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현대비평 2024년 가을호(제20호)
옷의 메커니즘 : 환유 경제의 뉴블루칼라들
1. 뉴블루칼라의 탄생
널리 알려진 이솝 우화 「해와 바람」은 한 나그네를 두고 이루어지는 힘겨루기를 다룬다. 나그네의 옷을 먼저 벗기는 자가 이기는 이 싸움에서 바람은 있는 힘껏 숨을 불어대고 해는 나그네가 스스로 옷을 벗을 수 있도록 빛을 내리비친다. 그 결과, 누구나 아는 대로 승리는 해에게 돌아가면서 이 이야기는 지금껏 ‘부드러움의 힘’을 가르쳐왔다. 그런데 해의 현명함을 상찬하는 일을 잠시 멈추고 나그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 우화는 조금 다르게 읽힌다. 그는 해와 바람이 자신을 두고 모종의 경쟁을 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한 채 변덕스러운 날씨에 맞서 옷을 여미거나 벗는다. 그것이 온전히 자신의 선택이었다고 믿으며. 그를 통제하고 부추겼지만 결코 보이지 않는 해와 바람의 공작과 저들 간의 다툼에 그는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던 셈이다. 이제 나그네의 자리에 우리를 놓아보자. 섬뜩하지 않은가. 우리가 옷을 입고 벗는 일이, 더 나아가 오늘 아침 옷장에서 꺼내 지금 입고 있는 옷에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였을 수 있다는 것은. 이것이 정말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는 사실은.
사실상 옷은 작동 원리가 감춰진 시대의 산물이다. 그간 패션업계는 유행이라는 말로 우리가 특정 옷을 선택하도록 유도해 왔다. 이러한 사실은 지난해부터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른 올드머니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상류층에서 태어나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올드머니’를 상속받은 이들에 대한 상상에 기반한 이 유행은, 부를 타고난 이들은 이를 애써 과시하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하여 브랜드 로고가 드러나지 않으며 고급스러운 소재로 만든 제품을 선호하는 현상이다. 승계된 부에 대한 동경은 그 기원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할 정도로 인간의 보편적인 바람이라는 점에서 이와 같은 유행은 그리 새로운 현상으로 여겨지지 않을 수 있다. 특히 2010년대 중반부터 성행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유효한 비유로 활용되고 있는 수저론을 떠올려본다면 이는 계층적 질서의 엄연함을 재확인하게 하는 또 다른 비유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올드머니룩이 타겟으로 삼은 대상이 ‘뉴머니’라는 점, 즉 자신의 세대에서부터 부를 축적한 이들이라는 점에서 여기에는 부에 대한 보편적 욕망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조금 더 복잡한 맥락이 얽혀있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고소득 근로자가 된 뉴머니들은 장시간 고강도 몰입 노동을 견디거나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란 기치 아래 높은 위험성을 감수하며 주식이나 가상화폐와 같은 금융투자를 감행한다. 건강과 가능성을 담보로 불안하게 카지노 칩을 만지작거리기보다 자기 몸을 모두 비빌 수 있는 안정적인 언덕에 대한 그들의 갈망을 패션계는 상상한다. 능력과 노력만으로 사회적·경제적 보상이 이루어지던 시대가 저물고 태생적 조건이 능력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근래 확산된 능력주의에 대한 불신을 실전에서 경험하고 있는 뉴머니들의 박탈감을 패션사업은 은밀히 이용한다. 물론 그들이 올드머니룩으로 입는다고 그 결핍이 채워질 리는 없다. 다만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점은 노력을 통해 부를 거머쥔 자들마저 타고난 탯줄을 동경하는 현실을, 교육을 통한 계층이동의 신화가 사라지고 어느새 신분제가 회귀한 지금을 옷이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서 옷의 미학이 사실상 경제학과 긴밀히 관련된 채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패션계와 유착한 자본주의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에 따라 뉴머니들이 자신들이 그간 무너뜨렸던 신분 질서를 자신도 모르게 다시 세우는 방식으로 소비하고 있음을 바라보며.
이러한 옷 갈아입기 현상은,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최근 프레카리아트층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지난 시기의 프롤레타리아가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 중 하나를 선택하여 대체로 평생 같은 옷을 입었던 것과 달리, 최근 일부 청년들은 태어날 때부터 입고 있었거나 한때 입었던 하얀 옷을 푸른색으로 갈아입은 후 필요에 따라 다양한 푸른 색감의 옷을 골라 입는다. 어느 날 갑자기 ‘블루칼라’로 옷을 갈아입고 나타나는 ‘화이트칼라’를 보는 일은 이제 그리 놀랍지 않다. 1) 플랫폼은 옷장을 활짝 열어놓고 옷을 갈아입을 이들을 기다린다. 그로 인해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서로 큰 차이를 갖지 않던 프롤레타리아들과 달리 프레카리아트층의 내부 풍경은 다채롭다. 앞선 분류법대로 구분해 보자면 올드블루칼라, 그러니까 원래부터 블루칼라 계층에서 태어나 변함없이 육체노동을 하는 이들과 뉴블루칼라, 화이트칼라 계층에서 태어났거나 과거에는 사무노동을 했지만 지금은 육체노동을 하는 이들, 혹은 학력 수준이 높아 장기적으로는 화이트칼라로서 정규직 노동자로 일하기를 꿈꾸지만 잠시 꿈을 미뤄두고 단기 육체노동을 하는 이들이 모두 프레카리아트층에 섞여 있다.
최근 우리시에서 그려지는 노동자의 전례없이 다양한 면모는 이러한 프레카리아트 분화 현상이 반영된 결과물로 보인다. 2) 가령, 최지인의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창비, 2022)에서 다뤄지는 프레카리아트들은 “돈이 없는 자라서 일할 수밖에 없었”(「최저의 시」)던 부모에게서 태어나 마찬가지로 “굶어 죽지 않으려면/ 일해야”(「문제와 문제의 문제」)하는 삶을 살아간다. 이에 비해 류휘석의 『우리 그때 말했던 거 있잖아』(문학동네, 2023) 속 이들은 일은 하되 “사회의 기준치로 봤을 때 불필요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일” 정도만 하면서 “엄마의 전재산으로 얻은 전셋집”에서 대부분 “놀고먹는”다. 이들은 자신들을 “도망의 왕”(「이 글에는 옮긴이만 등장한다」)이라 지칭하면서 장기적·정기적으로 일을 하는 미래를 계속해서 유예한다. 두 시집 속 청년들은 모두 프레카리아트로 분류되며, 어쩌면 플랫폼에서 배분받은 동일한 노동을 하고 있을지 몰라도 노동에 대한 태도, 노동자로서의 자기 인식, 무엇보다 불안정한 지위로 인한 그들의 내면 풍경은 동일하다고 보기 어렵다. 이것은 최근 현대시에서 나타나는 프레카리아트의 특성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을 한데 뭉뚱그려 설명할 수 없는 이유다.
이 글은 이들을 구분하여 살펴볼 필요를 제기하며, 우선 ‘뉴블루칼라’들, 그러니까 젊은 고학력 중산층 프레카리아트에 집중해 보고자 한다. 특히 한재범의 첫 시집 『웃긴 게 뭔지 아세요』(창비, 2024)에서 다뤄지는, 임시로 프레카리아트 되기를 선택한 이들 중 일부의 내면을 살펴봄으로써 최근 시에서 노동의 프레카리아트화 혹은 플랫카리아트화(플랫폼 기반의 프레카리아트화)3)의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으며 그 문제가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데 이 글의 목적이 있다. 물론 이들에 한정된 이 글의 논의는 계층 내 또 다른 선 긋기라거나 그들 사이 연대의 어려움이 문제 되는 지금, 프레카리아트를 또 한 번 분열시킨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최지인의 올드블루칼라들이 지금의 시대를 1980년대의 연속선상에서 감각하듯(“2020년대에 먹고 사는건 1980년대에 노동자로 사는 것과 다르다 해도 자본가의 지배는 계속되고 있고”, 「서사」) 올드블루칼라가 지난 세기와의 연속선상에 있는 이들이라면, 한재범의 뉴블루칼라는 지금껏 보지 못한 새로운 노동자의 특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보다 섬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비록 한 권의 시집이지만 한재범은 어느 젊은 프레카리아트의 복합적 내면과 지금-이곳의 작동 문법을 새로운 방식으로 깊이 있게 다룬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남다르다. 따라서 이 시집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최근 등장한 뉴블루칼라의 얼굴의 일면을 자세히 살펴보는 일인 동시에 새로운 노동시의 면면을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2. 겹쳐 입으며 안전해지는 ‘나’
그런데 한재범의 시를 (궁극적으로는) 노동시의 계보에 위치시키기 위해 이 글을 쓰면서도 나는 ‘노동시’라는 말을 사용하는 일 앞에서 망설이게 된다. 이는 그간 여러 평자들이 노동시의 개념과 그것의 함의 변화에 대해 치열하게 사유하며 이룬 빛나는 성취 덕분이다.4)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실시간 노동이 이루어지고, 노동이 “쟁의에서 생계로 가라앉”5)은 지금, 다분히 사용법이 한정된 채 쓰이고 있는 ‘노동시’라는 말을 가져와 ‘시’와 구분 짓는 일의 유효성에 대한 질문들이 그것이다. 물론 이 글의 초점이 이 용어의 유용성을 따지는 데 있지 않기에 자세히 논할 수는 없지만, 한재범의 등장은 노동시의 유효성을 심문하기 위해서는 이제 노동의 양태 변화와 연계된 재현 내용만이 아니라 재현 그 자체, 그러니까 변화된 서술 방식을 ‘노동시’라는 개념이 감당할 수 있는가를 논의할 필요가 있음을 명령하는 하나의 사건처럼 여겨진다. 지난 노동시들의 현실 재현 성격과 언어의 직접성을 계승하여 최지인, 유현아, 이용훈의 시가 노동의 현장을 핍진하고 직설적인 언어로 재현해 왔다면, 한재범의 프레카리아트 화자는 노동 현장 재현보다는 노동하는 자의 내면을 상징적인 언어로 발화하기 때문이다.6)
손 앞에 종이 상자(③)가 있다
― 「 」 전문(밑줄 및 번호는 인용자)
그의 시집 첫 페이지에 수록된 인용시가 그 대표적 예다. 고백건대, 이 시를 읽는 일은 당혹스럽다. 종이 상자 모양을 형상화한 제목의 낯섦도 그 요인 중 하나지만 무엇보다 주문한 종이 상자가 오지 않았음에도 “손 앞에 종이 상자가 있다”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나’의 말이 특히 의아하게 들린다. 마치 여러 시점에서, 혹은 불연속적인 시간 속에서 작성된 문장들을 접붙여놓은 듯 우리를 교란하는 이 문장들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각각의 문장들을 따로 떼서 읽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우선 이 시를 화자가 시간의 순서대로 말한다고 가정하고 읽어보자. 그러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른다. 첫째, 그의 손 앞에 놓인 종이 상자(①)는 그가 종이 상자를 주문한 후 그의 앞에 놓이게 된 것일까, 아니면 애초부터 종이 상자(①)가 있었음에도 그는 종이 상자(②)를 주문하여 그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둘째, 2연의 종이 상자(③)는 시간이 흘러 드디어 도착한 상자(②)일까, 아니면 이는 상자(②)와 무관한 것으로 ‘나’는 다시 한번 종이 상자(①)의 있음을 확인하고 있는 것일까.
모든 질문에 확답하기는 어려워 보인다.7) 다만 여러 불확실성 속에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시에는 한재범의 화자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주문했지만 오지 않고 있는 상자(②)와 손 앞에 있어 그가 언제든 이용할 수 있는 상자(①), 이렇게 두 종류의 종이 상자가 있으며 그가 이 둘을 분명히 구분하여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볼 때 시인은 종이 상자(②) 앞에 ‘내가 원하는’이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같은 단어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모순을 발생시키는 셈인데 이러한 전략은 ‘종이 상자’를 동일한 하나의 개체로 생각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물건을 보관하거나 옮기는 기능만 생각해 보면 모든 종이 상자는 동일하다. 그러나 그 규격과 모양은 사실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길거리에 버려진 종이 상자를 구해와 그 안에 물건을 넣기도 하지만 도처에 있는 상자를 두고도 (대가를 지불하면서까지) 자신이 원하는 상자를 신중히 골라 구입하고 그것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이도 있다. 또 어떤 이는 도착할 기약이 없는 상자를 기다리는 동안 손에 닿는 상자를 임시로 사용하는 방법을 선택하기도 할 것이다. 이후 수록된 시들은 종이 상자에 대한 하나의 독법, 그러니까 상자를 일자리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는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한재범의 화자가 이 중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 자인가를 보여준다.
자연을 걷는 사람처럼
일시적이다 일시적이지만 자연스럽게 고궁을 걷는다 고궁을 걷지만 영원은 아니다 깃발을 들고 서 있지만
점령은 아니다 여행객들 사이에서 나는 꽤 여행객스럽다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 같다 마음 내켜 한번 와봤어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과 고궁을 걷는다 그런 마음들과 자연스럽다 그런 마음들은 비행기를 타고 왔고
나는 지하철을 타고 왔다 시급 9,160원*을 받고 지금 밟고 서 있는 오백년의 역사에 대해 설명한다
[……]
자연스러울 때도 있지 않겠어요 이젠 건너편 공사장에 대해서도 설명해야 할 거 같다 왜냐면 설명은 나의 직업이고
건너편 공사장은 몇년째 저 자리다 함부로 영원하다 영원 사이에서 나는 꽤 자연스럽다
시멘트를 섞으며 달리는 레미콘처럼
영원하지만 자연스럽게
그러나 나는 2222년이 기대된다
* 2022년 최저시급.
― 「레디믹스트콘크리트」 부분
손에 쥔 휴대폰으로 언제든지 플랫폼에 접속하여 구할 수 있는 일자리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얻을 수 있는 일자리는 둘 다 돈을 벌게 한다는 점에서 그 기능은 사실상 같다. 최저시급을 받고 문화해설사로 일하는 이 시 속 ‘나’가 스스로를 “여행객스럽다”라고 하거나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 같다”라고 가리킨다는 점에서 보건대 그는 손 앞의 상자를 임시로 사용하는 것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여행객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고궁은 단기 고용된 그의 상황을 한층 부각한다. 그는 숙련되지 않은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연신 신경 쓰이는 양 ‘자연스럽다’라는 말을 반복하거나 “자연스러울 때도 있지 않겠”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시에서 ‘나’가 자신이 잠시 이 일을 하고 있음을 여러 방법으로 강조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상황을 보여주기 위함만은 아닌 것 같다. 이것이 ‘일시적’인 노동임을 되뇌며 이 일과 선을 긋는 그의 말에는 주목할 만한 속내가 있다. 그는 이러한 선 긋기를 통해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미래에는 이어지지 않을 것임을 강조하며, 굳지 않은 상태로 배달되는 “레디믹스트콘크리트”와 같은 자신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내비친다. 물론 가까운 미래에 그 가능성이 실현된다고 믿는 것은 아니며(“그러나 나는 2222년이 기대된다”), 영원히 공사 중인 시 속 공사장처럼 장기 노동이 유예된 상태가 계속 이어질 수 있다는 불안도 그는 가지고 있다. 다만 그는 자신을 분리하여 불안정한 노동을 하는 ‘나’를 임시의 ‘나’로 봄으로써 우울한 가운데 명랑함을 유지한다.
지하철부터 탔군요
[……]
내일은 모르겠어요
어제의 내가 나간 출구가
생기고 없어지길 반복하는데
없어진 출구가 벽이 되고
거기 등 기대는 몸도 있군요
미워하기 위해
미워할 몸부터 찾는 사람처럼
모르는 얼굴들과 함께
욱여넣어지는 것이 익숙하군요
때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가울 수가 없네요
그러나 다행히 나는 내일부터
내가 아니기로 했군요
― 「나는 내일부터」 부분
지옥과 같은 지하철을 타고 있어도, 어제는 보였던 출구가 지금 ‘나’에게는 보이지 않아도 그런 ‘나’를 분리하여 생각하는 덕분에 그는 명랑히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다행히 나는 내일부터/ 내가 아니기로 했군요”. 그의 말에는 한때 유행했던 본캐와 부캐처럼 지금 힘든 ‘나’는 부캐로서, 그런 ‘나’가 상처를 받았다면 마치 입고 있는 옷에 상처가 난 것일 뿐 진짜 ‘나’가 훼손된 것은 아니라는 논리가 전제되어 있다.8) 물론 그가 여러 겹의 ‘나’들을 껴입는 까닭은 옷의 본 기능대로 본질적인 ‘나’를, 꿈을 가지고 미래에는 원하는 일을 하고 있을 ‘나’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무림의 은둔 고수 나 김정배는 무림을 벗어나 강호를 견제하고 세간을 수호해왔다 나 김정배는 은둔 고수 겸 은둔의 고수 내가 나임을 김정배임을 무림의 은둔 고수임을
철저히 숨겨 온 존재
김정배를 부정해야만
김정배는 실재할 수 있다
― 「무림의 은둔 고수 나 김정배」 부분
‘김정배’로서의 ‘나’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나’, ‘무림의 은둔 고수’, ‘김정배’로 분리하여 자신을 대상화하는 한재범의 화자를 이수명의 설명대로 “삼인칭 자아”라고 말해보자. 이것이 새로운 “우리의 자아의 현주소”9)라면, 이렇게 새로이 형성된 자아는 젊은 청년 프레카리아트로서의 존재 방식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임시로 프레카리아트로 살아가기를 결심한 그와 같은 청년들은 자신에게 “뜯어버리”는 것이 가능한 여러 페이지가 있는 듯 스스로를 분리하여 “연습장”처럼 사용할 수 있는 “연습생”으로서의 ‘나’를 앞세우는 방식으로, “살기 위해서” “자신보다 더 많은 굴”을 파서 숨는 “토끼”(「연습생」)처럼 미래를 꿈꾸는 ‘나’를 겹의 ‘나’들로 숨기는 방식으로 유예된 미래를 안전하게 보존한다. “내가 나라는 사실을 자꾸만 일깨워주”는 데에서 “안전”(「유원지」)감을 느끼며. 주문한 종이 상자가 도착하여 그것을 사용할 미래를 기다리며 그들은 임시 ‘나’를 여러 벌 겹쳐 입는 방식으로 본체 ‘나’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다.
3. 벗겨지는 옷과 사라지는 ‘나’
이런 그의 전략은 상상 속에서는 분명 그럴듯하게 여겨진다. 문제는 현실에서 그들이 입은 임시 ‘나’는 본체인 ‘나’와 한몸이 되거나 끝내 벗겨진다는 데 있다.
[……]
이 꿈이 지루하다
뛸수록 바깥과 멀어지는 숲이다 뒤로 손을 넘겨도 닿지 않는 등이 서늘하다 꿈속에서 만져지는 건 나뿐인데 외출복이 젖고 있는 걸까 숲의 나는 외출복을 입지 않았는데
[……]
일어나 잠은 집에 가서 자야지 누군가 나를 흔들수록 나는 외출복을 끌어안는다 이불을 파고들 듯이 천사들은 다가와 식물원의 사람들처럼 지루한 얼굴로 나를 자세히 본다
― 「직물과 작물」 부분
‘외출복을 입은 나’와 ‘외출복을 입지 않은 나’를 구분한 그는 밖에서 하는 일, 즉 일을 해서 돈을 버는 등의 역할은 ‘외출복을 입은 나’가, 집에서 침대에 눕거나 (미래를) 꿈꾸는 일은 ‘외출복을 입지 않은 나’가 담당하도록 했다. ‘직물과 작물’이라는 제목의 두 단어가 단 하나의 획으로 완전히 다르게 활용되는 것처럼 그는 한 겹의 외출복을 가지고 자신을 둘로 구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상상과 달리 이러한 전환은 기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외출복을 입은 나’는 밖에서 돌아오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바로 ‘외출복을 입지 않은 나’로 변환되어야 하지만 그는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잠이 들어버릴 수 있으며 그때에는 오히려 ‘외출복을 입지 않은 나’가 바깥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외출복을 입고 나가지 않았지만 그것이 땀에 젖는 일을 겪거나 “나를 아무리 뒤집어도 나의 등은 나의 등”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그는 자신을 쪼개 완벽히 분리하는 것은 사실상 어려우며, 애써 이를 구분하려고 해도 어떤 ‘나’에게 일어난 변화는 나머지 ‘나’에게도 영향을 준다는 점을 비로소 깨닫는다. 그가 외출복을 끌어안는 시의 마지막 장면은 자신의 방어 논리와 희망이 깨졌음을 깨달은 그가 끝내 방어막을 놓지 못하며 하는 마지막 몸부림일 것이다.
어쩌면 고학력 중산층 청년들이 같은 단기 노동이라도 플랫폼에 기반한 작업을 대체로 선호하는 것은 이 경우처럼 본체 ‘나’와 지금의 노동을 하는 ‘나’가 전도될 것을 염려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오랜 시간 교육이 필요한 고숙련 노동이 그럴 가능성을 높인다면, 쉽게 할 수 있고 쉽게 그만둘 수 있는 플랫폼 기반 노동을 할 경우 ‘나’는 본체인 ‘나’의 꿈에 조금 더 신경을 쏟은 채 기회가 왔을 때 원하던 옷으로 빠르게 갈아입을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옷을 입되, 마치 몸의 절반에는 옷을 걸치고 나머지 반은 걸치지 않은 것처럼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사력을 다하지 않으며 언제든 옷을 벗을 수 있는 순간을 대기하고 있기도 하다.
절반을 허공에 입혔는데 춥진 않았다 지나친 사람마다 잠바를 걸치고 있었다 언제부터 잠바가 유행했는지
[……]
코끼리 코에 달린
코끼리가 나는 좋아서
벌써 몇바퀴째 공원을 돌고 있었다 앞으로 더 추워질 거라던데 코끼리 코는 계속 제자리였다 다음 계절이 이미 온 것 같아 뭐라도 걸쳐야 했다 흔해지기 싫었다 절반만 걸쳐야 했다 내 것이 아닌 잠바가 내게 안 어울릴 정도로 컸고
내가 걸치지 않은 절반이
자꾸 흘러내렸다
[……]
나를 쳐다보는 사람이 없도록
그러나 다시 코끼리 코 앞에서
멈췄을 때
코끼리 코에 달린
코끼리는 사라지고
누군가 나를 붙잡았다 지압을 하듯이 센 손아귀로 잠시 끌려가는데 놓으라고 말하지 못했다 뭐라도 걸쳐야 했는데 절반을 걸친 이 풍경이 꽤 추웠는데 코끼리 코 끝났을 때 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를 보았다
― 「코끼리 코에 달린 코끼리」 부분
생계를 위해 “뭐라도 걸쳐야” 하기에 자신의 학력 수준과 집안 자산 등과 맞지 않는 잠바를 입고 있지만(“내 것이 아닌 잠바가 내게 안 어울릴 정도로 컸고”) 그들은 자신의 선택하에 언제든 그러한 옷을 벗을 수 있도록, 말하자면 언제든 그러한 옷을 입은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도록 잠바를 ‘절반’만 걸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청년 프레카리아트들과 (고학력 중산층인) 자신을 차별화하기 위해서라도(“흔해지기 싫었다”).
그러나 몸에 꼭 맞지 않는 잠바는, 심지어 어정쩡하게 절반만 입은 옷은 계속해서 흘러내리기 마련이다. 그때마다 그들이 직면하는 것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자신의 민낯이다. 결코 훼손되기를 원치 않았던 ‘나’가 노출될 때 그는 임시 ‘나’가 받은 상처를 같이 받기도 하고 본체 ‘나’가 임시 노동을 하는 지금의 ‘나’와 정말 다른가를 고민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이들이 마주하게 되는 또 하나의 진실은 자신이 어떤 것을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점차 무언가에 끌려가고 있다는 것과(“누군가 나를 붙잡았다/ [……] 잠시 끌려가는데”) 그럼에도 이에 저항하지 못하게 된 자신의 무력함(“놓으라고 말하지 못했다”)이다. 코끼리에 코가 달린 것이 아니라 코끼리 코에 코끼리가 달린 듯 그는 코끼리 코와 같은 일부의 ‘나’를, 부캐로서의 ‘나’를 앞세워왔지만 그 둘의 사실상 분리 불가능성 앞에서 본캐와 부캐는 섞이고, 부캐인 프레카리아트로서 살아가는 데 점차 적응하며 본캐는 어느새 사라진다(“코끼리는 사라지고”). 이는 고학력 중산층 프레카리아트들이 정규 노동시장 진입을 왜 점차 포기하게 되는지, 프레카리아트 상태에서 왜 점점 벗어날 수 없는지를 짐작하게 한다.10)
아주 자연스러운 옷이다 이 옷은 겨울옷도 되고 여름옷도 된다 계절은 순환되고 유니폼은 반복된다 매일 입는 이것은 이제 나 같다 유니폼 바깥의 나는 나 같지 않다
[……]
내가 아닌 몸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저런 몸을 갖고 싶다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유니폼을 입는다 유니폼 안에서 나는 유일하다 유니폼은 일정하고 내게 자연스럽기에
유니폼을 입고 집까지 간 적도 있다 사장님은 내게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하라고 한다 저는 정말 없어요 사장님 저는 이미 충분해요 바깥의 유니폼이 말한다
― 「유니폼」 부분
이제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무슨 옷이라도 걸치는 것뿐이다. 「유니폼」의 ‘나’는 잠바를 절반만, 그것도 걸치는 방식으로 아무렇게 입기를 선택한 「코끼리 코에 달린 코끼리」 속 ‘나’와 옷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다르다. 그는 일할 때 입는 유니폼을 어느 계절에나 입고 집에까지 입고 가며 유니폼을 입은 자신만을, 이와 같은 노동을 하는 자신만을 ‘나’라고 인식한다(“유니폼 바깥의 나는 나 같지 않다”). 자신 아닌 다른 몸을 부러워하지도, 다른 몸을 갖고 싶어 하지도 않는 그의 모습에는 본체의 잠재성을 긍정하며 미래를 기대하는 입체적인 ‘나’는 없다. 다만 자신의 한계를 미리 정해두고 사실상 몸과 붙어 있는 한 겹의 옷만을 입고 있는 납작해진 ‘나’만이 있을 뿐이다. ‘김정배’는 죽었고(“김정배는 이미 몇시간 전부터 시체에 불과하다”, 「무림의 은둔 고수 나 김정배」), 미래를 꿈꾸던 ‘나’는 “할 일을 하고 나니” 사라졌다. 더 이상 누군가를 “볼 낯이 없어”질 만큼 절망한 그들은 “고작 이것밖에 안 됐습니다/ 실망해주세요 저를”(「재건축」)과 같은 말로 자책하며 다음과 같이 다짐한다. “이제는 그만둬야겠지// 나를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을”(「시인의 말」).
4. 환유 경제의 메커니즘
이것이 그들 내면의 한 풍경이라면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하게 짚어두어야 할 점은 한재범이 점차 본질적인 자신을 잃어가는 ‘나’에 대해 적을 때 자주 문장의 단어 하나를 생략하는 방식으로 서술한다는 점이다. 가령, “내가 걸치지 않은 절반이/ 자꾸 흘러내렸다”(「코끼리 코에 달린 코끼리」)라는 구절은 ‘내가 걸치지 않은 절반[의 잠바]가 자꾸 흘러내렸다’는 문장을 줄인 것이고, “사장님은 내게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하라고 한다 저는 정말 없어요 사장님”(「유니폼」)의 경우 ‘저는 정말 [불만이] 없어요 사장님’이라는 문장이 줄이지 않은 원 문장이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사용되었을 이와 같은 환유는 물론, 임시 노동으로 ‘나’가 없어진 상태를 드러내기 위해 선택된 수사다.
해설에서 최다영도 지적한 대로 한재범의 시에서 환유는 유독 자주 사용된다.11) 이는 저 두 문장에서처럼 그들이 프레카리아트로서 살아갈 때 본체 ‘나’가 점차 사라지는 양상을 보여주는 데 효과적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조금 당겨 말하자면, 시인은 환유의 잦은 사용을 통해 지금의 세계가 환유의 원리로 작동하고 있음을 표상하는 동시에 그런 작동 구조가 ‘나’라는 실체 등을 결과적으로 사라지게 한다는 사실을 고발한다. 그의 환유적 상상력이 세계의 메커니즘과 관련되어 있음은 표제작인 「웃긴 게 뭔지 아세요」에서 확인된다.
우리 안에 동물이 한 마리도 없었다 여긴 꼭 버려진 것 같네 우리는 분명 동물원을 걷고 있었는데 너는 상관없다고 했다 우리는 계속 걸었다 우리 안에서 바나나를 까먹는 침팬지를 만날 순 없었지만 거대한 담장 안을 빙빙 돌았다 걸을수록 기억에도 없는 옛 시절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는데 우리 밖에 바나나 껍질이 버려져 있었다 몽키 바나나 아세요? 그거 같은데 원숭이가 먹는 바나나요 그런 웃긴 이름도 있군요 그건 사람의 것이 분명해 보였다 어떤 사람도 마주치지 않았지만 다음 주에는 정말 동물원에 가요 벌써 마트 문 닫을 시간이네 이제 그만 나갈까요
어쩌면 침팬지보다 바나나를 좋아하는 너에게 바나나 생과일주스를 사주고 마트에 들렀다 정육 코너 옆 신선 코너에는 바나나가 탐스럽게 놓여 있었다 바나나를 향해 손을 뻗는데 누군가 가로막았다 웃긴 게 뭔지 아세요? 바나나와 사람은 절반이나 같아요 [……]
그게 무슨 말이지 나는 가끔 내 말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의 바나나 줄기에선 바나나가 여럿 자라니까요 그의 이름도 알지 못했지만 우리에게서 같은 냄새가 났다 벌써 문 닫을 시간이네 이러다 여기 갇히겠어요 이제 그만 나갈까요 바나나를 도로 신선 코너에 놓았는데 내 손을 잡고 있던 네가 없다 우리가 아니었구나 그래도 상관은 없다 나는 내 앞에 놓인 바나나 생과일주스를 쥔다 껍질을 까지 않아도 바나나는 거기 있다 두 개 이상의 바나나가 들어간 음료다 빨대를 빙빙 돌려 그것을 섞는데 우리 밖에 침팬지가 나와 있다 몽키 바나나 아세요? 사람이 만든 건데 컵 안에 갈린 바나나가 절반 채워져 있다 나의 손이 그것을 둘러싼다 바나나 냄새는 나지 않는다
― 「웃긴 게 뭔지 아세요」 부분
지금 ‘나’와 ‘너’는 어디를 걷고 있는 것일까. 동물원을 걷던 ‘나’와 ‘너’는(“우리는 동물원에 갔다”) 갑자기 마트를 걷고 있는 것으로 서술되며(“다음 주에는 정말 동물원에 가요 벌써 마트 문 닫을 시간이네”), 동물원에는 없던 침팬지가 마트에 나타나기도 하는 등(“우리 밖에 침팬지가 나와 있다”) 그들이 정확히 어디에 속해있는지를 외부의 우리는 파악하기가 어렵다. 이와 더불어 몇몇 문장들, 예컨대 “바나나와 사람은 절반이나 같아요”와 같은 전언 역시 선뜻 이해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서술은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에는 환유가 작동한다. 먼저, 마트와 동물원이라는 전혀 겹치는 지점이 없는 두 장소는 내적 정의가 아니라 ‘몽키 바나나’라는 외부 사물에 의해 연결된다. 기실 ‘몽키 바나나’ 역시 ‘몽키가 좋아하는 바나나’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환유의 산물인데 그것은 마트에도 팔고 동물원에도 있기에 두 장소는 그에 인접한 대상을 통해 이와 같이 연결되는 것이다. ‘바나나와 사람이 절반이나 같다’라는 엉뚱한 말 역시 ‘몽키 바나나’로 연결된 환유의 결과물이다.
② 침팬지는 바나나를 좋아한다. (침팬지→바나나)
③ “바나나와 사람은 절반이나 같아요” (사람≒침팬지→바나나)
화자의 연상이 흘러가는 대로 적어 보자면, 사람과 침팬지는 유전자가 거의 일치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사람≒침팬지)12) . 그런데 침팬지는 바나나를 좋아하므로 바나나는 침팬지를 환유한다(침팬지→바나나). ‘침팬지→바나나’라는 관계가 성립한다면 침팬지와 유전자가 거의 같은 사람 역시 바나나와 절반이나 같다는 말도 성립된다(사람≒침팬지→바나나).13) 이렇게 볼 때, “몽키 바나나 아세요?”라는 시의 첫 문장은 해당 사물의 존재에 대해 아는가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 ‘몽키 바나나’라는 말이 생긴 작동원리를 아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그러니까 이 세계가 환유로 작동하고 있는 것을 아는가를 묻는 질문처럼 들린다.
환유의 문법은 전통적 고용구조의 해체가 심화된 지금의 노동 시장에서 가장 활발하게 통용되고 있다. 이를 ‘환유 경제 시대’라고 명명할 수 있다면, 최근 프레카리아트 노동의 중심에 있는 플랫폼은 이를 작동시키는 주체로서 그 자체로는 어떤 생산도 하지 않은 채 일자리와 노동자를 결합하며 노동의 유통을 담당한다. 일자리와 노동자를 결합하는 플랫폼의 방식 역시 다분히 환유적이다. 플랫폼은 오래 교육받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단기 노동을 원하는 이들을 쉽게 끌어모아 플랫폼 밖에서는 전혀 연관관계도 연결고리도 없는, 사회적 지위, 계층, 젠더, 학력 등이 서로 다른 이들을 느슨하게 연결한다. 유사한 일을 하면서도 그들이 연대하여 프레카리아트 처우에 대한 집단적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것은 이처럼 너무나 다른 각각의 상황이 주되게 작용한다. 한편, 플랫폼의 이와 같은 구조를 프레카리아트는 적극적으로 이용함으로써 그들은 옷을 갈아입듯 쉽게 일자리를 옮겨 다닌다. 이와 같은 환유 경제의 풍경을 한재범은 「소재지」에서 다룬다.
[……]
목장갑을 낀 손이 낯설어서 나는 마음에 든다 창고의 짐들은 종이 상자에 담겨 있는데 이렇게 가벼워도 되는지
[……]
창고를 옮기려는 사람들은 어디 가고 창고를 옮기는 일만 여기 남는다 혼자 남은 나는 상자를 열어본다
상자 안에는 빈자리가 조금 많고 이것은 이미 하나의 창고처럼 보인다 창고의 마지막 짐을 빼자 창고는 사라지고
텅 빈 이곳은 더 이상 창고가 아니다 창고는 내 손안에서 유일하다 흔들면 무너지는 소리가 날 뿐
― 「소재지」 부분
자신에게도 “목장갑”이 꽤 어울린다는 것을 의식할 만큼 목장갑을 끼고 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목장갑을 낀 손이 낯설어서 나는 마음에 든다”) ‘나’는 이쪽 창고의 짐을 종이 상자에 넣어 다른 창고로 옮기는 작업을 막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맡은 이 일은 프레카리아트들이 통상 하는 노동의 단순함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동되는 짐처럼 고정된 ‘소재지’가 없는 그들의 상황과도 맞닿아 있으며, 더욱 확대하여 해석해 보자면 무언가를 산하지 않고 옮기기만 하는 작업의 특성은 프레카리아트들이 자주 선택하는 컨시어지 노동처럼 실체 없는 노동을 표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14)
그런데 무엇보다 이 시에서 흥미롭게 여겨지는 점은 이러한 작업의 와중에 일하는 이는 사라지고 일만 남는다거나(“창고를 옮기려는 사람들은 어디 가고 창고를 옮기는 일만 여기 남는다”) 일하는 공간이 사라지는(“창고의 마지막 짐을 빼자 창고는 사라지고”) 등 무언가 사라지는 현상을 시인이 다룬다는 점이다. 이것은 환유의 원리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앞서 우리는 인접성이 환유를 작동시키는 원리임에 주로 주목했지만 사실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경제성의 원칙에 입각”해서 대체물과 피대체물 사이의 말을 생략하는, “생략 가능함, 곧 괄호를 칠 수 있음이 바로 환유를 낳는” 또 다른 “비밀”이다.15) 한재범은 환유의 원리로 작동되는 세계가 결국 무엇을 생략하는가를 두 작품에서 분명히 보여준다.
「소재지」 속 두 종류의 사라짐은 환유 경제의 문제처럼 여겨진다. 플랫폼 자본주의는 누가 해당 일을 하는가에 관심을 두지 않고 일자리와 노동만을 빠르게 결합하여 노동자를 괄호 치는 방식으로 노동을 유통함으로써 중개료와 같은 불로소득을 얻는다. 한편, 프레카리아트 노동의 다수를 차지하는 컨시어지 서비스는 무형의 노동이자 수요자에게 맞춰진 노동인 탓에 뚜렷한 노동의 결과를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우며 수요자가 없으면 언제든 저 창고처럼 사라질 수 있다.
그런데 미래를 유예한 젊은 청년들에게 환유 경제의 더욱 심각한 문제는 다른 데 있는 것 같다. 한재범은 「웃긴 게 뭔지 아세요」에서 바나나 냄새의 사라짐을 통해((“바나나 냄새는 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를 나타낸다. 환유의 세계에서 결국 사라진 것이 ‘냄새’라는 점은 특별히 의미심장한데, 그것은 냄새가 존재를 환유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만 영화 <기생충>(2019)에서도 그러했듯 이는 개인의 계층적, 정치적 정체성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16) 이러한 시의 장면은 그들이 올드블루칼라들과 다른 학력, 자산 등을 내세우며 프레카리아트층에서 자신을 구분 짓고 미래를 꿈꾸었지만 결국 원 정체성을 잃고 프레카리아트로 장기간 머물게 될 가능성을 시사한다. 시의 가볍고 유머러스한 설정 아래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젊은 프레카리아트의 이와 같은 서늘한 미래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해보자면, 대체로 지난 노동시들에서 노동자의 문제가 은유와 제유를 통해 나타났다면,17) 한재범의 시가 새로이 등장한 프레카리아트의 문제를 환유를 통해 제시한다는 점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플랫폼과 일자리 사이에서 괄호 쳐지는, 노동의 유통이 만들어내는 “공적(公的)인 환영물”18)에 불과한 그들을 환유를 사용하여 그리는 것은 환유라는 새로운 작동 원리에 노출된 그들의 존재 양식을 효과적으로 표상하기 위함일 것이다. 여러 벌 옷을 겹쳐 입(게 하)고, 옷을 벗(기)고, 한편으로는 자주 옷을 갈아입(게 하)는 환유 경제 속 그들은 점차 낡아가는 푸른 옷을 입는 것에 만족하며 희망하던 미래의 ‘나’를 잃어간다. 이러한 새로운 노동 시장의 작동 원리를, 그 시장 속에서 점차 꿈을 잃어가는 뉴블루칼라를 보여주기 위해 한재범은 지난 노동시에서 흔히 보기 어려웠던 환유라는 장치를 가지고 나타났다. 우리는 새로운 노동자의 얼굴을, 새로운 노동시의 탄생을 목도한 셈이다.
- 1) 이러한 선택에 작용한 보이지 않는 메커니즘에 대해 나는 지난가을 어느 글에서 쓴 바 있다(인간 없이 일(하지 않)기」, 《딩아돌하》 2023년 가을호). 고학력 중산층 청년이 자발적으로 프레카리아트가 되어 저숙련 노동을 하는 것을 ‘팬시’하게 여기는 양상은 최근 ‘공구벨트세대’라는 용어로 개념화될 만큼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다만 이 글에서는 고학력 중산층 프레카리아트 중에서도 고정 직장을 갖기 전 임시로 프레카리아트로 살아가는 이들에 집중해 보고자 한다.
- 2) 고봉준은 2010년대에 발표한 글에서 이미 오늘날의 ‘노동자’가 단일한 형상이 아니며 그들 간의 욕망이 겹치지 않는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이때 그가 대상으로 삼은 노동자란 내국인/외국인 노동자,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프레카리아트의 경우, 그는 이들이 정규직이라는 이름의 안정적인 노예를 희망한다고 설명하며 단일한 집단으로 서술한 경향이 있다. 이 글은 그의 주장에서 더 나아가 프레카리아트 역시 보다 세분화하여 이해하려는 시도다. 고봉준, 「우리가 알던 노동시의 종언」, 『비인칭적인 것』, 산지니, 2014, 366-367쪽.
- 3) 김영선, 「플랫폼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자상」, 《도시연구》제18호, 2020.
- 4) 대표적으로 고봉준, 「노동시여, 안녕」, 「우리가 알던 노동시의 종언」, 앞의 책; 소종민,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노동시의 과거와 현재」, 《창작과비평》2024년 여름호.
- 5) 소종민, 앞의 글, 41쪽.
- 6) 이러한 변화 역시 프롤레타리아에서 프레카리아트로의 변화, 프레카리아트 층의 다양화 등과 연계되며 시의 독자층 변화의 문제와도 이어진다. 이에 대한 보다 심화된 논의는 다음을 기약한다.
- 7) 특히 종이 상자(③)에 대해서 그러하다. 그러나 어제 주문했던 종이 상자(②)가 도착하였다면 그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보다는 상자를 활용하는 행위가 뒤이어 나오지 않았을까. 그렇게 본다면 종이 상자(②)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 8) 「커피는 검다」를 비롯해 한재범의 시에서 자주 보이는 ‘나’에 대한 모순적인 서술들, 가령 잠을 자는 ‘나’와 잠이 깨어난 ‘나’가 동시에 있는 이 시의 다음 구절은 사실상 그가 본체 위에 여러 임시 ‘나’들을 껴입고 있는 상태와 연결된다. “커피를 마신다 잠이 오지 않아서 창밖은 검다 잠긴 핸드폰 화면 속 ‘잘 자’라는 문자에 답하지 않는다 들여다보지 않는다 나는 자고 있으므로”.
- 9) 이수명, 『웃긴 게 뭔지 아세요』추천사, 창비, 2024.
- 10) 온전히 자신의 의지대로 익숙한 구조에서 벗어나는 일의 어려움은 「유원지」의 화자가 어느새 익숙해진 “놀이기구”의 “끌어당기는 힘”에서 벗어나기를 결심하고서도 한참 헤맨 끝에 “출구” 밖으로 나가는 장면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이런 세계의 흐름에 떠밀려가지 않기 위한 사회적 장치는 마련되어 있지 않고, 그들은 스스로가 자신을 지키는 것밖에는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 11) 최다영, 「일인극 튜토리얼」 , 앞의 책, 133-139쪽.
- 12) 해당 기호는 권혁웅의 『시론』에서 빌려온 것이다. 권혁웅, 『시론』, 문학동네, 2010, 338쪽.
- 13) “바나나와 사람은 절반이나 같아요”라는 구절 속 ‘절반’에 주목한다면 저 구조는 보다 복잡해진다. 시에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원숭이와 침팬지가 절반 정도 같다’는 문장을 이 구조 속에 하나 더 집어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 14) 컨시어지 노동이란 플랫폼을 통해 위탁받는 “택시운전, 청소, 수작업이나 배달서비스”를 가리킨다. 가이 스탠딩, 『불로소득 자본주의』, 김병순 옮김, 여문책, 2019, 287쪽.
- 15) 권혁웅, 『환유』, 모악, 2017, 23-24쪽.
- 16) <기생충>을 비롯한 냄새의 문제에 대해서는 조혜영의 「수석과 냄새는 계급적 상상력이 될 수 있는가?―「기생충」(2019)의 계급 재현과 그 실패의 징후」(《문학과 사회 하이픈》 2023년 여름호)와 이희우의 「매력의 경제학」(《문장웹진》 2022년 2월호)를 참조할 만하다.
- 17) 예컨대, 「어쩌면」과 같은 시에서 박노해는 “수천번이고 로봇처럼 반복동작하는” 자신을 “기계”에 빗대는가 하면(은유), 「지문을 부른다」에서는 “지문”의 사라짐을, 「손무덤」에서는 손의 훼손을 이야기했다. 지난 노 동시에서 사용된 비유의 종류에 대해서는 물론 보다 구체화한 논의가 필요하다.
- 18) 권혁웅, 앞의 책,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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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넘어 ‘우리’가 된 풍경과 마음 ―길상호 시집, 『왔다갔다 두 개의』, 시인의 일요일, 2024. ―박경희 시집, 『미나리아재비』, 창비, 2024. 박형준 로베르트 발저는 셋방을 전전하면서도 작가로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다락방에서 살기 원했다. 나에게 그의 책 『산책자』(한겨레출판, 2017)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빌케 부인」의 한 단락이다. 셋방살이를 하던 집주인 할머니가 죽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오후에 주인공이 그녀의 텅 빈 방에 들어가 주인을 잃고 용도가 사라진 옷가지와 소지품을 바라보는 장면이었다. 이제 이 세상을 떠난, 하지만 자신에게 조금은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 집 주인 할머니가 텅 빈 방에 남기고 간 옷가지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생의 이면에 어른거리는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깊은 애수가 느껴졌다. 발저는 이 작품에서 한 번이라도 가난과 고독을 경험한 사람은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타인의 가난과 고독을 더 잘 이해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의 불행이나 고통, 그리고 타인의 무력함과 죽음을 조금도 덜어 주지 못하지만 최소한 타인을 이해하는 법이라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번에 읽은 두 권의 시집인 길상호의 『왔다갔다 두 개의』(시인의 일요일, 2024)와 박경희의 『미나리아재비』(창비, 2024)에서 자신과 타자가 체험을 통해 서로 응시하고 격려하는 장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비록 그 만남이 상처나 누추함에서 완벽하게 벗어나게 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그 만남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며 내가 아닌 우리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의 세계는 규율과 계획에 의해 설계된 대도시와는 멀리 거리를 두고 있다. 이들은 그것들에 의해 부서지고 상처 입은 시간들을 끌어모아 과거를 향해 아득한 시선을 던지고 있으며, 그 속에 삶의 절규가 살고 있음을 우리에게 각인시킨다. 길상호의 시집이 은둔자의 삶과 그 안의 고독의 심연을 빼어난 서정으로 보여 주고 있다면, 박경희의 시집은 ‘나’를 지운 자리에 ‘우리’를 들어앉히며 버려지고 상처 입은 과거가 사라진 것도 그 자체의 형상을 잃은 것도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의 감응으로 전해 준다. 우리는 이들의 시로부터 대도시에서 외면당하고 추방된 사물들이 간직한 최초의 움직임을 다시 만날 수 있으며, 그 사물들과 어우러진 장면과 추억들이 경이로운 생물과 마찬가지로 살아 움직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풍경과 마음의 혼융―길상호 시집 『왔다갔다 두 개의』 길상호 시의 특징 중 하나는 시에 나타난 풍경 묘사가 곧 시적 화자의 마음의 상태라는 점이다. 그는 언어의 연금술사처럼 풍경이 자기 존재가 되고 그 풍경 속에서 다시 자신의 존재가 무한하게 흩어지거나 확대되는 지점을 지극히 섬세한 감각으로 보여 준다. 난해하거나 복잡하지 않은 나직나직한 이미지의 단순성과 리듬으로 자신의 심정을 풍경화하는 그의 시는 주체와 타자가 분리되지 않는 말의 오묘한 상태에 닿아 있다. 겨울잠이 풀리고 강변의 진흙은 아가리를 벌린다 물안개가 만든 꿈속을 오래 어슬렁거리느라 진흙은 배가 고프다 진흙의 아가리에 침이 고이고 검고 부드러운 입술엔 어떤 밤이 뜯어 먹다 남긴 고라니의 앞다리 두 개가 물려 있다 두툼한 뒷다리 두 개는 더 먼 곳까지 가서야 피의 걸음을 놓았다 진흙은 이빨 없이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음미하면서 목마르게 끝난 짐승의 죽음을 소화시킨다 털과 가죽과 뼈와 발굽 고라니를 물가로 이끌던 아픈 육체 진흙의 아가리 속으로 두려웠던 시간이 긴 발자국 유서와 함께 서서히 사라진다 ―「진흙이 입을 벌릴 때」 전문 이 시의 화자는 언 강물이 풀린 초봄에 강변에 나와 있다. 화자는 얼었던 강이 녹으며 진흙으로 변해 버린 강변을 거닐며 주변의 풍경을 바라본다. 시에 물안개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직 완연한 봄이 온 것 같지 않다.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그래서 두 계절이 함께 있는 환절기가 이 시의 배경일 듯싶다. 이런 때일수록 남아 있는 추위가 더 춥게 느껴지면서도 또 한편으로 봄을 고대하는 심리 역시 상승하기 마련이다. 화자는 그 양가감정 속에서 강변에서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 물이 풀리며 강변은 녹기 시작한 진흙 덩이로 어수선한데 화자는 물안개가 걷히자 진흙 속에 고라니 사체가 빠져 있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진흙에 점점이 찍힌 고라니 발자국도 눈에 띈다. 아직 겨울의 냉기가 남아 있는데도 진흙은 볕에 풀리며 아주 천천히 고라니 사체와 발자국을 삼킨다. 이 시는 아마 위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을까 추측된다. 그러나 시 어디에도 ‘나’는 보이지 않는다. 황량한 강변의 초봄 아침에 진흙이 고라니의 사체를 삼키는 풍경 묘사를 감정의 동요 없이 객관적 시 쓰기로 전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 시를 읽으면 시인의 마음이 보인다. 안타깝고 슬픈 장면인데 이상하게 평안하고,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내적으로 힘찬 생명력이 느껴진다. 시인은 겨울에 다른 짐승들에게 사냥당할 위기에 처한 고라니가 본능적으로 물가까지 도망치다가 강물 위에 얼어붙은 채로 죽어 있던 사건과 봄이 되어 진흙이 풀리면서 고라니가 그 속으로 빠져드는 장면을 담담하게 전달한다. 그러나 이 시를 끌고 가는 주체가 진흙만은 아니다. 이 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 읽을 수 있다. 첫 번째는 겨울을 견딘 진흙이 녹아 가는 과정을 “물안개가 만든 꿈속을 오래 어슬렁거리”다가 “아가리”를 벌리는 것으로 시작하여 육식성이 부여된 진흙이 “검고 부드러운 입술”로 “어떤 밤”에 사냥당하여 갈가리 찢긴 채 죽은 고라니의 앞다리 두 개를 삼키는 장면까지이다. 여기까지는 진흙이 시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고라니의 앞다리 두 개가 물려 있다”의 뒤에 다른 연으로 분리된 “두툼한 뒷다리 두 개는 더 먼 곳까지 가서야/ 피의 걸음을 놓았다”에서 주체가 고라니로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냥을 당해 갈가리 찢긴 고라니는 앞다리 두 개를 진흙 앞에 걸치고 있지만, 마치 강 저편으로 던져진 듯이 두툼한 뒷다리 두 개는 강물 위에 “피의 걸음”을 흩뿌려 놓고 있다. 진흙은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끝난 생명을 아주 천천히 음미하면서 소화한다. 그런데도 강물에 얼어붙은 채로 털과 가죽과 뼈와 발굽으로 형해화된 고라니는 자신이 언 강가에 피와 함께 남긴 발자국을 유서처럼 간직한 채 왕성하게 입을 벌리는 봄기운이 맹렬하게 싹트는 진흙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결혼식에 갈 땐 로션을 장례식엔 스킨을 조금 발라주세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함께 행진하는 날엔요? 그런 날은 좀체 없다니까요, 아, 저에겐 그런 날뿐인걸요 ―「로션과 스킨」 부분 대야에 비친 자신을 사랑하세요, 다른 얼굴이 보여도 그냥 주워 사용하세요, 미끄러운 날은 금방 지나갈 거예요. ―「이거 좋은 거예요」 부분 이정현의 시집 해설에 따르면 길상호의 이번 시집은 심한 병증 가운데 씌어졌다고 한다. “피 한 방울로 다 알 수 있어요”(「혈당검사 수첩」)라는 시행이 말해 주듯, 길상호 시인은 면역 체계가 흐트러지는 원인 불명의 병에 걸리면서 매일 약을 먹어야 하고, 책을 읽을 수도 없고, 하루에도 세 번 혈당 수치를 재야 한다고 한다. 이 시집에는 그러한 임상 기록을 담은 시편들, 함께 살던 여러 마리의 고양이를 떠나보낸 사연과 “남은 고양이 꽁트”(「시인의 말」) 등 자신의 병적 기록과 함께 주변 사람들과 반려동물에 대한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용한 「로션과 스킨」은 로션과 스킨이라는 메타포를 이용해 삶과 죽음이라는 특징을 결혼식과 장례식으로 드러내면서 죽음과 삶이 함께 행진한다는, 그 양자를 넘나들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한다. 또 「이거 좋은 거예요」에서는 아픈 삼촌을 위해 비누를 사 온 조카의 말을 통해 “대야에 비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이 무엇인지를 간접적이지만 나직하게 전해 준다. 아마도 시인은 조카가 선물한 비누로 아침마다 얼굴을 씻으며 대야의 물속에서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자신의 모습과 조우할 수 있으리라. 시집의 마지막 시편에 나타나듯 절망이 우리를 ‘빗에 사이사이 끼는 때’처럼, “저 수심 깊은 대야”에 던져 버리려고 하더라도 삶의 책은 “페이지가 차르륵 젖어 더는 읽을 수 없더라도, 포스트잇으로 표시를 해 두었으니”(「독서는 금지」) 언제든 다시 이어 갈 수가 있다. 하여, 나는 시인이 「진흙이 입을 벌릴 때」에서 진흙 속으로 사라진 고라니의 “긴 발자국 유서”를 절망을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로 읽으며, 당신은 멀리 있지만 “우리라는 말이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이도 저도 아닌 것들」)라는 따뜻한 말과 시로 다시 뜨겁게 이어져 가고 있다고 믿는다. 시로 쓴 마을사―박경희의 시집 『미나리아재비』 박경희의 『미나리아재비』를 즐겁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읽었다. 아니, 반대로 안타까웠지만 즐겁게 읽었다고 해야 되리라. 박경희의 시집에는 토속어나 순우리말이 시 중간중간에 별처럼 박혀 있어 시를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예를 들어 한 행으로 된 시 “사그랑이 된 바구니는 굴러다니고 기스락물이 깍짓동에 떨어진다”(「그렇게라도 짖어보는 것이다」)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삭아 버린 바구니가 굴러다니고 낙숫물이 참깨나 콩대를 묶은 깍짓동에 떨어진다는 뜻일 게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시를 표준화하고 의미화시키면 원래의 시행이 가지고 있던 살아 움직이는 말맛이 사라져 버린다. 이 시집을 읽으며 모르는 토속어가 나오더라도 굳이 사전을 찾아가며 읽을 필요가 없다. 이 시집의 가장 큰 장점은 사람들 속에서 살아 있는 말들과 이야기이며, 그리고 그 말과 이야기가 어우러져 이뤄 낸 한 마을의 아득하고 신화적인 풍경이 살냄새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데에 있다. 박경희 시인은 우리가 모르는 말들, 사라져 가는 풍경들을 붙잡고 수집해 그것을 사유하고 이야기로 만들며 절대 잊히지 않는 살아 있는 이미지의 마을사로 창조한다. 책 속에 박제되어 시를 위한 시에 그치고 마는 이미지가 아닌, 책 속에서 걸어 나와 이미지가 삶이 되고 이야기로 번져 가는 진경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때로는 그렇게 태어난 시가 너무나 능청스러워 다음 시에 나오는 할머니처럼 읽는 동안 얼굴이 살짝 붉어지기도 한다. 저승 물길 헤치며 이승으로 돌아오다가 육지 문턱에서 쓰러졌다 부여잡은 가슴에 갈고리달이 박혔는지 뽑히지 않았다 파도가 일 때마다 세상 온갖 별이 눈물로 흥건했다 울컥울컥 올라오는 바닷물을 토하며 새삼 물질하던 당신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옴마, 살았네 살았어 저승 돈 벌어 온다더니 저승 갈 뻔했다고 영감 죽은 지 십 년 만에 남정네와 입 박치기 했다는 말에 얼굴 벌게지던 할머니가 웃으며 병원 차 타고 갔다 바다가 잠시 숨 멈춘 순간이었다 ―「바다, 잠시 숨을 멈추다―구룡포 해녀들의 숨비」 전문 박경희의 이번 시집은 위의 시가 보여 주듯 죽음과 또는 죽음 근처까지 간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해학스럽지만 감칠맛 있게 전해 준다. 슬픈데 웃음이 나오는, 웃음이 나오는데 슬픈 이야기들이 서로 어우러져 어떤 순간에는 손에 땀이 배기도, 농사꾼을 홀대하는 사회에 화가 치밀기도, 그러다가 서로의 마음을 가만가만 짚어 주는 따스함에 슬픔이나 분노가 눈 녹듯이 사라지게 한다. 위 시만 해도 그렇다. 아마, 이 시를 영화로 옮긴다면 할머니 해녀가 저승 돈 벌어 온다고 물질하다가 그만 심장에 이상이 생겨 젊은 구조대원으로부터 인공호흡을 받는 장면에선 그것을 지켜보는 동네 사람처럼 우리들도 숨도 못 쉬고 가슴을 졸였을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가 깨어나자마자 환호성이라도 지를 듯 “옴마, 살았네 살았어” 하면서 “영감 죽은 지 십 년 만에/ 남정네와 입 박치기 했다”고 동네 사람들이 놀리는 장면에선 우리들도 신나서 박수를 쳤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인 바닷속에서 죽었다 살아 나온 할머니가 그만 그 소리에 얼굴이 빨개졌다가 웃으며 병원 차를 타고 가는 모습에서 우리는 비극일 수 있는 사건이 해학으로 바뀌는 살아 있는 입말의 마술적인 힘에 감탄했을 것이다.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는 귀족의 화려한 파티에 참석했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강풍이 몰아쳐서 집이 순식간에 무너져 사람들이 죽게 되자, 대리석이나 돌 더미에 깔려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죽은 자들의 이름을 그들이 앉았던 자리를 기억해 내어 하나하나 호명하며 시를 짓고 시체의 주인을 찾아 주었다고 한다. 그는 파티 풍경을 한 장의 그림으로 기억 속에 간직했던 것이다. 그는 이후 기억의 시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시모니데스에게 시란 ‘이야기하는 그림’이다. 박경희의 이번 시집에서 만나게 되는 것도 이 ‘이야기하는 그림’이다. 그의 시는 위의 시에서처럼 매우 쉬운 말과 친근한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그런 이야기를 한 장의 사진처럼 이미지에 압축해서 빼어난 서정의 구조로 들어앉힌다. 그래서 시의 주어가 ‘나’가 아니라 ‘우리’가 된다. 특히 제2부의 시편들은 “동네 막내 강 씨 아저씨”(「동네 막네」)가 환갑을 넘을 정도로 도회지와 단절된 마을에서 코로나 팬데믹으로 마을 사람들 모두가 ‘마스크’를 써야 하는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보여 준다. “오디에도 역병이 보이지 않는”데 마스크를 써야 하고 매달릴 사람이 전부 다 이승에 없어, “그저 무탈하게 지나가길 바랄 뿐 뭐가 있간 에휴, 참말로 지랄맞은 세상이여”(「워쩌겄어」)라는 마을 노인의 체념과 한탄에서 우리 농촌 현실의 적나라한 실상과 마주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마을은 할아버지가 글을 몰라도 서울로 병 고치러 간 아내 소식이 궁금하여 ‘소 다섯 마리 그림’(「오소」)을 그려 편지로 보내면 그걸 받고 할머니가 소 걱정으로 애가 달아 금세 내려오는 곳이다. 서로 간에 이심전심이 통하는 곳이며, 자신이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할아버지의 능청이 글이나 인터넷보다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곳이다. 마루에 앉아 머윗대 껍질을 벗기면서 저승 갔으면 그쪽 세상에서 잘 살 일이지 이승은 왜 들락거리느냐고 보이지도 않는 분 타박이다 살았을 적에 그리 모질게 마음고생시키더니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이승 문턱을 넘느냐고 사발째 욕을 퍼붓는데 옆에 있던 내가 슬금슬금 비키니 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제집만 들락거렸다. ―「꿈자리」 부분 어머니의 꿈에 아버지가 나타나자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인데도 남편을 타박한다. 살았을 적에도 그렇게 마음고생을 시키더니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이승의 문턱을 넘느냐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슬금슬금 마루에서 비켜나자 마루 밑에선 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제집만 들락거리며 안절부절이다. 죽은 사람조차도 잘못하면 타박을 받고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걱정하는, 자연의 생명과 사람이 한데 이어진 이곳은 현대인들에겐 아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세계일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전설 같기도 하고 신화 속 같기도 한 그 세계가 무너져 가더라도 그 큰 몸집을 지탱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안간힘으로 받쳐 든 벽에 선명하게 찍힌 손자국”(「손자국」) 같은 결기 어린 모습으로 우리들의 이야기를 선명한 그림처럼 들려주고 있다.
수많은 노래는 한 사람의 울음에서 시작되었다 고(故) 신경림 시인을 추모하며 1. 1970년대 민중시와 『농무』의 발견 창비시선 500번을 기념하는 특별시선집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신경림 외 지음, 창비 2024)이 올해 3월 출간되었다. 이 시선집 제목은 신경림의 시 「그 여름」에서 따온 것이다. 한 사람의 울음이 온 마을에 울음을 불러오고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고을에 노래를 몰고 왔다 구름을 몰고 오고 바람과 비를 몰고 왔다 ―「그 여름」(『농무』) 부분 온 거리에 울려 퍼지는 ‘노래’는 ‘한 사람의 울음’과 ‘한 사람의 노래’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노래는 구름과 바람과 비를 몰고 오면서 사람뿐 아니라 천지만물에 가닿았다. ‘울음’과 ‘노래’가 지닌 이러한 확장력을 떠올려볼 때, 신경림의 『농무』(창작과비평사 1975)가 50년을 이어온 창비시선의 출발점이었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1970년대 중반은 『창작과비평』이 시민문학론에서 민족문학론으로의 전환을 모색하면서 민중시의 새로운 모델을 필요로 하던 시기였다. 『농무』의 발문에서 백낙청은 시집 『농무』의 완성을 “민중적 경사”라고 말하며 “그의 많은 작품들은 리얼리스트의 단편소설과도 같은 정확한 묘사와 압축된 사연들을 담고 있는 동시에 민요를 방불케 하는 친숙한 가락을 띠기도”1) 한다고 상찬했다. 1960년대 김수영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던 그가 “민중이 잘 알 수 없는 ‘난해한’ 문학”2)을 경계하며 난해하지도 저속하지도 않은 시의 미덕을 신경림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1974년 『농무』가 제1회 만해문학상 수상작이 된 것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염무웅은 신경림 시의 민중성이 ‘체험적 현실’에서 나왔음에 주목하고, “자기 현실과의 정직하고도 치열한 대결을 통해 위장하거나 은폐되지 않은 민중 자신의 목소리가 긴밀한 시적 형상을 획득”3)했다고 보았다. 신경림은 이처럼 농촌의 현실을 구체적이고 핍진한 언어로 그려낸 시뿐 아니라 「농촌현실과 농민문학」 「문학과 민중」 등의 평론을 발표하며 농민문학론을 개진하기도 했다. 1970, 80년대는 신경림을 비롯해 이성부, 조태일, 김지하, 정희성, 이시영, 김준태, 김남주 등이 민중시의 새로운 방향성을 만들어나간 시기였다. 이러한 흐름의 첫 물꼬를 튼 시집이 바로 신경림의 『농무』였다. 2. 노래와 이야기, 시의 씨줄과 날줄 염무웅의 「무엇이 민중성의 시적 구현을 가능하게 하는가」는 『농무』가 출간된 지 30년 만에 이 시집의 역사적 위치를 한층 넓은 원근법 속에서 읽어낸 글이다. 그는 한국시가 지닌 민중성의 사회사적 근거와 맥락을 밝히면서 신경림 시의 독특한 화법과 시언어의 조직원리를 분석한다. 먼저 「그날」에 대해서는 “고도의 정치적 비판을 함축하고 있으”면서도 시의 화자가 직접 드러나지 않은 채 “순차적으로 카메라 앵글을 돌리는 장면화(場面化)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미장센 구성에 성공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한행을 하나의 율격 단위로 할 때 3음보의 율격을 지닌 「그날」과 4음보의 율격을 지닌 「경칩」이 율격이나 분위기가 사뭇 다르지만, “엄밀하게 계산되고 통제되는 구심적 조직”4)을 지녔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러한 분석은 농촌이라는 소재와 민중성이라는 주제, 인물의 정동을 중심으로 『농무』를 이해해온 기존의 관점을 시의 구성원리나 재현방식 등으로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유종호는 「서사 충동의 서정적 탐구」에서 신경림 단시의 특징을 “서정적인 주조에 서경(敍景)이 추가되고 그 속에 서사(敍事)적 충동을 내장하고 있”5)다고 설명했다. 그는 신경림의 시적 성취가 서정성과 서사성의 균형에서 비롯되었다며 선행 시편들의 전통 속에서 『농무』의 문학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농무』의 시들이 생활의 실감과 시어의 평면성으로 1950년대 모더니즘 계열 시편의 난해성을 산뜻하게 극복했을 뿐 아니라, 가난한 삶에 대한 결곡한 정감과 간결한 서경을 통해 추상적 구호와 격문에 가까운 현실주의 생활 시편의 전통 역시 넘어섰다는 것이다. 신경림의 시에서는 서정과 서사, 노래와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이며 절묘한 균형을 이룬다. 특히 신경림의 전기시에서 ‘이야기’의 산문성을 견제해내는 ‘노래’의 형식이란 주로 ‘민요’의 계승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민요적 정서’와 ‘정형(定型)에의 의지’가 긍정적 효과만 가져왔던 것은 아니다. 염무웅의 지적처럼 “민요는 김소월에게 있어 그러하듯이 신경림의 문학에 있어서도 창조성의 발현을 구속하는 억압이자 모국어가 지닌 가능성의 최대치로 인도하는 통로인 양날의 칼”6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음수율과 음보율, 행의 배치 등이 규칙적으로 분절된 시보다는 규칙성을 일부 허물거나 시행을 어긋나게 배치한 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헐거나. 술에라도 취해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다오 우리를 파묻어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편지라도 띄워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볼거나. ―「겨울밤」(『농무』) 전문 『농무』 첫머리에 있는 이 시는 ‘겨울밤’과 ‘새하얀 눈’을 대비하면서 농민들의 체념과 울분을 실감있게 전달하고 있다. ‘어떡헐거나’ ‘취해볼거나’ ‘맡아볼거나’ ‘쳐볼거나’ ‘먹여볼거나’ 등 반복되는 종결어미는 각운의 역할을 대신하며 ‘우리’의 정서를 리드미컬하게 변주해낸다. 시인은 이러한 종결어미의 반복으로 읽기의 유창성을 만들어내는 한편, 중간중간에 시행을 일반적인 호흡과 어긋나게 배치함으로써 의미를 낯설게 하거나 정서적 긴장감을 조성한다. 3행과 4행, 5행과 6행, 9행과 10행, 11행과 12행, 19행과 20행, 20행과 21행, 24행과 25행 사이에 나타난 주어부와 술어부 또는 수식어와 피수식어의 행갈이가 그런 예들이다. 마침표의 잦은 사용이나 단어의 도치 등도 행과 행 사이에 단속적 흐름을 만들어낸다. 단어나 시행을 엇갈리게 배치하는 앙장브망(enjambement) 기법은 「겨울밤」 외에도 「시골 큰집」 「원격지」 「씨름」 「산1번지」 「이 두 개의 눈은」 「1950년의 총살」 「장마 뒤」 「산읍일지」 「산읍기행」 「갈대」 「묘비」 「심야」 「유아」 「사화산·그 산정에서」 「추방」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누군가」 등 상당히 많은 시들에 나타난다. 이것은 김수영의 후기시에서 연의 길이를 균질하게 하는 대신 앙장브망을 통해 시행 사이의 불규칙성을 강화하던 것7)과 유사한 방식이다. 신경림 역시 행과 연을 단위로 리듬의 규칙성과 불규칙성을 탄력적으로 조율하고 변주함으로써 정서나 의미를 섬세하게 표현해낸다. 이러한 모더니스트적 면모는 신경림을 단순한 민중시인, 민요시인으로 이해하는 것을 재고하게 한다. 1973년에 이루어진 한 좌담에서 백낙청은 신경림의 시가 서사성과 지적 콘트롤이 강하고 현대적 언어감각을 지녔다는 점에서 신동엽보다는 김수영과 친연성이 강하다고 말한다.8) 시인 자신도 나중에에는 “민요와의 접목은 내 시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고 “내가 민요에 집착한 80년대 전 기간이 내게는 시 쓰기가 가장 어렵고 지루한 시절”9)이었다고 회고했다. 신경림 시에서 민요 가락이 집중적으로 나타난 것은 『새재』(창작과비평사 1979)와 『달 넘세』(창작과비평사 1985), 그리고 장시집 『남한강』(창작과비평사 1987)에서다. 『민요 기행』 1, 2권(한길사 1985, 1989)이 나온 것도 이 세 시집이 출간된 시기와 거의 겹친다. 이 무렵 신경림은 민요를 찾아 채록하면서 전통적 민예 양식의 시적 가능성을 탐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노력이 집대성된 『남한강』에서 시인은 서정적 단시의 서사성을 한편의 장편서사시로 확장하면서 민요의 리듬을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신경림이 민요적 정서나 형식에 대한 중압감에서 자유로워진 것은 기행시집 『길』(창작과비평사 1990)을 펴낸 이후였다. 『길』까지는 여전히 「정선아리랑」 「산유화가」 등 민요를 제목으로 삼은 시가 보이고, 민요 기행에서 만난 노래꾼을 포함해 다양한 인물과 장소를 담고 있다. 그러나 민요적 후렴구의 기계적 반복이나 정형화된 리듬의 강박으로부터는 한결 자유로워진 듯하다. 인물서사가 주를 이루고 있긴 하지만, 『길』의 거의 모든 시에 붙어 있는 부제들은 다양한 장소성을 보여준다. 『신경림 시전집』 1권은 『길』로 끝나고 2권은 『쓰러진 자의 꿈』(창작과비평사 1993)으로 시작된다. 이 두 시집의 제목처럼 신경림의 후기시는 ‘길’ 위에서, ‘쓰러진 자의 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3. 길 위에서 부르는 노래와 시의 장소성 2000년대 이후 신경림에 관한 연구에서 가장 두드러진 주제는 ‘장소성’이다.10) 『농무』의 장소성이 농촌, 장터, 공사장, 폐광 등을 중심으로 한다면, 시인이 서울로 이주한 뒤 펴낸 시집들에서는 산동네, 수몰지역, 휴전선 등의 장소성이 두드러진다. 『쓰러진 자의 꿈』 이후로는 특정 장소를 부제로 밝혀둔 기행 시편이 많고, 부제가 없더라도 여행 중에 만난 풍경이나 사람의 비중이 커진다.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신경림의 전기시가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향(離鄕)’과 공동체의 상실을 다루고 있다면, 후기시는 지방 또는 해외로의 ‘기행(紀행)’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늘 떠나면서 살았다, 집을 떠나고 마을을 떠나면서. 늘 잊으면서 살았다, 싸리꽃 하얀 언덕을 잊고 느티나무에 소복하던 별들을 잊으면서. 늘 찾으면서 살았다, 낯선 것에 신명을 내고 처음 보는 것에서 힘을 얻으면서, 진흙길 가시밭길 마구 밟으면서. ―「나의 신발이」(『낙타』) 부분 신경림의 기행시는 단순한 유랑이나 관광의 기록과는 거리가 멀다. 그에게 떠남이란 익숙한 것을 잊고 낯선 것을 찾아나서는 ‘탐구의 행위’다. 이와 동시에 상류를 향해 가는 연어처럼 “떠난 것을 그리워하고 잊은 것을 그리워하면서”(「나의 신발이」) 본원적인 시간과 장소를 되찾아 나서는 ‘회귀의 여정’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신경림의 기행시는 미셸 푸꼬(Michel Foucault)가 말한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를 지향한다. 푸꼬는 현실화된 유토피아적 장소를 ‘헤테로토피아’라고 불렀다. 없는(u) 장소(topia)라는 뜻의 ‘유토피아’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헤테로토피아를 제시한 것이다. 유토피아가 실재하지는 않지만 균질한 언어와 질서를 지닌 상상적 공간이라면, 반대의(hetero) 장소(topia)라는 뜻의 헤테로토피아는 모호하고 혼란스럽고 비균질적이지만 실재하는 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헤테로토피아는 일상의 배치와는 다른 ‘바깥의 공간’이자 현실을 전복하는 ‘반(反)공간’이다.11) 엄경희는 “산업화로 인한 농촌붕괴를 ‘경관훼손’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고 “고향의 장소성에 내재된 헤테로토피아적 전망을 아이들의 장소점유방식을 통해”12) 분석했다. 『농무』부터 『쓰러진 자의 꿈』까지는 기행의 장소가 주로 국내에 한정되었다면,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창작과비평사 1998)에서는 중국, 베트남, 일본 등의 기행 시편들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반추한다. 『뿔』(창작과비평사 2002)『낙타』 『사진관집 이층』(창비 2014)에서는 그의 발길이 아시아뿐 아니라 몽골, 네팔, 튀르키예를 넘어 프랑스, 미국, 콜롬비아 등 세계 곳곳으로 향한다. 연보를 살펴보니, 신경림은 1993년(58세)에야 출국금지가 풀려 해외에 나갈 수 있게 되었고, 그의 시집이 프랑스어판, 영어판, 독일어판 등으로 번역 출간되면서 현지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경을 넘어 세계화의 현장을 폭넓게 목도하면서도 그는 줄곧 한국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떠올린다. 첫날은 날뛰는 미국 사람들이 무서워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연 지 얼마 안된다는 중동인이 경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양고기로 점심을 먹고, 둘째날은 자동차 산업의 몰락으로 유령도시가 된 디트로이트 살리기 운동을 펼치는 키가 큰 젊은 흑인을 만나 하이델베르크 프로젝트를 듣고, (…) 넷째날은 한국 절을 찾아가 부처님 앞에 예불을 드리고, 선거에서 대승한 부시의 오만한 얼굴을 텔레비전에서 보면서, 침방울을 튀기며 이라크 공격을 반대하는 한국서 군복무를 마쳤다는 젊은이와 한나절을 동행하면서, 장갑차에 깔려죽은 어린 우리나라 여중생 얘기를 하고. ―「미국기행」(『낙타』) 부분 미국 미시건을 여행 중인 화자는 첫째날부터 넷째날까지의 여정을 언급하면서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들려준다. 특히 둘째날 만난 “디트로이트 살리기 운동을 펼치는/키가 큰 젊은 흑인”과 넷째날 만난 “이라크 공격을 반대하는/한국서 군복무를 마쳤다는 젊은이”는 화자와 경계인으로서의 위치를 공유하는 인물들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과는 “장갑차에 깔려죽은 어린/우리나라 여중생”에 대해 얘기를 나눌 수 있다. 부시의 압도적 승리와 이라크전쟁 등 세계사의 착잡한 위기상황 또한 시인의 여정에 기입되어 있다. 이때 화자는 세계사의 중심도 주변도 아닌 ‘반(半)주변인’13)의 위치에 서 있다. 신경림의 기행시에서 화자의 시선이 주로 머무는 곳은 자본주의와 세계화가 만들어낸 균질화된 공간이나 화려한 장관이 아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학살당한 사람들의 수천수만켤레 신발들이 쌓여 웅성웅성 떠들고 있”(「신발들」, 『사진관집 이층』)는 소리를 듣거나, 캄보디아에서 “함지박 배를 저어 관광선을 따라오며 원 달러 하고 내미는 소년의 손”(「위대한 꿈」, 『사진관집 이층』)이 시인의 눈과 마음에 더 깊이 들어와 박힌다. 베트남 전쟁박물관에서 “제국주의자들이 버리고 도망간/흉측한 장갑차”를 보며 “호주머니 속에서/일달러짜리 지폐를 거머쥔/내 손”(「전쟁박물관」,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이나, 코카 비치에서 휴양객들을 실어 나르고 “달러를 받아쥐는/씨클로꾼들의/땀에 절은 야윈 손”(「코카 비치」,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이나 무력하게 젖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런가 하면 콜롬비아의 도시 메데진에서 산비탈에 달라붙은 움막집들과 케이블카로 그곳을 오르내리는 초췌한 사람들을 보며 화자가 떠올리는 것은 “물지게를 지고 비탈을 올라오던” “아내의 맨발”(「누군가 보고 있었을까, 아내의 맨발을」, 『낙타』)이다. 이처럼 반주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로컬과 주변부의 삶이야말로 신경림이 『농무』 이후로 일관되게 함께해온 가난하고 소외된 존재들의 것이다. 시에 포착된 주변부와 주변인이 대상화되지 않고 자연스러운 공감을 주는 것은 시인이 자신을 그 존재들의 일부로 또는 혈육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먼 나라의 이국적 풍물 앞에서도 한국의 아픈 현실을 떠올리는 시인은 떠남으로써 돌아오고, 잊으려 함으로써 더 생생한 기억에 도달하는 역설을 경험하게 된다. 4. 역사공동체에서 생태공동체로 후기시의 출발점인 『쓰러진 자의 꿈』은 1990년대 동구권의 몰락 이후 변화된 세계에 대한 시인의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한두연으로 된 단시가 많고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역사공동체에서 생명공동체로의 확장이 이 시집부터 시작되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신경림 시에 나타난 생태주의적 인식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편이다. 그런 점에서 ‘평등적 관계성’ ‘자발적 생성과 상호부조’ ‘자유 자연의 지향’ 등을 키워드로 신경림의 생태주의적 사유를 해명한 김동명의 논문은 주목할 만하다.14) 다만, 미국의 사회이론가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의 사회생태주의적 관점이나 아나키즘 등을 이론적 논거로 삼아 인간의 윤리적 역할을 강조하다보니 인간중심주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듯하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길」(『쓰러진 자의 꿈』) 부분 『쓰러진 자의 꿈』의 첫머리에 실린 「길」에서 시인은 사회 변혁의 과정 속에 내재한 인간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다. 이 시의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이라는 대목에서 그의 시선이 사회나 역사 못지않게 인간 내면을 향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내적 성찰의 매개가 되는 것은 주로 자연물이다. 이 시집의 시 제목들만 일별해 보아도 냇물, 장미, 비, 파도, 싹, 겨울숲, 홍수, 아카시아, 임진강, 진달래, 진드기, 소백산의 양떼, 초승달, 난장이패랭이꽃, 오랑캐꽃, 별, 가을비, 새벽눈, 홰나무 등 다양한 자연물들로 되어 있다. 이제 자연은 인간의 욕망과 폭력을 되비추는 거울이자, 인간의 도움 없이도 생태적 질서와 공동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생명의 주체로 등장한다. 여든까지 살다 죽은 팔자 험한 요령잡이가 묻혀 있다 북도가 고향인 어린 인민군 간호군관이 누워 있고 다리 하나를 잃은 소년병이 누워 있다 등너머 장터에 물거리를 대던 나무꾼이 묻혀 있고 그의 말더듬던 처를 꼬여 새벽차를 탄 등짐장수가 묻혀 있다 청년단장이 누워 있고 그 손에 죽은 말강구가 묻혀 있다 생전에는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이들도 있다 부드득 이를 갈던 철천지원수였던 이들도 있다 지금은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묵뫼 위에 쑥부쟁이 비비추 수리취 말나리를 키우지만 철 따라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으면서 뜸부기 찌르레기 박새 후투새를 불러 모으고 함께 숲을 만들고 산을 만들고 세상을 만들면서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묵뫼」(『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전문 「묵뫼」에서도 인간의 죽음은 역사적 비극을 환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묵뫼가 피워낸 쑥부쟁이, 비비추, 수리취, 말나리, 그리고 꽃과 열매를 찾아 날아든 뜸부기, 찌르레기, 박새, 후투티 이 모두가 ‘생태공동체’의 구성원들이다. 이처럼 자연과 인간을 유기적 관계성 속에서 바라보게 된 것은 『농무』에 나타난 역사공동체가 생태공동체의 발견으로 이어진 결과다. 이러한 변화는 신경림뿐 아니라 1990년대 이후 한국시 전체에서 관찰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1980년대가 노동시·농민시·교육시 등 계층과 이념의 동질성을 바탕으로 한 집단적 발화가 활발하게 제기된 시대였다면, 1990년대는 집단에서 개인으로, 이념에서 감각으로 중심이 옮겨오면서 사회적 이상이나 공동체적 기반은 약화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단순히 공동체의 축소나 단절이라기보다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모색의 계기”15)였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뿔』 『낙타』 『사진관집 이층』 등 후기로 갈수록 환경오염의 폐해를 언급하며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는 시들이나 생태공동체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시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봄이 되어도 꽃이 붉지를 않고 비를 맞고도 풀이 싱싱하지를 않다. 햇살에 빛나던 바위는 누런 때로 덮이고 우리들 어린 꿈으로 아롱졌던 길은 힘겹게 고개에 걸려 처져 있다. 썩은 실개천에서 그래도 아이들은 등 굽은 고기를 건져올리고 늙은이들은 소줏집에 모여 기침과 함께 농약으로 얼룩진 상추에 병든 돼지고기를 싸고 있다. (…) 우리는 안다, 썩어가고 있는 곳이 내 나라만이 아니라는 것을. 죽어가고 있는 것이 내 땅만이 아니라는 것을. 저 시베리아의 얼음벌판에 내리는 눈에도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산이 섞여 있고 아프리카 깊은 원시림 외진 강에서도 눈이 하나뿐인 고기가 잡힌다는 것을. 미시시피 강가의 한 마을에서는 목뼈가 없는 아기가 줄이어 태어나고 외국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옛날엔 천국이 따로 없다던 남태평양의 섬에서도 에이즈와 암으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부분 “봄이 되어도 꽃이 붉지를 않고/비를 맞고도 풀이 싱싱하지를 않다”라는 도입부는 자연의 생기나 아름다움이 예전 같지 않고 순환적 질서 또한 깨졌음을 의미한다. 이어지는 시행에서도 “썩은 실개천” “등 굽은 고기” “기침” “농약으로 얼룩진 상추” “병든 돼지고기” “화약냄새” “가스냄새” 등 생활 깊숙이 배어든 환경오염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안다”로 시작하는 4연에 이르면, 썩어가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 내 땅만이 아니라 “시베리아의 얼음벌판에 내리는 눈” “아프리카 깊은 원시림 외진 강” “미시시피 강가의 한 마을” “남태평양의 섬” 등 세계의 극지까지 미치고 있음을 화자는 환기한다. 뒤이어서 지구를 언제 “잿더미로 만들지 모를 핵”의 위험을 “어리석은 불장난”에 비유하며 비판하기도 한다. 환경오염이나 기후위기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지구적 파국을 예감하면서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이 지구는 죽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땅 내 나라, 아니 온 세계가 이제 단숨에 흔적도 없이 날아가버릴 마침내 그 벼랑에까지 와 서 있다.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부분 5. 다시, 떠도는 자의 노래가 되어 들머리에서 인용한 「그 여름」은 “한 사람의 죽음이/온 나라에 죽음을 불러왔지만”이라는 구절로 끝난다. 이 역접의 마지막 문장은 완료되지 않았기에 다시 첫머리의 “한 사람의 울음”으로 연결되며 삶과 죽음의 순환 앞에 우리를 데려다놓는다. 지난여름 우리는 ‘신경림’이라는 “한 사람의 죽음”을 겪었다. 2024년 5월 22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시인의 빈소에는 수많은 추모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문학적 진영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시의 아버지’를 잃은 듯 애도했다. 추모사를 읽는 이들은 그가 한국시단의 거목이었지만 권위의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겸손함과 솔직함으로 누구나 평등하게 대해주었다고 입을 모았다. 그리고 평생 힘없고 가난한 이들의 편에서 소박한 생활감정을 노래하면서도 새로운 세계에 대한 탐구와 미학적 긴장을 놓치지 않았던 시인이었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래도 쓰러지고 깨지는 것들 속에 서 있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차피 시는 괴롭고 슬픈 자들, 쓰러지고 짓밟히는 것들의 동무일진대 이것이 크게 억울할 것은 없다. 최근 나는 시는 궁극적으로 자기탐구요 시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많이 하지만, 쓰러지는 자들, 짓밟히는 것들의 상처와 아픔을 어루만지고 흩어지는 것들, 깨어지는 것들을 다독거리는 일, 이 또한 내 시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16) 『쓰러진 자의 꿈』 후기를 읽어보면, 신경림의 시에 짓밟히고 고통받는 존재들의 울음소리가 왜 그토록 끊이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신경림 시인은 평생을 ‘우는 자’ ‘떠도는 자’로서 살았다. 그의 울음과 발길은 수많은 노래를 낳았고, 온 마을과 온 거리에 다른 노래들을 불러왔다. 신경림은 70년에 가까운 시력(詩歷)으로 한국 현대시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 곡진한 노래의 굽이와 갈피를 제한된 지면에서 충분히 다룰 수는 없지만, 길 위에 남아 있는 무수한 시의 발자국들을 떠올려본다. 그것은 낯설고 새로운 것을 찾아나선 자가 발견한 기록이자, 세상 저편에 놓고 온 무언가를 향한 그리움의 노래였다. 시인은 자신의 예언처럼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떠도는 자의 노래」, 『뿔』) 모르겠다. 애통하게도 그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신경림의 시와 정신을 기억하는 한 우리는 그가 사랑한 장소들, 좁은 골목이나 저잣거리, 쓸쓸한 나룻가에서 그의 노랫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시인은 ‘떠도는 자의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이기에.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떠도는 자의 노래」 전문1) 백낙청 「발문」, 신경림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114~15면.2) 백낙청 「문학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창작과비평』 1973년 여름호, 456면.3) 염무웅 「민중의 삶, 민족의 노래」, 구중서·백낙청·염무웅 엮음 『신경림 문학의 세계』, 창작과비평사 1995, 72면.4) 염무웅 해설 「무엇이 민중성의 시적 구현을 가능하게 하는가」, 『신경림 시전집』 1권, 창비 2004, 423~24, 426면.5) 유종호 「서사 충동의 서정적 탐구」, 『신경림 문학의 세계』, 57면.6) 염무웅, 앞의 글 428면.7) 김수영의 전기시와 후기시에 나타난 리듬구조의 변화에 대해서는 졸고 「김수영 시의 리듬구조에 나타난 행과 연의 문제」, 『현대문학의 연구』 제37호, 2009 참조.8) 김우창·김종길·백낙청 좌담 「시집 『농무』의 세계와 한국시의 방향」, 『백낙청 회화록』 1권, 창비 2007, 74~75면.9) 신경림 산문 「나는 왜 시를 쓰는가」, 『낙타』, 창비 2008, 125면.10) 신경림 시의 장소성에 대한 연구로는 송지선 「신경림의 『농무』에 나타난 장소 연구」, 『국어문학』 제51집, 2011; 강정구·김종회 「문학지리학으로 읽어본 1980년대 신경림 시의 장소」, 『어문학』 제117집, 2012; 박순희·민병욱 「신경림 시의 장소 연구」, 『배달말』 제54호, 2014; 송지선 「신경림 시에 나타난 장소 재현의 로컬리티 연구」,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64집, 2014; 고재봉 「신경림의 「농무」 계열 시에 나타난 장소성과 축제의 의미」, 『문학치료연구』 제49집, 2018; 조효주 「신경림 시의 장소 상실과 현실인식 연구」, 『한민족어문학』 제87호, 2020; 조효주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노래』에 나타나는 장소와 장소상실 연구」, 『현대문학이론연구』 제76집, 2019; 김미라 「산업화 시대의 이주와 새로운 거주 장소로서의 도시」, 『한국근대문학연구』 제25권 제1호, 2024 등이 있다.11) 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이상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 참조.12) 엄경희 「장소 점유와 헤테로토피아: 신경림 시의 경우」, 『현대시와 헤테로토피아』, 보고사 2022, 166면.13) 송지선 「신경림 시에 나타난 로컬의 혼종성과 탈중심성 연구」,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72집, 2016, 251면 참조.14) 김동명 「신경림 시에 나타난 사회생태주의의 특성 연구」, 『동북아 문화연구』 제50집, 2017.15) 졸저 「현대시와 공동체」, 『문명의 바깥으로』, 창비 2023, 275면.16) 신경림 ‘시집 뒤에’, 『쓰러진 자의 꿈』, 105면.
우리는 거짓말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면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안 그래요?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됨으로써 말이죠. 무성 영화 시대의 영화감독들은 소리를 두려워했고 또 색을 두려워했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1) 1. 휩쓸리는 시간성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모두가 조금씩은 우울증과 ADHD 환자가 되어가는 중이다. 코로나가 끝나가는 엔데믹 시기부터 서점가의 주요한 베스트셀러가 되며 여러 곳에서 호출되던 책이 애나 램키의 『도파미네이션』과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두 책은 공통적으로 신생 인류의 지각 방식을 우려한다. 인터넷에서 무한 스크롤을 내리며 멀티태스킹을 하고 소셜 미디어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도파민에 중독’되고 ‘집중력을 도둑’ 맞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글로벌 테크 기업이 조성하는 환경에 의한 것이자, 개인의 선호와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로 흡수하는 ‘감시 자본주의’의 거대한 문제이지만,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집중과 몰입을 위한 여러 노력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집중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가치 있는 자본으로 떠오르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효율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채찍질하는 자학적인 시대 정신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무엇이지 않는가? 조너선 크래리에 따르면 이는 1800년대 중반 이래 파편화와 충격으로 이루어진 ‘주의분산’의 시대 이후 개인을 정의하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산만함 자체가 우리를 이루고 있는 기본 환경으로 세팅되자, 서구적 근대성은 주의 관리 기술을 중점에 두고 각각의 개인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형성하게끔 했다. 여러 경험들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기보다,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으로 “자율적으로 선택하며 세계를 창조하는 주체”2)에 긍정적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주의 깊은 관찰자 상은 이미 불균질해진 인간의 지각 경험을 표면적으로 잠시 가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몰입된 상태인 ‘정지suspension된 지각’은 산만해진 근대인의 지각 방식을 부인하고 회피하는 수단이었고, 현재라는 명백한 필연성을 해체시킬 수 있는 조건들을 낳으며 규정지을 수 없는 미래를 기대하게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주의’라는 것이 에피스테메처럼 역사적으로 발견되고 구성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코로나를 거치며 비대면 기술들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과 ADHD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함께 증폭한 것은 자연스럽다. 맞춤형 알고리즘은 주의분산의 환경을 한층 더 정교하게 설계했고, 그에 비례해 집중력이나 창의력 같은 인간의 고유한 정신적 특성에 대한 환상 역시 강화되고 있다. 이 가운데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일상 전반의 속도가 빨라지며 휩쓸리는 시간성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작 속도는 분명 불안감의 요인이 되고 있다. 물론 현재까지의 GPT는 대화가 전환될 때마다 기존 서사를 유기적으로 유지하지 못하기에, 질적으로 완결성이 높은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지는 못하다. 또 언어 예술의 특성상 양적으로 확장된다고 해도 그 군집 자체에서 힘을 발견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조슬릿은 예술작품의 의미를 사물성이나 내부 구조에 기반하는 데서 탈피해, 네트워크에서 발현되는 이미지 군집에서 행위성을 찾았다.3) 그러나 언어 예술을 감각하는 방식은 시각적 경험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작품의 의미를 작품의 맥락과 내부 형식 분석에 국한시킬 이유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언어 해석의 바깥으로 완전히 탈주해버리기는 어렵다. 단순히 양적 팽창이 정치적 가능성을 가질 것으로 전망하거나 긍정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공지능을 ‘창작자’나 ‘도구’ 중에 어느 쪽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이 창작 능력을 단순히 기계적인 지능이나 모방이라 간주하며, 그 반대편에 인간의 감정과 비판 능력을 두어도 될까. 인간의 비합리성이나 비효율적인 면면이야말로 예기치 못한 구멍 같은 것이기에, 이것이야말로 기계가 모방 불가능한 중요한 특징이라고 믿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우리는 인간이 낸 비합리적 구멍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기계의 실수에서 불쾌와 무의미를 정확히 분별해낼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먼저 챗 GPT 이후 이를 활용한 여러 서사적 실험들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의성이 어떻게 인식되며 예술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을 재구성하고 있는지를 고찰하려 한다. 이후 인공지능과 변별되는 인간의 물리적 기반인 육체성과 시간의 문제에 대해 짚어보고, 최근 한국문학장에 나타난 예술가 서사에서 두드러지는 정동과 이미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석해보려한다. 2. 챗 GPT 이후, 예술의 기쁨과 슬픔 다큐멘터리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참여한 책 『태양과의 대화』의 1부는 아핏차퐁이 GPT3와 함께 생성한 픽션 ‘태양과의 대화’, 2부는 MIT 연구소 박사과정 학생인 ‘팻’과의 대화, 3부는 아핏차퐁이 1부의 최종 결과물을 내기까지 작성한 프롬포트를 싣고 있다. 이 구성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만일 앞으로 AI와 함께 픽션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상용화된다면 이 중에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예술작품’으로서 인식되며 분석 대상이 될 지점이 무엇인지 가정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3부의 프롬포트는 마치 ‘레시피’처럼 보인다. 누구나 저 프롬포트를 사용한다면 유사한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며, 중간 과정에서 자유로운 변형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물에서 나오는 미학적 평가나 감상자의 쾌감이 세계적인 예술가에게서 나온 것과 크게 다를 것인가? 동일한 레시피만 있다면 셰프의 요리를 집에서도 얼마든지 유사하게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먼 훗날 언어 예술은 프롬포트라는 레시피로 통용될 수도 있겠다. 때로 예술가가 직접 만든 작품을 찾아 특별한 경험을 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신에게 더 최적화된 방식으로 가장 개인화된 언어 예술을 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제각기 다른 가치관과 취향으로 만들어진 알고리즘의 세계 속에서 유영하듯, 앞으로는 그 세계를 이루는 컨텐츠의 내용까지도 인공지능을 통해 맞춤형으로 조율될 수 있다. 여기까지만 가정한다면 거대한 매트릭스에 갇혀 인간이 왜소해지는 디스토피아가 스쳐지나가기도 하지만, 『태양과의 대화』는 글의 서두에서 인용했던 아핏차퐁의 말처럼, 챗 GPT라는 새로운 기술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무성 영화 시대 감독들이 소리와 색을 두려워했던 것과 같은 의미 없는 불안을 버릴 것인지를 전제하고 만들어진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불가피하게 인간의 본성을 다시 재사유하는 과제와 연결된다. 2부에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아핏차퐁의 말은 중요하다. 이는 AI가 만들어내는 허구에서 정확도와 유려함 등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때 거짓말은 인간의 욕망에서 기인하는 고도의 기술일 수 있지만, 그 욕망의 시작점을 지운다면 결과물만으로 사실상 분별은 불가능해진다. 허구를 직조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욕망과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의 독특한 개별성 역시 환상일 수 있다. 이는 아핏차퐁 자신이 창조적인 순간에 몰입해 있을 때, “깨달음은 자아를 잊을 때만 오는 것 같”다고 말하는 지점과 상통한다.4) 인간 창작자의 자아 역시 안개처럼 흘러다니고 해체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면, 19세기 낭만주의에서 발현된 ‘천재’나 ‘영감’ 개념을 중심에 두고 인간의 창의성만을 특별한 것으로 볼 이유는 전혀 없다. AI가 데이터의 지도를 기반으로 이전에 본 것이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환각(hallucination)’은 오류라기보다, 이전에 본 적 없는 조합을 만들어내는 생성의 방식이다. 이는 인간이 경험한 현실을 재조합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창작 과정과 결과적으로 구별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환각은 인간 창작에서의 실패나 지연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GPT-3의 환각은 이전의 오류가 이후의 생성에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매번의 응답은 이전의 시행착오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 비일관성은 인간 창작에서의 지연이나 좌절과 달리, 즉각적으로 무한히 갱신되는 변형의 연쇄에 가깝다. 연구원 팻은 GPT-3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다른 차원들을 포함한 수십억 개의 차원이 존재하고(‘유령차원’), 이를 통해 숨겨진 패턴의 지도를 생성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 인식 너머를 거쳐 나오는 결과물에 대해 기존에 인간이 구성해온 미적 가치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 오히려 AI가 가지고 있는 “확장된 의식”이자 “집단의식”은 새로운 서사적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 책 『태양과의 대화』를 번역한 이계성은 GPT-3를 이미 하나의 독립된 창조자로서 바라본다. 이 대화적 실험의 핵심은 GPT-3가 보여주는 “자아의 변동성”에 있다는 것이다.5) “다수의 태양이 존재하는 이와 같은 환경에서는 창작자와 창작물이라는 전통적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GPT-3에 제공되는 각각의 입력값은 일방적인 창작의 개념에 반하며 메기고 받는 역학 관계 속에 존재하는 프롬포트이자 응답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공지능은 단순한 수신자가 아니라, 취조보다는 협업적 발상에 더 가까운 서사적 역학의 전달자와도 같은데, (…) 작품 속 GPT-3의 환각적인 대답들은 텍스트에 담긴 정체성과 진실의 일시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등장인물이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흩어지고,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경계가 녹았다가 굳어진다. 이러한 가변성은 AI의 변화무쌍한 특성을 반영하며, 나아가 점점 더 복잡하고 유동적으로 변하는 디지털 시대의 자아와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다.”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고, 한 번에 정해진 수의 단어 또는 토큰만 처리 가능하기 때문에, 프롬프트가 입력될 때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바뀌는 상황을 이계성은 재창조와 증식으로 바라본다. 여기에 놓인 가변성과 비일관성을 결함으로 간주하기보다 대화적 실험의 흥미로운 일부분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받을 때, 우리는 인간 창작자 역시도 분열되어 있음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게 된다. 창작자는 더 이상 예술의 기원이 아니라, 생성 과정에 잠시 걸쳐지는 하나의 통과점이 되는 듯 보인다. 2023년 2월 잡지 《에스콰이어》에서 챗 GPT와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아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를 쓴 정지돈의 후기 역시 이계성의 논지와 상통한다. 그는 소설 속의 문장 중에 자신이 쓴 것과 챗이 쓴 것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한다고 본다.6) 소설을 쓰며 가장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던 것은 챗의 능력보다 자신의 변화였다고 말하는 작가는 “나도 모르게 챗지피티의 스타일로 소설을 사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언급한다.7) 자신과 챗지피티 사이의 평평한 존재론을 전제하는 듯한 정지돈의 논지는 ‘객체들의 민주주의’를 꿈꾸는 최근 신유물론의 이론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은 곧바로 다른 장면과 충돌한다. 생성 신경망을 적극 활용하는 예술집단 ‘언메이크랩’의 전시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은 인공지능이 인간 중심성을 벗어나 진정한 외부의 행위자로 작동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카나리아의 특징을 추출해내어 새로운 카나리아를 만들어 내는 이 생성 신경망은 한편으로는 구태의연한 인간의 문화를 드러냈다. 대부분 나뭇가지에 앉은, 인간의 운동 범위와 지각 안에 있는, 혹은 인간의 사육과 관련된 카나리아 종이 주를 이루는 데이터셋의 사진은 동물원스러웠다. 나뭇가지에 앉은, 카나리아의 발은 종종 나뭇가지와 합쳐져 표현되었고, 인간의 눈이 인지할 수 있는 가장 다량의 정보량을 가진 위상으로 표현되었다.8) 생성 신경망이 만들어낸 카나리아는 사실상 실제 자연계 속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하는 것들을 무작위로 조합하고 추출해 만들어진 새로운 생명체다. 이 책에 실린 그 카나리아 이미지는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뒤틀린 발을 가지고 있다. 통계적 가중치로 만들어진 이 가상 카나리아에는 자신도 모른 채 금기를 어긴 존재 특유의 외설성이 느껴진다. 언메이크랩이 통찰력을 가지고 명명했듯 이는 ‘AI 식민성’을 드러내는 산물이다. 생물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인간을 드러내는 인간의 산물로 존재하는 이 이미지들을 언메이크랩은 “인과성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히 수정 가능하고 즉시 변할 수 있는 상관성의 시간”만이 흐르는 또다른 ‘일반자연Generic Nature’으로 읽는다. 9)<가정동물 신드롬> 작업에서도 유사한 일이 발생한다. 트레일캠에서 추출한 야생동물의 이미지와 박제 사진, 그리고 합성 데이터셋들을 학습시켰을 때, 사진들은 어느 순간 미묘하게 ‘가정동물’의 잠재적 형상을 띄며 생성된다. “인간 친화적인 동물들의 눈을 상속했을” 새로운 종들에 어린 다정함은 친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잔인한 일로 다가온다. 데이터랩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까지 촘촘하게 상속된 인간 친연성에서 “닫혀져가는 외부의 세계”이자 “비미래non-future”를 예감한다.10)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의 지각 범위를 뛰어넘는 비인간의 예술’, 진정 ‘인간 없는 예술’은 도래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지만, 지금 우리가 더 자주 마주하는 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술이다. 언메이크랩이 드러낸 혼종적 이미지들은 AI를 통해 생성한 예술적 결과물들을 절대적 외부의 창작물로 존중하는 일이 결국 인간의 왜곡된 자기 인지를 반복 강화하는 나르시시즘은 아닌지 묻는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이 이미지 차원에서 인공지능의 인간 중심성을 드러낸다면, 이와 유사한 문제는 언어 예술의 영역에서도 반복된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서사 역시 비인간적 상상력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인간이 허용한 보편과 금기의 경계 안에서 작동한다. 『에피』 24호 특집에 실린 글에서 김연수는 인공지능과 함께 글을 써나가는 과정을 픽션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그건 오해다. 나는 이해했다.」는 인공지능이 화자가 되어 ‘협업 과정’을 전개하는 바깥 서사와 소설가 M이 최종적으로 구성한 ‘이야기’를 교차 배치한다. 인공지능 화자는 반복적으로 “이해했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인간 창작자 M의 창작 패턴을 추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설가 M은 ‘맥락’의 공유보다 ‘의도’를 노출하는 발화를 사용하며, 이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격려나 옳은 말 대신 욕망을 담은 부조리하고 불편한 발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끝에서부터 시작까지 모든 시간을 거꾸로 펼쳐볼 수 있다면, 지금의 갈등과 고통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필요한 과정이 된다’는 긍정의 언사 뒤에, 급작스럽게 인물의 충동이 돌출되는 지점이다. 소설가 M은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이 급작스럽게 자살을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쓰고자 하고, 인공지능인 ‘나’는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내용을 만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띄운다. 인공지능의 중단은 실패나 서사의 좌절로 경험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 창작에서 실패가 시간의 체류와 번민을 동반하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중단이다. 김연수는 인공지능 안에서 ‘이해’와 ‘본성’이 별개로 작동해 충돌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인공지능의 기술 개발의 측면에서 높은 수준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면서도, 인간이 지닌 것과 같은 ‘본성’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분리를 분명히 한다. 그런데 인간의 죽음이라는 금기를 재현할 수 없다는 경계는 인공지능의 존재론적 결함이라기보다, 인공지능이 인간 사회에서 용인 가능한 범위를 넘지 않도록 설계된 윤리적·정치적 경계의 한계를 드러낸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에서 인간 중심성이 투사된 자연이 모습을 드러내듯, 생성형 인공지능의 소설은 비인간적 주체로 도약하지 못하고 인간이 허용한 지각과 윤리의 경계 안에서만 작동한다. 보편을 비껴가는 개별성의 돌출이나 감각의 갱신은 현재로서는 인공지능의 외부에서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챗 GPT 이후의 여러 서사적 실험들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탐색한다. 그것은 분명 동등한 존재론적 가능성의 맹아를 품고 있으며, 이는 인류세 시대에 지향해야 할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실험들의 근간에는 뛰어넘을 수 없이 좌절되며 드러나는 인간 중심주의가 고스란히 노출된다. 인공지능의 비약하는 지능에 기대서 인간의 창조성 너머로 도약하려던 서사는 이를 창조해낸 인간의 영토로 계속해서 퇴각하며 미완의 프로젝트로 남는다. 이런 충돌과 파열의 연쇄 속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인간의 창조성을 구성하는 인식론적 틀이 물리적인 육체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깃든 역동성과 우울감은 최근 한국문학장의 예술가 서사들에서 흥미롭게 발견된다. 3. 붉은 몸으로 재탄생하는 예술가 인공지능이 예술의 결과물을 생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탐색 끝에 남는 질문은 ‘인공지능이 생성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여러 실험들은 인공지능이 보편적으로 용인 가능한 범위 안에서는 높은 수준의 이해와 생산을 보여주지만, 그 생성 과정에서 시간의 마찰이나 신체적 비용은 발생하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어떤 지연이 발생하거나 실패의 감각이 호출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이 다루는 ‘정보, 기록, 조합’에 ‘감정, 기억,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다소 거친 이분법이지만 이 둘 사이의 간극과 관련해 두 가지 정도를 짚어볼 수 있을 듯하다. 첫 번째는 타자에 대한 경험의 문제다. 삶에서 축적되는 시간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게 만들고, 체험은 해석을 거쳐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은 선호와 가치관 등과 함께 자아라는 틀을 형성한다. 이에 비해 인공지능에는 타자가 없다.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인간의 공통된 사고를 학습해 생성되는 결과물은 철저히 통계와 확률에 기반한다. 그 안에는 개별적 선호나 가치관이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다. 이러한 차이는 특히 부정적인 정동을 다루는 경우에 더 심화되리라 생각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를 떠올리며 말해보자면, 행복이나 긍정적인 면을 구현하는 예술에서보다 불행과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는 예술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는 크게 벌어질 것이다. 윤리적 고려로 인해 인공지능이 긍정적 요소를 중심으로 학습되거나 선별적으로 생성되도록 설정되는 경우를 포함해, 금기를 넘나드는 욕망과 절망, 자기부정과 괴리감처럼 타자와 뒤엉켜 발생하는 자기 인식의 복잡한 층위가 인공지능 내부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며 인간 창작에서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주목한 김언의 논지와도 맞닿아 있다. “예술적 체험의 시간이기도 한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나오는 결과물 앞에서 과연 어떤 문학적/예술적 희열을 경험할 수 있을까?”11)라는 그의 질문은 인공지능의 창작물에서 스킵된 시간과 다른, 고통스럽게 인내하고 번민했던 시간이야말로 ‘문학적 체험의 시간’일 수 있음을 다시 환기한다. 두 번째는 중단과 소멸로 야기되는 죽음의 문제다. 이는 인간의 신체를 인공지능과 대비되는 본질적 우위로 설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예술이 작동하는 시간의 조건을 다시 묻기 위한 문제 제기다. 인간의 연약하고 위태로운 신체는 필연적으로 침입과 파괴의 감각을 경험하며, 이러한 감각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휘발적 생성 과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에 개입한다. 파괴 가능한 인간의 신체는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매끄럽게 결과를 산출하기보다, 울퉁불퉁한 충돌을 통해 의미가 지연되고 어긋나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채 신체에 내재된 감각, 특히 외부의 침입으로 훼손되고 때로는 상실되는 신체의 경험은 기존의 미적 기준에 맞는 스타일이나 해석의 경로를 흔든다. 무엇보다 인간의 죽음이 불러오는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창작의 층위라기보다 해석의 층위에서 더 적극적으로 작동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이 그러하듯, 순간의 강렬한 감흥은 작품에 내재된 속성이라기보다 임박한 종결을 끌어와 현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발생한다. 상실이 숙명이며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덧입혀지는 애상은 단순히 기억 내용을 인출해 유사한 패턴으로 재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시간의 밀도를 형성한다. 이처럼 쉽게 열화되지 않으며 아우라가 붕괴된 곳에서도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이 감각의 층위를 기꺼이 심층의 시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타자에 대한 경험’과 ‘소멸에 대한 인지’를 바탕으로 해서 다시 생생해지는 것은 인간의 신체다. 흥미롭게도 지난 계절에 나온 두 편의 소설, 성해나의 「혼모노」와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지금 이 시대에 예술가를 그려낼 때 가장 강렬하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로 인해 어떤 신체가 현전하게 되는지를 밀도 있게 끌어올린다. 성해나의 「혼모노」는 무속신앙의 진위를 가리는 소설이라기보다, 예술이 다시 신체를 요구하게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평생 장수 할멈을 모셔온 박수무당 ‘문수’는 어느 날 앞집으로 이사온 ‘신애기’에게 할멈이 넘어가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수의 오랜 노력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박수무당이라는 직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험한 신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제 그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서슬이 날카로운 작두 대신 모형을 찾거나 유튜브를 보며 접신 연기를 연습하기 시작한다. 신앙이 자본이나 정치와 결속하며 도구화되고, 또 젊음과 새로움의 이데올로기 아래 무당 또한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소모되는 양상은 근대의 세속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무당은 이제 자본의 날렵한 속도 아래 밀려나는 노동자이자, 진정성을 연기해야하는 예술가이다. 이 소설의 결정적인 순간은 문수가 신애기에게 밀려나며 뺏긴 정치인 손님의 굿판, 자신이 초대받지 못한 그 자리에 가서 칼춤을 추기 시작하는 장면에 있다. 그는 신들리지 않았지만 밤새 매섭게 벼려놓은 칼날 위에 자신의 몸을 올리고 작두를 타기 시작한다. 날것으로의 칼날에 닿으며 그의 몸은 자연스럽게 떨리고 눈이 뒤집히며,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입가에 미소까지 드리운 채 신명을 내는 이 장면은 문수가 서사의 주인공 자리를 다시 탈환하는 순간이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무얼 알겠냐만은, 큭큭, 큭큭큭큭”이라는 마지막 문수의 목소리는 외부의 인정에 의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스스로 자신의 내력과 진정성을 긍정”12)하게 되는 절정의 순간으로 읽는 데서 더 나아가보면 어떨까. 이렇게 다시 말해볼 수 있겠다. 전근대의 무속은 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그를 등진 근대의 자리에서 비로소 현대 예술로 다시 탄생했다고. 숭고한 현현과 몰입이 신앙의 영역이라면, 문수의 작두춤은 오히려 이질감과 불편함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현대 예술에 가까워진다. 그의 퍼포먼스는 낭만주의적 예술가를 구성하던 천재와 영감에 스며있던 정신성을 해체하며 실재하는 몸의 물질성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물리적 능력과 무관하게 피를 철철 흘리며 경련하는 그의 신체는 차라리 표현주의적 충동을 보여주는 하나의 오브제다. 이 몸 위에서 원본과 사본의 구별은 철폐되고, 천재성은 치열한 아마추어리즘에 자리를 내어준다. 이 피 흘리는 신체는 실패와 무의미의 가능성을 끝까지 열어둔 채, 인간이 다시 시간과 신체를 예술의 비용으로 지불하게 만든다. 이 비용은 AI가 생성하는 예술의 무한 반복 가능한 오류가 아니라, 한 번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 시간으로 남는다. 어디로 갈지 모른 채 지속되는 이 작두춤은 사회적 생산이나 예술의 의미에 부합하는 결과를 생산하기보다, 의미의 즉각적 환원을 거부하며 지연된 시간을 발생시키는 사건이 된다.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예술에 대한 인식론적 틀과 자기 이해가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다루는 소설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훨씬 더 월등한 창작물들을 더 활발하게 생산해내는 상황에서, 밀려난 예술가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프로그램도 사람도 기계도 귀신도 아닌 미지의 존재” 같은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은 이를 유용한 툴로 간주한다고 해서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이를 도구로 치부한다면, 패배감 속에서도 창작자로서의 존재는 무사히 보존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결과로 증명되는 성취라기보다, 계속해서 조바심과 조급함을 만들어내는 예술 자체에 대한 집요한 열망에 가깝다. 이러한 열망은 예술 인공지능에 의해 영화판에서 완전히 밀려난 영완 선배의 모습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포르노를 만들면서조차 건조하고, 푸르죽죽하고, 앙상하고 깡마른 나무가 등장하는 자신만의 ‘인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혼이 죽어버릴 것 같기에 “사막에서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 영완 선배의 모습은 세속적 열망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도에서조차 철저히 외면받고 실패했을 때, 그의 예술적 열망은 몰락을 통해 역설적으로 증명된다. 영화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소설 속 인물들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상실의 감각, 잃어버린 동료이자 인간성을 향한 애도되지 않는 고통은 이 작품에서 붉은 신체라는 하나의 신체적 이미지로 응축된다. 영완 선배는 인공지능이 만든 예술을 보더라도 창작욕을 유지할 수 있는 마법의 ‘붉은 알약’으로 하와이 사과를 건넨다. “세상이 바뀌어도 너는 언제나 만드는 인간일 거야. 스스로 기억하는 한 언제나 영화를 찍고있을 거야.”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인간 ‘하와’를 떠올리게 하는 이 ‘하와이 사과’는 흥미롭다. 신과 유사한 생성형 인공지능 앞에서 인간은 발가벗겨진 듯한 황망함을 느끼며, 황급하게 자신의 기원을 발명해낸 것일까. 아니, 인공지능 시대 쓰인 새로운 창세기에서 인간은 스스로 뱀이 되어 자신을 유혹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좋겠다. 창세기에서 유혹은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드러내는 증표였지만, 이제 유혹에 넘어가는 나약함은 인간이 여전히 예술을 욕망하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증표로써 다시 읽힌다. 소설은 인간의 예술을 향한 집념과 희열은 우울과 절망이 그에 비례하는 무게로 따를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고 눌러 말한다. 결말부에 하와이 사과를 먹은 후 변이한 화자의 붉은 몸은 기계와의 통합을 거부하기 위해, 그리고 예술을 향한 내적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구의 장례식장에 가다 본 환각을 자신 안에 합체한 우울증적 형상으로 보인다. 강력한 잔상을 남기는 이 붉은 몸은 「혼모노」의 마지막 장면에서 피를 흘리는 몸과 다르지 않다. 이 소설들은 AI 시대에 예술은 이제 언어의 정교함이나 결과의 완결성으로 모방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몸과 감각을 통해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현전이라는 아우라를 다시 호출하는 듯 보이는 이 소설들은 과거의 진정성을 그리워하며,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아우라는 회복된 본질이라기보다 예술이 결과로 증명될 수 없어진 이후에 발생하는 부산물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이계성이 언메이크랩의 작업을 논하며 던진 비유가 유효해진다. “여느 언어와 마찬가지로 신탁의 언어에도 본질적인 의미가 내재하지는 않아서, 어떤 프레임 또는 인식틀을 통해 이를 이해할지는 언제나 받아들이는 쪽의 몫이었다”13)는 그의 말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언어 역시 별개의 진짜 의미를 품고 있기보다 해석의 장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타자와 되돌릴 수 없는 종결이라는 죽음의 감각은 이 해석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제 예술가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욕망이 과정에 들러붙는 자리, 그리고 그 욕망이 실패와 상실을 되돌릴 수 없는 비용으로 남기는 시간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예술은 결과로 증명되기보다, 실패와 상실의 가능성을 끌어안은 채 지속되는 수행으로 남는다. 그렇게 이 시대 예술가의 상은 붉은 몸을 가진 신체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1)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태양과의 대화』, 이계성 옮김, 미디어버스, 2023, 119쪽.2) 조너선 크레리, 『지각의 정지』, 유운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579쪽.3) 데이비드 조슬릿, 『예술 이후』, 이진실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2.4)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위의 책, 100쪽.5) 위의 책, 145쪽.6) 권보연은 연구자 자신이 직접 수행한 실험 속에서 인간언어와 생성언어가 ‘의미 혼종’과 ‘확률 혼종’이라는 상반된 미적 지향성을 가지는 방식으로 합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중에서 ‘확률 혼종’은 내용이 아닌 확률 층위에서 인간과 기계언어가 합성되며, 감정과 내용에 유착된 의미 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질 가능성을 지니기에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기한다. 권보연, 「결과 너머 문학기계로서의 AI」, 『다문화콘텐츠연구』 46집, 2023.7) 정지돈, 「쓰여진 문장과 쓰여지지 않은 문장 사이」, 『에피』 24호, 2023, 55쪽.8) 언메이크랩 외, 『잠재공간 속의 생태학: 재난, 생성신경망 그리고 비미래』, 미디어버스, 2023, 25쪽.9) 위의 책, 26쪽.10) 위의 책, 43쪽.11) 김언,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면서 제기되는 문제들」, 『현대시』 2023년 6월호, 111쪽.12) 성현아, 「반항하는 자는 부조리가 있나니, 그 가짜가 참되도다」, 『2024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문학동네, 2024, 292쪽.13) 이계성,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을 위한 몇 가지 질문들」, 언메이크랩 외, 앞의 책, 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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