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현대비평 2024년 여름호(제19호)
신성과 세속의 길항, 죄/참회, 인유-몽타주-역설 — 육호수 시의 구조화 원리, 모티프, 미학적 방법론
2016년 대산대학문학상에 당선되어 등단한 육호수는 첫 시집 『나 는 오늘 혼자 바다에 갈 수 있어요』(아침달, 2018)에서 천사·빛으로 대 변되는 신성과 소년·바다로 대변되는 유년을 접속하면서 그것이 세 속적 현실과 부딪히며 겪는 상실·좌절·상처를 잠과 꿈속에서 발화되 는 내적 고백의 화법으로 형상화함으로써 2010년대 새로운 시 쓰기 의 한 방향을 보여 주었다. 이후 그는 두 번째 시집 『영원 금지 소년 금지 천사 금지』(문학동네, 2023)를 통해 이러한 경향의 시 쓰기를 지속 하는 동시에 내용과 기법의 양 측면에서 다양한 질적 변화를 시도한 다. 내용적 측면에서는 기도·기다림을 통해 신성·원형에 대한 갈망을 유지하는 방향과 그 대척점에서 회의·절망을 통해 죽음·공백과 대면 하는 방향이 혼재하면서 큰 틀에서 후자 쪽으로 기우는 모습을 보여 준다. 기법적 측면에서는 기존의 모호하고 은밀한 내적 고백의 화법을 유지하는 한편 이야기를 통한 서사적 진술, 1인칭과 3인칭을 중첩 하는 혼재적 주체, 필연과 우연을 가로지르는 기표의 놀이, 여백과 공 란을 통한 독자의 해석 가능성 제시 등을 보여준다.1)
육호수의 시에 대한 중요한 선행 비평으로 최선교, 김준현, 박다 솜 등의 평론을 들 수 있다. 최선교는 육호수의 시를 꿈의 아이러니 와 나르시시즘적 속성, ‘사랑’이나 ‘미움’과 같이 대립적인 단어들도 쉽 게 자리를 바꾸는 발화, 형식이 아니라 자세이자 태도로 설정된 ‘꿈’, 전지적 작가 시점을 극복하기 위해 도입하는 3인칭 인물인 ‘철수’와 ‘영희’, 타인의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기인하는 시점의 전환, 명확한 의미 전달보다는 ‘■’에 나열된 상상의 집합체에 가까운 언어 등의 관점으로 해석한다.2) 김준현은 두 번째 시집의 해설에서 육호수 의 시를 시제를 초월해서 존재하는 세계의 파편들을 연결하여 영속 성을 부여하려는 노력, 완전한 원형의 복원을 위해 부서진 상태를 있 는 그대로 보여주기, 시 안에 타자를 능동적으로 초대하는 방식, 현 실보다 꿈·무의식·천국·죽음의 세계에서 획득 가능한 언어의 육체성, 망가진 꿈의 기억을 관찰하고 훼손된 꿈의 형태와 의미를 수집하기, 영원·소년·천사의 세계에 대한 단호한 결별의 의사, ‘꿈’을 뒷받침하 는 세계를 유희의 차원으로 변주하는 태도 등의 관점으로 해명한다.3) 한편 박다솜은 두 번째 시집의 서평에서 육호수의 시를 무(無)장소 혹 은 ‘장소-없음’을 바라보며 쓴 시, 시집 전체에서 다양한 양태로 반복되는 도저한 ‘없음’, 공백을 정시(正視)하고 형상화하는 예술의 한 존재 방식, 빈 어항·백지·상자 안의 상자·검은 네모 도형(■)·빈칸에 밑줄을 긋는 취소선 등으로 ‘없음’을 포착하려는 노력 등의 관점으로 분석한 다.4) 최선교는 두 번째 시집의 서평에서 앞에서 언급한 평론의 연장 선에서 육호수의 시를 적절한 재현을 위해 단어들이 자리를 바꾸는 꿈-공간, ‘■’의 빈 공간을 타인에게 선물하는 한 장의 편지, 독자가 채 워야 하는 (좋은 의미의) 성긴 공간들, 꿈-공간과 ‘쓰는 화자’가 공존하 여 ‘시’와 ‘삶’과 ‘꿈’이 구분되지 않고 상호 대체되는 특성 등의 관점으 로 조명한다.5)
이러한 선행 비평들의 견해는 전체적인 시적 추구와 지향성의 측 면, 세부적인 시적 발화와 형상화 방식의 측면, 독자 수용적 측면 등 에서 육호수 시의 중요한 특성들을 유효 적절히 해명했다고 볼 수 있 다. 필자는 이러한 선행 비평의 관점들이 육호수의 시 세계를 섬세 하게 분석한다고 간주하면서 세 가지 층위에서 이를 보완하는 해석 적 관점이 요청된다고 생각한다. 첫째 층위는 선행 비평들이 주로 두 번째 시집에 수록된 시들을 대상으로 시적 특성을 해명하는데, 육호 수 시에서 두 번째 시집은 첫 시집의 연장선에서 질적 변화를 모색 하고 있으므로 우선 첫 시집의 시들을 중점적으로 해명해야 두 번째 시집의 특성이 전체적 구도 안에서 온전히 드러날 수 있다. 둘째 층 위는 육호수 시 세계에 등장하는 다양한 상징체계들은 일정한 질서 를 가지고 구조화 원리를 형성하면서 특정한 모티프와 미학적 방법론을 파생시키는 복합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복수의 상징체 계들에 대해 비중을 고려하여 우선순위를 가지고 분석 및 해석을 시 도할 때 육호수 시의 중심부에 근접할 수 있다. 셋째 층위는 주로 잠 과 꿈속의 세계를 형상화하는 육호수 시의 특성상 징후발견적 독해 (symptomatic heuristic reading)를 통해 무의식의 비밀을 포착하는 것이 좀 더 효율적인 해석 방법이 될 수 있다. 시의 표면뿐만 아니라 심층에 숨어 있는 무의식의 은밀한 의미를 찾기 위해서 육호수 시의 이미지 들을 감응(affect)이나 파토스(pathos)가 은폐된 징후로 간주하고 그 속 에 내재된 심리적 메커니즘을 탐색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글은 선행 비평의 성과들을 존중하면서 부분과 전체, 주변과 중심, 표면과 심층 등의 상호 연관적 고찰을 염두에 두고 육호 수의 첫 시집 『나는 오늘 혼자 바다에 갈 수 있어요』를 중점적으로 분 석하고자 한다. 여기서 필자는 징후발견적 독해를 통해 육호수 시의 다양한 상징체계들 중에서 큰 비중을 가지는 상징체계를 포착하고 그 체계들의 질서를 이루는 구조화 원리를 파악하며 이것이 파생하 는 중심 모티프와 미학적 방법론을 상관적으로 고찰하는 방식을 채 택하려 한다.
육호수의 첫 시집에서 서시로 등장하는 다음 작품에는 시 세계의 중심부에 있는 상징체계, 구조화 원리, 모티프, 미학적 방법론 등의 원형질이 배태되어 있다.
밖에 나서지 못하고 불 꺼진 식탁에 앉아
콩 조림을 세었다
콩알만큼의 어둠을 방 안에 심었다
더 나빠져야지 내일은
조금도 비켜 가지 말아야지
입술에 돋은 보풀을 뜯다가
빨래 세제를 삼키는 남자와
변기통에 새를 토하는 감옥에 대하여
창밖은 매일 저녁
철문 내리는 소리
오지 않을 수 있다
상한 반찬을 두고 고민하다
별 모양 꽃 모양
사료를 먹었다
심장 모양 뼈다귀 모양이 먹음직해 보였다
식탁에서 쫓겨나 내 발을 핥는 개의 체온이
두렵고 자랑스러운 날들
오지 않을 수 있다
불을 지피기 위해 몸에 너무 오래 머물렀구나
내가 이렇게 작고 사랑스러운 개에게 쫓겼구나
툭, 툭,
부드럽게 부러지는 성냥들
창밖은 매일 아침
철문 올라가는 소리
문 앞에 죽어 있던 몸들은
밤사이 누군가 제 집으로 물고 갔다
집을 집에 두고
가까스로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
오지 않을 수 있다
어디로 자꾸 사라지는 거니 문 앞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내가 깬 유리병을 대신 치우는 사람에게
용서를 빌 뻔 했다
- 「나는 방을 감추는 사람입니다」 전문(1 : 10-12)
이 시는 잠과 꿈속의 세계를 주로 형상화하는 육호수 시의 무의식 적 비밀을 엿볼 수 있는 기본 토대가 되는 작품이다. 따라서 징후발 견적 독해를 시도하여 시의 심층에 숨어 있는 은밀한 내면의 양상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작품의 전체적 구도는 “방”, “문”, “창” 등의 이 미지가 시적 주체의 내면 공간과 중첩되면서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 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화자가 외적 상황에 대한 묘사 및 진술과 내 면적 감응에 대한 고백을 번갈아 교차적으로 제시한다. 먼저 외적 상 황에 대한 묘사 및 진술을 살펴보자. 화자는 “문”과 “창”으로 경계 지 워진 “방”의 안쪽에서 평범한 일상적 생활을 하면서 그 속에 고독과 불행이 내재하고 있음을 모순적이고 이율배반적인 형상으로 묘사한 다. 이러한 시적 형상화 방식의 중심에 있는 것은 ‘언캐니(uncanny)’하 거나 ‘그로테스크(grotesque)’한 이미지이다. 이 이미지 묘사 방법을 통 해 화자가 2연에서 “불 꺼진 식탁에 앉아/콩 조림을 세”는 모습이 “콩 알만큼의 어둠을 방 안에 심”는 상황으로 연결되는 것은 내면 무의식 의 고독과 암울함을 암시하고, 4연에서 “입술에 돋은 보풀을 뜯다가/ 빨래 세제를 삼키는 남자”의 모습 이후에 “변기통에 새를 토하는 감 옥”이 제시되는 것은 내면 무의식의 죽음과도 같은 감시 및 폐쇄성을 암시한다.
시적 화자가 7연에서 “심장 모양 뼈다귀 모양이 먹음직해 보였다” 고 말하는 것은 자신을 “개”의 존재성과 동일시하는 언캐니한 장면 인데, “식탁에서 쫓겨나 내 발을 핥는 개의 체온이/두렵고 자랑스러 운 날들”에서는 동일시 이후의 혼재적 주체가 가지는 모순적 심리가 “두”려움과 “자랑스러”움의 공존을 통해 노출된다. 이어서 9연의 “불 을 지피기 위해 몸에 너무 오래 머물렀구나/내가 이렇게 작고 사랑스 러운 개에게 쫓겼구나”에서는 자기 존재의 내적 양상과 외적 상황에 대해 섬광처럼 스치는 각성을 표출한다. “툭, 툭,/부드럽게 부러지는 성냥들”은 “불”-“몸”-“개”-“쫓김”으로 이어지는 파편적 이미지들의 연쇄가 “부러지는 성냥들”로 귀결되면서 어떤 목표를 추구하던 열정의 상실이나 좌절이라는 은밀한 의미를 발생시킨다. 이러한 시적 형상 화 방식의 중심에 있는 것은 파편적 이미지들의 충돌과 연결을 통해 충격 효과를 발생시키는 ‘몽타주’이다.
다음으로 내면적 감응에 대한 고백을 살펴보자. 시적 화자는 “방” 의 안쪽에서 경계 지점인 “문앞”의 사건에 대해 염려하고 경계 바깥 쪽인 “창밖”의 상황에 대해 주시하면서 ‘불안’과 ‘안도’를 동시에 느끼 는 모순적이고 이율배반적인 감응을 드러낸다. 여기서 화자의 내면 적 감응으로 ‘불안’과 ‘안도’가 공존한다는 점뿐만 아니라 모순된 감응 이 때로는 불행과의 ‘대결 의지’로 나아가고 때로는 상황에 대한 ‘참회 의식’으로 나아간다는 점이 중요하다. 화자가 1연에서 “문 앞에서 자 꾸 죽지 마 ”라고 말하는 것은 “문앞”에서 폭력이나 사고에 의한 죽음 이 빈번히 발생해 왔음을 암시하면서 ‘불안’을 드러낸다. 4연의 “변기 통에 새를 토하는 감옥”과 11연의 “문 앞에 죽어 있던 몸들은/밤사이 누군가 제 집으로 물고 갔다”를 미루어 볼 때 죽은 존재는 “새”이고 물 고 가는 존재는 “개”라고 짐작된다. 주목할 부분은 화자가 “새”의 죽음 과 “사라”짐에 대해 염려하고 불안감을 느낀다는 점이다. 6연, 8연, 12 연에 반복되는 “오지 않을 수 있다”라는 화자의 감응은 ‘불안’과 공존 하는 ‘안도’를 표현하지만 이러한 모순적 감응의 반복이 아이러니하 게도 ‘불안’을 더 가중시킨다. “오지 않을 수 있다”라는 문장이 3회나 반복되는 과정에서 점층적 효과를 통해 ‘불안’이 누적되면서 강도가 강해지기 때문이다.
점층되는 화자의 ‘불안’은 “새”가 “문”과 “창”이라는 경계에서 내부 로 진입하지 못하고 외부 현실의 억압이나 폭력에 의해 압살되기 때 문에 발생한다는 점에서 “새”의 의미와 정체를 밝히는 것이 필요하 다. “새”에 대한 징후발견적 독해는 이후에 진행하기로 하고, ‘불안’과 ‘안도’가 공존하는 모순적 감응이 3연의 “더 나빠져야지 내일은/조금 도 비켜 가지 말아야지”에서 능동적인 불행과의 대면이나 대결 의지 로 나아가는 부분과, 14연의 “내가 깬 유리병을 대신 치우는 사람에 게/용서를 빌 뻔 했다”에서 참회 혹은 속죄 의식으로 나아가는 부분 에 대해 먼저 살펴보자. “내가 깬 유리병”은 일단 “내일은/조금도 비 켜 가지 말아야지”라는 불행과의 대결 의지를 행동으로 실천한 결과 물로 이해할 수 있다. 대결 의지의 실천이 파괴적 결과를 낳고 불의 의 피해자를 발생시키므로 화자는 복잡하고 미묘한 감응으로서 ‘죄책 감’을 느끼게 되는 듯이 보인다. “용서를 빌 뻔 했다”라는 표현은 용서 를 빌어야 한다는 강박감과 용서를 빌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순간적 으로 교차하는 복합적인 심리의 갈등을 노출하면서 원초적 죄의식을 은연중에 암시한다. 이 부분에 대해 징후발견적 독해를 시도하면 육 호수 시의 다양한 상징체계들의 질서가 파생시키는 복수의 모티프들 중에서 ‘죄/참회(속죄, 용서)’의 모티프가 중심부를 차지한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죄/참회’의 모티프는 시적 주체가 “문앞”에서 일어나는 외부 현실의 억압이나 폭력에 대해 심리적으로 연루되어 있거나 방 임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더 나아가 “내일은/조금도 비켜 가지 말아 야지”라는 불행과의 ‘대결 의지’를 현실적으로 실천한 결과물인 “내가 깬 유리병”에 의해서도 억압이나 폭력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죄/참회’ 의 모티프는 이율배반적인 모순의 양가성을 여러 겹 껴안은 채 육호 수 시에 잠재된 무의식적 메커니즘을 이루는 중심적 요소가 된다.
한 가지 덧붙여야 할 부분은 제목인 「나는 방을 감추는 사람입니 다」에서 노출되는 화자의 자기 정체성 고백이 육호수 시의 무의식 적 비밀을 포착하는 또 하나의 퍼즐이 된다는 점이다. 화자는 자신이 “방”의 안쪽에 해당하는 무의식의 양상이나 비밀을 드러내기보다는 은폐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음을 단도직입적으로 고백한다. 이 심리 적 태도는 앞에서 분석한 불안과 안도, 억압·폭력과 연루·방임, 가학 과 피학, 불행과 대결 등의 다양한 이율배반적인 모순의 양가성들이 ‘죄/참회’의 중심 모티프로 수렴되고 결집되어 나타남으로써 ‘죄책감’ 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생겨난다고 볼 수 있다. 육호수 시의 무의식적 메커니즘을 해명하기 쉽지 않은 이유는 그 비밀을 감추거나 은폐하 려는 화자의 심리적 태도에서도 기인하는데, 시의 미학적 측면에서 는 이로 인해 오히려 베일 효과가 발생하면서 시적 애매성과 모호성 이 어우러져 매력적인 아우라가 발생하는 측면도 존재한다.
이러한 무의식적 비밀과 메커니즘을 기본 토대로 육호수의 첫 시 집에서 중심부에 있는 상징체계, 구조화 원리, 모티프, 미학적 방법론 등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작품을 살펴볼 필 요가 있다.
그는 천국에서 온 간첩이었다
나는 그를 숨겨주었다
천사는 천국의 기쁨을 가지고 오다. 나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알 릴까 고민하다. 나는 어디에서든 방심하게 되다. 좀 더 포괄적 의미 205 비평가의 시각 의 인간이 되어가다. 잠옷 입은 아이들과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내 려다보다. 풍선에 빛을 담아 창밖으로 던지다. 세계를 구하다 보면 세계와 사랑에 빠지나 봐. 모기가 모기를 잊고 바닥을 기어 다니다. 달걀은 무사히 늙어 죽는 닭의 꿈을 꾸다. 이젠 너도 나를 아주 불신 하진 않는 거야. 천사들과 농담하다. 부흥. 우리는 죽음과 믿음 사이 에 경계가 없다. 새를 쫓다. 새가 아닐까 봐서
*
너무 많은 빛이 방에 쏟아 들어와 꿈에서 깨다
이런 일들을 정말 견딜 수 없었다면 이미 죽었겠지
오늘, 늙음을 이해한다고 생각하다가, 이젠, 사랑에 천착할 수 있 을 거라 생각하다가, 오늘 아침 어쩌면 빛이 나를 완전히 통과할 수 도 있었다고 생각하다. 빛을 의심할 이유를 잃어가다 마침 개가 숨 을 멈추다. 너도 날 더 핥을 순 없는 거야. 개와 숨을 나누다. 개가 개 를 버리고 날아가다. 창문을 닫고 어깨를 움츠리다
*
천사에게 침을 뱉다 꿈에서 내쳐지다
베개 위로 침이 마저 떨어지다
오늘은 수치를 배워볼까
상처가 살 속으로 잠기다. 인형들을 벽 쪽으로 돌려 앉히다. 어제 죽은 개가 창가에 와 울다. 농담을 생각하다. 이곳은 당신 사는 곳이 아닙니다. 꿈에 들어가 난장 피우다. 인형에게 영혼을 구걸하다. 미 안해, 난 널 더럽다고 생각하고 있어. 언젠가 꼭 한번 빨아줄게.* · 뻔 한 일을 두려워하다. 종일 방바닥에 침을 뱉다. 사랑받아 마땅한 사 람이 되다. 오늘은 수치를 배워볼까. 벽에 맨 등을 기대어 창밖을 내 려다보다. 가죽.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거야.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거라면 죽음은 영원이 아닌 거야. 매일 시계에 새 건전지를 갈아 끼 우다. 영원. 인형이 내 말을 듣고 웃다. 영원. 어깨에 귀를 대고 더 작 게 말하다
*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요 13 : 8)
- 「포교」 전문1 : 34-35
이 시는 제목인 「포교」에서부터 ‘종교적 신성’의 소재 및 주제 의식 이 강하게 노출되는 작품이다. 육호수의 첫 시집에는 이 시 이외에도 「철야」, 「고해 전일」, 「고해 당일」, 「소돔의 밤」, 「맛체바」, 「나의 어린 신이 집을 나간 날」, 「건망증이 심한 천사」 등의 작품들이 제목에서 부터 ‘종교적 신성’의 소재 및 주제 의식을 강하게 드러낸다. 제목뿐 만 아니라 작품의 본문까지 포함한다면 ‘종교적 신성’은 육호수 첫 시 집에서 가장 지배적인 상징체계를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종교적 신 성’의 상징체계는 그 대척점에 있는 ‘세속적 욕망’의 상징체계와 대립 적 구도를 이루면서 ‘신성과 세속의 길항’이라는 구조화 원리를 파생 시킨다. 그리고 이 구조화 원리는 상징체계들의 질서 속에서 각 계열 별로 이미지들을 접속시키면서 복수의 모티프들 중에서 ‘죄/참회(속 죄, 용서)’라는 중심 모티프를 파생시키고 고유한 미학적 방법론을 발 생시킨다.
인용한 시에서 ‘종교적 신성’의 상징체계에 속하는 대표적 이미지 인 “천사”는 “천국”, “빛”, “새” 등의 이미지를 연쇄적으로 접속시킨다. “천사” 이미지는 1연에서 3연의 초반부까지 그 은유인 “첫 음성”, “천 국에서 온 간첩”, “천국의 기쁨” 등으로 이어지면서 ‘종교적 신성’의 본 래적 의미가 유지되는 듯하지만, 3연의 초반부 이후에는 화자가 “고 민”하고 “방심”하며 “좀 더 포괄적 의미의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에 서 ‘세속적 욕망’의 상징체계와 만나 퇴색되거나 변질되는 모습을 보 여준다. 여기서 ‘세속적 욕망’의 상징체계에 속하는 대표적 이미지인 “세계”가 연쇄적으로 접속하는 이미지는 “모기”, “달걀”, “닭” 등인데, 화자가 말하는 “포괄적 의미의 인간”은 이러한 ‘세속적 욕망’의 대상 들과 연결되거나 연루되는 존재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빛” 이미지는 3연에서 5연까지 ‘종교적 신성’의 의미 맥락을 유지 하면서 화자에게 영향을 미친다. 3연에서 화자는 “풍선에 빛을 담아 창밖으로 던지”는데, 이어지는 “세계를 구하다 보면 세계와 사랑에 빠 지나 봐.”에서는 “빛”이 구원의 의미를 동반한다는 점뿐만 아니라 화 자가 세속의 영역과 절충하거나 타협하는 경과도 암시된다. 이 과정 이후 3연의 시상 전개는 ‘종교적 신성’과 ‘세속적 욕망’의 의미 맥락이 절충하거나 타협한 결과를 보여주는 듯하다. 화자가 “너도 나를 아주 불신하진 않는 거야”라며 “천사들과 농담하”는 모습과 “부흥. 우리는 죽음과 믿음 사이에 경계가 없다”라는 문장 등에서 ‘신성과 세속의 길 항’이라는 육호수 시의 구조화 원리가 모종의 변주를 일으킨다는 점 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세속의 영역과 절충하거나 타협하는 존재는 “빛”이 아니라 화자이다. 4-5연에서 “빛”은 “너무 많”이 “방에 쏟아 들 어와” 화자를 “꿈에서 깨”어나게 하지만, 화자는 “빛이 나를 완전히 통 과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며 “빛을 의심할 이유를 잃어가”는 데서 보이듯 “빛”에 대한 순응과 모반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다. 이 진동 이 후에 등장하는 “개” 이미지는 ‘세속적 욕망’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시 상 전개를 강하게 견인하고 있다.
한편 3연의 “새를 쫓다. 새가 아닐까 봐서”에서 잠시 등장하는 “새” 는 ‘종교적 신성’의 상징체계에 속하면서 육호수의 시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중심 이미지이다. 「나는 방을 감추는 사람입니다」를 분석 하면서 이후에 진행하기로 한 “새”에 대한 징후발견적 독해는 그 대 척점에서 “개”가 함축하는 ‘세속적 욕망’의 의미 맥락과 대비함으로 써 시도할 수 있다. 「나는 방을 감추는 사람입니다」와 「포교」에는 공 통적으로 “새”와 “개” 이미지가 등장하면서 상호 대립적인 의미 구조 를 형성한다. 「나는 방을 감추는 사람입니다」의 “문 앞에서 자꾸 죽 지 마”, “변기통에 새를 토하는 감옥”, “문 앞에 죽어 있던 몸들은/밤사 이 누군가 제 집으로 물고 갔다” 등의 문장에서 “새”가 함축하는 ‘종교 적 신성’과 “개”가 함축하는 ‘세속적 욕망’ 간의 대립적 위상이 유추된 다. 「포교」에서는 ‘종교적 신성’의 상징체계에 속하는 “천사” 이미지가 “빛”과 “새” 이미지를 접속하는 과정에서 “개” 이미지가 ‘세속적 욕망’ 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시상을 견인한다는 점에서 작품 내부에 이러 한 대립적 구도가 잠재되어 있다.
인용한 시에서 “개” 이미지가 등장한 6연 이후의 시상은 ‘세속적 욕 망’의 영역으로 무게중심이 기울며 전개된다. 7연에서 “천사에게 침을 뱉다 꿈에서 내쳐지다”에 이어지는 “오늘은 수치를 배워볼까”라는 문 장은 꿈속 무의식의 세계에서 “천사”와의 관계가 불화와 파멸로 치닫 자 현실로 추방되면서 “수치”를 경험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9연에 서 “상처가 살 속으로 잠기”고 “인형들을 벽 쪽으로 돌려 앉히”며 “어 제 죽은 개가 창가에 와”서 우는 장면들도 유사한 의미 맥락을 형성한 다. 이 상황에서 화자가 “생각하”는 “농담”은 중요한 징후발견적 독해 의 대상이 된다. 육호수 첫 시집의 핵심적 구조화 원리인 ‘신성과 세 속의 길항’에서 ‘종교적 신성’의 상징체계에 속하는 “천사”-“천국”-“빛” “새”의 이미지 계열이 ‘세속적 욕망’의 상징체계에 속하는 “개” 이미지 로 무게중심을 이동하면서 “침”-“수치”-“상처” 등의 연결고리를 거쳐 “인형” 이미지에 도달했을 때 시적 주체가 떠올리는 것이 “농담”이라 는 점에 주목해 보자. “농담”에는 새로운 시적 돌파구를 모색하려는 시도뿐만 아니라 자기포기적 좌절감과 자책적 죄의식도 내재되어 있 다고 볼 수 있다.
시적 화자는 “농담을 생각”한 이후에 “이곳은 당신 사는 곳이 아닙 니다.”라고 거부되어 “꿈에 들어가 난장 피우”기도 하고 “인형에게 영 혼을 구걸하”기도 하는 등 현실과 꿈의 공간을 왕복하면서 심리적 갈 등을 겪으며 방황한다. ‘세속적 욕망’의 영역으로 무게중심이 기운 상 황에서 ‘신성과 세속의 길항’이라는 여진이 계속되는 형국이다. 이 상 황에서 화자가 “인형”에게 “난 널 더럽다고 생각하고 있어. 언젠가 꼭 한번 빨아줄게.”라고 말하는 것은 베드로가 예수에게 “주여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요한복음 13장 8절)라고 말한 것을 인유하 는 데서 출발한다. ‘인유’에서 출발한 이 표현은 인형을 베드로의 위 치에 두고 화자 자신을 ‘예수’의 위치에 두는 ‘패러디’를 거쳐 죄책감 을 자조적이고 자학적으로 굴절시키는 ‘역설’에 도달한다. 필자는 ‘인 유’로부터 ‘패러디’나 ‘몽타주’를 경유하여 ‘역설’로 전이되는 방식을 육 호수 첫 시집의 고유한 미학적 방법론으로 간주하고자 한다. 앞에서 분석한 ‘농담’의 차원과 ‘인유’로부터 ‘패러디’나 ‘몽타주’를 거쳐 도달 하는 ‘역설’의 차원은 향후 육호수 시의 향방을 좌우하는 중요한 이정 표이자 질적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결절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육호수 첫 시집의 구조화 원리인 ‘신성과 세속의 길항’은 중심 모티프 인 ‘죄/참회(속죄, 용서)’를 파생하면서 ‘인유-몽타주-역설’이라는 미학 적 방법론을 연쇄적으로 발생시킨다. 육호수의 첫 시집을 전체적으 로 지배하면서 관통하는 이러한 미학적 특이성들은 ‘종교적 신성’과 ‘세속적 욕망’이라는 대립적 양극의 상징체계가 가지는 간극을 충돌 시켜 그 낙차로부터 시적 긴장을 얻어냄으로써 강한 시적 밀도와 강 도를 발생시킨다.
인용한 시로 돌아가서 “농담” 및 ‘인유’와 ‘역설’ 이후의 시적 전개 를 살펴보자. 화자는 “뻔한 일을 두려워하”고 “종일 방바닥에 침을 뱉”으며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 되”면서 이러한 모습을 “수치”라 고 간주한다. 이어서 화자는 “벽에 맨 등을 기대어 창밖을 내려다보” 고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거라면 죽음은 영원이 아닌 거”라고 말한 다. 화자는 “죽음”이 대변하는 유한한 시간인 ‘순간’과 “영원” 사이에 서 심리적 갈등을 지속하는 듯이 보인다. “매일 시계에 새 건전지를 갈아 끼우”는 태도는 ‘순간’과 “영원”을 충돌시켜 시적 긴장을 발생시 키는 모습을 연상시키지만, 화자는 이미 ‘세속적 욕망’의 영역에 깊이 몸을 담고 있어서 어딘가 무기력해 보인다. “영원. 인형이 내 말을 듣 고 웃다. 영원. 어깨에 귀를 대고 더 작게 말하다”라는 마지막 문장에 서 “영원”을 견지하려는 화자와 ‘세속적 욕망’의 영역에 속하는 “인형” 이 대면한 결과로 “웃”음이라는 ‘냉소적 유머’의 차원이 생겨난다. ‘냉 소적 유머’는 미학적 방법론의 측면에서 자기포기적 좌절감과 자책적 죄의식을 내포하는 “농담”의 차원과 모종의 연관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논의한 육호수 시의 미학적 방법론을 좀 더 심층적으 로 고찰하기 위해서는 ‘역설’에 대한 징후발견적 독해가 필요하다.
고개를 끄덕일 수 없다
거울에 이마를 댄 채
턱을 좌우로 흔들 수는 있다
차가운 두부 속으로 파고드는 미꾸라지처럼
무리 속으로 파고드는 어린 양의 엉덩이처럼
거울에 비벼대는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소년은
자신의 선함을 의심하지 않았을까 나는
칭찬을 받기 위해
고의적으로 실패하는 아이같이 굴었다
우리 둘 중 누군가 먼저 몸을 돌려 달아난다면
등을 바라보는 사람은 맹수가 되어야 한다고
가지 말아달라고
누군가 애원하고 있다
역설 없는 곳에서
긴 잠을 잘 수 있다면
우리가 같은 주머니 속이라면
*
심해어에게 어둠은 무엇일까
빛이 없던 시절
신의 불면에 대해 생각하며 뒤척일 때
불 꺼진 방
누군가 거울 속에서
나를 빤히 보고 있다
어둠을 향해 개가 짖을 때
개의 적개심은 어디에서 생겨난 걸까
그러나 나는 어둠 속에서
무엇도 지켜낸 적 없다
목자의 아들 혹은 독사의 자식
어둠 속에서
맹수의 노란 눈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어둠의 뒤를 노려본 적 없다
목자의 아들
독사의 자식
나의 적(敵)은 천국에 있다
나는 천국에 가야 한다
꿈에서도 내가 싸우길 바라며
꿈속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응원했다
그러나 꿈속에
그 많은 개를 풀어놓은 건 누구였을까
- 「나의 어린 신이 집을 나간 날」 전문(1 : 56-58)
이 시는 제목인 「나의 어린 신이 집을 나간 날」에서부터 ‘종교적 신 성’의 세계에서 이탈하고 모반하는 주제 의식이 나타나는 작품이다. 이 시에서 중요한 부분은 핵심 이미지로 등장하는 “거울”과 육호수 시의 미학적 방법론인 ‘역설’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다. 전반부는 전 체적으로 시적 화자가 “거울”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상황을 묘사한 다. 1-2연에서 화자는 “거울에 이마를 대”고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상황과 “턱을 좌우로 흔들 수는 있”는 상황을 묘사한다. 3연 이후에 “거울”에 비치는 “소년”은 화자의 내면적 자아로서 유년의 자신이라 고 간주할 수 있다. “자신의 선함을 의심하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은 ‘선/악’ 및 ‘믿음/의심’의 기준을 통해, “칭찬을 받기 위해/고의적으로 실패하는 아이같이” 구는 모습은 ‘위선/위악’의 기준을 통해 ‘죄/참회’ 라는 중심 모티프를 변주시킨다. 이 두 문장에서 화자는 공통적으로 종교적·윤리적 기준이 전제하는 이분법적 구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적 화자가 ‘선/악’, ‘믿음/의심’, ‘위선/위악’ 등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도달하는 곳은 “역설”의 지점인데, 흥미로운 부분 은 화자가 다시 이 “역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4-5연에서 “우리 둘”은 “거울”을 사이에 두고 바라보는 화자와 “소 년”인데, “우리 둘 중 누군가 먼저 몸을 돌려 달아난다면/등을 바라보 는 사람은 맹수가 되어야” 하는 까닭은 현실적 자아와 내면적 자아 간 에 불화가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불화는 화자가 ‘선/악’, ‘믿음/ 의심’, ‘위선/위악’ 등의 이분법에서 벗어난 지점에서 만나는 이율배반 적인 모순의 “역설”과 긴밀히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가지 말아달라 고/누군가 애원하”는 이유도 잠재된 “역설”이 노출되는 것을 두려워 때문이고, 화자가 “역설 없는 곳에서/긴 잠을 잘 수 있다면/우리가 같 은 주머니 속이라면”이라고 소망하는 말에도 “역설”에 대한 두려움이 직설적으로 표현된다. 여기서 필자는 “거울” 이미지와 “역설”이 긴밀 한 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하는데, 시의 후반부를 분석하면서 이 점을 해명해 보기로 하자.
후반부는 전체적으로 “거울”을 사이에 두고 ‘시선’과 ‘응시’가 상충 하는 상황을 제시하고 “개”가 등장한 이후에 “역설”의 중심 내용이 등장한다. 1-2연에서 화자가 “빛이 없던 시절/ 신의 불면에 대해 생 각하”는 대목에서 “빛”과 “신”의 연관이 은연중에 드러난다. “불 꺼진 방//누군가 거울 속에서/나를 빤히 보고 있다”에서는 “거울”이 화자의 ‘시선’과 “누군가”의 ‘응시’가 충돌하는 지점으로 등장한다. 라캉은 주 체가 세계를 보는 눈인 ‘시선’과 구별하여 주체를 바라보는 세계 혹은 타자의 눈을 ‘응시’라고 개념화한다. 라캉에 의하면 ‘응시’는 주체의 시선보다 앞서 존재하는데 이로 인해 주체는 모든 방향으로부터 보 이는 자로서 세계의 스펙트럼 속에서 하나의 얼룩으로 존재할 따름 이다. 이 개념을 차용하면 육호수 시에서 “거울”은 ‘주체의 시선’과 ‘초 자아의 응시’가 상충하면서 “역설”을 발생시키는 지점이 된다. 여기서 육호수 첫 시집의 구조화 원리인 ‘신성과 세속의 길항’이 미학적 방법 론을 파생시킬 때 ‘인유’에서 출발하여 ‘몽타주’를 거쳐 ‘역설’에 도달 하는 과정 중에 ‘주체의 시선’과 ‘세계의 응시’의 충돌이 내밀하게 개입 된다는 무의식적 메커니즘의 비밀이 드러난다.
화자는 4연의 “어둠을 향해” “짖”는 “개”의 “적개심”과 “어둠 속에 서/무엇도 지켜낸 적 없”는 “나”의 죄책감이 충돌할 때 “거울”이 발생 시키는 “역설”을 통과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목자의 아들 혹은 독 사의 자식”이라는 이율배반적인 모순으로 표출한다. 6연에서 “어둠 속에서/맹수의 노란 눈이 나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은 주체를 응시하 는 존재가 “신”이 아니라 “맹수”라는 점에서 화자가 “노려본 적 없”는 “어둠”의 정체가 “역설”을 발생시킨다. 7-8연에서 반복되는 “목자의 아들/독사의 자식”이라는 역설은 화자가 “천국에 있”는 “적(敵)”과 싸 우기 위해 “천국에 가야”하고 “꿈에서도 내가 싸우길 바라며/꿈속으 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응원”하는 대결의 의지로 귀결됨으로써 정점 에 도달한다. 따라서 이 시도 육호수 첫 시집의 구조화 원리인 ‘신성 과 세속의 길항’이 대립적 양극의 간극을 충돌시켜 그 낙차로부터 얻 어지는 시적 긴장을 유지하면서 시적 밀도와 강도를 확보하게 된다.
이 글은 육호수의 첫 시집에 나타나는 다양한 상징체계들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종교적 신성’과 ‘세속적 욕망’이라고 간 주하고, 이 두 상징체계의 대립적 구도가 형성하는 ‘신성과 욕망의 길 항’을 육호수 시의 구조화 원리로 도출했다. 그리고 이것이 파생하는 복수의 모티프들 중에서 ‘죄/참회(속죄, 용서)’를 중심적 모티프로 간주 하고, 이것과 접속하면서 시적 추동력을 부여하는 핵심적인 미학적 방법론을 ‘인유-몽타주-역설’을 중심으로 분석했다. 또한 미학적 방법 론이 ‘인유’에서 출발하여 ‘몽타주’를 거쳐 ‘역설’에 도달하는 과정 중 에 ‘주체의 시선’과 ‘세계의 응시’의 충돌이 내밀하게 개입된다는 무의 식적 메커니즘을 해명하고, ‘농담-냉소적 유머’의 차원과 ‘인유-몽타 주-역설’의 차원이 향후 육호수 시의 향방을 좌우하는 이정표이자 질 적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결절점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두 번째 시 집 『영원 금지 소년 금지 천사 금지』 이후의 육호수 시가 상징체계, 구 조화 원리, 모티프, 미학적 방법론 등의 측면에서 어떤 질적 변화를 보여주는지 살피는 것은 다음 기회를 기약하고자 한다.
- 1) 육호수의 시집은 『나는 오늘 혼자 바다에 갈 수 있어요』(아침달, 2018),『영원 금지 소년 금지 천사 금지』 (문학동네, 2023) 등이 있다. 이 글에서 육호수의 시는 여기서 인용하되 시집은 출간된 순으로 번호를 달아 ‘(시집 번호 : 쪽수)’로 출처를 표시한다.
- 2) 최선교, 「시 쓰기/꿈 쓰기」, 《문예바다》 2023년 봄호, 123-133쪽.
- 3) 김준현, 「낮은 밤의 꿈」, 『영원 금지 소년 금지 천사 금지』 해설, 문학동네, 2023, 150-173쪽.
- 4) 박다솜, 「낡은 장소와 없는 장소」, 《현대시》 2023. 6, 181-192쪽.
- 5) 최선교, 「친절한 편지」, 《포지션》 2023년 여름호, 81-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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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운은 첫 시집 『감은 눈이 내 얼굴을』(민음사, 2016)에서 시적 주체가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환영적 프레임을 설정하고 대상을 바라보는 다각적 시선을 통해 시간 및 공간의 안팎을 이동하면서 균열과 어긋남과 소멸의 미학을 형상화했다. 그는 두 번째 시집 『산책하는 사람에게』(문학과지성사, 2020)를 통해 전체적인 시적 구도를 환영적 프레임에서 일상적 현실의 프레임으로 전이하고 편지 형식이나 서사적 진술을 시도하는 동시에 산책을 통해 시간 및 공간의 안팎을 이동하면서 타인이나 동물과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시적 실천을 보여주고, 세 번째 시집 『기억 몸짓』(문학동네, 2024)에서는 보고 생각나는 것을 따라 산책하고 생각하는 화자를 통해 시적 리듬감을 동반하면서 계절적 일상을 담담한 회상의 어조로 표현한다. 우리는 안태운 시의 전체적 구조를 지배하는 핵심적인 분석소를 시적 화자인 '나'와 대상인 '그(너)'의 관계, 시적 공간 및 심리의 위상으로 '안'과 '밖', 중요 모티프로 '빛'과 '물(비)', '소리'와 '침묵', '공터', 시적 서사의 사건으로 '바라봄', '걸어감', '산책', '사라짐' 등을 설정하고 상호 연관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미학적 특이성(singularity)을 추출해 볼 수 있다. 안태운의 시는 기본적으로 시적 주체가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환영을 통해 대상을 바라보는 프레임을 제시한다. 첫 시집 『감은 눈이 내 얼굴을』의 대표적 작품인 「얼굴의 물」은 이 기본 프레임 속에서 화자가 대상인 "그"를 관찰하는 장면 묘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여기서 공간적·심리적 위상으로 "안"과 "밖", 중요 모티프로 “빛”과 "비"가 설정되고 서사적 사건으로 '안에 있음'-'밖으로 나감'-'비가 내림'-'되뇌고 걸어감'-'얼굴의 물 안팎으로 드나듦'-'물이 차오르고 얼굴이 씻겨나감'이 진행된다. 안태운 시의 중요한 미학적 특이성은 대상을 바라보는 화자의 미분적 시선이 시시각각 다각도의 장면을 파편적으로 포착하여 시간 및 공간의 연결을 차단하고 주체와 대상의 정체성 및 관계성에 균열을 일으키는 데 있다. 이 시에서 화자가 관찰하는 대상인 "그"의 모습은 시 전체에 반복적으로 나열되는 "~고"라는 연결어미에 의해 통일된 전체적 시점이 분기됨으로써 다각적이고 다층적인 장면으로 파편화된다. 안태운의 시는 언술 구조의 층위에서 "~고"라는 연결어미의 나열과 접속부사의 파행적 구사를 통해 상식적이고 통상적인 사고의 질서에서 이탈하는 화자의 미분적 시선을 구조화시킨다. "안"과 "밖"은 '방'의 공간을 기준으로 설정되는 물리적 개념인 동시에 '심리'의 영역을 기준으로 설정되는 정신적 개념이기도 하다. "안"-"안개"/"밖"-"빛"-"비"라는 대비적 구도가 설정되는데, 중요한 부분은 일견 대립적 이미지로 간주될 수 있는 "빛"과 "비"가 모두 "밖"의 영역에 속한다는 점이다. 안태운 첫 시집의 중심 이미지를 이루는 '물'은 주체의 공간적·심리적 밖의 영역에서 안의 영역으로 침입함으로써 동요와 균열과 상처를 주는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안태운의 시는 화자의 시선이 거리를 두고 자신의 꿈을 관찰하면서 묘사하는 시점을 채택하므로 무의식적 꿈을 조망하는 언술 구조를 형성한다. 이로부터 주관적 감정이나 과잉된 감응을 배제하고 객관적이고 무미건조하며 심리적 거리를 가지는 문체적·구문적 특이성이 생겨난다. 기본적으로 무의식적 꿈을 조망하는 안태운의 시는 대상인 '그(너)'의 공간적 위상과 심리적 양상 및 행동적 상황이 '안'과 '밖'의 위상학을 중심으로 구조화된다. 「얼굴의 물」이 화자가 대상인 "그"를 관찰하는 장면 묘사로 일관하고, 「원경」이 화자가 대상인 “너”를 관찰하는 장면 묘사를 계속 전개하다가 자신인 '나'를 개입시킨다면, 「감은 눈으로」는 시종일관 화자가 자신인 "나"의 모습을 묘사한다. 이러한 차이를 '꿈'과 '현실'의 관계라는 관점으로 재서술하면, 「얼굴의 물」이 화자가 대상인 "그"를 바라보고 관찰하는 장면 묘사를 중심으로 '무의식적 꿈'의 구도를 유지하고, 「원경」이 화자가 대상인 “너”를 관찰하는 장면 묘사를 중심으로 '무의식적 꿈'을 전개하다가 자신인 '나'를 개입시켜 '현실'을 삽입한다면, 이 시는 화자 자신이 '무의식적 꿈'에서 내쳐지는 과정을 묘사하여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동요하는 모습을 형상화한다. "감은 눈"은 '잠'과 연결되고 '무의식적 꿈'의 영역과 결속하므로 "꿈으로부터 내쳐진다". "감은 눈으로"라는 구절은 화자가 '잠'이나 '무의식적 꿈'의 영역에 머물고 싶어 하지만 비자발적으로 현실로 쫓겨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부러 눈 뜨지 않고 걸으면"이라는 구절은 화자가 쫓겨난 현실에서 의지적으로 눈을 감는 모습을 제시하는데, 이를 통해 "나와 함께 내쳐진 논이 있고 논 위로 걷는 내가 만져지는" 상황이 가능해진다. 화자는 현실로 쫓겨남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음으로써 현실에 꿈의 동력을 개입시키려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안태운 시의 꿈/현실, 안/밖의 관계에 대한 두 가지 특이점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는 꿈에서 현실로 이동할 때 꿈의 실재가 현실의 리얼리티로 전이되어 나타난다는 점이고, 둘째는 현실의 화자가 꿈속의 자신을 관찰하는 객관적 거리뿐만 아니라 꿈에서 현실로 추방된 자신을 관찰하거나 감각하는 객관적 거리를 가짐으로써 이중의 거리 감각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중의 거리 감각은 안태운 시 특유의 미분적 시선이 생성시키는 다각적이고 다층적인 몽타주 기법과 결부되면서 미학적 특이성을 강화시킨다. 안태운은 "걷고 난 후의 일들"이 "다른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시적 가능성을 두 번째 시집 『산책하는 사람에게』에서 모색한다. 안태운이 모색하는 새로운 시적 가능성은 표면적으로 '편지 쓰기'와 '산책하기', '동물로 대표되는 비인간과 인간의 관계 재구성' 등을 통해서 수행되는데, 우리는 이러한 표면적 수행성의 차원뿐만 아니라 그것을 근저에서 지탱하며 발생시키는 심층적 미학성의 차원도 안태운 시의 중요한 요소라고 간주하고 새로운 시적 가능성의 양상을 '소리의 침묵'과 '공터의 공백'에서 찾을 수 있다. 안태운의 두 번째 시집에 수록된 「빈방의 빛」에서 시적 화자는 초반부에서 "빈방의 빛에 대해서 써야 한다고 생각"을 오래전부터 하다가 "강박"이 드는 상황에 이르러 그것에 대해 진술하기 시작한다. "빈방의 빛"에 대한 진술은 중반부에서 "비질하는 소리"가 제시된 이후 일련의 "소리"에 대한 진술로 이동한다. “소리"가 "배경음"으로 작용하여 무위의 삶에서 벗어나 '행위(몸의 이동)'를 유발하는 동인(動因)이 되고, "지도"는 "소리"라는 "배경음"에 의해 촉발되는 '행위(몸의 이동)'가 현실화되기 위해 경유하는 매개로 작용한다. 그리고 "소리"와 "지도"의 상호 침투적 왕복이 "멀리 빈방의 빛"에 이르러 미지의 시공간에 존재하는 또 다른 "빈방의 빛"을 연상하는 장면에 도달한다. 이러한 시상 전개는 "빈방의 빛"-"비질하는 소리"-"여행자들의 목소리"-"모의하는 소리"-"지도"-"다시 소리"-"멀리 빈방의 빛"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시상 전개를 거쳐서 등장하는 대상들이 바로 "개와 고양이"라는 동물이다. 무의식의 연상 기법으로 진행되는 이 시의 시상 전개는 "빈방의 빛"에서 출발하여 다양한 '소리들'과 "지도" 간의 상호 침투적 왕복을 거치고 "멀리 빈방의 빛"을 경유하여 다시 "빈방의 빛"에 도달하는 재귀적 순환의 구조를 보여준다. 이 재귀적 순환 속에서 시적 주체가 추구하는 큰 틀의 지향성은 "빈방의 빛"에서 벗어나서 "개와 고양이를 따라서 가"며 "전철을 타고" "터널을 지나"가는 '행위(몸의 이동)'라고 할 수 있다. 이 행위의 연장선에서 안태운이 두 번째 시집에서 모색하는 새로운 시적 가능성이 표면적으로 '편지 쓰기'와 '산책하기', '동물로 대표되는 비인간과의 관계 재구성' 등을 통해 수행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두 번째 시집의 표면적 흐름에 대한 비평적 조명뿐만 아니라 이것을 가능케 한 동인으로서 "빈방"이라는 공백, "소리"라는 "배경음”, “소리"와 "지도"의 상호 침투적 왕복, "멀리 빈방의 빛"이라는 미지의 시공간 등에 대한 비평적 해명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안태운의 두 번째 시집에서 표면적 수행성의 차원을 근저에서 지탱하며 발생시키는 심층적 미학성의 차원은 주로 '소리의 침묵' 및 '공터의 공백'에서 발견된다. 「인간의 소리」에서 화자는 "사람들"이 "동물에 흡사하다고 느끼는 소리를 내"지만 "인간의 소리"에 주안점을 두고 그 근원적 의미를 천착하는 과정에서 "침묵"과 "웃음"이 내포하는 의미를 "밤"-"끝없는 들판"-음악-"춤"-'멀리서 들려오는 기이한 소리'에서 찾는다. 이와 유사하게 「목소리」에서 화자는 "너"가 우연성에 근거하는 "풍경 소리"를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어"서 "사람을 찾"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이 상황에 맞서 "너는 네 목소리를 내보지만 "풍경 소리 같지는 않았"기 때문에 "네 목소리 뒤로 돌아 나"가고 “다른 소리들마저 다 뒤로 돌아 나가"는 "풍경 소리"의 근원적 차원인 '침묵'과 '공백'에 대해 제시한다. 그리고 「공터를 통해」와 「흰 개를 통해」는 화자인 "나"와 "공터"와 "흰 개"를 중심으로 "산책"이라는 행위가 제시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여준다. 「공터를 통해」에서 "공터"는 "나"와 "흰 개"의 시선이 어긋나는 공간적 개념인 동시에 '과거'와 '현재'가 어긋나는 시간적 개념을 융합시킨 '시차(視差/時差)적 공백'이고, 「흰 개를 통해」의 "공터"도 "나"와 "흰 개"의 시선이 어긋나는 공간적 개념인 동시에 '과거'와 '현재'가 어긋나는 시간적 개념을 융합시킨 '시차(視差/時差)적 공백'이다. 따라서 이 두 시의 중심 주제를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산책'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화자 "나"와 "흰 개" 간의 긍정적인 결속이나 '여전히 지금-이곳에서 비인간동물이 배제되고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견고한 분할선이 존재한다' 등의 주제를 도출하는 표면적 수행성의 차원뿐만 아니라 "공터"가 시선의 어긋남과 시간의 어긋남이라는 '시차(視差/時差)적 공백'을 내장하면서 표면적 수행성을 근저에서 지탱하며 좀 더 복잡미묘하고 깊은 의미를 발생시키는 이중의 시적 장치로 작용한다는 심층적 미학성의 차원까지 규명해야 한다. 이러한 안태운 시의 미학적 특이성을 염두에 두면서 최근작 중에서 한 편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손끝의 장소 물갈퀴로 흘러드는 횡목 하오 당신은 몸이 어디서 시작되고 끝나는지 모르는데 당신은 부딪치오 시간의 끝에서 울다 공간과 사물로 있다 발가락을 움직여봐 모빌과 함께 산책해 있다 당신은 양의 집 근처에 가서 부른다 하지만 양은 어딘가로 나가 있었다 그러므로 당신은 뒤돌아 뛰어갔다 하오 놀았다오 자러 가기 전에 안부를 물었다오 음소 단위로 노래를 불렀다오 아름다웠다오 두 얼굴 뒤에 숨었다오 커튼 뒤로 내 뒤로 어느새 내 앞으로 도요새가 날아간다 당신은 몇 걸음 걷다가 체육을 했다 기억의 덩어리가 날아들었다 쐐기의 관계 하오 건물에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구름은 광장처럼 떨었다오 그사이 당신은 뒤돌아 망설였다오 우표를 붙였다오 당신을 사랑하오 수레와 함께 움직인다 민달팽이가 퍼져나간다 잔등과 환초 하오 당신이 어른이 되다니 당신이 어른이 된다니 - 「하오」 전문 이 시는 첫 시집에서부터 두 번째 시집까지 진행해 온 안태운 시의 미학적 특이성뿐만 아니라 세 번째 시집 이후의 변모까지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화자인 '나'와 대상인 "당신"의 관계, 중요 모티프로 "빛"과 '소리'("노래"), 시적 서사의 사건으로 '바라봄', "산책", 비인간으로서 "양", "도요새", "민달팽이" 등이 첫 시집에서부터 두 번째 시집까지 진행해 온 특이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대상을 바라보는 화자의 미분적 시선이 시시각각 다각도의 장면을 파편적으로 포착하여 시간 및 공간의 연결을 차단하고 주체와 대상의 정체성 및 관계성에 균열을 일으키는 첫 시집의 시적 방법론이 견지된다는 점이다. 이 방법론이 은연중에 노출된 부분은 "당신은 부딪치오 / 시간의 끝에서 울다 / 공간과 사물로 있다"라는 문장이다. 안태운은 두 번째 시집 이후에 전체적인 시적 구도를 환영적 프레임에서 일상적 현실의 프레임으로 전이하고 산책을 통해 시간 및 공간의 안팎을 이동하면서 타인이나 동물과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시적 실천을 보여주었고, 이와 연동하여 시의 공간적·심리적 위상으로 '안'과 '밖', 중요 모티프로 "빛"과 "비"가 설정되면서 "안"-"안개"/"밖"-"빛"-"비"로 구조화되었던 첫 시집의 대비적 구도가 평면적 구도로 병합되었다. 그러나 편지 형식이나 서사적 진술을 시도하는 동시에 타인이나 동물과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이러한 일상적 현실의 프레임에서도 미분적 시선을 통해 공간과 시간의 안팎을 분할하는 동시에 연결하면서 이동하는 안태운 특유의 시적 방법론을 견지하고 있다. "건물에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 구름은 광장처럼 떨었다오 / 그사이 당신은 뒤돌아 망설였다오 / 우표를 붙였다오 / 당신을 사랑하오"라는 구절은 화자가 "그사이"라는 찰나적 시간을 경계로 "건물에" "들어오고 있"던 "빛"과 "광장처럼 떨었"던 "구름"이라는 자연적 풍경을 묘사하고 "뒤돌아 망설"이면서 "우표를 붙였"던 과거의 "당신"을 기억하면서 "당신을 사랑하오"라는 현재의 감정을 표출하는 자신의 모습을 미분적 시선으로 포착하면서 제시한다. 이 시선에는 현재의 화자가 과거의 장면을 회상하면서 자신의 현재 감정을 표현하는 시간적·공간적 격차가 충돌 몽타주의 방법으로 농축되어 있다. 그리고 "수레와 함께 움직인다 / 민달팽이가 퍼져나간다 / 잔등과 환초 / 하오 / 당신이 어른이 되다니 당신이 어른이 된다니"라는 구절은 화자가 "하오"라는 찰나적 시간을 경계로 "수레와 함께 움직인"고 "민달팽이가 퍼져나"가는 "잔등과 환초"라는 현재의 자연적 풍경을 묘사하면서 "당신"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지속을 통해 "어른이 되"는 과정을 미분적 시선으로 포착하면서 제시한다. 이 시선에는 현재의 화자가 현재의 장면을 묘사하면서 "당신"이 "어른이 되"는 과정을 현재완료적으로 회상하는 시간적·공간적 격차가 충돌 몽타주의 방법으로 농축되어 있다. 안태운의 독자적인 시적 방법론에 해당하는 미분적 시선과 시차(視差/時差)적 공백이 향후 어떤 모습으로 진화해 나가는지 주목하기로 하자.
1. 고통의 상상력 “학살 이전, 고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1) 이것은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Primo Levi)의 문장이 아니다. 『소년이 온다』에 나오는 한강의 문장이다. 그 단호함이 너무 고통스럽고 너무나 처절하여 차라리 숭고하다. 또 “증언. 의미. 기억. 미래를 위해”(p. 166) 기록하거나 증언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이가 있다고 말한다. 어떻게 증언할 수 있느냐고 통절하게 절규한다. “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수십번 후벼들어왔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궁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킨 당신을 그들이 통합병원으로 데려가 수혈받게 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이년 동안 그 하혈이 계속되었다고, 혈전이 나팔관을 막아 영구히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pp. 166~167). 이렇게 증언할 수 없는 것을 증언하기, 그렇지만 끝내 증언할 수 없으므로 증언할 수 없는 고통까지 겹쳐서 역설적으로 극화하기, 한강의 고통스러운 숭고미는 필경 거기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물론 그것은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한강의 경우에만 특화된 수사학은 아니다. 많은 이가 아프니까, 고통스러우니까 쓴다고 한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상상력으로 넘어서기 위해, 상상력으로 고안한 대안 세계로 고통스러운 현실을 치유하기 위해 쓴다고 토로한다. 가령 아직 드러나지 않았던 감정을 창조했고, 인간의 깊숙한 내부에 숨겨져 있던 무의식을 표출시킨 작가 도스토옙스키도 그렇지 않았던가. 그는 인간의 고통과 욕망과 열정의 극한까지 추구하며 우주의 심연을 향해 다가갔다. 두루 알다시피 저물어가는 황혼의 잿빛 러시아의 하늘 아래서 가슴을 짓이기며 살았던 인물이었다. 영혼의 상처를 휘감고 도는 어둠의 정체를 그는 언제나 직시하고자 했다. 은총과 정의가 사라진 고통스러운 연옥, 그 불행과 절망의 황무지에서 전율해야 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분노에 찬 이반 카라마조프가 말하듯, 도스토옙스키의 대지는 그 심연의 핵심까지 고통의 눈물로 젖어 있는 형국이었다. 어디를 가도 어디를 보아도 타락의 나락으로 빠지는 죄 많은 인간의 처참한 몰골뿐이라고 했던 드미트리 카라마조프의 탄식에서도 세계의 고통에 대한 감각은 뚜렷하다. 이같이 타락하고 죄 많은 현실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영혼의 구원을 갈망한다. 고통의 심연에서 고통을 초극할 수 있는 참 지혜는 그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고통을 통해서만 진실로 사랑할 수 있다고 한 이는 이반 카라마조프였다. 어쩌면 우리는 도스토옙스키 문학 세계를 횡단하고 성찰하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괴로워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도스토옙스키에서 한강에 이르기까지 진정한 작가들은 대개 ‘고통의 향유’를 통한 미학적 실천을 통절하게 수행했다. 작가들만이 아니다. 고통이 바로 사유의 시작이라고 했던 철학자 레비나스, 예술을 ‘고통의 언어’라고 불렀던 아도르노, 예술적 쾌락원칙의 역승화를 낳게 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현실과 그 현실원칙의 강고함에 있다고 했던 마르쿠제, 이야기와 함께 경험되는 허구적 체험을 일러 절망 속에서 하는 희망의 체험이라고 논의한 폴 리쾨르, 소포클레스의 『필록테테스』에 나타나는 상처/고통과 신궁의 기예 사이의 역설에서 예술가의 존재론을 착안하여 상처와 고통을 통한 예술적 영광을 강조했던 미국의 비평가 에드먼드 윌슨 등등의 사유와 고민이 함께 만나는 자리이기도 했다. 어쩌면 ‘고통의 향유’란 가장 인간적인, 그리고 가장 고귀한 예술적 과정이 아닐까.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응시하면서, 문학의 이름으로, 고통을 향유하는 지독한 역설을 수행할 때, 문학은 자연스럽게 치유의 지평을 예비하며 비극의 숭고미의 어떤 극점을 알게 된다. “학살 이전, 고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라는 사실을 단호하게 추문화하며, 독자와 더불어 정녕 인간적인 심연의 질문을 열어나간다. 한강 문학의 바탕 의식은 그러하다. 2. 영매(靈媒) 작가와 고통의 법열(法悅) 고통의 순간은 널려 있겠지만, 가장 비극적인 장면은 아무래도 전쟁터나 홀로코스트 현장에서 두드러진다. 트로이전쟁을 다룬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때부터 그렇지 않았던가. 그러기에 많은 작가, 예술가들이 반전사상이나 반폭력에의 연대를 열정적으로 펼쳤다. 파블로 피카소도 그런 경우 아닌가. 이른바 피카소의 3대 반전 작품, 그러니까 <게르니카>(1937), <시체구덩이>(1946), <한국에서의 학살>(1951) 등만을 떠올려도 그렇지 않은가. 큐비즘의 방식으로 고통을 입체적으로 형상화했던 피카소처럼, 한강 역시 고통의 서사가 선형적으로 재현되기보다 입체적으로 포개어지며 고통의 심연으로 한없이 내려간다. 그러면서 매우 인상적인 장면을 전경화한다. 피카소가 여러 방향에서 본 이미지를 한 화면에 구성했듯이, 한강도 상호 시점이거나 복합 시점으로 깊은 고통을 응시하면서, 곡진한 시적 문체로 장면화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서둘러 답하자면 한없이 그윽한 영매(靈媒) 작가이기에 가능하다. 사람과 사람, 산 자와 죽은 이, 인간과 동물, 인간과 식물 사이에서 하염없이 고통받으며, 끊어진 영혼의 길을 이어주려는 감수성과 상상력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렇다.2) 그녀는 있는 이야기, 있었던 과거를 단지 그대로 재현하는 작가가 아니다. 있었던 사건에서 고통받은 이들의 차가운 손을 어루만지고, 이미 식어버린 영혼 안으로 스며들어 시리면서도 뜨거운 감각의 실존을 수행한다. 스며든 순간에 몰입하여 시나브로 엑스타시의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 법열(法悅)의 에너지와 감수성으로 말미암아, 한강이 스며든 어떤 인간이나 사물도 단지 홀로인 존재의 차원을 넘어선다.3)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게 되는, 더 나아가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더불어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 죽은 이도 새롭게 시선과 목소리를 지니게 되며, 가장 고통스럽고 속절없는 서발턴(subaltern) 혹은 벌거벗은 호모 사케르들의 눈물 속에서도 청량한 생명의 메시지를 얻게 된다. 무엇보다 고통의 심연을 길어 올리는 한강의 시적 문체는 중층적 가역반응의 결과이자 원인이다. 자아와 세계가 충돌하면서도 그 충돌한 세계를 엄청난 에너지로 끌어안는 자아의 감수성으로 인해, 그토록 이상한 가역반응의 결과로 빚어질 수 있었던 게 한강의 시적 문체이다. 다시 말해 문학적 정의의 이름으로 심판해야 마땅할 역사적 트라우마를 다루면서도 그 고통의 만화경을 모두 자기 안에서 끌어안고 ‘고통하기’에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역설적으로 아름다운 문체로 빛난다. 그런 시적 문체를 독자들이 읽으면, 독자 또한 새로운 가역반응을 일으킨다. 아름다운 문체에 이끌려 한강의 세계로 들어간 독자는 그 안에 들어있는 엄청난 고통의 항아리에서 슬픔의 숨결과 교감하면서 함께 고통을 나누려는 진실한 인문적 인간으로 거듭나는 가역반응의 대열에 동참하게 된다. 이것은 단순한 것일 수 없다. 서로의 외로운 영혼을 이어주는 현묘한 영매 작가의 창작과 소통 과정에서 매우 복합적으로 빚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강은 19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소설 「붉은 닻」(필명: 한강현)으로 당선되기 한 해 전인 1993년 계간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 「서울의 겨울」외 4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그 전에 연세대 4학년 때인 1992년 시 「편지」로 연세대 신문인 <연세춘추>가 주관한 연세문화상-윤동주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때 심사위원은 정현종 시인과 김사인 시인/평론가였다. 애도의 정념과 밀도가 어지간한 이 시에 대한 심사평도 인상적이다. 한강 시의 능숙함을 칭찬하는 과정에서 “굿판의 무당의 춤과 같은 휘몰이의 내적 열기를 발산하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독특하며, “그러한 불과 같은 열정의 덩어리”에 들어있는 풍부한 에너지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청 시절부터 이미 한강의 샤먼 시인, 영매 작가로서 에너지가 넉넉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면에서 1992년 심사위원들의 안목은 탁월했다. 샤먼 시인 한강의 곁에 있는 ‘나무’는 대개 “하늘과/ 나를 이어주”(「새벽에 들은 노래 2」)4)는 우주목(宇宙木, cosmic tree)이다. 『채식주의자』 『작별하지 않는다』 등 여러 작품에서 꿈 장면에 그런 우주 나무들이 모여 있는 신비로운 숲의 정경이 자못 긴장감을 형성한다. 그런 우주 숲에서 서사 속 캐릭터는 종종 엑스터시의 순간으로 입사한다. 가령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도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 숲에서 밀물에 떠밀려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죽음들의 풍경을 떠올리던 주인공은 갑자기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고 서술한다. “마치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과 같은 떨림”이었지만, 공포, 불안, 전율, 혹은 “돌연한 고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어떤 것에 휩싸인다. 그런 전율과도 같은 떨림의 순간을 고통스럽게 침례한 다음 “이가 부딪히도록 차가운 각성”5)에 이른다. 이런 떨림과 고통, 전율과 공포, 불안과 각성의 과정에 몰입하는 영매 작가의 에너지는 엄청나다. 마치 작두를 타는 무당의 열기를 방불케 한다. 그 순간 끊어졌던 여러 관계가 이어지고, 안 보였던 상처의 얼룩들이 보이고,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가 들린다. 가령 「거울 저편의 겨울 6―중력의 선」이라는 시는 아르헨티아를 방문한 샤먼 시인이 중력의 선을 따라 지구 반대편 한국의 풍경을 보는 이야기로 이루어진다. 남미 대륙 남부에 원래 살던 인디오들을 거의 절멸시키고 아르헨티나를 건설한 군인 “로카의 동상을 올려다보다가” “반대편의 학살을 생각”6)하는 “나”의 초상을 전경화한다. 그렇게 “난자하는/ 죽음의 직선들을 생각하는 나는” 거기에 몰입하여 1980년 5월 광주에서 죽어간 어리고 여린 영혼 ‘동호’의 눈이 되고 입이 되어준다. ‘80년 5월 광주’를 애도한 『소년이 온다』는 그렇게 우리에게 전해지고 세계문학사를 수놓게 된다. 1970년 광주에서 태어난 한강은, 불과 몇 달 전인 1980년 1월 서울로 이사했다고 한다. 만약 이사하지 않았더라면 작중 동호의 처지가 되지 않았다는 보장이 없었던 상황이었기에, 한강은 더욱 고통스러워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동호를 비롯해 가장 고통스럽게 죽어간 비통한 유령들을 애도하는 영매자가 되려 했던 것이 아닐까. 국가 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 이전에 가족사의 비애도 고려해 볼 수 있다. 『흰』에서 드러나는 너무나도 일찍 죽은 언니 이야기, 어머니가 스물세 살에 낳은 첫 딸의 이야기, 엄마가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7)이라며 간절히 발원했음에도 불구하고 허망하게 먼저 간 언니 이야기 말이다. 이 가족사는 들을 수 없었던 아이를 대신해 들어야 하고, 말할 수 없었던 아기를 대신해서 말해야 하고, 눈도 뜰 수조차 없었던 아기를 대신해 보아야 하는 고통스러운 영매 작가의 가족사적 배경을 성찰하게 하는 요인이다. 3. 여수(旅愁)의 심연에 갇힌 여수(女囚)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공표되던 2024년 10월 10일 저녁 나는 남도 여수에 있었다. 해묵은 어깨 통증을 치료하기 위해 그쪽 병원에 잠시 입원한 상태였다. 기대도 하고 기도도 했지만, 그럼에도 생각보다 너무 빨리 받게 된 선물을 받게 될 때 엉거주춤함 같은 느낌을 잠시 거쳐, 한강의 첫 소설집이 『여수의 사랑』(문학과지성사, 1995)이었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공교롭다는 생각을 이어갔다. 그리고 퇴원하여 돌아오던 12일 낮에는 우연히 여수엑스포역 앞 여수세계박람회장에서 열린 <잠들지 않는 남도의 세월―여순 10·19와 제주 4·3 미술 교류전> 을 관람하게 되었다. ‘탐미협과 여수민미협의 세 번째 만남’으로, 여수와 순천, 제주에서 무자(戊子)년(1948년)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증거하는 고통의 붓질이 참으로 어지간했다. 김영하의 <바다 위 희망의 빛>(2024, Arcylic on Canvas, 162.2×97cm)이나 박정근의 <바다, 엇갈림02>(2023, Pigment print, 100×70cm)은 강렬한 핏빛 바다의 파동과 심연을 응시한 그림이어서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고경화의 <존재의 시간, 어디에도 있는 어디에도 없는―종남마을>(2022, Arcylic on Canvas, 162.2×130.3cm)은 무너진 돌담과 뒤편의 대나무숲을 그린 작품인데, 그냥 보면 오래된 전원 풍경 같아 보이기도 했지만, 실은 1948년 11월 계엄령으로 인해 초토화되어 복구되지 못하고 잃어버린 마을이 된 종남마을 풍경이라는 것이었다. 무너진 돌담만이 과거의 어떤 흔적처럼 남아있는데 그곳에 살던 이들은 그 누구도 돌아오지 못했다는 안타까운 사연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그림들을 보며 나는 전시회 관계자들에게 이번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도 제주 이야기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면서 본문보다 제목이 더 긴 시 한 편을 떠올렸다. 「이천오년 오월 삽십일, 제주의 봄바다는 햇빛이 반. 물고기 비늘 같은 바람은 소금기를 힘차게 내 몸에 끼얹으며, 이제부터 네 삶은 덤이라고」라는 긴 제목의 시였는데, 직접 확인해볼 기회는 없었지만, 한강 작가 역시 화가 김영하의 핏빛 바다의 고통을 애도하기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게 아닐까, 그래서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8)라고 한 게 아니까, 여수와 순천, 광주와 제주의 트라우마를 함께 앓기 위해 늘 “텅빈 항아리가 되”는 자기 몸을 응시하고 그 안에서 울리는 “검은 물소리” “깊은 물소리”(「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 p. 36)에 귀 기울인 게 아닐까, 그러면서 샤먼 시인이자 영매 작가로 고통스러운 글쓰기를 수행한 게 아닐까…… 그런 상념들을 이어갔다. 매우 개성적인 숨결로 이채로운 말결을 파동처럼 빚어, 그윽하고 깊은 감동을 독자들에게 선사는 영매 작가 한강이 초기부터 다룬 인물들은 대체로 세상의 온갖 허물을 모아 앓는 자, 상처 깊은 자의 형상을 하고 있다. 상처의 심연으로 내려가서, 왜 현존재는 이토록 탈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왜 세상은 그토록 고통스럽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질문한다. 그 탐문은 대체로 여로에서 이루어지고, 여로의 현존은 깊은 여수(旅愁)의 심연에 갇힌 여수(女囚) 형상을 한 경우가 많다.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 시절부터 그러했다. 일찍이 대학 4학년 때 쓴 「편지」에서 “잃을 사랑조차 없었던 날들을 지나 여기까지, 눈물도 눈물겨움도 없는 날들 파도와 함께 쓸려가지 못한 목숨, 목숨들 뻘밭에 뒹굴고”라고 토로했던 한강은 『여수의 사랑』에서 희망이 소진된 상황을 견디는 고통의 흔적을 시리도록 아프게 점묘한다. 대부분 20대의 주인공들인데도 불구하고, 한강의 소설적 프리즘 안에서 그들은 이미 청춘이 아니다. 발랄하고 경쾌한 젊음의 풍속이나 세태와는 아랑곳없다. 그들은 고아처럼 버려졌거나 버려졌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정처 없이 떠돌이 삶을 살며, 신체적 통증과 정신적 질환에 시달리고, 또 때때로 살기도 전에 죽어간다. 또한 고독하고 우울하며 피로에 지쳐 있다. 그들에게 세계는 매우 혹독하기만 하다. 가령 「여수의 사랑」에서 바람은 “내 어깨를 혹독하게 후려”치고 “무겁게 가라앉은 잿빛 하늘은 눈부신 얼음 조각 같은 빗발들을 내 악문 입술을 향해 내리꽂았다.”9)라는 부분만 보더라도 그렇지 않은가. 그 같은 “잿빛 하늘” 아래 드리워진 길고 짙은 어둠의 그림자 속에서 그들은 “얼음 조각”에 피격당한 듯한 현존을 부정하고 신생을 낭만적으로 동경하고 열망한다. 영혼의 숨결을 잃어버린 세대의 고통스러운 초상이다. 잃어버린 세대의 현실을 성찰하는 한강이 탐색한 신화소의 하나는 ‘버려진 아이’라는 의미에서 기아(棄兒)의식이다. 모태로부터 분리되는 순간의 고통, 부모로부터 버려졌을 때의 아픔, 사회와 현실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당했다고 느낄 때의 우수 등이 피투성이 같이 던져진 피투성(被投性)의 존재로서의 인간 초상을 떠올리게 하지만, 신화적인 맥락에서는 역시 기아의식이라는 다발 안에 포괄되는 것들이다. 원초적 고향으로부터 분리를 경험할 때 모든 존재는 자기동일성을 상실한 채 고통스러운 방황을 거듭하게 마련이다. 이때 단원신화는 입사식이라는 통과제의를 거쳐 귀환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상실했던 자기동일성을 회복하는 이야기로 마무리되지만, 현대에 이르러 그것은 해체되었고, 신화는 좀처럼 완성될 줄 모른다. 신화의 해체 이후 인간의 삶은 고통의 흔적으로 점철된다. 그럴 때 인간의 여로는 곧 여수(旅愁)의 길이 된다. 귀환을 보장해주는 통과제의적인 성격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상실한 자기동일성의 회복은 그야말로 난망이다. 첫 소설집의 표제작 「여수의 사랑」은 이렇듯 희망이 봉인된 상황에서 펼쳐지는 현대의 소외된 신화 속에서의 기아의식을 웅숭깊게 형상화한 소설이다. 버림받은 아이는 육체적 심리적으로 늘 허기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기아(棄兒)와 기아(飢餓)는 가깝다. 여수가 고향인 주인공 정선은 다섯 살에 어머니를, 일곱 살에 아버지를 차례로 잃었다. 스물다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어머니의 죽음도 그렇지만 아버지의 죽음이 더 문제적이다. 아버지는 술에 젖은 역한 숨결로 여수 앞바다에서 동반 자살을 시도했다. 아버지와 동생이 죽은 그 사건에서 정선만 살아남았다. 아니 홀로 버려졌다. 이 고통은 트라우마의 극치에 값한다. 그로부터 참담한 여수(旅愁)의 나날은 계속된다. 위경련과 결벽증으로 시달리고 있는 그녀가 특히 후각 공포증 혹은 냄새 강박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정선에게 자흔의 출현은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비슷한 운명의 그림자를 안고 떠돌며 사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두 살 무렵 강보에 싸인 채 여수발 서울행 열차에 버려졌던 자흔은 이 버려짐의 트라우마 때문에 자기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한다. 아니 자기 길이 있을 수 있다는 희망마저 제대로 지녀 갖지 못한다. “어느 곳 하나 고향이 아니었어요. 모든 도시가 곧 떠나야 할 낯선 곳이었어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길을 잃은 기분이었어요.”(『여수의 사랑』, p. 41). 이와 같은 여수(旅愁)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속절없이 살아가는 자흔이고 보니, 주인공의 존재의 거울일 수밖에. 거울을 통해 자신의 상실한 모습을 확인하는 심정은 처연하다. 주인공 정선의 고통이 가중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던 중 자흔이 또다시 여수(麗水)인지 여수(旅愁)인지 모를 길을 떠난다. 그래서 정선도 여수(旅愁)의 여수(麗水) 여로를 택한다. 하지만 그 여로는 고통의 흔적 찾기 이상의 어떤 은총도 허락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 고통의 흔적들은 탈난 후각이나 위장 등 여러 육체적, 심리적 증상으로 소설 속에 아프게 새겨진다. 그것들은 해체되거나 유폐된 현대 신화의 파편들이다. 한강이 점묘하는 누추하고 비루한 현대의 신화들은 차라리 예전의 신화들을 추문화하면서 동시대적 고통의 심연을 비추고 생경하게 드러내는 탈신화적인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10) 그런 탈신화의 전략은 디아스포라 주제와 관련한 존재론적 성찰과 함께, 문학의 기본 역할 중의 하나가 버림받은 디아스포라의 운명과 고통에 대한 깊은 응시와 관련된다는 생각을 저작하게 한다. 이 또한 한강 문학 주제의 세계적 보편성과 관련된다. 4. “왜 그래”와 “괜찮아” 사이에서, 혹은 동물성에의 구토 고통의 심연을 향해 한없이 자맥질하는 한강의 ‘여수의 미학’은 되풀이 변형 생성된다. 두 번째 소설집인 『내 여자의 열매』(2000)는 물론 장편 『검은 사슴』(1998) 『그대의 차가운 손』(2002)을 거쳐, 연작소설 『채식주의자』(2007), 장편 『바람이 분다, 가라』(2010), 『희랍어 시간』(2011) 등 한강의 소설들은 대체로 비루한 현대의 탈/신화와 관련된다. 많은 인물이 여전히 누추하게 태어나고, 출생보다 더 비참하게 버려지거나 버림받았다고 느끼며 여수(旅愁)의 심연으로 젖어든다. 그와 같은 인간 실존의 고통은 국가 폭력의 문제와 연계되면서 더욱 극적으로 형상화되는데, 바로 『소년이 온다』(2014)와 『작별하지 않는다』(2021)의 세계가 그러하다. 존재의 근거를 박탈당한 채, 이 세상 어디에도 속할 곳이나 속할 집이 없고, “찾아갈 곳도 없었고 행복할 곳도” 없을 뿐만 아니라 “긴장어린 시선을 접고 안도할 곳도 없”11)는 한강의 인물들은 사느라고 안간힘을 쓰다가 자주 ‘구토’ 증세를 보인다.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에서 정선이나 자흔을 비롯한 여러 인물이 그랬거니와 『내 여자의 열매』에서 아내, 『그대의 차가운 손』의 L,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 이정희나 서인주 등 많은 인물이 고통스러운 구토의 박물지를 형성한다. 가령 「내 여자의 열매」에서 아내는 어릴 적부터 자유롭게 살다가 자유롭게 죽기를 꿈꾸었던 인물이다. 그런데 소망과는 달리 “보이지 않는 사슬과 묵직한 철구(鐵球)가 발과 다리를 움쭉달싹하지 못하”12)게 하는 일상의 억압에 가위눌려 살다가 심한 구토 증세를 보인다. 매일 몇 번씩 토할 때마다 “머리가…… 오른쪽 눈이 후벼 파는 것같이” 아프고 “어깨가 나무토막처럼 딱딱해지고 입에 단물이”(p. 222) 고인다고 그녀가 토로할 때, 우리는 그 고통의 심연으로 함께 내려가게 된다. 단지 바람이나 햇빛, 물 같은 자연적인 것만으로 살 수 있기를 꿈꾸었던 그녀는, 마침내 고통스러운 실존을 넘어 식물화의 경계로 나아간다. 출장을 갔다가 오랜만에 귀가한 남편은 식물로 변신하는 그녀를 목도한다. 베란다 쇠창살 쪽으로 무릎 꿇은 채 만세 부르듯 두 팔을 치켜올린 아내의 진초록빛 몸과 푸른 얼굴이 마치 상록활엽수의 잎처럼 반들반들했고, 머리카락 또한 싱그러운 들풀 줄기처럼 윤기가 흘렀다는 것이다. 동물적 육체를 넘어 식물화하려는 아내의 요구에 따라 남편은 물을 뿌려주는데, 그 순간, 아내의 몸은 “거대한 식물의 잎사귀처럼 파들거리며” 살아난다. 「내 여자의 열매」의 식물 변신담은 연작 『채식주의자』에서 좀 더 면밀한 실감을 얻게 된다. 『채식주의자』에서 영혜는 맹수의 눈에 시달리는 악몽을 꾼 다음에 전격적으로 채식주의를 선언한다. 짐승의 눈은 피의 형상으로 범벅이 된 채 파헤쳐진 두개골을 비추기도 하면서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동물적인 공격성과 폭력성, 죽음을 몰고 오는 세계 파국의 공포와 불안 같은 것들 때문에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다가 내린 결단이었다. 동물적 공격성으로 넘쳐나는 세상에서 그녀가 원하는 것은 식물적 평화였다. 그녀가 유일하게 옹호하는 젖가슴의 상징이 그런 면에서 주목된다. 젖가슴으로는 아무것도 해치거나 죽일 수 없으니 괜찮다고 했다. 한강의 언어 중에 ‘괜찮아’라는 말은 은근한 마력의 매력을 느끼게 한다. 「괜찮아」라는 시를 참조해 보자. 난지 두 달 된 아이가 저녁마다 울자 시적 자아는 “왜 그래”라는 말을 안타깝게 반복하면서 애태웠다. 그러다 문득 “괜찮아”라는 말로 바꾸어 위무했더니 며칠 뒤부터 아이의 저녁 울음이 그쳤다는 이야기다. “왜 그래”는 따지듯 걱정하는 목소리다. 반면 “괜찮아”는 공감하며 끌어안는 마음의 소리다. 진심으로 위로하며 치유를 기도하는 말이다.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13)을 들여다보며 “괜찮아”라며 달래줄 수 있는 마음, 그것이 바로 둥근 젖가슴의 마음이다. 그러나 세상은 사실 괜찮지 않다. 괜찮지 않기에 “괜찮아”라는 말이 괜찮게 다가오는 게 아닐까. 「내 여자의 열매」에서도 그랬듯이, 『채식주의자』에서 영혜 역시 자신에게 “괜찮아”라고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런 눈과 목소리가 없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헤아려 줄 마음의 눈을 구하기 어렵다. 연작의 첫 작품인 「채식주의자」의 시작 부분부터 그렇다. 서술자 남편은 아내는 특별하지도 않거니와 끌리는 매력도 없는 사람이었다고 적는다. 평범하고 무난한 성격이어서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결혼했다고 말한다. 남성 중심주의적인 생각을 드러낸 경우가 아닐 수 없다. 그녀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가부장권을 행사하려는 인물이다. 육식하지 않겠다는 딸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탕수육을 집어넣는 아버지의 폭력으로 인해 딸은 결국 칼로 손목을 긋는 자해를 하고 만다. 그런 아버지이니 딸의 꿈속에 개를 오토바이 뒤에 매달아 동네를 끌고 다니다가 잡는 악몽의 주체로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아버지만이 아니라 어머니도, 언니도, 다른 가족들도 대개 “괜찮아” 대신 “왜 그래” 쪽에 가까운 인물로 제시된다. 사정이 그러하다 보니 영혜의 악몽은 계속되고 섭생은 어려워지고 마음은 불안하고 몸은 야위어 간다. 몸도 마음도 상하고 다친 상태가 되자 둥근 젖가슴도 야위어 날카로워지는 형국이 된다. 무엇보다 숨쉬기조차 힘들 지경이 되고 만다. 물과 바람과 공기와 더불어 숨 쉬며 초록빛 나무가 되려 했던 그녀의 소망은, 그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계속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그녀의 둥근 가슴이 날카로워지는 것은 충분히 일리 있는 몸의 항의로 받아들여진다. 한강의 여성 인물들은 고통스러운 상처와 트라우마를 지닌 채 살지만, 타인이나 세상을 향한 동물적 공격성이나 이렇다 할 적의를 보이지는 않는다. 그 대신 식물로 변신하는 과정을 통해 평화의 바람을 일으키기를, 아니 평화의 바람을 일으키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평화로운 숨결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최소한 편하게 숨쉬며 살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럼에도 동물적 공격성으로 점철된 현실이나 사람살이의 상황은 그런 소망을 지닌 여성들로 하여금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게 혹은 질식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만약 세상이 생태학적 진실에 따라 조금이라도 평화로운 식물성의 기미를 보여주었더라면 『채식주의자』에서 영혜는 그토록 가혹한 악몽에 시달리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그녀가 간절하게 안간힘을 다해 숨을 쉬면서 세상을 쏘아보는 것은 그런 사정 때문이다. 이 연작에서 영혜는 세상의 변두리로 밀리다 못해 그 존재를 위한 최소한의 공간조차 혹은 뿌리내릴 한 뼘의 자리조차 마련하기 어려운 처지다. 그녀는 식물적 젖가슴으로 세상의 동물적 공격성에 대응했지만, 턱없이 유약할 따름이었다.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광기의 영역으로 금줄 쳐 놓은 정신병원에 갇히게 되는 운명 역시 그녀의 존재를 제한적이게 한다. 물론 그녀는 행하지 않고 말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부재하듯 존재하면서 성찰적 메시지를 제공하는 그늘의 존재이다. 그늘에서 제발 편하게 숨 쉬고 악몽 없이 잘 수 있는 삶이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드러낸다. 여러모로 에코페미니즘의 관점에서 해석 가능성을 풍부하게 열고 있는 연작이다. 책방을 운영하기도 하는 한강은 아버지 한승원 작가에게 종종 책을 보내며 편지를 전했다고 한다. 그중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이나 로빈 윌 키머러의 『이끼와 함께』, 메리 올리버의 『긴 호흡』 같은 책들이 눈길을 끈다. 한강 소설에서 왜 여성들이 동물성에 저항하며 식물이 되고자 하는지, 식물과 더불어 숨 쉬며 불안한 실존을 넘어 편안한 평화의 바람을 맞이하려 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책들이다. 아버지나 남편과는 달리, 이끼는 “괜찮아”라고 말해준다. 그런 이끼의 토닥거림이나 속삭임과 더불어 숨 쉴 수 있다면 시나브로 편안해지고 괜찮아지겠다. 5. 깊은 고통으로 지은 주문(呪文) 깊은 고통 속에서 한강의 인물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주 구토를 일으킨다. 편안하게 숨을 쉬지 못한 채 밤낮으로 악몽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펄펄 내리는 눈의 슬픔과 반짝이는 숲의 고통 속에서 깊은 밤의 고통은 한없이 깊어지기만 한다. 어떻게 개인적이고 가족적이며 역사적인 트라우마를 넘어, 편하게 숨 쉴 수 있는 지극한 사랑과 평화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어떻게 나날의 장례식을 넘어 즐거운 축제 마당으로 건너갈 수 있을까? 『소년이 온다』의 인상적인 대목을 우리는 기억한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남은 자들의 한없는 슬픔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당신을 위한 진정한 장례식은 매우 요긴하다. 당신과 나의 공동 애도를 위한 장례식을 위한 제문(祭文)은 때로 주문(呪文)처럼 통절하다. 한강 소설에서 고통스러운 악몽은 대개 그런 주문의 상형문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주문을 통해 먼저 간 당신의 눈이 되고 입이 되어 준다. 『소년이 온다』의 에필로그 부분을 보자. 그 도시의 열흘을 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운 린치를 당하던 사람이 힘을 다해 눈을 뜨는 순간이 떠오른다. 입안에 가득 찬 피와 이빨 조각들을 뱉으며,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올려 상대를 마주 보는 순간,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p. 213) 주문은 떠지지 않는 눈을 뜨게 하고, 깊은 고통의 순간을 대면하게 한다. 응어리진 것들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그 응어리의 상처들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소환하는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의 대조가 비애극의 심연을 깊게 한다. 주문은 이렇듯 깊은 슬픔의 호곡을 불러낸다. 그런 다음 당신을 위로하며 청원한다.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p. 213). 깊은 고통으로 지은 주문은 이런 애도 작업으로 깊어지며 승화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앞에서 논의한 것처럼 한강은 여리고 취약한 존재들, 정처 없이 방황하며 상처받은 사람들, 고통 속에서 속절없이 절명한 사람들을 위한 영혼의 비가(悲歌)를 시적인 문체로 가만가만 불러온 작가이다. 제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서발턴(subaltern)의 입이 되어주고 제 몫을 보장받지 못한 채 벌거벗은 호모 사케르들의 눈물을 씻어주려는 영혼의 매개자가 되려 했던 영매 작가이다. 역사적 사실이나 진실을 넘어 고통의 심연에서 지극한 인간적 진실을 고통스럽게 탐구한 작가이다. 한 마디로 숨 쉴 수 없는 존재들, 그 숨 막힌 존재들이 나름대로 숨 쉴 수 있도록 위로와 생명의 음표를 감각적 리듬에 실어 소통하고자 한 작가이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Primo Levi)는 죽음과 유령들의 세계와도 같았던 참혹한 홀로코스트의 현장에서 “이 저주받을 망령들아, 비통할지어다!”라고 했던 단테의 『신곡』 ‘지옥’ 편의 목소리를 떠올린다.14) 『신곡』의 세계를 떠올리며 가까스로 그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그는 자신의 기록 서사에서 “이것이 인간인가”라며 깊게 탄식했다. 한강의 여러 작품 또한 그런 탄식에서 비롯된다. 그 서사적 대상이 된 가부장적 질서로 인해 일그러진 여성 문제나 4.3이나 5.18 같은 역사적 트라우마의 이야기는 한강보다 한 세대 혹은 두 세대 선배 작가들의 문학적 축적으로 인해 심연으로 깊어져 새로운 감각적 실존을 할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녀는 있는 이야기, 있었던 과거를 단지 그대로 재현하는 작가가 아니다. 있었던 사건에서 고통받은 이들의 차가운 손을 어루만지고, 이미 식어버린 영혼 안으로 스며들어 시리면서도 뜨거운 감각의 실존을 수행한다. 스며든 순간에 몰입하여 시나브로 엑스터시의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 법열(法悅)의 에너지와 감수성으로 말미암아, 한강이 스며든 어떤 인간이나 사물도 단지 홀로인 존재의 차원을 넘어선다.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게 되는, 더 나아가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더불어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 그 결과 한국문학이라는 특수성을 넘어서 문학이란 보편성의 측면에서 호소력 짙은 작품으로 승화된다. 한강은 비교적 이른 나이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까지 쓰인 작품보다 앞으로 쓰일 작품이 더 많거나 깊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이제까지 한강은 역사적 트라우마에 몰입하는 감각의 밀도를 통해 문학적 치유의 새로운 스타일을 감각적으로 발견한 작가, 서사의 전개를 초월하여 서정의 몰입으로 심리적 사건을 웅숭깊게 다룬 작가, 그리고 기존의 서정적 소설과도 또 다르게, 『흰』과 같은 작품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서정과 서사가 잘 어우러지는 새로운 문학 장르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가로 문학사에 기록될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기대되는 것은 2024년 10월 이후의 한강 문학이다. 섣불리 예측하지는 말자.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기대의 주문처럼, 한강 문학의 새로운 장도를 응원하면 될 일이다. 거듭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한다. 1) 한강, 『소년이 온다』, 창비, 2014, p. 174. 2) 한강은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인 「빛과 실」에서 『소년이 온다』를 준비하던 무렵 골몰했던 두 질문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그 질문을 뒤집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고백한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영매 작가로서 한강의 핵심 특성을 가늠하게 하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3) 예컨대 『소년이 온다』에서 이런 대목을 보자. “어쩌면 한사람씩 오는 게 아닌지도 몰라. 수많은 사람들이 희미하게 번지고 서로 스며들면서, 가볍디가벼운 한 몸이 돼서 오는 건지도 몰라.”(p. 174). 이렇게 한 몸이 된 여럿의 영혼들을 맞아들이는 장면에서 영매 작가의 인상적인 특징의 단면을 확인하게 된다. 4)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 p. 24. 5)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2021, pp. 11~12. 6)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p. 106. 7) 한강, 『흰』, 문학동네, 2016/2018, p. 36. 8)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p. 38. 9) 한강, 『여수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95, p. 58. 10) 「여수의 사랑」 관련 논의는 졸고, 「진실의 숨결과 서사의 파동」(『애도의 심연』, 문학과지성사, 2018)의 일부를 수정한 부분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글의 2~4장은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 웹진 《더라이브러리》에 부분적으로 발표한 원고를 전면 개정한 것임. 11) 한강, 『그대의 차가운 손』, 문학과지성사, 2002, p. 51. 12) 한강, 『내 여자의 열매』, 창작과비평사, 2000, p. 225. 13)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p. 76. 14)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이현경 옮김, 돌베개, 2007, p. 25.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위의 인용문은 육조 혜능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변형한 것으로서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도입부 내레이션이다. 질문을 간파하고 있는 스승의 답변은 제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 테고, 그것은 물론 관객의 심금을 휘저었을 것이다. 파편화된 불안을 쓸어 담는 이 명쾌하고 즉각적인 해답의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찰나에 불과하다. 제자의 마음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 동요하는 그 마음의 원인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궁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궁리하고 싶지 있다. 바쁜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보여지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무용한 그 '느낌'이라는 것을 숙려할 만큼 한가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하려는 노력 끝에 불안은 우리 현대인의 매우 증상적인 형태로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의 고질병이다. 불안, 외로움, 확신 없음이라는 결핍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기로에 선다. 고독을 선택하거나, 의존을 선택하거나. 전자는 불안에 대한 직면이고, 후자는 불안에 대한 외면이다. 그러나 바쁜 우리는 언제나 후자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 없다. 세상에 고독한 것은 이제 고독, 그 하나다. 사용되지 않은 고독은 밀린 과제처럼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을 외면한 후폭풍은 그에 비례하는 불안의 성장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독하지 않으려는 것은 고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고독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소외감 등의 통각이라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감각은 직면하는 대상으로서의 그것이지 결코 정념의 주인이 아니다. 고독은 머무름의 상태가 아니라 나아감의 과정이다. 키에르케고어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고독이란 '자기-이해'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실존적 과정"1)이다. 직면과 견인의 과정으로서 '나'의 발본적 반성을 꾀는 고독은 많은 시간과 심리적 통증을 수반하는 힘겨운 비포장도로이지만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 길은 당신에 의해 아주 단단히 포장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은 이제 너무 쉬운 길이다. 허나 우리는 당장의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의존을 택한다. '불안-의존-불안-의존-……'의 악무한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이 악무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싸움이 혼자만 하는 싸움은 아니다. 우리가 고독하고자 할 때, 시는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 '불확실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시와 고독은 함께 간다. 유일무이한 개별자로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시를 보면서 우리는 '나'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비록 그 세계가 하잘것없을지라도 시는 당신과 함께 고독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투쟁의 이미지가 너무 닮아서 단번에 요체로 휘몰아 넣는 시가 있다. 2024년 계간지 가을호에 실린 시편들이 대개 그러했다. 그것들은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증상에 직핍하는 표정을 하고선 우리의 불안을 응시하고 있다. '응시하는 시'를 응시하는 우리는 홀연 고독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시는 그 자체로 기꺼이 고독의 과정이 된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불안을 응시-진단하는 시편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고독의 여정을 걸어보자. 미리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찌되었건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해 미리엄은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엄은 자신을 설명하는 식으로 늘어져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미리엄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한 미리엄은 바빴다 설명하느라 바빴고 대체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느라 바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낡아지고 늙어가고 쪼그라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해진다 불쌍한 미리엄 온종일 나를 기다리는 미리엄은 버럭버럭 화를냈다 화를 내는 미리엄이 순간 유효해 보였다 미리엄이 악다구니를 쓸 때에야 미리엄의 전체가 설명되고 빛난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고 어차피 미리엄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다음부터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하루종일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일갈할 수밖에 없었다 넌 네 삶이 없어? 하고 말콤은 미리엄이 키우는 개다 말콤은 미리엄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좋아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말콤은 미리엄을 좋아하고 불쌍해한다는 것이다 말콤은 수동적인 주인 미리엄이 충동적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거나 밥때를 놓쳐도 재촉하지 않는다 말콤 역시 미리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하루종일 너만 기다렸어 이 망할 기집애야 하지만 말콤의 생각에서 미리엄은 한없이 불쌍한 인간이므로 개 말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말콤은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 것 같았다 (……) 미움받지만 않게 해주세요 누구로부터를 말하는 것이냐 뭘 물어요 당연히 미리엄이죠 열두 마리의 개를 키운 경험이 있는 신이 말콤의 턱을 간지럽히며 말한다 아이고 불쌍한 새끼 계속해도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시는 나로 시작했지만 나로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무언가를 빠뜨리는 바람에 또 내가 나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내가 나오면 미리엄은 또 하루종일 나를 기다릴 테고 그랬다는 이유로 나에게 화를 낼 것이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말콤은 삶이란 게 정말 불쌍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신경쓰이지 않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것도 없다 나는 빨리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때마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제때 미리엄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러면 말콤과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산책하는 말콤은 정말 행복해 보일 것이다 나는이런 게 좋다 이런게 더 좋다 - 박참새, 「시작된 것」 부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넌 네 삶이 없어?" 당신이 이 문장에 머무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장이 애틋한 이유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목줄을 달아매고 누군가의 손에 그 줄을 쥐여주었던 경험,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가슴 아픈 그 불안의 경험이 위의 문장으로 하여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리엄은 현대인들의 불안 형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히는 '해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기다린다.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한 '자기-수치심'을 해명하고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자기-효능'을 타인으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고 수용받기 위해. 따라서 '나'(타인)가 오지 않으면 그는 그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거니와, 그 효능을 되찾을 수 없다. 고독이라는 일련의 자기-이해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자기규정을 의탁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 박탈시킨 그의 가치는 그러므로 '나'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미리엄-나'의 관계에서 미리엄의 위치는 '말콤-미리엄'에서의 말콤의 위치와 상응한다. 미리엄은 말콤의 주인으로, 말콤은 온종일 미리엄을 기다리고 미리엄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다. 말콤의 삶의 주인이 미리엄인 것처럼 미리엄의 삶의 주인은 '나'이다. 말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미리엄의 삶은 따라서 개 같은 삶이다. 그 삶은 (자기 의지에 의해)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자기 삶을 전시하고 그 삶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좋아요'와 팔로워 숫자 등)을 기대하면서 오직 그것을 위해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일상을 공유하고 실제적 자신의 모습, 즉 '실존적' 자기 모습을 방치한다. 타인의 반응이 내 삶의 양식을 결정하게 내버려둔다. 문제적인 것은 여기서 타인은 '내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증명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너무 쉽게 그들을 미워해 버리고, 반응이 긍정적이면 또 너무 쉽게 사랑해 버린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감정 속에서 지쳐버린 자아는 당장의 휴식을 위해 타자에의 의존을 택한다. 불안을 즉각적으로 해소해 주기 때문에 의존하지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은 그러므로 불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란 듯이 참혹해진다. 배시은의 시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우리의 강박증적인 내면 상태와 그 징후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그에 대해 시인이,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쓴 시를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아직 쓰지 않은 시를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싶다. 재빠르게 적으면 감쪽같을 거라고. 시간의 장난 같은 거라고.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 제목을 옮겨 적었다. 이상하다. 나라면 이런 제목을 짓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찍이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항상 그런 모양이라는 듯이. 나는 여행을 가지 않는 대신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으로 여행을 대신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여행 가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한다.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냥 있는다. 그냥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대신한다. 아무것도 깨닫지 않는 것이 깨달음을 대신한다. 이상하다. 나라면 여기서 연갈이를 하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시를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시는 이미 끝났다. 시를 옮겨 적는 일은 끝났다. 시를 쓰면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무언갈 만들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만들 수 있는 때는 너무 짧다. 생각을 하고. 단어와 문장 등을 떠올리거나 받아 적고. 고개를 움직이고. 책상에 앉고. 신체 부위의 기능을 사용해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희소하며 예상만큼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이 시는 알고 있다.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 배시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부분, 『창비』 2024년 가을호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 싶다"는 바람은 다시 말해 독자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소망이다. 그러나 옮겨 적은 시는 어쩐지 제목부터 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기로에 선다.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냐. 당신이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면 선택은 물론 전자일 것이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잃어가고 이윽고 모호한 정체성과 동시에 끊임없는 불안을 경험한다. 위의 시는 그것을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여행조차 갈 수 없고,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다. 여행을 가는 대신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뿐이다.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잘 쉬는 사람과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본인의 취향과 호오를 잘 아는 사람과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타인에게 삶의 목줄을 내어준 사람에게 휴식이란 그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불친절하다.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건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때때로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방어 기제로 드러난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실존적인 '나'의 상태이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회적인 '나'의 모습이다. 건강한 사람은 친절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사회적인 모습이 중요한 우리는 건강하지 않아도 건강한 '척' 친절하다. 이때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 싶은 일종의 방어 전략으로 쓰인다. 어쩌면 건강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사회적인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당신의 상태는 이제 아무도 진단할 수 없다. 허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심급의 기회일지 모른다. 시가 응시하고 있는 사실을 응시해 보자. 때로는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사실 시는 진단하거나 처방하지 않는다. 기꺼이 고독의 기회를 내어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삶을 응시하고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견고한 삶을 살고 싶을 우리에게 고독이라는 자기-이해 과정은 이제 건너뛸 수 없는 삶의 발달과업이다. 견고하다는 말은 빈틈없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빈틈 있음'마저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이다. 당신의 약점도 당신이다. 고독은 그러므로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들어 기꺼이 '나' 자신을 승인하게끔 한다. 신이인 「새」는 그것을 딱따구리에 비유하면서 약점이 받아 온 그간의 오해를 풀어낸다. 2017년 2월 3일 딱따구리를 데리고 있다. 이것은 내 약점이다. 딱따구리는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 사람의 머리통에도. 딱따구리는 내 머리 옆쪽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사고였다. 귀가 생겼다. 딱따구리가 어찌나 청명하게 나무문을 쪼고 다니는지가 다 들렸다. 난 비로소 듣는 사람이 됐다. 나의 방문은 말할 줄 몰랐다. 내가 듣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방문은 딱따구리를 통해 내게 말을 전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딱따구리가 부리를 사용하는 이유,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내가 가진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었으며, 딱따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 어쩌면 딱따구리는 도망간 게 아닐지도 몰라. 아예 내 안쪽으로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따구리가 느껴질 수는 없어. 이 느낌에 대해 나 여전히 말을 멈출 수 없어. 가장 깊숙한 곳에 너 잘 살아 있어. 집인 줄도 모르고 흔들렸던 집이 너를 선명하게 품고 있어. 구멍으로 볕과 공기가 들이닥쳐. 너 거기 있구나.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파여가며 안쪽이 하는 말을 받아쓸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쓰는 사람이 됐다. - 신이인, 「새」 부분, 『문학과 사회』 2024년 가을호 딱따구리는 약점에 대한 절묘한 표상이다. 그것은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약점이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이유로 약점이 될 수 없다. 인식의 층위에서 그가 뚫어낸 구멍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그 구멍이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없다. 눈, 코, 입, 그리고 귀라는 구멍이 당신의 약점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든' 존재하는 그 구멍이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딱따구리(약점)에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where'이 아니라, 'why'일 것이다. 딱따구리는 '왜' 구멍을 만드는가? 그것은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이다. 즉 딱따구리가 구멍을 내는 이유는 '너'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어쨌든 약점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너'가 존재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뚫은 구멍은 '너'가 즐겁지 않으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고 바로 약점이 된다. 그 순간에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 떼어내고 싶은 악성 종양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인다. 약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너'의 시선에 얽매여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why'를 던지는 순간, 시선은 '너'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지고 약점에 대한 오해는 곧 이해로 변모한다. 우리가 가진 약점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고독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창구일 수 있다. 구멍 없이 어떻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밖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말한다. 약점은 '나'를 이해하는 고독의 진입로가 되고, 이윽고 뚫린 길은 '너'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견고해진다.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다. 고독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황홀감이다. 고독이 거듭될수록 성장하는 고독'력'은 당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독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계절의 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 류호인, 「정신분석학: 존재에 대한 물음 : 실존적 불안과 자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소고」, 『현대정신분석』, 2024, 제26권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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