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자음과모음 2024년 여름호(제61호)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 강우근, 『너와 바꿔 부를 수 있는 것』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1) : 강우근, 『너와 바꿔 부를 수 있는 것』
우리는 흔히 대상과의 거리를 측정하고자 할 때 그것을 보는 행위를 판단의 근거나 기준으로 삼는다. 이러한 우리의 믿음은 사물과 나의 거리를 얼마간 사후적으로 결정짓고 우리는 그 믿음에 근거해 사물과 나의 관계를 갱신해 나간다. 그러나 대체로 사물은 ‘거울로’ 보는 것보다 가깝거나 멀리 있다.2) 사물은 어떠한 필터와 시선에 의해 운반되어 인간의 뇌로 전송된다. 이때 책정된 거리를 전적으로 신뢰할 때 인간은 사물을 오해하기 십상이다. 몇 겹의 렌즈로 믿음과 오해를 경유한 사물을 기존의 맥락에서 떼어내고 ‘비-사물화’하는 것. 이것이 강우근의 첫 번째 시집이 제기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질문이자, 시인이 사물과 세계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관점 혹은 태도라 할 수 있다.
가령 이런 것이다. 「민무늬 탁자」(『너와 바꿔 부를 수 있는 것』, 창비, 2024)에서 할아버지가 만든 ‘민무늬 탁자’는 왜 ‘민무늬 탁자’가 되었는가를 인과적으로 추적해보면, “할아버지는 견고하고 튼튼한 탁자를 만드는 솜씨가 좋았으나” “새로운 무늬를 새겨 넣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세상에는 탁자에 새로운 무늬 넣기를 원하는 의뢰인”이 많고, 때문에 할아버지의 “민무늬 탁자는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 오랜 시간 방치된 후 “창고에서 발견된/할아버지의 유산 같은 민무늬 탁자들”은 다시 인간의 세계 어딘가에 놓이고, 인간과 세계의 흔적들을 “우연적으로” 새겨가면서, “마침내 흉내 낼 수 없는 하나의 무늬로 흔들거”리게 된다. ‘내’가 “오래도록 빛에 붙들리기를 원”하는 하나의 탁자는 이러한 인과적 과정을 통해 생성된 것이다. 하나의 사물이 내재한 이러한 종류의 인과성을 미적 현상의 일종으로 규정하는 티머시 모턴의 방식에 우리가 동의할 수 있다면, 이 시에서 할아버지의 “민무늬 탁자”는 매 순간 ‘미적 사건’을 일으키며 탁자 이상의 탁자가 되어간 것이라 할 수 있다. ‘민무늬 탁자’는 인과의 사슬 속에서 모든 순간 ‘민무늬 탁자’이면서 혹은 ‘민무늬 탁자’가 아닌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그 위에 고급 테이블보를 깔지 못한다. 주말 오후, 햇빛이 스며들면 할아버지가 나를 가만가만 쳐다본다. 오래오래 빛을 받으면서 환해진 얼굴로, 곧 사라질 것만 같은 모습으로. 나는 탁자가 오래도록 빛에 붙들리기를 원한다.
— 「민무늬 탁자」 부분
‘민무늬 탁자’이면서 더 이상 ‘민무늬 탁자’가 아닌 ‘탁자’가 나를 응시한다. 사물은 “곧 사라질 것만 같은 모습으로” 얼마간 물러나 있다. 강우근의 시는 사물과의 그 거리를 해독하려 하기보다 오히려 그 거리감의 환기를 통해 복원되는 기억에 주목한다. 위 시에서처럼 할아버지의 탁자는 ‘나’에게 어떠한 기억을 재생시키고, 기억은 부재와 함께 “빛에 붙들”려 “오래도록” 반짝거린다. 이처럼 사물은 사물 그 이상의 것을 남긴다.
인용한 시에서 사물이 ‘나’를 “쳐다본다”는 행위에 주목해보자. 객체들이 서로 미적 영향을 끼친다는 티머시 모턴의 논의를 우리가 조금 더 받아들일 수 있다면, 보는 행위, 즉 시선의 포착은 응시자와 대상을 같은 사태 안에 포섭시키고, 이때 응시자와 대상은 서로의 구분을 전제하거나 고정되어 있지 않은 채로 인과적 영향 관계 안에 놓이게 된다. 인간은 대체로 사물과 나와의 관계에서 시선의 선점을 믿어 의심치 않아 왔다. 때문에 인간이 사물에게 응시의 대상이 될 수 있다거나 서로의 시선이 교차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도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강우근의 시는 이러한 고정된 인간의 믿음을 파괴한다거나 극적인 방식으로 사고를 전환하고자 하는 시도 대신에, 그 믿음의 체계에 무엇이 내재되어 있는지, 혹은 누락되어 있는지를 상상한다. 가령 「다람쥐가 있던 숲」에서 다람쥐가 살고 있는 숲을 매일 찾아가던 과거의 ‘나’는 어느 순간 다람쥐에게 ‘내’가 응시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감지한다. 그리고 “영영 잊히지 않을 장면처럼, 다람쥐들의 기억에/멍하게 서 있던 내가 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대상에 대한 이와 같은 기억은 오히려 대상의 상실과 부재를 선명하게 드러내기도 한다는 점(“투명한 통 안에서 쳇바퀴를 굴리는 건 다람쥐가 아니다.”, 「다람쥐가 있던 숲」)에서 결락의 지점이 노출되는 것이다.
하나의 불이 꺼질 때 나의 영혼이 어디로 옮겨 가는지 궁금해
내가 희미해질 때 왜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얼굴은 전부 검게 물들어가는지
내가 사라질 때 또 다른 빛을 보는 아이들의 표정은 얼마나 생생할까
(……)
공기 중에 떠다니는 이 하얀 연기는 내가 말하는 방식일까, 당신이 말하는 방식일까
사람들은 영원히 살 것처럼 나를 자꾸만 피운다
— 「하루 종일 궁금한 양초」 부분
강우근의 시는 사물의 반짝거리는 순간에만 주목하지 않는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빛남이 종료되는 시점에 사물은 반짝거림을 멈추는 대신 존재의 방식을 양도한다. 인용한 시에서는 양초가 불을 밝히는 순간과 불이 꺼지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양초가 밝힘을 멈추었을 때, 밝힘의 부재는 밝힘의 순간을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시인은 양초의 꺼짐을 존재의 소멸로 보는 것이 아니라, 밝히는 것을 멈춘 양초의 “영혼이” “공기 중에 떠다니는” “하얀 연기의”의 모습으로 존재 방식을 옮겨가는 행위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 장면은 사물이 기존의 사물을 초과하는, 사물의 '비-사물화'가 이루어지는 한 국면이라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한편 표제작 「너와 바꿔 부를 수 있는 것」의 경우 사물과의 가능한 거리 및 관계를 미래의 가능성으로 제시한다.
네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너를 그것과 바꿔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창가에 키우는 식물이 많아질수록 너의 습관과 기분은 달라져 있을 것이다
식물에는 모두 그 씨앗을 흙 속에 묻은 정원사의 영혼이 담겨 있어
죽어가는 식물에서 조심스레 흘러나온 영혼이 너로 하여금 단단한 씨앗을 집게 할 것이다
— 「너와 바꿔 부를 수 있는 것」 부분
식물 혹은 사물을 ‘거울’에 반사된 개념으로만 이해하고, 이러한 방식으로 식물과 소통할 때 ‘너’는 식물 이상의 식물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거울을 경유하지 않고 사물 그 자체에 다가갔을 때 ‘너’는 “그것과 바꿔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달라진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 ‘그것’과 ‘너’의 새로운 관계는 사라져가는 사물, 즉 “죽어가는 식물”로부터의 들리지 않던 전언을 들리게 하며, 너로 하여금 “단단한 씨앗을 집”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즉 소멸해가는 사물을 단단히 붙잡을 수 있는 방법을 사물과의 진전된 관계를 통해 배우게 되는 것이다.
위 시의 일관적인 미래 시제는 아직 당도하지 않은 잠재적 미래에 대한 확신을 드러낸다. 강우근의 시에서 미래는 우연적이며 슬픔은 인과적(“세상의 너무 많은 슬픔을 들어서/귀가 어두워진 나의 미래처럼”, 「어두워지는 푸른 불」)이다. 이때 시간과 감각의 매개는 사물의 기억을 통한다. 「모두 다른 눈송이에 갇혀서」에서처럼 “지금” 내리는 눈은 “기후가 바뀌면서” “세상에 울리”는 “신호”일지 모른다. 현재의 눈은 “언제나 오”는 “마지막 겨울”을, “그렇기에” “아직 오지 않”은 “마지막 겨울”을 함께 감각하게 한다. 이처럼 강우근의 시는 자신을 구성하는 사물과 사태, 그리고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시간성까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에서 보고자 한다.
- 1) 티머시 모턴, 『실재론적 마술』, 안호성 옮김, 갈무리, 2023, 서론의 제목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을 변용.
- 2) 티머시 모턴은 자동차의 사이드미러에 새겨진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이라는 문구에 존재론적 통찰이 담겨 있다고 파악한다. 모턴은 여기서 우리가 객체와 맺는 습관적 인과관계, 즉 객체를 배경처럼 “뒤에 있다고” 여기는 것이 원근법적 속임수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이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드러낸다. 앞의 책, 45~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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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듯, 인물들이 같은 시대와 장소에서 같은 경험을 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인물들을 같거나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면, 소설은 이들의 집단 기억을 꾸리는 데에 일조한다. 문화적 기억의 다양한 형식을 세분화한 알라이다 아스만의 책 『기억의 공간』5)에 따르면 집단 기억이란 공동체가 공유하는 기억, 심지어는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기억이다. 현실에서 이러한 집단 기억의 대부분은 주요 역사적 사건과 관련하여 표면화된 기능 기억이지만, 소설이 활성화하고자 하는 기억은 무의식 저편에 맥락 없이 남아 있는 저장 기억에 가깝다. 망각된 기억을 끄집어내 서사로 펼쳐놓는 것이다. 특히 「마법사들」은 잊히고 버려진 공간에서 기억을 다시 구연한다. ‘나’와 성규는 가출한 뒤 나름대로 머물 곳을 찾기 위해 ‘성규네세탁소’라는 간판이 걸린 망한 가게에 들어간다. ‘나’는 그곳에서 3년 전 달력을 발견하고 제사와 생일 표시를 찾은 뒤, 오늘 날짜에 별표를 하고 ‘성규 생일’이라고 적는다. 이내 이들은 망한 곳에서는 자고 싶지 않다는 성규의 말에 영화관으로 몸을 옮긴다. 마지막 상영이 끝나고 어두워진 영화관에서 ‘나’와 성규는 ‘나’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스크린 앞에서 영화배우가 되어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관은 영화–기능 기억이 소등되고 저장 기억이 점등되는 공간이다. 「타임캡슐」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무수히 다양한 이야기의 가능성을 꺼내놓는다. 시골집 마당에 있는 창고를 철거하고 옆집의 담을 재구축하는 공사를 하던 중, 관 속에 들어 있는 아기 인형이 땅속에서 발굴되는 사건은 하나의 소동이 된다. 인형이 시체로 오인되어 신고까지 당하자, 사건은 뉴스에 보도된다. 이웃들은 물론 ‘나’, 친구 ‘진형’, 고모와 아빠까지 이 인형에 얽힌 사연–가설을 제시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에 대해 사유한다. 이후 ‘나’는 ‘어설픈 코난’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친구 진형과 함께 사흘에 한 번씩 금속탐지기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이 묻어두었으나 잊히고 만 타임캡슐을 발굴하고, 그곳에서 발견한 이야기를 영상으로 재구성하여 유튜브에 올린다. 저장 기억–타임캡슐의 이야기는 유튜브를 통해 현재 사람들의 삶에 당도하여 그들을 이어주는 역할까지 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고고학자처럼 거리에 즐비한 망한 가게를 들여다보고, 다종다양한 것들을 한데 모은 만물 트럭과 1년 후에 발신되는, 그래서 대개 잊히고 마는 느린 우체통의 우편물 더미를 뒤진다. 그렇게 발견된 죽은 기억들은 생생한 이야기로 소설책에 아카이빙된다. 이는 아스만이 말한 기록물 보관소의 역할과도 같다. 그러나 이 소설집은 물리적으로 제한된 공적 아카이브가 아니라, 층위가 뒤죽박죽 섞인 신변잡기, 미시사 등 기억 선별의 장에서 탈락한 것들이 모인 무덤과 비슷하다. 단락 나누기 없이 이어지고 분별없이 섞인 문장 스타일은 이를 형식적으로도 뒷받침한다. 그리하여 기억의 무덤, 쓰레기의 거대 아카이브에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기억, 중요한 기억과 중요하지 않은 기억, 기념된 기억과 망각된 기억이 함께 산다. 그 안을 떠도는 사람들의 삶은 죽음에 대한 상상력과 결부될 수밖에 없다. 아스만의 주장처럼, 몸도 기억 매체의 일종이라면 삶과 죽음의 길항에서 기억은 곧 유령이다. 「자장가」에서 죽어 유령이 된 ‘나’는 엄마의 꿈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기억 속에 잠재된 과거와 그것으로부터 재구성한 미래를 함께 겪고자 한다. 유령은 기억 속에서나마 살아 있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기억을 그러모으며 유령의 자취를 찾는다. 살아 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을 기억하는 방식을 갱신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새로이 구성하고 앞으로의 삶을 꾸린다. 이것이 윤성희 소설이 애도의 과정에 관여하는 방식이다. 3. 기이에서 경이로, 트라우마를 배격하는 유령 윤성희의 소설집이 공동체가 공유하는 한 권의 기억 아카이브였다면, 정한아의 장편소설 『3월의 마치』는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기억의 편린들이 어떻게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재구축하는지 보여준다. 주인공 ‘이마치’는 알츠하이머가 꽤 진행된 상태의 70세 노인이다. 그는 뇌의학 전문가의 정신병원에서 가상현실(VR) 프로그램을 통해 기억과 인지능력을 회복하는 치료를 10년째 받고 있다. 이 가상현실 프로그램 속 세계는 이마치의 기억과 현재 인지능력에 따라 매번 재구성되며, 인공지능으로 설계된 인물들은 이마치가 현실에서 제 기억을 되찾도록 돕는 기능을 한다. 되찾은 기억은 오래가지 않고 다시 사라져서 주기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이마치는 지난 삶을 기억하기 위해 치료를 지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소설 후반부에 가서야 명확하게 드러난다. 소설이 이마치의 시점에서 그가 인지하고 감각하는 정보에 한정하여 서술되는 탓에, 상황은 독자에게 정확히 설명되지 않고 꿈(혹은 가상현실)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소설은 이마치가 예순인 시점—자신의 딸 준영이 출산을 하고, 알츠하이머 발병 전 단계 진단을 받고, 배우 활동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시기—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라파트멍’이라는 아파트의 60층으로 이사했으며, 3개월 전부터 뇌의학자 ‘제제’를 만나 상담 중이라고 서술한다. 그러나 그가 가지는 의문—전날까지 55킬로그램이었던 몸무게가 하루 만에 59킬로그램까지 늘어날 수 있는 것일까?—은 독자로 하여금 소설 초반부에 드러난 서술을 곧이곧대로 믿기를 망설이게 만든다. 또한 이마치는 정신과 치료를 하게 된 계기로, 자신의 집에서 유령과 마주치던 언캐니한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독한 냄새, 부패의 냄새가 방안을 뒤덮었다. 이마치는 극심한 공포로 얼어붙었다. 침대맡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길고 뾰족한 얼굴을 가진 그것, 축 늘어진 몸으로 젖은 옷을 질질 끌고 다니는 그것, 손발이 썩어 흘러내리는 그것. 그것이 웃고 있었다”(pp. 33~34). 이러한 초자연적 현상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마치 스스로도 자신의 인지능력이 떨어져 일어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장 ‘누전’부터는 이마치가 라파트멍 옥상에 올라가 마흔세 살의 자신과 만나는 것을 시작으로 더욱 신비로운 일이 벌어진다. 라파트멍에서 예순 살의 이마치는 60층에, 마흔세 살의 이마치는 43층에, 스물다섯 살의 이마치는 25층에 살고 있다. 이마치는 기억의 집과 같은 이 건물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다. 초자연적인 일은 이뿐만이 아니다. 가령 장미가 없다고 말하면 곧장 장미 덩굴이 눈앞에 생기는 등 이마치의 말이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양 실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라파트멍의 가이드인 청년 ‘노아’는 이를 숨기려는 듯이 수상하게 행동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 현상은 환상적이라기보다 기이한 것에 가깝다. 환상적으로 보이는 이 사건들은 사실 이마치의 뇌 지도를 바탕으로 구축한 가상현실 세계 안이기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츠베탕 토도로프에 따르면, 환상적인 것the fantastic과 기이한 것the uncanny은 다르다. 초자연적 현상이 자연적 세계의 법칙으로 설명 가능하다면, 그 현상은 환상적인 것이 아니라 기이한 것이다. 환상적인 것의 주요 요건은 초자연적 세계로도 자연적 세계로도 단숨에 확정 지을 수 없는 망설임에 있기 때문이다.6) 그렇다면 소설은 이마치가 겪는 신비한 일(자기 자신의 과거 모습과 마주하고 대화하는 일)이 단지 뇌의학자에 의해 프로그램화된 가상현실 세계일 뿐이라고 일축하며 환상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일까? 그러할 경우, 이전에 집에서 보고 들었던 유령의 흔적 또한 알츠하이머 증상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소설은 어느 장면에서부터 어느 장면까지가 현실이고 프로그램인지, 혹은 환상이거나 망상인지 확정 짓기를 거부한다. 가상현실 치료 프로그램에서 완전히 깨어난 후, 이마치는 라파트멍이 자신이 사는 아파트가 아니라 VR에 나온 건물의 이름이자 입원실 병동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막상 이마치가 사는 곳은 ‘축복의 테라스’라는 아파트의 19층이다. 이러한 반전은, 앞서 서술된 예순 살의 이마치가 겪은 현실마저도 현재 이마치의 구멍 뚫린 기억과 함께 재구성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현실과 허구의 구분은 모호해지고, 유령을 보는 등의 초자연적 현상은 이마치의 인지능력 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이마치가 40층의 이마치를 만나 유령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 대목은 중요하다. 물냄새가 나는 유령, 그것은 알츠하이머의 망상이 아니었던가? 40층 여자는 매일 그것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유령은 아주 오랫동안 그녀의 삶에 출몰한 셈이었다. 이마치는 유령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떠올려보았다. 집을 떠나라고 했던 말, 이곳이 그녀의 집이 아니라고 했던 말. 알츠하이머가 아니라면 그녀의 망상은 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었단 말인가? 그녀는 어떻게 그것과 함께 살아왔단 말인가? (p. 171) 가상현실이나 알츠하이머가 만든 환영이 아니라면 “물냄새가 나는 유령”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마치는 서른아홉 살에 일곱 살이 된 둘째 정민을 잃어버린 트라우마적 경험이 있다. 정민의 실종 이후 이마치는 좌절했지만 여전히 정민을 되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60층의 이마치가 어린 준영을 통해 알게 되는, 정민을 찾던 중의 기억 한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다. 정민의 실종 신고 이후 언젠가 경찰서에서 시신을 찾았다는 연락이 와, 이마치는 준영을 데리고 강릉의 한 병원으로 간 적이 있다. 하얀 천을 걷어내고 마주한 시체의 얼굴과 냄새는 생각 이상으로 끔찍했으며, 이마치는 이 끔찍한 것은 자기 아들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병원 밖으로 도망쳐버린다. 그러니까 물냄새와 부패의 악취를 풍기며 이마치를 따라다니는 그 유령은 아들 정민이었던 것이다. 이마치는 이 기억을 까맣게 잊고서, 정민의 장례식도 제대로 치러주지 못한 채 아들이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렇다면 정민의 유령은 아들의 죽음을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이마치가 만들어낸 심리적 환영일까? 하지만 소설은 결말부 0장 ‘나의 마치’에서 유령–정민 입장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를 반박한다. ‘나’(정민)가 유령이 되어 이마치를 따라다니는 이유는 그가 죄책감을 느끼길 바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마치가 트라우마적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를 바란다. ‘나’는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기억을 되찾을 때마다 이마치는 증오를 한 겹씩 덧입는다. 그것은 삶에 대한 증오다. 그 누가 인생을 반복해서 복기하고 싶겠는가. 그것은 형벌이다. 아주 오랜 죗값이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죗값인가?”(pp. 277~78). 정민은 때로는 “바다를 사랑한 서퍼”가 되어 ‘괜찮다’는 말로 이마치에게 간접적인 용서를 건네고, 때로는 가상현실 프로그램 속 AI 가이드 “노아의 그림자”(p. 278)가 되어 기억을 복구하는 치료를 그만두라고 조언한다. 심지어는 일부러 프로그램에 오류를 일으키는데, 제제는 이를 두고 프로그램 기술이나 뇌과학으로도 설명 불가능한, 유령의 소행 같다고 한다. 이처럼 유령의 존재는 과학이나 심리학 같은 법칙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의 실재다. 즉 유령은 정신작용이나 알레고리가 아니라, 유령 그 자체다. 소설은 마침내 초자연적 현상, 유령이 실제로 나타나는 세계를 인정한다. 이는 토도로프식으로 설명하면, 환상 장르의 두 인접 장르 중 기이 장르the genre of uncanny에서 경이 장르the genre of marvelous로의 이동이다. 이 실재하는 유령은 기억 주체가 트라우마적 사건을 중심으로 기억하는 방식을 흐트러뜨린다. 트라우마를 기억하려는 힘과 기억하지 않으려는 힘의 긴장은 기억의 위계를 바꿔놓는다. 이마치에게 있어 엄마의 폭력과 언니의 죽음, 아들의 실종과 딸에게 행한 폭력, 남편 그리고 매니저 ‘K’와의 어그러진 관계 등 죄스럽고 아픈 기억은 이제 K, 즉 기석과 애틋하게 사랑을 나눈 기억, 딸 준영과 손녀 ‘아인’을 돌보았던 기억과 한데 뒤섞여 중심 없는 삶의 곡절이 된다. 이렇듯 정한아의 소설은 정신분석학적 맥락에서 주체가 유령을 상상하는 이유를 답습하지 않고, 유령을 상상하는 픽션이 구상하는 애도의 방식을 찾기 위해 이야기를 잇는다. 1) 프로이트에 따르면, uncanny(언캐니, 두려운 낯섦)는 무의식에 억압된 것이 변형되어 현재로 회귀하는 정신 작용과 관련이 있다. 이성과 합리가 지배하는 근대가 초자연적이고 비합리적인 현상을 억눌렀다면 그것은 유령 같은 형상으로 귀환한다 (지크문트 프로이트, 「두려운 낯설음」,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 정장진 옮김, 열린책들, 1996, pp. 400~52). 2) 같은 책, pp. 401~11. 3) Lacan, Jacques, “Desire and the Interpretation of Desire in Hamlet”, Yale French Studies No. 55/56, trans. James Hulbert, 1977, pp. 11~52(이미선, 「애도와 유령: 유령으로서의 문학」, 『비평과이론』 제24권 제1호, 2019, pp. 31~52에서 재인용). 4) 이는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 우울증melancholia에 가깝다. 그러나 주디스 버틀러를 비롯하여 사라 아메드 등 많은 페미니스트 연구자는 멜랑콜리아를 병리적으로 보는 프로이트의 초기 관점을 거부한다. 프로이트 또한 애도에 있어 대상과 자아의 우울증적 합체는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논의를 정정한 바 있다(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윤조원 옮김, 필로소픽, 2018; 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 감정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시우 옮김, 오월의봄, 2023, pp. 344~45 참조). 5) 변학수·채연숙 옮김, 그린비, 2011. 6) 츠베탕 토도로프, 『환상문학 서설』, 최애영 옮김, 필로소픽, 2022.
기억하기, 잊기, 다시 기억하기* 인아영 * 이 글은 안태운의 『기억 몸짓』(문학동네, 2024)을 대상으로 삼는다. 이하 인용시 시의 제목만 밝힌다. 움직임이라는 사건 안태운의 시에서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것은 거의 없다. 대단히 슬픈 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기쁜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거센 감정에 휩싸이는 것도 아니며, 구체적인 사유가 쌓아올려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여기에는 장면들이 있다. 화자가 어딘가를 돌아다니거나, 누군가와 놀거나, 무언가를 생각하는 정도의. 그런데 이렇게 느슨한 장면들에서 유일하게 많은 것이 있다면, 바로 움직임이다. 움직이는 것은 화자 자신, 어린이, 친구와 같은 사람일 때도 있고, 물고기, 풀잎, 개와 같은 생물일 때도 있으며, 시간, 계절, 기억과 같은 추상적 양태일 때도 있다. 그게 무엇이든 안태운의 시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없다. 움직임이라는 단위에서 세상만사가 동등하게 그려지는 세계. 움직이고 있다는 한에서 삼라만상이 평평한 세계. 움직임은 안태운의 시에서 벌어지는 최소치이자 최대치의 사건이다. 움직임은 시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이와」에서 화자는 춤을 춘다. 칭얼대는 아이를 돌보아야 하는데 울음을 멈추게 하는 방법을 모르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주위의 움직이는 것들에 관심을 쏟게 하”는 것뿐이고, 화자도 “주위의 것이 되어 움직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보채는 아이를 가만히 둘 수는 없으니, 아이의 기분을 바꿔보기 위해서, 못마땅한 마음으로부터 아이의 주의를 분산하기 위해서, 무엇이라도 움직여보는 것이다. 아이의 이름을 불러보기도 하고, “쁑과 꼉과 쨩과 뚕과……”처럼 말도 안 되는 발음으로 이루어진 노래를 지어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창피해서 어디서도 못 추는 춤을 추는 데 이른다. 그러자 아이는 손뼉을 치고 웃다가 다시 칭얼대며 운다. 어쩐지 아이를 달래려는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실패한 것 같지만, 화자는 문득 아이가 큰 다음 이 순간을 회상하며 삼촌을 놀리는 장면을 떠올리게 되었으니 “미래”의 시간을 열어내는 데는 성공한 것 같다.1) 하나의 작은 움직임이 낯선 움직임으로 이동하고, 그것이 기존의 무언가를 흔들고 깨뜨리면서 새로운 움직임을 파생하는 흐름. 이 움직임들의 연쇄와 파장이 안태운의 시에서 일어나는 전부다. 안태운의 시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없다. (…) 움직임은 안태운의 시에서 벌어지는 최소치이자 최대치의 사건이다. 물리학적으로 움직임은 시간에 따른 물체의 위치 변화를 의미한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은 변화하기 마련이고, 생겨나는 모든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므로, ‘시간이 흐른다’거나 ‘모든 것은 움직인다’는 명제는 물리적으로, 아니 일상적으로도 특별할 것 없는 자명한 현상이다. 그런데 안태운 시의 화자들은 이 자명한 현상에 번번이 놀라워한다. 그렇게 칭얼대던 어린아이가 언젠가 어른이 되어 내가 이상한 춤을 추었던 걸 기억한다고? “신기하다, 신기해”. 「공에 대해서라면」의 화자도 공의 움직임에 신기함을 느낀다. 공처럼 생긴 모든 것을 한꺼번에 굴려보기도 하고, 굴러다니는 공에 닿은 수많은 존재를 상상해보다가, 자신의 생활도 공처럼 굴러가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 공을 떨어뜨린다. 마치 이 떨어진 공을 이어받듯 「통일 시」의 화자는 주차장으로 굴러가는 농구공을 상상하면서 “세노테”나 “산정호수” 같은 “또다른 곳으로 가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이 공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모든 것은 움직인다’는 명제는 범상하지만 ‘어떻게 움직이느냐’라는 질문은 그보다 복잡하다. 물체는 외력이 없으면 정지 상태에 있고 외력이 주어지면 그 방향을 따라 움직인다. 그중에서도 구(球) 형태의 공은 어느 방향으로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 이론적으로 무한히 열려 있다. 아마도 화자가 공의 움직임에 놀라는 까닭은, 그것이 단지 운동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고정되지 않은 방향으로 열려 있는 공의 성질, 그리고 그 성질이 어쩌면 자신의 삶과 연결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감각 때문일 것이다. 문득 그 계절이 되는. 나는 할머니가 살았던 곳의 담벼락을 거닐고 있었는데 문득 그 계절을 걷게 되면 내게 파도가 밀려오는 듯하고 나는 순간 놀라 다음 걸음을 걷고 또 놀라 그다음 걸음을 걷고…… 놀라서 걷는 걸음이 다음 걸음이 되는. 거기서 하염없이 멀어진 채로 떠돈다면 나는 파도의 걸음이 되는 듯하다고 파도의 걸음으로 걷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기분이 좋아지고 문득 그 계절이 흘러드는. 그러면 꿈을 꿀 수도 있을 텐데. 어느 날엔가 불현듯 떠오를 만한 꿈. 이 꿈속에서는 누군가 사과를 하고 또 누군가 용서를 하고 나는 그 둘 다가 되어서 사과와 용서를 하고 그래 미안해 그리고 괜찮아, 헤어나올 수 있을 거라고 이 꿈을 마저 꾼 다음에는 어디로든 들어가버리자고 숨어버릴 수 있다고. 문득 잊어버린 꿈을 꾸고 난 후가 되어 있었지. 그러니 파도 속으로 들어가면 좋을 텐데. 바람 속인지 물속인지 모르는 채로 파도라는 것 속으로 들어가면 모든 게 서툴러지는 듯하고 문득 그 계절이 되는. 계절은 흔들릴 수 있을까. 흔들렸어, 잠깐 흔들렸던 것 같다고 방금 전 그 계절을 되돌아보며 멈칫했는데, 할머니? 하고 불러볼 수도 있을까. 할머니? 하고 부르면서는 다시 할머니라고 부르고 싶은 다른 것들이 생겨나나. 그 계절이 된다면. 문득 그 계절이 감은 눈 속으로 흐르는 노래라면 고추밭 너머에 있는 방파제라면 가을 평상으로 흘러드는 구름의 숨결이라면 내 앞에서 생겨나는 것들에 대해서 할머니? 내 앞에서 가만히 있는 것들, 테킬라와 감귤과 소라와 창문 너머 점멸하는 불빛에 대해서 할머니? 하고 불러보았는데. 문득 그것들한테는 너라고 할 수도 있어서 그 계절이 되는. 할머니한테도 순간 너라고 불렀으므로 기이한 느낌이 드는. 할머니한테 너라고 하다니, 나는 놀란 걸음으로 다시 걸어가고 다음 걸음을 놀란 채 딛다가도 문득 너는 누구입니까. ―「문득 그 계절이 되는」 중에서 이 시에는 화자가 할머니가 살았던 공간을 산책하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이 이어진다. 담벼락을 거닐며 계절을 느끼기도 하고, 누군가가 사과와 용서를 하는 꿈을 떠올리기도 하고, 그곳에는 없는 할머니를 불러보기도 한다. 그런데 이 산책의 리듬에는 독특한 구석이 있다. 걸음과 걸음 사이에 산책의 속도를 늦추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멈춤이나 쉼이 아니라 놀람이다. 화자는 “순간 놀라 다음 걸음을 걷고 또 놀라 그다음 걸음을 걷”는 방식으로 산책을 한다. 마치 놀라지 않고서는 한 발자국도 걸을 수 없다는 듯. 걷기 위한 최소의 조건이 놀람이라는 듯. 걸음과 놀람이 사이좋게 번갈아 반복되면서, 산책은 밀려옴과 물러남을 반복하는 “파도의 걸음”이 된다. 일반적인 걷기는 목적지를 향해 발을 번갈아 내디디며 앞으로 나아가는 행위이지만, 이 시의 ‘놀람-걸음’은 특정한 방향 없이 파도처럼 일렁이다가 이내는 계절 자체를 흔든다.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로 전진하는 선형적 흐름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들이 겹쳐지는 비선형적 시간성을 만들어낸다. 이를테면 화자가 꾸는 꿈속에서 누군가가 사과를 하고 또 누군가는 용서를 하는데, 화자는 “그 둘 다가 되어서 사과와 용서를” 동시에 한다. 일상적인 시간의 흐름에서는 A가 먼저 잘못을 하면, B에게 사과를 하고, 그후 B가 A를 용서하는 순서를 따른다. A의 잘못이 선행하는 원인이고 B의 수용이 뒤따르는 결과로 고정되는 셈이다. 그런데 이 꿈에서는 잘못한 사람과 잘못하지 않은 사람, 사과하는 사람과 용서하는 사람,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과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이 구별되지 않는다. 어쩌면 인간사의 모든 갈등이 그렇듯이 선후와 인과가 뒤얽혀 있고, 그것을 넘어 하나로 합쳐진다. 이 리듬 안에서는 눈앞에 있는 대상과 여기에 없는 대상도 하나가 된다. 어딘가 멀리 있는 할머니를 부르는 순간, “테킬라와 감귤과 소라와 창문 너머 점멸하는 불빛”을 부르는 호출로 이어지고, 급기야 할머니에게도 ‘너’라고 부르는 “기이한 느낌”까지 발생한다. 걸음과 놀람이 갈마드는 움직임으로부터 촉발된 리듬 안에서 사과와 용서는 하나로 포개지고, 할머니와 다른 사물들은 ‘너’라는 이름으로 겹쳐진다. 이것은 모든 차이를 소거하는 동일화일까? 아니, 그보다는 여러 대상을 중첩하면서 생성되는 또다른 움직임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움직임 안에서 잘못한 사람은 그저 잘못한 사람이기만 한 것이 아니고, 할머니는 단지 할머니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어떤 존재도 하나의 이름, 하나의 역할, 하나의 기억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어떤 존재도 하나의 본질로 고정되지 않고 변형되어 인식된다. 복수의 시간의 층위들이 겹쳐진 채로 나타나는 잠재적인 가능성. 이는 우리가 얼마든지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공간의 시간화 걷기라는 공간상의 움직임이 감각을 건드리고, 기억을 환기하고, 계절을 흔들면서 시간상의 움직임을 만들어낸다면, 이것을 ‘공간의 시간화’라고 말해볼 수도 있을까. 화자가 “시공간이란 무엇인지 어리둥절해하면서 / 공간에 놓여 있는 나를 시간이라고 음미해보기도 하면서 / 시간에 놓여 있는 나를 공간이라고 음미해보기도 하면서”(「통일 시」) 자신 앞에 놓인 시공간을 깊이 느껴보려는 장면은 안태운의 시에서 종종 등장하고, “빗소리가 들리므로 열리는, 저 공간이 살아나는”(「빗소리」)처럼 순간적인 감응으로 새로운 공간이 펼쳐지는 장면도 그려지지만, 이 감응 속에서 정말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공간이라기보다는 시간이다. 흔히 우리는 공간상으로는 어디로든 움직일 수 있지만, 시간상으로는 제한적으로만 움직일 수 있다고 여긴다. 공간이 눈앞에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붙잡을 수도 돌이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은 보이지도 않고 형태가 갖춰져 있지도 않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 비가시성과 비정형성으로 인해, 오히려 우리의 존재를 더 근본적으로 구성하고, 우리의 경험을 더 다층적으로 연다. 안태운의 시에서 시간은 아무것도 못하지만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아무것도 아니지만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눈을 떴고 어두웠고 지금은 새벽이군, 어렴풋이 인식했고 당연한 일이라며 시간을 흘려보냈는데 여전히 어두웠고 순간 나는 새벽이라는 시간을 무수히 지나쳐왔다고 느끼게 되었다. 새벽, 그렇게 있으면서 새벽에 깨어나면 눈뜬 채 가만히 누워 있기도 간혹 앉아보기도 했고 하지만 밖으로 나가지는 않고 새벽은 매번 지나가고 있었고 또다른 새벽에는 물론 꿈속이었을 테고 어느 날 깨어날 때도 눈감은 채 잠을 청하거나 날 밝길 기다렸던 것 같은데. 하지만 그때마다 일어나 밖으로 나가보았다면. 깨어난 새벽마다 어디든 나가보았다면 무엇을 볼 수 있었을까. 어떤 일을 겪었을까. 그러므로 나는 새벽, 지금에라도 나가야 할 것 같다고 느꼈네. 몽롱한 상태로 마침 이곳은 고향집이었으므로 더 가볼 수 있는 곳은 시내가 아니라 제(堤)일 것 같아서. 물과 나무가 우거진 곳으로 가보자 하면 더 가볼 수 있을 것 같아서 향했고 (……) 문득 이 제에 대해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 제의 물을 다 빼낸 적이 있었어. 정비 사업을 한다고 관청에서 사람들이 왔었지. 마침내 제의 물을 다 빼냈고 물이 다 사라지니 남은 것은 물속에 있던 선연한 물풀과 물고기. 어떤 주민들은 거기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어. 몇몇은 물고기를 품은 채 데려갔나. 그 물고기를 어떻게 했을까. 누군가는 눈물을 흘렸을까. 몰라. 그 물고기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하지만 관청에서는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몰라. 이윽고 제는 다시 물로 채워졌어. 물이 다시 생겼다. 생겨났다. 빼냈지만. 그러하여서 내가 지금 둘레를 걷고 있는 이 제의 생태계에는 온갖 생물이 살아가고 있는데, 실잠자리와 미나리, 갈대, 쇠물닭, 왜가리, 부들, 물꼬리풀, 거미, 송사리, 소금쟁이가 있었고 그 모습들을 바라보다가도 나는 시간이 지나 뜨거워질 한낮을 떠올려보기도 했고 한낮의 조그마한 그늘을 지나가고 있을 개미가 연상되기도 했는데. (……) 그날 나는 어땠나. 나는 비 오는 제를 몇 번이고 걸을 수 있었나. 이곳을 자주 오는 이유를 물론 내내 알아채고 있었나. 왜냐하면 제의 근방에 우리 개가 묻혀 있으니까. 나는 여름이 되어 무성해진 이곳을 돌면서 안도감이 들었다. 제의 둘레와 잠시 멀어져 우리 개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향하면서도 모든 게 자라나 있었으니까 마음이 놓였어. 이것들이 우리 개를 보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부러 풀을 헤치며 무덤 가까이 가지는 않았다. ―「오송」 중에서 이 시에는 새벽이라는 특정한 시간대가 반복된다. 새벽에 문득 잠에서 깬 화자는 자신이 지나쳐온 무수한 새벽의 시간들을 떠올린다. 언젠가는 눈을 뜨고 있기도 했고, 언젠가는 가만히 누워 있기도 했으며, 언젠가는 꿈을 꾸고 있었던 시간들. 여기에서 새벽은 분절된 하나의 시간대이자, 그 시간대를 중심으로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로 모이는 응축점이기도 하다. 새벽이라는 시간 안에서는 제각기 다른 순간과 행동도 하나의 가능성으로 겹쳐진다. 또한 새벽은 모든 것이 매일 새롭게 갱신되는 시간이다. 어제 새벽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오늘 새벽에는 불현듯 출현하고, 오늘 새벽에 하지 못한 일이 내일 새벽에는 이루어질 수도 있다. 새벽은 밤과 아침 사이를 흘러가는 시간이면서, 과거의 시간을 불러오고 미래의 시간을 당겨오는 잠재적인 지점이다. 시간의 열린 가능성을 어렴풋이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화자는 밖으로 나가 걷기 시작한다. 과거의 새벽에는 겪지 못했던 일도 현재의 새벽에는 겪을 수 있으므로 “지금에라도 나가야 할 것 같다”는 충동을 느낀 것이다. 화자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제(堤)다. 물이 흐르고 나무가 우거지고 날파리가 날아드는 어두운 둑을 걸어다니면서, 화자의 기대대로 여러 시간대가 서서히 하나씩 포개진다. 관청의 정비 사업 때문에 둑의 물을 빼냈을 때 마른 땅에 죽어 있었을 물고기들과, 한 달 전 둘레의 산책로를 걸었을 때 행여 밟을까봐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던 “풀쩍풀쩍 뛰는 여러 마리의 개구리”와, 둑의 생태계에 살고 있는 “실잠자리와 미나리, 갈대, 쇠물닭, 왜가리, 부들, 물꼬리풀, 거미, 송사리, 소금쟁이”와 같이 지금 눈앞에 보이는 온갖 생물들은, 행갈이도 선후도 없이 물결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비가 “나무 이파리들”에 닿은 다음 화자의 몸으로 흘러내렸듯, 각기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는 온갖 존재들을 동시에 부드럽게 연결하는 연쇄적인 동선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 느슨하고 응집된 연결 속에서 화자는 지금 새벽의 순간이 과거의 잔존이자 미래의 예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안태운의 시에서 시간은 아무것도 못하지만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아무것도 아니지만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여러 생물들을 떠올린 끝에 화자의 생각이 향하는 곳은 과거의 자신이다. 화자가 새벽에 굳이 둑을 걷고 있는 정황은 시의 후반부에서 밝혀지는데, 바로 키우던 개가 근방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화자가 새벽이라는 통로를 거쳐 오늘이 아닌 다른 날로 진입하고 싶었던 까닭은, 꿈에 자주 나올 만큼 그리워했던 개가 지금 이곳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라도 지금 이곳에 없는 개와 함께했던 시간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화자는 개의 무덤에 가까이 가지는 않는다. 그 주변의 “모든 게 자라나 있었”고 “이것들이 우리 개를 보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화자가 무덤가를 산책하면서 발견한 것은 죽은 개의 물리적인 흔적이 아니라 근처에 있는 생물들의 성장, 즉 시간의 흐름인 셈이다. 이것이 왜 화자에게 안도감을 주는 것일까? 시간은 어김없이 흐른다는 자명한 이치대로 세상이 올바르게 작동하고 있다면 죽은 개도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일까? 아니, 그보다는 이런 직감이 아닐까.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이 세계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움직인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개도 죽었다는 이유로 존재가 완전히 끝나버린 것이 아니라, 무덤 가까이에서 자라나고 있는 수풀, 물풀, 나무, 날파리, 개구리와 같은 온갖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생태계의 끊임없는 흐름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움직이고 있을 테니, 그렇다면 여전히 화자와 함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 시간이 그런 것이라면, 그러니까 생명을 사라지게 하는 무참한 것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생명을 자라나게 하는 신비로운 것이기도 하다면, 또한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가거나 서로 포개지기도 하는 것이라면, 개와 함께 보낸 시간도 과거에 그대로 박제된 것이 아니라 새벽에 둑을 걸을 때마다 새롭게 떠오를 수 있고, 꿈을 꿀 때마다 여러 마리의 형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중첩된 시간 속에서 우리는 언제든지 다시 마주칠 수 있다. 그리고 그때마다 기억을 새롭게 쓸 수 있다. 수동태의 기억들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떠올리는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기억은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여 뇌에 저장하는 인지적인 과정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기억이 의도적으로 지식을 암기하거나 주의깊게 감각을 각인하는 행위만으로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의식적인 통제와는 무관하게 특정한 자극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서 자동적으로 부호화되는 방식으로 형성되기도 한다. 이 경우 기억은 외부 세계에 대한 능동적인 인식의 결과라기보다 수동적인 반응으로 만들어지는 인상이나 흔적에 가깝다. 그렇다면 기억이란 과거가 차곡하게 쌓이는 저장소가 아니라 의식과 무의식, 의도와 우연이 교차하는 접속점이자, 과거, 현재, 미래가 중첩되면서 움직이는 통로이기도 할 것이다. 기억이 서로 다른 시간의 층위를 중첩하는 움직임이라면, 망각은 그 층위를 소거하는 움직임이다. 「불광천, 여름」에서 화자는 이전에 외국에서 만났던 외국인을 서울의 불광천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다. 화자가 놀라워하는 것은 시간이 흘러 다른 공간에서 두 사람이 재회했다거나 오랜만인데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자신이 예전에는 비교적 유창하게 말할 수 있었던 외국어를 이제는 비문으로 더듬거릴 만큼 잊어버렸다는 사실에 화자는 무엇보다 놀라워한다. 그러나 구사할 수 있는 언어를 하나 잃었다는 속상함이나 오랜만에 만난 친구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는 민망함은 보이지 않는다. 화자가 골똘하게 굴려보는 생각은 차라리 망각이라는 현상, 혹은 무언가를 잊게 만드는 시간의 흐름 자체다. 화자는 외국인 친구가 자신을 보면서 “말을 잊어버릴 수 있다는 걸 놀라워할까” 짐작해보기도 하고, “자신의 말을 잊어버릴 수 있다는 걸 나를 통해 깨달을까” 궁금해하기도 한다. 망각은 단지 특정한 기억이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시간의 질서를 재배열하는 일이다. 그것은 일시성, 우연성보다 지속성, 영속성에 특권을 부여하는 규범적인 시간성의 바깥을 사유하고 망각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시간의 가능성을 열어내는 일이기도 하다.2) 기억할 만한 것은 무엇일지. 해질녘. 짚이 타고. 냄새가 이리저리 번지고. 기억할 만한 건 무엇일까. 내가 지금 기억이라는 생각으로 이 도시의 공간들을 드나든다면. 이제부터 이 시간을 하나하나 공간으로 둔다면. 내가 가는 곳마다 실바람 불고. 해질녘. 호반새 날아들 것 같고. 퍼지고. 그렇게 나아가면서는 늦기 전에 박물관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았지. 출토된 것들. 오랜 세월 드문드문 발굴한 것들. 한데 모아놓은 것들. 가면서는 따라가듯 하고 싶었어. 무언가를 그냥 따라간다는 느낌으로 그것의 흔적이 놓여 있는데 수런거리는데 그 흔적이 귀띔하는구나 그걸 나는 눈치채는구나 하는 마음으로 걸어가는구나 횡단보도를 건너는구나 건너가면서는 실제로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와서 놀랐고. (……) 결국 박물관에 도착해 나는 내내 바라보다 멈추고 사진 찍는 인간으로 시간을 보낸다. 박물관을 떠나면서는 다른 흔적들을 찾아볼 것이라고 다짐했지. 발견할 수 있다는 듯이 조사단원처럼 매우 주의를 기울이며 걸어갈 것이다. 걸어서 그 걸음이 어떤 순간인지 어떤 기억인지 알아채며 갈 것이다. 해질녘. 어쩌다가 나는 총(冢) 주위에 있었고. 누가 살았는지 모르는 무덤 위로 온갖 동물들을 마주치는 듯하고. 그러니까 말, 소, 꿩, 사슴이 능선을 뛰어다니면서 모양을 이루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오묘한 능선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따라가고 있었는데 따라가는 나를 누군가 능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누군가를 또다른 말, 소, 꿩, 사슴이 따라가며 능선이라고. 능선과 너머, 그 이어짐은 끝없이 나열될 것도 같았는데. 그럼에도 끝이 있을까. 어떤 끝. 어떤 끝의 맺음. 매듭과 종료. 정말로 정말로. 결말. (……) 지금은 마침 오는 버스를 운좋게 탄다. 종점에 있는 마을로 그냥 향하게 된다. 나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는 참 좋았네. 정말로 정말로. 어딘가에 실려서 의탁해서 내가 모르는 장소로 내 눈을 풍경에 맡기는 느낌이라서. 모든 게 놀랍다는 생각이어서. 그러니까 문득 그날들이 훌쩍 지나 지금이라는 게. 퇴사일과 전역일과 만기일과 입학식과…… 그날들을 손꼽아 기다려온 날이 있었는데 얼마 안 남았다고 좋아할 때가 있었는데 그날이 훌쩍 지나 이제 그 모든 일이 과거라는 게 놀라워서, 지금이라는 게. (……) 기억될 만한 것은 무엇인지. ―「경주」 중에서 이 시는 화자가 해질녘의 경주에서 돌아다니는 이동 경로를 그리고 있다. 요약하자면 박물관에서 총(冢)으로 갔다가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도착한 후에 다시 총으로 돌아오는 경로다. 제법 먼 거리의 여러 지점을 들러 이동하고 있는 이 길에서 바뀌는 것은 공간만이 아니다. 화자는 경주에서 “시간을 하나하나 공간으로” 두어보기로 하고 돌아다니는 공간마다 새롭게 펼쳐지는 시간을 인식해본다. 이를테면 박물관에서 유적들을 구경하며 죽은 선조들의 삶을 생각하고, 총에서는 능선을 따라 뛰어다녔을지도 모르는 “말, 소, 꿩, 사슴”을 떠올리며, 버스 안에서는 “퇴사일과 전역일과 만기일과 입학식”을 “손꼽아 기다려온” 과거의 자신을 기억하고, 그러다가 무언가를 팔러 갔다가 돌아오는 할머니들의 대화를 엿듣는다. 천 년이 넘는 시간을 사이에 두고 수많은 생명이 하나로 포개져 몰려오는 것을 느끼며 화자는 이 아득한 시간의 흐름에 또다시 놀라워한다. 여러 층위의 시간을 체험하는 동안 화자가 스스로에게 되풀이해 묻는 것은 “기억할 만한 것은 무엇일지”다. 기억한다는 것은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별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모든 경험을 똑같이 취급함으로써 동일성을 만드는 일과는 반대로, 복잡하게 뒤섞여 있는 경험들 가운데 일부를 선별하여 차이를 만드는 일이다. 박물관은 그렇게 보관할 만한 역사적, 미적 가치를 지닌 물건을 모아두는 대표적인 기억의 저장소이다. 그런데 화자는 박물관에 방문하면서도 의외로 선별된 유물을 보는 데 대단한 관심이 있는 것 같지 않다. 화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오히려 그 바깥에 있다. 박물관에서 “오랜 세월 드문드문 발굴한 것들”과 “한데 모아놓은 것들”의 흔적을 따라가다가, 그곳을 떠나면서는 걸어다니며 스스로 “다른 흔적들을 찾아”보기로 다짐한다. 무덤 속에 누워 있는 선조가 아니라 그 위 능선을 뛰어다녔을 “말, 소, 꿩, 사슴”과 같은 동물들, 무덤의 안내문에서 보았을 “장육존상과 심초석, 해목, 추복, 녹유벼루”와 같은 옛 물건들은 마음속 상상으로만 떠오르고, 그것이 화자에게는 박물관에 박제된 역사와 다른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낸다. 그 기억은 특정한 기준에 따라 가치를 선별해 보존하는 능동적인 의지의 결과가 아니라 걷는 걸음마다 매순간 새롭게 생성되는 우연한 흔적에 가깝다. 시의 첫 구절인 “기억할 만한 것은 무엇일지”의 능동태가 마지막 구절에 이르러서는 “기억될 만한 것은 무엇인지”의 수동태로 바뀌어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애초에 화자가 움직이는 방식은 세계를 바꾸려는 능동적인 의지라기보다는 차라리 세계에 실려 있다는 수동적인 감각이다. 경주라는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걸음마다 마주하는 이곳의 풍경과 그 흐름에 맞춰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기억은 현재적인 움직임으로부터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기억될 만한 것’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은 단지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더 나아가서는 미래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것에 가깝다. ‘기억될 만한 것’은 애초에 고정되어 있거나 마땅히 발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의 새로운 경험과 감응을 통해 매순간 움직이며 형성되는 것이다. 망각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억에 붙들려 있지도 않는 것. 걷다가 멈추다가 머뭇거리다가 다시 걷는 산책의 리듬처럼 흘러가는 것. 그 리듬은 나를 새로운 시간 앞으로 펼쳐놓는다. 안태운의 시구를 빌려 다시 말하자면, “신기하다, 신기해”(「아이와」). 세계가 움직이다니. 시간이 흘러가다니. 기억이 흩어지다니. 계절이 되돌아오다니. 내가 달라지다니. 그것은 놀라운 일이다. 1) ‘미래를 상징하는 아이’라는 도상이 재생산 중심의 규범적이고 이성애적인 미래주의(heterofuturism)에 불과하다고 지적한 리 에델만의 비판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는 재생산의 시간성을 부정하는 태도가 쉽게 허무주의로 기울 수 있으며 퀴어 공동체에게도 ‘아직 도래하지 않은(not-yet-here)’ 미래의 지평이 필요하다고 말한 호세 무뇨즈의 비판을 더 기억하고 싶다(Lee Edelman, No Future: Queer Theory and the Death Drive, Duke University Press, 2004; José Esteban Muñoz, Cruising Utopia: The Then and There of Queer Futurity, New York University Press, 2009, pp. 19~33 참조). 2) 잭 핼버스탬, 『실패의 기술과 퀴어 예술』, 허원 옮김, 현실문화, 2024, 151~152쪽 참조. 핼버스탬은 가족이라는 표상에 결부되는 지속성, 영구성이라는 시간성에 과잉 가치가 부여되어온 반면, 우정과 같이 재생산과 무관한 관계와 연관되는 일시성, 우연성이라는 시간성은 폄하되어온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런 점에서 기억과 망각을 동등한 층위에 두고 일시적이고 우연하게 중첩된 시간의 역사를 포착하는 안태운 시의 시간성은 퀴어하다.
문학동네 2025 여름호_이주혜의 소설 읽기 달콤씁쓸한 암호들 사이에서 한 계절 동안 소설을 읽는 틈틈이 오래도록 번역 출간을 기다려왔던 앤 카슨의 책, 『에로스, 달콤씁쓸한』(황유원 옮김, 난다, 2025)을 읽었다. 사라지지 않을 것을 욕망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아무도 없다. 그리스인들은 이 점에 있어서 분명했다. 그들은 그것을 표현하고자 에로스를 발명했다.(29쪽) 그는 이어서 읽기와 쓰기 자체가 에로스적이며, 그 근거는 ‘우리와 우리가 대상으로 삼은 앎 사이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상상력의 놀이에 있다’고 역설한다. 다시 말해 작가는 은유와 속임수로 이 놀이 공간에 활기를 띠게 하고, 그 공간의 가장자리에 에로스가 나타나 사랑하는 대상을 보이지 않는 수수께끼이자 맹점으로 만들어, 그 대상이 알려진 동시에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있게 한다. 이렇게 앤 카슨의 글은 언제나 감탄과 아리송함을 동시에 안겨준다. 어쩌면 그 알 듯 말 듯 함이 그의 글이 지닌 아름다움의 근원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앤 카슨의 말을 빌리자면 읽기와 쓰기는 동시에 언급되어야 하는데 문학을 통한 의사소통 행위가 작가와 독자 사이의 은밀한 공모이기 때문이다. 작가와 독자는 텍스트의 두 절반을 연결해 그들 사이에 의미를 구성하고 이 의미에 다른 이들은 접근할 수가 없다. 이로써 글쓰기가 암호의 가능성을 지닐 때 읽기는 암호 줍기 혹은 제 식으로 암호 해독하기가 될 수 있다. 내가 이해한 식으로 말해보자면 출퇴근길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 내가 앤 카슨을 읽으며 빙긋 웃거나 이마를 찌푸리거나 ‘허! 이 언니가 또!’하고 중얼거릴 때, 그 공간은 오직 나와 앤 카슨만 아는 의미로 가득할 뿐, 수많은 다른 승객들은 적어도 그 순간, 그 공간에서 ‘우리의’ 공모를 전혀 눈치챌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계절 나는 정한아와 성해나와 예소연과 수반캄 탐마봉사와 ‘우리만의’ 의미를 만들며 놀고 공모했다. 정한아의 암호 : 굳이 기억해야 하는가 정한아의 『3월의 마치』(문학동네, 2025)는 『친밀한 이방인』 이후 8년 만에 발표한 장편 소설로 전작의 ‘이유미’만큼이나 수수께끼로 똘똘 뭉친 ‘이마치’가 주인공이다. 글쓰기가 암호이고 쓰기와 읽기는 그 암호를 둘러싼 작가와 독자의 한판 놀이라는 앤 카슨식 해석에 정한아만큼 딱 들어맞는 사례가 또 있을까. 『친밀한 이방인』에서 우리가 이유미의 정체와 이야기의 진상을 둘러싸고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할 때까지 암호 해독의 긴장을 늦추지 못했듯이 『3월의 마치』 역시 우리에게 난제를 안겨준다. 전작과 다른 점이라면 이번에는 인물의 정체나 사건의 진상보다는 이마치라는 인물 자체가 암호라는 것 정도랄까. 이마치는 성공한 60대 여성 배우인데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후 일종의 대안 치료로서 가상현실 치료를 받기로 한다. 그녀가 스스로를 인정하는 유일한 순간은 배우로서의 순간이었다. 그 외의 삶은 모조리 실패했고, 손아귀 사이로 빠져나갔다. 다른 사람의 가면을 쓰는 일, 그 일이 그녀를 살게 했다. 일은 그녀의 전부였다.(24쪽) 배우 외의 삶을 모조리 실패한 것으로 단정하는 그는 어떤 삶을 살아왔던 걸까? 평범한 서사였다면 이마치 자신의 진술이 이어지며 고통스러운 과거사를 들려주었겠지만, 정한아는 그렇게 쉬운 놀이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일단 주인공 이마치가 알츠하이머로 인해 과거의 기억을 잃었다지 않은가. 진단과 함께 그는 신뢰할 수 없는 화자가 되고 만다. 이마치의 과거가 알고 싶다면 우리는 이마치와 함께, 혹은 이마치가 되어 그가 동의한 가상현실 치료에 동참해야 한다. 물론 이 가상현실 치료 역시 어디까지나 실험 단계의 대안 치료이므로 이 안에서 이마치의 눈으로 목격하는 장면들도 신뢰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소설이라는 가상 현실 안에 또다른 가상 현실이 소재로 등장할 때 독자가 감수해야 할 이중의 의심이다. 어쨌든 우리는 이마치가 되어 이마치의 기억으로 지은 집에 들어가 그곳에서 관리자 노아와 함께 과거의 이마치(들)를 만난다. 이마치가 과거의 이마치(들)를 만나 대화도 나누고 싸우기도 하고 보살피기도 한다는 점에서 가상 현실은 시간 여행과 다르다. 즉, 이 안에서 무슨 짓을 해도 시공간의 왜곡이 일어나지 않는다. 과거를 아무리 여러 차례 기억한들 과거 자체가 달라지지는 않으니까. 그러므로 이마치가 들어선 가상 현실 공간은 ‘기억하기’의 거대한 은유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일까? 기억이란 아무리 반복해도 왜곡이나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배우의 상상력은 가짜 삶에 국한되지. 사람들에게 패턴화된 삶을 보여주는 거야. 하지만 진짜 삶에 패턴 같은 건 없잖아.”(131쪽) 이마치는 이렇게 배우 이외의 삶을 부정하지만, 기억 속 집의 관리자 노아는 그런 이마치를 위로한다. “이곳엔 수많은 당신이 있지만, 전부 당신이라는 존재의 허상일 뿐이에요. 거울에 비친 상과 같죠. 그러니까 도플갱어 어쩌고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은 유일하고 고유해요.”(86쪽) 그러나 기억을 잃어가는 이마치는 끝까지 ‘유일하고 고유한’ 자신을 지킬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고유한 자신을 알아볼 수는 있을까? 우리는 이런 의심을 떨치지 못하고 계속해서 이마치를 따라 수많은 과거의 이마치와 그들의 고통을 만난다. 의문은 꼬리를 물고 탄생한다. 이토록 고통스러운 기억까지 끝내 복원해야 하는가? 이것을 과연 치료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하지만 이마치가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는 이마치가 되어 그 공간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정한아가 제안하는 놀이는 이런 면에서 고약하고 지독하다. 그러나 한줄기 위안이랄까, 읽기를 포기하지 않게 하는 힘이랄까, 그런 게 있다면 바로 과거 기억과의 대면을 포기하지 않는 이마치 자신의 용기다. 그건 정한아의 용기이기도 할 터, 이마치와 정한아는 기억하기나 기억의 복원이 어떤 왜곡이나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다는 가상 현실 안의 원칙을 믿지 않는다. 기억하면 변한다. 치료는 몰라도 변화는 가능하다. 이마치가 이 치료를 통해 어떤 변화를 맞았는지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여기서 말하지는 않겠지만, 이 소설을 다 읽은 나는 죽음에 대해, 기억의 유실에 대해, 과거와의 대면에 대해 평소 품고 있던 어떤 생각들을 조금 바꾸었다. 그게 내가 정한아와의 놀이에서 주운 암호의 해독이다. 성해나의 암호 : ‘진짜 가짜’는 진짜인가 가짜인가 『혼모노』(창비, 2025)는 배우 박정민의 추천사에 따르면 ‘몰입의 파티’다. 정한아의 소설 읽기가 기억을 잃어가는 60대 배우 이마치가 되어 그의 고통스러운 과거와 대면하게 한다면, 성해나 읽기는 도무지 어느 편이 진짜인지 섣불리 알 수 없는 복잡다단한 상황 한가운데로 독자를 내동댕이친다. ‘초대’가 아니라 ‘내동댕이’다. 우리를 호랑이굴 한가운데로, 피가 낭자한 무당들의 작두 타기 굿판으로, 광화문 광장을 ‘이승만 광장’으로 부르는 이른바 ‘태극기 부대’ 사이로, 한줌의 빛과 희망마저 고문 받는 인간의 공포를 극대화하는데 이바지하게 하는 고문실 설계현장으로 데려간다. 해설 「진짜?―성해나 소설의 ‘나아감’에 대하여」에서 평론가 양경언은 읽기가 암호 해독 놀이일 수도 있다는 앤 카슨의 주장과 비슷한 맥락에서 성해나의 단편소설을 해석한다. 아르헨티나 소설가 리카르도 피글리아의 표현을 빌려 “‘보이는 이야기’와 그 속에 숨겨진 ‘비밀 이야기’의 다양한 방식의 조합”을 ‘단편소설’이라고 할 때, 성해나의 소설은 자신에게 부여된 현실의 세부를 힘껏 매만져가는 과정에서 세상의 진실을 드러내 보이는 인물들로부터 이야기를 채워나간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352쪽) 문제는 성해나가 짜놓은 ‘보이는 이야기’와 ‘비밀 이야기’의 조직이 겹겹이 질기다는 점이다. 태피스트리나 페르시아 양탄자의 거친 뒷면만 보고 매끄러운 앞면의 복잡한 문양을 알아맞혀 보라는 도전을 받는 기분이다. 그렇게 실컷 앞면의 문양을 짐작해보고 암호 해독에 성공했노라 은근히 좋아하다가 이런 문장을 만나면 어쩐지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 들고 만다. 신애기가 조소했다. 신빨이 다했다더니 진짠가보네. 할멈이 나한테 온 줄도 모르고. 그애는 살기 어린 눈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뭘 알겠냐만.(120쪽) 여기서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은 암호 해독에 실패한 읽는 사람일까, 완벽한 암호 설정에 실패한 쓰는 사람일까. 아니, 애초에 한몸으로 이루어지는 쓰기와 읽기의 상호작용 자체가(앤 카슨이 에로스적이라고 주장했던) 태생적으로 ‘존나 흉내내기’ 아닐까. 성해나는 에로스의 역설을 생래적으로 체득한 사람처럼 처음부터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진짜와 가짜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게 만들었던 단편 「혼모노」는 다음과 같은 독백으로 마무리된다. 삼십년 박수 인생에 이런 순간이 있었던가. 누구를 위해 살을 풀고 명을 비는 것은 이제 중요치 않다. 명예도, 젊음도, 시기도, 반목도, 진짜와 가짜까지도.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듯. 이제야 진짜 가짜가 된 듯.(153쪽) 자신이 진짜라고 믿었다가 가짜로 몰린 박수 무당은 이제야 모든 것에서 놓여나 ‘진짜 가짜’가 된다. 뒤통수를 맞다 못해 울고 싶은 심정이다. 진짜냐 가짜냐 물었더니 ‘진짜 가짜’라니, 작가님 너무하지 않소! 그러나 작가는 이에 대한 해명도 준비해둔 것 같다. 단편 「스무드」에서 유명 설치미술작가 ‘제프’가 한국 전시회에 들고 온 작품 <스무드>는 지름 2미터에 달하는 구의 형태다. “스테인리스스틸을 미끈하게 세공한 검은색의 구.”(70~71쪽) 작품 속 큐레이터는 한국 사람들이 유독 제프의 작품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인종 할당제’에 의해 유일한 동양인으로 제프의 매니저 팀에 합류한 ‘나’는 제프의 작품이 만인의 사랑을 받는 이유가 분노도 불안도 결핍도 없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그리고 인정한다. 사전지식 없이도 감상할 수 있고 뭘 안다고 감상이 크게 달라질 것도 없는 제프의 매끈한 작품처럼 ‘나’도 사람들도 그런 매끈한 세계를 추앙한다는 것을. 한국계 2세라는 사실조차 아버지로부터 부정당하며 철저한 미국인으로 자란 ‘나’가 아는 한국은 미국 드라마에서 본 뱀술이나 개고기를 파는 상점이 즐비한 우범지대, 낡고 부서진 건물들이 전부였다. 그러나 진짜 한국에 와서 만난 사람들은 스스로를 ‘열사’라고 부르고 광화문 광장을 ‘이승만 광장’이라고 부르며 ‘타이극기’를 흔든다. 그들은 ‘나’에게 떡을 나눠주고 기념품을 선물하며 ‘가족처럼’ 대해준다. 감동한 ‘나’는 미국의 아버지에게 사진과 함께 메시지를 전송한다. “저 지금 이승만 광장에 있어요. 아주 좋은 사람들과 함께요.”(109쪽) ‘진짜 가짜’만큼이나 아슬아슬한 가치판단이 필요한 문장이다. ‘나’가 만난 사람들은 정말로 ‘아주 좋은 사람들’인가. 내게 좋은 사람을 그렇게 쉽게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괜찮은가. 한바탕 블랙코미디 뒤에 적절한 조명을 받으며 매끄럽게 빛나는 작품이 <스무드>임을 기억하자. 이 불편한 조우를 통해 성해나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전시되는 세계는 모르겠고 적어도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계는 제프의 <스무드>처럼 날아가는 파리도 미끄러질 만큼 매끈하고 부드러운 구(球)체가 아니라고. 미끄러지기는커녕 무수히 많은 존재가 늘 세계와 부딪치며 부서지고 만다고. 그러니 세계는 오히려 박수 무당과 신애기가 올라탄 위태로운 작두 끝처럼 좁고 날카롭기가 더 쉽다고. 세계는, 더불어 인간 역시 언제나 울퉁불퉁하고 일그러진 다면체일 뿐이라고. 쓰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때론 뾰족하고 때론 구겨진 한 단면을 짚어 골똘히 바라보는 일에 불과하지 않겠느냐고. 그게 소설이 되어준다면 우리는 다시금 쓰기와 읽기의 호랑이 굴에 뛰어들어 수수께끼 같은 암호를 해독하면 족하다고. 이렇게 생각하면 성해나의 서사를 끌고 가는 가장 큰 힘 역시 정한아의 이마치 대면하기처럼 용기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세상에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도 모르는 ‘진짜’를 찾아보겠다고, 그게 안 되면 ‘진짜 가짜’라도 만나보겠다고 나서는 결기만큼 지독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예소연의 암호 : 무엇이 연루를 가능케 하나 『영원에 빚을 져서』(예소연, 현대문학, 2025)는 9년 전 캄보디아 해외봉사단으로 한 계절을 같이 보낸 세 친구 ‘나’와 ‘란’과 ‘석’, 세 여성의 이야기다. 엄마를 잃은지 얼마 지나지 않는 ‘나’는 우울과 애도 사이에 침잠해 있는데, 란으로부터 얼마전 캄보디아에 간 석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석을 찾으러 란과 함께 그곳으로 간다. 란과 ‘나’는 9년 전 석과 석연치 않은 관계였던 것으로 짐작되는 당시 바울학교의 학생 ‘삐섯’을 찾아간다. 실제로 삐섯은 석이 얼마 전 자신을 찾아왔었고, 지금쯤 어디에 있을지 짐작이 간다며 일행을 안내한다. 여전히 삐섯과 석의 관계를 불온한 것으로 오해하는 ‘나’는 삐섯의 과거를 추궁하다가 당시의 진상에 관해 놀라운 사실을 전해듣게 된다. 그리고 몇 년 전 란이 석과 ‘나’에게 청첩장을 전달하는 자리에서 석이 이상한 행동을 보였던 일을 떠올린다. “석이야. 좋은 날이잖아.” “누군가의 죽음에 그렇게 쉬운 방식으로 비극과 우연이라는 단어를 맥락 없이 갖다붙이면서 단순한 사고라고 얘기해버리는 게 너무 의아해.” “너 요즘 힘들어?” “어, 힘들어. 세상이 말도 안 되는 일투성이라서.” “그럼 도대체 어떡하자는 건데. 일어난 일을.”(61쪽) 정황만 보면 석은 참 눈치없는 사람이다. 친구에게 청첩장을 받고 축하를 건네야 하는 자리에서 자꾸 죽음을 이야기한다. 게다가 당시 ‘나’의 엄마는 투병중이었다. 분위기는 망가지고 셋은 똑같이 “남의 마음은 알려고 하지도 않은 채 자기 마음에만 골몰”(62쪽)한다. 그러나 몇 문단 지나지 않아 우리는 석이 왜 ‘힘들어’ 하는지 알게 된다. 당시 녹사평에 살던 석은 전철로 한 정거장 떨어진 이태원에서 일어난 사건을 “마치 제 일인 것마냥”(63쪽) 고통스러워한다. 당시 요양병원에서 엄마를 간병하고 있던 ‘나’는 그런 일까지 세세히 이해해주기에 마음이 너무 괴롭다. 이태원 참사를 둘러싼 세 친구의 각기 다른 마음은 캄보디아에 봉사단으로 머물던 해 “온종일 배가 침몰하는 과정을 생중계로”(33쪽) 지켜봤던 또 다른 참사의 기억과도 연결되어 있다. “대상 없는 배신감과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심”(33쪽) 때문에 세 친구는 멀어졌다. 그리고 9년 만에 다시 찾은 캄보디아에서 란과 ‘나’는 당시 석이 2010년 프놈펜에서 벌어진 꺼삑섬 물축제 압사 사고에 관해 영혼이 흔들릴 만큼 큰 충격과 참담함을 느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그러므로 타인의 고통이 전혀 남일 같지 않은 석에게 “그럼 도대체 어떡하자는 건데, 이미 일어난 일을.”과 같은 ‘나’의 말은 물리적인 동시에 정신적인 상처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서야 우리는 꺼삑섬과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를 연결하고 포개봄으로써, 9년 전 캄보디아와 그 이후 한국에서 맺은 세 친구 사이의 관계와 삶 자체의 변화를 짐작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소설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말을 작가의 말에서 찾았다. 『영원에 빚을 져서』는 실종된 친구를 찾아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사라진 사람의 흔적을 떠나 비로소 서로가 서로에게 연루된 존재임을 알게 되는 이야기이죠. 연루되는 일은 불가항력이지만 연루된 모든 존재를 놓치지 않고 톺아보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145쪽) 실종된 친구를 찾으러 떠나면서 시작하는 이야기는 끝내 그 친구를 못 만나고 끝이 난다. 대신 란과 ‘나’와 삐섯은 2010년 프놈펜 꺼삑섬 참사 현장 위령탑으로 간다. 그곳에 석은 없지만 대신 세 사람은 저마다 만날 사람을 떠올리거나 만나야 했던 어떤 마음을 만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만났다고 믿고 싶어한다. 참사를 통해 모두의 연루를 말하고, 연루를 통해 애도의 한 가지 분명한 방식을 예소연이 용기 있게 제안했으므로. 그게 예소연이 이 짧은 소설에서 은유랄지 아이러니랄지 그런 미학적 기술 없이 오로지 정직하고 우직하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을 것이므로. 그러므로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상실에 관해 담담하게 말하는 예소연의 생각을 읽고 있으면, 우리는 똑같이 미약하고 나약해서 오히려 계속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이상한 역설에 도달할 수밖에 없게 된다. 상실은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수많은 상실을 겪은 채 슬퍼하는 사람으로 평생을 살아가게 될 거고 그것은 나와 관계 맺은 이들에게까지 이어질 것이다. 엄마를 잃음으로써 내가 상실을 겪었듯, 누군가도 나를 잃음으로써 상실을 겪을 것이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 상실의 늪 속에서 깊은 슬픔과 처절한 슬픔, 가벼운 슬픔과 어찌할 수 없는 슬픔들에 둘러싸여 종국에는 축축한 비애에 목을 축이며 살아가게 되겠지. “나는 슬픔을 믿을 거야.” 처량하고 처절하고 절실한 것들을 믿을 거야.(113쪽) 수반캄 탐마봉사의 암호 : 묵음의 자리에서 어떤 소리가 날까 『나이프를 발음하는 법』(수반캄 탐마봉사 지음, 이윤실 옮김, 문학동네, 2025) 역시 외국 잡지에서 영어 텍스트로 먼저 접한 후 오래전부터 번역 출간되길 기다려왔던 책이다. 솔직히 knife를 ‘크나이프’로 Wednesday를 ‘웨드네스데이’로 외워본 적 있는 사람으로서 소설 제목만 보고는 비영어권에서 영어를 배우다가 일어나는 재미있는 해프닝인가 짐작했다가, 엽편에 가까운 짧은 이야기를 읽고 온종일 마음이 먹먹했던 기억이 난다. 라오스에서 캐나다로 온 난민 가족 아이는 단어 읽기 책을 보다가 참고할 그림이 없는 한 단어를 어떻게 발음해야 할지 몰라 집에서 유일하게 읽을 줄 아는 아빠에게 물어본다. 아빠는 단어를 골똘히 살펴보다가 “카-나-아이-프으, 카나이프.”(15쪽)라고 발음한다. 다음날 아이는 수업시간에 아빠에게 배운 대로 그 단어를 발음한다. 그러나 선생님은 틀렸다며 다시 발음하길 종용하고 아무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아이는 입을 다문다. 곧 같은 반 ‘노랑머리’ 여자아이가 세상에 그보다 쉬운 건 없다는 듯이 눈을 굴리며 말한다. “나이프예요! k가 묵음이에요.”(16쪽) 집으로 돌아간 아이는 저녁식사중에 아빠를 살펴보지만, 나이프의 k가 묵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 규칙 어쩌고 하는 것들에 관해 교장실로 불려가 무슨 말을 들었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거기서도 k가 묵음이 아니라고 우겼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아이는 교장실에서 우기고 또 우겼다. “맨 앞에 있는걸요! 첫 글자잖아요! 소리가 있어야죠!” 그러고서 아이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빼앗긴 양 괴성을 질러댔다. 아이는 아빠가 말해준 것, 그 첫 음을 단념하지 않았다. 평생 읽고 교육받아온 선생님 중 어느 누구도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 못했다.(18쪽) 아빠가 저녁을 먹는 걸 보면서 아이는 아빠가 모르는 게 또 뭐가 있을지 생각해본다. 부모가 전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아이는 공포와\를 느끼는 동시에 성장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야기 속 아이는 아빠에게 어떤 글자는 비록 존재하지만 발음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주고 싶으면서도 지금은 얘기할 때가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이것 역시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작가 수반캄 탐마봉사는 실제로 라오스계 캐나다 시인이자 소설가로 1978년 태국 농카이의 라오스 난민촌에서 태어났다. 이후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이주해 온타리오주 토론토에서 자랐다. 시를 먼저 쓰기 시작하며 문학계의 인정을 받았고 뒤이어 쓴 소설 역시 유수의 문학상을 받거나 후보에 올랐다. 2020년 스코샤뱅크 길러상을 수상한 『나이프를 발음하는 법』에는 이민자로서, 여성으로서, 어린이로서, 노인으로서, 소수자의 다양한 삶의 단층을 간결한 문장으로 묘파한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2019년 오헨리상 수상작이기도 한 단편 「슬링샷」의 화자는 일흔의 여성 노인인데, 이웃의 젊은 남성 ‘리처드’와 잠자리를 함깨 하는 사이가 되지만 리처드는 이 관계를 사랑이라 부르지 않는다. 주변 사람 모두 일흔 살 여성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부정한다. 그러나 ‘나’는 「나이프를 발음하는 법」의 아이처럼 자신에게 묵음의 위치를 강요하는 리처드를 스스로 지우고 홀로 존재하길 선택한다. 「파리」의 ‘레드’는 이웃집의 트럭과 상사 ‘토미’ 아내의 오뚝한 코와 공장의 사무실 자리를 원하지만, 동네 사람들과 함께 공장에서 닭털을 뽑는 게 그의 일이다. 그토록 지우고 싶은 라오스인의 정체성은 레드를 끝까지 따라다닐 기세다. 「세상의 가장자리」는 거꾸로 라오스인의 정체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굳게 믿는 엄마가 등장한다. 전쟁과 폭력을 겪은 엄마는 지구는 둥글다고 말하는 어린 딸의 주장을 인정할 수 없다. 그리고 어느 날 가족을 놔두고 홀로 집을 떠난다. 어린 ‘나’는 마흔다섯 살이 된 지금까지 엄마를 잃었다는 사실을 비통해하지만 아빠는 달랐다. 아빠는 비통해하지 않았다. 그는 난민이 되었을 때 이 삶의 모든 비통함을 소진해버렸다. 사랑을 잃는 것, 아내로부터 버림받는 것조차 사치였다―어쨌거나 살아 있으니까.(130쪽) 생존 앞에서 모든 비통함은 사치가 된다. 이들은 각자 다양한 위치에서 묵음의 자리에 서 있다. 분명히 머리글자로 존재하면서 도무지 음가를 가지지 못하는 knife의 k처럼. 「주유소」의 ‘메리’는 회계사이지만 조직의 일부가 되거나 사람을 상대하고 싶지 않아 프리랜서를 자처했다. 이 소설집 전체를 통틀어 가장 ‘성공한’ 인물로 보이는 메리 역시 자기부정과 도피 쪽을 선택하며 이렇게 말한다. 메리는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믿었다. 보이는 이들과 보이지 않는 이들. 메리는 자신은 후자라고 생각했다.(167쪽) 그러나 『나이프를 발음하는 법』 전체가 디아스포라적 불행으로만 점철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인물들이 처한 현실은 여느 난민서사처럼 냉혹하고 비참하지만, 이 소설집의 인물들에게는 스스로 묵음의 자리를 거부하려는 용기가 있다. 크게 눈에 띄지 않는 움직임이라도 저항은 저항이다. 무엇보다 모든 인물이 ‘라오스 출신 난민’이라는 집단 용어 안에 갇혀 대상화되지 않는다. 각자의 사정, 각자의 자리, 각자의 선택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어쩌면 이게 탐마봉사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이 아닐까 싶다. 그의 작품 속에 흐르는 미세한 희망과 두드러지는 아름다움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랜디 트레비스」의 다음 구절은 ‘에로스적 달콤씁쓸함’이란 무엇인가를 절로 깨닫게 하는데, 달콤함은 당분보다 오히려 슬픔의 함량으로 결정된다는 것을 나는 이 단편을 읽고 알게 되었다. 우리는 난민 정착 프로그램의 환영 선물 중 하나로 작은 라디오를 받았다. (……) 엄마는 작은 라디오가 조개껍질인 양 귀에 바짝 붙이고 들었다. 노래 사이에는 진행자의 짧은 멘트가 있었고 간간이 웃음소리도 들렸다. 웃음소리는, 어떤 언어에서든 웃음소리다. 거의 웃음은 부드럽고 은밀했으며 따뜻했다. 어딘가 외로운 느낌도 들었다.(59쪽) 묵음의 자리에 만국공통어인 웃음소리를 채워넣기. 그게 수반캄 탐마봉사가 소설을 통해 하고 싶은 일이라면 나 역시 적극 지지하며 기꺼이 동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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