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현대비평 2024년 가을호(제20호)
옷의 메커니즘 : 환유 경제의 뉴블루칼라들
1. 뉴블루칼라의 탄생
널리 알려진 이솝 우화 「해와 바람」은 한 나그네를 두고 이루어지는 힘겨루기를 다룬다. 나그네의 옷을 먼저 벗기는 자가 이기는 이 싸움에서 바람은 있는 힘껏 숨을 불어대고 해는 나그네가 스스로 옷을 벗을 수 있도록 빛을 내리비친다. 그 결과, 누구나 아는 대로 승리는 해에게 돌아가면서 이 이야기는 지금껏 ‘부드러움의 힘’을 가르쳐왔다. 그런데 해의 현명함을 상찬하는 일을 잠시 멈추고 나그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 우화는 조금 다르게 읽힌다. 그는 해와 바람이 자신을 두고 모종의 경쟁을 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한 채 변덕스러운 날씨에 맞서 옷을 여미거나 벗는다. 그것이 온전히 자신의 선택이었다고 믿으며. 그를 통제하고 부추겼지만 결코 보이지 않는 해와 바람의 공작과 저들 간의 다툼에 그는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던 셈이다. 이제 나그네의 자리에 우리를 놓아보자. 섬뜩하지 않은가. 우리가 옷을 입고 벗는 일이, 더 나아가 오늘 아침 옷장에서 꺼내 지금 입고 있는 옷에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였을 수 있다는 것은. 이것이 정말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는 사실은.
사실상 옷은 작동 원리가 감춰진 시대의 산물이다. 그간 패션업계는 유행이라는 말로 우리가 특정 옷을 선택하도록 유도해 왔다. 이러한 사실은 지난해부터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른 올드머니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상류층에서 태어나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올드머니’를 상속받은 이들에 대한 상상에 기반한 이 유행은, 부를 타고난 이들은 이를 애써 과시하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하여 브랜드 로고가 드러나지 않으며 고급스러운 소재로 만든 제품을 선호하는 현상이다. 승계된 부에 대한 동경은 그 기원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할 정도로 인간의 보편적인 바람이라는 점에서 이와 같은 유행은 그리 새로운 현상으로 여겨지지 않을 수 있다. 특히 2010년대 중반부터 성행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유효한 비유로 활용되고 있는 수저론을 떠올려본다면 이는 계층적 질서의 엄연함을 재확인하게 하는 또 다른 비유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올드머니룩이 타겟으로 삼은 대상이 ‘뉴머니’라는 점, 즉 자신의 세대에서부터 부를 축적한 이들이라는 점에서 여기에는 부에 대한 보편적 욕망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조금 더 복잡한 맥락이 얽혀있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고소득 근로자가 된 뉴머니들은 장시간 고강도 몰입 노동을 견디거나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란 기치 아래 높은 위험성을 감수하며 주식이나 가상화폐와 같은 금융투자를 감행한다. 건강과 가능성을 담보로 불안하게 카지노 칩을 만지작거리기보다 자기 몸을 모두 비빌 수 있는 안정적인 언덕에 대한 그들의 갈망을 패션계는 상상한다. 능력과 노력만으로 사회적·경제적 보상이 이루어지던 시대가 저물고 태생적 조건이 능력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근래 확산된 능력주의에 대한 불신을 실전에서 경험하고 있는 뉴머니들의 박탈감을 패션사업은 은밀히 이용한다. 물론 그들이 올드머니룩으로 입는다고 그 결핍이 채워질 리는 없다. 다만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점은 노력을 통해 부를 거머쥔 자들마저 타고난 탯줄을 동경하는 현실을, 교육을 통한 계층이동의 신화가 사라지고 어느새 신분제가 회귀한 지금을 옷이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서 옷의 미학이 사실상 경제학과 긴밀히 관련된 채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패션계와 유착한 자본주의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에 따라 뉴머니들이 자신들이 그간 무너뜨렸던 신분 질서를 자신도 모르게 다시 세우는 방식으로 소비하고 있음을 바라보며.
이러한 옷 갈아입기 현상은,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최근 프레카리아트층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지난 시기의 프롤레타리아가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 중 하나를 선택하여 대체로 평생 같은 옷을 입었던 것과 달리, 최근 일부 청년들은 태어날 때부터 입고 있었거나 한때 입었던 하얀 옷을 푸른색으로 갈아입은 후 필요에 따라 다양한 푸른 색감의 옷을 골라 입는다. 어느 날 갑자기 ‘블루칼라’로 옷을 갈아입고 나타나는 ‘화이트칼라’를 보는 일은 이제 그리 놀랍지 않다. 1) 플랫폼은 옷장을 활짝 열어놓고 옷을 갈아입을 이들을 기다린다. 그로 인해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서로 큰 차이를 갖지 않던 프롤레타리아들과 달리 프레카리아트층의 내부 풍경은 다채롭다. 앞선 분류법대로 구분해 보자면 올드블루칼라, 그러니까 원래부터 블루칼라 계층에서 태어나 변함없이 육체노동을 하는 이들과 뉴블루칼라, 화이트칼라 계층에서 태어났거나 과거에는 사무노동을 했지만 지금은 육체노동을 하는 이들, 혹은 학력 수준이 높아 장기적으로는 화이트칼라로서 정규직 노동자로 일하기를 꿈꾸지만 잠시 꿈을 미뤄두고 단기 육체노동을 하는 이들이 모두 프레카리아트층에 섞여 있다.
최근 우리시에서 그려지는 노동자의 전례없이 다양한 면모는 이러한 프레카리아트 분화 현상이 반영된 결과물로 보인다. 2) 가령, 최지인의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창비, 2022)에서 다뤄지는 프레카리아트들은 “돈이 없는 자라서 일할 수밖에 없었”(「최저의 시」)던 부모에게서 태어나 마찬가지로 “굶어 죽지 않으려면/ 일해야”(「문제와 문제의 문제」)하는 삶을 살아간다. 이에 비해 류휘석의 『우리 그때 말했던 거 있잖아』(문학동네, 2023) 속 이들은 일은 하되 “사회의 기준치로 봤을 때 불필요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일” 정도만 하면서 “엄마의 전재산으로 얻은 전셋집”에서 대부분 “놀고먹는”다. 이들은 자신들을 “도망의 왕”(「이 글에는 옮긴이만 등장한다」)이라 지칭하면서 장기적·정기적으로 일을 하는 미래를 계속해서 유예한다. 두 시집 속 청년들은 모두 프레카리아트로 분류되며, 어쩌면 플랫폼에서 배분받은 동일한 노동을 하고 있을지 몰라도 노동에 대한 태도, 노동자로서의 자기 인식, 무엇보다 불안정한 지위로 인한 그들의 내면 풍경은 동일하다고 보기 어렵다. 이것은 최근 현대시에서 나타나는 프레카리아트의 특성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을 한데 뭉뚱그려 설명할 수 없는 이유다.
이 글은 이들을 구분하여 살펴볼 필요를 제기하며, 우선 ‘뉴블루칼라’들, 그러니까 젊은 고학력 중산층 프레카리아트에 집중해 보고자 한다. 특히 한재범의 첫 시집 『웃긴 게 뭔지 아세요』(창비, 2024)에서 다뤄지는, 임시로 프레카리아트 되기를 선택한 이들 중 일부의 내면을 살펴봄으로써 최근 시에서 노동의 프레카리아트화 혹은 플랫카리아트화(플랫폼 기반의 프레카리아트화)3)의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으며 그 문제가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데 이 글의 목적이 있다. 물론 이들에 한정된 이 글의 논의는 계층 내 또 다른 선 긋기라거나 그들 사이 연대의 어려움이 문제 되는 지금, 프레카리아트를 또 한 번 분열시킨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최지인의 올드블루칼라들이 지금의 시대를 1980년대의 연속선상에서 감각하듯(“2020년대에 먹고 사는건 1980년대에 노동자로 사는 것과 다르다 해도 자본가의 지배는 계속되고 있고”, 「서사」) 올드블루칼라가 지난 세기와의 연속선상에 있는 이들이라면, 한재범의 뉴블루칼라는 지금껏 보지 못한 새로운 노동자의 특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보다 섬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비록 한 권의 시집이지만 한재범은 어느 젊은 프레카리아트의 복합적 내면과 지금-이곳의 작동 문법을 새로운 방식으로 깊이 있게 다룬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남다르다. 따라서 이 시집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최근 등장한 뉴블루칼라의 얼굴의 일면을 자세히 살펴보는 일인 동시에 새로운 노동시의 면면을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2. 겹쳐 입으며 안전해지는 ‘나’
그런데 한재범의 시를 (궁극적으로는) 노동시의 계보에 위치시키기 위해 이 글을 쓰면서도 나는 ‘노동시’라는 말을 사용하는 일 앞에서 망설이게 된다. 이는 그간 여러 평자들이 노동시의 개념과 그것의 함의 변화에 대해 치열하게 사유하며 이룬 빛나는 성취 덕분이다.4)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실시간 노동이 이루어지고, 노동이 “쟁의에서 생계로 가라앉”5)은 지금, 다분히 사용법이 한정된 채 쓰이고 있는 ‘노동시’라는 말을 가져와 ‘시’와 구분 짓는 일의 유효성에 대한 질문들이 그것이다. 물론 이 글의 초점이 이 용어의 유용성을 따지는 데 있지 않기에 자세히 논할 수는 없지만, 한재범의 등장은 노동시의 유효성을 심문하기 위해서는 이제 노동의 양태 변화와 연계된 재현 내용만이 아니라 재현 그 자체, 그러니까 변화된 서술 방식을 ‘노동시’라는 개념이 감당할 수 있는가를 논의할 필요가 있음을 명령하는 하나의 사건처럼 여겨진다. 지난 노동시들의 현실 재현 성격과 언어의 직접성을 계승하여 최지인, 유현아, 이용훈의 시가 노동의 현장을 핍진하고 직설적인 언어로 재현해 왔다면, 한재범의 프레카리아트 화자는 노동 현장 재현보다는 노동하는 자의 내면을 상징적인 언어로 발화하기 때문이다.6)
손 앞에 종이 상자(③)가 있다
― 「 」 전문(밑줄 및 번호는 인용자)
그의 시집 첫 페이지에 수록된 인용시가 그 대표적 예다. 고백건대, 이 시를 읽는 일은 당혹스럽다. 종이 상자 모양을 형상화한 제목의 낯섦도 그 요인 중 하나지만 무엇보다 주문한 종이 상자가 오지 않았음에도 “손 앞에 종이 상자가 있다”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나’의 말이 특히 의아하게 들린다. 마치 여러 시점에서, 혹은 불연속적인 시간 속에서 작성된 문장들을 접붙여놓은 듯 우리를 교란하는 이 문장들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각각의 문장들을 따로 떼서 읽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우선 이 시를 화자가 시간의 순서대로 말한다고 가정하고 읽어보자. 그러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른다. 첫째, 그의 손 앞에 놓인 종이 상자(①)는 그가 종이 상자를 주문한 후 그의 앞에 놓이게 된 것일까, 아니면 애초부터 종이 상자(①)가 있었음에도 그는 종이 상자(②)를 주문하여 그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둘째, 2연의 종이 상자(③)는 시간이 흘러 드디어 도착한 상자(②)일까, 아니면 이는 상자(②)와 무관한 것으로 ‘나’는 다시 한번 종이 상자(①)의 있음을 확인하고 있는 것일까.
모든 질문에 확답하기는 어려워 보인다.7) 다만 여러 불확실성 속에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시에는 한재범의 화자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주문했지만 오지 않고 있는 상자(②)와 손 앞에 있어 그가 언제든 이용할 수 있는 상자(①), 이렇게 두 종류의 종이 상자가 있으며 그가 이 둘을 분명히 구분하여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볼 때 시인은 종이 상자(②) 앞에 ‘내가 원하는’이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같은 단어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모순을 발생시키는 셈인데 이러한 전략은 ‘종이 상자’를 동일한 하나의 개체로 생각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물건을 보관하거나 옮기는 기능만 생각해 보면 모든 종이 상자는 동일하다. 그러나 그 규격과 모양은 사실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길거리에 버려진 종이 상자를 구해와 그 안에 물건을 넣기도 하지만 도처에 있는 상자를 두고도 (대가를 지불하면서까지) 자신이 원하는 상자를 신중히 골라 구입하고 그것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이도 있다. 또 어떤 이는 도착할 기약이 없는 상자를 기다리는 동안 손에 닿는 상자를 임시로 사용하는 방법을 선택하기도 할 것이다. 이후 수록된 시들은 종이 상자에 대한 하나의 독법, 그러니까 상자를 일자리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는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한재범의 화자가 이 중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 자인가를 보여준다.
자연을 걷는 사람처럼
일시적이다 일시적이지만 자연스럽게 고궁을 걷는다 고궁을 걷지만 영원은 아니다 깃발을 들고 서 있지만
점령은 아니다 여행객들 사이에서 나는 꽤 여행객스럽다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 같다 마음 내켜 한번 와봤어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과 고궁을 걷는다 그런 마음들과 자연스럽다 그런 마음들은 비행기를 타고 왔고
나는 지하철을 타고 왔다 시급 9,160원*을 받고 지금 밟고 서 있는 오백년의 역사에 대해 설명한다
[……]
자연스러울 때도 있지 않겠어요 이젠 건너편 공사장에 대해서도 설명해야 할 거 같다 왜냐면 설명은 나의 직업이고
건너편 공사장은 몇년째 저 자리다 함부로 영원하다 영원 사이에서 나는 꽤 자연스럽다
시멘트를 섞으며 달리는 레미콘처럼
영원하지만 자연스럽게
그러나 나는 2222년이 기대된다
* 2022년 최저시급.
― 「레디믹스트콘크리트」 부분
손에 쥔 휴대폰으로 언제든지 플랫폼에 접속하여 구할 수 있는 일자리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얻을 수 있는 일자리는 둘 다 돈을 벌게 한다는 점에서 그 기능은 사실상 같다. 최저시급을 받고 문화해설사로 일하는 이 시 속 ‘나’가 스스로를 “여행객스럽다”라고 하거나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 같다”라고 가리킨다는 점에서 보건대 그는 손 앞의 상자를 임시로 사용하는 것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여행객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고궁은 단기 고용된 그의 상황을 한층 부각한다. 그는 숙련되지 않은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연신 신경 쓰이는 양 ‘자연스럽다’라는 말을 반복하거나 “자연스러울 때도 있지 않겠”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시에서 ‘나’가 자신이 잠시 이 일을 하고 있음을 여러 방법으로 강조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상황을 보여주기 위함만은 아닌 것 같다. 이것이 ‘일시적’인 노동임을 되뇌며 이 일과 선을 긋는 그의 말에는 주목할 만한 속내가 있다. 그는 이러한 선 긋기를 통해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미래에는 이어지지 않을 것임을 강조하며, 굳지 않은 상태로 배달되는 “레디믹스트콘크리트”와 같은 자신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내비친다. 물론 가까운 미래에 그 가능성이 실현된다고 믿는 것은 아니며(“그러나 나는 2222년이 기대된다”), 영원히 공사 중인 시 속 공사장처럼 장기 노동이 유예된 상태가 계속 이어질 수 있다는 불안도 그는 가지고 있다. 다만 그는 자신을 분리하여 불안정한 노동을 하는 ‘나’를 임시의 ‘나’로 봄으로써 우울한 가운데 명랑함을 유지한다.
지하철부터 탔군요
[……]
내일은 모르겠어요
어제의 내가 나간 출구가
생기고 없어지길 반복하는데
없어진 출구가 벽이 되고
거기 등 기대는 몸도 있군요
미워하기 위해
미워할 몸부터 찾는 사람처럼
모르는 얼굴들과 함께
욱여넣어지는 것이 익숙하군요
때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가울 수가 없네요
그러나 다행히 나는 내일부터
내가 아니기로 했군요
― 「나는 내일부터」 부분
지옥과 같은 지하철을 타고 있어도, 어제는 보였던 출구가 지금 ‘나’에게는 보이지 않아도 그런 ‘나’를 분리하여 생각하는 덕분에 그는 명랑히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다행히 나는 내일부터/ 내가 아니기로 했군요”. 그의 말에는 한때 유행했던 본캐와 부캐처럼 지금 힘든 ‘나’는 부캐로서, 그런 ‘나’가 상처를 받았다면 마치 입고 있는 옷에 상처가 난 것일 뿐 진짜 ‘나’가 훼손된 것은 아니라는 논리가 전제되어 있다.8) 물론 그가 여러 겹의 ‘나’들을 껴입는 까닭은 옷의 본 기능대로 본질적인 ‘나’를, 꿈을 가지고 미래에는 원하는 일을 하고 있을 ‘나’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무림의 은둔 고수 나 김정배는 무림을 벗어나 강호를 견제하고 세간을 수호해왔다 나 김정배는 은둔 고수 겸 은둔의 고수 내가 나임을 김정배임을 무림의 은둔 고수임을
철저히 숨겨 온 존재
김정배를 부정해야만
김정배는 실재할 수 있다
― 「무림의 은둔 고수 나 김정배」 부분
‘김정배’로서의 ‘나’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나’, ‘무림의 은둔 고수’, ‘김정배’로 분리하여 자신을 대상화하는 한재범의 화자를 이수명의 설명대로 “삼인칭 자아”라고 말해보자. 이것이 새로운 “우리의 자아의 현주소”9)라면, 이렇게 새로이 형성된 자아는 젊은 청년 프레카리아트로서의 존재 방식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임시로 프레카리아트로 살아가기를 결심한 그와 같은 청년들은 자신에게 “뜯어버리”는 것이 가능한 여러 페이지가 있는 듯 스스로를 분리하여 “연습장”처럼 사용할 수 있는 “연습생”으로서의 ‘나’를 앞세우는 방식으로, “살기 위해서” “자신보다 더 많은 굴”을 파서 숨는 “토끼”(「연습생」)처럼 미래를 꿈꾸는 ‘나’를 겹의 ‘나’들로 숨기는 방식으로 유예된 미래를 안전하게 보존한다. “내가 나라는 사실을 자꾸만 일깨워주”는 데에서 “안전”(「유원지」)감을 느끼며. 주문한 종이 상자가 도착하여 그것을 사용할 미래를 기다리며 그들은 임시 ‘나’를 여러 벌 겹쳐 입는 방식으로 본체 ‘나’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다.
3. 벗겨지는 옷과 사라지는 ‘나’
이런 그의 전략은 상상 속에서는 분명 그럴듯하게 여겨진다. 문제는 현실에서 그들이 입은 임시 ‘나’는 본체인 ‘나’와 한몸이 되거나 끝내 벗겨진다는 데 있다.
[……]
이 꿈이 지루하다
뛸수록 바깥과 멀어지는 숲이다 뒤로 손을 넘겨도 닿지 않는 등이 서늘하다 꿈속에서 만져지는 건 나뿐인데 외출복이 젖고 있는 걸까 숲의 나는 외출복을 입지 않았는데
[……]
일어나 잠은 집에 가서 자야지 누군가 나를 흔들수록 나는 외출복을 끌어안는다 이불을 파고들 듯이 천사들은 다가와 식물원의 사람들처럼 지루한 얼굴로 나를 자세히 본다
― 「직물과 작물」 부분
‘외출복을 입은 나’와 ‘외출복을 입지 않은 나’를 구분한 그는 밖에서 하는 일, 즉 일을 해서 돈을 버는 등의 역할은 ‘외출복을 입은 나’가, 집에서 침대에 눕거나 (미래를) 꿈꾸는 일은 ‘외출복을 입지 않은 나’가 담당하도록 했다. ‘직물과 작물’이라는 제목의 두 단어가 단 하나의 획으로 완전히 다르게 활용되는 것처럼 그는 한 겹의 외출복을 가지고 자신을 둘로 구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상상과 달리 이러한 전환은 기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외출복을 입은 나’는 밖에서 돌아오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바로 ‘외출복을 입지 않은 나’로 변환되어야 하지만 그는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잠이 들어버릴 수 있으며 그때에는 오히려 ‘외출복을 입지 않은 나’가 바깥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외출복을 입고 나가지 않았지만 그것이 땀에 젖는 일을 겪거나 “나를 아무리 뒤집어도 나의 등은 나의 등”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그는 자신을 쪼개 완벽히 분리하는 것은 사실상 어려우며, 애써 이를 구분하려고 해도 어떤 ‘나’에게 일어난 변화는 나머지 ‘나’에게도 영향을 준다는 점을 비로소 깨닫는다. 그가 외출복을 끌어안는 시의 마지막 장면은 자신의 방어 논리와 희망이 깨졌음을 깨달은 그가 끝내 방어막을 놓지 못하며 하는 마지막 몸부림일 것이다.
어쩌면 고학력 중산층 청년들이 같은 단기 노동이라도 플랫폼에 기반한 작업을 대체로 선호하는 것은 이 경우처럼 본체 ‘나’와 지금의 노동을 하는 ‘나’가 전도될 것을 염려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오랜 시간 교육이 필요한 고숙련 노동이 그럴 가능성을 높인다면, 쉽게 할 수 있고 쉽게 그만둘 수 있는 플랫폼 기반 노동을 할 경우 ‘나’는 본체인 ‘나’의 꿈에 조금 더 신경을 쏟은 채 기회가 왔을 때 원하던 옷으로 빠르게 갈아입을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옷을 입되, 마치 몸의 절반에는 옷을 걸치고 나머지 반은 걸치지 않은 것처럼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사력을 다하지 않으며 언제든 옷을 벗을 수 있는 순간을 대기하고 있기도 하다.
절반을 허공에 입혔는데 춥진 않았다 지나친 사람마다 잠바를 걸치고 있었다 언제부터 잠바가 유행했는지
[……]
코끼리 코에 달린
코끼리가 나는 좋아서
벌써 몇바퀴째 공원을 돌고 있었다 앞으로 더 추워질 거라던데 코끼리 코는 계속 제자리였다 다음 계절이 이미 온 것 같아 뭐라도 걸쳐야 했다 흔해지기 싫었다 절반만 걸쳐야 했다 내 것이 아닌 잠바가 내게 안 어울릴 정도로 컸고
내가 걸치지 않은 절반이
자꾸 흘러내렸다
[……]
나를 쳐다보는 사람이 없도록
그러나 다시 코끼리 코 앞에서
멈췄을 때
코끼리 코에 달린
코끼리는 사라지고
누군가 나를 붙잡았다 지압을 하듯이 센 손아귀로 잠시 끌려가는데 놓으라고 말하지 못했다 뭐라도 걸쳐야 했는데 절반을 걸친 이 풍경이 꽤 추웠는데 코끼리 코 끝났을 때 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를 보았다
― 「코끼리 코에 달린 코끼리」 부분
생계를 위해 “뭐라도 걸쳐야” 하기에 자신의 학력 수준과 집안 자산 등과 맞지 않는 잠바를 입고 있지만(“내 것이 아닌 잠바가 내게 안 어울릴 정도로 컸고”) 그들은 자신의 선택하에 언제든 그러한 옷을 벗을 수 있도록, 말하자면 언제든 그러한 옷을 입은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도록 잠바를 ‘절반’만 걸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청년 프레카리아트들과 (고학력 중산층인) 자신을 차별화하기 위해서라도(“흔해지기 싫었다”).
그러나 몸에 꼭 맞지 않는 잠바는, 심지어 어정쩡하게 절반만 입은 옷은 계속해서 흘러내리기 마련이다. 그때마다 그들이 직면하는 것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자신의 민낯이다. 결코 훼손되기를 원치 않았던 ‘나’가 노출될 때 그는 임시 ‘나’가 받은 상처를 같이 받기도 하고 본체 ‘나’가 임시 노동을 하는 지금의 ‘나’와 정말 다른가를 고민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이들이 마주하게 되는 또 하나의 진실은 자신이 어떤 것을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점차 무언가에 끌려가고 있다는 것과(“누군가 나를 붙잡았다/ [……] 잠시 끌려가는데”) 그럼에도 이에 저항하지 못하게 된 자신의 무력함(“놓으라고 말하지 못했다”)이다. 코끼리에 코가 달린 것이 아니라 코끼리 코에 코끼리가 달린 듯 그는 코끼리 코와 같은 일부의 ‘나’를, 부캐로서의 ‘나’를 앞세워왔지만 그 둘의 사실상 분리 불가능성 앞에서 본캐와 부캐는 섞이고, 부캐인 프레카리아트로서 살아가는 데 점차 적응하며 본캐는 어느새 사라진다(“코끼리는 사라지고”). 이는 고학력 중산층 프레카리아트들이 정규 노동시장 진입을 왜 점차 포기하게 되는지, 프레카리아트 상태에서 왜 점점 벗어날 수 없는지를 짐작하게 한다.10)
아주 자연스러운 옷이다 이 옷은 겨울옷도 되고 여름옷도 된다 계절은 순환되고 유니폼은 반복된다 매일 입는 이것은 이제 나 같다 유니폼 바깥의 나는 나 같지 않다
[……]
내가 아닌 몸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저런 몸을 갖고 싶다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유니폼을 입는다 유니폼 안에서 나는 유일하다 유니폼은 일정하고 내게 자연스럽기에
유니폼을 입고 집까지 간 적도 있다 사장님은 내게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하라고 한다 저는 정말 없어요 사장님 저는 이미 충분해요 바깥의 유니폼이 말한다
― 「유니폼」 부분
이제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무슨 옷이라도 걸치는 것뿐이다. 「유니폼」의 ‘나’는 잠바를 절반만, 그것도 걸치는 방식으로 아무렇게 입기를 선택한 「코끼리 코에 달린 코끼리」 속 ‘나’와 옷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다르다. 그는 일할 때 입는 유니폼을 어느 계절에나 입고 집에까지 입고 가며 유니폼을 입은 자신만을, 이와 같은 노동을 하는 자신만을 ‘나’라고 인식한다(“유니폼 바깥의 나는 나 같지 않다”). 자신 아닌 다른 몸을 부러워하지도, 다른 몸을 갖고 싶어 하지도 않는 그의 모습에는 본체의 잠재성을 긍정하며 미래를 기대하는 입체적인 ‘나’는 없다. 다만 자신의 한계를 미리 정해두고 사실상 몸과 붙어 있는 한 겹의 옷만을 입고 있는 납작해진 ‘나’만이 있을 뿐이다. ‘김정배’는 죽었고(“김정배는 이미 몇시간 전부터 시체에 불과하다”, 「무림의 은둔 고수 나 김정배」), 미래를 꿈꾸던 ‘나’는 “할 일을 하고 나니” 사라졌다. 더 이상 누군가를 “볼 낯이 없어”질 만큼 절망한 그들은 “고작 이것밖에 안 됐습니다/ 실망해주세요 저를”(「재건축」)과 같은 말로 자책하며 다음과 같이 다짐한다. “이제는 그만둬야겠지// 나를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을”(「시인의 말」).
4. 환유 경제의 메커니즘
이것이 그들 내면의 한 풍경이라면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하게 짚어두어야 할 점은 한재범이 점차 본질적인 자신을 잃어가는 ‘나’에 대해 적을 때 자주 문장의 단어 하나를 생략하는 방식으로 서술한다는 점이다. 가령, “내가 걸치지 않은 절반이/ 자꾸 흘러내렸다”(「코끼리 코에 달린 코끼리」)라는 구절은 ‘내가 걸치지 않은 절반[의 잠바]가 자꾸 흘러내렸다’는 문장을 줄인 것이고, “사장님은 내게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하라고 한다 저는 정말 없어요 사장님”(「유니폼」)의 경우 ‘저는 정말 [불만이] 없어요 사장님’이라는 문장이 줄이지 않은 원 문장이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사용되었을 이와 같은 환유는 물론, 임시 노동으로 ‘나’가 없어진 상태를 드러내기 위해 선택된 수사다.
해설에서 최다영도 지적한 대로 한재범의 시에서 환유는 유독 자주 사용된다.11) 이는 저 두 문장에서처럼 그들이 프레카리아트로서 살아갈 때 본체 ‘나’가 점차 사라지는 양상을 보여주는 데 효과적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조금 당겨 말하자면, 시인은 환유의 잦은 사용을 통해 지금의 세계가 환유의 원리로 작동하고 있음을 표상하는 동시에 그런 작동 구조가 ‘나’라는 실체 등을 결과적으로 사라지게 한다는 사실을 고발한다. 그의 환유적 상상력이 세계의 메커니즘과 관련되어 있음은 표제작인 「웃긴 게 뭔지 아세요」에서 확인된다.
우리 안에 동물이 한 마리도 없었다 여긴 꼭 버려진 것 같네 우리는 분명 동물원을 걷고 있었는데 너는 상관없다고 했다 우리는 계속 걸었다 우리 안에서 바나나를 까먹는 침팬지를 만날 순 없었지만 거대한 담장 안을 빙빙 돌았다 걸을수록 기억에도 없는 옛 시절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는데 우리 밖에 바나나 껍질이 버려져 있었다 몽키 바나나 아세요? 그거 같은데 원숭이가 먹는 바나나요 그런 웃긴 이름도 있군요 그건 사람의 것이 분명해 보였다 어떤 사람도 마주치지 않았지만 다음 주에는 정말 동물원에 가요 벌써 마트 문 닫을 시간이네 이제 그만 나갈까요
어쩌면 침팬지보다 바나나를 좋아하는 너에게 바나나 생과일주스를 사주고 마트에 들렀다 정육 코너 옆 신선 코너에는 바나나가 탐스럽게 놓여 있었다 바나나를 향해 손을 뻗는데 누군가 가로막았다 웃긴 게 뭔지 아세요? 바나나와 사람은 절반이나 같아요 [……]
그게 무슨 말이지 나는 가끔 내 말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의 바나나 줄기에선 바나나가 여럿 자라니까요 그의 이름도 알지 못했지만 우리에게서 같은 냄새가 났다 벌써 문 닫을 시간이네 이러다 여기 갇히겠어요 이제 그만 나갈까요 바나나를 도로 신선 코너에 놓았는데 내 손을 잡고 있던 네가 없다 우리가 아니었구나 그래도 상관은 없다 나는 내 앞에 놓인 바나나 생과일주스를 쥔다 껍질을 까지 않아도 바나나는 거기 있다 두 개 이상의 바나나가 들어간 음료다 빨대를 빙빙 돌려 그것을 섞는데 우리 밖에 침팬지가 나와 있다 몽키 바나나 아세요? 사람이 만든 건데 컵 안에 갈린 바나나가 절반 채워져 있다 나의 손이 그것을 둘러싼다 바나나 냄새는 나지 않는다
― 「웃긴 게 뭔지 아세요」 부분
지금 ‘나’와 ‘너’는 어디를 걷고 있는 것일까. 동물원을 걷던 ‘나’와 ‘너’는(“우리는 동물원에 갔다”) 갑자기 마트를 걷고 있는 것으로 서술되며(“다음 주에는 정말 동물원에 가요 벌써 마트 문 닫을 시간이네”), 동물원에는 없던 침팬지가 마트에 나타나기도 하는 등(“우리 밖에 침팬지가 나와 있다”) 그들이 정확히 어디에 속해있는지를 외부의 우리는 파악하기가 어렵다. 이와 더불어 몇몇 문장들, 예컨대 “바나나와 사람은 절반이나 같아요”와 같은 전언 역시 선뜻 이해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서술은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에는 환유가 작동한다. 먼저, 마트와 동물원이라는 전혀 겹치는 지점이 없는 두 장소는 내적 정의가 아니라 ‘몽키 바나나’라는 외부 사물에 의해 연결된다. 기실 ‘몽키 바나나’ 역시 ‘몽키가 좋아하는 바나나’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환유의 산물인데 그것은 마트에도 팔고 동물원에도 있기에 두 장소는 그에 인접한 대상을 통해 이와 같이 연결되는 것이다. ‘바나나와 사람이 절반이나 같다’라는 엉뚱한 말 역시 ‘몽키 바나나’로 연결된 환유의 결과물이다.
② 침팬지는 바나나를 좋아한다. (침팬지→바나나)
③ “바나나와 사람은 절반이나 같아요” (사람≒침팬지→바나나)
화자의 연상이 흘러가는 대로 적어 보자면, 사람과 침팬지는 유전자가 거의 일치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사람≒침팬지)12) . 그런데 침팬지는 바나나를 좋아하므로 바나나는 침팬지를 환유한다(침팬지→바나나). ‘침팬지→바나나’라는 관계가 성립한다면 침팬지와 유전자가 거의 같은 사람 역시 바나나와 절반이나 같다는 말도 성립된다(사람≒침팬지→바나나).13) 이렇게 볼 때, “몽키 바나나 아세요?”라는 시의 첫 문장은 해당 사물의 존재에 대해 아는가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 ‘몽키 바나나’라는 말이 생긴 작동원리를 아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그러니까 이 세계가 환유로 작동하고 있는 것을 아는가를 묻는 질문처럼 들린다.
환유의 문법은 전통적 고용구조의 해체가 심화된 지금의 노동 시장에서 가장 활발하게 통용되고 있다. 이를 ‘환유 경제 시대’라고 명명할 수 있다면, 최근 프레카리아트 노동의 중심에 있는 플랫폼은 이를 작동시키는 주체로서 그 자체로는 어떤 생산도 하지 않은 채 일자리와 노동자를 결합하며 노동의 유통을 담당한다. 일자리와 노동자를 결합하는 플랫폼의 방식 역시 다분히 환유적이다. 플랫폼은 오래 교육받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단기 노동을 원하는 이들을 쉽게 끌어모아 플랫폼 밖에서는 전혀 연관관계도 연결고리도 없는, 사회적 지위, 계층, 젠더, 학력 등이 서로 다른 이들을 느슨하게 연결한다. 유사한 일을 하면서도 그들이 연대하여 프레카리아트 처우에 대한 집단적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것은 이처럼 너무나 다른 각각의 상황이 주되게 작용한다. 한편, 플랫폼의 이와 같은 구조를 프레카리아트는 적극적으로 이용함으로써 그들은 옷을 갈아입듯 쉽게 일자리를 옮겨 다닌다. 이와 같은 환유 경제의 풍경을 한재범은 「소재지」에서 다룬다.
[……]
목장갑을 낀 손이 낯설어서 나는 마음에 든다 창고의 짐들은 종이 상자에 담겨 있는데 이렇게 가벼워도 되는지
[……]
창고를 옮기려는 사람들은 어디 가고 창고를 옮기는 일만 여기 남는다 혼자 남은 나는 상자를 열어본다
상자 안에는 빈자리가 조금 많고 이것은 이미 하나의 창고처럼 보인다 창고의 마지막 짐을 빼자 창고는 사라지고
텅 빈 이곳은 더 이상 창고가 아니다 창고는 내 손안에서 유일하다 흔들면 무너지는 소리가 날 뿐
― 「소재지」 부분
자신에게도 “목장갑”이 꽤 어울린다는 것을 의식할 만큼 목장갑을 끼고 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목장갑을 낀 손이 낯설어서 나는 마음에 든다”) ‘나’는 이쪽 창고의 짐을 종이 상자에 넣어 다른 창고로 옮기는 작업을 막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맡은 이 일은 프레카리아트들이 통상 하는 노동의 단순함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동되는 짐처럼 고정된 ‘소재지’가 없는 그들의 상황과도 맞닿아 있으며, 더욱 확대하여 해석해 보자면 무언가를 산하지 않고 옮기기만 하는 작업의 특성은 프레카리아트들이 자주 선택하는 컨시어지 노동처럼 실체 없는 노동을 표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14)
그런데 무엇보다 이 시에서 흥미롭게 여겨지는 점은 이러한 작업의 와중에 일하는 이는 사라지고 일만 남는다거나(“창고를 옮기려는 사람들은 어디 가고 창고를 옮기는 일만 여기 남는다”) 일하는 공간이 사라지는(“창고의 마지막 짐을 빼자 창고는 사라지고”) 등 무언가 사라지는 현상을 시인이 다룬다는 점이다. 이것은 환유의 원리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앞서 우리는 인접성이 환유를 작동시키는 원리임에 주로 주목했지만 사실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경제성의 원칙에 입각”해서 대체물과 피대체물 사이의 말을 생략하는, “생략 가능함, 곧 괄호를 칠 수 있음이 바로 환유를 낳는” 또 다른 “비밀”이다.15) 한재범은 환유의 원리로 작동되는 세계가 결국 무엇을 생략하는가를 두 작품에서 분명히 보여준다.
「소재지」 속 두 종류의 사라짐은 환유 경제의 문제처럼 여겨진다. 플랫폼 자본주의는 누가 해당 일을 하는가에 관심을 두지 않고 일자리와 노동만을 빠르게 결합하여 노동자를 괄호 치는 방식으로 노동을 유통함으로써 중개료와 같은 불로소득을 얻는다. 한편, 프레카리아트 노동의 다수를 차지하는 컨시어지 서비스는 무형의 노동이자 수요자에게 맞춰진 노동인 탓에 뚜렷한 노동의 결과를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우며 수요자가 없으면 언제든 저 창고처럼 사라질 수 있다.
그런데 미래를 유예한 젊은 청년들에게 환유 경제의 더욱 심각한 문제는 다른 데 있는 것 같다. 한재범은 「웃긴 게 뭔지 아세요」에서 바나나 냄새의 사라짐을 통해((“바나나 냄새는 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를 나타낸다. 환유의 세계에서 결국 사라진 것이 ‘냄새’라는 점은 특별히 의미심장한데, 그것은 냄새가 존재를 환유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만 영화 <기생충>(2019)에서도 그러했듯 이는 개인의 계층적, 정치적 정체성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16) 이러한 시의 장면은 그들이 올드블루칼라들과 다른 학력, 자산 등을 내세우며 프레카리아트층에서 자신을 구분 짓고 미래를 꿈꾸었지만 결국 원 정체성을 잃고 프레카리아트로 장기간 머물게 될 가능성을 시사한다. 시의 가볍고 유머러스한 설정 아래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젊은 프레카리아트의 이와 같은 서늘한 미래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해보자면, 대체로 지난 노동시들에서 노동자의 문제가 은유와 제유를 통해 나타났다면,17) 한재범의 시가 새로이 등장한 프레카리아트의 문제를 환유를 통해 제시한다는 점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플랫폼과 일자리 사이에서 괄호 쳐지는, 노동의 유통이 만들어내는 “공적(公的)인 환영물”18)에 불과한 그들을 환유를 사용하여 그리는 것은 환유라는 새로운 작동 원리에 노출된 그들의 존재 양식을 효과적으로 표상하기 위함일 것이다. 여러 벌 옷을 겹쳐 입(게 하)고, 옷을 벗(기)고, 한편으로는 자주 옷을 갈아입(게 하)는 환유 경제 속 그들은 점차 낡아가는 푸른 옷을 입는 것에 만족하며 희망하던 미래의 ‘나’를 잃어간다. 이러한 새로운 노동 시장의 작동 원리를, 그 시장 속에서 점차 꿈을 잃어가는 뉴블루칼라를 보여주기 위해 한재범은 지난 노동시에서 흔히 보기 어려웠던 환유라는 장치를 가지고 나타났다. 우리는 새로운 노동자의 얼굴을, 새로운 노동시의 탄생을 목도한 셈이다.
- 1) 이러한 선택에 작용한 보이지 않는 메커니즘에 대해 나는 지난가을 어느 글에서 쓴 바 있다(인간 없이 일(하지 않)기」, 《딩아돌하》 2023년 가을호). 고학력 중산층 청년이 자발적으로 프레카리아트가 되어 저숙련 노동을 하는 것을 ‘팬시’하게 여기는 양상은 최근 ‘공구벨트세대’라는 용어로 개념화될 만큼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다만 이 글에서는 고학력 중산층 프레카리아트 중에서도 고정 직장을 갖기 전 임시로 프레카리아트로 살아가는 이들에 집중해 보고자 한다.
- 2) 고봉준은 2010년대에 발표한 글에서 이미 오늘날의 ‘노동자’가 단일한 형상이 아니며 그들 간의 욕망이 겹치지 않는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이때 그가 대상으로 삼은 노동자란 내국인/외국인 노동자,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프레카리아트의 경우, 그는 이들이 정규직이라는 이름의 안정적인 노예를 희망한다고 설명하며 단일한 집단으로 서술한 경향이 있다. 이 글은 그의 주장에서 더 나아가 프레카리아트 역시 보다 세분화하여 이해하려는 시도다. 고봉준, 「우리가 알던 노동시의 종언」, 『비인칭적인 것』, 산지니, 2014, 366-367쪽.
- 3) 김영선, 「플랫폼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자상」, 《도시연구》제18호, 2020.
- 4) 대표적으로 고봉준, 「노동시여, 안녕」, 「우리가 알던 노동시의 종언」, 앞의 책; 소종민,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노동시의 과거와 현재」, 《창작과비평》2024년 여름호.
- 5) 소종민, 앞의 글, 41쪽.
- 6) 이러한 변화 역시 프롤레타리아에서 프레카리아트로의 변화, 프레카리아트 층의 다양화 등과 연계되며 시의 독자층 변화의 문제와도 이어진다. 이에 대한 보다 심화된 논의는 다음을 기약한다.
- 7) 특히 종이 상자(③)에 대해서 그러하다. 그러나 어제 주문했던 종이 상자(②)가 도착하였다면 그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보다는 상자를 활용하는 행위가 뒤이어 나오지 않았을까. 그렇게 본다면 종이 상자(②)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 8) 「커피는 검다」를 비롯해 한재범의 시에서 자주 보이는 ‘나’에 대한 모순적인 서술들, 가령 잠을 자는 ‘나’와 잠이 깨어난 ‘나’가 동시에 있는 이 시의 다음 구절은 사실상 그가 본체 위에 여러 임시 ‘나’들을 껴입고 있는 상태와 연결된다. “커피를 마신다 잠이 오지 않아서 창밖은 검다 잠긴 핸드폰 화면 속 ‘잘 자’라는 문자에 답하지 않는다 들여다보지 않는다 나는 자고 있으므로”.
- 9) 이수명, 『웃긴 게 뭔지 아세요』추천사, 창비, 2024.
- 10) 온전히 자신의 의지대로 익숙한 구조에서 벗어나는 일의 어려움은 「유원지」의 화자가 어느새 익숙해진 “놀이기구”의 “끌어당기는 힘”에서 벗어나기를 결심하고서도 한참 헤맨 끝에 “출구” 밖으로 나가는 장면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이런 세계의 흐름에 떠밀려가지 않기 위한 사회적 장치는 마련되어 있지 않고, 그들은 스스로가 자신을 지키는 것밖에는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 11) 최다영, 「일인극 튜토리얼」 , 앞의 책, 133-139쪽.
- 12) 해당 기호는 권혁웅의 『시론』에서 빌려온 것이다. 권혁웅, 『시론』, 문학동네, 2010, 338쪽.
- 13) “바나나와 사람은 절반이나 같아요”라는 구절 속 ‘절반’에 주목한다면 저 구조는 보다 복잡해진다. 시에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원숭이와 침팬지가 절반 정도 같다’는 문장을 이 구조 속에 하나 더 집어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 14) 컨시어지 노동이란 플랫폼을 통해 위탁받는 “택시운전, 청소, 수작업이나 배달서비스”를 가리킨다. 가이 스탠딩, 『불로소득 자본주의』, 김병순 옮김, 여문책, 2019, 287쪽.
- 15) 권혁웅, 『환유』, 모악, 2017, 23-24쪽.
- 16) <기생충>을 비롯한 냄새의 문제에 대해서는 조혜영의 「수석과 냄새는 계급적 상상력이 될 수 있는가?―「기생충」(2019)의 계급 재현과 그 실패의 징후」(《문학과 사회 하이픈》 2023년 여름호)와 이희우의 「매력의 경제학」(《문장웹진》 2022년 2월호)를 참조할 만하다.
- 17) 예컨대, 「어쩌면」과 같은 시에서 박노해는 “수천번이고 로봇처럼 반복동작하는” 자신을 “기계”에 빗대는가 하면(은유), 「지문을 부른다」에서는 “지문”의 사라짐을, 「손무덤」에서는 손의 훼손을 이야기했다. 지난 노 동시에서 사용된 비유의 종류에 대해서는 물론 보다 구체화한 논의가 필요하다.
- 18) 권혁웅, 앞의 책,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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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리 뛰며 나아가는 미래 언젠가부터 시에서 ‘미래’라는 단어를 자주 본다. 아직 오지 않은 날에 대한 염려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이기 때문일까. ‘멸종’과 ‘멸망’이라는 말로 미래를 예감함과 동시에 노인이 등장하거나, 노인이 된 상황을 상상하는 젊은 시인의 시들이 유독 눈에 띈다.1) 이런 경향을 현실의 제 문제와 관련하여 논의하는 일이 필요하겠으나 이 글에서는 ‘미래’라는 용어에 대한 다분히 개인적인 감상을 꺼내놓고 싶다. 이 단어가 포함된 작품을 읽었을 때 느꼈던 생경한 감각에 대해. 물론 시에 사용하지 못할 말은 없으며 낯선 언어가 만들어내는 효과를 모르는 건 아니다(더욱이 ‘미래’라는 단어는 이제 시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말이기에 낯설다고 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왜 나는 ‘미래’가 들어간 문장을 읽을 때면 목에 무언가가 걸린 느낌이 드는 걸까. ‘미래도시’나 ‘미래 계획’과 같은 용례를 통해 이 단어를 처음 접했던 유년의 기억 탓일까. 그러니까 내게 ‘미래’란 현재와 동떨어져 있는 관념적인 시간이라 이 말이 포함된 문장의 경우 여러 번 읽어야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주관적이라 생각했던 이 느낌이 나에게 한정된 것만은 아님을, 나는 지난 계절에 발표된 여러 편의 시를 읽으며 알게 되었다. ‘미래’라는 말이 그토록 낯설게 여겨진 까닭에 대한 또 하나의 실마리와 더불어. 기대 없는 시간 안미옥과 정우신의 시를 나란히 읽는다. 네가 작은 돌멩이라면 주머니에 넣고 집으로 올 것이다 잘 보이는 곳에 놓고 두고두고 볼 것이다 곁에 둘 수 있는 다른 돌멩이를 찾아보기도 할 것이다 매일 깨끗하게 닦고 햇볕에 잘 말려두고 가끔은 이리저리 옮겨 다른 풍경을 보게 할 것이다 네가 작은 돌멩이라면 여긴 버튼을 눌러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 유리 액자 안 작은 돌멩이 나는 매일 다시 돌아와 보았다 만질 수 없는 너는 매일 같은 자리에서 제자리 뛰기를 했다 중력을 거슬러 있고 싶은 곳에 있겠다는 듯이 아무리 높게 뛰어올라도 어딘가 도착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으면서 다른 시간을 찾아보겠다는 듯이 매번 같은 자세로 넘어지면서 눈사람 이야기를 읽다가 덮는다 마지막엔 다 녹을 것이므로 네가 작은 눈송이라면 곁에 있는 눈송이와 함께 뭉쳐놓을 것이다 알게 놔둘 것이다 단단하게 녹을 수 있다는 것을 오리도 되었다가 곰도 되었다가 사람이 되어볼 수 있다는 것을 그러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녹지도 부서지지도 않고 ― 안미옥, 「미래 세계」(『현대문학』2024년 11월호) 전문 안미옥의 시는 ‘나’와 ‘너’가 대비되는 구도로 이루어져 있다. ‘너’를 무척이나 아끼는 듯 보이는 ‘나’는 ‘너’가 “작은 돌멩이라면” 집에 데려와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두고 정성껏 보살필 일을 상상한다. 이런 ‘나’의 가정에 짙게 깔린 사랑은 모성애에 비견될 수 있는 것이지만 굳이 ‘나’와 ‘너’의 관계를 부모와 아이로 한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나’는 앞으로의 일들을 ‘너’보다 조금은 더 잘 알고 있기도 해서 ‘너’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알려주려 애쓰고 있다는 점만은 짚어두자. 이때 주목해서 보아야 하는 것은 ‘너’에 대한 ‘나’의 염려가 세상에 어떠한 기대도 없는 마음에 의해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여긴 버튼을 눌러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고 한탄하는 ‘나’가 ‘너’에게 “눈사람 이야기”를 읽어주다가도 결국은 눈이 “다 녹을 것이므로” 책을 덮어버리는 장면을 보자. 그런 ‘나’에게 미래란 아직 오지 않은 불분명한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분명한 시간이기에 ‘나’는 ‘너’가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걱정한다. ‘미래’라는 말이 (낙관적이든 비관적이든) 어떠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떠올려본다면 이 단어가 화자에게 나 못지않게 생경한 것이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크리스티앙 보뱅은 「작은 파티 드레스」에서 유년기가 끝난 후 지속되는 죽음에 대해 말한 바 있다.2) 물론 이 아름다운 산문의 초점은 성년이 된 우리가 “죽음 속을 제자리걸음 하는 사람”같이 지내다 어떻게 사랑에 의해 변화되는가를 설명하는 데 맞추어져있지만 유년 이후의 시간을 그가 ‘기다림의 시간’이라고 칭하는 지점도 생각해 볼 거리가 있다. 특정한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기다리는 상태’로 지내는 것이 성인이 되고 난 뒤 우리가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이라는 그의 서술은, 우리가 점점 ‘가능성’이라는 말과 멀어진다는 사실을 정확히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는 실제적인 가능성만이 아니라 내적으로 우리가 체념 상태에 머무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이 내일과 같고 내일이 오늘과 다르지 않은 날들에서 상상해 볼 수 있는 미래는 한정된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며 이미 결정된 결말로 나아가는 삶 속에서 우리는 점차 무료해진다. 스펙터클한 변화의 시간에서 비껴선 채 이제는 삶의 어느 한쪽으로만 걷는 정우신의 시 속 “남녀”의 마음 상태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一. 말이 달린다. 二. 남녀가 태어난다. 三. 뒤이어 말이 달린다. 四. 남녀는 종소리를 듣고 잠에서 깬다. 五. 남녀는 체조한다. 六. 말이 콧김을 내뱉는다. 七. 남녀는 목장을 운영하는 것이 꿈이다. 八. 남녀는 가죽을 낳고 싶다. 四. 말이 주춤한다. 五. 말이 안장을 버리고 교차로에 서 있다. 六. 남녀는 정리한다. 七. 남녀는 채찍을 모두 버린다. [……] 三. 말이 등에 올라탄다. 四. 남녀는 정원에 구덩이를 판다. 五. 운과 복이 움직이는 것을 본다. 六. 남녀는 말의 눈동자를 이식한다. 七. 먹을 간다. 八. X축 위로 선이 하나 놓인다. 二. 방사선 치료를 받는다. 三. 폭포 소리가 들린다. 一. 삶의 가장 왼쪽으로 걷는다. 二. 남녀의 첫 단칸방. 三. 한쪽 벽면을 차지하던 곰팡이가 있다. 四. 좌에서 우로 오는 말이 있다. 五. 앞에서 뒤로 가는 말이 있다. 六. 남녀는 언제부터 걸려있었을까. 七. 가죽을 입어본다. 八. 초파리가 사리탑 주변으로 모여든다. ― 정우신, 「팔마도(八馬圖)」 (『릿터』2024년 12/ 2025년 1월호) 부분 이 시에서 정우신은 “팔마도” 속 역동적으로 달리고 있는 여덟 마리의 말들에 번호를 매겨 이를 각각의 개별적인 시간에 빗댐으로써 시간의 실재성과 운동성을 나타낸다. 우리의 삶은 움직이는 시간의 등에 올라타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듯 시에는 남녀의 “탄생”부터 “방사선 치료”를 받기까지 그들의 일생이 차례로 회고된다. 스스로 시간을 운영하기를 꿈꿨던 그들이(“七. 남녀는 목장을 운영하는 것이 꿈이다”) 어떻게 주춤하다(“四. 말이 주춤한다./ 五. 말이 안장을 버리고 교차로에 서 있다”) 지난날을 정리하는지(“六. 남녀는 정리한다”), 시간의 등에 올라타 그것을 채찍질하며 빠르게 앞으로만 나아가던 삶을 그만두자(“七. 남녀는 채찍을 모두 버린다”) 도리어 시간이 그들의 등에 올라타(“三. 말이 등에 올라탄다”) 그들을 덮친 양, 이제는 죽음을 떠올리는 그들의 모습은(“四. 남녀는 정원에 구덩이를 판다”) 우리의 일생 역시 시간과 함께 달리다 결국 어딘가에 멈춰져 전시되는 것이 아닌가를 쓸쓸하게 되짚어보게 한다. 삶이 결국 병듦과 죽음의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실감할 때 우리는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五. 앞에서 뒤로 가는 말이 있다”). 이처럼 생을 알아갈수록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일은 점점 더 쉽지 않아진다는 것을 정우신의 시는 생각하게 한다. 기도하기와 주석 달기 그런데 두 시 모두 이러한 생의 끝을 다루는 데 그치지 않는다. 먼저, 정우신은 ‘남녀’와 일정한 거리를 둔 채 그들에 대해 말하며 목소리로만 존재하는 화자를 마지막 연에서 가죽을 입어보는 자로 전면 등장시키며 그 존재를 강조하듯 보여준다. 시의 앞부분에서 남녀가 “가죽을 낳고 싶”어 했다는 서술과 그들이 남긴 가죽을 입어보는 화자의 행위를 연계해 볼 때 그는 그들의 자식으로 보인다. ‘가죽’은 ‘가족’의 변형으로 읽히기도 할뿐더러 누군가의 가죽을 입는 일은 외형이 유사해지는 것에 다름 아니어서 자식은 부모가 남긴 가죽을 입은 듯 그와 닮은 외형을 가진 자이기 때문이다. 아랫대의 그는 지난 세대의 시간을 애틋하게 추억하는 가운데, 그들이 남긴 가죽을 입음으로써 새로운 시간이 시작된다. 이는 정우신이 시간을 말에 빗대어 자율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시간의 특성을 강조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미래의 존재에 대해서라면 안미옥은 조금 더 적극적이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 「미래 세계」가 ‘나’와 ‘너’라는 대비 구도로 구성된다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시인은 ‘나’와 전혀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너’에 대해 적으며 ‘나’와 ‘너’를 의도적으로 구분한다. 계속해서 넘어질 것을 알면서도 “매일 같은 자리에서 제자리 뛰기”를 하는 ‘너’에게는 다음 벌어질 일을 그저 수용하는 ‘나’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너’에게는 패기가(“중력을 거슬러 있고 싶은 곳에 있겠다는 듯이”), 두려움보다는 믿음이(“아무리 높게 뛰어올라도 어딘가 도착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으면서”), 권태보다는 호기심이( “다른 시간을 찾아보겠다는 듯이”) 있다. ‘너’는 액자 속에 머물러 움직이지 않는 “작은 돌멩이”도, “눈”과 같이 곧 사라질 존재도 아니다. 돌멩이에게 가능한 미래란 점점 부서지는 것이고 눈에게 가능한 내일이 사라지는 것이라면 ‘너’는 그것들과 달리 정해진 시간 질서에 아랑곳하지 않는 자이다. 그러니까 ‘너’는 ‘나’의 마음속에서 절대로 녹지도 부서지지도 않을 만큼 ‘나’가 사랑하는 존재인 동시에 실제로도 소멸과는 거리가 먼 존재로 그려진다. ‘나’는 눈앞에 있는 이러한 ‘너’를 보며 ‘미래’라는 말이 내포한 ‘가능성’의 생생한 의미와 그것이 단단하고 구체적인 실재가 될 수 있음을 비로소 확인한다. 이때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너’가 만들어갈 날들에 “미래 세계”라는 SF에 어울릴 법한 제목을 붙인 시인이 시에서 주목하는 ‘너’의 행위가 “제자리 뛰기”라는 점이다. ‘너’의 행위의 소박함과 광대한 제목 사이의 불균형은 미래에 대한 ‘나’의 변화된 생각을 나타내는 다분히 의도적인 설정으로 읽힌다. 즉, 미래란 멀고 거창한 시간이 아니라 마치 제자리 뛰기를 하는 것처럼 현재 바로 뒤에 놓이는 시간이자 아주 미묘한 변화가 발생한 시간임을 저 낙차는 드러내고 있다. 이는 멸종이나 멸망 같은 먼 미래를 주로 이야기하는 최근의 시들과는 조금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러한 점은 양안다와 권박의 시에서도 발견되는 특성이기도 하다. 다락방에 료스케가 있다 다락방에서 예언의 서가 완성된다 다락방에서 료스케의 계절이다 태양은 바쁘고 여름밤은 잠시 바쁘다 냉소바 한 그릇을 비우고 예배당 료스케의 동생 료코는 제멋대로 구는 만담꾼이다 제멋대로 구는 외지인의 이마를 쳐대고 그런데 우리의 꿈은 너무도 원초적인 것이었지 기도문의 마지막 구절은 「춥고, 뜨거운 물을 식히고, 뇌우가 온다」라고 합의되었다 제멋대로 [……] 지난여름에 눈길을 끌었던 건 어느 정원의 측백나무 하얀빛의 뒷면을 깨부수는 조약돌과 꽃상 1인치 정도 사랑에 빠지는 행인들 청신호가 우리 머리 위에 료스케는 온통 멍든 팔을 베고 잠든다 료코는 나를 비웃고 비웃고 그리고 료코는 거짓말을 한다 “당장이라도 잠들고 싶다는 절박감에 너를 만났어. 입이 찢어져라 노래 부를 만큼 진심이었지.” 어느 날 료코는 여름 하늘을 통과하는 꿈 오늘의 여름밤이 끝나면 내일의 여름밤이 시작된다 눈가에 잿가루 묻히고 얼굴에 고양이 털을 덕지덕지 붙인 채로 서 있다 쪽빛 마음과 함께 우리들 깊은 산속 신사 앞에서 ― 양안다, 「예언과 등불을 걸고」(『웹진 비유』2024년 11/12월호) 부분 이 시에서 양안다는 여름밤의 몽상을 거치며 미래로 향해가는 이들을 그린다. “료스케”, “료코”, ‘나’는 양안다의 여러 인물들이 그러하듯 제각기 다른 이름처럼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미래를 떠올리는 방식도 다르다. 료스케가 좁은 “다락방에서” “예언의 서”를 완성한다면 그의 동생 료코는 세상에 대해 비판적인 말들을 늘어놓고(“료코는 제멋대로 구는 만담꾼이다”), ‘나’는 료스케의 품에서(“나를 품에 안은 료스케”) 무언가 만족스럽지 않은 지금을 곱씹는다(가령, “냉소바 한 그릇을 비”우는 료스케와 달리 ‘나’는 “많은 음식이 만족스럽지 않다”). 이러한 나열은 미래에 대해 갖는 여러 생각을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열거한 것으로도, 동일한 인물이 갖는 내적 갈등으로도 읽을 수 있지만 나는 이들이 합의한 기도문이 갖는 소박함에 주목하고 싶다. 여름의 한가운데에 그들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춥고, 뜨거운 물을 식히고, 뇌우가 온다”를 “기도문의 마지막 구절”로 삼았다는 사실은 미래의 도래를 바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냉소바 한 그릇을 비”우는 일로 더위를 잠시 잊고, 더위가 물러가도록 “예배당”에서 기도하는 그들의 행위는 “오늘의 여름밤”이 끝나도 “내일의 여름밤”이 시작되는, 어떠한 극적인 도약도 없는 시의 시간과 닮아 있다. “지난여름” “측백나무 하얀빛의 뒷면을 깨부수는 조약돌”처럼 아주 작은 움직임, “1인치 정도”의 아주 작은 사랑을 발견하는 것이 “청신호”인 세계. 이런 작은 변화를 위해 양안다의 인물들은 숲이 타올랐던(「다른 여름의 날들」, 『숲의 소실점을 향해』, 민음사, 2020) 지난 시간이 남긴 “잿가루”를 묻히고 자신에게 주어진 “쪽빛 마음”의 운세를 믿으며, 기도하기 위해 “신사 앞”에 있다. 기도는 언젠가 바라는 일이 이루어질 것을 기다리며 제자리를 뛰듯 같은 말을 간절히 반복하는 것. 그런 나날을 보내며 달라지는 것은 미래의 시간만이 아니라 현재 기도하고 있는 자의 내면 이기도 하다. 양안다의 시가 기도를 통해 미래로 나아간다면, 권박의 시에는 주석이 그 역할을 한다. 어여삐 여기는1) 사람이 만든 글자로 어여쁜 바늘을2) 추모한 사람에 대해 짓겠다 어여쁜 사람이…… () …… 될 때까지 짓겠다 위험한 커다란 돌 하나 사랑을 얼굴을 이런 시는 그만 찢겠다 짓겠다 내내 어여쁘겠다3) 적당한 말은 아니지만 어여쁘겠다4) 꺼진 밤, 멈춘 밤, 부러진 바늘의 밤, 위험한 커다란 돌 하나 하늘에 불꽃 튀긴 전신주 젖은 전선들 얼굴과 목이 해체된 여자 있다 모든 되는 신은 불구不具하면서 불구不拘하므로 어여쁘겠다 1) 『훈민정음』. 2) 유씨부인, 『조침문』. 3) 역사役事를 하느라고 땅을 파다가 커다란 돌을 하나 끄집어내어 놓고 보니 도무지 어디선가 본 듯한 생각이 들게 모양이 생겼는데 목도들이 그것을 메고 나가더니 어디다 갖다 버리고 온 모양이길래 쫓아 나가 보니 위험하기 짝이 없는 큰길가더라. ……(중략)……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다.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 어떤 돌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만 같아서 이런 시는 그만 찢어 버리고 싶더라. 이상, 「이런 시」, 『이상 전집』2, 가람기획, 2004 변주. 4) 님의 얼골을 「어여쁘다」고 하는 말은 적당適當한 말이 아닙니다. / 어여쁘다는 말은 인간人間 사람의 얼골에 대한 말이요, 님은 인간人間의 것이라고 할 수가 없을만치 어여쁜 까닭입니다. 한용운, 「님의 얼굴」, 최동호 편, 『한용운 시전집』, 서정시학, 2009 변주. ― 권박, 「어여쁘겠다」(『현대시』2024년 10월호) 전문 첫 시집 『이해할 차례이다』(민음사, 2019)에서부터 주석을 다는 방식으로 시를 써왔던 권박이 같은 방식을 고수하는 것은 그 자체로 제자리 뛰기다. 특히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여쁘다’라는 형용사를 사용한 글들을 조합하여 만든 이 시는 같은 자리를 계속해서 뛰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제자리를 뛸 때마다 도달할 수 있는 높이와 착지할 수 있는 범위가 미세하게 달라지는 것처럼 권박은 주석을 달며 그때마다 다른 시간과 사유에 머물렀음을 표기한다. 이 과정에서 그가 보게 된 것은 ‘어여쁘다’의 의미가 ‘불쌍하다’에서 ‘아름답다’로 달라지는 데 작용한 여성의 현실이다. 세종이 백성을 불쌍하게 생각해서 만든 글자(『훈민정음』)를 가지고 “유씨 부인”이 바늘을 불쌍하게 여겨 『조침문』이라는 제문을 지었을 때 ‘어여쁘다’는 분명 ‘불쌍하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작가인 유씨 부인이 누군가의 부인으로만 알려져 있고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여성이라는 점, “얼굴과 목이 해체된 여자”라는 점은 ‘어여쁘다’는 말의 용례가 변화했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불쌍하고 가련함을 나타내는 말이 언젠가부터 여성의 아름다운 얼굴을 드러내는 데 쓰이게 된 연유에는 여성의 비참한 현실이 작용했음을 그는 되짚는다. 그 오랜 역사를 이야기하기 위해, 새로운 역사를 위해, 시인은 ‘어여쁘다’라는 단어 위에 계속해서 주석을 달며 지난 역사 위에 또 다른 역사적 방식의 글쓰기를 시도하려 한다. “어여쁜 사람이…… () …… 될 때까지/ 짓겠다”라고 중간말을 생략하며 어떤 것도 한정짓지 않음으로써 쓰고 찢고 다시 쓰는 방식의 글쓰기. 그럴 때마다 새로이 조명되는 여성의 역사가, 그런 역사를 되짚어 보며 새로이 만들어지는 현재와 연결된 미래가 여기 있다. 이 시를 읽기 전과 후로 우리의 생각을 달라지게 하는, 현재와 이어진 미래가. 아주 조금 다른 자리에서 네 편의 시를 읽었다. 이제 ‘미래’는 더 이상 내가 알던 멀고 추상적인 시간이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 바로 다음 시간. 현재와 ‘1인치 정도’ 다른 자리와 높이에 머무르는 시간. 이처럼 미래가 현재와 붙어 있는 것이라면 미래는 사실상 지금 이 문장을 쓰는 중에도 벌써 와버린 것이다. 쓰는 행위는 언제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가로지른다. 쓰는 자는 녹거나 부서지지 않고 원하는 미래로 가기 위해 제자리에서 뛰는 일을 반복하는 이들, 지난 이가 낳은 가죽을 물려 입고 또 다른 가죽을 물려주는 이들, 지난 시간이 남긴 잿가루를 묻히고 기도하는 이들, 쓰고 찢는 일을 반복하는 이들이 아닐까.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가리키지만 그들은 기다리지 않고 시를 쓰며 나아간다. 반복할수록 조금 더 높은 자리에서 조금 더 멀리 바라보며, 아주 조금 다른 자리에 착지하며. 우리 역시 그런 시를 읽을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가운데 미래를 산다. 1) 이 문장은 윤혜지의 「음악없는 말」(『문학동네』, 2022년 봄호)과 주민현의 「넓어지는 세계」, 「오래된 영화」(『멀리 가는 느낌이 좋아』, 창비, 2023) 등을 염두에 두며 쓴 것이다. 최근 젊은 시인들이 시에서 미래를 다룰 때 자주 나타나는 이와 같은 양상은 일종의 ‘조로(早老) 현상’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상세하게 다룰 것을 기약한다. 2) 크리스티앙 보뱅, 「작은 파티드레스」, 『작은 파티드레스』, 이창실 옮김, 1984books, 2024.
겹의 생, 시의 겹 송현지 1 지구의 역사를 알기 위한 방법 중 하나는 지층(地層)을 수직으로 잘라 단면도를 살펴보는 것이다. 매 지층마다 다르게 발견되는 생물 화석종과 각기 다른 지질구조는 시간이 흐르며 변화된 지구의 양상을 선명히 드러낸다. 같은 방법을 한 시인이 지나온 시간을 짐작하는 데에도 적용해 볼 수 있을까. 기실 시집은 종이로 층을 이룬 그 자체로 지층(紙層)이므로. 물론 시집 구성에 따라 시가 적힌 낱낱의 종이들은 시간 순서와 다르게 배열되기도 하지만 적어도 시집 단위에서라면 그 순서는 대개 일치한다. 그러니까 어느 시인의 시집을 발간된 순서대로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면 우리는 누군가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셈이다. 책등에 적힌 각기 다른 제목은 중생대나 고생대 등과 같은 명칭처럼 시의 시간대를 가리키는 데에도 용이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채상우의 시는 『멜랑콜리』(천년의시작, 2007)와 『리튬』(천년의시작, 2013), 그리고 『필』(파란, 2021)의 시대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고. 그렇다면 채상우의 시세계를 톺아보는 이 자리에서 시인이 “층서학”을 가리켜 “사체 하나를 바라보다 다른 사체 하나를 바라보는 침묵들로 이루어져 있다”(「必 죽어 간다」, 『필』)1)라고 말했듯 세 권의 시집을 순서대로 거론하며 변화된 양상을 이야기해볼 수도 있으리라. 그런데 세 권의 시집 위에 이번 딩아돌하 작품상으로 선정된 「새가 두 번 우는 까닭은」을 올려두자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과연 그의 시간은 (앞으로) 흘러가는 것일까. 왜 그렇다잖아 사람이 말야 사람이 죽기 전에 말야 사람이 죽기 몇 분 전에 말야 자기가 살아온 한생을 통째로 기억한다잖아 낱낱이 되산다잖아 주마등처럼 내달리는 등불처럼 어쩌면 지금이 바로 그때인지도 몰라 바로 지금이 마지막 숨결을 삼키고 있는 그 찰나인지도 몰라 그래서 몇 십 년 전 일이 아까만 같고 시방 피고 있는 저 목련이 이미 오래전에 지던 그 목련만 싶고 그래서 금방 지나고도 영영 그리워지고 내내 서운해지고 그래서 그래서인 거야 새가 두 번 우는 까닭은 피고 지는 목련 아래 아내 손을 맨 처음인 듯 꼬옥 쥐는 까닭은 - 「새가 두 번 우는 까닭은」 전문(『딩아돌하』 2024년 봄) 여러 오해의 여지가 있는 이러한 질문으로부터 글을 시작하는 것은 채상우 시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되살기’가 이 작품에서 여전히 반복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기 몇 분 전에”는 “자기가 살아온 한생을 통째로 기억”하게 된다는 잘 알려진 이야기를 떠올린 시 속의 화자가 “지금이 바로 그때”가 아닌가를 반문하며 지난 시간을 낱낱이 되살고 있는 장면이 그러하다. 『멜랑콜리』와 『리튬』의 뒤편에 빼곡히 적힌 다양한 인유 텍스트 목록이 가리키듯 시는 물론 대중가요, 성경 등 과거의 수많은 텍스트를 현재 시점으로 가져왔던 그의 지난 시들이 자연스레 떠오르지 않는가. 『필』(파란, 2021)에서는 인유에 더해 ‘쓰는 행위’가 새로운 되살기 방법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예컨대, 저녁이 오고 있는 상황을 “저녁이 오고 있다라고 쓰고 다시 고쳐 쓰”(「必 그러나, 저녁이 오고 있다」)는 방식으로 그는 지나간 시간을 시 안에서 되살았다. 벽에 대고 공을 차면 “어김없이 되돌아”(「천국을 보는 눈」)오는 공처럼 끊임없이 돌아오는 과거들에 대해 “다 늦은” 후에라도 써야 했던 그는 “137억 년 동안 팽창하고 있”는 “우주”(「必 쓰고 있다」)의 시간과 반대 방향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이처럼 그의 시에 과거를 되풀이하는 화자가 자주 등장했으며, 이번 작품이 지난 시들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은 채상우 시에서 시간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새가 두 번 우는 까닭은」 속 화자의 ‘되살기 행위’는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성격을 갖는다. 이는 채상우의 시에서 어떤 변곡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해서 이 글은 그 변화를 이야기하기 위해 『필』을 중심으로 채상우의 지난 시 세계를 돌아보려 한다. 2 한 장면으로부터 시작해보자. 한여름 땡볕 아래 아이가 공을 찬다 아이가 벽에다 공을 차면 공은 다시 아이에게 어김없이 되돌아온다 나는 매번 단 한번만 진실했을 뿐이다 그것이 내 죄의 시작이고 끝이다 아이가 공을 찬다 아이는 쉬지 않고 공을 찬다 공은 공이 되어 가고 벽은 벽이 되어 가고 아이는 神이 되어 간다 내가 바라보는 곳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당신의 뻥 뚫린 동공들 벽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다 벽은 아무런 흔적 없이 다만 거기에 있다 한 아이가 공을 차면 벽은 반드시 거기에 있다 한 아이가 공을 찬다 공을 차고 다시 찬다 다시 차고 다시 차고 다시 차고 다시 차고 아이가 찬 공은 다시 돌아오고 다시 돌아오고 다시 돌아오고 다시 돌아오고 다시 돌아온다 기필코 돌아온다 어제는 유두였고 오늘은 유두가 하루 지난 칠월의 마지막 날이다 모두 이루었으나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가 있다 - 「천국을 보는 눈」 부분 아이가 벽을 향해 공을 차자 공이 벽에 부딪쳐 다시 아이에게 돌아가는 시의 장면은 앞서 말했듯 회귀하는 과거에 대한 비유로 읽힌다. 누구에게나 사로잡힌 과거가 있다는 점에서 이런 상상은 모두의 공감을 사는 만큼이나 그리 특별하지 않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채상우 시의 미덕은 보편적 상상을 바탕 삼아 한 단계 나아간 사유를 전개한다는 데 있다. 이 시의 경우 시인은 “나는 매번 단 한번만 진실했을 뿐”이라는 화자의 진술을 시의 중간 어느 부분에 삽입함으로써 이를 수행한다. ‘단 한번만’이라는 단어가 공이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과 공이 벽에 부딪쳐 다시 뒤로 돌아가는 움직임을 구분하게 하는 가운데 ‘진실’이라는 단어를 통해 두 움직임 중 어느 것에 아이의 마음이 담겨있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에게 이러한 생각은 불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대개 자신의 의지로 공을 차는 전자의 시간을, 실제 시간의 방향과 같은 이 공의 움직임을 생의 중심에 두며 현실을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채상우에게 공의 두 움직임은 실제 삶에서 언제나 겹쳐진 채 작용할 뿐만 아니라 대부분 부수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돌아오는 공의 움직임 역시 상상이 아니라 실제 그가 살아가는 생이라 그는 이 생각에 골몰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그는 현실을 살아가는 한편으로, 돌아오는 과거를 살아가는 자이므로. 흰 개가 지나간다 저 개는 내가 모르는 개다 구름이 흘러간다 저 구름은 오늘 처음 만난 구름이다 장미가 시든다 아니다 저 장미는 이미 시들었고 나는 시들지 않은 장미를 본 적이 없다 골목길은 텅 비어 있다 당신은 없다 흰 개는 지나갔고 구름은 흘러갔고 장미는 시들어 있다 텅 빈 골목길엔 라디오와 나뿐 라디오에선 어제부터 강릉에 폭우가 내린다고 한다 십사 년 전 강릉에 갔을 때도 하루 종일 비가 내렸었다 십사 년 동안 내리는 비 십사 년 동안 꺼지지 않는 라디오 당신은 없고 텅 빈 골목길엔 라디오와 나뿐이다 지나간 흰 개처럼 흘러간 구름처럼 시들어 버린 장미처럼 이제 남은 생은 언제나 어제이거나 어제일 뿐이다 - 「必 흰 개가 지나간다」 부분 모르는 흰 개가 지나가고, 처음 만난 구름도 흘러가고 장미가 시드는 것을 목격하는 것이 그의 실제 삶이라면, 여기에 그는 이미 시들었던 장미를 보았던 과거를 떠올리며 지금을 과거와 겹쳐놓는다. 현재와 과거를 동시에 사는 것을 ‘겹의 생’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는 마치 꿈과 현실이 나뉘는 것처럼 시간의 방향으로 가는 생과 이를 거스르는 생을 동시에 산다. 이런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는 삶을 동시에 살기에 그에게 현실은 언제나 두 가지로 인지된다. “슬픈데 슬프지가 않다”(「必 쓰고 있다」)거나 “오늘 본 부처나비가 첫 나비가 아닐 수도 있다”(「必 기약하지 않았는데」)는 서술은 ‘겹의 생’을 살고 있는 화자의 상태와 긴밀히 관련된다. 이때 유념해 두어야 할 것은 시간순으로 살아가는 일보다 되돌아오는 과거를 사는 일이 그에게 자주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오래전 만난 누군가를 떠올리거나 누군가의 부재를 생각하는 등 지나간 일을 생각하는 데 몰두할 때 실제로 지금 흘러가는 화자의 시간은 “언제나 어제이거나 어제일 뿐”이다. 계속해서 돌아오는 과거를 마주하며 오로지 이에 대해 쓰고 있는 것이 “미친 짓”(「必 쓰고 있다」)임을, 어제만이 계속되는 “하루하루 이상한 시절들이 계속되고 있”(「必 죽어 간다」)음을 그도 인식하지만 이를 벗어나지 못하는 그의 실제 삶은 이미 죽음이 도래한 상태와 다르지 않다. 이런 점에서 『필』에 묘사된 여러 죽은 존재들의 모습, 특히 “대못”이 머리에 박혀 “흐무러진 고양이 눈동자 속으로” “한여름 한낮이” “들어차고 있”는 광경이나(「必는 한여름이고 한낮이다」) “피어나려”는 “꽃”과 달리 “이틀째 가만히 있”는 “죽은 새”의 모습(「必 꽃이 피어나려 한다」)은 외부의 흘러가는 시간과 대비되는 멈춘 시간 속에 머무르는 존재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자화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는 겹의 생을 살아감으로써 죽음과 생을 동시에 살고 있는 셈이다. 3 이때 한 가지 더 짚어두어야 할 점은 그의 겹 생이 단지 시간의 차원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생의 중심에 누구를 놓는가의 문제와 닿아있다는 것, 그리하여 생의 주인은 반드시 자신이 아니기도 하다는 점이다. 『필』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당신은 모두 당신이었다 당신이 아닌 당신도 나도 당신이었다 - 「必 당신은 모두 당신이었다」 전문 ‘당신’도 당신이며, ‘당신’이 아닌 존재도 모두 당신이라는 이 모순적인 문장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당신’을 특정지을 수 없는 까닭에 이 시는 더욱 여러 방향으로 해석된다. 가령 우리는 ‘당신’에게서 태어나 ‘당신’의 일부를 나눠 가졌음을 제시하는 시로도, 그러한 서로의 유대감을 강조하는 시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채상우의 화자가 겹의 생을 살고 있다는 점과 연계해본다면 이 시는 ‘당신’이 아님에도 ‘당신’이 될 수 있는 특정한 상황에 대한 서술로 읽힌다. 앞서 인용한 「必 흰 개가 지나간다」에서와 같이 “당신은 없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되뇌며 살아간다고 할 때, 그는 자신의 생을 산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이것을 지난 날 헤어져 다시 볼 수 없는 ‘당신’에 대한 그의 애도 행위로 보는 것이 상식적인 해석일 것이다. 그러나 채상우는 이를 다분히 비현실적인 장면으로 바꾸어놓음으로써 그가 과거에서 돌아온 ‘당신’의 생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한다. 가령 「必 염통을 먹는다」에서 길을 건너는 개를 바라보던 ‘나’가 자신에게 드리워진 “목줄”을 실감하는 비현실적인 상황, 그러니까 화자와 개의 생이 교차하는 것으로 보이게 적은 시를 떠올려보자. 우리가 살고 있는 생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지 않는가. 우리는 우리의 생만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다른 누군가의 생을 동시에 사는 것은 아닌지 혹은 지금의 생은 꿈이어서 다른 생에서는 “기억이 나질 않는”(「生時」) 것은 아닌지 아리송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그렇게 본다면 다음 시는 ‘당신’에 대한 오랜 애도의 끝에 그가 도달하게 된 지점일 것이다. 날도 저물기 전 미아슈퍼 앞 자귀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반병 남은 소주 마저 먹고 소금 찍어 먹던 사람 삼십년 전 그 사람 비로소 내가 된 당신 - 「必 날도 저물기 전」 전문 30년 전에 보았던 당신이 비로소 ‘나’가 되었다는 문장은 ‘내가 (30년 전의)당신이 되었다’는 문장과는 다르다. ‘나’가 나이가 들어 (내가 보았던 그때)당신의 나이가 되었다는 후자의 문장이 시간의 방향대로 서술된 것이라면 전자의 문장은 시간의 반대 방향으로 적혔다는 기술적인 측면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방식의 기술은 오랫동안 ‘당신’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당신’의 삶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였던 ‘나’가 이제 당신의 삶에서 벗어나 ‘나’의 삶을 시작하게 된 것으로도 읽힌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여름이 여름을 벗고” “참나무가 참나무를 벗”(「必 여름이 여름을 벗고 있다」)듯 이제 ‘나’는 ‘당신’이란 겹을 벗게 된 것인가를 기대하게 하는 문장, 『필』 이후 그는 어떠한 생을 살게 될 것인가를 기대하게 하는 문장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새가 두 번 우는 까닭은」은 저 문장으로부터 시작하는 시다. 화자는 지난 작품에서와 다를 바 없이 여기서도 과거를 돌아보지만 명백히 『필』의 화자와 다른 시간을 산다. 그가 과거를 낱낱이 되살아 보는 것은 계속해서 현재로 돌아오는 과거 때문이 아니다. 죽음은 여전히 그의 삶에 편재해 있지만 그는 더 이상 죽은 상태로 현재를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 직전의 상황을 ‘상상’하며 ‘지금’ 옆에 있는 “아내 손을 맨 처음인 듯 꼬옥 쥐”어본다. 이제 그에게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의 생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다른 누구의 생이 아닌 ‘나’의 생만이 있다. 그는 비로소 ‘당신’의 시간에 도달하며 잠시 겹의 생에서 벗어난 것일까. 자신을 “구원할 수 없었”(「사순절」)던 과거를 지나 현실에 몰두하는 것일까. “마지막 숨결을 삼키고 있는” 듯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하는 화자의 목소리에서 ‘지금의 생’을 잘살아 보려는 의지가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그의 지나온 시간을 잘 알고 있어서일 것이다. 물론 그의 도처에는 그가 잊지 못하는 여러 ‘당신’들이 있었다는 점에서 여러 겹의 생을 벗은 이 시의 지금은 찰나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짧은 순간이 지난 시집들과 완연히 다른 시의 지층(紙層)을 새로이 쌓게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도 좋으리라. 채상우의 시는 겹의 생을 벗으며 또 다른 시의 겹을 쌓는 중이다. 1) 이 글에서 인용하는 작품은 「새가 두 번 우는 까닭은」을 제외하고는 모두 『필』에 수록된 것이다. 본문에서 이를 인용할 때에는 작품 제목만을 표기하고, 「必」이라는 동명 제목을 인용할 경우에는 시의 첫 구절을 병기하도록 한다.
1. 고통의 상상력 “학살 이전, 고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1) 이것은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Primo Levi)의 문장이 아니다. 『소년이 온다』에 나오는 한강의 문장이다. 그 단호함이 너무 고통스럽고 너무나 처절하여 차라리 숭고하다. 또 “증언. 의미. 기억. 미래를 위해”(p. 166) 기록하거나 증언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이가 있다고 말한다. 어떻게 증언할 수 있느냐고 통절하게 절규한다. “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수십번 후벼들어왔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궁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킨 당신을 그들이 통합병원으로 데려가 수혈받게 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이년 동안 그 하혈이 계속되었다고, 혈전이 나팔관을 막아 영구히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pp. 166~167). 이렇게 증언할 수 없는 것을 증언하기, 그렇지만 끝내 증언할 수 없으므로 증언할 수 없는 고통까지 겹쳐서 역설적으로 극화하기, 한강의 고통스러운 숭고미는 필경 거기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물론 그것은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한강의 경우에만 특화된 수사학은 아니다. 많은 이가 아프니까, 고통스러우니까 쓴다고 한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상상력으로 넘어서기 위해, 상상력으로 고안한 대안 세계로 고통스러운 현실을 치유하기 위해 쓴다고 토로한다. 가령 아직 드러나지 않았던 감정을 창조했고, 인간의 깊숙한 내부에 숨겨져 있던 무의식을 표출시킨 작가 도스토옙스키도 그렇지 않았던가. 그는 인간의 고통과 욕망과 열정의 극한까지 추구하며 우주의 심연을 향해 다가갔다. 두루 알다시피 저물어가는 황혼의 잿빛 러시아의 하늘 아래서 가슴을 짓이기며 살았던 인물이었다. 영혼의 상처를 휘감고 도는 어둠의 정체를 그는 언제나 직시하고자 했다. 은총과 정의가 사라진 고통스러운 연옥, 그 불행과 절망의 황무지에서 전율해야 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분노에 찬 이반 카라마조프가 말하듯, 도스토옙스키의 대지는 그 심연의 핵심까지 고통의 눈물로 젖어 있는 형국이었다. 어디를 가도 어디를 보아도 타락의 나락으로 빠지는 죄 많은 인간의 처참한 몰골뿐이라고 했던 드미트리 카라마조프의 탄식에서도 세계의 고통에 대한 감각은 뚜렷하다. 이같이 타락하고 죄 많은 현실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영혼의 구원을 갈망한다. 고통의 심연에서 고통을 초극할 수 있는 참 지혜는 그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고통을 통해서만 진실로 사랑할 수 있다고 한 이는 이반 카라마조프였다. 어쩌면 우리는 도스토옙스키 문학 세계를 횡단하고 성찰하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괴로워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도스토옙스키에서 한강에 이르기까지 진정한 작가들은 대개 ‘고통의 향유’를 통한 미학적 실천을 통절하게 수행했다. 작가들만이 아니다. 고통이 바로 사유의 시작이라고 했던 철학자 레비나스, 예술을 ‘고통의 언어’라고 불렀던 아도르노, 예술적 쾌락원칙의 역승화를 낳게 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현실과 그 현실원칙의 강고함에 있다고 했던 마르쿠제, 이야기와 함께 경험되는 허구적 체험을 일러 절망 속에서 하는 희망의 체험이라고 논의한 폴 리쾨르, 소포클레스의 『필록테테스』에 나타나는 상처/고통과 신궁의 기예 사이의 역설에서 예술가의 존재론을 착안하여 상처와 고통을 통한 예술적 영광을 강조했던 미국의 비평가 에드먼드 윌슨 등등의 사유와 고민이 함께 만나는 자리이기도 했다. 어쩌면 ‘고통의 향유’란 가장 인간적인, 그리고 가장 고귀한 예술적 과정이 아닐까.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응시하면서, 문학의 이름으로, 고통을 향유하는 지독한 역설을 수행할 때, 문학은 자연스럽게 치유의 지평을 예비하며 비극의 숭고미의 어떤 극점을 알게 된다. “학살 이전, 고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라는 사실을 단호하게 추문화하며, 독자와 더불어 정녕 인간적인 심연의 질문을 열어나간다. 한강 문학의 바탕 의식은 그러하다. 2. 영매(靈媒) 작가와 고통의 법열(法悅) 고통의 순간은 널려 있겠지만, 가장 비극적인 장면은 아무래도 전쟁터나 홀로코스트 현장에서 두드러진다. 트로이전쟁을 다룬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때부터 그렇지 않았던가. 그러기에 많은 작가, 예술가들이 반전사상이나 반폭력에의 연대를 열정적으로 펼쳤다. 파블로 피카소도 그런 경우 아닌가. 이른바 피카소의 3대 반전 작품, 그러니까 <게르니카>(1937), <시체구덩이>(1946), <한국에서의 학살>(1951) 등만을 떠올려도 그렇지 않은가. 큐비즘의 방식으로 고통을 입체적으로 형상화했던 피카소처럼, 한강 역시 고통의 서사가 선형적으로 재현되기보다 입체적으로 포개어지며 고통의 심연으로 한없이 내려간다. 그러면서 매우 인상적인 장면을 전경화한다. 피카소가 여러 방향에서 본 이미지를 한 화면에 구성했듯이, 한강도 상호 시점이거나 복합 시점으로 깊은 고통을 응시하면서, 곡진한 시적 문체로 장면화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서둘러 답하자면 한없이 그윽한 영매(靈媒) 작가이기에 가능하다. 사람과 사람, 산 자와 죽은 이, 인간과 동물, 인간과 식물 사이에서 하염없이 고통받으며, 끊어진 영혼의 길을 이어주려는 감수성과 상상력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렇다.2) 그녀는 있는 이야기, 있었던 과거를 단지 그대로 재현하는 작가가 아니다. 있었던 사건에서 고통받은 이들의 차가운 손을 어루만지고, 이미 식어버린 영혼 안으로 스며들어 시리면서도 뜨거운 감각의 실존을 수행한다. 스며든 순간에 몰입하여 시나브로 엑스타시의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 법열(法悅)의 에너지와 감수성으로 말미암아, 한강이 스며든 어떤 인간이나 사물도 단지 홀로인 존재의 차원을 넘어선다.3)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게 되는, 더 나아가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더불어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 죽은 이도 새롭게 시선과 목소리를 지니게 되며, 가장 고통스럽고 속절없는 서발턴(subaltern) 혹은 벌거벗은 호모 사케르들의 눈물 속에서도 청량한 생명의 메시지를 얻게 된다. 무엇보다 고통의 심연을 길어 올리는 한강의 시적 문체는 중층적 가역반응의 결과이자 원인이다. 자아와 세계가 충돌하면서도 그 충돌한 세계를 엄청난 에너지로 끌어안는 자아의 감수성으로 인해, 그토록 이상한 가역반응의 결과로 빚어질 수 있었던 게 한강의 시적 문체이다. 다시 말해 문학적 정의의 이름으로 심판해야 마땅할 역사적 트라우마를 다루면서도 그 고통의 만화경을 모두 자기 안에서 끌어안고 ‘고통하기’에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역설적으로 아름다운 문체로 빛난다. 그런 시적 문체를 독자들이 읽으면, 독자 또한 새로운 가역반응을 일으킨다. 아름다운 문체에 이끌려 한강의 세계로 들어간 독자는 그 안에 들어있는 엄청난 고통의 항아리에서 슬픔의 숨결과 교감하면서 함께 고통을 나누려는 진실한 인문적 인간으로 거듭나는 가역반응의 대열에 동참하게 된다. 이것은 단순한 것일 수 없다. 서로의 외로운 영혼을 이어주는 현묘한 영매 작가의 창작과 소통 과정에서 매우 복합적으로 빚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강은 19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소설 「붉은 닻」(필명: 한강현)으로 당선되기 한 해 전인 1993년 계간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 「서울의 겨울」외 4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그 전에 연세대 4학년 때인 1992년 시 「편지」로 연세대 신문인 <연세춘추>가 주관한 연세문화상-윤동주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때 심사위원은 정현종 시인과 김사인 시인/평론가였다. 애도의 정념과 밀도가 어지간한 이 시에 대한 심사평도 인상적이다. 한강 시의 능숙함을 칭찬하는 과정에서 “굿판의 무당의 춤과 같은 휘몰이의 내적 열기를 발산하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독특하며, “그러한 불과 같은 열정의 덩어리”에 들어있는 풍부한 에너지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청 시절부터 이미 한강의 샤먼 시인, 영매 작가로서 에너지가 넉넉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면에서 1992년 심사위원들의 안목은 탁월했다. 샤먼 시인 한강의 곁에 있는 ‘나무’는 대개 “하늘과/ 나를 이어주”(「새벽에 들은 노래 2」)4)는 우주목(宇宙木, cosmic tree)이다. 『채식주의자』 『작별하지 않는다』 등 여러 작품에서 꿈 장면에 그런 우주 나무들이 모여 있는 신비로운 숲의 정경이 자못 긴장감을 형성한다. 그런 우주 숲에서 서사 속 캐릭터는 종종 엑스터시의 순간으로 입사한다. 가령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도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 숲에서 밀물에 떠밀려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죽음들의 풍경을 떠올리던 주인공은 갑자기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고 서술한다. “마치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과 같은 떨림”이었지만, 공포, 불안, 전율, 혹은 “돌연한 고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어떤 것에 휩싸인다. 그런 전율과도 같은 떨림의 순간을 고통스럽게 침례한 다음 “이가 부딪히도록 차가운 각성”5)에 이른다. 이런 떨림과 고통, 전율과 공포, 불안과 각성의 과정에 몰입하는 영매 작가의 에너지는 엄청나다. 마치 작두를 타는 무당의 열기를 방불케 한다. 그 순간 끊어졌던 여러 관계가 이어지고, 안 보였던 상처의 얼룩들이 보이고,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가 들린다. 가령 「거울 저편의 겨울 6―중력의 선」이라는 시는 아르헨티아를 방문한 샤먼 시인이 중력의 선을 따라 지구 반대편 한국의 풍경을 보는 이야기로 이루어진다. 남미 대륙 남부에 원래 살던 인디오들을 거의 절멸시키고 아르헨티나를 건설한 군인 “로카의 동상을 올려다보다가” “반대편의 학살을 생각”6)하는 “나”의 초상을 전경화한다. 그렇게 “난자하는/ 죽음의 직선들을 생각하는 나는” 거기에 몰입하여 1980년 5월 광주에서 죽어간 어리고 여린 영혼 ‘동호’의 눈이 되고 입이 되어준다. ‘80년 5월 광주’를 애도한 『소년이 온다』는 그렇게 우리에게 전해지고 세계문학사를 수놓게 된다. 1970년 광주에서 태어난 한강은, 불과 몇 달 전인 1980년 1월 서울로 이사했다고 한다. 만약 이사하지 않았더라면 작중 동호의 처지가 되지 않았다는 보장이 없었던 상황이었기에, 한강은 더욱 고통스러워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동호를 비롯해 가장 고통스럽게 죽어간 비통한 유령들을 애도하는 영매자가 되려 했던 것이 아닐까. 국가 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 이전에 가족사의 비애도 고려해 볼 수 있다. 『흰』에서 드러나는 너무나도 일찍 죽은 언니 이야기, 어머니가 스물세 살에 낳은 첫 딸의 이야기, 엄마가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7)이라며 간절히 발원했음에도 불구하고 허망하게 먼저 간 언니 이야기 말이다. 이 가족사는 들을 수 없었던 아이를 대신해 들어야 하고, 말할 수 없었던 아기를 대신해서 말해야 하고, 눈도 뜰 수조차 없었던 아기를 대신해 보아야 하는 고통스러운 영매 작가의 가족사적 배경을 성찰하게 하는 요인이다. 3. 여수(旅愁)의 심연에 갇힌 여수(女囚)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공표되던 2024년 10월 10일 저녁 나는 남도 여수에 있었다. 해묵은 어깨 통증을 치료하기 위해 그쪽 병원에 잠시 입원한 상태였다. 기대도 하고 기도도 했지만, 그럼에도 생각보다 너무 빨리 받게 된 선물을 받게 될 때 엉거주춤함 같은 느낌을 잠시 거쳐, 한강의 첫 소설집이 『여수의 사랑』(문학과지성사, 1995)이었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공교롭다는 생각을 이어갔다. 그리고 퇴원하여 돌아오던 12일 낮에는 우연히 여수엑스포역 앞 여수세계박람회장에서 열린 <잠들지 않는 남도의 세월―여순 10·19와 제주 4·3 미술 교류전> 을 관람하게 되었다. ‘탐미협과 여수민미협의 세 번째 만남’으로, 여수와 순천, 제주에서 무자(戊子)년(1948년)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증거하는 고통의 붓질이 참으로 어지간했다. 김영하의 <바다 위 희망의 빛>(2024, Arcylic on Canvas, 162.2×97cm)이나 박정근의 <바다, 엇갈림02>(2023, Pigment print, 100×70cm)은 강렬한 핏빛 바다의 파동과 심연을 응시한 그림이어서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고경화의 <존재의 시간, 어디에도 있는 어디에도 없는―종남마을>(2022, Arcylic on Canvas, 162.2×130.3cm)은 무너진 돌담과 뒤편의 대나무숲을 그린 작품인데, 그냥 보면 오래된 전원 풍경 같아 보이기도 했지만, 실은 1948년 11월 계엄령으로 인해 초토화되어 복구되지 못하고 잃어버린 마을이 된 종남마을 풍경이라는 것이었다. 무너진 돌담만이 과거의 어떤 흔적처럼 남아있는데 그곳에 살던 이들은 그 누구도 돌아오지 못했다는 안타까운 사연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그림들을 보며 나는 전시회 관계자들에게 이번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도 제주 이야기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면서 본문보다 제목이 더 긴 시 한 편을 떠올렸다. 「이천오년 오월 삽십일, 제주의 봄바다는 햇빛이 반. 물고기 비늘 같은 바람은 소금기를 힘차게 내 몸에 끼얹으며, 이제부터 네 삶은 덤이라고」라는 긴 제목의 시였는데, 직접 확인해볼 기회는 없었지만, 한강 작가 역시 화가 김영하의 핏빛 바다의 고통을 애도하기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게 아닐까, 그래서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8)라고 한 게 아니까, 여수와 순천, 광주와 제주의 트라우마를 함께 앓기 위해 늘 “텅빈 항아리가 되”는 자기 몸을 응시하고 그 안에서 울리는 “검은 물소리” “깊은 물소리”(「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 p. 36)에 귀 기울인 게 아닐까, 그러면서 샤먼 시인이자 영매 작가로 고통스러운 글쓰기를 수행한 게 아닐까…… 그런 상념들을 이어갔다. 매우 개성적인 숨결로 이채로운 말결을 파동처럼 빚어, 그윽하고 깊은 감동을 독자들에게 선사는 영매 작가 한강이 초기부터 다룬 인물들은 대체로 세상의 온갖 허물을 모아 앓는 자, 상처 깊은 자의 형상을 하고 있다. 상처의 심연으로 내려가서, 왜 현존재는 이토록 탈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왜 세상은 그토록 고통스럽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질문한다. 그 탐문은 대체로 여로에서 이루어지고, 여로의 현존은 깊은 여수(旅愁)의 심연에 갇힌 여수(女囚) 형상을 한 경우가 많다.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 시절부터 그러했다. 일찍이 대학 4학년 때 쓴 「편지」에서 “잃을 사랑조차 없었던 날들을 지나 여기까지, 눈물도 눈물겨움도 없는 날들 파도와 함께 쓸려가지 못한 목숨, 목숨들 뻘밭에 뒹굴고”라고 토로했던 한강은 『여수의 사랑』에서 희망이 소진된 상황을 견디는 고통의 흔적을 시리도록 아프게 점묘한다. 대부분 20대의 주인공들인데도 불구하고, 한강의 소설적 프리즘 안에서 그들은 이미 청춘이 아니다. 발랄하고 경쾌한 젊음의 풍속이나 세태와는 아랑곳없다. 그들은 고아처럼 버려졌거나 버려졌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정처 없이 떠돌이 삶을 살며, 신체적 통증과 정신적 질환에 시달리고, 또 때때로 살기도 전에 죽어간다. 또한 고독하고 우울하며 피로에 지쳐 있다. 그들에게 세계는 매우 혹독하기만 하다. 가령 「여수의 사랑」에서 바람은 “내 어깨를 혹독하게 후려”치고 “무겁게 가라앉은 잿빛 하늘은 눈부신 얼음 조각 같은 빗발들을 내 악문 입술을 향해 내리꽂았다.”9)라는 부분만 보더라도 그렇지 않은가. 그 같은 “잿빛 하늘” 아래 드리워진 길고 짙은 어둠의 그림자 속에서 그들은 “얼음 조각”에 피격당한 듯한 현존을 부정하고 신생을 낭만적으로 동경하고 열망한다. 영혼의 숨결을 잃어버린 세대의 고통스러운 초상이다. 잃어버린 세대의 현실을 성찰하는 한강이 탐색한 신화소의 하나는 ‘버려진 아이’라는 의미에서 기아(棄兒)의식이다. 모태로부터 분리되는 순간의 고통, 부모로부터 버려졌을 때의 아픔, 사회와 현실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당했다고 느낄 때의 우수 등이 피투성이 같이 던져진 피투성(被投性)의 존재로서의 인간 초상을 떠올리게 하지만, 신화적인 맥락에서는 역시 기아의식이라는 다발 안에 포괄되는 것들이다. 원초적 고향으로부터 분리를 경험할 때 모든 존재는 자기동일성을 상실한 채 고통스러운 방황을 거듭하게 마련이다. 이때 단원신화는 입사식이라는 통과제의를 거쳐 귀환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상실했던 자기동일성을 회복하는 이야기로 마무리되지만, 현대에 이르러 그것은 해체되었고, 신화는 좀처럼 완성될 줄 모른다. 신화의 해체 이후 인간의 삶은 고통의 흔적으로 점철된다. 그럴 때 인간의 여로는 곧 여수(旅愁)의 길이 된다. 귀환을 보장해주는 통과제의적인 성격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상실한 자기동일성의 회복은 그야말로 난망이다. 첫 소설집의 표제작 「여수의 사랑」은 이렇듯 희망이 봉인된 상황에서 펼쳐지는 현대의 소외된 신화 속에서의 기아의식을 웅숭깊게 형상화한 소설이다. 버림받은 아이는 육체적 심리적으로 늘 허기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기아(棄兒)와 기아(飢餓)는 가깝다. 여수가 고향인 주인공 정선은 다섯 살에 어머니를, 일곱 살에 아버지를 차례로 잃었다. 스물다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어머니의 죽음도 그렇지만 아버지의 죽음이 더 문제적이다. 아버지는 술에 젖은 역한 숨결로 여수 앞바다에서 동반 자살을 시도했다. 아버지와 동생이 죽은 그 사건에서 정선만 살아남았다. 아니 홀로 버려졌다. 이 고통은 트라우마의 극치에 값한다. 그로부터 참담한 여수(旅愁)의 나날은 계속된다. 위경련과 결벽증으로 시달리고 있는 그녀가 특히 후각 공포증 혹은 냄새 강박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정선에게 자흔의 출현은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비슷한 운명의 그림자를 안고 떠돌며 사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두 살 무렵 강보에 싸인 채 여수발 서울행 열차에 버려졌던 자흔은 이 버려짐의 트라우마 때문에 자기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한다. 아니 자기 길이 있을 수 있다는 희망마저 제대로 지녀 갖지 못한다. “어느 곳 하나 고향이 아니었어요. 모든 도시가 곧 떠나야 할 낯선 곳이었어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길을 잃은 기분이었어요.”(『여수의 사랑』, p. 41). 이와 같은 여수(旅愁)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속절없이 살아가는 자흔이고 보니, 주인공의 존재의 거울일 수밖에. 거울을 통해 자신의 상실한 모습을 확인하는 심정은 처연하다. 주인공 정선의 고통이 가중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던 중 자흔이 또다시 여수(麗水)인지 여수(旅愁)인지 모를 길을 떠난다. 그래서 정선도 여수(旅愁)의 여수(麗水) 여로를 택한다. 하지만 그 여로는 고통의 흔적 찾기 이상의 어떤 은총도 허락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 고통의 흔적들은 탈난 후각이나 위장 등 여러 육체적, 심리적 증상으로 소설 속에 아프게 새겨진다. 그것들은 해체되거나 유폐된 현대 신화의 파편들이다. 한강이 점묘하는 누추하고 비루한 현대의 신화들은 차라리 예전의 신화들을 추문화하면서 동시대적 고통의 심연을 비추고 생경하게 드러내는 탈신화적인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10) 그런 탈신화의 전략은 디아스포라 주제와 관련한 존재론적 성찰과 함께, 문학의 기본 역할 중의 하나가 버림받은 디아스포라의 운명과 고통에 대한 깊은 응시와 관련된다는 생각을 저작하게 한다. 이 또한 한강 문학 주제의 세계적 보편성과 관련된다. 4. “왜 그래”와 “괜찮아” 사이에서, 혹은 동물성에의 구토 고통의 심연을 향해 한없이 자맥질하는 한강의 ‘여수의 미학’은 되풀이 변형 생성된다. 두 번째 소설집인 『내 여자의 열매』(2000)는 물론 장편 『검은 사슴』(1998) 『그대의 차가운 손』(2002)을 거쳐, 연작소설 『채식주의자』(2007), 장편 『바람이 분다, 가라』(2010), 『희랍어 시간』(2011) 등 한강의 소설들은 대체로 비루한 현대의 탈/신화와 관련된다. 많은 인물이 여전히 누추하게 태어나고, 출생보다 더 비참하게 버려지거나 버림받았다고 느끼며 여수(旅愁)의 심연으로 젖어든다. 그와 같은 인간 실존의 고통은 국가 폭력의 문제와 연계되면서 더욱 극적으로 형상화되는데, 바로 『소년이 온다』(2014)와 『작별하지 않는다』(2021)의 세계가 그러하다. 존재의 근거를 박탈당한 채, 이 세상 어디에도 속할 곳이나 속할 집이 없고, “찾아갈 곳도 없었고 행복할 곳도” 없을 뿐만 아니라 “긴장어린 시선을 접고 안도할 곳도 없”11)는 한강의 인물들은 사느라고 안간힘을 쓰다가 자주 ‘구토’ 증세를 보인다.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에서 정선이나 자흔을 비롯한 여러 인물이 그랬거니와 『내 여자의 열매』에서 아내, 『그대의 차가운 손』의 L,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 이정희나 서인주 등 많은 인물이 고통스러운 구토의 박물지를 형성한다. 가령 「내 여자의 열매」에서 아내는 어릴 적부터 자유롭게 살다가 자유롭게 죽기를 꿈꾸었던 인물이다. 그런데 소망과는 달리 “보이지 않는 사슬과 묵직한 철구(鐵球)가 발과 다리를 움쭉달싹하지 못하”12)게 하는 일상의 억압에 가위눌려 살다가 심한 구토 증세를 보인다. 매일 몇 번씩 토할 때마다 “머리가…… 오른쪽 눈이 후벼 파는 것같이” 아프고 “어깨가 나무토막처럼 딱딱해지고 입에 단물이”(p. 222) 고인다고 그녀가 토로할 때, 우리는 그 고통의 심연으로 함께 내려가게 된다. 단지 바람이나 햇빛, 물 같은 자연적인 것만으로 살 수 있기를 꿈꾸었던 그녀는, 마침내 고통스러운 실존을 넘어 식물화의 경계로 나아간다. 출장을 갔다가 오랜만에 귀가한 남편은 식물로 변신하는 그녀를 목도한다. 베란다 쇠창살 쪽으로 무릎 꿇은 채 만세 부르듯 두 팔을 치켜올린 아내의 진초록빛 몸과 푸른 얼굴이 마치 상록활엽수의 잎처럼 반들반들했고, 머리카락 또한 싱그러운 들풀 줄기처럼 윤기가 흘렀다는 것이다. 동물적 육체를 넘어 식물화하려는 아내의 요구에 따라 남편은 물을 뿌려주는데, 그 순간, 아내의 몸은 “거대한 식물의 잎사귀처럼 파들거리며” 살아난다. 「내 여자의 열매」의 식물 변신담은 연작 『채식주의자』에서 좀 더 면밀한 실감을 얻게 된다. 『채식주의자』에서 영혜는 맹수의 눈에 시달리는 악몽을 꾼 다음에 전격적으로 채식주의를 선언한다. 짐승의 눈은 피의 형상으로 범벅이 된 채 파헤쳐진 두개골을 비추기도 하면서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동물적인 공격성과 폭력성, 죽음을 몰고 오는 세계 파국의 공포와 불안 같은 것들 때문에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다가 내린 결단이었다. 동물적 공격성으로 넘쳐나는 세상에서 그녀가 원하는 것은 식물적 평화였다. 그녀가 유일하게 옹호하는 젖가슴의 상징이 그런 면에서 주목된다. 젖가슴으로는 아무것도 해치거나 죽일 수 없으니 괜찮다고 했다. 한강의 언어 중에 ‘괜찮아’라는 말은 은근한 마력의 매력을 느끼게 한다. 「괜찮아」라는 시를 참조해 보자. 난지 두 달 된 아이가 저녁마다 울자 시적 자아는 “왜 그래”라는 말을 안타깝게 반복하면서 애태웠다. 그러다 문득 “괜찮아”라는 말로 바꾸어 위무했더니 며칠 뒤부터 아이의 저녁 울음이 그쳤다는 이야기다. “왜 그래”는 따지듯 걱정하는 목소리다. 반면 “괜찮아”는 공감하며 끌어안는 마음의 소리다. 진심으로 위로하며 치유를 기도하는 말이다.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13)을 들여다보며 “괜찮아”라며 달래줄 수 있는 마음, 그것이 바로 둥근 젖가슴의 마음이다. 그러나 세상은 사실 괜찮지 않다. 괜찮지 않기에 “괜찮아”라는 말이 괜찮게 다가오는 게 아닐까. 「내 여자의 열매」에서도 그랬듯이, 『채식주의자』에서 영혜 역시 자신에게 “괜찮아”라고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런 눈과 목소리가 없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헤아려 줄 마음의 눈을 구하기 어렵다. 연작의 첫 작품인 「채식주의자」의 시작 부분부터 그렇다. 서술자 남편은 아내는 특별하지도 않거니와 끌리는 매력도 없는 사람이었다고 적는다. 평범하고 무난한 성격이어서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결혼했다고 말한다. 남성 중심주의적인 생각을 드러낸 경우가 아닐 수 없다. 그녀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가부장권을 행사하려는 인물이다. 육식하지 않겠다는 딸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탕수육을 집어넣는 아버지의 폭력으로 인해 딸은 결국 칼로 손목을 긋는 자해를 하고 만다. 그런 아버지이니 딸의 꿈속에 개를 오토바이 뒤에 매달아 동네를 끌고 다니다가 잡는 악몽의 주체로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아버지만이 아니라 어머니도, 언니도, 다른 가족들도 대개 “괜찮아” 대신 “왜 그래” 쪽에 가까운 인물로 제시된다. 사정이 그러하다 보니 영혜의 악몽은 계속되고 섭생은 어려워지고 마음은 불안하고 몸은 야위어 간다. 몸도 마음도 상하고 다친 상태가 되자 둥근 젖가슴도 야위어 날카로워지는 형국이 된다. 무엇보다 숨쉬기조차 힘들 지경이 되고 만다. 물과 바람과 공기와 더불어 숨 쉬며 초록빛 나무가 되려 했던 그녀의 소망은, 그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계속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그녀의 둥근 가슴이 날카로워지는 것은 충분히 일리 있는 몸의 항의로 받아들여진다. 한강의 여성 인물들은 고통스러운 상처와 트라우마를 지닌 채 살지만, 타인이나 세상을 향한 동물적 공격성이나 이렇다 할 적의를 보이지는 않는다. 그 대신 식물로 변신하는 과정을 통해 평화의 바람을 일으키기를, 아니 평화의 바람을 일으키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평화로운 숨결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최소한 편하게 숨쉬며 살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럼에도 동물적 공격성으로 점철된 현실이나 사람살이의 상황은 그런 소망을 지닌 여성들로 하여금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게 혹은 질식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만약 세상이 생태학적 진실에 따라 조금이라도 평화로운 식물성의 기미를 보여주었더라면 『채식주의자』에서 영혜는 그토록 가혹한 악몽에 시달리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그녀가 간절하게 안간힘을 다해 숨을 쉬면서 세상을 쏘아보는 것은 그런 사정 때문이다. 이 연작에서 영혜는 세상의 변두리로 밀리다 못해 그 존재를 위한 최소한의 공간조차 혹은 뿌리내릴 한 뼘의 자리조차 마련하기 어려운 처지다. 그녀는 식물적 젖가슴으로 세상의 동물적 공격성에 대응했지만, 턱없이 유약할 따름이었다.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광기의 영역으로 금줄 쳐 놓은 정신병원에 갇히게 되는 운명 역시 그녀의 존재를 제한적이게 한다. 물론 그녀는 행하지 않고 말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부재하듯 존재하면서 성찰적 메시지를 제공하는 그늘의 존재이다. 그늘에서 제발 편하게 숨 쉬고 악몽 없이 잘 수 있는 삶이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드러낸다. 여러모로 에코페미니즘의 관점에서 해석 가능성을 풍부하게 열고 있는 연작이다. 책방을 운영하기도 하는 한강은 아버지 한승원 작가에게 종종 책을 보내며 편지를 전했다고 한다. 그중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이나 로빈 윌 키머러의 『이끼와 함께』, 메리 올리버의 『긴 호흡』 같은 책들이 눈길을 끈다. 한강 소설에서 왜 여성들이 동물성에 저항하며 식물이 되고자 하는지, 식물과 더불어 숨 쉬며 불안한 실존을 넘어 편안한 평화의 바람을 맞이하려 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책들이다. 아버지나 남편과는 달리, 이끼는 “괜찮아”라고 말해준다. 그런 이끼의 토닥거림이나 속삭임과 더불어 숨 쉴 수 있다면 시나브로 편안해지고 괜찮아지겠다. 5. 깊은 고통으로 지은 주문(呪文) 깊은 고통 속에서 한강의 인물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주 구토를 일으킨다. 편안하게 숨을 쉬지 못한 채 밤낮으로 악몽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펄펄 내리는 눈의 슬픔과 반짝이는 숲의 고통 속에서 깊은 밤의 고통은 한없이 깊어지기만 한다. 어떻게 개인적이고 가족적이며 역사적인 트라우마를 넘어, 편하게 숨 쉴 수 있는 지극한 사랑과 평화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어떻게 나날의 장례식을 넘어 즐거운 축제 마당으로 건너갈 수 있을까? 『소년이 온다』의 인상적인 대목을 우리는 기억한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남은 자들의 한없는 슬픔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당신을 위한 진정한 장례식은 매우 요긴하다. 당신과 나의 공동 애도를 위한 장례식을 위한 제문(祭文)은 때로 주문(呪文)처럼 통절하다. 한강 소설에서 고통스러운 악몽은 대개 그런 주문의 상형문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주문을 통해 먼저 간 당신의 눈이 되고 입이 되어 준다. 『소년이 온다』의 에필로그 부분을 보자. 그 도시의 열흘을 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운 린치를 당하던 사람이 힘을 다해 눈을 뜨는 순간이 떠오른다. 입안에 가득 찬 피와 이빨 조각들을 뱉으며,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올려 상대를 마주 보는 순간,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p. 213) 주문은 떠지지 않는 눈을 뜨게 하고, 깊은 고통의 순간을 대면하게 한다. 응어리진 것들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그 응어리의 상처들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소환하는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의 대조가 비애극의 심연을 깊게 한다. 주문은 이렇듯 깊은 슬픔의 호곡을 불러낸다. 그런 다음 당신을 위로하며 청원한다.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p. 213). 깊은 고통으로 지은 주문은 이런 애도 작업으로 깊어지며 승화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앞에서 논의한 것처럼 한강은 여리고 취약한 존재들, 정처 없이 방황하며 상처받은 사람들, 고통 속에서 속절없이 절명한 사람들을 위한 영혼의 비가(悲歌)를 시적인 문체로 가만가만 불러온 작가이다. 제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서발턴(subaltern)의 입이 되어주고 제 몫을 보장받지 못한 채 벌거벗은 호모 사케르들의 눈물을 씻어주려는 영혼의 매개자가 되려 했던 영매 작가이다. 역사적 사실이나 진실을 넘어 고통의 심연에서 지극한 인간적 진실을 고통스럽게 탐구한 작가이다. 한 마디로 숨 쉴 수 없는 존재들, 그 숨 막힌 존재들이 나름대로 숨 쉴 수 있도록 위로와 생명의 음표를 감각적 리듬에 실어 소통하고자 한 작가이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Primo Levi)는 죽음과 유령들의 세계와도 같았던 참혹한 홀로코스트의 현장에서 “이 저주받을 망령들아, 비통할지어다!”라고 했던 단테의 『신곡』 ‘지옥’ 편의 목소리를 떠올린다.14) 『신곡』의 세계를 떠올리며 가까스로 그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그는 자신의 기록 서사에서 “이것이 인간인가”라며 깊게 탄식했다. 한강의 여러 작품 또한 그런 탄식에서 비롯된다. 그 서사적 대상이 된 가부장적 질서로 인해 일그러진 여성 문제나 4.3이나 5.18 같은 역사적 트라우마의 이야기는 한강보다 한 세대 혹은 두 세대 선배 작가들의 문학적 축적으로 인해 심연으로 깊어져 새로운 감각적 실존을 할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녀는 있는 이야기, 있었던 과거를 단지 그대로 재현하는 작가가 아니다. 있었던 사건에서 고통받은 이들의 차가운 손을 어루만지고, 이미 식어버린 영혼 안으로 스며들어 시리면서도 뜨거운 감각의 실존을 수행한다. 스며든 순간에 몰입하여 시나브로 엑스터시의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 법열(法悅)의 에너지와 감수성으로 말미암아, 한강이 스며든 어떤 인간이나 사물도 단지 홀로인 존재의 차원을 넘어선다.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게 되는, 더 나아가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더불어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 그 결과 한국문학이라는 특수성을 넘어서 문학이란 보편성의 측면에서 호소력 짙은 작품으로 승화된다. 한강은 비교적 이른 나이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까지 쓰인 작품보다 앞으로 쓰일 작품이 더 많거나 깊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이제까지 한강은 역사적 트라우마에 몰입하는 감각의 밀도를 통해 문학적 치유의 새로운 스타일을 감각적으로 발견한 작가, 서사의 전개를 초월하여 서정의 몰입으로 심리적 사건을 웅숭깊게 다룬 작가, 그리고 기존의 서정적 소설과도 또 다르게, 『흰』과 같은 작품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서정과 서사가 잘 어우러지는 새로운 문학 장르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가로 문학사에 기록될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기대되는 것은 2024년 10월 이후의 한강 문학이다. 섣불리 예측하지는 말자.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기대의 주문처럼, 한강 문학의 새로운 장도를 응원하면 될 일이다. 거듭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한다. 1) 한강, 『소년이 온다』, 창비, 2014, p. 174. 2) 한강은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인 「빛과 실」에서 『소년이 온다』를 준비하던 무렵 골몰했던 두 질문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그 질문을 뒤집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고백한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영매 작가로서 한강의 핵심 특성을 가늠하게 하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3) 예컨대 『소년이 온다』에서 이런 대목을 보자. “어쩌면 한사람씩 오는 게 아닌지도 몰라. 수많은 사람들이 희미하게 번지고 서로 스며들면서, 가볍디가벼운 한 몸이 돼서 오는 건지도 몰라.”(p. 174). 이렇게 한 몸이 된 여럿의 영혼들을 맞아들이는 장면에서 영매 작가의 인상적인 특징의 단면을 확인하게 된다. 4)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 p. 24. 5)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2021, pp. 11~12. 6)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p. 106. 7) 한강, 『흰』, 문학동네, 2016/2018, p. 36. 8)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p. 38. 9) 한강, 『여수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95, p. 58. 10) 「여수의 사랑」 관련 논의는 졸고, 「진실의 숨결과 서사의 파동」(『애도의 심연』, 문학과지성사, 2018)의 일부를 수정한 부분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글의 2~4장은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 웹진 《더라이브러리》에 부분적으로 발표한 원고를 전면 개정한 것임. 11) 한강, 『그대의 차가운 손』, 문학과지성사, 2002, p. 51. 12) 한강, 『내 여자의 열매』, 창작과비평사, 2000, p. 225. 13)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p. 76. 14)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이현경 옮김, 돌베개, 2007, p.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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