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자음과모음 2024년 봄호(제60호)
비평의 감정 — '조금도 비극적일 것 없는 분열'은 어떻게 가능할까
보잘것없는 애정을 숨기려는 그런 과장된 말들은 감안해서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충만한 마음이라도 때로는 고작 공허한 비유로나 표현될 뿐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욕망이나 관념, 고통의 정도를 결코 적확하게 표현할 수 없을뿐더러 사람의 말이란 금 간 냄비와도 같아서 별을 감동시키고자 하지만 곰을 춤추게 하는 가락을 내는 데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
-귀스타브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 중에서1)
분열의 감정
동시대 한국문학 비평장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최근 들어 비평가들 간의 대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비평장을 가리키는 관례적인 표현이 대화의 부족, 논쟁의 결핍, 비판의 실종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최근의 변화된 풍경은 이색적이고 주목할 만한 현상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대화의 분위기가 조성되는 데 이 글이 실릴 『자음과모음』의 역할은 분명 작지 않아 보인다. 작년 여름 ‘대화 장치로서의 문예지’라는 슬로건을 앞세우며, 잡지의 전반적인 기조를 새롭게 정립한 『자음과모음』이 주력하고 있는 것은 ‘문학에 대한 대화와 성찰의 장치로서의 문예지를 설계’하는 것, 이를 위해 비평들의 대화를 촉진시킬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을 모색하는 일인 것 같다. 당시 발표된 권두언의 일부이다.
비평은 본래 대화가 아니고서는 성립할 수 없는 글쓰기 양식이기도 하고, 이전부터 문예지라는 장치에 주요한 작동 원리로 기능했던 선례도 있다. 이 지나간 비평 주도 시대의 계간지라는 장치가 계속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비평이 힘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착시가 있고, 때로는 눈총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의 비평은 어쩌면 조금 더 힘을 가져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그 시대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비평이 문학의 권력과 위계를 가지려는 것이 아니라, 대화의 재능과 역량을 발휘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대화 그 자체보다 더 궁극적인 목표가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러한 대화를 통해 읽고 쓰는 이들이 함께하는 동시대 문학이라는 장의 구성과 참여, 그리고 삶의 감각과 문학의 경험에 대한 질문과 인식을 불러오는 것이다.2)
비평의 존재 방식이 근본적으로 대화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대화가 단지 작품과 비평 사이의 관계에 한정되지 않고, 문학 전반의 영역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선언과 다짐에 동의하지 않기란 어렵다. 물론 이러한 편집진의 기획 의도에 대한 의문과 비판, 그리고 얼마간의 반감도 없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제도적 호명에 의해 (이 글이 처하게 될 상황도 유사한데) 강제적으로 대화의 장에 불려 나오게 된 것 같다는 이상한 기분, 동료 비평가의 글에 대한 직접적 논평을 수행해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감,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이 모든 글쓰기 행위가 ‘동시대 문학이라는 장의 구성’을 위해 소모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과 결부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의 시간 속에서 문학의 현재를 고민하고, 비평적 의제를 생산하는 장치를 구성하려는 잡지의 새로운 방향과 노력에 나는 지지를 보내고 싶은 쪽에 가깝다.3) 비평이 오늘날 작동하는 문학적 통치 시스템에 온전히 예속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리하여 새로운 비평적 정치의 시공간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비평 간 대화는 권장되어야 하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작년 여름 이후 『자음과모음』 기획에 응답하는 많은 글들이 발표되었고, 이러한 추세가 다른 매체들로까지 확장되고 있는 걸 고려하면, 결과적으로 비평 간의 대화는 그 어느 때보다 활성화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대화에 대한 요청이 반드시 제도적 기획의 산물로만 이해될 수 없다는 방증이기도 할 것이다. 각각의 대화의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날카로운 문제의식과 비판적 의제는 동시대 한국문학과 비평에 대한 동료 비평가들의 고민의 깊이와 스펙트럼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쉽게 정리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주제와 현안들이 제기되는 가운데, 열띤 토론과 논쟁 그리고 긴장감도 조성되는 것 같다. 이 글에 요구되는 것 역시 이러한 비판적 분위기에로의 동참일 것이다. 동료 비평가들의 글을 세밀하게 검토하고 그에 대한 나의 입장과 주장을 비판적 논리와 함께 제시하는 것, 그리하여 연속적 대화를 위한 새로운 의제를 생산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그러나 이번 글에서는 그 과제를 성실히 수행하지 못할 것 같다. 최근의 비평적 대화를 따라가는 내내 이전과는 다른 감정을 느꼈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의 비평장과 문학 제도를 둘러싼 여러 비판적 논의와 쟁투 속에서 (비록 구체적으로 거론할 수는 없지만) 의심, 적대, 원한, 분열의 분위기를 감지하며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에 직면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도대체 이 감정의 정체는 무엇일까.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나는 내가 느낀 감정이 최근의 비판적 대화와 논쟁에 대한 정당한 평가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특정 독자군의 심리적 상태를 반영한다고 믿지 않는다. 대화의 밀도나 깊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일련의 대화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지극히 날카롭고 정확한 것이었으며,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깨우쳐주는 대목도 적지 않았다. 갈등과 분쟁이 없는 대화의 풍경을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대화에 갈등이 없을 수 없고, 특히 서로 다른 입장이 경합을 버리는 담론의 장에서라면 그것은 비일비재한 일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원인이 비판적 대화의 수준이나 정합성에 있지 않다는 사실부터 전제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이 해명하고 싶은 것은 최근의 메타비평을 읽으면서 내가 겪은 분열, 혹은 그러한 분열이 야기하는 주관적 감정과 결부되어 있다. 이 감정은 개별적인 것이고, 글에서 직접 언급할 수 없는 개인적 체험에 기반한 주관적 반응에 가깝다. 따라서 이 감정은 그 어떤 것도 대변하지도 못하고, 보편성을 결여한 나이브한 반응으로 비칠 수 있을 것이다. 몇몇 동료 비평가들의 글(혹은 그들의 감정)을 읽고 인용하며 글이 전개되겠지만, 이 글은 기본적으로 연속적 대화를 추구하기보다 그저 단편적 독백에 머무를 예정이다. 그래서 이 글은 불가피하게 최근 논란이 되기도 했던 ‘비평의 에세이적 경향’에 합류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최소한의 무언가에 대한 (대표하지 않는 차원에서) 부분적 반영뿐이다. 적지 않은 시간을 메타비평에 할애했던 비평가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제도에 강하게 결착되어 있는 비평가로서 내가 통과해야만 했던 위선과 모순, 그리고 그것에 수반되는 모종의 불가해한 무력감 같은 것 말이다.
조금도 비극적일 것 없는 분열
우선 분열에 관해 말하기 위해, 언젠가 폴 벤느가 회의주의자로서의 푸코의 초상을 묘사하면서 제시한 ‘어항의 비유’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회의주의자는 이중의 존재다. 사유하는 한 그는 어항 바깥에서 어항 안을 맴도는 금붕어들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 역시 살아가야 하기에, 그 자신 또한 한 마리 금붕어로 어항 속에서 다음번 선거에 어떤 후보를 지지할 것인지 결정한다(자기 선택에 대단한 진릿값을 부여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회의주의자는 어항 바깥에서 어항을 의심하는 한 명의 관찰자인 동시에 금붕어 가운데 한 마리다. 분열이 있지만 조금도 비극적일 것 없는 분열이다.4)
우리가 자신이 속한 세계에 대해 사유하고, 그것의 한계를 탐구할 때 정신의 주체는 바깥에서 안을 바라봐야 한다. 그러나 비판적 정신이 외부에 있을 때에도, 주체의 진짜 현실은 여전히 어항 안에 있다. 사유에 있어서 이상주의자이지만, 구체적 삶에 있어서 지극한 현실주의자라는 이중성 속에서 회의주의자는 분열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사유의 이상과 현실의 경험이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론적 사유와 현실적 실천 사이의 간극. 자칫 이러한 간극과 괴리가 야기하는 분열은 누군가에 의해 조롱거리로 비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비판을 통해 바뀌는 게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변화되지 않은 현실 속에서 여전히 살아간다는 사실은, 회의주의자가 모종의 자발적 위선과 모순, 심지어는 유체 이탈 화법을 감수해야 함을 뜻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비판적 주체의 실패를 뜻하는 것일까. 폴 벤느는 이러한 분열이 불가피한 것이고, 심지어 ‘조금도 비극적일 것 없는 분열’이라고 강조한다. 오히려 현실과의 간극을 내포하지 않는 비판적 사유를 기대하는 것이 순진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간극을 수용하면서도, 구체화된 실천의 방법을 모색하고 현실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이어가는 태도에 달려 있다.
비평장이라는 글쓰기 제도를 어항에 비유한다면, 비평가의 실존적 위치는 세 가지로 일별될 수 있을 것이다. 어항 안에 있거나, 어항 밖에 있거나, 아니면 안팎에서 이중적으로 존재하거나. 평소 우리는 어항 안의 금붕어로서 글쓰기를 이어가고, 제도 안에서 비평가에게 요구되는 다양한 활동들을 실천하며 살아간다. 그렇지만 비평가가 늘 어항 안의 금붕어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수행하는 글쓰기가 중요한지, 정의로운 일인지, 어떤 문제가 없는지, 그것을 강제하는 제도와 시스템은 무엇인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위해 비평은 종종 어항 바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여러 제도적 한계를 발견하고 자신의 글쓰기 역시 그러한 시스템 속에서 배태된 것임을 자각했다고 해서, 비평가가 온전히 어항 바깥으로 탈출하는 것은 아니다. 비평가가 실제 비평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는 다시 어항 속으로 들어와야 하고 그 과정에서 자아의 이중화, 즉 분열을 체험할 수밖에 없다.
최근 들어 내가 답답함을 느꼈다면, 아마도 이러한 분열이 언제부턴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기분을 선사하고 있음을 자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특별히 ‘비극적’일 것까지는 없지만, 비평장의 안팎을 오가는 정체성의 변동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그 분열이 불러일으키는 부정적 감정, 이를테면 피로, 냉소, 무기력, 답답함, 죄책감, 수치심 등을 체험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분열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분열을 감당할 수 있는 방법을, 다시 말해 어항 바깥의 나와 어항 속의 나를 매개할 수 있는 방법과 원리를 잃어버린 것 같다고 느낀다.
여기서 나는 비판에 대한 냉소적 응답의 일환으로 흔히 거론되는 대안 부재를 지적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현재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비판적 대화의 분위기, 분명 환영할 만한 변화 속에서도 비평가의 글이 어떻게 소비/소모될 수 있는지, 나아가 그러한 대화에 참여하고 있는 비평가의 실존을 분열시키고 소외시키는 기제가 없는지를 묻고 싶은 것이다.
비평과 비평가의 분리
이 분열이 야기되는 다양한 기제와 구조적 배경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좀 더 긴 글이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이야기의 방향을 조금 바꿔보고 싶다. 내가 제기하고 싶은 질문은 전혀 거창하지 않고, 오히려 지나치게 소박한 것이다. 그것은 비평의 분열과 (비)자발적 이중화가 야기하는 비판의 감정, 비평가의 위태로운 실존이다.
이러한 제안은 다소 뜬금없게 들릴지도 모른다. 비판과 감정은 양립할 수 없는 단어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비판이 이루어지는 데 있어서 감정은 일차적으로 배제되어야 할 요소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비판을 구성하는 것은 철저한 논리와 세련된 이론, 그리고 시대를 진단하는 번뜩이는 현실 인식이어야 한다. 반면, 감정은 비판에 있어 우선적으로 제압되어야 할 이질적인 이방인에 다를 바 없다. 비판 주체가 감정적일 때 우리는 그 비판으로부터 논리적 일관성을 기대할 수 없고, 의도의 진정성을 신뢰할 수 없다. 감정적 비판은 상대방에 대한 원한과 증오, 그리고 비합리적 적대 의식을 보여주는 징표에 불과하다. 즉, 감정은 비판에 있어 일종의 금기어와 다를 바가 없으며, 지금까지 비평의 감정이 진지하게 논의되지 않은 정당성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비판은 크든 작든 참여하는 주체에게 감정의 흔적을 남긴다. 나의 의견이 부정당했다는 사실에 분노하기도 하고, 때로는 논쟁의 적을 멋지게 쓰러뜨려보겠다는 열정의 근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내 주장과 입장이 부당하게 곡해되고 있다고 여길 경우,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상처와 억울함으로 인해 괴로움에 빠질 수도 있다. 대화 상대방의 의도를 의심하기도 하고, 때로는 내 비판에 대한 합당한 응답을 받지 못할 때 상처받고 고립감을 느끼기도 한다. 냉정을 유지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비판적 대화의 시간 속에서 감정은 생산되기 마련이다.
엄연히 존재하지만, 마치 없는 것처럼 비가시화된 비판 또는 비평의 감정. 내가 비평의 감정이라는 이 애매모호한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된 직접적 계기를 제공한 글은 이은지의 「비평의 오물-물밑을 휘저으며」5)였다. 나는 그의 글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는데, 그것은 ‘정치적 올바름’을 둘러싼 과거의 논쟁 속에서 이은지가 비평가로서 겪어야 했던 곤경, 그리고 그에 대한 그의 솔직하고 거침없는 고백이 비평장에 놓여 있는 비평 주체의 구조적 취약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같은 시기를 통과했던 과거의 나를 반추하도록 요구했다.
철저하게 ‘나’라는 화자의 개인적 층위에서 과거를 회고하는 에세이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비평의 오물」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단순히 사적인 경험으로 환원될 수 없어 보인다. 그것은 오늘날 비평장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주체들에게 야기될 수 있는 담론의 힘, 즉 사적인 형태(감정)로 발휘되는 시스템의 강력한 힘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의 비평적 주체들에게도 언제든지 가해질 수 있는 폭력이기도 하다.
이은지의 논의에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의제가 설정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비평가를 재생산하는 시스템의 원리와 메커니즘이다.
평론가가 평론가이기 위해서는 문예지라는 한정된 지면에 불러 세워지는 ‘호명’의 절차가 일차적으로 필요하며, 그렇게 호명된 자리에서 발화한 것이 다른 평론가들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는 ‘언급’의 과정이 이차적으로 요구된다. (……) 한정된 자원, 즉 지면을 확보해야 하므로 평론가는 주저하거나 머뭇거릴 자유가 없을 뿐 아니라 언제나 호명을 기다리는 ‘잠재 주체’로서의 불안을 견뎌야 한다.(77쪽)
이은지가 밝히고 있듯 이러한 지적은 전혀 새로운 문제의식이 아니며, 비평계만의 제도적 특수성을 가리키지도 않을 것이다. 관건은 호명, 언급, 인용이라는 인정의 메커니즘 안에서 비평가가 불안을 경험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자발적 모색과 선택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때 비평가의 불안은 자유와 억압이라는 이분법으로는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비식별적 경계를, 비평장이라는 제도 안에서 생산되는 비평 주체의 복잡하고도 분열적 실존을 표상한다.
따라서 이 불안을 제도의 검열과 강제의 메커니즘으로 묘사하는 것은 단순하고 순진한 일이다. 이은지가 비평계가 유지되는 재생산 시스템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면서도, 그것을 ‘주니어 시스템’으로 규정하려는 일각의 주장에 비판적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주니어 시스템론은 “신진 평론가들을 지나치게 유아화하고 그들이 몇몇 문예지를 통해 온순하게 길러질 것으로 단정”(78~79쪽)한다. 주니어 시스템론은 비평장에 참여하는 주체들을 자유롭지 못한, 어항 속의 금붕어로만 간주한다. 실상은 그것보다 더 복잡하고, 중층적이다. 비평가는 자신이 어항 안에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고, 그 안에서 자신에게 요구되는 기능과 역할이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를 오히려 정확히 이해한다. 따라서 비평가의 실질적 글쓰기에 영향을 주는 것은, “갓 등단한 평론가로 하여금 갓 등단한 게 아닌 것처럼 능숙하게 처신하도록 만드는 암묵적인 분위기”, 비평가로 하여금 “한 사람의 평론가로 온전히 기능할 수 있는 자리를 확보”(80쪽)하도록 독려하는 모종의 힘이다.
누구도 직접적으로 강제하지 않지만, 비평 주체는 자신이 수행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기대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미 알고’ 있는 자유로운 주체이다. 문제는 이러한 자유가 비평가에게는 오히려 불안의 원인이자, 시스템 안에서 더욱 취약한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방식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은지가 오늘날 문예지들에서 나타나는 “플랫폼”적 성격의 강화가 “평론가들의 원자화를 가속”(79쪽)화시키고 있다고 판단한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비평가는 단순히 억압된 존재가 아니다. 그에게는 어떤 자유가 제공되며, 심지어 자유를 행사하기를 권유받는다. 그러나 시스템 안에서 발휘될 수 있는 이 불완전한 자유는 비평가의 글쓰기를, 그리고 비평가가 감내해야 할 실존적 정서를 철저히 개인적인 문제로 축소시킨다.
문제는 이 장에서 주체가 실제로 그 ‘자유’를 행사함으로써, 모호하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플랫폼 내의 어떤 분위기를 거스르고 역행하는 순간 발생한다. 이은지가 제기한 두 번째 문제가 바로 그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문학은 정치적으로 올발라야 하는가」(『문학3』, 2017)를 발표했을 당시 “페미니즘 리부트와 시기적으로 맞물리며 뭇매를 맞아야 했던”(79쪽) 체험을 상기하며 과거에 벌어졌던 상황을 현시점에서 재검토한다. 당시의 비평계 전반에 조성된 어떤 흐름과 분위기에 반했던 그의 글은 집중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러한 글들을 읽으며 이은지는 자신이 쓴 글과 스스로의 실존 사이에 형성된 과도하고도 부당한 동일시를 경험했다고 진술한다. 그리고 그것이 가속화됨에 따라, 그의 글이 어떤 담론을 형성하는 매개로 활용됨에 따라, 비평 담론과 자신 사이에서 발생한 근본적 분열을 목도하게 된다.
나의 글을 둘러싼 비판들이 나의 상처를 악화시키는 한편으로 비평의 담론을 어딘가로 서서히 밀고 나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비평이 평론가를 소외시킨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다. (……) 물론 그것이 비평장이 활력을 얻는 방식이기는 하지만 이를 뒤집어보면 비평장이 얻는 몫만큼 평론가 개인에게 돌아가는 몫은 줄어든다는 공식이 성립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격론 뒤에 평론가 개인에게 남는 감정적 앙금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가 문제로 남는다. 자신의 몫을 알뜰하게 삼킨 비평장은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주저함과 머뭇거림, 열패감이나 모멸감, 분노와 적의 따위는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 할 몫으로, 그러나 격론 이후에 생성된 그 무엇보다도 가장 선명하게 평론가에게 남는다. 평론가의 감정은 평론가 개인이 처리해야 할 몫으로 남겨둔 채 비평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는다.(81-82쪽)
이은지는 자신의 글에 대한 비판들이 “비평의 담론을 어딘가로 서서히 밀고 나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비평과 평론가 사이의 분리를 경험한다. 마르크스의 개념을 빌리자면 ‘노동 생산물로부터의 소외’라고 규정할 수 있을 이러한 사태를 촉발한 주체는 누구일까. 문제의 복잡성은 그것에 대한 명확한 책임 주체를 지시할 수 없다는 것, 어쩌면 그 누구도 그러한 결과를 바라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서 한층 가중될 것이다. 관련하여 우리가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당시의 이러한 흐름이 어떤 단합과 의결에 의해 이루어진 억압과 배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담론적 통치성의 장에서 주체는 검열되거나 탄압되는 것이 아니라, ‘정당하게’ 재배치되고 망각된다. 이은지가 과거를 회고하며 특정 비평가나 구체적인 글을 거론하는 대신 추상화된 인격으로서 ‘비평’을, 나아가 ‘비평’과 ‘비평가’ 사이의 분열을 지적하는 이유를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비평가’와 분리된 ‘비평’ 혹은 ‘비평’으로부터 분리된 ‘비평가’라는 형상은, 통치의 장에서 비평가가 생존의 주체로 거듭나듯, 비평가의 생존을 위협하는 권력의 힘 역시 철저하게 원자화된 평론가 개인을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은지가 촉구하는 ‘비평가의 감정’이라는 의제는, 이와 같은 비평적 담론의 재생산 속에서 언제든지 위협받을 수 있는 비평가의 실존적 지반에 대해 우리가 충분히 고민해왔는지를 되묻게 한다. “나의 지난 상처로부터 나의 실책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는 그의 제언 앞에서, 한때 그의 글을 비판적으로 인용하며 글을 시작한 이력이 있던 과거의 ‘나’는, 그리고 현재의 ‘비평’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감정의 생산
누군가에게 비평의 감정은 근본적이라기보다는 표면적이고, 보편적이기보다는 지극히 상대적인 문제로 수렴될지도 모른다. 감정은 주체마다 다르기에, 그 안에서 어떤 보편적인 무언가를 도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감정의 내용에 있어 동일한 것은 없지만 그 감정이 생산되고, 관리되고, 처리되는 방식에 있어서는 어떤 공통적 기반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비평의 감정은 비평장을 가로지르는 모종의 힘을 반영하고, 증언하는 분석적 징후로 여겨질 수 있다. 비평가가 비평장 안에서 기능적으로 참여하면서 동시에 배제되는 메커니즘, 때로는 구성적 외부로 배치되는 과정에서 남게 되는 담론의 잔여, 그러나 결코 소거될 수 없는 비평가의 실존적 징표가 감정이다.
최가은의 「비평의 조건-예속과 애착」6)은 이러한 원자화된 개인으로서 비평가가 처해 있는 담론적 생산 조건을 규명하기 위한 이론적 시도로 읽힌다. 이 글은 문예지에 메타비평을 쓰면서 활동을 시작한 비평가가 반복적으로 직면하게 된 침묵, 즉 응답 없음이 선사한 감정을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실망, 소외, 분노, 열패감, 회의, 수치 등으로 묘사될 수 있을 자기 부정적 감정은, 메타비평에 참여했던 비평 주체들에게서 흔히 발생될 수 있는 감정의 계열들이다. 그러나 최가은의 글이 단지 이러한 감정의 개인적 토로에서 그치는 것은 아니다. ‘응답 없음’에도 불구하고 메타비평에 대한 요구와 기회가 반복적으로 자신에게 부여된다는 것은, 이러한 부정적 감정의 생산을 대가로 담론장이 무언가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주시하고 있는 것은 “비평(장)의 끊임없는 자기 동일적 재구성 과정에서 동화되지 못한 잔여, 그 잔여를 향한 비평(가)의 멜랑콜리한 흔적 같은 것”(314쪽)이다. 다시 말해 “비평이 놓인 현재의 특수한 조건과 맥락을 두루 살피며, ‘비판 의식’이라고 하는 비평의 근본적 역할을 강조하는 것을 제 미덕으로 삼는”(316쪽) 메타비평은 비판의 결핍을 대리하거나, 비평의 부재하는 윤리·정치적 역량을 대리 보충하려는 일종의 알리바이 같은 것이다. 문제는 그와 같은 비평의 자기 동일적 재생산의 메커니즘 속에서 정작 그것을 수행하는 (혹은 수행해야만 하는) 주체의 생산에 관해서는 묻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가은이 자신이 느낀 감정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이러한 비평의 재생산 기제, 즉 “메타비평 지면의 구조적 형식이 누락하는 지점에 관한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욕구”(316쪽)에 응답함으로써, 동시대 비평가들을 가로지르는 주체화/예속화의 기제를 이론적으로 해명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스스로의 경험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최가은의 자기 분석과, 이은지가 경험했던 ‘비평과 비평가의 분리’ 현상을 겹쳐 읽을 때, 우리는 동시대 비평 주체들이 통과해야만 하는 분열을 가시화할 수 있을 것이다.
최가은이 직접 밝히고 있듯, 그의 글은 문예지-장치의 분명한 의도 속에서 기획된 대화의 장에서 쓰였다.7) “‘대화’를 강제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향한 의문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에게 가해지는 힘에 사후적으로 응답하며 대화를 이어나가는 목적은, ‘비평의 에세이적 경향’에 대한 최근의 비판이 충분히 조명하지 못한 영역을 보다 전면화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비평하는-나’ 쓰기의 연장”(316쪽)이라는 패러디적 전유 속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비평 활동을 묘사한다.
근래 나의 비평 활동은, 소영현의 표현대로 하자면 ‘작가-비평가’ 모델의 어떤 귀결인 ‘기획자 비평가’이자 ‘리뷰어’, 나아가 ‘큐레이터’로서의 작업으로 분류될 수 있다. 나는 계간지 지면에 리뷰와 비평을 쓰고 ‘주례사 비평’의 근원이라는 작품 해설에 참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큐레이터로서 북 클럽을 기획하고 북 토크를 진행하며 작가와 독자를 ‘매개’한다. 더불어 이 모든 활동을 내 개인 SNS를 비롯한 각종 플랫폼을 경유해 전시 및 축적하는데, 이런 나의 활동은 기존의 문학장이라는 제도 내에서 이루어지는 제도 비평인 동시에 ‘다양한 미디어 플랫폼’이라는 다른 “제도이자 장치”를 두루 거치는 비-제도적인 비평이다. 나는 그 흔한 자기 관리의 주체로서뿐만 아니라 일종의 ‘피투자자’라는 새로운 주체성의 형식으로 비평 활동에 임하는 중인 것이다. 이는 평균적인 ‘젊은’ 문학평론가들의 초상이기도 할 텐데, 그렇다면 이런 종류의 비평(가)은 확실히 권위의 담지자랄 수 없다. (……) 그런데 이 비평 주체의 ‘책임’이 ‘비평하는 나’와 관련해 강조될 때, 내게 이것은 어딘가 과잉된 문제 설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와 같은 비평 활동을 통해 내가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어떤 책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의식, 혹은 그래야 한다는 당위적인 믿음이라기보다는 지나치게 개인화된 모순들이기 때문이다.(316-317쪽)
인용한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자기 진술은, 어찌 보면 앞서 토로한 메타비평적 주체의 실존과는 대비되는 것처럼 보인다. 여러 형태의 비/제도적 비평장 속에서 그는 ‘기획자-비평가’로서 비평가에게 통상적으로 요구되는 기능과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고, 그러한 활동들이 “자기 관리의 주체로서뿐만 아니라 일종의 ‘피투자자’라는 새로운 주체성의 형식을 보여주고 있음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처럼 “평균적인 ‘젊은’ 문학평론가들의 초상”이라고 할 수 있는 비평적 실천이 비평적 주체성을 온전하게 규정할 수 없는 계기도 그 메타적 자기 인식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어항 안의 금붕어(큐레이션 비평가)는 어항 바깥의 금붕어(메타비평가)이기도 하다. 담론적 자기 인식 속에서 비평 주체는 이중적으로 분할되어 있는 스스로를 자각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비평 주체는 어항 안의 금붕어이자 어항 바깥의 금붕어라는 서로 다른 위치를 분주히 오가는 과정에서 일종의 분열을 체험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 분열이 단지 비평가를 위선적인 존재로 만드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 비평 주체의 새로운 주체성을 활성화하는 생산의 원리라는 데 있다. “비평 활동에서 매 순간 마주하게 되는 즉각적이고 현실적인 분열된 감각이 있는데, 그것으로 구성되는 ‘비평하는-나’에 관한 이야기가 필요”(316쪽)한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비평의 에세이적 경향’에 대한 비판이 온당하면서도 “과잉된 문제 설정”인 이유는, 그것만으로는 이러한 이중적 분열로 인해 양산되는 모순들, ‘개인화된 모순’이라는 형식으로 원자화된 비평 주체에게 전가되는 힘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시대 비평 주체들이 단지 ‘어항 안의 금붕어’로 억압되고 관리되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비판 정신을 바탕으로 온전히 ‘어항 바깥’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비평가는 자기 자신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개인화된 모순들을 감수하면서, 스스로의 주체성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동시대 비평 주체는 어항 안의 금붕어이면서 동시에 어항 바깥의 금붕어라는 분열의 동시적 종합 속에서 생산되는 중이다. 오늘날의 비평의 감정은 이러한 주체화/예속화의 기제 속에서 생산되는 담론의 부산물이다.
‘비평하는 나’를 둘러싼 실제 맥락은 그보다 더 복잡해 보인다. 그것은 작품 해석과 배치에 수반되는 ‘제도 비평가로서의 책임’으로 건너가기 위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비평하는 나’의 ‘자유’가 상당히 의심스러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통한 자유의 감각은 발생과 동시에 즉각적으로 훼손된다. 혹은 훼손됨으로써 발생한다. 이 손쓸 수 없는 간극 속에서 솟아오르는 것은 ‘비평하는-나’의 긴장과 책임감이 아니라, 참을 수 없는 불안과 수치심이다. 대다수의 비평가의 입을 통해, 언제나 완결된 글을 생산해내지 못한다는 식의 개인적 수치로 표현되곤 하는 이 ‘취약성’은 그러나 그 자체로 분석의 대상이 될 필요와 가능성이 있다. ‘비평하는 나’의 속출은 이 ‘비평하는 나’라는 ‘인지’에 관여하는 믿음 의심 확실성이라는 삼중의 메커니즘을 세세히 살핌으로써 구체적으로 다르게 배치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순된 감각은 보다 근원적인데서 출발하는 것처럼 보인다.(318-319쪽)
우리가 흔히 ‘수치심’ 등으로 형언하곤 하는 비참한 기분, 멜랑콜리함, 혹은 내가 일전의 한 메타비평에서 주목하고자 했던 바에 따르면 ‘비평(장) 전반의 불안’으로 나타난다. 비평의 비참함은, 말하자면 예속화된 비평 주체들의 사회적 변용을 표상하는 것이다.(322쪽)
최가은이 “참을 수 없는 불안과 수치심”을 거듭 피력하는 것은 이러한 감정이 비평장에 참여하는 모든 개인들에게서 보편적으로 발견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도, 제도와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불만을 표현하기 위해서도, 혹은 우리가 영원히 비평적 담론의 생산 기제에 장악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도 아닐 것이다. 나는 그의 주장을 질문의 초점을 이동하자는 제언으로 이해하고 싶다. 왜냐하면 담론의 생산적 경제에서 지속적으로 누락되고, 비가시화되고 있는 비평의 감정이야말로 ‘예속화된 비평 주체들의 사회적 변용을 표상’으로 탐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평하는-나’의 속출이 현재를 설명할 수 있는 유효한 설명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그것을 단순히 부정적 현상으로 비판하거나 혹은 새로운 저항의 가능성으로 긍정하는 대신, 그 자체로 비평가의 자기 분석의 대상이자 방법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최가은이 버틀러의 이론적 시각을 토대로 그 전환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이유 역시 그러한 자기 분석적 글쓰기가 발휘할 수 있는 수행적 정치성을 작동시키는 방법, 그것을 위한 자산으로서의 역사적 경험이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비평하는-나’뿐만 아니라 이 모든 비/자기 이론적인 글쓰기들을 통해 ‘사회적 삶에 강력하게 노출된 정신적 삶’을 분석할 수 있는 자산이 말이다.”(322쪽)
비판적 대화의 이면
감정에 대한 고찰은 비판적 대화 이면에 관한 일반적 기분 묘사에 불과할까, 확실히 프로페셔널한 담론장에서 감정은 사적이고 주관적인 문제, 자기 스스로가 처리해야 할 지극히 개인적인 기분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담론의 ‘생산’이라는 차원에서는 문제가 조금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감정은 비판이 이뤄지는 데 있어서 (비)가시적으로 참여할 뿐만 아니라, 담론의 경제적 외부 효과externality처럼 지속적으로 발생한다.
나는, 담론의 경제가 활성화되는 가운데 계속해서 생산되는 비평의 감정(혹은 비평가의 감정)이라는 화두가,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활발한 이론적 결투와 비평적 논쟁에 비해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동시대 담론장에서 생산되는 비평의 감정은 단순히 개인이 감당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지극히 사적인 형식으로 감지되지만, 그것은 내면의 형식이라는 자생적 출현의 원리로 충분히 해명할 수 없다. 비평가 내부를 가로지르고 생산하는 분열, 나아가 비평과 비평가 사이의 분리를 가속화시키는 담론의 힘에 의한 비평가의 소외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비판적 대화를 포기해야만 하는 것일까. 폴 벤느가 언급한 ‘조금도 비극적일 것 없는 분열’은 과연 어떻게 가능할까. 이것은 타인의 감정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도덕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결론에 불과할까. 분명 그런 측면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비판적 대화의 국면 속에서 비평의 감정을 인식하고 배려epimeleia하는 일은 별도의 방법과 테크닉을 요구하며, 고도의 배움과 훈련의 과정을 동반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비평가에게 냉정을 주문하고 비판 정신을 촉구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오늘날처럼 비평가로 하여금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산하라고 닦달하는 담론적 장치들의 몰아세움(Ge-Stell, 하이데거)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요즘 내가 내린 잠정적 결론이자 솔직한 심정이다. 각각의 비평가들에 의해 생산되는 비평의 감정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면, 최근 들어 조금씩 고조되어가는 비판적 대화의 분위기가 낳을 수 있는 적대, 분열, 증오, 원한, 의심, 조롱의 정치에 의해 ‘나’라는 주체성이 내가 쓴 글, 생각, 주장, 발화의 위치에 부당하게 종속되는 경험을 반복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마다 비평은 저 멀리 만끽하며, 우리를 향해 조소의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 1) 귀스타브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 김난주 옮김, 문학동네, 2021, 272쪽.
- 2) 안서현, 「대화 장치로서의 문예지-작은 혁신호를 열며」, 『자음과모음』 2023 여름호, 5~6쪽.
- 3) 유사하지만 조금은 다른 문제의식 위에서, 내가 편집진으로 참여하고 있는 『문학과사회 하이픈』에서도 작년 가을과 겨울 ‘비평-대화’라는 주제로 연속 기획을 마련했었다.
- 4) 폴 벤느, 『푸코-그의 사유, 그의 인격』, 이상길 옮김, 리시올, 2023, 12쪽.
- 5) 이은지, 「비평의 오물-물밑을 휘저으며」,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 겨울호, 이하 인용 출처는 괄호 안에 표기.
- 6) 최가은, 「비평의 조건-예속과 애착」 『자음과모음』 2023 가을호, 이하 인용 출처는 괄호 안에 표기.
- 7) 이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최가은 선생님은 구체적으로 지난 호에 실렸던 소영현의 글 「비평을 찾아서-'K-'시대의 비평」과 김미정의 글 「비평, 플러스알파-얽힘을 발견하고 사유하는 관점에 대해」에 대한 응답에 해당하는 비평문을 써주셨으면 합니다."(3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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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넘어 ‘우리’가 된 풍경과 마음 ―길상호 시집, 『왔다갔다 두 개의』, 시인의 일요일, 2024. ―박경희 시집, 『미나리아재비』, 창비, 2024. 박형준 로베르트 발저는 셋방을 전전하면서도 작가로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다락방에서 살기 원했다. 나에게 그의 책 『산책자』(한겨레출판, 2017)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빌케 부인」의 한 단락이다. 셋방살이를 하던 집주인 할머니가 죽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오후에 주인공이 그녀의 텅 빈 방에 들어가 주인을 잃고 용도가 사라진 옷가지와 소지품을 바라보는 장면이었다. 이제 이 세상을 떠난, 하지만 자신에게 조금은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 집 주인 할머니가 텅 빈 방에 남기고 간 옷가지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생의 이면에 어른거리는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깊은 애수가 느껴졌다. 발저는 이 작품에서 한 번이라도 가난과 고독을 경험한 사람은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타인의 가난과 고독을 더 잘 이해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의 불행이나 고통, 그리고 타인의 무력함과 죽음을 조금도 덜어 주지 못하지만 최소한 타인을 이해하는 법이라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번에 읽은 두 권의 시집인 길상호의 『왔다갔다 두 개의』(시인의 일요일, 2024)와 박경희의 『미나리아재비』(창비, 2024)에서 자신과 타자가 체험을 통해 서로 응시하고 격려하는 장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비록 그 만남이 상처나 누추함에서 완벽하게 벗어나게 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그 만남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며 내가 아닌 우리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의 세계는 규율과 계획에 의해 설계된 대도시와는 멀리 거리를 두고 있다. 이들은 그것들에 의해 부서지고 상처 입은 시간들을 끌어모아 과거를 향해 아득한 시선을 던지고 있으며, 그 속에 삶의 절규가 살고 있음을 우리에게 각인시킨다. 길상호의 시집이 은둔자의 삶과 그 안의 고독의 심연을 빼어난 서정으로 보여 주고 있다면, 박경희의 시집은 ‘나’를 지운 자리에 ‘우리’를 들어앉히며 버려지고 상처 입은 과거가 사라진 것도 그 자체의 형상을 잃은 것도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의 감응으로 전해 준다. 우리는 이들의 시로부터 대도시에서 외면당하고 추방된 사물들이 간직한 최초의 움직임을 다시 만날 수 있으며, 그 사물들과 어우러진 장면과 추억들이 경이로운 생물과 마찬가지로 살아 움직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풍경과 마음의 혼융―길상호 시집 『왔다갔다 두 개의』 길상호 시의 특징 중 하나는 시에 나타난 풍경 묘사가 곧 시적 화자의 마음의 상태라는 점이다. 그는 언어의 연금술사처럼 풍경이 자기 존재가 되고 그 풍경 속에서 다시 자신의 존재가 무한하게 흩어지거나 확대되는 지점을 지극히 섬세한 감각으로 보여 준다. 난해하거나 복잡하지 않은 나직나직한 이미지의 단순성과 리듬으로 자신의 심정을 풍경화하는 그의 시는 주체와 타자가 분리되지 않는 말의 오묘한 상태에 닿아 있다. 겨울잠이 풀리고 강변의 진흙은 아가리를 벌린다 물안개가 만든 꿈속을 오래 어슬렁거리느라 진흙은 배가 고프다 진흙의 아가리에 침이 고이고 검고 부드러운 입술엔 어떤 밤이 뜯어 먹다 남긴 고라니의 앞다리 두 개가 물려 있다 두툼한 뒷다리 두 개는 더 먼 곳까지 가서야 피의 걸음을 놓았다 진흙은 이빨 없이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음미하면서 목마르게 끝난 짐승의 죽음을 소화시킨다 털과 가죽과 뼈와 발굽 고라니를 물가로 이끌던 아픈 육체 진흙의 아가리 속으로 두려웠던 시간이 긴 발자국 유서와 함께 서서히 사라진다 ―「진흙이 입을 벌릴 때」 전문 이 시의 화자는 언 강물이 풀린 초봄에 강변에 나와 있다. 화자는 얼었던 강이 녹으며 진흙으로 변해 버린 강변을 거닐며 주변의 풍경을 바라본다. 시에 물안개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직 완연한 봄이 온 것 같지 않다.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그래서 두 계절이 함께 있는 환절기가 이 시의 배경일 듯싶다. 이런 때일수록 남아 있는 추위가 더 춥게 느껴지면서도 또 한편으로 봄을 고대하는 심리 역시 상승하기 마련이다. 화자는 그 양가감정 속에서 강변에서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 물이 풀리며 강변은 녹기 시작한 진흙 덩이로 어수선한데 화자는 물안개가 걷히자 진흙 속에 고라니 사체가 빠져 있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진흙에 점점이 찍힌 고라니 발자국도 눈에 띈다. 아직 겨울의 냉기가 남아 있는데도 진흙은 볕에 풀리며 아주 천천히 고라니 사체와 발자국을 삼킨다. 이 시는 아마 위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을까 추측된다. 그러나 시 어디에도 ‘나’는 보이지 않는다. 황량한 강변의 초봄 아침에 진흙이 고라니의 사체를 삼키는 풍경 묘사를 감정의 동요 없이 객관적 시 쓰기로 전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 시를 읽으면 시인의 마음이 보인다. 안타깝고 슬픈 장면인데 이상하게 평안하고,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내적으로 힘찬 생명력이 느껴진다. 시인은 겨울에 다른 짐승들에게 사냥당할 위기에 처한 고라니가 본능적으로 물가까지 도망치다가 강물 위에 얼어붙은 채로 죽어 있던 사건과 봄이 되어 진흙이 풀리면서 고라니가 그 속으로 빠져드는 장면을 담담하게 전달한다. 그러나 이 시를 끌고 가는 주체가 진흙만은 아니다. 이 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 읽을 수 있다. 첫 번째는 겨울을 견딘 진흙이 녹아 가는 과정을 “물안개가 만든 꿈속을 오래 어슬렁거리”다가 “아가리”를 벌리는 것으로 시작하여 육식성이 부여된 진흙이 “검고 부드러운 입술”로 “어떤 밤”에 사냥당하여 갈가리 찢긴 채 죽은 고라니의 앞다리 두 개를 삼키는 장면까지이다. 여기까지는 진흙이 시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고라니의 앞다리 두 개가 물려 있다”의 뒤에 다른 연으로 분리된 “두툼한 뒷다리 두 개는 더 먼 곳까지 가서야/ 피의 걸음을 놓았다”에서 주체가 고라니로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냥을 당해 갈가리 찢긴 고라니는 앞다리 두 개를 진흙 앞에 걸치고 있지만, 마치 강 저편으로 던져진 듯이 두툼한 뒷다리 두 개는 강물 위에 “피의 걸음”을 흩뿌려 놓고 있다. 진흙은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끝난 생명을 아주 천천히 음미하면서 소화한다. 그런데도 강물에 얼어붙은 채로 털과 가죽과 뼈와 발굽으로 형해화된 고라니는 자신이 언 강가에 피와 함께 남긴 발자국을 유서처럼 간직한 채 왕성하게 입을 벌리는 봄기운이 맹렬하게 싹트는 진흙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결혼식에 갈 땐 로션을 장례식엔 스킨을 조금 발라주세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함께 행진하는 날엔요? 그런 날은 좀체 없다니까요, 아, 저에겐 그런 날뿐인걸요 ―「로션과 스킨」 부분 대야에 비친 자신을 사랑하세요, 다른 얼굴이 보여도 그냥 주워 사용하세요, 미끄러운 날은 금방 지나갈 거예요. ―「이거 좋은 거예요」 부분 이정현의 시집 해설에 따르면 길상호의 이번 시집은 심한 병증 가운데 씌어졌다고 한다. “피 한 방울로 다 알 수 있어요”(「혈당검사 수첩」)라는 시행이 말해 주듯, 길상호 시인은 면역 체계가 흐트러지는 원인 불명의 병에 걸리면서 매일 약을 먹어야 하고, 책을 읽을 수도 없고, 하루에도 세 번 혈당 수치를 재야 한다고 한다. 이 시집에는 그러한 임상 기록을 담은 시편들, 함께 살던 여러 마리의 고양이를 떠나보낸 사연과 “남은 고양이 꽁트”(「시인의 말」) 등 자신의 병적 기록과 함께 주변 사람들과 반려동물에 대한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용한 「로션과 스킨」은 로션과 스킨이라는 메타포를 이용해 삶과 죽음이라는 특징을 결혼식과 장례식으로 드러내면서 죽음과 삶이 함께 행진한다는, 그 양자를 넘나들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한다. 또 「이거 좋은 거예요」에서는 아픈 삼촌을 위해 비누를 사 온 조카의 말을 통해 “대야에 비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이 무엇인지를 간접적이지만 나직하게 전해 준다. 아마도 시인은 조카가 선물한 비누로 아침마다 얼굴을 씻으며 대야의 물속에서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자신의 모습과 조우할 수 있으리라. 시집의 마지막 시편에 나타나듯 절망이 우리를 ‘빗에 사이사이 끼는 때’처럼, “저 수심 깊은 대야”에 던져 버리려고 하더라도 삶의 책은 “페이지가 차르륵 젖어 더는 읽을 수 없더라도, 포스트잇으로 표시를 해 두었으니”(「독서는 금지」) 언제든 다시 이어 갈 수가 있다. 하여, 나는 시인이 「진흙이 입을 벌릴 때」에서 진흙 속으로 사라진 고라니의 “긴 발자국 유서”를 절망을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로 읽으며, 당신은 멀리 있지만 “우리라는 말이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이도 저도 아닌 것들」)라는 따뜻한 말과 시로 다시 뜨겁게 이어져 가고 있다고 믿는다. 시로 쓴 마을사―박경희의 시집 『미나리아재비』 박경희의 『미나리아재비』를 즐겁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읽었다. 아니, 반대로 안타까웠지만 즐겁게 읽었다고 해야 되리라. 박경희의 시집에는 토속어나 순우리말이 시 중간중간에 별처럼 박혀 있어 시를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예를 들어 한 행으로 된 시 “사그랑이 된 바구니는 굴러다니고 기스락물이 깍짓동에 떨어진다”(「그렇게라도 짖어보는 것이다」)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삭아 버린 바구니가 굴러다니고 낙숫물이 참깨나 콩대를 묶은 깍짓동에 떨어진다는 뜻일 게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시를 표준화하고 의미화시키면 원래의 시행이 가지고 있던 살아 움직이는 말맛이 사라져 버린다. 이 시집을 읽으며 모르는 토속어가 나오더라도 굳이 사전을 찾아가며 읽을 필요가 없다. 이 시집의 가장 큰 장점은 사람들 속에서 살아 있는 말들과 이야기이며, 그리고 그 말과 이야기가 어우러져 이뤄 낸 한 마을의 아득하고 신화적인 풍경이 살냄새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데에 있다. 박경희 시인은 우리가 모르는 말들, 사라져 가는 풍경들을 붙잡고 수집해 그것을 사유하고 이야기로 만들며 절대 잊히지 않는 살아 있는 이미지의 마을사로 창조한다. 책 속에 박제되어 시를 위한 시에 그치고 마는 이미지가 아닌, 책 속에서 걸어 나와 이미지가 삶이 되고 이야기로 번져 가는 진경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때로는 그렇게 태어난 시가 너무나 능청스러워 다음 시에 나오는 할머니처럼 읽는 동안 얼굴이 살짝 붉어지기도 한다. 저승 물길 헤치며 이승으로 돌아오다가 육지 문턱에서 쓰러졌다 부여잡은 가슴에 갈고리달이 박혔는지 뽑히지 않았다 파도가 일 때마다 세상 온갖 별이 눈물로 흥건했다 울컥울컥 올라오는 바닷물을 토하며 새삼 물질하던 당신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옴마, 살았네 살았어 저승 돈 벌어 온다더니 저승 갈 뻔했다고 영감 죽은 지 십 년 만에 남정네와 입 박치기 했다는 말에 얼굴 벌게지던 할머니가 웃으며 병원 차 타고 갔다 바다가 잠시 숨 멈춘 순간이었다 ―「바다, 잠시 숨을 멈추다―구룡포 해녀들의 숨비」 전문 박경희의 이번 시집은 위의 시가 보여 주듯 죽음과 또는 죽음 근처까지 간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해학스럽지만 감칠맛 있게 전해 준다. 슬픈데 웃음이 나오는, 웃음이 나오는데 슬픈 이야기들이 서로 어우러져 어떤 순간에는 손에 땀이 배기도, 농사꾼을 홀대하는 사회에 화가 치밀기도, 그러다가 서로의 마음을 가만가만 짚어 주는 따스함에 슬픔이나 분노가 눈 녹듯이 사라지게 한다. 위 시만 해도 그렇다. 아마, 이 시를 영화로 옮긴다면 할머니 해녀가 저승 돈 벌어 온다고 물질하다가 그만 심장에 이상이 생겨 젊은 구조대원으로부터 인공호흡을 받는 장면에선 그것을 지켜보는 동네 사람처럼 우리들도 숨도 못 쉬고 가슴을 졸였을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가 깨어나자마자 환호성이라도 지를 듯 “옴마, 살았네 살았어” 하면서 “영감 죽은 지 십 년 만에/ 남정네와 입 박치기 했다”고 동네 사람들이 놀리는 장면에선 우리들도 신나서 박수를 쳤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인 바닷속에서 죽었다 살아 나온 할머니가 그만 그 소리에 얼굴이 빨개졌다가 웃으며 병원 차를 타고 가는 모습에서 우리는 비극일 수 있는 사건이 해학으로 바뀌는 살아 있는 입말의 마술적인 힘에 감탄했을 것이다.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는 귀족의 화려한 파티에 참석했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강풍이 몰아쳐서 집이 순식간에 무너져 사람들이 죽게 되자, 대리석이나 돌 더미에 깔려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죽은 자들의 이름을 그들이 앉았던 자리를 기억해 내어 하나하나 호명하며 시를 짓고 시체의 주인을 찾아 주었다고 한다. 그는 파티 풍경을 한 장의 그림으로 기억 속에 간직했던 것이다. 그는 이후 기억의 시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시모니데스에게 시란 ‘이야기하는 그림’이다. 박경희의 이번 시집에서 만나게 되는 것도 이 ‘이야기하는 그림’이다. 그의 시는 위의 시에서처럼 매우 쉬운 말과 친근한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그런 이야기를 한 장의 사진처럼 이미지에 압축해서 빼어난 서정의 구조로 들어앉힌다. 그래서 시의 주어가 ‘나’가 아니라 ‘우리’가 된다. 특히 제2부의 시편들은 “동네 막내 강 씨 아저씨”(「동네 막네」)가 환갑을 넘을 정도로 도회지와 단절된 마을에서 코로나 팬데믹으로 마을 사람들 모두가 ‘마스크’를 써야 하는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보여 준다. “오디에도 역병이 보이지 않는”데 마스크를 써야 하고 매달릴 사람이 전부 다 이승에 없어, “그저 무탈하게 지나가길 바랄 뿐 뭐가 있간 에휴, 참말로 지랄맞은 세상이여”(「워쩌겄어」)라는 마을 노인의 체념과 한탄에서 우리 농촌 현실의 적나라한 실상과 마주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마을은 할아버지가 글을 몰라도 서울로 병 고치러 간 아내 소식이 궁금하여 ‘소 다섯 마리 그림’(「오소」)을 그려 편지로 보내면 그걸 받고 할머니가 소 걱정으로 애가 달아 금세 내려오는 곳이다. 서로 간에 이심전심이 통하는 곳이며, 자신이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할아버지의 능청이 글이나 인터넷보다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곳이다. 마루에 앉아 머윗대 껍질을 벗기면서 저승 갔으면 그쪽 세상에서 잘 살 일이지 이승은 왜 들락거리느냐고 보이지도 않는 분 타박이다 살았을 적에 그리 모질게 마음고생시키더니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이승 문턱을 넘느냐고 사발째 욕을 퍼붓는데 옆에 있던 내가 슬금슬금 비키니 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제집만 들락거렸다. ―「꿈자리」 부분 어머니의 꿈에 아버지가 나타나자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인데도 남편을 타박한다. 살았을 적에도 그렇게 마음고생을 시키더니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이승의 문턱을 넘느냐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슬금슬금 마루에서 비켜나자 마루 밑에선 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제집만 들락거리며 안절부절이다. 죽은 사람조차도 잘못하면 타박을 받고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걱정하는, 자연의 생명과 사람이 한데 이어진 이곳은 현대인들에겐 아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세계일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전설 같기도 하고 신화 속 같기도 한 그 세계가 무너져 가더라도 그 큰 몸집을 지탱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안간힘으로 받쳐 든 벽에 선명하게 찍힌 손자국”(「손자국」) 같은 결기 어린 모습으로 우리들의 이야기를 선명한 그림처럼 들려주고 있다.
수많은 노래는 한 사람의 울음에서 시작되었다 고(故) 신경림 시인을 추모하며 1. 1970년대 민중시와 『농무』의 발견 창비시선 500번을 기념하는 특별시선집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신경림 외 지음, 창비 2024)이 올해 3월 출간되었다. 이 시선집 제목은 신경림의 시 「그 여름」에서 따온 것이다. 한 사람의 울음이 온 마을에 울음을 불러오고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고을에 노래를 몰고 왔다 구름을 몰고 오고 바람과 비를 몰고 왔다 ―「그 여름」(『농무』) 부분 온 거리에 울려 퍼지는 ‘노래’는 ‘한 사람의 울음’과 ‘한 사람의 노래’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노래는 구름과 바람과 비를 몰고 오면서 사람뿐 아니라 천지만물에 가닿았다. ‘울음’과 ‘노래’가 지닌 이러한 확장력을 떠올려볼 때, 신경림의 『농무』(창작과비평사 1975)가 50년을 이어온 창비시선의 출발점이었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1970년대 중반은 『창작과비평』이 시민문학론에서 민족문학론으로의 전환을 모색하면서 민중시의 새로운 모델을 필요로 하던 시기였다. 『농무』의 발문에서 백낙청은 시집 『농무』의 완성을 “민중적 경사”라고 말하며 “그의 많은 작품들은 리얼리스트의 단편소설과도 같은 정확한 묘사와 압축된 사연들을 담고 있는 동시에 민요를 방불케 하는 친숙한 가락을 띠기도”1) 한다고 상찬했다. 1960년대 김수영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던 그가 “민중이 잘 알 수 없는 ‘난해한’ 문학”2)을 경계하며 난해하지도 저속하지도 않은 시의 미덕을 신경림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1974년 『농무』가 제1회 만해문학상 수상작이 된 것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염무웅은 신경림 시의 민중성이 ‘체험적 현실’에서 나왔음에 주목하고, “자기 현실과의 정직하고도 치열한 대결을 통해 위장하거나 은폐되지 않은 민중 자신의 목소리가 긴밀한 시적 형상을 획득”3)했다고 보았다. 신경림은 이처럼 농촌의 현실을 구체적이고 핍진한 언어로 그려낸 시뿐 아니라 「농촌현실과 농민문학」 「문학과 민중」 등의 평론을 발표하며 농민문학론을 개진하기도 했다. 1970, 80년대는 신경림을 비롯해 이성부, 조태일, 김지하, 정희성, 이시영, 김준태, 김남주 등이 민중시의 새로운 방향성을 만들어나간 시기였다. 이러한 흐름의 첫 물꼬를 튼 시집이 바로 신경림의 『농무』였다. 2. 노래와 이야기, 시의 씨줄과 날줄 염무웅의 「무엇이 민중성의 시적 구현을 가능하게 하는가」는 『농무』가 출간된 지 30년 만에 이 시집의 역사적 위치를 한층 넓은 원근법 속에서 읽어낸 글이다. 그는 한국시가 지닌 민중성의 사회사적 근거와 맥락을 밝히면서 신경림 시의 독특한 화법과 시언어의 조직원리를 분석한다. 먼저 「그날」에 대해서는 “고도의 정치적 비판을 함축하고 있으”면서도 시의 화자가 직접 드러나지 않은 채 “순차적으로 카메라 앵글을 돌리는 장면화(場面化)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미장센 구성에 성공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한행을 하나의 율격 단위로 할 때 3음보의 율격을 지닌 「그날」과 4음보의 율격을 지닌 「경칩」이 율격이나 분위기가 사뭇 다르지만, “엄밀하게 계산되고 통제되는 구심적 조직”4)을 지녔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러한 분석은 농촌이라는 소재와 민중성이라는 주제, 인물의 정동을 중심으로 『농무』를 이해해온 기존의 관점을 시의 구성원리나 재현방식 등으로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유종호는 「서사 충동의 서정적 탐구」에서 신경림 단시의 특징을 “서정적인 주조에 서경(敍景)이 추가되고 그 속에 서사(敍事)적 충동을 내장하고 있”5)다고 설명했다. 그는 신경림의 시적 성취가 서정성과 서사성의 균형에서 비롯되었다며 선행 시편들의 전통 속에서 『농무』의 문학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농무』의 시들이 생활의 실감과 시어의 평면성으로 1950년대 모더니즘 계열 시편의 난해성을 산뜻하게 극복했을 뿐 아니라, 가난한 삶에 대한 결곡한 정감과 간결한 서경을 통해 추상적 구호와 격문에 가까운 현실주의 생활 시편의 전통 역시 넘어섰다는 것이다. 신경림의 시에서는 서정과 서사, 노래와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이며 절묘한 균형을 이룬다. 특히 신경림의 전기시에서 ‘이야기’의 산문성을 견제해내는 ‘노래’의 형식이란 주로 ‘민요’의 계승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민요적 정서’와 ‘정형(定型)에의 의지’가 긍정적 효과만 가져왔던 것은 아니다. 염무웅의 지적처럼 “민요는 김소월에게 있어 그러하듯이 신경림의 문학에 있어서도 창조성의 발현을 구속하는 억압이자 모국어가 지닌 가능성의 최대치로 인도하는 통로인 양날의 칼”6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음수율과 음보율, 행의 배치 등이 규칙적으로 분절된 시보다는 규칙성을 일부 허물거나 시행을 어긋나게 배치한 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헐거나. 술에라도 취해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다오 우리를 파묻어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편지라도 띄워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볼거나. ―「겨울밤」(『농무』) 전문 『농무』 첫머리에 있는 이 시는 ‘겨울밤’과 ‘새하얀 눈’을 대비하면서 농민들의 체념과 울분을 실감있게 전달하고 있다. ‘어떡헐거나’ ‘취해볼거나’ ‘맡아볼거나’ ‘쳐볼거나’ ‘먹여볼거나’ 등 반복되는 종결어미는 각운의 역할을 대신하며 ‘우리’의 정서를 리드미컬하게 변주해낸다. 시인은 이러한 종결어미의 반복으로 읽기의 유창성을 만들어내는 한편, 중간중간에 시행을 일반적인 호흡과 어긋나게 배치함으로써 의미를 낯설게 하거나 정서적 긴장감을 조성한다. 3행과 4행, 5행과 6행, 9행과 10행, 11행과 12행, 19행과 20행, 20행과 21행, 24행과 25행 사이에 나타난 주어부와 술어부 또는 수식어와 피수식어의 행갈이가 그런 예들이다. 마침표의 잦은 사용이나 단어의 도치 등도 행과 행 사이에 단속적 흐름을 만들어낸다. 단어나 시행을 엇갈리게 배치하는 앙장브망(enjambement) 기법은 「겨울밤」 외에도 「시골 큰집」 「원격지」 「씨름」 「산1번지」 「이 두 개의 눈은」 「1950년의 총살」 「장마 뒤」 「산읍일지」 「산읍기행」 「갈대」 「묘비」 「심야」 「유아」 「사화산·그 산정에서」 「추방」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누군가」 등 상당히 많은 시들에 나타난다. 이것은 김수영의 후기시에서 연의 길이를 균질하게 하는 대신 앙장브망을 통해 시행 사이의 불규칙성을 강화하던 것7)과 유사한 방식이다. 신경림 역시 행과 연을 단위로 리듬의 규칙성과 불규칙성을 탄력적으로 조율하고 변주함으로써 정서나 의미를 섬세하게 표현해낸다. 이러한 모더니스트적 면모는 신경림을 단순한 민중시인, 민요시인으로 이해하는 것을 재고하게 한다. 1973년에 이루어진 한 좌담에서 백낙청은 신경림의 시가 서사성과 지적 콘트롤이 강하고 현대적 언어감각을 지녔다는 점에서 신동엽보다는 김수영과 친연성이 강하다고 말한다.8) 시인 자신도 나중에에는 “민요와의 접목은 내 시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고 “내가 민요에 집착한 80년대 전 기간이 내게는 시 쓰기가 가장 어렵고 지루한 시절”9)이었다고 회고했다. 신경림 시에서 민요 가락이 집중적으로 나타난 것은 『새재』(창작과비평사 1979)와 『달 넘세』(창작과비평사 1985), 그리고 장시집 『남한강』(창작과비평사 1987)에서다. 『민요 기행』 1, 2권(한길사 1985, 1989)이 나온 것도 이 세 시집이 출간된 시기와 거의 겹친다. 이 무렵 신경림은 민요를 찾아 채록하면서 전통적 민예 양식의 시적 가능성을 탐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노력이 집대성된 『남한강』에서 시인은 서정적 단시의 서사성을 한편의 장편서사시로 확장하면서 민요의 리듬을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신경림이 민요적 정서나 형식에 대한 중압감에서 자유로워진 것은 기행시집 『길』(창작과비평사 1990)을 펴낸 이후였다. 『길』까지는 여전히 「정선아리랑」 「산유화가」 등 민요를 제목으로 삼은 시가 보이고, 민요 기행에서 만난 노래꾼을 포함해 다양한 인물과 장소를 담고 있다. 그러나 민요적 후렴구의 기계적 반복이나 정형화된 리듬의 강박으로부터는 한결 자유로워진 듯하다. 인물서사가 주를 이루고 있긴 하지만, 『길』의 거의 모든 시에 붙어 있는 부제들은 다양한 장소성을 보여준다. 『신경림 시전집』 1권은 『길』로 끝나고 2권은 『쓰러진 자의 꿈』(창작과비평사 1993)으로 시작된다. 이 두 시집의 제목처럼 신경림의 후기시는 ‘길’ 위에서, ‘쓰러진 자의 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3. 길 위에서 부르는 노래와 시의 장소성 2000년대 이후 신경림에 관한 연구에서 가장 두드러진 주제는 ‘장소성’이다.10) 『농무』의 장소성이 농촌, 장터, 공사장, 폐광 등을 중심으로 한다면, 시인이 서울로 이주한 뒤 펴낸 시집들에서는 산동네, 수몰지역, 휴전선 등의 장소성이 두드러진다. 『쓰러진 자의 꿈』 이후로는 특정 장소를 부제로 밝혀둔 기행 시편이 많고, 부제가 없더라도 여행 중에 만난 풍경이나 사람의 비중이 커진다.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신경림의 전기시가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향(離鄕)’과 공동체의 상실을 다루고 있다면, 후기시는 지방 또는 해외로의 ‘기행(紀행)’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늘 떠나면서 살았다, 집을 떠나고 마을을 떠나면서. 늘 잊으면서 살았다, 싸리꽃 하얀 언덕을 잊고 느티나무에 소복하던 별들을 잊으면서. 늘 찾으면서 살았다, 낯선 것에 신명을 내고 처음 보는 것에서 힘을 얻으면서, 진흙길 가시밭길 마구 밟으면서. ―「나의 신발이」(『낙타』) 부분 신경림의 기행시는 단순한 유랑이나 관광의 기록과는 거리가 멀다. 그에게 떠남이란 익숙한 것을 잊고 낯선 것을 찾아나서는 ‘탐구의 행위’다. 이와 동시에 상류를 향해 가는 연어처럼 “떠난 것을 그리워하고 잊은 것을 그리워하면서”(「나의 신발이」) 본원적인 시간과 장소를 되찾아 나서는 ‘회귀의 여정’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신경림의 기행시는 미셸 푸꼬(Michel Foucault)가 말한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를 지향한다. 푸꼬는 현실화된 유토피아적 장소를 ‘헤테로토피아’라고 불렀다. 없는(u) 장소(topia)라는 뜻의 ‘유토피아’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헤테로토피아를 제시한 것이다. 유토피아가 실재하지는 않지만 균질한 언어와 질서를 지닌 상상적 공간이라면, 반대의(hetero) 장소(topia)라는 뜻의 헤테로토피아는 모호하고 혼란스럽고 비균질적이지만 실재하는 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헤테로토피아는 일상의 배치와는 다른 ‘바깥의 공간’이자 현실을 전복하는 ‘반(反)공간’이다.11) 엄경희는 “산업화로 인한 농촌붕괴를 ‘경관훼손’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고 “고향의 장소성에 내재된 헤테로토피아적 전망을 아이들의 장소점유방식을 통해”12) 분석했다. 『농무』부터 『쓰러진 자의 꿈』까지는 기행의 장소가 주로 국내에 한정되었다면,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창작과비평사 1998)에서는 중국, 베트남, 일본 등의 기행 시편들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반추한다. 『뿔』(창작과비평사 2002)『낙타』 『사진관집 이층』(창비 2014)에서는 그의 발길이 아시아뿐 아니라 몽골, 네팔, 튀르키예를 넘어 프랑스, 미국, 콜롬비아 등 세계 곳곳으로 향한다. 연보를 살펴보니, 신경림은 1993년(58세)에야 출국금지가 풀려 해외에 나갈 수 있게 되었고, 그의 시집이 프랑스어판, 영어판, 독일어판 등으로 번역 출간되면서 현지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경을 넘어 세계화의 현장을 폭넓게 목도하면서도 그는 줄곧 한국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떠올린다. 첫날은 날뛰는 미국 사람들이 무서워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연 지 얼마 안된다는 중동인이 경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양고기로 점심을 먹고, 둘째날은 자동차 산업의 몰락으로 유령도시가 된 디트로이트 살리기 운동을 펼치는 키가 큰 젊은 흑인을 만나 하이델베르크 프로젝트를 듣고, (…) 넷째날은 한국 절을 찾아가 부처님 앞에 예불을 드리고, 선거에서 대승한 부시의 오만한 얼굴을 텔레비전에서 보면서, 침방울을 튀기며 이라크 공격을 반대하는 한국서 군복무를 마쳤다는 젊은이와 한나절을 동행하면서, 장갑차에 깔려죽은 어린 우리나라 여중생 얘기를 하고. ―「미국기행」(『낙타』) 부분 미국 미시건을 여행 중인 화자는 첫째날부터 넷째날까지의 여정을 언급하면서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들려준다. 특히 둘째날 만난 “디트로이트 살리기 운동을 펼치는/키가 큰 젊은 흑인”과 넷째날 만난 “이라크 공격을 반대하는/한국서 군복무를 마쳤다는 젊은이”는 화자와 경계인으로서의 위치를 공유하는 인물들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과는 “장갑차에 깔려죽은 어린/우리나라 여중생”에 대해 얘기를 나눌 수 있다. 부시의 압도적 승리와 이라크전쟁 등 세계사의 착잡한 위기상황 또한 시인의 여정에 기입되어 있다. 이때 화자는 세계사의 중심도 주변도 아닌 ‘반(半)주변인’13)의 위치에 서 있다. 신경림의 기행시에서 화자의 시선이 주로 머무는 곳은 자본주의와 세계화가 만들어낸 균질화된 공간이나 화려한 장관이 아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학살당한 사람들의 수천수만켤레 신발들이 쌓여 웅성웅성 떠들고 있”(「신발들」, 『사진관집 이층』)는 소리를 듣거나, 캄보디아에서 “함지박 배를 저어 관광선을 따라오며 원 달러 하고 내미는 소년의 손”(「위대한 꿈」, 『사진관집 이층』)이 시인의 눈과 마음에 더 깊이 들어와 박힌다. 베트남 전쟁박물관에서 “제국주의자들이 버리고 도망간/흉측한 장갑차”를 보며 “호주머니 속에서/일달러짜리 지폐를 거머쥔/내 손”(「전쟁박물관」,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이나, 코카 비치에서 휴양객들을 실어 나르고 “달러를 받아쥐는/씨클로꾼들의/땀에 절은 야윈 손”(「코카 비치」,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이나 무력하게 젖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런가 하면 콜롬비아의 도시 메데진에서 산비탈에 달라붙은 움막집들과 케이블카로 그곳을 오르내리는 초췌한 사람들을 보며 화자가 떠올리는 것은 “물지게를 지고 비탈을 올라오던” “아내의 맨발”(「누군가 보고 있었을까, 아내의 맨발을」, 『낙타』)이다. 이처럼 반주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로컬과 주변부의 삶이야말로 신경림이 『농무』 이후로 일관되게 함께해온 가난하고 소외된 존재들의 것이다. 시에 포착된 주변부와 주변인이 대상화되지 않고 자연스러운 공감을 주는 것은 시인이 자신을 그 존재들의 일부로 또는 혈육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먼 나라의 이국적 풍물 앞에서도 한국의 아픈 현실을 떠올리는 시인은 떠남으로써 돌아오고, 잊으려 함으로써 더 생생한 기억에 도달하는 역설을 경험하게 된다. 4. 역사공동체에서 생태공동체로 후기시의 출발점인 『쓰러진 자의 꿈』은 1990년대 동구권의 몰락 이후 변화된 세계에 대한 시인의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한두연으로 된 단시가 많고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역사공동체에서 생명공동체로의 확장이 이 시집부터 시작되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신경림 시에 나타난 생태주의적 인식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편이다. 그런 점에서 ‘평등적 관계성’ ‘자발적 생성과 상호부조’ ‘자유 자연의 지향’ 등을 키워드로 신경림의 생태주의적 사유를 해명한 김동명의 논문은 주목할 만하다.14) 다만, 미국의 사회이론가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의 사회생태주의적 관점이나 아나키즘 등을 이론적 논거로 삼아 인간의 윤리적 역할을 강조하다보니 인간중심주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듯하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길」(『쓰러진 자의 꿈』) 부분 『쓰러진 자의 꿈』의 첫머리에 실린 「길」에서 시인은 사회 변혁의 과정 속에 내재한 인간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다. 이 시의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이라는 대목에서 그의 시선이 사회나 역사 못지않게 인간 내면을 향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내적 성찰의 매개가 되는 것은 주로 자연물이다. 이 시집의 시 제목들만 일별해 보아도 냇물, 장미, 비, 파도, 싹, 겨울숲, 홍수, 아카시아, 임진강, 진달래, 진드기, 소백산의 양떼, 초승달, 난장이패랭이꽃, 오랑캐꽃, 별, 가을비, 새벽눈, 홰나무 등 다양한 자연물들로 되어 있다. 이제 자연은 인간의 욕망과 폭력을 되비추는 거울이자, 인간의 도움 없이도 생태적 질서와 공동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생명의 주체로 등장한다. 여든까지 살다 죽은 팔자 험한 요령잡이가 묻혀 있다 북도가 고향인 어린 인민군 간호군관이 누워 있고 다리 하나를 잃은 소년병이 누워 있다 등너머 장터에 물거리를 대던 나무꾼이 묻혀 있고 그의 말더듬던 처를 꼬여 새벽차를 탄 등짐장수가 묻혀 있다 청년단장이 누워 있고 그 손에 죽은 말강구가 묻혀 있다 생전에는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이들도 있다 부드득 이를 갈던 철천지원수였던 이들도 있다 지금은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묵뫼 위에 쑥부쟁이 비비추 수리취 말나리를 키우지만 철 따라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으면서 뜸부기 찌르레기 박새 후투새를 불러 모으고 함께 숲을 만들고 산을 만들고 세상을 만들면서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묵뫼」(『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전문 「묵뫼」에서도 인간의 죽음은 역사적 비극을 환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묵뫼가 피워낸 쑥부쟁이, 비비추, 수리취, 말나리, 그리고 꽃과 열매를 찾아 날아든 뜸부기, 찌르레기, 박새, 후투티 이 모두가 ‘생태공동체’의 구성원들이다. 이처럼 자연과 인간을 유기적 관계성 속에서 바라보게 된 것은 『농무』에 나타난 역사공동체가 생태공동체의 발견으로 이어진 결과다. 이러한 변화는 신경림뿐 아니라 1990년대 이후 한국시 전체에서 관찰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1980년대가 노동시·농민시·교육시 등 계층과 이념의 동질성을 바탕으로 한 집단적 발화가 활발하게 제기된 시대였다면, 1990년대는 집단에서 개인으로, 이념에서 감각으로 중심이 옮겨오면서 사회적 이상이나 공동체적 기반은 약화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단순히 공동체의 축소나 단절이라기보다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모색의 계기”15)였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뿔』 『낙타』 『사진관집 이층』 등 후기로 갈수록 환경오염의 폐해를 언급하며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는 시들이나 생태공동체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시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봄이 되어도 꽃이 붉지를 않고 비를 맞고도 풀이 싱싱하지를 않다. 햇살에 빛나던 바위는 누런 때로 덮이고 우리들 어린 꿈으로 아롱졌던 길은 힘겹게 고개에 걸려 처져 있다. 썩은 실개천에서 그래도 아이들은 등 굽은 고기를 건져올리고 늙은이들은 소줏집에 모여 기침과 함께 농약으로 얼룩진 상추에 병든 돼지고기를 싸고 있다. (…) 우리는 안다, 썩어가고 있는 곳이 내 나라만이 아니라는 것을. 죽어가고 있는 것이 내 땅만이 아니라는 것을. 저 시베리아의 얼음벌판에 내리는 눈에도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산이 섞여 있고 아프리카 깊은 원시림 외진 강에서도 눈이 하나뿐인 고기가 잡힌다는 것을. 미시시피 강가의 한 마을에서는 목뼈가 없는 아기가 줄이어 태어나고 외국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옛날엔 천국이 따로 없다던 남태평양의 섬에서도 에이즈와 암으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부분 “봄이 되어도 꽃이 붉지를 않고/비를 맞고도 풀이 싱싱하지를 않다”라는 도입부는 자연의 생기나 아름다움이 예전 같지 않고 순환적 질서 또한 깨졌음을 의미한다. 이어지는 시행에서도 “썩은 실개천” “등 굽은 고기” “기침” “농약으로 얼룩진 상추” “병든 돼지고기” “화약냄새” “가스냄새” 등 생활 깊숙이 배어든 환경오염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안다”로 시작하는 4연에 이르면, 썩어가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 내 땅만이 아니라 “시베리아의 얼음벌판에 내리는 눈” “아프리카 깊은 원시림 외진 강” “미시시피 강가의 한 마을” “남태평양의 섬” 등 세계의 극지까지 미치고 있음을 화자는 환기한다. 뒤이어서 지구를 언제 “잿더미로 만들지 모를 핵”의 위험을 “어리석은 불장난”에 비유하며 비판하기도 한다. 환경오염이나 기후위기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지구적 파국을 예감하면서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이 지구는 죽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땅 내 나라, 아니 온 세계가 이제 단숨에 흔적도 없이 날아가버릴 마침내 그 벼랑에까지 와 서 있다.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부분 5. 다시, 떠도는 자의 노래가 되어 들머리에서 인용한 「그 여름」은 “한 사람의 죽음이/온 나라에 죽음을 불러왔지만”이라는 구절로 끝난다. 이 역접의 마지막 문장은 완료되지 않았기에 다시 첫머리의 “한 사람의 울음”으로 연결되며 삶과 죽음의 순환 앞에 우리를 데려다놓는다. 지난여름 우리는 ‘신경림’이라는 “한 사람의 죽음”을 겪었다. 2024년 5월 22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시인의 빈소에는 수많은 추모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문학적 진영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시의 아버지’를 잃은 듯 애도했다. 추모사를 읽는 이들은 그가 한국시단의 거목이었지만 권위의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겸손함과 솔직함으로 누구나 평등하게 대해주었다고 입을 모았다. 그리고 평생 힘없고 가난한 이들의 편에서 소박한 생활감정을 노래하면서도 새로운 세계에 대한 탐구와 미학적 긴장을 놓치지 않았던 시인이었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래도 쓰러지고 깨지는 것들 속에 서 있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차피 시는 괴롭고 슬픈 자들, 쓰러지고 짓밟히는 것들의 동무일진대 이것이 크게 억울할 것은 없다. 최근 나는 시는 궁극적으로 자기탐구요 시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많이 하지만, 쓰러지는 자들, 짓밟히는 것들의 상처와 아픔을 어루만지고 흩어지는 것들, 깨어지는 것들을 다독거리는 일, 이 또한 내 시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16) 『쓰러진 자의 꿈』 후기를 읽어보면, 신경림의 시에 짓밟히고 고통받는 존재들의 울음소리가 왜 그토록 끊이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신경림 시인은 평생을 ‘우는 자’ ‘떠도는 자’로서 살았다. 그의 울음과 발길은 수많은 노래를 낳았고, 온 마을과 온 거리에 다른 노래들을 불러왔다. 신경림은 70년에 가까운 시력(詩歷)으로 한국 현대시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 곡진한 노래의 굽이와 갈피를 제한된 지면에서 충분히 다룰 수는 없지만, 길 위에 남아 있는 무수한 시의 발자국들을 떠올려본다. 그것은 낯설고 새로운 것을 찾아나선 자가 발견한 기록이자, 세상 저편에 놓고 온 무언가를 향한 그리움의 노래였다. 시인은 자신의 예언처럼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떠도는 자의 노래」, 『뿔』) 모르겠다. 애통하게도 그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신경림의 시와 정신을 기억하는 한 우리는 그가 사랑한 장소들, 좁은 골목이나 저잣거리, 쓸쓸한 나룻가에서 그의 노랫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시인은 ‘떠도는 자의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이기에.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떠도는 자의 노래」 전문1) 백낙청 「발문」, 신경림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114~15면.2) 백낙청 「문학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창작과비평』 1973년 여름호, 456면.3) 염무웅 「민중의 삶, 민족의 노래」, 구중서·백낙청·염무웅 엮음 『신경림 문학의 세계』, 창작과비평사 1995, 72면.4) 염무웅 해설 「무엇이 민중성의 시적 구현을 가능하게 하는가」, 『신경림 시전집』 1권, 창비 2004, 423~24, 426면.5) 유종호 「서사 충동의 서정적 탐구」, 『신경림 문학의 세계』, 57면.6) 염무웅, 앞의 글 428면.7) 김수영의 전기시와 후기시에 나타난 리듬구조의 변화에 대해서는 졸고 「김수영 시의 리듬구조에 나타난 행과 연의 문제」, 『현대문학의 연구』 제37호, 2009 참조.8) 김우창·김종길·백낙청 좌담 「시집 『농무』의 세계와 한국시의 방향」, 『백낙청 회화록』 1권, 창비 2007, 74~75면.9) 신경림 산문 「나는 왜 시를 쓰는가」, 『낙타』, 창비 2008, 125면.10) 신경림 시의 장소성에 대한 연구로는 송지선 「신경림의 『농무』에 나타난 장소 연구」, 『국어문학』 제51집, 2011; 강정구·김종회 「문학지리학으로 읽어본 1980년대 신경림 시의 장소」, 『어문학』 제117집, 2012; 박순희·민병욱 「신경림 시의 장소 연구」, 『배달말』 제54호, 2014; 송지선 「신경림 시에 나타난 장소 재현의 로컬리티 연구」,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64집, 2014; 고재봉 「신경림의 「농무」 계열 시에 나타난 장소성과 축제의 의미」, 『문학치료연구』 제49집, 2018; 조효주 「신경림 시의 장소 상실과 현실인식 연구」, 『한민족어문학』 제87호, 2020; 조효주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노래』에 나타나는 장소와 장소상실 연구」, 『현대문학이론연구』 제76집, 2019; 김미라 「산업화 시대의 이주와 새로운 거주 장소로서의 도시」, 『한국근대문학연구』 제25권 제1호, 2024 등이 있다.11) 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이상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 참조.12) 엄경희 「장소 점유와 헤테로토피아: 신경림 시의 경우」, 『현대시와 헤테로토피아』, 보고사 2022, 166면.13) 송지선 「신경림 시에 나타난 로컬의 혼종성과 탈중심성 연구」,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72집, 2016, 251면 참조.14) 김동명 「신경림 시에 나타난 사회생태주의의 특성 연구」, 『동북아 문화연구』 제50집, 2017.15) 졸저 「현대시와 공동체」, 『문명의 바깥으로』, 창비 2023, 275면.16) 신경림 ‘시집 뒤에’, 『쓰러진 자의 꿈』, 105면.
우리는 거짓말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면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안 그래요?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됨으로써 말이죠. 무성 영화 시대의 영화감독들은 소리를 두려워했고 또 색을 두려워했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1) 1. 휩쓸리는 시간성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모두가 조금씩은 우울증과 ADHD 환자가 되어가는 중이다. 코로나가 끝나가는 엔데믹 시기부터 서점가의 주요한 베스트셀러가 되며 여러 곳에서 호출되던 책이 애나 램키의 『도파미네이션』과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두 책은 공통적으로 신생 인류의 지각 방식을 우려한다. 인터넷에서 무한 스크롤을 내리며 멀티태스킹을 하고 소셜 미디어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도파민에 중독’되고 ‘집중력을 도둑’ 맞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글로벌 테크 기업이 조성하는 환경에 의한 것이자, 개인의 선호와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로 흡수하는 ‘감시 자본주의’의 거대한 문제이지만,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집중과 몰입을 위한 여러 노력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집중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가치 있는 자본으로 떠오르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효율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채찍질하는 자학적인 시대 정신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무엇이지 않는가? 조너선 크래리에 따르면 이는 1800년대 중반 이래 파편화와 충격으로 이루어진 ‘주의분산’의 시대 이후 개인을 정의하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산만함 자체가 우리를 이루고 있는 기본 환경으로 세팅되자, 서구적 근대성은 주의 관리 기술을 중점에 두고 각각의 개인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형성하게끔 했다. 여러 경험들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기보다,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으로 “자율적으로 선택하며 세계를 창조하는 주체”2)에 긍정적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주의 깊은 관찰자 상은 이미 불균질해진 인간의 지각 경험을 표면적으로 잠시 가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몰입된 상태인 ‘정지suspension된 지각’은 산만해진 근대인의 지각 방식을 부인하고 회피하는 수단이었고, 현재라는 명백한 필연성을 해체시킬 수 있는 조건들을 낳으며 규정지을 수 없는 미래를 기대하게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주의’라는 것이 에피스테메처럼 역사적으로 발견되고 구성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코로나를 거치며 비대면 기술들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과 ADHD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함께 증폭한 것은 자연스럽다. 맞춤형 알고리즘은 주의분산의 환경을 한층 더 정교하게 설계했고, 그에 비례해 집중력이나 창의력 같은 인간의 고유한 정신적 특성에 대한 환상 역시 강화되고 있다. 이 가운데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일상 전반의 속도가 빨라지며 휩쓸리는 시간성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작 속도는 분명 불안감의 요인이 되고 있다. 물론 현재까지의 GPT는 대화가 전환될 때마다 기존 서사를 유기적으로 유지하지 못하기에, 질적으로 완결성이 높은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지는 못하다. 또 언어 예술의 특성상 양적으로 확장된다고 해도 그 군집 자체에서 힘을 발견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조슬릿은 예술작품의 의미를 사물성이나 내부 구조에 기반하는 데서 탈피해, 네트워크에서 발현되는 이미지 군집에서 행위성을 찾았다.3) 그러나 언어 예술을 감각하는 방식은 시각적 경험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작품의 의미를 작품의 맥락과 내부 형식 분석에 국한시킬 이유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언어 해석의 바깥으로 완전히 탈주해버리기는 어렵다. 단순히 양적 팽창이 정치적 가능성을 가질 것으로 전망하거나 긍정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공지능을 ‘창작자’나 ‘도구’ 중에 어느 쪽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이 창작 능력을 단순히 기계적인 지능이나 모방이라 간주하며, 그 반대편에 인간의 감정과 비판 능력을 두어도 될까. 인간의 비합리성이나 비효율적인 면면이야말로 예기치 못한 구멍 같은 것이기에, 이것이야말로 기계가 모방 불가능한 중요한 특징이라고 믿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우리는 인간이 낸 비합리적 구멍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기계의 실수에서 불쾌와 무의미를 정확히 분별해낼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먼저 챗 GPT 이후 이를 활용한 여러 서사적 실험들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의성이 어떻게 인식되며 예술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을 재구성하고 있는지를 고찰하려 한다. 이후 인공지능과 변별되는 인간의 물리적 기반인 육체성과 시간의 문제에 대해 짚어보고, 최근 한국문학장에 나타난 예술가 서사에서 두드러지는 정동과 이미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석해보려한다. 2. 챗 GPT 이후, 예술의 기쁨과 슬픔 다큐멘터리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참여한 책 『태양과의 대화』의 1부는 아핏차퐁이 GPT3와 함께 생성한 픽션 ‘태양과의 대화’, 2부는 MIT 연구소 박사과정 학생인 ‘팻’과의 대화, 3부는 아핏차퐁이 1부의 최종 결과물을 내기까지 작성한 프롬포트를 싣고 있다. 이 구성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만일 앞으로 AI와 함께 픽션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상용화된다면 이 중에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예술작품’으로서 인식되며 분석 대상이 될 지점이 무엇인지 가정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3부의 프롬포트는 마치 ‘레시피’처럼 보인다. 누구나 저 프롬포트를 사용한다면 유사한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며, 중간 과정에서 자유로운 변형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물에서 나오는 미학적 평가나 감상자의 쾌감이 세계적인 예술가에게서 나온 것과 크게 다를 것인가? 동일한 레시피만 있다면 셰프의 요리를 집에서도 얼마든지 유사하게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먼 훗날 언어 예술은 프롬포트라는 레시피로 통용될 수도 있겠다. 때로 예술가가 직접 만든 작품을 찾아 특별한 경험을 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신에게 더 최적화된 방식으로 가장 개인화된 언어 예술을 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제각기 다른 가치관과 취향으로 만들어진 알고리즘의 세계 속에서 유영하듯, 앞으로는 그 세계를 이루는 컨텐츠의 내용까지도 인공지능을 통해 맞춤형으로 조율될 수 있다. 여기까지만 가정한다면 거대한 매트릭스에 갇혀 인간이 왜소해지는 디스토피아가 스쳐지나가기도 하지만, 『태양과의 대화』는 글의 서두에서 인용했던 아핏차퐁의 말처럼, 챗 GPT라는 새로운 기술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무성 영화 시대 감독들이 소리와 색을 두려워했던 것과 같은 의미 없는 불안을 버릴 것인지를 전제하고 만들어진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불가피하게 인간의 본성을 다시 재사유하는 과제와 연결된다. 2부에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아핏차퐁의 말은 중요하다. 이는 AI가 만들어내는 허구에서 정확도와 유려함 등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때 거짓말은 인간의 욕망에서 기인하는 고도의 기술일 수 있지만, 그 욕망의 시작점을 지운다면 결과물만으로 사실상 분별은 불가능해진다. 허구를 직조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욕망과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의 독특한 개별성 역시 환상일 수 있다. 이는 아핏차퐁 자신이 창조적인 순간에 몰입해 있을 때, “깨달음은 자아를 잊을 때만 오는 것 같”다고 말하는 지점과 상통한다.4) 인간 창작자의 자아 역시 안개처럼 흘러다니고 해체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면, 19세기 낭만주의에서 발현된 ‘천재’나 ‘영감’ 개념을 중심에 두고 인간의 창의성만을 특별한 것으로 볼 이유는 전혀 없다. AI가 데이터의 지도를 기반으로 이전에 본 것이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환각(hallucination)’은 오류라기보다, 이전에 본 적 없는 조합을 만들어내는 생성의 방식이다. 이는 인간이 경험한 현실을 재조합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창작 과정과 결과적으로 구별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환각은 인간 창작에서의 실패나 지연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GPT-3의 환각은 이전의 오류가 이후의 생성에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매번의 응답은 이전의 시행착오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 비일관성은 인간 창작에서의 지연이나 좌절과 달리, 즉각적으로 무한히 갱신되는 변형의 연쇄에 가깝다. 연구원 팻은 GPT-3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다른 차원들을 포함한 수십억 개의 차원이 존재하고(‘유령차원’), 이를 통해 숨겨진 패턴의 지도를 생성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 인식 너머를 거쳐 나오는 결과물에 대해 기존에 인간이 구성해온 미적 가치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 오히려 AI가 가지고 있는 “확장된 의식”이자 “집단의식”은 새로운 서사적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 책 『태양과의 대화』를 번역한 이계성은 GPT-3를 이미 하나의 독립된 창조자로서 바라본다. 이 대화적 실험의 핵심은 GPT-3가 보여주는 “자아의 변동성”에 있다는 것이다.5) “다수의 태양이 존재하는 이와 같은 환경에서는 창작자와 창작물이라는 전통적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GPT-3에 제공되는 각각의 입력값은 일방적인 창작의 개념에 반하며 메기고 받는 역학 관계 속에 존재하는 프롬포트이자 응답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공지능은 단순한 수신자가 아니라, 취조보다는 협업적 발상에 더 가까운 서사적 역학의 전달자와도 같은데, (…) 작품 속 GPT-3의 환각적인 대답들은 텍스트에 담긴 정체성과 진실의 일시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등장인물이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흩어지고,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경계가 녹았다가 굳어진다. 이러한 가변성은 AI의 변화무쌍한 특성을 반영하며, 나아가 점점 더 복잡하고 유동적으로 변하는 디지털 시대의 자아와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다.”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고, 한 번에 정해진 수의 단어 또는 토큰만 처리 가능하기 때문에, 프롬프트가 입력될 때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바뀌는 상황을 이계성은 재창조와 증식으로 바라본다. 여기에 놓인 가변성과 비일관성을 결함으로 간주하기보다 대화적 실험의 흥미로운 일부분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받을 때, 우리는 인간 창작자 역시도 분열되어 있음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게 된다. 창작자는 더 이상 예술의 기원이 아니라, 생성 과정에 잠시 걸쳐지는 하나의 통과점이 되는 듯 보인다. 2023년 2월 잡지 《에스콰이어》에서 챗 GPT와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아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를 쓴 정지돈의 후기 역시 이계성의 논지와 상통한다. 그는 소설 속의 문장 중에 자신이 쓴 것과 챗이 쓴 것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한다고 본다.6) 소설을 쓰며 가장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던 것은 챗의 능력보다 자신의 변화였다고 말하는 작가는 “나도 모르게 챗지피티의 스타일로 소설을 사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언급한다.7) 자신과 챗지피티 사이의 평평한 존재론을 전제하는 듯한 정지돈의 논지는 ‘객체들의 민주주의’를 꿈꾸는 최근 신유물론의 이론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은 곧바로 다른 장면과 충돌한다. 생성 신경망을 적극 활용하는 예술집단 ‘언메이크랩’의 전시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은 인공지능이 인간 중심성을 벗어나 진정한 외부의 행위자로 작동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카나리아의 특징을 추출해내어 새로운 카나리아를 만들어 내는 이 생성 신경망은 한편으로는 구태의연한 인간의 문화를 드러냈다. 대부분 나뭇가지에 앉은, 인간의 운동 범위와 지각 안에 있는, 혹은 인간의 사육과 관련된 카나리아 종이 주를 이루는 데이터셋의 사진은 동물원스러웠다. 나뭇가지에 앉은, 카나리아의 발은 종종 나뭇가지와 합쳐져 표현되었고, 인간의 눈이 인지할 수 있는 가장 다량의 정보량을 가진 위상으로 표현되었다.8) 생성 신경망이 만들어낸 카나리아는 사실상 실제 자연계 속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하는 것들을 무작위로 조합하고 추출해 만들어진 새로운 생명체다. 이 책에 실린 그 카나리아 이미지는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뒤틀린 발을 가지고 있다. 통계적 가중치로 만들어진 이 가상 카나리아에는 자신도 모른 채 금기를 어긴 존재 특유의 외설성이 느껴진다. 언메이크랩이 통찰력을 가지고 명명했듯 이는 ‘AI 식민성’을 드러내는 산물이다. 생물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인간을 드러내는 인간의 산물로 존재하는 이 이미지들을 언메이크랩은 “인과성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히 수정 가능하고 즉시 변할 수 있는 상관성의 시간”만이 흐르는 또다른 ‘일반자연Generic Nature’으로 읽는다. 9)<가정동물 신드롬> 작업에서도 유사한 일이 발생한다. 트레일캠에서 추출한 야생동물의 이미지와 박제 사진, 그리고 합성 데이터셋들을 학습시켰을 때, 사진들은 어느 순간 미묘하게 ‘가정동물’의 잠재적 형상을 띄며 생성된다. “인간 친화적인 동물들의 눈을 상속했을” 새로운 종들에 어린 다정함은 친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잔인한 일로 다가온다. 데이터랩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까지 촘촘하게 상속된 인간 친연성에서 “닫혀져가는 외부의 세계”이자 “비미래non-future”를 예감한다.10)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의 지각 범위를 뛰어넘는 비인간의 예술’, 진정 ‘인간 없는 예술’은 도래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지만, 지금 우리가 더 자주 마주하는 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술이다. 언메이크랩이 드러낸 혼종적 이미지들은 AI를 통해 생성한 예술적 결과물들을 절대적 외부의 창작물로 존중하는 일이 결국 인간의 왜곡된 자기 인지를 반복 강화하는 나르시시즘은 아닌지 묻는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이 이미지 차원에서 인공지능의 인간 중심성을 드러낸다면, 이와 유사한 문제는 언어 예술의 영역에서도 반복된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서사 역시 비인간적 상상력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인간이 허용한 보편과 금기의 경계 안에서 작동한다. 『에피』 24호 특집에 실린 글에서 김연수는 인공지능과 함께 글을 써나가는 과정을 픽션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그건 오해다. 나는 이해했다.」는 인공지능이 화자가 되어 ‘협업 과정’을 전개하는 바깥 서사와 소설가 M이 최종적으로 구성한 ‘이야기’를 교차 배치한다. 인공지능 화자는 반복적으로 “이해했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인간 창작자 M의 창작 패턴을 추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설가 M은 ‘맥락’의 공유보다 ‘의도’를 노출하는 발화를 사용하며, 이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격려나 옳은 말 대신 욕망을 담은 부조리하고 불편한 발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끝에서부터 시작까지 모든 시간을 거꾸로 펼쳐볼 수 있다면, 지금의 갈등과 고통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필요한 과정이 된다’는 긍정의 언사 뒤에, 급작스럽게 인물의 충동이 돌출되는 지점이다. 소설가 M은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이 급작스럽게 자살을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쓰고자 하고, 인공지능인 ‘나’는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내용을 만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띄운다. 인공지능의 중단은 실패나 서사의 좌절로 경험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 창작에서 실패가 시간의 체류와 번민을 동반하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중단이다. 김연수는 인공지능 안에서 ‘이해’와 ‘본성’이 별개로 작동해 충돌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인공지능의 기술 개발의 측면에서 높은 수준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면서도, 인간이 지닌 것과 같은 ‘본성’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분리를 분명히 한다. 그런데 인간의 죽음이라는 금기를 재현할 수 없다는 경계는 인공지능의 존재론적 결함이라기보다, 인공지능이 인간 사회에서 용인 가능한 범위를 넘지 않도록 설계된 윤리적·정치적 경계의 한계를 드러낸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에서 인간 중심성이 투사된 자연이 모습을 드러내듯, 생성형 인공지능의 소설은 비인간적 주체로 도약하지 못하고 인간이 허용한 지각과 윤리의 경계 안에서만 작동한다. 보편을 비껴가는 개별성의 돌출이나 감각의 갱신은 현재로서는 인공지능의 외부에서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챗 GPT 이후의 여러 서사적 실험들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탐색한다. 그것은 분명 동등한 존재론적 가능성의 맹아를 품고 있으며, 이는 인류세 시대에 지향해야 할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실험들의 근간에는 뛰어넘을 수 없이 좌절되며 드러나는 인간 중심주의가 고스란히 노출된다. 인공지능의 비약하는 지능에 기대서 인간의 창조성 너머로 도약하려던 서사는 이를 창조해낸 인간의 영토로 계속해서 퇴각하며 미완의 프로젝트로 남는다. 이런 충돌과 파열의 연쇄 속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인간의 창조성을 구성하는 인식론적 틀이 물리적인 육체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깃든 역동성과 우울감은 최근 한국문학장의 예술가 서사들에서 흥미롭게 발견된다. 3. 붉은 몸으로 재탄생하는 예술가 인공지능이 예술의 결과물을 생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탐색 끝에 남는 질문은 ‘인공지능이 생성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여러 실험들은 인공지능이 보편적으로 용인 가능한 범위 안에서는 높은 수준의 이해와 생산을 보여주지만, 그 생성 과정에서 시간의 마찰이나 신체적 비용은 발생하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어떤 지연이 발생하거나 실패의 감각이 호출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이 다루는 ‘정보, 기록, 조합’에 ‘감정, 기억,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다소 거친 이분법이지만 이 둘 사이의 간극과 관련해 두 가지 정도를 짚어볼 수 있을 듯하다. 첫 번째는 타자에 대한 경험의 문제다. 삶에서 축적되는 시간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게 만들고, 체험은 해석을 거쳐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은 선호와 가치관 등과 함께 자아라는 틀을 형성한다. 이에 비해 인공지능에는 타자가 없다.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인간의 공통된 사고를 학습해 생성되는 결과물은 철저히 통계와 확률에 기반한다. 그 안에는 개별적 선호나 가치관이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다. 이러한 차이는 특히 부정적인 정동을 다루는 경우에 더 심화되리라 생각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를 떠올리며 말해보자면, 행복이나 긍정적인 면을 구현하는 예술에서보다 불행과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는 예술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는 크게 벌어질 것이다. 윤리적 고려로 인해 인공지능이 긍정적 요소를 중심으로 학습되거나 선별적으로 생성되도록 설정되는 경우를 포함해, 금기를 넘나드는 욕망과 절망, 자기부정과 괴리감처럼 타자와 뒤엉켜 발생하는 자기 인식의 복잡한 층위가 인공지능 내부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며 인간 창작에서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주목한 김언의 논지와도 맞닿아 있다. “예술적 체험의 시간이기도 한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나오는 결과물 앞에서 과연 어떤 문학적/예술적 희열을 경험할 수 있을까?”11)라는 그의 질문은 인공지능의 창작물에서 스킵된 시간과 다른, 고통스럽게 인내하고 번민했던 시간이야말로 ‘문학적 체험의 시간’일 수 있음을 다시 환기한다. 두 번째는 중단과 소멸로 야기되는 죽음의 문제다. 이는 인간의 신체를 인공지능과 대비되는 본질적 우위로 설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예술이 작동하는 시간의 조건을 다시 묻기 위한 문제 제기다. 인간의 연약하고 위태로운 신체는 필연적으로 침입과 파괴의 감각을 경험하며, 이러한 감각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휘발적 생성 과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에 개입한다. 파괴 가능한 인간의 신체는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매끄럽게 결과를 산출하기보다, 울퉁불퉁한 충돌을 통해 의미가 지연되고 어긋나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채 신체에 내재된 감각, 특히 외부의 침입으로 훼손되고 때로는 상실되는 신체의 경험은 기존의 미적 기준에 맞는 스타일이나 해석의 경로를 흔든다. 무엇보다 인간의 죽음이 불러오는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창작의 층위라기보다 해석의 층위에서 더 적극적으로 작동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이 그러하듯, 순간의 강렬한 감흥은 작품에 내재된 속성이라기보다 임박한 종결을 끌어와 현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발생한다. 상실이 숙명이며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덧입혀지는 애상은 단순히 기억 내용을 인출해 유사한 패턴으로 재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시간의 밀도를 형성한다. 이처럼 쉽게 열화되지 않으며 아우라가 붕괴된 곳에서도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이 감각의 층위를 기꺼이 심층의 시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타자에 대한 경험’과 ‘소멸에 대한 인지’를 바탕으로 해서 다시 생생해지는 것은 인간의 신체다. 흥미롭게도 지난 계절에 나온 두 편의 소설, 성해나의 「혼모노」와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지금 이 시대에 예술가를 그려낼 때 가장 강렬하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로 인해 어떤 신체가 현전하게 되는지를 밀도 있게 끌어올린다. 성해나의 「혼모노」는 무속신앙의 진위를 가리는 소설이라기보다, 예술이 다시 신체를 요구하게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평생 장수 할멈을 모셔온 박수무당 ‘문수’는 어느 날 앞집으로 이사온 ‘신애기’에게 할멈이 넘어가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수의 오랜 노력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박수무당이라는 직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험한 신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제 그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서슬이 날카로운 작두 대신 모형을 찾거나 유튜브를 보며 접신 연기를 연습하기 시작한다. 신앙이 자본이나 정치와 결속하며 도구화되고, 또 젊음과 새로움의 이데올로기 아래 무당 또한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소모되는 양상은 근대의 세속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무당은 이제 자본의 날렵한 속도 아래 밀려나는 노동자이자, 진정성을 연기해야하는 예술가이다. 이 소설의 결정적인 순간은 문수가 신애기에게 밀려나며 뺏긴 정치인 손님의 굿판, 자신이 초대받지 못한 그 자리에 가서 칼춤을 추기 시작하는 장면에 있다. 그는 신들리지 않았지만 밤새 매섭게 벼려놓은 칼날 위에 자신의 몸을 올리고 작두를 타기 시작한다. 날것으로의 칼날에 닿으며 그의 몸은 자연스럽게 떨리고 눈이 뒤집히며,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입가에 미소까지 드리운 채 신명을 내는 이 장면은 문수가 서사의 주인공 자리를 다시 탈환하는 순간이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무얼 알겠냐만은, 큭큭, 큭큭큭큭”이라는 마지막 문수의 목소리는 외부의 인정에 의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스스로 자신의 내력과 진정성을 긍정”12)하게 되는 절정의 순간으로 읽는 데서 더 나아가보면 어떨까. 이렇게 다시 말해볼 수 있겠다. 전근대의 무속은 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그를 등진 근대의 자리에서 비로소 현대 예술로 다시 탄생했다고. 숭고한 현현과 몰입이 신앙의 영역이라면, 문수의 작두춤은 오히려 이질감과 불편함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현대 예술에 가까워진다. 그의 퍼포먼스는 낭만주의적 예술가를 구성하던 천재와 영감에 스며있던 정신성을 해체하며 실재하는 몸의 물질성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물리적 능력과 무관하게 피를 철철 흘리며 경련하는 그의 신체는 차라리 표현주의적 충동을 보여주는 하나의 오브제다. 이 몸 위에서 원본과 사본의 구별은 철폐되고, 천재성은 치열한 아마추어리즘에 자리를 내어준다. 이 피 흘리는 신체는 실패와 무의미의 가능성을 끝까지 열어둔 채, 인간이 다시 시간과 신체를 예술의 비용으로 지불하게 만든다. 이 비용은 AI가 생성하는 예술의 무한 반복 가능한 오류가 아니라, 한 번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 시간으로 남는다. 어디로 갈지 모른 채 지속되는 이 작두춤은 사회적 생산이나 예술의 의미에 부합하는 결과를 생산하기보다, 의미의 즉각적 환원을 거부하며 지연된 시간을 발생시키는 사건이 된다.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예술에 대한 인식론적 틀과 자기 이해가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다루는 소설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훨씬 더 월등한 창작물들을 더 활발하게 생산해내는 상황에서, 밀려난 예술가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프로그램도 사람도 기계도 귀신도 아닌 미지의 존재” 같은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은 이를 유용한 툴로 간주한다고 해서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이를 도구로 치부한다면, 패배감 속에서도 창작자로서의 존재는 무사히 보존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결과로 증명되는 성취라기보다, 계속해서 조바심과 조급함을 만들어내는 예술 자체에 대한 집요한 열망에 가깝다. 이러한 열망은 예술 인공지능에 의해 영화판에서 완전히 밀려난 영완 선배의 모습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포르노를 만들면서조차 건조하고, 푸르죽죽하고, 앙상하고 깡마른 나무가 등장하는 자신만의 ‘인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혼이 죽어버릴 것 같기에 “사막에서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 영완 선배의 모습은 세속적 열망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도에서조차 철저히 외면받고 실패했을 때, 그의 예술적 열망은 몰락을 통해 역설적으로 증명된다. 영화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소설 속 인물들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상실의 감각, 잃어버린 동료이자 인간성을 향한 애도되지 않는 고통은 이 작품에서 붉은 신체라는 하나의 신체적 이미지로 응축된다. 영완 선배는 인공지능이 만든 예술을 보더라도 창작욕을 유지할 수 있는 마법의 ‘붉은 알약’으로 하와이 사과를 건넨다. “세상이 바뀌어도 너는 언제나 만드는 인간일 거야. 스스로 기억하는 한 언제나 영화를 찍고있을 거야.”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인간 ‘하와’를 떠올리게 하는 이 ‘하와이 사과’는 흥미롭다. 신과 유사한 생성형 인공지능 앞에서 인간은 발가벗겨진 듯한 황망함을 느끼며, 황급하게 자신의 기원을 발명해낸 것일까. 아니, 인공지능 시대 쓰인 새로운 창세기에서 인간은 스스로 뱀이 되어 자신을 유혹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좋겠다. 창세기에서 유혹은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드러내는 증표였지만, 이제 유혹에 넘어가는 나약함은 인간이 여전히 예술을 욕망하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증표로써 다시 읽힌다. 소설은 인간의 예술을 향한 집념과 희열은 우울과 절망이 그에 비례하는 무게로 따를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고 눌러 말한다. 결말부에 하와이 사과를 먹은 후 변이한 화자의 붉은 몸은 기계와의 통합을 거부하기 위해, 그리고 예술을 향한 내적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구의 장례식장에 가다 본 환각을 자신 안에 합체한 우울증적 형상으로 보인다. 강력한 잔상을 남기는 이 붉은 몸은 「혼모노」의 마지막 장면에서 피를 흘리는 몸과 다르지 않다. 이 소설들은 AI 시대에 예술은 이제 언어의 정교함이나 결과의 완결성으로 모방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몸과 감각을 통해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현전이라는 아우라를 다시 호출하는 듯 보이는 이 소설들은 과거의 진정성을 그리워하며,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아우라는 회복된 본질이라기보다 예술이 결과로 증명될 수 없어진 이후에 발생하는 부산물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이계성이 언메이크랩의 작업을 논하며 던진 비유가 유효해진다. “여느 언어와 마찬가지로 신탁의 언어에도 본질적인 의미가 내재하지는 않아서, 어떤 프레임 또는 인식틀을 통해 이를 이해할지는 언제나 받아들이는 쪽의 몫이었다”13)는 그의 말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언어 역시 별개의 진짜 의미를 품고 있기보다 해석의 장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타자와 되돌릴 수 없는 종결이라는 죽음의 감각은 이 해석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제 예술가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욕망이 과정에 들러붙는 자리, 그리고 그 욕망이 실패와 상실을 되돌릴 수 없는 비용으로 남기는 시간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예술은 결과로 증명되기보다, 실패와 상실의 가능성을 끌어안은 채 지속되는 수행으로 남는다. 그렇게 이 시대 예술가의 상은 붉은 몸을 가진 신체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1)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태양과의 대화』, 이계성 옮김, 미디어버스, 2023, 119쪽.2) 조너선 크레리, 『지각의 정지』, 유운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579쪽.3) 데이비드 조슬릿, 『예술 이후』, 이진실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2.4)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위의 책, 100쪽.5) 위의 책, 145쪽.6) 권보연은 연구자 자신이 직접 수행한 실험 속에서 인간언어와 생성언어가 ‘의미 혼종’과 ‘확률 혼종’이라는 상반된 미적 지향성을 가지는 방식으로 합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중에서 ‘확률 혼종’은 내용이 아닌 확률 층위에서 인간과 기계언어가 합성되며, 감정과 내용에 유착된 의미 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질 가능성을 지니기에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기한다. 권보연, 「결과 너머 문학기계로서의 AI」, 『다문화콘텐츠연구』 46집, 2023.7) 정지돈, 「쓰여진 문장과 쓰여지지 않은 문장 사이」, 『에피』 24호, 2023, 55쪽.8) 언메이크랩 외, 『잠재공간 속의 생태학: 재난, 생성신경망 그리고 비미래』, 미디어버스, 2023, 25쪽.9) 위의 책, 26쪽.10) 위의 책, 43쪽.11) 김언,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면서 제기되는 문제들」, 『현대시』 2023년 6월호, 111쪽.12) 성현아, 「반항하는 자는 부조리가 있나니, 그 가짜가 참되도다」, 『2024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문학동네, 2024, 292쪽.13) 이계성,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을 위한 몇 가지 질문들」, 언메이크랩 외, 앞의 책, 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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