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들 2024년 봄호(제75호)
얼굴 없는 목소리 ― 살아남은 자, 백은선의 시 쓰기
1. 나와 마주하는 시간
퍼스널 브랜딩 글쓰기(Personal branding writing). 이것이 2020년대 한국에서 첨예한 글쓰기의 목표이다. 퍼스널 브랜딩은 기업의 이윤과 이미지 제고를 위한 브랜딩처럼 개인의 수익과 이미지 제고를 위한 ‘나’의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다. 퍼스널 브랜딩은 ‘나’, 자신의 직업과 경력, 특별한 기술과 경험, 차별화된 정체성과 비전을 명확히 제시하고 ‘나’만의 상품 가치 창출을 목표로 삼는다. 특정 분야에서 ‘나’ 스스로를 고유 상품 브랜드로 만들어서 소비자가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도록 만드는 ‘표상’ 작업이다. 퍼스널 브랜딩 글쓰기는 ‘나’의 경험 속에서 축적한 직업 기술과 능력, 성공 사례와 세계관, 실패담의 서사를 친근하게 정기적으로 서술함으로써 소비자들로부터 폭 넓은 선호도와 높은 인지도 확보를 목표로 삼는 글쓰기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나’, 1인 비즈니스 수익 모델을 구축한다. 무엇보다 퍼스널 브랜딩 글쓰기는 미디어의 발달, 그 중에서도 블로그,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유튜브, 틱톡 등의 손쉬운 SNS 채널 개설을 통해 누구나 무료로 수행할 수 있는 인터넷 온라인을 바탕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는 평생직장과 정년제의 소멸, 노동 수입만으로 영위할 수 없는 경제적 어려움, 연봉 향상을 위한 이직에서 ‘나’의 정체성과 장점을 강조할 수 있는 ‘나’의 브랜드 필요성 등의 노동 환경 변화에서 요청된 것이다. TV와 SNS에서 쌓은 높은 인지도를 바탕으로 온라인 클래스를 개설해서 고수익을 얻고 있는 어느 소설가의 경우처럼 개인의 글쓰기가 미디어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개인의 브랜드 구축과 경제적 수입을 마련해주는 유용한 기술이 된 것이다. 미디어의 독점 체제에서 미디어 민주주의로 이행되면서 글쓰기의 민주주의와 1인 비즈니스 수익 모델의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이것은 디지털 미디어 사회가 전개한 개인의 글쓰기와 미디어 민주주의의 효능이다.
퍼스널 브랜딩 글쓰기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나’의 상품 가치와 광고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수많은 개인들과 자본 사이에서 무한 경쟁을 해야 한다. ‘나’의 노출 빈도와 조회수를 높이기 위한 자극적인 제목, 시각 이미지와 음악, 전문성과 분위기 연출 노동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그것은 익명의 대중들 속에서 특별한 것으로 여겨지는 상품 브랜드로서 ‘나’의 ‘드러냄’을 만들어내는 소외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나’의 있음 자체, 실재의 ‘나’는 사라지고 브랜드가 된 ‘나’의 이미지, 상품의 물신성이 만들어낸 환상의 ‘나’가 나타난다. 소비자와 구독자가 매혹되는 것은, 상품 물신성의 신비에 휩싸인 ‘나’이다. 상품 물신성의 신비와 환상 속에서 실재의 ‘나’는 부재하다. 지속적인 유용성과 상품 가치를 창출하려는 퍼스널 브랜딩 글쓰기 속에서 실재의 ‘나’와 상품가치의 ‘나’ 사이의 간극은 심화된다. 그 간극의 심화를 불러일으키는 무한 경쟁에서 퍼스널 브랜딩에 성공하는 ‘나’의 유용한 글쓰기는 당연하게도 소수이다. “부자나 유명인사와 같이 ‘이미지가 있는’ 사람들이 이미지를 소유하고, 상징 시장과 명성의 목적에 가장 잘 부합하게 이미지를 관리”1)하는 소수이다. 소수의 성공담은 화려하게 드러나고 다수의 실패담은 조용히 사라진다. 화려한 성공담의 ‘나’는, 상품 물신성의 환상 연출 노동으로 더욱 치닫는다. 실패담의 ‘나’는, 성공한 소수와 자신을 끝없이 비교하면서 우울과 자괴감에 빠진다. 퍼스널 브랜딩 글쓰기의 문화 산업 구조 속에서 수많은 나‘들’의 드러남과 사라짐은 무한 반복된다.
2020년대 한국시에서 나타나는 시적 주체, ‘나’의 표상들은 저 퍼스널 브랜딩 글쓰기의 생산 구조와 일정한 상동성을 지닌다. 2020년대 한국시에서 ‘나’는, 퍼스널 브랜딩 글쓰기의 ‘나’처럼 1인칭의 ‘나’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일상의 삶에서 길어 올린 소소한 경험과 상처의 풍경을 나열하고 재현한다. 1인칭의 시적 주체, ‘나’는,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의 사진과 동영상에 노출된 일상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는다. 일상적인 나의 경험과 기술적 능력은 화려한 이미지와 감성적인 음악으로 편집된 글과 영상으로 편집되어 소비자와 구독자가 즉각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매혹과 난이도의 글쓰기로 노출되듯이 1인칭의 시적 주체인 ‘나’가 진술하는 시적 정서와 시적 언어의 양상도 유사하게 노출된다. 그것은 유용한 재현의 시쓰기이다. 그러나 백은선의 시는 일관되게 ‘나’의 고통을 드러내면서도 ‘재현’의 시쓰기를 넘어서서 ‘암시’의 시쓰기를 실천한다. 백은선의 암시의 시쓰기는 퍼스널 브랜딩 글쓰기 시대에 유용성의 글쓰기와 거리를 두면서 어떻게 ‘나와 마주하는 시간’2)을 발명하는지를 제시한다.
2. 이피게네이아의 얼굴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아가멤논」은 근친 살해와 복수의 폭력으로 치닫는 『오레스테이아Oresteia』 3부작3)의 첫 작품이다. 아르고스의 왕 아가멤논은 일천 척의 그리스 함대를 이끌고 트로이아로 떠날 때 출전을 방해하는 폭풍과 직면한다. 그는 폭풍을 달래기 위해 아내 클뤼타이메스트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이피게네이아를 살해하고 희생 제물로 바친다. 마침내 트로이아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10년 만에 귀향하고 욕실로 향한다. 지난 10년 동안 클뤼타이메스트라는 딸의 죽음에 대한 비통함과 복수의 칼날을 품고 있었다. 클뤼타이메스트라는 그녀의 정부(情夫) 아이기스토스와 함께 남편 아가멤논을 욕조에서 무참히 살해한다. 아가멤논이 첩으로 삼고 데려온 전쟁 포로 캇산드라도 함께 살해한다. 클뤼타이메스트라는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친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녀의 정부 아이기스토스는 아가멤논의 아버지 아트레우스가 자기 아버지를 추방하고 형들을 살해한 것에 대한 정당한 복수라고 주장한다.
「아가멤논」 비극적 서사의 기원에는 무엇보다 이피게네이아의 죽음이 있다. 아가멤논은 국가의 수반이자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지배하고 있는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의 체현자이다. 그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죽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자신의 딸을 희생 제물로 삼아 살해한다. 그는 전쟁의 승리자로서의 명예를 향유하면서 적군의 딸 캇산드라를 첩으로 삼고 귀환한다. 동시에 그는 귀환한 국가의 권력자이자 클뤼타이메스트라의 남편으로서의 지위를 모두 향유하고자 한다. 그것은 모두 여성의 입장에서 매우 폭력적이다. 아가멤논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 딸 이피게네이아를 죽일 만큼 국가주의자이다. 그는 전승자의 지위를 통해 적국의 딸을 첩으로 삼고 성적 자율권을 침해한 성폭력 가해자이다. 그는 아내를 존중하면서도 다른 여성을 첩으로 삼는 가부장제의 남성중심주의자이다. 이것은 아이스퀼로스가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쓴 2,500여 년 전, 그리스의 지배적 이념이다. 『자비로운 여신들Eumenides』에서 정의의 여신 아테나는, “모든 면에서 진심으로 남자 편이며, 전적으로 아버지 편이니라. 그래서 나는 여인의 죽음을 더 중요시하지 않는 것이니, 그녀가 가장인 남편을 죽였기 때문”(181)에 그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며 아버지 아가멤논을 위해 어머니 클뤼타이메스트라를 살해하고 복수한 아들 오레스테스를 처벌하지 않는 판결을 내린다. 그런 점에서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그리스의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의 폭력을 정의로 판결하고 폭력의 성(gender) 정체성은 남성이라고 선언한 작품이다. 그 판결에 이르기까지 「아가멤논」의 여성들은 희생 제물(이피게네이아), 부정(不貞)을 저지른 암살자(클뤼타이메스트라), 성적 노예(캇산드라)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 중에서 비극의 기원, 이피게네이아는 비극의 무대에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이미 국가주의와 아버지의 폭력에 의해 희생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로지 어머니 클뤼타이메스트라의 진술에 의해서만 기억된다.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고 전쟁의 승리를 위해 희생된 그녀의 얼굴은 무대 위에 없다.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의 폭력이 자행되는 세계의 무대 위에 이피게네이아의 얼굴은 없다. 어머니 클뤼타이메스트라가 그 얼굴을 기억하고 억울한 희생을 진술하는 동안만큼만 상상 속에서 나타나는 한 사람의 얼굴이다. 클뤼타이메스트라의 죽음과 아테나의 판결 이후에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한 사람의 얼굴이다.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의 폭력 속에서 한 사람의 얼굴이 망각된다.
지금 한국 현실에서도 매일 희생되고 망각되는 여성들, 이피게네이아들은 많다. 그리스의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는 여전히 한국에서 지배적이며 그 폭력은 지속적이다. 다름 아닌 백은선의 시적 주체는 그 폭력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피게네이아의 부서진 얼굴로 재현 (불)가능한 폭력의 진실을 암시한다.
3. 얼굴의 파토스
백은선의 시집4)에서 시적 주체의 실존과 가족 관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시적 주체 ‘나’의 아버지는 폭력적이다. “입을 틀어막는 아버지 허리띠를 풀어 쥐는 아버지 벽에 밀어붙이고 목을 조르는 아버지 포르노를 보는 아버지”(1:141)이다. 아버지에게는 새엄마가 있다. 나는 “새엄마가 즐겨 입던 어두운 초록 재킷을 훔”(1:63)친 적 있다. 나에게는 언니가 있다. 그 언니는 죽었다. 나는 “죽은 언니를 생각할 때의 죄책감과 은밀한 기쁨”(3:50)을 동시에 느낀다. “왜 내가 아니었을까,”(3:50)라는 살아남은 자의 자책감과 안도감이다. 쉬운 영어만 할 줄 아는 엄마는, “화장대와 침대가 있는 작은 방”(1:180)에서 “검은 남자가 오면 손짓으로 나를” 부르고 “나의 등을 슬며시 떠밀”(1:180)었다. “여고생 때 일기장을 펼치면, 선생님 널 죽여버릴 거야, 라고”(1:176) 쓸 만큼 나는, 선생님에게 살의를 느낀 적 있다. 학교에서 따돌림을 받던 나는, “매일 혼자 벤치에 앉아”(3:30) 있었다. 나는 동급생들에게 “사물함 뒤에서 머리카락이 몽땅 잘리고” “#죽어. 죽어. 죽어.#” “발신자 없는 문자를 받을 때마다 미칠 것처럼 무서웠”(3:30)던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나는 남자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한다. 임신하고 출산을 앞두고 있는데, 남자, “너는 내가 진통할 때 전화를 했다. 나는 죽을 것 같아 전화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너는 내기에서 이겼다고 그럴 줄 알았다고 좋아했다. 도무지 어떤 일도 끼어들 수 없는 비좁은 벽 사이에서. 혼자 주먹으로 벽을 내리치며 울”(1:100)었다. “아이가 닫힌 문을 두들고 있었”기에 “세 번 목을 매고 세 번 실패”(3:167)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아이의 엄마, 너는 아이의 아빠”(2:80)가 되었는데, 남편이 된 남자, “네가 뺨을 때리던 날”, 나는 “그것을 지옥이라고 생각”(4:36)하였다. 끝내 나는 “협의이혼”(3:154)한다. 이제 나는 한 아이의 엄마. “아이가 새근거리며 몰아쉬는 숨소리만”(3:54) 가득한 방 안에 있다. 나는 “모로 누워 핸드폰 사진을 하나하나 넘겨보”고 “팔 년을 돌아보며 내 몸은 가만히 있는데 이토록 많은 시공간 속에 살아 있었다는 게 앞으로도 계속된다는 게 끔찍해서 눈물이 날 거”(4:52) 같다. “맨발로 찾아간 날에는 꼭/양말을 신겨주던”(4:128) 할머니의 기일에 “누구나 태어날 때 한 권의 책을 갖고 태어”난다는 말, “넌 커서 선생님이 되어야”(4:128) 한다는 할머니의 말이 떠오른다. 이것이 아버지와 남편의 폭력 속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 백은선의 시적 주체, 이피게네이아의 후예, 한 여성의 실존적 초상이다. 죽은 언니의 얼굴과 돌아가신 할머니의 얼굴은 없다. 내 기억의 상상 속에서만 있다. 엄마의 얼굴과 새엄마의 얼굴은 아버지의 폭력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첫 시집 『가능세계』(2016)에서 네 번째 시집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2023)까지 8년 동안 집중 출간된 4권의 백은선 시집은 할머니의 말씀처럼 한 권의 책, 하나의 얼굴로 읽힌다. 나의 얼굴은 아버지와 남편의 폭력5)이 깊이 새겨진 얼굴이다. 나의 “얼굴은 갈가리 찢겨 있어”(1:195) “구겨진 얼굴”(2:94), “비틀린 얼굴”(4:41), “허물어진 얼굴”(2:134), “물 위를 떠가는 뒤집힌 얼굴”(1:23)이다. “낯설고 차가운 얼굴”(1:189), “민둥 얼굴을 하고 표정 없이 말없이”(1:201) “텅 빈 얼굴”(3:167)이다. “미친 것 같은/얼굴”(3:16)이고 “이미 죽은 사람의 얼굴”(2:144)이어서 “문득 얼굴/나는 지워지고”(2:167) 싶다. 나의 얼굴은 아버지와 남편의 폭력에 의해 부서지고 깨어지고 파괴되어 구겨지고 허물어져 비틀린 한 사람의 얼굴이다. 남성의 폭력은 나의 얼굴에 기록되어 지속된다. 현재 나의 얼굴은 폭력이 자행된 과거의 현존이며 지울 수 없는 미래의 현전이다. 얼굴에 새겨진 흔적은 잔존하는 폭력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나쁜 기억력을 소망”(1:17)하면서 내가 나의 얼굴을 바라볼 때마다 그 폭력이 잔존하는 얼굴의 파토스(pathos)6)는 고통스러운 순간의 기억을 재생시킨다. 나는 나의 얼굴과 전면적으로 마주설 수 없다. 나의 얼굴을 마주본다는 것은 폭력으로 일그러져 부서진 얼굴의 파토스를, 고통의 총체적 기억과 파괴된 실존의 성채를 한꺼번에 출현시키고 ‘나’를 고통의 심연으로 침몰시키는 일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얼굴을 텅 비우고 거의 죽은 사람의 얼굴 없는 존재가 되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서지고 구겨지고 비워지는 얼굴의 조각들을 바라본다. 살아남으려는 힘과 죽어버리려는 힘이 단속적으로 교차하는 얼굴의 조각들에서 잔존하는 폭력의 이미지가 매순간 솟아오른다. 죽은 언니의 얼굴과 돌아가신 할머니의 얼굴, 엄마의 얼굴과 새엄마의 얼굴이 떠오른다. 내 얼굴의 조각들 배후에서 얼굴 없이 죽은 여성들의 울부짖음이 들린다.
백은선의 시는 얼굴의 조각들에서 섬광처럼 솟아오르는 잔존하는 폭력의 이미지를 붙잡는다. 얼굴의 조각들이 불러일으킨 얼굴의 파토스를 통해 ‘폭력의 모든 것을 말하고 싶다’는 증언 욕구와 ‘나만 살아남았다는 안도감 때문에 모두 말할 수 없다’는 부끄러움을 동시에 표출한다. 얼굴의 파토스에서 솟아오르는 폭력의 기억과 부서진 얼굴 조각들의 시. 완전한 사라짐을 거부하는 얼굴 조각들의 시. 가려지고 흐릿해진 얼굴들을 기억하고 파편적으로 재현한 조각 형상들의 시. 그녀의 시쓰기는 온전히 복원할 수 없는 얼굴 조각들의 잔존 기억을 지닌 한 사람의 살아있음, 살아있음이 저항이며 삶의 지속이며 지속된 폭력을 증언하는 몸의 발언임을 환기한다. 그녀의 시에서 얼굴 조각들은 이름도 없이 얼굴도 없이 죽은 여성들의 존재를 노출하고 보이지 않는 그녀들의 얼굴 이미지가 ‘지금-여기’의 삶에 드리워져 있음을 현시하는 심미적 정치성을 발현한다.
4. 조각 형상들의 섬광: 빛과 소리, 언어의 몽타주
첫 시집 『가능세계』는 백은선의 시세계를 관통하는 시적 입장과 언어 방법을 응축하고 있다. 얼굴은 한 사람이 살아온 시간과 마음의 근육이 새겨져서 나타나는 고유한 존엄과 정체성이다. 얼굴은 시간의 흐름과 피부의 변화가 새겨진 주름과 피부 빛깔의 형상으로서 한 사람의 인상을 드러낸다. 현재의 얼굴은 과거의 시간이 축적되어 도착한 형상의 인상(人相)이며 미래의 시간에 흔적으로 남는 형상의 인상(印象)이다. 그 얼굴이 아버지와 남편의 폭력으로 무참히 일그러지고 부서지고 비틀린 형상의 인상으로 지속되고 있을 때, 한 사람의 고유한 존엄과 정체성은 파괴되고 부정당한다. 파편적인 얼굴의 조각들에는 폭력의 흔적과 고통의 기억이 잔존한다. 폭력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얼굴에 깊은 상흔을 남길 만큼 강력한 것인데, 폭력에 대한 그녀의 시적 입장은 아이러니하다. 소크라테스가 “나는 알지 못합니다”로 시작해서 “우리 중 어느 쪽이 더 좋은 일을 향해 가고 있는지는 신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분명치 않”다고 끝맺는 원환(圓環) 구조의 변론7)을 통해 인간의 무지(無知)를 아이러니로 드러낸다면 백은선은 “나는 모른다네”(「어려운 일들」)로 시작해서 “우리는 그것을 안다”(「도움의 돌」)고 끝맺는 나선형적 원환 구조의 진술을 통해 남성의 폭력을 아이러니로 드러낸다. 그녀는 폭력의 진실에 대하여 낱낱이 기억하고 폭력의 상흔을 체현하고 있는 얼굴의 담지자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폭력을 기억해내는 고통의 강도가 너무나 강력하기에 자신이 겪은 폭력에 대하여 ‘나는 모른다’고 부정하는 아이러니의 입장을 취한다. 더 나아가 자신보다 더한 폭력을 감내한 엄마와 언니의 고통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는 증언의 불가능을 인식하고 ‘나는 모른다’, 선언한다.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생존자의 안도감과 부끄러움 때문에 폭력의 모든 진실에 대하여 ‘나는 모른다’고 부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폭력에서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과 죽은 언니에 대한 기억의 윤리 속에서 폭력의 진실을 말하고 싶은 집요한 욕구에 휩싸인다. 그녀는 끝까지 ‘우리는 그것을 안다’고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백은선의 시쓰기는 ‘나는 모른다’는 인식 부정과 ‘우리는 그것을 안다’는 인식 긍정 사이의 무한 왕복과 충돌에서 발생하는 아이러니의 섬광, 부서진 얼굴 조각 형상들의 섬광을 포착한다.
시적 입장의 아이러니는 시의 언어에 대한 성찰을 수행한다. ‘나는 모른다’는 인식 부정은 여성에 대한 모든 폭력을 재현할 수 없고 자신의 발언이 모두 진실한 증언이 될 수 없다는 시적 인식을 표출한다. 그것은 폭력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고통의 기억 속에서 재현 가능한 것과 재현 불가능한 것의 경계를 구획 짓는다. 그녀의 시쓰기는 자신이 겪은 폭력의 경험에 한정된다. 폭력을 기억하는 고통스러운 순간을 파편적으로 재현하고 조각의 진실을 지닌 언어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얼마나 뜨거운지 말할 수 있는 자는 그다지 뜨겁지 않은 불 속에 있는 것”이라는 페트라르카의 시처럼 온전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뜨겁고 재현 불가능한 폭력의 진실과 고통의 상흔은 시인이 비워둔 언어의 공백 속에 잔존하고 있는데, 우리는 상상력을 통해 ‘폭력의 사태, 그 현장으로’ 진입하여 조각들의 진실을 유추하고 언어의 공백을 채워가는 시쓰기의 공동체에 참여하게 된다. 거기서 ‘우리는 그것을 안다’고 말하는 인식의 긍정, 목격자의 장소에 서게 된다. 그런 점에서 백은선의 시적 언어는 폭력에 대한 전면적인 폭로와 고통의 사실적 증언을 목표로 삼는 르포르타주 글쓰기의 영역에서 벗어난 언어의 장소에서 발원한다. 그 언어는 폭력의 실재를 재현하는 언어가 아니라 암시하는 언어이다. 재현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것을 행간의 침묵과 언어의 공백으로 암시하는 언어이다. 암시 언어는 피학적 타자가 된 여성들의 몸을 폭력의 포르노그래피로 전시하거나 재현하지 않는다. 폭력에 노출된 여성의 몸을 사물처럼 전시하거나 끔찍함의 충격을 전파하려는 재현 언어의 유용성을 폐기한다. 재현 언어가 폭력의 진실을 파편적으로 품은 조각 형상들의 ‘가능 세계’를 전시한다면 암시 언어는 ‘가능 세계’의 공백과 배면에서 잔존하고 있는 총체적 폭력의 재현 ‘불가능 세계’를 상상력으로 현시한다.
백은선의 시에서 폭력은 ‘빛’의 이미지로 암시된다. “임계점을 넘어선 빛들이 차례로 얼굴을 부”(1:67)수고 “등 뒤에서 칼날처럼 꽂히는 빛들”(3:100), “빛들은 찢어발긴 얼굴”(1:200) 같다. “빛이 머리를 관통할 때의 저린 통증을 생각”(4:47)한다. “빛 속에서/관절이 모두 녹아내리는 기분”(1:18)이다. “유리를 관통해 들어오는 빛이/심장을 찌”(4:150)르고 “빛의 칼로 귀를 자”(4:145)른다. “가장 아픈 건 빛”(2:31)이다. 네 권의 시집에서 시적 주체가 ‘비혼 여성―아들의 엄마―이혼 여성―육아 여성’으로 변모하는 동안 지속되는 폭력의 상흔은 일관된 빛의 이미지로 암시된다. 폭력은 빛의 이미지로 암시되기에 폭력의 총체적 진실은 언어의 공백 속에 잔존하면서 유예되며 유예되는 만큼 그 폭력의 강도는 강력한 것으로서 시적 주체의 외상과 증상의 근본 원인으로 작동한다.
빛과 함께 시적 주체에게 폭력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촉발하는 것은 ‘소리’이다. “만 명의 울음소리를 겹치고 웃음소리를 겹쳐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짖음을 얻게”(1:150)되는데, 그것은 울부짖음8), “의도하지 않은 언어와 같은 형태”(1:150)이다. 신체 폭력이 유발하는 타격 소리와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는 언어폭력, 그것을 체험하거나 목도한 자의 울부짖음, 그 “모든 소리가 귓가를 스칠 때 가장 아픈 형식으로 소리는 있”(2:100)다. 소리는 “귀가 쫑긋한 나를 키워준 공포”(1:148)이기에 “나의 청각에 대해, 나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만큼만 생각”(1:138)해야 할 만큼 폭력적이다. 소리는 보이지 않지만 청각에 잔존하면서 보이지 않는 폭력의 순간을 연상시키고 재생하며 현재로 현전한다. 소리가 재생하는 폭력의 기억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울부짖음, 언어 이전의 폭력 사태 자체를 ‘지금-여기’에서, 다시 체험하도록 한다.
폭력의 빛과 소리 이미지로 구축한 백은선의 시는 고발하고 폭로하는 산문 언어 안에서 저항하는 방법으로서 단어의 재배치와 언어의 몽타주를 적극 실천한다. “디귿의 마음”(1:10)처럼 ‘ㄷ’의 문자(文字) 형상을 통해 시적 주체의 어떤 재귀적 마음을 암시하거나 “짖는다. 쏟아지는 비, 구겨진 얼굴, 입속의 말”(2:94)처럼 서로 다른 문맥의 언어들을 재배치하고 몽타주함으로써 맥락 없는 조각 언어들 사이에 시적 긴장의 섬광과 새로운 의미를 발명하고 시적 주체의 심리적 상태를 암시한다. “이중나선//파란 깃털//모자를 쓴 구름//불면의 밤//쓸수록 멀어지는 것”(3:129) 역시 연관 없이 멀리 있는 언어들의 병치와 몽타주를 통해 백은선의 고유한 언어 방법을 창안하고 시적 주체의 심리적 상태를 암시한다. “초록은 누가 잊은 기억”(4:79)처럼 ‘초록’에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색채 상징을 부여한다. 언어의 몽타주는 백은선의 시를 르포르타주 글쓰기의 영역에서 벗어난 시의 행위와 장소에 정초한다.
시적 인식의 아이러니, 부서진 얼굴 조각 형상들의 섬광, 빛과 소리의 암시, 언어의 몽타주.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무서운 것은 무서운 것을 무섭다고 하지 못하는 것”(1:85), 돌이킬 수 없는 사건으로서의 폭력을 산문의 재현 언어가 아니라 시의 암시9) 언어로 저항한 백은선 시의 언어 방법으로서 시의 심미적 정치성을 고도의 언어로 실천한 것이다.
5. 조각 형상들의 섬광: 상자의 어둠과 나무의 뿌리, 성냥의 불꽃
백은선의 시적 주체에게 빛의 세계는 세계의 어둠이다. 세계는 폭력의 빛이 점령한 어둠의 삶을 강제한다. 폭력의 빛은 다른 삶의 가능성을 인식할 수 없는 세계의 어둠 속에 ‘나’를 존재하도록 한다. 폭력의 빛이 중단되지 않는 한 살아있는 그녀의 거처는 어디서든 세계의 어둠 속이다. “이 밤은 너무 길다 아니 너무 멀”(1:171)다. 폭력의 빛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숨어든 ‘상자들’ 내부 또한 어둡다. 그 상자들은 작은 방과 여성의 몸, 관(棺)을 암시한다. “화장대와 침대가 있는 작은 방/심해처럼 어두운 파란 빛이 사방을 흐”(1:180)르는 작은 방은, 열쇠 구멍이 있는 상자로 비유되는데, 상자의 의지와 무관하게 밀고 들어온 열쇠에 의해 상자는 강제로 열린다. 그것은 동의 없이 여성의 몸 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남성의 폭력을 암시한다. “눈물에 눈물을 더하고/절벽에 절벽을 더해/상자는 가득 차”(2:15)오른다. 빛의 폭력을 피해 숨어든 상자 속조차 눈물과 상처로 인해 어둡다. 폭력의 흔적과 눈물의 기억은 작은 방, 강제로 열린 상자의 어둠처럼 여성의 몸, 어둠 속에 남아있다. “나는 눈을 뜨는 순간 빛의 세계에서 탈락”(4:70)한 존재로서 “나는 단지 상자들로 이루어진 부패 덩어리”(3:31)이다. “누군가는 결코 끝까지 상자를 열지 않을 수 있다는 거 그게 나”(4:53)다. 몸의 상흔, 상자의 어둠과 마주서는 것은 폭력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폭력의 순간은 ‘나’에게 영원한 것으로 기억되고 몸속에서 지속된다. 여성의 몸, 상자의 어둠은 남성의 폭력적인 “열쇠들 혹은 너무 많은 열쇠들”(1:181)의 기억으로 가득하다. 상자의 어둠은, “이 도시는 너무 어두워서 너무 밝”(4:26)은 ‘지옥’이다. “존재하는 데 왜 이렇게 많은 지옥이 필요한가요”(4:65)라고 되물어야 하는 도시. 상자의 어둠 속에서도 죽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살아 있어/지옥의 뜻”(4:138)을 지닌 도시. “지옥에는 돈이 있다//지옥의 집값은 비싸”(4:139)다. “모든 일이 상자로부터 시작”(1:186)된 것이다. 폭력의 “빛들이 관여할 수 없는 지하 세계는 얽힌 관들, 한없이 길어지는 관들, 텅텅 울려 퍼지는 거기가 내 몸속”(1:177)이라는 현실 인식에 다다른다. 작은 방과 상자의 어둠, 여성의 몸속은, 살아있는 한 폭력의 빛으로부터 은신할 수 있는 장소의 완전한 부재를 암시한다. 세계에서 은신할 수 있는 장소의 완전한 부재는 지하 세계의 관(棺) 속에서 살아가는 삶과 다르지 않다.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 ‘나’는 어떤 안식도 취할 수 없는 지하 세계의 어둠 속에 살아있다. 지하 세계의 관 속에서 나는, 죽지도 못하고 가까스로 호흡하고 있다. 두려워서 “뜯지 않은 선물 상자 속에는/호흡이 있”(1:191)다.
관 속에서의 호흡. 그것이 백은선 시의 존재론이다. 관 속에서 호흡만 하고 있는 존재. ‘죽음’, ‘없음’이 아니라 ‘죽어감’, ‘있지 않음의 있음’으로 존재하는 영(零). “나는 0, 0과 0 사이에서 무한히 증식하는 0”(3:194)이다. “나는 0입니다 나는 이 연극의 주인공입니다 나는 존재합니다 다만 무대 안에서 있을 수 없”(3:196)는 존재. 오직 세계의 무대 바깥, 지하 세계의 ‘목관’ 속에서 호흡만 하고 있는 나, 0이다. 거기에서 나는, 세계의 빛이 아니라 지하의 어둠 속으로 뻗어있는 나무의 뿌리를 발견한다. 나무의 뿌리는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대지의 숨결을 호흡하면서 뻗어가고 이어져 있다.
광장에 있는 나무는 우리 엄마, 우리 할머니, 우리 할머니의 할머니,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어.
우기 때 죽은 사람들은 거기에 묻혔어. 그 사람들의 이름을 이어 나무를 불렀어. 이름이 점점 길어졌어. 이제 정확한 이름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지.
물속에 잠긴 커다란 나무.
거짓과 거짓, 진실과 진실을 이어 붙인 커다란 목관.
뿌리가 움켜쥐고 있는 것.
―「여름시」(1:127) 부분
나무의 뿌리는, ‘나’부터 이피게네이아의 후예, “우리 엄마, 우리 할머니, 우리 할머니의 할머니,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까지 이어져 있다. 나무의 뿌리는, 죽은 사람들이 묻힌 무덤 속 목관, 그 사람들의 이름을 이어붙인 나무들의 뿌리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긴 이름, 얼굴 없는 목소리의 숨결이 나의 호흡까지 이어져 있다. “여자아이는 모두의 어머니”(1:132)라는 시적 인식의 발견. 그것은 여자아이, 나의 고통은 나만의 고통이 아니라 앞서 죽은 모든 어머니들 몸속, 고통의 뿌리까지 이어져 있다는 시적 인식으로의 전회이다. 나무의 뿌리는 죽은 어머니들의 목관을 움켜쥐고 있다. 뿌리가 움켜쥔 목관에서 어머니들의 울부짖음이 호흡하고 있다. 뿌리의 호흡에서 기원한 나무들은 세계의 숲, 광장의 숲을 이루지만 숲은 폭력의 빛 속에서 잘 자라나지 못한다. 굴광성을 지닌 나무들의 숲조차 폭력의 빛 속에서 온전하지 못하다. 숲은 찬란한 생명의 초록빛이 아니라 지하 세계 목관의 검은빛이다. “이 숲은 휘청이고 자꾸만 실족”(2:10)한다. “이 숲은 끝났어 나무들을 봐 저 흩어진 각도와 호흡에 대해 생각”(1:136)한다. “나는 나무에 올라가는 법을 잊”(3:80)는다. 나는 뿌리의 목관 속에 갇혀 호흡한다.
우리가 목도한 것은 세계의 모든 문이 동시에 열리는 순간
열리는 동시에 가장 굳게 닫혀 있는
숲
그리고 영원이지
―「1g의 영혼」(3:88) 부분
뿌리의 목관에서 호흡으로 존재하는 나. ‘1g의 영혼’, 나와 우리 엄마, 엄마의 할머니, 할머니의 할머니, 이피게네이아의 후예, 우리는 지하의 목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뿌리에서 지상의 나무로 자라나지만 폭력의 빛으로부터 은신할 수 없다. 지하의 뿌리에서 벗어난 지상의 나무가 직면하는 것은 폭력의 빛으로 휩싸인 숲이다. 지하의 목관을 움켜쥔 뿌리에게 지상의 초록빛 숲, 다른 세계는 절대적으로 부재하다. 그것은 다다를 수 없는 ‘영원(永遠)’이다. “열리는 동시에 가장 굳게 닫혀 있는//숲”이다. 이피게네이아의 후예, 우리는, 나는 ‘1g의 영혼’으로, 뿌리의 목관에서 숲으로, 숲에서 뿌리의 목관으로 이동할 뿐이다. 우리에게 다른 세계의 가능성과 다른 삶의 장소는 있지 않다. “길 끝을 돌면 다른 세계가 시작될 거라고 믿으면서 오래오래 걸었어. 물론 아무것도 없었”(1:199)다는 「비신비」 연작처럼 폭력의 빛이 세계의 숲에 내리꽂히고 있는 한, “나의 노래는 0과 숲으로 가득해서/시작도 끝도 없이 반복”(4:111)된다. “닫힌 유리병 속 순환하는 생태계”(4:167)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나는, 1g의 영혼은 상자의 어둠, 뿌리와 숲, 폐쇄된 세계에서 ‘침묵’으로 살아있다.
침묵은 남성 폭력의 빛이 강제한 것이다. 폭력의 빛은 폭력의 진실에 대하여 말하기를 금지하고 나는 폭력의 총체적 진실에 대하여 적확하게 말할 수 없어서 침묵에 잠긴다. 폭력의 빛이 쏟아지는 “침묵의 밖에서는 침묵을 읽을 수 없고/침묵의 안에서는 눈이 먼”(3:171)다. 침묵은 “검은 것을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을 허방뿐인 영원을”(3:202) 가르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의 폭력으로 죽은 어머니들의 진실을 말해야 한다. 죽은 어머니들에 대한 거짓과 진실을 이어붙인 목관에서 호흡하는 침묵의 영원을 깨뜨려야 한다. 나는 정확한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어머니들의 죽음에 대하여, 얼굴 없는 목소리에 대하여,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말할 수 없지만, 그 울부짖음을 하나의 단어로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모든 것을 무릅쓰고 어떤 하나의 단어로 재현하기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 침묵과 싸우면서 언어의 한계 속에서 거듭 말해야 한다. 그 지점에서 “나는 남아서 이야기를 지어내는 사람”(3:112)10)이 된다. “나한테 시를 쓰라고”(3:42) 한 언니는 죽었지만, 살아남은 자, “나는 죽지 않고 살아서”(3:32) 시를 쓴다. 나는 언니의 죽음과 어머니들의 목관에 대하여 “더듬거리며 고백할 수 있을 뿐”(1:117)이지만 “나는 최소한의 언어로 모든 것을 누설하고 최대한의 언어로 무의미에 도달”(3:54)하고자 한다. 거짓에 대한 두려움과 “가장 큰 중력이 만드는 침묵”(4:61) 앞에서 “그런데도 할 말이 있”(4:156)는 시인이 되고자 한다. 거짓 속에 진실을 담은 “소설을 마저 쓰”(4:147)고자 한다. “세계가 하나의 작은 성냥갑이라는 걸 긋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딱딱한 어둠에 불과하다는 걸”(3:124) 인식하고 성냥 긋기를 멈추지 않는 것. 곧 꺼지고 말 불꽃의 섬광이라 하더라도 상자의 어둠을 사르고 목관의 뿌리에 불 밝히는 일. 호흡이 살아있음을 말하는 일. 살아있음을 저항이라 말하고 얼굴 없는 목소리를 기억하는 일. 아가멤논, 남성 폭력의 지속을 암시하는 백은선의 시쓰기이다.
우리는 혼종에 대한 혼종, 일종의 갈망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것 같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이것은 사라진 마을에 대한 복기이고, 그 마을의 나무 아래 있던 돌에 대한 나의 생각이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돌은 어디에나 있고 우리는 그것을 안다.
― 「도움의 돌」 부분(1:209)
0. 사라진 마을의 나무 아래 돌이 있다
- 1)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민중들의 이미지』, 이나라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3, p.26.
- 2) 라이너 쿤체, 『나와 마주하는 시간』, 전영애․박세인 옮김, 봄날의책, 2019, p.55.
- 3)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Oresteia)의 이야기를 뜻하는 『오레스테이아Oresteia』 3부작은 『아가멤논Agamemnon』,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Choephoroi』, 『자비로운 여신들Eumenides』이다. 아버지의 딸 살해, 딸을 위한 복수로서 아내의 남편 살해, 아버지를 위한 복수로서 아들의 어머니 살해 서사로 이어지는 비극이다. 이하 서사 요약은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천병희 옮김, 숲, 2008) 참고. 인용은 면수만 표기한다.
- 4) 1987년생 백은선은 4권의 시집을 출간하였다. 1.『가능세계』(문학과지성사, 2016), 2.『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들로 만들어진 필름』(현대문학, 2019), 3.『도움받는 기분』(문학과지성사, 2021), 4.『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문학동네, 2023). 이하 1.『가능세계』(문학과지성사, 2016)의 141면은 (1:141)로 인용 표기하기로 한다.
- 5) 오스트리아 유대인으로서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어 구타와 고문을 받았던 장 아메리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고문에 시달렸던 사람은 이 세상을 더 이상 고향처럼 느낄 수 없다. 절멸의 수치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부분적으로는 첫 번째 구타에서, 그러나 전체 범위에서는 결국 고문 속에서 무너진 세계에 대한 신뢰는 다시 얻어지지 않는다. 이웃을 적대자로 경험했다는 것은 고문당한 사람 속에 경악으로 굳어진 채 남아 있다. 그 누구도 그것을 넘어 희망의 원칙이 지배하는 세계를 바라볼 수 없다. 고문당한 사람은 속수무책의 공포에 내맡겨진다.” 장 아메리, 「고문」, 『죄와 속죄의 저편: 정복당한 사람의 속죄를 위한 시도』(1966), 안미현 옮김, 길, 2012, p.91.
- 6) 노인 요양병원 의사이자 사진가 필리프 바쟁(Philippe Bazin, 1954- )은 “가로세로 27cm의 정사각형 표면 위에서, 예측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죽음의 문턱에 있는 노인의 얼굴이 우리 앞에 갑작스레 나타”나는 순간들을 작업한다. 1985년에서 1986년 사이에 어떤 예술적 의도도 없이 작업한 40여명의 노인들의 얼굴들은 곧 사라지고 말 사람들의 표정과 몸짓, 피부와 주름살이 새겨진 시간이 기록되어 있다. 노인들의 얼굴들은 고유한 존엄과 정체성이 붕괴되어가는 현재의 시간이며 장차 우리에게 도래할 미래의 얼굴들이다. 노인들의 얼굴들은 바쟁의 몽타주 사진들에 의해 기억되며 그 얼굴들의 파토스가 발생시키는 인간의 정체성과 존엄에 대한 근본 물음을 제기한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앞의 책, pp.48-60 참고.
- 7)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강철웅 옮김, 이제이북스, 2014 참고.
- 8) 이집트에서 추방된 유대계 시인 에드몽 자베스는 『질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울부짖음’을 진술한다. “울부짖음의 인내에는 한계가 없다. 그것은 희생된 자보다 오래 살아남는다./울부짖음의 인내에는 공(功)이 없다./어떠한 기관도, 어떠한 정부도 울부짖음을 독점할 수는 없다.” 에드몽 자베스, 『질문의 책』, 이주환 옮김, 한길사, 2022, p.109. 『질문의 책』,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사라(Sarah)는 울부짖고 유켈(Yukel)은 침묵한다. 인간의 언어로 말할 수 없다. 사태의 진리에 대하여 완벽하게 말할 수 없다.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자는 죽었고 생존자는 기억할 때마다 고통스럽다. 사라는 울부짖다가 미친다. 유켈은 고통 속에서 침묵한다.” 송승환, 「그 이름에 대하여」, 『포지션』, 포지션, 2023.6., p.244 참고.
- 9) 백은선의 시가 ‘암시’를 적극적으로 시의 행위와 장소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스테판 말라르메의 암시에 관한 시적 사유는 여전히 중요하다. “하나의 대상을 명명하는 것, 그것은 시를 즐기는 기쁨의 사분의 삼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시를 즐기는 기쁨은 그것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추측하는 행복에 있습니다. 대상을 암시하는 것, 거기에 꿈이 있습니다. 암시는 상징을 구성하는 그 신비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입니다.” Stéphane Mallarmé, l'enquête Sur L'évolution littéraire 1891, Igitur, Divagations, Un coup de dés(préface de Bertrand Marchal), Gallimard, Poésie, 2003, p.405. 번역은 필자.
- 10) 에드몽 자베스는 작가를 거짓말쟁이로 규정한다. 작가는 사태의 현장에 부재한 사람이지만 사태의 진리에 대하여 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사태의 진리에 대하여 쓸 때마다 작가는 사태의 진리에 완전히 도달할 수 없고 사태의 원천을 재현할 수 없다는 언어의 한계에 직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언어를 통해 사태의 진리에 대하여 매번 다시 쓰고 말할 수밖에 없다. 작가가 진리에의 접근을 희망하면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언어이다. 글쓰기의 진실은 진리를 향한 거짓말 속에 스며 있다. “내가 나의 글에 애착을 가질수록, 나는 내 글의 원천과 단절된다. 내가 진심이고자 할수록, 더 빠르게 나는 말의 주도권을 포기해야 한다. 나는 말들이 나 없이 존재하고자 하는 것을 거부할 수가 없기에.” 에드몽 자베스, 앞의 책, pp.342-343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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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 삶에 침투해 있는 국가폭력으로서의 필화 2024년의 겨울밤, 반국가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겠다는 명분으로 불법적인 계엄이 선포되었다. 민주주의를 지키겠답시고 어렵게 일군 민주주의 질서를 파괴하는 모순적인 행태는 잡은 권력을 유지 또는 강화하기 위해 우선 폭력을 행사하고 이후에 그 정당성을 확보하려 비합리적인 근거를 들이미는 국가폭력의 메커니즘과 완전히 일치한다. ‘반국가세력’이라는 범주는 실체 없고 추상적이기에 누구든 반국가활동에 연루되게 만들 수 있다. 이 만능 단어 앞에서 우리는 국가라기보다는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집권 세력에 반하는 이라면 누구나 ‘종북 좌파’, ‘빨갱이’로 낙인찍어 왔던 익숙한 책임 전가 방식을 환기하게 된다. 계엄령 선포 전에 발간된 책 『한국 현대 필화사 1』(소명출판, 2024)에서 일찍이 임헌영 작가가 “반공독재 체제로서의 국가형성의 골조”가 “미군정 시기부터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을 거쳐” 현재의 “윤석열 검찰독재”(177쪽)로 이어졌 왔음을 짚어냈다는 점은 매우 인상적이다. 민주주의를 빼앗길 뻔한 국민들은 고통받아야 했다. 계엄군이 국회에 난입할 때, 군인이 자국민에게 무기를 휘두르던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상기하며 공포에 떨어야 했고, 계엄이 해제된 이후에는 내란을 일으킨 자들이 정당한 처벌을 받게 하기 위해 광장에서 추위에 떨어야 했다. 계엄사령부 포고령 제1호에는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라고 적혀 있다. 이를 위반할 시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할 수 있으며 “처단”하겠다는 내용도 담겼다. 1950년에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가 첫 피난지인 대전에서 ‘비상사태하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만들어 적에게 협력한 사람을 3심이 아닌 “1심 단독 종심終審”(384쪽)으로 처벌하도록 하여 “모든 과오를 부역자들에게 전가해서 오히려 ‘레드 콤플렉스’를 심화시킬 수 있는”(408쪽) 기회를 잡았던 맥락과도 유사하다. 계엄이 선포됨과 동시에 미리 준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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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이다. 실로 역사는 분서가 홀로코스트로 이어지는 무시무시한 진행을 입증해 주었다. 임헌영은 저작물을 처형시키는 것이 작가를 간접 살인하는 일과 같다고 일갈한다. 필화란 글만 억압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글을 쓴 작가와 그 책을 읽거나 소지한 사람들 모두를 감시하고 처형함으로써 결국엔 그 안에 깃든 사상까지도 말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레베카 크누스가 창안한 “도서 대학살Libricide이란 술어”(9쪽)는 과장이 아니다. 이와 같은 근거에 기반하여 필화 또한 국가폭력의 범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 임헌영의 주장이다. 그는 국가로 인한 인명 사상 사건을 지칭하는 국가폭력에 필화를 포함할 수 있는가 하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음을 이해하며, 그에 대해서도 충분하게 논증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헬렌 페인이 정의한 제노사이드의 범주 중 하나는 “국가에 의해 절대적 악의 화신으로 분류되거나 국가의 신화에 의해 적으로 분류된 집단을 집단 제거하는 이데올로기적 학살ideological genocide”(21쪽)이다. 국가폭력은 물리적이고 직접적인 폭력뿐 아니라 “정신 활동에 가하는 일체의 금지, 제약, 학대, 억압 등”(21쪽)도 포함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필화도 여기에 해당한다. 더불어 필화사건에 휘말릴 때 작가들은 구금되거나 감시, 고문을 당하게 된다. 이를 폭력이 아니라고 볼 수 없다. 임헌영을 따라 필화를 국가폭력의 일환으로 해석하게 되면 필화사건을 더욱 다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한국 현대 필화사』를 읽으며 우리 삶에 필화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폭력인지 체감하게 된다. 2. 탄압받는 사람과 삶, 말살되는 글과 영혼 임헌영은 1945년 8·15 이후부터 시대순으로 필화사건을 배치하고 탄압의 주체에 따라 부를 나누어 그 양상을 살핀다. 제1권의 경우 해방에서 이승만 집권기까지의 필화를 다루고 있으며, 아직 발간되지 않은 제2권은 사월혁명부터 박정희 정권의 몰락까지의 필화를, 제3권은 전두환 쿠데타 이후부터 윤석열 정권까지의 필화를 다룬다.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한국 현대사에 나타난 방대한 양의 필화를 세밀히 다루어내는 엄청난 작업이다. 세계사에서도 손꼽힐 만큼 필화가 많았던 비극적인 한국의 역사를 상기하면, 한 사람이 한국의 필화사를 정리한다는 일 자체가 경이롭게 느껴진다. 특히 놀라운 점은 사료를 정리하여 현대사를 짚되,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정보 외에 모종의 조치 및 정책이 시행된 이면적 의미까지 예리하게 짚어낸다는 점과 필화를 당한 작가들의 생애 전반을 제시하여 필화사건에 연루된 작가가 국가권력의 희생양이자 검열의 대상일 뿐 아니라 지키고자 하는 신념과 독창적인 예술관을 지니고서 살아온 한 명의 입체적인 사람임을 독자가 느낄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임헌영 작가의 성실성을 입증해 줌과 동시에 필화가 한 인간과 그가 속한 집단, 그리고 사회 전반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면밀히 들여다보게 해준다. 임헌영 작가가 채택한 서술 방식의 긍정적인 효과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좀 더 깊이 살필 예정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제3부 제1장에서 “여류 4인방”(405쪽)이라 불리는 여성 작가 모윤숙, 이선희, 노천명, 최정희를 묘사하는 방식이다. 구태여 낱낱이 밝힐 필요가 없어 보이는 이들의 연애사는 “모윤숙과 이광수의 사랑은 너무나 유명하여 장편소설 소재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 “최정희와 시인 김동환의 러브 스토리 또한 이에 못지 않는 은메달급”(405쪽)과 같이 조롱 섞인 어조로 서술된다. 이는 여성 작가의 사생활이 여전히 가십거리로 소비된다는 인상을 남길뿐더러 필화사건에 엮여 고통받는 작가 역시 존중받아 마땅한 인간임을 피력하는 책의 취지와도 맞지 않아 보인다. 여성 작가의 삶의 일부를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기술하여 동등한 작가로 대하지 않고 대상화하는 관습적인 묘사 방식을 답습하는 것으로 비칠 위험이 있어 우려된다. 해당 부분은 거의 700장에 육박하는 책에서 1장 정도의 적은 분량이기는 하다. 다시 책의 기술 방식이 지니는 장점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필화사건 안에서만 작가를 조명하면 그는 단순히 검열과 억압의 희생양으로 보이게 된다. 이렇게만 부각되었을 때 작가는 상징적인 존재로 고정되어 버릴 수 있다. 물론 국가권력의 피해자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 다소 수동적인 객체로 여겨질 위험이 있다. 어떤 작가들은 자기 신념을 지키기 위해 글로써 국가권력에 저항하고 비유를 활용해 우회하여 발화하기도 하며 예술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검열의 위협을 무시하기도 한다는 점 역시 고찰되어야 한다. 또 한편으로는 그 염결성만이 강조되어 작가 또한 입체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점이 비가시화되기도 한다. 임헌영은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작가의 생애 전반을 자세히 묘사하고 친일 행적이 있는 인물의 경우 그 사실까지 가감 없이 드러낸다. 단, 친일파라고 해도 창작의 자유를 침해하면서 “필화로 다스리는 건 실패”에 가깝다며,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하는 방법이 더욱 바람직할 것이라는 논평을 덧붙인다.(142쪽) 악행을 저지른 작가라 하더라도 그 행위를 법적 절차를 거쳐 처벌하는 편이 옳으며, 악인을 단죄하는 의미로 주어지는 “바람직한 필화”(142쪽)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입장이다. 이러한 관점은 1949년, 문교부가 월북작가 작품을 교과서에서 전체 삭제하고 좌경 문학인의 실질적인 활동을 금지했던 일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승만 정부는 월북한 문학인을 1급, 남한에 생존했던 문학인 중 좌익으로 판단된 문학인을 2, 3급으로 분류하고 이들의 창작 활동을 제한했다. 더불어 자수하고 보도연맹에 가입할 것을 강권했다. 가장 많은 작품이 교과서에서 삭제된 정지용 시인의 경우 사상 검열과 모략에 몹시 시달렸음을 역사적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정지용은 좌익 인사로 분류되어 월북했다는 풍문에 휩싸이는 등 고초를 겪다 국민보도연맹에 자진 가맹하게 되는데, 당시 가입 심사를 밝히며 자신이 “이십삼(二十三) 년이란 세월을 교육에 바쳐 왔”던 “한 개의 시민인 동시에 양민”임에도 월북하였다는 소문에 휘말려 “동리 사람에게 빨갱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해 “집을 옮기고 동시에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2)하기도 했다고 토로한다. 이와 같은 정지용의 슬픈 고백마저도 신문에 보도되어 국민보도연맹의 홍보 수단으로 쓰이고 만다는 점은 해방기의 사상 탄압이 극심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1951년 10월 1일, 한창 전쟁 중이던 시기에 공보당국은 “월북 문학예술인 작품을 발매금지 처분”(307쪽)하고 월북작가 명단을 발표하는데, 이를 임헌영은 “반공의식을 고조시켜 아예 독재와 부정부패 등에 대한 문학적 관심을 전면 차단”(308쪽)하려는 의도로 해석한다. 이러한 판단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작가가 월북했다고 해서 그의 작품까지 향유할 수도 없게 만드는 국가의 조치는 그 사회가 얼마나 억압적인지를 보여준다. 임헌영은 문인이 북으로 갔다고 해도 “작품은 얼마든지 읽을 수 있는 사회를 유지하는 게 정상”(308쪽)이라고 역설하며, 작가의 행보에 근거하여 작품 자체를 금지 및 폐기하는 방식의 부당성을 다시금 지적한다. 임헌영에 의해 쓰인 필화사를 살피면서, 우리는 필화가 단순히 글과 그에 대한 검열의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된다. 필화사란 결국 권력 다툼과 정치 싸움 속에서 사람, 그리고 그에 깃든 영혼과 사상을 죽여 온 대학살의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안에서 한국이라는 특수한 민족사를 보되, 보편적인 인간이 지닌 악(惡)과 진리를 향한 양극단의 갈망을 확인하게 된다. 3. 검열 기준의 모순 임헌영의 저서 속에서 우리는 검열의 기준이 모호하다 못해 서로 상충하기까지 하는 황당한 상황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미군정은 해방 이후 1948년까지 한국에서 책이 번역된 작가 중 공산주의 사상 전파 저자로 플라톤, 아인슈타인, 셰익스피어, 톨스토이, 모파상, 조지 오웰 등을 꼽는데, 반소 소설로 소개하며 미공보원에서 나서서 번역하여 출판했던 『동물농장』의 작가 조지 오웰을 반공 작가가 아닌 공산주의 작가로 규정하는 허술함을 보인다.(53쪽, 282쪽 참조) 1959년에 필화를 당한 임수생의 시 「지붕」의 “인간이여, 우린 / 우리의 생활을 찾아 / 빠알갛게 돋아오는 아침의 햇빛 / 고향으로 돌아가자”(567쪽에서 재인용)라는 구절은 별다른 근거도 없이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문장으로 오독된다. 임수생을 취조했던 형사는 “고향으로 돌아가자”라는 시구는 평양으로 돌아가자는 선동이며 “빠알갛게 돋아오는 아침의 햇빛”은 공산주의를 예찬하는 표현이라고 일방적으로 정의한 후, 그의 시를 “빨갱이 시”라고 단정 짓는다. 이는 부모의 사상 전과를 근거로 한 비논리적이고 비약적인 추측이지만, 이후에도 임수생은 작품집이 출간될 때마다 국가 정보기관으로부터 번번이 조사를 받아야만 했다. 임헌영은 부산 시인 임수생의 일화를 제시하여 서울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필화사건이 있어왔다는 점을 유념하게 한다. 더불어 “서울 중심 문화형성 풍토 속에서 전국 각 지역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570쪽) 필화사가 훨씬 많을 것이라며, 이를 연구할 필요가 있음을 당부한다. 이때 짤막하게 소개되는, 빨치산을 비판하는 영화 『피아골』이 상영 허가 취소를 당한 이유도 자못 황당하다. 빨치산이 키스하는 장면이 이들을 인간적인 존재로 묘사함으로써 괴물됨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전해진다. 검열의 기준이 이처럼 모호할뿐더러 쉽게 뒤집히는 것은 검열의 필요성과 실효성이 집권 세력의 이익에 따라 헛되이 조작되기 때문일 것이다. 필화는 작품을 자의적으로 그릇되게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작품 자체를 난도질하여 바꾸어 놓기도 한다. 월간 『신천지』 1949년 4월호에 발표된 한하운의 시 「데모」는 그의 첫 시집 『한하운시초』(정음사, 1945)에 실리는데, 이때 추천사를 쓴 이병철과 표지를 그린 정현웅이 이듬해 월북한다. 이에 1953년에 재판이 간행될 때는 이병철의 해제가 빠지고 표지 디자인은 바뀌며, 수록 시 「데모」의 제목은 「행렬」로 변경되고 문제가 될 만한 구절인 “쌀을 달라! 자유를 달라!”라는 시구는 삭제된다.(420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하운은 빨치산으로 낙인찍혀 곤욕을 치르게 되자 『한하운 시전집』을 발간할 때 “아 문둥이는 죽고 싶어라”라는 시행을 추가하고 “함흥학생사건에 바치는 노래”라는 사족을 달아 미군정을 비판하는 시 「데모」를 반공 작품으로 변모시킨다.(423~424쪽) 검열과 모략이 어떻게 작품을 훼손하는지, 어떻게 문학을 왜곡하고 그에 담긴 정치성마저 뭉개버리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대상이 되는 작품뿐 아니라 작가의 아직 쓰이지 않은 작품들에까지 관여하게 되며 작가를 자기 검열의 굴레에 가둔다. 혼란스럽기는 독자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해석한 작품이 기이한 방향으로 변모해 가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문학과 예술에 대한 기대를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4. 필화(筆禍)의 역사이자 필화(筆花)의 역사 필화가 빈번하다는 것은 “질곡과 비극의 시대”임을 증명하는 것이지만, 임헌영이 적절히 지적해 주었듯 “필화가 있어야 할 시대에 직필은 없고 곡필과 망언과 허위와 날조만 난무하는 현상은 더 비참하다”.(4쪽) 필화사를 마주할 때, 우리는 터무니없이 악랄한 폭압에 경악하게 되지만, 무기력해질 필요는 없다. 역사 속에서 거듭되는 필화사건은 불의에 맞서서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보려던 국민들의 갈망과 노력이 절멸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렇게 본다면 희망이 없던 시대는 없었던 것이 된다. 책의 말미인 제11장에서 다루고 있는 『경향신문』 폐간 사건에 주목해 보자. 1959년 4월 30일, “신문 발행을 허가제”로 바꾸고 “언제든지 폐간조치할 수 있도록 규정”(656쪽)한 미군정법령 제88호(1946.5.29)에 의해 『경향신문』은 페간된다. 1946년 10월 창간 당시부터 친일파 청산을 강경하게 주장했으며 이승만 정권을 비판했다는 점과 칼럼 「여적(餘滴)」란의 논조 등이 문제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는 『경향신문』의 발행 허가를 취소한 것에 더해 사옥에 꽂힌 기를 내리게 하고 마크를 떼어내게 하여 상징물까지 모두 금지하는데, 임헌영은 이러한 조처는 여타의 필화사건에서도 보기 드문 비인간적인 처사라고 부연하며 “현대 한국언론사상 가장 가혹한 필화사건”(655쪽)이라고 진단한다. 주목할 점은 발행허가를 취소당한 이후의 대처다. 노기남 주교는 “경향신문의 정치비판 논조가 가톨릭 교지 위배”(669쪽)라는 지적에 맞서, 불의에 항거하는 것 역시 종교의 일임을 역설하였다. 『경향신문』의 편집국장이었던 염상섭을 비롯한 33인의 문학인들은 폐간 조치 철회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냈고 한국신문 편집인협회 또한 『경향신문』 폐간 취소를 위한 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신문사 측은 행정처분 취소 청구소송, 행정처분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하는데, 사복형사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재판부는 경향신문 발행허가를 취소한 행정처분의 집행을 정지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후에도 또다시 무기정간 명령이 내려져 우여곡절을 겪기는 하지만, 사월혁명 직후 『경향신문』은 복간된다. 부당한 억압에 굴하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정의를 지키고 양심을 따르려는 사람들의 분투는 붓을 꺾지 않는 염결한 자세를 생각하게 한다. ‘필화’는 쓴 글이 문제가 되어 화를 입는다는 뜻이지만, 한자를 바꾸면 좋은 글을 지칭하는, ‘붓 끝에 피는 꽃’이라는 뜻의 ‘필화(筆花)’가 된다. 붓을 쥔 손을 짓부수는 발길질 아래에서도 어둠을 먹으로 삼지 않고서 옳다고 믿는 것을 기록하려는 아름다운 손이 있다. 그 손들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꽃을 틔우고 있다. 1) 이에 관해서는 책의 목차에서 살필 수 있듯 발간 예정인 『한국 현대 필화사 3 : 전두환 쿠데타 이후의 필화사』의 제11부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필화’에서 ‘블랙리스트 문제’로 다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2) 「詩人鄭芝溶氏도加盟」, 『東亞日報』, 1949.11.5, 2쪽.
말을 한다는 것은 말하지 않을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골라 제외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형언할 수 없어서 침묵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미 모두가 알고 있어 굳이 말해질 필요가 없는 것도 있다. 이를테면 강화길 소설의 여성 인물들이 구태여 토로하지 않는 억울감과 소외감 같은 것. 이 사회의 언어로 묘사할 수 없으면서 부러 말할 필요도 없는, 각기 다른 여자들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거푸집으로 찍어낸 듯한 유사한 정서들. 그러므로 강화길의 소설 속 말해지지 않는 빈틈은 경험적 현실을 나눌 수 있도록 의도된 여백이 된다. 이는 매끈한 반사면으로 남아 독자의 체험을 되비추는 거울로 기능한다. 우리는 그 여백에 성차별적인 세계에서 타의로 경험한 불쾌감을 채워 소설을 완성한다. 강화길이 꾸준히 '안진'이라는 지방의 소도시를 여성이 경험하는 특수한 현실의 집합체로 구현하려 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외형적으로 매우 닮아 자매로 오해를 받곤 했던 '나'(진이)와 막내 이모는 음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토대로 유대감을 나누던 사이다. '나'는 이모가 친언니였으면 하고 바랄 만큼 그녀를 각별히 생각해 수시로 책과 엘피판 등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모가 암으로 죽자 그의 언니인 큰이모는 '나'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막내 이모가 아끼던 티셔츠를 남자 조카들에게 나누어주려고 한다. 이모의 여자 조카가 '나' 하나뿐이라는 점에서 이는 큰이모가 여자라는 이유로 '나'만 배제했다는 의미가 된다. '나'의 남동생은 이모의 발인 시간도 제대로 못 맞췄지만 큰이모는 그의 수고를 치하한다. 이렇듯 가장의 역할을 대신하는 여성이 가부장제를 대물림하는 광경을 우리는 강화길의 소설에서 여러 차례 목격한 바 있다. 경제적 부담을 짊어지고서 그러지 않은 여자들을 "멍청한 년"이라고 구박하는 여자(큰이모)와, 그런 여자가 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도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엄격한 미의 기준을 악용하여 "못생긴 게"라고 되받아치는 여자('나')가 소설에 남는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쉬이 불행해지고 마는 이들의 처지가 애석하게도 친숙하게 느껴진다. 강화길은 이전 작품에서 다루어온 문제의식을 이어가되 유품의 소유권을 둘러싼 갈등을 구성하여 '혈연과 가부장제'라는 범주로는 다 길어낼 수 없는 남은 마음들에 대해 숙고한다. 남자 조카들에 비해 이모와 훨씬 가까웠던 '나'는 이모가 남긴 유품을 처리할 권한이 자신에게 있음을 거리낌 없이 주장하지만, 이모를 언니라고 부르면서 '나'와 이모가 소원해졌다는 사실과 '나'가 알지 못하는 이모의 마음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낯선 여자 앞에서는 혼란스러워진다. '나'는 자신이 이모와 법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혈연관계임을 들먹이면서 여자를 내모는데, 이때 경제적으로 지원해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모의 대소사를 일방적으로 결정하던 큰이모의 기분을 경험하게 된다. 부재하는 대상과 맺었던 관계의 깊이를 증명하고 그에 대한 배타적인 소유권을 주장하는 일은 사람 사이의 감정적 교류를 해석하는 관점의 차이를 사유하게 한다. '나'는 "내가 사귄 남자들"을 이모가 다 알았던 것이 그만큼 서로 가까운 사이여서가 아니라 '나'가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연애사를 들려주었기 때문임을 아프게 확인한다. 자기 편의를 위해 이모가 어렵게 모은 돈을 빼앗아버렸다는 사실도. 그리하여 이모를 빼닮았다는 점이 이모의 횡격막 아래 자리한 "그것의 거푸집마냥 똑같은 형태의 길쭉한 암 덩어리"가 그랬듯, 부정적인 의미일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돈과 피로 얽힌 관계라거나, 서로 돌봄을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상히 대해주어야 하는 사이였다는 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사소한 추억 역시 분명히 실재한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진실한 마음과 말로도 가려지지 않는 거짓의 마음, '안진'이 모두 안진에 있다.
고통은 사람을 고독하게 만든다. 수치화할 수 없어서 증명하기 어려운 통증은 느끼는 이가 홀로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남은 사람」의 초점 화자인 '그녀'는 정강이에 화상을 입고 병원에서 반깁스를 하게 된다. 그녀는 "가시 돋친 불덩이를 다리에 얹고 있는 것" 같은 극심한 통증을 느끼지만, 그에 비해 의사가 해주는 처치는 너무나도 간단해 보인다. 게다가 딸은 병원에서 불평하지 말라고 핀잔을 준다. 더는 붕대를 할 필요가 없어졌을 때, 그녀는 다른 이들에게 통증을 증명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생각에 "아픔을 누릴 권리"를 잃은 것 같은 묘한 상실감을 느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통을 혼자서 떠안게 되리라는 두려움에 시달리는 것이다. 이는 편혜영의 다른 단편소설 「리코더」(『어쩌면 스무 번』, 문학동네, 2021) 속 '무영'이 많은 사상자를 낸 건물 붕괴 사고에서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남은 후, 멀쩡한 다리에 두 달간 깁스를 했던 것과도 궤를 같이한다. 참사를 겪은 당사자이자 죄책감과 트라우마를 갖게 된 목격자임에도 운 좋은 생존자라는 이유로 아픔을 인정받지 못하자 무영은 자신의 고통을 그렇게라도 드러내려 한다. 당사자만이 아는 내밀한 고통을 호소하고 입증하는 일은 이토록 복잡다단하다. 「남은 사람」의 그녀는 몇 해 전에도 허리를 다쳐 통증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번번이 뼈에는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대학병원에 가서야 척추뼈 중 일부가 손상되었다는 소견을 듣게 되는데, 이때 그녀는 치료를 받은 것이 아님에도 안심한다. 자기가 감각한 통증의 실체를 더는 스스로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는 데 해방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렇듯 고통은 자기에게는 아무리 생생하더라도 타자에게는 추체험되는 것이기에 온전히 이해받기 어렵다. 이 같은 고통의 맹점은 모녀 사이마저 갈라놓는다. 내내 앓던 손녀가 일곱 살에 죽자 그녀의 딸은 자식을 잃은 아픔에 오랫동안 자학하고 애통해한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마음을 추스르라고 위로하는 그녀에게 딸은 "자식을 잃어본 적도 없으면서 뭘 아느냐"고 쏘아붙인다. 그녀는 딸이 느끼는 고통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딸 역시 "어린 자식을 앞세운 딸을 둔" 엄마의 비통함을 가늠할 수 없다.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사진학과에 진학하겠다고 말하는 딸에게 그녀가 "그 나이에 남자들이나 찍는 사진을 배워서 어떻게 먹고살려느냐"고 묻자 딸은 피식 웃는다. 딸의 앞날을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은 전해지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응원받기는커녕 고정적인 성역할에 기반한 비난만 듣게 된 딸의 상처는 웃음 뒤에 가려진다. 편혜영은 고통에 울부짖고 몸서리치는 인물보다는 오히려 고통의 증언 불가능성을 깨닫고 일찌감치 입을 다물게 된 인물을 많이 그려왔다. 고요하게 싸늘해지는 사람들 가까이에서 침묵에 덮인 그들의 참혹을 서서히 누설하는 편혜영은 「남은 사람」에서도 여지없이 읽는 이들이 섬뜩한 슬픔에 감염되도록 만든다. 그녀의 시선으로 세계를 보게 하여 그녀의 감각을 체화하도록 유도하던 소설은 말미에 이르러서야 딸이 하던 "엄마, 괜찮아요. 이제는 다 지나갔어요"라는 무심한 말이 복선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화상을 입은 정강이를 부여잡고 아파하는 그녀에게 딸은 그녀가 다리를 다친 것이 십수 년 전의 일임을 일러준다. 그녀는 신체에 각인된 고통 대신 그 환부가 아물어가던 시간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엉킨 시간은 지나간 고통을 도리어 생생하게 만들기도, 완전히 잊은 고통을 다시 마주하게 하기도 한다. 기억을 상실해가는 이들이 망각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것과 달리 그녀는 자신이 잊어버린 기억을 알려주지 말라고 딸에게 부탁한다. 절친했던 지숙이 죽었다는 사실을 잊은 것처럼 언젠가 남편과 손녀의 죽음을 잊게 될 때, 그 끔찍한 고통을 되살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다. 기억을 잃어가는 한 여자가 무슨 일이든 겪게 하는 삶에 맞서서, 경험한 일들을 부단히 잊어가기를 바라는 결말은 섬찟하게 새롭고 선득하게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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