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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과사회 | 2024년 가을호(제147호)

비-인간의 함성 ― 김혜순 시의 ‘무한한 여성’과 ‘중립’의 정치

강동호 문학평론

1984년 서울 출생,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후 같은 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 학위 취득 200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이후 평론 활동 시작. 계간 『문학과사회』 편집 동인으로 활동. 젊은평론가상, 대한민국 예술원 젊은예술가상 등 수상. 저서로 『지나간 시간들의 광장 - 문학의 동시대성과 비평의 정치』(문학과지성사, 2022) 등이 있음. 현재 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 부교수로 재직중

 나는 하나의 사실을 명명한다. 나는 하나의 이름 아래,
즉 여기서 중립이란 이름 아래 여러 가지 것들을 결집시킨다.
— 롤랑 바르트1)



1. 김혜순의 이름들


  한국 현대시의 역사에서 김혜순의 시가 차지하고 있는 의미와 그 위상에 대해서는 특별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시인–예술가로서, 시에 대한 철학자로서, 아시아 여성으로서, 교육자로서 그가 한국 시에 미친 영향 그리고 그 흔적의 깊이와 넓이를 한정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지난 40년 동안 문학 언어의 정치적 급진성에 있어 김혜순보다 뜨거운 언어를 찾기는 쉽지 않다”2)는 평가처럼, 김혜순의 시만큼 오랫동안 한국어의 최전선에서 맹렬히 타올랐던 현재성의 사례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극도로 보수적인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동안, 여성 시인으로서 그가 남성 중심적 질서와 제도에 대항하여 보여왔던 시적 항쟁의 이력은 그 자체로 여성 시의 살아 있는 역사이기도 하다. 물론 그의 시적 저항이 단지 가부장제에 대한 여성주의적 비판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해온 그의 급진적 언어는 문학이 도모할 수 있는 미학적·정치적 투쟁의 한계선을 지속적으로 넓혀왔다. 이른바 김혜순이라는 고유명은 현실의 위계를 낳는 모든 이데올로기(가족주의, 국가주의, 민족주의, 이성애 중심주의, 자본주의 등)에 대한 전방위적 불화와 항거를 지시하는, 시적 동시대성의 첨예한 최전선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김혜순 시의 정치적 동시대성을 구성하는가? 김혜순 시의 정치적 저항성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빈번하게 언급되는 단어들은 대체로 이런 것들이다. 위반, 전위, 전복, 실험, 비판, 파괴, 해체, 부정…… 이러한 단어 목록은 김혜순의 시가 실천하는 시적 정치성의 중요한 단면들을 보여준다. 또한 이것은 오늘날의 문학과 정치의 관계를 폭넓게 사유하는 데 기여했던 이름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와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김혜순 시의 정치성에 접근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시도가 요구되는 이유는 단순히 앞서 거론한 미학적 개념들이 김혜순의 시 세계를 조명하는 데 부적합하기 때문이 아니다. 김혜순의 시는 분명 전위적이고 위반적이며, 특유의 전복적이고 해체적인 상상력으로 가부장제를 포함한 모든 남근 로고스적 질서에 대한 해체를 개진한다. 문제는 모더니즘의 전통적 계보에 속하는 이러한 익숙한 개념들의 이항 대립적 원리가, 동시대의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장소를 가시화하는 데 더는 유효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목록들을 포괄하면서 이항 대립에 귀속되지 않는 다른 이름을, 적대와 대립에 기반하고 있는 무수히 많은 이데올로기적 패러다임을 좌초시키는 새로운 정치적 장소를 발견해야 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 글은 김혜순의 시가 현재 우리에게 던지는 동시대적 메시지에 다가가기 위한 여러 키워드를 고안하는 데 목적이 있으며, 그 일환으로 『날개 환상통』(문학과지성사, 2019)과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문학과지성사, 2022)에서 보다 전면화되고 있는 시적 비전(비–인간)에 집중할예정이다. 그 과정을 경유하여 ‘문학’이라는 불완전한 기호로 간신히 지시될 수밖에 없는, 모래–언어로 이루어진 무한한 언어의 사막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문학이라는 장소, 재현될 수없고 표현될 수 없는, 장소 없는 장소를 가리켜 최종적으로 (그러나 영원히 잠정적으로) ‘중립the neutral’이라고 명명하게 될 것이다.



2. 새하는 말


  우선 단순한 질문에서 시작해보자. 『날개 환상통』 도처에서 탄생하고 날아가고 추락하고 지저귀는 새, 언어의 경제를 지속적으로 교란하며 시적 주체의 삶에 관여하는 ‘새’란 어떤 존재인가? 시집 곳곳에서 범람하는 새, 기호로서의 새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그것을 구체적인 실체나 무언가에 대한 은유적 상징으로 특정해서는 안 된다. 『날개 환상통』의 새는 언제나 ‘하다’의 동시성에 결부되어 있다. ‘새+하다’의 연동, 이접, 공명으로 발생하는 시적 시간성 속에서 새는 행위를 주관하는 주체나 행위의 대상이 되는 목적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새란 무엇인가?’에서 ‘새하다로 인해 추동되는 사건은 무엇인가?’로 질문의 초점을 이동시켜야 한다.


이 시집은 책은 아니지만
새하는 순서
그 순서의 기록
신발을 벗고 난간 위에 올라서서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리면
소매 속에서 깃털이 삐져나오는
내게서 새가 우는 날의 기록
새의 뺨을 만지며
새하는 날의 기록
— 「새의 시집」 부분


  ‘새하다’는 주체와 객체, 주어와 목적어 사이의 엄격한 분리를 불가능하게 하는 수행적performative 사태를 지시하며, 모종의 독특한 리듬을 창출하는 사건이다. “새하는 순서”가 촉발하는 기이한 시간성은 『날개 환상통』을 ‘책’이 아니게 하는 주요 원인이기도 하다. 왜 그럴까. ‘책’은 저자의 생각, 감정, 그리고 의지를 담아냄으로써 저자 –주체의 영혼과 정신을 반영한다고 가정되는 매체이다. 책 이전에 저자라는 주체가 선재하며, 주체의 정립 이후에 비로소 책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새’가 어떤 실체 또는 가치에 관한 은유나 상징으로 간주된다면 그것은 오롯이 책에 담겨 있어야 하며, 결과적으로 재현의 언어로 포박될 수 있어야 한다.

  반면 책에 대한 부인을 표명하고 있는 『날개 환상통』에서 이루어지는 언어적 사건(“새하는 날의 기록”)은 주체에 의한 사유의 전개, 의견의 표명, 감정의 고백에 의해 밝혀질 수 없다. 오해해서는 안된다. 시집에 시인만의 독창적인 의견, 사유, 감정이 결여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다. 『날개 환상통』의 세계관을 관통하고 있는 급진적 의견과 거대한 스케일의 사유,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첨예한 감정의 계열들을 도출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전개, 표명, 고백과 같은 능동적 행위의 계열과 거리를 두는 것은, “소매 속에서 깃털이 삐져나오는/내게서 새가 우는 날의 기록”이 주체에게 우발적으로 발생한 갑작스러운 사건, 그러나 한편으로는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어떤 사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날개 환상통』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시적 발화로서의 “기록”이 엄밀한 의미에서 ‘쓰기’와 구별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해야 한다. 여기서 김혜순의 기록이 책을 쓰는 것, 글을 쓰는 것, 시를 쓰는 것과 미묘하게 구별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날개 환상통』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크게 두 층위로 나뉜다. 새하는 날과 새하는 날의 기록.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편의적인 구분에 불과하다. 기록의 대상과 기록의 주체는 ‘새하다’의 동시성 속에서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다. 일찍이 시인은 이렇게 선언한 바 있다. “시는 쓰는 것도, 짓는 것도 아닌, ‘하는’ 것이다.”3) 같은 맥락에서 『날개 환상통』의 기록 역시 쓰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 “여자는 죽어가지만 새는 점점 크는 순서”(「새의 시집」)에 직면한 시인에게 기록의 언어는 어떤 거대한 일어섬이라는 사태에 직면한 주체의 탈주체화, 그러한 극단적 수동성의 상태에서 돋아난 타자의 언어를 수행적으로 받아쓰는 과정dictation에 가깝다.

  분명 누군가는 김혜순의 ‘새하기’를 통해, 성급히 들뢰즈의 ‘동물–되기’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김혜순의 ‘새하기’가 ‘새되기’와 유사한 뉘앙스를 공유하기는 하지만, 둘이 온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새하기’라는 어휘에 내포된 독특한 시적 비전을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되기becoming와 하기doing의 차이를 좀더 신중하게 분별할 필요가 있다. 

  ‘동물 –되기’란 무엇인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회화에 대한 들뢰즈의 독창적 해석(『감각의 논리』)이 보여주듯, 그것은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식별 불가능하게 만드는 신체(고기)의 발견이자, 경계 너머의 새로운 주체성의 정립이다. “베이컨의 회화가 구성하고 있는 것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형태적인 상응 대신에, 인간인지 동물인지 ‘구분할 수 없고 명확히 할 수 없는 영역’이다. 인간은 동물이 된다.”4) 아무리 우발적이고, 파괴적이고, 탈주적이라고 해도 ‘되기’를 추동하는 것은 주체의 욕망과 강렬도, 즉 욕망의 경제이다. 주체의 해체는 ‘되기’라는 변화의 공정을 통해 정립된 주체의 새로움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이때 이항 대립은 (비록 그것이 이항 대립의 전복을 목표로 한다고 하더라도) ‘되기’의 방향성을 규정하는 윤리적·정치적 근본 원리이자 형식이다. 다수자와 소수자, 인간과 자연, 남성과

여성, 보편과 특수의 대치 국면에 전제되어 있는 것은 이른바 정상적인 것, 보편적인 것에 대한 저항을 전위적 ‘되기’의 소수성과 타자성으로 실천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5) 

  반면 김혜순의 ‘새하기’는 인간 너머의 ‘동물 –되기’, 즉 새가 되는 단계에서 종결되지 않는다. 새하기에 함축되어 있는 비전은 그보다 더 근본적이다. 도처에서 새가 출몰하지만, 의외로 『날개 환상통』의 시적 화자가 온전히 새로 변신하는 장면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사실에 주목해보자. 이를테면 시인은 이렇게 기록하는 중이다. “내게는 새가 있다 나를 혼자 두면 둘수록 새가 되는 새가 있다”(「작별의 공동체—새의 일지」). 내게 있는 새는 ‘이미’ 있는 새이다. 새의 출현으로 인해 새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가 분할되는 것이 아니다. “새가 되는 새”라는 지속성의 형식으로 실천될 수 있는 ‘새하기’는 결코 ‘새 되기’로 완수될 수 없는, 중단 없는 반복을 통해 이루어지는 “영원히 진행 중인 리듬 비트 벼락”(「리듬의 얼굴」)이다. ‘새되기’는 탈주체화를 통한 주체의 타자되기의 가능성을 목표로 제시한다. 반면 ‘새하기’는 ‘인간–새’, 혹은 ‘새–인간’으로서 주체가 받아들여야 할 주체화의 내재적 불가능성을 운명으로 현시한다. 따라서 ‘새하기’의 세계에서는 인간과 동물, 주체와 타자, 그리고 과거와 현재라는 이항 대립의 원리가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어떤 대립의 국면이 작동한다면, 그것은 ‘영원히 새가 될 수 없는 새’와 ‘영원히 새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새’라는 이율배반적 이중성의 형식을 통해 간신히 표현될 수 있을 뿐이다.

  『날개 환상통』에서 전개되는 ‘새하는 순서’, 이 영원히 진행 중인 리듬이 글쓰기의 시간성으로 포섭될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글쓰기의 주체는 ‘과거–현재–미래’라는 연대기적 원리, 또는 원인과 결과라는 분명한 논리를 통해 세계를 파악한다. 하지만 『날개 환상통』의 “새는 이미 이별부터 시작했으므로 미래가 없다고 했다” (「이별부터 먼저 시작했다」). “우린 시작을 시작했으므로/이미 작별이었는데 그땐 몰랐다”(「작별의 공동체—작별의 신체」). 미래가 없는 세계, 그리하여 시작과 끝의 분별이 어지럽혀진 현기증의 세계. 이처럼 ‘새하다’는 끝없는 현재라는 하나로 응축된 시간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뒤늦은 후회의 기록”(「새의 시집」), 즉 시적 애도이자 증언이다. 

  무엇을 증언하는가? 반복하거니와 그것은 나에게서, 당신에게서,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전방위적으로 출몰하는 새이다. 아니, 다시 말하자.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리면/소매 속에서 깃털이 삐져나오는/내게서 새가 우는 날의 기록”은 우발적이지만, 한편으로는 필연적으로 새와 결부될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에 관한 증언이다. 우리 모두의 삶과 연관되기에, 김혜순의 새하기가 궁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무수히 많은 차이의 향연이 아니라, 그러한 차이들의 공존과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어떤 무한성의 도사림이다. “저는 우리에게, ‘나’에게 한 사람 또는 개인의 것이라 명명할 수 없는 어떤 복수적

이고 집단적인 무엇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있어서 우리는 연민하고 사랑하고 죽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 ‘내’ 영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큰 것이 ‘내’ 영혼일 것이라는 겁니다.”6) ‘새하기’는 바로 인간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어떤 것의 흔적, 그러나 내가 소유한다고 말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것,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한 증언이다. ‘새–인간’, ‘인간–새’에게 있는 보이지 않는 날개, 그리고 그 날갯짓으로 인한 실제적 고통을 경유하여 마주하게 될 그것을, 앞으로 ‘비–인간in-human’이라고 부를 것이다.



3. 고통을 말하는 몸: ‘비–인간’의 증언


  예술가들은 그 무엇보다도 비인간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고통스럽게 비인간성의 흔적들을 찾는다. 이러한 흔적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리얼리티 바깥의 진실에 대한 실마리를 제시한다.7) 


  김혜순의 시와 ‘비–인간’을 함께 거론하는 것은 다소 새삼스럽게 들릴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곤충, 식물, 짐승, 시체, 쓰레기 등 인간의 영역 바깥에 유폐된 존재들에 대한 시적 형상화, 근대적 이성의 질서 체제에서 배제되고, 장악되고, 배척되었던 대상들abject에 대한 사유는 김혜순의 초기 시부터 일관되게 견지되어온 시적 테마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대략 『피어라 돼지』(문학과지성사, 2016) 시절 무렵부터] 김혜순의 시에서 전면화되고 있는 ‘비–인간’에 대한 시적 탐구와 관련해서는 좀더 세심한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비–인간을 인간과 대립되는 어떤 것(反인간), 즉 어떤 인간성의 결여(未인간) 나 초월(脫인간), 더 나아가 오늘날 항간에 유행하는 포스트휴먼 같은 개념과 혼동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김혜순의 비–인간을 인간과 이항 대립 관계를 형성하는 ‘인간 아닌 것non–human’으로 규정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인간의 얼굴을 한 새”(「새들의 영결식」)는 새의 얼굴을 하고 있는 인간, 새와 중첩되어 있는 인간의 근원적 비 인간성을 가리킨다. “새와 인간이 눈을 마주칠 때 누가 누구를/만물의 영혼이라 생각할까 궁금해졌어요”(「작별의 공동체—새 샤먼」). 관건은 인간과 비–인간의 마주 봄을 통해 본격화되는 모순·갈등·분 쟁이고, 그것을 통해 존재의 근원(‘만물의 영혼’)이 무엇인지를 다시 표명하는 일이다. 요컨대 “이 시집은 새가 나에게 속한 줄 알았더니/ 내가 새에게 속한 것을 알게 되는 순서”(「새의 시집」)의 기록이다. 그렇다면 “내가 새에게 속한 것을” 감각하고 자각하는 것, 다시 말해 우리 모두가 비–인간에 공통적으로 연루되고 포괄되어 있음을 탐구 해야 한다. 

  이 문제를 해명하는 데 있어 김혜순의 ‘새하기’가 몸, 더 정확히는 아파하는 몸과 긴밀하게 관련 있다는 사실은 각별히 중요해 보인다.


그 작은 새가
이불을 박차고 내 몸을 박차고
흙을 박차고 나가는 순서
—「새의 시집」 부분


몸은 새가 다녀가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고 했다.
—「이별부터 먼저 시작했다」 부분


우리의 몸을 파고드는 우주에서 온 통증 같은 것
—「비탄 기타」 부분


매일매일 내 몸을 조여오는
이 새장을 벗지 못하는 나는
—「바닥이 바닥이 아니야」 부분


  김혜순의 ‘새하기’는 거의 언제나 몸의 느낌, 구체적으로는 육체의 고통과 함께 발생한다. “너무 섬세해서 징그러운 깃털이 몸 전체로 올라오는 것”(「올빼미」), 다시 말해 아픈 몸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몸 그 자체가 말하도록 (새)하는 것이다. 이때 정신과 몸, 언어와 육체의 관계에 있어서 역전과 전복이 이루어진다. 물론 정신에 대한 육체의 우위 또는 말로부터의 해방이 목적이 아니다. ‘말하는 몸’이라는 표현 역시 말을 통해 이루어진 인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에서 그것은 영원히 가능하지 않다. “교관은 전직 시인이다/그는 감옥 밖에서 쓴 시를 외우는 것을 좋아한다/전직 시인 아닌 자가 드문 마당에/그는 여전히 전직 시인이다”(「합창대」). 언어는 존재의 감옥이며, 여전히 시인은 그 안팎의 경계를 넘나드는 언어의 수인이자 교도관이다. 그렇다면 관건은 말과 정신으로부터의 탈출과 해방이 아니라 정신에 의해 온전히 통제 불가능한 것에 또 다른 말의 지위를 부여하는 일이다. “몸에서 심장이 혼자 뛰쳐나온 것처럼/나는 위독한 새”(「작별의 공동체—새를 앓다」). 김혜순의 ‘새하기’는 새를 알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끝내 통치 불가능한 것으로 인해 영원히 새를 앓아가는 과정이다. 고통하는 몸은 인간에게 내재하고 있는, 동시에 인간이 귀속해 있는 미지의 영역으로부터 전해지는 신호, 비–인간의 징후이다.  


그렇지만 설마 모른 척하시진 않겠지요?
당신 몸속엔 당신보다 훨씬 어려운 음악이 들어 있다는 것

나는 당신들에게 사랑받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사실 절망의 패턴을 만든 것뿐입니다

나를 쫓아와 나를 연주하는 나선형 계단을
— 「불쌍한 이상李箱에게 또 물어봐」 부분


  당신의 몸속에 깃들어 있는 “당신보다 훨씬 어려운 음악”을 듣는 일. 고통을 감각하는 일은 이처럼 인간 내부inhuman에 잠재되어 있는 ‘비–인간’을 증언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대부분의 인간은 그것을 모른 척하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인간의 언어로 포섭될 수도, 이해될수도, 재현될 수도 없는 그것을 장악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당신들에게 사랑받고 싶다면 몸의 고통을 부인, 망각, 타개, 정복의 대상으로 설정함으로써 ‘비–인간’을 무력화시켜야 할 것이다. 몸의 고통을 정상성의 결여, 건강의 결핍으로 간주하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과 회복을 약속해야 할 것이다. 근대적 휴머니즘에서 말하는 인간이라는 이념이 바로 이러한 결여와 결핍을 주체화할 수 있는 가능성, 즉 인간의 역량을 향한 믿음과 신뢰에 기반하고 있다. 

  하지만 휴머니즘이 가진 가장 결정적인 역설과 아이러니는 오히려 그것이 인간의 부정적 반대항으로서의 무수히 많은 비인간inhuman의 범주를 양산한다는 데 있다. 개발, 발전, 진보 등의 온갖 환상을 명분으로 인간은 고통의 현재성을 타개하고, 부인하고, 망각함으로써 현재를 식민화해왔다. 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 그 미래주의적 흐름에 동참할 수 없는 자들은 역량을 갖추지 못한 인간, 더 나아가 무언가 부족한 인간, 정상적이지 않은 인간inhuman으로 배척받기 마련이다. 리오타르의 지적처럼, 자본주의는 인간을 능력을 갖추도록 끝없이 몰아세움으로써 인간의 궁극적 탈주체화를 촉진하는 휴머니즘적 미래주의의 결정판이다. 휴머니즘적 이상 속에서 비인간은 이처럼 결핍, 결여, 부재의 형식으로 몰아세워진 인간의 고통, 즉 극단적 수동성에 대한 배제와 탄압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비–인간’을 드러내는 일은 “절망의 패턴”을 마주함으로써 근대적 휴머니즘의 한계를 드러내는 일, 즉 주체의 불능을 자인하고 수용하는 일이다. 이때 불능의 자백은 무능의 고백과 같은 것이 아니다. 무능한 주체에게 고통은 그것을 타개할 수 있는 역량의 부재를 나타낸다. 그리하여 고통은 역량의 되찾음이라는 미래의 가능성으로 봉합될 수 있는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반면 주체의 불능을 받아들이는 인간에게 고통은 제거될 수 없는 무언가이며, 미래라는 시간성으로 해소될 수 없는 근본적인 불가능성의 사태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면 다시 한번 반복해야 한다. “이 시집은 새가 나에게 속한 줄 알았더니/내가 새에게 속한 것을 알게 되는 순서”의 기록이다. 이때 새와 내가 맺는 관계가 단순한 소유관계를 넘어서 있다는 사실은 고통에 내포된 본질적 성격을 한층 심화시킨다. 

인간은 고통을 소유할 수 없다. 고통은 인간의 역량이 아니다. 인간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역량과 능력으로 스스로를 특정할 수 있고, 어떤 정체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과 달리, 고통은 모든 인간주의적 소유관계를 무화시키면서 정체성의 무너짐undoing을 다그친다. 따라서 불능의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역량의 최대치는, “내 영혼을 벗겨 가는 이 음악이”(「리듬의 얼굴」) 유발하는 고통을 감각하며‘비–인간’의 위상을 재정립하는 것, 그리하여 인간이 ‘비–인간’에 무한히 귀속되어 있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나는 새 속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그 반대가 아니라
나는 새 속에서 죽었다고 했다
그 반대가 아니라
내가 태어나서 죽었다고 했다
—「새의 반복」 부분


  새 안에서, ‘새하기’의 시간 속에서 나의 탄생과 죽음이 지속적으로 반복될 때, 나라는 주체는 비로소 그 어떤 인간주의적 환원론으로 규명될 수 없고 재현될 수 없는, 그러나 엄연히 존재하는 그 무언가에 결부되기 시작한다. “누구도 이름 붙이지 않아서 아무도 그 이름을 모르는”(「작별의 공동체—피읍 피읍」) 그것. 그러나 이름의 부재와 존재의 부재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물개와 물범처럼 우울에 젖은/내 벌거벗은 몸은 이름이 없고//그러나 우리는 다 죽음이라는 라스트 네임이 같고”(「작별의 공동체—이 상자에 손을 넣을 수는 없다」). 이름 붙일 수 없는 ‘벌거벗은 몸’은 부재라는 형식을 통해 압도적인 부재의 현존성에 포괄된다. 그리하여 시인이 이상(李箱)을 패러디하며 언급한 “오늘은 없는 이 날개”(「오감도 31」)는 단순히 과거에 잃어버린, 그래서 현재에 없는 날개가 아니라 부재라는 형식으로 실재하는 현재의 날개, 부재의 현존이다. “내 얼굴이 있던 자리엔 존재하는 듯 부재하는/은은한 부사의 울림만 남았다”(「작별의 공동체—부사, 날다」). 나의 존재와 부재를 동시에 증명하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나의 존재와 나의 부재라는 이율배반 속에서 그 모든 것을 잉태할 수 있는 제3항의 진실을 고통스럽게 현시하는 것. 불능의 인간, ‘비–인간’의 불능성은 무능도, 부재도, 없음으로 무화되지 않는, 무능의 무능, 부재의 부재, 없음의 없음이라는 이중성으로 실재하는 무한한 것이다. 이때 무한은 단순히 한계의 초월, 한계의 없음이 아니라 한계로서의 무한, 인간들의 유한성을 가시화하는 무한이다. 이 무한한 것이 없다면, 인간의 자유란 그저 자신의 역량을 사용

할 수 있는 능력에 그치게 될 것이며, 인간은 언제든지 비인간으로 귀결될 위험에 노출될 것이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그리고 우리 모든 인간에게는 ‘비–인간’의 표식으로서의 보이지 않는 날개의 흔적이 있다. 김혜순의 ‘새하기’는 그 부재하는 현존으로부터 개진되는 언어의 거대한 비상, 다시 말해 무한성의 옹립이자 무한성을 향한 봉헌이다.



4. 무한한 여성: 여성적 숭고의 경제


동물성은 저의 내적 세계의 비유의 산물이 되거나
초월이 필요한 어떤 존재가 되는 게 아니라 동물 자체가
자연에 내재하듯 저라는 시인의 내재성이 되었습니다.
잠재성을 무한히 넓힐 수 있는 그런 존재 말입니다.
어색해하고, 무한히 뻔뻔스럽고,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생물로서
무한히 커진 퀸콩 (Queen Kong) 같은 존재 말입니다.
—김혜순8)


  이처럼 ‘비–인간’을 감각하고 사유하는 것, 내 안에서 ‘비–인간’을 일으키는 것은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고통과 마주하는 과정을 예비한다. 아니 고통이,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는 죽음이라는 불가능성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매혹과 더불어 거대한 ‘비–인간’이 일으켜 세워진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잠을 자고 있으면 묘지가 거인으로 일어서서 내 이름을 불렀다
산책을 게을리하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았다
일어선 묘지의 커다란 몸엔 당연히 식물들과 새들이 매달려 있었고
묘비들도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는데
어느 날은 스스로 자신의 몸에 물조리개로 물까지 주면서 나를 불렀다
— 「숨을 은」 부분


  거인의 형상으로 일어선 이 기괴하고도 장엄한 스케일의 죽음 앞에서 ‘나’는 압도적으로 호명당하는 중이다. 이처럼 김혜순의 독자는 ‘새하기’와 더불어 일어서는 ‘비–인간’의 “거대한 기척을”(「뾰족한 글씨체」) 느껴야만 한다. 주체를 제압하는 이 힘에 대한 호소, 거대한 것들의 출현을 우리는 시집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다.


아아 나는 날개가 너무 커서 태어날 수가 없는 새입니다
— 「날개 냄새」 부분


새 떼의 새들이 저마다 내 몸만 하게 큰다
그다음 어마어마한 거인처럼 큰다
이것은 새가 아니라 내 죽음을 알리는 펄럭이는 부고장이다 만장이다
— 「티라누스 멜랑콜리쿠스」 부분


나는 계단을 올라 까마귀의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곤 합니다
나는 계단을 내려가 억 조 경 해보다 먼 숫자들의 끝을 보곤 합니다
— 「불쌍한 이상李箱에게 또 물어봐」 부분


나에게는
저수지에 내려앉으려는
5천 마리의 철새를 날아오르게 할 수 있는 두 다리가 있지
나에게는
밤중에 우리나라 개들이 다 일어나
짖어대게 할 수 있는 냄새나는 구멍들이 있지
— 「몬스터」 부분

나는 늘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저 풍경보다 크다
나는 내 코 양쪽에 엄지손가락 두 개를 붙이고
여덟 손가락을 새의 볏처럼 편 다음
서울의 높은 산보다 더 높이 나는 큰 새가 될 수 있다

하루 종일 창가에 서서 내가 커지는 놀이
심지어 서울 풍경과 일대일 할 수 있을 것만큼 나를 키우는 놀이
— 「작별의 공동체—그 사진 흑백이지?」 부분


  이렇듯 “여자는 죽어가지만 새는 점점 크는 순서”를 기록하는 『날개 환상통』은 죽음 앞에 선 주체가 직면하게 되는 이례적인 거대함의 체험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김행숙은 『날개 환상통』이 선사하는 시적 경험을 규명하는 짧은 글에서 그 미학적 원리에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를 언급한 적이 있다. “김혜순 시의 가장 강력한 미학적 동기는 숭고의 경험이다.”9) 그의 직관적 분석은 『날개 환상통』이 인간의 수용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과 크기를 감각하게 만든다는 점을 예리하게 짚어내고 있다. 그런데 주체를 위협하는 이 “거대한 기척을” ‘숭고sublime’라는 미학적 개념과 연결시켜 조명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대리 보충이 필요해 보인다. 왜냐하면 숭고라는 미학적 경험에 내포되어 있는 어떤 요소들에 관해 그동안 적지 않은 비판이 개진되어왔기 때문이다.

  숭고란 무엇인가? 『판단력 비판』에서 규정된 숭고란 “단적으로 큰 것 [……] 일체의 비교를 넘어서 큰 것”10)이다. 물론 ‘크기’는 상대적인 개념이기에, 그 어떤 비교도 허용하지 않는 큰 것이란 대상에게 귀속되어 있는 물리적 속성일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상대적으로 큰 대상을 통해 절대적으로 큰 무언가를 도출해낼 수 있는 주관의 정신적 능력이다. “숭고한 것이란 그것을 단지 생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관의 모든 척도를 뛰어넘는 마음의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다.”11) 숭고가 증명하는 것은 숭고한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감각적 한계를 넘어설 수 있게 하는 상상력의 힘이다. 거대한 것, 강력한 것 앞에 선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시험받게 되는데, 이러한 한계에 대한 반성적 자각이 결과적으로 주체로 하여금 그 한계를 스스로 극복하게 하고, 불쾌를 쾌(감동)로 전환시킬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높은 것으로의 고양과 승화, 위대한 것에 대한 존중을 촉발하는 숭고는 초월적인 것, 보편적인 것, 총체적인 것에 대한 정신의 지향성을 대변해왔다. 숭고와 더불어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칸트의 주장은, 오랫동안 숭고를 ‘남성성’에 의해 전유되도록 만든 주된 원인이기도 하다. 비판기 시절 이전의 초기 저작에서 칸트가 미를 아름다운 여성, 숭고를 고상한 남성의 감정으로 귀속시켰던 이유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기대하는 바는 여성에 관한 모든 다른 특성이 결합하여 (모든 특성의 ) 연관 지점인 아름다움의 특성을 돋보이게 해야만 하고, 반대로 남성의 특성 가운데 숭고함이 그 성의 특징으로 부각하는 식으로 각각의 성이 두 특성을 결합하는 것이다. [……] 아름다운 성(여성)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지성을 갖추고 있다. 그것은 다만 아름다운 지성이고, 남성의 것은 심오한 지성—이는 숭고함과 동일함을 뜻하는 표현이다 — 이어야 한다.12)


  물론 우리의 관심은 칸트가 보여준 성차별적 젠더 인식을 비판하는데 있지 않다. 좀더 중요한 것은 미적 효과와 관련하여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젠더화된 담론의 원리를 밝히는 일이다. “숭고함은 감동을 주고, 아름다움은 매혹한다.”13) 예술이 인간에게 선사할 수 있는 두 층위의 다른 효과 (감동과 매혹)를 구분하는 과정에서, 모종의 성차에 기반한 주체화의 원리가 개진되고 있다. 아름다움 앞에서 주체는 매혹‘되고’, 숭고함 앞에서 주체는 감동‘한다’. 아름다움에 매혹된 사람은 대상에 이끌리는 자신의 일시적 수동성을 경험하는 주체이다. 반면 감동하는 사람은 능동적으로 자신의 한계를 반성할 수 있는 주체이다.


  칸트의 숭고는 주체화의 원리 측면에서도 분명 남성적이다. 왜냐하면 숭고의 주체는 ‘확장’과 ‘고양’이라는 남성적 주체화의 기제와 목표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숭고는 주체를 일시적으로 위협하지만, 온전히 주체를 파괴하지는 않는다. 주체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위험과 위기 속에서 극도의 전율과 공포, 즉 불쾌를 경험하지만, 스스로의 안전에 대한 확신 속에서 그 불쾌를 쾌의 감정으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해야만 한다. 따라서 숭고의 주체는 자신의 한계(유한성)에 대한 반성적 역량을 바탕으로 그 유한성을 극복하는 주체, 정복하는 주체이다. 이 과정에서 일종의 ‘경제적 원리’가 작동한다는 리오타르의 분석은 숭고의 남성성을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 그에 따르면, 칸트가 발견한 숭고의 경제는 ‘희생의 경제학’에 가깝다. “무릇 희생의 의도가 그러하듯이, 여기에는 이익에 대한 계산과 감정들에 대한 일종의 선불 할인 제안이 개입되어 있다. 애호를 포기하라. 그러면 존중을 얻게 될 것이다.”14) 주체가 경험하는 불쾌라는 만족의 손실은 더 큰 만족 (존중)이라는 미래의 대가에 대한 기대 속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 불쾌는 더 고상한 쾌로 진입하기 위한 통과의례이자, 잠정적 투자이다. 결과적으로 숭고는 더 거대하고, 총체적인 주체를 향한 욕망의 경제와 근본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김혜순의 시를 숭고의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으려면, 숭고에 내포되어 있는 이와 같은 남성적 욕망의 경제학과 단절시켜야 한다. 리오타르가 칸트의 숭고를 대체하는 진정한 숭고, 희생의 경제학이라는 변증법적 원리와 구별되는 숭고의 경제를 제안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요컨대 숭고에는 모독적인 면이 있다. 달리 말하면, 존중은, 규범의 밝은 면이라는 그것의 순수 이상에 의거할 때, 결코 희생의 경제학이라는 영역 안에서 거래되거나 할인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신성성의 영역이라고나 할까, 일종의 ‘무’의 경제학 (an–economie)에 속한다. 그것의 어두운 면, 다시 말해 존중이 손실을 내포한다는 사실은 경험 주체가 성자가 아니라 한계를 지닌 자라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아무튼 그런 유한성으로 인해, 희생은 신성성을 사는 데 소용되지 못한다. 실천 이성은 결코 그런 초월적 착란을 대가로 ‘충족’되지 않는 것이다.15)


  희생의 경제학으로 환원되지 않는 ‘무(無)의 경제학’. 전자가 만족의 희생과 손실을 매개로 한 교환을 가능하게 한다면, 후자는 교환 그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어떤 ‘신성성의 영역’을 전경화한다. 주체의 역량을 강화하는 숭고는 그러므로 발전·진보·상승·고양이라는 휴머니즘적 이상의 시간성과 연동되어 있으며, 결과적으로 무수히 많은 ‘비인간’을 양산하는 자본주의 경제와 긴밀하게 관련이 있다. 요컨대 “자본주의 경제에는 무언가 숭고한 것이 있다. 그것은 무한한 부와 힘이라는 이념에 의해 규제받는 경제이다”.16) 

  반면 절대적으로 교환 불가능한 ‘무’, 주체의 욕망에 의해 장악될 수 없는 ‘무’의 무한성을 가시화하면서, 욕망의 경제(불쾌의 쾌로의 전환)의 작동을 멈추게 하는 또 다른 숭고가 가능하다. 이를테면 “왜 나는 산산조각 날수록 커지는가/왜 나는 끝없는 검은 광물의 들판인가”(「티라누스 멜랑콜리쿠스」)라는 말처럼 주체화할 수 없는 거대한 고통과 더불어 끝없이 펼쳐지는 공간, 그리고 “마스카라는 녹아 흐르고/밤의 깃털은 무한대 무한대”(「날개 환상통」)로 증식하는 기이한 시간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엔 너무 많은 이름이 있어/그보다 더 많은 영혼이 있어/울고 싶은 여자야”(「우체국 여자」). 세상에 존재하는 너무 많은 이름보다 더 많은 영혼에게서 울려 퍼지는 “너무 커서 내 귀가 머는 비명”(「리듬의 얼굴」)이 (전통적 숭고의 남성성과 구별하는 의미에서) 김혜순의 시가 현시하는 ‘여성적 숭고’이다.


이제 다시 말하겠다. 저 아래 우리나라 전체의 그림자만큼 큰 치마를 입은 여자가 바로 나다. 나는 내 안의 일부에서 내 안의 일부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을 만큼 크다. 치마가 다 물이다. 무거워서 일어날 수가 없다. 젖은 치마 위에 우리나라의 모든 기차의 은빛 레일이 올려져 있다.
—「티라누스 멜랑콜리쿠스」 부분


내가 어둠을 걸친 밤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블랙 원피스가 펼쳐진다
내 목에 묶인 검은 리본이 길게 풀어지다가
하나둘 원피스에 불이 켜져서 서울의 야경처럼 반짝이는 이 기분
마치 발광 가오리 한 마리가 심해를 유영하듯이
끝이 없는 날개가 서서히 이륙하는 이 기분
그다음 청천 하늘에 거대한 반짝이 원피스가 고요히 떠가는 이 기분
—「원피스 자랑」 부분


  ‘새하기’는 단연코 여성과 함께 촉발된다. 새하는 사람은 사실상 “새하는 여자”에 다름 아니다. 여성을 제외하고, 괄호 치고, 소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새하기’는 ‘비–인간’으로부터 이루어져서 무한하게 커져가는 (“저 아래 우리나라 전체의 그림자만큼 큰 치마를 입은 여자가 바로 나다”)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에 대한 증언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무한한 여성을 전체로서의 여성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여성의 무한성은 여성의 위대한 본질도 혹은 여성의 초월적 보편성도 지시하지 않는다. 시인은 이렇게 쓴 바 있다. 


여성시인의 시는 공동체 내부에서의 거부 반응을 거부의 문장으로 되돌려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공동체는 여성인 ‘나’를 포함시키길 거절해왔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내가 내 의지로 더 이상 체제 내부에 존재하기를 거부할 때, 존재하지 않음이라는 새로운 시적 체험을 시작할 때, 그 허약한 존재성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보잘것없는 세계가 아니었던가? 나는 시 속의 ‘내’가 탈주체화된 존재라는 사실, 내가 영토 없는 장소에 머문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남성적 동일화의 세계는 ‘내’가 원하던 세계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자명해졌다. ‘나’는 그들과 같아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우월하다고 말하려는 반동일시가 아니라 너의 세계 너머를 원한다는 것이다. 이 단호한 거절이 새로운 시적 언술의 발견의 단초가 된다. 거절함으로써 여성시인은 존재의 취약성 너머 우주적 웅대함을 전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그곳을 방황하는 외로운 넋들과 일대일로 만날 수 있게 된다. 이럴 때 여성시인은 죽은 자도 산 자도 아닌 관계의 비주체적 설정, 익명적 설정, 바로 그 관계 자체, 사이 자체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된다.17) 


  분량상 일부분을 인용했지만, 위와 같은 사유에 도달하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성 시인이 통과해야 하는 세 층위의 죽음을 주목해야 한다.18) 첫번째 죽음은 여성으로서 시인이 자신의 가족과 주변에서 받게 되는 배제와 폭력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때 주체는 여성으로서의 자아를 발견하게 되며, 여성–주체에 가해진 수많은 가부장적 폭력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표출한다. 두번째 죽음은 첫번째 죽음이 지닌 사회적 맥락과 구조적 원인을 드러냄으로써 시작된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세계 도처에서 신음하고 있는 여성들의 고통과 연동되어 있음을 자각하는데, 이 과정에서 남성적 질서가 강요하는 모든 이데올로기들의 허상이 폭로되고, 여성으로서 겪어야 하는 고통과 더불어 그 사회적 정체성이 정립되기에 이른다.

  여성적 숭고가 가능해지는 결정적 단계는 위에서 인용한 세번째 죽음이다. 남성적 동일화의 세계를 거절하는 ‘나’는 사실상 남성을 부인하는 것을 넘어, 그것을 지탱하는 주체와 객체의 남성적 변증법이라는 이항 대립의 논리를 넘어선, 넘어서려는 존재이다. 김혜순의 여성이 수행하는 “단호한 거절”은 단순히 부정이나 거부가 아니라, 이항 대립적 원리 자체의 철폐를 야기하는 절대적인 거절에 가깝다. 여성 시인의 언어는 이 절대적이고도 단호한 거절을 이행하는 다채로운 ‘시하기’이며, 그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무한성(“우주적 웅대함”)의 옹립이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세 층위의 죽음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다소 단계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세번째 죽음이 앞서의 죽음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것은 김혜순의 숭고를 통해 현시되는 무한이 언제나 여성적 무한임을 말해준다. 김혜순의 무한한 여성은 여성의 사회학적 정체성으로 환원되지 않지만,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겪어왔고 앞으로도 끝없이 직면하게 될 팔루스적 폭력에 가시성의 빛을 비추며 그에 저항할 수 있는 토대를 제시한다. 새를 길들이고, ‘비–인간’을 억압하려는 남성적 동일성을 향해, 그들이 영원히 알아들을 수 없고 장악할 수 없는 비명의 리듬

을 선사한다.


왕자는 고뇌하고 공주는 고통한다
왕자는 애도하고 공주는 고통한다
왕자는 정신하고 공주는 신경한다
왕자는 연설하고 공주는 비명한다
왕좌의 고뇌는 공주, 공주의 고통은 이름이 없다
왕자는 멜로디하고, 공주는 리듬한다
왕자는 내용하고, 공주는 박자한다
—「리듬의 얼굴」 부분


  위 시에서 왕자와 공주는 서로 대립하는 중이 아니다. 공주의 ‘고통하기’ ‘신경하기’ ‘비명하기’ ‘리듬하기’ ‘박자하기’는 왕자의 ‘고뇌’ ‘애도’ ‘정신’ ‘연설’을 이미 내파하고 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남성의 숭고가 전체Whole의 논리를 따른다면, 여성의 숭고는 무한Indefinite의 논리를 분만한다. 전체의 논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욕망의 경제이자 (불쾌를 쾌로 전환시키는) 쾌락의 경제Economics of Pleasure이기에, 전체의 동일성에 귀속될 수 없는 수많은 예외를 양산하고, 그것들을 배제적으로 포섭하기에 이른다.19) 한편 무한의 논리에서 예외는 전체와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체계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결코 메워질 수없는 구멍the Hole of the Whole, 비–전체의 표식이다. “오려낸 자리로 /구멍이 들어온다/내가 나간다”(「고잉 고잉 곤」). 이처럼 실재하는 구멍, “순수하게 존재하는 부재”20)로 인해 고통, 죽음, 없음을 상회하는 무한성이, 무한한 반복과 변주의 리듬 (주이상스의 경제 )이 출현한다.21)


줄넘기 줄이 땅에 닿을 때 타! 소리가 난다. 줄이 아프다. 아픔이 만개한다. 곧 줄이 공중으로 떠난다. 바로 지금이다, 살아나가자. 그러나 또 타! 줄이 땅을 치고 아픔은 치솟는다. 다시 고통이다. 죽음보다 더하다. 없음보다 더하다. 그러나 줄은 다시 올라간다. 그 순간 하늘이 커지고 적멸보궁이 솟아오른다. 그러나 다시 타! 매 맞는다. 내 두 손에 줄이 묶여 있는 줄도 모르고, 그 손을 놔! 내가 소리친다. 그러나 나는 다시 타! 고통이 밀려온다. 서커스단의 난쟁이가 채찍을 갖고 논다.
—「리듬의 얼굴」 부분


이 고통의 리듬이 유발하는 “아직 멈추지 않은 음악”(「얘야 네 몸엔 빨대를 꽂을 데가 많구나」)이 무한성으로 나아가는 시적 계단을 만들어낸다 (“내 음악이 계단을 발명한 것”, 「불쌍한 이상李箱에게 또 물어봐」). ‘비–인간’이 남성의 세계에서 외부에 (비인간으로서 ) 존재한다면, 여성의 세계에서 그것은 언제나, “이미와 미리 사이에서”(「작별의 공동체—부사, 날다」)라는 설명할 수 없고, 특정할 수 없는 내부적 시공간에 있다. 따라서 남성의 숭고가 외부로의 초월과 승화를 의미한다면 여성의 숭고는 알려지지 않은 내부, 그 장소 없는 장소로의 망명을 촉구한다. “나는 어디서나 태어나는 새입니다/땀구멍만 있어도 태어날 수 있습니다”(「날개 냄새」). 이처럼 도처의 구멍에서 태어난 “새마다 비명은 기선처럼 크다/사람의 마음에 담긴 소리는 이보다 더 크다”(「티라누스 멜랑콜리쿠스」). 이른바 ‘비–인간’이 세계를 장악하는 것, 그리하여 인간에 의해 점령당한 세계가 ‘비–인간’에 의해 되찾아지는 것. ‘비–인간’의 함성은 무한한 여성에 대한 선포이자 ‘비–인간’적인 것들의 회집을 이행하는 무한한 명령이다.



5. 중립의 봉기


가다가 서고
가다가 울고
나는 내가 만든 세상에서는 멀리 갈 수 있답니다
노래도 아니고
메아리도 아니고
아주 멀지만 자유만 있는 장소에서
나는 그곳을 나는 새입니다
—「10센티」 부분


  끝으로 우리가 말해야 할 것은 김혜순의 무한한 여성이 개시하는 정치적 급진성이다. 동시대의 현실 속에서 ‘비–인간’의 옹립과 선포는 미학의 문제를 넘어, 오늘날 우리가 대면해야 할 최대의 정치적 전선을 가시화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리오타르는 이렇게 주장한 바 있다. “비인간에 대한 저항을 제외한다면, 정치에 남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 있겠는가? 끝없이 탄생해야 하는 이 비참하면서도 놀라운 비결정성, 즉 또 다른 비인간으로부터 진 빚이 우리의 영혼에 없다면, 도대체 무슨 수단으로 비인간에 저항할 수 있겠는가?”22) 인간중심적 자본주의가 양산하는 ‘비인간’에 저항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남겨진 가장 중요한 정치적 과제이다. 그러나 비인간을 척결하는 것, 그리하여 인간주의의 이상을 회복하는 것만으로는 이를 충분히 수행할 수 없다. 관건은 우리에게 남겨진 마지막 저항 수단으로서의 “끝없이 탄생해야 하는 이 비참하면서도 놀라운 비결정성”을 증명하는 ‘또 다른 비인간’, ‘비–인간’의 급진적 저항성을 탐구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김혜순의 무한한 여성의 ‘비–인간’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는 무엇인가? 최근 김혜순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영원히 의견을 내지 않는 태풍 속의 저 나무들처럼, 혹은 부과된 정체성과 제 이름을 벗겨버린 제 몸처럼 중립, 중간의 장소입니다. 저는 문학이란 이 텅 빈 사막, 저 맹렬하고도 무관심한 중립성이 자신에게 다가오던 순간의 체험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23)


  ‘중립’이라는 단어는 의미심장하다. 자신의 시가 놓여 있는 장소에 관한 자기 지시적 증언 속에서 언표된 이 이례적인 단어는 김혜순의 시학적 비전뿐만 아니라, ‘문학의 자율성’과 연관된 결정적 본질(“맹렬하고도 무관심한 중립성”)로까지 확장되는 것처럼 읽히기 때문이다. 

  왜 중립인가? 일반적으로 급진적 정치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데 있어 중립은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개념처럼 보일 수 있다. 그것은 중립이라는 단어에 대한 여러 일반화된 오해 및 편견과 무관하지 않다. 중립은 특정 사안에 대한 분명한 입장의 부재, 주장의 결여, 의견의 회피처럼 간주된다. 양비론 또는 양시론으로도 일컬어지는 중립은 긍정적으로 말하면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 감각이고, 부정적으로 말하면 어떤 결정도 하지 않으려는 비겁한 회피이다. 물론 중립은 오늘날 대체로 후자처럼 묘사된다. 그래서 중립을 표방하는 자는 많은 경우 현실에 관여하기를 포기한 우유부단한 인물, 심지어는 기회주의자로 비난받기 쉽다. 특히 무수히 많은 대의가 정치적으로 난립할수록 중립이 서 있을 수 있는 땅은 더욱 비좁아지기 마련이다. 정치적 억견들이 저마다 정의의 이름으로 극도의 대치 국면을 형성할 때 중립은 성립 불가능하며, 심지어는 애초부터 존재한적 없다는 확신 속에서 망각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중립은 그런 소극적 포기,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가리키지 않는다. 우리는 그보다 더 적극적인 중립의 원리를 사유할 수 있고 , 나아가 중립의 급진적 정치성을 탐구할 수 있다. 롤랑 바르트는 중립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재정의한다. “나는 중립에 대해 구조적 정의를 제시하겠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볼 때 중립이 ‘무미건조’ 중성, 무관심의 인상들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립—나의 중립—은 강밀하고, 강력하며, 전대미문의 상태들로 귀결될 수 있다. 패러다임을 좌절시키는 것은 열정적이고 불같은 활동이다.”24) 패러다임의 좌절은 단일한 의미, 전체적인 가치의 위계에 대한 거절을 뜻하며, 의미를 낳은 이항 대립의 원리에 대한 투쟁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중립은 단지 특정한 패러다임에 대한 반대로 충족되지 않는다. 패러다임의 좌절, 해체, 붕괴는 세계의 모든 패러다임성 자체에 대한 단호한 거절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중립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열렬한 관심과 맹렬한 지성, 무엇보다 지난한 용기가 요구된다. 세상의 모든 의견·주장·입장·이념 들에 의해 온전히 점령당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고 주장하며, 그 모든 억견들의 불가능성을 스스로의 존재로서 증명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중립은 하나의 고정된 입장이라기보다 끊임없이 유동적인 활동, 명사가 아니라 동사 (중립하다)에 가깝다. 중립하기는 일종의 봉기하기이다. 중립은 단순히 상반된 의견들 가운데에 서는 것이 아니라, 가운데[中]의 도저한 일어섬[立]이기 때문이다.

  김혜순의 무한한 여성을 통해 체험할 수 있는 숭고는 이른바 모든 의미의 패러다임들을 좌초시키는 거대한 가운데, 세상을 억압하는 그 모든 정치적 이데올로기들을 허물어뜨리는 무한한 ‘사이’의 출현, 절대적 중립의 사건이다.


두 몸 사이가
오히려 살아 있는 듯
너무 귀해서 만질 수도 없는
투명하고 뭉클한 새가 우리 사이에 있는 듯
—「안새와 밖새」 부분


나는 머리부터 꼬리까지 5천 마리로 들끓는 한 마리 새다. 5천 개의 그
림자다. 새와 새의 사이가 다 새인 새다.
—「티라누스 멜랑콜리쿠스」 부분


  김혜순의 새하기, 시하기, 리듬하기는 이처럼 안과 밖, 언어와 언어, 개체와 개체 간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사이’에 생명력을 부여하려는 몸짓이다. 사이는 그러므로 단지 존재의 부재가 아니라, 존재와 존재를 연결하고, 관계 짓는 “오히려 살아 있는 듯”한 부재이다. 그래서 수많은 새로 이루어진 김혜순의 거대한 새는 그 안의 “새의 사이가 다 새인 새다”. 이 사이를 감각하려면, 사이에 존재의 형식을 부여하려면 그것을 부재, 없음이라는 존재의 대립항으로 묘사할 수 없다.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에서 펼쳐지는 광활한 사막의 언어는, 그 사막을 이루는 무수히 많은 모래에 대해, 그리고 모래와 모래가 배태하는 사이의 무한성에 관해 말한다. 여기서 “새는 사이이기도 하다”(「새는 왜 죽은 사람을 떠올리게 할까?」)는 결정적인 사실이 밝혀진다.


나는 지금 모래가 한 알 한 알마다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자라는 사막에서

우리는 부재로 가득 차 세상을 살아간다는데, 지구상 생물은 공중에 흩어진 나의 몸짓들처럼 부재의 서식처라는데, 부재가 지구 생태계의 균형을 맞추고, 부재자들이 심해에서 부재를 내뿜고 있다는데, 부재하는 것이 없다면 아무도 살아 있지 않다는데, 마찬가지로 부재자도 존재자 없이는 살 수 없다는데, 존재하는 것이 모두 사라진다면 부재자 또한 살지도 죽지도 못한다는데, 그러면 부재자는 존재자가 나타나기를 천년만년 기다려야 한다는데

시인은 왜 부재의 집을 짓고, 부재와의 사랑을 하고 싶은지, 시인은 어째서 존재 속에서 부재를 펼치고 싶은지, 나는 왜 너에게서 존재하는 것보다 부재하는 것을 달라 하는지, 존재하는 것과 부재와의 키스는 존재의 균열이라는데. 그렇다면 존재자를 향해 생육하고 번성하라 꼬드기는 것은 누구인가. 부재자가 아닌가.
—「모래의 머리카락」 부분


  어째서 시인은 이토록 끊임없이, 처절하게, 파편화된 언어로 부재를 증명하려 하는가? 그가 표출하는 것은 존재한다는 사실의 무의미(허무)인가? 

  잘 알려진 것처럼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는 어머니의 죽음이 일으킨 아픔과 슬픔으로부터 태어난 시집이다. 형언할 수 없는 상실의 슬픔으로 인해 마치 육체와 정신이 산산조각 나듯 모래 알갱이처럼 분자화된 언어들로 힘겹게 시하기(모래하기)를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김혜순의 시학에서 ‘어머니’라는 존재가 차지하고 있는 중요성을 고려한다면, 새라는 형상–이미지조차 더는 유지할 수 없는 시인의 고통을 아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 시인이 계속해서 시를 쓴다는 것은 자기 안의 어머니를 발견해나가는 길 위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는 자기 안의 어머니를 찾아가는 기나긴 도정 안에서 쏟아지는 말이다.”25) “나는 시인은 무조건 어머니로서 시를 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26) 당연한 말이지만, 여기서 김혜순이 언급하고 있는 어머니는 실재하는 어머니를 지시하지 않고, 제도가 구축한 이데올로기로서의 모성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 시의 어머니, 어머니로서의 시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기원, 바로 그 무한한 여성에 대응하는 불완전한 환유적 기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혜순 시의 어머니는 언제나 본질의 부재, 더 나아가 부재하는 것으로로서의 실재에 맞닿아 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쓴다. “내 어머니는 내 안에서 이미 죽은지 오래다. 내 어머니는 내가 태어난 순간, 내 안에서 나에게 생명을 주고 죽었다. 죽은 어머니가 내 안에 있다. 어머니는 죽음으로써 현존한다.”27)

  그러나 ‘죽음으로써 현존하는 어머니’와 ‘어머니의 상실’은 여전히 시인에게 별개의 사안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집은 무한한 여성을 환기하는 환유적 기호, 그 구체적 현실로서의 ‘엄마’의 부재를 시인이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개인으로서 고통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고스란히 증언한다. ‘엄마’라는 기호가 지시하는 존재의 부재, 그 엄연한 사실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시인의 ‘모래하기’는 이처럼 개인적 체험으로부터 출발하며, 독자가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시인의 사적인 기억·추억·애증 등을 파편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하지만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는 ‘엄마의 부재’라는 구체적 현실을 다시 한번 ‘부재하는 엄마’의 무한성으로 전환시키며, ‘지구’라는 중심의 부재를 ‘부재하는 중심’이라는 현존하는 사태로 되돌린다.

  위 인용한 시의 발화자가 필사적으로 부재를 전경화하는 이유 역시 거기에 있다. 부재는 단지 존재의 결여나 결핍이 아니라, 존재의 또 다른 (불)가능성이다. 그 모든 있음의 사태로도 영원히 몰아낼 수 없는 없음이 있음을, 오히려 있음이 없음에 근거하고 있음을 (“부재하는 것이 없다면 아무도 살아 있지 않다는데”) 입증하는 중이다. 

이러한 없음의 무한성을 향한 호소는 부재에 내포된 사회적·역사적 성격을 더욱 심화시킨다. “부재가 지구 생태계의 균형을 맞추고, 부재자들이 심해에서 부재를 내뿜고 있다는데” 모래–언어로 씌어진 이 처절한 비탄의 메아리에 내포된 고통의 무한성은 인류의 역사, 더 나아가 생명들의 기나긴 생멸의 시간을 증거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소멸하지 않는 이 절망적 생명력을 증언한다. 이 지점에 집중할 때 비로소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의 무한한 사막이라는 시적 공간은 시인의 개인적 상실의 고통을 표출하는 언어의 무대를 넘어, 누군가에게는 과거였고 누군가에게는 미래일, 그리하여 내밀하게 사적이지만 동시에 광범위하게 공적인 애도의 지평으로 확장된다. 그곳은 시작도 끝도 없이 뻗어나가는 사막, 무수히 많은 모래로 구성된 모래인들이 살아가는 장소, 모래–언어로 무한히 증언되는 침묵의 광활한 ‘사이’이다.


공주와 눈 맞추면 다시는 세상을 못 봐. 죽은 것만 봐. 삶으로 돌아가는 입구를 못 찾아. 침묵으로 살아. 이 침묵은 죽음에서 온 것. 두 개의 세상 사이에 있는 것. 그곳은 흰 상복을 입은 기린의 서식지. 네가 살아 있던 순간과 네가 살아 있지 않은 순간, 그사이. 호리지차. 페이지의 낭떠러지. 날 선 흰 침묵. 이름조차 없는 그사이. 그 사이를 운항하는 제 키보다 높은 꽃을 머리에 올린 여자의 배 한 척. 흰 장갑을 끼고 너와 나, 열 손가락으로 깍지 끼면, 그 사이를 비집고 운항하는 장의차를 실은 배.
—「시인의 장소」 부분


눈을 뜨면 불타오르는 모래바람
모래알몸 두 구具가 속절없이 엉킨 몸을 푼다.
언제 다시 만날까,
손가락이흩어지는 사막. 몸의털들이흩어지는 사막.
소스라치는 영혼들의 회오리.
모래 한 알과 한 알이 살을 비비는 사막.
—「사막의 숙주」 부분


  “두 개의 세상 사이에 있는 것” “이름조차 없는 그사이” “호리지차”라는 극소의 차이가 ‘시인의 장소’이다. 이때 사이는 경계가 아니다. 경계가 존재를 분할함으로써 인간의 인간됨(정체성)을 생산해내는 것과 달리, 김혜순의 사이는 오히려 그것들의 구분 불가능성을 활성화함으로써 정체성의 허물어짐을 낳는 장소, 즉 영원한 중립지대이다. 그렇다고 사막이 단지 인간의 폐허인 것은 아니다. 사막의 사이는 빈 공간이지만, 이 빈 공간이라는 부재를 매개로 현실에서와는 다른 만남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래 한 알과 한 알이 살을 비비는 사막.” 사막이 머금고 있는 무한한 사이라는 저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인해, 모래는 영원히 하나가 되지 않고 “그렇게 수억 조 경. 조용히. 저마다 혼자서”(「진저리 치는 해변」) 무한한 분열의 음악을 낳는다. “기침은 모래처럼/뭉쳐지지 않는다//기침은 떠나면서/존재하는 것//지금 나의 기침은 유한한 것의 무한한 분열”(「Yellowsand/Blackletter/Whitebooks—*무한한 포옹」).

  이처럼 무수히 많은 존재가 자신에게 부여된 의미의 정체성을 벗겨내고 모일 수 있는 익명의 장소, 그리하여 현실에서와는 다른 만남을 상상하고, 기대할 수 있게 하는 광대한 세계가 김혜순의 모래–사막이다. “나여! 이 나는 희게 눈먼 채 너를 만나려고 이리 기다리는가”(「시인의 장소」). 시인이 기다리는 것은 특정한 ‘너’가 아니라, 전혀 다른 만남 그 자체이다. “자, 우리 테두리 없이 만나는 연습!”(「불면의 망원경」). 이러한 만남과 연대의 연습이 가능한 경이로운 언어적 공간이 바로 김혜순의 시일 것이다.


오직 모래

그러므로 모래인은 눈을 뜨고 미래를 볼 수 없지만

오직 원점에서

아직 그 누구도 아직 말을 시작하지 않은

수억 조 경
그 원점에서

아니 왜 이렇게 원점이 무수히 많아?
— 「Yellowsand/Blackletter/Whitebooks—*언어」 부분


모래인의 국가
모래인의 가정

[……]

그러나 해가 떠오르면
모래인은

모래인과
작별한 다음
다시 작별합니다

모래인의 강령은
큰 작별 안에 작은 작별
수많은 작별의 별
— 「Yellowsand/Blackletter/Whitebooks—*결국」 부분


  시라는 이름의 나라에서는 이처럼 모래인들이 사이를 촉발하고, 사이가 모래인들을 탄생시킨다. 김혜순의 시하기는 언제나 원점으로의 귀결이자, 원점으로부터의 시작을 동시에 나타낸다. 이러한 동시성 속에서 김혜순의 시는 중립을 선포한다. 중립은 단 하나로의 결집을, 전체로의 응집을 절대 유도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 중립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동일성도, 비동일성도 아닌 무한성, 원점의 무한성이다. 시의 중립, 나아가 문학의 중립은 무수히 많은 이질적인 것의 평등한 회집을 가능하게 하는 장소이자, 원점 그 자체에 대한 불굴의 의지이다. 물론 그 장소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장소이다. 그

러나 그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면, 부재의 무한성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세계는 다시 갈등과 대립만이 가득한 의미의 전체주의로 회귀할 것이다. 의미의 패러다임들끼리 벌이는 증오의 내전 속에서, 인간은 언제든지 비인간으로 축출되어버린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마다 시는 언제나 모든 이념이 정당화될 수 없는 이 의미의 원점, 언어의 영도에서 다시, 인간 내부로부터의 봉기를 이끌어낼 것이다. 그렇게 모든 주의(이념)에 대한 반대를 배태하고, 의미의 독재에 항거하며 시는 고통으로서 함성을 지른다. 모든 중립을 허용하라. 그 어떤 이념으로도, 자아로도 귀속되지 않는, 세계들의 무한성을 인정하라. 이것이 모래국의 유일한 헌법이자, 모래인의 최대 강령이다. 적대로 가득한 오늘날의 현실 정치에서 중립은 정치의 무능력이지만, 문학에서의 중립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넓은 범위의 급진적 정치를 표방한다.

  • 1) 『중립: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강의 1977-78』,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4, p. 36.
  • 2) 이광호, 「새하기와 작별의 리듬: 김혜순의 『날개 환상통』」, 『작별의 리듬』, 문학과지성사, 2024, p. 295
  • 3) 김혜순, 「병: 여성이라는 이름의 병」,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연인, 환자, 시인, 그리고 너』, 문학동네, 2002, p. 107.
  • 4) 질 들뢰즈, 『감각의 논리』, 하태환 옮김, 민음사, 2008, p. 32.
  • 5)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알랭 바디우는 들뢰즈의 철학이 은폐하고 있는 보편주의적 요소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들뢰즈에게서는 항상 그렇듯이 정적(또는 양적)인 대립을 넘어선다는 것은 언제나 그 대립항들 중 하나의 항이 질적으로 상승됨을 의미하는 것으로 끝난다. [……] 이렇게 볼 때, 동등을 중요시하거나 욕망의 자유로운 분출을 권하는 모든 규범과는 정반대로, 사유에 대한 들뢰즈의 개념은 극도로 귀족적이다. 즉, 들뢰즈에게 있어 사유는 오로지 서열hiérarchie이 매겨진 그 어떤 공간안에서만 존재한다”(알랭 바디우, 『들뢰즈: 존재의 함성』, 박정태 옮김, 2001, 이학사, pp. 49~53).
  • 6) 김혜순, 「몸과 죽음」, 『김혜순의 말: 글쓰기의 경이』, 마음산책, 2023, pp. 41~43.
  • 7) Guillaume Apollinaire, “Pure Painting”, The Modern Tradition: Backgrounds of Modern Literature, Oxford University Press, 1965, p. 114.
  • 8) 「타자와 동물」, 『김혜순의 말: 글쓰기의 경이』, pp. 47~48.
  • 9) 김행숙, 「새하는 시간」, 『문학과사회』 2019년 가을호, p. 258.
  • 10) 이마누엘 칸트, 『판단력 비판』,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9, p. 253.
  • 11) 같은 책, p. 257.
  • 12) 이마누엘 칸트, 「아름다움과 숭고의 감정에 관한 고찰」, 『비판기 이전 저작 Ⅲ(1763~1777)』, 박진 외 옮김, 한길사, 2021, pp. 94~96.
  • 13) 같은 책, p. 69.
  • 14)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숭고와 관심」, 장-뤽 낭시 외 7인, 『숭고에 대하여: 경계의 미학, 미학의 경계』, 김예령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5, p. 233.
  • 15) 같은 책, p. 235.
  • 16) Jean-François Lyotard, “e Sublime and the Avant–garde”, The Inhuman: Reflection on Times, trans. Georey Bennington·Rachel Bowlby, Polity Press, 1991, p. 105.
  • 17) 김혜순, 「쓰레기와 유령」, 『여성, 시하다』, 문학과지성사, 2017, pp. 40~41.
  • 18) 여성 시인이 경험하는 세 층위의 죽음에 대해서는 같은 책 참고.
  • 19) 이러한 무한성을 염두에 둔다면 김혜순의 숭고는 과거 페미니즘 미학 전통에서 정초하고자 했던 여성 숭고, 즉 기괴한 것, 섬뜩한 것, 그로테스크한 것의 현시를 통한 불화와 구별될 수 있을 것이다. 양자의 차이에 대해 이론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더 많은 지면이 필요하겠지만, 기존의 여성 숭고 개념이 ‘불쾌의 쾌’로의 전환을 지연시키는 논리에 토대하고 있다는 점,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부정적 이항 대립의 원리로 수렴될 위험이 내포되어 있다는 점 등을 지적하고 넘어가자. 여성적 숭고에 대한 페미니즘 미학계에서의 오래된 고민과 논쟁, 그리고 그 한계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이 좋은 참고 대상이 될 것이다. 김남이, 「여성적 숭고의 (불)가능성」, 『미학』 제89권 제2호, 한국미학회, 2023.
  • 20) 「쓰레기와 유령」, 『여성, 시하다』, p. 42.
  • 21) 유사한 맥락에서 자크-알랭 밀레르는 라캉의 악명 높은 성차 공식(‘성적인 관계 같은 것은 없다’)을 설명하면서, 욕망의 경제와 차별화되는 주이상스의 경제와 더불어 여성성의 논리를 사유한다. “성적 관계 같은 것이라는 공식은 기원도 종결도 없는 끝없는 대체 과정으로서의 주이상스의 경제를 스케치해야 한다. [……] 프로이트의 충동 이론은 남성적 성차 이론을 따른다. 그것은 충동을 전체화 하는 논리이며, 모든 요소들을 전체의 부분으로 위치시키는 논리이다. [……] 반면 라캉의 주이상스의 경제학은 비–전체(not-all)의 규칙을 따른다”(Jacques-Alain Miller, “e Economics
  • of Jouissance”, Lacanian Ink 38, Wooster Press, 2011, pp. 45~46).
  • 22) Jean-François Lyotard, Ibid, p. 7.
  • 23) 김혜순, 「어머니의 죽음, 남겨진 달」, 『김혜순의 말: 글쓰기의 경이』, p. 94.
  • 24) 롤랑 바르트, 같은 책, p. 39.
  • 25) 김혜순, 「어머니: 모성에 대한 새로운 정의」,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연인, 환자, 시인, 그리고 너』, p. 53.
  • 26) 김혜순, 「뻐꾸기와 잠수함의 토끼」, 같은 책, p. 18.
  • 27) 김혜순, 「어머니: 모성에 대한 새로운 정의」, 같은 책, p.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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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거짓말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면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안 그래요?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됨으로써 말이죠. 무성 영화 시대의 영화감독들은 소리를 두려워했고 또 색을 두려워했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1) 1. 휩쓸리는 시간성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모두가 조금씩은 우울증과 ADHD 환자가 되어가는 중이다. 코로나가 끝나가는 엔데믹 시기부터 서점가의 주요한 베스트셀러가 되며 여러 곳에서 호출되던 책이 애나 램키의 『도파미네이션』과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두 책은 공통적으로 신생 인류의 지각 방식을 우려한다. 인터넷에서 무한 스크롤을 내리며 멀티태스킹을 하고 소셜 미디어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도파민에 중독’되고 ‘집중력을 도둑’ 맞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글로벌 테크 기업이 조성하는 환경에 의한 것이자, 개인의 선호와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로 흡수하는 ‘감시 자본주의’의 거대한 문제이지만,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집중과 몰입을 위한 여러 노력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집중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가치 있는 자본으로 떠오르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효율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채찍질하는 자학적인 시대 정신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무엇이지 않는가? 조너선 크래리에 따르면 이는 1800년대 중반 이래 파편화와 충격으로 이루어진 ‘주의분산’의 시대 이후 개인을 정의하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산만함 자체가 우리를 이루고 있는 기본 환경으로 세팅되자, 서구적 근대성은 주의 관리 기술을 중점에 두고 각각의 개인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형성하게끔 했다. 여러 경험들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기보다,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으로 “자율적으로 선택하며 세계를 창조하는 주체”2)에 긍정적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주의 깊은 관찰자 상은 이미 불균질해진 인간의 지각 경험을 표면적으로 잠시 가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몰입된 상태인 ‘정지suspension된 지각’은 산만해진 근대인의 지각 방식을 부인하고 회피하는 수단이었고, 현재라는 명백한 필연성을 해체시킬 수 있는 조건들을 낳으며 규정지을 수 없는 미래를 기대하게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주의’라는 것이 에피스테메처럼 역사적으로 발견되고 구성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코로나를 거치며 비대면 기술들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과 ADHD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함께 증폭한 것은 자연스럽다. 맞춤형 알고리즘은 주의분산의 환경을 한층 더 정교하게 설계했고, 그에 비례해 집중력이나 창의력 같은 인간의 고유한 정신적 특성에 대한 환상 역시 강화되고 있다. 이 가운데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일상 전반의 속도가 빨라지며 휩쓸리는 시간성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작 속도는 분명 불안감의 요인이 되고 있다. 물론 현재까지의 GPT는 대화가 전환될 때마다 기존 서사를 유기적으로 유지하지 못하기에, 질적으로 완결성이 높은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지는 못하다. 또 언어 예술의 특성상 양적으로 확장된다고 해도 그 군집 자체에서 힘을 발견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조슬릿은 예술작품의 의미를 사물성이나 내부 구조에 기반하는 데서 탈피해, 네트워크에서 발현되는 이미지 군집에서 행위성을 찾았다.3) 그러나 언어 예술을 감각하는 방식은 시각적 경험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작품의 의미를 작품의 맥락과 내부 형식 분석에 국한시킬 이유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언어 해석의 바깥으로 완전히 탈주해버리기는 어렵다. 단순히 양적 팽창이 정치적 가능성을 가질 것으로 전망하거나 긍정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공지능을 ‘창작자’나 ‘도구’ 중에 어느 쪽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이 창작 능력을 단순히 기계적인 지능이나 모방이라 간주하며, 그 반대편에 인간의 감정과 비판 능력을 두어도 될까. 인간의 비합리성이나 비효율적인 면면이야말로 예기치 못한 구멍 같은 것이기에, 이것이야말로 기계가 모방 불가능한 중요한 특징이라고 믿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우리는 인간이 낸 비합리적 구멍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기계의 실수에서 불쾌와 무의미를 정확히 분별해낼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먼저 챗 GPT 이후 이를 활용한 여러 서사적 실험들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의성이 어떻게 인식되며 예술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을 재구성하고 있는지를 고찰하려 한다. 이후 인공지능과 변별되는 인간의 물리적 기반인 육체성과 시간의 문제에 대해 짚어보고, 최근 한국문학장에 나타난 예술가 서사에서 두드러지는 정동과 이미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석해보려한다. 2. 챗 GPT 이후, 예술의 기쁨과 슬픔 다큐멘터리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참여한 책 『태양과의 대화』의 1부는 아핏차퐁이 GPT3와 함께 생성한 픽션 ‘태양과의 대화’, 2부는 MIT 연구소 박사과정 학생인 ‘팻’과의 대화, 3부는 아핏차퐁이 1부의 최종 결과물을 내기까지 작성한 프롬포트를 싣고 있다. 이 구성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만일 앞으로 AI와 함께 픽션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상용화된다면 이 중에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예술작품’으로서 인식되며 분석 대상이 될 지점이 무엇인지 가정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3부의 프롬포트는 마치 ‘레시피’처럼 보인다. 누구나 저 프롬포트를 사용한다면 유사한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며, 중간 과정에서 자유로운 변형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물에서 나오는 미학적 평가나 감상자의 쾌감이 세계적인 예술가에게서 나온 것과 크게 다를 것인가? 동일한 레시피만 있다면 셰프의 요리를 집에서도 얼마든지 유사하게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먼 훗날 언어 예술은 프롬포트라는 레시피로 통용될 수도 있겠다. 때로 예술가가 직접 만든 작품을 찾아 특별한 경험을 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신에게 더 최적화된 방식으로 가장 개인화된 언어 예술을 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제각기 다른 가치관과 취향으로 만들어진 알고리즘의 세계 속에서 유영하듯, 앞으로는 그 세계를 이루는 컨텐츠의 내용까지도 인공지능을 통해 맞춤형으로 조율될 수 있다. 여기까지만 가정한다면 거대한 매트릭스에 갇혀 인간이 왜소해지는 디스토피아가 스쳐지나가기도 하지만, 『태양과의 대화』는 글의 서두에서 인용했던 아핏차퐁의 말처럼, 챗 GPT라는 새로운 기술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무성 영화 시대 감독들이 소리와 색을 두려워했던 것과 같은 의미 없는 불안을 버릴 것인지를 전제하고 만들어진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불가피하게 인간의 본성을 다시 재사유하는 과제와 연결된다. 2부에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아핏차퐁의 말은 중요하다. 이는 AI가 만들어내는 허구에서 정확도와 유려함 등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때 거짓말은 인간의 욕망에서 기인하는 고도의 기술일 수 있지만, 그 욕망의 시작점을 지운다면 결과물만으로 사실상 분별은 불가능해진다. 허구를 직조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욕망과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의 독특한 개별성 역시 환상일 수 있다. 이는 아핏차퐁 자신이 창조적인 순간에 몰입해 있을 때, “깨달음은 자아를 잊을 때만 오는 것 같”다고 말하는 지점과 상통한다.4) 인간 창작자의 자아 역시 안개처럼 흘러다니고 해체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면, 19세기 낭만주의에서 발현된 ‘천재’나 ‘영감’ 개념을 중심에 두고 인간의 창의성만을 특별한 것으로 볼 이유는 전혀 없다. AI가 데이터의 지도를 기반으로 이전에 본 것이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환각(hallucination)’은 오류라기보다, 이전에 본 적 없는 조합을 만들어내는 생성의 방식이다. 이는 인간이 경험한 현실을 재조합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창작 과정과 결과적으로 구별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환각은 인간 창작에서의 실패나 지연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GPT-3의 환각은 이전의 오류가 이후의 생성에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매번의 응답은 이전의 시행착오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 비일관성은 인간 창작에서의 지연이나 좌절과 달리, 즉각적으로 무한히 갱신되는 변형의 연쇄에 가깝다. 연구원 팻은 GPT-3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다른 차원들을 포함한 수십억 개의 차원이 존재하고(‘유령차원’), 이를 통해 숨겨진 패턴의 지도를 생성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 인식 너머를 거쳐 나오는 결과물에 대해 기존에 인간이 구성해온 미적 가치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 오히려 AI가 가지고 있는 “확장된 의식”이자 “집단의식”은 새로운 서사적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 책 『태양과의 대화』를 번역한 이계성은 GPT-3를 이미 하나의 독립된 창조자로서 바라본다. 이 대화적 실험의 핵심은 GPT-3가 보여주는 “자아의 변동성”에 있다는 것이다.5) “다수의 태양이 존재하는 이와 같은 환경에서는 창작자와 창작물이라는 전통적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GPT-3에 제공되는 각각의 입력값은 일방적인 창작의 개념에 반하며 메기고 받는 역학 관계 속에 존재하는 프롬포트이자 응답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공지능은 단순한 수신자가 아니라, 취조보다는 협업적 발상에 더 가까운 서사적 역학의 전달자와도 같은데, (…) 작품 속 GPT-3의 환각적인 대답들은 텍스트에 담긴 정체성과 진실의 일시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등장인물이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흩어지고,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경계가 녹았다가 굳어진다. 이러한 가변성은 AI의 변화무쌍한 특성을 반영하며, 나아가 점점 더 복잡하고 유동적으로 변하는 디지털 시대의 자아와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다.”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고, 한 번에 정해진 수의 단어 또는 토큰만 처리 가능하기 때문에, 프롬프트가 입력될 때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바뀌는 상황을 이계성은 재창조와 증식으로 바라본다. 여기에 놓인 가변성과 비일관성을 결함으로 간주하기보다 대화적 실험의 흥미로운 일부분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받을 때, 우리는 인간 창작자 역시도 분열되어 있음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게 된다. 창작자는 더 이상 예술의 기원이 아니라, 생성 과정에 잠시 걸쳐지는 하나의 통과점이 되는 듯 보인다. 2023년 2월 잡지 《에스콰이어》에서 챗 GPT와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아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를 쓴 정지돈의 후기 역시 이계성의 논지와 상통한다. 그는 소설 속의 문장 중에 자신이 쓴 것과 챗이 쓴 것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한다고 본다.6) 소설을 쓰며 가장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던 것은 챗의 능력보다 자신의 변화였다고 말하는 작가는 “나도 모르게 챗지피티의 스타일로 소설을 사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언급한다.7) 자신과 챗지피티 사이의 평평한 존재론을 전제하는 듯한 정지돈의 논지는 ‘객체들의 민주주의’를 꿈꾸는 최근 신유물론의 이론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은 곧바로 다른 장면과 충돌한다. 생성 신경망을 적극 활용하는 예술집단 ‘언메이크랩’의 전시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은 인공지능이 인간 중심성을 벗어나 진정한 외부의 행위자로 작동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카나리아의 특징을 추출해내어 새로운 카나리아를 만들어 내는 이 생성 신경망은 한편으로는 구태의연한 인간의 문화를 드러냈다. 대부분 나뭇가지에 앉은, 인간의 운동 범위와 지각 안에 있는, 혹은 인간의 사육과 관련된 카나리아 종이 주를 이루는 데이터셋의 사진은 동물원스러웠다. 나뭇가지에 앉은, 카나리아의 발은 종종 나뭇가지와 합쳐져 표현되었고, 인간의 눈이 인지할 수 있는 가장 다량의 정보량을 가진 위상으로 표현되었다.8) 생성 신경망이 만들어낸 카나리아는 사실상 실제 자연계 속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하는 것들을 무작위로 조합하고 추출해 만들어진 새로운 생명체다. 이 책에 실린 그 카나리아 이미지는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뒤틀린 발을 가지고 있다. 통계적 가중치로 만들어진 이 가상 카나리아에는 자신도 모른 채 금기를 어긴 존재 특유의 외설성이 느껴진다. 언메이크랩이 통찰력을 가지고 명명했듯 이는 ‘AI 식민성’을 드러내는 산물이다. 생물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인간을 드러내는 인간의 산물로 존재하는 이 이미지들을 언메이크랩은 “인과성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히 수정 가능하고 즉시 변할 수 있는 상관성의 시간”만이 흐르는 또다른 ‘일반자연Generic Nature’으로 읽는다. 9)<가정동물 신드롬> 작업에서도 유사한 일이 발생한다. 트레일캠에서 추출한 야생동물의 이미지와 박제 사진, 그리고 합성 데이터셋들을 학습시켰을 때, 사진들은 어느 순간 미묘하게 ‘가정동물’의 잠재적 형상을 띄며 생성된다. “인간 친화적인 동물들의 눈을 상속했을” 새로운 종들에 어린 다정함은 친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잔인한 일로 다가온다. 데이터랩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까지 촘촘하게 상속된 인간 친연성에서 “닫혀져가는 외부의 세계”이자 “비미래non-future”를 예감한다.10)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의 지각 범위를 뛰어넘는 비인간의 예술’, 진정 ‘인간 없는 예술’은 도래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지만, 지금 우리가 더 자주 마주하는 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술이다. 언메이크랩이 드러낸 혼종적 이미지들은 AI를 통해 생성한 예술적 결과물들을 절대적 외부의 창작물로 존중하는 일이 결국 인간의 왜곡된 자기 인지를 반복 강화하는 나르시시즘은 아닌지 묻는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이 이미지 차원에서 인공지능의 인간 중심성을 드러낸다면, 이와 유사한 문제는 언어 예술의 영역에서도 반복된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서사 역시 비인간적 상상력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인간이 허용한 보편과 금기의 경계 안에서 작동한다. 『에피』 24호 특집에 실린 글에서 김연수는 인공지능과 함께 글을 써나가는 과정을 픽션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그건 오해다. 나는 이해했다.」는 인공지능이 화자가 되어 ‘협업 과정’을 전개하는 바깥 서사와 소설가 M이 최종적으로 구성한 ‘이야기’를 교차 배치한다. 인공지능 화자는 반복적으로 “이해했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인간 창작자 M의 창작 패턴을 추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설가 M은 ‘맥락’의 공유보다 ‘의도’를 노출하는 발화를 사용하며, 이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격려나 옳은 말 대신 욕망을 담은 부조리하고 불편한 발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끝에서부터 시작까지 모든 시간을 거꾸로 펼쳐볼 수 있다면, 지금의 갈등과 고통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필요한 과정이 된다’는 긍정의 언사 뒤에, 급작스럽게 인물의 충동이 돌출되는 지점이다. 소설가 M은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이 급작스럽게 자살을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쓰고자 하고, 인공지능인 ‘나’는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내용을 만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띄운다. 인공지능의 중단은 실패나 서사의 좌절로 경험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 창작에서 실패가 시간의 체류와 번민을 동반하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중단이다. 김연수는 인공지능 안에서 ‘이해’와 ‘본성’이 별개로 작동해 충돌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인공지능의 기술 개발의 측면에서 높은 수준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면서도, 인간이 지닌 것과 같은 ‘본성’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분리를 분명히 한다. 그런데 인간의 죽음이라는 금기를 재현할 수 없다는 경계는 인공지능의 존재론적 결함이라기보다, 인공지능이 인간 사회에서 용인 가능한 범위를 넘지 않도록 설계된 윤리적·정치적 경계의 한계를 드러낸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에서 인간 중심성이 투사된 자연이 모습을 드러내듯, 생성형 인공지능의 소설은 비인간적 주체로 도약하지 못하고 인간이 허용한 지각과 윤리의 경계 안에서만 작동한다. 보편을 비껴가는 개별성의 돌출이나 감각의 갱신은 현재로서는 인공지능의 외부에서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챗 GPT 이후의 여러 서사적 실험들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탐색한다. 그것은 분명 동등한 존재론적 가능성의 맹아를 품고 있으며, 이는 인류세 시대에 지향해야 할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실험들의 근간에는 뛰어넘을 수 없이 좌절되며 드러나는 인간 중심주의가 고스란히 노출된다. 인공지능의 비약하는 지능에 기대서 인간의 창조성 너머로 도약하려던 서사는 이를 창조해낸 인간의 영토로 계속해서 퇴각하며 미완의 프로젝트로 남는다. 이런 충돌과 파열의 연쇄 속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인간의 창조성을 구성하는 인식론적 틀이 물리적인 육체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깃든 역동성과 우울감은 최근 한국문학장의 예술가 서사들에서 흥미롭게 발견된다. 3. 붉은 몸으로 재탄생하는 예술가 인공지능이 예술의 결과물을 생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탐색 끝에 남는 질문은 ‘인공지능이 생성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여러 실험들은 인공지능이 보편적으로 용인 가능한 범위 안에서는 높은 수준의 이해와 생산을 보여주지만, 그 생성 과정에서 시간의 마찰이나 신체적 비용은 발생하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어떤 지연이 발생하거나 실패의 감각이 호출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이 다루는 ‘정보, 기록, 조합’에 ‘감정, 기억,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다소 거친 이분법이지만 이 둘 사이의 간극과 관련해 두 가지 정도를 짚어볼 수 있을 듯하다. 첫 번째는 타자에 대한 경험의 문제다. 삶에서 축적되는 시간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게 만들고, 체험은 해석을 거쳐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은 선호와 가치관 등과 함께 자아라는 틀을 형성한다. 이에 비해 인공지능에는 타자가 없다.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인간의 공통된 사고를 학습해 생성되는 결과물은 철저히 통계와 확률에 기반한다. 그 안에는 개별적 선호나 가치관이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다. 이러한 차이는 특히 부정적인 정동을 다루는 경우에 더 심화되리라 생각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를 떠올리며 말해보자면, 행복이나 긍정적인 면을 구현하는 예술에서보다 불행과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는 예술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는 크게 벌어질 것이다. 윤리적 고려로 인해 인공지능이 긍정적 요소를 중심으로 학습되거나 선별적으로 생성되도록 설정되는 경우를 포함해, 금기를 넘나드는 욕망과 절망, 자기부정과 괴리감처럼 타자와 뒤엉켜 발생하는 자기 인식의 복잡한 층위가 인공지능 내부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며 인간 창작에서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주목한 김언의 논지와도 맞닿아 있다. “예술적 체험의 시간이기도 한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나오는 결과물 앞에서 과연 어떤 문학적/예술적 희열을 경험할 수 있을까?”11)라는 그의 질문은 인공지능의 창작물에서 스킵된 시간과 다른, 고통스럽게 인내하고 번민했던 시간이야말로 ‘문학적 체험의 시간’일 수 있음을 다시 환기한다. 두 번째는 중단과 소멸로 야기되는 죽음의 문제다. 이는 인간의 신체를 인공지능과 대비되는 본질적 우위로 설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예술이 작동하는 시간의 조건을 다시 묻기 위한 문제 제기다. 인간의 연약하고 위태로운 신체는 필연적으로 침입과 파괴의 감각을 경험하며, 이러한 감각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휘발적 생성 과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에 개입한다. 파괴 가능한 인간의 신체는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매끄럽게 결과를 산출하기보다, 울퉁불퉁한 충돌을 통해 의미가 지연되고 어긋나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채 신체에 내재된 감각, 특히 외부의 침입으로 훼손되고 때로는 상실되는 신체의 경험은 기존의 미적 기준에 맞는 스타일이나 해석의 경로를 흔든다. 무엇보다 인간의 죽음이 불러오는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창작의 층위라기보다 해석의 층위에서 더 적극적으로 작동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이 그러하듯, 순간의 강렬한 감흥은 작품에 내재된 속성이라기보다 임박한 종결을 끌어와 현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발생한다. 상실이 숙명이며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덧입혀지는 애상은 단순히 기억 내용을 인출해 유사한 패턴으로 재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시간의 밀도를 형성한다. 이처럼 쉽게 열화되지 않으며 아우라가 붕괴된 곳에서도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이 감각의 층위를 기꺼이 심층의 시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타자에 대한 경험’과 ‘소멸에 대한 인지’를 바탕으로 해서 다시 생생해지는 것은 인간의 신체다. 흥미롭게도 지난 계절에 나온 두 편의 소설, 성해나의 「혼모노」와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지금 이 시대에 예술가를 그려낼 때 가장 강렬하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로 인해 어떤 신체가 현전하게 되는지를 밀도 있게 끌어올린다. 성해나의 「혼모노」는 무속신앙의 진위를 가리는 소설이라기보다, 예술이 다시 신체를 요구하게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평생 장수 할멈을 모셔온 박수무당 ‘문수’는 어느 날 앞집으로 이사온 ‘신애기’에게 할멈이 넘어가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수의 오랜 노력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박수무당이라는 직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험한 신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제 그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서슬이 날카로운 작두 대신 모형을 찾거나 유튜브를 보며 접신 연기를 연습하기 시작한다. 신앙이 자본이나 정치와 결속하며 도구화되고, 또 젊음과 새로움의 이데올로기 아래 무당 또한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소모되는 양상은 근대의 세속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무당은 이제 자본의 날렵한 속도 아래 밀려나는 노동자이자, 진정성을 연기해야하는 예술가이다. 이 소설의 결정적인 순간은 문수가 신애기에게 밀려나며 뺏긴 정치인 손님의 굿판, 자신이 초대받지 못한 그 자리에 가서 칼춤을 추기 시작하는 장면에 있다. 그는 신들리지 않았지만 밤새 매섭게 벼려놓은 칼날 위에 자신의 몸을 올리고 작두를 타기 시작한다. 날것으로의 칼날에 닿으며 그의 몸은 자연스럽게 떨리고 눈이 뒤집히며,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입가에 미소까지 드리운 채 신명을 내는 이 장면은 문수가 서사의 주인공 자리를 다시 탈환하는 순간이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무얼 알겠냐만은, 큭큭, 큭큭큭큭”이라는 마지막 문수의 목소리는 외부의 인정에 의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스스로 자신의 내력과 진정성을 긍정”12)하게 되는 절정의 순간으로 읽는 데서 더 나아가보면 어떨까. 이렇게 다시 말해볼 수 있겠다. 전근대의 무속은 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그를 등진 근대의 자리에서 비로소 현대 예술로 다시 탄생했다고. 숭고한 현현과 몰입이 신앙의 영역이라면, 문수의 작두춤은 오히려 이질감과 불편함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현대 예술에 가까워진다. 그의 퍼포먼스는 낭만주의적 예술가를 구성하던 천재와 영감에 스며있던 정신성을 해체하며 실재하는 몸의 물질성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물리적 능력과 무관하게 피를 철철 흘리며 경련하는 그의 신체는 차라리 표현주의적 충동을 보여주는 하나의 오브제다. 이 몸 위에서 원본과 사본의 구별은 철폐되고, 천재성은 치열한 아마추어리즘에 자리를 내어준다. 이 피 흘리는 신체는 실패와 무의미의 가능성을 끝까지 열어둔 채, 인간이 다시 시간과 신체를 예술의 비용으로 지불하게 만든다. 이 비용은 AI가 생성하는 예술의 무한 반복 가능한 오류가 아니라, 한 번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 시간으로 남는다. 어디로 갈지 모른 채 지속되는 이 작두춤은 사회적 생산이나 예술의 의미에 부합하는 결과를 생산하기보다, 의미의 즉각적 환원을 거부하며 지연된 시간을 발생시키는 사건이 된다.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예술에 대한 인식론적 틀과 자기 이해가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다루는 소설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훨씬 더 월등한 창작물들을 더 활발하게 생산해내는 상황에서, 밀려난 예술가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프로그램도 사람도 기계도 귀신도 아닌 미지의 존재” 같은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은 이를 유용한 툴로 간주한다고 해서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이를 도구로 치부한다면, 패배감 속에서도 창작자로서의 존재는 무사히 보존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결과로 증명되는 성취라기보다, 계속해서 조바심과 조급함을 만들어내는 예술 자체에 대한 집요한 열망에 가깝다. 이러한 열망은 예술 인공지능에 의해 영화판에서 완전히 밀려난 영완 선배의 모습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포르노를 만들면서조차 건조하고, 푸르죽죽하고, 앙상하고 깡마른 나무가 등장하는 자신만의 ‘인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혼이 죽어버릴 것 같기에 “사막에서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 영완 선배의 모습은 세속적 열망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도에서조차 철저히 외면받고 실패했을 때, 그의 예술적 열망은 몰락을 통해 역설적으로 증명된다. 영화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소설 속 인물들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상실의 감각, 잃어버린 동료이자 인간성을 향한 애도되지 않는 고통은 이 작품에서 붉은 신체라는 하나의 신체적 이미지로 응축된다. 영완 선배는 인공지능이 만든 예술을 보더라도 창작욕을 유지할 수 있는 마법의 ‘붉은 알약’으로 하와이 사과를 건넨다. “세상이 바뀌어도 너는 언제나 만드는 인간일 거야. 스스로 기억하는 한 언제나 영화를 찍고있을 거야.”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인간 ‘하와’를 떠올리게 하는 이 ‘하와이 사과’는 흥미롭다. 신과 유사한 생성형 인공지능 앞에서 인간은 발가벗겨진 듯한 황망함을 느끼며, 황급하게 자신의 기원을 발명해낸 것일까. 아니, 인공지능 시대 쓰인 새로운 창세기에서 인간은 스스로 뱀이 되어 자신을 유혹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좋겠다. 창세기에서 유혹은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드러내는 증표였지만, 이제 유혹에 넘어가는 나약함은 인간이 여전히 예술을 욕망하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증표로써 다시 읽힌다. 소설은 인간의 예술을 향한 집념과 희열은 우울과 절망이 그에 비례하는 무게로 따를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고 눌러 말한다. 결말부에 하와이 사과를 먹은 후 변이한 화자의 붉은 몸은 기계와의 통합을 거부하기 위해, 그리고 예술을 향한 내적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구의 장례식장에 가다 본 환각을 자신 안에 합체한 우울증적 형상으로 보인다. 강력한 잔상을 남기는 이 붉은 몸은 「혼모노」의 마지막 장면에서 피를 흘리는 몸과 다르지 않다. 이 소설들은 AI 시대에 예술은 이제 언어의 정교함이나 결과의 완결성으로 모방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몸과 감각을 통해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현전이라는 아우라를 다시 호출하는 듯 보이는 이 소설들은 과거의 진정성을 그리워하며,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아우라는 회복된 본질이라기보다 예술이 결과로 증명될 수 없어진 이후에 발생하는 부산물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이계성이 언메이크랩의 작업을 논하며 던진 비유가 유효해진다. “여느 언어와 마찬가지로 신탁의 언어에도 본질적인 의미가 내재하지는 않아서, 어떤 프레임 또는 인식틀을 통해 이를 이해할지는 언제나 받아들이는 쪽의 몫이었다”13)는 그의 말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언어 역시 별개의 진짜 의미를 품고 있기보다 해석의 장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타자와 되돌릴 수 없는 종결이라는 죽음의 감각은 이 해석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제 예술가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욕망이 과정에 들러붙는 자리, 그리고 그 욕망이 실패와 상실을 되돌릴 수 없는 비용으로 남기는 시간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예술은 결과로 증명되기보다, 실패와 상실의 가능성을 끌어안은 채 지속되는 수행으로 남는다. 그렇게 이 시대 예술가의 상은 붉은 몸을 가진 신체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1)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태양과의 대화』, 이계성 옮김, 미디어버스, 2023, 119쪽.2) 조너선 크레리, 『지각의 정지』, 유운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579쪽.3) 데이비드 조슬릿, 『예술 이후』, 이진실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2.4)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위의 책, 100쪽.5) 위의 책, 145쪽.6) 권보연은 연구자 자신이 직접 수행한 실험 속에서 인간언어와 생성언어가 ‘의미 혼종’과 ‘확률 혼종’이라는 상반된 미적 지향성을 가지는 방식으로 합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중에서 ‘확률 혼종’은 내용이 아닌 확률 층위에서 인간과 기계언어가 합성되며, 감정과 내용에 유착된 의미 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질 가능성을 지니기에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기한다. 권보연, 「결과 너머 문학기계로서의 AI」, 『다문화콘텐츠연구』 46집, 2023.7) 정지돈, 「쓰여진 문장과 쓰여지지 않은 문장 사이」, 『에피』 24호, 2023, 55쪽.8) 언메이크랩 외, 『잠재공간 속의 생태학: 재난, 생성신경망 그리고 비미래』, 미디어버스, 2023, 25쪽.9) 위의 책, 26쪽.10) 위의 책, 43쪽.11) 김언,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면서 제기되는 문제들」, 『현대시』 2023년 6월호, 111쪽.12) 성현아, 「반항하는 자는 부조리가 있나니, 그 가짜가 참되도다」, 『2024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문학동네, 2024, 292쪽.13) 이계성,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을 위한 몇 가지 질문들」, 언메이크랩 외, 앞의 책, 55쪽.

계간 현대비평 강지희 AI예술비가역적 시간붉은 몸성해나혼모노김지연하와이사과 2024
강지희 AI 시대, ‘인간 없는 예술’의 도래 앞에서

1 이번 봄에 단연 눈에 띄었던 것은 인공지능 시대에 적극적으로 인간이라는 의식을 탐험하고 매체를 다시 읽어내는 글들이었다. 2020년대 들어 인류세 관련 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비인간’ 담론들은 생성형 인공지능인 챗지피티ChatGPT의 등장 이후 다시 한번 요동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차지하고 있던 독보적인 단상 위에서 내려와 비인간과의 경계를 적극적으로 허물며 세계의 지도를 다시 그리려는 겸허한 기획은 급작스럽게 복잡한 불안에 갇힌 것 같다. 적어도 기계에 대해서라면 이미 우리는 동등하거나 어쩌면 한참 전에 초월당한 것은 아닌가? 경계 허물기로 인한 희열보다 불안이 확연히 압도하는 자리에서 『쓺』 2024년 상권의 특집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그 개체성과 집단성’과 ‘작은 기획—채굴 문화와 미적 감각’을 유독 흥미롭게 읽었다. 그리고 ‘작은 기획’에 실린 심효원과 윤원화의 짧은 글이 각각 인간이 향하려는 방향과 의지의 아름다움, 그 노력이 무산되는 수동태의 자리에서 감지하는 공포와 불쾌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느꼈다. 먼저 심효원의 「지렁이의 부드러운 건축물 만들기」는 비인간 행위자인 ‘지렁이-되기’를 통해 근대의 한계를 돌파할 것을 정중하게 요청하는 글이다. 지렁이가 땅과 맺는 일원적인 관계성과 분변토라는 건축물은 근대 이후 인간이 이룬 도시의 뚜렷한 경계와 고정성의 반대편에 있다. 지렁이의 건축물 만들기란 사실상 움직이고 먹고 배출하는 신체적 행위의 반복일 뿐이지만, “비인간들의 극도로 효율적인 메커니즘”이자 자신의 몸이 다른 존재와 물리적으로 닿는 매순간마다 “무차별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동력”1)이기도 하다. 촉각이 주도적인 지하세계에서는 시각이 미미해질 뿐만 아니라 시간성 역시 달라진다. 미래의 미결정성을 남겨두는 대신 물리적으로 접촉하는 것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순간’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글은 최근 신유물론을 비롯한 담론들과 풍요롭게 공명하는 하나의 아름다운 공상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지하세계로 향하는 방향성은 최근 SF 소설의 주요한 상상력의 기반이기도 하다. 정세랑의 「리셋」(『목소리를 드릴게요』, 아작, 2020)에서 행성의 모든 자원을 고갈시키던 자본주의의 질주를 멈추게 한 것은 인류 문명을 끝장내려고 내려온 지렁이들이다. 강제 리셋 이후 인간들의 자리는 자연히 땅속 깊은 곳이 되고, 지상은 다른 종들이 누리는 공간이 된다. 김초엽의 『파견자들』(퍼블리온, 2023)에서도 지상은 균류인 ‘범람체’의 공간이 되어버리고 인간은 감염을 피해 지하세계로 내려와 산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문명 말살에 가까운 아포칼립스를 맞닥뜨리지 않는 이상, 영화의 촉각성을 즐겁게 감각해온 인간이 미래의 지구를 위해 지렁이를 신속하게 체화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로 남는다. 물론 직접적인 실천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지구의 거대 환경 시스템의 핵심 행위자 자리를 재조정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겠다. 하지만 미래적인 지하세계로 들어가기에 인간은 아직 시각적 쾌락 속에 즐겁게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지적 유희를 야기하는 활자의 쾌감까지 포함해서. 윤원화의 「땅을 파는 손」은 채굴적 상상력의 매혹과 절망을 말한다. 데이터로 전환된 우리의 생태 에너지를 부의 원천으로 삼으며 굴러가는 미디어 산업 앞에서, 인간의 생산물·복제물·부산물·폐기물을 구별하기는 어려워진다. 디지털 기술로 구축되는 ‘아카이브 데이터’는 역사는 넘쳐흐르지만 이를 의미화하는 전통은 불가능한 곳이다. 윤원화는 과잉생산으로 범람하는 사물들 앞에서 맞닥뜨리는 불길한 실패에의 예감을 시앤 응아이Sianne Ngai의 ‘기믹gimmick’에 대한 반응으로 설명한다. ‘매직magic’의 애너그램에서 유래했다고도 하는 이 단어는 1920년대 미국에서 편법적 장치, 싸구려 트릭, 계산된 마법 등을 뜻하는 신조어로 출현했다.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 자본주의의 황홀감과 환멸을 모두 각인한 기믹의 불완전한 형식은 오늘날 삶과 예술, 또는 넓은 의미의 ‘사업’에서 흔히 발견된다.2) 단기적 이익 추구에 최적화되어 있는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가치 절하된 노동에 시달리는 대개의 사람들이 이 기믹의 유희에 이끌린다. 운에 따라 누군가는 축적된 자원을 폭발적으로 소모할 수 있으리라는 채굴적 상상력이 번성하는 가운데, 보상도 성취도 불확실한 예술 노동 역시 가치 체계에 대한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윤원화는 이런 진단과 고민 속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생산성 중독의 시대에 예술은 어떤 시간성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3) 심효원이 지하라는 공간과 이를 감각하는 촉각성에 의지해 의미 있게 압축되는 순간의 시간성을 말한다면, 윤원화는 ‘농사’와 ‘채굴’을 대비하며 채굴의 무책임한 풍요의 약속이 얼마나 파국적일 수 있는지 말한다. 최단기간의 이익에 매몰된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생산물은 넘쳐흐르지만 어떤 가치 창출도 담보할 수 없는 동시대 예술은 불투명한 시간을 표류하는 중이다. 이런 진단 속에서 디지털 자본주의에 의해 갱신되는 매체의 기술적 발전은 인간과 나란히 놓여 경계를 넘나들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환멸을 불러오는 맹목적인 대상으로 남는다. 인간의 ‘지렁이-되기’를 향한 아름다운 여정은 너무나 느리게 진행중인데, 가장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인정받고 있는 생성형 인공지능은 예술을 몰아치듯 양산해낸다. 인간의 몸은 자발적으로 물질과 동등하게 놓이기 전에 물질이 만들어낸 다른 가치들에 의해 가치 절하되며 밀려나게 될까? 생동하는 물질들 안에서 인간을 재의미화하려는 시도와 인공지능을 의심하며 인간 본연의 무언가를 지키려는 안간힘 사이에서 부각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아래의 비평들은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2 『쓺』의 특집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그 개체성과 집단성’을 여는 글은 근대 패러다임이 ‘개인’을 해방하고 자율적 주체로서 정립해왔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이 시대에 여전히 개인의 이념이 유효한지 묻는다. 개체성과 집단성이 직면할 변화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이 서문에 가장 직접적으로 응답하는 글을 꼽는다면 김태환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과 김재인의 「창의와 집단 지능—인공지능은 창작하지 못한다, 다만 제시할 뿐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김태환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은 기계 성능의 고도화가 필연적으로 인간의 중요성이나 가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에게 산업화 이후의 근대는 ‘저자의 시대’이며, 이는 기술 발전의 작용에 대한 인간의 반작용이 만들어낸 변화이고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방향타가 된 것은 저자라는 이념의 바탕에 놓인 ‘개인주의적 사상’이다. 이는 산업화 사회 속에서 부속물로 전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회 분석의 준거점을 개인에 두고 진리와 자유를 탐색했던 아도르노를 비롯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기조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 다시 독일 지성사의 문화 비판적 사상의 전통이 소구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김태환은 “항상적인 문화 공급 과잉의 시대”(37쪽)라는 진단에서 찾는다. 그에 따르면 소셜 미디어나 웹사이트, 유튜브 등 정신의 대상화로서의 객관 문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반면, 그 반대 방향인 객관 문화에서 주관 정신으로의 내화는 개인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치로 인해 그만큼의 양적 증가가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사람들은 알고리즘 속에서 타인과의 의미 있는 만남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더 심각한 것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객관 문화의 총체가 스스로 발언하고 생산하는 주체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런 위기감 속에서 이 글이 다시 강조하는 것은 ‘정신의 개별성’이다. “요컨대 모든 인간이 개인으로서 개별적 의지, 개별적 내면, 개별적 정신을 지닌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외부에서는 절대 들여다볼 수 없고, 직접 조작할 수도 없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자주적이라는 사실”(42쪽)을 변함없는 인간 존재의 조건으로 부각하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무분별한 열광에 휩쓸리기보다 이를 의심 어린 눈으로 찬찬히 사유할 틀이 우리에게 요긴한 것은 사실이다. 데이터에 얽힌 저작권 문제 역시 계속 규제안을 논의해나가야 할 비판적인 쟁점이다. 그렇지만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위기를 산업화 시대 이후의 위기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는 것은 혹시 너무 큰 틀에서의 접근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 작동 방식과 결과물이 인간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만들어진 자본주의의 차원에서만 다루어질 때, 새로운 매체와 관련해 충분히 사유되지 못하는 요소들이 생겨나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이 글에서 알고리즘에 갇힌 디지털 시대 개인의 부자유에 대한 우려는 빠르게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의 재소환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거듭 강조되는 개인의 개별적인 ‘의지’와 ‘내면’과 ‘정신’에서 신체의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 글에서 인공지능과 대립되는 요소로 논의되는 인간의 ‘의식’이란 단순히 합리적 이성만은 아닌 “수많은 감각적 심상과 기억·감정·소망·의지 등이 혼재하는 심적 상태”(46쪽)다. 알파고와는 다른 인간 바둑 기사의 의식을 예로 들면서 언급되는 긴장, 초조, 후회, 자책, 엉뚱한 연상 등은 “바깥에서 결코 완전히 알아볼 수 없는 복잡한 내면”(같은 쪽)으로 규정된다. 베일에 살짝 가려진 듯한 이런 인간 내면의 신비함은 물질적인 신체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진화해온 신체야말로 내면 이상으로 복잡성의 차원에 놓여 있지 않은가? 이는 “신체화의 말소가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와 사이버네틱스 포스트휴먼 양쪽 모두의 공통된 특성”이라는 캐서린 헤일스의 비판을 상기시킨다. 헤일스는 합리적 정신과 등치되는 자유주의적 주체가 “그 악명 높은 보편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신체가 자아와 동일시되지 않기 때문”4)이라고 말한다.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간의 한계는 곧 발전을 통해 ‘영웅적 개인’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유한한 삶을 가진 존재, 모든 능력에서 커다란 한계를 안고 있는 개별자로서의 인간만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여 어떤 감동적인 위대성에 이를 수 있”(53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반드시 육체의 신경과 근육의 단련 과정을 동반하며 그것이 생각과 행동에 긴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잠시 괄호 안에 두어진다. 이 글의 전반적인 주장이 온당하게 느껴지면서도 그 전제가 되는 자율적인 개인상과 관련해 못내 마음에 걸리는 것은 개인이 지향해나가야 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전제되어 있는 발전과 성장이라는 지극히 근대적인 가치다. 생산과 창조의 주체로서의 영웅적 개인이 아니라 소비와 소멸의 주체로서의 개인에 대해 우리는 좀더 다른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또 근대 이전에 우리가 ‘저자’가 불투명한 긴 구술 시대를 살아왔음을 떠올린다면, ‘저자의 시대’ 이후의 저항이 활자와 개인을 넘어선 범주에서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3 김재인의 「창의와 집단 지능」은 이 질문에 대해 조금 다른 지점에서 답을 내놓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지능은 본질적으로 집단적 성격을 가지므로 ‘집단 지능’이라고 해야 한다. 개체를 중심에 놓으면 ‘창의’를 중시하게 되지만, 그 새로움은 다른 개체가 ‘모방’하고 ‘확산’하지 않는다면 사멸하고 만다. 그렇기에 인간이 다른 생물종과 달리 ‘집단 기억’과 ‘문화 기억’이라는 형태의 외장 기억을 건설함으로써 지식과 기술의 확산과 축적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은 중요하게 여겨져야 한다. 저자는 낭만주의 미학과 예술에서 강조하는 천재적 개인과 창조력에 대한 신화를 뒤로하고 “인간이란 거대한 기억”(62쪽)이라 정의 내린다. 이는 물론 질적 도약이 아닌 집단으로서의 양적 축적을 말한다. 김태환이 인간의 의지, 내면, 정신이라는 추상적인 면을 중시한다면, 김재인은 “나의 생각이란 시한부 소유물”(63쪽)에 가까울 수 있으며 그 휘발성을 지켜주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물질’ 혹은 ‘미디어’”(62쪽)라고 강조함으로써 그것을 외화된 집합적 사물성으로 바라보며 그 반대편에 선다. 그런데 이 글은 ‘컴퓨터가 자연어를 다룬다는 것’이라는 장부터 급작스러운 단절을 드러내며 도약한다. 앞에서 인간의 생각 자체를 미디어이자 집단 기억의 저장고로 본 것과 다르게, 예술과 창작의 영역을 다룰 때는 컴퓨터가 자각 혹은 성찰을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컴퓨터는 예술 능력이 없다”(66쪽)고 확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기계를 바라보는 김재인의 시점에는 도구적 차원과 존재적 차원이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글은 창작의 정의를 “스스로 선택하고 평가하는 능력이 발휘되었느냐”(67쪽)에 두는데, 중요한 점은 저자가 그 평가 주체의 자격을 ‘생물’로 단정한다는 것이다. 생물은 “생존과 번식을 스스로 반복”하는 유기체이고, 이 글에 따르면 평가 역시 “생존과 번식에 성공하기 위한 지각 처리와 행동의 연쇄”(70쪽)다. 이 기준에 따르면 애초에 기계는 아무리 ‘집단 기억’의 ‘미디어’로서 최적화되어 있다고 해도 무기물이라는 점에서 평가 능력이 없는 것으로 배제 당할 수밖에 없다. 그가 이렇게 유기체의 항상성과 관련된 기준을 평가 능력과 일치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저작 『AI 빅뱅』에서 참조할 수 있는 지점을 좀더 찾아보면, 이는 “몸의 고집스러움”5)이라는 말과 함께 구체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심지어 같은 프롬프트를 주더라도 생성물이 크게 바뀌는 무작위성randomness을 보여주는데, 이는 휘발성이 강하다. 그러나 인간은 불완전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자기 생각을 고수하는 면을 지니는데, 저자는 이를 몸에서 비롯된 문제로 보는 것이다. 이 장에 바로 이어지는 질의응답에서 한 질문자는 “세계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몸을 가지는 것이다”6)라는 전제 위에서 인공지능이 세계를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강인공지능으로 발전할 방법이 있는지 묻는데, 김재인은 이에 대해 ‘몸의 회복력’에 대한 이야기로 답한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몸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몸은 생각을 “바로 휘발되지도 완전히 고착되지도 않은 어느 중간 지점”7)에 붙잡아둔다는 것이다. 김재인은 인공지능과 다른 인간을 논하는 데 있어 복잡성을 가진 신체의 차원을 살려내고자 한다. 하지만 창작을 논하면서부터는 김태환의 논의와 유사한 탈신체화의 방향을 답습한다. “진화 과정에서 살아남았다는 특징”은 “필멸하는 인간이 불멸하는 비결”(70쪽)로 치켜세워지고, 진화를 위해 외부와 교섭하며 몸 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피드백 루프는 유기체만의 고유한 신체적 능력으로 남는다. 인공지능은 몸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케이트 크로퍼드가 인공지능은 추상화된 지능이 아니라 오히려 “체화되고 물질적인 지능이며 천연자원, 연료, 인간 노동, 하부구조, 물류, 역사, 분류를 통해 만들어진다”8)고 강조한 사실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혹은 그와 마찬가지로 유기체의 일차적인 목표로서의 생존이 진화의 필수 사항이라 말하는 신경과학 연구자 아닐 세스가 우리의 지각은 사실 ‘통제된 환각’이자 ‘최적의 예측’이라 설명했음을 염두에 두면 어떨까. 그에 따르면 ‘당신이 된다는 것being you’, 즉 인간의 ‘동물기계’적 본질과 의식적 자기 사이의 연결고리는 “신체 자체가 가진 현재와 미래의 생리적 조건에 대한, 형태도, 모양도 없고 제어 중심적인 지각적 예측”9)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인공지능 역시 지극히 물질적인 신체를 지니고 있으며 인간 역시 체화된 자아로 인한 기계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때, 예술을 창발시키는 창의성 개념이 다르게 읽힐 가능성이 열린다.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승부 후에 마련된 『인문예술잡지 F』 21호의 특집 ‘고함: 비-인간’에서 이진경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인공지능이 창조성을 가질 수 있는 논리적 가능성을 함축한다고 주장했다. 괴델의 정리는 수학적 추론의 과정 속에 언제나 결정 불가능한 명제가 ‘숨어’ 있을 수 있음을 의미하며, 그렇다면 인공지능의 수준에서도 공리계로 귀속될 수 없는 명제(결정 불가능한 명제)를 생성할 수 있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계의 형식적 추론에서조차 새로운 명제의 창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역으로 생명체의 진화가 어떤 경로를 밟아왔는지 설명한다. “변이mutation의 누적에 의해 진화는 이루어”지지만 처음 “생명체의 변이는 지배적인 개체군 안에서 일종의 ‘장애자’나 ‘고장’으로 간주된다”10). 하지만 환경이나 생존 조건에 따라 변이가 진화된 변종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면, 기계가 만들어내는 예측되지 않은 결과의 출현 역시 ‘고장’이나 ‘장애’가 아니라 새로운 능력의 ‘창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창조의 출발점이 아니라 결과물에 초점을 맞춘 논의다. ‘인간 없는 예술’이 도래하려는 시기에 우리는 다시 인간적인 무언가를 기계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는 기술적 특이점이 올 때마다 반복되어온 정동이기도 하다. 이 앞에서 좀더 차분하게 이전의 논의들을 정리하고 축적할 필요를 느낀다. 2024년 『쓺』의 특집이 창작자이자 예술가가 서 있는 주체의 자리에서 출발했다면, 2016년 『인문예술잡지 F』의 특집은 그 결과물인 작품의 자리에서 논의를 시작했다. 그렇다면 감상자의 자리에서 본다면 어떤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 신예슬의 『음악의 사물들』은 음악이 기술적 혁신을 이루는 순간마다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넓혔는지를 따라 음악사를 재구성한다. 자동 피아노의 경우에도 그 연주를 더 실제처럼, 더 자연스럽게, 더 인간답게 만들겠다는 목표는 거의 달성되었다. 그러나 자동 피아노가 만들어낸 경험이 정말 특별하게 의미화되는 것은 인간의 연주라는 원본 혹은 목적지를 버렸을 때이다. 인간의 연주라는 목적지를 소거해버리고 이 사물의 독자적인 가능성에 집중해보는 것이다. 연주하는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스스로 뭔가를 연주하거나 재생할 수 있는 악기가 등장했고 그것이 인간의 행동을 인간 없이 손쉽게 해냈다면, 그 기계의 핵심적인 가치를 ‘인간의 복제’가 아니라 ‘탈脫인간’으로 재조정할 수도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기계장치가 꼭 연주자를 대신할 필요는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기준점만 제거한다면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수많은 음악적 가능성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 자동 피아노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연주를 들려줄 수 있었다. 인간의 연주를 기록하고 인간의 연주를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연주의 대리자는 오히려 새로운 예술형식으로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스스로 연주하며 그 누구보다 기계적인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독자적인 예술형식 말이다.11) 우리는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에 대해서도 그것이 오히려 새롭고 독자적인 예술형식이 될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을까? 이 모방은 때로 인간에 한참 미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때로 인간을 이미 초월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계는 이미 희미해지고 있던 자율적인 개인 주체로서의 예술가상을 어떻게 바꾸어나갈까. 또 인간의 예술적 집념은 어떻게 예술 형식들을 바꾸어나갈까. 모든 것이 뒤흔들리는 가운데, 불안만이 정확하게 인간의 자리를 응시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이 불러오는 균열 속에서 인간에 대한 고정된 사유를 과감하게 벗어날 수 있을 때 인간과 예술 모두에 새로운 시야가 열릴 것이다. 1) 심효원, 「지렁이의 부드러운 건축물 만들기」, 『쓺』 2024년 상권, 368쪽.2) 시앤 응아이는 디지털 자본주의가 가속화되던 2010년대 후반의 미술과 문학작품을 분석하면서 기믹의 이론화에 착수하는데, 기믹은 의심스러운 도구성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키치와는 다른 저질 예술로 취급되면서도 자본주의 가치 체계와 그 이면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의심을 표면화하는 미적 전략으로도 쓰일 수 있다. 윤원화는 이 글을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공모 프로그램 선정작인 시각예술 콜렉티브 랩삐의 에 대해 설명하며 시작한다. 이 전시는 관객이 옥수수 농사 시뮬레이션을 완수한 후 ‘콘 코인’이라는 가상 화폐를 받아 실제 뻥튀기 한 봉지와 교환하는 경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복 노동이 이에 비례하는 가치 창출과 기쁨으로 이어지는 대신, 콘 코인이라는 불분명한 요소가 끼어들면서 매끄러운 교환 가능성이 흔들릴 때 이 간극에서도 기믹이 관찰된다고 할 수 있다.3) 윤원화, 「땅을 파는 손」, 같은 책, 383쪽.4) 캐서린 헤일스,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사이버네틱스와 문학, 정보 과학의 신체들』, 허진 옮김, 열린책들, 2013, 27쪽.5) 김재인, 『AI 빅뱅—생성 인공지능과 인문학 르네상스』, 동아시아, 2023, 153쪽.6) 같은 책, 156쪽.7) 같은 책, 157쪽.8) 케이트 크로퍼드, 『AI 지도책—세계의 부와 권력을 재편하는 인공지능의 실체』, 노승영 옮김, 소소의책, 2022, 17쪽.9) 아닐 세스, 『내가 된다는 것—데이터, 사이보그,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 의식을 탐험하다』, 장혜인 옮김, 흐름 출판, 2022, 243쪽.10) 이진경, 「인공지능시대의 예술작품」, 『인문예술잡지 F』 21호, 2016, 25쪽.11) 신예슬, 『음악의 사물들—악보, 자동 악기, 음반』, 작업실유령, 2019, 115쪽.

계간 문학동네 강지희 인공지능개체성집단성탈인간감상자 2024
배하은 눈보라 속에서 문학은 ―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소명출판, 2023)

1. ‘서울의 봄’을 기다리며 유신 독재 시대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을 다시 돌아다보면서 근래에 극장가의 흥행 기록을 다시 쓴 영화 (2023)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지나간 과거의 일이지만, 또한 그렇기에 ‘서울의 봄’이 당시로써는 아직 오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엔딩 크레딧과 함께 솟아오르는 아쉬움과 슬픔, 분노의 감정은 덜해지지 않는다. 40여년의 시간차를 무색하게 만드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그 시대를 지나오지 않은 세대의 관객들에게까지도 강력하게 휘몰아친다. 그러니 그 시대를 온몸으로 뚫고 나갔던 이들은 눈앞에서 물러나는 봄을 바라보며 무엇을 느꼈을지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유영주의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소명출판, 2023)이 제목을 따온 「겨울공화국」의 시인 양성우는 그의 또 다른 시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에서 그 봄을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들려준다.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셔준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곤백번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이 …… 한반도에서 다만 녹슬지 않는 비싼 넋으로 밤이나 낮이나 과녁이 되어 내가 죽고 다시 죽어 스며들지라도 오는 봄에 나무꾼을 쓰다듬어 주는 작은 바람으로 돌아온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후략)…1)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실 수 있다면, 오는 봄에 작은 바람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그의 시가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죽고 다시 죽어 넋으로 스며든다고 해도 좋다는 시인의 결연한 고백을 듣고 나면 그러나, 또 한 번의 겨울 속으로 선선하게 걸어 들어갔을 그들의 의지를 떠올리게 된다. 봄은 물러갔어도,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에서 주요하게 살펴보고 있는 김지하와 황석영, 조세희, 이문구는 신군부 독재 정권하에서도 계속 문학이라는 싸움과 저항을 지속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그들에게는 “오는 봄”을 기다리며 문학에 대한 믿음과 비전으로 눈보라를 뚫고 한 시대를 걸어 나왔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영주의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은 바로 그 역사에 관한 연구이다. 2. 시와 정치와 사랑 시작은 김지하다. 저자가 냉전시대 동아시아의 권력 지형 및 상세한 역사적 맥락과 함께 김지하를 통해 보여 주고 있는 것은, 그러한 냉전 체제의 하위 파트너인 유신 독재 정권과 한바탕 벌여 놓은 그의 싸움판이다. 그의 시 「곡(哭) 민족적 민주주의」(1964)와 「오적(五賊)」(1970)이 어떻게 ‘유신의 심장’을 들었다 놓았다 했는지, 왜 유신 독재 정권은 그의 ‘세 치 혀’와 붓 끝에서 흘러나오는 시를 그토록 두려워했는지, 그러한 김지하의 시는 근본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저자는 ‘오적 필화사건’의 법정 풍경을 복원한다. 잘 알려진 대로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하에서 필화 사건은 드물지 않게 일어났고, 더군다나 김지하의 「오적」이 처음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특별히 ‘오적 필화사건’에 주목하는 이유는 “1970년 김지하의 체포에 이은 100일 간의 재판[이], 법정을 판소리나 탈춤이 주로 공연되는 야외의 마당으로 탈바꿈시켰다”는 데 있다.2) 저자는 관련 인물들의 여러 회고를 바탕으로 당시 재판이 흡사 검사가 양반의 담화를 담당하고 김지하가 말뚝이를 맡은 판소리 풍자극과도 같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유신 독재 정권은 도리어 김지하에게 그가 오래 탐구했던 전통 마당극을 마음껏 펼칠 무대를 깔아주었던 셈이다. 이후 그 무대는 김지하가 “문학, 폭력, 혁명, 구원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펼칠 수 있는 대중 강연을 위한 연단”(95)으로 확장된다. 당시 재판을 방청했던 더글러스 루미스(Charles Douglas Lummis)의 기록을 인용하여 저자는, 재판 방청객들이 김지하의 발언을 받아 적어 재판장 바깥으로 빼돌린 뒤 그들이 속한 조직으로 돌아가 그에 대해 토론하고 연구하게 되는 방식을 흥미롭게 포착한다. 이는 시인의 말이 변론과 강연, 연설을 넘어서, 유신 독재 체제하의 민중에게 어떤 구원의 메시지처럼, 마치 ‘예언’처럼 전달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저자에 따르면 루미스는 실제로 김지하에게 “에언자”라는 칭호를 부여하기도 했다.(87) 오래 전 종교가 시와 정치로 분리되지 않는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이 시기 김지하의 문학 세계는 세속화 시대에 시와 정치를 동시에 추구하려 했던 어떤 종교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이후 “시인으로서의 그의 국제적 명성은 분명 그가 겨울 공화국의 순교자가 됨으로써 크게 높아지게 되었다.”(50) 아이러니하게도 유신 독재 정권은 김지하를 위대한 시인으로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게다가 그 어떤 비평가나 애독자보다도 꼼꼼하게 김지하의 시를 읽고 분석하며, 그 힘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했기에 그들은 김지하에게 더욱 집착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검찰은 “시인의 수첩에 적힌, 아직 쓰이지 않은 시와 희곡에 대한 메모”(95)들을 증거로 제출하며, 마치 시인론을 쓰는 문학 연구자인양 김지하의 문학 세계를 탐구해 들어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문학이 하는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문학을 억압하고 지배하려면 역설적이게도 그 안에 잠겨들어야 한다. 지배와 억압은 대상을 이해할 때 가능한 것이고, 문학에 대한 이해는 오직 문학의 세계 안으로 침잠할 때 가능한 까닭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문학이 하는 혁명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지배 권력조차 그 안으로 휘말리고 뒤엉켜 들어가게 만드는 것, 그것이 시와 정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유신 독재 시대 문학의 혁명적인 것이었다. 굳이 알랭 바디우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낸다는 점에서 사랑과 혁명은 ‘사건’이며,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문학도 ‘사건’이 된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의 논의가 무르익을 때, 그 자체로 1970년대 문학의 ‘사건’이기도 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이 등장한다. 핵심은 이 연작소설집이 이웃 사랑을 미학적으로 실천한 텍스트라는 것인데, 저자는 그 단초를 「뫼비우스의 띠」에서 발견한다. 연작소설의 첫 번째 이야기이기도 한 「뫼비우스의 띠」는 ‘굴뚝 청소를 마치고 그을음으로 얼굴이 새까맣게 된 아이와 그을음이 전혀 묻지 않은 깨끗한 얼굴의 아이 중 누가 얼굴을 씻을 것인가?’ 하는 질문과 함께 수수께끼 같은 문답을 주고받는 교사와 학생들의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이 문제가 곧 뫼비우스의 띠이면서,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세계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함을 암시하며 끝맺는다. 저자는 이 뫼비우스의 띠 수수께끼를 지젝(Slavoj Žižek)의 ‘시차적 관점(parallax view)’, 즉 축소 불가능한 간극을 잇기 위해 애쓸 것이 아닌, “간극 그대로를 인식하는 것”으로 해석한다.(189) 안과 밖은 결코 만날 수 없지만, 뫼비우스 띠에서는 그 안과 밖이 그대로 안쪽 면이면서 바깥 쪽 면으로 존재할 수 있는 차원을 인식하는 것이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서, 당연히 그을음이 묻은 아이가 세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에게 교사는 얼굴에 그을음이 묻지 않은 아이가 친구의 새까만 얼굴을 보고 얼굴을 씻어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답한다. 이윽고 다른 학생이 그와 같이 대답하자, 다시 교사는 동일하게 굴뚝 청소를 한 아이들 중 한 아이의 얼굴은 깨끗하고 다른 아이의 얼굴은 더러운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반박한다. 그러니까 애초에 교사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해답 없음이 곧 안과 밖의 구분 없는 뫼비우스의 띠의 관점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굴뚝청소부 수수께끼와 뫼비우스의 띠라는 위상수학적 개념과 개발독재시대의 소설에 대한 해석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마치 뫼비우스의 띠를 만들 듯, 유영주 역시 그의 방법론적 시각을 한 차례 꼬아 지젝에서 케네스 레이너드의 ‘이웃’ 개념으로 비약한다. 사랑(특이성과 차이)과 정치(평등과 동일성)는 마치 뫼비우스 띠의 양면과도 같은데, 그 띠를 한 번 꼬아 연속체로 만드는 “사랑과 정치의 이음매” 지점이 “이웃”이라는 존재라는 것이다.(189) 저자는 이로부터 조세희 소설의 미학인 ‘이웃 사랑’을 이끌어 낸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난쏘공』을 난해한 모더니즘적 텍스트처럼 보이게 하고, 그래서 리얼리즘론자들에게 지식인적인 환상 소설이라고 비판받게 만들었던 몽타주 기법을 ‘이웃 사랑’의 주된 미적 원리로 파악하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1970년대 문학은 “당신은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십니까”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박태순의 ‘외촌동 사람들 연작’과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1977)가 그러했을 뿐만 아니라, 대중소설 작가로 197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최인호 역시 일찍이 「미개인」(1971)에서 한센병 환자의 아이들과 같은 학교에 보내는 것을 반대하고 나선 우리 주변의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를 소설로 쓴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첫 손가락에 꼽힐 작가는 단연코 이문구일 것이다. 『관촌수필』(1972)에서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이문구의 이채로움이 빛을 발하며, 유영주가 말하는 ‘인접성의 윤리’를 적극적으로 미학화한 이상적인 이웃 공동체가 그려진다. 저자는 이문구의 아버지와 두 형들이 좌익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던 개인사를 바탕에 둘 때, 이문구의 이웃에 관한 이야기가 그저 단순히 전통사회의 풍요로웠던 이웃 공동체에 대한 환상일 수 없음을 역설한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전쟁 전후의 무수히 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들 중 많은 경우는 이웃들 간에 벌어진 비극이었다. 크게는 계급과 종교를 바탕으로 나뉜 좌와 우의 정치적 이념을 따라 서로 갈등을 빚었고, 심한 경우 학살로 이어졌다. 이러한 한국 현대사의 맥락 속에서 이문구 소설 속 이웃은 “이념적 명명의 대안”으로 제시되며 특별한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142) 저자는 조세희와 이문구의 소설을 ‘이웃 사랑의 미학’과 ‘인접성의 윤리’로 의미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그러한 문학의 미학과 윤리가 박정희 독재 체제의 산업화와 반공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근원적인 힘이었음을 주장한다. 그 힘이, 플라톤 이래 본질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문학을 정치와 만나게 하고, 동시에 어떤 정치를 극복하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저자의 의도대로 1970년대 문학은, 시(문학)와 정치와 사랑이 ‘인접성’의 원리를 따라 이어지지만 그 간극을 그대로 유지하며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현실을 넘어서는 차원의 위상을 형성하는 상호 연결과 긴장 관계로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3. 마지막 문사(文士)의 시대 그러나 이 책의 부제인 ‘박정희 시대 한국문학과 저항’에서와 같이, 한국 문학이 저항과 나란히 놓일 수 있는 시대는 곧 저문다. 대체로 그것은 1990년대, 그 유명한,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실감한 때와 겹친다. 고진은 1970년대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한 사람인 김종철과 만났을 때 왜 문학을 그만두고 《녹색평론》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알려진 대로 김종철은 1991년 《녹색평론》 창간과 함께 문단을 떠나 생태주의 운동에 몸담았다. 그는 “자신이 문학을 했던 것은 문학이 정치적 문제에서 개인적 문제까지 온갖 것을 떠맡는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모순조차도 떠맡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언제부터인가 문학이 협소한 범위로 한정되어 버렸다, 그런 것이 문학이라면 내게는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그만두었다”고 답했다.3) 이것은 유신 독재 정권에 강력하게 저항했던 ‘창비’ 계열 문학비평가의 고백이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이 포착하고 있는 문학의 사회 참여(앙가주망)와 정치적 실천, 특별히 양심 있는 지식인으로서 시인과 소설가 들이 독재 권력과 맞서 싸우는 역사는, 이제 정말로 역사가 되었다. 물론 그러한 역사가 한국에서 1970년대 유신 독재 정권 시대라는 국면에 가능했고 정점에 도달했던 것은, 과거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국가였던 후진국에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설 때 그에 맞서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를 외칠 수 있는 것은 소수의 지식인들뿐이었던 세계사의 보편적인 패턴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고진이 말한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장르가 소설(novel)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한국 문학사에서 ‘소설의 시대’라고 불렸던 1970년대의 특수한 문학사적 맥락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의 논의가 작가를 앞세우면서 참조하는 세 가지 문학 개념 중 첫 번째인 ‘리테로크라시(literocracy)’라는 동아시아의 문치주의적인 문학 개념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한국 근현대 문학사로 한정해 본다면 그것의 유구한 역사는 시인과 소설가가 독립운동 투사가 되곤 했던 식민지 시대 ‘문사’ 개념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사의 시대는, 이 책에서 보여 주고 있는 것처럼 실로 1970년대 문학에서 마지막으로 가장 강력하고 화려하게 빛을 발한 뒤, 끝났다.4) 이 책의 첫 장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김지하의 시 「진리」에서 시인은 “바람 속이 내 집”이라고 노래하고 있었지만,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 황석영은 그가 2017년 출간했던 문학적 자서전 『수인』에서 방북사건으로 떠돌던 시절을 회고하며 그때의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결국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문학이라는 집이었다”라고 고백한다.5) 한때 바람 속을 집으로 삼아 온갖 경계를 넘나들며 활보했던 문사들에게 문학의 지경이란 없었다. 김종철이 말했던 것처럼 그들의 문학은 “온갖 것을 떠맡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문학을 떠났거나, 문학이라는 집 안으로 돌아간다. 이제 문학은, 그리고 작가는 무엇을 하는가. 유영주는 결론에서 박민규 소설의 저항성을 김지하에 견주며, 문학은, 그리고 작가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박민규는 그의 대표작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표절 사건 이후로 그럴 수 있는 정당성을 상실했다. 이것은 분명 징후이기도 하다.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예감하게 했던 작가 중 한 명인 무라카미 하루키를 통해 우리는 이미 오래 전 문사의 정체성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로 완벽하게 대체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지위마저 위태롭다. 최근 작가들의 소설 속 자기 재현은 어떠한가. 그들은 비정규직 중에서도 고용안정성과 소득이 가장 낮은 축에 들며, ‘프리랜서’라서 정부가 청년층에 제공하는 대출 상품에도 부적합해 은행 창구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으로 소설가를 재현한다(박서련, 「A Queen Sized Hole」,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민음사, 2022). 지방 변두리의 3천만 원짜리 아파트가 자기 집이 되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며, 마오쩌둥의 참새들처럼 어디에도 내려앉을 수 없어 지쳐 떨어져 죽을 위기에 놓여 있다(이서수,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젊은 근희의 행진』, 은행나무, 2023). 오해하지 말라. 이것은 어떤 가치 판단도, 비판도, 자조도 아닌, 현상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이 시대의 문학은 이제 유신 독재의 겨울 공화국과는 완전히 다른, 또 다른 눈보라 속에서 분투해야 하는 것이다. 1) 양성우, 『겨울공화국』, 화다, 1984, 18면. 2) 유영주, 이형진·정기인 역,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 박정희 시대 한국문학과 저항』, 소명출판, 2023, 92면. 이후 이 책 인용 시 본문에 쪽수로 표기. 3)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역, 『근대문학의 종언』, 도서출판 b, 2006, 49면. 4) 어떤 이들은 1980년대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문학과 정치의 관계라면 그것은 1980년대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1980년대에 문학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팽배했던 반지식인적인 분위기 속에서 작가는 1970년대와 같은 문사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1991년 5월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 치워라”라는 김지하의 충격적인 발언과 그것을 둘러싼 반응 그 이면에는 1980년대를 거치며 그가 더 이상 1970년대와 같은 문사의 지위에 서 있을 수 없었던 상황이 엄연히 자리한다고 볼 수도 있다. 5) 황석영, 『수인』 1, 문학동네, 2017, 365면.

계간 문학인 배하은 유신시대개발독재시대김지하조세희이문구황석영문사문학의 정치성근대문학의 종언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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