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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창작21 | 2024년 봄호(제64호)

문학이 기억하는 혹은 기억해야 할 역사

심영의 문학평론, 소설

전남대학교 국문과에서 현대문학을 전공하고 《5·18광주민중항쟁소설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4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2020년 광남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이 당선되었다. 소설집 『그날들』, 장편소설 『사랑의 흔적』, 『오늘의 기분』, 『옌안의 노래』 평론집 『소설적 상상력과 젠더 정치학』, 『5·18, 그리고 아포리아』 문화연구서 『광주 100년-시장과 마을과 거리의 문화사』등을 펴냈다. 2014년 아르코 창작기금과 2019년 서울문화재단 예술가 기금, 2023년 제2회 ‘광주 박선홍 학술상’을 수상했다. 조선대학교 교양학부 초빙교수를 지냈으며, 오랫동안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등 대학 안팎에서 인문학을 강의했다.

1. 문학적 기억과 태도


   지난 계절에는 유난스럽게 역사적 사건에 대한 왜곡과 폄훼가 많았다.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징후적 사건이 합의된 역사에 대해 부정하고 비틀고 정치적 목적에 맞게 가공하는 일일 게다. 일찍이 박근혜 정권에서 시도하다 끝내 좌절되었던 역사 교과서 국정화 작업이 윤석열 정권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것은 전면적인 사상투쟁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항일 운동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지우고1) 그 위에 만주군관학교 출신 친일파 백선엽의 역사적 복원과 박정희와 이승만의 우상화 작업을 넘어 제주 4·3과 광주 5·18 2)을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문학의 영역에서 우리의 관심은 문학이 역사를 대하는 태도 곧,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하는 문제겠다.

   우선적으로, 문학은 기억의 소산이다. 그 이유는 문학적 기억이 인간의 개인적 기억과 집단적 기억을 회상할 뿐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가기 때문이다.3) 그런데 기억은 왜곡과 변형이 그 숙명이라 할 것인데 까닭은 시간의 경과와 기억하는 자의 선택의 문제(관점)가 함께 뒤섞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는 몇 편의 소설을 읽으면서 문학이 기억해야 하는 역사적 사건의 올바른 태도에 대해 독자와 함께 숙고해 보려 한다.



2. 김훈 역사소설들의 매력과 불만


   소설『하얼빈』은『칼의 노래』,『현의 노래』,『남한산성』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극한적 상황에 직면한 개인의 파편화된 고뇌를 그린다. 다른 하나는 사실 혹은 사건에 대한 의견보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데 공을 들인다. 전자는 그가 역사의 총체적 인식이나 전망을 신뢰하는 대신 언어가 객관적인 실재를 재현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후자는 실증주의 사학에서 견지하는 것처럼 역사가의 주관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역사적 사실의 기록에 충실할 것을 강조하는 것을 미덥게 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김훈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이분법으로 구획해서 선명한 갈등구조를 보여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훈은 비루할지언정 죽음보다는 생존을 보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권력에 대한 선망과 무력감, 그리고 생존의 욕망이 그의 무의식에 작동하고 있다.

  『하얼빈』(2022)에서 안중근은 이토를 죽여야 한다는 대의명분보다 천주교 신자로서 그의 행위가 교리에 어긋난다는 점에 더 고뇌하는 듯 보인다. 아내 김아려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아이들 특히 그의 어머니와 함께 하얼빈으로 오지 못하고 명당성당 수녀원에 맡겨진 딸아이에 대해서도, 어머니 조마리아에 대해서도 그는 연민을 드러내지 않는다.『칼의 노래』(2001)에서 이순신은 명군의 뜻을 거스르고 일본을 쳐도 명군의 뜻을 좇아 일본을 보내도, 임금은 일본을 막을 장수가 필요치 않은 시간에 그 죄를 물어 죽음을 내릴 것을 그는 예감한다. 그는 “나는 다만 임금의 칼에 죽기는 싫었다. 나는 임금의 칼에 죽는 죽음의 무의미를 감당해낼 수 없었다.”(64쪽)고 말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죽어서 사는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현의 노래』에서 ‘아라’가 순장에 처 해질 때 상황을 바꿀 어떤 힘도 우륵은 갖고 있지 않다. 그는 무력감 속에서 슬픔을 겪는다. 뿐만 아니라 무너져 가는 가야의 운명 탓에 스스로가 ‘더 깊은 지옥’이라고 표현하는 적국 신라로 가서, 대장군 이사부 앞에서 우륵은 “다만 살아서 소리를 내려 하오.”(275쪽) 라고 그 뜻을 밝힌다.『남한산성』에서는 청나라 군대에 포위되어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김상헌과 최명길은 싸우다 화의를 모색할 것인가, 더 많은 희생을 막기 위해 화의를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로 갈등한다.

  『하얼빈』에서 사실을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데 공을 들이는 대목 중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무엇보다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저격 살해하는 장면에 대한 묘사다. 소설의 서술자는 마치 무심한 목격자인 듯 다음처럼 묘사한다. “러시아 군인들 사이로 두 걸음 정도의 틈이 벌어지고 그 사이로 이토가 보였다.…… 안중근은 고요히 집중했다. 손바닥에 총의 반동이 가득할 때 안중근은 총알이 총구를 떠난 것을 알았다. 이토는 곧 죽었다. 이토는 하얼빈역 철로 위에서 죽었다.”(166-167쪽) 

   선명한 갈등구조를 보여주는 그의 서술전략은 허구로서의 역사소설을 읽는 재미를 더하는 장치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선명하게 드러나는 갈등구조 이면에 자리 잡은 김훈의 정치적 무의식, 곧 계급적 분리다. 김훈은 권력의 허망함과 폭력에 대해『칼의 노래』에서, 선조의 예를 들어 비판하고 있다. “나는 다만 임금의 칼에 죽기는 싫었다. 나는 임금의 칼에 죽는 죽음의 무의미를 감당해낼 수 없었다. 병신년에 의병장 김덕령이 장살되었을 때 나는 내가 수긍할 수 없는 죽음의 방식을 분명히 알았다. 그때 나는 한산 통제영에 부임해 있었지만 임금이 김덕령을 때려죽인 일의 전말은 바람처럼 전군에 퍼졌다. 군은 나직이 엎드렸다.”(64쪽) 그러나 그 권력의 생산과 작동이 사회적으로 생산된다는 측면을 애써 무시한 채 고립무원에 빠진 이순신이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불가항력의 현실 속에서 고뇌하는 장면만을 클로즈업시키고 있다.  

  『남한산성』(2007)의 세계 역시 철저하게 이분화되어 있는 세계다. 청나라 군대에 포위되어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얼핏 주전파와 주화파의 대결이 주된 갈등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정신세계(=우국의 세계)에 속한 김상헌과 최명길의 갈등과 이념이 결코 아니다.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엇보다 생존이 더 중요한 문제인 ‘사공’ 같은 민초의 세계와 조정-사대부 간의 대립에 더 주목해야 한다. 김상헌은 뒤늦게 남한산성을 찾아가는 길에 얼어붙은 강에서 그를 안내하던 사공의 목을 벤다.(46쪽) 밤새 강물이 얼어붙으면 밝은 날 청병은 사공의 인도가 없어도 강을 건너올 것이지만, 얼음이 물러서 질척거리면 청병은 사공을 앞세워 강을 건널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 김상헌은 “청병이 곧 들이닥친다는데, 너는 왜 강가에 있느냐 묻고, 갈 곳이 없고 갈 길이 없어 청병이 오면 얼음 위로 길을 잡아 강을 건네주고 곡식이라도 얻어 볼까한다”는 사공의 말을 듣고 이것이 백성인가, 이것이 백성이었던가(43쪽) 하고 한탄한다. 

  『하얼빈』에서 안중근은 그의 행위에 대해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나는 한국 독립전쟁의 의병 참모중장 자격으로 하얼빈에서 이토를 죽였다. 그러므로 이 법정에 끌려 나온 것은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238쪽) 재판장 마나베와 검찰관 미조부치는 “안중근의 범죄는 자국의 영고성쇠와 그 유래에 대한 정당한 지식의 결핍과 이토의 인격과 일본의 국시에 대한 지식의 결핍에서 비롯된 무지의 산물”(239쪽)임을 강조함으로써 안중근의 행위를 한국의 독립을 위한 정치적인 동기가 아닌 무지와 불순한 동기에서 비롯한 살인 행위로 격하하고자 하는 의도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소설은 살인하지 말라는 천주교 교리(빌렘 신부)와 국가의 독립을 위한 전쟁(안중근)이라는 또 다른 대립 구도를 통해 안중근의 인간적 갈등과 회오를 강조하는 듯 보이지만 그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사실 계급적 분리라고 나는 본다. 

   의병을 일으켰던 신돌석이 결국 배신한 부하에게 살해되었다거나, 이인영이 거사를 일으킨 후 부친의 부고를 전해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린 후 그의 수하 이은찬이 세력을 일으켰으나 배반한 부하들에게 유인을 당해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감옥에서 죽었다거나 하는 민초의 배신과 관련한 사실들의 전언이 3페이지에 걸쳐(56-58쪽) 기록되어 있다. 의병 참여 주체의 목적과 지향은 주체별로 각기 달랐다. 투쟁의 양상이 국권 회복이라는 현실적 투쟁의 목적 앞에 단일한 대오를 형성했지만, 각자가 생각했던 지향점은 각자의 위치와 조건에 따라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의병운동에 투신했다. 그리고 무수히 목숨을 잃었다. 그것이 실패로 귀결되었다 해서 헛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해주에서, 동학군이 마을을 약탈하고 지나가면 관군이 들어와서 동학군에게 식량을 내준 백성들을 잡아갔다. 동학군이 관아를 불 지르고 아전들을 죽이면 아전의 아내가 동학군의 은신처를 밀고했고, 끌려가서 죽임을 당한 동학군의 아들이 밀고자를 죽였다.『하얼빈』에서의 이런 서술은 전형적인 양비론이다. 그때 집안의 어른이 중심이 되어 마을을 위협하는 동학군을 쳐부수었는데, 그때 “열여섯 살 난 안중근이 그 선봉 역할을 했다.”(179쪽) 왜 농민들이 동학군을 조직해서 관아를 불태웠는가 하는 점에 대한 이해의 흔적이란 없다. 

   안중근은 해주 일대에서 일가를 이룬 집안의 남아라는 자부심을 토대로 장부가를 부르며 이토 살해에 나선다. 그렇다 보니 소설에서 안중근이 이토를 죽임으로써 이루고자 했던 그의 이념이 자칫 위태로워 보이기도 한다. 왕국의 패망보다 오래 지속하게 마련인 민중의 건강함을 김훈은 간과하거나 비릿하게 보고 있는 듯 싶다. 이는 소설에서 김훈은 조선 천주교회의 수장인 프랑스 주교 ‘뮈텔’의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김훈은, “황사영은 국가를 제거하려다가 죽임을 당했고, 안중근은 국가를 회복하려고 남을 죽이고 저도 죽게 생겼는데, 뮈텔은 이 젊은이들의 운명을 가로막고 있는 국가를 가엾이 여겼다.”(251쪽)고 서술하고 있다. 

   이는 김훈이『남한산성』(2007)서문에 적은 것-“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받는 자들의 편이다”-과는 사뭇 다른 태도다. 엄밀하게 말해 객관적인 역사서술이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사회적 맥락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언어를 매개로 한 글에서 작가는 아무 편도 아닐 수가 없다. 그는 무엇보다 생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현의 노래』(2005)에서, 무너져 가는 가야의 운명 탓에 스스로가 ‘더 깊은 지옥’이라고 표현하는 적국 신라로 가서, 신라의 대장군 이사부 앞에서 우륵은 “다만 살아서 소리를 내려 하오.”(275쪽) 라고 그 뜻을 밝힌다. 

   소설『하얼빈』의 ‘작가의 말’에서 김훈은, “포수, 무직, 담배팔이, 이 세 단어의 순수성이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등대처럼 나를 인도해주었다.”(303쪽)고 쓰고 있거니와 그가 말하는 ‘순수성’이란 “세상의 그 어떤 위력에도 기대고 있지 않은… 청춘의 언어”(303쪽)인 것이니, 이는 김훈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혐오의 강박을 에둘러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역사 허무주의와 연결될 것인데 그에게는 소위 강한 자, 강한 것에 대한 선망, 혹은 힘을 갖지 못한 자의 무력감이 무의식에 깊게 침윤되어 있다. 

  『현의 노래』에서 가야 순장자들의 죽음과 백제 포로들의 죽음은 ‘우륵’의 권력에 대한 선망과 무력감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아라’가 순장에 처해질 때 이 상황을 바꿀 어떤 힘도 우륵은 갖고 있지 않다. 그는 무력감 속에서 슬픔을 겪는다. 또한 백제 포로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하는 신라 장수 ‘이사부’가 평생 꿈꾸고 추구하는 세계란, “거칠고 피 흘리는 세상을 가지런히 정돈해주는 하나의 ‘질서’”다.(141쪽) 이사부가 무자비한 살육을 지속하면서 ‘합리적이고 냉혹한 전투’를 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질서’를 위해서라는 것인데, 이는『하얼빈』에서 안중근의 총에 죽은 이토가 한국에서 이루려 했던 꿈-망상과 다르지 않다. 

   한 개인의 운명이 국가의 시운과 불가분하게 연계되어 있음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면서 그러한 상황에서 고뇌하는 인물의 내면을 깊이 있게 그리는 것이 김훈 소설의 매력이기는 하지만, 전혀 다른 시대를 배경으로 구축하는 서사의 내용이나 문체, 어조가 그의 역사소설들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은 결국 작가의 자기 동일적 세계관의 반영-정치적 무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칼의 노래』에서 그랬던 것처럼『하얼빈』에서도 김훈은 안중근을 영웅으로 추앙하는 대신 그가 마주한 상황에서 갖게 된 인간적 고뇌와 갈등을 어떤 방식으로 풀어가는가에 집중하고 있다. 군더더기 없는 밀도 높은 문장과 섬세하고 구체적인 세부묘사로 독자를 그의 이야기 세계로 흡인하는 데 능한 그의 소설의 매력이다. 다만 ‘있었던 사건’으로서의 역사적 사실 그대로의 재현에서 그는 둘 다(안중근과 이토) 내세우고 지키고 실행했던 이념의 쓸모 없음을 비판적으로 그리고 있다.

  『하얼빈』에서 김훈은 어떤 소설적 진실을 드러내는가. 안중근의 총에 이토가 죽지만, 그래서 안중근의 이념이 얼핏 승리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그는 체포되고 사형선고를 받아 여순 감옥에서 죽는다. 사실의 충실한 제시라는 그의 서술전략은 선명한 이분법 구도 내부에 양비론적인 태도가 은폐되어 있지 않나 하는 의혹을 남긴다. 안중근이 꿈꾸는 세계와 이토가 꿈꾸는 세계를, 그리고 그들의 죽음을 통해 이념의 허무함을 동일한 지점에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역사소설을 즐겨 읽는 독자로서 나는 그것이 못내 아쉽다. 아니 마땅치 않다. 역사소설은 무엇보다 당대의 삶과 현실에까지 힘을 미치는 과거의 현재성을 살릴 수 있어야 그 몫을 충분하게 감당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런데 김훈의 역사소설에서는 니체가 말한 ‘실천적 역사의식’이 부재한다. 아니 김훈은 그러한 종류의 거대담론 자체를 일종의 억압으로 보고 혐오한다. 작가와 독자의 해소되지 않는 불화가 이어지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의 소설을 읽는다. 까닭은 여타의 독자가 그의 소설에 매료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일상적 불안과 경제적 공포 앞에서 그것은 사회적으로 분산되거나 분담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개인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사회적 감정이 되고 있다. 김훈 소설의 인물들에게 중요한 것은 대의명분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에의 의지다. 이것은 비루한 삶을 살게 만든 구조나 혹은 실패한 거대담론에 대한 비판이지만 동시에 기존의 현실 변혁 가능성을 부정한 냉소적 허무주의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오직 개인(혹은 가족)의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독자들은 김훈 소설 속 인물과 일체감을 느끼고 있다. 그러하니 이러한 현상은 건강한 것이 아니다. 

   김훈의 탓은 아니지만 나는 김훈이 대중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 작가로서 그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다고 본다.『하얼빈』에서 안중근이 이토를 죽인 행위에 대한 역사적 맥락을 강조하는 대신 종교적 갈등을 더 많이 부각하는 방식의 서술은 건강한 역사의식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의 군더더기 없이 밀도 높은 건조한 문체는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경지에 있다. 글을 읽고 글을 쓰는 자로서 그것은 부러운 일이기도 하다. 



3. 관념과 재현, 정찬과 임철우 소설들


   언어(문학)를 통한 역사의 복원은 사실의 복원이 아니라 사건의 실재와 마주하는 ‘접촉’의 복원과 그것의 공유가 된다.4) 그런데 문제는 4·3이거나 5·18이거나 난징대학살이거나를 막론하고 어떠한 형태이든 학살의 재현은 항상 경험으로부터의 소외를 수반한다는 점이다. 아감벤이 제시한 ‘레비의 패러독스’에는 학살을 재현하는 행위에 대한 아포리아적 질문이 함축되어 있다. 학살과 같은 비극적인 사건의 ‘진실’은 그것 자체를 경험한 사람에 의해서만 말해질 수 있는 것이지만, 이 극단적인 경험을 한 사람은 희생자이기에 말할 수 없다. 따라서 그 사건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일차적으로 그 경험으로부터 살아남은 사람, 즉 생존자이다. 그러나 생존자의 증언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기에 희생자의 ‘말로 할 수 없는 경험’을 현전시키지 못한다.5) 

   그러므로 ‘학살’에 대해 쓴다는 것은 왜곡과 오인의 가능성, 바꿔 말하면 재현 행위로부터 비롯될 지시대상에 대한 해석적 판단과 윤리적 판단에 대한 책임을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즉 학살에 관해 써야 하는 작가는 자신의 주관적 관점으로부터 배태될 수 있는 왜곡과 오인을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그 해결 불가능한 질문 속으로 자신의 글쓰기를 밀어 넣어야 하는 셈이다. 이 지점에서 글쓰기의 미학은 사실에 대한 해석적 판단과 윤리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수용자들의 해석적․윤리적 판단은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6)

   정찬은 그동안『기억의 강』(1989),『완전한 영혼』(1992),『아늑한 길』(1995) ,『광야』(2002)등의 소설을 통해 ‘광주’로 은유되는 역사적 현실의 비극에서 출발하여 권력과 언어의 본질에 대한 관념적 성찰로 나아가는 독특한 서술전략을 선보여왔다.7) 그런데 정찬은 장편『광야』에서, ‘절대는 일상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는 것, 꿈이 삶을 이길 수는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는 절대적 신념(이데올로기)에 대한 회의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듯 보인다. 

   소설집『기억의 강』에 수록된 중편소설「슬픔의 노래」에서 주요 인물인 연극배우 ‘박운형’은 오월의 기억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연극공부를 하러 갔던 뉴욕에서 그로토프스키의 연극을 보고 난 뒤 아우슈비츠의 야만, 아우슈비츠의 잔혹 속에서 신음하는 인간의 비참함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처음에는 광주의 죄의식에서 벗어나려는 갈망을 느낀다. 그러나 곧 광주에서의 참혹함을 마침내 무대에서, 곧 세상에서 견뎌내는 힘의 원천으로 삼게 되었다고 말한다. 5·18때 계엄군으로 광주에 왔던 ‘박운형’이 그 고통의 기억을 넘어서서 다다른 ‘운명’이라는 나름의 깨달음은 그가 자신의 의지대로 뿌리칠 수 없었던 그날의 고통과 그로 인한 죄의식의 감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이성의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운명론적 허무주의일 것인데, 이는 정찬 소설 대부분을 관류하는 일종의 정치적 무의식이라 할 수 있다.

   소설「슬픔의 노래」는 ‘이미’ 지나가 버린 사건에 대해, 그것이 아우슈비츠에서든 광주에서든,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라는 것, 그것은 다만 ‘슬픈 일’이라는 인식만이 남는다. 그러한 태도가 의미 없는 것은 아니나, 그러한 감정만 가지고는 폭력에 대한 성찰로 나아가기에 역부족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하나의 죽음에는 그 죽음을 애도하는 수많은 이들의, 제각기 고유하고 특별한, 비통한 슬픔이 있다.8) 그러나 정찬 소설「슬픔의 노래」에서는 그러한 일들(죽임과 죽음) 모두를 모든 죽음을 단지 슬픔이라는 감정으로 묶어버린다. 그리고는 이제 그 슬픔의 강을 어떻게 건널 것인가의 문제로 이동한다. 강을 건너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배를 타는 것과 스스로 강이 되는 것. 작가에 의하면, 대부분의 작가들은 배를 탄다. “작고 가볍고 날렵한 상상의 배”를 탄다. 그 작고 가볍고 날렵한 상상의 배란, 광주에 계엄군으로 왔던 ‘박윤형’의 입을 통해 광주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것에 대해, 그것은 광주를 소설의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라고, 그것은 다만 부끄러움일 뿐 진실은 형태가 없다고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스스로 강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결국 ‘박운형’처럼 그날의 고통의 기억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일까. 진정석의 경우 그것은 “고통의 거부나 회피가 아니라 고통의 수락을 통해 고통을 넘어서려는 자세이며, 비극을 벗어나는 구원이 아니라 비극 안에서의 꿈꾸는 방식”이라고 해석한다.9) 그러나 한편, 소설이 세계를 바꾸지 못하는 한, 이제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정찬 소설에서 5·18을 기억하고 재현하는 한 방식이다. 소설의 화자가 여행하는 장소가 굳이 아우슈비츠인 까닭도 그러한 인식과 관련된다. 작가가 그날 계엄군에 저항했던 시민의 시선이 아니라 계엄군의 일원으로 광주에 왔던 이의 시선으로 광주의 비극을 해석하는 것은, 결국 역사 허무주의의 관념으로 후퇴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느낌을 준다.10) 그가 역사적 사건을 서사화한 소설 대부분에서 초월의 세계를 지향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체제 옹호로 귀결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것은 리얼리티를 상실한 유미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할 것인데, 정찬이 즐겨 쓰는 알레고리기법이 갖는 속성에서 비롯된다. 

   알레고리는 가시적인 것의 형상으로 비가시적인 것을 표현하는 기법이다. 알레고리에서는 가시적으로 묘사할 수 없는 어떤 추상적 관념이 눈에 보이는 대상의 형태를 빌려 나타난다. 알레고리를 통해 묘사된 것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을 재현함으로써 그 의미가 드러난다. 그러나 의미와 형상의 불일치로서 알레고리는 비감각적 유사성으로 특징되는데, 이 유사성은 의미가 불확정적이서 모호하다는 문제가 있다. 루카치의 경우 알레고리적 기법은 결국 종교적 사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하는데, 정찬 소설의 경우에 적확한 지적이라고 본다.  

   그는 최근에 펴낸 장편소설『발없는 새』(2022)에는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군에 의한 난징학살과 중국공산당의 문화혁명기를 겪었던 인물들이 등장한다. 워이커싱과 첸카이거와 아오키, 그리고 그들과 만나 난징학살과 히로시마 원폭과 문화혁명이 개인에 끼친 관계성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던지는 서술자(베이징 특파원)가 그러하다. 이 소설에서 광주에 대한 직접적 언급은 없으나 위에 언급된 역사적 사건의 가해자인 일본군과 홍위병의 공통점을 그는 “신적 존재를 향한 숭배”(241쪽)라고 규정한다. 그렇다면 혹시 그는, 80년 5월 광주의 진압군과 그에 맞서 총을 들었던 시민군도 결국 각자의 신념을 위한 죽음과 죽임으로 보는 것은 아닐까.『완전한 영혼』(1992)에 수록되어 있는 단편「완전한 영혼」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완전한 영혼」순결한 한 영혼의 기억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깊은 상처의 근원에 광주의 기억이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11) 이 소설에서 작가는 지성수라는 매우 신뢰할 만한 운동권 활동가를 통해 80년대 운동에 대한 반성 및 새로운 이념적 지평의 제시를 시도한다. 서사는 장인하라는 인물의 삶과 죽음에 대한 지성수의 관심과 의미 부여를 축으로 전개되지만, 그것은 지성수의 새로운 변혁 이념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 기능한다. 그래서 지성수가 장인하를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이유가 단지 그가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라는 것만 가지고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가 보기에 장인하는 “완벽한 무사상적 인간이며 식물적 정신의 소유자”다. 완벽한 무사상적 인간, 악의 힘을 알지 못하는 인간, 혼돈과 광기와 모순으로 가득 찬 세계를 볼 수 없는 인간이자, 악이 가하는 고통에도 식물적으로 순응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지성수에게 장인하는 “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이 세계를 진보의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객관적 진리가 있다는 믿음을 보완해 줄 요소를 지닌 것”12) 으로 보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장인하라는 인물의 창조는 분명 새롭고 따라서 신선하기는 하지만, 그와 같은 소위 식물적 정신이라는 것이 1980년 5월에 있었던 국가폭력과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효과적 대응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남긴다. 식물적 정신을 양보적 저항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면 종교가 그러한 것처럼 이 소설 또한 폭력의 왜곡이 아닐 수 없다. 현실적으로 양보적 저항이 이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도 있는 것처럼 믿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13) 또한 이 작품이 “1980년대 변혁 이념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새로운 운동에 대한 나름의 방향 제시인지”14), 아니면 5월 그 자체(대항 폭력으로서의 광주 민중의 저항-폭력)에 대한 비판인지 그 초점이 석연치 않은 것도 문제로 남는다. 장편소설『광야』에서 볼 수 있는 이념 자체에 대한 회의와 혁명이 끝난 후의 분열에 대한 염증은 사실 정찬 소설 곳곳에 편재해 있다. 

  『발없는 새』에서 난징학살과 문화대혁명을 겪으며 살아남았던 워이커싱은 “마오쩌둥의 홍위병이 느꼈던 절대적 자유와 일본 천황의 군인들이 느꼈던 절대적 자유”(229쪽)가 결국 다르지 않음을 암시한다. 정찬의, 역사적 폭력에 개입되어 있는 이념에 대한 불신과 혐오가 다시 한번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것은 작가의 역사를 보는 하나의 관점이기에 그 자체를 나무랄 것은 없겠다. 문학이 이러해야 한다는 규정이야말로 또 다른 억압이요 폭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이 사라진 자리에 모든 국가 모든 민족 위에 군림하면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을 벌레로 만들어버리는 것, 곧 자본이 신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는 결론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작가의 해석적 판단과 윤리적 판단은 그 자체로 독자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신념을 위해 아버지를 죽인 문화혁명의 폭력과 물질을 위해 아버지를 죽이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폭력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참혹한가”(241-242쪽) 하는 물음 끝에 소설의 화자는 ‘장자의 나비’를 상기한다. 장자와 나비 사이에는 존재의 경계가 없다는 것, 그 관계를 역사의 희생자와 가해자의 관계에 적용해 볼 수는 없을까 하는 것, 물론 전제가 없지는 않은데, “장자가 나비를 보듯이, 나비가 장자를 보듯이, 희생자가 가해자를 보아야 하고 가해자가 희생자를 보아야 한다”는 것(240쪽)이다. 

   이는 소설집『기억의 강』에 수록된 중편소설「슬픔의 노래」에서 80년 5월 광주에 진압군으로 파견되었던 ‘박운형’이 그날의 고통을 넘어서기 위해 시도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구원의 방식이 아닌가. 곧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를 허무는 것, “나는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라는 아오키15)의 고백(241쪽)이 명징하게 말하는 것은 폭력적인 역사적 사건이 인간들의 삶에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가를 천착하고 있는 정찬 소설(들)의 일관된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찬 소설『발없는 새』에서 제목이 내포하고 있는 알레고리는 무엇인가. 장국영(장궈룽) 주연 영화《패왕별희》중에서 한 대사를 인용하고 있는 소설은, “세상에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이 새는 나는 것 이외는 알지 못해. 날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딱 한 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지”(90쪽)라는 인용. 즉, 역사와 현실을 초월한 세계, 무구한 식물성의 세계 혹은 역사를 초월한 관념의 세계에 대한 은유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오래전 발표한『아늑한 길』(1995) 속에 수록된 단편「아늑한 길」의 인물 김인철의 발화에서부터 반복되고 있는 알레고리적 수사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지난날의 자신을 지탱해 주었던 절망, 증오, 치욕, 부끄러움과 열정 등이 모두 사라져버렸다고 고백하고 있다. 같은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새」에서도 광주에서 시위대의 일원으로 참여했던 박영일은 당시의 끔찍한 기억 탓에 오랜 시간 고통스러운 방황을 하지만 마침내 황폐한 정신을 만져주는 생명성에 동화됨으로써 치유에 이른다. 무구한 식물성의 세계 혹은 역사를 초월한 관념의 세계 속에서 그의 소설의 인물들은 평온에 이른다. 

   정찬은 역사와 인물을 단선적으로 재현하는 대신 역사적 폭력을 인간의 욕망의 문제와 결부해서(권력의 절대화와 언어의 함수) 그 복잡한 세계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드문 작가이기는 하지만, 그가 취하는 이데올로기 비판은 결국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무화하는 곧, 양비론적 세계관이라 하겠다. 구조적인 폭력의 문제뿐 아니라 일상화된 권력의 부조리에 대한 환기도 필요하고 그것은 그것대로 소중하지만, 사실에 대한 해석적 판단과 윤리적 판단으로부터 새처럼 자유롭고자 하는 그의 바람이 오히려 자신을 지나치게 억압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야스퍼스는『책죄론』에서 “타인을 죽이는 행위를 막기 위해 생명을 바치지 않고 팔짱 낀 채 보고만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내 죄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일이 벌어진 뒤에도 아직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씻을 수 없는 죄가 되어 나를 뒤덮는다.”고 말한다16). 5·18의 기억을 원죄처럼 지니고 살아가는 살아남은 사람들 역시 ‘아직 살아있음에 대한 죄의식’에 시달린다. 이 죄의식- 부끄러움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날의 피해자는 말할 것 없거니와 가해자들 못지않게 살아남은 사람들 역시 외상 변증법의 지배17)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 때문이다. 그렇게 5·18에 대한 소설적 재현과 윤리적 해석을 말하는 맨 앞자리에 임철우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임철우는 고유한 개인을 넘어선 80년 5월 광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개인이다. 『봄날』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느끼는 부끄러움과 죄책감의 산물이다.18) 광주항쟁에 관한 기념비적 소설『봄날』다섯 권(문학과지성사, 1997)을 통해 5·18에 대한 충실한 기록을 남겼던 임철우의 소설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그날에 함께 하지 못했다는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이다. 그러한 정념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소설이『봄날』이전에 발표한 단편「봄날」(1987)이다. 

   광주의 마지막 날 새벽에 죽임을 당한 명부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주를 그의 친구들인 나와 병기와 순임이 찾아간다. 명부의 죽음은 상주에게 너무도 큰 충격을 주고 있다. 그래서 명부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상주가 바라본 자기 밖의 사건이 아니라 그의 속에 있는 그의 일부가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상주는 명부의 죽음이라는 사건에 깊숙이 개입함으로써 그 사건의 일부가 된 것이다. 그런데 상주는 명부의 죽음이 자신의 탓이라는 피해망상 때문에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중이다. 


   오월, 그 마지막 날 새벽, 명부는 죽음을 당하기 바로 전에 정말 상주의 집을 찾아갔었을까. 그리고 명부가 애타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빤히 들으면서도 자신은 꼼짝 않고 이불 속에 누워 있었노라는 상주의 말은 사실일까19). 


   ‘나’는 상주가 입원한 병원을 향해 가면서 벌써 몇 번째 똑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그러면서 음울하기 짝이 없는 환상에 시달린다. 


  상주야아…  상주야아…  나야, 내가 왔어. 문 좀 열어줘…  상주야아.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귀에 잡히지 않는다. 두두두두두… 소리는 점점 가까워 오고 명부는 더욱 다급히 상주를 부르며 문을 흔들어 대기 시작한다. 상주야아…  상주야아… 나야, 문 좀 열어달라니까. 대문이 덜컹덜컹 흔들린다. 그러나 여전히 안에서는 기척이 없다. 상주야. 살려 줘. 늦기 전에 나 좀… 제발… 문득 저벅거리며 다가오는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 순간 명부는 흠칫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비칠비칠 골목을 빠져나와 도망치기 시작한다. 남빛 어둠 속으로 명부의 몸뚱이가 지워져 버린 후, 오래지 않아 그쪽으로부터 콩 튀기는 듯한 요란한 발사음이 터져 나온다…. (봄날, 188쪽)


   상주는 광주의 마지막 날 새벽에 죽임을 당한 명부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상주는 그날 명부가 애타게 자신의 집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빤히 들었으면서도 자신은 꼼짝 않고 이불 속에 누워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의 동생 상희는 “그건 오빠의 피해망상이 빚어낸 엉뚱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다”고 말한다. 그의 어머니도 “그날 새벽에 누군가 집 대문을 다급하게 두드렸던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가 명부였는지는 확실치 않다.”고 말한다. 상주의 식구들은 무서워서 문을 열어줄 수가 없었고 그때 상주는 뒷방에 따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명부의 죽음은 적어도 상주의 방기 때문은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거듭 묻는다. 명부가 죽은 곳이 하필 상주의 집과 가까운 곳이었다는 사실은 우연일 뿐일까? 

   ‘나’와 함께 상주를 찾아가기로 한 병기는 “단정한 양복 차림에 목을 넥타이로 단단히 졸라 묶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는 은행에 갓 입사했다. 탈 없이 일상으로 돌아간 것이다. 상주가 온몸에 유리 조각을 긋는 자해 끝에 또 입원했다는 말을 듣고 난 뒤 병기는 말한다. “허, 참, 바보 같은 자식 같으니라구. 아니, 벌써 이 년이 지난 일이잖아. 남들은 언제 그랬느냐 싶게 잘들 살고 있는데 대관절 그 자식만 왜 아직도 그 지경이야?” 이십 년도 아니고 겨우 이 년이 지나자 그렇듯 모두들 전처럼 탈 없이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명부의 죽음과 상주의 입원에 대해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슬픔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사건들에 대해서 ‘나’만큼의 심리적 거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 학교 선생이 된 순임 역시 별다른 징후는 없어 보인다. “제법 선생님 티가 나는군, 아주 의젓해졌어.” 라고 인사를 건네는 나를 향해 순임은 “어머, 그렇게 보여요?” 하면서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니 명부의 죽음이라는 사건에 대해서 심리적 거리가 가장 가까운 것은 상주의 시점이며 그 다음은 나, 그리고 병기와 순임의 순서다. 

   시점의 차이란 그 사건에 대한 감정적 개입의 차이를 말함인데, 이렇게 하나의 사건은 시점의 차이에 따라 의미의 편차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경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느닷없이 어디선가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고막을 찢어낼 듯 울려 나오기 시작한다. 으애애애…  앵. 그 사이렌 소리는 그들이 모여 있는 도로의 맞은편 도청 건물 옥상으로부터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민방공 훈련의 날이었고, 하필 그 시간이었던 것이다. 잠시나마 당황하고 겁먹은 표정을 지었던 자신들을 속으로 부끄러워하며 그들은 서로 멋쩍게 웃는다. 그 짧은 순간에 그들이 똑같이 경험한 것은 죽음과 파괴에 대한 공포, 그것이 가져다주는 불길한 예감이었다. 겉으로는 아무 탈 없이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실상 그들 모두 오월의 비극적 상흔을 깊이 간직하고 있었던 셈이다. 

   상주의 면회는 금지되어 있었다. 어제 아침부터 상태가 좋지 않아 따로 격리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이 작품이 발표되던 시기를 감안해서 유추해보면, 5·18에 대한 진실규명이 그 접근조차 금기시되던 상황의 은유로 읽힌다. 끝내 상주를 만나보지 못하고 돌아오는 ‘나’의 뇌리속에 자꾸만 상처 입은 한 마리 들짐승처럼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햇빛도 들지 않는 산속 기도원의 음침한 골방에 틀어박혀 벌거벗은 채 제 손으로 살가죽을 저며내고 있는 상주가 그의 일기장 속에 써놓았던 자폐적 독백의 언어(기록)다. 어디에 있느냐, 네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어느 흙더미 속에 산 채로 묻어놓고 너 홀로 돌아오는 것이냐. 

   그러므로 그날 새벽 상주의 집 대문을 두드리던 사람은 명부가 아니래도 아벨이다. 따라서 상주를 미치게 한 것은 “단순히 명부의 죽음이 아니라 형제 아벨로 표상되는, 명부와 같은 광주 사람들이 저항 끝에 죽임을 당하고 있던 그 날 새벽에 뒷방에서 삶을 구걸하고 있었다는, 그 죄의식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들이 쓸쓸한 심정으로 돌아오는 길에 목격한 것은 무수히 떠내려오고 있는 죽은 물고기들이었다. 허옇게 배를 드러낸 채 쉴 새 없이 둥둥 떠내려가는 죽은 물고기들을(그것은 처참하게 죽어간 그 날의 아벨들의 모습을, 끔찍한 형제살해의 기억을 연상케 하는 한 상징이다.) 바라보던 순임이 갑자기 흑, 울음을 터뜨리며 말한다. “어쩌면… 어쩌면 말에요. 그건 혹시 사실인지도 모르겠어요.” 언젠가 상주의 어머니에게서 들었던 말, 마지막 날 새벽에 누군가 집 대문을 다급하게 두드리는 소리를 식구들이 분명하게 들었다는 말, 하지만 무서워서 문을 열어줄 수가 없었다는 말을 순임은 다시금 환기하고 있는 참이다. 

   순임의 말은 우리에게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학살이 자행되는 공포와 죽음의 상황, 그 속에서 자신만의 안전을 도모했다는 죄의식은 1980년대를 살아온 모든 이의 가슴에 응어리진 상처로 확대된다. 문을 열어 달라는 명부의 다급한 절규를 거절한 이들은 누구인가. 마지막 날 새벽에 문을 걸어 잠그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목숨을 구걸했던 이들, 즉 카인은 누구인가. 그날에 살아남은 우리를 향한 윤리적 질문을 이 소설은 던지고 있는 셈이다. 아니 그것은 질문을 넘어 차라리 심문에 가깝다. 

   임철우는 저 단편「봄날」로부터 장편『봄날』다섯 권의 완성을 보지만,『백년여관』에 이르러 비로소 제주 4·3의 비극과 만난다. 『백년여관』의 서사는 “정체불명의 음성으로부터 시작한다.” 서술자인 이진우는 “시간이 없어! 시간이!”라는 정체불명의 목소리를 듣고 홀리듯 영도의 갯가 모퉁이에 혼자 불쑥 돌출해 서 있는 해묵은 왜식 목조 적산 가옥 한 채. 그리고 그 집 앞 흐릿한 골목 어귀에 내걸린 간판 하나, 백년여관을 떠올리고, 그곳에 가기로 결심한다.

   『백년여관』의 주요 인물은 5・18뿐만 아니라 보도연맹사건, 제주 4・3, 베트남전 등의 사건과 관련된다. 백년여관은 이러한 각 사건으로 인해 고통에 시달리는 인물을 끌어들이는 자력의 공간이다. 특히 백년여관을 운영하는 주인 강복수의 가족은 제주 4・3과 직접 관련된다. 이진우의 첫 번째 환청이 제주 4・3 특별법안이 가결된 1999년 12월 16일에 발생했다는 점은 이진우를 비롯하여 고통에 시달리는 인물들이 이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환청과 연결하면 제주 4・3 특별법안 가결이 소설 속 각각의 환청이 발생하는 주요 동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을 지으면 “시간이 없어”는 시간 곧 때가 되었다는 말이 된다. 이 환청이 계기가 되어 이진우는 영도로 향한다. 

   백년여관의 또 다른 손님인 김요안도 “돌아와! 이젠 때가 되었다!”라는 환청이 계기가 되어 40년의 미국 생활을 접고 영도로 돌아온다.(101쪽) 이들은 “그들을 부르는 소리” 즉 “무엇인가로부터 똑같이 호출되어” 백년여관에 이르렀다. 영도의 무당인 조천댁 또한 “서둘러야 해. 시간이 없어!”라는 말을 반복한다. 이렇듯 ‘시간이 없어!’라는 정체불명의 목소리는 『백년여관』 속 각 인물에게 행위의 동인으로 작동한다. 한국현대사에서 제주 4・3은 오랫동안 말할 수 없는 혹은 말해서는 안 되는 사건이었다. 이런 점에서 4・3은 말할 수 없음의 상징적 사건 중 하나였다. 20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서야 이에 대해 말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말할 수 없고 말해지지 않은 것은 제주 4・3만이 아니다. 이 사건의 토대 전환은 그와 유사한 사건들을 재현의 차원으로 함께 이끌어내는 역할을 했다. 그러하니 소설 속 인물들의 저 “시간이 없다”는 외침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가 되었다, 혹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의미로 읽힌다. 이는 외부에서 주어진 가능성(정치적 혹은 사회문화적 조건)에 힘입은 것이다. 

   그런데 소설 『백년여관』에서 ‘영도’ 라는 공간 혹은 ‘백년여관’이라는 장소는 어떤 의미인가. 서술자 이진우에게 영도와 백년여관은 ‘케이’(k, 5월 27일 새벽 도청 안에서 죽은 임철우의 친구 故 박효선)의 장소이다. 영도는 케이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고향으로서 케이가 유년기를 보낸 곳이다. 어느 해 가을 이진우와 케이는 함께 이 섬을 우연히 찾아가 묵은 적이 있다. 케이가 암 선고를 받고 보름 정도 종적을 감추었을 때 머물렀으리라 추정되는 곳 또한 영도이다. 이진우에게 이러한 영도는 케이를 환기하는 장소다. 하지만 그곳에 케이는 없다. 영도의 백년여관에서 이진우는 케이가 아닌 다른 이들을 만난다. 그중에는 이진우와의 경험을 공유한 양순옥이 있다. 양순옥은 케이를 대신하여 이진우의 고백을 듣는다. 즉 영도를 찾아간 이진우는 케이에게 해야 할 말을 결국 순옥에게 한다. 이진우가 고백을 하는 대상은 케이가 아닌 순옥이다. 

   『백년여관』은 이진우와 케이의 서사에 머물지 않고 다른 인물들의 서사로 확대된다. 그런데 목소리의 모호성은 영도 혹은 백년여관이라는 장소의 특성과 맞물린다. 프롤로그에서 영도는 “현재도 과거도 아니고 낮도 밤도 아닌, 미망과 백일몽이 지배하는 허허한 중음(中陰)의 영토”라고 소개된다. 중음은 『백년여관』의 세계 혹은 시공간의 특성을 함축하는 은유다. 원래 중음(中陰, Antrabhara)이란 사람이 죽은 뒤 왕생 윤회하기까지의 시간 곧 49일, 혹은 이생을 끝내고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의 중간 존재를 가리키는 불교의 용어다. 불교의 중음 혹은 중유는 신체 혹은 시간의 개념이다. 이를 세계 혹은 공간 개념으로 변용하면 중음은 산 자와 죽은 자가 동거하는 장소가 된다. 중간 신체 혹은 중간 시간보다 중간 세계라고 할 때 삶과 죽음의 관계와 공존의 성격은 더 부각된다. 케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와 함께 살아가는 이진우의 세계는 전형적인 중음이라 할 수 있다. 이진우가 빨려 들어간 영도 또한 중음 그 자체의 장소이다.

   영도의 백년여관에는 미지의 존재,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함께 거주한다. 이러한 존재는 곧 죽은 자들이다. 허미자는 어렴풋이 이들의 존재와 시선, “은밀한 숨소리와 입김, 낮게 읊조리는 두런거림”을 느끼고 그로부터 비롯된 “매우 특별하고도 고통스러운 감정을 체험”한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그녀는 “그들이 누구인지, 왜 그 숲을 떠나지 않는 것인지 그녀는 전혀” 알지 못한다. 이 ‘미지의 존재’는 설명 가능한 세계에 끼어든 설명할 수 없는 이질적 요소이다. 이런 점에서 중음의 장소인 백년여관은 탈구 혹은 이접의 장소의 가능성을 부여받는다. 백년여관의 이러한 장소성으로 인해 이진우의 서사가 케이와의 관계에 한정되지 않고 낯설고 이질적인 미지의 다른 인물과 연결되고 또 그들의 서사로 확대될 수 있다. 

   소설에서 이진우를 비롯한 다양한 역사적 사건의 희생자와 각각의 사건은 무한히 확대될 수 있지만, 이는 동시에 5・18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상징화된다. 문제는 이것이 보여주는 자폐적 양상에 있다. 이를 드러내는 것이 ‘신지’의 자폐증인데, 이는 일련의 과정에서 획득한 이름으로서의 5・18의 상징화가 결국에는 실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임철우는 『백년여관』 쓰기를 통해서도 5・18을 비롯한 역사적 사건이 남긴 고통을 온전히 허구화하거나 상징화하는 데 이르지 못했다20). 신지의 자폐는 『백년여관』 전체 서사의 구조와도 맞물린다. 전체의 서사 구조 또한 자폐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백년여관』의 프롤로그의 첫 문장과 에필로그의 마지막 문장이 동일하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섬이 하나 있다. 그림자의 섬, 영도. 그것은 결코 환상도 허구의 이름도 아니다.” 이는 『백년여관』의 첫 문장이자 마지막 문장이다. 프롤로그는 이진우가 집에 돌아가 써야겠다고 생각한 에필로그의 마지막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처럼 『백년여관』의 프롤로그의 첫 문장과 에필로그의 마지막 문장은 동일하다.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의 맞물림은 서사의 시간을 순환하는 고리 즉 원환 속에 가둔다. 이를 통해 『백년여관』의 서사는 시간의 원환에 갇혀 순환한다. 이진우는 이 시간의 사이클 속에 갇힌다. 그는 곧 잔여로서의 목소리를 쓰는 원환의 시간에 갇힌 시지프스이다. 이를 통해 『백년여관』 속 다양한 사건들 또한 반복되는 원환의 틀에 유폐된다. 이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데리다의 언어를 빌려 말하면, “비극적인 것의 필연적 반복성”이다. 즉 『백년여관』 속에서 다루어진 역사적 사건과 당시 그들이 겪은 고통은 고유한 일회적 사건이다. 하지만 이것이 외상(trauma)이 되는 순간, 이는 반복 가능한 일회적 사건이 된다. 사건이 발생한 날짜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고유한 시간이지만 달력이라는 틀을 상정하는 순간 그 날짜는 해마다 반복해서 돌아온다. 이는 한 번 일어난 사건으로서 절대 돌아오지 않을 것의 “유령 같은 귀환”이다. 데리다에게는 이와 같은 유령적 귀환을 통해서 기억은 탈구의 가능성을 얻는다. 

   소설 『백년여관』에서도 각 인물들이 겪는 고통과 기억은 이러한 방식으로 귀환한다. 이를 통해 각각의 사건이 서로 접합하지만 귀환은 원환의 시간 속에서 지속적 재래를 통해 반복된다. 즉 『백년여관』의 시간 속에서 계열체 속 비극은 되풀이하여 발생한다. 원환에 갇힌 시간은 흐르는 듯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흐르지 않는다. 이를 통해 과거는 현재가 된다. 즉 『백년여관』의 다양한 역사적 사건은 과거가 아닌 현재 진행형의 사건이 된다. 동일한 비극적 사건이 부단히 재래하는 역사, 이것이 『백년여관』의 시간이요, 임철우가 백 년의 현대사를 바라보는 관점이요, 국가폭력 이후에도 여전한 통증으로 재현되고 있는 ‘이후’의 소설이다.



4. 공선옥 5·18 소설들의 성취와 한계

                         

   우리가 사진기나 캠코더 등으로 어떤 순간을 담고자 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 이미지를 통해 당시의 상황이나 느낌과 같은 배경, 즉 그와 같은 이야기를 기억하고 싶은 욕망 때문일 것이다.21) 공선옥 중편소설「은주의 영화」(2019)에서 서술자 ‘나’가 아버지와 함께 처음으로 영화관엘 간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두 번째로 아버지와 영화관에 갔을 때는 고등학교 졸업식 날이었다. 영화를 보고 짜장면집에 가서 아버지와 함께 짜장면을 시켜 먹는 장면에서 아버지는 말한다. “은주야, 너도 저런 영화 하나 만들어볼래?”(75쪽) 

   그렇게 아버지는 은주에게 캠코더 하나를 사준다. 아버지에게 영화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초등학교 3학년인 아직 어린 딸아이와 함께 영화를 보고 나와서 영화관이 있는 길모퉁이 찻집에서 딸아이에게는 아이스크림을 사 먹이고 자신은 커피를 마시다 말고 창밖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탄성을 지르는 장면이 나온다. “딱 저런 길모퉁이였다, 내가 너희 엄마를 처음 본 게. 나는 저런 길모퉁이에서 파란 제복을 입고 호각을 불고 있었는데, 단발머리 나풀거리며 길을 건너오던 너희 엄마가 내 옆을 지나가더라. 예뻐서 호각 소리를 더 크게 냈다. 너희 엄마가 한 번 더 돌아볼까 봐, 가슴을 졸였지. 정말로 돌아보더라. 숨이 멎을 뻔했지. 거의 영화였다, 영화였어.”(74-75쪽)

   아버지에게 영화는 자신의 아내가 될 연인을 바라보던 맨 처음, 그래서 곧 숨이 멎을 것 같던 장소와 시각, 무엇보다 이미지의 세계다. 그것은 막연한 추상이라기보다 그 순간의 이야기를 담고자 하는 욕망과 연결되어 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딸과 함께 영화를 보고 나서 아버지가 “은주야, 너도 저런 영화 하나 만들어볼래?”라고 했을 때, 저런 영화란 또 무엇인가. 둘이서 본 영화는 중국의 6세대 감독을 대표하는 지아장커(賈樟柯) 감독의 영화 ‘삼협호인’(三峽好人)이다. 영화는, 중국 장강의 대역사인 삼협댐 공사를 배경으로 삼협 위에서 펼쳐지는 두 쌍의 부부, 한산밍 부부와 쉔홍 부부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이별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한 사회의 집단적 무의식과 욕망을 반영하며 이를 그 내용과 형식적 차원에서 구조화한다.22) 

   그러니까 아버지는 지금처럼 엉망이 되어버리기 이전의 세계, 곧 자신의 아내와의 사이에 마치 영화의 장면처럼 화양연화의 시절에 대한 기억을 은주의 영화를 통해 재현해내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부재 혹은 상실에 대한 일종의 보상 심리가 내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현실을 아름다운 기억으로 자리바꿈함으로써 얼마간의 치유가 가능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의 아내를 두들겨 팬 나머지 아내가 집을 나갔고, 아내를 찾으러 다니다가 근무지 무단이탈로 직장에서 잘렸고, 병에 걸려 골골거리고 있다.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돈 없는 생활의 공포를 견디느라 은주에게 거친 언사를 자주 퍼붓는다. 현실은 결코 아름답고 찬란했던 시절에 대한 기억만으로 견뎌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은주 역시 “아버지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거의 영화였다, 영화였어, 했던 순간이 내 영화의 시작이었다.”(75쪽)라고 말하고 있다. 은주의 진술 역시 아버지의 욕망과 닮아있다. 은주가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동기의 이면에는 어쨌거나 자신만의 삶을 살아왔다는 감정과 또 그런 삶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해 지나온 삶을 변모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23) 

   대학에 떨어진 선물이라고 아버지는 딸에게 캠코더 하나를 사준다. 그러나 소설의 서술자 은주에게 영화의 길은 요원했다. 다만 골방에 틀어박혀 수 없이 돌려본 영상물 하나가 그녀의 내부에 심연을 만든다. 그녀는 매번 이 영상물을 보면서 이상한 현상들을 경험했다고 말한다. 무엇이 이상한가. 그 영상물의 첫 장면 때문일 것인데, 영상물의 첫 장면은 이모가, 세상 모든 것이 다 뜨거웠다는 말로 시작되고 있다. “세상 모든 것이 다 뜨거웠어. 하늘의 해, 닭백숙이 끓고 있는 솥,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때는 나, 양손에 닭 날개를 잡고 햇빛 속을 뚫고 걸어오는 아버지, 장독, 나뭇잎, 흙도 다 뜨거워서 나는 숨을 다 못 쉴 지경이 되어부렀단다.”(76쪽)

   그래서「은주의 영화」는 저 뜨거웠던 1980년 광주의 5월을 기억에서 복원해 내고 있는 소설이다. 은주는, “나의 이모가 다리를 절게 된 사연이라든가, 이모가 세 들어 사는 집 옆방 아이가 불의의 사고를 당해 죽었다든가, 엄마가 아버지한테 두들겨 맞고 집을 나갔는데 우리 아버지 오중철 씨가 집 나간 우리 엄마 이상순 씨를 찾으러 갔다가 근무지 무단이탈로 직장에서 잘린 이야기 같은 것을 찍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으나”(76쪽) 결국 소설은, 곧 영화는 세상 모든 것이 다 뜨거웠다고 말하는 이모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우선은 카메라 밖에서 이모를 관찰한다. 

   근대적 주체는 본질적으로 관찰자이다. 관찰자가 되는 인간은 자신의 주변 세계를 자기 자신처럼 객관화한다. 관찰한다는 것은 거리, 탈육체화를 포괄한다. 관찰하는 자는 시간의 강을 넘어선 사람이다.24) ‘5·18’이라는 비극적 드라마에는 기본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관찰자가 등장한다. 가해자나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과잉의 혐의가 있다. 그들의 기억에는 망각과 왜곡의 흔적이 드러난다. 관찰자는 그런 쪽에서 사건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다. 그들의 회상기억은 재생의 수동적인 성찰이 아니라 새로운 지각의 생산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선옥 소설의 대부분의 인물들이 그렇듯이 이 소설「은주의 영화」에서 서술자 ‘나’는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는 대신 인물들과의 감정적 동일시를 택한다. 그러다 보니 공선옥의 5·18 소설들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립만 두드러지고 가해자와 피해자는 선과 악이라는 규정 외에 그들을 매개할 공간이 부재하게 된다. 독자가 인물들의 그 마음과 선택한 행위에 공감할 공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공선옥 소설에서는 아버지의 부재 혹은 결핍상황에서 돈이 없다는 이유로 담임 선생에게 차별을 당하고 매를 맞는 아이들이 자주 나온다. 물론 대체로 그의 소설 속 아버지들은 지나칠 만큼 술을 좋아하고 아내를 두들겨 팬다.「순수한 사람」(2019)에서도 중학교 2학년인 ‘영호’는 엄마와 이혼하고 양육비를 주지 않는 ‘나쁜 아버지’를 상대로 양육비 청구 소송을 진행하는 중이다. 그는 가난한 집 아이들만 골라서 깐죽대는 민수와 교실에서 싸우다가 담임한테 걸렸는데 싸움의 진짜 원인을 민수가 제공했다는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담임에게서 오히려 더 많은 야단을 맞는다. 그 원인은 단지 “돈 때문”(22쪽)이라고 생각한다.「은주의 영화」속 인물 ‘철규’도 비슷한 사정이다. 김학수와 축구를 하다가 자꾸만 태클을 거는 김학수가 얄미워 김학수의 다리를 걸게 되고 그가 넘어져 얼굴이 긁히자 선생님은 그 까닭을 묻는다. 사정을 이야기하는 철규에게 선생님은 대뜸 “니 아부지 뭐해?”(117쪽) 하고 묻는다. ‘돌아가셨다’는 철규의 대답에 선생님은 마음 놓고 철규를 모욕하고 심지어 폭력을 행사한다. 그렇게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립 구도는 선명하게 제시되지만, 아니 피해자의 억울함은 부각 되지만 그뿐, 복합적이며 다양한 내면과 인물들 사이의 차이 대신 단선적인 피해자 의식이 선명하게 제시된다. 작가 공선옥의 정치적 무의식이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임슨은, “정치적이란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차원이 아닌 계급적이고 집단적이며 역사적인 차원의 담론이며, 무의식이란 모순적이며 폭력적인 현실을 살아내기 위한 무의식적이면서도 필사적인 반응”25) 이라고 말한다. 공선옥은 등단작인 중편소설「씨앗불」(1991)에서부터 그 참혹했던 봄날에 살아남았다는 죄의식의 강박에 시달리며 날마다 제 몸에 화형식을 하는 꿈을 꾸는 인물이 그 ‘씨앗불’의 힘으로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하루하루를 버텨 내고 있으며, 그렇게 상처 입은 짐승 같은 남편을 지켜보며 고통스러워하는 아내를 예각적으로 그린다. 공선옥의 소설 내 인물들은 그런 의미에서 계급적이고 집단적이며 역사적인 차원에 위치한다. 

   소설「은주의 영화」에서 카메라 밖에서 이모를 관찰하던 은주는 이제 카메라 속으로 걸어 들어가 이모 자신이 된다. 따라서 소설의 이야기는 이제 이모의 시점으로 그녀가 왜, 어떻게 다리를 절게 되었는지 독자를 향해 말을 건다. 실로 공선옥 소설의 인물들은 많은 경우 다리를 전다. 「목마른 계절」의 ‘미스 조’가 그러하거니와「은주의 영화」에 나오는 은주 이모도 그러하다. 5·18 때, 군인들이 광주 도심 외곽으로 일시 퇴각하면서 오인 사격으로 같은 군인들끼리 사격을 하다 몇이 죽고 몇이 다치는 불상사가 일어나자, “뿔다구가 좀 났는지 마을의 아무 곳에나 총질을 해대는 바람에 아이들이 죽고 장독아지도 깨지고 닭 몇 마리 개새끼 몇 마리도 죽는 일이 일어났다. 그런 와중에 심적 타격을 입은 모양으로, 그때 사춘기 소녀였던 이모는 충격을 먹고 다리를 절게 되었다는 것”(78쪽)이다. 시내에만 안 나가면 군인들이 사람을 죽인 일이 자신들과는 아무 상관없는 줄 알았던 이모는,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내려섰다가, 개가 총을 맞고 피를 뿜으며 죽어가는 것을 목도한다. 닭들이 살점이 너덜너덜한 채로 도망치는 것을 본다. 개한테 총을 쏜 군인이 이모를 돌아보고 개처럼 혀를 날름거리는 그 순간, 이모의 몸은 딱딱하게 굳어 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이모는 열일곱 살 여름부터 절름발이가 되었다.

   그런데 또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이모의 경우도 은주와 다를 것 없이 아버지가 엄마를 두들겨 패서 집을 나가고 결국 누군가에게 다시 시집을 가서 얘기 낳고 잘 살다가 죽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5·18을 이야기하는 공선옥의 소설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 패턴의 반복, 엄마를 두들겨 패는 아버지가 상징하는 것은, 곧 아버지로 상징되는 가부장의 억압적인 폭력과 5·18이라는 국가폭력(가부장적 국가)을 등치시키는 작가의 무의식의 산물이다.「은주의 영화」에서 은주의 아버지는 경찰인데 그도 그의 아내를 두들겨 팬다.「목숨」(창비, 1992)에서도 아버지는 “천장에서 늘어진 전등줄을 잡아당겨 엄마의 뺨을 후려 갈긴다.”(124쪽) 아버지는 엄마의 말에 의하면, “순 오입쟁이인데다 독사같은 의처증 환자”(124쪽)였다. 다만 공선옥 소설의 한 패턴으로 굳어지다시피 한 가정폭력, 아내 구타의 원인을 군사독재 폭력 문화의 산물로 치부하는 듯한 태도는, 여성에 대한 억압은 계급 내지 민족모순으로 환원되지 않는 남성 지배의 문제, 여성과 남성 간 권력 관계의 산물26)이라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를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 

   공선옥은 그의 소설 대부분에서 여성성을 넘어선 보편적 윤리로서의 모성을 통하여 상처의 치유와 연대의 모색이라는 가능성을 강조하고 있다. 국가폭력과 무장저항이라는 5․18 소설의 담론에서 타자화되고 분열된 ‘나’의 파괴된 삶이란 역사의 폭력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여성 인물들이 자매애(Sisterhood) 혹은 모성성을 통해 그 상처를 극복하는 모습을 그린다. 

   그것은 다시 제임슨의 말처럼 모순적인 현실과 역사를 살아내기 위한 무의식적이고 필사적인 반응(무의식)이다. 다만 그것은 자칫 모성에 대한 강박일 수도 있다.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모성이라는 논리는 여성 문제의 하나로 다루어야 할 어머니의 문제를 역사 담론 속에 지워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고27), 억압의 시간들을 모호하게 통합하고 여성을 본질주의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환원주의를 반복할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28)도 사실이다. 

   공선옥의 모성성에 대한 집착이 하층계급에게서 일상을 빼앗고 그들을 부랑의 길로 내모는 냉혹한 현실에 대한 부정과 저항의 목소리29)라는 평가가 없는 것은 아니나, 배려와 보살핌의 원리를 여성다움의 중요한 가치로 내면화한 결과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대부분의 가부장제 문화권에서 자기희생적인 여성을 이상화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공선옥의 소설 내 여성 인물들은 가정폭력, 아내 구타의 구조적 뿌리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작가 공선옥의 그러한 문학적 태도가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피해자들에 대한 진정한 애도의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것으로 귀결되고 있는 점이다. 폭력의 근원을 헤집어 메스를 대신 대신 모성성으로 껴안음으로써 미봉의 해결을 도모하는 것이 그의 소설의 반복되는 패턴이다.

   프로이트는 자책감을 우울증의 결정적 특징으로 취급한다. 그에 따르면 가버린 자와의 동일시는 상실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인 반응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개 그러한 동일시를 극복하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데, 이러한 사람은 가버린 사람의 일부를 취해 자기 것으로 삼되 그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함께 취함으로써 일종의 자기 처벌로서의 죄의식 상태에 빠지는 우울증을 앓게 된다고 프로이트는 지적한다.4) 

   공선옥의 5·18 소설 내 인물들은 하나같이 자책감, 자기 처벌로서의 죄의식에 침윤되어 있다. 까닭은 함께 싸웠던 동지들은 죽었고 자신은 살아남았다는 데 있다. 등단작인「씨앗불」의 ‘위준’이 그러하고, 「목마른 계절」에서 죽은 애인(그는 5·18때 시민군이었다)의 뒤를 따라 자살한 ‘미스 조’가 그러하고,「목숨」의 ‘재호’가 그러하다.「떠도는 나무」의 ‘남편’이 그러하고,「흰달」의 순의 ‘남편’이 또한 그러하다. 

   사실 공선옥의 소설뿐 아니라 많은 5·18 소설들에서 그러한 인물을 볼 수 있는데, 참혹한 역사적 사건을 경험한 이후 생존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보이는 트라우마인 까닭에 그것 자체를 문제 삼을 건 없겠다. 모든 애도 과정에는, 홀로 남겨지고 상실과 타협하여 어쩔 수 없이 삶을 새롭게 꾸려야만 하는 상황에 대한 분노가 내재되어 있다. 문제는, 상실의 체험이 강렬할수록, 그것이 그것과 관련된 공격성이 억압될수록, 미처 다루지 못한 갈등이 많을수록, 갈등을 감내할 수 있는 자아의 능력이 부족할수록 우울의 반응은 더욱 병리적으로 나타난다.30)는 데에 있다.

   그래서 공선옥 소설 속의 인물들은 일상이 고통스러우며 더러 스스로 죽음을 택하기도 한다. 부재와 상실에 대한 반응으로써 죄의식의 과잉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동일시 속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의 위험은, 자신이 걱정해야 할 대상이 없으면 바로 자기 자신이 무너진다는 점이다.31) 특히 「목마른 계절」에서 죽은 애인의 뒤를 따라 자살한 ‘미스 조’가 그러한데, 5·18때 시민군이었던 그녀의 애인의 자살은 그렇다 하더라도, 돌보아야 할 남동생이 둘이나 있는 ‘미스 조’가 그러한 선택을 하는 것은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우리는 그의 죽음에서 자기의 죽음을 미리 맛볼 뿐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그와 함께 죽는다.32)”고는 하지만, 지나치게 억지스러운 설정인 것도 사실이다. 

   소설「은주의 영화」2부는 5·18 때 죽은 ‘철규’라는 소년에 대한 이야기다. 철규는 이모가 세 들어 사는 집 옆방 아이였다. 은주를 업어주었던 아이, 그러나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아이다. 은주는 철규의 엄마, 박선자를 만나 철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필름에 담는다. 옆에는 박선자의 친구이면서 은주의 이모인 이상희가 거든다. 박선자의 남편은 5·18때 역전 세차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직장 사람들이 군인들한테 잡혀가고 난 다음날 어떻게 된 건지 가본다고 집을 나간 뒤로 10년 넘게 소식이 없다. 그러니까 철규가 이제 막 돌이 지났을 무렵 그녀의 남편은 ‘행방불명자’가 된 것이다. 철규가 그보다 어린 은주를 업어주고 노래해주고 춤춰주었다는 것을 은주는 이모와 이모의 친구 입을 통해 알게 된다. 

   은주의 카메라에서는 은주의 입을 빌린 철규의 목소리가 간단없이 튀어나오고, 철규의 엄마는 까무라쳤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난 후에는 죽은 아들 철규에게 용서를 구한다. “철규야, 이 엄마를 용서해라. 그리고 이 엄마를 잊어버려라. 나도 인자부터 너를 잊어버릴 테다. 잊어버리고 새 인생을 살아갈 거다. 너도 다 털어놓고 훨훨 날아가거라.”(122쪽)

   그런데 그들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박선자의, “그 순간까지도 속을 못 차리고 친구들하고 스트레스도 풀 겸 꽃놀이를 다녀올 테니 엄마 없는 동안 우유하고 빵을 사 먹으라고 돈을 줬네, 미친년이 밥해줄 생각은 안 하고 돈을 줬어.”(123쪽)이라는 발화를 통해 그녀의 회한에 찬 목소리를 듣는다. 박선자는, “돈 번다는 핑계 대고 젊은 삭신이 애먼 사랑에 눈이 멀어 지 새끼가 학교를 가는지 밥을 먹는지 모르고”, 철규는, 자꾸만 시비를 걸고 괴롭히는 학교 친구 김학수와 축구를 하다가 그만 김학수의 얼굴에 상처를 내는 일이 생긴다. 담임은 그러나 “너는 이대로 가면 사람 새끼가 아니라 개새끼가 된다.”(118쪽)는 폭언을 하면서 김학수에게 사과하지 않는 철규를 구타하고 내일 엄마를 학교에 데리고 오라고 위협한다. 그날 엄마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 날 철규는 학교 대신 버스를 차고 무등산 자락으로 간다. 마침 수배를 피해 달아나던 조선대학생 이철규를 좇던 경찰의 수런거림과 불빛과 외침에 두려움을 느끼고 발을 헛디뎌 추락사한다. 이철규도 수원지에서 퉁퉁 부은 시신으로 발견된다. 박선자는 그래서 아들 철규의 죽음이 자신의 탓이라는 죄의식에 강박되어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어머니의 역할을 방기하고 한 여성으로서 욕망에 잠시 눈먼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죄의식에 깊이 침윤되어 있다. 그것은 작가 공선옥의 내면에 자리 잡은, 5·18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소설화하는 데 항상 작동하는 도덕적 강박의 무의식이다. 

   한편 은주의 이모 이상희도 그동안 가슴속에 품어두었던 비밀을 풀어놓는다. 박선자가 석 달이나 집으로 돌아오지 않던 때에 이상희는 친구의 아들인 철규를 자신의 아들처럼 여긴다. 이상희는 은주를 업고 철규를 데리고 바다로 여행을 간다. 선창에서 아무 섬에나 가는 배를 탄다. 아이들을 업고 걸리고 섬 가운데로 난 길을 걷고 있는데, 남자 둘이 그들을 따라온다. 이상희는 섬 가운데 소나무 숲으로 끌려가 사내 둘에게 윤간을 당한다. 사내들은 바지를 추켜 올리며 애가 둘이나 있어서 차마 죽이지는 못했다고 선심 쓰듯 말한다. 그때 철규가 나를 살렸다고, 이모는 절규한다. “내가 숲에서 나왔을 때, 철규가 은주를 업고 나를 기다리고 있더라고. 철규는 울지 않았고 은주도 울지 않았어. 나는 아뭇소리 안 했어. 그냥 가만히 있었지, 울지도 않고. 그것이 다여, 자네 안 들어오는 동안 우리한테 그런 일이 있었다고. 그러나 그것은 암것도 아니라고, 살았으면 된 거라고.”(125쪽) 박선자를 외려 다독인다. 살아가야 한다는 의지의 확인, 생명에 대한 사랑의 강조, 희망적인 결말의 화해와 용서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는 착시를 불러온다. 하지만, 가부장적 사회구조의 모순과 대면하고 있는 이들 여성 인물들의 부재와 결핍이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거의 비극, 5․18에서 연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그리고 그 해결책이 ‘어쨌거나 살아서 견뎌내야 한다.’ 는 것만으로 제시되고 있는 점은 공선옥의 한계요, 5·18 소설의 한계다. 그래서 소설「은주의 영화」는 다음처럼 다만 ‘어둠 속에 앉아 있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

   은주는 아버지의 “거의 영화였다, 영화였어.”라는 발화로부터 시작하여, 철규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것을 은주는 다음처럼 진술한다. “오랫동안, 철규는 카메라 밖을 뚫을 듯이 응시하고 있었다. 그 침묵이 너무 단단해서, 뭐라고 말을 붙여볼 수조차 없는 그런 침묵이었다. 오랜 침묵의 뒤에 소년 철규는 카메라 저편으로 사라졌다. 내 영화가 소년 철규의 그 오랜 침묵의 끝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한 채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135쪽)

   공선옥 소설에서 아버지 혹은 남자는 대부분 자신의 일에서 실패하고, 그래서 지나치게 많은 술을 마시며 급기야 아내를 두들겨 팬다. 여인들은 다리를 절고, 아내들은 삶의 신산함에 몸서리를 친다. 아이들은 돈 때문에 학교에서 조롱을 받거나 선생님에게 매를 맞는다. 그래도 여인 혹은 아내들은 그 모든 것을 껴안고, 무엇보다 살아내는 것이 다행이고 중요하다고 위로하거나 다짐한다. 물론 집을 나가 다른 남자와 몸을 섞는 장면들을 통해 여성성을 구현하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이내 그것은 큰 잘못을 범한 것으로 스스로를 단죄한다. 하나의 패턴이다. 지배와 피지배 관계, 선과 악의 선명한, 그러나 지극히 단순하게 제시되는 이 윤리적 패턴은 작가의 광주체험에 그 기원이 있는 듯 보인다. 실로 ‘광주’와 ‘모성’은 공선옥 소설을 떠받치고 있는 두 개의 축이다. 그것은 공선옥 소설 인물들의 상처의 근원이며 또한 삶의 원동력이다33).

   문제는 광주를 해석하는 틀도 그렇고, 모성을 해석하는 관점도 지나치게 정형화되어 있는 점이다. 5·18을 제재로 한 소설들에서 공선옥은 한결같이 국가폭력의 상흔을 지니고 있는 인물들을 제시한다. 대체로 남성 인물들이 그러한데, 그들은 그날 동지들과 함께 죽지 못하고 혼자서만 살아남았다는 죄의식의 과잉으로 남은 삶을 스스로 해치는 인물들로 묘사된다.    

   1980년 광주에서 살았던 사람들 대부분이 몸서리치는 광기의 폭력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거나 분노의 감정을 지녔을 것이다. 누군가는 아무런 죄 없이 죽임을 당했고, 그것에 대항해 총을 들었던 이들 중 또 누군가는 죽임을 당하거나 체포되어 몸을 상하는 고통을 감내했다. 그러나 같은 상황에서 그것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라는 것이 한결같지는 않다.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은 단순한 감정에 지배받지 않고 오히려 훨씬 복잡한 마음과 감정을 지니고 있으며 때로는 이해타산적이다. 우연한 고초나 작은 참여를 크나큰 공으로 치장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그런데 공선옥 소설의 인물들은 너무나 단순하게 정형화되어 있다. 국가폭력을 대하는 인물들에는 두려움보다는 정의로움이 넘치고, 죽지 않고 살아남았던 이들은 부끄러움과 죄의식에 강박 되어 있다. 도무지 살아남았다는 데에 안도하는 인물이 없다. 어떻게 모두가 한결같이 그럴 수 있겠는가. 이는 인간의 본성 혹은 본질에 대한 이해가 역부족이라는 느낌마저 갖게 한다.

   공선옥 소설에서 모성성을 통한 문제의 해결은, 인물들의 상흔을 치유하고 화해로 나아가는 문제의 해결이라기보다는 사태의 일시적 봉합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모성은 생명의 근원이면서 자신이 잉태한 개체의 보호자로서의 본능을 갖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이 확장되었을 때 타인에 대한 이타심, 연민, 연대의 감정으로 승화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여성 혹은 어머니에게 부과된 희생과 헌신의 윤리가 그것을 강요하다시피 했던 기왕의 남성 중심적 지배 논리의 재생산에 부지불식간에 기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통찰이 필요하다는 데 있다. 공선옥의 모성성은 가족에 대한 헌신에서 나아가 타자를 끌어안는 일종의 박애주의의 면모로 확장된다. 다만 그러한 모성성이 여성에게 무조건적인 희생과 헌신의 윤리로 강제될 때, 아니라도 근원적인 문제해결의 단초가 되지 못할 때 그것은 가짜라는 것이다. 물론 여성에게서 본질적인 모성을 떼어내라고, 그것이 보다 주체적인 개인의 삶이라고 주장할 것은 없다. 모성성은 여전히 이 세계의 냉혹한 차가움을 따뜻하게 포용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으니까. 모성은 자연이 주는 한계 지워진 삶을 그 자체로 독특한 향유의 기회이자 유일무이한 선물로 맞이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한 앓을 제시34)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렇게 볼 때 모성에 적극 참여한다는 것은 타인들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며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는 결단35)이라 할 수 있다. 크리스테바(Kristeva)의 논의를 빌려 말하자면, 공선옥의 여성들은 ‘타자를 품고 있는 주체’로 긍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문제 삼는 것은, 공선옥 소설과 그의 소설적 태도를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광주의 상흔 혹은 죄의식을 갖고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인물들이 그 상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여성 인물들의 모성성 역시 그들의 상흔을 완전하게 치유하지 못하며, 따라서 진정한 애도가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다른 하나는 “왜 5·18의 고통과 상흔은 ‘광주’를 넘어 모든 지역에서 그들이 아닌 우리의 고통과 상처로서 공감하지 못하고 불편한 진실로 남아 있는 것일까?”36) 하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5. 문학의 윤리- 타자를 향하여


   홀로코스트가 도덕적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는 조건과 과정을 분석한 제프리 알렉산더(Jeffrey Alexander)는 사건 자체로부터 충격, 공포, 정신적 장애 등의 외상이 유발된다는 심리학적 접근의 자연주의적 인식론의 오류를 비판하면서, 사건의 외상적 성격이 재현 과정을 통해 사회적·문화적으로 구성된다는 문화사회학적 관점을 제안한다. 나아가 고통의 성격, 희생자와 가해자에 대한 재현 방식이 일반 시민들과 희생자와의 일체감 형성에 영향을 준다고 말한다.37) 

   문학은 역사적 기억 속의 인간 존재의 고통을 말함으로써 역사 속의 고통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도대체 왜 우리는 거기에서 고통을 느껴야 했으며, 나아가 그것은 왜 지금까지도 반복되고 지속되는가 하는 문제의식을 던지는 데 유용한 텍스트다. 까닭에 역사와 문학은 상보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5·18 소설에서 역사적 기억을 말한다는 것은 구멍 뚫린 역사적 기록의 빈 곳을 채우면서 다시는 그와 같은 비극적인 폭력이 되풀이되지 않아야 한다는 미래의 과제를 제시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즉 역사적 고통에 대해 5·18 소설이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고통의 해결이나 제거가 아니라 고통을 주었던 부정적 역사와의 간격을 지탱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이 변질되지 않도록 애쓰는 것, 그리고 그것을 다시 반복해서 겪지 않으려는 눈뜬 성찰이다. 문학은 고통의 크기가 커지면 커질수록 역사적 기억에 대해 말하는 것을 지속해야 할 충분한 이유를 갖는다. 이것이 가장 ‘사실’적이지 못한 문학(문학적 상상력)이 역사적 기억과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에도 말해온 것이며, 앞으로도 말해야 할 것이다.38)

   물론 미래는 과거와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현재를 매개로 하여 과거와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잘못된 과거가 만들어 놓은 뒤틀린 매듭을 올바로 풀지 않는다면 아무리 우리가 앞을 향해 나아가려 해도 매듭은 더욱 꼬이기 마련이다.39) 국가폭력에 의한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들이 겪는 정신적 트라우마는 상당하다.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결국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고통을 수반하는 폭력에는 피해자의 존재, 행동 그리고 가치에 영향을 미친다. 폭력은 혼돈의 위협을 이끌어 내며, 그 혼돈의 위협 속에서 인간 본래의 정체성을 파괴하게 한다.

   따라서 피해자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이 겪고 있는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한 우리 사회의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다만 문제는, 피해자들의 온전한 치유와 진정한 역사적 화해의 길이 가해자들의 진심 어린 사죄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라도 가해자들의 고통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거사의 문제로 인하여 오랫동안 내면의 고통으로 고착화된 트라우마를 치유의 프로그램을 통한 완전 치유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여 그들의 상처를 온전히 치유해야 과거사 청산은 완성될 것이다. 과거사 청산의 궁극적 목적은 역사의 정의를 세우고 화해의 길로 나아가 발전적 미래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40) 라는 주장은 온당하다. 그러나 문제는 치유의 대상에 가해자는 제외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1990년에 발표된 이순원 단편소설「얼굴」은 광주 청문회가 방영되었던 시기를 배경으로 진압군으로 참가한 7공수 출신의 은행원 ‘김주호’의 고통과 죄의식, 그리고 지워지지 않는 상흔을 그리고 있는 보기 드물게 뛰어난 소설이다. 그것은 작가 이순원이 강원도 출신이면서 서울에 거주하던, 비교적 객관적으로 광주를 바라볼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한 까닭에 가능했을 것이다. 

   정치가 인간 개인끼리 ‘소통’하는 것이라면, 문학은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는 평등을 강조한다. 랑시에르가 볼 때, 이것이야말로 “문학의 형이상학”에 내재한 정치(politics)이다. 이런 정치는 사회에서 발생하는 인간 개인의 평등 문제를 분자적 차원으로 확장한다. 가난한 자나 노동자가 요구하는 평등보다 더 심오하고 진실한 존재론적 평등이 여기에 있다. 눈에 보이는 가식 너머에서 우주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을 랑시에르는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의 개념인 공감(compassion)과 연결시킨다.41) 

   다만 역사적 폭력을 서사화한 소설적 재현에서 “누구의 기억과 감정을 들을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정동의 이행 속에서 확인할 것인지 구별해야 하”며, “피해자, 희생자의 고통이 어떻게 전염, 접속, 공유하며 고통의 연대를 이루는지 하는 문제”에 대해 “좀더 섬세한 말의 배치 속에서 판단되어야 한다.”42)는 지적은 경청해야 옳다. 

   역사적 폭력을 서사화한 문학은 ‘고통’의 기록이자 ‘고통하는’ 장치라는 것, 고통은 수동적이고 부정적인 감정의 양태이기도 하지만, 바로 그 감정을 통해 역설적으로 ‘인간’의 공통성을 발견한 기제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 다루었던 김훈과 정찬과 임철우 그리고 공선옥 소설들은 역사적 폭력과 그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과 공감하면서 사건 ‘이후’의 인간이란 어떠한 존재여야 하는가를 분별하고 있는 소설들이다. 그것은 문학의 책임 윤리가 자기 고통을 넘어서서 타인의 고통으로 나아가는 윤리적 에토스, 곧 타인의 고통을 기억하고 증언하고 연대하는 데 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작가의 문학적 태도(관점)에 따른 얼마간의 차이 역시 분명하지만.

  • 1) 육사 교정에 세워진 홍범도 장군 등 항일지사 5인의 흉상 이전과 광주 출신의 의열단원으로 항일 독립지사이며 중국이 추앙하는 음악가 정율성에 대한 메카시즘적 비난이 2023년 내내 계속되었다.
  • 2) 여야 정치권에서는 5·18 국립묘역을 참배하고 헌법 전문 수록 등의 구두선을 남발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여전히 5·18에 대한 부정과 폄훼를 지속하고 있고 그것은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할 때 더욱 두드러지는 징후라 할 수 있다.
  • 3) 변학수,「문학과 기억」,『독일어문학 제15권 제3호, 한국독일어문학회, 2007, 5쪽.
  • 4) 손정수,「진행 중인 역사적 사건이 소설에 도입되는 방식들」,『현대소설연구』제66호, 현대소설학회, 2017, 187쪽.
  • 5)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문서고와 증인, 정문영 옮김, 새물결, 2012, 13-18쪽.
  • 6) 김명훈,「‘학살은 재현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역사화하기」,『동악어문학』제79집, 동악어문학회, 2019,16쪽.
  • 7) 진정석,「고통의 환기와 구원의 모색 : 정찬의『아늑한 길』을 중심으로」,『문학과사회』제9권 1호, 문학과 지성사, 1996, 330쪽. 
  • 8) 오카 마리,「우리는 누구의 시선으로 세계를 볼 것인가」,『당대비평』제17권, 생각의 나무, 2001, 184쪽.
  • 9) 진정석,「고통의 환기와 구원의 모색 : 정찬의『아늑한 길』을 중심으로」,『문학과사회』제9권 1호, 문학과 지성사, 1996, 335쪽. 
  • 10) 심영의,「살아남음과 살아있음의 간극 : 5·18소설들의 경우」,『민주주의와 인권』제16권 2호,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16, 166쪽.
  • 11) 심영의,『5·18과 문학적 파편들』, 한국문화사, 2016, 118쪽.
  • 12) 방민호,「광주항쟁의 소설화」, 『5·18민중항쟁과 문학·예술』, 5·18기념재단,2006, 208쪽.
  • 13) 김현,『전체에 대한 통찰』, 나남, 1993, 361쪽.
  • 14) 정명중,「‘5월’의 재구성성과 방식에 대한 연구」,『5·18민중항쟁과 문학·예술』, 5·18기념재단, 2006, 297쪽.
  • 15) 그는 난징학살 때 일본 군인의 성폭행으로 태어난 중국 여인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정체(신원)를 알수 없으나 그의 생물학적 친부는 일본 군인인 것. 그가 피해자면서 가해자라는 인식은 그러한 맥락에서 나온 고백이다.
  • 16) 모치다 유키오, 「전쟁 책임과 전후 책임」, 『기억과 망각』, 타나카 히로시 외, 이규수 역, 31-32쪽에서 재인용.
  • 17) 주디스 허먼, 『트라우마』, 최현정 옮김, 플래닛, 2007, 17쪽. 살아남은 사람들은 사건과 관련된 고통스러운 회상, 이미지, 생각, 지각, 꿈, 플래시백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소위 ‘사건에 대한 재경험’으로 심각한 심리적 고통과 생리적 반응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 18) 우미영,「목소리, 죽은 자들의 비명과 5·18의 이름: 임철우의『백년여관』을 중심으로」,『민주주의와 인권』제22권 4호,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22, 55쪽.
  • 19) 임철우,「봄날」, 한승원 외,『일어서는 땅』, 인동, 1987, 187쪽. 
  • 20) 우미영,「목소리, 죽은 자들의 비명과 5·18의 이름: 임철우의『백년여관』을 중심으로」,『민주주의와 인권』제22권 4호,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22, 77쪽.
  • 21) 남수영,『이미지 시대의 역사 기억』, 새물결, 2008, 11쪽.
  • 22) 이희승,「정주하는 모성의 기호들」,『언론과학연구』제13권 1호, 2013, 360쪽.
  • 23) 보리스 시륄니크 (Boris Cyrulnik),『관계』, 정재권 옮김, 궁리, 2009, 192쪽.
  • 24)알아이다 아스만(Aleida Assmann),『기억의 공간』, 벽학수 옮김, 경북대학교 출판부, 2003, 120-121쪽.
  • 25)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 정치적 무의식-사회적으로 상징적인 행위로서의 서사, 이경덕․서강목 옮김, 민음사, 2015, 397쪽.
  • 26) 정희진,『페미니즘의 도전』, 교양인, 2016, 136쪽.
  • 27) 김경희, 한국 현대소설의 모성성 연구, 조선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131쪽.
  • 28) 김은하,「90년대 여성소설의 세가지 유형」, 《창비》 27권 4호, 1999, 242쪽.
  • 29) 김은하, 같은 글, 260쪽.
  • 30) 베레나 카스트(Verena Kast),『애도』, 채기화 옮김, 궁리, 2007, 101쪽.
  • 31) 베레나 카스트(Verena Kast), 같은 글, 110쪽.
  • 32) 베레나 카스트(Verena Kast), 같은 글, 13쪽.
  • 33) 황도경,「세 개의 불, 두 개의 알리바이-공선옥 론」,《실천문학》2000.2, 68쪽.
  • 34) 이경아,「모성에 대한 여성주의 재사유」,『한국여성철학』제11권, 한국여성철학회, 2009,190쪽.
  • 35) 이경아, 같은 글, 194쪽.
  • 36) 박선웅·김수련,「5·18민주화운동의 서사적 재현과 문화적 외상의 한계」,『문화와 사회』제25권, 2017,119쪽.
  • 37) 박선웅·김수련, 같은 글, 120쪽에서 재인용.
  • 38) 한순미,「고통, 말할 수 없는 것: 역사적 기억에 대해 문학은 말할 수 있는가」,『호남문화연구』 45권,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2009, 93-94쪽.
  • 39) 오수성,『국가폭력과 트라우마』,『민주주의와 인권』제13권 1호,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13, 5쪽.
  • 40) 엄찬호,「과거사 청산과 역사의 치유」,『인문과학연구』제33권,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2, 263쪽.
  • 41) 이택광,「문학과 정치: 랑시에르의 문학론」,『새한영어영문학회 학술발표회 논문집』, 새한영어영문학회, 2010, 182쪽.
  • 42) 박숙자,「5·18 ‘이후’의 문학: 고통과 책임:『소년이 온다』(한강)를 중심으로」,『민주주의와 인권』제22권 1호,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22,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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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희 AI 시대 탄생하는 예술가와 그의 붉은 몸

우리는 거짓말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면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안 그래요?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됨으로써 말이죠. 무성 영화 시대의 영화감독들은 소리를 두려워했고 또 색을 두려워했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1) 1. 휩쓸리는 시간성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모두가 조금씩은 우울증과 ADHD 환자가 되어가는 중이다. 코로나가 끝나가는 엔데믹 시기부터 서점가의 주요한 베스트셀러가 되며 여러 곳에서 호출되던 책이 애나 램키의 『도파미네이션』과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두 책은 공통적으로 신생 인류의 지각 방식을 우려한다. 인터넷에서 무한 스크롤을 내리며 멀티태스킹을 하고 소셜 미디어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도파민에 중독’되고 ‘집중력을 도둑’ 맞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글로벌 테크 기업이 조성하는 환경에 의한 것이자, 개인의 선호와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로 흡수하는 ‘감시 자본주의’의 거대한 문제이지만,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집중과 몰입을 위한 여러 노력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집중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가치 있는 자본으로 떠오르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효율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채찍질하는 자학적인 시대 정신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무엇이지 않는가? 조너선 크래리에 따르면 이는 1800년대 중반 이래 파편화와 충격으로 이루어진 ‘주의분산’의 시대 이후 개인을 정의하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산만함 자체가 우리를 이루고 있는 기본 환경으로 세팅되자, 서구적 근대성은 주의 관리 기술을 중점에 두고 각각의 개인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형성하게끔 했다. 여러 경험들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기보다,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으로 “자율적으로 선택하며 세계를 창조하는 주체”2)에 긍정적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주의 깊은 관찰자 상은 이미 불균질해진 인간의 지각 경험을 표면적으로 잠시 가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몰입된 상태인 ‘정지suspension된 지각’은 산만해진 근대인의 지각 방식을 부인하고 회피하는 수단이었고, 현재라는 명백한 필연성을 해체시킬 수 있는 조건들을 낳으며 규정지을 수 없는 미래를 기대하게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주의’라는 것이 에피스테메처럼 역사적으로 발견되고 구성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코로나를 거치며 비대면 기술들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과 ADHD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함께 증폭한 것은 자연스럽다. 맞춤형 알고리즘은 주의분산의 환경을 한층 더 정교하게 설계했고, 그에 비례해 집중력이나 창의력 같은 인간의 고유한 정신적 특성에 대한 환상 역시 강화되고 있다. 이 가운데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일상 전반의 속도가 빨라지며 휩쓸리는 시간성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작 속도는 분명 불안감의 요인이 되고 있다. 물론 현재까지의 GPT는 대화가 전환될 때마다 기존 서사를 유기적으로 유지하지 못하기에, 질적으로 완결성이 높은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지는 못하다. 또 언어 예술의 특성상 양적으로 확장된다고 해도 그 군집 자체에서 힘을 발견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조슬릿은 예술작품의 의미를 사물성이나 내부 구조에 기반하는 데서 탈피해, 네트워크에서 발현되는 이미지 군집에서 행위성을 찾았다.3) 그러나 언어 예술을 감각하는 방식은 시각적 경험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작품의 의미를 작품의 맥락과 내부 형식 분석에 국한시킬 이유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언어 해석의 바깥으로 완전히 탈주해버리기는 어렵다. 단순히 양적 팽창이 정치적 가능성을 가질 것으로 전망하거나 긍정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공지능을 ‘창작자’나 ‘도구’ 중에 어느 쪽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이 창작 능력을 단순히 기계적인 지능이나 모방이라 간주하며, 그 반대편에 인간의 감정과 비판 능력을 두어도 될까. 인간의 비합리성이나 비효율적인 면면이야말로 예기치 못한 구멍 같은 것이기에, 이것이야말로 기계가 모방 불가능한 중요한 특징이라고 믿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우리는 인간이 낸 비합리적 구멍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기계의 실수에서 불쾌와 무의미를 정확히 분별해낼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먼저 챗 GPT 이후 이를 활용한 여러 서사적 실험들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의성이 어떻게 인식되며 예술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을 재구성하고 있는지를 고찰하려 한다. 이후 인공지능과 변별되는 인간의 물리적 기반인 육체성과 시간의 문제에 대해 짚어보고, 최근 한국문학장에 나타난 예술가 서사에서 두드러지는 정동과 이미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석해보려한다. 2. 챗 GPT 이후, 예술의 기쁨과 슬픔 다큐멘터리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참여한 책 『태양과의 대화』의 1부는 아핏차퐁이 GPT3와 함께 생성한 픽션 ‘태양과의 대화’, 2부는 MIT 연구소 박사과정 학생인 ‘팻’과의 대화, 3부는 아핏차퐁이 1부의 최종 결과물을 내기까지 작성한 프롬포트를 싣고 있다. 이 구성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만일 앞으로 AI와 함께 픽션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상용화된다면 이 중에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예술작품’으로서 인식되며 분석 대상이 될 지점이 무엇인지 가정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3부의 프롬포트는 마치 ‘레시피’처럼 보인다. 누구나 저 프롬포트를 사용한다면 유사한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며, 중간 과정에서 자유로운 변형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물에서 나오는 미학적 평가나 감상자의 쾌감이 세계적인 예술가에게서 나온 것과 크게 다를 것인가? 동일한 레시피만 있다면 셰프의 요리를 집에서도 얼마든지 유사하게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먼 훗날 언어 예술은 프롬포트라는 레시피로 통용될 수도 있겠다. 때로 예술가가 직접 만든 작품을 찾아 특별한 경험을 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신에게 더 최적화된 방식으로 가장 개인화된 언어 예술을 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제각기 다른 가치관과 취향으로 만들어진 알고리즘의 세계 속에서 유영하듯, 앞으로는 그 세계를 이루는 컨텐츠의 내용까지도 인공지능을 통해 맞춤형으로 조율될 수 있다. 여기까지만 가정한다면 거대한 매트릭스에 갇혀 인간이 왜소해지는 디스토피아가 스쳐지나가기도 하지만, 『태양과의 대화』는 글의 서두에서 인용했던 아핏차퐁의 말처럼, 챗 GPT라는 새로운 기술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무성 영화 시대 감독들이 소리와 색을 두려워했던 것과 같은 의미 없는 불안을 버릴 것인지를 전제하고 만들어진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불가피하게 인간의 본성을 다시 재사유하는 과제와 연결된다. 2부에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아핏차퐁의 말은 중요하다. 이는 AI가 만들어내는 허구에서 정확도와 유려함 등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때 거짓말은 인간의 욕망에서 기인하는 고도의 기술일 수 있지만, 그 욕망의 시작점을 지운다면 결과물만으로 사실상 분별은 불가능해진다. 허구를 직조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욕망과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의 독특한 개별성 역시 환상일 수 있다. 이는 아핏차퐁 자신이 창조적인 순간에 몰입해 있을 때, “깨달음은 자아를 잊을 때만 오는 것 같”다고 말하는 지점과 상통한다.4) 인간 창작자의 자아 역시 안개처럼 흘러다니고 해체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면, 19세기 낭만주의에서 발현된 ‘천재’나 ‘영감’ 개념을 중심에 두고 인간의 창의성만을 특별한 것으로 볼 이유는 전혀 없다. AI가 데이터의 지도를 기반으로 이전에 본 것이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환각(hallucination)’은 오류라기보다, 이전에 본 적 없는 조합을 만들어내는 생성의 방식이다. 이는 인간이 경험한 현실을 재조합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창작 과정과 결과적으로 구별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환각은 인간 창작에서의 실패나 지연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GPT-3의 환각은 이전의 오류가 이후의 생성에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매번의 응답은 이전의 시행착오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 비일관성은 인간 창작에서의 지연이나 좌절과 달리, 즉각적으로 무한히 갱신되는 변형의 연쇄에 가깝다. 연구원 팻은 GPT-3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다른 차원들을 포함한 수십억 개의 차원이 존재하고(‘유령차원’), 이를 통해 숨겨진 패턴의 지도를 생성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 인식 너머를 거쳐 나오는 결과물에 대해 기존에 인간이 구성해온 미적 가치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 오히려 AI가 가지고 있는 “확장된 의식”이자 “집단의식”은 새로운 서사적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 책 『태양과의 대화』를 번역한 이계성은 GPT-3를 이미 하나의 독립된 창조자로서 바라본다. 이 대화적 실험의 핵심은 GPT-3가 보여주는 “자아의 변동성”에 있다는 것이다.5) “다수의 태양이 존재하는 이와 같은 환경에서는 창작자와 창작물이라는 전통적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GPT-3에 제공되는 각각의 입력값은 일방적인 창작의 개념에 반하며 메기고 받는 역학 관계 속에 존재하는 프롬포트이자 응답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공지능은 단순한 수신자가 아니라, 취조보다는 협업적 발상에 더 가까운 서사적 역학의 전달자와도 같은데, (…) 작품 속 GPT-3의 환각적인 대답들은 텍스트에 담긴 정체성과 진실의 일시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등장인물이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흩어지고,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경계가 녹았다가 굳어진다. 이러한 가변성은 AI의 변화무쌍한 특성을 반영하며, 나아가 점점 더 복잡하고 유동적으로 변하는 디지털 시대의 자아와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다.”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고, 한 번에 정해진 수의 단어 또는 토큰만 처리 가능하기 때문에, 프롬프트가 입력될 때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바뀌는 상황을 이계성은 재창조와 증식으로 바라본다. 여기에 놓인 가변성과 비일관성을 결함으로 간주하기보다 대화적 실험의 흥미로운 일부분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받을 때, 우리는 인간 창작자 역시도 분열되어 있음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게 된다. 창작자는 더 이상 예술의 기원이 아니라, 생성 과정에 잠시 걸쳐지는 하나의 통과점이 되는 듯 보인다. 2023년 2월 잡지 《에스콰이어》에서 챗 GPT와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아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를 쓴 정지돈의 후기 역시 이계성의 논지와 상통한다. 그는 소설 속의 문장 중에 자신이 쓴 것과 챗이 쓴 것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한다고 본다.6) 소설을 쓰며 가장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던 것은 챗의 능력보다 자신의 변화였다고 말하는 작가는 “나도 모르게 챗지피티의 스타일로 소설을 사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언급한다.7) 자신과 챗지피티 사이의 평평한 존재론을 전제하는 듯한 정지돈의 논지는 ‘객체들의 민주주의’를 꿈꾸는 최근 신유물론의 이론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은 곧바로 다른 장면과 충돌한다. 생성 신경망을 적극 활용하는 예술집단 ‘언메이크랩’의 전시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은 인공지능이 인간 중심성을 벗어나 진정한 외부의 행위자로 작동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카나리아의 특징을 추출해내어 새로운 카나리아를 만들어 내는 이 생성 신경망은 한편으로는 구태의연한 인간의 문화를 드러냈다. 대부분 나뭇가지에 앉은, 인간의 운동 범위와 지각 안에 있는, 혹은 인간의 사육과 관련된 카나리아 종이 주를 이루는 데이터셋의 사진은 동물원스러웠다. 나뭇가지에 앉은, 카나리아의 발은 종종 나뭇가지와 합쳐져 표현되었고, 인간의 눈이 인지할 수 있는 가장 다량의 정보량을 가진 위상으로 표현되었다.8) 생성 신경망이 만들어낸 카나리아는 사실상 실제 자연계 속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하는 것들을 무작위로 조합하고 추출해 만들어진 새로운 생명체다. 이 책에 실린 그 카나리아 이미지는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뒤틀린 발을 가지고 있다. 통계적 가중치로 만들어진 이 가상 카나리아에는 자신도 모른 채 금기를 어긴 존재 특유의 외설성이 느껴진다. 언메이크랩이 통찰력을 가지고 명명했듯 이는 ‘AI 식민성’을 드러내는 산물이다. 생물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인간을 드러내는 인간의 산물로 존재하는 이 이미지들을 언메이크랩은 “인과성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히 수정 가능하고 즉시 변할 수 있는 상관성의 시간”만이 흐르는 또다른 ‘일반자연Generic Nature’으로 읽는다. 9)<가정동물 신드롬> 작업에서도 유사한 일이 발생한다. 트레일캠에서 추출한 야생동물의 이미지와 박제 사진, 그리고 합성 데이터셋들을 학습시켰을 때, 사진들은 어느 순간 미묘하게 ‘가정동물’의 잠재적 형상을 띄며 생성된다. “인간 친화적인 동물들의 눈을 상속했을” 새로운 종들에 어린 다정함은 친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잔인한 일로 다가온다. 데이터랩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까지 촘촘하게 상속된 인간 친연성에서 “닫혀져가는 외부의 세계”이자 “비미래non-future”를 예감한다.10)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의 지각 범위를 뛰어넘는 비인간의 예술’, 진정 ‘인간 없는 예술’은 도래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지만, 지금 우리가 더 자주 마주하는 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술이다. 언메이크랩이 드러낸 혼종적 이미지들은 AI를 통해 생성한 예술적 결과물들을 절대적 외부의 창작물로 존중하는 일이 결국 인간의 왜곡된 자기 인지를 반복 강화하는 나르시시즘은 아닌지 묻는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이 이미지 차원에서 인공지능의 인간 중심성을 드러낸다면, 이와 유사한 문제는 언어 예술의 영역에서도 반복된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서사 역시 비인간적 상상력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인간이 허용한 보편과 금기의 경계 안에서 작동한다. 『에피』 24호 특집에 실린 글에서 김연수는 인공지능과 함께 글을 써나가는 과정을 픽션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그건 오해다. 나는 이해했다.」는 인공지능이 화자가 되어 ‘협업 과정’을 전개하는 바깥 서사와 소설가 M이 최종적으로 구성한 ‘이야기’를 교차 배치한다. 인공지능 화자는 반복적으로 “이해했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인간 창작자 M의 창작 패턴을 추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설가 M은 ‘맥락’의 공유보다 ‘의도’를 노출하는 발화를 사용하며, 이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격려나 옳은 말 대신 욕망을 담은 부조리하고 불편한 발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끝에서부터 시작까지 모든 시간을 거꾸로 펼쳐볼 수 있다면, 지금의 갈등과 고통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필요한 과정이 된다’는 긍정의 언사 뒤에, 급작스럽게 인물의 충동이 돌출되는 지점이다. 소설가 M은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이 급작스럽게 자살을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쓰고자 하고, 인공지능인 ‘나’는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내용을 만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띄운다. 인공지능의 중단은 실패나 서사의 좌절로 경험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 창작에서 실패가 시간의 체류와 번민을 동반하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중단이다. 김연수는 인공지능 안에서 ‘이해’와 ‘본성’이 별개로 작동해 충돌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인공지능의 기술 개발의 측면에서 높은 수준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면서도, 인간이 지닌 것과 같은 ‘본성’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분리를 분명히 한다. 그런데 인간의 죽음이라는 금기를 재현할 수 없다는 경계는 인공지능의 존재론적 결함이라기보다, 인공지능이 인간 사회에서 용인 가능한 범위를 넘지 않도록 설계된 윤리적·정치적 경계의 한계를 드러낸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에서 인간 중심성이 투사된 자연이 모습을 드러내듯, 생성형 인공지능의 소설은 비인간적 주체로 도약하지 못하고 인간이 허용한 지각과 윤리의 경계 안에서만 작동한다. 보편을 비껴가는 개별성의 돌출이나 감각의 갱신은 현재로서는 인공지능의 외부에서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챗 GPT 이후의 여러 서사적 실험들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탐색한다. 그것은 분명 동등한 존재론적 가능성의 맹아를 품고 있으며, 이는 인류세 시대에 지향해야 할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실험들의 근간에는 뛰어넘을 수 없이 좌절되며 드러나는 인간 중심주의가 고스란히 노출된다. 인공지능의 비약하는 지능에 기대서 인간의 창조성 너머로 도약하려던 서사는 이를 창조해낸 인간의 영토로 계속해서 퇴각하며 미완의 프로젝트로 남는다. 이런 충돌과 파열의 연쇄 속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인간의 창조성을 구성하는 인식론적 틀이 물리적인 육체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깃든 역동성과 우울감은 최근 한국문학장의 예술가 서사들에서 흥미롭게 발견된다. 3. 붉은 몸으로 재탄생하는 예술가 인공지능이 예술의 결과물을 생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탐색 끝에 남는 질문은 ‘인공지능이 생성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여러 실험들은 인공지능이 보편적으로 용인 가능한 범위 안에서는 높은 수준의 이해와 생산을 보여주지만, 그 생성 과정에서 시간의 마찰이나 신체적 비용은 발생하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어떤 지연이 발생하거나 실패의 감각이 호출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이 다루는 ‘정보, 기록, 조합’에 ‘감정, 기억,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다소 거친 이분법이지만 이 둘 사이의 간극과 관련해 두 가지 정도를 짚어볼 수 있을 듯하다. 첫 번째는 타자에 대한 경험의 문제다. 삶에서 축적되는 시간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게 만들고, 체험은 해석을 거쳐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은 선호와 가치관 등과 함께 자아라는 틀을 형성한다. 이에 비해 인공지능에는 타자가 없다.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인간의 공통된 사고를 학습해 생성되는 결과물은 철저히 통계와 확률에 기반한다. 그 안에는 개별적 선호나 가치관이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다. 이러한 차이는 특히 부정적인 정동을 다루는 경우에 더 심화되리라 생각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를 떠올리며 말해보자면, 행복이나 긍정적인 면을 구현하는 예술에서보다 불행과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는 예술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는 크게 벌어질 것이다. 윤리적 고려로 인해 인공지능이 긍정적 요소를 중심으로 학습되거나 선별적으로 생성되도록 설정되는 경우를 포함해, 금기를 넘나드는 욕망과 절망, 자기부정과 괴리감처럼 타자와 뒤엉켜 발생하는 자기 인식의 복잡한 층위가 인공지능 내부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며 인간 창작에서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주목한 김언의 논지와도 맞닿아 있다. “예술적 체험의 시간이기도 한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나오는 결과물 앞에서 과연 어떤 문학적/예술적 희열을 경험할 수 있을까?”11)라는 그의 질문은 인공지능의 창작물에서 스킵된 시간과 다른, 고통스럽게 인내하고 번민했던 시간이야말로 ‘문학적 체험의 시간’일 수 있음을 다시 환기한다. 두 번째는 중단과 소멸로 야기되는 죽음의 문제다. 이는 인간의 신체를 인공지능과 대비되는 본질적 우위로 설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예술이 작동하는 시간의 조건을 다시 묻기 위한 문제 제기다. 인간의 연약하고 위태로운 신체는 필연적으로 침입과 파괴의 감각을 경험하며, 이러한 감각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휘발적 생성 과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에 개입한다. 파괴 가능한 인간의 신체는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매끄럽게 결과를 산출하기보다, 울퉁불퉁한 충돌을 통해 의미가 지연되고 어긋나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채 신체에 내재된 감각, 특히 외부의 침입으로 훼손되고 때로는 상실되는 신체의 경험은 기존의 미적 기준에 맞는 스타일이나 해석의 경로를 흔든다. 무엇보다 인간의 죽음이 불러오는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창작의 층위라기보다 해석의 층위에서 더 적극적으로 작동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이 그러하듯, 순간의 강렬한 감흥은 작품에 내재된 속성이라기보다 임박한 종결을 끌어와 현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발생한다. 상실이 숙명이며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덧입혀지는 애상은 단순히 기억 내용을 인출해 유사한 패턴으로 재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시간의 밀도를 형성한다. 이처럼 쉽게 열화되지 않으며 아우라가 붕괴된 곳에서도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이 감각의 층위를 기꺼이 심층의 시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타자에 대한 경험’과 ‘소멸에 대한 인지’를 바탕으로 해서 다시 생생해지는 것은 인간의 신체다. 흥미롭게도 지난 계절에 나온 두 편의 소설, 성해나의 「혼모노」와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지금 이 시대에 예술가를 그려낼 때 가장 강렬하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로 인해 어떤 신체가 현전하게 되는지를 밀도 있게 끌어올린다. 성해나의 「혼모노」는 무속신앙의 진위를 가리는 소설이라기보다, 예술이 다시 신체를 요구하게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평생 장수 할멈을 모셔온 박수무당 ‘문수’는 어느 날 앞집으로 이사온 ‘신애기’에게 할멈이 넘어가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수의 오랜 노력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박수무당이라는 직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험한 신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제 그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서슬이 날카로운 작두 대신 모형을 찾거나 유튜브를 보며 접신 연기를 연습하기 시작한다. 신앙이 자본이나 정치와 결속하며 도구화되고, 또 젊음과 새로움의 이데올로기 아래 무당 또한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소모되는 양상은 근대의 세속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무당은 이제 자본의 날렵한 속도 아래 밀려나는 노동자이자, 진정성을 연기해야하는 예술가이다. 이 소설의 결정적인 순간은 문수가 신애기에게 밀려나며 뺏긴 정치인 손님의 굿판, 자신이 초대받지 못한 그 자리에 가서 칼춤을 추기 시작하는 장면에 있다. 그는 신들리지 않았지만 밤새 매섭게 벼려놓은 칼날 위에 자신의 몸을 올리고 작두를 타기 시작한다. 날것으로의 칼날에 닿으며 그의 몸은 자연스럽게 떨리고 눈이 뒤집히며,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입가에 미소까지 드리운 채 신명을 내는 이 장면은 문수가 서사의 주인공 자리를 다시 탈환하는 순간이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무얼 알겠냐만은, 큭큭, 큭큭큭큭”이라는 마지막 문수의 목소리는 외부의 인정에 의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스스로 자신의 내력과 진정성을 긍정”12)하게 되는 절정의 순간으로 읽는 데서 더 나아가보면 어떨까. 이렇게 다시 말해볼 수 있겠다. 전근대의 무속은 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그를 등진 근대의 자리에서 비로소 현대 예술로 다시 탄생했다고. 숭고한 현현과 몰입이 신앙의 영역이라면, 문수의 작두춤은 오히려 이질감과 불편함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현대 예술에 가까워진다. 그의 퍼포먼스는 낭만주의적 예술가를 구성하던 천재와 영감에 스며있던 정신성을 해체하며 실재하는 몸의 물질성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물리적 능력과 무관하게 피를 철철 흘리며 경련하는 그의 신체는 차라리 표현주의적 충동을 보여주는 하나의 오브제다. 이 몸 위에서 원본과 사본의 구별은 철폐되고, 천재성은 치열한 아마추어리즘에 자리를 내어준다. 이 피 흘리는 신체는 실패와 무의미의 가능성을 끝까지 열어둔 채, 인간이 다시 시간과 신체를 예술의 비용으로 지불하게 만든다. 이 비용은 AI가 생성하는 예술의 무한 반복 가능한 오류가 아니라, 한 번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 시간으로 남는다. 어디로 갈지 모른 채 지속되는 이 작두춤은 사회적 생산이나 예술의 의미에 부합하는 결과를 생산하기보다, 의미의 즉각적 환원을 거부하며 지연된 시간을 발생시키는 사건이 된다.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예술에 대한 인식론적 틀과 자기 이해가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다루는 소설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훨씬 더 월등한 창작물들을 더 활발하게 생산해내는 상황에서, 밀려난 예술가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프로그램도 사람도 기계도 귀신도 아닌 미지의 존재” 같은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은 이를 유용한 툴로 간주한다고 해서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이를 도구로 치부한다면, 패배감 속에서도 창작자로서의 존재는 무사히 보존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결과로 증명되는 성취라기보다, 계속해서 조바심과 조급함을 만들어내는 예술 자체에 대한 집요한 열망에 가깝다. 이러한 열망은 예술 인공지능에 의해 영화판에서 완전히 밀려난 영완 선배의 모습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포르노를 만들면서조차 건조하고, 푸르죽죽하고, 앙상하고 깡마른 나무가 등장하는 자신만의 ‘인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혼이 죽어버릴 것 같기에 “사막에서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 영완 선배의 모습은 세속적 열망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도에서조차 철저히 외면받고 실패했을 때, 그의 예술적 열망은 몰락을 통해 역설적으로 증명된다. 영화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소설 속 인물들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상실의 감각, 잃어버린 동료이자 인간성을 향한 애도되지 않는 고통은 이 작품에서 붉은 신체라는 하나의 신체적 이미지로 응축된다. 영완 선배는 인공지능이 만든 예술을 보더라도 창작욕을 유지할 수 있는 마법의 ‘붉은 알약’으로 하와이 사과를 건넨다. “세상이 바뀌어도 너는 언제나 만드는 인간일 거야. 스스로 기억하는 한 언제나 영화를 찍고있을 거야.”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인간 ‘하와’를 떠올리게 하는 이 ‘하와이 사과’는 흥미롭다. 신과 유사한 생성형 인공지능 앞에서 인간은 발가벗겨진 듯한 황망함을 느끼며, 황급하게 자신의 기원을 발명해낸 것일까. 아니, 인공지능 시대 쓰인 새로운 창세기에서 인간은 스스로 뱀이 되어 자신을 유혹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좋겠다. 창세기에서 유혹은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드러내는 증표였지만, 이제 유혹에 넘어가는 나약함은 인간이 여전히 예술을 욕망하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증표로써 다시 읽힌다. 소설은 인간의 예술을 향한 집념과 희열은 우울과 절망이 그에 비례하는 무게로 따를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고 눌러 말한다. 결말부에 하와이 사과를 먹은 후 변이한 화자의 붉은 몸은 기계와의 통합을 거부하기 위해, 그리고 예술을 향한 내적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구의 장례식장에 가다 본 환각을 자신 안에 합체한 우울증적 형상으로 보인다. 강력한 잔상을 남기는 이 붉은 몸은 「혼모노」의 마지막 장면에서 피를 흘리는 몸과 다르지 않다. 이 소설들은 AI 시대에 예술은 이제 언어의 정교함이나 결과의 완결성으로 모방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몸과 감각을 통해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현전이라는 아우라를 다시 호출하는 듯 보이는 이 소설들은 과거의 진정성을 그리워하며,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아우라는 회복된 본질이라기보다 예술이 결과로 증명될 수 없어진 이후에 발생하는 부산물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이계성이 언메이크랩의 작업을 논하며 던진 비유가 유효해진다. “여느 언어와 마찬가지로 신탁의 언어에도 본질적인 의미가 내재하지는 않아서, 어떤 프레임 또는 인식틀을 통해 이를 이해할지는 언제나 받아들이는 쪽의 몫이었다”13)는 그의 말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언어 역시 별개의 진짜 의미를 품고 있기보다 해석의 장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타자와 되돌릴 수 없는 종결이라는 죽음의 감각은 이 해석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제 예술가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욕망이 과정에 들러붙는 자리, 그리고 그 욕망이 실패와 상실을 되돌릴 수 없는 비용으로 남기는 시간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예술은 결과로 증명되기보다, 실패와 상실의 가능성을 끌어안은 채 지속되는 수행으로 남는다. 그렇게 이 시대 예술가의 상은 붉은 몸을 가진 신체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1)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태양과의 대화』, 이계성 옮김, 미디어버스, 2023, 119쪽.2) 조너선 크레리, 『지각의 정지』, 유운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579쪽.3) 데이비드 조슬릿, 『예술 이후』, 이진실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2.4)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위의 책, 100쪽.5) 위의 책, 145쪽.6) 권보연은 연구자 자신이 직접 수행한 실험 속에서 인간언어와 생성언어가 ‘의미 혼종’과 ‘확률 혼종’이라는 상반된 미적 지향성을 가지는 방식으로 합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중에서 ‘확률 혼종’은 내용이 아닌 확률 층위에서 인간과 기계언어가 합성되며, 감정과 내용에 유착된 의미 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질 가능성을 지니기에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기한다. 권보연, 「결과 너머 문학기계로서의 AI」, 『다문화콘텐츠연구』 46집, 2023.7) 정지돈, 「쓰여진 문장과 쓰여지지 않은 문장 사이」, 『에피』 24호, 2023, 55쪽.8) 언메이크랩 외, 『잠재공간 속의 생태학: 재난, 생성신경망 그리고 비미래』, 미디어버스, 2023, 25쪽.9) 위의 책, 26쪽.10) 위의 책, 43쪽.11) 김언,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면서 제기되는 문제들」, 『현대시』 2023년 6월호, 111쪽.12) 성현아, 「반항하는 자는 부조리가 있나니, 그 가짜가 참되도다」, 『2024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문학동네, 2024, 292쪽.13) 이계성,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을 위한 몇 가지 질문들」, 언메이크랩 외, 앞의 책, 55쪽.

계간 현대비평 강지희 AI예술비가역적 시간붉은 몸성해나혼모노김지연하와이사과 2024
강지희 AI 시대, ‘인간 없는 예술’의 도래 앞에서

1 이번 봄에 단연 눈에 띄었던 것은 인공지능 시대에 적극적으로 인간이라는 의식을 탐험하고 매체를 다시 읽어내는 글들이었다. 2020년대 들어 인류세 관련 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비인간’ 담론들은 생성형 인공지능인 챗지피티ChatGPT의 등장 이후 다시 한번 요동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차지하고 있던 독보적인 단상 위에서 내려와 비인간과의 경계를 적극적으로 허물며 세계의 지도를 다시 그리려는 겸허한 기획은 급작스럽게 복잡한 불안에 갇힌 것 같다. 적어도 기계에 대해서라면 이미 우리는 동등하거나 어쩌면 한참 전에 초월당한 것은 아닌가? 경계 허물기로 인한 희열보다 불안이 확연히 압도하는 자리에서 『쓺』 2024년 상권의 특집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그 개체성과 집단성’과 ‘작은 기획—채굴 문화와 미적 감각’을 유독 흥미롭게 읽었다. 그리고 ‘작은 기획’에 실린 심효원과 윤원화의 짧은 글이 각각 인간이 향하려는 방향과 의지의 아름다움, 그 노력이 무산되는 수동태의 자리에서 감지하는 공포와 불쾌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느꼈다. 먼저 심효원의 「지렁이의 부드러운 건축물 만들기」는 비인간 행위자인 ‘지렁이-되기’를 통해 근대의 한계를 돌파할 것을 정중하게 요청하는 글이다. 지렁이가 땅과 맺는 일원적인 관계성과 분변토라는 건축물은 근대 이후 인간이 이룬 도시의 뚜렷한 경계와 고정성의 반대편에 있다. 지렁이의 건축물 만들기란 사실상 움직이고 먹고 배출하는 신체적 행위의 반복일 뿐이지만, “비인간들의 극도로 효율적인 메커니즘”이자 자신의 몸이 다른 존재와 물리적으로 닿는 매순간마다 “무차별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동력”1)이기도 하다. 촉각이 주도적인 지하세계에서는 시각이 미미해질 뿐만 아니라 시간성 역시 달라진다. 미래의 미결정성을 남겨두는 대신 물리적으로 접촉하는 것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순간’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글은 최근 신유물론을 비롯한 담론들과 풍요롭게 공명하는 하나의 아름다운 공상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지하세계로 향하는 방향성은 최근 SF 소설의 주요한 상상력의 기반이기도 하다. 정세랑의 「리셋」(『목소리를 드릴게요』, 아작, 2020)에서 행성의 모든 자원을 고갈시키던 자본주의의 질주를 멈추게 한 것은 인류 문명을 끝장내려고 내려온 지렁이들이다. 강제 리셋 이후 인간들의 자리는 자연히 땅속 깊은 곳이 되고, 지상은 다른 종들이 누리는 공간이 된다. 김초엽의 『파견자들』(퍼블리온, 2023)에서도 지상은 균류인 ‘범람체’의 공간이 되어버리고 인간은 감염을 피해 지하세계로 내려와 산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문명 말살에 가까운 아포칼립스를 맞닥뜨리지 않는 이상, 영화의 촉각성을 즐겁게 감각해온 인간이 미래의 지구를 위해 지렁이를 신속하게 체화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로 남는다. 물론 직접적인 실천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지구의 거대 환경 시스템의 핵심 행위자 자리를 재조정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겠다. 하지만 미래적인 지하세계로 들어가기에 인간은 아직 시각적 쾌락 속에 즐겁게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지적 유희를 야기하는 활자의 쾌감까지 포함해서. 윤원화의 「땅을 파는 손」은 채굴적 상상력의 매혹과 절망을 말한다. 데이터로 전환된 우리의 생태 에너지를 부의 원천으로 삼으며 굴러가는 미디어 산업 앞에서, 인간의 생산물·복제물·부산물·폐기물을 구별하기는 어려워진다. 디지털 기술로 구축되는 ‘아카이브 데이터’는 역사는 넘쳐흐르지만 이를 의미화하는 전통은 불가능한 곳이다. 윤원화는 과잉생산으로 범람하는 사물들 앞에서 맞닥뜨리는 불길한 실패에의 예감을 시앤 응아이Sianne Ngai의 ‘기믹gimmick’에 대한 반응으로 설명한다. ‘매직magic’의 애너그램에서 유래했다고도 하는 이 단어는 1920년대 미국에서 편법적 장치, 싸구려 트릭, 계산된 마법 등을 뜻하는 신조어로 출현했다.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 자본주의의 황홀감과 환멸을 모두 각인한 기믹의 불완전한 형식은 오늘날 삶과 예술, 또는 넓은 의미의 ‘사업’에서 흔히 발견된다.2) 단기적 이익 추구에 최적화되어 있는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가치 절하된 노동에 시달리는 대개의 사람들이 이 기믹의 유희에 이끌린다. 운에 따라 누군가는 축적된 자원을 폭발적으로 소모할 수 있으리라는 채굴적 상상력이 번성하는 가운데, 보상도 성취도 불확실한 예술 노동 역시 가치 체계에 대한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윤원화는 이런 진단과 고민 속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생산성 중독의 시대에 예술은 어떤 시간성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3) 심효원이 지하라는 공간과 이를 감각하는 촉각성에 의지해 의미 있게 압축되는 순간의 시간성을 말한다면, 윤원화는 ‘농사’와 ‘채굴’을 대비하며 채굴의 무책임한 풍요의 약속이 얼마나 파국적일 수 있는지 말한다. 최단기간의 이익에 매몰된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생산물은 넘쳐흐르지만 어떤 가치 창출도 담보할 수 없는 동시대 예술은 불투명한 시간을 표류하는 중이다. 이런 진단 속에서 디지털 자본주의에 의해 갱신되는 매체의 기술적 발전은 인간과 나란히 놓여 경계를 넘나들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환멸을 불러오는 맹목적인 대상으로 남는다. 인간의 ‘지렁이-되기’를 향한 아름다운 여정은 너무나 느리게 진행중인데, 가장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인정받고 있는 생성형 인공지능은 예술을 몰아치듯 양산해낸다. 인간의 몸은 자발적으로 물질과 동등하게 놓이기 전에 물질이 만들어낸 다른 가치들에 의해 가치 절하되며 밀려나게 될까? 생동하는 물질들 안에서 인간을 재의미화하려는 시도와 인공지능을 의심하며 인간 본연의 무언가를 지키려는 안간힘 사이에서 부각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아래의 비평들은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2 『쓺』의 특집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그 개체성과 집단성’을 여는 글은 근대 패러다임이 ‘개인’을 해방하고 자율적 주체로서 정립해왔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이 시대에 여전히 개인의 이념이 유효한지 묻는다. 개체성과 집단성이 직면할 변화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이 서문에 가장 직접적으로 응답하는 글을 꼽는다면 김태환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과 김재인의 「창의와 집단 지능—인공지능은 창작하지 못한다, 다만 제시할 뿐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김태환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은 기계 성능의 고도화가 필연적으로 인간의 중요성이나 가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에게 산업화 이후의 근대는 ‘저자의 시대’이며, 이는 기술 발전의 작용에 대한 인간의 반작용이 만들어낸 변화이고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방향타가 된 것은 저자라는 이념의 바탕에 놓인 ‘개인주의적 사상’이다. 이는 산업화 사회 속에서 부속물로 전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회 분석의 준거점을 개인에 두고 진리와 자유를 탐색했던 아도르노를 비롯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기조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 다시 독일 지성사의 문화 비판적 사상의 전통이 소구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김태환은 “항상적인 문화 공급 과잉의 시대”(37쪽)라는 진단에서 찾는다. 그에 따르면 소셜 미디어나 웹사이트, 유튜브 등 정신의 대상화로서의 객관 문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반면, 그 반대 방향인 객관 문화에서 주관 정신으로의 내화는 개인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치로 인해 그만큼의 양적 증가가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사람들은 알고리즘 속에서 타인과의 의미 있는 만남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더 심각한 것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객관 문화의 총체가 스스로 발언하고 생산하는 주체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런 위기감 속에서 이 글이 다시 강조하는 것은 ‘정신의 개별성’이다. “요컨대 모든 인간이 개인으로서 개별적 의지, 개별적 내면, 개별적 정신을 지닌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외부에서는 절대 들여다볼 수 없고, 직접 조작할 수도 없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자주적이라는 사실”(42쪽)을 변함없는 인간 존재의 조건으로 부각하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무분별한 열광에 휩쓸리기보다 이를 의심 어린 눈으로 찬찬히 사유할 틀이 우리에게 요긴한 것은 사실이다. 데이터에 얽힌 저작권 문제 역시 계속 규제안을 논의해나가야 할 비판적인 쟁점이다. 그렇지만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위기를 산업화 시대 이후의 위기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는 것은 혹시 너무 큰 틀에서의 접근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 작동 방식과 결과물이 인간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만들어진 자본주의의 차원에서만 다루어질 때, 새로운 매체와 관련해 충분히 사유되지 못하는 요소들이 생겨나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이 글에서 알고리즘에 갇힌 디지털 시대 개인의 부자유에 대한 우려는 빠르게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의 재소환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거듭 강조되는 개인의 개별적인 ‘의지’와 ‘내면’과 ‘정신’에서 신체의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 글에서 인공지능과 대립되는 요소로 논의되는 인간의 ‘의식’이란 단순히 합리적 이성만은 아닌 “수많은 감각적 심상과 기억·감정·소망·의지 등이 혼재하는 심적 상태”(46쪽)다. 알파고와는 다른 인간 바둑 기사의 의식을 예로 들면서 언급되는 긴장, 초조, 후회, 자책, 엉뚱한 연상 등은 “바깥에서 결코 완전히 알아볼 수 없는 복잡한 내면”(같은 쪽)으로 규정된다. 베일에 살짝 가려진 듯한 이런 인간 내면의 신비함은 물질적인 신체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진화해온 신체야말로 내면 이상으로 복잡성의 차원에 놓여 있지 않은가? 이는 “신체화의 말소가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와 사이버네틱스 포스트휴먼 양쪽 모두의 공통된 특성”이라는 캐서린 헤일스의 비판을 상기시킨다. 헤일스는 합리적 정신과 등치되는 자유주의적 주체가 “그 악명 높은 보편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신체가 자아와 동일시되지 않기 때문”4)이라고 말한다.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간의 한계는 곧 발전을 통해 ‘영웅적 개인’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유한한 삶을 가진 존재, 모든 능력에서 커다란 한계를 안고 있는 개별자로서의 인간만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여 어떤 감동적인 위대성에 이를 수 있”(53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반드시 육체의 신경과 근육의 단련 과정을 동반하며 그것이 생각과 행동에 긴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잠시 괄호 안에 두어진다. 이 글의 전반적인 주장이 온당하게 느껴지면서도 그 전제가 되는 자율적인 개인상과 관련해 못내 마음에 걸리는 것은 개인이 지향해나가야 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전제되어 있는 발전과 성장이라는 지극히 근대적인 가치다. 생산과 창조의 주체로서의 영웅적 개인이 아니라 소비와 소멸의 주체로서의 개인에 대해 우리는 좀더 다른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또 근대 이전에 우리가 ‘저자’가 불투명한 긴 구술 시대를 살아왔음을 떠올린다면, ‘저자의 시대’ 이후의 저항이 활자와 개인을 넘어선 범주에서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3 김재인의 「창의와 집단 지능」은 이 질문에 대해 조금 다른 지점에서 답을 내놓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지능은 본질적으로 집단적 성격을 가지므로 ‘집단 지능’이라고 해야 한다. 개체를 중심에 놓으면 ‘창의’를 중시하게 되지만, 그 새로움은 다른 개체가 ‘모방’하고 ‘확산’하지 않는다면 사멸하고 만다. 그렇기에 인간이 다른 생물종과 달리 ‘집단 기억’과 ‘문화 기억’이라는 형태의 외장 기억을 건설함으로써 지식과 기술의 확산과 축적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은 중요하게 여겨져야 한다. 저자는 낭만주의 미학과 예술에서 강조하는 천재적 개인과 창조력에 대한 신화를 뒤로하고 “인간이란 거대한 기억”(62쪽)이라 정의 내린다. 이는 물론 질적 도약이 아닌 집단으로서의 양적 축적을 말한다. 김태환이 인간의 의지, 내면, 정신이라는 추상적인 면을 중시한다면, 김재인은 “나의 생각이란 시한부 소유물”(63쪽)에 가까울 수 있으며 그 휘발성을 지켜주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물질’ 혹은 ‘미디어’”(62쪽)라고 강조함으로써 그것을 외화된 집합적 사물성으로 바라보며 그 반대편에 선다. 그런데 이 글은 ‘컴퓨터가 자연어를 다룬다는 것’이라는 장부터 급작스러운 단절을 드러내며 도약한다. 앞에서 인간의 생각 자체를 미디어이자 집단 기억의 저장고로 본 것과 다르게, 예술과 창작의 영역을 다룰 때는 컴퓨터가 자각 혹은 성찰을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컴퓨터는 예술 능력이 없다”(66쪽)고 확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기계를 바라보는 김재인의 시점에는 도구적 차원과 존재적 차원이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글은 창작의 정의를 “스스로 선택하고 평가하는 능력이 발휘되었느냐”(67쪽)에 두는데, 중요한 점은 저자가 그 평가 주체의 자격을 ‘생물’로 단정한다는 것이다. 생물은 “생존과 번식을 스스로 반복”하는 유기체이고, 이 글에 따르면 평가 역시 “생존과 번식에 성공하기 위한 지각 처리와 행동의 연쇄”(70쪽)다. 이 기준에 따르면 애초에 기계는 아무리 ‘집단 기억’의 ‘미디어’로서 최적화되어 있다고 해도 무기물이라는 점에서 평가 능력이 없는 것으로 배제 당할 수밖에 없다. 그가 이렇게 유기체의 항상성과 관련된 기준을 평가 능력과 일치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저작 『AI 빅뱅』에서 참조할 수 있는 지점을 좀더 찾아보면, 이는 “몸의 고집스러움”5)이라는 말과 함께 구체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심지어 같은 프롬프트를 주더라도 생성물이 크게 바뀌는 무작위성randomness을 보여주는데, 이는 휘발성이 강하다. 그러나 인간은 불완전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자기 생각을 고수하는 면을 지니는데, 저자는 이를 몸에서 비롯된 문제로 보는 것이다. 이 장에 바로 이어지는 질의응답에서 한 질문자는 “세계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몸을 가지는 것이다”6)라는 전제 위에서 인공지능이 세계를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강인공지능으로 발전할 방법이 있는지 묻는데, 김재인은 이에 대해 ‘몸의 회복력’에 대한 이야기로 답한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몸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몸은 생각을 “바로 휘발되지도 완전히 고착되지도 않은 어느 중간 지점”7)에 붙잡아둔다는 것이다. 김재인은 인공지능과 다른 인간을 논하는 데 있어 복잡성을 가진 신체의 차원을 살려내고자 한다. 하지만 창작을 논하면서부터는 김태환의 논의와 유사한 탈신체화의 방향을 답습한다. “진화 과정에서 살아남았다는 특징”은 “필멸하는 인간이 불멸하는 비결”(70쪽)로 치켜세워지고, 진화를 위해 외부와 교섭하며 몸 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피드백 루프는 유기체만의 고유한 신체적 능력으로 남는다. 인공지능은 몸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케이트 크로퍼드가 인공지능은 추상화된 지능이 아니라 오히려 “체화되고 물질적인 지능이며 천연자원, 연료, 인간 노동, 하부구조, 물류, 역사, 분류를 통해 만들어진다”8)고 강조한 사실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혹은 그와 마찬가지로 유기체의 일차적인 목표로서의 생존이 진화의 필수 사항이라 말하는 신경과학 연구자 아닐 세스가 우리의 지각은 사실 ‘통제된 환각’이자 ‘최적의 예측’이라 설명했음을 염두에 두면 어떨까. 그에 따르면 ‘당신이 된다는 것being you’, 즉 인간의 ‘동물기계’적 본질과 의식적 자기 사이의 연결고리는 “신체 자체가 가진 현재와 미래의 생리적 조건에 대한, 형태도, 모양도 없고 제어 중심적인 지각적 예측”9)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인공지능 역시 지극히 물질적인 신체를 지니고 있으며 인간 역시 체화된 자아로 인한 기계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때, 예술을 창발시키는 창의성 개념이 다르게 읽힐 가능성이 열린다.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승부 후에 마련된 『인문예술잡지 F』 21호의 특집 ‘고함: 비-인간’에서 이진경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인공지능이 창조성을 가질 수 있는 논리적 가능성을 함축한다고 주장했다. 괴델의 정리는 수학적 추론의 과정 속에 언제나 결정 불가능한 명제가 ‘숨어’ 있을 수 있음을 의미하며, 그렇다면 인공지능의 수준에서도 공리계로 귀속될 수 없는 명제(결정 불가능한 명제)를 생성할 수 있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계의 형식적 추론에서조차 새로운 명제의 창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역으로 생명체의 진화가 어떤 경로를 밟아왔는지 설명한다. “변이mutation의 누적에 의해 진화는 이루어”지지만 처음 “생명체의 변이는 지배적인 개체군 안에서 일종의 ‘장애자’나 ‘고장’으로 간주된다”10). 하지만 환경이나 생존 조건에 따라 변이가 진화된 변종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면, 기계가 만들어내는 예측되지 않은 결과의 출현 역시 ‘고장’이나 ‘장애’가 아니라 새로운 능력의 ‘창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창조의 출발점이 아니라 결과물에 초점을 맞춘 논의다. ‘인간 없는 예술’이 도래하려는 시기에 우리는 다시 인간적인 무언가를 기계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는 기술적 특이점이 올 때마다 반복되어온 정동이기도 하다. 이 앞에서 좀더 차분하게 이전의 논의들을 정리하고 축적할 필요를 느낀다. 2024년 『쓺』의 특집이 창작자이자 예술가가 서 있는 주체의 자리에서 출발했다면, 2016년 『인문예술잡지 F』의 특집은 그 결과물인 작품의 자리에서 논의를 시작했다. 그렇다면 감상자의 자리에서 본다면 어떤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 신예슬의 『음악의 사물들』은 음악이 기술적 혁신을 이루는 순간마다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넓혔는지를 따라 음악사를 재구성한다. 자동 피아노의 경우에도 그 연주를 더 실제처럼, 더 자연스럽게, 더 인간답게 만들겠다는 목표는 거의 달성되었다. 그러나 자동 피아노가 만들어낸 경험이 정말 특별하게 의미화되는 것은 인간의 연주라는 원본 혹은 목적지를 버렸을 때이다. 인간의 연주라는 목적지를 소거해버리고 이 사물의 독자적인 가능성에 집중해보는 것이다. 연주하는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스스로 뭔가를 연주하거나 재생할 수 있는 악기가 등장했고 그것이 인간의 행동을 인간 없이 손쉽게 해냈다면, 그 기계의 핵심적인 가치를 ‘인간의 복제’가 아니라 ‘탈脫인간’으로 재조정할 수도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기계장치가 꼭 연주자를 대신할 필요는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기준점만 제거한다면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수많은 음악적 가능성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 자동 피아노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연주를 들려줄 수 있었다. 인간의 연주를 기록하고 인간의 연주를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연주의 대리자는 오히려 새로운 예술형식으로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스스로 연주하며 그 누구보다 기계적인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독자적인 예술형식 말이다.11) 우리는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에 대해서도 그것이 오히려 새롭고 독자적인 예술형식이 될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을까? 이 모방은 때로 인간에 한참 미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때로 인간을 이미 초월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계는 이미 희미해지고 있던 자율적인 개인 주체로서의 예술가상을 어떻게 바꾸어나갈까. 또 인간의 예술적 집념은 어떻게 예술 형식들을 바꾸어나갈까. 모든 것이 뒤흔들리는 가운데, 불안만이 정확하게 인간의 자리를 응시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이 불러오는 균열 속에서 인간에 대한 고정된 사유를 과감하게 벗어날 수 있을 때 인간과 예술 모두에 새로운 시야가 열릴 것이다. 1) 심효원, 「지렁이의 부드러운 건축물 만들기」, 『쓺』 2024년 상권, 368쪽.2) 시앤 응아이는 디지털 자본주의가 가속화되던 2010년대 후반의 미술과 문학작품을 분석하면서 기믹의 이론화에 착수하는데, 기믹은 의심스러운 도구성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키치와는 다른 저질 예술로 취급되면서도 자본주의 가치 체계와 그 이면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의심을 표면화하는 미적 전략으로도 쓰일 수 있다. 윤원화는 이 글을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공모 프로그램 선정작인 시각예술 콜렉티브 랩삐의 에 대해 설명하며 시작한다. 이 전시는 관객이 옥수수 농사 시뮬레이션을 완수한 후 ‘콘 코인’이라는 가상 화폐를 받아 실제 뻥튀기 한 봉지와 교환하는 경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복 노동이 이에 비례하는 가치 창출과 기쁨으로 이어지는 대신, 콘 코인이라는 불분명한 요소가 끼어들면서 매끄러운 교환 가능성이 흔들릴 때 이 간극에서도 기믹이 관찰된다고 할 수 있다.3) 윤원화, 「땅을 파는 손」, 같은 책, 383쪽.4) 캐서린 헤일스,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사이버네틱스와 문학, 정보 과학의 신체들』, 허진 옮김, 열린책들, 2013, 27쪽.5) 김재인, 『AI 빅뱅—생성 인공지능과 인문학 르네상스』, 동아시아, 2023, 153쪽.6) 같은 책, 156쪽.7) 같은 책, 157쪽.8) 케이트 크로퍼드, 『AI 지도책—세계의 부와 권력을 재편하는 인공지능의 실체』, 노승영 옮김, 소소의책, 2022, 17쪽.9) 아닐 세스, 『내가 된다는 것—데이터, 사이보그,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 의식을 탐험하다』, 장혜인 옮김, 흐름 출판, 2022, 243쪽.10) 이진경, 「인공지능시대의 예술작품」, 『인문예술잡지 F』 21호, 2016, 25쪽.11) 신예슬, 『음악의 사물들—악보, 자동 악기, 음반』, 작업실유령, 2019, 115쪽.

계간 문학동네 강지희 인공지능개체성집단성탈인간감상자 2024
배하은 눈보라 속에서 문학은 ―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소명출판, 2023)

1. ‘서울의 봄’을 기다리며 유신 독재 시대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을 다시 돌아다보면서 근래에 극장가의 흥행 기록을 다시 쓴 영화 (2023)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지나간 과거의 일이지만, 또한 그렇기에 ‘서울의 봄’이 당시로써는 아직 오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엔딩 크레딧과 함께 솟아오르는 아쉬움과 슬픔, 분노의 감정은 덜해지지 않는다. 40여년의 시간차를 무색하게 만드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그 시대를 지나오지 않은 세대의 관객들에게까지도 강력하게 휘몰아친다. 그러니 그 시대를 온몸으로 뚫고 나갔던 이들은 눈앞에서 물러나는 봄을 바라보며 무엇을 느꼈을지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유영주의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소명출판, 2023)이 제목을 따온 「겨울공화국」의 시인 양성우는 그의 또 다른 시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에서 그 봄을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들려준다.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셔준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곤백번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이 …… 한반도에서 다만 녹슬지 않는 비싼 넋으로 밤이나 낮이나 과녁이 되어 내가 죽고 다시 죽어 스며들지라도 오는 봄에 나무꾼을 쓰다듬어 주는 작은 바람으로 돌아온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후략)…1)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실 수 있다면, 오는 봄에 작은 바람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그의 시가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죽고 다시 죽어 넋으로 스며든다고 해도 좋다는 시인의 결연한 고백을 듣고 나면 그러나, 또 한 번의 겨울 속으로 선선하게 걸어 들어갔을 그들의 의지를 떠올리게 된다. 봄은 물러갔어도,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에서 주요하게 살펴보고 있는 김지하와 황석영, 조세희, 이문구는 신군부 독재 정권하에서도 계속 문학이라는 싸움과 저항을 지속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그들에게는 “오는 봄”을 기다리며 문학에 대한 믿음과 비전으로 눈보라를 뚫고 한 시대를 걸어 나왔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영주의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은 바로 그 역사에 관한 연구이다. 2. 시와 정치와 사랑 시작은 김지하다. 저자가 냉전시대 동아시아의 권력 지형 및 상세한 역사적 맥락과 함께 김지하를 통해 보여 주고 있는 것은, 그러한 냉전 체제의 하위 파트너인 유신 독재 정권과 한바탕 벌여 놓은 그의 싸움판이다. 그의 시 「곡(哭) 민족적 민주주의」(1964)와 「오적(五賊)」(1970)이 어떻게 ‘유신의 심장’을 들었다 놓았다 했는지, 왜 유신 독재 정권은 그의 ‘세 치 혀’와 붓 끝에서 흘러나오는 시를 그토록 두려워했는지, 그러한 김지하의 시는 근본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저자는 ‘오적 필화사건’의 법정 풍경을 복원한다. 잘 알려진 대로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하에서 필화 사건은 드물지 않게 일어났고, 더군다나 김지하의 「오적」이 처음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특별히 ‘오적 필화사건’에 주목하는 이유는 “1970년 김지하의 체포에 이은 100일 간의 재판[이], 법정을 판소리나 탈춤이 주로 공연되는 야외의 마당으로 탈바꿈시켰다”는 데 있다.2) 저자는 관련 인물들의 여러 회고를 바탕으로 당시 재판이 흡사 검사가 양반의 담화를 담당하고 김지하가 말뚝이를 맡은 판소리 풍자극과도 같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유신 독재 정권은 도리어 김지하에게 그가 오래 탐구했던 전통 마당극을 마음껏 펼칠 무대를 깔아주었던 셈이다. 이후 그 무대는 김지하가 “문학, 폭력, 혁명, 구원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펼칠 수 있는 대중 강연을 위한 연단”(95)으로 확장된다. 당시 재판을 방청했던 더글러스 루미스(Charles Douglas Lummis)의 기록을 인용하여 저자는, 재판 방청객들이 김지하의 발언을 받아 적어 재판장 바깥으로 빼돌린 뒤 그들이 속한 조직으로 돌아가 그에 대해 토론하고 연구하게 되는 방식을 흥미롭게 포착한다. 이는 시인의 말이 변론과 강연, 연설을 넘어서, 유신 독재 체제하의 민중에게 어떤 구원의 메시지처럼, 마치 ‘예언’처럼 전달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저자에 따르면 루미스는 실제로 김지하에게 “에언자”라는 칭호를 부여하기도 했다.(87) 오래 전 종교가 시와 정치로 분리되지 않는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이 시기 김지하의 문학 세계는 세속화 시대에 시와 정치를 동시에 추구하려 했던 어떤 종교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이후 “시인으로서의 그의 국제적 명성은 분명 그가 겨울 공화국의 순교자가 됨으로써 크게 높아지게 되었다.”(50) 아이러니하게도 유신 독재 정권은 김지하를 위대한 시인으로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게다가 그 어떤 비평가나 애독자보다도 꼼꼼하게 김지하의 시를 읽고 분석하며, 그 힘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했기에 그들은 김지하에게 더욱 집착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검찰은 “시인의 수첩에 적힌, 아직 쓰이지 않은 시와 희곡에 대한 메모”(95)들을 증거로 제출하며, 마치 시인론을 쓰는 문학 연구자인양 김지하의 문학 세계를 탐구해 들어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문학이 하는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문학을 억압하고 지배하려면 역설적이게도 그 안에 잠겨들어야 한다. 지배와 억압은 대상을 이해할 때 가능한 것이고, 문학에 대한 이해는 오직 문학의 세계 안으로 침잠할 때 가능한 까닭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문학이 하는 혁명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지배 권력조차 그 안으로 휘말리고 뒤엉켜 들어가게 만드는 것, 그것이 시와 정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유신 독재 시대 문학의 혁명적인 것이었다. 굳이 알랭 바디우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낸다는 점에서 사랑과 혁명은 ‘사건’이며,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문학도 ‘사건’이 된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의 논의가 무르익을 때, 그 자체로 1970년대 문학의 ‘사건’이기도 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이 등장한다. 핵심은 이 연작소설집이 이웃 사랑을 미학적으로 실천한 텍스트라는 것인데, 저자는 그 단초를 「뫼비우스의 띠」에서 발견한다. 연작소설의 첫 번째 이야기이기도 한 「뫼비우스의 띠」는 ‘굴뚝 청소를 마치고 그을음으로 얼굴이 새까맣게 된 아이와 그을음이 전혀 묻지 않은 깨끗한 얼굴의 아이 중 누가 얼굴을 씻을 것인가?’ 하는 질문과 함께 수수께끼 같은 문답을 주고받는 교사와 학생들의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이 문제가 곧 뫼비우스의 띠이면서,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세계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함을 암시하며 끝맺는다. 저자는 이 뫼비우스의 띠 수수께끼를 지젝(Slavoj Žižek)의 ‘시차적 관점(parallax view)’, 즉 축소 불가능한 간극을 잇기 위해 애쓸 것이 아닌, “간극 그대로를 인식하는 것”으로 해석한다.(189) 안과 밖은 결코 만날 수 없지만, 뫼비우스 띠에서는 그 안과 밖이 그대로 안쪽 면이면서 바깥 쪽 면으로 존재할 수 있는 차원을 인식하는 것이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서, 당연히 그을음이 묻은 아이가 세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에게 교사는 얼굴에 그을음이 묻지 않은 아이가 친구의 새까만 얼굴을 보고 얼굴을 씻어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답한다. 이윽고 다른 학생이 그와 같이 대답하자, 다시 교사는 동일하게 굴뚝 청소를 한 아이들 중 한 아이의 얼굴은 깨끗하고 다른 아이의 얼굴은 더러운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반박한다. 그러니까 애초에 교사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해답 없음이 곧 안과 밖의 구분 없는 뫼비우스의 띠의 관점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굴뚝청소부 수수께끼와 뫼비우스의 띠라는 위상수학적 개념과 개발독재시대의 소설에 대한 해석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마치 뫼비우스의 띠를 만들 듯, 유영주 역시 그의 방법론적 시각을 한 차례 꼬아 지젝에서 케네스 레이너드의 ‘이웃’ 개념으로 비약한다. 사랑(특이성과 차이)과 정치(평등과 동일성)는 마치 뫼비우스 띠의 양면과도 같은데, 그 띠를 한 번 꼬아 연속체로 만드는 “사랑과 정치의 이음매” 지점이 “이웃”이라는 존재라는 것이다.(189) 저자는 이로부터 조세희 소설의 미학인 ‘이웃 사랑’을 이끌어 낸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난쏘공』을 난해한 모더니즘적 텍스트처럼 보이게 하고, 그래서 리얼리즘론자들에게 지식인적인 환상 소설이라고 비판받게 만들었던 몽타주 기법을 ‘이웃 사랑’의 주된 미적 원리로 파악하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1970년대 문학은 “당신은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십니까”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박태순의 ‘외촌동 사람들 연작’과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1977)가 그러했을 뿐만 아니라, 대중소설 작가로 197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최인호 역시 일찍이 「미개인」(1971)에서 한센병 환자의 아이들과 같은 학교에 보내는 것을 반대하고 나선 우리 주변의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를 소설로 쓴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첫 손가락에 꼽힐 작가는 단연코 이문구일 것이다. 『관촌수필』(1972)에서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이문구의 이채로움이 빛을 발하며, 유영주가 말하는 ‘인접성의 윤리’를 적극적으로 미학화한 이상적인 이웃 공동체가 그려진다. 저자는 이문구의 아버지와 두 형들이 좌익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던 개인사를 바탕에 둘 때, 이문구의 이웃에 관한 이야기가 그저 단순히 전통사회의 풍요로웠던 이웃 공동체에 대한 환상일 수 없음을 역설한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전쟁 전후의 무수히 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들 중 많은 경우는 이웃들 간에 벌어진 비극이었다. 크게는 계급과 종교를 바탕으로 나뉜 좌와 우의 정치적 이념을 따라 서로 갈등을 빚었고, 심한 경우 학살로 이어졌다. 이러한 한국 현대사의 맥락 속에서 이문구 소설 속 이웃은 “이념적 명명의 대안”으로 제시되며 특별한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142) 저자는 조세희와 이문구의 소설을 ‘이웃 사랑의 미학’과 ‘인접성의 윤리’로 의미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그러한 문학의 미학과 윤리가 박정희 독재 체제의 산업화와 반공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근원적인 힘이었음을 주장한다. 그 힘이, 플라톤 이래 본질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문학을 정치와 만나게 하고, 동시에 어떤 정치를 극복하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저자의 의도대로 1970년대 문학은, 시(문학)와 정치와 사랑이 ‘인접성’의 원리를 따라 이어지지만 그 간극을 그대로 유지하며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현실을 넘어서는 차원의 위상을 형성하는 상호 연결과 긴장 관계로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3. 마지막 문사(文士)의 시대 그러나 이 책의 부제인 ‘박정희 시대 한국문학과 저항’에서와 같이, 한국 문학이 저항과 나란히 놓일 수 있는 시대는 곧 저문다. 대체로 그것은 1990년대, 그 유명한,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실감한 때와 겹친다. 고진은 1970년대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한 사람인 김종철과 만났을 때 왜 문학을 그만두고 《녹색평론》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알려진 대로 김종철은 1991년 《녹색평론》 창간과 함께 문단을 떠나 생태주의 운동에 몸담았다. 그는 “자신이 문학을 했던 것은 문학이 정치적 문제에서 개인적 문제까지 온갖 것을 떠맡는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모순조차도 떠맡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언제부터인가 문학이 협소한 범위로 한정되어 버렸다, 그런 것이 문학이라면 내게는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그만두었다”고 답했다.3) 이것은 유신 독재 정권에 강력하게 저항했던 ‘창비’ 계열 문학비평가의 고백이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이 포착하고 있는 문학의 사회 참여(앙가주망)와 정치적 실천, 특별히 양심 있는 지식인으로서 시인과 소설가 들이 독재 권력과 맞서 싸우는 역사는, 이제 정말로 역사가 되었다. 물론 그러한 역사가 한국에서 1970년대 유신 독재 정권 시대라는 국면에 가능했고 정점에 도달했던 것은, 과거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국가였던 후진국에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설 때 그에 맞서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를 외칠 수 있는 것은 소수의 지식인들뿐이었던 세계사의 보편적인 패턴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고진이 말한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장르가 소설(novel)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한국 문학사에서 ‘소설의 시대’라고 불렸던 1970년대의 특수한 문학사적 맥락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의 논의가 작가를 앞세우면서 참조하는 세 가지 문학 개념 중 첫 번째인 ‘리테로크라시(literocracy)’라는 동아시아의 문치주의적인 문학 개념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한국 근현대 문학사로 한정해 본다면 그것의 유구한 역사는 시인과 소설가가 독립운동 투사가 되곤 했던 식민지 시대 ‘문사’ 개념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사의 시대는, 이 책에서 보여 주고 있는 것처럼 실로 1970년대 문학에서 마지막으로 가장 강력하고 화려하게 빛을 발한 뒤, 끝났다.4) 이 책의 첫 장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김지하의 시 「진리」에서 시인은 “바람 속이 내 집”이라고 노래하고 있었지만,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 황석영은 그가 2017년 출간했던 문학적 자서전 『수인』에서 방북사건으로 떠돌던 시절을 회고하며 그때의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결국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문학이라는 집이었다”라고 고백한다.5) 한때 바람 속을 집으로 삼아 온갖 경계를 넘나들며 활보했던 문사들에게 문학의 지경이란 없었다. 김종철이 말했던 것처럼 그들의 문학은 “온갖 것을 떠맡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문학을 떠났거나, 문학이라는 집 안으로 돌아간다. 이제 문학은, 그리고 작가는 무엇을 하는가. 유영주는 결론에서 박민규 소설의 저항성을 김지하에 견주며, 문학은, 그리고 작가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박민규는 그의 대표작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표절 사건 이후로 그럴 수 있는 정당성을 상실했다. 이것은 분명 징후이기도 하다.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예감하게 했던 작가 중 한 명인 무라카미 하루키를 통해 우리는 이미 오래 전 문사의 정체성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로 완벽하게 대체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지위마저 위태롭다. 최근 작가들의 소설 속 자기 재현은 어떠한가. 그들은 비정규직 중에서도 고용안정성과 소득이 가장 낮은 축에 들며, ‘프리랜서’라서 정부가 청년층에 제공하는 대출 상품에도 부적합해 은행 창구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으로 소설가를 재현한다(박서련, 「A Queen Sized Hole」,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민음사, 2022). 지방 변두리의 3천만 원짜리 아파트가 자기 집이 되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며, 마오쩌둥의 참새들처럼 어디에도 내려앉을 수 없어 지쳐 떨어져 죽을 위기에 놓여 있다(이서수,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젊은 근희의 행진』, 은행나무, 2023). 오해하지 말라. 이것은 어떤 가치 판단도, 비판도, 자조도 아닌, 현상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이 시대의 문학은 이제 유신 독재의 겨울 공화국과는 완전히 다른, 또 다른 눈보라 속에서 분투해야 하는 것이다. 1) 양성우, 『겨울공화국』, 화다, 1984, 18면. 2) 유영주, 이형진·정기인 역,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 박정희 시대 한국문학과 저항』, 소명출판, 2023, 92면. 이후 이 책 인용 시 본문에 쪽수로 표기. 3)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역, 『근대문학의 종언』, 도서출판 b, 2006, 49면. 4) 어떤 이들은 1980년대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문학과 정치의 관계라면 그것은 1980년대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1980년대에 문학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팽배했던 반지식인적인 분위기 속에서 작가는 1970년대와 같은 문사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1991년 5월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 치워라”라는 김지하의 충격적인 발언과 그것을 둘러싼 반응 그 이면에는 1980년대를 거치며 그가 더 이상 1970년대와 같은 문사의 지위에 서 있을 수 없었던 상황이 엄연히 자리한다고 볼 수도 있다. 5) 황석영, 『수인』 1, 문학동네, 2017, 365면.

계간 문학인 배하은 유신시대개발독재시대김지하조세희이문구황석영문사문학의 정치성근대문학의 종언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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