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봄호
문학의 경제학 ― 문학적 ‘배움’과 ‘세대’에 관한 이론적 검토
문학은 거의 없거나 있어도 아주 조금 있다.
—자크 데리다, 「더블 세션」1)
바로 이 거의 없음ce peu입니다.
—미셸 푸코, 「문학과 언어」2)
1. 도입
문학성이라는 어휘는 동시대 비평 담론에서 그다지 환영받는 주제는 아닌 것 같다. 어떤 방식으로든 문학성을 탐구하고, 그것을 새롭게 정의하려는 시도는 모종의 보편성 또는 고유한 본질을 향한 의심스러운 집착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확실히 문학성이라는 개념은 오늘날 시공을 초월한 실체적 가치라는 시대착오적 표상을 가리키며, 과거에 대한 퇴행적 노스탤지어를 떠올리게 한다. 보편성에 대한 동시대적 의혹은 문학성이라는 개념이 권력을 지닌 소수의 통치 엘리트들의 관념화된 믿음과 이해관계를 대변할 뿐이라는 주장에 이를 때 극적으로 정당화된다. 현재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이러한 입장에 동의하게 될 때, 우리가 문학성을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해체하고 탈신비화해야 할 이데올로기의 산물로 지목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결과적으로 문학의 본질에 대한 논의 필요성은 사라지고,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역시 최종적으로 극복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문학의 본질은 없다’는 결론에 대부분 흔쾌히 합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이라는 기호를 매개로 특정한 텍스트들을 지시하는 담론적 실천들은 여전히 가능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혹은 이론적으로) 우리는 문학의 본질(문학성)을 해체해야 한다고 선언하지만, 경험 세계에서는 문학과 문학이 아닌 것이 명확하게 구분되고, 특정 작품의 가치를 평가하는 비평적 식별 체제는 역동적으로 작동하는 중이다. 이것은 문학성에 대한 역사주의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텍스트들의 문학적 가치를 사유하는 과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되지는 않음을 말해준다. 문제는 이 둘을 혼동해버리면, 문학의 본질이 해체되었다는 확신 속에서, ‘문학’이 일종의 물신화된 텅 빈 기표처럼 담론 바깥에 배치된다는 데에서 발생한다. 일찍이 강보원은 이러한 아이러니를 정확히 짚은 바 있다.
문학성을 상대화한다는 것은 문학을 상대화하는 것과 다르다. 문학성이 상대적인 것일 때 우리는 원칙적으로 모든 종류의 글쓰기를 잠재적인 문학적 텍스트로, 그러므로 그것의 바깥이 없는 그러한 글쓰기의 일종으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 문학은 상대화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상대화의 보이지 않는 중심으로 작용한다. [……] 이 지점에서 문학이란 무엇으로든 채워질 수 있는 텅 빈 기표로, 이제까지는 존재한 적 없던 광활한 영토로, 자신을 확장하고자 하는 욕망만큼은 여전히 말해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3)
문학성을 상대화하는 것과 문학을 상대화하는 것은 별개의 사안이다. 문학이 ‘역사적으로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산물’이라는 결론에서 멈춘다면, 문학이라는 언표가 현재에도 양산하는 다양한 실정적 힘들, 그리고 그것이 은연중에 의존하고 있는 부정신학적 신비주의 앞에서 무력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4)
물론 대안적 설명이 없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문학’을 변화하는 현실과 사회적 기대를 반영하는 문화적 산물이며 문학에 대한 정의 역시 그러한 시대적 요구를 표현하고 대의하는 잠정적 기호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 ‘문학’은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생성되는 허구적 텍스트들을 지시하는 일시적 언표이자 제도적 협약의 결과에 가까워진다. 일종의 유명론nominalism에 가까운 이러한 시각의 한계는 문학적 담론과 그것이 실천하는 가치 평가의 유일한 근거로 ‘현실’이 채택된다는 데 있다. 현실이 문학의 유일한 근원으로 지목될 때 야기될 수 있는 문제는 ‘문학과 현실’ 중 무엇을 중요시할 것인가라는 이분법을 강요한다는 데 국한되지 않는다. 문학과 현실을 둘러싼 강화된 이분법은, 내가 일전에 재현 체제representative system라고 불렀던 대의제 정치representative politics 모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5) ‘어떤 것이 좋은 문학이냐’라는 실제적 물음 앞에서 대답은 ‘누가 현실의 문제를 정확하고 올바르게 재현/대변하는가’로 결정된다.
이 과정에서 텅 빈 기표처럼 물신화되는 것은 다름 아닌 ‘현실’이라는 기호이다. 재현/대의를 둘러싼 주체의 정당성 문제로 논의가 좁아진다면, 비평적 논쟁은 국민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며 적대적 분열을 가속화하는 오늘날의 망가진 정당정치와 유사해질지도 모른다.
문학이 현실을 재현하지 않거나, 사회적 요구를 반영해서는 안 된다는 비상식적인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문학과 현실 사이의 일원화된 관계 속에서 텍스트를 읽게 되었을 때 초래될 수 있는 갈등적이고 비생산적인 권력 게임으로부터 초점을 이동하고 싶은 것이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질문과 탐구의 방향을 바꿀 필요가 있다. 우리의 관심은 문학의 역사성과 문학의 내재적 원리라는, 겉으로는 이율배반적인 두 원리를 매개할 수 있는 이론적 방법론을 다시 고민하는 일이다. 어쩌면 문학의 본질(문학성)은 모순적으로 보이는 두 가지 원리의 양립 가능성을 지시하는 메커니즘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강보원의 글이다.
현실의 변화에 따라 문학성은 물론 끊임없이 해체되고 재구성되며, 문학은 시장과 제도와 권력 등의 수많은 요소에 영향을 받고 그것들과 함께 형성되는 담론이다. 다만 우리가 총체로서의 문학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로서 문학의 내재적 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글을 쓰는 이가 하필 문학이라는 장르를 선택해 무엇인가를 표현할 때 문학이 그 표현의 내용과 그것을 표현하려고 시도하는 주체 자신을 변화시킨다고 전혀 생각할 수 없다면, 문학이란 담론은 그 어떤 대화도 생성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경우 문학은 단순히 자신을 생성하는 현실과 현실적 주체를 단순히 반영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본질이란 다른 어떤 것이라기보다 단지 그러한 직접적 반영에 저항하는 작인을 부르는 이름일 뿐이다. 본질은 대상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총체성이 아니며, 단지 총체로서의 대상을 이루는 하나일 뿐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문학을 이루는 많은 요소 중 그러한 의미의 본질도 아주 조금 있다는 것이다.6)
최근 강보원은 ‘문학은 거의 없거나 있어도 아주 조금 있다’는 데리다의 명제를 변주하며, 역사적 해체와 재구성의 시간 속에서도 완벽하게 사라지지 않는 문학의 ‘본질’을 사유하자고 제안한다.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급진적 제안을 ‘선험적이고도 고정불변하는 문학이 있다’라는 비역사적인 주장으로 오해하지 않는 것이다. ‘아주 조금 있는 문학’(데리다), 혹은 ‘거의 없는 문학’(푸코)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문학에 대한 재현 불가능성은, 역사와 현실의 압력 속에서도 완전히 소진되지 않는 잔여로서의 문학을 지시하며,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지속적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문학의 자체적 역량을 증언하는 말로 읽혀야 한다. 관건은 이처럼 거의 보이지 않는 문학의 존재를 탐구하는 것, 그리고 그것만의 고유한 역량이 활성화되고 확산되는 과정을 묘사하고 관측하는 방법을 고찰하는 것이다.
이 글이 제안하는 ‘문학의 경제학’은 이를 시도하기 위한 일종의 시론적 모델이다. 경제와 문학을 이론적으로 연결하는 작업은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여러 오해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경제라는 비유적 모델을 채택하는 이유는 문학적 가치(문학성)가 생산, 소비, 인식, 측정, 평가, 해석되는 과정을 교환의 메커니즘으로 조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상품이 거래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학의 경제라는 독특한 문화적 장에서 문학적 가치에 관한 교환 행위가 발생한다고 가정할 수 있다. 물론 이때의 교환은 상품을 둘러싼 교환 행위와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다.
교환의 원리를 바탕으로 문학의 가치를 탐구하는 문학의 경제학은, 문학을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를 중시하는 실증주의적 모델과 구분된다. 문학의 경제학은 문학의 가치를 대상(작품)에 내재되어 있는 실체적 요소로 전제하는 대신, 작품과 독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순환과 교류,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체계 속에서 창발되는 것으로 가정한다. 기존의 전통적 문학 이론에서 문학성은 창조되고 발견되어야 할 것이지만, 문학의 경제학에서 문학의 가치는 문학적 교환을 통해 생산되고 소비되어야 하는 것에 가깝다.
문학의 경제학이 독단주의적 관념론을 경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학의 본질에 대한 주관주의적 상대주의나 회의주의를 결론으로 삼는 것 역시 아니다. 문학의 경제학에서는 여전히 문학의 가치를 생산/소비할 수 있도록 만드는 남다른 교환의 원리와 체계가 존재하며, 그것이 문학적 가치의 성격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다고 주장할 것이다. 따라서 문학의 경제학이 추구하는 것은 일종의 관계주의적 모델이다. 문학성은 이러한 문학의 교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독특한 화폐의 성격을 지니며, 문학의 자율성은 이 화폐를 매개로 문학의 경제를 작동시키는 특수한 담론적 네트워크를 지시하는 개념으로 이해될 것이다. 우리가 문학의 본질, 혹은 어떤 텍스트의 문학성을 체험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와 같은 체계와 원리의 특수하고도 내재적인 성격을 통해 해명될 수 있다. 이때 이 글에 주어진 화두로서의 ‘배움’과 ‘세대’는 문학의 경제적 교환 관계를 이론적으로 스케치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2. 경제적 가치란 무엇인가
문학의 경제에 대한 이론적 가설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우선 ‘경제’라는 용어에 대한 몇 가지 개념적 재규정이 시도되어야 한다. 오늘날 경제라는 어휘는 일반적으로 상품, 시장, 화폐, 기업 등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단어 목록을 즉각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경제를 이렇게 정의한다. “인간의 생활에 필요한 재화나 용역을 생산·분배·소비하는 모든 활동. 또는 그것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사회적 관계.” 그러나 경제라는 개념이 재화, 상품, 용역, 서비스 등 시장 안에서 거래되는 품목으로 한정되는 것은 특정한 역사적 국면을 통과하며 나타난 이데올로기적 현상일 뿐이다.7) 경제라는 말이 지시하는 바는 그보다 더 넓다. 가령 피에르 부르디외에 따르면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 역시 넓은 의미에서의 경제적 현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발화자와 수신자의 커뮤니케이션 관계로서, 기호화와 해독에 기초하는, 즉 코드 또는 언어생성 능력의 사용에 기초하는 언어의 교환은 경제적 교환이기도 하다.”8) 우리는 언어적 대화 국면 속에서 무언가(그것을 통상 ‘메시지’라고 부른다)를 주고받으며, 이러한 언어적 교환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메시지를 둘러싼 코드와 규약, 즉 사회적 질서가 존재해야 한다.9) 일상의 커뮤니케이션을 경제로 묘사하는 것의 이점은, 언어적 교환 행위 속에서 생산, 소비, 유통되는 메시지의 가치에 내포된 사회적 성격을 규명하고, 그것을 근거 짓는 사회적 질서의 토대를 가시화한다는 데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이 경제라는 어휘를 시장의 경제와 조금 다른 지평에서, 좀더 포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경제란 특정한 가치 위계 내부의 가치들을 거래하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모든 사람에게 사회적 삶에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문화는 그중 한 부분이다. [……] 여기서 말하는 경제는 시장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경제는 시장보다 더 오래되고 더 포괄적이다. 시장은 특정한 경제의 혁신적 특성 중 하나일 뿐이며 그렇기에 아무 조건 없이 그 자체로 규정될 수 있는 혁신의 원천으로 기능할 순 없다. 상품 교환의 경제뿐 아니라 희생, 탕진, 폭력, 점령의 경제도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이다.10)
보리스 그로이스의 지적처럼, 경제적 교환은 특정한 ‘가치’들의 거래 현상을 가리키며, 이러한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특정한 체제와 원리(“가치 위계 내부”)를 지시한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의 시장경제는 수많은 경제적 체제의 유력한 하나를 나타낼 뿐이지, 전체를 포괄하는 것은 (물론 최근에는 사회 전체를 점령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가치가 생산·소비되고, 그것을 교환·유통시킬 수 있는 체제가 정비된 곳이라면 어김없이 경제적 논리가 작동한다. 상품의 경제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의 경제, 혹은 더 좁게는 문학의 가치가 거래되고 교환되는 시공간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거기에 있다.
경제학에서 이론적 탐구와 분석의 대상이 되는 핵심 문제는 가치value의 본질을 규명하는 것이다. 경제적 가치는 교환에 참여하는 주체들의 욕망의 원천이자,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어떤 이해관계의 토대를 구성한다. 가치가 전혀 없는 대상을 원하고 거래하는 경우를 우리는 상상하기 힘들다. 사람들이 기꺼이 돈을 지불하면서 특정한 상품이나 재화를 구매한다면, 그 대상에 자기가 생각하는 쓸모가 충분히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면, 그러한 소통 속에서 이루어지는 메시지 교환이 의미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문학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굳이 시간과 노력을 할애하면서까지 어떤 작품을 읽기로 결정했다면, 그것을 통해 모종의 보람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거래 대상이 일정 수준의 기대치를 충족해주지 못한다고 판단될 때 구매, 대화, 읽기는 즉각 중단되고, 동일한 대상을 매개로 한 교환은 더 이상 실현되지 않는다.
주목할 것은 이때 가치는 욕망의 대상이지만, 교환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원리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가치는 교환의 필요조건이지만, 그 자체로 충분조건은 아니다. 가치가 교환과 거래의 대상으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주고받는 상품, 담화, 작품의 가치를 인식하고 인정하는 평가 기준이 존재해야 한다. 따라서 경제학은 가치의 측정 가능성(혹은 인지 가능성)에 기반하고 있으며, 거래 대상 사이의 대체 가능성이라는 ‘동일성의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 이때 ‘가치’와 ‘측정’의 문제는 동시적으로 제시될 수밖에 없는데, 측정 불가능한 가치는 교환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저해할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거래 불가능한 가치, 존재하지 않는 가치로 판명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제적 관계를 분석하는 데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대상의 ‘가치’ 유무를 판별하는 것이고 그것을 측정 가능한 단위로 환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경제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합의가 과연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에 관한 탐구 과제를 제기한다. 이러한 경제적 교환의 성격에 관한 최초의 고찰을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돈을 일종의 척도(metron)로서, 물품들을 같은 척도로 잴 수 있게 만들어 그것들을 동등하게 만든다. 교환이 없었다면 공동체도 없었을 것이며, 동등성이 없었다면 교환도 없었을 것이고, 같은 척도에 의해 측정 가능성(symmetria)이 없었더라면 동등성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큰 차이를 가진 것들을 같은 척도로 잴 수 있다는 실제로는 불가능하지만, 우리의 필요와 관련해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11)
‘정의dikaisoynē란 무엇인가?’를 논하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5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가 존재할 수 있는 다양한 영역 가운데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공동체”,12) 오늘날의 개념으로는 ‘시장market’에서 실현되어야 할 정의(‘교환의 정의’)의 문제를 짧게 다룬다. 교환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교환되는 대상의 가치가 측정되어야 하고, 서로 다른 재화 사이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게 해주는 사회적 원리가 설명되어야 한다. 이때 ‘돈’은 그것을 가늠케 하는 척도이자, 거래 품목 사이의 동등성을 기초하는 사회적 합의의 징표에 다름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한 교환의 정의는 바로 이러한 동등성이 실현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동등성의 원리 속에서 누군가가 부당한 편익을 취하지는 않는지를 따지는 ‘비례성의 준칙’을 뜻한다. 문제는 엄연히 질적으로 ‘큰 차이’를 가진 서로 다른 재화들 사이의 동등성을 설명하는 것이 지극히 까다롭다는 사실이다. 가령 사과 한 개와 책상 한 개의 실질적 가치를 어떤 기준으로 정확히 측정하고 비교할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이 ‘실제로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 둘의 관계를 매개하는 것이 실체가 아니라, 다만 사회적 필요(“우리의 필요”)일 뿐이라고 전제하며 자신의 분석을 매듭짓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13)
최초의 경제학이 형성되는 데 있어 이 가치의 측정 가능성 문제가 가장 중요하면서도 일차적인 화두가 되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다이아몬드와 물의 역설’14)이라는 애덤 스미스의 유명한 문제 제기에서부터 시작해 데이비드 리카르도, 카를 마르크스 등 근대 경제학의 위대한 창시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불가능’하다고 말한 가치척도의 기초를 정립하고, 그를 바탕으로 경제적 교환의 원리를 도출하는 데에서 자신의 경제학적 이론을 펼친다.
3. 가치의 두 패러다임
가치value는 오직 상품과 상품 사이의 사회적 관계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카를 마르크스15)
경제 법칙 또는 경제적 경향에 대한 연구는 주로 화폐의 가격money price으로 측정될 수 있는 동기들motives의 강도와 관련된 행동들을 다루는 사회 법칙이다.
—앨프리드 마셜16)
마르크스의 경제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멈춘 지점에서 이를 재개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자본론』 1권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천재는 바로 그가 상품의 가치표현에서 하나의 동등 관계를 발견한 데서 훌륭하게 나타나고 있다. 다만, 그가 살고 있던 사회의 역사적 한계 때문에 바로 이 동등 관계가 ‘실제로’ 무엇인가를 해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17) 마르크스가 지적하고 있는 ‘사회의 역사적 한계’란 무엇일까. 여기서 그가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상품 사이의 동등관계를 형성하는 토대로서의 사회적 관계, 즉 분업과 협업을 통한 생산 시스템으로서의 생산 관계이다.18) 특정한 생산 관계가 역사적으로 출현한 이후에야 상품의 가치를 결정짓고 측정하기 위한 본질적 요소가 추출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것이 바로 인간의 노동이다. “상품의 가치의 크기는 어떻게 측정하는가? 그 물건에 들어 있는 ‘가치를 형성하는 실체’인 노동의 양에 의해 측정된다.”19) 상품과 상품 사이의 교환을 매개하는 동일성의 원리는 각각의 상품들이 생산되는 데 투여되었던 추상화된 인간 노동abstract human labour의 양(시간)으로 환산될 수 있다. 상품의 유용성(사용가치)은 그것의 물리적 가치를 나타낼 뿐, 그 자체로 상품의 성격을 충분히 담지하지 못한다. 상품의 신비한 성격은 “그것들의 이중적인 성격, 즉 사용의 대상임과 동시에 가치의 담지자”20)라는 사실에서 기원하기 때문이다. 흔히 교환가치라고 불리는 ‘표현 양식form of appearance’이 상품을 대변represent할 수 있기 위해서는 “상품형태가 인간 자신의 노동의 사회적 성격을 노동생산물 자체의 물적 성격(물건들의 사회적인 자연적 속성)으로 보이게 하며, 따라서 총노동에 대한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를 그들의 외부에 존재하는 관계(즉, 물건들의 사회적 관계)로 보이게”21) 만들어야 한다. A라는 상품이 B라는 상품에 비해 더 비싼 이유는 그것을 생산하는 데 투여되었던 노동의 양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형태의 노동가치설은 후대의 경제학 이론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오늘날의 주류 경제학에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글의 관심사는 마르크스의 가치 이론의 타당성을 논하는 데 있지 않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정립한 가치 측정 모델에서 전개되는 분석적 관점은 문학의 경제학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비교항이 될 수 있다. 마르크스 경제학은 상품의 가치를 구성하고 측정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실체적 단위가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상품들 간 가치의 우열을 판단할 수 있다는 본질주의적 환원론을 대변한다. 이 글에서는 이를 잠정적으로 가치의 객관주의objectivism적 패러다임이라고 부르자.
한편 오늘날의 주류 경제학에서는 재화22)의 가치에 접근하는 시각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를테면, 앨프리드 마셜에 의해 정초된 가격 이론은 마르크스가 제안한 노동가치설의 객관주의적 패러다임을 전면으로 부정하고, 전혀 다른 방법론 속에서 재화의 가치가 결정되는 메커니즘을 조명한다. “어떤 물건의 가격은 일반적인 물건에 대한 상대적인 교환가치, 즉 일반적인 구매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된다.”23)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주류 관점에서 재화의 교환가치(가격)를 결정하는 것은 상품의 사용가치도 혹은 그것을 생산하는 데 투여되었던 노동력도 아닌, ‘구매력’이다. 요컨대 재화의 가치는 그것을 수요자가 얼마나 원하는지, 해당 재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만족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만족을 얻기 위해서는 얼마까지 지불할 용의가 있는지에 달려 있다. 특정 재화의 본질적인 유용성(사용가치)을 해명하는 것, 나아가 그것을 산출하는 데 동원되었던 인간의 노동을 분석하는 작업은 수요자의 주관적인 만족도를 가늠하는 문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처럼 수요의 측면에서 관측(혹은 전제)될 수 있는 만족도를 지시하는 경제학적 개념이 ‘효용utility’이다.24)
마르크스 경제학이 주장하고 있는 객관주의적 패러다임과 신고전학파 경제의 결정적인 차이는 가치의 실질적 본질에 대한 철저한 이론적 무관심성에 있다. 재화의 가치를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가 없으며, 가격은 단지 시장에 참여하는 수요자들의 주관적 효용을 반영할 뿐이다. 어째서 소비자는 특정 재화에 더 비싼 값을 지불하면서까지 그것을 얻고자 원하는가? 실제 원인을 파악할 수 없으므로, 단지 그로부터 그만큼의 효용을 느낀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다. A라는 재화가 B라는 재화에 비해 비싼 이유는, 그것에 그만큼의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만족을 느끼는 소비자들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종의 동어반복이 아닐까? 분명 그런 측면이 있다. 그러나 주류 경제학이 지닌 이론적 설득력은 재화의 가치를 규정하는 실질적인 법칙은 없지만, 소비자의 효용을 설명하는 일정한 법칙(한계효용의 법칙)은 존재하고, 이를 바탕으로 총수요 곡선을 도출할 수 있다는 데에서 마련된다. 이른바 시장에서 형성되는 재화의 가격은, 시장에 참여하는 두 주체(수요자와 공급자) 사이의 합리적 선택에 따라 결정되는 균형점equilibrium을 가리킨다. 따라서 경제학의 학문적 목표는 다양한 상황과 조건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할 수 있는 이 균형의 역동성을 분석하는 일이다. 이처럼 대상의 본질적 가치보다는 교환에 참여하는 주체들의 효용과 이득에 집중하는 관점을, 이 글에서는 잠정적으로 가치의 주관주의subjectivism적 패러다임이라고 부를 것이다.
마르크스 경제학과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각각 대표하는 가치의 두 패러다임은 문학의 경제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 유용한 참조항이다. 이들과의 비교를 통해 문학의 경제에서 가치가 산출되는 특수한 양상을 조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가 최소한으로 얻을 수 있는 첫번째 결론은, 가치에 대한 두 패러다임 모두 문학의 가치를 측정하는 데에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객관주의적 패러다임에 따르면 다양한 상품들의 가치를 비교할 수 있게 하는 실체적 요소가 있어야 하지만, 문학의 경제에서는 작품의 가치를 지표화할 수 있는 유일한 요소(가령 노동시간 같은)를 지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물론 과거의 러시아형식주의처럼 그에 대응되는 이론적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잘 알려진 것처럼 문학 이론의 역사는 그러한 실증적 환원이 불가능함을 입증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왔다. 마르크스가 전제하고 있는 단일한 사회적 관계(생산관계)를 전제할수 없기에, 문학의 경제에서는 작품의 생산 층위에서 ‘동등성의 원리’를 도출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그렇다면 주관주의적 패러다임은 어떨까? 대상의 실체적 가치보다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개인의 만족도에 초점을 둔다는 점에서, 주관주의적 패러다임은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는 대안처럼 보일 수 있다. 실제로 문학 이론의 역사 역시 저자의 의도나 작품에 내재된 가치보다, 독자의 해석과 수용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왔다. 그러나 주관주의적 패러다임을 적용할 때 나타날 수 있는 한계는, 수용자의 주관적 만족을 ‘표현’할 수 있는 공통의 척도가 부재한다는 점에 있다. 요컨대 문학의 경제에서는 수요와 공급의 균형점으로서의 역동적 ‘가격’이라고 하는 재현의 기호가 존재하지 않는다. 유명하고 인기 있는 작가의 작품이라고 해도, 최소한 그것이 동일한 장르에 속한다고 여겨질 경우(유적 동일성이 가정되는 경우), 신인 작가의 작품과 동일한 가격이 부여되는 것이 현실이다. 문학–책은 그것의 질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가격이 거의 무차별하다.25) 문학–책의 가격적 무차별성은 평소 인지하지 못할 만큼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사실이지만, 의외로 이것은 문학의 가치와 관련된 특수성을 밝히는 일과 관련하여 유용한 시작점이 될 수 있다.
먼저 그것은 시장에서 형성된 가격과 문학적 가치 사이의 임의성, 마르크스라면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사이의 무관계성이라고 파악했을 특수한 관계를 보여준다. 엄연히 존재하는 작품들 사이의 질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동일한 가격의 규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시장의 가격이 문학의 가치를 대변하는 ‘표현 양식form of appearance’으로 전혀 유용하지 않다는 뜻을 내포한다. 문학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계측, 측정, 지표화할 수 있는 단일한 화폐 같은 것이 현실의 층위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반론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가격은 무차별하지만 그것에 대한 수요량에 있어서는, 즉 판매량과 관련해서는 차이가 있지 않은가. 실제로 출판 시장에서 어떤 문학작품은 많이 팔리고, 또 어떤 문학작품은 거의 팔리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즉각적인 반론, 경험에 기초한 반론은 판매량이 문학의 가치를 직접적으로 반영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말은 다소 엘리트적인 뉘앙스를 내포할 수 있다. 그러나 소수적인 문학의 특권과 우위를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적게 팔린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문학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 역도 참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할 뿐이다.
문학의 경제에서 나타나는 가격의 고정성과 무차별성은 여타 예술 장르와의 비교를 통해 좀더 흥미롭게 조명될 수 있는 특징이다. 왜냐하면 다른 예술 장르에서는 실제로 가격의 변동성과 차별성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독려하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미술 시장에서는 특정 작가의 작품은 더 비싸게 팔리고, 심지어 경매 제도를 통해 가격의 변동성을 극대화함에 따라 해당 작품에 대해 최대의 효용을 느끼는 수요자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변동성으로 인해 미술 작품은 경제적 투자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음악은 어떨까? 유명 가수나 오케스트라의 콘서트 티켓 가격은 그렇지 않은 예술가들의 것보다 훨씬 비싸게 거래된다. 영화 티켓의 가격은 상대적으로 동일하지 않은가? 그러나 영화가 상업 예술을 대표하는 장르로 여겨질 수 있는 이유는, 손익분기점이라는 경제적 기준점이 존재한다는 데 있다. 영화는 그 생산의 특수한 메커니즘으로 인해 작품을 만들어내는 데 소요되는 생산 비용을 구체적으로 계산할 수 있고, 그 비용이 영화의 상업적 성공과 실패를 판정하는 기준으로 적용될 수 있다.26)
이러한 사실은 문학이라는 장르가 특별히 반상업주의를 표방하거나 자본주의에 반대한다는 뜻을 함축하지 않는다. 나아가 문학이 상품이 아니라는 비상식적인 주장을 제기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문학–책이 지닌 특별한 매체적 성격으로 인한 어떤 결핍, 가령 ‘원본성, 일회성, 소유 가능성’의 부재로 인해 발생하는 고유한 경제적 현상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상품과 재화의 가치를 측정하는 경제학적 교환의 원리가 문학의 가치를 온전하게 대변할 수 없는 이유의 근간을 구성한다. 주류 경제학이든 마르크스 경제학이든 가치에 접근하는 패러다임은 다르지만, 그것을 측정 가능한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짧게나마 이러한 이론적 모델과의 비교 속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문학의 가치를 측정하는 데 객관주의적 패러다임이나 주관주의적 패러다임 모두 불충분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문학의 경제의 불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시장가격이 말하는 재현 논리에 의해 표상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에 대한 교환·거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어김없이 ‘문학의 가치’가 있다는 믿음, 신뢰, 욕망, 환상, 그리고 그것에 기초한 협약이 작동해야 한다. 관련하여 롤랑 바르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서사의 기원은 욕망이다. 그러나 서사를 생산하기 위해 그 욕망은 다양하게 변주되어야 하고, 등가와 환유의 체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또는 서사가 생산되기 위해서는 ‘교환’의 가능성을 스스로에게 부여해야 하며, 경제적 체계를 따라야 한다.”27) 관건은 문학의 가치를 규정하고, 측정하고, 그것을 유통시키는 경제적 체계, 문학의 경제가 무엇인지를 따져 묻는 것이고, 그것을 시장경제와의 비교 속에서 해명하는 일이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가설은 문학적 가치가 상품의 가치와는 전혀 다른 형성 원리를 통해 규명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때 앞서 강조한 문학적 가치의 계측 불가능성, 환산 불가능성은 이를 탐색하기 위한 이론적 전제이자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제부터 우리는 ‘교환’이라는 개념을 마르크스나 주류 경제학에서 사용하는 ‘교환’이라는 단어와 조금 다른 맥락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상품(또는 재화)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시장에서의 교환은 대상에 이미 실재하거나(객관주의적 패러다임) 주관에 의해 미리 기대되는(주관주의적 패러다임) 가치가 표현되는 과정, 즉 대상의 객관성/주관성을 현실로 외화Aeusserung시키는 매개적 단계로 파악된다. 어떤 경우든 생산과 소비는 분리되어 있고, 교환은 양자의 만남을 중개하는 일시적 과정을 묘사하는 말에 불과하다. 상품에 대한 구매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순간 교환이라는 관계는 사실상 끝나버린다.
반면 문학의 경제에서 교환은 매개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다. 문학에서 이루어지는 교환은 책을 구매한다고 해서 종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작품의 물리적인 습득 이후 그것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고, 향유하는 읽기라는 단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의 교환은 저자–텍스트–독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 독특한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을 지시하는 이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의 경제학이 추구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관계주의relationism적 패러다임이다. 문학적 가치는 단지 작품이라는 개체에 귀속되는 것도, 독자의 주관적 만족으로 한정되는 것도 아닌, 양자 사이의 동시적 참여 속에서 발생하는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문학의 경제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 독특한 교환 관계의 상호 텍스트성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문학적 가치의 생산과 소비가 자주 중첩되며, 심지어는 구분이 불가능해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비식별의 시공간에서 문학적 가치는 시장에서의 교환가치와 상관성이 대단히 낮고, 오히려 자율적인 어떤 것을 가리키며, 재현될 수 없는 특이한 가치를 지칭하게 될 것이다. 문학의 경제는 근본적으로 표상 불가능하고, 환원 불가능한 독특한 가치를 생산·소비·측정·유통하려는 문화적 관계를, 시장경제와 구분되는 특수한 커뮤니케이션을 가리킨다. 문학에의 입문은 그런 의미에서 이와 같은 고유한 언어 게임에 대한 참가를, 자율적 경제 공동체로의 참여를 나타낼 것이다.
4. 문학적 교환의 특수성
문학적 가치의 계측/재현 불가능성은 문학적 교환에 내포된 독특한 성격과도 연동되어 있다. 문학의 경제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환의 양상과 관련된 특수성은, 그것이 시간을 비용으로 치르는 거래라는 점에서 발생한다. 여기서 우리는 상이한 두 층위의 경제적 교환이 문학의 경제에 중첩되어 나타난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시장에 던져진 상품으로서 문학–책은 일정한(그러나 대단히 비탄력적이면서, 무차별적인) 가격을 매개로 교환된다. 그러나 돈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교환 관계가 문학적 경제의 본질을 장악하지는 않는다. 다행스럽게도 인류가 도서관이라는 훌륭한 문화적 제도를 구축했기에, 원칙적으로 우리는 돈 없이도 문학의 경제에 참여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다면, 문학의 경제에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특별한 이론적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경험적 상식에 해당한다. 문학–책을 구입하고 소유하는 행위와 문학을 소비하는 행위는 전혀 다른 층위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문학작품을 구체적으로 향유하기 위해서는 독서라고 불리는 시간적 비용 투자가 요구된다. 때문에, 문학의 경제에서 어떤 작품의 실패를 표현하는 결정적인 선언은 ‘돈이 아깝다’가 아니라 ‘시간이 아깝다’이다.
시간이라는 요소는 (그것이 적든 많든) 문학의 경제와 상품의 경제를 구분시켜주는 핵심적인 차이로 고려될 수 있다. ‘시간에의 요구’는 교환의 성질을 근본적으로 결정짓는 요인으로도 작용하기 때문이다. 가령, 마르셀 모스의 ‘선물의 경제’는 좋은 참고 사례이다. 잘 알려져 있듯 모스의 『증여론』은 ‘호혜성’에 기반을 둔 선물의 주고받음을 사회를 구성하는 기초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원리로 분석한 중요한 인류학적 연구 사례이다. 여기서 증여와 교환의 근본적인 차이는 시간에 의해서도 가시화될 수 있다. 상품의 교환은 시간이 단축된 증여, 가속화된 증여 속에서 나타나는 시간의 삭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28)
마찬가지로 ‘시간에의 요구’는 상품을 소비하는 것과 문학을 소비하는 것의 결정적인 차이를 부각하는 데에도 유용해 보인다. 상품의 소비자로서 우리는 일정한 돈을 지불하고, 그 상품의 사용가치를 즉각적으로 인식하고, 활성화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것을 사용할 때 내가 느낀 주관적인 만족감(효용)이 즉시 확인되고, 그 효용이 내가 지불한 돈에 비해 높다고 생각할 때 그 교환은 성공적이었다고 판단될 것이다. 이 과정이 길어질수록, 시간이 많이 지체될수록 상품의 가치는 하락할 수밖에 없다. 시장경제에서 시간은 상품의 현재적 가치와 관련하여 대체로 이율배반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문학의 경우는 다르다. 문학의 가치가 확인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개인 독자의 시간이 요청된다. 이때 독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한정된 자원으로서의 시간을 다른 어떤 행동 대신 독서라는 행위에 배분하기로 선택한 주체로 그려질 수 있다. 교환 즉시 그 자신의 현실적 가치(사용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상품의 처지와 달리, 작품의 가치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소요된 시간에 따라, 독자에 의해 경험적으로 판명된다.29) 이러한 시간에의 요구는 상품의 교환과 문학의 교환을 근본적으로 구분시켜주는 결정적인 지점이다. 내가 들인 비용만큼 보상을 받을 수 있을지, 즉 작품의 사용가치의 실제를 확인하기 위해서도 역시 일정 기간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독서라는 교환 행위는 모스가 말한 ‘선물의 경제’에 좀더 가까워진다.
흥미로운 것은 시간이 상품과 제로섬 관계를 맺는 것과 달리 작품의 가치는 오히려 긍정적인 관계를 맺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우리는 매혹적인 작품을 읽을 때, 그것이 빨리 끝나지 않기를 바라며, 그에 대해 더 자주 오래 생각하는 데 시간을 쓰고, 심지어는 그것의 가치를 해명하는 행위(비평)에 다시 자신의 시간을 재투자한다. 문학의 경제에서 의미 있는 교환 행위는 시간을 많이 요구하고, 급기야 교환의 완수를 끊임없이 지연시키는 또 다른 시간을 창출해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과 가장 극단적인 대립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거래 품목은 주식 등의 금융 상품일 것이다. 사용가치가 없고 오직 교환가치밖에 없는 주식에 시간은 자신의 가치를 절하시키는 최후의 적이다. 반면 문학은 교환가치로 표현될 수 없는 작품의 사용가치를 활성하기 위해 소요되는 시간의 투자, 시간의 극단적 사용을 통해 그 가치가 사후적으로 증언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문학의 경제에서 거래되는 비용으로 시간을 지목했을 때 얻을 수 있는 몇 가지 기대 효과가 있다. 첫번째는 그것이 문학 생산의 측면에도 일관되게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시간은 작품이 생산되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비용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종의 공급 비용이기도 하다. 문학적 생산의 시간은 작품을 쓰는 데 소요되는 물리적인 시간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특정 작품이 배태되는 데 저자에게 작용했던 의미 있는 과거의 기억, 어떤 결정적이고도 강렬한 감각적 체험, 그리고 무엇보다 독서를 통해 구축되었던 시간적 경험 전체를 포괄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작품 생산의 시간은 마르크스가 파악한 것처럼 추상화된 양으로 환원될 수도 없고, 또 투여된 시간의 양이 작품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질적인 시간에 가깝다. 이것은 문학 생산의 노동과 관련하여 유의미한 통찰을 제공해준다. 피에르 마슈레는 이렇게 주장한 바 있다. “이제 예술은 인간의 창조물이 아니라, 그것의 생산물이다(여기서 생산자는 창조의 중심을 차지하는 주체가 아니다. 생산자는 상황이나 시스템의 요소를 이룬다). 생산의 관점에서 예술은 종교와 다르다. 종교는 자발성에 대한 자발적 환영들 가운데에서 그 자신의 거주지를 찾는데, 그것이 창조의 의미를 구성한다. 인간은 예술을 생산해야 한다. 마법이 아니라, 생산의 노동으로 말이다.”30)
동의할 수 있는 지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보충해야 할 것은 예술의 생산, 특히 그중에서도 문학의 생산에 있어 투여되는 노동의 대단히 특수한 성질이다. 문학은 추상화된 양적 개념으로 환원되지 않는, 독특한 질적 노동을 통해 산출된다. 분업화/공장화될 수 없고, 규모의 경제economies of scale를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학의 생산양식은 근본적으로 가내수공업에 가깝다.
문학적 시간 개념의 두번째 기대 효과는 문학의 경제에서 이루어지는 생산과 소비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작품 쓰기가 시간으로 표상될 수밖에 없는 어떤 자원을 투여한 생산 행위인 것과 마찬가지로, 작품에 대한 독서는 시간을 비용으로 지불하는 소비 행위이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두 행위를 매개하는 것은 책의 가격이 아니라 시간이다. 시간은 문학의 경제에서 일종의 금본위제이다. 문학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시간의 교환 행위는 교환가치(가격)로 계측될 수 없는 작품의 독특한 사용가치를 증언하는 수행적 활동이다. 여기서 우리가 고려해볼 수 있는 것은 문학의 소비에 함축된 ‘노동’으로서의 성격이다. 작품을 읽는 행위도 노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은 이상한 비유처럼 들린다. 문학을 열심히 읽는다고 해서 임금이 제공되는 경우를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작품을 읽는 행위가 작품의 물리적 생산에 기여한다고 억지를 부릴 수도 없다. 그러나 작품의 가치 층위에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교환가치로는 지시될 수 없는, 작품의 유일한 근거라고 할 수 있는 문학의 사용가치는 시간이 소요되는 독자의 실제 사용을 통해서만 증명되고, 산출되고, 활성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의 경제에서 발생하는 교환이 서로 상이한 두 노동 시간 사이의 교환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유도 그와 같다.
현대의 수많은 독자 중심 이론이 강조하고 있는 것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독자반응비평이라고도 불리는 다양한 분파들은 작품의 의미가 고정되지 않음을 입증하고, 수용자가 창조적으로 그 의미를 재구성할 수 있다고 독려했던 이론적 노력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흐름은 의도치 않게 ‘작품의 가치를 결정할 수 있는 진정한 주권자는 누구인가’라는 잘못된 질문을 낳기도 했고, 저자와 독자의 관계를 특정 영토를 두고 권력투쟁을 벌이는 사이로 오해하게 만든 측면이 있다.
문학의 경제학에서는 문학적 가치의 생산 층위에서 저자와 독자를 사실상 동업자로 바라본다. 문학의 가치를 단순히 물리적 작품의 생산(저자)이나 소비(독자)에 일임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문학의 경제가 가시화하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생산과 소비라는 이분화된 틀로 식별될 수 없는 어떤 공통의 토대이다. 저자의 노동과 독자의 노동은 작품의 가치, 문학의 가치를 산출하는 생산의 두 핵심 축이다. 반대로도 말할 수 있다. 저자의 소비와 독자의 소비는 작품의 사용가치, 문학의 사용가치를 향유하는 소비의 두 핵심 축이다. 문학의 가치를 생산하는 데 있어, 저자와 독자의 정체성은 서로 중첩되어 있다.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생산과 소비가 엄격히 구분된다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것은 분명 문학의 경제에서 벌어지는 고유의 현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문학의 가치가, 결국 그것의 독특한 사용가치의 특수한 사용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서 기인하는 현상이기도 하다. 벤야민이 보들레르의 위대함에 대해 설명하며 강조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위대한 시인은 자기 작품에 대해 결코 단순히 생산자 〈의〉 관계에 있지 않다. 그는 동시에 소비자 〈이기〉도 하다. 물론 그는 대중과 반대로 그것을 자극이 아니라 도구로 소비한다. 이러한 도구적 성격은 교환가치에는 좀처럼 포함되지 않는 사용가치를 대변한다.31)
“교환가치에는 좀처럼 종속되지 않는 사용가치.” 이것을 가시화할 때 우리는 ‘문학의 가치’가 지닌 특별한 성질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다. ‘배움’이라는 키워드는 벤야민이 발견한 사용가치, 교환가치로 환원될 수 없는 독특한 문학의 가치를 조명하는 데 일정 부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이 글은 문학의 효용 가치가 특수한 배움의 시간에 결부되어 있다고, 앎에 대한 특별한 사용으로부터 확인될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될 것이다.
5. 배움의 경제: 지식과 쾌락의 경제 너머
최근 평론가 이희우는 동시대 예술과 비평 담론이 봉착한 교착 상태를 분석하는 글에서 그 유력한 원인의 하나로 ‘비판’을 지목한 바 있다. 제도권 내 비평장을 포함하여, 우리의 일상과 SNS 전반에 확산되어 있는 ‘비판적 분위기’가 담론의 내전 상태를 초래하고 있으며, 이것이 산출하고 있는 죄책감과 원한 감정이 결과적으로 문학과 예술에 대한 풍부한 경험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다소 단순하게 요약한 감이 있지만) 이러한 이희우의 논쟁적인 분석은 적지 않은 반론과 비판에 직면한 것처럼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나 역시 ‘동시대의 비판’에 대한 그의 분석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전략적으로 의도된 ‘비판’의 이분법적 형상화가 유효했는지 관해 의문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글에서 주목될 수 있는 것은, 비판 이론의 과잉된 실정화 현상을 타개하고 예술적 경험의 가능성을 재조명하기 위한 이론적 대안으로 ‘배움’이 제시된다는 점이다. “나는 비평의 축을 ‘비판’도 ‘무비판적 위로’도 아닌 ‘배움’ 쪽으로 이동시켜보자고 제안한다.”32) 이희우의 ‘비판에 대한 비판’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있었지만, 정작 그의 글에서 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배움’이라는 야심 찬 문제 제기에 관해서는 충분히 논의되지 못한 인상이다. 나는 배움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말하면 배움의 경제가 이 글의 주제인 문학의 경제를 작동시키고, 문학의 가치(문학성)가 어떻게 생산·소비될 수 있는지를 해명해줄 수 있는 이론적 방법론으로도 유효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희우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문학을 통한 배움이 교육, 훈육, 훈련 등으로 묘사될 수 있을 여타의 배움과 차별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33)
돌이켜보면 배움이 문학의 가치를 해명하는 문제와 함께 거론되는 것은 대단히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문학의 가치를 옹호하는 최초의 본격적 문학 이론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도, ‘배움’은 시의 가치를 논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중요한 전제를 구성한다.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모방된 것에 대하여 쾌감을 느낀다. 이러한 사실은 경험이 증명하고 있다. 아주 보기 흉한 동물이나 시신의 모습처럼 실물을 볼 때면 불쾌감만 주는 대상이라도 매우 정확하게 그려놓았을 때에는 우리는 그것을 보고 쾌감을 느낀다.
그럴 것이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비단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그 밖에 다른 사람들에게도—비록 그들의 배움의 능력이 적다고 하더라도—최상의 즐거움이기 때문이다.34)
인간은 모방 행위에서 확인되는 대상과 재현 사이의 유사성을 확인할 때 “쾌감을 느낀다”. 이때의 쾌감은 배움의 즐거움과 관련이 있고,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에 해당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때 발생하는 배움의 사건이 대상에 귀속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주 보기 흉한 동물이나 시신의 모습”으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배움의 즐거움은 배움의 대상 그 자체가 아닌, 인간의 탁월한 본성 가운데 하나인 ‘배움의 능력’과 연동되어 있다고 말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하다”35)라는 급진적인 주장을 내세울 수 있었던 근거도 거기에 있다. 『시학』의 진정한 핵심은 ‘참/거짓’이라는 인식론적 기준이나, ‘선/악’이라는 도덕적 판단 기제로 식별되지 않는 ‘허구fiction’의 가치, 탁월한 허구가 유발하는 독특한 배움의 경제를 통해 새롭게 조명될 수 있다.
문학과 배움을 연결할 때 제기될 수 있는 화두는 ‘문학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다양한 문학 이론이 수행해온 자기 정당화 작업은 ‘문학을 통한 배움’의 가능성과 그 가치를 해명하는 일에 집중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문학의 경제학에서도 배움은 작품과 독자 사이의 교환 행위 위에서 창출되는 사용가치, 그 안에서 순환되는 욕망과 즐거움의 가치를 분석하는 방법을 이룰 것이다. 독자가 굳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할애하면서까지 작품을 읽는다면 그로부터 독특한 형태의 경험, 즉 ‘문학적 경험’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남다른 배움의 경제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문학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제부터는 이와 관련된 몇 가지 유력한 가설을 제기하고, 이를 조금씩 반박·조정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보겠다.
첫째로 생각해볼 수 있는 가설은 문학이 ‘앎’을 제공한다는 주장이다. ‘앎’에 집중하는 입장은 문학과 배움을 연결하려는 시도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에 속한다.36) 문학은 인간, 현실, 세계에 대한 앎의 영역을 확장하고, 심지어는 새로운 앎의 영역을 발견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그런데 이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가 추가되어야 한다. 우리가 새삼 강조할 수 있는 단순한 사실은 문학을 통한 배움이 다른 지식 담론을 매개로 얻을 수 있는 배움과 미묘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이다. 문학이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지 않는 담론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전제를 떠올려보자. 이 말이 문학이 정보를 전달하거나 지식을 확산하는 일과 무관하다는 뜻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모든 텍스트에는 분명 지식이 담겨있고, 특히 역사적 사실이나 현재적 진실에 관한 텍스트의 앎을 수반하고 있다. 정보이론을 토대로 한 기호학 이론이 주장하고 있듯, 문학작품 자체도 하나의 메타적인 차원의 정보값으로 환원될 수 있다. 우리는 문학작품을 통해 과거를 이해할 수 있으며, 현실의 문제에 대해 좀더 날카로운 인식을 얻을 수 있다. 심지어 ‘지식’과 ‘정보’는 특정한 문학 텍스트를 더욱 매력적으로 돋보이게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따라서 특정한 역사적 상황과 조건 위에서는 문학이 모종의 지식을 확산시키는 정치적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고, 심지어는 그 확산의 최전선에 설 수도 있다. 근대문학이 형성되는 시기에 일었던 계몽주의적 경향은 바로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지식과 앎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그것이 특수한 방식으로 배치·조직·서사화되는 양상에 대한 관심이 다르다는 것이다. 문학적 가치와 문학에 담겨 있는 지식의 가치는 반드시 정비례 관계에 있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반비례 관계에 놓여 있을 수도 있다.
이것은 문학적 배움이 여타의 지식 담론에서 이루어지는 배움의 양상과 근본적으로 다른 성질의 것임을 알려준다. 아인슈타인의 양자역학 이론을 다룬 물리학 교과서와 아인슈타인의 삶을 다룬 문학 텍스트를 평가하는 기준과 척도가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전자의 경우 관건은 해당 분야의 전문 지식을 정확하게, 효과적으로 잘 전달하는가이다. 지식 담론에서 작동되는 배움의 경제에서는, 정확성과 효율성이 담론의 가치를 측정하는 바로미터이다. 전문적인 담론서를 읽는 데 투여된 시간의 가치는 그것이 전달해주는 지식의 양과 질에 따라 그 효용을 입증할 수 있다. 일반적인 지식 담론의 경제에서 교환되는 앎은 확인되고, 축적되고, 활용될 수 있으며,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기 위한 자원으로 재투자될 수 있다. 그리하여 지식 담론의 교환경제에서 앎의 가치는 이러한 축적, 활용, 재투자 가능성, 즉 앎의 대상에 따라 결정된다. 결국 지식의 배움의 경제에서 유통되는 가치는 지식의 쓸모, 즉 사용가치에 결부된다. 상품경제에서 이루어지는 교환 양상과 아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이다.
문학적 배움의 경제에서는 배움의 사건이 지식의 쓸모(사용가치), 그리고 그것을 교환하는 데 지불해야 하는 시간의 양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문학의 경제에서 정확성과 효율성의 기준은 잘 적용되지 않는데, 대상으로서의 앎이 문학적 경험 전체를 대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그것이 문학의 태생적 본질이라기보다, 글쓰기의 역사에서 일어난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전환으로 파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르주아적 글쓰기의 승리를 구가했던 전체적인 시기가 있었다. 그 시기에는 형식은 사유와 동일한 가격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사람들은 형식의 간명함과 질서 잡힘, 그리고 표현의 우아함에 주목했다. 그러나 형식의 가격은 대단히 낮았다. 왜냐하면 당시의 작가들에게 형식은 새로움에 대한 강박도 없이 그저 변하지 않은 채 전수되는 것, 이미 존재하는 도구였기 때문이었다. 형식은 소유물로 여겨지지 않았다. 고전적인 언어의 보편성은 언어가 공유 자산이라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사유만이 다른 것이라고 여겨졌다. 우리는 이 시기 동안 형식에 사용가치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1850년경에 이르러, 문학이 자기 정당화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관찰할 수 있다. 이제 문학은 자기 자신의 존재근거에 대한 알리바이를 추구해야 했다. 그리고 정확히, 문학의 사용 가능성에 대한 의심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면서, 자신들의 전통에 어떤 책임감을 부여하려 했던 일련의 작가들은 글쓰기의 사용-가치를 노동-가치로 대체하려고 애썼다. 이때를 기점으로 글쓰기는 그것이 존재하는 목적의 가치가 아니라, 그것이 지불한 비용(노동)에 의해 구제받기에 이르렀다.37)
바르트는 문학이 담지하고 있는 가치의 역사적 층위 이동 속에서 근대문학의 출현을 설명한다. 문학의 형식이 명확히 쓸모(사용가치)를 지니고 있었던 시기, “부르주아적 글쓰기의 승리를 구가했던” 시기에 작품의 가치를 차등화하는 요소는 다름 아닌 ‘사유’, 즉 문학이 담고 있는 내용적 지식과 주장이었다. 문학의 도구적 성격이 부각될 수 있었던 시기는 문학 담론이 그러한 첨단의 지식과 주장을 전달하는 교환의 매개로 받아들여졌던 시기와 중첩된다. 문제는 “문학의 사용 가능성에 대한 의심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던 역사적 시기에 직면하면서 발생한다. (비록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있지만) 이러한 역사적 전환의 시기는 문학 담론이 전통적으로 담당했던 지식 전달의 역할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담론들이 출현하는 시기와 맞물린다. 문학이 해명해야 하는 “자기 정당화의 문제”는 지식의 경제에 있어서 교환적 기능의 상대적 하락 현상과 연동되어 있는데, 몇몇 위대한 작가(이를테면 고티에, 플로베르, 발레리 등)들은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글쓰기의 사용-가치를 노동-가치로 대체”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38)
여기서 주의할 것은, 바르트가 주목한 노동-가치가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가치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독창적 개념이라는 점이다. 작품의 노동-가치는 그것을 생산하기 위해 지불한 비용이면서, (앞에서 강조했듯) 그것을 향유하기 위해 투여되어야하는 독서라는 노동의 비용을 동시에 포괄한다. 문학의 가치가 교환되는 데 요구되는 두 층위의 노동가치라는 분석틀은, 문학의 사용가치가 지식이라는 담론의 사용가치와 구별되는, 자율적 가치일 수 있다는 이 글의 주장과 정확히 공명한다. 다만 바르트의 위 지적은 내용(사유)과 형식의 오래된 이분법적 갈등을 환기시키는 측면이 있고, 그것을 오직 미학적 형식에 대한 탐닉에 한정시키는 뉘앙스가 있다. 바르트가 말한 형식 개념을 좀더 넓게 확장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내용을 포괄하는 것으로서의 형식, 혹은 형식을 반영하는 것으로서의 내용으로 파악하는 캐롤라인 레빈의 관점을 참고할 수 있다.39) 두 개념의 구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둘을 엄격히 구분하려는 이론적 노력을 통해 얻게 되는 편익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다.
문학적 배움의 원천이 담론의 쓸모, 즉 지식의 사용가치에 토대를 두지 않는다면, 어디에 그 근원이 있는 것일까? 두번째로 제안해볼 수 있는 가설은 배움에서 동반되는 즐거움, 즉 쾌락이다. 문학적 배움의 근원에 지식의 사용가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으로부터 얻는 주관적 만족, 즉 쾌락이 설명되지 않고는 문학의 매혹,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응답이 해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문학을 향유하는 경험은 분명 즐거워야 하며, 남다른 재미를 선사해야 한다. 쾌락이라는 대안은 상당히 매력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모종의 대리 보충이 필요해 보인다. 문학을 통해 얻는 쾌락은 정신분석학에서 흔히 언급되는 ‘쾌락의 경제’를 따르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쾌락의 경제란 무엇인가? 잘 알려진 것처럼, 프로이트는 인간의 욕망과 정신 구조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경제적 관점’을 도입한 선구자 중 하나이다.40) 욕망의 경제학적 제1원리에 해당하는 쾌락 원칙에 따르면, 인간은 불편한 긴장의 완화 상태를 추구하고, 자신을 괴롭게 하는 흥분의 양을 낮추기를 추구하는 ‘항상성의 원칙Konstanzprinzip’에 지배받는다. 문명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쾌락의 경제와 대립되는 ‘현실 원칙Realitätsprinzip’ 속에서 마련된 중재와 타협의 산물이다. 문제는 이러한 쾌락의 경제를 거스르는 인간의 욕망이 빈번하게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프로이트가 각별히 해결하고 싶었던 문제도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본능적 삶에서 마조히즘적 경향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경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당연히 신비스러운 것으로 기술될 수 있을 것이다. [……] 만약 고통과 불쾌가 단순히 경고가 아니라 실제로 목표가 된다면, 쾌락 원칙은 마비되고 말 것이다.”41)
굳이 이론적인 설명을 보태지 않더라도, 우리는 문학을 체험하는 시간이 프로이트가 말한 쾌락의 경제와 배치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문학은 우리 자신에게 어떤 부정적인 감정, 불쾌에 가까운 시간을 선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때로 문학은 우리에게 즐거움·쾌락의 증진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슬픔·자책·죄의식·수치 그리고 이해 불가능성을 가중시키기 위한 마조히즘적 도구처럼 여겨지기도 한다.42)
그렇다면 우리가 문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특별한 만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지식과 쾌락의 경제로 환원되지 않는 효용이 있다면, 문학적 배움이라는 교환 속에서 이루어지는 특별한 사건은 과연 무엇일까? 정신분석학적인 용어를 변주하며 바르트는 쾌락 원칙 너머의 다른 만족, 즉 문학의 주이상스에 접근한다.
쾌락과 주이상스의 차이는 분명 실재적입니다. 저 혼자만이 그걸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쾌락은 자아와 주체의 일관성과 관련되며, 그것은 안락함, 완화, 편안함의 가치 속에서 추구될 수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 고전 작품을 읽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이 그에 해당합니다. 반면, 주이상스는 일종의 독서 및 발화의 체계로서, 자아를 정립하는 대신 주체를 잃어버리게 하는 것, 그 자체가 주이상스라고 부를 수 있는 소모의 경험을 말합니다. [……] 텍스트의 주이상스는 당신을 기분 나쁘게 하고, 모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섬광 같은 순간, 일시적으로나마 당신을 변화시키고 변형시키며, 자아의 상실이라는 소비/지출/소모를 경험하도록 영향을 줍니다.43)
쾌락과 구별되는 의미에서 텍스트의 주이상스는 “안락함, 완화, 편안함” 등으로 인해 유지될 수 있는 주체의 일관성과 차별화된다. 텍스트의 쾌락이 어떤 지식, 통찰, 감정, 교훈을 통해 이루어지는 주체의 일관성을 지칭한다면, 텍스트의 주이상스는 고통, 모욕, 불편함, 이해 불가능성으로 인해 촉발되는 주체의 상실을 지시한다. 주이상스는 탈주체화라고도 부를 수 있는 모종의 파괴적 경험을 주체에게 강제하는데,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탈주체화의 시간이 고조되고 고양될 때 비로소 ‘변화와 변형’의 기회가, 즉 새로운 주체화의 계기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쾌락’의 관점에서 보자면 문학과 독자 사이의 교환 관계는 지극히 비경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주이상스의 층위에서 그것은 바타유가 말했던 일반경제l’économie générale의 원리에 좀더 근접해 있다.44)
바르트는 이러한 주이상스를 선사하는 텍스트가 극소수이며, 주로 그것을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적인 작품들에 한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그가 강조하는 자아의 상실, 고통, 파괴 그리고 그것이 추동하는 주체의 변화와 변형이라는 사건은 생각보다 다양한 국면과 층위에서, 빈번하게 발생할 수 있는 경험의 실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문학적 배움의 경제를 말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자기 변형의 계기를 좀더 넓은 부문으로 확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학적 배움은 문학이라는 이름의 기호와의 마주침 속에서 이루어지는 낯선 단어, 표현, 문장에 대한 놀라움, 자기 자신의 욕망에 대한 고통스러운 대면, 나아가 자신이 속한 세계에 대한 비판적 인식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일어날 수 있다. ‘자아의 상실’을 최종적인 목적으로 삼지 않고 새로운 주체화의 기제를 스스로에게 제공하는 일. 이러한 특별한 배움과 연동된 주이상스가 문학의 경제에서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다.
6. 문학적 경험: 변화로서의 주체성
우리는 단순한 회의주의가 아니라,
주이상스에 의해 고양된 의심을 가르쳐야 한다.
—롤랑 바르트45)
문학의 경제 안에서 배움(변화를 통한 새로운 주체화)이 지닌 결정적인 특징은 배움의 대상이 곧 배움의 주체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문학적 배움의 관계 안에서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문학을 배우는 사람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서 배움의 스승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문학을 가르쳐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지식으로서의 문학은 교육할 수 있지만, 경험으로서의 문학을 가르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는 문학에 대한 역사적 지식과 이론을 설명할 수 있고, 특정 작품이 씌어지게 된 문화사적 배경과 당대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앎을 전달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텍스트에 대한 나의 분석을 예시 답안으로 제공할 수도 있다. 학생들은 그 지식을 외우고, 이해하고, 축적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시험을 치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제도 안에서 실행되는 문학 교육을 지칭하는 것이지, 문학적 경험의 전달을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특정한 문학작품에 대한 경험과 관련하여 문학 선생은 그것을 위한 조건과 환경을 제공하는 것에 그칠 뿐, 결국 그 경험이 발생했는지의 여부, 의미 있었는지의 여부는 전적으로 배우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문학적 배움에 있어 선생은 언제나 배움의 타자이다. 문학적 경험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선택한 사람들에게서만 일어나는 주체적 사건이다. 그리고 그것은 문학의 가치가 산출되는 과정에서 생산과 소비가 구별되지 않는다는 앞서의 주장과도 공명한다.
이러한 사실은 문학적 배움이 결국 배움의 주체화를 요구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러나 배움의 주체화가 배움의 주권자와 같은 것은 아니다. 문학적 경험의 주이상스를 통해 발생하는 변화와 변형이라고 하는 탈/주체화의 계기는 단순히 어떤 지식과 정보의 ‘능동적’ 습득으로 규명되지 않는다. 그것을 위해서는 고도의 기술과 테크닉이 요구되며, 무엇보다도 매 순간 문학에 입문하려는 주체의 결단이 필요하다. 문학을 통한 변화와 변형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다. 주체가 배움을 의도하고 계획할 때, 배움의 방향과 목표를 미리 설정함으로써 변화라는 사건의 주권자로 나설 때, 배움의 탈주체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체의 탈주체화는 불가피하게 자기 자신에게 가해진 어떤 강제적인 힘, 때로는 폭력적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는 어떤 타자적인 힘을 수용하는 일이다. 이때 주체가 할 수 있는 일의 최대치는 배움을 통한 변화의 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환경과 조건을 자신에게 마련하는 일이다. 항간에 유행하는 ‘무해한 문학’이라는 말은 최소한 문학적 배움의 현장에서는 성립될 수 없는 표현이다.
문학적 배움이 오늘날의 시장경제와 불화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오늘날 대학에서 문학 관련 전공, 학과, 수업 들이 퇴출되는 현상이 가속화되는 것은 부당하지만(시장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합리적이다. 특별히 반자본주의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문학적 배움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교육 목표와 분명하게 대립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경제에서 교육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의 자원화, 인간이 지닌 역량의 최대치를 뽑아내는 일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배움의 과제는 휴먼 리소스로서 잠재성을 최대한으로 증명하는 것이고, 그것을 대변하는 상징적 재현 기호로서의 높은 몸값을 획득하는 것이다. 흔히 자기 계발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몰아세움(Ge-stell, 하이데거)의 배움은 끊임없이 우리를 어떤 주체로 거듭나도록 닦달한다. 하지만 반복되는 주체화가 도달하게 되는 사태는 주체적 역량의 고갈과 탈진, 즉 주체의 최종적 탈주체화일 수밖에 없다.
반면 문학의 경제에서 배움은 탈주체화를 위한 연습이자 자기에 대한 실험을 뜻한다. 시장의 배움과 문학의 배움은 주체화와 탈주체화 사이의 운동이라는 점에서 유사해 보이지만, 각각의 과정이 무엇을 향해 있는지에 따라 명확히 구별될 수 있다. 문학적 배움은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독특한 탈주체화의 역량을 사용하려는 것, 예속화에 대해 저항하면서 자신의 잠재성을 보존하려는 능력을 사용하려는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의 배움은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배움과의 전도적 관계 속에서 형상화될 수 있다. 탈주체화를 유발하는 주체화가 아니라, 새로운 주체성의 창조를 향한 탈주체화. 파울 첼란은 그 과정을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한다. “예술을 눈앞에 또 마음속에 두고 있는 사람은, [……] 그는 스스로를 잊어버립니다. 예술은 자아와의—거리를 만들어냅니다.”46) 그리고 예술이 만들어낸 “자아와의—거리”는 또 다른 나, 새로운 나와 연계되어 있다.
문학적 배움과 시장의 배움 사이의 차이는 서로의 영역에 속해 있는 각각의 배움들끼리 맺는 관계의 차이로도 설명될 수 있다. 시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지식의 배움은 기본적으로 축적될 수 있고, 우열이 존재하며, 새로운 배움으로의 투자로 연결된다. 시장의 배움은 가산(加算)의 논리를 따른다. 이때 새로운 지식의 추가는 과거의 지식을 낡은 것으로, 정확하지 않은 것으로, 잘못된 것으로,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면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다.
이와 달리 문학적 배움들이 맺는 관계는 가산적인 것도, 단계적인 것도 아니다. 물론 배움의 경험들 사이의 차이와 비교는 가능하며, 그 안에서 모종의 위계와 서열 관계가 형성될 수는 있다. 텍스트가 일으키는 배움의 강도와 지속성이 작품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움의 장에서 각각의 배움은 서로 다른 배움을 위한 자원이자 동기이자 터전이다. 문학적 배움 체계에서는 선수 과목이 있을 수 없으며, 새로운 배움이 과거의 배움을 온전하게 대체할 수 없다. 우리는 과거에 감동적으로 읽었던 작품이 지금 동일한 감동을 제공하지 않는 경우를 언제든지 경험할 수 있다. 때로는 그 작품에 대한 실망이, 과거에 감동을 느꼈던 한때의 나에 대한 부정과 실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현재의 경험이 과거의 배움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것은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배움을 위한 또 다른 배움의 경로를 열어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적 배움이 엄밀한 의미에서의 계몽과 분기되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인간과 세계를, 그리고 자기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인식의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계몽은 문학의 배움을 설명하는 유사 개념처럼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무지에서의 지로의 이동’으로 표현될 수 있는 계몽은 이 무지의 상태를 어둠, 꿈, 어린아이 등 이성의 부재 또는 미성숙으로 간주한다는 면에서 과거를 배척하는 뉘앙스가 있다. 계몽은 앎의 부재를 타개하고, 장악하고,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게 한다. 계몽의 현재적 주체에게 무지는 부정되어야 할 과거에 불과하다. 과거와 부정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계몽적 주체의 가장 극단화된 원리주의적 형상화는 정치적 전향이나 종교적 개종이라 할 수 있다.
문학적 배움은 계몽주의와는 반대의 경로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문학을 배우면서 우리가 희망하는 것은 전향이나 개종이 아니라, 변화이기 때문이다. 이 변화는 새로운 앎을 통해 추동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지식으로 충분히 타개·장악·정복될 수 없는 어떤 것, 무지의 형식으로 증언될 수밖에 없는 어떤 특별한 앎에 의해 추동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변화를 겪는 주체는 종결이 없고,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예측하지 못한다. 관련하여 롤랑 바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주체성은 부정되거나, 권리를 상실하거나, 억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체성은 유동적으로 여겨져야 합니다. ‘변덕스러운’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점들의 직조로, 그것들의 망으로 말입니다. 니체의 인용문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점(주체성)의 개념입니다. 하나의 강, 심지어 변화하는 강으로서의 주체성, 그러나 여러 장소들의 불연속적인(그리고 부딪치는) 변화로서의 주체성입니다.”47) 이 변화의 사태 속에서 현재의 주체는 과거의 주체를 무효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변화 속에서 과거의 주체와 현재의 주체가 서로 중첩된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푸코는 문학이 일으킬 수 있는 변화의 창조적 역량에 집중하면서, 계몽에 대한 새로운 정의에 접근한다.
보들레르에게서 동시대인은 자기 자신, 자신의 비밀, 자신의 숨겨진 진실 따위를 발견하려고 하는 사람은 아니다. 동시대인은 자기 자신을 창조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현대성은 ‘인간을 자기 자신의 존재로부터 해방시키지 않는다’. 현대성은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생산하라는 과업을 떠맡긴다.48)
따라서 문학적 배움을 통해 생산되는 진실은 숨겨진 비밀, 적나라한 사실, 또는 이념적 어젠다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주체성의 실험이자 생산으로서 표현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학적 진실은 현실에서 수행되는 언어, 시장의 경제로 포섭될 수 없는 어떤 잔여, 현실과 등치될 수 없고 그렇다고 거짓이라고 말할 수 없는 모종의 가상 세계, 현실태(energia, 아리스토텔레스)로 온전히 흡수될 수 없는 역량의 지대로서의 잠재성의 픽션, 그 불확실성과 불가능성에 대한 증언을 말하는 것이다. 데리다가 문학의 본질 같은 것이 없다고 단언하면서도, ‘아주 약간의 문학이 존재한다’고 말한 이유를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그 어떠한 내부적 평가기준도 이 필수적 텍스트의 “문학적인 것”을 보증할 수는 없습니다. 문학의 확실한 본질 또는 존재라는 것은 없으니까요. [……] 한 공동체 내에서 다양한 현상들의 문학적 지위를 결정하는 관습조차도 불확실하고 불안정하며 언제나 바뀔 여지가 있습니다. “아주 약간의 문학만 있을 뿐”이란 말은 이런 관습을 겨냥한 것이었고, 아주 작은 이상적 서재를 지칭한다기보다는 텍스트 안에서 찾을 수 없는 허구라는 주제의 허구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거의 모든 것은 아니라고 해도 아무것도 아닌 것은 절대 아닙니다. 이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중요한 아무것도 아닌 것, 상당히 중요한 그런 것이겠죠.49)
문학의 경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상당히 중요한 그런 것’의 가치에 매혹당한 사람들, 그것의 가치를 증명하고자 자신의 삶을 증언의 재료로 삼는 사람들, 그것에 기꺼이 동참하기로 결단함으로써 변화를 체험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작동하는 시스템이다. 문학의 본질, 혹은 문학성이라고 하는 개념은 이러한 경제체제 안에서의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화폐, 그러나 실제로는 무엇도 대리하지 않고, 참/거짓/선/악 등의 식별 체제로 그 정체가 밝혀질 수 없는 화폐, 다시 데리다의 말을 빌리자면 일종의 위조화폐counterfeit money에 가깝다.50) 그런 의미에서 문학의 자율성이라는 테제는 교조화된 문학주의가 가르치듯 사회나 역사로부터 자유로운 문학, 현실의 영향을 초월한 문학의 가치를 의미할 수 없다. 문학의 자율성은 그런 것들의 시스템과 교환 법칙의 독특성을 조명하고, 그 경제 공동체의 가치를 보호하고 사수하기 위한 수행적이면서도 정치적인 슬로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7. 새로움의 경제: 문학의 경제는 어떻게 변화하는가
문학적 경제의 자율적 체제를 주장하고, 배움을 통해 생산되는 문학의 가치를 강조하는 이 글은 여러 익숙한 반론과 의문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문학의 경제와 시장의 경제를 구분하고 문학과 상품의 가치를 다르게 조명하는 이 글은, 결국 의심스러운 문학주의를 복권하려는 시도가 아닐까. 문학이 상업주의에 대항하고, 모든 현실적 목적(이를테면 정치적 어젠다)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무용성의 테제를 반복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관점은 문학이 다양한 사회적 이해관계가 투사되고, 교차되고, 경합하는 이데올로기적 상징 권력의 장소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부르디외는 문학의 자율적 경제에 관해 위와 유사한 비판들을 제기한 가장 저명한 사례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부르디외에게 문학은 지배 이데올로기가 구사하는 언어를 규범화하고, 불평등한 가치 체계를 정당화하기 위한 구별 짓기의 대표적인 사례에 가깝다. 문학장에서 생산, 유통되는 문학성이라는 상징 자본은 언어의 위계화, 서열화, 불평등화를 조장하는 분리, 은폐, 차별의 재생산 기제이다.51) 비록 시장에서 대단한 부를 쌓을 수는 없더라도, 문학적 명성과 권위라는 엘리트주의적 상징 자본을 산출한다는 점에서 문학을 현실의 이해관계를 초탈한 무언가로 간주하는 것은 기만적이다. 따라서 부르디외는 이렇게 역설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수하게 언어적인 질서를 자율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방식들 전체에 대항하여, 모든 말하기는 시장을 위해, 그리고 시장을 통해 생산되며, 말하기는 자신의 존재와 그 가장 특징적인 속성들을 시장에 빚지고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52)
문학의 경제를 시장의 경제와 동일시하는 부르디외의 급진적인 주장은 문학의 자율성에 대한 근본적 부정을 의미하는 것 같다. 문학 역시 상징 자본을 유통하는 시장에서의 거래 품목에 지나지 않다는 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구별 짓기의 경제라고도 지칭할 수 있는 그의 이론적 모델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경제적 원리는 대단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문학장 이론과 관련하여 대중에게 가장 알려진 저서는 『구별짓기』(1979)이지만, 이 글이 보다 주목하는 것은 그의 경제학적 관점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는 「가격형성과 이윤의 예측」의 한 대목이다.
담론은 하나의 시장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획득하는데, 이 시장의 특징은 특수한 가격형성 법칙을 갖는다는 것이다. 담론의 가치는 화자들의 언어능력 사이에 구체적으로 확립된 권력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이때 언어능력은 생산능력뿐 아니라 전유 및 평가의 능력, 다시 말해 언어적 교환에 참여하는 여러 행위자들이 가지고 있는, 각자의 생산물에 가장 유리한 평가기준을 관철시키는 능력을 가리킨다. 이러한 능력은 언어학적 관점에서만 결정되는 게 아니다. 언어능력은, 사회적으로 등급화된 생산력으로서, 사회적으로 등급화된 언어생산의 단위들에 특징을 부여하고, 전유와 평가의 능력으로서, 그 자체 사회적으로 등급화된 시장들을 규정하는데, 이 언어능력들 간의 관계가 특정한 교환에서 관철되는 가격형성 법칙을 결정하는 데 기여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53)
부르디외가 묘사하는 담론 시장이 지닌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 확인해야 하는 것은 그가 언급하고 있는 ‘가격형성 법칙’이 주류 경제학의 방법론과 동일하지 않다는 점이다. 즉 완전경쟁 시장에서의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뜻하는 시장가격과 달리, 부르디외의 담론 시장에서 담론의 가격은 주어지고 결정된 일종의 고정점이다. 부르디외의 구별 짓기의 경제에서 담론 시장은, 몇몇 소수의 공급자들의 타협에 의해 가격이 결정되는 일종의 독과점 경제 모델 혹은 담합 시장에 가까운 것 같다. 그 가격에 투사되고, 반영되어 있는 것은 언어능력에 대한 평가를 수행할 수 있는 지배계급의 힘이며, 담론 시장에서 형성된 가격은 그러한 권력의 효과에 다름 아니다. 가격(담론의 가치)은 지배계급에 의해 강제되며, 통치 엘리트의 취향, 에토스, 의례, 감각을 순환적으로 재생산, 재강화하는 차별과 검열의 기제일 뿐이다.
언뜻 보면 부르디외의 명쾌하고 선명한 논지는 문학의 경제가 작동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외부 효과externality를 비판적으로 조감하고, 그것의 사회학적 성격을 폭로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처럼 보인다. 담화 시장 안에서 발생하는 차별화된 위계가 사회적 계급의 불평등을 반영한다는 그의 주장도 강한 설득력이 있다. 문학적 가치의 재현/계측 불가능성이 가치의 동등성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제도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개인의 독서 이력 안에서도 작품들은 차별적인 가치의 위계 서열 안에 배치되어 있다. 어떤 작품은 나에게 의미가 있고 또 어떤 작품은 무가치하게 느껴진다. 문제는 이러한 차별화의 기제가 제도의 수준에 적용될 때 무슨 일이 발생하느냐이다.
문학의 경제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차별화의 기제가 낳을 수 있는 상징 자본 혹은 상징 권력의 효과를 부정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정할 필요가 있다. 모든 문학작품이 가치에 있어서 동등하고 평등하다는 주장은 아름답게 들리지만, 현실에서는 좀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관념화된 목표에 가깝다. 우리는 이러한 불가능한 목표를 현실화하기 위한 정치적 운동에 가담할 수는 있다. 그러나 문학의 경제학이 목표로 하는 것은 이러한 현상을 분석하는, 좀더 냉정하고 현실적인 그림이다.
관련하여 부르디외의 논의에서 발견되는 두 가지 문제를 짚을 수 있다. 첫째는 담화의 가격을 결정짓는 구체적인 논리가 전혀 설명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담화 시장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담론 가운데, 구체적으로 특정 담론이 더 가치 있게 평가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관한 내적 설명 원리가 결여되어 있다. 어떤 작품의 가치가 높게 평가되는 이유는 지배 엘리트가 그것을 높게 평가하기 때문이다. 지배 엘리트가 그것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그 작품이 가치가 높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마치 두 개의 거울이 맞서 있는 형국처럼, 작품과 권력 사이의 무매개적 반영성으로 인해 가격 평가의 대상과 주체 사이의 순환적 참조 관계만 드러날 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부르디외의 담화 시장 모델이 일종의 끝없는 동어반복적 교환만을 야기하는 관념적 비유가 아닌지 의심해볼 수 있다.
둘째, 담론 시장에서의 가격 변동 가능성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째서 특정 작품이 과거에는 높게 평가되다가 현재에는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지는지, 혹은 그 반대의 상황이 초래되는지에 대한 관심이 부재한다. 그러나 예술이라는 담론 시장에서 작품의 가치는 유동적이며, 시대에 따라 역동적으로 변화한다. 좀더 적극적으로 말할 수도 있다. 예술의 경제에서는 그 변화가 오히려 핵심이라고 말이다. 현대의 예술 담론장에서는 전통과 규범에 순응하는 작품일수록 오히려 매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판명된다. 예술 담론 시장은 이미 형성된 기존 가격에 관한 이의 제기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저항, 경쟁, 혁신, 분투의 현장이다. 이것은 비단 개별 작품에만 한정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장을 규제하는 장르에 대한 개념적 파괴와 재정의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그에 따라 가격 설정의 방식과 기준 자체의 변동을 가져오기도 한다. 만약 예술이나 문학의 가치를 사회적 계급과 이해관계의 직접적 반영으로 단순하게 받아들인다면, 이 끝없이 변화하는 가치의 역동성을 설명할 수 있는 내적인 근거가 사라지게 된다. 유일한 외적 가능성은 사회적 지배계급의 세력 교체로 그것을 이해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비현실적인 진단이다. 우리는 현실 사회의 권력 교체가 그렇게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부르디외가 제시하는 가격 모델이 대단히 관념적이고, 비탄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따라서 문학의 경제가 설명되기 위해서는 구체성과 역사적 탄력성이 동시에 고려되어야 한다. 만약 부르디외가 강조하고 있듯, 문학과 예술이 상징 권력과 위계 및 불평등한 가치의 질서를 낳는 측면이 있다면, 이 역시 이러한 이론적 구체성과 역사적 탄력성 속에서 분석될 필요가 있다.
예술 작품이 지배계급의 고상한 취향을 드러내는 속물적 욕망의 무대로 소비되는 경우, 그리하여 대중과의 구별을 실천하기 위한 차별의 지표로 향유되는 경우는 분명 빈번히 발생한다. 그러나 부르디외가 사용하는 이 구별이라는 개념은 좀더 세심하게 전유되어야 한다. 그것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의 영속화된 분리,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의 위계에 따른 영원한 단절만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의 경제에서 이루어지는 실제 구별은 단순히 서로 다른 두 권력 체제 사이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 내에 속해 있는 다양한 작품들 사이에서도 이루어진다. 예술의 경제에서는 이를 활성화하기 위해 구별la distinction 대신 차이la différence라는 단어를 선호하며, 이러한 차이들 사이의 분쟁différend을 독려하고, 그것의 긍정적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새로움’이라는 가치는 그것을 측정하는 대표적인 방법론적 어휘 중 하나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좀더 설득력 있는 모델은 보리스 그로이스의 문화경제학일 것이다. 그에 따르면 문화의 장은 ‘새로움’을 둘러싼 끊임없는 혁신 경쟁의 무대이다.
혁신적 예술작품의 근원은 문화적 전통에 대한 저항에서도 사태 자체를 향한 의지에서도 연유하지 않는다. 그것은, 문화를 주재하고 전통에 대한 긍정적 순응과 부정적 순응의 전략적 조합으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문화 경제적 논리에서 연유한다. 그 목표는 현재의 중요성을 산출해내는 것이다. 문화적 전범에 따라 깔끔하게 완성된 예술작품은 가치화된 전통을 현재와 미래로 지속시키지 않는다. 그런 예술작품은 가치화된 전통에 의해서도 아류적인 것으로 비판된다. 가치화된 전통 스스로가 독창성, 세속성, 그리고 혁신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세속적 공간 역시 혁신적 예술에 의해 대변될 수 없다. 모든 예술작품은 세속적 사물을 가치화된 전통과 대조되는 관계를 맺게 한다는 것만으로도 세속적 공간 그 자체와 급진적으로 구별되기 때문이다.54)
혁신은 기본적으로 교환이라는 문화경제적 형태로 행해진다. 이 교환은 세속적 공간과 가치화된 문화적 기억 사이에서 일어나는데, 문화적 기억은 미술관, 도서관 및 다른 아카이브에 보존되어 있는 문화적 가치들의 총체와 이 아카이브와 관계하는 관습, 제의, 전통으로 구성된다. 모든 혁신은 세속적 공간의 특정한 사물을 가치화해 문화적 아카이브에 도달하게 하고, 반면 특정한 문화의 가치는 가치절하하여 세속적 공간에 도달하게 한다. 혁신을 교환으로 이해하기는 이상해 보일 수도 있다. 통상 창조적 행위의 산물들은 특정한 가치를 갖지 않는, 절대적으로 비교 불가능하고 교환 불가능한 것으로 파악되어온 때문이다. 혁신에 대한 이와 같은 전통적 표상은, 예술작품이나 이론적 담론은 문화와 세속적 공간 너머에 있는 숨겨진 현실을 재현한다는 믿음에서 연유한다. 그러나 가치화된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의 경계가 어떤 식으로든 지속되는 한, 그 둘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은 둘 사이의 경계의 지양이나 구분된 두 영역의 최종적 융합이 아니라 교환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55)
새로움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그로이스의 문화경제학은 여러 가지 흥미로운 통찰을 제공해준다. 첫째, 우선 그것은 문화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가치 평가의 역사적 메커니즘을 가시화한다. 문학적 생산물의 가치가 독립적으로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사이의 경쟁적 차이 속에서 측정되는 것으로 시각을 전환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움과 연동된 문화적 가치는 독자적인 것, 실체적인 것, 고정적인 것,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적이고 유동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로 인해 새로움은 언제나 재평가(가치 절상과 가치 절하)의 운명에 놓여 있다.
둘째, 새로움은 문화와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변동이지만, 현실의 직접적 반영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움은 문화적 아카이브와 현실(세속적 공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교환이며,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가치의 재배치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문화의 역사에서 과거에 가치 있다고 평가되던 것이 돌연 낡은 것으로 느껴지고, 그전까지는 아무런 주의를 끌지 못했던 세속의 사물과 언어가 문화의 아카이브 안으로 침입해 혁신의 이름으로 평가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따라서 새로움은 창조의 산물이 아니라 문화와 현실 사이 경계의 교란, 그리고 그 결과 발생하는 가치의 재배치를 의미하는 것이다.
셋째, 이렇게 재배치된 가치의 측정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세속적 공간과 구별되는 문화적 기억이 필요하다. 어떤 작품의 새로움이 발견될 수 있는 이유는 현실적으로 새롭기 때문이 아니라 문화적 기억의 역사 안의 비교 체계 속에서 그 새로움이 인지되기 때문이다. 그로이스가 말한 아카이브는 그러한 문화적 기억을 유지하는 데 동원되었던 모든 제도적 관습과 기구를 가리킨다. 따라서 문화적 제도는 단순히 지배계급의 욕망과 이해관계가 투영되어 있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로만 간주될 수 없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제도의 운영이 공정하지 않고, 그 시스템이 정의롭지 않다고 항의할 수 있다. 나아가 오늘날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문학적 가치가 특정한 제도적 결함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충분히 평가되지 않음을 증명할 수도 있다. 새로움에 대해 말하고 판정할 수 있는 권한이 특정 집단의 주체(인종, 계급, 젠더 등)에 편중되어 있다고 비판하는 것도 가능하다. 부르디외의 비판적 통찰은 이러한 불합리함을 지적하는 과정에서 특히 빛을 발한다.
그러나 제도에 대한 비판과 제도의 부재를 동일시하는 것은 곤란하다. 제도와 아카이브가 완전히 붕괴되었을 때 초래되는 상황은, 문화적 가치의 평등이 아니라 그것의 소멸 혹은 시장경제에 의한 완벽한 장악일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의 가치를 부여하는 데 있어 이러한 일련의 제도적 환경은, 문학의 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기여하는 문화의 공장이자 은행이며 학교이다. 문학의 역사는 바로 문학적 기억이라는 제도적 아카이브 내에서 이루어졌던 문학적 가치 측정 기준의 변동의 역사이다. 따라서 문학의 경제에서 아카이브는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 혁신의 대상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넷째, 새로움을 문화와 현실 사이에서 발생하는 혁신적 교환의 결과로 파악하게 되면, 새로움을 연속적 발전의 내러티브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 과거와 현재의 관계는 유동적이며, 그 사이의 위계도 완전히 고정된 것이 아니다. 문학의 경제에서 과거에 대한 배움의 가능성은 차단되어 있지 않다. 과거의 작품이 일시적으로 세속의 공간으로 떨어지더라도, 그것은 언제든지 문화의 아카이브 안으로 복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품의 새로움과 문화의 새로움을 구별시켜주는 주요 차이점이기도 하다. 새로운 상품은 더 나은 기능, 더 훌륭한 성능을 발휘하면서 과거의 상품을 완벽히 대체할 수 있다. 그러나 상품의 새로움은 연속적 발전의 내러티브 속에서 언젠가 소멸할 수밖에 없는, 미래의 예정된 낡음이다. 반면 문화의 경제에서 과거는 현재의 새로움과 언제든지 교환될 수 있는, 과거의 잠재적 새로움이다.
문화의 아카이브를 관통하는 새로움의 경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세대’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자 분석적 개념으로 활용될 수 있다. 우선 세대는 문화의 장에서 이루어지는 작품들, 문화적 가치들 사이의 물리적 시간 관계를 가시화하는 구별적 개념이다. 여기에서 새로움은 과거 세대의 작품과 현재 세대의 작품의 차이를 가시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현재 세대에 속하는 작품은 새로움에 대한 호소 속에서 과거 세대의 작품을 일시적으로나마 오래된 것으로 느껴지게 만든다. 물론 여기서도 우리는 새로움이 어떤 가치의 영원한 우열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둘째, 세대는 현실(세속의 공간)의 재생산 원리와 문화의 원리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역동적 교환, 또는 침투의 과정을 설명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현실의 장에서 계급, 통치 등의 사회적, 구조적 권력관계의 변동은 잘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인간이 필연적으로 맞이해야 할 신체적, 사회적 노화 현상은 아직 그러한 단계를 거치지 않는 새로운 주체들에게 주도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만드는, 일종의 자연의 법칙이다. 예술 작품은 늙지 않지만, 모든 예술가는 늙고 사라지기 마련이다. 여기서 세대는 세속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자연적/사회적 권력 교체의 원리가 문화의 아카이브에 적용되는 과정을 묘사하기 위한 인식적 개념으로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그렇다면 세대와 결부된 ‘새로움’의 가치는 문화의 원리와 세속의 원리 사이의 교환을 증명하는 일종의 논리적 연결 고리의 징표이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문화의 원리 안에서 자주 언급되는 세대 개념을 특정한 현실, 혹은 일부 사회집단의 실재를 반영하는 사회학적 개념과 혼동하지 않는 일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현실의 실재를 탐구하는 사회과학 분야에서 세대론이 유효한 방법론인지와 관련하여 많은 논쟁이 있다. 그러나 문화의 경제에서 사용되는 세대라는 기호는 실제 현실, 특정한 인구 집단을 반영하기 위한 분석적 개념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새로움이 문화적 기억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가격에 해당될 수 있다면 세대는 그러한 가격의 역동적 변동을, 나아가서는 가격 형성 법칙의 재편까지도 초래하는 새로운 공급자와 수요자를 가시화하기 위한 방법적 기호일 뿐이다. 문화의 경제에서 세대라는 기호의 수행적 효력이 사회학적 세대론의 현실적 정합성에 따라 판별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것이 간과될 때, 문화의 아카이브에서 발생되는 것은 세대는 무용하다라는 인식론적 허무주의 또는 세대를 기치로 내세우는 비생산적 권력투쟁이다.
따라서 문학의 경제 층위에서 새로움을 틀에 박힌 슬로건, 무의미한 수사로 간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새로움과 젊음이라는 단어의 남용을 지적하는 일과 새로움의 사건을 알아보려는 노력은 전혀 별개의 사안이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새로움을 자본과 상품의 논리로 치부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이 둘은 자주 혼동되고, 실제로 엄밀하게 구별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우리는 최첨단 상품들의 (가령 산업디자인 분야에서) 전혀 특별하지 않는 차이를 새로움으로 포장하고, 그로부터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는 거대 기업들을 빈번하게 목격하는 중이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움의 가치에 대한 오리지널리티를 사업가들에게 넘겨줄 필요는 없다. 그것은 새로움이라는 문화의 논리가 상품경제에 침투한 긍정적 현상일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품의 논리가 문화의 논리를 전용한 부정적 결과일 수 있다. 문제는 상품경제에 의해 변용된 새로움의 이데올로기, 물리적·기능적 새로움을 중시하는 현재주의적 태도에 의해 문화의 경제가 잠식되는 경우다.56) 여기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새로움의 역사적 저작권이 문화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 그리고 그 저작권을 관철시키기 위한 특별한 노력이다. 동시대 비평에 부과되는 새로운 과제는, 문화의 새로움과 상품의 새로움을 구체적으로 분별하는 방법과 원리를 사유하는 일이다. 이것은 대단히 까다롭고 어려운 문제이지만 문학의 자율적 경제를 사수하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도전해볼 만한 과제이다. 이 글은 거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다만 이 글에서 부각한 ‘새로움’–‘세대’–‘배움’이라는 용어들의 특정한 결합 양상에 대한 고찰이 그것을 위한 하나의 방법적 시도가 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기회가 닿는 대로, 다음에 시도해보고자 한다.
8. 마무리
마무리하자. 이 글은 ‘문학의 경제학’이라는 새로운 이론적 틀을 시도하고 있지만, 전혀 새롭고 독창적인 주장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사실상 이 글의 목적은 문학에 관해 제출되었던 기존의 이론적 사유들을 다른 방식으로 재배치해보는 데 있고, 이를 바탕으로 문학을 통해 공유될 수 있는 유의미한 가치들을 긍정적으로 종합하는 데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그동안 문학 속에서 경험되었던 다양한 배움의 실제에 좀더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다음의 네 가지 특수성을 도출하고자 했다.
1. 문학적 가치의 특수성 : 문학의 경제학은 문학적 가치가 생산되고 유통되는 방식과 원리를 분석함으로써, 문학적 가치가 지닌 고유한 정체성을 밝힐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문학적 가치는 문학의 경제라고 불리는 독특한 언어 게임 속에서 구성되는 내재적 가치 개념에 가깝다. 이러한 가치가 어떻게 형성되고 측정될 수 있는지를 탐구하게 되면, 우리는 시장에서 교환되는 상품의 아이덴티티, 즉 상품의 가치라고 할 수 있는 가격price과 문학의 가치value 개념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의 가치는 시장 중심의 자본주의와 근본적으로 불화하는 성격을 지닌다. 그것은 문학이 특별히 시장에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문학의 가치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교환의 내재적 양태로 인해 빚어지는 차별적 현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문학의 경제학은 문학적 가치에 내포된 특수한 성격을 강조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2. 문학적 생산과 소비의 특수성 : 문학의 경제학은 문학적 교환을 담당하는 두 축, 즉 생산과 소비의 독특한 양태에 주목함으로써 양자 사이에 형성된 특수한 관계를 규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시장경제에 상품의 생산과 소비는 행위의 측면에서 엄격히 구분되며, 그 목적에 있어서도 분명히 구별된다. 판매자는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상품을 생산하고, 구매자는 주관적 만족의 효용을 추구하기 위해 상품을 구매한다. 교환은 서로 다른 두 행위를 일시적으로 매개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끝마친다. 그러나 문학적 교환 행위에서는 이러한 구분이 일어나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 이 둘은 일치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작품을 물리적으로 만들어내는 데 있어 생산과 소비는 구분되지만, 문학적 가치의 산출이라는 층위에서는 생산과 소비의 우위는 고정될 수 없다. 문학의 경제에서는 생산자가 소비하고, 소비자 역시 생산한다. 문학의 경제학은 문학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과정의 특수한 성격을 전면화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3. 문학적 효용의 특수성: 문학의 경제학은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 즉 문학의 효용적 가치와 관련된 특수한 성격을 해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구태여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하면서까지 다른 장르도 아닌 문학을 통해 무언가를 표현하고, 제작하고, 산출하고, 그것을 읽고 향유한다면, 거기에는 모종의 남다른 ‘즐거움jouissance의 경제’가 작동하기 때문이라고 말해야 한다. 문학적 경험이 야기하는 이 즐거움은 문학적 생산과 소비의 공통(공동) 목적이며,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교환 행위와는 전혀 다른 만족감을 제공한다. ‘배움’은 그러한 문학이 야기하는 쾌, 고통, 분노, 슬픔, 우울 등과 그것이 유발하는 효과로서의 어떤 ‘문학적 경험’을 좀더 긍정적인 뉘앙스로 전면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4. 문학적 역사의 특수성 : 문학의 경제학은 문학의 내재적 가치가 산출하는 역사적 시간성의 특수한 성격을 조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문학의 경제에서 문학의 가치는 시공을 초월하여 결정되어 있는, 일종의 주어진 가격이 아니다. 문학에 대한 가치 평가가 지속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학의 가치는 역사적으로 재구성되는 대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변동이 단지 현실의 변화, 새로운 외부적 시간의 산출에 의해 일방향적으로 결정되는 것 역시 아닙니다. 문학의 역사는 이 서로 다른 시간성 사이의 대화를 규제하는 원리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어떤 우연적인 사건, 상황, 조건에 의해 문학에 대한(제도를 포함한) 가치 평가의 기제가 언제든지 변동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함을 의미한다. ‘새로움’과 ‘세대’는 이러한 가치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한 분석적 요인이자 문화적 원리로 다시 활용될 수 있다. 문학의 역사는 이러한 체제의 변화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기 파괴적이다.
끝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문학의 경제가 시장경제처럼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선험적이고 독립적인 체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문학의 경제는 사회, 시장, 정치의 질서 속에서 문학을 문학으로서 사용하려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발견되는, 일종의 수행적 체제이다. 시장경제의 이면, 표면, 중간, 주변 등의 국지적인 시공간에서 작동되는, 대단히 취약한 시스템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장경제 부근에서 창발하는 가운데, 상품의 교환 관계에 혼란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문학의 경제는 미셸 세르가 말한 기생parasitism의 경제에 비유될 수도 있다.
누가 이 관계를 훔쳐 가는가? 어쩌면 이 관계의 중간 어디쯤에 있는 누군가에 의해 우회로가 만들어진 것일 수 있다. 제3의 인간이 존재한다는 말인가? 이것은 비단 논리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관계의 경로를 따라 이동하는 것은 돈, 금덩이, 상품, 심지어는 음식, 즉 물질적 재화일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재화들이 항상 자신들의 목적지에 쉽게 당도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경로를 따라 운반되는 재화들을 가로채려 애쓰는 방해자들이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기생parasitism이란 이 수많은 다양한 활동들에 가장 자주 부여되는 이름이다. 나는 기생이 이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가장 평범하고 흔한 활동이 아닌가 생각한다.57)
상품의 경제적 교환 경로의 방해, 이탈, 교란을 일으키는 이들은 언제나 시장의 잠재적 박멸 대상이다. 따라서 문학의 경제학은 문학을 향해 점차 고조되는 동시대적 위협과 장악의 힘에 대항하려는 정치적 독트린으로도 읽힐 수 있다. 그 독트린이 표방하는 것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문학 속에서 교환되는 특별한 배움에 의해, 문학의 경제는 누구에게서나 언제든, 어디서든, 어떻게든 출현할 것이다.
- 1) Dissemination, trans. Barbara Johnson, The Athlone Press, 1981, p. 223.
- 2) 『문학의 고고학』, 허경 옮김, 인간사랑, 2015, p. 123.
- 3) 강보원, 「아주 조금 있는 문학」, 〈웹진 크리틱-칼〉, 2020(www.critic-al.org/?p=5905).
- 4) 이와 관련하여 최근 비판의 주요 대상이 되고 있는 과거의 비평 담론 중 그 어떤 것도 문학의 본질을 노골적으로 정의하지 않았다는 점, 오히려 문학의 역사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징후적이다. 이를테면, ‘문학주의’ 담론의 유력한 주창자 중 하나로 지목되고 있는 1990년대 비평 담론의 전제 역시 문학의 역사성, 그리고 그에 따른 규정 불가능성이다. “문학적인 것에 대한 질문, 왜 문학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도 역시 부정적 규정의 방식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규정하는 순간 이미 문학은 문학이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까닭이다. 문학주의는 선언되는 그 순간 문학주의가 아닌 것이 된다”(서영채, 「왜 문학인가: 문학주의를 위한 변명」, 『문학동네』 2000년 여름호, p. 359).
- 5) 이에 대한 분석과 비판으로는 강동호, 「문학의 정치: 재현·잠재성·민주주의」, 『지나간 시간들의 광장: 문학의 동시대성과 비평의 정치』, 문학과지성사, 2022 참조.
- 6) 강보원, 「자가진단으로서의 비평」,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겨울호, pp. 12~13.
- 7) 경제economy의 어원학적 기원이 오이코노미아oikonomia에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그것에 내포되어 있는 철학적·정치적·신학적 의미를 통치성의 맥락에서 새롭게 조명한 사례로는 푸코(‘영혼의 관리술’)와 아감벤(‘삼위일체론’)의 연구가 있다. 이들의 지적이 이 글에 준 영향이 적지 않지만, 여러 정치신학적 계보와 맥락을 지니고 있는 이 의심스러운 개념의 복잡성은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다만 나는 경제라는 개념을 통해 부각될 수 있는 비교적 단순한 그림을 스케치하고 싶다. 오이코노미아 개념의 정치철학적 함의에 대해서는 다음의 두 저서를 참고하면 될 것이다. 미셸 푸코, 『안전, 영토, 인구: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7~78년』, 오트르망 옮김, 난장, 2011; 조르조 아감벤, 『왕국과 영광: 오이코노미아와 통치의 신학적 계보학을 향하여』, 박진우·정문영 옮김, 새물결, 2016.
- 8) 피에르 부르디외, 「가격형성과 이윤의 예측」, 『언어와 상징권력』, 김현경 옮김, 나남, 2020, p. 75.
- 9)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연구 사례로는 언어의 여섯 가지 기능에 대한 로만 야콥슨의 입체적 분석이 있었다(로만 야콥슨, 「언어학과 시학」, 『문학 속의 언어학』, 신문수 옮김, 문학과지성사, 1989).
- 10) 보리스 그로이스, 『새로움에 대하여: 문화경제학 시론』, 김남시 옮김, 현실문화, 2017, pp. 20~23.
- 11)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김재홍 외 옮김, 길, 2011, p. 179.
- 12) 같은 책, p. 175.
- 13) 아리스토텔레스는 교환경제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는 대신, 이러한 가치의 규정 불가능성을 타개할 수 있는 해법을 법, 제도, 통치에서 찾는다. 즉 교환의 정의가 유지되기 위해서 는 그 누구도 부당한 이익을 얻지 않도록 다스리고 규제하는 외부의 존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통치의 주체가 ‘교환의 정의’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원리가 ‘정의’라는 개념에 내포되어 있고, 이러한 ‘정의’의 실현을 통해 통치 주체가 어떤 보상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존경과 영예라고 파악한다. “다스리는 사람은 그가 정의로운 사람인 한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갖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에 대해 합당한 비례에 따른 것이 아니라면, 단적으로 좋은 것을 자기 자신에게 더 많이 배분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 까닭에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해 수고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앞에서 이야기했던 대로 사람들이 정의가 ‘타인에게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어떤 보수가 주어져야만 하며 이것이 존경과 영예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로 충분하지 않은 사람들은 참주가 되는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책, pp. 182~83).
- 14) 근대 경제학의 창시자인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제기된 ‘다이아몬드와 물의 역설’은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진 경제학의 고전적 난제이다. 그것은 생존에 있어 거의 쓸모가 없는 ‘다이아몬드’와 같은 사치재가 ‘물’이 대표하는 필수재에 비해 비싼 이유를 해명해야 한다는 과제를 제시했다. 애덤 스미스는 이 역설을 ‘희소성scarcity’으로 해결하고자 노력했는데, 경제학설사에서는 이 난제가 백 년 후 등장한 한계 효용 학파marginal utility school에 의해 비로소 해결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 15) 『자본론 1(상): 정치경제학 비판』,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01, p. 60.
- 16) Principle of Economics(8th ed.), Macmillan and Co., 1920, pp. 43~44.
- 17) 카를 마르크스, 같은 책, p. 77.
- 18) 이에 대해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인간은 그들 생활의 사회적 생산에서 그들의 물적 생산제력의 일정한 발전수준에 조응하는 일정한, 필연적인, 그들의 의사와는 무관한 제관계, 생산관계(Produktionsverhältnisse)를 맺는다”(카를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김호균 옮김, 중원문화, 1988, p. 7).
- 19)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1(상): 정치경제학 비판』, p. 48.
- 20) 같은 책, p. 59.
- 21) 같은 책, p. 93.
- 22) 주류 경제학에서는 마르크스와 달리 상품product이라는 용어 대신, 재화goods라는 개념을 선호한다. 이 글에서도 신고전학파 이후의 경제학에 관해 설명할 때에는 재화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 외에는 상품이라는 단어를 더 빈번하게 사용할 것이다.
- 23) Alfred Marshall, Ibid., pp. 43~44.
- 24) 주류 경제학의 핵심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효용에 대한 마샬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효용은 욕망 또는 욕구와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욕망은 직접적으로 측정될 수 없고, 단지 욕망의 원인이 되는 외적 현상에 의해서만 간접적으로 측정될 수 있다. 경제학이 가장 중요하게 관심을 갖는 척도는, 사람들이 욕망의 충족이나 만족을 위해 기꺼이 지불하는 가격이다. 물론 어떤 만족도 제공하지 않는 무언가에 대한 욕망과 열망을 갖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인간의 만족에 부합하는 행위에 최우선의 관심을 둔다. 그리고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구매를 했을 때 기대되는 만족이 실제의 만족과 결과적으로 잘 일치한다고 가정할 것이다”(Alfred Marshall, Ibid., p. 61).
- 25) 문학이 점차 경량화되고, 독자들의 재미를 자극하는 형태로 변해버렸다는 일각의 주장(상업주의에 대한 비판)은 어쩌면 부차적인 현상일 수 있다. 내가 보기에 문학이 시장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징후는 작품별 가격이 차등적으로 매겨질 때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일종의 상상이지만, 결코 상상하기 싫은 미래이다.
- 26) 그렇다고 해서 해당 예술 장르들이 본질적으로 상업 예술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동시대의 많은 작품은, 그리고 예술가들은 이러한 가격 형성 원리에 저항하기 위해 다양한 미학적 모색과 정치적 실험을 수행하고 있고, 그때 각 작품들을 지시하는 장르적 기호(‘음악’ ‘미술’ ‘영화’ 등)는 자본으로 환산될 수 없는 해당 작품들만의 고유한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수행적 개념으로 사용된다.
- 27) Roland Barthes, S/Z, trans. Richard Miller, Blackwell Publishing, 1990, p. 88.
- 28) 마르셀 모스의 사유에서 시간은 증여와 교환을 구별하는 원리로 작용하지만, 이러한 시간의 모호성으로 인해 모스의 증여론은 후대의 많은 학자에 의해 비판받았다. 가령, 레비스트로스는 모스가 간과하고 있는 교환의 메커니즘으로 그의 구조주의적 사유를 완성할 수 있었고, 데리다는 모스의 『증여론』을 해체적으로 독해함으로써, 선물의 역설적인 불가능성을 밝히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할 것.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마르셀 모스 저작집 서문』, 박정호·박세진 옮김, 파이돈, 2023; Jacques Derrida, Given Time: I. Counterfeit Money, trans. Peggy Kamuf,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4.
- 29) 물론 이 독서가 온전히 독립적인 행위인 것은 아니다. 작가의 명성, 평론가의 평가, 출판사에 대한 신뢰, 인플루언서의 활동, 상업 광고 등 다양한 주변 텍스트paratext들이 독자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의 가치 평가가 합당한지, 그 진실이 확인되기 위해서는 독자의 시간이 투여되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 30) Pierre Macherey, A Theory of Literary Production, trans. Geoffrey Wall, Routledge, 2006, p. 77.
- 31) 발터 벤야민, 『보들레르의 파리』,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08, p. 292.
- 32) 이희우, 「비판이 오래 가르쳤지만 배울 수 없었던 것들」, 『쓺』 2023년 하권, p. 87. 이희우가 새롭게 제시하는 배움의 정의와 목적은 다음과 같다. “나는 비판이 사용하는 설명의 구조와 매우 유사하지만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배움의 이야기 구조를 제안하고 싶다. 즉 비판 이론이 동원하는 서사적 틀—물신·우상·징벌·파국·우상파괴·의식화·탈신비화·모순·부인—을 배움의 이론이 만들어가는 서사적 구조—기호·매혹·실망·승화·세속화·깨달음·되찾기—로 대체하고 싶다. 이것은 비판을 금지하거나 한물간 것 취급하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비판적 가르침(계몽하기·일깨우기·의식화하기·상대화하기)과 배움의 역량(추구하기·실망하기·되찾기·연결하기) 중 무엇을 우선시할 것인가 하는 주체적 결단의 문제다. [……] 배움은 변증법적이지도 않고 모순을 동력으로 삼지도 않는다. 배움은 횡단적이고 또한 구성적이다. 비판은 위에서(지식인으로부터) 오거나 아래에서(소외된 자들로부터) 오지만 배움은 위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아래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오직 가로지름과 연결의 실천 속에서만 오기 때문에 배움은 장르나 장들, 영역들의 위계 같은 것을 알지 못한다. 해체가 목적은 아니지만, 배움은 자신의 실천 속에서 그러한 위계와 분리를 해체한다”(같은 글, pp. 103~104).
- 33) 덧붙이자면, 내가 배운 것은 ‘배움’이라는 화두의 중요성 외에 다른 것도 있다. 가령 배움이 실제 텍스트에서 어떻게 촉발되고 있는가를 분석한 그의 글 「배움의 단계들: 손보미, 「불장난」 읽기」(『문학동네』 2023년 겨울호)에서 제시되고 있는 ‘매력의 경제’라는 표현을 읽고, 나는 ‘경제’라는 단어가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 34)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천병희 옮김, 문예출판사, 2002, pp. 37~38. 강조는 인용자.
- 35) 같은 책, p. 62.
- 36) 위에서 언급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대표적 사례이다. 『시학』은 탁월한 비극들이 선보이는 훌륭한 플롯이 인과관계 등 개연성의 감각을 가르쳐줄 수 있다는 사실에 집중한다. 그러나 이 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결론과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서두에서 지나가듯이 언급한 ‘배움의 능력’을 강조하는 데 좀더 집중할 것이다.
- 37) Roland Barthes, “Style as Craftmanship”, Writing Degree Zero, trans. Annette Lavers·Colin Smith, Hill and Wang, 1970, pp. 62~63.
- 38) 문학이 요구하는 자기 정당화의 역사는 바르트의 지적보다 더 오래된 역사적 연원을 갖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근대 이전에도 문학에 대한 비난·증오·혐오·비판은 적지 않았는데,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비난들에 맞서 문학을 옹호하려는 사유들에 의해 문학에 대한 정당화가 촉발되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최초의 문학 이론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이 다름 아닌 『국가』에서 플라톤이 역설한 ‘시인추방론’이라는 사실은 징후적이다. 이에 대해 본격적으로 탐구한 사례로는 Williiam Marx, The Hatred of Literature, trans. Nicholas Elliot, Harvard University Press, 2018 참조.
- 39) 문학이론가 캐롤라인 레빈이 정의하고 있는 형식이란 문학을 구성하는 “모든 형태들과 배치들, 모든 질서화의 원리들, 모든 반복과 차이의 패턴들”(p. 30)을 의미한다. 형식 개념을 이처럼 폭넓게 재정의했을 때 기대할 수 있는 이점은 내용과 형식, 또는 문학과 현실 사이의 이분법으로부터 탈피하여, 양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역동적 긴장 속에서 문학 텍스트의 의미를 분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새로운 형식주의의 입장에서 과제는 “감추어진 형식의 내용을 추적하기보다, 내용의 형식들, 즉 문학 텍스트의 안팎에서 서로 만나는 조직들의 원리를 추적”(p. 58)하는 일이 된다. 이에 대해서는 캐롤라인 레빈, 『형식들』, 백준걸·황수경 옮김, 앨피, 2021 참조.
- 40) 이에 대해서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한다. “정신분석학의 이론에 따라 우리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정신적 사건이 취하는 진로가 쾌락 원칙Lustprinzip에 의해서 자동적으로 규제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러한 사건의 진로가 항상 불쾌한 긴장에 의해서 작동되고, 그것의 최종 결과는 긴장의 완화—즉, 불쾌를 피하고 쾌락을 얻는 것과 일치하도록 방향을 잡는다고 믿는다. 그러한 진로를 우리의 연구 주제인 정신 과정의 고려 속에서 논한다는 것은, 우리는 우리의 작업 속에 <경제적> 관점을 도입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지그문트 프로이트, 「쾌락 원칙을 넘어서」,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열린책들, 2020, p. 271).
- 41) 지그문트 프로이트, 「마조히즘의 경제적 문제」, 같은 책, p. 423.
- 42) 흥미로운 것은 프로이트도 이 문제를 도외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예술이 선사할 수 있는 독특한 불쾌의 문제를 설명해야 했는데,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있지만 일단 그것 역시 최종적으로는 쾌락을 산출한다고 보면서, 예술의 의도적 불쾌를 ‘쾌락의 경제’에 복속시킨다. “어른들에 의해서 수행되는 예술적 놀이와 예술적 모방은—이것은 어린아이들의 경우와는 달리 관객을 목표로 한다—관중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을 면제해 주지는 않지만(예컨대 비극에서), 그들은 그것을 고도로 즐거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 둘 만한 사항으로 덧붙이고 싶다. 이것은, 심지어는 쾌락 원칙이 지배적인 상황하에서도 그 자체로는 불쾌한 것을 마음속에서 상기해 보고 작업해볼 주제로 만들기에 충분한 수단과 방법이 존재한다는 설득력 있는 증거이다. 최종적 결과로서는 쾌락을 산출하는 이러한 사례와 상황을 고려해 보는 일이 그 주제에 대한 경제론적 접근법과 더불어 어떤 미학 체계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것들은 쾌락 원칙의 존재와 지배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목적에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들은 쾌락 원칙을 <넘어서는> 경향, 즉 이 원칙보다 더 원시적이고 독립되어 있는 어떤 경향의 운용에 대해서 아무런 증거를 제공해 주지 못하고 있다”(지그문트 프로이트, 「쾌락 원칙을 넘어서」, 같은 책, pp. 285~86). 이러한 프로이트의 견해에 대해 들뢰즈는 그가 마조히즘의 진정한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반론을 펼치면서, 이 쾌락으로 전환될 수 없는 불쾌 그 자체가 예술의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는 질 들뢰즈, 『매저키즘』, 이강훈 옮김, 인간사랑, 2007 참조.
- 43) Roland Barthes, “Twenty Key Words for Roland Barthes”, The Grain of the Voice: Interviews 1962~1980, trans. Linda Coverdale, Hill and Wang, 1991, pp. 206~207.
- 44) 이에 대해 바타유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멈출 줄 모르는 생명체의 누출(낭비)이라는 일반적 운동에 의해 활성화되는 존재이다. 심지어 인간은 생물계 안에서 자신이 지닌 주권souveraineté에서 이러한 누출/낭비의 운동과 동일시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러한 주권이 특권적인 방식으로 바로 인간을 영광스러운 작용l’opération glorieuse에, 곧 무용한 소비la consommation inutile에 바치는 것이다”(조르주 바타이유, 『저주받은 몫: 일반경제 시론—소진/소모』, 최정우 옮김, 문학동네, 2022, p. 33).
- 45) “Literature/Teaching”, The Grain of the Voice: Interviews 1962~1980, p. 242.
- 46) 파울 첼란, 「자오선」, 『파울 첼란 전집 3』, 허수경 옮김, 문학동네, 2022, p. 247.
- 47) 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변광배 옮김, 민음사, 2015, p. 92.
- 48) 미셸 푸코, 「계몽이란 무엇인가?」, 『자유를 향한 참을 수 없는 욕망: 푸코–하버마스 논쟁 재론』, 정일준 옮김, 새물결, 1999, p. 190.
- 49) 자크 데리다, 「“문학이라 불리는 이상한 제도”: 자크 데리다와의 인터뷰」, 『문학의 행위』, 정승훈·진주영 옮김, 2013, 문학과지성사, pp. 99~100. 강조는 인용자.
- 50) 데리다는 『파리의 우울』에 실린 보들레르의 시 「위조화폐」를 해체적으로 독해하면서 증여의 불가능성에 대한 매력적인 분석을 수행한다. 그런데 여기서 진행되는 ‘위조화폐’를 둘러싼 역설적 기제, 그것의 판별 불가능성은 그 자체로 시적(문학적) 허구의 판별 불가능성과 대응되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Jacques Derrida, Given Time: I. Counterfeit Money, trans. Peggy Kamuf,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4 참조.
- 51) 이에 대해 부르디외는 이렇게 규정한다. “문학 장 안에서 완수된 작업은 독창적 언어의 외관을 생산한다. 가장 흔한 용법, 즉 ‘평범하고’ ‘일상적이며’ ‘속된’ 용법과의 격차를 원리로 하는 파생어법들의 총체를 만들어내면서 말이다”(피에르 부르디외, 같은 책, p. 66).
- 52) 같은 책, p. 91.
- 53) 같은 책, p. 76.
- 54) 보리스 그로이스, 같은 책, pp. 136~37.
- 55) 같은 책, p. 177.
- 56) 새로움과 관련한 동시대 한국문학장의 시스템적 한계도 이와 관련 있다고 생각한다. 동시대 문학장에서 각광받는 새로움의 가치는 주로 새로운 작가의 새로운 작품에 한정되는 것처럼 보이며, 그것을 가속화하는 시스템이 정착된 지도 오래이다. 문학의 물리적 새로움을 재생산하는 데 몰두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작가와 작품은 망각이나 극복의 대상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흔히 말하는 문학장의 상업화/자본화와 무관할 수 없겠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새로움’이라는 어휘가 특정한 역사적 순간을 거치며 협애화 되는 개념사적/지성사적 문제를 제기하게 만든다. 이에 대한 분석은 차후에 시도하고자 한다.
- 57) Michel Serres, The Parasite, trans. Lawrence R. Schehr,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p. 11. 이에 대한 국내의 연구로는 이승철, 「불가능한 증여, 기생의 사회: 자크 데리다와 미셸 세르의 상호성 비판」, 『비교문화연구』 제25집 제2호, 201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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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넘어 ‘우리’가 된 풍경과 마음 ―길상호 시집, 『왔다갔다 두 개의』, 시인의 일요일, 2024. ―박경희 시집, 『미나리아재비』, 창비, 2024. 박형준 로베르트 발저는 셋방을 전전하면서도 작가로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다락방에서 살기 원했다. 나에게 그의 책 『산책자』(한겨레출판, 2017)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빌케 부인」의 한 단락이다. 셋방살이를 하던 집주인 할머니가 죽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오후에 주인공이 그녀의 텅 빈 방에 들어가 주인을 잃고 용도가 사라진 옷가지와 소지품을 바라보는 장면이었다. 이제 이 세상을 떠난, 하지만 자신에게 조금은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 집 주인 할머니가 텅 빈 방에 남기고 간 옷가지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생의 이면에 어른거리는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깊은 애수가 느껴졌다. 발저는 이 작품에서 한 번이라도 가난과 고독을 경험한 사람은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타인의 가난과 고독을 더 잘 이해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의 불행이나 고통, 그리고 타인의 무력함과 죽음을 조금도 덜어 주지 못하지만 최소한 타인을 이해하는 법이라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번에 읽은 두 권의 시집인 길상호의 『왔다갔다 두 개의』(시인의 일요일, 2024)와 박경희의 『미나리아재비』(창비, 2024)에서 자신과 타자가 체험을 통해 서로 응시하고 격려하는 장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비록 그 만남이 상처나 누추함에서 완벽하게 벗어나게 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그 만남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며 내가 아닌 우리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의 세계는 규율과 계획에 의해 설계된 대도시와는 멀리 거리를 두고 있다. 이들은 그것들에 의해 부서지고 상처 입은 시간들을 끌어모아 과거를 향해 아득한 시선을 던지고 있으며, 그 속에 삶의 절규가 살고 있음을 우리에게 각인시킨다. 길상호의 시집이 은둔자의 삶과 그 안의 고독의 심연을 빼어난 서정으로 보여 주고 있다면, 박경희의 시집은 ‘나’를 지운 자리에 ‘우리’를 들어앉히며 버려지고 상처 입은 과거가 사라진 것도 그 자체의 형상을 잃은 것도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의 감응으로 전해 준다. 우리는 이들의 시로부터 대도시에서 외면당하고 추방된 사물들이 간직한 최초의 움직임을 다시 만날 수 있으며, 그 사물들과 어우러진 장면과 추억들이 경이로운 생물과 마찬가지로 살아 움직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풍경과 마음의 혼융―길상호 시집 『왔다갔다 두 개의』 길상호 시의 특징 중 하나는 시에 나타난 풍경 묘사가 곧 시적 화자의 마음의 상태라는 점이다. 그는 언어의 연금술사처럼 풍경이 자기 존재가 되고 그 풍경 속에서 다시 자신의 존재가 무한하게 흩어지거나 확대되는 지점을 지극히 섬세한 감각으로 보여 준다. 난해하거나 복잡하지 않은 나직나직한 이미지의 단순성과 리듬으로 자신의 심정을 풍경화하는 그의 시는 주체와 타자가 분리되지 않는 말의 오묘한 상태에 닿아 있다. 겨울잠이 풀리고 강변의 진흙은 아가리를 벌린다 물안개가 만든 꿈속을 오래 어슬렁거리느라 진흙은 배가 고프다 진흙의 아가리에 침이 고이고 검고 부드러운 입술엔 어떤 밤이 뜯어 먹다 남긴 고라니의 앞다리 두 개가 물려 있다 두툼한 뒷다리 두 개는 더 먼 곳까지 가서야 피의 걸음을 놓았다 진흙은 이빨 없이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음미하면서 목마르게 끝난 짐승의 죽음을 소화시킨다 털과 가죽과 뼈와 발굽 고라니를 물가로 이끌던 아픈 육체 진흙의 아가리 속으로 두려웠던 시간이 긴 발자국 유서와 함께 서서히 사라진다 ―「진흙이 입을 벌릴 때」 전문 이 시의 화자는 언 강물이 풀린 초봄에 강변에 나와 있다. 화자는 얼었던 강이 녹으며 진흙으로 변해 버린 강변을 거닐며 주변의 풍경을 바라본다. 시에 물안개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직 완연한 봄이 온 것 같지 않다.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그래서 두 계절이 함께 있는 환절기가 이 시의 배경일 듯싶다. 이런 때일수록 남아 있는 추위가 더 춥게 느껴지면서도 또 한편으로 봄을 고대하는 심리 역시 상승하기 마련이다. 화자는 그 양가감정 속에서 강변에서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 물이 풀리며 강변은 녹기 시작한 진흙 덩이로 어수선한데 화자는 물안개가 걷히자 진흙 속에 고라니 사체가 빠져 있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진흙에 점점이 찍힌 고라니 발자국도 눈에 띈다. 아직 겨울의 냉기가 남아 있는데도 진흙은 볕에 풀리며 아주 천천히 고라니 사체와 발자국을 삼킨다. 이 시는 아마 위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을까 추측된다. 그러나 시 어디에도 ‘나’는 보이지 않는다. 황량한 강변의 초봄 아침에 진흙이 고라니의 사체를 삼키는 풍경 묘사를 감정의 동요 없이 객관적 시 쓰기로 전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 시를 읽으면 시인의 마음이 보인다. 안타깝고 슬픈 장면인데 이상하게 평안하고,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내적으로 힘찬 생명력이 느껴진다. 시인은 겨울에 다른 짐승들에게 사냥당할 위기에 처한 고라니가 본능적으로 물가까지 도망치다가 강물 위에 얼어붙은 채로 죽어 있던 사건과 봄이 되어 진흙이 풀리면서 고라니가 그 속으로 빠져드는 장면을 담담하게 전달한다. 그러나 이 시를 끌고 가는 주체가 진흙만은 아니다. 이 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 읽을 수 있다. 첫 번째는 겨울을 견딘 진흙이 녹아 가는 과정을 “물안개가 만든 꿈속을 오래 어슬렁거리”다가 “아가리”를 벌리는 것으로 시작하여 육식성이 부여된 진흙이 “검고 부드러운 입술”로 “어떤 밤”에 사냥당하여 갈가리 찢긴 채 죽은 고라니의 앞다리 두 개를 삼키는 장면까지이다. 여기까지는 진흙이 시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고라니의 앞다리 두 개가 물려 있다”의 뒤에 다른 연으로 분리된 “두툼한 뒷다리 두 개는 더 먼 곳까지 가서야/ 피의 걸음을 놓았다”에서 주체가 고라니로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냥을 당해 갈가리 찢긴 고라니는 앞다리 두 개를 진흙 앞에 걸치고 있지만, 마치 강 저편으로 던져진 듯이 두툼한 뒷다리 두 개는 강물 위에 “피의 걸음”을 흩뿌려 놓고 있다. 진흙은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끝난 생명을 아주 천천히 음미하면서 소화한다. 그런데도 강물에 얼어붙은 채로 털과 가죽과 뼈와 발굽으로 형해화된 고라니는 자신이 언 강가에 피와 함께 남긴 발자국을 유서처럼 간직한 채 왕성하게 입을 벌리는 봄기운이 맹렬하게 싹트는 진흙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결혼식에 갈 땐 로션을 장례식엔 스킨을 조금 발라주세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함께 행진하는 날엔요? 그런 날은 좀체 없다니까요, 아, 저에겐 그런 날뿐인걸요 ―「로션과 스킨」 부분 대야에 비친 자신을 사랑하세요, 다른 얼굴이 보여도 그냥 주워 사용하세요, 미끄러운 날은 금방 지나갈 거예요. ―「이거 좋은 거예요」 부분 이정현의 시집 해설에 따르면 길상호의 이번 시집은 심한 병증 가운데 씌어졌다고 한다. “피 한 방울로 다 알 수 있어요”(「혈당검사 수첩」)라는 시행이 말해 주듯, 길상호 시인은 면역 체계가 흐트러지는 원인 불명의 병에 걸리면서 매일 약을 먹어야 하고, 책을 읽을 수도 없고, 하루에도 세 번 혈당 수치를 재야 한다고 한다. 이 시집에는 그러한 임상 기록을 담은 시편들, 함께 살던 여러 마리의 고양이를 떠나보낸 사연과 “남은 고양이 꽁트”(「시인의 말」) 등 자신의 병적 기록과 함께 주변 사람들과 반려동물에 대한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용한 「로션과 스킨」은 로션과 스킨이라는 메타포를 이용해 삶과 죽음이라는 특징을 결혼식과 장례식으로 드러내면서 죽음과 삶이 함께 행진한다는, 그 양자를 넘나들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한다. 또 「이거 좋은 거예요」에서는 아픈 삼촌을 위해 비누를 사 온 조카의 말을 통해 “대야에 비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이 무엇인지를 간접적이지만 나직하게 전해 준다. 아마도 시인은 조카가 선물한 비누로 아침마다 얼굴을 씻으며 대야의 물속에서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자신의 모습과 조우할 수 있으리라. 시집의 마지막 시편에 나타나듯 절망이 우리를 ‘빗에 사이사이 끼는 때’처럼, “저 수심 깊은 대야”에 던져 버리려고 하더라도 삶의 책은 “페이지가 차르륵 젖어 더는 읽을 수 없더라도, 포스트잇으로 표시를 해 두었으니”(「독서는 금지」) 언제든 다시 이어 갈 수가 있다. 하여, 나는 시인이 「진흙이 입을 벌릴 때」에서 진흙 속으로 사라진 고라니의 “긴 발자국 유서”를 절망을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로 읽으며, 당신은 멀리 있지만 “우리라는 말이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이도 저도 아닌 것들」)라는 따뜻한 말과 시로 다시 뜨겁게 이어져 가고 있다고 믿는다. 시로 쓴 마을사―박경희의 시집 『미나리아재비』 박경희의 『미나리아재비』를 즐겁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읽었다. 아니, 반대로 안타까웠지만 즐겁게 읽었다고 해야 되리라. 박경희의 시집에는 토속어나 순우리말이 시 중간중간에 별처럼 박혀 있어 시를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예를 들어 한 행으로 된 시 “사그랑이 된 바구니는 굴러다니고 기스락물이 깍짓동에 떨어진다”(「그렇게라도 짖어보는 것이다」)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삭아 버린 바구니가 굴러다니고 낙숫물이 참깨나 콩대를 묶은 깍짓동에 떨어진다는 뜻일 게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시를 표준화하고 의미화시키면 원래의 시행이 가지고 있던 살아 움직이는 말맛이 사라져 버린다. 이 시집을 읽으며 모르는 토속어가 나오더라도 굳이 사전을 찾아가며 읽을 필요가 없다. 이 시집의 가장 큰 장점은 사람들 속에서 살아 있는 말들과 이야기이며, 그리고 그 말과 이야기가 어우러져 이뤄 낸 한 마을의 아득하고 신화적인 풍경이 살냄새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데에 있다. 박경희 시인은 우리가 모르는 말들, 사라져 가는 풍경들을 붙잡고 수집해 그것을 사유하고 이야기로 만들며 절대 잊히지 않는 살아 있는 이미지의 마을사로 창조한다. 책 속에 박제되어 시를 위한 시에 그치고 마는 이미지가 아닌, 책 속에서 걸어 나와 이미지가 삶이 되고 이야기로 번져 가는 진경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때로는 그렇게 태어난 시가 너무나 능청스러워 다음 시에 나오는 할머니처럼 읽는 동안 얼굴이 살짝 붉어지기도 한다. 저승 물길 헤치며 이승으로 돌아오다가 육지 문턱에서 쓰러졌다 부여잡은 가슴에 갈고리달이 박혔는지 뽑히지 않았다 파도가 일 때마다 세상 온갖 별이 눈물로 흥건했다 울컥울컥 올라오는 바닷물을 토하며 새삼 물질하던 당신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옴마, 살았네 살았어 저승 돈 벌어 온다더니 저승 갈 뻔했다고 영감 죽은 지 십 년 만에 남정네와 입 박치기 했다는 말에 얼굴 벌게지던 할머니가 웃으며 병원 차 타고 갔다 바다가 잠시 숨 멈춘 순간이었다 ―「바다, 잠시 숨을 멈추다―구룡포 해녀들의 숨비」 전문 박경희의 이번 시집은 위의 시가 보여 주듯 죽음과 또는 죽음 근처까지 간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해학스럽지만 감칠맛 있게 전해 준다. 슬픈데 웃음이 나오는, 웃음이 나오는데 슬픈 이야기들이 서로 어우러져 어떤 순간에는 손에 땀이 배기도, 농사꾼을 홀대하는 사회에 화가 치밀기도, 그러다가 서로의 마음을 가만가만 짚어 주는 따스함에 슬픔이나 분노가 눈 녹듯이 사라지게 한다. 위 시만 해도 그렇다. 아마, 이 시를 영화로 옮긴다면 할머니 해녀가 저승 돈 벌어 온다고 물질하다가 그만 심장에 이상이 생겨 젊은 구조대원으로부터 인공호흡을 받는 장면에선 그것을 지켜보는 동네 사람처럼 우리들도 숨도 못 쉬고 가슴을 졸였을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가 깨어나자마자 환호성이라도 지를 듯 “옴마, 살았네 살았어” 하면서 “영감 죽은 지 십 년 만에/ 남정네와 입 박치기 했다”고 동네 사람들이 놀리는 장면에선 우리들도 신나서 박수를 쳤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인 바닷속에서 죽었다 살아 나온 할머니가 그만 그 소리에 얼굴이 빨개졌다가 웃으며 병원 차를 타고 가는 모습에서 우리는 비극일 수 있는 사건이 해학으로 바뀌는 살아 있는 입말의 마술적인 힘에 감탄했을 것이다.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는 귀족의 화려한 파티에 참석했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강풍이 몰아쳐서 집이 순식간에 무너져 사람들이 죽게 되자, 대리석이나 돌 더미에 깔려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죽은 자들의 이름을 그들이 앉았던 자리를 기억해 내어 하나하나 호명하며 시를 짓고 시체의 주인을 찾아 주었다고 한다. 그는 파티 풍경을 한 장의 그림으로 기억 속에 간직했던 것이다. 그는 이후 기억의 시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시모니데스에게 시란 ‘이야기하는 그림’이다. 박경희의 이번 시집에서 만나게 되는 것도 이 ‘이야기하는 그림’이다. 그의 시는 위의 시에서처럼 매우 쉬운 말과 친근한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그런 이야기를 한 장의 사진처럼 이미지에 압축해서 빼어난 서정의 구조로 들어앉힌다. 그래서 시의 주어가 ‘나’가 아니라 ‘우리’가 된다. 특히 제2부의 시편들은 “동네 막내 강 씨 아저씨”(「동네 막네」)가 환갑을 넘을 정도로 도회지와 단절된 마을에서 코로나 팬데믹으로 마을 사람들 모두가 ‘마스크’를 써야 하는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보여 준다. “오디에도 역병이 보이지 않는”데 마스크를 써야 하고 매달릴 사람이 전부 다 이승에 없어, “그저 무탈하게 지나가길 바랄 뿐 뭐가 있간 에휴, 참말로 지랄맞은 세상이여”(「워쩌겄어」)라는 마을 노인의 체념과 한탄에서 우리 농촌 현실의 적나라한 실상과 마주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마을은 할아버지가 글을 몰라도 서울로 병 고치러 간 아내 소식이 궁금하여 ‘소 다섯 마리 그림’(「오소」)을 그려 편지로 보내면 그걸 받고 할머니가 소 걱정으로 애가 달아 금세 내려오는 곳이다. 서로 간에 이심전심이 통하는 곳이며, 자신이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할아버지의 능청이 글이나 인터넷보다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곳이다. 마루에 앉아 머윗대 껍질을 벗기면서 저승 갔으면 그쪽 세상에서 잘 살 일이지 이승은 왜 들락거리느냐고 보이지도 않는 분 타박이다 살았을 적에 그리 모질게 마음고생시키더니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이승 문턱을 넘느냐고 사발째 욕을 퍼붓는데 옆에 있던 내가 슬금슬금 비키니 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제집만 들락거렸다. ―「꿈자리」 부분 어머니의 꿈에 아버지가 나타나자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인데도 남편을 타박한다. 살았을 적에도 그렇게 마음고생을 시키더니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이승의 문턱을 넘느냐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슬금슬금 마루에서 비켜나자 마루 밑에선 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제집만 들락거리며 안절부절이다. 죽은 사람조차도 잘못하면 타박을 받고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걱정하는, 자연의 생명과 사람이 한데 이어진 이곳은 현대인들에겐 아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세계일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전설 같기도 하고 신화 속 같기도 한 그 세계가 무너져 가더라도 그 큰 몸집을 지탱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안간힘으로 받쳐 든 벽에 선명하게 찍힌 손자국”(「손자국」) 같은 결기 어린 모습으로 우리들의 이야기를 선명한 그림처럼 들려주고 있다.
수많은 노래는 한 사람의 울음에서 시작되었다 고(故) 신경림 시인을 추모하며 1. 1970년대 민중시와 『농무』의 발견 창비시선 500번을 기념하는 특별시선집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신경림 외 지음, 창비 2024)이 올해 3월 출간되었다. 이 시선집 제목은 신경림의 시 「그 여름」에서 따온 것이다. 한 사람의 울음이 온 마을에 울음을 불러오고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고을에 노래를 몰고 왔다 구름을 몰고 오고 바람과 비를 몰고 왔다 ―「그 여름」(『농무』) 부분 온 거리에 울려 퍼지는 ‘노래’는 ‘한 사람의 울음’과 ‘한 사람의 노래’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노래는 구름과 바람과 비를 몰고 오면서 사람뿐 아니라 천지만물에 가닿았다. ‘울음’과 ‘노래’가 지닌 이러한 확장력을 떠올려볼 때, 신경림의 『농무』(창작과비평사 1975)가 50년을 이어온 창비시선의 출발점이었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1970년대 중반은 『창작과비평』이 시민문학론에서 민족문학론으로의 전환을 모색하면서 민중시의 새로운 모델을 필요로 하던 시기였다. 『농무』의 발문에서 백낙청은 시집 『농무』의 완성을 “민중적 경사”라고 말하며 “그의 많은 작품들은 리얼리스트의 단편소설과도 같은 정확한 묘사와 압축된 사연들을 담고 있는 동시에 민요를 방불케 하는 친숙한 가락을 띠기도”1) 한다고 상찬했다. 1960년대 김수영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던 그가 “민중이 잘 알 수 없는 ‘난해한’ 문학”2)을 경계하며 난해하지도 저속하지도 않은 시의 미덕을 신경림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1974년 『농무』가 제1회 만해문학상 수상작이 된 것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염무웅은 신경림 시의 민중성이 ‘체험적 현실’에서 나왔음에 주목하고, “자기 현실과의 정직하고도 치열한 대결을 통해 위장하거나 은폐되지 않은 민중 자신의 목소리가 긴밀한 시적 형상을 획득”3)했다고 보았다. 신경림은 이처럼 농촌의 현실을 구체적이고 핍진한 언어로 그려낸 시뿐 아니라 「농촌현실과 농민문학」 「문학과 민중」 등의 평론을 발표하며 농민문학론을 개진하기도 했다. 1970, 80년대는 신경림을 비롯해 이성부, 조태일, 김지하, 정희성, 이시영, 김준태, 김남주 등이 민중시의 새로운 방향성을 만들어나간 시기였다. 이러한 흐름의 첫 물꼬를 튼 시집이 바로 신경림의 『농무』였다. 2. 노래와 이야기, 시의 씨줄과 날줄 염무웅의 「무엇이 민중성의 시적 구현을 가능하게 하는가」는 『농무』가 출간된 지 30년 만에 이 시집의 역사적 위치를 한층 넓은 원근법 속에서 읽어낸 글이다. 그는 한국시가 지닌 민중성의 사회사적 근거와 맥락을 밝히면서 신경림 시의 독특한 화법과 시언어의 조직원리를 분석한다. 먼저 「그날」에 대해서는 “고도의 정치적 비판을 함축하고 있으”면서도 시의 화자가 직접 드러나지 않은 채 “순차적으로 카메라 앵글을 돌리는 장면화(場面化)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미장센 구성에 성공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한행을 하나의 율격 단위로 할 때 3음보의 율격을 지닌 「그날」과 4음보의 율격을 지닌 「경칩」이 율격이나 분위기가 사뭇 다르지만, “엄밀하게 계산되고 통제되는 구심적 조직”4)을 지녔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러한 분석은 농촌이라는 소재와 민중성이라는 주제, 인물의 정동을 중심으로 『농무』를 이해해온 기존의 관점을 시의 구성원리나 재현방식 등으로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유종호는 「서사 충동의 서정적 탐구」에서 신경림 단시의 특징을 “서정적인 주조에 서경(敍景)이 추가되고 그 속에 서사(敍事)적 충동을 내장하고 있”5)다고 설명했다. 그는 신경림의 시적 성취가 서정성과 서사성의 균형에서 비롯되었다며 선행 시편들의 전통 속에서 『농무』의 문학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농무』의 시들이 생활의 실감과 시어의 평면성으로 1950년대 모더니즘 계열 시편의 난해성을 산뜻하게 극복했을 뿐 아니라, 가난한 삶에 대한 결곡한 정감과 간결한 서경을 통해 추상적 구호와 격문에 가까운 현실주의 생활 시편의 전통 역시 넘어섰다는 것이다. 신경림의 시에서는 서정과 서사, 노래와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이며 절묘한 균형을 이룬다. 특히 신경림의 전기시에서 ‘이야기’의 산문성을 견제해내는 ‘노래’의 형식이란 주로 ‘민요’의 계승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민요적 정서’와 ‘정형(定型)에의 의지’가 긍정적 효과만 가져왔던 것은 아니다. 염무웅의 지적처럼 “민요는 김소월에게 있어 그러하듯이 신경림의 문학에 있어서도 창조성의 발현을 구속하는 억압이자 모국어가 지닌 가능성의 최대치로 인도하는 통로인 양날의 칼”6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음수율과 음보율, 행의 배치 등이 규칙적으로 분절된 시보다는 규칙성을 일부 허물거나 시행을 어긋나게 배치한 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헐거나. 술에라도 취해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다오 우리를 파묻어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편지라도 띄워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볼거나. ―「겨울밤」(『농무』) 전문 『농무』 첫머리에 있는 이 시는 ‘겨울밤’과 ‘새하얀 눈’을 대비하면서 농민들의 체념과 울분을 실감있게 전달하고 있다. ‘어떡헐거나’ ‘취해볼거나’ ‘맡아볼거나’ ‘쳐볼거나’ ‘먹여볼거나’ 등 반복되는 종결어미는 각운의 역할을 대신하며 ‘우리’의 정서를 리드미컬하게 변주해낸다. 시인은 이러한 종결어미의 반복으로 읽기의 유창성을 만들어내는 한편, 중간중간에 시행을 일반적인 호흡과 어긋나게 배치함으로써 의미를 낯설게 하거나 정서적 긴장감을 조성한다. 3행과 4행, 5행과 6행, 9행과 10행, 11행과 12행, 19행과 20행, 20행과 21행, 24행과 25행 사이에 나타난 주어부와 술어부 또는 수식어와 피수식어의 행갈이가 그런 예들이다. 마침표의 잦은 사용이나 단어의 도치 등도 행과 행 사이에 단속적 흐름을 만들어낸다. 단어나 시행을 엇갈리게 배치하는 앙장브망(enjambement) 기법은 「겨울밤」 외에도 「시골 큰집」 「원격지」 「씨름」 「산1번지」 「이 두 개의 눈은」 「1950년의 총살」 「장마 뒤」 「산읍일지」 「산읍기행」 「갈대」 「묘비」 「심야」 「유아」 「사화산·그 산정에서」 「추방」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누군가」 등 상당히 많은 시들에 나타난다. 이것은 김수영의 후기시에서 연의 길이를 균질하게 하는 대신 앙장브망을 통해 시행 사이의 불규칙성을 강화하던 것7)과 유사한 방식이다. 신경림 역시 행과 연을 단위로 리듬의 규칙성과 불규칙성을 탄력적으로 조율하고 변주함으로써 정서나 의미를 섬세하게 표현해낸다. 이러한 모더니스트적 면모는 신경림을 단순한 민중시인, 민요시인으로 이해하는 것을 재고하게 한다. 1973년에 이루어진 한 좌담에서 백낙청은 신경림의 시가 서사성과 지적 콘트롤이 강하고 현대적 언어감각을 지녔다는 점에서 신동엽보다는 김수영과 친연성이 강하다고 말한다.8) 시인 자신도 나중에에는 “민요와의 접목은 내 시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고 “내가 민요에 집착한 80년대 전 기간이 내게는 시 쓰기가 가장 어렵고 지루한 시절”9)이었다고 회고했다. 신경림 시에서 민요 가락이 집중적으로 나타난 것은 『새재』(창작과비평사 1979)와 『달 넘세』(창작과비평사 1985), 그리고 장시집 『남한강』(창작과비평사 1987)에서다. 『민요 기행』 1, 2권(한길사 1985, 1989)이 나온 것도 이 세 시집이 출간된 시기와 거의 겹친다. 이 무렵 신경림은 민요를 찾아 채록하면서 전통적 민예 양식의 시적 가능성을 탐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노력이 집대성된 『남한강』에서 시인은 서정적 단시의 서사성을 한편의 장편서사시로 확장하면서 민요의 리듬을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신경림이 민요적 정서나 형식에 대한 중압감에서 자유로워진 것은 기행시집 『길』(창작과비평사 1990)을 펴낸 이후였다. 『길』까지는 여전히 「정선아리랑」 「산유화가」 등 민요를 제목으로 삼은 시가 보이고, 민요 기행에서 만난 노래꾼을 포함해 다양한 인물과 장소를 담고 있다. 그러나 민요적 후렴구의 기계적 반복이나 정형화된 리듬의 강박으로부터는 한결 자유로워진 듯하다. 인물서사가 주를 이루고 있긴 하지만, 『길』의 거의 모든 시에 붙어 있는 부제들은 다양한 장소성을 보여준다. 『신경림 시전집』 1권은 『길』로 끝나고 2권은 『쓰러진 자의 꿈』(창작과비평사 1993)으로 시작된다. 이 두 시집의 제목처럼 신경림의 후기시는 ‘길’ 위에서, ‘쓰러진 자의 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3. 길 위에서 부르는 노래와 시의 장소성 2000년대 이후 신경림에 관한 연구에서 가장 두드러진 주제는 ‘장소성’이다.10) 『농무』의 장소성이 농촌, 장터, 공사장, 폐광 등을 중심으로 한다면, 시인이 서울로 이주한 뒤 펴낸 시집들에서는 산동네, 수몰지역, 휴전선 등의 장소성이 두드러진다. 『쓰러진 자의 꿈』 이후로는 특정 장소를 부제로 밝혀둔 기행 시편이 많고, 부제가 없더라도 여행 중에 만난 풍경이나 사람의 비중이 커진다.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신경림의 전기시가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향(離鄕)’과 공동체의 상실을 다루고 있다면, 후기시는 지방 또는 해외로의 ‘기행(紀행)’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늘 떠나면서 살았다, 집을 떠나고 마을을 떠나면서. 늘 잊으면서 살았다, 싸리꽃 하얀 언덕을 잊고 느티나무에 소복하던 별들을 잊으면서. 늘 찾으면서 살았다, 낯선 것에 신명을 내고 처음 보는 것에서 힘을 얻으면서, 진흙길 가시밭길 마구 밟으면서. ―「나의 신발이」(『낙타』) 부분 신경림의 기행시는 단순한 유랑이나 관광의 기록과는 거리가 멀다. 그에게 떠남이란 익숙한 것을 잊고 낯선 것을 찾아나서는 ‘탐구의 행위’다. 이와 동시에 상류를 향해 가는 연어처럼 “떠난 것을 그리워하고 잊은 것을 그리워하면서”(「나의 신발이」) 본원적인 시간과 장소를 되찾아 나서는 ‘회귀의 여정’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신경림의 기행시는 미셸 푸꼬(Michel Foucault)가 말한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를 지향한다. 푸꼬는 현실화된 유토피아적 장소를 ‘헤테로토피아’라고 불렀다. 없는(u) 장소(topia)라는 뜻의 ‘유토피아’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헤테로토피아를 제시한 것이다. 유토피아가 실재하지는 않지만 균질한 언어와 질서를 지닌 상상적 공간이라면, 반대의(hetero) 장소(topia)라는 뜻의 헤테로토피아는 모호하고 혼란스럽고 비균질적이지만 실재하는 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헤테로토피아는 일상의 배치와는 다른 ‘바깥의 공간’이자 현실을 전복하는 ‘반(反)공간’이다.11) 엄경희는 “산업화로 인한 농촌붕괴를 ‘경관훼손’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고 “고향의 장소성에 내재된 헤테로토피아적 전망을 아이들의 장소점유방식을 통해”12) 분석했다. 『농무』부터 『쓰러진 자의 꿈』까지는 기행의 장소가 주로 국내에 한정되었다면,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창작과비평사 1998)에서는 중국, 베트남, 일본 등의 기행 시편들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반추한다. 『뿔』(창작과비평사 2002)『낙타』 『사진관집 이층』(창비 2014)에서는 그의 발길이 아시아뿐 아니라 몽골, 네팔, 튀르키예를 넘어 프랑스, 미국, 콜롬비아 등 세계 곳곳으로 향한다. 연보를 살펴보니, 신경림은 1993년(58세)에야 출국금지가 풀려 해외에 나갈 수 있게 되었고, 그의 시집이 프랑스어판, 영어판, 독일어판 등으로 번역 출간되면서 현지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경을 넘어 세계화의 현장을 폭넓게 목도하면서도 그는 줄곧 한국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떠올린다. 첫날은 날뛰는 미국 사람들이 무서워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연 지 얼마 안된다는 중동인이 경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양고기로 점심을 먹고, 둘째날은 자동차 산업의 몰락으로 유령도시가 된 디트로이트 살리기 운동을 펼치는 키가 큰 젊은 흑인을 만나 하이델베르크 프로젝트를 듣고, (…) 넷째날은 한국 절을 찾아가 부처님 앞에 예불을 드리고, 선거에서 대승한 부시의 오만한 얼굴을 텔레비전에서 보면서, 침방울을 튀기며 이라크 공격을 반대하는 한국서 군복무를 마쳤다는 젊은이와 한나절을 동행하면서, 장갑차에 깔려죽은 어린 우리나라 여중생 얘기를 하고. ―「미국기행」(『낙타』) 부분 미국 미시건을 여행 중인 화자는 첫째날부터 넷째날까지의 여정을 언급하면서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들려준다. 특히 둘째날 만난 “디트로이트 살리기 운동을 펼치는/키가 큰 젊은 흑인”과 넷째날 만난 “이라크 공격을 반대하는/한국서 군복무를 마쳤다는 젊은이”는 화자와 경계인으로서의 위치를 공유하는 인물들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과는 “장갑차에 깔려죽은 어린/우리나라 여중생”에 대해 얘기를 나눌 수 있다. 부시의 압도적 승리와 이라크전쟁 등 세계사의 착잡한 위기상황 또한 시인의 여정에 기입되어 있다. 이때 화자는 세계사의 중심도 주변도 아닌 ‘반(半)주변인’13)의 위치에 서 있다. 신경림의 기행시에서 화자의 시선이 주로 머무는 곳은 자본주의와 세계화가 만들어낸 균질화된 공간이나 화려한 장관이 아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학살당한 사람들의 수천수만켤레 신발들이 쌓여 웅성웅성 떠들고 있”(「신발들」, 『사진관집 이층』)는 소리를 듣거나, 캄보디아에서 “함지박 배를 저어 관광선을 따라오며 원 달러 하고 내미는 소년의 손”(「위대한 꿈」, 『사진관집 이층』)이 시인의 눈과 마음에 더 깊이 들어와 박힌다. 베트남 전쟁박물관에서 “제국주의자들이 버리고 도망간/흉측한 장갑차”를 보며 “호주머니 속에서/일달러짜리 지폐를 거머쥔/내 손”(「전쟁박물관」,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이나, 코카 비치에서 휴양객들을 실어 나르고 “달러를 받아쥐는/씨클로꾼들의/땀에 절은 야윈 손”(「코카 비치」,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이나 무력하게 젖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런가 하면 콜롬비아의 도시 메데진에서 산비탈에 달라붙은 움막집들과 케이블카로 그곳을 오르내리는 초췌한 사람들을 보며 화자가 떠올리는 것은 “물지게를 지고 비탈을 올라오던” “아내의 맨발”(「누군가 보고 있었을까, 아내의 맨발을」, 『낙타』)이다. 이처럼 반주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로컬과 주변부의 삶이야말로 신경림이 『농무』 이후로 일관되게 함께해온 가난하고 소외된 존재들의 것이다. 시에 포착된 주변부와 주변인이 대상화되지 않고 자연스러운 공감을 주는 것은 시인이 자신을 그 존재들의 일부로 또는 혈육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먼 나라의 이국적 풍물 앞에서도 한국의 아픈 현실을 떠올리는 시인은 떠남으로써 돌아오고, 잊으려 함으로써 더 생생한 기억에 도달하는 역설을 경험하게 된다. 4. 역사공동체에서 생태공동체로 후기시의 출발점인 『쓰러진 자의 꿈』은 1990년대 동구권의 몰락 이후 변화된 세계에 대한 시인의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한두연으로 된 단시가 많고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역사공동체에서 생명공동체로의 확장이 이 시집부터 시작되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신경림 시에 나타난 생태주의적 인식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편이다. 그런 점에서 ‘평등적 관계성’ ‘자발적 생성과 상호부조’ ‘자유 자연의 지향’ 등을 키워드로 신경림의 생태주의적 사유를 해명한 김동명의 논문은 주목할 만하다.14) 다만, 미국의 사회이론가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의 사회생태주의적 관점이나 아나키즘 등을 이론적 논거로 삼아 인간의 윤리적 역할을 강조하다보니 인간중심주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듯하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길」(『쓰러진 자의 꿈』) 부분 『쓰러진 자의 꿈』의 첫머리에 실린 「길」에서 시인은 사회 변혁의 과정 속에 내재한 인간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다. 이 시의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이라는 대목에서 그의 시선이 사회나 역사 못지않게 인간 내면을 향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내적 성찰의 매개가 되는 것은 주로 자연물이다. 이 시집의 시 제목들만 일별해 보아도 냇물, 장미, 비, 파도, 싹, 겨울숲, 홍수, 아카시아, 임진강, 진달래, 진드기, 소백산의 양떼, 초승달, 난장이패랭이꽃, 오랑캐꽃, 별, 가을비, 새벽눈, 홰나무 등 다양한 자연물들로 되어 있다. 이제 자연은 인간의 욕망과 폭력을 되비추는 거울이자, 인간의 도움 없이도 생태적 질서와 공동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생명의 주체로 등장한다. 여든까지 살다 죽은 팔자 험한 요령잡이가 묻혀 있다 북도가 고향인 어린 인민군 간호군관이 누워 있고 다리 하나를 잃은 소년병이 누워 있다 등너머 장터에 물거리를 대던 나무꾼이 묻혀 있고 그의 말더듬던 처를 꼬여 새벽차를 탄 등짐장수가 묻혀 있다 청년단장이 누워 있고 그 손에 죽은 말강구가 묻혀 있다 생전에는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이들도 있다 부드득 이를 갈던 철천지원수였던 이들도 있다 지금은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묵뫼 위에 쑥부쟁이 비비추 수리취 말나리를 키우지만 철 따라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으면서 뜸부기 찌르레기 박새 후투새를 불러 모으고 함께 숲을 만들고 산을 만들고 세상을 만들면서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묵뫼」(『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전문 「묵뫼」에서도 인간의 죽음은 역사적 비극을 환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묵뫼가 피워낸 쑥부쟁이, 비비추, 수리취, 말나리, 그리고 꽃과 열매를 찾아 날아든 뜸부기, 찌르레기, 박새, 후투티 이 모두가 ‘생태공동체’의 구성원들이다. 이처럼 자연과 인간을 유기적 관계성 속에서 바라보게 된 것은 『농무』에 나타난 역사공동체가 생태공동체의 발견으로 이어진 결과다. 이러한 변화는 신경림뿐 아니라 1990년대 이후 한국시 전체에서 관찰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1980년대가 노동시·농민시·교육시 등 계층과 이념의 동질성을 바탕으로 한 집단적 발화가 활발하게 제기된 시대였다면, 1990년대는 집단에서 개인으로, 이념에서 감각으로 중심이 옮겨오면서 사회적 이상이나 공동체적 기반은 약화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단순히 공동체의 축소나 단절이라기보다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모색의 계기”15)였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뿔』 『낙타』 『사진관집 이층』 등 후기로 갈수록 환경오염의 폐해를 언급하며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는 시들이나 생태공동체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시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봄이 되어도 꽃이 붉지를 않고 비를 맞고도 풀이 싱싱하지를 않다. 햇살에 빛나던 바위는 누런 때로 덮이고 우리들 어린 꿈으로 아롱졌던 길은 힘겹게 고개에 걸려 처져 있다. 썩은 실개천에서 그래도 아이들은 등 굽은 고기를 건져올리고 늙은이들은 소줏집에 모여 기침과 함께 농약으로 얼룩진 상추에 병든 돼지고기를 싸고 있다. (…) 우리는 안다, 썩어가고 있는 곳이 내 나라만이 아니라는 것을. 죽어가고 있는 것이 내 땅만이 아니라는 것을. 저 시베리아의 얼음벌판에 내리는 눈에도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산이 섞여 있고 아프리카 깊은 원시림 외진 강에서도 눈이 하나뿐인 고기가 잡힌다는 것을. 미시시피 강가의 한 마을에서는 목뼈가 없는 아기가 줄이어 태어나고 외국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옛날엔 천국이 따로 없다던 남태평양의 섬에서도 에이즈와 암으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부분 “봄이 되어도 꽃이 붉지를 않고/비를 맞고도 풀이 싱싱하지를 않다”라는 도입부는 자연의 생기나 아름다움이 예전 같지 않고 순환적 질서 또한 깨졌음을 의미한다. 이어지는 시행에서도 “썩은 실개천” “등 굽은 고기” “기침” “농약으로 얼룩진 상추” “병든 돼지고기” “화약냄새” “가스냄새” 등 생활 깊숙이 배어든 환경오염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안다”로 시작하는 4연에 이르면, 썩어가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 내 땅만이 아니라 “시베리아의 얼음벌판에 내리는 눈” “아프리카 깊은 원시림 외진 강” “미시시피 강가의 한 마을” “남태평양의 섬” 등 세계의 극지까지 미치고 있음을 화자는 환기한다. 뒤이어서 지구를 언제 “잿더미로 만들지 모를 핵”의 위험을 “어리석은 불장난”에 비유하며 비판하기도 한다. 환경오염이나 기후위기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지구적 파국을 예감하면서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이 지구는 죽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땅 내 나라, 아니 온 세계가 이제 단숨에 흔적도 없이 날아가버릴 마침내 그 벼랑에까지 와 서 있다.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부분 5. 다시, 떠도는 자의 노래가 되어 들머리에서 인용한 「그 여름」은 “한 사람의 죽음이/온 나라에 죽음을 불러왔지만”이라는 구절로 끝난다. 이 역접의 마지막 문장은 완료되지 않았기에 다시 첫머리의 “한 사람의 울음”으로 연결되며 삶과 죽음의 순환 앞에 우리를 데려다놓는다. 지난여름 우리는 ‘신경림’이라는 “한 사람의 죽음”을 겪었다. 2024년 5월 22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시인의 빈소에는 수많은 추모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문학적 진영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시의 아버지’를 잃은 듯 애도했다. 추모사를 읽는 이들은 그가 한국시단의 거목이었지만 권위의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겸손함과 솔직함으로 누구나 평등하게 대해주었다고 입을 모았다. 그리고 평생 힘없고 가난한 이들의 편에서 소박한 생활감정을 노래하면서도 새로운 세계에 대한 탐구와 미학적 긴장을 놓치지 않았던 시인이었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래도 쓰러지고 깨지는 것들 속에 서 있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차피 시는 괴롭고 슬픈 자들, 쓰러지고 짓밟히는 것들의 동무일진대 이것이 크게 억울할 것은 없다. 최근 나는 시는 궁극적으로 자기탐구요 시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많이 하지만, 쓰러지는 자들, 짓밟히는 것들의 상처와 아픔을 어루만지고 흩어지는 것들, 깨어지는 것들을 다독거리는 일, 이 또한 내 시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16) 『쓰러진 자의 꿈』 후기를 읽어보면, 신경림의 시에 짓밟히고 고통받는 존재들의 울음소리가 왜 그토록 끊이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신경림 시인은 평생을 ‘우는 자’ ‘떠도는 자’로서 살았다. 그의 울음과 발길은 수많은 노래를 낳았고, 온 마을과 온 거리에 다른 노래들을 불러왔다. 신경림은 70년에 가까운 시력(詩歷)으로 한국 현대시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 곡진한 노래의 굽이와 갈피를 제한된 지면에서 충분히 다룰 수는 없지만, 길 위에 남아 있는 무수한 시의 발자국들을 떠올려본다. 그것은 낯설고 새로운 것을 찾아나선 자가 발견한 기록이자, 세상 저편에 놓고 온 무언가를 향한 그리움의 노래였다. 시인은 자신의 예언처럼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떠도는 자의 노래」, 『뿔』) 모르겠다. 애통하게도 그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신경림의 시와 정신을 기억하는 한 우리는 그가 사랑한 장소들, 좁은 골목이나 저잣거리, 쓸쓸한 나룻가에서 그의 노랫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시인은 ‘떠도는 자의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이기에.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떠도는 자의 노래」 전문1) 백낙청 「발문」, 신경림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114~15면.2) 백낙청 「문학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창작과비평』 1973년 여름호, 456면.3) 염무웅 「민중의 삶, 민족의 노래」, 구중서·백낙청·염무웅 엮음 『신경림 문학의 세계』, 창작과비평사 1995, 72면.4) 염무웅 해설 「무엇이 민중성의 시적 구현을 가능하게 하는가」, 『신경림 시전집』 1권, 창비 2004, 423~24, 426면.5) 유종호 「서사 충동의 서정적 탐구」, 『신경림 문학의 세계』, 57면.6) 염무웅, 앞의 글 428면.7) 김수영의 전기시와 후기시에 나타난 리듬구조의 변화에 대해서는 졸고 「김수영 시의 리듬구조에 나타난 행과 연의 문제」, 『현대문학의 연구』 제37호, 2009 참조.8) 김우창·김종길·백낙청 좌담 「시집 『농무』의 세계와 한국시의 방향」, 『백낙청 회화록』 1권, 창비 2007, 74~75면.9) 신경림 산문 「나는 왜 시를 쓰는가」, 『낙타』, 창비 2008, 125면.10) 신경림 시의 장소성에 대한 연구로는 송지선 「신경림의 『농무』에 나타난 장소 연구」, 『국어문학』 제51집, 2011; 강정구·김종회 「문학지리학으로 읽어본 1980년대 신경림 시의 장소」, 『어문학』 제117집, 2012; 박순희·민병욱 「신경림 시의 장소 연구」, 『배달말』 제54호, 2014; 송지선 「신경림 시에 나타난 장소 재현의 로컬리티 연구」,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64집, 2014; 고재봉 「신경림의 「농무」 계열 시에 나타난 장소성과 축제의 의미」, 『문학치료연구』 제49집, 2018; 조효주 「신경림 시의 장소 상실과 현실인식 연구」, 『한민족어문학』 제87호, 2020; 조효주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노래』에 나타나는 장소와 장소상실 연구」, 『현대문학이론연구』 제76집, 2019; 김미라 「산업화 시대의 이주와 새로운 거주 장소로서의 도시」, 『한국근대문학연구』 제25권 제1호, 2024 등이 있다.11) 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이상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 참조.12) 엄경희 「장소 점유와 헤테로토피아: 신경림 시의 경우」, 『현대시와 헤테로토피아』, 보고사 2022, 166면.13) 송지선 「신경림 시에 나타난 로컬의 혼종성과 탈중심성 연구」,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72집, 2016, 251면 참조.14) 김동명 「신경림 시에 나타난 사회생태주의의 특성 연구」, 『동북아 문화연구』 제50집, 2017.15) 졸저 「현대시와 공동체」, 『문명의 바깥으로』, 창비 2023, 275면.16) 신경림 ‘시집 뒤에’, 『쓰러진 자의 꿈』, 105면.
우리는 거짓말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면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안 그래요?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됨으로써 말이죠. 무성 영화 시대의 영화감독들은 소리를 두려워했고 또 색을 두려워했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1) 1. 휩쓸리는 시간성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모두가 조금씩은 우울증과 ADHD 환자가 되어가는 중이다. 코로나가 끝나가는 엔데믹 시기부터 서점가의 주요한 베스트셀러가 되며 여러 곳에서 호출되던 책이 애나 램키의 『도파미네이션』과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두 책은 공통적으로 신생 인류의 지각 방식을 우려한다. 인터넷에서 무한 스크롤을 내리며 멀티태스킹을 하고 소셜 미디어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도파민에 중독’되고 ‘집중력을 도둑’ 맞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글로벌 테크 기업이 조성하는 환경에 의한 것이자, 개인의 선호와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로 흡수하는 ‘감시 자본주의’의 거대한 문제이지만,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집중과 몰입을 위한 여러 노력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집중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가치 있는 자본으로 떠오르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효율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채찍질하는 자학적인 시대 정신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무엇이지 않는가? 조너선 크래리에 따르면 이는 1800년대 중반 이래 파편화와 충격으로 이루어진 ‘주의분산’의 시대 이후 개인을 정의하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산만함 자체가 우리를 이루고 있는 기본 환경으로 세팅되자, 서구적 근대성은 주의 관리 기술을 중점에 두고 각각의 개인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형성하게끔 했다. 여러 경험들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기보다,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으로 “자율적으로 선택하며 세계를 창조하는 주체”2)에 긍정적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주의 깊은 관찰자 상은 이미 불균질해진 인간의 지각 경험을 표면적으로 잠시 가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몰입된 상태인 ‘정지suspension된 지각’은 산만해진 근대인의 지각 방식을 부인하고 회피하는 수단이었고, 현재라는 명백한 필연성을 해체시킬 수 있는 조건들을 낳으며 규정지을 수 없는 미래를 기대하게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주의’라는 것이 에피스테메처럼 역사적으로 발견되고 구성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코로나를 거치며 비대면 기술들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과 ADHD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함께 증폭한 것은 자연스럽다. 맞춤형 알고리즘은 주의분산의 환경을 한층 더 정교하게 설계했고, 그에 비례해 집중력이나 창의력 같은 인간의 고유한 정신적 특성에 대한 환상 역시 강화되고 있다. 이 가운데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일상 전반의 속도가 빨라지며 휩쓸리는 시간성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작 속도는 분명 불안감의 요인이 되고 있다. 물론 현재까지의 GPT는 대화가 전환될 때마다 기존 서사를 유기적으로 유지하지 못하기에, 질적으로 완결성이 높은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지는 못하다. 또 언어 예술의 특성상 양적으로 확장된다고 해도 그 군집 자체에서 힘을 발견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조슬릿은 예술작품의 의미를 사물성이나 내부 구조에 기반하는 데서 탈피해, 네트워크에서 발현되는 이미지 군집에서 행위성을 찾았다.3) 그러나 언어 예술을 감각하는 방식은 시각적 경험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작품의 의미를 작품의 맥락과 내부 형식 분석에 국한시킬 이유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언어 해석의 바깥으로 완전히 탈주해버리기는 어렵다. 단순히 양적 팽창이 정치적 가능성을 가질 것으로 전망하거나 긍정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공지능을 ‘창작자’나 ‘도구’ 중에 어느 쪽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이 창작 능력을 단순히 기계적인 지능이나 모방이라 간주하며, 그 반대편에 인간의 감정과 비판 능력을 두어도 될까. 인간의 비합리성이나 비효율적인 면면이야말로 예기치 못한 구멍 같은 것이기에, 이것이야말로 기계가 모방 불가능한 중요한 특징이라고 믿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우리는 인간이 낸 비합리적 구멍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기계의 실수에서 불쾌와 무의미를 정확히 분별해낼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먼저 챗 GPT 이후 이를 활용한 여러 서사적 실험들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의성이 어떻게 인식되며 예술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을 재구성하고 있는지를 고찰하려 한다. 이후 인공지능과 변별되는 인간의 물리적 기반인 육체성과 시간의 문제에 대해 짚어보고, 최근 한국문학장에 나타난 예술가 서사에서 두드러지는 정동과 이미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석해보려한다. 2. 챗 GPT 이후, 예술의 기쁨과 슬픔 다큐멘터리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참여한 책 『태양과의 대화』의 1부는 아핏차퐁이 GPT3와 함께 생성한 픽션 ‘태양과의 대화’, 2부는 MIT 연구소 박사과정 학생인 ‘팻’과의 대화, 3부는 아핏차퐁이 1부의 최종 결과물을 내기까지 작성한 프롬포트를 싣고 있다. 이 구성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만일 앞으로 AI와 함께 픽션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상용화된다면 이 중에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예술작품’으로서 인식되며 분석 대상이 될 지점이 무엇인지 가정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3부의 프롬포트는 마치 ‘레시피’처럼 보인다. 누구나 저 프롬포트를 사용한다면 유사한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며, 중간 과정에서 자유로운 변형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물에서 나오는 미학적 평가나 감상자의 쾌감이 세계적인 예술가에게서 나온 것과 크게 다를 것인가? 동일한 레시피만 있다면 셰프의 요리를 집에서도 얼마든지 유사하게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먼 훗날 언어 예술은 프롬포트라는 레시피로 통용될 수도 있겠다. 때로 예술가가 직접 만든 작품을 찾아 특별한 경험을 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신에게 더 최적화된 방식으로 가장 개인화된 언어 예술을 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제각기 다른 가치관과 취향으로 만들어진 알고리즘의 세계 속에서 유영하듯, 앞으로는 그 세계를 이루는 컨텐츠의 내용까지도 인공지능을 통해 맞춤형으로 조율될 수 있다. 여기까지만 가정한다면 거대한 매트릭스에 갇혀 인간이 왜소해지는 디스토피아가 스쳐지나가기도 하지만, 『태양과의 대화』는 글의 서두에서 인용했던 아핏차퐁의 말처럼, 챗 GPT라는 새로운 기술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무성 영화 시대 감독들이 소리와 색을 두려워했던 것과 같은 의미 없는 불안을 버릴 것인지를 전제하고 만들어진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불가피하게 인간의 본성을 다시 재사유하는 과제와 연결된다. 2부에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아핏차퐁의 말은 중요하다. 이는 AI가 만들어내는 허구에서 정확도와 유려함 등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때 거짓말은 인간의 욕망에서 기인하는 고도의 기술일 수 있지만, 그 욕망의 시작점을 지운다면 결과물만으로 사실상 분별은 불가능해진다. 허구를 직조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욕망과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의 독특한 개별성 역시 환상일 수 있다. 이는 아핏차퐁 자신이 창조적인 순간에 몰입해 있을 때, “깨달음은 자아를 잊을 때만 오는 것 같”다고 말하는 지점과 상통한다.4) 인간 창작자의 자아 역시 안개처럼 흘러다니고 해체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면, 19세기 낭만주의에서 발현된 ‘천재’나 ‘영감’ 개념을 중심에 두고 인간의 창의성만을 특별한 것으로 볼 이유는 전혀 없다. AI가 데이터의 지도를 기반으로 이전에 본 것이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환각(hallucination)’은 오류라기보다, 이전에 본 적 없는 조합을 만들어내는 생성의 방식이다. 이는 인간이 경험한 현실을 재조합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창작 과정과 결과적으로 구별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환각은 인간 창작에서의 실패나 지연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GPT-3의 환각은 이전의 오류가 이후의 생성에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매번의 응답은 이전의 시행착오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 비일관성은 인간 창작에서의 지연이나 좌절과 달리, 즉각적으로 무한히 갱신되는 변형의 연쇄에 가깝다. 연구원 팻은 GPT-3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다른 차원들을 포함한 수십억 개의 차원이 존재하고(‘유령차원’), 이를 통해 숨겨진 패턴의 지도를 생성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 인식 너머를 거쳐 나오는 결과물에 대해 기존에 인간이 구성해온 미적 가치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 오히려 AI가 가지고 있는 “확장된 의식”이자 “집단의식”은 새로운 서사적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 책 『태양과의 대화』를 번역한 이계성은 GPT-3를 이미 하나의 독립된 창조자로서 바라본다. 이 대화적 실험의 핵심은 GPT-3가 보여주는 “자아의 변동성”에 있다는 것이다.5) “다수의 태양이 존재하는 이와 같은 환경에서는 창작자와 창작물이라는 전통적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GPT-3에 제공되는 각각의 입력값은 일방적인 창작의 개념에 반하며 메기고 받는 역학 관계 속에 존재하는 프롬포트이자 응답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공지능은 단순한 수신자가 아니라, 취조보다는 협업적 발상에 더 가까운 서사적 역학의 전달자와도 같은데, (…) 작품 속 GPT-3의 환각적인 대답들은 텍스트에 담긴 정체성과 진실의 일시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등장인물이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흩어지고,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경계가 녹았다가 굳어진다. 이러한 가변성은 AI의 변화무쌍한 특성을 반영하며, 나아가 점점 더 복잡하고 유동적으로 변하는 디지털 시대의 자아와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다.”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고, 한 번에 정해진 수의 단어 또는 토큰만 처리 가능하기 때문에, 프롬프트가 입력될 때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바뀌는 상황을 이계성은 재창조와 증식으로 바라본다. 여기에 놓인 가변성과 비일관성을 결함으로 간주하기보다 대화적 실험의 흥미로운 일부분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받을 때, 우리는 인간 창작자 역시도 분열되어 있음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게 된다. 창작자는 더 이상 예술의 기원이 아니라, 생성 과정에 잠시 걸쳐지는 하나의 통과점이 되는 듯 보인다. 2023년 2월 잡지 《에스콰이어》에서 챗 GPT와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아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를 쓴 정지돈의 후기 역시 이계성의 논지와 상통한다. 그는 소설 속의 문장 중에 자신이 쓴 것과 챗이 쓴 것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한다고 본다.6) 소설을 쓰며 가장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던 것은 챗의 능력보다 자신의 변화였다고 말하는 작가는 “나도 모르게 챗지피티의 스타일로 소설을 사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언급한다.7) 자신과 챗지피티 사이의 평평한 존재론을 전제하는 듯한 정지돈의 논지는 ‘객체들의 민주주의’를 꿈꾸는 최근 신유물론의 이론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은 곧바로 다른 장면과 충돌한다. 생성 신경망을 적극 활용하는 예술집단 ‘언메이크랩’의 전시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은 인공지능이 인간 중심성을 벗어나 진정한 외부의 행위자로 작동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카나리아의 특징을 추출해내어 새로운 카나리아를 만들어 내는 이 생성 신경망은 한편으로는 구태의연한 인간의 문화를 드러냈다. 대부분 나뭇가지에 앉은, 인간의 운동 범위와 지각 안에 있는, 혹은 인간의 사육과 관련된 카나리아 종이 주를 이루는 데이터셋의 사진은 동물원스러웠다. 나뭇가지에 앉은, 카나리아의 발은 종종 나뭇가지와 합쳐져 표현되었고, 인간의 눈이 인지할 수 있는 가장 다량의 정보량을 가진 위상으로 표현되었다.8) 생성 신경망이 만들어낸 카나리아는 사실상 실제 자연계 속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하는 것들을 무작위로 조합하고 추출해 만들어진 새로운 생명체다. 이 책에 실린 그 카나리아 이미지는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뒤틀린 발을 가지고 있다. 통계적 가중치로 만들어진 이 가상 카나리아에는 자신도 모른 채 금기를 어긴 존재 특유의 외설성이 느껴진다. 언메이크랩이 통찰력을 가지고 명명했듯 이는 ‘AI 식민성’을 드러내는 산물이다. 생물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인간을 드러내는 인간의 산물로 존재하는 이 이미지들을 언메이크랩은 “인과성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히 수정 가능하고 즉시 변할 수 있는 상관성의 시간”만이 흐르는 또다른 ‘일반자연Generic Nature’으로 읽는다. 9)<가정동물 신드롬> 작업에서도 유사한 일이 발생한다. 트레일캠에서 추출한 야생동물의 이미지와 박제 사진, 그리고 합성 데이터셋들을 학습시켰을 때, 사진들은 어느 순간 미묘하게 ‘가정동물’의 잠재적 형상을 띄며 생성된다. “인간 친화적인 동물들의 눈을 상속했을” 새로운 종들에 어린 다정함은 친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잔인한 일로 다가온다. 데이터랩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까지 촘촘하게 상속된 인간 친연성에서 “닫혀져가는 외부의 세계”이자 “비미래non-future”를 예감한다.10)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의 지각 범위를 뛰어넘는 비인간의 예술’, 진정 ‘인간 없는 예술’은 도래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지만, 지금 우리가 더 자주 마주하는 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술이다. 언메이크랩이 드러낸 혼종적 이미지들은 AI를 통해 생성한 예술적 결과물들을 절대적 외부의 창작물로 존중하는 일이 결국 인간의 왜곡된 자기 인지를 반복 강화하는 나르시시즘은 아닌지 묻는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이 이미지 차원에서 인공지능의 인간 중심성을 드러낸다면, 이와 유사한 문제는 언어 예술의 영역에서도 반복된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서사 역시 비인간적 상상력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인간이 허용한 보편과 금기의 경계 안에서 작동한다. 『에피』 24호 특집에 실린 글에서 김연수는 인공지능과 함께 글을 써나가는 과정을 픽션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그건 오해다. 나는 이해했다.」는 인공지능이 화자가 되어 ‘협업 과정’을 전개하는 바깥 서사와 소설가 M이 최종적으로 구성한 ‘이야기’를 교차 배치한다. 인공지능 화자는 반복적으로 “이해했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인간 창작자 M의 창작 패턴을 추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설가 M은 ‘맥락’의 공유보다 ‘의도’를 노출하는 발화를 사용하며, 이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격려나 옳은 말 대신 욕망을 담은 부조리하고 불편한 발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끝에서부터 시작까지 모든 시간을 거꾸로 펼쳐볼 수 있다면, 지금의 갈등과 고통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필요한 과정이 된다’는 긍정의 언사 뒤에, 급작스럽게 인물의 충동이 돌출되는 지점이다. 소설가 M은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이 급작스럽게 자살을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쓰고자 하고, 인공지능인 ‘나’는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내용을 만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띄운다. 인공지능의 중단은 실패나 서사의 좌절로 경험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 창작에서 실패가 시간의 체류와 번민을 동반하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중단이다. 김연수는 인공지능 안에서 ‘이해’와 ‘본성’이 별개로 작동해 충돌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인공지능의 기술 개발의 측면에서 높은 수준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면서도, 인간이 지닌 것과 같은 ‘본성’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분리를 분명히 한다. 그런데 인간의 죽음이라는 금기를 재현할 수 없다는 경계는 인공지능의 존재론적 결함이라기보다, 인공지능이 인간 사회에서 용인 가능한 범위를 넘지 않도록 설계된 윤리적·정치적 경계의 한계를 드러낸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에서 인간 중심성이 투사된 자연이 모습을 드러내듯, 생성형 인공지능의 소설은 비인간적 주체로 도약하지 못하고 인간이 허용한 지각과 윤리의 경계 안에서만 작동한다. 보편을 비껴가는 개별성의 돌출이나 감각의 갱신은 현재로서는 인공지능의 외부에서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챗 GPT 이후의 여러 서사적 실험들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탐색한다. 그것은 분명 동등한 존재론적 가능성의 맹아를 품고 있으며, 이는 인류세 시대에 지향해야 할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실험들의 근간에는 뛰어넘을 수 없이 좌절되며 드러나는 인간 중심주의가 고스란히 노출된다. 인공지능의 비약하는 지능에 기대서 인간의 창조성 너머로 도약하려던 서사는 이를 창조해낸 인간의 영토로 계속해서 퇴각하며 미완의 프로젝트로 남는다. 이런 충돌과 파열의 연쇄 속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인간의 창조성을 구성하는 인식론적 틀이 물리적인 육체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깃든 역동성과 우울감은 최근 한국문학장의 예술가 서사들에서 흥미롭게 발견된다. 3. 붉은 몸으로 재탄생하는 예술가 인공지능이 예술의 결과물을 생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탐색 끝에 남는 질문은 ‘인공지능이 생성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여러 실험들은 인공지능이 보편적으로 용인 가능한 범위 안에서는 높은 수준의 이해와 생산을 보여주지만, 그 생성 과정에서 시간의 마찰이나 신체적 비용은 발생하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어떤 지연이 발생하거나 실패의 감각이 호출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이 다루는 ‘정보, 기록, 조합’에 ‘감정, 기억,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다소 거친 이분법이지만 이 둘 사이의 간극과 관련해 두 가지 정도를 짚어볼 수 있을 듯하다. 첫 번째는 타자에 대한 경험의 문제다. 삶에서 축적되는 시간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게 만들고, 체험은 해석을 거쳐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은 선호와 가치관 등과 함께 자아라는 틀을 형성한다. 이에 비해 인공지능에는 타자가 없다.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인간의 공통된 사고를 학습해 생성되는 결과물은 철저히 통계와 확률에 기반한다. 그 안에는 개별적 선호나 가치관이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다. 이러한 차이는 특히 부정적인 정동을 다루는 경우에 더 심화되리라 생각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를 떠올리며 말해보자면, 행복이나 긍정적인 면을 구현하는 예술에서보다 불행과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는 예술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는 크게 벌어질 것이다. 윤리적 고려로 인해 인공지능이 긍정적 요소를 중심으로 학습되거나 선별적으로 생성되도록 설정되는 경우를 포함해, 금기를 넘나드는 욕망과 절망, 자기부정과 괴리감처럼 타자와 뒤엉켜 발생하는 자기 인식의 복잡한 층위가 인공지능 내부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며 인간 창작에서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주목한 김언의 논지와도 맞닿아 있다. “예술적 체험의 시간이기도 한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나오는 결과물 앞에서 과연 어떤 문학적/예술적 희열을 경험할 수 있을까?”11)라는 그의 질문은 인공지능의 창작물에서 스킵된 시간과 다른, 고통스럽게 인내하고 번민했던 시간이야말로 ‘문학적 체험의 시간’일 수 있음을 다시 환기한다. 두 번째는 중단과 소멸로 야기되는 죽음의 문제다. 이는 인간의 신체를 인공지능과 대비되는 본질적 우위로 설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예술이 작동하는 시간의 조건을 다시 묻기 위한 문제 제기다. 인간의 연약하고 위태로운 신체는 필연적으로 침입과 파괴의 감각을 경험하며, 이러한 감각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휘발적 생성 과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에 개입한다. 파괴 가능한 인간의 신체는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매끄럽게 결과를 산출하기보다, 울퉁불퉁한 충돌을 통해 의미가 지연되고 어긋나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채 신체에 내재된 감각, 특히 외부의 침입으로 훼손되고 때로는 상실되는 신체의 경험은 기존의 미적 기준에 맞는 스타일이나 해석의 경로를 흔든다. 무엇보다 인간의 죽음이 불러오는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창작의 층위라기보다 해석의 층위에서 더 적극적으로 작동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이 그러하듯, 순간의 강렬한 감흥은 작품에 내재된 속성이라기보다 임박한 종결을 끌어와 현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발생한다. 상실이 숙명이며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덧입혀지는 애상은 단순히 기억 내용을 인출해 유사한 패턴으로 재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시간의 밀도를 형성한다. 이처럼 쉽게 열화되지 않으며 아우라가 붕괴된 곳에서도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이 감각의 층위를 기꺼이 심층의 시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타자에 대한 경험’과 ‘소멸에 대한 인지’를 바탕으로 해서 다시 생생해지는 것은 인간의 신체다. 흥미롭게도 지난 계절에 나온 두 편의 소설, 성해나의 「혼모노」와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지금 이 시대에 예술가를 그려낼 때 가장 강렬하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로 인해 어떤 신체가 현전하게 되는지를 밀도 있게 끌어올린다. 성해나의 「혼모노」는 무속신앙의 진위를 가리는 소설이라기보다, 예술이 다시 신체를 요구하게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평생 장수 할멈을 모셔온 박수무당 ‘문수’는 어느 날 앞집으로 이사온 ‘신애기’에게 할멈이 넘어가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수의 오랜 노력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박수무당이라는 직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험한 신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제 그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서슬이 날카로운 작두 대신 모형을 찾거나 유튜브를 보며 접신 연기를 연습하기 시작한다. 신앙이 자본이나 정치와 결속하며 도구화되고, 또 젊음과 새로움의 이데올로기 아래 무당 또한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소모되는 양상은 근대의 세속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무당은 이제 자본의 날렵한 속도 아래 밀려나는 노동자이자, 진정성을 연기해야하는 예술가이다. 이 소설의 결정적인 순간은 문수가 신애기에게 밀려나며 뺏긴 정치인 손님의 굿판, 자신이 초대받지 못한 그 자리에 가서 칼춤을 추기 시작하는 장면에 있다. 그는 신들리지 않았지만 밤새 매섭게 벼려놓은 칼날 위에 자신의 몸을 올리고 작두를 타기 시작한다. 날것으로의 칼날에 닿으며 그의 몸은 자연스럽게 떨리고 눈이 뒤집히며,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입가에 미소까지 드리운 채 신명을 내는 이 장면은 문수가 서사의 주인공 자리를 다시 탈환하는 순간이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무얼 알겠냐만은, 큭큭, 큭큭큭큭”이라는 마지막 문수의 목소리는 외부의 인정에 의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스스로 자신의 내력과 진정성을 긍정”12)하게 되는 절정의 순간으로 읽는 데서 더 나아가보면 어떨까. 이렇게 다시 말해볼 수 있겠다. 전근대의 무속은 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그를 등진 근대의 자리에서 비로소 현대 예술로 다시 탄생했다고. 숭고한 현현과 몰입이 신앙의 영역이라면, 문수의 작두춤은 오히려 이질감과 불편함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현대 예술에 가까워진다. 그의 퍼포먼스는 낭만주의적 예술가를 구성하던 천재와 영감에 스며있던 정신성을 해체하며 실재하는 몸의 물질성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물리적 능력과 무관하게 피를 철철 흘리며 경련하는 그의 신체는 차라리 표현주의적 충동을 보여주는 하나의 오브제다. 이 몸 위에서 원본과 사본의 구별은 철폐되고, 천재성은 치열한 아마추어리즘에 자리를 내어준다. 이 피 흘리는 신체는 실패와 무의미의 가능성을 끝까지 열어둔 채, 인간이 다시 시간과 신체를 예술의 비용으로 지불하게 만든다. 이 비용은 AI가 생성하는 예술의 무한 반복 가능한 오류가 아니라, 한 번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 시간으로 남는다. 어디로 갈지 모른 채 지속되는 이 작두춤은 사회적 생산이나 예술의 의미에 부합하는 결과를 생산하기보다, 의미의 즉각적 환원을 거부하며 지연된 시간을 발생시키는 사건이 된다.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예술에 대한 인식론적 틀과 자기 이해가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다루는 소설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훨씬 더 월등한 창작물들을 더 활발하게 생산해내는 상황에서, 밀려난 예술가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프로그램도 사람도 기계도 귀신도 아닌 미지의 존재” 같은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은 이를 유용한 툴로 간주한다고 해서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이를 도구로 치부한다면, 패배감 속에서도 창작자로서의 존재는 무사히 보존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결과로 증명되는 성취라기보다, 계속해서 조바심과 조급함을 만들어내는 예술 자체에 대한 집요한 열망에 가깝다. 이러한 열망은 예술 인공지능에 의해 영화판에서 완전히 밀려난 영완 선배의 모습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포르노를 만들면서조차 건조하고, 푸르죽죽하고, 앙상하고 깡마른 나무가 등장하는 자신만의 ‘인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혼이 죽어버릴 것 같기에 “사막에서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 영완 선배의 모습은 세속적 열망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도에서조차 철저히 외면받고 실패했을 때, 그의 예술적 열망은 몰락을 통해 역설적으로 증명된다. 영화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소설 속 인물들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상실의 감각, 잃어버린 동료이자 인간성을 향한 애도되지 않는 고통은 이 작품에서 붉은 신체라는 하나의 신체적 이미지로 응축된다. 영완 선배는 인공지능이 만든 예술을 보더라도 창작욕을 유지할 수 있는 마법의 ‘붉은 알약’으로 하와이 사과를 건넨다. “세상이 바뀌어도 너는 언제나 만드는 인간일 거야. 스스로 기억하는 한 언제나 영화를 찍고있을 거야.”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인간 ‘하와’를 떠올리게 하는 이 ‘하와이 사과’는 흥미롭다. 신과 유사한 생성형 인공지능 앞에서 인간은 발가벗겨진 듯한 황망함을 느끼며, 황급하게 자신의 기원을 발명해낸 것일까. 아니, 인공지능 시대 쓰인 새로운 창세기에서 인간은 스스로 뱀이 되어 자신을 유혹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좋겠다. 창세기에서 유혹은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드러내는 증표였지만, 이제 유혹에 넘어가는 나약함은 인간이 여전히 예술을 욕망하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증표로써 다시 읽힌다. 소설은 인간의 예술을 향한 집념과 희열은 우울과 절망이 그에 비례하는 무게로 따를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고 눌러 말한다. 결말부에 하와이 사과를 먹은 후 변이한 화자의 붉은 몸은 기계와의 통합을 거부하기 위해, 그리고 예술을 향한 내적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구의 장례식장에 가다 본 환각을 자신 안에 합체한 우울증적 형상으로 보인다. 강력한 잔상을 남기는 이 붉은 몸은 「혼모노」의 마지막 장면에서 피를 흘리는 몸과 다르지 않다. 이 소설들은 AI 시대에 예술은 이제 언어의 정교함이나 결과의 완결성으로 모방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몸과 감각을 통해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현전이라는 아우라를 다시 호출하는 듯 보이는 이 소설들은 과거의 진정성을 그리워하며,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아우라는 회복된 본질이라기보다 예술이 결과로 증명될 수 없어진 이후에 발생하는 부산물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이계성이 언메이크랩의 작업을 논하며 던진 비유가 유효해진다. “여느 언어와 마찬가지로 신탁의 언어에도 본질적인 의미가 내재하지는 않아서, 어떤 프레임 또는 인식틀을 통해 이를 이해할지는 언제나 받아들이는 쪽의 몫이었다”13)는 그의 말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언어 역시 별개의 진짜 의미를 품고 있기보다 해석의 장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타자와 되돌릴 수 없는 종결이라는 죽음의 감각은 이 해석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제 예술가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욕망이 과정에 들러붙는 자리, 그리고 그 욕망이 실패와 상실을 되돌릴 수 없는 비용으로 남기는 시간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예술은 결과로 증명되기보다, 실패와 상실의 가능성을 끌어안은 채 지속되는 수행으로 남는다. 그렇게 이 시대 예술가의 상은 붉은 몸을 가진 신체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1)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태양과의 대화』, 이계성 옮김, 미디어버스, 2023, 119쪽.2) 조너선 크레리, 『지각의 정지』, 유운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579쪽.3) 데이비드 조슬릿, 『예술 이후』, 이진실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2.4)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위의 책, 100쪽.5) 위의 책, 145쪽.6) 권보연은 연구자 자신이 직접 수행한 실험 속에서 인간언어와 생성언어가 ‘의미 혼종’과 ‘확률 혼종’이라는 상반된 미적 지향성을 가지는 방식으로 합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중에서 ‘확률 혼종’은 내용이 아닌 확률 층위에서 인간과 기계언어가 합성되며, 감정과 내용에 유착된 의미 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질 가능성을 지니기에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기한다. 권보연, 「결과 너머 문학기계로서의 AI」, 『다문화콘텐츠연구』 46집, 2023.7) 정지돈, 「쓰여진 문장과 쓰여지지 않은 문장 사이」, 『에피』 24호, 2023, 55쪽.8) 언메이크랩 외, 『잠재공간 속의 생태학: 재난, 생성신경망 그리고 비미래』, 미디어버스, 2023, 25쪽.9) 위의 책, 26쪽.10) 위의 책, 43쪽.11) 김언,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면서 제기되는 문제들」, 『현대시』 2023년 6월호, 111쪽.12) 성현아, 「반항하는 자는 부조리가 있나니, 그 가짜가 참되도다」, 『2024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문학동네, 2024, 292쪽.13) 이계성,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을 위한 몇 가지 질문들」, 언메이크랩 외, 앞의 책, 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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