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월간 현대시 2024년 2월호(제410호)
감각의 구원을 향한 나상裸像과의 대면과 무의식의 층위들
레종 데트르(raison d’être)
‘우성’이라는 단어가 방송에서 흘러나오자 머릿속이 분주해진다. ‘열성’의 반대 뜻으로서 ‘우 성’이 먼저 떠오르고, 세력 있고 훌륭한 집안을 뜻하는‘우성’인가 싶더니, 별이 비 오듯 쏟아지는 현상으로서 ‘우성’이나 국악의 오음(五音) 중 다섯째 음률을 의미하는 ‘우성’ 등 수많은 동음이의 어가 동시다발적으로 흩날린다. 자막에 표기된 ‘우성(雨聲)’을 확인하는 순간, 그것이 ‘소리’ 개념 이고 ‘비가 내리는 소리’를 함의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다양한 기의의 미끄러짐이 절대적 우 위성을 지닌 하나의 기표로 정돈된 셈이다. ‘우성(雨聲)’은 객관 세계에서 ‘빗소리’를 뜻한다. 빗소 리를 객관적 존재로 둘 때 비로소 객관적 탐구가 가능하기에 우리는 모든 것을 개념으로 만들어 그 의 미를 통일시켜왔다. 하이데거는 이런 전통적 존재론에 의문을 제기하고 객관 세계에 놓인 존재를 주관 세계로 끌고 온 거의 유일한 철학자이다. 그는 개인의 생생한 삶에서 보편화된 것 뒤에 숨겨진 개별적 특성들을 주목하였다. 우리는 그에 의해‘소리’라는 익숙하게 보편화된 개념 속에 담을 수 없는 ‘그 소리’에 관심을 쏟을 수 있었다. 이때 익숙함이란 관습의 세계, 사유가 정지된 세계로 읽을 수 있다. “어제와 같은 자리에 앉아 늘 먹던 음식을” 고르는 우리는 “한 가지 낱말들로 주머니”(김이녘, 「검 은 섬」)를 채우고 살아가는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익숙한 세계란 존재에게 부여된 여러 의미 가운데 하 나의 의미가‘더께’처럼 쌓인 세계를 말한다. 하나의 기의만을 가지는 기표의 세계에서 김이녘은 자꾸 미끄러지고 토한다. 그리고 그는 도시 전체에 흘러내리는 “괴상하고 연한 무질서한 덩어리”(사르트르, 『구토』, 강명희 역, 하서, 1999, 235쪽)를 “초서체로 흘려놓은 연체동물”로 감각하고 “읽지 못하여 기 어가다 죽어버린 것들을 옮겨”(「검은 섬」) 적는다. 과학과 통신기술의 비약적 발달로 20세기 말, 21세 기 초에 이룬 성과는 과거 100년 동안 일어난 변화보다 더 급격한 것들이었다. 텍스트는 불통을 해결할 개념과 관념만을 무한히 확산시키고 이 세계는 이른바 관념의 철옹성이 되었다. 그 결과 지나친 개인주 의로 원자화된 인간을 구원할 언어들, 본질을 발견하려는 감각적 언어들이 사라져가고 있다. 김이녘의 시집 『더께』(한국문연, 2023)는 쌓아 올려진 익숙한 세계를 주관 세계로 가져와 “흘려놓은 연체동물” 같은‘그 소리’에 주목하면서 “파먹은 글자들”을 “목구멍에서 꾸물꾸물” 꺼내 “섬어”(「장마」) 한다면, 김이듬은 시집 『투명한 것과 없는 것』(문학동네, 2023)에서 익숙한 삶과 관계에 묻어둔 지나쳐 온 면면의 고통과 고독을 풀어낸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세계가 부여한 개념이 존재의 본질을 증명할 수 없으므로 그 존재의 본질을 새롭게 발견하고 형성해나간다.
잃어버린 감각의 세계
실존(existence)이 본질(essence)에 선행한다는 사르트르의 말은 실존 없이는 본질을 파헤치는 것이 ‘불가능함’을 의미할 것이다. 김이듬은 화자를 통해 인간 존재의 실존에 집중하여 자신의 본질을 형 성해 나가려 하고 있다. 반면 김이녘은 언어가 미증유의 과학기술 용어와 개념·관념어로만 탄생되는 현대의 비극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언어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한다. 이것은 ‘소리’가 아닌 ‘그 소 리’에 집중하는 자세이며 ‘더께’로 축적된 객관의 언어를 부수고 본질을 탐색하는 일이다.
김이녘의 화자는 “친숙함이 모두를 천박하게”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그래서 “맘껏 식도를 열 어” 두고 “구토하세요”라고 권한다. “안긴 문장을 뱉고” 계속 이어지는 “중얼거림”을 마음껏 게 워 언어의 본질을 다가서려는 것이다. “토하는 것들”은 “식도로 내려가지 못하고.” 다시 몰려나온 다. 그곳에서 싹이 돋아나고 말들이 쏟아지는 내내 “꽃이랄 것도 없이 쉼표들이 쏟아진다.”(「오독」) 토한다는 것은 낯선 세계와 물질에 대한 신체의 거부반응을 의미한다. 그것은 익숙한 유용의 세계에서 멀어져 낯섦을 포착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에서 주인공 로캉탱이 익숙한 해변의 조약돌과 파이프, 문손잡이, 컵 손잡이, 포크 등을 보거나 익숙한 무언가를 하다가 구토를 느끼게 되는 데, 이때 구토 현상은 도구성과 유용성으로 배치된 것에 대한 거부반응이었을 테다. 마르크스적으로 말 하면 사물의 본질적 가치인 사물가치는 삭제되고 오로지 교환가치로만 해결되는 것에 대한 반작용이었 을 것이다. 사르트르는 세계를 채운 물질이 도구성과 유용성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그 물질의 나상(裸 像)을 보게 되며 그 나상을 봄으로써 인간과 사물 사이에 낯섦으로 인해 구토를 느끼게 됨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그는 외계의 사물이나 인간에게서 느끼는 구토감을 기록하며 그 해결책을 모색한다.
사르트르에게 ‘구토’는 들뢰즈가 말하는 ‘바깥에서 오는 기운을 포착하는 일’이며 하이데거 방식 으로 ‘존재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다. 로캉탱이 느끼는 구토가 타인과의 존재를 인식하는 데서부터 시작된 것처럼, 김이듬의 『투명한 것과 없는 것』은 항상 놓여있는 이웃과 타자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외관이 벗겨지고 ‘베일’ 너머의 고통을 마주함으로써 존재의 “헐벗은, 나체 덩어리만”을 목격한 후 기록한 성과임을 알 수 있다. 로캉탱이 구토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식이 <머지 않아서(Some of these days)>라는 재즈곡을 통해서였던 것처럼 사르트르나 김이듬에게 본질적인 것을 마주하는 것은 절대적인 실존의 임무이다. 화자는 “본질적으로 저것은 뭘까//본질이란 게 있긴 할까//(……)//서로에게 묻지 않는 다/너의 본질은 뭔지/자신다워지는 게 뭔지/자신이 꼭 있어야 하는지/네가 사랑하는 것이 어디서 왔는 지”(김이듬, 「올스파이스」) 묻고 또 묻는다. 이때 토한다는 것은 언어의 세계 속에 사는 한 주체가 기 표에 지배를 받기 때문에 구조화된 무의식을 풀어내는 행위가 되어준다.
나상(裸像)과의 대면, 손안의 구토(Nausée) 1 - 김이듬
보들레르가 『보들레르의 현대 생활의 화가』에서 ‘근대성’개념을 새롭게 정의하며 “덧없고 우발적 인 것”과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으로 양분하여 파악했듯이 19세기 말부터 고대 이래로 굳건하게 자 리한 ‘신적 요소’와 ‘영원성’의 자리는 ‘인간적 요소’와 ‘순간성’으로 대치되었다. 이 과정에 서 영원의 모토로 억압당해오고 배척되었던 ‘생성’, ‘운동’, ‘변화’가 의미를 띠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신 혹은 영원성의 부재는 인간의 실존적 불안을 증가시켰고 이러한 시대적 감수성의 세례를 받 고 성장한 사르트르는 그런 감수성을 ‘구토’ 개념으로 은유하였다. 그리고 구토를 막을 수 있는 방식 은 ‘본질적인 것의 발견’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예술적 창조의 주요 동기의 하나는 분명히 세계에 대해서 우리 자신의 존재가 본질적이라고 느끼려는 욕망이다. 내가 드러낸 들이나 바다의 이 모습을, 이 얼굴의 표정을, 나는 화폭에 옮기면서 또는 글로 옮기면서 고정(固定)시킨다. 나는 그 모습들을 긴밀 히 관련시키고 질서가 없던 곳에 질서를 만들고 사물의 다양성에 정신의 통일성을 박아 넣는다. 그러면 나는 이 모습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나는 나의 창조물에 대해서 스스로 본질적이라고 느낀다.”(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정명환 역, 민음사, 1998, 59쪽)라고 하면서 말 이다.
유용성과 도구성의 발호(跋扈) 속에 익숙해지지 않으려는 태도야말로 세계의 모든 존재에게서 본질적 인 것을 포착하려는 의지를 품은 것일 터이다. 따라서 우리가 필연의 세계 속에 놓인 것으로 이해할 때 익숙하고 친숙한 것은 본질에서 멀어지게 마련이다. 우연성과 잉여성에 몸을 맡길 때 비로소 무상의 존 재에게 다가갈 수 있으며 본질을 발견하는 것이다. 김이듬은 그 가운데 가장 민감한 존재인 인간에 주 목한다. 다양한 목소리가 발현하는 고뇌와 고독, 통증과 증상을 단 하나의‘고통’, ‘슬픔’이라는 개 념으로 정당화하려 하지 않고 무엇인가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면서 통증을 느끼는지 존재를 하나하나 펼 쳐가며 구토를 느낀다. “빵공장 기계에 끼여 숨진 노동자”와 파산 직전의 “자동차공장에서 일하는 친구”(「입국장」), 뮤즈가 되어달라며 성희롱을 전하는 이에게 거절한 시인이 들어야 했던“이 씨발년 이”(「뮤즈」)라는 모욕과 “해변으로 떠내려온 나체”와 “익사체를 구경하는 사람”에게서 “누가 사 람인가”(「리얼리티」)를 되묻는 데에까지 그는 나아간다. 또한 “아무도 그를 찾아오지 않는”(「외로운 사람」) 사람과 “조울증을 앓아온”아더 씨(「여장 남자 아더 씨」), “우유가 네 개 쌓여 있는 문 앞” 혼자 사시던 “깡마른 할머니”(「구도시」), “가난한 시민이 더 변두리로 이동”(「저지대」)하는 세계의 실존에 집중하며 그들의 사연을 낱낱이 기록한다. 이때 화자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우리가 살았다는 사실”에 놀라고 “고립의 감각이 쌓”(「일반 상식」)이는 현대에 살면서“우리는 소용없는 것을 배우며 할 일을 피”(「어제의 말들」)하지 않았는지 묻는다. 화자는 이제 이들을 위해 도래하지 않은 “내 생애 최고의 시”(「내일 쓸 시」)를 쓰고자 한다. 김이듬은 『투명한 것과 없는 것』을 매개로 대자-즉자의 결합 즉 “너는 나의 실존”(「스몰 레볼루션」)이므로 “길가에 앉아 사람들을 읽”고 “읽히”(「두 유 리드 미」)며 자기의 존재 이유를 ‘너(존재)’에게서 찾고 자기 원인자인 신의 존재 방식에 이르게 된 것이 다. 사르트르처럼 김이듬을 구원할 수 있는 세계는 ‘글쓰기’에 있다. 김이듬은 화자의 수많은 행위를 통해 자기 자신의 존재 근거와 이유를 찾아간 것이다.
나상(裸像)과의 대면, 손안의 구토(Nausée) 2 - 김이녘
김이녘은 『더께』에서 문어(文語)의 세계에서 탈피하고 언어의 본질을 발견하려 한다. 마치 에밀리 디 킨슨이 모든 시의 형식을 파괴함으로써 문학적 관성을 깨려 했던 것처럼, 그의 시집은 인간 중심의 사 유를 깰 뿐만 아니라 ‘더께’로 쌓인 시의 관성에서 멀어지려고 한다. 인간 중심에서 동물과 사물, 자 연에 반응하는 언어들을 인간에 대입해보고 자연스레 출력되는 익숙한 언어 대신 낯선 동사를 배치하는 가 하면, 강조 및 컴퓨터 약어, 연작시에 번호 생략 등의 실험을 통해 익숙한 언어의 세계를 해체한다. 이는 관념의 세계, 검은 글자의 세계에 가려진 “흰 것들”(「희게 날리는 것을 말하다. 파」)을 토해내는 행위이다. 시인에게 개념·관념의 언어는 “현장에서 두툼한 종이책을 들췄을 때 얼굴에 빽빽이 눌어붙 은 기호들”이고 그렇기에 읽을 수는 없는 “독극물”(「질식에 대한 기록들」)이다. 그는 “꾸물꾸물, 뒤 부터 기어” 나오는 “섬어들”을 기록하고 “목구멍으로 나오다 만 꼬랑지를 쓰다듬”(「장마」)는다. 그 의 시가 가독성이 떨어지고 제대로 이해했는가를 자꾸 되짚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 른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쥐어뜯는 소리를 반사”하고 “사물과 기호의 소리들로 가득 찬 방안에 오 직 자신의 얼굴로 자신의 얼굴을 눌러 죽이며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숫자들을”(「질식에 관한 기록 들」) 응시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묵은 말들”(「설명서」)을 털어내고 “축축하게 끈적이는 손바닥” 위 에 자꾸만“으깨지는 것들”(「우리, 연애하는 중인가요」)을 토한다. 그의 시어에는 고정된 관념이 없다. 시인은 젤리를 씹는 입 대신 “젤리를 씹는 손가락”(「영화를 보러 간 건 아니다」)을 택하고 치마를 입 은 여인 대신 염소를 택하여 “염소는 치마에 머리를 얹고 잠이 들었다. 버스 시간을 짚은 뒤 편의점에 서 김밥 한 줄을”(「환승센터」) 살 수 있으며 “사자 곁으로 공연을 마친 얼룩말이 지나”(「관람객」)가 고 “땀과 소나기에 젖은 셔츠에서 마른 풀 내”(「오독」)가 날 수가 있다고 기록한다. “닮은 말들로 번 역된 사적인 방언들을 잃었”으나 “꽃을 해부하고 난 뒤의 전철은 지나치게” 눈부시기에 ‘나’는 오 늘도 쓰기로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묻는다. 이것이 시가 될 수 있는지, “나는 오늘도 씁니까.”(「나는 오늘도 씁니까」)라고.
팔림프세스트(palimpsest)는 사본에 기록되어 있던 원문자 등을 갈아내거나 씻어 지은 후에 다른 내용 을 그 위에 덮어 기록한 양피지 사본을 의미한다. 김이듬과 김이녘의 시를 읽는 것은 이러한 양피지를 읽는 일이 될 것이다. 어느 것이 원본인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새겨진 의미들 모두 하나의 본질에 가닿으려는 시인의 기록이므로, 어떻게 읽더라도 그것은 옳으며 새로운 일이 될 것이다. 익숙함의 더께 를 벗겨내고 본질을 향한 새로운 낯섦을 토해내는 두 시인의 시는 예술을 통한 구원을 갈망한다. 우리 는 예술의 세계에서 구토를 멈춘 로캉탱을 기억한다. 그들의 창작은‘더께’위에 쌓아 올리는 것이 아 니라 ‘투명한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하는 세계이자 구원을 향한 무의식의 층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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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운은 첫 시집 『감은 눈이 내 얼굴을』(민음사, 2016)에서 시적 주체가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환영적 프레임을 설정하고 대상을 바라보는 다각적 시선을 통해 시간 및 공간의 안팎을 이동하면서 균열과 어긋남과 소멸의 미학을 형상화했다. 그는 두 번째 시집 『산책하는 사람에게』(문학과지성사, 2020)를 통해 전체적인 시적 구도를 환영적 프레임에서 일상적 현실의 프레임으로 전이하고 편지 형식이나 서사적 진술을 시도하는 동시에 산책을 통해 시간 및 공간의 안팎을 이동하면서 타인이나 동물과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시적 실천을 보여주고, 세 번째 시집 『기억 몸짓』(문학동네, 2024)에서는 보고 생각나는 것을 따라 산책하고 생각하는 화자를 통해 시적 리듬감을 동반하면서 계절적 일상을 담담한 회상의 어조로 표현한다. 우리는 안태운 시의 전체적 구조를 지배하는 핵심적인 분석소를 시적 화자인 '나'와 대상인 '그(너)'의 관계, 시적 공간 및 심리의 위상으로 '안'과 '밖', 중요 모티프로 '빛'과 '물(비)', '소리'와 '침묵', '공터', 시적 서사의 사건으로 '바라봄', '걸어감', '산책', '사라짐' 등을 설정하고 상호 연관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미학적 특이성(singularity)을 추출해 볼 수 있다. 안태운의 시는 기본적으로 시적 주체가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환영을 통해 대상을 바라보는 프레임을 제시한다. 첫 시집 『감은 눈이 내 얼굴을』의 대표적 작품인 「얼굴의 물」은 이 기본 프레임 속에서 화자가 대상인 "그"를 관찰하는 장면 묘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여기서 공간적·심리적 위상으로 "안"과 "밖", 중요 모티프로 “빛”과 "비"가 설정되고 서사적 사건으로 '안에 있음'-'밖으로 나감'-'비가 내림'-'되뇌고 걸어감'-'얼굴의 물 안팎으로 드나듦'-'물이 차오르고 얼굴이 씻겨나감'이 진행된다. 안태운 시의 중요한 미학적 특이성은 대상을 바라보는 화자의 미분적 시선이 시시각각 다각도의 장면을 파편적으로 포착하여 시간 및 공간의 연결을 차단하고 주체와 대상의 정체성 및 관계성에 균열을 일으키는 데 있다. 이 시에서 화자가 관찰하는 대상인 "그"의 모습은 시 전체에 반복적으로 나열되는 "~고"라는 연결어미에 의해 통일된 전체적 시점이 분기됨으로써 다각적이고 다층적인 장면으로 파편화된다. 안태운의 시는 언술 구조의 층위에서 "~고"라는 연결어미의 나열과 접속부사의 파행적 구사를 통해 상식적이고 통상적인 사고의 질서에서 이탈하는 화자의 미분적 시선을 구조화시킨다. "안"과 "밖"은 '방'의 공간을 기준으로 설정되는 물리적 개념인 동시에 '심리'의 영역을 기준으로 설정되는 정신적 개념이기도 하다. "안"-"안개"/"밖"-"빛"-"비"라는 대비적 구도가 설정되는데, 중요한 부분은 일견 대립적 이미지로 간주될 수 있는 "빛"과 "비"가 모두 "밖"의 영역에 속한다는 점이다. 안태운 첫 시집의 중심 이미지를 이루는 '물'은 주체의 공간적·심리적 밖의 영역에서 안의 영역으로 침입함으로써 동요와 균열과 상처를 주는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안태운의 시는 화자의 시선이 거리를 두고 자신의 꿈을 관찰하면서 묘사하는 시점을 채택하므로 무의식적 꿈을 조망하는 언술 구조를 형성한다. 이로부터 주관적 감정이나 과잉된 감응을 배제하고 객관적이고 무미건조하며 심리적 거리를 가지는 문체적·구문적 특이성이 생겨난다. 기본적으로 무의식적 꿈을 조망하는 안태운의 시는 대상인 '그(너)'의 공간적 위상과 심리적 양상 및 행동적 상황이 '안'과 '밖'의 위상학을 중심으로 구조화된다. 「얼굴의 물」이 화자가 대상인 "그"를 관찰하는 장면 묘사로 일관하고, 「원경」이 화자가 대상인 “너”를 관찰하는 장면 묘사를 계속 전개하다가 자신인 '나'를 개입시킨다면, 「감은 눈으로」는 시종일관 화자가 자신인 "나"의 모습을 묘사한다. 이러한 차이를 '꿈'과 '현실'의 관계라는 관점으로 재서술하면, 「얼굴의 물」이 화자가 대상인 "그"를 바라보고 관찰하는 장면 묘사를 중심으로 '무의식적 꿈'의 구도를 유지하고, 「원경」이 화자가 대상인 “너”를 관찰하는 장면 묘사를 중심으로 '무의식적 꿈'을 전개하다가 자신인 '나'를 개입시켜 '현실'을 삽입한다면, 이 시는 화자 자신이 '무의식적 꿈'에서 내쳐지는 과정을 묘사하여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동요하는 모습을 형상화한다. "감은 눈"은 '잠'과 연결되고 '무의식적 꿈'의 영역과 결속하므로 "꿈으로부터 내쳐진다". "감은 눈으로"라는 구절은 화자가 '잠'이나 '무의식적 꿈'의 영역에 머물고 싶어 하지만 비자발적으로 현실로 쫓겨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부러 눈 뜨지 않고 걸으면"이라는 구절은 화자가 쫓겨난 현실에서 의지적으로 눈을 감는 모습을 제시하는데, 이를 통해 "나와 함께 내쳐진 논이 있고 논 위로 걷는 내가 만져지는" 상황이 가능해진다. 화자는 현실로 쫓겨남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음으로써 현실에 꿈의 동력을 개입시키려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안태운 시의 꿈/현실, 안/밖의 관계에 대한 두 가지 특이점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는 꿈에서 현실로 이동할 때 꿈의 실재가 현실의 리얼리티로 전이되어 나타난다는 점이고, 둘째는 현실의 화자가 꿈속의 자신을 관찰하는 객관적 거리뿐만 아니라 꿈에서 현실로 추방된 자신을 관찰하거나 감각하는 객관적 거리를 가짐으로써 이중의 거리 감각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중의 거리 감각은 안태운 시 특유의 미분적 시선이 생성시키는 다각적이고 다층적인 몽타주 기법과 결부되면서 미학적 특이성을 강화시킨다. 안태운은 "걷고 난 후의 일들"이 "다른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시적 가능성을 두 번째 시집 『산책하는 사람에게』에서 모색한다. 안태운이 모색하는 새로운 시적 가능성은 표면적으로 '편지 쓰기'와 '산책하기', '동물로 대표되는 비인간과 인간의 관계 재구성' 등을 통해서 수행되는데, 우리는 이러한 표면적 수행성의 차원뿐만 아니라 그것을 근저에서 지탱하며 발생시키는 심층적 미학성의 차원도 안태운 시의 중요한 요소라고 간주하고 새로운 시적 가능성의 양상을 '소리의 침묵'과 '공터의 공백'에서 찾을 수 있다. 안태운의 두 번째 시집에 수록된 「빈방의 빛」에서 시적 화자는 초반부에서 "빈방의 빛에 대해서 써야 한다고 생각"을 오래전부터 하다가 "강박"이 드는 상황에 이르러 그것에 대해 진술하기 시작한다. "빈방의 빛"에 대한 진술은 중반부에서 "비질하는 소리"가 제시된 이후 일련의 "소리"에 대한 진술로 이동한다. “소리"가 "배경음"으로 작용하여 무위의 삶에서 벗어나 '행위(몸의 이동)'를 유발하는 동인(動因)이 되고, "지도"는 "소리"라는 "배경음"에 의해 촉발되는 '행위(몸의 이동)'가 현실화되기 위해 경유하는 매개로 작용한다. 그리고 "소리"와 "지도"의 상호 침투적 왕복이 "멀리 빈방의 빛"에 이르러 미지의 시공간에 존재하는 또 다른 "빈방의 빛"을 연상하는 장면에 도달한다. 이러한 시상 전개는 "빈방의 빛"-"비질하는 소리"-"여행자들의 목소리"-"모의하는 소리"-"지도"-"다시 소리"-"멀리 빈방의 빛"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시상 전개를 거쳐서 등장하는 대상들이 바로 "개와 고양이"라는 동물이다. 무의식의 연상 기법으로 진행되는 이 시의 시상 전개는 "빈방의 빛"에서 출발하여 다양한 '소리들'과 "지도" 간의 상호 침투적 왕복을 거치고 "멀리 빈방의 빛"을 경유하여 다시 "빈방의 빛"에 도달하는 재귀적 순환의 구조를 보여준다. 이 재귀적 순환 속에서 시적 주체가 추구하는 큰 틀의 지향성은 "빈방의 빛"에서 벗어나서 "개와 고양이를 따라서 가"며 "전철을 타고" "터널을 지나"가는 '행위(몸의 이동)'라고 할 수 있다. 이 행위의 연장선에서 안태운이 두 번째 시집에서 모색하는 새로운 시적 가능성이 표면적으로 '편지 쓰기'와 '산책하기', '동물로 대표되는 비인간과의 관계 재구성' 등을 통해 수행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두 번째 시집의 표면적 흐름에 대한 비평적 조명뿐만 아니라 이것을 가능케 한 동인으로서 "빈방"이라는 공백, "소리"라는 "배경음”, “소리"와 "지도"의 상호 침투적 왕복, "멀리 빈방의 빛"이라는 미지의 시공간 등에 대한 비평적 해명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안태운의 두 번째 시집에서 표면적 수행성의 차원을 근저에서 지탱하며 발생시키는 심층적 미학성의 차원은 주로 '소리의 침묵' 및 '공터의 공백'에서 발견된다. 「인간의 소리」에서 화자는 "사람들"이 "동물에 흡사하다고 느끼는 소리를 내"지만 "인간의 소리"에 주안점을 두고 그 근원적 의미를 천착하는 과정에서 "침묵"과 "웃음"이 내포하는 의미를 "밤"-"끝없는 들판"-음악-"춤"-'멀리서 들려오는 기이한 소리'에서 찾는다. 이와 유사하게 「목소리」에서 화자는 "너"가 우연성에 근거하는 "풍경 소리"를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어"서 "사람을 찾"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이 상황에 맞서 "너는 네 목소리를 내보지만 "풍경 소리 같지는 않았"기 때문에 "네 목소리 뒤로 돌아 나"가고 “다른 소리들마저 다 뒤로 돌아 나가"는 "풍경 소리"의 근원적 차원인 '침묵'과 '공백'에 대해 제시한다. 그리고 「공터를 통해」와 「흰 개를 통해」는 화자인 "나"와 "공터"와 "흰 개"를 중심으로 "산책"이라는 행위가 제시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여준다. 「공터를 통해」에서 "공터"는 "나"와 "흰 개"의 시선이 어긋나는 공간적 개념인 동시에 '과거'와 '현재'가 어긋나는 시간적 개념을 융합시킨 '시차(視差/時差)적 공백'이고, 「흰 개를 통해」의 "공터"도 "나"와 "흰 개"의 시선이 어긋나는 공간적 개념인 동시에 '과거'와 '현재'가 어긋나는 시간적 개념을 융합시킨 '시차(視差/時差)적 공백'이다. 따라서 이 두 시의 중심 주제를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산책'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화자 "나"와 "흰 개" 간의 긍정적인 결속이나 '여전히 지금-이곳에서 비인간동물이 배제되고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견고한 분할선이 존재한다' 등의 주제를 도출하는 표면적 수행성의 차원뿐만 아니라 "공터"가 시선의 어긋남과 시간의 어긋남이라는 '시차(視差/時差)적 공백'을 내장하면서 표면적 수행성을 근저에서 지탱하며 좀 더 복잡미묘하고 깊은 의미를 발생시키는 이중의 시적 장치로 작용한다는 심층적 미학성의 차원까지 규명해야 한다. 이러한 안태운 시의 미학적 특이성을 염두에 두면서 최근작 중에서 한 편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손끝의 장소 물갈퀴로 흘러드는 횡목 하오 당신은 몸이 어디서 시작되고 끝나는지 모르는데 당신은 부딪치오 시간의 끝에서 울다 공간과 사물로 있다 발가락을 움직여봐 모빌과 함께 산책해 있다 당신은 양의 집 근처에 가서 부른다 하지만 양은 어딘가로 나가 있었다 그러므로 당신은 뒤돌아 뛰어갔다 하오 놀았다오 자러 가기 전에 안부를 물었다오 음소 단위로 노래를 불렀다오 아름다웠다오 두 얼굴 뒤에 숨었다오 커튼 뒤로 내 뒤로 어느새 내 앞으로 도요새가 날아간다 당신은 몇 걸음 걷다가 체육을 했다 기억의 덩어리가 날아들었다 쐐기의 관계 하오 건물에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구름은 광장처럼 떨었다오 그사이 당신은 뒤돌아 망설였다오 우표를 붙였다오 당신을 사랑하오 수레와 함께 움직인다 민달팽이가 퍼져나간다 잔등과 환초 하오 당신이 어른이 되다니 당신이 어른이 된다니 - 「하오」 전문 이 시는 첫 시집에서부터 두 번째 시집까지 진행해 온 안태운 시의 미학적 특이성뿐만 아니라 세 번째 시집 이후의 변모까지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화자인 '나'와 대상인 "당신"의 관계, 중요 모티프로 "빛"과 '소리'("노래"), 시적 서사의 사건으로 '바라봄', "산책", 비인간으로서 "양", "도요새", "민달팽이" 등이 첫 시집에서부터 두 번째 시집까지 진행해 온 특이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대상을 바라보는 화자의 미분적 시선이 시시각각 다각도의 장면을 파편적으로 포착하여 시간 및 공간의 연결을 차단하고 주체와 대상의 정체성 및 관계성에 균열을 일으키는 첫 시집의 시적 방법론이 견지된다는 점이다. 이 방법론이 은연중에 노출된 부분은 "당신은 부딪치오 / 시간의 끝에서 울다 / 공간과 사물로 있다"라는 문장이다. 안태운은 두 번째 시집 이후에 전체적인 시적 구도를 환영적 프레임에서 일상적 현실의 프레임으로 전이하고 산책을 통해 시간 및 공간의 안팎을 이동하면서 타인이나 동물과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시적 실천을 보여주었고, 이와 연동하여 시의 공간적·심리적 위상으로 '안'과 '밖', 중요 모티프로 "빛"과 "비"가 설정되면서 "안"-"안개"/"밖"-"빛"-"비"로 구조화되었던 첫 시집의 대비적 구도가 평면적 구도로 병합되었다. 그러나 편지 형식이나 서사적 진술을 시도하는 동시에 타인이나 동물과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이러한 일상적 현실의 프레임에서도 미분적 시선을 통해 공간과 시간의 안팎을 분할하는 동시에 연결하면서 이동하는 안태운 특유의 시적 방법론을 견지하고 있다. "건물에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 구름은 광장처럼 떨었다오 / 그사이 당신은 뒤돌아 망설였다오 / 우표를 붙였다오 / 당신을 사랑하오"라는 구절은 화자가 "그사이"라는 찰나적 시간을 경계로 "건물에" "들어오고 있"던 "빛"과 "광장처럼 떨었"던 "구름"이라는 자연적 풍경을 묘사하고 "뒤돌아 망설"이면서 "우표를 붙였"던 과거의 "당신"을 기억하면서 "당신을 사랑하오"라는 현재의 감정을 표출하는 자신의 모습을 미분적 시선으로 포착하면서 제시한다. 이 시선에는 현재의 화자가 과거의 장면을 회상하면서 자신의 현재 감정을 표현하는 시간적·공간적 격차가 충돌 몽타주의 방법으로 농축되어 있다. 그리고 "수레와 함께 움직인다 / 민달팽이가 퍼져나간다 / 잔등과 환초 / 하오 / 당신이 어른이 되다니 당신이 어른이 된다니"라는 구절은 화자가 "하오"라는 찰나적 시간을 경계로 "수레와 함께 움직인"고 "민달팽이가 퍼져나"가는 "잔등과 환초"라는 현재의 자연적 풍경을 묘사하면서 "당신"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지속을 통해 "어른이 되"는 과정을 미분적 시선으로 포착하면서 제시한다. 이 시선에는 현재의 화자가 현재의 장면을 묘사하면서 "당신"이 "어른이 되"는 과정을 현재완료적으로 회상하는 시간적·공간적 격차가 충돌 몽타주의 방법으로 농축되어 있다. 안태운의 독자적인 시적 방법론에 해당하는 미분적 시선과 시차(視差/時差)적 공백이 향후 어떤 모습으로 진화해 나가는지 주목하기로 하자.
인간은 3차원적 존재이다.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세계는, 그 속의 모든 사물과 현상은 세 개의 방향 축 속에 존재한다. 당신이 앉은 의자와 책상, 눈앞에 놓인 책과 연필, 당신이 먹고 있는 사과 같은 것들. 당신의 바깥에 놓인 사물들만이 아니라 당신의 입 속 어두운 구멍 끝에 있는 기관과 장기들도 모두 세 개의 방향 축을 통해 폭과 높이를 가진다. 당신이 존재하는 공간이라는 것도 따져 말하자면 세 개의 방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당신이 죽어 소멸하게 되는 순간도 모두 세 개의 방향 축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해프닝에 불과하다. 모든 사물과 현상은 세 개의 방향으로 이루어진 공간 속에서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건 딱히 슬픈 이야기도 기쁜 이야기도 아닐 것이다. 단지 현상적이고, 물리적인 이야기일 뿐이기에, 실재가 아닌 실제에 이야기라고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바람직한 사실적인 공간 속에서 늘 무언가 부족함을 느낀다. 예컨대, 우리는 모든 사물과 현상이 세 개의 방향으로 구성된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세 개의 방향만으로는 그것을 온전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앎이 현상에 항상 미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인간에게 또 하나의 방향을 탐색하도록 부추긴다. 예컨대, 세 개의 방향 축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대상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가상의 방향 축을 하나 더 도입하는 것이다. 한때 물리학은 이 방향을 Q축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X, Y, Z에 속하지 않는 가상의 방향을 가리킨다. 물론 인간은 이 방향을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3차원의 공간성에 완전히 포획되어 있기에 그러한 방향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할 수 있더라도 그것을 실체적인 것으로 감각하거나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Q축은 일종의 가능성이면서 잠재성으로서 함의를 갖는다.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그러나 가정할 수 있기에 늘 염두에 둘 수밖에 없는 미지의 가능성 말이다. 어쩌면 이 Q를 우리는 질문(question)이라 읽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만약에 그것을 물리학적인 축의 문제가 아닌 질문의 문제로 치환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기실 시인들이야말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의 운동을 설명하고자 네 번째 방향을 헤매는 존재들이지 않을까. 물론 이 Q의 문제는 시인들이 가지는 공통의 문제이겠으나, 실질적인 방향성은 당연히도 시인마다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 이는 그것을 세계의 관찰자이자 참여자인 인간의 내면의 문제로 이해하며 나아가기도 하고, 혹 어떤 이는 그것을 세계에 대한 관찰과 참여의 부족으로 생각에 외부를 향해 나아가기도 한다. 그것뿐일까. 어떤 이는 언어와 언어의 충돌과 연쇄를 통해 이루어지는 거듭된 사고 실험을 통해 또 다른 행방을 추적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언어 그 자체의 속성에 골몰해 자기 앞의 단어들과 긴 밤을 지새우기도 할 것이다. 송은숙이라는 시인이 『열 두 개의 심장이 있다』는 말로 되풀이하고 있는 문제 또한 그러하다. 그의 시집에서는 끊임없이 외부의 사물을 관찰하는 한 사람의 화자가 등장한다. 높은 산과 굽은 강, 날개를 활짝 펼친 새와 어두운 숲, 그 숲 너머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와 이름 모를 들꽃 같은 것들까지도, 그는 세계의 모든 사물들을 향해 자신의 감각을 활짝 펼치고 그것들의 기척을 온 몸으로 받아들인다. 저녁의 발자국을 본 적이 있다 산책길 양옆을 따라 망초꽃이 줄지어 피어 내가 발을 옮길 때마다 꽃은 밝음에서 어둠으로 팽나무 그늘처럼 옮겨 가는 것이다 그날 나는 저녁과 함께 산책한 것인데 저녁은 서걱서걱 옷 스치는 소리와 쌀랑쌀랑 바람이 이는 소리로 한 발짝쯤 앞서 걸었다 그때 우리는 무슨 얘기를 했던가 징검다리 한가운데서 눈을 감고 섰을 때 물살이 나를 떠메고 가던 일 바람이 등을 밀어 줄 때 슬쩍슬쩍 허공을 밟던 일 분홍낮달맞이꽃에 고개를 박고 있던 나비의 그림자에 대해 저녁은 손짓 하나로 저 멀리 검은 창에 노란 달맞이 꽃을 피우고 하늘에 쌀알 같은 별 뿌려 놓고 그 마술에 현혹되어 저녁의 발자국을 따라가는데 망초 길이 끝나고 검은 아스팔트 길이 강처럼 가로지르고 그 너머 어둠 숲이 펼쳐지고 길을 건너다 징검다리에서 듣던 물소리를 아득히 다시 들으며 저녁이 저 녘으로 나를 이끄는 것을 힘겹게 깨닫고 몸을 돌리는 것인데 바짓단에 흠뻑 이슬을 적시는 까만 밤의 반딧불처럼 저녁의 주술은 매혹이어서 - 송은숙, 「저녁의 발자국」, 『열두 개의 심장이 있다』, 걷는 사람, 2024. 위의 시에서와 같이, 송은숙의 화자는 세계를 산보하며 두 눈으로 세계의 한 부분을 저마다 차지하고 있는 사물들의 현존을 목격한다. 그의 오감은 자신이 목격한 사물의 현존을 감각하는 동시에 사물들의 배치가 만들어내는 관계성 속에서 피어나는 제각각의 의미들의 사슬이 존재함을 느끼고 있다. 그의 시 속에 존재하는 사물들은 제각기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과의 연관 속에 위치 지어져 있는 셈이다. 물론 이러한 관계성과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배치는 객관적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사물이 객체로서 그 자체 존재함의 결과가 아닌, 화자의 시선의 이동이 만들어낸 배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은 결코 시 속에서 펼쳐지는 관계성의 이야기가 허구이거나 그릇된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객관적인 하나의 세계가 한 사람의 시선 속에서 주관적인 서사적 세계로 다시 빚어지는 방식을 설명해준다. 예컨대 “망초꽃”과 “팽나무”와 “징분홍낮달맞이꽃”과 “노란 달맞이 꽃”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세계에 속하면서 동시에 시적 화자인 나의 감각 속에서 주관적인 서사적 세계로 다시 셈해지며 분화된다. 그러한 방식으로 송은숙의 시적 화자는 하나의 객관적 세계를 다분한 주관적 서사들의 세계로 분화시키며, 그 분화 속에서 사물들은 또 다른 배치를 경험하며 잠재되어 있던 의미를 꽃피운다. 예컨대 “저녁은 손짓 하나로 저 멀리 검은 창에 노란 달맞이 꽃을 피우고/하늘에 쌀알 같은 별 뿌려 놓고/그 마술에 현혹되어 저녁의 발자국을 따라가는데”와 같은 진술은 단지 감상어린 화자의 사물에 대한 찬사가 아니다. 그것은 사물들의 객관적 배치 속에서 새로운 가능 세계를 찾아내고 그것을 현실화하는 시적 화자의 권능이다. 그가 그렇게 말할 때, 세계는 진정으로 그러한 모습으로 피어난다. 적어도 언어로 이루어진 시적 세계 그 속에서만은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말’은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송은숙의 시에서 거듭 돌출되는 또 하나의 영역, ‘너머’의 문제와 관계된다. 창 너머, 담 너머 너머는 너무 멀다 고개 너머, 산 너머 가려고 했는데, 가자고 했는데, 갈 수 있었는데 너머는 넘어가 아니라서 더 아득하고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을 보아야 보일 듯 말 듯한 아지랑이 같아서 고양이가 담 위에서 너머의 안쪽과 바깥쪽 어느 쪽으로 뛰어내릴까 갸우뚱 궁리하고 있다 너머의 바깥쪽으로 바람이 분다 너머의 너머쪽으로 불었던 바람이 다시 너머의 안쪽에 막혀 되돌아온다 무지개라든지 구름이라든지 계절이라든지 지금, 이 순간이라든지 너머의 결계는 거미줄같이 가벼워서 너머의 너머는 너무 투명해서 돌아오지 못한다 - 송은숙, 「너머의 너머」, 『열두 개의 심장이 있다』, 걷는 사람, 2024. 분명 송은숙의 시적 화자는 세계에 존재하는, 오감을 통해 인식되는 사물들의 세계 속에 존재한다. 그는 시에서 표현되는 “무지개”와 “구름”에 둘러싸인, 그리하여 계절의 변화가 오감을 통해 전해져오는 물리적 세계 속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그의 오감, 특히 시선 또한 이 물리적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의 인식은 거듭 시각적 형상 ‘너머’에 대한 질문으로 향한다. 우리는 이러한 오감과 인식의 서로 다른 방향성을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치환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세계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외관이 전부가 아니라는 인식으로 말이다. 이것에 상응하듯, 그의 시적 화자는 거듭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려고 했는데, 가자고 했는데, 갈 수 있었는데”, 마치 눈에 보이는 세계와 자신이 산보할 수 있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듯이. 하지만 그의 시적 화자가 보여주는 어투가 의미하듯, 그는 여전히 우리와 같은 세계 속에 머무르고 있다. 「너머의 너머」에는 그렇게 머무르는 시적 화자의 세계에 대한 주관적 감상이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그 세계는 분명 무수한 색채와 기척이 가득한 생기 넘치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창”과 “담”으로 둘러싸인, 비유적 의미에서의 “고개”와 “산”에 둘러싸여 화자가 더는 나아갈 수 없는 한계의 영역이기도 하다. 이 한계의 영역 속에서 화자는 물리적인 이동이 오직 그가 존재하는 물리적 영역의 안으로 제한되어 있기에, 역설적이게도 다음과 같은 사태가 벌어진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을” 바라보며, 자신의 오감이 감각하는 세계의 모습이 결코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더욱 강하게 감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새를 사랑하는 것은 한 마을을 사랑한다는 것 부리처럼 솟은 산이 하나 있고 산 옆으로 굽은 강이 흐르는 어느 마을을 사랑한다는 것 강에는 다리가 하나 있어 두 다리가, 네 다리가, 여섯 다리가 지껄지껄 건너다니는 은성한 풍경을 사랑한다는 것 저 거룩한 글자는 날개를 활짝 펼친 새의 눈이 바라보는 지구의 한 모퉁이를 상형한 것 다리 이쪽 끝에는 한 사내가 있어 소맷부리에서 새를 꺼내 자꾸자구 날리고 있다 새들은 새, 새, 새, 새, 새, 휘파람 소리를 내며 둥근 산의 정수리에 부리를 닦고 날아간다 그러니까 우리는 새와 함께 등성이로 비스듬히 해가 솟는 어느 마을의 맑은 사기그릇 같은 아침을 사랑한다는 것 - 송은숙, 「조감도」, 『열두 개의 심장이 있다』, 걷는 사람, 2024. 한계가 부추기는 초월에 대한 명상, 그것은 송은숙의 『열두 개의 심장이 있다』에서 거듭 반복되는 문제이다. 그의 시적 화자가 가진 ‘너머’에 대한 호기심과 욕망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한계를 더욱 강하게 인지하도록 만들며, 동시에 그토록 강하게 인지되는 한계의 문제가 물리적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또 다른 가능성의 영역을 자꾸만 상상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이것을 그의 시적 구조로 치환하여 말하자면, 한계에 대한 강렬한 감각이 세계 내에 또 다른 가능한 세계에 대한 서사를 불러일으키는 구조라 말할 수 있을 것이며, 그 한계가 감지되는 자리이자 가능한 세계가 피어나는 지점인 셈이다. 때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새를 사랑하는 것은” 결코 새 한 마리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그것이 포함될 수 있는 모든 영역으로서의 “은성한 풍경을 사랑한다는 것”이라고. 예컨대, 세계는 결코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에 우리의 사랑 또한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이다. 이것을 시인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그러니까 우리는 새와 함께”, “맑은 사기그릇 같은 아침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송은숙의 시가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로부터 그 너머를 향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면, 박지일의 시가 던지는 질문은 조금 다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듯 보인다. 물론 박지일의 시 또한 이 세계가 결코 그것이 전부 다가 아님을 전제하고는 있으나, 그 나머지 부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가령, 송은숙의 시적 화자가 명확한 시각과 대상에 대한 선명한 진술을 통해 진술될 수 없는 나머지에 대해 대략적인 실루엣을 그려내고 있다면, 박지일의 시는 명확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반복적이며 때로는 환각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두서없는 정보들의 배치 속에서 일별되는 미지의 대상의 실루엣을 그리고자 시도한다. 문이 등장한 까닭은 대개 가리고 선 그 너머를 네게 보여 주기 위함이고 (아무것도 없음까지 포함하여) 열기 위해 씨름하는 과정에서 네가 느낀 탈력과 굴복의 강도에 비례하여 문은 희열을 얻는다고 하던데. 근데, 네가 너를 작동할 수 있던가? 열거나, 열지 않거나, 선택을 어지하긴 해야 하는데… 너는 선택하지 못할 것 같고(선택하지 않는 선택까지 포함하여) 네게 너는 주도권이 없는 것 같아. - 박지일, 「물보라」, 『물보라』, 민음사, 2024, 13쪽, 부분. 위의 시에서 나타나듯 박지일이 집중하는 문제는 “문”으로 상징되는 경계성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 시의 가장 핵심적인 자리에 위치한 대상인 ‘문’은 공간을 ‘안’과 ‘밖’으로 나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또 다른 문제에 동시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문’이라는 사물이 그 외관으로 인해 갖게 되는 일종의 기만과 관계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문’은 공간을 나누고, 그 사이를 시각적으로 차폐시킨다. 그리고 이때의 시각적 차폐는 기묘한 착시를 불러일으키는데, 그것은 ‘문’ 너머에 실제로 어떤 공간이 존재하리라는 환영이다. 비록 주체가 그 ‘문’을 실제로 열어보지 않더라도, ‘문’이라는 외관은 주체로 하여금 그 너머에 어떤 실체적인 공간이 있으리라는 환영에 사로잡히도록 만든다. 실질적으로 그 너머에 실체적 공간이 존재하기에 ‘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문’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그 너머에 어떤 실체적 공간이 있으리라는 환영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물론 「물보라」 속 화자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화자는 다음과 같이 자조적으로 이야기한다. “문이 등장한 까닭은 대개 가리고 선 그 너머를 네게 보여 주기 위함이고 (아무것도 없음까지 포함하여”. 예컨대, 이 시적 세계에서 인간 주체는 그것이 기만이고 환영임을 알고 있음에도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는 위태롭고 나약한 존재로 느껴진다. ‘문’은 그러한 기만을 통해 주체에게 감각적 착취를 행하며 희열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러한 진술들을 종합하자면 ‘문’이란 실제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비유적인 것, 예컨대 기만을 통해 인간 주체의 경향성을 추동하는 모든 대상을 가리킨다고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시에서 ‘문’은 열리지 않는다. 사물의 기만은 시적 공간의 끝까지 이어지며, 화자는 ‘문’ 앞에서 끝나지 않는 질문을 반복하고 때로는 자신의 답변을 번복하며 존재한다. 이를 토대로 생각해보자면, 시적 화자의 모습을 통해 시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문 너머에 실제로 무엇이 있는지, 인간은 그곳에 다다를 수 있는지와 같은 가능성에 달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인이 시적 정황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실재적이냐 실제적이냐의 여부가 아닌, 그 앞에서 번민하길 반복하는 인간 존재의 모습에 가까워 보인다. 1. 누구는 없는 너. 누구만 없는 너. 네가 너를 계속하여 믿기 위해선, 너로부터 끝없이 도망쳐1. 야만 한단다. 멧닭은 듣는다; 네가 반복하여 내쉬는 한숨을. 평화를 내쉬는 것도, 불안을 내쉬1. 는 것도 아닌. 그것은 마치… 가장 작은 소리로 도망하기 위하여 1천년 동안 자기 뼈를 조금1. 씩 조금씩 긁어내는 바람의 들숨. - 박지일, 「물보라」, 『물보라』, 민음사, 2024, 32쪽, 부분. 비참하군, 설명하자니 비참해. 물보라. 너는 네가 비참하다. 이렇게 한들 저렇게 한들, 비참하다고 씀으로써 너는 너의 작업을 아주 망쳐 놓았어. 어쩔 수 없이 비참하다고 중얼거리며 너는 너를 시작하다; 네가 비참한 마트에 들르다, 네 목적이 아니었던 생물 코너 앞을 비참한 네가 어슬렁대면서, 생물 오징어 한 팩을 비참하게 찍고 마트를 나와서 비참한 건널목 건너서 비참한 랩을 뜯은 다음에, 횟집 수족관에 오징어를 풀어 놓고 악을 쓰다; 내가 비참하다고, 비참해서 비참 이의 말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을 때, 비참, 그게 뭘까? 어리둥절. 어리둥절이 너를 훔친다. - 박지일, 「「물보라」 우수리 편」, 『물보라』, 민음사, 2024, 189쪽, 부분. 그런 까닭에 박지일의 시집 『물보라』에서는 주체를 호명하는 대명사인 ‘나’와 ‘너’라는 시어가 가장 많이 반복된다. 그 모든 ‘나’와 ‘너’는 하나의 공통점을 소유하는데, 그것은 번민과 방황에 사로잡힌 존재들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을 좀 더 명징하게 말하자면, 두 가능성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지 못하기에(혹은 할 수 없기에) 발생하는 번민과 방황이라 할 수 있다. 선택의 가능성은 주체를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번민과 방황에 밀어넣는 기제인 것이다. 마치 앞서 인용했던 「물보라」의 한 장면에서 시적 화자가 문을 열 것이냐 말 것이냐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과 같이 시적 화자는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것이 강제되는 상황 속에서 어떤 것도 선택하지 못하기에 번민과 마주한다. 그리고 그러한 번민은 시적 화자를 “비참”하게, “어리둥절”하게 만들며 조금씩 지쳐가게 만든다. 예컨대, 문제는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선택이 강요되고 있는 상황 그 자체가 문제라는 것처럼. 그러나 이 반복의 양상 속에서 ‘나’와 ‘너’는 결코 같은 모습으로 반복되지 않는다. 시적 정황이 만들어내는 다소간의 차이의 연속 속에서, ‘나’와 ‘너’는 언어상 같은 모습으로 출현할지라도 그 양태 또한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물론 그러한 차이 속에서도 여전히 화자는 번민하고 방황하며 비참한 상태로 놓여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번민과 방황, 비참의 모습들은 하나의 시그널로 기능한다. 그것은 시적 화자로 대표되는 인간 존재가 상황에 굴복하지 않았다는(예컨대 상황의 강요에 떠밀려 무언가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여전히 끈질긴 사유의 줄다리기를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자체가 하나의 답변이 될 수는 없다. 여전히 시적 화자는 번민과 방황의 무대인 ‘여기’에 존재하며, 그의 사유의 줄다리기가 지속되는가의 여부와 관계없이 상황은 여전히 상황으로 굳건하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불가항력적인 상황 여부와 관계없이, 진정으로 불가사의한 것은 ‘주체’가 계속해서 사유를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이다. 그러한 번민이 반복될 때에만, ‘나’와 ‘너’는 ‘나’와 ‘너’로서, 이 시적 무대의 정중앙에 위치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때문에 여기에서는 하나의 질문이 덧붙여진다. 그것은 ‘문’ 너머에 정말로 다른 세계가 존재하는가의 여부나 이러한 가무한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와는 조금 다른 층위에 존재한다. 즉,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 ‘시’라는 한정된 공간에 질문을 적용하자면 무엇이 저 대상으로서의 존재를 시적 화자로서, ‘나’와 ‘너’라는 주체성의 상징으로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가. 물론 박지일의 시적 화자가 제시하는 답변은 ‘사유’의 지속성이다. 『물보라』의 시적 세계에서 인간 존재가 오직 한정적이며 순간적으로만 존재할 수 있을 따름이며, 인간이라는 존재의 토대란 이처럼 위태롭고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살아지듯이 죽으라. 지긋지긋한 거울 속으로 기상캐스터가 입장한다. 중부 지방은 맑거나 아침에 차차 맑아지겠다. 남부 지방은 흐리겠다. 경남 해안과 제주도 지방은 곳에 따라 한때 비가 조금 온 후 차차 개겠다. 바람은 약하겠다. 기상청은 “아침과 낮의 일교차가 10도 이상 벌어지는 날씨가 계속되겠다.”라고 밝혔다. 아침 최저기온 섭씨 –1에서 14도, 낮 최고 기온 16에서 20도. - 박지일, 「11月 6日」, 『물보라』, 민음사, 2024, 127쪽, 전문. 죽어지듯이 살라. 지긋지긋한 거울 속으로 기상캐스터가 온다. 사투리를 쓰면서 온다. 헤이수이(黑水县) 현은 좀 덥거나 아침은 아니 온다. 나나이 칼란(Nanai Kalan)은 습하거나 땅감이 익겠고 저녁은 아주 아니 온다. 마조르다(Majorda)와 파나두라(Panadura) 해안은 한때 더워 개골창으로 변한다. 바람은 없다. 눈도 없고 비도 없고 햇볕은 아주 없고 내일은 없다. 끝. - 박지일, 「11月 6.4日」, 『물보라』, 민음사, 2024, 128쪽, 전문. 어디가 죽음 이전이고 어디가 죽음 이후인지 모르겠다. 네 앞에 선 거울이 너를 슬쩍 납치한다. 너는 그네를 돌려달라고 엄마에게 조르는 중이었다. 엄마는 화를 낼 줄 모르는 사람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거울아, 거울아, 너는 거울에게 배운 대로 빌어 본다. 거울은 미동이 없고 너는 홀로 미동을 키운다. 엄마가 거울 속에서 등장한다. 너를 바라보는 눈동자 속에 너만 없다. 너는 거울을 납치하여 등에 업고 날아오른다. 너는 물구나무 한다. 네 긴 머리카락이 손잡이처럼 흔들린다. 세상이 뒤집히고 열차는 순환한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 박지일, 「11月 9.7日」, 『물보라』, 민음사, 2024, 134쪽, 전문. 정리하자면, 박지일의 시적 세계에서 그토록 호명되는 ‘나’와 ‘너’라는 인간 주체는 실로 한 순간의 물보라와 같이 순간적이며 부서지기 쉬운, 영속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위태로운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시집의 후반부에 위치한 일기의 형태를 띤 작품들에서는 유독 의지 혹은 지시를 전달하는 단정적인 표현들이 자주 등장한다. 분명한 대응관계라 말하기는 어렵겠으나, 어쩌면 이러한 의지와 지시를 담은 단정적인 표현들은 유약한 인간 존재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단서들이 아닐까 싶다. 이 시적 세계에서 ‘인간’ 존재란 그처럼 무수한 순간을 거쳐야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라면, 이 시적 세계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란 무엇이 올바른 선택인가와는 전혀 다른 층위의 문제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언제까지 이 『물보라』와 같은 부서지기 쉬운 존재가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을까.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가 계속되는 한에서일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시적 공간은 단지 언어를 통한 재치의 영역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위태로운 실존이 걸린 무대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적 무대 속에서 존재하는 인간 존재가 오직 거듭되는 방황과 번민 속에서 사유를 이어가는 한에서 인간으로 계속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그것을 일종의 철저한 데카르트적 주체라고도 이야기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러한 주체는 보편적 의미에서의 데카르트적 주체보다도 훨씬 더 회의론적이며 위태로운 것이라는 한에서. 생각하는 능력을 지녔기에 인간인 것이 아니라, 생각을 멈추는 순간 인간일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조건이라는 것으로. 물론 이러한 이야기는 박지일의 시집 『물보라』가 지닌 여럿 가운데 하나의 단상에 불과하다. 어쩌면 언어로 짜집어진 사물과 사물의 연쇄 속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의미론적 발견이야말로 그의 시가 지닌 최고의 미덕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시집 또한 이 세계가 X.Y.Z라는 세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으되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온전히 설명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감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질문은 반복될 것이며, 반복되는 질문 속에서 박지일의 시적 주체는 여전히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3차원의 공간임을 상식을 통해 알고 있다. 입체성을 지닌, 그림자를 지닌 세계의 부피들이란 그 자체로 이 세계가 3개의 방향 축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시인의 작품을 통해 살펴보았듯, 세계와 그 안의 사물과 일어나는 현상들은 세 개의 축만으로는 온전히 설명될 수 없다. 설명될 수 없는 이 실재의 영역을 향해 시인은 거듭 질문을 던지며 자기만의 답변을 질문의 형태로 거듭 제시한다. 우리가 언젠가 온전한 답변에, 정답에, 진리에 이를 수 있을까? 다소 회의적으로 말하자면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빛이 이 세계에서 30만km의 속도를 지닌다는 것이 하나의 규칙인 것처럼,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모든 것의 정답에 다다르는 일 역시 불가능한 것이 세계의 규칙인지도 모르므로.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질문을 이어가며 사물들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혹은 잠재되어 있던 위기를 거듭 질문의 형태로 발견해나갈 것이다. 아마 그때까지 시는 거듭 쓰여질 것이다. 우리가 인간이기를 지속하는 한에서, 그리하여 우리가 언어를 통해 이 불완전한 세계를 더듬거리며 계속 나아가는 한에서.
그런 염려를 한다. 나의 공감이나 이해가 뜻하지 않은 폭력을 포함하고 있지나 않을지. 해석의 욕망이 문학을 비좁게 만들지나 않을지. 부러 애써 덮어두었던 마음을 까불리고 파헤쳐 남루하게 만들지나 않을지. 그러나 염려는 금세 불식된다. 발화를 언어화라는 상징계의 지적 작업을 통과하는 일로, 발설을 입 밖으로 마음을 꺼내놓고자 하는 어쩌지 못하는 열망이라는 정동으로 구분할 수 있다면, 발화 이전에 뭉근히 부풀어져 끓어 넘치고자 하는 발설의 욕구가 문학의 안쪽에는 틀림없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글은 발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종의 생존을 위한 기술(技術), 생존에 대한 기술(記述)이기도 하다. 살려고, 살기 위해 쓰는 것이다. 유수연의 시만큼 오직 정념으로 넘실대는 시가 또 있을까. 사람의 에너지가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움직인다고 할 때 그 화살은 안에서 밖으로 또는 그 반대로 도식화할 수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내부를 향해 운동하는 에너지의 흐름을 따라가 닿는 단어는 침잠쯤일 텐데, 내부로 파고드는 이 에너지는 일상에서 사람을 감추는 방식에 가깝겠지만 시에서라면 이보다 자신을 전면화하는 방식도 없겠다. 그러니까 그는 “진심을 들키고 싶었다”(「생각 담그기」, ①)1)는 것이다. 그가 들키고 싶은 이 에너지의 실체는 바로 슬픔이다. 시집에는 슬픔이 내내 노크한다. 내심 드러내고 싶은 것이라 할지라도 이토록 감정에 깊숙이 젖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를 담은 게 나를 말한다”(「생각 담그기」,①)는 시인에게 그릇의 모양이야 하마 어떤 것으로든 변하는 것, 그러니까 그에게 감정이란 차라리 인식과 긴밀하고 그 반대편에 육체성은 자리한다. 어떤 날에는 그나마 손에 쥠으로써 사랑을 확인하고자 하기도 하지만(“서로의 것을 만져 간신히 살아 있음을 느낀 날”) 그럴 때마다 번번이 애인의 등만 보았던 셈이다(“같이 누웠지만 등을 돌리고 자다 깨는 날”,「새로운 일상」,①). 그런 감정이 그릇의 내용이면서 그 모양을 결정하는 가치인 반면 몸은 어쩐지 죄책감과 결부된다. 몸이란 “배가 고프면 슬퍼지고 저녁노을만 봐도 누군가 보고 싶다 착각하게 되”(「조가만가」,①)는 식이라, 배고프지 않으려 안간힘 쓰는 건 종국에 압도하는 그리움을 이길 자신이 없다는 뜻일 테다. 무엇이 이토록 두려운가? 죄책감의 모양새로 오는 두려움은 어떤 면에서는 종교에 밑그림을 둔 것처럼도 보인다. “교복을 입은 채 죽음을 작정했던 이유는/ 들키고 싶지 않은 일로” 두겠다는 고백은 “생각으로 지은 죄는 모두 용서받고 싶었다”(「그림자」,①)는 간곡함에 닿는다. 어떤 종교에서는 자살과 낙태, 동성애 같은 것을 죄의 세목에 둔다. 소년의 죄가 죽음의 작정에 있는지 죽음충동에 이르게 한 일에 있는지 혹은 그 이후에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다른 종교에서라도 구원을 구해보려 애쓰는 모습((「온라인 열반」,②)2)만은 삶의 안간힘 쪽에 방점을 찍는다. 분명한 것은 그에게 죄책감을 안기는 것 역시 슬픔이나 사랑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는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 죽음에 의한 상실이거나 이별에 의한 상실, 그건 나의 탄생과 직결되는 이일 수도 있고 나와 연인이란 이름으로 연결되어 있던 이일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첫 번째 시집에 가득한 죽음의 이미지 중 바다로 가라앉는 어린 죽음은 기시감을 드리우며 살아있는 자의 슬픔을 추동한다. 손아귀에 돌돌 말아 소복이 담아내는 국수 한 그릇에서 동그랗게 손을 잡는 아이들과 놀란 눈동자를 떠올리는 것은 흔히 국수가 생명줄을 상징한다는 믿음의 반대편에서 깊숙이 가라앉고만 죽음을 연상케 하는 것이다. “내가 본 가장 슬픈 정수리”가 “놀란 눈동자”(「개평」)란 말은 있는 힘껏 고개를 젖혀 가라앉음으로부터 두 눈을 부릅뜬 최후의 순간을 국수 그릇에 동동 띄운다. 그럴 때 남은 자의 삶이란 타인의 몫에서 공으로 얻은 일부로 여겨지기도 할 것이다. 애초 “나의 형제는 배다른 슬픔”(「기쁨 형제」,①)이라는 말에는 나의 존재 역시 슬픔이라는 전제가 도사린다. 그러니 이 시인은 슬픔의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자체가 슬픔이고, 그에게 들어오는 것이 슬픔이 된다. 도처의 슬픔을 내버려 둘 수가 없다. 이를테면 ‘슬픔-되기’. 우리는 이걸 1인칭 슬픔이라 부르기로 하자. 화자의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슬픔이 된다. 화자의 밖으로 나가는 것은 슬픔을 남겨놓고 빠져나간다. 그렇게 1인칭 슬픔은 점점 더 견고해진다. “슬픔이 바나나보다 빨리 익”어서 “한 겹 까기 전에 으깨진다”. 짓무른 슬픔은 “믹서에 집어넣고 꿀을 한 바퀴 돌”리니(「슬픔이 익을 동안 나눠 잊을까요」,①) 걸쭉해진다. 이런 순간에 슬픔이라는 감정은 바나나 셰이크의 이미지로 흘러내린다. 유수연의 시에는 이렇게 감정이 물성을 띠는 순간이 있다. 기분이나 느낌, 정동이나 정념 등으로 불러야 할 감정(의 잔여물)들이 물질로 변형되는데, 이 물질화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마치 슬라임slime을 닮았다. 유동성이 있는 끈끈한 물질의 총칭인 슬라임은 점균류를 뜻하기도 한다. 미생물이 군집을 이루어서 큰 유동적 유기체를 형성한 것 말이다. 그러니까 유수연의 슬픔은 슬라임화 되며 물성을 갖게 될 뿐만 아니라 일종의 생명체로 재생산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슬픔은, 응당 자라난다. 우리는 우리는 방류하기로 한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거기에 홀로 있고 당신은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나도 다음 열차로 올라갔습니다 좌석은 매진되어 전철을 타고 갔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껴서 답답하게 올라가니 슬픔보다 더위가 나를 지배했습니다 사람은 가까이 있는 것에 먼저 반응합니다 땀흘려 이룬 모든 일이 허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중에 사랑이 먼저 흘러가버렸네요 흐름의 시작을 찾을 수 없는 유수와 같은 시절이었습니다 -「소양강 소로우」,②부분 흐르는 물에 훌훌 풀려 떠내려가 버린 사랑도 그런 모양새다. 당신은 먼저 서울로 가고 나는 거기에 있다가 곧장 뒤따르지만 그 짧은 간극은 서로를 찢고 사랑을 흩트려 놓는다. 이 시에서 소양강은 잃어버린 사랑의 모습을 하고 한 덩어리로 출렁인다. 소양강이 한 덩이 슬라임의 모양으로 가만히 출렁일 때 그 출렁임이 소리 없이 흐느끼는 어깨의 움직임을 닮은 건 그가 흘러가 버린 사랑을 ‘유수’에 대비시키고 그러한 인연(緣)의 숙명을 자신인 양 일체화하기 때문이다. 이 시의 제목을 ‘유수연’으로 바꾼 들 어색함은 없는 것이다. 이 조로한 슬픔을 어쩌나. 그런가 하면 시집에 보란 듯이 넘쳐나는 것 또한 사랑이다. 사랑과 행복이 이토록 열렬하게 말해지기도 어려울 것 같다. 그런데 이 사랑과 행복은 썩 달콤하지 않다. 우리는 이제와 실컷 발화되는 사랑에 대한 열쇠를 첫 번째 시집의, “서사 없이도 사랑은 가능하다”(「유지」,①)는 문장으로부터 얻어올 수 있다. 인간의 행위와 관련되는 사건을 언어적으로 재현하는 사실적 기록 양식이라는 ‘서사’가 없다는 것을 문맥에 맞게 한 단어로 교체하여 문장을 다시 쓰자면 ‘이 사랑은 사후적이다’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다. 즉 유수연의 시에 그토록 넘쳐나는 사랑은 서사가 불가능한 종료, 사건의 종결과 대상의 부재로부터 비롯되는 후경인 것이다. 시의 발화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는 ‘불가피성’에서 비롯한다는 신형철의 말처럼, 이 시인은 내내 어쩔 수 없음을 발화한다. 어쩔 수 없어서 발설한다. 그에게 사랑의 종결이란 아직 오지 않은 일로, 그건 차라리 너와는 관계없는 일처럼 보인다. 그에게 사랑은 금세 사라지곤 하는 느낌이 아니다. 사랑은 느낌이 아닙니다 갈증과 배고픔은 느낌이에요 해결하면 사라지는 것 사랑은 사라지지 않아요 -「행복1」,②부분 느낌이라는 층위에서 나와 너는 대체로 타자라는 신형철의 말을 좀 더 당겨오면, 그저 나는 나이고 너는 너라는 느낌만 있을 뿐이고, 사랑이란 느낌의 세계 안에서 드물게 발생하는 사건일 거란다. 느낌의 세계 안에서 서로가 구성하는 공동체인 사랑은 능력이라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사랑이란 사건은 서로의 느낌 안에서 그 찰나의 조우를 찾아내는 가능성에 대한 능력인 셈이다. 다시 시로 돌아와, 시인은 이 정의 안에서 사랑의 능력을 상실하고 홀홀하게 빛나는 고독을 그물 안에 남는 물고기처럼 떠올린다. “내 마음도 통과되는 줄 알았는데/ 여과하고 남아버린 게 있”(「정중하게 외롭게」,②)다. 그래서 나는 남고 너는 없다. 사랑은 어디로 갔는가? 나는 내가 너를 사랑하는 그 느낌을, 너는 네가 나를 사랑하는 그 느낌을 각자 느끼면서 그 느낌으로 마주치는 아주 짧은 그 순간의 발견, 그 사랑을 유수연식으로는 “나는 나를 견디고 너는 너를 견딘다”(「애인」,①)로 다시 쓸 수도 있겠다. 시인은 이미 “내 몸을 초과하는 마음이 너무 많아”(「수련이 피기까지」,①) 죄가 되는 사랑을 놓쳐버리기로 했었다.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더니(「고백」,①)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나 못 헤어지겠어, 나 아직 안 헤어졌어라고 말하고 있는 듯 “같은 슬픔만 계속 채워내는 중”이다(「종 다양성 슬픔 무성히」,②). 그러니 두 번째 시집에 와서 그의 사랑은 가능성으로 열려있다기보다 일말의 가능성마저 폐기함으로써 되레 자유로워진다. 마음껏 사랑 이후의 사랑을 발화한다.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도 소용없다. “여태 나가지 않”을 줄 몰랐기에(「당기시오」,②). 그리고 그런 게 사람의 사랑임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사랑은 밖에서 와 내 안에 있다가 어느 순간 바깥을 향해 홀로 걸어 나간다. 손바닥 사이로 몸을 늘어뜨리며 스르르 흘러버리는 슬라임처럼 사랑은 어느새 내 손에 쥐어져 있지 않다. 사랑은 그렇게 남겨지지도 않고 그러쥘 수도 없다. 하루 만에 먹지 못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일을 그렇게 오래 시킬 줄은 몰랐다 데쳐서 초장에 찍어 먹을 생각으로 일을 했는데 너무 오래 하다보니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컸다 두릅을 두고 왔다 약수를 지날 때쯤 알게 되었다 두릅에 대한 걱정보다 두릅을 두고 올 수밖에 없게 한 일들이 계속 생각났다 왜 내가 두릅을 가져올 수 없게 이런 일들이 계속 이어지는 걸까 왜 내가 두릅을 먹을 수 없게 이런 일들이 계속 이어지는 것일까 (중략) 철이 있는 것은 철에 먹어야 하는데 내일 회사에 가서 가져올게 하루 만에 먹지 못하게 되진 않겠지 그리 촉촉하고 생기 있던 것이 하루 만에 마르진 않겠지 -「두릅을 두고 왔다」,② 부분, 강조는 인용자 이 시는 첫 연, 첫 행에 떡하니 결론을 내놓고는 혹시 내일은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먹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써 내려간다. 이 시의 첫 문장은 “하루 만에 먹지 못하게 될 줄은 몰랐다”는 현재완료형인 것이다! 이 능청스러움을 봤나! 생기를 잃어가는 두릅 앞에 오래 일하느라 집에 가고 싶은 마음만 앞섰던 사정은 아무 소용이 없다. 내일이 되면 더욱 분명해지는 것은 두릅이 더 시들 거라는 현상이 데려오는 엄정한 사실 뿐이다. 회사에 가서 가져와도 그건 먹지 못할 거다. 화자야말로 먹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거다. 시들어 가는 두릅에 포개진 사랑의 유효기간만이 그저 안타까워진다. 아름다운 사람이 더러운 마음을 가지지 못한 것을 참을 수 없다 더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름다우면 어떤 더러운 마음을 가졌는지 알아내고 싶다 이 진심을 너는 이해할 수 있지 서로 통하는 게 있으니 우리가 만나는 것을 남에게 들키지 않기로 했다 들키지 않는 동안 아름다운 사람이 된 것 같으니까 어쩌면 우리는 약점을 만들고 싶었다 -「정말 너무 진심」 부분 이 시에는 기어이 너의 ‘약점’이 되고 싶은 욕망이 여전히 똬리 틀고 있지만, 다음 두 편의 신작시에는 모종의 다른 의지랄지 애쓰는 모양이 엿보인다. 특히 이 시에는 타자의 존재가 희미하게나마 들어앉아 있는데, 강조한 부분이 그 지점이다. 매달리는 건 아니야 버티는 건 더더욱 아니지 흔들렸어 끈 없이 달아둔 거 같아 넘어지지도 못하게 삼각지에서 그네 탔던 거 기억하지, 기억해주면 좋겠는 이야기를 고르고 골랐어 (중략) 거울 앞에서 춤을 출 수는 있는데 거울이 없어지고는 어떻게 추는 걸까 쟤들도 그러겠지 시는 어떻게 쓰는 걸까 나는 답할 수 있어 쓰다 보니 그냥 써지게 된다고 왜 내 입장을 넣으면 계속 사람이 이해될까 내가 여기 있는 게 내가 거기 없을 이유는 아니잖아 다시는 안간힘이라는 말은 쓰지 않을 거야 나도 흔들려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부분, 강조는 인용자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흔들리는 건 지탱해주고 있다는 거”(「선선한 슬픔」,②)라고.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마리오네트처럼 누군가 정수리를 당겨주는 중인 걸까, 이 시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비비언 고닉은 균형이야말로 모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시인 역시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흔들리면서 끊임없이 균형을 잡으려 애쓴다. 여전히 마음은 ‘너’를 맴돌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이제 그 마음을 조금 옮겨 너도 지금 흔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실을 균형을 잡는데 쓰고자 마음먹어 본다. 그러다 보면 시를 묻는 사람들과 시로 답하며 사람을 헤아려보게 될 것도 같다. 너도 숱한 사람들 중의 하나라고 치환해 보면 너의 마음도 하릴없이 이해될 날이 있을 것도 같다. 죽어도 준치가 아니라 썩어도 준치, 나를 원하는 이를 원하지 않는 것보다 얘만 나를 원하는 게 죽기보다 썩은 준치를 택한 것 같다 (중략) 다정한 사람 다정한 사람에게 다정히 말하는 게 잘못일 수도 있다는 다정한 사람에게 한 번 더 만날까요 익숙해지는 미안함을 미루지 못했다 오늘도 노고가 많았다 마무리가 마무리를 지으며 돌아간다 모두가 잠에서 깨어날 기회는 있고, 그런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오랜만에 문장에 밑줄을 긋고 품고 있던 느낌을 이리 뒤집어 보고 저리 뒤집으며 작은 멍을 꾹꾹 눌렀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내려놓고」 부분, 강조는 인용자 그 사랑이 너와 관련 없음을 표방함으로써 태연을 가장하지만 새로운 시작은 그리 쉽지 않다. 노력 안 해본 것도 아니다. “상하는 게 아니라 익어가는 거라고/ 사람은 그런 거라고”(「슬픔이 익을 동안 나눠 잊을까요」,②) 너는 말했고, “썩은 게 아니란 걸/ 증명하기 위해” “익어가기로”(「제철 행복」,②)한 적도 있다. 그런데 실은 “내가 먹지 못하는 건 썩은 것을 삭혔다 말하는 것들”(「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내려놓고」)이다. 그런 증명을 위해 까치발을 들어온 관계라면 썩음을 인정하는 순간 끝장나기 마련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건 오직 과거의 너에게만, 너라서 가능했던 안간힘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다른 사람과 앉아 시도하는 이 시큰둥한 만남은 그러나 오래 품고 있던 마음을 이리저리 뒤적여보게도 한다. 도무지 적당한 마음으로는 쓸 수도 살 수도 없었을 그가 사랑을 궁구하는 방식은 이제부터 조금 달라질까? 영화 <오키쿠와 세계>(2023)에서 몰락한 무사의 딸 오키쿠가 아버지와 함께 제 목소리를 잃고 얻은 것은 공동주택의 인분을 수거하는 천민과의 사랑이었다. 잃으면서 얻는 이 관계는 영화 속에서 온통 ‘똥’으로 연결된다. 다소 찌푸려질지는 몰라도 어떤 물성은 관계를 잇고 감정을 이리저리 옮겨놓아 볼 수 있게 만들기도 한다. 물성은 그렇게 감정의 조작을 더러 돕기도 하는 것이다. 어쩌지를 못하는 마음을 지극히 밀어 붙여보는 건 살아보려고 그런다. 살기 위해 쓴다. “빈 괄호처럼 나 아팠다”(「종려」,②)는 말이 마음에 밑줄을 긋는다. 그 밑줄은 언제 생겼는지도 모를 얕게 긁힌 상처를 닮았다. 누구보다 슬픔도 사랑도 많은 이 시인의 빈 괄호는 결핍이기만 하지 않고 시를 써나가게 하는 웅숭그린 어둠, 발설을 기다리는 깊은 입이기도 할 것이다. 대신 앓아줄 수도 없는 그것은 슬라임처럼 나만 남겨놓고 빠져나간 사랑 뒤에 남은 1인칭 슬픔의 얼굴이다. 그에게 조물거리면 마음이 가라앉는다는 투명한 슬라임 하나 마련해주고 싶어진다. 1) 유수연, 『기분은 노크하지 않는다』, 창비, 2023. 본문 인용 시 시의 제목만 밝히고 시집명은 ①로 표기. 2) 유수연, 『사랑하고 선량하게 젖어드네』, 문학동네, 2024. 본문 인용 시 시의 제목만 밝히고 시집명은 ②로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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