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월간 현대시 2024년 11월호(제419호)
여섯 시인에게 응답하기
1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 진은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사, 2003) 전문
진은영의 첫 시집에 수록된 후 널리 알려진 이 작품은 일곱 개의 단어에 대한 정의로 이루어져 있다. 단어와 정의가 병렬된 이 목록은 제목이 가리키듯 하나의 “사전”과 같아서, 나는 오랫동안 이 시에 대한 적확한 독법이란 사전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각각의 단어를 따로 읽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문학을 업으로 삼은 이후부터 나는 이 시를 그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밖에, 그러니까 이를 시간 순서대로 전개되는 이야기로, 특히 ‘순환’되는 이야기로밖에 읽지 못하게 되었다. 그것은 “봄”에 대한 새로운 정의로부터 시작되는 이 작품이 시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문학을 시작하면서부터 느꼈던 어려움을 차례로 생각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상하지도, 의도하지도 않았지만(“놀라서 뒷걸음치다”) 우연히 “푸른 뱀의 머리”와 같은 물컹하고, 뭉클하고, 미끄럽고 때로는 비리기도 한 감각을 처음 느낀 일로부터 ‘시’라는 새로운 시간(“봄”)이 내게 열린 이래, 즐거움보다는 “슬픔”이,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갈 것인가를 되묻는 시간이 더 많이 뒤따랐던 날들을 이 시는 떠올리게 했다. 불어 터진 몸과 마음에도 불구하고 시는, 어딘가에서 분명히 들리는 “개구리 울음”같아서, “눈 감을 때”면 분명 보이는 작은 “혁명”을 행하기 위해서 “소리”를 내어보는 일을 포기하지는 못했던 시간도. 그럴 때면 어디서인지 알 수 없지만 시는 도착하고(“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푸른 뱀의 머리”를 밟을 때와 같은 강렬한 감각을 잊지 못해 다시 글을 쓰게 되는 날들까지. 그렇게 이 시는 시의 굴레에 매여 있는 지금 나의 상황을 그대로 재현한 시로 탈바꿈되었다.
새로운 시인들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길게 나의 이야기를 한 것은 이와 같은 경험이 비단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언제, 어떻게 저 ‘푸른 뱀의 머리’를 밟게 되었는지는 서로 다르겠지만 이제 막 많은 이들에게 소리가 닿기 시작한 그들에게 들뜬 마음은 점점 가라앉고 막막함이나 외로움이 찾아오는 것이 내게는 필연적인 순서처럼 여겨져서 지금의 그들에게 나는 동료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 본다. 다시 나의 경우에 빗대어 말해보자면, 그런 감정의 대부분은 (이제 와서) 시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좌절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의 소리를 누군가가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해서 나는 지금까지 그들이 낸 소리들을 듣고 응답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당신의 소리를 잘 듣고 있다는 응답. 그러니 함께 걸어가자는 응답.
2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다시 진은영의 시에 기대어보면 어떨까. 앞서 인용한 시에서 진은영은 누군가가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어둠 속에서” 필요한 “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하는 장면을 가져와 이를 “시인의 독백”이라 가리킨 바 있다(““어둠 속에서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진은영의 사전에 따라 시가 ‘어둠에서 내는 소리’라고 할 수 있다면, 시인들마다 처한 ‘어둠’과 저마다 내는 ‘소리’의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어떨까. 더욱이 이 글이 집중하여 살펴볼 여섯 시인은 자신이 무엇을 ‘어둠’으로 인식하는가를 뚜렷이 보여주는 가운데 그와 관련해서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소리를 낸다는 점에서 이는 서로 다른 그들의 시세계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물론 아직 그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소리를 낸 것이 아니므로 나의 응답은 잠정적이며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그들이 낸 소리를 정리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 믿기에 나는 이를 잘 전달하기 위해 그들을 거칠게 두 부류로 나누어 살펴보려 한다. 1) 자신이 속해 있는 ‘어둠’과 그로 인한 고통에 대해 주로 적음으로써 어둠과 고통의 물성과 구조를 생각해 보게 하는 시인들(엄시연, 추성은, 한백양)과 2) ‘어둠’에서 벗어나는 과정과 방법을 서술함으로써 현재를 견디는 데 무엇이 필요한가를 생각해 보게 하는 시인들(이실비, 장대성, 이정화)로.
엄시연은 여섯 시인 중에서 가장 큰 소리를 만들 줄 아는 시인이다. 등단 당시 심사평에서도 언급된 것이지만 그의 시에 있는 ‘강렬한 감정’이 이를 가능하게 한다.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으로 보이는데(“분출하는 감정을 사용하기로 했다”, 「교차빛」), 분출된 감정은, 많은 경우 극단으로 몰린 ‘나’의 상태를 재현하는 역할을 하지만, 엄시연은 이를 자신을 몰아붙이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문장의 일그러짐을 동반하는 이 강한 강도의 감정은 상징적인 이미지들과 함께 나타날 때 더욱 오래 그의 시를 곱씹게 한다. 이를테면, 실제로 226세까지 살았던 일본의 비단잉어 “하나코”를 모티브로 삼은 등단작 「몽고반」에 제시된 “이백오십 센치”나 되는 거대한 잉어와 “방혈 박피 적출”이 이루어지는 “정육점”, “연일 문전성시”인 “잘린 손”과 같은 이미지들. 맹렬함이란 느낌을 벼릴 대로 벼려 탄생한 이 이미지들과 높은 감정의 등고선은 ‘나’가 인식하고 있는 ‘어둠’의 깊이와 그로 인한 압박감을 감각하게 하는 시적 장치인 한편으로 어둠을 넘어서려는 ‘나’의 몸부림을 상상하게 한다. 또 다른 등단작인 「빈타게 드림」에서 서술된 대로 “돌을 깎아 만든 모형”이 엄시연이 생각하는 (어두운)세계의 물성이라서 그는 저 돌과, “부서지지 않는 유리창”(「교차빛」)을 깨기 위해 이처럼 큰 소리와 센 이미지를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어둠에서 벗어나려는 엄시연 화자의 행동이 다시 한번 그가 속한 세계의 부정성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자신에게 남겨진 일을 하기 위해(“아직 나에게 남은 것들이 많았다”) “고통”으로 스스로를 깨우기 바라는 「교차빛」의 화자를 보자. 그는 이를 위해, 맞아 피가 흐르거나 멍이 남는 물리적 고통을 선택한 듯하다(“내 팔은 동시에 붉고 동시에 파랗다”). “강인한 영혼은 나약한 육체로부터 만들어”진다고 믿는 그는 ‘나약한 육체’를 만들어 영혼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 멍과 피가 뒤섞인 “바이올렛”의 몸을 만든 것일까. “내리쳐도 무너지지 않는” 세계에 저항하기 위해 핏방울과 멍을 번갈아 몸에 새기는 것일까. 물론 이런 고통에의 자처는 이미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가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보다 ‘강인한 영혼’을 가지기 위해 새로운 고통을 요구하는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나이가 들면 점점 없어지는 “몽고반”(「몽고반」)이 푸른 멍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나’가 고통에서 벗어나는 일을 ‘나’의 성장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는 그날이 오기 전까지 “크고 단단한 빠루”로 자신의 몸을 친다. 그때마다 우리의 몸은 함께 일렁인다.
한백양은 「짐」과 「난류亂流」에서 엄시연과 마찬가지로 박동하는 감정의 풍경을 보여준다. 두 신문사 신춘문예로 등단할 당시의 작품들이 일상의 구체적인 풍경들을 통해 의미를 선명히 전달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면, 「짐」과 「난류亂流」에서 그는 긴 호흡으로 보다 자유롭게 내면의 목소리들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새롭다. 이런 새로움은 한백양이 다양한 몸을 가지고 있으며 언제든 시에 걸맞은 형식들로 몸을 바꿀 수 있을 만큼 유연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이번 호현대시에 수록된 두 편의 시에서 그가 집중적으로 다루는 것은 ‘나’의 복잡한 내면이다. 먼저, 「짐」은 문밖으로 “나가야 할 때가 되었”지만 이를 계속해서 망설이는 ‘나’의 목소리를 담는다. 시의 초반부에서 문의 안과 밖을 뚜렷이 나누어 제시하는 것과 달리 이 문은 사실상 손잡이가 달리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화장실에 문이 달리지 않았다는 걸 말해주지 않았다”), 이런 설정은 “문손잡이를 잡을 손이 없”다고 핑계를 대는 ‘나’의 성격과 심리를 짐작하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금 머무르고 있는 곳에서 나아갈 때 무엇이 우리를 막아서는지, 그러니까 무엇이 우리의 문을 (심리적으로) 닫히게 하는가를 생각해 보게 한다. 이에 덧붙여 “지하철 환승 통로”에 있는 ‘나’와 구분되지 않는 “사내”가 “어디에도 문이 없는데도 “여닫혔”던 상황은 이를 개인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에 포용 되는 일과 배제되는 일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히기도 해서 “문 너머”로 가고 싶은 ‘나’의 행위가 금기의 위반이나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탈을 꿈꾸는 것은 아닌가를 짐작하게 하기도 한다. 이는 그가 “들어주지 않는 말”, “죽었다 깨어나도 물어볼 수 없는 것들”을 묻기 위해 “유리문을 향해/ 돌을 던”지는 것을 선택한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행위란 문을 밀고 나가는 것이라기보다 문을 깨고 나가는 것에 가까운 것이므로.
아이와 함께 “나비를 땅에 묻은 날”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난류亂流」에서 한백양은 심적 고통이 세계와의 어긋남 때문에 발생하기도 한다는 점을 짚어준다. 속도의 크기와 방향이 시간적으로 변하는 흐름을 나타내는 ‘난류’를 제목에서 사용한 것에서 알 수 있듯 ‘나’는(그리고 ‘나’에게 “어지럼증”을 “유전”받은 ‘ 아이’는) 세계의 속도보다 앞서 “모든 방향으로 뻗어갈 수 있는” 생각들을 떠올리기에 세계와 계속해서 불화한다. “모든 것들이 지나치게” 느리다고 여겨질 만큼 느린 세계에서 자꾸 달아나는 생각들을 갖는 한 한백양의 주체는 결코 문 안에만 머무를 수는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속도의 불균형을 겪으며 그는 어쩌면 “모든 방향으로 뻗어갈 수 있는 발자국”을 시를 통해 만들고 있는지 모르겠다. 비슷한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이들이라면 자신의 고통이 어떤 구도로 인해 발생하였는가를 금세 이해하게 할 만큼 자세한 그의 서술들은 그를 따라 생각의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게 한다.
엄시연과 한백양이 그들의 내면에 자리한 어둠을 본다면, 추성은의 두 작품에는 ‘나’를 둘러싼 세계의 어둠이 주로 그려진다. 만약 두 시인에 비해 그의 소리가 소박하고 정갈하게 들린다면, 그것은 추성은이 감정의 파동을 사유의 방향으로 옮기려 부단히 애쓰는 시인인 까닭이다. 일상적인 사건과 평범한 사물에서 사유 거리를 찾아 점점 깊은 사유에 도달하는 그의 시작 방법은 등단작인 「벽」에서도 이미 확인된 것이다. 기발표작인 「커먼 센스」는 그런 추성은 시의 특성을 다시 한번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실온에 방치한 감자”를 “락앤락”에 정리하며 남은 “한 토막”을 가지고 그는 놀라운 사유의 도약을 보여준다. 통에 담지 못한 이 “짜투리”가 “고요한 숲”에서 시작된 “불길”처럼 금세 ‘나’의 생각을 지배하며 여러 생각들이 연달아 이어지는 방식은 그 자체로 추성은의 시작법과 닮아 있기도 하다. 그런데 「커먼 센스」에서 이런 생각들은 세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닿아 있기에 그는 “감자 자투리를 구워 먹으면 몸에 좋지”라고 말하며 감자 싹을 잘라내듯 저런 생각들을 곧 도려낸다. 그러나 아무리 도려낸다고 해도 “감자는 불빛이 닿은 자리부터 싹이” 나는 것이라 “불조심 표지판 앞에서 담배를 피”며 불빛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는 한, 그러니까 “커먼 센스”가 없는 이 세계에 사는 한 그의 생각과 염려의 불길은 결코 소진되지 않을 것임을, 그의 사유는 그런 고통 속에서 점점 깊어질 것임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어둠에 대한 이런 생각의 끝에서 추성은은 「체인질링」의 세계를 상상했을 것이다. “신이 버리고 간 세계”, “전기가 흐르는 나선 모양의 버섯이 자랐고 늪에서는 악어가 사람을 포식한다는 괴담이 즐비”한 세계, 더 이상 “녹색”이 아름답게 여겨지지 않으며, “오직 붉은 색 전조등만이 사람들을 안심시켜주”는 세계, 그러니까 모두가 “정지해” 있는 세계 말이다. 추성은은 이런 세계를 “공포”가 “논리있는 질서가 되어 있”는 곳이라 가리키며, 누군가는 신비롭거나(“대신 큰 잎사귀에 누워 잠드는 아이”) 기적을(“악어가 물고 간 아이가 죽지 않고서 신이 되어 돌아왔다는 이야기”) 상상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빨간 불빛 아래에서는 속수무책으로 잊히고” 만다고 말하며 세계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세계는, 전기 버섯만 없다 뿐이지 사실상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다르지 않아서 그의 상상은 지금의 어두운 세계를 낯설게 환기하는 효과적인 방법론이 된다.
3
한편, 이실비, 이정화, 장대성의 작품들은 어둠 자체보다는 그것에서 벗어나는 과정과 방법에 집중하여 서술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먼저, 이실비는 서사를 동원하여 이런 일들을 한다. 등단 이후 발표한 시들을 모아보면 이미 첫 시집에 대한 구상을 마친 것이 아닌가 생각될 만큼 이실비의 시들은 하나의 서사를 이루고 있는데, 각각의 시들에도 역시 매혹적인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이러한 이야기에서 지나온 날들이 어둠의 구심점이 되는 경우가 자주 보인다는 사실이다. 가령, “택시”가 “엄마만을 싣고 멀어”진 이후(「택시」, 문학과사회 2024년 여름호), “생존”이 무엇인가를 알아가며(「일지1―처음의 기록」) “고아”처럼 살아 온 지난날(「별장」)에 대해 그는 두 편의 시에서 적는다. 이때, 이실비의 화자가 과거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흥미롭다. 그는 지난 아픈 시간들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샅샅이 기록한 후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새로이 기입한다. 예컨대, 「일지1처음의 기록」에서 그는 “목격한 창문의 색깔마다 하나씩 다른 이름을 지어주고” “그 이름들을 정성껏 불러주며 창문을 깨부수”려 한다. 여기에는 과거에 있었던 일을 지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과, 그렇다면 무작정 벗어나려 하기보다 그것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를 깊이 고민한 흔적이 있다. 그가 선택한 기록의 방법은 지난 일에 대한 “불만과 욕설이 가득한 일지”를 바로 적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 거리를 두고 적는 것, “조용하게 포자를 늘려가는” “버섯 무리”처럼 오히려 “먼 곳을 응시”하며 새로운 감정과 생각이 찾아올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를 현재와 새로이 잇는 방식이다. 과거를 답습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과거와 멀어지지 않으면서도 이실비는 현재를 사는 방식을 점차 터득한다. 「별장」에서 볼 수 있듯 헤어진 엄마가 가지고 있었을 긴 머리카락과 비슷하고 또 다르게, 과거가 변형하여 승계된 ‘나’의 모습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전과 유사하나 다른 새로운 ‘나’의 탄생은 그의 시의 새로움과도 같아서, 엉겨 있는 털에 “세상 모든 찌꺼기가” “들러붙을 것”이라는 ‘나’의 당당한 예감은 자신처럼 “찌꺼기”와 같은 존재를 내치지 않고 포용하는 시적 주체의 탄생을 직감하게 한다. 그런 과거를 지나왔기에 누구보다 “상냥한 문장”의 소중함을 아는 이실비의 화자가 쓴 일지는 “썩기 직전의 자두나무”(「일지1―처음의 기록」)와 같은 생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유의미한 위로가 될 것이다.
이정화는 이미지의 운용에 능한 시인이다. 등단작이었던 「골조의 미래」에서도 그러했듯 그가 시에 가져온 이미지는 언제나 다른 이미지들을 불러 모으며 “먼 미래”나 “머나먼 과거의 일들”(「완만하기」)과 같은 추상적 개념마저 감각할 수 있는 실체로 만들어버린다. 더욱이 이 이미지들은 산만하게 나열되지 않고 유기적으로 연결됨으로써 이미지의 짜임만으로도 미학적인 완성도가 높은 시를 그는 써왔다. 그래서 이러한 이미지들을 그가 어떻게 통제하며 운용하는 것인가가 종종 궁금했다. 「새총과 권총」은 그가 의식의 힘으로 힘들게 이러한 이미지의 세계를 구축하였음을 확인하게 한다. 이 작품에서 그는 반복되는 부정적인 이미지와 연동되는 파국의 이미지를 정지하고, 새로운 이미지들의 연쇄를 의도적으로 만드는 작업 과정을 보여준다. 반복되는 파국의 이미지는 그가 예전에 어딘가에서 보았다가 기억하는 장면일 수도, 문득 떠오르는 상상의 장면일 수도 있지만 “주어진 이미지”가 이러한 것이라는 점은 그에게 짙게 자리한 어둠을 짐작하게 한다.
그렇다면 그는 어둠의 시간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네 지네는 아름답다」에서 이정화는 연쇄적으로 떠오르는 부정적 이미지들을 ‘정지’하게 하는 역할을 누군가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화자가 가지고 있는 “손등”의 흉터를 대하는 ‘너’가 바로 그런 이일 것이다. “자두를 베어 물 때” “딱딱한 씨앗”을 생각하는 ‘나’와 달리 거기에서 “과즙”과 “연둣빛 새 잎”을 보는 ‘너’는, 자신의 상처에서 “지네”를 보는 ‘나’와 달리 그것을 아름답게 바라보며 말해준다. “네 지네는 아름답다”고. “지네 같은 흉을 감감히 만져”주면서. “눅진한 진물을 닦아낸 기억이 없”기에, 상처에 “스치는 순간마다 눈감은 적 없”기에 ‘너’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를 의심하던 ‘나’였지만 이처럼 일관된 ‘너’의 말과 행동에서 ‘나’의 “지네”는 어느새 ‘나’의 “몸을 비집고 나가” 저편의 “떨어진 자두 안으로 파고든다”. 언젠가 자두를 먹으며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당분간 지네는 그 안에서 잠자고 있을 것이라고, 누군가의 어둠을 잠시 정지하게 하는 것은 저런 말과 행동임을 이정화는 보여준다.
이정화의 시가 이미지들을 나란히 늘어놓는 방식으로 축조되어 있다면, 장대성의 시에서 이미지들은 자주 액자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좋은 액자가 속을 장식하는 것만이 아니라 겉과 속이 겹쳐지며 특별한 효과를 만들 듯 장대성의 시는 이미지가 겹쳐질 때마다 특별한 서정성이 생긴다. 예컨대, 「식사食思」에서 “죽은 동물의 배를 가르는 티브이 속 부족민”과 “무언가를 열고 속을 꺼내는” ‘나’의 모습이 겹쳐질 때, 「밤이 오겠지」에서 “죽은 새의 날개를 엮어” “부채”를 만드는 이야기와 “집의 어른”의 죽음이 겹쳐질 때 시에는 묘한 분위기와 감각 및 사유의 깊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죽음을 다루는 두 작품에서 특히 효과적으로 사용된다. 가령, “부족장이 썩은 내장을 한데 모아 태”우는 장면은 실제로 “죽은 동물의” 뱃 ‘속’을 태우고 있는 것이라 “태우면 태울수록” “검게 솟아” 오르는 그 “연기”를 보고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간다는 말을/ 이해”하는「식사食思」의 서술은 ‘속이 탄다’는 말을 새로이 감각하게 해준다. 또한 “죽은 새의 날개”에 생전의 “속력”과 “남은 힘”이 있다고 여기는 어느 마을의 믿음이 “집의 어른”의 죽음 후 산에 “불길”처럼 번지는 슬픔과 겹쳐지는 「밤이 오겠지」의 장면은 죽음이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힘으로 전환되는 것이 아닌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처럼 장대성은 우리가 주변인의 죽음을 겪으며 느끼는 슬픔의 깊이와 “목줄을 벗어나지 못하는 개”(「밤이 오겠지」)처럼 여기에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하면서도 언제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을 지에 대해 말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데리러 갈 수 없는 먼 거리를 헤아리며 팔을 힘껏 뻗”을 때, “손이 새까맣게 그을”릴만큼 충분히 이를 반복할 때(「식사食思」) 슬픔의 불길로 밤도 낮처럼 느껴지는 날들과 타들어가는 ‘낮’의 감정이 나며 밤은 올 것이고(「밤이 오겠지」) 그때에는 벗어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애도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모두 지나가기를 우리는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말을 그가 “슬픔이라도 멀리 퍼뜨리고자 하는/ 끝의 마음”으로 온 마음을 다해 적을 때, 우리가 보는 것은 새로운 서정 시인이 탄생하는 광경이다.
4
여섯 시인들의 시를 읽었다. 그들은 어둠의 세계에서 깨어나기 위해 고통을 “될 때까지 반복”하며(엄시연, 「교차빛」), 신비로움을 “속수무책으로 잊히”게 하는 세계를 고발하고(추성은, 「체인질링」),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말을 하기 위해” “돌을 던”진다(한백양, 「짐」). 고통의 시간을 막 지나 보낸 듯한 세 시인은 “세상 모든 찌꺼기가 […] 들러붙”은 몸이 되어(이실비, 「별장」) “누구라도 만나면 좋은 말만 해주”려는 자세로(이실비, 「일지1―처음의 기록」) 우리의 “흉을 감감히 만져”주거나(이정화, 「네 지네는 아름답다」) 우리에게 있는 슬픔의 불을 조금이나마 “식게 만들”려 하기도 한다(장대성, 「밤이 오겠지」).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앞서 진은영이 선택한 여섯 개의 단어 중 하나를 다음과 같이 바꾸어 적어보고 싶다. ‘혁명’이 아니라 ‘시의 혁명’이라고. 시인의 마음속에만 있던 “별들의 회오리”를, “잎맥의 길”을 시를 통해 발견하며 우리의 내면에는 혁명과 같은 순간이 찾아왔다. 그러니까 우리는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마냥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드는 새로운 “백열전구”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모두를 대신해서 나는, 그들에게 “아름다운 편지”를 잘 받았다고 이렇게 답장을 쓴다. 물론 이 편지가 도착할 때쯤 그들은 이미, 우리에게 편지를 보냈던 장소에 더 이상 머물고 있지 않으리라(“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그곳보다 멀리 나아간 어느 곳에서 벽을 탕탕 치면서, 또 다른 소리를 내고 있으리라. 어디에서 보내는 것이든 그들의 편지가 앞으로도 자주, 우리에게 도착하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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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과 공생 - 나희덕의 신작시를 읽는 한 가지 방식 고봉준 “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이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고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없으면 ‘지각’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없어도 ‘지각’ 행위는 발생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인간이 없으므로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도 인간 이외의 생명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지각’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리를 지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믿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앎과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이러한 앎과 믿음에 근거해 살아온 인류의 책임이다. 나희덕의 최근 시는 ‘생명’을 주제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지구상의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이러한 생존의 조건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이 복잡한 관계를 ‘주체(주인)’와 ‘객체(대상)’라는 이항식으로 단순화해서 이해했고, ‘대상’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ecology)’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예로부터 심장은 연민의 장소로 여겨져 왔다 또는 영혼이 숨어 있는 곳 친구는 말했다, 몸을 다치면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고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고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며칠 전 부정맥이 다시 찾아왔다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가 지나가기만 가만히 기다렸다, 연민을 연민하며 - 「연민의 장소」 부분 ‘연민’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희덕은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시인이 말하는 ‘연민’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타고난 자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 그것을 초래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 근대 문명이 만든 인위적인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는 노력으로서의 ‘연민’이다. ‘타고난 자질’이 반응적인 감정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반복적인 노력과 실천적 의지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연민’은 “살고 썼다”라는 진술처럼 시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이다.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는 진술에는 이처럼 자신의 바깥, ‘나’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시인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연민’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연민의 장소’는 ‘심장’이다. 화자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연민’이라는 문제로 전치하고 있다. “부정맥으로 처음 응급실에 실려간 것은/스무 살 때였다”라는 도입부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맥’을 앓아왔다. 심장에 생긴 이러한 병리적 상태는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에서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심장을 켜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부정맥이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순환하는 체계로서의 몸을/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부정맥의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따금/들이닥치는 통증을 통해서 가늠해볼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화자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부정맥이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인식한다. 요컨대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병리학적인 의미의 연민이라면, 어떤 생명체가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는 시적인 의미의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민은 “사랑을 잃은 손녀가/담당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 장면처럼 상호적 관계로도 행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생명을 향한 마음과 “빈 자리를 통해서만 만져지는 것”(「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상실과 결핍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연민’과 ‘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을 나란하게 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사나운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는 화염이 동네 뒷산까지 번져오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어야 했다 불길이 고속도로를 넘어오고 산봉우리를 훌쩍 건너뛰어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모든 게 바람의 손에 달려 있었지요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우리 동네는 무사했어요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그나마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검은 흙 위로 어느새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다 무슨 위로처럼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 「불의 혀」 전문 이 시는 지난봄의 동해안 산불을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말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이며, 세계와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자의 내면은 ‘나’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처럼 ‘불가능성’이 예술의 중요한 논점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이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불가능성 속에서 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산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왜 어제의 ‘말’을 주워 담는 것일까? ‘불의 혀’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불의 혀’라는 익숙한 이미지와 자신의 말하는 ‘혀’, 즉 산불이 초래한 ‘고통’과 자신의 ‘말’이 초래한 ‘고통’을 나란하게 놓는다. 이러한 등치의 밑바닥에는 ‘혀’를 ‘불’에 비유한 성경적 상상력이 놓여 있는 듯하다. ‘불’이 ‘혀’에 비유될 때,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는 땅은 ‘식은 혓바닥’이 된다. 시인은 이 ‘식은 혓바닥’ 위에서 “검은 흙 위로 어느새/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은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에 풀이 “무슨 위로처럼” 돋아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풀’의 위로의 반대편에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 대한 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검게 타버린 대지 위에 위로처럼 돋아나는 ‘풀’과 산불로 거처를 상실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위로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느끼는 좌절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명적인 결핍의 사건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이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말’의 조건이다. 「불의 혀」가 보여주듯이 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겠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가 담긴 컵을 탁자에 놓아두고 언제 나올까, 잘린 줄기 끝을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을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 물에서 흙으로 이주한 박하는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 햇빛이든 물이든 흙이든 바닥이든, 한쪽을 향해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 뻗어감과 휘어짐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 남루한 옷과 때묻은 손, 두 사람의 눈빛을 바닥을 향해 있다 어떤 물기도 없이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는 계속 뻗어가고 나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 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었다 거리의 흙먼지도 함께 따라와 자욱해지곤 하지만 박하가 자라는 동안 굴성을 지닌 존재들은 자란다 - 「박하가 자라는 동안」 부분 화자는 박하 몇 줄기를 물꽂이 해놓고 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화분에 옮겨심기 위해서는 뿌리가 3센티 정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이 본체에서 잘려져 컵의 물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을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통점’은 일종의 상처인데, 식물은 바로 이 ‘통점=상처’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화자는 ‘박하’가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물에서 흙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주’라고 표현한다. ‘이주’란 본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한 생명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번식력이 강한 ‘박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화자가 ‘박하’의 성장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굴성’이다. 굴성이란 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민감하게 설계된 생명체이면서 항상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러한 식물의 굴성 현상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규칙을 읽는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뻗어감과 휘어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에서 ‘굴성’은 식물만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확장되며, 이때 “뻗어감과 휘어짐”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외부의 자극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풍경이다. 화자에게 이 풍경은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가 계속 뻗어가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형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이 궁핍한 형상 앞에서 화자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는다. ‘박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뿌리’가 존재하며, ‘뿌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물’을 갈아주는 행위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이 경우 ‘물’은 “기억의 물”이므로 이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태도로 그 궁핍한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이주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세계의 가난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심는다. 탐조의 마지막은 새들이 저수지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머리 숙여 낟알을 쪼던 기러기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떼 지어 저수지로 날아온다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얼음물 위에서의 잠,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슬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 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 「탐조의 이유」 부분 탐조(探鳥)는 새를 관찰하는 활동이다. 화자는 오래전 들판에 누워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한겨울 저수지로 되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화자에게 기러기의 모습은 “얼음물 위에서의 잠,/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라는 표현처럼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화자는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과거의 그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슬픔’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그에게 새들의 ‘울음소리’는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불현듯 자신이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 독자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새’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자는 왜 “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 것일까. 먼저는 그는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탐조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오래전의 ‘탐조’의 목표가 ‘새(기러기 떼)’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화자의 탐조는 ‘새’가 아니라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처럼 ‘나’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후자에서 ‘나’는 ‘새’의 바깥,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새들의 눈에 비친 내”이다.과거의 ‘나’는 ‘새’와 별개의 존재였던 반면 현재의 ‘나’는 ‘새’와 연결된 존재이다. 이런 생각에 기대어 화자는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그만 풀어주고”자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듯이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와 지금 얼음물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전자의 울음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 해석된 인간화된 울음이라면 후자의 울음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풀어준다거나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라는 표현에는 인간화된 자연 인식을 반성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공생’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사랑, 정의되지 않을 기록들 - 서윤후와 양안다의 사이, 그 틈 류수연 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멀리서 폭발음이 들려올 때 이은지 동물의 사육제 김기형의 다섯 편의 시를 읽으면서 자연스레 떠올린 것은 ‘사육제’였다. 각각의 시에는 동물의 형상(양, 강아지, 새, 잉어)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동물이 아니거나 동물인 가면을 쓰고, 털로 뒤덮인 날짐승의 피부 아래 붉은 속살을 양껏 뜯어 먹는 사육제. 얼굴이라는 외피를 감춤으로써 평시에 보이지 않던 내면을 폭발시키는 행위, 겉이 아닌 속을 먹는 행위가 갖는 의례적인 성격을 떠올려보면 그러한 단순한 연상이 영 틀리지는 않은 듯하다. 가면의 힘을 빌려 존재의 영원불변할 것만 같은 오랜 속성을 전복시키고 그 운행을 잠시나마 뒤얽어보는 데서 오는, 천진하기에 파괴적인 사육제의 위력이 김기형의 시에서도 엿보이기 때문이다. 마침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의 소설에는 다음과 같이 단순하지만 명료한 구절이 가로놓여 있다. 악령의 가면 밑에는 천사의 민낯이 있고, 천사의 가면 밑에는 악령의 민낯이 있어. 어느 한쪽만 있을 수는 없어. 그게 우리야.1) 민낯과 전혀 다른 속성을 띠는 듯하지만 민낯과 더불어, 혹은 민낯과 분리됨으로써 그 주인을 거꾸로 규정하기에 이르는 가면의 신비로운 성질은 화자와 독립된 존재로 등장하면서도 화자와 무관하지 않게 운용되는 동물들이 시 속에 존재하는 양상, 시로부터 행동하는 양태를 헤아려보게 한다. 시인의 첫 시집에서 인상적이었던 권두시 「자두 f」를 떠올려보면, 봉지가 뜯어져 “계단을 타고 다 터지면서 나타”난 자두가 “몸 전체로 힘을 주”고 “안으로 근육을 일으키”며 일거에 분출시키는 폭발적인 ‘힘’, 삼천원어치 자두를 봉지에 담아 어딘가로 보행 중인 화자와 완전히 무관한 운동성을 발산하며 자두와 화자의 역능이 역전되는 찰나를 포착하고 그 안으로 무한히 쪼개어 들어가고자 하는 시인의 집요함을 발견할 수 있다.2) 이 집요함은 손을 없게 하고 손을 “손이 아닌 것”3)으로 떼어내고자 하지만 완전히 그리할 수 없는, 손과 ‘나’의 관계 양상을 그야말로 물고 늘어지던 등단작 「손의 에세이」에도 선명한 자국으로 찍혀 있다. 한 마리 맹수처럼 으르렁대는 자두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손의 운동성은 금방의 비유가 상기하듯이 지극히 동물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 자체로 약동하는 생의 에너지를 품고 있으면서 인간 사회의 시계(視界)로는 온전히 예측할 수 없기에 흡사 무질서에 가까운 질서를 생성하는 동물의 움직임은 인간 민낯의 대행자이되 정물에 머무르는 가면의 역치를 비상한 수준으로 끌어올렸을 때 기대할 수 있는 성질이기도 할 테다. 오래전 사육제의 가면들이 다양한 동물의 형상을 꾸며내었던 것도 그러한 상상을 조형적으로 추구한 결과였을 테다. 「공사」에 등장하는 ‘사람’과 ‘개’를 살펴보면 김기형이 그리는 존재와 그 대행자의 관계 양태를 가늠해볼 수 있다. 공사로 무너지고 주저앉아 “누구나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지붕 없고 문 없는 집”에 살던 ‘그 사람’은 이제는 집의 “속살이 어떻게 잠들어 있는지 다 보”이는데도 “저 없는 문 열고 저 없는 문 닫”으며 거주자의 관성을 섬기고 있다. 반면 그가 키우는 ‘개’는 “화도 냈다가/꼬리를 흔들며 아저씨 목장갑에 털도 부비다가/어느 방으로 가야/그 사람 있는”지, 베란다는 어디였고 사료가 있던 곳은 어디인지, “꺾이고 내려앉은 집안”을 곧이곧대로 탐색한다. 그 사람은 분명 개의 주인이고 개 또한 주인에게 철저히 복종할 테지만, 눈앞의 현상에 즉물적으로 맞닿은 개와 달리 그에게는 한꺼풀의 관성과 관례가 입혀져 있다. 그는 이미 밖으로 훤히 다 보이며 안이 곧 밖이 되어버린 “집 밖, 돌무덤 밖으로 걸어 나와”서야 개의 이름을 부른다. 안팎이 뒤집힌 집의 민낯을 실컷 부비고 온 “개의 혓바닥으로 얼굴이 닦이고”(강조는 인용자)서야 “얼마나 오래 비워야 돌아올 수 있을까” 한마디 한다. 표지판 위 동물-대행자의 능동, 대행을 부과한 인간-주체의 피동이 시 속에서 얽히며 일으키는 주객의 역전은 표면상으로는 주체의 무기력으로 드러난다. 「한 가지」에서 세계가 기표로 이루어져 있음을 규정하는, “설명이 너무 크”게 박혀 있는 “표지판 위로 새는 그저 앉을 뿐”임을 일별하는 화자의 목소리에는 동경 비슷한 것이 묻어 있다. 기표의 의미는커녕 그 존재조차 모른 채 기표의 세계에 공존하고 있는 새가 표지판 위에 앉기도 하고 표지판 위를 날기도 하며 보이는 종횡무진은 화자가 “이런저런 자세로 (…) 가장 잘 맞는 도형처럼/콕 박”힌 지하철 안에서 각자 알아서 도형이 되고 서로에게 형틀이 되어 맞춰지는 사람들의 일사불란과 대비된다. 「자두 f」의 ‘자두’에 상응하는 “귤 하나”가 “주황이 떨어져 바닥을 구르고/소파 아래 어두움 속으로 사라지는” 것에 화자가 마음을, 시선을, 즉 “영혼이 가는 길”을 빼앗길 때, 거기에는 어떠한 규정도 질서도 없이 생 그 자체에 닿은 운동성을 향한 경애가 놓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의 피동은 대행자의 능동에 앞서는 것이자 다분히 의도된 것이기도 하다. 귤이 떨어져 바닥을 구르기에 앞서 “식탁 위로 귤 하나를 굴리”는 “나”가 선행한다. 주체의 피동을 대신 드러내 보여주는 귤의 운동이란 주체의 결행 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한 가지도 등에 업고 가지 않”는 새와 “한 명도 새처럼 떠나지 않”는 사람들을 견주는 것도 어디까지나 화자의 주도로 이루어진다. 심지어 화자는 “날아갈 때는 가르는 창처럼 내 마음을 가르”는 새들조차도 날기 전에는 “기우뚱하게 걷”는다는 것을, 즉 중력의 예속에 놓여 있음을 목격한 바 있다. 이처럼 주체의 피동이 ‘능동의 피동’임은 “그 옛날 목동처럼” 양들을 대하는 「양들에게 고백하기」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한 마리의 울음이 얼마나 빠르게 번질 수 있는지, 조용한 마음으로 너희를 지키고 있지. 양과 나의 언덕처럼 드높은 우정을 하늘이 알고 있다. 양들이 내 앞에서 잠도 자고 이갈이도 한다. 내가 오래도록 바라온 일. 양들이 이리 떼의 두려움 없이 잠들기를 원하네. 나 너희에게 빚진 잠을 갚으러 왔다네. ― 「양들에게 고백하기」 부분 잠이 오지 않으면 양을 세는 출처 불문의 관습이 가리키듯이 양은 잠으로 빠져드는 행위의 대리자인바, 화자는 양들에게 잠을 ‘빚’지고 있다. 그런 동시에 화자는 “양들이 이리 떼의 두려움 없이 잠들기”를 원하며 “조용한 마음으로” 그들을 지키는 목동이기도 하다. 양들의 목동을 자처하기에 앞선 그의 삶에는 “죄 많은 자가 죄 지은 자를 (…) 두들겨” 패는 폭력에 관성적으로 동참했던 시절이 놓여 있다. 당시 그는 “얼굴을 까고 벗고 도마 위에 올려두었지만”, 참회를 스스로 대리하려던 화자의 노력은 어쩐지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양들이 사는 들판으로 도망쳐온 것이 민낯을 벗겨 도마 위에 바치는 것보다 속죄로서 유효한 지점이 있다면, 직접 나서서 무언가를 조급하게 대리하기보다 양-대행자의 평안을 수호하기로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이 화자를 비롯한 인간에게 주어진 지난한 “숙제”이기 때문일 테다. 죄와 폭력으로 얼룩졌을지라도 기왕에 몸을 담근 기표의 세계로부터 얼굴을 까 벗기듯이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으면서도, 양을 치듯이 기표 너머, 기표 바깥의 세계를 보살피는 일에 김기형은 발이 묶이고자 한다. 화자가 목동을 자처하는 일이 “세상을 등지지 않고 등지자고 하는 것”이 될 수 있는 까닭이다. 도망쳐온 세계의 도마 위에 여전히 무언가가 썰리고 있을지라도 양들에게 진 빚을 조금씩 갚아주는 일은 무용하지 않아 보인다. 기표 바깥의 세계(시)가 기표의 세계(현실)에 대한 속죄를 대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행은 그저 양들을 잠재우는 일처럼 평화롭기 그지없어 보이지만, 민낯의 참회보다 훨씬 힘이 세다. 물속의 폭발 가면이 민낯은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하고 새로이 살 수 없는 삶을 사는 것을 숨죽여 지켜보면서, 가면 아래 민낯은 무엇을 도모하고 있을까. 가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민낯은 가면의 대행을, 민낯과 독립된 듯이 굴었을 때만 벌일 수 있는 난장을 가면의 뒷면으로부터 흡습하듯이 감지할 것이다. 민낯은 민낯과 가면 사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작은 틈을 매개로 눈과 코를 찡긋거리거나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자신과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는 대리자의 행위에 미세하지만 분명하게 감응하고 있을 것이다. 민낯과 가면 사이의 좁은 틈을 하나의 세상으로 확장한다면, 이 감응은 결코 미세한 수준이 아니게 된다. 그 좁은 틈에서 벌어지는 일을 김기형의 시로 환치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시인이 하는 일이란 기표의 세계와 기표 바깥의 세계를 매개할 뿐 아니라 그 지점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확장하는 일일 테니까. 「잉어가 와요」에서, 자신을 둘러싼 물(세계)을 모조리 삼켜 제 속을 물로 만들어버린 잉어의 형상은 두 세계를 매개하는 시인을 대신하여 새로 뱉어낼 세계를 뱃속에 저장하고 있다. 물을 삼켜 “불어 터진 입속에서 안으로도 밖으로도 가지 않고/둥둥 울리기만 하는 이명/메아리, 기척, 진동”을 머금은 잉어가 새까만 입을 벌린 채 “식탁을 덮쳐”올 때, 기표의 발화도 전달도 흩어지고 뭉개지는 그 뱃속 세계를 “감지”한 “우리”가 “침수하는 몸”이 되어 물속을 냉큼 유영하고자 할 때, 잉어는 우리를 도와줄 것이다. 잉어는 우리의 몸이 침수되기를 도와줄 뿐 아니라 “이후의 미래를, 조금 뒤의 목격을/아는 척하며” 화자가 쓴 문장을 제 속에 실어 “폭탄처럼” 터뜨린 뒤 부드럽게 뱉어낼 것이다. 나는 이후의 미래를, 조금 뒤의 목격을 아는 척하며 써요 꾹꾹 눌러쓰고 함께 하는 자들이라고 읽어요 맨 뒤의 문장이 잉어의 뱃속에 실려요 실려서 폭탄처럼 터져요 ― 「잉어가 와요」 부분 물속의 폭발은 그 파장과 파편을 견딜 만한 수준으로 유화시켜준다. 사육제의 난장이 의례에 불과하다는 사실 속에 용인되듯이 지금 이후의 문장, 여기 바깥의 문장이 당장에 불러일으킬 수 있는 충격을 잉어가 삼켜낸다. 물로 채워진 잉어의 뱃속에서 터진 문장은 기표의 세계가 모르는 질서, 아직 만들어본 적 없는 형상으로 꿈결처럼 일렁이고 있다. “내려오지 않는 별들이 하늘에 무수한 것은/그곳에/지어졌기 때문”이듯이, 잉어의 뱃속에는 “처음 글씨를 배울 때”처럼 “순서를 가지지 않고/멋대로 쓰”인 글씨가, “엎어진 물”에서 일순 드러나는 “형상”처럼 아직은 이곳에 속하지 않는 것들을 간직하고 있다(「세미한 소리」). 시인이란 뱃속이 흡사 일찍 온 미래의 소용돌이와 같이 된 잉어를 도마 위에 놓이지 않게 연못에 잘 풀어놓는 이다. 가끔 수면 위로 올라온 잉어의 뻐끔거리는 입속에서 현실이 모르는 문법으로 그려지는 글씨들을 발견하고, 몇 마디 문장을 먹이처럼 던져준 뒤 다시 물속으로 돌려보내는 이다. 물속을 자유로이 헤엄치는 잉어의 뱃속에서 자신이 던져준 문장들이 소화되면서 나는 폭발음이 이따금씩 물의 저항을 뚫고 귓전에 닿을 때, 그 소리는 지극히 ‘세미’하지만 결코 미약한 것이 아님을 퍼뜩 알아차리는 이다. 먼 물속의 폭발을 제 발밑의 지진처럼 감지하는 일, 세계 너머의 난장을 대행하는 이들을 기르고 보살피는 일을 자처하면서 끈질기게 관찰하고 기록하는 이가 김기형이다. 그는 그렇게 “불화도 분노도 없는 고요한 싸움”4)에 끝도 없이 매진한다. 1) 무라카미 하루키(홍은주 옮김), 「사육제(Carnaval)」, 『일인칭 단수』, 문학동네 2020, 169쪽. 2) 김기형, 「자두 f」, 『저녁은 넓고 조용해 왜 노래를 부르지 않니』, 문학동네 2021, 13쪽. 3) 김기형, 「손의 에세이」, 같은 책, 48쪽. 4) 안희연, 「기형의 시」, 같은 책, 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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