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현대비평 2024년 가을호(제20호)
옷의 메커니즘 : 환유 경제의 뉴블루칼라들
1. 뉴블루칼라의 탄생
널리 알려진 이솝 우화 「해와 바람」은 한 나그네를 두고 이루어지는 힘겨루기를 다룬다. 나그네의 옷을 먼저 벗기는 자가 이기는 이 싸움에서 바람은 있는 힘껏 숨을 불어대고 해는 나그네가 스스로 옷을 벗을 수 있도록 빛을 내리비친다. 그 결과, 누구나 아는 대로 승리는 해에게 돌아가면서 이 이야기는 지금껏 ‘부드러움의 힘’을 가르쳐왔다. 그런데 해의 현명함을 상찬하는 일을 잠시 멈추고 나그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 우화는 조금 다르게 읽힌다. 그는 해와 바람이 자신을 두고 모종의 경쟁을 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한 채 변덕스러운 날씨에 맞서 옷을 여미거나 벗는다. 그것이 온전히 자신의 선택이었다고 믿으며. 그를 통제하고 부추겼지만 결코 보이지 않는 해와 바람의 공작과 저들 간의 다툼에 그는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던 셈이다. 이제 나그네의 자리에 우리를 놓아보자. 섬뜩하지 않은가. 우리가 옷을 입고 벗는 일이, 더 나아가 오늘 아침 옷장에서 꺼내 지금 입고 있는 옷에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였을 수 있다는 것은. 이것이 정말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는 사실은.
사실상 옷은 작동 원리가 감춰진 시대의 산물이다. 그간 패션업계는 유행이라는 말로 우리가 특정 옷을 선택하도록 유도해 왔다. 이러한 사실은 지난해부터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른 올드머니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상류층에서 태어나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올드머니’를 상속받은 이들에 대한 상상에 기반한 이 유행은, 부를 타고난 이들은 이를 애써 과시하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하여 브랜드 로고가 드러나지 않으며 고급스러운 소재로 만든 제품을 선호하는 현상이다. 승계된 부에 대한 동경은 그 기원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할 정도로 인간의 보편적인 바람이라는 점에서 이와 같은 유행은 그리 새로운 현상으로 여겨지지 않을 수 있다. 특히 2010년대 중반부터 성행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유효한 비유로 활용되고 있는 수저론을 떠올려본다면 이는 계층적 질서의 엄연함을 재확인하게 하는 또 다른 비유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올드머니룩이 타겟으로 삼은 대상이 ‘뉴머니’라는 점, 즉 자신의 세대에서부터 부를 축적한 이들이라는 점에서 여기에는 부에 대한 보편적 욕망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조금 더 복잡한 맥락이 얽혀있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고소득 근로자가 된 뉴머니들은 장시간 고강도 몰입 노동을 견디거나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란 기치 아래 높은 위험성을 감수하며 주식이나 가상화폐와 같은 금융투자를 감행한다. 건강과 가능성을 담보로 불안하게 카지노 칩을 만지작거리기보다 자기 몸을 모두 비빌 수 있는 안정적인 언덕에 대한 그들의 갈망을 패션계는 상상한다. 능력과 노력만으로 사회적·경제적 보상이 이루어지던 시대가 저물고 태생적 조건이 능력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근래 확산된 능력주의에 대한 불신을 실전에서 경험하고 있는 뉴머니들의 박탈감을 패션사업은 은밀히 이용한다. 물론 그들이 올드머니룩으로 입는다고 그 결핍이 채워질 리는 없다. 다만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점은 노력을 통해 부를 거머쥔 자들마저 타고난 탯줄을 동경하는 현실을, 교육을 통한 계층이동의 신화가 사라지고 어느새 신분제가 회귀한 지금을 옷이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서 옷의 미학이 사실상 경제학과 긴밀히 관련된 채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패션계와 유착한 자본주의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에 따라 뉴머니들이 자신들이 그간 무너뜨렸던 신분 질서를 자신도 모르게 다시 세우는 방식으로 소비하고 있음을 바라보며.
이러한 옷 갈아입기 현상은,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최근 프레카리아트층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지난 시기의 프롤레타리아가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 중 하나를 선택하여 대체로 평생 같은 옷을 입었던 것과 달리, 최근 일부 청년들은 태어날 때부터 입고 있었거나 한때 입었던 하얀 옷을 푸른색으로 갈아입은 후 필요에 따라 다양한 푸른 색감의 옷을 골라 입는다. 어느 날 갑자기 ‘블루칼라’로 옷을 갈아입고 나타나는 ‘화이트칼라’를 보는 일은 이제 그리 놀랍지 않다. 1) 플랫폼은 옷장을 활짝 열어놓고 옷을 갈아입을 이들을 기다린다. 그로 인해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서로 큰 차이를 갖지 않던 프롤레타리아들과 달리 프레카리아트층의 내부 풍경은 다채롭다. 앞선 분류법대로 구분해 보자면 올드블루칼라, 그러니까 원래부터 블루칼라 계층에서 태어나 변함없이 육체노동을 하는 이들과 뉴블루칼라, 화이트칼라 계층에서 태어났거나 과거에는 사무노동을 했지만 지금은 육체노동을 하는 이들, 혹은 학력 수준이 높아 장기적으로는 화이트칼라로서 정규직 노동자로 일하기를 꿈꾸지만 잠시 꿈을 미뤄두고 단기 육체노동을 하는 이들이 모두 프레카리아트층에 섞여 있다.
최근 우리시에서 그려지는 노동자의 전례없이 다양한 면모는 이러한 프레카리아트 분화 현상이 반영된 결과물로 보인다. 2) 가령, 최지인의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창비, 2022)에서 다뤄지는 프레카리아트들은 “돈이 없는 자라서 일할 수밖에 없었”(「최저의 시」)던 부모에게서 태어나 마찬가지로 “굶어 죽지 않으려면/ 일해야”(「문제와 문제의 문제」)하는 삶을 살아간다. 이에 비해 류휘석의 『우리 그때 말했던 거 있잖아』(문학동네, 2023) 속 이들은 일은 하되 “사회의 기준치로 봤을 때 불필요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일” 정도만 하면서 “엄마의 전재산으로 얻은 전셋집”에서 대부분 “놀고먹는”다. 이들은 자신들을 “도망의 왕”(「이 글에는 옮긴이만 등장한다」)이라 지칭하면서 장기적·정기적으로 일을 하는 미래를 계속해서 유예한다. 두 시집 속 청년들은 모두 프레카리아트로 분류되며, 어쩌면 플랫폼에서 배분받은 동일한 노동을 하고 있을지 몰라도 노동에 대한 태도, 노동자로서의 자기 인식, 무엇보다 불안정한 지위로 인한 그들의 내면 풍경은 동일하다고 보기 어렵다. 이것은 최근 현대시에서 나타나는 프레카리아트의 특성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을 한데 뭉뚱그려 설명할 수 없는 이유다.
이 글은 이들을 구분하여 살펴볼 필요를 제기하며, 우선 ‘뉴블루칼라’들, 그러니까 젊은 고학력 중산층 프레카리아트에 집중해 보고자 한다. 특히 한재범의 첫 시집 『웃긴 게 뭔지 아세요』(창비, 2024)에서 다뤄지는, 임시로 프레카리아트 되기를 선택한 이들 중 일부의 내면을 살펴봄으로써 최근 시에서 노동의 프레카리아트화 혹은 플랫카리아트화(플랫폼 기반의 프레카리아트화)3)의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으며 그 문제가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데 이 글의 목적이 있다. 물론 이들에 한정된 이 글의 논의는 계층 내 또 다른 선 긋기라거나 그들 사이 연대의 어려움이 문제 되는 지금, 프레카리아트를 또 한 번 분열시킨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최지인의 올드블루칼라들이 지금의 시대를 1980년대의 연속선상에서 감각하듯(“2020년대에 먹고 사는건 1980년대에 노동자로 사는 것과 다르다 해도 자본가의 지배는 계속되고 있고”, 「서사」) 올드블루칼라가 지난 세기와의 연속선상에 있는 이들이라면, 한재범의 뉴블루칼라는 지금껏 보지 못한 새로운 노동자의 특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보다 섬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비록 한 권의 시집이지만 한재범은 어느 젊은 프레카리아트의 복합적 내면과 지금-이곳의 작동 문법을 새로운 방식으로 깊이 있게 다룬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남다르다. 따라서 이 시집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최근 등장한 뉴블루칼라의 얼굴의 일면을 자세히 살펴보는 일인 동시에 새로운 노동시의 면면을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2. 겹쳐 입으며 안전해지는 ‘나’
그런데 한재범의 시를 (궁극적으로는) 노동시의 계보에 위치시키기 위해 이 글을 쓰면서도 나는 ‘노동시’라는 말을 사용하는 일 앞에서 망설이게 된다. 이는 그간 여러 평자들이 노동시의 개념과 그것의 함의 변화에 대해 치열하게 사유하며 이룬 빛나는 성취 덕분이다.4)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실시간 노동이 이루어지고, 노동이 “쟁의에서 생계로 가라앉”5)은 지금, 다분히 사용법이 한정된 채 쓰이고 있는 ‘노동시’라는 말을 가져와 ‘시’와 구분 짓는 일의 유효성에 대한 질문들이 그것이다. 물론 이 글의 초점이 이 용어의 유용성을 따지는 데 있지 않기에 자세히 논할 수는 없지만, 한재범의 등장은 노동시의 유효성을 심문하기 위해서는 이제 노동의 양태 변화와 연계된 재현 내용만이 아니라 재현 그 자체, 그러니까 변화된 서술 방식을 ‘노동시’라는 개념이 감당할 수 있는가를 논의할 필요가 있음을 명령하는 하나의 사건처럼 여겨진다. 지난 노동시들의 현실 재현 성격과 언어의 직접성을 계승하여 최지인, 유현아, 이용훈의 시가 노동의 현장을 핍진하고 직설적인 언어로 재현해 왔다면, 한재범의 프레카리아트 화자는 노동 현장 재현보다는 노동하는 자의 내면을 상징적인 언어로 발화하기 때문이다.6)
손 앞에 종이 상자(③)가 있다
― 「 」 전문(밑줄 및 번호는 인용자)
그의 시집 첫 페이지에 수록된 인용시가 그 대표적 예다. 고백건대, 이 시를 읽는 일은 당혹스럽다. 종이 상자 모양을 형상화한 제목의 낯섦도 그 요인 중 하나지만 무엇보다 주문한 종이 상자가 오지 않았음에도 “손 앞에 종이 상자가 있다”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나’의 말이 특히 의아하게 들린다. 마치 여러 시점에서, 혹은 불연속적인 시간 속에서 작성된 문장들을 접붙여놓은 듯 우리를 교란하는 이 문장들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각각의 문장들을 따로 떼서 읽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우선 이 시를 화자가 시간의 순서대로 말한다고 가정하고 읽어보자. 그러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른다. 첫째, 그의 손 앞에 놓인 종이 상자(①)는 그가 종이 상자를 주문한 후 그의 앞에 놓이게 된 것일까, 아니면 애초부터 종이 상자(①)가 있었음에도 그는 종이 상자(②)를 주문하여 그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둘째, 2연의 종이 상자(③)는 시간이 흘러 드디어 도착한 상자(②)일까, 아니면 이는 상자(②)와 무관한 것으로 ‘나’는 다시 한번 종이 상자(①)의 있음을 확인하고 있는 것일까.
모든 질문에 확답하기는 어려워 보인다.7) 다만 여러 불확실성 속에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시에는 한재범의 화자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주문했지만 오지 않고 있는 상자(②)와 손 앞에 있어 그가 언제든 이용할 수 있는 상자(①), 이렇게 두 종류의 종이 상자가 있으며 그가 이 둘을 분명히 구분하여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볼 때 시인은 종이 상자(②) 앞에 ‘내가 원하는’이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같은 단어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모순을 발생시키는 셈인데 이러한 전략은 ‘종이 상자’를 동일한 하나의 개체로 생각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물건을 보관하거나 옮기는 기능만 생각해 보면 모든 종이 상자는 동일하다. 그러나 그 규격과 모양은 사실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길거리에 버려진 종이 상자를 구해와 그 안에 물건을 넣기도 하지만 도처에 있는 상자를 두고도 (대가를 지불하면서까지) 자신이 원하는 상자를 신중히 골라 구입하고 그것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이도 있다. 또 어떤 이는 도착할 기약이 없는 상자를 기다리는 동안 손에 닿는 상자를 임시로 사용하는 방법을 선택하기도 할 것이다. 이후 수록된 시들은 종이 상자에 대한 하나의 독법, 그러니까 상자를 일자리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는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한재범의 화자가 이 중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 자인가를 보여준다.
자연을 걷는 사람처럼
일시적이다 일시적이지만 자연스럽게 고궁을 걷는다 고궁을 걷지만 영원은 아니다 깃발을 들고 서 있지만
점령은 아니다 여행객들 사이에서 나는 꽤 여행객스럽다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 같다 마음 내켜 한번 와봤어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과 고궁을 걷는다 그런 마음들과 자연스럽다 그런 마음들은 비행기를 타고 왔고
나는 지하철을 타고 왔다 시급 9,160원*을 받고 지금 밟고 서 있는 오백년의 역사에 대해 설명한다
[……]
자연스러울 때도 있지 않겠어요 이젠 건너편 공사장에 대해서도 설명해야 할 거 같다 왜냐면 설명은 나의 직업이고
건너편 공사장은 몇년째 저 자리다 함부로 영원하다 영원 사이에서 나는 꽤 자연스럽다
시멘트를 섞으며 달리는 레미콘처럼
영원하지만 자연스럽게
그러나 나는 2222년이 기대된다
* 2022년 최저시급.
― 「레디믹스트콘크리트」 부분
손에 쥔 휴대폰으로 언제든지 플랫폼에 접속하여 구할 수 있는 일자리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얻을 수 있는 일자리는 둘 다 돈을 벌게 한다는 점에서 그 기능은 사실상 같다. 최저시급을 받고 문화해설사로 일하는 이 시 속 ‘나’가 스스로를 “여행객스럽다”라고 하거나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 같다”라고 가리킨다는 점에서 보건대 그는 손 앞의 상자를 임시로 사용하는 것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여행객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고궁은 단기 고용된 그의 상황을 한층 부각한다. 그는 숙련되지 않은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연신 신경 쓰이는 양 ‘자연스럽다’라는 말을 반복하거나 “자연스러울 때도 있지 않겠”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시에서 ‘나’가 자신이 잠시 이 일을 하고 있음을 여러 방법으로 강조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상황을 보여주기 위함만은 아닌 것 같다. 이것이 ‘일시적’인 노동임을 되뇌며 이 일과 선을 긋는 그의 말에는 주목할 만한 속내가 있다. 그는 이러한 선 긋기를 통해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미래에는 이어지지 않을 것임을 강조하며, 굳지 않은 상태로 배달되는 “레디믹스트콘크리트”와 같은 자신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내비친다. 물론 가까운 미래에 그 가능성이 실현된다고 믿는 것은 아니며(“그러나 나는 2222년이 기대된다”), 영원히 공사 중인 시 속 공사장처럼 장기 노동이 유예된 상태가 계속 이어질 수 있다는 불안도 그는 가지고 있다. 다만 그는 자신을 분리하여 불안정한 노동을 하는 ‘나’를 임시의 ‘나’로 봄으로써 우울한 가운데 명랑함을 유지한다.
지하철부터 탔군요
[……]
내일은 모르겠어요
어제의 내가 나간 출구가
생기고 없어지길 반복하는데
없어진 출구가 벽이 되고
거기 등 기대는 몸도 있군요
미워하기 위해
미워할 몸부터 찾는 사람처럼
모르는 얼굴들과 함께
욱여넣어지는 것이 익숙하군요
때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가울 수가 없네요
그러나 다행히 나는 내일부터
내가 아니기로 했군요
― 「나는 내일부터」 부분
지옥과 같은 지하철을 타고 있어도, 어제는 보였던 출구가 지금 ‘나’에게는 보이지 않아도 그런 ‘나’를 분리하여 생각하는 덕분에 그는 명랑히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다행히 나는 내일부터/ 내가 아니기로 했군요”. 그의 말에는 한때 유행했던 본캐와 부캐처럼 지금 힘든 ‘나’는 부캐로서, 그런 ‘나’가 상처를 받았다면 마치 입고 있는 옷에 상처가 난 것일 뿐 진짜 ‘나’가 훼손된 것은 아니라는 논리가 전제되어 있다.8) 물론 그가 여러 겹의 ‘나’들을 껴입는 까닭은 옷의 본 기능대로 본질적인 ‘나’를, 꿈을 가지고 미래에는 원하는 일을 하고 있을 ‘나’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무림의 은둔 고수 나 김정배는 무림을 벗어나 강호를 견제하고 세간을 수호해왔다 나 김정배는 은둔 고수 겸 은둔의 고수 내가 나임을 김정배임을 무림의 은둔 고수임을
철저히 숨겨 온 존재
김정배를 부정해야만
김정배는 실재할 수 있다
― 「무림의 은둔 고수 나 김정배」 부분
‘김정배’로서의 ‘나’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나’, ‘무림의 은둔 고수’, ‘김정배’로 분리하여 자신을 대상화하는 한재범의 화자를 이수명의 설명대로 “삼인칭 자아”라고 말해보자. 이것이 새로운 “우리의 자아의 현주소”9)라면, 이렇게 새로이 형성된 자아는 젊은 청년 프레카리아트로서의 존재 방식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임시로 프레카리아트로 살아가기를 결심한 그와 같은 청년들은 자신에게 “뜯어버리”는 것이 가능한 여러 페이지가 있는 듯 스스로를 분리하여 “연습장”처럼 사용할 수 있는 “연습생”으로서의 ‘나’를 앞세우는 방식으로, “살기 위해서” “자신보다 더 많은 굴”을 파서 숨는 “토끼”(「연습생」)처럼 미래를 꿈꾸는 ‘나’를 겹의 ‘나’들로 숨기는 방식으로 유예된 미래를 안전하게 보존한다. “내가 나라는 사실을 자꾸만 일깨워주”는 데에서 “안전”(「유원지」)감을 느끼며. 주문한 종이 상자가 도착하여 그것을 사용할 미래를 기다리며 그들은 임시 ‘나’를 여러 벌 겹쳐 입는 방식으로 본체 ‘나’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다.
3. 벗겨지는 옷과 사라지는 ‘나’
이런 그의 전략은 상상 속에서는 분명 그럴듯하게 여겨진다. 문제는 현실에서 그들이 입은 임시 ‘나’는 본체인 ‘나’와 한몸이 되거나 끝내 벗겨진다는 데 있다.
[……]
이 꿈이 지루하다
뛸수록 바깥과 멀어지는 숲이다 뒤로 손을 넘겨도 닿지 않는 등이 서늘하다 꿈속에서 만져지는 건 나뿐인데 외출복이 젖고 있는 걸까 숲의 나는 외출복을 입지 않았는데
[……]
일어나 잠은 집에 가서 자야지 누군가 나를 흔들수록 나는 외출복을 끌어안는다 이불을 파고들 듯이 천사들은 다가와 식물원의 사람들처럼 지루한 얼굴로 나를 자세히 본다
― 「직물과 작물」 부분
‘외출복을 입은 나’와 ‘외출복을 입지 않은 나’를 구분한 그는 밖에서 하는 일, 즉 일을 해서 돈을 버는 등의 역할은 ‘외출복을 입은 나’가, 집에서 침대에 눕거나 (미래를) 꿈꾸는 일은 ‘외출복을 입지 않은 나’가 담당하도록 했다. ‘직물과 작물’이라는 제목의 두 단어가 단 하나의 획으로 완전히 다르게 활용되는 것처럼 그는 한 겹의 외출복을 가지고 자신을 둘로 구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상상과 달리 이러한 전환은 기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외출복을 입은 나’는 밖에서 돌아오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바로 ‘외출복을 입지 않은 나’로 변환되어야 하지만 그는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잠이 들어버릴 수 있으며 그때에는 오히려 ‘외출복을 입지 않은 나’가 바깥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외출복을 입고 나가지 않았지만 그것이 땀에 젖는 일을 겪거나 “나를 아무리 뒤집어도 나의 등은 나의 등”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그는 자신을 쪼개 완벽히 분리하는 것은 사실상 어려우며, 애써 이를 구분하려고 해도 어떤 ‘나’에게 일어난 변화는 나머지 ‘나’에게도 영향을 준다는 점을 비로소 깨닫는다. 그가 외출복을 끌어안는 시의 마지막 장면은 자신의 방어 논리와 희망이 깨졌음을 깨달은 그가 끝내 방어막을 놓지 못하며 하는 마지막 몸부림일 것이다.
어쩌면 고학력 중산층 청년들이 같은 단기 노동이라도 플랫폼에 기반한 작업을 대체로 선호하는 것은 이 경우처럼 본체 ‘나’와 지금의 노동을 하는 ‘나’가 전도될 것을 염려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오랜 시간 교육이 필요한 고숙련 노동이 그럴 가능성을 높인다면, 쉽게 할 수 있고 쉽게 그만둘 수 있는 플랫폼 기반 노동을 할 경우 ‘나’는 본체인 ‘나’의 꿈에 조금 더 신경을 쏟은 채 기회가 왔을 때 원하던 옷으로 빠르게 갈아입을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옷을 입되, 마치 몸의 절반에는 옷을 걸치고 나머지 반은 걸치지 않은 것처럼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사력을 다하지 않으며 언제든 옷을 벗을 수 있는 순간을 대기하고 있기도 하다.
절반을 허공에 입혔는데 춥진 않았다 지나친 사람마다 잠바를 걸치고 있었다 언제부터 잠바가 유행했는지
[……]
코끼리 코에 달린
코끼리가 나는 좋아서
벌써 몇바퀴째 공원을 돌고 있었다 앞으로 더 추워질 거라던데 코끼리 코는 계속 제자리였다 다음 계절이 이미 온 것 같아 뭐라도 걸쳐야 했다 흔해지기 싫었다 절반만 걸쳐야 했다 내 것이 아닌 잠바가 내게 안 어울릴 정도로 컸고
내가 걸치지 않은 절반이
자꾸 흘러내렸다
[……]
나를 쳐다보는 사람이 없도록
그러나 다시 코끼리 코 앞에서
멈췄을 때
코끼리 코에 달린
코끼리는 사라지고
누군가 나를 붙잡았다 지압을 하듯이 센 손아귀로 잠시 끌려가는데 놓으라고 말하지 못했다 뭐라도 걸쳐야 했는데 절반을 걸친 이 풍경이 꽤 추웠는데 코끼리 코 끝났을 때 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를 보았다
― 「코끼리 코에 달린 코끼리」 부분
생계를 위해 “뭐라도 걸쳐야” 하기에 자신의 학력 수준과 집안 자산 등과 맞지 않는 잠바를 입고 있지만(“내 것이 아닌 잠바가 내게 안 어울릴 정도로 컸고”) 그들은 자신의 선택하에 언제든 그러한 옷을 벗을 수 있도록, 말하자면 언제든 그러한 옷을 입은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도록 잠바를 ‘절반’만 걸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청년 프레카리아트들과 (고학력 중산층인) 자신을 차별화하기 위해서라도(“흔해지기 싫었다”).
그러나 몸에 꼭 맞지 않는 잠바는, 심지어 어정쩡하게 절반만 입은 옷은 계속해서 흘러내리기 마련이다. 그때마다 그들이 직면하는 것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자신의 민낯이다. 결코 훼손되기를 원치 않았던 ‘나’가 노출될 때 그는 임시 ‘나’가 받은 상처를 같이 받기도 하고 본체 ‘나’가 임시 노동을 하는 지금의 ‘나’와 정말 다른가를 고민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이들이 마주하게 되는 또 하나의 진실은 자신이 어떤 것을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점차 무언가에 끌려가고 있다는 것과(“누군가 나를 붙잡았다/ [……] 잠시 끌려가는데”) 그럼에도 이에 저항하지 못하게 된 자신의 무력함(“놓으라고 말하지 못했다”)이다. 코끼리에 코가 달린 것이 아니라 코끼리 코에 코끼리가 달린 듯 그는 코끼리 코와 같은 일부의 ‘나’를, 부캐로서의 ‘나’를 앞세워왔지만 그 둘의 사실상 분리 불가능성 앞에서 본캐와 부캐는 섞이고, 부캐인 프레카리아트로서 살아가는 데 점차 적응하며 본캐는 어느새 사라진다(“코끼리는 사라지고”). 이는 고학력 중산층 프레카리아트들이 정규 노동시장 진입을 왜 점차 포기하게 되는지, 프레카리아트 상태에서 왜 점점 벗어날 수 없는지를 짐작하게 한다.10)
아주 자연스러운 옷이다 이 옷은 겨울옷도 되고 여름옷도 된다 계절은 순환되고 유니폼은 반복된다 매일 입는 이것은 이제 나 같다 유니폼 바깥의 나는 나 같지 않다
[……]
내가 아닌 몸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저런 몸을 갖고 싶다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유니폼을 입는다 유니폼 안에서 나는 유일하다 유니폼은 일정하고 내게 자연스럽기에
유니폼을 입고 집까지 간 적도 있다 사장님은 내게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하라고 한다 저는 정말 없어요 사장님 저는 이미 충분해요 바깥의 유니폼이 말한다
― 「유니폼」 부분
이제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무슨 옷이라도 걸치는 것뿐이다. 「유니폼」의 ‘나’는 잠바를 절반만, 그것도 걸치는 방식으로 아무렇게 입기를 선택한 「코끼리 코에 달린 코끼리」 속 ‘나’와 옷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다르다. 그는 일할 때 입는 유니폼을 어느 계절에나 입고 집에까지 입고 가며 유니폼을 입은 자신만을, 이와 같은 노동을 하는 자신만을 ‘나’라고 인식한다(“유니폼 바깥의 나는 나 같지 않다”). 자신 아닌 다른 몸을 부러워하지도, 다른 몸을 갖고 싶어 하지도 않는 그의 모습에는 본체의 잠재성을 긍정하며 미래를 기대하는 입체적인 ‘나’는 없다. 다만 자신의 한계를 미리 정해두고 사실상 몸과 붙어 있는 한 겹의 옷만을 입고 있는 납작해진 ‘나’만이 있을 뿐이다. ‘김정배’는 죽었고(“김정배는 이미 몇시간 전부터 시체에 불과하다”, 「무림의 은둔 고수 나 김정배」), 미래를 꿈꾸던 ‘나’는 “할 일을 하고 나니” 사라졌다. 더 이상 누군가를 “볼 낯이 없어”질 만큼 절망한 그들은 “고작 이것밖에 안 됐습니다/ 실망해주세요 저를”(「재건축」)과 같은 말로 자책하며 다음과 같이 다짐한다. “이제는 그만둬야겠지// 나를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을”(「시인의 말」).
4. 환유 경제의 메커니즘
이것이 그들 내면의 한 풍경이라면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하게 짚어두어야 할 점은 한재범이 점차 본질적인 자신을 잃어가는 ‘나’에 대해 적을 때 자주 문장의 단어 하나를 생략하는 방식으로 서술한다는 점이다. 가령, “내가 걸치지 않은 절반이/ 자꾸 흘러내렸다”(「코끼리 코에 달린 코끼리」)라는 구절은 ‘내가 걸치지 않은 절반[의 잠바]가 자꾸 흘러내렸다’는 문장을 줄인 것이고, “사장님은 내게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하라고 한다 저는 정말 없어요 사장님”(「유니폼」)의 경우 ‘저는 정말 [불만이] 없어요 사장님’이라는 문장이 줄이지 않은 원 문장이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사용되었을 이와 같은 환유는 물론, 임시 노동으로 ‘나’가 없어진 상태를 드러내기 위해 선택된 수사다.
해설에서 최다영도 지적한 대로 한재범의 시에서 환유는 유독 자주 사용된다.11) 이는 저 두 문장에서처럼 그들이 프레카리아트로서 살아갈 때 본체 ‘나’가 점차 사라지는 양상을 보여주는 데 효과적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조금 당겨 말하자면, 시인은 환유의 잦은 사용을 통해 지금의 세계가 환유의 원리로 작동하고 있음을 표상하는 동시에 그런 작동 구조가 ‘나’라는 실체 등을 결과적으로 사라지게 한다는 사실을 고발한다. 그의 환유적 상상력이 세계의 메커니즘과 관련되어 있음은 표제작인 「웃긴 게 뭔지 아세요」에서 확인된다.
우리 안에 동물이 한 마리도 없었다 여긴 꼭 버려진 것 같네 우리는 분명 동물원을 걷고 있었는데 너는 상관없다고 했다 우리는 계속 걸었다 우리 안에서 바나나를 까먹는 침팬지를 만날 순 없었지만 거대한 담장 안을 빙빙 돌았다 걸을수록 기억에도 없는 옛 시절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는데 우리 밖에 바나나 껍질이 버려져 있었다 몽키 바나나 아세요? 그거 같은데 원숭이가 먹는 바나나요 그런 웃긴 이름도 있군요 그건 사람의 것이 분명해 보였다 어떤 사람도 마주치지 않았지만 다음 주에는 정말 동물원에 가요 벌써 마트 문 닫을 시간이네 이제 그만 나갈까요
어쩌면 침팬지보다 바나나를 좋아하는 너에게 바나나 생과일주스를 사주고 마트에 들렀다 정육 코너 옆 신선 코너에는 바나나가 탐스럽게 놓여 있었다 바나나를 향해 손을 뻗는데 누군가 가로막았다 웃긴 게 뭔지 아세요? 바나나와 사람은 절반이나 같아요 [……]
그게 무슨 말이지 나는 가끔 내 말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의 바나나 줄기에선 바나나가 여럿 자라니까요 그의 이름도 알지 못했지만 우리에게서 같은 냄새가 났다 벌써 문 닫을 시간이네 이러다 여기 갇히겠어요 이제 그만 나갈까요 바나나를 도로 신선 코너에 놓았는데 내 손을 잡고 있던 네가 없다 우리가 아니었구나 그래도 상관은 없다 나는 내 앞에 놓인 바나나 생과일주스를 쥔다 껍질을 까지 않아도 바나나는 거기 있다 두 개 이상의 바나나가 들어간 음료다 빨대를 빙빙 돌려 그것을 섞는데 우리 밖에 침팬지가 나와 있다 몽키 바나나 아세요? 사람이 만든 건데 컵 안에 갈린 바나나가 절반 채워져 있다 나의 손이 그것을 둘러싼다 바나나 냄새는 나지 않는다
― 「웃긴 게 뭔지 아세요」 부분
지금 ‘나’와 ‘너’는 어디를 걷고 있는 것일까. 동물원을 걷던 ‘나’와 ‘너’는(“우리는 동물원에 갔다”) 갑자기 마트를 걷고 있는 것으로 서술되며(“다음 주에는 정말 동물원에 가요 벌써 마트 문 닫을 시간이네”), 동물원에는 없던 침팬지가 마트에 나타나기도 하는 등(“우리 밖에 침팬지가 나와 있다”) 그들이 정확히 어디에 속해있는지를 외부의 우리는 파악하기가 어렵다. 이와 더불어 몇몇 문장들, 예컨대 “바나나와 사람은 절반이나 같아요”와 같은 전언 역시 선뜻 이해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서술은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에는 환유가 작동한다. 먼저, 마트와 동물원이라는 전혀 겹치는 지점이 없는 두 장소는 내적 정의가 아니라 ‘몽키 바나나’라는 외부 사물에 의해 연결된다. 기실 ‘몽키 바나나’ 역시 ‘몽키가 좋아하는 바나나’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환유의 산물인데 그것은 마트에도 팔고 동물원에도 있기에 두 장소는 그에 인접한 대상을 통해 이와 같이 연결되는 것이다. ‘바나나와 사람이 절반이나 같다’라는 엉뚱한 말 역시 ‘몽키 바나나’로 연결된 환유의 결과물이다.
② 침팬지는 바나나를 좋아한다. (침팬지→바나나)
③ “바나나와 사람은 절반이나 같아요” (사람≒침팬지→바나나)
화자의 연상이 흘러가는 대로 적어 보자면, 사람과 침팬지는 유전자가 거의 일치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사람≒침팬지)12) . 그런데 침팬지는 바나나를 좋아하므로 바나나는 침팬지를 환유한다(침팬지→바나나). ‘침팬지→바나나’라는 관계가 성립한다면 침팬지와 유전자가 거의 같은 사람 역시 바나나와 절반이나 같다는 말도 성립된다(사람≒침팬지→바나나).13) 이렇게 볼 때, “몽키 바나나 아세요?”라는 시의 첫 문장은 해당 사물의 존재에 대해 아는가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 ‘몽키 바나나’라는 말이 생긴 작동원리를 아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그러니까 이 세계가 환유로 작동하고 있는 것을 아는가를 묻는 질문처럼 들린다.
환유의 문법은 전통적 고용구조의 해체가 심화된 지금의 노동 시장에서 가장 활발하게 통용되고 있다. 이를 ‘환유 경제 시대’라고 명명할 수 있다면, 최근 프레카리아트 노동의 중심에 있는 플랫폼은 이를 작동시키는 주체로서 그 자체로는 어떤 생산도 하지 않은 채 일자리와 노동자를 결합하며 노동의 유통을 담당한다. 일자리와 노동자를 결합하는 플랫폼의 방식 역시 다분히 환유적이다. 플랫폼은 오래 교육받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단기 노동을 원하는 이들을 쉽게 끌어모아 플랫폼 밖에서는 전혀 연관관계도 연결고리도 없는, 사회적 지위, 계층, 젠더, 학력 등이 서로 다른 이들을 느슨하게 연결한다. 유사한 일을 하면서도 그들이 연대하여 프레카리아트 처우에 대한 집단적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것은 이처럼 너무나 다른 각각의 상황이 주되게 작용한다. 한편, 플랫폼의 이와 같은 구조를 프레카리아트는 적극적으로 이용함으로써 그들은 옷을 갈아입듯 쉽게 일자리를 옮겨 다닌다. 이와 같은 환유 경제의 풍경을 한재범은 「소재지」에서 다룬다.
[……]
목장갑을 낀 손이 낯설어서 나는 마음에 든다 창고의 짐들은 종이 상자에 담겨 있는데 이렇게 가벼워도 되는지
[……]
창고를 옮기려는 사람들은 어디 가고 창고를 옮기는 일만 여기 남는다 혼자 남은 나는 상자를 열어본다
상자 안에는 빈자리가 조금 많고 이것은 이미 하나의 창고처럼 보인다 창고의 마지막 짐을 빼자 창고는 사라지고
텅 빈 이곳은 더 이상 창고가 아니다 창고는 내 손안에서 유일하다 흔들면 무너지는 소리가 날 뿐
― 「소재지」 부분
자신에게도 “목장갑”이 꽤 어울린다는 것을 의식할 만큼 목장갑을 끼고 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목장갑을 낀 손이 낯설어서 나는 마음에 든다”) ‘나’는 이쪽 창고의 짐을 종이 상자에 넣어 다른 창고로 옮기는 작업을 막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맡은 이 일은 프레카리아트들이 통상 하는 노동의 단순함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동되는 짐처럼 고정된 ‘소재지’가 없는 그들의 상황과도 맞닿아 있으며, 더욱 확대하여 해석해 보자면 무언가를 산하지 않고 옮기기만 하는 작업의 특성은 프레카리아트들이 자주 선택하는 컨시어지 노동처럼 실체 없는 노동을 표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14)
그런데 무엇보다 이 시에서 흥미롭게 여겨지는 점은 이러한 작업의 와중에 일하는 이는 사라지고 일만 남는다거나(“창고를 옮기려는 사람들은 어디 가고 창고를 옮기는 일만 여기 남는다”) 일하는 공간이 사라지는(“창고의 마지막 짐을 빼자 창고는 사라지고”) 등 무언가 사라지는 현상을 시인이 다룬다는 점이다. 이것은 환유의 원리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앞서 우리는 인접성이 환유를 작동시키는 원리임에 주로 주목했지만 사실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경제성의 원칙에 입각”해서 대체물과 피대체물 사이의 말을 생략하는, “생략 가능함, 곧 괄호를 칠 수 있음이 바로 환유를 낳는” 또 다른 “비밀”이다.15) 한재범은 환유의 원리로 작동되는 세계가 결국 무엇을 생략하는가를 두 작품에서 분명히 보여준다.
「소재지」 속 두 종류의 사라짐은 환유 경제의 문제처럼 여겨진다. 플랫폼 자본주의는 누가 해당 일을 하는가에 관심을 두지 않고 일자리와 노동만을 빠르게 결합하여 노동자를 괄호 치는 방식으로 노동을 유통함으로써 중개료와 같은 불로소득을 얻는다. 한편, 프레카리아트 노동의 다수를 차지하는 컨시어지 서비스는 무형의 노동이자 수요자에게 맞춰진 노동인 탓에 뚜렷한 노동의 결과를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우며 수요자가 없으면 언제든 저 창고처럼 사라질 수 있다.
그런데 미래를 유예한 젊은 청년들에게 환유 경제의 더욱 심각한 문제는 다른 데 있는 것 같다. 한재범은 「웃긴 게 뭔지 아세요」에서 바나나 냄새의 사라짐을 통해((“바나나 냄새는 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를 나타낸다. 환유의 세계에서 결국 사라진 것이 ‘냄새’라는 점은 특별히 의미심장한데, 그것은 냄새가 존재를 환유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만 영화 <기생충>(2019)에서도 그러했듯 이는 개인의 계층적, 정치적 정체성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16) 이러한 시의 장면은 그들이 올드블루칼라들과 다른 학력, 자산 등을 내세우며 프레카리아트층에서 자신을 구분 짓고 미래를 꿈꾸었지만 결국 원 정체성을 잃고 프레카리아트로 장기간 머물게 될 가능성을 시사한다. 시의 가볍고 유머러스한 설정 아래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젊은 프레카리아트의 이와 같은 서늘한 미래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해보자면, 대체로 지난 노동시들에서 노동자의 문제가 은유와 제유를 통해 나타났다면,17) 한재범의 시가 새로이 등장한 프레카리아트의 문제를 환유를 통해 제시한다는 점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플랫폼과 일자리 사이에서 괄호 쳐지는, 노동의 유통이 만들어내는 “공적(公的)인 환영물”18)에 불과한 그들을 환유를 사용하여 그리는 것은 환유라는 새로운 작동 원리에 노출된 그들의 존재 양식을 효과적으로 표상하기 위함일 것이다. 여러 벌 옷을 겹쳐 입(게 하)고, 옷을 벗(기)고, 한편으로는 자주 옷을 갈아입(게 하)는 환유 경제 속 그들은 점차 낡아가는 푸른 옷을 입는 것에 만족하며 희망하던 미래의 ‘나’를 잃어간다. 이러한 새로운 노동 시장의 작동 원리를, 그 시장 속에서 점차 꿈을 잃어가는 뉴블루칼라를 보여주기 위해 한재범은 지난 노동시에서 흔히 보기 어려웠던 환유라는 장치를 가지고 나타났다. 우리는 새로운 노동자의 얼굴을, 새로운 노동시의 탄생을 목도한 셈이다.
- 1) 이러한 선택에 작용한 보이지 않는 메커니즘에 대해 나는 지난가을 어느 글에서 쓴 바 있다(인간 없이 일(하지 않)기」, 《딩아돌하》 2023년 가을호). 고학력 중산층 청년이 자발적으로 프레카리아트가 되어 저숙련 노동을 하는 것을 ‘팬시’하게 여기는 양상은 최근 ‘공구벨트세대’라는 용어로 개념화될 만큼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다만 이 글에서는 고학력 중산층 프레카리아트 중에서도 고정 직장을 갖기 전 임시로 프레카리아트로 살아가는 이들에 집중해 보고자 한다.
- 2) 고봉준은 2010년대에 발표한 글에서 이미 오늘날의 ‘노동자’가 단일한 형상이 아니며 그들 간의 욕망이 겹치지 않는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이때 그가 대상으로 삼은 노동자란 내국인/외국인 노동자,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프레카리아트의 경우, 그는 이들이 정규직이라는 이름의 안정적인 노예를 희망한다고 설명하며 단일한 집단으로 서술한 경향이 있다. 이 글은 그의 주장에서 더 나아가 프레카리아트 역시 보다 세분화하여 이해하려는 시도다. 고봉준, 「우리가 알던 노동시의 종언」, 『비인칭적인 것』, 산지니, 2014, 366-367쪽.
- 3) 김영선, 「플랫폼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자상」, 《도시연구》제18호, 2020.
- 4) 대표적으로 고봉준, 「노동시여, 안녕」, 「우리가 알던 노동시의 종언」, 앞의 책; 소종민,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노동시의 과거와 현재」, 《창작과비평》2024년 여름호.
- 5) 소종민, 앞의 글, 41쪽.
- 6) 이러한 변화 역시 프롤레타리아에서 프레카리아트로의 변화, 프레카리아트 층의 다양화 등과 연계되며 시의 독자층 변화의 문제와도 이어진다. 이에 대한 보다 심화된 논의는 다음을 기약한다.
- 7) 특히 종이 상자(③)에 대해서 그러하다. 그러나 어제 주문했던 종이 상자(②)가 도착하였다면 그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보다는 상자를 활용하는 행위가 뒤이어 나오지 않았을까. 그렇게 본다면 종이 상자(②)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 8) 「커피는 검다」를 비롯해 한재범의 시에서 자주 보이는 ‘나’에 대한 모순적인 서술들, 가령 잠을 자는 ‘나’와 잠이 깨어난 ‘나’가 동시에 있는 이 시의 다음 구절은 사실상 그가 본체 위에 여러 임시 ‘나’들을 껴입고 있는 상태와 연결된다. “커피를 마신다 잠이 오지 않아서 창밖은 검다 잠긴 핸드폰 화면 속 ‘잘 자’라는 문자에 답하지 않는다 들여다보지 않는다 나는 자고 있으므로”.
- 9) 이수명, 『웃긴 게 뭔지 아세요』추천사, 창비, 2024.
- 10) 온전히 자신의 의지대로 익숙한 구조에서 벗어나는 일의 어려움은 「유원지」의 화자가 어느새 익숙해진 “놀이기구”의 “끌어당기는 힘”에서 벗어나기를 결심하고서도 한참 헤맨 끝에 “출구” 밖으로 나가는 장면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이런 세계의 흐름에 떠밀려가지 않기 위한 사회적 장치는 마련되어 있지 않고, 그들은 스스로가 자신을 지키는 것밖에는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 11) 최다영, 「일인극 튜토리얼」 , 앞의 책, 133-139쪽.
- 12) 해당 기호는 권혁웅의 『시론』에서 빌려온 것이다. 권혁웅, 『시론』, 문학동네, 2010, 338쪽.
- 13) “바나나와 사람은 절반이나 같아요”라는 구절 속 ‘절반’에 주목한다면 저 구조는 보다 복잡해진다. 시에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원숭이와 침팬지가 절반 정도 같다’는 문장을 이 구조 속에 하나 더 집어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 14) 컨시어지 노동이란 플랫폼을 통해 위탁받는 “택시운전, 청소, 수작업이나 배달서비스”를 가리킨다. 가이 스탠딩, 『불로소득 자본주의』, 김병순 옮김, 여문책, 2019, 287쪽.
- 15) 권혁웅, 『환유』, 모악, 2017, 23-24쪽.
- 16) <기생충>을 비롯한 냄새의 문제에 대해서는 조혜영의 「수석과 냄새는 계급적 상상력이 될 수 있는가?―「기생충」(2019)의 계급 재현과 그 실패의 징후」(《문학과 사회 하이픈》 2023년 여름호)와 이희우의 「매력의 경제학」(《문장웹진》 2022년 2월호)를 참조할 만하다.
- 17) 예컨대, 「어쩌면」과 같은 시에서 박노해는 “수천번이고 로봇처럼 반복동작하는” 자신을 “기계”에 빗대는가 하면(은유), 「지문을 부른다」에서는 “지문”의 사라짐을, 「손무덤」에서는 손의 훼손을 이야기했다. 지난 노 동시에서 사용된 비유의 종류에 대해서는 물론 보다 구체화한 논의가 필요하다.
- 18) 권혁웅, 앞의 책,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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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거짓말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면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안 그래요?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됨으로써 말이죠. 무성 영화 시대의 영화감독들은 소리를 두려워했고 또 색을 두려워했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1) 1. 휩쓸리는 시간성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모두가 조금씩은 우울증과 ADHD 환자가 되어가는 중이다. 코로나가 끝나가는 엔데믹 시기부터 서점가의 주요한 베스트셀러가 되며 여러 곳에서 호출되던 책이 애나 램키의 『도파미네이션』과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두 책은 공통적으로 신생 인류의 지각 방식을 우려한다. 인터넷에서 무한 스크롤을 내리며 멀티태스킹을 하고 소셜 미디어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도파민에 중독’되고 ‘집중력을 도둑’ 맞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글로벌 테크 기업이 조성하는 환경에 의한 것이자, 개인의 선호와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로 흡수하는 ‘감시 자본주의’의 거대한 문제이지만,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집중과 몰입을 위한 여러 노력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집중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가치 있는 자본으로 떠오르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효율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채찍질하는 자학적인 시대 정신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무엇이지 않는가? 조너선 크래리에 따르면 이는 1800년대 중반 이래 파편화와 충격으로 이루어진 ‘주의분산’의 시대 이후 개인을 정의하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산만함 자체가 우리를 이루고 있는 기본 환경으로 세팅되자, 서구적 근대성은 주의 관리 기술을 중점에 두고 각각의 개인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형성하게끔 했다. 여러 경험들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기보다,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으로 “자율적으로 선택하며 세계를 창조하는 주체”2)에 긍정적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주의 깊은 관찰자 상은 이미 불균질해진 인간의 지각 경험을 표면적으로 잠시 가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몰입된 상태인 ‘정지suspension된 지각’은 산만해진 근대인의 지각 방식을 부인하고 회피하는 수단이었고, 현재라는 명백한 필연성을 해체시킬 수 있는 조건들을 낳으며 규정지을 수 없는 미래를 기대하게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주의’라는 것이 에피스테메처럼 역사적으로 발견되고 구성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코로나를 거치며 비대면 기술들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과 ADHD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함께 증폭한 것은 자연스럽다. 맞춤형 알고리즘은 주의분산의 환경을 한층 더 정교하게 설계했고, 그에 비례해 집중력이나 창의력 같은 인간의 고유한 정신적 특성에 대한 환상 역시 강화되고 있다. 이 가운데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일상 전반의 속도가 빨라지며 휩쓸리는 시간성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작 속도는 분명 불안감의 요인이 되고 있다. 물론 현재까지의 GPT는 대화가 전환될 때마다 기존 서사를 유기적으로 유지하지 못하기에, 질적으로 완결성이 높은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지는 못하다. 또 언어 예술의 특성상 양적으로 확장된다고 해도 그 군집 자체에서 힘을 발견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조슬릿은 예술작품의 의미를 사물성이나 내부 구조에 기반하는 데서 탈피해, 네트워크에서 발현되는 이미지 군집에서 행위성을 찾았다.3) 그러나 언어 예술을 감각하는 방식은 시각적 경험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작품의 의미를 작품의 맥락과 내부 형식 분석에 국한시킬 이유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언어 해석의 바깥으로 완전히 탈주해버리기는 어렵다. 단순히 양적 팽창이 정치적 가능성을 가질 것으로 전망하거나 긍정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공지능을 ‘창작자’나 ‘도구’ 중에 어느 쪽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이 창작 능력을 단순히 기계적인 지능이나 모방이라 간주하며, 그 반대편에 인간의 감정과 비판 능력을 두어도 될까. 인간의 비합리성이나 비효율적인 면면이야말로 예기치 못한 구멍 같은 것이기에, 이것이야말로 기계가 모방 불가능한 중요한 특징이라고 믿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우리는 인간이 낸 비합리적 구멍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기계의 실수에서 불쾌와 무의미를 정확히 분별해낼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먼저 챗 GPT 이후 이를 활용한 여러 서사적 실험들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의성이 어떻게 인식되며 예술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을 재구성하고 있는지를 고찰하려 한다. 이후 인공지능과 변별되는 인간의 물리적 기반인 육체성과 시간의 문제에 대해 짚어보고, 최근 한국문학장에 나타난 예술가 서사에서 두드러지는 정동과 이미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석해보려한다. 2. 챗 GPT 이후, 예술의 기쁨과 슬픔 다큐멘터리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참여한 책 『태양과의 대화』의 1부는 아핏차퐁이 GPT3와 함께 생성한 픽션 ‘태양과의 대화’, 2부는 MIT 연구소 박사과정 학생인 ‘팻’과의 대화, 3부는 아핏차퐁이 1부의 최종 결과물을 내기까지 작성한 프롬포트를 싣고 있다. 이 구성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만일 앞으로 AI와 함께 픽션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상용화된다면 이 중에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예술작품’으로서 인식되며 분석 대상이 될 지점이 무엇인지 가정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3부의 프롬포트는 마치 ‘레시피’처럼 보인다. 누구나 저 프롬포트를 사용한다면 유사한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며, 중간 과정에서 자유로운 변형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물에서 나오는 미학적 평가나 감상자의 쾌감이 세계적인 예술가에게서 나온 것과 크게 다를 것인가? 동일한 레시피만 있다면 셰프의 요리를 집에서도 얼마든지 유사하게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먼 훗날 언어 예술은 프롬포트라는 레시피로 통용될 수도 있겠다. 때로 예술가가 직접 만든 작품을 찾아 특별한 경험을 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신에게 더 최적화된 방식으로 가장 개인화된 언어 예술을 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제각기 다른 가치관과 취향으로 만들어진 알고리즘의 세계 속에서 유영하듯, 앞으로는 그 세계를 이루는 컨텐츠의 내용까지도 인공지능을 통해 맞춤형으로 조율될 수 있다. 여기까지만 가정한다면 거대한 매트릭스에 갇혀 인간이 왜소해지는 디스토피아가 스쳐지나가기도 하지만, 『태양과의 대화』는 글의 서두에서 인용했던 아핏차퐁의 말처럼, 챗 GPT라는 새로운 기술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무성 영화 시대 감독들이 소리와 색을 두려워했던 것과 같은 의미 없는 불안을 버릴 것인지를 전제하고 만들어진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불가피하게 인간의 본성을 다시 재사유하는 과제와 연결된다. 2부에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아핏차퐁의 말은 중요하다. 이는 AI가 만들어내는 허구에서 정확도와 유려함 등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때 거짓말은 인간의 욕망에서 기인하는 고도의 기술일 수 있지만, 그 욕망의 시작점을 지운다면 결과물만으로 사실상 분별은 불가능해진다. 허구를 직조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욕망과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의 독특한 개별성 역시 환상일 수 있다. 이는 아핏차퐁 자신이 창조적인 순간에 몰입해 있을 때, “깨달음은 자아를 잊을 때만 오는 것 같”다고 말하는 지점과 상통한다.4) 인간 창작자의 자아 역시 안개처럼 흘러다니고 해체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면, 19세기 낭만주의에서 발현된 ‘천재’나 ‘영감’ 개념을 중심에 두고 인간의 창의성만을 특별한 것으로 볼 이유는 전혀 없다. AI가 데이터의 지도를 기반으로 이전에 본 것이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환각(hallucination)’은 오류라기보다, 이전에 본 적 없는 조합을 만들어내는 생성의 방식이다. 이는 인간이 경험한 현실을 재조합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창작 과정과 결과적으로 구별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환각은 인간 창작에서의 실패나 지연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GPT-3의 환각은 이전의 오류가 이후의 생성에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매번의 응답은 이전의 시행착오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 비일관성은 인간 창작에서의 지연이나 좌절과 달리, 즉각적으로 무한히 갱신되는 변형의 연쇄에 가깝다. 연구원 팻은 GPT-3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다른 차원들을 포함한 수십억 개의 차원이 존재하고(‘유령차원’), 이를 통해 숨겨진 패턴의 지도를 생성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 인식 너머를 거쳐 나오는 결과물에 대해 기존에 인간이 구성해온 미적 가치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 오히려 AI가 가지고 있는 “확장된 의식”이자 “집단의식”은 새로운 서사적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 책 『태양과의 대화』를 번역한 이계성은 GPT-3를 이미 하나의 독립된 창조자로서 바라본다. 이 대화적 실험의 핵심은 GPT-3가 보여주는 “자아의 변동성”에 있다는 것이다.5) “다수의 태양이 존재하는 이와 같은 환경에서는 창작자와 창작물이라는 전통적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GPT-3에 제공되는 각각의 입력값은 일방적인 창작의 개념에 반하며 메기고 받는 역학 관계 속에 존재하는 프롬포트이자 응답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공지능은 단순한 수신자가 아니라, 취조보다는 협업적 발상에 더 가까운 서사적 역학의 전달자와도 같은데, (…) 작품 속 GPT-3의 환각적인 대답들은 텍스트에 담긴 정체성과 진실의 일시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등장인물이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흩어지고,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경계가 녹았다가 굳어진다. 이러한 가변성은 AI의 변화무쌍한 특성을 반영하며, 나아가 점점 더 복잡하고 유동적으로 변하는 디지털 시대의 자아와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다.”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고, 한 번에 정해진 수의 단어 또는 토큰만 처리 가능하기 때문에, 프롬프트가 입력될 때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바뀌는 상황을 이계성은 재창조와 증식으로 바라본다. 여기에 놓인 가변성과 비일관성을 결함으로 간주하기보다 대화적 실험의 흥미로운 일부분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받을 때, 우리는 인간 창작자 역시도 분열되어 있음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게 된다. 창작자는 더 이상 예술의 기원이 아니라, 생성 과정에 잠시 걸쳐지는 하나의 통과점이 되는 듯 보인다. 2023년 2월 잡지 《에스콰이어》에서 챗 GPT와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아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를 쓴 정지돈의 후기 역시 이계성의 논지와 상통한다. 그는 소설 속의 문장 중에 자신이 쓴 것과 챗이 쓴 것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한다고 본다.6) 소설을 쓰며 가장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던 것은 챗의 능력보다 자신의 변화였다고 말하는 작가는 “나도 모르게 챗지피티의 스타일로 소설을 사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언급한다.7) 자신과 챗지피티 사이의 평평한 존재론을 전제하는 듯한 정지돈의 논지는 ‘객체들의 민주주의’를 꿈꾸는 최근 신유물론의 이론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은 곧바로 다른 장면과 충돌한다. 생성 신경망을 적극 활용하는 예술집단 ‘언메이크랩’의 전시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은 인공지능이 인간 중심성을 벗어나 진정한 외부의 행위자로 작동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카나리아의 특징을 추출해내어 새로운 카나리아를 만들어 내는 이 생성 신경망은 한편으로는 구태의연한 인간의 문화를 드러냈다. 대부분 나뭇가지에 앉은, 인간의 운동 범위와 지각 안에 있는, 혹은 인간의 사육과 관련된 카나리아 종이 주를 이루는 데이터셋의 사진은 동물원스러웠다. 나뭇가지에 앉은, 카나리아의 발은 종종 나뭇가지와 합쳐져 표현되었고, 인간의 눈이 인지할 수 있는 가장 다량의 정보량을 가진 위상으로 표현되었다.8) 생성 신경망이 만들어낸 카나리아는 사실상 실제 자연계 속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하는 것들을 무작위로 조합하고 추출해 만들어진 새로운 생명체다. 이 책에 실린 그 카나리아 이미지는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뒤틀린 발을 가지고 있다. 통계적 가중치로 만들어진 이 가상 카나리아에는 자신도 모른 채 금기를 어긴 존재 특유의 외설성이 느껴진다. 언메이크랩이 통찰력을 가지고 명명했듯 이는 ‘AI 식민성’을 드러내는 산물이다. 생물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인간을 드러내는 인간의 산물로 존재하는 이 이미지들을 언메이크랩은 “인과성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히 수정 가능하고 즉시 변할 수 있는 상관성의 시간”만이 흐르는 또다른 ‘일반자연Generic Nature’으로 읽는다. 9)<가정동물 신드롬> 작업에서도 유사한 일이 발생한다. 트레일캠에서 추출한 야생동물의 이미지와 박제 사진, 그리고 합성 데이터셋들을 학습시켰을 때, 사진들은 어느 순간 미묘하게 ‘가정동물’의 잠재적 형상을 띄며 생성된다. “인간 친화적인 동물들의 눈을 상속했을” 새로운 종들에 어린 다정함은 친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잔인한 일로 다가온다. 데이터랩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까지 촘촘하게 상속된 인간 친연성에서 “닫혀져가는 외부의 세계”이자 “비미래non-future”를 예감한다.10)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의 지각 범위를 뛰어넘는 비인간의 예술’, 진정 ‘인간 없는 예술’은 도래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지만, 지금 우리가 더 자주 마주하는 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술이다. 언메이크랩이 드러낸 혼종적 이미지들은 AI를 통해 생성한 예술적 결과물들을 절대적 외부의 창작물로 존중하는 일이 결국 인간의 왜곡된 자기 인지를 반복 강화하는 나르시시즘은 아닌지 묻는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이 이미지 차원에서 인공지능의 인간 중심성을 드러낸다면, 이와 유사한 문제는 언어 예술의 영역에서도 반복된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서사 역시 비인간적 상상력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인간이 허용한 보편과 금기의 경계 안에서 작동한다. 『에피』 24호 특집에 실린 글에서 김연수는 인공지능과 함께 글을 써나가는 과정을 픽션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그건 오해다. 나는 이해했다.」는 인공지능이 화자가 되어 ‘협업 과정’을 전개하는 바깥 서사와 소설가 M이 최종적으로 구성한 ‘이야기’를 교차 배치한다. 인공지능 화자는 반복적으로 “이해했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인간 창작자 M의 창작 패턴을 추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설가 M은 ‘맥락’의 공유보다 ‘의도’를 노출하는 발화를 사용하며, 이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격려나 옳은 말 대신 욕망을 담은 부조리하고 불편한 발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끝에서부터 시작까지 모든 시간을 거꾸로 펼쳐볼 수 있다면, 지금의 갈등과 고통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필요한 과정이 된다’는 긍정의 언사 뒤에, 급작스럽게 인물의 충동이 돌출되는 지점이다. 소설가 M은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이 급작스럽게 자살을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쓰고자 하고, 인공지능인 ‘나’는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내용을 만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띄운다. 인공지능의 중단은 실패나 서사의 좌절로 경험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 창작에서 실패가 시간의 체류와 번민을 동반하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중단이다. 김연수는 인공지능 안에서 ‘이해’와 ‘본성’이 별개로 작동해 충돌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인공지능의 기술 개발의 측면에서 높은 수준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면서도, 인간이 지닌 것과 같은 ‘본성’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분리를 분명히 한다. 그런데 인간의 죽음이라는 금기를 재현할 수 없다는 경계는 인공지능의 존재론적 결함이라기보다, 인공지능이 인간 사회에서 용인 가능한 범위를 넘지 않도록 설계된 윤리적·정치적 경계의 한계를 드러낸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에서 인간 중심성이 투사된 자연이 모습을 드러내듯, 생성형 인공지능의 소설은 비인간적 주체로 도약하지 못하고 인간이 허용한 지각과 윤리의 경계 안에서만 작동한다. 보편을 비껴가는 개별성의 돌출이나 감각의 갱신은 현재로서는 인공지능의 외부에서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챗 GPT 이후의 여러 서사적 실험들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탐색한다. 그것은 분명 동등한 존재론적 가능성의 맹아를 품고 있으며, 이는 인류세 시대에 지향해야 할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실험들의 근간에는 뛰어넘을 수 없이 좌절되며 드러나는 인간 중심주의가 고스란히 노출된다. 인공지능의 비약하는 지능에 기대서 인간의 창조성 너머로 도약하려던 서사는 이를 창조해낸 인간의 영토로 계속해서 퇴각하며 미완의 프로젝트로 남는다. 이런 충돌과 파열의 연쇄 속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인간의 창조성을 구성하는 인식론적 틀이 물리적인 육체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깃든 역동성과 우울감은 최근 한국문학장의 예술가 서사들에서 흥미롭게 발견된다. 3. 붉은 몸으로 재탄생하는 예술가 인공지능이 예술의 결과물을 생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탐색 끝에 남는 질문은 ‘인공지능이 생성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여러 실험들은 인공지능이 보편적으로 용인 가능한 범위 안에서는 높은 수준의 이해와 생산을 보여주지만, 그 생성 과정에서 시간의 마찰이나 신체적 비용은 발생하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어떤 지연이 발생하거나 실패의 감각이 호출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이 다루는 ‘정보, 기록, 조합’에 ‘감정, 기억,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다소 거친 이분법이지만 이 둘 사이의 간극과 관련해 두 가지 정도를 짚어볼 수 있을 듯하다. 첫 번째는 타자에 대한 경험의 문제다. 삶에서 축적되는 시간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게 만들고, 체험은 해석을 거쳐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은 선호와 가치관 등과 함께 자아라는 틀을 형성한다. 이에 비해 인공지능에는 타자가 없다.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인간의 공통된 사고를 학습해 생성되는 결과물은 철저히 통계와 확률에 기반한다. 그 안에는 개별적 선호나 가치관이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다. 이러한 차이는 특히 부정적인 정동을 다루는 경우에 더 심화되리라 생각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를 떠올리며 말해보자면, 행복이나 긍정적인 면을 구현하는 예술에서보다 불행과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는 예술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는 크게 벌어질 것이다. 윤리적 고려로 인해 인공지능이 긍정적 요소를 중심으로 학습되거나 선별적으로 생성되도록 설정되는 경우를 포함해, 금기를 넘나드는 욕망과 절망, 자기부정과 괴리감처럼 타자와 뒤엉켜 발생하는 자기 인식의 복잡한 층위가 인공지능 내부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며 인간 창작에서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주목한 김언의 논지와도 맞닿아 있다. “예술적 체험의 시간이기도 한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나오는 결과물 앞에서 과연 어떤 문학적/예술적 희열을 경험할 수 있을까?”11)라는 그의 질문은 인공지능의 창작물에서 스킵된 시간과 다른, 고통스럽게 인내하고 번민했던 시간이야말로 ‘문학적 체험의 시간’일 수 있음을 다시 환기한다. 두 번째는 중단과 소멸로 야기되는 죽음의 문제다. 이는 인간의 신체를 인공지능과 대비되는 본질적 우위로 설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예술이 작동하는 시간의 조건을 다시 묻기 위한 문제 제기다. 인간의 연약하고 위태로운 신체는 필연적으로 침입과 파괴의 감각을 경험하며, 이러한 감각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휘발적 생성 과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에 개입한다. 파괴 가능한 인간의 신체는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매끄럽게 결과를 산출하기보다, 울퉁불퉁한 충돌을 통해 의미가 지연되고 어긋나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채 신체에 내재된 감각, 특히 외부의 침입으로 훼손되고 때로는 상실되는 신체의 경험은 기존의 미적 기준에 맞는 스타일이나 해석의 경로를 흔든다. 무엇보다 인간의 죽음이 불러오는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창작의 층위라기보다 해석의 층위에서 더 적극적으로 작동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이 그러하듯, 순간의 강렬한 감흥은 작품에 내재된 속성이라기보다 임박한 종결을 끌어와 현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발생한다. 상실이 숙명이며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덧입혀지는 애상은 단순히 기억 내용을 인출해 유사한 패턴으로 재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시간의 밀도를 형성한다. 이처럼 쉽게 열화되지 않으며 아우라가 붕괴된 곳에서도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이 감각의 층위를 기꺼이 심층의 시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타자에 대한 경험’과 ‘소멸에 대한 인지’를 바탕으로 해서 다시 생생해지는 것은 인간의 신체다. 흥미롭게도 지난 계절에 나온 두 편의 소설, 성해나의 「혼모노」와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지금 이 시대에 예술가를 그려낼 때 가장 강렬하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로 인해 어떤 신체가 현전하게 되는지를 밀도 있게 끌어올린다. 성해나의 「혼모노」는 무속신앙의 진위를 가리는 소설이라기보다, 예술이 다시 신체를 요구하게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평생 장수 할멈을 모셔온 박수무당 ‘문수’는 어느 날 앞집으로 이사온 ‘신애기’에게 할멈이 넘어가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수의 오랜 노력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박수무당이라는 직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험한 신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제 그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서슬이 날카로운 작두 대신 모형을 찾거나 유튜브를 보며 접신 연기를 연습하기 시작한다. 신앙이 자본이나 정치와 결속하며 도구화되고, 또 젊음과 새로움의 이데올로기 아래 무당 또한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소모되는 양상은 근대의 세속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무당은 이제 자본의 날렵한 속도 아래 밀려나는 노동자이자, 진정성을 연기해야하는 예술가이다. 이 소설의 결정적인 순간은 문수가 신애기에게 밀려나며 뺏긴 정치인 손님의 굿판, 자신이 초대받지 못한 그 자리에 가서 칼춤을 추기 시작하는 장면에 있다. 그는 신들리지 않았지만 밤새 매섭게 벼려놓은 칼날 위에 자신의 몸을 올리고 작두를 타기 시작한다. 날것으로의 칼날에 닿으며 그의 몸은 자연스럽게 떨리고 눈이 뒤집히며,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입가에 미소까지 드리운 채 신명을 내는 이 장면은 문수가 서사의 주인공 자리를 다시 탈환하는 순간이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무얼 알겠냐만은, 큭큭, 큭큭큭큭”이라는 마지막 문수의 목소리는 외부의 인정에 의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스스로 자신의 내력과 진정성을 긍정”12)하게 되는 절정의 순간으로 읽는 데서 더 나아가보면 어떨까. 이렇게 다시 말해볼 수 있겠다. 전근대의 무속은 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그를 등진 근대의 자리에서 비로소 현대 예술로 다시 탄생했다고. 숭고한 현현과 몰입이 신앙의 영역이라면, 문수의 작두춤은 오히려 이질감과 불편함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현대 예술에 가까워진다. 그의 퍼포먼스는 낭만주의적 예술가를 구성하던 천재와 영감에 스며있던 정신성을 해체하며 실재하는 몸의 물질성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물리적 능력과 무관하게 피를 철철 흘리며 경련하는 그의 신체는 차라리 표현주의적 충동을 보여주는 하나의 오브제다. 이 몸 위에서 원본과 사본의 구별은 철폐되고, 천재성은 치열한 아마추어리즘에 자리를 내어준다. 이 피 흘리는 신체는 실패와 무의미의 가능성을 끝까지 열어둔 채, 인간이 다시 시간과 신체를 예술의 비용으로 지불하게 만든다. 이 비용은 AI가 생성하는 예술의 무한 반복 가능한 오류가 아니라, 한 번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 시간으로 남는다. 어디로 갈지 모른 채 지속되는 이 작두춤은 사회적 생산이나 예술의 의미에 부합하는 결과를 생산하기보다, 의미의 즉각적 환원을 거부하며 지연된 시간을 발생시키는 사건이 된다.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예술에 대한 인식론적 틀과 자기 이해가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다루는 소설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훨씬 더 월등한 창작물들을 더 활발하게 생산해내는 상황에서, 밀려난 예술가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프로그램도 사람도 기계도 귀신도 아닌 미지의 존재” 같은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은 이를 유용한 툴로 간주한다고 해서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이를 도구로 치부한다면, 패배감 속에서도 창작자로서의 존재는 무사히 보존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결과로 증명되는 성취라기보다, 계속해서 조바심과 조급함을 만들어내는 예술 자체에 대한 집요한 열망에 가깝다. 이러한 열망은 예술 인공지능에 의해 영화판에서 완전히 밀려난 영완 선배의 모습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포르노를 만들면서조차 건조하고, 푸르죽죽하고, 앙상하고 깡마른 나무가 등장하는 자신만의 ‘인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혼이 죽어버릴 것 같기에 “사막에서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 영완 선배의 모습은 세속적 열망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도에서조차 철저히 외면받고 실패했을 때, 그의 예술적 열망은 몰락을 통해 역설적으로 증명된다. 영화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소설 속 인물들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상실의 감각, 잃어버린 동료이자 인간성을 향한 애도되지 않는 고통은 이 작품에서 붉은 신체라는 하나의 신체적 이미지로 응축된다. 영완 선배는 인공지능이 만든 예술을 보더라도 창작욕을 유지할 수 있는 마법의 ‘붉은 알약’으로 하와이 사과를 건넨다. “세상이 바뀌어도 너는 언제나 만드는 인간일 거야. 스스로 기억하는 한 언제나 영화를 찍고있을 거야.”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인간 ‘하와’를 떠올리게 하는 이 ‘하와이 사과’는 흥미롭다. 신과 유사한 생성형 인공지능 앞에서 인간은 발가벗겨진 듯한 황망함을 느끼며, 황급하게 자신의 기원을 발명해낸 것일까. 아니, 인공지능 시대 쓰인 새로운 창세기에서 인간은 스스로 뱀이 되어 자신을 유혹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좋겠다. 창세기에서 유혹은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드러내는 증표였지만, 이제 유혹에 넘어가는 나약함은 인간이 여전히 예술을 욕망하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증표로써 다시 읽힌다. 소설은 인간의 예술을 향한 집념과 희열은 우울과 절망이 그에 비례하는 무게로 따를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고 눌러 말한다. 결말부에 하와이 사과를 먹은 후 변이한 화자의 붉은 몸은 기계와의 통합을 거부하기 위해, 그리고 예술을 향한 내적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구의 장례식장에 가다 본 환각을 자신 안에 합체한 우울증적 형상으로 보인다. 강력한 잔상을 남기는 이 붉은 몸은 「혼모노」의 마지막 장면에서 피를 흘리는 몸과 다르지 않다. 이 소설들은 AI 시대에 예술은 이제 언어의 정교함이나 결과의 완결성으로 모방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몸과 감각을 통해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현전이라는 아우라를 다시 호출하는 듯 보이는 이 소설들은 과거의 진정성을 그리워하며,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아우라는 회복된 본질이라기보다 예술이 결과로 증명될 수 없어진 이후에 발생하는 부산물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이계성이 언메이크랩의 작업을 논하며 던진 비유가 유효해진다. “여느 언어와 마찬가지로 신탁의 언어에도 본질적인 의미가 내재하지는 않아서, 어떤 프레임 또는 인식틀을 통해 이를 이해할지는 언제나 받아들이는 쪽의 몫이었다”13)는 그의 말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언어 역시 별개의 진짜 의미를 품고 있기보다 해석의 장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타자와 되돌릴 수 없는 종결이라는 죽음의 감각은 이 해석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제 예술가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욕망이 과정에 들러붙는 자리, 그리고 그 욕망이 실패와 상실을 되돌릴 수 없는 비용으로 남기는 시간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예술은 결과로 증명되기보다, 실패와 상실의 가능성을 끌어안은 채 지속되는 수행으로 남는다. 그렇게 이 시대 예술가의 상은 붉은 몸을 가진 신체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1)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태양과의 대화』, 이계성 옮김, 미디어버스, 2023, 119쪽.2) 조너선 크레리, 『지각의 정지』, 유운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579쪽.3) 데이비드 조슬릿, 『예술 이후』, 이진실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2.4)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위의 책, 100쪽.5) 위의 책, 145쪽.6) 권보연은 연구자 자신이 직접 수행한 실험 속에서 인간언어와 생성언어가 ‘의미 혼종’과 ‘확률 혼종’이라는 상반된 미적 지향성을 가지는 방식으로 합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중에서 ‘확률 혼종’은 내용이 아닌 확률 층위에서 인간과 기계언어가 합성되며, 감정과 내용에 유착된 의미 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질 가능성을 지니기에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기한다. 권보연, 「결과 너머 문학기계로서의 AI」, 『다문화콘텐츠연구』 46집, 2023.7) 정지돈, 「쓰여진 문장과 쓰여지지 않은 문장 사이」, 『에피』 24호, 2023, 55쪽.8) 언메이크랩 외, 『잠재공간 속의 생태학: 재난, 생성신경망 그리고 비미래』, 미디어버스, 2023, 25쪽.9) 위의 책, 26쪽.10) 위의 책, 43쪽.11) 김언,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면서 제기되는 문제들」, 『현대시』 2023년 6월호, 111쪽.12) 성현아, 「반항하는 자는 부조리가 있나니, 그 가짜가 참되도다」, 『2024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문학동네, 2024, 292쪽.13) 이계성,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을 위한 몇 가지 질문들」, 언메이크랩 외, 앞의 책, 55쪽.
1 이번 봄에 단연 눈에 띄었던 것은 인공지능 시대에 적극적으로 인간이라는 의식을 탐험하고 매체를 다시 읽어내는 글들이었다. 2020년대 들어 인류세 관련 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비인간’ 담론들은 생성형 인공지능인 챗지피티ChatGPT의 등장 이후 다시 한번 요동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차지하고 있던 독보적인 단상 위에서 내려와 비인간과의 경계를 적극적으로 허물며 세계의 지도를 다시 그리려는 겸허한 기획은 급작스럽게 복잡한 불안에 갇힌 것 같다. 적어도 기계에 대해서라면 이미 우리는 동등하거나 어쩌면 한참 전에 초월당한 것은 아닌가? 경계 허물기로 인한 희열보다 불안이 확연히 압도하는 자리에서 『쓺』 2024년 상권의 특집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그 개체성과 집단성’과 ‘작은 기획—채굴 문화와 미적 감각’을 유독 흥미롭게 읽었다. 그리고 ‘작은 기획’에 실린 심효원과 윤원화의 짧은 글이 각각 인간이 향하려는 방향과 의지의 아름다움, 그 노력이 무산되는 수동태의 자리에서 감지하는 공포와 불쾌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느꼈다. 먼저 심효원의 「지렁이의 부드러운 건축물 만들기」는 비인간 행위자인 ‘지렁이-되기’를 통해 근대의 한계를 돌파할 것을 정중하게 요청하는 글이다. 지렁이가 땅과 맺는 일원적인 관계성과 분변토라는 건축물은 근대 이후 인간이 이룬 도시의 뚜렷한 경계와 고정성의 반대편에 있다. 지렁이의 건축물 만들기란 사실상 움직이고 먹고 배출하는 신체적 행위의 반복일 뿐이지만, “비인간들의 극도로 효율적인 메커니즘”이자 자신의 몸이 다른 존재와 물리적으로 닿는 매순간마다 “무차별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동력”1)이기도 하다. 촉각이 주도적인 지하세계에서는 시각이 미미해질 뿐만 아니라 시간성 역시 달라진다. 미래의 미결정성을 남겨두는 대신 물리적으로 접촉하는 것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순간’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글은 최근 신유물론을 비롯한 담론들과 풍요롭게 공명하는 하나의 아름다운 공상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지하세계로 향하는 방향성은 최근 SF 소설의 주요한 상상력의 기반이기도 하다. 정세랑의 「리셋」(『목소리를 드릴게요』, 아작, 2020)에서 행성의 모든 자원을 고갈시키던 자본주의의 질주를 멈추게 한 것은 인류 문명을 끝장내려고 내려온 지렁이들이다. 강제 리셋 이후 인간들의 자리는 자연히 땅속 깊은 곳이 되고, 지상은 다른 종들이 누리는 공간이 된다. 김초엽의 『파견자들』(퍼블리온, 2023)에서도 지상은 균류인 ‘범람체’의 공간이 되어버리고 인간은 감염을 피해 지하세계로 내려와 산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문명 말살에 가까운 아포칼립스를 맞닥뜨리지 않는 이상, 영화의 촉각성을 즐겁게 감각해온 인간이 미래의 지구를 위해 지렁이를 신속하게 체화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로 남는다. 물론 직접적인 실천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지구의 거대 환경 시스템의 핵심 행위자 자리를 재조정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겠다. 하지만 미래적인 지하세계로 들어가기에 인간은 아직 시각적 쾌락 속에 즐겁게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지적 유희를 야기하는 활자의 쾌감까지 포함해서. 윤원화의 「땅을 파는 손」은 채굴적 상상력의 매혹과 절망을 말한다. 데이터로 전환된 우리의 생태 에너지를 부의 원천으로 삼으며 굴러가는 미디어 산업 앞에서, 인간의 생산물·복제물·부산물·폐기물을 구별하기는 어려워진다. 디지털 기술로 구축되는 ‘아카이브 데이터’는 역사는 넘쳐흐르지만 이를 의미화하는 전통은 불가능한 곳이다. 윤원화는 과잉생산으로 범람하는 사물들 앞에서 맞닥뜨리는 불길한 실패에의 예감을 시앤 응아이Sianne Ngai의 ‘기믹gimmick’에 대한 반응으로 설명한다. ‘매직magic’의 애너그램에서 유래했다고도 하는 이 단어는 1920년대 미국에서 편법적 장치, 싸구려 트릭, 계산된 마법 등을 뜻하는 신조어로 출현했다.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 자본주의의 황홀감과 환멸을 모두 각인한 기믹의 불완전한 형식은 오늘날 삶과 예술, 또는 넓은 의미의 ‘사업’에서 흔히 발견된다.2) 단기적 이익 추구에 최적화되어 있는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가치 절하된 노동에 시달리는 대개의 사람들이 이 기믹의 유희에 이끌린다. 운에 따라 누군가는 축적된 자원을 폭발적으로 소모할 수 있으리라는 채굴적 상상력이 번성하는 가운데, 보상도 성취도 불확실한 예술 노동 역시 가치 체계에 대한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윤원화는 이런 진단과 고민 속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생산성 중독의 시대에 예술은 어떤 시간성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3) 심효원이 지하라는 공간과 이를 감각하는 촉각성에 의지해 의미 있게 압축되는 순간의 시간성을 말한다면, 윤원화는 ‘농사’와 ‘채굴’을 대비하며 채굴의 무책임한 풍요의 약속이 얼마나 파국적일 수 있는지 말한다. 최단기간의 이익에 매몰된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생산물은 넘쳐흐르지만 어떤 가치 창출도 담보할 수 없는 동시대 예술은 불투명한 시간을 표류하는 중이다. 이런 진단 속에서 디지털 자본주의에 의해 갱신되는 매체의 기술적 발전은 인간과 나란히 놓여 경계를 넘나들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환멸을 불러오는 맹목적인 대상으로 남는다. 인간의 ‘지렁이-되기’를 향한 아름다운 여정은 너무나 느리게 진행중인데, 가장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인정받고 있는 생성형 인공지능은 예술을 몰아치듯 양산해낸다. 인간의 몸은 자발적으로 물질과 동등하게 놓이기 전에 물질이 만들어낸 다른 가치들에 의해 가치 절하되며 밀려나게 될까? 생동하는 물질들 안에서 인간을 재의미화하려는 시도와 인공지능을 의심하며 인간 본연의 무언가를 지키려는 안간힘 사이에서 부각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아래의 비평들은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2 『쓺』의 특집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그 개체성과 집단성’을 여는 글은 근대 패러다임이 ‘개인’을 해방하고 자율적 주체로서 정립해왔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이 시대에 여전히 개인의 이념이 유효한지 묻는다. 개체성과 집단성이 직면할 변화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이 서문에 가장 직접적으로 응답하는 글을 꼽는다면 김태환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과 김재인의 「창의와 집단 지능—인공지능은 창작하지 못한다, 다만 제시할 뿐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김태환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은 기계 성능의 고도화가 필연적으로 인간의 중요성이나 가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에게 산업화 이후의 근대는 ‘저자의 시대’이며, 이는 기술 발전의 작용에 대한 인간의 반작용이 만들어낸 변화이고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방향타가 된 것은 저자라는 이념의 바탕에 놓인 ‘개인주의적 사상’이다. 이는 산업화 사회 속에서 부속물로 전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회 분석의 준거점을 개인에 두고 진리와 자유를 탐색했던 아도르노를 비롯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기조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 다시 독일 지성사의 문화 비판적 사상의 전통이 소구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김태환은 “항상적인 문화 공급 과잉의 시대”(37쪽)라는 진단에서 찾는다. 그에 따르면 소셜 미디어나 웹사이트, 유튜브 등 정신의 대상화로서의 객관 문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반면, 그 반대 방향인 객관 문화에서 주관 정신으로의 내화는 개인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치로 인해 그만큼의 양적 증가가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사람들은 알고리즘 속에서 타인과의 의미 있는 만남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더 심각한 것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객관 문화의 총체가 스스로 발언하고 생산하는 주체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런 위기감 속에서 이 글이 다시 강조하는 것은 ‘정신의 개별성’이다. “요컨대 모든 인간이 개인으로서 개별적 의지, 개별적 내면, 개별적 정신을 지닌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외부에서는 절대 들여다볼 수 없고, 직접 조작할 수도 없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자주적이라는 사실”(42쪽)을 변함없는 인간 존재의 조건으로 부각하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무분별한 열광에 휩쓸리기보다 이를 의심 어린 눈으로 찬찬히 사유할 틀이 우리에게 요긴한 것은 사실이다. 데이터에 얽힌 저작권 문제 역시 계속 규제안을 논의해나가야 할 비판적인 쟁점이다. 그렇지만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위기를 산업화 시대 이후의 위기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는 것은 혹시 너무 큰 틀에서의 접근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 작동 방식과 결과물이 인간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만들어진 자본주의의 차원에서만 다루어질 때, 새로운 매체와 관련해 충분히 사유되지 못하는 요소들이 생겨나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이 글에서 알고리즘에 갇힌 디지털 시대 개인의 부자유에 대한 우려는 빠르게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의 재소환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거듭 강조되는 개인의 개별적인 ‘의지’와 ‘내면’과 ‘정신’에서 신체의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 글에서 인공지능과 대립되는 요소로 논의되는 인간의 ‘의식’이란 단순히 합리적 이성만은 아닌 “수많은 감각적 심상과 기억·감정·소망·의지 등이 혼재하는 심적 상태”(46쪽)다. 알파고와는 다른 인간 바둑 기사의 의식을 예로 들면서 언급되는 긴장, 초조, 후회, 자책, 엉뚱한 연상 등은 “바깥에서 결코 완전히 알아볼 수 없는 복잡한 내면”(같은 쪽)으로 규정된다. 베일에 살짝 가려진 듯한 이런 인간 내면의 신비함은 물질적인 신체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진화해온 신체야말로 내면 이상으로 복잡성의 차원에 놓여 있지 않은가? 이는 “신체화의 말소가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와 사이버네틱스 포스트휴먼 양쪽 모두의 공통된 특성”이라는 캐서린 헤일스의 비판을 상기시킨다. 헤일스는 합리적 정신과 등치되는 자유주의적 주체가 “그 악명 높은 보편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신체가 자아와 동일시되지 않기 때문”4)이라고 말한다.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간의 한계는 곧 발전을 통해 ‘영웅적 개인’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유한한 삶을 가진 존재, 모든 능력에서 커다란 한계를 안고 있는 개별자로서의 인간만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여 어떤 감동적인 위대성에 이를 수 있”(53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반드시 육체의 신경과 근육의 단련 과정을 동반하며 그것이 생각과 행동에 긴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잠시 괄호 안에 두어진다. 이 글의 전반적인 주장이 온당하게 느껴지면서도 그 전제가 되는 자율적인 개인상과 관련해 못내 마음에 걸리는 것은 개인이 지향해나가야 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전제되어 있는 발전과 성장이라는 지극히 근대적인 가치다. 생산과 창조의 주체로서의 영웅적 개인이 아니라 소비와 소멸의 주체로서의 개인에 대해 우리는 좀더 다른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또 근대 이전에 우리가 ‘저자’가 불투명한 긴 구술 시대를 살아왔음을 떠올린다면, ‘저자의 시대’ 이후의 저항이 활자와 개인을 넘어선 범주에서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3 김재인의 「창의와 집단 지능」은 이 질문에 대해 조금 다른 지점에서 답을 내놓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지능은 본질적으로 집단적 성격을 가지므로 ‘집단 지능’이라고 해야 한다. 개체를 중심에 놓으면 ‘창의’를 중시하게 되지만, 그 새로움은 다른 개체가 ‘모방’하고 ‘확산’하지 않는다면 사멸하고 만다. 그렇기에 인간이 다른 생물종과 달리 ‘집단 기억’과 ‘문화 기억’이라는 형태의 외장 기억을 건설함으로써 지식과 기술의 확산과 축적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은 중요하게 여겨져야 한다. 저자는 낭만주의 미학과 예술에서 강조하는 천재적 개인과 창조력에 대한 신화를 뒤로하고 “인간이란 거대한 기억”(62쪽)이라 정의 내린다. 이는 물론 질적 도약이 아닌 집단으로서의 양적 축적을 말한다. 김태환이 인간의 의지, 내면, 정신이라는 추상적인 면을 중시한다면, 김재인은 “나의 생각이란 시한부 소유물”(63쪽)에 가까울 수 있으며 그 휘발성을 지켜주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물질’ 혹은 ‘미디어’”(62쪽)라고 강조함으로써 그것을 외화된 집합적 사물성으로 바라보며 그 반대편에 선다. 그런데 이 글은 ‘컴퓨터가 자연어를 다룬다는 것’이라는 장부터 급작스러운 단절을 드러내며 도약한다. 앞에서 인간의 생각 자체를 미디어이자 집단 기억의 저장고로 본 것과 다르게, 예술과 창작의 영역을 다룰 때는 컴퓨터가 자각 혹은 성찰을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컴퓨터는 예술 능력이 없다”(66쪽)고 확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기계를 바라보는 김재인의 시점에는 도구적 차원과 존재적 차원이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글은 창작의 정의를 “스스로 선택하고 평가하는 능력이 발휘되었느냐”(67쪽)에 두는데, 중요한 점은 저자가 그 평가 주체의 자격을 ‘생물’로 단정한다는 것이다. 생물은 “생존과 번식을 스스로 반복”하는 유기체이고, 이 글에 따르면 평가 역시 “생존과 번식에 성공하기 위한 지각 처리와 행동의 연쇄”(70쪽)다. 이 기준에 따르면 애초에 기계는 아무리 ‘집단 기억’의 ‘미디어’로서 최적화되어 있다고 해도 무기물이라는 점에서 평가 능력이 없는 것으로 배제 당할 수밖에 없다. 그가 이렇게 유기체의 항상성과 관련된 기준을 평가 능력과 일치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저작 『AI 빅뱅』에서 참조할 수 있는 지점을 좀더 찾아보면, 이는 “몸의 고집스러움”5)이라는 말과 함께 구체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심지어 같은 프롬프트를 주더라도 생성물이 크게 바뀌는 무작위성randomness을 보여주는데, 이는 휘발성이 강하다. 그러나 인간은 불완전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자기 생각을 고수하는 면을 지니는데, 저자는 이를 몸에서 비롯된 문제로 보는 것이다. 이 장에 바로 이어지는 질의응답에서 한 질문자는 “세계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몸을 가지는 것이다”6)라는 전제 위에서 인공지능이 세계를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강인공지능으로 발전할 방법이 있는지 묻는데, 김재인은 이에 대해 ‘몸의 회복력’에 대한 이야기로 답한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몸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몸은 생각을 “바로 휘발되지도 완전히 고착되지도 않은 어느 중간 지점”7)에 붙잡아둔다는 것이다. 김재인은 인공지능과 다른 인간을 논하는 데 있어 복잡성을 가진 신체의 차원을 살려내고자 한다. 하지만 창작을 논하면서부터는 김태환의 논의와 유사한 탈신체화의 방향을 답습한다. “진화 과정에서 살아남았다는 특징”은 “필멸하는 인간이 불멸하는 비결”(70쪽)로 치켜세워지고, 진화를 위해 외부와 교섭하며 몸 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피드백 루프는 유기체만의 고유한 신체적 능력으로 남는다. 인공지능은 몸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케이트 크로퍼드가 인공지능은 추상화된 지능이 아니라 오히려 “체화되고 물질적인 지능이며 천연자원, 연료, 인간 노동, 하부구조, 물류, 역사, 분류를 통해 만들어진다”8)고 강조한 사실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혹은 그와 마찬가지로 유기체의 일차적인 목표로서의 생존이 진화의 필수 사항이라 말하는 신경과학 연구자 아닐 세스가 우리의 지각은 사실 ‘통제된 환각’이자 ‘최적의 예측’이라 설명했음을 염두에 두면 어떨까. 그에 따르면 ‘당신이 된다는 것being you’, 즉 인간의 ‘동물기계’적 본질과 의식적 자기 사이의 연결고리는 “신체 자체가 가진 현재와 미래의 생리적 조건에 대한, 형태도, 모양도 없고 제어 중심적인 지각적 예측”9)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인공지능 역시 지극히 물질적인 신체를 지니고 있으며 인간 역시 체화된 자아로 인한 기계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때, 예술을 창발시키는 창의성 개념이 다르게 읽힐 가능성이 열린다.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승부 후에 마련된 『인문예술잡지 F』 21호의 특집 ‘고함: 비-인간’에서 이진경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인공지능이 창조성을 가질 수 있는 논리적 가능성을 함축한다고 주장했다. 괴델의 정리는 수학적 추론의 과정 속에 언제나 결정 불가능한 명제가 ‘숨어’ 있을 수 있음을 의미하며, 그렇다면 인공지능의 수준에서도 공리계로 귀속될 수 없는 명제(결정 불가능한 명제)를 생성할 수 있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계의 형식적 추론에서조차 새로운 명제의 창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역으로 생명체의 진화가 어떤 경로를 밟아왔는지 설명한다. “변이mutation의 누적에 의해 진화는 이루어”지지만 처음 “생명체의 변이는 지배적인 개체군 안에서 일종의 ‘장애자’나 ‘고장’으로 간주된다”10). 하지만 환경이나 생존 조건에 따라 변이가 진화된 변종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면, 기계가 만들어내는 예측되지 않은 결과의 출현 역시 ‘고장’이나 ‘장애’가 아니라 새로운 능력의 ‘창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창조의 출발점이 아니라 결과물에 초점을 맞춘 논의다. ‘인간 없는 예술’이 도래하려는 시기에 우리는 다시 인간적인 무언가를 기계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는 기술적 특이점이 올 때마다 반복되어온 정동이기도 하다. 이 앞에서 좀더 차분하게 이전의 논의들을 정리하고 축적할 필요를 느낀다. 2024년 『쓺』의 특집이 창작자이자 예술가가 서 있는 주체의 자리에서 출발했다면, 2016년 『인문예술잡지 F』의 특집은 그 결과물인 작품의 자리에서 논의를 시작했다. 그렇다면 감상자의 자리에서 본다면 어떤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 신예슬의 『음악의 사물들』은 음악이 기술적 혁신을 이루는 순간마다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넓혔는지를 따라 음악사를 재구성한다. 자동 피아노의 경우에도 그 연주를 더 실제처럼, 더 자연스럽게, 더 인간답게 만들겠다는 목표는 거의 달성되었다. 그러나 자동 피아노가 만들어낸 경험이 정말 특별하게 의미화되는 것은 인간의 연주라는 원본 혹은 목적지를 버렸을 때이다. 인간의 연주라는 목적지를 소거해버리고 이 사물의 독자적인 가능성에 집중해보는 것이다. 연주하는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스스로 뭔가를 연주하거나 재생할 수 있는 악기가 등장했고 그것이 인간의 행동을 인간 없이 손쉽게 해냈다면, 그 기계의 핵심적인 가치를 ‘인간의 복제’가 아니라 ‘탈脫인간’으로 재조정할 수도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기계장치가 꼭 연주자를 대신할 필요는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기준점만 제거한다면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수많은 음악적 가능성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 자동 피아노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연주를 들려줄 수 있었다. 인간의 연주를 기록하고 인간의 연주를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연주의 대리자는 오히려 새로운 예술형식으로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스스로 연주하며 그 누구보다 기계적인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독자적인 예술형식 말이다.11) 우리는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에 대해서도 그것이 오히려 새롭고 독자적인 예술형식이 될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을까? 이 모방은 때로 인간에 한참 미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때로 인간을 이미 초월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계는 이미 희미해지고 있던 자율적인 개인 주체로서의 예술가상을 어떻게 바꾸어나갈까. 또 인간의 예술적 집념은 어떻게 예술 형식들을 바꾸어나갈까. 모든 것이 뒤흔들리는 가운데, 불안만이 정확하게 인간의 자리를 응시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이 불러오는 균열 속에서 인간에 대한 고정된 사유를 과감하게 벗어날 수 있을 때 인간과 예술 모두에 새로운 시야가 열릴 것이다. 1) 심효원, 「지렁이의 부드러운 건축물 만들기」, 『쓺』 2024년 상권, 368쪽.2) 시앤 응아이는 디지털 자본주의가 가속화되던 2010년대 후반의 미술과 문학작품을 분석하면서 기믹의 이론화에 착수하는데, 기믹은 의심스러운 도구성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키치와는 다른 저질 예술로 취급되면서도 자본주의 가치 체계와 그 이면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의심을 표면화하는 미적 전략으로도 쓰일 수 있다. 윤원화는 이 글을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공모 프로그램 선정작인 시각예술 콜렉티브 랩삐의 에 대해 설명하며 시작한다. 이 전시는 관객이 옥수수 농사 시뮬레이션을 완수한 후 ‘콘 코인’이라는 가상 화폐를 받아 실제 뻥튀기 한 봉지와 교환하는 경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복 노동이 이에 비례하는 가치 창출과 기쁨으로 이어지는 대신, 콘 코인이라는 불분명한 요소가 끼어들면서 매끄러운 교환 가능성이 흔들릴 때 이 간극에서도 기믹이 관찰된다고 할 수 있다.3) 윤원화, 「땅을 파는 손」, 같은 책, 383쪽.4) 캐서린 헤일스,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사이버네틱스와 문학, 정보 과학의 신체들』, 허진 옮김, 열린책들, 2013, 27쪽.5) 김재인, 『AI 빅뱅—생성 인공지능과 인문학 르네상스』, 동아시아, 2023, 153쪽.6) 같은 책, 156쪽.7) 같은 책, 157쪽.8) 케이트 크로퍼드, 『AI 지도책—세계의 부와 권력을 재편하는 인공지능의 실체』, 노승영 옮김, 소소의책, 2022, 17쪽.9) 아닐 세스, 『내가 된다는 것—데이터, 사이보그,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 의식을 탐험하다』, 장혜인 옮김, 흐름 출판, 2022, 243쪽.10) 이진경, 「인공지능시대의 예술작품」, 『인문예술잡지 F』 21호, 2016, 25쪽.11) 신예슬, 『음악의 사물들—악보, 자동 악기, 음반』, 작업실유령, 2019, 115쪽.
1. ‘서울의 봄’을 기다리며 유신 독재 시대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을 다시 돌아다보면서 근래에 극장가의 흥행 기록을 다시 쓴 영화 (2023)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지나간 과거의 일이지만, 또한 그렇기에 ‘서울의 봄’이 당시로써는 아직 오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엔딩 크레딧과 함께 솟아오르는 아쉬움과 슬픔, 분노의 감정은 덜해지지 않는다. 40여년의 시간차를 무색하게 만드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그 시대를 지나오지 않은 세대의 관객들에게까지도 강력하게 휘몰아친다. 그러니 그 시대를 온몸으로 뚫고 나갔던 이들은 눈앞에서 물러나는 봄을 바라보며 무엇을 느꼈을지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유영주의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소명출판, 2023)이 제목을 따온 「겨울공화국」의 시인 양성우는 그의 또 다른 시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에서 그 봄을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들려준다.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셔준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곤백번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이 …… 한반도에서 다만 녹슬지 않는 비싼 넋으로 밤이나 낮이나 과녁이 되어 내가 죽고 다시 죽어 스며들지라도 오는 봄에 나무꾼을 쓰다듬어 주는 작은 바람으로 돌아온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후략)…1)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실 수 있다면, 오는 봄에 작은 바람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그의 시가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죽고 다시 죽어 넋으로 스며든다고 해도 좋다는 시인의 결연한 고백을 듣고 나면 그러나, 또 한 번의 겨울 속으로 선선하게 걸어 들어갔을 그들의 의지를 떠올리게 된다. 봄은 물러갔어도,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에서 주요하게 살펴보고 있는 김지하와 황석영, 조세희, 이문구는 신군부 독재 정권하에서도 계속 문학이라는 싸움과 저항을 지속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그들에게는 “오는 봄”을 기다리며 문학에 대한 믿음과 비전으로 눈보라를 뚫고 한 시대를 걸어 나왔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영주의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은 바로 그 역사에 관한 연구이다. 2. 시와 정치와 사랑 시작은 김지하다. 저자가 냉전시대 동아시아의 권력 지형 및 상세한 역사적 맥락과 함께 김지하를 통해 보여 주고 있는 것은, 그러한 냉전 체제의 하위 파트너인 유신 독재 정권과 한바탕 벌여 놓은 그의 싸움판이다. 그의 시 「곡(哭) 민족적 민주주의」(1964)와 「오적(五賊)」(1970)이 어떻게 ‘유신의 심장’을 들었다 놓았다 했는지, 왜 유신 독재 정권은 그의 ‘세 치 혀’와 붓 끝에서 흘러나오는 시를 그토록 두려워했는지, 그러한 김지하의 시는 근본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저자는 ‘오적 필화사건’의 법정 풍경을 복원한다. 잘 알려진 대로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하에서 필화 사건은 드물지 않게 일어났고, 더군다나 김지하의 「오적」이 처음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특별히 ‘오적 필화사건’에 주목하는 이유는 “1970년 김지하의 체포에 이은 100일 간의 재판[이], 법정을 판소리나 탈춤이 주로 공연되는 야외의 마당으로 탈바꿈시켰다”는 데 있다.2) 저자는 관련 인물들의 여러 회고를 바탕으로 당시 재판이 흡사 검사가 양반의 담화를 담당하고 김지하가 말뚝이를 맡은 판소리 풍자극과도 같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유신 독재 정권은 도리어 김지하에게 그가 오래 탐구했던 전통 마당극을 마음껏 펼칠 무대를 깔아주었던 셈이다. 이후 그 무대는 김지하가 “문학, 폭력, 혁명, 구원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펼칠 수 있는 대중 강연을 위한 연단”(95)으로 확장된다. 당시 재판을 방청했던 더글러스 루미스(Charles Douglas Lummis)의 기록을 인용하여 저자는, 재판 방청객들이 김지하의 발언을 받아 적어 재판장 바깥으로 빼돌린 뒤 그들이 속한 조직으로 돌아가 그에 대해 토론하고 연구하게 되는 방식을 흥미롭게 포착한다. 이는 시인의 말이 변론과 강연, 연설을 넘어서, 유신 독재 체제하의 민중에게 어떤 구원의 메시지처럼, 마치 ‘예언’처럼 전달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저자에 따르면 루미스는 실제로 김지하에게 “에언자”라는 칭호를 부여하기도 했다.(87) 오래 전 종교가 시와 정치로 분리되지 않는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이 시기 김지하의 문학 세계는 세속화 시대에 시와 정치를 동시에 추구하려 했던 어떤 종교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이후 “시인으로서의 그의 국제적 명성은 분명 그가 겨울 공화국의 순교자가 됨으로써 크게 높아지게 되었다.”(50) 아이러니하게도 유신 독재 정권은 김지하를 위대한 시인으로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게다가 그 어떤 비평가나 애독자보다도 꼼꼼하게 김지하의 시를 읽고 분석하며, 그 힘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했기에 그들은 김지하에게 더욱 집착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검찰은 “시인의 수첩에 적힌, 아직 쓰이지 않은 시와 희곡에 대한 메모”(95)들을 증거로 제출하며, 마치 시인론을 쓰는 문학 연구자인양 김지하의 문학 세계를 탐구해 들어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문학이 하는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문학을 억압하고 지배하려면 역설적이게도 그 안에 잠겨들어야 한다. 지배와 억압은 대상을 이해할 때 가능한 것이고, 문학에 대한 이해는 오직 문학의 세계 안으로 침잠할 때 가능한 까닭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문학이 하는 혁명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지배 권력조차 그 안으로 휘말리고 뒤엉켜 들어가게 만드는 것, 그것이 시와 정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유신 독재 시대 문학의 혁명적인 것이었다. 굳이 알랭 바디우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낸다는 점에서 사랑과 혁명은 ‘사건’이며,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문학도 ‘사건’이 된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의 논의가 무르익을 때, 그 자체로 1970년대 문학의 ‘사건’이기도 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이 등장한다. 핵심은 이 연작소설집이 이웃 사랑을 미학적으로 실천한 텍스트라는 것인데, 저자는 그 단초를 「뫼비우스의 띠」에서 발견한다. 연작소설의 첫 번째 이야기이기도 한 「뫼비우스의 띠」는 ‘굴뚝 청소를 마치고 그을음으로 얼굴이 새까맣게 된 아이와 그을음이 전혀 묻지 않은 깨끗한 얼굴의 아이 중 누가 얼굴을 씻을 것인가?’ 하는 질문과 함께 수수께끼 같은 문답을 주고받는 교사와 학생들의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이 문제가 곧 뫼비우스의 띠이면서,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세계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함을 암시하며 끝맺는다. 저자는 이 뫼비우스의 띠 수수께끼를 지젝(Slavoj Žižek)의 ‘시차적 관점(parallax view)’, 즉 축소 불가능한 간극을 잇기 위해 애쓸 것이 아닌, “간극 그대로를 인식하는 것”으로 해석한다.(189) 안과 밖은 결코 만날 수 없지만, 뫼비우스 띠에서는 그 안과 밖이 그대로 안쪽 면이면서 바깥 쪽 면으로 존재할 수 있는 차원을 인식하는 것이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서, 당연히 그을음이 묻은 아이가 세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에게 교사는 얼굴에 그을음이 묻지 않은 아이가 친구의 새까만 얼굴을 보고 얼굴을 씻어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답한다. 이윽고 다른 학생이 그와 같이 대답하자, 다시 교사는 동일하게 굴뚝 청소를 한 아이들 중 한 아이의 얼굴은 깨끗하고 다른 아이의 얼굴은 더러운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반박한다. 그러니까 애초에 교사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해답 없음이 곧 안과 밖의 구분 없는 뫼비우스의 띠의 관점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굴뚝청소부 수수께끼와 뫼비우스의 띠라는 위상수학적 개념과 개발독재시대의 소설에 대한 해석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마치 뫼비우스의 띠를 만들 듯, 유영주 역시 그의 방법론적 시각을 한 차례 꼬아 지젝에서 케네스 레이너드의 ‘이웃’ 개념으로 비약한다. 사랑(특이성과 차이)과 정치(평등과 동일성)는 마치 뫼비우스 띠의 양면과도 같은데, 그 띠를 한 번 꼬아 연속체로 만드는 “사랑과 정치의 이음매” 지점이 “이웃”이라는 존재라는 것이다.(189) 저자는 이로부터 조세희 소설의 미학인 ‘이웃 사랑’을 이끌어 낸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난쏘공』을 난해한 모더니즘적 텍스트처럼 보이게 하고, 그래서 리얼리즘론자들에게 지식인적인 환상 소설이라고 비판받게 만들었던 몽타주 기법을 ‘이웃 사랑’의 주된 미적 원리로 파악하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1970년대 문학은 “당신은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십니까”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박태순의 ‘외촌동 사람들 연작’과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1977)가 그러했을 뿐만 아니라, 대중소설 작가로 197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최인호 역시 일찍이 「미개인」(1971)에서 한센병 환자의 아이들과 같은 학교에 보내는 것을 반대하고 나선 우리 주변의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를 소설로 쓴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첫 손가락에 꼽힐 작가는 단연코 이문구일 것이다. 『관촌수필』(1972)에서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이문구의 이채로움이 빛을 발하며, 유영주가 말하는 ‘인접성의 윤리’를 적극적으로 미학화한 이상적인 이웃 공동체가 그려진다. 저자는 이문구의 아버지와 두 형들이 좌익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던 개인사를 바탕에 둘 때, 이문구의 이웃에 관한 이야기가 그저 단순히 전통사회의 풍요로웠던 이웃 공동체에 대한 환상일 수 없음을 역설한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전쟁 전후의 무수히 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들 중 많은 경우는 이웃들 간에 벌어진 비극이었다. 크게는 계급과 종교를 바탕으로 나뉜 좌와 우의 정치적 이념을 따라 서로 갈등을 빚었고, 심한 경우 학살로 이어졌다. 이러한 한국 현대사의 맥락 속에서 이문구 소설 속 이웃은 “이념적 명명의 대안”으로 제시되며 특별한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142) 저자는 조세희와 이문구의 소설을 ‘이웃 사랑의 미학’과 ‘인접성의 윤리’로 의미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그러한 문학의 미학과 윤리가 박정희 독재 체제의 산업화와 반공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근원적인 힘이었음을 주장한다. 그 힘이, 플라톤 이래 본질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문학을 정치와 만나게 하고, 동시에 어떤 정치를 극복하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저자의 의도대로 1970년대 문학은, 시(문학)와 정치와 사랑이 ‘인접성’의 원리를 따라 이어지지만 그 간극을 그대로 유지하며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현실을 넘어서는 차원의 위상을 형성하는 상호 연결과 긴장 관계로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3. 마지막 문사(文士)의 시대 그러나 이 책의 부제인 ‘박정희 시대 한국문학과 저항’에서와 같이, 한국 문학이 저항과 나란히 놓일 수 있는 시대는 곧 저문다. 대체로 그것은 1990년대, 그 유명한,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실감한 때와 겹친다. 고진은 1970년대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한 사람인 김종철과 만났을 때 왜 문학을 그만두고 《녹색평론》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알려진 대로 김종철은 1991년 《녹색평론》 창간과 함께 문단을 떠나 생태주의 운동에 몸담았다. 그는 “자신이 문학을 했던 것은 문학이 정치적 문제에서 개인적 문제까지 온갖 것을 떠맡는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모순조차도 떠맡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언제부터인가 문학이 협소한 범위로 한정되어 버렸다, 그런 것이 문학이라면 내게는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그만두었다”고 답했다.3) 이것은 유신 독재 정권에 강력하게 저항했던 ‘창비’ 계열 문학비평가의 고백이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이 포착하고 있는 문학의 사회 참여(앙가주망)와 정치적 실천, 특별히 양심 있는 지식인으로서 시인과 소설가 들이 독재 권력과 맞서 싸우는 역사는, 이제 정말로 역사가 되었다. 물론 그러한 역사가 한국에서 1970년대 유신 독재 정권 시대라는 국면에 가능했고 정점에 도달했던 것은, 과거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국가였던 후진국에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설 때 그에 맞서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를 외칠 수 있는 것은 소수의 지식인들뿐이었던 세계사의 보편적인 패턴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고진이 말한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장르가 소설(novel)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한국 문학사에서 ‘소설의 시대’라고 불렸던 1970년대의 특수한 문학사적 맥락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의 논의가 작가를 앞세우면서 참조하는 세 가지 문학 개념 중 첫 번째인 ‘리테로크라시(literocracy)’라는 동아시아의 문치주의적인 문학 개념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한국 근현대 문학사로 한정해 본다면 그것의 유구한 역사는 시인과 소설가가 독립운동 투사가 되곤 했던 식민지 시대 ‘문사’ 개념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사의 시대는, 이 책에서 보여 주고 있는 것처럼 실로 1970년대 문학에서 마지막으로 가장 강력하고 화려하게 빛을 발한 뒤, 끝났다.4) 이 책의 첫 장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김지하의 시 「진리」에서 시인은 “바람 속이 내 집”이라고 노래하고 있었지만,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 황석영은 그가 2017년 출간했던 문학적 자서전 『수인』에서 방북사건으로 떠돌던 시절을 회고하며 그때의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결국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문학이라는 집이었다”라고 고백한다.5) 한때 바람 속을 집으로 삼아 온갖 경계를 넘나들며 활보했던 문사들에게 문학의 지경이란 없었다. 김종철이 말했던 것처럼 그들의 문학은 “온갖 것을 떠맡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문학을 떠났거나, 문학이라는 집 안으로 돌아간다. 이제 문학은, 그리고 작가는 무엇을 하는가. 유영주는 결론에서 박민규 소설의 저항성을 김지하에 견주며, 문학은, 그리고 작가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박민규는 그의 대표작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표절 사건 이후로 그럴 수 있는 정당성을 상실했다. 이것은 분명 징후이기도 하다.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예감하게 했던 작가 중 한 명인 무라카미 하루키를 통해 우리는 이미 오래 전 문사의 정체성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로 완벽하게 대체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지위마저 위태롭다. 최근 작가들의 소설 속 자기 재현은 어떠한가. 그들은 비정규직 중에서도 고용안정성과 소득이 가장 낮은 축에 들며, ‘프리랜서’라서 정부가 청년층에 제공하는 대출 상품에도 부적합해 은행 창구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으로 소설가를 재현한다(박서련, 「A Queen Sized Hole」,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민음사, 2022). 지방 변두리의 3천만 원짜리 아파트가 자기 집이 되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며, 마오쩌둥의 참새들처럼 어디에도 내려앉을 수 없어 지쳐 떨어져 죽을 위기에 놓여 있다(이서수,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젊은 근희의 행진』, 은행나무, 2023). 오해하지 말라. 이것은 어떤 가치 판단도, 비판도, 자조도 아닌, 현상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이 시대의 문학은 이제 유신 독재의 겨울 공화국과는 완전히 다른, 또 다른 눈보라 속에서 분투해야 하는 것이다. 1) 양성우, 『겨울공화국』, 화다, 1984, 18면. 2) 유영주, 이형진·정기인 역,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 박정희 시대 한국문학과 저항』, 소명출판, 2023, 92면. 이후 이 책 인용 시 본문에 쪽수로 표기. 3)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역, 『근대문학의 종언』, 도서출판 b, 2006, 49면. 4) 어떤 이들은 1980년대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문학과 정치의 관계라면 그것은 1980년대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1980년대에 문학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팽배했던 반지식인적인 분위기 속에서 작가는 1970년대와 같은 문사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1991년 5월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 치워라”라는 김지하의 충격적인 발언과 그것을 둘러싼 반응 그 이면에는 1980년대를 거치며 그가 더 이상 1970년대와 같은 문사의 지위에 서 있을 수 없었던 상황이 엄연히 자리한다고 볼 수도 있다. 5) 황석영, 『수인』 1, 문학동네, 2017, 36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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