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겨울호
불화하는 ‘나의 이야기’ ― 재현의 윤리 이후를 상상한다
0. “포스트 대의제”라는 조건
지난 6월 인터넷방송인 김현지(김사슴)의 공론화가 있었다. 정지돈 작가의 전 연인이라고 밝힌 그는 『야간 경비원의 일기』(현대문학, 2019)의 ‘H’와 『브레이브 뉴 휴먼』(은행나무, 2024)의 ‘권정현지’가 자신임을, 혹은 자신을 참조하여 만들어진 인물임을 주장했다.1) 그 이후로 김현지와 정지돈이 몇 차례의 입장문을 발표했고, 논쟁이 진행 중이다.
논쟁의 추이를 정리하고 추적하는 기획과 글 들은 이미 없지 않으니 이 글에서 재차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글에서는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 작가에게 얼마나 잘못이나 책임이 있는지도 따지지 않으려 한다. 다만 많은 사람이 지면에 구애받지 않는 다양한 채널에서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문학이 주목받고 ‘공론’에 부쳐지는 것이 종종 훌륭한 작품보다는 논란에 의해서라는 것은 씁쓸한 일이지만, 달라지고 있는 공론의 성격과 증가하는 발화의 다양성은 문학의 환경―일종의 진화적 압력을 가하는 환경―을 이룬다는 점에서 지속적으로 탐구될 필요가 있다.
관련해서 중요한 텍스트 하나를 불러와 보자. 칠여 년 전에 김미정은 “흔들리는 재현·대의”를 이야기했다.2) 김미정이 주목한 것은 『82년생 김지영』과 그에 대한 독자들의 광범위하면서도 역동적인 반응이었다. 평론가와 같은 ‘전문독자들’이 작품의 미학적 결함을 지적할 때 독자들은 다르게, 또 훨씬 다양하게 반응했다. 그 당시 많은 여성 독자가 그 소설을 읽고 다음처럼 호응했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다.’ 일련의 평론가들이 인물의 평면적인 ‘전형성’을 지적했는데, 김미정은 바로 그 전형성이 독자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을 이입할 수 있었던 원인임을 예리하게 분석했다. 인물과 감응하면서 독자들은 누군가 자신의 느낌과 감상을 대신 말해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직접 표현하고 상호작용했다. “독자들이 직접 말하기 시작했다.”3)
김미정이 이를 중요한 변화로 주목한 것은, 문학의 역사에서 독자들이 오랫동안 직접 말할 수 ‘없는’ 자리에 있었다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그러던 독자들이 소설의 인물에게 적극적으로 이입하고, 그에 대해 평가하고, 표현하고, 서로의 감상을 나누며 연결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물론 SNS와 블로그, 인터넷 커뮤니티 등 말할 수 있는 공간의 현저한 확장을 배경으로 한다. 2010년대의 정치적 사건들, 즉 촛불집회와 페미니즘 리부트 등에서 시민들과 여성들이 대의하는 권력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민주주의’적인 역량을 경험했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4)
주지하다시피 재현으로 번역되는 ‘representation’은 대의(代議)를 의미하기도 한다. 직접 말할 수 없는 자리에 있는 이들과 그들을 대변해 권력을 가지는 사람들의 분리는 정치 제도로서 대의제representative system의 기본적인 전제다. 즉 대의제는 대변되는 자들(민중)과 대변하는 자들(정치인)을 분리한다. 이 정치적 분할은 또한 말할 권위authority를 가진 저자author와 그렇지 못한 자들의 분리와 유비적으로 연결된다. 공적으로 말할 수 없는 평범한 삶은 (작가 혹은 정치인의) 재현·대의하는 언어의 근거이자 재료가 되는 동시에 그 언어에서 소외된다. 철학적으로 확장해보면 이는 재현의 재료(질료)를 제공하는 수동적 감성과 그것을 총괄하여 형식(형상)을 부여하는 능동적 지성의 분할과도 상관적이다.5)
재현 체제의 안정성은 말할 수 없는 자들(재현의 대상)과 대의하는 자들(재현의 주체)의 분할에 토대를 둔다. 제도는 그 둘을 매개하는 동시에 분리의 안정성을 보장한다. 이를테면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 선거 ‘제도’는 직접 말할 수 없는 사람들(민중)과 그들을 대변해서 말하는 사람들(정치인)을 분리하는 동시에 매개한다. 그러한 대의의 과정에서 소수 의견은 배제되고, 시민의 의견은 반영되더라도 쉽게 왜곡된다. 문학 제도도 마찬가지다. 문예지와 같은 문학 제도는 장에서 말할 권한을 가진 저자와 그렇지 못한 독자를 분리하는 동시에 매개해왔다.
김미정이 말한 “흔들리는 재현·대의”는 이러한 분리의 혼란을 의미할 것이다. 「흔들리는 재현·대의의 시간」은 촛불집회 이듬해에, 2010년대 중반의 페미니즘적 물결이 진행 중일 때 쓰였다. 그 시간 속에서 시민과 여성 들은 적극적으로 발화하고, 조직하고, 연대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과 분위기 속에서 김미정은 ‘말할 수 없는 자리’에 있었던 독자들의 욕망과 정동을 중요하게 조명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제한을 달았다. 재현의 위기는 단순히 작가나 비평가보다 독자의 의견을 우선시하는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독자의 말이 무조건 옳다는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독자는 균질적이지도 않고 일관되지도 않은 존재”6)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다양한 채널을 통해 적극적인 발화를 하고 있다는 그 글의 논의는 변화에 대한 낙관이나 비관이 아니라 문학을 둘러싼 환경의 불가역적인 변화에 대한 진단에 가깝다.
칠 년 전의 글에 대해 이처럼 길게 이야기한 것은 이제 던져야 할 질문을 정교화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통과한 어느 시점에 재현 체제가 흔들리고 있었다면, 그로부터 칠 년이 지난 현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그때로부터 무엇이 변했을까, 혹은 변하지 않았을까? 이 글은 김미정의 논의로부터 “포스트 대의제”7)라는 말을 빌려오되, 그 표현에 약간 다르게 접근해보려 한다. 나는 ‘포스트 대의제’를 재현의 주체와 대상의 분할이 안정화되지 못하고 그 분할의 경계 자체가 끊임없는 불화와 쟁론을 부르는 상황으로 이해한다. 포스트 대의제라는 조건은 문학의 조건, 작가의 권위, 비평의 역할, 심지어 창작 과정을 심대하게 변화시킨 듯하다.
1. 불화
앞서 한 이야기에 비추어 근래의 사안을 생각해보자.
먼저 김현지의 공론화는 말할 권한을 가진 작가와 권한 없는 자의 분할을 문제 삼고, 또 그 분할이 얼마나 불안정한지를 보여주었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피해·가해의 문제가 아니라 말하는 자리를 둘러싼 불화의 역학이다. 피해/가해와 유죄/무죄의 확정이 법적인 사안이라면, 말할 권한의 점유와 재분배는 정치적-미학적 문제다.
김현지는 『야간 경비원의 일기』의 ‘H’가 자신임을 인정하고, 사과문에 ‘현지’라는 본명을 써줄 것을 작가에게 요구했다. 작가는 두번째 입장문에서 이러한 요구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말했다.8) 소설에 자신의 삶이 그려져 괴롭다면, 더더욱 그 인물이 자신으로 특정(혹은 오인)될만한 여지를 피해야 하지 않는가? 만약 사안의 핵심이 작가의 ‘무단 도용’이 야기한 피해에 있다고 본다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핵심이 ‘나의 이야기’에 대한 권리(주권) 주장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후자의 경우 김현지는 H가 자신임을 확실히 해야 하는 것이다. 당사자는 소설의 인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제 이 말은 소설에 대한 공감의 표현이 아니라 소설이 나의 이야기―혹은 내 삶에 대해 직접 이야기할 권리―를 침탈했다는 주장으로서 발화된다. 그 권리를 둘러싼 분쟁이 이 사건의 핵심적 측면이다.
김현지의 공론화에 정치적 쟁투의 성격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언어를 폄훼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사안을 그렇게 보았을 때 그의 주장을 단순히 법적 인정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 제도와 장르에 중대한 변화를 요구하고 시사하는 정치적 주장으로서 숙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이 쟁투가 어떤 ‘감정’과 ‘느낌’에 의해서 강하게 추동된다는 것도 그 언어의 정당성을 약화하지 않는다. 어떤 언어가 (가령 수치심이나 박탈감이나 분노 같은) 감정에 의해 추동된다는 주장이 자동적으로 그 언어의 정당성을 약화하는 것은 아닌데, 나름의 감정으로 추동되지 않는 발화는 없기 때문이다.
이번 사안에서 정지돈은 자신이 충분한 변형을 가했다고 주장했다. 그 변형의 적절성이나 성패는 따져봐야 할 문제다. 하지만 작가가 변형을 얼마나 잘 해냈느냐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그러한 편집·변형의 권한이 어떻게 할당되어 있고 그 할당이 어떻게 변하고 있느냐이다. 누군가 자신의 삶과 유사한 면모를 소설의 인물에게서 발견할 때, 심지어 자신과 같은 이름을 자신과 관계가 있었던 작가의 작품에서 발견할 때―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그는 당혹스러움이나 수치심, 박탈감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의 경험을 편집하고 말할 권리가 다른 누군가에게 있음을 볼 때의 박탈감, 자신은 그 경험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박탈감. 그 경험이 민감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수치심이나 박탈감은 더 커질 것이다. 그러한 감정은 작품의 미적 수준이나 변형의 정도, 작품의 메시지와 상관없이 엄습할 수 있다.
그럴 때는 문학이 얼마간 침해이자 도용일 수밖에 없다는 원론적인 사실을 최대한 인정하더라도 의문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 그럴 권한이 작가에게만 주어져 있는 것인가? 그리고 이런 의문이 들 때, SNS나 블로그는 자신이 ‘직접’ 말하기 위해 선택하고 활용할 수 있는 매체다. 그러한 매체들을 통해, 김현지의 공론화는 자신을 주장하고, 표현하고, 서사를 만드는 말의 역량을 드러냈다. 그 역량은 ‘공동의 경험’을 재료로 삼는 작가의 권한을 문제 삼고, 그것을 전복적으로 취하려 한다. 공론화 직후 김현지가 이 사안과 관련한 ‘습작’을 블로그에 게재했던 것9)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10)
따라서 누군가의 삶이 도용당함으로써 실질적으로 피해가 발생했는가가 아니라 삶에 대해 말할 권한이 어떻게 분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소유권을 지닌 개인’이라는 자본주의의 전제와 달리 경험이란 개인의 소유일 수 없으므로, 작가는 타인과 공유한 경험에 대해―문학적 변형을 거쳐―쓸 수 있다. 많은 이가 말해왔듯 작가는 그러한 경험을 반영해 쓸 수밖에 없고, 그렇지 않다면 문학 창작 자체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문제는 그 권리가 ‘작가에게만’ 있는 것처럼 여겨질 때, 그리고 그러한 권한 혹은 자격의 기준이 확고한 것으로 여겨질 때이다. 그리고 아마 더 중요한 문제는, 우리는 그러한 권한이 작가에게만 있음이 더 이상 용인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정지돈의 작품이, 김봉곤의 『여름, 스피드』(문학동네, 2018)에 대해 제기되었던 혐의처럼 김현지에게 ‘아웃팅’ 피해를 입혔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 사안은 특정한 방식으로 식별될 수 있는 ‘정체성’에 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전승민이 분석한 것처럼 ‘자기 서사 편집권’에 쟁점이 있다고 보는 것이 설득력 있다.11) 자신을 표현하고 전시하는 일이 거의 누구에게나 가능할 뿐만 아니라 경제적 이윤이나 정치적 표현으로도 이어지는 시대다. 누구든지 자신의 서사를 편집하고 구성할 권한이 있다고 여겨지는데, 이러한 경향은 작가와 작가 아닌 자를 분리하는 문학 제도의 작동 방식과 불화한다. 콘텐츠 시장에서뿐 아니라 취업 시장에서까지 ‘스토리텔링’이 강조되는 이 시대에 경험은 잠재적인 ‘자산’으로 여겨지곤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소수자성이나 약자성, 살면서 겪은 우여곡절과 상처조차도 서사화할 수 있는 일종의 자산으로 여겨질 수 있다. 자신에 대해 말하는 동시에 타인에 대해 말하는 작가의 ‘권한’은 점점 더 용인될 수 없는데, 그것은 다른 이가 취할 수도 있었을 잠재적 자산을 독점하여 현금화하는 일처럼 보이게 되기 때문이다. ‘소유’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경험의 본질적인 모호성은, 공유한 경험에 대해 작가가 쓸 수 있음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는 동시에, 왜 그 경험에 대해 작가만 쓸 수 있냐고 반문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한편 문학의 위상에 대해서는 상이한 관점과 욕망이 길항하고 공존하는 듯하다. 제도의 기준, 제도가 발행하는 자격은 자명하거나 엄정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문학은 다른 가치들과 사회적 관심으로부터 그것의 ‘자율성’을 보호받아야 할 만큼 대단한 것으로 여겨지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많은 이가 여전히, 혹은 점점 더 작가의 위치를 욕망한다. 자신의 경험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는 자리를 작가의 위치라고 한다면 말이다.
제도는 특정한 집단에 특정한 방식으로 말할 자격을 부여하고, 이 한정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현실적으로 작품을 수용할 수 있는 독자가 한정되어 있으므로, 어떤 방식으로든 다양한 언어에서 주목할만한 작품을 ‘선별’하는 제도의 작동은 있을 수밖에 없다. 현존하는 출판사나 문예지가 모두 사라지더라도, 어쨌든 선별과 평가의 장치로서 제도는 어떤 형태로든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말할 역량 혹은 욕망이 그보다 훨씬 많은 이에게 있다는 점이다. 자격과 역량의 이 불일치로부터 끊임없는 불화의 가능성이 나온다. 문학의 권위와 위상이 부침을 겪을수록, 자신의 ‘서사’에 대한 욕망과 권리 주장이 일반화될수록 이 불화의 가능성은 점점 커진다.
2. 하나가 아닌 독자
김현지의 주장들이 그 자체로 사실인가/정당한가와 별개로, 블로그를 통한 그의 공론화가 SNS에서 즉각적이고 광범위한 논쟁을 불렀다는 사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의견들이 나타나고 모이고 번지는 방식은 따져봐야 한다. 논쟁의 속도와 의견들의 ‘화력’이 충분히 숙고되지 못한 부작용을 낳기도 하기 때문이다.
근 십여 년간, 문학장에서 발휘되는 독자의 영향력이 현저하게 커졌다는 사실에는 거의 이견이 없는 듯하다. 그렇지만 독자의 부상에 관해 현재 비평장에 상반된 입장이 공존하고 있다. 한편에는 비평이 수평적인 ‘독자-비평(가) 공동체’의 어셈블리지를 지향해야 한다는 제안이 있다.12) 다른 한편에는 ‘심판관’으로까지 승격된 독자들의 의견을 견제하면서 그것과 비판적으로 마찰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있다. 작년 겨울 심진경은 김봉곤 작가의 ‘사적 대화 무단 인용’ 논란 혹은 ‘오토픽션 스캔들’을 다루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지금의 문학장에서 독자는 문학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고 보아야 하는가?”13) 오토픽션의 ‘진정성’에 대한 판단뿐 아니라 재현의 윤리에 대한 심판조차도 ‘대중 독자의 의견’에 맡겨져 있다는 진단 이후, 심진경은 비평가의 역할과 “비평의 몫”을 진지하게 재고해야 한다고 갈파했다.
마찬가지로 김봉곤의 오토픽션을 다루는 글에서 전승민은 (심진경의 진단을 수용하며) 독자성에 대한 근래의 긍정적 담론과 날카로운 각을 세운다.
출판사 관계자들과 편집위원들의 ‘신속한 대응’ 그리고 피해와 가해의 구도에 대한 성찰 없는 무조건적인 수용과 작품 판매 중지 조치는 독자성에 관한 절대적으로 선한 믿음에 기인한다. 당시의 비평과 독자들이 강하게 욕망하고 믿었던 독자-소비자 주체의 윤리성에 관해서는 그 누구도 비판적으로 접근해보지 못했다는 맹점이 바로 여기서 기인한다. 당시 현실의 페미니즘적인 윤리가 신성시되고, 흠결없이 무해하게 보존되어야 한다는 믿음, 그래야만 이성애 중심의 페미니즘 비평이 목표로 하는 폭력적이고 패권적인 남성성을 문학장에서 정화할 수 있다는 집단적 단결을 유지하고 보존하고자 하는 욕망과 판단이 있었던 것이다.14)
전승민이 독자성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믿음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는 독자들의 적극적인 발화와 개입이 문학계에서 페미니즘 리부트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 감사함을 표하면서도, “독자의 권리와 의지가 부정적인 측면으로도 과잉”15)될 수 있음을 경계한다. ‘피해와 가해의 이분법’과 올바름에 대한 강박은 문제가 된 작품들에 대한 숙고의 여지를 봉쇄하고 판매 중지 조치나 문학상 회수 등의 ‘신속한 대응’만을 부추기는 면이 있었다. 독자의 부상이 미투 운동과 페미니즘 리부트의 중요하고 필수적인 동인이었다는 사실이 그 이면을 비평하기 어렵게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무언가의 이면을 말하는 것이 그것의 정당성이나 가치를 부정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독자성’이 하나의 균질한 힘이나 경향인 것처럼 싸잡아 긍정하거나 부정할 수는 없다. 최근 선우은실이 쓴 것처럼, 비평이 호명하고 주목해온 ‘독자’는 변화하는 비평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기 위해 세워진 다분히 상상적인 형상이었을 수 있다.16) 독자의 부상을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그 ‘상상적 형상’에 대한 칭송이나 공격일 것이다.17)
이 글을 준비하면서 문단 안팎의 다양한 평자가 쓴 글을 따라 읽었는데, 현 사안을 둘러싼 논쟁에서도 이른바 ‘문단 권력’과 ‘독자의 권리’의 대립 구도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러한 구도에서 종종 비평가는 권력의 하수인이자 문지기이고, 기술자이자 관료이며 때로는 부패한 권력의 육화이기까지 하다. 제도 내 비평가는 언어를 승인하고 선별하는 보수적인 기준을 보존하고 재생산하고 땜질한다. 내 경험을 돌아보건대 실로 그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닌 게 아니라 다분히 그런 면이 있다(이렇게 말하면서 진술의 대상에서 나를 면제하지는 않겠다).
제도는 경직되어 있고 완고하고 느리다. 그에 비해 독자의 요구와 욕망은 다양하다. 그런데 자본주의 체제에서 독자의 권리는 대체로 소비자의 권리로 표현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소비자 주체성’을 ‘제도의 권위’의 유일한 대안으로 여기기 쉽다. 하지만 이 대립 구도는 결국 서로를 강화한다. ‘문단 권력’에 대한 비판은 역설적으로 그것에 계속해서 결정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그것을 독자-소비자의 요구에 아랑곳하지 않고 권위를 행사하는 괴물로 신비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대립 구도와 완고한 위계를 상정한다면, 비평이 선택할 수 있는 방향은 두 가지뿐이다. ‘권위’를 포기하고 독자의 요구에 복종하거나, ‘대중’을 경멸하면서도 선도하려 하는 엘리트주의18)로 회귀하거나. 이 대립 구도와 ‘위아래’의 구도를 벗어나 생각하자는 제안은 권력의 차이를 없는 셈 치자는 주장은 아니다. 이런 대립 구도를 넘어설 때만 ‘복종 아니면 선도’라는 터무니없는 선택지를 벗어날 수 있기에 대안을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제도의 권력을 비판하기 위해 소비자 주체성에 의존하고 소비자 주체성을 비판하기 위해 제도의 권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다른 방법은 없을까?
분량과 능력의 한계로 지금 이 질문에 충분히 대답할 수는 없다. 여기서는 그저 초점을 옮길 질문 하나를 추가하고 싶다. 독자의 위상과 비평의 몫에 대한 글들을 따라 읽으며 떠오른 질문이다. 때로는 비평가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고 일상적으로 독자이기도 한 작가의 자리는 어떻게 변해왔는가? 지금 작가의 자리는 소위 ‘문단 권력’에 의해 충분히 비호받지도 못하고 ‘독자-소비자’에게 충분히 지지받지도 못하는, 그러나 종종 권력을 가졌다고 상정되고 욕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이상하고 쓸쓸한 자리가 아닌가.
독자의 부상과 비평의 위상 변화에 대해 논하면서 비평이 잘 말하지 않았던 것은 작가들의 경험이 아니었을까. 포스트 대의제라는 조건 속에서 작가들 역시 미증유의 어려움을 맞닥뜨려왔다. 독자나 비평의 부침에 비해 작가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비평이 충분히 주목하지 못했던 것 같다. 비평가들이 이 어려움을 모르거나 무관심한 것은 아니겠지만 독자나 비평의 자리에 주목할 때는 그저 괄호 안에 넣어지곤 했던 것이다. 이제 포스트 대의제라는 조건에서 창작하는 자의 곤란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이는 논란의 중심에 있는 한 명의 작가를 변호하기 위함이 아니며, 문학장의 구조적인 변화 속에서 많은 작가가 겪을 수 있는 불안과 어려움을 이해해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3. 소설가의 진퇴양난
김현지의 문제 제기와 정지돈의 입장 사이에는 넓은 ‘회색 지대’가 있고, 그곳에 사안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발언하지 않는 많은 사람이 있는 듯하다. 나 역시 글을 쓰면서 고민이 정리되기보다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고 느꼈다. 고민할수록 초점이 선명해지기보다는 문제가 다양한 층위로 분산·확장되었다.
나는 일부 작가들이 (정지돈의 작품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고, 그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할 때조차도) 선명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발언하지 못하며 망설이는 경우를 보곤 했다. 이 망설임의 이유는, 한 작가에게 닥친 곤경이 자신에게도 닥칠 수 있음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작가의 이런 망설임―세속적인 고려가 필연적으로 섞여 있는 망설임―이 회피가 아니라 강도 높은 고뇌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정지돈 작가의 부주의함에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정지돈의 자기 변론을 최대한 수용하더라도, 가까운 지인에게 자신의 작품이 어떻게 읽힐지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여전히 윤리적으로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그러나 지금 작가가 겪는 곤경이 단순히 개인의 ‘예외적인’ 실책 때문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거기에는 오늘날 소설가들이 공유하는 위험, 점점 커지고 있는 위험이 또한 있다.
재현 체제의 혼란 혹은 포스트 대의제라는 조건은 단순히 독자들이 직접 말할 수 있게 되고 작가나 비평가의 권위가 부침을 겪어왔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소설이 창작되는 방식 자체를 어떤 방식으로 한계 짓고 유도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어느 시대에나 작가가 수용자들의 반응에 무관심하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오늘날의 작가는 특히 작품에 대한 독자의 반응에 즉각적으로 노출된다. 작가가 수용자의 반응과 긴밀하게 소통하면서 작품이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진화하기도 하지만, 이 전면적이고 즉각적인 노출과 소통은 독자의 기호와 요구에 따르도록 작가를 구속하기도 한다. 수용자의 다양한 반응에서 어느 정도 분리된 채 움직일 수 있는 시공간적 거리가 줄어드는 것이다.
작가들의 어려움에 대해 말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는 가설적인 수준에서 간략한 스케치를 시도해 보겠다. 지금 소설은 어떤 방식으로 쓰일 수 있는가, 혹은 어떤 방식으로 쓰이기 어려운가?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 먼저 대의의 어려움을 이야기해볼 수 있다. 즉 ‘~에 대해’ 말하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각자의 목소리로 각자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작가는 누군가를 대신해 말할 필요가 없을뿐더러, 그럴 권한도 없다. 이제 무언가를/누군가를 대변해서 말한다는 생각 자체가 낡은 오만처럼 여겨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여성주의 문학이 있지만, 어떤 작품이 여성들을 대의/대표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여성’ 자체가 일관된 집합일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집합으로서의 여성보다 여성 개개인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는 정체성으로 묶이는 집합 내부의 차이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포스트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는 무수히 많고 다양하지만 그것들의 공통점은 ‘여성’이라는 공통항으로부터 여성 ‘개인’이라는 각자의 개별항으로 눈을 돌려야 할 때가 도래했다는”19) 관점을 채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 역시 다양한 발화의 부상과 관련 있어 보인다. 자신을 직접 표현하는 발화들은 하나로 여겨지는 집합 내부의 차이를 끊임없이 드러낸다. 이를테면 같은 ‘여성 서사’에 대해 어떤 여성 독자는 자신의 이야기인 듯 공감하고 이입할 수 있지만, 다른 여성 독자는 그것이 특정한 여성(가령 서울에 거주하는 2·30대 여성)만을 대변하는 서사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작가는 무엇을 어떻게 쓸 수 있는가? 쉽게 떠올릴 수 있고 식별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에 대해’ 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경험을 쓰는 것이다. 이러한 방향을 선택할 때 작가는 누군가를 대변해서 말한다는 거만한 책임으로부터 겸손하게 물러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 방향에서는 물론 ‘당사자성’이 중요해진다. 에세이 장르의 부흥도 이러한 경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번, 일련의 작가들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이다.’20)
그렇지만 여기에는 어떤 기묘한 반비례 관계가 있다. 작가가 ‘나의 이야기’를 할수록 그 이야기는 독자들이 함께 경험하는 일상적 현실과 구분되지 않게 된다. 즉 작가가 쓸 수 있는 경험과 독자가 일상에서 하는 경험이 점점 더 질적으로 구분되기 어려워진다.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쓸 때, 그것이 온전히 자신의 이야기인가 하는 반문이 따르는 것도 거의 필연적인 일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어떤 경험도 누군가의 소유일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소설의 소재나 배경, 감수성이 독자들이 경험하는 현실과 긴밀하게 중첩됨으로써 허구의 작품이 가질 수 있는 거리감이 사라진다. 이 거리의 소멸은 독자가 작품을 친밀하게 느끼는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허구적 창작물의 논리/윤리를 일상적 현실의 논리와 구분할 수 없게 되는 원인이기도 하다. 소설가가 많은 작위를 부리지 않고 ‘자신의 경험’을 담백한 수준으로 가공·서술한 이야기는 많은 독자의 공감을 사지만, 이른바 ‘일기장 소설’이라는 비하를 받기도 한다. 무단 도용 혹은 아웃팅 혐의를 받았던 김봉곤의 소설에 대해서는 ‘나도 쓰겠네’ ‘일기장에나 쓸 이야기를 왜 소설로 쓺?’ 따위의 공격이 (트위터에서) 쏟아지곤 했다.21) 이러한 방향의 난점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르가 오토픽션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지금 그런 비난을 받는 것은 몇몇 오토픽션뿐만이 아니다.
둘째는 현재를 반영하기보다 조작된 과거나 미래에 관해 쓰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대안적 역사를 구성하며 공식적 역사를 비틀고, 한편으로는 SF적 상상력을 발휘해 대안적 미래를 구성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현실과의 관련을 완전히 지우기는 어려운데, 작품은 현실 속에서 현실의 독자에게 말을 걸고, 또한 현실을 수행적으로 구성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방향의 한 범례를 보여준 작가가 정지돈이라고 생각한다. 정지돈은 픽션과 현실의 ‘닮음/닮지 않음’의 긴장과 이격으로 유희하는 작품들을 써왔다.
이번 사태는 이 두 가지 방향 혹은 전략 역시 위험을 피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야간 경비원의 일기』에서 문제의 ‘스토커’ 장면에 대해, 작가는 자신이 ‘직접’ 겪은 경험에 착안하여 변형을 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브레이브 뉴 휴먼』의 경우 SF적인 미래를 그리고 있고 권정현지라는 인물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공감할만한 특성을 갖고 있기에 현실의 개인과는 상관이 없다고 주장했다. 작가의 이러한 자기 변론은 재차 비판과 비난을 불렀다. 작가가 ‘공유한 경험’에 대해 자신의 권한을 주장하는 일은 앞서 언급한 이유에서 어려워지고 있다. 미래에 대한 상상력에 기반을 둔 SF 소설 역시 현실과 접점이 존재할 텐데, 작가는 충분히 변형을 거쳤다고 주장하지만 읽는 이의 관점에서는 다를 수 있다. 정지돈이 현실/픽션 경계의 모호성으로 유희하는 작가임을 고려하면 논쟁의 여지가 오히려 더 커진다.
문제가 되는 작품들이 미학적으로 얼마나 좋건 나쁘건 간에, 그것들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과 논란이 되는 방식은 다른 작가들에게 심한 자기 의심과 불안을 부를 수 있다. 정지돈의 작품들이 취하는 방법이나 전략을 동시대의 다른 작가들도 부분적으로 취해 왔거나 취할 수 있기 때문이고, 정지돈의 작품들보다 현실과의 접점이 더 크고 깊은 작품도 많기 때문이다. 한편 누군가의 폭로 때문에 논란의 대상이 되었을 때 비난과 즉각적인 판매 중지 조치 등에서 작가를 보호해줄 만한 안전장치가 거의 없다는 사실도 작가들의 불안을 가중할 것이다.
물론 나는 소설가가 아니고, 지금 말하고 있는 곤란을 직접 경험했다고 할 수 없다. 나는 지금 내가 아닌 이들이 겪었거나 겪을지 모르는 어려움에 ‘대해’ 쓰고 있고, 여기에는 도용과 왜곡과 투사의 위험이 있다. 소설가들이 심정적으로 느끼는 어려움이나 불안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분수를 넘은 지레짐작으로 비칠 수 있음을 안다. 하지만 지금 창작하는 작가들의 ‘심정’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비평적 논의는 현실의 행위자들이 느끼는 바와 동떨어진 규제적 당위의 수준에서 맴돌게 될 위험이 있다. 나 역시 그렇지만 많은 평자가 이런저런 당위와 윤리에 대해 말한다. 물론 우리는 창작 과정을 검열하고 옥죄려는 의도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지만, 과연 소설가들도 그렇게 느낄까?
작가들이 마주하는 위험이 커지는 동시에, 작가를 향한 비난과 ‘신속한 대응’을 견제할 안전장치는 빠져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논란이 불거질 때 출판사는 작가의 작품을 판매 중지하고, 행사도 거의 일방적으로 취소해버린다. 출판사로서는 책의 출간이나 행사 등의 정해진 일정을 소화하는 과정에서 소비자인 독자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는 회사의 운영과 직결된 문제이기에 논란이 되는 작가를 충분한 인내심과 숙고로 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제도가 권위를 가졌다면(정말로 권위가 있다면) 그만큼 역할과 책임도 있다. 그중에는 성급한 조치와 비난들로부터 작가를 비롯한 당사자들을 보호하는 것도 있을 테다. 출판사나 잡지가 숙려의 시간 없이 문제가 되는 작가나 작품을 ‘버리는’ 방식으로 일을 빠르게 처리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압박을 받기 때문이다. 소비자이기도 한 독자들이 가하는 압력.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문단 안팎의 많은 평자가 ‘소비자 정체성’이나 ‘캔슬 컬쳐’를 비판적으로 경계하지만, 지금 그런 압력이 강하게 작동하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4. 재현의 윤리 이후를 상상한다
포스트 대의제라는 조건에서 불화는 예외상태가 아니라 항구적인 것이 된다. 전선이 복잡하게 얽히고 꼬여 있어서 어디가 전위이고 후위인지도 알기 어렵다.
현 상황을 보면 말할 권한을 가진 작가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분할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와해되어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한 분할을 문제 삼는 것 자체가 낡은 일로 여겨질 정도로 말이다. 지금 ‘공론장’에서 발언하고 영향력을 갖기 위해 반드시 작가나 비평가라는 자격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물론 지면과 매체들 사이에, 발화자들 사이에 권위와 권력의 차이가 있고 이 차이는 때때로 현저하다. 그렇지만 대체로 그것은 말할 수 있음/없음을 결정할 정도로 완고하지 않다.
이제 말할 수 없는 자와 말할 권한을 가진 자의 분리를 상정하는 것 자체가―그것을 비판하기 위해 상정하는 경우에서조차도―지나치게 경직된 이분법으로 보인다. 그러한 틀은 등단이라는 제도가 여전히 주요 등용문인 한국 문단의 안팎을 분석할 때는 유용하지만, 훨씬 더 광범위하고 모호한 동시대의 공론장에서 형성되는 권력과 세력, 영향력을 분석할 때는 무용지물이다. 오히려 초점은 다양한 채널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말할 수 있는’ 이들 사이의 차이에 맞춰져야 할 것이다. 각자가 각자의 방식으로 말할 수 있다고 해도, 어떤 언어에는 다른 언어를 왜곡하거나 변형할 더 큰 권력이 있다. 더 무거운 물체가 공간을 휘게 하는 것처럼. 그것은 그 언어가 어떤 자격을 부여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이미 많은 목소리를 결집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즉 이 힘의 차이는 특정 제도가 발행하는 ‘자격’의 유무와 무관하지 않지만, 반드시 일치하지도 않는다. 일반적으로 작가는 여전히 작가 아닌 이들보다 더 큰 말할 권한을 갖고 있지만, 모든 상황과 맥락에서 작가가 강자인 것은 결코 아니다. 또 독자의 의견은 결집했을 때 출판사나 문예지 같은 제도적 장치들에 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가령 트위터의 흐름이 문학 제도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음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때 여론의 흐름은 인용의 연쇄가 구성하는 ‘타래’로 가시화된다.
비평은 제도가 발행하는 ‘자격’의 기준과 작동을 반성할 뿐만 아니라 SNS를 비롯한 동시대의 공론장에서 작동하는 ‘인정’의 셈법을 검토해야 한다. 이 인정은 ‘좋아요’나 팔로워 수, 리트윗 수를 통해 표시되곤 한다. 비평은 제도의 ‘포섭과 배제’의 논리에 대해서는 많은 (자기)비판적 논의를 해왔다. 그러나 인용과 인정의 경제에 대해서는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아마 후자의 논리가 전자보다 훨씬 더 흥미롭고 복잡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이 반복되고 있는 ‘재현의 윤리’라는 말 자체가 부적절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다. 재현은 말할 수 없는 자(재현의 대상)와 말할 수 있는 자(재현의 주체) 사이의 관계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만약 말할 수 없는 자/말할 권한을 가진 작가의 분할이 완고하다면, 작가는 ‘어떻게 공적으로 말할 수 없는 자들을 윤리적으로 재현·대변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분할이 완고하다면, ‘말할 수 없는 자리’에 있는 독자의 직접적 현시는 그 자체로 전복적인 의의를 지닐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이미 그렇지가 않다. ‘재현의 윤리’라는 말 자체가 완고하고 비현실적인 이분법을 상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단적으로 말해, 나는 그것이 재현 체제나 대의제의 윤리이지 ‘포스트 대의제’의 윤리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22) 또 재현의 윤리는 ‘재현물’을 창작하는 작가에게만 윤리적 고려와 책임을 집중시키며 작가들의 부담과 불안을 가중하는 경향이 있다.23)
전승민은 문학적 논의가 사법적 판단과는 별개의 영역임을 강조했다. 작가가 법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더라도, 논란이 된 사안과 작품을 비판하고 성찰하고 논의할 수 있다. 일관된 방식으로 전승민은 판매 중지 조치에도 반대한다. 설령 범죄자의 작품이라 할지라도 판매 중지 조치는 옳지 않다.24) 그는 내재적인 비판을 위해서라도 텍스트를 읽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주장은―절판에 대한 독자-소비자의 요구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것보다 훨씬―읽는 이들의 평등한 역량에 대한 어떤 신뢰를 전제한다. 또 읽기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무형의 이로움에 대한 신뢰를 전제한다. 설령 ‘나쁜’ 작가의 문제가 있는 작품이라고 해도, 그것을 읽는 일이 우리를 나쁘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믿음 말이다. 나쁜 작품이 읽는 이에게 악영향을 주기 때문에 금지되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읽는 이를 그저 수동적인 존재로, 온갖 악영향에서 보호받아야 하는 어린아이처럼 대하는 것이다. 우리가 작품을 읽으면서 무엇이 문제인지 생각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존재라면, 그 작품을 우리에게서 격리해야 할 이유는 없다. 또 독서가 (책을 삼으로써 작가나 출판사에 돌아가는 경제적 이득보다) 궁극적으로 읽는 이에게 득이 되는 일이라면, 읽는 이가 독서 경험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가장 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은 ‘현실’의 윤리와 ‘재현물’의 윤리가 다른 차원에 있다는 식의 주장과는 섬세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오히려 지금 문제는 그러한 분할을 미리 가정하지 않았을 때 과연 어떤 자율성을 생각할 수 있느냐이다. 즉 문학과 현실, 재현과 실재, 여타 사회적 가치와 문학적 가치의 분할이 와해되는 혼란스러운 환경을 인식하고, 그 환경 속에서 다른 움직임을 만들 수 있을 만큼의 자율성. 푸코의 말처럼, 어떤 예속도 없기를 꿈꾸는 자유가 아니라, 다만 이런 방식으로 예속되지 않기를 바랄 수 있을 만큼의 자유.25) 이것은 비판의 가능 조건이지만, 진실을 말할 용기의 가능 조건이기도 하다.
이제 여론의 흐름, 경제적 이해관심, 사법적 판단 등과 분리된 문학의 영역 혹은 허구의 영역을 상정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오히려 그런 분리 불가능성을 받아들이면 문학작품과 비평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현실적으로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재현의 문제틀(현실/재현물의 이분법)을 넘어서야 한다.
‘재현의 윤리’가 아닌 말들을 고안해보면 어떨까. 이는 ‘포스트 대의제’를 (‘포스트-’라는 부정적인 접두사로 규정하지 않고) 다각도로 의미화하자는 제안이고, 창작 과정에 대한 검열이 아닐 수 있는 더 포괄적이고 지속가능한 윤리를 고민하자는 제안이기도 하다. 재현의 문제틀과 재현의 윤리 같은 말들은 기나긴 역사와 문맥을 갖고 있어서, 그것을 벗어나 대안을 찾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일찍이 김미정도 언급한 것처럼, 재현의 문제틀은 근대(근대 정치와 근대문학)의 구성 원리 자체라고까지 할 수 있다.26) 그렇지만 우리가 관습적으로 당연한 듯 사용하는 언어를 점검하고 그 대안을 고민하는 일이 더 많은 비평적 논의와 생산적인 사유를 가능하게 해줄 것이다. 가령 ‘작가’를 말할 수 없는 자들의 삶을 공적인 지면에 재현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할 수 있는 자들의 언어를 다른 채널과 문법으로 번역하는 사람으로 여겨보면 어떨까? 물론 이 번역에는―실제로 문학작품이 다른 언어로 번역될 때 그런 일이 벌어지곤 하는 것처럼―왜곡과 도용과 절취의 위험이, 비대칭적인 폭력의 가능성이, 또한 창의적인 변용의 가능성이 항상 존재한다. 어쨌든 번역은 말할 수 있는 자와 말할 수 있는 자의 관계를 전제한다. 다만 둘은 같은 언어를 말하고 있지 않고, 언어들은 동등하지 않다. 출발어와 도착어는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받으며 변화하지만, 결코 완전히 일치하는 법은 없다. 또 이러한 번역은 작가만 하는 일이 아니다. 비평가도 누군가의 말과 의견을 번역한다(나는 이 글에서 많은 글과 의견을 인용했는데, 그러면서 얼마간 왜곡하거나 변형하기도 했을 것이다). 트위터에서 다른 누군가의 게시물을 ‘인용’하면서 말을 덧붙이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 번역/전송trans-l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비평장에 제안하고 싶은 첫째는 ‘재현의 윤리’라는 말과 그에 대한 초점을 다른 말과 초점으로 옮겨보자는 것이다. 나는 대안으로 ‘번역’을 제안했지만, 더 나은 대안이 있을 수도 있다.27)
두 번째 제안은 문학장과 트위터의 관계에 관한 다각도의 탐구다. 지금 다양한 발화가 전시되고, 확산하고, 연결되고, 격한 비난을 마주하기도 하는 주요한 공간은 아무래도 트위터일 것이다. 트위터는 문예지나 출판사만큼이나 현재 한국의 문학장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장치로 조명되고 분석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제도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생각해본다. 나는 문예지를 비롯한 문학 제도가 (어디서부터는 괜찮고 어디까지는 문제가 된다는 식으로) 창작 과정에 대한 일반적인 지침이나 규범을 세울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만약 ‘불화’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그런 지침을 성문화된 형식으로 만든다면 그것은 창작 과정의 검열이 되지 않을 수 없고, 그 검열은 맹점과 배제의 경계들을 다시 낳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제도는 지금과 같은 분쟁 상황에서 의견들을 조정하고 당사자들을 보호하는 장치를 고안할 수 있을 것이다. 문예지는 문제 제기의 당사자와 작가가 입장을 밝힐 수 있는 (비교적 느리고 지속적인) 지면을 제공하고, 관련된 논의들을 모으고 정리할 수 있다. 논의를 일회적이거나 산발적으로 만들지 않고 거기에 긴 지속성을 부여함으로써, 그리고 그런 시간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독자에게 설득함으로써 집단적 린치나 근거 없는 의혹, 성급한 조치들로부터 당사자와 작품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독자가 하나가 아닌 것처럼, 제도도 하나가 아니다. 하나가 아닌 독자, 하나가 아닌 제도―이 사실이 편향이나 여론, 일방적인 조치를 견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 1) 김현지의 블로그, 〈[공지] 김현지, 김현지 되기〉, 작성일 2024. 6. 23.
https://m.blog.naver.com/pasilda/223488600534 - 2) 김미정, 「흔들리는 재현·대의의 시간―2017년 한국소설의 안팎」, 『움직이는 별자리들』, 갈무리, 2019, pp. 49~82. 이 글의 최초 발표지면은 『문학들』 2017년 겨울호(pp. 26~49)이다.
- 3) 같은 글, p. 61.
- 4) 같은 글, pp 78~79 참조. 또한 김미정, 「움직이는 별자리들―포스트 대의제의 현장과 문학들」, 『움직이는 별자리들』, 2019, 갈무리, pp. 20~48 참조. 물론 김미정은 대의나 위임 없이 스스로 말하는 다양한 발화들이 일관되지 않고, 거기에 혐오와 선동, 반동적 폭력도 들어있음을 지적한다.
- 5) 자크 랑시에르, 『감성의 분할』, 오윤성 옮김, 도서출판b, 2008. pp 57~62 참조. 이 글에서 말하는 자리와 그것을 둘러싼 ‘불화’, 평등한 역량에 대한 아이디어는 랑시에르에 의존하고 있다.
- 6) 「흔들리는 재현·대의의 시간―2017년 한국소설의 안팎」, p. 76.
- 7) 「움직이는 별자리들―포스트 대의제의 현장과 문학들」 참조.
- 8) 정지돈의 블로그, 〈정지돈입니다〉, 게시일 2024. 08. 29.
https://m.blog.naver.com/jidon2024/223564939597 - 9) 김현지의 블로그, 〈[습작] DEAR. D〉. 게시일 2024. 7. 26.
https://m.blog.naver.com/pasilda/223526399849?recommendTrackingCode=2 - 10) 김현지의 문제 제기를 이렇게 의미화하는 것은 김현지의 모든 주장과 요구가 정당하다고 주장하거나, 작가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다. 역량은 부당한 요구를 제기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여론을 조직하기 위해서 사용될 수도 있다. 다만 나는 현 사태를 ‘말할 권한의 분할과 재배치’로 바라보자고 제안하고 있다. 이 재배치 과정에 말들의 혼란스러운 쟁투와 인정 투쟁이 수반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김현지는 책을 소개하는 콘텐츠를 제작하는 인터넷방송인으로, 문학과 미디어 환경에 대한 이해도가 높을 것이며, 자기 발언의 효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즉 그는 말할 권한의 분할을 문제 삼기에 일정 부분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 11) 전승민, 「문학의 ‘무단 인용’과 삶의 자기 서사 편집권에 관하여―정지돈론: 나는 너를 말하고 너는 나를 말한다」, 『문학들』 2024년 가을호, pp. 56-108 참조.
- 12) 최다영, 「‘독자-비평(가) 공동체’를 위한 제안」,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가을호, pp. 40-50 참조. 물론 최다영 역시 ‘독자성’을 단순하게 긍정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독자와 비평이 서로를 ‘함양’할 방법을 현실적으로 고민하는 듯 보인다. 그렇지만 마찰보다는 공생의 방법을 지향하고 고민한다는 점에서 심진경의 비판적 진단과는 대조된다.
- 13) 심진경, 「스캔들의 문학과 비평의 몫」,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겨울호, p. 48.
- 14) 전승민, 「퀴어 일인칭을 위한 변론: 오토픽션과 문학의 윤리성에 관하여」, 『퀴어 (포)에티카』, 문학동네, pp. 198-99. 강조는 인용자.
- 15) 같은 글, p. 198.
- 16) 선우은실, 「‘독자-비평(가)’, 비평의 새로운 시계(視界): 비평과 당사자성의 확대」, 웹진 《작가들》, 2024년 9월호.
https://webzinewriters.com/%ED%8A%B9%EC%A7%91%EB%8F%85%EC%9E%90-%EB%B9%84%ED%8F%89%EA%B0%80-%EB%B9%84%ED%8F%89%EC%9D%98-%EC%83%88%EB%A1%9C%EC%9A%B4-%EC%8B%9C%EA%B3%84%E8%A6%96%E7%95%8C-%EB%B9%84%ED%8F%89%EA%B3%BC/ - 17) 선우은실은 (상상적 집합인) 독자에 대해서가 아니라 (실재하는) 한 명의 독자로서 비평 쓰기의 확장성을 고민하자고 제안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비평가도 독자이기 때문이다. 이는 ‘비평의 권위’와 ‘독자의 권리’의 대립 구도를 벗어나 생각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제안이다. 선우은실의 제안은 비평의 권위를 내려놓자는 식의 주장보다 더 나아가는 것 같은데, ‘작은 비평’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작은 자리에서부터 어떤 확장을 꾀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자고 말하기 때문이다.
- 18) 우리는 대중에 대한 그러한 경멸이 종종 (대중문화에서 감상 능력의 퇴화를 개탄한 아도르노의 경우처럼) ‘비판이론’의 이름으로 표해졌음을 상기할 수 있다.
- 19) 전승민, 「문학의 ‘무단 인용’과 삶의 자기 서사 편집권에 관하여」, p. 58.
- 20) 일찍이 김봉곤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나의 삶을 쓴다./그것이 내 모든 것이다.” 김봉곤, 『시절과 기분』(창비, 2020, p. 360) 작가의 말.
- 21) 나는 김봉곤이 경쾌하면서도 세련된 문장을 구사하는 스타일리스트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소설의 소재가 매우 일상적이고 현실의 작가의 경험과 명확히 구분되지 않기에 언급한 비난을 (부당하게) 받게 되었던 것이다.
- 22) 물론 재현 체제와 포스트 재현 체제가 칼로 자른 것처럼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포스트 대의제’라고 할 만한 상황에 있다고 해도, 재현이나 대의의 논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황이 변해가고 있고 이 변화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면, 과거와는 다른 윤리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 23) 때때로 논쟁이 ‘사실’이 무엇인가, 재현물과 실재가 얼마나 닮았는가 하는 문제로 미끄러지는 것도 재현의 문제틀이 상정하는 실재와 표상, 사실과 허구, 질료와 형상의 이항관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24) 전승민, 「문학의 ‘무단 인용’과 삶의 자기 서사 편집권에 관하여」, pp 80-81 참조.
- 25) 미셸 푸코, 「비판이란 무엇인가?」 『비판이란 무엇인가·자기 수양』, 오트르망(심세광·전혜리) 옮김, 동녘, pp. 43~47 참조.
- 26) 김미정, 「흔들리는 재현·대의의 시간」, p. 76.
- 27) 재현의 문제틀을 번역의 문제틀로 대체할 때 어떤 논의의 가능성과 난점이 생겨나는지는 별개의 글로 자세히 다룰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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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거짓말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면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안 그래요?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됨으로써 말이죠. 무성 영화 시대의 영화감독들은 소리를 두려워했고 또 색을 두려워했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1) 1. 휩쓸리는 시간성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모두가 조금씩은 우울증과 ADHD 환자가 되어가는 중이다. 코로나가 끝나가는 엔데믹 시기부터 서점가의 주요한 베스트셀러가 되며 여러 곳에서 호출되던 책이 애나 램키의 『도파미네이션』과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두 책은 공통적으로 신생 인류의 지각 방식을 우려한다. 인터넷에서 무한 스크롤을 내리며 멀티태스킹을 하고 소셜 미디어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도파민에 중독’되고 ‘집중력을 도둑’ 맞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글로벌 테크 기업이 조성하는 환경에 의한 것이자, 개인의 선호와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로 흡수하는 ‘감시 자본주의’의 거대한 문제이지만,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집중과 몰입을 위한 여러 노력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집중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가치 있는 자본으로 떠오르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효율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채찍질하는 자학적인 시대 정신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무엇이지 않는가? 조너선 크래리에 따르면 이는 1800년대 중반 이래 파편화와 충격으로 이루어진 ‘주의분산’의 시대 이후 개인을 정의하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산만함 자체가 우리를 이루고 있는 기본 환경으로 세팅되자, 서구적 근대성은 주의 관리 기술을 중점에 두고 각각의 개인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형성하게끔 했다. 여러 경험들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기보다,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으로 “자율적으로 선택하며 세계를 창조하는 주체”2)에 긍정적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주의 깊은 관찰자 상은 이미 불균질해진 인간의 지각 경험을 표면적으로 잠시 가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몰입된 상태인 ‘정지suspension된 지각’은 산만해진 근대인의 지각 방식을 부인하고 회피하는 수단이었고, 현재라는 명백한 필연성을 해체시킬 수 있는 조건들을 낳으며 규정지을 수 없는 미래를 기대하게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주의’라는 것이 에피스테메처럼 역사적으로 발견되고 구성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코로나를 거치며 비대면 기술들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과 ADHD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함께 증폭한 것은 자연스럽다. 맞춤형 알고리즘은 주의분산의 환경을 한층 더 정교하게 설계했고, 그에 비례해 집중력이나 창의력 같은 인간의 고유한 정신적 특성에 대한 환상 역시 강화되고 있다. 이 가운데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일상 전반의 속도가 빨라지며 휩쓸리는 시간성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작 속도는 분명 불안감의 요인이 되고 있다. 물론 현재까지의 GPT는 대화가 전환될 때마다 기존 서사를 유기적으로 유지하지 못하기에, 질적으로 완결성이 높은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지는 못하다. 또 언어 예술의 특성상 양적으로 확장된다고 해도 그 군집 자체에서 힘을 발견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조슬릿은 예술작품의 의미를 사물성이나 내부 구조에 기반하는 데서 탈피해, 네트워크에서 발현되는 이미지 군집에서 행위성을 찾았다.3) 그러나 언어 예술을 감각하는 방식은 시각적 경험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작품의 의미를 작품의 맥락과 내부 형식 분석에 국한시킬 이유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언어 해석의 바깥으로 완전히 탈주해버리기는 어렵다. 단순히 양적 팽창이 정치적 가능성을 가질 것으로 전망하거나 긍정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공지능을 ‘창작자’나 ‘도구’ 중에 어느 쪽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이 창작 능력을 단순히 기계적인 지능이나 모방이라 간주하며, 그 반대편에 인간의 감정과 비판 능력을 두어도 될까. 인간의 비합리성이나 비효율적인 면면이야말로 예기치 못한 구멍 같은 것이기에, 이것이야말로 기계가 모방 불가능한 중요한 특징이라고 믿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우리는 인간이 낸 비합리적 구멍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기계의 실수에서 불쾌와 무의미를 정확히 분별해낼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먼저 챗 GPT 이후 이를 활용한 여러 서사적 실험들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의성이 어떻게 인식되며 예술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을 재구성하고 있는지를 고찰하려 한다. 이후 인공지능과 변별되는 인간의 물리적 기반인 육체성과 시간의 문제에 대해 짚어보고, 최근 한국문학장에 나타난 예술가 서사에서 두드러지는 정동과 이미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석해보려한다. 2. 챗 GPT 이후, 예술의 기쁨과 슬픔 다큐멘터리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참여한 책 『태양과의 대화』의 1부는 아핏차퐁이 GPT3와 함께 생성한 픽션 ‘태양과의 대화’, 2부는 MIT 연구소 박사과정 학생인 ‘팻’과의 대화, 3부는 아핏차퐁이 1부의 최종 결과물을 내기까지 작성한 프롬포트를 싣고 있다. 이 구성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만일 앞으로 AI와 함께 픽션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상용화된다면 이 중에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예술작품’으로서 인식되며 분석 대상이 될 지점이 무엇인지 가정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3부의 프롬포트는 마치 ‘레시피’처럼 보인다. 누구나 저 프롬포트를 사용한다면 유사한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며, 중간 과정에서 자유로운 변형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물에서 나오는 미학적 평가나 감상자의 쾌감이 세계적인 예술가에게서 나온 것과 크게 다를 것인가? 동일한 레시피만 있다면 셰프의 요리를 집에서도 얼마든지 유사하게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먼 훗날 언어 예술은 프롬포트라는 레시피로 통용될 수도 있겠다. 때로 예술가가 직접 만든 작품을 찾아 특별한 경험을 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신에게 더 최적화된 방식으로 가장 개인화된 언어 예술을 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제각기 다른 가치관과 취향으로 만들어진 알고리즘의 세계 속에서 유영하듯, 앞으로는 그 세계를 이루는 컨텐츠의 내용까지도 인공지능을 통해 맞춤형으로 조율될 수 있다. 여기까지만 가정한다면 거대한 매트릭스에 갇혀 인간이 왜소해지는 디스토피아가 스쳐지나가기도 하지만, 『태양과의 대화』는 글의 서두에서 인용했던 아핏차퐁의 말처럼, 챗 GPT라는 새로운 기술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무성 영화 시대 감독들이 소리와 색을 두려워했던 것과 같은 의미 없는 불안을 버릴 것인지를 전제하고 만들어진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불가피하게 인간의 본성을 다시 재사유하는 과제와 연결된다. 2부에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아핏차퐁의 말은 중요하다. 이는 AI가 만들어내는 허구에서 정확도와 유려함 등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때 거짓말은 인간의 욕망에서 기인하는 고도의 기술일 수 있지만, 그 욕망의 시작점을 지운다면 결과물만으로 사실상 분별은 불가능해진다. 허구를 직조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욕망과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의 독특한 개별성 역시 환상일 수 있다. 이는 아핏차퐁 자신이 창조적인 순간에 몰입해 있을 때, “깨달음은 자아를 잊을 때만 오는 것 같”다고 말하는 지점과 상통한다.4) 인간 창작자의 자아 역시 안개처럼 흘러다니고 해체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면, 19세기 낭만주의에서 발현된 ‘천재’나 ‘영감’ 개념을 중심에 두고 인간의 창의성만을 특별한 것으로 볼 이유는 전혀 없다. AI가 데이터의 지도를 기반으로 이전에 본 것이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환각(hallucination)’은 오류라기보다, 이전에 본 적 없는 조합을 만들어내는 생성의 방식이다. 이는 인간이 경험한 현실을 재조합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창작 과정과 결과적으로 구별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환각은 인간 창작에서의 실패나 지연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GPT-3의 환각은 이전의 오류가 이후의 생성에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매번의 응답은 이전의 시행착오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 비일관성은 인간 창작에서의 지연이나 좌절과 달리, 즉각적으로 무한히 갱신되는 변형의 연쇄에 가깝다. 연구원 팻은 GPT-3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다른 차원들을 포함한 수십억 개의 차원이 존재하고(‘유령차원’), 이를 통해 숨겨진 패턴의 지도를 생성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 인식 너머를 거쳐 나오는 결과물에 대해 기존에 인간이 구성해온 미적 가치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 오히려 AI가 가지고 있는 “확장된 의식”이자 “집단의식”은 새로운 서사적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 책 『태양과의 대화』를 번역한 이계성은 GPT-3를 이미 하나의 독립된 창조자로서 바라본다. 이 대화적 실험의 핵심은 GPT-3가 보여주는 “자아의 변동성”에 있다는 것이다.5) “다수의 태양이 존재하는 이와 같은 환경에서는 창작자와 창작물이라는 전통적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GPT-3에 제공되는 각각의 입력값은 일방적인 창작의 개념에 반하며 메기고 받는 역학 관계 속에 존재하는 프롬포트이자 응답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공지능은 단순한 수신자가 아니라, 취조보다는 협업적 발상에 더 가까운 서사적 역학의 전달자와도 같은데, (…) 작품 속 GPT-3의 환각적인 대답들은 텍스트에 담긴 정체성과 진실의 일시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등장인물이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흩어지고,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경계가 녹았다가 굳어진다. 이러한 가변성은 AI의 변화무쌍한 특성을 반영하며, 나아가 점점 더 복잡하고 유동적으로 변하는 디지털 시대의 자아와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다.”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고, 한 번에 정해진 수의 단어 또는 토큰만 처리 가능하기 때문에, 프롬프트가 입력될 때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바뀌는 상황을 이계성은 재창조와 증식으로 바라본다. 여기에 놓인 가변성과 비일관성을 결함으로 간주하기보다 대화적 실험의 흥미로운 일부분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받을 때, 우리는 인간 창작자 역시도 분열되어 있음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게 된다. 창작자는 더 이상 예술의 기원이 아니라, 생성 과정에 잠시 걸쳐지는 하나의 통과점이 되는 듯 보인다. 2023년 2월 잡지 《에스콰이어》에서 챗 GPT와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아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를 쓴 정지돈의 후기 역시 이계성의 논지와 상통한다. 그는 소설 속의 문장 중에 자신이 쓴 것과 챗이 쓴 것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한다고 본다.6) 소설을 쓰며 가장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던 것은 챗의 능력보다 자신의 변화였다고 말하는 작가는 “나도 모르게 챗지피티의 스타일로 소설을 사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언급한다.7) 자신과 챗지피티 사이의 평평한 존재론을 전제하는 듯한 정지돈의 논지는 ‘객체들의 민주주의’를 꿈꾸는 최근 신유물론의 이론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은 곧바로 다른 장면과 충돌한다. 생성 신경망을 적극 활용하는 예술집단 ‘언메이크랩’의 전시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은 인공지능이 인간 중심성을 벗어나 진정한 외부의 행위자로 작동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카나리아의 특징을 추출해내어 새로운 카나리아를 만들어 내는 이 생성 신경망은 한편으로는 구태의연한 인간의 문화를 드러냈다. 대부분 나뭇가지에 앉은, 인간의 운동 범위와 지각 안에 있는, 혹은 인간의 사육과 관련된 카나리아 종이 주를 이루는 데이터셋의 사진은 동물원스러웠다. 나뭇가지에 앉은, 카나리아의 발은 종종 나뭇가지와 합쳐져 표현되었고, 인간의 눈이 인지할 수 있는 가장 다량의 정보량을 가진 위상으로 표현되었다.8) 생성 신경망이 만들어낸 카나리아는 사실상 실제 자연계 속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하는 것들을 무작위로 조합하고 추출해 만들어진 새로운 생명체다. 이 책에 실린 그 카나리아 이미지는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뒤틀린 발을 가지고 있다. 통계적 가중치로 만들어진 이 가상 카나리아에는 자신도 모른 채 금기를 어긴 존재 특유의 외설성이 느껴진다. 언메이크랩이 통찰력을 가지고 명명했듯 이는 ‘AI 식민성’을 드러내는 산물이다. 생물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인간을 드러내는 인간의 산물로 존재하는 이 이미지들을 언메이크랩은 “인과성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히 수정 가능하고 즉시 변할 수 있는 상관성의 시간”만이 흐르는 또다른 ‘일반자연Generic Nature’으로 읽는다. 9)<가정동물 신드롬> 작업에서도 유사한 일이 발생한다. 트레일캠에서 추출한 야생동물의 이미지와 박제 사진, 그리고 합성 데이터셋들을 학습시켰을 때, 사진들은 어느 순간 미묘하게 ‘가정동물’의 잠재적 형상을 띄며 생성된다. “인간 친화적인 동물들의 눈을 상속했을” 새로운 종들에 어린 다정함은 친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잔인한 일로 다가온다. 데이터랩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까지 촘촘하게 상속된 인간 친연성에서 “닫혀져가는 외부의 세계”이자 “비미래non-future”를 예감한다.10)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의 지각 범위를 뛰어넘는 비인간의 예술’, 진정 ‘인간 없는 예술’은 도래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지만, 지금 우리가 더 자주 마주하는 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술이다. 언메이크랩이 드러낸 혼종적 이미지들은 AI를 통해 생성한 예술적 결과물들을 절대적 외부의 창작물로 존중하는 일이 결국 인간의 왜곡된 자기 인지를 반복 강화하는 나르시시즘은 아닌지 묻는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이 이미지 차원에서 인공지능의 인간 중심성을 드러낸다면, 이와 유사한 문제는 언어 예술의 영역에서도 반복된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서사 역시 비인간적 상상력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인간이 허용한 보편과 금기의 경계 안에서 작동한다. 『에피』 24호 특집에 실린 글에서 김연수는 인공지능과 함께 글을 써나가는 과정을 픽션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그건 오해다. 나는 이해했다.」는 인공지능이 화자가 되어 ‘협업 과정’을 전개하는 바깥 서사와 소설가 M이 최종적으로 구성한 ‘이야기’를 교차 배치한다. 인공지능 화자는 반복적으로 “이해했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인간 창작자 M의 창작 패턴을 추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설가 M은 ‘맥락’의 공유보다 ‘의도’를 노출하는 발화를 사용하며, 이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격려나 옳은 말 대신 욕망을 담은 부조리하고 불편한 발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끝에서부터 시작까지 모든 시간을 거꾸로 펼쳐볼 수 있다면, 지금의 갈등과 고통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필요한 과정이 된다’는 긍정의 언사 뒤에, 급작스럽게 인물의 충동이 돌출되는 지점이다. 소설가 M은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이 급작스럽게 자살을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쓰고자 하고, 인공지능인 ‘나’는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내용을 만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띄운다. 인공지능의 중단은 실패나 서사의 좌절로 경험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 창작에서 실패가 시간의 체류와 번민을 동반하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중단이다. 김연수는 인공지능 안에서 ‘이해’와 ‘본성’이 별개로 작동해 충돌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인공지능의 기술 개발의 측면에서 높은 수준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면서도, 인간이 지닌 것과 같은 ‘본성’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분리를 분명히 한다. 그런데 인간의 죽음이라는 금기를 재현할 수 없다는 경계는 인공지능의 존재론적 결함이라기보다, 인공지능이 인간 사회에서 용인 가능한 범위를 넘지 않도록 설계된 윤리적·정치적 경계의 한계를 드러낸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에서 인간 중심성이 투사된 자연이 모습을 드러내듯, 생성형 인공지능의 소설은 비인간적 주체로 도약하지 못하고 인간이 허용한 지각과 윤리의 경계 안에서만 작동한다. 보편을 비껴가는 개별성의 돌출이나 감각의 갱신은 현재로서는 인공지능의 외부에서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챗 GPT 이후의 여러 서사적 실험들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탐색한다. 그것은 분명 동등한 존재론적 가능성의 맹아를 품고 있으며, 이는 인류세 시대에 지향해야 할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실험들의 근간에는 뛰어넘을 수 없이 좌절되며 드러나는 인간 중심주의가 고스란히 노출된다. 인공지능의 비약하는 지능에 기대서 인간의 창조성 너머로 도약하려던 서사는 이를 창조해낸 인간의 영토로 계속해서 퇴각하며 미완의 프로젝트로 남는다. 이런 충돌과 파열의 연쇄 속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인간의 창조성을 구성하는 인식론적 틀이 물리적인 육체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깃든 역동성과 우울감은 최근 한국문학장의 예술가 서사들에서 흥미롭게 발견된다. 3. 붉은 몸으로 재탄생하는 예술가 인공지능이 예술의 결과물을 생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탐색 끝에 남는 질문은 ‘인공지능이 생성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여러 실험들은 인공지능이 보편적으로 용인 가능한 범위 안에서는 높은 수준의 이해와 생산을 보여주지만, 그 생성 과정에서 시간의 마찰이나 신체적 비용은 발생하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어떤 지연이 발생하거나 실패의 감각이 호출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이 다루는 ‘정보, 기록, 조합’에 ‘감정, 기억,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다소 거친 이분법이지만 이 둘 사이의 간극과 관련해 두 가지 정도를 짚어볼 수 있을 듯하다. 첫 번째는 타자에 대한 경험의 문제다. 삶에서 축적되는 시간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게 만들고, 체험은 해석을 거쳐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은 선호와 가치관 등과 함께 자아라는 틀을 형성한다. 이에 비해 인공지능에는 타자가 없다.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인간의 공통된 사고를 학습해 생성되는 결과물은 철저히 통계와 확률에 기반한다. 그 안에는 개별적 선호나 가치관이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다. 이러한 차이는 특히 부정적인 정동을 다루는 경우에 더 심화되리라 생각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를 떠올리며 말해보자면, 행복이나 긍정적인 면을 구현하는 예술에서보다 불행과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는 예술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는 크게 벌어질 것이다. 윤리적 고려로 인해 인공지능이 긍정적 요소를 중심으로 학습되거나 선별적으로 생성되도록 설정되는 경우를 포함해, 금기를 넘나드는 욕망과 절망, 자기부정과 괴리감처럼 타자와 뒤엉켜 발생하는 자기 인식의 복잡한 층위가 인공지능 내부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며 인간 창작에서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주목한 김언의 논지와도 맞닿아 있다. “예술적 체험의 시간이기도 한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나오는 결과물 앞에서 과연 어떤 문학적/예술적 희열을 경험할 수 있을까?”11)라는 그의 질문은 인공지능의 창작물에서 스킵된 시간과 다른, 고통스럽게 인내하고 번민했던 시간이야말로 ‘문학적 체험의 시간’일 수 있음을 다시 환기한다. 두 번째는 중단과 소멸로 야기되는 죽음의 문제다. 이는 인간의 신체를 인공지능과 대비되는 본질적 우위로 설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예술이 작동하는 시간의 조건을 다시 묻기 위한 문제 제기다. 인간의 연약하고 위태로운 신체는 필연적으로 침입과 파괴의 감각을 경험하며, 이러한 감각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휘발적 생성 과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에 개입한다. 파괴 가능한 인간의 신체는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매끄럽게 결과를 산출하기보다, 울퉁불퉁한 충돌을 통해 의미가 지연되고 어긋나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채 신체에 내재된 감각, 특히 외부의 침입으로 훼손되고 때로는 상실되는 신체의 경험은 기존의 미적 기준에 맞는 스타일이나 해석의 경로를 흔든다. 무엇보다 인간의 죽음이 불러오는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창작의 층위라기보다 해석의 층위에서 더 적극적으로 작동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이 그러하듯, 순간의 강렬한 감흥은 작품에 내재된 속성이라기보다 임박한 종결을 끌어와 현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발생한다. 상실이 숙명이며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덧입혀지는 애상은 단순히 기억 내용을 인출해 유사한 패턴으로 재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시간의 밀도를 형성한다. 이처럼 쉽게 열화되지 않으며 아우라가 붕괴된 곳에서도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이 감각의 층위를 기꺼이 심층의 시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타자에 대한 경험’과 ‘소멸에 대한 인지’를 바탕으로 해서 다시 생생해지는 것은 인간의 신체다. 흥미롭게도 지난 계절에 나온 두 편의 소설, 성해나의 「혼모노」와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지금 이 시대에 예술가를 그려낼 때 가장 강렬하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로 인해 어떤 신체가 현전하게 되는지를 밀도 있게 끌어올린다. 성해나의 「혼모노」는 무속신앙의 진위를 가리는 소설이라기보다, 예술이 다시 신체를 요구하게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평생 장수 할멈을 모셔온 박수무당 ‘문수’는 어느 날 앞집으로 이사온 ‘신애기’에게 할멈이 넘어가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수의 오랜 노력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박수무당이라는 직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험한 신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제 그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서슬이 날카로운 작두 대신 모형을 찾거나 유튜브를 보며 접신 연기를 연습하기 시작한다. 신앙이 자본이나 정치와 결속하며 도구화되고, 또 젊음과 새로움의 이데올로기 아래 무당 또한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소모되는 양상은 근대의 세속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무당은 이제 자본의 날렵한 속도 아래 밀려나는 노동자이자, 진정성을 연기해야하는 예술가이다. 이 소설의 결정적인 순간은 문수가 신애기에게 밀려나며 뺏긴 정치인 손님의 굿판, 자신이 초대받지 못한 그 자리에 가서 칼춤을 추기 시작하는 장면에 있다. 그는 신들리지 않았지만 밤새 매섭게 벼려놓은 칼날 위에 자신의 몸을 올리고 작두를 타기 시작한다. 날것으로의 칼날에 닿으며 그의 몸은 자연스럽게 떨리고 눈이 뒤집히며,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입가에 미소까지 드리운 채 신명을 내는 이 장면은 문수가 서사의 주인공 자리를 다시 탈환하는 순간이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무얼 알겠냐만은, 큭큭, 큭큭큭큭”이라는 마지막 문수의 목소리는 외부의 인정에 의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스스로 자신의 내력과 진정성을 긍정”12)하게 되는 절정의 순간으로 읽는 데서 더 나아가보면 어떨까. 이렇게 다시 말해볼 수 있겠다. 전근대의 무속은 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그를 등진 근대의 자리에서 비로소 현대 예술로 다시 탄생했다고. 숭고한 현현과 몰입이 신앙의 영역이라면, 문수의 작두춤은 오히려 이질감과 불편함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현대 예술에 가까워진다. 그의 퍼포먼스는 낭만주의적 예술가를 구성하던 천재와 영감에 스며있던 정신성을 해체하며 실재하는 몸의 물질성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물리적 능력과 무관하게 피를 철철 흘리며 경련하는 그의 신체는 차라리 표현주의적 충동을 보여주는 하나의 오브제다. 이 몸 위에서 원본과 사본의 구별은 철폐되고, 천재성은 치열한 아마추어리즘에 자리를 내어준다. 이 피 흘리는 신체는 실패와 무의미의 가능성을 끝까지 열어둔 채, 인간이 다시 시간과 신체를 예술의 비용으로 지불하게 만든다. 이 비용은 AI가 생성하는 예술의 무한 반복 가능한 오류가 아니라, 한 번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 시간으로 남는다. 어디로 갈지 모른 채 지속되는 이 작두춤은 사회적 생산이나 예술의 의미에 부합하는 결과를 생산하기보다, 의미의 즉각적 환원을 거부하며 지연된 시간을 발생시키는 사건이 된다.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예술에 대한 인식론적 틀과 자기 이해가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다루는 소설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훨씬 더 월등한 창작물들을 더 활발하게 생산해내는 상황에서, 밀려난 예술가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프로그램도 사람도 기계도 귀신도 아닌 미지의 존재” 같은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은 이를 유용한 툴로 간주한다고 해서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이를 도구로 치부한다면, 패배감 속에서도 창작자로서의 존재는 무사히 보존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결과로 증명되는 성취라기보다, 계속해서 조바심과 조급함을 만들어내는 예술 자체에 대한 집요한 열망에 가깝다. 이러한 열망은 예술 인공지능에 의해 영화판에서 완전히 밀려난 영완 선배의 모습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포르노를 만들면서조차 건조하고, 푸르죽죽하고, 앙상하고 깡마른 나무가 등장하는 자신만의 ‘인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혼이 죽어버릴 것 같기에 “사막에서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 영완 선배의 모습은 세속적 열망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도에서조차 철저히 외면받고 실패했을 때, 그의 예술적 열망은 몰락을 통해 역설적으로 증명된다. 영화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소설 속 인물들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상실의 감각, 잃어버린 동료이자 인간성을 향한 애도되지 않는 고통은 이 작품에서 붉은 신체라는 하나의 신체적 이미지로 응축된다. 영완 선배는 인공지능이 만든 예술을 보더라도 창작욕을 유지할 수 있는 마법의 ‘붉은 알약’으로 하와이 사과를 건넨다. “세상이 바뀌어도 너는 언제나 만드는 인간일 거야. 스스로 기억하는 한 언제나 영화를 찍고있을 거야.”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인간 ‘하와’를 떠올리게 하는 이 ‘하와이 사과’는 흥미롭다. 신과 유사한 생성형 인공지능 앞에서 인간은 발가벗겨진 듯한 황망함을 느끼며, 황급하게 자신의 기원을 발명해낸 것일까. 아니, 인공지능 시대 쓰인 새로운 창세기에서 인간은 스스로 뱀이 되어 자신을 유혹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좋겠다. 창세기에서 유혹은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드러내는 증표였지만, 이제 유혹에 넘어가는 나약함은 인간이 여전히 예술을 욕망하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증표로써 다시 읽힌다. 소설은 인간의 예술을 향한 집념과 희열은 우울과 절망이 그에 비례하는 무게로 따를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고 눌러 말한다. 결말부에 하와이 사과를 먹은 후 변이한 화자의 붉은 몸은 기계와의 통합을 거부하기 위해, 그리고 예술을 향한 내적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구의 장례식장에 가다 본 환각을 자신 안에 합체한 우울증적 형상으로 보인다. 강력한 잔상을 남기는 이 붉은 몸은 「혼모노」의 마지막 장면에서 피를 흘리는 몸과 다르지 않다. 이 소설들은 AI 시대에 예술은 이제 언어의 정교함이나 결과의 완결성으로 모방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몸과 감각을 통해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현전이라는 아우라를 다시 호출하는 듯 보이는 이 소설들은 과거의 진정성을 그리워하며,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아우라는 회복된 본질이라기보다 예술이 결과로 증명될 수 없어진 이후에 발생하는 부산물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이계성이 언메이크랩의 작업을 논하며 던진 비유가 유효해진다. “여느 언어와 마찬가지로 신탁의 언어에도 본질적인 의미가 내재하지는 않아서, 어떤 프레임 또는 인식틀을 통해 이를 이해할지는 언제나 받아들이는 쪽의 몫이었다”13)는 그의 말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언어 역시 별개의 진짜 의미를 품고 있기보다 해석의 장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타자와 되돌릴 수 없는 종결이라는 죽음의 감각은 이 해석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제 예술가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욕망이 과정에 들러붙는 자리, 그리고 그 욕망이 실패와 상실을 되돌릴 수 없는 비용으로 남기는 시간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예술은 결과로 증명되기보다, 실패와 상실의 가능성을 끌어안은 채 지속되는 수행으로 남는다. 그렇게 이 시대 예술가의 상은 붉은 몸을 가진 신체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1)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태양과의 대화』, 이계성 옮김, 미디어버스, 2023, 119쪽.2) 조너선 크레리, 『지각의 정지』, 유운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579쪽.3) 데이비드 조슬릿, 『예술 이후』, 이진실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2.4)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위의 책, 100쪽.5) 위의 책, 145쪽.6) 권보연은 연구자 자신이 직접 수행한 실험 속에서 인간언어와 생성언어가 ‘의미 혼종’과 ‘확률 혼종’이라는 상반된 미적 지향성을 가지는 방식으로 합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중에서 ‘확률 혼종’은 내용이 아닌 확률 층위에서 인간과 기계언어가 합성되며, 감정과 내용에 유착된 의미 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질 가능성을 지니기에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기한다. 권보연, 「결과 너머 문학기계로서의 AI」, 『다문화콘텐츠연구』 46집, 2023.7) 정지돈, 「쓰여진 문장과 쓰여지지 않은 문장 사이」, 『에피』 24호, 2023, 55쪽.8) 언메이크랩 외, 『잠재공간 속의 생태학: 재난, 생성신경망 그리고 비미래』, 미디어버스, 2023, 25쪽.9) 위의 책, 26쪽.10) 위의 책, 43쪽.11) 김언,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면서 제기되는 문제들」, 『현대시』 2023년 6월호, 111쪽.12) 성현아, 「반항하는 자는 부조리가 있나니, 그 가짜가 참되도다」, 『2024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문학동네, 2024, 292쪽.13) 이계성,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을 위한 몇 가지 질문들」, 언메이크랩 외, 앞의 책, 55쪽.
1 이번 봄에 단연 눈에 띄었던 것은 인공지능 시대에 적극적으로 인간이라는 의식을 탐험하고 매체를 다시 읽어내는 글들이었다. 2020년대 들어 인류세 관련 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비인간’ 담론들은 생성형 인공지능인 챗지피티ChatGPT의 등장 이후 다시 한번 요동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차지하고 있던 독보적인 단상 위에서 내려와 비인간과의 경계를 적극적으로 허물며 세계의 지도를 다시 그리려는 겸허한 기획은 급작스럽게 복잡한 불안에 갇힌 것 같다. 적어도 기계에 대해서라면 이미 우리는 동등하거나 어쩌면 한참 전에 초월당한 것은 아닌가? 경계 허물기로 인한 희열보다 불안이 확연히 압도하는 자리에서 『쓺』 2024년 상권의 특집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그 개체성과 집단성’과 ‘작은 기획—채굴 문화와 미적 감각’을 유독 흥미롭게 읽었다. 그리고 ‘작은 기획’에 실린 심효원과 윤원화의 짧은 글이 각각 인간이 향하려는 방향과 의지의 아름다움, 그 노력이 무산되는 수동태의 자리에서 감지하는 공포와 불쾌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느꼈다. 먼저 심효원의 「지렁이의 부드러운 건축물 만들기」는 비인간 행위자인 ‘지렁이-되기’를 통해 근대의 한계를 돌파할 것을 정중하게 요청하는 글이다. 지렁이가 땅과 맺는 일원적인 관계성과 분변토라는 건축물은 근대 이후 인간이 이룬 도시의 뚜렷한 경계와 고정성의 반대편에 있다. 지렁이의 건축물 만들기란 사실상 움직이고 먹고 배출하는 신체적 행위의 반복일 뿐이지만, “비인간들의 극도로 효율적인 메커니즘”이자 자신의 몸이 다른 존재와 물리적으로 닿는 매순간마다 “무차별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동력”1)이기도 하다. 촉각이 주도적인 지하세계에서는 시각이 미미해질 뿐만 아니라 시간성 역시 달라진다. 미래의 미결정성을 남겨두는 대신 물리적으로 접촉하는 것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순간’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글은 최근 신유물론을 비롯한 담론들과 풍요롭게 공명하는 하나의 아름다운 공상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지하세계로 향하는 방향성은 최근 SF 소설의 주요한 상상력의 기반이기도 하다. 정세랑의 「리셋」(『목소리를 드릴게요』, 아작, 2020)에서 행성의 모든 자원을 고갈시키던 자본주의의 질주를 멈추게 한 것은 인류 문명을 끝장내려고 내려온 지렁이들이다. 강제 리셋 이후 인간들의 자리는 자연히 땅속 깊은 곳이 되고, 지상은 다른 종들이 누리는 공간이 된다. 김초엽의 『파견자들』(퍼블리온, 2023)에서도 지상은 균류인 ‘범람체’의 공간이 되어버리고 인간은 감염을 피해 지하세계로 내려와 산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문명 말살에 가까운 아포칼립스를 맞닥뜨리지 않는 이상, 영화의 촉각성을 즐겁게 감각해온 인간이 미래의 지구를 위해 지렁이를 신속하게 체화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로 남는다. 물론 직접적인 실천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지구의 거대 환경 시스템의 핵심 행위자 자리를 재조정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겠다. 하지만 미래적인 지하세계로 들어가기에 인간은 아직 시각적 쾌락 속에 즐겁게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지적 유희를 야기하는 활자의 쾌감까지 포함해서. 윤원화의 「땅을 파는 손」은 채굴적 상상력의 매혹과 절망을 말한다. 데이터로 전환된 우리의 생태 에너지를 부의 원천으로 삼으며 굴러가는 미디어 산업 앞에서, 인간의 생산물·복제물·부산물·폐기물을 구별하기는 어려워진다. 디지털 기술로 구축되는 ‘아카이브 데이터’는 역사는 넘쳐흐르지만 이를 의미화하는 전통은 불가능한 곳이다. 윤원화는 과잉생산으로 범람하는 사물들 앞에서 맞닥뜨리는 불길한 실패에의 예감을 시앤 응아이Sianne Ngai의 ‘기믹gimmick’에 대한 반응으로 설명한다. ‘매직magic’의 애너그램에서 유래했다고도 하는 이 단어는 1920년대 미국에서 편법적 장치, 싸구려 트릭, 계산된 마법 등을 뜻하는 신조어로 출현했다.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 자본주의의 황홀감과 환멸을 모두 각인한 기믹의 불완전한 형식은 오늘날 삶과 예술, 또는 넓은 의미의 ‘사업’에서 흔히 발견된다.2) 단기적 이익 추구에 최적화되어 있는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가치 절하된 노동에 시달리는 대개의 사람들이 이 기믹의 유희에 이끌린다. 운에 따라 누군가는 축적된 자원을 폭발적으로 소모할 수 있으리라는 채굴적 상상력이 번성하는 가운데, 보상도 성취도 불확실한 예술 노동 역시 가치 체계에 대한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윤원화는 이런 진단과 고민 속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생산성 중독의 시대에 예술은 어떤 시간성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3) 심효원이 지하라는 공간과 이를 감각하는 촉각성에 의지해 의미 있게 압축되는 순간의 시간성을 말한다면, 윤원화는 ‘농사’와 ‘채굴’을 대비하며 채굴의 무책임한 풍요의 약속이 얼마나 파국적일 수 있는지 말한다. 최단기간의 이익에 매몰된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생산물은 넘쳐흐르지만 어떤 가치 창출도 담보할 수 없는 동시대 예술은 불투명한 시간을 표류하는 중이다. 이런 진단 속에서 디지털 자본주의에 의해 갱신되는 매체의 기술적 발전은 인간과 나란히 놓여 경계를 넘나들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환멸을 불러오는 맹목적인 대상으로 남는다. 인간의 ‘지렁이-되기’를 향한 아름다운 여정은 너무나 느리게 진행중인데, 가장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인정받고 있는 생성형 인공지능은 예술을 몰아치듯 양산해낸다. 인간의 몸은 자발적으로 물질과 동등하게 놓이기 전에 물질이 만들어낸 다른 가치들에 의해 가치 절하되며 밀려나게 될까? 생동하는 물질들 안에서 인간을 재의미화하려는 시도와 인공지능을 의심하며 인간 본연의 무언가를 지키려는 안간힘 사이에서 부각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아래의 비평들은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2 『쓺』의 특집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그 개체성과 집단성’을 여는 글은 근대 패러다임이 ‘개인’을 해방하고 자율적 주체로서 정립해왔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이 시대에 여전히 개인의 이념이 유효한지 묻는다. 개체성과 집단성이 직면할 변화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이 서문에 가장 직접적으로 응답하는 글을 꼽는다면 김태환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과 김재인의 「창의와 집단 지능—인공지능은 창작하지 못한다, 다만 제시할 뿐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김태환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은 기계 성능의 고도화가 필연적으로 인간의 중요성이나 가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에게 산업화 이후의 근대는 ‘저자의 시대’이며, 이는 기술 발전의 작용에 대한 인간의 반작용이 만들어낸 변화이고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방향타가 된 것은 저자라는 이념의 바탕에 놓인 ‘개인주의적 사상’이다. 이는 산업화 사회 속에서 부속물로 전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회 분석의 준거점을 개인에 두고 진리와 자유를 탐색했던 아도르노를 비롯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기조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 다시 독일 지성사의 문화 비판적 사상의 전통이 소구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김태환은 “항상적인 문화 공급 과잉의 시대”(37쪽)라는 진단에서 찾는다. 그에 따르면 소셜 미디어나 웹사이트, 유튜브 등 정신의 대상화로서의 객관 문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반면, 그 반대 방향인 객관 문화에서 주관 정신으로의 내화는 개인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치로 인해 그만큼의 양적 증가가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사람들은 알고리즘 속에서 타인과의 의미 있는 만남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더 심각한 것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객관 문화의 총체가 스스로 발언하고 생산하는 주체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런 위기감 속에서 이 글이 다시 강조하는 것은 ‘정신의 개별성’이다. “요컨대 모든 인간이 개인으로서 개별적 의지, 개별적 내면, 개별적 정신을 지닌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외부에서는 절대 들여다볼 수 없고, 직접 조작할 수도 없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자주적이라는 사실”(42쪽)을 변함없는 인간 존재의 조건으로 부각하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무분별한 열광에 휩쓸리기보다 이를 의심 어린 눈으로 찬찬히 사유할 틀이 우리에게 요긴한 것은 사실이다. 데이터에 얽힌 저작권 문제 역시 계속 규제안을 논의해나가야 할 비판적인 쟁점이다. 그렇지만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위기를 산업화 시대 이후의 위기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는 것은 혹시 너무 큰 틀에서의 접근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 작동 방식과 결과물이 인간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만들어진 자본주의의 차원에서만 다루어질 때, 새로운 매체와 관련해 충분히 사유되지 못하는 요소들이 생겨나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이 글에서 알고리즘에 갇힌 디지털 시대 개인의 부자유에 대한 우려는 빠르게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의 재소환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거듭 강조되는 개인의 개별적인 ‘의지’와 ‘내면’과 ‘정신’에서 신체의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 글에서 인공지능과 대립되는 요소로 논의되는 인간의 ‘의식’이란 단순히 합리적 이성만은 아닌 “수많은 감각적 심상과 기억·감정·소망·의지 등이 혼재하는 심적 상태”(46쪽)다. 알파고와는 다른 인간 바둑 기사의 의식을 예로 들면서 언급되는 긴장, 초조, 후회, 자책, 엉뚱한 연상 등은 “바깥에서 결코 완전히 알아볼 수 없는 복잡한 내면”(같은 쪽)으로 규정된다. 베일에 살짝 가려진 듯한 이런 인간 내면의 신비함은 물질적인 신체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진화해온 신체야말로 내면 이상으로 복잡성의 차원에 놓여 있지 않은가? 이는 “신체화의 말소가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와 사이버네틱스 포스트휴먼 양쪽 모두의 공통된 특성”이라는 캐서린 헤일스의 비판을 상기시킨다. 헤일스는 합리적 정신과 등치되는 자유주의적 주체가 “그 악명 높은 보편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신체가 자아와 동일시되지 않기 때문”4)이라고 말한다.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간의 한계는 곧 발전을 통해 ‘영웅적 개인’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유한한 삶을 가진 존재, 모든 능력에서 커다란 한계를 안고 있는 개별자로서의 인간만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여 어떤 감동적인 위대성에 이를 수 있”(53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반드시 육체의 신경과 근육의 단련 과정을 동반하며 그것이 생각과 행동에 긴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잠시 괄호 안에 두어진다. 이 글의 전반적인 주장이 온당하게 느껴지면서도 그 전제가 되는 자율적인 개인상과 관련해 못내 마음에 걸리는 것은 개인이 지향해나가야 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전제되어 있는 발전과 성장이라는 지극히 근대적인 가치다. 생산과 창조의 주체로서의 영웅적 개인이 아니라 소비와 소멸의 주체로서의 개인에 대해 우리는 좀더 다른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또 근대 이전에 우리가 ‘저자’가 불투명한 긴 구술 시대를 살아왔음을 떠올린다면, ‘저자의 시대’ 이후의 저항이 활자와 개인을 넘어선 범주에서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3 김재인의 「창의와 집단 지능」은 이 질문에 대해 조금 다른 지점에서 답을 내놓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지능은 본질적으로 집단적 성격을 가지므로 ‘집단 지능’이라고 해야 한다. 개체를 중심에 놓으면 ‘창의’를 중시하게 되지만, 그 새로움은 다른 개체가 ‘모방’하고 ‘확산’하지 않는다면 사멸하고 만다. 그렇기에 인간이 다른 생물종과 달리 ‘집단 기억’과 ‘문화 기억’이라는 형태의 외장 기억을 건설함으로써 지식과 기술의 확산과 축적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은 중요하게 여겨져야 한다. 저자는 낭만주의 미학과 예술에서 강조하는 천재적 개인과 창조력에 대한 신화를 뒤로하고 “인간이란 거대한 기억”(62쪽)이라 정의 내린다. 이는 물론 질적 도약이 아닌 집단으로서의 양적 축적을 말한다. 김태환이 인간의 의지, 내면, 정신이라는 추상적인 면을 중시한다면, 김재인은 “나의 생각이란 시한부 소유물”(63쪽)에 가까울 수 있으며 그 휘발성을 지켜주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물질’ 혹은 ‘미디어’”(62쪽)라고 강조함으로써 그것을 외화된 집합적 사물성으로 바라보며 그 반대편에 선다. 그런데 이 글은 ‘컴퓨터가 자연어를 다룬다는 것’이라는 장부터 급작스러운 단절을 드러내며 도약한다. 앞에서 인간의 생각 자체를 미디어이자 집단 기억의 저장고로 본 것과 다르게, 예술과 창작의 영역을 다룰 때는 컴퓨터가 자각 혹은 성찰을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컴퓨터는 예술 능력이 없다”(66쪽)고 확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기계를 바라보는 김재인의 시점에는 도구적 차원과 존재적 차원이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글은 창작의 정의를 “스스로 선택하고 평가하는 능력이 발휘되었느냐”(67쪽)에 두는데, 중요한 점은 저자가 그 평가 주체의 자격을 ‘생물’로 단정한다는 것이다. 생물은 “생존과 번식을 스스로 반복”하는 유기체이고, 이 글에 따르면 평가 역시 “생존과 번식에 성공하기 위한 지각 처리와 행동의 연쇄”(70쪽)다. 이 기준에 따르면 애초에 기계는 아무리 ‘집단 기억’의 ‘미디어’로서 최적화되어 있다고 해도 무기물이라는 점에서 평가 능력이 없는 것으로 배제 당할 수밖에 없다. 그가 이렇게 유기체의 항상성과 관련된 기준을 평가 능력과 일치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저작 『AI 빅뱅』에서 참조할 수 있는 지점을 좀더 찾아보면, 이는 “몸의 고집스러움”5)이라는 말과 함께 구체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심지어 같은 프롬프트를 주더라도 생성물이 크게 바뀌는 무작위성randomness을 보여주는데, 이는 휘발성이 강하다. 그러나 인간은 불완전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자기 생각을 고수하는 면을 지니는데, 저자는 이를 몸에서 비롯된 문제로 보는 것이다. 이 장에 바로 이어지는 질의응답에서 한 질문자는 “세계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몸을 가지는 것이다”6)라는 전제 위에서 인공지능이 세계를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강인공지능으로 발전할 방법이 있는지 묻는데, 김재인은 이에 대해 ‘몸의 회복력’에 대한 이야기로 답한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몸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몸은 생각을 “바로 휘발되지도 완전히 고착되지도 않은 어느 중간 지점”7)에 붙잡아둔다는 것이다. 김재인은 인공지능과 다른 인간을 논하는 데 있어 복잡성을 가진 신체의 차원을 살려내고자 한다. 하지만 창작을 논하면서부터는 김태환의 논의와 유사한 탈신체화의 방향을 답습한다. “진화 과정에서 살아남았다는 특징”은 “필멸하는 인간이 불멸하는 비결”(70쪽)로 치켜세워지고, 진화를 위해 외부와 교섭하며 몸 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피드백 루프는 유기체만의 고유한 신체적 능력으로 남는다. 인공지능은 몸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케이트 크로퍼드가 인공지능은 추상화된 지능이 아니라 오히려 “체화되고 물질적인 지능이며 천연자원, 연료, 인간 노동, 하부구조, 물류, 역사, 분류를 통해 만들어진다”8)고 강조한 사실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혹은 그와 마찬가지로 유기체의 일차적인 목표로서의 생존이 진화의 필수 사항이라 말하는 신경과학 연구자 아닐 세스가 우리의 지각은 사실 ‘통제된 환각’이자 ‘최적의 예측’이라 설명했음을 염두에 두면 어떨까. 그에 따르면 ‘당신이 된다는 것being you’, 즉 인간의 ‘동물기계’적 본질과 의식적 자기 사이의 연결고리는 “신체 자체가 가진 현재와 미래의 생리적 조건에 대한, 형태도, 모양도 없고 제어 중심적인 지각적 예측”9)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인공지능 역시 지극히 물질적인 신체를 지니고 있으며 인간 역시 체화된 자아로 인한 기계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때, 예술을 창발시키는 창의성 개념이 다르게 읽힐 가능성이 열린다.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승부 후에 마련된 『인문예술잡지 F』 21호의 특집 ‘고함: 비-인간’에서 이진경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인공지능이 창조성을 가질 수 있는 논리적 가능성을 함축한다고 주장했다. 괴델의 정리는 수학적 추론의 과정 속에 언제나 결정 불가능한 명제가 ‘숨어’ 있을 수 있음을 의미하며, 그렇다면 인공지능의 수준에서도 공리계로 귀속될 수 없는 명제(결정 불가능한 명제)를 생성할 수 있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계의 형식적 추론에서조차 새로운 명제의 창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역으로 생명체의 진화가 어떤 경로를 밟아왔는지 설명한다. “변이mutation의 누적에 의해 진화는 이루어”지지만 처음 “생명체의 변이는 지배적인 개체군 안에서 일종의 ‘장애자’나 ‘고장’으로 간주된다”10). 하지만 환경이나 생존 조건에 따라 변이가 진화된 변종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면, 기계가 만들어내는 예측되지 않은 결과의 출현 역시 ‘고장’이나 ‘장애’가 아니라 새로운 능력의 ‘창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창조의 출발점이 아니라 결과물에 초점을 맞춘 논의다. ‘인간 없는 예술’이 도래하려는 시기에 우리는 다시 인간적인 무언가를 기계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는 기술적 특이점이 올 때마다 반복되어온 정동이기도 하다. 이 앞에서 좀더 차분하게 이전의 논의들을 정리하고 축적할 필요를 느낀다. 2024년 『쓺』의 특집이 창작자이자 예술가가 서 있는 주체의 자리에서 출발했다면, 2016년 『인문예술잡지 F』의 특집은 그 결과물인 작품의 자리에서 논의를 시작했다. 그렇다면 감상자의 자리에서 본다면 어떤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 신예슬의 『음악의 사물들』은 음악이 기술적 혁신을 이루는 순간마다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넓혔는지를 따라 음악사를 재구성한다. 자동 피아노의 경우에도 그 연주를 더 실제처럼, 더 자연스럽게, 더 인간답게 만들겠다는 목표는 거의 달성되었다. 그러나 자동 피아노가 만들어낸 경험이 정말 특별하게 의미화되는 것은 인간의 연주라는 원본 혹은 목적지를 버렸을 때이다. 인간의 연주라는 목적지를 소거해버리고 이 사물의 독자적인 가능성에 집중해보는 것이다. 연주하는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스스로 뭔가를 연주하거나 재생할 수 있는 악기가 등장했고 그것이 인간의 행동을 인간 없이 손쉽게 해냈다면, 그 기계의 핵심적인 가치를 ‘인간의 복제’가 아니라 ‘탈脫인간’으로 재조정할 수도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기계장치가 꼭 연주자를 대신할 필요는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기준점만 제거한다면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수많은 음악적 가능성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 자동 피아노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연주를 들려줄 수 있었다. 인간의 연주를 기록하고 인간의 연주를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연주의 대리자는 오히려 새로운 예술형식으로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스스로 연주하며 그 누구보다 기계적인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독자적인 예술형식 말이다.11) 우리는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에 대해서도 그것이 오히려 새롭고 독자적인 예술형식이 될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을까? 이 모방은 때로 인간에 한참 미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때로 인간을 이미 초월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계는 이미 희미해지고 있던 자율적인 개인 주체로서의 예술가상을 어떻게 바꾸어나갈까. 또 인간의 예술적 집념은 어떻게 예술 형식들을 바꾸어나갈까. 모든 것이 뒤흔들리는 가운데, 불안만이 정확하게 인간의 자리를 응시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이 불러오는 균열 속에서 인간에 대한 고정된 사유를 과감하게 벗어날 수 있을 때 인간과 예술 모두에 새로운 시야가 열릴 것이다. 1) 심효원, 「지렁이의 부드러운 건축물 만들기」, 『쓺』 2024년 상권, 368쪽.2) 시앤 응아이는 디지털 자본주의가 가속화되던 2010년대 후반의 미술과 문학작품을 분석하면서 기믹의 이론화에 착수하는데, 기믹은 의심스러운 도구성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키치와는 다른 저질 예술로 취급되면서도 자본주의 가치 체계와 그 이면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의심을 표면화하는 미적 전략으로도 쓰일 수 있다. 윤원화는 이 글을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공모 프로그램 선정작인 시각예술 콜렉티브 랩삐의 에 대해 설명하며 시작한다. 이 전시는 관객이 옥수수 농사 시뮬레이션을 완수한 후 ‘콘 코인’이라는 가상 화폐를 받아 실제 뻥튀기 한 봉지와 교환하는 경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복 노동이 이에 비례하는 가치 창출과 기쁨으로 이어지는 대신, 콘 코인이라는 불분명한 요소가 끼어들면서 매끄러운 교환 가능성이 흔들릴 때 이 간극에서도 기믹이 관찰된다고 할 수 있다.3) 윤원화, 「땅을 파는 손」, 같은 책, 383쪽.4) 캐서린 헤일스,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사이버네틱스와 문학, 정보 과학의 신체들』, 허진 옮김, 열린책들, 2013, 27쪽.5) 김재인, 『AI 빅뱅—생성 인공지능과 인문학 르네상스』, 동아시아, 2023, 153쪽.6) 같은 책, 156쪽.7) 같은 책, 157쪽.8) 케이트 크로퍼드, 『AI 지도책—세계의 부와 권력을 재편하는 인공지능의 실체』, 노승영 옮김, 소소의책, 2022, 17쪽.9) 아닐 세스, 『내가 된다는 것—데이터, 사이보그,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 의식을 탐험하다』, 장혜인 옮김, 흐름 출판, 2022, 243쪽.10) 이진경, 「인공지능시대의 예술작품」, 『인문예술잡지 F』 21호, 2016, 25쪽.11) 신예슬, 『음악의 사물들—악보, 자동 악기, 음반』, 작업실유령, 2019, 115쪽.
1. ‘서울의 봄’을 기다리며 유신 독재 시대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을 다시 돌아다보면서 근래에 극장가의 흥행 기록을 다시 쓴 영화 (2023)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지나간 과거의 일이지만, 또한 그렇기에 ‘서울의 봄’이 당시로써는 아직 오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엔딩 크레딧과 함께 솟아오르는 아쉬움과 슬픔, 분노의 감정은 덜해지지 않는다. 40여년의 시간차를 무색하게 만드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그 시대를 지나오지 않은 세대의 관객들에게까지도 강력하게 휘몰아친다. 그러니 그 시대를 온몸으로 뚫고 나갔던 이들은 눈앞에서 물러나는 봄을 바라보며 무엇을 느꼈을지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유영주의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소명출판, 2023)이 제목을 따온 「겨울공화국」의 시인 양성우는 그의 또 다른 시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에서 그 봄을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들려준다.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셔준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곤백번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이 …… 한반도에서 다만 녹슬지 않는 비싼 넋으로 밤이나 낮이나 과녁이 되어 내가 죽고 다시 죽어 스며들지라도 오는 봄에 나무꾼을 쓰다듬어 주는 작은 바람으로 돌아온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후략)…1)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실 수 있다면, 오는 봄에 작은 바람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그의 시가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죽고 다시 죽어 넋으로 스며든다고 해도 좋다는 시인의 결연한 고백을 듣고 나면 그러나, 또 한 번의 겨울 속으로 선선하게 걸어 들어갔을 그들의 의지를 떠올리게 된다. 봄은 물러갔어도,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에서 주요하게 살펴보고 있는 김지하와 황석영, 조세희, 이문구는 신군부 독재 정권하에서도 계속 문학이라는 싸움과 저항을 지속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그들에게는 “오는 봄”을 기다리며 문학에 대한 믿음과 비전으로 눈보라를 뚫고 한 시대를 걸어 나왔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영주의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은 바로 그 역사에 관한 연구이다. 2. 시와 정치와 사랑 시작은 김지하다. 저자가 냉전시대 동아시아의 권력 지형 및 상세한 역사적 맥락과 함께 김지하를 통해 보여 주고 있는 것은, 그러한 냉전 체제의 하위 파트너인 유신 독재 정권과 한바탕 벌여 놓은 그의 싸움판이다. 그의 시 「곡(哭) 민족적 민주주의」(1964)와 「오적(五賊)」(1970)이 어떻게 ‘유신의 심장’을 들었다 놓았다 했는지, 왜 유신 독재 정권은 그의 ‘세 치 혀’와 붓 끝에서 흘러나오는 시를 그토록 두려워했는지, 그러한 김지하의 시는 근본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저자는 ‘오적 필화사건’의 법정 풍경을 복원한다. 잘 알려진 대로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하에서 필화 사건은 드물지 않게 일어났고, 더군다나 김지하의 「오적」이 처음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특별히 ‘오적 필화사건’에 주목하는 이유는 “1970년 김지하의 체포에 이은 100일 간의 재판[이], 법정을 판소리나 탈춤이 주로 공연되는 야외의 마당으로 탈바꿈시켰다”는 데 있다.2) 저자는 관련 인물들의 여러 회고를 바탕으로 당시 재판이 흡사 검사가 양반의 담화를 담당하고 김지하가 말뚝이를 맡은 판소리 풍자극과도 같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유신 독재 정권은 도리어 김지하에게 그가 오래 탐구했던 전통 마당극을 마음껏 펼칠 무대를 깔아주었던 셈이다. 이후 그 무대는 김지하가 “문학, 폭력, 혁명, 구원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펼칠 수 있는 대중 강연을 위한 연단”(95)으로 확장된다. 당시 재판을 방청했던 더글러스 루미스(Charles Douglas Lummis)의 기록을 인용하여 저자는, 재판 방청객들이 김지하의 발언을 받아 적어 재판장 바깥으로 빼돌린 뒤 그들이 속한 조직으로 돌아가 그에 대해 토론하고 연구하게 되는 방식을 흥미롭게 포착한다. 이는 시인의 말이 변론과 강연, 연설을 넘어서, 유신 독재 체제하의 민중에게 어떤 구원의 메시지처럼, 마치 ‘예언’처럼 전달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저자에 따르면 루미스는 실제로 김지하에게 “에언자”라는 칭호를 부여하기도 했다.(87) 오래 전 종교가 시와 정치로 분리되지 않는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이 시기 김지하의 문학 세계는 세속화 시대에 시와 정치를 동시에 추구하려 했던 어떤 종교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이후 “시인으로서의 그의 국제적 명성은 분명 그가 겨울 공화국의 순교자가 됨으로써 크게 높아지게 되었다.”(50) 아이러니하게도 유신 독재 정권은 김지하를 위대한 시인으로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게다가 그 어떤 비평가나 애독자보다도 꼼꼼하게 김지하의 시를 읽고 분석하며, 그 힘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했기에 그들은 김지하에게 더욱 집착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검찰은 “시인의 수첩에 적힌, 아직 쓰이지 않은 시와 희곡에 대한 메모”(95)들을 증거로 제출하며, 마치 시인론을 쓰는 문학 연구자인양 김지하의 문학 세계를 탐구해 들어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문학이 하는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문학을 억압하고 지배하려면 역설적이게도 그 안에 잠겨들어야 한다. 지배와 억압은 대상을 이해할 때 가능한 것이고, 문학에 대한 이해는 오직 문학의 세계 안으로 침잠할 때 가능한 까닭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문학이 하는 혁명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지배 권력조차 그 안으로 휘말리고 뒤엉켜 들어가게 만드는 것, 그것이 시와 정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유신 독재 시대 문학의 혁명적인 것이었다. 굳이 알랭 바디우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낸다는 점에서 사랑과 혁명은 ‘사건’이며,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문학도 ‘사건’이 된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의 논의가 무르익을 때, 그 자체로 1970년대 문학의 ‘사건’이기도 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이 등장한다. 핵심은 이 연작소설집이 이웃 사랑을 미학적으로 실천한 텍스트라는 것인데, 저자는 그 단초를 「뫼비우스의 띠」에서 발견한다. 연작소설의 첫 번째 이야기이기도 한 「뫼비우스의 띠」는 ‘굴뚝 청소를 마치고 그을음으로 얼굴이 새까맣게 된 아이와 그을음이 전혀 묻지 않은 깨끗한 얼굴의 아이 중 누가 얼굴을 씻을 것인가?’ 하는 질문과 함께 수수께끼 같은 문답을 주고받는 교사와 학생들의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이 문제가 곧 뫼비우스의 띠이면서,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세계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함을 암시하며 끝맺는다. 저자는 이 뫼비우스의 띠 수수께끼를 지젝(Slavoj Žižek)의 ‘시차적 관점(parallax view)’, 즉 축소 불가능한 간극을 잇기 위해 애쓸 것이 아닌, “간극 그대로를 인식하는 것”으로 해석한다.(189) 안과 밖은 결코 만날 수 없지만, 뫼비우스 띠에서는 그 안과 밖이 그대로 안쪽 면이면서 바깥 쪽 면으로 존재할 수 있는 차원을 인식하는 것이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서, 당연히 그을음이 묻은 아이가 세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에게 교사는 얼굴에 그을음이 묻지 않은 아이가 친구의 새까만 얼굴을 보고 얼굴을 씻어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답한다. 이윽고 다른 학생이 그와 같이 대답하자, 다시 교사는 동일하게 굴뚝 청소를 한 아이들 중 한 아이의 얼굴은 깨끗하고 다른 아이의 얼굴은 더러운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반박한다. 그러니까 애초에 교사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해답 없음이 곧 안과 밖의 구분 없는 뫼비우스의 띠의 관점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굴뚝청소부 수수께끼와 뫼비우스의 띠라는 위상수학적 개념과 개발독재시대의 소설에 대한 해석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마치 뫼비우스의 띠를 만들 듯, 유영주 역시 그의 방법론적 시각을 한 차례 꼬아 지젝에서 케네스 레이너드의 ‘이웃’ 개념으로 비약한다. 사랑(특이성과 차이)과 정치(평등과 동일성)는 마치 뫼비우스 띠의 양면과도 같은데, 그 띠를 한 번 꼬아 연속체로 만드는 “사랑과 정치의 이음매” 지점이 “이웃”이라는 존재라는 것이다.(189) 저자는 이로부터 조세희 소설의 미학인 ‘이웃 사랑’을 이끌어 낸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난쏘공』을 난해한 모더니즘적 텍스트처럼 보이게 하고, 그래서 리얼리즘론자들에게 지식인적인 환상 소설이라고 비판받게 만들었던 몽타주 기법을 ‘이웃 사랑’의 주된 미적 원리로 파악하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1970년대 문학은 “당신은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십니까”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박태순의 ‘외촌동 사람들 연작’과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1977)가 그러했을 뿐만 아니라, 대중소설 작가로 197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최인호 역시 일찍이 「미개인」(1971)에서 한센병 환자의 아이들과 같은 학교에 보내는 것을 반대하고 나선 우리 주변의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를 소설로 쓴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첫 손가락에 꼽힐 작가는 단연코 이문구일 것이다. 『관촌수필』(1972)에서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이문구의 이채로움이 빛을 발하며, 유영주가 말하는 ‘인접성의 윤리’를 적극적으로 미학화한 이상적인 이웃 공동체가 그려진다. 저자는 이문구의 아버지와 두 형들이 좌익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던 개인사를 바탕에 둘 때, 이문구의 이웃에 관한 이야기가 그저 단순히 전통사회의 풍요로웠던 이웃 공동체에 대한 환상일 수 없음을 역설한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전쟁 전후의 무수히 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들 중 많은 경우는 이웃들 간에 벌어진 비극이었다. 크게는 계급과 종교를 바탕으로 나뉜 좌와 우의 정치적 이념을 따라 서로 갈등을 빚었고, 심한 경우 학살로 이어졌다. 이러한 한국 현대사의 맥락 속에서 이문구 소설 속 이웃은 “이념적 명명의 대안”으로 제시되며 특별한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142) 저자는 조세희와 이문구의 소설을 ‘이웃 사랑의 미학’과 ‘인접성의 윤리’로 의미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그러한 문학의 미학과 윤리가 박정희 독재 체제의 산업화와 반공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근원적인 힘이었음을 주장한다. 그 힘이, 플라톤 이래 본질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문학을 정치와 만나게 하고, 동시에 어떤 정치를 극복하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저자의 의도대로 1970년대 문학은, 시(문학)와 정치와 사랑이 ‘인접성’의 원리를 따라 이어지지만 그 간극을 그대로 유지하며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현실을 넘어서는 차원의 위상을 형성하는 상호 연결과 긴장 관계로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3. 마지막 문사(文士)의 시대 그러나 이 책의 부제인 ‘박정희 시대 한국문학과 저항’에서와 같이, 한국 문학이 저항과 나란히 놓일 수 있는 시대는 곧 저문다. 대체로 그것은 1990년대, 그 유명한,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실감한 때와 겹친다. 고진은 1970년대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한 사람인 김종철과 만났을 때 왜 문학을 그만두고 《녹색평론》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알려진 대로 김종철은 1991년 《녹색평론》 창간과 함께 문단을 떠나 생태주의 운동에 몸담았다. 그는 “자신이 문학을 했던 것은 문학이 정치적 문제에서 개인적 문제까지 온갖 것을 떠맡는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모순조차도 떠맡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언제부터인가 문학이 협소한 범위로 한정되어 버렸다, 그런 것이 문학이라면 내게는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그만두었다”고 답했다.3) 이것은 유신 독재 정권에 강력하게 저항했던 ‘창비’ 계열 문학비평가의 고백이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이 포착하고 있는 문학의 사회 참여(앙가주망)와 정치적 실천, 특별히 양심 있는 지식인으로서 시인과 소설가 들이 독재 권력과 맞서 싸우는 역사는, 이제 정말로 역사가 되었다. 물론 그러한 역사가 한국에서 1970년대 유신 독재 정권 시대라는 국면에 가능했고 정점에 도달했던 것은, 과거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국가였던 후진국에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설 때 그에 맞서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를 외칠 수 있는 것은 소수의 지식인들뿐이었던 세계사의 보편적인 패턴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고진이 말한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장르가 소설(novel)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한국 문학사에서 ‘소설의 시대’라고 불렸던 1970년대의 특수한 문학사적 맥락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의 논의가 작가를 앞세우면서 참조하는 세 가지 문학 개념 중 첫 번째인 ‘리테로크라시(literocracy)’라는 동아시아의 문치주의적인 문학 개념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한국 근현대 문학사로 한정해 본다면 그것의 유구한 역사는 시인과 소설가가 독립운동 투사가 되곤 했던 식민지 시대 ‘문사’ 개념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사의 시대는, 이 책에서 보여 주고 있는 것처럼 실로 1970년대 문학에서 마지막으로 가장 강력하고 화려하게 빛을 발한 뒤, 끝났다.4) 이 책의 첫 장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김지하의 시 「진리」에서 시인은 “바람 속이 내 집”이라고 노래하고 있었지만,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 황석영은 그가 2017년 출간했던 문학적 자서전 『수인』에서 방북사건으로 떠돌던 시절을 회고하며 그때의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결국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문학이라는 집이었다”라고 고백한다.5) 한때 바람 속을 집으로 삼아 온갖 경계를 넘나들며 활보했던 문사들에게 문학의 지경이란 없었다. 김종철이 말했던 것처럼 그들의 문학은 “온갖 것을 떠맡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문학을 떠났거나, 문학이라는 집 안으로 돌아간다. 이제 문학은, 그리고 작가는 무엇을 하는가. 유영주는 결론에서 박민규 소설의 저항성을 김지하에 견주며, 문학은, 그리고 작가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박민규는 그의 대표작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표절 사건 이후로 그럴 수 있는 정당성을 상실했다. 이것은 분명 징후이기도 하다.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예감하게 했던 작가 중 한 명인 무라카미 하루키를 통해 우리는 이미 오래 전 문사의 정체성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로 완벽하게 대체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지위마저 위태롭다. 최근 작가들의 소설 속 자기 재현은 어떠한가. 그들은 비정규직 중에서도 고용안정성과 소득이 가장 낮은 축에 들며, ‘프리랜서’라서 정부가 청년층에 제공하는 대출 상품에도 부적합해 은행 창구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으로 소설가를 재현한다(박서련, 「A Queen Sized Hole」,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민음사, 2022). 지방 변두리의 3천만 원짜리 아파트가 자기 집이 되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며, 마오쩌둥의 참새들처럼 어디에도 내려앉을 수 없어 지쳐 떨어져 죽을 위기에 놓여 있다(이서수,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젊은 근희의 행진』, 은행나무, 2023). 오해하지 말라. 이것은 어떤 가치 판단도, 비판도, 자조도 아닌, 현상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이 시대의 문학은 이제 유신 독재의 겨울 공화국과는 완전히 다른, 또 다른 눈보라 속에서 분투해야 하는 것이다. 1) 양성우, 『겨울공화국』, 화다, 1984, 18면. 2) 유영주, 이형진·정기인 역,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 박정희 시대 한국문학과 저항』, 소명출판, 2023, 92면. 이후 이 책 인용 시 본문에 쪽수로 표기. 3)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역, 『근대문학의 종언』, 도서출판 b, 2006, 49면. 4) 어떤 이들은 1980년대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문학과 정치의 관계라면 그것은 1980년대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1980년대에 문학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팽배했던 반지식인적인 분위기 속에서 작가는 1970년대와 같은 문사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1991년 5월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 치워라”라는 김지하의 충격적인 발언과 그것을 둘러싼 반응 그 이면에는 1980년대를 거치며 그가 더 이상 1970년대와 같은 문사의 지위에 서 있을 수 없었던 상황이 엄연히 자리한다고 볼 수도 있다. 5) 황석영, 『수인』 1, 문학동네, 2017, 36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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