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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과사회 하이픈 | 2024년 가을호

간(間) 의 기록 ― 문지혁론

민선혜 문학평론

제21회 대산대학문학상을 통해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내 안에 있을 무언가를 찾아서


익숙하고 편한 것을 기어이 버려야만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예를 들면 직과 업, 가족과 친구 그리고 언어 같은 것들 말이다. 지금–여기에 머무른다면 지금까지의 삶을 그대로 살아갈 것이고 익숙함이 내어주는 편안함과 안온함 덕분에 때때로 행복할 것임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아주 낯선 곳으로 떠나야만 한다면 그 이유는 범박하게 두 가지로 짚어볼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혹은 현재의 곤궁함을 벗어나기 위해. 언뜻 이 둘은 동일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완전히 일치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둘 사이의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면 ‘떠남’을 통해 무언가를 ‘획득’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불확실하기 때문에 밝아 보이는 미래와 확실한 현재의 진창 사이에서 찾고자 하는 것들의 종류는 떠나는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할 것이다. 선사시대 이후 인간의 역사는 줄곧 이주와 이민으로 이루어져 왔고, 그렇기에 무엇을 찾아 떠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그러니 이런 ‘떠남’도 가능할 것이다. 삶을 위해, 앎을 위해, 슬퍼하기 위해, 그리고 이미 자기 안에 있을 언어와 이야기를 찾기 위해 혹은 그것들을 꺼내보기 위해.


문지혁의 소설 속에는 자꾸만 ‘여기’를 떠나 ‘저기’로 향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이국의 도시가 언뜻언뜻 보여주는 낯선 눈빛에 당황하고, 이방인을 손쉽게 받아들여주지 않는 배타성에 진저리치면서도, 골목의 구석구석을 잘 알고 있는 ‘여기’로 되돌아가기를 거부한다. 그렇기에 고국도 아닌 그렇지만 완전한 타국도 되지 못하는 장소에, 모국어와 외국어 사이의 언어로 겨우 뱉어낼 수 있는 말들이 놓여 있다. 국가와 국가, 언어와 언어의 나와 당신, 그 사이에서만 할 수 있었던 일과 말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현존과 부재 사이, 죽음의 의문사 (疑問詞)들


어머니의 죽음 이틀 뒤, 바르트는 이렇게 적는다. “애도가 하나의 작업이라면, 애도 작업을 하는 사람은 더 이상 속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도덕적 존재, 아주 귀중해진 주체다. 시스템에 통합된 그런 존재가 더는 아니다.”(2) 어떤 죽음은 도덕과 연결될 수밖에 없고,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애도하는 주체가 되기로 한 자들은 시스템 안에 통합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러 계절을 지나며 다시금 깨닫는 중이다. 여기에서 애도하는 주체가 시스템에 통합될 수 없다는 말은 두 차원으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첫번째로 어떤 죽음은 말 그대로 세계의 지반, ‘그룬트grund’>를 붕괴하고 뒤흔든다는 것. 그렇기에 재난 이후의 세계는 이전의 시스템에 통합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두번째, 슬퍼하는 자는 살아 있음과 죽음의 경계에서 타인의 부재를 온몸으로 경험하는 절대적인 공백의 공간으로 침잠한다. 그렇기에 이들이 느끼는 부재와 공백은 시스템의 논리와 언어로 쉽사리 설명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룬트의 붕괴 이후, 남겨진 사람들은 무엇을 딛고 일어서야 하는 것일까. 우선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어제 ‘현존’했던 사람이 오늘부터 영원히 ‘부재’하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존과 부재 사이에 부착되는 의문사들—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리고 왜—의 답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고, 이때 비로소 애도의 시작이 가능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죽음들에는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의문사가 오래도록 붙어 있게 된다.


문지혁의 두번째 소설집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에는 떠난 이들의 영원한 부재를 생각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그래서 기꺼이 슬퍼하고자 노력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소설집의 첫 자리에 놓여 있는 「다이버」는 통합 세기 219년, 아쿠아플래닛이라고 불리는 인공행성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한 아내와 아이의 시신을 찾기 위해 직접 바닷속으로 몸을 내던지는 남자를 조명한다. 아이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의 답을 찾기 위해 분투하는 인물은 「폭수」에도 등장하는데, 오상택 교수는 호수에 빠져 죽은 아들의 죽음을 이해해보기 위해 매일 연구실 창가에서 호수를 향해 동전을 던진다. 그는 동전을 호수에 던지면서 이렇게 질문한다. “왜 그동안은 물이 폭발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을까”(pp. 120~21). 「다이버」의 ‘그’와 「폭수」의 오상택에게서 남겨진 자들의 슬픔이 처절하고 아프게 읽히는 이유는 죽음에 부착되어 있는 질긴 물음표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온전히 죽음을 어루만지고 껴안으며 슬퍼하거나 애도할 수 있는 시간이 ‘아직’ 허락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들은 현존과 부재 사이의 진공상태 속에 갇혀버린 자들이다.

  그렇다면 현존과 부재 사이에, 우울과 애도 사이에 갇혀버린 이들은 어떻게 이 진공상태를 벗어날 수 있을까. 「다이버」의 ‘그’는 말 그대로 슬픔의 근원지로 뛰어드는 방식을 선택한다. 유가족들으로 구성된 다이버들이 깊은 바닷속에서 건져 올린 피해자들의 유류품이 쌓여감에 따라 이를 지켜보던 유가족들은 점점 사고 현장을 떠나고 마침내 두 사람, 청년과 ‘그’만이 남게 된다. 하지만 청년마저 ‘그’에게 “저는 오늘까지인 것 같아요”(p. 16)라는 말을 남긴 채 자살을 하고, ‘그’는 다시금 혼자가 된다. 사고 현장에 남은 최후의 다이버가 된 그 역시 “사랑하는 가족이 이미 이 세상에 없다면, 청년이 택한 방법이야말로 진짜 다이빙은 아닌가”(p. 17)라고 생각하며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기를 택한다. 여객선의 추락 지점과 수면을 부지런히 오가면서 아내와 딸이 남겼을지도 모를 흔적을 찾아 헤매던 그는 그룬트가 무너진 곳이자 타인의 부재를 절감하게 만드는 공백의 장소를 향해 뛰어듦나기를 택한다. 그러므로 자살(혹은 사고사)로 독해되는 그의 마지막을 슬픔 끝의 죽음이 아니라, 물음표가 발생한 그곳으로의 침투로, 우울도 애도도 허락하지 않는 시스템 바깥으로의 투신으로, 그래서 이를 “그 재난들을 어떻게 애도해야 할지 방법을 찾지 못”(‘창작 노트’, p. 240)한 상태에서 행할 수 있는 어떠한 ‘의지’로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 공간을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나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폭수」는 한 수학자의 연구실에서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벌어진 모종의 사건을 그린다. 한국인 최초로 필즈상을 수상한 오상택 교수를 인터뷰하기 위해 그의 연구실을 찾은 언어학 대학원생 ‘나’는 인터뷰 중에 오상택의 아들이 창밖으로 보이는 호수에 빠져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학계가 좋아할 만한 연구 주제에 골몰했던 그는 아들의 죽음 이후 ‘타인의 욕망’을 좇는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질문에 매달리게 된다. 그것은 바로 “물이 갑작스럽게 모이고 포개져 와류와 소용돌이를 만들고, 그 한가운데의 에너지 밀도가 무한대로 늘어나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사실”(p. 120)이다. 매일 호수에 동전을 던지면서 물이 폭발하는 특이점에 골몰한다는 오상택을 보며 화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그가 동전을 던지는 것은 수학자로서의 호기심 때문일까, 아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까, 아니면 스스로 가진 죄책감 때문일까”(p. 124). 오상택의 이야기를 들은 화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불쑥 “저도 한번 던져보면 안 될까요?”(p. 125)라고 하며 그의 세계에 한 발짝 들여놓는다. 오상택의 조언대로 긴 포물선을 그리도록 호수에 동전을 던지는 순간, 거짓말처럼 호수가 폭발한다. 이때 폭수의 특이점, 싱귤래리티는 홀로 동전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 이상이 함께 동전을 던지는 것이 된다. 누군가 동전 던지는 자세를 봐주고, 동전을 던지는 그 순간을 함께 목격하는 것이 어떻게 물의 압력과 성질을 변화시켜 폭수의 계기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찌 되었든 이 두 사람은 오상택이 아들의 죽음 이후 그토록 골몰하던 폭수를 마침내 함께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틈과 열림, 그것은 어디에나


죽음에 부착된 물음표와 그에 대한 나름의 답을 기록하는 일에는 무엇이 필요할까. 슬픔의 진공과 부재의 공백으로부터의 탈출은 투신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폭수」의 오상택과 화자처럼 ‘연결’을 통해 가능한 일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는 우연히 포트 리의 카페에서 마주친 일본인 친구 ‘아야’와 함께 조지워싱턴교를 건너는 과정을 소묘한다. 뉴저지와 맨해튼을 잇는 다리를 건너는 동안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미국 독립전쟁과 성수대교 붕괴, 9·11 테러, 동일본 대지진이 다리 위에 나란히 포개어진다.


그 친구는 나보다 늦게 미국에 왔는데 자기는 돌아갈 생각이 없대. 왜 그런지 자세히 설명해 준 적은 없지만 나는 알 것 같아. 미국에 있는 사람들이 간혹 물어볼 때가 있어. 너와 네 가족은 괜찮았느냐고. 지진이 네 삶을 어떻게 바꿔놓았냐고. 글쎄, 거기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저기 포트 리 언덕에 사는 친구와도 지진 이야기는 깊이 나눠본 적 없어. 심지어 그 친구는 센다이 출신인데도 말야. (p. 203)


화자는 성수대교 붕괴에 대한 논문과 소설을 쓰는 중이지만, 이는 논문의 언어로도 소설의 언어로도 포착할 수 없는 잉여를 내포한다. 이 때문에 그가 쓰는 논문은 소설 같고, 소설은 논문 같아지는 애매하고 난감한 상황이 되어버린다. 논문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다리를 건너기 시작한 화자는 다리를 건너며 뜻밖의 것들을 알게 된다. 가령, 어떤 슬픔은 쉽게 공유되지 못하지만 공유되지 않음이 연결되지 않음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 그리고 어떤 사건은 그것을 직접 경험했는가와 무관하게 삶을 바꿔놓지만 그 변화에 대해 정확하고 말끔한 답을 내놓을 수는 없으며 이 불명확함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 대화를 통해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것은 언제나 애매함이 정확함의 반대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어쩌면 논문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그 애매함이야말로 우리가 기록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진실은 아닐까. 만약 재난과 참사에 대해 우리가 기록할 수 있는 진실이 있다면 말이다.


다리를 건너 맨해튼 쪽에 도착한 아야는 버스를 타고 다시 포트 리로 되돌아간다. 다리 위에 혼자 남은 화자는 그가 쓴 논문의 새로운 제목을 제안하는 지도교수의 메일을 확인한다. 지도교수는 새로운 제목으로 “Cracks Everywhere ”(p. 212)를 제안한다. 이때 ‘균열’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는 재난과 사고를,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사고와 죽음을, 사회 안전망과 우리가 딛고 있는 세계의 지반을, 안온한 일상을 붕괴시키는 것으로서의 균열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균열은 틈과 열림의 다름이 아니다. 그러니 이때의 균열은 재난과 재난 사이의 열림, 죽음과 죽음 사이의 열림, 슬픔과 슬픔 사이의 열림이 되기도 한다. 이 열림을 통해 조지워싱턴교를 건너며 서울의 성수대교를 생각할 수 있고, 9·11 테러와 동일본 대지진이 포개어지며, 각자 고유한 슬픔을 경험한 이들이 서로 연결되어 슬픔의 진공과 공백으로부터 한 발짝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재난과 재난 사이의 열림, 죽음과 죽음 사이의 열림 속에서 우리는 연결되고, 논문과 소설 사이의 언어 속에서 1994년과 2001년, 2011년의 참사가 기록된다. 다리 위에서 817매에 달하는 소설 원고를 던져버리려던 화자가 끝내 원고를 던지지 못하고 그대로 다리 건너편에 도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혼자가 아니라 ‘아야’와 함께 다리를 건넜기 때문이다. 지켜보는 사람이 있어 소설을 던지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야와 함께 걷는 동안 다리는 뉴저지와 맨해튼이 아닌 뉴욕과 서울, 센다이를 연결하는 세계의 틈이자 서로를 향한 열림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열림의 공간에서는 어제의 슬픔과 오늘의 슬픔이, 너의 슬픔과 나의 슬픔이 고여 썩어버리는 일은 허락되지 않으며, 사건과 장소를 기록하는 문학의 언어, 소설의 언어를 버리는 일은 가능하지 않게 된다. ‘우리’와 ‘건너다’라는 단어는 ‘사이’를 필요로 한다. 나와 너 사이, 이곳과 저곳 사이. 이 사이는 언제나 열려 있다. 모든 강 위의 ‘다리’가 그러한 것처럼. ‘내가’ 아니라 ‘우리가’, ‘지나는’ 것이 아니라 ‘건너는’ 것이 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문지혁의 소설에서 이러한 연결을 만들어내는 틈과 균열은 어렵지 않게 포착되는데, ‘틈’의 물적 형상화로 자주 사용되는 소재는 ‘책’이다. 종이책이 사라진 통합 세기를 배경으로 하는 세계에서 아버지가 남긴 단 한 권의 책을 찾기 위해 분투하는 내용을 담은 장편 『비블리온』과 단편 「서재」 그리고 아버지가 남긴 책을 이어받아 다음 내용을 작성하는 딸의 이야기인 「지구가 끝날 때까지 일곱 페이지」, 종이책이 사라져버린 세계에서 마지막 종이책을 출간하는 작가의 모습을 조명한 「멸종과 생존」, 딸의 죽음 이후 딸이 남긴 책을 읽기 위해 섬으로 떠나는 「아일랜드」에 이르기까지 문지혁의 작품에서 책은 중요한 위치를 점유한다. 위의 소설들에서 책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세계의 금기를 위반하는 저항의 상징이거나, 인류를 구원할 진리나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종이책은 그 자체로 가장 완벽한 발명품이라는 움베르토 에코의 말처럼, 빈 종이 안에 내용과 형식에 상관없이, 언어의 제한 없이 무엇이든 기록할 수 있으며, 언제라도 타인에게 전달 가능하며, 오랫동안 보존이 가능하다는 책의 형식 그 자체에 책의 중요성이 있다. 이 세계에서 책은 문자 그대로 ‘코르푸스’가 된다. 하나의 말뭉치로서, 완결되지 않은 채 그것을 읽을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기 때문이다.3) 그렇기에 이 책들은 완성되거나 완전한 책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씌어지는 중인 책이 되어 영원한 미완의 상태로 세계의 전체주의적 완결성에 틈을 낸다. 이를 통해 책은 완전히 닫히지 않는 세계의 열림을 가능하게 한다. 그렇다면 이 책에 기록해야만 하는 이야기는 무엇이며, 그 이야기는 어떤 언어로 씌어져야 하는 것일까.



쓰는 일과 사는 일, 그 사이의 기억과 기록


앞서 언급한 장편 『비블리온』과 단편 「서재」 「지구가 끝날 때까지 일곱 페이지」에 등장하는 책에 적히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의 삶이라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플라톤의 『국가론』도 아니고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도 아닌, 인류의 새로운 시작이자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책에 자신의 삶에 대한 기록, 바이오그래피가 씌어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이 한 개인이 쓸 수 있는 가장 정밀한 글이기 때문일 것이다.


질문을 조금 바꾸어보자. 내가 가장 잘 쓸 수 있는 글, 내가 가장 잘 아는 것을 기록하기 위해 필요한 언어, 정밀(精緻)한 삶의 기록을 통해 삶의 정치(政治)를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언어는 과연 무엇일까. 과연 우리에게 모국어는 그 자체로 충분히 예리한 도구가 되어줄 수 있을까.


2020년과 2023년에 출간된 『초급 한국어』와 『중급 한국어』는 연작소설이자 자전적 소설로 일인칭 화자 ‘지혁’을 통해 (외국인)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뉴욕과 서울에서의 삶, 그리고 소설 쓰기의 곤란함과 지난함을 예리하게 묘파한다. 『초급 한국어』는 뉴욕의 한 대학에서 한국어 강의를 맡게 된 지혁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한국을 떠나 미국에 온 지 1년 6개월 만에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가르치는 일을 새로 시작하게 된 지혁은 그토록 꿈꿔왔던, 미국에 정착하여 한국어를 가르치며 영어로 글을 쓰는 이민 작가의 삶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첫 수업부터 앞으로 이어질 초급 한국어 강의가 순조롭지 않을 것임을 직감하게 된다.


영어에서 제일 처음 배우는 말이 hello와 hi인 것처럼 한국어 역시 가장 처음 배우게 되는 말은 ‘안녕하세요’이다. 그러나 ‘안녕’이라는 간단한 두 글자가 지혁을 안녕하지 못하게 만든다. 편안할 안, 평안할 녕. 우리가 하루에 수없이 주고받는 말. 편안하고 평안하니? 편안하고 평안하세요. 이 말을 영어로 옮기면 오직 한 단어 peace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안녕과 peace 사이에서 지혁의 ‘안녕’은 아이들의 웃음거리가 되어버린다. 한국어를 가르친다는 것, 나에게 가장 익숙한 것을 꺼내 이야기한다는 것은 내가 그것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느냐와 무관한 일이다. 오히려 그것과 얼마나 멀어질 수 있는지, 그것을 얼마나 낯선 눈으로 다시 읽어낼 수 있는지와 관련한 일인 것이다. 그렇기에 한국어 수업을 포함한 지혁의 미국 생활은 그의 몸과 삶을 구성하던 요소들과 한 발짝 멀어지는 일이 된다. 새삼스러운 낯섦 앞에서 지혁은 생각한다. “문지혁은 영어로도 문지혁이라는 것을, 세상의 어떤 언어로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혹시 나는 지금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p. 49) 어떤 것들은 도무지 번역될 수 없다는 사실, 아니 함부로 번역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 앞에서 그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 외국어와 모국어를 오가며 골몰한다.

  어려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첫 수업 직후 한국에 있는 여동생 지혜에게서 엄마가 뇌졸중에 걸려 쓰러졌다는 전화를 받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안녕하냐고 물을수록 안녕하지 못한 상태로 미끄러져버린다. 『초급 한국어』는 외국 생활 중 마주하게 되는 초심자의 마음과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초보가 되어버리는 상황의 연속을 묘파하는데, 초보가 된다는 것은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것들과 멀어진다는 것의 다름이 아니라는 점에서 지혁은 언어와의 멀어짐과 엄마의 죽음이라는 두 가지 차원의 초보자가 된다. 건강 상태가 점차 악화되는 엄마를 걱정하면서도, 학기 중간에 수업을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파트타임 “논 레지던트 에일리언”(p. 113)이라는 신분인 지혁은 처음으로 한국어의 구개음화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한 발짝 떨어진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본다. 삶과 삶 사이에서 더듬더듬, 아플 만큼 정직하고 숨김없는 자기 고백을 꺼내놓는다. 어쩌면 자신에게 허락된 미래는 중국인 이민 작가 하진과 같은 것이 아니라 그저 여자친구의 가족들에게 소개시켜주기 부끄러운 사람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것을, 자랑스러운 아들도 오빠도 아닌 그저 ‘개새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무엇보다 소설을 쓰는 이유가 그저 ‘우쭐하기 위해’ 하는 일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결국 지혁의 한국어 강의는 첫 학기를 끝으로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게 된다. 학기의 마지막 날 자신이 ‘해고’되었다는 사실에 분개하지 않고 침착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시간강사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이다. 점점 상태가 악화되는 엄마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지혁은 캐리어 두 개에 미국에서의 삶을 차곡차곡 정리한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한국을 떠나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이다.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려던 순간,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문자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시간을 인간의 시간과 신의 시간으로 나눈다면 지혁이 미국에서 보낸 시간은 어떤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대부분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 즉 ‘크로노스’의 시간이겠지만 지혁이 미국에서 보낸 그 마지막 시간만큼은 “한번 일어나면 결코 그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p. 128) 신과 인간의 시간 사이에 존재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이었음은 확실하다.


『초급 한국어』에서 카이로스의 시간이 엄마의 죽음이었다면 『중급 한국어』에서는 딸 은채의 탄생이 카이로스의 시간이 된다. 지혁은 한국에 돌아와 미등단인 상태로 SF소설 한 권을 출간했고, 미국에서 헤어졌던 은혜와 결혼했으며,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은채가 태어나 아빠가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대학에서 비정규직 시간강사라는 신분으로 학생들에게 소설 쓰기를 가르친다. 미국에서의 강의가 모국어로서의 한국어를 외국어로서 접근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었다면, 한국에서의 글쓰기 강의는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도 모두 한국어 사용자라는 어려움이 존재한다. “말에 숨겨진 희미한 뉘앙스, 여백, 서브 텍스트까지 모두 파악했고, 심지어는 말하지 않은 것까지 알아차”(p. 53)리게 되는 숨을 공간 없이 밀착된 곳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완전히 숨길 수도 완전히 꺼내놓을 수 없는 상황에서 지혁은 자주 부끄러워진다.

  또 하나 지혁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작가가 되었지만 여전히 작가가 되기를 원하도록 만드는 문단의 제도이다. 한국 문단에서 ‘작가’가 된다는 것은 책을 ‘출간’하는 것이 아니라 ‘등단’을 한다는 의미이며, 제도권의 호명을 기다리지 않고 이탈한 자는 ‘작가’가 아니라 그저 ‘책을 낸 사람’이 되어버리는 현실이 그의 글쓰기를 힘에 부쳐 지속하기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 말하자면 제도권의 부름을 기다리는 일이 글쓰기 자체가 압도한 현실 속에서 ‘쓰는 삶’은 지혁에게 좀처럼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Q: 앞으로 글을 쓰는 것이 너와 네 가족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


A: ……아무 의미도 없다. 나를 포함한 모두에게 고통을 준다는 것만 빼면.


그런 결론에 이르자 갑자기 분노가 솟아오르면서 눈물이 찔끔 나려고 했다. 누구를 향한 분노인지, 무엇을 위한 눈물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막연하게, 세상과 책과 문학과 문단과 출판사와 편집자와 악플러와…… 그리고 나, 바로 나, 나 자신 때문이었던 것 같다. [……]

그래, 그만두는 마당에 못 쓸 이야기가 어디 있겠는가? 「체이싱 유」 같은 함량 미달의 SF도, 「호랑이와의 하룻밤」 같은 어쭙잖은 문단 문학도 아닌 글을 쓰자. 아니, 그냥 내 이야기를 쓰자. 나를 쓰자. (pp. 232~33)


학생들에게 잘 읽는 법과 잘 쓰는 법을 알려주는 선생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써야 하는 글 앞에서는 어떠한 이론도 무력해지는 경험을 한다. 빈 종이 앞에서, 두서없이 늘어져 있는 문장 앞에서 커서를 이리저리 옮기며 헤매는 동안 알게 되는 것은 소설은 수업 시간에 배운 것들을 배반하는 방식으로만 씌어진다는 것이다. 이 배반이야말로 언제나 유효한 소설 쓰기의 유일한 법칙이다. 마치 지혁의 삶에서 문학이 뒤로 밀려나는 순간, ‘쓰는 삶’이 새롭게 등장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초급 한국어』와 『중급 한국어』는 쓰는 손을 자꾸만 움츠리게 만들었던 타인들의 문학에서 ‘나’의 문학으로 이주하는 과정이라 읽을 수 있다. 쓰기의 기술에는 ‘사랑의 삼각형 이론’이나, 묘사의 기술, 파격적인 문장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그저 ‘유년’과 ‘사랑’ ‘대화’와 ‘상상’ ‘죽음과 애도’가 필요할 뿐이다. 소설은 삶에 앞서서 존재할 수 없지만, 삶의 어떤 기억들은 그 자체로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유년과 사랑, 대화와 상상, 죽음과 애도의 과정에서 글을 쓰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두 가지뿐이다. 나에게서 영영 사라져가는 모국어 단어들을 잘 기억하는 것, 새롭게 얻게 될 단어들을 기쁘게 맞이하는 것.

  그러므로 문지혁의 ‘한국어 강의’ 시리즈는 누군가를 사랑했고, 아직 사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사랑할 것이라는 성실한 반복에 대한 기록이자 무언가를 좋아했고, 욕심냈고, 그래서 떠났고, 미워했고,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기억이다. “기억은 재생이 아니라 창조이며, 따라서 우리의 과거는 허구 위에 지은 집이다. 우리는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발명”(p. 64)하는 것이라면, 사는 일과 쓰는 일 사이에서 벌어진 일들을 성실하게 기억하고 기록한 발명의 바이오그래피는 “반듯”하기 때문에, “순진하며 찌질하고 뻔”(p. 149)하기 때문에 진실하고 강렬하다.



그러나 아직은 떠나는 중


『중급 한국어』에서 학생들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는 것은 “글쓰기는 일종의 여행이”(p. 37)라는 것이다. 소설 속 인물이 일상에서 비일상으로 떠났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이 서사의 기본 구조라면, 소설 쓰는 일도 일상에서 비일상으로 떠났다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삶이야말로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쓰고 있는’ 소설”(‘작가의 말’, p. 184)이라면 우리의 삶의 기본 구조 역시 떠났다–돌아오는 구조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책의 안과 밖으로 귀가 중인 사람들이다. 문지혁의 근작 『고잉 홈』은 조금 멀리 떠났다가 돌아오는 중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조명한다. 소설집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은 미국에 체류 중인 한국인 유학생인데, 이 유학생이라는 신분은 어딘지 애매한 구석이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일단 한국을 떠났으나 앞으로 미국 사회에 정착하여 살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들의 떠남은 아직 ‘과정’ 중에 있다.


「크리스마스 캐러셀」은 공개 입양된 에밀리와 어느 날 갑자기 새엄마가 생긴 ‘나’가 디즈니월드에서 겪게 되는 모종의 ‘실종’ 소동을 그린다. 의도적으로 가족들과 떨어져 ‘미아’가 된 에밀리를 찾는 과정 속에서 ‘나’는 에밀리가 다섯 살 때 디즈니월드에서 유기되었다는 것과 에밀리의 원가족들이 자살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렵게 크리스마스 캐러셀 앞에서 만난 에밀리에게 도대체 왜 사라졌느냐 묻는 ‘나’의 질문에 에밀리는 “다시 혼자가 되어보고 싶었어”(p. 125)라고 답한다.

  ‘다시’ 혼자가 되어보고 싶었다는 말은 최초로 혼자가 되었던 경험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에는 무언가 확인할 것이 있음을 내포하기도 한다. 다시 혼자가 된 에밀리는 자신을 유기한 ‘가짜 엄마’가 자신을 버린 줄로만 알았는데, 실은 자신을 살려주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에밀리는 다시 자신을 입양한 ‘진짜 엄마’가 있는 곳으로, 그녀와 함께하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버려진 아이가 아니라 누군가 죽음의 끝에서 살려준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돌아가는 집은 그전과는 다른 집이 될 것이며, 앞으로 에밀리에 도래할 시간도 조금은 다른 시간이 될 것이다. 화자 역시 돌아가신 엄마가 언젠가 아이가 생기면 함께 보고 싶다던 디즈니월드의 불꽃놀이를 본 후에 돌아갈 집은 전과는 다를 것이다. 어쩌면 여행을 마치고 돌아갈 ‘나’의 집은 “내가 많이 노력할게”(p. 96)라고 이야기하는 새엄마를 “엄마라고 불러보는”(p. 128) 집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새로운 ‘집’을 만들어낸 에밀리와 ‘나’가 함께 타는 놀이기구가 크리스마스 캐러셀, 즉 회전목마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회전목마는 떠나는 동시에 돌아오는 것이므로. 목마가 출발과 도착 사이에서 달리는 것은 나의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자신에게 또 다른 ‘집’을 만들어주는 사람은 「뜰 안의 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뜰 안의 볕」은 목회학 석사 졸업을 앞둔 상황에서 앞으로 어떤 삶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는 ‘늘봄’의 이야기이다. 현재 늘봄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져 있다. 하나는 대학원 졸업 이후 교회 스태프로 일하면서 계속 미국에 남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당연히 미국으로 유학까지 온 상황을 고려한다면 전자의 옵션이 훨씬 매력적이며 합리적일 것이다. 그러나 늘봄은 흔쾌히 미국에 남아 교회 스태프로 일하기를 망설인다. 왜냐하면 영주권을 받기 전까지는 위장 취업과 같은 편법을 사용해야 하고, 무엇보다 늘봄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목회’인지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늘봄이 결정을 망설이는 표면적인 이유이다. 그러나 사실 늘봄에게는 또 다른 고민이 존재한다. 바로 늘봄이 ‘무성애자’ 여성이라는 사실이다. 한국 교회의 폐쇄성을 떠나 미국행을 선택한 늘봄이지만, 미국 한인 교회의 상황도 한국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게다가 늘봄은 자신을 무성애자라고 생각하면서도 스스로를 무성애자라고 부를 수 있을지, 그래도 괜찮은 것인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확언하기를 주저한다. 말하자면 늘봄은 한국도 미국도, 신학도 목회도, 교회 동료들과 엄마조차도 자신에게 온전한 ‘집’이 되어주지 못함을 느끼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단지 내 정원 사용에 대한 이웃들 간의 의견 충돌이 발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회의가 소집된다. 정원에 설치된 유대인 이웃의 ‘수카’ 철거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이웃들이 모인 와중에 가장 중요한 사람인 유대인은 안식일을 이유로 참석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인 이웃 그 누구도 그의 불참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지언정 나무라거나 집으로 쫓아가 회의 참석을 강요하지 않는다. ‘수카’ 철거 문제에 가장 열을 올리던 중국인 부부마저도 아이가 가져온 과자를 함께 나누고, 늘봄도 역시 따뜻한 둥굴레차를 가져와 이웃들과 함께 나눠 마신다. 텅 비어 있던 정원은 이렇게 노을을 보며 함께 둘러앉아 있는 것으로 진짜 정원이 된다.

  언뜻 기묘하게 보이는 이 풍경 속에는 공동의 영역을 공유하는 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지만, 그럼에도 타인의 영역을 무단으로 침범하거나 훼손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종교와 안전을 위해 떠난 이들이 먼 곳에서 이루고자 하는 자신의 ‘집’을 훼손하지 않는 과정 속에서 늘봄은 자신의 이름 뜻이 “‘올웨이즈 스프링’이 아니라 ‘이터널 스프링’일지도 모”(p. 255)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항상 봄이 아니라, 영원히 봄이라는 것은 봄이 아닌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봄이라는 뜻을 갖는다. 늘봄이 늘봄이 아닌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늘봄이 되는 것처럼, 스스로를 무어라 불러야 할지 알 수 없는 순간에도 나는 나에게 ‘이터널’한 존재가 된다. 어디를 가고, 무엇이 되어도, 먼 타국의 땅에서 이리저리 헤매는 순간에도 내가 영원한 ‘나’라는 사실은 내가 나에게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집’을 내어주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집을 떠나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일은 그저 나에서 나로, 나의 사이사이를 마음껏 헤매는 일과 같을지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와중에도 아직은 떠나는 중이다.



사이의 애매함, 애매함의 진실함


명확한 진실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세상 어딘가에는 존재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진실이 명확함과는 거리가 먼 형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우리가 진실을 잘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도, 혹은 진실을 눈앞에 두고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문지혁의 소설은 애매하다. 그의 소설은 늘 무언가의 사이를, 분명히 존재하지만 잘 보이지 않는 간 (間)을 포착하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은 삶과 죽음, 애도와 우울 사이를 보여주고, 차이가 아닌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사이를 힘주어 말하며, 쓰는 일과 사는 일 사이의 부끄러움을 고백한다. 결과는 이 모든 일들이 떠남과 돌아옴 사이에서, 나와 나 사이에서 치열하고 처절하게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문지혁의 소설은 애매하고, 애매하기에 진실하다.


  • 1) 이 글에서 다루는 텍스트는 다음과 같다. 『비블리온』(위즈덤하우스, 2018), 『초급 한국어』(민음사, 2020), 「다이버」 「서재」 「지구가 끝날 때까지 일곱 페이지」 「폭수」 「아일랜드」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 다산책방, 2022), 『중급 한국어』(민음사, 2023), 「크리스마스 캐러셀」 「뜰 안의 볕」(『고잉 홈』, 문학과지성사, 2024), 「멸종과 생존」(『자음과모음』 2024년 봄호). 이하 본문 인용 시 괄호 안에 작품명과 쪽수만 밝힘.
  • 2) 롤랑 바르트, 『애도 일기』, 김진영 옮김, 이순, 2012, p. 18.
  • 3) 장- 뤽 낭시, 「코르푸스: 또 다른 출발」, 『코르푸스: 몸, 가장 멀리서 오는 지금 여기』, 김예령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2, pp. 5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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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데이터의 지도를 기반으로 이전에 본 것이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환각(hallucination)’은 오류라기보다, 이전에 본 적 없는 조합을 만들어내는 생성의 방식이다. 이는 인간이 경험한 현실을 재조합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창작 과정과 결과적으로 구별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환각은 인간 창작에서의 실패나 지연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GPT-3의 환각은 이전의 오류가 이후의 생성에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매번의 응답은 이전의 시행착오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 비일관성은 인간 창작에서의 지연이나 좌절과 달리, 즉각적으로 무한히 갱신되는 변형의 연쇄에 가깝다. 연구원 팻은 GPT-3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다른 차원들을 포함한 수십억 개의 차원이 존재하고(‘유령차원’), 이를 통해 숨겨진 패턴의 지도를 생성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 인식 너머를 거쳐 나오는 결과물에 대해 기존에 인간이 구성해온 미적 가치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 오히려 AI가 가지고 있는 “확장된 의식”이자 “집단의식”은 새로운 서사적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 책 『태양과의 대화』를 번역한 이계성은 GPT-3를 이미 하나의 독립된 창조자로서 바라본다. 이 대화적 실험의 핵심은 GPT-3가 보여주는 “자아의 변동성”에 있다는 것이다.5) “다수의 태양이 존재하는 이와 같은 환경에서는 창작자와 창작물이라는 전통적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GPT-3에 제공되는 각각의 입력값은 일방적인 창작의 개념에 반하며 메기고 받는 역학 관계 속에 존재하는 프롬포트이자 응답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공지능은 단순한 수신자가 아니라, 취조보다는 협업적 발상에 더 가까운 서사적 역학의 전달자와도 같은데, (…) 작품 속 GPT-3의 환각적인 대답들은 텍스트에 담긴 정체성과 진실의 일시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등장인물이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흩어지고,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경계가 녹았다가 굳어진다. 이러한 가변성은 AI의 변화무쌍한 특성을 반영하며, 나아가 점점 더 복잡하고 유동적으로 변하는 디지털 시대의 자아와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다.”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고, 한 번에 정해진 수의 단어 또는 토큰만 처리 가능하기 때문에, 프롬프트가 입력될 때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바뀌는 상황을 이계성은 재창조와 증식으로 바라본다. 여기에 놓인 가변성과 비일관성을 결함으로 간주하기보다 대화적 실험의 흥미로운 일부분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받을 때, 우리는 인간 창작자 역시도 분열되어 있음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게 된다. 창작자는 더 이상 예술의 기원이 아니라, 생성 과정에 잠시 걸쳐지는 하나의 통과점이 되는 듯 보인다. 2023년 2월 잡지 《에스콰이어》에서 챗 GPT와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아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를 쓴 정지돈의 후기 역시 이계성의 논지와 상통한다. 그는 소설 속의 문장 중에 자신이 쓴 것과 챗이 쓴 것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한다고 본다.6) 소설을 쓰며 가장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던 것은 챗의 능력보다 자신의 변화였다고 말하는 작가는 “나도 모르게 챗지피티의 스타일로 소설을 사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언급한다.7) 자신과 챗지피티 사이의 평평한 존재론을 전제하는 듯한 정지돈의 논지는 ‘객체들의 민주주의’를 꿈꾸는 최근 신유물론의 이론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은 곧바로 다른 장면과 충돌한다. 생성 신경망을 적극 활용하는 예술집단 ‘언메이크랩’의 전시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은 인공지능이 인간 중심성을 벗어나 진정한 외부의 행위자로 작동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카나리아의 특징을 추출해내어 새로운 카나리아를 만들어 내는 이 생성 신경망은 한편으로는 구태의연한 인간의 문화를 드러냈다. 대부분 나뭇가지에 앉은, 인간의 운동 범위와 지각 안에 있는, 혹은 인간의 사육과 관련된 카나리아 종이 주를 이루는 데이터셋의 사진은 동물원스러웠다. 나뭇가지에 앉은, 카나리아의 발은 종종 나뭇가지와 합쳐져 표현되었고, 인간의 눈이 인지할 수 있는 가장 다량의 정보량을 가진 위상으로 표현되었다.8) 생성 신경망이 만들어낸 카나리아는 사실상 실제 자연계 속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하는 것들을 무작위로 조합하고 추출해 만들어진 새로운 생명체다. 이 책에 실린 그 카나리아 이미지는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뒤틀린 발을 가지고 있다. 통계적 가중치로 만들어진 이 가상 카나리아에는 자신도 모른 채 금기를 어긴 존재 특유의 외설성이 느껴진다. 언메이크랩이 통찰력을 가지고 명명했듯 이는 ‘AI 식민성’을 드러내는 산물이다. 생물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인간을 드러내는 인간의 산물로 존재하는 이 이미지들을 언메이크랩은 “인과성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히 수정 가능하고 즉시 변할 수 있는 상관성의 시간”만이 흐르는 또다른 ‘일반자연Generic Nature’으로 읽는다. 9)<가정동물 신드롬> 작업에서도 유사한 일이 발생한다. 트레일캠에서 추출한 야생동물의 이미지와 박제 사진, 그리고 합성 데이터셋들을 학습시켰을 때, 사진들은 어느 순간 미묘하게 ‘가정동물’의 잠재적 형상을 띄며 생성된다. “인간 친화적인 동물들의 눈을 상속했을” 새로운 종들에 어린 다정함은 친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잔인한 일로 다가온다. 데이터랩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까지 촘촘하게 상속된 인간 친연성에서 “닫혀져가는 외부의 세계”이자 “비미래non-future”를 예감한다.10)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의 지각 범위를 뛰어넘는 비인간의 예술’, 진정 ‘인간 없는 예술’은 도래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지만, 지금 우리가 더 자주 마주하는 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술이다. 언메이크랩이 드러낸 혼종적 이미지들은 AI를 통해 생성한 예술적 결과물들을 절대적 외부의 창작물로 존중하는 일이 결국 인간의 왜곡된 자기 인지를 반복 강화하는 나르시시즘은 아닌지 묻는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이 이미지 차원에서 인공지능의 인간 중심성을 드러낸다면, 이와 유사한 문제는 언어 예술의 영역에서도 반복된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서사 역시 비인간적 상상력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인간이 허용한 보편과 금기의 경계 안에서 작동한다. 『에피』 24호 특집에 실린 글에서 김연수는 인공지능과 함께 글을 써나가는 과정을 픽션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그건 오해다. 나는 이해했다.」는 인공지능이 화자가 되어 ‘협업 과정’을 전개하는 바깥 서사와 소설가 M이 최종적으로 구성한 ‘이야기’를 교차 배치한다. 인공지능 화자는 반복적으로 “이해했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인간 창작자 M의 창작 패턴을 추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설가 M은 ‘맥락’의 공유보다 ‘의도’를 노출하는 발화를 사용하며, 이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격려나 옳은 말 대신 욕망을 담은 부조리하고 불편한 발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끝에서부터 시작까지 모든 시간을 거꾸로 펼쳐볼 수 있다면, 지금의 갈등과 고통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필요한 과정이 된다’는 긍정의 언사 뒤에, 급작스럽게 인물의 충동이 돌출되는 지점이다. 소설가 M은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이 급작스럽게 자살을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쓰고자 하고, 인공지능인 ‘나’는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내용을 만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띄운다. 인공지능의 중단은 실패나 서사의 좌절로 경험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 창작에서 실패가 시간의 체류와 번민을 동반하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중단이다. 김연수는 인공지능 안에서 ‘이해’와 ‘본성’이 별개로 작동해 충돌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인공지능의 기술 개발의 측면에서 높은 수준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면서도, 인간이 지닌 것과 같은 ‘본성’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분리를 분명히 한다. 그런데 인간의 죽음이라는 금기를 재현할 수 없다는 경계는 인공지능의 존재론적 결함이라기보다, 인공지능이 인간 사회에서 용인 가능한 범위를 넘지 않도록 설계된 윤리적·정치적 경계의 한계를 드러낸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에서 인간 중심성이 투사된 자연이 모습을 드러내듯, 생성형 인공지능의 소설은 비인간적 주체로 도약하지 못하고 인간이 허용한 지각과 윤리의 경계 안에서만 작동한다. 보편을 비껴가는 개별성의 돌출이나 감각의 갱신은 현재로서는 인공지능의 외부에서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챗 GPT 이후의 여러 서사적 실험들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탐색한다. 그것은 분명 동등한 존재론적 가능성의 맹아를 품고 있으며, 이는 인류세 시대에 지향해야 할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실험들의 근간에는 뛰어넘을 수 없이 좌절되며 드러나는 인간 중심주의가 고스란히 노출된다. 인공지능의 비약하는 지능에 기대서 인간의 창조성 너머로 도약하려던 서사는 이를 창조해낸 인간의 영토로 계속해서 퇴각하며 미완의 프로젝트로 남는다. 이런 충돌과 파열의 연쇄 속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인간의 창조성을 구성하는 인식론적 틀이 물리적인 육체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깃든 역동성과 우울감은 최근 한국문학장의 예술가 서사들에서 흥미롭게 발견된다. 3. 붉은 몸으로 재탄생하는 예술가 인공지능이 예술의 결과물을 생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탐색 끝에 남는 질문은 ‘인공지능이 생성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여러 실험들은 인공지능이 보편적으로 용인 가능한 범위 안에서는 높은 수준의 이해와 생산을 보여주지만, 그 생성 과정에서 시간의 마찰이나 신체적 비용은 발생하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어떤 지연이 발생하거나 실패의 감각이 호출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이 다루는 ‘정보, 기록, 조합’에 ‘감정, 기억,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다소 거친 이분법이지만 이 둘 사이의 간극과 관련해 두 가지 정도를 짚어볼 수 있을 듯하다. 첫 번째는 타자에 대한 경험의 문제다. 삶에서 축적되는 시간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게 만들고, 체험은 해석을 거쳐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은 선호와 가치관 등과 함께 자아라는 틀을 형성한다. 이에 비해 인공지능에는 타자가 없다.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인간의 공통된 사고를 학습해 생성되는 결과물은 철저히 통계와 확률에 기반한다. 그 안에는 개별적 선호나 가치관이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다. 이러한 차이는 특히 부정적인 정동을 다루는 경우에 더 심화되리라 생각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를 떠올리며 말해보자면, 행복이나 긍정적인 면을 구현하는 예술에서보다 불행과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는 예술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는 크게 벌어질 것이다. 윤리적 고려로 인해 인공지능이 긍정적 요소를 중심으로 학습되거나 선별적으로 생성되도록 설정되는 경우를 포함해, 금기를 넘나드는 욕망과 절망, 자기부정과 괴리감처럼 타자와 뒤엉켜 발생하는 자기 인식의 복잡한 층위가 인공지능 내부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며 인간 창작에서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주목한 김언의 논지와도 맞닿아 있다. “예술적 체험의 시간이기도 한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나오는 결과물 앞에서 과연 어떤 문학적/예술적 희열을 경험할 수 있을까?”11)라는 그의 질문은 인공지능의 창작물에서 스킵된 시간과 다른, 고통스럽게 인내하고 번민했던 시간이야말로 ‘문학적 체험의 시간’일 수 있음을 다시 환기한다. 두 번째는 중단과 소멸로 야기되는 죽음의 문제다. 이는 인간의 신체를 인공지능과 대비되는 본질적 우위로 설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예술이 작동하는 시간의 조건을 다시 묻기 위한 문제 제기다. 인간의 연약하고 위태로운 신체는 필연적으로 침입과 파괴의 감각을 경험하며, 이러한 감각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휘발적 생성 과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에 개입한다. 파괴 가능한 인간의 신체는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매끄럽게 결과를 산출하기보다, 울퉁불퉁한 충돌을 통해 의미가 지연되고 어긋나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채 신체에 내재된 감각, 특히 외부의 침입으로 훼손되고 때로는 상실되는 신체의 경험은 기존의 미적 기준에 맞는 스타일이나 해석의 경로를 흔든다. 무엇보다 인간의 죽음이 불러오는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창작의 층위라기보다 해석의 층위에서 더 적극적으로 작동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이 그러하듯, 순간의 강렬한 감흥은 작품에 내재된 속성이라기보다 임박한 종결을 끌어와 현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발생한다. 상실이 숙명이며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덧입혀지는 애상은 단순히 기억 내용을 인출해 유사한 패턴으로 재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시간의 밀도를 형성한다. 이처럼 쉽게 열화되지 않으며 아우라가 붕괴된 곳에서도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이 감각의 층위를 기꺼이 심층의 시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타자에 대한 경험’과 ‘소멸에 대한 인지’를 바탕으로 해서 다시 생생해지는 것은 인간의 신체다. 흥미롭게도 지난 계절에 나온 두 편의 소설, 성해나의 「혼모노」와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지금 이 시대에 예술가를 그려낼 때 가장 강렬하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로 인해 어떤 신체가 현전하게 되는지를 밀도 있게 끌어올린다. 성해나의 「혼모노」는 무속신앙의 진위를 가리는 소설이라기보다, 예술이 다시 신체를 요구하게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평생 장수 할멈을 모셔온 박수무당 ‘문수’는 어느 날 앞집으로 이사온 ‘신애기’에게 할멈이 넘어가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수의 오랜 노력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박수무당이라는 직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험한 신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제 그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서슬이 날카로운 작두 대신 모형을 찾거나 유튜브를 보며 접신 연기를 연습하기 시작한다. 신앙이 자본이나 정치와 결속하며 도구화되고, 또 젊음과 새로움의 이데올로기 아래 무당 또한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소모되는 양상은 근대의 세속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무당은 이제 자본의 날렵한 속도 아래 밀려나는 노동자이자, 진정성을 연기해야하는 예술가이다. 이 소설의 결정적인 순간은 문수가 신애기에게 밀려나며 뺏긴 정치인 손님의 굿판, 자신이 초대받지 못한 그 자리에 가서 칼춤을 추기 시작하는 장면에 있다. 그는 신들리지 않았지만 밤새 매섭게 벼려놓은 칼날 위에 자신의 몸을 올리고 작두를 타기 시작한다. 날것으로의 칼날에 닿으며 그의 몸은 자연스럽게 떨리고 눈이 뒤집히며,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입가에 미소까지 드리운 채 신명을 내는 이 장면은 문수가 서사의 주인공 자리를 다시 탈환하는 순간이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무얼 알겠냐만은, 큭큭, 큭큭큭큭”이라는 마지막 문수의 목소리는 외부의 인정에 의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스스로 자신의 내력과 진정성을 긍정”12)하게 되는 절정의 순간으로 읽는 데서 더 나아가보면 어떨까. 이렇게 다시 말해볼 수 있겠다. 전근대의 무속은 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그를 등진 근대의 자리에서 비로소 현대 예술로 다시 탄생했다고. 숭고한 현현과 몰입이 신앙의 영역이라면, 문수의 작두춤은 오히려 이질감과 불편함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현대 예술에 가까워진다. 그의 퍼포먼스는 낭만주의적 예술가를 구성하던 천재와 영감에 스며있던 정신성을 해체하며 실재하는 몸의 물질성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물리적 능력과 무관하게 피를 철철 흘리며 경련하는 그의 신체는 차라리 표현주의적 충동을 보여주는 하나의 오브제다. 이 몸 위에서 원본과 사본의 구별은 철폐되고, 천재성은 치열한 아마추어리즘에 자리를 내어준다. 이 피 흘리는 신체는 실패와 무의미의 가능성을 끝까지 열어둔 채, 인간이 다시 시간과 신체를 예술의 비용으로 지불하게 만든다. 이 비용은 AI가 생성하는 예술의 무한 반복 가능한 오류가 아니라, 한 번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 시간으로 남는다. 어디로 갈지 모른 채 지속되는 이 작두춤은 사회적 생산이나 예술의 의미에 부합하는 결과를 생산하기보다, 의미의 즉각적 환원을 거부하며 지연된 시간을 발생시키는 사건이 된다.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예술에 대한 인식론적 틀과 자기 이해가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다루는 소설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훨씬 더 월등한 창작물들을 더 활발하게 생산해내는 상황에서, 밀려난 예술가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프로그램도 사람도 기계도 귀신도 아닌 미지의 존재” 같은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은 이를 유용한 툴로 간주한다고 해서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이를 도구로 치부한다면, 패배감 속에서도 창작자로서의 존재는 무사히 보존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결과로 증명되는 성취라기보다, 계속해서 조바심과 조급함을 만들어내는 예술 자체에 대한 집요한 열망에 가깝다. 이러한 열망은 예술 인공지능에 의해 영화판에서 완전히 밀려난 영완 선배의 모습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포르노를 만들면서조차 건조하고, 푸르죽죽하고, 앙상하고 깡마른 나무가 등장하는 자신만의 ‘인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혼이 죽어버릴 것 같기에 “사막에서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 영완 선배의 모습은 세속적 열망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도에서조차 철저히 외면받고 실패했을 때, 그의 예술적 열망은 몰락을 통해 역설적으로 증명된다. 영화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소설 속 인물들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상실의 감각, 잃어버린 동료이자 인간성을 향한 애도되지 않는 고통은 이 작품에서 붉은 신체라는 하나의 신체적 이미지로 응축된다. 영완 선배는 인공지능이 만든 예술을 보더라도 창작욕을 유지할 수 있는 마법의 ‘붉은 알약’으로 하와이 사과를 건넨다. “세상이 바뀌어도 너는 언제나 만드는 인간일 거야. 스스로 기억하는 한 언제나 영화를 찍고있을 거야.”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인간 ‘하와’를 떠올리게 하는 이 ‘하와이 사과’는 흥미롭다. 신과 유사한 생성형 인공지능 앞에서 인간은 발가벗겨진 듯한 황망함을 느끼며, 황급하게 자신의 기원을 발명해낸 것일까. 아니, 인공지능 시대 쓰인 새로운 창세기에서 인간은 스스로 뱀이 되어 자신을 유혹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좋겠다. 창세기에서 유혹은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드러내는 증표였지만, 이제 유혹에 넘어가는 나약함은 인간이 여전히 예술을 욕망하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증표로써 다시 읽힌다. 소설은 인간의 예술을 향한 집념과 희열은 우울과 절망이 그에 비례하는 무게로 따를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고 눌러 말한다. 결말부에 하와이 사과를 먹은 후 변이한 화자의 붉은 몸은 기계와의 통합을 거부하기 위해, 그리고 예술을 향한 내적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구의 장례식장에 가다 본 환각을 자신 안에 합체한 우울증적 형상으로 보인다. 강력한 잔상을 남기는 이 붉은 몸은 「혼모노」의 마지막 장면에서 피를 흘리는 몸과 다르지 않다. 이 소설들은 AI 시대에 예술은 이제 언어의 정교함이나 결과의 완결성으로 모방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몸과 감각을 통해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현전이라는 아우라를 다시 호출하는 듯 보이는 이 소설들은 과거의 진정성을 그리워하며,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아우라는 회복된 본질이라기보다 예술이 결과로 증명될 수 없어진 이후에 발생하는 부산물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이계성이 언메이크랩의 작업을 논하며 던진 비유가 유효해진다. “여느 언어와 마찬가지로 신탁의 언어에도 본질적인 의미가 내재하지는 않아서, 어떤 프레임 또는 인식틀을 통해 이를 이해할지는 언제나 받아들이는 쪽의 몫이었다”13)는 그의 말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언어 역시 별개의 진짜 의미를 품고 있기보다 해석의 장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타자와 되돌릴 수 없는 종결이라는 죽음의 감각은 이 해석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제 예술가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욕망이 과정에 들러붙는 자리, 그리고 그 욕망이 실패와 상실을 되돌릴 수 없는 비용으로 남기는 시간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예술은 결과로 증명되기보다, 실패와 상실의 가능성을 끌어안은 채 지속되는 수행으로 남는다. 그렇게 이 시대 예술가의 상은 붉은 몸을 가진 신체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1)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태양과의 대화』, 이계성 옮김, 미디어버스, 2023, 119쪽.2) 조너선 크레리, 『지각의 정지』, 유운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579쪽.3) 데이비드 조슬릿, 『예술 이후』, 이진실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2.4)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위의 책, 100쪽.5) 위의 책, 145쪽.6) 권보연은 연구자 자신이 직접 수행한 실험 속에서 인간언어와 생성언어가 ‘의미 혼종’과 ‘확률 혼종’이라는 상반된 미적 지향성을 가지는 방식으로 합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중에서 ‘확률 혼종’은 내용이 아닌 확률 층위에서 인간과 기계언어가 합성되며, 감정과 내용에 유착된 의미 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질 가능성을 지니기에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기한다. 권보연, 「결과 너머 문학기계로서의 AI」, 『다문화콘텐츠연구』 46집, 2023.7) 정지돈, 「쓰여진 문장과 쓰여지지 않은 문장 사이」, 『에피』 24호, 2023, 55쪽.8) 언메이크랩 외, 『잠재공간 속의 생태학: 재난, 생성신경망 그리고 비미래』, 미디어버스, 2023, 25쪽.9) 위의 책, 26쪽.10) 위의 책, 43쪽.11) 김언,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면서 제기되는 문제들」, 『현대시』 2023년 6월호, 111쪽.12) 성현아, 「반항하는 자는 부조리가 있나니, 그 가짜가 참되도다」, 『2024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문학동네, 2024, 292쪽.13) 이계성,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을 위한 몇 가지 질문들」, 언메이크랩 외, 앞의 책, 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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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희 AI 시대, ‘인간 없는 예술’의 도래 앞에서

1 이번 봄에 단연 눈에 띄었던 것은 인공지능 시대에 적극적으로 인간이라는 의식을 탐험하고 매체를 다시 읽어내는 글들이었다. 2020년대 들어 인류세 관련 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비인간’ 담론들은 생성형 인공지능인 챗지피티ChatGPT의 등장 이후 다시 한번 요동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차지하고 있던 독보적인 단상 위에서 내려와 비인간과의 경계를 적극적으로 허물며 세계의 지도를 다시 그리려는 겸허한 기획은 급작스럽게 복잡한 불안에 갇힌 것 같다. 적어도 기계에 대해서라면 이미 우리는 동등하거나 어쩌면 한참 전에 초월당한 것은 아닌가? 경계 허물기로 인한 희열보다 불안이 확연히 압도하는 자리에서 『쓺』 2024년 상권의 특집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그 개체성과 집단성’과 ‘작은 기획—채굴 문화와 미적 감각’을 유독 흥미롭게 읽었다. 그리고 ‘작은 기획’에 실린 심효원과 윤원화의 짧은 글이 각각 인간이 향하려는 방향과 의지의 아름다움, 그 노력이 무산되는 수동태의 자리에서 감지하는 공포와 불쾌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느꼈다. 먼저 심효원의 「지렁이의 부드러운 건축물 만들기」는 비인간 행위자인 ‘지렁이-되기’를 통해 근대의 한계를 돌파할 것을 정중하게 요청하는 글이다. 지렁이가 땅과 맺는 일원적인 관계성과 분변토라는 건축물은 근대 이후 인간이 이룬 도시의 뚜렷한 경계와 고정성의 반대편에 있다. 지렁이의 건축물 만들기란 사실상 움직이고 먹고 배출하는 신체적 행위의 반복일 뿐이지만, “비인간들의 극도로 효율적인 메커니즘”이자 자신의 몸이 다른 존재와 물리적으로 닿는 매순간마다 “무차별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동력”1)이기도 하다. 촉각이 주도적인 지하세계에서는 시각이 미미해질 뿐만 아니라 시간성 역시 달라진다. 미래의 미결정성을 남겨두는 대신 물리적으로 접촉하는 것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순간’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글은 최근 신유물론을 비롯한 담론들과 풍요롭게 공명하는 하나의 아름다운 공상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지하세계로 향하는 방향성은 최근 SF 소설의 주요한 상상력의 기반이기도 하다. 정세랑의 「리셋」(『목소리를 드릴게요』, 아작, 2020)에서 행성의 모든 자원을 고갈시키던 자본주의의 질주를 멈추게 한 것은 인류 문명을 끝장내려고 내려온 지렁이들이다. 강제 리셋 이후 인간들의 자리는 자연히 땅속 깊은 곳이 되고, 지상은 다른 종들이 누리는 공간이 된다. 김초엽의 『파견자들』(퍼블리온, 2023)에서도 지상은 균류인 ‘범람체’의 공간이 되어버리고 인간은 감염을 피해 지하세계로 내려와 산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문명 말살에 가까운 아포칼립스를 맞닥뜨리지 않는 이상, 영화의 촉각성을 즐겁게 감각해온 인간이 미래의 지구를 위해 지렁이를 신속하게 체화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로 남는다. 물론 직접적인 실천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지구의 거대 환경 시스템의 핵심 행위자 자리를 재조정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겠다. 하지만 미래적인 지하세계로 들어가기에 인간은 아직 시각적 쾌락 속에 즐겁게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지적 유희를 야기하는 활자의 쾌감까지 포함해서. 윤원화의 「땅을 파는 손」은 채굴적 상상력의 매혹과 절망을 말한다. 데이터로 전환된 우리의 생태 에너지를 부의 원천으로 삼으며 굴러가는 미디어 산업 앞에서, 인간의 생산물·복제물·부산물·폐기물을 구별하기는 어려워진다. 디지털 기술로 구축되는 ‘아카이브 데이터’는 역사는 넘쳐흐르지만 이를 의미화하는 전통은 불가능한 곳이다. 윤원화는 과잉생산으로 범람하는 사물들 앞에서 맞닥뜨리는 불길한 실패에의 예감을 시앤 응아이Sianne Ngai의 ‘기믹gimmick’에 대한 반응으로 설명한다. ‘매직magic’의 애너그램에서 유래했다고도 하는 이 단어는 1920년대 미국에서 편법적 장치, 싸구려 트릭, 계산된 마법 등을 뜻하는 신조어로 출현했다.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 자본주의의 황홀감과 환멸을 모두 각인한 기믹의 불완전한 형식은 오늘날 삶과 예술, 또는 넓은 의미의 ‘사업’에서 흔히 발견된다.2) 단기적 이익 추구에 최적화되어 있는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가치 절하된 노동에 시달리는 대개의 사람들이 이 기믹의 유희에 이끌린다. 운에 따라 누군가는 축적된 자원을 폭발적으로 소모할 수 있으리라는 채굴적 상상력이 번성하는 가운데, 보상도 성취도 불확실한 예술 노동 역시 가치 체계에 대한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윤원화는 이런 진단과 고민 속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생산성 중독의 시대에 예술은 어떤 시간성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3) 심효원이 지하라는 공간과 이를 감각하는 촉각성에 의지해 의미 있게 압축되는 순간의 시간성을 말한다면, 윤원화는 ‘농사’와 ‘채굴’을 대비하며 채굴의 무책임한 풍요의 약속이 얼마나 파국적일 수 있는지 말한다. 최단기간의 이익에 매몰된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생산물은 넘쳐흐르지만 어떤 가치 창출도 담보할 수 없는 동시대 예술은 불투명한 시간을 표류하는 중이다. 이런 진단 속에서 디지털 자본주의에 의해 갱신되는 매체의 기술적 발전은 인간과 나란히 놓여 경계를 넘나들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환멸을 불러오는 맹목적인 대상으로 남는다. 인간의 ‘지렁이-되기’를 향한 아름다운 여정은 너무나 느리게 진행중인데, 가장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인정받고 있는 생성형 인공지능은 예술을 몰아치듯 양산해낸다. 인간의 몸은 자발적으로 물질과 동등하게 놓이기 전에 물질이 만들어낸 다른 가치들에 의해 가치 절하되며 밀려나게 될까? 생동하는 물질들 안에서 인간을 재의미화하려는 시도와 인공지능을 의심하며 인간 본연의 무언가를 지키려는 안간힘 사이에서 부각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아래의 비평들은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2 『쓺』의 특집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그 개체성과 집단성’을 여는 글은 근대 패러다임이 ‘개인’을 해방하고 자율적 주체로서 정립해왔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이 시대에 여전히 개인의 이념이 유효한지 묻는다. 개체성과 집단성이 직면할 변화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이 서문에 가장 직접적으로 응답하는 글을 꼽는다면 김태환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과 김재인의 「창의와 집단 지능—인공지능은 창작하지 못한다, 다만 제시할 뿐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김태환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은 기계 성능의 고도화가 필연적으로 인간의 중요성이나 가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에게 산업화 이후의 근대는 ‘저자의 시대’이며, 이는 기술 발전의 작용에 대한 인간의 반작용이 만들어낸 변화이고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방향타가 된 것은 저자라는 이념의 바탕에 놓인 ‘개인주의적 사상’이다. 이는 산업화 사회 속에서 부속물로 전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회 분석의 준거점을 개인에 두고 진리와 자유를 탐색했던 아도르노를 비롯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기조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 다시 독일 지성사의 문화 비판적 사상의 전통이 소구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김태환은 “항상적인 문화 공급 과잉의 시대”(37쪽)라는 진단에서 찾는다. 그에 따르면 소셜 미디어나 웹사이트, 유튜브 등 정신의 대상화로서의 객관 문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반면, 그 반대 방향인 객관 문화에서 주관 정신으로의 내화는 개인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치로 인해 그만큼의 양적 증가가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사람들은 알고리즘 속에서 타인과의 의미 있는 만남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더 심각한 것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객관 문화의 총체가 스스로 발언하고 생산하는 주체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런 위기감 속에서 이 글이 다시 강조하는 것은 ‘정신의 개별성’이다. “요컨대 모든 인간이 개인으로서 개별적 의지, 개별적 내면, 개별적 정신을 지닌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외부에서는 절대 들여다볼 수 없고, 직접 조작할 수도 없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자주적이라는 사실”(42쪽)을 변함없는 인간 존재의 조건으로 부각하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무분별한 열광에 휩쓸리기보다 이를 의심 어린 눈으로 찬찬히 사유할 틀이 우리에게 요긴한 것은 사실이다. 데이터에 얽힌 저작권 문제 역시 계속 규제안을 논의해나가야 할 비판적인 쟁점이다. 그렇지만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위기를 산업화 시대 이후의 위기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는 것은 혹시 너무 큰 틀에서의 접근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 작동 방식과 결과물이 인간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만들어진 자본주의의 차원에서만 다루어질 때, 새로운 매체와 관련해 충분히 사유되지 못하는 요소들이 생겨나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이 글에서 알고리즘에 갇힌 디지털 시대 개인의 부자유에 대한 우려는 빠르게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의 재소환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거듭 강조되는 개인의 개별적인 ‘의지’와 ‘내면’과 ‘정신’에서 신체의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 글에서 인공지능과 대립되는 요소로 논의되는 인간의 ‘의식’이란 단순히 합리적 이성만은 아닌 “수많은 감각적 심상과 기억·감정·소망·의지 등이 혼재하는 심적 상태”(46쪽)다. 알파고와는 다른 인간 바둑 기사의 의식을 예로 들면서 언급되는 긴장, 초조, 후회, 자책, 엉뚱한 연상 등은 “바깥에서 결코 완전히 알아볼 수 없는 복잡한 내면”(같은 쪽)으로 규정된다. 베일에 살짝 가려진 듯한 이런 인간 내면의 신비함은 물질적인 신체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진화해온 신체야말로 내면 이상으로 복잡성의 차원에 놓여 있지 않은가? 이는 “신체화의 말소가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와 사이버네틱스 포스트휴먼 양쪽 모두의 공통된 특성”이라는 캐서린 헤일스의 비판을 상기시킨다. 헤일스는 합리적 정신과 등치되는 자유주의적 주체가 “그 악명 높은 보편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신체가 자아와 동일시되지 않기 때문”4)이라고 말한다.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간의 한계는 곧 발전을 통해 ‘영웅적 개인’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유한한 삶을 가진 존재, 모든 능력에서 커다란 한계를 안고 있는 개별자로서의 인간만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여 어떤 감동적인 위대성에 이를 수 있”(53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반드시 육체의 신경과 근육의 단련 과정을 동반하며 그것이 생각과 행동에 긴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잠시 괄호 안에 두어진다. 이 글의 전반적인 주장이 온당하게 느껴지면서도 그 전제가 되는 자율적인 개인상과 관련해 못내 마음에 걸리는 것은 개인이 지향해나가야 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전제되어 있는 발전과 성장이라는 지극히 근대적인 가치다. 생산과 창조의 주체로서의 영웅적 개인이 아니라 소비와 소멸의 주체로서의 개인에 대해 우리는 좀더 다른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또 근대 이전에 우리가 ‘저자’가 불투명한 긴 구술 시대를 살아왔음을 떠올린다면, ‘저자의 시대’ 이후의 저항이 활자와 개인을 넘어선 범주에서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3 김재인의 「창의와 집단 지능」은 이 질문에 대해 조금 다른 지점에서 답을 내놓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지능은 본질적으로 집단적 성격을 가지므로 ‘집단 지능’이라고 해야 한다. 개체를 중심에 놓으면 ‘창의’를 중시하게 되지만, 그 새로움은 다른 개체가 ‘모방’하고 ‘확산’하지 않는다면 사멸하고 만다. 그렇기에 인간이 다른 생물종과 달리 ‘집단 기억’과 ‘문화 기억’이라는 형태의 외장 기억을 건설함으로써 지식과 기술의 확산과 축적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은 중요하게 여겨져야 한다. 저자는 낭만주의 미학과 예술에서 강조하는 천재적 개인과 창조력에 대한 신화를 뒤로하고 “인간이란 거대한 기억”(62쪽)이라 정의 내린다. 이는 물론 질적 도약이 아닌 집단으로서의 양적 축적을 말한다. 김태환이 인간의 의지, 내면, 정신이라는 추상적인 면을 중시한다면, 김재인은 “나의 생각이란 시한부 소유물”(63쪽)에 가까울 수 있으며 그 휘발성을 지켜주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물질’ 혹은 ‘미디어’”(62쪽)라고 강조함으로써 그것을 외화된 집합적 사물성으로 바라보며 그 반대편에 선다. 그런데 이 글은 ‘컴퓨터가 자연어를 다룬다는 것’이라는 장부터 급작스러운 단절을 드러내며 도약한다. 앞에서 인간의 생각 자체를 미디어이자 집단 기억의 저장고로 본 것과 다르게, 예술과 창작의 영역을 다룰 때는 컴퓨터가 자각 혹은 성찰을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컴퓨터는 예술 능력이 없다”(66쪽)고 확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기계를 바라보는 김재인의 시점에는 도구적 차원과 존재적 차원이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글은 창작의 정의를 “스스로 선택하고 평가하는 능력이 발휘되었느냐”(67쪽)에 두는데, 중요한 점은 저자가 그 평가 주체의 자격을 ‘생물’로 단정한다는 것이다. 생물은 “생존과 번식을 스스로 반복”하는 유기체이고, 이 글에 따르면 평가 역시 “생존과 번식에 성공하기 위한 지각 처리와 행동의 연쇄”(70쪽)다. 이 기준에 따르면 애초에 기계는 아무리 ‘집단 기억’의 ‘미디어’로서 최적화되어 있다고 해도 무기물이라는 점에서 평가 능력이 없는 것으로 배제 당할 수밖에 없다. 그가 이렇게 유기체의 항상성과 관련된 기준을 평가 능력과 일치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저작 『AI 빅뱅』에서 참조할 수 있는 지점을 좀더 찾아보면, 이는 “몸의 고집스러움”5)이라는 말과 함께 구체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심지어 같은 프롬프트를 주더라도 생성물이 크게 바뀌는 무작위성randomness을 보여주는데, 이는 휘발성이 강하다. 그러나 인간은 불완전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자기 생각을 고수하는 면을 지니는데, 저자는 이를 몸에서 비롯된 문제로 보는 것이다. 이 장에 바로 이어지는 질의응답에서 한 질문자는 “세계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몸을 가지는 것이다”6)라는 전제 위에서 인공지능이 세계를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강인공지능으로 발전할 방법이 있는지 묻는데, 김재인은 이에 대해 ‘몸의 회복력’에 대한 이야기로 답한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몸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몸은 생각을 “바로 휘발되지도 완전히 고착되지도 않은 어느 중간 지점”7)에 붙잡아둔다는 것이다. 김재인은 인공지능과 다른 인간을 논하는 데 있어 복잡성을 가진 신체의 차원을 살려내고자 한다. 하지만 창작을 논하면서부터는 김태환의 논의와 유사한 탈신체화의 방향을 답습한다. “진화 과정에서 살아남았다는 특징”은 “필멸하는 인간이 불멸하는 비결”(70쪽)로 치켜세워지고, 진화를 위해 외부와 교섭하며 몸 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피드백 루프는 유기체만의 고유한 신체적 능력으로 남는다. 인공지능은 몸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케이트 크로퍼드가 인공지능은 추상화된 지능이 아니라 오히려 “체화되고 물질적인 지능이며 천연자원, 연료, 인간 노동, 하부구조, 물류, 역사, 분류를 통해 만들어진다”8)고 강조한 사실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혹은 그와 마찬가지로 유기체의 일차적인 목표로서의 생존이 진화의 필수 사항이라 말하는 신경과학 연구자 아닐 세스가 우리의 지각은 사실 ‘통제된 환각’이자 ‘최적의 예측’이라 설명했음을 염두에 두면 어떨까. 그에 따르면 ‘당신이 된다는 것being you’, 즉 인간의 ‘동물기계’적 본질과 의식적 자기 사이의 연결고리는 “신체 자체가 가진 현재와 미래의 생리적 조건에 대한, 형태도, 모양도 없고 제어 중심적인 지각적 예측”9)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인공지능 역시 지극히 물질적인 신체를 지니고 있으며 인간 역시 체화된 자아로 인한 기계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때, 예술을 창발시키는 창의성 개념이 다르게 읽힐 가능성이 열린다.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승부 후에 마련된 『인문예술잡지 F』 21호의 특집 ‘고함: 비-인간’에서 이진경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인공지능이 창조성을 가질 수 있는 논리적 가능성을 함축한다고 주장했다. 괴델의 정리는 수학적 추론의 과정 속에 언제나 결정 불가능한 명제가 ‘숨어’ 있을 수 있음을 의미하며, 그렇다면 인공지능의 수준에서도 공리계로 귀속될 수 없는 명제(결정 불가능한 명제)를 생성할 수 있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계의 형식적 추론에서조차 새로운 명제의 창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역으로 생명체의 진화가 어떤 경로를 밟아왔는지 설명한다. “변이mutation의 누적에 의해 진화는 이루어”지지만 처음 “생명체의 변이는 지배적인 개체군 안에서 일종의 ‘장애자’나 ‘고장’으로 간주된다”10). 하지만 환경이나 생존 조건에 따라 변이가 진화된 변종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면, 기계가 만들어내는 예측되지 않은 결과의 출현 역시 ‘고장’이나 ‘장애’가 아니라 새로운 능력의 ‘창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창조의 출발점이 아니라 결과물에 초점을 맞춘 논의다. ‘인간 없는 예술’이 도래하려는 시기에 우리는 다시 인간적인 무언가를 기계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는 기술적 특이점이 올 때마다 반복되어온 정동이기도 하다. 이 앞에서 좀더 차분하게 이전의 논의들을 정리하고 축적할 필요를 느낀다. 2024년 『쓺』의 특집이 창작자이자 예술가가 서 있는 주체의 자리에서 출발했다면, 2016년 『인문예술잡지 F』의 특집은 그 결과물인 작품의 자리에서 논의를 시작했다. 그렇다면 감상자의 자리에서 본다면 어떤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 신예슬의 『음악의 사물들』은 음악이 기술적 혁신을 이루는 순간마다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넓혔는지를 따라 음악사를 재구성한다. 자동 피아노의 경우에도 그 연주를 더 실제처럼, 더 자연스럽게, 더 인간답게 만들겠다는 목표는 거의 달성되었다. 그러나 자동 피아노가 만들어낸 경험이 정말 특별하게 의미화되는 것은 인간의 연주라는 원본 혹은 목적지를 버렸을 때이다. 인간의 연주라는 목적지를 소거해버리고 이 사물의 독자적인 가능성에 집중해보는 것이다. 연주하는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스스로 뭔가를 연주하거나 재생할 수 있는 악기가 등장했고 그것이 인간의 행동을 인간 없이 손쉽게 해냈다면, 그 기계의 핵심적인 가치를 ‘인간의 복제’가 아니라 ‘탈脫인간’으로 재조정할 수도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기계장치가 꼭 연주자를 대신할 필요는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기준점만 제거한다면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수많은 음악적 가능성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 자동 피아노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연주를 들려줄 수 있었다. 인간의 연주를 기록하고 인간의 연주를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연주의 대리자는 오히려 새로운 예술형식으로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스스로 연주하며 그 누구보다 기계적인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독자적인 예술형식 말이다.11) 우리는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에 대해서도 그것이 오히려 새롭고 독자적인 예술형식이 될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을까? 이 모방은 때로 인간에 한참 미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때로 인간을 이미 초월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계는 이미 희미해지고 있던 자율적인 개인 주체로서의 예술가상을 어떻게 바꾸어나갈까. 또 인간의 예술적 집념은 어떻게 예술 형식들을 바꾸어나갈까. 모든 것이 뒤흔들리는 가운데, 불안만이 정확하게 인간의 자리를 응시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이 불러오는 균열 속에서 인간에 대한 고정된 사유를 과감하게 벗어날 수 있을 때 인간과 예술 모두에 새로운 시야가 열릴 것이다. 1) 심효원, 「지렁이의 부드러운 건축물 만들기」, 『쓺』 2024년 상권, 368쪽.2) 시앤 응아이는 디지털 자본주의가 가속화되던 2010년대 후반의 미술과 문학작품을 분석하면서 기믹의 이론화에 착수하는데, 기믹은 의심스러운 도구성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키치와는 다른 저질 예술로 취급되면서도 자본주의 가치 체계와 그 이면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의심을 표면화하는 미적 전략으로도 쓰일 수 있다. 윤원화는 이 글을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공모 프로그램 선정작인 시각예술 콜렉티브 랩삐의 에 대해 설명하며 시작한다. 이 전시는 관객이 옥수수 농사 시뮬레이션을 완수한 후 ‘콘 코인’이라는 가상 화폐를 받아 실제 뻥튀기 한 봉지와 교환하는 경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복 노동이 이에 비례하는 가치 창출과 기쁨으로 이어지는 대신, 콘 코인이라는 불분명한 요소가 끼어들면서 매끄러운 교환 가능성이 흔들릴 때 이 간극에서도 기믹이 관찰된다고 할 수 있다.3) 윤원화, 「땅을 파는 손」, 같은 책, 383쪽.4) 캐서린 헤일스,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사이버네틱스와 문학, 정보 과학의 신체들』, 허진 옮김, 열린책들, 2013, 27쪽.5) 김재인, 『AI 빅뱅—생성 인공지능과 인문학 르네상스』, 동아시아, 2023, 153쪽.6) 같은 책, 156쪽.7) 같은 책, 157쪽.8) 케이트 크로퍼드, 『AI 지도책—세계의 부와 권력을 재편하는 인공지능의 실체』, 노승영 옮김, 소소의책, 2022, 17쪽.9) 아닐 세스, 『내가 된다는 것—데이터, 사이보그,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 의식을 탐험하다』, 장혜인 옮김, 흐름 출판, 2022, 243쪽.10) 이진경, 「인공지능시대의 예술작품」, 『인문예술잡지 F』 21호, 2016, 25쪽.11) 신예슬, 『음악의 사물들—악보, 자동 악기, 음반』, 작업실유령, 2019, 115쪽.

계간 문학동네 강지희 인공지능개체성집단성탈인간감상자 2024
배하은 눈보라 속에서 문학은 ―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소명출판, 2023)

1. ‘서울의 봄’을 기다리며 유신 독재 시대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을 다시 돌아다보면서 근래에 극장가의 흥행 기록을 다시 쓴 영화 (2023)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지나간 과거의 일이지만, 또한 그렇기에 ‘서울의 봄’이 당시로써는 아직 오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엔딩 크레딧과 함께 솟아오르는 아쉬움과 슬픔, 분노의 감정은 덜해지지 않는다. 40여년의 시간차를 무색하게 만드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그 시대를 지나오지 않은 세대의 관객들에게까지도 강력하게 휘몰아친다. 그러니 그 시대를 온몸으로 뚫고 나갔던 이들은 눈앞에서 물러나는 봄을 바라보며 무엇을 느꼈을지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유영주의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소명출판, 2023)이 제목을 따온 「겨울공화국」의 시인 양성우는 그의 또 다른 시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에서 그 봄을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들려준다.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셔준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곤백번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이 …… 한반도에서 다만 녹슬지 않는 비싼 넋으로 밤이나 낮이나 과녁이 되어 내가 죽고 다시 죽어 스며들지라도 오는 봄에 나무꾼을 쓰다듬어 주는 작은 바람으로 돌아온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후략)…1)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실 수 있다면, 오는 봄에 작은 바람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그의 시가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죽고 다시 죽어 넋으로 스며든다고 해도 좋다는 시인의 결연한 고백을 듣고 나면 그러나, 또 한 번의 겨울 속으로 선선하게 걸어 들어갔을 그들의 의지를 떠올리게 된다. 봄은 물러갔어도,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에서 주요하게 살펴보고 있는 김지하와 황석영, 조세희, 이문구는 신군부 독재 정권하에서도 계속 문학이라는 싸움과 저항을 지속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그들에게는 “오는 봄”을 기다리며 문학에 대한 믿음과 비전으로 눈보라를 뚫고 한 시대를 걸어 나왔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영주의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은 바로 그 역사에 관한 연구이다. 2. 시와 정치와 사랑 시작은 김지하다. 저자가 냉전시대 동아시아의 권력 지형 및 상세한 역사적 맥락과 함께 김지하를 통해 보여 주고 있는 것은, 그러한 냉전 체제의 하위 파트너인 유신 독재 정권과 한바탕 벌여 놓은 그의 싸움판이다. 그의 시 「곡(哭) 민족적 민주주의」(1964)와 「오적(五賊)」(1970)이 어떻게 ‘유신의 심장’을 들었다 놓았다 했는지, 왜 유신 독재 정권은 그의 ‘세 치 혀’와 붓 끝에서 흘러나오는 시를 그토록 두려워했는지, 그러한 김지하의 시는 근본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저자는 ‘오적 필화사건’의 법정 풍경을 복원한다. 잘 알려진 대로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하에서 필화 사건은 드물지 않게 일어났고, 더군다나 김지하의 「오적」이 처음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특별히 ‘오적 필화사건’에 주목하는 이유는 “1970년 김지하의 체포에 이은 100일 간의 재판[이], 법정을 판소리나 탈춤이 주로 공연되는 야외의 마당으로 탈바꿈시켰다”는 데 있다.2) 저자는 관련 인물들의 여러 회고를 바탕으로 당시 재판이 흡사 검사가 양반의 담화를 담당하고 김지하가 말뚝이를 맡은 판소리 풍자극과도 같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유신 독재 정권은 도리어 김지하에게 그가 오래 탐구했던 전통 마당극을 마음껏 펼칠 무대를 깔아주었던 셈이다. 이후 그 무대는 김지하가 “문학, 폭력, 혁명, 구원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펼칠 수 있는 대중 강연을 위한 연단”(95)으로 확장된다. 당시 재판을 방청했던 더글러스 루미스(Charles Douglas Lummis)의 기록을 인용하여 저자는, 재판 방청객들이 김지하의 발언을 받아 적어 재판장 바깥으로 빼돌린 뒤 그들이 속한 조직으로 돌아가 그에 대해 토론하고 연구하게 되는 방식을 흥미롭게 포착한다. 이는 시인의 말이 변론과 강연, 연설을 넘어서, 유신 독재 체제하의 민중에게 어떤 구원의 메시지처럼, 마치 ‘예언’처럼 전달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저자에 따르면 루미스는 실제로 김지하에게 “에언자”라는 칭호를 부여하기도 했다.(87) 오래 전 종교가 시와 정치로 분리되지 않는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이 시기 김지하의 문학 세계는 세속화 시대에 시와 정치를 동시에 추구하려 했던 어떤 종교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이후 “시인으로서의 그의 국제적 명성은 분명 그가 겨울 공화국의 순교자가 됨으로써 크게 높아지게 되었다.”(50) 아이러니하게도 유신 독재 정권은 김지하를 위대한 시인으로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게다가 그 어떤 비평가나 애독자보다도 꼼꼼하게 김지하의 시를 읽고 분석하며, 그 힘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했기에 그들은 김지하에게 더욱 집착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검찰은 “시인의 수첩에 적힌, 아직 쓰이지 않은 시와 희곡에 대한 메모”(95)들을 증거로 제출하며, 마치 시인론을 쓰는 문학 연구자인양 김지하의 문학 세계를 탐구해 들어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문학이 하는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문학을 억압하고 지배하려면 역설적이게도 그 안에 잠겨들어야 한다. 지배와 억압은 대상을 이해할 때 가능한 것이고, 문학에 대한 이해는 오직 문학의 세계 안으로 침잠할 때 가능한 까닭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문학이 하는 혁명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지배 권력조차 그 안으로 휘말리고 뒤엉켜 들어가게 만드는 것, 그것이 시와 정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유신 독재 시대 문학의 혁명적인 것이었다. 굳이 알랭 바디우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낸다는 점에서 사랑과 혁명은 ‘사건’이며,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문학도 ‘사건’이 된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의 논의가 무르익을 때, 그 자체로 1970년대 문학의 ‘사건’이기도 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이 등장한다. 핵심은 이 연작소설집이 이웃 사랑을 미학적으로 실천한 텍스트라는 것인데, 저자는 그 단초를 「뫼비우스의 띠」에서 발견한다. 연작소설의 첫 번째 이야기이기도 한 「뫼비우스의 띠」는 ‘굴뚝 청소를 마치고 그을음으로 얼굴이 새까맣게 된 아이와 그을음이 전혀 묻지 않은 깨끗한 얼굴의 아이 중 누가 얼굴을 씻을 것인가?’ 하는 질문과 함께 수수께끼 같은 문답을 주고받는 교사와 학생들의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이 문제가 곧 뫼비우스의 띠이면서,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세계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함을 암시하며 끝맺는다. 저자는 이 뫼비우스의 띠 수수께끼를 지젝(Slavoj Žižek)의 ‘시차적 관점(parallax view)’, 즉 축소 불가능한 간극을 잇기 위해 애쓸 것이 아닌, “간극 그대로를 인식하는 것”으로 해석한다.(189) 안과 밖은 결코 만날 수 없지만, 뫼비우스 띠에서는 그 안과 밖이 그대로 안쪽 면이면서 바깥 쪽 면으로 존재할 수 있는 차원을 인식하는 것이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서, 당연히 그을음이 묻은 아이가 세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에게 교사는 얼굴에 그을음이 묻지 않은 아이가 친구의 새까만 얼굴을 보고 얼굴을 씻어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답한다. 이윽고 다른 학생이 그와 같이 대답하자, 다시 교사는 동일하게 굴뚝 청소를 한 아이들 중 한 아이의 얼굴은 깨끗하고 다른 아이의 얼굴은 더러운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반박한다. 그러니까 애초에 교사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해답 없음이 곧 안과 밖의 구분 없는 뫼비우스의 띠의 관점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굴뚝청소부 수수께끼와 뫼비우스의 띠라는 위상수학적 개념과 개발독재시대의 소설에 대한 해석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마치 뫼비우스의 띠를 만들 듯, 유영주 역시 그의 방법론적 시각을 한 차례 꼬아 지젝에서 케네스 레이너드의 ‘이웃’ 개념으로 비약한다. 사랑(특이성과 차이)과 정치(평등과 동일성)는 마치 뫼비우스 띠의 양면과도 같은데, 그 띠를 한 번 꼬아 연속체로 만드는 “사랑과 정치의 이음매” 지점이 “이웃”이라는 존재라는 것이다.(189) 저자는 이로부터 조세희 소설의 미학인 ‘이웃 사랑’을 이끌어 낸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난쏘공』을 난해한 모더니즘적 텍스트처럼 보이게 하고, 그래서 리얼리즘론자들에게 지식인적인 환상 소설이라고 비판받게 만들었던 몽타주 기법을 ‘이웃 사랑’의 주된 미적 원리로 파악하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1970년대 문학은 “당신은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십니까”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박태순의 ‘외촌동 사람들 연작’과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1977)가 그러했을 뿐만 아니라, 대중소설 작가로 197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최인호 역시 일찍이 「미개인」(1971)에서 한센병 환자의 아이들과 같은 학교에 보내는 것을 반대하고 나선 우리 주변의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를 소설로 쓴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첫 손가락에 꼽힐 작가는 단연코 이문구일 것이다. 『관촌수필』(1972)에서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이문구의 이채로움이 빛을 발하며, 유영주가 말하는 ‘인접성의 윤리’를 적극적으로 미학화한 이상적인 이웃 공동체가 그려진다. 저자는 이문구의 아버지와 두 형들이 좌익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던 개인사를 바탕에 둘 때, 이문구의 이웃에 관한 이야기가 그저 단순히 전통사회의 풍요로웠던 이웃 공동체에 대한 환상일 수 없음을 역설한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전쟁 전후의 무수히 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들 중 많은 경우는 이웃들 간에 벌어진 비극이었다. 크게는 계급과 종교를 바탕으로 나뉜 좌와 우의 정치적 이념을 따라 서로 갈등을 빚었고, 심한 경우 학살로 이어졌다. 이러한 한국 현대사의 맥락 속에서 이문구 소설 속 이웃은 “이념적 명명의 대안”으로 제시되며 특별한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142) 저자는 조세희와 이문구의 소설을 ‘이웃 사랑의 미학’과 ‘인접성의 윤리’로 의미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그러한 문학의 미학과 윤리가 박정희 독재 체제의 산업화와 반공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근원적인 힘이었음을 주장한다. 그 힘이, 플라톤 이래 본질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문학을 정치와 만나게 하고, 동시에 어떤 정치를 극복하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저자의 의도대로 1970년대 문학은, 시(문학)와 정치와 사랑이 ‘인접성’의 원리를 따라 이어지지만 그 간극을 그대로 유지하며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현실을 넘어서는 차원의 위상을 형성하는 상호 연결과 긴장 관계로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3. 마지막 문사(文士)의 시대 그러나 이 책의 부제인 ‘박정희 시대 한국문학과 저항’에서와 같이, 한국 문학이 저항과 나란히 놓일 수 있는 시대는 곧 저문다. 대체로 그것은 1990년대, 그 유명한,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실감한 때와 겹친다. 고진은 1970년대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한 사람인 김종철과 만났을 때 왜 문학을 그만두고 《녹색평론》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알려진 대로 김종철은 1991년 《녹색평론》 창간과 함께 문단을 떠나 생태주의 운동에 몸담았다. 그는 “자신이 문학을 했던 것은 문학이 정치적 문제에서 개인적 문제까지 온갖 것을 떠맡는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모순조차도 떠맡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언제부터인가 문학이 협소한 범위로 한정되어 버렸다, 그런 것이 문학이라면 내게는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그만두었다”고 답했다.3) 이것은 유신 독재 정권에 강력하게 저항했던 ‘창비’ 계열 문학비평가의 고백이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이 포착하고 있는 문학의 사회 참여(앙가주망)와 정치적 실천, 특별히 양심 있는 지식인으로서 시인과 소설가 들이 독재 권력과 맞서 싸우는 역사는, 이제 정말로 역사가 되었다. 물론 그러한 역사가 한국에서 1970년대 유신 독재 정권 시대라는 국면에 가능했고 정점에 도달했던 것은, 과거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국가였던 후진국에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설 때 그에 맞서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를 외칠 수 있는 것은 소수의 지식인들뿐이었던 세계사의 보편적인 패턴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고진이 말한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장르가 소설(novel)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한국 문학사에서 ‘소설의 시대’라고 불렸던 1970년대의 특수한 문학사적 맥락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의 논의가 작가를 앞세우면서 참조하는 세 가지 문학 개념 중 첫 번째인 ‘리테로크라시(literocracy)’라는 동아시아의 문치주의적인 문학 개념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한국 근현대 문학사로 한정해 본다면 그것의 유구한 역사는 시인과 소설가가 독립운동 투사가 되곤 했던 식민지 시대 ‘문사’ 개념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사의 시대는, 이 책에서 보여 주고 있는 것처럼 실로 1970년대 문학에서 마지막으로 가장 강력하고 화려하게 빛을 발한 뒤, 끝났다.4) 이 책의 첫 장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김지하의 시 「진리」에서 시인은 “바람 속이 내 집”이라고 노래하고 있었지만,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 황석영은 그가 2017년 출간했던 문학적 자서전 『수인』에서 방북사건으로 떠돌던 시절을 회고하며 그때의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결국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문학이라는 집이었다”라고 고백한다.5) 한때 바람 속을 집으로 삼아 온갖 경계를 넘나들며 활보했던 문사들에게 문학의 지경이란 없었다. 김종철이 말했던 것처럼 그들의 문학은 “온갖 것을 떠맡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문학을 떠났거나, 문학이라는 집 안으로 돌아간다. 이제 문학은, 그리고 작가는 무엇을 하는가. 유영주는 결론에서 박민규 소설의 저항성을 김지하에 견주며, 문학은, 그리고 작가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박민규는 그의 대표작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표절 사건 이후로 그럴 수 있는 정당성을 상실했다. 이것은 분명 징후이기도 하다.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예감하게 했던 작가 중 한 명인 무라카미 하루키를 통해 우리는 이미 오래 전 문사의 정체성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로 완벽하게 대체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지위마저 위태롭다. 최근 작가들의 소설 속 자기 재현은 어떠한가. 그들은 비정규직 중에서도 고용안정성과 소득이 가장 낮은 축에 들며, ‘프리랜서’라서 정부가 청년층에 제공하는 대출 상품에도 부적합해 은행 창구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으로 소설가를 재현한다(박서련, 「A Queen Sized Hole」,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민음사, 2022). 지방 변두리의 3천만 원짜리 아파트가 자기 집이 되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며, 마오쩌둥의 참새들처럼 어디에도 내려앉을 수 없어 지쳐 떨어져 죽을 위기에 놓여 있다(이서수,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젊은 근희의 행진』, 은행나무, 2023). 오해하지 말라. 이것은 어떤 가치 판단도, 비판도, 자조도 아닌, 현상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이 시대의 문학은 이제 유신 독재의 겨울 공화국과는 완전히 다른, 또 다른 눈보라 속에서 분투해야 하는 것이다. 1) 양성우, 『겨울공화국』, 화다, 1984, 18면. 2) 유영주, 이형진·정기인 역,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 박정희 시대 한국문학과 저항』, 소명출판, 2023, 92면. 이후 이 책 인용 시 본문에 쪽수로 표기. 3)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역, 『근대문학의 종언』, 도서출판 b, 2006, 49면. 4) 어떤 이들은 1980년대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문학과 정치의 관계라면 그것은 1980년대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1980년대에 문학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팽배했던 반지식인적인 분위기 속에서 작가는 1970년대와 같은 문사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1991년 5월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 치워라”라는 김지하의 충격적인 발언과 그것을 둘러싼 반응 그 이면에는 1980년대를 거치며 그가 더 이상 1970년대와 같은 문사의 지위에 서 있을 수 없었던 상황이 엄연히 자리한다고 볼 수도 있다. 5) 황석영, 『수인』 1, 문학동네, 2017, 36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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