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창작21 2024년 봄호(제64호)
모빌리티 시대의 장소 상실과 존재의 위기 ― 정우영 「무탈한 하루」, 『창작21』 2023년 겨울. 남현지 「가이드」, 『자음과모음』 2023년 가을. 조성래 「지상화」, 『문학동네』 2023년 가을. 이선유 「아침의 재촉」, 『창작21』 2023년 겨울
‘핑크빛 미래’와 ‘쓰라린 과거’라는 클리셰
좋은 삶을 기대하는 유토피아적 희망을 통해 우리는 현재를 마주할 용기를 얻는다. 힘들고 쓰 라린 과거를 딛고 세상은 아름답게 버티고 있으며 악한 사람들은 천하에 그 민낯을 드러낼 것이라는 믿 음은 환등처럼 미래를 향해 달리게끔 해주는 근원이 되어주곤 한다. 특별히 과학기술의 발달은 실제 세 계를 보다 희망적이고 긍정적으로 그려볼 수 있게끔 해주었고 우리는 그곳에서 사적 불안이라는 껍질을 벗고 매우 낙관적인 세계의 파노라마를 펼쳐내고 있다. 어쩌면 가상 세계는 현실의 불확실성에서 벗어 나고 싶은 인간의 열망에 반비례하는 크기로 존재하는 듯이 보인다.
가상 세계에는 위험과 불안과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만약 그러한 세계에서 한계를 파 악한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가 될까?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를 내린 것처럼 “아무것도 찾을 수 없는 바 깥의 첫 번째 것인 동시에 모든 것을 찾을 수 있는 안쪽의 첫 번째의 것”(아리스토텔레스, 이종훈 역, 『형이상학』, 동서문화사, 2016)이 ‘한계’라면 그것을 인지하는 과정을 가상 세계의 내부와 바깥을 동 시에 탐구하는 여정과 등가의 몫을 띨 것이다. 실제 사회와 유리된 가상 세계가 유토피아적이라고 믿는 방식은 미래가 핑크빛이라는 맹신과도 같은데, 이러한 태도는 과학기술의 결과물이 될 미래에 대한 무 비판적 수용을 가져다주고, 동시에 현재의 삶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과거가 패배했다는 비판을 불러 온다. 그렇다면 과연 과학기술은 현재를 구원하고 우리를 핑크빛 미래로 인도해갈 것인가. 과거의 재앙 이 기술과 지식의 부족에 뿌리를 둔 불안이자 위협이었다고 한다면 현대의 재앙은 과학기술의 진보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어쩌면 과학기술의 발전은 이성을 상수로 두고 있어 고유한 인식과 해답을 찾기 어렵게 할 뿐만 아니라 표지(標識)를 가지는 것 자체를 옳은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표 지되지 못하는 비물질적이고 정신적인 것에 대해 좀체 수용하지 못한 역사를 가지게 된 것이다.
장소 상실의 위기
현대인의 가장 큰 질병이자 위기를 소외와 고독으로 본다면 이는 효율성과 편리성 중심으로 재편되는 장소 상실의 위기에 대한 방증일 수 있다. 데이비드 하비는 현대 도시가 자본과 사람의 유동 성이 증가하면서 ‘장소 상실’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인본주의 지리학자인 이푸 투안(Yi-Fu Tuan)은 ‘토포필리아(장소애)’라는 용어로 사람과 장소 간의 정서적 유대를 강조한 바 있 다. 또한 에드워드 렐프는 『장소와 장소상실』(에드워드 렐프, 『장소와 장소상실』 김덕현 역, 논형, 2005)- 1 에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생활 세계이자 인간 실존의 근본적 토대인 장소가 상실되어가고 있음 을 언급하면서 그에 따른 인간 소외와 정체성 상실의 심각성을 지적하였다. 소비와 교통, 동질의 정체 성과 익명성을 요구하는 ‘비장소’는 의미의 불모지(barren)라는 측면에서 ‘무장소’와 유사한 것이 다. 이때‘비장소’와 ‘무장소’는 환승과 통과의 장소이면서 동질의 정체성과 익명성을 요구할 뿐이 다. 감성, 의미, 경험, 소속감 등이 출현하는 ‘장소’에서 인간은 비물질적 요소를 획득하여 정서적 안 정을 찾게 되므로 장소 상실 혹은 비장소와 무장소의 확장은 존재의 위기를 의미하는 것이 된다. 우리 주변은 편리와 효율을 중심으로 공간을 재편하고 있고, 모빌리티 시대에 걸맞게 고속도로, 지하철역, 대 형 쇼핑몰, 공항 등이 집(장소)을 둘러싸고 있다. 비장소와 무장소는 겉으로는 화려하고 혼잡하지만 의 미가 출현하지 않는 무의미의 영역이므로 그 속에서 인간은 익명의 대중이자 고독한 군중으로 존재할 뿐이다. 이런 공공의 장소는 배제와 소외뿐만 아니라 ‘위반’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즉 환승과 통과 의 장소에서 제자리를 벗어난 행위를 했을 때 우리는 이를 위반으로 간주하게 된 것이다. 환승과 통과 의 영역은 더 이상 대중이 모일 수 없게 탈바꿈을 하였고 이곳에서 빚어지는 모든 행위는 사(私)행위로 간주되었다. 이제 장소는 자연적이지도 않고 ‘위반’을 규정하는 권력이 작동하는 곳으로 변화한 셈이 다. 지하철에서 우리는 종종 서발턴을 마주 대했고, 그만큼 윤리적 존재가 되었고, 존재들과의 관계에서 수많은 서사를 접하기도 하였다. 장소란 사람과 사람의 서사가 새겨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 소가 사라진다는 것이 서발턴에게는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까? 경제적으로 설 자리를 잃는 것과 동시 에 모빌리티 차원에서도 ‘우연히 마주치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장소 상실은 그들에게 일상생활 조차 불가능하게 한다. 서발턴은 장소 상실의 위기에서 더욱 고립되고 소외되며 배제되는 것이다. 이들 의 서사는 새겨질 수조차 없어 모빌리티 시대에 이들은 투명하게 존재할 뿐이다. 인간은 일상생활을 통 해 그가 맺는 여러 상황과 연결되는데, 서발턴은 모빌리티 차원에서조차 사회적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 게 된 것이다.
존재의 위기 1
지하철역 광장에 들어서면 노점상을 비롯하여 많은 약소자를 대하던 시기가 있었다. 지하철역 같은 장소가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던 ‘장소’였다는 낭만적 회상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당시 우리 는 타자에 ‘관해’, ‘대해’ 말하기보다 직접 ‘얼굴 대 얼굴(face à face)’로 마주 대했으며 그들의 아픔에 교감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당시엔 ‘얼굴 대 얼굴’에서 시작된 사유가 물음이 되고 덕분에 우리는 윤리적 존재로 나아갈 수 있었다. 지하철역 주변 그 많던 노점상과 도움을 요청하던 많은 ‘서 발턴’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 시대 서발턴은 과연 사라졌는가? 편리와 효용의 이름으로 구획된 비장소와 무장소, 폴리머 지폐를 포함한 플라스틱 카드 화폐의 출현 등은 서발턴의 설 자리만 앗아간 것이 아니라 이들에 대한 ‘나’와 ‘우리’가 윤리적 존재로 나아갈 기회마저 박탈해간 것이다. 그것 이 바로 우리가 염려하는 존재의 위기가 아닐까.
있어도 없는 투명함이 내 특기지만, 내 무소유에 다들 동조해주시는가. 오늘은 놀라울 만큼 비켜나 있다. 감각 없는 다리로 어떻게 서야 할지 고민하는 참인데. 무언가가 깡통에 바스락바스락 조심스레 내린다. 안녕, 할부지! 사랑 달아요. 슬그머니 눈 들자 아가의 눈동자가 가만히 바라본다. 두 돌이나 지났을까. 너 무 맑아서 풍덩 빠질 것만 같아, 고맙다, 아가야. 고마워. 황급히 웅얼거린다.
가진 모두를 건네준 아가가 엄마 손 잡고 멀어진다. 작은 성자의 온기가 날 일으켜 세운다. 이제 다시 노 숙으로 돌아갈 시간. 없는 사람답게 아주 무탈하게 지냈다. 아무런 노동도 하지 않았다. 내 무능이 저 무 자비한 기계의 진격을 무디게 할 것이다.
눈 감고 아가가 준 사랑을 입에 넣는다.
달다. 살아야겠다.
―정우영, 「무탈한 하루」 전문
정우영의 시편은 사회적 약소자인 ‘나’가 경험하는 모빌리티 시대 ‘우리 상(像)’의 현주 소인지도 모른다. 정우영은 시적 주체에게 두 개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독자인 우리는 주체를 포함해 세 개의 목소리를 듣는다. ‘나’는 두 타자의 목소리에서 자신의 사유와 삶에 대한 태도가 변화하는 과정을 전달하는데, 그것은 단순히 쾌/불쾌의 관계가 아니라 두 타자의 전체성을 마주하는 일에서 비롯 된다. ‘나’를 대상화하는 첫 번째 목소리는 ‘나’가 대체로 경험하는 세계의 것이면서 동시에 모빌 리티 시대의 존재가 타자와 맺는 관계 방식이기도 하다. 존재를 움츠러들게만 하는 목소리가 “뭐야, 저 저러고 있어? 사지 멀쩡해 보이는데.”라는 형식으로 들려온다. 사지 멀쩡해 보이는 사람의 구걸 방 식에 손가락질부터 하고 보는 태도에서 사람을 이해하는 오늘날의 방식에 문제가 있음을 직감하게 된 다. 장애는 오랜 시간 ‘시각적 차이’로 규정되었으며 이로써 장애인의 정체성마저 규정해왔다. 그 같 은 규정은 장애인 스스로 규정한 것이 아니라 비장애인에 의해 규정된 ‘가상적 사회 정체성’이다. 어 빙 고프만은 우리가 “낯선 사람을 대하고 있는 동안, 그가 다른 사람과 달리 바람직하지 않은 속성을 보유하고 있다는 단서가 나타날 수 있는데 극단적인 경우, 대단히 나쁘거나, 위험하며, 또는 나약한 인 물임을 의미하는 범주의 속성들일 수 있다.”(어빙 고프만, 윤선길‧정기현 역, 『스티그마』, 한신대학교출 판부, 2009, 15쪽)라고 말하면서 이 경우 그 존재는 건전하고 평범한 인격체에서 더럽혀지고 무시되는 인격체로 전락하게 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장애는 존재가 타자 속으로 던져지는 것을 포기하고 타자 를 나의 선험적 지식과 경험에 데려와 판단을 내리는 일방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정우영의 시적 주체 는 “무자비한 기계의 진격을 무디게” 하기 위해 혹독한 고통을 감내하며 노동하지 않는 주체의 삶을 선택한다. 지배 권력이 부추기는 소비 사회에서 무소비를,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 모든 것을 잠식할 때 자본을 포기하는 ‘무소유’를 택하는 일은 지배 권력이 형성한 담론과 이데올로기에 복종하는 일보 다 훨씬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사람답게 아주 무탈하게” 지낸다. 이는 전체성과 조화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레비나스의 주체와 동질의 것으로 현상한다. 사람들이 비난하는 목소리를 통해 사회 체제적 관점에서 장애가 지위로 간주(조홍중‧김미경, 「‘장애’ 레이블링에 대한 특 수교육학적 담론」, 『국제문화연구』 15(1), 조선대학교 국제문화연구원, 2022.06, 116쪽)가 됨을 알 수 있 는데, 이는 푸코 식으로 말하면 부정적 정체성을 부여하고 다양한 사회적 활동을 배제하는 권력작용의 기제인 셈이다. 테넨바움은 대상자에게 부정적인 정체성을 갖게 하고 사회생활에서 배제의 기제가 작동 된다고 말한다. 장애와 장애인은 현대사회에서 무능력과 비효율로 여겨지지만, 그것은 이들을 배제하려 는 기제가 작동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나’는 이제 “안녕, 할부지! 사랑 달아요.”라는 두 번째 목소리를 듣는다. 앞선 방식과 달- 3 리 아이는 ‘나’와의 관계를 회복하려 하는데 그것은 호명에서 시작된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그 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나’와의 관계 속에서 정체성을 찾아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을 거는 행위 는 대화를 연결하고 지속하여 사유를 불러일으키면서 내적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 아이의 “안녕, 할부 지! 사랑 달아요.” 한 마디가 ‘나’에게 고마움이 되고 “달다. 살아야겠다.”는 삶의 의미를 되찾게 한 것이다. 아이가 할아버지에게 건넨 것은 ‘사탕’이었을 것이다. 아이는 ‘사탕’을 사랑이라고 발 음하면서 “사랑 달아요.”라고 부정확한 발음으로 발화하지만 ‘나’는 아이에게‘사랑’을 건네받은 것이 분명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모에게나 자식에게조차 돈이 최고라는 믿음은 사회적 약자들이 원 하는 것마저 ‘돈’이라고 판단하게 한다. 그들의 ‘약자 됨’은 본질적인 어떤 것에서 소외되고 배제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정우영의 시적 주체가 바라는 것은 ‘관심’ 자체였고 그것이 사회적 약소자들 이 필요로 여기는 본질임을 「무탈한 하루」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존재의 위기 2
텍스트 외부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 데리다의 목소리처럼, 텍스트나 담론은 그저 단순한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객체를 영구적으로 박제하는 행위이자 개념의 영속화를 위한 매개물로 존재 한다. 이처럼 언어와 텍스트는 주체의 정신세계와 객관적 물질세계를 보편타당한 것으로 연결하는 형식 이다. 호미 바바에 따르면 “텍스트성이란 정치적인 것의 이차적 반영이 아니며 정치적 행동은 텍스트 성의 역동성과 분리될 수 없다.”(호미 바바, 『문화의 위치-탈식민주의 문화이론』, 나병철 역, 소명출판, 2012, 12쪽) 이는 주체의 정치적 의식과 실천이 언어와 담론, 텍스트의 매개를 통해 의미화됨을 암시한 다. 그리하여 바바는 권력과 계급의 시선으로부터 이탈하는 틈새를 다양하게 설명해야 하고 그것은 그 틈새에 놓인 피식민자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말한 것이다(호미 바바, 위의 책, 10~16쪽). 그렇게 시가 탐 색하고 이루어가는 미학은 세계를 이탈하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독서 대중과 독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정우영의 시가 서발턴이 원하는 것이 관심이었음을 놓치고 오로지 물질만을 강조하 는 시대에 일대 각성을 요구했다면, 남현지의 시는 ‘믿음’과 ‘소속’을 통해 사람과의 관계 회복을 촉구하고 있다.
같은 티셔츠를 입고 모였다가
티셔츠를 벗으면 사라지는 소속이
세탁기에서 돌아가는 동안
믿음을 가진다
기계가 줄 수 있는 마음
인간은 그렇게 줄 수가 없어서
안내문을 동봉한다
이케아 가구 조립 설명서에서
나사의 그림은 실제 크기와 같다
우리는 부품에서 시작해서
정확하게 가구에 다다르게 된다
믿음이 도처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본다
새벽 배송과 지하철 시간표처럼
믿는다고 나를?
한 번도 완성해본 적 없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없어진 단체의 티셔츠를 입고 잠든다
인간이 줄 수 있는 것
면으로 만들어서
부드럽고
친구 있었지
친구 있었다
―남현지, 「가이드」 전문
남현지의 시편은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고유하게 빚어지는 개념과 정의가 상품화되어가는 사 회 현상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동시에 직접 대면하며 의식했던 ‘소속’과 ‘믿음’, ‘친구’를 제대 로 인식할 수 있도록 감각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분열과 개인화, 혐오와 위험 사회는 믿음과 연대라는 관계의 구속력을 불가능으로 이끌어간다. 믿음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제품과 서비스가 만연하게 되면 서 ‘믿음’마저 상품이 되어가는 것이다. 이때 “인간이 줄 수 있는” 믿음은 “새벽 배송과 지하철 시간표처럼” 도처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어떤 믿음과 소속 없이, 돌봄이나 위로 없이‘한 몸’을 건사하도록 성장했고 사회적 존재가 되었다. 또한 믿음에 대한 정의는 ‘사람을 믿는 마음’에서 “기계가 줄 수 있는 마음”으로 변하였고 시간의 초침과 가구 조립 설명서 혹은 안내문에 따라 한 치의 어긋남이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시적 주체는 믿음에 깃든 진정한 의미를 되찾으려 “없어진 단체의 티셔츠를 입고 잠든다.” 그리하여 믿음을 잉태한‘소속’과 ‘친구’를 기 억한다. 시적 주체는 “같은 티셔츠를 입고 모였다가/티셔츠를 벗으면 사라지는 소속”에 믿음이 있음 을 역설하며 그러한 “소속이 있다면 기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환자복 입은 친구가 손 흔든다
비극 위에서 살다보면
남이 겪었던 비극을 뒤져보고 싶어서
내 눈 주위를 살피던
그는 이제 없다
방구석에서 옥편과 씨름하는 내 사학도 친구는
뒤주에 갇혀 죽은 자의 아들의
조용한 불을 연구한다
(중략)
불……어머니와 사카모토 류이치가 시한부 상태라고 한다
(중략)
가끔은 전부를
주물공장, 사리 같은 구슬이 발견되는 재미로
캄보디아 동료와 뜨거운 불량품을 뒤졌었다
그녀마저 암 걸려 있었다
어느 날은 어떤 이를 증오해야 했는데
누구의 마음에든 불량해지지 않는 구슬 하나가 굴러다녀서 괴로웠다
―조성래, 「지상화」 부분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디에나 기쁨과 희망처럼 불안과 죽음 그리고 고통이 있다. 존재의 죽음 과 고통을 삶의 거울삼아 검토하는 철학 구조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기쁨과 희망이 휘발성을 띠는 것에 비해서 고통과 죽음은 지속력이 강하고 삶의 가장자리를 물어뜯는다. 레비나스에게 주체는 타자의 ‘대리자’이며, 타인에 대해 열려 있는 진정한 의미의 주체는 타인을 위해 고통 받을 수 있음 을 의미한다면서 사람이 고통 없이 진정한 사람이 될 수 없음을 역설한 바 있지만(강영안, 『타인의 얼 굴』, 문학과지성사, 2005, 211쪽) 의식에 ‘주어진’ 고통은 사람을 성숙케도 하지만 동시에 강퍅하고 냉소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부작용이 있다. 레비나스에게 고통은 공동체, 연대, 소속을 위해서는 필요조 건일 수밖에 없지만, 죽음과 고통이 뉴스와 영화 속에 넘쳐나는 스펙터클 시대에서 고통은 ‘너무 많 음’ ‘너무 지나침’으로 수용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조성래의 시편에는 아픔과 죽음이 가득 깃들여 있다. 조성래의 시적 주체 ‘나’는 타인의 고통에 참여하는 존재자다. “하늘의 존재에게 보이고 싶 어” “커다란 문양”의 “환자복 입은 친구가 손”을 흔들고 “남이 겪었던 비극 뒤져보고 싶어” 했 던 “그는 이제 없”으며 “캄보디아 동료”는 “암 걸려”있다. “뒤주에 갇혀 죽은 자의 아들의/조용 한 불을 연구”하는 “내 사학도 친구”가 있고 ‘나’의 “어머니와 사카모토 류이치가 시한부 상태” 이다. 조성래는 단순히 만연한 죽음에 대한 고통의 본질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이들의 신체적 고통이 어떤 사회적 고통과 도덕적 고통으로 이어지며 이들의 신체적 고통이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맥락 에서 사유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조성래가 죽음과 고통에 대해 논하는 것은 그 하나의 ‘내용’이 아 니라 하나의 현재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자신과 관계 맺어진 이들에 대한 전적인 책임이자 윤리적 접근 이 되는 셈이다. 시적 주체가 마주 대하는 죽음은 죽음 사실에 눌려 망각될 수 있는 존재에 관한 근원 적 고민이고 영원한 ‘너’에게 직시하는 일이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흰옷 입은 사람들
고요하던 마을에 아침이 부서져 내린다
주인은 말없이 어미 소를 쓰다듬고
남은 시간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먹으라는 듯
어미는 퉁퉁 불은 젖통을 끝끝내 물리며
어린 송아지를 재촉한다
죄도 없이 명분도 없이 염불도 없이
집어 던져지기 전에
발길로 차이기 전에
앞마당 뒷마당 뛰놀 듯 평온한 마음으로
말똥말똥 두 눈 부릅뜨고 맨정신으로
가라 한다 구덩이로 깊은 구덩이 속으로
포클레인 삽날에 찍혀 나가기 전에
―이선유, 「아침의 재촉」 전문
이선유에게 죽음과 고통은 신체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대상이 인간에게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그의 시에서 죽음 사유를 두 가지로 톺아볼 수 있는데, 첫째는 존재자의 물질적 죽음이고 나머지는 죽음과 고통 앞에 무감한 정신 혹은 영혼의 죽음이다. 바이러스로 인한 죽음이 더 이상 생경한 일로 여겨지지 않게 되면서 인간은 무수한 죽음에 노출되었다. 존재의 죽음 앞에 충분히 애도하고 정리할 시간도 없이 순간에 쏟아지는 세계의 비참은 ‘나’를 윤리적 존재로 만드는 ‘타자’ 의 지위를 하락하게 하고 정신 혹은 영혼이 자꾸만 분열된 채 소진되어가게끔 만든다. 시인은 죽음과 고통을 대하는 인간의 윤리적 죽음이 육체적 죽음보다 더 큰 문제임을 지적하고 있다. 코로나와 구제역 같은 바이러스 시대에서의 최선은 인간으로부터의 격리이지만 가축들에게는 격리 이후의 살처분이다. 구제역 등으로 폐사한 동물들의 사체는 구덩이로 던져진다. 이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 이유는 인간 에게 구제역이 전파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인간의 민낯은 “말없이 어미 소를 쓰다듬”는 주인과 얼마 안 “남은 시간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먹으라는 듯” “퉁퉁 불은 젖통을 끝 끝내 물리”는 어미 소와 포개진다. 이들의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성의 시대가 윤리의 부 재를 정당화할 수는 없지 않은가.
『존재와 시간』의 하이데거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인간존재의 조건은 ‘장소’이며 그 장 소는 자연과 물질 그리고 인간적인 것들을 매개한다. 비물질적‧정신적인 것이 태동하는 ‘장소’가 모빌 리티 시대에 맞추어 ‘무장소’와 ‘비장소’로 대체되면서 인간은 타자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순간에 쏟아지는 무수한 고통과 죽음 속에서 윤리적 존재로서의 ‘나’는 분열하고 있다. 타자와 무수한 존재의 고통과 죽음 앞에 애도하는 인간의 모습이 이성의 시대에 결여로 나타나고 있다 고 해도 이 같은 현상을 염려하는 시인들이 있는 한 본질적인 것은 현재 속에서 항구적으로 살아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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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경란의 단편소설 「검은 개 흰 말」(『2024년 제4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 2024), 「그들」(『2024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4) 및 소설집 『일요일의 철학』(창비, 2013), 『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문학과지성사, 2018), 『가정 사정』(문학동네, 2022), 장편소설 『복어』(문학동네, 2010), 『식빵 굽는 시간 가족의 기원』(문학동네, 2024) 등을 다룬다. 이하 소설을 인용할 시 본문에 쪽수만 밝힌다. 1. 나의 등을 향해 걸어가기 조경란 작가는 "좋은 제목은 독자에게 문학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1)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우리를 궁금하게 만드는 그의 소설 제목 하나를 들여다보는 일로 글을 시작해봐도 좋을 것이다. 그의 소설집 『가정 사정』에 수록된 단편의 제목 「한방향 걷기」를 보자. 이 제목은 낯설지 않다. 터미널 표지판 또는 길가의 현수막에서 익히 보아왔던 문구이기 때문이다. 보행자들의 발길이 서로 겹치지 않도록 돕는 안내문은 조경란의 소설 속에서도 "문화재청에서 나무에 달아놓은"(255쪽) 푯말에 쓰인 말로 등장한다. "한방향 걷기"는 해당 소설의 본문에서 유일하게 다른 글씨체로 표시되어 있어 형식 측면에서도 표지판 역할을 한다. 걸어온 방향 그대로 걸어가라고 조언하는 것 같기도, 다른 방향은 기웃대지 말라고 권고하는 것 같기도 한 이 구절을 읽으면 궁금해진다. 그래서 '한방향'은 어디를 가리키는지, '걷기'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등단 이래 이십구 년 동안 꾸준히 소설을 써온 조경란의 작품세계는 다채롭고 방대하여 이를 한 가지 특징으로 일괄하는 것은 오히려 그 세계를 축소하는 일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하나의 공통점을 꼽아본다면,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이 웅크리고 쪼그라들어 아주 납작해진 공처럼 보일 때도 걷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걷는다. 그리고 걷기는 조경란이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공들여 묘사하는 행위다. 조경란의 소설 속에서 인물이 걷는 장면은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빈번하게 등장한다. 인물이 걷는 장면으로 끝이 나는 소설들만 몇 가지 꼽아보아도 다음과 같이 많다. 조경란의 첫 장편소설 『식빵 굽는 시간』의 결미에서 여진은 사람들은 모두 "지도라곤 없는 자신만의 삶으로" "걸어가야 한다"(160쪽)는 것을 깨닫고는 창가에서 등을 돌려 식빵을 만들기 위해 주방으로 걸어간다. 두 번째 장편 『가족의 기원』 또한 정원이 "지도도, 아무도 없는 길 저쪽으로" "트렁크"를 쥐고 "서툴게 걸음을 옮"(333쪽)기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이는 정원을 가두어왔던 "세계로부터의 탈주"2)로 비친다. 「양파 던지기」(『가정 사정』)의 초점 화자인 원진은 생각이 많아질 때면 산에 올라 양파를 던지던 세입자 기중구가 떠난 후 그의 소식을 기다리면서 집을 나선다. "그는 양파를 쥔 손에 힘을 주고 걸었다. 꽃도 아닌 것을, 어쩌면 마음만큼 세밀하게 표현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115쪽) 이 소설 역시 인물의 걷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네 번째 장편소설 『복어』 또한 "그녀는 머리를 앞으로 내민 채 그를 향해 걸었다"(346쪽)라는 문장으로 끝이 난다. 아버지의 삶을 추모하며 자기를 찾아가는 아들의 이야기를 그린 단편 「성냥의 시대」(『일요일의 철학』)의 마지막 장면을 옮겨보면 이러하다. 햇살이 번져들고 있었다. 공장 안은 아직 어두컴컴했고 귀마개가 필요할 만큼 많이 만들어내야 할 성냥도 없었지만 그는 그쪽으로 걸어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갑자기 햇빛을 받으면 눈이 아플지도 몰랐다. 어둠이 아니라 그늘 속으로 그는 똑바로 걸어갔다. 그가 그를 지켜보는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53쪽) 이 단편이 소설집의 가장 마지막에 배치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경란이 소설집 전체를 인물이 걷는 장면으로 끝내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처럼 조경란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가지각색의 걷기는 물리적인 행위이자 실질적인 운동이면서 동시에 주저앉은 곳에서 다시 일어나 나아간다는 상징적 의미를 띤다. "매일 10분씩이라도 글을 쓴다면 삶이 적어도 1킬로미터쯤은 나아간 거라고"3)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조경란의 에세이를 참조하면, 걷기는 쓰기의 다른 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더욱 궁금해진다. 단일한 방향으로 걸으면 무엇을 만나게 될까. 소설가 이승우는 과학이 발달하기 전, 옛사람들은 세계가 평평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똑바로 계속 걸으면 세상의 끝에 닿고 낭떠러지로 떨어질 거라고"4) 생각했지만,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우리는 한방향으로 계속 걷는다면 출발한 자리로 돌아올 수 있음을 이해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출발점이 곧 도착점이 되는 이 세계에서는 역설적이게도 등 뒤에 있는 사람이 가장 멀리 있는 자가 된다고 한다. 이승우는 한 번 더 생각이 도약하게끔 이끈다. 등 뒤에 있는 사람보다 그 등을 가진 사람이 출발점에서 더욱 먼 사람이 아닐까, 하고 묻는다. 그러니까 한방향으로 쉬지 않고 지구를 다 걸어서야 만날 수 있는 가장 먼 사람이 자기 자신인 것이다. 어쩐지 마주보기 두려워서 사는 내내 눈을 내리깔고 걷다가 이 둥근 지구상에서 종내에는 퉁, 부딪히게 될 굽은 등. 한 번도 본 적이 없기에 낯설기만 한 캄캄한 뒷면, 그것은 어쩌면 가장 가까이 있지만 가장 멀게 느껴지는 '나'에게로 걸어가는 '나'의 뒷모습일 테다. 조경란의 소설에는 "세상과 잘 사귀지 못하고 세상으로부터 유기되어 있는"5)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지나치게 내향적"(「양파 던지기」, 85쪽)이고 소심하여 타인에게 환영받기는커녕 번번이 소외되는 이들은 가족에게마저 거부당하거나 사회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통에도 실패한 채 고독하게 남겨져 있을 때가 많다. 이들은 외로운 자신을 돌보는 방법조차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 자기와도 불화한다. 하지만 조경란은 그런 인물들이 마음의 장벽을 걸어 잠그고 자기 안으로 침잠해 질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는 작가 자신과도 닮아 있는 인물들이 자기 안을 헤집고 허물어 내면을 넓히고서 '나'의 실존을 찾기 위해 걸음을 떼는 이야기를 꾸준히 만들어왔다. 자기를 알아가는 일에 실패할 때도 유의미한 성공을 거둘 때도 계속해서 이들이 '나'를 향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도록, 어떻게든 그들 안의 자력을 발견해주려 노력해왔다. 조경란의 최근 소설들은 주관에 대한 집요한 탐구가 여러 주관이 병존하는 세계를 이해하는 일과 맞닿아 있음을 밝히려 한다. 한 사람의 내면세계를 탐구하는 일이 보편의 세계에서 등 돌리는 일이 아님을 헤아리고, 안으로 파고드는 응시가 평균으로 동일시될 것을 강요하는 외압에서 벗어나 특수한 삶들이 공존할 수 있게 하려는 시도임을 이해할 때, 조경란의 소설은 더욱 와닿게 된다. '나'라는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해보기 위해서 지구 한 바퀴를 다 걸어 '나'에게 다다르는 일은 언뜻 미련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나'를 만나기 위해서는 우선 저마다의 '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걸음마다 여러 '나'를 마주치면서 처음에 품었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나'들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으로 옮겨가게 된다. 아둔하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행로는 복수의 '나'가 병존하는 세계의 이치를 일찍이 이해한 자가 설정한 지름길일지도 모른다. 2. 원한의 역학 단순한 움직임으로 보이는 걷기는 의외로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이들에게는 산책하러 나가기 위해 신발을 신는 일부터가 고역이다. 그러므로 걷기 시작했다는 것, 어딘가를 향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회복의 단초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아지기 위한 첫걸음이 부정적인 감정으로 비치는 '원한'에서 시작되었다면 어떤가? 독특한 발단을 꾀하고 있는 2024년 김승옥문학상 대상 수상작 「그들」을 살펴보자. 「그들」의 중심인물인 종소와 영주가 만나게 된 계기는 전혀 아름답지 않다. 오히려 음침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종소가 품은 복수심으로 인해 서로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겸임교수였던 종소는 자기 제자를 뽑으려는 최교수에 의해 임용 과정에서 부당하게 제외되어 팔 년간 담당해온 과목을 더는 가르치지 못하게 된다. 종소는 "자신은 수업을 더 할 권리가 있다"(41쪽)고 자기 몫을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다. 그는 한 번 항의해보지도 못하고 자신이 알아온 "유일한 삶"(24쪽)을 송두리째 빼앗긴다. 이후 그는 후배의 출판사 일을 돕지만 출판사 사정이 어려워지자 해고당한다. 군산, 부산, 광주와 같이 먼 지역을 전전하며 자기 전공과 무관한 강의도 가리지 않고 떠맡아 생계를 이어나가지만, 당장 다음 학기를 보장할 수 없는 불안정한 강사 생활에 불안해한다. 고용의 불안정성 외에도 그를 노심초사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노인 우울증을 진단받은 어머니가 죽음을 선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불안들이 늘 공기처럼"(12쪽) 그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 종소는 양파를 물에 담그다가도 불안해져 어머니가 닫은 방문을 열어두고서 그 문이 다시 닫힐까 마음 졸인다. 일상생활에서도 막연한 두려움에 시달려야 하는 그는 불안 없이 사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부족한 무엇이 있"(13쪽)는 것일까 궁금해하기도 한다. 종소가 하는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면, 그가 자신에게 어떤 결함이 있기 때문에 불안을 느끼는 거라고 추측하며 자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종소는 문득 "내가 이선생을 선택하지 않은 것뿐"(같은 쪽)이라고 통보함으로써 선택권이 자기에게 있음을 은근히 드러내고 종소의 삶에 매우 중요한 사건을 단순히 선택의 문제로 축소해버렸던 최교수를 떠올린다. 매사 두려움을 느끼며 위축되고 경직되었던 종소는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사람"(같은 쪽)이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이상의 가장 유명한 시 「오감도-시 제1호」에 등장하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가 분간되지 않았던 것처럼, 아니 어쩌면 동일 인물인 것처럼, 두려움에 떠는 이는 위협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 공포감에 제압당하는 수동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행위하는 자가 되려는 기획, 그것으로 종소는 미래에 대한 모종의 기대감을 가지게 된다. 자신에게 다가올 최악의 일에만 골몰하던 종소가 부도덕한 일이나마 계획하고 실행하려 하는 것이다. 최교수를 두렵게 만들기 위해 "그를 찾아가야겠다고"(14쪽) 다짐할 때, 미래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가볼 수 있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따라서 이때 원한의 감정은 그것을 품은 이를 살려두는 동력이 된다. 무엇이라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먼저 말해보자면, 「그들」은 자기를 살려두는 일에 기여하는 감정적 자원인 '원한'으로 우연한 만남을 발생시킨 후, 그 만남을 통해 인물들이 원망하는 마음에 응축되었던 에너지를 차츰 다른 방향으로 발산하는 과정을 그린다. 이때 원한으로 일어선 인물들은 생존의 차원을 넘어서서 살 만한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으로 바뀌어나간다. 어찌됐든 그 만남 자체는 종소의 복수심에서 시작한다. 그는 최교수의 부인인 영주가 운영하는 카페에 가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악의를 품고 일부러 카페에 찾아왔음을 넌지시 드러낸다. 종소가 카페에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 최교수가 영주에게 위험해 보이는 그를 내보낼 것을 권유할 때, 종소의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된다. 그러나 원한으로 시작된 관계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의도하지 않은 굴절은 주어진 정보를 통해 서로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과는 다른, 직관적인 알아차림에서 발생한다. 종소는 멀리서 보면 "우는 사람처럼"(20쪽) 보이는 영주의 슬픔을 알아챈다. 영주 역시 종소가 누군가를 나름의 방식으로 괴롭히겠다는 일념으로 카페에 오지만, 막상 자신의 두 손이 "무기라도 되는 듯 주머니 깊이 찔러넣"(30쪽)고서 위협이 될 만한 행동을 삼간다는 것을 포착한다. 영주는 그가 자신이 당한 부적절한 해고에 소극적이나마 대응하고 있다는 사실에 작은 위안을 얻으면서 짧게나마 고요와 평온을 누리다가 가는 사람임을 알아차린다. 영주는 최교수의 작은 손이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하던 아버지의 "크고 두꺼운 손"(21쪽)에 비해 무섭지 않다는 이유로 결혼을 결심한 사람이다. 영주가 안전하고 싶은 욕구가 강한 사람이라는 점은 그녀가 언제나 안전을 위협받는 위치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최교수의 손과 종소의 손은 영주의 불안을 낮추어준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것이 안정감을 선사하는 방식에서는 대조된다. 최교수의 작은 손은 폭력을 행사하더라도 공격력이 약하리라고 추측되기에 영주를 덜 두렵게 한다. 이는 그의 의지와 무관한 신체적 외양일 뿐이다. 이와 달리 자기를 비롯한 누군가를 해치게 될까 두려워 손을 주머니 속에 가둬두는 종소의 습관은 그가 선택한 행동이며, 그의 성향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종소라는 인물에 대한 신뢰감으로 이어진다. 종소의 습관은 영주를 편안하게 해주면서 동시에 종소가 영주와 마찬가지로 '죽음'에 생각이 기울어 있음을 확인하게 해준다. 영주는 실제로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 구름과 전선줄이 겹친 듯 보이는 풍경을 "깃털 구름이 전선줄에 걸려 있"(23쪽)는 모양으로 읽어내는 사람이다. 전선줄을 "잘못 그어놓은"(같은 쪽) 금으로 인식하는 영주는 그것을 통해 남편과 아들의 편에 좀처럼 설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선 밖에 놓인 자기 처지를 환기하기도 하지만, "지켜온 생활이 모두 무너져버릴"(16쪽) 것만 같은 불안을 단번에 종식할 방법으로서의 죽음 또한 은연중에 떠올린다. 종소도 강의실 창문 커튼을 묶어둔 "케이블 줄"을 보면서 그것이 자기 죽음을 돕는 "다른 용도"(25쪽)로 쓰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최악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생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리리라는 생각에 마음 졸이며 살아온 종소와 영주는 죽음에 갈증을 느낀다. 자기 상처는 외면한 채 삶을 견뎌온 두 사람이 서로의 아픔만큼은 기민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던 이유는 이들이 '나' 아닌 대상이 망쳐지는 일에는 예민하게 반응하는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종소는 잠귀가 밝은 어머니가 도어 록 소리에 깰까 싶어 열쇠를 지니고 다닌다. 영주는 카페 문을 닫을 때마다 야외 테이블을 훔쳐가지 못하도록 쇠줄로 동여매는 일, 즉 불특정 다수를 의심하며 자기 것을 지켜내는 일이 끔찍하게 느껴져 그 자리에 카페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상추와 고추 모종을 심는다. 이러한 사정을 살피면, 영주 또한 종소처럼 원한을 지닌 인물이다. 엄마로서 자격 미달이라고 자기를 몰아세워 천천히 죽여가고 있었던 영주는 종소의 찢어진 재킷 주머니를 꿰매어주면서 응어리진 마음을 털어놓는다. 이때 영주는 미움의 칼날이 시종 자기를 겨누고 있었음을 어렴풋이 알게 되고, 오랫동안 벼려온 날이 자기를 찌르는 대신 바늘이 되어 다른 사람의 찢긴 상처를 꿰매어줄 수도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 "지금 안 꿰매면 더 중요한 걸 잃어버리게 될 거예요"(29쪽)라는 영주의 충고는 외투 주머니에 대한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는다. 슬픔이 줄줄 새는 다친 마음에 대한 이야기로 들린다. 안에 든 내용물 전부를 들키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며 들고 다니던 에코백에서 영주가 '반짇고리'를 꺼내고 이를 종소가 지켜보는 것 또한 의미가 있다. 들키고 싶었지만 혼자 감당해야만 했던 불안을 알아채주는 상대에게 마음을 털어놓으면서 자기를 살려놓기 위해 동아줄처럼 붙들어야 했던 원한은 점차 희미해진다. 살려만 놓자는 생각이 살 만한 삶을 꾸려가고 싶다는 소망으로, 한 단계 발전된 형태의 욕구로 나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종소는 팔 년간 재직했던 학교를 떠나며 건물의 수도꼭지를 모두 틀어놓았던 것처럼, 자신의 슬픔보다 더 많은 양의 무엇을 대신 흘려보내는 방식으로 불행에 대처해왔던 인물이다. 자기감정을 마주하기 두려워 다른 큰 소리를 냄으로써 내면의 소리를 스스로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감추고, 시간이 흘러서 자연스럽게 마음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소극적인 대응을 해왔던 것이다. 그런 종소는 어머니가 자주 소리 내서 운다는 사실을 털어놓음으로써 자신이 슬픈 상황에 처해 있음을, 그래서 자신도 울고 싶은 심정임을 영주에게 간접적인 방식으로나마 처음 고백한다. 종소는 더는 최교수를 기다리지 않게 된다. 대신 다른 것을 기다리게 된다. 누군가를 두렵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 두려움에 떠는 사람과 깊이 연결되면서 사그라든 것이다. 결국 종소는 최교수와 마주치는 상황을 기다렸으면서도 그것이 더 미뤄졌으면 하고 바란다. 원망의 마음, 최교수를 두렵게 하려는 마음은 비슷한 불안을 지닌 영주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자리를 잡자 자연스레 내쫓겨버린다. 영주 역시 좋은 엄마가 될 수 없어 아들 상현을 괴롭게 할 것이라는 두려움, 부족한 엄마 밑에서 자란 아들 주변의 또래 아이들까지 위험에 처하게 하리라는 공포에서 걸어나와 자기와 닮은 불안을 지닌 사람의 상처를 꿰매어주면서, 자신이 작은 돌봄을 실천할 수 있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인물임을 배우게 된다. 3. 필연적인 불안 각자의 불안은 본디 특수성이 있지만, '여성적 불안'이라고 불러봄직한 영주의 불안은 종소의 것과는 구별된다. 영주는 눌러왔던 마음이 솟구칠 때, 어디에도 말할 수 없었던 자기 이야기를 적어 '선생님'에게 문자로 전송한다. 선생님의 번호로 "알았어"(16쪽)라는 세 글자의 답장이 왔을 때, 영주는 그것이 선생님의 말투가 아님을 알아차리고 번호가 바뀌었을 가능성을 생각한다. 이후 선생님인 체하며 답장을 보내온 상대가 자신의 카페를 찾아와 자기를 위협하리라고 예상하며 영주는 두려움에 떤다. 영주의 불길한 상상 속에서 그는 해치기 쉬운 "여자"(17쪽)로 대상화되어 있다. 이러한 비약적 사고가 과민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런 사소한 계기로 스토킹 당하거나 죽임당하는 여성이 실제로도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다친 이웃을 대신해 가게 일을 돕다가 손님에게 "씨발, 아줌마 뭘 그렇게까지 친절하세요"(22쪽)라는 욕설을 듣는 「일러두기」의 미용, 「양파 던지기」에서 "소심하고 사회성"이 "떨어지기"에 상대적으로 "안전한"(95쪽) 남자를 결혼 상대로 선택하는 원진의 아내, 이웃에게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집에 남자도 없으면서"(245쪽)와 같이 사건과 무관한 비하의 말을 듣는 「한방향 걷기」의 은제 이모, 「봉천동의 유령」(『일요일의 철학』)에서 샤워하는 소리가 시끄럽다며 가만히 안 두겠다고 협박하는 남자 세입자의 말을 듣고 두려움에 떠는 엄마로 대변되는 여성 인물6)은 모두 불안을 느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특히 은제 이모가 베란다에 흙물이 드는 사건을 언급하면서 "어딜 가도 완전히 안전한 데가 없"(「한방향 걷기」, 233쪽)다고 토로하는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십일층 남자가 화분에 물을 주느라 은제 이모의 베란다를 더럽히는 일은 언뜻 안전과 무관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혼자 사는 여성의 입장에서 남자 이웃에게 항의하는 일은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는 위험한 일로 여겨진다. 그와 같은 불길한 예감은 매우 비논리적인 망상처럼 보이지만 현실의 삶을 참조하면 적절한 추론에 가깝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조차 범죄의 위협과 연결되어 있는 여성들의 처지는 불안 또한 젠더화될 수밖에 없음을 생각하게 한다. 최교수를 두렵게 하기 위해 그의 아내가 운영하는 카페에 가는 종소, 그 소극적인 방식의 앙갚음조차 종소의 성별이 바뀌면 불가능하리라고 씁쓸히 예측하게 된다. 쉽게 일터에서 내쳐지는, 그러나 누군가를 짧은 시간이나마 두렵게 할 수는 있는 종소의 그 불안정한 위치조차 비교적 안정적으로 비친다는 점은 성차별의 심각성을 환기한다. 조경란이 지속해온 여성 폭력에 대한 섬세한 고찰은 젠더화된 불안에 대한 사유로 이어진다. 집이나 직장, 일터의 화장실과 같은 일상적인 공간조차 여성에게는 성적 대상화, 성폭력의 위험이 상존하는 공포스러운 공간으로 인식될 수 있음을 밝혀주었던 조경란은 범죄에 노출되리라는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어 빈번히 경험해야만 하는 여성적 불안과, 그로 인해 여성들이 일상적인 상황에서 경험하게 되는 특수한 어려움까지 소설에 담아내고 있다. 강제로 날 선 감각을 지닌 채 살아가야 하는 여성의 불안이 유별난 기질에 기반한 왜곡된 감정이 아님을 소설은 확인하게 한다. 불안을 뜻하는 독일어 'Angst'가 원래 '궁지'라는 뜻이었다는 점은 불안이 "가능한 것과 새로운 것으로 향하는 통로를 차단한다"7)는 사실을 환기한다. 불안은 그것을 느끼는 주체를 고립시키고 미래를 기대하지 못하게 한다. 불안 요소들을 생각하느라 그 자리에 계속 머물게 만든다. 살아갈 가치가 있는 삶을 도모하기보다 모든 불행을 잘 모면하여 생존해가는 일에 연연하게 한다. 「그들」의 인물들은 불안이 추동하던 도망침을 멈추고 그렇게 도망치기만 했던 자기를 마주하고 돌보기 위해 걸음을 옮기게 된다. 서로에게 들키고 서로를 알아채주면서 종소와 영주는 도저히 삶을 지탱할 수 없게 하는 일들이 일어나리라는 불행한 미래에의 예감을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일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48쪽)다는 다행한 현재의 확인으로 바꾸어낸다. 앞서 이야기했듯, 이들이 안정감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은 과도하게 예민한 성정 때문이 아니라 언제든 해고되고 언제든 위협받을 수 있는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조경란의 소설은 불안함을 느끼는 개개인을 탓하지 않고 그 불안을 창출하고 체득하게 만드는 불의한 사회를 조명하게 한다. 조경란은 안전조치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누구도 해칠 의도가 없었던 무고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눌리어 죽어가야 했던 이태원 참사에 대한 흔적을 소설 곳곳에 녹여내면서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하는 기이한 사회구조를 지적한다. 권희철은 소설 「그들」이 구체적인 날짜를 언급한다는 점, 상현이 가한 학교폭력이 참사를 흉내내는 '압사 놀이'의 형태를 띤다는 점, 영주가 압박당하는 공포에 대해서 자주 거론한다는 점 등을 분석하여 '그들'이라는 지칭이 트라우마 이후를 치열하게 살아내는 이태원 참사 생존자들을 아우를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8) 이러한 해석을 참조할 때, 소설 「그들」은 종소와 영주가 지닌 개별적인 아픔뿐 아니라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정부와 그로 인한 치안의 부재가 사람들을 강제로 불안에 취약해지도록 한다는 점까지 고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재해에 인재가 더해져서 일어나는 참사는 그의 다른 소설 「검은 개 흰 말」에서도 묘사된다. 기록적인 폭우로 인해 도림천이 범람하고 "인근 반지하 빌라가 침수돼 세 이웃이 사망"했다는 뉴스(106쪽)가 보도되는 장면은 2022년 집중호우로 사망한 신림동의 세 모녀를 떠올리게 한다. "졸업여행을 가던 길에 생을 마치게 될 수도 있다"(108쪽)고 '나'(서양지)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가정하는 대목은 세월호 참사를 상기시킨다. "수해 피해의 경험들"로 인해서 '나'에게 여름은 "일년 중 가장 긴장하는 시기"(96쪽)로 감각되며, '나'는 "평범한 순간에도"(108쪽) 자신 혹은 타자들의 죽음을 걱정하며 초조해한다. 구조적 재난이 빈번하게 일어남에도 안전관리에는 소홀한 한국사회가 개개인의 일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조경란의 소설은 끊임없이 드러낸다. 이러한 대목들은 조경란의 소설이 '나'에 천착하고 있음에도 결코 개인의 단위로 이야기를 축소하거나 '나'라는 한 사람의 서사로만 유폐되지 않는다는 점을 입증한다. 4. 그저 살아내는 삶에서 살리는 삶으로 조경란의 최근 소설에는 이처럼 복수심에서 걷기 시작했더라도 자기를 살리는 일로 반격하는 방법을 익히게 되어, 방치해왔던 자기의 굽은 등을 안아주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 인물의 이야기가 자주 발견된다. 「일러두기」의 중심 인물인 미용은 마흔아홉 살로 공교롭게도 「그들」의 종소와 같은 나이이다. 복사집 '대학사'를 운영하는 재서는 인쇄를 하러 온 손님인 미용의 글을 읽게 되면서 그녀와 가까워진다. 자식을 바란 적 없었다는 이유로 자식을 정신적, 물리적으로 학대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미용은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살길이라는 판단하에 자기감정과 자기 존재를 숨기는 데 "가진 에너지를 다"(19쪽) 소진하면서 살아온 인물이다. 지금은 반찬가게 주인인 미용은 특성화고등학교로 배달을 나갔다가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해 기절한다. 구강 기능 저하증을 진단받고, 팔을 다친 재서를 대신하여 인쇄소 일을 돕다가 욕설까지 듣게 된 미용은 "아무래도 그 사람을 찾아야겠어요. (……) 나한테 왜 그랬는지 물어봐야겠어요, 지금이라도"(22~23쪽)라며, 과거 자신에게 부당한 폭력을 행사했던 교련 선생님을 찾겠다는 결심을 한다. 1987년, 미용은 당시 열일곱 살이었고 교련 수업을 맡은 선생은 지금 미용의 나이였다. 그는 "교련의 원래 목적이 길들여진 신체를 만드는 거"(42쪽)라는 말을 서슴지 않으며 수업시간에 여학생의 뺨을 내리치기도 하는 사람이었고, 겁을 먹은 미용은 붕대 감기를 연습하는 실습 시간에 실수를 한다. 그러자 교련 선생은 여럿이 돌아가면서 맡았던 환자 역할을 미용이 홀로 감당하게 만든다. 수업시간 내내 미용은 업혔다가 바닥에 내팽개쳐지고 또다시 일으켜 세워졌다가 내동댕이쳐진다. 경찰청장의 딸로 추정되는, 선생님들도 눈치를 보는 여학생이 "가여워서 못 보겠으니깐"(45쪽) 그만하라고 선생을 만류하고 나서야 이 가혹한 형벌은 끝이 난다. 미용은 아주 오랜 시간 막 대해도 되는 신체로 길들어왔던 것이다. "외로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죽이거나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18쪽)는 내용이 담긴 미용의 글을 보았던 재서는 그녀가 나쁜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닐까 불안해한다. 독자 또한 재서의 시선으로 미용을 바라보고 미용에 대해 추측하면서, 그가 원한을 품고서 선생님을 찾아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본다. 「그들」의 종소가 그랬듯, 자신에게 왜 그랬는지 따지고 싶은 원망감은 불안에 떨며 자기방어에만 힘써왔던 웅크린 존재를 일으켜세워 어딘가로 걸어나가게 만든다. 부정적일지언정 강력한 원한의 감정은 멈춰 있던 내면의 시계를 움직인다. 하지만 조경란의 소설은 언제나 그 시작점에서 훨씬 더 먼 곳으로,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간다. 재서는 미용이 불행했던 자기 삶을 보상받기 위해 선생을 찾았고, 불만족스러운 삶을 선사한 부모는 이미 죽어버렸으니 어찌할 수 없어서 자기 자신을 죽이기로 마음먹었으리라고 상상한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재서는 미용을 찾아가지만, 미용은 짐작과 달리 밝은 모습으로 지내고 있다. 미용은 자신이 쓴 글을 재서에게 보여주면서 자기가 쓰고 싶었던 게 교련 시간에 당했던 폭력이 아니라 교련 시간 시작 전에 마주한, 창밖의 복사나무에서 "연연한 분홍 꽃잎 몇 장이 후르르 떨어지"(46쪽)던 아름답고도 평화로운 광경이라고 이야기한다. 선생님에 관해 쓰려고 했지만 결국 자기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는 미용의 말을 다 듣고 나서 재서는 미용이 선생님을 찾아서 하려던 일이 그러한 잔혹한 시간을 겪고도 이렇게 또렷이 "계속 자신으로 살아가고"(47쪽) 있음을, 그 단단한 생명력이 미용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일임을 이해한다. 조경란은 "평생을 움츠리고 산 아이"가 "자라서 펼치는 미니멀한 복수 서사"를 쓰려고 했으나 미용이 그것을 거부했다고 전한 바 있다.9) 조경란의 소설 속 인물들이 처음엔 원한 때문에 걷기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그 걸음의 끝에 세워두었던 원망의 대상을 지나쳐 더 멀리에 있는, 숱한 폭력과 불의를 견디면서 생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은 '나'에게로 꿋꿋하게 나아가리라는 것을 우리는 이제 안다. "처음 작가로 하여금 그 소설을 쓰도록 이끈 직감, 사고, 지식 등등"10)을 의미하는 소설의 중심부가 바뀐다는 것은 작가와 독자가 각각 쓰기와 읽기를 통해 그 감춰진 중심부이자 진짜 주제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소설이라는 장르가 지닌 흥미로운 유동성과 창조성을 생각하게 한다. 인물의 걸음이 그려내는 궤적은 작가가 설정해두었던 최단거리가 아니라 인물이 경로를 이탈하여 내달린, 그리하여 더디지만 멈추지 않는 발걸음으로 만들어낸, 생으로 가는 새로운 길이다. 「한방향 걷기」에서, 은제 이모가 어렵게 가꾸어온 세계에 흙물을 끼얹는 십일층 주인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마흔아홉의 미석이 고안하는 방식 역시 동갑인 미용의 반격과 유사하다. 그는 민폐를 끼치는 당사자가 있는 십일층이 아니라 십이층으로 올라가서 몬스테라 화분을 문 앞에 두고 올 계획을 세운다. 그것을 베란다 난간에 올려놓고 물을 주었으면 한다고 부탁하려는 것이다. 십일층 남자가 아랫집의 입장이 되어 은제 이모가 경험하는 불편함과 불쾌를 고스란히 느껴보길 바라는 마음이므로 그것은 "악의"(256쪽)에 가깝다. 하지만 이는 원망의 감정을 누군가를 해치거나 죽이는 것이 아닌 무언가를 살려내는 일을 통해 해소하는 방법이다. 미석은 십이층에 선물한 몬스테라가 잘 자라나기를, 강력한 생기를 지니고서 아래층으로 뻗어가기를 바라는 것으로 앙갚음한다. 게다가 그것은 "자신을 안에서 마냥 걸어 잠그고 있"(247쪽)던 미석이 처음으로 위했던 타자, 은제 이모가 자기 삶을 오롯이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한 대리 복수다. 조경란의 소설에서 중심인물이 지닌 원한은 결국에는 살리고 살아내는 일로 나아간다. 이는 더 멀리 내다보면서 더욱 나은 곳으로 걸어가는 일이자 우리의 삶을 한 단계 나아지게 하는 아름다운 대안이 된다. 5. 취약한 사람들의 걷기 연합, 아니 살기 연합 서로를 살리고 살고 싶게끔 만드는 길을 내는 조경란의 인물들은 하잘것없다고 여겨져 사회에서 배제되었음에도 그러한 서로를 하찮다고 여기지 않는다. 자신의 취약함을 오래 들여다본 이들은 그것이 어떤 것을 갖추지 못했거나 어떤 능력을 연마하지 못해서 또는 어떤 덕목이 부족해서 얻게 된 나약함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상대의 약함을 나무라지 않고 그 아픔과 외로움을 오롯이 보듬는다. 단, 조경란 소설의 차별점은 그와 같은 돌봄의 공동체가 "개개인의 선함에 호소되는 관계의 합이라기보다 각자의 약함이나 부족함을 아는 이들의 자연스러운 연합"11)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그의 소설은 인물과 독자에게 연민이나 이타적인 마음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자기 세계를 탐색하는 일이 곧 '나'와 같은 연약한 '나'들을 만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둔다. "무엇을 하고 어디에 있든 자격 미달"(「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 72쪽)이라고 느끼던 인물들이 각자의 자기를 찾으러 떠날 때, 그것은 홀로 감내해야 하는 여정이지만 잠깐씩 서로의 동행이 되어준다면 고독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사람이란 서로 들키고 마주치고 살피고 돌보아야 하는 존재임을 깨달아가는 '나'들이 서로의 보폭이 다르다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 다채로운 속도에 안도하면서, 모르는 걸음걸이를 따라 배우기도 하면서 걸어간다. 이제는 이상이 아니라 생활이 되었다는 소설12)을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가는 작가처럼, 그의 소설을 함께 걸어내는 독자가 되어도 좋을 것이다. 우리의 굽은 등, 그 볼품없지만 고유한 이면을 껴안아주기 위해 나선 길에 마주치는 숱한 등을 토닥이며 우리는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 1) 조경란, 「제목의 힘」, 『세계일보』, 2024. 12. 13. 2) 염승숙, 「가족의 '양막'을 찢어내고 홀로서기」, 『식빵 굽는 시간 가족의 기원』 해설, 357쪽. 3) 조경란, 「날마다 10분씩 볼펜」, 『소설가의 사물』, 마음산책, 2018, 80~81쪽. 4) 이승우, 『고요한 읽기』, 문학동네, 2024, 17쪽. 5) 이광호, 「죽음을 견디는 메타포」, 『불란서 안경원』 해설, 문학동네, 2006 (개정판), 342쪽. 6) 이에 대해서는 류진아의 글 「공간 인식과 여성에 대한 폭력-하성란 조경란의 소설을 중심으로」(『한국문학이론과 비평』 85집, 2019)를 참조할 수 있다. 7) 한병철, 『불안사회』, 최지수 옮김, 다산북스, 2024, 19쪽. 8) 권희철, 「타임아웃, 조경란, 그들 리뷰」, 『2024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60~61쪽. 9) 조경란 수상 소감, 「오늘은 여기까지만」, 『2024 제4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52쪽. 10) 오르한 파묵, 『소설과 소설가』, 이난아 옮김, 민음사, 2012, 149쪽. 11) 김미정, 「리무버블 스티커의 마음」, 『가정 사정』 해설, 304쪽. 12) "예전에는 소설이 어떤 이상(理想)이었다면 이제 소설은 생활(生活)이 되었다." (조경란, 작가의 말, 『가정 사정』, 310쪽)
미래의 인간에겐 얼마만큼의 공간이 주어질까. 기술의 발전으로 지리적 한계를 뛰어넘어 대화하거나 가상현실 속에서 놀라운 일들을 체험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미래는 이제 인간에겐 넓은 공간이 필요치 않는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팬데믹을 거치며 깨달은 것은 인간에겐 자신을 보호해줄 사적 공간 외의 공적 공간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느리게 걸으며 자연의 변화를 목격하고, 나와 비슷하고도 다른 사람들의 일상을 발견하며, 친밀한 이들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곳 말이다. "인간답다는 것은 의미 있는 장소로 가득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자 "곧 자신의 장소를 가지고 있으며 잘 알고 있다는 뜻"1)이라는 에드워드 렐프의 말처럼 인간은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여 장소를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장소들은 인간의 삶을 지탱한다. 우리에겐 여전히 장소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현시점에서 많은 이와 관계 맺는 장소이자, 가장 문제적인 장소는 어디일까. 그곳은 단연 광장일 것이다. 그리스의 아고라(Agora), 로마의 포럼(Forum)을 거쳐 현재의 광장은 사람들을 위한 장터부터 공연과 전시, 종교적 행사나 군중의 집회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광장이 중요한 점은 "오늘날까지도 시민사회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장소"2)이기 때문이다. 문학에서 나타나는 광장도 현실의 광장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문학 안에는 시대를 반영하고, 시민을 대변하면서도 시인의 시 세계를 드러내는 다양한 광장들이 존재한다. 최근 출간된 배수연의 시집 『여름의 힌트와 거위들』과 윤은성의 『유리 광장에서』에서도 타자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새로운 결의 광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발랄한 상상력과 단단한 실천으로 이루어진 광장을 함께 거닐어보자. 이분법을 넘는 걸음들 배수연의 세 번째 시집은 동화적인 상상력이 흩어져 있다는 점에서 전작들과 맥을 함께하면서도 경계가 희미해지는 장소들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모두가 혼자 있지만 같은 노래를 듣는 집이나(「모두네 집」), 컬렉션과 컬렉터의 위치가 동등해지는 갤러리(「컬렉터 모임 1」, 「컬렉터 모임 2」), 청소부와 손님의 역할이 구분되지 않는 호텔(「마리골드」) 등 사회가 구분해놓은 경계는 배수연의 시에선 무의미한 것이 된다. 청소 노동자와 손님, 컬렉션과 컬렉터와 같이 마주칠 일 없는 이들을 한곳에 배치함으로써 배수연의 시 세계는 만들어진다. 시에 등장하는 동물 타자들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거위나 두더지(「모두네 집」), 광대 역할을 맡은 앵무새(「광대 없는 마을」), 컬렉션이 된 갈치와 악어(「컬렉터 모임 1」, 「컬렉터 모임 2」), 터진 포대 안을 처리하는 비둘기(「개발팀」)처럼 시 속 동물들은 극에 따라 얼마든지 역할을 바꿀 수 있는 배우처럼 시와 시 사이를 건너다니며 경계를 허무는 데 일조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거위들이다. 거위는 어린 시절에 함께 놀던 친구로 대화를 나누다가도 화자의 심술에 낯선 동물이 되기도 하며(「거위와의 목욕」),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누리다가도 자유롭게 헤엄치며 동물적 특성을 드러낸다(「반짝이는」). 의인화가 일반적으로 부재한 자의 목소리를 내는 것3)이라면 배수연 시의 동물들은 의인화를 보여주는 동시에 의인화에 한정되지 않으려는 듯하다. 시집의 뒤표지에 실린 거위의 말들(“거위 1 나는 돌이 될 수도 있고 풀이 될 수도 있다 물이 될 수도 곰이 될 수도 / 거위 2 나는 상인이 될 수도 있고 목수가 될 수도 있다 배우가 될 수도 학자가 될 수도”)처럼 거위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으면서도 언제든 동물로 돌아갈 수 있다. 이를 보면 배수연의 세계에서 고정된 것이란 없으며 개념들은 넓게 풀어져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날은 약속한 날이었다 높은 빌딩 근사한 곳에서 밥을 먹는데 거위 하나가 일찍 와 있었다 여기 청소 일 알아봤어 번호가 적힌 쪽지를 가방에 접어 넣었다 [……] 거위들과 나란히 책을 읽을 때 거지의 개와 과부의 고양이 그런 건 우화였다 행복한 손님이 많은 곳에서는 청소하지 마 차라리 종합병원은 어때? 사실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부끄러웠고 나와 거위들의 부끄러움은 다르지만 함께 책을 읽었다 아무도 부탁한 적 없어서 계속할 수 있었다 - 「여름의 힌트와 거위들 1」 부분 그런데 배수연 시의 떠다니는 이미지들 속에서 건져지는 것이 있다. 시인은 의미가 고착화되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몫 없는 자들의 곁에서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인의 마음은 알려지지 않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공부하며(「독서 모임」), 광대가 받는 박수를 원하는 왕을 만들어내고(「새 하늬 마 높」), 항상 청소부를 자처하는 거위들을 등장시킨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거위들이 선택한 것이 청소부라는 점은 시인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힌트가 된다. 청소만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것처럼 거위는 계속해서 일을 하고(「거위와 모과」), 스스로가 청소부에 적임자임을 강조하는 거위의 모습에서 [“누구나 리더가 될 수는 없어요 / 저는 좋은 팔로워, 현명한 팔로워예요”(「모두네 집」)] 그들은 언제까지나 청소부의 자리에 머무르며 사회가 원하는 노동을 제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준다. 하지만 줄을 잘 서는 거위들과 마주칠수록(「여름의 힌트와 거위들 2」) 화자의 부끄러움은 배가된다. 앞서 인용한 시에서 화자가 거위와 마주친 곳은 높은 빌딩의 근사한 식당이다. 식사를 즐기는 화자 앞에서 거위는 장소에 개의치 않고 “청소 일”을 알아보았다며 말을 건넨다. 어디서든 청소부를 자처하는 거위에게 높은 빌딩은 인간적인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거위와 함께 읽은 책의 주인공들은 “건축가가 아니라 작곡가가” “시인이 아니라 화가가” “소설가가 아니라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다”며 이루지 못한 꿈을 갈망한다. 하지만 거위들에게 이런 이야기는 관심 밖의 일이며, 사람들이 부와 행복을 과시하는 곳이라도 거위에겐 일을 할 수 있는 곳에 불과하다. 그렇게 보면 거위는 착취 구조에 무지하기에 역설적으로 착취 구조에서 해방된 존재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담담하게 현실을 살아가는 거위를 보고 죄책을 느끼는 것은 화자이다. 화자는 청소부로 살아가는 거위 앞에 항상 손님으로 누군가의 노동의 혜택을 누려왔다는 부끄러움, 행복한 이들 사이에서 일할 거위의 불행을 단정 짓는 편협함에 대한 부끄러움 속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죄책은 화자를 수직적 공간에서 내려와 거위와 누울 수 있는 수평적 장소로 이끈다. 경계를 구분하는 수직적 문법을 탈피하고 무해한 거위와 누운 곳이야말로 화자가 원하는 장소일 것이다. “아무도 부탁한 적 없”(「여름의 힌트와 거위들 1」)는 행동을 함으로써 거위와 화자는 우화가 아닌 현실에서 함께하게 된다. 서로 다른 부끄러움을 견디며 거위들과 책을 읽는 것, 근사한 곳에서 내려와 청소부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정기 모임」), 기록되지 않는 이들을 조명하는 것을 [“동대문 미싱사는 이런 말을 하지 않고, / 기록되지도 않는다”(「일요일」)] 몫 없는 자들에 대한 애정4)이 아니면 무어라 불러야 할까. 항상 의자에 앉을 수는 없어서 모자가 발명되었어 구두닦이와 빵 장수 왕과 판관들 농부와 마술사 유모와 화가의 무리 나는 모자를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을 많이 알아 [……] 더 좋은 모자를 줘, 더 좋은 의자를 줘, 더 멋지고 더 가치 있는! 진실을 잘 이용해야 해 진실은 쉽게 녹지 않으니까 진실을 휘젓다 지친 사람들 그들의 비석 앞에 꽃과 모자가 놓여 있네 모자를 맞대고 오래오래 행진했어 실패라는 생각에 괴로울 때면 종종 모자 안의 코끼리를 쓰다듬지 인명 없는 미술사를 읽는 기분으로 흰 연기로 색색의 카펫을 짜는 기분으로 해방되는 기분으로 - 「모자의 기분-광장에서」 부분 거위와의 만남에서 보이듯 배수연은 경계를 구분하고, 계급을 나누는 이분법을 탈피하고자 한다. 하지만 시인의 바람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위의 시에서 모자는 의자를 대신해 사회적 계급을 상징하게 된 물건이다. 기존의 세계가 권력을 가진 이에게만 의자를 허락하여 수직적인 계급 구분을 뚜렷이 했다면, 모자로 구분되는 세계는 모두를 광장이라는 수평적 공간에 자리하게 함으로써 기존 체제와의 차이를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세계가 계급을 나누는 방식이 더욱 교묘해졌을 뿐, 계급은 여전히 견고하게 남아 있다. 되레 간편하게 착용할 수 있는 모자는 어디에서든지 서로의 계급을 확인할 수 있어 모자를 향한 욕망을 부추기고, 누구나 멋진 모자를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더 많은 갈등을 만들어낸다. 이렇듯 모자가 전부인 세계는 군중을 어리석게 만든다. 사람들은 현재의 모자에 만족하기보다 더 좋은 모자를 쓰기 위해 아우성치고, 이미 멋진 모자를 가진 왕과 판관들도 자신의 모자에 만족하지 않는다. 모자에 현혹되지 않고 진실에 다가가려 했던 이들은 죽고 묘비만이 남아 세계의 폐쇄성을 확인시켜준다. 화자가 서 있는 광장은 이 모든 상황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혼돈의 장소이다. “구두닦이와 빵 장수 왕과 판관들 농부와 마술사 유모와 화가의 무리” 등 모자를 바꾸기 위해 모여든 이들과 죽은 자들의 묘비, 모자를 외치는 아이들의 목소리와 헹가래하는 군중이 함께하는 어지러운 곳에서 화자는 거위와 함께 책을 읽었던 것처럼 이들과 모자를 맞대고 행진한다. “실패라는 생각에” 무너질 때마다 모자 안의 코끼리를 만지며, 상상력에 기대어 다시금 몫 없는 자들과 함께 걷는 것이다. 성호를 긋는 마음으로 걷고 또 걷는(「예술가」), 몫 없는 자와 거위들을 하나로 잇는 마음은 이분법에서 해방될 하나의 미래를 바라며 행해진다. 그래서일까. “나비 떼가 번쩍 곰을 들었으면 좋겠다”(「산책」)는 화자의 고백처럼 작은 발걸음들이 모여 이분법을 부수는 미래를 그리게 되는 것은. 우리는 배수연의 시를 통해 이분법을 넘어 화자와 거위, 두더지, 악어, 앵무새 들과 함께 행진하는 광장을 그리게 된다. 아무나와 함께하는 미래를. 아무나와 걸을 수 있는 광장을. 희미한 연대의 광장 윤은성의 두 번째 시집은 투명한 눈물들로 이루어진 슬픔의 기록 같다. “슬픔을 얼굴에 눌러 붙인 물고기들”(「둑과 빛과 물의 시」)처럼 “어디에서도 잠은 슬펐다고”(「멀다」) 고백하며, “슬픔으로 빌린 / 집”(「영원과 하루」)에 초대되는 화자를 보면 우리도 슬픔의 한가운데로 빠져들게 된다. 그렇다면 시인이 감지하는 깊은 슬픔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그것은 시인이 목격한 죽음과 체험한 사건에서 비롯된다. "물을 걷기 위해 먼 길을 다녀”(「물 긷는 아이들이 지나가」)와야 하는 소년 소녀 들의 이야기부터, 여름날을 채우던 “죽은 교사들”(「우리의 물이 우리를」)의 소식, 비난받는 소수자들과 함께하며 “먼 / 미래를 보여준 사람”(「좁고 긴 옷」)의 부고와 “크레인도 아닌 전신주 위에 올라가”(「창문을 열다가」) 목소리를 내던 여자의 이야기를 화자는 지나치지 못한다. 또한 시인에게 비인간 존재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과 다르지 않다. 때문에 그의 시는 고양이의 얼굴을 사람의 얼굴과 겹쳐 보게 하고(「선반 달기」), 닭이나 소, 돼지와 같은 비인간을 조명하며(“닭과 소와 돼지가 차례로 앓거나 / 물에 잠겨 죽거나 / 한꺼번에 묻히거나”, 「행사장」), “너무 크거나 작아서 / 발견되지 않는 죽음들”(「둑과 빛과 물의 시」)에게 자리를 마련해준다. 마음을 쏟는 대상이 많아질수록 시인이 겪게 되는 슬픔이 더욱 깊고 넓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랑시에르가 몫 없는 이들의 몫을 전제해야지만 평등이 가능하다고 본 것5)처럼 윤은성은 사회적 분배에서 배제된 이들뿐 아니라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비인간들을 동일 선상에 놓으며 그들과 함께 걷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게 실천으로 엮인 시는 슬픔을 껴안은 채로 행동하는 화자를 만들고(“지금 아프다고 우리 함께 울고 웃고 // 무슨 이상한 계절을 불러오게 되더라도 // 외쳤어야 맞아”, 「확성 빛 겨울」), 우리는 윤은성의 시를 통해 문학과 정치가 불가분의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기억하니 우리는 음악과 지구과학을 같은 날 배우고 함께 옥상에 올랐잖아 구름 사이로 빛이 보이면 무언가 알아챈** 것만 같은 기분도 들고 소나 강아지의 이마를 만지는 것 같은 부드러운 떠가는 시간을 촘촘히 알 것 같았잖아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하면서 엎드려 울기밖에 할 수 없더라도 시간에 맞추어 책상에 앉아 이어폰을 나눠 끼었잖아 그때도 이걸 알았던 기분이야 내가 사는 도시에선 자주 광장으로 사람이 모이고 흩어져 계속 말하려고 하는데 어쩐지 여기에서 외치는 기도가 멀리까지 가닿지 못하는 기분도 들고 [……] 내 목소리가 지상에서 또 지하에서 잠시 울리고 사라져 우리가 붙들고 모이는 게 미래를 등지고 선 사람들이 몸을 되돌려보려고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된 조용한 기도라고 하자 유리와 안개를 동시에 깨뜨리고 밖에서 안으로 집어넣는 손들을 알아채려 잠시 모였다고 하자 * 교사 보란을 통해 과학 교과목이 따뜻할 수도 있겠다고 상상함. ** 동물해방 운동을 했던 혜린과의 대화에서 “알아채다”라는 말을 전해 받음. - 「유리 광장에서」 부분 하지만 분배에서 배제된 이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 숨 쉬는 것만큼 당연해서 경각심을 가지지 못하는 위기들에 마음을 쏟고 행동하기란 얼마나 어렵고 또 외로운가. 위의 시에서 시인의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화자는 친구와 함께 보낸 다정한 과거를 떠올린다. “부드러운 / 떠가는 시간” 속에서 무언가 깨달은 것 같으면서도 어떤 변화도 이끌어내지 못하는 현실에 좌절하고, 서로에게 의지하여 보낸 기억들은 슬프지만 아름답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화자는 광장에 선다. 그러나 화자가 처한 상황은 더욱 절망적이다. 현재의 화자는 엎드려 울기만 했던 과거보다 자주 목소리를 내고, 기도도 해보지만 상황이 나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미래, 기대할 수 없는 희망에 화자는 “무엇을 더 느끼고” “나이를 더 먹어야” 하느냐며 절망에 빠지는 듯하다. 이때 화자가 선 광장을 자세히 살펴보자. 윤은성은 첫 시집 『주소를 쥐고』(문학과지성사, 2021)에서부터 광장에 대한 사유를 보여주었는데 첫 시집의 광장이 쓸쓸함이 깃든 곳이거나(「비단길앞잡이」) “살갗을 할퀴는”(「장미 광장」) 상처를 내는 곳이었다면 두 번째 시집의 광장은 희미한 연대가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장소이다. 일반적으로 광장은 "대중에 의해 정의되는 유일한 물리적 공간"6)으로 사람들이 모이기 쉽도록 도시의 중요한 장소에 위치한다. 많은 장소가 그러한 것처럼 광장의 성격은 광장에 모인 사람들에 의해 좌우되며 사람이 모이지 않은 광장은 빈터일 뿐이다. 그런데 몫이 없는 자들을 위해 외치는 화자의 목소리는 사람을 모으지 못한다. 많은 사람이 생태주의에 관심을 보이지만 다른 사회적 갈등과 다르게 생태주의는 대중의 결집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생태주의는 “어디에나 있으면서도 어디에도 없다"7)는 말처럼 광장을 지나는 사람들은 화자의 모습을 보면서도 유리를 부수고 화자의 곁에 서려고 하지 않는다. 광장은 공공장소이지 거주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듯 함께 모인 이들조차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해산되고, 화자의 목소리는 유리에 부딪혀 산산이 흩어진다. 이같이 사람들 사이의 단절과 연대의 불안정성을 거듭 확인하게 되는 유리 광장에서 시인은 홀로 허망함과 미움을 삭일지언정 희미한 연대를 원망하지 않는다. 사안에 따라 잠시 모였다 흩어지는 것이 더 많은 참여를 만들어내고, 더 오래 참여를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아는 듯하다. 때문에 무자비한 손들을 알아채기 위해 모인 광장에서도 그는 조심스럽게 몸을 기대오고, 조용한 기도로 사람들과 연결된다. 이것이 윤은성의 시가 몫 없는 자들을 위한 최전선에 서 있으면서도 온화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너무 멀리서 헤맨 날이면 자다 깨어나 안을 것을 찾아서 내가 얻어 온 모든 체온이 도는 몸을 천천히 뻗어봐. [……] 살아 움직이는 우리가 서로를 알아채며 가지처럼 빛처럼 단단하고 부드럽게 안아주고 있었어. 파도보다 오래 더 오래 다시 모르는 아픈 물결까지 붙잡아주고 있었어. 안다고, 안다고 붙잡아주고 있었어. - 「사슴뿔청각」 부분 시인에게 광장은 그가 지키고자 하는 생태계이기도 하다. 위의 시에서는 물의 광장으로서의 바다가 나타난다. 바다는 새로운 물결이 기존의 물결과 더해져 ‘하나의 물결’을 만드는 끊임없는 생성의 장소이다. 그러나 투명한 파도가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시인은 바다의 포용력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보여준다. 물고기들의 떼죽음과(「둑과 빛과 물의 시」), 조개들의 죽음, 바다에 터를 둔 사람들의 이주는(「행사장」) 미래가 아닌 현재의 일이다. 바닷가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천진함과 바다 생물의 사체가 함께 놓이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현실에서 화자는 바다가 더 나쁜 쪽으로 변하고 있음을 어린 청각을 통해 목도한다. “자라다 말고 색이 변하”(「사슴뿔청각」)는 어린 청각의 현실이 말간 얼굴로 첨벙거리는 아이들의 미래인 것만 같아 화자는 두려움에 떨고 “시를 잃어버린 것 같”(「창문을 열다가」)은 기분에 휩싸인다. 두렵고 슬픈 마음에 무너져 내리는 시인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은 광장에서 만난 동료들이다. 슬퍼하는 시인에게 전해진 체온과 전달된 언어(「생일 세계 공원」) 그리고 그림자(「모르는 일들로부터」) 등 동료들에게 받은 것들은 시인을 허무의 파도에 쓸려가지 않게 하는 안전망이 된다. “파도보다 오래” 화자를 끌어안는 포옹을 통해 시인이 낙담과 허무에 잠식되지 않고 일어날 것을 예감할 수 있다. “가지처럼 빛처럼 단단하고 부드럽게” 서로를 안아주는 연대는 약하지 않다. 서로의 고통까지 보듬어줌으로써 희미할지언정 끊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소가 “끊임없이 변동하는 궤적들의 묶음으로서 우리의 ‘함께 내던져져 있음’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8)이라면, 윤은성이 보여주는 장소들은 우리가 ‘지구에’ 함께 내던져져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윤은성이 보여주는 장소들에서 우리는 모두 몫 없는 자들이 된다. 사회가 정한 계급, 성별, 종차를 넘어 우리는 무너져가는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야 할 ‘땅에 속한 자들 The Earthbound’9)이 되고 그제야 우리는 몫 없는 자들의 슬픔을, 언어가 없는 이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감각할 수 있는 것이다. 슬픔과 아픔을 견디고 묵묵히 기도하며 나아가는 시 앞에서 나는 기꺼이 손을 내밀고 싶어진다. 서 있는 자리를 조심스럽게 확인하며(「구름이 있는 광장에 모여서 우리는」) 곧은 마음으로 걷는 시인과 다양한 생명체들을 잇는 광장에서 만나고 싶기에. 시인이 그리는 안전한 미래에 멸종하지 않은 우리가 있기를 바란다. 1) 에드워드 렐프, 『장소와 장소상실』, 김덕현 외 옮김, 논형, 2005, p. 25. 2) 프랑코 만쿠조 외, 『광장』, 장택수 외 옮김, 생각의나무, 2009, p. 5. 3) James J. Paxon, 『The Poetics of Personifica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p. 13. 4) 자크 랑시에르, 『미학 안의 불편함』, 주형일 옮김, 인간사랑, 2008, p. 11. 5) 자크 랑시에르, 『불화: 정치와 철학』, 진태원 옮김, 길, 2015, pp. 48, 64, 68~69. 6) 프랑코 만쿠조 외, 같은 책, pp. 6, 19. 7) 브뤼노 라투르·니콜라이 슐츠, 『녹색 계급의 출현: 스스로를 의식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이규현 옮김, 이음, 2022, p. 13. 8) 도린 매시, 『공간을 위하여』, 박경환 외 옮김, 2016, 심산, p. 284. 9) 브뤼노 라투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신기후체제의 정치』, 박범순 옮김, 이음, 2021, p. 124.
부정의 세계, 스키드마크 모든 예술이 세계가 완전하지 않다는 부정을 전제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왔기에, 시인을 비롯한 예술가들은 주어진 세계의 허물을 벗고 만료된 현재의 형상을 깔고 앉아 새로운 여정을 떠난다. 이는 낯선 미지의 세계에서 발원되는 새로운 감각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찾고 세계의 한계를 확장해 나가기 위함이다. 새로움을 창조하기 위해 서슴없이 “지옥의 연쇄”(류수연, 「연옥으로의 한 걸음」, 김안, 『Mazeppa』, 문학과지성사, 2024, 108쪽)에 몸을 맡긴 바 있는 김안과 그의 시적 주체는 죽음에의 도정을 『귀신의 왕』(아시아, 2024)에서 이어간다. 『아무는 밤』(민음사, 2019) 이후 5년 만에 『Mazeppa』(문학과지성사, 2024.2)를 발간한 시인은 2024년 11월 『귀신의 왕』을 내놓았다. 2024년에 출간된 두 권의 시집은 창조된 세계가 의식의 세계와 이질감 없이 포개져 시인만의 독특한 시적 형식을 작성한다는 특징을 가진다. 『아무는 밤』 이후 죽음에 관한 의식에 큰 변화가 생긴다. “어떤 아이가 내 무릎 위에 앉아” 있는데 “죽은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미타찰」, 『아무는 밤』)를 듣게 된 것이다. 시인은 2014년 딸아이의 출생과 수많은 학생의 죽음 사건을 동시에 경험했고 생과 사에 대해 깊이 통찰하며 결국 삶과 죽음이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원으로 연결되어 구분할 수 없다는 깨달음에 이른다.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이 ‘죽음’이라는 ‘사건’과 ‘순간’에 의해 우리에게서 유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김안은 죽음과 삶을 이어주던 ‘골목’을 매개로 그들에게 다가선다. ‘골목’이 기억의 실재를 규정하거나 보여주는 장소 역할을 해 왔듯 시인은 의미가 되는 실재, 존재, 사물, 활동으로 가득 차 있는 바로 그 ‘골목’에서 만나고 들었던 이야기들을 쏟아낸다. 물론 모두 다 믿을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없는 것이라고는 말하지 못할”(「시인 노트」, 98쪽) 것 같다는 김안의 고백에는 어딘지 모를 짙은 여운이 서려져 있다. ‘귀신’이 된 ‘나’에게 귀신들은 더 이상 이질적 세계의 존재가 아니다. ‘나’가 사랑하던 이웃과 가족이 되고 그들의 목소리는 사랑하는 이들의 목소리로 전환된다. 그 어떤 낯선 행동과 기묘한 일들도 더는 ‘불가해’의 영역이 아니다. 변선우는 소진된 의식 세계의 언어와 감각 대신 미지의 땅인 ‘무의식’의 세계를 굴착(掘鑿)한다. 무의식 세계는 의식의 흐름에 따라 글쓰기가 진행되므로 기존의 독법과 문법을 살해하고 ‘난시의 눈’으로 세상 읽기가 된다. 시인은 시가 언어에 의해 현실화된다는 것을 잘 알기에 무의식의 존재들에게 ‘몸’을 내주고 그 ‘몸’이 직접 발화하도록 한다. 그 언어는 무의미의 시처럼 보일 수 있으며 풀이할 수 없는 기표의 ‘스키드마크’로 읽힐 수도 있다. 그것이 당장은 독해 불가능한 것일 수 있겠지만, 이는 나 자신의 배면에 관한 일이므로 시인은 작업을 결코 멈출 수 없다. 변선우의 이러한 창작 태도는 무의식의 세계가 의식의 세계보다 중요하고 무의식이 의식 세계의 대부분을 설명해 줄 것이라 굳게 믿은 프로이트를 충분히 연상시킨다. 경험 불가능한 세계에서 최초의 사물 앞에 섰던 ‘최초의 인간’ 보들레르처럼, 귀신의 세계와 무의식의 세계와 관계 맺는 변선우와 김안은 ‘사물’이 되고 ‘귀신’이 되어 감각 불가능한 세계의 존재를 마주 대하는 최초의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다. 초석적 살해·창조적 전환 2018년 《동아일보》로 등단한 변선우 시인이 6년 만에 첫 시집 『비세계』(2024, 타이피스트)를 냈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인간의 시선과 감각에 따른 획일화와 몰개성적 감각의 다발에서 떠나 무의식과 환시 세계의 존재들에게 ‘몸’을 내어줌으로써 그들만의 독특한 감각을 써나간다. 그것은 말라르메가 말한 것처럼 새로운 시학에서 솟아나야만 하는 어떤 언어를 발명하는 일이다. 변선우의 ‘비세계’는 “너무 많은 가시 때문에 너무 많은 구멍”(「비세계」)을 가졌고 ‘눈물’과 ‘콧물’ 그리고 ‘물’처럼 흐르며(「복도」, 「비세계」, 「식물의 말」) 자꾸만 “터지고”(「오토와 마톤」, 「폭탄 마니아」) “계속 움직이고 / 계속 변”(「사건과 순간」)한다. 변화하는 세계는 박제하듯 고정하는 기존의 언어가 절대 포착할 수 없다. 그래서 변선우는 기존의 세계를 뒤집기로 한다. 의식의 세계가 아닌 무의식과 환시 세계의 존재들이 써나가는 언어의 모험을 택함으로써 시인은 무한한 지평 위에 시를 올려놓으려는 것이다. 나는 회전하므로 입장이 번복됩니다. 내부와 외부는 나로 하여금 교차합니다. 나의 내부는 외부가, 나의 외부는 내부가 되어 공존을 도모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반복적으로 중단을 사유합니다. 내 몸에, 이 순간에 도사리는 안과 밖이 이토록 함께 간섭하다니. 나는 놀라움으로 하여금 조작을 하여 회전문을 더욱 빠르게 작동합니다. 더욱 빠르게 넘나듭니다. 그래서 경계는 도리어 뚜렷해지며 내부는 능숙하게 외부가 되고, 외부는 능숙하게 내부가 됩니다. 그럴수록 나는 바깥을 몽상합니다. 그럴듯하게 중단을 사유합니다. - 변선우, 「회전문」 전문 「회전문」은 무의식 세계에 몸을 내맡긴 시인의 의지를 잘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시편이다. 회전문이 된 시적 주체 ‘나’는 회전하면서 자꾸 “입장을 번복”하여 의미를 전환하고 순환시킨다. 마치 하나의 텍스트는 단 하나의 의미를 드러내는 단어들의 행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원본도 없는 단어들이 뒤섞이고 충돌하는 다차원의 공간임을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회전문이 된 ‘나’는 내부의 사유를 중단시키고 외부가 내부가 되도록 “공존을 도모”한다. 이윽고 ‘나’는 “회전문을 더욱 빠르게 작동”시켜 “내부는 능숙하게 외부가 되고, 외부는 능숙하게 내부”가 되도록 만든다. 그것은 전통적인 사유 방식을 뒤집는 일이며 무의식과 일탈의 언어가 시인을 통해 박제되지 않도록 하여 보다 ‘진실’에 가까운 날것의 의미를 생성하는 것이다. 변선우의 『비세계』는 ‘비세계’로 탈주하는 시인의 상상을 통해 현실과 의식의 한계와 경계를 극복하려는 상상의 연주인 셈이다. 고집스럽게 담과 벽을 넘는 『비세계』는 이후 시인이 펼쳐나갈 시적 지평이자 포석으로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2004년 『현대시』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인 김안의 다섯 번째 시집 『귀신의 왕』이 출간되었다. 문단 경향이나 세대의 유행에 연연하지 않고 꾸준히 ‘자기만의 방’을 완성해 온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현실을 도외시하지 않으면서 더 이상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비존재들과 마주 대한다. 이는 삶과 죽음에 대한 존재의 근원적 성찰로, 김안은 죽음을 삶으로부터 분리해 내는 대신 생(生)이라는 세계에 맞닿은 하나의 ‘골목’으로 삼는다. 이는 불교에서 논하는 존재론의 핵심인 연기론(緣起論)에 바탕을 둔 생사불이(生死不異) 또는 생사일여(生死一如)로 풀이될 수 있다. 생사일여란 삶과 죽음은 다른 것이 아니라 원처럼 하나로 연결되어 구분할 수 없다는 불교의 생사관을 나타낸다. 한 승려가 온몸에 불이 붙은 채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아주 맛있는 냄새가 풍겨 왔으므로 나는 따랐다. 이윽고 승려의 몸은 사라지고 불이 저 혼자 허기에 몸부림치며 걷고 있었다. 불에게는 눈이 없으므로, 허나 불에게는 길고 거대한 팔이 있으므로, 허기진 불은 사방을 향해 성난 붉은 원숭이처럼 제 팔을 휘둘렀다. 나는 저 낯선 불의 팔을 붙잡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충동은 지난밤 꿈에서 황금빛 옥수수밭 사이를 헤매다 우연히 발견한 시체를 안아주려 했던 것과 비슷했다. 가여운 것, 허기진 것, 끝없는 거대한 어둠이 너를 보고 있구나 이렇게 계속 눈 감고 있으면 영영 뜨지 못할 거야. 나는 시체에게 말을 건넸다. 설득하려는 듯. 누구를? 시체를. 꿈이었으니까. 죽지 말자고. 시체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내게 말했다. 나는 안개처럼 떠다니는 흐릿한 이야기일 뿐이야. 나는 밤의 어두운 주머니에서만 존재하는 이야기일 뿐이야. 그리고 시체의 이마에 작은 불씨가 피어오르더니 작은 나방으로 변해 내 이마에 부딪혔다. 눈을 떴다. 지금 내 앞에는 거대한 불이 비틀비틀 걸어가고 있다. 그 모습은 마치 구름처럼 느린 춤과 같았다. 나는 저 불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때 잊고 있던 시체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눈을 뜨면 현실. 그것은 얼어 죽은 불의 낙원이야. 경험했지만 설명할 수 없는 것들. 욕망들. 그리고 나는 시체를 껴안았다. 나는 화로의 재처럼 조금씩 멀리 흩어져가는 나를 느끼기 시작했다. - 김안, ① 「미메시스」 전문, 8~9쪽 그해 겨울, 나는 죽은 것 같았다. …(중략)… 나는 손으로 억세게 귀를 막았다. 귓구멍이 손을 먹기 시작했다. 억지로 귀에서 손을 떼자, 귓구멍에서 긴긴 이야기들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그날 이후, 매일 밤마다 문틈으로 흘러 들어와 숙덕이던 하얗고 묽은 영혼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따라 나는 온몸으로 어둠을 받아들이며 옥수수밭으로 들어갔다. 귀 밖으로 늙음과 붉음과 묽음이 꿀렁거리며 뱀처럼 끝없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김안, ② 「미메시스」 부분, 92~94쪽 시작과 끝을 알리는 두 편의 「미메시스」에는 죽음과 죽어감에 대한 영상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두 작품은 하나이면서 결코 하나가 아닌 서사로, 죽음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시 전체가 운용될 것임을 전제하는 관문인 셈이다. ① 「미메시스」에서 ‘나’는 “승려의 온몸에 불이 붙은 채” 걸어가는 모습을 목격한다. 우리는 ‘나’가 바라보는 이 ‘죽어감’의 생생한 한 장면에서 어떤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온몸으로 물을 껴안고”(「불가촉천민」, 『아무는 밤』, 민음사, 2019, 26쪽) 죽어가던 아이들의 모습이다. “나는 저 낯선 불의 팔을 붙잡고 싶은 충동에 사로” 잡힌다. ‘나’는 시체를 “설득하려는 듯” 눈을 뜨라고 말한다. “죽지 말자고.” 잠시 머뭇거리던 시체는 “나는 안개처럼 떠다니는 흐릿한 이야기”이고 “밤의 어두운 주머니에서만 존재하는 이야기”라고 ‘나’에게 말을 건넨다. 이 시 속에서 죽음은 절망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세계이다. 또한 ‘시체’는 인간이 만들어낸 “어두운 주머니에서만 존재하는” ‘단어’일 뿐이다. ‘시체’와 ‘나’는 설명할 수 없지만 다르지 않은 ‘존재’이므로 이제 “나는 시체를 껴안”는다. “화로의 재처럼 조금씩 멀리 흩어져가는 나”는 이제 ‘귀신’이다. 계사(繫辭), 미메시스, 뫼비우스 철학적 용어 가운데 계사(繫辭)라는 말이 있다. 계사는 서양 논리학의 기초 용어인 ‘코풀라(coupula)’의 번역어로, 코풀라는 무엇인가를 묶고 조이는 데 쓰이는 일종의 끈(매듭)을 의미하는 라틴어(김상환,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 창비, 2013, 421쪽)다. 계사는 주어와 보어를 잇는 ‘be동사’인 ‘이다’(est)라는 점에서 관절(마디) 역할을 하고 의미론적으로 실체를 지시하는 ‘끈’을 지시하기도 한다. 두 개의 명사가 계사에 묶여 영원히 하나가 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김안과 변선우의 시집에서 우리는 어떠한 ‘끈’을 발견할 수 있을까. 두 시인을 이어주는 ‘끈’은 두 세계를 하나로 묶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나’의 존재를 발견해 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두 세계는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 현실과 몽상/환시의 세계, 죽음과 삶의 세계, 죽음과 죽어감의 세계, 너와 나, 존재와 비존재, 비존재와 비존재를 모두 포함한다. 김안과 변선우는 이질적인 두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배치하지 않고 하나의 세계로 통합한다. 2000년대는 전쟁 아닌 일상에서 죽음을 목격하는 시대가 되었다. 2014년 이후 우리의 죽음에 관한 정신의 지도가 크게 바뀐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삶뿐만 아니라 시인들의 발자취마저 돌려놓았다. 아이들이 돌아오겠다던 금요일은 550번 이상 지났고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이 훌쩍 지났어도 좀체 낫지 않고 집단적 우울증으로 남아 각인된 죽음들, 어린 친구들의 무고한 죽음이 남긴 통증은 사라지지 않고 삶에 도사리고 있다. 2015년 메르스에 이어 2020년 코로나19, 2022년 이태원 참사로 죽음은 우리의 삶에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가족 대부분은 갑작스럽게 준비도 없이 가족 구성원을 잃어야 했고 그 ‘상실’로 가족은 아직도 고통과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수많은 가족 구성원들의 삶이 죽음의 그림자를 지니게 된 셈이다. 세계는 다양한 감정의 다발들로 소용돌이치고 슬픔이 넘쳐 흐른다. 엘리베이터에서 인사하던 아이, 아파트 공동 현관문을 잡아드린 어른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상지(上肢)에는 여전히 그들의 온기가 남아 있는데 말이다. 죽음을 단순히 한 개인의 불행과 삶의 질감으로만 여길 수 있을까? 그들은 내게서 완전히 분리되어 소멸했는가? 우리는 말더듬이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의식적으로 감각과 감정을 억제하고 슬픔을 애써 외면한다. 애도해야 한다면서 어떻게 애도해야 하는지 모른 채 ‘애도, 애도, 애도’만을 되뇌곤 한다. 변선우는 무의식이 흘러나오도록 하여 고통받는 무의식의 ‘나’에게 손을 내밀고 김안은 죽음 사건으로 비존재가 된 존재들에게 직접 말을 건넴으로써 잊지 않겠다는 진정한 애도를 수행한다. 그곳과 먼 곳에도 있는 ‘나’ 『귀신의 왕』의 촘촘한 유기적 연결성이 ‘나’의 ‘어린 시절’ 골목으로 우리를 자연스럽게 이끈다. 시인에게 “기억들은 한 골목에 집중되어 있”(「시인 노트」, 96쪽)기 때문이다. 이 시집은 삶과 죽음이 분리되지 않고 순환하며 연결되어 있다. 시인은 우리가 ‘귀신’이라고 부르는 죽은 존재들도 살아있는 “나와 비슷한 형식과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존재들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온기를 더듬어 나간다. ‘나’는 어린 시절의 공간에 도착해 ‘귀신’이 된 그들에게 안부를 묻는다. 『귀신의 왕』은 어린 시절 ‘나’가 살았던 한 골목의 ‘그 집’을 중심으로, 이제 ‘귀신’이 되어 버린 사랑하는 존재들의 서사를 잔뿌리처럼 펼쳐 보여준다. ‘귀신’이 된 ‘나’가 마주 대하는 귀신들은 오랜만에 해후하는 이웃이자 벗이다. 그곳과 먼 곳의 ‘나’는 ‘너’를 포용하여 ‘우리’가 된다. 11월의 늦은 오후, 멍한 상태로 식탁에 앉아 있었다. 아직까지 전화가 오지 않았다는 건 내일도 내내 이렇게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겠지. 깊은 한숨이 나왔다. 그때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기다란 그림자가 나타났다.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내게 식사는 잘 챙겨 먹는지, 물으시고선 냉장고 문을 열었다. 나는 오랜만에 뵌 어머니 모습에 얼떨떨하면서도 반가웠다. 철모르는 호기심으로 가득한 강아지 같은 마음이었다. 엄마, 나 어렸을 때 키웠던 강아지 이름이 뭐였죠? 무슨 소리니? 강아지라니. 내가 그 강아지가 된 마음이라니까, 오랜만에 엄마를 보니. 냉장고에서 하얗고 서늘한 빛과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어머니는 냉장고 문을 열어두고서 내게로 다가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강아지 키운 적이 없어. 왜 나 예닐곱 살 때 무당집 골목에 살 적에 키웠잖아. 굶어 죽었던가, 맞아 죽었던가, 그래서 아버지가 화장실 옆 나무에 묻어준. 나는 허기진 짐승처럼 어머니의 신선한 손목을 물어뜯으며 말했다. 어머니는 다정하게 손목을 내어주었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아버지가 없잖아? 생각해보니 내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난 왜 그걸 모르고 있었을까? 어린 시절, 밤마다 창밖으로 검은 그림자들이 서늘하게 흘러 들어와 어머니의 몸을 휘감았는데, 나는 그것을 아버지라 여긴 것일까? 어머니는 남은 한쪽 손목을 내어주었다. 그건 골목들이란다. 양팔이 사라진 어머니는 하얗게, 깊게, 서늘하게, 침묵하고 있는 냉장고 속으로 뱀처럼 기어 들어갔다. 어머니의 팔에서 흘러나온 붉은 그림자들이 밤의 골목처럼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 김안, 「기일」 전문 세계가 달라도 존재의 관계는 부식되지 않는다는 주제를 잘 보여주면서 동시에 독특한 서사를 작성하는 명편 중 하나는 「기일」이다. 우리는 「기일」을 통해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귀신의 세계에서도 변하지 않는 존재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기억이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가이다. 이를 통해 생과 사의 ‘벽’은 무너지고 확실의 세계에 균열이 생긴다. ‘나’는 ‘기일’이 되어 어머니를 만난다. 어머니는 만나자마자 “식사는 잘 챙겨 먹는지, 물으시고선 냉장고 문”을 여신다. 모든 어머니가 그러하듯 귀신이 된 어머니와 자식의 대화 역시 낯설지 않다. “나는 오랜만에 뵌 어머니 모습에 얼떨떨하면서도 반”갑다. 항상 자식이 그러하듯 “철모르는 호기심으로 가득한 강아지 같은 마음”으로 “엄마, 나 어렸을 때 키웠던 강아지 이름이 뭐였죠?”라며 평소 궁금했던 질문 하나를 한다. 어머니는 “우리 강아지를 키운 적이 없어”라고 답한다. 이 부분에서 확신과 확실의 세계가 흔들린다. ‘나’는 세계를 공고히 다지려 한다. 아니, “굶어 죽었던가, 맞아 죽었던가, 그래서 아버지가 화장실 옆 나무에 묻어준” 바로 그 강아지요. 라고 묻자, 어머니는 “넌 아버지가 없잖아?”라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확신과 확실의 경계는 무너진다. 마치 귀신의 세계를 읽는 독자의 현실 세계와의 경계를 허물기라도 하듯 말이다. 현실 세계에서 형성한 가치관과 사유·언어가 얼마나 불확실하고 불완전한지, 이것 때문에 너머의 세계에 도달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닌지, 죽음의 세계를 ‘나’의 세계에서 분리해 ‘나’라는 실존이 고통스럽고 고독한 것은 아니었는지 많은 사유와 깨달음이 우리에게 도착한다. 「기일」은 귀신들의 대화를 변증법적으로 검토하여 우리를 다양한 세계로 이끌고 결코 관계란 끊어지지 않음을 상기시켜 준다. 비세계(非世界), 비세계(飛世界) 김안과 변선우는 하나의 주제에 대한 글쓰기를 이어나가면서 같은 제목을 몇 차례 부여한다. 김안은 『아무는 밤』에서 「파산된 노래」 5편, 「불가촉천민」 8편, 「가정의 행복」 4편, 「피그말리온」 2편 등 동일한 제목으로 시를 써나갔는데, 이러한 시적 방식과 특징은 「미메시스」로 시작하여 「미메시스」로 끝을 맺는 『귀신의 왕』에서 ‘신성한 높이’에 도달하게 된다. 변선우 역시, 『비세계』에서 「비세계」 10편, 「제정신세계」 11편, 「폭탄 마니아」 4편을 써나가면서 비가시적 시적 장소를 가시화하고 활성화한다. 두 시인에 ‘미메시스’적 글쓰기를 통해서 텍스트 속 장소의 가상성은 순환하며 생명을 얻고 구체화되는 것이다. ‘밤’의 세계, ‘죽음’의 세계, ‘무의식’의 세계, ‘환시’의 세계는 장소의 언어와 몸이 없어 우리는 그 세계를 실감하기 어렵다. 시인은 귓구멍에서 흘러내리는 “긴긴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이는 “그날 이후, 매일 밤마다 문틈으로 흘러 들어와 숙덕이던 하얗고 묽은 영혼의 목소리”이다. 1 세계를 발견하였어요. 이 말은 세계를 발명하였다는 의미의 다름 아녜요. 나는 세계의 경계에 당도하여, 문을 밀어 열 듯, 선을 넘어 입장하였어요. 새하얀 세계, 금방 새카만 세계……, 새하얗기도 하고 새카맣기도 하는 세계가 펼쳐졌어요. 복판에 사람들이 있었어요. 살충제 마신 벌레들처럼 반지르르하게 널브러져 있었어요. 바라던 광경이었어요. 너무도 돌아왔어요. - 변선우, ① 「비세계」 부분, 11쪽 1 사물은 넘어진다. 깨진다. 흐르기 시작한다. 비세계에 도착한다. 2 사물은 거기서 내가 된다. 나를 시작한다. 트랙을 걷는다. 달린다. - 변선우, ② 「비세계」 부분, 19쪽 변선우의 10편의 「비세계」 가운데 2편(번호 필자 부여)을 살펴보자. ① 「비세계」에서 시적 주체는 “세계를 발견”한다. 아니 “세계를 발명하였다는 의미”가 더 정확할 것이다. 시인은 “새하얀 세계, 금방 새카만 세계”에 “반지르르하게 널브러져 있”는 존재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려고 한다. 혼돈(Chaos)의 세계에서 세계가 창조되듯이 ‘비세계’의 존재들이 시인의 ‘몸’과 ‘글쓰기’를 통해 생명이 획득된다. “사물은 넘어”지고 깨져서 마침내 “흐르기 시작한다.” 사물은 마침내 생명을 얻는다. 살아있다는 것의 상징성은 ‘정지’ 대신 ‘흐름’, ‘순환’이다. 생명의 순환을 대표하는 원소를 부러 꼽으라면 우리는 주저없이 ‘물’을 택할 것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지구의 97%, 인간 신체의 70% 이상이 물로 구성되어 있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순환’은 원형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변신의 반복을 의미한다. 물은 친화적 성격을 지녔다. 물은 다른 요소들과 결합하여 긍정의 에너지를 생성한다. ‘흙(土)’과 결합한 물은 진흙이 되어 집을 짓고 ‘불(火)’과 결합하여 삶을 윤택하게 하는 에너지가 되며, ‘공기(風)’와 결합한 물은 파도와 바람이 되어 자연물과 유기체의 이동을 도와 생존을 도모한다. 이것은 물이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잃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변화의 중심에 서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변선우의 ② 「비세계」에서 마침내 “흐르기 시작한” 사물이 내가 되어 “나를 시작한다.” 사물은 이제 “트랙을 걷”고 달릴 수 있다. 변선우의 시적 주체는 무의식과 상상/몽상의 존재들이 ‘나’의 ‘몸’을 입고 현시의 세계에서 걷고 달릴 수 있도록 몸을 내준다. ‘몸’과 ‘언어’를 가진 비세계의 사물들이 비상한다. 김안과 변선우는 열린 시선과 감각을 지니고 있다. “겨울에는 겨울의 소리가 있고 겨울의 언어가 있”(「끽다거喫茶去」, 『Mazeppa』)다고 믿기에 시인은 ‘방’이라는 단어에서 “차마 말하지 못한 진실과 울먹임들이 웅얼웅얼 귓속으로 들려오는 것”(김안, 「사전」, 강정 외, 『시인의 사물들』, 한겨레출판, 2014, 164쪽)을 포착한 것이다. 이제 시인은 ‘귀신의 왕’이 되어 귀신의 소리와 귀신의 언어를 듣고 말한다. 이는 시인이 현실적 문제보다 비가시적·비현실적 문제에 집중해 시세계를 확장하거나 “문학성이라는 뻔한 밀교”(「시인의 말」, 『Mazeppa』)를 펼치려는 자세가 아니다. 오히려 시인은 한때 우리 삶을 감쌌던 존재들이 불쑥불쑥 의식의 세계에 찾아오는 것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대화함으로써 존재들이 살아가는 실재적 삶을 명시해 보려는 것이다. 김안과 변선우는 유일한 세계, 인간만이 사유의 존재로 믿어왔던 가치관들이 오히려 존재에게 고통과 고독을 주지 않았나 하고 의문을 가진다. 그들이 창조한 시적 세계에서 무수히 많은 사물과 귀신들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 사실 죽음이 관계를 갈라놓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갈라졌다고 믿어왔던 것은 아닐까, 그것이 생의 고통이 되지 않았을까. 시인들은 아교처럼 생의 한가운데 흘러내리는 수많은 고통과 단절이 고립된 사유 때문임을 안다. 『귀신의 왕』과 『비세계』는 아직 언어가 도달하지 못한 세계를 더 이상 못 본 척 시약불견(視若不見)하지 않겠다는 시인들의 의지이자 세계로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죽음이 뛰어오”(「아오리스트」, 『Mazeppa』)는 소리와 무의식의 몸짓을 외면하지 않는다. 이들은 계속해서 너머의 세계를 우리에게 전해줄 것이다. 액체적 지각을 통해 거침없이 새로운 세계로 흘러 들어가 ‘몸’ 없는 세계 속 존재들의 ‘언어’가 되어줄 것이다. 확신의 세계를 허물자, 다양한 세계의 새로운 언어와 감각이 흘러넘치면서 출렁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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