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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파란 | 2024년 가을호(제34호)

서정 없는 만두의 불연속 전개 ㅡ 임승유, 『생명력 전개』, 문학동네, 2024

박민아 문학평론

2024년부터 비평을 쓰기 시작했다.

  같은 만두가 두 개일 수는 없다. 동일한 만두가 같은 시공간 내에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만두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부재하는 만두는 오히려 만두 이상의 만두에 대한 사유를 촉발시킨다. 게다가 이 만두에는 서정이 없다. 만두에 대해 생각하고 만두에 대해 말하고 만두에 대한 시를 쓰지만 정작 ‘만두’의 실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시인은 만두에서 서정을 걷어 낸다. 실재하지 않는 만두는 어떤 개념에 구속되거나 정의되지 않는 방식으로 만두이면서 만두가 아닌 상태로 존재한다. 만두 관찰자의 서정이 개입되지 않은 만두는 ‘만두’ 이전의 만두로서의 시간을 지속시킨다. 임승유의 네 번째 시집 『생명력 전개』는 이러한 방식으로 무언가에 대해 말하면 말할수록 그 대상으로부터 멀어지며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처음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특성을 보인다. 「만두」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 보자.


  지금은 만두만 생각하자. 만두란 무엇인가. 나는 만두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만두는 만두 만드는 일요일에 도착할 수 있는가. 그럴 때의 만두란 언젠가 먹어 본 적 있으며, 오래 사귀던 사람과 헤어진 날 모퉁이 만두 가게에서 혼자 먹던 만두인데

오오 여기서의 만두란 그런 서정적 만두여서는 안 됩니다.

드디어 일요일 아침이 시작될 때

하루 종일 만두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만두는 늘어나서 온 겨울을 함께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게 중요한 만두입니다. ―「만두」 부분


  마감 때문에 “만두를 못 해 먹고 있”는 상황은 ‘내’가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든다. ‘나’는 만두에 관한 생각을 멈추는 대신 “만두에 대한 시”를 쓴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만두를 먹고 있지도, 보고 있지도, 만들고 있지도 않지만 다가올 일요일에 하루 종일 만들기로 예정된 만두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 안에서의 만두는 ‘만두’로서의 소용이나 역할과 무관하며, 오히려 그 부재를 통해 존재의 가능성을 발생시키는 중이라 할 수 있다. 인간적 서정을 지운 이 만두는 아직 오지 않은 만두, 당도하지 않은 만두에 대해 우리가 과연 무엇을 알고있고 또 알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비슷한 방식으로「레몬」에서의 ‘레몬’의 경우 다음 연으로 이행할수록 실용적 레몬으로부터 멀어지는 양상을 보이다가 “레몬이라는 제목의 시를 쓰는 사람”에 의해 “레몬에게서 레몬을 떼어 내려고 이것저것 시도”되지만 그마저도 “잘 안 돼서” “그냥 레몬한테 레몬을 줘 버리는”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여주에 가기 전에 여주에 대해 상상하는 「여주」를 경유해, 과거 특정 순간에서 “빠져나오고있”는 「충북대학교」, 사라지지 않는 어떤 “장면”으로 가고자 하는 「이야기」에까지 도달하면 결국 이 시집의 중요한 키워드는 ‘장면’과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시인은 이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이제 서두에서 언급한 같은 만두 두 개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 이 당연한 문장을 다시 떠올려 보자. ‘나’ 역시 같은 시공간 안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차원의 무수한 ‘나’들이 어떠한 과정을 공유하거나 서로가 교차할 수 있다는 상상은 어떠한가. SF 소설 『쿼런틴』에서 그렉 이건이 제시하는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인간의 관측이 우주의 가능성을 수축시켜 버리고, 매 순간 발생하는 인간의 선택은 자기였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살해’하는 것에 가깝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렉 이건의 디스토피아적 가정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이를 통해 사태나 사물을 고정시키거나 결정지을 수 있다는 결론까지 반드시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화이트헤드라면 이때 ‘나’라고 할 수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해, 시간의 연속성 측면에서 볼 때는 “같은” ‘나’이지만 1초보다도 짧은 “현실적 계기”의 측면에서 보자면 매 순간의 ‘나’는 과거의 ‘나’와 ‘다른’ ‘나’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할지도 모른다.1) 시인은 이처럼 연속적이면서도 불연속적인 속성을 가진 ‘나’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감자 양식」을 보면, 시에는 “도통 뭘 먹는 법이 없는 여자”와, “그녀”가 등장하는 소설을 쓰는 “그녀”와, 다시 이것을 시로 쓰는 ‘내’가 등장한다. 이 ‘같고’도 ‘다른’ 무수한 “그녀” 혹은 ‘나’는 “음식 생각”에서부터 시작해 “감자채전”을 요리하는 과정을 공유한다. 시인은 감자 양식(糧食)이라는 매개를 통해 글쓰기라는 양식(樣式)을 가로지르며 ‘나’ 혹은 “그녀”를 증식해 간다. 이는 우주의 가능성이 수축이 아닌 확장이나 팽창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시인의 세계관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어쨌거나 시집에 등장하는 모든 존재, 모든 생명체들은 매 순간 변화한다. 그리고 그것이 소멸이 아닌 방식과 관계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렇듯 시인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의 연속성보다는 ‘내’가 ‘나’로부터 분리되거나 균열을 일으키는 순간의 감각에 치중하고자 하는데, 「소매가 긴 푸른 셔츠에 검정 바지」의 경우 시간의 분절과 이로 인해 발생하는 불연속적 ‘나’에 대한 포착이 잘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가 ‘나’에 대해 인식하고자 할 때, 그때의 ‘나’는 지속적이거나 항상적 존재가 아니라 때로 분절적이며 가끔은 불가해한 상태로 다가오기도 한다.이 단속적 기억들 속에서 “소철나무” 앞에 망연자실 앉아 있는 ‘나’의 의식과 감각이 오래도록 머물고자 하는 곳은 “생명력으로 가득한” 쪽에 있다. ‘내’가 ‘나’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순간, 지나가던 목격자의 일상적 질문(“여기서 뭐하세요?”)은 감당할 수 없는 ‘나’를 ‘나’로부터 분리하고 으레 “주변의 다른 생물이 그러하듯” 움직임의 행위로 이어지게 한다. 특히 시집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식물은 화자의 위치성과 관계한다고 할 수 있는데, ‘나’는 “타라를 키우는 사람”이 되었다가(「다세대주택」), ‘화초를 옮겨 심는 사람’이 되고(「종묘」), 엄마에 의해 양육되는“생물체”가 되기도 한다(「양육」). 어느 아침 “일어나 보면”,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 “미끌거리는 생물체”일 뿐인 ‘나’라는 자각은 양육의 주체와 대상이 고정되어 있지 않음을 드러내 준다. ‘내’가 양육을 행하는 존재에서 양육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것처럼, 결국 생명이 전개된다는 것은 존재와 존재 사이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이자 그들이 일으키는 운동의 한 양상인 셈이다. ‘생명’을 숨이 들어가고 빠져나오는 모든 행위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면, 존재의 아름다움 역시 생명의 유한함과 취약성에서 발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애니시다의 죽음」은 존재의 살아 있음이 “무엇이 무엇을 지나 무엇이 되는” 과정임을, 존재의 죽음이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을 지나 아름다움을 넘어가”는 과정임을 상기시켜준다. “나는 나갔다가 들어오고. 애니시다가 죽었다.”라는 시의 마지막 문장에 눈길이 오래 머문다. 이상하지만, ‘애니시다의 죽음’에 대해 말하는 이 시가 가장 생명으로 충만해 보이는 역설에 대해서도 오래 곱씹게 된다. 어쩌면 ‘생명의 전개’에 있어서 숨이 필수적으로 필요했던 것처럼 죽음 역시 “생명력 전개”의 일부인 것은 아닌지도.

  • 1) 스티븐 샤비로, 『사물들의 우주』, 안호성 역, 갈무리, 2021, 42쪽. 각주의 다음 문장을 참조. “1초 전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다르다”(different). 다른 한편, 지금의 나는 1초 전의 나와 “같은”(same) 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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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오늘이 지나면 내일은 무사할까. 가끔은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를 만나면 자랑스럽게 웃으며 이 몸을 건네줄 수 있을까. 너는 참 쓰기 좋은 몸을 갖고 있구나. 누구에게도 피해 주고 싶지 않다는 것은 그의 거짓말이다. 동호대교에서 한남대교 쳐다보기. 하지만 너와 걸어서 건넜던 건 한남대교. 다리 위에 서면 항상 무언가를 떨어뜨리고 싶어진다. 뭐였어? 뭐겠어. 우리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가기 위해 다리를 건넌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다리의 중간은 기억에 없었지. 택시 기사는 말이 많았고 나는 이곳이 처음이라고 대답했다. 사거리에서 어디로 갈까요? 그러자 나는 갑자기 구토가 일었다. - 「친구의 장례식과 애인의 결혼식」 부분  일상의 세속적인 반복과 사물들은 '내' 몸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이질감이 엄습해 와도 요지부동이다. 그 몸을 다리 아래로 떨구고 싶어도 그것은 '나'의 소유가 아니므로 생각만이다. 빠져나갈 수 없는 생의 중력 앞에서 그는 또 어딘가로 방향을 정해서 기사에게 알려 주어야 하고 폐쇄 회로에 갇힌 그는 급기야 구토의 기미를 느끼고 입을 틀어막는다. 그의 하루를 짐작할 때 제목이 본문에 생략된 낮의 시간을 나지막이 일러 준다. 친구는 저곳으로 돌아가고 사랑하던 이도 다른 삶 속으로 들어간 하루. 장례식과 결혼식은 모두 떠남을 공표하는 의례들이다. 떠남의 연속을 마주하며 그는 삶의 과대한 대전제에 반문한다. 실상 우리에게 남는 것은 중간 지점이라는 기억이 아니라 출발점과 도착점뿐이지 않느냐고, 그래서 '나'는 다리의 중간에 '내' 몸을 떨굴 수가 없다고 항의해 보고 싶기도 하지만 무력하다. 그조차도 빌린 몸에서 비롯한 생각들이라면 그는 이 세계의 "자명종과 전철, 점심, 회의, 저녁, 퇴근. 혹은 야근"에 대하여 완전한 패배자다.  신에게 이 다리를 무사히 건너게 해 달라는 기도는 그러므로 진실한 읍소라기보다 이미 무사할 것을 알고 있는 자의 지쳐 버린 탄식이다. 근대의 산책자는 이 세계에서 바깥의 관찰자로 전락한다. 그의 발설은 작은 발버둥에 불과하다. 사이렌이 울어도 시간은 사전의 종이들이 빠르게 넘어가듯 휘몰아치거나 냄비 속 기포처럼 부글대지 않는다. 흠집 하나 없는 세계의 매끄러움은 완전하게 유지된다. 「신도시」의 빛나는 빌딩과 그 사이를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은 도시의 관성을 알맞게 완성하는 부품들이다("빌딩과 빌딩/많은 전선이 이동했다"). 빌딩과 빌딩 전선으로 연결된 콘크리트의 감정은 서로를 일관적으로 바라보겠지 연인들은 뜨거웠다 차츰 모른 척하겠지 소방차가 교차로를 통과하는 동안 오늘도 우리는 다만 무사하고 그게 네 가족이라 생각해 봐 너를 키운 게 가족이라고 단정 짓지 마 그것은 사이렌 소리를 따라 날아가는 비둘기 같은 것 마지막 남은 희망대출 같은 것 전철역에서 절하며 지지를 호소하는 정치인과 그 앞을 지나는 직장인에게 출근은 무엇보다 중요합니까 간과 쓸개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새로 생긴 진입로를 따라 차례로 들어서는 차들을 보고 있으면 어째서 당신의 가족은 오늘도 무사합니까 - 「신도시」 부분  시인의 감각은 격동하지 않고 그조차도 무사할 따름이다("그것은 사이렌 소리를 따라 날아가는 비둘기 같은 것"). 이곳의 유일한 변화 가능성이 인간 의식과 감각의 번뜩이는 칼날이라면 도시의 문명은 무엇이든 막아 내고 마는 거대한 방패다. 변혁의 단초는 그저 "마지막 남은 희망대출"일 뿐일 때, 신에게 탄식했던 그는 (신은 이미 우리를 완벽한 무사함 속으로 집어넣은 이후이므로) 또 한 번 작게 한탄할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우리는 어째서 이토록 무사한 것이냐고, 연인과 가족, 정치인과 직장인의 무사함은 그저 "차례로 들어서는 차들"일 뿐인데 이것이 정말 다일 뿐이냐고 말이다. 마지막 연의 비문은("보고 있으면" / "오늘도 무사합니까") 신의 도덕과 규범에 맞서 보려는 '나'의 사소한 어긋남이다.  이 시집은 세계와의 대결에서 이미 패한 자의 입지에서 쓰이고 있지만 저항이 전연 부재하는 것은 아니다. 시 쓰기란 결국 "타인의 필체 속에서 / 잠시 나를 죽은 혓바닥처럼 놓아 보는 것"이라 하더라도(「필적감정」) 그 빌린 손끝에서 흐르는 잉크로 '너'에 대한 사랑만큼은 한사코 주장하려고 한다. '나'라는 대상에 대한 자기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해도 '나'는 '너'라는 사랑에 관해 유치권을 주장할 수는 있지 않느냐고 항변한다("왜 / 이제 나를 당신의 미망인으로 부르면 안 되나", 「저 금목서를 당신의 미망인으로 부르면 안 되나」). '네'가 '나'를 떠나 사라졌다는 이별의 사실마저도 앗아 가려는 세계의 난폭함에 맞서 '네' 그림자 뒤에 이어진 것이 바로 다름 아닌 '나'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차피 이 세계의 중력이 "모든 거리가 한 호흡 안에 있게 한"다면(「영원의 스코프」) '너'와 '나' 또한 하나의 원 안에서 거주할 테다. 사랑은 그의 손목을 잡거나 입술을 맞대는 촉각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같은 시야 안에 속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감하게 성취된다. 그런 당신은 언제나 너무 오래 한곳에 머무는 습관이 있다 정해진 결말은 얼마나 안락한가 누군가 꽃다발을 건네며 인사한다면 그것은 배수구의 소용돌이치는 중심처럼 무언가 당신에게 다가가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 앉는다 - 「영원의 스코프」 부분  세탁소에 옷을 맡기러 가는 길은 '네'가 지나간 길이다("애인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수선」). '나'의 체취로 젖은 셔츠를 누군가에게 맡기러 가는 길에 '네'가 지나간 자취를 떠올리며 둘을 겹쳐 두면, 봄밤의 하얀 목련은 두 눈을 덮어 버린다. 사랑은 부재 속에서 충만하게 향기롭다. 이처럼 시종일관 타자들의 그림자와 사물 사이를 거니는 그는 완전히 고립된 자는 아니지만 세계의 가장 나중의 자리에서 모든 것의 뒷모습을 담아내므로 과연 은둔하는 자4)다.  그러나 은둔자는 그를 잠식한 피로를 떨쳐 낼 재간이 없으므로 그가 시편들을 통해 보고하는 생의 단편들은 정치적 실천이라기보다 현재화된 영원을 배회하는 자의 소진되지 못한 에너지가 흐르도록 내버려두는 방관의 산물에 가깝다. 그는 피리 부는 사나이가 아니라 사나이가 피리에서 손을 뗀 후에야 찾아드는 파동의 나머지를 훔치는 관객이다("연주가 끝나자 단원들이 악기에서 손을 뗀다 // 그제야 나는 음악이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식적(息笛)」). 은둔자는 어둠 속에서 이 도시를 재배치하거나 남몰래 구획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주인이 아니다. 그는 다만 숨어 있는 방관자다. 그가 방관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은둔하는 지경이다. 그가 기록하는 현실의 답보 상태는 '나'에게 명백히 승리할지언정 '나'를 지루하게 하지는 않으므로 삶의 피로는 그의 사랑이 '너'의 뒤를 쫓는 일을 멈추게 하지 못한다. 피로를 체현하는 삶은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먼 거리에서 '너'와 '내'가 하나의 그물에 함께 걸려 있음을, 희미하게 떨리는 그물코를 뒤늦게 감각하는 방식을 사랑이라 여길 수 있다면 사랑은 바로 그 피로함 때문에 세계와 마찬가지로 끝나지 않는다. 사랑은 피로 속에서 영원하다. 2. 탐미주의 도망자의 편린들: 김연덕, 『폭포 열기』(문학과지성사, 2024)  방관자가 도시의 어둠 속에서 사물들의 궤적을 따라 느리게 걸어갈 때, 그 한켠에는 빛의 사나움이 자신을 소진시키는 것이라는 걸 알아 가는 이가 있다. 원인 모를 수치가 자신을 장악했으나("종이 사이를 뚫고 이 안으로 들어왔지만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겠어", 「미지근한 폭포」) 그 사실을 보란 듯이 움켜쥐고 무거운 걸음을 떼는 이가 있다. 김연덕의 『폭포 열기』에는 빛과 대적하는 '나'들이 그것의 사나움과 폭력성을("돔에서 투과해 들어온 겨울의 각진 빛이 가만히 볼을 스쳤어 / 상처가 났어", 「구식 부끄러움」) 아름답게 증언하며 남몰래 폭포를 찾아가는 장면들이 산재한다.  그러나 이것이 도망의 궤적임을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은데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화자가 사물 하나하나에 들이치는 빛을 세심히 관찰하며 아주 느리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며(시편들에서 발견되는 장소들은 거의 하나의 공간으로부터 파생되는 인상을 준다) 그가 코를 박고 마음 속에서 관찰하는 사물들의 빛깔은 부정할 길 없이 아름다워서 당신은 폭포수처럼 흐르는 화려함에 넋을 잃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집을 끝까지 통과하고 나면 밀려드는 아늑하고 부드러운 피로감은 제 모습을 기어코 정직하게 드러낸다. 김연덕이 빛의 다채로운 조각들에 찔리면서도 당신의 손을 잡고 어딘가로 이끄는 건 염두에 둔 목적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동욱의 화자가 피로를 신체 내부에서 체현하는 방관자의 기록으로 시를 쓴다면 김연덕의 화자는 외부 세계의 사물들이 자신을 조각낼 폭력적인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것들의 집요한 추적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대상을 좇는 행위 속에 자신의 도주선을 남몰래 숨겨 두며 피로한 빛의 사나움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져 간다. 밀착하는 방식으로 최대한 멀어진다. 김연덕의 시 쓰기는 사물에 비현실적일 만큼 가까이 다가섬으로 세계의 폭력으로부터 몰래 도주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우선, 한 개의 형광등에서 시작해 보자. 도시의 빛은 방 한 칸에 매달린 형광등으로 달라붙고 화자는 독자의 귀 가까이로 다가와 빛이 선사하는 "현대적인 아픔"에 대해 속삭인다("그래요 나 그것 덕분에"). 어둠 속에서 고요히 흐르던 자연의 정동은 스위치 하나를 누르면 일순간 빛 속으로 모두 흡수되고 그의 말대로 이는 아픔에 관한 참으로 편안한 정리법이다. 수치심이 '나'의 민낯이라면 그것은 형광등이 밝아지기 전의 어둠 속에서만 생생하다. 나는 어둠 속에서 내가 나를 부끄러워하는 냄새를 맡을 수 있는데 버튼만 누르면 이 방을 조금 전과 다른 감정으로 채우는 전기가 들어온다는 사 실은 얼마나 새삼스럽고 간편하고 현대적인 아픔인가요 그래요 나 그것 덕분에 내 몸에 걸려 넘어지거나 모서리 날카로운 악취에 부딪치지 않을 수 있지만 낮 동안의 수치가 얼마나 정교한 무늬와 기울기 절단면을 얻었는지 손바닥에 올려놓고 가까이 들여다볼 수도 있겠지만 형광등을 켜는 것은 단지 한밤중에도 이 따뜻하고 복잡한 세공에 많은 시간이 필요해서입니다 (중략) 미세하게 다른 속도와 각도로 형광등 빛을 튕겨 내며 움직이던 수정의 소리 자신들을 견고하게 빛내는 소리가 났습니다 규칙적이었고 아주 조용했어요 - 「수정은 아름답고, 수정은 정확하고, 수정은 승리한다.」 부분  그는 "낮 동안의 수치"를 더듬어 볼 기회를 앗아 간 빛을 힐난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에 더욱 주의를 기울인다. 유리로 만든 진공관 안의 형광물질이 필라멘트 끝에서 튀겨지는 소리에 고막을 밀착한다. 이동욱의 '내'가 피로에 맞서지 않고 피로를 몸으로 살아 흘렀듯, 김연덕의 '나'는 빛의 손아귀에서 버둥대지 않고 도리어 빛을 향해 피부를 더욱 가까이 당겨 붙인다.  그곳에서 빛은 사물의 적대자다. 빛은 "삽으로 그것의 안을 파내고 / 쪼개"(「찬물처럼」) 관찰자의 지위를 점령하며 세계의 유일한 주체이자 절대자가 된다. 화자를 압도하는 그 시선의 힘에 대하여 화를 낼 만도 한데 그는 자신의 문장 안에 몸을 숨기고 빛의 사나운 뒤를 계속 좇을 따름이다. 간혹 빛에게 발각되려 할 때 그는 스스로 사물이 됨으로써 최선의 은닉을 감행하기도 한다. 나를 향해 있지는 않지만 이것을 만든 이의. 누군가의 세계를 향한 슬프고 기쁜 병들고 건강한 열망의 반복이 흘러드는 느낌이고 저 가벼운 선반에 잠시 올려 둔 채 때로는 먼지를 털어 주고 때로는 잊다가 다시 별 뜻 없이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은 따뜻하고 추상적인 느낌이기도 하다. 그리운 채 깨어 있는 이 느낌을 위해 나는 매번 나 자신을 어색하게 부푼 내 표정을 값으로 지불해 왔다. 물건의 선과 마무리가 아름답고 고유할수록 많은 시간과 힘을 요했으므로 가끔은, 트럭에서 품에서 떨어져 나와 스스로 곤두박질쳤다. - 「생활 속 폭포」 부분  그는 눈앞의 사물 속에서 그것을 만든 이의 "세계를 향한 슬프고 기쁜 / 병들고 / 건강한 / 열망의 반복이 흘러드는 느낌"을 찾아낸다. 사물이 자신을 향해 있지 않다는 진실 앞에서 그는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실은 그 역시도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물화시키며 살아 왔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고백을 마치자마자 곧장, 사물로부터 떨어져 나와 폭포 속으로 추락한다. 이는 빛에게 패배하듯 폭포에게 제 실존을 투항하고 마는 일이 아니다. 빛의 파장으로부터 완벽하게 숨어드는 일이다. 가장 완벽한 도망이야말로 완전히 사라지는 위장술로 성취된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어두운 폭포를 보게 될 것이다. 원하는 자리에서 원하는 속도로 삭아 가게 될 것이다. 거실과 선반과 빛이 절묘하게 맞물려 그림자가 거대하게 드리울 경우에는 마치 폭포가 물건을 삼켜 버린 것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충격을 이기지 못해 절망하고 멍해져 영영 사라져 버린 것으로 착각되겠지만 - 「생활 속 폭포」 부분  시집에 수록된 동명의 연작시 「gleaming/tiny area」는 제목 그대로 빛과 그것이 파생시킨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다5)(빛이 없다면 존재도 없다). 그중 하나의 시편은 "평범한 나무 밑에 / 산 채로 매장된 빛"이 있으며 더불어 그 나무에는 우아하게 숨은 분노도 함께 거주하고 있다고 누설한다("어떤 분노는 우아한 광대뼈 아래 아주 조용하게 살아가기도 한다", 56쪽). "세상에 분노하는 온도"로 첫 행을 시작하는 이 시편은 빛과 연루된 정동이 분노이며, 그것은 이 탐미주의자의 시 쓰기 속에 매장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재봉되었던 빛 안쪽은", 71쪽). 그는 빛의 사나움 앞에서 함께 칼을 들고 결투를 벌이는 일 대신 나무 아래 묻거나 실로 기워 버리고, 이는 최선의 공격이란 무릇 최선의 방어라는 평화적인 신념을 지닌 자만이 할 수 있는 행위다. 낮 동안 너무 많은 빛에, 밤 동안 너무 많은 형광등의 소리에 시달렸던 그는 세계와 정면으로 대적하기에는 이미 지쳐 있다. 세계를 영속시키면서 무한한 소진을 생산하는 힘의 근원이 곧 빛이라는 사실을("아침까지 눈을 뚫고 전속력으로 달려도 / 피곤한 빛으로 계속되는", 「드라이브 마이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므로 그는 그것과 함부로 맞서지 않는다. 더불어, "통째로 긁히거나 뭉개지기"에 이 세계는 너무 고상하다는 그의 말은 빛이 대상을 쪼개지만 동시에 그러한 파편들의 부서짐이 자아내는 아름다움 역시 존엄하다는 믿음이기도 하다. 그래서 김연덕의 '나'는 빛에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빛을 따라 움직이는 듯하다가 불현듯 폭포 속으로 몸을 던진다. 세찬 물줄기 아래의 어둠 안에는 숨어든 '내'가 있고 그런 '나'를 일갈하며 후려치는 다른 '나'들이 있다. 빛의 피로에 잠식된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빛이 매 순간 훔쳐 가던 수치심의 적나라한 회수라고 주장하는 피학의 목소리가 있다. 내 몸을 때리는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폭포 밖으로 바로 빠져나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나를 비난하던 내가 스스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던 조금 전까지 너무나 부드럽고 따뜻하던 그것은 나의 수치심 미친 듯이 신나서 나를 때리는 - 「따뜻한 폭포」 부분  피로한 자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막아서지 않는다. 그저 내버려둔다. 피로는 '나'의 몸을 그것에 오롯이 헌납하게 한다. 밝은 곳에서 쉬이 납득하기 어렵던 수치는 어둠의 안락함 속에서 껴안을 수 있는 것으로 변모하고 (그것이 '나'를 신나게 때린다 할지라도) 시종일관 사물의 휘광을 쫓던 화자는 그리하여 독자를 빛에서 어둠으로, 지상에서 폭포수 아래로 이끌고 간다. 낮이 생산자들의 시간이라면 밤은 피로 속에 곱게 누운 자들의 몫이다. 수치를 품을 수 있는 비밀스러운 시간이야말로 피로한 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간이다. 그 어떤 긍정이나 부인의 능동적 제스처도 불필요한, 그저 시작도 끝도 바닥도 위도 없는 물줄기의 연속처럼 그 안에 몸을 맡기고 드러눕는 장소. 그러나 이 탐미주의자는 산란하는 빛의 날카로운 끝이 조각내는 아름다움들을 모르지 않고, 다만 그 광채에 현혹되어 제 몸이 찢기는 줄도 모르고 낮의 시간을 살아 내던 이들의 손을 조용히 잡아끌고 폭포의 어둠 속으로 낙하할 따름이다.  외부에서도 내부에서도 시선의 대상이 되지 않음으로써 그는 주체이기를 자진해서 포기하고 그리하여 역설적으로 존재의 해방을 만끽한다. 피로를 사실이자 하나의 비유로서 그리고 비유로서의 피로를 다시 한번 현실의 감각으로 받아들이면서, 사실과 비유 양측의 생성이 이끄는 물줄기 아래로 그저 침잠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김연덕의 폭포는 관념의 비유인 것만은 아니며 자연주의자들이 찬미하는 대자연의 그것만도 아니다. 폭포는 빛의 세계에서 낡고 지친 자들이 몸을 이끌고 눕는 피로의 세계다. 순도 높은 분노와 수치심으로 세차게 이글거리는 안락의 세계다. 그렇다면 폭포가 아닌 곳들 또한 폭포가 된다. 가령, 우리가 가장 처음 만났던 형광등이 깜빡이는 방. 빛을 매장해 두었던 한 그루 나무는 방으로 들어와 '내' 수치심을 양분 삼아 눈부신 꽃 한 송이를 피워 낸다. 오래된 나무 한 그루의 기분만큼 보호받는 밤. 침대가 좁아진다. 작고 물컹한 열매가 떨어진다. 천장이 벽이 사각형이 살아 있는 어두운 땀이 백 년 전의 나와 함께 차게 식는다. 눈부신 꽃이 어둠 속에서 휘날리며 얼굴을 감쌀 때 당신은 끌어안을수록 슬퍼지는 사랑을 반드시 사랑하게 됩니다. - 「무르고 사적인 나의 방」 부분  이 꽃은 '내'가 언젠가 호텔방에서 본 거대한 흰 백합의 이미지와 겹쳐지는데(「나의 레리안」) 그가 꽃 앞에서 보았던 "적막하고 무서운 감정" 역시 누군가의 수치이자 분노이지만 그것은 '나'의 것처럼 폭포의 어둠 아래에서 아늑하게 향유한 것이 아닌 "제 몸을 마구잡이로 터뜨리는 그런 옛날의 빛" 앞에서 패배한 대가임을 알게 된다. 화자는 흰 백합을 보면서 꽃을 장식한 이의 삶을 앗아 간 빛의 난폭함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가 이내 아연해진다("그의 삶을 대신 죽여 준 아름다움은 어디 있었을까"). 말하자면 「나의 레리안」은 호텔에 잠시 머무른 '내'가 빛 앞에서 파열한 타인의 흔적을 애도하는 시다. 그렇다면 김연덕의 화자 역시도 이동욱의 '나'와 마찬가지로 은둔을 자처하나 세계로부터 고립된 처지는 아닌 셈이며 시집에 수록된 마지막 시편인 「이구아수폭포」의 후반부가 말해 주듯, 이 시집의 '나'들은 실상 빛의 폭력에 노출된 사물과 타자들을 구해 내려는 열기로 들떠 있는 것이다("생생한 폭력과 죽음에 지친 수많은 나들이 자포자기한 나들이 / 무척 활기차고 다정하고 아름다운 면도 있던 그런 나들이 살아남은 나들마저 죽이려는 지금").  피로는 차갑지 않다. 피로는 그 어느 것보다도 뜨겁다. 에너지의 흐름이 주체를 압도하고 제패하고도 남아서 세계 전체를 유동하는 상태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피로는 죽음의 가장 큰 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피로함 속에서 방관자가 되거나 도망자가 되어 삶을 지속할 수 있다. 환멸이나 분노가 자주 방문하겠지만 그러나 종말과 죽음만큼은 이곳을 침범할 수 없다. 그래서 김연덕의 '나'는 무수한 '너'인 '나'들에게 계속 폭포 아래를, 그러나 빛이 전혀 눈치챌 수 없게끔 빛의 조각들로 길어 올린 아름다운 조각들로 길을 위장하며 가리키는 것이다. "선명한 시야가 돌아올 때"까지만 그렇게 잠시 폭포의 어둠 속에 함께 머물러 있자고, 우리의 수치와 분노가 생생하게 쏟아져 내리는 이 아늑한 피로 속에 잠시만이라도, 고요히 숨어 있자고 말이다. 1) 김진영, 「사라짐」, 『이별의 푸가』, 한겨레출판, 2019, 77쪽. 2) 아래의 말들을 잠시 빌린다면 시는 또한 피로함 그 자체다. "시는 이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시는 고독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가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가, 아니다. 시는 사람에 대해서도 증오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시는 무엇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시는 무엇 자체다. 시는 고독 자체이고 결별 자체이며 또한 사랑 자체다." 김언, 「그 여름에서 여름까지 짧은 기록 몇 개 2」, 『시는 이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난다, 2019, 32쪽. 3) "이때 뚜우 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이상, 「날개」, 1936. 4) 시집의 해설을 쓴 오연경도 이동욱의 화자를 은둔자라고 말한다. "이동욱 시의 주체는 도시의 거리 한복판에서 간격을 만들어 내고 경계선을 재배치하는 '거리의 은둔자'라 부를 만하다." 오연경, 「은둔하는 삶의 정치성(해설)」, 이동욱, 『우리의 파안』, 문학동네, 2025, 109-110쪽. 5) "사실은 비유를, 비유는 사실을 배제하면서 또 자극한다. 한편으로 서로가 서로를 반사하면서 자신을 갱신한다. 사실의 폭발은 해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유의 밑거름으로 다시 돌아오며, 비유의 극점에서 발견되는 추상화된 현실은 그 자체 현실을 보는 또 다른 눈을 제공하는 것이다." 김언, 「시는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다」, 『시는 이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307쪽.

계간 파란 전승민 피로위로야근은둔폭포이동욱김연덕 2025
이찬 천의 얼굴로 일렁이는 “정든 유곽”의 빛다발 ― 이성복 『서시』

천의 얼굴로 일렁이는 “정든 유곽”의 빛다발 - 이성복의 「서시」 읽기 1 스물 언저리를 청춘의 열꽃으로 신음했던 사람이라면, 이성복 시집 『남해 금산』이 괴로움과 깨달음이 겹쳐 울리는 “물결무늬 자국”으로 번득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단번에 알아챌 수 있으리라.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오래 고통 받는 사람은」, 『남해 금산』)가 선명하게 일러주듯, 단 한 번이라도 남해의 바닷길을 에돌아 금산의 ‘해수관세음보살상’에 이르러 두 손 모아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보리암 앞으로 펼쳐진 다도해의 풍광과 ‘해조음(海潮音)’이 우리 모두에게 건넸을 저 깊고 깊은 삼매(三昧)의 소리를. 낙산사 홍련암, 강화 보문사와 더불어 남해 보리암이 ‘한국의 관음 3대 성지’로 자리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와 맥락을. 마치 숲을 이루듯 빽빽하게 늘어선 섬들의 행렬 사이로 어지러이 펄럭이는 무량한 풍파를 듣고 다시 또 듣는다는 ‘해수관음상’이 어떤 생의 모서리와 이야기의 곡절들로 여울져 있는지를. 나아가 세상의 거센 풍파와 오욕의 파고에서 벗어나려는 중생들의 현세 기복적 신앙이 종교화되는 과정에서 빚어진 ‘천수천안관세음보살’과 더불어,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등장하는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구제하려는 ‘서원(誓願)’, 그들의 갖가지 공포와 근심을 씻어주려는 수행자의 날빛으로 번득이는 것임을 헤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안목(眼目)을 품을 수만 있다면, 시집 『남해 금산』에서 쉴새 없이 어른거리는 정화와 치유, 기원과 구도라는 두 줄기 빛살을 정면에서 마주할 수 있으리라. ‘관세음보살’과 ‘해수관음상’에 담긴 두 갈래 마음이란, 말하기와 말, 능(能)과 소(所), 구제(救濟)와 기도(祈禱), 영원과 순간, 관음수행과 관음신앙 등등으로 열거될 수 있을 ‘화해적 이원성’이라는 좀 더 큰 테두리로 수렴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들은 한결같이, 되돌릴 수 없는 갈림길에서 둘로 쪼개지거나 나눠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어떤 확고부동한 실체처럼 한곳에 붙박일 수조차 없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저 이원성의 다양한 분신들은 비록 둘이라는 모양새를 띠고 나타나지만, 이미 하나의 ‘원통(圓通)’ 세계를 동시에 이루고 있는 것이기에. 그리하여, 미칠 듯한 생의 회한을 타고 들이치는 말소리의 미세한 잔영과 그 눅진한 존재의 파열음으로 뼈마디까지 스며드는 김소월의 가공할 신운(神韻)과 더불어, 이에 필적하는 이성복의 절제된 리듬-이미지의 긴 여운(餘韻)을 가만히 느껴보라. 나아가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서부터 깃들어 있던 ‘이원성의 세계’가 서로를 가로지르면서 일구는 낯선 교향악의 카니발, 그리고 그 뒷면에서 “소리 없이” 나투며 반짝거리는 ‘숨은 조화’의 윤슬을 묵묵히 들여다보라. 특히 “구부러진 것 얼어붙은 것 갈라터진 것 나가떨어진 것들/옆에서 한 번, 한 번만 보고 싶음과 만지고 싶음과 살 부비고 싶음”(「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 한참 동안 머물러 볼 필요가 있겠다. 이 구절은 『남해 금산』 첫머리에 수록된 「서시」와 더불어, 이후 펼쳐질 시집들의 운명선을 예고하고 있었던 핵심 단자(單子)이기 때문이다. 이성복의 첫 시집 맨 뒷자리를 이루는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는 “때 늦은 사랑”의 라멘트(lament), 그 절정의 곡조를 이룬다. 이 곡조의 먹먹한 운명선에서 말없이 일렁이는 여운의 리듬은 ‘서글픈 그물’처럼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다시 울린다. 이 시에 새겨진 ‘얼굴 없는 희망’은 애틋한 메아리로 휘돌아 나오면서 그 오랜 시간의 여울목을 현재진행형의 파문들로 되살려오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시인의 예술적 주도 동기와 사유의 정수가 겉면으로 드러난 매우 드문 사례를 이룬다. 또한 「서시」와 「남해 금산」을 필두로 시집 『남해 금산』의 무수한 협곡들을 넘실거리는 ‘화해적 이원성’의 역설적 미감과 ‘숨은 조화’를 오묘한 시간의 리듬으로 현시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라는 표제어에 얼룩진 고의적 시간 착오의 몸부림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라. 이 시는 “사랑”에 잠긴 무수한 대극(對極)의 상황을 단번에 가로질러,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원통’ 세계를 그 뒷면에 감춰두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관세음보살’에 주름진 두 갈래로 엇갈린 상반된 마음의 자취들을 되짚어보면, 양자는 결국 상대편의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뫼비우스의 안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상대방의 안쪽에 이미 들어박힌 바깥으로 전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생의 곳곳에 매복된 온갖 환란들을 회피하려는 우리 모두의 간절한 행복 충동으로 틔워 올려진 기복 신앙이나, 다른 생의 결핍과 고통을 함께 앓고 나누고 치유하려는 수행의 열망이란 결국 하나의 태반에서 자라난 쌍생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남해 금산』 뿐 아니라 이성복의 모든 시집을 관통하는 상반된 양면성을 강렬하게 응집하고 있는 “정든 유곽” 이미지를 다시 곰곰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그것은 우리 생의 더할 나위 없는 비루함과 가혹한 운명의 모서리를 돌아 나온 자리에서만 빚어질 수 있을 화룡점정(畵龍點睛)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시인의 고단한 예술적 사유 매듭과 ‘용맹정진(勇猛精進)’의 형상화 방법이 태어나는 자리를 가장 명료하게 집약한다. 그리하여, 저토록 과감하고 진득하면서도 한없이 허허로운 ‘이성복 사유의 축도(縮圖)’로 들어박힌다. 달리 말해, “정든 유곽”의 한복판엔 보들레르가 ‘영혼의 성스러운 매음(sainte prostitution de l'âme)’이라고 불렀으며, 불가에서 ‘상즉상입(相卽相入)’이라고 일컬어왔던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사유와 ‘회통(會通)’의 세계관이 보이지 않는 에테르처럼 “소리 없이” 스며있다는 것이다. 마치 희부연 안갯속 신기루처럼 ‘화해적 이원성’의 신비한 뒷자락을 얼비치면서 이내 사라져버린다고 말하는 것이 좀 더 적확하겠다. 2 스무 살의 문학도에게 「서시」는 그야말로 특출한 ‘연시(戀詩)’이자, 미래의 불안으로 내던져진 청춘의 송가(頌歌)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지금-여기, 오십을 훌쩍 넘긴 중늙은이들에게도 그 젊음이 간직했던 아스라한 “사랑”의 열병과 선득한 “치욕”의 모멸감을 동시에 떠오르게 만드는 또 다른 ‘공-실존’의 무대일 것이 틀림없다. 나아가 그 처참한 젊음의 빛살 아래 다시 열리는 회고조(懷古調)의 ‘사랑 노래’이자 감정의 고고학적 무대일 수밖에 없으리라. 이러한 견지에서 이성복의 두 번째 시집 『남해 금산』의 수미쌍관 별자리를 이루는 「서시」와 「남해 금산」의 ‘해조음’을 다시 느릿느릿 들어보라. 이 수려한 두 편의 시는 “그대 벗은 어깨 위를 타고 흘러 떨어지는 빛다발의 歡呼”(「라라를 위하여」,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섬세한 여백의 필치로 그린다. 나아가 “빛나는 못, 빛나는 신음소리”(「나는 식당 주인이」, 『남해 금산』)로 압축되는 우리 생의 ‘본원적 역설’과 그것으로 빼곡하게 에둘러진 ‘예술작품의 근원’을 새로운 리듬-이미지로 현시한다. 따라서 「서시」와 「남해 금산」은 “그토록 피해 다녔던 치욕이 뻑뻑한, 뻑뻑한 사랑이었”(「오래 고통 받는 사람은」, 『남해 금산』)노라고 읊조릴 수밖에 없을, 최고 순도의 시적 긴장을 내뿜는다. “소리 없이, 간단 없이/그대의 시야를 유린하는/아지랭이 ! 아지랭이 ! 아지랭이 !”(「치욕에 대하여」, 『남해 금산』)가 넌지시 일러주듯, 양자는 시집 『남해 금산』이 품은 ‘신성한 잉여’를 그 마디마디에 감춰두었노라고 말하는 것이 좋겠다. 이들의 사이 공간에선 본원적이라고 불러야만 마땅할, 역설적 존재 상황과 극단적 아이러니로 얼룩진 생이 그침 없는 승화(昇華) 운동이 말없이 솟아나기 때문이다. 좀 더 섬세하게 말하면, 승화의 “아지랭이”가 보이지 않는 여운을 거느린 채 쉴새 없이 들이치기 때문이리라. 이성복의 시와 산문이 서로를 횡단하면서 빚어놓는 리듬-이미지 곳곳에서, ‘화해적 이원성’의 카니발 또는 ‘극단적 아이러니’의 ‘대대(對待)’ 운동으로 풀이될 수 있을, ‘본원적 역설’의 무대가 열릴 수밖에 없는 이유와 맥락 역시,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해 온 바와 같다. 그리하여, 오십에 다시 읽는 「남해 금산」이란 어떤 빛깔과 모양새를 띠고 우리 앞으로 나타날 것인가? 그저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연시’의 한 자락으로 읽어 온 「서시」는 어떤 영혼의 갈망과 존재론적 신비를 ‘숨비소리’처럼 쓸어안고 있었던 것일까?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 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 「서시」 전문, 『남해 금산』 「서시」 1연 마지막 행에 배치된 “나는 정처 없습니다.”라는 이미지 매듭을 다시 면밀하게 뜯어볼 필요가 있겠다.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라는 첫 행의 무늬와 대위법적 구도를 형성한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간이식당”이 풍기는 비정상적 결핍과 예외적 허술함이란 뉘앙스를 읽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늦고 헐한 저녁”이라는 심상과 잇닿으면서 누추하고 비루한 생활의 감각을 전경화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비가시적 느낌의 잔영은 작품 전체의 해석 방향을 좌우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뒤에서 이어지는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가 발산하는 중의적 맥락과 연결해보면 긴요한 맥락이 감춰져 있음을 “문득”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에 서린 “어두운” 불안의 정서와 ‘두려운 낯섦’의 분위기는 다소 모호하면서도 양면적인 느낌의 여운을 끝자락까지 계속 드리우기 때문이리라.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라는 1연 3행의 이미지는 우선 “늦고 헐한” 삶의 테두리에 도사리고 있을 ‘예기치 못한 사건’과 ‘보이지 않는 위험’을 암시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뒷자리의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와 결부된 좀 더 내밀한 맥락에서 다시 읽어야만 할 것이다. 이 구절은 어떤 신비와 황홀경에 이르려는 순결한 마음결이 감당할 수밖에 없을, 보이지 않는 난관과 돌발 사태의 위험성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읽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 구절의 뒷면에선 미래의 불확정 상태로 열린 기도와 불안의 “목소리”가 겹겹의 메아리로 울린다. 이 숨겨진 맥락 역시 “사랑하는 사람”과 “당신”에 깃든 상징의 복합적인 의미 운동과 다채로운 스펙트럼에서 기원한다. 그리하여, 「서시」의 “사랑하는 사람”과 “당신”은 만해 시에서 지극한 부드러움으로 형상화된 “누구”와 “당신”에 비견되는 ‘감응의 빛살’을 선사한다. 따라서 이들은 광대한 보편주의의 광휘, 곧 ‘강산무진(江山無盡)’, 그 모든 생의 우여곡절 속에서 하염없이 빛나게 될 우리 안에 들어앉은 부처이자, 우리 모두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인지도 모른다. 간절한 “내 목소리”로 부르는 “당신”이란 결국, 우리 안의 ‘숨은 조화’이자 우리 모두의 “내 목소리” 안에 이미 깃들어 온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기 때문이다. 이 아름다운 ‘연시(戀詩)’가 말소리의 부드러운 훈기와 굳건한 미래 예감과 충실한 실천의 수행력을 드넓게 감쌀 수 있는 잠재력 역시 ‘본래면목’의 자리에서 온다. 더구나 “남해 금산” 보리암에서 ‘영원한 지금’으로 드리워질 ‘해조음’과 ‘이근원통(耳根圓通)’ 수행법을 떠올려보면, 「서시」가 이성복의 두 번째 시집 『남해 금산』의 맨 앞머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는 맥락을 즉각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맥락에는 “나는 정처 없습니다”라는 불확정성의 무늬가 만해의 “알 수 없어요”와 겹쳐 떨리면서 예술적 메아리로 퍼져나가는 감응 운동의 궤적과 “물결무늬 자국”이 숨겨져 있다. 그러하기에 “나는 정처 없습니다”라는 작은 무늬에 주름진 『남해 금산』 전체의 ‘사유 이미지’와 더불어 그 분광(分光)의 윤슬을 포착하는 것이 핵심 관건을 이룬다. 2연 첫머리에서 나타나는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나는 정처 없습니다”라는 반복의 리듬과 굴절된 이미지의 변형 역시,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에 이미 깃든 우리 모두의 ‘본래면목’을 되찾으려는 절절한 마음결과 부단한 기다림의 운명을 현시한다. 그것은 ‘영원한 지금’으로 지속될 현재진행형의 시간 속에서만 자기 생의 온전한 리듬을 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그대에게 가는 먼 길”을 타박타박 내딛어가는 시인-수행자의 ‘영원한 지금’이야말로,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에서 “번쩍이며 흘러내리는” 빛살이요 “잎잎이 춤추”는 우리 모두의 생명력이라는 것이다. 이 탁월한 반복의 신운(神韻)과 굴절된 이미지의 숲길은 「서시」의 “사방”으로 “흘러내린”다. 마치 경건한 씻김굿 한 가락처럼, 그것은 시집 『남해 금산』 곳곳에서 현현하는 정화와 치유의 모신(母神)으로 “소리 없이” 깃들기 때문이다. 이 시집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어머니”가 시인의 육친을 나타내는 동시에 “聖母聖月”의 광활하면서도 경건한 수용력을 표현하는 상징적 이미지의 한 매듭으로 기능하게 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노자가 선명하게 아로새긴 ‘현빈(玄牝)’의 ‘사유 이미지’와 『남해 금산』의 “어머니”는 곳곳에서 닮은꼴의 지력선을 구축하기 때문이다. 이 시집에서 정화와 치유와 구원의 미감이 돋을새김의 필치와 ‘원형 상징’에 육박하는 명징한 이미지들로 형상화되는 이유와 배경 역시 이와 같다. 따라서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어두워 가며 몸 뒤트는 풀밭,”이란 아름다운 무늬들은 “당신”이라는 ‘본래면목’에 이르는 “길”, 그 노정기(路程記)에 기록될 수밖에 없을 ‘성과 속’ ‘광명과 암흑’ ‘영광과 비참’ ‘거룩함과 비루함’ 등을 폭넓게 암시한다. 나아가 저 무수한 이원성의 분광(分光)들을 끊임없이 되비치는 ‘해조음’과 더불어, 그 한복판에서 겹쳐 울리는 “내 목소리”의 환희와 절망을 동시에 표현한다.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라는 아슴아슴한 무늬는 불가에서 오래도록 이어져 내려온 ‘천지여아동근(天地與我同根) 만물여아일체(萬物與我一體)’의 사유를 매혹적인 문채(文彩)로 빛나게 하는 깨달음의 징표일 것이다. 반면 “어두워 가며 몸 뒤트는 풀밭,”이란 이 깨달음이 마주할 수밖에 없을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의 난맥상을 함축한다. 곧 ‘이근원통’을 비롯한 그 모든 수행 과정이 수반할 수밖에 없을 무수한 고뇌와 내적 갈등과 ‘주화입마(走火入魔)’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이미지로 읽힌다. 어쩌면 이 상반된 무늬들의 돌발적 엇갈림과 지극한 절제의 향연에는 이성복 특유의 “정든 유곽”의 ‘사유 이미지’가 숨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이 이미지는 우리 생활세계의 훼손된 한 조각의 절단면, 그 처절한 “치욕”의 서사를 격렬하게 집약한다. 더불어 세상이 추구하는 상투적인 사랑의 척도를 넘어 훨씬 차원 높은 화합에 이르려는, 우리 모두의 꿈과 소망을 보이지 않는 뒷면에 담는다. 그것은 보들레르의 ‘영혼의 성스러운 매음’이 표상하는 것처럼, 타자와의 “완전한 화합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수행 과정의 극진한 충실성을 함유하기 때문이다. 가장 더러운 오물투성이의 현실에서 움트면서도 지극히 아름다운 신비의 빛을 뿜는 진주처럼, ‘진흙 속의 연꽃’에 비견될 수 있을 ‘극단적 아이러니’의 상호 침투와 그침 없는 횡단 운동을 강렬하게 응집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성복의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에는 보들레르가 ‘파리 풍경’의 우울한 단면들로 소묘했던 ‘잠에 떨어진 매춘부들,/추위에 떠는 가난한 이들,/고통받는 임신부들,/아무런 위안 없이 죽어가는 병자들’이 함께 숨 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들을 “송두리째 자기 자신으로 받아들여”, “이성적이거나 윤리적인 한계를 초월하는 화합”을 이루어가는, 그런 ‘형언할 수 없는 잔치(ineffable orgie)’가 그 뒷자락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잔치’를 불교식으로 덧붙이자면, ‘본래면목’에 다다른 ‘원통(圓通)’ 세계가 빛을 뿜는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본래면목’의 자리에서만, 부처가 선언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으로 우리 존재가 매 순간 다시 거듭나는, “당신”이라는 “집으로 가는 길”이 열릴 수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이 자리는 세상의 모든 일과 사람이 “내”가 될 수 있는 ‘본래면목’의 자리이며, 그 깨달음이 “사방으로 흘러내리는” 자리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 모두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그 ‘영원한 지금’의 시간이 매번 다시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자리일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내 목소리”에 이미 깃든 것이지만, “나”라는 ‘아상(我想)’의 테두리를 벗겨낸 ‘본래면목’으로서의 ‘아(我)’, ‘제법무아(諸法無我)’의 광휘가 “흘러내리”는 자리이자 ‘시방세계(十方世界)’의 삼라만상이 빠짐없이 존귀해지는 자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서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라는 이미지 역시, ‘대방광불(大方廣佛)’의 무량한 빛살, 그 “사랑”의 수행으로 겹겹이 아롱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서시」 마지막 행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키 큰 미루나무”와 “잎잎이”라는 탁 트인 초록의 무늬들을 “문득” 다시 떠올려볼 필요가 있겠다. 이들 역시 ‘큼과 작음’ ‘부처와 중생’ ‘신성과 세속’ ‘영원과 순간’ 같은 그 모든 이원성의 매듭을 가로지르는 ‘본래면목’의 보편주의를 표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본래면목’의 자리에서만 가능해지는 ‘무아(無我)’, 그리고 ‘시방세계(十方世界)’로 드넓게 열리는 ‘관음’의 위대한 수용력을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라. 나아가 “남해 금산 바닷가에” ‘영원한 지금’으로 철썩거릴 그 ‘해조음’을 오랫동안 귀 기울여 다시 들어보라. 그것만이 우리 모두의 “벗은 어깨 위로 흘러 떨어지는 빛다발의 歡呼”를 가능케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이근원통’ 수행 과정에서 매 순간 다시 열리게 될 보편주의 광휘를 도래케 할 것이 틀림없기에. 3 우리가 「서시」를 한결같이 ‘연시’의 테두리에서 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나는 정처 없습니다.”라는 절정의 압도적인 시구에서 온다. 그것이 발산하는 강인하면서도 절절한 마음결의 지속성에서 비롯한다. 이 시구는 저 마음결이 내딛어갈 수밖에 없었을 순결하면서도 굳건한 ‘기다림의 자세’, 그리고 그 운명선의 궤적을 ‘영원한 지금’이라는 현재진행형의 사태로 부단히 바꿔놓는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에서 기원하기 때문이다. 이 기다림의 운명선 또한, ‘영원한 지금’이라는 부단한 생명력의 트임으로 되살아나는 ‘말과 시간의 깊이’에서 온다. 나아가 매번의 순간마다 ‘회광반조(廻光返照)’를 거듭할 수 있는 순결한 마음과 지속성의 예감을 쓸어안는다. 사람의 말이 순결하면서도 드넓은 감응력의 파장을 뿜을 수 있는 것은 그것에 담긴 소망과 기도가 한없는 시간의 너비로 확장될뿐더러, 그 실패와 좌절의 예감에도 불구하고 온몸을 다한 기다림을 오래도록 지속하는 장면에서일 것이다. 따라서 “나는 정처 없습니다”라는 불확정 상태의 고뇌와 불안의 무늬는 그 뒤척임의 시간을 정면으로 수용하려는 순도 높은 “물결무늬 자국”을 감싼다. 나아가 우리 모두의 ‘본래면목’을 깨우치도록 강제하는 내적 계기의 촉발점과 자기 수행의 탄력성을 암시한다. 그리하여, 이 “무늬”는 우리 생의 어찌할 수 없는 역설적 존재 상황과 더불어 ‘본원적 아이러니’의 숙명으로 이끌어간다. 나아가 우리 모두를 부단한 자기 수행의 공간으로 내던지는 “집으로 가는 길”, 그 ‘혼자 가는 먼 집’을 쓸어안는다. ‘범속한 트임(profane Erleuchtung)’을 여는 한 비평가의 문장, ‘화엄을 찾는 나그네는 어떠한 상처에도 존재의 핵심을 개방하려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가 상기시키는 ‘영원한 지금’의 수행이 그러하듯. 어쩌면 시간의 풍화작용을 거스르는 오랜 ‘기다림의 자세’란 나날의 밥벌이와 물신의 쾌락에 도취한 생활인의 감각을 넘어선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랑 예찬’을 노래한 한 철학자가 말하듯,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존재 전체’를 뒤흔드는 ‘진리-사건’의 발생 터전이자 수행 과정일 것이 자명하다. 적어도 ‘공간과 세계와 시간이 사랑에 드리우는 장애물들을 부단하게, 또는 단호하게 극복해가는 그런 사랑’의 일관된 지속성의 견지에서 본다면, “나는 정처 없습니다.”라는 구절에 “소리 없이” 내려앉는 순결하면서도 굳건한 마음의 흔적이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순결한 마음의 자리에서 「서시」는 ‘연시’의 테두리를 뛰어넘는 ‘신성한 잉여’의 파장을 그 뒷자락에 걸쳐두고 있었던 듯 보인다. 달리 말해, 부단한 자기 성찰과 구도 수행의 터전으로 나아가는 탐색의 ‘노정기(路程記)’, 그 이면적 주제로의 ‘변신 모티프’를 보이지 않는 배경에 드리우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수려한 예술작품은 여전히 매력적인 ‘사랑 노래’일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읽힌다 해도 큰 문제는 없다. 그것은 소월과 만해가 함께 이룬 한국시의 가장 유력한 ‘연시’ 풍의 서정 미학, 부드러운 문채(文彩)와 ‘숨은 조화’의 절제된 리듬으로 아름답게 여울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의 여성적 어조와 역설적 미감의 분위기를 세련된 말소리의 어감과 정갈한 리듬, 그리고 균제(均齊)의 이미지로 새롭게 채색하면서, 동아시아 문화에서 ‘오래된 미래’로 이어져 온 ‘백비(白賁)’의 미학적 전통을 다시 해체-재구성하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서시」는 그 ‘현묘한 여성성(玄牝之門)’의 경건한 수용력을 “소리 없이” 일렁이게 함으로써, 우리 생의 도처(到處)에 감춰진 역설적 존재 상황과 극단적 아이러니의 심연을 수행의 차원으로 말없이 도약시킨다. 이 맥락은 비단 「서시」와 「남해 금산」뿐 아니라, 그 사이를 구성하는 무수한 시편들에서도 일관되게 발견된다. 곧 이성복의 시집 『남해 금산』에는 소월의 처연한 어조와 역설적 리듬의 자장(磁場)이 도드라진 형세와 윤곽선으로 펼쳐져 있지만, 만해가 성취한 구도(求道)의 상징적 리듬과 이미지의 후광이 ‘연시’ 풍의 어조와 분위기 아래 설핏한 기색으로 감춰져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집은 ‘백비(白賁)’의 ‘숨은 조화’를 우아(優雅)의 미감에 실린 잔잔한 윤슬처럼 빛나게 한다. 그리고 그 뒷자락엔 만해가 이룬 ‘연시’의 독보적인 성취, 경건하고 부드러운 구도 수행의 빛이 “소리 없이” 어른거린다. 그렇다. 만해가 자신의 구도 수행과 실천적 탐색의 과정을 ‘연시’ 풍의 부드러운 어조와 서정적 스타일로 노래했다면, 이성복의 『남해 금산』은 소월과 만해를 동시에 가로질러, “정든 유곽”으로 표상되는 생의 숙명적 폭력과 찢긴 실존의 “신음소리”, 그 통절한 절규와 시퍼렇게 날 선 ‘공-실존’의 아이러니를 정화하고 치유하고 구원하려는 기도의 이미지들을 아로새겼다. 달리 말해, “어머니” “성모성월” 등과 같은 ‘원형 상징’의 구체적 무늬들을 폭넓게 활용하여, ‘관음’으로 표상되는 위대한 수용력을 부드러운 어조와 균제미의 리듬-이미지로 형상화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집 『남해 금산』은 ‘한국의 관음 3대 성지’인 남해 보리암과 그 ‘해조음’이 생성하는 ‘이근원통(耳根圓通)’의 광휘를 뒷면에 “소리 없이” 드리움으로써, “정든 유곽”의 한 축을 이루는 폭력과 절망, 고통과 상처를 보듬고 어루만지는 강인한 수용력의 세계를 현시했노라고 말할 수 있겠다. 달리 말해, 이 시집은, ‘관음 성지’의 광휘로 그침 없이 나아가는 수행의 노정기(路程記)를 ‘오래된 미래’의 순결한 ‘사랑 노래’에 실어 우리에게 다시 들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맥락은 수행의 빛과 어둠을 새로운 미감으로 조율할 수 있는 말소리의 굴곡과 반복의 여운, 그리고 그 무늬들의 형세와 윤곽선, 행간의 깊이와 예술적 짜임새를 치열하게 탐구하고 모색했던 오랜 시간의 깊이와 충실한 수행의 자리에서 비롯하는 것이리라. 『남해 금산』의 마디마디에서 빛을 뿜는 강인한 수용력의 미감과 원초적 생명력의 리듬 역시, 시인의 ‘1차 프랑스 유학’ 직후 시점인 1985년부터 시작된 동아시아 문화에 관한 집중 탐구에서 기원한다. 이 맥락은 “어머니”라는 ‘현묘한 모성성(玄牝之門)’의 세계를 소월과 만해가 공존하는 절제된 어조와 여백의 리듬에 얹어, 그 무수한 심상들을 “잎잎이 춤추”게 하는 자리에서 비롯한다. 나아가 시인이 다시 새긴 한국시의 새로운 별자리가 『남해 금산』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 자리에선 소월과 만해가 아닌, 이 둘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절정의 ‘시운(詩韻)’으로 틔어 오르는 청신한 리듬-이미지가 흘러나올뿐더러, 동아시아 전통의 ‘백비(白賁)’ 미학이 새로운 의장(意匠)을 에두른 채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노자의 ‘현빈지문’과 불가의 ‘관세음보살’을 아우르면서 양자를 정화와 치유와 구원이라는 ‘현묘한 모성성’의 이미지로 동시에 여울지게 하는 자리에서, 『남해 금산』이 탄생했노라고 선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시집을 ‘법고창신(法古創新)’의 테두리에서 다시 면밀하게 뜯어 읽어야만 하는 이유와 맥락도 이 자리에서 온다. 이 자리에선 ‘현묘한 여성성’을 짜고 닦고 씻는 기막힌 어조와 극진한 절제의 리듬, 그리고 여백의 신비스러운 미감이 동시에 울려 나오기 때문이다. 4 표제 시편으로 돋아난 「남해 금산」 역시,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해 온 테두리에서 읽어야만 적확한 독법을 마련할 수 있을 듯하다. 어쩌면 「서시」와 「남해 금산」이 시집 『남해 금산』의 시작과 끝을 이루면서 서로 잇닿을 수밖에 없는 은폐된 맥락 역시, 이 테두리에 감춰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아가 이 비가시적 차원에 대한 ‘증상적 독해’란 그것을 흐릿한 암시의 문법으로 묘사하는 자리에서 좀 더 오롯한 진실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자리에서 이 작품의 가려진 신비가 강렬한 섬광처럼 도래하는 놀라운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 「남해 금산」 전문, 『남해 금산』 이미 오래전 우리는 이 시에 관한 압도적인 글 한 편을 기억에 새겼다. 그리고 “한 여자”가 “그 여자”로 변신하는 그 모진 생의 곡절과 절절한 이야기의 매듭 속에서,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 숲길에서 “문득” 귓전으로 스며들던 ‘삼매(三昧)’ 소리를 잠시 엿들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우리 마음결 한복판에 주름져 있었을 “해와 달”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은 설화적 신비와 황홀경에 휩싸였으리라. 이 신비의 빛은 나날의 삶을 이루는 범속한 시간의 테두리에서 잠시 날아올라, 우리 안에 이미 깃들어 온 ‘영원한 지금’의 시간으로 고양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지금-여기’로 주어지는 당면한 순간을 벗어나 저 아득한 설화의 시간으로 되살아나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삼매(三昧)의 순간적 광휘가 ‘영원한 지금’의 시간으로 매 순간 되살아나는 것에 비견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남해 금산」의 “한 여자”가 품은 설화는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잠기”는 “나 혼자”의 당면한 현재 상황으로 “돌 속에” 봉인된다. 그러나 이 설화는 봉인됨으로써, 오히려 ‘영원한 지금’으로 부단히 이어져갈 미래의 육체성을 얻는다. 이는 물론 역설이다. 그것도 본원적 차원의 역설일 수밖에 없으리라. 이 역설이 빚는 말과 시간의 운명이란 “삶이란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시인의 산문 한 조각에서 찾아질 수 있다. 그리고 그 “집”은 그 어디도 아닌 “돌 속에 묻혀 있었네”라는 시의 무늬에서 포착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이성복의 시와 산문을 일관되게 가로지르는 ‘본래면목(本來面目)’, 또는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자리에서만 발견될 수 있으리라. ‘영원한 천국’이란 ‘잃어버린 천국’일 수밖에 없으며, ‘태초의 낙원’이란 ‘실낙원’의 리듬을 타고 우리 생의 마디마디로 매 순간 다시 들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돌 속에 묻힌” “한 여자”와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간” 바로 “그 여자”는 둘이면서 하나이고, 둘도 아니며 하나도 아닌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존재일 것이다. 곧 ‘불일불이’의 ‘원통(圓通)’ 세계로 빛나는 ‘본래면목’으로서의 “나”일 것이 자명하다. 적어도 ‘영원한 지금’이라는 아나크로니즘(anachronism)의 황홀경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그 여자”는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남해 금산 보리암 곁에 우두커니 선 “돌”이자, 그 “돌 속에 들어간” “나”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리라. 마찬가지로 “그 여자”가 전한 “사랑” 노래는 “나도 돌 속에 들어가”도록 “끌어주었”던 “돌 속에 묻혀 있”었던 “한 여자”에게서 온 것이지만, “그 여자”의 “빛나는 신음소리”를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로 매 순간 바꿔놓는, 바로 “그” 자리에서만 설화적 시간의 영속성을 얻는다. 이 영속성은 우리 모두의 ‘본래면목’이 매 순간 다시 발견되는 자리,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쉼 없는 ‘노정기(路程記)’ 속에서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영원한 지금’이라는 모순 형용의 시간으로만 표현될 수 있을 ‘불가능’의 자리에서만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불가능’의 자리에서 보면,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간” “그 여자”는 그리 슬프거나 비극적인 존재일 리 없다. 오히려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으로 남겨질 수밖에 없는, 신비롭고 성스러운 존재일 것이다. 여기서 나타난 “떠나감”의 무늬는 ‘영원한 지금’이라는 현재진행형의 시제 속에서 “그 여자 사랑”을 끊임없이 다시 수행하게 만드는 근본 동력으로 자리하기 때문이다. 「남해 금산」의 “그 여자”를 시인의 산문 「집으로 가는 길」로 풀어보면, “여지껏 경험해보지 못한 경건한 느낌”을 주는 “당신”일 수밖에 없다. “한 여자”가 “그 여자”로 변신하는 순간, 그 뒷면으로 “소리 없이” 드리워지는 “당신”이란 “내가 찾아 헤매던 숨은 그림”이자, 우리 모두의 ‘본래면목’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당신”이란 존재는, 우리 안에서 같이 살아온 우리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일 수밖에 없기에. “나의 삶은 ‘당신’이라는 ‘집으로 가는 길’이다.”라는 산문 한 조각이 「남해 금산」의 “한 여자”와 “그 여자” 사이에서 그침 없이 넘실거리는 “사랑”의 변주곡으로 읽히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이 변주곡에 깃들일 수밖에 없을 온갖 “사랑” 이야기 또한, ‘오래된 미래’로 표상되는 무한한 시간의 동심원을 그리면서 끊임없이 번져나갈 수밖에 없으리라. 지금-여기,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언젠가 “문득” 깨닫게 될 것이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가 이별의 슬픔과 단독성의 비애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오히려 「서시」의 “어두워가며 몸 뒤트는 풀밭”과 겹쳐 떨리면서,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울려 퍼지는 원격 감응의 “빛다발”로 넘쳐흐르고 있음을. 그리하여, ‘영원한 지금’의 시간으로 매 순간 되살아나는 「남해 금산」의 “그 여자 사랑에”와 “돌 속에 들어간”, 그리고 “나”를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라. 이 무늬들이 ‘시방세계(十方世界)’의 오롯한 순간들로 매번 다시 열리는 영원한 “사랑”의 “길”을 표상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시인에게 “길”이란 결국 “집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집으로 가는 길”이란 “길”이 감내할 수밖에 없을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의 단독성, 시인 허수경에게 기대어 말하자면, ‘혼자 가는 먼 집’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내가 집을 발견하는 순간”, “삶의 길은 끊어진다.”라고 말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삶은 집이 아니라, ‘집으로 가는 길’이다.”라는 문장은 곧 “그대에게 가는 먼 길”, 그 ‘백척간두 진일보’의 단독성을 현시하려는 말일 수밖에 없기에. 만일 “나는 아직도 정면으로 ‘당신’의 얼굴을 마주 본 적이 없다. 언제나 ‘당신’은 어렴풋한 모습으로 내 앞에 있다.”라는 산문 한 조각에서 「서시」의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가 “소리 없이” 울리게 된다면, 우리는 이성복 시의 “물결무늬 자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작고 “헐한” 사립문 하나를 열게 된 셈이리라.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라는 단독성의 무늬는 우리 모두를 폐쇄적 실존의 가두리에 고립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에게서 “사랑”이 다시 시작되는 바로 그 순간, 그 깨달음의 단독성을 현시하려는 역설적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 혼자”의 반복은 우리 생의 존재론적 고독과 숙명적 비애감을 표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만인으로 뻗어나가는 “사랑”의 무한정한 힘조차 “나” 안에 있는 ‘본래면목’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 그 ‘단독성’의 자리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음을 현시한다. 이처럼 시인 이성복과 그의 텍스트에 대한 ‘증상적 독해’는 그 사이 공간들에 가로놓인 무수한 여백을 가로질러, 표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던 ‘본질적 절단면’을 새롭게 포착하는 ‘창조적 해석’의 장을 새롭게 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에 따르면,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는 “더는 싸울 수 없는 순간에/별은 내린다 더는 내릴 수 없는/순간에 별들은 내 몸에 달라붙는다”(「그대 위의 푸른 나뭇가지들」, 『남해 금산』) 같은 무늬들이 내뿜는 “빛다발의 歡呼”, 그렇게 아름다운 “별”들이 총총히 떠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것은 “奇蹟처럼 떠오를 푸른 잎사귀”(「밤은 넓고 드높아」, 『남해 금산』)이자, “모든 게 神祕”(「口話」,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일 수밖에 없을 “뒹구는 돌”의 탄력과 그 “神祕”가 머물다 갈 “길”을 보이지 않는 행간에 계속 숨겨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로부터 신비로 나아가는 것은 또한 신비로부터 현실로 되돌아오는 것을 암암리에 예비한다.”라는 시인의 보들레르 연구 한 대목은, “현실”과 “신비” 사이에서 부단히 일어나는 ‘화해적 이원성’의 역동적 순환 운동을 집약한다. 나아가 이 순환 운동을 예술적 모티프의 중핵으로 삼는 이성복 시의 ‘본질적 절단면’을 단 한 문장으로 응축한다. 시인의 예술적 사유를 전적으로 지탱하는 것은, 양극단의 에너지를 투쟁과 정복이 아닌 화해와 연대의 차원으로 수렴하려는 동아시아 전통의 ‘대대(對待)’ 원리이기 때문이다. 결국 ‘대대’라는 말은 양극단의 힘이나 사태들이 상호 대립적인 상황과 조건에 놓여 있으면서도, 상호 보완적인 작용과 운동으로 수렴되어가는 ‘천지만물(天地萬物)’의 역동적 삼투 운동과 그 현상 전체를 빠짐없이 함축할 수 있는 용어이기 때문이리라. 그리하여,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의 “모든 게 神祕였다 사랑의 힘 죽음의 힘 죽은 꽃의 힘/모든 게 神祕였다” 같은 무늬들을 보라. 이 무늬들이 적확하게 예시하듯, “神祕”란 우리 모두를 “죽지 않을 만큼 짓이기”며 다가오는 그 “龜甲같은 치욕”에서조차 “아지랭이”처럼 움터 오르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사랑의 힘”을 낳는 “죽은 꽃의 힘”이라는 ‘본원적 역설’의 존재로서 우리 마음결로 끊임없이 들이쳐오는 것이기에. 모든 게 神秘였다 길에서 오줌 누는 여자아이와 곱추 남자와 電子時計 모든 게 神秘였다 채찍 맞은 말이 길게 울었다 모든게 神秘였다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고, 그러나 죽지 않을 만큼 짓이겼다 모든 게 神秘였다 사랑의 힘 죽음의 힘 죽은 꽃의 힘 모든 게 神秘였다 삼백 육십 오일 駱駝는 타박거렸다 얼마나 멀리 가야 하나 얼마나 가까이 있어야 하는가 - 「口話」 부분,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결국 “神祕”란 “길에서 오줌 누는 여자아이와/곱추 남자와 電子時計”에서 나타나듯, 그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조차 분별심을 두지 않고 그 경계와 차별을 거두는 자리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게 神秘였다”라는 말이 참으로 가능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멀리 가야 하나 얼마나 가까이 있어야 하는가”라는 거리 감각의 분별심조차 “없는 것”으로 자리할 수 있어야만 한다. 시인은 “없는 것”의 자리를 우리가 감당하거나 “슬퍼할 수조차” “없지만” 매일같이 감당하기 위해 또한 수행할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을 “불가능(不可能)”이라는 역설 어법으로 일컬었던 것인지 모른다. ‘영원한 지금’으로 주어지는 매 순간의 수행 과정인 ‘본래면목’이란 ‘알 수 없어요’로 표상되는 “불가능(不可能)”을 수반할 수밖에 없기에. 「슬퍼할 수 없는 것」의 마지막 무늬, “슬퍼할 수 없는 것,/슬퍼할 수조차 없는 것”에서 “소리 없이” 일렁이는 ‘불가능’의 이미지가 그러하듯.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눈이 쌓여 있다는 것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가지 못하리라는 것 굳이 못 갈 것도 없지만 끝내 못 가리라는 것 나 없이 눈은 녹고 나 없이 봄은 오리라는 것 슬퍼할 수 없는 것, 슬퍼할 수조차 없는 것 - 「슬퍼할 수 없는 것」 전문, 『아, 입이 없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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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견고한 삶의 조건 ― 박참새, 배시은, 신이인의 시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위의 인용문은 육조 혜능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변형한 것으로서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도입부 내레이션이다. 질문을 간파하고 있는 스승의 답변은 제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 테고, 그것은 물론 관객의 심금을 휘저었을 것이다. 파편화된 불안을 쓸어 담는 이 명쾌하고 즉각적인 해답의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찰나에 불과하다. 제자의 마음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 동요하는 그 마음의 원인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궁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궁리하고 싶지 있다. 바쁜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보여지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무용한 그 '느낌'이라는 것을 숙려할 만큼 한가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하려는 노력 끝에 불안은 우리 현대인의 매우 증상적인 형태로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의 고질병이다. 불안, 외로움, 확신 없음이라는 결핍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기로에 선다. 고독을 선택하거나, 의존을 선택하거나. 전자는 불안에 대한 직면이고, 후자는 불안에 대한 외면이다. 그러나 바쁜 우리는 언제나 후자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 없다. 세상에 고독한 것은 이제 고독, 그 하나다. 사용되지 않은 고독은 밀린 과제처럼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을 외면한 후폭풍은 그에 비례하는 불안의 성장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독하지 않으려는 것은 고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고독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소외감 등의 통각이라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감각은 직면하는 대상으로서의 그것이지 결코 정념의 주인이 아니다. 고독은 머무름의 상태가 아니라 나아감의 과정이다. 키에르케고어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고독이란 '자기-이해'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실존적 과정"1)이다. 직면과 견인의 과정으로서 '나'의 발본적 반성을 꾀는 고독은 많은 시간과 심리적 통증을 수반하는 힘겨운 비포장도로이지만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 길은 당신에 의해 아주 단단히 포장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은 이제 너무 쉬운 길이다. 허나 우리는 당장의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의존을 택한다. '불안-의존-불안-의존-……'의 악무한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이 악무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싸움이 혼자만 하는 싸움은 아니다. 우리가 고독하고자 할 때, 시는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 '불확실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시와 고독은 함께 간다. 유일무이한 개별자로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시를 보면서 우리는 '나'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비록 그 세계가 하잘것없을지라도 시는 당신과 함께 고독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투쟁의 이미지가 너무 닮아서 단번에 요체로 휘몰아 넣는 시가 있다. 2024년 계간지 가을호에 실린 시편들이 대개 그러했다. 그것들은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증상에 직핍하는 표정을 하고선 우리의 불안을 응시하고 있다. '응시하는 시'를 응시하는 우리는 홀연 고독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시는 그 자체로 기꺼이 고독의 과정이 된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불안을 응시-진단하는 시편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고독의 여정을 걸어보자. 미리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찌되었건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해 미리엄은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엄은 자신을 설명하는 식으로 늘어져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미리엄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한 미리엄은 바빴다 설명하느라 바빴고 대체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느라 바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낡아지고 늙어가고 쪼그라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해진다 불쌍한 미리엄 온종일 나를 기다리는 미리엄은 버럭버럭 화를냈다 화를 내는 미리엄이 순간 유효해 보였다 미리엄이 악다구니를 쓸 때에야 미리엄의 전체가 설명되고 빛난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고 어차피 미리엄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다음부터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하루종일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일갈할 수밖에 없었다 넌 네 삶이 없어? 하고 말콤은 미리엄이 키우는 개다 말콤은 미리엄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좋아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말콤은 미리엄을 좋아하고 불쌍해한다는 것이다 말콤은 수동적인 주인 미리엄이 충동적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거나 밥때를 놓쳐도 재촉하지 않는다 말콤 역시 미리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하루종일 너만 기다렸어 이 망할 기집애야 하지만 말콤의 생각에서 미리엄은 한없이 불쌍한 인간이므로 개 말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말콤은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 것 같았다 (……) 미움받지만 않게 해주세요 누구로부터를 말하는 것이냐 뭘 물어요 당연히 미리엄이죠 열두 마리의 개를 키운 경험이 있는 신이 말콤의 턱을 간지럽히며 말한다 아이고 불쌍한 새끼 계속해도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시는 나로 시작했지만 나로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무언가를 빠뜨리는 바람에 또 내가 나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내가 나오면 미리엄은 또 하루종일 나를 기다릴 테고 그랬다는 이유로 나에게 화를 낼 것이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말콤은 삶이란 게 정말 불쌍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신경쓰이지 않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것도 없다 나는 빨리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때마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제때 미리엄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러면 말콤과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산책하는 말콤은 정말 행복해 보일 것이다 나는이런 게 좋다 이런게 더 좋다 - 박참새, 「시작된 것」 부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넌 네 삶이 없어?" 당신이 이 문장에 머무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장이 애틋한 이유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목줄을 달아매고 누군가의 손에 그 줄을 쥐여주었던 경험,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가슴 아픈 그 불안의 경험이 위의 문장으로 하여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리엄은 현대인들의 불안 형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히는 '해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기다린다.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한 '자기-수치심'을 해명하고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자기-효능'을 타인으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고 수용받기 위해. 따라서 '나'(타인)가 오지 않으면 그는 그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거니와, 그 효능을 되찾을 수 없다. 고독이라는 일련의 자기-이해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자기규정을 의탁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 박탈시킨 그의 가치는 그러므로 '나'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미리엄-나'의 관계에서 미리엄의 위치는 '말콤-미리엄'에서의 말콤의 위치와 상응한다. 미리엄은 말콤의 주인으로, 말콤은 온종일 미리엄을 기다리고 미리엄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다. 말콤의 삶의 주인이 미리엄인 것처럼 미리엄의 삶의 주인은 '나'이다. 말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미리엄의 삶은 따라서 개 같은 삶이다. 그 삶은 (자기 의지에 의해)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자기 삶을 전시하고 그 삶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좋아요'와 팔로워 숫자 등)을 기대하면서 오직 그것을 위해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일상을 공유하고 실제적 자신의 모습, 즉 '실존적' 자기 모습을 방치한다. 타인의 반응이 내 삶의 양식을 결정하게 내버려둔다. 문제적인 것은 여기서 타인은 '내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증명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너무 쉽게 그들을 미워해 버리고, 반응이 긍정적이면 또 너무 쉽게 사랑해 버린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감정 속에서 지쳐버린 자아는 당장의 휴식을 위해 타자에의 의존을 택한다. 불안을 즉각적으로 해소해 주기 때문에 의존하지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은 그러므로 불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란 듯이 참혹해진다. 배시은의 시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우리의 강박증적인 내면 상태와 그 징후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그에 대해 시인이,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쓴 시를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아직 쓰지 않은 시를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싶다. 재빠르게 적으면 감쪽같을 거라고. 시간의 장난 같은 거라고.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 제목을 옮겨 적었다. 이상하다. 나라면 이런 제목을 짓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찍이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항상 그런 모양이라는 듯이. 나는 여행을 가지 않는 대신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으로 여행을 대신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여행 가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한다.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냥 있는다. 그냥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대신한다. 아무것도 깨닫지 않는 것이 깨달음을 대신한다. 이상하다. 나라면 여기서 연갈이를 하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시를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시는 이미 끝났다. 시를 옮겨 적는 일은 끝났다. 시를 쓰면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무언갈 만들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만들 수 있는 때는 너무 짧다. 생각을 하고. 단어와 문장 등을 떠올리거나 받아 적고. 고개를 움직이고. 책상에 앉고. 신체 부위의 기능을 사용해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희소하며 예상만큼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이 시는 알고 있다.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 배시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부분, 『창비』 2024년 가을호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 싶다"는 바람은 다시 말해 독자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소망이다. 그러나 옮겨 적은 시는 어쩐지 제목부터 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기로에 선다.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냐. 당신이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면 선택은 물론 전자일 것이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잃어가고 이윽고 모호한 정체성과 동시에 끊임없는 불안을 경험한다. 위의 시는 그것을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여행조차 갈 수 없고,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다. 여행을 가는 대신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뿐이다.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잘 쉬는 사람과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본인의 취향과 호오를 잘 아는 사람과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타인에게 삶의 목줄을 내어준 사람에게 휴식이란 그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불친절하다.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건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때때로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방어 기제로 드러난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실존적인 '나'의 상태이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회적인 '나'의 모습이다. 건강한 사람은 친절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사회적인 모습이 중요한 우리는 건강하지 않아도 건강한 '척' 친절하다. 이때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 싶은 일종의 방어 전략으로 쓰인다. 어쩌면 건강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사회적인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당신의 상태는 이제 아무도 진단할 수 없다. 허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심급의 기회일지 모른다. 시가 응시하고 있는 사실을 응시해 보자. 때로는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사실 시는 진단하거나 처방하지 않는다. 기꺼이 고독의 기회를 내어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삶을 응시하고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견고한 삶을 살고 싶을 우리에게 고독이라는 자기-이해 과정은 이제 건너뛸 수 없는 삶의 발달과업이다. 견고하다는 말은 빈틈없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빈틈 있음'마저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이다. 당신의 약점도 당신이다. 고독은 그러므로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들어 기꺼이 '나' 자신을 승인하게끔 한다. 신이인 「새」는 그것을 딱따구리에 비유하면서 약점이 받아 온 그간의 오해를 풀어낸다. 2017년 2월 3일 딱따구리를 데리고 있다. 이것은 내 약점이다. 딱따구리는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 사람의 머리통에도. 딱따구리는 내 머리 옆쪽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사고였다. 귀가 생겼다. 딱따구리가 어찌나 청명하게 나무문을 쪼고 다니는지가 다 들렸다. 난 비로소 듣는 사람이 됐다. 나의 방문은 말할 줄 몰랐다. 내가 듣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방문은 딱따구리를 통해 내게 말을 전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딱따구리가 부리를 사용하는 이유,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내가 가진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었으며, 딱따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 어쩌면 딱따구리는 도망간 게 아닐지도 몰라. 아예 내 안쪽으로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따구리가 느껴질 수는 없어. 이 느낌에 대해 나 여전히 말을 멈출 수 없어. 가장 깊숙한 곳에 너 잘 살아 있어. 집인 줄도 모르고 흔들렸던 집이 너를 선명하게 품고 있어. 구멍으로 볕과 공기가 들이닥쳐. 너 거기 있구나.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파여가며 안쪽이 하는 말을 받아쓸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쓰는 사람이 됐다. - 신이인, 「새」 부분, 『문학과 사회』 2024년 가을호 딱따구리는 약점에 대한 절묘한 표상이다. 그것은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약점이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이유로 약점이 될 수 없다. 인식의 층위에서 그가 뚫어낸 구멍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그 구멍이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없다. 눈, 코, 입, 그리고 귀라는 구멍이 당신의 약점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든' 존재하는 그 구멍이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딱따구리(약점)에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where'이 아니라, 'why'일 것이다. 딱따구리는 '왜' 구멍을 만드는가? 그것은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이다. 즉 딱따구리가 구멍을 내는 이유는 '너'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어쨌든 약점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너'가 존재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뚫은 구멍은 '너'가 즐겁지 않으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고 바로 약점이 된다. 그 순간에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 떼어내고 싶은 악성 종양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인다. 약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너'의 시선에 얽매여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why'를 던지는 순간, 시선은 '너'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지고 약점에 대한 오해는 곧 이해로 변모한다. 우리가 가진 약점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고독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창구일 수 있다. 구멍 없이 어떻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밖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말한다. 약점은 '나'를 이해하는 고독의 진입로가 되고, 이윽고 뚫린 길은 '너'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견고해진다.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다. 고독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황홀감이다. 고독이 거듭될수록 성장하는 고독'력'은 당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독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계절의 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 류호인, 「정신분석학: 존재에 대한 물음 : 실존적 불안과 자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소고」, 『현대정신분석』, 2024, 제26권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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