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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들 | 2024년 가을호(제77호)

문학의 ‘무단 인용’과 삶의 자기 서사 편집권에 관하여-정지돈론 — 나는 너를 말하고 너는 나를 말한다

전승민 문학평론

문학평론가.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한국 문학 평론을 쓰고 있다. 주요 관심사는 영미 모더니즘 문학과 퀴어-페미니즘이다. 시와 소설의 접점과 엇갈림을 사랑한다. 문학평론집 『퀴어 (포)에티카』(문학동네, 2024)와 산 문집 『허투루 읽지 않으려고』(핀드, 2024), 『악인의 서사』(공저)(돌고래, 2023), 『다시 만날 세계에서』(공저)(안온북스, 2025) 등을 썼다.

문학의 ‘무단 인용’과 삶의 자기 서사 편집권에 관하여-정지돈론
- 나는 너를 말하고 너는 나를 말한다1)



문학은 누군가의 사유지가 아닙니다.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우리는 그곳으로 자유롭고 용감하게 걸어 들어가 자신만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 버지니아 울프2)



1부 접근


1. 자기 재현과 전시의 시대


  칠 년이 지났다. 미국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에 대한 성폭력 고발로 시작된 미투운동(#MeToo)이 일어난 지 꼬박 칠 년이다.3) 그간의 변화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페미니즘의 본격적인 대중화, 그리고 수많은 정체성들의 자기 전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중화라는 말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로 퍼져 나가는 것’이라는 뜻으로 너르게 정의한다면 이는 곧 성폭력 가해자와 피해 당사자 외의 사람들, 이웃한 이들뿐만 아니라 그들을 전혀 알지 못하던 사람들도 사안에 대해 접근하는 페미니즘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자신의 생각을 정립해 보는 일이 자연스럽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러한 정치적 견해와 입장은 온라인 SNS 공간에서 적극 표현된다.


  2016년 10월 트위터에서 시작된 #문단_내_성폭력 고발 운동은 한국문학장 내부에 만연하고 공고하던 남성 지배와 폭력적인 남성성을 가시화했다. 이 과정에서 인스타그램과 트위터, 페이스북 등 온라인에서의 공론화는 운동의 아주 중요한 동력을 제공했다. 여성 창작자와 독자들이 경험한 폭력을 공유하는 작업은 구조적인 성차별과 성폭력, 여성 혐오를 가시화하고 축출하고자 했다. 그 결과, 완벽하지 않지만 얼마 간의 정화 작업이 문학장 내부에서 이루어졌고 이제는 페미니즘을 말하는 것이 놀랍거나 이상하지 않은 국면까지 왔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 ‘이후(post)’를 돌아볼 수 있을까? 미투운동이 종료되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당장 와인스타인의 재판만 하더라도 현재 계속 진행 중이며 폭력은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다.4) 우리는 필요하다면 언제고 또 다시 ‘미투’를 외칠 것이다. 사안은 더욱더 복잡한 국면으로 이행하고 있을 따름이며, 끝이 아닌 무수한 시작을 야기할 것이다. 사법적인 처벌과 응징이 이루어진 후에도 해당 사건들은 새로운 현재 속에서 몇 번이고 다시금 소환될 것이다. 단 한 번이라도 문제로 드러난 것은 진행하는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재소환되며 비판적인 성찰의 대상이 되고 몇 번이고 다시금 현재화되어 사안을 바라보는 새로운 맥락들을 끊임없이 생산할 것이다. 이때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면, 폭력에 대처하는 우리의 방식이 그 ‘이전’과는 분명 다르리라는 것이다.


  특정한 시대의 페미니즘이 경험하는 ‘이후’의 시간, 포스트 페미니즘은 각 문화권에 따라 다른 시점에서 다른 양태로 드러난다. 가령 20세기 초 영국의 서프레제트 운동가들에게 여성의 투표권 획득 후의 시간이 포스트 페미니즘이었던 것처럼5) 한국의 페미니즘 또한 미투운동으로 경험한 모종의 성취를 기준으로 현재 우리가 거치고 있는 이 시간은 그 ‘이후’의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이때 주체들의 행위가 더욱더 각자도생하는 신자유주의적인 주체로 강화되는 양상은 한국의 (포스트) 페미니즘이 경험하고 있는 한 가지 특징적인 국면을 견인한다. 포스트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는 무수히 많고 다양하지만 그것들의 공통점은 ‘여성’이라는 공통항으로부터 여성 ‘개인’이라는 각자의 개별항으로 눈을 돌려야 할 때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은 특히 재현에 관한 문제와 강력히 결부된다. 가령 『인생샷 뒤의 여자들』(오월의봄, 2023)은 저자가 자신의 여성학 석사학위 논문6)을 수정하여 발표한 책으로 여성 주체가 자신을 온라인 가상 공간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재현하고자 하며, 그러한 재현 속에서 페미니스트로서의 욕망, 여성 문제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어떻게 드러내고자 하는지를 살핀다. 요컨대 페미니즘이 철저히 개인의 사적인 삶의 영역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실천되는가 하는 문제, 미투운동 당시에는 공동의 현안이었던 여성 문제가 그 ‘이후’의 시간 속에서 더욱 사적인 현안으로 전환되는 면모를 탐색한다.


  신자유주의의 주체들은 트위터와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 온라인 가상 세계에서 재현된 정체성을 자신의 오프라인 정체성과 긴밀히 연동시키려 하며 심지어 대체하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체제를 전복할 수 없음이 자명해진 시대 감각 안에서 개인이 발휘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정치적 실천 중 하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재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예컨대, 소비의 내용을 전시하는 행위는 구조 안의 주체가 실천할 수 있는 최선의 운동이 되기도 한다.7) 이와 함께 특별히 부각되는 주체성 중 하나는 소비자 주체성이다. 체제를 영속하게 하는 거대한 힘의 주체가 기업이기에 ‘나는 구매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가 무리 없을 만큼 현실의 거의 모든 사안은 소비와 불매의 이분법적 실천 속에서 논해진다. 친환경적인 기업을 지지하고 그들의 제품을 구입하며 노동자를 착취하는 기업에게 불매를 선언한다. 기후 위기나 노동 문제, 여성 혐오 등 대부분의 현안들은 그러한 소비 실천과 더불어 발화된다. 이러한 주체성이 동시대 한국의 페미니즘과 만나면서 발현하게 되는 한 가지 모습은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 또한 다른 여러 정체성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스스로를 재현하는 데에 사용되는 하나의 해쉬태그, 기표이자 자기 재현의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외모나 구매 내역뿐만 아니라 주체가 전시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정체성의 재현인 동시에 사적이고 공적인 사안에 관한 정치적인 발화가 된다. 예컨대, 이와 관련해서 『인생샷 뒤의 여자들』이 제공하는 흥미로운 대목 중 하나는 ‘예쁜 페미니스트’에 관한 부분이다. 페미니스트가 못생긴 여자가 아님을 입증하는 것을 보다 효과적인 페미니즘의 ‘영업’을 위한 전략으로 취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다.8) 김지효가 뒤이어 덧붙이는 바와 같이, 이들은 “구조적 차별을 열등한 여성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 전략”에 대항하여, 여성 문제가 개인적인 사안이 아니라 사회 구조에서 기인한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개인적 무능이 원인으로 지목될 수 있는 변수를 모두 소거”9)하고자 한다. 역으로 여성의 억압을 강화하는 효과를 낳기도 하는 이러한 모순적인 전략은 주체가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편집할 수 있다는 신념에서 비롯한다. 책에서는 특히 여성의 외모에 관한 욕망과 그것의 드러냄, 꾸밈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한편으로 이 지점에서 발견되는 무의식은 그러한 외모가 ‘나’의 신체라는 사실, 다시 말해 ‘나’의 절대적인 소유물이므로 ‘내’ 마음대로 꾸미고 표현할 수 있다는 시대적 합의와 상식이다. 코로나와 미투운동을 겪은 동시대의 페미니즘운동은 여성 공동의 현안으로 상정될 수 있는 문제에 대하여 한자리에 모여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내보이고자 하는 개인적인 ‘재현’의 외양, 그것들의 이합집산을 통해 이루어진다. ‘나’의 입장 표명은 매체를 통한 ‘나’의 재현으로, 게릴라적인 방식으로 발생한다.


  여성의 개별적인 정치적 주권을 획득하고자 했던 제1물결 페미니즘 이후, 여성의 사회·문화적인 해방을 도모했던 제2물결 페미니즘이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라는 기치 아래에 진행되었다면,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포스트 페미니즘은 그것의 역, 가장 정치적인 것이야 말로 가장 사적인 것이라는 표현에 더욱 부합한다. 제2물결의 구호가사적인 것을 공동의 정치적인 힘으로 재구성하는 하나의 부분 집합으로 위치시킨다면, 후자는 공공의 정치성마저도 사적인 것의 하위 영역으로 간주하여 사적 영역의 배타성을 공고히 하려 한다. 이렇게 고도로 개인화된 정치성은 일인칭의 광장에서 새로운 동력으로 전환된다.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물화하여 자신의 소유물처럼 인식하는 남성의 폭력적인 가상(재현), 남성적인 시선(male gaze)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여성들은 이제 스스럼없이 자기 자신을 대상화하고 자랑함으로써 그 역학을 전복한다.10) 말하자면, 이제는 대상화되거나 전시되는 것 자체가 절대로 문제가 되는 시대가 아닌 것이다.11)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삶에 대해 내가 가진 재현의 배타적인 권리다. 타인들에게 비춰지는 ‘나’의 재현을 ‘나’라는 재현 주체가 자신이 원하는 맥락 속에 기입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여성의 자기 재현에 관한 권리는 정치적인 의사 표현의 사유화와 더불어 그 어떤 타인도 침해할 수 없는 불가침의 성역으로 간주된다. 이때 만약, 누군가가 ‘나’의 삶을 ‘나’의 허락 없이 재료로 삼아 예술품으로 내어 둔다면 어떨까? 그것은 일말의 여지없이 비윤리적인 일일까? 그러나 그 예술 작품이 퀴어와 페미니즘을 재현하는 윤리를 수행한다면? 복수의 윤리적 가치들이 충돌하며 우선순위를 경합할 때, 우리는 특정한 하나를 다른 하나보다 우위에 둘 수 있을까? 문학 내부에서 생성되는 이 ‘윤리’는 도대체 무엇일까? 현실의 윤리적 당위들은 아무런 무리 없이 문학 속으로 곧장 들어올까?


  이러한 문제들에 관해 우리는 정지돈 소설가에 대한 김현지의 공론화와 2020년에 제기되었던 김봉곤 소설가의 ‘무단 인용’ 논란을 통해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이 운동의 주요한 전략으로 사용해 왔던 정체성의 공표, 자신의 삶에 관한 서사 편집권의 발휘가 재현의 세계인 문학에서 어떠한 난항을 겪을 수 있는지 살펴볼 수 있다. 해당 사안들을 이하에서 구체적으로 살피면서 우리가 지나고 있는 ‘이후’의 국면, 여러 정체성의 전시를 통해 폭력적인 남성성을 축출하는 데에 성공한 후 그 어느 때보다 넘쳐나는 퀴어와 여성의 이야기를 헤엄치는 우리에게 새롭게 날아든 모순과 문제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자 한다.



2. 자기 서사 편집권의 배타성


  2020년 7월, 김봉곤의 단편소설 「그런 생활」(『시절과 기분』, 창비, 2020)에 대하여, 작가와 자신이 나누었던 카카오톡 대화 내용이 소설 속에 무단으로 인용되었다고 고발한 ‘C누나’는 자신이 해당 대화를 소설 속에 인용할 것을 허락한 적이 없으며, 소설에 인용된 표현들로 인해 불쾌하고 수치스러운 감정을 느끼며 극심한 피해를 입고 있다고 트위터를 통해 공론화했다.12) 그는 작가가 자신의 ‘동의 없이’ 대화를 무단 인용한 사실에 대하여 3,500만 원의 위자료를 청구하는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법원은 “(최 씨는) 자신이 등장인물로 등장하고, 자신과 피고 사이의 카카오톡 대화내용을 인용하여 소설을 집필하고 출판하는 것에 대하여 동의해 주었다.”고 판단했고, 더불어, 그가 카카오톡 대화 내용을 삭제해 달라고 한 요청의 발화에 대하여 “(최씨의 요청이) 소설의 내용 중 일부가 미흡하다고 표현한 것에 불과해 보일 뿐, 소설에 인용한 카카오톡 대화내용을 삭제하거나 수정을 요구하는 의미로 보기 어렵다.”13)고 판단했다. 사법적으로 김봉곤의 사적 대화 무단 인용은 무단 인용이 아니므로 피해자 “C누나”가 만들었던 가해와 피해의 구도는 적어도 사법적으로는 성립하지 않는다.14) 그러나 법원의 판결은 ‘무단 인용이 아님’을 적시할 뿐, ‘문학이 무단 인용을 해도 문제가 없다’는 내용은 아니기에 사안은 더욱 복잡해진다.15)


  법원을 경유하지는 않았으나 ‘무단 인용’과 좀 더 가까이 붙어 있는 사례는 작가에게 문제를 제기했던 두 번째 피해자 ‘영우’의 사례다. ‘영우’는 김봉곤의 단편소설 「여름, 스피드」(『여름, 스피드』, 문학동네, 2018)의 등장인물 중 한 명이 바로 자신이라고 말하며 소설로 인해 아웃팅을 당했다고 밝혔다.16) 그 또한 자신이 작가와 실제로 나눈 대화가 동의 없이 소설에 등장했으며, 그의 “신변을 이루고 있는 요소와 사담, 사생활이 작품의 질료로 쓰였”기 때문에, “소설 속 ‘영우’의 모습과 행동을 보고 지인들이 ‘영우’가 나임을 추정할 수 있었다.”고 했다.17) ‘영우’의 진술에 의하면, ‘C누나’의 사례와 달리 ‘영우’의 실제 삶은 소설의 한 부분으로 동의 없이 기입되었으며, 작가는 사과와 함께 인물에 관한 묘사를 어떤 방식으로 수정했으면 하는가를 그와 논의하려 했다. 이후, 김봉곤은 문학상을 자진해서 반납했으며 출판사 문학동네는 해당 작품이 실린 단행본과 젊은작가상 수상집을 환불 조치했다. 출판사 창비 또한 작가의 소설집을 환불 조치했으며 두 출판사 모두 해당 작품집의 판매를 전면 중단했다.


  그리고 올해 6월, ‘영우’의 사례와 유사한 문제가 하나 더 발생했다. 김현지 씨가 정지돈 소설가의 『야간 경비원의 일기』(현대문학, 2021)에 등장하는 ‘H’와 『브레이브 뉴 휴먼』(은행나무, 2024)에 등장하는 ‘권정현지’가 자신이라고 SNS에 공론화한 것이다. 작가와 연인 관계였던 그는 자신이 그에게 공유했던 내밀한 사적인 경험이 동의 없이 소설 속에 재현되었으며, 그러한 재현으로 인해 소설 속 인물의 서사가 가까운 이들에 의해 자신의 것으로 식별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작가에게 공유했던 자신의 가족사가 소설 속에서 그대로 사용되었다고 말하며 그로 인해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고 했다. 그는 작가에게 보낸 메일을 공개하면서, 작가에게 (1) 사안에 대한 인정을 담은 공식 사과문을 개인 인스타그램과 출판사 인스타그램 및 홈페이지에 게시할 것, (2) 『야간 경비원의 일기』에 대한 출판 중지 및 판매 회수, 그리고 (3) 작가가 교제했던 실제 인물 김현지에 대한 영원한 비밀 유지를 요청했음을 말했다. 그는 이후의 게시물에서 “지난 7월 초, 중재를 통해 출판계가 그토록 싫어하는 출간 중지 및 회수가 아닌 어떤 희망적인 방법을 제안함과 동시에 입장문을 요청하였으나 당사자로부터 그 어떠한 대답도 전달받지 못했”18)다고 이어서 밝혔다.


  김봉곤과 정지돈의 사건은 세 가지 점에서 교차한다. (1) 소설가가 타인의 삶을 ‘허락 없이’(동의 없이) 소설의 요소로 기입한 것, (2) 작품의 재현 주체(창작자)가 남성이라는 것, 그리고 (3) 소설이 재현한 텍스트의 가상(내용)이 실제 현실의 대상(인물)의 삶을 위험에 빠뜨린다는 것이다. 요컨대 소설에서 현실과 가상이 뒤섞인 재현의 내용이 현실에서 실존하는 ‘나’로 이어진다는 점이 문제가 되며, 소설이 재현하는 서사의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당사자가 작가에게 그것을 쓸 권리를 허락하지 않았고, 소설의 재현이 현실의 당사자를 특정할 수 있게 하는 효과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각 소설이 담아내는 재현의 내용이 질적으로 문제가 되는 사안은 아니다. 가령, ‘영우’가 아웃팅 당했다고 밝힌 김봉곤의 「여름, 스피드」는 사랑의 농밀함과 사랑했던 사람과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마음의 인력과 장력을 보여 준다. 그것은 퀴어 당사자의 것이기도 하면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종류의 감정과 서사다. 다소 도발적인 성적 묘사들이 있지만 퀴어뿐만 아니라 보편의 인간 존재는 성적인 존재이며 사람들과 그러한 욕망을 나누고, 교환하고 몸을 섞는다. 텍스트 내부에서 얽혀드는 욕망이 보여 주는 보편과 특수의 길항, 그로부터 생성되는 새로운 윤리성이 있다.19)


  정지돈의 『브레이브 뉴 휴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소설은 2040년대의 한국을 배경으로 인공 자궁을 통해 출생한 ‘체외인’들과 자연 분만을 통해 태어난 ‘일반인’이 공존하는 세계를 상정한다. 소설 속 한국은 저출산 현상이 심화됨으로써 턱없이 부족해진 노동 인구를 보충하고자 정부와 기업이 결탁하여 인공 자궁을 개발하고 사용한다. 체외인인 ‘권정현지’는 체외인의 임신과 출산이 금지된 현실 속에서 아이를 낳을지 말지를 고민하다가 결국 아이를 낳는다. 소설 속 현실에 대하여 인물은 서로 다른 입장을 표명하며 정부와 충돌하고 갈등한다. ‘권정현지’는 다층적인 차원에서 폭력적인 현실에 온몸으로 항거하는 인물이며 ‘엄마’(난자 기증자)를 찾아나서고, 손가락을 잘라 ‘체외인’들의 비밀을 폭로하고자 한다. 그녀의 존재는 인간의 임신과 출산을 둘러싼 생명 윤리, 재생산 이데올로기에 관한 여러 다른 논박이 치열하게 경합하는 가운데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적 가치를 믿는 숭고한 영웅적 인물로 형상화된다. 동시에 모성이 여성의 생물학적 본능이라는 모성 신화를 박살내는 페미니스트이기도 하다.20) 인물이 담지하는 가치도 그러하지만 서사 속에서 ‘권정현지’가 보여 주는 캐릭터성은 “생식의 압제로부터 사람들을 해방”21)시키고자 하는 정부의 폭력적인 재생산 정책의 비인간성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비판적인 시선을 생성·강화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22)


  이처럼 정지돈의 소설 역시 김봉곤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재현된 결과 자체가 비윤리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C누나’와 ‘영우’가 실제 작가의 정체성과 겹쳐지는 소설 속 인물인 ‘나’가 자기 삶 안에서 경험하는 연루된 타자로 재현된다면, 정지돈에서의 ‘권정현지’는 소설 속 인물인 ‘나’와 연루된 부분적 타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한 독립된 가상의 개체로서 성립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김봉곤의 소설이 실제 작가인 ‘나’까지도 작중 인물로 포함시켜 대상화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정지돈의 소설은 실제 작가인 ‘나’를 텍스트 바깥의 영역으로 분리해 둔다는 점에서 소설 세계의 가상과 현실의 연동되는 정도가 비교적 약화되는 반면, 소설 속 대상들은 대상으로서의 지위가 강화되고 작가-주체와 분리된 재현의 목적어의 자리에 더욱더 확실히 놓이게 된다.


  재현의 내용이 담는 ‘좋음’의 가치와 그것이 작품 밖에서 생산하는 부정적인 효과의 충돌 속에서 소설 속 재료로 사용된 자신의 삶에 관한 소설가에게 동의를 요청하는 일이 당위로 세워지는 흐름은 자기 삶에 대한 배타적인 자기 소유권과 그에 대한 서사 편집권으로부터 비롯한다. 이 두 가지의 저변에는 ‘나’를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뿐이라는 믿음이 자리한다. 그러나, 무수한 타인들과 여러 관계를 맺고 영향을 받은 창작자가 만들어 내는 예술의 세계에서 그의 창작물이 타인으로부터 연유한 것들로 구성되는 것은 한편으로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소설의 재현이 개인의 삶과 그 재현에 대한 편집권과 연동될 때, ‘영우’의 삶에 대한 김봉곤의 재현은 ‘나’가 ‘영우’와 함께 경험한 공동의 경험의 일부로 제시된다. 김봉곤의 재현이 자신이 경험한 ‘영우’와의 시간에 대하여 자신에게도 편집권이 있다는 간주 아래 행해진 것이라면, (독자의 층위에서) 실제 작가 ‘나’의 정체성을 직접적으로 재구성하지 않는 소설 속 인물 ‘권정현지’에 관한 정지돈의 재현은 타인이 지닌 삶의 편집권을 그보다 훨씬 덜 고려한 행위라 할 수 있다. ‘영우’와 ‘권정현지’의 사례에서 현실 속 당사자들이 경험하는 피해는 그들이 타인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을 소설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원하지 않게 노출했다는 데에서 온다.


  동시대 페미니스트들에게 인스타그램이 여성운동의 공간일 수 있는 것은 해당의 가상 공간 내에서 이루어지는 자기 전시 행위의 권한이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한껏 꾸민 자신의 모습이든, ‘탈코’를 한 모습이든 자신이 원하는 자기 정체성을 자유롭게 편집하고 전시할 수 있으며, 인스타그램에서 연루되는 타자들은 자신의 편집권에 조금도 간섭할 수 없는 관객의 위치에 놓인다. 김봉곤과 정지돈의 사례는 타인의 자기 전시 재현권을 ‘동의 없이’ 침해하고 점유하는 효과로 이해될 수 있다. 실제의 ‘영우’와 ‘권정현지’가 작가에게 문제를 제기한 것은 앞서 간략히 언급한 재현의 내용, 질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내보이고 싶지 않은 실제의 삶이 노출되었다는 감각 때문이다. 요컨대 ‘내 삶’에서 비롯하는 서사에 대한 편집권이 소설가에 의해 박탈당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이들은 ‘나’가 공개적으로 밝히고 싶지 않았던 삶의 내용이 작품을 매개로 드러났고, 자신을 아는 이들이라면 그것의 반영을 충분히 알아챌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나’를 아는 이들이 ‘내’가 말하고 싶지 않은 삶의 경험을 알게 되는 것도 문제적이지만, ‘나’와 무관한 이들에게 노출되는 것 또한 문제적일 수 있다.


  내가 전혀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누군가가 ‘나’를 재현하여 익명의 다수에게 노출시킨다면 누구든 불편할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작품 속에서 ‘나’가 동의한 적도, 원한 적도 없는 방식으로 재현된 ‘나’를 마주하는 일은 누군가가 그의 인스타그램의 피드에 ‘내’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던 모습을 멋대로 게재하는 일과 유사하다. 만약 누군가가 그 사진만을 보고 ‘나’를 자의적으로 ‘어떠한 사람’이라고 (특히 부정적인 맥락 속에서) 단정해 버린다면, 그래서 그 누군가들과의 연결될 가능성이 사라진다거나, 타자들에게 직접 ‘나’를 내보이며 그들과의 첫 만남을 경험할 기회를 박탈당한다면 그것은 분명 불쾌한 일일 것이다. ‘나’를 받아들이는 타인의 시선이 아니더라도 ‘나’가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재현된 ‘나’를 보는 일은 그 누구보다 ‘나’에게 불편한 일이 된다.



3. 그렇다면 시선은 어느 곳에,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가?


  페미니즘 문학비평은 이 지점에서 난처해진다. 인식론적 관점에서 여성운동의 한 축을 중요하게 담당해 온 페미니즘 문학비평은 실제 현실에 접근하는 문학의 여러 가상적인 태도들을 검토하며, 특정한 시선에 내장된 여성 혐오와 폭력성을 내파해 왔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실제의 작가, 사람과 그의 인격 전체를 겨냥한 비판이 아니라 그가 재현해 낸 결과, 텍스트의 세계에서 발휘되어 왔다는 점을 주지하자. 물론 문단 내 성폭력 사건 당시 여러 비평가들이 성범죄를 저지른 남성 작가들에 대한 처벌과 문학장의 구조에 대한 변화를 촉구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은 비평을 쓰는 한 ‘작가(사람)’로서 현실의 문제에 개입하고 참여했던 것이지 ‘비평’(글)이 처벌을 행한 것은 아니다. 비평이 재현된 창작물의 결과가 아닌 그 이전의 시간, 작가의 창작 과정에 대하여 적극 개입할 수는 없다.23) 이는 ‘하지 않겠다’는 고집스러운 의지의 천명이 아니라 ‘할 수 없다’는 권한의 불가능성에 관한 냉정한 판단이다. 그것은 차라리 사법적인 힘의 영향권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지극히 현실의 사안이지, 재현된 가상 세계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가 창작의 영감을 얻는 현실의 과정에 대하여 비평(가)이 작가와의 관계에서 지니는 권력을 발휘하여 작가로 하여금 특정한 입장을 취하도록 강요하거나 종용할 수도 없다. 그렇게 하는 순간, 창작은 비평(가)과 독자가 승인한 재현만이 가능하다는 당위가 설정된다.


  ‘허락’을 구하는 행위는 ‘나의 것’이 아닌 타인의 소유물을 빌려 온다는 맥락을 전제한다. 김봉곤과 정지돈의 사건을 둘러싸고 독자들이 제출했던 여러 의견 중 하나는 ‘어떻게 소설가가 남의 삶을 갖다 쓸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 동의하기는 어려운데, 너무나 많은 문학 작품들이 타인의 이야기 위에서 작성되기 때문이다. 그 어떤 문학 작품이나 예술도 타인의 삶 없이는 생산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연루된 존재들이다. 순수한 가상의 인물, 고도의 상상력으로 가공되거나 창작된 서사를 생각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상상력은 우리 각자가 구체적으로 경험한 타자들과의 연루된 현실로부터 연유한다. 문학비평도 마찬가지다. 한 명의 비평가가 쓴 여러 편의 비평을 모아 읽으면 저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안과 문제들이 드러나고, 그가 삶에서 추구하는 핵심적인 가치들이 직간접적으로 드러난다. 글의 내용, 가치관 뿐만 아니라 글을 전개하는 스타일마저도 저자의 실제 캐릭터를 반영한다. 요컨대 소설과 비평을 포함한 모든 창작물은 각자의 주관적인 삶으로부터 파생되며 타인의 삶과 함께 생성되어 왔다. 우리가 이를 드러내게 체감하지 못하는 것은 (저자가 밝히지 않는 한) 다만 그것의 직접적인 출처가 되는 저자의 경험을 모르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세계 속에서 한 명의 주체로 살아가는 일은 그의 의지나 의도와 무관하게 무수한 타인들과 연루될 수밖에 없음을 전제로 한다. 법은 그 과정에서 ‘나’의 침해되어서는 안 되는 가장 기본 단위의 권리, 개인의 재산과 신체에 관한 자기 소유권을 사법적 언어와 제도로 공표하여 보장한다. 가령, 성폭력은 누군가가 누군가의 신체를 불법적이고 폭력적으로 침탈하는 행위이므로 사법적인 처벌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나’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가치관, 정치적 입장들은 어떠할까? 우리가 ‘우리’의 생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에서 생겨난 유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유(有)’들 속을 굴러다니며 경합하고 영향받은 결과이며, 우리가 전적으로 ‘나’의 것으로 쉽게 간주하는 경험들 또한 온전히 ‘나’의 힘으로 이루어 내거나 겪게 된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순수하게 ‘나’만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대상은 거의 없다. 절대적으로 자기 소유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사적 재산과 자신의 신체 정도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다른 존재자들과 반드시 연루될 수밖에 없는 실존적인 조건과 한계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문학과 예술은 현실의 삶보다 더한 ‘무단 인용’이 벌어지는 세계다. 소설이 완전한 무에서 자기만의 상상력으로 서사를 창출하는가? 그렇지 않다. 소설을 쓰는 ‘나’라는 주체는 작품 이전에 이미 무수한 타자성으로 구성된 결과의 총체이며 그것의 욕망과 사유 또한 무수한 타인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의 모든 출처를 정확하게 적시할 수 있는가? 출처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작품이라는 새로운 차원으로 생성해 낼 때 누군가(들)에게 매번 동의를 구한 후에 반영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과연 가능한가(당연한 말이지만, 기존에 발표된 작품들을 표절하는 행위는 이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그것이 작가의 자율적인 행위를 초과하는 규범과 당위로 부과될

수 있는가?


  전적으로 ‘너’가 소유하는 ‘너’의 경험과 ‘나’가 경험하는 ‘너’, 그리고 ‘나’와 ‘너’의 공동 경험-세계를 살아가는 일이 ‘나’와 ‘너’의 얽힘이라는 행위로 정의될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세 가지 차원 안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배타적인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물질, 신체와 재산에 관해서는 이 세 가지 차원이 어렵지 않게 구분될 수 있겠으나 비물질적인 소유물들, 가령 경험의 내용과 서사는 분류가 쉽지 않을 것이다. ‘공동’과 ‘공동이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있는 경계가 명확하지 않거나 겹쳐 있기 때문이다. ‘나’가 경험한 것이 배타적으로 ‘나’만의 것이 아니라 ‘너’들과 공동으로 소유한 것이라는 데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소설가가 타인의 삶을 ‘무단 인용’하는 문제에 관하여 우리는 직관적으로 불편함을 느낀다. ‘무단’이라는 말 때문이다. ‘무단’은 ‘사전에 허락이 없음’을 뜻하는 말로, 타인의 삶이 소설이라는 예술 작품에 기입될 때 그 당사자의 허락을 반드시 구해야 함을 전제한다. 그런데, 타인의 삶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작품으로 재현할 때마다 당사자의 동의를 ‘반드시’ 구해야 한다는 당위가 창작의 명실상부한 대원칙이자 당위로 마련된다면 특정한 수준의 재현은 동의 없이도 가능하고, 특정한 수준의 재현은 동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등의 아주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기준도 마련되어야 할 터인데, 그것은 과연 가능한가? 만일 가능하다면 그 기준은 현실을 지배하는 우리의 규범들로 복제되어야 할까? 만약, 현실의 사람이 소설의 재현에 동의했다 하더라도 그것의 결과가 당사자를 불편하게 한다면, 그는 소설을 폐기하라고 말할 권리를 자동으로 갖게 되는 것일까?


  물론 상호 간의 동의가 마련된다면 작가나 재현 대상의 당사자 입장에서도 서로 마음이 불편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기 위해 자율적으로 도모하는 일과 하지 않으면 곧장 악인으로 낙인찍혀 공식적인 제재를 받는 일은 분명히 다르다.24) 신중하고 섬세한 자발적 고려와 규율로서의 준칙 아래에 주체들을 복종시키는 당위는 결코 같을 수 없다. 더구나 그것이 작가로서 어기면 안 되는 대원칙으로 정립되고 그를 위반한 작가가 그에 대한 징벌적 조치로 당해야 하는 것이 작품의 판매 중지라면 문학은 작가들에게도, 독자들에게도 더는 자유로운 공간일 수 없다. 작가는 강화된 검열 의식 속에서 독자와 비평이 승인한 재현이 무엇인지를 골몰하며 그것에 얽매일 것이고, 그로인해 독자는 그간 문학이 발휘해 온 도발적이고 발칙한, 때로는 폭력적인 상상력과 재현을 경험할 기회를 잃을 것이다. 독자인 우리가 문학에서 경험하는 효용과 가치는 현실에서 합의되어 안정된 의미들을 낱낱이 해체시키거나 비약하며 확장적인 인식론을 생성해 내는 것, 그리고 그렇게 현실을 초과하는 배움을 삶 속으로 끌어와 껴안는 일에서 비롯한다. 이는 김봉곤과 정지돈의 사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문학의 효용과 가치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텍스트로 재확인하고 이미 마련된 현실 인식을 강화하거나 축소하여 하나의 의미로 수렴시키는 데에 있지 않다. 우리는 문학이 제공하는 가상 세계 속에서 여러 사건을 경험하며 그러한 읽기를 바탕으로 현실의 삶을 보다 확장적이고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다. 문학은 우리가 전혀 원하지 않았던, 예상할 수조차 없는 국면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 새로운 차원은 비평가나 독자, 그리고 작가조차도 미리 설계하지 않은 효과 속에서의 열림이다.


  그러나 만약 작가가 특정한 독자(‘영우’와 ‘권정현지’)에게 자신의 작품이 트라우마의 트리거가 되거나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알고도 발표했다면 오히려 그러한 문학의 공간은 열림을 향해서가 아니라 이미 모종의 닫힘을 딛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반대로, 그가 전혀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러한 효과는 여전히 유효하며 작가가 특정 독자에게 자신의 작품이 어떻게 읽힐 수 있는지에 관한 고려를 전혀 하지 않았다고 간주할 수 있다. 작품의 창작이 전적으로 독자의 욕망과 입장만을 고려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문학이 누군가의 삶에 현실의 사건들보다 더 큰 파장을 일으키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열림’의 효과는 필연적으로 파괴를 동반한다. 파열된 자리에서 새로운 열림이 생겨난다. 그러한 ‘열림’이 누군가의 실제 삶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고려는 예술 창작자로서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할 수밖에 없는 고민이다. 창작을 하는 이라면 누구든 ‘이것이 어떻게 읽힐 것인가?’에 대한 의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작품이 자신의 아주 가까운 어떤 독자에게 어떤 층위에서 읽힐 수 있는지에 관해 전혀 고려하지 않은 창작은 그를 배제한 창작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독자에 대한 고려는 당위로서 강제될 수 있는 덕목이 아니므로 작가는 독자를 일절 고려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그러한 경우에 우리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작가의 창작에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는 것이 오직 해당 작품이 작가로서의 ‘나’에게 어떻게 읽히는가에 관한 닫힌 차원에 머무른다는 것, 그리고 독자라는 타자의 세계는 저자로서의 ‘나’가 축조하고자 하는 세계보다 열등한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들이 작가에게 자신의 반응을 적극적으로 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작가’와 ‘창작’이라는 이름 뒤로 묻어 버린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일방적인 나르시시즘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그것의 비/의도성과 무관하게 작가의 손을 떠나 독자의 손으로 들어가고, 독자의 읽기는 언제나 작가와 작품의 의도와 설계를 초과한다. 독자의 권위는 작품에 대한 작가의 의도와 저자의 권위를 추락시킨다.25) 여기에 문학의 궁극적인 열림이 있다. 독자는 저자의 나르시시즘을 파괴하는 저항적 주체들이다. 사법 체계 안에서라면 당사자(작가)의 의도가 사안의 이해와 판단에 중요하게 작용하겠지만, 문학의 세계에서 의도성은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독자의 반응을 제한할 수 있는 근거로 작용하지 않는다. 작품을 둘러싼 무수한 읽기들 속에서 저자성(authorship)이 중요해지는 지점은 결국, 해당 작품이 누구의 창작물이냐 하는 소유권의 문제이지 그것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를 좌우할 수는 없다. 그것은 문학의 문을 닫아 잠그는 일과도 같으며, 작가가 독자에게 행사할 수 없으며 실행될 수도 없는 권한을 행사하고자 하는 일이다.


  페미니즘과 문학이 긴밀하게 연결되는 지점 또한 바로 이 부분이다. ‘무단 인용’ 사안에서 피해자의 고통을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 가해자의 위치에 놓이는 작가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관한 문제는 이 지점에서 피해와 가해의 이분법이 성범죄자 처벌에 관한 사안에서와 거의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피해와 가해의 구도 안에서 논의의 참여자들은 한쪽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와 의사 표명을 하여 가해자의 처벌과 피해자의 구제를 향한 집단적인 권력을 형성한다(우리는 이것을 ‘연대’라고 부르기도 하고 ‘여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저간의 사건들에서도 마찬가지로, 개인의 역량을 초과하는 구조와 집단의 힘을 이용하여 재현 당사자의 피해를 보다 ‘직접적’으로 구제하고자 하는 욕망은 이것이 현실의 사법 권력 등으로 처리될 수 없는 ‘예술’에 관한 사안이라는 현실 인식 안에서 점점 더 깊은 딜레마로 빠져든다. 피해와 가해 두 진영 중 오직 하나만을 택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는 책임감과 의무감, 그리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가치를 최대한으로 수호하고자 하는 시민의식과 그로 인해 신중히 고려된 발화들이라 할지라도 피해 당사자에게 2차 가해를 가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조심스러움은 사건에 관한 보다 확장적인 논의를 어렵게 만든다. 나아가 피해와 가해의 이분법은 소비와 불매, 창작의 자유와 개인의 인격권, 가상과 현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양심의 자율과 윤리적 당위라는 이원론적 구도를 소거한다. 요컨대 현실과 가상이 뒤섞인 소설의 공간에서 빚어진 재현의 문제들은 현실의 성범죄와 동일한 사안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오히려 현실에서는 명확해 보이던 이분법은 문학이라는 세계를 통과하면서 두 개의 항이 서로를 끝없이 재구성하는 이원론적인 역학 구도로 변환된다. 문학과 현실이 서로를 한 몸으로 박음질하고 있는 ‘무단 인용’의 사안들은 이분법의 정중앙을 힘겹게 찢으면서 틈새에 제 몸을 구겨넣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둘 중 어느 하나만을 택하거나 택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이 힘겹게 벌어지고 있는 사이 공간을 잔뜩 노려보아야 할 것이다. 문학의 힘은 ‘열림’이라는 파괴 안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비교적 더 최근에 벌어진 정지돈 작가의 사건은 트위터와 블로그, 페이스북 등에서 정말 많은 이들이 논의에 참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열기와 무관하게 여전히 중요한 무언가가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갈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것은 피해자 김현지가 구체적인 사과를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그것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았고, 어느 시점부터는 무언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법적인 처벌이 불가한 사안에 관하여 피해자의 구제는 해당 사건에 관한 상대방의 공식적인 인정과 공개적인 사과로부터 시작하고, 그것이 구제의 가장 중요한 동력이 된다. 그러나 사과는 자발적인 행위이므로 그 누구/무엇으로부터도 강제될 수 없다26)(한 사람의 독자이자 시민으로서 그가 사과할 것을 촉구하는 의사 표현과 비평가가 비평을 통해 한 작가에게 그것을 종용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발화다). 이는 곧 정지돈 사건의 핵심이 작가의 자율성, 그가 작가이자 한 인간으로서 지닌 양심의 문제라는 것을 뜻한다. 만약 작가가 현재의 입장을 고수한다면 사안은 어떻게 되는가? 현재 공론장에서 치열하게 논의되고 있는 발화들의 열기는 그 어디로도 향하지 못한 채 그저 하나의 미제 사건(cold case)의 일부로 차갑게 식어가고 말 것인가? 다시 한 번, 둘 중 어느 하나만을 고르고 그것이 정답인지 아닌지를 판별하고 그를 근거로 오답들을 적발하는 작업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작은 틈새 하나 없어 보이던 이분법의 구도를 힘겹게 찢고 있는 그 사이 공간으로 들어서는 일이 중요하다. 페미니즘 문학비평은 피해와 가해, 해결과 미해결의 이분법 사이를 비집고 양쪽이 놓인 토대를, 그리고 그 토대가 두 개의 항이 벌이는 이원론적 상호구성 작용을 통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집요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바로 그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입장은 마치 비평이 작가의 모든 과오와 수치를 문학의 이름으로 사면하고자 하는 의지를 발휘하는 것으로 곡해될 수 있다. 그러나 문학과 비평이 한 작가의 자율성과 양심을 중요히 여긴다는 것은, 역으로 자신이 작품을 통해 발생시킨 모든 사후 효과와 파생물에 대하여 오롯이 작가 본인이 감당해야 한다는 엄정한 태도를 드러내는 것이지, 그것들을 마치 없던 것처럼 여기고 면책권을 부여하고자 함은 결코 아니다. 가령, 범죄자의 경우에도 형벌이라는 신체적인 유형력을 통한 법익(法益)의 박탈만이 그에게 내려지는 처벌의 전부는 아니다. 그가 속해 있던 사회·문화적 집단 내부에서의 격리와 소외, 그가 저지른 비윤리적인 이고 ‘나쁜’ 일의 폭로는 그가 앞으로 어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가든 부정할 수 없는 한 인간의 역사로 새겨질 것이며, 바로 그 부정할 수 없는 자기 대면의 시간이 그의 인격과 시간을 계속해서 재구성할 것이다. 물론 법의 엄중한 처벌을 받고 사회로부터 맹비난을 받아도 전혀 반성하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이 마땅히 감내해야 할 수치와 모욕을 내심 아주 깔끔하게 분리하여 타자화해 버릴 수도 있다. 때때로 인간은 자신의 기만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의 죽음조차 탕진해 버리기도 한다.27) 우리가 자신의 삶을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의 것이라고 간명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무한히 얽히는 연루의 자연 속에서도 한 인간이 자기 스스로에 관해 갖는 자기 인식, 성찰과 비판의 내용이 그 어떤 형벌로도 강제할 수 없는 배타적인 자기 소유권 안에서 발휘되기 때문이다. 그와 가장 가까운 타인들이라 할지라도, 심지어 법과 제도의 권력조차도 한 인간이 스스로에 대하여 행사하는 인격권의 내용을 좌우할 수는 없다. 하물며, 타인과 세계, 그리고 결국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거리를 두며 메타적인 성찰을 수행하는 비평이 한 작가로 하여금 자기 인격의 자유로운 발휘를 막아설 수 있겠인가. 단, 그러한 인격권의 발휘로 인한 효과와 결과 또한 그 인격의 주체에게 귀속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지돈 작가의 사건을 말하면서 김봉곤 작가의 사건을 함께 언급한 것은, 위에서 말한 비평과 출판 권력의 부당한 개입이 실제로 김봉곤 작가에게 벌어졌기 때문이다. 일련의 사건은 ‘나쁜 작가’의 작품은 그것의 재현과 무관하게 (해당하지 않는 다른 작품들 또한) 곧장 ‘나쁜 작품’이 된다는 도식을 남겼고 이는 전혀 문제시되지 않았다. 작품의 창작 과정과 그것이 재현하는 내용에 관한 비판은 작가를 ‘나쁜 작가’로 더욱 매도하고 창작물의 유통을 막아서는 쪽으로 향했다. 이후의 독자 반응은 그 외에도 또 누가 ‘나쁜 작가’인지 판별하는 검열의 시선이 강화되는 양상을 보여 준다. 요컨대 저간의 사건은 공공의 독자가 작품을 읽고 자신의 독해를 세울 권리와 서사 속에서 ‘무단’으로 인용된 당사자의 자기 삶에 대해 주장하는 서사 편집권 사이에서 발생한 충돌이다. 김봉곤의 소설집이 환불 조치되고 판매 중단된 것은 그러한 충돌 속에서 후자가 전자를 이긴 사례다.28)


  이때, 비평은 한 사람의 자기 서사 편집권과 독자의 읽을 권리가 충돌하는 지점에 대해 적극 성찰할 수 있다. 개인의 사적 소유물에 관한 갈등에 관여하여 실질적인 유형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사법 권력이 유일하다. 그러나 비평(가)은 판사나 법원이 아니며 오히려 사법 권력과 정반대의 작업을 수행한다. 사안을 여러 각도에서 들여다보며 문제 상황을 단일한 해석으로 수렴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구심력에 지속적으로 저항하면서 상충하는 여러 개의 해석과 새로운 질문들로 나아간다. 비평이 재현의 윤리에 접근할 수 있는 차원은 작가의 구체적인 창작 과정이나 실제 삶의 사적인 영역이 아니라 그것의 결과 그리고 그 이후에 관해서다. 문단 내 성폭력 고발에 동참했던 페미니즘 문학비평 또한 실제 삶에서 일어난 폭력, 그리고 문학장이 공고하게 묵인해 온 구조적인 폭력과 공동의 문제를 가시화하는 작업에 동참한 것이지, 창작 과정에서 개인 간에 일어난 갈등에 개입하여 중재하거나 화해와 처벌을 판정하는 작업에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 비평은 문학의 주체들이 양심적일 것을 당위로 제시할 수 있으나, 그 양심의 구체적인 실행들 각각을 강제할 수는 없다. 양심의 핵심은 한 인간이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인격권과 자율성으로부터 기인하며 문학 역시, 그러한 자율성과 개인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가지는 인격권의 존중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만약, 비평을 쓰는 어떤 이가 그러한 삶의 영역에 개입한다면 그것은 ‘비평’ 그 자체가 아니라 한 사람의 문학인으로서 또는 여성으로서 행동하는 일일 것이다. 물론 비평을 쓰는 주체는 시민과 여성/남성, 그리고 그 외의 중첩된 여러 정체성을 동시에 지니므로 사안은 더욱 복잡해진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사적 영역에 접근할 수 없다는 한계 속에서 비평의 힘은 더욱 유의미하게 발휘된다.



2부 겹눈


4. 재현의 의도와 무관하게 삶은 열려 있으므로


  페미니즘은 여성이 부당하게 입은 피해를 가시화하고 그것을 사회적인 공동의 사안으로 문제화한다. 페미니즘 운동 자체를 너른 의미에서 공론화라고 말한다면 공론화의 목표는 피해자의 구제와 재발 방지를 위한 구조의 개선 또는 파기다. 비평은 작품이 행하는 재현과 그에 내장된 시선에 관해 깊은 탐색과 엄정한 심문을 행할 수 있다. 김봉곤의 작품들에 대한 일괄적인 환불·판매 중지 조치 사안과 정지돈의 소설이 어떤 지점에서, 어떠한 과정으로 재현된 당사자의 수치심과 분노를 유발하는지에 관해 치밀하게 파고들어 논쟁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해당 작품에 접근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정지돈의 『야간 경비원의 일기』가 판매 중지된 것은 그러므로 옳지 않다. 마찬가지로, 판매 중지된 김봉곤의 소설집 두 권도 복간되어야 마땅하다. 이 글에서 정지돈의 『브레이브 뉴 휴먼』만을 다루는 이유는 사건이 발생한 후 『야간 경비원의 일기』를 그 어디에서도 구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29) ‘현재’ 발생한 사안에 대하여 모두가 언제든 사유하고 성찰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이들이 사건에 동시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극단적으로는 성 범죄자의 시나 소설이라 하더라도 판매를 중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비평이나 출판사가 먼저 개입하지 않더라도, 그의 문학성은 독자들에 의해 자연히 획득되거나 폐기될 것이기 때문이다.30) 

  

  게다가, 불편한 진실이기도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든 읽고 쓸 권리가 있다. 범죄를 저지른 자가 처벌의 종료 이후에도 남은 평생 동안 표현의 자유에 관한 권리를 영구히 박탈당해야 한다면 그것은 그가 갱생하여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기회 중 하나를 빼앗기는 일일 테다. 범죄자의 경제적인 이해 관계도 동등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관점에 서는 것이 아니다. 독자는 그 어떤 사안에 대해서도 읽고 자신의 입장을 세울 권리를 가지며, 이러한 공공의 자유와 복지는 개인의 권리와 이익만큼이나 중요하게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이다.30 여기에 숨은 모순은 ‘읽는다’는 것이 곧 해당 작품과 작가를 지지하는 것으로 곧장 치환되는 전제를 폭로한다. 그러나 ‘읽기’ 그 자체가 ‘동의’와 ‘지지’의 행위로 즉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반드시 유념해야 한다. 게다가 성범죄자가 문학을 쓸 수 있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그것을 읽어야만 한다는 것도 아니다. 가령, 고은은 그의 성범죄가 고발된 후에도 실천문학사에서 두 권의 책을 냈지만 독자 반응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은 누구 잘 알 것이다. 그러나 우선 누구든 해당 작품에 접근할 수 있는 열린 조건 하에서만 동시대적인 비판, 나아가 역사적인 성찰이 열린다. 페미니즘이 역사적으로 여러 폭력에 맞서 대항할 수 있었던 궁극의 힘은 현실의 모순을 모두 소거하지 않고 바로 그 모순들을 안고 나아왔던 데에서 비롯한다. 가령, 미국 페미니즘운동권에서 레즈비언들과 이성애중심 페미니스트들이 충돌하여 일으킨 ‘라벤더 위협(lavender menace)’은 이에 관한 멋진 사례다.31) 


  『브레이브 뉴 휴먼』의 세계관은 1970년대 영미권의 래디컬 페미니즘을 기초로 한다. 인공 자궁에 대한 상상력이 그러하고 “젠더는 임의적”32)이라는 입장과 인간의 생물학적 재생산 능력에 기초한 가족 제도가 젠더 불평등의 토대라는 시각이 그러하다. 맑시즘의 영향을 받은 (그것을 부분적으로 수용하거나 또는 전면 거부하면서)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성 차별이 가부장제에 기초한 가족 형태로부터 비롯한다고 파악하며 ‘가족’ 제도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역학으로부터 생산되고 유지된다고 말한다.33) 소설의 중요한 서사적 결절점이 되는 ‘체외인’의 출생의 비밀은 이를 반영한다. 여섯 명의 정자 기증자(아버지)로부터 약 800만 명의 체외인이 태어났다는 것, 그들은 거의 한 명의 아버지만을 공유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은 소설 속 인물이 위험을 무릅쓰고 밝혀내는 자신의 종(種)에 관한 비밀이다(급진적인 혁명 조직인 ‘뉴 휴머니스트’들이 행하는 테러는 프로이트의 남자아이가 지닌 친부 살해 욕망을 함축하기도 한다).


  소설 속 뉴 휴머니스트들은 래디컬 페미니즘의 가장 큰 영향권 하에 있는 이들로 ‘체외인’과 ‘일반인’을 동등하게 대우하며 정부가 독점하는 인공 자궁을 탈취해 민간으로 분배하려 한다. 그들은 인공 자궁을 통해 인류의 억압이었던 생산과 그 결과인 가족 구조로부터 해방될 때, 생물학적 재생산의 결과로 부여받는 인간의 젠더와 그로 인한 억압이 무의미해지고 성 역할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 요컨대 그들은 생물학적 아버지를 죽이고 여성을 임신과 출산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이성애 유성 생식의 역학 자체를 이 세계에서 추방하여 인간이 처한 여러 종류의 차별과 위계를 철폐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러한 급진적인 이상을 향한 추구 속에서 동성애자들은 도구화되거나 소리 소문 없이 희생되고 만다.34)


  자연적인 출산과 임신 중단 사이에서 갈등하는 ‘권정현지’는 소설이 지향하는 래디컬 페미니즘의 욕망의 한가운데서 독자로 하여금 비판적인 성찰을 하게 하는 중요한 인물이다. 세계의 구조와 정면으로 대치하고, 출생의 비밀을 파헤치는 영웅적인 인물이다. 소설에 따르면 그녀는 “주어진 조건을 극복하고 삶을 개척하려는 체외인”의 한 분류인 ‘일인’이자 ‘체외인’의 인권을 주장하는 이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인간상, “인간성의 증거”가 되는 희망을 표상한다.35) 임신 중단에 대한 고민, 모성이 여성의 본능이 아니라는 것을 견인하는 그녀의 캐릭터성은 인공 자궁을 통한 재생산이 자연화된 세계에서 일탈적인 휴머니즘적인 가치를 체현한다. 그러나 모든 제도와 시스템이 예외를 포함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계속해서 유지되고 운용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권정현지’는 ‘체외인’과 ‘일반인’의 위계가 자연스럽게 작동하기 위해 구조를 완성하는 예외적인 인물, 즉 구성적 외부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악이 악으로서 존립하기 위해서 그에 맞서는 선이라는 이항 대립물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가 보여 주는 영웅적 면모의 예외성은 인물이 지닌 근본적인 결핍에서 비롯한다. 소설은 이를 인물이 ‘엄마’(난자 기증자)를 찾아나섰다가 실패하는 장면, 임신 중단을 고민하고 ‘체외인’으로서의 실존적인 박탈감을 느끼는 부분36) 등을 통해 재현한다. 인물의 실제 모델인 당사자가 구체적으로 소설의 어떠한 부분에서 수치심과 모욕을 느꼈는지 우리는 완벽하게 알 수 없지만 (두 당사자들 사이에서만 공유되는 정보의 한계는 현실의 사실과 소설의 재현이 어떻게 재구성 되었는지에 관해 세부적인 가늠을 어렵게 하고, 정보의 부족은 이 사안 자체를 대하는 당사자 외의 이들과 비평에게도 동일한 한계로 작용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서 피해자나 가해자가 그들 삶의 내밀한 맥락, 사생활을 추가적으로 더 공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소설에서의 재현이 실제 현실의 ‘나’로 돌아와 ‘나’를 재구성하며 대치하게 되는 효과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김현지는 바로 그것이 자신이 겪는 부당한 피해라고 말한다.37) 이는 오토픽션의 역학이 발생시키는 효과와도 일치하는데, 차이가 있다면 오토픽션은 재현의 주체이자 재현의 대상인 ‘나’ 스스로의 욕망에서 비롯한 행위38)인 반면, 정지돈 소설의 재현이 일으키는 효과, 가상과 현실 사이를 침투하는 재귀적인 효과는 재현된 대상 당사자의 욕망이 재현 주체의 그것과 불일치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재현의 결과가 독자의 차원에서 발생시키는 효과는 재현된 당사자의 욕망과 무관한 층위에서도 중요하다. 그러므로 김현지가 자신의 삶이 투영되었다고 언급한 부분들에 대해 그러한 반영을 부인하며 해명하는 정지돈의 글은 어쩌면 무의미하다고도 할 수 있다.39) 게다가, 독자가 작품을 읽고 ‘내 삶이 이곳에도 있었다’고 말하는 연루의 감각을 작가가 나서서 부정하는 일은 앞서 말한 문학의 열림을 닫히게 하는 효과에 복무할 뿐이다.


  작품 안에서 재현된 인물이 디스토피아적인 세계 속에서 휴머니즘을 사수하는 영웅적인 페미니스트라 하더라도 그것이 실제의 ‘나’가 원한 재현이 아니라면, 텍스트가 내포하는 내부의 ‘좋음’은 바깥의 실제 ‘나’에게 수치와 불쾌가 될 수 있다. 김봉곤의 오토픽션이 소설 속 가상 세계에서 수치를 전면 재현함으로써 실제 ‘나’의 현실의 자긍심으로 전환시킬 수 있었던 것에는 그러한 수치를 받아들이는 당사자의 주관성이 강하게 작동한다. ‘나’를 포함한 타자와 세계를 감각하는 인식의 주관성과 그것의 발휘는 배타적으로 ‘나’에게 귀속된 것이므로 결과적으로 재현된 것의 가치가 아름답거나 윤리적이라 하더라도 작품이 포함하는 질적 가치와 무관하게, 그것이 형상화되는 미시적인 과정 안에서 독자는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것들을 발견하고 감각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이 작품에 기입되었다고 느끼는 당사자 뿐만 아니라 당사자가 아닌 이들 또한 그들의 읽기에 따라 그들만의 수치와 모욕을 감지할 수도 있다.


  문학은 오독의 세계다. 누군가는 아웃팅을 발생시킨 ‘전력’이 있는 소설에 대해서 문학적으로 가치가 없다고 여길 수도 있고, 누군가는 그 아웃팅에 대하여 공감하고 안타까워 하면서도 소설이 지닌 고유의 미덕과 힘을 동시에 보기도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성주의적인 가치를 체현하며 가족사라는 개인적 차원의 비극을 넘어서는 영웅적인 인물을 보더라도 누군가는 그로부터 고양감(empowering)을 느낄 수도, 다른 누군가는 그러한 예외적인 영웅성이 또 다른 배제의 시선이라고 읽을 수도 있다. 작품에 대한 해석과 평가에 유일무이한 절대적 정답은 없다. 독자는 문학이 자신을 갱신하고 성장시킬 수 있는 가장 큰 동력을 제공하는 자다. 독자가 자신의 고유한 삶을 겹쳐 읽으면서 작품 속 세계와 함께하고, 감화되고, 또는 대결하면서 자신만의 오독을 발견해 낼 때 비로소 그 작품은 독자 자신만의 것이 된다.


  비평이 독자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은 작품이 갓 태어나는 현장의 최전선에서 그러한 작업을 가장 적극적으로 하는 독자이기 때문이다. 무수한 오독의 역동 속에서 삶을 더 나은 곳으로 데려가는 길이 나타나기도 하고 역으로 퇴행하는 길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읽기, 독자의 수행은 독자가 자신이 그간 살아온 삶의 역사와 몸의 감각을 총동원하여 행하는 뼈아픈 행위다. 저자의 권위 속에서 생산된 작품을 ‘나’가 읽어 낸 ‘나’의 텍스트로 해체하여 변환하는 작업이다. 소설 속에서 재현된 가상의 ‘나’가 현실의 ‘나’를 긍정적으로 재구성하거나 부정적으로 공격하여 불행하게 만들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언제나 현실과 재현의 세계는 부분 집합으로서 상호를 구성한다는 것이지 한쪽이 다른 한쪽을 완전히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40) 문학이 현실을 완전히 대체하거나 제압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낭만으로의 도피와 다름없다.


  신자유주의가 나날이 가속화되는 이 시대에 설령 가상으로 지어진 표면의 세계가 실제의 현실을 대체할 만큼 큰 위력을 지닌다 하더라도, 『브레이브 뉴 휴먼』의 세계가 말하는 것처럼 “진정성은 내면이 아니라 표면에 있으며 이미 존재하는 게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41)이라 하더라도, 비평과 독자의 시선은 언제나 그 표면을 뚫고 이면의 내부로 침투한다. 독자의 비평적 시선은 현실을 물화하는 가상 세계의 작용을 일시 중지하고 둘 사이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 게다가 당사자가 동의한 재현이든 아니든, 재현의 결과가 윤리적이든 윤리적이지 않든 문학은 우리의 삶을 축소하여 획정하지 않고 오히려 잔인할 만큼 거침없이 뒤흔든다. 문학이 추구하는 윤리는 현실 도덕의 올바름이나 정의와 다르다. 문학의 윤리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안정적으로 합의된 사회적 당위나 가치를 몇 번이고 집요하게 되묻는 급진적인 개방성과 그러한 수행이다. 그것은 그 ‘윤리’를 현실의 행위들을 정당화하기 위한 절대불가침의 준거점으로 삼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현실을 축소하려는 억압적인 시선과 행위를 내파하기 위해서다. “페미니즘의 궁극적인 목표는 페미니즘의 소멸”42)이라는 말처럼, 현실을 바라보는 여러 시선을 해체하고 비판적으로 반추하는 작업이 중단될 때가 온다면 그것은 이 세계에서 더는 페미니즘이 필요치 않게 될 때, 즉, 깔끔하게 정리된 단일한 의미의 세계만이 남게될 때뿐일 것이다.



5. 배제가 아닌 포함 속에서 ‘무단 인용’은 과연 가능한가?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사안을 바라볼 때, 김봉곤과 정지돈 사건이 문제가 되었던 것에는 재현의 주체가 남성이라는 사실 또한 포함된다.43) 2020년의 김봉곤 사건과 2024년의 정지돈 사건의 배경에는 2010년대의 문단 내 성폭력의 공론화, 해쉬태그 미투운동의 경험이 역사로 자리한다. 많은 남성 작가들이 문학 창작을 매개로 한 위계 성폭력을 일삼았고, 많은 여성들이 그러한 폭력을 축출하고 재발되지 않기 위해 힘을 모았다.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문학의 ‘비호’ 안에서 발생하는 것을 막아내고자 한다는 하나의 목표를 구심점 삼아 많은 이들이 온라인 가상 속에서 결집했다. 페미니즘 문학비평이 집요하게 맞서 싸워 온 것 역시 여성을 소비·착취 가능한 대상으로 물화하는 폭력적인 남성성의 시선이었다. 그러나 작품을 읽을 때 재현의 주체가 생물학적 남성이라는 사실 그 자체가 읽기의 선험적 한계로 미리 작동해도 되는 걸까? 우리가 미투운동을 통해 얻은 것이 과연 이러한 배제의 논리였던가? 배제의 논리는 여성들이 긴 시간 동안 대항해 온 남성적 언어와 논리의 핵심이 아니었던가. 페미니즘은 남성의 배제가 아니라 여성의 포함으로부터 출발한다.44)


  직접적으로 묻자. 남성은 페미니즘 소설을 쓸 수 없는가? 여성에 관한 적극적인 재현이 단지 작가가 남성이라는 사실만으로 문제적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가령, 남성 작가는 페미니스트 여성 인물이 경험하는 내적 갈등이나 인공 자궁에 대한 상상력을 재현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되는가? 특정한 ‘여성’의 몸을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이들(당사자성이 없는 이들, 가령, 남성이나 트랜스여성 등)이 재현하는 여성 서사는 텍스트는 당사자에게 수치와 모욕을 안겨 줄 뿐인가? 『브레이브 뉴 휴먼』이 보여 주는 임신과 출산, 가족 제도 전반에 관한 비판적이고 도발적인 접근을 단지 성적 대상화의 일환이라고 말하려 한다면, 작가의 성별이 남성이라는 사실 외에 텍스트 내부의 다른 근거들이 필요할 것이다. 페미니즘 문학은 (생물학적) 여성 창작자에 의해서만 점유되는 것이 아니며, 여성에 관한 모든 문학적 담론을 포함한다. 또한 소설의 도입부에서 제시되는 ‘패닉룸’에서의 섹스 장면은 여성의 문란함을 드러내는 장면이라기보다 소설의 세계가 구획된 섹슈얼리티의 경계 없이 역동적으로 뒤섞이는 욕망 위에서 그려짐을 알리는 부분으로 읽힌다.45) 게다가 ‘패닉룸’에서 ‘현지’와 조우하게 되는 ‘아미’가 같은 성별인 여성과의 섹스를 그것이 더 안전하다는 이유로 선호한다는 대목은 이성애 섹스 관계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폭력을 작품이 강하게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 주기도 한다.46) 다만, 작중에서 섹스하는 인물이 현실의 구체적인 대상으로 특정될 수 있는 기표(이름)가 장착되는 대목은 작가와 작품의 의도가 어떠하든 그와 무관하게 당사자에게 굉장한 불쾌감을 줄 수 밖에 없다.47) 『브레이브 뉴 휴먼』이 받아야 하는 비판은 남성이 여성에 대한 재현을 행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재현이 역으로 현실의 주체가 직접 행위한 것과 같은 오인을 불러일으키는 효과에 근거한다. 『브레이브 뉴 휴먼』이 재현하는 페미니즘의 가치와 이상이 ‘감히’ 남성에 의해 시도되었다는 것을 비판한다면 이는 페미니즘의 주체가 오직 생물학적 여성들로만 제한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강화하는 것과 같다. 또는, 작품이 견인하는 여러 문제 의식의 급진성이 (페미니스트) 여성들의 환심을 얻으려는 남성적 욕망의 산물이라고 비하하는 것 역시 우리 스스로 삶과 문학, 여성과 남성 사이의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젠더 이분법을 강화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재현의 내용이 아니라 단지 창작 주체의 성별만을 강조하며 작품을 비하/비난하는 것은 그간 문학사에서 남성 젠더가 여성 젠더를 ‘여류’로 비하해 온 역사의 역학과 동일하다. 발화의 주체가 지닌 남성성과 여성성의 맥락을 충분히 고려하며 더욱 확장적인 논의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48)


  2010년대를 건너온 우리는 당사자성의 여부를 떠나 부당하고 정의롭지 않은 문제에 관하여 결집하고 힘을 모아 해결한 빛나는 경험을 얻었다. 그러나 동시에 재현에서의 윤리성과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강박을 얻었다.49) 가령, 최근에 발표되는 대부분의 소설 안에서 남성 작가들은 남성 화자만을 주요하게 그리며, 여성 작가들은 성애적인 관계를 묘사할 때 성적인 묘사들을 적극 배제한다. 퀴어인 인물을 재현한 소설을 두고는 작가가 실제로 퀴어인가? 하는 질문이 곧장 날아들기도 한다. 억압적인 남성 지배 질서와 시스템 안에 숨어 있던 폭력을 색출하는 과정 속에서 ‘적발’하고 ‘고발’하는 시선이 지나치게 강화된 것이다. 이는 포스트 페미니즘, 미투운동 이후의 국면에서 2020년대의 한국문학, 퀴어 문학과 여성 문학이 처한 새로운 억압의 내용이다. 이때 재현은 작가에게 ‘퀴어’와 ‘여성’이 당사자성으로 마련되는 한에서 그나마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지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소설이 재현하는 인물이나 사건, 서사가 아무리 허구의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창작하고 편집할 권리가 작가 자신에게 허용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의 증상이다. 재현의 결과가 작가 자신의 실제 정체성과 겹칠 수 있을 때 그러한 부분적 일치는 2010년대 이후 문학장이 경험하는 불안을 다소 해결해 주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과 더불어 타인의 삶이 소설 속 재료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공론화되고, 실제 모델이 되는 인물이 자기 서사에 대한 배타적인 소유권을 주장하며 대치하는 상황은 작가와 독자, 비평 모두를 자기 재현에 관해 제기되는 새로운 갈등 앞으로 데려간다. 동의와 허락의 여부를 둘러싼 문제는 개인이 지닌 자기 삶을 서사화할 권리를 가시화하고, ‘나’가 타인과 연루된 세계의 실제를 허구 속으로 녹여 낼 때 과연 그 경계의 설정은 어디까지 가능한지를 물으며 창작의 권리의 범위에 관해 묻는다. 이러한 질문은 언뜻 마땅히 정당해 보이지만 문학, 예술의 세계를 이루는 것들이 철저히 타자적이라는 점을 쉽게 간과하게 만들기도 한다. 타자로부터 건네 받은 삶의 경험을 서사화할 수 있는 권리는 우선적으로 당사자 본인에게서 출발하지만, 현실에서 무수한 방식으로 연루되고 해체되기를 반복하는 존재의 관계망을 고려한다면 그러한 경험은 ‘나’와 ‘너’가 공유하며 나눠 갖는 공동의 것이기도 하다. 문학은 출처를 알 수 없는 ‘무단 인용’으로 지어진 세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경험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우연과 타자, 그리고 여러 조건과 환경으로부터 연유한다.


  그렇다면 소설 창작에서 타인의 삶이 반영되거나 그것을 들여올 때, ‘무단 인용’이라는 표현의 사용 자체가 수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50) 오히려, 소설은 현실의 출처가 분명하든 분명하지 않든, 그 복수의 출처들이 뒤섞여 원래의 출처를 알 수 없게 되기도 하는 무자비한 무단 인용의 세계다. 오토 픽션의 본격화 이후로 우리에게 날아드는 새로운 고민은 그러한 무단 인용의 세계, 사실과 허구가 뒤섞일 수밖에 없는 역학 자체를 무너뜨려 불가능한 순수의 허구를 추구하려 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복합적인 중층 작용 안에서 어떻게 최대한으로 그 복잡성을 이해하고 실제로 이어지는 피해를 막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어야 한다. 문학의 폭력과 파괴는 다른 차원으로 이행하는 열림의 파열이지 작가나 독자 그 누구의 실제 삶을 주저앉히려는 의지나 힘이 아니다. (물론 그런 작품도 분명 어딘가에 존재하겠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문학성이 과연 그런 것일까?) 문학을 포함한 예술은 ‘나’와 타자가 보유한 배타적 권리와 그 사이의 거리를 정확하게 가늠하며 상호 침범하지 않을 것을 최선의 가치로 합의하는 세계가 아니다. 우리는 서로를 침해한다. 서로를 물들이고, 서로에게 비/의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서로를 오독한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가 재현한 ‘나’의 일부를 보며 ‘나’는 재현의 의도나 결과와 다른 것을 읽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누군가에게 부정적인 방향으로 작동한다면, 나아가 그러한 재현이 실제 삶에 대한 누군가의 좋지 않은 평가나 해석으로 여겨진다면 ‘나’는 깊이 낙심하거나 절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발휘하는 창작의 자유와 그 대상이 되는 다른 누군가의 삶에 대한 자기 서사 편집권, 그리고 그 삶 자체에 대한 권리가 충돌하는 경우, 우리는 어느 한쪽을 우위에 세우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상상을 해 왔다. 그러나 복수의 자유/권리가 서로 경합할 때, 각각의 힘을 축소시키지 않면서 상생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부작용을 발생시키는 힘에 관하여 제한하고 제재를 가하는 것은 사법적인 해결의 방식이지 우리가 안착한 현실을 초과하는 더 크고 열린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문학의 방식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질문에 유의하자. 무엇을 ‘해야 할’까, 가 아니라 ‘할 수 있을’까를 물어야 한다. 규제로 작동하는 당위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능동적 행위자로서의 우리가 지닌 역능 속으로 나아가야 한다.


  정체성에 관한 자기 재현의 기술과 전시의 역능은 이때 다시 한 번 더 유효해진다. 그 어느 때보다 ‘나’를 둘러싼 타자들의 알 수 없는 시선이 곳곳에 매복해 있는 시대다. 대상화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누가’ 대상화를 하느냐가 중요해지는 국면을 경험하고 있다. 동시대 여성들은 자신을 원하는 방향과 맥락으로 대상화하는 작업을 주체의 역능으로 삼아 그를 적극적으로 발휘하며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고 욕망을 실현한다. 이는 곧 자신이 자신에 대해 갖는 주관성의 힘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말이다. 누군가 ‘나’를 재현한다면 ‘나’ 역시도 ‘나’를 재현할 수 있고, ‘나’ 역시도 ‘너’의 동의 없이 ‘너’를 재현할 수 있다. 인정하자.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얽힘의 운명이다. 서로에게 어쩔 수 없이 연루되고 마는 이 공거(共居)의 형식 자체가 우리를 난감하게 한다. 작가가 주변의 타인들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를 소설의 작고 큰 부분으로 재현하는 것이 ‘무단 인용’이 될 수 없는 이유 중 또 하나는, 형식적으로는 타인의 삶 자체가 활자로 고정되어 그에 대한 지적 재산권을 주장할 수 없는 유동하는 물질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글이 되지 않은 말과 이야기들은 세계의 공중을 떠다닌다.51)


  이러한 불가항력적인 맥락들이 경합하는 그간의 문학사에서 퀴어들은 비가시화되거나 제한적으로 타자화되고 게토화되어 왔지만 퀴어 문학은 그러한 수치를 자긍심으로 전환해 내며 퀴어의 삶을 스스로 생성하고 확장하는 중이다. 페미니즘 문학비평이 폭력적인 남성성을 체현하고 퀴어를 혐오하는 작품들에 관하여 그것을 유통되지 못하게 막아서야 한다거나, 창작의 권리를 제한해야 한다는 등 권리의 실현을 제재하는 층위의 주장을 제기할 수는 없는 것처럼, 페미니즘 문학과 퀴어 문학이 이에 대응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역으로 더 많은 발화를 생성하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서사의 편집권으로 다른 세계와 다른 가치를 써 내려가며 대응하는 일이며 그것은 수치의 역사를 딛고, 그러나 부정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페미니즘 역시 남성의 ‘입’ 자체를 틀어막는 일이 아니라 여성의 더 많은 말하기와 행동을 이끌어 내는 운동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요컨대 우리를 억압하던 폭력적 시선을 다시, ‘우리’의 맥락이 세워지는 구성적 외부로 재전유하여 오독과 오독의 치열한 대립, 그리고 경합의 장으로 더욱 깊이 나아가는 일이다. 페미니즘 문학비평은 바로 이 한가운데에 서 있다.



6. 연대 불가능의 자리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가상을 재현해 내는 것이 주체의 생존과 삶의 전략으로 대두된 시대에서 누군가가 ‘나’에 대해 부당한 재현으로 상처 입힐 때, 폭력적인 가상이 실제의 현실로 삼투하며 오염을 일으킬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대항의 실천은 그러한 오염의 국면을 낱낱이 살피고 또 다른 재현을 내보이는 일일 것이다. 재현된 가상이 현실에게 발휘하는 효과 앞에 전적으로 굴복하지 않고 그 모든 과정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새로운 재현을 생산하는 일일 것이다.52) 누구라도 ‘나’에 관해 쓸 수 있지만 ‘나’가 직접 쓰는 ‘나’의 서사는 여타의 재현물과 질적으로 다른 권위를 갖는다. ‘나’가 경험한 서사의 편집권이 배타적으로 소유될 수 없다 하더라도, ‘삶’ 자체를 창작할 권리는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불가침한 ‘나’의 권리이기 때문이다.53)


  오토픽션뿐만 아니라 ‘나’가 ‘나’에 관해 쓰는 모든 쓰기는 반드시 현실의 ‘나’를 재귀적으로 구성한다. 가령 최근의 독자들이 에세이에 관해 나날이 더 큰 관심을 갖게 되는 현상은 한 사람이 ‘나’에 관한 쓰기라는 자기 재현을 어떻게 실행하고 있는지 그 과정을 살피고자 하는 욕망의 반영이기도 한다. ‘나’가 행하는 자기 재현의 과정, 그것의 양상이 어떠한 것이냐에 따라 삶은 전혀 다른 국면으로 나아가게 된다. 다시 말해,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어떻게 써야만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쓸 수 있을까?’의 질문을 붙들어야 한다. 이때의 ‘쓰기’는 직접 문학 작품이나 비평을 쓰는 등의 문학적 실천이기도 하면서 자기 삶의 서사를 현실에서 새로운 방향으로 살아내고자 하는 전인격적인 살아냄 그 자체에 관한 실천 두 가지 모두를 담는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누군가가 조건 지어 둔 안전한 당위를 내면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의 눈, 오독하는 고유의 시선을 발명하는 일이 필요하다. 아무리 평범한 서사라 하더라도 그것이 ‘나’에 의해 작성된 것이라면 그러한 재현의 과정은 ‘나’의 삶을 예측할 수 없는 먼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도착하는 좌표는 ‘나’만의 세계가 아니라 그러한 ‘나’조차도 무수한 타자들 중 한 명으로 정위되는 타자적 세계의 한가운데일 것이다. 이미 우리 뒤에 놓인 수많은 문학이, 퀴어 문학이, 그리고 여성 문학이 그러했다. 소수자에게 가해진 폭력과 그것의 트라우마가 회복될 수 있는 방법은 상처를 없었던 것처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흉터로 만들어 끝내 자신만의 무늬로 만드는 것이다.54)


  ‘나’의 삶에 관한 서사 편집권이 ‘나’의 권리라 하더라도 그것이 한 존재의 ‘삶’ 자체가 지니는 권리나 역량이 전적으로 한 명의 주체에게 위임될 수 있는 배타적인 것이라고 여기기는 어렵다. 삶의 ‘주인’됨을 생각해 볼 때, 그것은 분명 개인으로서의 ‘나’에게 우선적으로 귀속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 삶의 출처와 배경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이 세계 자체, 또는 자연이라는 너른 범위로 귀속되기도 한다. 한 사람의 실제 삶과 그 경험을 과연 유일무이한 하나의 원본으로 여길 수 있을지 의문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경험을 재료로 삼아 생산하는 모든 ‘쓰기’는 들뢰즈의 ‘반복’과도 같다. 예술의 물질적인 재료로 동원되는 경험들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한 사람이 삶을 살아나가며 무엇을 자신으로 서사로 취득할 것인지를 타진하며 행하는 살아감 자체로서의 ‘쓰기’ 또한 마찬가지다. 들뢰즈가 말하는 반복은 흔히 우리가 ‘반복’으로부터 떠올리는 무의미함, 또는 동일성이나 유사성과 같은 자질이 아니라 ‘차이’의 생성이자 그 생산이다. 들뢰즈에게 반복은 주체의 외적인 행동이자 역량이다.55) 동일한 것으로 여겨지는 하나의 삶의 원본성에 대하여 서로 다른 시선으로 물화하려는 예술의 행위가 각각의 ‘반복’이라면 이것은 무수한 차이를 생산해 내는 작업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반복의 ‘연극’이 통상적인 재현의 연극에 대립한다고 보며, 이것은 ‘운동’과 결부된다.


  반면 반복의 연극에서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순수한 힘들이며 공간 안에서 용솟음치는 어떤 역동적인 궤적들이다. 이들은 매개물 없이 정신에 작용하며 정신을 자연과 역사에 직접적으로 통합한다. 이들은 단어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말하는 언어, 유기적 신체들보다 앞서 표현되는 몸짓들, 얼굴들보다 앞선 가면들, 등장인물보다 앞선 유령과 환영들 - ‘공포의 힘’에 해당하는 반복의 모든 장치들-이다.56)


  앞서 살펴보았던 ‘무단 인용’ 사건의 피해를 고백하는 현실의 당사자들이 작품 속에서 재현된 ‘나’의 모습에서 발견하는 것은 자신의 일부가 투영된 “등장인물”로서의 자신, 그리고 그보다 앞선 “유령과 환영들”로서의 형상화된 결과물이다. 분명 자기 자신의 살아냄으로부터 연유한 것들에서 근거하나 자신의 소유물로 인지하는 대상들을 너끈

히 초과해 버리는 재현은 ‘나’가 지닌 삶에 대한 서사 편집권, 재현할 권리와 충돌하는 “순수한 힘들”의 격동이다. ‘나’의 바깥 세계, 자연에서 넘실대는 무수한 힘들이 설령 그것이 ‘나’를 경유해서 지나간다 하더라도 그것들의 운동, 움직임에 대하여 배타적인 권한을 독점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의 삶이 그가 배타적으로 붙들고자 하는 하나의 ‘개념’이 될 수 있다고 할 때, 권리 차원에서의 ‘개념’은 “실존하는 특수한 사물의 개념일 수 있고, 그런 한에서 무한한 내포(內包)를 갖는다.”57)고 말하는 들뢰즈의 사유를 빌려 올 수 있다. 하나의 개념은 “자신이 내포하는 술어들 각각의 수준에서 봉쇄될 수 있”으며 따라서 “규정으로서의 술어는 개념 안에서는 고정되어 있지만”58) 사물 안에서는 얼마든지 그를 초과하는 무한한 내포를 발생시키며, 그래서 결국 “사물 안에서 달라지고 난 술어는 개념 안에서는 어떤 다른 술어의 대상이나 마찬가지인 셈”59)이 된다. 요컨대 사물들은 주체가 인위적으로 봉쇄60)해 둔 ‘개념’의 영역 안에서 명료하게 규정되지만 그것들이 또 다른 술어들을 통해 자유롭게 발화될 때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국면은 결국 무한함인 것이다.


  ‘술어’가 삶의 한 가지 경험을 둘러싼 여러 방식의 재현과 작품의 발화라면 작품 바깥에서 그것의 원본성을 주장하는 ‘개념’으로서의 삶은 역설적으로 삶 자체를 특정 형태로 속박하고 축소시킨다. 그러나 무수한 타자들과 여러 ‘사물’들로 구성되며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인간의 삶은 그렇게 속박되는 특정한 ‘개념’들의 복수적인 비/의도적인 얽힘으로 이루어진다. 한 사람의 차원에서 그러한 개념들이 안정적으로 구속될 수 있다 하더라도, 세계의 한 부분으로서 삶이 지니는 지위를 고려할 때 삶 자체는 결국 한 가지 개념만으로 고정될 수 없다. 그러므로 “개념의 내포에 대한 모든 논리적 제한은 1보다 큰 외연, 권리상 무한한 외연을 가져온다.”61) 우리가 하나의 삶에 대해 한 가지 종류의 술어로 서술할 때, 그러한 재현 결과는 그것과 치열하게 대립하고 충돌하는 “무한한 외연”을 생산한다. 그렇다면 작가가 ‘나’(“1”)의 삶을 자신의 작품 속으로 기입하는 쓰기는 자연스럽게 또 다른 쓰기, ‘1’을 초과하는 무한한 외연을 창발시킬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유되는 삶의 양태들이다.


  ‘나’가 경험하는 삶의 부분을 서사화할 수 있는 권리가 오직 ‘나’만이 갖는 배타적인 소유권일 수 없을 때, 타인의 힘이 ‘나’의 삶에 개입하게 되면서 여러 충돌과 갈등, 피해와 상처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문학은 지극히 타자적인 세계이며, 그곳에 포함되는 ‘나’ 또한 자신에 대한 배타적인 소유권을 지닐 수 없는 타자가 된다. 문학은 이를 둘러싼 무수한 시선의 오독들이 치열하게 경합하는 장이기에, 우리는 예측 불허로 날아드는 행복과 불행을 모두 안아들고 자신만의 읽기와 쓰기를 계속해 나갈 수밖에 없다. 문학 속 가상이나 실제의 현실 한쪽으로 의미를 수렴시키지 않으려 애쓰면서, 그러한 중력을 매 순간 쳐내면서 그것을 초과하는 차원으로 돌파해 나아가야 한다. 주체가 행하는 노력의 차원에서도 그러하겠으나 실질적인 차원에서도 하나의 재현은, 그리고 그것이 부분으로 끌어안는 한 사람의 삶은 가상과 현실 그 어느 한쪽으로 배타적으로 귀속되지만은 않는다. 들뢰즈가 말하듯, 봉쇄된 개념의 배후에는 또 다른 술어들의 무한한 생성 작용, ‘반복’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무한정한 내포를 지니는 한에서 자연의 개념들은 항상 다른 사물 안에 있게 된다.”62)는 그의 말처럼,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쩌면 삶의 특정한 원본성은 수립될 수 없음을, 다만 그것을 둘러싼 무수한 ‘반복’의 쓰기와 재현만이 운동하고 있을 따름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미투운동은 그간 쉽게 밝혀지지 않았던 가해와 피해의 구도를 힘껏 견인해 내는 데에 힘을 모았던 소중한 경험이다. 우리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 역사적 경험은 그 ‘이후’의 시간 속으로 막 들어서는 우리에게, 폭력이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고 손쉽게 채택할 수 있는 구도이자 도구가 되었다. 가해와 피해의 구도가 명확해야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있는가 하면 그러한 이분법을 초과하는 더욱 입체적인 경우도 있다. 혹은 가해자나 피해자가 없는데도 분명하게 실재하는 폭력도 있다. 재현의 윤리에서 우리가 더욱 섬세하게 접근해야 하는 부분은 폭력과 상처에 관한 위의 세 가지 경우에 대하여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적 구도를 일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심지어 가해와 피해의 구도가 명확한 사안에서조차 가해자의 처벌은 문제 해결의 궁극적인 최종 국면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피해자의 구제. 그리고 폭력이 발생한 구조와 시스템이 정화가 이루어지기 위한 하나의 과정적인 부분이다.63)


  소설의 재현 윤리에 관한 갈등은 성범죄의 사안과 명백히 다르다. 피해자의 피해는 현실의 신체나 재산에 가해진 유형력이 아니라, 현실과 가상이 중층된 복합적인 차원에서 그가 읽어 내는 ‘읽기’의 효과로 발생하는 주관적인 감정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모든 폭력의 해결이 반드시 처벌로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화와 합의, 사과와 인정

등으로도 어떤 폭력은 더 잘 해결될 수 있으며 향후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도 재발을 막을 수 있는 논의의 과정을 형성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문학사에서 ‘적발’과 ‘처벌’ 외의 방법으로 폭력을 해결해 온 경험은 아직 없었고, 미투운동의 중력 속에서 그러한 전인격적인 접근 방식은 해결에 대한 회피나 기만적인 타협으로 여겨지기 쉽다. 그러나 미투운동에서 가해자의 응당한 처벌과 피해자의 구제는 가해와 피해의 정체성을 획정하기 위함도, 남성 젠더를 모조리 축출해 버리기 위함도 아니었다. 우리는 더 많은 여성들의 존재와 목소리가 들리고, 보이는 세계를, 하나의 시선으로만 형상화되는 재현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선이 경합하고 불화하면서 생성하는 교차적인 재현의 무수한 등장을 욕망했다. 이 글에서 다루는 문학적 재현에 관한 일련의 사안에 대하여 손쉽게 피해와 가해의 구도를 들이대려 하는 시선이 있다면, 어쩌면 미투운동에서 우리가 경험했던 고발의 효능감을 무리 없이 재경험하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그를 통한 주체의 윤리성을 강화하고자 하는 욕망이 그 시선의 내면을 압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냉정하게 되물을 필요가 있다. 매체의 가상이 실제의 현실과 더욱더 긴밀히 중첩되고 동화되는 양상을 보이는 현재와 미래의 예감 속에서, ‘적발과 처벌’, 그리고 ‘피해와 가해’의 이분법적 구도를 적용하는 것은 사안의 복잡성을 단순화할 뿐이다.


  우리는 어떤 사안에 대하여 연대하고자 하는가? 또는 무엇을 위해 연대를 필요로 하는가? 개인과 개인들의 산술적인 집합을 초과하는 유기체로서의 구조와 제도가 부당한 권력을 행사할 때 우리는 연대하고자 한다. 언뜻 그 자체로 절대적인 윤리를 지시하는 말인 것처럼 보이는 ‘연대’는 그러나 성스러움보다는 아주 실용적인 차원의 효용 때문에 필요하다. 시스템이 자행하는 불의와 폭력, 억압을 악이라 부를 수 있다면 선은 살아 있는 구체적인 개별자들, 한 사람만큼의 크기를 지닌다. 그러므로 선은 필연적으로 악보다 약하다. 본질적으로 무력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지닌 힘의 크기와 그 작용 범위가 상대적으로 열세에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연대한다. 구조적인 악에 맞서고 그것을 능가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을 모으기 위해서, 악이 제 힘을 증대시키기 위해 취한 동일한 편법과 술수를 모방하거나 정당화하지 않으면서 그에 대항할 수 있는 만큼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결국, 작은 선(善)들이 응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구조적 악에 맞서는 선은 언제나 작다. 그러나 크다. 연대는 이러한 모순을 성공적으로 성립시킨다.


  그러나, 만약 ‘나’가 당한 폭력과 불의가 구조적인 악이 아니라 의도와 비의도가 중첩되어 있고, 가상과 현실의 상호작용이 만들어 내는 복잡함과 모호함 속에서 파생된 결과이자 의도를 초과하는 재현의 효과라면, ‘나’가 행할 수 있는 대항의 실천은 연대가 들어서기 어려운 독립의 자리에서 마련되기도 한다. 3장에서 말한 바처럼, 우리는 지금 이 글에서 피해와 가해의 이분법적 구도를 강화하는 게 아니라 바로 그것의 균열과 사이 공간을 살피고 있다. 이 비좁은 틈새에서 피해자의 구제는 어디로부터, 어떻게 성취될 수 있을까? 자신의 삶이 여전히 자신의 것이라는 감각의 확인, 자기 삶에 대한 서사 편집권이 상실된 것이 아니라는 인지, 그리고 얼마든지 그 삶은 ‘나’에 의해 다시 쓰일 수 있다는 역능의 재발견이 필요하다. ‘나’는 자신이 소설 속에서 겪은 모든 행태에 관해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자신이 느끼는 분노와 부당함은 얼마든지 표현될 수 있다.64) 타자로서의 우리가 할 수 있는 실천은 그가 표현하는 여러 감정과 생각을 경청하는 일이다. 마치 사법 주체가 행하는 것처럼 사안을 판정하고 색출과 검증, 검열의 태도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이야기를, 그 유동하는 모호한 물질을 덩어리째로, 훼손하지 않고 오롯하게 듣는 일이다. 이때 ‘사람’의 항에 놓이는 것은 피해 당사자뿐만 아니라 작가와 독자, 출판사 등 사안에 연루된 모든 문학의 주체다. 그러니 우리는 ‘나’와 다른 의견과 입장을 지닌 그 누구와도 ‘대화’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 이때, 말하기의 자질을 위해서 그보다 선제적으로 요청되는 자질은 ‘듣기’다. 듣지 않는 말하기는 다른 종류의 발화를 막아선다. 상대방의 침묵은 대화를 거부하는 회피의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지만, ‘나’가 ‘너’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지 않았음에 대한 방증이기도 한다. 이야기하던 누군가가 도중에 입을 다문다면, 그의 입닫음 자체를 비난하기보다 ‘왜’ 그가 침묵을 선택하는지에 대한 숙고 또한 필요하다. 대화는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 이상이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65)


  인간이 한 인간을 평등하게 대우한다는 것은 서로가 지닌 계급성의 차이를 무화하여 기계적인 동질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기만이다) 각자가 서 있는 다른 좌표를 인정하고, 서로의 차이가 발생시키는 이야기들을 힘겹게 듣는 일이다. 그로 인한 ‘너’와의 연루를 정직하게 감당하는 일이다. 우리가 그간 기민하게 경계해 왔던 타자화는 이와 정반대의 작업이다. 그것은 ‘나’가 ‘너’와의 연루를 적극 부인하는 일이다. 마치 ‘너’의 차이와 고유함을 겉으로는 인정하는 듯하면서도 그가 ‘나’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을 막아서고, 혹은 그 진입이 실제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극구 부인하는 것이다. 만약 ‘나’의 세계가 그 어떤 타자적인 존재나 힘과의 연루 없이 순수하게 배타적인 ‘나’만의 행위들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나’가 자기 자신을 대상화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나아가 스스로를 타자화하는 일이 되고 만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주체들이 처할 수 있는 자기 소외의 위험이다. 그러한 타자화의 과정이 행해질 때 ‘너’의 세계는 ‘나’에 의해 (겉으로는 비폭력적으로) 게토화된다. 그러니 상대를 타자화하지 않면서 그의 말을 듣는 일은 그가 ‘나’에게 던지는 말에 의해 적극 오염되고자 하는 일이다. 타자의 이야기가 ‘나’의 세계로 침투하지 못하고 주변을 공회전하는 일은 경청이 아니라 ‘나’와의 연루를 차단하는 고도로 기술화된 배제의 결과다. 오가는 대화 속에서 그 누구도 변하지 않고 자기만의 입장을 고수한다면 그것은 실상 서로의 일방적인 방백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상대방의 말을 ‘들을 수 있는 대화’로 진입하게 된다면 ‘적발’과 ‘처벌’이 아니라 ‘사과’와 ‘인정’ 그리고 사유의 갱신을 반드시 마주하게 될 것이다.


  경청의 작업에는 생각보다 상당히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어쩌면 우리는 죽기 전까지도, 동일한 하나의 이야기를 몇 번이고 다른 판본으로 반복해서 들어야만 하는지도 모른다.66) ‘나’가 ‘나’에 관해 말한다는 것은 단지 일방적인 말하기만을 뜻하지 않는다. 화자로서의 ‘나’는 ‘나’에 관해 쓰고, 말함으로써 ‘나’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는 청자의 위치에 놓이기도 한다. 결국 내가 ‘나’의 이야기를 쓰고 말하는 일은 ‘나’가 자신을 다시 듣는다는 점에서 ‘듣기’이자 ‘읽기’다. 말하자면, ‘나’에 관해 쓰는 작업은 인스타그램에 올려 둔 매끄럽게 편집된 사진과 멋진 해시태그들을 통해 ‘나’를 원하는 대로만 편집하고 전시하는 일로 축소되거나 환원될 수 없다. ‘나’를 전시하는 주체인 ‘나’ 또한 자기 자신을 향한 한 명의 타자가 됨으로서, 인스타그램에서 순전히 관객이기만 하던 타자들과 ‘나’의 관계는 분리되지 않고 뒤섞인다. ‘나’ 또한 ‘나’의 관객이다.


  연대가 공감의 자리에서 최초로 마련된다는 데에 동의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서로의 고통에 대해 완전히, 그리고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니다. ‘나’ 자신이 ‘나’와 맺는 관계까지 포함하여, 우리는 서로에 대한 타자다. 타자로서의 우리는 서로를 열렬히 오해하고, 열심히 오독하면서 일평생 함께 살아간다. 이 지구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러한 운명적인 얽힘을 받아들인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공감에서 마련되는 연대의 자리는 타자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나’만이 말할 수 있는 고유한 응답의 언어를 내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67) 하나의 삶은 수많은 서사를 내포하고 여러 개의 삶이 한곳에서 만나 얽힐 때, ‘나’가 ‘너’에게 혹은 ‘너’가 ‘나’에게 증여할 수 있는 공감의 반응은 서로 다를 것이다. 어쩌면 전혀 공감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언어들의 조합으로 공감을 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각자의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논한 사안들에 대하여 단일한 의견의 합치를 무의식적으로 기대하고 욕망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피해자를 구제하고 사안을 해결하고 재발을 방지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하나됨의 연대로 이루어지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미투운동의 경험이 그러한 낙관적인 믿음을 더욱 강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이후’의 자리에서 진정으로 ‘차이’와 ‘대화’를 중요하게 여긴다면 공론화되는 사안들은 이전보다 반드시 더 복잡해질 것이며 깔끔하게 해결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만이 더욱 확실해지리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미 경험했던 모습의 ‘연대’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 현실이 문학적 재현의 가상 안으로 그 어느 때보다 깊이 들어올 때, 실제와 가상은 둘 중 어느 하나로 귀속되거나 동화되지 않는 새롭고 복합적인 차원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이때 우리가 주목할 것은 제출된 복수의 의견들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여 정답으로 신격화하며 그와 다른 의견들을 폄하하고 배제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 서로 다른 ‘응답’들이 게릴라적으로 한곳에 모였을 때 발생시키는, 아주 낯선 차원에서 드러나는 복수의 ‘오답’들의 자리다. 조악하게나마 비유하자면 1+1=1 이 아니라 1+1>2 가 되는 차원으로 진입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우리’일 수 있는 것은 무수한 ‘나’들이 만들어 내는 교집함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것의 바깥에 있는 차이들 때문이다. 미투 국면을 통과하며 페미니즘은 우리에게 여성 간 연대의 고양감을 주고 사안에 대한 결집력을 높였지만 이제는 거기에만 머무르지 않고 더욱더 복잡한 불화의 국면으로 나아가야 한다. 문제를 제기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서 서로 다른 페미니즘의 입장들이 태어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할 차례다.68)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를 적대시하고 불화하고 미워하기도 하겠지만, 누구든 자신의 오인과 한계를 정확하게 인정하되 합리화하지 않으면서 사과를 주고 받을 수 있다면, 새로운 ‘이후’의 차원은 비로소 열릴 것이다. 역동하는 게릴라적 연대 속에서 나타날 비판의 낯선 얼굴을 기대하는 시간, 그것이 우리 앞에 놓인 ‘이후’의 시간이다.


*


  ‘정치적인 것은 개인적인 것이다.’로 설명되는 국면 속에서, 누군가들이 특정한 정치적 사안에 관하여 다른 이들과 뜻을 모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공동의 입장이나 정체성으로 모아지기보다 그것을 전시하는 주체 개인에게 전적으로 귀속되는 재현물의 한 부분임이 더욱 강조된다. 재현되는 ‘나’의 정치성 또한 전적으로 ‘나만의’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연대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앞으로 우리가 목격하게 될 연대는 과거의 모습과 분명 다를 것이며 사안의 해결과 그 필요에 따라 이합집산 하는 게릴라적인 양태에 가까울 것이다.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복수의 주체가 실천하는 행위들이 점점 더 보이지 않는 형태로,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도 복잡하고 어려운 방식으로 얽히리라는 것이다. 이때 사법적 권력의 시선인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적 구도를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것으로는 결코 더 나은 국면을 향해 나아갈 수 없다. 페미니즘이 재현 윤리와 만날 때,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역사적 경험이 만든 맥락 속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맥락들을 세심하게 살펴보는 작업이지, 창작과 재현의 당위를 설정하고 그를 위반한 존재들을 소거하여 창작의 권리를 박탈하며 문학의 범위를 축소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삶과 문학, 재현과 정치, 주체와 대상, 페미니즘과 신자유주의 등의 열쇳말을 통해 살펴본 바에 따르면 페미니즘 문학비평의 실천은 마치 사회학자가 인터뷰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상을 기존의 개념과 도식 안으로 분류해 넣는 것이 아니라) 그가 여태 보유하던 개념과 도식을 해체하거나 확장하고 수정하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최근 발생한 정지돈 작가의 사건은 2020년에 일어났던 김봉곤 작가의 사건에 무리 없이 적용되었던 성범죄자 처벌과 유사한 피해와 가해의 이분법적 구도의 적용이 타당하지 않았으며, 사안의 복잡성을 깊이 다루지 않고 판매 중지 조치 등으로 성급하게 해결한 것의 부작용으로 재발견된다. 기시 마사히코의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해결하고자 할 때 그것은 반드시 이전보다 복잡해질 것이다. 인간이 지구 위를 살아가는 한 페미니즘이 소멸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삶이 있는 한 폭력은 완전히 사라질 수 없고 우리가 그에 관해 성찰하면 할수록 더욱 많은 모순과 마주할 것이다. 사건이 물리적으로 종결된다 하더라도 그것의 사후적인 화학 작용은 몇 번이고 삶 속으로 재침투해 들어올 것이기 때문이다. 사안에 대한 우리의 반추와 성찰, 그리고 비판은 계속될 것이고 그와 유사한 사건들이 다만 ‘차이’나는 것으로 ‘반복’ 생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문학은, ‘읽기’와 ‘쓰기’는 그러한 모순을 끝없이 안아 들며 앞으로 나아가는 아주 느리고 더딘 자기 구원의 작업이며, 그것은 개별자로서의 ‘나’의 의도와 욕망을 초과하는 공유지에서 행해진다.


  ‘인간에 관한 이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런 상황에 있다면 그런 행위를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이해’, 또한 그런 상황에서 한 그 행동에 얼마나 책임이 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이해’의 집합이다. 이 이론은 폭주하여 상호 모순되는 다수의 가설을 축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이론은 더욱 가설을 늘리려고 한다. 즉, 상호 모순되는 가설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모두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실물과 같은 크기의 지도를 그리려는 듯, 모순되는 가설들을 최대한 늘리려 한다.69)


전승민 2020년 대산대학문학상 수상과 202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며 비평을 발표하기 시작.

  • 1) 이 글은 '문학들 2024년 여름호에 실린 '퀴어 일인칭을 위한 변론-오토픽션과 문학의 윤리성에 관하여에서 다룬 소설의 재현 윤리에 관한 논의의 연장이자 확장이다(해당 글은 평론집 「퀴어(포)에티카」(문학동네, 2024)에 약간의 윤문을 거쳐 수록되었다). 더불어, 이하의 내용은 2024년 8월 3일에 최종으로 작성되었으며, 글 속에 반영된 사실은 해당 시점까지 누구든 접근할 수 있는 공개적인 차원에서 밝혀진 사실과 입장문에 근거하여 쓰였음을 밝힌다.
  • 2) "Literature is no one's private ground: literature is common ground. [......] Let us trespass freely and fearlessly and find our own way for ourselves." Wooll, Virginia, "The Leaning Tower." The Essays of Virginia Woolf: Volume 6: 1933~1941, Hogarth Press, 2011. 번역은 인용자.
  • 3) 지난 5월, 미국 뉴욕의 최고 법원은 와인스타인의 2020년 강간 범죄에 대해 내렸던 유죄 판결을 뒤집었다. 현재 72세인 와인스타인은 2006년 TV/영화 제작 스태프에게 강제로 구강 성교를 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2013년 한 여성 배우에 대한 3급 강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23년형을 선고 받고 현재 뉴욕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2022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또 다른 강간으로 유죄 판결과 16년형을 선고 받았기 때문에 그는 계속 투옥될 것이지만, 뉴욕에서 증언한 여성 중 한 명에 관련된 혐의에 대해서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New York Appeals Court Overturns Harvey Weinstein's 2020 Rape Conviction From Landmark #MeToo Trial," EL PAÍS English, April 25, 2024, https://english.elpais.com/usa/2024-04-25/new-york-appeals-court-overturns-harvey-weinsteins-2020-rape-conviction-from-landmark-metoo-trial.html
  • 4) 머리 짧다고 여성 구타... 대검, '진주 편의점 폭행 사건' 엄정대응 지시 <한겨레>. 정환봉 기자, 입력일 2023, 11, 21.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17180.html
  • 5) 조선정, 포스트 페미니즘과 그 불만 영미권 페미니즘 담론에 나타난 세대론과 역사쓰기 「한국여성학, 30권 4호, 2014, 51쪽.
  • 6) 김지효, '20대 여성의 인생사진 문화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협동과정 여성학과 석사학위논문, 2020,
  • 7) 소비는 자신을 구성하는 정체성의 일부가 되고, 무엇을 구매할지에 관한 고민은 따라서 '나'의 정체성을 어떻게 편집하고 재구성할지에 관한 문제로 재귀된다. 자신이 생각하는 윤리적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제품/기업을 불매하는 움직임인 '캔슬 컬쳐' 등이 이와 같다. 이는 SNS 시대의 소비자 '보이콧'의 한 형태로, 반드시 '윤리적'인 맥락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가령, 직원을 대상으로 페미니스트 사상 검증을 실시했던 게임회사 넥슨에 대한 여성 유저들의 불매 운동뿐만 아니라, 페미니스트로 여겨지는 연예인의 광고 모델로 사용한 맥도날드에 대한 남성 유저들의 불매 운동도 같은 맥락 속에서 파악될 수 있다. "넥슨, 여혐 논란 침묵하더니..." 여성 게임 유저 '불매운동' 확산 (경향신문), 박채연·윤기은 기자. 입력일 2023. 12. 10.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312102135025, 「재재, 맥도날드 모델되자... "페미 요람 이대 출신, 불매하자" <한국경제신문>, 김예랑 기자, 입력일 2021. 5. 3.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105033697H
  • 8) "예쁜 페미니스트가 말하면 좀 더 다가가기 쉽다고 생각했고, 좀 더 먹힐 거라 생각했어요. 페미니스트이기 이전에 여자로서 그 사회에 들어가려면 일단 기본적인 꾸밈을 해야 해요. 기본적인 꾸밈. (………) 내가 꿈꿔 온 커리어우먼, 되게 멋있는 대학생 언니에 대한 이미지가 있잖아요. 그걸 구현하면서 저를 정말로 잘 가꾸고 잘 통제하는 사람이 페미니즘 이야기를 했을 때, 더 잘 먹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김지효, '인생샷 뒤의 여자들, 오월의봄, 2023, 206쪽.
  • 9) 김지효, 위의 책, 208쪽.
  • 10) 가령 어떤 여성들은 탈코르셋을 실천하고 자신이 코르셋은 벗은 사람임을 입증하는 '탈코' 행위를 열렬히 전시한다.
  • 11) 그간 여성을 억압해온 외모 강박과 그를 대상화하는 남성의 시선을 전유하여 메갈리아는 역으로 남성들을 외모 평가의 대상으로 삼는 전략을 보이기도 했다. "young and rich, big and handsome, tall and muscle(어리고 부유하며 잘생기고 몸이 좋고 키가 크며 성기가 큰 남성을 지칭하는 은어)"라던가 "dutch face(더치페이를 미러링한 단어로 남성이 여성만큼 꾸밈에 공들이지 않아 여남 간 외모 격차가 큰 상황을 비꼬는 은어)" 또는 어느 안경점에서 만든 이미지로 한국 남성의 '표준' 외모라며 "십이한남 (한국 남성들이 외모를 꾸미지 않아 거의 다 외모가 비슷하다는 점을 비꼬는 이미지)" 짤을 만들어 조롱하는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김지효, '메갈리아와 '미러링': '얼평'의 대상이 된 남성들, 앞의 책 211~212쪽.
  • 12) 트위터 닉네임 "다이섹슈얼"(@kuntakinte1231) 2020년 7월 10일 게시물. https://twitter.com/kuntakinte1231/status/1281501681042120709? qvjgiHix4zYMbllwtx689g&s=19
  • 13) 인용한 대목은 다음의 기사에서 가져왔다. 「카카오톡 대화 인용한 김봉곤 소설 법원 "무단인용 아니다" 한소범 기자, <한국일보> 입력일 2021. 10. 5.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1100514250004812#
  • 14) 전승민 '퀴어 일인칭을 위한 변론: 오토픽션과 문학의 윤리성에 관하여」 「퀴어 (포)에티카, 문학동네, 2024, 181쪽.
  • 15) 이 사안에서 사법 주체의 판단을 신뢰할 수 있는 이유는, 특히 한국 법원이 성범죄에 대해 선고하는 가벼운 형량을 고려한다면 모든 사법적 판단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실정임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인용 허락의 여부에 관해서는 법원이 작가와 피해자 두 당사자의 내밀한 입장과 사정을 살필 수 있는 최선의 객관적 주체였기 때문, 그리고 성범죄의 사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설의 내용 일부가 미흡하다고 한 'C누나'의 말로 미루어보건대 그가 자신의 대화가 소설 안에 들어가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거부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16) 현재는 트위터의 원본 게시글을 읽을 수 없는 상태이나 한 블로그에 당시 트윗의 전문이 이미지로 공유되어 있다. 「김봉곤과 오토 픽션 - 쓰는 사람의 윤리, 작성자 유해, 입력일 2020. 7. 18. https://m.blog.naver.com/yoozont/222034220808
  • 17) "소설속 영우입니다" 또 사생활 아우팅... 김봉곤 책 판매중지, 김호정 기자. <중앙일보> 입력일 2020. 7. 19.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828040
  • 18) 김현지 본인의 블로그, [공지] <김현지, 김현지 되기> 작성자 사스미, 입력일 2024. 6, 23, https://blog.naver.com/pasilda/223488600534
  • 19) 위의 사이트,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 작성자 사스미, 입력일 2024. 7. 21. https://blog.naver.com/pasilda/223520532731
  • 20) "애를 가진 상태로 열 달 동안 있으면 그런 생각이 사라질 거라고 믿었어. 나도 보통 사람처럼, 모성의 위대함과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을 거라고, 하지만 아니었어. 내 몸을 차지하고 영양분을 빨아들이는 얘가 미워 죽을 것 같았어. 내가 죽지 않고 버틴 이유는 지지 않기 위해서였어." 정지돈, 브레이브 뉴휴먼 은행나무, 2024, 185쪽.
  • 21) 정지돈, 위의 책, 16쪽.
  • 22) 김현지는 자신이 모델이 되는 소설 속 인물 '권정현지'가 "엄마 없이 소설 속을 떠돌고 자기가 임신한 태아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고 [소설은 인용자] 이미 너는 실패한 세계를 살고 있는 거라고 단언한다고 해석하며 자신이 느끼는 슬픔을 말했다. 서사가 중요하게 견인하는 핵심적인 가치가 누군가에게는 '좋은 것으로 여겨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물의 특정한 요소들은 당사자의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다. 김현지 본인의 블로그, <천하의 정지돈이 왜 이리 혓바닥이 길어?>」 작성자 사스미, 입력일 2024. 6. 27. https://blog.naver.com/pasilda/223493531083
  • 23) 이광호는 고은과 김수영의 시를 젠더적인 관점으로 다시 읽는 글에서 여성 혐오를 행하는 남성중심성의 재현에 관해 "다시 읽기와 재배치를 통해 한국문학 전반에 구축되어 있는 왜곡된 젠더 시스템을 폭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여성 혐오의 흔적을 삭제한 한국문학의 목록은 오히려 '혐오 없는 세상'이라는 허구적인 믿음을 가져다 준다. 비평이 여성 혐오에 관하여 행할 수 있는 문학적 수행은 작품을 삭제하여 독자들이 접근 불가한 세계로 이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그러한 작품들에 관한 비판적 읽기를 몇 번이고 다시 시작하는 일이다. 이광호, 저 책들을 불태워야 할까? 정치적 올바름과 비정체성의 '문학 정치' 작별의 리듬 문학과지성사, 2024, 80쪽.
  • 24) 그러나, 타인으로부터 공유받은 폭력의 피해 또는 트라우마의 경험을 문학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은 그중에서도 더욱 섬세히 고려되어야 할 예외적인 경우다. 가령. 무엇보다도, 작가는 타인이 경험한 폭력을 재현하고자 할 때, 인간과 작품의 존엄성을 지키는 차원에서 당사자와 사전에 충분히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소설이나 시로 가공된 타자의 경험이 그의 실제 삶으로 반향되며 삶을 재구성하는 효과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문학의 '읽기'는 독자의 삶을 재구성한다. 그러나 그 효과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경우에는 문제적일 것이다. 문학의 '폭력성'은 현실의 '구속력'을 파괴하며 더 나은 '열림'으로 이끄는 힘이지, 삶을 (예컨대 피해자라는) 하나의 차원 안으로 몰아넣고자 하는 '닫힘'의 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어떤 삶의 모양은 피해자로서의 지위를 획득하는 과정 속에서 더욱 생생하게 가시화되어 열리기도 한다. 이러한 모순적인 복잡성을 고려한다면, 타인의 '피해' 자체가 재현될 수 없다는 당위로 나아가기 이전에, 그것이 어떤 맥락으로 서술되는지에 따라 (독자이기도 한) 당사자의 반응이 다를 수 있으며, 작가가 의도한 맥락과는 독립적으로 별개의 주관적 반응을 보일 수 있음을 살펴볼 수도 있다. 예컨대 경험의 직접 당사자는 가공의 정도와 재현의 방식에 따라 작품 속에 반영된 것이 자신의 경험이라고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 25) "그렇다면 독자의 그러한 주관적인 감정이 작가의 소설세계와 그것을 구성해 온 소설론을 단번에 무너뜨릴 만큼의 위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독자의 권위에서 온다. 소설의 핍진성, 정당성, 문학성과 미학성에 대한 승인은 이제 비평이 아니라 정말로 독자로부터 상당 부분 발생하게 됐다." 전승민, 앞의 글. 퀴어(포)에티카, 문학동네, 2024, 197쪽.
  • 26) 누군가에게 사과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인 셈인데 왜냐하면 사과를 원하는 이가 상대방에게 동등한 인격적 대우를 행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처받은 이가 사과를 기대하지 않는 국면에서 상처를 준 이는 더 이상 누군가의 세계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비인격적 존재로 추락한다. 그 어떤 발화도 의미를 갖지 않으며, 그것이 발화의 수신자에게 그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을 때 발화의 주체는 실상 주체의 지위를 상실한 것과 마찬가지다.
  • 27) 「성재기 남성연대 대표 사흘만에 주검 발견 <한겨레>, 박유리 기자. 입력일 2013. 7. 29.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7554.html
  • 28) 이는 사안을 둘러싼 비평과 출판사, 그리고 독자들이 각기 감당하던 불안과 두려움이 크게 작용한 결과다. 문단 내 성폭력 이후의 문학장의 분위기 속에서 피해자의 호소는 곧장 독자 다수의 공감으로 발화되었으며, 독자로부터 외면 받을 것에 대한 출판사들의 공포는 사안에 대한 입체적인 논의가 아니라 문제를 '삭제'할 것만이 유일한 해결법인 것으로 간주하게 했다.
  • 29) 해당 작품은 현재 도서관에서도 대출 불가한 상태다. 이 글은 그러한 현재적 한계를 사안이 처한 현실로서 동반하고자 한다.
  • 30) 최영미는 2017년 시인 고은의 성범죄를 폭로하며 문단 내 성폭력 고발 운동을 점화했다. 그는 고은의 시를 교과에서 빼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밝히며 "고은의 시가 생명력이 있다면 교과서에서 빼든 빼지 않든 살아남을 것이다. 반대로 그의 시가 생명력이 없다면 교과서에 실리든 실리지 않든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투' 촉발 최영미 "고은 시 교과서에서 빼는 것 반대" <한겨레>, 김미향 기자, 입력일 2019. 10. 19. https://www.hani.co.kr/arti/area/area_general/851721.html
  • 31) '라벤더 위협'은 1969년 당시 전미여성기구(NOW, The 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의 대표였던 베티 프리단이 처음 사용한 말로 페미니즘 진영이 레즈비언들과 연합할 때 맞닥뜨릴 위험을 의미한다. 프리단은 레즈비언들이 페미니즘 진영의 구심력을 흩뜨린다고 보았으며 레즈비언들을 배제하려고 했다. 페미니즘 내부의 이러한 충돌과 갈등은 '레즈비언 페미니즘'을 태어나게 했고 1970년 리타 매 브라운 등이 '라벤더 위협 그룹(the Lavender Menace Group)'을 창설함으로써 페미니즘 운동의 새로운 활력을 이끌었다. 라벤더는 게이와 LGBT+ 진영을 뜻하는 색상이기도 하다.
  • 32) 정지돈, 앞의 책, 112쪽.
  • 33)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성의 변증법, 김민예숙·유숙열 옮김, 꾸리에, 2016.
  • 34) 프로이트의 도식을 경유하며 해방의 급진성을 보여 주는 듯한 이 주장은 그러나 동성애자들을 가족 제도의 변이 또는 희생자라고 해석하며 가부장제 가족 제도가 사라지면 동성애자들 또한 사라지리라는 비약적인 결론에 도착한다. 페미니즘이 여성의 해방을 위해 동성애자들을 삭제할 수밖에 없다는 그녀의 주장은 명백한 동성애 혐오이며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다. "우리 시대의 동성애자들은 가족에서 발전한 왜곡된 성적 제도의 극단적인 희생자들일 뿐이다." 파이어스톤, 위의 책, 91쪽,
  • 35) 정지돈, 앞의 책, 26쪽.
  • 36) "우리는 일종의 실험이었을까? 만약 실험이었다면 이 실험은 성공일까, 실패일까? 광장에 모여서 고개를 쳐들고 스크린을 바라보는 체외인들의 마음속에는 어쩔 수 없는 의문과 질문이 떠올랐다." 정지돈. 위의 책 187쪽.
  • 37) "상처받았다구요. 힘들다구요. 당신이 김현지를 'H'라는 이름으로 불행하게 소설 속에 가둬 버려서 그게 겨우 내 전부일까 봐, 불행한 내가 전부일까 봐 너무너무 슬프고 아프다구요. 근데 이게 다가 아니잖아요." 김현지 블로그, 앞의 글.
  • 38) 김봉곤의 오토픽션이 발휘하는 가장 핵심적인 예술성과 미학은 작가가 재현한 예술의 가상이 실제의 '나'를 역으로 구성하면서 퀴어로서 그가 내면화했던 수치심을 자부심으로 전환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그러한 방법론을 펼치는 과정에서 '영우'의 아웃팅이 발생했고, 물론 이를 윤리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 39) 그가 김현지의 글을 일부 반박하며 소설에 재현된 인물의 캐릭터성이 실제 모델의 삶의 서사와 일치하지 않음을 입증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 소설의 방법론이 그로 인해 무너질 위험에 처하는 것을 막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간 정지돈이 발휘해왔던 소설적 방법론이 실제 현실의 기표들을 소설의 가상 속에 배치하여 가공된 상상력과 함께 녹여내 원본성을 삭제하며 현실과 가상을 다른 차원으로 연동시키는 것일 때, 소설 속의 특정 부분이 실제의 기호와 완벽한 일대일 대응 관계를 이룬다고 말하게 된다면 자신의 작법이 더는 유효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정지돈 블로그, 현 상황에 대한 제 입장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작성자 jidon2024, 작성일 2024. 6. 25. https://blog.naver.com/jidon2024/223490507152
  • 40) 그런데 만약, 소설 속 인물이 경험하는 일련의 사건과 섹슈얼리티 등이 현실의 실제적인 폭력으로부터 기인했고, 작가가 자신이 실제로 가한 (성)폭력을 작품으로 서사화한 것이라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것은 성범죄자가 문학의 힘을 남용하여 피해자에게 새로운 폭력을 가한 행위다. 이 글의 1장에서 밝혔듯, 미투운동은 언제고 다시 시작될 수 있다.
  • 41) 정지돈, 앞의 책, 152쪽.
  • 42) 손현주, '페미니즘의 궁극적인 목표는 페미니즘의 소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15호 2018, 30쪽.
  • 43) 전승민, 이 글의 2장, 78쪽.
  • 44) 리베카 솔닛은 페미니즘을 자신들의 이익이 배제당하는 것이라고 느끼는 여러 남성들을 향해 아래와 같이 말한 바 있다. 남성들에게 있어 페미니즘이 그들의 몫을 빼앗으려 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여성들의 입장에서 페미니즘은 남성들을 배제하는 운동이 아니(어야 한다.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 어느 한쪽의 힘을 축소하고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소외되었던 여성의 입지와 영역을 최소한 남성과 동등한 출발점 위로 놓아두려는 운동이다. "페미니즘의 목표는 남성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더 많이 포함시키는 것이다. 남성은 항상 배제되지 않았다. 좀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자본주의적 희소성 개념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희망, 자신감, 정의 등 비물질적인 가치는 양이 무한하다. 누군가 더 누림에 의해 내 것을 빼앗길 것 같다는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다. 여성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줘도 남성이 누리는 것이 감소되는 것이 아니다. 여성이 더 자유를 누리고 존중을 받는 것을 남성들도 희망했으면 한다." '리베카 솔닛 "한국 페미니스트들, 5년 아니라 50년 보고 가길"」 <한국일보>, 안선희 기자. 입력일 2022, 3. 16.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034905.html
  • 45) "이곳에선 어떤 차별도 없이 마음껏 섹스를 즐길 수 있었다. 인종이나 계급, 외모, 성별, 나이, 경제력, 유전자 모두 무관하게 성욕만으로 서로를 탐할 수 있다고" 정지돈, 앞의 책, p. 10.
  • 46) 여성 동성애가 폭력적인 이성애 섹스와 남성의 폭력성에 대한 대타항으로 발생하는 역학은 래디컬 페미니즘의 세계 인식이다. "아미는 선수들에게 종종 몸을 맡겼고 그들의 생물학적 성별이 여자일수록 좋았다. 안전하게 느껴졌고 안전함을 금기를 넘나드는 행위의 두려움을 나른한 서스펜스로 바꿨다. 그러나 아미와 달리 권정현지는 붐랜드를 좋아하지 않았고 패닉룸을 경멸했다." 정지돈, 앞의 책, 11쪽.
  • 47) 소설 초반의 해당 '쓰리썸' 장면이 나중에 발생하는 '권정현지'의 임신과 임신 중단에 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이것은 마치 여성의 '문란한' 섹스로 인해 계획없이 일어난 임신을 비난하는 맥락처럼 보일 수도 있다. 서사의 해당 부분을 '문란한' 섹스로 인한 임신으로 읽는 시선도 분명 있겠으나, 소설이 그러한 맥락을 일방적으로 강조한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여성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자유롭게 펼치는 국면이 어떠한 위험 부담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는지에 관해 지극히 현실적으로 담아낸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독자가 여성의 자유로운 섹스에 관하여 어떠한 가치판단을 하고 있는지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는 부분이다. "현지를 닮은 여자는 패닉룸의 왼쪽 끝방에서 두 명의 남자와 뒤엉켜 있었다. 아미는 구역질을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정지돈, 위의 책, 12쪽.
  • 48) 정지돈의 이 소설은 그것이 얼마나 '잘' 쓰인 '좋은' 소설인지에 관한 질적 판단의 결과와 별개로 동시대를 향해 던지는 급진적인 질문을 품고 있고, 그것들은 분명 독자가 그들의 삶 속으로 가져와 진지하게 고민해 볼 만한 유의미한 지점들이다.
  • 49) 2010년대의 페미니즘 문학비평이 김봉곤 소설의 게이 화자를 열렬히 호명하는 동시에 무단 인용 논란이 일어났을 때 신속하게 돌아섰던 모순적인 행위는 당시의 페미니즘 문학비평이 채택하던 이성애 중심성으로 설명된다. 게이의 남성성은 문학장에서 몰아내고자 하던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폭력성을 지니지 않으면서도 '나'(이성애자 여성)를 욕망의 대상으로 물화하지 않을 수 있는 안전한 시선을 장착한다. 당시 문학장이 열광했던 김봉곤과 박상영 소설의 게이 서사는 그러한 윤리적 강박 안에서 '안전한 작품들이었다. "비평의 '나'가 여성일 때, '나'를 욕망의 대상으로 물화할 가능성이 아주 적으면서도 동시에 그 시선의 주체가 페미니즘이 주장하는 소수자로서의 여성과 동등하거나 혹은 더 열악한 지위에 있는 곳은 게이의 세계다." 전승민, 퀴어 일인칭을 위한 변론: 오토픽션과 문학의 윤리성에 관하여」 「퀴어 (포)에티카 문학동네, 2024, 183쪽.
  • 50) 작가가 실제 삶에서 함께 살아가는 타인들의 삶이 작품 안으로 다양한 층위에서 직간접적으로 기입되며,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각자의 것을 상호 공유한다는 뜻이지 타인의 소유권을 침탈하여 '나'의 배타적인 영역으로 물화시킬 수 있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나'의 이야기가 '너'에게로 흘러들어 갈 때 그것은 분명히 공유된다. 그러나 '너'가 '나'의 이야기를 공유받았다고 하여 그 이야기의 최초 소유권자인 '나'의 권리가 '너'의 세계에 의해 무화되는 것은 아니다. 공동 소유는 자신의 소유권 외의 소유권 또한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며, 창작은 그렇게 공유하고 공유받은 것들을 토대로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일이다. 창작의 자유는 서로의 것을 공유할 권리이자 그것의 실행이다.
  • 51) 가령, 이런 사례를 들 수도 있다. 비평가 A와 B가 오랜만에 만나 카페에서 사담을 나누던 도중, B가 A에게 최근 골몰하는 작업이 무엇이냐고 안부차 묻는다. A는 자신이 작품 K에 대하여 그간 합의되어 온 해석을 뒤집는 새로운 해석을 발견했다고 B에게 기쁘게 말해 주었고, B 역시 그러한 해석에 대하여 놀라워하며 동의한다. 작업을 계속해 나가던 A는 얼마 뒤 B가 자신이 말했던 '새로운 해석'을 기반으로 한 비평을 발표한 것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B의 행위는 과연 '무단 인용'인가 아닌가? 이때, A는 모종의 과정을 통해서 B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훔쳤음을 증명하고 B의 글의 게재를 철회시킬 수 있을까? A와 B가 대화를 나누던 시점에서 작품 K에 관한 A의 '새로운 해석'은 아직 공식적인 글로 발표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적 재산권이 없는 상태이며 B는 그것을 알기 때문에 글을 발표했을 것이다. A는 결국 먼저 발표된 B의 글을 인용하며 자신만의 비평을 완성해서 발표했지만 그의 논의는 후발 주자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A가 포착한 '새로운 해석'은 A가 자신의 사유를 통해 스스로 발견해 낸 것이었으므로 B와는 전혀 다른 주장을 펼친다. 이때, A가 B의 '합법적인 절도'로 인해 느낀 모욕과 수치는 어떻게 구제받을 수 있을까?
  • 52) 문학의 세계는 현실 세계와 긴밀히 연동되는 다른 또 다른 가상의 세계다. '코드화'는 현실의 주체들이 자신의 이해 관계와 욕망을 문학이라는 가상에 투사하거나 반영할 때 이루어지는 한 가지 작용 양상이다. 전승민, '가장 음험한 가장 앞의 책
  • 53) 이와 관련해 읽어 볼 수 있는 아주 좋은 예시 중 하나는 박서련의 장편소설 「폐월: 초선전(은행나무. 2024)이다. 이 소설은 남성의 시선에서 일방적으로 재현되었던 여성 '초선'이 자신의 삶의 서사를 서술할 권리를 한껏 발휘하며 소설의 서술자인 동시에 서사의 주인공이 되는 '나'가 됨으로써 그녀가 지닌 여성과 인간의 지위를 복권하는 이야기다. 누구든 '나'에 관해 재현할 수 있지만 '나'가 재현하는 '나'의 서사는 타인의 재현으로부터는 발생하지 않는 강력한 힘이 있다. "삼국지의 초선이 남성 간에 이루어지는 여성 거래의 재화에 불과했다면 박서련의 초선은 그러한 거래의 역학을 통해 자기 해방에 도달하는 여성의 주체성, 급진적인 재전유의 극단을 행위한다. 만약 유통되지 않았더라면 유교 가부장제의 예속된 주체로 고정되어 죽은 바 다름없었을 초선의 인격은 역설적으로 남성의 여성 거래 '덕택에' 남성의 '집'을 탈출한다. 이는 저간의 한국소설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여성 해방의 가장 급진적인 국면이다." 전승민, 발문 가장 급진적인 존엄 박서련, 위의 책, 240~241쪽.
  • 54) '흉터'와 '무늬'의 관계에 관한 의미는 최영미 시인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장편소설 『흉터와 무늬(랜덤하우스코리아, 2005)와 청동정원(은행나무, 2014)에서 영감을 얻었다. 전승민, 사청(乍晴)」「퀴어 (포)에티카 문학동네, 2024, 18쪽.
  • 55) "반복한다는 것은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유사한 것도 등가적인 것도 갖지 않는 어떤 유일무이하고 독특한 것과 관계하면서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외적인 행동에 해당하는 이 반복은 그자체로 아마 더욱 비밀스러운 어떤 떨림의 반향일 것이다. 그것은 더욱 심층적이고 내면적인 어떤 반복의 반향, 다시 말해서 그것에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단독자 안에서 일어나는 반복의 반향이다."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 24쪽, 강조는 인용자.
  • 56) 질 들뢰즈, 위의 책 43~44쪽, 강조는 인용자.
  • 57) 질 들뢰즈, 위의 책, 46쪽.
  • 58) 질 들뢰즈, 위의 책, 47쪽.
  • 59) 질 들뢰즈, 위의 책, 같은 쪽.
  • 60) 이때의 봉쇄는 "개념의 내포가 확장되지 못하도록 저지하거나 동결하는 것, 개념의 내포를 고정시키는 것 등을 의미한다." 질 들뢰즈, 위의 책, 역주 20번, 48쪽.
  • 61) 질 들뢰즈, 앞의 책, 같은 쪽.
  • 62) 질 들뢰즈, 위의 책, 52쪽.
  • 63) 김남숙의 단편소설 「파주」( 2024 제1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4)는 폭력의 피해와 가해의 구도를 넘어서는 국면을 담는다. "피해자로서의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 글은 단지 가해와 피해의 구도를 명확히 밝히고 누군가를 엄정하게 처벌하는 것만이 끝이 아니라고 말한다. 피해와 가해의 구도는 사실로서의 사건을 적확하게 검토하고자 하는 과정적이고 부분적인 차원이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성취하고자 하는 것은 가해자의 물리적인 처벌이 아니라 피해자의 구제와 세계의 정화다. 폭력을 경험한 자를 '피해자'라는 이름으로 단순히 물화시키지 않을 때 그는 비로소 폭력을 끝낼 수 있는 가장 큰 힘을 지닌 자로 다시 태어난다." 전승민, 앞의 글, 14쪽, 피해자로 물화시키지 말자는 말은 피해자의 경험을 무화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라 그가 가진 인격의 총체를 피해자성과 피해자로서의 경험만으로 압축·환원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 64) 작가인 '나'와 독자인 '나'는 '지면'의 보유 여부를 두고 서로 다른 힘을 가진다. 이전의 세계에서는 잡지와 단행본 등의 지면의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강했으나 지금의 현실에서 종이 지면은 그 어떤 매체보다도 양적으로 빈약한 독자수를 가진다. 가령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의 채널은 종이 지면보다 훨씬 더 많은 독자를 보유하고 실시간으로 상호 소통하며 서로의 현실을 더욱 빠르게 재구성할 수 있는 상당한 파급력을 지닌다. 그러므로 '지면 권력'이라는 말은 이제 다른 방식으로 접근될 필요가 있다. 이제 작가는 더 이상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거대한 존재가 아니며, 마찬가지로 독자 역시 그저 무력한 존재가 아니다. 이 시대의 독자들은 이미 자기 재현과 그 전시에 능한 주체들이다. 신자유주의라는 시대의 중력이 개인을 각자도생 하도록 내몰고 있다면 그 시대에 속한 개인이 행할 수 있는 역공 중 하나는 바로 그 외부의 힘을 재전유 하여 '나'의 삶의 역능으로 발휘하는 일이다. 그러나 1부에서 언급한 사례, 페미니스트들의 인스타그램을 통한 자기 재현과 전시가 스스로를 모순에 처하게 했던 것처럼, 그것이 구조 자체를 파기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주체들에게는 '일인칭 바깥으로 나아가는 대화'가 필요하게 된다.
  • 65) 피해자 김현지는 트위터에서 출판사 은행나무가 7월 26일 그에게 전한 마지막 답변을 공개했다("현 상황에서 저희 출판사는 특별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해당 답변은 '회피'로서 '대화'의 종결을 꾀하는 (피해자와 출판사가 주고 받은 이야기의 모든 내용과 맥락을 공개된 해당 메일만으로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발언으로 읽힐 수 있다. 만약 피해자와 출판사 사이에 충분한 이야기가 오가지 않았다면 이는 무책임한 태도일 것이나, 논의의 끝에 도달한 입장이 그것이라면 그것은 침묵이라기보다 한 주체가 내보이는 반응의 내용일 것이다. 김봉곤 작가의 사건에서 벌어진 작품집의 일괄적인 판매 중단 조치가 겉으로는 당시 독자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대화적인 행위처럼 보이지만, 실상 사안의 주요 당사자인 작가를 그들(독자와 출판사)의 대화 속에서 배제하는 일과 다름없었을 뿐인 것과 마찬가지이거나 다를 수 있는데, 당사자가 아닌 이들은 그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으므로 이에 대해 섣부르게 판단할 수 없다. 다만, 문학동네와 창비가 2020년 당시 독자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제스처를 보이면서 작가를 대화의 장에서 일방적으로 축출시킨 것과 같은 발화나 행위는 앞으로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것이다. 트위터 닉네임 "H권정현지가 아닌 김현지" (@beinghyunji) 2024년 7월 29일 게시물. https://x.com/beinghyunji/status/1817766399479332958?uwDpzPoFS3w6Uwldsc9zw&s=19
  • 66) 김혜진의 장편소설 「경청(민음사, 2022)은 피해와 가해의 이분법적 구도를 초월하는 '듣기'에 관한 한 가지 탁월한 예시다.
  • 67) 아서 프랭크는 2024년 8월 3일, 최근 출간된 신작 '아픈 몸을 이야기하기 - 육체 질병, 윤리(최은경·윤자형 옮김, 갈무리, 2024) 기념 온라인 실시간 강연회에서 타인의 아픔에 대한 '완벽한 이해'는 불가능하며 우리는 오직 그에 대해 각자의 고유한 '응답'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 68) 2010년대의 한국 페미니즘 문학비평은 이성애중심성을 채택한다. 페미니즘이 이성애중심적이라는 말은 그 주체들의 성적 지향이 단지 이성애자라는 뜻만을 담보로 하지 않는다. 퀴어들조차도 삶의 수행에 있어서는 얼마든지 이성애중심의 문법을 채택할 수 있다. 가령, 레즈비언 부치의 남성성을 동성애 관계 내에서 이성애 각본을 수행하는 '남성'의 젠더로 간주하는 일 등이 그러하다. 또는 래디컬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레즈비언들의 경우 '남성'과 '여성'이라는 젠더의 극단적인 분리를 전제하고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성애중심성을 재생산하기도 한다.
  • 69) 기시 마사히코, '담배와 코코아 망고와 수류탄 - 생활사 이론, 정세경 옮김, 두번째테제, 2021, 293쪽. 강조는 인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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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을 지나고 봄을 맞이할 때 반가움보다 피로가 앞서는 것은 지난 계절이 지나치게 소란했기 때문일까. 이별 뒤에는 긴 피곤함이 있다는 돌아간 철학자의 말1)을 곱씹는다. 시절의 시곗바늘에 정확히 때맞추어 걸음을 옮길 수 없을 때 환절기는 더욱 길어진다. 이것도 하나의 사태라면 사태다. 사건이 아니다. 한계는 아직 임박하지 않았다. 그런 탓에 피로는 늘상 현재형으로 찾아온다. 이불 위에 몸을 늘어뜨리고 눈을 깜빡이는 개는 피로를 모른다. 개를 바라보는 사람의 늘어진 의식만이 지난하다. 시가 스며드는 곳은 이런 장면들이다.  시란 본디 가장 느리게 도착하는 말들이고 우리의 감각과 인지가 이별 후의 인내를 감내하느라 버둥거릴 때 그것은 날카로운 하품처럼 정확하게 착지한다. 서사의 시간 속으로 전진하는 소설은 피로할 틈을 누리지 못하지만 시는 피로의 한가운데에서 한없이 늘어질 수 있다. 시는 제가 원하는 대로 머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무한에 가깝게 지연되는 시의 시간은 피로의 무시간적 현재와 꼭 닮아 있다. 어쩌면 시는 피로를 껴안을 수 있는 언어의 유일한 방식이다.2)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모든 부분을 피로로 적셔 버릴 때 우리는 세상과 대결하는 자가 아니라 다만 흘러가는 자로 사라진다. 세상의 예리하고 모난 각들은 녹아서 더 이상 우리를 찌르지 않는다. 일렁임에 구역질을 할지언정 우리는 더는 상처 입거나 피 흘리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누군가가 내게 피로란 본디 우리의 바깥이 아닌 내부에서 흐르는 것임을 잊어선 안 된다고 일러 주었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실존적 증상인 피로에 소진되지 않는 한 가지 역설적인 방법은 그것을 극복하거나 해결하려 하지 않고 냅다 사랑해 버리는 일이라고, 피로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온몸에 힘을 빼고 나를 관철하지 않는 방식으로 피로를 체현해 버리는 일이라고 말한 누군가가 있다. 그러자 그에 찬동하며 자신을 상처 낸 자의 빛으로 몸을 더욱 가까이 밀착하는 또 다른 누군가도 다가온다. 1. 사랑하는 방관자의 기록들: 이동욱, 『우리의 파안』 (문학동네, 2025)  시는 무엇 때문에 우리가 지쳤다고 알려 주지 않는다. 시라는 것이 세계에 응전하는 '나'의 목소리일 때 자신이 이미 패자라는 것을 납득한 이에게 이유의 구체들은 불필요하다. 시는 대신 이미 닫힌 문 너머로도 여전히 농구공이 튀겨지는 소리를 들려주거나(「폐회」) 어느 곳을 가더라도 이곳에 이미 와 본 적 있다는 기시감으로 새로움을 무마하고(「답사」) 종국에는 복도만큼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를 기지개처럼(「월량대표아적심」) 헛헛하게 개켜 볼 따름이다. 시는 무엇 때문에 피로하다는 분석이나 무엇에 관해 피로하다고 부연하지 않는다. 시는 그저 지쳐 있는 얼굴의 주름을 천천히 짚어 간다.  여기에는 그 어떤 극복의 의지나 미래를 향한 열망이 들어서지 않는다. 피로를 들여다보는 일은 그와 정반대의 작업이다. 사랑의 황홀함도 성장의 희열도 찰나의 현재에 머물다가 이내 과거의 영원 속으로 사라진다. 살아 있음이라는 단어를 차지하는 유일한 현재 시제는 피로의 것인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피로를 자주 언급하지 않는 것은 피로함을 욕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선택과 무관하게 현재를 비집고 들어서는 이 무한의 감각에 순종하고자 한다면 상황은 그때부터 조금 달라진다. 피로는 생의 관성을 폭력적으로 찢어 버릴 것이다. 미래에 저당 잡힌 역사가 된 과거도, 과거로의 수갑에 손이 묶인 미래도 모두 풀려날 것이다. 당신은 항구적인 현재로 지어진 피로의 담요 위에 비로소 몸을 누이고 그제야 은둔할 장소를 발견할 것이다("이제야 이별이다", 「배교의 에피파니」).  모더니스트들이 거리를 산책하며 금속성의 시간들이 녹아내리는 장면들3)을 시로 쓸 때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세계가 끝장날지도 모른다는 감각이었으나 인간 종이 사라져도 이 세상은 결코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는 이십일 세기의 시인에게 끝이란 그저 관념의 수사일 뿐이다. 오히려 세계는 끝을 반복하는 방식으로 제 몸을 영원히 유지한다. 끝마저도 완전히 끝장나 버린 시대의 개인은 자기 자신을 끝장내는 방법 외에는 진정 끝을 맞이할 방법이 없다. 다리 위에서 몸을 떨구고 싶은 욕망이 들어도(이것은 죽음 '충동'이 아니다. 신중한 화자가 긴 시간 동안 지체와 망설임을 번복하며 지켜 온 욕망일 것이다.) 그것은 택시 기사의 물음표에 의해 내쳐지고, 또 한 번 끝장내는 데에 실패한 '나'의 몫으로 남겨지는 건 치미는 구토감이다. 무엇이 나를 움직이는 걸까, 내일도 같은 날이겠지. 반복되는 것이 이렇게 편안한 마음을 주다니. 생활의 주기는 한 달에 맞춰진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 많은 주기들이 있다. 자명종과 전철, 점심, 회의, 저녁, 퇴근. 혹은 야근. 다시 전철, 혹은 택시. 동호대교를 건널 때 내가 느꼈던 것. 내비게이션에 찍힌 택시의 위치. 파란 것은 한강. 직선은 다리. 그 위로 지나가는 것은 나. 혹은 택시. 기사는 음악을 크게 틀고, 음악은 트로트, 혹은 찬송가. 주여 제발 이 다리를 무사히 건너게 해 주시옵소서. (중략) 오늘이 지나면 내일은 무사할까. 가끔은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를 만나면 자랑스럽게 웃으며 이 몸을 건네줄 수 있을까. 너는 참 쓰기 좋은 몸을 갖고 있구나. 누구에게도 피해 주고 싶지 않다는 것은 그의 거짓말이다. 동호대교에서 한남대교 쳐다보기. 하지만 너와 걸어서 건넜던 건 한남대교. 다리 위에 서면 항상 무언가를 떨어뜨리고 싶어진다. 뭐였어? 뭐겠어. 우리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가기 위해 다리를 건넌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다리의 중간은 기억에 없었지. 택시 기사는 말이 많았고 나는 이곳이 처음이라고 대답했다. 사거리에서 어디로 갈까요? 그러자 나는 갑자기 구토가 일었다. - 「친구의 장례식과 애인의 결혼식」 부분  일상의 세속적인 반복과 사물들은 '내' 몸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이질감이 엄습해 와도 요지부동이다. 그 몸을 다리 아래로 떨구고 싶어도 그것은 '나'의 소유가 아니므로 생각만이다. 빠져나갈 수 없는 생의 중력 앞에서 그는 또 어딘가로 방향을 정해서 기사에게 알려 주어야 하고 폐쇄 회로에 갇힌 그는 급기야 구토의 기미를 느끼고 입을 틀어막는다. 그의 하루를 짐작할 때 제목이 본문에 생략된 낮의 시간을 나지막이 일러 준다. 친구는 저곳으로 돌아가고 사랑하던 이도 다른 삶 속으로 들어간 하루. 장례식과 결혼식은 모두 떠남을 공표하는 의례들이다. 떠남의 연속을 마주하며 그는 삶의 과대한 대전제에 반문한다. 실상 우리에게 남는 것은 중간 지점이라는 기억이 아니라 출발점과 도착점뿐이지 않느냐고, 그래서 '나'는 다리의 중간에 '내' 몸을 떨굴 수가 없다고 항의해 보고 싶기도 하지만 무력하다. 그조차도 빌린 몸에서 비롯한 생각들이라면 그는 이 세계의 "자명종과 전철, 점심, 회의, 저녁, 퇴근. 혹은 야근"에 대하여 완전한 패배자다.  신에게 이 다리를 무사히 건너게 해 달라는 기도는 그러므로 진실한 읍소라기보다 이미 무사할 것을 알고 있는 자의 지쳐 버린 탄식이다. 근대의 산책자는 이 세계에서 바깥의 관찰자로 전락한다. 그의 발설은 작은 발버둥에 불과하다. 사이렌이 울어도 시간은 사전의 종이들이 빠르게 넘어가듯 휘몰아치거나 냄비 속 기포처럼 부글대지 않는다. 흠집 하나 없는 세계의 매끄러움은 완전하게 유지된다. 「신도시」의 빛나는 빌딩과 그 사이를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은 도시의 관성을 알맞게 완성하는 부품들이다("빌딩과 빌딩/많은 전선이 이동했다"). 빌딩과 빌딩 전선으로 연결된 콘크리트의 감정은 서로를 일관적으로 바라보겠지 연인들은 뜨거웠다 차츰 모른 척하겠지 소방차가 교차로를 통과하는 동안 오늘도 우리는 다만 무사하고 그게 네 가족이라 생각해 봐 너를 키운 게 가족이라고 단정 짓지 마 그것은 사이렌 소리를 따라 날아가는 비둘기 같은 것 마지막 남은 희망대출 같은 것 전철역에서 절하며 지지를 호소하는 정치인과 그 앞을 지나는 직장인에게 출근은 무엇보다 중요합니까 간과 쓸개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새로 생긴 진입로를 따라 차례로 들어서는 차들을 보고 있으면 어째서 당신의 가족은 오늘도 무사합니까 - 「신도시」 부분  시인의 감각은 격동하지 않고 그조차도 무사할 따름이다("그것은 사이렌 소리를 따라 날아가는 비둘기 같은 것"). 이곳의 유일한 변화 가능성이 인간 의식과 감각의 번뜩이는 칼날이라면 도시의 문명은 무엇이든 막아 내고 마는 거대한 방패다. 변혁의 단초는 그저 "마지막 남은 희망대출"일 뿐일 때, 신에게 탄식했던 그는 (신은 이미 우리를 완벽한 무사함 속으로 집어넣은 이후이므로) 또 한 번 작게 한탄할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우리는 어째서 이토록 무사한 것이냐고, 연인과 가족, 정치인과 직장인의 무사함은 그저 "차례로 들어서는 차들"일 뿐인데 이것이 정말 다일 뿐이냐고 말이다. 마지막 연의 비문은("보고 있으면" / "오늘도 무사합니까") 신의 도덕과 규범에 맞서 보려는 '나'의 사소한 어긋남이다.  이 시집은 세계와의 대결에서 이미 패한 자의 입지에서 쓰이고 있지만 저항이 전연 부재하는 것은 아니다. 시 쓰기란 결국 "타인의 필체 속에서 / 잠시 나를 죽은 혓바닥처럼 놓아 보는 것"이라 하더라도(「필적감정」) 그 빌린 손끝에서 흐르는 잉크로 '너'에 대한 사랑만큼은 한사코 주장하려고 한다. '나'라는 대상에 대한 자기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해도 '나'는 '너'라는 사랑에 관해 유치권을 주장할 수는 있지 않느냐고 항변한다("왜 / 이제 나를 당신의 미망인으로 부르면 안 되나", 「저 금목서를 당신의 미망인으로 부르면 안 되나」). '네'가 '나'를 떠나 사라졌다는 이별의 사실마저도 앗아 가려는 세계의 난폭함에 맞서 '네' 그림자 뒤에 이어진 것이 바로 다름 아닌 '나'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차피 이 세계의 중력이 "모든 거리가 한 호흡 안에 있게 한"다면(「영원의 스코프」) '너'와 '나' 또한 하나의 원 안에서 거주할 테다. 사랑은 그의 손목을 잡거나 입술을 맞대는 촉각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같은 시야 안에 속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감하게 성취된다. 그런 당신은 언제나 너무 오래 한곳에 머무는 습관이 있다 정해진 결말은 얼마나 안락한가 누군가 꽃다발을 건네며 인사한다면 그것은 배수구의 소용돌이치는 중심처럼 무언가 당신에게 다가가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 앉는다 - 「영원의 스코프」 부분  세탁소에 옷을 맡기러 가는 길은 '네'가 지나간 길이다("애인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수선」). '나'의 체취로 젖은 셔츠를 누군가에게 맡기러 가는 길에 '네'가 지나간 자취를 떠올리며 둘을 겹쳐 두면, 봄밤의 하얀 목련은 두 눈을 덮어 버린다. 사랑은 부재 속에서 충만하게 향기롭다. 이처럼 시종일관 타자들의 그림자와 사물 사이를 거니는 그는 완전히 고립된 자는 아니지만 세계의 가장 나중의 자리에서 모든 것의 뒷모습을 담아내므로 과연 은둔하는 자4)다.  그러나 은둔자는 그를 잠식한 피로를 떨쳐 낼 재간이 없으므로 그가 시편들을 통해 보고하는 생의 단편들은 정치적 실천이라기보다 현재화된 영원을 배회하는 자의 소진되지 못한 에너지가 흐르도록 내버려두는 방관의 산물에 가깝다. 그는 피리 부는 사나이가 아니라 사나이가 피리에서 손을 뗀 후에야 찾아드는 파동의 나머지를 훔치는 관객이다("연주가 끝나자 단원들이 악기에서 손을 뗀다 // 그제야 나는 음악이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식적(息笛)」). 은둔자는 어둠 속에서 이 도시를 재배치하거나 남몰래 구획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주인이 아니다. 그는 다만 숨어 있는 방관자다. 그가 방관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은둔하는 지경이다. 그가 기록하는 현실의 답보 상태는 '나'에게 명백히 승리할지언정 '나'를 지루하게 하지는 않으므로 삶의 피로는 그의 사랑이 '너'의 뒤를 쫓는 일을 멈추게 하지 못한다. 피로를 체현하는 삶은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먼 거리에서 '너'와 '내'가 하나의 그물에 함께 걸려 있음을, 희미하게 떨리는 그물코를 뒤늦게 감각하는 방식을 사랑이라 여길 수 있다면 사랑은 바로 그 피로함 때문에 세계와 마찬가지로 끝나지 않는다. 사랑은 피로 속에서 영원하다. 2. 탐미주의 도망자의 편린들: 김연덕, 『폭포 열기』(문학과지성사, 2024)  방관자가 도시의 어둠 속에서 사물들의 궤적을 따라 느리게 걸어갈 때, 그 한켠에는 빛의 사나움이 자신을 소진시키는 것이라는 걸 알아 가는 이가 있다. 원인 모를 수치가 자신을 장악했으나("종이 사이를 뚫고 이 안으로 들어왔지만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겠어", 「미지근한 폭포」) 그 사실을 보란 듯이 움켜쥐고 무거운 걸음을 떼는 이가 있다. 김연덕의 『폭포 열기』에는 빛과 대적하는 '나'들이 그것의 사나움과 폭력성을("돔에서 투과해 들어온 겨울의 각진 빛이 가만히 볼을 스쳤어 / 상처가 났어", 「구식 부끄러움」) 아름답게 증언하며 남몰래 폭포를 찾아가는 장면들이 산재한다.  그러나 이것이 도망의 궤적임을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은데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화자가 사물 하나하나에 들이치는 빛을 세심히 관찰하며 아주 느리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며(시편들에서 발견되는 장소들은 거의 하나의 공간으로부터 파생되는 인상을 준다) 그가 코를 박고 마음 속에서 관찰하는 사물들의 빛깔은 부정할 길 없이 아름다워서 당신은 폭포수처럼 흐르는 화려함에 넋을 잃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집을 끝까지 통과하고 나면 밀려드는 아늑하고 부드러운 피로감은 제 모습을 기어코 정직하게 드러낸다. 김연덕이 빛의 다채로운 조각들에 찔리면서도 당신의 손을 잡고 어딘가로 이끄는 건 염두에 둔 목적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동욱의 화자가 피로를 신체 내부에서 체현하는 방관자의 기록으로 시를 쓴다면 김연덕의 화자는 외부 세계의 사물들이 자신을 조각낼 폭력적인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것들의 집요한 추적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대상을 좇는 행위 속에 자신의 도주선을 남몰래 숨겨 두며 피로한 빛의 사나움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져 간다. 밀착하는 방식으로 최대한 멀어진다. 김연덕의 시 쓰기는 사물에 비현실적일 만큼 가까이 다가섬으로 세계의 폭력으로부터 몰래 도주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우선, 한 개의 형광등에서 시작해 보자. 도시의 빛은 방 한 칸에 매달린 형광등으로 달라붙고 화자는 독자의 귀 가까이로 다가와 빛이 선사하는 "현대적인 아픔"에 대해 속삭인다("그래요 나 그것 덕분에"). 어둠 속에서 고요히 흐르던 자연의 정동은 스위치 하나를 누르면 일순간 빛 속으로 모두 흡수되고 그의 말대로 이는 아픔에 관한 참으로 편안한 정리법이다. 수치심이 '나'의 민낯이라면 그것은 형광등이 밝아지기 전의 어둠 속에서만 생생하다. 나는 어둠 속에서 내가 나를 부끄러워하는 냄새를 맡을 수 있는데 버튼만 누르면 이 방을 조금 전과 다른 감정으로 채우는 전기가 들어온다는 사 실은 얼마나 새삼스럽고 간편하고 현대적인 아픔인가요 그래요 나 그것 덕분에 내 몸에 걸려 넘어지거나 모서리 날카로운 악취에 부딪치지 않을 수 있지만 낮 동안의 수치가 얼마나 정교한 무늬와 기울기 절단면을 얻었는지 손바닥에 올려놓고 가까이 들여다볼 수도 있겠지만 형광등을 켜는 것은 단지 한밤중에도 이 따뜻하고 복잡한 세공에 많은 시간이 필요해서입니다 (중략) 미세하게 다른 속도와 각도로 형광등 빛을 튕겨 내며 움직이던 수정의 소리 자신들을 견고하게 빛내는 소리가 났습니다 규칙적이었고 아주 조용했어요 - 「수정은 아름답고, 수정은 정확하고, 수정은 승리한다.」 부분  그는 "낮 동안의 수치"를 더듬어 볼 기회를 앗아 간 빛을 힐난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에 더욱 주의를 기울인다. 유리로 만든 진공관 안의 형광물질이 필라멘트 끝에서 튀겨지는 소리에 고막을 밀착한다. 이동욱의 '내'가 피로에 맞서지 않고 피로를 몸으로 살아 흘렀듯, 김연덕의 '나'는 빛의 손아귀에서 버둥대지 않고 도리어 빛을 향해 피부를 더욱 가까이 당겨 붙인다.  그곳에서 빛은 사물의 적대자다. 빛은 "삽으로 그것의 안을 파내고 / 쪼개"(「찬물처럼」) 관찰자의 지위를 점령하며 세계의 유일한 주체이자 절대자가 된다. 화자를 압도하는 그 시선의 힘에 대하여 화를 낼 만도 한데 그는 자신의 문장 안에 몸을 숨기고 빛의 사나운 뒤를 계속 좇을 따름이다. 간혹 빛에게 발각되려 할 때 그는 스스로 사물이 됨으로써 최선의 은닉을 감행하기도 한다. 나를 향해 있지는 않지만 이것을 만든 이의. 누군가의 세계를 향한 슬프고 기쁜 병들고 건강한 열망의 반복이 흘러드는 느낌이고 저 가벼운 선반에 잠시 올려 둔 채 때로는 먼지를 털어 주고 때로는 잊다가 다시 별 뜻 없이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은 따뜻하고 추상적인 느낌이기도 하다. 그리운 채 깨어 있는 이 느낌을 위해 나는 매번 나 자신을 어색하게 부푼 내 표정을 값으로 지불해 왔다. 물건의 선과 마무리가 아름답고 고유할수록 많은 시간과 힘을 요했으므로 가끔은, 트럭에서 품에서 떨어져 나와 스스로 곤두박질쳤다. - 「생활 속 폭포」 부분  그는 눈앞의 사물 속에서 그것을 만든 이의 "세계를 향한 슬프고 기쁜 / 병들고 / 건강한 / 열망의 반복이 흘러드는 느낌"을 찾아낸다. 사물이 자신을 향해 있지 않다는 진실 앞에서 그는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실은 그 역시도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물화시키며 살아 왔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고백을 마치자마자 곧장, 사물로부터 떨어져 나와 폭포 속으로 추락한다. 이는 빛에게 패배하듯 폭포에게 제 실존을 투항하고 마는 일이 아니다. 빛의 파장으로부터 완벽하게 숨어드는 일이다. 가장 완벽한 도망이야말로 완전히 사라지는 위장술로 성취된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어두운 폭포를 보게 될 것이다. 원하는 자리에서 원하는 속도로 삭아 가게 될 것이다. 거실과 선반과 빛이 절묘하게 맞물려 그림자가 거대하게 드리울 경우에는 마치 폭포가 물건을 삼켜 버린 것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충격을 이기지 못해 절망하고 멍해져 영영 사라져 버린 것으로 착각되겠지만 - 「생활 속 폭포」 부분  시집에 수록된 동명의 연작시 「gleaming/tiny area」는 제목 그대로 빛과 그것이 파생시킨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다5)(빛이 없다면 존재도 없다). 그중 하나의 시편은 "평범한 나무 밑에 / 산 채로 매장된 빛"이 있으며 더불어 그 나무에는 우아하게 숨은 분노도 함께 거주하고 있다고 누설한다("어떤 분노는 우아한 광대뼈 아래 아주 조용하게 살아가기도 한다", 56쪽). "세상에 분노하는 온도"로 첫 행을 시작하는 이 시편은 빛과 연루된 정동이 분노이며, 그것은 이 탐미주의자의 시 쓰기 속에 매장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재봉되었던 빛 안쪽은", 71쪽). 그는 빛의 사나움 앞에서 함께 칼을 들고 결투를 벌이는 일 대신 나무 아래 묻거나 실로 기워 버리고, 이는 최선의 공격이란 무릇 최선의 방어라는 평화적인 신념을 지닌 자만이 할 수 있는 행위다. 낮 동안 너무 많은 빛에, 밤 동안 너무 많은 형광등의 소리에 시달렸던 그는 세계와 정면으로 대적하기에는 이미 지쳐 있다. 세계를 영속시키면서 무한한 소진을 생산하는 힘의 근원이 곧 빛이라는 사실을("아침까지 눈을 뚫고 전속력으로 달려도 / 피곤한 빛으로 계속되는", 「드라이브 마이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므로 그는 그것과 함부로 맞서지 않는다. 더불어, "통째로 긁히거나 뭉개지기"에 이 세계는 너무 고상하다는 그의 말은 빛이 대상을 쪼개지만 동시에 그러한 파편들의 부서짐이 자아내는 아름다움 역시 존엄하다는 믿음이기도 하다. 그래서 김연덕의 '나'는 빛에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빛을 따라 움직이는 듯하다가 불현듯 폭포 속으로 몸을 던진다. 세찬 물줄기 아래의 어둠 안에는 숨어든 '내'가 있고 그런 '나'를 일갈하며 후려치는 다른 '나'들이 있다. 빛의 피로에 잠식된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빛이 매 순간 훔쳐 가던 수치심의 적나라한 회수라고 주장하는 피학의 목소리가 있다. 내 몸을 때리는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폭포 밖으로 바로 빠져나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나를 비난하던 내가 스스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던 조금 전까지 너무나 부드럽고 따뜻하던 그것은 나의 수치심 미친 듯이 신나서 나를 때리는 - 「따뜻한 폭포」 부분  피로한 자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막아서지 않는다. 그저 내버려둔다. 피로는 '나'의 몸을 그것에 오롯이 헌납하게 한다. 밝은 곳에서 쉬이 납득하기 어렵던 수치는 어둠의 안락함 속에서 껴안을 수 있는 것으로 변모하고 (그것이 '나'를 신나게 때린다 할지라도) 시종일관 사물의 휘광을 쫓던 화자는 그리하여 독자를 빛에서 어둠으로, 지상에서 폭포수 아래로 이끌고 간다. 낮이 생산자들의 시간이라면 밤은 피로 속에 곱게 누운 자들의 몫이다. 수치를 품을 수 있는 비밀스러운 시간이야말로 피로한 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간이다. 그 어떤 긍정이나 부인의 능동적 제스처도 불필요한, 그저 시작도 끝도 바닥도 위도 없는 물줄기의 연속처럼 그 안에 몸을 맡기고 드러눕는 장소. 그러나 이 탐미주의자는 산란하는 빛의 날카로운 끝이 조각내는 아름다움들을 모르지 않고, 다만 그 광채에 현혹되어 제 몸이 찢기는 줄도 모르고 낮의 시간을 살아 내던 이들의 손을 조용히 잡아끌고 폭포의 어둠 속으로 낙하할 따름이다.  외부에서도 내부에서도 시선의 대상이 되지 않음으로써 그는 주체이기를 자진해서 포기하고 그리하여 역설적으로 존재의 해방을 만끽한다. 피로를 사실이자 하나의 비유로서 그리고 비유로서의 피로를 다시 한번 현실의 감각으로 받아들이면서, 사실과 비유 양측의 생성이 이끄는 물줄기 아래로 그저 침잠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김연덕의 폭포는 관념의 비유인 것만은 아니며 자연주의자들이 찬미하는 대자연의 그것만도 아니다. 폭포는 빛의 세계에서 낡고 지친 자들이 몸을 이끌고 눕는 피로의 세계다. 순도 높은 분노와 수치심으로 세차게 이글거리는 안락의 세계다. 그렇다면 폭포가 아닌 곳들 또한 폭포가 된다. 가령, 우리가 가장 처음 만났던 형광등이 깜빡이는 방. 빛을 매장해 두었던 한 그루 나무는 방으로 들어와 '내' 수치심을 양분 삼아 눈부신 꽃 한 송이를 피워 낸다. 오래된 나무 한 그루의 기분만큼 보호받는 밤. 침대가 좁아진다. 작고 물컹한 열매가 떨어진다. 천장이 벽이 사각형이 살아 있는 어두운 땀이 백 년 전의 나와 함께 차게 식는다. 눈부신 꽃이 어둠 속에서 휘날리며 얼굴을 감쌀 때 당신은 끌어안을수록 슬퍼지는 사랑을 반드시 사랑하게 됩니다. - 「무르고 사적인 나의 방」 부분  이 꽃은 '내'가 언젠가 호텔방에서 본 거대한 흰 백합의 이미지와 겹쳐지는데(「나의 레리안」) 그가 꽃 앞에서 보았던 "적막하고 무서운 감정" 역시 누군가의 수치이자 분노이지만 그것은 '나'의 것처럼 폭포의 어둠 아래에서 아늑하게 향유한 것이 아닌 "제 몸을 마구잡이로 터뜨리는 그런 옛날의 빛" 앞에서 패배한 대가임을 알게 된다. 화자는 흰 백합을 보면서 꽃을 장식한 이의 삶을 앗아 간 빛의 난폭함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가 이내 아연해진다("그의 삶을 대신 죽여 준 아름다움은 어디 있었을까"). 말하자면 「나의 레리안」은 호텔에 잠시 머무른 '내'가 빛 앞에서 파열한 타인의 흔적을 애도하는 시다. 그렇다면 김연덕의 화자 역시도 이동욱의 '나'와 마찬가지로 은둔을 자처하나 세계로부터 고립된 처지는 아닌 셈이며 시집에 수록된 마지막 시편인 「이구아수폭포」의 후반부가 말해 주듯, 이 시집의 '나'들은 실상 빛의 폭력에 노출된 사물과 타자들을 구해 내려는 열기로 들떠 있는 것이다("생생한 폭력과 죽음에 지친 수많은 나들이 자포자기한 나들이 / 무척 활기차고 다정하고 아름다운 면도 있던 그런 나들이 살아남은 나들마저 죽이려는 지금").  피로는 차갑지 않다. 피로는 그 어느 것보다도 뜨겁다. 에너지의 흐름이 주체를 압도하고 제패하고도 남아서 세계 전체를 유동하는 상태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피로는 죽음의 가장 큰 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피로함 속에서 방관자가 되거나 도망자가 되어 삶을 지속할 수 있다. 환멸이나 분노가 자주 방문하겠지만 그러나 종말과 죽음만큼은 이곳을 침범할 수 없다. 그래서 김연덕의 '나'는 무수한 '너'인 '나'들에게 계속 폭포 아래를, 그러나 빛이 전혀 눈치챌 수 없게끔 빛의 조각들로 길어 올린 아름다운 조각들로 길을 위장하며 가리키는 것이다. "선명한 시야가 돌아올 때"까지만 그렇게 잠시 폭포의 어둠 속에 함께 머물러 있자고, 우리의 수치와 분노가 생생하게 쏟아져 내리는 이 아늑한 피로 속에 잠시만이라도, 고요히 숨어 있자고 말이다. 1) 김진영, 「사라짐」, 『이별의 푸가』, 한겨레출판, 2019, 77쪽. 2) 아래의 말들을 잠시 빌린다면 시는 또한 피로함 그 자체다. "시는 이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시는 고독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가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가, 아니다. 시는 사람에 대해서도 증오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시는 무엇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시는 무엇 자체다. 시는 고독 자체이고 결별 자체이며 또한 사랑 자체다." 김언, 「그 여름에서 여름까지 짧은 기록 몇 개 2」, 『시는 이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난다, 2019, 32쪽. 3) "이때 뚜우 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이상, 「날개」, 1936. 4) 시집의 해설을 쓴 오연경도 이동욱의 화자를 은둔자라고 말한다. "이동욱 시의 주체는 도시의 거리 한복판에서 간격을 만들어 내고 경계선을 재배치하는 '거리의 은둔자'라 부를 만하다." 오연경, 「은둔하는 삶의 정치성(해설)」, 이동욱, 『우리의 파안』, 문학동네, 2025, 109-110쪽. 5) "사실은 비유를, 비유는 사실을 배제하면서 또 자극한다. 한편으로 서로가 서로를 반사하면서 자신을 갱신한다. 사실의 폭발은 해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유의 밑거름으로 다시 돌아오며, 비유의 극점에서 발견되는 추상화된 현실은 그 자체 현실을 보는 또 다른 눈을 제공하는 것이다." 김언, 「시는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다」, 『시는 이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307쪽.

계간 파란 전승민 피로위로야근은둔폭포이동욱김연덕 2025
김미정 나를 쓰는 일은 어떻게 너를 쓰는 일이 되는가

나를 쓰는 일은 어떻게 너를 쓰는 일이 되는가1) : ‘소유’와 ‘주권적 자기’를 질문하며 1. 다시 ‘자기’를 질문하며 일인칭 글쓰기, 에세이, 자문화기술지, 당사자 서사 등 ‘자기’를 중심에 놓는 글쓰기가 주목받아 온지 여러해를 지나고 있고, 최근 또다른 방식으로 논의가 이어질 듯하다.2) 이 글은 그러한 글쓰기의 핵심에 놓일 자기를 다시 질문하고 그것이 어떻게 ‘커먼즈’(commons)로서의 문학의 조건이 될 수 있을지 가늠해보려 한다. 이때 얼핏 자기와 커먼즈라는 말 사이의 아득한 이격(처럼 여겨지는 것)이 떠오를지 모르겠다. 자기라는 말은 ‘나’ ‘1인칭’ 같은 단수적 계열어나 차이를 통해 이해되곤 하고, 커먼즈란 ‘공통장’ ‘공유지’ 같은 번역어가 암시하듯 복수적이고 공통적인 것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자기에 대한 이야기는 루쏘의 『고백록』(1770)이 상기시키듯 자신을 신과 독대하는 개인으로 발견하고 고백하는 일에서 출발한 근대적 존재 인식의 표현양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에 대한 이야기 안에서도 젠더 및 공/사 역학에 따른 위계가 작동해왔음이 이제 대중적으로도 널리 환기되었고, 전통적으로 자서전을 쓸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거나 획득하지 못했던 여성의 글쓰기와 그 수행적 힘이 각별히 조명3)되기도 했다. 또한 최근 에세이물의 당사자 서사가 규범 바깥의 여성 정체성을 실험하며 여성주의적 급진성을 갖는다는 논의4)에서와 같이, 글쓰기의 수행적 힘은 다양한 여성 및 소수자의 가시화와 연동되었다. 한편, 에세이적 글쓰기 일반을 “자아를 일종의 자산으로 생산해내는 장치” 측면에서 조망하고, 이러한 글쓰기의 스펙트럼과 읽기-쓰기의 복잡한 역학 및 형식 문제를 분석하는 논의도 제기된다. 오늘날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자기진술”이 “주체에 대한 진실을 생산해내는 권력을 스스로(재)생산”하는 측면을 비판적으로 점검하는 한영인의 글은 특히 신자유주의 통치술과 개인의 관계를 비롯하여 개인과 자아 등을 둘러싼 복잡함의 근간을 짐작케 한다. 한영인의 논의에서 파생시켜 떠올려보는 장면이지만, 예컨대 당사자가 아님에도 타자를 대신 이야기할 때의 윤리문제는 최근 장르를 불문하고 상식으로 여겨진다. 그 와중에 픽션에서 대상화를 피하는 일이 근본적으로 가능한가라는 회의가 종종 제기되는가 하면 타자를 모델로 삼는 소설의 종언이 비관적으로 선언되기도 했다.6) 그간 문화예술 창작계에서 당사자(성)의 강조는 ‘당사자만 말할 수 있다’는 방식으로 오인되기도 했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서사의 주체를 ‘저자’ 개인으로 환원시키는 좁은 의미의 당사자주의를 우려하는 논의도 오갔다.7) 당사자주의를 넘는 ‘타자와의 관계성’ 혹은 ‘목격-증인’의 자리8)가 강조될 때조차, 그것은 나와 타자의 좁힐 수 없는 차이를 근거로 회의되거나, 진짜 당사자가 누구인지를 가리는 시시비비로 연결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당사자(성)를 둘러싼 논의는 연대가 필요한 자리에서 때로 그것을 더디게 하거나 좌절시켰고, 이런 곤경은 오늘날 ‘나’ ‘자기’에 대한 감각이 무엇에 구속되어 있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진정한 나를 찾는다’는 식의 익숙한 말은 어쩌면 차이로서 증명되는 나를 갈망하는 표현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인식은 일상에서 종종 불안정한 것으로 경험된다. 오늘날 기술 상황에서 타자와의 차이를 통해 확인되는 고유한 나에 대한 바람은 점점 더 곤란을 겪는다. 사용자 데이터 기반 서비스를 표방하는 무수한 플랫폼에서도 주체적 행위, 고유성, 독창성 같은 변별자질을 통해 스스로를 해명하기란 요원해 보인다. 오늘날 우리는 더욱 ‘진정한 나’ ‘진짜 나’를 갈망할 수밖에 없이 세팅된 세계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유와 권리에 대해 조밀해지는 법과 제도가 이러한 이중구속을 강화하는 것도 물론이다. 앞서 적었듯 오늘날 자기서사는 특히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소수자의 존재와 글쓰기를 가시화한 양식의 하나다. 그것은 이 세계 존재를 둘러싼 오랜 위계의 구조를 환기시켰고, 스스로가 서 있는 위치에 대한 감각을 정치화했으며, 자기 삶의 주권을 표명하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러한 ‘자기’는 여전히 개인, 차이, 구획, 정체성, 소유 같은 관념 사이를 공회전하는 측면이 있어왔다. 물론 이것이 현행 세계 속 ‘나’의 지배적 조건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단적으로 대개의 사람들은 어떤 정체성들의 소유자(개인)로 식별되며 인구로 셈해진다. 그러니 정체성을 둘러싼 시민권 투쟁의 즉각적 장소 역시 바로 여기일 수밖에 없다. 정체성에서 출발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그 너머를 향해야 한다는 이야기가9)종종 지난하게 여겨지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요컨대 지금 ‘자기’를 둘러싼 이야기와 곤경이 동시에 부상하는 상황 앞에서 ‘나-1인칭-개인-소유’ 등의 계열어 속 자기표상은 불충분하거나 종종 모순적이다. 2. 나는 나를 소유할 수 있는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지에 따라 그 정체를 가늠하는 감각은 오늘날 존재 인식의 근간을 이룬다. 이때 ‘무엇’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이 글에서 더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소유’ 개념이다. 오늘날 개인 및 개인주의의 근간에 소유의 원리가 놓여 있다는 사실은 ‘소유적 개인주의’라는 말이 잘 드러내준다. 우선 짚어둘 것은, 여기에서의 소유란 유무형의 재화가 아니라 본래 인간 ‘신체’에 대한 소유를 의미했다는 사실이다. 즉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신체, 재능의 고유한 소유주로서의 개인이라는 인식에 기초”하는 “자유로운” 존재로 간주되었고, 이때의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인간이란 바로 이념형으로서의 능동적·자율적 개인에 다름 아니다. 자유는 곧 “소유권을 의미”했고, 그렇기에 소유권의 반대 개념은 탈소유·무소유가 아니라 “타인의 의미지에 대한 종속”으로 간주되었다.10) 의존을 죄악시하고 기피하며 자립한 개인의 능력을 상찬하는 오늘날 지배적 심상의 기원도 여기에서 잠시 짐작해볼 수 있다. 요컨대 소유적 개인주의에서 ‘소유적’이라는 말은 상품과의 관계 이전에 우선은 우리 신체, 그리고 나아가 우리 자신의 노동에 대한 소유를 의미했다. 우리의 신체란 비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재산”이었고 “완전한 자유의 기준은 자기 노동에 대한 소유권의 보유이며, 그 보유의 조건은 곧 물질적 재산의 소유”11)였다. 이는 강조건대 소유가 곧 내가 나 자신과 맺는 관계를 기초지었음을 의미한다. 바로 여기에서 ‘자아’ 역시 신체에 준거한 획정이 필요해진다. 즉 소유적 개인주의는 자아를 둘러싼 모순이나 모호함을 봉합하는 기술이기도 했다. 그런데 신체에 근거한 자아 역시 소유의 대상으로 간주되려면 먼저 일종의 객체가 되어야 한다. 신체를 누가 –다시 말해서 내가 – 소유하느냐의 문제 앞에서 자아는 하나의 구획된 것으로, 그리고 관리 가능한 일종의 통합된 것으로 간주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 ‘적절한 자아’를 가진 ‘주체’가 재산의 소유자로서 행동할 자격과 능력이 있는 사람 즉, 통상 남성·이성애자·백인·비장애인 등으로 간주되어왔음은 강조할 것도 없다. 소유에 기반한 자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특히 2010년대 이후 세계의 여러 변화 앞에서 새삼 부각되고 있는 것 같다.12) 이 세계의 인종·성·장애 여부 등을 둘러싼 정상성 각본에 대해서는 이제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소유’ 개념을 매개로 한 각본이라는 점에 대해 지금 다시 각별히 강조하고 싶다. 우리가 ‘가진 것’에 따라 온전한 인간인지 아닌지를 셈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곧 오늘날 지배적인 ‘주권적인 자아’(sovereign self)13) 개념을 구성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소수자의 정치적 수행성 논의에서야말로 강한 전제로 놓여 있었음을 기억해두고 싶다. 예컨대 퀴어 이론가이자 정치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2010년대 이후 논의에서 특히 소유적 개인주의의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자아 개념을 비판하고 그 너머를 상상하는 관점을 두드러지게 드러내온 점이 의미심장하다. 물론 “주권적, 유아독존적 자아 개념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며 “자아란 이미 관계적인 개념”이라는 그녀의 전제는 오늘날 상호의존적 관계나 타자윤리가 요청되는 자리에서 자주 참조되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이 지닌 정치성을 좀더 강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녀의 주장이 “소유적 개인주의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면서 “소유의 논리 바깥”14)을 고민하며 제출되어 왔음을 환기해야 한다. 그 맥락이 드러나지 않으면서 논해지는 관계성이나 타자 윤리는, 자유주의 휴머니즘과 그리 충돌하지 않는다. 오늘날 여전히 좁힐 수 없는 차이를 전제하는 당사자 논의의 곤경에도 근본적으로는 다른방식의 소유 혹은 (개인적) 소유 바깥이 상상되지 못하는 감각이 놓여 있는지 모른다. 동일성(정체성)으로부터 출발하여 궁극적으로는 차이의 연대로 나아가는 과정에 대한 오늘날의 많은 논의가 있다. 그런데 그 현장마다 좀더 원리적으로 환기해야 할 대목은 “서로가 서로에게 현전하기 위해서는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자기 박탈”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 혹은 “자아를 상대에게 넘겨주는 행위”15) 쪽이어야 할지 모르겠다. 나를 내어주는 일 없이 타인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본성을 제어하도록 하는 도덕이나 의무가 아니며, 우리는 본래 소유 이전의 존재라는 것. 요컨대 ‘자기’에 대한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오늘날 제2의 자연이 된 소유의 관념보다 더 오래된 관계적 존재 양태를 발견하고 긍정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소유를 근본적으로 질문하지 않는 관계성이나 커먼즈 논의는 다소 공허한 이상 혹은 도덕적 당위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하지만 소유보다 더 근본적이고 오래된 존재의 원리가 있다는 사실을 환기할 때, 관계성의 사유는 설득 문제가 아니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자 필연임이 밝혀진다. 이에 대해 한 편의 소설을 경유하여 좀더 생각해본다. 3. 나를 쓰는 일은 어떻게 너를 쓰는 일이 되는가 : 이주혜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속 ‘일기’에 대해 이주혜의 장편소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창비 2023. 이하 이 책에서 인용시 면수만 표기) 속 주인공은 불안, 공황 등으로 치료받는 50대 여성이다. 그는 현재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받은 남편과 가족의 위기로 고통받고 있다. 의사는 치료의 한 방편으로 일기 쓰기를 권하고, 주인공은 어느 글쓰기 교습소의 수업에 참여해 일기를 써나가며 그것을 타인들과 공유한다. 소설의 중요한 장치인 일기는, 일차적으로 의사의 권유를 통해 자기치유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런 설정은 글쓰기를 통해서 자신을 회복하며 스스로를 자기 삶의 주인(소유자)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을 먼저 떠올리게 한다. 최근 많은 자기 서사가 품고 있는 글쓰기의 수행성과 ‘자기’의 테크놀로지가 서사화된 듯 여겨진다. 하지만 이것은 소설에 대한 절반의 독해다. 주인공의 일기 안으로 좀더 들어가보자. 소설 속 일기는 주인공의 유년을 회고하는 장치다. 회고되는 시간은 1979년 겨울부터 1980년 초여름이다. 이 시간이 암시하는 바를 한국의 독자는 쉽게 알 수 있지만 그 의미를 전하는 것이 소설의 핵심은 아니다. 일기 속 사건이나 존재는 명료하게 요약하기 어렵다. 어린 주인공의 시점을 통해, 이른바 시대적인 것과 사적인 것은 썩 구별되지 않게 그려진다. 예컨대 한국 현대사의 격변을 암시하는 것들은 아이들을 재우고 어른들끼리 주고받는 비밀스러운 분위기,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모호함과 불안으로 묘사된다. 비상계엄령, 데모 등과 같은 시대어는 주인공의 사사로운 일상에 비해 배경으로만 놓여 있다. 하지만 직접 의미화하는 것 이상으로 배경의 구속력은 강하게 전달된다. 이런 효과가 주인공의 일기 속 기록으로부터 발생하고 있음을 우선 확인해둔다. 일기 속 사건과 사건, 장면과 장면 사이는 환유적으로 연결되며 궁극적 의미는 자꾸 미끄러진다. 회고되는 기억도 불안정하다. 아빠의 실종, 낯선 남자의 등장 및 그의 느닷없는 추방 등은 파편적 이미지로만 제시될 뿐 어떤 구체적 의미에 도달하지는 않는다. 이런 서사적 파편과 공백은 얼핏 소설적 개연성의 결함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간 우리가 회고에 기반한 성장서사, 기억서사로부터 어떤 익숙한 의미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작품들이 현재 시점에서 과거로 임의로 재구성·편집되는 과정을 노련하게 감추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 소설 속 일기는 그러한 과정을 최대한 지양하고 기억의 파편을 그대로 노출한다. 주인공의 일기에서 부상하는 것은 오히려 기억이 종종 부정교합을 수반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러한 기억주체로서 자기의 불안정함이다. 통상 일기 속 성찰 대상이 될 ‘자기’는 늘 스스로가 소유하는 객체로 전제된다. 하지만 이 소설 속 일기는 그 장르의 핵심인 자기를 문제의 장소로 삼는다. 자기는 애초에 불안정하고 픽션적일 수 있음이 우선 소설에 암시되어 있다. 불안정하다는 것은 윤곽이 불분명하다는 의미다. 어떤 소유의 형상으로 대상화될 수 없다는 말이다. 소설 속 일기는 처음에 분명 자기를 질료 삼는 자기치유의 의미를 부여받았지만, 실제 그 서술과정에서는 연루된 존재와 사건과 세계가 부조된다. 주인공과 친구, 사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등은 명료하게 구분되지 않는 얽힘(entanglement)으로 이미지화된다. 불안과 같은 정서도 누군가의 것(소유물)이라기보다 그 모두를 관통하고 아우르는 것으로 혼연해 있다.16) 예컨대 “시옷에게 비는 살이 부러진 우산과 젖은 신발을 의미했다. 그 축축함과 막막함은 군모를 깊숙이 눌러쓴 어느 군인이 국방색 우비 위로 길쭉한 소총을 끌어안고 집요하게 비를 맞고 있던 장면을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끌어들이기도 했다”(26면)는 대목을 보자. 지금 이 대목에서, 어린 시절 주인공이 싫어했던 비의 경험은 ‘젖은 신발’과 ‘소총을 든 어느 군인’을 매개로 겹쳐지며 그녀의 ‘비’에 대한 기억을 이미지화한다. 또한 이것은 지극히 내밀한 몸의 감각에 대한 기억인 동시에 한 시대의 폭력이 단번에 서사적으로 환기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사사롭다고 여겨지는 어린아이의 경험이지만, 거기에는 개체적 몸을 관통하는 어떤 세계가 있다. 이런 서술의 와중에 홀연 인지되는 주인공의 몸의 변용 순간도 흥미롭다. 소설에서 유독 강렬한 정서를 자아내는 대목이다. 주인공은 글쓰기 교실에 서 1980년 “5월의 한복판”(212면)의 일을 낭독하는데, 이는 유년시절 주인공이 품고 있던 비밀이 폭력적으로 억압된 경험에 대한 회고이다. 성인이 된 주인공은 수강생들 앞에서 그 회고의 일기를 읽으며 격렬한 울음을 터뜨린다. 그때까지의 서사 속 긴장은 순간 파열한다. 독자는 이 장면을 심리적 문제가 해결되는 단계로 읽고 싶은 강한 유혹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이것은 심리적·정서적 문제극복의 과정으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질적 시공간이 서로 긴장하다가 동시적으로 마주치며 폭발하는 순간에 가깝다. 가령 그녀의 현재 고통은 남편으로 인해 관계가 파괴된 일로 인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치유하기 위한 글쓰기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어른들에 의해 좌우되는 아이의 일상과 그 배후에 놓인 가부장제 및 친밀한 폭력의 -그것은 다름 아니라 남자아이에 대한 어른들의 염원 때문에 그녀가 자신의 성별을 숨긴 채 남성 성별을 수행해야 했던 일이다- 이 드러나자 느닷없이 그녀가 내쫓기는 순간은, 한없이 취약했던 존재가 무참히 상처 입는 순간이다. 그것은 정확히 학교에도 거리에도 총을 든 군인들이 있었던 ‘1980년 봄’ 한복판의 일로 기록된다. 지극히 내밀한 자기의 비밀이 시대의 폭력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 장면은 정확히 환기시킨다. 그녀의 뒤늦은 울음에는 서로 무관해 보이지만 구조를 공유하는 여러 시공간의 폭력이 가로지른다. 이 울음 장면은, 어떤 존재(몸)가 독자적인 개체이기 이전에 이미 늘 연루되어 있던 세계와의 교섭 현장이자 그 효과임을 증거하는 것 같다. ‘나’ ‘자기’는 선행되어 있다기보다 사건적으로 출현하고 이내 사라지는 것이다. 이후 주인공의 이야기가 후경화하고 타인들의 이야기가 본격 부상하는 서사 진행도 이를 뒷받침한다. 4부에서는 어린 그녀가 이사한 곳에서 만난 이들, 특히 이웃집 윤수와 그 가족 이야기가 다소 의미심장하게 전개된다. 윤수와의 우정, 이웃집과의 친교는 1980년대 이른바 기층민의 삶을 엿보게 하는 바가 있지만 그것을 기록하는 시선은 바깥에 있지 않고 그 삶 안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소설은 점점 현재 그들의 안부를 묻는 이야기로 이행한다. 그녀, 즉 1인칭 주인공 ‘나’의 이야기이자 일기 속 ‘시옷’의 이야기는 그 고유함을 버리지 않으면서 점점 한 시대의 공기를 ‘감각’시키는 이야기가 되어간다. 현재 ‘나’의 상처가 추동했을 글쓰기는 타인과의 관계가 지지해 온 시간을 회고하는 서사로 이행한다. ‘나’의 윤곽은 주인공의 일기뿐 아니라 소설 전체에서도 점점 흐려진다. 이들의 삶은 각자의 것으로 소유, 독점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 속에서 의미화된다. 즉 기존에 일기라는 1인칭 글쓰기가 담보하던 ‘나’ ‘자기’는 이 소설에서 어떤 기원이나 본질 혹은 증명의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삶이 어떻게 구성되고 어떤 메커니즘을 거쳐 의미화되는지 일기 쓰는 주인공이 체현한다. 주인공의 일기에 적히는 것은 할머니의 독경 소리, 늘 복잡한 감정을 품게 했던 옆집 친구 애니, 아버지의 빈자리 등 타인과 얽혀 있는 기억이며, 또한 이 소설에 그려지는 것은 그 일기를 함께 읽어주는 현재의 무심하면서 다정한 동료들의 모습이다. 이렇게 소설은, 자기를 쓰는 일이 곧 타자를 쓰는 일임을 보여준다. 좀더 적극적으로 의미부여를 한다면 이것은 나/너와 같은 개체적 몸을 초과하는, 혹은 그런 몸으로 분화하기 이전의(metastable)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읽은 일기 안팎의 ‘나’들은 개체들간의 상호적인(inter) 관계라기보다, 식별되지 않는 내적으로(intra) 얽힌 존재의 이미지에 가깝다. 즉 오롯한 자기, 내면 같은 표상이 본래 품고 있었을 모호함과 균열뿐 아니라, 그러한 자기와 내면을 구성시키는 무수한 연루됨 자체가 곧 ‘나’임을 암시하는 것이 이 소설 속 일기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감각으로 미처 식별되지 않는 무수한 사물도 나를 관통하고 구성할 것이다. 앞서 인용한 비 내리는 장면의 회고에서처럼 단일하게 통합된 자기가 아니라, 오히려 이질적 존재와 사건들, 시공간의 비인격적 웅성거림 속에서 불현듯 확인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각별히 기억해야 할 ‘자기’의 한 의미일지 모른다. 주인공이 일기 속 자신을 내내 ‘시옷’이라는 기호로 표기하고 지칭하는 것도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일기를 쓰는 주인공은 “‘나는’이라고 시작했더니 한줄도 쓸 수가 없었”(32면)다는 이유에서 시옷이라는 이름을 쓴다. 시옷은 “넘어지지 않고 걸어가는 사람처럼”(33면) 생겼다는 이유에서 선택되었는데, 이것이 서로를 지탱하는 ‘사람 인(人)’의 형상을 염두에 둔 작명임도 분명하다.17) 소설은 이렇게 주인공을 통해 처음부터 ‘나’라는 주어의 함의와 무게를 암시해두었으며, ‘나’의 시선이 독점해온 1인칭의 세계를 내어 주고 3인칭적 재현을 전경화한다. 이 소설을 두고 “‘나’의 쓰기가 스스로의 이야기에만 머무르지 않고 타인의 다면성을 서술하는 일로도 이어진다”18)는 평가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 적확하다. 소설 속 ‘나’는 명료한 윤곽과 표상을 갖는 존재이기 이전에, 내내 유동하고 있는 어떤 관계 자체이다. 이런 메커니즘을 생각할 때 오늘날 항간에서 말하는 타자 윤리는, 도덕적 의무가 아니라 존재의 원리이자 필연이다. 소유 너머 자기를 상상하는 일과, 연루됨 자체를 사유하는 것은 불가분이다. 4. 소유와 주권적 자기 너머, 혹은 소설적 커먼즈의 상상 지금까지 읽은 이주혜의 지금까지 읽은 이주혜의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속 ‘자기’는 ‘내 삶은 내가 소유하고 있다’는 식의 당사자성이나 자기인식과는 거리가 있다. 주권의 문제는 늘 경계 획정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19) 주권은 항상 권력 관계와 지배를 표시한다. 국가뿐 아니라 인간의 가장 내밀한 자아 역시 소유를 위해 구획되고 객체처럼 간주된다. 그런데 이주혜 소설은 ‘나’ ‘자기’가 그런 객체이기 이전에 이미 늘 타자와 연루되어 있는 준안정적인 지대임을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면 지금 주권적 자기 너머를 상상한다는 일은 어떤 구획과 소유와 권리 이전의 지대, 일종의 잠재성을 사유하는 일과 관련된다. 나아가 그러한 ‘자기’를 일종의 관계성의 장소로 전유하는 일이 요청된다. 어떤 존재가 배타적으로 점유한 예컨대 정체성을 본질처럼 인종화하는 통치술과 겨룰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독점될 수 없는 세계의 속성을 생각할 때, 미학과 윤리는 불가분이 아니라는 점도 다시 진지한 성찰의 대상이 된다. 물론 유의할 점은, 이것이 오늘날 세계의 역학과 실제를 없는 것처럼 여기며 소유로부터의 이탈을 낭만적으로 예찬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탈소유에 대한 논의는 자칫, 누군가의 땅을 무주지나 황무지로 간주하여 점유해온 정착민 식민주의의 역사를 정당화하기도 쉽다. 또한 무엇이든 가능한 자아를 낭만화하는 자유주의적 모토로 전유되기도 쉽다. 앞서 버틀러의 논의에서처럼 탈소유라는 말이 품고 있는 폭력적 ‘박탈’은 지금도 이 세계에서 늘 진행형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살핀 ‘나’ ‘자기’는 분명 소유 이전의 양태를 환기시킨다. 모든 사물에 소유의 권리가 부여되어온 역사에도 불구하고, 본래 경계를 획정할 수도 독점할 수도 없는 ‘나’가 있다. 근대적 주권 및 소유적 개인주의와 불가분이었던 자기를 이렇게 다르게 사유해볼 때, 커먼즈로서의 문학에 대해서도 약간의 첨언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언어, 감정, 사유, 땅, 하늘 등 나열할 수 없는 많은 것이 본래 누군가에게 배타적으로 귀속될 수 없는 커먼즈임은 부연할 것도 없다. 하지만 언어, 감정, 사유 등에 일종의 형식을 부여한 문학에 대해서 커먼즈의 사유를 진척시키는 데에는 모종의 어려움이 있다. 예컨대 ‘서명(署名)’으로 상징되는 오리지널리티와 소유의 감각이 성립시킨 (근대)문학 관념은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오늘날 문학을 둘러싸고 조밀해지는 법과 제도는 소유의 감각을 더욱 자명한 것으로 여겨지게 한다. 소유와 주권적 자기의 구조로부터 도피하지 않으면서 부당함을 문제 삼고, 동시에 그 구조 너머를 상상하는 일은 지난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커먼즈로서의 문학 논의에서 계속 질문해야 할 고리가 바로 이 소유의 원리임도 분명하다. 물론 많은 이들이 지적해왔듯, 커먼즈는 단지 주어져 있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커먼즈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그것은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라기보다 함께 만들어가야 할(commoning) 것이고,20) 때로는 투쟁의 산물21)이다. 그렇기에 현행 세계의 역학과 다양한 폭력을 문제 삼는 것은 곧 커먼즈의 주제이기도 하다. 소유를 자명하게 여기는 감각은 커먼즈의 사유를 자꾸 멈춰 세운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러한 이중구속적 상황에서 쉽게 몸을 빼거나 멈춰서는 안 된다. 한 문학연구자는, 새로운 소유권의 형태로 도래한 근대 일본문학 초창기 풍경을 조망하면서 거기에 아이러니하게도 다양한 커먼즈의 계기가 있었음을 발견한다. 그는 소유를 질문하는 불안정한 지대를 포함하여 “작가, 허구의 인물, 독자가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과정”으로부터 커먼즈의 가능성을 타진한다.22) 그는 질문한다. 어느 소설 속 ‘이름 없는 고양이’가 발화하는 그 발언권은 (고양이는 인간도 아니고 이름도 없다는 의미에서) 법적으로 누구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인물의 광기는, (통합되고 관리되는 자아를 갖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으로 소유의 주체적 위치에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닌지. 또는 한 여성의 소유를 둘러싼 한 지식인의 죄책감은 (가부장제 속 여성의 위치와 마찬가지로) 식민지를 폭력적으로 소유하는 당시 제국의 죄책감을 의미한 것 아닐지 등.23) 앞서 이주혜 소설에서 읽은 ‘나’ 역시 심지어 자기에게조차 독점될 수 없고, 늘 무언가와 연루되어 있는 일종의 준안정적인 지대임을 확인했다. 지금 커먼즈의 조건은 바로 이 불안정함, 혹은 경험되지 않은 잠재성 자체로부터 상상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바로 이 지대에서 바로 (방금 인용한 문장에서처럼) ‘독자, 인물, 작가’가 만나는 것 아닐까.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읽는 나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의 뒤표지에는 소설가 하성란의 이런 감상이 적혀 있다. “누구 한명의 것일 수 없는 그들의 이야기는 결국 이주혜의 이야기이자 책을 읽는 ‘나’ 들의 이야기가 된다.” 여기에서, 소설 속 그들의 이야기가 곧 “이주혜의 이야기이자 책을 읽는 ‘나’들의 이야기가 된다”는 대목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앞서 강조한 ‘자기박탈’ ‘자기를 내어주는 일’을 겹쳐 생각하고 싶다. 예를 들어, 우리는 허구로서의 이야기에서 나에 가까운 무언가를 만나고 공감한다. 하지만 때로는 그 이야기 속에서 자기를 잃고 헤매기도 한다. 이야기 속에서 나는 이미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 -예컨대 경험, 정체성- 에 대해 응답받기도 하지만, 반대로 나를 내어주는 장소가 곧 이야기이기도 하다. 앞서 이주혜 소설 속 주인공이 일기라는 형식 속에서 1인칭(나)을 내어 주면서 자기를 쓰는 일이 곧 타인을 쓰는 일이 되었음을 떠올려보자. 동시에 그때, 일기와 픽션을 구별할 수 없게 된 것을 떠올려보자(소설 속 한 인물은 그녀의 일기가 소설 같다고 말하고, 그녀는 자신의 글이 픽션이 아니라고 말한다). 일기가 타인들의 세계로 이행하는 서사 속에서 소유에 기반하는 주권적 자기의 형상은 교란된다. 그리고 픽션과 일기라는 형식과 관련해서도 장르적 구획 이전의 불명료한 지대가 부상된다. 자기를 내어주면서 도달한 곳이 타인의 세계와 더불어 소설적 장소라는 사실은 ‘소설적 커먼즈’ 의 또다른 의미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강조하건대 소유를 질문할 때, 경험으로 환원될 수 없는 잠재성의 지대가 열린다. 그것은 주권적 자기 너머의 연루됨 자체로 우리를 데려간다. 쓰는 이만 자기를 내어주는 것이 아니다. 독자, 소비자, 유저 등 특정 정체성의 이름으로 환원되기 이전의 나의 몸들이 거기에서 스스로를 잃고/잊고/헤매도록(dispossession) 초대받는다. 익숙한 회로 속에서 쉽게 공감하는 것만 ‘함께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스스로(라고 여겨지는 것)를 내어주는 일에 초대받고, 그 낯섦에 기꺼이 응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지는 시대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는지 모른다. 이것이 지금 커먼즈로서의 문학에 보태볼 또 하나의 의미일 수 있지 않을까. 1) 계간 『창작과비평』 2025년 봄호(제207호)에 게재된 동명의 글을 수정 보완했지만, 이에 대한 좀더 최근의 상세한 내용은 「말하는 입에서 듣는 귀까지 : ‘자기서사’ 문제틀의 재구성」(김미지 외, 『젠더』, 문학과지성사, 2025)에서 전개했다. 2) 이른바 ‘자기서사’가 2016~17년 광장, 페미니즘 대중화의 시간을 통과하며 특히 부상했다는 점이 2025년 2월 시점에서 다시 의미심장하게 환기된다. 12·3 사태 이후 여의도, 광화문, 남태령, 한 강진 광장에서의 ‘자유발언’ 및 이후 일일이 거론할 수 없는 다양한 그룹(시민활동가, 소수정당, 연구자 등)의 집담회, 토론회 등에서 자유발언이 이어지고 있고 그 발언 속 ‘개인’과 ‘연대’의 형식에 많은 이가 주목하고 있다. 광장의 경험은 늘 말을 바꾸어왔고, 말은 늘 광장을 바꾸어왔다. 지금의 분위기는 또 한번 자기를 발화하는 형식에 대한 논의가 재점화될 것을 예고하는 듯하다. 이 글에서 ‘자기’는 self의 번역어이다. 부분적으로 ‘자아’로 읽는 것이 자연스러울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기’로 표기했다. 3) 장영은,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민음사, 2018 참조. 4) 김은하, 「젊고 아픈/미친 여자들과 자기 이론으로서의 글쓰기」, 『여성문학연구』61호, 2024 참조. 5) 한영인, 「자아 생산 장치로서의 에세이」, 『갈라지는 욕망들』, 창비 2024, 215, 217면. 6) 日比嘉高, 『プライヴァシーの誕生』, 新曜社 2020, 254면 참조. 7) 오혜진, 「지금 한국문학장에서 ‘퀴어한 것’은 무엇인가(1)」, 『문학과사회-하이픈』, 2018년 겨울호. 8) 오카 마리,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 이재봉·사이키 가쓰히로 옮김, 현암사 2016. ‘목격-증인 되기’에 대해서는 8장을 참조할 수 있다. 9) 가야트리 스피박, 『스피박의 대담』(새럼 하라쉼 엮음, 이경순 옮김, 갈무리, 2006, 254쪽),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어셈블리』(이승준·정유진 옮김, 알렙, 2020) 참조. 10) C. B. 맥퍼슨, 『소유적 개인주의의 정치이론』, 이유동 옮김, 인간사랑 1991, 25-26, 206면. 11) 같은 책, 212면. 12) 특히 2010년대 이후 영어권의 각 분과마다 신자유주의 지배구조 분석과 관련해 ‘소유적 개인주의 50년 후’라는 문제의식이 널리 공유되어왔음을 참조해본다. 13) 주디스 버틀러·아테나 아타나시오우, 『박탈』, 김응산 옮김, 자음과모음 2016 참조. 이 책에서 두 대담자는, 오늘날 세계가 어떻게 주체의 구성적 상호의존성을 차단하고 정착민 식민 체계에서 박탈·탈소유(dispossession)를 역사적으로 합리화하기 위해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넘어설 원리가 무엇일지 논의한다. 14) 같은 책, 26-27, 338면. 15) 같은 책, 337면. 16) 여기에서 물리적으로 구획된 몸을 넘는 정동적인 경험과 연결신체(assemblage)의 주제를 소환할 수도 있고, 이런 이유에서 이 소설은 ‘5월 광주 소설’의 새로운 방법을 가늠케도 한다. 이것은 단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축자적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 ‘개인적인 것’의 의미를 재구축하는 과정, 그리고 ‘자기’라는 내적 표상이 시간의 축적 속에서 구축되는 과정을 확인하는 것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어떤 사건에 대한 당사자와 비당사자 문제, 이른바 경험 없는 세대의 ‘포스트 기억 장치’ 문제에 시사하는 바도 적지 않다. 17) 물론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시옷에게 이름조차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순간을 이야기하며 그에 대해 “사과하고” “말을 걸고 싶었”으며 “이름을 불러주고” “다정하게 안부를 묻고 싶었다”(347면)고 적어두기도 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작가의 사후적 소회와 별개로 분명 ‘나’ 혹은 어떤 고유명을 피하는 설정 속에서 오히려 자기=나를 둘러싼 존재의 원리를 근원적으로 보여준다. 18) 김다솔, 「붉은 언어로부터 무한히 탄생하는 세계」, 『문학동네』 2024년 봄호 56면. 19) 우카이 사토시, 『주권의 너머에서』, 신지영 옮김, 그린비 2010, 379면 참조. 20) 데이비드 볼리어, 『공유인으로 사고하라』, 배수현 옮김, 갈무리 2015 참조. 21) Silvia Federici, Re-enchanting the World, PM Press 2018, 87면 참조. 22) Michael K. Bourdaghs, A Fictional Commons, Duke University Press 2021, 11, 23면. 23) Michael K. Bourdaghs, 같은 책 2~4부 참조.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문」 「마음」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을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계간 창작과비평 김미정 자기서사커먼즈자기소유주권소유적 개인주의 2025
선우은실 상태로 말하는 방법 : 최재원 , 『백합의 지옥』 (민음사, 2024) /신미나 , 『백장미의 창백』 (문학동네, 2024)

표면-상태-읽기  문학은 인간의 내면 또는 물질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하나의 관점이다. 하나 내면은 '내면'에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앞의 문장은 의미를 다르게 가진다. 내면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틀리고 비뚤어진 형태로 또는 속에 있는 그것과 다르지 않은 형태로 비죽이 튀어나오는 것임을, 우리는 이미 안다. '내면'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이 그것을 가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타인에게서 또한 그것을 '본다'. 그것이 '어디'에 있든 누구에게 있든 그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표면적인(보이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문학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을 표면을 읽는 일과 같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표면을 읽는 것이 내면을 읽는 일이 될 수 있을까? 아주 표면적인 방식으로 내면을 추측하게 만드는 시에서라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울지도 모른다. 최재원 시인의 『백합의 지옥』 중 "별늪"이라 이름 붙은 장에 수록된 시편들은 연결성을 가진다. 제목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상어 세계의 법칙에 적응하지 못하고 친구가 되어줄 누군가를 찾는 "부끄럼쟁이 상어 위스퍼"는 "제멋대로 올챙이 오페라"를 바다에서 만나고, 이 둘은 “배고픈 물뱀 나르샤"를 만나 함께 모험에 오른다. 자기 위로 쌓이는 모래를 떨어낼 생각도 없이 침잠했던 "심심한 넙치 누가바"가 이 무리에 합류하고, 이들은 “마그마라는 이름의 마그마"를 만나며, 이들과 함께 걸음 하는 마그마는 은하수라는 이름의 은하수를 만나 "별늪"이 된다. 그리고 이 시들의 여정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마그마와 은하수는 별들을 주고받으며 / 하나가 되었다 / 별늪엔 별꿀이 가득히 흘러서 누구도 / 배고프거나 심심하거나 외롭지 않았다 - 「별늪」 부분  요약건대 이 시는 위스퍼, 오페라, 나르샤, 누가바, 마그마, 은하수가 별늪이 되어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 내면은 어디에 있는가? 요약이 말해주지 않은 부연 설명과 수식의 말들을 들여다볼 때 그것을 찾을 수 있다. 상어 위스퍼는 동료 상어들이 "자신들과 함께 다니려면 사람의 다리 하나를 / 가져오라고 부추"(「부끄럼쟁이 상어 위스퍼」)긴 끝에 길을 나섰으나 끝내 그렇게 하지 못한 채 오페라를 만났다. 올챙이 오페라는 자신이 살 수 없는 바다에서 살고자 하다가 동료를 만났고, 오래 굶은 물뱀 나르샤는 오페라를 잡아먹으려다 위스퍼를 보고 숨었지만 이내 그들과 동료가 되기로 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무언가에 저항하거나 반(反)함에 따라 삶을 성취하고 있다. 이때 '반'은 '부정'에 방점이 찍히지 않고 주어진 것의 '바깥'에 찍힌다. 주어진 것에서 탈출하는 것, '하라고 시켜서 되는 것'의 바깥쪽에 위치한 수많은 가능성을 지향한다.  그렇다면 이 시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저항함으로써, 때때로 죽음을 감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워지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해석은 이 시의 표면인가, 이면인가? 문장이 지시하는 것을 읽어나갔을 뿐임에도 문장이 발설하지 않고 내포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헤아렸으므로 이면을 읽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표면을 읽은 것이라 할 수 있지 않나?...... 정답 없는 이 의문점에서 표면이냐 이면이냐 중 하나로 결론을 내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질문을 돌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살아가는 일이 '존재'가 아니라 '상태'로 지속된다는 사실이다. 즉 존재의 방식이나 형식(표면), 존재의 의미(이면)를 파악한다는 것은 어떠한 상태인가를 헤아림으로써 가능하다.  이처럼 최재원의 시는 표면으로 이면을 말한다. 대도시와 약간의 거리를 둔 업스테이트에 살면서 그야말로 '삶'과 자연의 의미를 갈구하는 듯하지만 지극히 탈자연적인 방식으로 시간과 공간 곳곳을 채우고 있는 두 사람이 등장하는 시 「업스테이트」 역시 지극히 표면적인 것을 묘사한다. 그러나 그 표면을 잘 살피면 삶을 주관하는 자와(퍼치를 낚음) 삶에 종속당하는 자(대도시적인 생활 관습으로부터 멀어지지 못함)의 위치가 거듭 전도되는 '상태'가 발견된다. 표면을 통해 상태를 보여주는 이 시를 지나, 비누 거품을 내어 손을 씻는 모든 과정과, 그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는 타인을 바라보며 관념적 상태변화를 묘사하는 「기브앤테이크」를 거쳐, 「비엔나소시지」에 도착해 이번에는 이런 물음을 꺼내본다. 분리 불가능한 표면과 이면 어디께를 휘저으며 의미를 찾아내는 일의 가장 흔한 방식은 어쩌면 '개인적으로 좋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과 같지 않은가? 그게 과연 '개인적'일 수 있는지 묻고, '좋음'이란 게 구체적으로 뭘 의미하는지 설명하는 순간 시라는 표면은 지극히 개인적인(내면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게다가 그것이 발설되면 내면은 더는 내면이 아니게 되는 데다 이 시에 대한 변형된 의사를 전달하는 것으로는 개인적인 이야기가 되지 않으니, 이 역시도 표면으로 내면을 드러내 보이는 상태에 관한 것이겠다.  그런 까닭에 이 시에 대한 '개인적으로 좋음'이라는 메모를 이런 식의 해석으로 풀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시는 비엔나소시지를 먹는 상황을 묘사한다. 물론 그사이에 끼어드는 세부적인 의견이나 수식된 말 등이 중요하다. 어떻게 먹어야 최상의 조화로움 속에서 비엔나소시지볶음을 먹을 수 있는가를 궁구하는 일련의 상황 사이에 그리움, 환멸, 어머니와 같은 정념들이 “꾸역꾸역” 끼어든다. 당근의 맛이라든가, 재료 익힘의 정도, 당근과 다른 재료와의 조합을 씹을 때의 맛, 감각, 만족도 같은 것은 꾸역꾸역 끼어드는 생각들의 맛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면 그건 무슨 맛인가. 그런데 한 번도 빼놓지 않고 / 양파와 당근을 썰어 넣는다는 것은 얼마나 착실한 / 일입니까 얼마나 / 열심한 일입니까 특히 / [......] / 꾸역꾸역 아침부터 국을 / 데우고 소시지를 볶고 찬 / 반찬 더운 반찬 김치를 / 각각 포일로 그 비좁은 / 도시락통을 지혜롭게도 / 기술적이게도 딱 / 3등분으로 나누어 / 나는 그런데 국물이 흐르면 / 화가 났습니다 당신에게는 / 아니고 국물에게 그리고 신부님의 / 고고하고도 자애로운 모습을 문득 / 떠올립니다 급할 것 하나 없이) - 「비엔나소시지」 부분  비엔나소시지를 반찬으로 싸는 사람이 그렇게 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에 무엇이 깃들어 있는지, 요컨대 이 재료들이 비엔나소시지 반찬이라는 지금의 상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화자는 생각한다. 비엔나소시지는 누군가 성실하고 착실하게 열심히 야채를 썰어 넣는 노고이고, 비좁은 도시락통을 현명하게 구획하는 지혜이고, 그 결과물이 의도치 않게 약간의 국물을 새어 나가게 만들 수도 있는 우연적 실수를 동반한다. 수많은 사랑에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비의지적 결과에 화가 난다고 화자는 말한다. 이 근사한 노고와 지혜와 사랑과 성실함이 흘린 약간의 국물을 두고 감사·만족·풍족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단지 국물 때문에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분노를 느끼는 이 어긋나는 감각은 이것을 먹는 사람에게 죄책감이나 환멸을 느끼게 만들고, 그러다가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는 이에게 자애를 구하고 싶어지게 만든다. 그래서 이 시는 이렇게 끝난다. “저에게 / 저에게 자애를 베푸소서 / (내가 갈 곳에는 비엔나 / 소시지와 같은 추잡한 / 것들이 없게 하소서 / 꾸역꾸역 살아 낸 것들 / 의 기억을 모두 잊게 하소서"(「비엔나소시지」)라고. 그러면 비엔나소시지 먹기라는 건 노고·노동·사랑·지혜, 그런 것들에 대한 생각, 이 모든 걸 배반할 만큼의 분노와 짜증과 혐오감 그리고 그것에 대해 용서받고 싶은 마음이다.  요컨대 최재원 시의 표면 읽기란 의미란 무엇이며 어떻게 발생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을 듣는 일이다. 최재원의 시는 인내심을 가지고 여러 차례 그것을 일러주고 있다. 자세한 표면을 보라고. 그리고 존재를 강구하지 말며 상태를 헤아리라고. 상태를 헤아리면 의미가 발생한다고. 죽음-상태-읽기  꼭두를 한 달 사이에 세 번이나 보았다. 한번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전시되고 있는 사진전에서, 다른 한번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다른 전시장으로 건너가며 스쳐 지나가듯 놓인 실물을, 마지막 한 번은 신미나의 시에서 “꼭두"라는 기호로 보았다. 꼭두를 세 번 보았지만 '꼭두'를 본 것이지 실제로 그것이 본래의 의미로서 작동하는 상태를 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꼭두는 전통적인 장사(將事) 문화에서 볼 수 있는 목각 인형이다. 망자를 '저편'으로 인도하고 수호하는 역할을 하며 상여의 곳곳에 놓인다. 말하자면 꼭두는 나무이고, 나무로 만들어진 인형이고, 죽음이고, 수호이고, 죽음의 길잡이다.  최근 세 번이나 보았지만 꼭두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나? 나는 사진으로 된 목각 인형을 보았고, 목각 인형 전시물을 보았고, 죽음에 대한 시를 읽었다. 사진전에서는 꼭두를 찍어 186.5×159센티미터 사이즈로 커다랗게 인쇄하여 세로로 세워두었고, 지나치듯 본 꼭두 인형은 '전시물'로서 전시장 한복판에 서 있었다. 꼭두의 모양새와 가장 닮지 않았지만 꼭두의 수행적 의미에 가장 가까운 것은 신미나가 쓴 「꼭두전」에 등장하는 “꼭두"라고 할 수 있겠는데, 장사를 지내는 시에서 “꼭두"가 망자를 이끌고 수호하는 존재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 "꼭두"는 문자의 나열과 문장의 직조로 펼쳐진 죽음으로 향하는 상상된 언어 속에서 등장했으므로 어쨌거나 상징적 기표의 상태로 간주되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꼭두를 세 번 봤지만 세 번 다 꼭두를 봤다고 할 수는 없고, 사진과 전시물과 죽음에 대한 상상의 현물로서 그것을 보았다. 보았다...... 한데 나는 무엇을 본 것일까?  앞서 최재원의 시를 읽으면서 개체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상태를 지속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상태의 지속은 항상성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불안정성과 유동성을 의미한다. 변함없는 상태처럼 보이기 위해서 개체는 변화하는 시간에 맞게 대응해야 하고 달라진 상태에 맞서 새로운 움직임(혹은 멈춤)을 추동해야 한다. 신미나의 시에서 여러 번 발견되는 '죽음'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죽음은 역시 삶의 중(中)이자 삶이 아닌 중의 중의 이동에서 감지된다. 죽음은 존재의 중지, 상태의 종료처럼 생각되곤 하지만 삶이 곧 존재가 아니듯 죽음 역시 비-존재가 아니라 삶이 아닌 상태다. 이로써 신미나의 시는 삶과 죽음을 상태, 즉 유동으로 간주하는 듯하다.  죽음이 존재라는 것에 불이 들어왔다가 나가는 그런 이분법적인 것이 아니라면, 삶을 소거하는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보고 이 질문에서 시작해보자. 삶이란 무엇인가? 즉, 죽음을 소거한 채로 죽음을 어떻게 말하는가? 언니들은 비밀이 많고 / 금요일엔 주름이 많은 치마를 입었지 / 블라우스 리본을 매고 / 흔들리는 구두를 신고 뾰족하게 웃었네 // 나도 따라가고 싶어 [......] // 넌 아직 어려 [......] // 주머니 속에는 시를 쓴 종이가 있는데 / 언니들을 슬프게 만드는 시가 있는데 / 여름휴가는 짧고 / 동생이 시를 써서 언니들은 기쁘다 말하고 / 시를 쓰면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 같아 // 언니들을 시로 써도 될까 / 사탕수수밭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을 / 미래, 미래, 미래로 물결쳐오는 문장들을 // 언니들은 풀었던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으며 / 머릿수건을 두른다 / 식판을 들고 밥과 국을 배급받는다 / 에나멜 구두는 금요일에만 꺼내 신을 것 // [......] // 뭔가 시작되려는데 / 그게 무엇인지 / 아무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지 / 아무도 - 「바람 주머니가 부풀 때」 부분  “아무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지"에 시의 핵심적 태도가 함축되어 있다. 아무도 일러주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 '뭔가'가 무엇인지. 그런데 이 표현 자체가 '그것'이 소거된 형태로 말해진 결론이다. “그게"로 표현되어 있는 '그것'의 정체를 어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일러줄 수 없다. 그래서 아무도 '나'에게 일러주지 않은 것이다. 이미 그 상태에 속해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일러줄 수 없는 것이 바로 삶인지라, '나'는 알고 싶었으나 아무도 일러주지 않아서 속수무책 빨려 들어가 있는 바로 이 '상태'에 그냥 놓인 채로 그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는 중이다(삶-인 중이다).  삶은 '무엇'이 아니기 때문에 '무어'라고 알려줄 수 없다. 삶은 존재하는 상태와 같이 유동하는 흐름 속에 놓여 있다. 시를 조금 더 세밀하게 살펴 이들이 어떤 흐름과 상태에 놓여 '그것'을 겪고 있는지를 따라가보자. 이 시에서 "언니들은 비밀이 많”은 존재다. '나'는 언니들을 따라가고 싶어 하지만 어리기 때문에 언니들의 비밀에 합류할 수 없다. 비밀이 많은 언니란 언젠가 될(또는 궁구하는, 희망하는) '나'의 미래이고, 그런 점에서 삶의 한 단면이다. 이 문장을 좀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삶이란 비밀을 지닌 미래'다. '나'는 언니들의 비밀에 합류하지 못한 대신 시를 쓰면서 비밀을 만든다. 시를 쓴다는 것은 비밀을 만드는 것이다. 시를 쓰는 일은 '나'를 몰래 나쁜 일을 하는 것 같은 비밀스러운 상태로 만든다. 비밀스러운 '나'의 미래인 언니들을 시로 쓴다는 건, 미래를 비밀스럽게 만들어 맞이하겠다는 것. '나'는 언니들의 비밀을 공유하지 않았지만 '비밀'이라는 미래를 만들어내고 있다(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이 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삶'이라는 말을 소거한 채 미래를 비밀스럽게 스스로 만들어 쫓는 것이 삶임을 보여준다.  이 시에 들어섰던 최초의 까닭은 삶을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규명하기 위함이었다. 이 시가 '그것'을 소거하면서 동시에 말하는 것과 같이,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다다르기 위한 방법 역시 마찬가지로 그것을 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죽음이 아닌 상태에 대해 말해도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때의 소거는 실제로 뭔가를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빠진 상태 그 자체로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이다. 찾았냐고 물었다 // 클로버는 잎이 세 장 / 드물게 네 장 / 초록의 이랑이 팬다 / 반복의 물결, 물결, 물결 // [......] 하나만 길게 잡아당기는 / 신의 놀이 / 토끼는 귀가 크고 / 코끼리는 코가 길다고 / 말하려다 / 코끼!라고 했는데 // 지구 바깥에 / 귀도 크고 / 코도 긴 / 진짜 코끼가 있을지도 몰라 // [ ] 토끼는 위험하면 / 뒷발을 구른다는데 // 코끼, 코끼, 코끼래! / 우리 중 누구도 /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 「풀」 부분  이 시의 현재에 있는 것은 풀이고, 어쩌면 있을 수도 있는 것은 위험을 감지하고 발을 구르는 토끼이며, 보다 희미한 가능성으로 있을 수도 있는 것은 '코끼'인데 이것은 사실상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없는가? 이 시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코끼다. 코끼는 토끼로부터 연상된 코끼리를 말하려다 튀어나온 것이고, 토끼는 클로버를 찾으려 풀밭을 샅샅이 뒤지다가 떠오른 모자 속에서 폴짝 뛰어나온 것이므로 그것은 풀밭에서 비롯된 어떤 상태로서 그 어떤 것보다도 커다란 존재감을 드러낸다. 여기서 벌어지는 소거는 “코끼”라는 표현 속에 압축되어 있다. 그것은 없음('리'의 소거)으로 하여금 있는 것이고(코끼), 상상 속의 토끼이자 코끼리를 온통 아우르는 관념의 상태다. '리'가 빠졌지만 '리'만 빠진 것이 아니고, '리'가 빠진 '코끼'로 하여금 없는 모든 것을 있게끔 만드는 것이 되었다.  뭔가를 빼고 말한다는 것은, 빼려고 했던 것을 포함한 모든 가능성을 지금의 상태로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뺀다는 것은 상태를 바꾼다는 것이고,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이전의 상태에서 놓여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때 신부가 되길 원했으나" 조선소에서 노동자로 살아가게 된 한 사람의 삶(이라는 상태)에 대해 시인은 이렇게 쓴 바 있다. 스토브 안에서 무연탄 더미가 / 조용히 스러질 때 / 그는 부드러운 재를 / 얼굴 위에 뿌리고 / 더러워진 몸을 머리끝까지 욕조에 담근다 / 숨을 참고 열을 세다가 / 마침내 뱉을 때 / 현실은 간신히 그를 따라왔다 // 그는 눈을 뭉쳐 / 눈사람을 만들어 물에 넣는다 / 순식간에 / 눈사람이 사라지는 모양을 본다 / 기분이 아니라 / 감정이 아니라 / 어떤 / 상태에서 풀려나는 것을 - 「북에서 온 사람」 부분  그는 그가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않은 상태에 있고 때때로 "섬망과 미혹 사이에서 / 그는 하마터면 / 자기 자신을 넘어갈 뻔"하기도 하지만, 그는 미혹되지 않고 그가 바랐던 것이 아닌 조선소 노동자의 상태로 되돌아온다. 그가 욕조에 몸을 담글 때, 그가 바랐던 것은 아니나 그에게 주어진 조선소 노동자라는 "현실은 간신히 그를 따라왔"(「북에서 온 사람」)는데 어쩐지 그는 지금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계속 바뀌어나가려고 하는 것 같다. 그는 눈사람을 물에 넣고 그것이 흩어지는 것을 본다. 이는 "어떤 / 상태에서 풀려나는 것"이라고 표현된다.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바뀌는 것이 곧 삶(죽음)이고, 그 전환의 순간에 시간의 흐름이 발생하며(무언가가 지나갔다, 무언가가 도래한다), 그러한 전환의 틈에 자각되는 것이 죽음(삶이 지나가고 있음)이다.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넘어가는 것을 소거의 형식으로 발화하는 것이 이 시집이 보여주는 성찰일진대, 그것을 요약해서 말하자면 “백장미의 창백"이다. 언뜻 백장미는 본래 창백한데, 백(白)이라는 색이 빨강으로 대표되는 '장미색'의 빠져나감이라 보는 한 그렇다. 그렇다면 백장미가 창백해지기 위해서는, 장미색이라는 일관된 상태에서 벗어난 장미의 색이 존재하며(또는 색의 장미가 존재하며) 그것이 색이 옅어지는 상태로 바뀌어가는 것이라는 상태의 전환에 대한 상상이 필요하다. 이때 동원되는 것은 장미의 색, 바래지는 색, 외부의 자극(풍화·비 등), 시간의 흐름...... 그런 무수한 상태의 변화 속에서 백장미는 창백해지고, 백장미의 창백이라는 소거된 말에 이르렀을 때 소거된 모든 시간은 모두 소환된다. 백장미 죽음에 가까워진 상태에서 백장미 삶의 이력을 함축하는 방식으로.

계간 문학과사회 선우은실 최재원백합의 지옥신미나백장미의 창백상태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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