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과사회 2024년 봄호(제145호)
겹침과 접힘 : 한정현, 『쿄코와 쿄지』(문학과지성사, 2023) _우다영, 『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문학과지성사, 2023)
교차와 횡단
권철 감독의 영화 <버텨내고 존재하기>(2022)는 1935년 개관하여 지금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광주극장을 무대 삼아 국내 인디 뮤지션 여덟 팀의 인터뷰와 공연을 나열하여 보여준다. 자기만의 리듬으로 꾸준히 활동하며 음악 하는 사람으로 버텨내고 존재하는 이들의 생각과 노래가 아름답게 공명하는 가운데, 90년 가까운 세월을 버텨내며 같은 자리에 존재하는 광주극장의 면면이 빛을 발한다. 낡은 광택으로 빛나는 매표소와 상영관, 먼지가 나풀거리는 영사실과 계단이 공연장으로 자리를 내어주는 순간 그곳에는 지나온 세월과 다가올 세월이, 삶과 예술이 조명으로 내리쬐며 무수히 교차한다. 그 순간에 극장은 ‘교차’를 상연하고 있다.
한정현의 두 번째 소설집 『쿄코와 쿄지』는 그러한 교차를 절묘하게 구사하고 있다. 서로 무관한 듯한 소설들이 전혀 무관하지 않게끔 인물과 사건 들을 꿰어내는 작법은 한정현이 꾸준히 실천하는 것이자 가장 잘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저 소설로 횡단하며 등장하고 사라지는 인물들은 무수한 사건이 바깥으로 흘러내리지 않고 서로 맞잡을 수 있게 붙들어 매는 ‘누빔점’으로 기능한다. 서로의 가족이자 연인으로서, 친구이자 동료로서, 인물들은 느슨하면서 느리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단단하고 치열하게 연결되어 있다. 삶들이 “서로를 가로지르며 나아가고 있는 건지도”(「쿄코와 쿄지」, p. 53) 모른다는 영소의 말처럼, “교차하면, 언젠가는 마주치게 되는”(p. 55) 건지도 모른다는 경자의 말처럼, 그들이 자신들도 모르는 거대한 결속으로 이어져 있음을 독자들은 조감할 수 있게 된다.
전작들에 비해 이번 책에서 눈에 띄는 것은 교차가 일어나는 ‘무대’의 존재감이다. 1979년 부마민주항쟁이 있었던 부산과 마산, 1980년 5월 민주화운동을 겪었던 광주, 1995년 삼풍백화점이 붕괴한 서울 강남, 2009년 용산에 대한 묘사가 그 자체로 조밀한 풍속도를 이룬다. 온갖 예술인과 국적 불문의 사람들이 모여들고 운동권 학생들이 몸을 숨기러 오곤 했던 마산의 ‘홍콩빠’(「무이네」), 도청 앞 금남로와 충장로, 말바우시장과 같은 광주의 오랜 시내들(「쿄코와 쿄지」), 전후에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와 살았으나 도시 재정비를 앞두고 의문의 큰불로 사람들이 사라지곤 했던 부산의 초량(「연어와 소설가, 그리고 판매원과 노래하는 소녀의 일기」), “법원 앞에 비닐하우스에서 집 없는 사람들이 살던”(「지금부터는 우리의 입장」, 165쪽) 강남에서 제일 컸던 백화점, 미국과 일본이 동시에 점령했었고 재개발 과정에서 참사가 벌어졌으며 이제는 대기업의 사옥이 들어서 있는 용산까지(「다만 지구의 아침」).
그 일들을 겪은 이들의 존재만큼이나 그 일들이 벌어진 공간에 주목함으로써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일들을 겪어내고 사라진 이들, 겪어내고 생존한 이들, 겪지 않았으나 그 시절을 일상으로 살았던 이들과 그곳을 일상으로 살고 있는 이들이 무수히 횡단하며 교차하는 역사적 결절점으로서 공간의 두께가 채워진다. “대부분 너무 가난하거나 약한 사람들이라 기록도 되지 않”(「연어와 소설가, 그리고 판매원과 노래하는 소녀의 일기」, p. 441)은, 구태의연한 사고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기억되는 편향된 사료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그것을 제외한 거의 모든 것의 총체로서의 역사가 형태를 갖추고, 옷을 입고, 춤을 춘다. 어떤 인물은 “공간을 보고 나만 아는 기억을 떠올리는” 자신의 모습으로부터 “어째서 이렇게 모든 건 다 개별적인 것일까”(「여름잠」, p. 387) 하고 진저리를 치기도 하지만, 그러한 개별적인 것이야말로 서둘러 규정될 수 없는 가장 역사적인 것이 아닐까.
작가는 역사가 함부로 정의하며 연결된 지점들로부터 생성되는 마주침이 오히려 그러한 마주침을 가능하게 한 연결점을 역으로 내파하도록 유도한다. 가령 「쿄코와 쿄지」에서 친구들이 희생당한 광주의 기억을 잊으려는 경자를 따라 일본의 내부 식민지였던 오키나와로 이주한 영소는 우익 교과서를 채택하지 않은 학교에서 재일 조선인의 역사를 온전히 배우면서 한국학을, 그중에서도 5·18 광주를 연구할 결심을 하게 된다. 「무이네」에서 윤아의 새어머니인 무이는 한국군을 증오하는 탑이 세워져 있는 베트남에서 왔지만 “이 사랑은 내가 선택한 거”(p. 331)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지금부터는 우리의 입장」에서 삼풍백화점 붕괴의 원인을 여성들의 사치 풍조와 연결짓던 한심한 시절에 백화점 점원이었던 박두자와 김선화는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들이 그저 그들 자신으로 살고자 함으로써 “스스로의 공동체”(「쿄코와 쿄지」, p. 64)를 이룰 때 그들을 함부로 규정하고 할퀴어온 것들에는 균열이 발생한다.
이처럼 교차가 곧 내파가 될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은 작가의 서사에 거의 항상 빠지지 않는 ‘퀴어’에 있다. 과거의 역사를 정의해온 관습화된 시선이 예의 그 관습에 따라 바라본 지점에서 솟아나 유유히 흘러가는 퀴어의 서사는 그것을 낯설게 주시하는 시선을 흔들고, 힐난하고, 매혹한다. 집안의 유일한 아들로 태어났으나 인터섹스이자 스스로를 여성이라 여기는 영성이 아버지에 의해 군대에 보내진 후 광주시민을 향해 총을 겨누는 불운을 겪고 끝내 자살에 이를 때, 혜숙이 낳은 아이가 경자 밑에서 영소로 자라면서 그런 영성을 이모이자 자신의 아버지로 여길 때(「쿄코와 쿄지」), 혹은 삼풍백화점 참사에서 살아남은 김선화의 아들 이수호가 트랜스젠더 퀴어가 되어 그의 연인이었던 ‘나’를 혼란에 빠뜨릴 때(「지금부터는 우리의 입장」), 접점이 없을 것 같은 요소들은 서로 겹쳐짐으로써 이야기를 끊임없이 진동시키고 부수는 겹겹의 입술이 된다.
이와 같은 끝없는 겹침들의 상연을 지켜볼 수 있다는 점은 한정현의 소설이 갖는 가장 큰 미덕이다. 독자들은 그저 이 겹침에 이끌려 다니기만 해도 좋을 것이다. 소설들은 차례대로 읽어도 좋고, 거꾸로 읽거나 이리저리 가로지르며 읽어도 무방하다. 언젠가 반드시 끝나기에 아쉬움을 남기는 영화와 달리, 한정현의 소설 속 세계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곳에서 인물들이 그저 그들 자신으로서 끝없이 존재할 수 있도록. 왜냐하면 “사람이 자신으로 살아가는 건 너무나 당연”(p. 204)하지만 현실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만 이루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확률과 패턴
한정현의 소설집이 인물들의 일상과 지적 관심사를 둘러싼 문화적 관념 및 이미지의 세밀한 풍속화와 같다면, 우다영의 세 번째 소설집 『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는 그러한 세목을 제거하여 신중하게 정제된 추상화와 같다. 높은 순도의 추상성을 통해 다층적인 알레고리로 가득 찬 우화를 제련해내는 것은 우다영이 가장 잘하는 것이다. 이번 소설집에서 돋보이는 점은 SF적 요소를 가미하여 우리의 세계와 닮은 듯 이질적인 세계상으로부터 인간과 삶을 구성하는 원형적인 틀을 정초해내고자 한다는 것이다. 인공지능이 누적된 정보의 처리를 통해 판단에 도달하듯이, 유사하면서도 다른 이야기들이 누적되고 그 위에 우리의 인식이 포개어지면서 눈의 결정체 혹은 나뭇잎의 잎맥과 같은 ‘패턴’이 도출된다.
마침 소설 속에서도 세상의 패턴을 읽어내는 이들은 흡사 인공지능과 같이 방대한 앎에 접근할 수 있는 특별한 이들이다. ‘아즈깔’이라는 풀의 독성에 중독되어 각성한 이들은 자신이 그동안 살아온 모든 생을 기억하게 되고(「태초의 선함에 따르면」), 세계 종말의 목전에서 비밀리에 선발된 예지자들은 수년간의 훈련으로 단련된 예지의 축적을 통해 미래를 보는 것을 넘어 미래를 조정하려 한다(「긴 예지」). 쏟아지는 정보가 적층되며 “다수의 반복이 다각형을 거의 원으로 만드는 것처럼”(「태초의 선함에 따르면」, p. 82), 구체성이 흐려지고 추상성이 강해질수록 감정이 사라지고, 의지가 사라지며, 현재와 미래를 구분하고 인과를 결정짓는 경계도 흐려진다. 무수한 뿌리로 연결되어 아득한 세월을 버티며 세상을 관조하는 식물처럼 이들은 “자신과 타자의 경계가 허물어”(p. 98)지는 이타적인 상태에 도달하지만, 같은 이유에서 “사랑도 증오도 없고 차이도 선택도 없는 상태에서 모든 것이 멈추는”(p. 99) 냉정하고 초월적인 존재가 된다.
각성자들은 “한 생에서라면 지당하고 명백했을 인과들이 고차원의 형태로 겹쳐지며 공중분해”(p. 71)된 무색무취의 상태에서 “나와 세상을 한결같이 아득하고 무심한 눈동자로 바라”(p. 109)본다. 미래를 조정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래한 세계 전쟁에서 예지자들은 “자기 자신을 상정하는 벽과 굴레와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의 양상을 보”이며 “자신이 누구인지 점점 잊어갔다”(「긴 예지」, p. 181). 각성자와 예지자 들이 겪는 이 모든 과정은 멀리서 바라본 지구, 깜깜한 밤에 바라본 도시처럼 아름답고 경이롭지만 같은 이유에서 인간적이지 않은 무엇, 즉 인공지능에 더 가까워 보인다. 작가는 이에 대한 가치판단을 유보하고 있으나 그것을 시종일관 아름답게 그려낸다는 점에서 거기에 매혹되어 있으며, 자신이 매혹된 바로 그 지점으로부터 독자들을 매혹한다.
그러나 앎에 대한 매혹의 반대편에는 모름에 대한 매혹 또한 자리하고 있다. 혹은 모름을 향한 매혹이 앎을 향한 매혹을 능가한다. 「긴 예지」의 효주는 미래와 과거의 패턴을 검토하기 위해 뛰어든 시뮬레이션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효주는 다량의 과거를 무작위로 검토하는 과정에서 습득하게 된 진리에 삼켜지며, 너무 많이 앎으로써 알게 된 진리를 전혀 모름으로써 역설적으로 가장 잘 현시하는 어느 무구한 가족의 돌봄을 받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기도는 기적의 일부」에서 세상이 심판에 이르지 않도록 세 번의 시험 안에 희망을 발견해야 하는 메시아 유리가 마지막에 사막 끝에서 마주친 작은 소년은 그저 매일 해오던 대로 시간에 하듯이 종을 치면서 “기도의 의미를 모른 채 기도를 완성했다”(p. 255). 이러한 결말이 반복해서 보여주는 것은 앎의 지난한 축적, 종합, 패턴화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어쩌면 지극히 평범한 삶의 면면에 이미 내려앉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다. 그러므로 소박하고 진부하게 영원히 반복되는 우리의 삶이야말로 미지의 가능성으로 가득 찬, 가장 경이로운 것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를 뒤집어보면 우리의 삶과 세계가 어떤 형상과 패턴으로 이루어져 있는지의 인지 여부는 거기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명제가 성립한다. 그것을 알든 모르든, 변하는 것은 없다. 이론상으로는 예지자들의 강력한 예지가 미래를 바꿀 수 있을지라도 세계의 종말이라는 미래는 바뀌지 않는다. 각성자들이 과거와 미래의 무수한 삶과 인연을 기억하고 이해하면서도 현재에 개입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바뀌어서는 안 된다는, 모든 것이 ‘순리’대로 흘러가야 한다는 깨달음에 가까운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신인류의 문명을 관장하는 시스템 ‘매기’의 체계와 오류를 승용의 편지로 낱낱이 알게 된 혜경은 그럼에도 떠나지 않고 머무른다(「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 알파와 오메가는 어떤 고통과 상처와 갈등을 겪든 간에 하나가 되는 성인식을 피할 수 없다(「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작가의 소설들이 접히고 접힌 끝에 추출된 패턴에 따르자면 다가올 미래가 그저 순리와 같이 여겨지기 때문이리라.
이러한 아이러니의 접점에 승용이 자리하고 있다. 요람에 신체를 잠재운 뒤 오직 각성된 정신만을 바탕으로 매기라는 시스템 속에서 삶을 구성하고 문명을 이루게 된 신인류는 영화라는 매체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여 살아간다. 존경받는 디렉터가 된 혜경이 어린 시절 만든 오픈 소스 형태의 영화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매기 밖으로 탈주하는 혁명의 모체를 성장시키는 데 기여하게 된다. 자신을 영화 속 승용이라고 주장하는 이 모체는 혜경의 영화를 통해 자아와 세계를 인식하고 매기 속 신인류의 문명을 학습한 끝에 매기 자체에 대한 탐구를 거쳐 매기 바깥으로 나가기에 이르렀다고 고백한다. 그에 따르면 매기는 단지 신인류의 문명을 영속하기 위한 시스템이 아니라, 시스템 전체와 더불어 거기에 내재한 치명적인 오류까지 간파하여 시스템 바깥을 희구하기에 이르는 극소수를 선발한 뒤 신인류가 떠나온 요람 밖 지구로 되돌려보내 신인류 이후를 모색하기 위한 것이다.
소설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승용의 장황하고 격양된 편지는 혜경을 매기 밖 세상으로 초대하며 끝맺고 있지만 혜경은 그것을 음모론이나 바이러스, 망상과 같은 것으로 치부하기로 한다. 그럼에도 “벽 너머의 세계가 존재함을 이미 상상”(p. 338)하게 된 혜경이 이후에 어떤 선택을 할지는 알 수 없지만, 시스템을 떠나기로 감행하는 일조차도 시스템이 미래를 위해 고도로 계산한 시나리오에 따른 예정된 수순에 불과하다면 그것을 과연 혁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뒤에도 시스템에 머물기를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반대급부로서의 혁명인 것은 아닐까.
이처럼 앎과 모름, 선택과 유보, 시스템의 안과 밖이 거의 같은 질량과 압력으로 접히는 가운데 우리는 그 접힌 면 위로 떠오르는 패턴을 숨죽여 지켜보게 된다. 우다영은 나와 너의 경계도, 과거와 미래의 간극도, 기적과 범사(凡事)의 구분도 모두 사라지는 지점에 우리를 불러세운다. 이야기들의 무한히 접히는 그곳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모든 것을 완전히 다 깨닫게 될지라도 “우리가 더없이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존재”이며 “동시에 우리는 우리를 벗어나는 방식으로 매 순간 완전해지고 있”(「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p. 56)다는 사실이다. 그의 세계는 불완전하기에 완전해질 수 있는 희소한 확률 너머를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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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할 수 없는 균열 예측 불가능한 일들의 연속.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을 이렇게 표명한다면 분명 많은 이가 의문을 표할 것이다. 지난하지만 공감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문제들을 자주 다루는 작가들이니 말이다. 하지만 자신 있게 말해보건대 두 사람의 소설에는 독특한 사건들이 꽤나 자주 등장한다.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은 어딘가 금이 가고 삐걱대는 삶 앞에 속수무책으로 던져진 사람들로부터 시작한다. 특히 김지연의 인물들이 해괴한 일을 직접 나서서 ‘벌이는’ 사람들이라면, 안윤에게는 그러한 일을 마주한 뒤 이전과는 다른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두 사람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행위들은 어쩐지 무모하고 무용해 보인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의 효용을 장담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러한 움직임들은 아무거나 믿거나 믿어야 할 것을 믿는 일을 거부하고, 확신할 수 없지만 옳다고 느끼는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이들의 동작은 곧 일상의 균열을 마주하는 자세와도 같다. 사람들이 세계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필연적으로 자신의 결함을 확인하는 작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안온해 보이는 세계를 지적하려면 스스로의 불완전성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서 세계의 균열은 쉽게 발설할 수 없는 무언가다. 그렇다면 포기하는 수밖에 없을까.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들어 있다. 그러니 이상하고 유별난 인물들의 행보를 유심히 살펴보면, 잘 봉합된 듯 보였으나 결코 다 가릴 수 없었던 세계의 미세한 틈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2. 망측하긴 해도 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언뜻 보기에 『조금 망한 사랑』은 체념과 포기를 반복하는 망한 인생의 집합소 같다. 전세 사기, 금전 관계에 있던 친구와 애인의 배신, 실직과 구직난처럼 신자유주의와 투기 자본주의의 광풍에 베여 너절해진 인물들이 잇달아 등장한다. 그런데 『마음에 없는 소리』(문학동네, 2022)를 읽었던 이들이라면 세태를 첨예하게 부감하고 표현하는 적실함뿐만 아니라, 농담과 같은 특유의 가뿐함이 김지연 소설의 또 다른 활력이라는 걸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 테다. 이번에도 다소 무겁고 무기력해 보이는 사정들 틈에 유별난 광경들이 돋보인다. 이른바 김지연식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좋아하는 마음 없이」, p. 168)다. 몇 가지 사연만 잠시 나열해보자. 양육권을 포기했던 아이를 말 그대로 ‘좋아하는 마음도 없이’ 다시 키워볼 생각을 하면서 죽은 전남편의 가족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니는 여자(「좋아하는 마음 없이」). 빚만 잔뜩 남기고 떠난 전 여자친구에게 자꾸만 마음이 기우는 아이러니를 겪는 레즈비언(「반려빚」). 달밤에 무덤 사이를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고(「포기」) 출입이 금지된 저수지의 한가운데까지 기어코 노를 저어 도달했다는 일화(「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까지. 소설의 인물들은 왜 자꾸만 이상한 일을 벌일까. 김지연의 소설은 삶이 이미 망했으며 앞으로도 계속 망해 나가리라는 잔인한 현실 공식을 동력 삼는다. 그곳엔 “반려빚처럼, 있어서는 안 되는 것도 태연하게 있”(「반려빚」, p. 104)고 누군가는 “있는 놈들을 위해 아주 싼값의 육체노동에 부려지”(「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 p. 42)지만 이토록 불합리한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도 제도도 없”(「반려빚」, p. 96)다. 자본의 바깥을 떠올리는 일조차 돈의 힘에 기대야만 가능한 오늘날, 소설 안팎의 현실을 살피며 저항의 포기를 물었던 우리에게 김지연은 두 가지 대답을 내놓는다. 하나, 설명 혹은 주장하기. “소리 지르고 때려 부수는 것만이 화내는 방식인 건 아니잖아요.”(「좋아하는 마음 없이」, p. 151) 둘, 괴상망측한 행동들을 늘어놓기. 그런데 짐작과 달리 이때의 망측(罔測)은 망할 망(亡) 자를 쓰지 않는다. 그물[网]과 망함[亡]이라는 뜻이 더해진 한자[罔]는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어그러진 상태를 가리키면서도, 완전한 끝을 잠시 유예하는 힘을 발휘한다. 망측한 일은 낯부끄러울지언정 완전히 망하지는 않은 무언가다. 그런 일을 벌이는 사람 역시 조금 망그러졌을지라도 여전히 어딘가에, 누군가와 분명히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폐기된 존재를 망가진 상태로라도 끌어올리려는 작가의 수고로움이 와닿는다면, 다르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의 행위는 단순한 기행이 아니다. 그들은 차가운 현실이야말로 ‘진짜 해괴한 것’이라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다. 김지연이 말하는 포기는 더 이상 무엇도 ‘기대하지 않는 마음’에 가깝다. 그런데 인물들은 먹고살기에 급급해서가 아니라, 아무리 노력해도 망한 삶이 평범한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괴이한 공식을 꼼짝없이 따라야만 해서 포기한다. 그래서 「포기」에서 거듭되는 “아무 소용도 없는 일”(p. 19)은 자본에만 기를 쓰고 달려드는 평범한 세계를 조금이나마 문제 삼는 계기가 된다. ‘미선’과 그녀의 사촌 ‘호두’는 주변인들에게 돈을 빌리고 사라진 미선의 전 남자친구 ‘민재’를 찾아 헤매고 있다. 그런데 미선과 호두는 물론이고 민재를 찾는 이들은 대부분 돈을 돌려받으려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 궁금해서라기보다는 그저 민재가 잘 지내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의 행방을 살피고, 신고를 권하면 “그렇게까지?”(p. 16)라고 되묻는다. 그리고 막상 민재에게 정말로 닿을 것만 같은 순간엔 발을 뺀다. 민재는 돈을 가지고 도망쳤기에 평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특별한 사람이다. 돈을 빌려준 사람들 대부분이 그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민재는 같으면서도 다른 것들의 차이를 세세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설명은 “왠지 말이 안 되는 이유들도 납득하게 되는 순간”(p. 23)들을 만드는 힘이 있었고, 각자도생과 효율성을 제일로 섬기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받았던 도움은 민재의 이런 성격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니 민재는 자금난이라는 평범한 사정 때문에 결국 평범해져버린, “완전히 나쁜 사람”(p. 16)일 수만은 없는 사람이다. 이렇듯 아무리 애써도 포기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래서 어떤 그만둠은 포기 자체를 미루고, 돈만을 좇게 만드는 기존의 “미친 짓”(p. 12)을 중단하고 새로운 “미친 짓”(p. 28)을 가능케 한다. 술에 취한 호두와 미선은 한 남자의 도움으로 의릉에 들어가 “이상한 괴성”(p. 30)을 내지른다. 한 번쯤 누군가 불가능한 시간에 난립하는 걸 보고 싶었다던 남자 덕분에 “예상 밖의 방향”(p. 28)을 향해 내달릴 가능성이 반짝이며 움튼 순간이다. 망해버린 인간관계와 삶 속에서 건져 올려진 이 희한한 야행은 두 사람이 잃어버린 진짜 호두가 의릉에서 나무로 자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연결되면서 다시 한번 끝을 지연시킨다. 하지만 평범하게 살려면 불운을 껴안아야만 하는 현실에 낭만이 끼어들 자리는 협소하다. 결국 각서를 주고받은 뒤에도 또 한번 배신당한 호두는 민재와의 관계에서 “정말 원하지 않던 포기”(p. 37)를 하고, “나중으로 미루는 버릇”(p. 25) 때문에 민재와 만날 가능성마저 미룬 미선 역시 연결될 방법을 끝내 포기한다. 기존의 삶이 반복되면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을 더욱 희미하게 만드는 자본의 견고함을 김지연은 결코 만만히 생각하지 않는다. 「반려빚」에서 전세자금대출과 전 연인 ‘서일’이 남기고 간 빚을 갚는 ‘정현’의 삶은 숨 쉬듯이 “매 순간 돈에 대해 생각”(p. 76)해야만 하는 하루들로 빼곡하다.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관계 중 하나인 연인 사이를 지탱하기 위해서 돈이 “제법 중요한 요소”(p. 84)로 호출되고, 유일한 반려의 자리에는 빚이 올라앉은 정현의 세계를 보면, 「포기」에서 미세한 틈을 열어젖혔던 망측함이 결국 잇속 빠른 자본주의의 환상에 불과한 건 아닌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할 수 없는 것만 가득한 날들 속” 유일하게 “할 수 있어!”라고 외칠 수 있는 일이 전 연인의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는 일일 때,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을 만큼 망한 듯한 인생의 내력을 모조리 아는 이가 자신을 망하게 한 장본인뿐일 때, 서일과 다시금 함께 있고 싶은 “정신 나간 마음”(p. 89)이 고립과 단절로 내몰려 어쩔 수 없이 택하게 된 불모지처럼 보이기도 하는 탓이다. 그래서 김지연은 평균치의 삶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나선다.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가 탄생한 「좋아하는 마음 없이」의 ‘안지’는 이혼한 전 남편의 부고를 내연녀였던 ‘그녀’로부터 전해 듣는다. 이외에도 그녀는 전남편의 보험금 수혜자가 안지로 되어 있고, 이혼할 때 두고 온 아들 ‘성준’이 안지와 함께 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안지에게 전달한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묘한 구석이 있다. 벌을 받았다고 생각하느냐는 안지의 말에 “누가 벌을 주는데요?”(p. 142)라고 되묻고, 미안해할 겨를이 없을 만큼 행복했다고 묻지도 않은 말까지 술술 털어놓으며, 이제껏 키워온 성준은 누가 뭐래도 자기 아들이지만 양육비는 보태달라는 염치없음까지. 하지만 안지는 바로 이 뻔뻔함이야말로 전남편과 똑같은 “여자의 장점”(p. 154)이라고 생각한다. 안지가 보기에 전남편은 “집을 해올 형편”(p. 149)을 갖춘 “좋은 사람이”(p. 159)었지만 “좋아 죽을 것 같은 사람”(p. 161)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형적인 사람”(p. 137)으로 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어온 안지는 스스로가 “아주 평균적인 삶”(p. 139)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전남편과 이른 결혼을 했었다. 호불호를 쉽게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선택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안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전남편과 여자는 정확히 안지의 정반대편에 선 사람들이다. 솔직하고 당당하게 이혼을 요구하는 사람들.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솔직한 사람. 숨기느니 차라리 정면 돌파를 선택하는 사람. 그래서 뻔뻔할 수 있는 사람”(p. 158)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안지는 이들의 뻔뻔함을 겪고서 “조금 더 자기 자신에게 가까운 삶을 살게 되었”(p. 137)다고 믿는다. 무엇이 좋고 싫은지를 탐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안지의 가족들은 “좋아하는 마음 없이 함께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이고, 때문에 안지의 삶에는 “그 사람들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내렸던 선택들”(p. 163)이 수두룩하다. 반면에 현재의 안지는 좋아 죽을 것 같은 사람과 재혼하고, 싫어하는 게 무엇인지 알기 위해 이상한 대회들을 연다. 분명한 미래가 아니라, 잘 그려지지 않는 미래를 골똘히 떠올린다. 그래서 안지는 전남편과 그녀, 아이가 있는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세 사람이 함께 있는 사진”(p. 165)을 훔쳐 지갑에 넣고 다님으로써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의 명예의 전당에 오른다. 여자를 다시금 우연히 만난다면 되돌려주겠지만, 그때까지는 그들에 관해 거듭 생각하면서 무엇이 옳고 그른 삶인지 단정하지 않기 위해 끝을 한없이 지연시키면서 말이다. 전남편과 관련한 모든 일로부터 그저 멀어지고 싶었던 안지는, 그렇게 무엇도 기대하지 않고 연루되지 않음으로써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두고 보기를 택한다. 계산하고 판단한 “확신”을 따르기를 포기하고, 그들의 방식처럼 “선명하고 분명한 감정”(p. 161)이 있는 삶의 방식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선다. 해괴하고 이상한 것의 가능성은 「유자차를 마시고 나는 쓰네」에 이르러 더욱 커진다. 재개발이 예정되어 누구든지 마음껏 열매를 가져가라고 전달받은 ‘나’와 ‘삼촌’은 유자밭에서 유자를 따던 도중 땅에 묻힌 상자를 발견한다. 기대감을 안고 열어본 결과, 그곳에는 “알 수 없는 썩어 문드러진 쓰레기”(p. 271)만이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상자를 내동댕이쳤던 ‘나’는 서사의 마지막에 이르러 “어쩌면 영영 썩지 않는 것도 못할 짓이라는 생각”(p. 289)에 도달한다. 이러한 깨달음은 1년 전 사고로 세상을 떠난 ‘숙모’와 그의 아들 ‘민재 오빠’를 애도하는 ‘나’와 삼촌의 시간과 연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촌보다 열 살 많은 나이에 아이까지 있는 이혼녀였던 숙모의 세세한 사정과는 별개로, ‘나’는 매번 콤플렉스를 건드리는 말을 내뱉고 짝사랑 상대의 엄마인 그녀를 싫어해왔다. 하지만 무엇이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보였던 숙모가 췌장암으로 사망한 전남편을 떠올릴 때마다 사는 게 너무 달아서 미안함을 느끼는 모습을 목격한 뒤, ‘나’는 그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자신이 싫어하던 사람을 닮아버린 순간부터 그 사람을 싫어할 수 없게 되었다던 숙모의 말처럼, ‘나’ 역시 죽은 사람을 떠올리는 일이 마냥 괴롭게만 느껴지지는 않게 되면서 변하는 것, 썩는 것을 긍정하게 된다. 해괴해지지 않는 것은 없다. 오히려 왜곡과 변형을 거치면서 이전과 다른 상태 변화를 맞이하는 것이 더욱 유의미한 일일 수 있다. 밀봉하지 않아 썩어버린 자리에서 공벌레가 새롭게 자리를 틀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조금 망측하긴 해도 망하지 않은 인생. 김지연의 소설은 우리에게 그런 인생들의 가치와 가능성을 펼쳐준다. 3. 잃어버려야만 만날 수 있는 세계 『남겨진 이름들』(문학동네, 2022)과 『방어가 제철』(자음과모음, 2022)에서부터 주목받았듯이, 안윤 소설의 중핵에는 ‘상실’이 자리한다. 이에 조금 더 안윤스러운 특징을 부여해보자면, ‘원인을 알 수 없는 상실’이라 고쳐 부를 수 있겠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할 수 없이,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잃은 인물들이 겪는 상실은 기이하다. 의심 없이 정상이라 믿어왔던 체계가 뒤틀린 채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어짐이 꼭 불행해야만 할까. 균열을 되짚으면서 우리는 모자람에 몸서리칠 뿐만 아니라, 온전함을 “새로이 감각”(「틈」, p. 237)해볼 수도 있다. 사라진 이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일깨워준다면 어떨까. 이를테면 안온한 세계는 허상이고, 그것은 위태로운 누군가의 현실을 말끔히 소거해야만 가능하다는 것. 금이 간 세계의 틈새로 유실된 존재들이 있다는 것. 이를 마주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보편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실과 괴리를 좁힐 수 없는 인물들의 선택이 어쩐지 생소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하지만 그들의 결단 덕분에 기이한 감각들은 응달에 고여 있지 않고 변주된다. 안윤의 소설에서 기괴하고 낯선 기운이 세계를 다시 쓰는 역량으로 옮아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비밀을 알아차린 뒤 다른 삶을 향해 몸을 트는 인물은 우선 「핀홀Pinhole」에서 만나볼 수 있다. 직장 동료로 처음 만나 4년을 사귄 ‘보라’와 ‘승원’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다. 평탄해 보이던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떤 ‘비밀’이 드러나면서 전연 다른 국면을 맞게 된다. 제목처럼 소설에서는 바늘구멍처럼 아주 미세할지라도 분명한 틈을 내는 질문들이 등장한다. 첫번째, “비밀 하나씩 얘기할까”(pp. 55, 75, 88). 소설에서 총 세 번 등장하는 이 질문은 모두 보라로부터 나온다. 비밀은 수치스럽거나 비정상적인 치부들을 의미한다. 보라에게 딸들을 버리고 갔던 엄마와 새아버지, 이복 남동생이 있다는 복잡한 가정사 같은 것들. 보라는 비밀을 들추거나 캐묻지 않는 승원에게 편안함을 느낀다. 이렇듯 보라가 감추고 싶은 것, 감춰야만 하는 사실들을 응시하고 발화하는 인물이라면 승원은 비밀 앞에서 “짧은 침묵”(p. 56)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소설이 전개될수록 승원의 침묵은 배려가 아니라 자신의 비밀을 덮기 위한 자구책으로 드러난다. 보라는 어느 날 중증장애인 거주 시설의 실태를 고발하는 기자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경진’의 메시지를 통해 외동으로 자처해왔던 승원에게 마흔넷의 중증장애인 형 ‘정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경진은 부모가 강제로 입원시킨 시설에서 관계자들의 폭력으로 인해 사망한 걸로 보이는 정원의 사인을 밝히고 그의 삶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정원의 가족들로부터 무시당했다. 두번째 질문은 경진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승원씨를 얼마나 안다고 생각하세요?”(p. 61). 모든 것이 그렇게 돌연 생경해진다. “경험해본 적 없는 단란한 가정의 화기”(p. 72)는 “너무나도 깔끔하고 정연하게 통제된 느낌”(p. 73)을 주고, “앎의 정도를”(p. 66) 고려할 필요 없이 가까웠던 승원은 “엄연한 타인”(p. 53)으로 다가온다. 그중에서도 승원이 동그란 공 모양으로 뭉쳐놓은 양말이 보라에게 “집쥐가 ‘된 것’”(p. 53)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추방하려 아무리 애써도 계속해서 출몰하는 집쥐처럼, 정원의 존재는 여타의 삶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승원이 습관처럼 만드는 양말 뭉치가 어린 시절 정원과 가지고 놀던 장난감 공에서 비롯된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보라는 직감한다. 평범했던 양말 뭉치가 “집쥐로 보이기 시작한 그 늦은 오후 이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p. 54)다고. 보육원에서 지내던 어린 시절, 약을 먹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집쥐는 어디에서 누구와 살 수 있는 걸까”(p. 87)를 궁금해했던 보라의 의문은 정원의 생애를 접하면서 되살아난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지만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삶은 온통 투쟁이었다. 더딜지라도 꾸준히 삶을 기록하고, 장애인 스포츠인 보치아 선수가 되어 진지하게 공을 던져왔다. 죽고 싶을 때마다 “타 자 칠 때 총 쏜 다 생각”(p. 83)하며 쓴 시들, 시설에서 나가기 위해 새벽마다 컴퓨터실까지 기어가 적어 내려간 정원의 이야기는 “스스로 훼손을 인정할 수 없었던”(p. 71) 보라를 변화시킨다. 과거의 결함을 지우고 무결하고 단란한 가족으로 살고 싶었던 욕망을 외면하고, 승원 대신 정원의 기록물을 경진으로부터 건네받는다. 할머니에게 배운 바느질처럼 보라는 정원의 생애를 몇 번이나 곱씹은 후 그의 이야기들을 정성스럽게 잇대어 나간다. 그리하여 세 사람만이 담긴 가족 그림에서 “가는 연필 선으로 밑그림만 그려놓은 테두리뿐인 사람”(p. 61)이었던 정원을 “한 사람의 형상”(p. 88)으로 만들어낸다. 양말 공을 죽어가는 집쥐로 느끼던 낯선 감각은 그렇게 자신이 바라는 삶을 향해 공을 굴리는 정원의 의지를 헤아리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다시 첫번째. 보라는 승원에게 다시 한번 비밀 말하기를 제안한다. 경진을 만났다는 자신의 비밀을 먼저 밝히면서. 사실 안윤의 인물들이 내린 선택을 따라가다 보면 경진이 던진 이 질문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왜 이렇게까지 하세요?”(p. 85). 어째서,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걸까. 친숙함을 등지고 불가해한 누군가를 끌어안게 만드는 힘의 근원을 짐작하기 위해 표제작 「모린」을 살펴본다. 사고로 중도 실명한 시각장애인 ‘영은’은 잃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범하거나 무감하게 태어나서가 아니라 살면서 많은 것을 잃어봤기 때문이다. 실명 이후 영은은 다채로운 세상의 이미지들, 오래도록 자신의 곁을 지켜왔던 연인 ‘선주’를 비롯해 자신을 이루던 수많은 조각을 놓쳐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은은 여전히 처음부터 가져본 적 없는 삶보다는 여전히 나중에 잃는 삶을 선택하겠다고 말한다. 이는 “있음과 없음, 그 둘을 연결하는 잃음”을 통해 “주어지는 모든 세계를 빠짐없이 살아보”(p. 25)겠다는 다정한 결단이다. 어떤 것을 잃어본 사람은 그것의 소중함을 비롯해 어떻게 더 잘 잃을 수 있는지, 상실 이후에 무엇이 변화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 특히 자기 자신을 잃어보는 경험은 세계가 뒤바뀌는 사건이다. 하나의 세계는 곧 한 명의 사람과도 같다. 그리고 세계는 곧잘 무너지고 다시 서길 반복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한 사람’은 변치 않고 그대로 남아 있어서가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고 가기에 유일하다. 그런 의미에서 “유일한 사람은 죽어서도 죽지 않는다”(p. 9). 영은이 잃음을 두려워하기보다, 각각의 자신과 타인을 마음껏 사랑하는 일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이유다. 유일한 것들의 흔적을 덧입고서 모진 시간을 견뎌온 영은은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사실만이 유구하다는 걸 안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정상성이 비틀리는 감각이 일상처럼 자리 잡고 있다. 안윤이 굳게 믿는, 상실을 지나온 자의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영은의 질서”(p. 30)는 기존의 질서에서 멀어지거나 누군가를 잃는 일을 유독 겁내던 ‘미란’을 조금씩 변화시킨다. 자신을 제쳐둔 채 사회의 규율만을 엄격히 따르느라 영은을 사랑하는 마음마저 밀어내길 반복해온 미란은 영은의 곁에서 “한 사람이 자신을 넘어서 는 어떤 감정을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p. 44)을 경험한다. “죄다 망해버려서 다행”스럽게 찾아온 “그동안의 내가 다 망해버린 기분”(p. 41)은 여성과 여성의 사랑, 장애인의 삶처럼 분명히 있는 것들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세계의 문법을 무너뜨리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의 무수한 면면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든다. 이러한 세계에는 정상성이 비틀리는 감각이 일상처럼 스며들어 있다. “누군가가 이상한 말이나 행동을 하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게 저 사람이 말할 수 없는 사정이구나 하는”(p. 12). 세계는 곧 한 사람 그 자체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 바 있으니, 영은의 말처럼 기이한 낯섦은 이제 한층 더 애처롭게 감각된다. 기꺼이 열리고, 연결되고 싶을 만큼. 때로는 나 자신을 잃어버려야만 닿을 수 있는 누군가가, 무너져야만 만날 수 있는 세계가 있다. 상실과 결여를 메우지 않은 채로 살아가는 방법을 안윤의 소설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4. 실패 연습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은 현실이 감추려 해온 불합리성이라는 비밀을 고발하고, 이때 드러난 균열에 힘을 가해 기존의 제도와 체계에 일격을 가한다. 특히 주목해야 할 지점은 두 사람의 소설이 자신의 균열을 뼈아프게 직시해야만 들여다볼 수 있는 세계의 결함과 마주한 뒤, 그러한 생채기를 어떻게 매만질 수 있을지까지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지연은 잿더미 속에서도 아직 전소하지 않은 기대와 희망을 조심스럽게 건져 올린다. 그의 인물들은 자본 외부의 의지와 노력이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상황에서 한없이 작아져 있다가도 뜬금없이 괴상한 사안들 편에 서거나 망측한 일을 감행한다. 이때 강렬히 분출되는 어긋난 감각은 살 만한 삶을 간단없이 소거하는 자본의 법칙이야말로 진정으로 이상한 무언가임을 강렬히 느끼게 해준다. 안윤은 이유 없는 상실을 강제하는 현실에 짓눌리는 와중에도 잊힌 이들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잃어버려서는 안 될 자신의 고유한 속성을 부지하려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들은 세계의 결함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사건을 목도할 때 생기는 기이함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결단하기 위해 분연히 사건을 찾아 나서거나 세계가 무너지는 감각 아래에 자신을 놓아둔다. 그런데 이들 소설이 나아가고 있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인물들의 일격이 너무 쉽게 저지당하거나, 세계의 비밀을 목격한 이후에 결과적으로는 다시 자신의 결함으로 회귀하는 수축성을 보이는 측면이 두드러짐을 간과할 수 없다. 김지연의 소설에서처럼 잠깐 보인 희망이 오히려 지난한 현실을 조금 더 버틸 수 있게 하는 마취제로 작용하고, 안윤의 인물들이 억눌리고 배척당한 존재들의 고통을 자기 이해와 친밀한 사람과의 좁은 세계에 가둬두는 건 아닌지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의도와 달리 두 사람의 소설이 보여주는 건 균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재한 현실 아닌가. 이런 우려는 결함마저도 소비적 욕망과 충동에 포섭시켜 자기 발전의 재료로 삼는 자본주의의 영악한 힘이 가진 위험을 알기에 생겨나는 것이다. 하지만 장담컨대, 이런 의심을 향해 김지연과 안윤은 한층 더 이상하게 말하고, 행동하며, 선택하는 인물들을 다시금 내보일 것이다. 한 번의 실패는 억압의 기제에 영영 봉합되는 것이 아니라 더 잘 망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믿는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더 자주 서로에게 보여져야 한다고” “잘 살든 못 살든 그냥 살아 있는 게 목격이 되어야”(「긴 끝」, p. 122) 한다는 김지연에게 소설은 끝을 길게 늘어뜨려 무한히 연장하는 목격의 수단이다. “만약이라는 말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또,」, p. 174)는 걸 아는 안윤이 보기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로 허물어지는 일이야말로 세계가 연결되는 가장 첫걸음이기에 둘의 세계는 여정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될 것이다. 두 사람에게 실패란 기존의 견고한 세계가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 그래서 고정되어 있던 자신이 허물어지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집들은 이제 막 실패했다. 어쩐지 걱정되는 마음이 앞선다면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숙련이 뒤따르듯이, 이들은 지금의 연습을 거쳐 실패에 능숙해질 것이다.그러니 자주, 계속해서 더 잘 실패해보려는 두 사람의 힘을 믿는 마음으로 애정을 담아 덧붙여본다. 앞으로의 소설에서는 무너지고 재건된 세계가 어떤 다른 모습으로 솟아오를지, 기이한 인물들은 구체적으로 어디를 향해 걸어 나갈지 궁금하다고 말이다.
표면-상태-읽기 문학은 인간의 내면 또는 물질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하나의 관점이다. 하나 내면은 '내면'에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앞의 문장은 의미를 다르게 가진다. 내면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틀리고 비뚤어진 형태로 또는 속에 있는 그것과 다르지 않은 형태로 비죽이 튀어나오는 것임을, 우리는 이미 안다. '내면'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이 그것을 가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타인에게서 또한 그것을 '본다'. 그것이 '어디'에 있든 누구에게 있든 그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표면적인(보이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문학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을 표면을 읽는 일과 같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표면을 읽는 것이 내면을 읽는 일이 될 수 있을까? 아주 표면적인 방식으로 내면을 추측하게 만드는 시에서라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울지도 모른다. 최재원 시인의 『백합의 지옥』 중 "별늪"이라 이름 붙은 장에 수록된 시편들은 연결성을 가진다. 제목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상어 세계의 법칙에 적응하지 못하고 친구가 되어줄 누군가를 찾는 "부끄럼쟁이 상어 위스퍼"는 "제멋대로 올챙이 오페라"를 바다에서 만나고, 이 둘은 “배고픈 물뱀 나르샤"를 만나 함께 모험에 오른다. 자기 위로 쌓이는 모래를 떨어낼 생각도 없이 침잠했던 "심심한 넙치 누가바"가 이 무리에 합류하고, 이들은 “마그마라는 이름의 마그마"를 만나며, 이들과 함께 걸음 하는 마그마는 은하수라는 이름의 은하수를 만나 "별늪"이 된다. 그리고 이 시들의 여정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마그마와 은하수는 별들을 주고받으며 / 하나가 되었다 / 별늪엔 별꿀이 가득히 흘러서 누구도 / 배고프거나 심심하거나 외롭지 않았다 - 「별늪」 부분 요약건대 이 시는 위스퍼, 오페라, 나르샤, 누가바, 마그마, 은하수가 별늪이 되어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 내면은 어디에 있는가? 요약이 말해주지 않은 부연 설명과 수식의 말들을 들여다볼 때 그것을 찾을 수 있다. 상어 위스퍼는 동료 상어들이 "자신들과 함께 다니려면 사람의 다리 하나를 / 가져오라고 부추"(「부끄럼쟁이 상어 위스퍼」)긴 끝에 길을 나섰으나 끝내 그렇게 하지 못한 채 오페라를 만났다. 올챙이 오페라는 자신이 살 수 없는 바다에서 살고자 하다가 동료를 만났고, 오래 굶은 물뱀 나르샤는 오페라를 잡아먹으려다 위스퍼를 보고 숨었지만 이내 그들과 동료가 되기로 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무언가에 저항하거나 반(反)함에 따라 삶을 성취하고 있다. 이때 '반'은 '부정'에 방점이 찍히지 않고 주어진 것의 '바깥'에 찍힌다. 주어진 것에서 탈출하는 것, '하라고 시켜서 되는 것'의 바깥쪽에 위치한 수많은 가능성을 지향한다. 그렇다면 이 시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저항함으로써, 때때로 죽음을 감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워지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해석은 이 시의 표면인가, 이면인가? 문장이 지시하는 것을 읽어나갔을 뿐임에도 문장이 발설하지 않고 내포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헤아렸으므로 이면을 읽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표면을 읽은 것이라 할 수 있지 않나?...... 정답 없는 이 의문점에서 표면이냐 이면이냐 중 하나로 결론을 내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질문을 돌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살아가는 일이 '존재'가 아니라 '상태'로 지속된다는 사실이다. 즉 존재의 방식이나 형식(표면), 존재의 의미(이면)를 파악한다는 것은 어떠한 상태인가를 헤아림으로써 가능하다. 이처럼 최재원의 시는 표면으로 이면을 말한다. 대도시와 약간의 거리를 둔 업스테이트에 살면서 그야말로 '삶'과 자연의 의미를 갈구하는 듯하지만 지극히 탈자연적인 방식으로 시간과 공간 곳곳을 채우고 있는 두 사람이 등장하는 시 「업스테이트」 역시 지극히 표면적인 것을 묘사한다. 그러나 그 표면을 잘 살피면 삶을 주관하는 자와(퍼치를 낚음) 삶에 종속당하는 자(대도시적인 생활 관습으로부터 멀어지지 못함)의 위치가 거듭 전도되는 '상태'가 발견된다. 표면을 통해 상태를 보여주는 이 시를 지나, 비누 거품을 내어 손을 씻는 모든 과정과, 그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는 타인을 바라보며 관념적 상태변화를 묘사하는 「기브앤테이크」를 거쳐, 「비엔나소시지」에 도착해 이번에는 이런 물음을 꺼내본다. 분리 불가능한 표면과 이면 어디께를 휘저으며 의미를 찾아내는 일의 가장 흔한 방식은 어쩌면 '개인적으로 좋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과 같지 않은가? 그게 과연 '개인적'일 수 있는지 묻고, '좋음'이란 게 구체적으로 뭘 의미하는지 설명하는 순간 시라는 표면은 지극히 개인적인(내면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게다가 그것이 발설되면 내면은 더는 내면이 아니게 되는 데다 이 시에 대한 변형된 의사를 전달하는 것으로는 개인적인 이야기가 되지 않으니, 이 역시도 표면으로 내면을 드러내 보이는 상태에 관한 것이겠다. 그런 까닭에 이 시에 대한 '개인적으로 좋음'이라는 메모를 이런 식의 해석으로 풀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시는 비엔나소시지를 먹는 상황을 묘사한다. 물론 그사이에 끼어드는 세부적인 의견이나 수식된 말 등이 중요하다. 어떻게 먹어야 최상의 조화로움 속에서 비엔나소시지볶음을 먹을 수 있는가를 궁구하는 일련의 상황 사이에 그리움, 환멸, 어머니와 같은 정념들이 “꾸역꾸역” 끼어든다. 당근의 맛이라든가, 재료 익힘의 정도, 당근과 다른 재료와의 조합을 씹을 때의 맛, 감각, 만족도 같은 것은 꾸역꾸역 끼어드는 생각들의 맛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면 그건 무슨 맛인가. 그런데 한 번도 빼놓지 않고 / 양파와 당근을 썰어 넣는다는 것은 얼마나 착실한 / 일입니까 얼마나 / 열심한 일입니까 특히 / [......] / 꾸역꾸역 아침부터 국을 / 데우고 소시지를 볶고 찬 / 반찬 더운 반찬 김치를 / 각각 포일로 그 비좁은 / 도시락통을 지혜롭게도 / 기술적이게도 딱 / 3등분으로 나누어 / 나는 그런데 국물이 흐르면 / 화가 났습니다 당신에게는 / 아니고 국물에게 그리고 신부님의 / 고고하고도 자애로운 모습을 문득 / 떠올립니다 급할 것 하나 없이) - 「비엔나소시지」 부분 비엔나소시지를 반찬으로 싸는 사람이 그렇게 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에 무엇이 깃들어 있는지, 요컨대 이 재료들이 비엔나소시지 반찬이라는 지금의 상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화자는 생각한다. 비엔나소시지는 누군가 성실하고 착실하게 열심히 야채를 썰어 넣는 노고이고, 비좁은 도시락통을 현명하게 구획하는 지혜이고, 그 결과물이 의도치 않게 약간의 국물을 새어 나가게 만들 수도 있는 우연적 실수를 동반한다. 수많은 사랑에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비의지적 결과에 화가 난다고 화자는 말한다. 이 근사한 노고와 지혜와 사랑과 성실함이 흘린 약간의 국물을 두고 감사·만족·풍족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단지 국물 때문에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분노를 느끼는 이 어긋나는 감각은 이것을 먹는 사람에게 죄책감이나 환멸을 느끼게 만들고, 그러다가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는 이에게 자애를 구하고 싶어지게 만든다. 그래서 이 시는 이렇게 끝난다. “저에게 / 저에게 자애를 베푸소서 / (내가 갈 곳에는 비엔나 / 소시지와 같은 추잡한 / 것들이 없게 하소서 / 꾸역꾸역 살아 낸 것들 / 의 기억을 모두 잊게 하소서"(「비엔나소시지」)라고. 그러면 비엔나소시지 먹기라는 건 노고·노동·사랑·지혜, 그런 것들에 대한 생각, 이 모든 걸 배반할 만큼의 분노와 짜증과 혐오감 그리고 그것에 대해 용서받고 싶은 마음이다. 요컨대 최재원 시의 표면 읽기란 의미란 무엇이며 어떻게 발생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을 듣는 일이다. 최재원의 시는 인내심을 가지고 여러 차례 그것을 일러주고 있다. 자세한 표면을 보라고. 그리고 존재를 강구하지 말며 상태를 헤아리라고. 상태를 헤아리면 의미가 발생한다고. 죽음-상태-읽기 꼭두를 한 달 사이에 세 번이나 보았다. 한번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전시되고 있는 사진전에서, 다른 한번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다른 전시장으로 건너가며 스쳐 지나가듯 놓인 실물을, 마지막 한 번은 신미나의 시에서 “꼭두"라는 기호로 보았다. 꼭두를 세 번 보았지만 '꼭두'를 본 것이지 실제로 그것이 본래의 의미로서 작동하는 상태를 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꼭두는 전통적인 장사(將事) 문화에서 볼 수 있는 목각 인형이다. 망자를 '저편'으로 인도하고 수호하는 역할을 하며 상여의 곳곳에 놓인다. 말하자면 꼭두는 나무이고, 나무로 만들어진 인형이고, 죽음이고, 수호이고, 죽음의 길잡이다. 최근 세 번이나 보았지만 꼭두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나? 나는 사진으로 된 목각 인형을 보았고, 목각 인형 전시물을 보았고, 죽음에 대한 시를 읽었다. 사진전에서는 꼭두를 찍어 186.5×159센티미터 사이즈로 커다랗게 인쇄하여 세로로 세워두었고, 지나치듯 본 꼭두 인형은 '전시물'로서 전시장 한복판에 서 있었다. 꼭두의 모양새와 가장 닮지 않았지만 꼭두의 수행적 의미에 가장 가까운 것은 신미나가 쓴 「꼭두전」에 등장하는 “꼭두"라고 할 수 있겠는데, 장사를 지내는 시에서 “꼭두"가 망자를 이끌고 수호하는 존재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 "꼭두"는 문자의 나열과 문장의 직조로 펼쳐진 죽음으로 향하는 상상된 언어 속에서 등장했으므로 어쨌거나 상징적 기표의 상태로 간주되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꼭두를 세 번 봤지만 세 번 다 꼭두를 봤다고 할 수는 없고, 사진과 전시물과 죽음에 대한 상상의 현물로서 그것을 보았다. 보았다...... 한데 나는 무엇을 본 것일까? 앞서 최재원의 시를 읽으면서 개체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상태를 지속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상태의 지속은 항상성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불안정성과 유동성을 의미한다. 변함없는 상태처럼 보이기 위해서 개체는 변화하는 시간에 맞게 대응해야 하고 달라진 상태에 맞서 새로운 움직임(혹은 멈춤)을 추동해야 한다. 신미나의 시에서 여러 번 발견되는 '죽음'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죽음은 역시 삶의 중(中)이자 삶이 아닌 중의 중의 이동에서 감지된다. 죽음은 존재의 중지, 상태의 종료처럼 생각되곤 하지만 삶이 곧 존재가 아니듯 죽음 역시 비-존재가 아니라 삶이 아닌 상태다. 이로써 신미나의 시는 삶과 죽음을 상태, 즉 유동으로 간주하는 듯하다. 죽음이 존재라는 것에 불이 들어왔다가 나가는 그런 이분법적인 것이 아니라면, 삶을 소거하는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보고 이 질문에서 시작해보자. 삶이란 무엇인가? 즉, 죽음을 소거한 채로 죽음을 어떻게 말하는가? 언니들은 비밀이 많고 / 금요일엔 주름이 많은 치마를 입었지 / 블라우스 리본을 매고 / 흔들리는 구두를 신고 뾰족하게 웃었네 // 나도 따라가고 싶어 [......] // 넌 아직 어려 [......] // 주머니 속에는 시를 쓴 종이가 있는데 / 언니들을 슬프게 만드는 시가 있는데 / 여름휴가는 짧고 / 동생이 시를 써서 언니들은 기쁘다 말하고 / 시를 쓰면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 같아 // 언니들을 시로 써도 될까 / 사탕수수밭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을 / 미래, 미래, 미래로 물결쳐오는 문장들을 // 언니들은 풀었던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으며 / 머릿수건을 두른다 / 식판을 들고 밥과 국을 배급받는다 / 에나멜 구두는 금요일에만 꺼내 신을 것 // [......] // 뭔가 시작되려는데 / 그게 무엇인지 / 아무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지 / 아무도 - 「바람 주머니가 부풀 때」 부분 “아무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지"에 시의 핵심적 태도가 함축되어 있다. 아무도 일러주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 '뭔가'가 무엇인지. 그런데 이 표현 자체가 '그것'이 소거된 형태로 말해진 결론이다. “그게"로 표현되어 있는 '그것'의 정체를 어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일러줄 수 없다. 그래서 아무도 '나'에게 일러주지 않은 것이다. 이미 그 상태에 속해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일러줄 수 없는 것이 바로 삶인지라, '나'는 알고 싶었으나 아무도 일러주지 않아서 속수무책 빨려 들어가 있는 바로 이 '상태'에 그냥 놓인 채로 그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는 중이다(삶-인 중이다). 삶은 '무엇'이 아니기 때문에 '무어'라고 알려줄 수 없다. 삶은 존재하는 상태와 같이 유동하는 흐름 속에 놓여 있다. 시를 조금 더 세밀하게 살펴 이들이 어떤 흐름과 상태에 놓여 '그것'을 겪고 있는지를 따라가보자. 이 시에서 "언니들은 비밀이 많”은 존재다. '나'는 언니들을 따라가고 싶어 하지만 어리기 때문에 언니들의 비밀에 합류할 수 없다. 비밀이 많은 언니란 언젠가 될(또는 궁구하는, 희망하는) '나'의 미래이고, 그런 점에서 삶의 한 단면이다. 이 문장을 좀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삶이란 비밀을 지닌 미래'다. '나'는 언니들의 비밀에 합류하지 못한 대신 시를 쓰면서 비밀을 만든다. 시를 쓴다는 것은 비밀을 만드는 것이다. 시를 쓰는 일은 '나'를 몰래 나쁜 일을 하는 것 같은 비밀스러운 상태로 만든다. 비밀스러운 '나'의 미래인 언니들을 시로 쓴다는 건, 미래를 비밀스럽게 만들어 맞이하겠다는 것. '나'는 언니들의 비밀을 공유하지 않았지만 '비밀'이라는 미래를 만들어내고 있다(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이 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삶'이라는 말을 소거한 채 미래를 비밀스럽게 스스로 만들어 쫓는 것이 삶임을 보여준다. 이 시에 들어섰던 최초의 까닭은 삶을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규명하기 위함이었다. 이 시가 '그것'을 소거하면서 동시에 말하는 것과 같이,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다다르기 위한 방법 역시 마찬가지로 그것을 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죽음이 아닌 상태에 대해 말해도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때의 소거는 실제로 뭔가를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빠진 상태 그 자체로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이다. 찾았냐고 물었다 // 클로버는 잎이 세 장 / 드물게 네 장 / 초록의 이랑이 팬다 / 반복의 물결, 물결, 물결 // [......] 하나만 길게 잡아당기는 / 신의 놀이 / 토끼는 귀가 크고 / 코끼리는 코가 길다고 / 말하려다 / 코끼!라고 했는데 // 지구 바깥에 / 귀도 크고 / 코도 긴 / 진짜 코끼가 있을지도 몰라 // [ ] 토끼는 위험하면 / 뒷발을 구른다는데 // 코끼, 코끼, 코끼래! / 우리 중 누구도 /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 「풀」 부분 이 시의 현재에 있는 것은 풀이고, 어쩌면 있을 수도 있는 것은 위험을 감지하고 발을 구르는 토끼이며, 보다 희미한 가능성으로 있을 수도 있는 것은 '코끼'인데 이것은 사실상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없는가? 이 시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코끼다. 코끼는 토끼로부터 연상된 코끼리를 말하려다 튀어나온 것이고, 토끼는 클로버를 찾으려 풀밭을 샅샅이 뒤지다가 떠오른 모자 속에서 폴짝 뛰어나온 것이므로 그것은 풀밭에서 비롯된 어떤 상태로서 그 어떤 것보다도 커다란 존재감을 드러낸다. 여기서 벌어지는 소거는 “코끼”라는 표현 속에 압축되어 있다. 그것은 없음('리'의 소거)으로 하여금 있는 것이고(코끼), 상상 속의 토끼이자 코끼리를 온통 아우르는 관념의 상태다. '리'가 빠졌지만 '리'만 빠진 것이 아니고, '리'가 빠진 '코끼'로 하여금 없는 모든 것을 있게끔 만드는 것이 되었다. 뭔가를 빼고 말한다는 것은, 빼려고 했던 것을 포함한 모든 가능성을 지금의 상태로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뺀다는 것은 상태를 바꾼다는 것이고,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이전의 상태에서 놓여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때 신부가 되길 원했으나" 조선소에서 노동자로 살아가게 된 한 사람의 삶(이라는 상태)에 대해 시인은 이렇게 쓴 바 있다. 스토브 안에서 무연탄 더미가 / 조용히 스러질 때 / 그는 부드러운 재를 / 얼굴 위에 뿌리고 / 더러워진 몸을 머리끝까지 욕조에 담근다 / 숨을 참고 열을 세다가 / 마침내 뱉을 때 / 현실은 간신히 그를 따라왔다 // 그는 눈을 뭉쳐 / 눈사람을 만들어 물에 넣는다 / 순식간에 / 눈사람이 사라지는 모양을 본다 / 기분이 아니라 / 감정이 아니라 / 어떤 / 상태에서 풀려나는 것을 - 「북에서 온 사람」 부분 그는 그가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않은 상태에 있고 때때로 "섬망과 미혹 사이에서 / 그는 하마터면 / 자기 자신을 넘어갈 뻔"하기도 하지만, 그는 미혹되지 않고 그가 바랐던 것이 아닌 조선소 노동자의 상태로 되돌아온다. 그가 욕조에 몸을 담글 때, 그가 바랐던 것은 아니나 그에게 주어진 조선소 노동자라는 "현실은 간신히 그를 따라왔"(「북에서 온 사람」)는데 어쩐지 그는 지금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계속 바뀌어나가려고 하는 것 같다. 그는 눈사람을 물에 넣고 그것이 흩어지는 것을 본다. 이는 "어떤 / 상태에서 풀려나는 것"이라고 표현된다.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바뀌는 것이 곧 삶(죽음)이고, 그 전환의 순간에 시간의 흐름이 발생하며(무언가가 지나갔다, 무언가가 도래한다), 그러한 전환의 틈에 자각되는 것이 죽음(삶이 지나가고 있음)이다.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넘어가는 것을 소거의 형식으로 발화하는 것이 이 시집이 보여주는 성찰일진대, 그것을 요약해서 말하자면 “백장미의 창백"이다. 언뜻 백장미는 본래 창백한데, 백(白)이라는 색이 빨강으로 대표되는 '장미색'의 빠져나감이라 보는 한 그렇다. 그렇다면 백장미가 창백해지기 위해서는, 장미색이라는 일관된 상태에서 벗어난 장미의 색이 존재하며(또는 색의 장미가 존재하며) 그것이 색이 옅어지는 상태로 바뀌어가는 것이라는 상태의 전환에 대한 상상이 필요하다. 이때 동원되는 것은 장미의 색, 바래지는 색, 외부의 자극(풍화·비 등), 시간의 흐름...... 그런 무수한 상태의 변화 속에서 백장미는 창백해지고, 백장미의 창백이라는 소거된 말에 이르렀을 때 소거된 모든 시간은 모두 소환된다. 백장미 죽음에 가까워진 상태에서 백장미 삶의 이력을 함축하는 방식으로.
흑백의 표지를 본다. 정면을 보는 이의 옆얼굴이 먼저 보인다. 그는 가방을 들고 있다(무엇이 들어있을까?). 그가 걷는 중인지, 잠시 멈춰 있는지, 혹은 아주 오래도록 서 있었는지는 아직 모른다. 가방과 모자와 같은 색으로 칠해진 검은 눈이 어디/누구/무엇을 보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다섯 편의 희곡을 연달아 읽고 나면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이 여러 방향을 가리키는 수많은 갈림길일지도 모르겠다고, 움직임의 여부가 분명치 않은 발 역시 흑백의 세계에서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 경계를 건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은용 작가의 희곡집 『우리는 농담이(아니)야』를 이루는 다섯 편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농담이(아니)야」(총 여섯 편의 이야기로 구성된 장막 희곡이다) 「세상의 첫 생일」 「우리는 그것을 찾아서」 「엄마, 엄마」 「가을 손님」. 각 작품에서 등장인물은 “문성”과 “아성” 등의 이름으로 소개되기도 하고, “사람1(A)”처럼 숫자 혹은 알파벳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여자”와 “남자”로 적힐 때도 있으며, (「우리는 첫 생일」의 ‘사람 2’처럼) “아마도 여성”으로 소개될 때도 있다. 「우리는 농담이(아니)야」에 수록된 ‘변신 혹은 메타몰포시스(Metamorlphosis)’의 주인공 설명은 다음과 같다. 주인공 스물여덟 살의 에프티엠 트랜스젠더Female to male transgender로 살아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열여섯 살 시스젠더 소년으로 살아갈 기회를 얻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그런 사람.(65쪽) 이은용의 세계에서 인물들이 소개되는 방식은 이처럼 다양하며 세부적이다. 각 이야기에서 인물들이 그려지고 행동하는 방식 또한 마찬가지다. 이들은 에프티엠 트랜스젠더이자 아마도 여성이며 하나의 이름 또는 기호를 가진 인물인 동시에, 무대에 오르는 배우이고 여행하는 “아티스트 앤 트랜스젠더”이자 어른이 사라진 세계에서 노동의 주체가 된 십대들이다. 이들은 ‘여성’과 ‘남성’을 이분법으로 가르는 사회에 나뉜 구획들을 끊임없이 월경(越境)한다. 나아가 경계를 나눈 벽에 난 문을 연신 두드린다. 이 소리는 책 전체를 관통하여 울리고 있다. 넘는 걸음이나 문을 두드리는 손짓 모두 삶에서 잦게 벌어지는 일상적인 ‘동작’이다. 여기에 관한 ‘반응’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경계를 넘거나 문을 지날 때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혼란스러워”한다. 다섯 편의 희곡에서 이러한 ‘동작과 반응’은 장면과 움직임 그리고 수차례의 질문으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우리는 농담이(아니)야」의 장막 ‘월경’에서 에프티엠 트랜스젠더 진희는 국경을 지날 때마다 그의 성별에 혼란을 겪는 검색대 직원들을 마주한다. 진희는 독백한다. “그들은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국경을 넘기 위해서는, 월경하기 위해서는 겨우 이것이 끝이다. 그리고 월경은 농담이 맞으니 웃어도 된다. 웃어라.” 그는 뒤이어 월경의 과정과 그 의의에 관해 이야기한다. “어딘가에 선이 그어져 있고, 그 선은 때로 벽 같아서 그걸 지키는 사람들이 늘 서 있다. 그들은 언제나 질문을 던진다. 내가 누구인지 묻는다. 국가를 떠나는, 월경하는, 나는 누구인가?”(31쪽) 독백의 마지막 질문은 진희와 만나는 검색대 직원들이 반복하는 질의이자, 이은용의 인물들이자기 자신에게 반복하여 던지는 물음이다. “나는 누구인가?” 현실에서 트랜스젠더에게 반복되는 질문(“너는 누구인가?”)의 주어를 비튼 이 물음을, 인물들은 자기 자신을 향해 또 서로를 향해 거듭 던진다. 이는 그들 앞에 벽으로 우뚝 선 세계를 더듬는 몸짓이기도 하다. 진희의 벗이자 트랜스젠더 여성인 친구2는 “진희야, 자궁이 있는 건 어떤 느낌이니?”(37쪽) 하고 질문함으로써 그가 겪지 못한 신체, 벽으로서의 세상이 “들어올 수 없다”라고 주장하던 공간을 알아가고자 한다. 「세상의 첫 생일」 속 사람1의 “왜 스무 살이 넘는 어른들만 없앤 건데?”(141쪽)라는 물음은 그들의 세상이 겪은 중대한 ‘변신’(스무 살이 넘은 어른들의 증발)을 이해하려는 시도다. 에프티엠 트랜스젠더 작가인 준영이 꿈속에서 스무 살의 엄마 희수와 서로 “몇 살이야?”(161쪽) 하고 묻는 과정은 일시적으로 교차된 ‘이해의 시간대’의 주파수를 조정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의문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로써 세계가 어떻게 ‘변신’할 수 있는지에 관한 가능성‘들’을제안한다. 한 가지 형태와 성질로 고정된 세계에 던져진 질문은 흑백으로 명확히 구분된 세계의 표피를 관통하여 그 내부를 들여다보고, 심층까지 파고든다. 바로 이 과정에서 금과 균열은 생겨난다. 얼핏 ‘균열’은 ‘경계’와 비슷한 선(line)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면의 선으로 이뤄진 경계와 달리, 균열은 다양한 방향의 선과 층층의 면으로 만들어져 있다. 여러 갈래로 나뉜 선과 면은 공간을 형성한다. 이 공간을 ‘틈’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틈의 형태와 성질은 다양하다. 계속 두드린 끝에 열린 문틈, 수많은 발자국이 만든 조그만 골, ‘여성’과 ‘남성’이라는 두 구분지(너무도 명확히 나뉘어 있기에 오히려 한 덩어리로 보이는 땅)를 어그러뜨린 궤적 역시 틈으로 볼 수 있다. 실제의 세계에서 그러하듯이 틈은 많은 가능성을 품은 장소다. 환경의 제한으로 미처 움트지 못했던 몸이 틈바구니로 자라나거나, 새로운 장소로 통하는 사잇길이 열리기도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이은용의 언어는 종이에 인쇄된 활자이자 무대에서의 상연을 위한 텍스트이면서, 세계의 변신을 불러오는 움직임이 된다. ○ 덧붙이는 말 『우리는 농담이(아니)야』는 고(故) 이은용 극작가가 남긴 다섯 편의 작품을 한데 묶은 희곡집이다. 표제작 「우리는 농담이(아니)야」는 2020년 극단 ‘여기는 당연히, 극장’의 초연으로 그해 한국평론가협회 선정 ‘올해의 연극 베스트3’과 제57회 동아연극상 4개 부문을 수상했으며, 2022년에는 백상예술대상의 ‘백상연극상’을 수상했다. 2019년 신작희곡페스티벌의 당선 소감에서 이은용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첫 작품은 절대 정체성에 관련된 이야기를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정체성은 내 삶의 한 부분일 뿐, 나를 결정지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삶이 늘 그렇듯 존재하는 것을 외면하기는 어려운 일이지요. 정체성이 나의 전부는 아니지만, 정체성을 떼어놓고 삶을 이야기하는 일 또한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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