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창작21 2024년 여름호(제65호)
더 이상 꿈꾸지 않는 소설들 ― 2024년 주요 신춘문예 당선작 읽기
지난 계절에는 2024년 주요 신춘문예 당선작을 읽었다. 마침 한국연출가협회에서 올해 신춘문예 당선작 8편을 대상으로 제33회 대한민국 신춘문예 페스티벌(공연)을 연다는 소식도 있었다. 연출가협회에서 선정한 작품은 강원일보, 경상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문, 서울신문, 조선일보, 한국일보 당선작과 한국극작가협회에서 별도로 선정한 작품 등이라고 했다.
나는 주요 신문의 당선작들, 서울신문, 문화일보, 세계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을 읽었다. 신춘문예 당선소설들은 당대의 첨예한 문제의식을 환기하면서 소설의 새로운 감각을 살펴보는 데 유용한 자료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선을 목적으로 오랜 훈련을 거듭한 작품들이라 대체로 새로움과 익숙함의 경계에 있는 점이 눈에 띄었다.
한국 문단의 오랜 경향성이기도 한데, 주요 신문사 소설 당선자의 성별 분포를 보면 여성이 더 많고1), 90년대 문학의 주요한 특징이라 할 “공동체에 대한 관심에서 존재에 대한 성찰과 일상에 대한 관심으로의 이동 현상”2)이 여전하다는 점이다. 그것은 당대 첨예한 문제의식을 서사화하는 소설이(비록 단편이고 신춘문예 당선작이긴 하나) 왜소해진 반면 자신만의 세계 내부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러운 면이 있다. 존재에 대한 성찰과 일상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중요하겠고, 이 우려는 작가 중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더 많은 것과는 물론 상관없는 일이겠다.
벌써 몇 년 전에 임철우 소설 『백년여관』(문학동네, 2017)의 한 대목에서, 출판사 근처 한 카페, 대부분 이삼십 대의 젊고 낯선 얼굴들- 출판사의 편집자, 신문사의 문학 담당 기자들은 “역사나 정치의식의 과잉이라는 것도 한참 지난 시절의 이야기”(20쪽)라거나, “요즘 젊은 친구들 사전엔 ‘우리’라는 어휘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고, ‘나’만 있다고, ‘우리’니 혹은 공유해야 할 무슨 엄숙한 가치니 따위는 말짱 헛것이라고, 우리 세대한테 현실이란 건 컴퓨터 게임 배경만큼도 리얼하지 않다”(20-21쪽)는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니까 그들은 “앞세대한테 빚진 것 없다고, 진짜 아무것도 없다고”(21쪽)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엄숙한 가치 따위는 말짱 헛것이다.”(21쪽)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전쟁이든 국가폭력이든 혹은 코로나바이러스와 같은 질병이든 어떠한 재난이라도 그것은 누구에게나 균질적이지 않지만, 또 누구든 그것을 피해갈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다른 면에서 보면 이제 소설이 더 이상 꿈꾸는 장르가 아니라는 인식으로 읽히기도 한다. 세상과 맞서지 못하거나 맞서지 않는, 자아 속으로만 침잠하는 문학을 건강하다고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긴 주요 대학의 총학생회가 학생들의 무관심으로 선거가 무산되거나 학생회장 후보조차 내지 못했다는데, 그 까닭 중 하나가 학생들이 극심한 취업난 속에서 스펙(specification) 쌓기에 몰두하다 보니 관심이 없다는 것이라 했다. 해마다 총학 주관으로 진행하는 대학 축제가 최정상급 가수를 초청하는 연예인 콘서트로 변질된 지 오래되었고, 그 비용으로 수억 원씩을 경쟁하듯 쓰는 것으로 알려졌다.
더구나 광주에서는, 5월 27일은 1980년 신군부의 광포한 폭력에 맞서 싸우던 시민군이 전남도청에서 최후의 저항을 하다가 죽임을 당한 역사적인 날이다. 열흘 동안의 저항이 마침내 무력진압되었던, 5월 항쟁 기념주간 마지막 날이다. 그런데 2024년 5월 27일, 그 전남도청 인근의 어느 사립종합대학교에서는 인기 절정의 가수들을 초청한 대학 축제를 시작했다. 도무지 역사의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세태가 저러한데, 공동체의 문제나 거대담론을 우리 소설이 외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물론 문학이 이러해야 한다는 생각이나 주장은 그 자체로 오류거나 또 다른 억압이기는 하겠다.
관계의 회복과 사랑의 확인 –서울과 문화
서울신문 당선작「북바인딩 수업」(이지혜)은 서술자 ‘나-민정’과 그녀의 한 살 많은 사촌 오빠 윤재와의 미묘한 감정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민정이 여섯 살 때 아빠가 돌아가신다. 홀로 생활을 꾸려나가야 했던 그녀의 엄마가 이모 집에 민정을 맡긴다. 이모부는 이년 간 ‘나’를 맡아 키우면서 싫은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 다만 윤재와 윤석(윤재의 형)을 대할 때는 태도가 엄격했고, 자녀의 교육과 생활지도에 대한 자기만의 기준이 확고했다. 불편한 일이 없지 않았다는 뜻이다.
민정과 윤재는 호텔에서 인턴으로 일하면서 겪는 마음의 상처라든가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느낀 기쁨과 좌절 따위 각자에게 일어난 크고 작은 일들을 서로에게 알리면서 서로를 애틋하게 여기는 사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런 관계가 어색해지고 부담되어 연락이 뜸해졌다. 그런데 윤재로부터 민정이 사는 곳 근처 책방에서 북바인딩(bookbinding, 낱장의 종이를 묶어 책으로 꾸미는 일) 수업을 하게 됐다고 연락이 온다. 이모의 병환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하지 않으면서, 또 자신에게는 특별한 관심을 보이는 것 같지 않으면서 참가자들에게 책 만드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수업에 집중하고 있는 윤재를 바라보는 민정의 마음이 복잡하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두 인물 사이에 자연스레 형성된 연민과 애정이라는 감각을 작가가 어떤 방식으로 처리하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이를테면 호텔에 근무하는 민정의 경우 업무규정 탓에 손가락에 매니큐어를 바르지 못하는 대신 윤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그랬듯이 자주 화장품 가게에 들러 매니큐어를 사고 그것을 발톱에 바르는 행위를 통해 윤재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을 스스로 억압하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윤재를 사랑하는 마음이 발톱에만 바를 수 있는 매니큐어 같다고 민정은 생각한다.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이종사촌이 아닌가. 여전히 고루한 관습이 작동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이종사촌 간의 사랑은 터부시되고 있는 게 현실이니까.
윤재의 글쓰기나 책 만들기는 책방에 온 사람들이 “그걸 왜 만드느냐?”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성과는 거리가 먼 일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 윤재의 ‘북바인딩 수업’이란 일종의 메타포로 기능한다. 윤재의 책 만들기 수업에 참여한 민정이 그의 안내에 따라 함께 책을 만들어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으로 두 사람의 감정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이 책 만들기 수업을 통해 도달한 곳은 상처의 치유 혹은 관계의 회복을 통한 사랑의 확인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그것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사랑이 무엇인지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으나 그것은 복잡미묘해서 감정인지 신체적 접촉을 통한 감각인지 그 둘인지를 변별하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생각하면서 만나기를 원하고 그리워하는 감정과 애정을 기본 감정으로 하는 다양한 층위의 인지적 판단과 정서적 요소, 관계적 양식과 태도가 결합 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3) 이 소설의 두 인물이 그러한 것처럼.
신춘문예 당선소설들의 일종의 패턴을 이 소설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오래전부터 문신을 새기는 과정이나(천운영, 200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소설「바늘」) 광어회를 뜨는 과정(백가흠, 200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광어」) 혹은 질그릇을 만드는 과정 등이 소설의 이야기 구조, 형태를 만들면서 주제를 형상화해 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더 멀리는 이청준의『서편제』나 이문열의『금시조』와 같은 장편소설이「북바인딩 수업」과 같은 소설구성의 원형으로 여겨질 법하다.
문화일보 당선작은「유명한 기름집」(기명진)이라는 제목의 소설이다. 경기도 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문을 연 지 삼십 년도 더 지난 ‘기름집’이라는 공간과 ‘하루’라는 시간을 설정하고, 관절이 굳고 온몸이 통증으로 몸이 아픈 서술자 나(희경)와 아이를 잃은 뒤 조카를 돌보는 한 인물(해수)이 만나는 이야기다. 대학 때 친구였던 ‘해수’는 소설의 서술자 나에게 찌꺼기가 하나도 없이 깨끗하다는 참기름과 들기름을 산 뒤 근처 민물매운탕집에 가서 점심을 먹자고 전화를 해왔다. 기껏 참기름 들기름을 사겠다고 먼 곳으로 왕래하는 것이 내키지 않아 하던 나는 결국 해수를 만나러 간다.
두 사람은 십오 년만에 만나게 된다. 매운탕도 먹고 기름도 짜고 무엇보다 근처에 있다는 절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대학 때 해수의 외할아버지가 암에 걸렸는데 그 절에서 새벽마다 예불을 올렸고 일 년 만에 암이 완쾌되었다는 말이 기억났다. 해수와는 십오 년 동안 만나지 않았고 연락도 하지 않고 지냈다. 초중고를 같이 다녔던 주영을 만나 해수에게 많은 일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주영은 중학교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길 때도 울지 않았던 친구였는데 해수의 죽은 아이 이야기를 전하다 눈물을 보였다. 표정의 변화가 없는 나를 보고 주영은 내가 변했다고 생각한다.
결혼하고 이혼하고 어머니와 아버지의 장례를 차례로 치르는 동안 나(희경)는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내가 그들과 멀어진 사이 내 소개로 알게 된 해수와 주영은 서로 왕래하며 친밀하게 지낸 모양이다. 나는 소외감을 느낀다. 주영을 통해 해수가 인터넷을 통해 호두과자를 만들어 판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모자 밖으로 비죽 튀어나온 해수의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하다. 만으로 아직 쉰 살이 되지 않았지만, 어느 사이 젊음이 지나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해수는 자신도 기름 짜는 기술을 익혀 기름 가게를 열고 싶다고 말한다. 가게 이름은 ‘서준기름’으로 정해 두었다고. 서준은 해수와 열 살 밖에 차이나지 않는 그의 형 막내아들로 해수가 돌보고 있다. 헤어지기 전에 해수에게 묻는다. 왜 나한테 기름집을 보여줬는지. 해수는 “친구 중에서 너만 한 눈썰미를 가진 얘가 어딨냐?”고 답한다.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으나 그들은 서로를 그리워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대체 인물의 성 씨 구별이 이름만으로는 종잡을 수 없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이 소설도 그러한 점에 있다. 이 소설의 서술자 ‘희경’은 여자인가 남자인가? 소설을 한참 읽다 보면 희경이 남자고 해수는 여자가 분명한데, 남자인 희경이 참기름과 들기름을 사기 위해 먼 곳까지 걸음을 한다는 설정 자체가 흔한 일은 아니다. 소설을 읽을 때 세 인물, 희경과 해수와 주영 모두 여성 인물인 듯 보였으나 희경이 남자라니, 그럼 희경과 해수는 대학 때 만나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으나 각각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또 그들은 모두 이혼을 한 처지라서 오랫동안 서로를 만나지 않았다는 것인가.
아무려나 오랜 친구(그것이 이성이든 동성이든)가 각자 상처를 안고 있고, 오랜만에 참기름을 매개로 만나서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끼는 이야기로 읽었다. 미안함의 연유는 무엇인가. 자신의 삶에 지쳐 오랫동안 서로의 안부를 묻지 못한 무심함? 고맙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위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 아니 애매모호 하기는 하지만(사랑의 정체 자체가 애매모호 하거니와)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서로를 사랑해왔다는 것인가? 실로 사랑에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설렘, 또는 고통 등의 감정은 ‘당신’이 결코 ‘나’와 동일자일 수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사랑하는 대상은 늘 타자일 수밖에 없으며, 그리하여 이렇게 비동일성을 기반으로 한 사랑은 예측 불가능한 것, 계산 불가능한 것, 통제 불가능한 것일 수밖에 없다.4)
그렇게 읽고 나면 소설에 대한 독해가 좀더 편안해지는 측면이 있다. 어쨌든 다행인 것은 해수가 기름집을 열겠다는 것으로, 그러니까 자신 앞에 놓인 어려움에 굴하지 않겠다는 다짐. 두 인물이 오래 단절되었던 관계를 회복하고 서로의 상처를 위무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것 역시 신춘 소설이 갖는 결말의 특징이겠다. 따뜻한 마무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된다는 긍정적 전망을 제시하는 것으로 소설을 마무리하라는 일종의 문법에 충실한 작품이다.
상징을 활용한 주제 제시-세계와 경향
세계일보 당선작은「붉은 베리야」(유호민)다. ‘붉은 베리야’는 소설의 서술자 가족이 열대식물인 ‘부겐빌레아’를 ‘붉은 베리야’라 부른 데서 가져온 제목이다. 추운 겨울 붉은 것이 꽃처럼 피는데 정작 그것은 꽃이 아닌 꽃받침이고, 가운데에 꽃술처럼 아주 작고 하얀 것이 꽃이다. 서술자 ‘나’의 가족은 다양한 지식을 갖고 여러 책도 펴낸 공대 교수 출신의 그러나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모시고 서해안에 가서 바지락죽을 먹고 온다. 마지막 가족여행이다.
그해 아빠의 생신 선물을 갈색의 푸들로 샀는데, 까닭은 시간 맞춰 밥을 주려면 머리도 써야 하고 산책을 시키며 운동도 하고 정서 안정에도 좋을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빠가 굳이 ‘초코’라 불렀던 푸들을 데리고 노부부가 산책을 할 때마다 아빠가 초코에 끌려다니다 엄마가 넘어지는 일이 잦았다. 그 후 노부부는 바깥에 나가지 않는 날이 더 많아졌다. 강아지 대신 화분을 돌보도록 했다.
이번에는 아빠가 화분에 물 준 것을 잊어버리고 물을 또 주고, 주고 했다. 화분은 썩거나 말라죽거나 했다. 그 와중에 뜻밖에도 빨간 꽃을 탐스럽게 피우는 식물이 있었다. 아빠가 사 들고 온 것으로, 이름이 ‘부겐빌레아’라고 했다. 식구들은 발음하기 까다로운 그 이름 대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붉은 베리야’로 부른다. 아빠의 치매는 느리게 진행되었고 그러다 평온한 척 십 년을 버티던 엄마가 아빠 먼저 세상을 떠났다. 언니네 집 근처로 거처를 옮기느라 옆집에 맡기고 간 푸들 ‘초코’도 이년 후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 안락사시킨 후 아빠에게는 말하지 않았어도 뭔가 통하는 게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빠의 전신 기능이 갑자기 떨어지더니 40일간의 입원 끝에 아빠도 세상을 떠나셨다.
장례를 치르고 49재가 지나 아빠의 마지막 요양보호사가 집에 방문한다. 아빠가 소중하게 쥐고 있다가 자기에게 건네주었다는 상자 안에는 어린 시절 내가 엄마에게 선물했던 유리구슬로 만든 ‘왕다이아 반지가 들어있었다. 나는 생전 아빠가 들려주었던 얘기를 떠올리며 생각한다. 열대에 살던 저 ‘붉은 베리야’가 왜 한겨울에 꽃이 피는 걸까. 아빠가 말씀하셨다. “열대에 살면 항상 여름이거든. 열대지방엔 다만 우기와 건기가 있을 뿐 사계절의 감각 자체가 없다. 그러니 춥고 덥고 여름 가고 겨울 오고가 아니라, 물을 안 주면 건기가 왔나보다, 물을 많이 주면 우기가 왔구나, 열대 꽃들은 그리 생각하고 꽃을 피운단다.” 그러하니 이 소설은 한겨울에 붉은 꽃받침이 만개한 후에 조그맣고 하얀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보편적인 어떤 기준이 아니라 다른 기준에 맞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는 거라는 작은 깨달음으로 혹은 나이 들면 누구도 피해가지 못하는 치매라든가 사별 또한 자연스러운 순환의 과정이라는 담담한 주제로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신춘 소설뿐 아니라 노령인구가 점차 늘어가고 있는 우리 사회 현실을 반영하듯 소위 노년 소설이라 불리는 작품들이 많아졌다. 암과 치매를 비롯한 질병으로 생의 전환기를 맞는 인물들의 등장 역시 익숙해졌다. 일찍이 박완서와 오정희의 노년 소설에서 나이 든 인물은 점점 낯설어져만 가는 자기 자신과의 불화를 견디거나, 앞선 죽음들을 목격한 이후에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루하고 공포스러운 일상을 영위해야 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오로지 겪어낼 뿐 반추하거나 계획할 수 없는 노년의 시간은 ‘견딤’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시험한다.5) 그런데「붉은 베리야」는 계절이 순환하듯 그러한 질병과 사별을 오히려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담담한 서술로 주목을 끈다.
경향신문은 알파벳 소문자「i」(허성환)를 제목으로 한 소설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제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한 독자는 우선 임신 12주 차인 아내와 서술자 ‘나’가 산부인과에 함께 가서 초음파 검사를 하는 첫 장면을 읽으면서 새로운 탄생으로서의 ‘i-아이’를 떠올려도 괜찮을 듯싶다. 소설의 서술자는 연차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포장 용기를 대량으로 발주하는 매장에서 일한다. 한 명이 쉬게 되면 업무강도가 살인적으로 늘어나는 상황이라 아내와 함께 병원에 가야 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병원에 같이 가 줄 수 있느냐는 ‘아내와 연차는 어림도 없는’ 사장 사이에서 눈치를 보고 속을 끓이던 ‘나’는 다행스럽게 사장의 의외의 선심 덕분에 산부인과에 가게 된 것이다. 다행스럽게 아이는 아내의 뱃속에서 탈 없이 잘 자라고 있다.
그 전에 아내는 임신했다는 말을 하면서 소설을 쓰겠다고 말한다. 생필품 하나를 구매할 때도 의논할 만큼 신중한 아내의 그 말에 서술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겠다거나 하는, 통장 잔고를 확인해야 할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묻는다. “그래서 뭘 쓸 건데?” 아내는 의자에 대해 쓰겠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의자라니? 하루에 적게는 28만 개, 많게는 42만 개까지 종일 포장 용기를 배달하는 서술자에게 의자는 사치일 뿐이었다. 피곤해서 커피 한 잔이라도 마시려 해도 의자가 없으니 테이블도 없고, 그래서 허름한 상자 두어 개를 포개서 탁자처럼 썼다. 아내는 기절한 듯 잠에 취해 있던 주말에 “왜 의자를 달라고 말하지 못하냐?”고 나를 다그쳤다. 세상의 모든 노동자는 의자가 있다고, 의자 없는 회사나 직장은 들어본 적이 없다고, 예전에 자신도 계약직으로 시청에 근무할 때 의자가 있었고, 식당이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해도 의자가 있지 않느냐고, 내게 따지듯이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의자가 없어도 된다고, 앉아서 쉴 시간이 없다고, 그 시간에 물건을 더 날라야 한다고 울다시피 말한다.
이 소설에서 ‘의자’는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 하나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그것은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서비스 업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의자가 주어지지 않거나 형식적으로 주어질 뿐 의자에 앉아서 쉴 여유가 없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상기한다.
‘나’의 아버지는 일용직 노동자였다. 나와 막내(라고 부르는 동료 노동자)는 고졸에 토익 점수가 없다. 경기가 나빠서 다른 일터를 알아볼 겨를이 없다는 것을 간파한 사장은 에어컨 설치 작업과 수백만 원의 견적이 나오는 창고 물건 정리 따위 잡무를 떠안긴다. 몸은 천근만근 무너질 듯하지만 그래도 나는 막내와 달리 불평조차 하지 않는다. 곧 아버지가 되기 때문이다. 아내와의 연애 시절, 좁은 곳에 사는 남자와 작은 곳에 사는 여자가 만나면 좁고 작아져서 삶은 더 비참해질 거라고 판단한 나는 아내와 되도록 빨리 헤어지려 했었다. 그러나 아내는 혼자 사는 3평과 혼자 사는 4평이 합해지면 7평이 끝이 아니라 서로 껴안고 있으면 14평처럼 쓸 수 있을 거라 했고, 그 사랑의 마음으로 두 사람은 가난을 견디고 있다. 나는 편의점에 가서 삼각김밥이나 컵라면으로 때우고 아내가 점심으로 무엇을 먹었느냐고 물으면 보아두었던 식당의 메뉴를 말한다. 나뿐 아니라 시장에서 일하는 나와 비슷한 노동자들이 앉는 유일한 의자는 공용화장실의 변기 의자다. 나는 변기 의자에 앉아서 흑백으로 된 아이의 초음파 사진을 들여다본다. 사람들은 그곳에 앉아서 딸과 통화하거나 아내와 영상통화를 한다.
소설을 쓰겠다는 아내는 내가 가져다준 허름한 나무를 가지고 작고 귀여운 의자를 만들어 놓았다. 이 소설에서 아내가 만들어둔 의자는 하나의 중요한 상징이다. 의자는 누구나 알다시피, 편히 앉아서 무언가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만든 사물이다. 그런데 이 소설의 서술자가 그렇듯 많은 불완전 노동자들은 의자가 없거나 의자가 있어도 그것은 형식적으로만 주어진 사물이어서 노동환경은 불안하고 위태롭다. 그러하니 이때 의자란 고용과 노동의 불안, 그것이 초래하는 경제적 공포에서 벗어나서 안정된 노동환경을 염원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상징을 활용한 좋은 서술기법이다.
그런데 아내의 소설 쓰기란 또 무엇인가. 소설이란 현실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허구를 본질로 하는 문학이다. 상상력에 기반한 이야기를 통해 주제를 표상하는 장르다. 소설이라는 허구가 망상은 아니지만, 실현 가능한 현실도 아니라는 점에서 아내의 소설 쓰기가 의자 만들기로 제시되는 것은 현실에서의 실현 여부와는 관계없는, 아니면 현실에서 실현되기 어려운 다만 강력한 소망의 표상일 뿐이다.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포획당하고, 노동시장으로부터 퇴출되더라도 국가가 안전판을 제공해주지는 못하는 상황에서 생존을 위한 개인의 철두철미한 노력 외에는 다른 대안이 마땅히 제시되지 못하고 있는 게 우리 사회의 노동 현실 아닌가.6)
그렇다면 소설의 제목에서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아이(세대)는 의자로 표상되는 안정된 삶이 가능할 것인가 묻는다면, 그러하기를 소망할 뿐이겠다. 문학은 무엇보다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향한) 꿈꾸는 자의 것이므로.
자전적 글쓰기와 문화적 기억의 확장 - 조선
조선일보는「러브레터」(권희진)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서술자 ‘나’는 한 건물 16층 옥상으로 와서 한 노인을 생각하다가 문득 ‘서태지’를 떠올린다. 가수 서태지가 아니라 서태지와 목소리가 비슷했던 30대 후반의 아저씨다. 그 아저씨는 내가 예전에 살던 동네 비디오 가게 사장님으로, 내 친구의 삼촌이었다. 그런데 또 나는 16층 옥상에서 죽은 노인을 생각한다. 그러다가 자신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어쩌다 이 16층 옥상에 오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서사라고 말하면서. 독자는 하릴없이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는다. 열 살쯤 두통이 심했다. 엄마의 편두통이 전염되기라도 한 듯 자신도 늘 머리가 아팠다. 아버지는 일 년 중 집에 머무는 날보다 밖으로 나도는 날이 더 많았고, 그래서 엄마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니네 아빠가 없으니까 잠을 잘 수가 있니?” 하며 하소연을 하곤 했다. 어쩌다 아빠가 집에 돌아오는 날이면 엄마는 깔끔하게 차려입고 식사 준비를 했다. 그런 아버지가 열세 살 무렵부터 집에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는 우는 날이 많았다. 자식의 아픔보다 자신의 슬픔이 더 중요한 듯 보였다. 나는 편두통 때문이 아니라 어금니가 심하게 썩어서 그 통증 때문에 머리까지 아팠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나도 집에 들어가는 날이 줄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다가 눈치를 하는 친구네가 있으면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순일 네 집에 가서 자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순일의 고등학교 친구들이 하라는 대로 ‘남의 것을 훔치는 기술’을 배웠다. 순일은 소년원에 들어갔고, 나는 변호사를 선임한 덕분에 그렇지는 않았으나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군대에 갔다. 제대 후에 해외 화장품을 직수입하는 회사에 취직해서 구매자들의 데이터를 분석하는 일을 했다. 그곳에서 나보다 열 살 많은 ‘안과장’이라는 여성을 만난다. 만난 지 한 달 만에 안과장의 일곱 평짜리 원룸에 들어가 산다. 안과장과 헤어지고 목수일 배달 일 다 하다가 지금 이 건물에서 경비업무를 맡고 있다. 두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은 요즘 젊은이들답게 쿨하다. 그러나 한편 우리는 사랑에 빠지지만, 사랑의 불꽃이 꺼지고 나면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현실을 발견한다.7) 저 두 사람의 만남을 사랑의 이름으로 해석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둘 중)어느 쪽이든 재빨리 현실을 깨닫게 된 것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어야 하는지 독자는 인내심이 바닥나기 시작한다. 더구나 단편소설 아닌가. 그래서 어쩌라고? 가끔 폐지나 박스 따위를 주워가거나 유리병을 훔쳐 가곤 하던 노인을 3년 가까이 지켜보았는데, 수도가 얼어붙을 만큼 혹한의 어느 겨울 노인이 결국 죽어버렸다. 그런데 다시, 이 소설의 서술자는 16층 옥상에 와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언가 생각(회상)을 하고 있다. 옥상에서 얼어 죽은 노인과 홀로 살아가는 엄마를 생각한다. 잠시 살다가 헤어진 안과장도 생각한다. 그래서 결론은? 죽기 위해서도 애도를 하기 위해서도 아닌, 안과장이 언젠가 했던 말, 높은 곳에 올라오면 모든 것이 이해된다던 그녀의 말처럼, 무언가를 이해해 보기 위해 올라왔다는 것이다. 그가 “잠시 살다가 헤어진 안과장”이 이 소설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난감하다. 안과장이 무언가 이해하고 생각해보기 위해 옥상에 올라온 하나의 계기 정도로만 그 쓰임이 부여되고 있는 게 아무래도 미심쩍다.
이 소설의 경우 자전적 글쓰기를 통한 자아정체성의 (재)확인이라는 점에서 일정한 의의가 없지 않다. 주제 역시 각박한 세상에서 생의 의지라는 마지막 끈을 놓지 않고 있다는 점은 바람직한 태도겠다. 단편소설 결말의 공식이기도 하다. 다만 서술자의 회상작업이 ‘자서전적 저장고’에 보관된 개인적 기억을 ‘의식적으로’ 불러냄으로써8) 그 기억의 서술이 개인을 넘어 당대 문화적 정체성의 형성과정으로 나아가지 못한 점은 아무래도 불만족스럽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 한국
한국일보는「말을 하자면」(김영은)을 당선작으로 선보였다. 서술자 ‘나’와 나의 친구 ‘너’는 기숙사 룸메이트로 대학 졸업을 앞둔 여학생들이다. ‘너’는 경쟁률이 높기로 소문난 H신문사 입사를 준비하고 있다. 두 사람은 졸업을 앞두고 준비할 게 많아 직접 만나기보다는 SNS를 통해 서로의 근황을 확인하는 형편이다. ‘너’의 SNS에는 캣맘 사건, 민식이법, 스쿨 미투, 동성결혼합법화, 공정무역과 케냐 어린이노동착취, 플라스틱으로 오염된 바다 사진 등 정치적인 이슈 관련 글이 많이 올라와 있다.
오랜만에 조우한 ‘나’와 ‘너’ 사이에는 ‘형우’라는, 낡은 기계에 팔이 잘렸고 봉합수술을 시도했으나 쇼크사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한 노동자 문제가 개입하고 있다. 정확히는, ‘너’는 “우리 모두 형우다”라는 단단하게 쓰인 문구와 그 아래 정의연대연합이라 쓰인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러 간다. 나에게도 동참을 묻고 망설이면 거부로 보일까 봐 나는 장소와 시간을 묻는다. 그러나 나는 졸업 전시에 내놓을 작품준비로 여유가 없다. 재룟값만 해도 한 학기 등록금을 훨씬 뛰어넘는 금액이라 신경도 날카롭다.
그런데 나는 뒤늦게 알게 되지만 그 ‘형우’가 지난 여름방학 무렵 구미의 한 휴대폰 공장에서 아르바이트 할 때 알게 된 동료 노동자였다. 휴대폰 카메라 렌즈를 육안으로 검사하는 일이었는데, 숙식 제공에 두 달만 일해도 한 학기 등록금을 벌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노동강도가 장난이 아니었고, 허허벌판에 있는 공장인 탓에 일이 끝나고 나면 캔 맥주 하나 사 먹을 조건이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두 달만 버티자고, 그러면 생활비와 노트북과 세부 여행이 가능하다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 앞에 나타난 게 ‘형우’다. 형우는 조립라인에서 일하는 직원으로, 실업고등학교를 나와 곧바로 취업해서 벌써 삼 년 차라고 했다. 누님이라 부르면서 친근하게 굴던 형우. 줄곧 엄마와 함께 살아왔고, 두 살 터울인 형은 트럭운전을 하며 일찍 독립했는데 그가 아빠가 되었다고 휴대폰 사진첩에 저장된 조카의 사진을 보여주었던 형우. 공장 기숙사 앞 정자에서 그가 사 온 캔맨주를 함께 마시곤 했던 형우. 형우는 두 사람에게 친절(한 척)했으나 그들 사이에는 성별 구분과 학력에 따른 이질감이 존재했다.
형우는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게 돈이라고 믿으며, 대학 나와봐야 취업이 잘 되는 것도 아니라고 비아냥거리며, 사귀던 여자가 자신의 친구와 눈이 맞아 헤어졌다면서 그때부터 자신은 여자를 믿지 않으며, 여자도 군대에 가야 한다고, 그러니까 형우는 공장 ‘남자’들이 갖고 있는 일반적 신념 혹은 정서를 대표하고 있다. 이 여성 혐오의 언어는 결국 굴절된 성적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일베 현상은 개인이 감내해야 하는 불안과 공포의 임계치가 한계에 달했을 때 여성을 전면적으로 타자화하는 방식으로 이를 해소해 온 한국사회의 한 단면이다.9) 나중에 ‘나’에게 성적 욕망을 드러내고서도 그것이 무슨 문제냐는 듯한 그의 태도는 자신이 결코 이성으로 사귈 수 없는 여자 대학생인 ‘나’와 ‘너’에 대한 선망과 질시 그리고 왜곡된 성 의식을 표상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다 ‘너’는 형우에게 발끈하고 만다. “고졸 새끼 주제에”라고 내뱉곤 그날 밤 공장을 혼자 떠났다. 형우가 여자대학생에게 갖는 선망과 질시와 왜곡된 성적 욕망을 갖고 있는 것처럼 ‘너’ 또한 부지불식간에 고졸의 생산직 노동자인 형우에게 학벌은 물론 남성 혐오의 정서를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너’의 무단퇴사는 공장 직원들의 오랫동안 뒤 담화 재료는 물론 형우가 ‘나’에 대해 이죽거리는 빌미가 된다.
그런데 형우가 죽은 후 ‘너’는 유가족들과 함께 시위대의 맨 앞에 서서 그의 죽음에 대한 분노를 표하고 있다. 어정쩡하게 시위에 동참한 ‘나’는 형우를 소개하고 있는 팸플릿 속의 글, 다재다능한 착한 막내아들이었으며, 음악을 좋아했으나 집안 형편 탓에 공장 일을 하게 되었고, 힘든 환경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착하게 살아온, 또래들과 달리 유독 성숙했고 철들었던, 그러나 그 대가가 죽음이었다는 문장을 읽다가 그만 둔다.
‘나’는 형우의 무미건조하던 마지막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너’가 무단퇴사하고 난 다음 날 형우가 찾아와 ‘너’를 비난할 때, 나에게 술을 권하고 그와 함께 어정쩡하게 술을 마실 때, 내 손가락과 손등을 만지고 기습 키스를 하고서도 그게 무슨 문제인지 모른다는 그 태도를 나는 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다음날 공장을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나를 비웃던 작업반장의 헛웃음도 공장을 나오고 나서 곧 잊기로 했다. 나중에 나는 너를 만나 형우가 내게 했던 일을 두고 실컷 욕하면서 공장에서 벌었던 돈을 다 써버리자고 실컷 욕하고 술을 마셨었다.
이 소설은 여러 가지 생각거리를 남긴다. 젠더와 계급을 가로지르는 혐오의 정서가 그것의 부당함을 말하는 우리에게 여전한 잔여로 남아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사회(노동)운동의 이름으로 치켜든 깃발 이면에 놓인 내부의 폭력에 대해 어떤 대응이 가능한가 하는 난망한 질문이다. 우선 소설에서 두 여성 인물 ‘나’와 ‘너’는 ‘여자’대학생이다. 노동현장에서 죽은 인물 형우는 고졸의 ‘남성’ 생산직 노동자다. ‘너’는 형우에게 고졸이라는 학벌과 여성 혐오 정서를 갖고 있는 데 대한 반발로 남성 혐오라 할 만한 차별적 인식을 보인다. 그런데도 그가 죽자 누구보다 앞장서서 그의 죽음이 노동자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은 회사-자본가의 책임이라는 시위에 나선다. 그리고 형우가 누구보다 성실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내세운다. ‘나’는 역겨움을 느낀다. 형우가 내게 했던 성추행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고, 그가 누구보다 성실한 젊은이였다는 데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결국 그동안 우리 문학에 일종의 억압으로 작용했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이의제기로 읽을 수 있다. 정치적 올바름이 정의롭고, 깨끗하고, 올바른 상황만을 지향하는 문화적 경향성을 ‘살균된 문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오염되고 더럽고 모호하고 애매한 것들이 살균된 자리에 자신들이 믿는 건강하고 정의로운 올바름이 들어선다. 하지만 이 살균된 문화는 사실 병든 문화의 다른 이름이다. 모든 것을 살균시킴으로써 이 문화는 살균된 깨끗함 너머에 있는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불평등을 보지 못하게 하며, 올바름을 외치는 ‘나’의 모순과 분열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10)
나는 특히 ‘형우’를 향한 혐오의 정서를 갖고 있던 ‘너’가 누구보다 앞장서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의 죽음이 자본가의 노동 착취에 있다고 분노하는 ‘너’를 보면서 “지금 분노하는 자가 가장 정의로운가?” 하는 질문을 작가가 하고 있는 것으로 읽었다. 일정하게 공감하고 동의하면서도, 이 논쟁과 관련하여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려스러운 일은, 기득권과 맞서려는 친페미니스트, 친장애인, 친이주민, 친동성애 등과 같은 소수자 혹은 억압받는 자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세력의 등장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세력에 대한 즉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과장된 경계와 비판, 반대, 혐오의 분위기가 거세지고 있는 상황이라는 사실11)에 나는 좀더 주목하고자 한다. 한국일보가 이 소설을 신춘 당선작으로 꼽은 까닭은 저러한 논쟁에서 기왕의 소설 담론을 비판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작가의 도전정신을 높이 산 것으로 보인다.
- 1) 더스쿠프 Lab. 뉴스페이퍼 이민우 기자의 2024년 신춘문예 통계 기사를 보면, 성별은 여성이 66.5% 남성이 33.5%로 여성이 2배 이상 많았다. 시 소설 수필 등 전 장르를 합한 통계수치인데 소설만의경우도 비슷하다.
- 2) 김소륜,「신춘문예를 통해 바라보는 90년대 한국 문단의 경향성 연구」,『현대소설연구』제89호, 현대소설학회, 2023, 8쪽. 김소륜은 1990년대 문학의 특징으로 주목되는 것은 단연 ‘탈이데올로기성’이라고 말한다. 누구라도 동의하는 지적일 것인데, 문제는 2천년대에도 그러한 ‘중산층 시각의 응모작’ 경향이지속하고 있다는 점이겠다.
- 3) 김경호,「우리는 사랑을 어떻게 경험하고 의미화 하는가」,『동서철학연구』제75호, 2015, 12쪽.
- 4) 김주은,「사랑의 존재론 : 오늘날의 사랑에 대한 비판적 소고」, 『Homo Migrans』제13권 2015, 106쪽.
- 5) 손유경,「노년의 시간과 ‘견딤’의 감각」,『한국현대문학연구』제68권, 2022, 186쪽.
- 6) 정수남,「공포, 개인화, 그리고 축소된 주체」,『정신문화연구』제33권 제4호, 2010, 338쪽.
- 7) 보리스 시퀄니크, 『관계』, 정재권 옮김, 궁리, 2009, 220쪽.
- 8) 신지영,「자서전적 글쓰기와 문화적 정체성」,『독일어문학』제75집, 2016, 89쪽.
- 9) 윤보라,「일베와 여성혐오」,『진보평론』제57호, 2013, 38쪽.
- 10) 문형준,「정치적 올바름과 살균된 문화」,『비교문학』 제73집, 2017, 103-104쪽.
- 11) 이윤복,「'정치적 올바름' 논쟁에 관한 비판적 고찰」,『철학논총』제110집ㆍ2022, 75쪽.
추천 콘텐츠
왜 하필 그림자였을까, 그가 상자에 차곡차곡 가두어 둔 것은. 당신에게 함이 하나 생겼다고 하자. 육면체여도 좋고 팔면체여도 상관없지만 어쨌든 내부와 외부가 구분되는 상자. 종이로 만든 것이어도 좋고 철재나 목재여도 무관한데, 뚜껑째로 열 수 있거나 경첩으로 상하부가 연결된 그 상자는, 비어있다. 당신은 무엇을 담겠는가? 그의 함에 든 그것은 말하자면 그림자였다.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2024)에서 히라야마는 심상한 일상을 자신만의 취향으로 세공한다. 도쿄 공중화장실 미화원인 그는 청소도 허투루 하는 법 없이 자신만의 방법과 도구, 약품으로 꼼꼼하게도 닦는다. 변기 앞에 쭈그리고 앉아 누가 일부러 허리를 구부리고 찾아볼 리도 없는 구석진 면까지 오염을 닦아내는 그의 손길에 저어함은 없다. 점심은 신사의 야외 벤치에서 편의점 샌드위치와 우유. 더없이 간결하고 간소하다. 옆 사람과 눈인사를 나누기도 하지만 그의 눈길은 주로 위를 향한다. 높다란 나무에서 뻗은 가지에 매달린 잎사귀가 해를 받아 검은 무늬를 드리운다. 잎사귀 사이로 설핏 들어오는 햇살은 그 순간 더없이 명료하다. 영화는 내내 그의 ‘지금’을 보여준다. 청소일이 끝나면 동네 목욕탕에서 개운하게 몸을 씻은 후 지하상가에서 도수가 약한 술을 저녁 삼아 마신다. 다다미방에 요를 깔고 누워 탁상용 스탠드 불빛에 기대 헌책방에서 구입한 문고판 책을 몇 장이나마 읽다가 잠들고. 다음날 같은 시각에 일어나 단풍나무 묘목에 물을 뿌리고 간단히 씻고 수염을 정돈한 후 자판기 캔 커피를 뽑아 출근길에 오르면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하루가 반복된다. 그러니까 그토록 단정하고 과묵하며 그다지 남과 얽히지도 않고 독서와 필름 카메라, 카세트테이프로 듣는 올드팝이라는 그의 태도와 취향이 어디서부터 연유한 것일까 궁금해지기도 하지만 영화는 그의 전사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이 영화의 백미는 거기 있다고 본다. ‘이런 일 할 사람으로는 안 보이는데…’ 유의 질척한 궁금증으로부터 가뿐히 등 돌리는 것. 그의 전사는 영화 안에 없다. 홍성욱의 「함」(『현대문학』, 2025년 2월호) 속에 든 것은 꿀이다. 꿀단지는 일하는 회사에서 사장님으로부터 받은 것인데, ‘나’에게는 어쩐지 이것이 “납골함”(55쪽)이라 여겨진다. 그래서일까. 함을 안고 천변을 걸어 집으로 가는 40여 분의 타임라인 동안 두 개의 죽음은 자연스레 환기된다. 기억조차 없는 아버지의 죽음이란 요컨대 이러하다. “엄마는 아버지의 시신을 어떻게 했을까?”와 그것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59쪽). 집에 다다르기까지 전화를 걸어 어디냐, 언제쯤 오냐, 아직이냐 묻는 엄마는 집요하다. 열 한 시간을 일한 몸으로 함을 지고 걸어가는 ‘나’는 그걸 또 다 받아낸다, 온몸으로. 잇단 벨소리가 또 엄마의 전화인가 싶은 때, 고교 동창에게서 승화의 2주기를 알리는 전화가 온다. 그리하여 또 하나의 죽음이 찾아든다. 승화와는 딱히 가까웠다고 할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우연히 같이 과제를 하게 되어 집에 온 날 승화가 의자 뒤에서 내 목을 끌어안고 볼을 쓰다듬은 일, 그리고 그걸 엄마가 본 일. 승화가 돌아가고 난 뒤 엄마는 그와 멀어질 것을 종용했고 ‘나’는 뭘 잘 모르는 채로 그저 엄마의 뜻에 따랐다. 그리고 엄마는 그날 이후 “더 내 안쪽으로 들어왔다”(67쪽). 승화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도 엄마는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단정했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승화의 2주기에 딱히 가지 않을 것이다. 그게 전부다. 엄마와 불화하지도 그렇다고 엄마를 극복하지도 않는 이 소설은 다만 두 가지를 돌올하게 밀어 올린다. 애도와 성장. 그런데 이 애도와 성장에 좀 희한한 면이 있다. 애도가 불가능 쪽으로 점쳐질 때 우울증적 자아가 탄생한다는 익숙한 이론으로부터 이 소설은 각도를 튼다. 당장 함의 무게도 무게지만 가계를 건사하기 위해 긴 노동을 감내하는 인물에게 제법 기우뚱 기대어 있는 것은 엄마라는 존재다. 자신 쪽으로 지나치게 밀고 들어온 엄마를 허용한 대가는 아무래도 반反성장에 가까운 결정권의 이양이어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함구하고 승화라는 관계의 싹을 애초에 절단한 것은 모두 엄마의 결정이었다. 아감벤은 애도의 실패가 불러오는 우울증의 모호함에 대해 일별하면서 소유할 수 없는 것을 향한 ‘점유’의 시도로 정리한다. 그러니까 가질 수 없는 대상을 잃어버린 대상으로 치환하는 상상력이란 실제 잃어버린 것이라기보다 잃어버린 것처럼 연기하는 쪽에 가깝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내게 진정으로 깃들어본 적이 없는 대상과의 관계에 집중하면서 우울증이라는 단어를 잠시 뭉개버리고라도 함을 들고 걷는 인물에게 찾아온 두 죽음을 이 말에 포개보자. 무언가를 제대로 소유해보지 않았다는 것은 그것을 잃는 일 또한 불가능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승화와도 제대로 우정이라 부를만한 시간을 공유했다고 보기 어렵지만 아버지의 존재는 특히 기억조차 전무해 아버지란 오직 나의 존재로서만 짐작되는 불확실성에 기대어 있디. 그런 사람의 죽음은 더더욱 내가 알 수도 없는 식으로 처리되어 부재만을 그 증거로 내밀 따름이다. 소설은 지연된 애도의 수행, 그 정식화를 시도하지 않는다. 그저 복기하기, 다만 그것만을 할 수 있을 뿐인데 주체적인 판단이라는 것을 해 볼 기회가 없었던 이에게는 어쩌면 그편이 가장 실천 가능하달 수 있겠다. 그리고 40여 분간(이날은 조금 더 지연된다) 스스로 “납골함”(55쪽)을 지고 무대를 걷는 것이다. 그러다 무대의 끝에 다다라 발이 걸려 철푸덕 넘어지며 함은 그만 깨져버린다. 꿀은 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흘러나와 바닥을 흥건히 적신다. 진정으로 실패한 애도야말로 애도라는 데리다식의 전유가 가능하려면 대상을 곁으로 당겨 유연관계로 만드는 일이 먼저 필요하겠다. 그럴 때 비로소 나에게 이만치 들어와 있는 엄마와, 열 한 시간 노동의 세계와, 아버지와 친구의 죽음을 인수한 ‘나’는 접맥 가능할 것이다. 그때 ‘나’는 자그마한 딱지에 쓰인 유통기한이 2년 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본다. 이제 꿀도 함도 손쓸 수 없지만 길 위에서 ‘나’는 누군가의 죽음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유골함보다 왠지 사후적으로 들리는 납골함이라는 단어는 회수할 수 없는 죽음을 가리키는 것처럼도 여겨진다. 그리고 저 꿀은 기어이 쏟아짐으로써 치유의 성분으로 남은 이의 상처를 덮어주기도 할 것임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그런가하면 어떤 함의 이름은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기계’다(명학수,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기계」,『창작과 비평』, 2024년 겨울호). 하루 열네 시간의 노동을 견디는 ‘나’에겐 소설 쓰는 친구들 진호와 미미가 있다. 소설은 전에 그런 일 없던 미미가 예의 저 기계를 갖고 싶어 한다면서 진호가 보여주는 동영상 속 함에 대한 묘사로 시작된다. 18초짜리 동영상에서는 스위치를 누르면 함이 열리고 그 안에서 막대가 나와 스위치를 눌러 원 상태로 돌린다. 막대가 제자리에 돌아가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굳게 닫힌 함이 거기 놓여 있을 뿐이다. 다소 뻔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기계의 ‘쓸모’와 인물들의 ‘쓸모’를 얽고 쓸모없음의 역설을 말한다는 건. 미미는 자신을 방구석에서 홀로 돌아가고 있는 선풍기와 동일시해 “누군가 작동시켜놓고 까맣게 잊어버린 존재, 잊힌 줄도 모르고 이 어두운 방에서 혼자 존나게 영혼을 갈아대고 있는 똥멍청이”(209쪽)라 하니까. 스스로를 그리 여기는 건 미미뿐만은 아니어서 선풍기를 거울삼기는 ‘나’도 매한가지다. 자기 비하에 깊숙이 빠진 여자친구에게 기필코 저 기계를 구해주고자 애쓰는 진호의 마음은 다소 지당해 보인다. 그런데 정작 ‘나’는 왜 이리 열심이란 말인가? 카페와 편의점을 오가며 낯선 사람을 상대하는 연중무휴의 삶, 그런 일상에 함 하나가 슬며시 끼어든 것이다. ‘나’는 기계를 구하는 일에 완전 진심이다. 온갖 사이트며 동영상을 뒤지고 전자회로 관련 서적을 소지한 카페 손님에게 자문을 구하는 일은 사뭇 열정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다 보니 종일 기계를 생각하게 되고 정작 업무에 오류가 끼어든다. 이를테면 이런 식인데, 카푸치노를 손님에게 내밀자 손님은 자신이 카페라테를 주문했다고 말한다. ‘나’는 영수증을 확인하고 카푸치노가 맞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자 손님은 “나는 집에서 나와 여기까지 오면서 오늘은 따뜻한 라떼를 마셔야겠다고 계속 생각하고 다짐까지 했다고요. 그런 제가 주문을 잘못했겠어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카푸치노가 찍혔다는 건 그쪽이 실수를 했다는 뜻 아닌가요?”(211쪽)라며 응수한다. 얼핏 너무도 주관적이고 증명되지도 않을 손님의 논리는 억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손님의 저 지적에는 뜻밖에 꽤 명징한 논리가 있다. 바로 입력의 오류 가능성. 입력이 오류이면 출력값도 오류일 수밖에 없다는 이 논리는 사실, 이 실재하는 기계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우리는 소설을 읽는 중이고 이 기계를 만난 곳 또한 소설이니 효용적 측면이나 개발 동기와 무관하게 이 기계를 해석해도 될 터. 이 기계는 말하자면 끄라는 명령어를 켜고, 켜짐으로써 끔을 실행하는 역설의 명령을 실천한다. 여느 기계들이 인간의 명령으로 켜지고 꺼지는 것과 달리 이 기계는 인간의 행위로 시작해 기계의 실천으로 끝을 맺는다는 것 아닌가. 달리 말해 이 기계는 인간과 모종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도 전유되어 ‘나’는 기계로 인해 사람들을 만나고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질문을 하기 위해 용기를 내고, 급기야 전자회로 여학생을 기다린다! 생각만큼 그리 간단치 않은 문제의 장치를 구했다며 진호 미미가 가져온 기계의 실물은 정작 제대로 구현되지도 않는 텅 빈 것이었다. 그 속을 소설적 상상력으로 채우겠다는 미미의 결심은 다소 뻔한 결말이지만 그 부분을 괄호 치더라도 분명한 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기계’가 내내 작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마치 원본도 실체도 없는 가속력에 의해 현재를 다만 가열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겹쳐진다. 이 기계의 다른 이름은 ‘궁극의 기계’다. 그러니 정작 “그 녀석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229쪽)는 것은 때때로 텅 빈 기표가 되고마는 아니 어쩌면 내내 텅 빈 것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하는 삶의 모호성이라는 실재나 다름없다. 다시 <퍼펙트 데이즈>에서, 예정에 없이 여동생의 딸이 가출하여 히라야마와 머물게 되자 여동생은 기사가 운전하는 고급 세단을 타고 딸을 데리러 온다. 잠시 나누는 남매의 대화에서 히라야마와 아버지의 오랜 불화가 엿보인다. 드문드문 드러나는 힌트에 의지해 그의 사연을 추적하는 일은 얼마쯤은 가능하다. 그러나 관객이 그런 시도를 할 때 영화는 클리셰로 범벅되고 만다. 인간의 삶이란 그토록 뻔한 면도 있지 않은가. 그런 이유로 영화가 보이지 않으려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려는 것도 있지만, 이상스레 그의 과거를 캐지 않으려는 마음 쪽에 힘을 더 싣게 되는 것은 그것이 예의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어쩐지 그가 그편을 원하는 것 같아서. 다만 여동생이 다녀간 뒤 순간의 오열은 그의 단단하고 고집스러운 취향으로 쌓은 일상이 어쩌면 무언가로부터 기필코 달아나고자 하는 행위로 빚어 올린 벽일지도 모른다는 짐작만은 보태진다. 그런 안간힘에도 간혹 일상을 기습하는 외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충직하게. 돌아가야 하는 것, 그럴 수 있을 때 돌아가는 것, 부드럽고 고집스러운 회복. 무너져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회복에 대한 탄력성. 그러나 회복이 이전으로 돌아감과 등가가 아님을 아는 사람의 자가면역 행위. 목표는 더 나빠지지 않는 것. 다만 나를 온전히 지켜내는 것. 그럴 때 중요한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이다. 일상은 노력으로 일구어내는 순간의 더께로 켜켜이 쌓이지만 당연하게도 ‘지금’이 누구에게나 만족스러운 것일 수는 없다. 지키기 위해 감행하지만 도대체 온전히 거머쥘 수 없다면, 그렇게 끈질기게 돌아오는 자리가 만족스럽기는커녕 어쩐지 열등감만 부추길 뿐이라면, 그것이 다름 아닌 자신의 모습이라면 우리는 삶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여기 소설이란 함에 한 장의 사진이 들어있다(서장원, 「피루엣」, 『웹진 림』, 2025년 2월호). 사진에는 초등학교 3학년 규오가 동화 속 왕자님 차림으로 발레 동작을 취하고 있다. 지금의 규오는 트랜스젠더 남성이다. 여성으로의 이차성징을 맞이했을 규오는 지금 자신의 몸을 아름답지 않다고 여긴다. 규오와 함께 노아의 환송 파티에 간 ‘나’는 노아를 바라보는 규오의 눈빛에서 선망을 본다. 내가 보기에 노아는 “키가 크고 잘생긴 데다 친구가 많고, 어디를 가든 중심이 되는 남자. 자신의 몸이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어떤 관계에서든 어렵지 않게, 스스로도 잘 모르는 사이에 우위를 점거해버리는 남자들” 중 하나다. ‘나’는 노아와 같은 남자에게는 관심이 없고, 어떤 면에서 규오를 “안전한 선택”이라고 여긴다. 이른바 ‘설레는 키 차이’ 같은 것에는 힘의 구도가 주는 불평등함이 있다고 여기는 내가 규오를 안전한 상대로 여기는 것은 “규오의 몸이 가진 내력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규오가 정말”“좋은 남자이기 때문일까”. 반면 규오는 노아에 대한 ‘나’의 저런 평가에 대해 “그냥 그게 좋은 거 아닐까?”라고 답한다. 그런 남자가 좋은 남자의 표본이란 뜻일까, 그런 남자에게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행동이란 뜻일까. 어떤 식으로 저 모호한 문장을 번역하든 분명한 건 규오가 자신을 ‘그런 남자’들과 따로이 놓는다는 점이다. 규오는 자신의 ‘왕자님’ 사진을 노아에게 타투 도안으로 맡긴 터였다. 어영부영 타투는 새기지 못했고 그 사진은 노아의 타투 숍에 그대로 남아 노아의 전 여자친구로부터 인수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규오가 그걸 몸에 새기고 싶어 했다면 그건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건 아마도 지금의 몸과 대척점에 놓이는 게 아닐까. 정작 ‘나’는 규오가 겪었을 “골반이 넓어지고 가슴이 발달하는 원치 않는 변화를 생각하면서. 그리고 서른 살 규오의 몸속에 파묻힌, 아직 그 일을 겪지 않은 소년을 생각하면서”“사진 속의 잘생긴 소년을 바라보곤”하는데, 이는 ‘나’의 ‘안전한 선택’에 도사린 욕망과 충돌하는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규오의 몸이 좀 더 안전하다고, 무해하다고 여기면서도 규오가 넓어진 골반을 아쉬워할 때 내심 동감했다는 점은 더 ‘남자다운’ 몸을 원하기에 이차성징의 전을 새로운 영점으로, 거머쥐기 힘든 높다란 곳에 저 사진을 놓아두고자 하는 규오의 욕망과 정 반대축으로 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안전한’에 방점을 찍은 선택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해가 지면 집 앞 편의점을 가는 일에도 느끼는 불안이 여성의 몸에 비롯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차라리 우리는 사랑의 정의와 함께 몸의 정의를 새로이 써야 하는 것은 아닐까. 자, 버젓이 냉장고 문에 붙은 저 사진에 들러붙는 것은 누구의 욕망인가? 피루엣, 자신의 한 발을 축으로 팽이처럼 도는 이 동작은 결국 원점에 서게 된다. 트랜스젠더를 택했지만 불만족으로 노아를 선망하는 규오의 모습은 그 자체 피루엣처럼 원점으로 돌아오면서도 ‘나’의 욕망과 어긋나면서 서로를 욕망의 시발점으로 돌려놓는 또 하나의 피루엣을 그린다. 그럴 때 우리는 일상을 둘러싼 많은 정체성에 대해 다시 묻게 된다. 무엇이 정상이고 안전이고 평온이고 행복인지를. 누가 규오의 저 욕망이 넘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함(혹은 그 속의 물건)이 제유적으로 쓰인다면 그것은 곧 주물(呪物)로 볼 수도 있다는 말이 기도 하다. 아감벤에 따르면 무언가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그것의 부정을 상징하고, 무(無)의 실체인 동시에 그 부재의 기호가 되는 주물은 본질적으로 분열적이다. 사물에 의미를 매다는 일, 그 문학적 작업에서 제유적인 면이 있다면 애착과 바람, 부재하는 대상을 향한 기호화와 같은 일은 사물로부터 이미 분열한다고도 말할 수 있게 된다. 한 거푸집에서 나왔으나 조금씩은 다른, 어떤 것은 금이 가기도 한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사랑하는 여자들”(『다정한 유전』, 11쪽)의 모양이 그의 전작 『다양한 유전』(아르떼, 2020)을 겹쳐 읽게 하는, 강화길의 소설 「거푸집의 형태」(『문학동네』 2024년 겨울호)에서도 그러하다. 이모의 죽음 뒤에 남겨진 록 밴드의 기념 티셔츠는 관계의 의미를 완전히 새로 쓰게 한다. 단지 외모가 닮아서여서만은 아니었을 게다, 이모와 취향을 공유하고 다정한 자매처럼 지내온 것은. 장녀로서 가계를 책임져왔던 큰이모와 그의 물질적인 그늘에 있는 엄마를 비롯한 형제들의 권력 구도는 다분히 경멸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었고, 음악을 만들고 가수로 살고 싶어했지만 번번이 대학가요제 예선까지만 닿았던 막내를 비정상 처리하는 큰이모의 언사는 천박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모를 건사하고 우리 집과 막내 이모를 갈라놓았던 결정적 사건을 처리한 것도 큰이모였다. 돈 “팔백사십만원”(「거푸집의 형태」, 211쪽)은 외삼촌네와 우리 집에 얹혀살며 우울증과 대인기피를 앓던 이모가 근근이 카페나 편의점에서 일해서 모은, 말하자면 그의 전 재산이었다. 그리고 이모가 암을 진단받자 국가 지원을 신청하기 위해 엄마 계좌로 돌려놓은 그 돈은 이모는 모르게 ‘나’의 전세 자금으로 쓰인다. 그 일로 엄마와 이모는 서로를 등지고 ‘나’ 역시 이모와 소원해진다. 그럼에도 이모와 나의 세월은 제법 끈질긴 것이어서 이모의 취향에 맞는 밴드의 기념 티셔츠, 사인 시디며 출판사에 취직한 내가 선물한 책 같은 것들은 이모의 서가 한 칸을 당당하게 메운다. 특히 이모가 모으던 티셔츠들은 의미가 크다. ‘나’는 이모가 왜 그걸 모았는지 오직 나만이 안다고 여기니까, 이모의 죽음 이후 그것들은 응당 내가 인수해야 할 터였다. 그러나 큰이모는 ‘나’를 제외한 ‘남자조카들’을 인수자로 지목했다. 큰이모는 모른다. 오직 나만이 그럴 자격이 있다고 철석같이 믿으며 이모의 집으로 향하지만 거기서 만난 건 뜻밖에 이모의 마지막 친구였던 20대 여자다. 길고양이 밥을 주다 친구가 되었다는데, 이것저것 이모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게다가 이모는 여자에게 ‘나’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정보값이 좀 이상하다. 이모는 어떤 사람이었나? 지금에 와 이모는 나와 취향을 나누던 그가 아니다. 의존적인 막내, 자신의 취향을 위해 큰이모와 불화했지만 투병 이후 큰이모에게 복속된 다소 유약하고 무능한 사람일 뿐이다. 생각해볼 것은 질병 이후의 삶에 대해 누구도 감히 짐작으로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질병은 그 자체 자신의 몸을 비정상으로 선언(당)하는 일이기도 해서 앓는 사람의 시간은 재구성되기 마련이다. 이전의 시간 틀로는 일상을 살아낼 수가 없는 거다. 큰이모의 기준에서 막내의 삶은 언제나 미친 것이었겠지만 역설적으로 이모의 질병 이후 이모의 삶은 큰이모가 규정한 정상성에 복속하게 하는 것이기도 해서, 질병이라는 비정상성으로 인해 정상의 삶이 불가한 자의 막다른 선택이 큰이모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굳이 미화하여 해석할 필요가 있을까? 삶의 궤적을 옮겨 앉고 그간 구축된 아비투스를 폐기하는 일. 모든 취향과 선호를 버리는 일. “병에 걸린다는 건, 타인에게 내 행복을 맡겨둔 것과 같다.”(『다양한 유전』, 146쪽) 이모의 마지막에 남은 것은 몇 장의 티셔츠와 시디 따위가 전부이지만 그런데 그건 또 누구의 것이었나. 이모는 왜 ‘나’와 이모가 절반씩 섞인 혼종의 ‘그녀’, 자신의 꿈까지 들씌운 그녀를 완성했나? 아마도 이모는 그때 모든 아름다운 것들로부터 이별한 것이리라. 이런 행위를 일종의 ‘창작’으로 본다면, 이모가 만들어낸 혼종의 그녀는 다름 아닌 욕망의 잔여물이었을 테다. 그리고 그건 종국에 “환상을 포기하는 이야기”(『다양한 유전』, 129쪽)이다. ‘거푸집의 형태’는 소설 속에서 이모의 몸속에 끝내 남은 횡경막 아래의 암세포를 일컬으면서, 어떤 기질이 기묘하게 유전되는 한 가계의 이력을 모조리 끌어안는 형상물이기도 하다. 큰이모의 입장에서라면 금 간 항아리 쯤에 비유할 수 있을지도 모를 막내를 품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겠다. 함은 그 자체 사물이면서 사물에 의미론적 가치를 매기는 수납의 기능이 덧붙는 사물, 사물의 겹이면서 의미의 미끄러짐이다. 그것은 열려 있거나 닫혀 있고 비어있거나 채워질 가능성으로 항상 중첩된다. 열지 않으면 알 수 없기도 하지만 어떤 함은 열면 모두 파국에 이를 진실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이 가족들에게 진실은 모두를 할퀴는 남루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남루함이란 이들을 연결하는 것이 외모나 재능의 유사성이기는커녕 고통이라는 사실에 있다. 매일 오염되고 매일 그 오염을 닦아내야만 유지되는 화장실의 청결처럼 일상 또한 반복을 통해 쌓인다. 때때로 어떤 차이가 발생하지만 그걸 다시 반복하는 것. 그럼으로써 유지되는 삶. 그것은 어쩌면 매우 고결한 것이다. 내가 가진 함에 이름을 붙여주고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지난겨울을 건너오며 우리가 잃은 것은 바로 일상이 아니었나. 그림자는 원 사물 없이 존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사본은 아니라서 원 사물과 완전히 같지도 않고 존재론적, 가치론적으로 열등하지도 않다. 그런 면에서 어떤 이야기는 필요치 않을 때도 있다. <퍼펙트 데이즈>의 마지막에는 ‘코모레비’라는 단어가 나뭇잎 사이로 가만히 떠오른다.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햇살을 뜻하는 이 말은, 그 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자의 간절함을 다만 묵묵히 담기에 참 좋은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그가 함에 담은 것은 빛이었다.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빛. 어떤 이야기는 쓰이기보다 쓰이지 않음으로써 더욱 단단한 이력을 확보하기도 한다. 쓰이지 않은 이야기는 모든 함의 안이자 때로는 밖의 벡터인 셈이다. 어떤 이야기는 우리가 읽고 있는 이야기 안에 없다. 그건 기록되지 않은 채로 거기에 있다. 그리고 그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일렁인다. 그러니까 그가 함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싶어 한 것은 결국 ‘지금’이라는 순간이었던 셈이다. 어떤 이야기는 결코 쓰여지지 않는다.
한때 행복의 지표로 회자 되며 최근까지도 세간의 주요 키워드로 꼽히던 소확행은 소비사회의 알리바이로 작동하기 시작하면서 변질된 모양새다. #소확행은 행복을 소비의 정도에 대비시켜 되레 과도한 물질적 욕망에 명분을 제공하는 식이다. 그렇게 해시태그를 단 이 단어는 비교와 경쟁을 추동하고 스몰럭셔리, 행복 강박의 다른 이름이 되어 소셜미디어에서 행복의 경쟁이라는 또 다른 피로를 누적한다. 이에 그 자리에 새롭게 떠오른 행복 담론을 한 매체는 아주 보통의 하루, ‘#아보하’로 제시한다.1) 아보하의 핵심은 무탈, 평온, 보통과 같은 평범하고 안온한 일상에 있다. 초고도 발전의 사회란 안전한 삶과 등가가 아니어서 길을 가다가 넘어지거나 다치는 정도가 아니라 길을 가다가 여행을 다녀오다가, 죽는다. 너무도 쉽게 반복되는 우연과 거듭되는 참사, 믿을 수 없는 역사의 회귀는 일상의 유지라는 문제를 기도하고 소망해야 하는 난제로 만든다. 행복까지는 이르지 않더라도 무탈하게 하루를 보낸 것만으로도 장하고 고맙다는 ‘아주 보통의 하루’는 논쟁적인 말일 수 있지만 순차적 인생 모형이라는 것이 죄 뒤틀어진 지금, 행복을 좇을 때는 행복하지 않다는 역설이 낳은 이 ‘추구미’에 우리는 해시태그를 달 수 있을까? 지금, 우리의 겨울을 함께 지나온 시집을 읽어본다. 1. 골디락스2) 생존법 (남현지,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 창비, 2024, 12.) 성격유형 지표에 따를 때 사고형(Thinking)을 일컫는 T형 타입은 감정형에 비해 사실에 관심을 두고 객관성을 중시하는 것으로 특징 지어진다. 현실적이라는 단어로 갈음되는 이 타입은 공감에 높은 가치를 두는 이상주의적 인간형 F(Feeling)로부터 ‘너 T야?’라는 말을 듣곤 한다. 남현지의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은 모종의 태도를 견지하는데, 이 시집을 읽고 있자면 화자를 향해서도 이 질문은 가능할 것 같다. 혹시, 너 T야? 그런데 저 물음은 수상쩍다. 그간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정동이 꽤나 들러붙어 있는 듯해서인데, 재난과 참사라는 상처에 쓰라림을 끼얹은 것은 정치적 입장과 재난을 둘러싼 부조리였고 애도를 불가능하게 몰아세운 이들에게 누군가 바란 것은 최소한의 공감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감하지 못하는(않는) 일에 대한 집단적 트라우마는 농담에 힐난의 어조를 들씌워 저 물음을 썩 개운치 못한 것으로 투사한다. 공감을 강요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올바르지도 않음에도 혹자는 공감 부재와 불능에 대해 일종의 반작용을 작동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너는 T형 타입이구나! 라는 말에는 공감에 대한 사회적 강박이 내재하고 개인의 윤리의식을 강제하는 측면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요구되는 정서에 반하는 커밍아웃은 제법 정당성을 가지게 된다. 매일 아침 기도는 드리지만 신을 사랑하라는 이들의 발화가 낯선 것은 (가족에게도) 사랑한다는 말 대신 인사말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고백 같은 것 말이다(“제가 사랑이 없습니다”, 「오늘 서울 날씨」). 사랑이 없다는 고백 뒤로는 생활의 후경이 일상과 함께 두루 그려진다. 산책로와 그 길을 따라 흐르는 하천과 뒷산, 빵집, 마트, 지하철역과 같은 동네 지형지물을 배경으로 이 시집의 화자는 ‘산다’. 시인의 주변을 살짝 옮겨보면, “산속 개구리의 주인이 있고/ 소비자가 있고” 들개는 “자주 훼손된 채로 발견”되며(「뒷산에서」), “호수는 잘 묶여 있”다. 묶여 있는 것은 호수뿐만이 아니라서 큰 개도 묶여 있는데, 화자는 그 점이 마음에 든다(“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내가 배가 부르다는 게/ 큰 개가 묶여 있다는 게”, 「호수공원」). 화자를 둘러싸고 있는 풍광은 이렇듯 이미 묶여 있는 것, 인간의 손을 탄 것, 다시 말해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채로 존재한다. 그래서 이런 질문은 자연이 되레 인공에 의해 그 의미의 자리가 탈각된 상태를 지칭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쐐기를 박는다. “전기 좋아해요?” 그리고 따라붙는 문장은 자답에 가깝다. “이제 그만/ 그걸 자연이라고 불러도 될까요?”(「빛의 생산」). 기존의 의미 체계가 이미 소실된 세계에서 자연(스러움)이란 거대한 인공호수와 나를 해칠 염려가 없도록 묶인 개가 있는 풍경이며, 종달새는 없을 수 있겠지만 전기 없는 미래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취향은 얼마든지 삭제 가능하고 ‘나’라는 존재는 필멸이며 그 시기는 언제든 가능한 이 세계에 대한 냉철한 인식은, 고통과 전기만을 재편된 세계의 질서에 의심 없이 남을 대상물로 지목한다. 그 모든 시간이 나의 선택이었다고 쓸쓸한 얼굴로 일기를 쓰고 있을 때도 휠체어에 앉아 피켓을 들고 있는 우주에서도 매일 아침 기도문을 외우는 내게도 마트와 감자칩이 있었고 어떤 세계에서는 문자가 비위생적인 것이 되어서 물건의 표기가 금지되었다 문자 없는 거리를 만들었다는 신도시를 바라보며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감자칩을 뜯었고 수백 번에 한 번은 투자에 성공했다 자신의 힘으로 노후를 준비하고 균형 잡힌 생활을 좋아했다 내가 바란다고 감자칩도 몇개만 먹을 수 있다면 괜찮은 간식이라고 이 무수한 우주에 계속해서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며 마트에서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쓰여 있다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 부분 자연은 인공적인 것을 거쳐 물질화된 것으로 그 정의를 다시 쓴다. 무언가를 바꾸어야 한다면 그 출발은 마트에 있을 것이라는 화자에게는 차라리 글로벌 유통과 거기에 매달린 지구 반대편의 노동과 부채, 불안정한 나의 노후에 관계되는 GMO 감자칩 한 봉지가 더 세계관에 밀착된 것이 아닐까? 그러니 건강과 질병은 마트에서 나의 선택으로 판가름 나는 것일 수도 있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에게 모든 선택의 자유를 내맡기지 않나. 친환경 무라벨이든 해석 불가의 외국어 상표든 문자의 제 기능이 소외되기는 매한가지인 상품 진열대 앞에서 문자가 물건에 부착되기에는 비위생적인 것이 된 것이라 해석하는 화자는 이 유니버스의 ‘적당히’ 건강한 소비자(식용 동물도 그렇지만 소비자 역시 적당히 병들고 적당히 건강해야 한다. 소비자는 식품뿐만이 아니라 약품도 소비해야 하기 때문이다)로서만 요구될 따름이다. 세계의 질서, 그 정의가 변하면 거기서 생존 내지는 의탁하는 존재들의 양태 또한 변해야 할 것인데, 변형된 질서와 정의의 불일치는 화자를 곤란하게 한다. 그래서 그는 학습을 통해 세계를 배우고 연습하려 하지만, 자연에는 없는 곡선을 연습하는 일이나(「곡선을 쓰지 않는 디자이너」) 원데이 클래스에 등록해 휴일을 배우려는 일은(「도시의 명소」) 늘 실패로 귀결된다. 변화는 한 인간이라는 개체의 리듬에도 적용되는데, “누가 아줌마하고 소리쳐 부르면/ 갑자기 아줌마로서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은 그래서 내력과 외력의 충돌이라는 소란 양상의 능동태가 된다. 그럴 때 화자는 발화와 협의된 적 없는 행동반응의 요구라는 부조리를 체현하는 중이다. 부조리는 도처에 있는데, “이웃집에서 애들을 조용히 시키라고 했지만/ 아이가 없다고 말해도 믿지 않는다면/ 우리 집에 있다는 그 아이들을 찾아 나서야”(「복도식으로」)하는 식이다. 사태란 우물쭈물하는 화자보다 먼저 근미래에 도달하고 그럴 때 이웃의 요구에 대한 화자의 다소 순진한 답은 오답 처리되고 만다. 먼저 도착한 발화가 정해놓은 답에 화자는 다다를 수 있을까? 나이를 먹는 일을 ‘자연스러움’이라고 할 때 미처 자라지 못한 마음은, 아직 수긍에 이르지 못한 심정은 삐걱댄다. 「꿈의 번영」에서 말하듯 세계란 때로 해결을 위해 문제를 만들기도 하니 말이다. 연결해서, “초월”이라는 식당에는 도무지 가능한 메뉴보다는 불가능한 메뉴가 많다. 때마침 뉴스에서는 비만과의 전쟁을 보도하고, 식당에서 밥을 먹는 행위는 곧 어떤 전쟁의 적이 되는 일로 전환된다. “왜 나는/ 혼자서 뚱뚱한가”(「자영업자들」)라는 질문을 읽기라도 한 듯, 식당 주인이 (다이어트에 효과가 있다고 여겨지는) 고대의 붉은 곡물을 판매하는 게 우리가 사는 세계, 일상이다. 이웃의 정원을 보면서도 내 눈길이 집요하게 향하는 곳은 ‘조화’일 뿐인데(「이웃의 정원」), 생화와 조화를 구별하지 못하는 상태가 어쩌면 더 ‘자연’스러운 것은 아닐까? 누군가에게는 조화가 더 눈길을 끌 수도 있지 않은가? 인공의 자연에 ‘자연스럽게’ 섞이고 엉키는 일보다 차라리 마트에서 감자칩을 적당히 사 먹는 편이 이치에 더 가까이 있다는 이 멀찍한 시선은 실은 조심스러움을 포함한다. 어쩌면 다소 미온적으로 보이는 이 태도야말로 그가 일상을 유지하는 생존전략은 아닐까, 적극적 수행도 폐기도 하지 않는 상태만이 ‘지금’을 가능하게 한 것은 아닐까 싶은 것이다. 환생을 거듭하며 우리는 우주의 먹이를 공급하고 있다고 깨달은 수행자가 있었다 오직 우주에서 삭제되는 것을 목표로 하세요 -「우리가 작고 어두운 것이었을 때」 부분 2. 무해함의 사정 (고선경,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 열림원, 2025, 01.) 반면 고선경의 화자는 지극히 F형 타입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시집은 무해함으로 가득하다. 귀여운 것이 무해하다는 이 트렌디함은 그러나 단지 귀여움으로만 소급되지 않는다. “대기만성보다는 만사형통/ 만사형통보다는 만사대길”을 바라고 “나에게는 아직 끝낼(끝내주는) 인생이 남아 있다”며 “내가 태어난 게 대길”(「신년운세」)이라고 믿는 문장의 저류는 전혀 자신감이 아니다. 그건 차라리 ‘지금’을 버티는 자신을 응원하는 안간힘에 가깝다. 남을 돕는 팔자라는 시인의 운세는 도움이 필요한 자는 자신의 시집을 사라는 기지로 변형되는데, 시에 일말의 구원이 있다는 믿음을 초과하여 흘러넘치는 것은 어쩌면 시를 사서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생존 신고와도 같아서 시집을 사는 이와 시인이 서로의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는 소통의 감각이다. 풍선껌만 한 세계, 그마저도 단물이 다 빠진 이 세계에서 자주 벗겨지는 양말을 닮은 미래란 매일 걷는 골목에서도 여행자의 기분을 느끼게 한다(「럭키슈퍼」). 이런 기분은 서울에 거주하지만 자신이 “외지인”(「남영」)인 까닭은 설령 빌런이 출현한다 해도 익숙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엄정함에 닿지 못하는 사실과 함께 화자가 소속감 부재, 이탈자의 감각을 느끼게끔 만든다. 어딘가에 온전히 속해 있지 않다는 기분은 화자(또는 시인)로 하여금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궁구하게 한다. 나는 차례를 기다리면서 시집을 뒤적인다. 해설에 적힌 말을 내 식대로 풀어 말하면 되지 않을까. 아니, 그건 마케팅의 언어와 다르다. 백화점 판매직에 종사한 적 있는 나는 어떤 말이 효과적으로 소비자를 현혹하는지 알고 있다. 내 앞의 시인이 “한 권쯤 책장에 비치해 두면 지성과 감성을 두루 갖춘 사람으로 보일 것이므로 여자를 꼬시기에 좋다.”고 말하는 것을 비웃는다. 그러다가 내 차례가 다가오면 나는 시집을 펼치고 말한다. “여기······ 딸기와 판다곰이라는 시가 수록돼 있는데요. 딸기랑 판다곰······ 참 귀엽죠? 귀여우니까······ 좋아하실 거예요. 어디에나 두루······ 잘 어울릴 거고요.” -「도전! 판매왕」 부분 살아남기 위해 화자는 시인들이 홈쇼핑에 나와 자신의 시집을 팔 수 있기를 소망한다. 팔린다는 소비시장의 논리라면 문학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소위 ‘잘 팔리는’ 일은 모든 예술에서도 중요하다. 예술과 예술가의 생존이라는 문제는 급기야 어차피 팔려야 한다면 잘 팔아보자는데 가닿는다. 여자를 꼬시는데 유용하다거나 문장의 밀도가 높다거나 하는 선배들의 시와는 다른 자신의 시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는 고심 끝에 귀엽고 두루 잘 어울리는 것이라 정의한다. 이 대책 없는 무해함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죽어서도 유망주가 되고 싶다>는 제목으로 묶인 시집의 2부는 어쩌면 무해함과 귀여움, 그리고 보통의 하루에 대한 소망에 닿는데 중요한 축으로 보인다. 이 시집의 코어에 들어앉은 것은 그러니까 친구의 죽음, 그가 “안 죽는다고 했는데 죽었다”(「팬레터-12월 31일」)는 사실이다. 어쩌면 생의 통과의례를 가족보다, 가족이 아니라서 더욱 긴밀하고 친밀하게 나누었을 다정한 또래의 죽음은 멈춘 채인 친구의 나이와 달리 꼬박꼬박 셈해지는 나의 생을 그와 다른 것으로 가르는 결정적 사건이다. 그러니까 죽어서도 유망주가 되고 싶다는 말은 무엇을 욕망하는 문장이 아니라 욕망의 유예를 소망하는 문장으로 읽을 수 있다. 무엇이 화자의 욕망을 성취의 이전으로 되돌리고 싶게 하는가? 너의 죽음이다. 차라리 유망주일 때 우리는 함께였다. 나의 삶이 타인의 죽음을 인수함으로써 이룩된다고 할 때, 화자의 삶은 더 이상 자신만의 것이지 않다. 죽은 너를 응원하는 나의 삶은 동시에 나를 조로하게 하고, 나의 삶과 너의 죽음은 이어져 너의 것이게끔 하며, 너의 삶은 나의 늙음을 재촉한다. 이런 뒤엉킴과 연결의 감각은 ‘뜨개질’을 빌려 표현되기도 하며(「털실로 뜬 시계」) 이 시집을 삶 쪽으로도 죽음 쪽으로도 당겨 놓는데 성공하게끔 한다. 너는 마당의 수돗가에서 손을 씻다가 내게 물 한 줌을 뿌렸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 물이 더 많았다 내일은 비가 내린대 예보를 무를 수는 없고 그것이 걱정되지 않았다 미래가 태어나려면 필요한 일들이었다 -「미래에 내리던 비에는 아무도 잠기지 않고」 부분 무해하고 귀여운 그렇지만 당돌한 어조들은 실은 그 아래 실패의 감각을 공유하고 이를 전유함으로써 가능한 전복적 의미로 가득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미래가 태어나려면 필요한 일들이 있다”라는 말은 심상하지 않다. 미래가 태어나려면 필요한 일들은 살아있는 일이겠지만 이 문장을 조금 변형해 ‘미래가 태어나려면 필요한 일들이었다’로 읽는다면 그건 누군가는 죽는 필멸의 운명에 대한 수긍이 된다. 오늘 나의 일상이 죽은 친구의 미래라는 이런 인식은 ‘열심’이나 ‘최고’를 강조했던 때 유행하던 격언을 닮아있지만 작금에 곁의 친구들이 느닷없이 죽거나 돌아오지 않는 일을 ‘흔히’ 겪은 세대의 죽음과 삶에 대한 다소 직관적인 감각이라 읽는다면 과도한 것일까? 생사에 대한 달라진 감각은 “나는 그저 내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랄 뿐”(「행복한 파괴자들」)인 이들이 아주 보통의 하루를 원하는 이유를 짐작게 하는데 결정적인 것이 아닐까. 그저 죽거나 죽을 많은 친구들의 이름을 주문처럼 가까이 당겨 부르며 “씨발······을 견딜 뿐”(「검은 고양이와 자객」)일지라도, 미래를 먼저 보고 온 듯한 저 과거형의 전언에는 누구도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순한 마음이 돌올하게 남는다. 3. 기대하지마, 배반할 거니까 (윤지양, 『기대 없는 토요일』, 민음사, 2024, 12.) 윤지양의 시집은, 기대하지 않는다. 이 시집은 어떤 기대를 파기한 것일까? 그리고 왜 기대하지 않을까? 김수영이라는 이름에 기대어볼 때 이 시집은 윤지양의 시가 기성의 것에 기대지 않고 어딘가를 찌르고 없는 것을 만들고 있어야 할 것을 지운다는 증거이기도 할 테다. 그래서일까? 이 시집은 시종일관 무척 냉랭하다. 그러나 그것이 사태에 대한 냉담을 뜻하지는 않아서 시집의 많은 것들은 실증이기보다 실증할 수 없음, “부정형으로 실현되는 소설”(「소설」)과 같은 문장과 사유를 표방한다. 어쩌면 나는 문장의 가능성만으로 쓰인 소설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 부정형 어미만으로 실현되는 소설을. 최대한의 심상을 떠올리고 그것을 부정하는 것을. 그것은 소설이기에 가능하다. 소설 속 진실은, 사실상 모두 허구가 아닌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그가 부럽고 질투가 난다. 뛰어난 것을 보면 으레 그러하듯. 나는 단지 시를 쓰는 시인이다. 그러나 시를 쓰지 않는다. 언제부터 쓰지 않게 되었는지 모른다. 누군가가 말했다.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대요. 소설 또한 쓰지 않는다. 연필을 들어, 가장자리에 금박을 입힌 메모지에 글자를 채워 넣지 않는다.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를 들으며 내 앞에 있는 전등을 하염없이 바라보지 않는다. 전등은 가끔씩 깜박이지 않는다. 위층에서 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소설」 부분 부정형으로 실현이 되는 소설은 실현되지 않는다. 그건 허구일테니까. 그러나 부정형으로 실현이 되는 소설은 「소설」이라는 시로 쓰인다. 시의 내용은 그러하지 않음을 단정하는 부정(否定)으로 연결되지만 이를 정해지지 않음의 부정(不定)으로 놓을 때 성립하는 듯도 하다. 이 시집을 관통하는 것이야말로 지어놓은 심상을, 알고 있는 형식을, 그 안에 담긴 모든 의미를 배반하는 부정(否定)과 부정(不定)이기 때문이다. “최대한의 심상을 떠올리고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대체로 잃어버린 것들을 호명하기에 알맞다. 그러니까 시간, 책(내용), 기억, 관계와 같은 비물질들, 쉽사리 의미화에 도달하지 않는 것을 호출하기에 적당하다. 이를테면 기억은 왜곡과 밀착되어 있다. 성글게 말해서 정확한 기억이란 불가능하다. 왜곡 가능성 자체를 포함하는 기억은 기억 주체에 ‘의해서’ 일어나는 작용인데, 이는 저장 과정에 이미 불순물을 포함한 채로 유입되고, 주체를 통과함으로써 변형되며, 시간을 경유하면서 유실된다. 그렇기에 기억을 불신 쪽으로 밀어붙이고 왜곡의 모양새를 살피는 일은 역으로 개인을 가장 그‘답게’ 알아낼 지표를 얻는 일일 수 있다. 「7월 9일 비는 미스트처럼」이란 제목을 기억에 기대 읽으면, 날짜는 틀릴 수 있고 비가 내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으며, 미스트처럼 흩뿌렸는지 옷이 젖을 만큼 제법 내렸는지도 불확실하다. 미스트의 자리에는 얼마든지 다른 비유물이 놓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날 바라본 것은 별 의미로 연결되지 않는 지하철 안의 사람들과 역사를 수리하는 인부들이다. 화자의 의문은 이런 것이다. “왜 이런 것들을 기억하고 싶은 걸까?” “바라본 것은 일이초의 순간이며 그보다 몇 백 배의 시간 동안 기억하는 데 열중해”야만 하는 이런 일을 말이다. 그렇다면 화자가 기억하고자 하는 일은 혹시 정보의 값어치라는 기준을 배반하는 작업이 아닐까?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것을 장기기억으로 저장하는 기억회로에 대한 배반 말이다. 어쩌면 7월 9일 미스트처럼 비가 뿌리던 날 내게 맺힌 기억들이 나와의 특별한 관계성을 획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만이 기억의 가능성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단 하나의 사실은 내가 기억한다는 것. 그래서일까? 역사를 나오며 바라본 인부들이 치우고, 세우고, 고치는 구조물은 마치 기억의 해체와 조립, 왜곡과 직조 가능성의 모형화로 가시화된다. 그런 기억에 대해 천착하면서도 시인일 이 시집의 화자가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그것은 바로 의미이다(“의미가 제일 무서워 그게 나를 평생 피했으면 좋겠어”, 「외면」). 의미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건 어쩐지 한 곳에 맺히는 것, 부정(不定)을 부정(否定)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누군가 치우고, 세우고, 고치길 거부하는 것 말이다. 한 곳에 부착되어 떨어지지 않을 때 어쩌면 그 의미는 죽어버리는 것일 테니까. 그래서 제목은 지워지고(「 」), 주석은 또 하나의 시가 되며(「경계 수칙」), 본문의 문장도 없이 홀홀한 주석이 탄생한다(「소원」). 이런 형식의 파괴는 때로 주석에 비해 내용을 하등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고, 형식은 내용과 자리를 바꾼다. 거기서 무엇을 달성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럴 때 형식과 의미는 다만 고민되는 중이다. 시를 쓰는 일이 시인의 내면 쪽에 방점을 찍어왔다는 점을 상기할 때, 시 쓰기가 몰래 바깥을 토해내는 일이라는 화자(「폭우」)는 시인의 사유를 대변한다. 비켜 가고 또 빗겨 가며 바깥을 제 내부에서 조립의 이전으로 분해하고 흩트리는 과정에 윤지양의 시가 쓰여지는 것은 아닐까 짐작하게 되는 대목이다. 그런가 하면 「Nguyễn Thế Hoàng」과 같은 시에서는 언어를 통해 형식과 의미에 대해 묻는다. 이 시는 번역을 통해 읽는 시, 편집된 시는 완전한 독해가 가능한가? 그렇다면 모국어로 쓰인 시는 또 완전한 독해가 가능한가? 와 같은 질문을 파생하면서도 시의 내용에 대해서도 묻게끔 한다. 이 시는 ‘윤지양’과 ‘Nguyễn Thế Hoàng’의 업무 메신저를 편집해 부분만 들여온 것이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가능해진다. 시는 무엇을 의미 삼는가? 또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애초에 시는 완전한 독해를 목표로 하는가? 그럴 때 윤지양의 시도들은 차라리 시가 만들어낼 수 있는 숱한 가능성을 찢어버림으로써, 놓치지 않고 모조리 해석하겠다는 욕구 대신 불가능의 인식과 만질 수 없다는 사실을 ‘만지는 중인’ 시의 본성을 일깨운다. 그럴 때 저 인부들의 직조 행위는 차라리 시적 태도일까? 그런 태도에 근간할 때 이 시집의 감정은 물성화되며(「유실물」, 「토요일」), 감정은 ‘안다’는 인지적 사실로만 성립하는(“너를 뺀 모든 걸 사랑한다는 걸 알아”, 「조지에게」) 낯선 것이 된다. 그리하여 냉랭하며 파괴적인 윤지양의 시가 배반하는 것은 차라리 신화가 아닌 일상, 시의 살아냄이라는 형식 자체는 아닐까? 기대라는 게 누군가 정해놓은 일정 높이의 허들을 넘는 일이라면, 이 시인에게 기대란 의미라는 약속의 틀에 처박히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의미로 가득 찬 일상과 시라는 세계에서 윤지양의 시는 기대하지 않는다. 얼음이 단단해지고 사무실에 앉아 있던 사람이 하품을 한다 모든 것이 침묵의 기억이라면 기억은 얼마나 녹을 수 있을까 걸어가는 사람들은 분홍색 자전거는 언제쯤 녹을 수 있을까 -「토요일」 어째서 아주 보통의 하루가 추구해야 할 미덕이 되었을까? 추구해야만 도달 가능한 보통의 일상은 시인에게도 퀘스트가 된다. 한 시인은 이제 “이 풍경 속에서 달리기 시작했다”(남현지, 시인의 말). 또 다른 시인의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으니 기다리라”(고선경, 「카푸치노 감정」)는 다짐은 자신을 향한 주문일 테다. 헤어지고 연인이 되었다 다시 덩어리가 되고 해봤자 창틀 안에서 돌뿐인(윤지양, 「비연인」) 이 관계 속에서 여러모로 뒤틀고 바꾸고 엮고 지우며 세계를 읽고 쓰는 일, 시 쓰기와 일상을 따로 놓지 않는 일은 자신을 고백하고 다독이며 배반하는 식으로 시작되었다. 아주 보통의 하루가 가능하다면, 설령 #아보하를 달 수 없는 날에도 시를 읽으며 서로의 생존을 확인하리라. 우리, 그러하기를 약속하기로. 그렇게 살아내기로. 1) 김난도 외, 『트렌드 코리아 2025-2025 대한민국 소비트렌드 전망』, 미래의 창, 2024. 2) 영국 전래동화의 주인공이기도 한 골디락스는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적당한 상태를 일컫는 관용어이다. 골디락스가 곰이 끓인 뜨거운 스프와 차가운 스프, 적당한 온도의 스프 중 적당한 온도의 스프를 고른 데서 유래했다.
1. 이 소설은 어떤 패배를 예정하고 있다 Day 9200 서울 1 이것은 여행에 관한 기록이다. 하지만 인생에 여행 아닌 것이 존재할 수 있나? 2 이 글을 쓰고 있는 건 2024년 9월 6일 금요일이다. 그다음 문장을 쓰고 있는 건 10월 26일 토요일이다. 나는 몇 달째 여기까지만 쓰고 멈춰 있다. 쓰다가 말다가, 썼다가 지웠다가. 나는 이제 어떤 여행에 관해 쓰려는 참이다. - 「나이트 트레인」, 372-373쪽. 문지혁의 소설 「나이트 트레인」(『현대문학』, 2025.1.)은 ‘소설 쓰기의 소설화’라는 익숙한 서사 문법 위에서 시작된다. 소설은 허구적 세계를 구축하는 일이지만, 소설가 자신의 삶이라는 단단한 토양 없이는 온전히 생육할 수 없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자전적 삶을 되짚어 그로부터 허구의 세계를 이끌어내는 일은, 소설을 쓰는 이라면 누구나 거칠 수밖에 없는 통과의례이다. 소설 「나이트 트레인」 역시 자전적 성격이 매우 뚜렷한 작품이다. 아니, 그렇게 보인다. 98학번, 남자, 소설가. 고작 이 세 개의 이력만으로도 우리는 이 소설의 화자인 ‘나’가 소설가 문지혁 자신일 것이라고 바로 예측하고, 그대로 긍정해버린다. 그 결과 이 글은 한 남자가 오랜 기억으로부터 끄집어낸 ‘사실’과 그로부터 촉발된 ‘진실’에 대한 기록이라고 인지된다.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이다. 독자가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나’에게 너무나 빠르게 감정이입 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소설 쓰기의 소설화’는 대단히 전략적이다. 소설을 읽는 과정은 일종의 줄다리기 같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고자 하는 독자와 그러한 독자를 자기 세계 속에 끌어들이고자 하는 소설가. 그런데 ‘소설 쓰기’라는 과정이 노출되는 순간, 그 팽팽한 긴장은 이완된다. 지금 읽고 있는 소설이,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과정 그 자체임을 받아들이는 순간, 독자는 순식간에 무력해지기 때문이다. 고작 두 문장을 쓰는 데 무려 한 달 열흘의 시간을 허비했다고 말하는 이 소설 속의 화자는, 그것을 너무나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그는 한 단락을 넘기기 전에 이미 승기를 잡았다. 이 글을 쓰는 필자 역시 소설을 읽다 말고, 작가 문지혁의 이력부터 다시 확인해 봤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독자의 예정된 패배, 그것은 이 소설을 이끄는 첫 번째 전제가 된다. 소설 속의 ‘나’가 소설가 문지혁일 거라고 믿는 순간, 우리는 소설이 아닌 ‘나’의 솔직한 여행기(억)를 읽는다는 것에 저절로 동의하게 되는 것이다. 2. 세 겹의 시간, 그의 여행은 시작되지 않았다 「나이트 트레인」에 서술된 시간은 세 겹의 층위를 가진다. 첫째는 소설을 쓰기 시작해서 그것을 완성하기까지 소설가인 ‘나’의 시간, 바로 DAY 9200~9286의 시간이다. 두 번째는 여행기를 표방하는 이 소설의 실질적인 서술 시간인 1999년, 21일 간의 유럽 여행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그 여행 기간 동안 ‘나’가 썼던 소설 속의 시간이다. 이 세 겹의 시간은 이 소설을 액자 속에 들어 있는 또 다른 액자까지, 세 개의 서사적 층위를 이루며 이어진다. 이 세 개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동력은 ‘나’와 관련된 세 명의 ‘그녀’이다. 첫 번째 ‘그녀’는 전 여친 O. 그녀는 ‘나’가 이 여행을 시작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다.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그녀가 ‘나’에게 은반지를 선물하며 이별을 고한 것이 여행의 실질적 출발점이니 말이다. 그녀의 여행을 되짚어가는 과정은, 결국 그녀가 자신에게 이별을 고한 이유를 찾아내고자 함이다. 두 번째 ‘그녀’는 여행에서 만난 E. 같은 대학에 다니는 미대생 E는 ‘나’가 곤란에 처할 때마다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스스로 만든 고립에서 벗어나게 한다. 어쩌면 그녀야말로 ‘나’가 이 여행에서 방향을 잃지 않게 만들어주는 나침반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세 번째 ‘그녀’는 암스테르담에서 프라하로 넘어가는 나이트 트레인에서 만난 전수진. 그녀는 이 소설의 제목이 가진 의미를 환기하는 동시에, ‘나’가 이 소설을 쓰게 만든 결정적인 동력이다. 또한 이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이름으로 언급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는 그녀에게 더 주목하게 되는 효과를 야기한다. 사실 전수진은 ‘나’의 불안을 환기하는 존재였다. 그녀와 마주친 순간들은, 언제나 ‘나’가 가장 절망하는 때였기 때문이다. 수진을 처음 마주쳤던 야간 열차 안에서 ‘나’는 술 취한 독일인 프란츠에게 소매치기로 몰려 고초를 겪었다. 두 번째 만남 역시 유쾌하지 않았다. O에게 받은 은반지를 버리고자 탔던 빈의 대관람차에서, ‘나’는 관광객들의 사진을 찍어주다 기회를 놓치고 만다. 스스로를 위한 최종적 애도마저 실패하고 내렸을 때, 운명처럼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일종의 ‘흔들다리 효과’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혼자만의 이별 여행에서 가장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그래서 자신의 내면에 있던 불안에 분출되는 바로 그 순간. 수진이 그 자리에 있었다. ‘나’가 조금만 시선을 돌렸다면, 이 여행은 이별이 아닌 전수진과의 만남을 위한 것으로 전환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연은 운명이 되지 못했다. 그들의 여정은 잠시 교차되었지만, 일치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패키지 여행객인 '나'와 자유여행객인 전수진 사이의 우연은 거기서 끝났다. 떠난 기회를 되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O와의 이별도, 수진과의 새로운 만남도 완성하지 못한 채 남은 여행을 채운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소설쓰기’였다. ‘나’는 저도 모르게 전수진을 찾으며 자신의 습작을 이어나간다. 그리고 그것은 액자 안의 또 다른 액자로서, 세 겹의 시간적 층위를 이루며 서사를 완성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깨닫는다. 이별을 고하는 O에게 이유를 묻지 못했던 것도, 여정을 미뤄 자신과 하루를 더 여행하자는 수진의 권유를 거부했던 것도, 사실은 온전히 그의 선택이었음을. 그러므로 이별은 갑작스럽게 다가온 충격이 아니라, ‘나’ 자신도 이미 예감하고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던 필연적 결과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비행기 안에서 그는 ‘소설 쓰기’라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묵혀둔 이별 여행을 시작한다. 수와 진이 햄버거 가게에서 일어날 즈음, 한강 잠수교에서는 빗길에 미끄러진 승용차 한 대가 중앙선을 넘어 마주 오는 차를 들이받고 강으로 뛰어들었다. 모두 네 명이 숨졌고 여섯 대의 차가 부서졌으며 부근의 교통을 세 시간이나 마비시킨 대형 사고였다. 그러나 수와 진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고, 그것은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고 있는 그들의 옛 애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가 사랑했던 그는 학교 도서관에서 잘 읽히지 않는 책을 앞에 놓아둔 채 비 오는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고 있었고, 진이 사랑했던 그녀는 별러왔던 사랑니를 뽑고는 병원 정류장에서 우산을 든 채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 「나이트 트레인」, 443쪽. 3. 고잉 홈, 여행의 시작과 끝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1'로 번호 매겨진 서술이 시작되기 전, 서사에 집중하는 독자가 순간적으로 놓치기 쉬운 그 날짜. 바로 ‘DAY 9200 서울’ 말이다. 거기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 여행 아닌 것이 없다는 그의 말은, 그의 서사 전체가 하나의 여행기임을 보여주는 한편, 그의 여행이 이 소설을 쓰기 전까지 종료되지 않았음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25년 전 3주간의 여행을 기록하고 있음에도 그의 서사가 ‘DAY 9200’에서 시작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사실 이 소설은, 아직 끝나지 않은 여행을 현재진행형으로 업로드 하는 과정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나’는 무려 9200일 동안 지속된 여행기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소설의 첫 문장을 뒤집어 보자. 그는 자신의 소설이 “여행에 관한 기록”이라고 쓰면서 “인생에 여행이 아닌 것이 존재할 수 있나?”라는 질문을 덧붙였다. 그 답은 명확하다. 그의 소설은 여행에 관한 기록이 아니다. 여행 아닌 인생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여행기를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는, 이것이 여행인 동시에 그저 여행이라는 특별한 순간이나 장소에 국한할 수 없는 인생의 모든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지점이다.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소설의 끝, ‘DAY 9286 서울’이다. “그때 정말로 유럽 여행 왜 왔던 거야?” 아내는 씩 웃더니 내 팔에서 손을 뺀다. 그리고 아파트 입구를 향해 먼저 걷는다. 나는 동그란 가로등 불빛을 벗어나 그림자 속으로 멀어지는 E, 아니 은혜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뒤돌아 한 번 더 수거장으로 향한다. 반지를 버리고, 이 여행을 끝내기 위해. - 「나이트 트레인」, 451쪽. 25년 전에 시작되어 9286일 만에 마침표를 찍은 그의 여행, 그 종착점은 어디인가? 분리수거를 하며 아내와 함께 하는 일상, 바로 그곳이다. 거기에서 ‘나’는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는 스스로의 현재를 마주한다. 그것을 환기하는 것은 더 이상 E라는 이니셜로 호명되지 않는 그의 아내 은혜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깨닫는다. 오래전 시작된 그 여행의 진짜 목적, 그것은 바로 ‘고잉 홈’이었음을.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