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파란 2024년 봄호(제32호)
편지의 말이 오네 오고 있네 ― 장이지 시집 『편지의 시대』(창비, 2023)
시집 제목이 반드시 개별 시편들과 호응을 이루는 건 아니겠으나, 특정한 형식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다면 제목을 둘러싼 여러 생각들을 쉽게 지나칠 순 없을 것이다. 장이지의 이번 시집 『편지의 시대』에서 독자는 ‘지금, 여기’의 문명으로부터 먼 심리적 거리를 지니는 “편지”라는 매체가 “시대”의 수식어가 된 난감한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 각종 SNS 어플이 공해 수준의 메시지 알람을 울려 대는 현실 속에서 밤새 연애편지를 쓰고 지우던 낭만적 기억은 결코 동시대를 꾸밀 수 없는 말이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현실로 인해 조금은 아련하고 애틋한 어감을 지니게 된 것 역시 부정하기 어렵다. ‘지금 여기’의 “편지”는 과거로부터 당도한 비공식적 역사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부치지 못한 혹은 수취인 불명의 무수한 “편지”들 역시 함께 호출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손으로 꼭꼭 눌러쓴 “편지”는 실제 일어난 개인들의 ‘사건’이며, 아직 뜯지 않은 “편지” 속에는 현재와 접촉하지 않은 과거의 시간이 보존되어 있다. 편지의 왕래가 줄어들수록 현재의 역사에 편입되지 못한 밀봉된 시간도 쌓여 갈 것이며, 우리 주변 어딘가에서 발견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의 편지가 열리면 저는 예전의 제가 아니에요 두 귀는 뾰족해지고 손톱 밑의 달은 활처럼 휘어요 우리 사이에는 흰 별이 있고 그 별에는 우체국이 있어서 엽서가 나비처럼 날아요 (중략) 당신이 떠난 자리에는 절이나 탑처럼 짓지 않고서는 달랠 수 없는 늪의 시간이 있어요 알아요 저는 당신뿐 아니라 당신과 이어 진 제 일부를 잃게 되죠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표정을 고치고 지하철역 계단을 오르죠
―「표변」 부분
그러다 “편지가 열리”는 순간 우리의 삶은 “표변”하게 되는데 “표변”의 사전적 의미처럼 말과 행동이 뚜렷하게 달라지는 것이다. 인용한 시편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보존된 시간은 현실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세계를 구성하는 일상의 언어를 흔들어 생기를 부여한다. 하지만 그러한 기쁨도 잠시, 발신자가 부재한 현실이 육박해 오면서 우리는 비로소 “편지” 속의 사소한 사연 들과 개인사적 사건들이 현실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시적 화자에게 “편지” 속 사건은 과거가 아닌 현재의 “일부”이며, 일상의 시간관념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늪의 시간”인 것이다. 어떤 역사서에서도 찾을 수 없고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기에 화자 자신도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표정을 고치고 지하철역 계단을 오르”게 될 테지만, 시인의 눈에는 장삼이사들의 수만큼 많은 사연의 봉인들이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현실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편지의 시대는 이미 끝났고(하늘의 새들이 모두 편지로 변해 추락한다) 우리의 시대 역시 그렇다 얼음 편지가 날 아온다 모래의 눈물이 흐른다 편지를 펼치면 그것은 당신이라는 이름의 계단이 되고 편지의 젖은 부분이 깊어지면서 우물이 되고 늪이 되고 이렇게 난공불락의 성채를 쌓고
―「슬픈 습관」 부분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의 뒤편에서 보이지 않게 작동 하는 “편지의 시대”를 시인은 “슬픈 습관”으로 비유한다. “편지” 의 사연은 지극히 일상적인 언어로 구성되어 있지만 당사자에 게 그것은 “젖은 부분이 깊어지면서 우물이 되고 늪이 되고 이렇게 난공불락의 성채를 쌓”는 일과 다르지 않다. 시인에게 “편지”는 추상화된 언어를 벗어날 수 있는 소통의 방식이고, 감정의 동요를 불러일으키는 근원적인 우울이 도사리고 있다. 종말 의 순간까지도 “편지”의 일상어 뒤편에선 “하늘의 새들이 모두 편지로 변해 추락”하는 괄호 속 “습관”이 작동한다. 그리곤 앞서 언급한 「표변」의 시구처럼 애틋한 감정의 동요를 삼키며 아무렇지도 않게 지하철을 타고 일상으로 복귀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시대”, 즉 개인들의 사연으로 이루어진 “시대”의 역사는 “편지의 시대”와 더불어 막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시인이 가리키는 “편지의 시대”는 과거의 ‘전성시대’를 추억 하거나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 에 덧씌워 버린 편견이나 강박들을 벗어나고자 한다. 시집의 제 목을 통해 기대했던 바와 달리 내밀한 고백의 낭만성이나 “편지”가 쓰이지 않는 “시대”에 대한 아이러니 등은 자취를 감추고 있다. 빈번하게 등장하는 “편지”, “엽서” 등의 시어와 서간체를 빌려 제시되는 시적 상황 역시 외형만 그러할 뿐 노스탤지어 (nostalgia)의 손수건이 매달린 잔잔한 풍경들과는 어딘지 달라 보인다. 시집 전반에 걸쳐 완결되지 않은 이야기와 동문서답이 흩어져 있고 대본 형식을 빌려 오거나 영화 장르로부터 소재를 가져오기도 한다. 인용문을 그대로 나열한 듯한 시편을 읽다 보 면 실험적인 느낌마저 든다. 결국 시인이 호출하고자 하는 과거 는 소비될 수 없는 노스탤지어이며, 사연의 내용이 아니라 “편지”의 형식 자체가 존속시키는 ‘수신자’와 ‘발신자’의 자리를 마련하고 확인하는 데 방점이 있음을 짐작하게 된다.
히로코는 죽은 애인에게 편지를 써요 그 편지는 후지이 이츠키(♀)에게 전해지고 이츠키는 또 다른 후지이 이츠키(♂)를 떠올리게 되죠 이츠키에게는 플래시백이 있고 과거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아요 히로코에게는 플래시백이 없고 몸 위에 주소를 옮겨 적는 욕망이 있어요 엽서에 상처를 내면서 잘 지내십니까, 저는 잘 지냅니다 하고 쓰죠 저에게는 플래시백이 없고, 그러니까 되찾을 기억이 없고, 당신과의 추억이 없고, 지금 당장 제가 몸에 당신 이름을 쓰면 당신이 제 앞에 나타나는 동굴벽화의 요술 같은 것이 필요해요 슬픈 엽서 같은게 말이죠
―「러브레터」 부분
많은 시편에서 ‘사랑’과 관계된 시적 화자가 등장하지만, 정작 시집을 읽고 난 독자는 그들의 사연을 잘 알지 못한다. 당사자들의 과잉된 감정이 어떠하든 오직 ‘발신’을 했다는 진실과 ‘수신’을 했다는 진실, 그들의 소통 여부와 무관하게 물리적인 시 간이 흐르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역사서 어디쯤 낱말이 늘어 간다는 사실이 남을 뿐이다. 인용한 「러브레터」에서 드러나듯이 시인은 종종 “편지”의 내용은 묻어 둔 채 편지지 외부의 간절함을 발산하는 시적 화자를 호출한다. 영화 「러브레터」를 본 사람이라면 남학생 ‘이츠키’가 같은 이름을 가진 여학생 ‘이츠키’에게 반해 짝사랑하게 되지만 고백하지 못한 채 ‘이츠키’와 닮은 ‘히로코’와 사귀게 되고, 훗날 ‘히로코’가 보낸 “편지”는 남학생이 아닌 여학생 ‘이츠키’에 게 전달되는 이야기가 떠오를 것이다. 우리는 영화 속 주인공들이 서로 이어지지 못한 인과적 플롯을 설명할 수 있고, 영화의 흥행에 힘입어 “잘 지내십니까, 저는 잘 지냅니다”의 일본어 발음 “오겡키데스카, 아타시와 겡키데스”가 유행했다는 사실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둘러싼 ‘기억’을 만들어 낸 관객 중 한 명이 분명한 시적 화자에 대해선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어딘지 외로워 보인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플래시백이 없고, 그러니까 되찾을 기억이 없고, 당신과의 추억이 없”기 때문이다. 현실에선 전사 (前事)가 없는 첫사랑이 찾아오기도 하고 겨우 이름을 알 뿐인 상대방에게 “러브레터”를 쓰기도 하지만, 어쩐지 시적 화자는 “제가 몸에 당신 이름을 쓰면 당신이 제 앞에 나타나는 동굴벽화의 요술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말할 뿐이다. 만약 우리의 언어가 이름을 통해서 스스로를 설명할 수 있다면 시적 화자 역시 이름을 밝히는 것으로 “당신과의 추억”을 호출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영화를 보지 않은 독자에게 낯선 이름들이 아무것도 전해 주지 않는 것처럼 그의 이름을 듣는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추상화 이전 ‘산이 있으라’는 말이 실제로 산을 보여 주던 태초의 언어, 혹은 순수한 언어를 회복할 수 없는 한 그것은 불가능하다. 시적 화자의 외로움과 슬픔은 그러한 일상어의 한계와 관련되어 보인다. “동굴벽화의 요술”을 언급하는 것은 동굴 벽의 입체를 활용해 동물을 그리면서 살아 있는 동물로 간주해 창으로 찌르던 원시 예술가의 순수한 믿음을 가리키는데, 시적 화자에게 이것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에 가깝다. 실제로 남학생 ‘이츠키’는 여학생 ‘이츠키’의 모습을 도서 카드 뒷면에 그려 놓았다. 사랑의 감정을 아는 사 람에게 그것은 복사본으로서의 스케치가 아니라 “동굴벽화의 요술”처럼 학생 시절 그녀 자체가 보존된 것이다. 따라서 “러브레터”는 말할 수 없는 대상을 말해야 하는 언어의 내재한 슬픔이며, 그 내용이 무엇이든 “슬픈 엽서”인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편지”라는 형식 자체가 건네는 언어를 포착 하고자 하는 시인의 의도를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편지”의 사연을 읽고 말할 수 있을 뿐, “편지” 스스로가 건네는 사물의 언어를 일상어처럼 듣는 것이 어렵다.1) 사물의 언어는 쉽게 소통되지 않고 늘 침묵이라는 슬픔에 감겨 있다. 그러한 침묵을 깨기 위해선 가장 먼저 “동굴벽화”를 그린 원시 예술가처럼 의심 없이 대상이 숨 쉬고 있음을 믿어야 한다. 시인에게 는 바로 이 침묵을 깨는 여하한 행위가 사랑인 셈이다. 즉각적인 소통을 위한 언어가 아니라는 점에서 모든 시는 사랑을 동반 하는 문자(letter)로서의 “러브레터”이고, 그곳의 궁극적인 도착 지는 “몸 위에 주소를 옮겨 적는 욕망”을 가진 ‘히로코’처럼 ‘지금, 여기’에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자기 자신이다.
조카가 시에는 무엇을 담느냐고 묻기에 편지에는 내장을 담지, 하고 가르쳐 준다 라플란드 할머니가 핀란드 할머니에게 편지를 보낼 때 생선의 내장을 긁어내고 그 죽음에 편지를 쌌듯이, 만지 면 아픈 시를 쓸어안는다 무슨 말이든 잘 믿는 조카가 시에는 무 엇을 담느냐고 묻기에 편지에는 꿈틀대는 내장을 담는다고 말할 수는 없어서 그보다도 하얗게 하얗게 쓸어안는 게 중요하다고 눈 오는 밤의 봉인이 중요하다고 속여 본다 속아 주려느냐 조카야, 이것은 너만 속이려는 게 아니란다
―「라플란드」 전문
별자리와 동물의 내장을 보고 소통하던 시대로 돌아갈 순 없겠지만 그것을 믿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시에는 무엇을 담느 냐고 묻”는 “조카”에게 “편지에는 내장을 담”는다는 동문서답을 하지만 “시”도 “편지”도 우리의 일상어를 넘어서는 어딘가를 가리킨다.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와 국경을 접하는 “라플란드” 는 현재의 국경 개념으로는 설명이 어렵다. “라플란드 할머니가 핀란드 할머니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정보만으로는 “라플란드 할머니”가 “핀란드”에 속한 “라플란드 할머니”인지 속하지 않은 “라플란드 할머니”인지 확인해 주지 못한다. 만약 “핀란드”에 속 한 “라플란드 할머니”라면, “핀란드 할머니”가 “핀란드 할머니에게 편지를 보낼 때”와 같은 의미가 되고 만다. 하지만 “라플란드”는 “핀란드”의 국경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라플란드”의 고유한 성질을 지니고 있고 그것은 일상의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다. “시”는 “생선의 내장을 긁어내고 그 죽음에 편지를 쌌듯이, 만지면 아픈” 것이고 “꿈틀대는 내장”처럼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소통 방식이다. 그래서 “시”는 “무슨 말이든 잘 믿는 조카”처럼 존재론적 닮기가 가능할 만큼 편견 없이 사물을 대할 때 비로소 들리는 장르이다. 그리고 표현 불가능한 비밀은 “눈 오는 밤의 봉인”처럼 비밀 그대로 남겨 놓을 때 비로소 보존할 수 있다. “라플란드”의 산타클로스를 진짜라고 믿는 아이에게도, 산타 복장을 하고서 진심으로 기쁨을 전하는 삼촌에게도 이 속임 은 얄팍한 눈속임이 아니라 진짜 ‘마술’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광주로 돌아가지만 광주를 졸업할 수는 없어요 노란 우산을 쓴 인파 그리고 피 흘리는 소녀, 피 흘리는 양곤, 블루 사이공, 꽃잎 꽃잎 사랑의 시간, 우리가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 있는 곳
―「책갈피―krytonite」 부분
그렇다면 마음을 다해 사물의 언어를 읽고, 읽어 낸 것을 간절하게 믿는 것만으로 온전히 자기 삶을 살 수 있을까? 편지의 사연과 무관하게 시간은 흘러가고 현재 삶에 아무리 큰 영향을 미친다 해도 공식적인 역사는 바뀌지 않는다. 더구나 자본은 과거의 사건들로 상품을 만들어 소비하도록 하는데 80년대 “광주” 를 겪을 수 없는 세대가 매체를 통해 당시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은 역사를 잊지 않는 일이지만, 그로 인해 가닿을 수 없는 순수한 사실로부터 멀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인용한 시편에서 “광주”, 홍콩, 미얀마, 베트남 등의 어떠한 이미지가 떠오른다면 그 이미지의 출처는 바로 경험하지 못한 과거의 기억을 판매하는 노스탤지어 상품들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한 상품 속 사건은 각 개인의 사연을 아우르는 온전하고 순수 한 역사가 아닌 취사선택을 거쳐 인과적 플롯에 따라 가공된 것 이다. 제목인 “책갈피”는 부분으로서만 존재하는 사건에 끼워진 표시이며 부제인 “크립토나이트(krytonite)”가 뜻하는 것처럼 ‘슈퍼맨’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힘을 행사한다.
디디와 고고는 오늘 하루도 고단했다고 서로를 껴안는다 고도는 그곳에 나타날 수 없는데…… 서로를 껴안다니, 서로의 현전을 확인해 주다니
―「고도를 기다리다 보면―p.s I miss you」 전문
물론 현실을 타계할 정치적 방법을 제시하거나 구호를 외치는 것은 문학의 일이 아니다. 다만 시인은 “미아(迷兒)”의 가능성을 제시한다.2 고정된 것과 불변의 것을 맹신하지 않을 때 우리는 목적지를 알아도 “미아”가 될 수 있고 예상 밖의 상황과 마주할 수도 있다. 그리고 함께 방황하는 무수한 “미아”들의 언어를 듣 고 연결하는 일이 바로 시인이 부여한 “편지”의 역할일 것이다. 당신과 내가 거기 있어서 편지를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편지” 가 여기 있어서 당신과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 당신의 “편지”는 늘 어딘가에서 쓰이고 당신을 향해 지구를 몇 바퀴나 돌아서 오고 있다. 그러면 “당신의 부드러운 혀가 내 귀 안에 이미 있”는 것이다(「기대」).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부조리극의 주인공들처럼 당신의 소식이 담긴 “편지”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무기력하게 죽음을 기다리지 않는다. “서로를 껴안”으면서 “현전을 확인해” 줄 수 있는 것이다.
- 1) 발터 벤야민의 언어철학을 참고해 본다면 그 윤곽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벤야민은 인간의 언어뿐 아니라 정신적인 본질을 전달하는 모든 사건과 사 물 그리고 자연 역시 언어를 가진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이때의 정신적 본질은 언어 자체가 아니라 ‘그와는 다른 어떤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말 없는 언어’로 자체의 정신적 본질을 전달하려는 ‘사물적 언어’는 일상 언어 의 입장에선 침묵과 다르지 않다. 그러한 정신적 본질의 언어가 소통할 수 있는 이유는 성경의 ‘창세기’가 그러하듯 특정 대상에 이름을 붙이면 그대로 이루어지던 태초의 언어에 내재한 ‘마법’적 속성에 기인한다. 그리고 예술 작품의 경우가 그러하듯 비유나 표상, 각종 예술적 표현활동 등을 통해 잠재 되어 있다가 전혀 다른 이름들 사이에서 섬광처럼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선 다음 책 1부 2장 1절 「언어, 미메시스, 경험」 참조. 강수미, 『아이스테시스―발터 벤야민과 사유하는 미학』, 글항아리, 2011, 51-71쪽.
- 시편 「운메이(運迷)―민주주의」에는 다음과 같은 주석이 붙어 있다. “‘운 메이(運迷)’는 ‘운명(destination)’과 ‘방황(errance)’을 결합한 프랑스어 조어 ‘destinerrance’를 일본어로 번역한 말이에요 ‘운명(運命)’과 일본어 발음이 같으면서도 본래의 뜻에 ‘헤맴의 가능성’이라는 의미를 더해 운명의 고정성 이나 불변성을 해체해요 목적지를 알아도 우리는 길 위에서 항상 미아(迷兒) 가 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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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정의되지 않을 기록들 - 서윤후와 양안다의 사이, 그 틈 류수연 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간-절기, 밤을 불러내는 주문의 시간 ― 2025년 봄, 환절의 시편들 최 진 석 1. 밤의 주문 간절기(間節期). 계절과 계절 사이의 이행기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계절이 바뀌는 시기를 지칭하기에 환절기라고도 부르며, 매운 더위의 여름과 날 선 추위의 겨울로 넘어가기 위해 준비하는 여유로운 시절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봄가을이 점점 짧아지다 못해 거의 사라지고 여름과 겨울만 남아버린 요즈음, 예전과 같이 계절 사이를 지나는 여유로움을 맛보기는 힘든 게 사실이다. 여유는 체감의 영역에 달린 일이기에 달력을 넘기며 알아채는 숫자의 이월보다 먼저 몸이 느껴야 하는 것이지만, 바쁜 일상에 파묻혀 살다 보면 어느새 여름과 겨울로 넘어가 버리는 탓이다. 끝났나 싶으면 다시 찾아오는 3월의 꽃샘추위가 유난스러웠고, 4월에도 눈을 뿌리며 그만큼 겨울과 여름 사이의 간극을 길게 늘여 놓은 올해의 간절기는 우리를 기이한 느낌으로 인도한다. 나로서는 이를 봄이 왔는지 안 왔는지가 아니라, 밤이 오는지 오지 않는지에 관한 물음으로 돌려 부르고 싶다. 전자는 단순한 계절의 변화를 담는 문제지만, 후자는 어제와는 다른 오늘을 긍정하고 오늘과는 달라질 내일을 맞아들이는 사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른다는 말은 이 밤이 깔아놓는 순간의 포석들을 건너 저 아침을 난생처음으로 만날 때 생겨나는 차이의 감각 아닌가? 어제의 피곤을 안고 오늘을 살 수 없듯, 오늘의 고민을 풀지 못한 채 내일을 시작할 수는 없다. 내일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필연코 밤의 시간을 지나야 한다. 밤은 하루를 정리하고 쏟아내는 과정이다. 낮 동안 쌓인 온갖 피로를 씻고, 사람과 사람 그리고 사물과 사물 사이에서 누적된 갖가지 문제들을 해소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밤은 신체에 대해서는 망각의 수면을, 정신에 대해서는 신경의 안정과 정신의 이완을 선사한다. 동시에 밤은 절단과 단절, 변화의 시작점이 된다. 눈뜨면 다른 세계가 열리고 다른 자신을 발견하는 계기도 역시 밤을 통해서이다. 블랑쇼가 밤을 “미래로의 부름”이라 말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터. 저 미래는 낮과 밤의 기계적 순환에서 오는 순차적 시간이 아니라 순전한 밤의 노동 속에 도래하는 미-래이다. 그렇다, 밤이 주체다. 지난 수 개월간 우리는 그 밤을 기다렸다. 망연히 쉴 수 없는 밤, 부지런한 이행의 노고를 통해 움직이는 밤, 그럼에도 무엇이 변화했는지 알아챌 수 없는 부동의 밤. 그럼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내일을 불러내고 낯선 자신과 낯선 세계를 창안하는 밤. 지금은 일단 그 밤을 그저 밤이라 불러보기로 하자. 사회와 역사, 공동체의 변전을 통해 이름하는 자리는 따로 마련될 것이다. 그러니 저 밤을 기약하고 인도하며 견인하는 시간의 노동, 이를테면 시라 불리는 주문에 귀를 기울여 보자. 2. 원본 없는 사건 밤이 오지 않는다 분명 문밖은 어두운데 손목시계가 자정을 가리키는데 밤이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처음엔 밤이 사라진 줄 알았다 저녁이 밤의 정면을 무시한 줄 알았다 한낮이 심야를 점령한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밤이 나를 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문을 두드렸는데도 그렇게 창문 밖에서 서성거렸는데도 어둠을 데리고 잠과 꿈의 손을 잡고 그토록 신호를 보냈는데도 아침저녁이 오전 오후가 다 밤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그토록 귀띔해주었는데도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24시간 밤의 외부였던 것이다 뒤늦게 깨닫고 돌아보거니와 눈뜨자마자 밤부터 찾아야 했던 것이다 아침부터 밤을 챙겨 나가야 했던 것이다 - 이문재, 「밤이 부족하다」 전문 (『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12시간 낮의 시간을 보낸다고 절로 밤이 오지는 않는다. 아니, 밤은 올 것이다. 어둡고 캄캄한, 하루의 일과가 중단되고 긴 잠만을 남겨두는 시간표의 여백이. 하지만 그 시간은 소진된 오늘을 간신히 벌충하는 충전의 순간일 뿐, 새로운 무엇을 만들지는 않는다. “문밖은 어두운데” “손목시계가 자정을 가리키는데” 잠들지 못한 우리를 여전히 서성대도록 만들며 기다리게 하는 저 밤은 그와 다른 것이다. 그런 밤은 절로 찾아들지 않는다. 온종일 욕망하고 기다리며 다가들 때, 간절히 원하고 갈구할 때야 비로소 자신을 드러낸다. 아침부터 한낮, 오후와 석양까지의 모든 시간이 밤을 위한 준비가 되지 않는다면 저 밤은 끝내 오지 않으리라. 그러니 “아침저녁이 오전 오후가 다/밤의 또 다른 얼굴”임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밤은 그저 낮의 반대말이요 시계 바늘이 이동할 때마다 다가왔다가 어느새 사라지고 마는 지루한 순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매양 똑같기만 한 어둠의 상태 그 자체로. 지구의 자전이 일으키는 자연 현상으로서 밤은 늘 똑같아 보이지만, 지난 날과 오늘을 구별하고, 오늘과 다가올 날을 갈라내는 사건의 시간은 단 한 번, 지금-여기라는 밤의 시공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원본 없는 밤”으로서, 이전에도 이후에도 다시 없을 낯선 시작의 출현에 값한다. 언젠가 이런 밤을 살았던 적 있는데 그 밤은 영영 지나버린 것 같아 아무래도 오늘은 원본이 없는 밤이네 당신은 오늘 당신의 뒷모습에 대해 들었지 당신을 험담하는 동료들로부터 흐릿하거나 너무 가까운 시선들로부터 그건 진짜 내가 아니야! 진짜 나를 봐! 몸에 덮인 외투를 결점을 곡해를 걷어내도 당신은 진짜 당신을 보여줄 수 없고 사람들의 속마음은 수장고에 숨겨놓은 모나리자처럼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지 […] 초고를 지워버린 소설에서 그때에는 있지만 지금은 사라진, 더는 똑같은 묘사란 불가능한 시절과 풍경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밤에 - 조온윤, 「원본 없는 밤」 부분 (『서정시학』 2025년 봄호) 삶이 통과하는 모든 밤이 단 하나도 똑같지 않다는 깨달음은 마주하는 모든 밤을 “원본 없는 밤”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지금 도래한 밤은 과거의 그 어느 때도 있지 않았고, 미래의 어느 시점에도 동일하지 않을 밤, 전적으로 낯선 생성의 순간들이라 불러도 좋을 터. “초고를 지워버린 소설”처럼 매 순간의 이야기가 다만 처음 만난 봄처럼 새롭게 펼쳐지는 서사라 말해도 과장은 아닐 법하다. 외양과 모양새는 언젠가 엇비슷하게 존재했을지라도, 지금-여기를 환하게 비추며 만들어지는 낯익지만 또한 낯선 광경들로서. 이야기는 이미 수천 년 전의 이야기 별빛은 이미 수만 년 전의 별빛 일찍이 부스러졌을지 모를 세계로부터 소멸로부터 도망쳐 온 복본으로서의 빛 - 조온윤, 「원본 없는 밤」 부분 (『서정시학』 2025년 봄호) 3. ambulo ergo sum 아마도 봄은 그와 같은 낯설고도 낯익은 빛의 광경 속에 형상화되는 사건일 게다. 하지만 사전 속 단어처럼 단 하나로 지칭되는 봄은 없다. 그저 매번의 봄, 서로 다른 봄을 향해 이행하는 봄들이 있을 뿐이다. 겨울과 여름이라는 계절의 이름 사이, 그 어딘가에 자리한 시간의 흐름으로서의 봄. 지속되는 겨울을 절단하고, 어떤 밤의 생성 속에 틈입하기 시작한 낯선 순간으로서의 봄. 당연하게도, 이 같은 시간은 순전한 자연 현상을 가리키지 않는다. 항상 다르고 낯선 무수한 밤을 건너던, 의미의 사건을 바라던 수많은 욕망과 용기, 행동이 낳은 저 시간의 이행을 보라. 새로 이사 온 집 뜰에는 키 큰 목련 한 그루 옛 애인처럼 나를 반겼네 […] 아, 아린 너 아니라면 어찌 견디리 꽃을 기다리는 내 마음에도 눈보라 치고 봄날을 기다리 저 광장에도 밤새 눈이 내려 하늘에서 내린 면사포를 쓴 천사 같은 어린 소녀들 눈꽃 같네, 눈에 아리네 아, 아린 기다림은 또 얼마나 황홀한 고통이던가 - 김경윤, 「겨울 목련나무 아래서」 부분 (『문학들』 2025년 봄호) 낯선 곳에 정착한 화자는 언제부터인가 거기 있었을 “키 큰 목련 한 그루”가 오래된 연인처럼 여겨진다. 풍경도 분위기도 익숙지 않은 그곳에서 의지할 것은 단지 자연물인 목련 하나. 하지만 그것 없이 겨울 한파를 버티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 목련 한 그루를 버티도록 해주는 아린 곧 싹눈의 껍질은, 따라서 화자의 벗이자 동지이며 마음의 거처가 될 수밖에. 그와 마찬가지로 세찬 계절을 건너도록 도와주는 것은 “하늘에서 내린 면사포를 쓴/천사 같은 어린 소녀들”이다. 마치 아린 없이 내가 없었듯, 그들이 없었다면 “저 광장에도” “봄날”은 도래하지 않을 터이니. 그러니 우리는 결코 가만히 앉아 이 날을 기다리지 않았다. 간절기, 즉 계절의 사이는 절로 채워지지 않는다. 밤을 새워 내리는 눈을 온몸으로 맞으며 버티던 누군가, 스스로 “눈꽃”이 되어 이 지상을 녹이지 않았더라면 절대 이루어지지 않았을 계절의 이행을 기억하자. 어쩌면 밤은 그들이 온전히 지켜내고 녹여낸 생성의 순간들로 가득 차, 낯선 아침으로 우리 앞에 도달한 미-래의 현전일 테니. 하루에 한번쯤은 나서는 그의 산책길은 발끝부터 시작되는 생각의 근육 키우기다. 유아차를 미는 고샅길의 노인을 만나면 잠시 안아드리며 세월을 질문하고 망초꽃 들길을 걷다가 훅 끼치는 두엄 냄새를 맡고는 대지의 권력에 끌린다. 사람이기에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 걸으면서 길을 잃기도 하지만 걸으면서 자갈이 아삭거리는 강길을 찾고 강물에서 쏘가리를 건지는 사람과 웃는다. […] 이래저래 늦게 돌아오는 길, 다른 사람들로부터 좀 멀리 떨어져 있기에 별의 길은 자전거로 잠깐이면 가는 곳쯤이나 될까, 생각을 이내 고원한 데로 몰기도 하는데, 날마다 그 길이와 풍광이 다르고 막다른 절역에선 환한 돌장미의 시도 만나는 길, 다만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걷는 게 생명이라면 길마다에서 사라진 발자국도 찾아보고 길에서 만나는 왕오색나비와도 한통속으로 그는 걸을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기에. - 고재종, 「걷는 사람」 부분 (『창작과비평』 2025년 봄호) 사유하는 자로서 근대의 주체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고 선언했다면, 우리 시대의 그는 다만 ‘나는 걷는다. 그러므로 존재한다(ambulo ergo sum)’라고 되뇔 따름이다. 이를 주체의 퇴락이나 축소, 소멸로 부르진 말자. 거꾸로 그것은 이 세계를 살아내는 그, 예전의 데카르트적 주체가 이제 더 이상 자신이 이 세계를 관장하는 주인이 아님을 인정하고 물러서기 위한 몸짓일 뿐이다. 나로 인해 이 세계가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외부, 이를테면 저 밤이 이 세계를 다른 곳으로, 낯선 시간으로 밀어 넣는 주체임을 알았으니까. “대지의 권력”이란 그 같은 인간 너머, 주체 바깥의 주체가 놓인 광대한 생성을 가리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우리는,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시 강조하건대, 밤은 저절로 도래하지 않는다. 변화의 시간, 생성의 사건, 어제와 오늘을 가르고 오늘과 내일을 절단하여 낯선 세계로 이월시키는 저 밤은 욕망과 용기, 행동을 통해 인간과 우리, 나를 통과할 것이다. 소란스럽게 열띤 행진만큼이나 홀로 나서는 산책마저도 저 밤을 위한 걸음걸음이 되어 도래할 밤을 촉진할 테니, 이것이 지금-여기의 존재가 처한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은 아닐까? 때로 “걸으면서 길을 잃기도” 하고, 때로 길을 잃으며 걷기도 하겠지만, “이래저래 늦게 돌아오는 길” 안에 모든 밤이 있을 것이다. 그런 밤들을 모조리 통과하고서야 비로소 미-래는 지금-여기와 겹쳐질 게다. 따라서 인간은, 우리는, 나는 “걸을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기에.” * 누군가는 잠들고 다른 누군가는 여태 잠들지 못한 이 시간, 그러나 아직 밤은 오지 않았다. 아니, 지금은 밤이다. 다만 어제와 다르지 않고, 내일도 똑같고야 말 추상적인 밤일 뿐이다. 정체된 채 흐르지 않고, 누구의 산책길도 준비하지 못한 상태로 그저 주저앉아 있을 따름인 시간. 그럼에도 시간은 흐르고, 밤은 촉진되리라. 낯설고 또 다른 밤을 향하여. 그러니 지금은 계절의 사이를 마냥 기다리지 않고, 바라보아야 할 때. 주의 깊게 머리를 숙인 채, 눈을 질끈 감고서 저 밤의 도래를 직시해야 할 시간이다. 간-절기(看-節期). 욕망하지 않고서, 용기를 갖지 않고서, 행동하지 않고서 생겨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봄을 여름으로 옮기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며, 익숙하던 세계를 낯선 세계로 돌려놓을 환절의 운동은 기어코 저 밤이 이루어낼 테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주문을 외워야 한다. 예감해야 하며, 때로 믿기도 해야 할 테다. 그렇게 밤은 올 것이라고. 지금-여기에 구멍을 뚫어 현재를 함몰시키고 어딘가의 낯선 시공으로 뱉어내리라고. 그것이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미-래의 권력이라고. 간-절기, 혹은 시적 주문의 시간을 통해. 누가 피어나려는 꽃나무를 막을까, 누가, 온 세상에 차례로 번지는 색색의 봄을, 누가 쫓아다니며 막을까, 누가, 동시에 펼쳐지는 우산을 접을까, 누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비를 막을까, 누가, 기울어지는 나무를, 세울까, 누가 무너지는 세상의, 얼굴을, 닦을까 - 박연준, 「새된 소리」 부분 (『문학동네』 2025년 봄호)
‘곁’의 사랑, 사랑의 ‘둥지’ -『피로의 필요』(김지윤, 청색종이, 2025), 『가라 인생』(강백수, 시인동네, 2025) 차성환 살아가는 것은 살아지는 것이고 사라지는 것이다. 이는 두 시인이 세계를 바라보는 동일한 인식이다. 다른 이들은 바쁘게 저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 같은데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삶을 잘 살았다는 느낌보다는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느낌이다. 삶은 곧 소멸에 대한 감각으로 채워진다. 죽고 사라지는 것들을 돌아보는 행위가 시를 쓰게 한다. 여기 앞에 놓인 두 개의 시집은 세계의 사라짐에 대한 감각을 공통분모로 한다. 중요한 것은 불가항력적인 소멸의 속도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문제일 것이다. 세계의 소멸에 대한 응전으로써 이들은 각기 다른 사랑의 일을 도모한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랑의 일을 꾸민다. ‘곁’의 사랑 김지윤 시인은 사라지는 것들에게서 아름다움을 본다. 지구상에 피었다가 사라지는 무수한 사물들을 그냥 보내지 못한다. 그것들이 자신의 눈동자에 맺히도록 지긋이 바라본다. 그 목소리가 몸 안에 담기도록 한없이 귀 기울인다. 그것들이 죽고 사라진 후에도 쉽게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그는 “꽃이 시들고 노을이 지듯/ 지금 아름다운 것도/ 끝날 것이다”(「오늘의 하늘」)라며 소멸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기우는 햇살 아래 꽃 그림자/ 희미하게 남은 노을의 자취/ 무언가 사라져 가는 자리에/ 어른거리는 그런 것들만 사랑했지”(「피로의 필요」). 시인은 소멸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시를 쓴다. 시인의 임무는 찰나에 피었던 짧은 생을 죽음에서 건져 올려 끊임없이 기억하고 회상하는 것이다. 지난해의 꽃들은 어느 땅에 묻혀 있을까 아름다운 것들이 죽어서 이름이 없어진 잃어버린 시절의 흔적을 감추는 겨울 흙 작은 씨앗의 뿌리는 죽은 이름을 먹고 자라나 푸르러질 준비를 하고 바람은 속삭이지, 네 차례야그러면 낡은 땅에서 새 풀이, 늙은 가지에 연한 잎이 다시 낡아질 줄 알면서도 한철 마음껏 돋아나 우리는 그것들을 신록이라고 부르지 어차피 역사란 그런 것 죽은 이름이 산 이름을 기르고 새로운 것으로 가득한 눈부신 봄날 문득 스치는 바람으로 옛 냄새를 기억하는 것 언 땅을 뚫고 끝내 피고야 마는 꽃들을 쓰다듬는 바람, 입술을 적시는 빗방울 젖은 노래들이 하염없이 계속되는 메들리 그리고 또다시 시간이 깊어지면 찰나의 빛을 품은 침묵이 땅에 묻히고 서리가 내리고 눈이 쌓여 한동안 고요해져도 정녕 끝나지는 않는 그런 노래를, 우리는 봄이라고 부르지 -「봄」 전문 시인은 지금 이 땅에 없는 것들을 떠올린다. “지난해의 꽃들은/ 어느 땅에 묻혀 있”는지 찬찬히 바라본다. “잃어버린 시절의 흔적을 감추는 겨울 흙” 때문에 그 자리를 좀처럼 찾아낼 수 없다. “꽃”의 존재가 사라지고 “이름”도 알 수 없지만 “봄”이 오면 어김없이 “낡은 땅에서 새 풀이, 늙은 가지에 연한 잎이” 자라난다. “작은 씨앗의 뿌리”가 “지난해”에 죽은 “꽃들”의 “죽은 이름을 먹고 자라나”기 때문이다. 이제 피는 꽃들은 “지난해의 꽃들”과 마찬가지로 “다시 낡아질 줄 알면서도 한철 마음껏 돋아”날 것이다. 피어남과 동시에 소멸해야 하는 운명임에도 불구하고 “한철 마음껏” 피는 “꽃들”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새로운 것으로 가득한 눈부신 봄날”을 온 힘을 다해 살다가 가겠다는 결심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바로 “문득 스치는 바람으로 옛 냄새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땅”에 묻혀 있는 “지난해의 꽃들”이 살아있었을 때의 “냄새”를 위해, 죽음으로 스러진 지난 “꽃들”의 아름다움을 다시 살아내기 위함이다. 그러하기에 꽃들은 “언 땅을 뚫고 끝내 피고야 마는” 결의를 보여준다. 가없는 생의 아름다움에 감동한 “바람”이 꽃을 쓰다듬고 “빗방울”이 꽃의 입술을 적신다. 하지만 꽃들은 곧 스러질 것이다. 결국 “땅에 묻히”게 될 터이지만, “우리”는 그 “꽃들”이 피었던 눈부신 “찰나의 빛”을 기억한다. 그 기억은 “정녕 끝나지는 않는 그런 노래”로 계속 전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매년 “봄”이 오면 기적처럼 “언 땅을 뚫고 끝내 피고야 마는 꽃들”이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죽은 이름이 산 이름을 기르”는 일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 곧 사랑의 “역사”이다. 그렇기에 “신록”은 매번 새로운 초록빛(新綠)인 동시에 새로운 행복(新祿)이고 또 새로운 기록(新錄)이 된다. 이것은 비단 “꽃”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어쩌면 내가 아끼는 사람일 수도 있다. ‘나’를 길러낸 부모도 “죽은 이름이 산 이름을 기르”는 일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시인은 ‘나’라는 존재가 꽃피우기 전에 이 지구상에는 무수히 “아름다운 것들”이 피고 지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 또한 ‘나’의 다음 세대를 위해 기꺼이 “죽은 이름”이 되고 “산 이름”을 기르리라는 것을 예감할 터이다. 시인이 사랑하는 것들은 곧 사라지는 것들이고 사라지는 것들이 곧 사랑하는 것들이다. 3 멀리 있는 것들은 대개 아름답지 고요하고 평안한 무감각 속에 너무 멀어 풍경이 되는 것들 가까이, 오직 가까이서만 볼 수 있지 상처도 주름도 균열도 모든 낡아지는 것들도, 모든 티끌, 더러움, 떨림은 가까이 선 이만 알 수 있는 것 고운 늦가을 단풍이 실은 아파하는 중이라는 걸 앓다가 긴 겨울을 준비하리라는 걸 그러니 사랑은 가까워지는 것 작은 들꽃들도 곁에서 서로 뿌리를 뻗어 험한 바람결에도 몸을 지탱하고 낮은 속삭임은 가까운 데서만 들리는 것을 조그만 촛불도 가까운 곳에서는 밝고 보잘것없는 온기도 다가서면 따스하지 초라한 모닥불 하나 피워 나란히 앉자 그 작은 불씨마저 꺼진대도 입김을 불어 넣어 줄게, 창백한 시간의 푸른 얼굴에 핏기가 돌 때까지 한참 후에야 우린 알게 되겠지, 가까이에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우릴 살아남게 했다는 걸 -「가까이에서」 전문 ‘당신’의 삶이 “풍경”이 될 정도로 저 “멀리” 있다면 모든 것이 “고요하고 평안”할 것이다. ‘나’는 먼 거리가 주는, 일종의 “무감각” 속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는 것에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면, 사랑하기 시작한다면 그 거리를 포기해야 한다. “오직 가까이”에 있을 때만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당신’의 “상처도 주름도 균열도 모든 낡아지는 것들”, “모든 티끌, 더러움, 떨림”은 “가까이”에 있는 이에게만 허락된다. 결점은 ‘당신’의 약함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을 지키고 사랑하게 하는 것들이다. “사랑은 가까워지는 것”이다. 사랑은 다른 이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당신’의 “곁”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특권이다. “곁”은 “낮은 속삭임”도 들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를 뜻한다. “작은 들꽃들도 곁에서 서로 뿌리를 뻗어/ 험한 바람결에도 몸을 지탱하”는 것처럼, ‘곁’을 지키고 있는 힘만으로도 서로를 살릴 수 있다. “조그만 촛불”의 “보잘것없는 온기”도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는 밝고 따듯한 힘이 된다. 서로의 “곁”을 내어준 자들은 서로의 “작은 불씨”가 꺼져갈 때마다 “입김을 불어 넣어” 함께 살아갈 힘을 얻는다. “가까이에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은 “곁에서 서로 뿌리를 뻗”고 “낮은 속삭임”을 듣고 서로에게 “입김을 불어 넣어” 주는 일이다. 이 일들이 “창백한 시간의 푸른 얼굴에 핏기”를 돌게 하고 “우릴 살아남게” 한다. 서로의 “곁”을 지킨다면 우리는 무너지지 않는다. 김지윤 시인의 사랑은 당신의 “곁”에서 오래도록 그 빈 자리를 지키고 기다리는 것이다. “서로의 소리에 귀 기울여/ 나는 너의 빈 곳을,/ 너는 나의 부서진 곳을/ 기어이 찾아냈고// 우린 망가진 채로도 하나가 될 수 있어”(「화음」). 비록 불완전하더라도 서로의 결여가 포개져 온전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에 내기를 거는 것이다. 그는 “바람이 부는 소리, 꽃이 흔들리는 소리/ 귓가에 속삭였던 아득한 그 말들”(「세상 모든 것들의 소음」)에 귀 기울인다. “나뭇잎과 꽃잎들마다, 져 버리고 시들어 버릴 모든 존재들에/ 이슬과 햇살과 바람으로 적혀 있는 희미한 진심을 읽는다”(<시인의 말> 중에서). 시집 『피로의 필요』에는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사랑의 밀어가 가득하다. “나는 너를 살리겠어// 땅이 뿌리에게/ 숲이 나무에게/ 빛이 어둠에게 하는 말”(「스미는 숨」)처럼, 사라지는 것들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사랑의 결의로 가득 차 있다. 김지윤의 시는 “내 입술에서 흘러/ 너에게 스미는/ 희미한 숨”(「스미는 숨」)이다. 그것은 ‘당신’의 소멸 이후에도 ‘당신’을 결코 떠나지 않겠다는 ‘곁’의 사랑이다. 사랑의 ‘둥지’ 강백수 시인은 자신이 지나온 어두운 터널과 같은 청춘의 뒤안길을 사랑한다. 이 청춘이 시를 쓰고 기타를 치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힘이다. 한 손에 시, 다른 한 손에 기타를 들고 엉망진창 온몸으로 살아낸 사랑의 기록이다. 시집 『가라 인생』의 제목은 가짜(fake) 인생이자 고고(go go) 인생으로 읽힐 수 있는, 중의적인 효과를 노리고 있다. 시집의 결론에 도달하면 알겠지만, 이는 선후관계이다. 시인은 “블로그와 유튜브와 여행책이 아니더라도 대충 어떻게 살다가 언제쯤 어떻게 죽을지 정도는 알 수 있다 다 알면서도 굳이 산다 나는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 것인가”(「시부야」)라며 생에 대한 차가운 냉소를 언뜻 내비친다. 또한 “삶의 의미가 고작 담배냐고/ 그렇다면 삶의 의미가 무엇이어야 하는가”(「워크에식(Work ethic)」)라면 생의 의미를 갈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아무것도 아닌 놈이/ 아무것도 아닌 삶을 살고 있다고”(「가라 인생」) 자조적으로 말하지만 결국은 “어쨌거나 삶은 주어졌고/ 어느 시점엔가 당신은/ 그래도 살아볼 만한 게 삶이구나”(「시작점」)라고 무릎을 탁, 치는 순간에 도달하게 된다. 지구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도 아직 지구에 도착하지 않은 사람을 미리 사랑한다 이미 지구를 떠난 사람을 뒤늦게 사랑한다 그건 이를테면 아직 눈코입도 없는 태아를 벌써 사랑해서 이름을 짓고 이미 재가 되어 흩어진 고인이 아직 그리워서 이름을 쓰는 일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 초음파 사진을 공유하며 벌써부터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영정사진을 공유하며 아직까지 당신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고백하는 일 지구에 사람이 이렇게 많다지만 지구상에는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고 올 사람을 위해 예비된 공간과 간 사람을 위해 남겨둔 공간이 있어 미래의 사람과 사랑을 하고 과거의 사람과 사랑을 한다 완벽하게 분리되지 못한 미래와 현재와 과거 -「뒤섞인 시간」 전문 이 시는 그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사랑의 시차時差를 보여준다. 우리는 아기를 낳기도 전에 미리 뱃속의 태아를 찍은 “초음파 사진을 공유하며/ 벌써부터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야기를 한다. 사랑하는 이가 살아있을 때는 건네지 못한 말을, 이제는 죽고 없을 때 “아직까지 당신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고백”한다. 우리는 왜 “지구에 도착하지 않은 사람을”, 그리고 “이미 지구를 떠난 사람을” 이토록 사랑하는 것일까. 시인의 궁금증은 “사랑”에 대한 특별한 깨달음을 불러온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올 사람을 위해 예비된 공간”이 있고 또 “간 사람을 위해 남겨둔 공간”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불가능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 바로 “미래의 사람과 사랑을 하”는, ‘미래의 사랑’과 “과거의 사람과 사랑을” 하는, ‘과거의 사랑’이 그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곳에 존재하지만 우리는 늘 “미래와 현재와 과거”가 “완벽하게 분리되지 못한” 사랑의 시간을 살아간다. 시인의 이 독특한 시간관이 곧 그의 독특한 사랑관을 말해준다. ‘나’의 사랑이 과거의 어떤 시점에서 종결되거나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가 분리되지 않은 채 영원한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없으면 못살 것 같았던 것들이 대부분 사라졌다 사랑하는 것들과 벌써부터 점점 멀어진다 그러나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 의연히 커피를 내려 마셨다 밤하늘에 빛나는 이미 죽어버린 별들과 그나마 남아 있는 것들이 있대도 닿기 전에 죽어버릴 나의 생 그러나 바로 지금 별자리는 저기에 있다 일 년이건 백 년이건 그대도 나도 결국은 시한부 인생 두고 떠나건 홀로 남겨지건 결국은 예정된 이별 그러나 우리는 입을 맞추고 서로를 어루만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키스를」 청춘을 건너온 시인은 삶을 뒤돌아본다. “없으면 못살 것 같았던 것들”, 그 “사랑하는 것들”은 “대부분 사라졌”고 기억에서 “점점 멀어”져 간다. 과거의 그때는 이 사랑이 끝난다면 다른 삶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또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영원할 것이라고 여겼던 과거의 사랑은 어디에 있을까. 이것은 사랑의 배신일까. 아니다. 강백수 시인이 말하는 사랑의 윤리는 이렇다. 이 몸이 다할 때까지 사랑하는 ‘나’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사랑해서 살아남은 것이다. 지금까지 지속하는 사랑의 힘을 통해 무의미하게 사라졌을 ‘나’를 지켰고 과거에 “없으면 못살 것 같았던 것들”에 대한 ‘나’의 사랑을 간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서 온 사랑의 대상들을 영원히 지킬 수 있는 것이다. “밤하늘에 빛나는/ 이미 죽어버린 별들”, 혹은 이제 곧 사라질 “별들”이 뿜어내는 그 별빛이 지구에 닿기도 전에 ‘나’는 “죽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밤하늘을 수놓은 아름다운 “별자리”이다. 세계의 모든 사물은 그것이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 삶의 조건은 죽음이다. “결국은”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이 “시한부 인생”이고 우리는 모두 “예정된 이별”을 하게 된다. 그러나 시인은 죽음의 예감에 함몰되지 않는다. 죽거나 말거나 “우리는 입을 맞추고/ 서로를 어루만”지는 육탄전으로 “예정된 이별”에 뛰어든다. 첫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그러거나 말거나 키스를’은 어쩌면 시인이 삶에 장착한 제1의 신조일 수도 있겠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지구 최후의 벙커는 진정 사랑이라는 듯이, 온갖 세상의 풍파도 이별도 죽음도 다 막아내겠다는 듯이, 키스한다. “모든 생은 단 한 번”(「사후세계관」)이다. 그러니 후회 없이 사랑할 것이다. 시인은 다른 시에서 “저마다 힘겨운 삶을 산다/ 그 힘듦으로부터 어떻게든 몸을 숨긴다”(「버러지」)라고 썼다. 연약한 우리의 몸을 숨길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두 연인이 서로 몸을 포개고 어루만지며 키스를 하는 사랑의 둥지이다. 이 사랑의 둥지가 시인이 찾은, “거의 무의미한 내 삶 속의 유일한 의미”(「무임금 노가다」)이다. 그는 죽음마저 이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사랑의 둥지를 노래한다. 나는 그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싶다. “사랑의 끝을 알면서도 스로틀을 당기던 그 밤”(「110cc」)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알아, 우리가 결국 죽는다는 거. 그래도 나쁘지 않아. “우리 가족에게는 종교가 없지만 단 하나 우리를 지탱해 주는 사후세계관이 하나 있단다 죽고 나면 반드시 돌아가신 엄마를 만날 거라는 거 그걸 생각하면 어떤 이별도 나의 죽음도 최악의 일은 아니어서 그럭저럭 견딜 만한 것이 되곤 한단다”(「명견 강삼돌」). 그의 솔직한 위로 앞에서 마음은 무장해제될 것이다. 그리고 이 시집은 꼭 그의 노래 <타임머신>과 같이 감상하기를 추천한다. 강백수의 시는 세계가 무너져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둥지’이다. 자크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사랑하고 있을 때, 그에 대한 애도도 이미 시작된 것이다’. 사랑하는 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기에, 이 사랑은 한없이 덧없고 슬프다. 사랑의 윤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도 함께 껴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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