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격월간 악스트 2024년 11-12월호(제57호)
픽션과 현실
1. 가짜 딜레마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할까? 지난여름 소설가 정지돈을 둘러싼 논란이 제기된 이후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생산적인 논의를 위한 출발점을 찾는 것이 여전히 쉽지 않아 보인다. 최초 폭로부터 정지돈의 2차 입장문이 나오기까지,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동안 내 나름의 입장과 문제의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해소되지 않는 이 혼란스러움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이번 사안을 바라보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당혹감을 느꼈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간 사회적으로 합의되었던 규범들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양상이 벌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 작품에 있어서 표현의 자유를 보호해야 한다는 미학적 규범과 타인에게 고통을 안겨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 규범 사이의 충돌. 모든 문학 작품에는 작가뿐 아니라 타인의 현실이 담겨 있을 수밖에 없다는 창작의 기본 원리와 타인의 삶을 동의 없이 가져와서는 안 된다는 윤리적 기준 사이의 대립. 특히 이번 사례처럼 고통과 피해를 체험했다고 주장하는 당사자가 등장하고, 그것이 자신의 실제 삶과 연동되어 있다고 증언할 경우 사안은 더욱 복잡하고 까다로워진다.
문제는 특정한 규범을 선택 지지하게 될 경우 자연스럽게 반대 의견을 부정하게 되고, 양자가 마치 양립 불가능한 입장처럼 인식된다는 점이다. 창작의 자유라는 미학적 규범을 절대적 준칙으로 삼아버리면 현실에서 주장하는 고통의 목소리가 비가시화될 우려가 발생한다. 반면 현실에서 통용되는 도덕적 규범을 무조건적으로 적용하게 된다면, 예술 작품의 근본 토대라고 할 수 있는 자유가 붕괴되는 결과가 초래된다. 이러한 극단적인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창작상의 허구적 변형과 관련된 규범적 기준들을 고안하려 노력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그에 대한 분명한 준칙을 세부적으로 정립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쩌면 논란의 초기 시점에 우선적으로 요구되었던 것은 두 규범의 대립이 야기할 수 있는 회색지대의 복잡성과 불투명성을 인정하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외면받는다면, 특히 각자의 정의를 내세우며 논쟁이 속도전으로 비화된다면, 우리가 목도해왔듯 담론장은 둘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를 강요하고, 반대 입장을 제압해야만 내 의견의 정당성이 확인되는 극심한 정치적 투쟁의 장으로 변질되기 마련이다. 결국 '문학 작품은 무한한 자유를 행사할 권리가 있다', '현실의 누군가에게 고통을 안기는 문학 작품은 사라져야 한다'는 식의 극단적인 원론들, 겉으로는 명료하게 느껴지지만 사실상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는 텅빈 명제들만 남게 될 뿐이다.
나는 두 원론적 목소리를 중재하고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단일한 '규범' 같은 것을 상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합의할 수 있는 보편적 기준과 원칙 같은 것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책임한 상대주의를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제기하고 싶은 문제는 '창작의 자유와 재현의 윤리 사이의 대립', '작가의 권리와 독자의 권리 사이의 충돌'이라는 이항 대립적 국면이 모종의 착시에 기반하고 있으며, 지금과 같은 인정 투쟁과 비생산적 갈등을 더욱 조장하고 있다고 사실이다.
요컨대 우리의 과제는 창작의 자유와 독자의 권리 사이의 충돌이라는 이분법적 딜레마의 허상을 넘어서는 일이다. 표면상 둘은 모순적이며 현재는 공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상 둘은 이율배반적인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동일한 토대를 공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술가의 권한과 수용자의 권리', '창작의 자유와 재현의 윤리' 중 무엇을 우선시할 것인가라는 물음으로는 이 토대가 밝혀지지 않는다.
따라서 문제의 틀을 바꿔야 한다. 문학 작품(예술 작품)에 대한 규범적 기준을 정립하는 것에서 문학이 문학으로서 지각될 수 있는 인식적 원리를 해명하는 것, 문학을 포함한 다양한 예술 작품들이 실존적으로 근거하고 있는 보편적 토대와 조건을 밝히는 방향으로 말이다. 이것은 문학을 다시 현실과 유리된 시공간에 가두는 일일까, 나는 그렇지 않으며, 오히려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문학 작품이라는 가상적 대상이 실제 현실과 연관을 맺을 수 있는 이유는, 문학의 근본적 토대를 현실의 인간 역시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그것을 잠정적으로 '픽션적인 것' (The Fictional)이라고 부를 예정이다. 픽션적인 것은 문학(예술)과 현실을 구분하는 원리라기보다 문학과 현실을 매개하고, 양자가 접촉할 수 있도록 만드는 보편적 가교에 가깝다. 그러나 이 말이 문학과 현실이 동일한 지평에서 논의될 수 있다는 뜻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문학은 현실이 아니며, 현실 역시 문학이 아니다. 이를 혼동할 때 우리는 문학과 현실 중 무엇을 더 중시할 것인가와 같은 잘못된 물음 앞에 언제든지 내몰릴 수 있다.
해결하기 어려운 여러 난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현 시점에, 이 글이 우선적으로 시도해보고자 하는 일은 문학적 허구와 실제 현실 사이의 관계에 관한 인식적 모델을 재정립하는 것이다. 이번 사안과 관련하여 서로 다른 입장과 관점, 그리고 규범적 주장들이 첨예하게 대립하도록 만드는 밑바탕에는, 예술가에 의해 가공된 허구적 창작물과 그것에 상응한다고 여겨지는 실제 현실 사이의 중첩(Overlap) 및 교차(Intersect) 가능성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굳이 중첩과 교차라는 낯선 용어를 제시하는 이유는 문학과 현실의 관계를 논할 때 익숙하게 사용되었던 모방·지시·재현·표현 등의 개념과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개념들은 문학 작품과 현실 사이의 동일성 및 유사성을 전제하고, 양자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반영·변형의 정도와 그 적절성을 따져 묻는 문제로 논의를 좁힌다. 어떤 경우든 현실이라고 불리는 대상이 선재하고, 문학 작품은 그것에 대한 2차적 변형의 결과라는 대전제가 작동하는 셈이다. 나는 이런 접근법이 이번 사태를 파악하는 데 그리 생산적이지 않으며, 문학 작품을 읽을 때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지각 경험 전반을 이해하는 데에도 그리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2. 두 패러다임 - 객관주의적 반영론과 주관주의적 표현론
일반적으로 우리는 문학 작품을 작가의 의도에 의해 가공된 가상의 세계로, 현실을 무수히 많은 사실들로 축적된 실재의 세계로 엄격히 구분한다. 물리적 층위에서 이러한 구분은 분명 타당하다. 문학은 특정 저자에 의해 인공적으로 창작된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며, 현실은 우리가 감각·지각·경험할 수 있는 엄연히 존재하는 세계를 가리킨다. 문학 작품으로 구현된 세계와 실제 세계가 혼동되지 않는 이유는 '허구'라는 지표를 매개로 양자가 명확히 식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실감나게, 살아 있는 것같이 느껴지는 소설 속 인물이라 하더라도 그 인물이 물리적 현실에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문학의 현실과 우리가 근거하고 있는 실제 현실이 일치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문학 이론의 역사는 이처럼 자명해 보이는 문학의 본질적 허구성, 혹은 가상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속성을 해명하고 그것과 현실의 관계를 모색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했다. 수많은 이론적 탐구들이 있었지만, 나는 그것들을 두 가지 모델 또는 패러다임으로 단순하게 범주화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범주화를 제안하는 이유는 이를 바탕으로 우리 앞에 놓인 가짜 딜레마의 발생 원인을 파악하고, 이와 관련된 다양한 극단적 폐해들을 기술하기 위해서이다.
(1) 객관주의적 반영론(Objective Reflectionism)
문학과 현실이 허구를 매개로 연결될 수 있는 원리는 무엇일까. 가장 오래된 가설적 대답 가운데 하나가 바로 유사성이다. 꾸며낸 이야기로서의 문학은 비록 실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유사성 덕분에 현실을 향한 지시적 성격을 갖는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모방(Mimesis)에 관한 플라톤의 사유는 가상의 문학 작품이 현실에 대해 갖는 지시적 성격을 문제 삼는다. 플라톤에 따르면 문학의 모방은 어디까지나 현실(나아가 이데아)에 대한 불완전한 모방일 수밖에 없다. 이때 허구성은 문학 작품과 현실 사이의 간극·괴리·격차를 가시화하는 부정적인 측면을 뜻한다. 문학은 근본적으로 허구이기에 늘 세계의 진실에 미달하며, 문학과 예술은 현실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적 허구는 위험하다. 허구는 늘 실제 현실에 대한 왜곡과 변형을 수반하는 가운데, 수용자의 감정을 선동하고 이성을 마비시킴으로써 실제 현실을 오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자신이 구상한 이상적 국가로부터 과감히 시인을 추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론은 플라톤에게 폄하되었던 허구의 위상을 복원하는 것, 그리하여 문학과 현실의 관계를 재조정하는 이론에 해당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문학이 모방의 산물이며, 실재하지 않는 가상들을 제작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다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세계가 실제 현실에서의 삶보다 더욱 '보편적'이고 '철학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역사가는 물리적으로 일어났던 과거의 사건을 기록하고, 시인은 일어나지 않는 가상의 사건을 구상한다. 그러나 시인이 만든 허구의 세계는 현실에서 발견되지 않지만, 개연성과 필연성의 법칙하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종의 '가능 세계'일 수 있다. 무수히 많은 우연적 계기와 우발적 사건으로 가득하기에 역사적 현실에서는 도덕·윤리·정의라는 가치가 충분히 실현되지 않는다. 반면 개연성과 필연성의 원리에 의해 구축되는 문학은 이러한 가치들이 충분히 현실화될 수 있는, 일종의 가능성의 시공간으로 거듭난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문학에 무한한 자유를 허용했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방의 결과(문학적 허구)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우리의 현실에서 존재할 수 있을 어떤 진실에 대한 반영이어야 한다는 제약 조건과 규제의 원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진짜 세계가 아니라는 점에서 문학은 여전히 현실의 그림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그림자를 통해 현실의 숨겨진 진실을 발견하고, 인간과 세계에 관한 더욱 진실한 인식적 통찰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편의상 두 고전적 사례를 가져왔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정초된 허구 이론은 이후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며 문학과 현실의 관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거듭났다. 이를테면 사실주의, 자연주의, 리얼리즘, 마르크스적 리얼리즘 등의 다양한 현대적 사조들은 문학과 현실의 관계를 인식하는 데 있어 어떤 공통의 패러다임에 속한다고 범주화될 수 있다. 이러한 패러다임에 따르면 세계는 우리의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이자 현실에 해당하고, 문학은 그에 대한 정교한 모방·변형·인용으로 빚어진 허구적 결과물로서의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다. 원본으로서의 현실과 이차적 복제품으로서의 문학이라는 명료한 이분법, 자연스럽게 문학의 발생학적 원천, 그리고 문학의 허구성을 정당화하는 토대와 근거는 문학 바깥의 현실에서 탐색되며, 현실이라는 객관적 대상과 문학적 허구 사이의 지시적 관계가 중요한 평가 척도로 작용한다. 요컨대 관건은 문학에 반영되는 현실이 얼마나 정확히 반영되는지, 정치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진실되게 재현되는지 여부이다. 허구의 가치를 정당화하는 것은 허구성 그 자체가 아니라, 허구에 함축되어 있는 현실의 진실성이어야 하는 셈이다. 이처럼 허구 바깥의 현실이 객관적 대상처럼 존재하고 문학적 허구를 그것을 되비추는 거울로 간주하는 시각, 현실을 재현되어야 할 객관적 세계로, 그리고 문학을 그것을 지시하는 허구적 가상으로 구분하는 패러다임을 객관주의적 반영론이라고 불러보자.
(2) 주관주의적 표현론(Subjective Expressionism)
문학과 예술의 역사는 이러한 객관주의적 반영론이라는 패러다임에 도전하고 저항하는 방식으로 다양한 형태의 이견들을 제출하며 전개되어왔다. 만약 문학과 예술의 가치를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를 외부의 현실에서 발견해야만 한다면 모든 작품은 유사성과 동일성의 원리에 지배되어버리며, 결국 문학과 예술은 현실의 복제에 불과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과 예술이 현실과 세계로부터 해방되고 독자적인 자율성의 영역을 구축하는 데 있어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칸트의 예술론일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예술의 아름다움은 모방의 결과가 아니라, 천재적 영감의 산물이다. 예술가는 무질서하기만 한 경험적 현실에 어떤 보편적 형식과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현실과는 구분되는 미적인 세계를 자유롭게 만들어내는 존재로 묘사된다. 일종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로 지칭될 수 있는 이러한 전환을 기점으로 문학과 예술의 정당성이 외부의 객관적 현실이 아니라 창작의 주체, 나아가 예술 작품 그 자체라는 주관적 영역에서 탐색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물론 칸트가 예술과 현실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을 의도했는지에 관해서는 다양한 해석과 평가가 공존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칸트가 시도한 전화로 인해 예술적 허구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들이 촉발되고, '예술-현실'의 관계에 관한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이 태동했다는 사실이다.
아브람스(M. H. Abrams)의 고전적인 선언처럼, 예술은 외부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 아니라 스스로 빛나는 램프가 되어야 한다. '예술의 자율성', '예술가의 독립성', '예술을 위한 예술', '예술의 진정성' 등 흔히 낭만주의적 예술관을 대변한다고 알려진 오래된 명제들은, 객관주의적 반영론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확보된 일종의 이념적 전리품들이다. 이로 인해 예술가의 사회적·제도적 지위의 급격한 상승이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이제 예술가들은 더 이상 현실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게 되었으며, 자신에게 부여된 창조적 역량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주관적 존재로 표현된다. 오스카 와일드는 그러한 태도를 이념화한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그에 따르면 예술가의 임무는 현실이나 삶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허구 그 자체를 재현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오래된 거짓말의 기술을 되살리는 것이다."1) "예술이 삶을 모방하는 것보다 삶이 예술을 훨씬 더 많이 모방하는 게 사실"2)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다소 극단적인 예술 지상주의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이러한 '예술-현실'론은 현대의 다양한 형태의 미학 이론의 토대로 작용해왔다. 심리주의, 표현주의, 인상주의, 모더니즘, 초현실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다양한 스펙트럼에 속하는 작품과 미학 이론의 계열들이 공통적으로 호소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외부의 현실로부터 진실의 정당성을 발견할 수 없다는 (찰스 테일러의 개념을 빌리자면) 일종의 반토대주의(Anti-Foundationalism)적 주장이다. 예술의 본질은 창작자, 또는 그 정신이 외화된 작품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으며, 예술 내부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의 허구적 표현만이 진정한 주관적 진실이라는 이념이 형성된 것이다. 이처럼 예술적 허구를 사회적 규범이 침투할 수 없는, 철저히 자율적인 내적 영역으로 구획하려는 패러다임을 잠정적으로 주관주의적 표현론이라고 불러보자.
3. 한계들 - 윤리의 미학화와 미학의 윤리화
앞에서 내가 간략하게 제시한 구분법으로 (당연한 말이지만) 기나긴 예술사의 복잡하고도 다층적인 계열 전부를 개괄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두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은 예술과 세계의 관계를 이해하고, 그 관계 속에서 '허구적인 것'에 위상을 부여하는 다양한 입장들을 보다 심플하게 범주화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딜레마에 내포된 인식론적 함정이 무엇인지를 가시화하는 데, 나아가 이와 관련하여 파생될 수 있는 여러 폐해들을 묘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두 패러다임은 문학적 허구와 현실의 관계를 전혀 다르게 파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동일한 전제 하나를 공유하고 있다. 두 패러다임은 문학적 허구와 현실을 구분하는 가운데, 현실을 문학 바깥에 존재하는 외부 세계로 전제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차이는 이러한 명료한 이항 대립적 원리 속에서, 문학과 예술에 대한 규범적 정당성을 어디에 부여하느냐에 따라 발생할 뿐이다. 허구성이라는 속성을 척도로 현실(객관주의적 외부)과 문학(주관주의적 내부)을 나누는 구분법은 직관적 상식에 부합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다른 측면으로는 많은 오해를 낳을 수 있다. 특히 이번과 유사한 사례들처럼 허구와 현실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경우, 그리하여 현실의 규범과 미학의 규약이 충돌한다고 오인되는 경우, 둘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와 같은 그릇된 물음에 내몰리고, 그에 따라 많은 부정적인 효과가 초래될 수 있다.
가령 객관주의적 반영론에 의거하게 된다면 현실 사회에서 준용되는 여러 기준들, 이를테면 도덕·윤리·법을 바탕으로 허구를 규제하고 통제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허구를 객관적 현실에 대한 반영으로 규정해버림으로써 허구적 반영에 있어서의 대상 및 정도와 관련된 규범이 제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극단화 될 때 나타나는 것은 (미학의 윤리화가 아니라) 윤리의 미학화이다. 윤리의 미학화를 통해 실제로 선하고 정의로운 허구적 세계를 구현할 수 있다면 그것도 하나의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의 실제 현실이 그러하듯, 도덕과 정의를 구체적으로 정의하는 데 있어서 상이한 입장들이 공존하고 갈등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들이 유발하는 갈등과 적대는 문학과 예술을 정치적 투쟁의 무대로 전환시킨다. 윤리의 미학화가 야기하는 것은 단순히 윤리의 군림이 아니라, 윤리들 사이의 인정 투쟁으로 점철된 극심한 내전 상태이다.
반면 주관주의적 표현론이 극단화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외부 현실과의 단절을 당연시하고, 허구 자체의 무제한적인 자율성과 독립성을 용인하는 흐름이 전면화되는 순간 도덕·정의·정치·과학 등 역사적으로 인류가 힘겹게 합의해왔던 가치·규범·지식들은 예술적 허구의 무한한 자유 앞에서 그 어떤 목소리도 낼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사회적으로 통용되고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허구를 판별하고,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의미 있는 허구를 식별할 수 있는 기준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러한 현상이 극단화될 때 나타나는 현상은 (윤리의 미학화와 구별되는 의미에서의) 미학의 윤리화이다. 이를 통해 예술을 현실로부터 완벽히 고립시킬 수 있다면 그것도 하나의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도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미학의 윤리화는 예술적 허구의 현실적인 것으로부터의 단절을 빚어내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경우 현실에 대한 예술의 역설적 침범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학의 윤리화는 예술을 자율적인 공간에 가두는 대신 예술과 현실, 미학과 윤리 사이의 빗장을 해제한다. 미학이 공동체의 도덕적·윤리적·사실적 규범들을 파괴하고 현실을 점령하는 결과를 막지 못하며, 때로는 그런 상황을 독려하고 정당화하기도 한다. 벤야민이 사례로 들었던 파시즘의 미학(정치의 미학화)이 그와 무관하지 않으며, 오늘날 문제시되었던 예술가들의 수많은 (예술의 이름으로 자행된) 범죄 행각들이 그와 관련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탈진실'(Post-Truth)이라는 동시대적 국면들이야말로, 예술적 허구가 현실과 일치할 때 나타날 수 있는 사태의 세속화(Secularization)된 버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관건은 둘 중 어떤 것으로도 현재 우리가 당면한 딜레마를 해결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술의 입장에서 현실을 잠식해버리는 극단적 상황(미학의 윤리화)이 발생할 때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모든 것이 다 허구다',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식의 인식론적 상대주의 또는 무정부 상태이다. 반면 현실의 입장에서 예술을 장악해버리고 허구적인 것에 내포된 자유의 계기를 제거해버리면, 결국 맞이하게 되는 것은 현실이라는 이름의 다양한 이념적 전제 국가들 사이의 전쟁, 즉 예술의 종말이다. 이 사실이 간과될 때 우리는 또다시 '예술 작품(예술가)은 현실로부터 자유롭다', '문학은 현실을 억압하지 않는다',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작품은 사라져야 한다', '예술을 삶보다 우선시할 수 없다', '문학보다 현실이 더 중요하다' 등과 같은 동의하기 어려운 원론들 사이에서 무의미하게 방황하게 된다.
4. 중첩과 교차
이와 같은 비생산적인 내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문학과 현실을 둘러싼 복잡한 관계를 재인식할 수 있는 다른 프레임이 제시되어야 하며, 특히 양자를 구별 짓는 요소로 지목되는 '허구'의 위상을 재정립해야 한다. 왜냐하면 허구는 문학과 현실을 분리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존재론적 요소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중첩과 교차의 방식으로) 양자의 만남과 접촉을 가능하게 하는 실재론적 조건으로 재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 글에서 '픽션적인 것'이라고 부르게 될 이것은 문학(예술)과 현실(세계)이 공유하는 어떤 근본 토대로서, 객관주의적 반영론으로도 주관주의적 표현론으로도 온전히 인지되지 않는 어떤 것으로 강조될 예정이다. 일반적으로 허구는 실재하지 않는 어떤 것으로 인식되기 마련이다. 허구로서의 이야기는 만들어진·상상된·꾸며낸 서사로서 우리가 실제 살아가고 있는 현실과 구분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문학적 허구라는 가상적 세계가 실제 살아가고 있는 현실과 모종의 연관을 맺고 있다고 느끼고, 대단히 유사하기도 하며, 또 그래야 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훌륭한 문학 작품을 읽은 경우, 텍스트가 보여주는 허구적 인물과 허구적 삶이 물리적 현실의 그것보다 더 '진실하다'고 느끼기도 하고, 이 감각을 토대로 현실에 대한 이해를 재조정하기도 한다. 물론 늘 긍정적인 효과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특정 문학 작품이 전개하는 세계관과 대면하여 불쾌감을 느낄 수 있고, 나와 유사한 입장에 처해 있는 인물들이 부당하게 다뤄진다고 여겨져 상처 입을 수도 있다. 때로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 누군가에게 나쁜 평가를 받고 비난받을 때, 마치 나 자신의 일부가 모욕당한 것 같은 기분을 체험하기도 한다.
문학 작품이라는 가상 세계가 실제 현실에 미치는 이러한 영향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인간이 단지 물리적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의미(Sinn)의 장들 속에서 모종의 의미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약 의미가 없다면, '현실' 또는 '세계'라는 말은 무수히 많은 물리적 사실들의 집합을 나타내는 죽은 기호에 불과할 뿐이다. 의미는 문학 작품이라는 가상 세계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현실 세계를 이어주는 '실재론적' 교두보이다. 의미가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뜻일까. 그렇지 않다. 의미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숨겨진 선험적 진리 같은 것이 아니다. 의미는 그것을 상상하고, 감각하고, 추구하고, 보존하려는 인간의 적극적 역량에 의해 부여되고 재구성되는, 보이지 않는 가치이다. 의미는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이 의미는 아니다. 인간이 아직 상상하고, 구성하지 못한 의미가 우리의 의미장 바깥에서 영원히 잠재적인 형태로 비가시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의 허구와 그 바깥의 물리적 세계가 연결될 수 있는 이유는, 이처럼 의미를 매개로 어떤 교집합이 형성되기 때문이며, 이러한 의미들로 구성된 장(Field) 위에서 직간접적인 상호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때 상호작용이 단방향적인 것이 아니라 양방향적이며 지속적으로, 때로는 무한히 일어날 수 있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지나치게 상식적인 이야기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러한 의미의 사태는 전혀 새로운 진실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일터에서, 문학 작품을 읽는 서재 등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지각 경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외로 그동안의 문학 이론은 이처럼 당연하고 사소해 보이는 실재적 현상에 (어쩌면 지극히 상식적이라는 이유로) 주목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최근까지 우리가 목도했던 극심한 대립도, 문학과 현실의 관계를 설명하는 기존의 이론적 패러다임들도 바로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서 강조해야 하는 것은 의미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외부 대상에 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 유명한 프루스트의 '마들렌'을 떠올려보자.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마들렌'과 마들렌을 통해서 출현하는 '의미'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마들렌의 '맛'이라는 물리적 속성을 감각한 프루스트가 자신의 과거를 기억·추억·상상·이미지화하는 과정을 통해 적극적으로 마들렌의 의미를 출현시켰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마들렌의 의미를 엄밀한 뜻에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한 의미에 대응되는 외부의 대상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마들렌의 의미를 부정하거나, 그것을 망상과 착각의 산물이라고 폄훼하지는 않는다. 프루스트에게는 마들렌의 '존재'보다 그것을 통해 출현한 의미의 현전성과 진실됨이 더욱 중요하게 지각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우리는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마들렌이 '존재한다'고 규정하고, 마들렌이 촉발한 의미가 '실재한다'고 구분 지을 수 있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을 짚을 수 있다. 방금 나는 프루스트의 '마들렌'과 관련한 구체적인 배경 지식이나 맥락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것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실제 프루스트가 아닌) 주인공이 맛보는 그 '마들렌'임을 지각했을 것이고, 문학사적으로 대단히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특정 장면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처럼 '마들렌'을 함께 지각할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할 수 있는 이유는 '마들렌'이 현실에서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의미의 장 속에서 '프루스트의 마들렌'으로 지칭될 수 있을 특정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떠올리고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프루스트의 마들렌은 허구적인 가상 세계에서 제시된 일종의 기호에 불과한 것 아닐까. 바로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프루스트의 마들렌을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어떤 것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내가 떠올린 마들렌과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이 떠올린 마들렌은 완벽히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마들렌을 상상하고 이미지화할 때 그 재료가 되었을 현실에서의 지각 경험이 상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들렌의 실재는 그것을 떠올린 사람들의 이미지 상만큼 복수적일 수밖에 없다.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사건·배경·대상·장면들은 그것에 대응되는 물리적 대상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이다. 허구적인 대상을 실재한다고 규정하는 이러한 주장은 다소 낯설게 느껴지거나 이상한 궤변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라고 하는 시공간도 이처럼 '존재하는 것'과 '실재하는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신실재론을 이끌고 있는 독일의 철학자 마르쿠스 가브리엘(Markus Gabriel)이 주장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방대하면서도 논쟁적인 철학적·인식론·존재론·윤리학을 소개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도 아니고 이 글이 감당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의 의미 실재론은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문화적 교착 상태를 해결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 특히 최근 한국어로도 번역된 『허구의 철학』은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폄훼했던 '허구적인 것'이 실제 현실을 지각하는 데 얼마나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나아가 문학과 현실의 관계를 보다 상식적으로 인지할 수 있도록 기여하는 것 같다.
5. 허구적인 것의 실재
가브리엘의 신실재론이 지닌 주요 문제의식을 표현해줄 수 있는 간략한 명제는 이것이다. '세계는 존재하지 않고, 허구는 실재한다.' 이러한 명제를 포스트모더니즘적 구성주의나 인식론적 회의주의로 오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가브리엘의 철학적 작업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가 무수히 많은 허구들로 가득하지만, 그러한 허구들 덕분에 보편적인 층위에서의 의미가 출현할 수 있음을 입증하려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에 내포되어 있는 메시지에 접근해보자.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세계'나 그와 유사한 계열의 단어들, 이를테면 현실·사회·삶 등의 기호를 사용할 때 어떤 일이 수행적으로 일어날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세계'라는 기호를 발화할 때 그것에 대응되는 대상이 명징하게 존재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세계'라는 기호가 가리킬 수 있는 총체적인 세계상은 있을 수 없으며, 늘 그 기호를 사용하는 주체에 의한 의미론적 선택과 배제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가령 물리적인 장소로서의 '서울'을 떠올릴 때를 생각해보자. 서울이라는 기호의 경우에도 내가 마음속에서 표상하는 서울과 다른 사람이 표상하는 서울은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상에서 서울이라는 기호를 사용할 때 그것은 행정구역으로서의 서울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경험 속에서 축적된 서울에 대한 기억과 생각, 이미지들이 종합적으로 재구성된 결과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모종의 선택과 배제, 그리고 편집과 상상이라는 프로세스가 발생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며, 서울에 대한 특정한 경험적 국면들이 재료로 활용된다는 점이 핵심이다. 이것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대상을 지시·지각·감각할 때, 반드시 인간의 허구적 역량이 작동해야 함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허구란 단순히 비실존하는 어떤 가상 세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허구란 우리가 우리 삶의 장면들 안에 놓인 대상들과 관련 맺는 사이사이의 틈새에서 벌어지는 정신적 사건들이다. 우리는 의식적 삶의 매 순간에 우리를 장면 안에 놓는다.3)
사람들마다 떠올리는 서울의 상이 다른 이유는 서울을 떠올릴 때 동원되는 현실적 경험의 차이에서 비롯되며, 그와 같은 적극적 의미 부여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허구적 상상의 양태가 다르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서울은 존재하지만, 의미의 층위에서 서울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허구라는 정신적 사건의 발생 때문에 서울 그 자체를 허구적인 것으로 단언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허구가 개입한다고 해서, 서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섣불리 메트릭스적 환상이나 환영으로 간주해버리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인식론적 회의주의에 빠지게 된다. 스탠리 카벨(Stanley Cavell)의 말을 인용하며, 가브리엘은 허구적 환영에 적극적인 역할을 부여한다.
환상을 실재와 분리된 세계로, 자신의 비실재성을 명백히 드러내는 세계로 간주하는 것은 환상에 대한 매우 궁핍한 견해다. 실재가 변경될 수 있는 것은 바로 환상이 있기 때문이다. 실재의 가치에 대한 우리의 신념은 환상을 통해 형성된다. 우리의 환상을 포기한다는 것은 우리와 세계 사이의 접촉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4)
각자의 서울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서울에 관해 사람들과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서울'이라는 기호 속에 서울은 존재하지 않지만, 각자의 의미장들이 공존하는 가운데 서울이라는 공통의 의미가 실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양한 의미의 장들이 서로 중첩·교차될 수 있는 허구적 영역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최소한의 의미론적 토대임을 말해준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처럼 상상적으로 실재하는 것들의 의미장들 속에서 살아가며, 그것에 분명한 실재론적 권위와 믿음을 부여하고 그로부터 보편적인 규범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허구적 실재이다. 국가, 공동체, 도덕, 윤리, 정의, 법 등이 바로 그러한 대표적 사례들이다. 여기서 가브리엘이 세계는 존재하지 않지만, 허구는 실재한다고 주장한 진의를 찾을 수 있다. 허구적인 것은 인간이 의미를 발견하고, 구성하고, 부여하려는 모든 영역에서 활동하며, 우리는 허구적 상상을 토대로 세계를 파악하고, 인지하고, 감각하면서 의미의 실재를 출현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내가 이해하기에 허구란 우리에게 우리 삶의 장면으로서 감각적 직관에 단박에 나타나는 놈의 틀을 벗어난 사정에 대한 묘사다. 따라서 허구는 텍스트 유형의 유적 특징도 아니고 예술 작품의 정의에만 특유하게 등장하는 개념도 아니다. 허구는 법률 안에도 있고 자연 과학, 신학, 철학, 또 우리의 지극히 일상적인 몽상 안에도 있다. 거의 모든 진술과 모든 사실 보고는 허구적 성분을 지녔다. 하지만 감각적으로 여기 있지 않은, 참인 진술의 모든 대상이 허구적이거나 꾸며낸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제안은 문학적 허구성 범주를 토대로 삼은 과도한 일반화가 아니라 거꾸로 문학적 허구성을 정신적 생물의 자기 이해에서 역할을 할 수 있는 무언가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이론의 첫걸음이다.5)
그의 말처럼 허구는 문학이나 예술에만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인간이 의미를 생성하고자 한다면 모든 곳에서 작동할 수밖에 없는 지각적·상상적 역량을 뜻한다. 이처럼 인간에게 허구가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작용하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인간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의미를 지닌 사람인지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자기 규정적 욕망이 있는 정신적 존재이다. 둘째, 그러나 나는, 그리고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와 현실은 총체적으로 완벽하게 파악될 수 없는 대단히 불투명한 시공간이다. 인간은 그런 불투명한 시공간 속에서 불투명하기만 한 자기 자신을 정의하고 규정하기 위해 애쓰는 정신적 존재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이 인간의 자유가 활성화되는 장소이다.
허구들의 범위를 최종적으로 확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허구들은 우리의 정신적이고 자유로운 삶의 표현이며, 그 삶의 역사적이고 가변적인 자기 규정을 최종적으로 한눈에 굽어보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허구들의 발생에 관여하는, 역사화할 수 없는 형식적 불변항은 인간의 자화상 그리기 능력으로서의 정신이다. 인간은 자신이 누구 혹은 무엇인지에 관한 견해에 비추어 삶을 꾸려 간다.6)
우리가 흔히 '자아'라고 부르는 어떤 것은 이러한 허구적 산물의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우리는 날마다 자서전을 서사적으로, 따라서 허구적으로 써나간다."7) 인간은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나날이 인식·감각·상상하며 내 삶의 의미를 만들어내기 위한 다양한 허구적 실천을 전개한다. 물론 자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허구적 상상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으면, 인간이 실재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회적 삶의 역동성을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자아라는 허구적 구성물은 단지 나에게서만 자발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허구적 상상 속에서도 공유되는 것이다. 흔히 타인의 인식·시선·평가에 의해 구축되는 사회적 자아가 그런 경우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자아의 실재성을 확인받기 위해 타인의 지각 속에서 형성되는 나의 이미지를 궁금해하고 신경 쓴다. 때로는 내가 그리는 자아상과 타인의 정신 속에서 구현되는 자아상 사이의 간극과 차이로 인해 고통받기도 하고, 나 자신이 오인·오해받고 있다고 느끼기도 한다. 둘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회적으로 유통되는 나의 이미지는 진실이 아닌 허구이며, 사람들에게 영원히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 절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내가 나 자신의 진실을 강력히 주장한다고 해서, 타인의 정신 속에서 상상되는 나의 실재성을 부정하고 규제할 수 있는 근거나 권한은 없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생각하는 나가 일치하는 경우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아의 실재성은 나에 의해 독단적으로 점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나와 얽힌) 의미장들의 중첩과 교차 속에서 다원적으로 공존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에 대한 타인들의 사회적 상상을 무제한적으로 용인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때로는 내가 물리적으로 행하지 않은 사실들, 즉 순전한 거짓이라고 불리는 잘못된 정보에 의해 나의 자아가 구성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개인의 삶을 위협하는·위험한·존재해서는 안 되는 거짓들, 명백히 수정되고 정정되어야 할 사실들이다. 자아를 허구적 실재로 정립한다고 해서, 거짓 정보들이 그 자아를 구성하도록 용납해서는 안 된다. 한편 이러한 물리적 거짓과 다른 층위에서의 거짓들, 사회적으로 만연해 있지만 규범적으로 지지할 수 없는 허구적 실재들이 있다. 이를테면 인종 차별·여성 혐오·퀴어 혐오·장애인 혐오 등이 바로 그것이다. 과거에는 인지되지 않았으나 오늘날 보편적으로 실재하게 된 이러한 폭력 앞에 인간이 노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인간에게는 받아들일 수 있는 실재와 그렇지 않은 실재를 구별해야 할 명백한 도덕적·정치적 책무가 있으며, 인간 사회는 그것을 명료하게 구분하기 위한 다양한 지적·제도적·문화적 질서와 장치들을 마련해왔다. 우리는 그것을 문명이라고 부른다.
6. 해석학적 실재-문학의 자율성
인간이 삶과 현실에 의미를 부여할 때 본원적 역량으로서의 허구적인 것(정신적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발휘한다는 사실은 문학과 현실 사이의 접촉과 만남이 발생하는 원리가 무엇인지를 간명하게 보여준다. 이것은 규범적 가치의 문제이기에 앞서, 지각 경험과 관련하여 인간에게 주어진 일종의 실존적 조건 같은 것이다. 문학에서 구현되는 가상 세계가 어떠한 사실들에 대한 허구적 편집·변용·조작·배열의 산물인 것과 마찬가지로 현실이나 우리의 일상적 삶 역시 사실에 기반한(이것이 중요하다) 기억·체험·경험 등의 상상적 조합을 바탕으로 시뮬레이션된 의미화의 결과이다. 하지만 문학과 현실을 구성하는 허구적 원리의 동일성을 양자의 존재론적 동일성으로 오해하게 되면 모든 것이 망가져버린다. 다시 강조하지만 문학(예술)적 허구와 현실(세계)을 구성하는 허구적인 것은 같은 범주로 인식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 둘 사이의 불가피한 중첩의 양상을 파악하는 것이고, 그 중첩을 매개로 양자를 구별하는 원리를 재정립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좀 더 구체적으로 구분해야 할 것은 광의의 허구와 그러한 허구들로 구성된 문학(예술) 작품의 허구를 분리하는 일이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여러 차이들이 있지만, 이 글의 논의와 관련하여 가브리엘은 대단히 간명한 원리 하나를 제시한다. 가브리엘이 비존재론적 격리주의라고 명명한 그것을, 내 나름대로 변주해보면 이렇게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적 허구는 '실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대상이 꾸며 낸 놀이라 함은 대상이 본질적으로 해서 가능하다는 , 바뀌 말해 대상이 누군가가 그 대상을 가지고 미적 경험을 하는 것에 의존한다는 뜻이다. 곧 보겠지만, 이 생각은 꾸며 낸 대상들이 아예 실존하지 않는 대상들의 부분 집합이라는 뜻이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허구적 대상들도 그렇고, 거기에 상응하는 꾸며 낸 대상들도 그렇고, 이것들은 제각각 자신의 의미장 안에서 실존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꾸며 낸 대상들은 우리의 의미장과 충분히 격리되어 있기 때문에, 존재적 카오스는 발생하지 않는다.8)
이것은 허구적 상상의 역량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가령 인간이 물리적으로 현존하는 어떤 것을 생각할 때 상상은 그 대상의 의미를 구성하는 데 영향을 줄 수 있지만, 대상의 물리적 현존 자체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가령 어떤 공동체에서 내가 대단히 부당한 방식으로 평가되고, 오해로 가득한 이미지로 유통된다면 나는 심대한 실존적 타격을 입을 것이다. 심지어 나라는 사람 자체가 인지되지 못할 만큼 철저하게 고립되고 배제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나에 대한 타인의 인지·상상이 부당하다고 해서, 전혀 상상되지 않는다고 해서 나의 '존재' 자체가 무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학이나 예술과 같이 가공된 허구의 세계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물리적으로 현존하는 세계와의 존재론적 대응점을 갖지 않는 문학적 허구의 세계는 철저히, 사람들이 생성하는 의미장에서만 출현하고 실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막스 브로트가 카프카의 유언대로 그의 모든 작품을 불태웠다면,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요제프 K., 그레고르 잠자 등은 더 이상 실재할 수 없는 대상들이 된다. 비록 그들을 지시하는 기호가 적힌 문헌들이 과거에 물리적으로 잠깐 존재했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여기서 도출될 수 있는 중요한 결론 중 하나는 특정 작가에 의해 성립된 가공의 세계와 그 속에서 배치되어 있는 인물들의 실재성이 온전히 수용자의 상상에 의존적이라는 점이다.
문학적 허구는 실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는 문학과 예술 작품에서 구현되는 세계의 실재성이 독자가 구성하는 의미장의 영역에서만 출현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문학 작품이 허구적으로 의도된 가상적 현실을 독자에게 보여준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독자는 눈앞에 구현된 허구적 세계를 단순히 수용하고 관람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문학 텍스트를 지각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독자는 자신의 다양한 인간관계, 사회생활, 지적·예술적 경험을 통해 구성된 의미장을 활용하고, 상상적 허구의 역량을 동원하여 능동적으로 시뮬레이션한 결과로서의 세계를 스스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일컬어 미적 경험이라고 부를 수 있다. 미적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말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문학이라는 어떤 가상적 세계와 직면하면서, 독자가 활성화하는 의미장의 상상적 구축을 가리키는 것이다. 내가 문학과 현실이 지시·재현·모방·표현의 관계로 엮여 있는 것이 아니라 중첩과 교차의 형태로 공존한다고 말했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독자의 능동적이고도 자유로운 역할과 관련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역량의 자유로운 사용의 과정을 일컬어 해석이라고 부른다.
해석은 미적 가상이라고 지칭되는 예술 작품들을 실재하게 만드는 의미론적 장의 건립을 뜻한다. "예술 작품을 해석한다는 건 그것을 지각하거나 그것에 관해 생각한다는 뜻이다."9) 따라서 독자가 없다면, 의미론적 장을 구성하는 능동적 주체들의 해석적 실천이 부재하게 된다면 예술 작품이 구현하는 세계는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새삼 강조해야 할 것은 독자의 복수성이 곧 의미장의 복수성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즉, 중첩과 교차는 문학과 현실의 관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독자들이 구축한 무수히 많은 의미장들 사이에서도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한 의미장들이 다원적으로 공존하는 현상을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없다는 것, 바로 거기에 문학과 예술의 무한한 해석 가능성이 열린다.
물론 문학적 허구에 대한 무한한 해석 가능성을 해석의 무제한성과 혼동할 필요는 없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사례로 들어보자. 독자들의 『햄릿』 읽기가 계속되는 한 햄릿이라는 허구적 인물은 각각의 의미장들의 수만큼 복수적으로 실재할 수 있다. 이러한 실재의 복수성은 그 자체로 문학 연구에 있어서 흥미로운 분석 대상이다. 과거의 어느 시점에 상상되었던 햄릿의 이미지와 현재 상상되는 햄릿의 이미지의 차이를 분별하고, 그 차이로부터 현실 세계를 가로지르는 사회적·역사적 변화의 실재를 추정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실이 재구축되는 만큼 실재의 역사에서 햄릿은 지속적으로 변화된 형상으로 출현한다. 물론 햄릿의 실재는 무한하지만, 무제약적으로 확장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햄릿을 실재하게 만드는 조건과 제약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첫째는 문헌학적 조건들이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햄릿』을 읽고 햄릿이 덴마크의 공주라고 인지할 경우, 그와 같은 주장은 단박에 거짓으로 기각될 것이다. 문학적 허구에 대한 해석 역시 (물리적 현실에서의 존재론적 사실에 상응하는) 문헌학적 사실에 제약받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해석학적 조건이다. 가령 누군가가 『햄릿』을 읽고 햄릿이 실은 오필리어를 내심 증오하고 있었고, 정신적으로 예민하고 섬약한 그녀를 자살에 이르게 하기 위해 폴로니어스를 살해했으며, 『햄릿』의 진정한 메시지는 오필리어의 죽음으로 완성되는 햄릿의 복수담이라고 주장한다고 가정해보자. 파격적이고 신선해 보이겠지만, 이러한 해석이 광범위한 동의를 얻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햄릿의 숨은 의도를 그런 방식으로 상상하기에는 주어진 해석학적 정보가 많지 않으며, 그것을 받아들일 경우 '오필리어의 죽음'이라는 에피소드 외에 너무나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이야기들의 실재가 외면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엉뚱한 상상을 가로막을 근본적인 규범 같은 것은 없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독자는 텍스트에 대해 자유롭게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그러나 문학의 세계에서 특정한 상상의 방식을 강요할 수 있는 규범은 없지만, 의미 있는 상상을 분별할 수 있는 기준과 원칙이 없는 것은 아니다. 독자의 모든 해석은 텍스트에 참여하는 다른 독자들의 해석과 경합을 벌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의미장들이 중첩되고 교차되는 해석적 투쟁의 장에서, 어떤 해석은 인정받고 또 어떤 해석은 인정받지 못하고 사라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해석은 독자가 텍스트에 대해 벌이는 허구적 상상이지만, 이러한 해석 역시 해석의 대상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처럼 독자의 해석을 전면화하는 시각 속에서 허구적 실재의 토대를 발견할 수 있다면 작가의 역할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앞선 예를 조금 더 이어나가보자. 만약 누군가가 '오필리어의 죽음'이라는 장면을 두고 그것이 햄릿의 남성적 내면과 고뇌, 그리고 그의 영웅주의적 비극성을 전면화하기 위해 벌이는 희생양적 제의라고 해석하고, 여성 인물이 다뤄지는 전형적인 방식의 이데올로기성을 비판했다 가정해보자. 셰익스피어가 살아서 그러한 해석을 접하면 대단히 억울할지도 모른다. 자신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며 오필리어라는 인물을 통해 구현하려는 진실은 다른 데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설령 저자의 의도가 다른 데 있었다고 해서, 『햄릿』에 대한 비판적 해석보다 더 우월한 것은 아니다. 저자 역시 독자와 동일한 입장에서 자신이 창작한 작품의 의미론적 장에 동참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작품을 통해 독자에게 어떤 분명한 허구적 현실을 제시하는 존재가 아니라, 독자가 문학적 허구를 시뮬레이션할 수 있도록 문헌학적 재료와 환경을 디자인하는 존재에 가깝다. 그렇다고 해서 작품에 대한 저자의 의도가 전혀 실재하지 않고, 무가치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저자의 의도는 우리가 작품을 경험하고 해석할 때, 가정되고 상상되는 하나의 실재론적 지표 같은 것이다. 저자는 작품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해석자 가운데 하나이다. 저자가 작품의 허구적 실재의 주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허구적 실재가 특정한 방향으로 출현할 수 있도록 가장 오랜 시간 고민한 장본인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의 의도 역시 해석적 실재라는 점에서 독자의 해석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것은 아니며, 그에 따라 그 누구도 작품에 대한 해석을 독점하고 전유할 수 없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해석학적 실재의 의미장 위에서는 저자의 의도 역시 다른 독자들의 해석과 동등한 위치에서 경합을 벌인다.
나는 이처럼 문학과 예술에 대한 무한한 해석 가능성이야말로 문학과 예술의 자율성을 증언하는 가장 분명하고도 명확한 증거라고 생각한다. 문학의 자율성은 문학이 현실보다 우월하고 더 가치 있다는 식의 규범을 지시하는 것도 아니고, 문학의 이름과 더불어 창작자가 그 어떤 도덕적·윤리적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일컫지도 않는다. 우리는 주관주의적 표현론으로부터 유래된 낡은 자율성의 신화를 세속화하고, 더욱 급진화시켜야 한다. 문학의 자율성은 창작자의 권리나 문학 작품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무한한 참여 가능성, 그에 따라 끝없이 펼쳐질 수 있는 의미장들의 잠재적 무한성을 뜻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예술적 허구를 지속적으로 생성시킬 수 있는, 무한히 많은 현실의 허구들이 보편적으로 실재하기 때문이다. 문학의 자율성은 문학을 문학으로 지각될 수 있게 하는 실재론적 조건과 토대를 나타낼 뿐, 그 어떤 도덕적·윤리적·정치적 규범도 함축하지 않는다. 문학과 예술의 자율성과 사회적으로 구축해온 규범적 정의들은, 최소한 내용적 차원에서는 아무런 직접적 관계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건은 문학(예술)적 허구와 현실 사이의 중첩·교차를 가능하게 하는 이 자율성의 영역을 제한하거나 특정한 규범적 가치를 바탕으로 섣불리 봉쇄하지 않는 것이다. 이 말은 예술 작품에 대한 도덕적·윤리적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우리는 예술 작품에 대한 경험 속에서 상상된 모종의 메시지, 작품의 이념 등에 관해 토론할 수 있고, 그 한계를 비판할 수 있다. 동시대에 통용되는 사회적·문화적 상식과 규범을 파괴한다고 판단될 때, 그것의 적절성 여부에 관해 따져 물을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창작자의 인격과 세계관에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규범적 실천 역시 독자가 해당 작품에 대한 허구적 실재의 의미장을 출현시킴으로써 실천되는, 일종의 또 다른 해석 행위로 인식되어야 하고, 그래야만 한다. 그러한 해석적 실천 속에서 문학과 예술 작품을 규범적으로 비판할 수 있지만, 문학 작품과 실제 현실이 교차할 수 있게 하는 원리(픽션적인 것의 무한성) 자체에 어떤 규범적 제재를 가한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그것은 문학과 예술이 실재할 수 있도록 하는 기초적 토대와 기반의 완전한 붕괴를 뜻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문학과 예술의 자유가 표현의 자유로 온전히 설명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표현의 자유는 일종의 필요조건에 가까울 뿐, 그것이 완성되는 순간은 독자의 자유가 실재적으로 행사될 때이다. 그러나 독자의 자유는 무조건적인 권한의 남용이 아니기에, 오히려 더욱 무거운 의무와 책임으로 보일 수도 있다. 작품이 구현할 수 있는 실재의 세계와 그 운명이 독자에게 온전히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각의 극단적 주장처럼, 논란이 되는 특정 작품들을 공적 세계에서 배제시킬 수 있는 독점적 권리 같은 것이 독자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을 벌일 경우, 독자는 자신의 실재론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읽기의 자유를 스스로 파괴하게 된다. 창작자의 자유와 독자의 자유는 서로 이율배반적인 대립항이 아니며, 독자가 단순히 창작자의 대척점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독자는 하나의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늘 어떤 특정한 작품을 읽는 과정에서 매순간 '출현'하고 '실재'하는 무한한 주체들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정반대로도 해석될 수 있다. 만약 어떤 작품에 접근하는 길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어버린다면 우리는 작품만 잃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더불어 나타날 수 있는 독자의 무한한 잠재성을 '실재로' 잃어버린다.
7. 폐허 너머의 세계
끝으로, 조심스럽게나마 이번에 제기된 사안에 대한 의견을 짧게나마 밝혀둔다. 지난 계절 흔히 '공론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공간에서 거칠게 오갔던 수많은 주장·의견·비판·비난·증오·혐오의 목소리를 지켜보면서 나는 지금 우리 사회가 모종의 지적·윤리적·문화적 폐허 상태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했다. 경청할 만한 이야기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합리적이고 건강한 공론장을 유지하려는 노력들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사실과 의견이 무책임하게 뒤섞이고 거짓 정보와 풍문, 그리고 사안과 무관한 사생활에 대한 관음증적 욕망이 무분별하게 혼재되는 가운데, 무언가를 제거해야만 나의 옳음이 증명될 수 있다는 식의 태도가 공론장을 장악해나가는 시간을 통과하면서, 한없이 큰 절망을 느끼기도 했다. 내가 더 크게 절망한 것은, 사안의 복잡성과 불투명성에도 불구하고 어떤 단호하고 빠른 조치와 처벌이 감행되어야 한다는 태도가 힘을 얻고, 과거 사례와 유사한 방식으로 그 힘이 일부 실현되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이 모든 일들이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졌다는 사실이다. 과거에도 반복되었고 지금도 반복되는 일들을 바라보며, 공동체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인류가 힘겹게 쌓아올렸던 지적·윤리적·문화적 토대가 동일한 이름의 명분으로 무너져 내려가는 과정을 무력하게 목격해야만 했다. 텍스트의 진실은 하나일 수 없으며, 다양한 진실의 얼굴들이 공존하고 실재할 수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픽션적인 것의 본질이자 의무라는 보편적 규범이 더 이상 존중받지 못한 시대에 진입했다 느끼기도 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개인적으로 나는 김현지 씨가 정지돈 작가의 일부 작품을 읽으며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라고 느끼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며, 그로부터 어떤 당혹스러움과 충격을 넘어 고통과 괴로움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텍스트 경험을 근본적으로 차단하고, 그것을 부인할 수 있는 권리와 권한은 그 누구에게도 주어져 있지 않다. 아울러 그와 같은 실재론적 상상이 발생하는 데 있어 창작자로서 정지돈에게 귀책사유가 없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미 입장문에서 밝히고 스스로의 부주의함에 사과했듯, 텍스트에 존재하는 어떤 요소들이 김현지 씨로 하여금 그와 같은 상상적 경험을 촉발하게 하는 데 개연성 있는 계기를 제공한 측면을 온전히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설령 저자의 의도가 '실재로' 그것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김현지 씨가 경험하고 상상한 허구적 진실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통용되어야 한다는 '규범적' 원칙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가령 『브레이브 뉴 휴먼』의 독자로서 나는 '권정현지=김현지'라는 주장의 실재성이 성립할 수 있는 구체적 개연성이 현재로서는 좀처럼 상상이 안 되고, 해당 텍스트가 권정현지를 불행한 인물로 모욕하고 있다는 해석적 실재에 동의하기 어렵다.10) 김현지 씨의 주장처럼 공개할 수 없는 어떤 사적인 과거와 기억, 또는 인연을 알게 되면 상황이 바뀔 수 있을까.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여하간 그것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브레이브 뉴 휴먼』을 읽고 그것을 유추·상상·추정하는 것은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며, 그것이 『브레이브 뉴 휴먼』을 읽는 과정에서 구성되는 나의 의미장에 관여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일이다.
설령 그 구체적 사실을 알고도 『브레이브 뉴 휴먼』에 대한 나의 해석적 경험에 변화가 없다고 해서, (당연한 말이지만) 김현지 씨가 재구성한 실재가 진실인지 아닌지를 규범적으로 강요할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 하지만 그가 느꼈을 것으로 짐작되는 혼란·충격·놀라움·고통·고립감 등을 하나의 의미장으로 존중하는 것과 그것을 텍스트에 대한 유일한 독점적 실재라고 주장하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나는 그것이 정지돈이 김현지 씨에 대한 개인적 사과와 별개로 구체적인 요구 조건을 들어줄 수 없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권정현지=김현지'라고 확정하고, 미학적 실패를 자인할 수 있는 권한은 저자 자신은 물론이고, 그 누구에게도 부여될 수 없는 권한이다. 그것은 정지돈이 말하는 진실만이 믿을 수 있는 실재여서가 아니라, 특정한 누군가의 실재가 작품을 둘러싼 의미상 전체를 전유하고 장악하도록 방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누구에게도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김현지 씨의 실재적 고통을 이해하고 존중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과 그것이 텍스트 전체를 독점할 수 없도록 막는 일은 별개의 사안이며, 충분히 양립 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이러한 양립 가능성이 무너질 때, 단지 정지돈의 텍스트만 사라지는 것에서 상황이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텍스트의 실재에 대한 권한을 독점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존재'한다는 인식이 만연하게 된다면, 문학과 예술을 실재할 수 있게 하는 근간 토대를 파괴할 수 있는 길이 언제든,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문학이나 예술보다 우리의 실제 현실이 중요하고, 삶보다 우선시되는 문학은 없다고 목소리를 높일 수도 있다. 그 의견을 존중한다. 그러나 이러한 규범은 정확히 정반대의 형식으로도 적용되어야 한다. 문학이 삶보다 우선시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삶 역시 문학보다 우선시될 수는 없다. 우열을 가리는 문제로는 둘의 관계가 올바르게 정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은 내가 '픽션적인 것'이라고 부른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유사해 보이지만, 양자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문학은 삶이 아니고, 삶 또한 문학이 아니다. 양자를 규제할 수 있는 규범적 원리는 그렇게 단순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나는 문학과 예술과 관련하여 우리가 목도했던 다양한 범죄에 가까운 폐해들이 양자의 우위 관계를 잘못 설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둘의 경계를 혼동하고, 심지어는 일치하는 것으로 간주했던 지난날의 (앞에서 미학의 윤리화라고 설명했던) 잘못된 인식들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른 누군가는 그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며, 문학이나 예술 따위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문학과 현실이 같은 것이 아니라면, 현실적 정의에 관해 문학이 말해줄 수 있는 바는 아무것도 없다고 결론지을 수 있고, 이 모든 논의가 무의미하고 무용하며, 현학적이라 느껴질 수도 있다. 문학과 예술의 근본 토대와 본질에 관해 고민하고, 그것을 지키려 노력하는 일들이 우리의 실제 현실에 관해 그 어떤 규범적 당위와 실용적 지침들을 제시해주지 못한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되는 진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문학과 현실이 같은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무언가를 공유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픽션적인 것', '허구적인 것'이라고 지칭될 수 있는 인간의 고유한 역량, 즉 자유에 대한 감각이다. 이것이 붕괴되면, 문학과 삶 모두가 무너져버린다. 문학과 예술은 바로 그것을 보존하고 기록하는 실재의 의미장이자,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자유의 역량이 고도의 방식으로 연습되고 실천되는 제도적 장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문학과 예술에서 실험되었던 자유가 현실에서 그대로 실현되는 경우는 많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허용되어서도 안 된다. 하지만 문학과 현실이 공유하는 영역에서 감각되는 자유가 실재하기에, 우리는 현실을 조금은 더 나은 곳으로 변화시켜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으로 주어진 현실적 실재에 안주하고 적응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무수히 많은 권력적 통제와 검열, 억압적 폭력과 부조리한 차별에 항거하고, 존재하는 현실 너머의 새로운 실재를 상상하고 희망하며 현실을 재구성해나간다.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자유로운 상상이 실재하기에 현실이 조금씩 달라지고, 생각·사유·사상·이념·정체성의 자유를 지속적으로 넓혀가며 어딘가를 향해 실재로 나아가게 된다. 오래전에 잃어버린,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이 진보의 감각을 되찾아야 한다.
앞서 나는 지난 계절 동안 구성되었던 공론장의 양태를 '폐허'라고 묘사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과거에 내가 목격했던 현실적 국면들에 지나치게 영향받고 있어서였던 것 같다. 과거 유사한 사례를 경험할 때 우리가 행했던 잘못된 판단과 조치가 동일하게 반복된다고 느꼈고, 그 어떤 합리적 대화도 불가능하다고 여겼으며, 시간이 흐르면 우리가 자행했던 수많은 오류들이 빠르게 망각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윤리적 혐의의 실재와 그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구체적 검토 없이,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들을 외면하면서 사태를 무마하려는 습성이 규칙과 질서로 내면화되었다고 결론 내렸다.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붕괴 현상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까지 이르렀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지금 시점에 이르러서야, 내가 상황을 오인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조금 하게 된다. 다시 한번 돌이켜보면, 미세하지만 이번 사태가 과거와는 조금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적지 않고, 이 일을 관음증적으로 소비하는 것을 넘어 대단히 중요한 문제로 진지하게 고민했던 독자들 또한 존재했으며, 비록 침묵의 형식으로나마 우리 앞에 놓인 불투명한 지대를 힘겹게 응시하려는 작가들도 적지 않았다. 다만 이러한 차이들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잠재적 차이들을 새로운 논의의 장으로 출현시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에 손쉽게 결론 내렸던 일 모두를 재검토하고, 토론과 대화의 과정을 통해 그간 외면했던 수많은 오류들, 잘못된 판단들을 정정해나가야 한다. 과거의 실수와 한계를 탓하거나 평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나은 무언가를 함께 모색하고 상상해나가기 위해서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동시대의 문학 작품과 작가들을 보호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과 제도적 장치들을 찾아나가야 한다. 문단이라는 공고한 성채를 지키는 일을 반복하자는 말일까. 그렇지 않다.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작가의 비위를 비호하는 과거의 악습과, 오늘날의 현실적 국면에서 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보호하는 일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둘은 전혀 별개의 사안이다. 동시대 매체와 플랫폼들 사이에서 픽션적인 것의 토대는 그 어느 때보다 취약한 현실적 상황에 직면해 있다. 사실과 거짓이 무분별하게 뒤섞이는 동시대적 현실을 무력하게 승인하고, 진실의 이름으로 픽션적인 것의 무한한 진실들을 지배해버리는 장면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문학 작품이 개시할 수 있는 진실들의 무한한 잠재성을 지키는 일이야말로 현실의 무한한 가능성을 지키는 일이고, 결국은 독자의 자유를 지키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의 지혜와 경험, 그리고 용기가 요구되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을 의미 있는 일로 생각하는 동료들, 독자들이 실재할 것이라 믿는다.
여기서 나는 앞서 내가 한 말을 정정해야 할 것이다. 현실은 아직 폐허가 아니다. 현실은 폐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폐허로 믿어버리는 데에서 멈출 때, 비로소 현실은 폐허로 '실재'하게 된다. 폐허 너머의, 다른 세계를 상상해야 한다.
- 1) 『오스카 와일드: 거짓의 쇠락』, 박명숙 옮김, 은행나무, 2015, 71쪽.
- 2) 위의 책 53쪽.
- 3) 『허구의 철학』, 마르쿠스 가브리엘, 전대호 옮김, 열린책들, 2024, 25~26쪽.
- 4) 위의 책, 26쪽.
- 5) 위의 책, 107쪽.
- 6) 위의 책, 32쪽.
- 7) 위의 책, 28쪽.
- 8) 위의 책, 60쪽.
- 9) 『예술의 힘』, 마르쿠스 가브리엘, 김남시 옮김, 이비, 2022, 54쪽.
- 10)작품에 대한 규범적 판단을 개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수 있는 작품에 대한 실재적 해석 경험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이번 공론장에서(그리고 유사한 사례와 관련한 과거의 공론장에서) 나타났던 일부 외설적 특징은, 그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작품과 작가에 대한 판단이 가능하다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들이 실재로 만연해 있었다는 점에 있다. 물론 이 글의 목적상 나 역시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해석적 실천을 전개하지 않았기에, 나의 주장 역시 불완전한 상태로 제시될 수밖에 없다. 다만, 『야간 경비원의 일기』와 『브레이브 뉴 휴먼』에 대한 해석적 실재에 있어서 강보원, 전승민 평론가의 해석적 경험과 중첩되는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밝혀 둔다. 이에 대해서는 강보원의 블로그에 게재된 세 편의 글([https://m.blog.naver.com/lians)과](https://www.google.com/search?q=https://m.blog.naver.com/lians)과) 전승민, 「문학의 '무단 인용'과 삶의 자기 서사 편집권에 관하여 - 정지돈론」, 『문학들』 2024년 가을호를 참조하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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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넘어 ‘우리’가 된 풍경과 마음 ―길상호 시집, 『왔다갔다 두 개의』, 시인의 일요일, 2024. ―박경희 시집, 『미나리아재비』, 창비, 2024. 박형준 로베르트 발저는 셋방을 전전하면서도 작가로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다락방에서 살기 원했다. 나에게 그의 책 『산책자』(한겨레출판, 2017)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빌케 부인」의 한 단락이다. 셋방살이를 하던 집주인 할머니가 죽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오후에 주인공이 그녀의 텅 빈 방에 들어가 주인을 잃고 용도가 사라진 옷가지와 소지품을 바라보는 장면이었다. 이제 이 세상을 떠난, 하지만 자신에게 조금은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 집 주인 할머니가 텅 빈 방에 남기고 간 옷가지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생의 이면에 어른거리는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깊은 애수가 느껴졌다. 발저는 이 작품에서 한 번이라도 가난과 고독을 경험한 사람은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타인의 가난과 고독을 더 잘 이해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의 불행이나 고통, 그리고 타인의 무력함과 죽음을 조금도 덜어 주지 못하지만 최소한 타인을 이해하는 법이라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번에 읽은 두 권의 시집인 길상호의 『왔다갔다 두 개의』(시인의 일요일, 2024)와 박경희의 『미나리아재비』(창비, 2024)에서 자신과 타자가 체험을 통해 서로 응시하고 격려하는 장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비록 그 만남이 상처나 누추함에서 완벽하게 벗어나게 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그 만남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며 내가 아닌 우리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의 세계는 규율과 계획에 의해 설계된 대도시와는 멀리 거리를 두고 있다. 이들은 그것들에 의해 부서지고 상처 입은 시간들을 끌어모아 과거를 향해 아득한 시선을 던지고 있으며, 그 속에 삶의 절규가 살고 있음을 우리에게 각인시킨다. 길상호의 시집이 은둔자의 삶과 그 안의 고독의 심연을 빼어난 서정으로 보여 주고 있다면, 박경희의 시집은 ‘나’를 지운 자리에 ‘우리’를 들어앉히며 버려지고 상처 입은 과거가 사라진 것도 그 자체의 형상을 잃은 것도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의 감응으로 전해 준다. 우리는 이들의 시로부터 대도시에서 외면당하고 추방된 사물들이 간직한 최초의 움직임을 다시 만날 수 있으며, 그 사물들과 어우러진 장면과 추억들이 경이로운 생물과 마찬가지로 살아 움직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풍경과 마음의 혼융―길상호 시집 『왔다갔다 두 개의』 길상호 시의 특징 중 하나는 시에 나타난 풍경 묘사가 곧 시적 화자의 마음의 상태라는 점이다. 그는 언어의 연금술사처럼 풍경이 자기 존재가 되고 그 풍경 속에서 다시 자신의 존재가 무한하게 흩어지거나 확대되는 지점을 지극히 섬세한 감각으로 보여 준다. 난해하거나 복잡하지 않은 나직나직한 이미지의 단순성과 리듬으로 자신의 심정을 풍경화하는 그의 시는 주체와 타자가 분리되지 않는 말의 오묘한 상태에 닿아 있다. 겨울잠이 풀리고 강변의 진흙은 아가리를 벌린다 물안개가 만든 꿈속을 오래 어슬렁거리느라 진흙은 배가 고프다 진흙의 아가리에 침이 고이고 검고 부드러운 입술엔 어떤 밤이 뜯어 먹다 남긴 고라니의 앞다리 두 개가 물려 있다 두툼한 뒷다리 두 개는 더 먼 곳까지 가서야 피의 걸음을 놓았다 진흙은 이빨 없이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음미하면서 목마르게 끝난 짐승의 죽음을 소화시킨다 털과 가죽과 뼈와 발굽 고라니를 물가로 이끌던 아픈 육체 진흙의 아가리 속으로 두려웠던 시간이 긴 발자국 유서와 함께 서서히 사라진다 ―「진흙이 입을 벌릴 때」 전문 이 시의 화자는 언 강물이 풀린 초봄에 강변에 나와 있다. 화자는 얼었던 강이 녹으며 진흙으로 변해 버린 강변을 거닐며 주변의 풍경을 바라본다. 시에 물안개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직 완연한 봄이 온 것 같지 않다.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그래서 두 계절이 함께 있는 환절기가 이 시의 배경일 듯싶다. 이런 때일수록 남아 있는 추위가 더 춥게 느껴지면서도 또 한편으로 봄을 고대하는 심리 역시 상승하기 마련이다. 화자는 그 양가감정 속에서 강변에서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 물이 풀리며 강변은 녹기 시작한 진흙 덩이로 어수선한데 화자는 물안개가 걷히자 진흙 속에 고라니 사체가 빠져 있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진흙에 점점이 찍힌 고라니 발자국도 눈에 띈다. 아직 겨울의 냉기가 남아 있는데도 진흙은 볕에 풀리며 아주 천천히 고라니 사체와 발자국을 삼킨다. 이 시는 아마 위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을까 추측된다. 그러나 시 어디에도 ‘나’는 보이지 않는다. 황량한 강변의 초봄 아침에 진흙이 고라니의 사체를 삼키는 풍경 묘사를 감정의 동요 없이 객관적 시 쓰기로 전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 시를 읽으면 시인의 마음이 보인다. 안타깝고 슬픈 장면인데 이상하게 평안하고,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내적으로 힘찬 생명력이 느껴진다. 시인은 겨울에 다른 짐승들에게 사냥당할 위기에 처한 고라니가 본능적으로 물가까지 도망치다가 강물 위에 얼어붙은 채로 죽어 있던 사건과 봄이 되어 진흙이 풀리면서 고라니가 그 속으로 빠져드는 장면을 담담하게 전달한다. 그러나 이 시를 끌고 가는 주체가 진흙만은 아니다. 이 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 읽을 수 있다. 첫 번째는 겨울을 견딘 진흙이 녹아 가는 과정을 “물안개가 만든 꿈속을 오래 어슬렁거리”다가 “아가리”를 벌리는 것으로 시작하여 육식성이 부여된 진흙이 “검고 부드러운 입술”로 “어떤 밤”에 사냥당하여 갈가리 찢긴 채 죽은 고라니의 앞다리 두 개를 삼키는 장면까지이다. 여기까지는 진흙이 시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고라니의 앞다리 두 개가 물려 있다”의 뒤에 다른 연으로 분리된 “두툼한 뒷다리 두 개는 더 먼 곳까지 가서야/ 피의 걸음을 놓았다”에서 주체가 고라니로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냥을 당해 갈가리 찢긴 고라니는 앞다리 두 개를 진흙 앞에 걸치고 있지만, 마치 강 저편으로 던져진 듯이 두툼한 뒷다리 두 개는 강물 위에 “피의 걸음”을 흩뿌려 놓고 있다. 진흙은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끝난 생명을 아주 천천히 음미하면서 소화한다. 그런데도 강물에 얼어붙은 채로 털과 가죽과 뼈와 발굽으로 형해화된 고라니는 자신이 언 강가에 피와 함께 남긴 발자국을 유서처럼 간직한 채 왕성하게 입을 벌리는 봄기운이 맹렬하게 싹트는 진흙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결혼식에 갈 땐 로션을 장례식엔 스킨을 조금 발라주세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함께 행진하는 날엔요? 그런 날은 좀체 없다니까요, 아, 저에겐 그런 날뿐인걸요 ―「로션과 스킨」 부분 대야에 비친 자신을 사랑하세요, 다른 얼굴이 보여도 그냥 주워 사용하세요, 미끄러운 날은 금방 지나갈 거예요. ―「이거 좋은 거예요」 부분 이정현의 시집 해설에 따르면 길상호의 이번 시집은 심한 병증 가운데 씌어졌다고 한다. “피 한 방울로 다 알 수 있어요”(「혈당검사 수첩」)라는 시행이 말해 주듯, 길상호 시인은 면역 체계가 흐트러지는 원인 불명의 병에 걸리면서 매일 약을 먹어야 하고, 책을 읽을 수도 없고, 하루에도 세 번 혈당 수치를 재야 한다고 한다. 이 시집에는 그러한 임상 기록을 담은 시편들, 함께 살던 여러 마리의 고양이를 떠나보낸 사연과 “남은 고양이 꽁트”(「시인의 말」) 등 자신의 병적 기록과 함께 주변 사람들과 반려동물에 대한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용한 「로션과 스킨」은 로션과 스킨이라는 메타포를 이용해 삶과 죽음이라는 특징을 결혼식과 장례식으로 드러내면서 죽음과 삶이 함께 행진한다는, 그 양자를 넘나들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한다. 또 「이거 좋은 거예요」에서는 아픈 삼촌을 위해 비누를 사 온 조카의 말을 통해 “대야에 비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이 무엇인지를 간접적이지만 나직하게 전해 준다. 아마도 시인은 조카가 선물한 비누로 아침마다 얼굴을 씻으며 대야의 물속에서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자신의 모습과 조우할 수 있으리라. 시집의 마지막 시편에 나타나듯 절망이 우리를 ‘빗에 사이사이 끼는 때’처럼, “저 수심 깊은 대야”에 던져 버리려고 하더라도 삶의 책은 “페이지가 차르륵 젖어 더는 읽을 수 없더라도, 포스트잇으로 표시를 해 두었으니”(「독서는 금지」) 언제든 다시 이어 갈 수가 있다. 하여, 나는 시인이 「진흙이 입을 벌릴 때」에서 진흙 속으로 사라진 고라니의 “긴 발자국 유서”를 절망을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로 읽으며, 당신은 멀리 있지만 “우리라는 말이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이도 저도 아닌 것들」)라는 따뜻한 말과 시로 다시 뜨겁게 이어져 가고 있다고 믿는다. 시로 쓴 마을사―박경희의 시집 『미나리아재비』 박경희의 『미나리아재비』를 즐겁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읽었다. 아니, 반대로 안타까웠지만 즐겁게 읽었다고 해야 되리라. 박경희의 시집에는 토속어나 순우리말이 시 중간중간에 별처럼 박혀 있어 시를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예를 들어 한 행으로 된 시 “사그랑이 된 바구니는 굴러다니고 기스락물이 깍짓동에 떨어진다”(「그렇게라도 짖어보는 것이다」)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삭아 버린 바구니가 굴러다니고 낙숫물이 참깨나 콩대를 묶은 깍짓동에 떨어진다는 뜻일 게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시를 표준화하고 의미화시키면 원래의 시행이 가지고 있던 살아 움직이는 말맛이 사라져 버린다. 이 시집을 읽으며 모르는 토속어가 나오더라도 굳이 사전을 찾아가며 읽을 필요가 없다. 이 시집의 가장 큰 장점은 사람들 속에서 살아 있는 말들과 이야기이며, 그리고 그 말과 이야기가 어우러져 이뤄 낸 한 마을의 아득하고 신화적인 풍경이 살냄새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데에 있다. 박경희 시인은 우리가 모르는 말들, 사라져 가는 풍경들을 붙잡고 수집해 그것을 사유하고 이야기로 만들며 절대 잊히지 않는 살아 있는 이미지의 마을사로 창조한다. 책 속에 박제되어 시를 위한 시에 그치고 마는 이미지가 아닌, 책 속에서 걸어 나와 이미지가 삶이 되고 이야기로 번져 가는 진경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때로는 그렇게 태어난 시가 너무나 능청스러워 다음 시에 나오는 할머니처럼 읽는 동안 얼굴이 살짝 붉어지기도 한다. 저승 물길 헤치며 이승으로 돌아오다가 육지 문턱에서 쓰러졌다 부여잡은 가슴에 갈고리달이 박혔는지 뽑히지 않았다 파도가 일 때마다 세상 온갖 별이 눈물로 흥건했다 울컥울컥 올라오는 바닷물을 토하며 새삼 물질하던 당신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옴마, 살았네 살았어 저승 돈 벌어 온다더니 저승 갈 뻔했다고 영감 죽은 지 십 년 만에 남정네와 입 박치기 했다는 말에 얼굴 벌게지던 할머니가 웃으며 병원 차 타고 갔다 바다가 잠시 숨 멈춘 순간이었다 ―「바다, 잠시 숨을 멈추다―구룡포 해녀들의 숨비」 전문 박경희의 이번 시집은 위의 시가 보여 주듯 죽음과 또는 죽음 근처까지 간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해학스럽지만 감칠맛 있게 전해 준다. 슬픈데 웃음이 나오는, 웃음이 나오는데 슬픈 이야기들이 서로 어우러져 어떤 순간에는 손에 땀이 배기도, 농사꾼을 홀대하는 사회에 화가 치밀기도, 그러다가 서로의 마음을 가만가만 짚어 주는 따스함에 슬픔이나 분노가 눈 녹듯이 사라지게 한다. 위 시만 해도 그렇다. 아마, 이 시를 영화로 옮긴다면 할머니 해녀가 저승 돈 벌어 온다고 물질하다가 그만 심장에 이상이 생겨 젊은 구조대원으로부터 인공호흡을 받는 장면에선 그것을 지켜보는 동네 사람처럼 우리들도 숨도 못 쉬고 가슴을 졸였을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가 깨어나자마자 환호성이라도 지를 듯 “옴마, 살았네 살았어” 하면서 “영감 죽은 지 십 년 만에/ 남정네와 입 박치기 했다”고 동네 사람들이 놀리는 장면에선 우리들도 신나서 박수를 쳤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인 바닷속에서 죽었다 살아 나온 할머니가 그만 그 소리에 얼굴이 빨개졌다가 웃으며 병원 차를 타고 가는 모습에서 우리는 비극일 수 있는 사건이 해학으로 바뀌는 살아 있는 입말의 마술적인 힘에 감탄했을 것이다.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는 귀족의 화려한 파티에 참석했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강풍이 몰아쳐서 집이 순식간에 무너져 사람들이 죽게 되자, 대리석이나 돌 더미에 깔려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죽은 자들의 이름을 그들이 앉았던 자리를 기억해 내어 하나하나 호명하며 시를 짓고 시체의 주인을 찾아 주었다고 한다. 그는 파티 풍경을 한 장의 그림으로 기억 속에 간직했던 것이다. 그는 이후 기억의 시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시모니데스에게 시란 ‘이야기하는 그림’이다. 박경희의 이번 시집에서 만나게 되는 것도 이 ‘이야기하는 그림’이다. 그의 시는 위의 시에서처럼 매우 쉬운 말과 친근한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그런 이야기를 한 장의 사진처럼 이미지에 압축해서 빼어난 서정의 구조로 들어앉힌다. 그래서 시의 주어가 ‘나’가 아니라 ‘우리’가 된다. 특히 제2부의 시편들은 “동네 막내 강 씨 아저씨”(「동네 막네」)가 환갑을 넘을 정도로 도회지와 단절된 마을에서 코로나 팬데믹으로 마을 사람들 모두가 ‘마스크’를 써야 하는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보여 준다. “오디에도 역병이 보이지 않는”데 마스크를 써야 하고 매달릴 사람이 전부 다 이승에 없어, “그저 무탈하게 지나가길 바랄 뿐 뭐가 있간 에휴, 참말로 지랄맞은 세상이여”(「워쩌겄어」)라는 마을 노인의 체념과 한탄에서 우리 농촌 현실의 적나라한 실상과 마주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마을은 할아버지가 글을 몰라도 서울로 병 고치러 간 아내 소식이 궁금하여 ‘소 다섯 마리 그림’(「오소」)을 그려 편지로 보내면 그걸 받고 할머니가 소 걱정으로 애가 달아 금세 내려오는 곳이다. 서로 간에 이심전심이 통하는 곳이며, 자신이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할아버지의 능청이 글이나 인터넷보다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곳이다. 마루에 앉아 머윗대 껍질을 벗기면서 저승 갔으면 그쪽 세상에서 잘 살 일이지 이승은 왜 들락거리느냐고 보이지도 않는 분 타박이다 살았을 적에 그리 모질게 마음고생시키더니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이승 문턱을 넘느냐고 사발째 욕을 퍼붓는데 옆에 있던 내가 슬금슬금 비키니 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제집만 들락거렸다. ―「꿈자리」 부분 어머니의 꿈에 아버지가 나타나자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인데도 남편을 타박한다. 살았을 적에도 그렇게 마음고생을 시키더니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이승의 문턱을 넘느냐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슬금슬금 마루에서 비켜나자 마루 밑에선 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제집만 들락거리며 안절부절이다. 죽은 사람조차도 잘못하면 타박을 받고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걱정하는, 자연의 생명과 사람이 한데 이어진 이곳은 현대인들에겐 아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세계일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전설 같기도 하고 신화 속 같기도 한 그 세계가 무너져 가더라도 그 큰 몸집을 지탱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안간힘으로 받쳐 든 벽에 선명하게 찍힌 손자국”(「손자국」) 같은 결기 어린 모습으로 우리들의 이야기를 선명한 그림처럼 들려주고 있다.
수많은 노래는 한 사람의 울음에서 시작되었다 고(故) 신경림 시인을 추모하며 1. 1970년대 민중시와 『농무』의 발견 창비시선 500번을 기념하는 특별시선집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신경림 외 지음, 창비 2024)이 올해 3월 출간되었다. 이 시선집 제목은 신경림의 시 「그 여름」에서 따온 것이다. 한 사람의 울음이 온 마을에 울음을 불러오고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고을에 노래를 몰고 왔다 구름을 몰고 오고 바람과 비를 몰고 왔다 ―「그 여름」(『농무』) 부분 온 거리에 울려 퍼지는 ‘노래’는 ‘한 사람의 울음’과 ‘한 사람의 노래’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노래는 구름과 바람과 비를 몰고 오면서 사람뿐 아니라 천지만물에 가닿았다. ‘울음’과 ‘노래’가 지닌 이러한 확장력을 떠올려볼 때, 신경림의 『농무』(창작과비평사 1975)가 50년을 이어온 창비시선의 출발점이었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1970년대 중반은 『창작과비평』이 시민문학론에서 민족문학론으로의 전환을 모색하면서 민중시의 새로운 모델을 필요로 하던 시기였다. 『농무』의 발문에서 백낙청은 시집 『농무』의 완성을 “민중적 경사”라고 말하며 “그의 많은 작품들은 리얼리스트의 단편소설과도 같은 정확한 묘사와 압축된 사연들을 담고 있는 동시에 민요를 방불케 하는 친숙한 가락을 띠기도”1) 한다고 상찬했다. 1960년대 김수영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던 그가 “민중이 잘 알 수 없는 ‘난해한’ 문학”2)을 경계하며 난해하지도 저속하지도 않은 시의 미덕을 신경림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1974년 『농무』가 제1회 만해문학상 수상작이 된 것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염무웅은 신경림 시의 민중성이 ‘체험적 현실’에서 나왔음에 주목하고, “자기 현실과의 정직하고도 치열한 대결을 통해 위장하거나 은폐되지 않은 민중 자신의 목소리가 긴밀한 시적 형상을 획득”3)했다고 보았다. 신경림은 이처럼 농촌의 현실을 구체적이고 핍진한 언어로 그려낸 시뿐 아니라 「농촌현실과 농민문학」 「문학과 민중」 등의 평론을 발표하며 농민문학론을 개진하기도 했다. 1970, 80년대는 신경림을 비롯해 이성부, 조태일, 김지하, 정희성, 이시영, 김준태, 김남주 등이 민중시의 새로운 방향성을 만들어나간 시기였다. 이러한 흐름의 첫 물꼬를 튼 시집이 바로 신경림의 『농무』였다. 2. 노래와 이야기, 시의 씨줄과 날줄 염무웅의 「무엇이 민중성의 시적 구현을 가능하게 하는가」는 『농무』가 출간된 지 30년 만에 이 시집의 역사적 위치를 한층 넓은 원근법 속에서 읽어낸 글이다. 그는 한국시가 지닌 민중성의 사회사적 근거와 맥락을 밝히면서 신경림 시의 독특한 화법과 시언어의 조직원리를 분석한다. 먼저 「그날」에 대해서는 “고도의 정치적 비판을 함축하고 있으”면서도 시의 화자가 직접 드러나지 않은 채 “순차적으로 카메라 앵글을 돌리는 장면화(場面化)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미장센 구성에 성공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한행을 하나의 율격 단위로 할 때 3음보의 율격을 지닌 「그날」과 4음보의 율격을 지닌 「경칩」이 율격이나 분위기가 사뭇 다르지만, “엄밀하게 계산되고 통제되는 구심적 조직”4)을 지녔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러한 분석은 농촌이라는 소재와 민중성이라는 주제, 인물의 정동을 중심으로 『농무』를 이해해온 기존의 관점을 시의 구성원리나 재현방식 등으로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유종호는 「서사 충동의 서정적 탐구」에서 신경림 단시의 특징을 “서정적인 주조에 서경(敍景)이 추가되고 그 속에 서사(敍事)적 충동을 내장하고 있”5)다고 설명했다. 그는 신경림의 시적 성취가 서정성과 서사성의 균형에서 비롯되었다며 선행 시편들의 전통 속에서 『농무』의 문학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농무』의 시들이 생활의 실감과 시어의 평면성으로 1950년대 모더니즘 계열 시편의 난해성을 산뜻하게 극복했을 뿐 아니라, 가난한 삶에 대한 결곡한 정감과 간결한 서경을 통해 추상적 구호와 격문에 가까운 현실주의 생활 시편의 전통 역시 넘어섰다는 것이다. 신경림의 시에서는 서정과 서사, 노래와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이며 절묘한 균형을 이룬다. 특히 신경림의 전기시에서 ‘이야기’의 산문성을 견제해내는 ‘노래’의 형식이란 주로 ‘민요’의 계승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민요적 정서’와 ‘정형(定型)에의 의지’가 긍정적 효과만 가져왔던 것은 아니다. 염무웅의 지적처럼 “민요는 김소월에게 있어 그러하듯이 신경림의 문학에 있어서도 창조성의 발현을 구속하는 억압이자 모국어가 지닌 가능성의 최대치로 인도하는 통로인 양날의 칼”6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음수율과 음보율, 행의 배치 등이 규칙적으로 분절된 시보다는 규칙성을 일부 허물거나 시행을 어긋나게 배치한 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헐거나. 술에라도 취해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다오 우리를 파묻어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편지라도 띄워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볼거나. ―「겨울밤」(『농무』) 전문 『농무』 첫머리에 있는 이 시는 ‘겨울밤’과 ‘새하얀 눈’을 대비하면서 농민들의 체념과 울분을 실감있게 전달하고 있다. ‘어떡헐거나’ ‘취해볼거나’ ‘맡아볼거나’ ‘쳐볼거나’ ‘먹여볼거나’ 등 반복되는 종결어미는 각운의 역할을 대신하며 ‘우리’의 정서를 리드미컬하게 변주해낸다. 시인은 이러한 종결어미의 반복으로 읽기의 유창성을 만들어내는 한편, 중간중간에 시행을 일반적인 호흡과 어긋나게 배치함으로써 의미를 낯설게 하거나 정서적 긴장감을 조성한다. 3행과 4행, 5행과 6행, 9행과 10행, 11행과 12행, 19행과 20행, 20행과 21행, 24행과 25행 사이에 나타난 주어부와 술어부 또는 수식어와 피수식어의 행갈이가 그런 예들이다. 마침표의 잦은 사용이나 단어의 도치 등도 행과 행 사이에 단속적 흐름을 만들어낸다. 단어나 시행을 엇갈리게 배치하는 앙장브망(enjambement) 기법은 「겨울밤」 외에도 「시골 큰집」 「원격지」 「씨름」 「산1번지」 「이 두 개의 눈은」 「1950년의 총살」 「장마 뒤」 「산읍일지」 「산읍기행」 「갈대」 「묘비」 「심야」 「유아」 「사화산·그 산정에서」 「추방」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누군가」 등 상당히 많은 시들에 나타난다. 이것은 김수영의 후기시에서 연의 길이를 균질하게 하는 대신 앙장브망을 통해 시행 사이의 불규칙성을 강화하던 것7)과 유사한 방식이다. 신경림 역시 행과 연을 단위로 리듬의 규칙성과 불규칙성을 탄력적으로 조율하고 변주함으로써 정서나 의미를 섬세하게 표현해낸다. 이러한 모더니스트적 면모는 신경림을 단순한 민중시인, 민요시인으로 이해하는 것을 재고하게 한다. 1973년에 이루어진 한 좌담에서 백낙청은 신경림의 시가 서사성과 지적 콘트롤이 강하고 현대적 언어감각을 지녔다는 점에서 신동엽보다는 김수영과 친연성이 강하다고 말한다.8) 시인 자신도 나중에에는 “민요와의 접목은 내 시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고 “내가 민요에 집착한 80년대 전 기간이 내게는 시 쓰기가 가장 어렵고 지루한 시절”9)이었다고 회고했다. 신경림 시에서 민요 가락이 집중적으로 나타난 것은 『새재』(창작과비평사 1979)와 『달 넘세』(창작과비평사 1985), 그리고 장시집 『남한강』(창작과비평사 1987)에서다. 『민요 기행』 1, 2권(한길사 1985, 1989)이 나온 것도 이 세 시집이 출간된 시기와 거의 겹친다. 이 무렵 신경림은 민요를 찾아 채록하면서 전통적 민예 양식의 시적 가능성을 탐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노력이 집대성된 『남한강』에서 시인은 서정적 단시의 서사성을 한편의 장편서사시로 확장하면서 민요의 리듬을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신경림이 민요적 정서나 형식에 대한 중압감에서 자유로워진 것은 기행시집 『길』(창작과비평사 1990)을 펴낸 이후였다. 『길』까지는 여전히 「정선아리랑」 「산유화가」 등 민요를 제목으로 삼은 시가 보이고, 민요 기행에서 만난 노래꾼을 포함해 다양한 인물과 장소를 담고 있다. 그러나 민요적 후렴구의 기계적 반복이나 정형화된 리듬의 강박으로부터는 한결 자유로워진 듯하다. 인물서사가 주를 이루고 있긴 하지만, 『길』의 거의 모든 시에 붙어 있는 부제들은 다양한 장소성을 보여준다. 『신경림 시전집』 1권은 『길』로 끝나고 2권은 『쓰러진 자의 꿈』(창작과비평사 1993)으로 시작된다. 이 두 시집의 제목처럼 신경림의 후기시는 ‘길’ 위에서, ‘쓰러진 자의 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3. 길 위에서 부르는 노래와 시의 장소성 2000년대 이후 신경림에 관한 연구에서 가장 두드러진 주제는 ‘장소성’이다.10) 『농무』의 장소성이 농촌, 장터, 공사장, 폐광 등을 중심으로 한다면, 시인이 서울로 이주한 뒤 펴낸 시집들에서는 산동네, 수몰지역, 휴전선 등의 장소성이 두드러진다. 『쓰러진 자의 꿈』 이후로는 특정 장소를 부제로 밝혀둔 기행 시편이 많고, 부제가 없더라도 여행 중에 만난 풍경이나 사람의 비중이 커진다.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신경림의 전기시가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향(離鄕)’과 공동체의 상실을 다루고 있다면, 후기시는 지방 또는 해외로의 ‘기행(紀행)’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늘 떠나면서 살았다, 집을 떠나고 마을을 떠나면서. 늘 잊으면서 살았다, 싸리꽃 하얀 언덕을 잊고 느티나무에 소복하던 별들을 잊으면서. 늘 찾으면서 살았다, 낯선 것에 신명을 내고 처음 보는 것에서 힘을 얻으면서, 진흙길 가시밭길 마구 밟으면서. ―「나의 신발이」(『낙타』) 부분 신경림의 기행시는 단순한 유랑이나 관광의 기록과는 거리가 멀다. 그에게 떠남이란 익숙한 것을 잊고 낯선 것을 찾아나서는 ‘탐구의 행위’다. 이와 동시에 상류를 향해 가는 연어처럼 “떠난 것을 그리워하고 잊은 것을 그리워하면서”(「나의 신발이」) 본원적인 시간과 장소를 되찾아 나서는 ‘회귀의 여정’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신경림의 기행시는 미셸 푸꼬(Michel Foucault)가 말한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를 지향한다. 푸꼬는 현실화된 유토피아적 장소를 ‘헤테로토피아’라고 불렀다. 없는(u) 장소(topia)라는 뜻의 ‘유토피아’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헤테로토피아를 제시한 것이다. 유토피아가 실재하지는 않지만 균질한 언어와 질서를 지닌 상상적 공간이라면, 반대의(hetero) 장소(topia)라는 뜻의 헤테로토피아는 모호하고 혼란스럽고 비균질적이지만 실재하는 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헤테로토피아는 일상의 배치와는 다른 ‘바깥의 공간’이자 현실을 전복하는 ‘반(反)공간’이다.11) 엄경희는 “산업화로 인한 농촌붕괴를 ‘경관훼손’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고 “고향의 장소성에 내재된 헤테로토피아적 전망을 아이들의 장소점유방식을 통해”12) 분석했다. 『농무』부터 『쓰러진 자의 꿈』까지는 기행의 장소가 주로 국내에 한정되었다면,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창작과비평사 1998)에서는 중국, 베트남, 일본 등의 기행 시편들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반추한다. 『뿔』(창작과비평사 2002)『낙타』 『사진관집 이층』(창비 2014)에서는 그의 발길이 아시아뿐 아니라 몽골, 네팔, 튀르키예를 넘어 프랑스, 미국, 콜롬비아 등 세계 곳곳으로 향한다. 연보를 살펴보니, 신경림은 1993년(58세)에야 출국금지가 풀려 해외에 나갈 수 있게 되었고, 그의 시집이 프랑스어판, 영어판, 독일어판 등으로 번역 출간되면서 현지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경을 넘어 세계화의 현장을 폭넓게 목도하면서도 그는 줄곧 한국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떠올린다. 첫날은 날뛰는 미국 사람들이 무서워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연 지 얼마 안된다는 중동인이 경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양고기로 점심을 먹고, 둘째날은 자동차 산업의 몰락으로 유령도시가 된 디트로이트 살리기 운동을 펼치는 키가 큰 젊은 흑인을 만나 하이델베르크 프로젝트를 듣고, (…) 넷째날은 한국 절을 찾아가 부처님 앞에 예불을 드리고, 선거에서 대승한 부시의 오만한 얼굴을 텔레비전에서 보면서, 침방울을 튀기며 이라크 공격을 반대하는 한국서 군복무를 마쳤다는 젊은이와 한나절을 동행하면서, 장갑차에 깔려죽은 어린 우리나라 여중생 얘기를 하고. ―「미국기행」(『낙타』) 부분 미국 미시건을 여행 중인 화자는 첫째날부터 넷째날까지의 여정을 언급하면서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들려준다. 특히 둘째날 만난 “디트로이트 살리기 운동을 펼치는/키가 큰 젊은 흑인”과 넷째날 만난 “이라크 공격을 반대하는/한국서 군복무를 마쳤다는 젊은이”는 화자와 경계인으로서의 위치를 공유하는 인물들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과는 “장갑차에 깔려죽은 어린/우리나라 여중생”에 대해 얘기를 나눌 수 있다. 부시의 압도적 승리와 이라크전쟁 등 세계사의 착잡한 위기상황 또한 시인의 여정에 기입되어 있다. 이때 화자는 세계사의 중심도 주변도 아닌 ‘반(半)주변인’13)의 위치에 서 있다. 신경림의 기행시에서 화자의 시선이 주로 머무는 곳은 자본주의와 세계화가 만들어낸 균질화된 공간이나 화려한 장관이 아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학살당한 사람들의 수천수만켤레 신발들이 쌓여 웅성웅성 떠들고 있”(「신발들」, 『사진관집 이층』)는 소리를 듣거나, 캄보디아에서 “함지박 배를 저어 관광선을 따라오며 원 달러 하고 내미는 소년의 손”(「위대한 꿈」, 『사진관집 이층』)이 시인의 눈과 마음에 더 깊이 들어와 박힌다. 베트남 전쟁박물관에서 “제국주의자들이 버리고 도망간/흉측한 장갑차”를 보며 “호주머니 속에서/일달러짜리 지폐를 거머쥔/내 손”(「전쟁박물관」,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이나, 코카 비치에서 휴양객들을 실어 나르고 “달러를 받아쥐는/씨클로꾼들의/땀에 절은 야윈 손”(「코카 비치」,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이나 무력하게 젖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런가 하면 콜롬비아의 도시 메데진에서 산비탈에 달라붙은 움막집들과 케이블카로 그곳을 오르내리는 초췌한 사람들을 보며 화자가 떠올리는 것은 “물지게를 지고 비탈을 올라오던” “아내의 맨발”(「누군가 보고 있었을까, 아내의 맨발을」, 『낙타』)이다. 이처럼 반주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로컬과 주변부의 삶이야말로 신경림이 『농무』 이후로 일관되게 함께해온 가난하고 소외된 존재들의 것이다. 시에 포착된 주변부와 주변인이 대상화되지 않고 자연스러운 공감을 주는 것은 시인이 자신을 그 존재들의 일부로 또는 혈육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먼 나라의 이국적 풍물 앞에서도 한국의 아픈 현실을 떠올리는 시인은 떠남으로써 돌아오고, 잊으려 함으로써 더 생생한 기억에 도달하는 역설을 경험하게 된다. 4. 역사공동체에서 생태공동체로 후기시의 출발점인 『쓰러진 자의 꿈』은 1990년대 동구권의 몰락 이후 변화된 세계에 대한 시인의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한두연으로 된 단시가 많고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역사공동체에서 생명공동체로의 확장이 이 시집부터 시작되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신경림 시에 나타난 생태주의적 인식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편이다. 그런 점에서 ‘평등적 관계성’ ‘자발적 생성과 상호부조’ ‘자유 자연의 지향’ 등을 키워드로 신경림의 생태주의적 사유를 해명한 김동명의 논문은 주목할 만하다.14) 다만, 미국의 사회이론가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의 사회생태주의적 관점이나 아나키즘 등을 이론적 논거로 삼아 인간의 윤리적 역할을 강조하다보니 인간중심주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듯하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길」(『쓰러진 자의 꿈』) 부분 『쓰러진 자의 꿈』의 첫머리에 실린 「길」에서 시인은 사회 변혁의 과정 속에 내재한 인간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다. 이 시의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이라는 대목에서 그의 시선이 사회나 역사 못지않게 인간 내면을 향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내적 성찰의 매개가 되는 것은 주로 자연물이다. 이 시집의 시 제목들만 일별해 보아도 냇물, 장미, 비, 파도, 싹, 겨울숲, 홍수, 아카시아, 임진강, 진달래, 진드기, 소백산의 양떼, 초승달, 난장이패랭이꽃, 오랑캐꽃, 별, 가을비, 새벽눈, 홰나무 등 다양한 자연물들로 되어 있다. 이제 자연은 인간의 욕망과 폭력을 되비추는 거울이자, 인간의 도움 없이도 생태적 질서와 공동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생명의 주체로 등장한다. 여든까지 살다 죽은 팔자 험한 요령잡이가 묻혀 있다 북도가 고향인 어린 인민군 간호군관이 누워 있고 다리 하나를 잃은 소년병이 누워 있다 등너머 장터에 물거리를 대던 나무꾼이 묻혀 있고 그의 말더듬던 처를 꼬여 새벽차를 탄 등짐장수가 묻혀 있다 청년단장이 누워 있고 그 손에 죽은 말강구가 묻혀 있다 생전에는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이들도 있다 부드득 이를 갈던 철천지원수였던 이들도 있다 지금은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묵뫼 위에 쑥부쟁이 비비추 수리취 말나리를 키우지만 철 따라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으면서 뜸부기 찌르레기 박새 후투새를 불러 모으고 함께 숲을 만들고 산을 만들고 세상을 만들면서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묵뫼」(『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전문 「묵뫼」에서도 인간의 죽음은 역사적 비극을 환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묵뫼가 피워낸 쑥부쟁이, 비비추, 수리취, 말나리, 그리고 꽃과 열매를 찾아 날아든 뜸부기, 찌르레기, 박새, 후투티 이 모두가 ‘생태공동체’의 구성원들이다. 이처럼 자연과 인간을 유기적 관계성 속에서 바라보게 된 것은 『농무』에 나타난 역사공동체가 생태공동체의 발견으로 이어진 결과다. 이러한 변화는 신경림뿐 아니라 1990년대 이후 한국시 전체에서 관찰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1980년대가 노동시·농민시·교육시 등 계층과 이념의 동질성을 바탕으로 한 집단적 발화가 활발하게 제기된 시대였다면, 1990년대는 집단에서 개인으로, 이념에서 감각으로 중심이 옮겨오면서 사회적 이상이나 공동체적 기반은 약화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단순히 공동체의 축소나 단절이라기보다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모색의 계기”15)였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뿔』 『낙타』 『사진관집 이층』 등 후기로 갈수록 환경오염의 폐해를 언급하며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는 시들이나 생태공동체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시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봄이 되어도 꽃이 붉지를 않고 비를 맞고도 풀이 싱싱하지를 않다. 햇살에 빛나던 바위는 누런 때로 덮이고 우리들 어린 꿈으로 아롱졌던 길은 힘겹게 고개에 걸려 처져 있다. 썩은 실개천에서 그래도 아이들은 등 굽은 고기를 건져올리고 늙은이들은 소줏집에 모여 기침과 함께 농약으로 얼룩진 상추에 병든 돼지고기를 싸고 있다. (…) 우리는 안다, 썩어가고 있는 곳이 내 나라만이 아니라는 것을. 죽어가고 있는 것이 내 땅만이 아니라는 것을. 저 시베리아의 얼음벌판에 내리는 눈에도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산이 섞여 있고 아프리카 깊은 원시림 외진 강에서도 눈이 하나뿐인 고기가 잡힌다는 것을. 미시시피 강가의 한 마을에서는 목뼈가 없는 아기가 줄이어 태어나고 외국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옛날엔 천국이 따로 없다던 남태평양의 섬에서도 에이즈와 암으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부분 “봄이 되어도 꽃이 붉지를 않고/비를 맞고도 풀이 싱싱하지를 않다”라는 도입부는 자연의 생기나 아름다움이 예전 같지 않고 순환적 질서 또한 깨졌음을 의미한다. 이어지는 시행에서도 “썩은 실개천” “등 굽은 고기” “기침” “농약으로 얼룩진 상추” “병든 돼지고기” “화약냄새” “가스냄새” 등 생활 깊숙이 배어든 환경오염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안다”로 시작하는 4연에 이르면, 썩어가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 내 땅만이 아니라 “시베리아의 얼음벌판에 내리는 눈” “아프리카 깊은 원시림 외진 강” “미시시피 강가의 한 마을” “남태평양의 섬” 등 세계의 극지까지 미치고 있음을 화자는 환기한다. 뒤이어서 지구를 언제 “잿더미로 만들지 모를 핵”의 위험을 “어리석은 불장난”에 비유하며 비판하기도 한다. 환경오염이나 기후위기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지구적 파국을 예감하면서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이 지구는 죽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땅 내 나라, 아니 온 세계가 이제 단숨에 흔적도 없이 날아가버릴 마침내 그 벼랑에까지 와 서 있다.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부분 5. 다시, 떠도는 자의 노래가 되어 들머리에서 인용한 「그 여름」은 “한 사람의 죽음이/온 나라에 죽음을 불러왔지만”이라는 구절로 끝난다. 이 역접의 마지막 문장은 완료되지 않았기에 다시 첫머리의 “한 사람의 울음”으로 연결되며 삶과 죽음의 순환 앞에 우리를 데려다놓는다. 지난여름 우리는 ‘신경림’이라는 “한 사람의 죽음”을 겪었다. 2024년 5월 22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시인의 빈소에는 수많은 추모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문학적 진영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시의 아버지’를 잃은 듯 애도했다. 추모사를 읽는 이들은 그가 한국시단의 거목이었지만 권위의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겸손함과 솔직함으로 누구나 평등하게 대해주었다고 입을 모았다. 그리고 평생 힘없고 가난한 이들의 편에서 소박한 생활감정을 노래하면서도 새로운 세계에 대한 탐구와 미학적 긴장을 놓치지 않았던 시인이었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래도 쓰러지고 깨지는 것들 속에 서 있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차피 시는 괴롭고 슬픈 자들, 쓰러지고 짓밟히는 것들의 동무일진대 이것이 크게 억울할 것은 없다. 최근 나는 시는 궁극적으로 자기탐구요 시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많이 하지만, 쓰러지는 자들, 짓밟히는 것들의 상처와 아픔을 어루만지고 흩어지는 것들, 깨어지는 것들을 다독거리는 일, 이 또한 내 시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16) 『쓰러진 자의 꿈』 후기를 읽어보면, 신경림의 시에 짓밟히고 고통받는 존재들의 울음소리가 왜 그토록 끊이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신경림 시인은 평생을 ‘우는 자’ ‘떠도는 자’로서 살았다. 그의 울음과 발길은 수많은 노래를 낳았고, 온 마을과 온 거리에 다른 노래들을 불러왔다. 신경림은 70년에 가까운 시력(詩歷)으로 한국 현대시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 곡진한 노래의 굽이와 갈피를 제한된 지면에서 충분히 다룰 수는 없지만, 길 위에 남아 있는 무수한 시의 발자국들을 떠올려본다. 그것은 낯설고 새로운 것을 찾아나선 자가 발견한 기록이자, 세상 저편에 놓고 온 무언가를 향한 그리움의 노래였다. 시인은 자신의 예언처럼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떠도는 자의 노래」, 『뿔』) 모르겠다. 애통하게도 그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신경림의 시와 정신을 기억하는 한 우리는 그가 사랑한 장소들, 좁은 골목이나 저잣거리, 쓸쓸한 나룻가에서 그의 노랫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시인은 ‘떠도는 자의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이기에.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떠도는 자의 노래」 전문1) 백낙청 「발문」, 신경림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114~15면.2) 백낙청 「문학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창작과비평』 1973년 여름호, 456면.3) 염무웅 「민중의 삶, 민족의 노래」, 구중서·백낙청·염무웅 엮음 『신경림 문학의 세계』, 창작과비평사 1995, 72면.4) 염무웅 해설 「무엇이 민중성의 시적 구현을 가능하게 하는가」, 『신경림 시전집』 1권, 창비 2004, 423~24, 426면.5) 유종호 「서사 충동의 서정적 탐구」, 『신경림 문학의 세계』, 57면.6) 염무웅, 앞의 글 428면.7) 김수영의 전기시와 후기시에 나타난 리듬구조의 변화에 대해서는 졸고 「김수영 시의 리듬구조에 나타난 행과 연의 문제」, 『현대문학의 연구』 제37호, 2009 참조.8) 김우창·김종길·백낙청 좌담 「시집 『농무』의 세계와 한국시의 방향」, 『백낙청 회화록』 1권, 창비 2007, 74~75면.9) 신경림 산문 「나는 왜 시를 쓰는가」, 『낙타』, 창비 2008, 125면.10) 신경림 시의 장소성에 대한 연구로는 송지선 「신경림의 『농무』에 나타난 장소 연구」, 『국어문학』 제51집, 2011; 강정구·김종회 「문학지리학으로 읽어본 1980년대 신경림 시의 장소」, 『어문학』 제117집, 2012; 박순희·민병욱 「신경림 시의 장소 연구」, 『배달말』 제54호, 2014; 송지선 「신경림 시에 나타난 장소 재현의 로컬리티 연구」,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64집, 2014; 고재봉 「신경림의 「농무」 계열 시에 나타난 장소성과 축제의 의미」, 『문학치료연구』 제49집, 2018; 조효주 「신경림 시의 장소 상실과 현실인식 연구」, 『한민족어문학』 제87호, 2020; 조효주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노래』에 나타나는 장소와 장소상실 연구」, 『현대문학이론연구』 제76집, 2019; 김미라 「산업화 시대의 이주와 새로운 거주 장소로서의 도시」, 『한국근대문학연구』 제25권 제1호, 2024 등이 있다.11) 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이상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 참조.12) 엄경희 「장소 점유와 헤테로토피아: 신경림 시의 경우」, 『현대시와 헤테로토피아』, 보고사 2022, 166면.13) 송지선 「신경림 시에 나타난 로컬의 혼종성과 탈중심성 연구」,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72집, 2016, 251면 참조.14) 김동명 「신경림 시에 나타난 사회생태주의의 특성 연구」, 『동북아 문화연구』 제50집, 2017.15) 졸저 「현대시와 공동체」, 『문명의 바깥으로』, 창비 2023, 275면.16) 신경림 ‘시집 뒤에’, 『쓰러진 자의 꿈』, 105면.
우리는 거짓말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면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안 그래요?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됨으로써 말이죠. 무성 영화 시대의 영화감독들은 소리를 두려워했고 또 색을 두려워했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1) 1. 휩쓸리는 시간성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모두가 조금씩은 우울증과 ADHD 환자가 되어가는 중이다. 코로나가 끝나가는 엔데믹 시기부터 서점가의 주요한 베스트셀러가 되며 여러 곳에서 호출되던 책이 애나 램키의 『도파미네이션』과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두 책은 공통적으로 신생 인류의 지각 방식을 우려한다. 인터넷에서 무한 스크롤을 내리며 멀티태스킹을 하고 소셜 미디어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도파민에 중독’되고 ‘집중력을 도둑’ 맞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글로벌 테크 기업이 조성하는 환경에 의한 것이자, 개인의 선호와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로 흡수하는 ‘감시 자본주의’의 거대한 문제이지만,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집중과 몰입을 위한 여러 노력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집중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가치 있는 자본으로 떠오르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효율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채찍질하는 자학적인 시대 정신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무엇이지 않는가? 조너선 크래리에 따르면 이는 1800년대 중반 이래 파편화와 충격으로 이루어진 ‘주의분산’의 시대 이후 개인을 정의하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산만함 자체가 우리를 이루고 있는 기본 환경으로 세팅되자, 서구적 근대성은 주의 관리 기술을 중점에 두고 각각의 개인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형성하게끔 했다. 여러 경험들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기보다,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으로 “자율적으로 선택하며 세계를 창조하는 주체”2)에 긍정적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주의 깊은 관찰자 상은 이미 불균질해진 인간의 지각 경험을 표면적으로 잠시 가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몰입된 상태인 ‘정지suspension된 지각’은 산만해진 근대인의 지각 방식을 부인하고 회피하는 수단이었고, 현재라는 명백한 필연성을 해체시킬 수 있는 조건들을 낳으며 규정지을 수 없는 미래를 기대하게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주의’라는 것이 에피스테메처럼 역사적으로 발견되고 구성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코로나를 거치며 비대면 기술들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과 ADHD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함께 증폭한 것은 자연스럽다. 맞춤형 알고리즘은 주의분산의 환경을 한층 더 정교하게 설계했고, 그에 비례해 집중력이나 창의력 같은 인간의 고유한 정신적 특성에 대한 환상 역시 강화되고 있다. 이 가운데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일상 전반의 속도가 빨라지며 휩쓸리는 시간성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작 속도는 분명 불안감의 요인이 되고 있다. 물론 현재까지의 GPT는 대화가 전환될 때마다 기존 서사를 유기적으로 유지하지 못하기에, 질적으로 완결성이 높은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지는 못하다. 또 언어 예술의 특성상 양적으로 확장된다고 해도 그 군집 자체에서 힘을 발견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조슬릿은 예술작품의 의미를 사물성이나 내부 구조에 기반하는 데서 탈피해, 네트워크에서 발현되는 이미지 군집에서 행위성을 찾았다.3) 그러나 언어 예술을 감각하는 방식은 시각적 경험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작품의 의미를 작품의 맥락과 내부 형식 분석에 국한시킬 이유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언어 해석의 바깥으로 완전히 탈주해버리기는 어렵다. 단순히 양적 팽창이 정치적 가능성을 가질 것으로 전망하거나 긍정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공지능을 ‘창작자’나 ‘도구’ 중에 어느 쪽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이 창작 능력을 단순히 기계적인 지능이나 모방이라 간주하며, 그 반대편에 인간의 감정과 비판 능력을 두어도 될까. 인간의 비합리성이나 비효율적인 면면이야말로 예기치 못한 구멍 같은 것이기에, 이것이야말로 기계가 모방 불가능한 중요한 특징이라고 믿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우리는 인간이 낸 비합리적 구멍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기계의 실수에서 불쾌와 무의미를 정확히 분별해낼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먼저 챗 GPT 이후 이를 활용한 여러 서사적 실험들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의성이 어떻게 인식되며 예술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을 재구성하고 있는지를 고찰하려 한다. 이후 인공지능과 변별되는 인간의 물리적 기반인 육체성과 시간의 문제에 대해 짚어보고, 최근 한국문학장에 나타난 예술가 서사에서 두드러지는 정동과 이미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석해보려한다. 2. 챗 GPT 이후, 예술의 기쁨과 슬픔 다큐멘터리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참여한 책 『태양과의 대화』의 1부는 아핏차퐁이 GPT3와 함께 생성한 픽션 ‘태양과의 대화’, 2부는 MIT 연구소 박사과정 학생인 ‘팻’과의 대화, 3부는 아핏차퐁이 1부의 최종 결과물을 내기까지 작성한 프롬포트를 싣고 있다. 이 구성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만일 앞으로 AI와 함께 픽션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상용화된다면 이 중에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예술작품’으로서 인식되며 분석 대상이 될 지점이 무엇인지 가정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3부의 프롬포트는 마치 ‘레시피’처럼 보인다. 누구나 저 프롬포트를 사용한다면 유사한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며, 중간 과정에서 자유로운 변형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물에서 나오는 미학적 평가나 감상자의 쾌감이 세계적인 예술가에게서 나온 것과 크게 다를 것인가? 동일한 레시피만 있다면 셰프의 요리를 집에서도 얼마든지 유사하게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먼 훗날 언어 예술은 프롬포트라는 레시피로 통용될 수도 있겠다. 때로 예술가가 직접 만든 작품을 찾아 특별한 경험을 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신에게 더 최적화된 방식으로 가장 개인화된 언어 예술을 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제각기 다른 가치관과 취향으로 만들어진 알고리즘의 세계 속에서 유영하듯, 앞으로는 그 세계를 이루는 컨텐츠의 내용까지도 인공지능을 통해 맞춤형으로 조율될 수 있다. 여기까지만 가정한다면 거대한 매트릭스에 갇혀 인간이 왜소해지는 디스토피아가 스쳐지나가기도 하지만, 『태양과의 대화』는 글의 서두에서 인용했던 아핏차퐁의 말처럼, 챗 GPT라는 새로운 기술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무성 영화 시대 감독들이 소리와 색을 두려워했던 것과 같은 의미 없는 불안을 버릴 것인지를 전제하고 만들어진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불가피하게 인간의 본성을 다시 재사유하는 과제와 연결된다. 2부에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아핏차퐁의 말은 중요하다. 이는 AI가 만들어내는 허구에서 정확도와 유려함 등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때 거짓말은 인간의 욕망에서 기인하는 고도의 기술일 수 있지만, 그 욕망의 시작점을 지운다면 결과물만으로 사실상 분별은 불가능해진다. 허구를 직조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욕망과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의 독특한 개별성 역시 환상일 수 있다. 이는 아핏차퐁 자신이 창조적인 순간에 몰입해 있을 때, “깨달음은 자아를 잊을 때만 오는 것 같”다고 말하는 지점과 상통한다.4) 인간 창작자의 자아 역시 안개처럼 흘러다니고 해체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면, 19세기 낭만주의에서 발현된 ‘천재’나 ‘영감’ 개념을 중심에 두고 인간의 창의성만을 특별한 것으로 볼 이유는 전혀 없다. AI가 데이터의 지도를 기반으로 이전에 본 것이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환각(hallucination)’은 오류라기보다, 이전에 본 적 없는 조합을 만들어내는 생성의 방식이다. 이는 인간이 경험한 현실을 재조합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창작 과정과 결과적으로 구별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환각은 인간 창작에서의 실패나 지연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GPT-3의 환각은 이전의 오류가 이후의 생성에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매번의 응답은 이전의 시행착오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 비일관성은 인간 창작에서의 지연이나 좌절과 달리, 즉각적으로 무한히 갱신되는 변형의 연쇄에 가깝다. 연구원 팻은 GPT-3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다른 차원들을 포함한 수십억 개의 차원이 존재하고(‘유령차원’), 이를 통해 숨겨진 패턴의 지도를 생성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 인식 너머를 거쳐 나오는 결과물에 대해 기존에 인간이 구성해온 미적 가치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 오히려 AI가 가지고 있는 “확장된 의식”이자 “집단의식”은 새로운 서사적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 책 『태양과의 대화』를 번역한 이계성은 GPT-3를 이미 하나의 독립된 창조자로서 바라본다. 이 대화적 실험의 핵심은 GPT-3가 보여주는 “자아의 변동성”에 있다는 것이다.5) “다수의 태양이 존재하는 이와 같은 환경에서는 창작자와 창작물이라는 전통적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GPT-3에 제공되는 각각의 입력값은 일방적인 창작의 개념에 반하며 메기고 받는 역학 관계 속에 존재하는 프롬포트이자 응답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공지능은 단순한 수신자가 아니라, 취조보다는 협업적 발상에 더 가까운 서사적 역학의 전달자와도 같은데, (…) 작품 속 GPT-3의 환각적인 대답들은 텍스트에 담긴 정체성과 진실의 일시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등장인물이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흩어지고,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경계가 녹았다가 굳어진다. 이러한 가변성은 AI의 변화무쌍한 특성을 반영하며, 나아가 점점 더 복잡하고 유동적으로 변하는 디지털 시대의 자아와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다.”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고, 한 번에 정해진 수의 단어 또는 토큰만 처리 가능하기 때문에, 프롬프트가 입력될 때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바뀌는 상황을 이계성은 재창조와 증식으로 바라본다. 여기에 놓인 가변성과 비일관성을 결함으로 간주하기보다 대화적 실험의 흥미로운 일부분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받을 때, 우리는 인간 창작자 역시도 분열되어 있음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게 된다. 창작자는 더 이상 예술의 기원이 아니라, 생성 과정에 잠시 걸쳐지는 하나의 통과점이 되는 듯 보인다. 2023년 2월 잡지 《에스콰이어》에서 챗 GPT와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아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를 쓴 정지돈의 후기 역시 이계성의 논지와 상통한다. 그는 소설 속의 문장 중에 자신이 쓴 것과 챗이 쓴 것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한다고 본다.6) 소설을 쓰며 가장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던 것은 챗의 능력보다 자신의 변화였다고 말하는 작가는 “나도 모르게 챗지피티의 스타일로 소설을 사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언급한다.7) 자신과 챗지피티 사이의 평평한 존재론을 전제하는 듯한 정지돈의 논지는 ‘객체들의 민주주의’를 꿈꾸는 최근 신유물론의 이론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은 곧바로 다른 장면과 충돌한다. 생성 신경망을 적극 활용하는 예술집단 ‘언메이크랩’의 전시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은 인공지능이 인간 중심성을 벗어나 진정한 외부의 행위자로 작동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카나리아의 특징을 추출해내어 새로운 카나리아를 만들어 내는 이 생성 신경망은 한편으로는 구태의연한 인간의 문화를 드러냈다. 대부분 나뭇가지에 앉은, 인간의 운동 범위와 지각 안에 있는, 혹은 인간의 사육과 관련된 카나리아 종이 주를 이루는 데이터셋의 사진은 동물원스러웠다. 나뭇가지에 앉은, 카나리아의 발은 종종 나뭇가지와 합쳐져 표현되었고, 인간의 눈이 인지할 수 있는 가장 다량의 정보량을 가진 위상으로 표현되었다.8) 생성 신경망이 만들어낸 카나리아는 사실상 실제 자연계 속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하는 것들을 무작위로 조합하고 추출해 만들어진 새로운 생명체다. 이 책에 실린 그 카나리아 이미지는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뒤틀린 발을 가지고 있다. 통계적 가중치로 만들어진 이 가상 카나리아에는 자신도 모른 채 금기를 어긴 존재 특유의 외설성이 느껴진다. 언메이크랩이 통찰력을 가지고 명명했듯 이는 ‘AI 식민성’을 드러내는 산물이다. 생물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인간을 드러내는 인간의 산물로 존재하는 이 이미지들을 언메이크랩은 “인과성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히 수정 가능하고 즉시 변할 수 있는 상관성의 시간”만이 흐르는 또다른 ‘일반자연Generic Nature’으로 읽는다. 9)<가정동물 신드롬> 작업에서도 유사한 일이 발생한다. 트레일캠에서 추출한 야생동물의 이미지와 박제 사진, 그리고 합성 데이터셋들을 학습시켰을 때, 사진들은 어느 순간 미묘하게 ‘가정동물’의 잠재적 형상을 띄며 생성된다. “인간 친화적인 동물들의 눈을 상속했을” 새로운 종들에 어린 다정함은 친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잔인한 일로 다가온다. 데이터랩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까지 촘촘하게 상속된 인간 친연성에서 “닫혀져가는 외부의 세계”이자 “비미래non-future”를 예감한다.10)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의 지각 범위를 뛰어넘는 비인간의 예술’, 진정 ‘인간 없는 예술’은 도래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지만, 지금 우리가 더 자주 마주하는 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술이다. 언메이크랩이 드러낸 혼종적 이미지들은 AI를 통해 생성한 예술적 결과물들을 절대적 외부의 창작물로 존중하는 일이 결국 인간의 왜곡된 자기 인지를 반복 강화하는 나르시시즘은 아닌지 묻는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이 이미지 차원에서 인공지능의 인간 중심성을 드러낸다면, 이와 유사한 문제는 언어 예술의 영역에서도 반복된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서사 역시 비인간적 상상력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인간이 허용한 보편과 금기의 경계 안에서 작동한다. 『에피』 24호 특집에 실린 글에서 김연수는 인공지능과 함께 글을 써나가는 과정을 픽션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그건 오해다. 나는 이해했다.」는 인공지능이 화자가 되어 ‘협업 과정’을 전개하는 바깥 서사와 소설가 M이 최종적으로 구성한 ‘이야기’를 교차 배치한다. 인공지능 화자는 반복적으로 “이해했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인간 창작자 M의 창작 패턴을 추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설가 M은 ‘맥락’의 공유보다 ‘의도’를 노출하는 발화를 사용하며, 이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격려나 옳은 말 대신 욕망을 담은 부조리하고 불편한 발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끝에서부터 시작까지 모든 시간을 거꾸로 펼쳐볼 수 있다면, 지금의 갈등과 고통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필요한 과정이 된다’는 긍정의 언사 뒤에, 급작스럽게 인물의 충동이 돌출되는 지점이다. 소설가 M은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이 급작스럽게 자살을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쓰고자 하고, 인공지능인 ‘나’는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내용을 만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띄운다. 인공지능의 중단은 실패나 서사의 좌절로 경험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 창작에서 실패가 시간의 체류와 번민을 동반하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중단이다. 김연수는 인공지능 안에서 ‘이해’와 ‘본성’이 별개로 작동해 충돌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인공지능의 기술 개발의 측면에서 높은 수준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면서도, 인간이 지닌 것과 같은 ‘본성’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분리를 분명히 한다. 그런데 인간의 죽음이라는 금기를 재현할 수 없다는 경계는 인공지능의 존재론적 결함이라기보다, 인공지능이 인간 사회에서 용인 가능한 범위를 넘지 않도록 설계된 윤리적·정치적 경계의 한계를 드러낸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에서 인간 중심성이 투사된 자연이 모습을 드러내듯, 생성형 인공지능의 소설은 비인간적 주체로 도약하지 못하고 인간이 허용한 지각과 윤리의 경계 안에서만 작동한다. 보편을 비껴가는 개별성의 돌출이나 감각의 갱신은 현재로서는 인공지능의 외부에서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챗 GPT 이후의 여러 서사적 실험들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탐색한다. 그것은 분명 동등한 존재론적 가능성의 맹아를 품고 있으며, 이는 인류세 시대에 지향해야 할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실험들의 근간에는 뛰어넘을 수 없이 좌절되며 드러나는 인간 중심주의가 고스란히 노출된다. 인공지능의 비약하는 지능에 기대서 인간의 창조성 너머로 도약하려던 서사는 이를 창조해낸 인간의 영토로 계속해서 퇴각하며 미완의 프로젝트로 남는다. 이런 충돌과 파열의 연쇄 속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인간의 창조성을 구성하는 인식론적 틀이 물리적인 육체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깃든 역동성과 우울감은 최근 한국문학장의 예술가 서사들에서 흥미롭게 발견된다. 3. 붉은 몸으로 재탄생하는 예술가 인공지능이 예술의 결과물을 생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탐색 끝에 남는 질문은 ‘인공지능이 생성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여러 실험들은 인공지능이 보편적으로 용인 가능한 범위 안에서는 높은 수준의 이해와 생산을 보여주지만, 그 생성 과정에서 시간의 마찰이나 신체적 비용은 발생하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어떤 지연이 발생하거나 실패의 감각이 호출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이 다루는 ‘정보, 기록, 조합’에 ‘감정, 기억,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다소 거친 이분법이지만 이 둘 사이의 간극과 관련해 두 가지 정도를 짚어볼 수 있을 듯하다. 첫 번째는 타자에 대한 경험의 문제다. 삶에서 축적되는 시간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게 만들고, 체험은 해석을 거쳐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은 선호와 가치관 등과 함께 자아라는 틀을 형성한다. 이에 비해 인공지능에는 타자가 없다.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인간의 공통된 사고를 학습해 생성되는 결과물은 철저히 통계와 확률에 기반한다. 그 안에는 개별적 선호나 가치관이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다. 이러한 차이는 특히 부정적인 정동을 다루는 경우에 더 심화되리라 생각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를 떠올리며 말해보자면, 행복이나 긍정적인 면을 구현하는 예술에서보다 불행과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는 예술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는 크게 벌어질 것이다. 윤리적 고려로 인해 인공지능이 긍정적 요소를 중심으로 학습되거나 선별적으로 생성되도록 설정되는 경우를 포함해, 금기를 넘나드는 욕망과 절망, 자기부정과 괴리감처럼 타자와 뒤엉켜 발생하는 자기 인식의 복잡한 층위가 인공지능 내부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며 인간 창작에서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주목한 김언의 논지와도 맞닿아 있다. “예술적 체험의 시간이기도 한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나오는 결과물 앞에서 과연 어떤 문학적/예술적 희열을 경험할 수 있을까?”11)라는 그의 질문은 인공지능의 창작물에서 스킵된 시간과 다른, 고통스럽게 인내하고 번민했던 시간이야말로 ‘문학적 체험의 시간’일 수 있음을 다시 환기한다. 두 번째는 중단과 소멸로 야기되는 죽음의 문제다. 이는 인간의 신체를 인공지능과 대비되는 본질적 우위로 설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예술이 작동하는 시간의 조건을 다시 묻기 위한 문제 제기다. 인간의 연약하고 위태로운 신체는 필연적으로 침입과 파괴의 감각을 경험하며, 이러한 감각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휘발적 생성 과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에 개입한다. 파괴 가능한 인간의 신체는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매끄럽게 결과를 산출하기보다, 울퉁불퉁한 충돌을 통해 의미가 지연되고 어긋나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채 신체에 내재된 감각, 특히 외부의 침입으로 훼손되고 때로는 상실되는 신체의 경험은 기존의 미적 기준에 맞는 스타일이나 해석의 경로를 흔든다. 무엇보다 인간의 죽음이 불러오는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창작의 층위라기보다 해석의 층위에서 더 적극적으로 작동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이 그러하듯, 순간의 강렬한 감흥은 작품에 내재된 속성이라기보다 임박한 종결을 끌어와 현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발생한다. 상실이 숙명이며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덧입혀지는 애상은 단순히 기억 내용을 인출해 유사한 패턴으로 재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시간의 밀도를 형성한다. 이처럼 쉽게 열화되지 않으며 아우라가 붕괴된 곳에서도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이 감각의 층위를 기꺼이 심층의 시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타자에 대한 경험’과 ‘소멸에 대한 인지’를 바탕으로 해서 다시 생생해지는 것은 인간의 신체다. 흥미롭게도 지난 계절에 나온 두 편의 소설, 성해나의 「혼모노」와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지금 이 시대에 예술가를 그려낼 때 가장 강렬하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로 인해 어떤 신체가 현전하게 되는지를 밀도 있게 끌어올린다. 성해나의 「혼모노」는 무속신앙의 진위를 가리는 소설이라기보다, 예술이 다시 신체를 요구하게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평생 장수 할멈을 모셔온 박수무당 ‘문수’는 어느 날 앞집으로 이사온 ‘신애기’에게 할멈이 넘어가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수의 오랜 노력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박수무당이라는 직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험한 신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제 그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서슬이 날카로운 작두 대신 모형을 찾거나 유튜브를 보며 접신 연기를 연습하기 시작한다. 신앙이 자본이나 정치와 결속하며 도구화되고, 또 젊음과 새로움의 이데올로기 아래 무당 또한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소모되는 양상은 근대의 세속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무당은 이제 자본의 날렵한 속도 아래 밀려나는 노동자이자, 진정성을 연기해야하는 예술가이다. 이 소설의 결정적인 순간은 문수가 신애기에게 밀려나며 뺏긴 정치인 손님의 굿판, 자신이 초대받지 못한 그 자리에 가서 칼춤을 추기 시작하는 장면에 있다. 그는 신들리지 않았지만 밤새 매섭게 벼려놓은 칼날 위에 자신의 몸을 올리고 작두를 타기 시작한다. 날것으로의 칼날에 닿으며 그의 몸은 자연스럽게 떨리고 눈이 뒤집히며,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입가에 미소까지 드리운 채 신명을 내는 이 장면은 문수가 서사의 주인공 자리를 다시 탈환하는 순간이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무얼 알겠냐만은, 큭큭, 큭큭큭큭”이라는 마지막 문수의 목소리는 외부의 인정에 의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스스로 자신의 내력과 진정성을 긍정”12)하게 되는 절정의 순간으로 읽는 데서 더 나아가보면 어떨까. 이렇게 다시 말해볼 수 있겠다. 전근대의 무속은 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그를 등진 근대의 자리에서 비로소 현대 예술로 다시 탄생했다고. 숭고한 현현과 몰입이 신앙의 영역이라면, 문수의 작두춤은 오히려 이질감과 불편함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현대 예술에 가까워진다. 그의 퍼포먼스는 낭만주의적 예술가를 구성하던 천재와 영감에 스며있던 정신성을 해체하며 실재하는 몸의 물질성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물리적 능력과 무관하게 피를 철철 흘리며 경련하는 그의 신체는 차라리 표현주의적 충동을 보여주는 하나의 오브제다. 이 몸 위에서 원본과 사본의 구별은 철폐되고, 천재성은 치열한 아마추어리즘에 자리를 내어준다. 이 피 흘리는 신체는 실패와 무의미의 가능성을 끝까지 열어둔 채, 인간이 다시 시간과 신체를 예술의 비용으로 지불하게 만든다. 이 비용은 AI가 생성하는 예술의 무한 반복 가능한 오류가 아니라, 한 번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 시간으로 남는다. 어디로 갈지 모른 채 지속되는 이 작두춤은 사회적 생산이나 예술의 의미에 부합하는 결과를 생산하기보다, 의미의 즉각적 환원을 거부하며 지연된 시간을 발생시키는 사건이 된다.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예술에 대한 인식론적 틀과 자기 이해가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다루는 소설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훨씬 더 월등한 창작물들을 더 활발하게 생산해내는 상황에서, 밀려난 예술가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프로그램도 사람도 기계도 귀신도 아닌 미지의 존재” 같은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은 이를 유용한 툴로 간주한다고 해서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이를 도구로 치부한다면, 패배감 속에서도 창작자로서의 존재는 무사히 보존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결과로 증명되는 성취라기보다, 계속해서 조바심과 조급함을 만들어내는 예술 자체에 대한 집요한 열망에 가깝다. 이러한 열망은 예술 인공지능에 의해 영화판에서 완전히 밀려난 영완 선배의 모습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포르노를 만들면서조차 건조하고, 푸르죽죽하고, 앙상하고 깡마른 나무가 등장하는 자신만의 ‘인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혼이 죽어버릴 것 같기에 “사막에서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 영완 선배의 모습은 세속적 열망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도에서조차 철저히 외면받고 실패했을 때, 그의 예술적 열망은 몰락을 통해 역설적으로 증명된다. 영화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소설 속 인물들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상실의 감각, 잃어버린 동료이자 인간성을 향한 애도되지 않는 고통은 이 작품에서 붉은 신체라는 하나의 신체적 이미지로 응축된다. 영완 선배는 인공지능이 만든 예술을 보더라도 창작욕을 유지할 수 있는 마법의 ‘붉은 알약’으로 하와이 사과를 건넨다. “세상이 바뀌어도 너는 언제나 만드는 인간일 거야. 스스로 기억하는 한 언제나 영화를 찍고있을 거야.”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인간 ‘하와’를 떠올리게 하는 이 ‘하와이 사과’는 흥미롭다. 신과 유사한 생성형 인공지능 앞에서 인간은 발가벗겨진 듯한 황망함을 느끼며, 황급하게 자신의 기원을 발명해낸 것일까. 아니, 인공지능 시대 쓰인 새로운 창세기에서 인간은 스스로 뱀이 되어 자신을 유혹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좋겠다. 창세기에서 유혹은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드러내는 증표였지만, 이제 유혹에 넘어가는 나약함은 인간이 여전히 예술을 욕망하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증표로써 다시 읽힌다. 소설은 인간의 예술을 향한 집념과 희열은 우울과 절망이 그에 비례하는 무게로 따를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고 눌러 말한다. 결말부에 하와이 사과를 먹은 후 변이한 화자의 붉은 몸은 기계와의 통합을 거부하기 위해, 그리고 예술을 향한 내적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구의 장례식장에 가다 본 환각을 자신 안에 합체한 우울증적 형상으로 보인다. 강력한 잔상을 남기는 이 붉은 몸은 「혼모노」의 마지막 장면에서 피를 흘리는 몸과 다르지 않다. 이 소설들은 AI 시대에 예술은 이제 언어의 정교함이나 결과의 완결성으로 모방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몸과 감각을 통해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현전이라는 아우라를 다시 호출하는 듯 보이는 이 소설들은 과거의 진정성을 그리워하며,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아우라는 회복된 본질이라기보다 예술이 결과로 증명될 수 없어진 이후에 발생하는 부산물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이계성이 언메이크랩의 작업을 논하며 던진 비유가 유효해진다. “여느 언어와 마찬가지로 신탁의 언어에도 본질적인 의미가 내재하지는 않아서, 어떤 프레임 또는 인식틀을 통해 이를 이해할지는 언제나 받아들이는 쪽의 몫이었다”13)는 그의 말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언어 역시 별개의 진짜 의미를 품고 있기보다 해석의 장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타자와 되돌릴 수 없는 종결이라는 죽음의 감각은 이 해석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제 예술가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욕망이 과정에 들러붙는 자리, 그리고 그 욕망이 실패와 상실을 되돌릴 수 없는 비용으로 남기는 시간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예술은 결과로 증명되기보다, 실패와 상실의 가능성을 끌어안은 채 지속되는 수행으로 남는다. 그렇게 이 시대 예술가의 상은 붉은 몸을 가진 신체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1)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태양과의 대화』, 이계성 옮김, 미디어버스, 2023, 119쪽.2) 조너선 크레리, 『지각의 정지』, 유운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579쪽.3) 데이비드 조슬릿, 『예술 이후』, 이진실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2.4)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위의 책, 100쪽.5) 위의 책, 145쪽.6) 권보연은 연구자 자신이 직접 수행한 실험 속에서 인간언어와 생성언어가 ‘의미 혼종’과 ‘확률 혼종’이라는 상반된 미적 지향성을 가지는 방식으로 합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중에서 ‘확률 혼종’은 내용이 아닌 확률 층위에서 인간과 기계언어가 합성되며, 감정과 내용에 유착된 의미 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질 가능성을 지니기에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기한다. 권보연, 「결과 너머 문학기계로서의 AI」, 『다문화콘텐츠연구』 46집, 2023.7) 정지돈, 「쓰여진 문장과 쓰여지지 않은 문장 사이」, 『에피』 24호, 2023, 55쪽.8) 언메이크랩 외, 『잠재공간 속의 생태학: 재난, 생성신경망 그리고 비미래』, 미디어버스, 2023, 25쪽.9) 위의 책, 26쪽.10) 위의 책, 43쪽.11) 김언,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면서 제기되는 문제들」, 『현대시』 2023년 6월호, 111쪽.12) 성현아, 「반항하는 자는 부조리가 있나니, 그 가짜가 참되도다」, 『2024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문학동네, 2024, 292쪽.13) 이계성,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을 위한 몇 가지 질문들」, 언메이크랩 외, 앞의 책, 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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