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자음과모음 2024년 여름호(제61호)
예민한 동시대인들 ― 전하영, 『시차와 시대착오』
예민한 동시대인들 – 전하영, 『시차와 시대착오』
이원기
1. 관찰하는 동시대인들
아감벤은 「동시대인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참으로 동시대인이란 자신의 시대와 완벽히 어울리지 않는 자, 자기 시대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는 자, 그래서 이런 뜻에서 비시대적인/비현실적인 자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까닭에, 바로 이 간극과 시대착오 때문에 동시대인은 다른 이들보다 더 그의 시대를 지각하고 포착할 수 있다.”1) 자신의 시대와 거리를 둠으로 그 시대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들이라야 진정한 동시대인이며, “그것은 시차와 시대착오를 통해 시대에 들러붙음으로써 시대와 맺는 관계”(72쪽)에 가깝다는 설명이다. 그런 점에서 전하영 소설의 인물들은 마땅히 동시대인이라 불러줄 만한데,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성향이 일종의 예민함이기 때문이다. 예민함이 세계를 대하는 한 가지 태도가 될 수 있다고 할 때, 전하영의 인물들은 각기 다른 밀도의 예민함으로 세계와 그 안의 자신을 적극적으로 감각하고 분석한다.
유학 이후 줄곧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영화감독 난희(「영향」)는 서울 외곽의 중국인 거리에서 방을 얻어 살며 창밖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촬영을 하며 난희는 “거리의 그 누구든 간에 저마다의 생활에 몰두하고 있”2)음을 보고 오직 자신만이 “한 걸음 멀리 떨어져 거리를 관망할 뿐”(같은 쪽)임을 실감한다. 외부를 관찰함으로 세계와 자신 사이의 거리를 감각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마음이 급해질 때면 혼잣말을”(106쪽) 하는 난희의 버릇에 대한 서술은 반대로 스스로를 관찰되는 자리에 위치시키며(“마치 다른 외부자가 그녀의 삶을 바로 곁에서 관찰하고 있다는 듯이”(107쪽)) 마찬가지로 관찰이라는 행위가 전제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거리두기’의 감각을 내면화한 인물에 대한 묘사로 읽힌다. 무언가를 관찰하는 인물들은 이 단편에뿐 아니라 단편집 곳곳에 편재해 있는데, 이러한 관찰의 태도는 근본적으로 ‘이질감을 빠르게 느끼고 분석하는 능력’인 예민함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3)
인물들의 예민함은 먼저 신체감각에 대한 관찰로서 나타난다. 「남쪽에서」의 화자 ‘나’는 예술재단의 지원사업으로 고층 호텔에서 시나리오를 쓰게 되는데, 36층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순간적으로 귀가 멍해지며 몸이 미세하게 찌그러지는 느낌”(50쪽)을 받는다. 이는 영화화되지 못하는 시나리오와 반복되는 패배감에 대한 그녀의 자격지심이 알레고리화된 신체감각의 형태로 관찰되는 장면이라 할 만하다. 성공의 자리를 연상시키는 ‘높은 곳’(36층)에 스스로의 힘이 아닌 외부의 힘(엘리베이터)으로 도달할 때의 불쾌감이 엘리베이터를 탈 때의 감각과 중첩되어 그려지는 것이다. 예민한 신체감각이 그 자체로 세계에 대한 예민함의 은유로 기능하며 화자가 느끼는 세계의 이질감이 실체화되는 지점이다.
신체감각이 신체 외부로서의 세계에 대해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예민함의 일차원적 발현이라면, 인간관계로 대표되는 보다 다차원적인 세계에 대한 예민함은 인물들이 타인과 소통하는 상황에서 가시화된다. 독특하게도 이 단편집에서 인물들이 자주 관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표정, 그중에서도 자신의 표정이다. 이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때에 따라 필요한 표정을 짓고(“난희는 수줍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그래야 할 것 같았으므로”(111쪽)) 감정을 숨기며(“아무 일도 아니라는 내색을 하려고 순간적으로 (… …) 온화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44쪽)) 그것의 효과를 가늠한다(“그가 나를 쳐다보고 있지 않아서 내가 지은 표정은 아무 의미가 없어졌고”(28쪽)). 때로 이들은 자신의 표정에 담긴 미묘한 뉘앙스를 객관적으로 포착해내고(“당신의 미소에는 어떤 직업적인 뉘앙스가 담기는데”(274쪽)), 그러한 태도는 곧잘 자기객관화로 연결되기도 한다(“당신은 그 사실을 새삼 알아차리고 남몰래 기쁨을 느낀다. 이상한 여자. 당신은 당신 자신을 그렇게 생각한다.”(같은 쪽)).
사실 이들은 자주 “자신의 어떤 기질적인 특성에 대해 생각”하는데, 가령 “그 어떤 상황에서도 무언가 스스로에게 결핍된 면을 찾아내고 슬퍼하는 것”(195쪽)이 한 예다. 이때 자아 분리로서의 자기객관화는 예민함이 도달하는 필연적인 상태처럼 보인다. 예민함이 관찰을 추동하며, 이때 정확한 관찰의 필수요건이 바로 객관성의 확보이기 때문이다. 「검은 일기」에서 화자가 쓰기 시작한 일기-소설로 짐작되는 후반부의 “우리는 한 사람이 두 사람으로 쪼개진 것 같았다”(38쪽) 같은 서술은 그러한 자아의 분리가 직접적으로 묘사되는 장면으로도 읽을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남쪽에서」의 “화장실에서 이를 닦을 때면 거울 속의 내가 나와 똑같이 행동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기분이 들”(53쪽)곤 했다는 문장 또한 단순히 전에 살던 집에 대한 부정적인 서술이기를 넘어 그 이상으로 읽힐 여지를 갖는다.
그렇기에 전하영의 소설에 예술가 인물들이 자주 등장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예술가란 언제나 세계와 일정한 거리를 둔 채 관찰하고 질문을 던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때 예술은 곧 예민한 감각의 작동이자 대응이며 그 결과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특히 20대 초반의 여성 현대미술가가 이인칭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단편 「당신의 밝은 미래─현대미술 작가로 살아남기」에서는 “어쩌면 당신은 정말로 남다른 예술적 감각을 타고났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떤 면에서는 예민하지만”(290쪽)이라든지 “당신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거라고 다짐한다. 당신은 그런 것에 예민한 사람이니까”(298쪽) 같은 문장들이 예민함과 예술성을 보다 직접적으로 연결하고 있기도 하다.
2. 예민함으로 세계를 확장하기
이쯤에서 다시 사전을 펼쳐보자. 표준국어대사전이 정의하는 ‘예민하다’의 두 번째 뜻은 “자극에 대한 반응이나 감각이 지나치게 날카롭다”인데, 여기서 “지나치게”라는 부정적 가치판단이 눈에 띈다. 오늘날 일상에서 예민함의 감각이 우리 자신보다 타인을 향해 작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탓에 의도와 무관하게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많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예민하다는 표현이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게 된 경위도 일견 이해된다. 그러나 정말 예민함은 그렇게밖에 활용될 수 없는 걸까. 그것을 더 생산적으로 사용하기란 불가능할까. 예민함의 감각이 자신만을 위해 쓰일 땐 문제의 원인을 타인에게서 찾으려는 이기적인 형태로 나타나기 쉽지만, 자신뿐 아니라 타인의 예민함과 그 반경에 대한 충분한 감수성이 함께 발현된다면 이 감각은 무엇보다 강력하고 효과적인 이타성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앞서 전하영의 인물들이 자신의 표정에 대해 독특한 관찰을 수행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는데, 대화를 할 때 타인의 표정만큼이나 자신의 표정을 살피는 사람이란 어쩌면 관계에 있어 섬세하고 사려 깊은 자세로 임하려는 사람인 건 아닐까. 외부로부터 내가 받는 영향만큼이나 내가 외부로 주게 될 영향에 대해서도 숙고하는 이러한 태도는, 모두가 서로의 세계를 예민하게 감각할 때 이곳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예민함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희망은 「숙희가 만든 실험영화」의 한 장면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발견된다. 40대 후반의 독신 여성 숙희는 할머니가 된 윤미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나이에 대해 생각한다. ‘아줌마’라고 불리는 것에 이제 겨우 익숙해졌는데 머잖아 ‘할머니’라고 불려야 한다는 사실이 숙희를 괴롭힌다. “칠십대면 칠십대 여성이라 하고, 팔십대면 그냥 팔십대 여성이라 지칭하면 될 것이지, (… …) 단순히 나이가 들었다고 아무에게나 할머니라고 대충 불리고 싶진 않았다.”(133쪽) 주목을 요하는 건 숙희가 “꾀죄죄한 행색의 백인 남자”를 보는 장면이다. “숙희는 자기도 모르게 할아버지라고 생각했다가 이내 칠십대 남성으로 정정했다.”(154쪽) 간략한 서술 이후 더 진전되지 않는 장면이지만, 자신을 할머니라는 범박한 호칭이 아니라 특정한 나이대로 불러주길 바라는 숙희의 예민함, 말하자면 당사자성을 띤 예민함이 타인의 입장으로까지 그 작동 범위를 넓히는 모습이 발견되는 순간이라 할 만하다. 이처럼 자신과 비슷한 폭력에 노출된 타인의 입장을 상상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예민함은 일종의 감각적 확장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예민하게 가다듬고 확장하는 일이 우리의 세계를 확장하는 일과 연결될 수 있다는 상상력은 「검은 일기」에서도 발견된다. 화자 ‘나’는 죽은 작가의 일기를 소설로 만들고, 동시에 그 과정을 일지로 남기는 일을 청탁받는다. 삶과 글쓰기가 뒤섞이는 이 작업의 구조 속에서, 하나의 삶이 소설로 재서사화될 때 또 다른 삶은 다시 한 편의 글로 기록된다. 삶의 언어화가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글쓰기가 애도의 유일한 방법으로서 수행되는 것도 같은 흐름에서 이해될 수 있다. “애도는…… 언제 끝날까. 결국 글을 쓰는 것 외에는 별도리가 없을 것이다.”(65쪽) 글쓰기가 언어적 예민함을 필요로 하는 작업임을 생각해볼 때, 이 다시쓰기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은 타인의 삶, 나아가 세계에 대한 폭넓은 감각이다. 이 예민함으로 언어는 넓어지고 세계는 확장된다.
그렇기에 전하영 소설의 인물들이 부지불식간에 개진하는 것은 자기 영역에 대한 배타주의적 주장이기보다 차라리 세계에 대한 이해의 반경을 넓히는 일이며, 이 맥락에서 예민함은 세계를 넓게 보려는 태도가 된다.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건 그런 작은 태도들일 것이다. “인류의 약 십오 퍼센트 정도는 남들보다 조금 더 예민한 감각을 지니는데, 이들이야말로 세계를 위해 실질적으로 필요한 일을 해내는 특별한, 아니 유의미한 사람들이라는”(57쪽) 믿음으로 다시금 용기를 얻으며, 이제 아감벤적 동시대인은 더 많아지길 바라야 할 것 같다. 동시대의 어둠을 관찰하고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예민함을 가진 전하영 소설의 인물들이 우리의 “밝은 미래”를 꿈꾸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여기서 동시대성에 대한 두 번째 정의를 제안하고 싶다. 동시대인이란 자신의 시대에 시선을 고정함으로써 빛이 아니라 어둠을 지각하는 자이다. 모든 시대는 그 동시대성을 체험하는 자들에게는 어둡다. 따라서 동시대인이란 이 어둠을 볼 줄 아는 자, 현재의 암흑에 펜을 적셔 글을 써내려갈 수 있는 자이다.”4)
- 1) 조르조 아감벤, 「동시대인이란 무엇인가?」, 『장치란 무엇인가? 장치학을 위한 서론』, 양창렬, 난장, 2010, 71쪽.
- 2) 전하영, 「영향」, 『시차와 시대착오』, 문학동네, 2024, 105쪽. 이후 쪽수만 표기하며 모든 중략은 인용자.
- 3) 표준국어대사전이 정의하는 ‘예민하다’는 다음과 같다. “무엇인가를 느끼는 능력이나 분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빠르고 뛰어나다.”
- 4) 조르조 아감벤, 같은 글, 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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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고기는 어떻게 죽은 동물의 살이었을까? ‘나’는 그마저도 동이 나 먹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그 고기가 무엇이었는지 끝까지 알지 못한다. ‘나’는 의뢰인들이 뭔가를 의뢰하면 출장을 가 처리하는데, 그 일이 무엇인지 독자는 알 수 없다. 모르기는 의뢰인도, 의뢰받은 ‘나’도 마찬가지다. 그저 짐작할 뿐. 모호함은 이 소설의 주요 상태이면서 ‘나’라는 존재의 불확실성을 부추기는 정동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일례로 잇몸 동상이라는 진단은 그런 ‘나’의 모호성과 포개져 전날 방문했던 치과에서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고 하고, 곤란한 상황은 의사가 ‘나’를 기억해내면서 근근이 모면 되는 식이다. 병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의사, 누런 가래를 소맷부리며 손님용 의자에 묻히고 약을 조제하는 약사를 비롯해 이 소설은 미심쩍은 낌새들로 가득 차 있다. 의뢰인은 ‘나’와 번번이 엇갈리고, 팔콘의 의족을 만들어준 기술자는 자신이 의뢰인이라고 하며, 꿈은 자주 꿈의 바깥으로 나와 텍스트를 흩트려 놓는다. 수치(數値)를 기록하는 조수가 읽어내는 게 왠지 수치(羞恥)로 읽히는 것이 그런 모호함의 체화가 수치(數値)로만 표면화되는 공무 앞에 존재를 옹색하게 만들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무엇을 하는지 모르면서 자신에게 부여된 일을 반복, 맹목적으로 하는 데서 오는 자괴감일 터이나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상태가 주는어쩔 수 없음이라는 수치심 말이다. 이 불투명한 서사에 제법 선명한 실체 하나는 송전탑이다. 송전탑의 위용은 마치 소설의 중앙부에 높다랗게 드리워진 거대한 금속성의 신처럼 읽힌다. 그 저류의 공통 기억 때문일성싶은데, 어떤 의뢰는 분명 송전탑 꼭대기에 아직 사람이 올라서 있는지 확인해달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번개가 스친 뒤 “물에 잠긴 채로, 영원히 녹슬지 않는 송전탑”(24쪽) 아래 뒤집힌 채 허연 배를 내밀고 둥둥 떠 오르는 개구리의 사체만이 의뢰에 대한 답처럼 보인다. 길은 자주 텅 비어 있지만 병원과 약국은 붐비는 곳,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거쳐 가고 난 뒤에는 피와 약품의 냄새가 진동하는 곳, 그런 즈음 사람들은 기름진 고기를 얼마든지 먹는 곳, 그곳은 우리의 삶과 얼마나 먼가? 어떤 의미에서는 망한 게 틀림없는, 이미 멀리 와버린 인류세가 제 흔적으로 닭뼈와 플라스틱 말고도 남길 것이 있다면 금속성일 수도 있겠다. 화석연료가 일종의 희생 구역을 필연적으로 요한다는 것을 대척점에 놓을 때 금속성은 조금 달리 이야기될 수 있으려나? ‘어떻게’의 문제가 전적으로 인간의 손에 달렸음을 박물관의 의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것을 신통치 않은 안마의자라고 생각하지만 한 세기 전에 만들어졌다는 그 의자가 내게는 왠지 고문용 전기의자로 읽힌다. ‘금속성’이라는 이 소설의 제목이 남은 시간에 대하여 일말의 가능성을 내포한다면 그것은 의사도 목수도 아닌 ‘기술자’가 팔콘에게 연결하는 의족에 있으리라 여겨지는 것이다. 송전탑과 함께 명징한 또 하나의 피사체가 바로 팔콘인데, 모든 이가 이름도 없이 그 고유성을 탈각한 채 살아가지만 팔콘에게는 이름이 있다(마르코는 이방인의 대명사쯤일 따름이고). 종국에 팔콘은 주기적으로 윤활유만 칠해주면 너끈한 새로운 의족과 금빛의 꼬리를 달게 된다. 팔콘은 매처럼 날 수 없지만 그는 애초 매가 아니었으니 척추의 연장일 유연하고 기다란 금빛 꼬리는 그에게 새로운 코어를 갖게 할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분명 상실된 팔콘의 육제성 앞에서 조수와 ‘나’에게 돌올하게 떠오르던 그에 대한 사랑과 책임 그리고 금속성-팔콘 사이의 ‘횡단’이었다. ‘나’도 이전에 감전 사고로 잠시 몸을 잃는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몸에 대해 고심했던 적은 그때가 유일하다”(97쪽)는 고백처럼 우리가 몸을 의식하는 순간은 몸이 손상되어 제 모습이나 기능을 상실한 때 아니면 타인을 마주할 때이다. 몸을 단장하는 것은 몸이 타인에게 노출됨을 전제하는 익숙한 매만짐이다. 그러니까 몸은 실추됨으로써 타자성을 일깨우는 자리이면서 타인과 연결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공적 차원에서의 몸은 우리의 취약성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면서 연결의 감각을 일깨우는 셈이다. 더이상의 증식과 확장을 멈춘 도시, 병든 사람과 동물 들, 목적이 불분명한 검문과 감시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 잃어가는 것, 잃을 것이 분명한 것의 후경이다. 어떤 면에서는 어차피 망한 게 분명한 이 마당에, 그럼에도 우리의 취약성은 ‘연결’에 대한 명분으로 작동할 수 있을까? 팔콘과 같은 존재가 오래 감수했던 타자성은 공생이라는 그런 가로지름을 통해 우리에게 가장 다정한 타인으로 돌아올 수도 있지 않을까. 3. 불행을 지우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라서 (김채원, 『서울 오아시스』, 문학과지성사, 2025, 1) 주디스 버틀러는 애도에 대해, 특히 ‘너’에 대한 애착이 ‘나’의 일부를 구성하는 관계에서라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너 없이 나는 누구로 존재하는가?” 상실 이후 비로소 융기하는 그 대상과의 연결성을 통해 애도에 더해 나는 자신에 대해서마저 이해 불능의 존재가 됨을 말하는 이 질문에 김채원의 『서울 오아시스』를 놓아본다.2) 그건 질문의 답으로 이 소설집이 놓인다기보다 차라리 소설에 대한 답이 저 질문인 듯 보인다는 뜻이다. 이 소설집은 죽음 뒤에 남겨진 사람들, 어머니, 친구, 딸이 죽거나 자신의 (실패한) 죽음 뒤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소묘한다. 등단작인 「현관은 수국 뒤에 있다」는 그 자체 애도와 애도 불가능 사이를 맴맴 도는 서사이지만 작품들은 대체로 그 불가능성 쪽에 무게중심을 놓는다. 이들의 애도는 어째서 불가능한가? 애도가 일정부분 공적 차원의 형식을 전제한다고 할 때, 가능한 애도는 공적 삶의 내부에 ‘존재함’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무연고자의 애도는 절차에서부터 가로막힌다. 그렇다면 이렇게 바꾸어 물을 수 있다. 애도가 가능한 삶이란 어떤 것인가? 여기서 끌고 갈 것은 그러한 삶의 경계와 그 경계의 밖에 놓이는 결락의 삶들이다. 이 소설집에 그 결락들이 있다. 자살하려 한 적도 있지만 학점을 따고 졸업도 하려고 마음먹던 그러나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채로 공원의 햇살 속을 걸어가던 「쓸 수 있는 대답」의 인물 유림의 부고에 교정시설에서 만난 친구들이 그의 짐을 정리하러 가는 여정인 「현관은 수국 뒤에 있다」에는 이 소설집이 ‘김채원스러운’ 것이게끔 하는 요소들이 촘촘히 엎드려 있다. 소설은 내내 길 위에 있다. 아이들은 누군가 예약해 놓은 우버 택시를 가로채 타고 길에 놓인 공유 자전거도 타고 땀을 흘리며 걷기도 하면서 그렇게 빙빙 돈다. 한편 저 현관 앞의 수국은 현관을 막아서고 있는데, 현관으로의 진입은 이들에게 요원하기만 해 보인다. 흰국화가 아닌 수국은 약속된 제의와는 조금은 동떨어져 놓여있는 듯하다. 수국이 불두화를 닮았음을 떠올린다면 이들의 ‘돎’이 어떤 생으로 거듭날 것인가 기대해봄직도 하지만 언제까지고 바깥에 놓인 이들의 궤도 진입은 가능한 걸까? 소설의 결말부에 다다라 피 터지게 맞는 사람의 모습을 멀거니 구경하는 것이나 시의 다음 구절을 태워버리는 아이의 모습은 각각 약화된 형태의 죽음과 제의라는 표상처럼 보인다. 유림의 동생에게서 걸려 온 언제 올 거냐는 전화는 애도의 시간마저도 지극히 빠듯하기만 하다는 듯한 재촉이니, 채 받아들이지도 못한 죽음이란 실재 앞에서 이들의 애도는 가능하기나 한 걸까? 김채원의 인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건 유기의 감각이다. 이들은 모두 ‘남겨진’ 존재로, 어쩐지 죔쇠가 필요해 보인다. 세계로부터 영 헐거워진 듯 상실 뒤에 남은 이들은, 퇴행하거나(「영원 없이」 「다섯 개의 오렌지 씨앗」), 갑자기 늙어버리고(「외출」), 소멸해 버림으로써(「현관은 수국 뒤에 있다」) 되레 유기감을 강화한다. 그런 면에서 이걸 ‘적극적인 유기’라고 말해도 된다면, 이들은 유기되기를 원치는 않았으나 이른바 ‘정상적’ 애도에 애초 실패함으로써 자신을 적극적으로 유기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특히 인물들의 이런 유기감은 작가의 서술 기법에 의해 더욱 핍진해진다. 약속된 문법의 파기라기보다는 마땅히 예견된 인식의 수순을 폐기하는 것에 가까운 서술은 울퉁불퉁한 의식과 순서를 뭉개고 빗겨나가는 대화(의 단절)를 수고스러우리만치 옮겨적는다. 그것은 의식의 내부와 외부 사이를 무람없이 넘나들고 때로는 의지적으로 중단하는 식인데, 상징계의 약속과 예단을 스스로 비켜가는 이런 방식은 모성의 부재, 혈육의 상실 즉 타인의 소멸이 자신의 육체 어디쯤을 소실한 것과 동일한 효과로써 증명되는 유기의 증상이랄 수 있겠다. 해서 대체로 말은 늦되고 정신은 종종 엉킨다. 번번이 코드화되지 않는 이들의 말, 얼키설키한 의식을 따라가다 보면 최소한의 일상조차 움켜쥐지 못하고 멀겋게 앓는 심로를 짐작게 된다. 타인에게 말을 거는 일이 도덕적 구속력으로 연결된다고 할 때 이러한 정상적 언어(이자 인식)의 순서 폐기란 어쩌면 외부와의 연결을 끊고 가장 근본적인 ‘나’, 지금은 상실한 타인이 알던 그때의 ‘나’로 남겠다는 올올한 선택은 아닐는지. 언어가 욕망의 잔여물이라면 이들은 스스로 생존이라는 최소한의 욕망조차 방기해 버린 것은 아닐는지. 해야 할 말조차 묵음 처리함으로써 통상의 질서가 포섭할 수 없는 쪽에서 애도의 다른 가능성을 열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생각해보게 되는 건, 인물들이 애초에 ‘바깥’에 놓여있었다는 점과 함께 어떤 ‘정상성’으로는 이 인물들의 곁에 결코 다다를 수 없을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서울 오아시스」의 가족들, 그러니까 정신병을 오래 앓은 엄마와 내게 “어떤 사람은 건강하지 않고도 오래 살 수 있다”(71쪽)고 알려준 실종된 외삼촌, 그런 가계의 불행을 견뎌내며 나쁜 일이 생기면 이사를 가버리는 이웃들과 달리 “나쁜 일이라고는 아무 일도 안 생겼으니까”(78쪽) 이사를 갈 필요는 없다며 독주를 들이켜는 할아버지의 사정 같은 것은 소위 정상성의 문법으로는 읽어내기 요원하다. 그렇다면 작가는 인물들에게 그렇게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어도 된다고, 정해진 애도의 기간이란 누구도 알 수 없으니 그렇게 생각을 흘려보내고 여기서 저기로 건너뛰고 괄호치고 흩어놓아도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상적인 삶에 대한 요구도(한 번도 그래본 적 없으므로), 애도의 기간을 설정해두는 것도(애도를 끝내고 정상적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뜻이므로) 이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로 성립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작가는 감히 예단하거나 넘겨짚기 불가한 그 ‘흐름’에 자리를 내어줌으로써 어쩌면 불행을 견디는 것이 삶의 전부인 이들을 그대로 놓아두기, 이들의 곁에 있어주기를 택한 것은 아닐지, 그들의 (기한을 가늠할 수 없는) 복기를 함께 반복하는 것, 그것이 김채원이 타인에게 말을 거는 법이 아닐지, 짐작해 본다. 4. 최악과 차악 (안보윤, 『세상 모든 곳의 전수미』, 현대문학, 2024, 10) 정상성이 통치의 수단이고 규범의 준거라고 할 때 삶의 많은 부분들이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공적 차원에 회부된다는 사실은 문득 새삼스럽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모종의 감각으로 자신을 통제한다. 불안에 대한 서두의 언급도 그런 차원이지만 감각은 생의 균형을 위해 끊임없이 작동한다. 그런데 이 감각의 균형이란 애초에 어떤 조건 안에서 작동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건 반드시 선한 쪽으로 움직이는가? 수미는 수영과 한 살 터울의 자매다. 언니라는 말 대신 ‘수미년’이 입에 붙을 만큼 수영에게 수미란 존재는 절대 악이다. 말간 얼굴로 어른을 제 손바닥 위에 놓고 조물락댈 수 있는 맹랑한 아이였던 수미는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여느 아이들처럼 떼를 쓰는 대신 폭력으로 표한다. 물건을 부수고 극단적으로 험한 말을 하는 어린 수미의 문제 행동 앞에 부모는 절절매며 더욱 그를 사랑으로만 품으려 한다. 그럴 때마다 자연스레 수영의 자리는 물려 진다. 순한 양처럼 굴지 않으면 안 된다. 집에 아픈 아이가 있거나 문제 행동을 하는 아이가 있으면 미연에 그런 말을 듣는다. 너까지 이러면 엄마 못산다고. 수영의 삶은 늘 견디는 것이었다. 수미 때문이기도 했지만 일터에서도 그랬다. “존중받고 싶어 하는 나를,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싶어 하는 나를 기를 쓰고 찍어 눌러야 했”(115쪽)던 것이다. 수미에게 제 삶을 도난당했다고 여기기에 죽음은 선수 치리라, 죽는 일만큼은 수미년을 앞지르리라는 수영의 결심으로 소설은 열리지만, 이번에도 수미가 한 발 날래다. 그 시각 전화 통화를 했고 일상적인 말들을 주고받았다는 알리바이를 위해 수영을 호출한 수미는 요양병원에 일하면서 노인들의 죽음에 협조하거나 죽음을 방치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수영이 일하게 된 노견 돌봄센터는 동물병원과 더불어 운영되며 24시간 의사가 상주하는 고급 호스피스 시설이다. ‘절박한 사람’만 고용하는 우 원장은 인간 기저의 이중적인 심리를 기민하게 자본화하여 자신의 부로 환원할 줄 아는 인물이다. 병든 동물을 끝까지 돌보고 싶지만 사정이 부치면 빠른 이별을 바랄지도 모르는 누군가의 심리 같은 것 말이다. 우 원장의 병원에서는 보호자의 발길이 뜸해지거나 보호자가 비용을 염려하는 때에 딱딱 맞춰 개들이 죽는다. 개의 가족, 보호자들은 내 품에서 아이를 보냈다는 사실에 위로 내지는 감동을 받지만 실은 적당한 때에 안락사를 감행함으로써 보호자의 부담을 덜고 자신의 수익 기반을 안정적으로 다지는 우 원장의 치밀한 계산이 만들어내는 마법의 순간이다. 빠른 유속의 이 소설은 그러나 곳곳에 감속 구간을 배치한다. 수미의 숱한 악행 가운데는 수영을 구제한 일도 있는데, 캠핑장 숲길에서 낯선 남자에게 니쁜 일을 당할 뻔한 수영을 구하고 수영이 남자에게 위해를 가한 것을 비밀에 부치고 덮어준 일, 수영이 급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자 모두가 보는 앞에서 수영의 뺨을 연달아 갈겨서 어쭙잖게 수영을 해코지하던 아이들을 질려버리게 만들어버린 일 같은 것들이다. 그러니까 ‘악’으로 보이는 수미의 기행들은 모두 자신의 주장을 드러내거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소통이자 장치로 나름의 정당성을 가지는 셈이고, 그 정당성은 전능감을 내면화한다. 그런 수미가 요양병원에서 노인들의 죽음에 동조한 것이다. 그래도 그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냐 답을 내릴 때쯤 자신을 피해자의 자리에만 위치시켰던 수영에게 질문은 날아든다. 종양에 대해 보고하는 것이 곧 태풍의 죽음을 당기는 일임을 모르지 않기에 손끝에 느껴지는 악성 종양을 외면한 수영의 마음은 피를 쏟으며 죽은 태풍의 병을 알고도 방치했다는 업무상 과실 혐의에 대치된다. 살 권리와 죽을 권리는 누가 어떻게 결정하는가? 오로지 자신만이 제 삶과 죽음의 주체라면 비루하고 고통받는 삶에 대한 결정이나 행위가 불가한 이에게 삶은, 죽음은 어떤 것이어야 하나? 이럴 때 어느 어떤 것이 더 폭력에 가까이 있는가? 수영은 끝내 제 삶을 구제하는 쪽으로 선회하지만 갇히고 묶여 연명하는 노인, 병들고 지친 채 온몸에 분변을 바르고 피를 쏟으며 간신히 생을 유지하는 동물에게 ‘보호자’는 생명의 결정권자와 동의어인가? 그들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조력해야 옳은가. 이를테면 이런 경우. 수영의 할머니에게 비녀는 자신의 처지를 대변하는 상징물이자 사회적 자아의 표상이기도 했고 정정한 날의 추억이 깃든 정서적이고 감각적 차원의 것이기도 했다. 그런 할머니의 쪽머리는 본인의 의사와 아무 관계도 없이 요양원 입소와 함께 싹둑 잘려 나간다. 관리의 편리와 비녀의 위험성 때문인데, 이럴 때 할머니의 권리가 공공의 안전 앞에 삭제되는 것이 마냥 옳기만 한 것이라면 인간은 병든 이후의 삶을 어떻게 견뎌내야 한단 말인가. 세상 모든 곳에는 전수미가 있다. 전수미는 전수미로만 있는 게 아니라 전수영의 일부, 전수영과의 모의, 전수영이 품고는 있던 것들의 투사이기도 하다. 사람은 어떤 악의를 없애거나 다스리며 산다. 악은 특별하지도 않고 누구나 조금씩 갖고 있다가 때로 불툭거리며 크기를 키워나가거나 차마 드러내지 못하고 일기장에 쓰기도 하는 것이다, 수영이 그런 것처럼. 악은 선이 아니므로 악에 대한 입장은 단호하게 정리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뒤집어 물을 때 선에 대해서라면 그 답이 쉽지 않을 것 같다. 어떤 것이 선인가? 어떤 돌봄과 보호는 악의 얼굴 쪽으로 좀 더 기운 것도 같다. 어떤 선은 최악은 아니지만 차악을 닮았을지도 모르겠다. 5. 들킬지도 몰라 불온함 (전지영, 『타운하우스』, 창비, 2024, 12) 안보윤의 폭력에 대한 감각이 물리적인 폭력에 겹쳐 배제와 그 권리에 대해 묻는 것이라면, 전지영의 소설은 관계와 구조 속에서 은폐되는 폭력 위에 설립한 삶 혹은 폭력 이후의 삶에 대해 말한다. 공간을 중요시 여긴다는 작가의 말처럼 그의 소설들은 독자가 위계의 구조라는 밑그림을 먼저 그려두도록 공간을 직조한다. 구조에 대한 이런 감각은 타자성을 더욱 벼리게 제시할만한 장소로 제공된다. 은폐한 진실이 언제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한 번도 그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지만 잇자국으로 드러나는 쥐(「쥐」), 태풍을 몰고 오는 섬의 돌풍과 낙뢰(「말의 눈」), 저수지의 음험함과 사격장의 총소리(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 안으로 들이쳤지만」), 어시장의 비린내와 척척한 물기(「맹점」), 물질적 풍요 뒤에 숨겨진 히스테리(「소리 소문 없이」)와 같은 오감을 건드리는 장치와 함께 안온한 생활이 언제 깨어질지 모른다는 긴박감을 몰아온다. 작가가 구체적으로 그려내는 공간에 더해 불안을 부추기는 효과들이 쥐락펴락하는 것은 불온한 진실의 맨얼굴이다. 자녀가 학교폭력의 피해자일 때 학교 측의 미온적 태도와 가해 학생들의 뻔뻔함에 상처 입고 딸과 함께 제주의 타운하우스로 이사한 수연 앞에 학교폭력은 또 한 번 전혀 다른 얼굴로 찾아온다. 피해자는 가해자의 구도로 삽시간에 전환되며 수연은 자신의 딸을 위해 증언을 요청하는 지희를 외면한다. 섬의 생리와 무관하게 지은 타운하우스의 지붕으로는 빗물이 흘러들어 집안에 차오르고 돌풍과 낙뢰에 전문기사도 손을 쓸 수가 없는 마당에 지희는 치마를 동여매고 지붕을 오르고, 이내 추락하고 만다. 지붕에서 내려오면 지희는 수연에게 증언을 강요할 거였다. 순간 수연이 바란 것은 이대로 지희가 깨어나지 않는 것. 전지영은 바로 이 순간을 잡아챈다. 인간이라는 수면 아래 잔잔하게 깔린 숱한 얼굴들 중 우리가 차마 밖으로 내놓지 못하는 표정과 감정, 그 부박함을 작가는 낚아올린다. 그런가 하면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 안으로 들이쳤지만」에는 사격장과 저수지라는 공간이 세워진다. 혜경과 윤석 부부는 데면데면하게 지낸 지 오랜데, 서로를 눈치껏 빗겨가려 애쓰는 중이다. 혜경은 남편의 무심함에 아들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죄책감을 투사해왔던 것이다. 사격장은 윤석이 공무원 재직 당시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치한 것이었는데 실종된 아들이 저수지가 범람하고 주검으로 발견될 때도 그는 사격장 건립 문제로 회의 중이었다. 윤석은 그 나름대로 사격장 건립을 추진한 시장을 원망해 그의 불행을 기도해가며 간신히 견뎌내는 중이다. 사격장의 총소리와 탄약 냄새는 집의 안팎을 둘러싸며 여전히 거기 있는 컴컴한 정주못과 함께 이 부부의 잠잠한 일상을 언제든 깨트릴 수 있을 것처럼 에워싼다. 그러다 시장이 실종되고 그가 저수지에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수사의 가닥이 잡히자 윤석은 갑작스레 무엇이 툭 끊어지는 기분을 느낀다. 용서할 수 없었던 건 바로 자기 자신일 테니까. 대타자의 소멸로 부부는 비로소 졸은 청국장에 밥을 비벼 먹고 커피를 채워주고 마시는 일상으로 조금씩 되돌아올 기미를 보인다. 사람은 때로 불행을 그런 식으로 견디기도 하는 모양이다. 부자 동네 청한동을 배경으로 높은 성벽 안에 거주하는 주민들과 청한동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하는 사람들을 대비시키는 「언캐니 밸리」에서 왜소증을 가진 크로키작가이자 택시 기사는 ‘당신’이 염산 테러를 당하자 의심을 사 경찰의 조사를 받는다. 그녀는 왜소증의 사내가 ‘기괴하다’고 표현했지만, 사내가 생각할 적에 여자를 의자에 앉혀놓고 몇 시간 동안 관찰한다는 노부부가 더 수상쩍고 기괴하다. 넘치도록 가진 노인들의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은 끝내 어떤 얼굴로 드러났을까? 140cm의 키로 높은 담벼락을 기어오르는 왜소증 사내를 줌아웃하는 결말은 그가 작아서가 아니라 그와 대비되는 담벼락만큼 쌓였을 집 내부에 들어찬 비밀의 크기 때문에 잔뜩 기괴해진다. 누가 누구에게 ‘언캐니’한가? 전지영의 소설들은 인간의 치졸을, 비열을, 낯 뜨거운 찌질함을 솥에서 푹 삶은 고깃덩이를 꺼내 도마 위에 부려놓듯 불쑥 꺼내놓는다. 썰어주면 잘만 먹을 거면서 징그럽다며 찌푸리지 말란 듯이 태연하게. 예술을 한다면서 돈과 재능 그 둘을 다 가지고 있거나 둘 중 어느 쪽이든 가진 이는 어떻게든 성공한다. 그런데 어느 쪽도 가지지 않았다면? 음해라도 해서 누군가를 망가뜨리고 싶은 마음은 「뼈와 살」, 「소리 소문 없이」에서 한 존재를 삭제해버리거나 없는 ‘진실’을 만들어내 ‘사실’로 만들고 만다 기어이. 그런 날조의 ‘사실’들은 인간의 작은 열등감에서 기인하고, 그건 자기 보호라는 엉성하고 얄팍한 난막에 감싸여 있다. 전지영은 그 막을 대차게 찢어서 눈앞에 들이대며 마주 보게 한다. 말의 검은 눈에 비친 것이 누구의 얼굴인지, 누구를 향한 원망인지, 진실은 어쩌면 처음부터 없는 것은 아니었는지, 불을 활활 질러서라도 거기에 쥐가 있는지 확인하라고. 그러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쥐의 잇자국과 소리와 낌새는 우리를 쫓아올 테니까. 6. 바늘은 구멍을 가로지른다 (안윤, 『모린』, 문학동네, 2024, 11) 관계나 사랑이 ‘나’를 읽는 터이듯, 타자의 감정 역시 나 없이는 성립 불가하다는 점에서 타인은 나의 필요충분이다. 안윤의 소설집은 나란히 양립하는 관계, 사랑이 비로소 시작되는 느리고 꼼꼼한 이야기들로 바느질되어 있다. 표제작 「모린」은 영은과 미란의 사랑을 그려낸다. 콜센터에서 일하는 미란은 감정적으로 늘 부대끼면서 낭독 봉사에서 만난 시각 장애인 영은과 찬찬한 사랑에 빠진다. 여기에 낭독용 텍스트인 요제프 코발스키의 산문 『보이지 않는 것들』가 나란히 놓인다. 후천적으로 시각을 잃고 피아노 조율사로 일하면서 평생을 독신으로 산 그는 피아노 줄과 밧줄을 엮은 끈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모린은 요제프가 사랑한 유일한 사람이었고 그의 생활은 하숙집 아들 조지가 도왔는데 산문집을 출간한 것도 조지였다. 이 텍스트는 세상 어딘가에 있는 실화를 초과하여 존재한다. 그래서 더욱 귀한 텍스트 『보이지 않는 것들』은 「모린」과 조밀히 넘나든다. 돌봄을 사랑으로 여겼다는 선주의 고백은 장애에 대한 배려가 어쩌면 영은의 정체성을 장애에 두는 선민이었음에 대한 후회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사랑이 꼭 옳지 않기만 할까? 요제프와 조지의 우정 역시 지극히 순수한 사랑의 형태일 수 있을 것인데, 마지막 순간에 조지를 위해 콘플레이크 상자를 찢어 “사랑하는 조지, 절대 들어오지 말고 경찰을 부르거라”(27쪽)고 힘겹게 쓴 요제프의 마음은 배려와 우정의 모양새를 한 따듯한 사랑일 것이다.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이전의 세계와 뚝 끊어짐을, 그리하여 넘어감을 통해 두 번째가 아닌 세 번째의 세계로 진입함을. 자신의 팔꿈치를 내어주고 미란을 믿겠다는, 영은의 팔꿈치를 가만히 쥐는 두 사람의 사랑은 비로소 시작되지만 어쩐지 오래 뜨듯할 것 같은 뭉근한 이 마음은 두 개의 선을 연결하여 제 삶을 끊어냄으로써 세 번째의 세계로 건너간 요제프의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에 대한 유일했던 태도와 겹치며 묵직하게 내려 앉는다. 「담담」은 내밀한 타인과의 단절을 겪은 이들이 한 번의 보챔도 없이 서서히 연결되며 다시 서로의 타인으로 구성되는 미덕을 보여준다. 소개팅 자리에서 자신의 양성애 성향을 고백하는 혜재에게 “그게 가장 중요한 정체성인가요?”(100쪽)라고 묻는 은석은 한동안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 유가족이었노라 고백한다. 그러고 보면 정체성을 지나치게 성적 취향을 기준으로 두기도 하는 듯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또 그렇지만도 않아서 은석의 경우와 같은 유가족, 장애를 가진 이들은 그 자체가 정체성이 되는데, 이런 정체화의 실체는 공통적으로 ‘정상성’의 범주에서 벗어남 그 특이성을 지목한다는 점에서 퍽 사려 깊지 못하다. 정체성은 내가 나를 규정하기보다 외부가 나를 어떻게 인식해야 할지 이름표를 붙여주는 몹시 성급하고 거친 방식인 셈이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은석과 혜재의 담담한 사랑의 맛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어려운 형태일지도. 스스로 자신의 한때와 이별하는 「하지」나 고모의 딸과 친구의 남편이 불륜이 되어버리자 가족과 친구 양쪽애서 떨어져나와 버린 「틈」은 깨어짐과 봉합이 따로 있지 않음을, 어리고 가난한 사랑의 미장센 「작은 눈덩이 하나」와 전세 사기로 죽음을 택한 남자친구의 기억에 겹치는 후배의 전세 사기에 마음을 쓰는 「또,」는 타인의 불행에 냉담하지 않으려는 안간힘으로 써 내려간 이야기다. 안윤의 소설은 하나같이 맞은편을 바라본다. 편편이 까물까물 아득하게 마음을 쓰다듬지만 「핀홀」은 단연 타인의 이름을 내 곁으로 당겨 부르고 함께 앓게 한다. 보라는 안정감을 주는 승원의 성격과 그 부모의 다정함이 부럽다. 그들의 일원이 되고 싶다고 여기는데 자신이 재혼가정에서 자랐음을 차마 고백하지 못해 괴롭다. 이들의 일상은 승원이 피하기만 하던 경진의 전화를 보라가 받으면서 조금씩 구멍을 보인다. 기자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경진은 중증장애인 시설에 거주하던 정원의 사망을 알려오는데, 정원은 승원의 형이고 삼십일 년간 시설을 전전하며 생활했다고 했다. 그는 시설에서 나가 독립하고 싶어 했지만 절차상 필수인 부모의 동의가 여의치 않자 장애인인권운동가와의 접촉을 통해 탈시설을 계획하던 중 낙상사고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승원과 부모의 안정감이 숨긴 비밀, 정원의 의사에도 불구하고 “거길 나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네가 살 곳은 거기라고”(81쪽) 탈시설을 반대한 부모님. 그들의 안정감의 비밀은 그것이었다. 구멍을 막고 처음부터 없었던 듯 태연하게 살아내는 것. 정원의 죽음이 석연치 않음에도 부모는 일을 키우고 싶지 않다며 끝내 부검을 반대하고 승원은 거기에 순하게 동조한다. 결국 정원의 인터뷰 영상과 그가 쓴 시는 보라가 인수하게 된다. 정원의 ‘말’을 인수한다는 것은, 가족에 의해 삭제되고 사회에서도 영영 지워질 뻔한 한 존재를 인수한 것이나 다름 없다. 보라의 할머니는 그런 말을 했다. “이쪽에 하나, 다른 쪽에 하나. 각각 구멍이 있어야 무엇이든 이을 수 있다고”(88쪽) 찢어진 것들을 이어 붙이려면 바느질을 해야 하고 바늘이 통과하려면 구멍이 필요하다. 안윤은 그런 사랑을 천천히 기워낸다. 안윤의 소설에서 사랑을 배운다. 그 가로지름의 다양한 단서와 모양들이 느리고 단단한 물결의 질감을 하고 이쪽으로 건너온다. 7. 봉합할 가능성 있음 마거릿 애트우드의 「흰 말」3)에는 흰 말이 등장한다. 술에 절어 사는 농장주로부터 방치되었던 흰 말은 다정한 부부의 지극한 돌봄을 받고 건강을 회복한다. 부부와 함께 삶을 지속하던 흰 말 글레이디스는 하룻 저녁 소동에 자극을 받고 농장을 뛰쳐나간다. 글레이디스는 제 힘껏 달리다 차에 치이고 만다. 글레이디스는 그렇게 죽었다. 그런데 그가 가장 행복했던 때는 언제였을까? 사람의 손길에 살을 찌우고 빗질을 받으며 때로 손님을 태우고 살던 때일까 아니면 힘껏 달리던 질주의 마지막 순간일까? 사랑은 무엇일까? 내가 견디기 위해서 하는 것인가, 그를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것인가? 또 보호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순치하여 발아래 묶어두는 것인가, 위험으로부터 차단하여 생명을 유지하게끔 하는 것인가? 우리의 감각은 타자의 존재를 재빨리 알아챈다. 마당에서 기르는 개에게는 되도록 줄을 길게 묶어주고 자주 쓰다듬어 주어야 한다. 한겨울에는 수돗물을 미리 받아두었다 찬 기를 식혀 햇살이 대지를 데울만한 때에 고목 나무에 뿌려주는 게 좋다. 전동휠체어가 길 위에서 느닷없이 멈춰서지 않으려면 배터리를 미리 충전해두어야 한다. 산책로 곳곳에 집을 만들어 비닐을 씌우고 헌옷가지를 깐 잠자리와 보온 주머니를 둘러싸 얼지 않을 물그릇을 마련해 주는 손길이 길고양이를 살리듯, 슬픔을 통과하는 중에는 등을 쓸어주는 염려가 필요하다. 아침에 나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고 며칠 전 메시지를 나눈 친구가 영영 돌아올 수 없다고 할 때, 또다시 과거의 끔찍한 장면이 반복돼 트라우마를 건드릴 때도 견딜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함께 겪고 있다는 단 하나의 사실에 기대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슬픔은 타자에 대한 감각 수용 반응의 일종이기도 하다. 들떠서 여행길에 오른 사람들과 사고의 순간을 내용으로 하는 초등학교 2학년 조카가 쓴 시의 마지막 구절은 “사람들은 아주 가만히 눈을 감았지”였다. 그는 시를 쓰는 동안 사람들의 감정을 헤아리고 죽음의 순간을 그려보았을 것이다. 그 순간이 그가 타인에게 몰입한 때, 타인이란 존재를 체현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때로 상실했지만 끝내 끊어내지 못한 것들로 나를 채워가기도 한다. 그것이 이른바 ‘우울증적 정체성’이겠지만, 나의 일부가 거기에 건너가 있다는 면에서 우울은 필요하기도 하다. 내가 나를 위해, 타인을 위해 애쓰는 순간 나의 타인들도 서로의 곁으로 건너와 주리라는 범박하고 느슨한 믿음이 어쩌면 우리의 취약성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하고 변치 않는 명제가 아닐까. 이 글을 함께 읽는 봄이 크게 달라지기야 하겠냐만 그럼에도 우리가 서로 구멍 사이를 가로질러 서서히 당겨지는 중이라면 어떨까. 내가 더딘 바느질의 한 땀을 뜨려 애쓸 때 나의 타인이 되어주길, 그렇게 봉합할 가능성을 우리는 서로 알아보길. 그렇게 우리 서로에게 가장 다정한 방식으로 무심한 타인이 되길. 1) 산업이 발견한 진짜 혁명은 병든 동물이 더 돈이 된다는 것이다. 천연의 동물들과 달리 인간이 개량한 동물은 항생제니 유기농이나 방목이니 해봤자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산업 동물’이다. 사람들은 그런 동물을 먹고 사는 셈이다. 조너선 사프란 모어,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송은주 옮김, 민음사, 2011, 146-150. 2) 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애도의 힘과 폭력』, 필로소피, 2018. 3) 마거릿 애트우드, 『도덕적 혼란』, 차은정 옮김, 민음사, 2020.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위의 인용문은 육조 혜능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변형한 것으로서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도입부 내레이션이다. 질문을 간파하고 있는 스승의 답변은 제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 테고, 그것은 물론 관객의 심금을 휘저었을 것이다. 파편화된 불안을 쓸어 담는 이 명쾌하고 즉각적인 해답의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찰나에 불과하다. 제자의 마음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 동요하는 그 마음의 원인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궁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궁리하고 싶지 있다. 바쁜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보여지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무용한 그 '느낌'이라는 것을 숙려할 만큼 한가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하려는 노력 끝에 불안은 우리 현대인의 매우 증상적인 형태로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의 고질병이다. 불안, 외로움, 확신 없음이라는 결핍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기로에 선다. 고독을 선택하거나, 의존을 선택하거나. 전자는 불안에 대한 직면이고, 후자는 불안에 대한 외면이다. 그러나 바쁜 우리는 언제나 후자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 없다. 세상에 고독한 것은 이제 고독, 그 하나다. 사용되지 않은 고독은 밀린 과제처럼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을 외면한 후폭풍은 그에 비례하는 불안의 성장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독하지 않으려는 것은 고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고독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소외감 등의 통각이라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감각은 직면하는 대상으로서의 그것이지 결코 정념의 주인이 아니다. 고독은 머무름의 상태가 아니라 나아감의 과정이다. 키에르케고어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고독이란 '자기-이해'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실존적 과정"1)이다. 직면과 견인의 과정으로서 '나'의 발본적 반성을 꾀는 고독은 많은 시간과 심리적 통증을 수반하는 힘겨운 비포장도로이지만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 길은 당신에 의해 아주 단단히 포장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은 이제 너무 쉬운 길이다. 허나 우리는 당장의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의존을 택한다. '불안-의존-불안-의존-……'의 악무한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이 악무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싸움이 혼자만 하는 싸움은 아니다. 우리가 고독하고자 할 때, 시는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 '불확실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시와 고독은 함께 간다. 유일무이한 개별자로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시를 보면서 우리는 '나'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비록 그 세계가 하잘것없을지라도 시는 당신과 함께 고독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투쟁의 이미지가 너무 닮아서 단번에 요체로 휘몰아 넣는 시가 있다. 2024년 계간지 가을호에 실린 시편들이 대개 그러했다. 그것들은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증상에 직핍하는 표정을 하고선 우리의 불안을 응시하고 있다. '응시하는 시'를 응시하는 우리는 홀연 고독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시는 그 자체로 기꺼이 고독의 과정이 된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불안을 응시-진단하는 시편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고독의 여정을 걸어보자. 미리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찌되었건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해 미리엄은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엄은 자신을 설명하는 식으로 늘어져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미리엄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한 미리엄은 바빴다 설명하느라 바빴고 대체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느라 바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낡아지고 늙어가고 쪼그라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해진다 불쌍한 미리엄 온종일 나를 기다리는 미리엄은 버럭버럭 화를냈다 화를 내는 미리엄이 순간 유효해 보였다 미리엄이 악다구니를 쓸 때에야 미리엄의 전체가 설명되고 빛난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고 어차피 미리엄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다음부터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하루종일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일갈할 수밖에 없었다 넌 네 삶이 없어? 하고 말콤은 미리엄이 키우는 개다 말콤은 미리엄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좋아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말콤은 미리엄을 좋아하고 불쌍해한다는 것이다 말콤은 수동적인 주인 미리엄이 충동적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거나 밥때를 놓쳐도 재촉하지 않는다 말콤 역시 미리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하루종일 너만 기다렸어 이 망할 기집애야 하지만 말콤의 생각에서 미리엄은 한없이 불쌍한 인간이므로 개 말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말콤은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 것 같았다 (……) 미움받지만 않게 해주세요 누구로부터를 말하는 것이냐 뭘 물어요 당연히 미리엄이죠 열두 마리의 개를 키운 경험이 있는 신이 말콤의 턱을 간지럽히며 말한다 아이고 불쌍한 새끼 계속해도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시는 나로 시작했지만 나로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무언가를 빠뜨리는 바람에 또 내가 나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내가 나오면 미리엄은 또 하루종일 나를 기다릴 테고 그랬다는 이유로 나에게 화를 낼 것이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말콤은 삶이란 게 정말 불쌍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신경쓰이지 않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것도 없다 나는 빨리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때마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제때 미리엄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러면 말콤과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산책하는 말콤은 정말 행복해 보일 것이다 나는이런 게 좋다 이런게 더 좋다 - 박참새, 「시작된 것」 부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넌 네 삶이 없어?" 당신이 이 문장에 머무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장이 애틋한 이유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목줄을 달아매고 누군가의 손에 그 줄을 쥐여주었던 경험,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가슴 아픈 그 불안의 경험이 위의 문장으로 하여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리엄은 현대인들의 불안 형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히는 '해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기다린다.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한 '자기-수치심'을 해명하고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자기-효능'을 타인으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고 수용받기 위해. 따라서 '나'(타인)가 오지 않으면 그는 그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거니와, 그 효능을 되찾을 수 없다. 고독이라는 일련의 자기-이해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자기규정을 의탁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 박탈시킨 그의 가치는 그러므로 '나'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미리엄-나'의 관계에서 미리엄의 위치는 '말콤-미리엄'에서의 말콤의 위치와 상응한다. 미리엄은 말콤의 주인으로, 말콤은 온종일 미리엄을 기다리고 미리엄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다. 말콤의 삶의 주인이 미리엄인 것처럼 미리엄의 삶의 주인은 '나'이다. 말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미리엄의 삶은 따라서 개 같은 삶이다. 그 삶은 (자기 의지에 의해)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자기 삶을 전시하고 그 삶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좋아요'와 팔로워 숫자 등)을 기대하면서 오직 그것을 위해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일상을 공유하고 실제적 자신의 모습, 즉 '실존적' 자기 모습을 방치한다. 타인의 반응이 내 삶의 양식을 결정하게 내버려둔다. 문제적인 것은 여기서 타인은 '내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증명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너무 쉽게 그들을 미워해 버리고, 반응이 긍정적이면 또 너무 쉽게 사랑해 버린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감정 속에서 지쳐버린 자아는 당장의 휴식을 위해 타자에의 의존을 택한다. 불안을 즉각적으로 해소해 주기 때문에 의존하지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은 그러므로 불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란 듯이 참혹해진다. 배시은의 시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우리의 강박증적인 내면 상태와 그 징후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그에 대해 시인이,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쓴 시를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아직 쓰지 않은 시를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싶다. 재빠르게 적으면 감쪽같을 거라고. 시간의 장난 같은 거라고.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 제목을 옮겨 적었다. 이상하다. 나라면 이런 제목을 짓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찍이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항상 그런 모양이라는 듯이. 나는 여행을 가지 않는 대신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으로 여행을 대신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여행 가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한다.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냥 있는다. 그냥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대신한다. 아무것도 깨닫지 않는 것이 깨달음을 대신한다. 이상하다. 나라면 여기서 연갈이를 하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시를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시는 이미 끝났다. 시를 옮겨 적는 일은 끝났다. 시를 쓰면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무언갈 만들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만들 수 있는 때는 너무 짧다. 생각을 하고. 단어와 문장 등을 떠올리거나 받아 적고. 고개를 움직이고. 책상에 앉고. 신체 부위의 기능을 사용해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희소하며 예상만큼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이 시는 알고 있다.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 배시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부분, 『창비』 2024년 가을호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 싶다"는 바람은 다시 말해 독자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소망이다. 그러나 옮겨 적은 시는 어쩐지 제목부터 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기로에 선다.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냐. 당신이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면 선택은 물론 전자일 것이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잃어가고 이윽고 모호한 정체성과 동시에 끊임없는 불안을 경험한다. 위의 시는 그것을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여행조차 갈 수 없고,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다. 여행을 가는 대신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뿐이다.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잘 쉬는 사람과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본인의 취향과 호오를 잘 아는 사람과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타인에게 삶의 목줄을 내어준 사람에게 휴식이란 그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불친절하다.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건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때때로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방어 기제로 드러난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실존적인 '나'의 상태이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회적인 '나'의 모습이다. 건강한 사람은 친절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사회적인 모습이 중요한 우리는 건강하지 않아도 건강한 '척' 친절하다. 이때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 싶은 일종의 방어 전략으로 쓰인다. 어쩌면 건강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사회적인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당신의 상태는 이제 아무도 진단할 수 없다. 허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심급의 기회일지 모른다. 시가 응시하고 있는 사실을 응시해 보자. 때로는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사실 시는 진단하거나 처방하지 않는다. 기꺼이 고독의 기회를 내어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삶을 응시하고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견고한 삶을 살고 싶을 우리에게 고독이라는 자기-이해 과정은 이제 건너뛸 수 없는 삶의 발달과업이다. 견고하다는 말은 빈틈없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빈틈 있음'마저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이다. 당신의 약점도 당신이다. 고독은 그러므로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들어 기꺼이 '나' 자신을 승인하게끔 한다. 신이인 「새」는 그것을 딱따구리에 비유하면서 약점이 받아 온 그간의 오해를 풀어낸다. 2017년 2월 3일 딱따구리를 데리고 있다. 이것은 내 약점이다. 딱따구리는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 사람의 머리통에도. 딱따구리는 내 머리 옆쪽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사고였다. 귀가 생겼다. 딱따구리가 어찌나 청명하게 나무문을 쪼고 다니는지가 다 들렸다. 난 비로소 듣는 사람이 됐다. 나의 방문은 말할 줄 몰랐다. 내가 듣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방문은 딱따구리를 통해 내게 말을 전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딱따구리가 부리를 사용하는 이유,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내가 가진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었으며, 딱따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 어쩌면 딱따구리는 도망간 게 아닐지도 몰라. 아예 내 안쪽으로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따구리가 느껴질 수는 없어. 이 느낌에 대해 나 여전히 말을 멈출 수 없어. 가장 깊숙한 곳에 너 잘 살아 있어. 집인 줄도 모르고 흔들렸던 집이 너를 선명하게 품고 있어. 구멍으로 볕과 공기가 들이닥쳐. 너 거기 있구나.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파여가며 안쪽이 하는 말을 받아쓸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쓰는 사람이 됐다. - 신이인, 「새」 부분, 『문학과 사회』 2024년 가을호 딱따구리는 약점에 대한 절묘한 표상이다. 그것은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약점이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이유로 약점이 될 수 없다. 인식의 층위에서 그가 뚫어낸 구멍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그 구멍이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없다. 눈, 코, 입, 그리고 귀라는 구멍이 당신의 약점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든' 존재하는 그 구멍이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딱따구리(약점)에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where'이 아니라, 'why'일 것이다. 딱따구리는 '왜' 구멍을 만드는가? 그것은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이다. 즉 딱따구리가 구멍을 내는 이유는 '너'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어쨌든 약점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너'가 존재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뚫은 구멍은 '너'가 즐겁지 않으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고 바로 약점이 된다. 그 순간에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 떼어내고 싶은 악성 종양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인다. 약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너'의 시선에 얽매여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why'를 던지는 순간, 시선은 '너'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지고 약점에 대한 오해는 곧 이해로 변모한다. 우리가 가진 약점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고독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창구일 수 있다. 구멍 없이 어떻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밖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말한다. 약점은 '나'를 이해하는 고독의 진입로가 되고, 이윽고 뚫린 길은 '너'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견고해진다.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다. 고독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황홀감이다. 고독이 거듭될수록 성장하는 고독'력'은 당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독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계절의 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 류호인, 「정신분석학: 존재에 대한 물음 : 실존적 불안과 자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소고」, 『현대정신분석』, 2024, 제26권 제1호.
1. '너'가 존재하는 한 '나'는 단속된다. 너는 나의 복장을 단속하고, 도덕성을 단속한다. 그리고 표정과 감정을 단속한다. 아니, 사실 너는 나를 단속하지 않는다. 다만 '너'의 시선을 의식하는 '나'의 불안과 내면의 유약함이 '나'를 단속한다. '너'의 시선 속에 사로잡혀 출현한 '나'는 그 시선에 대상화된다. 곧 자기 고유의 절대적인 자유는 균열을 일으킨다. 한편 '너'는 끊임없이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단속될 것이다. 타자에 의해 대상화되지 않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해야 한다. 개인의 실존적 차원에서,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고 자기효능을 되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각자 진정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와 그 시선의 억압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그것에 억압된 자신을 객관적으로 응시해야 한다. 응시는 똑바로 본다는 말이다. 똑바로 봐야지 똑바로 안다. 반성의 지평에서 출현한 시는 따라서 인간의 삶을 무엇보다 객관적으로 응시한다. 그리고 타자를 직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직시함으로서 삶의 오류를 발견하려는, 그런 시가 있다. 202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노이즈 캔슬링」과 함께 출현한 윤혜지는 첨단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삶에 기꺼이 구식(舊式)의 삶을 틈입시킨다. 이윽고 그것은 타자의 시선 아래 구식, 혹은 비극으로 취급될 우리 각자의 진실한 꿈과 그 미래를 구출한다. 그런 점에서 윤혜지의 시작(詩作)은 그 시선과의 투쟁의 시작(始作)일 것이다. 그 시선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그리하여 구식의 삶, 야생의 삶을 견인하기 위해, 시인은 먼저 그것을 응시한다. 그가 그려나간 궤적은 자기의 존재가 타자의 시선 아래 짓눌리고 밀려났던 경험을 면면히 보여준다. '나'의 침대가 아니라 "남의 침대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너무」)음을 고백하면서, "고개를 쳐들"고 다양성이 말살된 "하늘을 뒤덮은/보급형 드론들"(「언캐니」)을 똑바로 바라본다. 바야흐로 "내가 발을 갖고 있었구나 내 발로 나를/옮길 수 있"(「근사」)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인은 "해변에 가득한 돌을 골라"(「희고 흰 빛」)내듯, '타자의 시선'이 아니라, 온전히 '자기의 시선'으로 고유한 자기의 꿈과 그 정체성을 확보해 나간다. 지금 살펴볼 「사로잡힌 세계」에서 시인은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힌, 그 세계를 기꺼이 응시하면서 자신의 유약함을 진단한다.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 연인을 만들었어요 굴착기를 좋아하는 사람 병원 침대에 누워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자신이 부순 어떤 마을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 그것 참 쓸쓸하군요, 하며 웃다가 병이 깊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엔 저수지에 가라앉은 목각 인형을 건져 올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굴착기 끝에 닿은 인형의 마디마디가 부러져 나무 조각에 불과해져 버렸다고요 나도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어요 그냥 조그맣고 쪼글쪼글한 조약돌일 뿐이에요, 라고 하자 그는 달걀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내 어깨를 다독여주었습니다 뜨겁고 달고 부드러운 것을 먹이다 포기한 사이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는데도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아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 「사로잡힌 세계」 중에서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그는 병실의 적막이 두려운지, 병태의 실감이 두려운지,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연인을 만들"었지만 연인의 이야기로 무성한 통화 내용은 그의 "병이 깊어지"게 만들 뿐, 적막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하물며 연인의 이야기는 "그것 참 쓸쓸하"다. 전화하고 싶다는 말은 일방의 청취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쌍방의 '대화'를 하고 싶다는 말이다. '너'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얽히고설키면서 '우리'의 이야기가 탄생하는 것. 한편 일방적인 청취를 당하고 있던 '나'는 결국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다. 타자에 의탁해 상황을 모면하고 모종의 감정을 유예하려던 계략은 종국에 타자로 하여금 '나'를 "달걀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다루어야 하는 유약한 존재로 치부한다. 아직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몸은 회복되지 않았지만, 유약해진 '나'는 강력해진(타자에 자기를 의탁하면서 타자는 '나'보다 강력한 존재로 부상한다) 타자 앞에서 그저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다고 말한다. 시인의 세계는 그야말로 타자에 의해 "사로잡힌 세계"가 된다. '나'가 아니라,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면서 세계의 편위는 더욱 명백해진다. 이렇듯 윤혜지는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그 유약함을 직시한다. 이제 그는 그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를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 시작한다. 2.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었다 몸집이 작고 짧은 데님 바지를 입은 언니 요를 펴고 잠든 나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다른 이에게 물어보았다 얘는 언제쯤 깨어날까 냉장고에서 내 몫의 아이스크림을 꺼내 놓고 싶어서, 녹을 게 분명한데, 그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느껴져 꿈속에서도 좋았다 마음은 생생하고 그윽하고 선한 사람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문장이 적힌 책을 읽었다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입니다 그렇다면 언니도 하염없이 그림자구나 우리가 나무이고 지금 서성이는 저들이 드리워진 잎사귀인 것처럼 (…)언니가 흐느꼈고 우리들은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다 많은 것들이, 퍽 많은 것들이 나왔다 간혹 용서에 관한 이야기도 했지만 그 생각은 연약해서 곧 다른 걱정, 그러니까 관습적인 생각들로 덮어졌다 언니는 어른이었다 한 종류의 울음밖에 없는 인간 누군가 지친 문을 열고 음식을 내왔다 이것 좀 먹어봐 여름 야채를 가득 넣고 키슈를 구웠어 랩을 씌워둔 키슈는 오래되었고 길이 잘 들어 온순하다 이것을 만든 엄마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텐데, 저렇게 곯아떨어졌는데 키슈는 영문도 모르게 포실하구나 싶어 울었다 사실 선한 사람과 온전한 사람이 같지 않다는 이야기는 엄마의 맑은 탕이다 모두가 조금씩 떠먹고 떠난 자리에서 오가는 사람을 헤아려보는 사실 이 부분은 망친 시에서 오려온 것이다 상해버린 삶에서 시를 도려내듯 - 「그림자 언니」 중에서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라는 점에서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고, 재워주고 내가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가진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시인의 그림자, 곧 자신의 일부분이다. 꿈속의 나의 수고를 기꺼이 대신해 주려는 꿈속의 언니, 그러니까 시인의 그림자는 그러므로 '온전한 사람'보다는 '선한 사람'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마음이 불안할 때 특히 삼시세끼를 꼬박 잘 챙겨 먹고, 7시간 이상 숙면을 취하며, 1시간 이상 유산소 운동을 하는데, 그렇다고 누가 나를 선한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무거운 짐을 들고 있을 '너'를 위해 그 짐의 일부를 대신 들어주고, 사무실 바닥에 커피 쏟은 '너'의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헤아려 그것을 대신 닦아주고 있을, 그런 나를 두고 사람들은 선하다고 할 것이다. 기실 선한 사람은 타자로의 사려 깊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 온전한 사람은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잘 돌보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일, 선한 사람이 등장하는 그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는 시인의 모습을 미루어 볼 때, 그는 아마도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었나 보다. 여태 선한 사람으로 살았을 시인의 삶은 "랩을 씌워둔 키슈"처럼 "길이 잘 들어 온순하"고 누르면 푹하고 꺼질 것처럼 "포실하"다. 시인은 그 삶이 "상해버린 삶"이라고 말한다. 온전하지 못한 '그 삶'을 말하며 "울었다"는 그를 두고 혹자는 삶에 대한 후회라고 볼 수 있겠으나, 나는 이 울음이 이제라도 타자의 시선에 굴복하지 않는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에서 오는 벅차오름이라고 확신한다. 회피해버릴 수도 있을 '그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한 끝에 시인은 자기 삶의 방향성을, 진정한 자기 정체성을, 그렇게 확립한 것이다. 3. 타자에 의한, 타자를 위한, 타자로 인한 삶에서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시인의 노력은 다만 '자기 삶' 하나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삶으로 확장된다. 그는 타자로부터의 모든 인간의 자유를 꿈꾼다. 내가 아무리 '너'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 한들, '너'가 '나'의 시선을 의식해서 '너' 자신을 단속한다면 '나'는 또한 그 사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도 나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나'는 전연 자유로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맥락의 생활」은 그 사실을 기저에 두고 이 시대 아이들의 삶을 응시하면서 그것의 오류를 들추고 있다. 거대 쇼핑몰의 한 쪽에서 우리는 아이스링크의 인공 얼음을 지치는 우리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빙질이 훌륭하다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가 아니니까 금이 가도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 잊어버리고 우리는 남은 커피를 마시고 서로 좋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곳은 사랑이 넘치고 훈훈해서 금방이라도 아무나 커버릴 것 같다 (…)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로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이야기의 도입부를 잊어버렸다 (…) 너는 내 에피소드를 들어도 웃지 않는다 울어준다 - 「고맥락의 생활」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아이들의 삶에는 크게 두 가지 세계관이 있다고 말한다. 즉 거대 쇼핑몰 한 쪽의 "아이스링크"와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이다. 물론 위 시에 등장하는 "우리의 아이"가 살아가는 세계는 전자의 것이다. "빙질이 훌륭한" "인공 얼음"으로 만들어진 그곳에서 아이는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는 고민하지 않는다. 거대 쇼핑몰의 아이스링크는 이미 어른들에 의해 단단하게 건조(建造)된 안전한 얼음판일 테니, 아이는 어떤 중대한 고민 없이 그 위에 오를 것이다. 더구나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에는 언제든 아이의 불운을 쫓아줄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있다. 곧 나보다 강력한, 어른이라는 타자가 만들어 놓은 세계 위에서, 부모라는 타자의 시선 아래, 아이는 자기 주체성을 잃어간다. 한편, 후자의 "그 호수" 앞에서 아이는 생각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얼음판이 깨지면 죽을 것이고, 깨지지 않으면 살 것이다. 아이는 또 생각한다. 그 위험을 감수하고 얼음판 위에 오를 것이냐, 오직 살기 위해 다시 숲으로 돌아갈 것이냐.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떤 결정이든 그것은 아이의 독자적인 선택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이스링크"에서의 생활은 어떤 배경지식이 필요 없고 단순하게 관계에 의존하는 '고맥락의 생활'이다. 반면 "그 호수"에서의 생활은 가치 독립적이고, 자기 확신에 의한, 주체적인 '저맥락의 생활'이다. 시인은 이미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고맥락 문화의 오류를 응시하면서, "이야기를 들으면 울도록 만들어"진 보급형 로봇(「사랑과 공」)처럼 사라져가는 아이들의 주체성과 그 태도로 하여금 그들의 자유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통제되고 단속될 것을 염려한다. 이처럼 시인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속박되고 통제되고 있을 인간의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하면서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한다. 4. 그리고 시인은 말한다. 각자의 진정한 정체성 확립을 위해,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각자 "야생"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무덤 위는 미끄럼 타기 좋아 (…) 한 번도 온전하게 겹치지 않는 눈송이 눈송이 손가락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간다(…)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린다 여긴 잊어버려 이제 넌 오지 않을 거야 다른 것이 될 거야 (…) 가방을 부려 놓으면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랑하던 것들이 있고 이제 그것들은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인다 이렇게 시간이 가는 건가 봐 대답 대신 눈송이 - 「야생의 눈사람」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무덤 위에서 미끄럼 타던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상한다. 펄펄 내리는 눈송이를 "손바닥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가기도 하고,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리기도 한다. 시간이 가면서 유년의 기억들이 이제는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이는 지금, 그는 다시 한번 "대답 대신 눈송이"를 말한다. 온전한 사람으로 살고 싶을 그는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눈송이를 감각하던 그때, 그 야생의 시절이 그리운 것이다. 시에서 아홉 번이나 "눈송이"를 언급한 것은 야생의 꿈, 그러니까 자신이 진정으로 순수하게 좋아하는 일을 다시 한번 꿈꾸고 싶은 그 열망에의 외침일 테다. 그리고 타자의 시선과 현실에 굴복하지 않은 끝에, 우리 곁에 시인 윤혜지가 있다. 윤혜지의 시는 분명 우리를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제 그것을 동일화하고 내면화하는 능력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이 과연 무엇일지 마음을 솔직하게 진단하고 타자의 시선에 잠식당하는 진실한 꿈을 구출하자. 기실 그것은 '나'와 '너', 우리 모두의 자유를 보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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