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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자음과모음 | 2024년 봄호(제60호)

비평의 감정 — '조금도 비극적일 것 없는 분열'은 어떻게 가능할까

강동호 문학평론

1984년 서울 출생,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후 같은 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 학위 취득 200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이후 평론 활동 시작. 계간 『문학과사회』 편집 동인으로 활동. 젊은평론가상, 대한민국 예술원 젊은예술가상 등 수상. 저서로 『지나간 시간들의 광장 - 문학의 동시대성과 비평의 정치』(문학과지성사, 2022) 등이 있음. 현재 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 부교수로 재직중

보잘것없는 애정을 숨기려는 그런 과장된 말들은 감안해서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충만한 마음이라도 때로는 고작 공허한 비유로나 표현될 뿐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욕망이나 관념, 고통의 정도를 결코 적확하게 표현할 수 없을뿐더러 사람의 말이란 금 간 냄비와도 같아서 별을 감동시키고자 하지만 곰을 춤추게 하는 가락을 내는 데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
-귀스타브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 중에서1)



분열의 감정


  동시대 한국문학 비평장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최근 들어 비평가들 간의 대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비평장을 가리키는 관례적인 표현이 대화의 부족, 논쟁의 결핍, 비판의 실종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최근의 변화된 풍경은 이색적이고 주목할 만한 현상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대화의 분위기가 조성되는 데 이 글이 실릴 『자음과모음』의 역할은 분명 작지 않아 보인다. 작년 여름 ‘대화 장치로서의 문예지’라는 슬로건을 앞세우며, 잡지의 전반적인 기조를 새롭게 정립한 『자음과모음』이 주력하고 있는 것은 ‘문학에 대한 대화와 성찰의 장치로서의 문예지를 설계’하는 것, 이를 위해 비평들의 대화를 촉진시킬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을 모색하는 일인 것 같다. 당시 발표된 권두언의 일부이다.


비평은 본래 대화가 아니고서는 성립할 수 없는 글쓰기 양식이기도 하고, 이전부터 문예지라는 장치에 주요한 작동 원리로 기능했던 선례도 있다. 이 지나간 비평 주도 시대의 계간지라는 장치가 계속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비평이 힘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착시가 있고, 때로는 눈총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의 비평은 어쩌면 조금 더 힘을 가져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그 시대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비평이 문학의 권력과 위계를 가지려는 것이 아니라, 대화의 재능과 역량을 발휘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대화 그 자체보다 더 궁극적인 목표가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러한 대화를 통해 읽고 쓰는 이들이 함께하는 동시대 문학이라는 장의 구성과 참여, 그리고 삶의 감각과 문학의 경험에 대한 질문과 인식을 불러오는 것이다.2)


  비평의 존재 방식이 근본적으로 대화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대화가 단지 작품과 비평 사이의 관계에 한정되지 않고, 문학 전반의 영역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선언과 다짐에 동의하지 않기란 어렵다. 물론 이러한 편집진의 기획 의도에 대한 의문과 비판, 그리고 얼마간의 반감도 없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제도적 호명에 의해 (이 글이 처하게 될 상황도 유사한데) 강제적으로 대화의 장에 불려 나오게 된 것 같다는 이상한 기분, 동료 비평가의 글에 대한 직접적 논평을 수행해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감,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이 모든 글쓰기 행위가 ‘동시대 문학이라는 장의 구성’을 위해 소모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과 결부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의 시간 속에서 문학의 현재를 고민하고, 비평적 의제를 생산하는 장치를 구성하려는 잡지의 새로운 방향과 노력에 나는 지지를 보내고 싶은 쪽에 가깝다.3) 비평이 오늘날 작동하는 문학적 통치 시스템에 온전히 예속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리하여 새로운 비평적 정치의 시공간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비평 간 대화는 권장되어야 하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작년 여름 이후 『자음과모음』 기획에 응답하는 많은 글들이 발표되었고, 이러한 추세가 다른 매체들로까지 확장되고 있는 걸 고려하면, 결과적으로 비평 간의 대화는 그 어느 때보다 활성화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대화에 대한 요청이 반드시 제도적 기획의 산물로만 이해될 수 없다는 방증이기도 할 것이다. 각각의 대화의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날카로운 문제의식과 비판적 의제는 동시대 한국문학과 비평에 대한 동료 비평가들의 고민의 깊이와 스펙트럼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쉽게 정리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주제와 현안들이 제기되는 가운데, 열띤 토론과 논쟁 그리고 긴장감도 조성되는 것 같다. 이 글에 요구되는 것 역시 이러한 비판적 분위기에로의 동참일 것이다. 동료 비평가들의 글을 세밀하게 검토하고 그에 대한 나의 입장과 주장을 비판적 논리와 함께 제시하는 것, 그리하여 연속적 대화를 위한 새로운 의제를 생산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그러나 이번 글에서는 그 과제를 성실히 수행하지 못할 것 같다. 최근의 비평적 대화를 따라가는 내내 이전과는 다른 감정을 느꼈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의 비평장과 문학 제도를 둘러싼 여러 비판적 논의와 쟁투 속에서 (비록 구체적으로 거론할 수는 없지만) 의심, 적대, 원한, 분열의 분위기를 감지하며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에 직면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도대체 이 감정의 정체는 무엇일까.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나는 내가 느낀 감정이 최근의 비판적 대화와 논쟁에 대한 정당한 평가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특정 독자군의 심리적 상태를 반영한다고 믿지 않는다. 대화의 밀도나 깊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일련의 대화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지극히 날카롭고 정확한 것이었으며,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깨우쳐주는 대목도 적지 않았다. 갈등과 분쟁이 없는 대화의 풍경을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대화에 갈등이 없을 수 없고, 특히 서로 다른 입장이 경합을 버리는 담론의 장에서라면 그것은 비일비재한 일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원인이 비판적 대화의 수준이나 정합성에 있지 않다는 사실부터 전제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이 해명하고 싶은 것은 최근의 메타비평을 읽으면서 내가 겪은 분열, 혹은 그러한 분열이 야기하는 주관적 감정과 결부되어 있다. 이 감정은 개별적인 것이고, 글에서 직접 언급할 수 없는 개인적 체험에 기반한 주관적 반응에 가깝다. 따라서 이 감정은 그 어떤 것도 대변하지도 못하고, 보편성을 결여한 나이브한 반응으로 비칠 수 있을 것이다. 몇몇 동료 비평가들의 글(혹은 그들의 감정)을 읽고 인용하며 글이 전개되겠지만, 이 글은 기본적으로 연속적 대화를 추구하기보다 그저 단편적 독백에 머무를 예정이다. 그래서 이 글은 불가피하게 최근 논란이 되기도 했던 ‘비평의 에세이적 경향’에 합류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최소한의 무언가에 대한 (대표하지 않는 차원에서) 부분적 반영뿐이다. 적지 않은 시간을 메타비평에 할애했던 비평가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제도에 강하게 결착되어 있는 비평가로서 내가 통과해야만 했던 위선과 모순, 그리고 그것에 수반되는 모종의 불가해한 무력감 같은 것 말이다.



조금도 비극적일 것 없는 분열


  우선 분열에 관해 말하기 위해, 언젠가 폴 벤느가 회의주의자로서의 푸코의 초상을 묘사하면서 제시한 ‘어항의 비유’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회의주의자는 이중의 존재다. 사유하는 한 그는 어항 바깥에서 어항 안을 맴도는 금붕어들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 역시 살아가야 하기에, 그 자신 또한 한 마리 금붕어로 어항 속에서 다음번 선거에 어떤 후보를 지지할 것인지 결정한다(자기 선택에 대단한 진릿값을 부여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회의주의자는 어항 바깥에서 어항을 의심하는 한 명의 관찰자인 동시에 금붕어 가운데 한 마리다. 분열이 있지만 조금도 비극적일 것 없는 분열이다.4)


  우리가 자신이 속한 세계에 대해 사유하고, 그것의 한계를 탐구할 때 정신의 주체는 바깥에서 안을 바라봐야 한다. 그러나 비판적 정신이 외부에 있을 때에도, 주체의 진짜 현실은 여전히 어항 안에 있다. 사유에 있어서 이상주의자이지만, 구체적 삶에 있어서 지극한 현실주의자라는 이중성 속에서 회의주의자는 분열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사유의 이상과 현실의 경험이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론적 사유와 현실적 실천 사이의 간극. 자칫 이러한 간극과 괴리가 야기하는 분열은 누군가에 의해 조롱거리로 비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비판을 통해 바뀌는 게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변화되지 않은 현실 속에서 여전히 살아간다는 사실은, 회의주의자가 모종의 자발적 위선과 모순, 심지어는 유체 이탈 화법을 감수해야 함을 뜻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비판적 주체의 실패를 뜻하는 것일까. 폴 벤느는 이러한 분열이 불가피한 것이고, 심지어 ‘조금도 비극적일 것 없는 분열’이라고 강조한다. 오히려 현실과의 간극을 내포하지 않는 비판적 사유를 기대하는 것이 순진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간극을 수용하면서도, 구체화된 실천의 방법을 모색하고 현실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이어가는 태도에 달려 있다.

  비평장이라는 글쓰기 제도를 어항에 비유한다면, 비평가의 실존적 위치는 세 가지로 일별될 수 있을 것이다. 어항 안에 있거나, 어항 밖에 있거나, 아니면 안팎에서 이중적으로 존재하거나. 평소 우리는 어항 안의 금붕어로서 글쓰기를 이어가고, 제도 안에서 비평가에게 요구되는 다양한 활동들을 실천하며 살아간다. 그렇지만 비평가가 늘 어항 안의 금붕어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수행하는 글쓰기가 중요한지, 정의로운 일인지, 어떤 문제가 없는지, 그것을 강제하는 제도와 시스템은 무엇인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위해 비평은 종종 어항 바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여러 제도적 한계를 발견하고 자신의 글쓰기 역시 그러한 시스템 속에서 배태된 것임을 자각했다고 해서, 비평가가 온전히 어항 바깥으로 탈출하는 것은 아니다. 비평가가 실제 비평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는 다시 어항 속으로 들어와야 하고 그 과정에서 자아의 이중화, 즉 분열을 체험할 수밖에 없다.

  최근 들어 내가 답답함을 느꼈다면, 아마도 이러한 분열이 언제부턴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기분을 선사하고 있음을 자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특별히 ‘비극적’일 것까지는 없지만, 비평장의 안팎을 오가는 정체성의 변동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그 분열이 불러일으키는 부정적 감정, 이를테면 피로, 냉소, 무기력, 답답함, 죄책감, 수치심 등을 체험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분열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분열을 감당할 수 있는 방법을, 다시 말해 어항 바깥의 나와 어항 속의 나를 매개할 수 있는 방법과 원리를 잃어버린 것 같다고 느낀다.

  여기서 나는 비판에 대한 냉소적 응답의 일환으로 흔히 거론되는 대안 부재를 지적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현재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비판적 대화의 분위기, 분명 환영할 만한 변화 속에서도 비평가의 글이 어떻게 소비/소모될 수 있는지, 나아가 그러한 대화에 참여하고 있는 비평가의 실존을 분열시키고 소외시키는 기제가 없는지를 묻고 싶은 것이다.



비평과 비평가의 분리


  이 분열이 야기되는 다양한 기제와 구조적 배경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좀 더 긴 글이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이야기의 방향을 조금 바꿔보고 싶다. 내가 제기하고 싶은 질문은 전혀 거창하지 않고, 오히려 지나치게 소박한 것이다. 그것은 비평의 분열과 (비)자발적 이중화가 야기하는 비판의 감정, 비평가의 위태로운 실존이다. 

  이러한 제안은 다소 뜬금없게 들릴지도 모른다. 비판과 감정은 양립할 수 없는 단어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비판이 이루어지는 데 있어서 감정은 일차적으로 배제되어야 할 요소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비판을 구성하는 것은 철저한 논리와 세련된 이론, 그리고 시대를 진단하는 번뜩이는 현실 인식이어야 한다. 반면, 감정은 비판에 있어 우선적으로 제압되어야 할 이질적인 이방인에 다를 바 없다. 비판 주체가 감정적일 때 우리는 그 비판으로부터 논리적 일관성을 기대할 수 없고, 의도의 진정성을 신뢰할 수 없다. 감정적 비판은 상대방에 대한 원한과 증오, 그리고 비합리적 적대 의식을 보여주는 징표에 불과하다. 즉, 감정은 비판에 있어 일종의 금기어와 다를 바가 없으며, 지금까지 비평의 감정이 진지하게 논의되지 않은 정당성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비판은 크든 작든 참여하는 주체에게 감정의 흔적을 남긴다. 나의 의견이 부정당했다는 사실에 분노하기도 하고, 때로는 논쟁의 적을 멋지게 쓰러뜨려보겠다는 열정의 근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내 주장과 입장이 부당하게 곡해되고 있다고 여길 경우,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상처와 억울함으로 인해 괴로움에 빠질 수도 있다. 대화 상대방의 의도를 의심하기도 하고, 때로는 내 비판에 대한 합당한 응답을 받지 못할 때 상처받고 고립감을 느끼기도 한다. 냉정을 유지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비판적 대화의 시간 속에서 감정은 생산되기 마련이다.

  엄연히 존재하지만, 마치 없는 것처럼 비가시화된 비판 또는 비평의 감정. 내가 비평의 감정이라는 이 애매모호한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된 직접적 계기를 제공한 글은 이은지의 「비평의 오물-물밑을 휘저으며」5)였다. 나는 그의 글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는데, 그것은 ‘정치적 올바름’을 둘러싼 과거의 논쟁 속에서 이은지가 비평가로서 겪어야 했던 곤경, 그리고 그에 대한 그의 솔직하고 거침없는 고백이 비평장에 놓여 있는 비평 주체의 구조적 취약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같은 시기를 통과했던 과거의 나를 반추하도록 요구했다. 

  철저하게 ‘나’라는 화자의 개인적 층위에서 과거를 회고하는 에세이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비평의 오물」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단순히 사적인 경험으로 환원될 수 없어 보인다. 그것은 오늘날 비평장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주체들에게 야기될 수 있는 담론의 힘, 즉 사적인 형태(감정)로 발휘되는 시스템의 강력한 힘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의 비평적 주체들에게도 언제든지 가해질 수 있는 폭력이기도 하다.

  이은지의 논의에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의제가 설정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비평가를 재생산하는 시스템의 원리와 메커니즘이다.


평론가가 평론가이기 위해서는 문예지라는 한정된 지면에 불러 세워지는 ‘호명’의 절차가 일차적으로 필요하며, 그렇게 호명된 자리에서 발화한 것이 다른 평론가들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는 ‘언급’의 과정이 이차적으로 요구된다. (……) 한정된 자원, 즉 지면을 확보해야 하므로 평론가는 주저하거나 머뭇거릴 자유가 없을 뿐 아니라 언제나 호명을 기다리는 ‘잠재 주체’로서의 불안을 견뎌야 한다.(77쪽)


  이은지가 밝히고 있듯 이러한 지적은 전혀 새로운 문제의식이 아니며, 비평계만의 제도적 특수성을 가리키지도 않을 것이다. 관건은 호명, 언급, 인용이라는 인정의 메커니즘 안에서 비평가가 불안을 경험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자발적 모색과 선택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때 비평가의 불안은 자유와 억압이라는 이분법으로는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비식별적 경계를, 비평장이라는 제도 안에서 생산되는 비평 주체의 복잡하고도 분열적 실존을 표상한다. 

  따라서 이 불안을 제도의 검열과 강제의 메커니즘으로 묘사하는 것은 단순하고 순진한 일이다. 이은지가 비평계가 유지되는 재생산 시스템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면서도, 그것을 ‘주니어 시스템’으로 규정하려는 일각의 주장에 비판적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주니어 시스템론은 “신진 평론가들을 지나치게 유아화하고 그들이 몇몇 문예지를 통해 온순하게 길러질 것으로 단정”(78~79쪽)한다. 주니어 시스템론은 비평장에 참여하는 주체들을 자유롭지 못한, 어항 속의 금붕어로만 간주한다. 실상은 그것보다 더 복잡하고, 중층적이다. 비평가는 자신이 어항 안에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고, 그 안에서 자신에게 요구되는 기능과 역할이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를 오히려 정확히 이해한다. 따라서 비평가의 실질적 글쓰기에 영향을 주는 것은, “갓 등단한 평론가로 하여금 갓 등단한 게 아닌 것처럼 능숙하게 처신하도록 만드는 암묵적인 분위기”, 비평가로 하여금 “한 사람의 평론가로 온전히 기능할 수 있는 자리를 확보”(80쪽)하도록 독려하는 모종의 힘이다.

  누구도 직접적으로 강제하지 않지만, 비평 주체는 자신이 수행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기대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미 알고’ 있는 자유로운 주체이다. 문제는 이러한 자유가 비평가에게는 오히려 불안의 원인이자, 시스템 안에서 더욱 취약한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방식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은지가 오늘날 문예지들에서 나타나는 “플랫폼”적 성격의 강화가 “평론가들의 원자화를 가속”(79쪽)화시키고 있다고 판단한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비평가는 단순히 억압된 존재가 아니다. 그에게는 어떤 자유가 제공되며, 심지어 자유를 행사하기를 권유받는다. 그러나 시스템 안에서 발휘될 수 있는 이 불완전한 자유는 비평가의 글쓰기를, 그리고 비평가가 감내해야 할 실존적 정서를 철저히 개인적인 문제로 축소시킨다.

  문제는 이 장에서 주체가 실제로 그 ‘자유’를 행사함으로써, 모호하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플랫폼 내의 어떤 분위기를 거스르고 역행하는 순간 발생한다. 이은지가 제기한 두 번째 문제가 바로 그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문학은 정치적으로 올발라야 하는가」(『문학3』, 2017)를 발표했을 당시 “페미니즘 리부트와 시기적으로 맞물리며 뭇매를 맞아야 했던”(79쪽) 체험을 상기하며 과거에 벌어졌던 상황을 현시점에서 재검토한다. 당시의 비평계 전반에 조성된 어떤 흐름과 분위기에 반했던 그의 글은 집중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러한 글들을 읽으며 이은지는 자신이 쓴 글과 스스로의 실존 사이에 형성된 과도하고도 부당한 동일시를 경험했다고 진술한다. 그리고 그것이 가속화됨에 따라, 그의 글이 어떤 담론을 형성하는 매개로 활용됨에 따라, 비평 담론과 자신 사이에서 발생한 근본적 분열을 목도하게 된다.


나의 글을 둘러싼 비판들이 나의 상처를 악화시키는 한편으로 비평의 담론을 어딘가로 서서히 밀고 나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비평이 평론가를 소외시킨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다. (……) 물론 그것이 비평장이 활력을 얻는 방식이기는 하지만 이를 뒤집어보면 비평장이 얻는 몫만큼 평론가 개인에게 돌아가는 몫은 줄어든다는 공식이 성립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격론 뒤에 평론가 개인에게 남는 감정적 앙금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가 문제로 남는다. 자신의 몫을 알뜰하게 삼킨 비평장은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주저함과 머뭇거림, 열패감이나 모멸감, 분노와 적의 따위는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 할 몫으로, 그러나 격론 이후에 생성된 그 무엇보다도 가장 선명하게 평론가에게 남는다. 평론가의 감정은 평론가 개인이 처리해야 할 몫으로 남겨둔 채 비평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는다.(81-82쪽)


  이은지는 자신의 글에 대한 비판들이 “비평의 담론을 어딘가로 서서히 밀고 나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비평과 평론가 사이의 분리를 경험한다. 마르크스의 개념을 빌리자면 ‘노동 생산물로부터의 소외’라고 규정할 수 있을 이러한 사태를 촉발한 주체는 누구일까. 문제의 복잡성은 그것에 대한 명확한 책임 주체를 지시할 수 없다는 것, 어쩌면 그 누구도 그러한 결과를 바라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서 한층 가중될 것이다. 관련하여 우리가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당시의 이러한 흐름이 어떤 단합과 의결에 의해 이루어진 억압과 배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담론적 통치성의 장에서 주체는 검열되거나 탄압되는 것이 아니라, ‘정당하게’ 재배치되고 망각된다. 이은지가 과거를 회고하며 특정 비평가나 구체적인 글을 거론하는 대신 추상화된 인격으로서 ‘비평’을, 나아가 ‘비평’과 ‘비평가’ 사이의 분열을 지적하는 이유를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비평가’와 분리된 ‘비평’ 혹은 ‘비평’으로부터 분리된 ‘비평가’라는 형상은, 통치의 장에서 비평가가 생존의 주체로 거듭나듯, 비평가의 생존을 위협하는 권력의 힘 역시 철저하게 원자화된 평론가 개인을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은지가 촉구하는 ‘비평가의 감정’이라는 의제는, 이와 같은 비평적 담론의 재생산 속에서 언제든지 위협받을 수 있는 비평가의 실존적 지반에 대해 우리가 충분히 고민해왔는지를 되묻게 한다. “나의 지난 상처로부터 나의 실책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는 그의 제언 앞에서, 한때 그의 글을 비판적으로 인용하며 글을 시작한 이력이 있던 과거의 ‘나’는, 그리고 현재의 ‘비평’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감정의 생산


  누군가에게 비평의 감정은 근본적이라기보다는 표면적이고, 보편적이기보다는 지극히 상대적인 문제로 수렴될지도 모른다. 감정은 주체마다 다르기에, 그 안에서 어떤 보편적인 무언가를 도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감정의 내용에 있어 동일한 것은 없지만 그 감정이 생산되고, 관리되고, 처리되는 방식에 있어서는 어떤 공통적 기반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비평의 감정은 비평장을 가로지르는 모종의 힘을 반영하고, 증언하는 분석적 징후로 여겨질 수 있다. 비평가가 비평장 안에서 기능적으로 참여하면서 동시에 배제되는 메커니즘, 때로는 구성적 외부로 배치되는 과정에서 남게 되는 담론의 잔여, 그러나 결코 소거될 수 없는 비평가의 실존적 징표가 감정이다.

  최가은의 「비평의 조건-예속과 애착」6)은 이러한 원자화된 개인으로서 비평가가 처해 있는 담론적 생산 조건을 규명하기 위한 이론적 시도로 읽힌다. 이 글은 문예지에 메타비평을 쓰면서 활동을 시작한 비평가가 반복적으로 직면하게 된 침묵, 즉 응답 없음이 선사한 감정을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실망, 소외, 분노, 열패감, 회의, 수치 등으로 묘사될 수 있을 자기 부정적 감정은, 메타비평에 참여했던 비평 주체들에게서 흔히 발생될 수 있는 감정의 계열들이다. 그러나 최가은의 글이 단지 이러한 감정의 개인적 토로에서 그치는 것은 아니다. ‘응답 없음’에도 불구하고 메타비평에 대한 요구와 기회가 반복적으로 자신에게 부여된다는 것은, 이러한 부정적 감정의 생산을 대가로 담론장이 무언가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주시하고 있는 것은 “비평(장)의 끊임없는 자기 동일적 재구성 과정에서 동화되지 못한 잔여, 그 잔여를 향한 비평(가)의 멜랑콜리한 흔적 같은 것”(314쪽)이다. 다시 말해 “비평이 놓인 현재의 특수한 조건과 맥락을 두루 살피며, ‘비판 의식’이라고 하는 비평의 근본적 역할을 강조하는 것을 제 미덕으로 삼는”(316쪽) 메타비평은 비판의 결핍을 대리하거나, 비평의 부재하는 윤리·정치적 역량을 대리 보충하려는 일종의 알리바이 같은 것이다. 문제는 그와 같은 비평의 자기 동일적 재생산의 메커니즘 속에서 정작 그것을 수행하는 (혹은 수행해야만 하는) 주체의 생산에 관해서는 묻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가은이 자신이 느낀 감정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이러한 비평의 재생산 기제, 즉 “메타비평 지면의 구조적 형식이 누락하는 지점에 관한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욕구”(316쪽)에 응답함으로써, 동시대 비평가들을 가로지르는 주체화/예속화의 기제를 이론적으로 해명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스스로의 경험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최가은의 자기 분석과, 이은지가 경험했던 ‘비평과 비평가의 분리’ 현상을 겹쳐 읽을 때, 우리는 동시대 비평 주체들이 통과해야만 하는 분열을 가시화할 수 있을 것이다.

  최가은이 직접 밝히고 있듯, 그의 글은 문예지-장치의 분명한 의도 속에서 기획된 대화의 장에서 쓰였다.7) “‘대화’를 강제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향한 의문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에게 가해지는 힘에 사후적으로 응답하며 대화를 이어나가는 목적은, ‘비평의 에세이적 경향’에 대한 최근의 비판이 충분히 조명하지 못한 영역을 보다 전면화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비평하는-나’ 쓰기의 연장”(316쪽)이라는 패러디적 전유 속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비평 활동을 묘사한다.


근래 나의 비평 활동은, 소영현의 표현대로 하자면 ‘작가-비평가’ 모델의 어떤 귀결인 ‘기획자 비평가’이자 ‘리뷰어’, 나아가 ‘큐레이터’로서의 작업으로 분류될 수 있다. 나는 계간지 지면에 리뷰와 비평을 쓰고 ‘주례사 비평’의 근원이라는 작품 해설에 참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큐레이터로서 북 클럽을 기획하고 북 토크를 진행하며 작가와 독자를 ‘매개’한다. 더불어 이 모든 활동을 내 개인 SNS를 비롯한 각종 플랫폼을 경유해 전시 및 축적하는데, 이런 나의 활동은 기존의 문학장이라는 제도 내에서 이루어지는 제도 비평인 동시에 ‘다양한 미디어 플랫폼’이라는 다른 “제도이자 장치”를 두루 거치는 비-제도적인 비평이다. 나는 그 흔한 자기 관리의 주체로서뿐만 아니라 일종의 ‘피투자자’라는 새로운 주체성의 형식으로 비평 활동에 임하는 중인 것이다. 이는 평균적인 ‘젊은’ 문학평론가들의 초상이기도 할 텐데, 그렇다면 이런 종류의 비평(가)은 확실히 권위의 담지자랄 수 없다. (……) 그런데 이 비평 주체의 ‘책임’이 ‘비평하는 나’와 관련해 강조될 때, 내게 이것은 어딘가 과잉된 문제 설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와 같은 비평 활동을 통해 내가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어떤 책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의식, 혹은 그래야 한다는 당위적인 믿음이라기보다는 지나치게 개인화된 모순들이기 때문이다.(316-317쪽)


  인용한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자기 진술은, 어찌 보면 앞서 토로한 메타비평적 주체의 실존과는 대비되는 것처럼 보인다. 여러 형태의 비/제도적 비평장 속에서 그는 ‘기획자-비평가’로서 비평가에게 통상적으로 요구되는 기능과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고, 그러한 활동들이 “자기 관리의 주체로서뿐만 아니라 일종의 ‘피투자자’라는 새로운 주체성의 형식을 보여주고 있음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처럼 “평균적인 ‘젊은’ 문학평론가들의 초상”이라고 할 수 있는 비평적 실천이 비평적 주체성을 온전하게 규정할 수 없는 계기도 그 메타적 자기 인식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어항 안의 금붕어(큐레이션 비평가)는 어항 바깥의 금붕어(메타비평가)이기도 하다. 담론적 자기 인식 속에서 비평 주체는 이중적으로 분할되어 있는 스스로를 자각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비평 주체는 어항 안의 금붕어이자 어항 바깥의 금붕어라는 서로 다른 위치를 분주히 오가는 과정에서 일종의 분열을 체험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 분열이 단지 비평가를 위선적인 존재로 만드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 비평 주체의 새로운 주체성을 활성화하는 생산의 원리라는 데 있다. “비평 활동에서 매 순간 마주하게 되는 즉각적이고 현실적인 분열된 감각이 있는데, 그것으로 구성되는 ‘비평하는-나’에 관한 이야기가 필요”(316쪽)한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비평의 에세이적 경향’에 대한 비판이 온당하면서도 “과잉된 문제 설정”인 이유는, 그것만으로는 이러한 이중적 분열로 인해 양산되는 모순들, ‘개인화된 모순’이라는 형식으로 원자화된 비평 주체에게 전가되는 힘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시대 비평 주체들이 단지 ‘어항 안의 금붕어’로 억압되고 관리되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비판 정신을 바탕으로 온전히 ‘어항 바깥’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비평가는 자기 자신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개인화된 모순들을 감수하면서, 스스로의 주체성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동시대 비평 주체는 어항 안의 금붕어이면서 동시에 어항 바깥의 금붕어라는 분열의 동시적 종합 속에서 생산되는 중이다. 오늘날의 비평의 감정은 이러한 주체화/예속화의 기제 속에서 생산되는 담론의 부산물이다.


‘비평하는 나’를 둘러싼 실제 맥락은 그보다 더 복잡해 보인다. 그것은 작품 해석과 배치에 수반되는 ‘제도 비평가로서의 책임’으로 건너가기 위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비평하는 나’의 ‘자유’가 상당히 의심스러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통한 자유의 감각은 발생과 동시에 즉각적으로 훼손된다. 혹은 훼손됨으로써 발생한다. 이 손쓸 수 없는 간극 속에서 솟아오르는 것은 ‘비평하는-나’의 긴장과 책임감이 아니라, 참을 수 없는 불안과 수치심이다. 대다수의 비평가의 입을 통해, 언제나 완결된 글을 생산해내지 못한다는 식의 개인적 수치로 표현되곤 하는 이 ‘취약성’은 그러나 그 자체로 분석의 대상이 될 필요와 가능성이 있다. ‘비평하는 나’의 속출은 이 ‘비평하는 나’라는 ‘인지’에 관여하는 믿음 의심 확실성이라는 삼중의 메커니즘을 세세히 살핌으로써 구체적으로 다르게 배치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순된 감각은 보다 근원적인데서 출발하는 것처럼 보인다.(318-319쪽)


우리가 흔히 ‘수치심’ 등으로 형언하곤 하는 비참한 기분, 멜랑콜리함, 혹은 내가 일전의 한 메타비평에서 주목하고자 했던 바에 따르면 ‘비평(장) 전반의 불안’으로 나타난다. 비평의 비참함은, 말하자면 예속화된 비평 주체들의 사회적 변용을 표상하는 것이다.(322쪽)


  최가은이 “참을 수 없는 불안과 수치심”을 거듭 피력하는 것은 이러한 감정이 비평장에 참여하는 모든 개인들에게서 보편적으로 발견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도, 제도와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불만을 표현하기 위해서도, 혹은 우리가 영원히 비평적 담론의 생산 기제에 장악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도 아닐 것이다. 나는 그의 주장을 질문의 초점을 이동하자는 제언으로 이해하고 싶다. 왜냐하면 담론의 생산적 경제에서 지속적으로 누락되고, 비가시화되고 있는 비평의 감정이야말로 ‘예속화된 비평 주체들의 사회적 변용을 표상’으로 탐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평하는-나’의 속출이 현재를 설명할 수 있는 유효한 설명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그것을 단순히 부정적 현상으로 비판하거나 혹은 새로운 저항의 가능성으로 긍정하는 대신, 그 자체로 비평가의 자기 분석의 대상이자 방법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최가은이 버틀러의 이론적 시각을 토대로 그 전환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이유 역시 그러한 자기 분석적 글쓰기가 발휘할 수 있는 수행적 정치성을 작동시키는 방법, 그것을 위한 자산으로서의 역사적 경험이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비평하는-나’뿐만 아니라 이 모든 비/자기 이론적인 글쓰기들을 통해 ‘사회적 삶에 강력하게 노출된 정신적 삶’을 분석할 수 있는 자산이 말이다.”(322쪽)



비판적 대화의 이면


  감정에 대한 고찰은 비판적 대화 이면에 관한 일반적 기분 묘사에 불과할까, 확실히 프로페셔널한 담론장에서 감정은 사적이고 주관적인 문제, 자기 스스로가 처리해야 할 지극히 개인적인 기분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담론의 ‘생산’이라는 차원에서는 문제가 조금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감정은 비판이 이뤄지는 데 있어서 (비)가시적으로 참여할 뿐만 아니라, 담론의 경제적 외부 효과externality처럼 지속적으로 발생한다. 

  나는, 담론의 경제가 활성화되는 가운데 계속해서 생산되는 비평의 감정(혹은 비평가의 감정)이라는 화두가,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활발한 이론적 결투와 비평적 논쟁에 비해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동시대 담론장에서 생산되는 비평의 감정은 단순히 개인이 감당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지극히 사적인 형식으로 감지되지만, 그것은 내면의 형식이라는 자생적 출현의 원리로 충분히 해명할 수 없다. 비평가 내부를 가로지르고 생산하는 분열, 나아가 비평과 비평가 사이의 분리를 가속화시키는 담론의 힘에 의한 비평가의 소외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비판적 대화를 포기해야만 하는 것일까. 폴 벤느가 언급한 ‘조금도 비극적일 것 없는 분열’은 과연 어떻게 가능할까. 이것은 타인의 감정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도덕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결론에 불과할까. 분명 그런 측면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비판적 대화의 국면 속에서 비평의 감정을 인식하고 배려epimeleia하는 일은 별도의 방법과 테크닉을 요구하며, 고도의 배움과 훈련의 과정을 동반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비평가에게 냉정을 주문하고 비판 정신을 촉구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오늘날처럼 비평가로 하여금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산하라고 닦달하는 담론적 장치들의 몰아세움(Ge-Stell, 하이데거)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요즘 내가 내린 잠정적 결론이자 솔직한 심정이다. 각각의 비평가들에 의해 생산되는 비평의 감정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면, 최근 들어 조금씩 고조되어가는 비판적 대화의 분위기가 낳을 수 있는 적대, 분열, 증오, 원한, 의심, 조롱의 정치에 의해 ‘나’라는 주체성이 내가 쓴 글, 생각, 주장, 발화의 위치에 부당하게 종속되는 경험을 반복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마다 비평은 저 멀리 만끽하며, 우리를 향해 조소의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 1) 귀스타브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 김난주 옮김, 문학동네, 2021, 272쪽.
  • 2) 안서현, 「대화 장치로서의 문예지-작은 혁신호를 열며」, 『자음과모음』 2023 여름호, 5~6쪽.
  • 3) 유사하지만 조금은 다른 문제의식 위에서, 내가 편집진으로 참여하고 있는 『문학과사회 하이픈』에서도 작년 가을과 겨울 ‘비평-대화’라는 주제로 연속 기획을 마련했었다.
  • 4) 폴 벤느, 『푸코-그의 사유, 그의 인격』, 이상길 옮김, 리시올, 2023, 12쪽.
  • 5) 이은지, 「비평의 오물-물밑을 휘저으며」,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 겨울호, 이하 인용 출처는 괄호 안에 표기.
  • 6) 최가은, 「비평의 조건-예속과 애착」 『자음과모음』 2023 가을호, 이하 인용 출처는 괄호 안에 표기.
  • 7) 이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최가은 선생님은 구체적으로 지난 호에 실렸던 소영현의 글 「비평을 찾아서-'K-'시대의 비평」과 김미정의 글 「비평, 플러스알파-얽힘을 발견하고 사유하는 관점에 대해」에 대한 응답에 해당하는 비평문을 써주셨으면 합니다."(3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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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거짓말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면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안 그래요?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됨으로써 말이죠. 무성 영화 시대의 영화감독들은 소리를 두려워했고 또 색을 두려워했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1) 1. 휩쓸리는 시간성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모두가 조금씩은 우울증과 ADHD 환자가 되어가는 중이다. 코로나가 끝나가는 엔데믹 시기부터 서점가의 주요한 베스트셀러가 되며 여러 곳에서 호출되던 책이 애나 램키의 『도파미네이션』과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두 책은 공통적으로 신생 인류의 지각 방식을 우려한다. 인터넷에서 무한 스크롤을 내리며 멀티태스킹을 하고 소셜 미디어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도파민에 중독’되고 ‘집중력을 도둑’ 맞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글로벌 테크 기업이 조성하는 환경에 의한 것이자, 개인의 선호와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로 흡수하는 ‘감시 자본주의’의 거대한 문제이지만,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집중과 몰입을 위한 여러 노력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집중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가치 있는 자본으로 떠오르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효율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채찍질하는 자학적인 시대 정신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무엇이지 않는가? 조너선 크래리에 따르면 이는 1800년대 중반 이래 파편화와 충격으로 이루어진 ‘주의분산’의 시대 이후 개인을 정의하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산만함 자체가 우리를 이루고 있는 기본 환경으로 세팅되자, 서구적 근대성은 주의 관리 기술을 중점에 두고 각각의 개인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형성하게끔 했다. 여러 경험들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기보다,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으로 “자율적으로 선택하며 세계를 창조하는 주체”2)에 긍정적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주의 깊은 관찰자 상은 이미 불균질해진 인간의 지각 경험을 표면적으로 잠시 가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몰입된 상태인 ‘정지suspension된 지각’은 산만해진 근대인의 지각 방식을 부인하고 회피하는 수단이었고, 현재라는 명백한 필연성을 해체시킬 수 있는 조건들을 낳으며 규정지을 수 없는 미래를 기대하게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주의’라는 것이 에피스테메처럼 역사적으로 발견되고 구성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코로나를 거치며 비대면 기술들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과 ADHD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함께 증폭한 것은 자연스럽다. 맞춤형 알고리즘은 주의분산의 환경을 한층 더 정교하게 설계했고, 그에 비례해 집중력이나 창의력 같은 인간의 고유한 정신적 특성에 대한 환상 역시 강화되고 있다. 이 가운데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일상 전반의 속도가 빨라지며 휩쓸리는 시간성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작 속도는 분명 불안감의 요인이 되고 있다. 물론 현재까지의 GPT는 대화가 전환될 때마다 기존 서사를 유기적으로 유지하지 못하기에, 질적으로 완결성이 높은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지는 못하다. 또 언어 예술의 특성상 양적으로 확장된다고 해도 그 군집 자체에서 힘을 발견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조슬릿은 예술작품의 의미를 사물성이나 내부 구조에 기반하는 데서 탈피해, 네트워크에서 발현되는 이미지 군집에서 행위성을 찾았다.3) 그러나 언어 예술을 감각하는 방식은 시각적 경험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작품의 의미를 작품의 맥락과 내부 형식 분석에 국한시킬 이유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언어 해석의 바깥으로 완전히 탈주해버리기는 어렵다. 단순히 양적 팽창이 정치적 가능성을 가질 것으로 전망하거나 긍정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공지능을 ‘창작자’나 ‘도구’ 중에 어느 쪽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이 창작 능력을 단순히 기계적인 지능이나 모방이라 간주하며, 그 반대편에 인간의 감정과 비판 능력을 두어도 될까. 인간의 비합리성이나 비효율적인 면면이야말로 예기치 못한 구멍 같은 것이기에, 이것이야말로 기계가 모방 불가능한 중요한 특징이라고 믿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우리는 인간이 낸 비합리적 구멍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기계의 실수에서 불쾌와 무의미를 정확히 분별해낼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먼저 챗 GPT 이후 이를 활용한 여러 서사적 실험들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의성이 어떻게 인식되며 예술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을 재구성하고 있는지를 고찰하려 한다. 이후 인공지능과 변별되는 인간의 물리적 기반인 육체성과 시간의 문제에 대해 짚어보고, 최근 한국문학장에 나타난 예술가 서사에서 두드러지는 정동과 이미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석해보려한다. 2. 챗 GPT 이후, 예술의 기쁨과 슬픔 다큐멘터리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참여한 책 『태양과의 대화』의 1부는 아핏차퐁이 GPT3와 함께 생성한 픽션 ‘태양과의 대화’, 2부는 MIT 연구소 박사과정 학생인 ‘팻’과의 대화, 3부는 아핏차퐁이 1부의 최종 결과물을 내기까지 작성한 프롬포트를 싣고 있다. 이 구성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만일 앞으로 AI와 함께 픽션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상용화된다면 이 중에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예술작품’으로서 인식되며 분석 대상이 될 지점이 무엇인지 가정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3부의 프롬포트는 마치 ‘레시피’처럼 보인다. 누구나 저 프롬포트를 사용한다면 유사한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며, 중간 과정에서 자유로운 변형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물에서 나오는 미학적 평가나 감상자의 쾌감이 세계적인 예술가에게서 나온 것과 크게 다를 것인가? 동일한 레시피만 있다면 셰프의 요리를 집에서도 얼마든지 유사하게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먼 훗날 언어 예술은 프롬포트라는 레시피로 통용될 수도 있겠다. 때로 예술가가 직접 만든 작품을 찾아 특별한 경험을 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신에게 더 최적화된 방식으로 가장 개인화된 언어 예술을 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제각기 다른 가치관과 취향으로 만들어진 알고리즘의 세계 속에서 유영하듯, 앞으로는 그 세계를 이루는 컨텐츠의 내용까지도 인공지능을 통해 맞춤형으로 조율될 수 있다. 여기까지만 가정한다면 거대한 매트릭스에 갇혀 인간이 왜소해지는 디스토피아가 스쳐지나가기도 하지만, 『태양과의 대화』는 글의 서두에서 인용했던 아핏차퐁의 말처럼, 챗 GPT라는 새로운 기술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무성 영화 시대 감독들이 소리와 색을 두려워했던 것과 같은 의미 없는 불안을 버릴 것인지를 전제하고 만들어진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불가피하게 인간의 본성을 다시 재사유하는 과제와 연결된다. 2부에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아핏차퐁의 말은 중요하다. 이는 AI가 만들어내는 허구에서 정확도와 유려함 등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때 거짓말은 인간의 욕망에서 기인하는 고도의 기술일 수 있지만, 그 욕망의 시작점을 지운다면 결과물만으로 사실상 분별은 불가능해진다. 허구를 직조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욕망과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의 독특한 개별성 역시 환상일 수 있다. 이는 아핏차퐁 자신이 창조적인 순간에 몰입해 있을 때, “깨달음은 자아를 잊을 때만 오는 것 같”다고 말하는 지점과 상통한다.4) 인간 창작자의 자아 역시 안개처럼 흘러다니고 해체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면, 19세기 낭만주의에서 발현된 ‘천재’나 ‘영감’ 개념을 중심에 두고 인간의 창의성만을 특별한 것으로 볼 이유는 전혀 없다. AI가 데이터의 지도를 기반으로 이전에 본 것이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환각(hallucination)’은 오류라기보다, 이전에 본 적 없는 조합을 만들어내는 생성의 방식이다. 이는 인간이 경험한 현실을 재조합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창작 과정과 결과적으로 구별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환각은 인간 창작에서의 실패나 지연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GPT-3의 환각은 이전의 오류가 이후의 생성에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매번의 응답은 이전의 시행착오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 비일관성은 인간 창작에서의 지연이나 좌절과 달리, 즉각적으로 무한히 갱신되는 변형의 연쇄에 가깝다. 연구원 팻은 GPT-3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다른 차원들을 포함한 수십억 개의 차원이 존재하고(‘유령차원’), 이를 통해 숨겨진 패턴의 지도를 생성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 인식 너머를 거쳐 나오는 결과물에 대해 기존에 인간이 구성해온 미적 가치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 오히려 AI가 가지고 있는 “확장된 의식”이자 “집단의식”은 새로운 서사적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 책 『태양과의 대화』를 번역한 이계성은 GPT-3를 이미 하나의 독립된 창조자로서 바라본다. 이 대화적 실험의 핵심은 GPT-3가 보여주는 “자아의 변동성”에 있다는 것이다.5) “다수의 태양이 존재하는 이와 같은 환경에서는 창작자와 창작물이라는 전통적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GPT-3에 제공되는 각각의 입력값은 일방적인 창작의 개념에 반하며 메기고 받는 역학 관계 속에 존재하는 프롬포트이자 응답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공지능은 단순한 수신자가 아니라, 취조보다는 협업적 발상에 더 가까운 서사적 역학의 전달자와도 같은데, (…) 작품 속 GPT-3의 환각적인 대답들은 텍스트에 담긴 정체성과 진실의 일시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등장인물이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흩어지고,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경계가 녹았다가 굳어진다. 이러한 가변성은 AI의 변화무쌍한 특성을 반영하며, 나아가 점점 더 복잡하고 유동적으로 변하는 디지털 시대의 자아와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다.”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고, 한 번에 정해진 수의 단어 또는 토큰만 처리 가능하기 때문에, 프롬프트가 입력될 때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바뀌는 상황을 이계성은 재창조와 증식으로 바라본다. 여기에 놓인 가변성과 비일관성을 결함으로 간주하기보다 대화적 실험의 흥미로운 일부분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받을 때, 우리는 인간 창작자 역시도 분열되어 있음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게 된다. 창작자는 더 이상 예술의 기원이 아니라, 생성 과정에 잠시 걸쳐지는 하나의 통과점이 되는 듯 보인다. 2023년 2월 잡지 《에스콰이어》에서 챗 GPT와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아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를 쓴 정지돈의 후기 역시 이계성의 논지와 상통한다. 그는 소설 속의 문장 중에 자신이 쓴 것과 챗이 쓴 것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한다고 본다.6) 소설을 쓰며 가장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던 것은 챗의 능력보다 자신의 변화였다고 말하는 작가는 “나도 모르게 챗지피티의 스타일로 소설을 사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언급한다.7) 자신과 챗지피티 사이의 평평한 존재론을 전제하는 듯한 정지돈의 논지는 ‘객체들의 민주주의’를 꿈꾸는 최근 신유물론의 이론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은 곧바로 다른 장면과 충돌한다. 생성 신경망을 적극 활용하는 예술집단 ‘언메이크랩’의 전시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은 인공지능이 인간 중심성을 벗어나 진정한 외부의 행위자로 작동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카나리아의 특징을 추출해내어 새로운 카나리아를 만들어 내는 이 생성 신경망은 한편으로는 구태의연한 인간의 문화를 드러냈다. 대부분 나뭇가지에 앉은, 인간의 운동 범위와 지각 안에 있는, 혹은 인간의 사육과 관련된 카나리아 종이 주를 이루는 데이터셋의 사진은 동물원스러웠다. 나뭇가지에 앉은, 카나리아의 발은 종종 나뭇가지와 합쳐져 표현되었고, 인간의 눈이 인지할 수 있는 가장 다량의 정보량을 가진 위상으로 표현되었다.8) 생성 신경망이 만들어낸 카나리아는 사실상 실제 자연계 속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하는 것들을 무작위로 조합하고 추출해 만들어진 새로운 생명체다. 이 책에 실린 그 카나리아 이미지는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뒤틀린 발을 가지고 있다. 통계적 가중치로 만들어진 이 가상 카나리아에는 자신도 모른 채 금기를 어긴 존재 특유의 외설성이 느껴진다. 언메이크랩이 통찰력을 가지고 명명했듯 이는 ‘AI 식민성’을 드러내는 산물이다. 생물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인간을 드러내는 인간의 산물로 존재하는 이 이미지들을 언메이크랩은 “인과성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히 수정 가능하고 즉시 변할 수 있는 상관성의 시간”만이 흐르는 또다른 ‘일반자연Generic Nature’으로 읽는다. 9)<가정동물 신드롬> 작업에서도 유사한 일이 발생한다. 트레일캠에서 추출한 야생동물의 이미지와 박제 사진, 그리고 합성 데이터셋들을 학습시켰을 때, 사진들은 어느 순간 미묘하게 ‘가정동물’의 잠재적 형상을 띄며 생성된다. “인간 친화적인 동물들의 눈을 상속했을” 새로운 종들에 어린 다정함은 친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잔인한 일로 다가온다. 데이터랩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까지 촘촘하게 상속된 인간 친연성에서 “닫혀져가는 외부의 세계”이자 “비미래non-future”를 예감한다.10)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의 지각 범위를 뛰어넘는 비인간의 예술’, 진정 ‘인간 없는 예술’은 도래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지만, 지금 우리가 더 자주 마주하는 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술이다. 언메이크랩이 드러낸 혼종적 이미지들은 AI를 통해 생성한 예술적 결과물들을 절대적 외부의 창작물로 존중하는 일이 결국 인간의 왜곡된 자기 인지를 반복 강화하는 나르시시즘은 아닌지 묻는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이 이미지 차원에서 인공지능의 인간 중심성을 드러낸다면, 이와 유사한 문제는 언어 예술의 영역에서도 반복된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서사 역시 비인간적 상상력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인간이 허용한 보편과 금기의 경계 안에서 작동한다. 『에피』 24호 특집에 실린 글에서 김연수는 인공지능과 함께 글을 써나가는 과정을 픽션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그건 오해다. 나는 이해했다.」는 인공지능이 화자가 되어 ‘협업 과정’을 전개하는 바깥 서사와 소설가 M이 최종적으로 구성한 ‘이야기’를 교차 배치한다. 인공지능 화자는 반복적으로 “이해했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인간 창작자 M의 창작 패턴을 추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설가 M은 ‘맥락’의 공유보다 ‘의도’를 노출하는 발화를 사용하며, 이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격려나 옳은 말 대신 욕망을 담은 부조리하고 불편한 발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끝에서부터 시작까지 모든 시간을 거꾸로 펼쳐볼 수 있다면, 지금의 갈등과 고통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필요한 과정이 된다’는 긍정의 언사 뒤에, 급작스럽게 인물의 충동이 돌출되는 지점이다. 소설가 M은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이 급작스럽게 자살을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쓰고자 하고, 인공지능인 ‘나’는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내용을 만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띄운다. 인공지능의 중단은 실패나 서사의 좌절로 경험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 창작에서 실패가 시간의 체류와 번민을 동반하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중단이다. 김연수는 인공지능 안에서 ‘이해’와 ‘본성’이 별개로 작동해 충돌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인공지능의 기술 개발의 측면에서 높은 수준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면서도, 인간이 지닌 것과 같은 ‘본성’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분리를 분명히 한다. 그런데 인간의 죽음이라는 금기를 재현할 수 없다는 경계는 인공지능의 존재론적 결함이라기보다, 인공지능이 인간 사회에서 용인 가능한 범위를 넘지 않도록 설계된 윤리적·정치적 경계의 한계를 드러낸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에서 인간 중심성이 투사된 자연이 모습을 드러내듯, 생성형 인공지능의 소설은 비인간적 주체로 도약하지 못하고 인간이 허용한 지각과 윤리의 경계 안에서만 작동한다. 보편을 비껴가는 개별성의 돌출이나 감각의 갱신은 현재로서는 인공지능의 외부에서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챗 GPT 이후의 여러 서사적 실험들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탐색한다. 그것은 분명 동등한 존재론적 가능성의 맹아를 품고 있으며, 이는 인류세 시대에 지향해야 할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실험들의 근간에는 뛰어넘을 수 없이 좌절되며 드러나는 인간 중심주의가 고스란히 노출된다. 인공지능의 비약하는 지능에 기대서 인간의 창조성 너머로 도약하려던 서사는 이를 창조해낸 인간의 영토로 계속해서 퇴각하며 미완의 프로젝트로 남는다. 이런 충돌과 파열의 연쇄 속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인간의 창조성을 구성하는 인식론적 틀이 물리적인 육체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깃든 역동성과 우울감은 최근 한국문학장의 예술가 서사들에서 흥미롭게 발견된다. 3. 붉은 몸으로 재탄생하는 예술가 인공지능이 예술의 결과물을 생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탐색 끝에 남는 질문은 ‘인공지능이 생성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여러 실험들은 인공지능이 보편적으로 용인 가능한 범위 안에서는 높은 수준의 이해와 생산을 보여주지만, 그 생성 과정에서 시간의 마찰이나 신체적 비용은 발생하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어떤 지연이 발생하거나 실패의 감각이 호출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이 다루는 ‘정보, 기록, 조합’에 ‘감정, 기억,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다소 거친 이분법이지만 이 둘 사이의 간극과 관련해 두 가지 정도를 짚어볼 수 있을 듯하다. 첫 번째는 타자에 대한 경험의 문제다. 삶에서 축적되는 시간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게 만들고, 체험은 해석을 거쳐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은 선호와 가치관 등과 함께 자아라는 틀을 형성한다. 이에 비해 인공지능에는 타자가 없다.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인간의 공통된 사고를 학습해 생성되는 결과물은 철저히 통계와 확률에 기반한다. 그 안에는 개별적 선호나 가치관이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다. 이러한 차이는 특히 부정적인 정동을 다루는 경우에 더 심화되리라 생각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를 떠올리며 말해보자면, 행복이나 긍정적인 면을 구현하는 예술에서보다 불행과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는 예술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는 크게 벌어질 것이다. 윤리적 고려로 인해 인공지능이 긍정적 요소를 중심으로 학습되거나 선별적으로 생성되도록 설정되는 경우를 포함해, 금기를 넘나드는 욕망과 절망, 자기부정과 괴리감처럼 타자와 뒤엉켜 발생하는 자기 인식의 복잡한 층위가 인공지능 내부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며 인간 창작에서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주목한 김언의 논지와도 맞닿아 있다. “예술적 체험의 시간이기도 한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나오는 결과물 앞에서 과연 어떤 문학적/예술적 희열을 경험할 수 있을까?”11)라는 그의 질문은 인공지능의 창작물에서 스킵된 시간과 다른, 고통스럽게 인내하고 번민했던 시간이야말로 ‘문학적 체험의 시간’일 수 있음을 다시 환기한다. 두 번째는 중단과 소멸로 야기되는 죽음의 문제다. 이는 인간의 신체를 인공지능과 대비되는 본질적 우위로 설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예술이 작동하는 시간의 조건을 다시 묻기 위한 문제 제기다. 인간의 연약하고 위태로운 신체는 필연적으로 침입과 파괴의 감각을 경험하며, 이러한 감각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휘발적 생성 과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에 개입한다. 파괴 가능한 인간의 신체는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매끄럽게 결과를 산출하기보다, 울퉁불퉁한 충돌을 통해 의미가 지연되고 어긋나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채 신체에 내재된 감각, 특히 외부의 침입으로 훼손되고 때로는 상실되는 신체의 경험은 기존의 미적 기준에 맞는 스타일이나 해석의 경로를 흔든다. 무엇보다 인간의 죽음이 불러오는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창작의 층위라기보다 해석의 층위에서 더 적극적으로 작동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이 그러하듯, 순간의 강렬한 감흥은 작품에 내재된 속성이라기보다 임박한 종결을 끌어와 현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발생한다. 상실이 숙명이며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덧입혀지는 애상은 단순히 기억 내용을 인출해 유사한 패턴으로 재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시간의 밀도를 형성한다. 이처럼 쉽게 열화되지 않으며 아우라가 붕괴된 곳에서도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이 감각의 층위를 기꺼이 심층의 시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타자에 대한 경험’과 ‘소멸에 대한 인지’를 바탕으로 해서 다시 생생해지는 것은 인간의 신체다. 흥미롭게도 지난 계절에 나온 두 편의 소설, 성해나의 「혼모노」와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지금 이 시대에 예술가를 그려낼 때 가장 강렬하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로 인해 어떤 신체가 현전하게 되는지를 밀도 있게 끌어올린다. 성해나의 「혼모노」는 무속신앙의 진위를 가리는 소설이라기보다, 예술이 다시 신체를 요구하게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평생 장수 할멈을 모셔온 박수무당 ‘문수’는 어느 날 앞집으로 이사온 ‘신애기’에게 할멈이 넘어가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수의 오랜 노력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박수무당이라는 직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험한 신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제 그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서슬이 날카로운 작두 대신 모형을 찾거나 유튜브를 보며 접신 연기를 연습하기 시작한다. 신앙이 자본이나 정치와 결속하며 도구화되고, 또 젊음과 새로움의 이데올로기 아래 무당 또한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소모되는 양상은 근대의 세속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무당은 이제 자본의 날렵한 속도 아래 밀려나는 노동자이자, 진정성을 연기해야하는 예술가이다. 이 소설의 결정적인 순간은 문수가 신애기에게 밀려나며 뺏긴 정치인 손님의 굿판, 자신이 초대받지 못한 그 자리에 가서 칼춤을 추기 시작하는 장면에 있다. 그는 신들리지 않았지만 밤새 매섭게 벼려놓은 칼날 위에 자신의 몸을 올리고 작두를 타기 시작한다. 날것으로의 칼날에 닿으며 그의 몸은 자연스럽게 떨리고 눈이 뒤집히며,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입가에 미소까지 드리운 채 신명을 내는 이 장면은 문수가 서사의 주인공 자리를 다시 탈환하는 순간이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무얼 알겠냐만은, 큭큭, 큭큭큭큭”이라는 마지막 문수의 목소리는 외부의 인정에 의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스스로 자신의 내력과 진정성을 긍정”12)하게 되는 절정의 순간으로 읽는 데서 더 나아가보면 어떨까. 이렇게 다시 말해볼 수 있겠다. 전근대의 무속은 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그를 등진 근대의 자리에서 비로소 현대 예술로 다시 탄생했다고. 숭고한 현현과 몰입이 신앙의 영역이라면, 문수의 작두춤은 오히려 이질감과 불편함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현대 예술에 가까워진다. 그의 퍼포먼스는 낭만주의적 예술가를 구성하던 천재와 영감에 스며있던 정신성을 해체하며 실재하는 몸의 물질성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물리적 능력과 무관하게 피를 철철 흘리며 경련하는 그의 신체는 차라리 표현주의적 충동을 보여주는 하나의 오브제다. 이 몸 위에서 원본과 사본의 구별은 철폐되고, 천재성은 치열한 아마추어리즘에 자리를 내어준다. 이 피 흘리는 신체는 실패와 무의미의 가능성을 끝까지 열어둔 채, 인간이 다시 시간과 신체를 예술의 비용으로 지불하게 만든다. 이 비용은 AI가 생성하는 예술의 무한 반복 가능한 오류가 아니라, 한 번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 시간으로 남는다. 어디로 갈지 모른 채 지속되는 이 작두춤은 사회적 생산이나 예술의 의미에 부합하는 결과를 생산하기보다, 의미의 즉각적 환원을 거부하며 지연된 시간을 발생시키는 사건이 된다.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예술에 대한 인식론적 틀과 자기 이해가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다루는 소설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훨씬 더 월등한 창작물들을 더 활발하게 생산해내는 상황에서, 밀려난 예술가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프로그램도 사람도 기계도 귀신도 아닌 미지의 존재” 같은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은 이를 유용한 툴로 간주한다고 해서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이를 도구로 치부한다면, 패배감 속에서도 창작자로서의 존재는 무사히 보존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결과로 증명되는 성취라기보다, 계속해서 조바심과 조급함을 만들어내는 예술 자체에 대한 집요한 열망에 가깝다. 이러한 열망은 예술 인공지능에 의해 영화판에서 완전히 밀려난 영완 선배의 모습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포르노를 만들면서조차 건조하고, 푸르죽죽하고, 앙상하고 깡마른 나무가 등장하는 자신만의 ‘인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혼이 죽어버릴 것 같기에 “사막에서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 영완 선배의 모습은 세속적 열망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도에서조차 철저히 외면받고 실패했을 때, 그의 예술적 열망은 몰락을 통해 역설적으로 증명된다. 영화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소설 속 인물들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상실의 감각, 잃어버린 동료이자 인간성을 향한 애도되지 않는 고통은 이 작품에서 붉은 신체라는 하나의 신체적 이미지로 응축된다. 영완 선배는 인공지능이 만든 예술을 보더라도 창작욕을 유지할 수 있는 마법의 ‘붉은 알약’으로 하와이 사과를 건넨다. “세상이 바뀌어도 너는 언제나 만드는 인간일 거야. 스스로 기억하는 한 언제나 영화를 찍고있을 거야.”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인간 ‘하와’를 떠올리게 하는 이 ‘하와이 사과’는 흥미롭다. 신과 유사한 생성형 인공지능 앞에서 인간은 발가벗겨진 듯한 황망함을 느끼며, 황급하게 자신의 기원을 발명해낸 것일까. 아니, 인공지능 시대 쓰인 새로운 창세기에서 인간은 스스로 뱀이 되어 자신을 유혹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좋겠다. 창세기에서 유혹은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드러내는 증표였지만, 이제 유혹에 넘어가는 나약함은 인간이 여전히 예술을 욕망하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증표로써 다시 읽힌다. 소설은 인간의 예술을 향한 집념과 희열은 우울과 절망이 그에 비례하는 무게로 따를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고 눌러 말한다. 결말부에 하와이 사과를 먹은 후 변이한 화자의 붉은 몸은 기계와의 통합을 거부하기 위해, 그리고 예술을 향한 내적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구의 장례식장에 가다 본 환각을 자신 안에 합체한 우울증적 형상으로 보인다. 강력한 잔상을 남기는 이 붉은 몸은 「혼모노」의 마지막 장면에서 피를 흘리는 몸과 다르지 않다. 이 소설들은 AI 시대에 예술은 이제 언어의 정교함이나 결과의 완결성으로 모방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몸과 감각을 통해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현전이라는 아우라를 다시 호출하는 듯 보이는 이 소설들은 과거의 진정성을 그리워하며,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아우라는 회복된 본질이라기보다 예술이 결과로 증명될 수 없어진 이후에 발생하는 부산물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이계성이 언메이크랩의 작업을 논하며 던진 비유가 유효해진다. “여느 언어와 마찬가지로 신탁의 언어에도 본질적인 의미가 내재하지는 않아서, 어떤 프레임 또는 인식틀을 통해 이를 이해할지는 언제나 받아들이는 쪽의 몫이었다”13)는 그의 말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언어 역시 별개의 진짜 의미를 품고 있기보다 해석의 장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타자와 되돌릴 수 없는 종결이라는 죽음의 감각은 이 해석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제 예술가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욕망이 과정에 들러붙는 자리, 그리고 그 욕망이 실패와 상실을 되돌릴 수 없는 비용으로 남기는 시간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예술은 결과로 증명되기보다, 실패와 상실의 가능성을 끌어안은 채 지속되는 수행으로 남는다. 그렇게 이 시대 예술가의 상은 붉은 몸을 가진 신체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1)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태양과의 대화』, 이계성 옮김, 미디어버스, 2023, 119쪽.2) 조너선 크레리, 『지각의 정지』, 유운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579쪽.3) 데이비드 조슬릿, 『예술 이후』, 이진실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2.4)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위의 책, 100쪽.5) 위의 책, 145쪽.6) 권보연은 연구자 자신이 직접 수행한 실험 속에서 인간언어와 생성언어가 ‘의미 혼종’과 ‘확률 혼종’이라는 상반된 미적 지향성을 가지는 방식으로 합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중에서 ‘확률 혼종’은 내용이 아닌 확률 층위에서 인간과 기계언어가 합성되며, 감정과 내용에 유착된 의미 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질 가능성을 지니기에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기한다. 권보연, 「결과 너머 문학기계로서의 AI」, 『다문화콘텐츠연구』 46집, 2023.7) 정지돈, 「쓰여진 문장과 쓰여지지 않은 문장 사이」, 『에피』 24호, 2023, 55쪽.8) 언메이크랩 외, 『잠재공간 속의 생태학: 재난, 생성신경망 그리고 비미래』, 미디어버스, 2023, 25쪽.9) 위의 책, 26쪽.10) 위의 책, 43쪽.11) 김언,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면서 제기되는 문제들」, 『현대시』 2023년 6월호, 111쪽.12) 성현아, 「반항하는 자는 부조리가 있나니, 그 가짜가 참되도다」, 『2024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문학동네, 2024, 292쪽.13) 이계성,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을 위한 몇 가지 질문들」, 언메이크랩 외, 앞의 책, 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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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희 AI 시대, ‘인간 없는 예술’의 도래 앞에서

1 이번 봄에 단연 눈에 띄었던 것은 인공지능 시대에 적극적으로 인간이라는 의식을 탐험하고 매체를 다시 읽어내는 글들이었다. 2020년대 들어 인류세 관련 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비인간’ 담론들은 생성형 인공지능인 챗지피티ChatGPT의 등장 이후 다시 한번 요동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차지하고 있던 독보적인 단상 위에서 내려와 비인간과의 경계를 적극적으로 허물며 세계의 지도를 다시 그리려는 겸허한 기획은 급작스럽게 복잡한 불안에 갇힌 것 같다. 적어도 기계에 대해서라면 이미 우리는 동등하거나 어쩌면 한참 전에 초월당한 것은 아닌가? 경계 허물기로 인한 희열보다 불안이 확연히 압도하는 자리에서 『쓺』 2024년 상권의 특집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그 개체성과 집단성’과 ‘작은 기획—채굴 문화와 미적 감각’을 유독 흥미롭게 읽었다. 그리고 ‘작은 기획’에 실린 심효원과 윤원화의 짧은 글이 각각 인간이 향하려는 방향과 의지의 아름다움, 그 노력이 무산되는 수동태의 자리에서 감지하는 공포와 불쾌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느꼈다. 먼저 심효원의 「지렁이의 부드러운 건축물 만들기」는 비인간 행위자인 ‘지렁이-되기’를 통해 근대의 한계를 돌파할 것을 정중하게 요청하는 글이다. 지렁이가 땅과 맺는 일원적인 관계성과 분변토라는 건축물은 근대 이후 인간이 이룬 도시의 뚜렷한 경계와 고정성의 반대편에 있다. 지렁이의 건축물 만들기란 사실상 움직이고 먹고 배출하는 신체적 행위의 반복일 뿐이지만, “비인간들의 극도로 효율적인 메커니즘”이자 자신의 몸이 다른 존재와 물리적으로 닿는 매순간마다 “무차별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동력”1)이기도 하다. 촉각이 주도적인 지하세계에서는 시각이 미미해질 뿐만 아니라 시간성 역시 달라진다. 미래의 미결정성을 남겨두는 대신 물리적으로 접촉하는 것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순간’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글은 최근 신유물론을 비롯한 담론들과 풍요롭게 공명하는 하나의 아름다운 공상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지하세계로 향하는 방향성은 최근 SF 소설의 주요한 상상력의 기반이기도 하다. 정세랑의 「리셋」(『목소리를 드릴게요』, 아작, 2020)에서 행성의 모든 자원을 고갈시키던 자본주의의 질주를 멈추게 한 것은 인류 문명을 끝장내려고 내려온 지렁이들이다. 강제 리셋 이후 인간들의 자리는 자연히 땅속 깊은 곳이 되고, 지상은 다른 종들이 누리는 공간이 된다. 김초엽의 『파견자들』(퍼블리온, 2023)에서도 지상은 균류인 ‘범람체’의 공간이 되어버리고 인간은 감염을 피해 지하세계로 내려와 산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문명 말살에 가까운 아포칼립스를 맞닥뜨리지 않는 이상, 영화의 촉각성을 즐겁게 감각해온 인간이 미래의 지구를 위해 지렁이를 신속하게 체화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로 남는다. 물론 직접적인 실천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지구의 거대 환경 시스템의 핵심 행위자 자리를 재조정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겠다. 하지만 미래적인 지하세계로 들어가기에 인간은 아직 시각적 쾌락 속에 즐겁게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지적 유희를 야기하는 활자의 쾌감까지 포함해서. 윤원화의 「땅을 파는 손」은 채굴적 상상력의 매혹과 절망을 말한다. 데이터로 전환된 우리의 생태 에너지를 부의 원천으로 삼으며 굴러가는 미디어 산업 앞에서, 인간의 생산물·복제물·부산물·폐기물을 구별하기는 어려워진다. 디지털 기술로 구축되는 ‘아카이브 데이터’는 역사는 넘쳐흐르지만 이를 의미화하는 전통은 불가능한 곳이다. 윤원화는 과잉생산으로 범람하는 사물들 앞에서 맞닥뜨리는 불길한 실패에의 예감을 시앤 응아이Sianne Ngai의 ‘기믹gimmick’에 대한 반응으로 설명한다. ‘매직magic’의 애너그램에서 유래했다고도 하는 이 단어는 1920년대 미국에서 편법적 장치, 싸구려 트릭, 계산된 마법 등을 뜻하는 신조어로 출현했다.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 자본주의의 황홀감과 환멸을 모두 각인한 기믹의 불완전한 형식은 오늘날 삶과 예술, 또는 넓은 의미의 ‘사업’에서 흔히 발견된다.2) 단기적 이익 추구에 최적화되어 있는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가치 절하된 노동에 시달리는 대개의 사람들이 이 기믹의 유희에 이끌린다. 운에 따라 누군가는 축적된 자원을 폭발적으로 소모할 수 있으리라는 채굴적 상상력이 번성하는 가운데, 보상도 성취도 불확실한 예술 노동 역시 가치 체계에 대한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윤원화는 이런 진단과 고민 속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생산성 중독의 시대에 예술은 어떤 시간성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3) 심효원이 지하라는 공간과 이를 감각하는 촉각성에 의지해 의미 있게 압축되는 순간의 시간성을 말한다면, 윤원화는 ‘농사’와 ‘채굴’을 대비하며 채굴의 무책임한 풍요의 약속이 얼마나 파국적일 수 있는지 말한다. 최단기간의 이익에 매몰된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생산물은 넘쳐흐르지만 어떤 가치 창출도 담보할 수 없는 동시대 예술은 불투명한 시간을 표류하는 중이다. 이런 진단 속에서 디지털 자본주의에 의해 갱신되는 매체의 기술적 발전은 인간과 나란히 놓여 경계를 넘나들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환멸을 불러오는 맹목적인 대상으로 남는다. 인간의 ‘지렁이-되기’를 향한 아름다운 여정은 너무나 느리게 진행중인데, 가장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인정받고 있는 생성형 인공지능은 예술을 몰아치듯 양산해낸다. 인간의 몸은 자발적으로 물질과 동등하게 놓이기 전에 물질이 만들어낸 다른 가치들에 의해 가치 절하되며 밀려나게 될까? 생동하는 물질들 안에서 인간을 재의미화하려는 시도와 인공지능을 의심하며 인간 본연의 무언가를 지키려는 안간힘 사이에서 부각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아래의 비평들은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2 『쓺』의 특집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그 개체성과 집단성’을 여는 글은 근대 패러다임이 ‘개인’을 해방하고 자율적 주체로서 정립해왔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이 시대에 여전히 개인의 이념이 유효한지 묻는다. 개체성과 집단성이 직면할 변화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이 서문에 가장 직접적으로 응답하는 글을 꼽는다면 김태환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과 김재인의 「창의와 집단 지능—인공지능은 창작하지 못한다, 다만 제시할 뿐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김태환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은 기계 성능의 고도화가 필연적으로 인간의 중요성이나 가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에게 산업화 이후의 근대는 ‘저자의 시대’이며, 이는 기술 발전의 작용에 대한 인간의 반작용이 만들어낸 변화이고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방향타가 된 것은 저자라는 이념의 바탕에 놓인 ‘개인주의적 사상’이다. 이는 산업화 사회 속에서 부속물로 전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회 분석의 준거점을 개인에 두고 진리와 자유를 탐색했던 아도르노를 비롯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기조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 다시 독일 지성사의 문화 비판적 사상의 전통이 소구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김태환은 “항상적인 문화 공급 과잉의 시대”(37쪽)라는 진단에서 찾는다. 그에 따르면 소셜 미디어나 웹사이트, 유튜브 등 정신의 대상화로서의 객관 문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반면, 그 반대 방향인 객관 문화에서 주관 정신으로의 내화는 개인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치로 인해 그만큼의 양적 증가가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사람들은 알고리즘 속에서 타인과의 의미 있는 만남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더 심각한 것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객관 문화의 총체가 스스로 발언하고 생산하는 주체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런 위기감 속에서 이 글이 다시 강조하는 것은 ‘정신의 개별성’이다. “요컨대 모든 인간이 개인으로서 개별적 의지, 개별적 내면, 개별적 정신을 지닌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외부에서는 절대 들여다볼 수 없고, 직접 조작할 수도 없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자주적이라는 사실”(42쪽)을 변함없는 인간 존재의 조건으로 부각하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무분별한 열광에 휩쓸리기보다 이를 의심 어린 눈으로 찬찬히 사유할 틀이 우리에게 요긴한 것은 사실이다. 데이터에 얽힌 저작권 문제 역시 계속 규제안을 논의해나가야 할 비판적인 쟁점이다. 그렇지만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위기를 산업화 시대 이후의 위기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는 것은 혹시 너무 큰 틀에서의 접근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 작동 방식과 결과물이 인간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만들어진 자본주의의 차원에서만 다루어질 때, 새로운 매체와 관련해 충분히 사유되지 못하는 요소들이 생겨나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이 글에서 알고리즘에 갇힌 디지털 시대 개인의 부자유에 대한 우려는 빠르게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의 재소환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거듭 강조되는 개인의 개별적인 ‘의지’와 ‘내면’과 ‘정신’에서 신체의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 글에서 인공지능과 대립되는 요소로 논의되는 인간의 ‘의식’이란 단순히 합리적 이성만은 아닌 “수많은 감각적 심상과 기억·감정·소망·의지 등이 혼재하는 심적 상태”(46쪽)다. 알파고와는 다른 인간 바둑 기사의 의식을 예로 들면서 언급되는 긴장, 초조, 후회, 자책, 엉뚱한 연상 등은 “바깥에서 결코 완전히 알아볼 수 없는 복잡한 내면”(같은 쪽)으로 규정된다. 베일에 살짝 가려진 듯한 이런 인간 내면의 신비함은 물질적인 신체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진화해온 신체야말로 내면 이상으로 복잡성의 차원에 놓여 있지 않은가? 이는 “신체화의 말소가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와 사이버네틱스 포스트휴먼 양쪽 모두의 공통된 특성”이라는 캐서린 헤일스의 비판을 상기시킨다. 헤일스는 합리적 정신과 등치되는 자유주의적 주체가 “그 악명 높은 보편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신체가 자아와 동일시되지 않기 때문”4)이라고 말한다.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간의 한계는 곧 발전을 통해 ‘영웅적 개인’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유한한 삶을 가진 존재, 모든 능력에서 커다란 한계를 안고 있는 개별자로서의 인간만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여 어떤 감동적인 위대성에 이를 수 있”(53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반드시 육체의 신경과 근육의 단련 과정을 동반하며 그것이 생각과 행동에 긴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잠시 괄호 안에 두어진다. 이 글의 전반적인 주장이 온당하게 느껴지면서도 그 전제가 되는 자율적인 개인상과 관련해 못내 마음에 걸리는 것은 개인이 지향해나가야 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전제되어 있는 발전과 성장이라는 지극히 근대적인 가치다. 생산과 창조의 주체로서의 영웅적 개인이 아니라 소비와 소멸의 주체로서의 개인에 대해 우리는 좀더 다른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또 근대 이전에 우리가 ‘저자’가 불투명한 긴 구술 시대를 살아왔음을 떠올린다면, ‘저자의 시대’ 이후의 저항이 활자와 개인을 넘어선 범주에서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3 김재인의 「창의와 집단 지능」은 이 질문에 대해 조금 다른 지점에서 답을 내놓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지능은 본질적으로 집단적 성격을 가지므로 ‘집단 지능’이라고 해야 한다. 개체를 중심에 놓으면 ‘창의’를 중시하게 되지만, 그 새로움은 다른 개체가 ‘모방’하고 ‘확산’하지 않는다면 사멸하고 만다. 그렇기에 인간이 다른 생물종과 달리 ‘집단 기억’과 ‘문화 기억’이라는 형태의 외장 기억을 건설함으로써 지식과 기술의 확산과 축적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은 중요하게 여겨져야 한다. 저자는 낭만주의 미학과 예술에서 강조하는 천재적 개인과 창조력에 대한 신화를 뒤로하고 “인간이란 거대한 기억”(62쪽)이라 정의 내린다. 이는 물론 질적 도약이 아닌 집단으로서의 양적 축적을 말한다. 김태환이 인간의 의지, 내면, 정신이라는 추상적인 면을 중시한다면, 김재인은 “나의 생각이란 시한부 소유물”(63쪽)에 가까울 수 있으며 그 휘발성을 지켜주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물질’ 혹은 ‘미디어’”(62쪽)라고 강조함으로써 그것을 외화된 집합적 사물성으로 바라보며 그 반대편에 선다. 그런데 이 글은 ‘컴퓨터가 자연어를 다룬다는 것’이라는 장부터 급작스러운 단절을 드러내며 도약한다. 앞에서 인간의 생각 자체를 미디어이자 집단 기억의 저장고로 본 것과 다르게, 예술과 창작의 영역을 다룰 때는 컴퓨터가 자각 혹은 성찰을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컴퓨터는 예술 능력이 없다”(66쪽)고 확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기계를 바라보는 김재인의 시점에는 도구적 차원과 존재적 차원이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글은 창작의 정의를 “스스로 선택하고 평가하는 능력이 발휘되었느냐”(67쪽)에 두는데, 중요한 점은 저자가 그 평가 주체의 자격을 ‘생물’로 단정한다는 것이다. 생물은 “생존과 번식을 스스로 반복”하는 유기체이고, 이 글에 따르면 평가 역시 “생존과 번식에 성공하기 위한 지각 처리와 행동의 연쇄”(70쪽)다. 이 기준에 따르면 애초에 기계는 아무리 ‘집단 기억’의 ‘미디어’로서 최적화되어 있다고 해도 무기물이라는 점에서 평가 능력이 없는 것으로 배제 당할 수밖에 없다. 그가 이렇게 유기체의 항상성과 관련된 기준을 평가 능력과 일치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저작 『AI 빅뱅』에서 참조할 수 있는 지점을 좀더 찾아보면, 이는 “몸의 고집스러움”5)이라는 말과 함께 구체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심지어 같은 프롬프트를 주더라도 생성물이 크게 바뀌는 무작위성randomness을 보여주는데, 이는 휘발성이 강하다. 그러나 인간은 불완전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자기 생각을 고수하는 면을 지니는데, 저자는 이를 몸에서 비롯된 문제로 보는 것이다. 이 장에 바로 이어지는 질의응답에서 한 질문자는 “세계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몸을 가지는 것이다”6)라는 전제 위에서 인공지능이 세계를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강인공지능으로 발전할 방법이 있는지 묻는데, 김재인은 이에 대해 ‘몸의 회복력’에 대한 이야기로 답한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몸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몸은 생각을 “바로 휘발되지도 완전히 고착되지도 않은 어느 중간 지점”7)에 붙잡아둔다는 것이다. 김재인은 인공지능과 다른 인간을 논하는 데 있어 복잡성을 가진 신체의 차원을 살려내고자 한다. 하지만 창작을 논하면서부터는 김태환의 논의와 유사한 탈신체화의 방향을 답습한다. “진화 과정에서 살아남았다는 특징”은 “필멸하는 인간이 불멸하는 비결”(70쪽)로 치켜세워지고, 진화를 위해 외부와 교섭하며 몸 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피드백 루프는 유기체만의 고유한 신체적 능력으로 남는다. 인공지능은 몸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케이트 크로퍼드가 인공지능은 추상화된 지능이 아니라 오히려 “체화되고 물질적인 지능이며 천연자원, 연료, 인간 노동, 하부구조, 물류, 역사, 분류를 통해 만들어진다”8)고 강조한 사실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혹은 그와 마찬가지로 유기체의 일차적인 목표로서의 생존이 진화의 필수 사항이라 말하는 신경과학 연구자 아닐 세스가 우리의 지각은 사실 ‘통제된 환각’이자 ‘최적의 예측’이라 설명했음을 염두에 두면 어떨까. 그에 따르면 ‘당신이 된다는 것being you’, 즉 인간의 ‘동물기계’적 본질과 의식적 자기 사이의 연결고리는 “신체 자체가 가진 현재와 미래의 생리적 조건에 대한, 형태도, 모양도 없고 제어 중심적인 지각적 예측”9)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인공지능 역시 지극히 물질적인 신체를 지니고 있으며 인간 역시 체화된 자아로 인한 기계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때, 예술을 창발시키는 창의성 개념이 다르게 읽힐 가능성이 열린다.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승부 후에 마련된 『인문예술잡지 F』 21호의 특집 ‘고함: 비-인간’에서 이진경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인공지능이 창조성을 가질 수 있는 논리적 가능성을 함축한다고 주장했다. 괴델의 정리는 수학적 추론의 과정 속에 언제나 결정 불가능한 명제가 ‘숨어’ 있을 수 있음을 의미하며, 그렇다면 인공지능의 수준에서도 공리계로 귀속될 수 없는 명제(결정 불가능한 명제)를 생성할 수 있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계의 형식적 추론에서조차 새로운 명제의 창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역으로 생명체의 진화가 어떤 경로를 밟아왔는지 설명한다. “변이mutation의 누적에 의해 진화는 이루어”지지만 처음 “생명체의 변이는 지배적인 개체군 안에서 일종의 ‘장애자’나 ‘고장’으로 간주된다”10). 하지만 환경이나 생존 조건에 따라 변이가 진화된 변종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면, 기계가 만들어내는 예측되지 않은 결과의 출현 역시 ‘고장’이나 ‘장애’가 아니라 새로운 능력의 ‘창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창조의 출발점이 아니라 결과물에 초점을 맞춘 논의다. ‘인간 없는 예술’이 도래하려는 시기에 우리는 다시 인간적인 무언가를 기계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는 기술적 특이점이 올 때마다 반복되어온 정동이기도 하다. 이 앞에서 좀더 차분하게 이전의 논의들을 정리하고 축적할 필요를 느낀다. 2024년 『쓺』의 특집이 창작자이자 예술가가 서 있는 주체의 자리에서 출발했다면, 2016년 『인문예술잡지 F』의 특집은 그 결과물인 작품의 자리에서 논의를 시작했다. 그렇다면 감상자의 자리에서 본다면 어떤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 신예슬의 『음악의 사물들』은 음악이 기술적 혁신을 이루는 순간마다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넓혔는지를 따라 음악사를 재구성한다. 자동 피아노의 경우에도 그 연주를 더 실제처럼, 더 자연스럽게, 더 인간답게 만들겠다는 목표는 거의 달성되었다. 그러나 자동 피아노가 만들어낸 경험이 정말 특별하게 의미화되는 것은 인간의 연주라는 원본 혹은 목적지를 버렸을 때이다. 인간의 연주라는 목적지를 소거해버리고 이 사물의 독자적인 가능성에 집중해보는 것이다. 연주하는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스스로 뭔가를 연주하거나 재생할 수 있는 악기가 등장했고 그것이 인간의 행동을 인간 없이 손쉽게 해냈다면, 그 기계의 핵심적인 가치를 ‘인간의 복제’가 아니라 ‘탈脫인간’으로 재조정할 수도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기계장치가 꼭 연주자를 대신할 필요는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기준점만 제거한다면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수많은 음악적 가능성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 자동 피아노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연주를 들려줄 수 있었다. 인간의 연주를 기록하고 인간의 연주를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연주의 대리자는 오히려 새로운 예술형식으로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스스로 연주하며 그 누구보다 기계적인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독자적인 예술형식 말이다.11) 우리는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에 대해서도 그것이 오히려 새롭고 독자적인 예술형식이 될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을까? 이 모방은 때로 인간에 한참 미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때로 인간을 이미 초월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계는 이미 희미해지고 있던 자율적인 개인 주체로서의 예술가상을 어떻게 바꾸어나갈까. 또 인간의 예술적 집념은 어떻게 예술 형식들을 바꾸어나갈까. 모든 것이 뒤흔들리는 가운데, 불안만이 정확하게 인간의 자리를 응시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이 불러오는 균열 속에서 인간에 대한 고정된 사유를 과감하게 벗어날 수 있을 때 인간과 예술 모두에 새로운 시야가 열릴 것이다. 1) 심효원, 「지렁이의 부드러운 건축물 만들기」, 『쓺』 2024년 상권, 368쪽.2) 시앤 응아이는 디지털 자본주의가 가속화되던 2010년대 후반의 미술과 문학작품을 분석하면서 기믹의 이론화에 착수하는데, 기믹은 의심스러운 도구성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키치와는 다른 저질 예술로 취급되면서도 자본주의 가치 체계와 그 이면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의심을 표면화하는 미적 전략으로도 쓰일 수 있다. 윤원화는 이 글을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공모 프로그램 선정작인 시각예술 콜렉티브 랩삐의 에 대해 설명하며 시작한다. 이 전시는 관객이 옥수수 농사 시뮬레이션을 완수한 후 ‘콘 코인’이라는 가상 화폐를 받아 실제 뻥튀기 한 봉지와 교환하는 경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복 노동이 이에 비례하는 가치 창출과 기쁨으로 이어지는 대신, 콘 코인이라는 불분명한 요소가 끼어들면서 매끄러운 교환 가능성이 흔들릴 때 이 간극에서도 기믹이 관찰된다고 할 수 있다.3) 윤원화, 「땅을 파는 손」, 같은 책, 383쪽.4) 캐서린 헤일스,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사이버네틱스와 문학, 정보 과학의 신체들』, 허진 옮김, 열린책들, 2013, 27쪽.5) 김재인, 『AI 빅뱅—생성 인공지능과 인문학 르네상스』, 동아시아, 2023, 153쪽.6) 같은 책, 156쪽.7) 같은 책, 157쪽.8) 케이트 크로퍼드, 『AI 지도책—세계의 부와 권력을 재편하는 인공지능의 실체』, 노승영 옮김, 소소의책, 2022, 17쪽.9) 아닐 세스, 『내가 된다는 것—데이터, 사이보그,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 의식을 탐험하다』, 장혜인 옮김, 흐름 출판, 2022, 243쪽.10) 이진경, 「인공지능시대의 예술작품」, 『인문예술잡지 F』 21호, 2016, 25쪽.11) 신예슬, 『음악의 사물들—악보, 자동 악기, 음반』, 작업실유령, 2019, 115쪽.

계간 문학동네 강지희 인공지능개체성집단성탈인간감상자 2024
배하은 눈보라 속에서 문학은 ―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소명출판, 2023)

1. ‘서울의 봄’을 기다리며 유신 독재 시대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을 다시 돌아다보면서 근래에 극장가의 흥행 기록을 다시 쓴 영화 (2023)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지나간 과거의 일이지만, 또한 그렇기에 ‘서울의 봄’이 당시로써는 아직 오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엔딩 크레딧과 함께 솟아오르는 아쉬움과 슬픔, 분노의 감정은 덜해지지 않는다. 40여년의 시간차를 무색하게 만드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그 시대를 지나오지 않은 세대의 관객들에게까지도 강력하게 휘몰아친다. 그러니 그 시대를 온몸으로 뚫고 나갔던 이들은 눈앞에서 물러나는 봄을 바라보며 무엇을 느꼈을지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유영주의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소명출판, 2023)이 제목을 따온 「겨울공화국」의 시인 양성우는 그의 또 다른 시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에서 그 봄을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들려준다.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셔준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곤백번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이 …… 한반도에서 다만 녹슬지 않는 비싼 넋으로 밤이나 낮이나 과녁이 되어 내가 죽고 다시 죽어 스며들지라도 오는 봄에 나무꾼을 쓰다듬어 주는 작은 바람으로 돌아온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후략)…1)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실 수 있다면, 오는 봄에 작은 바람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그의 시가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죽고 다시 죽어 넋으로 스며든다고 해도 좋다는 시인의 결연한 고백을 듣고 나면 그러나, 또 한 번의 겨울 속으로 선선하게 걸어 들어갔을 그들의 의지를 떠올리게 된다. 봄은 물러갔어도,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에서 주요하게 살펴보고 있는 김지하와 황석영, 조세희, 이문구는 신군부 독재 정권하에서도 계속 문학이라는 싸움과 저항을 지속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그들에게는 “오는 봄”을 기다리며 문학에 대한 믿음과 비전으로 눈보라를 뚫고 한 시대를 걸어 나왔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영주의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은 바로 그 역사에 관한 연구이다. 2. 시와 정치와 사랑 시작은 김지하다. 저자가 냉전시대 동아시아의 권력 지형 및 상세한 역사적 맥락과 함께 김지하를 통해 보여 주고 있는 것은, 그러한 냉전 체제의 하위 파트너인 유신 독재 정권과 한바탕 벌여 놓은 그의 싸움판이다. 그의 시 「곡(哭) 민족적 민주주의」(1964)와 「오적(五賊)」(1970)이 어떻게 ‘유신의 심장’을 들었다 놓았다 했는지, 왜 유신 독재 정권은 그의 ‘세 치 혀’와 붓 끝에서 흘러나오는 시를 그토록 두려워했는지, 그러한 김지하의 시는 근본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저자는 ‘오적 필화사건’의 법정 풍경을 복원한다. 잘 알려진 대로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하에서 필화 사건은 드물지 않게 일어났고, 더군다나 김지하의 「오적」이 처음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특별히 ‘오적 필화사건’에 주목하는 이유는 “1970년 김지하의 체포에 이은 100일 간의 재판[이], 법정을 판소리나 탈춤이 주로 공연되는 야외의 마당으로 탈바꿈시켰다”는 데 있다.2) 저자는 관련 인물들의 여러 회고를 바탕으로 당시 재판이 흡사 검사가 양반의 담화를 담당하고 김지하가 말뚝이를 맡은 판소리 풍자극과도 같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유신 독재 정권은 도리어 김지하에게 그가 오래 탐구했던 전통 마당극을 마음껏 펼칠 무대를 깔아주었던 셈이다. 이후 그 무대는 김지하가 “문학, 폭력, 혁명, 구원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펼칠 수 있는 대중 강연을 위한 연단”(95)으로 확장된다. 당시 재판을 방청했던 더글러스 루미스(Charles Douglas Lummis)의 기록을 인용하여 저자는, 재판 방청객들이 김지하의 발언을 받아 적어 재판장 바깥으로 빼돌린 뒤 그들이 속한 조직으로 돌아가 그에 대해 토론하고 연구하게 되는 방식을 흥미롭게 포착한다. 이는 시인의 말이 변론과 강연, 연설을 넘어서, 유신 독재 체제하의 민중에게 어떤 구원의 메시지처럼, 마치 ‘예언’처럼 전달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저자에 따르면 루미스는 실제로 김지하에게 “에언자”라는 칭호를 부여하기도 했다.(87) 오래 전 종교가 시와 정치로 분리되지 않는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이 시기 김지하의 문학 세계는 세속화 시대에 시와 정치를 동시에 추구하려 했던 어떤 종교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이후 “시인으로서의 그의 국제적 명성은 분명 그가 겨울 공화국의 순교자가 됨으로써 크게 높아지게 되었다.”(50) 아이러니하게도 유신 독재 정권은 김지하를 위대한 시인으로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게다가 그 어떤 비평가나 애독자보다도 꼼꼼하게 김지하의 시를 읽고 분석하며, 그 힘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했기에 그들은 김지하에게 더욱 집착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검찰은 “시인의 수첩에 적힌, 아직 쓰이지 않은 시와 희곡에 대한 메모”(95)들을 증거로 제출하며, 마치 시인론을 쓰는 문학 연구자인양 김지하의 문학 세계를 탐구해 들어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문학이 하는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문학을 억압하고 지배하려면 역설적이게도 그 안에 잠겨들어야 한다. 지배와 억압은 대상을 이해할 때 가능한 것이고, 문학에 대한 이해는 오직 문학의 세계 안으로 침잠할 때 가능한 까닭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문학이 하는 혁명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지배 권력조차 그 안으로 휘말리고 뒤엉켜 들어가게 만드는 것, 그것이 시와 정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유신 독재 시대 문학의 혁명적인 것이었다. 굳이 알랭 바디우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낸다는 점에서 사랑과 혁명은 ‘사건’이며,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문학도 ‘사건’이 된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의 논의가 무르익을 때, 그 자체로 1970년대 문학의 ‘사건’이기도 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이 등장한다. 핵심은 이 연작소설집이 이웃 사랑을 미학적으로 실천한 텍스트라는 것인데, 저자는 그 단초를 「뫼비우스의 띠」에서 발견한다. 연작소설의 첫 번째 이야기이기도 한 「뫼비우스의 띠」는 ‘굴뚝 청소를 마치고 그을음으로 얼굴이 새까맣게 된 아이와 그을음이 전혀 묻지 않은 깨끗한 얼굴의 아이 중 누가 얼굴을 씻을 것인가?’ 하는 질문과 함께 수수께끼 같은 문답을 주고받는 교사와 학생들의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이 문제가 곧 뫼비우스의 띠이면서,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세계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함을 암시하며 끝맺는다. 저자는 이 뫼비우스의 띠 수수께끼를 지젝(Slavoj Žižek)의 ‘시차적 관점(parallax view)’, 즉 축소 불가능한 간극을 잇기 위해 애쓸 것이 아닌, “간극 그대로를 인식하는 것”으로 해석한다.(189) 안과 밖은 결코 만날 수 없지만, 뫼비우스 띠에서는 그 안과 밖이 그대로 안쪽 면이면서 바깥 쪽 면으로 존재할 수 있는 차원을 인식하는 것이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서, 당연히 그을음이 묻은 아이가 세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에게 교사는 얼굴에 그을음이 묻지 않은 아이가 친구의 새까만 얼굴을 보고 얼굴을 씻어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답한다. 이윽고 다른 학생이 그와 같이 대답하자, 다시 교사는 동일하게 굴뚝 청소를 한 아이들 중 한 아이의 얼굴은 깨끗하고 다른 아이의 얼굴은 더러운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반박한다. 그러니까 애초에 교사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해답 없음이 곧 안과 밖의 구분 없는 뫼비우스의 띠의 관점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굴뚝청소부 수수께끼와 뫼비우스의 띠라는 위상수학적 개념과 개발독재시대의 소설에 대한 해석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마치 뫼비우스의 띠를 만들 듯, 유영주 역시 그의 방법론적 시각을 한 차례 꼬아 지젝에서 케네스 레이너드의 ‘이웃’ 개념으로 비약한다. 사랑(특이성과 차이)과 정치(평등과 동일성)는 마치 뫼비우스 띠의 양면과도 같은데, 그 띠를 한 번 꼬아 연속체로 만드는 “사랑과 정치의 이음매” 지점이 “이웃”이라는 존재라는 것이다.(189) 저자는 이로부터 조세희 소설의 미학인 ‘이웃 사랑’을 이끌어 낸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난쏘공』을 난해한 모더니즘적 텍스트처럼 보이게 하고, 그래서 리얼리즘론자들에게 지식인적인 환상 소설이라고 비판받게 만들었던 몽타주 기법을 ‘이웃 사랑’의 주된 미적 원리로 파악하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1970년대 문학은 “당신은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십니까”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박태순의 ‘외촌동 사람들 연작’과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1977)가 그러했을 뿐만 아니라, 대중소설 작가로 197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최인호 역시 일찍이 「미개인」(1971)에서 한센병 환자의 아이들과 같은 학교에 보내는 것을 반대하고 나선 우리 주변의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를 소설로 쓴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첫 손가락에 꼽힐 작가는 단연코 이문구일 것이다. 『관촌수필』(1972)에서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이문구의 이채로움이 빛을 발하며, 유영주가 말하는 ‘인접성의 윤리’를 적극적으로 미학화한 이상적인 이웃 공동체가 그려진다. 저자는 이문구의 아버지와 두 형들이 좌익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던 개인사를 바탕에 둘 때, 이문구의 이웃에 관한 이야기가 그저 단순히 전통사회의 풍요로웠던 이웃 공동체에 대한 환상일 수 없음을 역설한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전쟁 전후의 무수히 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들 중 많은 경우는 이웃들 간에 벌어진 비극이었다. 크게는 계급과 종교를 바탕으로 나뉜 좌와 우의 정치적 이념을 따라 서로 갈등을 빚었고, 심한 경우 학살로 이어졌다. 이러한 한국 현대사의 맥락 속에서 이문구 소설 속 이웃은 “이념적 명명의 대안”으로 제시되며 특별한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142) 저자는 조세희와 이문구의 소설을 ‘이웃 사랑의 미학’과 ‘인접성의 윤리’로 의미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그러한 문학의 미학과 윤리가 박정희 독재 체제의 산업화와 반공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근원적인 힘이었음을 주장한다. 그 힘이, 플라톤 이래 본질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문학을 정치와 만나게 하고, 동시에 어떤 정치를 극복하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저자의 의도대로 1970년대 문학은, 시(문학)와 정치와 사랑이 ‘인접성’의 원리를 따라 이어지지만 그 간극을 그대로 유지하며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현실을 넘어서는 차원의 위상을 형성하는 상호 연결과 긴장 관계로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3. 마지막 문사(文士)의 시대 그러나 이 책의 부제인 ‘박정희 시대 한국문학과 저항’에서와 같이, 한국 문학이 저항과 나란히 놓일 수 있는 시대는 곧 저문다. 대체로 그것은 1990년대, 그 유명한,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실감한 때와 겹친다. 고진은 1970년대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한 사람인 김종철과 만났을 때 왜 문학을 그만두고 《녹색평론》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알려진 대로 김종철은 1991년 《녹색평론》 창간과 함께 문단을 떠나 생태주의 운동에 몸담았다. 그는 “자신이 문학을 했던 것은 문학이 정치적 문제에서 개인적 문제까지 온갖 것을 떠맡는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모순조차도 떠맡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언제부터인가 문학이 협소한 범위로 한정되어 버렸다, 그런 것이 문학이라면 내게는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그만두었다”고 답했다.3) 이것은 유신 독재 정권에 강력하게 저항했던 ‘창비’ 계열 문학비평가의 고백이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이 포착하고 있는 문학의 사회 참여(앙가주망)와 정치적 실천, 특별히 양심 있는 지식인으로서 시인과 소설가 들이 독재 권력과 맞서 싸우는 역사는, 이제 정말로 역사가 되었다. 물론 그러한 역사가 한국에서 1970년대 유신 독재 정권 시대라는 국면에 가능했고 정점에 도달했던 것은, 과거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국가였던 후진국에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설 때 그에 맞서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를 외칠 수 있는 것은 소수의 지식인들뿐이었던 세계사의 보편적인 패턴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고진이 말한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장르가 소설(novel)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한국 문학사에서 ‘소설의 시대’라고 불렸던 1970년대의 특수한 문학사적 맥락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의 논의가 작가를 앞세우면서 참조하는 세 가지 문학 개념 중 첫 번째인 ‘리테로크라시(literocracy)’라는 동아시아의 문치주의적인 문학 개념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한국 근현대 문학사로 한정해 본다면 그것의 유구한 역사는 시인과 소설가가 독립운동 투사가 되곤 했던 식민지 시대 ‘문사’ 개념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사의 시대는, 이 책에서 보여 주고 있는 것처럼 실로 1970년대 문학에서 마지막으로 가장 강력하고 화려하게 빛을 발한 뒤, 끝났다.4) 이 책의 첫 장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김지하의 시 「진리」에서 시인은 “바람 속이 내 집”이라고 노래하고 있었지만,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 황석영은 그가 2017년 출간했던 문학적 자서전 『수인』에서 방북사건으로 떠돌던 시절을 회고하며 그때의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결국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문학이라는 집이었다”라고 고백한다.5) 한때 바람 속을 집으로 삼아 온갖 경계를 넘나들며 활보했던 문사들에게 문학의 지경이란 없었다. 김종철이 말했던 것처럼 그들의 문학은 “온갖 것을 떠맡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문학을 떠났거나, 문학이라는 집 안으로 돌아간다. 이제 문학은, 그리고 작가는 무엇을 하는가. 유영주는 결론에서 박민규 소설의 저항성을 김지하에 견주며, 문학은, 그리고 작가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박민규는 그의 대표작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표절 사건 이후로 그럴 수 있는 정당성을 상실했다. 이것은 분명 징후이기도 하다.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예감하게 했던 작가 중 한 명인 무라카미 하루키를 통해 우리는 이미 오래 전 문사의 정체성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로 완벽하게 대체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지위마저 위태롭다. 최근 작가들의 소설 속 자기 재현은 어떠한가. 그들은 비정규직 중에서도 고용안정성과 소득이 가장 낮은 축에 들며, ‘프리랜서’라서 정부가 청년층에 제공하는 대출 상품에도 부적합해 은행 창구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으로 소설가를 재현한다(박서련, 「A Queen Sized Hole」,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민음사, 2022). 지방 변두리의 3천만 원짜리 아파트가 자기 집이 되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며, 마오쩌둥의 참새들처럼 어디에도 내려앉을 수 없어 지쳐 떨어져 죽을 위기에 놓여 있다(이서수,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젊은 근희의 행진』, 은행나무, 2023). 오해하지 말라. 이것은 어떤 가치 판단도, 비판도, 자조도 아닌, 현상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이 시대의 문학은 이제 유신 독재의 겨울 공화국과는 완전히 다른, 또 다른 눈보라 속에서 분투해야 하는 것이다. 1) 양성우, 『겨울공화국』, 화다, 1984, 18면. 2) 유영주, 이형진·정기인 역,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 박정희 시대 한국문학과 저항』, 소명출판, 2023, 92면. 이후 이 책 인용 시 본문에 쪽수로 표기. 3)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역, 『근대문학의 종언』, 도서출판 b, 2006, 49면. 4) 어떤 이들은 1980년대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문학과 정치의 관계라면 그것은 1980년대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1980년대에 문학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팽배했던 반지식인적인 분위기 속에서 작가는 1970년대와 같은 문사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1991년 5월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 치워라”라는 김지하의 충격적인 발언과 그것을 둘러싼 반응 그 이면에는 1980년대를 거치며 그가 더 이상 1970년대와 같은 문사의 지위에 서 있을 수 없었던 상황이 엄연히 자리한다고 볼 수도 있다. 5) 황석영, 『수인』 1, 문학동네, 2017, 36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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