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창작과비평 2024년 겨울호(제206호)
시의 커먼즈를 향한 비평의 고투
독일의 철학자 안젤름 야페(Anselm Jappe)는 250년 전 처음 등장한 자본주의적 생활방식, 생산방식, 사고방식이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인간과 세계 사이에 끼어든 공허하고 추상적인 가치형태, 다시 말해 화폐의 위기가 자본주의의 파국이자 우리가 직면한 근본적 위기임을 지적하는 말이다.1) 세계의 파국을 상상하게 만드는 재앙이자 이미 강력한 현실이 된 기후위기 역시 자본의 위기에 연루되어 있다. 지속가능성에 관한 어떤 통념과도 대립되는 자본주의체제에서 생태 재앙이 필연적임은2) 이미 지적된 바 있다. 이상기후 현상으로 인한 생태난민의 증가는 자본의 양극화와 맞물린 기후불평등의 확산을 증명한다.
기후위기를 야기한 문명을 비판하며 인식론적 전환을 꾀해온 문학의 실천은,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재구성하고 물질의 존재론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시도로 이어지고 있다. 한편 생성언어예술의 영역에서는 인공지능을 도구로 활용하는 문학의 가능성과 한계를 지속적으로 성찰하며 “인간적 언어”(자연언어)에서 “인간의 언어” 전체로3) 탐색의 범주를 넓히고자 한다. 삶과 문학의 전환이라는 과제는 사유의 영역을 인간이라는 범주 밖으로 이끌고 인간과 비인간의 공존과 공생을 구상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만드는 중이다. 2010년대 중반 이후 제기된 문학 커먼즈에 관한 논의도 이러한 맥락에 있다. 사회학적·인류학적·생태학적 커먼즈 담론의 확산과 함께 “언어를 매개로 하며 지식, 규범, 정보, 정동 등 모두와 관계하는 문학”이 “오늘날 가장 중요한 커먼즈”4) 가운데 하나라는 인식은 위기의 시대에 맞서 문학적 연대의 대안적 모델을 모색하는 한국문학의 현실적 고민과도 맞닿는다.
서로 다른 입장에서 ‘현재의 시’5)를 조명하는 세편의 글을 시의 커먼즈6)를 사유하는 맥락에서 읽어보려고 한다. 지금 문학이 안고 있는 과제를 염두에 두고 커먼즈로서의 시가 무엇이며 어떻게 가능한가를, 시를 통한 커먼즈가 가능하다면 그 조건과 전제는 무엇일까를 탐색해보기 위해서이다.
최다영 「동시대 가속류 시의 생산 조건과 가능성」 「망각지—채굴 불가」7)
문학평론가 최다영은 디지털 플랫폼 자본주의 시대의 시적 발화 패턴에 주목하며 ‘가속류’라는 명명을 제안한다. 가속류는 “객관적·사실적인 단문의 진술 활용이 두드러”지고, “특정 패턴을 자동적으로 반복”하는 시적 발화 현상을 일컫는다(「동시대」, 84면). 그는 최근 시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발화의 패턴이 인공적 생성언어와 유사하다고 분석하며 인간의 욕망과 주체성이 제거된 기계적 발화가 시인과 독자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호응을 얻는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디지털화된 자본주의가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내면화하게 만들어 시쓰기를 마치 문장 생성기계에 의한 자동발화와 같은 자동 창작으로 견인한다는 논지를 펼친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가치평가가 목적은 아니라고 덧붙이지만 최다영의 비평은 가속류가 보여준 플랫폼 알고리즘 문법이 독자를 (시)쓰기에 참여시킴으로써 “발화의 특권성이 광장에 있는 모두의 몫으로 돌려질”(132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하기에 이른다. 유한한 존재로서 인간이 지닌 경험과 정서에 기초한 시적 발화를 거부하면서 기계화된 자동발화를 생성하는 플랫폼 알고리즘을 문학적 민주주의의 기반으로 삼은 셈이다.
그런데 플랫폼 알고리즘에 기반하여 전개된 최다영의 해석과 전망은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생각하게 한다. 먼저 이 글이 출구 없는 인지자본주의를 현실로 인정하면서도 플랫폼 알고리즘을 중립적으로 다룬다는 점이다.“축적된 데이터가 커먼즈로서 공유된다는 가정하에, 특권적 창작 주체가 소거되고 익명의 시쓰기가 보편화되는 미래를 상정해볼 수 있”(131면)다는 그의 주장은 플랫폼 알고리즘을 소유한 자본의 개입을 생략함으로써 가속류와 플랫폼 알고리즘의 대치점을 스스로 놓쳐버린다. 데이터 노동을 회수하는 자본을 생략하고 플랫폼 알고리즘의 산출물인 데이터가 플랫폼 알고리즘의 외부에 있는 커먼즈로 공유된다는 가정 자체가 모순을 안고 있다. 디지털공간이 기술-사회적 인터페이스들을 약호화하고 사회적 상호작용의 신경회로와 틀을 생산하며 집합적 두뇌를 조직하는 자본에 장악되어 있다면8) 플랫폼 알고리즘의 생산물과 커먼즈의 생산물은 구분되어야 한다.전자는 기업의 이윤으로 흡수되지만 후자는 사회에 증여된다. 플랫폼 자본주의 시대의 데이터 인클로저(data enclosure)9)에 대항할 전략이 없다면 가속류는 자본의 예속화로부터 탈주하는 미학적 형식으로 채택되기 어렵다.
“광장’으로서의’ 시”(132면)라는 문학적 연대의 가능성을 생각할 때 짚어야 할 또다른 문제는 최다영이 현재 문학제도의 장벽으로 지적하는 “발화의 특권성”(같은 면)이다. 이 글의 논지에 따르면 현재 문학장은 시에 대한 가치 평가를 진입장벽으로 세워두고 공식적으로 승인된 시인에게만 발화의 특권을 부여한다. 이 한계를 뛰어넘어 시인과 독자가 평등한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게 하는 장치가 가속류이다. 최다영은 문학이 “수용자로 하여금 시대적 명령을 체화하고 그 형식을 학습, 모방하도록 하는 재생산 장치”라고 전제하면서 가속류가 독자들의 “인지 회로를 자동화하여 시 창작에 알고리즘 체계를 도입하도록 권유한다”(같은 면)는 주장을 편다. 한마디로 가속류는 광장에 참여한 모든 이에게 발화의 권리를 분배하는 형식인 셈이다. 물론 분배는 의미의 독점을 거부한다는 뜻도 있지만 시의 의미가 발생하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창작 주체가 지닌 발화의 특권이 무엇인지는 모호해지고 만다. 적어도 현대예술이 작품을 텍스트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이래 미적 생산물이 지닌 가치와 의미는 수용자에 의해 향유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하나의 예술 작품은 실로 반은 예술가의 활동의 결과이고, 다른 반은 (그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읽고, 혹은 그것을 듣는) 대중의 활동의 결과물”10)이라고 볼 때, 예술적 원동력은 커먼즈의 창조와 실현에서 작동하기 마련이다. 시의 향유 또한 이미 정해진 의미와 가치를 소비하는 과정이 아니라 감각의 불일치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산출해내는 창조적 과정이다. 독점될 수밖에 없는 상품과 달리 시는 불화 속에서 그 의미를 누구도 소유할 수 없을 때 풍요로워진다.
요컨대 문학적 연대 혹은 시의 커먼즈를 구상할 때 유의할 것은 발화(쓰기)가 시의 커먼즈에 참여하는 한 방식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점이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지만 소유할 수 없으며 참여한 이들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 되기를 경험하게 하는 시의 커먼즈에서 시인과 독자의 경계는 유동적이고 불안정하며 임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모두가 시인이 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시를 매개로 시인과 독자가 함께 시의 의미를 산출하고, 시를 통해 사물과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야를 경험하는 일이다. 최다영의 논의는 디지털공간을 장악한 플랫폼 알고리즘의 내면화 현상을 시적 발화와 긴밀히 연결시켜 성찰해보게 한다. 그러나 동시에 ‘현재의 시’를 마주하는 비평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플랫폼 알고리즘 외부의 현실이며, 또한 시를 통해 현실을 보는 새로운 눈을 발견하는 일이다.
송종원 「되찾은 ‘님’의 시간」
‘시의 공동영역’을 탐색하는 문학평론가 송종원의 「되찾은 ‘님’의 시간:커먼즈로서의 한국시와 시비평」(『창작과비평』 2024년 여름호)은 시의 커먼즈에 대한 본격적인 비평을 시도한다. 시가 현실 사회와 접속해온 독특한 역사성을 읽어내면서 인간의 경험과 감정이 응축된 삶의 면면을 들여다보고 그로써 시의 커먼즈를 증명하고자 한다. 송종원이 시의 커먼즈를 증명하기 위해 텍스트로 삼은 것은 각자의 방식으로 세계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거나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강렬한 삶의 감각을 발화함으로써 독자를 현실과 대면하게 만드는 시들이다. 물론 시적 언어의 의미가 재발견되도록, 달리 말해 시어들이 다시 생기와 활력을 얻도록 재특이화(resingularization)11)를 견인하는 일 역시 시를 읽고 의미를 발견해내는 비평의 역할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송종원에게 비평의 대상으로서 ‘현재의 시’란 유한하고 취약한 존재가 역사적·사회적 맥락 위에서 삶을 제약하는 힘과 불화를 겪으며 경험하는 삶의 감각을 표출하는 시이다. 살아 있음을 위협하는 세계의 질서와 통제에 맞서 그것을 돌파하고자 하는 긴장을 품은 시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다룬 이수명과 박노해의 시가 말해주듯이 시인이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이나 세계를 보는 눈은 불일치할 수밖에 없고, 이것은 공동영역이 탄생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송종원은 다양한 삶의 흔적이 새겨진 한국시라는 세계에서 “시인들은 각자의 꿈과 시 속에 그려진 꿈을 겹쳐놓고 사유할 영역을 얻었”(27면)다고 지적하면서 한국시가, 역사적 시간성과 언어를 매개로 형성된 삶의 공통감각 위에 창조된 ‘시의 공동영역’이라고 명명한다. 보편적 담론의 차원에서 논의되는 시의 커먼즈를 한국시라는 영역에서 구체화하기 위해 그는 이수명의 시와 박노해의 시가 교차하는 지점을 발견한다. 시인들의 작업을 성실히 읽어내며 “민주적 대화의 공간을 열어 협업하는 일”(같은 면)을 비평의 역할로 설정한 이 글에서 우리는 시의 커먼즈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확인하게 된다.
시의 커먼즈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송종원이 강조하는 것은 ‘역사적 시간성’이다. 자칫 과거의 기억을 강조하는 태도로 비춰질 수도 있겠지만, 시의 커먼즈에서 역사적 시간성이 고려되어야 하는 이유는 시적 의미와 가치를 발굴하고 공유하는 과정인 커머닝(commoning)이 경험의 지배를 받으며 역사적 맥락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12) 창조적 과정으로서 커머닝에 초점을 두고 한국시를 논의하려면 삶이 축적된 시간을 배제할 수 없고, 비평역시 역사적 맥락을 두텁고 풍부하게 읽어내야 하는 임무를 맡아야 한다. 그러나 송종원은 민주화 이후 한국 시문학의 난해화 앞에서 시비평이 그러한 작업에 충실하지 못했다며 비판한다. 삶이 빠져 있는 비평의 언어가 “시의 두터운 언어에 내포된 의미는 발굴하지 못한 채 방어적 개념들로 시에 깃든 우리 삶을 고립시”(18면)키기에 이르렀다는 성찰을 바탕으로 송종원의 글이 조명하는 것은 현대사의 질곡과 삶의 풍경이 만나는 고유한 시들이다. 그의 글에서 섬세하게 분석되는 이세기 시가 드러내는 고유한 장소성과 역사적 감각은 ‘잃어버린 시의 커먼즈’를 회복하려는 비평의 지향성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더불어 송종원의 글에서 커먼즈와 ‘님’이라는 한국시의 대표적인 시어를 연결하는 지점은 여러모로 주목된다. 그의 논지를 따라 추론해보면 ‘님’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꿈이자 현실의 외부지만 이미 현실 안에 예정되어 있는 공백이다. 이것을 창조적 열망이라고도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일반적인 커먼즈가 ‘자원, 공동체, 일련의 사회적 규약’이라는 세 항으로 구성된다면13) 창조적 열망이 강조되어야 하는 시의 커먼즈는 ‘언어, 시인/독자, 문학장, 님’이라는 네가지 항으로 구성해볼 수 있다. 이를 토대로 형성되는 한국 시의 공통감각은 동질성에 기반한 문화적 정체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운동성을 지닌다. 부연하면 시의 커먼즈를 가능케 하는 한국시의 공통감각이란 선험적 동질성에 기반하거나 외적인 준거로 작동할 수 없고, 고정적이거나 불변하는 것도 아니며, 심지어 과거에만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도 관여하는 힘이자 내적 긴장이다. 그것은 하나의 이념이나 가치로 수렴될 수 없지만 감각의 영역을 통해 분명히 공유되고 있으며 현재의 삶을 통해 재창조된다. 이것을 다양한 시적 발화로 구현해내고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삶의 가능성들을 실험하는 것이 바로 시의 커머닝이다.
송종원의 논의는 시의 커먼즈에 대한 선언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시의 커먼즈가 어떻게 구성되고 작동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특히 이수명과 박노해 시의 문학사적 맥락이 교신하는 지점을 새롭게 겹쳐 읽으며 시의 관계맺음을 사유하는 부분은 커머닝으로서의 시와 거기에 참여하는 비평의 역할을 제시함으로써 이에 관한 후속 비평의 등장을 기대해보게 한다. 물론 역사적 시간성과 언어를 공통감각의 조건으로 삼고 있는 이 글이 더 부연해야 할 점도 없지는 않다. 문화정체성과는 다른 한국시의 공통감각이라는 난제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님’이라는 자리가 무엇인지 면밀하게 설명될 필요가 있다. 시의 커먼즈를 탐색하는 비평이 더욱 예리해져야 하는 대목은 커먼즈로서의 문학이 언어적·역사적·정서적 동질성을 지닌 문화적 산물이나 이미 주어진 실체가 아니라 매순간 갱신되어야 하는 유동적이고 지속적인 실천의 현장이라는 것을14) 증명해야 하는 순간이다. ‘님’은 바로 그 실천의 장소에서 경험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광장‘으로서의’ 시를 위한 조건으로 디지털 플랫폼 시대의 발화 형식을 살피는 최다영의 비평과 커머닝으로서 한국시의 가능성을 짚으면서 역사적 경험과 창조적 열망 속에서 재해석되는 삶의 의미를 조명하는 송종원의 비평을 살펴보았다. 문학장에 참여한 이들이 새로운 문학적 연대의 모델을 희망한다면 시(문학)의 커먼즈를 말하고자 하는 비평의 고투는 계속되어야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새로운 길을 찾으려면 언제나 길을 잃을 각오가 필요하듯이 시의 커먼즈에 다가가는 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아직까지 비평이 사유하지 못했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기 위한 ‘협동적 창조’의 과정이라면 그것을 위한 분투는 비평의 소진이 아니라 비평의 활성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기대해본다.
- 1) 안젤름 야페 『파국이 온다』, 강수돌 옮김, 천년의상상 2021, 137면 참조
- 2)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 박진철 옮김, 리시올 2018, 40면 참조.
- 3) 김언·권보연·허희 좌담 「우리는 왜 인공지능으로 문학을 꿈꾸는가?」, 『현대시』 2024년 10월호 참조. 인용은 128면.
- 4) 황정아 「문학성과 커먼즈」, 『창작과비평』 2018년 여름호, 17면.
- 5) “현재로부터 탈주하는 것이 아닌, 현재에 압도되는 것도 아닌, ‘현재의 시’는 어디에 있을까”(최원식 「자력갱생의 시학」, 『창작과비평』 2005년 여름호, 22면)라는 질문에 담긴 비평의 태도를 잇기 위해 사용한 표현이다.
- 6) 시의 커먼즈란 시라는 장르를 매개로 한 커먼즈(commons)라는 맥락에서 쓴 표현이다. 시적 커먼즈, 시-커먼즈라고 불러도 무방하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시의 커먼즈로 통일해서 사용했다. 여기서 다루는 글에서 송종원은 ‘시의 공동영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 7) 최다영은 현재의 시를 ‘가속류’라 명명하며 두편의 글을 연달아 발표했다. 여기서는 「동시대 가속류 시의 생산 조건과 가능성」(『문학동네』 2024년 여름호, 이하 「동시대」)과 「망각지—채굴 불가:가속류 시 현상에 반영된 인지 자본주의의 (비)상상력」(『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이하 이 글 인용은 본문에 면수만 표기) 두편을 함께 살핀다.
- 8) 조정환 『지구 제국』, 갈무리 2002, 166~67면.
- 9) 데이터 인클로저는 디지털공간의 데이터 활동을 이윤으로 가치화하고 그것을 사유화하는 것을 말한다. 인클로저의 형태로서 플랫폼 기업은 알고리즘을 이용해 이용자의 데이터 활동(노동)을 포획하는 자동화 기계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광석 『피지털 커먼즈』, 갈무리 2021 참조.
- 10) 마우리찌오 랏짜라또 「자본-노동에서 자본-삶으로」, 질 들뢰즈 외 『비물질노동과 다중』, 서창현 외 옮김, 갈무리 2021, 267면.
- 11) 문학·철학 연구자 정남영은 프랑스 철학자 펠릭스 가따리(Félix Guattari)의 논의를 빌려 재특이화(resingularization)란 “예술이 ‘전례 없는, 예상치 못하고 생각하지 못한 존재의 질을 생성’하는 원리이며 미적 패러다임에서 모든 것이 계속적으로 재창안되고 처음부터 시작되는 원리”라고 설명한다. 정남영 「현대 자본주의와 미적 생산」, 『비물질노동과 다중』, 350~51면.
- 12) 데이비드 볼리어 『공유인으로 사고하라』, 배수현 옮김, 갈무리 2015, 189면.
- 13) 같은 책 40면.
- 14) Michael K. Bourdaghs, A Fictional Commons, Duke University Press 2021, 174~7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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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올려보는 장면이지만, 예컨대 당사자가 아님에도 타자를 대신 이야기할 때의 윤리문제는 최근 장르를 불문하고 상식으로 여겨진다. 그 와중에 픽션에서 대상화를 피하는 일이 근본적으로 가능한가라는 회의가 종종 제기되는가 하면 타자를 모델로 삼는 소설의 종언이 비관적으로 선언되기도 했다.6) 그간 문화예술 창작계에서 당사자(성)의 강조는 ‘당사자만 말할 수 있다’는 방식으로 오인되기도 했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서사의 주체를 ‘저자’ 개인으로 환원시키는 좁은 의미의 당사자주의를 우려하는 논의도 오갔다.7) 당사자주의를 넘는 ‘타자와의 관계성’ 혹은 ‘목격-증인’의 자리8)가 강조될 때조차, 그것은 나와 타자의 좁힐 수 없는 차이를 근거로 회의되거나, 진짜 당사자가 누구인지를 가리는 시시비비로 연결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당사자(성)를 둘러싼 논의는 연대가 필요한 자리에서 때로 그것을 더디게 하거나 좌절시켰고, 이런 곤경은 오늘날 ‘나’ ‘자기’에 대한 감각이 무엇에 구속되어 있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진정한 나를 찾는다’는 식의 익숙한 말은 어쩌면 차이로서 증명되는 나를 갈망하는 표현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인식은 일상에서 종종 불안정한 것으로 경험된다. 오늘날 기술 상황에서 타자와의 차이를 통해 확인되는 고유한 나에 대한 바람은 점점 더 곤란을 겪는다. 사용자 데이터 기반 서비스를 표방하는 무수한 플랫폼에서도 주체적 행위, 고유성, 독창성 같은 변별자질을 통해 스스로를 해명하기란 요원해 보인다. 오늘날 우리는 더욱 ‘진정한 나’ ‘진짜 나’를 갈망할 수밖에 없이 세팅된 세계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유와 권리에 대해 조밀해지는 법과 제도가 이러한 이중구속을 강화하는 것도 물론이다. 앞서 적었듯 오늘날 자기서사는 특히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소수자의 존재와 글쓰기를 가시화한 양식의 하나다. 그것은 이 세계 존재를 둘러싼 오랜 위계의 구조를 환기시켰고, 스스로가 서 있는 위치에 대한 감각을 정치화했으며, 자기 삶의 주권을 표명하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러한 ‘자기’는 여전히 개인, 차이, 구획, 정체성, 소유 같은 관념 사이를 공회전하는 측면이 있어왔다. 물론 이것이 현행 세계 속 ‘나’의 지배적 조건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단적으로 대개의 사람들은 어떤 정체성들의 소유자(개인)로 식별되며 인구로 셈해진다. 그러니 정체성을 둘러싼 시민권 투쟁의 즉각적 장소 역시 바로 여기일 수밖에 없다. 정체성에서 출발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그 너머를 향해야 한다는 이야기가9)종종 지난하게 여겨지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요컨대 지금 ‘자기’를 둘러싼 이야기와 곤경이 동시에 부상하는 상황 앞에서 ‘나-1인칭-개인-소유’ 등의 계열어 속 자기표상은 불충분하거나 종종 모순적이다. 2. 나는 나를 소유할 수 있는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지에 따라 그 정체를 가늠하는 감각은 오늘날 존재 인식의 근간을 이룬다. 이때 ‘무엇’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이 글에서 더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소유’ 개념이다. 오늘날 개인 및 개인주의의 근간에 소유의 원리가 놓여 있다는 사실은 ‘소유적 개인주의’라는 말이 잘 드러내준다. 우선 짚어둘 것은, 여기에서의 소유란 유무형의 재화가 아니라 본래 인간 ‘신체’에 대한 소유를 의미했다는 사실이다. 즉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신체, 재능의 고유한 소유주로서의 개인이라는 인식에 기초”하는 “자유로운” 존재로 간주되었고, 이때의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인간이란 바로 이념형으로서의 능동적·자율적 개인에 다름 아니다. 자유는 곧 “소유권을 의미”했고, 그렇기에 소유권의 반대 개념은 탈소유·무소유가 아니라 “타인의 의미지에 대한 종속”으로 간주되었다.10) 의존을 죄악시하고 기피하며 자립한 개인의 능력을 상찬하는 오늘날 지배적 심상의 기원도 여기에서 잠시 짐작해볼 수 있다. 요컨대 소유적 개인주의에서 ‘소유적’이라는 말은 상품과의 관계 이전에 우선은 우리 신체, 그리고 나아가 우리 자신의 노동에 대한 소유를 의미했다. 우리의 신체란 비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재산”이었고 “완전한 자유의 기준은 자기 노동에 대한 소유권의 보유이며, 그 보유의 조건은 곧 물질적 재산의 소유”11)였다. 이는 강조건대 소유가 곧 내가 나 자신과 맺는 관계를 기초지었음을 의미한다. 바로 여기에서 ‘자아’ 역시 신체에 준거한 획정이 필요해진다. 즉 소유적 개인주의는 자아를 둘러싼 모순이나 모호함을 봉합하는 기술이기도 했다. 그런데 신체에 근거한 자아 역시 소유의 대상으로 간주되려면 먼저 일종의 객체가 되어야 한다. 신체를 누가 –다시 말해서 내가 – 소유하느냐의 문제 앞에서 자아는 하나의 구획된 것으로, 그리고 관리 가능한 일종의 통합된 것으로 간주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 ‘적절한 자아’를 가진 ‘주체’가 재산의 소유자로서 행동할 자격과 능력이 있는 사람 즉, 통상 남성·이성애자·백인·비장애인 등으로 간주되어왔음은 강조할 것도 없다. 소유에 기반한 자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특히 2010년대 이후 세계의 여러 변화 앞에서 새삼 부각되고 있는 것 같다.12) 이 세계의 인종·성·장애 여부 등을 둘러싼 정상성 각본에 대해서는 이제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소유’ 개념을 매개로 한 각본이라는 점에 대해 지금 다시 각별히 강조하고 싶다. 우리가 ‘가진 것’에 따라 온전한 인간인지 아닌지를 셈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곧 오늘날 지배적인 ‘주권적인 자아’(sovereign self)13) 개념을 구성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소수자의 정치적 수행성 논의에서야말로 강한 전제로 놓여 있었음을 기억해두고 싶다. 예컨대 퀴어 이론가이자 정치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2010년대 이후 논의에서 특히 소유적 개인주의의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자아 개념을 비판하고 그 너머를 상상하는 관점을 두드러지게 드러내온 점이 의미심장하다. 물론 “주권적, 유아독존적 자아 개념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며 “자아란 이미 관계적인 개념”이라는 그녀의 전제는 오늘날 상호의존적 관계나 타자윤리가 요청되는 자리에서 자주 참조되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이 지닌 정치성을 좀더 강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녀의 주장이 “소유적 개인주의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면서 “소유의 논리 바깥”14)을 고민하며 제출되어 왔음을 환기해야 한다. 그 맥락이 드러나지 않으면서 논해지는 관계성이나 타자 윤리는, 자유주의 휴머니즘과 그리 충돌하지 않는다. 오늘날 여전히 좁힐 수 없는 차이를 전제하는 당사자 논의의 곤경에도 근본적으로는 다른방식의 소유 혹은 (개인적) 소유 바깥이 상상되지 못하는 감각이 놓여 있는지 모른다. 동일성(정체성)으로부터 출발하여 궁극적으로는 차이의 연대로 나아가는 과정에 대한 오늘날의 많은 논의가 있다. 그런데 그 현장마다 좀더 원리적으로 환기해야 할 대목은 “서로가 서로에게 현전하기 위해서는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자기 박탈”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 혹은 “자아를 상대에게 넘겨주는 행위”15) 쪽이어야 할지 모르겠다. 나를 내어주는 일 없이 타인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본성을 제어하도록 하는 도덕이나 의무가 아니며, 우리는 본래 소유 이전의 존재라는 것. 요컨대 ‘자기’에 대한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오늘날 제2의 자연이 된 소유의 관념보다 더 오래된 관계적 존재 양태를 발견하고 긍정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소유를 근본적으로 질문하지 않는 관계성이나 커먼즈 논의는 다소 공허한 이상 혹은 도덕적 당위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하지만 소유보다 더 근본적이고 오래된 존재의 원리가 있다는 사실을 환기할 때, 관계성의 사유는 설득 문제가 아니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자 필연임이 밝혀진다. 이에 대해 한 편의 소설을 경유하여 좀더 생각해본다. 3. 나를 쓰는 일은 어떻게 너를 쓰는 일이 되는가 : 이주혜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속 ‘일기’에 대해 이주혜의 장편소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창비 2023. 이하 이 책에서 인용시 면수만 표기) 속 주인공은 불안, 공황 등으로 치료받는 50대 여성이다. 그는 현재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받은 남편과 가족의 위기로 고통받고 있다. 의사는 치료의 한 방편으로 일기 쓰기를 권하고, 주인공은 어느 글쓰기 교습소의 수업에 참여해 일기를 써나가며 그것을 타인들과 공유한다. 소설의 중요한 장치인 일기는, 일차적으로 의사의 권유를 통해 자기치유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런 설정은 글쓰기를 통해서 자신을 회복하며 스스로를 자기 삶의 주인(소유자)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을 먼저 떠올리게 한다. 최근 많은 자기 서사가 품고 있는 글쓰기의 수행성과 ‘자기’의 테크놀로지가 서사화된 듯 여겨진다. 하지만 이것은 소설에 대한 절반의 독해다. 주인공의 일기 안으로 좀더 들어가보자. 소설 속 일기는 주인공의 유년을 회고하는 장치다. 회고되는 시간은 1979년 겨울부터 1980년 초여름이다. 이 시간이 암시하는 바를 한국의 독자는 쉽게 알 수 있지만 그 의미를 전하는 것이 소설의 핵심은 아니다. 일기 속 사건이나 존재는 명료하게 요약하기 어렵다. 어린 주인공의 시점을 통해, 이른바 시대적인 것과 사적인 것은 썩 구별되지 않게 그려진다. 예컨대 한국 현대사의 격변을 암시하는 것들은 아이들을 재우고 어른들끼리 주고받는 비밀스러운 분위기,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모호함과 불안으로 묘사된다. 비상계엄령, 데모 등과 같은 시대어는 주인공의 사사로운 일상에 비해 배경으로만 놓여 있다. 하지만 직접 의미화하는 것 이상으로 배경의 구속력은 강하게 전달된다. 이런 효과가 주인공의 일기 속 기록으로부터 발생하고 있음을 우선 확인해둔다. 일기 속 사건과 사건, 장면과 장면 사이는 환유적으로 연결되며 궁극적 의미는 자꾸 미끄러진다. 회고되는 기억도 불안정하다. 아빠의 실종, 낯선 남자의 등장 및 그의 느닷없는 추방 등은 파편적 이미지로만 제시될 뿐 어떤 구체적 의미에 도달하지는 않는다. 이런 서사적 파편과 공백은 얼핏 소설적 개연성의 결함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간 우리가 회고에 기반한 성장서사, 기억서사로부터 어떤 익숙한 의미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작품들이 현재 시점에서 과거로 임의로 재구성·편집되는 과정을 노련하게 감추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 소설 속 일기는 그러한 과정을 최대한 지양하고 기억의 파편을 그대로 노출한다. 주인공의 일기에서 부상하는 것은 오히려 기억이 종종 부정교합을 수반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러한 기억주체로서 자기의 불안정함이다. 통상 일기 속 성찰 대상이 될 ‘자기’는 늘 스스로가 소유하는 객체로 전제된다. 하지만 이 소설 속 일기는 그 장르의 핵심인 자기를 문제의 장소로 삼는다. 자기는 애초에 불안정하고 픽션적일 수 있음이 우선 소설에 암시되어 있다. 불안정하다는 것은 윤곽이 불분명하다는 의미다. 어떤 소유의 형상으로 대상화될 수 없다는 말이다. 소설 속 일기는 처음에 분명 자기를 질료 삼는 자기치유의 의미를 부여받았지만, 실제 그 서술과정에서는 연루된 존재와 사건과 세계가 부조된다. 주인공과 친구, 사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등은 명료하게 구분되지 않는 얽힘(entanglement)으로 이미지화된다. 불안과 같은 정서도 누군가의 것(소유물)이라기보다 그 모두를 관통하고 아우르는 것으로 혼연해 있다.16) 예컨대 “시옷에게 비는 살이 부러진 우산과 젖은 신발을 의미했다. 그 축축함과 막막함은 군모를 깊숙이 눌러쓴 어느 군인이 국방색 우비 위로 길쭉한 소총을 끌어안고 집요하게 비를 맞고 있던 장면을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끌어들이기도 했다”(26면)는 대목을 보자. 지금 이 대목에서, 어린 시절 주인공이 싫어했던 비의 경험은 ‘젖은 신발’과 ‘소총을 든 어느 군인’을 매개로 겹쳐지며 그녀의 ‘비’에 대한 기억을 이미지화한다. 또한 이것은 지극히 내밀한 몸의 감각에 대한 기억인 동시에 한 시대의 폭력이 단번에 서사적으로 환기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사사롭다고 여겨지는 어린아이의 경험이지만, 거기에는 개체적 몸을 관통하는 어떤 세계가 있다. 이런 서술의 와중에 홀연 인지되는 주인공의 몸의 변용 순간도 흥미롭다. 소설에서 유독 강렬한 정서를 자아내는 대목이다. 주인공은 글쓰기 교실에 서 1980년 “5월의 한복판”(212면)의 일을 낭독하는데, 이는 유년시절 주인공이 품고 있던 비밀이 폭력적으로 억압된 경험에 대한 회고이다. 성인이 된 주인공은 수강생들 앞에서 그 회고의 일기를 읽으며 격렬한 울음을 터뜨린다. 그때까지의 서사 속 긴장은 순간 파열한다. 독자는 이 장면을 심리적 문제가 해결되는 단계로 읽고 싶은 강한 유혹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이것은 심리적·정서적 문제극복의 과정으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질적 시공간이 서로 긴장하다가 동시적으로 마주치며 폭발하는 순간에 가깝다. 가령 그녀의 현재 고통은 남편으로 인해 관계가 파괴된 일로 인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치유하기 위한 글쓰기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어른들에 의해 좌우되는 아이의 일상과 그 배후에 놓인 가부장제 및 친밀한 폭력의 -그것은 다름 아니라 남자아이에 대한 어른들의 염원 때문에 그녀가 자신의 성별을 숨긴 채 남성 성별을 수행해야 했던 일이다- 이 드러나자 느닷없이 그녀가 내쫓기는 순간은, 한없이 취약했던 존재가 무참히 상처 입는 순간이다. 그것은 정확히 학교에도 거리에도 총을 든 군인들이 있었던 ‘1980년 봄’ 한복판의 일로 기록된다. 지극히 내밀한 자기의 비밀이 시대의 폭력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 장면은 정확히 환기시킨다. 그녀의 뒤늦은 울음에는 서로 무관해 보이지만 구조를 공유하는 여러 시공간의 폭력이 가로지른다. 이 울음 장면은, 어떤 존재(몸)가 독자적인 개체이기 이전에 이미 늘 연루되어 있던 세계와의 교섭 현장이자 그 효과임을 증거하는 것 같다. ‘나’ ‘자기’는 선행되어 있다기보다 사건적으로 출현하고 이내 사라지는 것이다. 이후 주인공의 이야기가 후경화하고 타인들의 이야기가 본격 부상하는 서사 진행도 이를 뒷받침한다. 4부에서는 어린 그녀가 이사한 곳에서 만난 이들, 특히 이웃집 윤수와 그 가족 이야기가 다소 의미심장하게 전개된다. 윤수와의 우정, 이웃집과의 친교는 1980년대 이른바 기층민의 삶을 엿보게 하는 바가 있지만 그것을 기록하는 시선은 바깥에 있지 않고 그 삶 안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소설은 점점 현재 그들의 안부를 묻는 이야기로 이행한다. 그녀, 즉 1인칭 주인공 ‘나’의 이야기이자 일기 속 ‘시옷’의 이야기는 그 고유함을 버리지 않으면서 점점 한 시대의 공기를 ‘감각’시키는 이야기가 되어간다. 현재 ‘나’의 상처가 추동했을 글쓰기는 타인과의 관계가 지지해 온 시간을 회고하는 서사로 이행한다. ‘나’의 윤곽은 주인공의 일기뿐 아니라 소설 전체에서도 점점 흐려진다. 이들의 삶은 각자의 것으로 소유, 독점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 속에서 의미화된다. 즉 기존에 일기라는 1인칭 글쓰기가 담보하던 ‘나’ ‘자기’는 이 소설에서 어떤 기원이나 본질 혹은 증명의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삶이 어떻게 구성되고 어떤 메커니즘을 거쳐 의미화되는지 일기 쓰는 주인공이 체현한다. 주인공의 일기에 적히는 것은 할머니의 독경 소리, 늘 복잡한 감정을 품게 했던 옆집 친구 애니, 아버지의 빈자리 등 타인과 얽혀 있는 기억이며, 또한 이 소설에 그려지는 것은 그 일기를 함께 읽어주는 현재의 무심하면서 다정한 동료들의 모습이다. 이렇게 소설은, 자기를 쓰는 일이 곧 타자를 쓰는 일임을 보여준다. 좀더 적극적으로 의미부여를 한다면 이것은 나/너와 같은 개체적 몸을 초과하는, 혹은 그런 몸으로 분화하기 이전의(metastable)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읽은 일기 안팎의 ‘나’들은 개체들간의 상호적인(inter) 관계라기보다, 식별되지 않는 내적으로(intra) 얽힌 존재의 이미지에 가깝다. 즉 오롯한 자기, 내면 같은 표상이 본래 품고 있었을 모호함과 균열뿐 아니라, 그러한 자기와 내면을 구성시키는 무수한 연루됨 자체가 곧 ‘나’임을 암시하는 것이 이 소설 속 일기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감각으로 미처 식별되지 않는 무수한 사물도 나를 관통하고 구성할 것이다. 앞서 인용한 비 내리는 장면의 회고에서처럼 단일하게 통합된 자기가 아니라, 오히려 이질적 존재와 사건들, 시공간의 비인격적 웅성거림 속에서 불현듯 확인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각별히 기억해야 할 ‘자기’의 한 의미일지 모른다. 주인공이 일기 속 자신을 내내 ‘시옷’이라는 기호로 표기하고 지칭하는 것도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일기를 쓰는 주인공은 “‘나는’이라고 시작했더니 한줄도 쓸 수가 없었”(32면)다는 이유에서 시옷이라는 이름을 쓴다. 시옷은 “넘어지지 않고 걸어가는 사람처럼”(33면) 생겼다는 이유에서 선택되었는데, 이것이 서로를 지탱하는 ‘사람 인(人)’의 형상을 염두에 둔 작명임도 분명하다.17) 소설은 이렇게 주인공을 통해 처음부터 ‘나’라는 주어의 함의와 무게를 암시해두었으며, ‘나’의 시선이 독점해온 1인칭의 세계를 내어 주고 3인칭적 재현을 전경화한다. 이 소설을 두고 “‘나’의 쓰기가 스스로의 이야기에만 머무르지 않고 타인의 다면성을 서술하는 일로도 이어진다”18)는 평가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 적확하다. 소설 속 ‘나’는 명료한 윤곽과 표상을 갖는 존재이기 이전에, 내내 유동하고 있는 어떤 관계 자체이다. 이런 메커니즘을 생각할 때 오늘날 항간에서 말하는 타자 윤리는, 도덕적 의무가 아니라 존재의 원리이자 필연이다. 소유 너머 자기를 상상하는 일과, 연루됨 자체를 사유하는 것은 불가분이다. 4. 소유와 주권적 자기 너머, 혹은 소설적 커먼즈의 상상 지금까지 읽은 이주혜의 지금까지 읽은 이주혜의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속 ‘자기’는 ‘내 삶은 내가 소유하고 있다’는 식의 당사자성이나 자기인식과는 거리가 있다. 주권의 문제는 늘 경계 획정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19) 주권은 항상 권력 관계와 지배를 표시한다. 국가뿐 아니라 인간의 가장 내밀한 자아 역시 소유를 위해 구획되고 객체처럼 간주된다. 그런데 이주혜 소설은 ‘나’ ‘자기’가 그런 객체이기 이전에 이미 늘 타자와 연루되어 있는 준안정적인 지대임을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면 지금 주권적 자기 너머를 상상한다는 일은 어떤 구획과 소유와 권리 이전의 지대, 일종의 잠재성을 사유하는 일과 관련된다. 나아가 그러한 ‘자기’를 일종의 관계성의 장소로 전유하는 일이 요청된다. 어떤 존재가 배타적으로 점유한 예컨대 정체성을 본질처럼 인종화하는 통치술과 겨룰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독점될 수 없는 세계의 속성을 생각할 때, 미학과 윤리는 불가분이 아니라는 점도 다시 진지한 성찰의 대상이 된다. 물론 유의할 점은, 이것이 오늘날 세계의 역학과 실제를 없는 것처럼 여기며 소유로부터의 이탈을 낭만적으로 예찬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탈소유에 대한 논의는 자칫, 누군가의 땅을 무주지나 황무지로 간주하여 점유해온 정착민 식민주의의 역사를 정당화하기도 쉽다. 또한 무엇이든 가능한 자아를 낭만화하는 자유주의적 모토로 전유되기도 쉽다. 앞서 버틀러의 논의에서처럼 탈소유라는 말이 품고 있는 폭력적 ‘박탈’은 지금도 이 세계에서 늘 진행형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살핀 ‘나’ ‘자기’는 분명 소유 이전의 양태를 환기시킨다. 모든 사물에 소유의 권리가 부여되어온 역사에도 불구하고, 본래 경계를 획정할 수도 독점할 수도 없는 ‘나’가 있다. 근대적 주권 및 소유적 개인주의와 불가분이었던 자기를 이렇게 다르게 사유해볼 때, 커먼즈로서의 문학에 대해서도 약간의 첨언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언어, 감정, 사유, 땅, 하늘 등 나열할 수 없는 많은 것이 본래 누군가에게 배타적으로 귀속될 수 없는 커먼즈임은 부연할 것도 없다. 하지만 언어, 감정, 사유 등에 일종의 형식을 부여한 문학에 대해서 커먼즈의 사유를 진척시키는 데에는 모종의 어려움이 있다. 예컨대 ‘서명(署名)’으로 상징되는 오리지널리티와 소유의 감각이 성립시킨 (근대)문학 관념은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오늘날 문학을 둘러싸고 조밀해지는 법과 제도는 소유의 감각을 더욱 자명한 것으로 여겨지게 한다. 소유와 주권적 자기의 구조로부터 도피하지 않으면서 부당함을 문제 삼고, 동시에 그 구조 너머를 상상하는 일은 지난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커먼즈로서의 문학 논의에서 계속 질문해야 할 고리가 바로 이 소유의 원리임도 분명하다. 물론 많은 이들이 지적해왔듯, 커먼즈는 단지 주어져 있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커먼즈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그것은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라기보다 함께 만들어가야 할(commoning) 것이고,20) 때로는 투쟁의 산물21)이다. 그렇기에 현행 세계의 역학과 다양한 폭력을 문제 삼는 것은 곧 커먼즈의 주제이기도 하다. 소유를 자명하게 여기는 감각은 커먼즈의 사유를 자꾸 멈춰 세운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러한 이중구속적 상황에서 쉽게 몸을 빼거나 멈춰서는 안 된다. 한 문학연구자는, 새로운 소유권의 형태로 도래한 근대 일본문학 초창기 풍경을 조망하면서 거기에 아이러니하게도 다양한 커먼즈의 계기가 있었음을 발견한다. 그는 소유를 질문하는 불안정한 지대를 포함하여 “작가, 허구의 인물, 독자가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과정”으로부터 커먼즈의 가능성을 타진한다.22) 그는 질문한다. 어느 소설 속 ‘이름 없는 고양이’가 발화하는 그 발언권은 (고양이는 인간도 아니고 이름도 없다는 의미에서) 법적으로 누구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인물의 광기는, (통합되고 관리되는 자아를 갖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으로 소유의 주체적 위치에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닌지. 또는 한 여성의 소유를 둘러싼 한 지식인의 죄책감은 (가부장제 속 여성의 위치와 마찬가지로) 식민지를 폭력적으로 소유하는 당시 제국의 죄책감을 의미한 것 아닐지 등.23) 앞서 이주혜 소설에서 읽은 ‘나’ 역시 심지어 자기에게조차 독점될 수 없고, 늘 무언가와 연루되어 있는 일종의 준안정적인 지대임을 확인했다. 지금 커먼즈의 조건은 바로 이 불안정함, 혹은 경험되지 않은 잠재성 자체로부터 상상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바로 이 지대에서 바로 (방금 인용한 문장에서처럼) ‘독자, 인물, 작가’가 만나는 것 아닐까.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읽는 나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의 뒤표지에는 소설가 하성란의 이런 감상이 적혀 있다. “누구 한명의 것일 수 없는 그들의 이야기는 결국 이주혜의 이야기이자 책을 읽는 ‘나’ 들의 이야기가 된다.” 여기에서, 소설 속 그들의 이야기가 곧 “이주혜의 이야기이자 책을 읽는 ‘나’들의 이야기가 된다”는 대목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앞서 강조한 ‘자기박탈’ ‘자기를 내어주는 일’을 겹쳐 생각하고 싶다. 예를 들어, 우리는 허구로서의 이야기에서 나에 가까운 무언가를 만나고 공감한다. 하지만 때로는 그 이야기 속에서 자기를 잃고 헤매기도 한다. 이야기 속에서 나는 이미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 -예컨대 경험, 정체성- 에 대해 응답받기도 하지만, 반대로 나를 내어주는 장소가 곧 이야기이기도 하다. 앞서 이주혜 소설 속 주인공이 일기라는 형식 속에서 1인칭(나)을 내어 주면서 자기를 쓰는 일이 곧 타인을 쓰는 일이 되었음을 떠올려보자. 동시에 그때, 일기와 픽션을 구별할 수 없게 된 것을 떠올려보자(소설 속 한 인물은 그녀의 일기가 소설 같다고 말하고, 그녀는 자신의 글이 픽션이 아니라고 말한다). 일기가 타인들의 세계로 이행하는 서사 속에서 소유에 기반하는 주권적 자기의 형상은 교란된다. 그리고 픽션과 일기라는 형식과 관련해서도 장르적 구획 이전의 불명료한 지대가 부상된다. 자기를 내어주면서 도달한 곳이 타인의 세계와 더불어 소설적 장소라는 사실은 ‘소설적 커먼즈’ 의 또다른 의미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강조하건대 소유를 질문할 때, 경험으로 환원될 수 없는 잠재성의 지대가 열린다. 그것은 주권적 자기 너머의 연루됨 자체로 우리를 데려간다. 쓰는 이만 자기를 내어주는 것이 아니다. 독자, 소비자, 유저 등 특정 정체성의 이름으로 환원되기 이전의 나의 몸들이 거기에서 스스로를 잃고/잊고/헤매도록(dispossession) 초대받는다. 익숙한 회로 속에서 쉽게 공감하는 것만 ‘함께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스스로(라고 여겨지는 것)를 내어주는 일에 초대받고, 그 낯섦에 기꺼이 응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지는 시대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는지 모른다. 이것이 지금 커먼즈로서의 문학에 보태볼 또 하나의 의미일 수 있지 않을까. 1) 계간 『창작과비평』 2025년 봄호(제207호)에 게재된 동명의 글을 수정 보완했지만, 이에 대한 좀더 최근의 상세한 내용은 「말하는 입에서 듣는 귀까지 : ‘자기서사’ 문제틀의 재구성」(김미지 외, 『젠더』, 문학과지성사, 2025)에서 전개했다. 2) 이른바 ‘자기서사’가 2016~17년 광장, 페미니즘 대중화의 시간을 통과하며 특히 부상했다는 점이 2025년 2월 시점에서 다시 의미심장하게 환기된다. 12·3 사태 이후 여의도, 광화문, 남태령, 한 강진 광장에서의 ‘자유발언’ 및 이후 일일이 거론할 수 없는 다양한 그룹(시민활동가, 소수정당, 연구자 등)의 집담회, 토론회 등에서 자유발언이 이어지고 있고 그 발언 속 ‘개인’과 ‘연대’의 형식에 많은 이가 주목하고 있다. 광장의 경험은 늘 말을 바꾸어왔고, 말은 늘 광장을 바꾸어왔다. 지금의 분위기는 또 한번 자기를 발화하는 형식에 대한 논의가 재점화될 것을 예고하는 듯하다. 이 글에서 ‘자기’는 self의 번역어이다. 부분적으로 ‘자아’로 읽는 것이 자연스러울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기’로 표기했다. 3) 장영은,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민음사, 2018 참조. 4) 김은하, 「젊고 아픈/미친 여자들과 자기 이론으로서의 글쓰기」, 『여성문학연구』61호, 2024 참조. 5) 한영인, 「자아 생산 장치로서의 에세이」, 『갈라지는 욕망들』, 창비 2024, 215, 217면. 6) 日比嘉高, 『プライヴァシーの誕生』, 新曜社 2020, 254면 참조. 7) 오혜진, 「지금 한국문학장에서 ‘퀴어한 것’은 무엇인가(1)」, 『문학과사회-하이픈』, 2018년 겨울호. 8) 오카 마리,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 이재봉·사이키 가쓰히로 옮김, 현암사 2016. ‘목격-증인 되기’에 대해서는 8장을 참조할 수 있다. 9) 가야트리 스피박, 『스피박의 대담』(새럼 하라쉼 엮음, 이경순 옮김, 갈무리, 2006, 254쪽),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어셈블리』(이승준·정유진 옮김, 알렙, 2020) 참조. 10) C. B. 맥퍼슨, 『소유적 개인주의의 정치이론』, 이유동 옮김, 인간사랑 1991, 25-26, 206면. 11) 같은 책, 212면. 12) 특히 2010년대 이후 영어권의 각 분과마다 신자유주의 지배구조 분석과 관련해 ‘소유적 개인주의 50년 후’라는 문제의식이 널리 공유되어왔음을 참조해본다. 13) 주디스 버틀러·아테나 아타나시오우, 『박탈』, 김응산 옮김, 자음과모음 2016 참조. 이 책에서 두 대담자는, 오늘날 세계가 어떻게 주체의 구성적 상호의존성을 차단하고 정착민 식민 체계에서 박탈·탈소유(dispossession)를 역사적으로 합리화하기 위해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넘어설 원리가 무엇일지 논의한다. 14) 같은 책, 26-27, 338면. 15) 같은 책, 337면. 16) 여기에서 물리적으로 구획된 몸을 넘는 정동적인 경험과 연결신체(assemblage)의 주제를 소환할 수도 있고, 이런 이유에서 이 소설은 ‘5월 광주 소설’의 새로운 방법을 가늠케도 한다. 이것은 단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축자적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 ‘개인적인 것’의 의미를 재구축하는 과정, 그리고 ‘자기’라는 내적 표상이 시간의 축적 속에서 구축되는 과정을 확인하는 것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어떤 사건에 대한 당사자와 비당사자 문제, 이른바 경험 없는 세대의 ‘포스트 기억 장치’ 문제에 시사하는 바도 적지 않다. 17) 물론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시옷에게 이름조차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순간을 이야기하며 그에 대해 “사과하고” “말을 걸고 싶었”으며 “이름을 불러주고” “다정하게 안부를 묻고 싶었다”(347면)고 적어두기도 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작가의 사후적 소회와 별개로 분명 ‘나’ 혹은 어떤 고유명을 피하는 설정 속에서 오히려 자기=나를 둘러싼 존재의 원리를 근원적으로 보여준다. 18) 김다솔, 「붉은 언어로부터 무한히 탄생하는 세계」, 『문학동네』 2024년 봄호 56면. 19) 우카이 사토시, 『주권의 너머에서』, 신지영 옮김, 그린비 2010, 379면 참조. 20) 데이비드 볼리어, 『공유인으로 사고하라』, 배수현 옮김, 갈무리 2015 참조. 21) Silvia Federici, Re-enchanting the World, PM Press 2018, 87면 참조. 22) Michael K. Bourdaghs, A Fictional Commons, Duke University Press 2021, 11, 23면. 23) Michael K. Bourdaghs, 같은 책 2~4부 참조.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문」 「마음」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을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기후위기로 인한 지구 멸망의 시나리오는 이제 더는 황당한 괴소문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종말은 우리 곁에 바투 다가온 예측 가능한 결말이자 부대끼며 살아가야 할 반려가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 더해 2024년 말 우리는 45년 만에 다시 계엄을 경험하게 되었고 참사를 반복적으로 목격해야만 했다. 현재 우리에게 일상이란 반복되는 보통의 나날이 아니라 필사적으로 수호해야만 누릴 수 있는 놀랍도록 운수 좋은 날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는 우리가 구할 수 있는 해답이 무엇인지를 면밀히 따져보는 일만큼이나 어떠한 해답을 구하려고 노력할 것인지, 그 구도의 자세를 설정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전력을 다해 살아남되 생존에만 매몰되지 않고서 더 나은 방향으로 삶을 변화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뒤집어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지' 질문하게 되었다는 한강 작가의 말에 힘을 얻어, 지금 물어야 하는 문학적인 질문을 해본다. 도달하고 싶은 미래를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미리 체험하게 하는 문학이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응답이 될 수 있는 양경언과 인아영의 비평을 읽었다. 두 평론을 만나면서 미래를 새로이 구축하는 서정과 그에 대한 논의의 갱신이 현재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그러한 긍정적인 예측이 극복되어야 하는 낡은 장르로 여겨졌던 '서정시'의 가능성을 재탐색하면서 도출될 때, 과거-현재-미래는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고 선순환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의 평론가들이 미래로 뻗어간 시가 현재를 어떻게 바꾸어나갈지 논의하며 치열해지는 것도 그 이유에서일 것이다. 양경언 「노래가 들리는 곳」 양경언은 「노래가 들리는 곳: 서정시의 변혁성에 대하여」(『창작과비평』 2024년 겨울호)에서 전운이 감돌고 기후위기가 심화된 현사회에서 삶을 '사는 일'이 아닌 '살아남는 일'로 인식하는 경향성이 더욱 공고해졌음을 지적한다. 그는 생존 이외의 선택지를 차단하여 삶을 죽음의 대타항으로만 사유하게 하고 "더 나은 삶으로의 진전이나 변화를 거부하게 만드는" 정치적인 맥락을 비판한다. 살아남기만을 강조하는 사회가 살 만한 삶을 향한 욕망 자체를 소거해버린다는 분석에 동의하게 된다. 양경언은 "우리 시대가 놓치고 있는 '좋은 삶'에 대한 구상과 내용"(79면)을 회복하기 위해 더 나은 세상을 추구해왔던 분투의 역사를 참조하자고 말한다. 그리고 새로운 문명전환의 노정에서 우리가 다시금 들여다보아야 할 문학형식은 생생한 발화를 통해서 변혁의 비전을 제시해온 서정시라고 역설한다. 그에 따르면 좋은 서정시는 "'사는 일'을 '살아남는 일'로" 축소하지 않고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삶"(80면)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그러므로 서정시와 그에 대한 논의는 우리가 갈망하는 다음 시대로 진입하기 위한 이행의 역량을 고취한다. 가령 양경언은 신경림 시 「상암동의 쇠가락」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불변의 진리를 전하는 대행자의 역할을 하기보다 "지배적인 체제의 승인을 얻지 못할지라도 주관적인 시선을 진솔하게 가꾸어" "같은 편에 서고자 하는 이들의 편으로 다가가는 태도를 취한다"(84면)고 해석한다. 「상암동의 쇠가락」은 산동네 사람들의 생기와 자력을 존중하면서 그 각각의 삶이 평등하게 공존할 수 있도록 살핀다. 그것은 타자의 고유함을 보편으로 무리하게 확장하거나 함부로 자아와 동일시하려는 움직임과는 다르다. 양경언은 서정시가 세계를 자아에 종속시켜 타자성까지 동일화하고 만다는 기존의 다소 도식적인 이해에서 벗어나, "'주관'을 지킴으로써 '대상'을 돌보는 관계를 성립시"(같은 면)키고 이로써 다양한 삶이 "평등하게 공존하는 감각을 길러"(86면)내 생의 전망을 길어올린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서정시에서 발현되는 주관성이란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정을 뚝심 있게 보살피면서 이를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노래로 울려퍼지도록 두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85면) 양경언의 글을 읽으며 폭압적인 동일시의 토대로 간주되고 극복의 대상으로 여겨져온 '주관성'이 비대해진 자의식, 혹은 나르시시즘적인 주체성의 동의어로 취급되어온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자아를 비워내야만 타자를 들일 자리가 존재하리라고 믿음으로써 주관성을 소거하는 작업에 몰두하여 산출해낸 것이 어쩌면 윤리적인 여백이 아니라, 개성적인 목소리들이 지워지고 남은 허무한 공백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사유는 한편으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인간을 배격하는 일로 귀결되는 흐름을 저지하는 기능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포스트휴머니즘 담론 및 신유물론이 활성화됨에 따라 '인간답게' 사고하고 행동하자는 휴머니즘적 요청이 누군가에게는 폭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음을 감지하게 되었고 이는 긍정할 만한 변화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최소한의 도덕을 요구할 수 있게 하는 기준이기도 한 '인간다움'을 해체하려 애쓰다 인간이 지닌 타자에의 감응력과, 존엄하게 살아가려는 의지까지 허물 위험은 없는지 점검해야 한다. 문제적으로 언급되는 문학적 경향을 개선하는 일이 꼭 그것을 소거하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질 필요는 없음을 새삼 깨닫는다. 서정시가 극복되어야 할 무엇으로 정의되기 시작했던 것은 그것이 타자를 자아(화자)로 수렴시키는 장르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이라는 테제가 받아들여짐에 따라 그간 서정적 경험이란 객체에 대한 주체의 일방적 동일시로 이해되어온 경향이 있지만, 이는 자아와 세계가 '서로에게 침투(interpenetration)'하여 동화되는 과정에 가깝다.1) 시적 자아에 부여되는 과도한 권력을 해결하기 위해 다성성, 분열적 주체 등을 고안해왔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아 마땅하지만, 서정의 이해방식에 대해서는 재논의해볼 만하다. 더불어 김승희의 시 「호텔 자유로」에서 자아가 세계와 이미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려 한 양경언의 해석을 살펴보자. 꽉 막힌 자유로에서 진정한 자유를 갈망하는 시적 자아의 감정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밀고 가는 자유"를 수행했던 전봉준의 의지와 "공습 탄환에 스러진" 카불 소녀의 간절함과 맞닿는다.(88~89면) 물론 이 같은 연결 역시 화자의 의식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이 창출될 때 여전히 자아가 우위에 놓이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는 점은 더욱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서정시가 세계를 자아화한다는 식의 단선적인 이해가 세계와 자아를 분리하여 바라볼 것을 요구하고 있었음은 확실해진다. 습관적으로 전제되는 이 같은 대립 구도는 자아가 역사성과 계급성, 사회 이데올로기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진공 상태의 개인처럼 느껴지도록 종용한다. 새로운 세계를 향해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시에서 "만인의 몸짓"(89면)이 감지되고, 각자의 바람이 여러 존재의 마음과 공명할 수 있는 이유는 자아라는 단위가 근본적으로 타자와의 연결을 포함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이 자아의 일방적인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양경언이 말했듯 '누가 말하는가'를 '누구와 함께 말하는가'로 바꾸어 쓰고 '누구와 함께 나아가는가'로 풀어낼 수 있을 듯하다. 새로운 미래를 불러들이는 서정시는 현재를 구하는 노래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인아영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밤은 아름답다」 인아영의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밤은 아름답다: 1990년대 이후 한국문학의 미적인 지도」(『문학동네』 2024년 겨울호) 역시 지극한 주관성에 대한 고찰로 시작한다. 인아영은 실제 현실과 거리가 멀다 해도 분명히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내면의 풍경을 말하고 싶은 자신의 욕망에서 출발해 "내 마음이 바라보는 풍경으로부터 현실을 이해하고" "꿈속의 장면으로부터 거꾸로 세계를 재구성"(111면)하는 방식이 2020년대 한국시에서 자주 목격되는 조류라고 이야기한다. 화자의 마음과 세계를 일치시키고 그 세계를 믿기로 결심하여, 현실의 논리에 근간한 사실주의적 접근보다 내면에서 출현하는 세계 및 그에 대한 애정을 우선시하는 경향성을 인아영은 '내향성'이라고 명명한다. 인아영의 적극적인 해석에 보태어, 시적 세계의 협소화, 비개연적이고 자의적인 세계관, 현실감각의 결여 등으로 비판받기도 하는 최근의 시편들이 독해될 때의 효과를 덧붙여 논의해보고 싶다. 시인-화자가 꿈꾸는 환상적이고 주관적인 세계를 마음껏 탐닉하고 그 내밀한 세계관을 자세히 정립해나가는 2020년대의 시가 펼쳐 보이려는 것은 자기유폐적인 망상이 아니다. 팬데믹, 전쟁, 기후위기와 같은 거대한 시류 앞에 일상이 무너져가는 현시대에서 개인적인 노력이나 개개인의 영향력에 대한 믿음은 거의 소멸한 상태다. 모종의 개별적 행위가 어떤 변화를 창출할 것이라는 기대를 품기 어려운 때, 이와 반대로 '나'라는 개인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나'의 마음에 따라 세계가 구축되는 최근 시의 방식은 독자에게 믿을 수 없지만 믿고 싶은 매력적인 세계의 주조 원리가 된다. 그 간극을 채우는 것은 원하는 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꿈꾸는 일이 그 가능성과 무관하게 가치롭다는 판단이자, 극도의 주관성을 응원하면서 자기만의 특수성을 가꾸고 수호하고자 하는 이들 독자들의 적극적인 지지일 것이다. 인아영은 이러한 내향성의 성행이 "서정적 아름다움의 귀환"이거나 "현실과 긴밀하게 연루된 시적 흐름에 대한 반동"(같은 면)일 수 있겠다고도 이야기한다. '현실적'이라 여겨지는 이성중심 세계의 논리에만 얽매이지 않겠다는 저항의 움직임으로도, 서정의 창조적 계승으로도 보인다는 말이다. "'미래파'의 실험적 성격보다는" "서정의 계보에 한층 가까운" 느낌을 주는 미래파 이후의 시 경향성을 '서정의 귀환'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최근의 서정이 지닌 차별성을 희석해버릴 위험이 있어 동의하지 않는 고봉준 평론가 역시 그러한 경향성이 시대 맥락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는 서정의 역사성과 가능성을 환기할 수 있음을 긍정한다. 그는 서정이 시인의 진솔한 감정표현 정도로 환원되는 일을 경계하면서 서정시의 정서적 호소력은 시인의 자기고백을 통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것이 시인-개인"이라는 주관성을 지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설명한다.2) 그러므로 서정적 주관성 역시 개인사로 한정되지 않으며 공동의 경험으로 나아가는 확장성을 지닐 수 있다고 보았다. 필자 역시 2010년대 후반부터 생겨난 시적 경향이 억압적 동일시로 퇴행하거나 과거의 유행이 되돌아오는 흐름이라 보지 않는다.3) 그보다는 시인과 화자의 분리와 시적 주체의 분열을 전제하는 시가 주류였던 시기를 거쳐, 가상이라 하더라도 속아주고 싶은 단일하고도 확신에 찬 목소리를 내는 '화자-시인-시민'이라는 하나의 통합체를 확인하고 싶은 갈망에 대한 새로운 응답으로 보인다고 해석한 바 있다. 박소란의 시들을 분석하며, 서로의 안녕을 묻는 모두가 헤어짐 없이 평온히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시에서만큼은 선명하게 그리고 실현시킴으로써 불가능의 가능성을 점쳐보는 것이 변화된 서정의 방식일지 모른다고 추측했었다. 이처럼 내향성이자 달라진 서정성이 두드러지는 시를 쓰고 읽는 일은, 각자의 주관을 지닌 개인이 공통된 미적 경험으로 만나 변혁의 주체로 기능할 수 있다는, 행여 그것이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최소한 소망해볼 수는 있다는 역능을 확인하고 회복하는 과정이 된다. 그렇다면 지금의 시가 보여주는 내향성은 혼란한 세계를 등지고 자기폐쇄적인 몽상으로 잠기고자 하는 소극성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자아의 주관적인 체험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 현실적이지 않기에 무시당하곤 하는 내밀한 세계를 아름다운 것으로 경험하고, 타자인 독자 역시 시와 시에 드러난 주체 내부에 접속하는 이 일련의 과정을 우리는 어쩌면 새롭고도 낯익은 얼굴의 '환상적 서정'이라고 이야기해볼 수 있다. 인아영은 현대예술에서 고전적 의미에서의 '미적인 것'은 종말했다고 하더라도, 미적이라는 감각 자체는 "보편성에 대한 예감"을 지니기에 시대를 초월하여 "자기동일성으로부터"(112면) 벗어나는 방식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아름다움이 주관적인 감상에 가까운 특수성을 지향할 때도 여전히 다른 이들 또한 이를 느낄 수 있으리라는 예감은 남는 것이다. 인아영의 논의는 주관성이 보편성 및 객관성과 대립하는 성질이라기보다 타자에게 있을 주관성을 함께 인지하게 만들어 어떤 방식으로든 이미 보편, 객관과 연루된 특성임을 생각하게 한다. 『문학동네』 30주년을 기념하여 기획된 '문학비평 키워드 1994-2024' 특집에 속한 이 글에서 인아영은 미학성에 초점을 맞춰 감성적인 자질로서의 '미적인 것'이 한국문학에서 어떻게 변형되고 발전되어왔는지를 돌아본다. 이때 인아영은 현실에 얽매이지 않은 아름다움에 집중하는 시편들에 나타나는 미적 범주를 '귀여움'(cuteness)으로 명명한다. 귀여움이란 대상이 되는 사물의 위험성을 제거하고 무해하게 만들어 소비하려는 욕망에 근거한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증상적인 미감이지만, 자본가치로 환산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사소한 존재를 교환논리에서 지켜내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향성이 2020년대 시편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는 진단에 동의하지만, 이를 '귀여움'으로 범주화하는 것에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단어가 본래 지니고 있는 약소한 뉘앙스가 부각되면서, 애정하는 대상 혹은 세계가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지 않게 수호하는 소극적인 대응만이 지금의 시가 지닌 정치성인 것처럼 축소되어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귀여움과는 다른 결을 지닌 동시대 미학적 경험의 한축으로 '언캐니'(uncanny)를 꼽는다. 방대한 데이터가 쏟아지는 시대에 달라진 인지방식을 반영하여 "자동화된 알고리즘을 통해 응답하는 기계적인 방법"을 차용하는 시편들은 독자에게 "무언가 비인간적인 것이 압도적으로 끼어"(115면)드는 낯선 경험을 선사한다. 인간도 비인간도 아닌 비확정적인 상태에 걸쳐 있으므로 "미래에 대한 열려 있는 감각을 동반"(116면)하는 시는 우리가 인간이기를 그만두거나 인간에서 해방될 수 있는지가 아니라 새로운 무엇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해 질문하게 한다. 이러한 논의는 주관적인 미적 체험이 결코 '타자를 향해 열려 있음'과 대립하지 않으며 양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맞이하고 싶은 미래세계와 되고 싶은 미래상을 집요하게 꿈꾸고 그것을 언어화하는 일은 반대로 그러한 미래를 도모하기 위해 현재에서 중단되어야 할 것들을 비추면서 지금-여기를 구한다. 바라는 세계를 그리는 일을 멈추지 않는 서정시는 현재로 온다. 이것이 서정의 귀환인지 지속인지, 창조적 계승인지 변혁인지 단언할 수 없지만, 새롭게 쓰이는 우리의 미래인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1) 오문석, 「서정적 경험으로서 '상호침투'」, 『한국시학연구』 제80호, 2024, 132면. 2) 고봉준, 「서정의 고고학」, 『문학 이후의 문학』, 도서출판 b, 2020, 239~42면. 3) 성현아, 「시와 복고: 다시 만난 서정」, 『시와 사상』 2021년 여름호 참조.
김유진, 『평균율 연습』(문학동네 2024) 이미 단편 「음의 속성」(『보이지 않는 정원』, 문학동네, 2018)에서 등장한 바 있는 피아노 조율사는 김유진 소설이 다루는 가족간의 불화와 갈등에 잘 어울리는 직업이다. 미세하게 틀어진 음을 조절하고 감정의 진폭을 고르게 하는 일은 가족에게도 필요하다. 김유진 소설은 섬세한 조율사처럼 이들이 어떻게 틀어지고 불확실한 간극을 넓히게 되었는지를 탐사한다. 『평균율 연습』에서 이제 막 결혼 생활을 끝낸 수민과 수찬, 고리대금업을 하다가 실패한 수민의 엄마, 빠리에서 예술가로 활동하는 정우의 이야기는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내는 피아노의 현처럼 연결되어 있다. 소설은 주인공 수민이 피아노 조율 수업을 배우는 과정을 따라 삼인칭 시점으로 인물들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조율은 산술과 이론이 아니라 경험과 실전만이 중요한 삶의 기술이다. “실제로 피아노를 만져보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자신이 악기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 없다는 걸 깨달”(57면)은 수민처럼 상대를 모르면서도 안다고 착각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수민과 수찬의 이혼에도 그런 오해가 있었다. 수민이 프랑스 어학연수를 하던 시절 만난 수찬은 원예학을 전공한 유망한 청년이었으나 귀국해서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았고 수민의 피로와 불만은 쌓여만 갔다. 수민에게 배우자의 무능력은 “아주 자주 유대와 이해를 가로막는 장벽”(20면)이었다. 먼저 이혼을 말한 사람은 수찬이었지만 이미 정서적 이혼 상태와 다름없던 수민은 살려고 이혼한다는 수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틀린 부분을 찾아 고치는 유능한 편집자인 수민은 판사처럼 “단죄하고 처단하”(41면)는 일이 어울리는 “너무 엄격하고 고지식”(122면)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수민의 불행은 엄마 임정희의 불행과 닮았다. 임정희가 어린 시절 딸이라는 이유로 부모와 형제들에게 무시를 당했듯 수민 역시 친척집을 전전하며 자신의 개인성을 존중받지 못하며 자랐다. 슬픔과 두려움을 위로해 줄 누군가가 없었던 이들에게 결혼은 인생의 도피처였다. 임정희는 남편이 “자신을 새로운 세계로 데려가주리라는 확신”(111면)을 가졌고 수민은 “자신을 예상치 못한 곳으로 데려다줄 것만 같은”(97면) 예감으로 수찬과 결혼했다. 그러나 이들은 남편의 무능함을 견디지 못하고 이혼을 선택하고, 낭만적 사랑이나 구원의 허위성을 벗어나 자기 삶을 재조율하는 새로운 국면에 진입해야 한다. 인생 초기의 결핍은 임정희와 수민을 무뚝뚝하고 애정에 인색한 사람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가족 공동체에서 독립할 수 있게 했다. 이 점에서 『평균율 연습』은 가족보다 개인으로서의 과업에 몰두하는 여자들의 삶의 궤적을 그린다. 이혼 후 임정희는 생활고를 이겨내며 왕성한 경제활동을 펼친다. 서울의 아파트를 사고 시세차익을 노리는 “불확실한 숫자놀음”(73면)을 즐기며 전남편을 사업 파트너로 이용할 만큼 대범하고, 투자 사기를 당했을 때는 딸에게 호소하고 가족에 의지하기보다 주도적으로 소송에 임한다. 『평균율 연습』에서 이 둘과 대비를 이루는 것은 정우의 사랑 이야기이다. 정우는 프랑스 어학연수 시절 수민의 룸메이트이자 예술가로 자립한 여성으로 도피나 구원으로서의 사랑이 아닌 온전한 자신의 사랑을 창조한다. 그녀는 남자친구가 자신에게 실수할 때조차 상대에 대한 연민을 잃지 않는다. 정우는 남자친구를 사랑하고 있다. 불운한 사고를 겪은 그의 열일곱 살 시절로 가 곁에 있어주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의 척추를 따라 길게 이어진 흉터를 매만질 때마다 그 결함이 마치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149면)이라고 상상하는 정우는 그와 결혼 대신 새로운 가족형태인 시민연대계약을 맺으며 살아간다. 수민은 정우를 자신과 비교하지만, 그런 사랑은 수민에게도 있었다. 수찬의 이야기를 보면 이들이 서로 얼마나 기적 같은 존재였는지, 수찬이 얼마나 수민의 외로웠던 과거를 보듬어주려 했는지 알 수 있다. 사랑은 결혼이나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정우의 경우처럼 상대의 경험과 감정까지 자신의 것처럼 상상하는 능력이다. 수민이 수찬을 무능하게만 보는 것은 그런 상상력이 권태와 오해 속에서 무뎌졌음을 의미한다. 피아노 조율 학원 원장의 말처럼 평균율은 순정율이 만든 결함을 모든 건반에 조금씩 떠안겨 어긋남이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절충하는 대안이다. 조율은 완벽한 순정율이 아니라 “불확실성을 수용할 때에야 비로소 거리가 아름다워질 수 있”(194~195면)는 미묘한 작업이다. 수민은 이 조율 훈련의 심화 과정을 마쳤다. 그러나 “수민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너그러운 세계(202면)”는 왜 “고치고 또 고쳐 쓰는”(202면)” 과정이 필요하다. 엄마와 수찬의 결함에는 그들만의 이유가 있다. 엄마 임정희는 이혼 후 돈에 집착하며 살 수밖에 없었고 소심하고 마음이 여린 수찬은 회사의 인원 감축에 어쩔 도리 없이 권고사직을 당했다. 그렇다면 수민에게 필요한 조율은 무엇을 의미할까. 조율 수업에는 교훈적인 메시지들이 많지만 조율의 핵심은 그것의 기능이나 유용성에만 있지 않다. 수민에게 고치는 일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하나하나 매만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두 음의 진동수를 조화롭게 만드는 기술이 단번에 되지 않듯 수민의 삶도 무언가에 천천히 시간을 들이는 과정에 있다. 『평균율 연습』은 상대의 결함을 나눠가지려는 시도가 사랑과 이해의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기당한 엄마에게 같이 살자고 말하는 것은 수민이 선택한 조율의 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소설의 결말에서 수찬이 이혼 후에도 수민과 수민의 어머니와 이어나가는 우정이다. 그것은 가족에 관한 하나의 대안이자 수찬이 만드는 평균율이다. 지금 가족 서사에 필요한 조율이 있다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서로 지지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드는 상상력일 것이다. 전지영, 『타운하우스』(창비 2024) 전지영의 『타운하우스』는 어둡고 불편하다. 이 이야기들은 대체로 눈에 보이지 않는 위협과 위계가 삶을 어떻게 지옥으로 만드는지를 보여주고 결말을 유보한다. 긴장의 해소가 아니라 곤경의 실상을 지켜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말의 눈」은 폭력의 전염성을 파헤친 수작이다. 주인공 수연은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던 딸 서아를 섬에 있는 국제 학교로 전학시킨다. 새출발을 결심한 그곳의 타운하우스는 CCTV와 보안이 완비되었지만 그럴싸한 외관과 달리 미세하게 갈라진 이층 천장 틈으로 물이 새는 곳이다. 이곳에서 수연은 “눈에 보이지 않는 위협”(10면)을 경험한다. 이번에는 서아가 지희의 딸이 저지른 학교 폭력을 옆에서 방관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수연은 서아의 행동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개입하지 않은 채 서아가 가해자가 아니라는 것에 ‘비겁한 안도감’을 느낀다. 같은 타운하우스 이웃인 지희는 수연의 이러한 모순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인물이다. 지희는 자신의 딸이 가해자지만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걸 서아가 증언해 주기를 바라며 그동안 쌓은 친분과 의리를 내세워 수연을 압박한다. 지희는 폭풍우를 무릅쓰고 비가 세는 수연의 집 지붕에 올라가 방수포를 덮으려다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다. 어떻게든 자기 아이를 구하겠다는 지희의 얼굴에서 수연이 자신의 얼굴을 보는 장면은 예리한 통찰력이 엿보인다. “아이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35면)는 모성은 그들이 그토록 피하고 싶어하는 폭력을 은폐함으로써 폭력에 공모하기 쉽다. 지희처럼 궁지에 몰린 부모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그것은 수연에게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35면)이다. 여기서 피해자와 가해자, 방관자의 경계는 매우 모호하며 폭력은 언제 어디서든 서로를 위협하고 전염시킬 수 있다. 눈여겨 볼 점은 피해자의 내면에 숨겨진 가해 심리다. 친구의 폭력을 관망했던 서아는 맞는 아이의 고통을 외면하고 “차라리 때리는 쪽”(26면)이 낫다고 말한다. 수연의 가해 심리는 한층 교묘하고 잔인하다. 수연은 지희에게서 과거 자신의 선처를 바라던 가해자 부모의 모습을 떠올리며 지희를 떠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지붕에서 떨어진 지희가 깨어나지 않기를 은밀히 바란다. “같은 폭력을 반복”(23)할 것이라며 가해자들을 엄정하게 심판했던 수연의 도덕적 신념은 서아가 잠재적인 가해자가 됨으로써 무너진다. 소설 초반에 타운하우스를 어슬렁거렸던 말은 검은 실루엣으로 수연 앞에 다시 나타난다. 여기서 수연이 낯설게 마주한 것은 바깥의 위협 때문에 보지 못했던 자신의 내면이다. 수연은 말의 눈에 비친 얼굴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보지 못한다. 무고한 피해자였던 자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검은 웅덩이 같은 말의 눈은 수연으로 하여금 자기 안에 숨겨진 가해자의 마음을 보게 만든다. 수연은 자신을 부정하고 싶어하지만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폭력의 악순환은 지금 우리가 직시해야 하는 현실이다. 이 소설집에 엮인 작품들에서 삶의 안전지대는 찾아보기 어렵다. 걷잡을 수 없이 물이 새는 타운하우스는 “갑작스런 기온 변화, 결로, 바람과 비에 약”(8면)하고 인물들의 갈등은 악천후 속에서 고조된다. 이런 식의 묘사가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전지영의 소설에서 변화무쌍한 기후(climate)는 불가해한 삶에 관한 징표로 때로 인물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 「쥐」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와 솟아오른 불기둥은 군 내부의 불미스런 의혹을 감춘 해군 관사를 태울 기세로 커진다. 그러나 관사를 돌아다니는 쥐를 잡을 수 없는 것처럼 부조리의 실체는 밝혀지지 않는다.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 안으로 들이쳤지만」에서 기습적인 스콜은 아들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공무원인 주인공은 불합리한 공공 사업에 몰두하느라 아들의 죽음에 무방비 상태였고 성공적으로 끝난 사업은 자신의 일상에 예기치 않은 해를 입히는 중이다. 스콜은 아파트 지하 주차장을 침수시키며 평온한 일상 속에 숨어 있던 문제들을 수면 위로 올려놓는다. 「소리 소문 없이」의 ‘나’는 음대 입시생으로 피아노와 악보가 삽시간에 물에 잠기는 수해를 겪는다. 이 “이해되지 않는 일”(211면)은 입시 경쟁으로 누군가를 무너뜨리고 싶어하는 ‘나’의 뒤틀린 욕망을 누그러뜨리는 계기가 된다. 한편 자연재해와 관련된 소설적 배경은 삶의 불평등과 부조리를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언캐니 밸리」 속 도시 고지대에 있는 부촌 청한동에서 흐르는 물은, 장마철마다 ‘나’가 세 들어 사는 저지대 상가 건물을 물바다로 만든다. 그러나 청한동 노부부의 저택에서 일어나는 수상한 약물과 주사가 오가는 일들에 ‘나’는 접근할 수 없다. 기후는 한국 사회의 계급 지형도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을 침식시키는 중요한 사사적 요소이다. 『타운하우스』에서 악은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다. 친구나 동료에 대해 악의적인 루머를 퍼뜨리고(「뼈와 살」, 「소리 소문 없이」) 부당한 업무와 명령에 복종하는(「쥐」,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 안으로 들이쳤지만」) 인물들은 단지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할 뿐이다. 「맹점」에서 안과 의사 은애도 그런 유형의 인물이다. 은애는 어시장 노인들에게 고액의 백내장 수술을 해주고 보험제도의 틈새에서 이익을 착복한다. 병원에 노인 환자들을 공급하며 “주는 걸 확실히 주고 받을 걸 확실히 받는”(121면) 보험회사 영업사원 재복과 과잉 진료로 수술 건수를 늘리는 은애는 「말의 눈」의 수연과 지희처럼 비슷한 욕망으로 조응한다. 은애가 검게 젖은 어시장을 빠져나올 때 고양이 한마리가 생선 피와 비늘, 내장으로 범벅이 된 입으로 은애의 발을 맹렬하게 핥는 장면의 기이함은 그녀의 맹목적인 탐욕을 암시한다. 사회적 약자이자 가정폭력의 피해자였던 은애의 성공은 그러기에 더 착잡하다. “한 사람이 웃으면 다른 사람은 웃지 못하는”(「뼈와 살」) 경쟁 사회의 심리는 거의 생존 본능처럼 전지영 소설의 인물들에게 내면화되어 있다. 상처받은 피해자의 이야기는 익숙하다. 그러나 『타운하우스』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피해자의 상처를 돌보지 않는 사회가 만드는 파괴적인 갈등이 주목한다. 모두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되는 사회는 끔찍하다. 「맹점」의 은애처럼 소설의 다른 인물들도 자신의 성공 뒤에 누군가의 불운과 불행이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불길한 날씨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휩싸인 『타운하우스』는 각자도생의 시대를 반영한 한국형 고딕 소설로 손색이 없다. 비슷한 갈등 구조와 패턴이 반복되는 면도 있지만 이들 이야기가 일으킨 균열은 오래 들여다볼 가치가 있다. 그것은 낯설고 두려운 일이다. 자기도 모르게 세상의 폭력에 가담하는 사람들, 더 나쁘게는 알면서도 그 불길한 운명에 적신 발을 빼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우리의 얼굴이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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