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어린이와 문학 2024년 가을호 (모두모아 188호)
작고 거대한 이야기 문화 ― 아동문학 단편에 대해
1. 다시, 단편
나는 꽤 오랫동안 한 아동문학 작가 교실에서 담임 강사를 맡고 있다. 내 특권 중 하나는 첫날 수강생들에게 내 마음대로 만든 필독서 리스트를 권하는 것인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히 생각하는 것은 우리 아동문학 단편 앤솔로지 들이다. 1923년 방정환과 색동회 때부터 한국 전쟁 직전까지 단편을 모은 『겨레아동문학선집』(보리, 1999) 8권과 1990년대 이오덕 선생님이 엮은 『남북 어린이가 함께 읽는 창작동화』 5권(사계절, 2006), 좀 더 여력이 있으면 창비 대표동화 단편 선집도 읽어보시라 권한다. 생업에 바쁜 어른들이라 한 번에 다 읽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시간과 노력 대비 우리 아동문학 전반을 맛보고 사랑하기에 그만한 지름길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백여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수많은 작가들이 한 줌씩 보태 이룬 우리 아동문학 단편의 산맥을 등반하다 보면 어린이가 겪어온 우리 근현대사가 보이고, 강산이 몇 번 변했다지만 동시에 여전한 어린이의 본질이 보이고, 일반 문학과 다른 아동문학만의 특징과 개성도 체득할 수 있다. 그리고 동시대에 가까이 올수록 막연히 ‘애들 보는 동화니까 쉽고 단순하겠지.’ 싶은 선입견이 무너질 만큼 다채롭고 정교한 문학성이 이곳에 있음을 저절로 알게 된다. 나만 해도 지금 당장 눈앞의 우리 아동문학을 보면 투덜투덜 불평이 많지만 몇 년, 몇십 년 단위로 이렇게 골라낸 성과를 한 자리에 놓고 보면 절로 경외심이 일곤 한다.
사실 아동문학 단편에 대해서는 양면적인 감정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아동문학을 공부하거나 직접 쓰고 싶어 하는 사람, 즉 어른에게 단편은 가장 훌륭한 선생이자 세상으로 나아가는(出世) 등용문 노릇을 한다. 나처럼 늘 새로운 이야기, 작가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사람에게도 매우 유용하다. 어린이책 출판계도 단편에 대한 애정과 미련이 많으리라 짐작된다. 하나 실제 지금 어린이들에게 좋은 아동문학 단편이 잘 전달되고 소화되어 영양분이 되고 있는지는 자신할 수 없다. 물론 눈 밝은 부모와 교사를 만나 좋은 단편을 맛보는 아이들이 없지는 않겠지만 안 그래도 책을 멀리하는 것이 대세가 된 지금 스스로 단편을 찾아 읽고 자기 취향과 기준을 세워가는 어린이란 유니콘 같은 존재일 것이다. 정확히 조사나 통계를 내보지 않았지만 근래 우리 아동문학 단편의 영향력과 지분이 상당히 줄거나 쇠한 듯하다. 어린이책은 엔터테인먼트 색채가 짙어졌고, 진지한 단편 문학이 약해진 만큼 각종 캐릭터와 아이디어, 일러스트로 무장한 시리즈 물이 부쩍 늘어났다. 신인 작가와 습작하는 이들이 실력을 벼르는 과정에서 단편에 힘을 쏟곤 하지만 일부 평자나 관련자의 독후감 외에(그마저도 극히 드물 터) 어린이들의 반향을 얻지 못한다면 창작 동력이 지속되기 어렵다. 단편은 단지 길이가 짧아서 쓰기 쉽고 읽기 쉬운 문학인 것은 아닌데, 그만의 미학과 존재 가치가 있고 지나온 시간만큼 지속되어야 할 문화 자산인데, 마치 당면한 저출산 문제 앞에서 이도 저도 못하는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듯하다. 그렇다고 자포자기할 수 없다. 저출산 문제를 두고 탁상공론과 헛소리가 난무하는 가운데 우연찮게 라디오에서 들은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저출산의 현실을 부정하지 말고 이제부터는 사람 귀한 줄 알고 적은 사람을 귀하게 쓰는 세상으로 가면 된다’라는 것이었다. 그렇다. 좋은 어린이 단편이 점점 귀해진다면 그걸 더욱 귀하게 여기고 가꾸어 동시대와 후세대 어린이들, 덤으로 아동문학에 관여할 어른들과도 공유할 것을 고민해야지 그 수가 적어짐을 한탄만 할 일이 아니었다.
이 글은 내가 8년 전에 썼던 「단편, 병 속의 메시지」(『창비어린이』, 2016년 가을호)의 후속격 이다. 다시 단편을 생각할 기회를 얻은 김에 그 이후 내 마음속에 모아둔 우리 아동문학 단편을 일부라도 정리해보려 한다. 그동안 써온 독후감 메모 중 내용이 절로 떠오르거나 한 대목이라도 뇌리에 박힌 무언가가 있었던 것들이 기준이다. 기억을 외주화하는 시대이고 나도 그런 사람이지만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교통사고처럼 마음과 뇌리에 직접 부딪혀온 이야기의 가치가 더 소중하다.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는 교통사고 이후 시간을 두고 곰곰이 생각해보거나 다른 사람과 그 이야기를 공유하며 되새기거나 깨닫곤 한다. 우리가 문학에서 구하는 것은 이런 것이고 좋은 단편에는 순간적인 자극과 달리 오래 지속되는 끈질기고 강한 무언가가 있다.
아동문학 단편이라 총칭했지만, 그 안에서 어느 정도 분류는 필요하다. 어린이는 서너 살부터 사춘기 청소년까지 연령에 따라 키와 몸무게, 경험과 사고 체계가 쑥쑥 달라지고 그에 부응하는 이야기도 무지개의 양 끝처럼 색깔이 확연히 다르다. 우리나라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스토리, 서사를 동화라 총칭하는 것이 일반이지만 이 글에서는 가능한 동화라는 용어를 한정해서 쓰고 싶다. 낮은 연령 대상의, 타인이 읽어주거나 말도 전해 들어도 본질이 훼손되지 않는 종류는 ‘이야기’, 때로 동화라 하고, 독자가 직접 문장을 읽고 작가와 내밀히 소통하며 보이는 것 이상을 생각해야 하는 밀도 높은 종류는 어린이를 위한 단편(소설)이라 하겠다. 전자는 말, 집단, 총체, 보편에 기반을 두고, 후자는 글, 개인, 각론, 특별함에 기반을 두는 것이 상이하지만 이 총합은 아동문학이기에 성인 대상의 일반 문학과 또 다른 차이와 특별함이 있다. 최소한 이쯤만 나눠놓고 어린이를 위한 짧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2. 작지만 다 들어 있는 씨앗
“이건 작지만 들어 있을 건 다 들어 있어요.” 어린아이가 낸 이 퀴즈의 정답은 씨앗이다. 낮은 연령 어린이가 듣거나 읽고 이해해 마음의 땅에 심어두고, 장차 큰 나무로 자라 평생 기댈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씨앗처럼 짧고 단순한 이야기다. 그러나 요즘은 이런 씨앗 같은 이야기가 흔히 나오지 않고, 씨앗을 심고 기다리기보다 이미 완성된 것을 취하는 게 편한 시대이긴 하다. 훌륭한 국내외 그림책을 어린아이들과 공유하는 문화가 자리 잡은 것은 반길 일인데 한편으로는 ‘어린아이는 그림책이지!’라는 공식이 자리 잡아 동화는 설 자리가 좁아졌을까 봐 신경이 쓰이곤 한다. 그림책만큼은 아니어도 국산의, 짧고 단순한 이야기의 문화도 융성하기를 바란다. 이는 단지 작가들이 좋은 작품을 써주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문화’가 되길 바라는 것이다. 그림책, 하면 양육자의 무릎에 앉아서 함께 그림책을 보거나, 어린이집에서 교사가 어린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는 풍경이 자연스레 떠오르고, 어린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다 자신이 더 사랑에 빠지는 어른들이 자연스레 늘어나고 있다. 이는 예술이 삶을 바꾸고 풍요롭게 하는 문화다. 그렇다면 짧은 이야기, 동화가 우리의 문화가 되는 풍경은 어떤 것일까. 어른이 아이에게 책을 읽어줄 수도 있지만 그림책처럼 눈 둘 곳이 없으면 아이는 집중하지 못하고 몸을 비비 꼴 것 같다. 가장 이상적인 풍경은 책을 미리 읽고 이야기를 숙지한 어른이 아이와 눈을 맞추며 들려주거나, 일상생활을 하다 문득 맞춤한 이야기가 떠오르면 화제에 올려 공유하는 것이다. 이건 어른이 아이에게 해주는 일 방향의 서비스만이 아니라 아이가 친구에게, 또는 주변 어른에게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글도, 책도 없던 시절의 이야기 문화가 현대에도 구현될 수 있을까? 헛된 백일몽일지도 모르지만 현대 동화에도 이야기의 DNA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면 일말의 가능성은 있다. 이는 새로운 동화를 읽을 때 옥석을 가리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책을 읽은 뒤 억지로 외우지 않았는데 저절로 머리와 마음에 남아 대화 중 튀어나오거나,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문득 떠올라 용기와 지혜를 주는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차영아의 『쿵푸, 아니고 똥푸』(문학동네, 2017)는 인생의 마라톤을 막 시작한 어린이들에게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품게 한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아이가 똥싸개가 되기 직전인 최악의 날에 똥푸맨을 만난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혹시 창피당할까 전전궁궁할 때 ‘설마 여기서 똥을 싸더라도 나만 용기 있으면 된다!’라는 정신으로 살면 무엇이 두려우랴. (「쿵푸, 아니고 똥푸」) 세상을 떠난 반려동물이 꿈에 찾아와 자신은 세상 만물에 깃들어 생을 이어가고 있으니 축하하고 인사해 달라 당부하는 「오, 미지의 택배」는 내가 반려동물을 보내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저절로 떠오른 이야기다. 이소풍의 『반쪽짜리 초대장』(바람의 아이들, 2021)은 내게 있어 2년여의 코로나 팬데믹 기간을 상징하는 것과 같다. 누가, 언제, 어디로 오라는 건지 알 수 없는, 찢어진 초대장을 들고 무작정 집을 나선 아이들이 하루 종일 걷다 지쳐 고독한 곰 아저씨 집에 들어가 ‘우리를 초대해주세요. 우리는 초대만 바라며 지금까지 걸어왔어요.’라고 말했을 때 그만 울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만하면 혼자 잘 지내고 있다며 자신만만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은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나는 멀리 사는 친구와 전화하거나, 연로하신 은사님을 뵐 때도 이 이야기를 종종 꺼냈는데 이는 당신을 그리워했다는 마음을 동화로 빈 고백이었다. 작가 이름과 제목을 몰라도 ‘반쪽짜리 초대장’의 홀씨는 그렇게 훌훌 세상 밖으로 날아가고, 바라건대 그 이야기를 들은 이들도 내가 모르는 또 누군가에게 들려주길 바란다. 김미애의 「특공대 5호」(『여덟 살에서 살아남기』,바람의 아이들, 2022)는 이상하게도 스토킹 관련 끔찍한 뉴스를 접할 때마다 절로 떠오른다. 놀이터에서 모르는 아이에게 같이 놀자고 했다가 거절당해 기가 죽지만 보란 듯이 멋진 눈 하마를 만들어 아이들과 함께 노는 이 아이를 보면, 거절이 곧 자기를 부정 당하는 것이라 여기고 전혀 성장하지 못한 어른의 비극을 생각해보게 된다. 길상효의 『한밤중 필통 속에서』(비룡소, 2021)의 연필들은 현대인이 스스로 소외당하는 일, 학문, 예술의 참된 뜻을 되새기게 한다. 권태에 시달리던 연필이 진심 어린 문장을 쓰며 환희를 느끼고, 육체의 소멸에 연연치 않고 자기는 참 좋은 삶을 살았다고 자평하는 몽당연필은 그야말로 현대의 군자(君子)들이었다. 작고 귀여운 동물, 연필, 어린이가 뒷동산, 필통, 놀이터에서 뛰어놀다 넘어지고, 울다가 웃는 단순한 이야기지만 이 안에는 쓴 이도 미처 몰랐을, 장차 거대한 나무와 숲이 될 씨앗이 있다. 그리고 이야기를 받아든 사람은 그 씨앗을 심고 가꾸는 데 동참해야 하는 것이다.
위의 이야기들처럼 일상에서 툭툭 꺼낼 만한 사이즈는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한 번 구술에 도전해보고 싶은 복잡한 이야기도 있다. 주미경의 『와우의 첫 책』(문학동네, 2018)은 동화라는 이야기가 얼마나 오묘한지, 어디까지 담을 수 있는지, 얼마나 자유로운지 스스로 증명한다. 작가 한 명이 골방에 틀어박혀 고뇌하며 쓰는 근대 소설과 달리, 이야기는 오랜 시간 여러 사람의 입을 거치며 다듬어지고 생명을 연장하는 말의 세계다. 처음에는 별로 재미있지 않았던 이야기가 개구리에게 닿고 그 개구리가 온갖 고초를 겪으며 여러 모티프들이 더해져 어엿한 이야기가 되는데 목숨을 빼앗기는 지경에도 이야기를 이어 나가는 개구리는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드 격이다. 첫 번째 이야기의 씨앗이 되는 뱀의 무지개 옷은 다른 이야기에서 카프카의 「벌레」나 장자의 호접몽과 접목되며 더 기묘해지고, 앞선 이야기 속 일부 모티프가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가 또 다른 이야기로 이어지는 양상은 마치 나뭇가지가 사방 뻗어나가고 해안이 굽이굽이 이어지는 이야기의 프랙탈 같다. 읽거나 들으면 하나도 어렵지 않고 그저 재미있어 죽겠는데 비루한 기억력으로 이걸 남에게 들려줄 수 있을까 엄두가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꾸준한 훈련과 도전으로 한계를 넘는 스포츠처럼, 이야기를 구경하고 소비만 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스스로 듣고 기억하고 퍼뜨리는 노력의 즐거움을 깨닫는다면 혹시 알겠는가? 나도 그럭저럭 쓸 만한 이야기꾼이 될지.
3. 난제를 어린이에게 묻다 - 아동 단편 소설
높은 연령 어린이 대상의 단편 소설을 살펴보자. 어린이를 존중하는 것은 당연히 아동문학의 알파고 오메가겠지만 어른이 어린이와 마주하는 마음가짐은 좀 다를 수 있다. 내 생각에, 낮은 연령 어린이에게는 존경심과 경외심이, 높은 연령 어린이는 동시대인으로서 동지애가 기본에 깔려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고 어린이를 어른처럼 대하자는 게 아니고 난제 앞에서 어린이는 어떤 의견인가, 어떻게 행동할까 진지하게 묻고 상담하는 것이다. 지식과 경험이건 힘과 돈이건 어린이는 어른보다 가진 게 적거나 아예 없기 때문이다. 궁지에 몰린 어린이를 도와주지 않을 어른은 거의 없겠지만 문학에서 그런 도움은 그야말로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일시적이건 본질적이건 어린이가 기성세대로부터 답과 도움을 얻기 힘들 때 어린이의 직관과 용기, 나름의 궁리가 작동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문학을 구하고 이 세상을 존속게 하는 동력으로 전환된다. 앞선 단순한 이야기들이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아직 그게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모르는 씨앗이라면, 이제 볼 이야기는 그 씨앗이 땅에 떨어지거나 누군가 묻어 싹이 튼 뒤 주위 세계와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자라는 과정이다. 저절로 속 편히 자라는 풀 한 포기 없을 텐데 하물며 사람은 오죽하겠는가. 문학 안팎의 어린이가 백인백색(百人百色)이고 상황들이 천태만상(千態萬象)이기에 이때부터는 보편과 총체성, 밑도 끝도 없는 낙관성보다, 인생과 세계의 각론과 일면에서 전체를 유추하고, 현실은 암담해도 그 안에서 억척스럽게 빛과 길을 찾아야 한다. 낮은 연령 어린이보다 상대적으로 고생길에 들어섰지만, 용기 없고 시야가 좁아진 어른보다 시간과 회복력을 더 많이 가진 것이 어린이고 젊은이다. 문제는 어린이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자생력과 내일의 희망을 어디서, 어떻게 찾는가이다.
그건 어린이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교실에도 분명히 있다. 날마다 학생, 학부모, 교사의 상호 불신, 교실 붕괴가 뉴스화되는데 문제는 해결해야 하지만 그 못지않게 경계해야 할 것은 사회 뉴스가 아동문학 작가와 작품을 읽는 어린이의 내면을 잠식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뉴스로 재단할 수 없이 다양하고 복잡한 사람과 상황이 있음을 문학으로 접하고 배워야 하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리얼리즘 아동문학이 강점을 가졌지만, 현재로 올수록 점차 기운이 쇠해진 영역이기도 하다. 탁동철의 「벨튀」(『배추 선생과 열 네 아이들』, 양철북, 2021)는 2000년대 이후 우리 아동문학에 실종되다시피 했던 ‘삶을 위한 어린이 글쓰기’의 귀환이다. 어른이 아이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이 직접 하는 말, 표현하는 마음을 아동문학의 궁극적 출발이자 목표로 삼았던 어린이 글쓰기 운동은 엄청난 철학, 사상이었지만 2000년대 전후해 아동문학의 주류가 농촌의 일하는 아이에서 도시의 스트레스 받는 아이들로 옮겨가며 존재감이 흐려졌다. 그러다 불현듯 튀어나온 탁동철의 ‘배추 선생과 열 네 아이들’은 마치 멸종위기 동물이 강원도에서 건강히 새끼들을 낳고 기르며 살고 있다는 기쁜 소식 같다. 아이들과 교사가 교실 구성원으로 1/n의 권리와 책임을 갖고, 에너지 절약을 위해 문을 안 닫으면 교장실 문을 ‘벨튀’하는 벌칙은 교사도 예외 없이 지켜야 한다. 관리자 입장에서 보면 이 교실은 정신없는 카오스지만 더 큰 교육의 관점에서 보면 연령이나 배움, 경험의 높낮이를 따지지 않고 함께 배우고 만들어가는 훌륭한 교육공동체이다. 이 작품은 엄연히 창작물이지만 작가의 상상이나 바람으로 만들어낸 허구가 아니라 작가와 제자들의 교실 생활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다. 오랫동안 가공식품에 길들여 살다 갑자기 너무 싱싱한 식재료를 한가득 받아든 기분이었는데, 어린이 글쓰기와 아동문학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 믿고 끝까지 추구했던 작가 임길택의 유산이 사후 30년이 다 되어 다시 살아나는 감동, 미안함, 책임감이 한꺼번에 밀려 들어오는 이야기였다.
원래 세상은 공평치 않고 씨앗이 어디에 떨어져 자라는가는 신의 무작위지만 그래도 문학에는 리얼리즘이 있어 불행과 소외를 귀하게 여기고 그곳에 참된 복과 길이 있음을 증명한다. 윤슬빛의 단편집 『갈림길』(웅진주니어, 2023)은 이 세상에는 어쩔 수 없이 일찍 철들어야 하는 상황의 아이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아이는 아이이고, 그렇기에 아동문학은 어른의 일반 문학이 찾지 못하는 희망을 발견한다는 변증법을 보여준다. 직접 말하지 못하지만 가까운 어른으로부터 지속적인 추행을 당하는 친구의 사정을 눈치챈 아이는 고민 끝에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우리 집으로 달려와. 톡톡톡 세 번 두드려.’라고 말하고 상대방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금세 해맑은 얼굴로 내일은 수달을 보러 가자 약속한다. 이 장면은 무자비한 폭력 앞에 선 어린이의 무기력함에 빙의되어 함께 얼어붙었던 리얼리즘 아동문학의 막힌 끝을 어린이들 스스로 돌파하는 지점이다.(「갈림길」) 교실에서는 번듯한 모범생이었는데 알코올 중독 아버지를 찾아가는 길에서 실망스런 모습을 보인 친구에게 자신과 왜 여기 왔냐는 질문을 던지니 ‘너는 누구나 남모를 사정이 있다고 말했다’며, ‘이런 말을 하는 아이에게는 남모를 내 사정을 보여줘도 창피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단다. 이 ‘철든’ 아이는 어른처럼 무언가를 포기하거나 타협하는 ‘철’이 아니라 남모를 경험으로 인해 직관적으로 옳고 그른 것,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는 힘을 습득했다는 의미의 ‘철’이다. 어른으로서가 아니라 어린이로서 드는 철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당장은 힘없고 가진 게 없지만 그렇기에 직관적으로 중요한 것을 분별하고 스스로, 또 같이 자생하는 어린이를 발견할 때 리얼리즘 아동문학은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간다.
동화라는 특별한 소설은 비현실, 초현실을 아우르면서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 이상을 이야기하곤 한다. 2016년부터 지금까지 인상에 뚜렷이 남았던 단편들을 손가락으로 꼽아보면 이 방면이 더 우세한데, 이는 완전히 비현실이나 공상인 것만도 아니고 낯설게 포착한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김기정의 단편집 『잘 지내겠지?』(창비, 2019)에는 80년 광주, 세월호, 뉴스에 나오는 어린이 관련 참사 등으로 죽은 이들이 살아 있는 사람들과 한 시공간에 공존한다. 이는 지난 과오와 억울한 죽음들을 얼른 잊으라 종용하는 세력에 맞서는 기억 투쟁이다. 끝까지 자발적으로 기억하려면 책이나 뉴스가 아닌, 이야기의 힘을 빌어야 한다. 나는 지금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얼마든지 억울하게 죽을 수도 있었다. 내가 만일 죽은 처지라면 아예 없었던 사람인 양 취급하기보다 가끔은 나를 기억해주고 나를 귀신처럼 멀리하기보다 내가 살아 있었을 때의 모습을 기쁘게 떠올려주길 바랄 것이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은 죽은 이를 까맣게 잊으라는 것이 아니라 엎어진 곳에서 삶과 죽음을 끌어안고 나머지 삶을 충실히 이어가라는 말이 되어야 한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지만 이야기 안에서, 문학 안에서 죽은 자는 언제든 살아나고 산 자와 소통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산 자의 삶을 더 풍요롭고 의미 있게 만든다.
이야기가 사람만을 위한 것일 리 없다. 안미란의 연작 『그냥 씨의 동물 직업 상담소』(창비, 2023)는 동물들도 먹고사는 문제로 고충을 안고 사는 도시의 이웃임을 이야기한다. 겨울잠을 자야 할 곰이 냉동창고에서 일하고, 위염을 앓아 병원에 가야 하는데 동물원 수의사와 동물병원은 받아주지 않고, 둥지 지을 터를 못 찾은 새 부부는 부동산업자 고양이를 찾아온다. 이쯤 되면 이들이 야생에서 도시로 넘어온 동물인지, 낯선 나라에 체류하는 이주민 노동자, 난민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동화라는 특별한 소설은 나와 너, 동물과 인간,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섞는 오랜 비법을 갖고 있는데, 이 이야기는 보편적 인간, 어린이의 본질을 동물화하여 ‘위아 더 월드’ 노래하는 동화는 결코 아니다. 이 이야기는 텃세를 부리는 인간에 먼 곳에서 온 인간, 집 안에 있는 의존적 동물과 집 밖의 독립적 동물, 편하게 도시의 혜택을 누리는 인간과 도시의 허드렛일과 폐해를 고스란히 맡아야 하는 인간들(동시에 동물들)의 복잡하고 거대한 생태계를 그린 지극히 현대적인 소설이다. 그럼에도 이것이 풍자적이고 냉소적인 우화에 머물지 않았던 것은 아동문학으로서의 정체성이 있기 때문이다. 생태계는 피라미드 같은 위계와 먹이사슬이 있는 듯해도 서로 상호 작용을 하고 그 형태를 변화시킬 수 있다. 도시 생태계 아래쪽의 고달픈 동물과 인간이 언제쯤 살림이 피고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을까 아득하지만 미미하게나마 모순을 인지하고 서로 연대하는 한 희망은 남아 있다. 작품 후반부에는 이 동물들이 일차원적인 삶의 굴레에서 잠시 벗어나 종을 초월한 돌봄으로 한 발 나아간다. 동물의 외견을 하고 있으나 고향 아닌 타지에서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겹쳐 보이는 것은 공상이나 꿈이 아닌 희망의 잔상이다.
SF에서는 지난 몇 년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가장 활발히 단편이 생산되고 있다. 기존 SF 문학이나 영화의 설정, 인물의 기시감이 강하게 보이는 장편 아동문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단편은 아동문학의 장점과 특징이 잘 살아난다. 과거에는 미래에 대한 상상이 SF의 주된 요소였지만 이제 미래는 이미 도착해 있고 이제부터 어린이가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SF 아동문학에 대해서는 상세하고 애정 깊은 연구와 평론들이 다수 있어 중언부언 내가 보탤 새로운 작품 해석이나 시각은 없지만, SF적인 관점에서보다 아동문학의 관점에서 특히 애정하는 세 편만 되새겨보고 싶다. 우미옥의 「동식이 사육 키트」(『하늘은 무섭지 않아』, 사계절, 2016/ 『운동장의 등뼈』, 창비, 2019)는 아이가 돈이 모자라 반려동물에게 불량 먹이를 먹였다가 참담한 상황을 겪는데 아이도 아이지만 죄 없이 고통에 시달리는 동물을 보며 억장이 무너졌다. 이는 돈이 우선인 어른들이 어린이를 궁지에 몬 결과지만 동물 처지에서는 아이도 가해자로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아동문학이라 하여 무조건 어린이는 나약한 피해자라 변호하지 않고 어린이도 크건 작건 현대인으로서 져야 할 모순과 책임이 있음을 아프게 말하고 있다. 이병승의 「우주 영웅의 셈법」(창비, 2022)은 함장의 아들이라는 특권에 출중한 능력까지 갖춘 소년이 관리자와 치열한 토론을 벌인 끝에 평범한 친구에게 생존을 좌우할 우주선 탑승권을 주겠다 선언한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거나 남보다 우월한 경쟁력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 지구인의 가치 기준이지만, 우주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지구에서 평범하거나 기준 이하인 것이 우주에서는 비범함이 되어 인류를 생존케 할 수 있고, 꼭 그게 아니더라도 생존할 사람과 그렇지 않을 사람을 능력주의로 가르는 당신들이 틀렸다는 데 이 소년은 자신의 목숨을 건다. 이 소년의 패기는 모래알 같은 지구가 아니라 우주 너머로 뻗어 있는 것이다. 김상화의 「연우의 재밌는 일기 쓰기 기계」(202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는 미래 사회 배경은 아니지만 휴대폰의 자동 문장 완성 기능을 이용해 재미있게 일기 쓰는 아이를 통해 과도한 AI 추종과 경계를 넘어서는 어린이를 한 발 일찍 제시하였다. 어른은 AI를 노예로 보고 그것이 혹 주인을 해치고 자리를 뺏을까 전전궁궁하지만, 어린이는 AI와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 한다. 그것이 AI를 변화시키고 그 AI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순환을 이루며 이다음 세상을 만들어 가리라는 것이다. 과도한 기술 발전이 어린이를 망친다거나, 반대로 시대의 변화를 쫓아가지 못하면 도태될 것이라는 식으로 어른들은 공포와 불안을 조성하지만, 어린이는 그저 자기 시대의 조건과 상호관계를 주고받으며 살아갈 뿐이다. 미래는 정확히 예측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모든 것이 변화하며 그 변화의 중심에 어린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어른이 세상일에 손을 다 놓고 어린이에게 책임을 전가할 것만은 아니다. 세상에는 이야기가 있어 오늘의 우리는 어제의 조언을 듣고 내일의 사람에게 우리의 시행착오와 마음을 공유한다. 내일의 사람 또한 그러할 것이니 이야기는 한계투성이 인간을 인류 그 이상으로 만드는 최고의 발명품이 아닐 수 없다.
4. 단편에 날개를
지면과 기억력, 맞춤한 수납 상자의 한계로 미처 못 다룬 아동문학 단편들이 수없이 많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내가 부탁하지도 않은 영화, 드라마, 음악, 책 추천이 넘쳐나는데 내가 애정 하는 아동문학 단편들을 이 세상에 제대로 권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대학생 때 나를 한국 문학으로 이끌었던 ‘평론가들이 뽑은 올해의 단편 소설들’ 같은 책들이 지금 우리 아동문학에 꼭 필요하고 나를 선정자로 초대해준다면 성심성의껏 임할 각오도 되어 있다. 어린이의 문해력을 높이고자 시행되었던 ‘한 학기 한 책’ 정책처럼 ‘아침 10분 독서’ 같은 것이 활성화된다면 어린이가 단편을 접하고 이야기하는 문화가 정착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요즘 세상에 꼭 책의 형태로 단편을 만나야 하는 것도 아니다. 원래 단편 소설은 기차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잡지나 신문에 실린 짧은 이야기였다. 음원을 다운받거나 스트리밍해서 듣는 것처럼 단편도 언제 어디서나 마음 편히 접속해서 읽기에 딱이다. 나도 내 기준대로, 내 마음대로 테마를 달리 한 단편 아동문학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서 세상 여기저기에 뿌리고 싶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보니 아차, 싶은 게 있다. 음원은 하나하나 가격이 책정되어 그 비용을 지불하는 게 당연한데 단편 문학은?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소비재에 가까운 웹소설은 사서 보는 제도가 정착되었는데 정작 인간과 세계를 바꿀 만큼 훌륭한 문학 작품은 도서관에서 빌려보지 않나? 어른들이 어린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문화가 생기길 바란다고 했는데 그것도 빌려 읽거나 심지어 복사해서 읽는다고 생각하면 무릎에 힘이 죽 빠진다. 예술이 복제되고 상품화되는 시대지만 훌륭한 이야기, 문학에는 완전히 복제되어 상품화되기 곤란한 무언가가 있어 점점 궁지에 몰리고 있다. 진정한 문학의 가치는 한눈에 파악되지 않고 무게를 달아 계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짧은 이야기들이 책을 벗어나 세상과 어린이에게 훨훨 날아가기를 바라는 만큼, 우리 시대 이야기를 지을 농부들이 굶어 죽거나 포기하지 않게 해야 한다. 문화는 누가 만들어내 앞에 대령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이 함께 일구는 물질과 정신의 총합이다. 그 중심에 어린이가 있고 이야기가 있다. 그러니, 우선 단편을 구하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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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미 마인』과의 만남은 뭐랄까…… 운명적이었다. 때는 전 국민을 잠 못 들게 한 12월 3일로부터 열흘가량이 지난 어느 평일 저녁. 나는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누구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니 늘 눈이 피로했고, 집중력도 떨어져 독서는커녕 글 한 줄도 쓰지 못했다. 매일매일 현실의 뉴스에 압도되어 실핏줄이 바짝 선 눈으로 휴대폰만 들여다봤더랬다. 가장 나를 괴롭혔던 건 ‘지금 소설 같은 걸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프리랜서인 나에게는 정해진 마감 날짜가 있었다. 도저히 가상 세계에 몰입할 만한 여건이 아니었음에도 시시각각 디데이는 다가왔다. 나는 점차 초조함과 위기감에 사로잡혔다. ‘글을 써야 한다! 더 이상 이러면 안 돼!’ 일단 잃어버린 텍스트의 감각부터 되찾을 목적으로 독서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우리 집 소파 옆에는 사거나 선물 받고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이 마구잡이로 쌓여 있다. 한참을 살펴봤는데도 딱히 끌리는 게 없었다. 내 신경은 계속 휴대폰과 그날 이후 ASMR처럼 틀어 놓는 뉴스 채널으로만 쏠렸다. 이러다가는 또 한 줄도 못 읽겠다 싶어서, 일단 눈을 감고 책탑을 더듬다가 아무 책이나 붙잡았다. 그게 바로 이 샛노란 표지의 『에너미 마인』. 무려 1979년에 쓰인 SF이다. 처음엔 내 손으로 골랐지만 우려스러웠다. 하필 지금, 급한 작업에조차 집중을 못 하는데 가상의 시대, 미지의 행성을 배경으로 한 외계인 소설에 몰입할 수 있을까? 나중에 좀 더 심적 여유가 있을 때 읽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보드라운 표지의 감촉에 이끌려 책을 펼쳤고, 단숨에 몰입해 그날 새벽에 마지막 장을 넘겼다. 지금은 세상의 어떤 신묘한 흐름이 나에게 이 책을 만나게 한 것 아닐까 생각한다. 엄마가 동생 시험 날에 예수님이 상장을 하사하는 꿈을 꿨던 것처럼……. 난 아직 종교가 없지만. 소설이 공개된 1979년은 이념 갈등이 극심했던 냉전 시기다. 그런 국제 정세를 비유하듯 소설 안의 두 종족, 드랙과 인간 사이에도 긴 전쟁이 진행 중이다. 드랙은 손가락이 세 개에 노란 피부를 가진 외계 종족이다. 우리의 주인공 군인 윌리스 데이비지는 전투 중 적군인 제리바 쉬간과 함께 무인 행성 ‘파이린 4호’에 조난 당한다. 시대적 배경을 직접적으로 대입해 보자면, 데스 매치 중이던 미군과 소련군이 함께 무인도에 불시착한 셈이다. 행성에서 눈을 뜬 두 존재는 서로를 인식하자마자 다시 몸싸움을 벌인다. 하지만 곧 괜한 짓이라는 걸 깨닫는다. 중요한 건 적을 죽이는 것보다 살아남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구조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이제 두 종족 간의 원한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인간과 드랙은 생존을 위해 협력한다. 함께 식량을 구하고,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동굴을 아늑하게 꾸민다. 낮의 노동 후에는 긴 밤이 기다리고 있다. 그곳에는 즐길 거리가 아무것도 없다. 무료함을 달래 줄 만한 게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은 무인도와 달라 파도에 떠밀려 오는 새로운 아이템조차 없다. 날씨 변화 이외의 사건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서로의 이야기에, 목소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공허한 공간에서 오로지 두 존재의 회상만이 지루함을 달래 준다. 우리의 인간 주인공 데이비지는 외로움에 취약하다. 적군이었던 쉬간마저 없었으면 분명 미치거나 자살했을 거라고 그는 말한다. 쉬간 역시 마찬가지다. 두 종족은 완전히 다른 문화와 배경을 가지고 있고, 살아온 세월도 다르지만 절대적인 고립은 양극단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제리바는 데이비지의 언어(영어)와 그의 농담을 이해하게 되고, 데이비지는 제리바의 족보와 드랙의 역사를 매일 밤 경청한다. 핏줄의 기록을 달달 외는 게 이 드랙이라는 종족의 특성이므로, 다행히 이야기는 많이 남아 있다. 여기까지가 소설의 극 초반부 전개이다. 아직 분량이 많이 남아 있다. 고난은 계속된다. 드랙의 또 다른 특성은 스스로 번식이 가능한 양성체라는 점이다. 제리바는 삭막한 행성에서 임신을 하고, 결국 출산 중 사망한다. 데이비지는 쉬간의 부탁으로 적이자 친구인 그의 배를 찢는다. 그렇게 샛노란 드랙 아기 자미스가 태어난다. 데이비지는 친구에게 섣불리 약속한 대가로 이 외계인 아기를 키워야 한다. 생존기에 육아가 더해진 것도 고달픈데, 자미스는 어마어마하게 발육이 빠르고 호기심도 왕성하다. 자미스는 데이비지를 삼촌이라고 부른다. 이제 예정된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난 인간이고 손가락이 다섯 개지.” 나는 그때 어린애의 눈에서 눈물이 솟는 것을 보았다. “삼촌, 어른이 되면 네 번째, 다섯 번째 손가락이 생기나요?” 나는 앉아서 자미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이는 자신의 다른 두 손가락이 어디로 가 버린 건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데이비지는 너와 내가 어떻게, 왜 다른지 설명해야 한다. 왜 이 행성에는 우리 둘만 있게 되었는지도 알려 주어야 한다. 쉬간과의 전투와 전쟁에 대해서도 말하지만 그 모든 갈등과 유리된 행성에서 태어난 자미스는 쉽게 이해할 수 없다. 그는 다만 이 행성 밖에서도 ‘삼촌’인 데이비지와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이다. “서로 대화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전쟁을 멈출 수 있겠어요?” 자미스는 언젠가 행성을 떠나면 통역사가 되어 전쟁을 끝내게 돕고 싶다고 말한다. 두 존재의 애절한 여정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성인 인간과 드랙 아이, 대척점의 존재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로가 필요하다. 소설은 중요한 건 혼자가 아닌 함께 살아남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 안에서 개인과 개인이 공유한 시간은 상황이 급변한다 해도 동영상 파일처럼 간단히 삭제되지 않는다. 그것은 각자의 일부가 되었다. 이 길지 않은 분량의 소설은 결말이 도달하도록 두 종족의 평화를 확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한 종족 안에서도 깊어 가는 혐오와 차별의 현상을 짚어 낸다. 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혼란한 시대를 배경으로 약속을 지키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하며 노력하는 인물을 보여준다. 홍보 문구에 적혀 있듯이, 『에너미 마인』은 무려 ‘전 세계 최초로 휴고상, 네뷸러상, 로커스상을 동시에 석권한 소프트sf의 걸작’이다. 이렇게 요란하게 상을 휩쓸면 기대감보다는 ‘어디 한번 보자.’ 싶은 마음으로 책을 펼치기 마련이다. 나 역시 집중력 부족에 더불어 조금 삐뚤어진 마음으로 첫장을 넘겼는데, 결국 단번에 납득하고 말았다. SF라는 장르와 외계 종족과의 전쟁이라는 오락적인 배경으로 작가는 인류가 추구해야 할 보편의 가치, 공존에 대해 말한다. 호불호 없이 흥미로운 전개는 다른 종족의 캐릭터에도 쉽게 이입하게 하고, 매력적인 대화와 문체는 독서에 속도감을 더한다. 나에게 SF는 정말 호불호도 많이 갈리고 어려운 장르다. 스스로도 정확히 취향을 가늠할 수 없다. 어렸을 땐 스페이스 오페라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마블 시리즈에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가 가장 좋은 걸 보니 아닌 것 같다. 절대 내 취향이 아닌 것 같은 작품에 심장이 직격타를 맞을 때도 있고, 분명 내 취향일 거라 생각하고 접했는데 그저 한편의 과학 강의를 듣는 것 같은 작품도 있었다. 복불복이 크다보니 주변의 추천을 받은 게 아니면 선뜻 시작하기 꺼려진다. 그런 와중에 만난 『에너미 마인』은 쓰는 욕망을 되찾아 주는 것은 물론 어지러운 세계에서 소설이 가지는 힘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sf 장르에 장벽을 느끼는 독자들에게도 추천한다. 그렇게 한밤의 독서가 끝나고……. 나는 다음 날 이제 다시 힘내서 쓰자, 하고 의지를 다지며 노트북 앞에 앉았다. 과연 마감을 지킬 수 있을까? tmi. 이 리뷰 원고도 지각함…….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위의 인용문은 육조 혜능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변형한 것으로서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도입부 내레이션이다. 질문을 간파하고 있는 스승의 답변은 제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 테고, 그것은 물론 관객의 심금을 휘저었을 것이다. 파편화된 불안을 쓸어 담는 이 명쾌하고 즉각적인 해답의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찰나에 불과하다. 제자의 마음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 동요하는 그 마음의 원인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궁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궁리하고 싶지 있다. 바쁜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보여지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무용한 그 '느낌'이라는 것을 숙려할 만큼 한가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하려는 노력 끝에 불안은 우리 현대인의 매우 증상적인 형태로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의 고질병이다. 불안, 외로움, 확신 없음이라는 결핍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기로에 선다. 고독을 선택하거나, 의존을 선택하거나. 전자는 불안에 대한 직면이고, 후자는 불안에 대한 외면이다. 그러나 바쁜 우리는 언제나 후자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 없다. 세상에 고독한 것은 이제 고독, 그 하나다. 사용되지 않은 고독은 밀린 과제처럼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을 외면한 후폭풍은 그에 비례하는 불안의 성장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독하지 않으려는 것은 고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고독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소외감 등의 통각이라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감각은 직면하는 대상으로서의 그것이지 결코 정념의 주인이 아니다. 고독은 머무름의 상태가 아니라 나아감의 과정이다. 키에르케고어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고독이란 '자기-이해'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실존적 과정"1)이다. 직면과 견인의 과정으로서 '나'의 발본적 반성을 꾀는 고독은 많은 시간과 심리적 통증을 수반하는 힘겨운 비포장도로이지만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 길은 당신에 의해 아주 단단히 포장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은 이제 너무 쉬운 길이다. 허나 우리는 당장의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의존을 택한다. '불안-의존-불안-의존-……'의 악무한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이 악무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싸움이 혼자만 하는 싸움은 아니다. 우리가 고독하고자 할 때, 시는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 '불확실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시와 고독은 함께 간다. 유일무이한 개별자로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시를 보면서 우리는 '나'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비록 그 세계가 하잘것없을지라도 시는 당신과 함께 고독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투쟁의 이미지가 너무 닮아서 단번에 요체로 휘몰아 넣는 시가 있다. 2024년 계간지 가을호에 실린 시편들이 대개 그러했다. 그것들은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증상에 직핍하는 표정을 하고선 우리의 불안을 응시하고 있다. '응시하는 시'를 응시하는 우리는 홀연 고독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시는 그 자체로 기꺼이 고독의 과정이 된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불안을 응시-진단하는 시편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고독의 여정을 걸어보자. 미리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찌되었건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해 미리엄은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엄은 자신을 설명하는 식으로 늘어져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미리엄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한 미리엄은 바빴다 설명하느라 바빴고 대체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느라 바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낡아지고 늙어가고 쪼그라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해진다 불쌍한 미리엄 온종일 나를 기다리는 미리엄은 버럭버럭 화를냈다 화를 내는 미리엄이 순간 유효해 보였다 미리엄이 악다구니를 쓸 때에야 미리엄의 전체가 설명되고 빛난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고 어차피 미리엄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다음부터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하루종일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일갈할 수밖에 없었다 넌 네 삶이 없어? 하고 말콤은 미리엄이 키우는 개다 말콤은 미리엄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좋아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말콤은 미리엄을 좋아하고 불쌍해한다는 것이다 말콤은 수동적인 주인 미리엄이 충동적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거나 밥때를 놓쳐도 재촉하지 않는다 말콤 역시 미리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하루종일 너만 기다렸어 이 망할 기집애야 하지만 말콤의 생각에서 미리엄은 한없이 불쌍한 인간이므로 개 말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말콤은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 것 같았다 (……) 미움받지만 않게 해주세요 누구로부터를 말하는 것이냐 뭘 물어요 당연히 미리엄이죠 열두 마리의 개를 키운 경험이 있는 신이 말콤의 턱을 간지럽히며 말한다 아이고 불쌍한 새끼 계속해도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시는 나로 시작했지만 나로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무언가를 빠뜨리는 바람에 또 내가 나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내가 나오면 미리엄은 또 하루종일 나를 기다릴 테고 그랬다는 이유로 나에게 화를 낼 것이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말콤은 삶이란 게 정말 불쌍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신경쓰이지 않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것도 없다 나는 빨리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때마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제때 미리엄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러면 말콤과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산책하는 말콤은 정말 행복해 보일 것이다 나는이런 게 좋다 이런게 더 좋다 - 박참새, 「시작된 것」 부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넌 네 삶이 없어?" 당신이 이 문장에 머무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장이 애틋한 이유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목줄을 달아매고 누군가의 손에 그 줄을 쥐여주었던 경험,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가슴 아픈 그 불안의 경험이 위의 문장으로 하여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리엄은 현대인들의 불안 형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히는 '해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기다린다.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한 '자기-수치심'을 해명하고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자기-효능'을 타인으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고 수용받기 위해. 따라서 '나'(타인)가 오지 않으면 그는 그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거니와, 그 효능을 되찾을 수 없다. 고독이라는 일련의 자기-이해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자기규정을 의탁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 박탈시킨 그의 가치는 그러므로 '나'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미리엄-나'의 관계에서 미리엄의 위치는 '말콤-미리엄'에서의 말콤의 위치와 상응한다. 미리엄은 말콤의 주인으로, 말콤은 온종일 미리엄을 기다리고 미리엄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다. 말콤의 삶의 주인이 미리엄인 것처럼 미리엄의 삶의 주인은 '나'이다. 말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미리엄의 삶은 따라서 개 같은 삶이다. 그 삶은 (자기 의지에 의해)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자기 삶을 전시하고 그 삶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좋아요'와 팔로워 숫자 등)을 기대하면서 오직 그것을 위해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일상을 공유하고 실제적 자신의 모습, 즉 '실존적' 자기 모습을 방치한다. 타인의 반응이 내 삶의 양식을 결정하게 내버려둔다. 문제적인 것은 여기서 타인은 '내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증명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너무 쉽게 그들을 미워해 버리고, 반응이 긍정적이면 또 너무 쉽게 사랑해 버린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감정 속에서 지쳐버린 자아는 당장의 휴식을 위해 타자에의 의존을 택한다. 불안을 즉각적으로 해소해 주기 때문에 의존하지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은 그러므로 불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란 듯이 참혹해진다. 배시은의 시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우리의 강박증적인 내면 상태와 그 징후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그에 대해 시인이,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쓴 시를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아직 쓰지 않은 시를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싶다. 재빠르게 적으면 감쪽같을 거라고. 시간의 장난 같은 거라고.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 제목을 옮겨 적었다. 이상하다. 나라면 이런 제목을 짓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찍이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항상 그런 모양이라는 듯이. 나는 여행을 가지 않는 대신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으로 여행을 대신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여행 가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한다.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냥 있는다. 그냥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대신한다. 아무것도 깨닫지 않는 것이 깨달음을 대신한다. 이상하다. 나라면 여기서 연갈이를 하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시를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시는 이미 끝났다. 시를 옮겨 적는 일은 끝났다. 시를 쓰면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무언갈 만들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만들 수 있는 때는 너무 짧다. 생각을 하고. 단어와 문장 등을 떠올리거나 받아 적고. 고개를 움직이고. 책상에 앉고. 신체 부위의 기능을 사용해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희소하며 예상만큼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이 시는 알고 있다.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 배시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부분, 『창비』 2024년 가을호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 싶다"는 바람은 다시 말해 독자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소망이다. 그러나 옮겨 적은 시는 어쩐지 제목부터 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기로에 선다.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냐. 당신이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면 선택은 물론 전자일 것이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잃어가고 이윽고 모호한 정체성과 동시에 끊임없는 불안을 경험한다. 위의 시는 그것을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여행조차 갈 수 없고,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다. 여행을 가는 대신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뿐이다.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잘 쉬는 사람과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본인의 취향과 호오를 잘 아는 사람과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타인에게 삶의 목줄을 내어준 사람에게 휴식이란 그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불친절하다.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건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때때로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방어 기제로 드러난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실존적인 '나'의 상태이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회적인 '나'의 모습이다. 건강한 사람은 친절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사회적인 모습이 중요한 우리는 건강하지 않아도 건강한 '척' 친절하다. 이때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 싶은 일종의 방어 전략으로 쓰인다. 어쩌면 건강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사회적인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당신의 상태는 이제 아무도 진단할 수 없다. 허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심급의 기회일지 모른다. 시가 응시하고 있는 사실을 응시해 보자. 때로는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사실 시는 진단하거나 처방하지 않는다. 기꺼이 고독의 기회를 내어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삶을 응시하고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견고한 삶을 살고 싶을 우리에게 고독이라는 자기-이해 과정은 이제 건너뛸 수 없는 삶의 발달과업이다. 견고하다는 말은 빈틈없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빈틈 있음'마저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이다. 당신의 약점도 당신이다. 고독은 그러므로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들어 기꺼이 '나' 자신을 승인하게끔 한다. 신이인 「새」는 그것을 딱따구리에 비유하면서 약점이 받아 온 그간의 오해를 풀어낸다. 2017년 2월 3일 딱따구리를 데리고 있다. 이것은 내 약점이다. 딱따구리는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 사람의 머리통에도. 딱따구리는 내 머리 옆쪽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사고였다. 귀가 생겼다. 딱따구리가 어찌나 청명하게 나무문을 쪼고 다니는지가 다 들렸다. 난 비로소 듣는 사람이 됐다. 나의 방문은 말할 줄 몰랐다. 내가 듣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방문은 딱따구리를 통해 내게 말을 전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딱따구리가 부리를 사용하는 이유,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내가 가진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었으며, 딱따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 어쩌면 딱따구리는 도망간 게 아닐지도 몰라. 아예 내 안쪽으로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따구리가 느껴질 수는 없어. 이 느낌에 대해 나 여전히 말을 멈출 수 없어. 가장 깊숙한 곳에 너 잘 살아 있어. 집인 줄도 모르고 흔들렸던 집이 너를 선명하게 품고 있어. 구멍으로 볕과 공기가 들이닥쳐. 너 거기 있구나.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파여가며 안쪽이 하는 말을 받아쓸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쓰는 사람이 됐다. - 신이인, 「새」 부분, 『문학과 사회』 2024년 가을호 딱따구리는 약점에 대한 절묘한 표상이다. 그것은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약점이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이유로 약점이 될 수 없다. 인식의 층위에서 그가 뚫어낸 구멍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그 구멍이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없다. 눈, 코, 입, 그리고 귀라는 구멍이 당신의 약점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든' 존재하는 그 구멍이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딱따구리(약점)에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where'이 아니라, 'why'일 것이다. 딱따구리는 '왜' 구멍을 만드는가? 그것은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이다. 즉 딱따구리가 구멍을 내는 이유는 '너'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어쨌든 약점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너'가 존재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뚫은 구멍은 '너'가 즐겁지 않으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고 바로 약점이 된다. 그 순간에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 떼어내고 싶은 악성 종양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인다. 약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너'의 시선에 얽매여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why'를 던지는 순간, 시선은 '너'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지고 약점에 대한 오해는 곧 이해로 변모한다. 우리가 가진 약점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고독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창구일 수 있다. 구멍 없이 어떻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밖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말한다. 약점은 '나'를 이해하는 고독의 진입로가 되고, 이윽고 뚫린 길은 '너'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견고해진다.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다. 고독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황홀감이다. 고독이 거듭될수록 성장하는 고독'력'은 당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독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계절의 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 류호인, 「정신분석학: 존재에 대한 물음 : 실존적 불안과 자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소고」, 『현대정신분석』, 2024, 제26권 제1호.
1. '너'가 존재하는 한 '나'는 단속된다. 너는 나의 복장을 단속하고, 도덕성을 단속한다. 그리고 표정과 감정을 단속한다. 아니, 사실 너는 나를 단속하지 않는다. 다만 '너'의 시선을 의식하는 '나'의 불안과 내면의 유약함이 '나'를 단속한다. '너'의 시선 속에 사로잡혀 출현한 '나'는 그 시선에 대상화된다. 곧 자기 고유의 절대적인 자유는 균열을 일으킨다. 한편 '너'는 끊임없이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단속될 것이다. 타자에 의해 대상화되지 않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해야 한다. 개인의 실존적 차원에서,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고 자기효능을 되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각자 진정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와 그 시선의 억압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그것에 억압된 자신을 객관적으로 응시해야 한다. 응시는 똑바로 본다는 말이다. 똑바로 봐야지 똑바로 안다. 반성의 지평에서 출현한 시는 따라서 인간의 삶을 무엇보다 객관적으로 응시한다. 그리고 타자를 직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직시함으로서 삶의 오류를 발견하려는, 그런 시가 있다. 202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노이즈 캔슬링」과 함께 출현한 윤혜지는 첨단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삶에 기꺼이 구식(舊式)의 삶을 틈입시킨다. 이윽고 그것은 타자의 시선 아래 구식, 혹은 비극으로 취급될 우리 각자의 진실한 꿈과 그 미래를 구출한다. 그런 점에서 윤혜지의 시작(詩作)은 그 시선과의 투쟁의 시작(始作)일 것이다. 그 시선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그리하여 구식의 삶, 야생의 삶을 견인하기 위해, 시인은 먼저 그것을 응시한다. 그가 그려나간 궤적은 자기의 존재가 타자의 시선 아래 짓눌리고 밀려났던 경험을 면면히 보여준다. '나'의 침대가 아니라 "남의 침대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너무」)음을 고백하면서, "고개를 쳐들"고 다양성이 말살된 "하늘을 뒤덮은/보급형 드론들"(「언캐니」)을 똑바로 바라본다. 바야흐로 "내가 발을 갖고 있었구나 내 발로 나를/옮길 수 있"(「근사」)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인은 "해변에 가득한 돌을 골라"(「희고 흰 빛」)내듯, '타자의 시선'이 아니라, 온전히 '자기의 시선'으로 고유한 자기의 꿈과 그 정체성을 확보해 나간다. 지금 살펴볼 「사로잡힌 세계」에서 시인은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힌, 그 세계를 기꺼이 응시하면서 자신의 유약함을 진단한다.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 연인을 만들었어요 굴착기를 좋아하는 사람 병원 침대에 누워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자신이 부순 어떤 마을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 그것 참 쓸쓸하군요, 하며 웃다가 병이 깊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엔 저수지에 가라앉은 목각 인형을 건져 올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굴착기 끝에 닿은 인형의 마디마디가 부러져 나무 조각에 불과해져 버렸다고요 나도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어요 그냥 조그맣고 쪼글쪼글한 조약돌일 뿐이에요, 라고 하자 그는 달걀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내 어깨를 다독여주었습니다 뜨겁고 달고 부드러운 것을 먹이다 포기한 사이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는데도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아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 「사로잡힌 세계」 중에서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그는 병실의 적막이 두려운지, 병태의 실감이 두려운지,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연인을 만들"었지만 연인의 이야기로 무성한 통화 내용은 그의 "병이 깊어지"게 만들 뿐, 적막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하물며 연인의 이야기는 "그것 참 쓸쓸하"다. 전화하고 싶다는 말은 일방의 청취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쌍방의 '대화'를 하고 싶다는 말이다. '너'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얽히고설키면서 '우리'의 이야기가 탄생하는 것. 한편 일방적인 청취를 당하고 있던 '나'는 결국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다. 타자에 의탁해 상황을 모면하고 모종의 감정을 유예하려던 계략은 종국에 타자로 하여금 '나'를 "달걀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다루어야 하는 유약한 존재로 치부한다. 아직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몸은 회복되지 않았지만, 유약해진 '나'는 강력해진(타자에 자기를 의탁하면서 타자는 '나'보다 강력한 존재로 부상한다) 타자 앞에서 그저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다고 말한다. 시인의 세계는 그야말로 타자에 의해 "사로잡힌 세계"가 된다. '나'가 아니라,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면서 세계의 편위는 더욱 명백해진다. 이렇듯 윤혜지는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그 유약함을 직시한다. 이제 그는 그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를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 시작한다. 2.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었다 몸집이 작고 짧은 데님 바지를 입은 언니 요를 펴고 잠든 나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다른 이에게 물어보았다 얘는 언제쯤 깨어날까 냉장고에서 내 몫의 아이스크림을 꺼내 놓고 싶어서, 녹을 게 분명한데, 그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느껴져 꿈속에서도 좋았다 마음은 생생하고 그윽하고 선한 사람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문장이 적힌 책을 읽었다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입니다 그렇다면 언니도 하염없이 그림자구나 우리가 나무이고 지금 서성이는 저들이 드리워진 잎사귀인 것처럼 (…)언니가 흐느꼈고 우리들은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다 많은 것들이, 퍽 많은 것들이 나왔다 간혹 용서에 관한 이야기도 했지만 그 생각은 연약해서 곧 다른 걱정, 그러니까 관습적인 생각들로 덮어졌다 언니는 어른이었다 한 종류의 울음밖에 없는 인간 누군가 지친 문을 열고 음식을 내왔다 이것 좀 먹어봐 여름 야채를 가득 넣고 키슈를 구웠어 랩을 씌워둔 키슈는 오래되었고 길이 잘 들어 온순하다 이것을 만든 엄마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텐데, 저렇게 곯아떨어졌는데 키슈는 영문도 모르게 포실하구나 싶어 울었다 사실 선한 사람과 온전한 사람이 같지 않다는 이야기는 엄마의 맑은 탕이다 모두가 조금씩 떠먹고 떠난 자리에서 오가는 사람을 헤아려보는 사실 이 부분은 망친 시에서 오려온 것이다 상해버린 삶에서 시를 도려내듯 - 「그림자 언니」 중에서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라는 점에서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고, 재워주고 내가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가진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시인의 그림자, 곧 자신의 일부분이다. 꿈속의 나의 수고를 기꺼이 대신해 주려는 꿈속의 언니, 그러니까 시인의 그림자는 그러므로 '온전한 사람'보다는 '선한 사람'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마음이 불안할 때 특히 삼시세끼를 꼬박 잘 챙겨 먹고, 7시간 이상 숙면을 취하며, 1시간 이상 유산소 운동을 하는데, 그렇다고 누가 나를 선한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무거운 짐을 들고 있을 '너'를 위해 그 짐의 일부를 대신 들어주고, 사무실 바닥에 커피 쏟은 '너'의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헤아려 그것을 대신 닦아주고 있을, 그런 나를 두고 사람들은 선하다고 할 것이다. 기실 선한 사람은 타자로의 사려 깊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 온전한 사람은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잘 돌보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일, 선한 사람이 등장하는 그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는 시인의 모습을 미루어 볼 때, 그는 아마도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었나 보다. 여태 선한 사람으로 살았을 시인의 삶은 "랩을 씌워둔 키슈"처럼 "길이 잘 들어 온순하"고 누르면 푹하고 꺼질 것처럼 "포실하"다. 시인은 그 삶이 "상해버린 삶"이라고 말한다. 온전하지 못한 '그 삶'을 말하며 "울었다"는 그를 두고 혹자는 삶에 대한 후회라고 볼 수 있겠으나, 나는 이 울음이 이제라도 타자의 시선에 굴복하지 않는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에서 오는 벅차오름이라고 확신한다. 회피해버릴 수도 있을 '그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한 끝에 시인은 자기 삶의 방향성을, 진정한 자기 정체성을, 그렇게 확립한 것이다. 3. 타자에 의한, 타자를 위한, 타자로 인한 삶에서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시인의 노력은 다만 '자기 삶' 하나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삶으로 확장된다. 그는 타자로부터의 모든 인간의 자유를 꿈꾼다. 내가 아무리 '너'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 한들, '너'가 '나'의 시선을 의식해서 '너' 자신을 단속한다면 '나'는 또한 그 사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도 나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나'는 전연 자유로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맥락의 생활」은 그 사실을 기저에 두고 이 시대 아이들의 삶을 응시하면서 그것의 오류를 들추고 있다. 거대 쇼핑몰의 한 쪽에서 우리는 아이스링크의 인공 얼음을 지치는 우리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빙질이 훌륭하다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가 아니니까 금이 가도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 잊어버리고 우리는 남은 커피를 마시고 서로 좋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곳은 사랑이 넘치고 훈훈해서 금방이라도 아무나 커버릴 것 같다 (…)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로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이야기의 도입부를 잊어버렸다 (…) 너는 내 에피소드를 들어도 웃지 않는다 울어준다 - 「고맥락의 생활」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아이들의 삶에는 크게 두 가지 세계관이 있다고 말한다. 즉 거대 쇼핑몰 한 쪽의 "아이스링크"와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이다. 물론 위 시에 등장하는 "우리의 아이"가 살아가는 세계는 전자의 것이다. "빙질이 훌륭한" "인공 얼음"으로 만들어진 그곳에서 아이는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는 고민하지 않는다. 거대 쇼핑몰의 아이스링크는 이미 어른들에 의해 단단하게 건조(建造)된 안전한 얼음판일 테니, 아이는 어떤 중대한 고민 없이 그 위에 오를 것이다. 더구나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에는 언제든 아이의 불운을 쫓아줄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있다. 곧 나보다 강력한, 어른이라는 타자가 만들어 놓은 세계 위에서, 부모라는 타자의 시선 아래, 아이는 자기 주체성을 잃어간다. 한편, 후자의 "그 호수" 앞에서 아이는 생각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얼음판이 깨지면 죽을 것이고, 깨지지 않으면 살 것이다. 아이는 또 생각한다. 그 위험을 감수하고 얼음판 위에 오를 것이냐, 오직 살기 위해 다시 숲으로 돌아갈 것이냐.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떤 결정이든 그것은 아이의 독자적인 선택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이스링크"에서의 생활은 어떤 배경지식이 필요 없고 단순하게 관계에 의존하는 '고맥락의 생활'이다. 반면 "그 호수"에서의 생활은 가치 독립적이고, 자기 확신에 의한, 주체적인 '저맥락의 생활'이다. 시인은 이미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고맥락 문화의 오류를 응시하면서, "이야기를 들으면 울도록 만들어"진 보급형 로봇(「사랑과 공」)처럼 사라져가는 아이들의 주체성과 그 태도로 하여금 그들의 자유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통제되고 단속될 것을 염려한다. 이처럼 시인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속박되고 통제되고 있을 인간의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하면서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한다. 4. 그리고 시인은 말한다. 각자의 진정한 정체성 확립을 위해,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각자 "야생"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무덤 위는 미끄럼 타기 좋아 (…) 한 번도 온전하게 겹치지 않는 눈송이 눈송이 손가락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간다(…)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린다 여긴 잊어버려 이제 넌 오지 않을 거야 다른 것이 될 거야 (…) 가방을 부려 놓으면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랑하던 것들이 있고 이제 그것들은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인다 이렇게 시간이 가는 건가 봐 대답 대신 눈송이 - 「야생의 눈사람」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무덤 위에서 미끄럼 타던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상한다. 펄펄 내리는 눈송이를 "손바닥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가기도 하고,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리기도 한다. 시간이 가면서 유년의 기억들이 이제는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이는 지금, 그는 다시 한번 "대답 대신 눈송이"를 말한다. 온전한 사람으로 살고 싶을 그는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눈송이를 감각하던 그때, 그 야생의 시절이 그리운 것이다. 시에서 아홉 번이나 "눈송이"를 언급한 것은 야생의 꿈, 그러니까 자신이 진정으로 순수하게 좋아하는 일을 다시 한번 꿈꾸고 싶은 그 열망에의 외침일 테다. 그리고 타자의 시선과 현실에 굴복하지 않은 끝에, 우리 곁에 시인 윤혜지가 있다. 윤혜지의 시는 분명 우리를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제 그것을 동일화하고 내면화하는 능력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이 과연 무엇일지 마음을 솔직하게 진단하고 타자의 시선에 잠식당하는 진실한 꿈을 구출하자. 기실 그것은 '나'와 '너', 우리 모두의 자유를 보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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