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가을호
간(間) 의 기록 ― 문지혁론
내 안에 있을 무언가를 찾아서
익숙하고 편한 것을 기어이 버려야만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예를 들면 직과 업, 가족과 친구 그리고 언어 같은 것들 말이다. 지금–여기에 머무른다면 지금까지의 삶을 그대로 살아갈 것이고 익숙함이 내어주는 편안함과 안온함 덕분에 때때로 행복할 것임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아주 낯선 곳으로 떠나야만 한다면 그 이유는 범박하게 두 가지로 짚어볼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혹은 현재의 곤궁함을 벗어나기 위해. 언뜻 이 둘은 동일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완전히 일치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둘 사이의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면 ‘떠남’을 통해 무언가를 ‘획득’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불확실하기 때문에 밝아 보이는 미래와 확실한 현재의 진창 사이에서 찾고자 하는 것들의 종류는 떠나는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할 것이다. 선사시대 이후 인간의 역사는 줄곧 이주와 이민으로 이루어져 왔고, 그렇기에 무엇을 찾아 떠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그러니 이런 ‘떠남’도 가능할 것이다. 삶을 위해, 앎을 위해, 슬퍼하기 위해, 그리고 이미 자기 안에 있을 언어와 이야기를 찾기 위해 혹은 그것들을 꺼내보기 위해.
문지혁의 소설 속에는 자꾸만 ‘여기’를 떠나 ‘저기’로 향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이국의 도시가 언뜻언뜻 보여주는 낯선 눈빛에 당황하고, 이방인을 손쉽게 받아들여주지 않는 배타성에 진저리치면서도, 골목의 구석구석을 잘 알고 있는 ‘여기’로 되돌아가기를 거부한다. 그렇기에 고국도 아닌 그렇지만 완전한 타국도 되지 못하는 장소에, 모국어와 외국어 사이의 언어로 겨우 뱉어낼 수 있는 말들이 놓여 있다. 국가와 국가, 언어와 언어의 나와 당신, 그 사이에서만 할 수 있었던 일과 말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현존과 부재 사이, 죽음의 의문사 (疑問詞)들
어머니의 죽음 이틀 뒤, 바르트는 이렇게 적는다. “애도가 하나의 작업이라면, 애도 작업을 하는 사람은 더 이상 속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도덕적 존재, 아주 귀중해진 주체다. 시스템에 통합된 그런 존재가 더는 아니다.”(2) 어떤 죽음은 도덕과 연결될 수밖에 없고,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애도하는 주체가 되기로 한 자들은 시스템 안에 통합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러 계절을 지나며 다시금 깨닫는 중이다. 여기에서 애도하는 주체가 시스템에 통합될 수 없다는 말은 두 차원으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첫번째로 어떤 죽음은 말 그대로 세계의 지반, ‘그룬트grund’>를 붕괴하고 뒤흔든다는 것. 그렇기에 재난 이후의 세계는 이전의 시스템에 통합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두번째, 슬퍼하는 자는 살아 있음과 죽음의 경계에서 타인의 부재를 온몸으로 경험하는 절대적인 공백의 공간으로 침잠한다. 그렇기에 이들이 느끼는 부재와 공백은 시스템의 논리와 언어로 쉽사리 설명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룬트의 붕괴 이후, 남겨진 사람들은 무엇을 딛고 일어서야 하는 것일까. 우선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어제 ‘현존’했던 사람이 오늘부터 영원히 ‘부재’하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존과 부재 사이에 부착되는 의문사들—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리고 왜—의 답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고, 이때 비로소 애도의 시작이 가능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죽음들에는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의문사가 오래도록 붙어 있게 된다.
문지혁의 두번째 소설집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에는 떠난 이들의 영원한 부재를 생각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그래서 기꺼이 슬퍼하고자 노력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소설집의 첫 자리에 놓여 있는 「다이버」는 통합 세기 219년, 아쿠아플래닛이라고 불리는 인공행성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한 아내와 아이의 시신을 찾기 위해 직접 바닷속으로 몸을 내던지는 남자를 조명한다. 아이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의 답을 찾기 위해 분투하는 인물은 「폭수」에도 등장하는데, 오상택 교수는 호수에 빠져 죽은 아들의 죽음을 이해해보기 위해 매일 연구실 창가에서 호수를 향해 동전을 던진다. 그는 동전을 호수에 던지면서 이렇게 질문한다. “왜 그동안은 물이 폭발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을까”(pp. 120~21). 「다이버」의 ‘그’와 「폭수」의 오상택에게서 남겨진 자들의 슬픔이 처절하고 아프게 읽히는 이유는 죽음에 부착되어 있는 질긴 물음표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온전히 죽음을 어루만지고 껴안으며 슬퍼하거나 애도할 수 있는 시간이 ‘아직’ 허락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들은 현존과 부재 사이의 진공상태 속에 갇혀버린 자들이다.
그렇다면 현존과 부재 사이에, 우울과 애도 사이에 갇혀버린 이들은 어떻게 이 진공상태를 벗어날 수 있을까. 「다이버」의 ‘그’는 말 그대로 슬픔의 근원지로 뛰어드는 방식을 선택한다. 유가족들으로 구성된 다이버들이 깊은 바닷속에서 건져 올린 피해자들의 유류품이 쌓여감에 따라 이를 지켜보던 유가족들은 점점 사고 현장을 떠나고 마침내 두 사람, 청년과 ‘그’만이 남게 된다. 하지만 청년마저 ‘그’에게 “저는 오늘까지인 것 같아요”(p. 16)라는 말을 남긴 채 자살을 하고, ‘그’는 다시금 혼자가 된다. 사고 현장에 남은 최후의 다이버가 된 그 역시 “사랑하는 가족이 이미 이 세상에 없다면, 청년이 택한 방법이야말로 진짜 다이빙은 아닌가”(p. 17)라고 생각하며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기를 택한다. 여객선의 추락 지점과 수면을 부지런히 오가면서 아내와 딸이 남겼을지도 모를 흔적을 찾아 헤매던 그는 그룬트가 무너진 곳이자 타인의 부재를 절감하게 만드는 공백의 장소를 향해 뛰어듦나기를 택한다. 그러므로 자살(혹은 사고사)로 독해되는 그의 마지막을 슬픔 끝의 죽음이 아니라, 물음표가 발생한 그곳으로의 침투로, 우울도 애도도 허락하지 않는 시스템 바깥으로의 투신으로, 그래서 이를 “그 재난들을 어떻게 애도해야 할지 방법을 찾지 못”(‘창작 노트’, p. 240)한 상태에서 행할 수 있는 어떠한 ‘의지’로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 공간을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나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폭수」는 한 수학자의 연구실에서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벌어진 모종의 사건을 그린다. 한국인 최초로 필즈상을 수상한 오상택 교수를 인터뷰하기 위해 그의 연구실을 찾은 언어학 대학원생 ‘나’는 인터뷰 중에 오상택의 아들이 창밖으로 보이는 호수에 빠져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학계가 좋아할 만한 연구 주제에 골몰했던 그는 아들의 죽음 이후 ‘타인의 욕망’을 좇는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질문에 매달리게 된다. 그것은 바로 “물이 갑작스럽게 모이고 포개져 와류와 소용돌이를 만들고, 그 한가운데의 에너지 밀도가 무한대로 늘어나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사실”(p. 120)이다. 매일 호수에 동전을 던지면서 물이 폭발하는 특이점에 골몰한다는 오상택을 보며 화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그가 동전을 던지는 것은 수학자로서의 호기심 때문일까, 아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까, 아니면 스스로 가진 죄책감 때문일까”(p. 124). 오상택의 이야기를 들은 화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불쑥 “저도 한번 던져보면 안 될까요?”(p. 125)라고 하며 그의 세계에 한 발짝 들여놓는다. 오상택의 조언대로 긴 포물선을 그리도록 호수에 동전을 던지는 순간, 거짓말처럼 호수가 폭발한다. 이때 폭수의 특이점, 싱귤래리티는 홀로 동전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 이상이 함께 동전을 던지는 것이 된다. 누군가 동전 던지는 자세를 봐주고, 동전을 던지는 그 순간을 함께 목격하는 것이 어떻게 물의 압력과 성질을 변화시켜 폭수의 계기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찌 되었든 이 두 사람은 오상택이 아들의 죽음 이후 그토록 골몰하던 폭수를 마침내 함께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틈과 열림, 그것은 어디에나
죽음에 부착된 물음표와 그에 대한 나름의 답을 기록하는 일에는 무엇이 필요할까. 슬픔의 진공과 부재의 공백으로부터의 탈출은 투신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폭수」의 오상택과 화자처럼 ‘연결’을 통해 가능한 일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는 우연히 포트 리의 카페에서 마주친 일본인 친구 ‘아야’와 함께 조지워싱턴교를 건너는 과정을 소묘한다. 뉴저지와 맨해튼을 잇는 다리를 건너는 동안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미국 독립전쟁과 성수대교 붕괴, 9·11 테러, 동일본 대지진이 다리 위에 나란히 포개어진다.
그 친구는 나보다 늦게 미국에 왔는데 자기는 돌아갈 생각이 없대. 왜 그런지 자세히 설명해 준 적은 없지만 나는 알 것 같아. 미국에 있는 사람들이 간혹 물어볼 때가 있어. 너와 네 가족은 괜찮았느냐고. 지진이 네 삶을 어떻게 바꿔놓았냐고. 글쎄, 거기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저기 포트 리 언덕에 사는 친구와도 지진 이야기는 깊이 나눠본 적 없어. 심지어 그 친구는 센다이 출신인데도 말야. (p. 203)
화자는 성수대교 붕괴에 대한 논문과 소설을 쓰는 중이지만, 이는 논문의 언어로도 소설의 언어로도 포착할 수 없는 잉여를 내포한다. 이 때문에 그가 쓰는 논문은 소설 같고, 소설은 논문 같아지는 애매하고 난감한 상황이 되어버린다. 논문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다리를 건너기 시작한 화자는 다리를 건너며 뜻밖의 것들을 알게 된다. 가령, 어떤 슬픔은 쉽게 공유되지 못하지만 공유되지 않음이 연결되지 않음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 그리고 어떤 사건은 그것을 직접 경험했는가와 무관하게 삶을 바꿔놓지만 그 변화에 대해 정확하고 말끔한 답을 내놓을 수는 없으며 이 불명확함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 대화를 통해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것은 언제나 애매함이 정확함의 반대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어쩌면 논문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그 애매함이야말로 우리가 기록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진실은 아닐까. 만약 재난과 참사에 대해 우리가 기록할 수 있는 진실이 있다면 말이다.
다리를 건너 맨해튼 쪽에 도착한 아야는 버스를 타고 다시 포트 리로 되돌아간다. 다리 위에 혼자 남은 화자는 그가 쓴 논문의 새로운 제목을 제안하는 지도교수의 메일을 확인한다. 지도교수는 새로운 제목으로 “Cracks Everywhere ”(p. 212)를 제안한다. 이때 ‘균열’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는 재난과 사고를,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사고와 죽음을, 사회 안전망과 우리가 딛고 있는 세계의 지반을, 안온한 일상을 붕괴시키는 것으로서의 균열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균열은 틈과 열림의 다름이 아니다. 그러니 이때의 균열은 재난과 재난 사이의 열림, 죽음과 죽음 사이의 열림, 슬픔과 슬픔 사이의 열림이 되기도 한다. 이 열림을 통해 조지워싱턴교를 건너며 서울의 성수대교를 생각할 수 있고, 9·11 테러와 동일본 대지진이 포개어지며, 각자 고유한 슬픔을 경험한 이들이 서로 연결되어 슬픔의 진공과 공백으로부터 한 발짝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재난과 재난 사이의 열림, 죽음과 죽음 사이의 열림 속에서 우리는 연결되고, 논문과 소설 사이의 언어 속에서 1994년과 2001년, 2011년의 참사가 기록된다. 다리 위에서 817매에 달하는 소설 원고를 던져버리려던 화자가 끝내 원고를 던지지 못하고 그대로 다리 건너편에 도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혼자가 아니라 ‘아야’와 함께 다리를 건넜기 때문이다. 지켜보는 사람이 있어 소설을 던지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야와 함께 걷는 동안 다리는 뉴저지와 맨해튼이 아닌 뉴욕과 서울, 센다이를 연결하는 세계의 틈이자 서로를 향한 열림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열림의 공간에서는 어제의 슬픔과 오늘의 슬픔이, 너의 슬픔과 나의 슬픔이 고여 썩어버리는 일은 허락되지 않으며, 사건과 장소를 기록하는 문학의 언어, 소설의 언어를 버리는 일은 가능하지 않게 된다. ‘우리’와 ‘건너다’라는 단어는 ‘사이’를 필요로 한다. 나와 너 사이, 이곳과 저곳 사이. 이 사이는 언제나 열려 있다. 모든 강 위의 ‘다리’가 그러한 것처럼. ‘내가’ 아니라 ‘우리가’, ‘지나는’ 것이 아니라 ‘건너는’ 것이 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문지혁의 소설에서 이러한 연결을 만들어내는 틈과 균열은 어렵지 않게 포착되는데, ‘틈’의 물적 형상화로 자주 사용되는 소재는 ‘책’이다. 종이책이 사라진 통합 세기를 배경으로 하는 세계에서 아버지가 남긴 단 한 권의 책을 찾기 위해 분투하는 내용을 담은 장편 『비블리온』과 단편 「서재」 그리고 아버지가 남긴 책을 이어받아 다음 내용을 작성하는 딸의 이야기인 「지구가 끝날 때까지 일곱 페이지」, 종이책이 사라져버린 세계에서 마지막 종이책을 출간하는 작가의 모습을 조명한 「멸종과 생존」, 딸의 죽음 이후 딸이 남긴 책을 읽기 위해 섬으로 떠나는 「아일랜드」에 이르기까지 문지혁의 작품에서 책은 중요한 위치를 점유한다. 위의 소설들에서 책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세계의 금기를 위반하는 저항의 상징이거나, 인류를 구원할 진리나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종이책은 그 자체로 가장 완벽한 발명품이라는 움베르토 에코의 말처럼, 빈 종이 안에 내용과 형식에 상관없이, 언어의 제한 없이 무엇이든 기록할 수 있으며, 언제라도 타인에게 전달 가능하며, 오랫동안 보존이 가능하다는 책의 형식 그 자체에 책의 중요성이 있다. 이 세계에서 책은 문자 그대로 ‘코르푸스’가 된다. 하나의 말뭉치로서, 완결되지 않은 채 그것을 읽을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기 때문이다.3) 그렇기에 이 책들은 완성되거나 완전한 책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씌어지는 중인 책이 되어 영원한 미완의 상태로 세계의 전체주의적 완결성에 틈을 낸다. 이를 통해 책은 완전히 닫히지 않는 세계의 열림을 가능하게 한다. 그렇다면 이 책에 기록해야만 하는 이야기는 무엇이며, 그 이야기는 어떤 언어로 씌어져야 하는 것일까.
쓰는 일과 사는 일, 그 사이의 기억과 기록
앞서 언급한 장편 『비블리온』과 단편 「서재」 「지구가 끝날 때까지 일곱 페이지」에 등장하는 책에 적히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의 삶이라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플라톤의 『국가론』도 아니고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도 아닌, 인류의 새로운 시작이자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책에 자신의 삶에 대한 기록, 바이오그래피가 씌어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이 한 개인이 쓸 수 있는 가장 정밀한 글이기 때문일 것이다.
질문을 조금 바꾸어보자. 내가 가장 잘 쓸 수 있는 글, 내가 가장 잘 아는 것을 기록하기 위해 필요한 언어, 정밀(精緻)한 삶의 기록을 통해 삶의 정치(政治)를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언어는 과연 무엇일까. 과연 우리에게 모국어는 그 자체로 충분히 예리한 도구가 되어줄 수 있을까.
2020년과 2023년에 출간된 『초급 한국어』와 『중급 한국어』는 연작소설이자 자전적 소설로 일인칭 화자 ‘지혁’을 통해 (외국인)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뉴욕과 서울에서의 삶, 그리고 소설 쓰기의 곤란함과 지난함을 예리하게 묘파한다. 『초급 한국어』는 뉴욕의 한 대학에서 한국어 강의를 맡게 된 지혁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한국을 떠나 미국에 온 지 1년 6개월 만에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가르치는 일을 새로 시작하게 된 지혁은 그토록 꿈꿔왔던, 미국에 정착하여 한국어를 가르치며 영어로 글을 쓰는 이민 작가의 삶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첫 수업부터 앞으로 이어질 초급 한국어 강의가 순조롭지 않을 것임을 직감하게 된다.
영어에서 제일 처음 배우는 말이 hello와 hi인 것처럼 한국어 역시 가장 처음 배우게 되는 말은 ‘안녕하세요’이다. 그러나 ‘안녕’이라는 간단한 두 글자가 지혁을 안녕하지 못하게 만든다. 편안할 안, 평안할 녕. 우리가 하루에 수없이 주고받는 말. 편안하고 평안하니? 편안하고 평안하세요. 이 말을 영어로 옮기면 오직 한 단어 peace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안녕과 peace 사이에서 지혁의 ‘안녕’은 아이들의 웃음거리가 되어버린다. 한국어를 가르친다는 것, 나에게 가장 익숙한 것을 꺼내 이야기한다는 것은 내가 그것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느냐와 무관한 일이다. 오히려 그것과 얼마나 멀어질 수 있는지, 그것을 얼마나 낯선 눈으로 다시 읽어낼 수 있는지와 관련한 일인 것이다. 그렇기에 한국어 수업을 포함한 지혁의 미국 생활은 그의 몸과 삶을 구성하던 요소들과 한 발짝 멀어지는 일이 된다. 새삼스러운 낯섦 앞에서 지혁은 생각한다. “문지혁은 영어로도 문지혁이라는 것을, 세상의 어떤 언어로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혹시 나는 지금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p. 49) 어떤 것들은 도무지 번역될 수 없다는 사실, 아니 함부로 번역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 앞에서 그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 외국어와 모국어를 오가며 골몰한다.
어려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첫 수업 직후 한국에 있는 여동생 지혜에게서 엄마가 뇌졸중에 걸려 쓰러졌다는 전화를 받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안녕하냐고 물을수록 안녕하지 못한 상태로 미끄러져버린다. 『초급 한국어』는 외국 생활 중 마주하게 되는 초심자의 마음과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초보가 되어버리는 상황의 연속을 묘파하는데, 초보가 된다는 것은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것들과 멀어진다는 것의 다름이 아니라는 점에서 지혁은 언어와의 멀어짐과 엄마의 죽음이라는 두 가지 차원의 초보자가 된다. 건강 상태가 점차 악화되는 엄마를 걱정하면서도, 학기 중간에 수업을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파트타임 “논 레지던트 에일리언”(p. 113)이라는 신분인 지혁은 처음으로 한국어의 구개음화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한 발짝 떨어진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본다. 삶과 삶 사이에서 더듬더듬, 아플 만큼 정직하고 숨김없는 자기 고백을 꺼내놓는다. 어쩌면 자신에게 허락된 미래는 중국인 이민 작가 하진과 같은 것이 아니라 그저 여자친구의 가족들에게 소개시켜주기 부끄러운 사람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것을, 자랑스러운 아들도 오빠도 아닌 그저 ‘개새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무엇보다 소설을 쓰는 이유가 그저 ‘우쭐하기 위해’ 하는 일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결국 지혁의 한국어 강의는 첫 학기를 끝으로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게 된다. 학기의 마지막 날 자신이 ‘해고’되었다는 사실에 분개하지 않고 침착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시간강사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이다. 점점 상태가 악화되는 엄마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지혁은 캐리어 두 개에 미국에서의 삶을 차곡차곡 정리한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한국을 떠나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이다.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려던 순간,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문자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시간을 인간의 시간과 신의 시간으로 나눈다면 지혁이 미국에서 보낸 시간은 어떤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대부분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 즉 ‘크로노스’의 시간이겠지만 지혁이 미국에서 보낸 그 마지막 시간만큼은 “한번 일어나면 결코 그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p. 128) 신과 인간의 시간 사이에 존재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이었음은 확실하다.
『초급 한국어』에서 카이로스의 시간이 엄마의 죽음이었다면 『중급 한국어』에서는 딸 은채의 탄생이 카이로스의 시간이 된다. 지혁은 한국에 돌아와 미등단인 상태로 SF소설 한 권을 출간했고, 미국에서 헤어졌던 은혜와 결혼했으며,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은채가 태어나 아빠가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대학에서 비정규직 시간강사라는 신분으로 학생들에게 소설 쓰기를 가르친다. 미국에서의 강의가 모국어로서의 한국어를 외국어로서 접근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었다면, 한국에서의 글쓰기 강의는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도 모두 한국어 사용자라는 어려움이 존재한다. “말에 숨겨진 희미한 뉘앙스, 여백, 서브 텍스트까지 모두 파악했고, 심지어는 말하지 않은 것까지 알아차”(p. 53)리게 되는 숨을 공간 없이 밀착된 곳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완전히 숨길 수도 완전히 꺼내놓을 수 없는 상황에서 지혁은 자주 부끄러워진다.
또 하나 지혁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작가가 되었지만 여전히 작가가 되기를 원하도록 만드는 문단의 제도이다. 한국 문단에서 ‘작가’가 된다는 것은 책을 ‘출간’하는 것이 아니라 ‘등단’을 한다는 의미이며, 제도권의 호명을 기다리지 않고 이탈한 자는 ‘작가’가 아니라 그저 ‘책을 낸 사람’이 되어버리는 현실이 그의 글쓰기를 힘에 부쳐 지속하기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 말하자면 제도권의 부름을 기다리는 일이 글쓰기 자체가 압도한 현실 속에서 ‘쓰는 삶’은 지혁에게 좀처럼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Q: 앞으로 글을 쓰는 것이 너와 네 가족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
A: ……아무 의미도 없다. 나를 포함한 모두에게 고통을 준다는 것만 빼면.
그런 결론에 이르자 갑자기 분노가 솟아오르면서 눈물이 찔끔 나려고 했다. 누구를 향한 분노인지, 무엇을 위한 눈물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막연하게, 세상과 책과 문학과 문단과 출판사와 편집자와 악플러와…… 그리고 나, 바로 나, 나 자신 때문이었던 것 같다. [……]
그래, 그만두는 마당에 못 쓸 이야기가 어디 있겠는가? 「체이싱 유」 같은 함량 미달의 SF도, 「호랑이와의 하룻밤」 같은 어쭙잖은 문단 문학도 아닌 글을 쓰자. 아니, 그냥 내 이야기를 쓰자. 나를 쓰자. (pp. 232~33)
학생들에게 잘 읽는 법과 잘 쓰는 법을 알려주는 선생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써야 하는 글 앞에서는 어떠한 이론도 무력해지는 경험을 한다. 빈 종이 앞에서, 두서없이 늘어져 있는 문장 앞에서 커서를 이리저리 옮기며 헤매는 동안 알게 되는 것은 소설은 수업 시간에 배운 것들을 배반하는 방식으로만 씌어진다는 것이다. 이 배반이야말로 언제나 유효한 소설 쓰기의 유일한 법칙이다. 마치 지혁의 삶에서 문학이 뒤로 밀려나는 순간, ‘쓰는 삶’이 새롭게 등장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초급 한국어』와 『중급 한국어』는 쓰는 손을 자꾸만 움츠리게 만들었던 타인들의 문학에서 ‘나’의 문학으로 이주하는 과정이라 읽을 수 있다. 쓰기의 기술에는 ‘사랑의 삼각형 이론’이나, 묘사의 기술, 파격적인 문장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그저 ‘유년’과 ‘사랑’ ‘대화’와 ‘상상’ ‘죽음과 애도’가 필요할 뿐이다. 소설은 삶에 앞서서 존재할 수 없지만, 삶의 어떤 기억들은 그 자체로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유년과 사랑, 대화와 상상, 죽음과 애도의 과정에서 글을 쓰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두 가지뿐이다. 나에게서 영영 사라져가는 모국어 단어들을 잘 기억하는 것, 새롭게 얻게 될 단어들을 기쁘게 맞이하는 것.
그러므로 문지혁의 ‘한국어 강의’ 시리즈는 누군가를 사랑했고, 아직 사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사랑할 것이라는 성실한 반복에 대한 기록이자 무언가를 좋아했고, 욕심냈고, 그래서 떠났고, 미워했고,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기억이다. “기억은 재생이 아니라 창조이며, 따라서 우리의 과거는 허구 위에 지은 집이다. 우리는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발명”(p. 64)하는 것이라면, 사는 일과 쓰는 일 사이에서 벌어진 일들을 성실하게 기억하고 기록한 발명의 바이오그래피는 “반듯”하기 때문에, “순진하며 찌질하고 뻔”(p. 149)하기 때문에 진실하고 강렬하다.
그러나 아직은 떠나는 중
『중급 한국어』에서 학생들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는 것은 “글쓰기는 일종의 여행이”(p. 37)라는 것이다. 소설 속 인물이 일상에서 비일상으로 떠났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이 서사의 기본 구조라면, 소설 쓰는 일도 일상에서 비일상으로 떠났다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삶이야말로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쓰고 있는’ 소설”(‘작가의 말’, p. 184)이라면 우리의 삶의 기본 구조 역시 떠났다–돌아오는 구조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책의 안과 밖으로 귀가 중인 사람들이다. 문지혁의 근작 『고잉 홈』은 조금 멀리 떠났다가 돌아오는 중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조명한다. 소설집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은 미국에 체류 중인 한국인 유학생인데, 이 유학생이라는 신분은 어딘지 애매한 구석이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일단 한국을 떠났으나 앞으로 미국 사회에 정착하여 살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들의 떠남은 아직 ‘과정’ 중에 있다.
「크리스마스 캐러셀」은 공개 입양된 에밀리와 어느 날 갑자기 새엄마가 생긴 ‘나’가 디즈니월드에서 겪게 되는 모종의 ‘실종’ 소동을 그린다. 의도적으로 가족들과 떨어져 ‘미아’가 된 에밀리를 찾는 과정 속에서 ‘나’는 에밀리가 다섯 살 때 디즈니월드에서 유기되었다는 것과 에밀리의 원가족들이 자살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렵게 크리스마스 캐러셀 앞에서 만난 에밀리에게 도대체 왜 사라졌느냐 묻는 ‘나’의 질문에 에밀리는 “다시 혼자가 되어보고 싶었어”(p. 125)라고 답한다.
‘다시’ 혼자가 되어보고 싶었다는 말은 최초로 혼자가 되었던 경험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에는 무언가 확인할 것이 있음을 내포하기도 한다. 다시 혼자가 된 에밀리는 자신을 유기한 ‘가짜 엄마’가 자신을 버린 줄로만 알았는데, 실은 자신을 살려주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에밀리는 다시 자신을 입양한 ‘진짜 엄마’가 있는 곳으로, 그녀와 함께하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버려진 아이가 아니라 누군가 죽음의 끝에서 살려준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돌아가는 집은 그전과는 다른 집이 될 것이며, 앞으로 에밀리에 도래할 시간도 조금은 다른 시간이 될 것이다. 화자 역시 돌아가신 엄마가 언젠가 아이가 생기면 함께 보고 싶다던 디즈니월드의 불꽃놀이를 본 후에 돌아갈 집은 전과는 다를 것이다. 어쩌면 여행을 마치고 돌아갈 ‘나’의 집은 “내가 많이 노력할게”(p. 96)라고 이야기하는 새엄마를 “엄마라고 불러보는”(p. 128) 집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새로운 ‘집’을 만들어낸 에밀리와 ‘나’가 함께 타는 놀이기구가 크리스마스 캐러셀, 즉 회전목마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회전목마는 떠나는 동시에 돌아오는 것이므로. 목마가 출발과 도착 사이에서 달리는 것은 나의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자신에게 또 다른 ‘집’을 만들어주는 사람은 「뜰 안의 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뜰 안의 볕」은 목회학 석사 졸업을 앞둔 상황에서 앞으로 어떤 삶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는 ‘늘봄’의 이야기이다. 현재 늘봄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져 있다. 하나는 대학원 졸업 이후 교회 스태프로 일하면서 계속 미국에 남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당연히 미국으로 유학까지 온 상황을 고려한다면 전자의 옵션이 훨씬 매력적이며 합리적일 것이다. 그러나 늘봄은 흔쾌히 미국에 남아 교회 스태프로 일하기를 망설인다. 왜냐하면 영주권을 받기 전까지는 위장 취업과 같은 편법을 사용해야 하고, 무엇보다 늘봄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목회’인지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늘봄이 결정을 망설이는 표면적인 이유이다. 그러나 사실 늘봄에게는 또 다른 고민이 존재한다. 바로 늘봄이 ‘무성애자’ 여성이라는 사실이다. 한국 교회의 폐쇄성을 떠나 미국행을 선택한 늘봄이지만, 미국 한인 교회의 상황도 한국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게다가 늘봄은 자신을 무성애자라고 생각하면서도 스스로를 무성애자라고 부를 수 있을지, 그래도 괜찮은 것인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확언하기를 주저한다. 말하자면 늘봄은 한국도 미국도, 신학도 목회도, 교회 동료들과 엄마조차도 자신에게 온전한 ‘집’이 되어주지 못함을 느끼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단지 내 정원 사용에 대한 이웃들 간의 의견 충돌이 발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회의가 소집된다. 정원에 설치된 유대인 이웃의 ‘수카’ 철거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이웃들이 모인 와중에 가장 중요한 사람인 유대인은 안식일을 이유로 참석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인 이웃 그 누구도 그의 불참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지언정 나무라거나 집으로 쫓아가 회의 참석을 강요하지 않는다. ‘수카’ 철거 문제에 가장 열을 올리던 중국인 부부마저도 아이가 가져온 과자를 함께 나누고, 늘봄도 역시 따뜻한 둥굴레차를 가져와 이웃들과 함께 나눠 마신다. 텅 비어 있던 정원은 이렇게 노을을 보며 함께 둘러앉아 있는 것으로 진짜 정원이 된다.
언뜻 기묘하게 보이는 이 풍경 속에는 공동의 영역을 공유하는 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지만, 그럼에도 타인의 영역을 무단으로 침범하거나 훼손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종교와 안전을 위해 떠난 이들이 먼 곳에서 이루고자 하는 자신의 ‘집’을 훼손하지 않는 과정 속에서 늘봄은 자신의 이름 뜻이 “‘올웨이즈 스프링’이 아니라 ‘이터널 스프링’일지도 모”(p. 255)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항상 봄이 아니라, 영원히 봄이라는 것은 봄이 아닌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봄이라는 뜻을 갖는다. 늘봄이 늘봄이 아닌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늘봄이 되는 것처럼, 스스로를 무어라 불러야 할지 알 수 없는 순간에도 나는 나에게 ‘이터널’한 존재가 된다. 어디를 가고, 무엇이 되어도, 먼 타국의 땅에서 이리저리 헤매는 순간에도 내가 영원한 ‘나’라는 사실은 내가 나에게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집’을 내어주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집을 떠나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일은 그저 나에서 나로, 나의 사이사이를 마음껏 헤매는 일과 같을지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와중에도 아직은 떠나는 중이다.
사이의 애매함, 애매함의 진실함
명확한 진실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세상 어딘가에는 존재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진실이 명확함과는 거리가 먼 형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우리가 진실을 잘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도, 혹은 진실을 눈앞에 두고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문지혁의 소설은 애매하다. 그의 소설은 늘 무언가의 사이를, 분명히 존재하지만 잘 보이지 않는 간 (間)을 포착하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은 삶과 죽음, 애도와 우울 사이를 보여주고, 차이가 아닌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사이를 힘주어 말하며, 쓰는 일과 사는 일 사이의 부끄러움을 고백한다. 결과는 이 모든 일들이 떠남과 돌아옴 사이에서, 나와 나 사이에서 치열하고 처절하게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문지혁의 소설은 애매하고, 애매하기에 진실하다.
- 1) 이 글에서 다루는 텍스트는 다음과 같다. 『비블리온』(위즈덤하우스, 2018), 『초급 한국어』(민음사, 2020), 「다이버」 「서재」 「지구가 끝날 때까지 일곱 페이지」 「폭수」 「아일랜드」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 다산책방, 2022), 『중급 한국어』(민음사, 2023), 「크리스마스 캐러셀」 「뜰 안의 볕」(『고잉 홈』, 문학과지성사, 2024), 「멸종과 생존」(『자음과모음』 2024년 봄호). 이하 본문 인용 시 괄호 안에 작품명과 쪽수만 밝힘.
- 2) 롤랑 바르트, 『애도 일기』, 김진영 옮김, 이순, 2012, p. 18.
- 3) 장- 뤽 낭시, 「코르푸스: 또 다른 출발」, 『코르푸스: 몸, 가장 멀리서 오는 지금 여기』, 김예령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2, pp. 5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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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표지를 본다. 정면을 보는 이의 옆얼굴이 먼저 보인다. 그는 가방을 들고 있다(무엇이 들어있을까?). 그가 걷는 중인지, 잠시 멈춰 있는지, 혹은 아주 오래도록 서 있었는지는 아직 모른다. 가방과 모자와 같은 색으로 칠해진 검은 눈이 어디/누구/무엇을 보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다섯 편의 희곡을 연달아 읽고 나면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이 여러 방향을 가리키는 수많은 갈림길일지도 모르겠다고, 움직임의 여부가 분명치 않은 발 역시 흑백의 세계에서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 경계를 건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은용 작가의 희곡집 『우리는 농담이(아니)야』를 이루는 다섯 편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농담이(아니)야」(총 여섯 편의 이야기로 구성된 장막 희곡이다) 「세상의 첫 생일」 「우리는 그것을 찾아서」 「엄마, 엄마」 「가을 손님」. 각 작품에서 등장인물은 “문성”과 “아성” 등의 이름으로 소개되기도 하고, “사람1(A)”처럼 숫자 혹은 알파벳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여자”와 “남자”로 적힐 때도 있으며, (「우리는 첫 생일」의 ‘사람 2’처럼) “아마도 여성”으로 소개될 때도 있다. 「우리는 농담이(아니)야」에 수록된 ‘변신 혹은 메타몰포시스(Metamorlphosis)’의 주인공 설명은 다음과 같다. 주인공 스물여덟 살의 에프티엠 트랜스젠더Female to male transgender로 살아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열여섯 살 시스젠더 소년으로 살아갈 기회를 얻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그런 사람.(65쪽) 이은용의 세계에서 인물들이 소개되는 방식은 이처럼 다양하며 세부적이다. 각 이야기에서 인물들이 그려지고 행동하는 방식 또한 마찬가지다. 이들은 에프티엠 트랜스젠더이자 아마도 여성이며 하나의 이름 또는 기호를 가진 인물인 동시에, 무대에 오르는 배우이고 여행하는 “아티스트 앤 트랜스젠더”이자 어른이 사라진 세계에서 노동의 주체가 된 십대들이다. 이들은 ‘여성’과 ‘남성’을 이분법으로 가르는 사회에 나뉜 구획들을 끊임없이 월경(越境)한다. 나아가 경계를 나눈 벽에 난 문을 연신 두드린다. 이 소리는 책 전체를 관통하여 울리고 있다. 넘는 걸음이나 문을 두드리는 손짓 모두 삶에서 잦게 벌어지는 일상적인 ‘동작’이다. 여기에 관한 ‘반응’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경계를 넘거나 문을 지날 때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혼란스러워”한다. 다섯 편의 희곡에서 이러한 ‘동작과 반응’은 장면과 움직임 그리고 수차례의 질문으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우리는 농담이(아니)야」의 장막 ‘월경’에서 에프티엠 트랜스젠더 진희는 국경을 지날 때마다 그의 성별에 혼란을 겪는 검색대 직원들을 마주한다. 진희는 독백한다. “그들은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국경을 넘기 위해서는, 월경하기 위해서는 겨우 이것이 끝이다. 그리고 월경은 농담이 맞으니 웃어도 된다. 웃어라.” 그는 뒤이어 월경의 과정과 그 의의에 관해 이야기한다. “어딘가에 선이 그어져 있고, 그 선은 때로 벽 같아서 그걸 지키는 사람들이 늘 서 있다. 그들은 언제나 질문을 던진다. 내가 누구인지 묻는다. 국가를 떠나는, 월경하는, 나는 누구인가?”(31쪽) 독백의 마지막 질문은 진희와 만나는 검색대 직원들이 반복하는 질의이자, 이은용의 인물들이자기 자신에게 반복하여 던지는 물음이다. “나는 누구인가?” 현실에서 트랜스젠더에게 반복되는 질문(“너는 누구인가?”)의 주어를 비튼 이 물음을, 인물들은 자기 자신을 향해 또 서로를 향해 거듭 던진다. 이는 그들 앞에 벽으로 우뚝 선 세계를 더듬는 몸짓이기도 하다. 진희의 벗이자 트랜스젠더 여성인 친구2는 “진희야, 자궁이 있는 건 어떤 느낌이니?”(37쪽) 하고 질문함으로써 그가 겪지 못한 신체, 벽으로서의 세상이 “들어올 수 없다”라고 주장하던 공간을 알아가고자 한다. 「세상의 첫 생일」 속 사람1의 “왜 스무 살이 넘는 어른들만 없앤 건데?”(141쪽)라는 물음은 그들의 세상이 겪은 중대한 ‘변신’(스무 살이 넘은 어른들의 증발)을 이해하려는 시도다. 에프티엠 트랜스젠더 작가인 준영이 꿈속에서 스무 살의 엄마 희수와 서로 “몇 살이야?”(161쪽) 하고 묻는 과정은 일시적으로 교차된 ‘이해의 시간대’의 주파수를 조정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의문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로써 세계가 어떻게 ‘변신’할 수 있는지에 관한 가능성‘들’을제안한다. 한 가지 형태와 성질로 고정된 세계에 던져진 질문은 흑백으로 명확히 구분된 세계의 표피를 관통하여 그 내부를 들여다보고, 심층까지 파고든다. 바로 이 과정에서 금과 균열은 생겨난다. 얼핏 ‘균열’은 ‘경계’와 비슷한 선(line)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면의 선으로 이뤄진 경계와 달리, 균열은 다양한 방향의 선과 층층의 면으로 만들어져 있다. 여러 갈래로 나뉜 선과 면은 공간을 형성한다. 이 공간을 ‘틈’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틈의 형태와 성질은 다양하다. 계속 두드린 끝에 열린 문틈, 수많은 발자국이 만든 조그만 골, ‘여성’과 ‘남성’이라는 두 구분지(너무도 명확히 나뉘어 있기에 오히려 한 덩어리로 보이는 땅)를 어그러뜨린 궤적 역시 틈으로 볼 수 있다. 실제의 세계에서 그러하듯이 틈은 많은 가능성을 품은 장소다. 환경의 제한으로 미처 움트지 못했던 몸이 틈바구니로 자라나거나, 새로운 장소로 통하는 사잇길이 열리기도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이은용의 언어는 종이에 인쇄된 활자이자 무대에서의 상연을 위한 텍스트이면서, 세계의 변신을 불러오는 움직임이 된다. ○ 덧붙이는 말 『우리는 농담이(아니)야』는 고(故) 이은용 극작가가 남긴 다섯 편의 작품을 한데 묶은 희곡집이다. 표제작 「우리는 농담이(아니)야」는 2020년 극단 ‘여기는 당연히, 극장’의 초연으로 그해 한국평론가협회 선정 ‘올해의 연극 베스트3’과 제57회 동아연극상 4개 부문을 수상했으며, 2022년에는 백상예술대상의 ‘백상연극상’을 수상했다. 2019년 신작희곡페스티벌의 당선 소감에서 이은용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첫 작품은 절대 정체성에 관련된 이야기를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정체성은 내 삶의 한 부분일 뿐, 나를 결정지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삶이 늘 그렇듯 존재하는 것을 외면하기는 어려운 일이지요. 정체성이 나의 전부는 아니지만, 정체성을 떼어놓고 삶을 이야기하는 일 또한 불가능합니다.”*
말을 한다는 것은 말하지 않을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골라 제외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형언할 수 없어서 침묵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미 모두가 알고 있어 굳이 말해질 필요가 없는 것도 있다. 이를테면 강화길 소설의 여성 인물들이 구태여 토로하지 않는 억울감과 소외감 같은 것. 이 사회의 언어로 묘사할 수 없으면서 부러 말할 필요도 없는, 각기 다른 여자들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거푸집으로 찍어낸 듯한 유사한 정서들. 그러므로 강화길의 소설 속 말해지지 않는 빈틈은 경험적 현실을 나눌 수 있도록 의도된 여백이 된다. 이는 매끈한 반사면으로 남아 독자의 체험을 되비추는 거울로 기능한다. 우리는 그 여백에 성차별적인 세계에서 타의로 경험한 불쾌감을 채워 소설을 완성한다. 강화길이 꾸준히 '안진'이라는 지방의 소도시를 여성이 경험하는 특수한 현실의 집합체로 구현하려 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외형적으로 매우 닮아 자매로 오해를 받곤 했던 '나'(진이)와 막내 이모는 음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토대로 유대감을 나누던 사이다. '나'는 이모가 친언니였으면 하고 바랄 만큼 그녀를 각별히 생각해 수시로 책과 엘피판 등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모가 암으로 죽자 그의 언니인 큰이모는 '나'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막내 이모가 아끼던 티셔츠를 남자 조카들에게 나누어주려고 한다. 이모의 여자 조카가 '나' 하나뿐이라는 점에서 이는 큰이모가 여자라는 이유로 '나'만 배제했다는 의미가 된다. '나'의 남동생은 이모의 발인 시간도 제대로 못 맞췄지만 큰이모는 그의 수고를 치하한다. 이렇듯 가장의 역할을 대신하는 여성이 가부장제를 대물림하는 광경을 우리는 강화길의 소설에서 여러 차례 목격한 바 있다. 경제적 부담을 짊어지고서 그러지 않은 여자들을 "멍청한 년"이라고 구박하는 여자(큰이모)와, 그런 여자가 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도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엄격한 미의 기준을 악용하여 "못생긴 게"라고 되받아치는 여자('나')가 소설에 남는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쉬이 불행해지고 마는 이들의 처지가 애석하게도 친숙하게 느껴진다. 강화길은 이전 작품에서 다루어온 문제의식을 이어가되 유품의 소유권을 둘러싼 갈등을 구성하여 '혈연과 가부장제'라는 범주로는 다 길어낼 수 없는 남은 마음들에 대해 숙고한다. 남자 조카들에 비해 이모와 훨씬 가까웠던 '나'는 이모가 남긴 유품을 처리할 권한이 자신에게 있음을 거리낌 없이 주장하지만, 이모를 언니라고 부르면서 '나'와 이모가 소원해졌다는 사실과 '나'가 알지 못하는 이모의 마음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낯선 여자 앞에서는 혼란스러워진다. '나'는 자신이 이모와 법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혈연관계임을 들먹이면서 여자를 내모는데, 이때 경제적으로 지원해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모의 대소사를 일방적으로 결정하던 큰이모의 기분을 경험하게 된다. 부재하는 대상과 맺었던 관계의 깊이를 증명하고 그에 대한 배타적인 소유권을 주장하는 일은 사람 사이의 감정적 교류를 해석하는 관점의 차이를 사유하게 한다. '나'는 "내가 사귄 남자들"을 이모가 다 알았던 것이 그만큼 서로 가까운 사이여서가 아니라 '나'가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연애사를 들려주었기 때문임을 아프게 확인한다. 자기 편의를 위해 이모가 어렵게 모은 돈을 빼앗아버렸다는 사실도. 그리하여 이모를 빼닮았다는 점이 이모의 횡격막 아래 자리한 "그것의 거푸집마냥 똑같은 형태의 길쭉한 암 덩어리"가 그랬듯, 부정적인 의미일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돈과 피로 얽힌 관계라거나, 서로 돌봄을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상히 대해주어야 하는 사이였다는 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사소한 추억 역시 분명히 실재한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진실한 마음과 말로도 가려지지 않는 거짓의 마음, '안진'이 모두 안진에 있다.
왜 하필 그림자였을까, 그가 상자에 차곡차곡 가두어 둔 것은. 당신에게 함이 하나 생겼다고 하자. 육면체여도 좋고 팔면체여도 상관없지만 어쨌든 내부와 외부가 구분되는 상자. 종이로 만든 것이어도 좋고 철재나 목재여도 무관한데, 뚜껑째로 열 수 있거나 경첩으로 상하부가 연결된 그 상자는, 비어있다. 당신은 무엇을 담겠는가? 그의 함에 든 그것은 말하자면 그림자였다.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2024)에서 히라야마는 심상한 일상을 자신만의 취향으로 세공한다. 도쿄 공중화장실 미화원인 그는 청소도 허투루 하는 법 없이 자신만의 방법과 도구, 약품으로 꼼꼼하게도 닦는다. 변기 앞에 쭈그리고 앉아 누가 일부러 허리를 구부리고 찾아볼 리도 없는 구석진 면까지 오염을 닦아내는 그의 손길에 저어함은 없다. 점심은 신사의 야외 벤치에서 편의점 샌드위치와 우유. 더없이 간결하고 간소하다. 옆 사람과 눈인사를 나누기도 하지만 그의 눈길은 주로 위를 향한다. 높다란 나무에서 뻗은 가지에 매달린 잎사귀가 해를 받아 검은 무늬를 드리운다. 잎사귀 사이로 설핏 들어오는 햇살은 그 순간 더없이 명료하다. 영화는 내내 그의 ‘지금’을 보여준다. 청소일이 끝나면 동네 목욕탕에서 개운하게 몸을 씻은 후 지하상가에서 도수가 약한 술을 저녁 삼아 마신다. 다다미방에 요를 깔고 누워 탁상용 스탠드 불빛에 기대 헌책방에서 구입한 문고판 책을 몇 장이나마 읽다가 잠들고. 다음날 같은 시각에 일어나 단풍나무 묘목에 물을 뿌리고 간단히 씻고 수염을 정돈한 후 자판기 캔 커피를 뽑아 출근길에 오르면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하루가 반복된다. 그러니까 그토록 단정하고 과묵하며 그다지 남과 얽히지도 않고 독서와 필름 카메라, 카세트테이프로 듣는 올드팝이라는 그의 태도와 취향이 어디서부터 연유한 것일까 궁금해지기도 하지만 영화는 그의 전사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이 영화의 백미는 거기 있다고 본다. ‘이런 일 할 사람으로는 안 보이는데…’ 유의 질척한 궁금증으로부터 가뿐히 등 돌리는 것. 그의 전사는 영화 안에 없다. 홍성욱의 「함」(『현대문학』, 2025년 2월호) 속에 든 것은 꿀이다. 꿀단지는 일하는 회사에서 사장님으로부터 받은 것인데, ‘나’에게는 어쩐지 이것이 “납골함”(55쪽)이라 여겨진다. 그래서일까. 함을 안고 천변을 걸어 집으로 가는 40여 분의 타임라인 동안 두 개의 죽음은 자연스레 환기된다. 기억조차 없는 아버지의 죽음이란 요컨대 이러하다. “엄마는 아버지의 시신을 어떻게 했을까?”와 그것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59쪽). 집에 다다르기까지 전화를 걸어 어디냐, 언제쯤 오냐, 아직이냐 묻는 엄마는 집요하다. 열 한 시간을 일한 몸으로 함을 지고 걸어가는 ‘나’는 그걸 또 다 받아낸다, 온몸으로. 잇단 벨소리가 또 엄마의 전화인가 싶은 때, 고교 동창에게서 승화의 2주기를 알리는 전화가 온다. 그리하여 또 하나의 죽음이 찾아든다. 승화와는 딱히 가까웠다고 할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우연히 같이 과제를 하게 되어 집에 온 날 승화가 의자 뒤에서 내 목을 끌어안고 볼을 쓰다듬은 일, 그리고 그걸 엄마가 본 일. 승화가 돌아가고 난 뒤 엄마는 그와 멀어질 것을 종용했고 ‘나’는 뭘 잘 모르는 채로 그저 엄마의 뜻에 따랐다. 그리고 엄마는 그날 이후 “더 내 안쪽으로 들어왔다”(67쪽). 승화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도 엄마는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단정했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승화의 2주기에 딱히 가지 않을 것이다. 그게 전부다. 엄마와 불화하지도 그렇다고 엄마를 극복하지도 않는 이 소설은 다만 두 가지를 돌올하게 밀어 올린다. 애도와 성장. 그런데 이 애도와 성장에 좀 희한한 면이 있다. 애도가 불가능 쪽으로 점쳐질 때 우울증적 자아가 탄생한다는 익숙한 이론으로부터 이 소설은 각도를 튼다. 당장 함의 무게도 무게지만 가계를 건사하기 위해 긴 노동을 감내하는 인물에게 제법 기우뚱 기대어 있는 것은 엄마라는 존재다. 자신 쪽으로 지나치게 밀고 들어온 엄마를 허용한 대가는 아무래도 반反성장에 가까운 결정권의 이양이어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함구하고 승화라는 관계의 싹을 애초에 절단한 것은 모두 엄마의 결정이었다. 아감벤은 애도의 실패가 불러오는 우울증의 모호함에 대해 일별하면서 소유할 수 없는 것을 향한 ‘점유’의 시도로 정리한다. 그러니까 가질 수 없는 대상을 잃어버린 대상으로 치환하는 상상력이란 실제 잃어버린 것이라기보다 잃어버린 것처럼 연기하는 쪽에 가깝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내게 진정으로 깃들어본 적이 없는 대상과의 관계에 집중하면서 우울증이라는 단어를 잠시 뭉개버리고라도 함을 들고 걷는 인물에게 찾아온 두 죽음을 이 말에 포개보자. 무언가를 제대로 소유해보지 않았다는 것은 그것을 잃는 일 또한 불가능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승화와도 제대로 우정이라 부를만한 시간을 공유했다고 보기 어렵지만 아버지의 존재는 특히 기억조차 전무해 아버지란 오직 나의 존재로서만 짐작되는 불확실성에 기대어 있디. 그런 사람의 죽음은 더더욱 내가 알 수도 없는 식으로 처리되어 부재만을 그 증거로 내밀 따름이다. 소설은 지연된 애도의 수행, 그 정식화를 시도하지 않는다. 그저 복기하기, 다만 그것만을 할 수 있을 뿐인데 주체적인 판단이라는 것을 해 볼 기회가 없었던 이에게는 어쩌면 그편이 가장 실천 가능하달 수 있겠다. 그리고 40여 분간(이날은 조금 더 지연된다) 스스로 “납골함”(55쪽)을 지고 무대를 걷는 것이다. 그러다 무대의 끝에 다다라 발이 걸려 철푸덕 넘어지며 함은 그만 깨져버린다. 꿀은 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흘러나와 바닥을 흥건히 적신다. 진정으로 실패한 애도야말로 애도라는 데리다식의 전유가 가능하려면 대상을 곁으로 당겨 유연관계로 만드는 일이 먼저 필요하겠다. 그럴 때 비로소 나에게 이만치 들어와 있는 엄마와, 열 한 시간 노동의 세계와, 아버지와 친구의 죽음을 인수한 ‘나’는 접맥 가능할 것이다. 그때 ‘나’는 자그마한 딱지에 쓰인 유통기한이 2년 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본다. 이제 꿀도 함도 손쓸 수 없지만 길 위에서 ‘나’는 누군가의 죽음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유골함보다 왠지 사후적으로 들리는 납골함이라는 단어는 회수할 수 없는 죽음을 가리키는 것처럼도 여겨진다. 그리고 저 꿀은 기어이 쏟아짐으로써 치유의 성분으로 남은 이의 상처를 덮어주기도 할 것임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그런가하면 어떤 함의 이름은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기계’다(명학수,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기계」,『창작과 비평』, 2024년 겨울호). 하루 열네 시간의 노동을 견디는 ‘나’에겐 소설 쓰는 친구들 진호와 미미가 있다. 소설은 전에 그런 일 없던 미미가 예의 저 기계를 갖고 싶어 한다면서 진호가 보여주는 동영상 속 함에 대한 묘사로 시작된다. 18초짜리 동영상에서는 스위치를 누르면 함이 열리고 그 안에서 막대가 나와 스위치를 눌러 원 상태로 돌린다. 막대가 제자리에 돌아가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굳게 닫힌 함이 거기 놓여 있을 뿐이다. 다소 뻔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기계의 ‘쓸모’와 인물들의 ‘쓸모’를 얽고 쓸모없음의 역설을 말한다는 건. 미미는 자신을 방구석에서 홀로 돌아가고 있는 선풍기와 동일시해 “누군가 작동시켜놓고 까맣게 잊어버린 존재, 잊힌 줄도 모르고 이 어두운 방에서 혼자 존나게 영혼을 갈아대고 있는 똥멍청이”(209쪽)라 하니까. 스스로를 그리 여기는 건 미미뿐만은 아니어서 선풍기를 거울삼기는 ‘나’도 매한가지다. 자기 비하에 깊숙이 빠진 여자친구에게 기필코 저 기계를 구해주고자 애쓰는 진호의 마음은 다소 지당해 보인다. 그런데 정작 ‘나’는 왜 이리 열심이란 말인가? 카페와 편의점을 오가며 낯선 사람을 상대하는 연중무휴의 삶, 그런 일상에 함 하나가 슬며시 끼어든 것이다. ‘나’는 기계를 구하는 일에 완전 진심이다. 온갖 사이트며 동영상을 뒤지고 전자회로 관련 서적을 소지한 카페 손님에게 자문을 구하는 일은 사뭇 열정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다 보니 종일 기계를 생각하게 되고 정작 업무에 오류가 끼어든다. 이를테면 이런 식인데, 카푸치노를 손님에게 내밀자 손님은 자신이 카페라테를 주문했다고 말한다. ‘나’는 영수증을 확인하고 카푸치노가 맞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자 손님은 “나는 집에서 나와 여기까지 오면서 오늘은 따뜻한 라떼를 마셔야겠다고 계속 생각하고 다짐까지 했다고요. 그런 제가 주문을 잘못했겠어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카푸치노가 찍혔다는 건 그쪽이 실수를 했다는 뜻 아닌가요?”(211쪽)라며 응수한다. 얼핏 너무도 주관적이고 증명되지도 않을 손님의 논리는 억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손님의 저 지적에는 뜻밖에 꽤 명징한 논리가 있다. 바로 입력의 오류 가능성. 입력이 오류이면 출력값도 오류일 수밖에 없다는 이 논리는 사실, 이 실재하는 기계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우리는 소설을 읽는 중이고 이 기계를 만난 곳 또한 소설이니 효용적 측면이나 개발 동기와 무관하게 이 기계를 해석해도 될 터. 이 기계는 말하자면 끄라는 명령어를 켜고, 켜짐으로써 끔을 실행하는 역설의 명령을 실천한다. 여느 기계들이 인간의 명령으로 켜지고 꺼지는 것과 달리 이 기계는 인간의 행위로 시작해 기계의 실천으로 끝을 맺는다는 것 아닌가. 달리 말해 이 기계는 인간과 모종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도 전유되어 ‘나’는 기계로 인해 사람들을 만나고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질문을 하기 위해 용기를 내고, 급기야 전자회로 여학생을 기다린다! 생각만큼 그리 간단치 않은 문제의 장치를 구했다며 진호 미미가 가져온 기계의 실물은 정작 제대로 구현되지도 않는 텅 빈 것이었다. 그 속을 소설적 상상력으로 채우겠다는 미미의 결심은 다소 뻔한 결말이지만 그 부분을 괄호 치더라도 분명한 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기계’가 내내 작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마치 원본도 실체도 없는 가속력에 의해 현재를 다만 가열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겹쳐진다. 이 기계의 다른 이름은 ‘궁극의 기계’다. 그러니 정작 “그 녀석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229쪽)는 것은 때때로 텅 빈 기표가 되고마는 아니 어쩌면 내내 텅 빈 것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하는 삶의 모호성이라는 실재나 다름없다. 다시 <퍼펙트 데이즈>에서, 예정에 없이 여동생의 딸이 가출하여 히라야마와 머물게 되자 여동생은 기사가 운전하는 고급 세단을 타고 딸을 데리러 온다. 잠시 나누는 남매의 대화에서 히라야마와 아버지의 오랜 불화가 엿보인다. 드문드문 드러나는 힌트에 의지해 그의 사연을 추적하는 일은 얼마쯤은 가능하다. 그러나 관객이 그런 시도를 할 때 영화는 클리셰로 범벅되고 만다. 인간의 삶이란 그토록 뻔한 면도 있지 않은가. 그런 이유로 영화가 보이지 않으려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려는 것도 있지만, 이상스레 그의 과거를 캐지 않으려는 마음 쪽에 힘을 더 싣게 되는 것은 그것이 예의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어쩐지 그가 그편을 원하는 것 같아서. 다만 여동생이 다녀간 뒤 순간의 오열은 그의 단단하고 고집스러운 취향으로 쌓은 일상이 어쩌면 무언가로부터 기필코 달아나고자 하는 행위로 빚어 올린 벽일지도 모른다는 짐작만은 보태진다. 그런 안간힘에도 간혹 일상을 기습하는 외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충직하게. 돌아가야 하는 것, 그럴 수 있을 때 돌아가는 것, 부드럽고 고집스러운 회복. 무너져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회복에 대한 탄력성. 그러나 회복이 이전으로 돌아감과 등가가 아님을 아는 사람의 자가면역 행위. 목표는 더 나빠지지 않는 것. 다만 나를 온전히 지켜내는 것. 그럴 때 중요한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이다. 일상은 노력으로 일구어내는 순간의 더께로 켜켜이 쌓이지만 당연하게도 ‘지금’이 누구에게나 만족스러운 것일 수는 없다. 지키기 위해 감행하지만 도대체 온전히 거머쥘 수 없다면, 그렇게 끈질기게 돌아오는 자리가 만족스럽기는커녕 어쩐지 열등감만 부추길 뿐이라면, 그것이 다름 아닌 자신의 모습이라면 우리는 삶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여기 소설이란 함에 한 장의 사진이 들어있다(서장원, 「피루엣」, 『웹진 림』, 2025년 2월호). 사진에는 초등학교 3학년 규오가 동화 속 왕자님 차림으로 발레 동작을 취하고 있다. 지금의 규오는 트랜스젠더 남성이다. 여성으로의 이차성징을 맞이했을 규오는 지금 자신의 몸을 아름답지 않다고 여긴다. 규오와 함께 노아의 환송 파티에 간 ‘나’는 노아를 바라보는 규오의 눈빛에서 선망을 본다. 내가 보기에 노아는 “키가 크고 잘생긴 데다 친구가 많고, 어디를 가든 중심이 되는 남자. 자신의 몸이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어떤 관계에서든 어렵지 않게, 스스로도 잘 모르는 사이에 우위를 점거해버리는 남자들” 중 하나다. ‘나’는 노아와 같은 남자에게는 관심이 없고, 어떤 면에서 규오를 “안전한 선택”이라고 여긴다. 이른바 ‘설레는 키 차이’ 같은 것에는 힘의 구도가 주는 불평등함이 있다고 여기는 내가 규오를 안전한 상대로 여기는 것은 “규오의 몸이 가진 내력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규오가 정말”“좋은 남자이기 때문일까”. 반면 규오는 노아에 대한 ‘나’의 저런 평가에 대해 “그냥 그게 좋은 거 아닐까?”라고 답한다. 그런 남자가 좋은 남자의 표본이란 뜻일까, 그런 남자에게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행동이란 뜻일까. 어떤 식으로 저 모호한 문장을 번역하든 분명한 건 규오가 자신을 ‘그런 남자’들과 따로이 놓는다는 점이다. 규오는 자신의 ‘왕자님’ 사진을 노아에게 타투 도안으로 맡긴 터였다. 어영부영 타투는 새기지 못했고 그 사진은 노아의 타투 숍에 그대로 남아 노아의 전 여자친구로부터 인수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규오가 그걸 몸에 새기고 싶어 했다면 그건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건 아마도 지금의 몸과 대척점에 놓이는 게 아닐까. 정작 ‘나’는 규오가 겪었을 “골반이 넓어지고 가슴이 발달하는 원치 않는 변화를 생각하면서. 그리고 서른 살 규오의 몸속에 파묻힌, 아직 그 일을 겪지 않은 소년을 생각하면서”“사진 속의 잘생긴 소년을 바라보곤”하는데, 이는 ‘나’의 ‘안전한 선택’에 도사린 욕망과 충돌하는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규오의 몸이 좀 더 안전하다고, 무해하다고 여기면서도 규오가 넓어진 골반을 아쉬워할 때 내심 동감했다는 점은 더 ‘남자다운’ 몸을 원하기에 이차성징의 전을 새로운 영점으로, 거머쥐기 힘든 높다란 곳에 저 사진을 놓아두고자 하는 규오의 욕망과 정 반대축으로 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안전한’에 방점을 찍은 선택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해가 지면 집 앞 편의점을 가는 일에도 느끼는 불안이 여성의 몸에 비롯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차라리 우리는 사랑의 정의와 함께 몸의 정의를 새로이 써야 하는 것은 아닐까. 자, 버젓이 냉장고 문에 붙은 저 사진에 들러붙는 것은 누구의 욕망인가? 피루엣, 자신의 한 발을 축으로 팽이처럼 도는 이 동작은 결국 원점에 서게 된다. 트랜스젠더를 택했지만 불만족으로 노아를 선망하는 규오의 모습은 그 자체 피루엣처럼 원점으로 돌아오면서도 ‘나’의 욕망과 어긋나면서 서로를 욕망의 시발점으로 돌려놓는 또 하나의 피루엣을 그린다. 그럴 때 우리는 일상을 둘러싼 많은 정체성에 대해 다시 묻게 된다. 무엇이 정상이고 안전이고 평온이고 행복인지를. 누가 규오의 저 욕망이 넘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함(혹은 그 속의 물건)이 제유적으로 쓰인다면 그것은 곧 주물(呪物)로 볼 수도 있다는 말이 기도 하다. 아감벤에 따르면 무언가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그것의 부정을 상징하고, 무(無)의 실체인 동시에 그 부재의 기호가 되는 주물은 본질적으로 분열적이다. 사물에 의미를 매다는 일, 그 문학적 작업에서 제유적인 면이 있다면 애착과 바람, 부재하는 대상을 향한 기호화와 같은 일은 사물로부터 이미 분열한다고도 말할 수 있게 된다. 한 거푸집에서 나왔으나 조금씩은 다른, 어떤 것은 금이 가기도 한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사랑하는 여자들”(『다정한 유전』, 11쪽)의 모양이 그의 전작 『다양한 유전』(아르떼, 2020)을 겹쳐 읽게 하는, 강화길의 소설 「거푸집의 형태」(『문학동네』 2024년 겨울호)에서도 그러하다. 이모의 죽음 뒤에 남겨진 록 밴드의 기념 티셔츠는 관계의 의미를 완전히 새로 쓰게 한다. 단지 외모가 닮아서여서만은 아니었을 게다, 이모와 취향을 공유하고 다정한 자매처럼 지내온 것은. 장녀로서 가계를 책임져왔던 큰이모와 그의 물질적인 그늘에 있는 엄마를 비롯한 형제들의 권력 구도는 다분히 경멸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었고, 음악을 만들고 가수로 살고 싶어했지만 번번이 대학가요제 예선까지만 닿았던 막내를 비정상 처리하는 큰이모의 언사는 천박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모를 건사하고 우리 집과 막내 이모를 갈라놓았던 결정적 사건을 처리한 것도 큰이모였다. 돈 “팔백사십만원”(「거푸집의 형태」, 211쪽)은 외삼촌네와 우리 집에 얹혀살며 우울증과 대인기피를 앓던 이모가 근근이 카페나 편의점에서 일해서 모은, 말하자면 그의 전 재산이었다. 그리고 이모가 암을 진단받자 국가 지원을 신청하기 위해 엄마 계좌로 돌려놓은 그 돈은 이모는 모르게 ‘나’의 전세 자금으로 쓰인다. 그 일로 엄마와 이모는 서로를 등지고 ‘나’ 역시 이모와 소원해진다. 그럼에도 이모와 나의 세월은 제법 끈질긴 것이어서 이모의 취향에 맞는 밴드의 기념 티셔츠, 사인 시디며 출판사에 취직한 내가 선물한 책 같은 것들은 이모의 서가 한 칸을 당당하게 메운다. 특히 이모가 모으던 티셔츠들은 의미가 크다. ‘나’는 이모가 왜 그걸 모았는지 오직 나만이 안다고 여기니까, 이모의 죽음 이후 그것들은 응당 내가 인수해야 할 터였다. 그러나 큰이모는 ‘나’를 제외한 ‘남자조카들’을 인수자로 지목했다. 큰이모는 모른다. 오직 나만이 그럴 자격이 있다고 철석같이 믿으며 이모의 집으로 향하지만 거기서 만난 건 뜻밖에 이모의 마지막 친구였던 20대 여자다. 길고양이 밥을 주다 친구가 되었다는데, 이것저것 이모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게다가 이모는 여자에게 ‘나’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정보값이 좀 이상하다. 이모는 어떤 사람이었나? 지금에 와 이모는 나와 취향을 나누던 그가 아니다. 의존적인 막내, 자신의 취향을 위해 큰이모와 불화했지만 투병 이후 큰이모에게 복속된 다소 유약하고 무능한 사람일 뿐이다. 생각해볼 것은 질병 이후의 삶에 대해 누구도 감히 짐작으로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질병은 그 자체 자신의 몸을 비정상으로 선언(당)하는 일이기도 해서 앓는 사람의 시간은 재구성되기 마련이다. 이전의 시간 틀로는 일상을 살아낼 수가 없는 거다. 큰이모의 기준에서 막내의 삶은 언제나 미친 것이었겠지만 역설적으로 이모의 질병 이후 이모의 삶은 큰이모가 규정한 정상성에 복속하게 하는 것이기도 해서, 질병이라는 비정상성으로 인해 정상의 삶이 불가한 자의 막다른 선택이 큰이모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굳이 미화하여 해석할 필요가 있을까? 삶의 궤적을 옮겨 앉고 그간 구축된 아비투스를 폐기하는 일. 모든 취향과 선호를 버리는 일. “병에 걸린다는 건, 타인에게 내 행복을 맡겨둔 것과 같다.”(『다양한 유전』, 146쪽) 이모의 마지막에 남은 것은 몇 장의 티셔츠와 시디 따위가 전부이지만 그런데 그건 또 누구의 것이었나. 이모는 왜 ‘나’와 이모가 절반씩 섞인 혼종의 ‘그녀’, 자신의 꿈까지 들씌운 그녀를 완성했나? 아마도 이모는 그때 모든 아름다운 것들로부터 이별한 것이리라. 이런 행위를 일종의 ‘창작’으로 본다면, 이모가 만들어낸 혼종의 그녀는 다름 아닌 욕망의 잔여물이었을 테다. 그리고 그건 종국에 “환상을 포기하는 이야기”(『다양한 유전』, 129쪽)이다. ‘거푸집의 형태’는 소설 속에서 이모의 몸속에 끝내 남은 횡경막 아래의 암세포를 일컬으면서, 어떤 기질이 기묘하게 유전되는 한 가계의 이력을 모조리 끌어안는 형상물이기도 하다. 큰이모의 입장에서라면 금 간 항아리 쯤에 비유할 수 있을지도 모를 막내를 품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겠다. 함은 그 자체 사물이면서 사물에 의미론적 가치를 매기는 수납의 기능이 덧붙는 사물, 사물의 겹이면서 의미의 미끄러짐이다. 그것은 열려 있거나 닫혀 있고 비어있거나 채워질 가능성으로 항상 중첩된다. 열지 않으면 알 수 없기도 하지만 어떤 함은 열면 모두 파국에 이를 진실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이 가족들에게 진실은 모두를 할퀴는 남루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남루함이란 이들을 연결하는 것이 외모나 재능의 유사성이기는커녕 고통이라는 사실에 있다. 매일 오염되고 매일 그 오염을 닦아내야만 유지되는 화장실의 청결처럼 일상 또한 반복을 통해 쌓인다. 때때로 어떤 차이가 발생하지만 그걸 다시 반복하는 것. 그럼으로써 유지되는 삶. 그것은 어쩌면 매우 고결한 것이다. 내가 가진 함에 이름을 붙여주고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지난겨울을 건너오며 우리가 잃은 것은 바로 일상이 아니었나. 그림자는 원 사물 없이 존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사본은 아니라서 원 사물과 완전히 같지도 않고 존재론적, 가치론적으로 열등하지도 않다. 그런 면에서 어떤 이야기는 필요치 않을 때도 있다. <퍼펙트 데이즈>의 마지막에는 ‘코모레비’라는 단어가 나뭇잎 사이로 가만히 떠오른다.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햇살을 뜻하는 이 말은, 그 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자의 간절함을 다만 묵묵히 담기에 참 좋은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그가 함에 담은 것은 빛이었다.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빛. 어떤 이야기는 쓰이기보다 쓰이지 않음으로써 더욱 단단한 이력을 확보하기도 한다. 쓰이지 않은 이야기는 모든 함의 안이자 때로는 밖의 벡터인 셈이다. 어떤 이야기는 우리가 읽고 있는 이야기 안에 없다. 그건 기록되지 않은 채로 거기에 있다. 그리고 그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일렁인다. 그러니까 그가 함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싶어 한 것은 결국 ‘지금’이라는 순간이었던 셈이다. 어떤 이야기는 결코 쓰여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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