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창작과비평 | 2024년 겨울호(제206호)

인간적인 것을 향한 (부)적절한 인카운터 : 김기태 소설 속 ‘두 사람’들

권영빈 문학평론

문학평론가. 한국 현대문학 연구자. 비평전문계간지 오늘의문예비평 편집위원. 2023년 창비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주요 평론으로 「가지 않(을)은 길을 향한 반유토피아적 노스탤지어: 전하영의 소설들」, 「가상-현실을 만드는 리얼리티와의 조우: VR 서사를 위한 시론」, 「인간적인 것을 향한 (부)적절한 인카운터: 김기태 소설 속 ‘두 사람’들」, 「포스트 한일 관계 서사를 향한 마음의 지리학: 김금희, 대온실 수리 보고서(창비, 2024)」가, 공저로『연결 (불)가능한 신체의 역사』, 『교차하는 페미니즘』, 『가족커뮤니티 내 복수의 시공간과 도래할 가족커뮤니티』가 있다. 현재 동아대학교 한국어문학과 초빙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 인간이라는 규모와 만남의 정치

  오늘날 인간이라는 생태적·담론적 구성물을 재고하게 하는 관점으로 ‘인류세’를 빼놓을 수 없다. 대기권과 생물권의 구성, 유기체의 거주 환경과 생태계 전반이 획기적으로 달라진 현시대를 기술하고 이를 촉발한 요인으로 인류를 지목하는 인류세는 지구 생명체의 심각한 실존적 위기로 말미암아 종(種)으로서의 인간 문명에 대한 비판과 전환을 전방위적으로 요청하는 문제틀로 자리 잡고 있다.
  인류세를 둘러싼 논쟁은 무엇보다 인간이라는 규모(scale)를 다시 생각하는 일과 관련된다. 인류세라는 말은 행성 차원의 행위자로 급격히 부상한 인간의 규모를 표시할 따름이지만, 그 안에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 정치적·윤리적 주체로서 자신에 무심한 지구시스템과 얽혀 어떻게 스스로의 규모를 (재)조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핵심으로 들어서 있다. 그러한 조정은 인간이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을 폐기하거나 변용함으로써 인간이라는 규모와 그 행성적 힘을 직접적으로 축소하는 것이기도 하고, 인간이 경험적이고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현하고 소망해야 할 것들을 재론함으로써 인간성, 인간적인 것의 규모를 재정립하는 일이기도 하다. 실재이면서도 인식론적인 공간의 메타포이자 존재의 현상학적 범주인 ‘규모’는 언제나 다른 규모, 다른 존재와의 연결 속에서 의미를 획득하는바, 그토록 크고도 작은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인간’이라는 규모를 재구축하고 다른 규모들과의 관계를 재편할 수 있을지 가늠해보는 것은 인간에 관한 앎과 서사를 재구성하는 데 부합하는 일일 것이다. 가령 단 ‘두 사람’이 빚어내는 인간이라는 규모와 인간의 대안적 초상에 관한 구상은 어떨까.
  김기태의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문학동네 2024)은 발표하는 소설마다 반향을 불러일으킨 작가의 첫 소설집답게 큰 주목을 받았다. 소설이 포착하는 세태와 그것을 그리는 방식이 차별화된 감각적 재미를 창출한다는 점, 그 속에서도 통렬한 비전을 제시한다는 점이 김기태 소설이 회자되는 요인일 것이다. 고도로 원자화된 삶, 각종 관계 속 부침이나 이데올로기적 억압으로 인해 침잠해 있는 존재들의 담담한 말들을 포착하고 조심스레 건져올리는 최근 소설들의 경향과 다르게, 그의 소설은 그러한 소외감을 다루면서도 세계의 구성원리가 단방향적인 침식의 메커니즘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을 활달하게 펼쳐낸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 글에서 주로 다루는 소설은 「세상 모든 바다」와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이상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그리고 「일렉트릭 픽션」(『릿터』 2024년 6-7월호)이다. 앞선 두 소설이 작가의 본격적인 활동을 알리며 그의 주제적·형식적 관심사를 두루 엿볼 수 있게 한다면, 근작은 그러한 작가적 표명이 하나의 사례로 집약되어 제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 소설에서 ‘두 사람’의 만남과 관계는 인류세가 문제 삼는 인간이라는 규모를 성찰하게 한다. (비)의도적으로 고립된 개별 존재들이 교차·중첩되면서 만들어지는 관계가 다른 삶을 구성하게 하는 토대로 모델링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예기치 않은 두 사람의 ‘마주침’(encounter)은 이른바 취약성을 동력으로 하는 관계적 주체의 의미나 중요성에 관한 논의로 직진하지 않는다. 소설이 그들의 관계를 미래에 관해 무엇도 약속하거나 전망하지 않는 일시적 열림인 채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에 대한 이해가 고정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만남은 그들이 다다를 수 있는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관계의 지평을 좀더 멀리, 넓게 조망할 수 있게 한다.1) 어쩔 수 없이, 또는 우발적으로, 때로는 자족적인 시도로 조성되는 두 사람의 만남이 부적절한 정동을 내포하거나 단지 잠정적 알맞음(적절함)의 상태를 표시할 뿐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이라는 규모를 재구성하는 정치적 행위일 수 있음을 김기태의 소설은 보여준다.


2. 두 사람 몫으로 다시 보는 세계: 「세상 모든 바다」

  「세상 모든 바다」는 ‘ K’라는 접두어가 불필요할 만큼 세계적으로 영향력있는 아이돌 걸그룹 ‘세상 모든 바다’(이하 세모바)의 콘서트에 간 두 사람, 하쿠와 백영록의 이야기이다2). 소설에서 생생하게 재현되는 아이돌과 팬덤의 존재방식, 글로벌 스케일에서 작동하는 문화정치는 정치적 주체로서의 ‘우리’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 속에 담긴 여러 힘들의 길항으로 소설의 화두를 결집시킨다.3) 그러나 「세상 모든 바다」는 그런 내용에 앞서 타인이 당한 비극에 대한 연루의 감각, 죄의식 같은 다소 익숙한 주제를 다루는 소설이기도 하다. 중심인물 하쿠가 당면한 설명책임과 그 실패를 형상화하는 방식이 이 소설이 보여주는 인간이라는 규모에 관한 탐색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탐색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요소로 소설이 활용하는 오리엔탈리즘의 문법에 주목할 수 있다. 글로벌 문화시장에서 인정받는 케이팝의 중심에 있을 뿐 아니라 반전(反戰)이나 차별금지법 제정, 기후위기 같은 지구적 화제들을 거느리는 세모바는 소설 속 표현대로 아름답고, 유능하며, 옳음으로써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자기를 대입함직한 정체성의 표상이 된다. 반면 재일교포 신분을 포기하고 일본 국적을 취득한 하쿠의 외국인 또는 ‘외부인’이라는 기표는 그가 자기에 관한 설명을 계속 유보하게 만든다. 예컨대 한국어과에 진학하거나 한국 유학을 위한 면접에서 그의 까다로운 정체성은 서로 다른 문화를 잇는 “가교”(20면)로 의미화되지만, 백영록과의 만남에서는 그저 “외국인”(13면)이 되는 근거로 쓰인다. 대학원 환영회에서 하쿠는 케이팝의 영향력을 입증하는 ‘K’ 바깥의 외국인으로 인정받으면서도, 아이돌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 떳떳하지 않은 행동일 수 있음을 암시하는 선배의 푸념을 듣고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고, 만약 그런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이라는 걸 감추고 싶”(21면)어 한다. 이 소설이 글로벌 아이돌의 행보에 자기 정체성과 욕망을 투사하는 많은 이들 중에서도 하쿠의 입장에 착목한 이유는 그러한 외부인 ‘다움’은 어떤 부적절한 사태가 발생했을 때 이를 설명할 책임을 요구받지 않는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한편 소설에서 오리엔탈리즘은 하쿠가 자기 또는 자기를 둘러싼 사람들을 규정하는 방식일 뿐 아니라 소설의 또다른 주인공이기도 한 세모바의 존재양태를 지배하는 질서이기도 하다. 정체성이 집단 고유의 속성을 부정하거나 은폐하는 방식으로 정의된다는 점과 그것이 식민화된 문화의 재현은 물론 식민자/피식민자 모두의 주체적 입장이 형성되는 데 중대한 영향을 준다는 것이 사이드( E. Said)의 요체인바, 하쿠는 케이팝 걸그룹을 좋아하면서도 소위 “열렬한 ‘덕후’”(13면)처럼 보이는 것과 엄격한 거리를 두면서 백영록의 외형만으로 그를 “오타쿠”(14면)로 규정하는가 하면, 트위터를 모르는 백영록이 과연 “그룹을 지지하는 온전한 방식”(17면)을 취하고 있는지 의심한다. 이러한 타자화는 스스로 아름답고 유능한 세모바와는 언뜻 무관해 보이는 기제지만, 사실 세모바 또한 아이돌 산업이 추구하는 어린-아시안-여성이라는 차별적 정체성을 근간으로 한다. 이들의 정의로운 운동들도 타 지역이나 역사에 대한 단편적 이해에 따른 이슈몰이일 수 있다는 점이 하쿠의 해진 탐방 대목에서 드러난다(원전도시 해진은 백영록의 고향이자 세모바의 팬들이 탈원전 캠페인을 벌인 곳으로, 원전이 지역 타자화와 식민화의 상징이라는 점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결국 세모바로 만들어지는 통합된 자아와 정체성은 세모바가 대리하는 타자화에 의탁해 있다는 점에서 “세상의 모든 바다는 이어져 있다”는 하쿠의 “실감”(12면)도 환상과 다름없다.
  그런데 하쿠는 백영록을 만나고 그의 죽음을 경험하며 더이상 외부인이라는 위치를 고수할 수 없게 된다. 케이팝 걸그룹 또는 세모바를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말로는 빠져나갈 수 없는 당사자성을, 소설은 그가 백영록에게 소문을 전한 행위의 확실성으로 구성한다. 자신이 ‘하쿠’라는 것마저 “부분적으로는 거짓”(9면)이고 그날 잠실 콘서트장에 밀집된 십삼만의 인원에 자기가 집계되어 있다는 것도 “완전한 사실은 아닐”(25면) 수 있지만, 그러한 불확실성 속에서 백영록을 만나 그에게 게릴라 콘서트에 관한 정보를 전한 것만은 “어떻게 보아도 사실”(9면), “틀림없는 사실”(31면)이다. 그러한 확실성은 하쿠로 하여금 백영록을 해석해야만 하는 위치로 내몬다. 조각나고 해체되어 소셜 미디어 속을 떠도는 사망자 백영록이 아닌, 소설에서 여러 번 반복되는 “당신은 ‘세상 모든 바다’의 팬입니까”(9면)(또는 좋아합니까)라는 물음을 둘러싼 백영록의 고유성을 알고 있는 자로 하쿠의 정체성이 돌연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영록을 ‘다시’ 만나고자 하는 하쿠의 노력을 통해 오히려 뚜렷해지는 것은 두 사람의 만남이 부적절한 방식으로 성립되었다는 사실이다. 좋아하는 대상을 향한 망설임 없는 진심을 보여주는 백영록과, 케이팝 걸그룹에 자아를 부분적으로 의탁하면서도 좋아하는 행위에서 감지되는 위계(또는 위기)의 문제를 자신의 외부인 지향으로 숨기는 하쿠 사이에는 바다같이 넓은 거리가 있다. 이로 인해 둘 사이에서 돌이킬 수 없는 거래가 발생한다. 백영록은 하쿠를 일본에서 잠실까지 온 사람으로 인식하여 굿즈 숍에서 하나 남은 세계지도 플래그를 양보하고, 하쿠는 세모바를 향한 애정을 감추지 않는 백영록에게 그가 알지 못할 것이 분명한 트위터 속 소문을 건넨다. 이 여파가 백영록의 죽음으로 나타난 것은 하쿠가 그가 가진 세계지도에 세계가 그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해진행을 통해) 알아차리게 하면서, ‘좋아한다’는 마음의 댓가가 죽음일 수 있다는 점 또한 하쿠에게 인식시킨다.
  하지만 여기서 소설은 타인과의 만남이란 리스크를 짊어진 연루를 지향해야 한다는 당위, 또는 그 당위를 실현하기 위한 주체의 행위성을 묻기보다 ‘두 사람’이 낳은 탐문의 자리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하쿠의 실패를 의미화한다.
  바다를 통하지 않고 만났음에도 서로를 “파 파 플레이스”(14면)에서 온 사람으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둘 사이의 이격은 마치 아프리카 기아나 아랍권의 내전과 같은 난해한 문제를 굿즈 숍에서 판매하는 세계지도 플래그에 욱여넣듯 기만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그렇게 글로벌 아이돌이 구가하는 정치적·윤리적 행위를 안온한 위치에서 자신의 것인 양 누리며 ‘세계’를 유영하던 하쿠는 백영록과의 만남과 그의 죽음을 계기로 갑자기 구석자리로 포획된다. 그러나 내몰려 다다른 지점이 마냥 궁벽한 곳은 아니다. 그곳은 글로벌-로컬-개별 존재의 관계를 다시 보게 하는, 불편하면서도 희망적인 시야를 생성해주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해진 해안가의 산포하는 파도 앞에서 하쿠가 취하는 뒷걸음질은 지하아이돌에 열광하는 ‘오타쿠’들의 “근시의 사랑”(37면)을 그리워하는 그의 상념과 상통하지만, 백영록과의 ‘재회’라는 해진행의 본 목적이 어느 정도 달성됐다는 점 또한 말해준다. 궁지로 보이지만 바다와 면해 있는 곳에서, 그러한 바다를 두려워하며 간격을 벌리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 비로소 실질적 거리감이 갖춰졌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바다가 연결되어 있다는 당연한 이치와 그것이 실체적 진실이 되는 것 사이에는 간극이 있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죽음’은 너무나 큰 리스크이지만, 두 사람의 만남이 만든 탐문의 자리는 인간이라는 최소한의 규모가 만들어지는 방식과, 그것을 이루었을 때 그 안에 자연스레 밀려들어오는 ‘세상 모든 바다’의 존재를 역설한다.


3. ‘두 사람’이라는 결속의 패러다임: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의 또다른 소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첨예한 자본주의 속을 살아가는 두 사람을 조명한다. 주인공 권진주와 김니콜라이는 각자의 계급적·지역적 한계 속에서 그 외부를 향하는 욕망을 반성적으로 잠재우고 형편대로 삶을 꾸려나간다. 개인의 삶을 틀 지우는 구조의 문제를 인식하기도 하지만 이들에게 중차대한 과업은 일상을 가성비 높게 설계하는 일이다.
  소설에서 집중적으로 묘사되는 ‘밈’은 이들이 이러한 삶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다. 특정 순간을 빠르게 해석하고 맥락화한 뒤 휘발시켜버리는 밈은 단순하고 일시적이며 ‘복붙’만 해도 되는 완제품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범용성과 기동력은 밈이 원본과의 관계에서 자유롭다는 것과 관련된다. 밈의 원본성은 사용되는 과정에서 서서히 깎이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그것을 풍미( flavor)로 취급하거나 본래의 맥락을 소거 또는 과장해야만 밈으로 통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자신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다만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해석의 기능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밈은 ‘수행성’이나 ‘행위자성’과 같은 긍정적 개념과 어울리는 듯하다. 그러나 소설에서 밈은 그 자체로 전복적 의미를 주지는 못한다. 두 인물의 삶이 지속될 수 있도록 특정한 피드백루프를 만들어주는 고효율의 물자로 우선 동원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권진주와 김니콜라이가 “우리가 그렇게 잘못 살았냐?”(134면)라는 의문과 회한에 빠질 때 느닷없이 김정은과 추노꾼 장혁, 아마존 짤이 대답의 자리를 메운다. 살기 위한 끝없는 분투에 괴로울 때는 “네가 선택했잖아”(120면)라는 시대의 정언명령이 나타나 인물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밈은 생활세계에서 일종의 자극 -반응체제로 패턴화되어 있다. 삶의 모순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고 그것이 드러날 법한 자리는 순간적이고 단순한, 댓가(책임)는 없지만 해석의 기능은 있는 밈으로 채워진다. 그들의 동창인 ‘앙맨’은 공장에서 손가락이 잘린 후 그가 가진 경박한 별명과 다르게 두문불출하게 되지만 그러한 모순은 다뤄지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밈이 자본주의 시스템에 귀속된 인간의 적응기제를 보여주는 것에서 다른 방식의 쓰임으로 옮아가는 것은 ‘두 사람’이라는 역사를 (다시) 쓰는 도구로 그것이 활용되면서부터이다.4)
  소설에서 두 사람이 주고받는 밈은 비선형적이고 유희적이며 미래를 염두에 두지 않는 일시적 교감이기에 만남의 ‘역사’를 쓰기에 적합한 도구가 아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특성 덕에 ‘두 사람’이라는 새로운 규모가 싹튼다. 평범하지만 초라한, 당장의 생활은 있지만 미래는 불확실한 이들의 삶을 찰나라도 빛내주는 밈은 권진주와 김니콜라이 각자의 삶을 ‘두 사람’의 것으로 다시 새기는 기술로 절묘하게 전유된다. ‘인터내셔널가(歌)’라는 밈은 시스템을 둘러싼 포획/저항이라는 오래된 이분법을 넘어서 적응 속에서 적응을 내파하는 방식으로 두 사람의 만남을 새롭게 역사화하고 이들의 삶이 밈들의 절합 이상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 노래는 “기립하시오 당신도!”(135면)라고 외치는 양갈래 머리 소녀의 이미지로 온라인에서 소비되고, 두 사람도 알고리즘을 통해 그것을 접하고 향유한다. 만사가 귀찮아 누워 있는 상대에게 말 그대로 ‘기립’을 재촉하기 위해 이미지를 전송하거나, 일터에서의 불합리를 보면서 “이거는 기립이네, 기립해야겠네”(138면)와 같은 뼈있는 농담으로 응용하거나, 함께 살기로 한 두 사람이 가재도구를 정리하면서 이 노래를 ‘노동요’로 틀어놓는 것 사이에는 언뜻 유의미한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밈은 단 한문장만 되풀이하며 제자리걸음 하는 태엽인형에 빗대어지지만, “어쨌든 태엽을 감아주는 사람들은 계속 있”(137면)다는 인식은 그것이 패턴 속의 차이, 차이를 가진 패턴으로 존재할 여지를 남긴다. 이들이 규정하는 “친한 사이”(142면)라는 말이 그것이다.
  ‘친한 사이’라는 결속은 ‘인터내셔널가’가 내포하는 집단적 믿음의 구조를 모방하면서도 그러한 집단성을 계급적·지역적 한계와 자본주의 질서하에서 억압을 겪는 개인들이 ‘두 사람’의 형태로 취할 수 있도록 재조정한다. 그래서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이들의 존재방식,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과거 사회주의 국제조직의 축소판이 아니라 매순간 서로를 소외된 두 사람의 형식으로 발견하게 하는 일종의 밈이자 패러다임이 된다. 이러한 규정(력)은 밈처럼 두 사람의 역사에 틈입하거나, 둘만의 관계를 넘어 주변인들을 향한 애정으로 퍼져나가는 기동성을 보인다.5) 예컨대 졸업앨범 단체사진의 양 끝에 서 있던 권진주와 김니콜라이에게 “둘이 친하게 지내”(114면)라는 교사의 말은 무성의하고 무의미한 것이었지만, ‘친한 사이’라는 ‘두 사람’만의 자의적이고 자율적인 규정은 그 말을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실현”되는 “예언”(143면)으로 만든다.
   “중국인 혹은 중국인이 아닌 누군가”(141면)가 만들었을 식탁과 그가 먹는 국수에 대한 상상, ‘피자나라 치킨공주’라는 황당한 ‘인터내셔널’이 접속하고 공존하는 가운데 이제 해방의 꿈은 밈의 리듬으로 돌아다닌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이라는 규모는 그 외롭고 한정적인 형식에도 불구하고 패배주의적인 색채를 띠거나 기존의 고립감을 강화하지 않는다. ‘인터내셔널가’와 양갈래 머리 소녀가 ‘일어나시오!’라고 말할 때, 그럼으로써 그것이 오랜 시간 상징해온 메시지인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고 외칠 때 세계 속에서 오직 둘만 일어나 단결하는 모습은 ‘두 사람’이라는 ‘친한 사이’가 매번 탄생되는 역사적 장면으로 부족함이 없다. 그러한 연결이 “우리 오늘 이웃이랑 친한 사이 해버림”(143면)과 같은 두 사람만의 언어로 재차 번역될 때 ‘두 사람’은 어느새 두 사람의 형식을 면하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두 사람’이라는 결속을 인간이 구체적 삶 속에서 새롭게 성취해야 할 질서로 내놓으면서, 그것을 고정된 약속이나 지향점으로서가 아닌 반복운동하는 무언가로 제안하고 있다.


4. 유폐된 곳에서 만나는 기술 : 「일렉트릭 픽션」 그리고 「갱도에서」

  「세상 모든 바다」와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에서 ‘두 사람’으로 표현되는 인간의 초상은 로컬-내셔널-글로벌이라는 현시대의 다중스케일적 공간구조와 질서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다시) 만나 다른 삶을 구성할 수 있을지 타진하게 하는 가늠쇠이다. 이들 소설에서 ‘두 사람’이라는 의미작용의 범위가 둘만의 협소한 관계만이 아닌 바다처럼 가없는 바깥을 향해 있다는 점이 그러한 가능성을 말해준다. 쉽게 약속하거나 전망하지 않기에 오히려 열어젖힘의 정동으로 더 먼 곳을 바라보게 하는 ‘두 사람’이라는 규모와 존재방식을 김기태 문학성을 구성하는 한 요소로 이해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근작 「일렉트릭 픽션」에도 이러한 관심이 뚜렷하다.
  고만고만한 계층의 1인가구나 영세한 가족이 모여 있을 법한 빌라에 거주 중인 주인공 ‘그’는 문안/문밖으로 철저히 구분된 생활을 견지하면서 “진짜 삶이라 부를 만한 것은 문 안에 있”(116면)다고 자신한다. 그러나 우연히 흥미를 갖게 된 일렉트릭 기타 덕에 그는 돌봄의 성격이 있는 취미 공동체를 찾아 나가거나 벽 너머의 사람들을 향해 자기 존재를 알리게 된다. (비)자발적으로 유폐되어 고립에 족하며 살던 그가 서서히 달라지는 모습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조건을 이야기하는 소설로서 그것을 읽히게 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전기’라는 소재와 은유는 인간의 연결과 유대를 마치 인프라처럼 간주하도록 만들기에 효과적이다. 그 점을 가장 쉽게 전해주는 것은 단연 일렉트릭 기타이다. 악기는 혼자서도 소리를 내지만 언제나 합주나 협연 같은 다른 규모의 소리를 꿈꾼다는 점에서 그가 애플리케이션의 AI 교사 ‘조니’가 아닌 현실의 교사 ‘재니스’를 만나게 되는 것도 서사적으로 시간문제이다. 셔플 리듬을 직접 가르쳐주려는 재니스가 손을 덥석 잡자 “전기가 통한 듯 솜털이 오스스”(126면) 돋은 그는 이제 그러한 감전이 부재하는 ‘비밀스러운’ 연주와 결별한다.
  일렉트릭 기타를 둘러싼 이야기 배면에서 찾을 수 있는 전기의 의미는 또 있다. 8년째 같은 직장에 근무하면서도 그는 단 한 사람의 동료도 없다. 각종 잡일을 도맡는, 계약직이라는 그의 불안정한 위치는 인간 삶의 필수 에너지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전기와 닮은 구석이 있다. ‘지원’이나 ‘보조’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그의 노동은 돌봄노동처럼 필수불가결하지만 쉽게 잊히거나 공적 인정체계에서 소외되곤 한다. 단체사진 촬영날, 몇벌 되지 않는 정장을 고심해 골라 입고 출근한 그가 사진 속에 자신이 설 자리가 없다는 “어떤 느낌”(119면) 탓에 홀로 사무실에 남는 장면은 「일렉트릭 픽션」이라는 소설의 제목에 값하게 가슴을 찌릿하게 한다.
  소설에서 ‘전기’로 표현되는 연결의 의미는 또다른 중심인물인 ‘나’로부터도 연유한다. 소설은 ‘그’가 자발적으로 구분한 문안의 생활과 문밖의 질서가 일렉트릭 기타로 인해 바뀌어나가는 과정을 전지적 시점으로 보여주면서, 그렇게 낱낱이 조명된 그가 소설의 결말에서 ‘나’라는 일인칭 화자에 의해 주목된 인물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그의 변화와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소감은 부름과 대답의 모양새를 띠기에 두 사람은 직접 대면하지 않고도 만남을 이룬다.
  요컨대 만남은 하쿠와 백영록의 재회처럼 실물과의 진실한 접촉을 전제하거나 권진주와 김니콜라이의 관계처럼 상호규정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고백과 그에 대한 응답으로 서로를 발견해주는 방식으로도 꾸려진다. “익명이 되려고 서로 최선을 다하는”(128면) 폐쇄된 연립주택에서 기타를 연주한다는 그의 자못 당당한 고백이 만들어낸 작은 틈은 ‘나’가 웅얼거리듯 연습해온 핀란드어 인사말을 비로소 누군가 들을 수 있는 안부의 말로 만든다. 인간을 존립하게 하는 전기적 네트워크의 시작점으로 ‘여기 있음’을 알리는 것은 ‘두 사람’과 그 너머로 향하는 규모를 만들어나가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충분하다.
  김기태의 소설세계가 추구하는 이러한 만남의 기술과 인간성에 대한 희구는 소설 속 ‘두 사람’들에게서만 엿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 의미는 ‘문학’의 이름으로 마주해야 할 것에 관한 그의 또다른 글에서도 분명히 전해진다.
  세월호 참사 10주기의 의미를 담은 산문 「갱도에서」(『문학동네』 2024년 봄호)는 폭발의 전조인 무색무취의 가스를 가장 먼저 탐지하는 갱도의 작은 새 카나리아를 문학에 비유한다. 각종 참사가 매일같이 벌어지고 유가족 공동체가 끊임없이 양산되는 현실에서, 문학은 때로 ‘차마 말할 수 없음’을 이유로 문제를 방기하거나 문학(화)의 권력을 의식해 지향점을 잃기도 한다. 그러나 문학의 (불)가능한 정체화에 앞서는, 문학의 최소한의/최대한의 존재 의의는 갱도의 카나리아가 그렇듯 위험을 알리는 데 있다. 그것은 ‘동료’를 부르기 위해 내는 소리이기도 하다.

  가스 냄새가 진동하는 갱도 안에서 문학은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지금 나는 그 예민하고 연약한 새뿐만 아니라 믿음직한 동료 광부도 필요하다고 느낀다. 가끔 객기로 변질되더라도 얼마간의 낙관과 용기를 잃지 않으면서, 동시에 상황을 침착하게 점검하고 지식과 경험을 동원할, 곡괭이로 바위에 흠집이라도 내서 그것이 영원불멸은 아니며 언젠가 쪼개지리라는 희망을 주는 동료 광부 말이다. (…)
  지난한 탐구와 논의와 곡괭이질 끝에 발견한 모든 사실이 명백한 멸망을 지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동료라면, 그때조차 어떻게 최소한의 존엄을 품고 평등하게 망할지를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 그게 각자 죽는 것보다는 낫다. (15면)


  갱도는 서로 접촉하고 땀 흘리며 목숨을 건 밭은 호흡을 나누는 곳이다. 그처럼 폐쇄된 공간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그 안에 담긴 절실함으로 서로를 크게 북돋울 수 있다. 김기태의 소설은 때로 인물들이 지닌 자기충족적인 태도와 그것을 마치 문화비평의 대상으로 삼아 속사하듯 펼쳐내는 글쓰기를 보여줌으로써 그의 소설을 ‘가능성’이나 ‘실험’에 국한된 서사 모델로 인식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카나리아의 경보가 목적하는 바가 당장의 탈출만이 아닌 ‘동료 광부’를 부르는 일이라면, 그래서 죽음 앞에서도 존엄하고 평등한 연대를 이루고자 함이라면 그러한 가능성은 단지 실험해보는 것만으로도 온전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가 첫번째 소설집을 발표한 작가라는 점도 새삼 기억해둬야 할 것이다.
  갱도 내부가 인류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 자체일지라도 그저 비관적이지 않을 수 있는 이유를, 김기태는 어둡고 좁은 곳일수록 더욱 요긴해지는 부름-응답이라는 인카운터의 기술로 보여준다. 그러한 만남이 단 ‘두 사람’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사건일지라도 말이다.
  • 1) 즉 이 글에서 인카운터(encounter)는 예측 불가능한 마주침, 알 수 없는 대상과의 접촉이라는 부정적 뉘앙스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일한 인과성이나 논리를 따르지 않는 만남에 담긴 정치적 효과에 방점을 두기 위한 것으로 쓰인다. 인카운터는 서로를 침윤하면서 새로운 감각체계를 발굴해나가는 만남의 의미로 정동 이론에서 자주 거론되기도 한다.
  • 2) 그러나 사실은 하쿠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두 사람이 스치듯 만난 후 백영록이 이내 사망한다는 사실, 또 그것이 하쿠에게 미치는 영향이 소설의 주된 내용이라는 점에서 「세상 모든 바다」는 후술할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과 다르게 두 사람의 만남을 바라보는 한 사람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수록작 대부분이 삼인칭인 데 비해 이 소설에서는 일인칭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러한 내용과 관련된다. 그러나 ‘나’의 정체성이 두 사람의 만남에 기반해 변화해간다는 점에서 일인칭은 그저 단독적인 성격만 갖고 있지는 않다.
  • 3) 남상욱, 「‘K’가 만들어가는 ‘보편’의 향방」, 『창작과비평』 2024년 가을호; 류수연, 「글로벌, K-컬처와 김기태의 소설이 말하는 것들」, 『문장웹진』 2024년 9월호.
  • 4) ‘두 사람’들의 역사로 시작하는 소설의 도입부가 그 점을 암시하고 있다. 김건형은 이 대목이 밈의 화법에 가깝게 구성되어 있다고 적절하게 지적한다. 맑스와 엥겔스를 비롯한 ‘두 사람’들의 역사를 계보화하는 원리가 역사적 인과에 대한 분석에 의거하지 않고 ‘두 사람’ 자체를 기호화하여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의 유사성을 찾아내는 즐거움의 문법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김건형, 「김기태의 즐거운 시민들」,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 5) 그래서 ‘친한 사이’는 둘 사이에서 태어나는 친밀감을 뜻한다기보다 비인칭적이고 비언어적인 형태로 세상에 넘실거리는 역량으로 인식된다. 백지은은 이러한 ‘친한 사이’의 의미를 그것이 행위하는 주체가 아닌 “이 세계의 한구석에 자리 잡은 객체”로 묘사된다는 점을 통해 설명한다. 소설이 제3자의 화자를 설정해 두 사람의 역사를 동등하게 병렬시켜 묘사한다는 점, 그럼으로써 재현의 가시성이 화자의 위치가 아닌 “말해진 것들의 동등(평평/평등)한 평면”으로부터 발생된다는 것이다. 백지은, 「우리 소설의 자리 (3)」, 『문장웹진』 2023년 3월호.

추천 콘텐츠

김미정 나를 쓰는 일은 어떻게 너를 쓰는 일이 되는가

나를 쓰는 일은 어떻게 너를 쓰는 일이 되는가1) : ‘소유’와 ‘주권적 자기’를 질문하며 1. 다시 ‘자기’를 질문하며 일인칭 글쓰기, 에세이, 자문화기술지, 당사자 서사 등 ‘자기’를 중심에 놓는 글쓰기가 주목받아 온지 여러해를 지나고 있고, 최근 또다른 방식으로 논의가 이어질 듯하다.2) 이 글은 그러한 글쓰기의 핵심에 놓일 자기를 다시 질문하고 그것이 어떻게 ‘커먼즈’(commons)로서의 문학의 조건이 될 수 있을지 가늠해보려 한다. 이때 얼핏 자기와 커먼즈라는 말 사이의 아득한 이격(처럼 여겨지는 것)이 떠오를지 모르겠다. 자기라는 말은 ‘나’ ‘1인칭’ 같은 단수적 계열어나 차이를 통해 이해되곤 하고, 커먼즈란 ‘공통장’ ‘공유지’ 같은 번역어가 암시하듯 복수적이고 공통적인 것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자기에 대한 이야기는 루쏘의 『고백록』(1770)이 상기시키듯 자신을 신과 독대하는 개인으로 발견하고 고백하는 일에서 출발한 근대적 존재 인식의 표현양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에 대한 이야기 안에서도 젠더 및 공/사 역학에 따른 위계가 작동해왔음이 이제 대중적으로도 널리 환기되었고, 전통적으로 자서전을 쓸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거나 획득하지 못했던 여성의 글쓰기와 그 수행적 힘이 각별히 조명3)되기도 했다. 또한 최근 에세이물의 당사자 서사가 규범 바깥의 여성 정체성을 실험하며 여성주의적 급진성을 갖는다는 논의4)에서와 같이, 글쓰기의 수행적 힘은 다양한 여성 및 소수자의 가시화와 연동되었다. 한편, 에세이적 글쓰기 일반을 “자아를 일종의 자산으로 생산해내는 장치” 측면에서 조망하고, 이러한 글쓰기의 스펙트럼과 읽기-쓰기의 복잡한 역학 및 형식 문제를 분석하는 논의도 제기된다. 오늘날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자기진술”이 “주체에 대한 진실을 생산해내는 권력을 스스로(재)생산”하는 측면을 비판적으로 점검하는 한영인의 글은 특히 신자유주의 통치술과 개인의 관계를 비롯하여 개인과 자아 등을 둘러싼 복잡함의 근간을 짐작케 한다. 한영인의 논의에서 파생시켜 떠올려보는 장면이지만, 예컨대 당사자가 아님에도 타자를 대신 이야기할 때의 윤리문제는 최근 장르를 불문하고 상식으로 여겨진다. 그 와중에 픽션에서 대상화를 피하는 일이 근본적으로 가능한가라는 회의가 종종 제기되는가 하면 타자를 모델로 삼는 소설의 종언이 비관적으로 선언되기도 했다.6) 그간 문화예술 창작계에서 당사자(성)의 강조는 ‘당사자만 말할 수 있다’는 방식으로 오인되기도 했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서사의 주체를 ‘저자’ 개인으로 환원시키는 좁은 의미의 당사자주의를 우려하는 논의도 오갔다.7) 당사자주의를 넘는 ‘타자와의 관계성’ 혹은 ‘목격-증인’의 자리8)가 강조될 때조차, 그것은 나와 타자의 좁힐 수 없는 차이를 근거로 회의되거나, 진짜 당사자가 누구인지를 가리는 시시비비로 연결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당사자(성)를 둘러싼 논의는 연대가 필요한 자리에서 때로 그것을 더디게 하거나 좌절시켰고, 이런 곤경은 오늘날 ‘나’ ‘자기’에 대한 감각이 무엇에 구속되어 있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진정한 나를 찾는다’는 식의 익숙한 말은 어쩌면 차이로서 증명되는 나를 갈망하는 표현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인식은 일상에서 종종 불안정한 것으로 경험된다. 오늘날 기술 상황에서 타자와의 차이를 통해 확인되는 고유한 나에 대한 바람은 점점 더 곤란을 겪는다. 사용자 데이터 기반 서비스를 표방하는 무수한 플랫폼에서도 주체적 행위, 고유성, 독창성 같은 변별자질을 통해 스스로를 해명하기란 요원해 보인다. 오늘날 우리는 더욱 ‘진정한 나’ ‘진짜 나’를 갈망할 수밖에 없이 세팅된 세계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유와 권리에 대해 조밀해지는 법과 제도가 이러한 이중구속을 강화하는 것도 물론이다. 앞서 적었듯 오늘날 자기서사는 특히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소수자의 존재와 글쓰기를 가시화한 양식의 하나다. 그것은 이 세계 존재를 둘러싼 오랜 위계의 구조를 환기시켰고, 스스로가 서 있는 위치에 대한 감각을 정치화했으며, 자기 삶의 주권을 표명하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러한 ‘자기’는 여전히 개인, 차이, 구획, 정체성, 소유 같은 관념 사이를 공회전하는 측면이 있어왔다. 물론 이것이 현행 세계 속 ‘나’의 지배적 조건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단적으로 대개의 사람들은 어떤 정체성들의 소유자(개인)로 식별되며 인구로 셈해진다. 그러니 정체성을 둘러싼 시민권 투쟁의 즉각적 장소 역시 바로 여기일 수밖에 없다. 정체성에서 출발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그 너머를 향해야 한다는 이야기가9)종종 지난하게 여겨지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요컨대 지금 ‘자기’를 둘러싼 이야기와 곤경이 동시에 부상하는 상황 앞에서 ‘나-1인칭-개인-소유’ 등의 계열어 속 자기표상은 불충분하거나 종종 모순적이다. 2. 나는 나를 소유할 수 있는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지에 따라 그 정체를 가늠하는 감각은 오늘날 존재 인식의 근간을 이룬다. 이때 ‘무엇’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이 글에서 더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소유’ 개념이다. 오늘날 개인 및 개인주의의 근간에 소유의 원리가 놓여 있다는 사실은 ‘소유적 개인주의’라는 말이 잘 드러내준다. 우선 짚어둘 것은, 여기에서의 소유란 유무형의 재화가 아니라 본래 인간 ‘신체’에 대한 소유를 의미했다는 사실이다. 즉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신체, 재능의 고유한 소유주로서의 개인이라는 인식에 기초”하는 “자유로운” 존재로 간주되었고, 이때의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인간이란 바로 이념형으로서의 능동적·자율적 개인에 다름 아니다. 자유는 곧 “소유권을 의미”했고, 그렇기에 소유권의 반대 개념은 탈소유·무소유가 아니라 “타인의 의미지에 대한 종속”으로 간주되었다.10) 의존을 죄악시하고 기피하며 자립한 개인의 능력을 상찬하는 오늘날 지배적 심상의 기원도 여기에서 잠시 짐작해볼 수 있다. 요컨대 소유적 개인주의에서 ‘소유적’이라는 말은 상품과의 관계 이전에 우선은 우리 신체, 그리고 나아가 우리 자신의 노동에 대한 소유를 의미했다. 우리의 신체란 비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재산”이었고 “완전한 자유의 기준은 자기 노동에 대한 소유권의 보유이며, 그 보유의 조건은 곧 물질적 재산의 소유”11)였다. 이는 강조건대 소유가 곧 내가 나 자신과 맺는 관계를 기초지었음을 의미한다. 바로 여기에서 ‘자아’ 역시 신체에 준거한 획정이 필요해진다. 즉 소유적 개인주의는 자아를 둘러싼 모순이나 모호함을 봉합하는 기술이기도 했다. 그런데 신체에 근거한 자아 역시 소유의 대상으로 간주되려면 먼저 일종의 객체가 되어야 한다. 신체를 누가 –다시 말해서 내가 – 소유하느냐의 문제 앞에서 자아는 하나의 구획된 것으로, 그리고 관리 가능한 일종의 통합된 것으로 간주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 ‘적절한 자아’를 가진 ‘주체’가 재산의 소유자로서 행동할 자격과 능력이 있는 사람 즉, 통상 남성·이성애자·백인·비장애인 등으로 간주되어왔음은 강조할 것도 없다. 소유에 기반한 자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특히 2010년대 이후 세계의 여러 변화 앞에서 새삼 부각되고 있는 것 같다.12) 이 세계의 인종·성·장애 여부 등을 둘러싼 정상성 각본에 대해서는 이제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소유’ 개념을 매개로 한 각본이라는 점에 대해 지금 다시 각별히 강조하고 싶다. 우리가 ‘가진 것’에 따라 온전한 인간인지 아닌지를 셈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곧 오늘날 지배적인 ‘주권적인 자아’(sovereign self)13) 개념을 구성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소수자의 정치적 수행성 논의에서야말로 강한 전제로 놓여 있었음을 기억해두고 싶다. 예컨대 퀴어 이론가이자 정치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2010년대 이후 논의에서 특히 소유적 개인주의의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자아 개념을 비판하고 그 너머를 상상하는 관점을 두드러지게 드러내온 점이 의미심장하다. 물론 “주권적, 유아독존적 자아 개념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며 “자아란 이미 관계적인 개념”이라는 그녀의 전제는 오늘날 상호의존적 관계나 타자윤리가 요청되는 자리에서 자주 참조되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이 지닌 정치성을 좀더 강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녀의 주장이 “소유적 개인주의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면서 “소유의 논리 바깥”14)을 고민하며 제출되어 왔음을 환기해야 한다. 그 맥락이 드러나지 않으면서 논해지는 관계성이나 타자 윤리는, 자유주의 휴머니즘과 그리 충돌하지 않는다. 오늘날 여전히 좁힐 수 없는 차이를 전제하는 당사자 논의의 곤경에도 근본적으로는 다른방식의 소유 혹은 (개인적) 소유 바깥이 상상되지 못하는 감각이 놓여 있는지 모른다. 동일성(정체성)으로부터 출발하여 궁극적으로는 차이의 연대로 나아가는 과정에 대한 오늘날의 많은 논의가 있다. 그런데 그 현장마다 좀더 원리적으로 환기해야 할 대목은 “서로가 서로에게 현전하기 위해서는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자기 박탈”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 혹은 “자아를 상대에게 넘겨주는 행위”15) 쪽이어야 할지 모르겠다. 나를 내어주는 일 없이 타인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본성을 제어하도록 하는 도덕이나 의무가 아니며, 우리는 본래 소유 이전의 존재라는 것. 요컨대 ‘자기’에 대한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오늘날 제2의 자연이 된 소유의 관념보다 더 오래된 관계적 존재 양태를 발견하고 긍정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소유를 근본적으로 질문하지 않는 관계성이나 커먼즈 논의는 다소 공허한 이상 혹은 도덕적 당위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하지만 소유보다 더 근본적이고 오래된 존재의 원리가 있다는 사실을 환기할 때, 관계성의 사유는 설득 문제가 아니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자 필연임이 밝혀진다. 이에 대해 한 편의 소설을 경유하여 좀더 생각해본다. 3. 나를 쓰는 일은 어떻게 너를 쓰는 일이 되는가 : 이주혜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속 ‘일기’에 대해 이주혜의 장편소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창비 2023. 이하 이 책에서 인용시 면수만 표기) 속 주인공은 불안, 공황 등으로 치료받는 50대 여성이다. 그는 현재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받은 남편과 가족의 위기로 고통받고 있다. 의사는 치료의 한 방편으로 일기 쓰기를 권하고, 주인공은 어느 글쓰기 교습소의 수업에 참여해 일기를 써나가며 그것을 타인들과 공유한다. 소설의 중요한 장치인 일기는, 일차적으로 의사의 권유를 통해 자기치유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런 설정은 글쓰기를 통해서 자신을 회복하며 스스로를 자기 삶의 주인(소유자)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을 먼저 떠올리게 한다. 최근 많은 자기 서사가 품고 있는 글쓰기의 수행성과 ‘자기’의 테크놀로지가 서사화된 듯 여겨진다. 하지만 이것은 소설에 대한 절반의 독해다. 주인공의 일기 안으로 좀더 들어가보자. 소설 속 일기는 주인공의 유년을 회고하는 장치다. 회고되는 시간은 1979년 겨울부터 1980년 초여름이다. 이 시간이 암시하는 바를 한국의 독자는 쉽게 알 수 있지만 그 의미를 전하는 것이 소설의 핵심은 아니다. 일기 속 사건이나 존재는 명료하게 요약하기 어렵다. 어린 주인공의 시점을 통해, 이른바 시대적인 것과 사적인 것은 썩 구별되지 않게 그려진다. 예컨대 한국 현대사의 격변을 암시하는 것들은 아이들을 재우고 어른들끼리 주고받는 비밀스러운 분위기,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모호함과 불안으로 묘사된다. 비상계엄령, 데모 등과 같은 시대어는 주인공의 사사로운 일상에 비해 배경으로만 놓여 있다. 하지만 직접 의미화하는 것 이상으로 배경의 구속력은 강하게 전달된다. 이런 효과가 주인공의 일기 속 기록으로부터 발생하고 있음을 우선 확인해둔다. 일기 속 사건과 사건, 장면과 장면 사이는 환유적으로 연결되며 궁극적 의미는 자꾸 미끄러진다. 회고되는 기억도 불안정하다. 아빠의 실종, 낯선 남자의 등장 및 그의 느닷없는 추방 등은 파편적 이미지로만 제시될 뿐 어떤 구체적 의미에 도달하지는 않는다. 이런 서사적 파편과 공백은 얼핏 소설적 개연성의 결함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간 우리가 회고에 기반한 성장서사, 기억서사로부터 어떤 익숙한 의미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작품들이 현재 시점에서 과거로 임의로 재구성·편집되는 과정을 노련하게 감추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 소설 속 일기는 그러한 과정을 최대한 지양하고 기억의 파편을 그대로 노출한다. 주인공의 일기에서 부상하는 것은 오히려 기억이 종종 부정교합을 수반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러한 기억주체로서 자기의 불안정함이다. 통상 일기 속 성찰 대상이 될 ‘자기’는 늘 스스로가 소유하는 객체로 전제된다. 하지만 이 소설 속 일기는 그 장르의 핵심인 자기를 문제의 장소로 삼는다. 자기는 애초에 불안정하고 픽션적일 수 있음이 우선 소설에 암시되어 있다. 불안정하다는 것은 윤곽이 불분명하다는 의미다. 어떤 소유의 형상으로 대상화될 수 없다는 말이다. 소설 속 일기는 처음에 분명 자기를 질료 삼는 자기치유의 의미를 부여받았지만, 실제 그 서술과정에서는 연루된 존재와 사건과 세계가 부조된다. 주인공과 친구, 사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등은 명료하게 구분되지 않는 얽힘(entanglement)으로 이미지화된다. 불안과 같은 정서도 누군가의 것(소유물)이라기보다 그 모두를 관통하고 아우르는 것으로 혼연해 있다.16) 예컨대 “시옷에게 비는 살이 부러진 우산과 젖은 신발을 의미했다. 그 축축함과 막막함은 군모를 깊숙이 눌러쓴 어느 군인이 국방색 우비 위로 길쭉한 소총을 끌어안고 집요하게 비를 맞고 있던 장면을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끌어들이기도 했다”(26면)는 대목을 보자. 지금 이 대목에서, 어린 시절 주인공이 싫어했던 비의 경험은 ‘젖은 신발’과 ‘소총을 든 어느 군인’을 매개로 겹쳐지며 그녀의 ‘비’에 대한 기억을 이미지화한다. 또한 이것은 지극히 내밀한 몸의 감각에 대한 기억인 동시에 한 시대의 폭력이 단번에 서사적으로 환기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사사롭다고 여겨지는 어린아이의 경험이지만, 거기에는 개체적 몸을 관통하는 어떤 세계가 있다. 이런 서술의 와중에 홀연 인지되는 주인공의 몸의 변용 순간도 흥미롭다. 소설에서 유독 강렬한 정서를 자아내는 대목이다. 주인공은 글쓰기 교실에 서 1980년 “5월의 한복판”(212면)의 일을 낭독하는데, 이는 유년시절 주인공이 품고 있던 비밀이 폭력적으로 억압된 경험에 대한 회고이다. 성인이 된 주인공은 수강생들 앞에서 그 회고의 일기를 읽으며 격렬한 울음을 터뜨린다. 그때까지의 서사 속 긴장은 순간 파열한다. 독자는 이 장면을 심리적 문제가 해결되는 단계로 읽고 싶은 강한 유혹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이것은 심리적·정서적 문제극복의 과정으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질적 시공간이 서로 긴장하다가 동시적으로 마주치며 폭발하는 순간에 가깝다. 가령 그녀의 현재 고통은 남편으로 인해 관계가 파괴된 일로 인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치유하기 위한 글쓰기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어른들에 의해 좌우되는 아이의 일상과 그 배후에 놓인 가부장제 및 친밀한 폭력의 -그것은 다름 아니라 남자아이에 대한 어른들의 염원 때문에 그녀가 자신의 성별을 숨긴 채 남성 성별을 수행해야 했던 일이다- 이 드러나자 느닷없이 그녀가 내쫓기는 순간은, 한없이 취약했던 존재가 무참히 상처 입는 순간이다. 그것은 정확히 학교에도 거리에도 총을 든 군인들이 있었던 ‘1980년 봄’ 한복판의 일로 기록된다. 지극히 내밀한 자기의 비밀이 시대의 폭력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 장면은 정확히 환기시킨다. 그녀의 뒤늦은 울음에는 서로 무관해 보이지만 구조를 공유하는 여러 시공간의 폭력이 가로지른다. 이 울음 장면은, 어떤 존재(몸)가 독자적인 개체이기 이전에 이미 늘 연루되어 있던 세계와의 교섭 현장이자 그 효과임을 증거하는 것 같다. ‘나’ ‘자기’는 선행되어 있다기보다 사건적으로 출현하고 이내 사라지는 것이다. 이후 주인공의 이야기가 후경화하고 타인들의 이야기가 본격 부상하는 서사 진행도 이를 뒷받침한다. 4부에서는 어린 그녀가 이사한 곳에서 만난 이들, 특히 이웃집 윤수와 그 가족 이야기가 다소 의미심장하게 전개된다. 윤수와의 우정, 이웃집과의 친교는 1980년대 이른바 기층민의 삶을 엿보게 하는 바가 있지만 그것을 기록하는 시선은 바깥에 있지 않고 그 삶 안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소설은 점점 현재 그들의 안부를 묻는 이야기로 이행한다. 그녀, 즉 1인칭 주인공 ‘나’의 이야기이자 일기 속 ‘시옷’의 이야기는 그 고유함을 버리지 않으면서 점점 한 시대의 공기를 ‘감각’시키는 이야기가 되어간다. 현재 ‘나’의 상처가 추동했을 글쓰기는 타인과의 관계가 지지해 온 시간을 회고하는 서사로 이행한다. ‘나’의 윤곽은 주인공의 일기뿐 아니라 소설 전체에서도 점점 흐려진다. 이들의 삶은 각자의 것으로 소유, 독점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 속에서 의미화된다. 즉 기존에 일기라는 1인칭 글쓰기가 담보하던 ‘나’ ‘자기’는 이 소설에서 어떤 기원이나 본질 혹은 증명의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삶이 어떻게 구성되고 어떤 메커니즘을 거쳐 의미화되는지 일기 쓰는 주인공이 체현한다. 주인공의 일기에 적히는 것은 할머니의 독경 소리, 늘 복잡한 감정을 품게 했던 옆집 친구 애니, 아버지의 빈자리 등 타인과 얽혀 있는 기억이며, 또한 이 소설에 그려지는 것은 그 일기를 함께 읽어주는 현재의 무심하면서 다정한 동료들의 모습이다. 이렇게 소설은, 자기를 쓰는 일이 곧 타자를 쓰는 일임을 보여준다. 좀더 적극적으로 의미부여를 한다면 이것은 나/너와 같은 개체적 몸을 초과하는, 혹은 그런 몸으로 분화하기 이전의(metastable)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읽은 일기 안팎의 ‘나’들은 개체들간의 상호적인(inter) 관계라기보다, 식별되지 않는 내적으로(intra) 얽힌 존재의 이미지에 가깝다. 즉 오롯한 자기, 내면 같은 표상이 본래 품고 있었을 모호함과 균열뿐 아니라, 그러한 자기와 내면을 구성시키는 무수한 연루됨 자체가 곧 ‘나’임을 암시하는 것이 이 소설 속 일기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감각으로 미처 식별되지 않는 무수한 사물도 나를 관통하고 구성할 것이다. 앞서 인용한 비 내리는 장면의 회고에서처럼 단일하게 통합된 자기가 아니라, 오히려 이질적 존재와 사건들, 시공간의 비인격적 웅성거림 속에서 불현듯 확인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각별히 기억해야 할 ‘자기’의 한 의미일지 모른다. 주인공이 일기 속 자신을 내내 ‘시옷’이라는 기호로 표기하고 지칭하는 것도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일기를 쓰는 주인공은 “‘나는’이라고 시작했더니 한줄도 쓸 수가 없었”(32면)다는 이유에서 시옷이라는 이름을 쓴다. 시옷은 “넘어지지 않고 걸어가는 사람처럼”(33면) 생겼다는 이유에서 선택되었는데, 이것이 서로를 지탱하는 ‘사람 인(人)’의 형상을 염두에 둔 작명임도 분명하다.17) 소설은 이렇게 주인공을 통해 처음부터 ‘나’라는 주어의 함의와 무게를 암시해두었으며, ‘나’의 시선이 독점해온 1인칭의 세계를 내어 주고 3인칭적 재현을 전경화한다. 이 소설을 두고 “‘나’의 쓰기가 스스로의 이야기에만 머무르지 않고 타인의 다면성을 서술하는 일로도 이어진다”18)는 평가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 적확하다. 소설 속 ‘나’는 명료한 윤곽과 표상을 갖는 존재이기 이전에, 내내 유동하고 있는 어떤 관계 자체이다. 이런 메커니즘을 생각할 때 오늘날 항간에서 말하는 타자 윤리는, 도덕적 의무가 아니라 존재의 원리이자 필연이다. 소유 너머 자기를 상상하는 일과, 연루됨 자체를 사유하는 것은 불가분이다. 4. 소유와 주권적 자기 너머, 혹은 소설적 커먼즈의 상상 지금까지 읽은 이주혜의 지금까지 읽은 이주혜의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속 ‘자기’는 ‘내 삶은 내가 소유하고 있다’는 식의 당사자성이나 자기인식과는 거리가 있다. 주권의 문제는 늘 경계 획정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19) 주권은 항상 권력 관계와 지배를 표시한다. 국가뿐 아니라 인간의 가장 내밀한 자아 역시 소유를 위해 구획되고 객체처럼 간주된다. 그런데 이주혜 소설은 ‘나’ ‘자기’가 그런 객체이기 이전에 이미 늘 타자와 연루되어 있는 준안정적인 지대임을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면 지금 주권적 자기 너머를 상상한다는 일은 어떤 구획과 소유와 권리 이전의 지대, 일종의 잠재성을 사유하는 일과 관련된다. 나아가 그러한 ‘자기’를 일종의 관계성의 장소로 전유하는 일이 요청된다. 어떤 존재가 배타적으로 점유한 예컨대 정체성을 본질처럼 인종화하는 통치술과 겨룰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독점될 수 없는 세계의 속성을 생각할 때, 미학과 윤리는 불가분이 아니라는 점도 다시 진지한 성찰의 대상이 된다. 물론 유의할 점은, 이것이 오늘날 세계의 역학과 실제를 없는 것처럼 여기며 소유로부터의 이탈을 낭만적으로 예찬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탈소유에 대한 논의는 자칫, 누군가의 땅을 무주지나 황무지로 간주하여 점유해온 정착민 식민주의의 역사를 정당화하기도 쉽다. 또한 무엇이든 가능한 자아를 낭만화하는 자유주의적 모토로 전유되기도 쉽다. 앞서 버틀러의 논의에서처럼 탈소유라는 말이 품고 있는 폭력적 ‘박탈’은 지금도 이 세계에서 늘 진행형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살핀 ‘나’ ‘자기’는 분명 소유 이전의 양태를 환기시킨다. 모든 사물에 소유의 권리가 부여되어온 역사에도 불구하고, 본래 경계를 획정할 수도 독점할 수도 없는 ‘나’가 있다. 근대적 주권 및 소유적 개인주의와 불가분이었던 자기를 이렇게 다르게 사유해볼 때, 커먼즈로서의 문학에 대해서도 약간의 첨언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언어, 감정, 사유, 땅, 하늘 등 나열할 수 없는 많은 것이 본래 누군가에게 배타적으로 귀속될 수 없는 커먼즈임은 부연할 것도 없다. 하지만 언어, 감정, 사유 등에 일종의 형식을 부여한 문학에 대해서 커먼즈의 사유를 진척시키는 데에는 모종의 어려움이 있다. 예컨대 ‘서명(署名)’으로 상징되는 오리지널리티와 소유의 감각이 성립시킨 (근대)문학 관념은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오늘날 문학을 둘러싸고 조밀해지는 법과 제도는 소유의 감각을 더욱 자명한 것으로 여겨지게 한다. 소유와 주권적 자기의 구조로부터 도피하지 않으면서 부당함을 문제 삼고, 동시에 그 구조 너머를 상상하는 일은 지난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커먼즈로서의 문학 논의에서 계속 질문해야 할 고리가 바로 이 소유의 원리임도 분명하다. 물론 많은 이들이 지적해왔듯, 커먼즈는 단지 주어져 있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커먼즈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그것은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라기보다 함께 만들어가야 할(commoning) 것이고,20) 때로는 투쟁의 산물21)이다. 그렇기에 현행 세계의 역학과 다양한 폭력을 문제 삼는 것은 곧 커먼즈의 주제이기도 하다. 소유를 자명하게 여기는 감각은 커먼즈의 사유를 자꾸 멈춰 세운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러한 이중구속적 상황에서 쉽게 몸을 빼거나 멈춰서는 안 된다. 한 문학연구자는, 새로운 소유권의 형태로 도래한 근대 일본문학 초창기 풍경을 조망하면서 거기에 아이러니하게도 다양한 커먼즈의 계기가 있었음을 발견한다. 그는 소유를 질문하는 불안정한 지대를 포함하여 “작가, 허구의 인물, 독자가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과정”으로부터 커먼즈의 가능성을 타진한다.22) 그는 질문한다. 어느 소설 속 ‘이름 없는 고양이’가 발화하는 그 발언권은 (고양이는 인간도 아니고 이름도 없다는 의미에서) 법적으로 누구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인물의 광기는, (통합되고 관리되는 자아를 갖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으로 소유의 주체적 위치에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닌지. 또는 한 여성의 소유를 둘러싼 한 지식인의 죄책감은 (가부장제 속 여성의 위치와 마찬가지로) 식민지를 폭력적으로 소유하는 당시 제국의 죄책감을 의미한 것 아닐지 등.23) 앞서 이주혜 소설에서 읽은 ‘나’ 역시 심지어 자기에게조차 독점될 수 없고, 늘 무언가와 연루되어 있는 일종의 준안정적인 지대임을 확인했다. 지금 커먼즈의 조건은 바로 이 불안정함, 혹은 경험되지 않은 잠재성 자체로부터 상상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바로 이 지대에서 바로 (방금 인용한 문장에서처럼) ‘독자, 인물, 작가’가 만나는 것 아닐까.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읽는 나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의 뒤표지에는 소설가 하성란의 이런 감상이 적혀 있다. “누구 한명의 것일 수 없는 그들의 이야기는 결국 이주혜의 이야기이자 책을 읽는 ‘나’ 들의 이야기가 된다.” 여기에서, 소설 속 그들의 이야기가 곧 “이주혜의 이야기이자 책을 읽는 ‘나’들의 이야기가 된다”는 대목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앞서 강조한 ‘자기박탈’ ‘자기를 내어주는 일’을 겹쳐 생각하고 싶다. 예를 들어, 우리는 허구로서의 이야기에서 나에 가까운 무언가를 만나고 공감한다. 하지만 때로는 그 이야기 속에서 자기를 잃고 헤매기도 한다. 이야기 속에서 나는 이미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 -예컨대 경험, 정체성- 에 대해 응답받기도 하지만, 반대로 나를 내어주는 장소가 곧 이야기이기도 하다. 앞서 이주혜 소설 속 주인공이 일기라는 형식 속에서 1인칭(나)을 내어 주면서 자기를 쓰는 일이 곧 타인을 쓰는 일이 되었음을 떠올려보자. 동시에 그때, 일기와 픽션을 구별할 수 없게 된 것을 떠올려보자(소설 속 한 인물은 그녀의 일기가 소설 같다고 말하고, 그녀는 자신의 글이 픽션이 아니라고 말한다). 일기가 타인들의 세계로 이행하는 서사 속에서 소유에 기반하는 주권적 자기의 형상은 교란된다. 그리고 픽션과 일기라는 형식과 관련해서도 장르적 구획 이전의 불명료한 지대가 부상된다. 자기를 내어주면서 도달한 곳이 타인의 세계와 더불어 소설적 장소라는 사실은 ‘소설적 커먼즈’ 의 또다른 의미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강조하건대 소유를 질문할 때, 경험으로 환원될 수 없는 잠재성의 지대가 열린다. 그것은 주권적 자기 너머의 연루됨 자체로 우리를 데려간다. 쓰는 이만 자기를 내어주는 것이 아니다. 독자, 소비자, 유저 등 특정 정체성의 이름으로 환원되기 이전의 나의 몸들이 거기에서 스스로를 잃고/잊고/헤매도록(dispossession) 초대받는다. 익숙한 회로 속에서 쉽게 공감하는 것만 ‘함께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스스로(라고 여겨지는 것)를 내어주는 일에 초대받고, 그 낯섦에 기꺼이 응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지는 시대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는지 모른다. 이것이 지금 커먼즈로서의 문학에 보태볼 또 하나의 의미일 수 있지 않을까. 1) 계간 『창작과비평』 2025년 봄호(제207호)에 게재된 동명의 글을 수정 보완했지만, 이에 대한 좀더 최근의 상세한 내용은 「말하는 입에서 듣는 귀까지 : ‘자기서사’ 문제틀의 재구성」(김미지 외, 『젠더』, 문학과지성사, 2025)에서 전개했다. 2) 이른바 ‘자기서사’가 2016~17년 광장, 페미니즘 대중화의 시간을 통과하며 특히 부상했다는 점이 2025년 2월 시점에서 다시 의미심장하게 환기된다. 12·3 사태 이후 여의도, 광화문, 남태령, 한 강진 광장에서의 ‘자유발언’ 및 이후 일일이 거론할 수 없는 다양한 그룹(시민활동가, 소수정당, 연구자 등)의 집담회, 토론회 등에서 자유발언이 이어지고 있고 그 발언 속 ‘개인’과 ‘연대’의 형식에 많은 이가 주목하고 있다. 광장의 경험은 늘 말을 바꾸어왔고, 말은 늘 광장을 바꾸어왔다. 지금의 분위기는 또 한번 자기를 발화하는 형식에 대한 논의가 재점화될 것을 예고하는 듯하다. 이 글에서 ‘자기’는 self의 번역어이다. 부분적으로 ‘자아’로 읽는 것이 자연스러울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기’로 표기했다. 3) 장영은,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민음사, 2018 참조. 4) 김은하, 「젊고 아픈/미친 여자들과 자기 이론으로서의 글쓰기」, 『여성문학연구』61호, 2024 참조. 5) 한영인, 「자아 생산 장치로서의 에세이」, 『갈라지는 욕망들』, 창비 2024, 215, 217면. 6) 日比嘉高, 『プライヴァシーの誕生』, 新曜社 2020, 254면 참조. 7) 오혜진, 「지금 한국문학장에서 ‘퀴어한 것’은 무엇인가(1)」, 『문학과사회-하이픈』, 2018년 겨울호. 8) 오카 마리,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 이재봉·사이키 가쓰히로 옮김, 현암사 2016. ‘목격-증인 되기’에 대해서는 8장을 참조할 수 있다. 9) 가야트리 스피박, 『스피박의 대담』(새럼 하라쉼 엮음, 이경순 옮김, 갈무리, 2006, 254쪽),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어셈블리』(이승준·정유진 옮김, 알렙, 2020) 참조. 10) C. B. 맥퍼슨, 『소유적 개인주의의 정치이론』, 이유동 옮김, 인간사랑 1991, 25-26, 206면. 11) 같은 책, 212면. 12) 특히 2010년대 이후 영어권의 각 분과마다 신자유주의 지배구조 분석과 관련해 ‘소유적 개인주의 50년 후’라는 문제의식이 널리 공유되어왔음을 참조해본다. 13) 주디스 버틀러·아테나 아타나시오우, 『박탈』, 김응산 옮김, 자음과모음 2016 참조. 이 책에서 두 대담자는, 오늘날 세계가 어떻게 주체의 구성적 상호의존성을 차단하고 정착민 식민 체계에서 박탈·탈소유(dispossession)를 역사적으로 합리화하기 위해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넘어설 원리가 무엇일지 논의한다. 14) 같은 책, 26-27, 338면. 15) 같은 책, 337면. 16) 여기에서 물리적으로 구획된 몸을 넘는 정동적인 경험과 연결신체(assemblage)의 주제를 소환할 수도 있고, 이런 이유에서 이 소설은 ‘5월 광주 소설’의 새로운 방법을 가늠케도 한다. 이것은 단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축자적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 ‘개인적인 것’의 의미를 재구축하는 과정, 그리고 ‘자기’라는 내적 표상이 시간의 축적 속에서 구축되는 과정을 확인하는 것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어떤 사건에 대한 당사자와 비당사자 문제, 이른바 경험 없는 세대의 ‘포스트 기억 장치’ 문제에 시사하는 바도 적지 않다. 17) 물론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시옷에게 이름조차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순간을 이야기하며 그에 대해 “사과하고” “말을 걸고 싶었”으며 “이름을 불러주고” “다정하게 안부를 묻고 싶었다”(347면)고 적어두기도 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작가의 사후적 소회와 별개로 분명 ‘나’ 혹은 어떤 고유명을 피하는 설정 속에서 오히려 자기=나를 둘러싼 존재의 원리를 근원적으로 보여준다. 18) 김다솔, 「붉은 언어로부터 무한히 탄생하는 세계」, 『문학동네』 2024년 봄호 56면. 19) 우카이 사토시, 『주권의 너머에서』, 신지영 옮김, 그린비 2010, 379면 참조. 20) 데이비드 볼리어, 『공유인으로 사고하라』, 배수현 옮김, 갈무리 2015 참조. 21) Silvia Federici, Re-enchanting the World, PM Press 2018, 87면 참조. 22) Michael K. Bourdaghs, A Fictional Commons, Duke University Press 2021, 11, 23면. 23) Michael K. Bourdaghs, 같은 책 2~4부 참조.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문」 「마음」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을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계간 창작과비평 김미정 자기서사커먼즈자기소유주권소유적 개인주의 2025
성현아 미래를 꿈꾸는 서정시는 현재의 삶을 구할 수 있는가

 기후위기로 인한 지구 멸망의 시나리오는 이제 더는 황당한 괴소문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종말은 우리 곁에 바투 다가온 예측 가능한 결말이자 부대끼며 살아가야 할 반려가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 더해 2024년 말 우리는 45년 만에 다시 계엄을 경험하게 되었고 참사를 반복적으로 목격해야만 했다. 현재 우리에게 일상이란 반복되는 보통의 나날이 아니라 필사적으로 수호해야만 누릴 수 있는 놀랍도록 운수 좋은 날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는 우리가 구할 수 있는 해답이 무엇인지를 면밀히 따져보는 일만큼이나 어떠한 해답을 구하려고 노력할 것인지, 그 구도의 자세를 설정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전력을 다해 살아남되 생존에만 매몰되지 않고서 더 나은 방향으로 삶을 변화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뒤집어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지' 질문하게 되었다는 한강 작가의 말에 힘을 얻어, 지금 물어야 하는 문학적인 질문을 해본다. 도달하고 싶은 미래를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미리 체험하게 하는 문학이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응답이 될 수 있는 양경언과 인아영의 비평을 읽었다. 두 평론을 만나면서 미래를 새로이 구축하는 서정과 그에 대한 논의의 갱신이 현재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그러한 긍정적인 예측이 극복되어야 하는 낡은 장르로 여겨졌던 '서정시'의 가능성을 재탐색하면서 도출될 때, 과거-현재-미래는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고 선순환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의 평론가들이 미래로 뻗어간 시가 현재를 어떻게 바꾸어나갈지 논의하며 치열해지는 것도 그 이유에서일 것이다. 양경언 「노래가 들리는 곳」  양경언은 「노래가 들리는 곳: 서정시의 변혁성에 대하여」(『창작과비평』 2024년 겨울호)에서 전운이 감돌고 기후위기가 심화된 현사회에서 삶을 '사는 일'이 아닌 '살아남는 일'로 인식하는 경향성이 더욱 공고해졌음을 지적한다. 그는 생존 이외의 선택지를 차단하여 삶을 죽음의 대타항으로만 사유하게 하고 "더 나은 삶으로의 진전이나 변화를 거부하게 만드는" 정치적인 맥락을 비판한다. 살아남기만을 강조하는 사회가 살 만한 삶을 향한 욕망 자체를 소거해버린다는 분석에 동의하게 된다. 양경언은 "우리 시대가 놓치고 있는 '좋은 삶'에 대한 구상과 내용"(79면)을 회복하기 위해 더 나은 세상을 추구해왔던 분투의 역사를 참조하자고 말한다. 그리고 새로운 문명전환의 노정에서 우리가 다시금 들여다보아야 할 문학형식은 생생한 발화를 통해서 변혁의 비전을 제시해온 서정시라고 역설한다. 그에 따르면 좋은 서정시는 "'사는 일'을 '살아남는 일'로" 축소하지 않고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삶"(80면)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그러므로 서정시와 그에 대한 논의는 우리가 갈망하는 다음 시대로 진입하기 위한 이행의 역량을 고취한다.  가령 양경언은 신경림 시 「상암동의 쇠가락」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불변의 진리를 전하는 대행자의 역할을 하기보다 "지배적인 체제의 승인을 얻지 못할지라도 주관적인 시선을 진솔하게 가꾸어" "같은 편에 서고자 하는 이들의 편으로 다가가는 태도를 취한다"(84면)고 해석한다. 「상암동의 쇠가락」은 산동네 사람들의 생기와 자력을 존중하면서 그 각각의 삶이 평등하게 공존할 수 있도록 살핀다. 그것은 타자의 고유함을 보편으로 무리하게 확장하거나 함부로 자아와 동일시하려는 움직임과는 다르다. 양경언은 서정시가 세계를 자아에 종속시켜 타자성까지 동일화하고 만다는 기존의 다소 도식적인 이해에서 벗어나, "'주관'을 지킴으로써 '대상'을 돌보는 관계를 성립시"(같은 면)키고 이로써 다양한 삶이 "평등하게 공존하는 감각을 길러"(86면)내 생의 전망을 길어올린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서정시에서 발현되는 주관성이란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정을 뚝심 있게 보살피면서 이를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노래로 울려퍼지도록 두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85면)  양경언의 글을 읽으며 폭압적인 동일시의 토대로 간주되고 극복의 대상으로 여겨져온 '주관성'이 비대해진 자의식, 혹은 나르시시즘적인 주체성의 동의어로 취급되어온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자아를 비워내야만 타자를 들일 자리가 존재하리라고 믿음으로써 주관성을 소거하는 작업에 몰두하여 산출해낸 것이 어쩌면 윤리적인 여백이 아니라, 개성적인 목소리들이 지워지고 남은 허무한 공백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사유는 한편으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인간을 배격하는 일로 귀결되는 흐름을 저지하는 기능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포스트휴머니즘 담론 및 신유물론이 활성화됨에 따라 '인간답게' 사고하고 행동하자는 휴머니즘적 요청이 누군가에게는 폭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음을 감지하게 되었고 이는 긍정할 만한 변화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최소한의 도덕을 요구할 수 있게 하는 기준이기도 한 '인간다움'을 해체하려 애쓰다 인간이 지닌 타자에의 감응력과, 존엄하게 살아가려는 의지까지 허물 위험은 없는지 점검해야 한다. 문제적으로 언급되는 문학적 경향을 개선하는 일이 꼭 그것을 소거하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질 필요는 없음을 새삼 깨닫는다.  서정시가 극복되어야 할 무엇으로 정의되기 시작했던 것은 그것이 타자를 자아(화자)로 수렴시키는 장르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이라는 테제가 받아들여짐에 따라 그간 서정적 경험이란 객체에 대한 주체의 일방적 동일시로 이해되어온 경향이 있지만, 이는 자아와 세계가 '서로에게 침투(interpenetration)'하여 동화되는 과정에 가깝다.1) 시적 자아에 부여되는 과도한 권력을 해결하기 위해 다성성, 분열적 주체 등을 고안해왔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아 마땅하지만, 서정의 이해방식에 대해서는 재논의해볼 만하다.  더불어 김승희의 시 「호텔 자유로」에서 자아가 세계와 이미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려 한 양경언의 해석을 살펴보자. 꽉 막힌 자유로에서 진정한 자유를 갈망하는 시적 자아의 감정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밀고 가는 자유"를 수행했던 전봉준의 의지와 "공습 탄환에 스러진" 카불 소녀의 간절함과 맞닿는다.(88~89면) 물론 이 같은 연결 역시 화자의 의식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이 창출될 때 여전히 자아가 우위에 놓이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는 점은 더욱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서정시가 세계를 자아화한다는 식의 단선적인 이해가 세계와 자아를 분리하여 바라볼 것을 요구하고 있었음은 확실해진다. 습관적으로 전제되는 이 같은 대립 구도는 자아가 역사성과 계급성, 사회 이데올로기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진공 상태의 개인처럼 느껴지도록 종용한다. 새로운 세계를 향해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시에서 "만인의 몸짓"(89면)이 감지되고, 각자의 바람이 여러 존재의 마음과 공명할 수 있는 이유는 자아라는 단위가 근본적으로 타자와의 연결을 포함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이 자아의 일방적인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양경언이 말했듯 '누가 말하는가'를 '누구와 함께 말하는가'로 바꾸어 쓰고 '누구와 함께 나아가는가'로 풀어낼 수 있을 듯하다. 새로운 미래를 불러들이는 서정시는 현재를 구하는 노래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인아영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밤은 아름답다」  인아영의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밤은 아름답다: 1990년대 이후 한국문학의 미적인 지도」(『문학동네』 2024년 겨울호) 역시 지극한 주관성에 대한 고찰로 시작한다. 인아영은 실제 현실과 거리가 멀다 해도 분명히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내면의 풍경을 말하고 싶은 자신의 욕망에서 출발해 "내 마음이 바라보는 풍경으로부터 현실을 이해하고" "꿈속의 장면으로부터 거꾸로 세계를 재구성"(111면)하는 방식이 2020년대 한국시에서 자주 목격되는 조류라고 이야기한다. 화자의 마음과 세계를 일치시키고 그 세계를 믿기로 결심하여, 현실의 논리에 근간한 사실주의적 접근보다 내면에서 출현하는 세계 및 그에 대한 애정을 우선시하는 경향성을 인아영은 '내향성'이라고 명명한다.  인아영의 적극적인 해석에 보태어, 시적 세계의 협소화, 비개연적이고 자의적인 세계관, 현실감각의 결여 등으로 비판받기도 하는 최근의 시편들이 독해될 때의 효과를 덧붙여 논의해보고 싶다. 시인-화자가 꿈꾸는 환상적이고 주관적인 세계를 마음껏 탐닉하고 그 내밀한 세계관을 자세히 정립해나가는 2020년대의 시가 펼쳐 보이려는 것은 자기유폐적인 망상이 아니다. 팬데믹, 전쟁, 기후위기와 같은 거대한 시류 앞에 일상이 무너져가는 현시대에서 개인적인 노력이나 개개인의 영향력에 대한 믿음은 거의 소멸한 상태다. 모종의 개별적 행위가 어떤 변화를 창출할 것이라는 기대를 품기 어려운 때, 이와 반대로 '나'라는 개인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나'의 마음에 따라 세계가 구축되는 최근 시의 방식은 독자에게 믿을 수 없지만 믿고 싶은 매력적인 세계의 주조 원리가 된다. 그 간극을 채우는 것은 원하는 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꿈꾸는 일이 그 가능성과 무관하게 가치롭다는 판단이자, 극도의 주관성을 응원하면서 자기만의 특수성을 가꾸고 수호하고자 하는 이들 독자들의 적극적인 지지일 것이다.  인아영은 이러한 내향성의 성행이 "서정적 아름다움의 귀환"이거나 "현실과 긴밀하게 연루된 시적 흐름에 대한 반동"(같은 면)일 수 있겠다고도 이야기한다. '현실적'이라 여겨지는 이성중심 세계의 논리에만 얽매이지 않겠다는 저항의 움직임으로도, 서정의 창조적 계승으로도 보인다는 말이다. "'미래파'의 실험적 성격보다는" "서정의 계보에 한층 가까운" 느낌을 주는 미래파 이후의 시 경향성을 '서정의 귀환'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최근의 서정이 지닌 차별성을 희석해버릴 위험이 있어 동의하지 않는 고봉준 평론가 역시 그러한 경향성이 시대 맥락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는 서정의 역사성과 가능성을 환기할 수 있음을 긍정한다. 그는 서정이 시인의 진솔한 감정표현 정도로 환원되는 일을 경계하면서 서정시의 정서적 호소력은 시인의 자기고백을 통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것이 시인-개인"이라는 주관성을 지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설명한다.2) 그러므로 서정적 주관성 역시 개인사로 한정되지 않으며 공동의 경험으로 나아가는 확장성을 지닐 수 있다고 보았다.  필자 역시 2010년대 후반부터 생겨난 시적 경향이 억압적 동일시로 퇴행하거나 과거의 유행이 되돌아오는 흐름이라 보지 않는다.3) 그보다는 시인과 화자의 분리와 시적 주체의 분열을 전제하는 시가 주류였던 시기를 거쳐, 가상이라 하더라도 속아주고 싶은 단일하고도 확신에 찬 목소리를 내는 '화자-시인-시민'이라는 하나의 통합체를 확인하고 싶은 갈망에 대한 새로운 응답으로 보인다고 해석한 바 있다. 박소란의 시들을 분석하며, 서로의 안녕을 묻는 모두가 헤어짐 없이 평온히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시에서만큼은 선명하게 그리고 실현시킴으로써 불가능의 가능성을 점쳐보는 것이 변화된 서정의 방식일지 모른다고 추측했었다. 이처럼 내향성이자 달라진 서정성이 두드러지는 시를 쓰고 읽는 일은, 각자의 주관을 지닌 개인이 공통된 미적 경험으로 만나 변혁의 주체로 기능할 수 있다는, 행여 그것이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최소한 소망해볼 수는 있다는 역능을 확인하고 회복하는 과정이 된다.  그렇다면 지금의 시가 보여주는 내향성은 혼란한 세계를 등지고 자기폐쇄적인 몽상으로 잠기고자 하는 소극성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자아의 주관적인 체험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 현실적이지 않기에 무시당하곤 하는 내밀한 세계를 아름다운 것으로 경험하고, 타자인 독자 역시 시와 시에 드러난 주체 내부에 접속하는 이 일련의 과정을 우리는 어쩌면 새롭고도 낯익은 얼굴의 '환상적 서정'이라고 이야기해볼 수 있다.  인아영은 현대예술에서 고전적 의미에서의 '미적인 것'은 종말했다고 하더라도, 미적이라는 감각 자체는 "보편성에 대한 예감"을 지니기에 시대를 초월하여 "자기동일성으로부터"(112면) 벗어나는 방식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아름다움이 주관적인 감상에 가까운 특수성을 지향할 때도 여전히 다른 이들 또한 이를 느낄 수 있으리라는 예감은 남는 것이다. 인아영의 논의는 주관성이 보편성 및 객관성과 대립하는 성질이라기보다 타자에게 있을 주관성을 함께 인지하게 만들어 어떤 방식으로든 이미 보편, 객관과 연루된 특성임을 생각하게 한다.  『문학동네』 30주년을 기념하여 기획된 '문학비평 키워드 1994-2024' 특집에 속한 이 글에서 인아영은 미학성에 초점을 맞춰 감성적인 자질로서의 '미적인 것'이 한국문학에서 어떻게 변형되고 발전되어왔는지를 돌아본다. 이때 인아영은 현실에 얽매이지 않은 아름다움에 집중하는 시편들에 나타나는 미적 범주를 '귀여움'(cuteness)으로 명명한다. 귀여움이란 대상이 되는 사물의 위험성을 제거하고 무해하게 만들어 소비하려는 욕망에 근거한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증상적인 미감이지만, 자본가치로 환산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사소한 존재를 교환논리에서 지켜내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향성이 2020년대 시편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는 진단에 동의하지만, 이를 '귀여움'으로 범주화하는 것에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단어가 본래 지니고 있는 약소한 뉘앙스가 부각되면서, 애정하는 대상 혹은 세계가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지 않게 수호하는 소극적인 대응만이 지금의 시가 지닌 정치성인 것처럼 축소되어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귀여움과는 다른 결을 지닌 동시대 미학적 경험의 한축으로 '언캐니'(uncanny)를 꼽는다. 방대한 데이터가 쏟아지는 시대에 달라진 인지방식을 반영하여 "자동화된 알고리즘을 통해 응답하는 기계적인 방법"을 차용하는 시편들은 독자에게 "무언가 비인간적인 것이 압도적으로 끼어"(115면)드는 낯선 경험을 선사한다. 인간도 비인간도 아닌 비확정적인 상태에 걸쳐 있으므로 "미래에 대한 열려 있는 감각을 동반"(116면)하는 시는 우리가 인간이기를 그만두거나 인간에서 해방될 수 있는지가 아니라 새로운 무엇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해 질문하게 한다. 이러한 논의는 주관적인 미적 체험이 결코 '타자를 향해 열려 있음'과 대립하지 않으며 양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맞이하고 싶은 미래세계와 되고 싶은 미래상을 집요하게 꿈꾸고 그것을 언어화하는 일은 반대로 그러한 미래를 도모하기 위해 현재에서 중단되어야 할 것들을 비추면서 지금-여기를 구한다. 바라는 세계를 그리는 일을 멈추지 않는 서정시는 현재로 온다. 이것이 서정의 귀환인지 지속인지, 창조적 계승인지 변혁인지 단언할 수 없지만, 새롭게 쓰이는 우리의 미래인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1) 오문석, 「서정적 경험으로서 '상호침투'」, 『한국시학연구』 제80호, 2024, 132면. 2) 고봉준, 「서정의 고고학」, 『문학 이후의 문학』, 도서출판 b, 2020, 239~42면. 3) 성현아, 「시와 복고: 다시 만난 서정」, 『시와 사상』 2021년 여름호 참조.

계간 창작과비평 성현아 서정성2020년대시적 경향메타비평내향성 2025
김주원 불확실한 세계에 던지는 소설의 질문

김유진, 『평균율 연습』(문학동네 2024) 이미 단편 「음의 속성」(『보이지 않는 정원』, 문학동네, 2018)에서 등장한 바 있는 피아노 조율사는 김유진 소설이 다루는 가족간의 불화와 갈등에 잘 어울리는 직업이다. 미세하게 틀어진 음을 조절하고 감정의 진폭을 고르게 하는 일은 가족에게도 필요하다. 김유진 소설은 섬세한 조율사처럼 이들이 어떻게 틀어지고 불확실한 간극을 넓히게 되었는지를 탐사한다. 『평균율 연습』에서 이제 막 결혼 생활을 끝낸 수민과 수찬, 고리대금업을 하다가 실패한 수민의 엄마, 빠리에서 예술가로 활동하는 정우의 이야기는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내는 피아노의 현처럼 연결되어 있다. 소설은 주인공 수민이 피아노 조율 수업을 배우는 과정을 따라 삼인칭 시점으로 인물들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조율은 산술과 이론이 아니라 경험과 실전만이 중요한 삶의 기술이다. “실제로 피아노를 만져보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자신이 악기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 없다는 걸 깨달”(57면)은 수민처럼 상대를 모르면서도 안다고 착각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수민과 수찬의 이혼에도 그런 오해가 있었다. 수민이 프랑스 어학연수를 하던 시절 만난 수찬은 원예학을 전공한 유망한 청년이었으나 귀국해서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았고 수민의 피로와 불만은 쌓여만 갔다. 수민에게 배우자의 무능력은 “아주 자주 유대와 이해를 가로막는 장벽”(20면)이었다. 먼저 이혼을 말한 사람은 수찬이었지만 이미 정서적 이혼 상태와 다름없던 수민은 살려고 이혼한다는 수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틀린 부분을 찾아 고치는 유능한 편집자인 수민은 판사처럼 “단죄하고 처단하”(41면)는 일이 어울리는 “너무 엄격하고 고지식”(122면)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수민의 불행은 엄마 임정희의 불행과 닮았다. 임정희가 어린 시절 딸이라는 이유로 부모와 형제들에게 무시를 당했듯 수민 역시 친척집을 전전하며 자신의 개인성을 존중받지 못하며 자랐다. 슬픔과 두려움을 위로해 줄 누군가가 없었던 이들에게 결혼은 인생의 도피처였다. 임정희는 남편이 “자신을 새로운 세계로 데려가주리라는 확신”(111면)을 가졌고 수민은 “자신을 예상치 못한 곳으로 데려다줄 것만 같은”(97면) 예감으로 수찬과 결혼했다. 그러나 이들은 남편의 무능함을 견디지 못하고 이혼을 선택하고, 낭만적 사랑이나 구원의 허위성을 벗어나 자기 삶을 재조율하는 새로운 국면에 진입해야 한다. 인생 초기의 결핍은 임정희와 수민을 무뚝뚝하고 애정에 인색한 사람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가족 공동체에서 독립할 수 있게 했다. 이 점에서 『평균율 연습』은 가족보다 개인으로서의 과업에 몰두하는 여자들의 삶의 궤적을 그린다. 이혼 후 임정희는 생활고를 이겨내며 왕성한 경제활동을 펼친다. 서울의 아파트를 사고 시세차익을 노리는 “불확실한 숫자놀음”(73면)을 즐기며 전남편을 사업 파트너로 이용할 만큼 대범하고, 투자 사기를 당했을 때는 딸에게 호소하고 가족에 의지하기보다 주도적으로 소송에 임한다. 『평균율 연습』에서 이 둘과 대비를 이루는 것은 정우의 사랑 이야기이다. 정우는 프랑스 어학연수 시절 수민의 룸메이트이자 예술가로 자립한 여성으로 도피나 구원으로서의 사랑이 아닌 온전한 자신의 사랑을 창조한다. 그녀는 남자친구가 자신에게 실수할 때조차 상대에 대한 연민을 잃지 않는다. 정우는 남자친구를 사랑하고 있다. 불운한 사고를 겪은 그의 열일곱 살 시절로 가 곁에 있어주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의 척추를 따라 길게 이어진 흉터를 매만질 때마다 그 결함이 마치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149면)이라고 상상하는 정우는 그와 결혼 대신 새로운 가족형태인 시민연대계약을 맺으며 살아간다. 수민은 정우를 자신과 비교하지만, 그런 사랑은 수민에게도 있었다. 수찬의 이야기를 보면 이들이 서로 얼마나 기적 같은 존재였는지, 수찬이 얼마나 수민의 외로웠던 과거를 보듬어주려 했는지 알 수 있다. 사랑은 결혼이나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정우의 경우처럼 상대의 경험과 감정까지 자신의 것처럼 상상하는 능력이다. 수민이 수찬을 무능하게만 보는 것은 그런 상상력이 권태와 오해 속에서 무뎌졌음을 의미한다. 피아노 조율 학원 원장의 말처럼 평균율은 순정율이 만든 결함을 모든 건반에 조금씩 떠안겨 어긋남이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절충하는 대안이다. 조율은 완벽한 순정율이 아니라 “불확실성을 수용할 때에야 비로소 거리가 아름다워질 수 있”(194~195면)는 미묘한 작업이다. 수민은 이 조율 훈련의 심화 과정을 마쳤다. 그러나 “수민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너그러운 세계(202면)”는 왜 “고치고 또 고쳐 쓰는”(202면)” 과정이 필요하다. 엄마와 수찬의 결함에는 그들만의 이유가 있다. 엄마 임정희는 이혼 후 돈에 집착하며 살 수밖에 없었고 소심하고 마음이 여린 수찬은 회사의 인원 감축에 어쩔 도리 없이 권고사직을 당했다. 그렇다면 수민에게 필요한 조율은 무엇을 의미할까. 조율 수업에는 교훈적인 메시지들이 많지만 조율의 핵심은 그것의 기능이나 유용성에만 있지 않다. 수민에게 고치는 일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하나하나 매만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두 음의 진동수를 조화롭게 만드는 기술이 단번에 되지 않듯 수민의 삶도 무언가에 천천히 시간을 들이는 과정에 있다. 『평균율 연습』은 상대의 결함을 나눠가지려는 시도가 사랑과 이해의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기당한 엄마에게 같이 살자고 말하는 것은 수민이 선택한 조율의 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소설의 결말에서 수찬이 이혼 후에도 수민과 수민의 어머니와 이어나가는 우정이다. 그것은 가족에 관한 하나의 대안이자 수찬이 만드는 평균율이다. 지금 가족 서사에 필요한 조율이 있다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서로 지지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드는 상상력일 것이다. 전지영, 『타운하우스』(창비 2024) 전지영의 『타운하우스』는 어둡고 불편하다. 이 이야기들은 대체로 눈에 보이지 않는 위협과 위계가 삶을 어떻게 지옥으로 만드는지를 보여주고 결말을 유보한다. 긴장의 해소가 아니라 곤경의 실상을 지켜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말의 눈」은 폭력의 전염성을 파헤친 수작이다. 주인공 수연은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던 딸 서아를 섬에 있는 국제 학교로 전학시킨다. 새출발을 결심한 그곳의 타운하우스는 CCTV와 보안이 완비되었지만 그럴싸한 외관과 달리 미세하게 갈라진 이층 천장 틈으로 물이 새는 곳이다. 이곳에서 수연은 “눈에 보이지 않는 위협”(10면)을 경험한다. 이번에는 서아가 지희의 딸이 저지른 학교 폭력을 옆에서 방관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수연은 서아의 행동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개입하지 않은 채 서아가 가해자가 아니라는 것에 ‘비겁한 안도감’을 느낀다. 같은 타운하우스 이웃인 지희는 수연의 이러한 모순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인물이다. 지희는 자신의 딸이 가해자지만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걸 서아가 증언해 주기를 바라며 그동안 쌓은 친분과 의리를 내세워 수연을 압박한다. 지희는 폭풍우를 무릅쓰고 비가 세는 수연의 집 지붕에 올라가 방수포를 덮으려다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다. 어떻게든 자기 아이를 구하겠다는 지희의 얼굴에서 수연이 자신의 얼굴을 보는 장면은 예리한 통찰력이 엿보인다. “아이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35면)는 모성은 그들이 그토록 피하고 싶어하는 폭력을 은폐함으로써 폭력에 공모하기 쉽다. 지희처럼 궁지에 몰린 부모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그것은 수연에게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35면)이다. 여기서 피해자와 가해자, 방관자의 경계는 매우 모호하며 폭력은 언제 어디서든 서로를 위협하고 전염시킬 수 있다. 눈여겨 볼 점은 피해자의 내면에 숨겨진 가해 심리다. 친구의 폭력을 관망했던 서아는 맞는 아이의 고통을 외면하고 “차라리 때리는 쪽”(26면)이 낫다고 말한다. 수연의 가해 심리는 한층 교묘하고 잔인하다. 수연은 지희에게서 과거 자신의 선처를 바라던 가해자 부모의 모습을 떠올리며 지희를 떠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지붕에서 떨어진 지희가 깨어나지 않기를 은밀히 바란다. “같은 폭력을 반복”(23)할 것이라며 가해자들을 엄정하게 심판했던 수연의 도덕적 신념은 서아가 잠재적인 가해자가 됨으로써 무너진다. 소설 초반에 타운하우스를 어슬렁거렸던 말은 검은 실루엣으로 수연 앞에 다시 나타난다. 여기서 수연이 낯설게 마주한 것은 바깥의 위협 때문에 보지 못했던 자신의 내면이다. 수연은 말의 눈에 비친 얼굴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보지 못한다. 무고한 피해자였던 자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검은 웅덩이 같은 말의 눈은 수연으로 하여금 자기 안에 숨겨진 가해자의 마음을 보게 만든다. 수연은 자신을 부정하고 싶어하지만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폭력의 악순환은 지금 우리가 직시해야 하는 현실이다. 이 소설집에 엮인 작품들에서 삶의 안전지대는 찾아보기 어렵다. 걷잡을 수 없이 물이 새는 타운하우스는 “갑작스런 기온 변화, 결로, 바람과 비에 약”(8면)하고 인물들의 갈등은 악천후 속에서 고조된다. 이런 식의 묘사가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전지영의 소설에서 변화무쌍한 기후(climate)는 불가해한 삶에 관한 징표로 때로 인물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 「쥐」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와 솟아오른 불기둥은 군 내부의 불미스런 의혹을 감춘 해군 관사를 태울 기세로 커진다. 그러나 관사를 돌아다니는 쥐를 잡을 수 없는 것처럼 부조리의 실체는 밝혀지지 않는다.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 안으로 들이쳤지만」에서 기습적인 스콜은 아들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공무원인 주인공은 불합리한 공공 사업에 몰두하느라 아들의 죽음에 무방비 상태였고 성공적으로 끝난 사업은 자신의 일상에 예기치 않은 해를 입히는 중이다. 스콜은 아파트 지하 주차장을 침수시키며 평온한 일상 속에 숨어 있던 문제들을 수면 위로 올려놓는다. 「소리 소문 없이」의 ‘나’는 음대 입시생으로 피아노와 악보가 삽시간에 물에 잠기는 수해를 겪는다. 이 “이해되지 않는 일”(211면)은 입시 경쟁으로 누군가를 무너뜨리고 싶어하는 ‘나’의 뒤틀린 욕망을 누그러뜨리는 계기가 된다. 한편 자연재해와 관련된 소설적 배경은 삶의 불평등과 부조리를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언캐니 밸리」 속 도시 고지대에 있는 부촌 청한동에서 흐르는 물은, 장마철마다 ‘나’가 세 들어 사는 저지대 상가 건물을 물바다로 만든다. 그러나 청한동 노부부의 저택에서 일어나는 수상한 약물과 주사가 오가는 일들에 ‘나’는 접근할 수 없다. 기후는 한국 사회의 계급 지형도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을 침식시키는 중요한 사사적 요소이다. 『타운하우스』에서 악은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다. 친구나 동료에 대해 악의적인 루머를 퍼뜨리고(「뼈와 살」, 「소리 소문 없이」) 부당한 업무와 명령에 복종하는(「쥐」,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 안으로 들이쳤지만」) 인물들은 단지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할 뿐이다. 「맹점」에서 안과 의사 은애도 그런 유형의 인물이다. 은애는 어시장 노인들에게 고액의 백내장 수술을 해주고 보험제도의 틈새에서 이익을 착복한다. 병원에 노인 환자들을 공급하며 “주는 걸 확실히 주고 받을 걸 확실히 받는”(121면) 보험회사 영업사원 재복과 과잉 진료로 수술 건수를 늘리는 은애는 「말의 눈」의 수연과 지희처럼 비슷한 욕망으로 조응한다. 은애가 검게 젖은 어시장을 빠져나올 때 고양이 한마리가 생선 피와 비늘, 내장으로 범벅이 된 입으로 은애의 발을 맹렬하게 핥는 장면의 기이함은 그녀의 맹목적인 탐욕을 암시한다. 사회적 약자이자 가정폭력의 피해자였던 은애의 성공은 그러기에 더 착잡하다. “한 사람이 웃으면 다른 사람은 웃지 못하는”(「뼈와 살」) 경쟁 사회의 심리는 거의 생존 본능처럼 전지영 소설의 인물들에게 내면화되어 있다. 상처받은 피해자의 이야기는 익숙하다. 그러나 『타운하우스』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피해자의 상처를 돌보지 않는 사회가 만드는 파괴적인 갈등이 주목한다. 모두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되는 사회는 끔찍하다. 「맹점」의 은애처럼 소설의 다른 인물들도 자신의 성공 뒤에 누군가의 불운과 불행이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불길한 날씨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휩싸인 『타운하우스』는 각자도생의 시대를 반영한 한국형 고딕 소설로 손색이 없다. 비슷한 갈등 구조와 패턴이 반복되는 면도 있지만 이들 이야기가 일으킨 균열은 오래 들여다볼 가치가 있다. 그것은 낯설고 두려운 일이다. 자기도 모르게 세상의 폭력에 가담하는 사람들, 더 나쁘게는 알면서도 그 불길한 운명에 적신 발을 빼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우리의 얼굴이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계간 창작과비평 김주원 가족 서사우정폭력가해자피해자기후(climate)불평등 2025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