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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현대비평 | 2024년 봄호(제18호)

시적 인터페이스와 몽타주의 방법론 ㅡ 양안다 시의 미로형 프레임 형상화 방식

오형엽 문학평론

문학평론가.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회장. 비평전문 계간지 [현대비평] 주간. 시전문 월간지 [현대시] 주간. 1994년 『현대시』신인추천작품상 당선,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으로 등단했음. 평론집으로 『신체와 문체』(문학과지성사, 2001), 『주름과 기억』(작가, 2004), 『환상과 실재』(문학과지성사, 2012), 『알레고리와 숭고』(문학과지성사, 2021) 등이 있고, 연구서로 『한국 근대시와 시론의 구조적 연구』(태학사, 1999), 『현대시의 지형과 맥락』(작가, 2004), 『현대문학의 구조와 계보』(작가, 2010), 『문학과 수사학』(소명출판, 2011), 『한국 모더니즘 시의 반복과 변주』(소명출판, 2015)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이성의 수사학』(고려대출판부, 2001)이 있다. 제3회 젊은 평론가상(2002), 제6회 애지문학상 평론부문(2008), 제21회 편운문학상 평론부문(2011), 제24회 김달진문학상 평론부문(2013), 제32회 팔봉비평문학상(2021) 등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1. 시적 프레임과 몽타주 및 인터페이스


     2014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으로 등단한 양안다는 첫 시집 『작은 미래의 책』(현대문학, 2018)과 두 번째 시집 『백야의 소문으로 영원히』 (민음사, 2018)를 통해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에서 펼쳐지는 불가항력 의 재난과 파국 앞에서 시적 주체가 겪는 사랑의 실패와 마음의 슬픔 을 복합적이고 다성적인 발화 방식으로 형상화하면서 2010년대 새로 운 시 쓰기의 한 방향을 보여주었다. 이후 그는 이러한 경향의 시 쓰기 를 지속하면서 세 번째 시집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아시아, 2020)을 통 해 몰락하는 세계에서 망가지고 병들며 죽어가는 시적 주체와 타자의 우연적 운명을 악몽의 서사와 복화술의 발화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네 번째 시집 『숲의 소실점을 향해』(민음사, 2020)에서 극도로 비참한 세계 상황 속에서 파국을 예감하면서 불행을 위악적으로 살아내는 시적 주 체와 타자의 폐허를 ‘불타는 숲’과 ‘재’의 이미지로 묘사한다. 그리고 다 섯 번째 시집 『천사를 거부하는 우울한 연인에게』(문학동네, 2023)에서 영원한 사랑에 실패하고 추락하는 시적 주체와 타자의 모습을 파편적 인 영상들로 묘사하면서 ‘불’과 ‘춤’의 이미지를 통해 극한을 드러내고, 여섯 번째 시집 『몽상과 거울』(아침달, 2023)에서는 거울 안의 우리와 거 울 밖의 자아를 난반사하는 비대칭적 데칼코마니의 방법론으로 분열 된 주체와 타자가 찢어진 악보로 노래하고 망가지는 몸으로 춤을 추는 모습을 형상화한다. 1)

     양안다의 시에 대한 중요한 선행 비평으로 박상수, 신수진, 박동억, 윤의섭 등의 평론을 들 수 있다. 박상수는 두 번째 시집의 해설에서 양 안다의 시를 영화 속에 있는 것 같은 비현실감, ‘행동하는 나’와 ‘관찰하 는 나’를 분리하여 트라우마적 고통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이인증(離人 症)의 세계, 공허한 현실과 파국적 미래 및 순진무구한 희생양, 불가항 력 이후의 예지력 등의 관점으로 해명한다.2) 신수진은 세 번째 시집의 해설에서 양안다의 시에 대해 역사적 존재의 좌표를 상실한 주인공의 비대해진 감수성과 독백, 고립·위기·사랑이라는 항목들로 세계 전체를 불가능으로 점철시키는 허구적 고안물, 판단 불능 상태의 외화로서 전 시되는 공포, 내화의 프레임으로서 분열적 시선이 자신을 감상하는 메타적 구조, ‘나’만의 세계인 절대적 성소(聖所)로서 밤의 이미지와 어두 운 병실에 당도하는 시뮬라크르의 질주, 망가지는 ‘나’를 무너지는 세 계로 곧장 치환하는 위악적이고 비약적인 성장 서사 등의 관점으로 평 가한다.3) 박동억은 네 번째 시집의 해설에서 양안다의 시를 상실의 장 소이자 추억의 체온을 간직하려는 장소로서 소실점, 세상을 거부하는 ‘회복자들’의 애도의 윤리성, 타자의 고통을 직시하며 돌보는 사랑의 무조건성, 분노와 자학을 통해 드러내는 사랑의 악마적 진실, 편지의 형식으로 고백되는 불안에 중독된 자기 진실, 사랑이 동반하는 후회와 죄의식 등으로 분석한다.4) 윤의섭은 다섯 번째 시집의 발문에서 양안 다의 시에 대해 꿈-욕망이 보여주는 무정형의 불완전한 상태의 기호, 발화의 다양한 색깔과 방향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다성성의 오케스트 라 화음, 시를 쓰는 주체인 ‘나’가 시 속의 주체인 ‘나’를 통해 말하는 간 접적 발화의 방식, 꿈이나 환상을 통해 묘사하는 현실에서 배제된 것 과 혐오스럽거나 기괴한 것들인 아브젝트(abject)의 세계, 미성숙하고 개선할 여지가 많은 기호계적 코라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누리는 방식 으로서 ‘춤’ 등으로 설명한다.5)

     이러한 선행 비평들의 통찰은 시적 주체의 심리적 양상과 세계 인 식의 측면에서부터 시적 기법 및 주제의 측면을 경유하여 존재론적·사 회적·윤리적 측면에 이르기까지 양안다 시의 중요한 특성들을 유효 적 절히 해명했다고 볼 수 있다. 선행 비평들의 관점을 전체적으로 정리 하면 박상수, 박동억, 윤의섭의 평론이 양안다 시의 기법적 특성이나 미학적 구성을 분석하면서 시 의식의 지향성 및 주제의식에 이르는 특 성을 해명한다면, 신수진의 평론은 이러한 관점을 공유하면서도 양안 다 시의 위상을 역사와 세계의 지평이라는 현실성의 척도에서 평가하 는 관점까지 적극적으로 개입시킨다. 양안다의 시 세계에 대해 신수진 이 언급하는 평가들 중에서 특히 역사적 존재의 좌표를 상실한 주인공 의 비대해진 감수성과 독백, 고립·위기·사랑이라는 항목들로 세계 전 체를 불가능으로 점철시키는 허구적 고안물, 망가지는 ‘나’를 무너지는 세계로 곧장 치환하는 위악적이고 비약적인 성장 서사 등의 언급은 양 안다와 동세대의 젊은 시인인 황인찬, 송승언 등의 시를 분석할 때에 도 몇몇 선행 비평들이 언급했던 ‘히키코모리’6) 및 ‘세카이계’7)라는 개념 과 동궤에 있거나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이 두 개념은 주체가 현 실이나 세계와의 관계에서 확인하는 심리적 자기 이해가 과소화와 과 대화라는 관점으로 양극적 대비를 이루지만, 몰락하는 세계 혹은 유동 하고 불투명한 사회 속에서 삶의 방향과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존재들 이 보여주는 주체의 퇴조 혹은 무기력 현상과 연관된다는 공통점을 찾 을 수 있다.

     복수의 2010년대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유사한 세계 인식이나 심리적 자기 이해가 발견된다면 사회학적 관점이나 대중문화적 관점에 서 세대론적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유효한 설명 모델을 발견할 수 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양안다를 포함하여 황인찬, 송승언 등의 2010년대 젊은 시인들의 시에 나타나는 시적 주체의 공통분모로 서 ‘히키코모리’나 ‘세카이계’의 현상은 중요한 참조 사항이 될 수 있다. 필자는 이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보고 두 가 지 측면에서 이를 보충하거나 보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이러 한 관점이 시적 주체의 세계관이나 사고방식 혹은 심리적 태도를 해명 한다는 점에서 시인의 의식이나 시적 내용 차원의 탐구에 속하므로 개 별 시인의 고유한 시적 특성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측면이 시적 으로 형상화되는 미학적 기법 및 구조화 원리를 해명할 필요가 있다. 또 하나는 ‘히키코모리’라는 개념을 통한 작품 이해는 사회학적 관점에 기초한 분석이고, ‘세카이계’라는 개념을 통한 작품 이해는 대중문화적 관점에 기초한 분석이므로, 2010년대 젊은 시인들의 시를 온전히 이해 하기 위해서는 사회학적 관점과 문학적 관점 간에 놓인 간격뿐만 아니 라 대중문화적 관점과 문학적 관점 간에 놓인 간격에 대한 섬세한 고 찰을 통해 영역적·장르적 차이에 근거하여 고유한 시적 기능 및 효과 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해명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글은 선행 비평의 성과들을 존중하면서 양안다 시의 미 학적 기법과 구조화 원리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사회학적 관점이나 대 중문화적 관점과 연관되면서도 변별되는 시적 고유성의 측면을 살펴 보고자 한다. 이 글이 양안다 시의 미학적 기법을 탐색하면서 중점을 두는 것은 ‘프레임 형상화 방식’이다. 일반적으로 시의 프레임을 형성 하는 중요한 요소로는 시적 주체의 시선적 관점, 발화 방식, 시간 및 공간의 설정, 서사적 요소들 중에서 존재나 인물의 정체성, 인물들 간의 관계성 등을 들 수 있다. 이를 토대로 양안다 시의 프레임이 가지는 기 본적인 특성들을 추출하면 첫째, 시적 주체의 시선 및 발화의 측면에서 화자의 내면 영역들 중 ‘마음’이 중심축을 이룬다는 점, 둘째, 시적 상황 이나 배경의 측면에서 꿈과 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진 영역이 설정되어 환상과 실재, 무의식과 의식 등의 혼종이 나타난다는 점, 셋째, 시적 서 사의 측면에서 영화로 대표되는 문화적 매체를 설정하여 스크린 속 서 사와 현실의 서사를 혼종시킨다는 점(영화 이외에 책, 그림, 드라마 등의 문화 적 매체도 활용된다), 넷째, 시적 존재의 정체성 측면에서 주체인 ‘나’를 복 수로 분리시킬 뿐만 아니라 타자이자 연인인 ‘너’를 복수로 분리시키고 공동체인 ‘우리’를 통해 연합과 증식을 시도한다는 점(‘나’, ‘너’, ‘우리’ 이외 에 ‘선생’이 특징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등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양안다 시의 기본적인 ‘프레임 형상화 방식’을 전제 로 그것들을 포괄하면서 종합하는 특성을 ‘미로형 프레임 형상화 방식’ 이라고 명명하고 그 구조화 원리를 규명하기 위해 ‘시적 인터페이스’ 와 이를 통해 구성되는 ‘몽타주의 방법론’을 내적 분석소로 설정하고자 한다. ‘인터페이스(interface)’는 원래 정보통신 분야의 용어로서 ‘다른 둘 이상의 시스템, 장치, 소프트웨어 따위를 서로 이어 주는 부분 또는 그 런 접속 장치’를 의미한다. 필자는 이종 경계면을 통한 접속 장치의 개 념인 ‘인터페이스’를 융합적 관점으로 활용하여 영화, 드라마, 웹툰 등 의 대중문화의 영역뿐만 아니라 시의 프레임 형상화 방식을 고찰할 때 분석소로 설정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리고 ‘시적 인터페이스’ 의 차이에 따라 ‘몽타주의 방법론’이 변별성을 가지고 구성된다고 보고 그 상관성을 중심으로 시의 미학적 특이성과 구조화 원리를 해명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이 글은 양안다 시의 미학적 기법을 포괄하고 종 합하는 ‘미로형 프레임 형상화 방식’이 가지는 구조화 원리를 탐색하기 위해 ‘시적 인터페이스’와 이와 통해 구성되는 ‘몽타주의 방법론’을 유 형별 사례를 통해 고찰하고자 한다.



2. ‘병든 몸’의 인터페이스와 교차·연쇄·왕복의 몽타주


     양안다의 첫 시집에서 서시로 등장하는 「전주곡」에는 시적 프레임 을 지배하는 서사적 구조와 시적 주체의 내면으로서 ‘마음’의 형상화 방식을 비롯해서 양안다 시의 미학적 기법과 구조화 원리가 잠재적으 로 농축되어 있다.


어느 날 교정을 걷다가 이곳이 영화 속이라는 걸 알아버렸다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나를 속일 때마다 나뭇잎이 떨어지고

누군가가 너의 목소리를 모사한다, 나 역시 당신의 발목이기도 했 으니까, 같이 춤을 춰요 그대

옅어지는 호흡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면 마음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만 깨달았다

누가 내 옆에 있는 줄도 모른 채 억지로 웃어 보이고

고백해야 할 이야기가 떠오르면
떠오르는 생각들이 누군가가 쓴 각본일까봐

분수대에서 물이 솟구치고 그걸 바라보는 너라는 이름의 누군가를 바라보고

너의 이름을 부르지 않기 위해

분수대의 물은 계속 모양을 바꾸고 있었다 분명 아름답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떨어지는 나뭇잎은 떨어지는 일을 하는 중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 애쓰고

계속 숨이 막혀서

분명 너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 「전주곡」전문(1 : 9-11)


     양안다 시의 기본적인 프레임은 시적 화자가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유동하면서 어떤 상황이나 사건을 암시하며 내면의 마음과 감응을 고백하는 발화 방식을 근간으로 형성된다. 이로부터 마치 꿈속 이야기 혹은 영화 속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아우라가 발생한다. 양안다 시 의 화면이나 이야기에는 인물, 사건, 배경 등의 요소가 다양하게 등장 한다. 이 시에서는 “교정”인 듯 “영화 속”인 듯한 모호한 장소가 배경으 로 등장하고, 화자인 “나”, 연인으로 짐작되는 “너” 혹은 “그대”, “누군 가” 등이 현실적·잠재적 인물로 등장한다. 화자의 내면 영역인 ‘마음’이 발화의 중심축을 이루면서 외부 상황에 대한 지각과 내면 상태에 대한 인지가 교차하면서 연쇄적으로 제시된다. 이 시의 서사적 구조는 크 게 A(1-3연), B(4연), C(5-8연), B′(9연), D(10-11연), B″(12연), E(13연)로 전개되는 흐름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한 행이 한 연을 이루는 B(4연), B′(9연), B″(12연) 등이 ‘시적 인터페이스’로 작동하여 그 자체로 화자가 자신의 ‘병든 몸’ 상태를 드러내는 동시에 등장인물 간 의 관계를 둘러싸고 형성되는 파편적 시간 및 공간들 간의 충돌과 연 결이라는 ‘몽타주의 방법론’을 견인하면서 ‘미로형 프레임’을 형상화하 는 중심 기능을 담당한다는 점이다.

     A(1-3연)에서 화자가 제시하는 세 연의 상황은 각각 파편적으로 흩 어져 있고 연결고리를 찾기 어려운데, 심지어는 3연의 세 문장도 상호 연결성이 희박하다. 고백적 발화의 중심에는 화자인 “나”가 존재하면 서 파편적이고 비선형적인 인물·사건·배경 등으로 이루어지는 이질 혼 재적 서사들을 관장하지만 “나”도 파편적으로 분리되는 형국이다. 1연 은 “나”의 행위와 인지를 중심으로 “교정”과 “영화 속”이라는 이질적 배 경을 중첩시키는데, 이때 “나”는 교정을 걷는 ‘나-1’과 영화 속에 등장 하는 ‘나-2’와 이 두 자아를 바라보는 ‘나-3’으로 분리된다. 2연은 “나”의 심정에 따르는 자연 현상을 제시하는데, “나를 속일 때마다”라는 구절 이 암시하듯 과거-현재-미래의 차원에서 시간적 이동이 지속된다. 3연 에서는 잠재적 인물인 “누군가”와 부재하는 인물인 “너”가 등장하는데, “누군가가” “목소리를 모사”하는 “너”는 화자가 “같이 춤을 춰요”라고 말하는 “당신”이므로 세 명의 인물 간에는 불투명한 관계성이 형성된 다. 여기서 “너”는 “누군가”의 “모사”의 대상이 되는 ‘너-1’과 “나”의 연대 감의 대상이 되는 ‘너-2’로 분리된다. 요약하면 A(1-3연)는 이질적 배경 의 중첩과 “나”의 분리, 시간의 지속, 인물들 간의 모호한 관계와 “너”의 분리 등을 파편적인 서사의 몽타주로 형상화하는 것이다.

     B(4연)의 “옅어지는 호흡”이라는 구절은 ‘시적 인터페이스’로 작동하 여 그 자체로 위태로운 쇠락과 소멸을 겪는 화자의 ‘병든 몸’ 상태를 드 러내는 동시에 A(1-3연)의 파편적 서사의 몽타주를 C(5-8연)의 파편적 서사의 몽타주로 접속시키는 연결고리 역할을 담당한다. A(1-3연)에서 화자의 시선이 주로 자신의 외부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이라면 C(5-8 연)에서 화자의 시선은 주로 자신의 내면 영역인 “마음”을 바라보는 관 점이라고 볼 수 있다. C(5-8연)의 5연은 화자가 자신의 내면으로 이동 하여 “마음”에 대해 각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마음”의 영역은 다 분히 A(1-3연)의 파편적 서사의 몽타주를 수렴하여 결집시키는 중심 축 역할을 담당한다. 다시 말해 A(1-3연)에서 제시된 이질적 배경의 중 첩과 “나”의 분리, 시간의 지속, 인물들 간의 모호한 관계와 “너”의 분리 등이 모두 화자 내면의 “마음”의 프리즘에 투사되어 분기된 파편적이 고 이질적인 장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 은 양안다 시의 미학적 특이성인 카오스적인 미로의 서사, 파편적이고 이질적인 몽타주의 구성 원리 등이 모두 복잡미묘하고 중층적인 ‘마음의 우발성’과 연루되어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이어서 C(5-8연)의 6연에서 화자는 “억지로 웃어 보이”고 7연에서 는 “고백해야 할 이야기가 떠오르면” 그것이 “누군가가 쓴 각본일까봐” 라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백”이라는 “이야기”는 주체가 자 기 내면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말하는 형식이지만, 화자는 이것이 “누 군가가 쓴 각본”일 수 있다고 의심함으로써 자기 내부에 또 다른 타자 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가정을 제기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누군가”는 A(1-3연)의 3연에서 “너의 목소리를 모사”하는 “누군가”와 동일 인물일 수도 있고 ‘누군가-1’과 분리되는 ‘누군가-2’라고 간주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C(5-8연)의 8연 “분수대에서 물이 솟구치고 그걸 바라보는 너 라는 이름의 누군가를/바라보고 ”에서 화자는 “너”와 “누군가”를 동일시 함으로써 ‘너=누군가-3’을 설정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나”뿐만 아니라 “너”와 “누군가”도 복수로 분리함으로써 파편적 서사의 몽타주에 등장 하는 인물들 간의 관계를 토대로 형성되는 시적 프레임은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순환적 미로의 회로에 빠져든다.

     B′(9연)의 “너의 이름을 부르지 않기 위해”라는 구절은 ‘시적 인터페 이스’로 작동하여 그 자체로 절제하고 긴장하는 화자의 상태를 드러내 면서 C(5-8연)의 파편적 서사의 몽타주를 D(10-11연)의 파편적 서사의 몽타주로 접속시키는 연결고리 역할을 담당한다. C(5-8연)에서 화자의 시선이 주로 자신의 내면 영역인 “마음”을 바라보는 관점이라면, D(10 11연)에서 화자의 시선은 주로 자기 외부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복 귀한다고 볼 수 있다. D(10-11연)는 화자가 외부 상황을 바라보며 “분 수대의 물은 계속 모양을 바꾸고” “떨어지는 나뭇잎은 떨어지는 일을 하는” 모습을 제시하는 동시에 내면 심리의 측면에서 “분명 아름답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 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표출한다. 그리고 “어디선 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에서 잠재적 익명의 목소리를 배음으로 제시하고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을 통해 상황과 거리를 두려는 수동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B″(12연)의 “계속 숨이 막혀서”라 는 구절은 ‘시적 인터페이스’로 작동하여 그 자체로 화자의 ‘병든 몸’ 상 태가 질식하는 위기의 상황임을 드러내면서 D(10-11연)의 파편적 서사 의 몽타주를 E(13연)의 결구로 접속시키는 연결고리 역할을 담당한다. E(13연)의 “분명 너를 기다리고 있었는데”라는 구절은 A(1-3연), B(4연), C(5-8연), B′(9연), D(10-11연), B″(12연), E(13연)으로 전개되는 파편적 서사의 몽타주가 어떤 만남을 통해 종착지를 찾지 못하고 허공의 미로 속을 배회하는 양상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 양안다 시에서 ‘병든 몸’의 ‘시적 인터페이스’가 ‘몽타주의 방법론’을 견인하면서 ‘미로형 프레임’을 형상화하는 방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양안다의 ‘시적 인터페이스’ 사례인 ‘병든 몸’은 그 자체로 화자가 자신의 몸 상태를 드러내는 동시에 등장인물 간의 관계를 둘러싸고 형성되는 파편적 시간 및 공간들 간의 충돌과 연결이 라는 ‘몽타주의 방법론’을 견인하면서 ‘미로형 프레임’을 형상화하는 중 심 기능을 담당한다. 양안다의 시에서 이질적 배경의 중첩과 ‘나’의 분 리, 시간의 지속, 인물들 간의 모호한 관계와 ‘너’의 분리 등이 파편적 인 서사의 몽타주로 형상화되는데, 주체의 내면 영역인 ‘마음’은 다분 히 파편적 서사의 몽타주를 수렴하여 결집시키는 중심축 역할을 담당 한다. “나”뿐만 아니라 “너”와 “누군가”도 복수로 분리함으로써 파편적 서사의 몽타주에 등장하는 인물들 간의 관계를 토대로 형성되는 시적 프레임은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순환적 미로의 회로에 빠져든다. ‘병든 몸’이라는 이종 경계면을 통한 접속 장치를 통해 화자의 시선이 외부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자신의 내면 심리인 ‘마음’를 바라보는 관점 으로 이동한 후 교차하고 연쇄되면서 왕복하다가 종착지를 찾지 못하 고 허공의 미로 속을 배회하게 된다.



3. ‘창문’의 인터페이스와 왜곡·변형·전도의 몽타주


     양안다의 첫 시집에서부터 여섯 번째 시집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 로 등장하는 대표적인 ‘시적 인터페이스’ 중 하나는 ‘창문’ 이미지이다. 양안다의 시에서 ‘창문’이 ‘시적 인터페이스’로 작동하여 ‘몽타주의 방 법론’을 견인하면서 ‘미로형 프레임’을 형상화하는 사례는 곳곳에서 발 견된다. 양안다의 개별 작품들에서 ‘창문’의 ‘인터페이스’가 작동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은 여타의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층위의 시적 장치와 결부되거나 접목될 때 변별성을 가지고 상이한 기능 및 효과를 발생시 킨다.


아무도 커튼을 내려 주지 않았지만 나 역시 창문 따위 바라보지 않 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우는 일은 아이에게나 어울리는 것일까

그러니까 문제는 창문이었을 텐데

투명하게 바라보지 마세요.
나의 마음을 안다고 말하지 말아요
웃는 나를 믿지 말아요
믿지 마세요 나를

-당신은 외면만 하는군요.
-나는 조금 내성적일 뿐이에요. -다시 돌아올 거면서 떠나려 하니까요.
-나는 사람이 두려워요.
-당신은 지금도 외면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느 노인이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면
그곳이 출구라고 믿은 채
달려가는 소년처럼

나는 당신의 환각, 그 반대도 마찬가지, 서로를 하염없이 왜곡하고 뒤틀고

뽑아놓은 눈알이 테이블 위를 굴러가면

닫은 마음
닫은 눈
그리고

역한 냄새는 오래 지워지지 않지

꿈속에서 꿈 밖을 바라보듯이

나는 계속 뒤집어진다

열차의 창문은 풍경을 자꾸 바꾸는데

- 「dejavu」부분(4 : 147-149)


     인용한 구절들은 “어째서 환각은 언제나 편도인 걸까요 머릿속을 휘젓고는 이내 사라져서 돌아오지 않는 열차라도 되는 걸까요”에서 보 이듯 화자 “나”가 청자를 염두에 두는 고백적 발화를 시도한 이후에 제 시되는 부분이다. “환각”을 “열차”의 이미지를 결부시켜 표현한 이 문 장은 서사적 전개에서 발화 방식뿐만 아니라 의미 맥락에서도 중요 한 징후적 상징성을 발휘한다. “환각”의 일방향성과 미로성은 “열차” 처럼 질주하면서 휘발되는 속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염두에 두면서 인용한 구절들의 서사적 구조를 살펴보면 크게 A(1-3연), B(4 연), C(5연), D(6연), A′(7-10연), A″(11-12연), D′(13연)로 전개되는 흐름 이 나타난다. 이 서사적 구조에서 ‘미로형 프레임’의 근간을 이루는 것 은 상황과 연관되는 “나”의 내면 심리 발화(A, A′, A″)를 중심축으로 삼 아 “나”의 청자를 염두에 두는 고백적 발화(B), “나”와 “당신”의 대화적 발화(C), 상황에 대한 화자 “나”의 객관적 발화(D, D′) 등의 화법이 이질 혼재적으로 교차하고 연쇄하면서 진행되는 몽타주의 방법이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이질 혼재적 몽타주의 기법이 작품의 미로형 프레임을 형상화하는데 핵심적인 촉매 작용을 하는 요소가 “창문” 의 인터페이스라는 점이다. 인용한 A(1-3연)는 상황과 연관되는 화자 “나”의 내면 심리 발화를 보여주는데, 1연, 2연, 3연의 문장들은 상호 인과성 및 선형성을 찾기 어려운 파편적인 심리 상태의 발화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창문 따위 바라보지 않으면 그 만”, “그러니까 문제는 창문이었을텐데” 등의 표현이 드러내듯 “창문” 이 일차적으로 파편적 문장들을 접속시키는 연결고리를 형성하고, 더 나아가 네 가지 이질적인 발화 유형을 교차하고 연쇄하면서 진행되는 파편적 몽타주의 방법론을 견인함으로써 작품 전체가 ‘미로형 프레임’ 로 구조화되는 ‘시적 인터페이스’로 작동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문제는 창문이었을텐데”라는 구절 이후에 B(4연)에서 화자 “나”가 청자 를 염두에 두는 고백적 발화가 제시된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창문” 의 ‘인터페이스’가 서사 구조의 측면에서 파편적 몽타주의 방법론을 견 인할 뿐만 아니라 그 속성이 자체로 의미 맥락의 중심을 이루면서 상 징적 발화체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화자 “나”의 “투명하게 바라보지 마세요./나의 마음을 안다고 말하지 말아요/웃는 나를 믿지 말아요/믿지 마세요 나를”이라는 표현에서 “창문”의 ‘인터페이스’는 투 명/불투명, 마음을 앎/마음을 모름, 믿음/믿지 않음 등의 의미 맥락을 작품 내에 형성하는 동시에 그 양가적 모호성을 상징적으로 발현하고 있다. 그리고 화자의 발화를 중심축으로 발화 방식의 유형이 교차하고 연쇄될 때뿐만 아니라 “창문”의 ‘인터페이스’가 이종 경계면을 통한 접 속을 진행할 때에도 작품의 시공간이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입체성을 확보하게 된다.

     화자 “나”와 “당신”의 대화적 발화가 제시되는 C(5연)에서도 이러한 양상이 유지된다. 5연의 문장들은 대화 당사자들 간에 진정한 내면적 만남과 교류가 허용되지 않는 관계의 불일치와 좌절로 인해 생기는 불 안과 원망 등을 표출한다. 이러한 표현은 “창문”의 ‘인터페이스’가 형성 하는 양가적 모호성이 “커튼” 이미지와 결부되어 단절과 폐쇄의 상징 적 발화체로 작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대화적 발화 방식으로의 전 환은 양안다 시의 기본적인 형상화 방식인 몽타주 기법의 일환이기도 하면서 “창문”의 ‘인터페이스’가 이질적 화법 들 간의 경계에서 접속을 가능케 하는 동인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이어서 파편적으 로 접속되는 D(6연)는 상황에 대한 화자 “나”의 객관적 발화로서 “어느 노인이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면/그곳이 출구라고 믿은 채/달려가 는 소년”이 제시된다. 이 장면을 현실의 객관적 모습으로 간주할 수도 있고 “∼처럼”이라는 어구로 짐작할 때 화자가 설정한 상상 속의 모습 이라고 간주할 수도 있다. 어느 쪽으로 이해하건 중요한 것은 “소년”이 자신을 폐쇄된 공간 속에 갇힌 존재로 이해한다는 점과 “어느 노인”의 “방향” 지시와 “그곳”을 “출구라고 믿”고 “달려가는 소년” 사이에 ‘지도’ 와 ‘믿음’의 관계라는 의미 맥락이 형성된다는 점이다(여기서 양안다 시에 종종 등장하는 ‘선생’의 정체와 위상을 유추할 수도 있다).

     A′(7-10연)에서는 상황과 연관되는 “나”의 내면 심리 발화 방식으로 복귀하면서 이러한 의미 맥락을 충격적으로 반전시킨다. 7연 “나는 당 신의 환각, 그 반대도 마찬가지, 서로를 하염없이 왜곡하고 뒤틀고”라 는 구절은 “창문”의 ‘인터페이스’가 이질적 화법들 간의 접속을 가능케 하는 동인일 뿐만 아니라 “나”와 “당신”의 관계를 환각을 통해 상호 ‘왜 곡’시키고 ‘변형’시키는 동인으로도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양안 다 시의 중요한 미학적 특이성인 주체와 타자 간에 형성되는 환각과 그 왜곡 및 변형의 속성이 “창문”의 ‘인터페이스’에서 기인한다고 간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은 양안다 시에서 다양한 인터페이스 장치가 파편적 서사들을 접속하는 몽타주의 방법론을 견인하면서 궁극적으로 는 작품 전체가 미로형 프레임으로 구조화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 한다는 이 글의 중심 논지를 뒷받침한다. 8연 “뽑아놓은 눈알이 테이블 위를 굴러가면”이라는 구절은 “눈알”의 “굴러”감을 통해 주체의 시선을 분리시키고 이동함으로써 시적 관점의 변주를 암시한다. 9-10연 “닫 은 마음/닫은 눈/그리고//역한 냄새는 오래 지워지지 않지”라는 구절 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폐된 공간 속에 갇힌 존재로 남는 시적 주체 의 양상을 드러낸다. 그 연장선에서 A″(11-12연)에서는 “나”의 내면 심 리 발화 방식을 유지하면서 “창문”의 ‘인터페이스’에 초점을 맞추어 그 것이 파생시키는 몽타주의 방법론과 미로형 프레임 형상화 방식에 대 해 언급한다. “꿈속에서 꿈 밖을 바라보듯이/나는 계속 뒤집어진다”라 는 표현은 “창문”의 ‘인터페이스’가 시적 화자의 “꿈속”과 “꿈 밖”의 경 계에서 시선의 충돌을 통해 존재적 ‘전도’와 ‘전복’을 반복적으로 진행 하는 양상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시는 D′(13연)에 이르러 상황에 대한 화자 “나”의 객관적 발화 방식으로 전환하여 “열차의 창문은 풍경을 자 꾸 바꾸는데”라는 문장으로 마무리한다. 이 구절은 “창문”의 인터페이 스가 “풍경”으로 표상되는 시적 프레임을 변화시키고 변주하는 중요한 미학적 장치라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 양안다 시에서 ‘창문’의 ‘시적 인터페이스’가 ‘몽 타주의 방법론’을 견인하면서 ‘미로형 프레임’을 형상화하는 방법을 요 약하면 다음과 같다. 양안다의 ‘시적 인터페이스’ 사례인 ‘창문’은 일차 적으로 각 연의 파편적 문장들을 접속시키는 연결고리를 형성하고 더 나아가 복수의 이질적인 발화 유형들을 교차하고 연쇄하면서 진행되 는 ‘파편적 몽타주의 방법론’을 견인함으로써 작품 전체가 ‘미로형 프레 임’으로 구조화되는 데 기여한다. ‘창문’의 ‘인터페이스’는 서사 구조의 측면에서 파편적 몽타주의 방법론을 견인할 뿐만 아니라 그 속성이 자 체로 의미 맥락의 중심을 이루면서 상징적 발화체로 작용하기도 한다. 화자의 발화를 중심축으로 발화 방식의 유형이 교차하고 연쇄될 때뿐 만 아니라 ‘창문’의 ‘인터페이스’가 이종 경계면을 통한 접속을 진행할 때에도 작품의 시공간이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입체성을 확보하게 된 다. ‘창문’의 ‘인터페이스’는 이질적 화법들 간의 접속을 가능케 하는 동 인일 뿐만 아니라 “나”와 “당신”의 관계를 환각을 통해 상호 ‘왜곡’시키 고 ‘변형’시키는 동인으로 작용하고, 시적 화자의 “꿈속”과 “꿈 밖”의 경 계에서 시선의 충돌을 통해 존재적 ‘전도’와 ‘전복’을 반복적으로 진행 하는 양상을 드러낸다.



4. ‘거울’의 인터페이스와 분열·복제·증식의 몽타주


     양안다의 세 번째 시집에서부터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이후 지속 적으로 등장하는 대표적인 ‘시적 인터페이스’는 ‘거울’ 이미지이다. 양 안다의 시에서 ‘거울’이 ‘시적 인터페이스’로 작동하여 ‘몽타주의 방법 론’을 견인하면서 ‘미로형 프레임’을 형상화하는 사례는 주로 네 번째 시집 이후에 중점적으로 형상화되는데, 여섯 번째 시집은 ‘거울’의 인 터페이스가 시집 전체의 구성 원리로까지 확대되어 중심부를 형성하 게 된다. 양안다의 개별 작품들에서 ‘거울’의 ‘인터페이스’가 작동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은 여타의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층위의 시적 장치와 결부되거나 접목될 때 변별성을 가지고 상이한 기능 및 효과를 발생시 킨다.


“이곳 주민들은
이 수많은 산들을
거울 산이라 부른다고 하더군요. 구전되는 이야기에 따르면
신이 만든 거대한 거울이 산을 비추고
서로 증식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입을 맞추었다.
나는 너에게 밤과 낮의 아름다움에 대해 물었다.
나는 너에게 불과 재의 아름다움에 대해 물었다.
폭포 안에서 바깥을 바라보면
유리 조각들이 반짝였고 그것이 차가웠다.
손목이 투명해,
그렇게 말하며 깨어나는 꿈은 현실과 얼마나 닮았는지 가늠하곤 했다.
무엇이 더 아름다운 걸까.
봐.
창밖에 바다가 있는데. 파도를 들으려 하지 않는데. 유리가 깨지고 있군. 유리가 깨지고 있어. 유리가
조각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내가 두 개의 귀를 가졌다는 사 실이 믿기지 않았다.
악몽에는 언제나 인파가 쏟아졌다. 그것은 기나긴 행렬, 불규칙한 리듬이자 소음이었고
그러나 하나의 타악기처럼 들린다.
장미 밭.
장미 밭.

- 「유리 장미」 부분(3 : 30-32)


     이 시는 인용하지 않은 서두에 “봐./창밖에 바다가 있는데. 밤은 물 결을 지우는데. 이 방에는 거울이 있었고. 그러나 나는 나를 확인할 수 없어서.”라는 문장들로부터 시작한다. 이 문장들은 시적 화자가 “창” 을 경계로 “방” 안에서 “밖”의 “바다”를 관찰하는 모습과 “방” 안에 “거울 이 있었”지만 자신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을 제시한다. 여기서 우리 는 양안다 시에서 ‘창문’의 ‘인터페이스’에 ‘거울’의 ‘인터페이스’가 개입 하여 좀 더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입체성을 확보하면서 ‘몽타주의 방법 론’을 견인하여 ‘미로형 프레임’을 형상화한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우선 이 문장들에서부터 가설을 검증해 보자. 양안다의 시는 기본적으 로 ‘창문’의 ‘인터페이스’를 통해 ‘방’의 ‘안’과 ‘밖’이라는 공간적 이종 경 계면을 형성하고 꿈·현실 등의 내면 정신적 경계, 과거·현재·미래 등의 시간적 경계, 나·너·우리·선생 등의 인물적 경계 등을 횡단하는 이질 혼종적 몽타주를 형상화하는데, ‘방’에 존재하는 ‘거울’의 ‘인터페이스’ 를 통해 그 내부에서 다시 시적 주체 및 타자의 분열뿐만 아니라 시적 공간, 내면 정신, 시간, 인물 등의 분열을 파생시킨다. 따라서 ‘거울’의 ‘인터페이스’는 ‘창문’의 인터페이스가 생성시키는 ‘왜곡’, ‘변형’, ‘전도’ 등의 몽타주 방법론에 ‘분열’의 몽타주 방법론을 개입시켜 보다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입체성을 확보하게 된다. 이러한 부분을 좀 더 구체적 으로 검증하기 위해 인용한 구절들을 세밀히 분석해 보자.

     인용한 구절의 서사적 구조는 크게 A(1-6행), B(7-13행), C(14-17행), B′(18-21행)로 전개되는 흐름으로 나타난다. 이 서사적 구조에서 ‘미로 형 프레임’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상황과 연관되는 “나”의 내면 심리 발 화(B, B′)를 중심축으로 삼아 “너”가 “나”에게 말하는 대화적 발화(A), “나”가 “너”에게 말하는 대화적 발화(C) 등의 화법이 이질 혼재적으로 교차하고 연쇄하면서 진행되는 몽타주의 방법이다. 여기서 중요한 부 분은 이질 혼재적 몽타주의 기법이 작품의 미로형 프레임을 형상화하 는데 촉매 작용을 하는 핵심적인 요소가 “창문” 및 “거울”의 인터페이 스라는 점이다. 인용한 A(1-6행)는 직접 인용의 형태로 “너”가 “나”에게 말하는 대화적 발화 및 행위를 보여준다. “너”가 “나”에게 말하는 부분 인 1-5행은 “거울 산”과 관련된 “구전되는 이야기”로서 “신이 만든 거 대한 거울”의 작용에 의해 “산을 비추고/서로 증식”하여 “수많은 산들” 이 생성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확인하는 것은 양안다의 시에서 “거 울”의 인터페이스가 상호 ‘복제’ 및 ‘증식’의 기능을 발휘하여 존재나 사 물을 복수화한다는 점과 그것이 신이 만든 일종의 운명의 영역에 속한 다는 점이다. 이때 복제 및 증식은 유사성의 반복이라는 속성을 가지 는 동시에 원본의 가치를 불인정한다는 점에서 상사성의 속성도 가지 므로 이율배반성을 내포한다. 따라서 양안다의 시에서 “거울”의 인터 페이스가 가지는 ‘복제’ 및 ‘증식’의 기능은 존재나 사물을 복수화한다 는 점뿐만 아니라 유사성과 상사성이 충돌하는 모순 대립을 생성시킨 다. 이어지는 6행 “그리고 입을 맞추었다.”라는 “너”의 행위는 단순히 “너”와 “나”가 연인 관계라는 점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상호 복제 및 증식의 관계라는 점을 드러낸다.

     “거울”의 인터페이스로 인해 발생하는 존재적 복제 및 증식은 상 황과 연관되는 “나”의 내면 심리를 발화하는 B(7-13행)에서 “밤과 낮” 이 “불과 재”로 전이되는 상황적 복제 및 증식으로 이동하고 “꿈”이 “현 실”로 전이되는 심리적 복제 및 증식으로 이동한다. 7-8행 “나는 너에 게 밤과 낮의 아름다움에 대해 물었다./나는 너에게 불과 재의 아름다 움에 대해 물었다.”라는 대구의 문장이 전자를 보여주는 언어적 등가 물이라면, 12행 “그렇게 말하며 깨어나는 꿈은 현실과 얼마나 닮았는 지 가늠하곤 했다.”라는 문장은 후자를 보여주는 언어적 등가물이라고 볼 수 있다. “밤과 낮”의 모티프 및 “불과 재”의 모티프는 양안다 시 세 계의 전체적 주제 의식과도 맞닿아 있는 중요한 요소이다. “밤”이 파국 적 세계를 표상하고 “낮”이 그 대립 개념을 표상하면서 시간성뿐만 공 간성을 포괄하는 세계상을 표현한다면, “불”은 공허한 현실과 몰락하 는 존재의 운명 속에서 그 불행 및 절망을 극한까지 실현하는 역설적 충일의 에너지를 표상하고 “재”는 그 에너지의 완전한 소진 및 폐허를 표상하면서 존재의 지향성뿐만 아니라 결과까지를 포괄하는 존재상 을 표현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 두 모티프를 대구로 비교할 때 제시 하는 “아름다움”과 13행 “무엇이 더 아름다운 걸까.”라는 구절은 상황 적 복제 및 증식과 심리적 복제 및 증식의 공통분모로서 “아름다움”이 화자의 중요한 판단 척도임을 확인시킨다. 이 ‘아름다움’이라는 척도는 시적 주체가 “거울”의 인터페이스가 가지는 속성인 분열·복제·증식 등 이 파생시키는 양가성 및 유사성과 상사성의 이율배반성 등과 관련하 여 시도하는 평가의 척도와 관련되고, 더 나아가 양안다 시에서 “거울” 의 인터페이스가 파편적 서사의 몽타주를 견인하면서 미로형 프레임을 형상화하는 구조화 원리에 대한 평가의 척도와도 관련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9-11행에서 화자가 “폭포 안에서 바깥을 바라” 볼 때 발견하는 “유리 조각들”의 “반짝”임과 “차가”움은 의미심장한 암 시를 던져준다. “유리 조각들”의 “반짝”임과 “차가”움이 드러내는 양가 성은 “거울”의 인터페이스가 가지는 속성인 분열·복제·증식 등이 파생 시키는 양가성 및 유사성과 상사성의 이율배반성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C(14-17행)에서는 화자 “나”가 “너”에게 말하는 대화적 발화로 화법 이 전환된다. 이 발화 내용에서도 “창”과 “유리”가 중요한 모티프로 등 장한다. “창밖에 바다가 있는데. 파도를 들으려 하지 않는데.”라는 문 장은 “창”이 안과 밖의 소통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하는 모습을 보 여준다. 우리는 이 장애물이 “유리가 깨지고 있”고 “조각나고 있는” 원 인으로 작용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창”문이나 “거울” 이미지와 친연 성을 가지거나 공통분모를 형성하는 “유리” 이미지의 “깨”짐이나 “조 각”남은 “반짝”임과 “차가”움이 드러내는 양가성과 동궤에 있으면서 “아름다움”에 대한 평가와도 접목될 수 있다. 그런데 화자가 17행 “내 가 두 개의 귀를 가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용한 시의 시상 전개가 16행까지 “창”, “거울”, “유리” 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점에서 볼 때 주목할 부분은 15행 “파도를 들으 려 하지 않는데.”에서 은연중에 노출되는 “들으려”이다. 청각적 이미지 를 전제하는 이 시어는 “바다”에 잠재되어 있던 충동적 에너지를 내적 으로 함축하다가 B′(18-21행)에서 현실화시켜 시의 표면에 드러낸다.

     따라서 B′(18-21행)에서 주로 형상화되는 것은 “창밖”의 “바다”가 보 여주는 “파도”의 잠재적 에너지인데, 주목할 부분은 화자가 이 영역을 “악몽”으로 지칭한다는 점이다. 심지어 B′에서 화자는 이전까지의 시 상 전개 전체를 “악몽”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의 전체적 구도는 상황과 연관되는 “나”의 내면 심리 발화(B, B′)를 중심축으로 삼 아 “너”가 “나”에게 말하는 대화적 발화(A), “나”가 “너”에게 말하는 대 화적 발화(C) 등의 화법을 교차하고 연쇄하면서 파편적 몽타주를 접속 하다가 B′(18-21행)에 와서 이전까지의 서사적 전개 전체를 “악몽”으로 설정하는 도약적 전환으로 구성된다고 볼 수 있다. 이 도약적 전환을 견인하는 이종 경계면을 통한 접속 장치도 “거울”의 ‘인터페이스’이다. 18-19행은 “쏟아”지는 “인파”, “기나긴 행렬”, “불규칙한 리듬이자 소 음”, “타악기” 등의 이미지로 “파도”의 잠재적 충동의 에너지를 청각적 요소들로 표현한다. 20-21행 “장미 밭./장미 밭.”은 인용하지 않은 부 분에서 “마침내 너”가 “내 손목을 붙잡아” “이끌었”던 공간이자 “내”가 “악몽” 속이라고 깨달은 공간이다. 이것은 “거울”의 ‘인터페이스’를 둘 러싸고 “창”과 “유리”의 인터페이스가 복합적이고 중층적으로 결부되 면서 “아름다움”이라는 척도를 통해 표상하는 시적 주제를 함축한 채 응결되는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 양안다 시에서 ‘거울’의 ‘시적 인터페이스’가 ‘몽 타주의 방법론’을 견인하면서 ‘미로형 프레임’을 형상화하는 방법을 요 약하면 다음과 같다. 양안다의 시는 ‘창문’의 ‘인터페이스’를 통해 ‘방’의 ‘안’과 ‘밖’이라는 공간적 이종 경계면을 형성하고 꿈·현실 등의 내면 정 신적 경계, 과거·현재·미래 등의 시간적 경계, 나·너·우리·선생 등의 인 물적 경계 등을 횡단하는 이질 혼종적 몽타주를 형상화한다. 양안다의 ‘시적 인터페이스’ 사례인 ‘거울’은 ‘방’의 내부에서 다시 시적 주체 및 타자의 분열뿐만 아니라 시적 공간, 내면 정신, 시간, 인물 등의 분열을 파생시킨다. 따라서 ‘거울’의 ‘인터페이스’는 ‘창문’의 인터페이스가 생 성시키는 ‘왜곡’, ‘변형’, ‘전도’ 등의 몽타주 방법론에 ‘분열’의 몽타주 방 법론을 개입시켜 보다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입체성을 확보하게 된다. 양안다의 시에서 ‘거울’의 인터페이스가 가지는 ‘복제’ 및 ‘증식’의 기능 은 존재나 사물을 복수화한다는 점뿐만 아니라 양가성 및 유사성과 상 사성이 충돌하는 모순 대립을 생성시킨다. ‘거울’의 인터페이스로 인해 존재적 복제 및 증식은 상황적 복제 및 증식으로 이동하고 심리적 복 제 및 증식으로 이동한다. ‘아름다움’이라는 척도는 시적 주체가 ‘거울’ 의 인터페이스가 가지는 속성인 분열·복제·증식 등이 파생시키는 양가 성 및 유사성과 상사성의 이율배반성 등과 관련하여 시도하는 평가의 척도와 관련되고, 더 나아가 양안다 시에서 ‘거울’의 인터페이스가 파 편적 서사의 몽타주를 견인하면서 미로형 프레임을 형상화하는 구조 화 원리에 대한 전체적 평가의 척도와도 관련된다.

  • 1) 양안다의 시집은 『작은 미래의 책』(현대문학, 2018), 『백야의 소문으로 영원히』(민음사, 2018), 『세계의 끝 에서 우리는』(아시아, 2020), 『숲의 소실점을 향해』(민음사, 2020), 『천사를 거부하는 우울한 연인에게』(문학동 네, 2023), 『몽상과 거울』(아침달, 2023) 등이 있다. 이 글에서 양안다의 시는 여기서 인용하되 시집은 출간된 순으로 번호를 달아 ‘(시집 번호 : 쪽수)’로 출처를 표시한다.
  • 2) 박상수,「불가항력 이후, 예지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 『백야의 소문으로 영원히』 해설, 민음사, 2018, 161-184쪽.
  • 3) 신수진,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해설, 아시아, 2020, 98-116쪽.
  • 4) 박동억, 「언어의 소실점」, 『숲의 소실점을 향해』 해설, 민음사, 2020, 229-248쪽.
  • 5) 윤의섭, 「온전한 불완전」, 『천사를 거부하는 우울한 연인에게』 발문, 문학동네, 2023, 133-148쪽.
  • 6) ‘히키코모리’는 1970년대부터 일본 사회에서 나타나고 1990년대 중반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현상으로 서 사회나 조직의 유동성과 불투명성, 자기실현에 대한 혐오로 인해 내면으로 침잠하고 판단 유보의 회색 지대로 후퇴하여 사태를 관망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한국 사회에서도 1990년대 후반 이후에 ‘방콕족’이라 는 유사한 현상이 발견되었고 우리말로는 ‘은둔형 외톨이’라는 용어가 정착되어 사용되고 있다.
  • 7) ‘세카이계(世界界)’는 일본 대중문화를 설명하는 문화비평의 개념으로서 주인공과 연애 대상의 감정적 인간관계를 세계의 위기나 종말이라는 거대한 존재론적 문제에 직결시키는 상상력을 의미한다. 1990년대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을 지배해온 주인공의 사고방식으로서 급진적 사회변혁 운동이 실패하고 자본주의의 승리를 선언했던 찬란한 버블 경제마저 붕괴된 이후 더는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는 비관과 불안이 대 중문화로 스며들었다고 분석되고 있다. 가이낙스 원작의「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징후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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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지 대화의 기술 — 이혜원, 『고백의 파동』 (파란, 2024)

| 비평집 리뷰 | 대화의 기술 — 이혜원, 『고백의 파동』(파란, 2024) 송현지 1  이혜원은 2013년 여름부터 2023년 가을까지 발표한 글들을 묶은 『고백의 파동』에서 시의 가치를 다음과 같은 말로 새롭게 정의한다. “자신을 열고 사물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의 대화술은 물질과의 전면적 대화가 필요한 현재의 시점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특별한 기술이다”(7)1). 코로나19를 지나며 물질의 생기를 실감하게 된 지금, 물질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는 ‘대화의 기술’이 전례 없이 중요해졌지만, 그는 시가 이미 오래전부터 그러한 대화를 실천하며 “신유물론적 사유를 선취”(7)해왔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 비평의 가치 역시 시의 대화 능력을 매개로 물질과 간접적인 대화를 수행해 온 실천으로 새롭게 정의된다. 그런데 이 정의에서 그가 시 비평을 “시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특별한 대화술”(7)로 바라본다는 점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와 같은 시각은 “코로나 사태와 신유물론의 유행”(6)을 거치며 견고해졌다는 점에서 동시대적 맥락을 획득하지만, 사실상 이는 그의 비평 전반을 관통하는 일관된 태도였기 때문이다.  “또박또박 읽는다”는 2016년 팔봉비평문학상을 수상할 당시의 평처럼, 이혜원은 줄곧 시를 비평의 중심에 놓고 시에 대한 주의 깊은 독해를 통해 꾸준히 대화를 시도해 왔다. 초현실적이거나 침묵에 가까운 시 앞에서도 그는 귀 기울이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시인의 언어를 먼저 듣고자 하는 겸손함을 비평의 출발점으로 삼아 왔다. 그런데 이러한 겸양의 태도는 의도치 않게 시 비평이 함의하는 또 하나의 대화 구조를 간과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것은 비평이 시와의 대화일 뿐 아니라 독자와의 대화이기도 하며, 이 이중의 대화 구조 안에서 의미를 완성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가 시 비평의 대화적 성격을 설명할 때 시를 중심에 놓는 데서 멈춘 것은 그 특유의 겸양에서 비롯된 일이겠지만 이 글은 바로 그의 서술이 누락한 대화의 층위, 곧 독자와의 대화에 주목하고자 한다. 요컨대 이혜원이 시의 고백을 성실히 듣고, 그로부터 구성된 대화를 독자에게 다시 건넴으로써 새로운 대화의 장을 열어가는 과정을 주목하려는 것이다. 이는 그의 비평이 시의 언어에 머무르지 않고 시로부터 들은 것을 다시 자신의 언어로 옮겨 독자에게 전달하는 데 특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그가 구축해 온 ‘대화의 기술’은 단지 시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데 그치지 않으며, 그가 독자에게 건네는 말이 새로운 언어, 새로운 접속, 그리고 새로운 파동을 발생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함으로써 또 하나의 대화의 장을 연다는 것이다. 미리 말하자면, 이 기술이야말로 그의 비평이 지닌 가장 분명한 미덕이다. 2  좋은 대화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가. 시중의 수많은 책들이 입을 모아 강조하듯, 그 핵심은 경청에 있다. “최고의 대화술이 잘 듣는 법”(6)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이혜원이 시에 대한 상세한 해석들로부터 글을 시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산문시의 리듬과 대화의 시학」을 제외하고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모든 글들은 개개 시편에 대한 구체적 시 해석을 바탕으로 한다. 더구나 예외처럼 보이는 「산문시의 리듬과 대화의 시학」 또한, 그보다 약 10년 전 발표된 「슬픔의 달콤한 리듬―이제니의 시」에서 이루어진 이제니의 산문시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디디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의 비평은 예외 없이 시의 목소리에 온전히 집중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경청’은 단일한 방식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대의 말을 조용히 듣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등 적극적인 반응을 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상대의 말을 주의하여 듣는 목적이 이후의 대화를 잘 해나가는 데 있다는 점에서 이혜원은 시가 하는 말을 듣고 반응하는 와중에 그 말이 어떠한 상황에서 나온 것인지 그 배경과 의도, 감정까지 헤아리는 맥락적 경청을 한다. 예컨대, 앞서 언급한 이제니론에서 그는 이제니 시의 리듬을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어떠한 배경에서 발현된 것인지를 살펴보는 데 골몰한다. 현실이 아닌 상상에 의해 이제니 시가 작동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와 같은 상상이 언어와 리듬으로 발현되었다는 점을 밝히는가하면, 현대시의 산문화 경향에 따라 리듬이 점차 위축되는 흐름 속에서 이제니 시가 출현했다는 맥락을 제시하며 그 고유성을 보여주는 방식이 그것이다. 이러한 서술은 결국 통시적·공시적 좌표를 설정하여 시나 시인을 그에 맞는 정확한 자리에 배치하는 방식이다. 그가 비평에서 비교와 대조의 방법을 자주 사용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방식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주목할 점은 이혜원이 마련한 좌표가 동시대 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동시대 작품들 중 “리듬이 살아 있는 시들의 질서 있는 언어”나 “리듬이 상실된 시들의 혼란스러운 언어”(558)와의 비교를 통해 이제니 시의 리듬 특수성을 드러내는 한편, 이를 “전통이나 정형의 리듬”(557)과 구분하며 전체 한국 현대시의 흐름 속에서 해당 시(인)의 위치를 설정한다. 「감각의 향유―황인숙론」에서 황인숙 시의 개성이 “감각을 향유하는 능동적인 감수성”(384)에서 비롯됨을 밝히는 부분 역시 그러하다. 그는 거침없이 감각을 발산시킨 황인숙의 시가 “이념의 시들이 주도하던 당시의 분위기”에서 얼마나 낯설고 새로웠는가를 짚는 가운데 감각의 중요성을 언급한 김기림의 시론을 불러온다. 이로써 황인숙의 시는 현대시사 내 감각적 시의 계보에 위치 지워지는 것이다.2)  나는 이와 같은 비평 방식을 ‘지형학적 비평’이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부르고자 한다. 그것은 이러한 명명이 필요할 만큼 이 방식이 하나의 비평 전략이자 효과적인 대화술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와의 긴밀한 대화를 통해 구축된 현대시의 좌표는, 비평과 독자의 거리를 좁히고, 궁극적으로는 독자가 시와 보다 가까이 접속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원활하고 생산적인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한편, 내 말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필요함을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좌표 설정은 비평가가 바라보는 시적 관점을 독자와 공유함으로써 독자와의 대화를 이어가게 하고, 궁극적으로 독자가 시에 더 가까워지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혜원의 비평이 현대시사의 지형을 명료하게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개념까지 꼼꼼하게 설명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황인숙론에서 그는 황인숙의 감각적인 시가 왜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현대예술에서 감각이 저평가되어 온 연원을 밝히는가 하면 레비나스를 경유해 감각의 중요성을 세심하게 설명한다. 그는 현대시를 비롯한 예술이 “대중과 유리되면서”(36) 그 가치를 가질 수 없다는 자신의 주장을 사실상 비평으로 선취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나는 독자를 난해한 말로 멈추어 세우는 많은 비평과 달리 단정하고 친절한 그의 비평이 단지 시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는 데에만 장점이 있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비평적 특성은 독자가 스스로 새로운 대화를 시작하도록 격려한다는 데 그 중요성이 있다. 그의 비평을 읽는 독자는 더 이상 비평적 사유를 ‘비평가의 일’로 한정하지 않는다. 시를 둘러싼 맥락과 작품에 대한 명확한 이해 위에서 독자는 마침내 이혜원이 던진 질문에 함께 응답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독자들이 이혜원의 답변에 머무르지 않고 저마다 새롭게 바라본 문제를 바탕으로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또 다른 이유가 그의 좌표 설정 ‘방식’에 있다는 사실이다. 얼핏 보기에는 작품을 특정한 계보 아래 분류하고 좌표를 만드는 일이 곧 닫힌 체계를 만드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비평은 단순히 계보를 만드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더 많은 대화와 생산적인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목표인 이러한 좌표 설정은 때로 상투적인 틀을 흔들며 시인과 작품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다. 예를 들어, 『고백의 파동』의 첫 글인 「고백과 공감」에서 그는 ‘고백시’의 효과를 논하기 위해 이성복과 최승자, 기형도와 황지우, 박준과 심보선 등 익숙한 조합뿐 아니라 윤동주와 김수영을 묶어 제시한다. 이 낯선 연결을 “견고한 양심의 울림”(21)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제시함으로써 독자는 보다 넓은 시야에서 현대시사를 조망할 수 있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이 두 시인을 “1960-70년대의 베스트셀러 시집”의 주인공이라는 공통점으로 묶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대중이 두 시집을 선호하게 된 배경을 비롯한 또 다른 질문을 제기하게하며 새로운 대화의 장을 여는 계기가 된다.  이혜원이 설정한 현대시의 좌표가 닫히거나 고정된 체계가 아님은, 그가 점차 확장되는 서정시 영역을 시종 강조한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비평에서 가장 섬세하게 다뤄지는 것은 서정시 미학의 변화다. 예를 들어, 「2010년대 서정시와 질문의 확장성」 등의 글에서 그는 서정시와 비(非)서정시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틀로 시를 나누거나 서정시의 개념을 고정하기보다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의 서정시의 특성을 구분하여 그 개념을 점진적으로 확장한다. 서정시에 대한 이러한 사유는 2000년대 중반부터 벌어진 미래파 논쟁을 통과하면서 보다 공고해졌을 수 있지만, 그 논의는 단지 미래파와의 대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예컨대 「‘나’의 사랑의 회의에서 ‘너’의 사랑의 발견으로―김수영 시에서 서정적 주체의 확장성」에서 그는 “김수영 시는 서정시인가”(301)라는 질문을 던지며 김수영을 “넓은 진폭의 서정시를 썼던 시인”(302)으로 바라본다. 동시에 그는 김수영이 왜 “전형적인 서정시와 거리가 먼 것으로 보였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김수영 시의 서정성이 갖는 특성을 가늠해”(303)본다. 이러한 관점은 그가 분류를 위한 분류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의 말을 세심히 듣는 작업을 통해 각 시(인)의 미묘한 차이를 강조하고, 결국 시의 구체적 미학을 발견하려는 데 초점을 두고 있음을 입증한다. 3  정리해보자. 『고백의 파동』을 읽고 우리가 손에 쥐게 되는 것은 한국 현대시의 지형도와 그 지형 위에서 끊임없이 뻗어 나가는 수많은 질문들이다. 이번 평론집에서 시인론의 비중이 크다는 점을 들어 어떤 이는 이혜원 비평의 대화적 성격을 ‘논쟁’의 반대말로 사용하려 할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2015년 신경숙 소설의 표절 논란이 한창이던 시기에 발표된 「모방과 창조의 거리」를 함께 언급하며 말이다. 이 글에서 그는 당시 비평가들처럼 명확한 찬반 입장을 표하며 논쟁에 뛰어들기보다는, “표절과 창조적 모방 사이의 다양한 양상을 통해 바람직한 창작의 방법을 살펴보”(143)려는 다분히 학술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는 즉각적으로 링에 오르기보다는 약간의 거리를 둔 채 표절 개념을 정리하고 모방과 창조의 관계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사유하기를 유도한다. 이것은 결국 시의 본질적 가치를 되새기게 만드는 방식으로 논쟁에 응답하는 것이 아닐까. 생산적인 대화란 결국,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아 상대의 말을 곱씹게 만드는 대화이기에, 시의 가치라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수렴되는 그의 문제 제기는 겉으로는 조용히 감추어져 있지만 오히려 더 날카로운 것일 수 있다. 『고백의 파동』은 그렇게 앞으로 이루어질 더 많은 논쟁을 예비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다시 책머리로 돌아가 물질의 능동적 운동을 설명한 그의 다음 문장을 다시 읽게 된다. “마치 자유의지를 지닌 듯 소립자는 순간적으로 파동이 되어 자신을 가둔 장벽을 통과한다”(6). 이제 나는 이 문장에서 ‘소립자’ 자리에 이혜원의 평론집을 대신 놓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책은 순간적으로 파동이 되어 독자에게 영향을 미치고, 책이라는 물질적 형식을 넘어 한국 비평장의 새로운 경로를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새로운 대화의 장을 여는 데 이혜원의 ‘대화의 기술’이 있다. 1) 본문에서 『고백의 파동』을 인용할 때에는 쪽수만을 표기한다. 2) 때로 그는 한국 현대시를 세계 문학 및 예술의 지형 속에 위치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정재학, 강성은, 서대경의 초현실주의 시를 카프카 문학과 병치하며 읽어내는 「초현실주의 시와 현실의 재발견」이나, 김수영과 자코메티의 관계를 단순한 영향 관계가 아닌, 공통된 방법론을 지닌 예술로서 고찰하는 「김수영과 '시선'의 재발견」 등이 그러하다.

계간 현대비평 송현지 이혜원고백의파동대화경청지형학적비평 2025
남기택 타자의 외연―이형권론

■ 평론 : 『현대비평』 2025년 여름호. 타자의 외연 ―이형권론 남기택 1. 비평의 입지 문학 용어로서 비평은 작품의 뜻, 작가의 기능, 어느 작가 또는 작품의 가치를 논의하는 작업이라 정의된다. 범박하게는 문학에 관련된 일체의 논의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두루 쓰인다. 그 밖에 방법론에 따라 기술비평, 실천비평, 이론비평, 인상비평 등의 범주로 분류되기도 하고, 에이브럼즈의 입론대로 모방론, 존재론, 표현론, 효용론 등 관점에서 설명되기도 한다. 웰렉은 내재적 비평과 외재적 비평으로 그 양상을 대별하였다. 요컨대 문학비평의 중요한 과제는 내재적 요소와 외재적 구조 사이의 필연적 관련성을 어떻게 규정한 후 서술 및 평가하느냐의 문제이다. 또한 부인하기 어려운 것은 문학작품 자체에 대한 면밀하고도 편견 없는 관찰이 어떤 종류의 비평에서나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이상섭, 『문학비평용어사전』) 그렇다면 비평을 대상으로 하는 비평은 어떤 기준을 따라야 하는가. 비평이란 위 기준에 의거해 접근된 하나의 결과이기에 나름의 논리와 정당성을 전제한다. 전제된 기준은 중층적일 뿐만 아니라 동시성과 수행성을 담보하기에 종합적 접근이 요구된다. 비평의 비평이라는 메타 담론적 성격이 지닌 자체의 곤란도 분명해 보인다. 비평 행위에 내재된 ‘평가’란 한 작품의 객관적인 가치를 인식하거나 그 가치의 특징을 기술하는 것이다. 20세기 이래의 이론적 지평에 따르면 어느 작품에 대한 평가는 다양한 종류의 개인적 활동과 사회적·제도적 관행을 통한 지속적 작용이다. 평가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복합적 활동과 관행에 의해 생산되는 효과에 가깝다. 어떤 문학작품의 해석과 그 가치에 대한 경험은 상호 의존적이며, 양자는 특정한 가정 혹은 기대를 따른다.(프랭크 랜트리키아·토마스 맥로린 공편, 『문학 연구를 위한 비평용어』) 결국 비평 행위의 관건은 텍스트 구조는 물론 이를 둘러싼 문학사회학적 관계를 수렴하는 평론가의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어느 비평세계에 대한 판단은 그 평론가의 입지 기반에 대한 재구가 우선되어야 한다. 이형권 비평세계는 1998년 월간 『현대시』 신인추천작품상 평론 부문에 「영상화시대의 시쓰기 전략」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962년 경기도 안성 출신인 그는 충남대 국문과와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한 후 한때 지역의 중등 강단에 몸담았다. 이어 1997년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9년 모교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 과정 중 평론 쓰기를 병행하던 그였기에 제도적 등단 자격을 갖추기 위해 제출한 원고는 충분한 내공을 체현하고 있었다. 당시 심사평은 세기말 위기의식에 빠진 시가 영상문화에 대응하는 현장을 균형적 감각으로 다가선 비평적 시각에 주목하였다.(『현대시』 1998년 7월호) 「영상화시대의 시쓰기 전략」은 1990년대 이후 일군의 시인들을 다룬다. 이형권은 장르 의식의 확산과 초월, 도시적 일상성, 우울한 내면세계의 고백, 대중문화의 수용 등이 전통적 시 경계를 해체하는 양상이라고 보았다. 그중 영상예술의 수용 및 변주를 시적 상상력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경우로 이승하의 사진시, 하재봉의 컴퓨터시, 유하의 영화시 등을 꼽고, 그 성과와 한계를 분석하였다.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새로운 시적 리얼리티를 개척하려는 이들 노력은 향후 시적 긴장의 영역을 개방할 것이라 예고하였다. 반면 대상에 대한 내적 인식의 진정성 차원은 경계의 대상이다. 이들이 예증하는 영상매체의 시적 전유가 문화사적 의미나 역사적 전망을 추구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진단은 향후 지난하게 펼쳐질 장르의 길항을 전조하기에 충분한 비전이었다. 이처럼 이형권은 문학의 본령에 대한 천착을 바탕으로 그 외부, 어쩌면 문학 장르의 타자성에 대한 시대적 응전 감각을 출발 단계부터 벼리어 온 비평가에 해당된다. 대개 이러한―문학의 장르론에 관한―입장이 취하는 포즈는 이론적 언어로의 무장이다. 문학이라는 범주의 선험적 조건이기도 한 모더니티의 공재성(共在性)이 한국문학 연구에 있어서 주된 관성으로 작동되어 온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비평 영역을 포함하여 문학은 ‘literature’의 역어이자 제도적 산물로 생성된 것이었고, 이론적 내면화는 한국문학의 정체성 설정을 위한 필연의 수순이기도 했다. 한편 이형권 비평의 경우 이론에의 경사로부터 의도적 거리를 취한다. 이는 여러 지면에서 반복되어 온 비평적 입장을 통해 확인된다. 이를테면 “진정한 의미의 공감은 시의 정서적 깊이와 높이를 확보하여 시적 감동을 전문 독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까지 넓히는 일”(『공감의 시학』 서문)이라는 신념이 그것이다. 그에게는 문학의 타자라는 분명한 성찰 대상이, 그리고 그 존재 의미를 구명하는 언어는 현학적 외장이 아닌 문학 본연의 공감과 소통 기제라는 입지가 초기 비평 단계로부터 각인되어 있었다. 2. 문학의 타자, 타자의 문학 이형권 비평세계는 『타자들, 에움길에 서다』(2006), 『발명되는 감각들』(2011), 『공감의 시학』(2017) 등의 평론집으로 집약되어 왔다. 대학 강단에서의 교육을 병행하고 있기에 연구서 성격의 다양한 성과물이 평론집 사이사이 배치되어 있다. 그 밖에도 문예지 『너머』, 『시와 시학』, 『시작』, 『애지』 등의 편집위원 역할이 주요한 문단 경력으로 꼽힌다. 꾸준한 연구 작업과 더불어 실천적 문단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외현이다. 오늘날 비평 행위가 대학을 중심으로 한 아카데미즘에 역학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구조는 비단 한국문단만의 실정이 아니다. 일부 비평가는 대학 교원으로 정착한 이후 평단의 참여에는 소원해지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형권은 중부권 거점 대학의 구성원으로 자리 잡으면서도 서울과 지역을 넘나들며 문단 활동을 이어 온 실천적 사례라 평가할 만하다. 제도적 성과도 다양하다. 그의 저술 중 『공감의 시학』은 2018년 시와시학상 평론상의 대상 평론집이 되었다. 당시 심사평은 이형권 평론이 ‘공감과 소통’을 화두로 삼고 있으며, 한국 시문학이 마주하는 핵심 문제에 대해 정공법의 언어로 다가서는 자세를 특징으로 한다고 평가한 바 있다.(『시와 시학』 2018년 겨울호) 그는 이때 자신의 문학 여정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은 문학적 자전을 적었다. 나의 대표적인 평론집은 『발명되는 감각들』, 『공감의 시학』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평론가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텍스트를 주인공으로 하면서 독자와의 공감을 지향해 온 글쓰기의 결과물들이다. 가능하면 관념이나 이론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혹은 관념과 이론마저도 문학적이고 구체적인 표현으로 바꾸어 보려고 노력한 흔적들이다. 나는 지금도 가장 어려운 작품도 가장 쉽게 비평할 수 있는 평론가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중략) 무엇보다도 다른 비평가들과는 다른 나만의 비평 언어, 나만의 비평 이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비평이란 ‘물음표로 출발하여 느낌표로 돌아오는 여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심미적 개성과 인간적 진실을 찾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기로 다짐해 본다.(「안성천에서 자란, 내 영혼의 자서전」, 『시와 시학』 2018년 겨울호) 이 회고에서도 비평적 입지의 방법론적 기반을 확인할 수 있다. 표제로 내건 공감의 가치가 일종의 정언명령으로 강조되었다. 독자적 언어와 이론을 향한 포부는 일견 무모하게도 들린다. 어느 장르보다 기존 시학적 지평을 전제로 성립되는 비평의 존재론을 염두에 둔다면 언어와 이론의 신생은 비평보다는 또 다른 창작 영역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이형권 비평의 시각이 이른바 비평과 창작의 이분법에 근거하지 않은, 양방향적 이해를 위한 의사소통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대목이다. 이형권의 시학적 탐구는 『미주 한인 시문학사 : 1905∼1999』(2020)라는 중요한 성과이자 비평적 변곡점을 낳았다. 그는 이 연구서로 인해 2021년 김준오시학상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 앞서 살핀 것처럼 이형권 비평은 출발 단계부터 시 장르의 타자성 문제를 다루었다. 타자라는 주제는 이형권 비평세계를 관통하는 중요한 화두로 어어져 왔다. 그는 김준오시학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서울 이외의 주변부 지역 문학도 일종의 타자”이며 “국외의 한인 문학도 타자의 문학”임을 강조했다. 그것은 곧 “다양성의 문학과 확장성의 문학”을 의미하기에 앞으로도 추구해 나갈 것이라 다짐하였다.(『신생』 2021년 겨울호) 『미주 한인 시문학사』는 한국문단 내부의 타자성 영역을 최대 이민국이자 패권국이라는 외부로 확장하여 모색한 결과물이라 하겠다. 2012년 상반기 LA에서의 방문교수 경험은 이형권 시학의 영역을 확장하는 물리적 토대가 되었다. 한국문학의 경계에 관한 비평적 모색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최근 사례로는 평론 「한민족 디아스포라와 모국어의 시적 형상」이 주목된다. 이 글은 디아스포라의 맥락 속에서 모국어의 의미와 시의 형상화 방식을 분석한다. 특히 문학이 어떻게 민족 정체성과 심상지리를 구성하는지를 조명하고 있다. 이주 한인에게 모국어는 도구가 아닌 생존을 환기하는 의사소통적 매개일 뿐만 아니라 감정을 현전하는 물성이자 문화적, 정신적 정체성에 비견된다. 이 글에서 주요 논거로 제시된 김병현, 배정웅, 오문강 등의 작품들은 디아스포라의 난관뿐만 아니라 현지 문화와의 동일시 욕망, 이주국 지리 환경과의 정서적 공감, 새로운 삶의 개척 의지 등을 재현한다. 이들 작품에 사용된 모국어는 그 자체로 다양한 실존의 영역을 증거하는 시적 형상인 것이다. 이 같은 논의로부터 파생되는 또 다른 쟁점 역시 분명하다. 대표적 문제가 이주국 한인문단의 분파적 속성이다. 일종의 아마추어리즘을 포함하여, 서정적 언어 구성물로서의 시작 경향이 주류 흐름으로 반복되는 현상은 경계의 대상이다. 치밀한 제도적 기반이 전제되기 어렵다는 게 난관이다. 긴장 없는 자족적 시스템이 매너리즘으로 고착화되어 가는 실정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중언어 환경에서 살아가는 후속 세대의 중층적 문학 환경 역시 문제적이다. 이런 배경 위에 모국어의 소멸 위기이자 새로운 문학 언어의 개방이라는 역설적 가능성이 양립한다. 이형권은 이중언어의 문제 혹은 현지어 창작의 문제에 대해서 다소 유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듯하다. 국문학의 매개로서 한국어라는 기능적 판단 외에도 민족적 정체성을 담보하는 전제로서의 언어관에 입각한 견해로 보인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제언으로 마무리된다. 한인이 현지어로 창작한 문학작품에 대한 태도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한인 문학은 한글 표기를 전제로 하여 그 존재의 소멸을 인정하거나, 아니면 한인 문학에서 한글 표현과 현지어 표현을 모두 용인하는 것이다. 곤혹스럽지만, 이에 대한 선택의 날이 멀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한인 디아스포라 문학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실체라는 사실이다. (중략) 그들이 국외에서 뿌린 한인 문학의 씨앗은 어떤 형태로든 한국인 혹은 한인의 문화가 다양하고 폭넓게 퍼져 나가는 데 일조를 했다고 하겠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훗날 그것이 비록 과거형이 될지라도, 발해의 역사가 분명 우리 역사의 일부인 것처럼, 한인의 디아스포라 문학은 우리 문학사의 일부임에 틀림이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한민족 디아스포라와 모국어의 시적 형상」, 『시작』 2022년 여름호) 물리적 경계 간의 거리가 해체된 오늘날에 있어서 ‘영어’로 상징되는 글로벌 의사소통 기호는 문학의 필수불가결한 전제일 수밖에 없다. 국가와 언어의 경계를 넘나드는 문학의 위상은 선험적 가치가 되었다. 모국어라는 숙주의 해체는 디아스포라 같은 문학적 타자가 변주하는 또 다른 생성의 선을 개방할 것이다. 이형권 평론은 디아스포라 시인이 모국어를 통해 존재를 형상화하는 양상을 분류해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나아가 그의 제언은 문학의 타자성을 제도적으로 정립하기 위한 방안, 다양한 언어와 한국문학의 공존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업을 요구하고 있다. 3. 또 다른 감각 혹은 환상 이형권이 조명하는 비평적 타자의 영역은 장르적 다양성이나 문단 경계의 확장에 한정되지 않는다. 문학적 상상력의 기반을 재고하려는 이론적 모색 역시 초기 단계부터 지속되어 온 탐구 분야였다. 이와 관련하여 부각되는 주제가 이른바 환상의 역학이다. 환상의 상상력을 집중해서 다룬 평론으로 「발명되는 감각들―현대시와 환상시학」(『발명되는 감각들』)이 있다. 이 글은 비평가 스스로에게도 기념비적 의미를 지닌 성과물로 자리한다. 그는 김준오시학상을 수상하는 지면에서 자신의 대표 평론으로 이 글을 꼽았다. 「발명되는 감각들」은 현대시의 또 다른 주류 범주에 환상의 시를 올려놓은 동력으로 21세기 초의 젊은 시인군을 예시한다. 이들은 과거의 역사적 혹은 자의식적 시 쓰기에서 벗어나, 환상을 통해 새로운 감각을 표출하는 동시에 시적 형식의 재구를 시도하였다. 환상은 단순한 도피나 유희가 아닌, 미적 전복과 시적 실험의 전략적 기제인 것이다. 이형권은 환상이 현실에 대한 예술적 저항이요 결 다른 감각을 창조하는 에너지라고 보았다. 김행숙(귀신), 문혜진(메두사), 김민정(아이), 유형진(모니터), 장석원(낙타), 이민하(마네팅) 등의 도발적 이미지를 대표적인 환상의 장치로 거론하였다. 더불어 이러한 환상들이 현실의 폭력과 억압에 대한 미적 전유로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지, 의미 있는 윤리적 혹은 사회적 감동으로 독자들과 공명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 면밀한 판단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 분석된 시편들의 수용적 거리감은 실험적 외장의 포즈에 비례한다. 일부 작품의 경우 감각의 발명보다는 소재주의적 실험 경향이 짙다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아 보인다. 이형권 역시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며 새로움에 대한 강박이나 문학적 진정성의 결여를 경계하였다. 이는 환상의 시학이 진정한 문학적 성취로 평가되기 위해서는 형식적 파격에 수반되는 사유의 깊이를 구조화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어서 이 글은 환상의 상상력이 폐쇄성과 섹트주의에 빠지지 않아야 함을 역설한다. 환상은 기호로 재현될 수 없는 실재에 다가서기 위한 언어적 우회로일 수 있지만, 그것이 서정성이나 진정성을 대신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환상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것이 독자의 기대지평에 어떻게 관계되고 소통하는지의 문제이다. 문학의 경계를 재구성하려는 이형권의 비평적 모색은 지금도 진행 중에 있다. 최근 사례로서 「리진: 로씨아 땅에서 바라보는 조선의 하늘」(『시작』 2024년 겨울호)은 재러 시인 리진의 경우를 조명한다. 북한 정권에 저항하며 무국적자로 소련에서 살아가게 된 배경, 그의 시가 조국과 언어 정체성을 고수했던 흔적을 개관해 주었다. 이형권은 리진 시의 본질을 우리 언어에 대한 사랑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정체성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판단은 리진의 시적 형상이 재러 고려인들의 보편적 경험에 맞닿아 있다는 관찰을 담고 있으며, 언어가 곧 민족을 잇는 정신적 뿌리라는 기존의 모국어 인식과도 연동된다. 한편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실존의 기반이 단절된 상황 속에서 모국어는 실체 없는 상징에 머물 수도 있다. 리진의 시가 제한된 독자층에만 읽혔다는 사실은 언어의 고립성과 함께 시적 단절을 지시한다. 이형권 비평이 집중적으로 수렴해 온 미주 한인 디아스포라 시문학의 현황 속에서도 이러한 구조적 한계는 동일하게 발견된다. 그렇다면 이형권 비평을 포함한 한국문학의 제도는 보다 정치한 장르론으로 재설계되어야 한다. 이를 또 다른 환상의 영역으로 다룰 수도 있겠다. 이형권 비평이 전유하고 있는 시학적 개념으로서의 환상은 우리 시대의 자유를 사유하는 철학적 기제이기도 하다. 예컨대 지젝의 현학적 분석에 따르면 환상은 자유의 조건이 된다. 그 논리를 보면, 무의식은 매끄러운 인과적 연결이 아니라 트라우마적 침입에서 비롯된 충격과 잔여이다. 프로이트가 명명한 ‘증상(symptoms)’은 트라우마적 단절에 대처하는 방식이요, 그런 단절을 가리기 위한 형성물로 ‘환상(fantasy)’이 작동한다. 이처럼 지젝의 논의는 현대사회의 복잡한 자유 의지를 분석하는 기제로서 환상을 전유하고 있다. 현대의 이성은 실재와 같은 신적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신의 반대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하이데거 식으로 자유가 존재 방식의 근원적 가능성일 때에도, 자아는 결정된 존재일지언정 우리는 자유로운 행동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때 자유는 타자의 균열에 공명하는 무언가로서 미친 도박이자 자기 자신에 선행하는 위태로운 도약이 된다.(지젝, 『자유, 치유할 수 없는 질병』) 결국 주체는 그 자체가 객관화될 수 없는 하나의 가정에 불과하다. 이 간극을 지양하고, 필연적인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환상은 비롯된다. 동일성의 장르로서 시 역시 동종의 운명 위에 놓여 있다. 이 위태로운 서정시의 미래를 보듬어 공동체의 담론으로 이끈 양태가 곧 이형권 비평이 천착해 온 타자의 외연이기도 할 것이다.▪

계간 현대비평 남기택 이형권감각공감타자환상 2025
김미정 체현하는 비평 — 백지은 작품론

체현하는 비평 : 백지은 비평 작품론1) 2) 1. 전환 서사들과 포스트 비평 최근 ‘포스트 비평’의 담론 지형3)에 동물·몸·정동·존재론 등을 중심으로 하는 전환(turn) 서사들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그러한 사유 및 원리와 부대끼는 과정에서 비평이라는 장르에 대한 질문과 고민을 이어가는 와중에, 잠정적으로는 사물 세계의 ‘얽힘·연루됨’을 언어화하는 글쓰기에 대한 고민으로 질문을 전환해 가던 차였다.4) 문제는, 이 전환의 사유들이 세계를 근본적으로 다르게 볼 실마리를 명백하게 제시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스스로의 글쓰기로 육화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체감에 있었다. 우선 어떤 이론이 근본적으로 사유의 관점을 조정케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현시키는 글쓰기는 여전히 근대의 제도적 지식 체계나 원리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무엇보다 그러한 조건과 교섭하며 쓰는 몸 스스로의 행위 도식이 바뀌어야 가능할 터이지만, 몸이야말로 결코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잘 움직여지지 않는 관성 자체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렇듯 개인적 딜레마로 여겨진 것이 실은 어딘가에서 차근차근 내파되고 있었음을 알아차린 것은 문학평론가 백지은의 작업을 다시 살피면서부터였다. 그녀가 내내 ‘독자’ ‘읽기’ ‘쓰기’ 등의 문제를 통해 오랫동안 한국문학 비평 현장을 풍요롭게 증거해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 그 비평 행보를 찬찬히 살피며 새삼 깨닫게 된 것은 바로, 독자-읽기-쓰기를 주제화해 온 그녀의 작업이 실은 스스로의 몸을 바꾸고 그 몸과 연결된 배치를 바꾸는 과정 자체이기도 했으리라는 사실이었다. 그것을 개인적 문제의식 하에서 조금 구부러뜨리는 일이 허용된다면, 예컨대 어떤 연루됨(이때의 연루됨은 주체/객체를 넘어서는) 속 자기 위치를 감각하고 또 다른 연루됨을 만드는 과정을 글쓰기 자체가 수행해 왔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여기에서 잠시, 과거 그녀의 말도 떠올려본다. 그녀는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발화의 주체 혹은 발화의 근거이자 제재로 삼아 어떤 것을 발생시킨다는 뜻이고, 또한 그 발생을 자기 자신으로 세우는 일”5)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그때는 평범해 보이는 말이었지만 이것이 어떤 의미를 거느릴지는, 이제서야 제대로 보이는 것이었다. 백지은 글쓰기의 이러한 수행적 의미를 ‘비평’이라는 장르의 특징과 관련해서 좀더 생각해본다. 비평이란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주체/대상(객관)이라는 근대적 도식이 선명하게 구현되는 장르인 것 같다. 비평의 ABC에 대한 글들에서 자주 확인할 수 있듯, 비평은 대상(객관)으로 놓여 있는 텍스트를 경유하면서 말해지는 주체의(주관적) 형식이라고 여겨져 왔다. 즉, 자기를 말하고자 하는 충동에서 출발하더라도 거기에는 늘 ‘주체/대상’ 구도의 긴장과 역학이 놓여 있는 것이 비평이다. 대상이 선행되어 있을지라도 궁극적으로는 그것의 의미가 감상하는 이의 주관과 연동된 장르라는 특징 탓에, 종종 비평에 덧씌워진 고압적 이미지도 아예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백지은 비평에서 언젠가부터 이러한 ‘주체/대상’의 도식성이 여러모로 미미해지는 인상을 받을 때가 있었다. 예컨대 (본문에서 다루겠지만) 역사를 ‘감각’하는 방식으로서의 ‘산책’을 주제화하는 「안으로 나가는 역사」의 도입부는, 대상 텍스트와 필자가 어떻게 얽히고 서로 스며들어 가는지 생생하게 감각시키는 퍽 드문 대목이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내내, 다 읽고 나서도 그 기분은 사라지지 않는다. (...) 산책이 뭐가 좋은 것일까”와 같은, 평범한 말들인데다가 어딘지 비평의 단호하고 명료한 이미지와 거리가 먼 이 진술을 잠시 생각해보자. 일상의 호흡에 밀착한 이 조곤조곤한 말들은 읽는 이마저 부지불식중 그 활자에 스며들게 한다. ‘주체(필자)/대상(소설)’ 사이 경계가 지워지는 듯한 서술 장면, 그리고 그러한 문장에 읽는 이까지 연루시키는 장면에서 누군가는 ‘비평은 텍스트와 거리를 확보해야 한다’는 식의 말이나 최근 에세이적 비평 경향 같은 것을 얼핏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그녀의 문장은, 어떤 망설임이나 흔들림이 감추어지지 않은 상태를 언표화할 때가 많다. 그렇기에 무언가를 명료하게 의미화하기 이전의 웅성거림을 감지시킨다. 기존의 장르 이미지들을 떠올릴 때 백지은의 글에는 여느 비평에서와 같은 단호하고 결연한 어조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확신에 찬 말로 스스로를 주장하거나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의향도 백지은의 비평과 거리가 멀다. 이런 특징들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백지은의 글에서 ‘마음’ ‘감정’ ‘기분’ ‘정동’ ‘객체’ 같은 말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 것에 주목하고 싶다. 언젠가부터 새로운 유물론의 사유가 백지은의 비평을 관통하고 있음도 확인해 두자. 그것은 ‘글 속 내용’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글 자체로 체화’되고 있는 중이었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의도된 것이든 아니든 종국에는 ‘비평이라는 장르’의 성격마저 갱신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앞서 적었듯, 비평 장르가 강하게 전제해 온 주체/대상의 근대적 도식은, 그녀가 천착한 ‘마음론’이 오히려 질문하는 것에 다름아니고, 그녀의 글쓰기는 곧 그러한 마음론의 사유를 체현한(emboded)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앞서 ‘쓴다’는 일을, 자기로부터 무언가를 발생시키고 그것이 다시 자기를 세우는 과정으로 설명했던 백지은의 말은 지금 스스로의 비평 궤적에서 활물적으로 증거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글쓰기의 특징이 그녀 자신이 골몰해 온 비평 주제와 관련해 필연적이리라는 점은 다음 장에서 좀더 살펴보겠다. 2. ‘마음’의 조건에 대해 : 「마음대로 사는 사람아」(2024) 읽기 백지은 비평의 주제와 방법을 최전선에서 확인시키는 글의 하나가 「마음대로 사는 사람아」이다. 이 글은 김화진의 『나주에 대하여』에 수록된 소설들을 중심으로 ‘마음’의 존재론을 그려간다. 마음이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고, 무엇을 통해 작동하는지 고찰하는 글이다. 이 글의 화두인 ‘마음’은 장르를 불문하고 최근 한국문학의 여러 작품을 통해 언표화되어 왔다. 그것을 ‘감정’ ‘정동’ ‘감응’ 같은 개념을 통해 접근하고자 한 비평적 논의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백지은의 글은, 그러한 개념, 이론들을 두드러지게 내세우지 않으면서 ‘마음’의 정체를 섬세히 풀어나간다. “적다보니 ‘마음은 대체 뭘까’ 싶은 의문이 소박하게 일어난다”는 식으로, 다루는 주제에 스스로 연결되는 과정을 솔기없이 노출하기도 한다. 물론 그녀의 글에는 마음을 둘러싼 최근의 인지과학, 정동이론, 문화연구 등의 사유가 행간에 놓여 있다. 하지만 그것을 생경하게 전경화하지 않으며 정합적 논리로 이어가는 이런 장면에서, 비평도 하나의 작품(이라 말해지는 것)이 될 수 있을 가능성을 새삼 환기하게 된다. 「마음대로 사는 사람아」는 마음이나 감정 등과 같은 것이 어떤 개체적 신체의 내부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여겨온 우리의 통념을 먼저 뒤집는다. 이 글에 따르자면 마음은 단지 개인의 내부 감정이나 심리 상태가 아니다. 마음은 “누군가의 가슴속이나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 존재한다. 마음이나 감정이 누군가의 배타적 소유가 아니라 실은 어떤 무수한 타자들과의 마주침과 연결 속에서 빚어지는 산물이라는 통찰이 저 말에 담겨 있다. 이때 “마음”이란 “이러한 연결 작용 및 상호 조절의 무수한 경우의 수로 된 결과물”에 가깝다. 즉 “마음은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다. 그녀는 이렇게 적는다. “내 마음은 물론 나라는 한 사람의 성격과 내가 처한 상황과 나 스스로 내린 결정으로 생겨난 사적인 것이다. 동시에 그것이 생겨나기까지 벌어진 일들은 개인에 귀속되지 않는 집단의 또는 공동의 조건 안에서 복잡하게 출몰하는 다른 요소들과 함께 움직인 결과이므로 또한 사회적인 산물”이다. 단, 여기에서 오해하지 말 것이 있다. 첫째, 백지은이 말하는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마음은 어떤 균질적 덩어리(mole)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마음론은 마음의 보편성이나 균질성이 아니라, 고유한 마음들이 단지 개인적, 사적인 것으로 귀속되기 이전 구체적인 마주침과 연결을 통해 각각 다르게 발현되는 것에 주목한다. 그녀는 “우리가 몸짓이나 표정으로 타인의 마음을 읽는 것은 마음에 보편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마음을 표현하고 해석하는 주요 코드를 공유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그녀의 말처럼 구체적 조건과 무관한 보편적 마음이나 감정이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물론 마음, 감정, 정동 등은 살아있는 존재 모두가 지니고 있다해도, 그럼에도 더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그것이 언제나 특정 조건 속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발현되게끔 세팅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 점을 확인하지 않는 마음 이야기는 어딘지 불순하고 불철저한데, 백지은이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마음을 말하는 대목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특히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기억할 것은, 그녀의 마음론이 존재의 자기구성 역량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글에 따르면 마음은 분명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자기 스스로의 정동이나 역량과 무관하게 그저 수동적으로 결정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마음론’은 기계적 구성주의로 환원될 수 없다. 관련하여 ‘나’라는 감각 행위자의 고유성 역시 각별히 강조되는 것도 눈여겨 볼 일이다. 잠시 이런 대목을 보자. “우리의 마음이 사회적 구성물이라 해도, 어떤 공동의 지평에서 바로 그러한 마음이 ‘내’게 지어져 바로 이런 방식으로 ‘내’가 느끼(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나’에게 고유한, 중요한 사실이다. ‘나’를 규정하는 것은 내 마음이고, 내 마음으로 인해 ‘나’는 만들어진다.” 여기에서 다시, 과거 백지은의 말, 즉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발화의 주체 혹은 발화의 근거이자 제재로 삼아 어떤 것을 발생시킨다는 뜻이고, 또한 그 발생을 자기 자신으로 세우는 일”이라고 했던 것이 오버랩된다. 자기 원인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더불어, 그것이 단지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시 무언가를 만들어간다는 세계관은 여기에서도 다시 확인된다. 이러한 마음론이 어떤 사유와 고민으로부터 전개된 것인지 그 시간의 궤적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녀의 마음론은 단지 비평에 소용되는 이론의 하나가 아니라, 삶의 과정이자 그것이 만들어낸 세계관의 한 발현인지 모르는 것이다. 마음은 단지 내 몸 어딘가에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뇌-신체 활동에서 구성된 산물이고, 사회적으로 공유된 코드나 경험을 통해 해석되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다시 나를 움직이고 또한 내가 스스로의 마음을 움직여 간다는 이 논의의 정합성은 ‘이론’이라는 말에 대한 항간의 오해를 교정하는 데에도 큰 참고가 될 것 같다. 더욱이 대상으로 다뤄진 김화진 소설이 마음론의 매개, 도구로만 소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특히 소중하다. 백지은의 글은 쓰는 이(주체) 스스로 소설(대상)에 스미고 얽히는 과정 자체를 보여주고 있음에도, 대상(소설)의 고유성은 내내 글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또한 따뜻한 공감을 상찬하거나 낭만화하는 식으로만 읽히기 쉬운 김화진 소설을 구출하고, 작품이 지닌 “‘마음’에 관한 탐구 서사”로서의 의미를 풍부히 드러내는 과정도 인상적이다. 각 텍스트가 지니고 있을 고유한 의미를 발하도록 하면서, 그럼에도 저변의 관통하는 논리를 발견-전달하는 이 장면은 오늘날 비평적 글쓰기 자체가 전환(turn)하는 한 사례로 읽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3. 감각하는 역사에 대해 : 「안으로 나가는 역사」(2019) 읽기 한편 백지은 식의 마음론은, 역사를 보는 관점과도 흥미롭게 연결된다. 「마음대로 사는 사람아」보다 앞서 발표되기는 했으나, 텍스트를 따라 걷는 이의 심상과 호흡을 그대로 노출하며 시작하는 「안으로 나가는 역사」를 잠시 살펴보자. 이 글은 박솔뫼 장편소설 『미래 산책 연습』을 통해 역사와 나/우리가 어떻게 관계 맺을 수 있을지 찬찬히 짚어간다. 이 글 역시, 무언가를 장악하고 자기화하여 독자에게 보여주겠다는 비평적 자의식 등과는 거리가 멀다. 앞서 언급한 백지은 글의 특징, 즉 텍스트와 나란히 혹은 그것에 스며들어 발화를 이어가려는 비인칭적 발화자의 흔적도 이 글에서 어김없이 엿보인다. ‘비재현’ 사유와 역사의 문제를 날카롭게 환기하고 있지만 여기에서도 역시 특정 개념이나 이론이 박솔뫼 소설을 압도하거나 유리시키는 법은 없다. 『미래 산책 연습』에는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이 제재로 등장하지만 박솔뫼 소설이 그러하듯 그것은 직접 재현되거나 의미화되지 않는다. 단지 ‘산책’이라는 행위와 그 동선이 두드러지는 소설이다. 백지은의 결론부터 적어두자면, 소설 속 산책은 단지 이동하는 행위가 아니라 “다리로 하는 명상”이고 사유의 기반이자 감각-접촉의 형식이다. 그녀의 분석을 통해 주인공의 산책은 부산이라는 공간을 거닐며 과거 사건과 접속하고 미래를 기억하며 현재를 질문하는 역사적 행위성으로 의미화된다. 여기에서 부산 역시 단순한 소설적 배경이 아니다. ‘부산’은 사건과 사물이 서로 연결되고 교차하며 구성되는 유동적 장이다. 부산은 과거의 역사-현재의 만남-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서로 얽히는 시/공간적 밀도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이곳은, 세계가 복수적으로 존재할 가능성을 증거하는 장소다. 박솔뫼 소설 속 자기, 나, 역사 등에 대한 백지은의 설명은 예컨대 일종의 연결신체(assemblage)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이것이 그녀의 ‘마음론’과 연동되는 것임도 물론이다. 이 글의 출발지점은 ‘이야기가 곧 역사/세계가 아니’라는, 어찌 보면 당연하고 소박한 지점이다. 도입부는 “소설에 드러난 역사/세계는 역사/세계에 대한 ‘인식’”일뿐 그 ‘존재’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며 본격적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때, 박솔뫼 소설과 역사 제재를 이야기할 때 자연스레 등장함직한 ‘재현’ ‘표상’ 같은 개념은 일절 구사되지 않는 것이 흥미롭다. 아니 정확히 말해, 백지은의 글에서 개념이나 이론은 구사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감각과 경험의 언어로 번역되고 있다. 이 점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스스로의 글을 포함하여, 그간 많은 비평은 강단(논문)의 언어와 친연성을 떨치지 못하며 본의 아니게 개념과 이론의 생경함을 별로 의식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 그 점은 비평의 독자와 장(field)을 제약한 측면이 적지 않다고도 여겨진다. 또한, 오늘날 많은 비평 논의가 근대적 재현·표상 너머를 역설할 때조차, 어쩔 수 없이 재현·표상의 언어를 경유하고, 의도치 않게도 다시 기존 재현·표상의 원리가 강화되거나 재생산되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앞서 적었듯 여전히 비평이 근대의 제도적 글쓰기의 구속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탓이 우선은 클 것이다. 하지만 지금 백지은의 글은 이러한 곤경을 가뿐히(물론 치열한 시간을 지나왔을 것이 분명한) 넘어서는 듯 보인다. 아예 비재현, 비표상의 언어를 고안하고 발명하는 과정 자체가 그녀의 글쓰기에 함축된 듯 보인다. 예를 들어 그녀의 글은, 박솔뫼 소설 속 ‘역사’는 “생각-가정의 대상이 아니라 생각-가정의 현상”이라고 말한다. 백지은 식 조어(造語)인 ‘생각-가정’은 단지 “상상으로 꾸며진 가상의 역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우주의 암흑 물질처럼 알 수 없음과 불확정의 상태를 가정한 채로 존재하여 알 수 있음과 확정의 상태를 역으로 증명”하는 것이고, “다른 위치의 역사/세계”다. 기록, 증언과 같이 익숙한 재현 개념의 한계를 사유하면서 그 너머를 말로 움켜쥐려는 그녀의 고투는 분명 박솔뫼 소설을 포스트 재현, 포스트 메모리의 개념을 통해 읽는 방법과 닿아 있지만 그 목적이나 효과는 분명 다르다. 이 “생각-가정하는 역사”는 어떤 유일무이한 진실로부터 ‘역사적 사실’을 이탈시킨다. 그리고 그 다양한 감각의 가능성을 긍정한다. 이때 ‘역사적 사실’은 “다만 느슨하게 연계되어 세계 ‘속에’ 있을 뿐”이다. 그것은 “세계의 일부로서 전체를 의미화”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통상, 부분의 합이 전체라거나 전체가 곧 부분의 우주를 품고 있다고 여기곤 한다. 하지만 그러한 통념은 이 글에서 낡은 것이 된다. 백지은이 부상시키는 이러한 연결적 관계들은 어떤 중심/주변의 위계도 없고 총체성으로 수렴되지 않는 병렬적인 흐름으로 이미지화된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이른바 주체/대상 도식 속에 배치되어 사유되던 이 세계를 다르게 재구성하려는 시도에 가까워 보인다. 백지은은 박솔뫼 소설 속 “‘나’의 생각-가정”은 “대상에 대한 통제나 지배의 가능성을 거의 품지 않”았다고 말한다. 또한 “자기의 관점을 주관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어떤 것도 중심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생각을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말들이 곧 ‘자기’에 대한 근대 이래의 서사를 다시 쓰는 장면의 하나임도 기억해 두고 싶다. 그녀가 말하는 ‘생각-가정’은 흔한 ‘자기’로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너머로 개방되며 연결되는 활동이다. 여기에서는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하거나 중심적이거나 주변적이거나 하는 상이한 위상”이 두어지지 않는다. ‘안으로 나가는 역사’라는 제목의 수수께끼도 이제 풀리는 듯하다. 공식 기록 혹은 객관화된 기록 등으로 이해되곤 하는 역사는 그녀의 글에서 오히려 개개의 기억이나 내밀한 것을 향해 접속하려는 움직임, 방향성을 지닌다. 하지만 그 개개의 기억이나 내밀한 것은 어떤 진공 상태의 것이 아니다. 소설 속 산책자 역시 단지 걸으며 보는 주체가 아니다. 그는 자기 안의 감각, 사유, 몸의 미세한 반응 속에서 사건을 감지하는 자다. 이때 역사는, 바깥에 그저 놓여 있는 진실이 아니다. 역사는, 삶과 함께 유동하며 점점 안으로 향해오는 감각의 기원에 가깝다. 거칠게 말해, ‘역사/내면’이라는 말처럼 정반대의 벡터를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는 범주들이 이 글에서는 서로를 향해 작동하고 있고, 그 얽힘의 관계가 섬세하게 가시화되고 있다. 이러한 원리는 이제까지 살핀 백지은의 글과 말에도 상응한다. 그녀가 밀어붙인 비재현·비표상의 말들은 곧 이 세계의 원리를 찬찬히 응시해 온 그녀의 마음이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을 만든 것이 또한 재현·표상을 흘러넘치는 어떤 세계였을 터였다. 비록 재현 체계 안에서 쓰여지는 글이지만, 그럼에도 재현 체계·제도의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세계를 어떻게든 감각시키려는 고투가 백지은 비평을 가로지르고 있는 것이다. 4. 균열을 내고 거기에서 장소를 만드는 비평 백지은의 글들을 읽으며, 이 세계 속 존재나 사건의 연루됨을 발견하고 또 다른 연루됨을 만들어가는 글쓰기에 대한 개인적 고민을 더 밀어붙여도 될 용기를 얻는다. 읽기-쓰기의 순환적 수행성에 대해서도 큰 자극을 받는다. 읽기(듣기) 없이 쓰기(말하기)가 불가능하다는, 당연하지만 오늘날 새삼 중요한 사실도 다시금 곱씹게 된다. 사실 전환(turn)을 둘러싼 이론, 담론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돌이켜보면 말과 담론은 자주 인플레였고, 정작 그것이 제대로 체현, 수행되어 본 일은 썩 많지 않았다고도 생각된다. (과거라면 ‘실천’ 같은 말로 표현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일종의 체현과 수행이 어쩌면 늘 이 세계의 궁극적 과제이자 관건일 터였다. 하지만 우리의 몸은 좀처럼 관성과 도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글은 종종 제자리를 맴돈다.지금, 백지은 작업의 극히 일부분만 읽은 셈이지만, 제도적 비평의 현장에서 그 전환이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에 대해서는 적지 않게 엿보았다고 생각한다. 비평이라는 장르에 대한 유례없는 고민이 이어진 지난 십여 년을 백지은의 행보가 이렇게 증거해 주는 것 같다. 포스트 비평의 형질 변환이 선언이나 논쟁이 아니라 이렇게 글자의 안쪽에서부터 차분하게 진행되어왔다는 사실이 새삼 의미심장하게 여겨진다. 제도의 관성, 시스템의 회로에 균열을 내고 빈틈을 만들며 그곳을 장소화해 온 그녀의 작업에 많은 언어들이 닿고 연결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것을 기존 방식의 ‘비평’ 같은 말로 반드시 명명하지 않아도 괜찮으리라 생각하는 편이어서 적는 말이기는 한데, 분명한 것은 늘 각 시대마다 요청되거나 그 시대와 정합적인 글쓰기 양식이 있어 왔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백지은의 작업에서 엿본 것도 바로 그에 대한 도약의 한 장면이었는지 모른다. 1) 「체현하는 비평 : 백지은 작품론」(『현대비평』, 2025년 여름호)을 수정 보완한 글임을 밝혀둡니다. 2) 이 글에서 다루는 텍스트는, 백지은의 「마음대로 사는 사람아」(『자음과모음』, 2024년 여름호) /「안으로 나가는 역사」(『문학동네』, 2022년 봄호)이다. 3) ‘포스트 비평’이라는 말의 문제의식 및 그 정황에 대해서는 2010년대 이래 영미 비평-이론계 맥락에서의 논의가 선행한다. 예컨대 브뤼노 라투르의 “Why Has Critique Run out of Steam?”(Critical Inquiry Vol. 30, No. 2, Winter 2004)이 제기한 쟁점이 서구 비평-이론계에서 본격 맥락화되는 것은 Elizabeth S. Anker, Rita Felski, Critique and Postcritique(Duke University Press, 2017)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이러한 이론을 한국적으로 맥락화하고자 하는 최근의 논의들(이희우, 「비판이 오래 가르쳤지만 배울 수 없었던 것들」, 『쓺』 2023 하권 / 인아영, 「비평과 사랑 : 포스트 비평과 동시대 한국문학 비평의 논점들」, 『문학동네』, 2023년 겨울)을 포함하여, 현재 한국어 문학 비평에서 기존과 다른 패러다임의 글쓰기가 전개되고 있는 양상 전반을 지칭한다. 4) 이에 대해서는 졸고, 「비평, 플러스 알파 : ‘얽힘’을 발견하고 사유하는 관점에 대해」(『자음과모음』, 2023년 여름호) / 「마음의 유물론」(강우근 시집『너와 바꿔 부를 수 있는 것』, 창비, 2024 해설) 등. 5) 백지은, 「독자 시대의 문학과 쓰는 개인의 형식」, 『자음과모음』, 2019년 겨울호.

계간 현대비평 김미정 포스트 비평체현독자신유물론정동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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