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창작21 2024년 봄호(제64호)
문학이 기억하는 혹은 기억해야 할 역사
1. 문학적 기억과 태도
지난 계절에는 유난스럽게 역사적 사건에 대한 왜곡과 폄훼가 많았다.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징후적 사건이 합의된 역사에 대해 부정하고 비틀고 정치적 목적에 맞게 가공하는 일일 게다. 일찍이 박근혜 정권에서 시도하다 끝내 좌절되었던 역사 교과서 국정화 작업이 윤석열 정권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것은 전면적인 사상투쟁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항일 운동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지우고1) 그 위에 만주군관학교 출신 친일파 백선엽의 역사적 복원과 박정희와 이승만의 우상화 작업을 넘어 제주 4·3과 광주 5·18 2)을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문학의 영역에서 우리의 관심은 문학이 역사를 대하는 태도 곧,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하는 문제겠다.
우선적으로, 문학은 기억의 소산이다. 그 이유는 문학적 기억이 인간의 개인적 기억과 집단적 기억을 회상할 뿐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가기 때문이다.3) 그런데 기억은 왜곡과 변형이 그 숙명이라 할 것인데 까닭은 시간의 경과와 기억하는 자의 선택의 문제(관점)가 함께 뒤섞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는 몇 편의 소설을 읽으면서 문학이 기억해야 하는 역사적 사건의 올바른 태도에 대해 독자와 함께 숙고해 보려 한다.
2. 김훈 역사소설들의 매력과 불만
소설『하얼빈』은『칼의 노래』,『현의 노래』,『남한산성』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극한적 상황에 직면한 개인의 파편화된 고뇌를 그린다. 다른 하나는 사실 혹은 사건에 대한 의견보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데 공을 들인다. 전자는 그가 역사의 총체적 인식이나 전망을 신뢰하는 대신 언어가 객관적인 실재를 재현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후자는 실증주의 사학에서 견지하는 것처럼 역사가의 주관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역사적 사실의 기록에 충실할 것을 강조하는 것을 미덥게 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김훈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이분법으로 구획해서 선명한 갈등구조를 보여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훈은 비루할지언정 죽음보다는 생존을 보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권력에 대한 선망과 무력감, 그리고 생존의 욕망이 그의 무의식에 작동하고 있다.
『하얼빈』(2022)에서 안중근은 이토를 죽여야 한다는 대의명분보다 천주교 신자로서 그의 행위가 교리에 어긋난다는 점에 더 고뇌하는 듯 보인다. 아내 김아려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아이들 특히 그의 어머니와 함께 하얼빈으로 오지 못하고 명당성당 수녀원에 맡겨진 딸아이에 대해서도, 어머니 조마리아에 대해서도 그는 연민을 드러내지 않는다.『칼의 노래』(2001)에서 이순신은 명군의 뜻을 거스르고 일본을 쳐도 명군의 뜻을 좇아 일본을 보내도, 임금은 일본을 막을 장수가 필요치 않은 시간에 그 죄를 물어 죽음을 내릴 것을 그는 예감한다. 그는 “나는 다만 임금의 칼에 죽기는 싫었다. 나는 임금의 칼에 죽는 죽음의 무의미를 감당해낼 수 없었다.”(64쪽)고 말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죽어서 사는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현의 노래』에서 ‘아라’가 순장에 처 해질 때 상황을 바꿀 어떤 힘도 우륵은 갖고 있지 않다. 그는 무력감 속에서 슬픔을 겪는다. 뿐만 아니라 무너져 가는 가야의 운명 탓에 스스로가 ‘더 깊은 지옥’이라고 표현하는 적국 신라로 가서, 대장군 이사부 앞에서 우륵은 “다만 살아서 소리를 내려 하오.”(275쪽) 라고 그 뜻을 밝힌다.『남한산성』에서는 청나라 군대에 포위되어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김상헌과 최명길은 싸우다 화의를 모색할 것인가, 더 많은 희생을 막기 위해 화의를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로 갈등한다.
『하얼빈』에서 사실을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데 공을 들이는 대목 중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무엇보다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저격 살해하는 장면에 대한 묘사다. 소설의 서술자는 마치 무심한 목격자인 듯 다음처럼 묘사한다. “러시아 군인들 사이로 두 걸음 정도의 틈이 벌어지고 그 사이로 이토가 보였다.…… 안중근은 고요히 집중했다. 손바닥에 총의 반동이 가득할 때 안중근은 총알이 총구를 떠난 것을 알았다. 이토는 곧 죽었다. 이토는 하얼빈역 철로 위에서 죽었다.”(166-167쪽)
선명한 갈등구조를 보여주는 그의 서술전략은 허구로서의 역사소설을 읽는 재미를 더하는 장치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선명하게 드러나는 갈등구조 이면에 자리 잡은 김훈의 정치적 무의식, 곧 계급적 분리다. 김훈은 권력의 허망함과 폭력에 대해『칼의 노래』에서, 선조의 예를 들어 비판하고 있다. “나는 다만 임금의 칼에 죽기는 싫었다. 나는 임금의 칼에 죽는 죽음의 무의미를 감당해낼 수 없었다. 병신년에 의병장 김덕령이 장살되었을 때 나는 내가 수긍할 수 없는 죽음의 방식을 분명히 알았다. 그때 나는 한산 통제영에 부임해 있었지만 임금이 김덕령을 때려죽인 일의 전말은 바람처럼 전군에 퍼졌다. 군은 나직이 엎드렸다.”(64쪽) 그러나 그 권력의 생산과 작동이 사회적으로 생산된다는 측면을 애써 무시한 채 고립무원에 빠진 이순신이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불가항력의 현실 속에서 고뇌하는 장면만을 클로즈업시키고 있다.
『남한산성』(2007)의 세계 역시 철저하게 이분화되어 있는 세계다. 청나라 군대에 포위되어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얼핏 주전파와 주화파의 대결이 주된 갈등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정신세계(=우국의 세계)에 속한 김상헌과 최명길의 갈등과 이념이 결코 아니다.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엇보다 생존이 더 중요한 문제인 ‘사공’ 같은 민초의 세계와 조정-사대부 간의 대립에 더 주목해야 한다. 김상헌은 뒤늦게 남한산성을 찾아가는 길에 얼어붙은 강에서 그를 안내하던 사공의 목을 벤다.(46쪽) 밤새 강물이 얼어붙으면 밝은 날 청병은 사공의 인도가 없어도 강을 건너올 것이지만, 얼음이 물러서 질척거리면 청병은 사공을 앞세워 강을 건널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 김상헌은 “청병이 곧 들이닥친다는데, 너는 왜 강가에 있느냐 묻고, 갈 곳이 없고 갈 길이 없어 청병이 오면 얼음 위로 길을 잡아 강을 건네주고 곡식이라도 얻어 볼까한다”는 사공의 말을 듣고 이것이 백성인가, 이것이 백성이었던가(43쪽) 하고 한탄한다.
『하얼빈』에서 안중근은 그의 행위에 대해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나는 한국 독립전쟁의 의병 참모중장 자격으로 하얼빈에서 이토를 죽였다. 그러므로 이 법정에 끌려 나온 것은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238쪽) 재판장 마나베와 검찰관 미조부치는 “안중근의 범죄는 자국의 영고성쇠와 그 유래에 대한 정당한 지식의 결핍과 이토의 인격과 일본의 국시에 대한 지식의 결핍에서 비롯된 무지의 산물”(239쪽)임을 강조함으로써 안중근의 행위를 한국의 독립을 위한 정치적인 동기가 아닌 무지와 불순한 동기에서 비롯한 살인 행위로 격하하고자 하는 의도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소설은 살인하지 말라는 천주교 교리(빌렘 신부)와 국가의 독립을 위한 전쟁(안중근)이라는 또 다른 대립 구도를 통해 안중근의 인간적 갈등과 회오를 강조하는 듯 보이지만 그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사실 계급적 분리라고 나는 본다.
의병을 일으켰던 신돌석이 결국 배신한 부하에게 살해되었다거나, 이인영이 거사를 일으킨 후 부친의 부고를 전해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린 후 그의 수하 이은찬이 세력을 일으켰으나 배반한 부하들에게 유인을 당해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감옥에서 죽었다거나 하는 민초의 배신과 관련한 사실들의 전언이 3페이지에 걸쳐(56-58쪽) 기록되어 있다. 의병 참여 주체의 목적과 지향은 주체별로 각기 달랐다. 투쟁의 양상이 국권 회복이라는 현실적 투쟁의 목적 앞에 단일한 대오를 형성했지만, 각자가 생각했던 지향점은 각자의 위치와 조건에 따라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의병운동에 투신했다. 그리고 무수히 목숨을 잃었다. 그것이 실패로 귀결되었다 해서 헛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해주에서, 동학군이 마을을 약탈하고 지나가면 관군이 들어와서 동학군에게 식량을 내준 백성들을 잡아갔다. 동학군이 관아를 불 지르고 아전들을 죽이면 아전의 아내가 동학군의 은신처를 밀고했고, 끌려가서 죽임을 당한 동학군의 아들이 밀고자를 죽였다.『하얼빈』에서의 이런 서술은 전형적인 양비론이다. 그때 집안의 어른이 중심이 되어 마을을 위협하는 동학군을 쳐부수었는데, 그때 “열여섯 살 난 안중근이 그 선봉 역할을 했다.”(179쪽) 왜 농민들이 동학군을 조직해서 관아를 불태웠는가 하는 점에 대한 이해의 흔적이란 없다.
안중근은 해주 일대에서 일가를 이룬 집안의 남아라는 자부심을 토대로 장부가를 부르며 이토 살해에 나선다. 그렇다 보니 소설에서 안중근이 이토를 죽임으로써 이루고자 했던 그의 이념이 자칫 위태로워 보이기도 한다. 왕국의 패망보다 오래 지속하게 마련인 민중의 건강함을 김훈은 간과하거나 비릿하게 보고 있는 듯 싶다. 이는 소설에서 김훈은 조선 천주교회의 수장인 프랑스 주교 ‘뮈텔’의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김훈은, “황사영은 국가를 제거하려다가 죽임을 당했고, 안중근은 국가를 회복하려고 남을 죽이고 저도 죽게 생겼는데, 뮈텔은 이 젊은이들의 운명을 가로막고 있는 국가를 가엾이 여겼다.”(251쪽)고 서술하고 있다.
이는 김훈이『남한산성』(2007)서문에 적은 것-“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받는 자들의 편이다”-과는 사뭇 다른 태도다. 엄밀하게 말해 객관적인 역사서술이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사회적 맥락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언어를 매개로 한 글에서 작가는 아무 편도 아닐 수가 없다. 그는 무엇보다 생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현의 노래』(2005)에서, 무너져 가는 가야의 운명 탓에 스스로가 ‘더 깊은 지옥’이라고 표현하는 적국 신라로 가서, 신라의 대장군 이사부 앞에서 우륵은 “다만 살아서 소리를 내려 하오.”(275쪽) 라고 그 뜻을 밝힌다.
소설『하얼빈』의 ‘작가의 말’에서 김훈은, “포수, 무직, 담배팔이, 이 세 단어의 순수성이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등대처럼 나를 인도해주었다.”(303쪽)고 쓰고 있거니와 그가 말하는 ‘순수성’이란 “세상의 그 어떤 위력에도 기대고 있지 않은… 청춘의 언어”(303쪽)인 것이니, 이는 김훈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혐오의 강박을 에둘러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역사 허무주의와 연결될 것인데 그에게는 소위 강한 자, 강한 것에 대한 선망, 혹은 힘을 갖지 못한 자의 무력감이 무의식에 깊게 침윤되어 있다.
『현의 노래』에서 가야 순장자들의 죽음과 백제 포로들의 죽음은 ‘우륵’의 권력에 대한 선망과 무력감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아라’가 순장에 처해질 때 이 상황을 바꿀 어떤 힘도 우륵은 갖고 있지 않다. 그는 무력감 속에서 슬픔을 겪는다. 또한 백제 포로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하는 신라 장수 ‘이사부’가 평생 꿈꾸고 추구하는 세계란, “거칠고 피 흘리는 세상을 가지런히 정돈해주는 하나의 ‘질서’”다.(141쪽) 이사부가 무자비한 살육을 지속하면서 ‘합리적이고 냉혹한 전투’를 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질서’를 위해서라는 것인데, 이는『하얼빈』에서 안중근의 총에 죽은 이토가 한국에서 이루려 했던 꿈-망상과 다르지 않다.
한 개인의 운명이 국가의 시운과 불가분하게 연계되어 있음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면서 그러한 상황에서 고뇌하는 인물의 내면을 깊이 있게 그리는 것이 김훈 소설의 매력이기는 하지만, 전혀 다른 시대를 배경으로 구축하는 서사의 내용이나 문체, 어조가 그의 역사소설들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은 결국 작가의 자기 동일적 세계관의 반영-정치적 무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칼의 노래』에서 그랬던 것처럼『하얼빈』에서도 김훈은 안중근을 영웅으로 추앙하는 대신 그가 마주한 상황에서 갖게 된 인간적 고뇌와 갈등을 어떤 방식으로 풀어가는가에 집중하고 있다. 군더더기 없는 밀도 높은 문장과 섬세하고 구체적인 세부묘사로 독자를 그의 이야기 세계로 흡인하는 데 능한 그의 소설의 매력이다. 다만 ‘있었던 사건’으로서의 역사적 사실 그대로의 재현에서 그는 둘 다(안중근과 이토) 내세우고 지키고 실행했던 이념의 쓸모 없음을 비판적으로 그리고 있다.
『하얼빈』에서 김훈은 어떤 소설적 진실을 드러내는가. 안중근의 총에 이토가 죽지만, 그래서 안중근의 이념이 얼핏 승리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그는 체포되고 사형선고를 받아 여순 감옥에서 죽는다. 사실의 충실한 제시라는 그의 서술전략은 선명한 이분법 구도 내부에 양비론적인 태도가 은폐되어 있지 않나 하는 의혹을 남긴다. 안중근이 꿈꾸는 세계와 이토가 꿈꾸는 세계를, 그리고 그들의 죽음을 통해 이념의 허무함을 동일한 지점에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역사소설을 즐겨 읽는 독자로서 나는 그것이 못내 아쉽다. 아니 마땅치 않다. 역사소설은 무엇보다 당대의 삶과 현실에까지 힘을 미치는 과거의 현재성을 살릴 수 있어야 그 몫을 충분하게 감당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런데 김훈의 역사소설에서는 니체가 말한 ‘실천적 역사의식’이 부재한다. 아니 김훈은 그러한 종류의 거대담론 자체를 일종의 억압으로 보고 혐오한다. 작가와 독자의 해소되지 않는 불화가 이어지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의 소설을 읽는다. 까닭은 여타의 독자가 그의 소설에 매료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일상적 불안과 경제적 공포 앞에서 그것은 사회적으로 분산되거나 분담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개인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사회적 감정이 되고 있다. 김훈 소설의 인물들에게 중요한 것은 대의명분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에의 의지다. 이것은 비루한 삶을 살게 만든 구조나 혹은 실패한 거대담론에 대한 비판이지만 동시에 기존의 현실 변혁 가능성을 부정한 냉소적 허무주의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오직 개인(혹은 가족)의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독자들은 김훈 소설 속 인물과 일체감을 느끼고 있다. 그러하니 이러한 현상은 건강한 것이 아니다.
김훈의 탓은 아니지만 나는 김훈이 대중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 작가로서 그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다고 본다.『하얼빈』에서 안중근이 이토를 죽인 행위에 대한 역사적 맥락을 강조하는 대신 종교적 갈등을 더 많이 부각하는 방식의 서술은 건강한 역사의식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의 군더더기 없이 밀도 높은 건조한 문체는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경지에 있다. 글을 읽고 글을 쓰는 자로서 그것은 부러운 일이기도 하다.
3. 관념과 재현, 정찬과 임철우 소설들
언어(문학)를 통한 역사의 복원은 사실의 복원이 아니라 사건의 실재와 마주하는 ‘접촉’의 복원과 그것의 공유가 된다.4) 그런데 문제는 4·3이거나 5·18이거나 난징대학살이거나를 막론하고 어떠한 형태이든 학살의 재현은 항상 경험으로부터의 소외를 수반한다는 점이다. 아감벤이 제시한 ‘레비의 패러독스’에는 학살을 재현하는 행위에 대한 아포리아적 질문이 함축되어 있다. 학살과 같은 비극적인 사건의 ‘진실’은 그것 자체를 경험한 사람에 의해서만 말해질 수 있는 것이지만, 이 극단적인 경험을 한 사람은 희생자이기에 말할 수 없다. 따라서 그 사건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일차적으로 그 경험으로부터 살아남은 사람, 즉 생존자이다. 그러나 생존자의 증언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기에 희생자의 ‘말로 할 수 없는 경험’을 현전시키지 못한다.5)
그러므로 ‘학살’에 대해 쓴다는 것은 왜곡과 오인의 가능성, 바꿔 말하면 재현 행위로부터 비롯될 지시대상에 대한 해석적 판단과 윤리적 판단에 대한 책임을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즉 학살에 관해 써야 하는 작가는 자신의 주관적 관점으로부터 배태될 수 있는 왜곡과 오인을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그 해결 불가능한 질문 속으로 자신의 글쓰기를 밀어 넣어야 하는 셈이다. 이 지점에서 글쓰기의 미학은 사실에 대한 해석적 판단과 윤리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수용자들의 해석적․윤리적 판단은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6)
정찬은 그동안『기억의 강』(1989),『완전한 영혼』(1992),『아늑한 길』(1995) ,『광야』(2002)등의 소설을 통해 ‘광주’로 은유되는 역사적 현실의 비극에서 출발하여 권력과 언어의 본질에 대한 관념적 성찰로 나아가는 독특한 서술전략을 선보여왔다.7) 그런데 정찬은 장편『광야』에서, ‘절대는 일상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는 것, 꿈이 삶을 이길 수는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는 절대적 신념(이데올로기)에 대한 회의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듯 보인다.
소설집『기억의 강』에 수록된 중편소설「슬픔의 노래」에서 주요 인물인 연극배우 ‘박운형’은 오월의 기억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연극공부를 하러 갔던 뉴욕에서 그로토프스키의 연극을 보고 난 뒤 아우슈비츠의 야만, 아우슈비츠의 잔혹 속에서 신음하는 인간의 비참함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처음에는 광주의 죄의식에서 벗어나려는 갈망을 느낀다. 그러나 곧 광주에서의 참혹함을 마침내 무대에서, 곧 세상에서 견뎌내는 힘의 원천으로 삼게 되었다고 말한다. 5·18때 계엄군으로 광주에 왔던 ‘박운형’이 그 고통의 기억을 넘어서서 다다른 ‘운명’이라는 나름의 깨달음은 그가 자신의 의지대로 뿌리칠 수 없었던 그날의 고통과 그로 인한 죄의식의 감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이성의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운명론적 허무주의일 것인데, 이는 정찬 소설 대부분을 관류하는 일종의 정치적 무의식이라 할 수 있다.
소설「슬픔의 노래」는 ‘이미’ 지나가 버린 사건에 대해, 그것이 아우슈비츠에서든 광주에서든,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라는 것, 그것은 다만 ‘슬픈 일’이라는 인식만이 남는다. 그러한 태도가 의미 없는 것은 아니나, 그러한 감정만 가지고는 폭력에 대한 성찰로 나아가기에 역부족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하나의 죽음에는 그 죽음을 애도하는 수많은 이들의, 제각기 고유하고 특별한, 비통한 슬픔이 있다.8) 그러나 정찬 소설「슬픔의 노래」에서는 그러한 일들(죽임과 죽음) 모두를 모든 죽음을 단지 슬픔이라는 감정으로 묶어버린다. 그리고는 이제 그 슬픔의 강을 어떻게 건널 것인가의 문제로 이동한다. 강을 건너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배를 타는 것과 스스로 강이 되는 것. 작가에 의하면, 대부분의 작가들은 배를 탄다. “작고 가볍고 날렵한 상상의 배”를 탄다. 그 작고 가볍고 날렵한 상상의 배란, 광주에 계엄군으로 왔던 ‘박윤형’의 입을 통해 광주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것에 대해, 그것은 광주를 소설의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라고, 그것은 다만 부끄러움일 뿐 진실은 형태가 없다고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스스로 강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결국 ‘박운형’처럼 그날의 고통의 기억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일까. 진정석의 경우 그것은 “고통의 거부나 회피가 아니라 고통의 수락을 통해 고통을 넘어서려는 자세이며, 비극을 벗어나는 구원이 아니라 비극 안에서의 꿈꾸는 방식”이라고 해석한다.9) 그러나 한편, 소설이 세계를 바꾸지 못하는 한, 이제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정찬 소설에서 5·18을 기억하고 재현하는 한 방식이다. 소설의 화자가 여행하는 장소가 굳이 아우슈비츠인 까닭도 그러한 인식과 관련된다. 작가가 그날 계엄군에 저항했던 시민의 시선이 아니라 계엄군의 일원으로 광주에 왔던 이의 시선으로 광주의 비극을 해석하는 것은, 결국 역사 허무주의의 관념으로 후퇴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느낌을 준다.10) 그가 역사적 사건을 서사화한 소설 대부분에서 초월의 세계를 지향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체제 옹호로 귀결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것은 리얼리티를 상실한 유미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할 것인데, 정찬이 즐겨 쓰는 알레고리기법이 갖는 속성에서 비롯된다.
알레고리는 가시적인 것의 형상으로 비가시적인 것을 표현하는 기법이다. 알레고리에서는 가시적으로 묘사할 수 없는 어떤 추상적 관념이 눈에 보이는 대상의 형태를 빌려 나타난다. 알레고리를 통해 묘사된 것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을 재현함으로써 그 의미가 드러난다. 그러나 의미와 형상의 불일치로서 알레고리는 비감각적 유사성으로 특징되는데, 이 유사성은 의미가 불확정적이서 모호하다는 문제가 있다. 루카치의 경우 알레고리적 기법은 결국 종교적 사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하는데, 정찬 소설의 경우에 적확한 지적이라고 본다.
그는 최근에 펴낸 장편소설『발없는 새』(2022)에는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군에 의한 난징학살과 중국공산당의 문화혁명기를 겪었던 인물들이 등장한다. 워이커싱과 첸카이거와 아오키, 그리고 그들과 만나 난징학살과 히로시마 원폭과 문화혁명이 개인에 끼친 관계성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던지는 서술자(베이징 특파원)가 그러하다. 이 소설에서 광주에 대한 직접적 언급은 없으나 위에 언급된 역사적 사건의 가해자인 일본군과 홍위병의 공통점을 그는 “신적 존재를 향한 숭배”(241쪽)라고 규정한다. 그렇다면 혹시 그는, 80년 5월 광주의 진압군과 그에 맞서 총을 들었던 시민군도 결국 각자의 신념을 위한 죽음과 죽임으로 보는 것은 아닐까.『완전한 영혼』(1992)에 수록되어 있는 단편「완전한 영혼」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완전한 영혼」순결한 한 영혼의 기억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깊은 상처의 근원에 광주의 기억이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11) 이 소설에서 작가는 지성수라는 매우 신뢰할 만한 운동권 활동가를 통해 80년대 운동에 대한 반성 및 새로운 이념적 지평의 제시를 시도한다. 서사는 장인하라는 인물의 삶과 죽음에 대한 지성수의 관심과 의미 부여를 축으로 전개되지만, 그것은 지성수의 새로운 변혁 이념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 기능한다. 그래서 지성수가 장인하를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이유가 단지 그가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라는 것만 가지고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가 보기에 장인하는 “완벽한 무사상적 인간이며 식물적 정신의 소유자”다. 완벽한 무사상적 인간, 악의 힘을 알지 못하는 인간, 혼돈과 광기와 모순으로 가득 찬 세계를 볼 수 없는 인간이자, 악이 가하는 고통에도 식물적으로 순응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지성수에게 장인하는 “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이 세계를 진보의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객관적 진리가 있다는 믿음을 보완해 줄 요소를 지닌 것”12) 으로 보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장인하라는 인물의 창조는 분명 새롭고 따라서 신선하기는 하지만, 그와 같은 소위 식물적 정신이라는 것이 1980년 5월에 있었던 국가폭력과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효과적 대응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남긴다. 식물적 정신을 양보적 저항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면 종교가 그러한 것처럼 이 소설 또한 폭력의 왜곡이 아닐 수 없다. 현실적으로 양보적 저항이 이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도 있는 것처럼 믿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13) 또한 이 작품이 “1980년대 변혁 이념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새로운 운동에 대한 나름의 방향 제시인지”14), 아니면 5월 그 자체(대항 폭력으로서의 광주 민중의 저항-폭력)에 대한 비판인지 그 초점이 석연치 않은 것도 문제로 남는다. 장편소설『광야』에서 볼 수 있는 이념 자체에 대한 회의와 혁명이 끝난 후의 분열에 대한 염증은 사실 정찬 소설 곳곳에 편재해 있다.
『발없는 새』에서 난징학살과 문화대혁명을 겪으며 살아남았던 워이커싱은 “마오쩌둥의 홍위병이 느꼈던 절대적 자유와 일본 천황의 군인들이 느꼈던 절대적 자유”(229쪽)가 결국 다르지 않음을 암시한다. 정찬의, 역사적 폭력에 개입되어 있는 이념에 대한 불신과 혐오가 다시 한번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것은 작가의 역사를 보는 하나의 관점이기에 그 자체를 나무랄 것은 없겠다. 문학이 이러해야 한다는 규정이야말로 또 다른 억압이요 폭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이 사라진 자리에 모든 국가 모든 민족 위에 군림하면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을 벌레로 만들어버리는 것, 곧 자본이 신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는 결론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작가의 해석적 판단과 윤리적 판단은 그 자체로 독자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신념을 위해 아버지를 죽인 문화혁명의 폭력과 물질을 위해 아버지를 죽이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폭력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참혹한가”(241-242쪽) 하는 물음 끝에 소설의 화자는 ‘장자의 나비’를 상기한다. 장자와 나비 사이에는 존재의 경계가 없다는 것, 그 관계를 역사의 희생자와 가해자의 관계에 적용해 볼 수는 없을까 하는 것, 물론 전제가 없지는 않은데, “장자가 나비를 보듯이, 나비가 장자를 보듯이, 희생자가 가해자를 보아야 하고 가해자가 희생자를 보아야 한다”는 것(240쪽)이다.
이는 소설집『기억의 강』에 수록된 중편소설「슬픔의 노래」에서 80년 5월 광주에 진압군으로 파견되었던 ‘박운형’이 그날의 고통을 넘어서기 위해 시도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구원의 방식이 아닌가. 곧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를 허무는 것, “나는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라는 아오키15)의 고백(241쪽)이 명징하게 말하는 것은 폭력적인 역사적 사건이 인간들의 삶에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가를 천착하고 있는 정찬 소설(들)의 일관된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찬 소설『발없는 새』에서 제목이 내포하고 있는 알레고리는 무엇인가. 장국영(장궈룽) 주연 영화《패왕별희》중에서 한 대사를 인용하고 있는 소설은, “세상에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이 새는 나는 것 이외는 알지 못해. 날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딱 한 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지”(90쪽)라는 인용. 즉, 역사와 현실을 초월한 세계, 무구한 식물성의 세계 혹은 역사를 초월한 관념의 세계에 대한 은유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오래전 발표한『아늑한 길』(1995) 속에 수록된 단편「아늑한 길」의 인물 김인철의 발화에서부터 반복되고 있는 알레고리적 수사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지난날의 자신을 지탱해 주었던 절망, 증오, 치욕, 부끄러움과 열정 등이 모두 사라져버렸다고 고백하고 있다. 같은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새」에서도 광주에서 시위대의 일원으로 참여했던 박영일은 당시의 끔찍한 기억 탓에 오랜 시간 고통스러운 방황을 하지만 마침내 황폐한 정신을 만져주는 생명성에 동화됨으로써 치유에 이른다. 무구한 식물성의 세계 혹은 역사를 초월한 관념의 세계 속에서 그의 소설의 인물들은 평온에 이른다.
정찬은 역사와 인물을 단선적으로 재현하는 대신 역사적 폭력을 인간의 욕망의 문제와 결부해서(권력의 절대화와 언어의 함수) 그 복잡한 세계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드문 작가이기는 하지만, 그가 취하는 이데올로기 비판은 결국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무화하는 곧, 양비론적 세계관이라 하겠다. 구조적인 폭력의 문제뿐 아니라 일상화된 권력의 부조리에 대한 환기도 필요하고 그것은 그것대로 소중하지만, 사실에 대한 해석적 판단과 윤리적 판단으로부터 새처럼 자유롭고자 하는 그의 바람이 오히려 자신을 지나치게 억압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야스퍼스는『책죄론』에서 “타인을 죽이는 행위를 막기 위해 생명을 바치지 않고 팔짱 낀 채 보고만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내 죄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일이 벌어진 뒤에도 아직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씻을 수 없는 죄가 되어 나를 뒤덮는다.”고 말한다16). 5·18의 기억을 원죄처럼 지니고 살아가는 살아남은 사람들 역시 ‘아직 살아있음에 대한 죄의식’에 시달린다. 이 죄의식- 부끄러움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날의 피해자는 말할 것 없거니와 가해자들 못지않게 살아남은 사람들 역시 외상 변증법의 지배17)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 때문이다. 그렇게 5·18에 대한 소설적 재현과 윤리적 해석을 말하는 맨 앞자리에 임철우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임철우는 고유한 개인을 넘어선 80년 5월 광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개인이다. 『봄날』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느끼는 부끄러움과 죄책감의 산물이다.18) 광주항쟁에 관한 기념비적 소설『봄날』다섯 권(문학과지성사, 1997)을 통해 5·18에 대한 충실한 기록을 남겼던 임철우의 소설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그날에 함께 하지 못했다는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이다. 그러한 정념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소설이『봄날』이전에 발표한 단편「봄날」(1987)이다.
광주의 마지막 날 새벽에 죽임을 당한 명부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주를 그의 친구들인 나와 병기와 순임이 찾아간다. 명부의 죽음은 상주에게 너무도 큰 충격을 주고 있다. 그래서 명부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상주가 바라본 자기 밖의 사건이 아니라 그의 속에 있는 그의 일부가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상주는 명부의 죽음이라는 사건에 깊숙이 개입함으로써 그 사건의 일부가 된 것이다. 그런데 상주는 명부의 죽음이 자신의 탓이라는 피해망상 때문에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중이다.
오월, 그 마지막 날 새벽, 명부는 죽음을 당하기 바로 전에 정말 상주의 집을 찾아갔었을까. 그리고 명부가 애타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빤히 들으면서도 자신은 꼼짝 않고 이불 속에 누워 있었노라는 상주의 말은 사실일까19).
‘나’는 상주가 입원한 병원을 향해 가면서 벌써 몇 번째 똑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그러면서 음울하기 짝이 없는 환상에 시달린다.
상주야아… 상주야아… 나야, 내가 왔어. 문 좀 열어줘… 상주야아.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귀에 잡히지 않는다. 두두두두두… 소리는 점점 가까워 오고 명부는 더욱 다급히 상주를 부르며 문을 흔들어 대기 시작한다. 상주야아… 상주야아… 나야, 문 좀 열어달라니까. 대문이 덜컹덜컹 흔들린다. 그러나 여전히 안에서는 기척이 없다. 상주야. 살려 줘. 늦기 전에 나 좀… 제발… 문득 저벅거리며 다가오는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 순간 명부는 흠칫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비칠비칠 골목을 빠져나와 도망치기 시작한다. 남빛 어둠 속으로 명부의 몸뚱이가 지워져 버린 후, 오래지 않아 그쪽으로부터 콩 튀기는 듯한 요란한 발사음이 터져 나온다…. (봄날, 188쪽)
상주는 광주의 마지막 날 새벽에 죽임을 당한 명부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상주는 그날 명부가 애타게 자신의 집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빤히 들었으면서도 자신은 꼼짝 않고 이불 속에 누워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의 동생 상희는 “그건 오빠의 피해망상이 빚어낸 엉뚱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다”고 말한다. 그의 어머니도 “그날 새벽에 누군가 집 대문을 다급하게 두드렸던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가 명부였는지는 확실치 않다.”고 말한다. 상주의 식구들은 무서워서 문을 열어줄 수가 없었고 그때 상주는 뒷방에 따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명부의 죽음은 적어도 상주의 방기 때문은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거듭 묻는다. 명부가 죽은 곳이 하필 상주의 집과 가까운 곳이었다는 사실은 우연일 뿐일까?
‘나’와 함께 상주를 찾아가기로 한 병기는 “단정한 양복 차림에 목을 넥타이로 단단히 졸라 묶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는 은행에 갓 입사했다. 탈 없이 일상으로 돌아간 것이다. 상주가 온몸에 유리 조각을 긋는 자해 끝에 또 입원했다는 말을 듣고 난 뒤 병기는 말한다. “허, 참, 바보 같은 자식 같으니라구. 아니, 벌써 이 년이 지난 일이잖아. 남들은 언제 그랬느냐 싶게 잘들 살고 있는데 대관절 그 자식만 왜 아직도 그 지경이야?” 이십 년도 아니고 겨우 이 년이 지나자 그렇듯 모두들 전처럼 탈 없이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명부의 죽음과 상주의 입원에 대해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슬픔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사건들에 대해서 ‘나’만큼의 심리적 거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 학교 선생이 된 순임 역시 별다른 징후는 없어 보인다. “제법 선생님 티가 나는군, 아주 의젓해졌어.” 라고 인사를 건네는 나를 향해 순임은 “어머, 그렇게 보여요?” 하면서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니 명부의 죽음이라는 사건에 대해서 심리적 거리가 가장 가까운 것은 상주의 시점이며 그 다음은 나, 그리고 병기와 순임의 순서다.
시점의 차이란 그 사건에 대한 감정적 개입의 차이를 말함인데, 이렇게 하나의 사건은 시점의 차이에 따라 의미의 편차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경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느닷없이 어디선가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고막을 찢어낼 듯 울려 나오기 시작한다. 으애애애… 앵. 그 사이렌 소리는 그들이 모여 있는 도로의 맞은편 도청 건물 옥상으로부터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민방공 훈련의 날이었고, 하필 그 시간이었던 것이다. 잠시나마 당황하고 겁먹은 표정을 지었던 자신들을 속으로 부끄러워하며 그들은 서로 멋쩍게 웃는다. 그 짧은 순간에 그들이 똑같이 경험한 것은 죽음과 파괴에 대한 공포, 그것이 가져다주는 불길한 예감이었다. 겉으로는 아무 탈 없이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실상 그들 모두 오월의 비극적 상흔을 깊이 간직하고 있었던 셈이다.
상주의 면회는 금지되어 있었다. 어제 아침부터 상태가 좋지 않아 따로 격리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이 작품이 발표되던 시기를 감안해서 유추해보면, 5·18에 대한 진실규명이 그 접근조차 금기시되던 상황의 은유로 읽힌다. 끝내 상주를 만나보지 못하고 돌아오는 ‘나’의 뇌리속에 자꾸만 상처 입은 한 마리 들짐승처럼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햇빛도 들지 않는 산속 기도원의 음침한 골방에 틀어박혀 벌거벗은 채 제 손으로 살가죽을 저며내고 있는 상주가 그의 일기장 속에 써놓았던 자폐적 독백의 언어(기록)다. 어디에 있느냐, 네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어느 흙더미 속에 산 채로 묻어놓고 너 홀로 돌아오는 것이냐.
그러므로 그날 새벽 상주의 집 대문을 두드리던 사람은 명부가 아니래도 아벨이다. 따라서 상주를 미치게 한 것은 “단순히 명부의 죽음이 아니라 형제 아벨로 표상되는, 명부와 같은 광주 사람들이 저항 끝에 죽임을 당하고 있던 그 날 새벽에 뒷방에서 삶을 구걸하고 있었다는, 그 죄의식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들이 쓸쓸한 심정으로 돌아오는 길에 목격한 것은 무수히 떠내려오고 있는 죽은 물고기들이었다. 허옇게 배를 드러낸 채 쉴 새 없이 둥둥 떠내려가는 죽은 물고기들을(그것은 처참하게 죽어간 그 날의 아벨들의 모습을, 끔찍한 형제살해의 기억을 연상케 하는 한 상징이다.) 바라보던 순임이 갑자기 흑, 울음을 터뜨리며 말한다. “어쩌면… 어쩌면 말에요. 그건 혹시 사실인지도 모르겠어요.” 언젠가 상주의 어머니에게서 들었던 말, 마지막 날 새벽에 누군가 집 대문을 다급하게 두드리는 소리를 식구들이 분명하게 들었다는 말, 하지만 무서워서 문을 열어줄 수가 없었다는 말을 순임은 다시금 환기하고 있는 참이다.
순임의 말은 우리에게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학살이 자행되는 공포와 죽음의 상황, 그 속에서 자신만의 안전을 도모했다는 죄의식은 1980년대를 살아온 모든 이의 가슴에 응어리진 상처로 확대된다. 문을 열어 달라는 명부의 다급한 절규를 거절한 이들은 누구인가. 마지막 날 새벽에 문을 걸어 잠그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목숨을 구걸했던 이들, 즉 카인은 누구인가. 그날에 살아남은 우리를 향한 윤리적 질문을 이 소설은 던지고 있는 셈이다. 아니 그것은 질문을 넘어 차라리 심문에 가깝다.
임철우는 저 단편「봄날」로부터 장편『봄날』다섯 권의 완성을 보지만,『백년여관』에 이르러 비로소 제주 4·3의 비극과 만난다. 『백년여관』의 서사는 “정체불명의 음성으로부터 시작한다.” 서술자인 이진우는 “시간이 없어! 시간이!”라는 정체불명의 목소리를 듣고 홀리듯 영도의 갯가 모퉁이에 혼자 불쑥 돌출해 서 있는 해묵은 왜식 목조 적산 가옥 한 채. 그리고 그 집 앞 흐릿한 골목 어귀에 내걸린 간판 하나, 백년여관을 떠올리고, 그곳에 가기로 결심한다.
『백년여관』의 주요 인물은 5・18뿐만 아니라 보도연맹사건, 제주 4・3, 베트남전 등의 사건과 관련된다. 백년여관은 이러한 각 사건으로 인해 고통에 시달리는 인물을 끌어들이는 자력의 공간이다. 특히 백년여관을 운영하는 주인 강복수의 가족은 제주 4・3과 직접 관련된다. 이진우의 첫 번째 환청이 제주 4・3 특별법안이 가결된 1999년 12월 16일에 발생했다는 점은 이진우를 비롯하여 고통에 시달리는 인물들이 이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환청과 연결하면 제주 4・3 특별법안 가결이 소설 속 각각의 환청이 발생하는 주요 동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을 지으면 “시간이 없어”는 시간 곧 때가 되었다는 말이 된다. 이 환청이 계기가 되어 이진우는 영도로 향한다.
백년여관의 또 다른 손님인 김요안도 “돌아와! 이젠 때가 되었다!”라는 환청이 계기가 되어 40년의 미국 생활을 접고 영도로 돌아온다.(101쪽) 이들은 “그들을 부르는 소리” 즉 “무엇인가로부터 똑같이 호출되어” 백년여관에 이르렀다. 영도의 무당인 조천댁 또한 “서둘러야 해. 시간이 없어!”라는 말을 반복한다. 이렇듯 ‘시간이 없어!’라는 정체불명의 목소리는 『백년여관』 속 각 인물에게 행위의 동인으로 작동한다. 한국현대사에서 제주 4・3은 오랫동안 말할 수 없는 혹은 말해서는 안 되는 사건이었다. 이런 점에서 4・3은 말할 수 없음의 상징적 사건 중 하나였다. 20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서야 이에 대해 말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말할 수 없고 말해지지 않은 것은 제주 4・3만이 아니다. 이 사건의 토대 전환은 그와 유사한 사건들을 재현의 차원으로 함께 이끌어내는 역할을 했다. 그러하니 소설 속 인물들의 저 “시간이 없다”는 외침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가 되었다, 혹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의미로 읽힌다. 이는 외부에서 주어진 가능성(정치적 혹은 사회문화적 조건)에 힘입은 것이다.
그런데 소설 『백년여관』에서 ‘영도’ 라는 공간 혹은 ‘백년여관’이라는 장소는 어떤 의미인가. 서술자 이진우에게 영도와 백년여관은 ‘케이’(k, 5월 27일 새벽 도청 안에서 죽은 임철우의 친구 故 박효선)의 장소이다. 영도는 케이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고향으로서 케이가 유년기를 보낸 곳이다. 어느 해 가을 이진우와 케이는 함께 이 섬을 우연히 찾아가 묵은 적이 있다. 케이가 암 선고를 받고 보름 정도 종적을 감추었을 때 머물렀으리라 추정되는 곳 또한 영도이다. 이진우에게 이러한 영도는 케이를 환기하는 장소다. 하지만 그곳에 케이는 없다. 영도의 백년여관에서 이진우는 케이가 아닌 다른 이들을 만난다. 그중에는 이진우와의 경험을 공유한 양순옥이 있다. 양순옥은 케이를 대신하여 이진우의 고백을 듣는다. 즉 영도를 찾아간 이진우는 케이에게 해야 할 말을 결국 순옥에게 한다. 이진우가 고백을 하는 대상은 케이가 아닌 순옥이다.
『백년여관』은 이진우와 케이의 서사에 머물지 않고 다른 인물들의 서사로 확대된다. 그런데 목소리의 모호성은 영도 혹은 백년여관이라는 장소의 특성과 맞물린다. 프롤로그에서 영도는 “현재도 과거도 아니고 낮도 밤도 아닌, 미망과 백일몽이 지배하는 허허한 중음(中陰)의 영토”라고 소개된다. 중음은 『백년여관』의 세계 혹은 시공간의 특성을 함축하는 은유다. 원래 중음(中陰, Antrabhara)이란 사람이 죽은 뒤 왕생 윤회하기까지의 시간 곧 49일, 혹은 이생을 끝내고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의 중간 존재를 가리키는 불교의 용어다. 불교의 중음 혹은 중유는 신체 혹은 시간의 개념이다. 이를 세계 혹은 공간 개념으로 변용하면 중음은 산 자와 죽은 자가 동거하는 장소가 된다. 중간 신체 혹은 중간 시간보다 중간 세계라고 할 때 삶과 죽음의 관계와 공존의 성격은 더 부각된다. 케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와 함께 살아가는 이진우의 세계는 전형적인 중음이라 할 수 있다. 이진우가 빨려 들어간 영도 또한 중음 그 자체의 장소이다.
영도의 백년여관에는 미지의 존재,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함께 거주한다. 이러한 존재는 곧 죽은 자들이다. 허미자는 어렴풋이 이들의 존재와 시선, “은밀한 숨소리와 입김, 낮게 읊조리는 두런거림”을 느끼고 그로부터 비롯된 “매우 특별하고도 고통스러운 감정을 체험”한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그녀는 “그들이 누구인지, 왜 그 숲을 떠나지 않는 것인지 그녀는 전혀” 알지 못한다. 이 ‘미지의 존재’는 설명 가능한 세계에 끼어든 설명할 수 없는 이질적 요소이다. 이런 점에서 중음의 장소인 백년여관은 탈구 혹은 이접의 장소의 가능성을 부여받는다. 백년여관의 이러한 장소성으로 인해 이진우의 서사가 케이와의 관계에 한정되지 않고 낯설고 이질적인 미지의 다른 인물과 연결되고 또 그들의 서사로 확대될 수 있다.
소설에서 이진우를 비롯한 다양한 역사적 사건의 희생자와 각각의 사건은 무한히 확대될 수 있지만, 이는 동시에 5・18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상징화된다. 문제는 이것이 보여주는 자폐적 양상에 있다. 이를 드러내는 것이 ‘신지’의 자폐증인데, 이는 일련의 과정에서 획득한 이름으로서의 5・18의 상징화가 결국에는 실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임철우는 『백년여관』 쓰기를 통해서도 5・18을 비롯한 역사적 사건이 남긴 고통을 온전히 허구화하거나 상징화하는 데 이르지 못했다20). 신지의 자폐는 『백년여관』 전체 서사의 구조와도 맞물린다. 전체의 서사 구조 또한 자폐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백년여관』의 프롤로그의 첫 문장과 에필로그의 마지막 문장이 동일하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섬이 하나 있다. 그림자의 섬, 영도. 그것은 결코 환상도 허구의 이름도 아니다.” 이는 『백년여관』의 첫 문장이자 마지막 문장이다. 프롤로그는 이진우가 집에 돌아가 써야겠다고 생각한 에필로그의 마지막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처럼 『백년여관』의 프롤로그의 첫 문장과 에필로그의 마지막 문장은 동일하다.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의 맞물림은 서사의 시간을 순환하는 고리 즉 원환 속에 가둔다. 이를 통해 『백년여관』의 서사는 시간의 원환에 갇혀 순환한다. 이진우는 이 시간의 사이클 속에 갇힌다. 그는 곧 잔여로서의 목소리를 쓰는 원환의 시간에 갇힌 시지프스이다. 이를 통해 『백년여관』 속 다양한 사건들 또한 반복되는 원환의 틀에 유폐된다. 이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데리다의 언어를 빌려 말하면, “비극적인 것의 필연적 반복성”이다. 즉 『백년여관』 속에서 다루어진 역사적 사건과 당시 그들이 겪은 고통은 고유한 일회적 사건이다. 하지만 이것이 외상(trauma)이 되는 순간, 이는 반복 가능한 일회적 사건이 된다. 사건이 발생한 날짜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고유한 시간이지만 달력이라는 틀을 상정하는 순간 그 날짜는 해마다 반복해서 돌아온다. 이는 한 번 일어난 사건으로서 절대 돌아오지 않을 것의 “유령 같은 귀환”이다. 데리다에게는 이와 같은 유령적 귀환을 통해서 기억은 탈구의 가능성을 얻는다.
소설 『백년여관』에서도 각 인물들이 겪는 고통과 기억은 이러한 방식으로 귀환한다. 이를 통해 각각의 사건이 서로 접합하지만 귀환은 원환의 시간 속에서 지속적 재래를 통해 반복된다. 즉 『백년여관』의 시간 속에서 계열체 속 비극은 되풀이하여 발생한다. 원환에 갇힌 시간은 흐르는 듯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흐르지 않는다. 이를 통해 과거는 현재가 된다. 즉 『백년여관』의 다양한 역사적 사건은 과거가 아닌 현재 진행형의 사건이 된다. 동일한 비극적 사건이 부단히 재래하는 역사, 이것이 『백년여관』의 시간이요, 임철우가 백 년의 현대사를 바라보는 관점이요, 국가폭력 이후에도 여전한 통증으로 재현되고 있는 ‘이후’의 소설이다.
4. 공선옥 5·18 소설들의 성취와 한계
우리가 사진기나 캠코더 등으로 어떤 순간을 담고자 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 이미지를 통해 당시의 상황이나 느낌과 같은 배경, 즉 그와 같은 이야기를 기억하고 싶은 욕망 때문일 것이다.21) 공선옥 중편소설「은주의 영화」(2019)에서 서술자 ‘나’가 아버지와 함께 처음으로 영화관엘 간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두 번째로 아버지와 영화관에 갔을 때는 고등학교 졸업식 날이었다. 영화를 보고 짜장면집에 가서 아버지와 함께 짜장면을 시켜 먹는 장면에서 아버지는 말한다. “은주야, 너도 저런 영화 하나 만들어볼래?”(75쪽)
그렇게 아버지는 은주에게 캠코더 하나를 사준다. 아버지에게 영화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초등학교 3학년인 아직 어린 딸아이와 함께 영화를 보고 나와서 영화관이 있는 길모퉁이 찻집에서 딸아이에게는 아이스크림을 사 먹이고 자신은 커피를 마시다 말고 창밖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탄성을 지르는 장면이 나온다. “딱 저런 길모퉁이였다, 내가 너희 엄마를 처음 본 게. 나는 저런 길모퉁이에서 파란 제복을 입고 호각을 불고 있었는데, 단발머리 나풀거리며 길을 건너오던 너희 엄마가 내 옆을 지나가더라. 예뻐서 호각 소리를 더 크게 냈다. 너희 엄마가 한 번 더 돌아볼까 봐, 가슴을 졸였지. 정말로 돌아보더라. 숨이 멎을 뻔했지. 거의 영화였다, 영화였어.”(74-75쪽)
아버지에게 영화는 자신의 아내가 될 연인을 바라보던 맨 처음, 그래서 곧 숨이 멎을 것 같던 장소와 시각, 무엇보다 이미지의 세계다. 그것은 막연한 추상이라기보다 그 순간의 이야기를 담고자 하는 욕망과 연결되어 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딸과 함께 영화를 보고 나서 아버지가 “은주야, 너도 저런 영화 하나 만들어볼래?”라고 했을 때, 저런 영화란 또 무엇인가. 둘이서 본 영화는 중국의 6세대 감독을 대표하는 지아장커(賈樟柯) 감독의 영화 ‘삼협호인’(三峽好人)이다. 영화는, 중국 장강의 대역사인 삼협댐 공사를 배경으로 삼협 위에서 펼쳐지는 두 쌍의 부부, 한산밍 부부와 쉔홍 부부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이별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한 사회의 집단적 무의식과 욕망을 반영하며 이를 그 내용과 형식적 차원에서 구조화한다.22)
그러니까 아버지는 지금처럼 엉망이 되어버리기 이전의 세계, 곧 자신의 아내와의 사이에 마치 영화의 장면처럼 화양연화의 시절에 대한 기억을 은주의 영화를 통해 재현해내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부재 혹은 상실에 대한 일종의 보상 심리가 내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현실을 아름다운 기억으로 자리바꿈함으로써 얼마간의 치유가 가능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의 아내를 두들겨 팬 나머지 아내가 집을 나갔고, 아내를 찾으러 다니다가 근무지 무단이탈로 직장에서 잘렸고, 병에 걸려 골골거리고 있다.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돈 없는 생활의 공포를 견디느라 은주에게 거친 언사를 자주 퍼붓는다. 현실은 결코 아름답고 찬란했던 시절에 대한 기억만으로 견뎌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은주 역시 “아버지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거의 영화였다, 영화였어, 했던 순간이 내 영화의 시작이었다.”(75쪽)라고 말하고 있다. 은주의 진술 역시 아버지의 욕망과 닮아있다. 은주가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동기의 이면에는 어쨌거나 자신만의 삶을 살아왔다는 감정과 또 그런 삶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해 지나온 삶을 변모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23)
대학에 떨어진 선물이라고 아버지는 딸에게 캠코더 하나를 사준다. 그러나 소설의 서술자 은주에게 영화의 길은 요원했다. 다만 골방에 틀어박혀 수 없이 돌려본 영상물 하나가 그녀의 내부에 심연을 만든다. 그녀는 매번 이 영상물을 보면서 이상한 현상들을 경험했다고 말한다. 무엇이 이상한가. 그 영상물의 첫 장면 때문일 것인데, 영상물의 첫 장면은 이모가, 세상 모든 것이 다 뜨거웠다는 말로 시작되고 있다. “세상 모든 것이 다 뜨거웠어. 하늘의 해, 닭백숙이 끓고 있는 솥,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때는 나, 양손에 닭 날개를 잡고 햇빛 속을 뚫고 걸어오는 아버지, 장독, 나뭇잎, 흙도 다 뜨거워서 나는 숨을 다 못 쉴 지경이 되어부렀단다.”(76쪽)
그래서「은주의 영화」는 저 뜨거웠던 1980년 광주의 5월을 기억에서 복원해 내고 있는 소설이다. 은주는, “나의 이모가 다리를 절게 된 사연이라든가, 이모가 세 들어 사는 집 옆방 아이가 불의의 사고를 당해 죽었다든가, 엄마가 아버지한테 두들겨 맞고 집을 나갔는데 우리 아버지 오중철 씨가 집 나간 우리 엄마 이상순 씨를 찾으러 갔다가 근무지 무단이탈로 직장에서 잘린 이야기 같은 것을 찍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으나”(76쪽) 결국 소설은, 곧 영화는 세상 모든 것이 다 뜨거웠다고 말하는 이모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우선은 카메라 밖에서 이모를 관찰한다.
근대적 주체는 본질적으로 관찰자이다. 관찰자가 되는 인간은 자신의 주변 세계를 자기 자신처럼 객관화한다. 관찰한다는 것은 거리, 탈육체화를 포괄한다. 관찰하는 자는 시간의 강을 넘어선 사람이다.24) ‘5·18’이라는 비극적 드라마에는 기본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관찰자가 등장한다. 가해자나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과잉의 혐의가 있다. 그들의 기억에는 망각과 왜곡의 흔적이 드러난다. 관찰자는 그런 쪽에서 사건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다. 그들의 회상기억은 재생의 수동적인 성찰이 아니라 새로운 지각의 생산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선옥 소설의 대부분의 인물들이 그렇듯이 이 소설「은주의 영화」에서 서술자 ‘나’는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는 대신 인물들과의 감정적 동일시를 택한다. 그러다 보니 공선옥의 5·18 소설들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립만 두드러지고 가해자와 피해자는 선과 악이라는 규정 외에 그들을 매개할 공간이 부재하게 된다. 독자가 인물들의 그 마음과 선택한 행위에 공감할 공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공선옥 소설에서는 아버지의 부재 혹은 결핍상황에서 돈이 없다는 이유로 담임 선생에게 차별을 당하고 매를 맞는 아이들이 자주 나온다. 물론 대체로 그의 소설 속 아버지들은 지나칠 만큼 술을 좋아하고 아내를 두들겨 팬다.「순수한 사람」(2019)에서도 중학교 2학년인 ‘영호’는 엄마와 이혼하고 양육비를 주지 않는 ‘나쁜 아버지’를 상대로 양육비 청구 소송을 진행하는 중이다. 그는 가난한 집 아이들만 골라서 깐죽대는 민수와 교실에서 싸우다가 담임한테 걸렸는데 싸움의 진짜 원인을 민수가 제공했다는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담임에게서 오히려 더 많은 야단을 맞는다. 그 원인은 단지 “돈 때문”(22쪽)이라고 생각한다.「은주의 영화」속 인물 ‘철규’도 비슷한 사정이다. 김학수와 축구를 하다가 자꾸만 태클을 거는 김학수가 얄미워 김학수의 다리를 걸게 되고 그가 넘어져 얼굴이 긁히자 선생님은 그 까닭을 묻는다. 사정을 이야기하는 철규에게 선생님은 대뜸 “니 아부지 뭐해?”(117쪽) 하고 묻는다. ‘돌아가셨다’는 철규의 대답에 선생님은 마음 놓고 철규를 모욕하고 심지어 폭력을 행사한다. 그렇게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립 구도는 선명하게 제시되지만, 아니 피해자의 억울함은 부각 되지만 그뿐, 복합적이며 다양한 내면과 인물들 사이의 차이 대신 단선적인 피해자 의식이 선명하게 제시된다. 작가 공선옥의 정치적 무의식이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임슨은, “정치적이란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차원이 아닌 계급적이고 집단적이며 역사적인 차원의 담론이며, 무의식이란 모순적이며 폭력적인 현실을 살아내기 위한 무의식적이면서도 필사적인 반응”25) 이라고 말한다. 공선옥은 등단작인 중편소설「씨앗불」(1991)에서부터 그 참혹했던 봄날에 살아남았다는 죄의식의 강박에 시달리며 날마다 제 몸에 화형식을 하는 꿈을 꾸는 인물이 그 ‘씨앗불’의 힘으로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하루하루를 버텨 내고 있으며, 그렇게 상처 입은 짐승 같은 남편을 지켜보며 고통스러워하는 아내를 예각적으로 그린다. 공선옥의 소설 내 인물들은 그런 의미에서 계급적이고 집단적이며 역사적인 차원에 위치한다.
소설「은주의 영화」에서 카메라 밖에서 이모를 관찰하던 은주는 이제 카메라 속으로 걸어 들어가 이모 자신이 된다. 따라서 소설의 이야기는 이제 이모의 시점으로 그녀가 왜, 어떻게 다리를 절게 되었는지 독자를 향해 말을 건다. 실로 공선옥 소설의 인물들은 많은 경우 다리를 전다. 「목마른 계절」의 ‘미스 조’가 그러하거니와「은주의 영화」에 나오는 은주 이모도 그러하다. 5·18 때, 군인들이 광주 도심 외곽으로 일시 퇴각하면서 오인 사격으로 같은 군인들끼리 사격을 하다 몇이 죽고 몇이 다치는 불상사가 일어나자, “뿔다구가 좀 났는지 마을의 아무 곳에나 총질을 해대는 바람에 아이들이 죽고 장독아지도 깨지고 닭 몇 마리 개새끼 몇 마리도 죽는 일이 일어났다. 그런 와중에 심적 타격을 입은 모양으로, 그때 사춘기 소녀였던 이모는 충격을 먹고 다리를 절게 되었다는 것”(78쪽)이다. 시내에만 안 나가면 군인들이 사람을 죽인 일이 자신들과는 아무 상관없는 줄 알았던 이모는,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내려섰다가, 개가 총을 맞고 피를 뿜으며 죽어가는 것을 목도한다. 닭들이 살점이 너덜너덜한 채로 도망치는 것을 본다. 개한테 총을 쏜 군인이 이모를 돌아보고 개처럼 혀를 날름거리는 그 순간, 이모의 몸은 딱딱하게 굳어 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이모는 열일곱 살 여름부터 절름발이가 되었다.
그런데 또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이모의 경우도 은주와 다를 것 없이 아버지가 엄마를 두들겨 패서 집을 나가고 결국 누군가에게 다시 시집을 가서 얘기 낳고 잘 살다가 죽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5·18을 이야기하는 공선옥의 소설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 패턴의 반복, 엄마를 두들겨 패는 아버지가 상징하는 것은, 곧 아버지로 상징되는 가부장의 억압적인 폭력과 5·18이라는 국가폭력(가부장적 국가)을 등치시키는 작가의 무의식의 산물이다.「은주의 영화」에서 은주의 아버지는 경찰인데 그도 그의 아내를 두들겨 팬다.「목숨」(창비, 1992)에서도 아버지는 “천장에서 늘어진 전등줄을 잡아당겨 엄마의 뺨을 후려 갈긴다.”(124쪽) 아버지는 엄마의 말에 의하면, “순 오입쟁이인데다 독사같은 의처증 환자”(124쪽)였다. 다만 공선옥 소설의 한 패턴으로 굳어지다시피 한 가정폭력, 아내 구타의 원인을 군사독재 폭력 문화의 산물로 치부하는 듯한 태도는, 여성에 대한 억압은 계급 내지 민족모순으로 환원되지 않는 남성 지배의 문제, 여성과 남성 간 권력 관계의 산물26)이라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를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
공선옥은 그의 소설 대부분에서 여성성을 넘어선 보편적 윤리로서의 모성을 통하여 상처의 치유와 연대의 모색이라는 가능성을 강조하고 있다. 국가폭력과 무장저항이라는 5․18 소설의 담론에서 타자화되고 분열된 ‘나’의 파괴된 삶이란 역사의 폭력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여성 인물들이 자매애(Sisterhood) 혹은 모성성을 통해 그 상처를 극복하는 모습을 그린다.
그것은 다시 제임슨의 말처럼 모순적인 현실과 역사를 살아내기 위한 무의식적이고 필사적인 반응(무의식)이다. 다만 그것은 자칫 모성에 대한 강박일 수도 있다.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모성이라는 논리는 여성 문제의 하나로 다루어야 할 어머니의 문제를 역사 담론 속에 지워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고27), 억압의 시간들을 모호하게 통합하고 여성을 본질주의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환원주의를 반복할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28)도 사실이다.
공선옥의 모성성에 대한 집착이 하층계급에게서 일상을 빼앗고 그들을 부랑의 길로 내모는 냉혹한 현실에 대한 부정과 저항의 목소리29)라는 평가가 없는 것은 아니나, 배려와 보살핌의 원리를 여성다움의 중요한 가치로 내면화한 결과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대부분의 가부장제 문화권에서 자기희생적인 여성을 이상화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공선옥의 소설 내 여성 인물들은 가정폭력, 아내 구타의 구조적 뿌리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작가 공선옥의 그러한 문학적 태도가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피해자들에 대한 진정한 애도의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것으로 귀결되고 있는 점이다. 폭력의 근원을 헤집어 메스를 대신 대신 모성성으로 껴안음으로써 미봉의 해결을 도모하는 것이 그의 소설의 반복되는 패턴이다.
프로이트는 자책감을 우울증의 결정적 특징으로 취급한다. 그에 따르면 가버린 자와의 동일시는 상실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인 반응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개 그러한 동일시를 극복하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데, 이러한 사람은 가버린 사람의 일부를 취해 자기 것으로 삼되 그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함께 취함으로써 일종의 자기 처벌로서의 죄의식 상태에 빠지는 우울증을 앓게 된다고 프로이트는 지적한다.4)
공선옥의 5·18 소설 내 인물들은 하나같이 자책감, 자기 처벌로서의 죄의식에 침윤되어 있다. 까닭은 함께 싸웠던 동지들은 죽었고 자신은 살아남았다는 데 있다. 등단작인「씨앗불」의 ‘위준’이 그러하고, 「목마른 계절」에서 죽은 애인(그는 5·18때 시민군이었다)의 뒤를 따라 자살한 ‘미스 조’가 그러하고,「목숨」의 ‘재호’가 그러하다.「떠도는 나무」의 ‘남편’이 그러하고,「흰달」의 순의 ‘남편’이 또한 그러하다.
사실 공선옥의 소설뿐 아니라 많은 5·18 소설들에서 그러한 인물을 볼 수 있는데, 참혹한 역사적 사건을 경험한 이후 생존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보이는 트라우마인 까닭에 그것 자체를 문제 삼을 건 없겠다. 모든 애도 과정에는, 홀로 남겨지고 상실과 타협하여 어쩔 수 없이 삶을 새롭게 꾸려야만 하는 상황에 대한 분노가 내재되어 있다. 문제는, 상실의 체험이 강렬할수록, 그것이 그것과 관련된 공격성이 억압될수록, 미처 다루지 못한 갈등이 많을수록, 갈등을 감내할 수 있는 자아의 능력이 부족할수록 우울의 반응은 더욱 병리적으로 나타난다.30)는 데에 있다.
그래서 공선옥 소설 속의 인물들은 일상이 고통스러우며 더러 스스로 죽음을 택하기도 한다. 부재와 상실에 대한 반응으로써 죄의식의 과잉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동일시 속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의 위험은, 자신이 걱정해야 할 대상이 없으면 바로 자기 자신이 무너진다는 점이다.31) 특히 「목마른 계절」에서 죽은 애인의 뒤를 따라 자살한 ‘미스 조’가 그러한데, 5·18때 시민군이었던 그녀의 애인의 자살은 그렇다 하더라도, 돌보아야 할 남동생이 둘이나 있는 ‘미스 조’가 그러한 선택을 하는 것은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우리는 그의 죽음에서 자기의 죽음을 미리 맛볼 뿐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그와 함께 죽는다.32)”고는 하지만, 지나치게 억지스러운 설정인 것도 사실이다.
소설「은주의 영화」2부는 5·18 때 죽은 ‘철규’라는 소년에 대한 이야기다. 철규는 이모가 세 들어 사는 집 옆방 아이였다. 은주를 업어주었던 아이, 그러나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아이다. 은주는 철규의 엄마, 박선자를 만나 철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필름에 담는다. 옆에는 박선자의 친구이면서 은주의 이모인 이상희가 거든다. 박선자의 남편은 5·18때 역전 세차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직장 사람들이 군인들한테 잡혀가고 난 다음날 어떻게 된 건지 가본다고 집을 나간 뒤로 10년 넘게 소식이 없다. 그러니까 철규가 이제 막 돌이 지났을 무렵 그녀의 남편은 ‘행방불명자’가 된 것이다. 철규가 그보다 어린 은주를 업어주고 노래해주고 춤춰주었다는 것을 은주는 이모와 이모의 친구 입을 통해 알게 된다.
은주의 카메라에서는 은주의 입을 빌린 철규의 목소리가 간단없이 튀어나오고, 철규의 엄마는 까무라쳤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난 후에는 죽은 아들 철규에게 용서를 구한다. “철규야, 이 엄마를 용서해라. 그리고 이 엄마를 잊어버려라. 나도 인자부터 너를 잊어버릴 테다. 잊어버리고 새 인생을 살아갈 거다. 너도 다 털어놓고 훨훨 날아가거라.”(122쪽)
그런데 그들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박선자의, “그 순간까지도 속을 못 차리고 친구들하고 스트레스도 풀 겸 꽃놀이를 다녀올 테니 엄마 없는 동안 우유하고 빵을 사 먹으라고 돈을 줬네, 미친년이 밥해줄 생각은 안 하고 돈을 줬어.”(123쪽)이라는 발화를 통해 그녀의 회한에 찬 목소리를 듣는다. 박선자는, “돈 번다는 핑계 대고 젊은 삭신이 애먼 사랑에 눈이 멀어 지 새끼가 학교를 가는지 밥을 먹는지 모르고”, 철규는, 자꾸만 시비를 걸고 괴롭히는 학교 친구 김학수와 축구를 하다가 그만 김학수의 얼굴에 상처를 내는 일이 생긴다. 담임은 그러나 “너는 이대로 가면 사람 새끼가 아니라 개새끼가 된다.”(118쪽)는 폭언을 하면서 김학수에게 사과하지 않는 철규를 구타하고 내일 엄마를 학교에 데리고 오라고 위협한다. 그날 엄마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 날 철규는 학교 대신 버스를 차고 무등산 자락으로 간다. 마침 수배를 피해 달아나던 조선대학생 이철규를 좇던 경찰의 수런거림과 불빛과 외침에 두려움을 느끼고 발을 헛디뎌 추락사한다. 이철규도 수원지에서 퉁퉁 부은 시신으로 발견된다. 박선자는 그래서 아들 철규의 죽음이 자신의 탓이라는 죄의식에 강박되어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어머니의 역할을 방기하고 한 여성으로서 욕망에 잠시 눈먼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죄의식에 깊이 침윤되어 있다. 그것은 작가 공선옥의 내면에 자리 잡은, 5·18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소설화하는 데 항상 작동하는 도덕적 강박의 무의식이다.
한편 은주의 이모 이상희도 그동안 가슴속에 품어두었던 비밀을 풀어놓는다. 박선자가 석 달이나 집으로 돌아오지 않던 때에 이상희는 친구의 아들인 철규를 자신의 아들처럼 여긴다. 이상희는 은주를 업고 철규를 데리고 바다로 여행을 간다. 선창에서 아무 섬에나 가는 배를 탄다. 아이들을 업고 걸리고 섬 가운데로 난 길을 걷고 있는데, 남자 둘이 그들을 따라온다. 이상희는 섬 가운데 소나무 숲으로 끌려가 사내 둘에게 윤간을 당한다. 사내들은 바지를 추켜 올리며 애가 둘이나 있어서 차마 죽이지는 못했다고 선심 쓰듯 말한다. 그때 철규가 나를 살렸다고, 이모는 절규한다. “내가 숲에서 나왔을 때, 철규가 은주를 업고 나를 기다리고 있더라고. 철규는 울지 않았고 은주도 울지 않았어. 나는 아뭇소리 안 했어. 그냥 가만히 있었지, 울지도 않고. 그것이 다여, 자네 안 들어오는 동안 우리한테 그런 일이 있었다고. 그러나 그것은 암것도 아니라고, 살았으면 된 거라고.”(125쪽) 박선자를 외려 다독인다. 살아가야 한다는 의지의 확인, 생명에 대한 사랑의 강조, 희망적인 결말의 화해와 용서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는 착시를 불러온다. 하지만, 가부장적 사회구조의 모순과 대면하고 있는 이들 여성 인물들의 부재와 결핍이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거의 비극, 5․18에서 연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그리고 그 해결책이 ‘어쨌거나 살아서 견뎌내야 한다.’ 는 것만으로 제시되고 있는 점은 공선옥의 한계요, 5·18 소설의 한계다. 그래서 소설「은주의 영화」는 다음처럼 다만 ‘어둠 속에 앉아 있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
은주는 아버지의 “거의 영화였다, 영화였어.”라는 발화로부터 시작하여, 철규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것을 은주는 다음처럼 진술한다. “오랫동안, 철규는 카메라 밖을 뚫을 듯이 응시하고 있었다. 그 침묵이 너무 단단해서, 뭐라고 말을 붙여볼 수조차 없는 그런 침묵이었다. 오랜 침묵의 뒤에 소년 철규는 카메라 저편으로 사라졌다. 내 영화가 소년 철규의 그 오랜 침묵의 끝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한 채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135쪽)
공선옥 소설에서 아버지 혹은 남자는 대부분 자신의 일에서 실패하고, 그래서 지나치게 많은 술을 마시며 급기야 아내를 두들겨 팬다. 여인들은 다리를 절고, 아내들은 삶의 신산함에 몸서리를 친다. 아이들은 돈 때문에 학교에서 조롱을 받거나 선생님에게 매를 맞는다. 그래도 여인 혹은 아내들은 그 모든 것을 껴안고, 무엇보다 살아내는 것이 다행이고 중요하다고 위로하거나 다짐한다. 물론 집을 나가 다른 남자와 몸을 섞는 장면들을 통해 여성성을 구현하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이내 그것은 큰 잘못을 범한 것으로 스스로를 단죄한다. 하나의 패턴이다. 지배와 피지배 관계, 선과 악의 선명한, 그러나 지극히 단순하게 제시되는 이 윤리적 패턴은 작가의 광주체험에 그 기원이 있는 듯 보인다. 실로 ‘광주’와 ‘모성’은 공선옥 소설을 떠받치고 있는 두 개의 축이다. 그것은 공선옥 소설 인물들의 상처의 근원이며 또한 삶의 원동력이다33).
문제는 광주를 해석하는 틀도 그렇고, 모성을 해석하는 관점도 지나치게 정형화되어 있는 점이다. 5·18을 제재로 한 소설들에서 공선옥은 한결같이 국가폭력의 상흔을 지니고 있는 인물들을 제시한다. 대체로 남성 인물들이 그러한데, 그들은 그날 동지들과 함께 죽지 못하고 혼자서만 살아남았다는 죄의식의 과잉으로 남은 삶을 스스로 해치는 인물들로 묘사된다.
1980년 광주에서 살았던 사람들 대부분이 몸서리치는 광기의 폭력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거나 분노의 감정을 지녔을 것이다. 누군가는 아무런 죄 없이 죽임을 당했고, 그것에 대항해 총을 들었던 이들 중 또 누군가는 죽임을 당하거나 체포되어 몸을 상하는 고통을 감내했다. 그러나 같은 상황에서 그것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라는 것이 한결같지는 않다.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은 단순한 감정에 지배받지 않고 오히려 훨씬 복잡한 마음과 감정을 지니고 있으며 때로는 이해타산적이다. 우연한 고초나 작은 참여를 크나큰 공으로 치장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그런데 공선옥 소설의 인물들은 너무나 단순하게 정형화되어 있다. 국가폭력을 대하는 인물들에는 두려움보다는 정의로움이 넘치고, 죽지 않고 살아남았던 이들은 부끄러움과 죄의식에 강박 되어 있다. 도무지 살아남았다는 데에 안도하는 인물이 없다. 어떻게 모두가 한결같이 그럴 수 있겠는가. 이는 인간의 본성 혹은 본질에 대한 이해가 역부족이라는 느낌마저 갖게 한다.
공선옥 소설에서 모성성을 통한 문제의 해결은, 인물들의 상흔을 치유하고 화해로 나아가는 문제의 해결이라기보다는 사태의 일시적 봉합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모성은 생명의 근원이면서 자신이 잉태한 개체의 보호자로서의 본능을 갖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이 확장되었을 때 타인에 대한 이타심, 연민, 연대의 감정으로 승화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여성 혹은 어머니에게 부과된 희생과 헌신의 윤리가 그것을 강요하다시피 했던 기왕의 남성 중심적 지배 논리의 재생산에 부지불식간에 기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통찰이 필요하다는 데 있다. 공선옥의 모성성은 가족에 대한 헌신에서 나아가 타자를 끌어안는 일종의 박애주의의 면모로 확장된다. 다만 그러한 모성성이 여성에게 무조건적인 희생과 헌신의 윤리로 강제될 때, 아니라도 근원적인 문제해결의 단초가 되지 못할 때 그것은 가짜라는 것이다. 물론 여성에게서 본질적인 모성을 떼어내라고, 그것이 보다 주체적인 개인의 삶이라고 주장할 것은 없다. 모성성은 여전히 이 세계의 냉혹한 차가움을 따뜻하게 포용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으니까. 모성은 자연이 주는 한계 지워진 삶을 그 자체로 독특한 향유의 기회이자 유일무이한 선물로 맞이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한 앓을 제시34)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렇게 볼 때 모성에 적극 참여한다는 것은 타인들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며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는 결단35)이라 할 수 있다. 크리스테바(Kristeva)의 논의를 빌려 말하자면, 공선옥의 여성들은 ‘타자를 품고 있는 주체’로 긍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문제 삼는 것은, 공선옥 소설과 그의 소설적 태도를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광주의 상흔 혹은 죄의식을 갖고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인물들이 그 상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여성 인물들의 모성성 역시 그들의 상흔을 완전하게 치유하지 못하며, 따라서 진정한 애도가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다른 하나는 “왜 5·18의 고통과 상흔은 ‘광주’를 넘어 모든 지역에서 그들이 아닌 우리의 고통과 상처로서 공감하지 못하고 불편한 진실로 남아 있는 것일까?”36) 하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5. 문학의 윤리- 타자를 향하여
홀로코스트가 도덕적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는 조건과 과정을 분석한 제프리 알렉산더(Jeffrey Alexander)는 사건 자체로부터 충격, 공포, 정신적 장애 등의 외상이 유발된다는 심리학적 접근의 자연주의적 인식론의 오류를 비판하면서, 사건의 외상적 성격이 재현 과정을 통해 사회적·문화적으로 구성된다는 문화사회학적 관점을 제안한다. 나아가 고통의 성격, 희생자와 가해자에 대한 재현 방식이 일반 시민들과 희생자와의 일체감 형성에 영향을 준다고 말한다.37)
문학은 역사적 기억 속의 인간 존재의 고통을 말함으로써 역사 속의 고통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도대체 왜 우리는 거기에서 고통을 느껴야 했으며, 나아가 그것은 왜 지금까지도 반복되고 지속되는가 하는 문제의식을 던지는 데 유용한 텍스트다. 까닭에 역사와 문학은 상보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5·18 소설에서 역사적 기억을 말한다는 것은 구멍 뚫린 역사적 기록의 빈 곳을 채우면서 다시는 그와 같은 비극적인 폭력이 되풀이되지 않아야 한다는 미래의 과제를 제시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즉 역사적 고통에 대해 5·18 소설이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고통의 해결이나 제거가 아니라 고통을 주었던 부정적 역사와의 간격을 지탱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이 변질되지 않도록 애쓰는 것, 그리고 그것을 다시 반복해서 겪지 않으려는 눈뜬 성찰이다. 문학은 고통의 크기가 커지면 커질수록 역사적 기억에 대해 말하는 것을 지속해야 할 충분한 이유를 갖는다. 이것이 가장 ‘사실’적이지 못한 문학(문학적 상상력)이 역사적 기억과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에도 말해온 것이며, 앞으로도 말해야 할 것이다.38)
물론 미래는 과거와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현재를 매개로 하여 과거와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잘못된 과거가 만들어 놓은 뒤틀린 매듭을 올바로 풀지 않는다면 아무리 우리가 앞을 향해 나아가려 해도 매듭은 더욱 꼬이기 마련이다.39) 국가폭력에 의한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들이 겪는 정신적 트라우마는 상당하다.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결국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고통을 수반하는 폭력에는 피해자의 존재, 행동 그리고 가치에 영향을 미친다. 폭력은 혼돈의 위협을 이끌어 내며, 그 혼돈의 위협 속에서 인간 본래의 정체성을 파괴하게 한다.
따라서 피해자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이 겪고 있는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한 우리 사회의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다만 문제는, 피해자들의 온전한 치유와 진정한 역사적 화해의 길이 가해자들의 진심 어린 사죄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라도 가해자들의 고통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거사의 문제로 인하여 오랫동안 내면의 고통으로 고착화된 트라우마를 치유의 프로그램을 통한 완전 치유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여 그들의 상처를 온전히 치유해야 과거사 청산은 완성될 것이다. 과거사 청산의 궁극적 목적은 역사의 정의를 세우고 화해의 길로 나아가 발전적 미래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40) 라는 주장은 온당하다. 그러나 문제는 치유의 대상에 가해자는 제외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1990년에 발표된 이순원 단편소설「얼굴」은 광주 청문회가 방영되었던 시기를 배경으로 진압군으로 참가한 7공수 출신의 은행원 ‘김주호’의 고통과 죄의식, 그리고 지워지지 않는 상흔을 그리고 있는 보기 드물게 뛰어난 소설이다. 그것은 작가 이순원이 강원도 출신이면서 서울에 거주하던, 비교적 객관적으로 광주를 바라볼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한 까닭에 가능했을 것이다.
정치가 인간 개인끼리 ‘소통’하는 것이라면, 문학은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는 평등을 강조한다. 랑시에르가 볼 때, 이것이야말로 “문학의 형이상학”에 내재한 정치(politics)이다. 이런 정치는 사회에서 발생하는 인간 개인의 평등 문제를 분자적 차원으로 확장한다. 가난한 자나 노동자가 요구하는 평등보다 더 심오하고 진실한 존재론적 평등이 여기에 있다. 눈에 보이는 가식 너머에서 우주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을 랑시에르는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의 개념인 공감(compassion)과 연결시킨다.41)
다만 역사적 폭력을 서사화한 소설적 재현에서 “누구의 기억과 감정을 들을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정동의 이행 속에서 확인할 것인지 구별해야 하”며, “피해자, 희생자의 고통이 어떻게 전염, 접속, 공유하며 고통의 연대를 이루는지 하는 문제”에 대해 “좀더 섬세한 말의 배치 속에서 판단되어야 한다.”42)는 지적은 경청해야 옳다.
역사적 폭력을 서사화한 문학은 ‘고통’의 기록이자 ‘고통하는’ 장치라는 것, 고통은 수동적이고 부정적인 감정의 양태이기도 하지만, 바로 그 감정을 통해 역설적으로 ‘인간’의 공통성을 발견한 기제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 다루었던 김훈과 정찬과 임철우 그리고 공선옥 소설들은 역사적 폭력과 그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과 공감하면서 사건 ‘이후’의 인간이란 어떠한 존재여야 하는가를 분별하고 있는 소설들이다. 그것은 문학의 책임 윤리가 자기 고통을 넘어서서 타인의 고통으로 나아가는 윤리적 에토스, 곧 타인의 고통을 기억하고 증언하고 연대하는 데 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작가의 문학적 태도(관점)에 따른 얼마간의 차이 역시 분명하지만.
- 1) 육사 교정에 세워진 홍범도 장군 등 항일지사 5인의 흉상 이전과 광주 출신의 의열단원으로 항일 독립지사이며 중국이 추앙하는 음악가 정율성에 대한 메카시즘적 비난이 2023년 내내 계속되었다.
- 2) 여야 정치권에서는 5·18 국립묘역을 참배하고 헌법 전문 수록 등의 구두선을 남발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여전히 5·18에 대한 부정과 폄훼를 지속하고 있고 그것은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할 때 더욱 두드러지는 징후라 할 수 있다.
- 3) 변학수,「문학과 기억」,『독일어문학 제15권 제3호, 한국독일어문학회, 2007, 5쪽.
- 4) 손정수,「진행 중인 역사적 사건이 소설에 도입되는 방식들」,『현대소설연구』제66호, 현대소설학회, 2017, 187쪽.
- 5)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문서고와 증인, 정문영 옮김, 새물결, 2012, 13-18쪽.
- 6) 김명훈,「‘학살은 재현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역사화하기」,『동악어문학』제79집, 동악어문학회, 2019,16쪽.
- 7) 진정석,「고통의 환기와 구원의 모색 : 정찬의『아늑한 길』을 중심으로」,『문학과사회』제9권 1호, 문학과 지성사, 1996, 330쪽.
- 8) 오카 마리,「우리는 누구의 시선으로 세계를 볼 것인가」,『당대비평』제17권, 생각의 나무, 2001, 184쪽.
- 9) 진정석,「고통의 환기와 구원의 모색 : 정찬의『아늑한 길』을 중심으로」,『문학과사회』제9권 1호, 문학과 지성사, 1996, 335쪽.
- 10) 심영의,「살아남음과 살아있음의 간극 : 5·18소설들의 경우」,『민주주의와 인권』제16권 2호,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16, 166쪽.
- 11) 심영의,『5·18과 문학적 파편들』, 한국문화사, 2016, 118쪽.
- 12) 방민호,「광주항쟁의 소설화」, 『5·18민중항쟁과 문학·예술』, 5·18기념재단,2006, 208쪽.
- 13) 김현,『전체에 대한 통찰』, 나남, 1993, 361쪽.
- 14) 정명중,「‘5월’의 재구성성과 방식에 대한 연구」,『5·18민중항쟁과 문학·예술』, 5·18기념재단, 2006, 297쪽.
- 15) 그는 난징학살 때 일본 군인의 성폭행으로 태어난 중국 여인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정체(신원)를 알수 없으나 그의 생물학적 친부는 일본 군인인 것. 그가 피해자면서 가해자라는 인식은 그러한 맥락에서 나온 고백이다.
- 16) 모치다 유키오, 「전쟁 책임과 전후 책임」, 『기억과 망각』, 타나카 히로시 외, 이규수 역, 31-32쪽에서 재인용.
- 17) 주디스 허먼, 『트라우마』, 최현정 옮김, 플래닛, 2007, 17쪽. 살아남은 사람들은 사건과 관련된 고통스러운 회상, 이미지, 생각, 지각, 꿈, 플래시백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소위 ‘사건에 대한 재경험’으로 심각한 심리적 고통과 생리적 반응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 18) 우미영,「목소리, 죽은 자들의 비명과 5·18의 이름: 임철우의『백년여관』을 중심으로」,『민주주의와 인권』제22권 4호,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22, 55쪽.
- 19) 임철우,「봄날」, 한승원 외,『일어서는 땅』, 인동, 1987, 187쪽.
- 20) 우미영,「목소리, 죽은 자들의 비명과 5·18의 이름: 임철우의『백년여관』을 중심으로」,『민주주의와 인권』제22권 4호,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22, 77쪽.
- 21) 남수영,『이미지 시대의 역사 기억』, 새물결, 2008, 11쪽.
- 22) 이희승,「정주하는 모성의 기호들」,『언론과학연구』제13권 1호, 2013, 360쪽.
- 23) 보리스 시륄니크 (Boris Cyrulnik),『관계』, 정재권 옮김, 궁리, 2009, 192쪽.
- 24)알아이다 아스만(Aleida Assmann),『기억의 공간』, 벽학수 옮김, 경북대학교 출판부, 2003, 120-121쪽.
- 25)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 정치적 무의식-사회적으로 상징적인 행위로서의 서사, 이경덕․서강목 옮김, 민음사, 2015, 397쪽.
- 26) 정희진,『페미니즘의 도전』, 교양인, 2016, 136쪽.
- 27) 김경희, 한국 현대소설의 모성성 연구, 조선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131쪽.
- 28) 김은하,「90년대 여성소설의 세가지 유형」, 《창비》 27권 4호, 1999, 242쪽.
- 29) 김은하, 같은 글, 260쪽.
- 30) 베레나 카스트(Verena Kast),『애도』, 채기화 옮김, 궁리, 2007, 101쪽.
- 31) 베레나 카스트(Verena Kast), 같은 글, 110쪽.
- 32) 베레나 카스트(Verena Kast), 같은 글, 13쪽.
- 33) 황도경,「세 개의 불, 두 개의 알리바이-공선옥 론」,《실천문학》2000.2, 68쪽.
- 34) 이경아,「모성에 대한 여성주의 재사유」,『한국여성철학』제11권, 한국여성철학회, 2009,190쪽.
- 35) 이경아, 같은 글, 194쪽.
- 36) 박선웅·김수련,「5·18민주화운동의 서사적 재현과 문화적 외상의 한계」,『문화와 사회』제25권, 2017,119쪽.
- 37) 박선웅·김수련, 같은 글, 120쪽에서 재인용.
- 38) 한순미,「고통, 말할 수 없는 것: 역사적 기억에 대해 문학은 말할 수 있는가」,『호남문화연구』 45권,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2009, 93-94쪽.
- 39) 오수성,『국가폭력과 트라우마』,『민주주의와 인권』제13권 1호,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13, 5쪽.
- 40) 엄찬호,「과거사 청산과 역사의 치유」,『인문과학연구』제33권,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2, 263쪽.
- 41) 이택광,「문학과 정치: 랑시에르의 문학론」,『새한영어영문학회 학술발표회 논문집』, 새한영어영문학회, 2010, 182쪽.
- 42) 박숙자,「5·18 ‘이후’의 문학: 고통과 책임:『소년이 온다』(한강)를 중심으로」,『민주주의와 인권』제22권 1호,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22,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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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넘어 ‘우리’가 된 풍경과 마음 ―길상호 시집, 『왔다갔다 두 개의』, 시인의 일요일, 2024. ―박경희 시집, 『미나리아재비』, 창비, 2024. 박형준 로베르트 발저는 셋방을 전전하면서도 작가로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다락방에서 살기 원했다. 나에게 그의 책 『산책자』(한겨레출판, 2017)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빌케 부인」의 한 단락이다. 셋방살이를 하던 집주인 할머니가 죽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오후에 주인공이 그녀의 텅 빈 방에 들어가 주인을 잃고 용도가 사라진 옷가지와 소지품을 바라보는 장면이었다. 이제 이 세상을 떠난, 하지만 자신에게 조금은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 집 주인 할머니가 텅 빈 방에 남기고 간 옷가지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생의 이면에 어른거리는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깊은 애수가 느껴졌다. 발저는 이 작품에서 한 번이라도 가난과 고독을 경험한 사람은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타인의 가난과 고독을 더 잘 이해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의 불행이나 고통, 그리고 타인의 무력함과 죽음을 조금도 덜어 주지 못하지만 최소한 타인을 이해하는 법이라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번에 읽은 두 권의 시집인 길상호의 『왔다갔다 두 개의』(시인의 일요일, 2024)와 박경희의 『미나리아재비』(창비, 2024)에서 자신과 타자가 체험을 통해 서로 응시하고 격려하는 장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비록 그 만남이 상처나 누추함에서 완벽하게 벗어나게 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그 만남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며 내가 아닌 우리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의 세계는 규율과 계획에 의해 설계된 대도시와는 멀리 거리를 두고 있다. 이들은 그것들에 의해 부서지고 상처 입은 시간들을 끌어모아 과거를 향해 아득한 시선을 던지고 있으며, 그 속에 삶의 절규가 살고 있음을 우리에게 각인시킨다. 길상호의 시집이 은둔자의 삶과 그 안의 고독의 심연을 빼어난 서정으로 보여 주고 있다면, 박경희의 시집은 ‘나’를 지운 자리에 ‘우리’를 들어앉히며 버려지고 상처 입은 과거가 사라진 것도 그 자체의 형상을 잃은 것도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의 감응으로 전해 준다. 우리는 이들의 시로부터 대도시에서 외면당하고 추방된 사물들이 간직한 최초의 움직임을 다시 만날 수 있으며, 그 사물들과 어우러진 장면과 추억들이 경이로운 생물과 마찬가지로 살아 움직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풍경과 마음의 혼융―길상호 시집 『왔다갔다 두 개의』 길상호 시의 특징 중 하나는 시에 나타난 풍경 묘사가 곧 시적 화자의 마음의 상태라는 점이다. 그는 언어의 연금술사처럼 풍경이 자기 존재가 되고 그 풍경 속에서 다시 자신의 존재가 무한하게 흩어지거나 확대되는 지점을 지극히 섬세한 감각으로 보여 준다. 난해하거나 복잡하지 않은 나직나직한 이미지의 단순성과 리듬으로 자신의 심정을 풍경화하는 그의 시는 주체와 타자가 분리되지 않는 말의 오묘한 상태에 닿아 있다. 겨울잠이 풀리고 강변의 진흙은 아가리를 벌린다 물안개가 만든 꿈속을 오래 어슬렁거리느라 진흙은 배가 고프다 진흙의 아가리에 침이 고이고 검고 부드러운 입술엔 어떤 밤이 뜯어 먹다 남긴 고라니의 앞다리 두 개가 물려 있다 두툼한 뒷다리 두 개는 더 먼 곳까지 가서야 피의 걸음을 놓았다 진흙은 이빨 없이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음미하면서 목마르게 끝난 짐승의 죽음을 소화시킨다 털과 가죽과 뼈와 발굽 고라니를 물가로 이끌던 아픈 육체 진흙의 아가리 속으로 두려웠던 시간이 긴 발자국 유서와 함께 서서히 사라진다 ―「진흙이 입을 벌릴 때」 전문 이 시의 화자는 언 강물이 풀린 초봄에 강변에 나와 있다. 화자는 얼었던 강이 녹으며 진흙으로 변해 버린 강변을 거닐며 주변의 풍경을 바라본다. 시에 물안개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직 완연한 봄이 온 것 같지 않다.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그래서 두 계절이 함께 있는 환절기가 이 시의 배경일 듯싶다. 이런 때일수록 남아 있는 추위가 더 춥게 느껴지면서도 또 한편으로 봄을 고대하는 심리 역시 상승하기 마련이다. 화자는 그 양가감정 속에서 강변에서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 물이 풀리며 강변은 녹기 시작한 진흙 덩이로 어수선한데 화자는 물안개가 걷히자 진흙 속에 고라니 사체가 빠져 있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진흙에 점점이 찍힌 고라니 발자국도 눈에 띈다. 아직 겨울의 냉기가 남아 있는데도 진흙은 볕에 풀리며 아주 천천히 고라니 사체와 발자국을 삼킨다. 이 시는 아마 위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을까 추측된다. 그러나 시 어디에도 ‘나’는 보이지 않는다. 황량한 강변의 초봄 아침에 진흙이 고라니의 사체를 삼키는 풍경 묘사를 감정의 동요 없이 객관적 시 쓰기로 전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 시를 읽으면 시인의 마음이 보인다. 안타깝고 슬픈 장면인데 이상하게 평안하고,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내적으로 힘찬 생명력이 느껴진다. 시인은 겨울에 다른 짐승들에게 사냥당할 위기에 처한 고라니가 본능적으로 물가까지 도망치다가 강물 위에 얼어붙은 채로 죽어 있던 사건과 봄이 되어 진흙이 풀리면서 고라니가 그 속으로 빠져드는 장면을 담담하게 전달한다. 그러나 이 시를 끌고 가는 주체가 진흙만은 아니다. 이 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 읽을 수 있다. 첫 번째는 겨울을 견딘 진흙이 녹아 가는 과정을 “물안개가 만든 꿈속을 오래 어슬렁거리”다가 “아가리”를 벌리는 것으로 시작하여 육식성이 부여된 진흙이 “검고 부드러운 입술”로 “어떤 밤”에 사냥당하여 갈가리 찢긴 채 죽은 고라니의 앞다리 두 개를 삼키는 장면까지이다. 여기까지는 진흙이 시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고라니의 앞다리 두 개가 물려 있다”의 뒤에 다른 연으로 분리된 “두툼한 뒷다리 두 개는 더 먼 곳까지 가서야/ 피의 걸음을 놓았다”에서 주체가 고라니로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냥을 당해 갈가리 찢긴 고라니는 앞다리 두 개를 진흙 앞에 걸치고 있지만, 마치 강 저편으로 던져진 듯이 두툼한 뒷다리 두 개는 강물 위에 “피의 걸음”을 흩뿌려 놓고 있다. 진흙은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끝난 생명을 아주 천천히 음미하면서 소화한다. 그런데도 강물에 얼어붙은 채로 털과 가죽과 뼈와 발굽으로 형해화된 고라니는 자신이 언 강가에 피와 함께 남긴 발자국을 유서처럼 간직한 채 왕성하게 입을 벌리는 봄기운이 맹렬하게 싹트는 진흙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결혼식에 갈 땐 로션을 장례식엔 스킨을 조금 발라주세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함께 행진하는 날엔요? 그런 날은 좀체 없다니까요, 아, 저에겐 그런 날뿐인걸요 ―「로션과 스킨」 부분 대야에 비친 자신을 사랑하세요, 다른 얼굴이 보여도 그냥 주워 사용하세요, 미끄러운 날은 금방 지나갈 거예요. ―「이거 좋은 거예요」 부분 이정현의 시집 해설에 따르면 길상호의 이번 시집은 심한 병증 가운데 씌어졌다고 한다. “피 한 방울로 다 알 수 있어요”(「혈당검사 수첩」)라는 시행이 말해 주듯, 길상호 시인은 면역 체계가 흐트러지는 원인 불명의 병에 걸리면서 매일 약을 먹어야 하고, 책을 읽을 수도 없고, 하루에도 세 번 혈당 수치를 재야 한다고 한다. 이 시집에는 그러한 임상 기록을 담은 시편들, 함께 살던 여러 마리의 고양이를 떠나보낸 사연과 “남은 고양이 꽁트”(「시인의 말」) 등 자신의 병적 기록과 함께 주변 사람들과 반려동물에 대한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용한 「로션과 스킨」은 로션과 스킨이라는 메타포를 이용해 삶과 죽음이라는 특징을 결혼식과 장례식으로 드러내면서 죽음과 삶이 함께 행진한다는, 그 양자를 넘나들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한다. 또 「이거 좋은 거예요」에서는 아픈 삼촌을 위해 비누를 사 온 조카의 말을 통해 “대야에 비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이 무엇인지를 간접적이지만 나직하게 전해 준다. 아마도 시인은 조카가 선물한 비누로 아침마다 얼굴을 씻으며 대야의 물속에서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자신의 모습과 조우할 수 있으리라. 시집의 마지막 시편에 나타나듯 절망이 우리를 ‘빗에 사이사이 끼는 때’처럼, “저 수심 깊은 대야”에 던져 버리려고 하더라도 삶의 책은 “페이지가 차르륵 젖어 더는 읽을 수 없더라도, 포스트잇으로 표시를 해 두었으니”(「독서는 금지」) 언제든 다시 이어 갈 수가 있다. 하여, 나는 시인이 「진흙이 입을 벌릴 때」에서 진흙 속으로 사라진 고라니의 “긴 발자국 유서”를 절망을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로 읽으며, 당신은 멀리 있지만 “우리라는 말이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이도 저도 아닌 것들」)라는 따뜻한 말과 시로 다시 뜨겁게 이어져 가고 있다고 믿는다. 시로 쓴 마을사―박경희의 시집 『미나리아재비』 박경희의 『미나리아재비』를 즐겁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읽었다. 아니, 반대로 안타까웠지만 즐겁게 읽었다고 해야 되리라. 박경희의 시집에는 토속어나 순우리말이 시 중간중간에 별처럼 박혀 있어 시를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예를 들어 한 행으로 된 시 “사그랑이 된 바구니는 굴러다니고 기스락물이 깍짓동에 떨어진다”(「그렇게라도 짖어보는 것이다」)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삭아 버린 바구니가 굴러다니고 낙숫물이 참깨나 콩대를 묶은 깍짓동에 떨어진다는 뜻일 게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시를 표준화하고 의미화시키면 원래의 시행이 가지고 있던 살아 움직이는 말맛이 사라져 버린다. 이 시집을 읽으며 모르는 토속어가 나오더라도 굳이 사전을 찾아가며 읽을 필요가 없다. 이 시집의 가장 큰 장점은 사람들 속에서 살아 있는 말들과 이야기이며, 그리고 그 말과 이야기가 어우러져 이뤄 낸 한 마을의 아득하고 신화적인 풍경이 살냄새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데에 있다. 박경희 시인은 우리가 모르는 말들, 사라져 가는 풍경들을 붙잡고 수집해 그것을 사유하고 이야기로 만들며 절대 잊히지 않는 살아 있는 이미지의 마을사로 창조한다. 책 속에 박제되어 시를 위한 시에 그치고 마는 이미지가 아닌, 책 속에서 걸어 나와 이미지가 삶이 되고 이야기로 번져 가는 진경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때로는 그렇게 태어난 시가 너무나 능청스러워 다음 시에 나오는 할머니처럼 읽는 동안 얼굴이 살짝 붉어지기도 한다. 저승 물길 헤치며 이승으로 돌아오다가 육지 문턱에서 쓰러졌다 부여잡은 가슴에 갈고리달이 박혔는지 뽑히지 않았다 파도가 일 때마다 세상 온갖 별이 눈물로 흥건했다 울컥울컥 올라오는 바닷물을 토하며 새삼 물질하던 당신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옴마, 살았네 살았어 저승 돈 벌어 온다더니 저승 갈 뻔했다고 영감 죽은 지 십 년 만에 남정네와 입 박치기 했다는 말에 얼굴 벌게지던 할머니가 웃으며 병원 차 타고 갔다 바다가 잠시 숨 멈춘 순간이었다 ―「바다, 잠시 숨을 멈추다―구룡포 해녀들의 숨비」 전문 박경희의 이번 시집은 위의 시가 보여 주듯 죽음과 또는 죽음 근처까지 간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해학스럽지만 감칠맛 있게 전해 준다. 슬픈데 웃음이 나오는, 웃음이 나오는데 슬픈 이야기들이 서로 어우러져 어떤 순간에는 손에 땀이 배기도, 농사꾼을 홀대하는 사회에 화가 치밀기도, 그러다가 서로의 마음을 가만가만 짚어 주는 따스함에 슬픔이나 분노가 눈 녹듯이 사라지게 한다. 위 시만 해도 그렇다. 아마, 이 시를 영화로 옮긴다면 할머니 해녀가 저승 돈 벌어 온다고 물질하다가 그만 심장에 이상이 생겨 젊은 구조대원으로부터 인공호흡을 받는 장면에선 그것을 지켜보는 동네 사람처럼 우리들도 숨도 못 쉬고 가슴을 졸였을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가 깨어나자마자 환호성이라도 지를 듯 “옴마, 살았네 살았어” 하면서 “영감 죽은 지 십 년 만에/ 남정네와 입 박치기 했다”고 동네 사람들이 놀리는 장면에선 우리들도 신나서 박수를 쳤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인 바닷속에서 죽었다 살아 나온 할머니가 그만 그 소리에 얼굴이 빨개졌다가 웃으며 병원 차를 타고 가는 모습에서 우리는 비극일 수 있는 사건이 해학으로 바뀌는 살아 있는 입말의 마술적인 힘에 감탄했을 것이다.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는 귀족의 화려한 파티에 참석했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강풍이 몰아쳐서 집이 순식간에 무너져 사람들이 죽게 되자, 대리석이나 돌 더미에 깔려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죽은 자들의 이름을 그들이 앉았던 자리를 기억해 내어 하나하나 호명하며 시를 짓고 시체의 주인을 찾아 주었다고 한다. 그는 파티 풍경을 한 장의 그림으로 기억 속에 간직했던 것이다. 그는 이후 기억의 시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시모니데스에게 시란 ‘이야기하는 그림’이다. 박경희의 이번 시집에서 만나게 되는 것도 이 ‘이야기하는 그림’이다. 그의 시는 위의 시에서처럼 매우 쉬운 말과 친근한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그런 이야기를 한 장의 사진처럼 이미지에 압축해서 빼어난 서정의 구조로 들어앉힌다. 그래서 시의 주어가 ‘나’가 아니라 ‘우리’가 된다. 특히 제2부의 시편들은 “동네 막내 강 씨 아저씨”(「동네 막네」)가 환갑을 넘을 정도로 도회지와 단절된 마을에서 코로나 팬데믹으로 마을 사람들 모두가 ‘마스크’를 써야 하는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보여 준다. “오디에도 역병이 보이지 않는”데 마스크를 써야 하고 매달릴 사람이 전부 다 이승에 없어, “그저 무탈하게 지나가길 바랄 뿐 뭐가 있간 에휴, 참말로 지랄맞은 세상이여”(「워쩌겄어」)라는 마을 노인의 체념과 한탄에서 우리 농촌 현실의 적나라한 실상과 마주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마을은 할아버지가 글을 몰라도 서울로 병 고치러 간 아내 소식이 궁금하여 ‘소 다섯 마리 그림’(「오소」)을 그려 편지로 보내면 그걸 받고 할머니가 소 걱정으로 애가 달아 금세 내려오는 곳이다. 서로 간에 이심전심이 통하는 곳이며, 자신이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할아버지의 능청이 글이나 인터넷보다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곳이다. 마루에 앉아 머윗대 껍질을 벗기면서 저승 갔으면 그쪽 세상에서 잘 살 일이지 이승은 왜 들락거리느냐고 보이지도 않는 분 타박이다 살았을 적에 그리 모질게 마음고생시키더니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이승 문턱을 넘느냐고 사발째 욕을 퍼붓는데 옆에 있던 내가 슬금슬금 비키니 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제집만 들락거렸다. ―「꿈자리」 부분 어머니의 꿈에 아버지가 나타나자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인데도 남편을 타박한다. 살았을 적에도 그렇게 마음고생을 시키더니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이승의 문턱을 넘느냐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슬금슬금 마루에서 비켜나자 마루 밑에선 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제집만 들락거리며 안절부절이다. 죽은 사람조차도 잘못하면 타박을 받고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걱정하는, 자연의 생명과 사람이 한데 이어진 이곳은 현대인들에겐 아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세계일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전설 같기도 하고 신화 속 같기도 한 그 세계가 무너져 가더라도 그 큰 몸집을 지탱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안간힘으로 받쳐 든 벽에 선명하게 찍힌 손자국”(「손자국」) 같은 결기 어린 모습으로 우리들의 이야기를 선명한 그림처럼 들려주고 있다.
수많은 노래는 한 사람의 울음에서 시작되었다 고(故) 신경림 시인을 추모하며 1. 1970년대 민중시와 『농무』의 발견 창비시선 500번을 기념하는 특별시선집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신경림 외 지음, 창비 2024)이 올해 3월 출간되었다. 이 시선집 제목은 신경림의 시 「그 여름」에서 따온 것이다. 한 사람의 울음이 온 마을에 울음을 불러오고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고을에 노래를 몰고 왔다 구름을 몰고 오고 바람과 비를 몰고 왔다 ―「그 여름」(『농무』) 부분 온 거리에 울려 퍼지는 ‘노래’는 ‘한 사람의 울음’과 ‘한 사람의 노래’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노래는 구름과 바람과 비를 몰고 오면서 사람뿐 아니라 천지만물에 가닿았다. ‘울음’과 ‘노래’가 지닌 이러한 확장력을 떠올려볼 때, 신경림의 『농무』(창작과비평사 1975)가 50년을 이어온 창비시선의 출발점이었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1970년대 중반은 『창작과비평』이 시민문학론에서 민족문학론으로의 전환을 모색하면서 민중시의 새로운 모델을 필요로 하던 시기였다. 『농무』의 발문에서 백낙청은 시집 『농무』의 완성을 “민중적 경사”라고 말하며 “그의 많은 작품들은 리얼리스트의 단편소설과도 같은 정확한 묘사와 압축된 사연들을 담고 있는 동시에 민요를 방불케 하는 친숙한 가락을 띠기도”1) 한다고 상찬했다. 1960년대 김수영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던 그가 “민중이 잘 알 수 없는 ‘난해한’ 문학”2)을 경계하며 난해하지도 저속하지도 않은 시의 미덕을 신경림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1974년 『농무』가 제1회 만해문학상 수상작이 된 것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염무웅은 신경림 시의 민중성이 ‘체험적 현실’에서 나왔음에 주목하고, “자기 현실과의 정직하고도 치열한 대결을 통해 위장하거나 은폐되지 않은 민중 자신의 목소리가 긴밀한 시적 형상을 획득”3)했다고 보았다. 신경림은 이처럼 농촌의 현실을 구체적이고 핍진한 언어로 그려낸 시뿐 아니라 「농촌현실과 농민문학」 「문학과 민중」 등의 평론을 발표하며 농민문학론을 개진하기도 했다. 1970, 80년대는 신경림을 비롯해 이성부, 조태일, 김지하, 정희성, 이시영, 김준태, 김남주 등이 민중시의 새로운 방향성을 만들어나간 시기였다. 이러한 흐름의 첫 물꼬를 튼 시집이 바로 신경림의 『농무』였다. 2. 노래와 이야기, 시의 씨줄과 날줄 염무웅의 「무엇이 민중성의 시적 구현을 가능하게 하는가」는 『농무』가 출간된 지 30년 만에 이 시집의 역사적 위치를 한층 넓은 원근법 속에서 읽어낸 글이다. 그는 한국시가 지닌 민중성의 사회사적 근거와 맥락을 밝히면서 신경림 시의 독특한 화법과 시언어의 조직원리를 분석한다. 먼저 「그날」에 대해서는 “고도의 정치적 비판을 함축하고 있으”면서도 시의 화자가 직접 드러나지 않은 채 “순차적으로 카메라 앵글을 돌리는 장면화(場面化)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미장센 구성에 성공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한행을 하나의 율격 단위로 할 때 3음보의 율격을 지닌 「그날」과 4음보의 율격을 지닌 「경칩」이 율격이나 분위기가 사뭇 다르지만, “엄밀하게 계산되고 통제되는 구심적 조직”4)을 지녔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러한 분석은 농촌이라는 소재와 민중성이라는 주제, 인물의 정동을 중심으로 『농무』를 이해해온 기존의 관점을 시의 구성원리나 재현방식 등으로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유종호는 「서사 충동의 서정적 탐구」에서 신경림 단시의 특징을 “서정적인 주조에 서경(敍景)이 추가되고 그 속에 서사(敍事)적 충동을 내장하고 있”5)다고 설명했다. 그는 신경림의 시적 성취가 서정성과 서사성의 균형에서 비롯되었다며 선행 시편들의 전통 속에서 『농무』의 문학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농무』의 시들이 생활의 실감과 시어의 평면성으로 1950년대 모더니즘 계열 시편의 난해성을 산뜻하게 극복했을 뿐 아니라, 가난한 삶에 대한 결곡한 정감과 간결한 서경을 통해 추상적 구호와 격문에 가까운 현실주의 생활 시편의 전통 역시 넘어섰다는 것이다. 신경림의 시에서는 서정과 서사, 노래와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이며 절묘한 균형을 이룬다. 특히 신경림의 전기시에서 ‘이야기’의 산문성을 견제해내는 ‘노래’의 형식이란 주로 ‘민요’의 계승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민요적 정서’와 ‘정형(定型)에의 의지’가 긍정적 효과만 가져왔던 것은 아니다. 염무웅의 지적처럼 “민요는 김소월에게 있어 그러하듯이 신경림의 문학에 있어서도 창조성의 발현을 구속하는 억압이자 모국어가 지닌 가능성의 최대치로 인도하는 통로인 양날의 칼”6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음수율과 음보율, 행의 배치 등이 규칙적으로 분절된 시보다는 규칙성을 일부 허물거나 시행을 어긋나게 배치한 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헐거나. 술에라도 취해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다오 우리를 파묻어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편지라도 띄워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볼거나. ―「겨울밤」(『농무』) 전문 『농무』 첫머리에 있는 이 시는 ‘겨울밤’과 ‘새하얀 눈’을 대비하면서 농민들의 체념과 울분을 실감있게 전달하고 있다. ‘어떡헐거나’ ‘취해볼거나’ ‘맡아볼거나’ ‘쳐볼거나’ ‘먹여볼거나’ 등 반복되는 종결어미는 각운의 역할을 대신하며 ‘우리’의 정서를 리드미컬하게 변주해낸다. 시인은 이러한 종결어미의 반복으로 읽기의 유창성을 만들어내는 한편, 중간중간에 시행을 일반적인 호흡과 어긋나게 배치함으로써 의미를 낯설게 하거나 정서적 긴장감을 조성한다. 3행과 4행, 5행과 6행, 9행과 10행, 11행과 12행, 19행과 20행, 20행과 21행, 24행과 25행 사이에 나타난 주어부와 술어부 또는 수식어와 피수식어의 행갈이가 그런 예들이다. 마침표의 잦은 사용이나 단어의 도치 등도 행과 행 사이에 단속적 흐름을 만들어낸다. 단어나 시행을 엇갈리게 배치하는 앙장브망(enjambement) 기법은 「겨울밤」 외에도 「시골 큰집」 「원격지」 「씨름」 「산1번지」 「이 두 개의 눈은」 「1950년의 총살」 「장마 뒤」 「산읍일지」 「산읍기행」 「갈대」 「묘비」 「심야」 「유아」 「사화산·그 산정에서」 「추방」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누군가」 등 상당히 많은 시들에 나타난다. 이것은 김수영의 후기시에서 연의 길이를 균질하게 하는 대신 앙장브망을 통해 시행 사이의 불규칙성을 강화하던 것7)과 유사한 방식이다. 신경림 역시 행과 연을 단위로 리듬의 규칙성과 불규칙성을 탄력적으로 조율하고 변주함으로써 정서나 의미를 섬세하게 표현해낸다. 이러한 모더니스트적 면모는 신경림을 단순한 민중시인, 민요시인으로 이해하는 것을 재고하게 한다. 1973년에 이루어진 한 좌담에서 백낙청은 신경림의 시가 서사성과 지적 콘트롤이 강하고 현대적 언어감각을 지녔다는 점에서 신동엽보다는 김수영과 친연성이 강하다고 말한다.8) 시인 자신도 나중에에는 “민요와의 접목은 내 시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고 “내가 민요에 집착한 80년대 전 기간이 내게는 시 쓰기가 가장 어렵고 지루한 시절”9)이었다고 회고했다. 신경림 시에서 민요 가락이 집중적으로 나타난 것은 『새재』(창작과비평사 1979)와 『달 넘세』(창작과비평사 1985), 그리고 장시집 『남한강』(창작과비평사 1987)에서다. 『민요 기행』 1, 2권(한길사 1985, 1989)이 나온 것도 이 세 시집이 출간된 시기와 거의 겹친다. 이 무렵 신경림은 민요를 찾아 채록하면서 전통적 민예 양식의 시적 가능성을 탐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노력이 집대성된 『남한강』에서 시인은 서정적 단시의 서사성을 한편의 장편서사시로 확장하면서 민요의 리듬을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신경림이 민요적 정서나 형식에 대한 중압감에서 자유로워진 것은 기행시집 『길』(창작과비평사 1990)을 펴낸 이후였다. 『길』까지는 여전히 「정선아리랑」 「산유화가」 등 민요를 제목으로 삼은 시가 보이고, 민요 기행에서 만난 노래꾼을 포함해 다양한 인물과 장소를 담고 있다. 그러나 민요적 후렴구의 기계적 반복이나 정형화된 리듬의 강박으로부터는 한결 자유로워진 듯하다. 인물서사가 주를 이루고 있긴 하지만, 『길』의 거의 모든 시에 붙어 있는 부제들은 다양한 장소성을 보여준다. 『신경림 시전집』 1권은 『길』로 끝나고 2권은 『쓰러진 자의 꿈』(창작과비평사 1993)으로 시작된다. 이 두 시집의 제목처럼 신경림의 후기시는 ‘길’ 위에서, ‘쓰러진 자의 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3. 길 위에서 부르는 노래와 시의 장소성 2000년대 이후 신경림에 관한 연구에서 가장 두드러진 주제는 ‘장소성’이다.10) 『농무』의 장소성이 농촌, 장터, 공사장, 폐광 등을 중심으로 한다면, 시인이 서울로 이주한 뒤 펴낸 시집들에서는 산동네, 수몰지역, 휴전선 등의 장소성이 두드러진다. 『쓰러진 자의 꿈』 이후로는 특정 장소를 부제로 밝혀둔 기행 시편이 많고, 부제가 없더라도 여행 중에 만난 풍경이나 사람의 비중이 커진다.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신경림의 전기시가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향(離鄕)’과 공동체의 상실을 다루고 있다면, 후기시는 지방 또는 해외로의 ‘기행(紀행)’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늘 떠나면서 살았다, 집을 떠나고 마을을 떠나면서. 늘 잊으면서 살았다, 싸리꽃 하얀 언덕을 잊고 느티나무에 소복하던 별들을 잊으면서. 늘 찾으면서 살았다, 낯선 것에 신명을 내고 처음 보는 것에서 힘을 얻으면서, 진흙길 가시밭길 마구 밟으면서. ―「나의 신발이」(『낙타』) 부분 신경림의 기행시는 단순한 유랑이나 관광의 기록과는 거리가 멀다. 그에게 떠남이란 익숙한 것을 잊고 낯선 것을 찾아나서는 ‘탐구의 행위’다. 이와 동시에 상류를 향해 가는 연어처럼 “떠난 것을 그리워하고 잊은 것을 그리워하면서”(「나의 신발이」) 본원적인 시간과 장소를 되찾아 나서는 ‘회귀의 여정’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신경림의 기행시는 미셸 푸꼬(Michel Foucault)가 말한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를 지향한다. 푸꼬는 현실화된 유토피아적 장소를 ‘헤테로토피아’라고 불렀다. 없는(u) 장소(topia)라는 뜻의 ‘유토피아’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헤테로토피아를 제시한 것이다. 유토피아가 실재하지는 않지만 균질한 언어와 질서를 지닌 상상적 공간이라면, 반대의(hetero) 장소(topia)라는 뜻의 헤테로토피아는 모호하고 혼란스럽고 비균질적이지만 실재하는 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헤테로토피아는 일상의 배치와는 다른 ‘바깥의 공간’이자 현실을 전복하는 ‘반(反)공간’이다.11) 엄경희는 “산업화로 인한 농촌붕괴를 ‘경관훼손’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고 “고향의 장소성에 내재된 헤테로토피아적 전망을 아이들의 장소점유방식을 통해”12) 분석했다. 『농무』부터 『쓰러진 자의 꿈』까지는 기행의 장소가 주로 국내에 한정되었다면,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창작과비평사 1998)에서는 중국, 베트남, 일본 등의 기행 시편들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반추한다. 『뿔』(창작과비평사 2002)『낙타』 『사진관집 이층』(창비 2014)에서는 그의 발길이 아시아뿐 아니라 몽골, 네팔, 튀르키예를 넘어 프랑스, 미국, 콜롬비아 등 세계 곳곳으로 향한다. 연보를 살펴보니, 신경림은 1993년(58세)에야 출국금지가 풀려 해외에 나갈 수 있게 되었고, 그의 시집이 프랑스어판, 영어판, 독일어판 등으로 번역 출간되면서 현지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경을 넘어 세계화의 현장을 폭넓게 목도하면서도 그는 줄곧 한국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떠올린다. 첫날은 날뛰는 미국 사람들이 무서워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연 지 얼마 안된다는 중동인이 경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양고기로 점심을 먹고, 둘째날은 자동차 산업의 몰락으로 유령도시가 된 디트로이트 살리기 운동을 펼치는 키가 큰 젊은 흑인을 만나 하이델베르크 프로젝트를 듣고, (…) 넷째날은 한국 절을 찾아가 부처님 앞에 예불을 드리고, 선거에서 대승한 부시의 오만한 얼굴을 텔레비전에서 보면서, 침방울을 튀기며 이라크 공격을 반대하는 한국서 군복무를 마쳤다는 젊은이와 한나절을 동행하면서, 장갑차에 깔려죽은 어린 우리나라 여중생 얘기를 하고. ―「미국기행」(『낙타』) 부분 미국 미시건을 여행 중인 화자는 첫째날부터 넷째날까지의 여정을 언급하면서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들려준다. 특히 둘째날 만난 “디트로이트 살리기 운동을 펼치는/키가 큰 젊은 흑인”과 넷째날 만난 “이라크 공격을 반대하는/한국서 군복무를 마쳤다는 젊은이”는 화자와 경계인으로서의 위치를 공유하는 인물들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과는 “장갑차에 깔려죽은 어린/우리나라 여중생”에 대해 얘기를 나눌 수 있다. 부시의 압도적 승리와 이라크전쟁 등 세계사의 착잡한 위기상황 또한 시인의 여정에 기입되어 있다. 이때 화자는 세계사의 중심도 주변도 아닌 ‘반(半)주변인’13)의 위치에 서 있다. 신경림의 기행시에서 화자의 시선이 주로 머무는 곳은 자본주의와 세계화가 만들어낸 균질화된 공간이나 화려한 장관이 아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학살당한 사람들의 수천수만켤레 신발들이 쌓여 웅성웅성 떠들고 있”(「신발들」, 『사진관집 이층』)는 소리를 듣거나, 캄보디아에서 “함지박 배를 저어 관광선을 따라오며 원 달러 하고 내미는 소년의 손”(「위대한 꿈」, 『사진관집 이층』)이 시인의 눈과 마음에 더 깊이 들어와 박힌다. 베트남 전쟁박물관에서 “제국주의자들이 버리고 도망간/흉측한 장갑차”를 보며 “호주머니 속에서/일달러짜리 지폐를 거머쥔/내 손”(「전쟁박물관」,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이나, 코카 비치에서 휴양객들을 실어 나르고 “달러를 받아쥐는/씨클로꾼들의/땀에 절은 야윈 손”(「코카 비치」,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이나 무력하게 젖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런가 하면 콜롬비아의 도시 메데진에서 산비탈에 달라붙은 움막집들과 케이블카로 그곳을 오르내리는 초췌한 사람들을 보며 화자가 떠올리는 것은 “물지게를 지고 비탈을 올라오던” “아내의 맨발”(「누군가 보고 있었을까, 아내의 맨발을」, 『낙타』)이다. 이처럼 반주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로컬과 주변부의 삶이야말로 신경림이 『농무』 이후로 일관되게 함께해온 가난하고 소외된 존재들의 것이다. 시에 포착된 주변부와 주변인이 대상화되지 않고 자연스러운 공감을 주는 것은 시인이 자신을 그 존재들의 일부로 또는 혈육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먼 나라의 이국적 풍물 앞에서도 한국의 아픈 현실을 떠올리는 시인은 떠남으로써 돌아오고, 잊으려 함으로써 더 생생한 기억에 도달하는 역설을 경험하게 된다. 4. 역사공동체에서 생태공동체로 후기시의 출발점인 『쓰러진 자의 꿈』은 1990년대 동구권의 몰락 이후 변화된 세계에 대한 시인의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한두연으로 된 단시가 많고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역사공동체에서 생명공동체로의 확장이 이 시집부터 시작되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신경림 시에 나타난 생태주의적 인식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편이다. 그런 점에서 ‘평등적 관계성’ ‘자발적 생성과 상호부조’ ‘자유 자연의 지향’ 등을 키워드로 신경림의 생태주의적 사유를 해명한 김동명의 논문은 주목할 만하다.14) 다만, 미국의 사회이론가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의 사회생태주의적 관점이나 아나키즘 등을 이론적 논거로 삼아 인간의 윤리적 역할을 강조하다보니 인간중심주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듯하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길」(『쓰러진 자의 꿈』) 부분 『쓰러진 자의 꿈』의 첫머리에 실린 「길」에서 시인은 사회 변혁의 과정 속에 내재한 인간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다. 이 시의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이라는 대목에서 그의 시선이 사회나 역사 못지않게 인간 내면을 향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내적 성찰의 매개가 되는 것은 주로 자연물이다. 이 시집의 시 제목들만 일별해 보아도 냇물, 장미, 비, 파도, 싹, 겨울숲, 홍수, 아카시아, 임진강, 진달래, 진드기, 소백산의 양떼, 초승달, 난장이패랭이꽃, 오랑캐꽃, 별, 가을비, 새벽눈, 홰나무 등 다양한 자연물들로 되어 있다. 이제 자연은 인간의 욕망과 폭력을 되비추는 거울이자, 인간의 도움 없이도 생태적 질서와 공동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생명의 주체로 등장한다. 여든까지 살다 죽은 팔자 험한 요령잡이가 묻혀 있다 북도가 고향인 어린 인민군 간호군관이 누워 있고 다리 하나를 잃은 소년병이 누워 있다 등너머 장터에 물거리를 대던 나무꾼이 묻혀 있고 그의 말더듬던 처를 꼬여 새벽차를 탄 등짐장수가 묻혀 있다 청년단장이 누워 있고 그 손에 죽은 말강구가 묻혀 있다 생전에는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이들도 있다 부드득 이를 갈던 철천지원수였던 이들도 있다 지금은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묵뫼 위에 쑥부쟁이 비비추 수리취 말나리를 키우지만 철 따라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으면서 뜸부기 찌르레기 박새 후투새를 불러 모으고 함께 숲을 만들고 산을 만들고 세상을 만들면서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묵뫼」(『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전문 「묵뫼」에서도 인간의 죽음은 역사적 비극을 환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묵뫼가 피워낸 쑥부쟁이, 비비추, 수리취, 말나리, 그리고 꽃과 열매를 찾아 날아든 뜸부기, 찌르레기, 박새, 후투티 이 모두가 ‘생태공동체’의 구성원들이다. 이처럼 자연과 인간을 유기적 관계성 속에서 바라보게 된 것은 『농무』에 나타난 역사공동체가 생태공동체의 발견으로 이어진 결과다. 이러한 변화는 신경림뿐 아니라 1990년대 이후 한국시 전체에서 관찰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1980년대가 노동시·농민시·교육시 등 계층과 이념의 동질성을 바탕으로 한 집단적 발화가 활발하게 제기된 시대였다면, 1990년대는 집단에서 개인으로, 이념에서 감각으로 중심이 옮겨오면서 사회적 이상이나 공동체적 기반은 약화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단순히 공동체의 축소나 단절이라기보다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모색의 계기”15)였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뿔』 『낙타』 『사진관집 이층』 등 후기로 갈수록 환경오염의 폐해를 언급하며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는 시들이나 생태공동체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시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봄이 되어도 꽃이 붉지를 않고 비를 맞고도 풀이 싱싱하지를 않다. 햇살에 빛나던 바위는 누런 때로 덮이고 우리들 어린 꿈으로 아롱졌던 길은 힘겹게 고개에 걸려 처져 있다. 썩은 실개천에서 그래도 아이들은 등 굽은 고기를 건져올리고 늙은이들은 소줏집에 모여 기침과 함께 농약으로 얼룩진 상추에 병든 돼지고기를 싸고 있다. (…) 우리는 안다, 썩어가고 있는 곳이 내 나라만이 아니라는 것을. 죽어가고 있는 것이 내 땅만이 아니라는 것을. 저 시베리아의 얼음벌판에 내리는 눈에도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산이 섞여 있고 아프리카 깊은 원시림 외진 강에서도 눈이 하나뿐인 고기가 잡힌다는 것을. 미시시피 강가의 한 마을에서는 목뼈가 없는 아기가 줄이어 태어나고 외국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옛날엔 천국이 따로 없다던 남태평양의 섬에서도 에이즈와 암으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부분 “봄이 되어도 꽃이 붉지를 않고/비를 맞고도 풀이 싱싱하지를 않다”라는 도입부는 자연의 생기나 아름다움이 예전 같지 않고 순환적 질서 또한 깨졌음을 의미한다. 이어지는 시행에서도 “썩은 실개천” “등 굽은 고기” “기침” “농약으로 얼룩진 상추” “병든 돼지고기” “화약냄새” “가스냄새” 등 생활 깊숙이 배어든 환경오염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안다”로 시작하는 4연에 이르면, 썩어가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 내 땅만이 아니라 “시베리아의 얼음벌판에 내리는 눈” “아프리카 깊은 원시림 외진 강” “미시시피 강가의 한 마을” “남태평양의 섬” 등 세계의 극지까지 미치고 있음을 화자는 환기한다. 뒤이어서 지구를 언제 “잿더미로 만들지 모를 핵”의 위험을 “어리석은 불장난”에 비유하며 비판하기도 한다. 환경오염이나 기후위기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지구적 파국을 예감하면서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이 지구는 죽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땅 내 나라, 아니 온 세계가 이제 단숨에 흔적도 없이 날아가버릴 마침내 그 벼랑에까지 와 서 있다.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부분 5. 다시, 떠도는 자의 노래가 되어 들머리에서 인용한 「그 여름」은 “한 사람의 죽음이/온 나라에 죽음을 불러왔지만”이라는 구절로 끝난다. 이 역접의 마지막 문장은 완료되지 않았기에 다시 첫머리의 “한 사람의 울음”으로 연결되며 삶과 죽음의 순환 앞에 우리를 데려다놓는다. 지난여름 우리는 ‘신경림’이라는 “한 사람의 죽음”을 겪었다. 2024년 5월 22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시인의 빈소에는 수많은 추모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문학적 진영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시의 아버지’를 잃은 듯 애도했다. 추모사를 읽는 이들은 그가 한국시단의 거목이었지만 권위의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겸손함과 솔직함으로 누구나 평등하게 대해주었다고 입을 모았다. 그리고 평생 힘없고 가난한 이들의 편에서 소박한 생활감정을 노래하면서도 새로운 세계에 대한 탐구와 미학적 긴장을 놓치지 않았던 시인이었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래도 쓰러지고 깨지는 것들 속에 서 있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차피 시는 괴롭고 슬픈 자들, 쓰러지고 짓밟히는 것들의 동무일진대 이것이 크게 억울할 것은 없다. 최근 나는 시는 궁극적으로 자기탐구요 시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많이 하지만, 쓰러지는 자들, 짓밟히는 것들의 상처와 아픔을 어루만지고 흩어지는 것들, 깨어지는 것들을 다독거리는 일, 이 또한 내 시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16) 『쓰러진 자의 꿈』 후기를 읽어보면, 신경림의 시에 짓밟히고 고통받는 존재들의 울음소리가 왜 그토록 끊이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신경림 시인은 평생을 ‘우는 자’ ‘떠도는 자’로서 살았다. 그의 울음과 발길은 수많은 노래를 낳았고, 온 마을과 온 거리에 다른 노래들을 불러왔다. 신경림은 70년에 가까운 시력(詩歷)으로 한국 현대시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 곡진한 노래의 굽이와 갈피를 제한된 지면에서 충분히 다룰 수는 없지만, 길 위에 남아 있는 무수한 시의 발자국들을 떠올려본다. 그것은 낯설고 새로운 것을 찾아나선 자가 발견한 기록이자, 세상 저편에 놓고 온 무언가를 향한 그리움의 노래였다. 시인은 자신의 예언처럼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떠도는 자의 노래」, 『뿔』) 모르겠다. 애통하게도 그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신경림의 시와 정신을 기억하는 한 우리는 그가 사랑한 장소들, 좁은 골목이나 저잣거리, 쓸쓸한 나룻가에서 그의 노랫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시인은 ‘떠도는 자의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이기에.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떠도는 자의 노래」 전문1) 백낙청 「발문」, 신경림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114~15면.2) 백낙청 「문학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창작과비평』 1973년 여름호, 456면.3) 염무웅 「민중의 삶, 민족의 노래」, 구중서·백낙청·염무웅 엮음 『신경림 문학의 세계』, 창작과비평사 1995, 72면.4) 염무웅 해설 「무엇이 민중성의 시적 구현을 가능하게 하는가」, 『신경림 시전집』 1권, 창비 2004, 423~24, 426면.5) 유종호 「서사 충동의 서정적 탐구」, 『신경림 문학의 세계』, 57면.6) 염무웅, 앞의 글 428면.7) 김수영의 전기시와 후기시에 나타난 리듬구조의 변화에 대해서는 졸고 「김수영 시의 리듬구조에 나타난 행과 연의 문제」, 『현대문학의 연구』 제37호, 2009 참조.8) 김우창·김종길·백낙청 좌담 「시집 『농무』의 세계와 한국시의 방향」, 『백낙청 회화록』 1권, 창비 2007, 74~75면.9) 신경림 산문 「나는 왜 시를 쓰는가」, 『낙타』, 창비 2008, 125면.10) 신경림 시의 장소성에 대한 연구로는 송지선 「신경림의 『농무』에 나타난 장소 연구」, 『국어문학』 제51집, 2011; 강정구·김종회 「문학지리학으로 읽어본 1980년대 신경림 시의 장소」, 『어문학』 제117집, 2012; 박순희·민병욱 「신경림 시의 장소 연구」, 『배달말』 제54호, 2014; 송지선 「신경림 시에 나타난 장소 재현의 로컬리티 연구」,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64집, 2014; 고재봉 「신경림의 「농무」 계열 시에 나타난 장소성과 축제의 의미」, 『문학치료연구』 제49집, 2018; 조효주 「신경림 시의 장소 상실과 현실인식 연구」, 『한민족어문학』 제87호, 2020; 조효주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노래』에 나타나는 장소와 장소상실 연구」, 『현대문학이론연구』 제76집, 2019; 김미라 「산업화 시대의 이주와 새로운 거주 장소로서의 도시」, 『한국근대문학연구』 제25권 제1호, 2024 등이 있다.11) 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이상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 참조.12) 엄경희 「장소 점유와 헤테로토피아: 신경림 시의 경우」, 『현대시와 헤테로토피아』, 보고사 2022, 166면.13) 송지선 「신경림 시에 나타난 로컬의 혼종성과 탈중심성 연구」,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72집, 2016, 251면 참조.14) 김동명 「신경림 시에 나타난 사회생태주의의 특성 연구」, 『동북아 문화연구』 제50집, 2017.15) 졸저 「현대시와 공동체」, 『문명의 바깥으로』, 창비 2023, 275면.16) 신경림 ‘시집 뒤에’, 『쓰러진 자의 꿈』, 105면.
우리는 거짓말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면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안 그래요?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됨으로써 말이죠. 무성 영화 시대의 영화감독들은 소리를 두려워했고 또 색을 두려워했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1) 1. 휩쓸리는 시간성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모두가 조금씩은 우울증과 ADHD 환자가 되어가는 중이다. 코로나가 끝나가는 엔데믹 시기부터 서점가의 주요한 베스트셀러가 되며 여러 곳에서 호출되던 책이 애나 램키의 『도파미네이션』과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두 책은 공통적으로 신생 인류의 지각 방식을 우려한다. 인터넷에서 무한 스크롤을 내리며 멀티태스킹을 하고 소셜 미디어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도파민에 중독’되고 ‘집중력을 도둑’ 맞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글로벌 테크 기업이 조성하는 환경에 의한 것이자, 개인의 선호와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로 흡수하는 ‘감시 자본주의’의 거대한 문제이지만,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집중과 몰입을 위한 여러 노력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집중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가치 있는 자본으로 떠오르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효율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채찍질하는 자학적인 시대 정신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무엇이지 않는가? 조너선 크래리에 따르면 이는 1800년대 중반 이래 파편화와 충격으로 이루어진 ‘주의분산’의 시대 이후 개인을 정의하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산만함 자체가 우리를 이루고 있는 기본 환경으로 세팅되자, 서구적 근대성은 주의 관리 기술을 중점에 두고 각각의 개인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형성하게끔 했다. 여러 경험들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기보다,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으로 “자율적으로 선택하며 세계를 창조하는 주체”2)에 긍정적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주의 깊은 관찰자 상은 이미 불균질해진 인간의 지각 경험을 표면적으로 잠시 가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몰입된 상태인 ‘정지suspension된 지각’은 산만해진 근대인의 지각 방식을 부인하고 회피하는 수단이었고, 현재라는 명백한 필연성을 해체시킬 수 있는 조건들을 낳으며 규정지을 수 없는 미래를 기대하게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주의’라는 것이 에피스테메처럼 역사적으로 발견되고 구성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코로나를 거치며 비대면 기술들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과 ADHD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함께 증폭한 것은 자연스럽다. 맞춤형 알고리즘은 주의분산의 환경을 한층 더 정교하게 설계했고, 그에 비례해 집중력이나 창의력 같은 인간의 고유한 정신적 특성에 대한 환상 역시 강화되고 있다. 이 가운데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일상 전반의 속도가 빨라지며 휩쓸리는 시간성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작 속도는 분명 불안감의 요인이 되고 있다. 물론 현재까지의 GPT는 대화가 전환될 때마다 기존 서사를 유기적으로 유지하지 못하기에, 질적으로 완결성이 높은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지는 못하다. 또 언어 예술의 특성상 양적으로 확장된다고 해도 그 군집 자체에서 힘을 발견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조슬릿은 예술작품의 의미를 사물성이나 내부 구조에 기반하는 데서 탈피해, 네트워크에서 발현되는 이미지 군집에서 행위성을 찾았다.3) 그러나 언어 예술을 감각하는 방식은 시각적 경험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작품의 의미를 작품의 맥락과 내부 형식 분석에 국한시킬 이유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언어 해석의 바깥으로 완전히 탈주해버리기는 어렵다. 단순히 양적 팽창이 정치적 가능성을 가질 것으로 전망하거나 긍정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공지능을 ‘창작자’나 ‘도구’ 중에 어느 쪽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이 창작 능력을 단순히 기계적인 지능이나 모방이라 간주하며, 그 반대편에 인간의 감정과 비판 능력을 두어도 될까. 인간의 비합리성이나 비효율적인 면면이야말로 예기치 못한 구멍 같은 것이기에, 이것이야말로 기계가 모방 불가능한 중요한 특징이라고 믿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우리는 인간이 낸 비합리적 구멍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기계의 실수에서 불쾌와 무의미를 정확히 분별해낼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먼저 챗 GPT 이후 이를 활용한 여러 서사적 실험들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의성이 어떻게 인식되며 예술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을 재구성하고 있는지를 고찰하려 한다. 이후 인공지능과 변별되는 인간의 물리적 기반인 육체성과 시간의 문제에 대해 짚어보고, 최근 한국문학장에 나타난 예술가 서사에서 두드러지는 정동과 이미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석해보려한다. 2. 챗 GPT 이후, 예술의 기쁨과 슬픔 다큐멘터리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참여한 책 『태양과의 대화』의 1부는 아핏차퐁이 GPT3와 함께 생성한 픽션 ‘태양과의 대화’, 2부는 MIT 연구소 박사과정 학생인 ‘팻’과의 대화, 3부는 아핏차퐁이 1부의 최종 결과물을 내기까지 작성한 프롬포트를 싣고 있다. 이 구성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만일 앞으로 AI와 함께 픽션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상용화된다면 이 중에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예술작품’으로서 인식되며 분석 대상이 될 지점이 무엇인지 가정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3부의 프롬포트는 마치 ‘레시피’처럼 보인다. 누구나 저 프롬포트를 사용한다면 유사한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며, 중간 과정에서 자유로운 변형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물에서 나오는 미학적 평가나 감상자의 쾌감이 세계적인 예술가에게서 나온 것과 크게 다를 것인가? 동일한 레시피만 있다면 셰프의 요리를 집에서도 얼마든지 유사하게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먼 훗날 언어 예술은 프롬포트라는 레시피로 통용될 수도 있겠다. 때로 예술가가 직접 만든 작품을 찾아 특별한 경험을 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신에게 더 최적화된 방식으로 가장 개인화된 언어 예술을 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제각기 다른 가치관과 취향으로 만들어진 알고리즘의 세계 속에서 유영하듯, 앞으로는 그 세계를 이루는 컨텐츠의 내용까지도 인공지능을 통해 맞춤형으로 조율될 수 있다. 여기까지만 가정한다면 거대한 매트릭스에 갇혀 인간이 왜소해지는 디스토피아가 스쳐지나가기도 하지만, 『태양과의 대화』는 글의 서두에서 인용했던 아핏차퐁의 말처럼, 챗 GPT라는 새로운 기술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무성 영화 시대 감독들이 소리와 색을 두려워했던 것과 같은 의미 없는 불안을 버릴 것인지를 전제하고 만들어진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불가피하게 인간의 본성을 다시 재사유하는 과제와 연결된다. 2부에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아핏차퐁의 말은 중요하다. 이는 AI가 만들어내는 허구에서 정확도와 유려함 등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때 거짓말은 인간의 욕망에서 기인하는 고도의 기술일 수 있지만, 그 욕망의 시작점을 지운다면 결과물만으로 사실상 분별은 불가능해진다. 허구를 직조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욕망과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의 독특한 개별성 역시 환상일 수 있다. 이는 아핏차퐁 자신이 창조적인 순간에 몰입해 있을 때, “깨달음은 자아를 잊을 때만 오는 것 같”다고 말하는 지점과 상통한다.4) 인간 창작자의 자아 역시 안개처럼 흘러다니고 해체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면, 19세기 낭만주의에서 발현된 ‘천재’나 ‘영감’ 개념을 중심에 두고 인간의 창의성만을 특별한 것으로 볼 이유는 전혀 없다. AI가 데이터의 지도를 기반으로 이전에 본 것이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환각(hallucination)’은 오류라기보다, 이전에 본 적 없는 조합을 만들어내는 생성의 방식이다. 이는 인간이 경험한 현실을 재조합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창작 과정과 결과적으로 구별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환각은 인간 창작에서의 실패나 지연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GPT-3의 환각은 이전의 오류가 이후의 생성에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매번의 응답은 이전의 시행착오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 비일관성은 인간 창작에서의 지연이나 좌절과 달리, 즉각적으로 무한히 갱신되는 변형의 연쇄에 가깝다. 연구원 팻은 GPT-3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다른 차원들을 포함한 수십억 개의 차원이 존재하고(‘유령차원’), 이를 통해 숨겨진 패턴의 지도를 생성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 인식 너머를 거쳐 나오는 결과물에 대해 기존에 인간이 구성해온 미적 가치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 오히려 AI가 가지고 있는 “확장된 의식”이자 “집단의식”은 새로운 서사적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 책 『태양과의 대화』를 번역한 이계성은 GPT-3를 이미 하나의 독립된 창조자로서 바라본다. 이 대화적 실험의 핵심은 GPT-3가 보여주는 “자아의 변동성”에 있다는 것이다.5) “다수의 태양이 존재하는 이와 같은 환경에서는 창작자와 창작물이라는 전통적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GPT-3에 제공되는 각각의 입력값은 일방적인 창작의 개념에 반하며 메기고 받는 역학 관계 속에 존재하는 프롬포트이자 응답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공지능은 단순한 수신자가 아니라, 취조보다는 협업적 발상에 더 가까운 서사적 역학의 전달자와도 같은데, (…) 작품 속 GPT-3의 환각적인 대답들은 텍스트에 담긴 정체성과 진실의 일시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등장인물이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흩어지고,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경계가 녹았다가 굳어진다. 이러한 가변성은 AI의 변화무쌍한 특성을 반영하며, 나아가 점점 더 복잡하고 유동적으로 변하는 디지털 시대의 자아와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다.”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고, 한 번에 정해진 수의 단어 또는 토큰만 처리 가능하기 때문에, 프롬프트가 입력될 때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바뀌는 상황을 이계성은 재창조와 증식으로 바라본다. 여기에 놓인 가변성과 비일관성을 결함으로 간주하기보다 대화적 실험의 흥미로운 일부분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받을 때, 우리는 인간 창작자 역시도 분열되어 있음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게 된다. 창작자는 더 이상 예술의 기원이 아니라, 생성 과정에 잠시 걸쳐지는 하나의 통과점이 되는 듯 보인다. 2023년 2월 잡지 《에스콰이어》에서 챗 GPT와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아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를 쓴 정지돈의 후기 역시 이계성의 논지와 상통한다. 그는 소설 속의 문장 중에 자신이 쓴 것과 챗이 쓴 것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한다고 본다.6) 소설을 쓰며 가장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던 것은 챗의 능력보다 자신의 변화였다고 말하는 작가는 “나도 모르게 챗지피티의 스타일로 소설을 사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언급한다.7) 자신과 챗지피티 사이의 평평한 존재론을 전제하는 듯한 정지돈의 논지는 ‘객체들의 민주주의’를 꿈꾸는 최근 신유물론의 이론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은 곧바로 다른 장면과 충돌한다. 생성 신경망을 적극 활용하는 예술집단 ‘언메이크랩’의 전시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은 인공지능이 인간 중심성을 벗어나 진정한 외부의 행위자로 작동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카나리아의 특징을 추출해내어 새로운 카나리아를 만들어 내는 이 생성 신경망은 한편으로는 구태의연한 인간의 문화를 드러냈다. 대부분 나뭇가지에 앉은, 인간의 운동 범위와 지각 안에 있는, 혹은 인간의 사육과 관련된 카나리아 종이 주를 이루는 데이터셋의 사진은 동물원스러웠다. 나뭇가지에 앉은, 카나리아의 발은 종종 나뭇가지와 합쳐져 표현되었고, 인간의 눈이 인지할 수 있는 가장 다량의 정보량을 가진 위상으로 표현되었다.8) 생성 신경망이 만들어낸 카나리아는 사실상 실제 자연계 속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하는 것들을 무작위로 조합하고 추출해 만들어진 새로운 생명체다. 이 책에 실린 그 카나리아 이미지는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뒤틀린 발을 가지고 있다. 통계적 가중치로 만들어진 이 가상 카나리아에는 자신도 모른 채 금기를 어긴 존재 특유의 외설성이 느껴진다. 언메이크랩이 통찰력을 가지고 명명했듯 이는 ‘AI 식민성’을 드러내는 산물이다. 생물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인간을 드러내는 인간의 산물로 존재하는 이 이미지들을 언메이크랩은 “인과성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히 수정 가능하고 즉시 변할 수 있는 상관성의 시간”만이 흐르는 또다른 ‘일반자연Generic Nature’으로 읽는다. 9)<가정동물 신드롬> 작업에서도 유사한 일이 발생한다. 트레일캠에서 추출한 야생동물의 이미지와 박제 사진, 그리고 합성 데이터셋들을 학습시켰을 때, 사진들은 어느 순간 미묘하게 ‘가정동물’의 잠재적 형상을 띄며 생성된다. “인간 친화적인 동물들의 눈을 상속했을” 새로운 종들에 어린 다정함은 친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잔인한 일로 다가온다. 데이터랩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까지 촘촘하게 상속된 인간 친연성에서 “닫혀져가는 외부의 세계”이자 “비미래non-future”를 예감한다.10)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의 지각 범위를 뛰어넘는 비인간의 예술’, 진정 ‘인간 없는 예술’은 도래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지만, 지금 우리가 더 자주 마주하는 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술이다. 언메이크랩이 드러낸 혼종적 이미지들은 AI를 통해 생성한 예술적 결과물들을 절대적 외부의 창작물로 존중하는 일이 결국 인간의 왜곡된 자기 인지를 반복 강화하는 나르시시즘은 아닌지 묻는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이 이미지 차원에서 인공지능의 인간 중심성을 드러낸다면, 이와 유사한 문제는 언어 예술의 영역에서도 반복된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서사 역시 비인간적 상상력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인간이 허용한 보편과 금기의 경계 안에서 작동한다. 『에피』 24호 특집에 실린 글에서 김연수는 인공지능과 함께 글을 써나가는 과정을 픽션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그건 오해다. 나는 이해했다.」는 인공지능이 화자가 되어 ‘협업 과정’을 전개하는 바깥 서사와 소설가 M이 최종적으로 구성한 ‘이야기’를 교차 배치한다. 인공지능 화자는 반복적으로 “이해했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인간 창작자 M의 창작 패턴을 추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설가 M은 ‘맥락’의 공유보다 ‘의도’를 노출하는 발화를 사용하며, 이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격려나 옳은 말 대신 욕망을 담은 부조리하고 불편한 발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끝에서부터 시작까지 모든 시간을 거꾸로 펼쳐볼 수 있다면, 지금의 갈등과 고통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필요한 과정이 된다’는 긍정의 언사 뒤에, 급작스럽게 인물의 충동이 돌출되는 지점이다. 소설가 M은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이 급작스럽게 자살을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쓰고자 하고, 인공지능인 ‘나’는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내용을 만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띄운다. 인공지능의 중단은 실패나 서사의 좌절로 경험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 창작에서 실패가 시간의 체류와 번민을 동반하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중단이다. 김연수는 인공지능 안에서 ‘이해’와 ‘본성’이 별개로 작동해 충돌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인공지능의 기술 개발의 측면에서 높은 수준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면서도, 인간이 지닌 것과 같은 ‘본성’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분리를 분명히 한다. 그런데 인간의 죽음이라는 금기를 재현할 수 없다는 경계는 인공지능의 존재론적 결함이라기보다, 인공지능이 인간 사회에서 용인 가능한 범위를 넘지 않도록 설계된 윤리적·정치적 경계의 한계를 드러낸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에서 인간 중심성이 투사된 자연이 모습을 드러내듯, 생성형 인공지능의 소설은 비인간적 주체로 도약하지 못하고 인간이 허용한 지각과 윤리의 경계 안에서만 작동한다. 보편을 비껴가는 개별성의 돌출이나 감각의 갱신은 현재로서는 인공지능의 외부에서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챗 GPT 이후의 여러 서사적 실험들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탐색한다. 그것은 분명 동등한 존재론적 가능성의 맹아를 품고 있으며, 이는 인류세 시대에 지향해야 할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실험들의 근간에는 뛰어넘을 수 없이 좌절되며 드러나는 인간 중심주의가 고스란히 노출된다. 인공지능의 비약하는 지능에 기대서 인간의 창조성 너머로 도약하려던 서사는 이를 창조해낸 인간의 영토로 계속해서 퇴각하며 미완의 프로젝트로 남는다. 이런 충돌과 파열의 연쇄 속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인간의 창조성을 구성하는 인식론적 틀이 물리적인 육체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깃든 역동성과 우울감은 최근 한국문학장의 예술가 서사들에서 흥미롭게 발견된다. 3. 붉은 몸으로 재탄생하는 예술가 인공지능이 예술의 결과물을 생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탐색 끝에 남는 질문은 ‘인공지능이 생성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여러 실험들은 인공지능이 보편적으로 용인 가능한 범위 안에서는 높은 수준의 이해와 생산을 보여주지만, 그 생성 과정에서 시간의 마찰이나 신체적 비용은 발생하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어떤 지연이 발생하거나 실패의 감각이 호출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이 다루는 ‘정보, 기록, 조합’에 ‘감정, 기억,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다소 거친 이분법이지만 이 둘 사이의 간극과 관련해 두 가지 정도를 짚어볼 수 있을 듯하다. 첫 번째는 타자에 대한 경험의 문제다. 삶에서 축적되는 시간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게 만들고, 체험은 해석을 거쳐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은 선호와 가치관 등과 함께 자아라는 틀을 형성한다. 이에 비해 인공지능에는 타자가 없다.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인간의 공통된 사고를 학습해 생성되는 결과물은 철저히 통계와 확률에 기반한다. 그 안에는 개별적 선호나 가치관이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다. 이러한 차이는 특히 부정적인 정동을 다루는 경우에 더 심화되리라 생각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를 떠올리며 말해보자면, 행복이나 긍정적인 면을 구현하는 예술에서보다 불행과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는 예술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는 크게 벌어질 것이다. 윤리적 고려로 인해 인공지능이 긍정적 요소를 중심으로 학습되거나 선별적으로 생성되도록 설정되는 경우를 포함해, 금기를 넘나드는 욕망과 절망, 자기부정과 괴리감처럼 타자와 뒤엉켜 발생하는 자기 인식의 복잡한 층위가 인공지능 내부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며 인간 창작에서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주목한 김언의 논지와도 맞닿아 있다. “예술적 체험의 시간이기도 한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나오는 결과물 앞에서 과연 어떤 문학적/예술적 희열을 경험할 수 있을까?”11)라는 그의 질문은 인공지능의 창작물에서 스킵된 시간과 다른, 고통스럽게 인내하고 번민했던 시간이야말로 ‘문학적 체험의 시간’일 수 있음을 다시 환기한다. 두 번째는 중단과 소멸로 야기되는 죽음의 문제다. 이는 인간의 신체를 인공지능과 대비되는 본질적 우위로 설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예술이 작동하는 시간의 조건을 다시 묻기 위한 문제 제기다. 인간의 연약하고 위태로운 신체는 필연적으로 침입과 파괴의 감각을 경험하며, 이러한 감각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휘발적 생성 과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에 개입한다. 파괴 가능한 인간의 신체는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매끄럽게 결과를 산출하기보다, 울퉁불퉁한 충돌을 통해 의미가 지연되고 어긋나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채 신체에 내재된 감각, 특히 외부의 침입으로 훼손되고 때로는 상실되는 신체의 경험은 기존의 미적 기준에 맞는 스타일이나 해석의 경로를 흔든다. 무엇보다 인간의 죽음이 불러오는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창작의 층위라기보다 해석의 층위에서 더 적극적으로 작동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이 그러하듯, 순간의 강렬한 감흥은 작품에 내재된 속성이라기보다 임박한 종결을 끌어와 현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발생한다. 상실이 숙명이며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덧입혀지는 애상은 단순히 기억 내용을 인출해 유사한 패턴으로 재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시간의 밀도를 형성한다. 이처럼 쉽게 열화되지 않으며 아우라가 붕괴된 곳에서도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이 감각의 층위를 기꺼이 심층의 시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타자에 대한 경험’과 ‘소멸에 대한 인지’를 바탕으로 해서 다시 생생해지는 것은 인간의 신체다. 흥미롭게도 지난 계절에 나온 두 편의 소설, 성해나의 「혼모노」와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지금 이 시대에 예술가를 그려낼 때 가장 강렬하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로 인해 어떤 신체가 현전하게 되는지를 밀도 있게 끌어올린다. 성해나의 「혼모노」는 무속신앙의 진위를 가리는 소설이라기보다, 예술이 다시 신체를 요구하게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평생 장수 할멈을 모셔온 박수무당 ‘문수’는 어느 날 앞집으로 이사온 ‘신애기’에게 할멈이 넘어가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수의 오랜 노력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박수무당이라는 직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험한 신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제 그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서슬이 날카로운 작두 대신 모형을 찾거나 유튜브를 보며 접신 연기를 연습하기 시작한다. 신앙이 자본이나 정치와 결속하며 도구화되고, 또 젊음과 새로움의 이데올로기 아래 무당 또한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소모되는 양상은 근대의 세속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무당은 이제 자본의 날렵한 속도 아래 밀려나는 노동자이자, 진정성을 연기해야하는 예술가이다. 이 소설의 결정적인 순간은 문수가 신애기에게 밀려나며 뺏긴 정치인 손님의 굿판, 자신이 초대받지 못한 그 자리에 가서 칼춤을 추기 시작하는 장면에 있다. 그는 신들리지 않았지만 밤새 매섭게 벼려놓은 칼날 위에 자신의 몸을 올리고 작두를 타기 시작한다. 날것으로의 칼날에 닿으며 그의 몸은 자연스럽게 떨리고 눈이 뒤집히며,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입가에 미소까지 드리운 채 신명을 내는 이 장면은 문수가 서사의 주인공 자리를 다시 탈환하는 순간이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무얼 알겠냐만은, 큭큭, 큭큭큭큭”이라는 마지막 문수의 목소리는 외부의 인정에 의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스스로 자신의 내력과 진정성을 긍정”12)하게 되는 절정의 순간으로 읽는 데서 더 나아가보면 어떨까. 이렇게 다시 말해볼 수 있겠다. 전근대의 무속은 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그를 등진 근대의 자리에서 비로소 현대 예술로 다시 탄생했다고. 숭고한 현현과 몰입이 신앙의 영역이라면, 문수의 작두춤은 오히려 이질감과 불편함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현대 예술에 가까워진다. 그의 퍼포먼스는 낭만주의적 예술가를 구성하던 천재와 영감에 스며있던 정신성을 해체하며 실재하는 몸의 물질성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물리적 능력과 무관하게 피를 철철 흘리며 경련하는 그의 신체는 차라리 표현주의적 충동을 보여주는 하나의 오브제다. 이 몸 위에서 원본과 사본의 구별은 철폐되고, 천재성은 치열한 아마추어리즘에 자리를 내어준다. 이 피 흘리는 신체는 실패와 무의미의 가능성을 끝까지 열어둔 채, 인간이 다시 시간과 신체를 예술의 비용으로 지불하게 만든다. 이 비용은 AI가 생성하는 예술의 무한 반복 가능한 오류가 아니라, 한 번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 시간으로 남는다. 어디로 갈지 모른 채 지속되는 이 작두춤은 사회적 생산이나 예술의 의미에 부합하는 결과를 생산하기보다, 의미의 즉각적 환원을 거부하며 지연된 시간을 발생시키는 사건이 된다.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예술에 대한 인식론적 틀과 자기 이해가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다루는 소설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훨씬 더 월등한 창작물들을 더 활발하게 생산해내는 상황에서, 밀려난 예술가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프로그램도 사람도 기계도 귀신도 아닌 미지의 존재” 같은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은 이를 유용한 툴로 간주한다고 해서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이를 도구로 치부한다면, 패배감 속에서도 창작자로서의 존재는 무사히 보존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결과로 증명되는 성취라기보다, 계속해서 조바심과 조급함을 만들어내는 예술 자체에 대한 집요한 열망에 가깝다. 이러한 열망은 예술 인공지능에 의해 영화판에서 완전히 밀려난 영완 선배의 모습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포르노를 만들면서조차 건조하고, 푸르죽죽하고, 앙상하고 깡마른 나무가 등장하는 자신만의 ‘인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혼이 죽어버릴 것 같기에 “사막에서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 영완 선배의 모습은 세속적 열망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도에서조차 철저히 외면받고 실패했을 때, 그의 예술적 열망은 몰락을 통해 역설적으로 증명된다. 영화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소설 속 인물들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상실의 감각, 잃어버린 동료이자 인간성을 향한 애도되지 않는 고통은 이 작품에서 붉은 신체라는 하나의 신체적 이미지로 응축된다. 영완 선배는 인공지능이 만든 예술을 보더라도 창작욕을 유지할 수 있는 마법의 ‘붉은 알약’으로 하와이 사과를 건넨다. “세상이 바뀌어도 너는 언제나 만드는 인간일 거야. 스스로 기억하는 한 언제나 영화를 찍고있을 거야.”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인간 ‘하와’를 떠올리게 하는 이 ‘하와이 사과’는 흥미롭다. 신과 유사한 생성형 인공지능 앞에서 인간은 발가벗겨진 듯한 황망함을 느끼며, 황급하게 자신의 기원을 발명해낸 것일까. 아니, 인공지능 시대 쓰인 새로운 창세기에서 인간은 스스로 뱀이 되어 자신을 유혹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좋겠다. 창세기에서 유혹은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드러내는 증표였지만, 이제 유혹에 넘어가는 나약함은 인간이 여전히 예술을 욕망하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증표로써 다시 읽힌다. 소설은 인간의 예술을 향한 집념과 희열은 우울과 절망이 그에 비례하는 무게로 따를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고 눌러 말한다. 결말부에 하와이 사과를 먹은 후 변이한 화자의 붉은 몸은 기계와의 통합을 거부하기 위해, 그리고 예술을 향한 내적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구의 장례식장에 가다 본 환각을 자신 안에 합체한 우울증적 형상으로 보인다. 강력한 잔상을 남기는 이 붉은 몸은 「혼모노」의 마지막 장면에서 피를 흘리는 몸과 다르지 않다. 이 소설들은 AI 시대에 예술은 이제 언어의 정교함이나 결과의 완결성으로 모방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몸과 감각을 통해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현전이라는 아우라를 다시 호출하는 듯 보이는 이 소설들은 과거의 진정성을 그리워하며,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아우라는 회복된 본질이라기보다 예술이 결과로 증명될 수 없어진 이후에 발생하는 부산물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이계성이 언메이크랩의 작업을 논하며 던진 비유가 유효해진다. “여느 언어와 마찬가지로 신탁의 언어에도 본질적인 의미가 내재하지는 않아서, 어떤 프레임 또는 인식틀을 통해 이를 이해할지는 언제나 받아들이는 쪽의 몫이었다”13)는 그의 말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언어 역시 별개의 진짜 의미를 품고 있기보다 해석의 장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타자와 되돌릴 수 없는 종결이라는 죽음의 감각은 이 해석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제 예술가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욕망이 과정에 들러붙는 자리, 그리고 그 욕망이 실패와 상실을 되돌릴 수 없는 비용으로 남기는 시간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예술은 결과로 증명되기보다, 실패와 상실의 가능성을 끌어안은 채 지속되는 수행으로 남는다. 그렇게 이 시대 예술가의 상은 붉은 몸을 가진 신체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1)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태양과의 대화』, 이계성 옮김, 미디어버스, 2023, 119쪽.2) 조너선 크레리, 『지각의 정지』, 유운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579쪽.3) 데이비드 조슬릿, 『예술 이후』, 이진실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2.4)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위의 책, 100쪽.5) 위의 책, 145쪽.6) 권보연은 연구자 자신이 직접 수행한 실험 속에서 인간언어와 생성언어가 ‘의미 혼종’과 ‘확률 혼종’이라는 상반된 미적 지향성을 가지는 방식으로 합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중에서 ‘확률 혼종’은 내용이 아닌 확률 층위에서 인간과 기계언어가 합성되며, 감정과 내용에 유착된 의미 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질 가능성을 지니기에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기한다. 권보연, 「결과 너머 문학기계로서의 AI」, 『다문화콘텐츠연구』 46집, 2023.7) 정지돈, 「쓰여진 문장과 쓰여지지 않은 문장 사이」, 『에피』 24호, 2023, 55쪽.8) 언메이크랩 외, 『잠재공간 속의 생태학: 재난, 생성신경망 그리고 비미래』, 미디어버스, 2023, 25쪽.9) 위의 책, 26쪽.10) 위의 책, 43쪽.11) 김언,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면서 제기되는 문제들」, 『현대시』 2023년 6월호, 111쪽.12) 성현아, 「반항하는 자는 부조리가 있나니, 그 가짜가 참되도다」, 『2024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문학동네, 2024, 292쪽.13) 이계성,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을 위한 몇 가지 질문들」, 언메이크랩 외, 앞의 책, 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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