탐문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작가가 할 일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려 했다. 다양한 사고 실험과 상상력 실험을 통해 “‘문학’을 내 손으로 ‘발명’하려고 들었던”(1:120) 작가가 바로 최인훈이다. 그 발명을 위해서는 상상력과 성찰의 현미경이 긴요했다. “없던 세균도 현미경을 통하면 그때 비로소 ‘있게’” 되는 것처럼, ‘잘된’ 현실의 ‘모사’, “즉 명문(名文)”(1:132)이 되기 위해서는 상상력의 현미경이 소중하다. 도저한 현미경을 장착하고 도서관과 우주선 사이를 무한질주하면서 자기 문학을 발명하고,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했다.
『화두』의 최종심급에서 골몰하고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어떻게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 수 있는가? 서두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조명희 최후의 담론과 관련한 장면과 레닌 최후의 나날 에피소드가 강력하게 환기하는 바는 바로 그것이었고, 대조의 거울 사이에서 작가가 평생 골몰한 것도 그 문제였다. 하지만 어찌 그것이 조명희나 레닌, 그리고 최인훈에게 국한된 문제겠는가.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인간 존재 일반의 최후 화두 아닐까. 이 최후의 화두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작가가 자기 이야기의 주인으로 살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성찰을 동반한다는 점이 『화두』의 핵심이다. 이와 관련하여 『화두』 속 1992년 러시아 여정에서 방을 같이 썼던 작가 M이 최인훈에게 “지금쯤 뭔가 발표하실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라고 묻는 대목을 눈여겨본다. 그 말을 듣고 작가는 소스라치며 이런 감각을 체험한다.
마치 먼 데서 출발해서 지금 막 도착한 별빛처럼 그 소리가 나를 흔든다. 아니, 그렇게 먼 데서가 아니라 마치 내 마음속에서 문득 흘러나온 소리의 메아리 같다. 근래에 내 마음속에서 무엇인가 움직임이 있었다. 어떤 것에 아주 가깝게 다가선 듯한 설레임―그렇다. 그런 설레임이다. 그런데도 그 모양, 그 무엇인가의 모양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은 미동을 시작한 듯한 이즈음이었다. 마치 아득한 지진처럼.(2: 415)
먼 우주의 별빛에서 타전한 소리와 자신의 내면에서 흘러 넘치는 소리 사이의 교감 속에서 어떤 움직임과 설레임을 감지한다. 슬픈 육체는 별빛의 전파를 감각하며 별들과 토론할 새로운 심포지엄을 예비한다. 이때 마음이 움직이고 설레게 된다. 이 마음의 미동을 바탕으로 작가는 자기 이야기의 주인이 되는 작가이자, 자기 삶의 주인이고자 하는 인간의 이야기를 발명하고자 한다. 그 결과가 바로 『화두』이리라. 그것을 위해서라면 우선 심연의 애도 작업이 필요했을 터이다. 조명희와 박성운과 로사, 그 이전에 마르크스와 레닌이 모색하고 추구했던 혁명의 (불)가능성에 대한 애도, 자기 삶과 가족사 그리고 문학사에서의 회한에 대한 애도 등 여러 애도 작업을 거쳐야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구상 당시 메모에서 먼 “슬픈 항구”를 응시했던 것 역시 이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러시아 여정에서 드러낸 작가의 발화 또한 그런 사정을 뒷받침한다. “여행자여, 그대 자신을 위해서 울어라”(2:481).
요컨대 최인훈은 분단국에서 태어나 이산의 운명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거스르며 자기 문학 상상력과 스타일의 새로운 여정을 일구어낸 독특한 작가이다. 『화두』를 통해 드러나는 그의 체험과 의식은 디아스포라의 탈주선과 흡사하며, 그 경계와 탈주의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추동하며, 정주민과는 다른 스타일의 문학을 추구했던 작가임을 확인하게 해준다. 디아스포라의 풍경, 그러니까 추방, 뿌리뽑힘, 떠돎, 배제, 소외, 고독과 같은 풍경들을 끌어안으면서 동시에 인식의 층위에서 자기 존재론, 세계 존재론을 능동적으로 정위하려 한 점이 돋보인다. 최인훈이 탐문한 자기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 자기 이야기의 주인이 된다는 것,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탐문한다는 것, 바로 그것은 디아스포라 문학의 기본적 열망이면서 동시에 문학의 본원적 과제이기도 하다. 결국 『화두』의 주제는 보편적으로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는가?’이고, 작가적 관심사로는 ‘나는 나의 이야기의 주인으로서 합당한 발명을 수행하고 있는가?’로 압축된다. 그러기 위해 ‘환경적 조건을 넘어서 어떤 인식의 조건 혹은 의식의 조건을 추구하고 탐문할 것인가?’ 하는 질문 혹은 화두를 서사적으로 탐문했다. 20세기에 동원된 디아스포라의 타자성을 통해 나의 주체성(20세기를 동원한 나)을 가늠해 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화두』의 핵심 주제이면서 문학의 심층 관심사요. 삶의 핵심사다. 이래저래 30년 된 『화두』를 다시 읽어야 할 이유는 넉넉하다.
- 1) 최인훈, 『화두 2』, 문학과지성사, 2008, p. 552. 1992년 가을 집필이 시작된 『화두』는 1994년 민음사에서 초판이 발행되었고, 2002년 문이재 출판사를 거쳐, 2008년 문학과지성사 개정판 전집에 포함되었다. 앞으로 본문 인용은 작가 생전에 최종 텍스트로 확정해 놓은 이 전집본으로 하고, 본문에 직접 그 번호와 쪽수만을 괄호안에 적기로 한다.
- 2) 지난 7월 18일 서강대학교에서 <20세기의 ‘기억’과 21세기의 ‘화두’>라는 주제로 열린 최인훈의 『화두』 발간 30주년 기념 콜로키엄에서 작가의 아들인 최윤구 평론가는 아버지 최인훈에 대한 다큐멘터리와 자료 일부를 공개했다. 「시대의 서기, 최인훈」에서 공개된 자료 중에 『화두』를 집필하면서 최인훈이 처음 생각했던 제목과 메모가 인상적이다. 구상 당시 제목은 ‘쇄빙선(碎氷船)’이었다는 것이다. 그 제목과 함께 이런 ‘시적’ 메모가 여러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자 마음이여/ 노여움에 입을 다문/ 기억의 얼음바다를 깨면서/ 거기 먼 곳/ 슬픈 항구에 닿자.” “기억의 얼음바다를 깨면서” 먼 “슬픈 항구”를 향하는 “쇄빙선”의 선장 최인훈! 어쩌면 『화두』 읽기는 그 “기억의 얼음바다”를 깨며 나아가는 먼 항해에 동참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잠깐, 왜 “슬픈 항구”였을까? 이 질문을 함께 풀어가 보기로 하자. 또 하나는 목포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동창들과 나눈 비망록의 글이다. 작가의 아들은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의 친필을 처음 발견하고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었다. “이별을 제하여 기쁘던 옛일을 적어서 서로 보존하는 이 회상의 기록을 그대에게 줌에 제하여 무슨 신통한 충고(忠告)나 줄 수 있을까. 이제부터가 우리의 시련(試鍊)의 길이니 이 길에서 승리(勝利)하는 자(者)만이 진실(眞實)한 행복(幸福)의 획득자가 될 것이다. 그대는 자기(自己)의 생(生)을 더 충실히 더 의의(意義)있게 할 것을 늘 생각하라. 이것만이 내가 줄 수 있는 부탁!”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최인훈은 이미 “시련의 길”을 예감한다. 그때부터 벌써 먼 “슬픈 항구”를 응시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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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할 수 없는 균열 예측 불가능한 일들의 연속.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을 이렇게 표명한다면 분명 많은 이가 의문을 표할 것이다. 지난하지만 공감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문제들을 자주 다루는 작가들이니 말이다. 하지만 자신 있게 말해보건대 두 사람의 소설에는 독특한 사건들이 꽤나 자주 등장한다.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은 어딘가 금이 가고 삐걱대는 삶 앞에 속수무책으로 던져진 사람들로부터 시작한다. 특히 김지연의 인물들이 해괴한 일을 직접 나서서 ‘벌이는’ 사람들이라면, 안윤에게는 그러한 일을 마주한 뒤 이전과는 다른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두 사람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행위들은 어쩐지 무모하고 무용해 보인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의 효용을 장담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러한 움직임들은 아무거나 믿거나 믿어야 할 것을 믿는 일을 거부하고, 확신할 수 없지만 옳다고 느끼는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이들의 동작은 곧 일상의 균열을 마주하는 자세와도 같다. 사람들이 세계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필연적으로 자신의 결함을 확인하는 작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안온해 보이는 세계를 지적하려면 스스로의 불완전성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서 세계의 균열은 쉽게 발설할 수 없는 무언가다. 그렇다면 포기하는 수밖에 없을까.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들어 있다. 그러니 이상하고 유별난 인물들의 행보를 유심히 살펴보면, 잘 봉합된 듯 보였으나 결코 다 가릴 수 없었던 세계의 미세한 틈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2. 망측하긴 해도 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언뜻 보기에 『조금 망한 사랑』은 체념과 포기를 반복하는 망한 인생의 집합소 같다. 전세 사기, 금전 관계에 있던 친구와 애인의 배신, 실직과 구직난처럼 신자유주의와 투기 자본주의의 광풍에 베여 너절해진 인물들이 잇달아 등장한다. 그런데 『마음에 없는 소리』(문학동네, 2022)를 읽었던 이들이라면 세태를 첨예하게 부감하고 표현하는 적실함뿐만 아니라, 농담과 같은 특유의 가뿐함이 김지연 소설의 또 다른 활력이라는 걸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 테다. 이번에도 다소 무겁고 무기력해 보이는 사정들 틈에 유별난 광경들이 돋보인다. 이른바 김지연식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좋아하는 마음 없이」, p. 168)다. 몇 가지 사연만 잠시 나열해보자. 양육권을 포기했던 아이를 말 그대로 ‘좋아하는 마음도 없이’ 다시 키워볼 생각을 하면서 죽은 전남편의 가족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니는 여자(「좋아하는 마음 없이」). 빚만 잔뜩 남기고 떠난 전 여자친구에게 자꾸만 마음이 기우는 아이러니를 겪는 레즈비언(「반려빚」). 달밤에 무덤 사이를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고(「포기」) 출입이 금지된 저수지의 한가운데까지 기어코 노를 저어 도달했다는 일화(「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까지. 소설의 인물들은 왜 자꾸만 이상한 일을 벌일까. 김지연의 소설은 삶이 이미 망했으며 앞으로도 계속 망해 나가리라는 잔인한 현실 공식을 동력 삼는다. 그곳엔 “반려빚처럼, 있어서는 안 되는 것도 태연하게 있”(「반려빚」, p. 104)고 누군가는 “있는 놈들을 위해 아주 싼값의 육체노동에 부려지”(「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 p. 42)지만 이토록 불합리한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도 제도도 없”(「반려빚」, p. 96)다. 자본의 바깥을 떠올리는 일조차 돈의 힘에 기대야만 가능한 오늘날, 소설 안팎의 현실을 살피며 저항의 포기를 물었던 우리에게 김지연은 두 가지 대답을 내놓는다. 하나, 설명 혹은 주장하기. “소리 지르고 때려 부수는 것만이 화내는 방식인 건 아니잖아요.”(「좋아하는 마음 없이」, p. 151) 둘, 괴상망측한 행동들을 늘어놓기. 그런데 짐작과 달리 이때의 망측(罔測)은 망할 망(亡) 자를 쓰지 않는다. 그물[网]과 망함[亡]이라는 뜻이 더해진 한자[罔]는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어그러진 상태를 가리키면서도, 완전한 끝을 잠시 유예하는 힘을 발휘한다. 망측한 일은 낯부끄러울지언정 완전히 망하지는 않은 무언가다. 그런 일을 벌이는 사람 역시 조금 망그러졌을지라도 여전히 어딘가에, 누군가와 분명히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폐기된 존재를 망가진 상태로라도 끌어올리려는 작가의 수고로움이 와닿는다면, 다르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의 행위는 단순한 기행이 아니다. 그들은 차가운 현실이야말로 ‘진짜 해괴한 것’이라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다. 김지연이 말하는 포기는 더 이상 무엇도 ‘기대하지 않는 마음’에 가깝다. 그런데 인물들은 먹고살기에 급급해서가 아니라, 아무리 노력해도 망한 삶이 평범한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괴이한 공식을 꼼짝없이 따라야만 해서 포기한다. 그래서 「포기」에서 거듭되는 “아무 소용도 없는 일”(p. 19)은 자본에만 기를 쓰고 달려드는 평범한 세계를 조금이나마 문제 삼는 계기가 된다. ‘미선’과 그녀의 사촌 ‘호두’는 주변인들에게 돈을 빌리고 사라진 미선의 전 남자친구 ‘민재’를 찾아 헤매고 있다. 그런데 미선과 호두는 물론이고 민재를 찾는 이들은 대부분 돈을 돌려받으려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 궁금해서라기보다는 그저 민재가 잘 지내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의 행방을 살피고, 신고를 권하면 “그렇게까지?”(p. 16)라고 되묻는다. 그리고 막상 민재에게 정말로 닿을 것만 같은 순간엔 발을 뺀다. 민재는 돈을 가지고 도망쳤기에 평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특별한 사람이다. 돈을 빌려준 사람들 대부분이 그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민재는 같으면서도 다른 것들의 차이를 세세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설명은 “왠지 말이 안 되는 이유들도 납득하게 되는 순간”(p. 23)들을 만드는 힘이 있었고, 각자도생과 효율성을 제일로 섬기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받았던 도움은 민재의 이런 성격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니 민재는 자금난이라는 평범한 사정 때문에 결국 평범해져버린, “완전히 나쁜 사람”(p. 16)일 수만은 없는 사람이다. 이렇듯 아무리 애써도 포기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래서 어떤 그만둠은 포기 자체를 미루고, 돈만을 좇게 만드는 기존의 “미친 짓”(p. 12)을 중단하고 새로운 “미친 짓”(p. 28)을 가능케 한다. 술에 취한 호두와 미선은 한 남자의 도움으로 의릉에 들어가 “이상한 괴성”(p. 30)을 내지른다. 한 번쯤 누군가 불가능한 시간에 난립하는 걸 보고 싶었다던 남자 덕분에 “예상 밖의 방향”(p. 28)을 향해 내달릴 가능성이 반짝이며 움튼 순간이다. 망해버린 인간관계와 삶 속에서 건져 올려진 이 희한한 야행은 두 사람이 잃어버린 진짜 호두가 의릉에서 나무로 자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연결되면서 다시 한번 끝을 지연시킨다. 하지만 평범하게 살려면 불운을 껴안아야만 하는 현실에 낭만이 끼어들 자리는 협소하다. 결국 각서를 주고받은 뒤에도 또 한번 배신당한 호두는 민재와의 관계에서 “정말 원하지 않던 포기”(p. 37)를 하고, “나중으로 미루는 버릇”(p. 25) 때문에 민재와 만날 가능성마저 미룬 미선 역시 연결될 방법을 끝내 포기한다. 기존의 삶이 반복되면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을 더욱 희미하게 만드는 자본의 견고함을 김지연은 결코 만만히 생각하지 않는다. 「반려빚」에서 전세자금대출과 전 연인 ‘서일’이 남기고 간 빚을 갚는 ‘정현’의 삶은 숨 쉬듯이 “매 순간 돈에 대해 생각”(p. 76)해야만 하는 하루들로 빼곡하다.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관계 중 하나인 연인 사이를 지탱하기 위해서 돈이 “제법 중요한 요소”(p. 84)로 호출되고, 유일한 반려의 자리에는 빚이 올라앉은 정현의 세계를 보면, 「포기」에서 미세한 틈을 열어젖혔던 망측함이 결국 잇속 빠른 자본주의의 환상에 불과한 건 아닌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할 수 없는 것만 가득한 날들 속” 유일하게 “할 수 있어!”라고 외칠 수 있는 일이 전 연인의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는 일일 때,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을 만큼 망한 듯한 인생의 내력을 모조리 아는 이가 자신을 망하게 한 장본인뿐일 때, 서일과 다시금 함께 있고 싶은 “정신 나간 마음”(p. 89)이 고립과 단절로 내몰려 어쩔 수 없이 택하게 된 불모지처럼 보이기도 하는 탓이다. 그래서 김지연은 평균치의 삶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나선다.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가 탄생한 「좋아하는 마음 없이」의 ‘안지’는 이혼한 전 남편의 부고를 내연녀였던 ‘그녀’로부터 전해 듣는다. 이외에도 그녀는 전남편의 보험금 수혜자가 안지로 되어 있고, 이혼할 때 두고 온 아들 ‘성준’이 안지와 함께 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안지에게 전달한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묘한 구석이 있다. 벌을 받았다고 생각하느냐는 안지의 말에 “누가 벌을 주는데요?”(p. 142)라고 되묻고, 미안해할 겨를이 없을 만큼 행복했다고 묻지도 않은 말까지 술술 털어놓으며, 이제껏 키워온 성준은 누가 뭐래도 자기 아들이지만 양육비는 보태달라는 염치없음까지. 하지만 안지는 바로 이 뻔뻔함이야말로 전남편과 똑같은 “여자의 장점”(p. 154)이라고 생각한다. 안지가 보기에 전남편은 “집을 해올 형편”(p. 149)을 갖춘 “좋은 사람이”(p. 159)었지만 “좋아 죽을 것 같은 사람”(p. 161)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형적인 사람”(p. 137)으로 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어온 안지는 스스로가 “아주 평균적인 삶”(p. 139)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전남편과 이른 결혼을 했었다. 호불호를 쉽게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선택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안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전남편과 여자는 정확히 안지의 정반대편에 선 사람들이다. 솔직하고 당당하게 이혼을 요구하는 사람들.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솔직한 사람. 숨기느니 차라리 정면 돌파를 선택하는 사람. 그래서 뻔뻔할 수 있는 사람”(p. 158)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안지는 이들의 뻔뻔함을 겪고서 “조금 더 자기 자신에게 가까운 삶을 살게 되었”(p. 137)다고 믿는다. 무엇이 좋고 싫은지를 탐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안지의 가족들은 “좋아하는 마음 없이 함께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이고, 때문에 안지의 삶에는 “그 사람들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내렸던 선택들”(p. 163)이 수두룩하다. 반면에 현재의 안지는 좋아 죽을 것 같은 사람과 재혼하고, 싫어하는 게 무엇인지 알기 위해 이상한 대회들을 연다. 분명한 미래가 아니라, 잘 그려지지 않는 미래를 골똘히 떠올린다. 그래서 안지는 전남편과 그녀, 아이가 있는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세 사람이 함께 있는 사진”(p. 165)을 훔쳐 지갑에 넣고 다님으로써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의 명예의 전당에 오른다. 여자를 다시금 우연히 만난다면 되돌려주겠지만, 그때까지는 그들에 관해 거듭 생각하면서 무엇이 옳고 그른 삶인지 단정하지 않기 위해 끝을 한없이 지연시키면서 말이다. 전남편과 관련한 모든 일로부터 그저 멀어지고 싶었던 안지는, 그렇게 무엇도 기대하지 않고 연루되지 않음으로써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두고 보기를 택한다. 계산하고 판단한 “확신”을 따르기를 포기하고, 그들의 방식처럼 “선명하고 분명한 감정”(p. 161)이 있는 삶의 방식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선다. 해괴하고 이상한 것의 가능성은 「유자차를 마시고 나는 쓰네」에 이르러 더욱 커진다. 재개발이 예정되어 누구든지 마음껏 열매를 가져가라고 전달받은 ‘나’와 ‘삼촌’은 유자밭에서 유자를 따던 도중 땅에 묻힌 상자를 발견한다. 기대감을 안고 열어본 결과, 그곳에는 “알 수 없는 썩어 문드러진 쓰레기”(p. 271)만이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상자를 내동댕이쳤던 ‘나’는 서사의 마지막에 이르러 “어쩌면 영영 썩지 않는 것도 못할 짓이라는 생각”(p. 289)에 도달한다. 이러한 깨달음은 1년 전 사고로 세상을 떠난 ‘숙모’와 그의 아들 ‘민재 오빠’를 애도하는 ‘나’와 삼촌의 시간과 연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촌보다 열 살 많은 나이에 아이까지 있는 이혼녀였던 숙모의 세세한 사정과는 별개로, ‘나’는 매번 콤플렉스를 건드리는 말을 내뱉고 짝사랑 상대의 엄마인 그녀를 싫어해왔다. 하지만 무엇이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보였던 숙모가 췌장암으로 사망한 전남편을 떠올릴 때마다 사는 게 너무 달아서 미안함을 느끼는 모습을 목격한 뒤, ‘나’는 그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자신이 싫어하던 사람을 닮아버린 순간부터 그 사람을 싫어할 수 없게 되었다던 숙모의 말처럼, ‘나’ 역시 죽은 사람을 떠올리는 일이 마냥 괴롭게만 느껴지지는 않게 되면서 변하는 것, 썩는 것을 긍정하게 된다. 해괴해지지 않는 것은 없다. 오히려 왜곡과 변형을 거치면서 이전과 다른 상태 변화를 맞이하는 것이 더욱 유의미한 일일 수 있다. 밀봉하지 않아 썩어버린 자리에서 공벌레가 새롭게 자리를 틀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조금 망측하긴 해도 망하지 않은 인생. 김지연의 소설은 우리에게 그런 인생들의 가치와 가능성을 펼쳐준다. 3. 잃어버려야만 만날 수 있는 세계 『남겨진 이름들』(문학동네, 2022)과 『방어가 제철』(자음과모음, 2022)에서부터 주목받았듯이, 안윤 소설의 중핵에는 ‘상실’이 자리한다. 이에 조금 더 안윤스러운 특징을 부여해보자면, ‘원인을 알 수 없는 상실’이라 고쳐 부를 수 있겠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할 수 없이,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잃은 인물들이 겪는 상실은 기이하다. 의심 없이 정상이라 믿어왔던 체계가 뒤틀린 채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어짐이 꼭 불행해야만 할까. 균열을 되짚으면서 우리는 모자람에 몸서리칠 뿐만 아니라, 온전함을 “새로이 감각”(「틈」, p. 237)해볼 수도 있다. 사라진 이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일깨워준다면 어떨까. 이를테면 안온한 세계는 허상이고, 그것은 위태로운 누군가의 현실을 말끔히 소거해야만 가능하다는 것. 금이 간 세계의 틈새로 유실된 존재들이 있다는 것. 이를 마주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보편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실과 괴리를 좁힐 수 없는 인물들의 선택이 어쩐지 생소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하지만 그들의 결단 덕분에 기이한 감각들은 응달에 고여 있지 않고 변주된다. 안윤의 소설에서 기괴하고 낯선 기운이 세계를 다시 쓰는 역량으로 옮아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비밀을 알아차린 뒤 다른 삶을 향해 몸을 트는 인물은 우선 「핀홀Pinhole」에서 만나볼 수 있다. 직장 동료로 처음 만나 4년을 사귄 ‘보라’와 ‘승원’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다. 평탄해 보이던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떤 ‘비밀’이 드러나면서 전연 다른 국면을 맞게 된다. 제목처럼 소설에서는 바늘구멍처럼 아주 미세할지라도 분명한 틈을 내는 질문들이 등장한다. 첫번째, “비밀 하나씩 얘기할까”(pp. 55, 75, 88). 소설에서 총 세 번 등장하는 이 질문은 모두 보라로부터 나온다. 비밀은 수치스럽거나 비정상적인 치부들을 의미한다. 보라에게 딸들을 버리고 갔던 엄마와 새아버지, 이복 남동생이 있다는 복잡한 가정사 같은 것들. 보라는 비밀을 들추거나 캐묻지 않는 승원에게 편안함을 느낀다. 이렇듯 보라가 감추고 싶은 것, 감춰야만 하는 사실들을 응시하고 발화하는 인물이라면 승원은 비밀 앞에서 “짧은 침묵”(p. 56)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소설이 전개될수록 승원의 침묵은 배려가 아니라 자신의 비밀을 덮기 위한 자구책으로 드러난다. 보라는 어느 날 중증장애인 거주 시설의 실태를 고발하는 기자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경진’의 메시지를 통해 외동으로 자처해왔던 승원에게 마흔넷의 중증장애인 형 ‘정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경진은 부모가 강제로 입원시킨 시설에서 관계자들의 폭력으로 인해 사망한 걸로 보이는 정원의 사인을 밝히고 그의 삶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정원의 가족들로부터 무시당했다. 두번째 질문은 경진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승원씨를 얼마나 안다고 생각하세요?”(p. 61). 모든 것이 그렇게 돌연 생경해진다. “경험해본 적 없는 단란한 가정의 화기”(p. 72)는 “너무나도 깔끔하고 정연하게 통제된 느낌”(p. 73)을 주고, “앎의 정도를”(p. 66) 고려할 필요 없이 가까웠던 승원은 “엄연한 타인”(p. 53)으로 다가온다. 그중에서도 승원이 동그란 공 모양으로 뭉쳐놓은 양말이 보라에게 “집쥐가 ‘된 것’”(p. 53)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추방하려 아무리 애써도 계속해서 출몰하는 집쥐처럼, 정원의 존재는 여타의 삶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승원이 습관처럼 만드는 양말 뭉치가 어린 시절 정원과 가지고 놀던 장난감 공에서 비롯된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보라는 직감한다. 평범했던 양말 뭉치가 “집쥐로 보이기 시작한 그 늦은 오후 이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p. 54)다고. 보육원에서 지내던 어린 시절, 약을 먹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집쥐는 어디에서 누구와 살 수 있는 걸까”(p. 87)를 궁금해했던 보라의 의문은 정원의 생애를 접하면서 되살아난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지만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삶은 온통 투쟁이었다. 더딜지라도 꾸준히 삶을 기록하고, 장애인 스포츠인 보치아 선수가 되어 진지하게 공을 던져왔다. 죽고 싶을 때마다 “타 자 칠 때 총 쏜 다 생각”(p. 83)하며 쓴 시들, 시설에서 나가기 위해 새벽마다 컴퓨터실까지 기어가 적어 내려간 정원의 이야기는 “스스로 훼손을 인정할 수 없었던”(p. 71) 보라를 변화시킨다. 과거의 결함을 지우고 무결하고 단란한 가족으로 살고 싶었던 욕망을 외면하고, 승원 대신 정원의 기록물을 경진으로부터 건네받는다. 할머니에게 배운 바느질처럼 보라는 정원의 생애를 몇 번이나 곱씹은 후 그의 이야기들을 정성스럽게 잇대어 나간다. 그리하여 세 사람만이 담긴 가족 그림에서 “가는 연필 선으로 밑그림만 그려놓은 테두리뿐인 사람”(p. 61)이었던 정원을 “한 사람의 형상”(p. 88)으로 만들어낸다. 양말 공을 죽어가는 집쥐로 느끼던 낯선 감각은 그렇게 자신이 바라는 삶을 향해 공을 굴리는 정원의 의지를 헤아리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다시 첫번째. 보라는 승원에게 다시 한번 비밀 말하기를 제안한다. 경진을 만났다는 자신의 비밀을 먼저 밝히면서. 사실 안윤의 인물들이 내린 선택을 따라가다 보면 경진이 던진 이 질문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왜 이렇게까지 하세요?”(p. 85). 어째서,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걸까. 친숙함을 등지고 불가해한 누군가를 끌어안게 만드는 힘의 근원을 짐작하기 위해 표제작 「모린」을 살펴본다. 사고로 중도 실명한 시각장애인 ‘영은’은 잃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범하거나 무감하게 태어나서가 아니라 살면서 많은 것을 잃어봤기 때문이다. 실명 이후 영은은 다채로운 세상의 이미지들, 오래도록 자신의 곁을 지켜왔던 연인 ‘선주’를 비롯해 자신을 이루던 수많은 조각을 놓쳐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은은 여전히 처음부터 가져본 적 없는 삶보다는 여전히 나중에 잃는 삶을 선택하겠다고 말한다. 이는 “있음과 없음, 그 둘을 연결하는 잃음”을 통해 “주어지는 모든 세계를 빠짐없이 살아보”(p. 25)겠다는 다정한 결단이다. 어떤 것을 잃어본 사람은 그것의 소중함을 비롯해 어떻게 더 잘 잃을 수 있는지, 상실 이후에 무엇이 변화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 특히 자기 자신을 잃어보는 경험은 세계가 뒤바뀌는 사건이다. 하나의 세계는 곧 한 명의 사람과도 같다. 그리고 세계는 곧잘 무너지고 다시 서길 반복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한 사람’은 변치 않고 그대로 남아 있어서가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고 가기에 유일하다. 그런 의미에서 “유일한 사람은 죽어서도 죽지 않는다”(p. 9). 영은이 잃음을 두려워하기보다, 각각의 자신과 타인을 마음껏 사랑하는 일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이유다. 유일한 것들의 흔적을 덧입고서 모진 시간을 견뎌온 영은은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사실만이 유구하다는 걸 안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정상성이 비틀리는 감각이 일상처럼 자리 잡고 있다. 안윤이 굳게 믿는, 상실을 지나온 자의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영은의 질서”(p. 30)는 기존의 질서에서 멀어지거나 누군가를 잃는 일을 유독 겁내던 ‘미란’을 조금씩 변화시킨다. 자신을 제쳐둔 채 사회의 규율만을 엄격히 따르느라 영은을 사랑하는 마음마저 밀어내길 반복해온 미란은 영은의 곁에서 “한 사람이 자신을 넘어서 는 어떤 감정을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p. 44)을 경험한다. “죄다 망해버려서 다행”스럽게 찾아온 “그동안의 내가 다 망해버린 기분”(p. 41)은 여성과 여성의 사랑, 장애인의 삶처럼 분명히 있는 것들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세계의 문법을 무너뜨리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의 무수한 면면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든다. 이러한 세계에는 정상성이 비틀리는 감각이 일상처럼 스며들어 있다. “누군가가 이상한 말이나 행동을 하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게 저 사람이 말할 수 없는 사정이구나 하는”(p. 12). 세계는 곧 한 사람 그 자체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 바 있으니, 영은의 말처럼 기이한 낯섦은 이제 한층 더 애처롭게 감각된다. 기꺼이 열리고, 연결되고 싶을 만큼. 때로는 나 자신을 잃어버려야만 닿을 수 있는 누군가가, 무너져야만 만날 수 있는 세계가 있다. 상실과 결여를 메우지 않은 채로 살아가는 방법을 안윤의 소설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4. 실패 연습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은 현실이 감추려 해온 불합리성이라는 비밀을 고발하고, 이때 드러난 균열에 힘을 가해 기존의 제도와 체계에 일격을 가한다. 특히 주목해야 할 지점은 두 사람의 소설이 자신의 균열을 뼈아프게 직시해야만 들여다볼 수 있는 세계의 결함과 마주한 뒤, 그러한 생채기를 어떻게 매만질 수 있을지까지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지연은 잿더미 속에서도 아직 전소하지 않은 기대와 희망을 조심스럽게 건져 올린다. 그의 인물들은 자본 외부의 의지와 노력이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상황에서 한없이 작아져 있다가도 뜬금없이 괴상한 사안들 편에 서거나 망측한 일을 감행한다. 이때 강렬히 분출되는 어긋난 감각은 살 만한 삶을 간단없이 소거하는 자본의 법칙이야말로 진정으로 이상한 무언가임을 강렬히 느끼게 해준다. 안윤은 이유 없는 상실을 강제하는 현실에 짓눌리는 와중에도 잊힌 이들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잃어버려서는 안 될 자신의 고유한 속성을 부지하려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들은 세계의 결함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사건을 목도할 때 생기는 기이함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결단하기 위해 분연히 사건을 찾아 나서거나 세계가 무너지는 감각 아래에 자신을 놓아둔다. 그런데 이들 소설이 나아가고 있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인물들의 일격이 너무 쉽게 저지당하거나, 세계의 비밀을 목격한 이후에 결과적으로는 다시 자신의 결함으로 회귀하는 수축성을 보이는 측면이 두드러짐을 간과할 수 없다. 김지연의 소설에서처럼 잠깐 보인 희망이 오히려 지난한 현실을 조금 더 버틸 수 있게 하는 마취제로 작용하고, 안윤의 인물들이 억눌리고 배척당한 존재들의 고통을 자기 이해와 친밀한 사람과의 좁은 세계에 가둬두는 건 아닌지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의도와 달리 두 사람의 소설이 보여주는 건 균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재한 현실 아닌가. 이런 우려는 결함마저도 소비적 욕망과 충동에 포섭시켜 자기 발전의 재료로 삼는 자본주의의 영악한 힘이 가진 위험을 알기에 생겨나는 것이다. 하지만 장담컨대, 이런 의심을 향해 김지연과 안윤은 한층 더 이상하게 말하고, 행동하며, 선택하는 인물들을 다시금 내보일 것이다. 한 번의 실패는 억압의 기제에 영영 봉합되는 것이 아니라 더 잘 망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믿는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더 자주 서로에게 보여져야 한다고” “잘 살든 못 살든 그냥 살아 있는 게 목격이 되어야”(「긴 끝」, p. 122) 한다는 김지연에게 소설은 끝을 길게 늘어뜨려 무한히 연장하는 목격의 수단이다. “만약이라는 말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또,」, p. 174)는 걸 아는 안윤이 보기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로 허물어지는 일이야말로 세계가 연결되는 가장 첫걸음이기에 둘의 세계는 여정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될 것이다. 두 사람에게 실패란 기존의 견고한 세계가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 그래서 고정되어 있던 자신이 허물어지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집들은 이제 막 실패했다. 어쩐지 걱정되는 마음이 앞선다면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숙련이 뒤따르듯이, 이들은 지금의 연습을 거쳐 실패에 능숙해질 것이다.그러니 자주, 계속해서 더 잘 실패해보려는 두 사람의 힘을 믿는 마음으로 애정을 담아 덧붙여본다. 앞으로의 소설에서는 무너지고 재건된 세계가 어떤 다른 모습으로 솟아오를지, 기이한 인물들은 구체적으로 어디를 향해 걸어 나갈지 궁금하다고 말이다.
표면-상태-읽기 문학은 인간의 내면 또는 물질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하나의 관점이다. 하나 내면은 '내면'에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앞의 문장은 의미를 다르게 가진다. 내면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틀리고 비뚤어진 형태로 또는 속에 있는 그것과 다르지 않은 형태로 비죽이 튀어나오는 것임을, 우리는 이미 안다. '내면'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이 그것을 가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타인에게서 또한 그것을 '본다'. 그것이 '어디'에 있든 누구에게 있든 그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표면적인(보이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문학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을 표면을 읽는 일과 같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표면을 읽는 것이 내면을 읽는 일이 될 수 있을까? 아주 표면적인 방식으로 내면을 추측하게 만드는 시에서라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울지도 모른다. 최재원 시인의 『백합의 지옥』 중 "별늪"이라 이름 붙은 장에 수록된 시편들은 연결성을 가진다. 제목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상어 세계의 법칙에 적응하지 못하고 친구가 되어줄 누군가를 찾는 "부끄럼쟁이 상어 위스퍼"는 "제멋대로 올챙이 오페라"를 바다에서 만나고, 이 둘은 “배고픈 물뱀 나르샤"를 만나 함께 모험에 오른다. 자기 위로 쌓이는 모래를 떨어낼 생각도 없이 침잠했던 "심심한 넙치 누가바"가 이 무리에 합류하고, 이들은 “마그마라는 이름의 마그마"를 만나며, 이들과 함께 걸음 하는 마그마는 은하수라는 이름의 은하수를 만나 "별늪"이 된다. 그리고 이 시들의 여정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마그마와 은하수는 별들을 주고받으며 / 하나가 되었다 / 별늪엔 별꿀이 가득히 흘러서 누구도 / 배고프거나 심심하거나 외롭지 않았다 - 「별늪」 부분 요약건대 이 시는 위스퍼, 오페라, 나르샤, 누가바, 마그마, 은하수가 별늪이 되어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 내면은 어디에 있는가? 요약이 말해주지 않은 부연 설명과 수식의 말들을 들여다볼 때 그것을 찾을 수 있다. 상어 위스퍼는 동료 상어들이 "자신들과 함께 다니려면 사람의 다리 하나를 / 가져오라고 부추"(「부끄럼쟁이 상어 위스퍼」)긴 끝에 길을 나섰으나 끝내 그렇게 하지 못한 채 오페라를 만났다. 올챙이 오페라는 자신이 살 수 없는 바다에서 살고자 하다가 동료를 만났고, 오래 굶은 물뱀 나르샤는 오페라를 잡아먹으려다 위스퍼를 보고 숨었지만 이내 그들과 동료가 되기로 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무언가에 저항하거나 반(反)함에 따라 삶을 성취하고 있다. 이때 '반'은 '부정'에 방점이 찍히지 않고 주어진 것의 '바깥'에 찍힌다. 주어진 것에서 탈출하는 것, '하라고 시켜서 되는 것'의 바깥쪽에 위치한 수많은 가능성을 지향한다. 그렇다면 이 시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저항함으로써, 때때로 죽음을 감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워지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해석은 이 시의 표면인가, 이면인가? 문장이 지시하는 것을 읽어나갔을 뿐임에도 문장이 발설하지 않고 내포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헤아렸으므로 이면을 읽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표면을 읽은 것이라 할 수 있지 않나?...... 정답 없는 이 의문점에서 표면이냐 이면이냐 중 하나로 결론을 내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질문을 돌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살아가는 일이 '존재'가 아니라 '상태'로 지속된다는 사실이다. 즉 존재의 방식이나 형식(표면), 존재의 의미(이면)를 파악한다는 것은 어떠한 상태인가를 헤아림으로써 가능하다. 이처럼 최재원의 시는 표면으로 이면을 말한다. 대도시와 약간의 거리를 둔 업스테이트에 살면서 그야말로 '삶'과 자연의 의미를 갈구하는 듯하지만 지극히 탈자연적인 방식으로 시간과 공간 곳곳을 채우고 있는 두 사람이 등장하는 시 「업스테이트」 역시 지극히 표면적인 것을 묘사한다. 그러나 그 표면을 잘 살피면 삶을 주관하는 자와(퍼치를 낚음) 삶에 종속당하는 자(대도시적인 생활 관습으로부터 멀어지지 못함)의 위치가 거듭 전도되는 '상태'가 발견된다. 표면을 통해 상태를 보여주는 이 시를 지나, 비누 거품을 내어 손을 씻는 모든 과정과, 그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는 타인을 바라보며 관념적 상태변화를 묘사하는 「기브앤테이크」를 거쳐, 「비엔나소시지」에 도착해 이번에는 이런 물음을 꺼내본다. 분리 불가능한 표면과 이면 어디께를 휘저으며 의미를 찾아내는 일의 가장 흔한 방식은 어쩌면 '개인적으로 좋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과 같지 않은가? 그게 과연 '개인적'일 수 있는지 묻고, '좋음'이란 게 구체적으로 뭘 의미하는지 설명하는 순간 시라는 표면은 지극히 개인적인(내면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게다가 그것이 발설되면 내면은 더는 내면이 아니게 되는 데다 이 시에 대한 변형된 의사를 전달하는 것으로는 개인적인 이야기가 되지 않으니, 이 역시도 표면으로 내면을 드러내 보이는 상태에 관한 것이겠다. 그런 까닭에 이 시에 대한 '개인적으로 좋음'이라는 메모를 이런 식의 해석으로 풀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시는 비엔나소시지를 먹는 상황을 묘사한다. 물론 그사이에 끼어드는 세부적인 의견이나 수식된 말 등이 중요하다. 어떻게 먹어야 최상의 조화로움 속에서 비엔나소시지볶음을 먹을 수 있는가를 궁구하는 일련의 상황 사이에 그리움, 환멸, 어머니와 같은 정념들이 “꾸역꾸역” 끼어든다. 당근의 맛이라든가, 재료 익힘의 정도, 당근과 다른 재료와의 조합을 씹을 때의 맛, 감각, 만족도 같은 것은 꾸역꾸역 끼어드는 생각들의 맛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면 그건 무슨 맛인가. 그런데 한 번도 빼놓지 않고 / 양파와 당근을 썰어 넣는다는 것은 얼마나 착실한 / 일입니까 얼마나 / 열심한 일입니까 특히 / [......] / 꾸역꾸역 아침부터 국을 / 데우고 소시지를 볶고 찬 / 반찬 더운 반찬 김치를 / 각각 포일로 그 비좁은 / 도시락통을 지혜롭게도 / 기술적이게도 딱 / 3등분으로 나누어 / 나는 그런데 국물이 흐르면 / 화가 났습니다 당신에게는 / 아니고 국물에게 그리고 신부님의 / 고고하고도 자애로운 모습을 문득 / 떠올립니다 급할 것 하나 없이) - 「비엔나소시지」 부분 비엔나소시지를 반찬으로 싸는 사람이 그렇게 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에 무엇이 깃들어 있는지, 요컨대 이 재료들이 비엔나소시지 반찬이라는 지금의 상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화자는 생각한다. 비엔나소시지는 누군가 성실하고 착실하게 열심히 야채를 썰어 넣는 노고이고, 비좁은 도시락통을 현명하게 구획하는 지혜이고, 그 결과물이 의도치 않게 약간의 국물을 새어 나가게 만들 수도 있는 우연적 실수를 동반한다. 수많은 사랑에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비의지적 결과에 화가 난다고 화자는 말한다. 이 근사한 노고와 지혜와 사랑과 성실함이 흘린 약간의 국물을 두고 감사·만족·풍족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단지 국물 때문에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분노를 느끼는 이 어긋나는 감각은 이것을 먹는 사람에게 죄책감이나 환멸을 느끼게 만들고, 그러다가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는 이에게 자애를 구하고 싶어지게 만든다. 그래서 이 시는 이렇게 끝난다. “저에게 / 저에게 자애를 베푸소서 / (내가 갈 곳에는 비엔나 / 소시지와 같은 추잡한 / 것들이 없게 하소서 / 꾸역꾸역 살아 낸 것들 / 의 기억을 모두 잊게 하소서"(「비엔나소시지」)라고. 그러면 비엔나소시지 먹기라는 건 노고·노동·사랑·지혜, 그런 것들에 대한 생각, 이 모든 걸 배반할 만큼의 분노와 짜증과 혐오감 그리고 그것에 대해 용서받고 싶은 마음이다. 요컨대 최재원 시의 표면 읽기란 의미란 무엇이며 어떻게 발생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을 듣는 일이다. 최재원의 시는 인내심을 가지고 여러 차례 그것을 일러주고 있다. 자세한 표면을 보라고. 그리고 존재를 강구하지 말며 상태를 헤아리라고. 상태를 헤아리면 의미가 발생한다고. 죽음-상태-읽기 꼭두를 한 달 사이에 세 번이나 보았다. 한번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전시되고 있는 사진전에서, 다른 한번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다른 전시장으로 건너가며 스쳐 지나가듯 놓인 실물을, 마지막 한 번은 신미나의 시에서 “꼭두"라는 기호로 보았다. 꼭두를 세 번 보았지만 '꼭두'를 본 것이지 실제로 그것이 본래의 의미로서 작동하는 상태를 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꼭두는 전통적인 장사(將事) 문화에서 볼 수 있는 목각 인형이다. 망자를 '저편'으로 인도하고 수호하는 역할을 하며 상여의 곳곳에 놓인다. 말하자면 꼭두는 나무이고, 나무로 만들어진 인형이고, 죽음이고, 수호이고, 죽음의 길잡이다. 최근 세 번이나 보았지만 꼭두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나? 나는 사진으로 된 목각 인형을 보았고, 목각 인형 전시물을 보았고, 죽음에 대한 시를 읽었다. 사진전에서는 꼭두를 찍어 186.5×159센티미터 사이즈로 커다랗게 인쇄하여 세로로 세워두었고, 지나치듯 본 꼭두 인형은 '전시물'로서 전시장 한복판에 서 있었다. 꼭두의 모양새와 가장 닮지 않았지만 꼭두의 수행적 의미에 가장 가까운 것은 신미나가 쓴 「꼭두전」에 등장하는 “꼭두"라고 할 수 있겠는데, 장사를 지내는 시에서 “꼭두"가 망자를 이끌고 수호하는 존재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 "꼭두"는 문자의 나열과 문장의 직조로 펼쳐진 죽음으로 향하는 상상된 언어 속에서 등장했으므로 어쨌거나 상징적 기표의 상태로 간주되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꼭두를 세 번 봤지만 세 번 다 꼭두를 봤다고 할 수는 없고, 사진과 전시물과 죽음에 대한 상상의 현물로서 그것을 보았다. 보았다...... 한데 나는 무엇을 본 것일까? 앞서 최재원의 시를 읽으면서 개체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상태를 지속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상태의 지속은 항상성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불안정성과 유동성을 의미한다. 변함없는 상태처럼 보이기 위해서 개체는 변화하는 시간에 맞게 대응해야 하고 달라진 상태에 맞서 새로운 움직임(혹은 멈춤)을 추동해야 한다. 신미나의 시에서 여러 번 발견되는 '죽음'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죽음은 역시 삶의 중(中)이자 삶이 아닌 중의 중의 이동에서 감지된다. 죽음은 존재의 중지, 상태의 종료처럼 생각되곤 하지만 삶이 곧 존재가 아니듯 죽음 역시 비-존재가 아니라 삶이 아닌 상태다. 이로써 신미나의 시는 삶과 죽음을 상태, 즉 유동으로 간주하는 듯하다. 죽음이 존재라는 것에 불이 들어왔다가 나가는 그런 이분법적인 것이 아니라면, 삶을 소거하는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보고 이 질문에서 시작해보자. 삶이란 무엇인가? 즉, 죽음을 소거한 채로 죽음을 어떻게 말하는가? 언니들은 비밀이 많고 / 금요일엔 주름이 많은 치마를 입었지 / 블라우스 리본을 매고 / 흔들리는 구두를 신고 뾰족하게 웃었네 // 나도 따라가고 싶어 [......] // 넌 아직 어려 [......] // 주머니 속에는 시를 쓴 종이가 있는데 / 언니들을 슬프게 만드는 시가 있는데 / 여름휴가는 짧고 / 동생이 시를 써서 언니들은 기쁘다 말하고 / 시를 쓰면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 같아 // 언니들을 시로 써도 될까 / 사탕수수밭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을 / 미래, 미래, 미래로 물결쳐오는 문장들을 // 언니들은 풀었던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으며 / 머릿수건을 두른다 / 식판을 들고 밥과 국을 배급받는다 / 에나멜 구두는 금요일에만 꺼내 신을 것 // [......] // 뭔가 시작되려는데 / 그게 무엇인지 / 아무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지 / 아무도 - 「바람 주머니가 부풀 때」 부분 “아무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지"에 시의 핵심적 태도가 함축되어 있다. 아무도 일러주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 '뭔가'가 무엇인지. 그런데 이 표현 자체가 '그것'이 소거된 형태로 말해진 결론이다. “그게"로 표현되어 있는 '그것'의 정체를 어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일러줄 수 없다. 그래서 아무도 '나'에게 일러주지 않은 것이다. 이미 그 상태에 속해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일러줄 수 없는 것이 바로 삶인지라, '나'는 알고 싶었으나 아무도 일러주지 않아서 속수무책 빨려 들어가 있는 바로 이 '상태'에 그냥 놓인 채로 그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는 중이다(삶-인 중이다). 삶은 '무엇'이 아니기 때문에 '무어'라고 알려줄 수 없다. 삶은 존재하는 상태와 같이 유동하는 흐름 속에 놓여 있다. 시를 조금 더 세밀하게 살펴 이들이 어떤 흐름과 상태에 놓여 '그것'을 겪고 있는지를 따라가보자. 이 시에서 "언니들은 비밀이 많”은 존재다. '나'는 언니들을 따라가고 싶어 하지만 어리기 때문에 언니들의 비밀에 합류할 수 없다. 비밀이 많은 언니란 언젠가 될(또는 궁구하는, 희망하는) '나'의 미래이고, 그런 점에서 삶의 한 단면이다. 이 문장을 좀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삶이란 비밀을 지닌 미래'다. '나'는 언니들의 비밀에 합류하지 못한 대신 시를 쓰면서 비밀을 만든다. 시를 쓴다는 것은 비밀을 만드는 것이다. 시를 쓰는 일은 '나'를 몰래 나쁜 일을 하는 것 같은 비밀스러운 상태로 만든다. 비밀스러운 '나'의 미래인 언니들을 시로 쓴다는 건, 미래를 비밀스럽게 만들어 맞이하겠다는 것. '나'는 언니들의 비밀을 공유하지 않았지만 '비밀'이라는 미래를 만들어내고 있다(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이 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삶'이라는 말을 소거한 채 미래를 비밀스럽게 스스로 만들어 쫓는 것이 삶임을 보여준다. 이 시에 들어섰던 최초의 까닭은 삶을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규명하기 위함이었다. 이 시가 '그것'을 소거하면서 동시에 말하는 것과 같이,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다다르기 위한 방법 역시 마찬가지로 그것을 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죽음이 아닌 상태에 대해 말해도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때의 소거는 실제로 뭔가를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빠진 상태 그 자체로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이다. 찾았냐고 물었다 // 클로버는 잎이 세 장 / 드물게 네 장 / 초록의 이랑이 팬다 / 반복의 물결, 물결, 물결 // [......] 하나만 길게 잡아당기는 / 신의 놀이 / 토끼는 귀가 크고 / 코끼리는 코가 길다고 / 말하려다 / 코끼!라고 했는데 // 지구 바깥에 / 귀도 크고 / 코도 긴 / 진짜 코끼가 있을지도 몰라 // [ ] 토끼는 위험하면 / 뒷발을 구른다는데 // 코끼, 코끼, 코끼래! / 우리 중 누구도 /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 「풀」 부분 이 시의 현재에 있는 것은 풀이고, 어쩌면 있을 수도 있는 것은 위험을 감지하고 발을 구르는 토끼이며, 보다 희미한 가능성으로 있을 수도 있는 것은 '코끼'인데 이것은 사실상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없는가? 이 시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코끼다. 코끼는 토끼로부터 연상된 코끼리를 말하려다 튀어나온 것이고, 토끼는 클로버를 찾으려 풀밭을 샅샅이 뒤지다가 떠오른 모자 속에서 폴짝 뛰어나온 것이므로 그것은 풀밭에서 비롯된 어떤 상태로서 그 어떤 것보다도 커다란 존재감을 드러낸다. 여기서 벌어지는 소거는 “코끼”라는 표현 속에 압축되어 있다. 그것은 없음('리'의 소거)으로 하여금 있는 것이고(코끼), 상상 속의 토끼이자 코끼리를 온통 아우르는 관념의 상태다. '리'가 빠졌지만 '리'만 빠진 것이 아니고, '리'가 빠진 '코끼'로 하여금 없는 모든 것을 있게끔 만드는 것이 되었다. 뭔가를 빼고 말한다는 것은, 빼려고 했던 것을 포함한 모든 가능성을 지금의 상태로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뺀다는 것은 상태를 바꾼다는 것이고,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이전의 상태에서 놓여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때 신부가 되길 원했으나" 조선소에서 노동자로 살아가게 된 한 사람의 삶(이라는 상태)에 대해 시인은 이렇게 쓴 바 있다. 스토브 안에서 무연탄 더미가 / 조용히 스러질 때 / 그는 부드러운 재를 / 얼굴 위에 뿌리고 / 더러워진 몸을 머리끝까지 욕조에 담근다 / 숨을 참고 열을 세다가 / 마침내 뱉을 때 / 현실은 간신히 그를 따라왔다 // 그는 눈을 뭉쳐 / 눈사람을 만들어 물에 넣는다 / 순식간에 / 눈사람이 사라지는 모양을 본다 / 기분이 아니라 / 감정이 아니라 / 어떤 / 상태에서 풀려나는 것을 - 「북에서 온 사람」 부분 그는 그가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않은 상태에 있고 때때로 "섬망과 미혹 사이에서 / 그는 하마터면 / 자기 자신을 넘어갈 뻔"하기도 하지만, 그는 미혹되지 않고 그가 바랐던 것이 아닌 조선소 노동자의 상태로 되돌아온다. 그가 욕조에 몸을 담글 때, 그가 바랐던 것은 아니나 그에게 주어진 조선소 노동자라는 "현실은 간신히 그를 따라왔"(「북에서 온 사람」)는데 어쩐지 그는 지금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계속 바뀌어나가려고 하는 것 같다. 그는 눈사람을 물에 넣고 그것이 흩어지는 것을 본다. 이는 "어떤 / 상태에서 풀려나는 것"이라고 표현된다.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바뀌는 것이 곧 삶(죽음)이고, 그 전환의 순간에 시간의 흐름이 발생하며(무언가가 지나갔다, 무언가가 도래한다), 그러한 전환의 틈에 자각되는 것이 죽음(삶이 지나가고 있음)이다.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넘어가는 것을 소거의 형식으로 발화하는 것이 이 시집이 보여주는 성찰일진대, 그것을 요약해서 말하자면 “백장미의 창백"이다. 언뜻 백장미는 본래 창백한데, 백(白)이라는 색이 빨강으로 대표되는 '장미색'의 빠져나감이라 보는 한 그렇다. 그렇다면 백장미가 창백해지기 위해서는, 장미색이라는 일관된 상태에서 벗어난 장미의 색이 존재하며(또는 색의 장미가 존재하며) 그것이 색이 옅어지는 상태로 바뀌어가는 것이라는 상태의 전환에 대한 상상이 필요하다. 이때 동원되는 것은 장미의 색, 바래지는 색, 외부의 자극(풍화·비 등), 시간의 흐름...... 그런 무수한 상태의 변화 속에서 백장미는 창백해지고, 백장미의 창백이라는 소거된 말에 이르렀을 때 소거된 모든 시간은 모두 소환된다. 백장미 죽음에 가까워진 상태에서 백장미 삶의 이력을 함축하는 방식으로.
깨진 조각이 비추는 것1) 박지일, 『물보라』 최하연, 『보헤미아 유리』 내가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면 시인은 나를 던지는 사람이다. 인간은 한평생 던져지면서 파편화된 존재의 조각들을 주워 담는다. 시가 그 존재의 조각들이라면 시인은 먼저 깨져 본 사람이다. 어떤 시가 당신에게 온다면 그것은 당신이 찾던 존재의 한 조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모은 조각이 당신이 모은 조각과 다르지 않다면,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임에 틀림 없다. * 『물보라』의 깨진 조각은 존재의 움직임을 비추는 금속의 표면이다. 행위를 하지 않아도 그것은 움직임을 포착한다. 밥을 먹기 위해 손을 움직이거나, 입을 오물거려 씹거나 삼키는 행위 없이, 그러니까 동작하지 않는 행위를 하는 존재의 움직임을 담아낸다. 예컨대 「물보라」(15p)에서 시인에게 중요한 것은 "중단전은 하단전과 상단전 사이에 있다"는 것과 "접시는 벽과 문, 어둠과 빛 사이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에게는 이 사실이 중요하다. 아니, 시인은 이 사실을 중요하다고 믿는다. 아니, 중요하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모종의 대상에 대한 믿음은 믿지 않음에 다름 아니다. 그것이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이 믿음을 발명해내기 때문이다. 기실 불안하지 않으면 구태여 믿지 않아도 상관 없다. 쓴 것은 찢어버리면 그만이듯 믿음은 믿지 않으면 그만이다. "나의 쓰기와 저 배는 상관 없이 간다" 당신의 마음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이 믿음은 그러니까 나와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곧 '나를 믿는다'는 말은 '나를 믿고 싶다'는 말이다. '너를 믿는다'는 말은 '너를 믿고 싶다'는 말이다. 하물며 '하고 싶다'는 소망은 "너는 네게 주도권이 없"(「물보라」,p.137)을 때 발생한다. 주도권 있는 자는 무언가를 간절하게 소망하지 않는다. 영화 트로이에서 아킬레스가 했던 말을 곱씹어본다. 신이 인간을 질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죽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마지막 순간을 살기 때문이다. 삶은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다. 당신이 그 삶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생과 사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신과 같은 존재라면, 당신은 굳이 살고 싶지 않아도 된다. 굳이 죽고 싶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당신은 태어나고 싶을 때 태어나지 않았다. 즉 당신에게는 삶에 주도권이 없다. 그러므로 살아 있음은 그 자체로 살고 싶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물보라』의 깨진 조각으로부터 나는 살아 있음만으로 살고 싶다는 소망을 발견한다. 그리고 살고 싶다는 말은 "지긋지긋하게도 세상이 좋다"(「물보라」,p.17)는 말이었다. 느리다고 쓰면 느리게 나아가는 듯하고, 느리지 않다고 쓰면 느리지 않게 나아가는 듯한 시간. 나는 믿을 수 없다. 방향은 나를 바꾼다. 나의 쓰기와 저 배는 상관없이 간다. - 「물보라」(p.15) 부분 "느리게 쓰면 느리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느리게 나아가는 듯하고", "느리지 않다고 쓰면 느리지 않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느리지 않게 나아가는 듯한 시간"은 바로 우리가 그 삶의 주도권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삶은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에 감각될 수 있는 것이다. 믿음과 믿지 않음, 삶과 죽음, 그 사이에서의 '부딪침'. 그것이 물보라다. 물보라의 사전적 정의가 '물결이 바위 따위에 부딪쳐 사방으로 흩어지는 자잘한 물방울'이라면, 여기서 방점은 그러므로 자잘한 물방울이 아닌 '부딪쳐' '흩어지는' 데에 찍혀 있다. 흩어지는 것들은 참혹하게 아름답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은 흩어진다.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다. 연애는 물보라를 즐긴다. 물보라 물보라. 키스는 섞이는 혀를 잊었다. 머릿속에서 키스는 절단한다 섞이는 혀를 잊은 본인을. 키스와 키스는 멀어지면서 비로소 키스가 된다. 너는 나와 혀를 섞는구나. 나와 멀어지기 위해서. - 「물보라」(25p) 전문 한편 물보라는 물보라를 일으키기도 한다. "연애"는 당신이라는 물보라와 나라는 물보라가 부딪히면서 또 하나의 물보라를 일으키는 사건이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을 당신의 삶과 나의 삶이 부딪히면서 또 다른 삶을 일으킨다. 키스를 하면 혀가 부딪치고, 나란히 걸으면 손이 부딪친다. 키스는 혀들이 굴곡되어 부딪치고 섞이면서 타액이 서로의 몸으로 흩어지는 일이다. 그리고 이 '부딪침'은 기억을 생성한다. 기억은 발생하는 동시에 '왜곡'된 것이고, 다른 기억들과 '섞이는 것'이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흩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도, 나도, 키스도, 기억도 이 모든 게 다 물보라다. 따라서 연애란 물보라와 물보라가 부딪혀서 물보라를 일으키는 일이다. 물보라 없는 물은 고여 있는 물이다. 물이 순환되지 않을 때 그 자리에서 번식하는 박테리아가 물을 썩게 만든다. 물은 고여 있으면 썩는다. 물보라는 산소를 공급하고 물을 순환시키며 정화한다. 물이 고여 썩지 않게 하기 위해, 살아 있기 위해 우리는 그러므로 필사적으로 물보라를 일으켜야 한다. 박살나기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질 하고 달음박질 해야 한다. 시인에게 발버둥질은 시 쓰기이다. 시인은 그가 쓴 시에 주도권이 없다. 이미지는 정해진 그곳이 아니라 사방으로 튀어야만 한다. 시란 깨지고 박살난 그 기록들이 얽히면서, 그것과 독자 각자의 기억이 설키면서 발생하는 무수한 이미지의 사건이니까. 그러므로 시인은 자기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 날의 기억들을 부수고 날짜를 쪼개는 이 시집의 부록은 특히 그것을 여실히 드러낸다. 너는 그를 사랑하고 그는 네게 미안하다. 사랑해서 미안할 수는 있지만 미안해서 사랑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가 찾아오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네가 그를 찾아 헤매는 것이 순서가 맞다. 그것이 이치다. 한데 왜 그는 계속하여 네 앞에 설까? 네가 그의 앞에 가서 설 때, 그는 너를 상대하지 않는다. 그는 매번 너를 거절하고 내치고 지우려고 한다. 네게 미안하기는 한 걸까? 너는 그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사랑은 무엇이든 이겨 낼 수 있다고 한다. 너는 그 말을 그 무엇에게도 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읽는다. 모처럼 네가 마음속에서 그를 지워 냈을 때 너는 네게 미안해한다. - 「11月4日」 전문 하지만 거기 너는 없다. 너만 상대해 주지 않는 거울. 망할 놈의 거울. 초원에 선 울타리만을 보여 주는 거울. 거울은 엄마를 닮았다. 너는 엄마라는 단어를 처음 써 본다. 너는 거울로 도망한다. 거울은 너를 찾아 사방을 비춘다. 양의 걸음으로 울타리를 향해 너는 걷는다. 양처럼 밥을 먹고 양처럼 뿔을 간다. 그리고 양은 울보다. 울음소리를 들은 거울이 양을 비춘다. 너는 거울 바깥으로 도망한다. 염소가 울타리 안에서 바깥을 찾아 맴돈다. 염소는 울보다. 너는 염소에게 미안하고 양에게도 미안하다. 미안해서 눈물이 나고 마침 눈물이 나온 김에 울어 본다. 거울은 바깥과 안을 번갈아 비춘다. 안과 밖 모두를 비추는 거울,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는 거울. 망할 놈의 거울 - 「11月4.3日」 전문 첫 번째 인용시는 아마도 아직 사랑하는 '너'를 매번 "거절하고 내치고 지우려고 했던" '그'를 이제는 지워 낸 사람의 기록일 테다. 그리고 그 다음 인용시는 그 날의 풍경에 대한 감각의 재구성이다. "그를 지워 냈을 때" '너'가 "네게 미안"한 것은 '너'가 지워 낸 것이 '그'가 아니라 '그를 사랑한 너'이기 때문이다. '너'가 사랑했던 사람은 너 자신이었고, '너'는 그런 너의 모습을 지워서 "네게 미안"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너'와 "네게 미안"하고 "너를 거절하고 내치고 지우려고" 하는 '그'는 '거울' 같은 존재이다. '너'를 상대하지 않는 '그'가 '너'와 다르지 않다면 '너'는 "너만 상대해 주지 않는 거울"이다. 그것은 "너를 찾아 사방을 비추"지만 "너를 거절하고 내치고 지우려고" 하는 '그'. '너'는 그렇기 때문에 "거울 바깥으로 도망한다". '너'와 '그', 그리고 '너'를 지워 낸 '너'는 각자 그 자리에서 양처럼 염소처럼 울지만, 이미 '너'를 지워 냈기 때문에 "안과 밖 모두를 비추는 거울"은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는 거울"이 된다. 이처럼 기억은 흩어지면서 파편화 되지만 동시에 흩어진 다른 기억의 파편들과 섞이면서 감각적으로 재구성된다. 물보라가 일면서 사방으로 흩어지는 자잘한 물방울들이 부피와 빛깔이 다른 또 하나의 물보라를 일으키는 것이다. 자, 이제 세상에 물보라 아닌 것 없고 물보라 일으키지 않는 물보라 없다. 우리는 『물보라』라는 물보라가 일으킨 물보라다. 그의 시는 우리를 살게 하고, 우리는 그를 살게 한다. 당신이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했던 발버둥질과 달음박질, 그 숨 막히는 고투가 결국 나를 숨쉬게 한다. ('모르겠다'는 말은 사실 모르고 싶은 당신의 소망이 아니던가요?) * 『물보라』의 깨진 조각이 존재의 움직임을 비추는 금속의 표면이라면, 『보헤미아 유리』의 깨진 조각은 존재 그 너머의 풍경을 모으거나 분산시키는 렌즈에 가깝다. 폭우가 내리던 언젠가 고인을 떠올린 적이 있다. 그와 함께했던 풍경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벅차오르는 동시에 곧 씻겨져 내려 갈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폭우 이후에 뒤섞인 풍경은 곳곳에 그를 심어두었고, 어디에도 그는 없지만 어디에나 그가 있었다. 그 풍경의 파편들을 모으다 보면 언젠가 그를 만날 수 있을까? 시인은 존재의 기억을 무작위로 뒤섞고, 그것을 곳곳의 풍경에 심어두는 것으로 존재의 흔적을 보존한다. 양철 지붕 위로 비가 내린다 하얗게 낯선 도시의 장례식장 앞에서 시외버스를 기다리듯 톡 들판과 들판이 이어지는 꽃대의 어디쯤에서 먼저 온 버스에 올라 내릴 곳을 가늠하듯 톡톡 더러는 졸고 툭 누군가는 젤리 한 봉지를 쥐고 있다 처마의 맛 들판 끝에 기차역이 있고 창밖 풍경은 잎맥의 반대쪽으로 달린다 뿌리에서 멀어지면 꽃과 가까워지는 중이니 빗소리를 들으며 종점까지 가기로 한다 젤리를 깨문다 툭 마른 풀잎의 맛, 검은 리본의 맛 들춰보면 남은 물기가 조금은 있으리라 들춰야 보이는 곳들은 발 없는 것들의 무덤- 눅눅하고 달고 창백했다 고인의 얼굴은 잊었다 상주의 이름도 잊었다 양철 지붕 아래 하얀 장례식장을 짓고 긴 객차를 대절해 문상 와서는 홀로 남겨진 사람 꽃대 위로 거짓말처럼 비가 내렸고 들판을 가로질러 바람이 일자 양철 지붕 한 짝이 날아갔다 양초가 젖는 동안 나머지 지붕을 걷어내고 지붕을 걷는 동안 무릎을 접어 절을 올린다 오금이 축축하게 저려온다 툭툭 혓바늘이 솟아올랐지만 톡톡 양철 지붕이 빗방울을 때리듯이 나도옥잠화 하얀 꽃 안에 길고 검은 나비 한 마리가 앉았다가 일어선다 - 「흰꽃」 "양철 지붕 위로 비가 내리"는 이곳은 누군가의 장례식장이다. 빗소리가 유독 크고 선명하게 들려오는 이 쓸쓸한 풍경은 비가 그치고 소리가 멎으면, 아니 그보다 먼저 빈소를 벗어나면서 이내 잊힐 풍경이다. 존재'였던' 것들의 풍경은 이제 굳이 들추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들춰야 보이는 곳들"이 된다. 하지만 시인은 흔적을 곳곳에 심어두는 것으로 들추지 않아도 보이는 풍경으로 그것을 재구성한다. 예컨대 양철 지붕 위로 내리는 빗소리는 시인에 의해 누군가 고개를 '툭' 떨구고 졸고 있는 모습으로, 젤리를 '툭' 깨무는 모습으로, 혓바늘이 '톡톡' 솟아오르는 모습으로 치환된다. 말하자면 청각적 심상의 그것이 다양한 시각적 심상의 그것으로 곳곳에 분산 되면서 풍경은 파편화 되는 동시에 보존된다. 한편 어느날 문득 밟히는 "신발 속 모래 한 알"을 두고 "걸을 때마다 소식이 생긴 것 같아" "그냥 두었다"(「보헤미아 유리」)는 시구로 미루어보았을 때 시인은 풍경을 부수어서 재구성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어쨌든 풍경이란 감각하는 자에 의한 기억의 소산이라서, 그 자체로 이미 파편화 된 것이라면, 시인은 그것을 최대한 비슷하게 그 자국으로 남기는 사람이다. 존재가 남긴 자국은 그 존재를 온전히 표상할 수 없으나, 흐릿하게나마 형태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흔적이다. 그렇다면 자국을 남기는 가장 쉬운 방법은 깨무는 것이다. 깨물면 대개는 물린 자국이 생긴다. 예컨대 한 계절의 풍경을 기록하고 싶으면 그 계절을 이루는 것들을 깨물면 된다. 코너에는 재봉틀이 있다. 꿰맬 수 있는 명암과 꿰맬 수 없는 독경이 바람에 실려 밀려온다. 라일락을 깨물었다. 남천을 깨물었다. 나비의 엉덩이를 깨물었다. 모과나무의 그림자를 갉아먹으며 딱정벌레가 지나간다. 돌에게 돌을 던진 돌을 향해 개가 짖는다. - 「쉿」부분 여기서 깨무는 것은 무엇을 터뜨리는 것도 아프게 하는 것도 지워지게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흔적을 남기는 일이다. 내가 그 존재에 잠시 닿아 있었음을 그저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모과나무를 갉아먹는 것이 아니라 "모과나무의 그림자를 갉아 먹"어야 한다. 그리고 시인에게 있어서 깨무는 것은 시 쓰는 일과 다르지 않다. 하물며 깨물리는 것과 깨무는 것이 서로의 존재에 닿아야 하는 것이 깨물이라면 시인이 풍경을 깨물 때 그도 그것에 깨물린다. 그러므로 흔적을 남기는 일은 쌍방의 사건이다. 풍경을 곳곳에 분산하고 자국으로 남겨서 그 흔적을 보존하는 시인의 렌즈로 우리는 기억을 또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게 된다. 누구나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기억하고 싶은 어느 날이 있지만 흩어지는 기억을 어찌 할 줄을 몰라 망각하기를 택한다. 그러나 "식의 좌변이 망각이면 우변은 반드시 슬픔이 뒤따른다"(「쉬」). 비록 그 풍경이 슬플지라도 '기억되는 슬픔'은 다만 슬프지 않을 것이다. 덕분에 나는 그를 만나기 위한 풍경의 파편들을 조금 더 모은 것 같다. 그는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다. * 존재의 움직임을 비추는 『물보라』의 깨진 조각과, 풍경을 분산하거나 깨물어서 기억하려는 『보헤미아 유리』의 깨진 조각은 다른 듯 다르지 않다. 물보라가 일면서 사방으로 흩어지는 자잘한 물방울과 폭우 이후에 사방으로 떠내려가는 풍경은 모두 물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물론 전자는 존재의 움직임이고, 후자는 존재의 자국 흔적이다. 존재 자체로 불안한 우리는 평생토록 무엇인가에 부딪치고 깨지고 발버둥질 하며 살아간다. 그로 인해 일어나는 물보라의 자잘한 물방울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또 다른 물보라를 일으킨다. 물보라가 일면서 물은 순환하고 정화되며 생명력을 얻는다. 한편 삶에 폭우가 내린 이후 휩쓸린 풍경들은 곳곳에서 기억의 파편으로 발견된다. 또한 존재와 존재가 맞물리면서 생긴 자국은 너와 내가 살아 있다는 혹은 살아 있었다는 존재의 흔적이다. 깨무는 것과 깨물린 것은 서로의 존재를 증명한다. 결국 움직임도, 자국도 모두 삶에 대한 증명이고 살아 있음에 대한 방증이다. 중요한 것은 '존재'이다. 존재가 없으면 움직임도 자국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살아서, 살아 있음을 말해야 하는 것이다. * 내가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면 시인은 나를 던지는 사람이다. 인간은 한평생 던져지면서 파편화된 존재의 조각들을 주워 담는다. 시가 그 존재의 조각들이라면 시인은 먼저 깨져본 사람이다. 어떤 시가 당신에게 온다면 그것은 당신이 찾던 존재의 한 조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모은 조각이 당신이 모은 조각과 다르지 않다면,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임에 틀림 없다. 1) 「물보라」(2024) 에서 인용 시편이 「물보라」 연작시인 경우 쪽수만 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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