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시작 2024년 여름호(제88호)
사유는 무한하고 상상력은 막강하다 ― 이재무와 강연호의 시집
1. 이재무 시집 『고독의 능력』
이재무의 시가 서정시의 외형을 따르면서도 기존의 서정시와는 완연히 다른 정서와 화법을 드러낸다는 사실은 여러 사람이 거론했다. 『데스밸리에서 죽다』(2020)의 해설을 쓴 김경복은 “이재무의 시가 늘 새롭고” “인간의 운명에 대한 깊은 사색을 영혼의 관점에서 특이하게 전개”한다고 언급했다. 『즐거운 소란』(2022)의 해설을 쓴 고형진도 이재무의 시가 서정시의 경향을 따르면서도 “서정시에 대한 재래적 관념을 완전히 전복시켜 놓는다”라고 논평했다. 『고독의 능력』(2024)의 해설을 쓴 임지연은 “새로운 시적 인식과 방법론 창안에 대한 시인의 예민함”에 주목하여 독해를 전개했다. 이 글 역시 이재무 시의 새로움과 선진적 성취를 드러내는 데 주력할 것이다. 우선 이재무의 길지 않은 시 중 이재무식 서정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작품 한 편을 소개하겠다. 『데스밸리에서 죽다』에 수록된 작품이다.
밤사이 비가 다녀가셨다
우리가 잠든 사이 도둑처럼 오셔서 산과 들을 깨끗이 쓸고 닦고 가셨구나
나는 이렇게 몰래 다녀간 것들이 좋다
몰래 온 비
몰래 온 눈
몰래 온 사랑
몰래 와서는 존재의 흔적을 남기고 가는 것들
몰래 들어와 내 안에서 기숙하는 사랑아!
올 때처럼 갈 때에도 몰래 가거라
「몰래 온 사랑」 전문
비와 눈이 도둑처럼 몰래 와서 산과 들을 깨끗이 쓸고 닦고 간다고 본 시선이 독특하다. 더 나아가 이렇게 몰래 다녀간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발상이 신선하다. 비와 눈에 이어 몰래 온 대상으로 사랑을 배치한 점이 시적이다. 이렇게 되자 사랑은 비와 눈처럼 몰래 와서 영혼을 쓸고 닦는 정화의 표상으로 이채롭게 떠오른다. 몰래 와서 존재의 흔적을 남기고 가는 형상이 사랑이라니. 이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 사랑은 그렇게 내 안에 몰래 들어와 ‘기숙하고’ 있다. 그다음에 이재무다운 반전이 온다. “올 때처럼 갈 때에도 몰래 가거라”.
나는 이 대목을 사랑한다. 사랑은 몰래 오지만 갈 때 흔적을 남기지 않고 몰래 가는 예는 사실 드물다. 감정의 파탄이 따르거나 희비의 곡절이 따르거나 “애증의 그림자”(박인환, 「목마와 숙녀」)를 남긴다. 인간의 정념에 대한 깊은 사색이 있었기에 이재무는 “올 때처럼 갈 때에도 몰래 가거라”라고 노래했다. 그런 사랑이라면 비와 눈처럼 온 세상을 적시고 인간의 영혼도 정결히 정화할 것이다. 이재무의 내면에 그러한 의식이 있었기에 비와 눈을 보며 이러한 상상을 했을 것이다. 그 사유와 상상의 새로움에 마음에서 솟아나는 경의를 표한다.
이재무의 시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활달하고 걸림 없는 육성이 특징이다. 그 빛나는 울림은 한 소식 깨친 선승의 설법처럼 우리 마음을 환하게 터준다. 그의 시는 오랜 숙성을 거쳐 오롯한 경지에 진입했다. 그것은 진속(塵俗)의 못 위에 떠오른 한 송이 연꽃을 연상시킨다. 그는 하루 대부분을 시와 삶에 대해 고민하며 보내는 것이 틀림없다. 자신의 시작과 생활에 관한 새로운 자각을 담은 시가 그 사실을 알려준다. 「고독의 능력」, 「노인과 길」, 「빈손」, 「나를 먹는다」 등이 그러한 작품이다.
그는 ‘삶의 애증’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을 넘어서서 자연과 화합하는 대동의 세상으로 넘어가려 한다. 이재무 시인은 자연과 인간의 조응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한다. 그의 의식은 깊고 부드러운 시와 뜨겁고 정갈한 삶을 한꺼번에 추구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티 나게 드러내지 않고 부드러운 생활의 감성 속에 담아내려 한다. 여기에 이재무 시의 특성이 있다.
이재무 시인이 생태시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그의 시적 이력으로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는 인간이 살아가는 구체적이고 전형적인 현실 문제에 관심을 두고 시작 활동을 했기 때문에 생태에 관한 지향도 그 연장선상에서 생성된 것이다. 그는 관념론적 생태주의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고 인간의 평등한 삶의 조건에 바탕을 둔 조화로운 공존의 생태학을 지향한다.
알겯는 소리가 좋았다
알겯는 소리가 나고 얼마 후
닭장 구석 어두운 모래밭
암탉이 낳은 알이 뽀얗게 빛났다
산고 치른 닭은 알 낳았다는
소식을 울음소리로 알렸다
낳은 알 모아지면 꾸러미에 담아서
장에 내다 팔고 큰 인심 쓰듯
엄니가 찜을 해서 저녁상에 올리기도 하였다
졸음 부르는 햇살 환한 봄날 하오
어디선가 알겯는 소리가 들려와
괜스레 고개를 좌우로 돌려 본다
우리들 어둡고 구차한 생활에도
소소한 기쁨의 알겯는 소리
들려올 일 있었으면 좋겠다
「알겯는 소리」 전문
‘알겯는 소리’는 암탉이 알을 낳을 무렵 내는 골골대는 소리를 말한다. 그 소리는 잠시 후 알을 얻게 될 기쁨을 미리 느끼게 한다. 이 시를 감상하려면 우선 그 단어의 뜻부터 알고 그로부터 연상되는 자연 친화적 농촌 공동체의 생활 양태를 이해해야 한다. 알겯는 소리와 그 얼마 후 보게 되는 알의 뽀얗게 빛나는 자태를 연상할 수 있으면 이 시의 아름다움에 친화적 공감을 얻을 수 있다. “암탉이 낳은 알이 뽀얗게” 빛나는 모습을 어디서 다시 볼 수 있겠는가. 자연과의 협업으로 얻은 알이지만 그 생산물은 인간의 생계에 도움을 준다. 어머니는 알을 모아 장에 내다 팔았고 여유가 있는 날엔 달걀찜을 해서 저녁 밥상에 올려 주셨다. 소년은 알겯는 소리나 알의 뽀얀 빛깔보다 달걀찜의 감미로운 미각을 더 기다렸을 것이다.
이제 세월이 흘러 소년은 농촌을 떠났고 도시의 시인이 되었다. 그래도 고요가 밀려드는 햇살 환한 봄날 하오가 되면 어디선가 알겯는 소리 들리는 듯한 환각을 갖는다. 각박한 생활의 틈 속에서도 온 가족이 즐길 만한 “소소한 기쁨”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알겯는 소리의 청각이나 뽀얗게 빛나던 알의 시각이나 달걀찜의 미각 차원을 떠나, 그 모든 감각이 결합하여 조화를 이루는 자연 친화적 공동체의 회복을 시인은 염원한다. 우리 시대가 상실한 것이 바로 그 기쁨이고 우리의 삶이 결여한 것이 공동의 조화다. 시인은 사전 속에 퇴색되어 가는 ‘알겯는 소리’라는 독특한 소재를 끌어들여 현재 삶의 결여 부분을 지적하며 비판적 의식은 뒤로 감추고 이상적 상태에 대한 향수를 통해 올바른 삶의 자리를 암시했다. 노련하면서도 원숙한 시인의 시선과 화법으로 하나의 진경을 대하게 되었다. 이것이 이재무 시를 읽는 기쁨이다. 발견의 기쁨은 다음 시에서도 얻을 수 있다. 짧은 시일수록 기쁨은 더욱 강렬하다.
저울은 0을 사수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의 존재다. 다녀가는 무게들과 악전고투하는 그는 힘에 눌려 숫자를 드러냈다가도 무게가 내려가면 빛처럼 빠르게 0으로 되돌아간다. 누구도 처음으로 돌아가려는 그의 고집을 이길 수 없다.
「시인」 전문
이 시를 읽은 후 제목을 다시 보고 무릎을 쳤다. 이것이 정말 시로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울을 “0을 사수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의 존재”로 본 시인은 이재무 이전에 없었고 이재무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그 저울을 시인의 표상으로 활용한 시인도 이재무 외에는 없다. 이 독창적 경구에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 시를 기억 목록에 넣었다. 시인이란 무엇인가? 저울과 같은 존재다. 저울은 어떠한 사물인가? 어떠한 무게와 힘이 가해져도 그것이 내려가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0으로 되돌아가는 사물이다. 저울을 우리는 수시로 보지만, 저울을 보고 이 사실을 알아낸 사람은 이재무 외에 없으며 이 현상을 시인의 속성으로 환치한 사람도 이재무 시인 외에는 없다. 어떠한 시련과 압력이 가해져도 그것이 사라지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속성을 지닌 존재. 그것이 시인이다. 김수영은 바람과 풀의 관계를 통해 풀의 능동적 복원력을 길게 서술했는데, 이재무 시인은 이 문제를 저울의 상징성을 통해 단도직입적으로 해결했다. 그 사유와 상상력의 용수철 같은 탄성에 경의를 표한다.
2. 강연호 시집 『하염없이 하염없는』
강연호는 과작의 시인이다. 그의 첫 시집 『비단길』은 1994년에 나왔다. 이듬해 현대시동인상을 받고 두 번째 시집이 나왔는데 그 시집은 현대시동인상 수상자 기념 시집이어서 첫 시집 작품이 대부분 들어 있다. 그로부터 6년 후 세 번째 시집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2001)가 간행되었고, 다시 11년 후 네 번째 시집 『기억의 못갖춘마디』(2012)가 간행되었다. 그리고 이번에 다섯 번째 시집 『하염없이 하염없는』(2023)이 나왔다. 1991년에 등단해서 32년의 시력을 가졌는데 다섯 권의 시집을 냈으니 아주 드문 과작의 시인이 틀림없다. 세 번째 시집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의 「시인의 말」에서 ‘흔적의 기록’이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번 시집의 머리말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저녁은 늘 한숨같이 와서
결국 달래지 못할 것을 달래려 하고 있다
하염없이 하염없는 날들이 흘러간다
돌이킬 수 없어서 다행이다
시간이 오고 가는 현상을 한숨에 비유한 것이 이채롭고, 한숨으로 표상되는 시간의 흐름을 어떤 것도 달래지 못하리라는 우울한 인식이 가슴에 닿는다. 하염없는 날들이 흘러가지만, 무엇도 그 흐름을 돌이킬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 정념에 대해 비극적이라는 말을 붙여도 될까?
그의 초기 시에는 ‘자갈밭’, ‘허방’, 적소(謫所)’ 등의 시어가 많이 나왔다. 그는 유배지와 같은 이 세상을 쓸쓸히 걸으며 자갈밭에 발이 상하여 아파하기도 하고 허방에 발을 디뎌 추락감에 잠기기도 했다. 그의 아름다운 연작시 「비단길」은 세상은 엉클어져 있고 나는 길을 잘못 들었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우울한 허무주의 시편들은 우리 마음을 달래주는 위안의 기능을 수행했다. 그것은 우리가 감지하지 못하고 예감하지 못하는 생의 운명을 미리 조명하고 인식의 차원에서 선험적 통찰을 부여한다. 절망하기 전에 먼저 절망을 가르치는 선험의 예지를 선사했다. 우리가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으나 일상의 안온함에 길들어 사태의 세부를 통찰하지 못하는 인간의 존재론적 비애를 우리 스스로 느끼게 했다. 그것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그의 시편은 소멸의 어법을 통해 삶의 확충을 예시하며 비애의 음영을 통해 마음의 상처를 다스리는 심리적 치유의 효능을 베풀었다.
이러한 흐름은 세월이 오래 흐른 지금도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얼마 전 그의 시를 읽고 짧은 감상을 쓴 적이 있는데 그 시는 이 시집에 그대로 자리 잡고 있다.
살 만큼 살아 보니 좀 알겠다는 말보다
주절주절한 변명이 있으랴
대체로는 무엇을 알겠다는 건지 얼버무리는 거다
애초에 목적어가 있기는 했나
오늘의 허기를 달래려 수제비 뜨는 저녁인데
이 반죽에서 무슨 세월을 떠낼 수 있을까
어떤 요리 장인의 수제비도 같은 모양은 없고
뭉개고 치대고 찢고 떼고 뜯어내는 게 다는 아니라지만
결국 모든 수제비는 둥글고 펑퍼짐하게 떠오른다
이 형상은 모호하고 그저 덩어리로 있다
가령 미술관의 인상파 그림 앞에서 오래 머무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이다
고개를 갸우뚱할수록 뭔가 깊이 아는 사람이다
니가 뭘 안다고 나서, 나서길!
수제비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청천벽력의 세상을 요령껏 건너왔다
나는 용맹정진의 도전을 재주껏 피해 왔다
허깨비가 나를 보면 그저 웃지요 할라나 울지요 할라나
허깨비에게 물어볼 생각은 없다 사실은 두렵다
긴 한숨부터 내쉴까 봐 먼저 설레발을 칠 뿐이다
그러면 좀 있어 보인다 이번에는 주어가 없다
살 만큼 살아 보니 수제비 뜨는 저녁이다
수제비는 주걱으로도 젓가락으로도 손으로도 뜨지만
그래 봤자 뭉개고 치대고 찢고 떼고 뜯어내는 게 다라서
눈물이 아니라 수제비 얘기다
수제비를 뜨다 말고 저녁이 우두커니 깊어진다 해도
수제비는 고개를 수그리고 수제비는 두 손을 모으고
수제비는 한껏 둥글게 몸을 말아야 수제비라는 것을
아무리 뜨거워도 국물과 함께 훌훌 감추듯 삼켜야 한다는 것을
어디까지나 눈물이 아니라 수제비 얘기다
강연호, 「수제비 뜨는 저녁」 전문
시인은 자신이 보내온 삶의 단면을 수제비 뜨는 일로 환유하여 표현했다. 서술적인 호흡이 두드러져서 강연호의 시가 초기와 많이 달라졌음을 느끼게 된다. 첫 행에서 그는 “살 만큼 살아 보니 좀 알겠다는 말”은 변명이라고 하면서 세월의 흐름에 많은 일을 묻어버리려는 안이한 태도를 비판한다. 여기에는 시에 충실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반성이 담겨 있는 것 같다. 그는 말머리를 돌려 “오늘의 허기를 달래려 수제비 뜨는 저녁”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구절은 상징적이다. ‘허기’라는 시어가 그렇고 반죽을 빚어 만드는 수제비라는 음식의 속성이 그렇다. 이 비유를 산문으로 바꾸면 ‘생의 허기를 달래려 시를 빚어 만드는 저녁’이라는 뜻이 된다. 장인들이 만든 수제비는 비슷한 것 같지만, 세밀히 보면 모양이 다르고 맛도 다르다. 시도 마찬가지다. “형상은 모호하고 그저 덩어리로” 존재하는 시의 원질(原質)을 어떻게 바꾸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작품이 생산된다. 작품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많지만, 시를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은 드물다.
시인은 서술의 어조를 바꾸어 한자어를 사용해서 “청천벽력의 세상”을 “용맹정진”하지 않고 살아왔음을 자인한다. 맑은 하늘에 날벼락 치듯 돌변하는 세상에서 자신이 정한 목표를 향해 돌진하지 못하고 요령껏 그럭저럭 살아왔다는 고백이다. 그런 자기 존재가 ‘허깨비’ 같다고 했다. 자아 확인의 어려움을 고백한 것이다. 그는 주어를 잃은 공허한 존재로 살아왔다. 그런 자신을 생각하니 목이 메고 눈물이 솟아난다. 물론 시인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눈물이 아니라 수제비 얘기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 속뜻은 ‘수제비 얘기가 아니라 눈물 얘기’라는 내용이다. 사실은 수제비 얘기가 아니라 시 쓰는 얘기라는 뜻이다. 그는 언어를 “뭉개고 치대고 찢고 떼고 뜯어내”서 진정한 시를 쓰고 싶은 것이다. 청천벽력의 세상에서 고개를 수그리고 두 손을 모으고 한껏 둥글게 몸을 말아 진정한 수제비를 빚어내고 싶은 것이다.
이순을 앞둔 나이에 용맹정진의 길을 걸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뜨거워도 국물과 함께 훌훌 감추듯 삼켜야”하는 것이 인생이며, 시를 쓰다가 말고 “저녁이 우두커니 깊어진다 해도” 끝까지 시를 쓰는 것이 시인의 운명이다. 그는 “요리 장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에게 ‘시의 장인’ 시절이 있었다. 한번 장인은 영원한 장인, 저녁이 아무리 깊어져도 인생이 아무리 뜨거워도 시 외에 그가 할 일은 없다. 그는 시 쓰기가 “좌절된 열망의 흔적”이라고 했다. 그것은 또한 운명의 흔적이기도 할 것이다. 한 사람이 살아간 생의 자취요 고뇌와 눈물의 흔적, 그것이 시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다시 자각하고 운명의 흔적을 기록하는 길로 나아갈 것이다. 저녁이 어둡게 깊어지더라도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은 늘 아름답다. 홀로 가더라도 그 길은 아름답고 그 사람은 강해 보인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썼다.
혼자 밥 먹는 사람은 외로워서 강해 보인다
기억의 부력은 놀라워서 언제든 기어이 떠오른다
너무 오랜 낮잠으로 불어터진 얼굴을 짓이기며
스쿠터가 슬리퍼를 끌 듯 지나간 게 전부인 오후다
세계가 고요하면 긴장해야 한다
목련의 실핏줄이 아프게 터지는 계절인데
꽃말처럼 흩어지는 신파를 거두며
찻물이 끓는 동안 입술이 식혀야 할 이름이 있다
혼자 노래하는 사람은 쓸쓸해서 강해 보인다
「혼자 밥 먹는 사람은」 전문
혼자 밥 먹는 것이 목표가 될 수는 없지만 삶의 태도는 될 수 있다. 시인은 혼자 밥 먹는 것을 외로움의 강도로 표현했다. 외로움과 강함이 어떤 관계를 맺는지 알 수 없지만 스스로 외로움을 견디는 사람은 내면이 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외로워서 강해 보인다”라는 인과 관계의 접속은 시인이 갖는 외로움에 대한 내적 신뢰를 연상케 한다. 젊은 시절부터 고독과 우울의 연금술을 보여주었으니 그러한 자신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인은 ‘기억의 부력’을 이야기한다. ‘기억의 부력’이라는 말은 예전 시집 머리말에 썼던 ‘흔적의 기록’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흔적이 잊히지 않고 기록되듯이 기억도 사라지지 않고 부력에 의해 떠오르게 되니 그것 또한 영원히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일상의 삶은 무료해서 오랜 낮잠으로 얼굴은 부어오르고 창밖에는 낡은 스쿠터가 소음을 남기고 지나간 지 오래다. 그 외에는 아무 소리도 동요도 없는 무료한 저녁에 고요가 긴장을 자극한다. 무슨 일이 있을 것 같은 불안감을 안겨준다. 때는 봄이어서 “목련의 실핏줄이 아프게 터지는 계절”이다. 진달래나 철쭉 같으면 붉은 실핏줄이 보일 만한데 시인은 유백색 목련에서도 아픈 실핏줄을 볼 정도도 아픔에 예민하다. 시인의 자의식은 슬픔과 아픔 쪽으로 기울어 있다. 이제 감상적 정동을 자제하고 냉정하게 과거의 기억을 반추해야 할 시간이다. 그럴 때 외로움이 밀려오는데 그 외로움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의해 내면의 강도와 차후의 향방이 결정된다.
시인은 과거의 기억을 단단히 다스리며 밥 먹는 장면을 노래로 바꾸어 표현한다. 고독의 강인함을 절대의 차원으로 전환하여 정신의 영역으로 승화하려는 태도다. “혼자 밥 먹는 사람”과 “혼자 노래하는 사람”의 정황적 간격 사이에 이 시의 진실이 있다. 밥 먹는 것은 일상의 일이지만 노래하는 것은 감흥의 창조 작업이다. 시인은 고독이 지탱하는 정신의 강도를 일상의 국면에서 창조의 지평으로 전환하려 한다. 그러한 정신의 작동이 이 마지막 시행에 투영되어 있다. 여기서 벌어지는 정신의 행로가 하염없이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에 매듭을 부여한다. 이 매듭은 세상에 대한 냉소와 연민이 부질없음을 깨닫게 한다. 그 이외의 감정으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 깨우친다. 혼자의 시간에서 힘을 얻어 세상의 소리를 경청하고 타자를 포옹하는 공동체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것은 경청의 감각을 타자에게로 확장하는 일”(이경수)이다. ‘홀로’의 자리에서 ‘경청’의 감각을 익힐 때 ‘홀로’는 힘을 얻는다. 홀로 밥 먹은 것이 강해 보이고 홀로 노래하는 것이 당당해 보일 때 하염없이 흐르는 시간의 누적은 누를 수 없는 부력으로 떠오른다. 바로 그 기억의 부력으로 시인은 시를 쓰고 사람들은 그 시에서 기억의 흔적을 찾아내 공감을 얻는다. 이것이 바로 정신과 정신이 교류하는 공동체의 현상학적 마당이다. 무한한 사유와 막강한 상상력에 힘입어 창조의 언어가 작동한다. 그 작동의 견고한 메커니즘을 강연호의 시집에서 새롭게 깨닫는다.추천 콘텐츠
1 시인 허연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시작은 이 문장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엔 늘 나만 있어서 이토록 아찔하다.” 시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의 마지막 문장이다. 가끔씩 누군가 나 대신 죽지 않을 것이라는 걸. 나 대신 지하도를 건너지도 않고, 대학 병원 복도를 서성이지도 않고, 잡지를 뒤적이지도 않을 것이라는 걸. 그 사실이 겨울날 새벽보다도 시원한 순간이 있다. 직립 이후 중력과 싸워온 나에게 남겨진 고독이라는 거. 그게 정말 다행인 순간이 있다. 살을 섞었다는 말처럼 어리숙한 거짓말은 없다. 그건 섞이지 않는다.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 다시 밖으로 나갈 자다. 세찬 빗줄기가 무엇 하나 비켜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남겨 놓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 비가 나에게 말 한마디 건넨 적이 있었던가. 나를 용서한 적이 있었던가.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엔 늘 나만 있어서 이토록 아찔하다. -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나쁜 소년이 서 있다』) 부분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세계사, 1995) 이후 13년 만에 선보인 두 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민음사, 2008)에 담긴 시. 이 시를 허연의 대표작이라 이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또 허연의 오랜 독자인 내가 가장 애정하는 작품으로 첫손에 꼽기도 다소 애매하다. 그렇지만 언제부턴가 허연의 시를 음미할 때면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엔 늘 나만 있어서 이토록 아찔하다.” 하는 문장과 함께 이 시가 자연스레 겹쳐진다. ‘나’ 자신에 대한, 지나온 삶에 대한 몹시도 내밀한 사색이 서린 때문일까.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는 어떤 면에서 그 자체로 시인의 시론 같다. 처음 나는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을 수도 있다. 혼자란 어째서 “시원한” 것인지, 고독이란 어째서 “다행인” 것인지. 스무 살 무렵 시인의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를 탐독하며 그랬던 것처럼, 끝내 명징해지지 않는 문제들 앞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시에 그 낯선 매혹에 속수무책 빠져들었을 수도. 혼자라는 건 어떤 것일까. 그것은 얼마큼 오롯한 것일까.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엔 늘 나만 있어서 이토록 아찔하다.” 곱씹다 보면 지독한 고독이 자아내는 맹렬함, 아득함, 서늘함 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들곤 했다. 지금에 와서 보자면 이는 인생에 대한 직시에 가까운 것이다. 결국 ‘나’는 세상의 무엇도, 누구도 아닌 ‘나’이므로. 이 하나만이 살아 있는 우리가 확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진실이므로. 아울러 이는 자신의 방향에 대한 시인의 선언이자 시인 스스로 아로새긴 다짐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후 세 권의 특기할 만한 시집을 통과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매서운 선언과 다짐은 유효한 듯하다. “세상엔 늘 나만 있”는 자에게 ‘나’는 곧 세계다. 존재만으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셈. ‘나’로써 세계는 이미 완전하다. 더 이상 뭐가 필요할까. 물론, 이는 철저한 고독을 의미한다. 홀로 동떨어진 상태. 누구 하나 자신과 같은 존재가 없다는 것. “비뚤어진 세계관”조차 “나누어 가질 그대”는 오지 않는다는 것. ‘그대’는 어째서 감감무소식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빛을 피해서 한없이” 걸어간다(「나는 빛을 피해 걸어간다」). 밖으로, 더 밖으로. 이로써 허연의 화자들은 일반의 세상으로부터 어느 정도 괴리된 상태에 있다. ‘안’이 아니라 ‘밖’에 위치한다는 것. 얼핏 안에 있는 듯 보여도 실상 밖을 산다는 것. 언제든 밖으로 달려나갈 채비를 한다는 것.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점은, 그것이 수동이 아니라 능동의 형태를 띤다는 사실이다. 엄연히 스스로가 채택한 삶의 방식이라는 것.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에서 고백하듯, 끊임없이 “중력과 싸워온”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허연의 고독은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군 것으로 보는 편이 옳다. 이 고독은 지금껏 허연의 시적 자양이 되었으리라. 묵은 고독은 때때로 섬세한 내면을 짓누르는 병인(病因)이기도 했겠으나, 그럼에도 다름 아닌 고독으로 인해 계속해서 쓸 수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2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은연히 분리시키고자 하는 태도. 안에 있지만 밖을 살아간다는 인식은 허연의 레테르라 할 수 있는 ‘소년(성)’과도 유관하다. 허연의 소년은 흔히 말하는 비성년의 아슬아슬 들끓는 에너지, 그 이상의 무엇을 담지하고 있다.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은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 「나쁜 소년이 서 있다」(『나쁜 소년이 서 있다』) 부분 이 시의 마지막 부분 역시 앞선 시에서 언급한 문장과 함께 시인의 선언으로 읽어도 좋겠다.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세속에 몸을 담글지라도 종내 슬그머니 한 발을 빼는 태도. 섞이지 않는 푸른빛. 그러나 그 빛, 즉 허연의 소년은 주로 현재가 아닌 과거로, 기억으로 현현한다.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기억을 지금까지 투철히 간직하는 것으로 “무슨 넥타이 부대”와 같은 일상의 그렇고 그런 권태로부터 스스로를 구해내는 것이다. 근작 시집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문학과지성사, 2020) 발문에 인용된 시인의 발화를 끌어오자면 이렇다. “어느 날부터 나이 먹고 뻔해지는 게 싫더라고…… 사회가 원하는 딱 들어맞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고…… ‘정리된 착함’ 이런 게 싫었고…… 하지만 사실 나는 착하고 싶었어…… 기름기 없는 착한 소년으로, 권력에 어울리고 그것을 잘 지키는 점잖은 어른이 아닌…… 철 안 든 푸른 유리 조각 같은…… 누군가가 주머니에 집어넣으려고 하면 그 사람의 살을 찌르는……” “철 안 든 푸른 유리 조각”, 즉 허연이 간직한 소년이란 일종의 반골 기질 같은 것으로 읽히기 쉽겠지만, 이는 생래적인 것이라기보다 후천적으로 체득한, 단련한 삶의 자세로 보는 편이 적절할 듯하다. 사실은 착하고 싶었던, 여리고 외로운 한 존재가 자신을 지키고자 발악하듯 꺼내 든 유리 조각. 그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스스로 “나쁜 소년”이 되기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마치 자신의 ‘공화국’을 스스로 설계하고 거기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해 나가듯이. 시인에게 이는 그저 “사과를 베어 무는 것” 만큼이나 예사로웠을지도. 소년은 어째서 나쁜 소년이 되었을까. 시인 스스로가 규정한 “나쁜”이라는 말 속에는 모종의 자책, 죄책감이 스며있는 것도 같다. 이에 대해서는 그간 시인이 여러 글과 인터뷰 등을 통해 밝힌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어린 시절 집안의 오랜 기대를 배반하고 신부(神父)가 되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이야기. (단편적인 사실로써 한 시인의 내력을 모조리 파악할 수야 없겠지만, 시인의 탄생을 둘러싼 이런 식의 극적인 비화는 언제나 흥미롭다.) 이후 자연히 생겨난 죄의식, 그리고 낙망이나 허무 같은 복잡다단한 감정이 어린 소년의 근간을 뒤흔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흰 말뚝을 찾아냈지만 / 화살표도 숫자도 / 모두 지워져 있었습니다 / 말뚝을 탓하진 않았습니다 / (원래 길은 없었으니까요)”(「희망」)와 같은 부정의식은 자연스레 배양된 것이 아닐까. 세상의 통념으로부터 비켜서고자 한, 고독한, 나쁜, 소년. 결과적으로 일상의 권태에 휩쓸리지 않기 위한 삶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허연의 소년은 ‘시’와 동의어이기도 하다. 「구내식당」과 같은 작품이 이를 선명히 부연한다. “지하 5층 구내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다 / 그렇게 시를 지킨다 우리 나이엔 근육량을 늘려야 한다느니 저금리 시대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느니 이번 인사가 어땠고 누구 줄을 타야 한다느니…… // 이런 소식에서 멀어지기 위해 / 나를 소식에서 떼어놓기 위해 나는 오늘도 구내식당에서 / 혼자 밥을 먹는다”. 시를 지키기 위해 굳이 “구내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 중년의 사내라니. 다른 무엇도 아닌 ‘시’를 위해 말이다. 3 허연의 푸른색은 여전히 그를 소년이게 하고 시인이게 하고, 뒷골목을 헤매게 하는 것. 그렇다면 그 푸른색을 지속하고 추동하는 힘은 무엇일까. 아마도 ‘사랑’이 아닐까. 사랑이란 세상의 셈법과는 어긋난 일. 세상의 셈법으로 보자면 지극히 비합리적이고 비생산적인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 스스로 마음의 약자 되기를 자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일상의 권태와 대척점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허연에게 사랑은 유의미한 동력임에 분명하다. 때때로 사랑은 그로 하여금 고독을 견딜 수 있도록 하는 방책으로 기능하기도 하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고독을 불식하기는커녕 고독의 기미를 더욱 북돋는 데 이바지한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같은 지점에서 사랑은 본연의 힘을 발휘하는 것. “마음이 가난한 자는 소년으로 살고, 늘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다”. 「오십 미터」를 보자. 이는 사랑에 대한 시인의 가장 정직한 고백 같다. “그리워하는 병”의 중증으로 인해 채 오십 미터도 걸어갈 수 없다고 쓴, 절절한 사랑의 열병이 깃든 시. “정지 화면처럼 서서 그대를 그리워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십 미터를 넘어서기가 수행보다 버거운 그런 날이 계속된다. (……) 잊고 싶었지만 그립지 않은 날은 없었다.” 말하자면 사랑이 가장 극에 달한 순간, 지금은 이별 후다. 펄펄 끓는 그리움을 온몸으로 앓는 때이며, 이 어찌할 수 없는 병의 증상이 바로 허연 시의 중추를 이룬다. 이는 얼핏 낭만적 정취로 비칠지 모르겠으나 실상 그런 것만은 아닌 듯하다. 언젠가 그 열기가 걷히고 나면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게 되므로. “때가 되면 바위채송화 가득 피어 있는 길에서 너를 놓고 싶다”라는 마음과는 별개로, “그리워하는 병”의 고통이 사그라지면 사랑은 사랑으로서의 기능과 효력을 상실하고 만다. 그것은 허연이 그토록 경계하는 일상의 권태와 양상이 다르지 않기 때문. “이대로 죽어도 좋았던 / 그 시절”이 지나면 “저 강물 속에서 / 당신을 구별해낼 수” 없는 것(「상수동」)과 같이. 그러므로 허연에게 사랑은 애당초 실패를 전제로 한다. 예정된 실패. 예정된 이별. 빼다 박은 아이 따위 꿈꾸지 않기. 소식에 놀라지 않기. 어쨌든 거룩해지지 않기. 상대의 문장 속에서 죽지 않기.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는 연습을 하자. 언제 커피 한잔 하자는 말처럼 쉽고 편하게, 그리고 불타오르지 않기. (……) 중독되면 누가 더 오래 살까? 이런 거 걱정해야 하잖아. 뻔해, 우리보다 융자받은 집이 더 오래 남을 텐데. -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부분 사랑의 끝에는 그토록 몸서리치는 권태와 무료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다. 건강을 살피고 주택 융자를 걱정하는 따위의 평범한, 혹은 끔찍한 생활의 일면들. 시간의 조류에 쓸려 “그저 가끔씩 끔찍하고, 아주 자주 평범”한 ‘생(生)’(『오십 미터』 시인의 말)은 소년의 푸른빛과 얼마나 먼 것인지. 그러므로 사랑하되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이 지나친 나머지 생활과 한데 뒤엉키는 것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그는, 그의 화자들은 적정한 정도로 사랑의 감각을 다스리고자 한다. “사랑해. 그렇지만 / 불타는 자동차에서는 내리기.” 하고 다짐하는 이 순간의 강렬한 열기만이 사랑으로 기억된다. 활활한 사랑의 기억은 이따금 반복 재생되며 푸른빛을 한층 선연하게 만든다. 문예지 발표 당시 이 시의 제목은 ‘불타는 드라이브’였다. 하지만 이후 제목은 바뀌었고, 그렇듯 ‘드라이브’는 결코 불타지 않았을 것이다. 덧붙이자면, 허연에게 사랑은 철저히 그 자신의 것이다. ‘너’가 아닌 ‘나’의 것. 나만의 것. 때문인지, 사랑의 대상은 좀체 드러나지 않는다. 잔영으로 남거나 아니면 철저히 소거된 채다. 그리움의 얼굴조차 불분명하다. “죽었다 살았다 하는 깜박이는 보안등 아래에서 얼굴 반쪽이 있다가 없기를 반복”할 뿐, ‘나’는 끝내 “너를 영원히 알 수 없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아직 얼마간 사랑의 열기를 머금은 ‘이별’ 자체만이 “선한 의식”으로 기록된다(「이별은 선한 의식이다」). 이별의 의식으로부터 멀어진 후라면 더더욱. 사랑의 대상이었던 ‘너’는 “재잘거리는 소녀들 사이에서 / 언뜻” 떠올랐다 사라지기도 하지만 금세 “먼지처럼 가라앉”는 것. “시체 공시소에나 있을 / 무연고 시신처럼 / 어떤 기념도 되지 않았다” 하고 정리된다(「항구」). 이 같은 시인의 시선은 비정한 것 같기도, 지극히 천진한 것 같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 허연 식의 사랑은 조금 고약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지. 허연의 세계를 곧추세우는 ‘혼자’가 얼마나 완고한지를. “살을 섞었다는 말처럼 어리숙한 거짓말은 없다. 그건 섞이지 않는다.”(「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 하는 엄숙한 표명을. 다시 말하지만, 허연의 세계는 ‘나’로써 이미 완전하다. 무엇도, 누구도 ‘나’와 “비뚤어진 세계관”을 “나누어 가질”(「나는 빛을 피해 걸어간다」) 수 없다. 스스로 이룩한 완전한, 고독한 세계에서…… 그러나 그는 수시로 다툴 것이다. 모진 쓸쓸함을 견디지 못해 몸부림칠 것이다. 뒷골목을 헤매고 사람을 찾고 사랑을 나눌 것이다. 나눈다,라는 헛된 말에 잠시 기대어 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지금 권태로운 일상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순간 또다시 모든 것을 뒤로하고 ‘밖’으로 뛰쳐나갈 것이다. 정주와 탈주를 반복하며 빚는 내적 긴장 속에서 그의 세상은, 시는 “아찔하게” 이어질 것이다. 그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는 자다」)에서 허연은 한결같이 쓸쓸할 것이다. 끝내 완전할 것이다.
동화(同化)와 견딤, 재현 불가능한 ‘자연미’를 드러내는 두 방식 - 서정화 시집, 『3D 렌티큘러』, 천년의시작, 2024. - 임경숙 시집, 『가시 많은 생이 맛있다』, 천년의시작, 2024. 기혁 서정화의 『3D 렌티큘러』와 임경숙의 『가시 많은 생이 맛있다』를 읽고 ‘서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시의 본령’ 혹은 학술적으로 합의된 개념이라기보다 정서적 느낌에 가까울 것이다. 난해한 실험성, 자폐적 세계 인식에 따른 파편화와 산문화 경향의 반대편에 선 작품을 언급하기 위해선 진정성과 소통 가능성, 최소한의 리듬감 등을 동시에 충족하는 ‘가정된 일관성’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실험성이 강한 작품의 경우 그 형식에서 첨단의 사회성을 도출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는 반면, ‘서정시’ 혹은 ‘정통 서정시’ 등으로 분류된 작품은 대체로 형식보다 내용을 우선시함으로써 인간(자연)의 본성이나 보편성 등 원론적인 문제를 다룬다. 이는 형식과 내용, 형식과 사회의 불화를 해소된 것으로 간주하는 서정시의 독법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로 인해 개인적 경험과 감상에 머무른다거나, ‘지금, 여기’의 현실과는 거리감을 유지하는 시풍으로 인식되는 경향도 없지 않다. 다만 서정성이 강조된 작품이라 하더라도 내부적으론 ‘가정된 일관성’의 이탈과 유지가 반복적으로 교차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새로운 시적 형식이나 긴장감 있는 표현에 대한 도전 의식이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곧바로 비루한 삶의 슬픔이나 고통의 진정성만을 읽어 낸다면 서정성의 범위 내에서 작동하는 새로운 시도마저 평면화할 우려가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전통 장르인 시조의 형식을 갖춘 서정화의 『3D 렌티큘러』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여는 시로 배치된 「천수암 인생네컷」은 시집의 서문 격으로 ‘자연’이 상실된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접근하고자 하는지 전반적인 의도가 드러난다. 형형색색 태어나는 행리단길 간판들 영원 같은 전경으로 변하고 있을 전생 천 개의 보이지 않는 거룩한 눈 움직이는 손, 전망은 어딘지 신점 같은 면이 있지 문턱 낮은 입구로 통과하는 호기심들 이음매 빠진 시간 앞 네 개의 컷 네게로의 컷, 어둠의 눈 감기 위해 빛의 눈을 떠야 하는 운명도 바꿔 놓을 이미지로 변환하니 이상의 무한을 열어 환해지는 다른 세계 환생한 천수관음보살 수행같이 넓어지는 행렬과 행간 사이 세상과 말을 걸며 압축된 암호를 풀고 나를 올려놓는다 - 「천수암 인생네컷」 전문 인용한 시편의 1수 초장의 “행리단길”에는 ‘수원 행궁동은 점집 타운이었으나 점집이 나간 자리에 다양한 가게들이 입점되었다’는 각주가 붙어 있다. 신과 소통하던 무당이 사라진 자리에 상업적 논리에 따라 존립이 결정되는 ‘맛집’ 등이 들어섰을 저녁 풍경은 시의 창작 동기이자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의 풍경이기도 하다. 사설 조로 늘인 1수 중장에서 시인은 “행리단길”의 “전생”이라 할 수 있는 ‘점집 타운’의 풍경을 겹쳐 봄으로써 “형형색색”인 “간판”의 불빛과 사이사이의 어둠 너머로 “천수관음보살”의 “천 개의 보이지 않는 거룩한 눈”과 “움직이는 손”을 떠올린다. 과거세(過去世) 중생을 구원하던 “천수관음보살”은 신이자 범접할 수 없는 ‘자연’의 일부로서 과거 ‘점집 타운’의 무당을 매개로 공존할 수 있었으나, “인생네컷”을 찍는 방문객들의 “호기심” 앞에선 한낮 미신으로 간주될 뿐이다. ‘자연’에 동화될 수 있었던 마지막 매개체(“이음매”)인 무당이 사라진 시공간 속에서 본성의 박탈과 은폐를 인지하지 못한 계몽된 주체는 통제된 사회가 요구하는 “네 개의 컷”에 맞춰 동일한 셀카를 찍는다. 동시에 구속의 결과물인 “이미지”를 공유하고 재생산함으로써 모든 행위가 자신에게 되돌아오는(“네게로의 컷”) 순환 구조에 갇히고 만다. 여기서 시인은 문명을 비판하거나 도래하지 않는 과거를 추억하는 대신 모호한 전언을 남긴다. 1수 중장의 마지막 문장인 “어둠의 눈 감기 위해 빛의 눈을 떠야 하는 운명도 바꿔 놓을 이미지로 변환하니”에서 시인은 구속의 산물인 ‘셀카’(“이미지”)가 사실상 어둠과 빛의 예술인 사진 작품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점을 상기한다. “행리단길”의 야경 “이미지”에서 과거의 ‘점집 타운’과 “천수관음보살”을 겹쳐 보는 시적 화자(예술가)의 응시는 “이미지” 자체에서 도래한 것이 아니라 계몽 사회에 대한 반성적 태도로 인해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도르노가 언급한 바와 같이, 재현 불가능한 자연의 존재 방식인 ‘자연미’는 예술 작품 속에서 계몽에 대한 반성적 태도를 불러일으키면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자연을 모사한 사진은 그저 사진일 뿐 진정한 ‘자연미’를 담지 못한다. 바꿔 말하면 비록 ‘셀카’라 할지라도 어떻게 향유되느냐에 따라 부여할 만한 가치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천수관음보살”을 떠올리면서 시작된 시적 화자의 자각은 ‘숭고’로 이어진다. “천수관음보살”의 숭고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능력을 보여 주어서가 아니라 그러한 능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인간 스스로 “운명도 바꿔 놓을” 수 있도록 지배권을 내려놓음으로써 발현되는 것이다. 과거세 중생을 구원하는 “천수관음보살”이 미래 어느 시점에서 ‘지금, 여기’를 바라본다면, 구원이란 “이미지”에 의해 자신(의 자연)을 구속할 운명에 놓인 계몽된 주체가 “운명도 바꿔 놓을 이미지로 변환”할 수 있도록 방법을 일깨우는 일과 다르지 않다. 1수 종장의 “이상의 무한을 열어 환해지는 다른 세계”는 앞서 언급한 아도르노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것으로서, 가닿을 수 없는 ‘자연’과 계몽적 주체의 화해가 인공물인 예술 작품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기대와 믿음이 반영된 가상의 영역이다. 이어지는 2수에서 시인은 별다른 부연 없이 3장 전체를 할애해 예술가로서의 각오를 드러내고 있는데 1수에서 전개한 자각의 과정과 호응 관계를 이루려는 의도로 짐작된다. 예술가의 작업이란 결국 “행렬과 행간 사이” 침묵뿐인 “세상”(자연)과의 대화이며 자연의 “압축된 암호”(‘자연미’)는 작두를 탄 무당이 그러하듯 이성과 논리가 아닌 “나를 올려놓”고 대상과 동화됨으로써만 해독의 여지를 갖는다. 말도 되지 않는 말과 함께 언어의 들판을 횡단하면서 시 속에 한참 빠져 말무리 가까이에서 꿈을 꾸었다. 그러나 나의 시는 서툰 말만큼 아직도 미숙한 것임을 깨달았다. 끝없이 펼쳐진 언어의 광야, 그 속에서 말과 시를 구분할 때까지 한 그루 나무가 되고 싶었다. 언어의 뿌리를 내려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말의 나무. 그렇다. 나무의 무덤이 되길 바랐는지도 - 「시인의 말」 부분 하지만 시가 문자를 통해 ‘자연미’를 드러낼 수 있다는 기대와 믿음의 소산이라면 가상의 문제가 발생한다. ‘셀카’가 예술 사진으로 향유될 수 있는 가상의 영역에서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인용한 「시인의 말」에서 드러나듯이 문명 이전과 같은 완전한 동화는 “꿈”에서만 가능하다. 도구화된 일상어를 사용하는 한 “말과 시”를 구분해 내는 일조차 쉽지 않다. “나무가 되고 싶”다는 시인의 바람은 실패를 향한 수많은 시도 속에 잠재된 가능성이므로, “말의 나무” 역시 가상이 현실로 육박할 때의 ‘마법’처럼 휘발하면서 존재할 뿐이다. 그러한 마법의 무대 뒤편에는 무수한 실패로 쌓아 올린 “나무의 무덤”이 버티고 있다. 무력감에 빠질 법도 하지만 시인은 가상과 현실의 괴리를 은폐하는 대신 창작의 과정에 의미를 부여해 “무덤이 되길 바랐는지도” 모른다고 고백한다. 실제로 시집을 살펴보면 ‘불가능한 가능성’에 운명을 내맡긴 자의 허무는 보이지 않는다. AI, 생체공학 등 문명의 발달에 따른 상실된 인간 본성을 다루거나, 자연이 부재한 세계를 채우고 있는 남겨진 존재에 대한 여러 감정을 노출하며 현실을 직시한다. 표제작인 「3D 렌티큘러」를 비롯해 「수상한 푸드 스타일리스트」 「호모 라보란스 칸탄스」 「날아가는 침대처럼」 「Butter Book」 「영화 경로당」 「봄날」 등 시조 장르에서 익숙한 소재와 낯선 소재가 혼재되어 있다. 또한 텍스트의 자리에 특정 기호를 콜라주(collage) 하거나(「휴지통」), 여백의 구분을 회화적으로 활용하는(「평화 인쇄사」) 실험적인 형식도 눈에 띈다. 소재가 혼재된 만큼 다양한 어투를 구사하는데 과도한 비판이나 냉소, 관조나 회상에 스며드는 ‘잠언투’ 등은 절제되어 있다. 형식적인 면에선 대체로 시조의 3장 중 중장을 변형한 사설시조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통념상의 시조 장르와 달리 당사자로부터 한 발짝 떨어진 듯한 인상을 준다. 그렇다면 현실과 가상의 괴리에 대한 시인의 대응은 무엇일까? 열거한 특징에도 불구하고 개별 작품의 면면은 ‘서정성’의 범위 내에 있다. 정형시의 제약과 종장의 묘미를 살리는 시상 전개의 관습 등도 유지된다. 실험적인 작품에서조차 시조의 3장 형식은 흐트러지지 않는다. 이는 장르적 이탈이나 의도적인 실험이 ‘자연미’를 환기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 아니라는 인식을 내비친다. 중요한 것은 형식을 유지하거나 이탈하려는 예술적 행위가 인과적 논리를 언급할 만큼 경직될 때 계몽의 산물로 추락한다는 점이다. 현실과 가상의 괴리 앞에서 시인이 주목한 것이 바로 이 예술적 형식이다. 유리 벽에 안과 밖이 부풀어 올랐어요 눈부신 디테일의 볼륨은 투명해져요 세 개의 면이 돌출되는 입체감과 공간 사이 무한의 차원이 되어 새로운 길이 나더군요 보이는 세계와 불투명한 세계를 오가는 사이 루프탑이 솟아나고 시간은 파란색에서 초록색으로 편의점 간판처럼 변해 가도 노랗게 내 마음의 풍경은 은행나무가 되어 기다렸어요 투명 인간이 불투명한 인간들을 말하네요 재배열되는 건물 앞 피켓 들고 울분을 띠로 두른 사람들 농 성 사이 의문의 시간 뒤에 미래를 여는 이유를 416 생명안전공원은 노란 리본을 수놓았어요 사라진 그 아이들이 굳어 가는 걸 보았어요 청록색 밤의 감정이 착시를 일으켜요 거대한 벽의 사막처럼 추인되지 않는 일들 바다를 증명하려던 불투명한 그 세계가 위험에 노출되지 않게 회멸이 되지 않도록 오늘의 뒷면과 앞면을 이제 당신이 이어 주세요 - 「3D 렌티큘러」 전문 주로 장난감이나 각종 카드, 케이스의 장식으로 사용되는 “3D 렌티큘러”는 빛의 각도에 따라서 서로 다른 그림을 보여 준다. 예를 들어, 앉아 있는 사자의 모습이 정면이라면 보는 각도에 따라 포효하는 모습으로 변함으로써 평면 위에 입체감을 주게 된다. 그런데 “렌티큘러”의 작동 원리1)는 동굴벽화에서 발견될 만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벽화를 그리고 신을 호출하던 주술사(예술가)에게 “렌티큘러”의 원리는 눈속임이 아니라 ‘자연’에 동화되어 자연물의 영혼을 있는 그대로 옮기는 신성한 작업 중 하나였을 것이다. ‘자연미’를 재현하고자 하는 모든 예술가에게 그러한 작업은 이상적인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현대 예술가가 처한 상황은 녹록지 않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현대 예술가의 “3D 렌티큘러”는 실재로부터 소외되어 더 뛰어난 눈속임으로 전락할 운명에 놓인다. 앞서 열거한 “렌티큘러”의 쓰임새가 말해 주듯이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작은 유희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주술사의 작업 방식을 단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예술 형식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리 벽에 안과 밖이 부풀어” 오르고 “3D 렌티큘러”가 작동하는 순간만큼은 고대 주술사가 그러했듯 “세 개의 면이 돌출되는 입체감과 공간 사이 무한의 차원이 되어 새로운 길이 나”는 ‘마술’을 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인에게 그것은 종이에 적힌 시조가 입체의 ‘자연미’를 드러내는 순간과 겹친다. 천(天)·지(地)·인(人) 3장의 기본 형식은 ‘자연미’를 재현해 본 기억이 잠재된 형식이다. 비록 근대 이후 재발견된 ‘전통’으로서 ‘자연’과의 화해를 가정할 뿐이라고 해도, 고대 주술사가 그러하듯 진실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눈속임으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동화(同化)를 위한 움직임이다. “보이는 세계와 불투명한 세계를 오가”는 동화의 움직임이 없다면 제아무리 훌륭한 “렌티큘러”라 해도 입체를 보여 주지 못한다. “노랗게 내 마음의 풍경은 은행나무가 되어 기다렸”다는 기대와 믿음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고개를 돌려 가며 “투명 인간이 불투명한 인간들을 말”하는 현실의 이면을 함께 보아야만 한다. “재배열되는 건물 앞 피켓 들고 울분을 띠로 두른 사람들 농성 사이”에서 시선의 각도를 달리할 때 “의문의 시간 뒤에 미래를 여는 이유”를 물으며 비로소 ‘자연미’가 모습을 드러낸다. 일상의 시인은 세월호 희생자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겹쳐 봄으로써 계몽된 세계의 명령(‘조난 시 안내 방송에 따라 행동하라!’)이 ‘자연’을 정복하지도 인간을 구원하지도 못했던 사건을 상기한다. 수로의 특성을 분석하고, 침몰의 원인을 찾고, 재발 방지를 위한 기술을 모색하는 가운데 “의문(계몽)의 시간”은 모든 사고의 책임을 ‘자연’에 전가한다. 하지만 “청록색 밤의 감정이 착시를 일으”키게 할 뿐 “바다”도 희생된 아이들의 ‘자연’도 “증명”하지 못한다. 시인에게 ‘자연’과 계몽의 불화는 “거대한 벽의 사막처럼 추인되지 않는 일들”이므로, ‘자연미’ 역시 “불투명”하게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쯤에서 우리는 가상과 현실의 괴리에 대한 앞선 질문을 곱씹어 볼 수 있다. 시가 언어를 통해 ‘자연미’를 드러낼 수 있다는 시인의 기대와 믿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3장 형식의 훌륭한 “3D 렌티큘러” 장치를 지닌 것도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시인의 역할은 ‘불가능한 가능성’에 운명을 내맡기는 것도, ‘형식’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실험 정신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불투명한 그 세계가 위험에 노출되지 않게” 위장된 화해를 경계하는 데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자연’은 “바다”가 불타 버리듯 이내 성질을 뒤바꾸고 “회멸” 되어 버린다. 엄밀히 말해 시인은 현실과 “3D 렌티큘러”의 가상이 서로를 훼손하지 않고 공존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동화를 꿈꾼다. n개로 분절된 세계의 모습과 입체 사이에 위치하는 볼록렌즈처럼 “오늘의 뒷면(과거)과 앞면(미래)을” 조율하고 매개함으로써 계몽된 주체의 자발적인 동참을 호소하는 것이다. 모조품으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 “아르고스처럼 백 개의 눈을”(「수상한 푸드 스타일리스트」) 뜨고 “늦은 봄, 개의 목줄은(이) 아직도 팽팽”(「봄날」)해지는 이유를 찾는다면 그것은 곧 괴물이 되어 버린 계몽의 능력을 온전한 인간의 시선으로 되돌리려는 시도일 것이다. “백 개의 눈”으로 걸러 낸 생의 이유를 벼르고 별러 다시금 이유로 남겨 두려는 응시. 이것이 바로 서정화의 ‘서정’이자 동일자들의 세계에서 비동일자로서의 시인에게 주어진 동화의 임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살펴볼 임경숙의 시집 『가시 많은 생이 맛있다』는 별다른 부연이 필요 없을 만큼 삶의 진정성을 개진한 흔적이 역력하다. 연과 행의 구분에서도 낭독을 염두에 둔 듯 자연스럽다. 이것은 작품의 소통 가능성을 중요시한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시적 대상에 대한 책임 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고추전 골목”의 “가교리 언니”와 “태봉 할매”(「봄의 좌판」), “한낮에도 셔터가 내려진 문구점 신발 가게 옷 가게 레코드 가게”(「중동 골목 147」), “베트남 여인, 예쁜이 린이”(「공심채」), ‘공곶이 수목원’을 처음 일군 “아흔두 살 사내”(「공곶이 수선화」), 포로수용소의 “아버지”(「1953년 거제도」) 등등 구체화된 인물과 배경엔 아픈 전사(前事)가 깃들어 있다. 낡고 손때가 탄 사진첩을 꺼내듯 사연을 적어 내는 시인에게 그것은 단순한 소재 이상의 무게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산을 끼고 도는 북쪽은 응달이었다 산그림자에 가려져 햇살 한 점 간절하지만 바닥은 늘 보이지 않는 블랙 아이스가 깔려 있다 길은 좁아서 한번 접어들면 되돌아 나갈 수 없어 모든 그림자는 강물 쪽으로 기운다 위태로운 바퀴는 자주 경계선을 넘었다 어미는 아이 하나에 희망의 심지를 돋워 떨리는 손으로 등불을 켰지만 바람 잘 날 없는 그 방에선 자주 불을 꺼뜨렸다 길 없는 길로 접어든 순간부터 운전대는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가끔은 급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 날에는 가늘어진 손목에 과부하가 걸려서 떨리기도 했다 한동안 밖으로 폭주하던 아이가 이제는 골방으로 들어가 성장통이 끝난 저를 잠가 두고 어미의 언어를 냉동고에 넣었다 어미는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시린 손을 비빈다 - 「결빙 구간」 전문 인용한 시편 역시 불우한 환경을 살아온 모자(母子)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블랙 아이스”가 깔린 아슬아슬한 삶의 현장에서 시적 화자가 기댈 곳은 없다. “아이 하나에 희망”을 걸고 견뎌 보지만 “길 없는 길”처럼 막막한 일상은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브레이크”를 잡은 만큼 “아이”는 “밖으로 폭주”하다 마침내 자신을 “골방”에 가둬 버린다. 그토록 피하고자 애쓰던 “블랙 아이스”의 냉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어미의 언어”를 얼리고 “성장통이 끝난” 다 큰 “아이”의 마음까지 얼려 “어미의 언어를 냉동고에 넣”게 만든다.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시린 손을 비”비는 “어미”의 모습은 시린 손이 서러운 “어미”의 모습으로도, 참회의 합장을 대신한 것으로도 읽힐 수 있다. 그런데 ‘서정시’로서 손색이 없는 이 작품은 ‘시 쓰기’의 여정과도 겹쳐 읽을 수 있다. 시적 대상에 대한 책임 의식을 지닌 시인에게 시 쓰기란 “결빙 구간”을 지니듯 조심스럽고 “한번 접어들면 되돌아 나갈 수 없”는 성질일 테다. 착상 이후엔 시인의 의지대로 전개되는 듯했으나 물러나 보면 “모든 그림자는(가) 강물 쪽으로 기운” 것처럼 보인다. “강물”의 ‘자연미’와 ‘역사’는 손쉽게 재현되지 않는 것이어서, 형식과 관습의 “경계선을 넘”고 ‘길이 아닌 길’을 찾아 “브레이크를 밟”기도 한다. “그림자에 가려져 햇살 한 점 간절”한 그늘진 현실은 그곳이 어디든 “골방”처럼 주체를 고립시키고, 시인은 자식 같은 작품에 “희망의 심지를 돋워” 작은 “등불”을 “햇살” 삼아 고립된 현실을 견뎌 내고자 한다. 하지만 “브레이크”를 밟는 기교가 능숙해질수록 자판을 치는 “손목”이 상할 뿐 “강물”을 끼고 도는 ‘진실’은 멀어진다. 그렇게 “폭주”와 자폐의 “성장통이 끝난” 작품을 완성했으나 이제는 작품이 시인의 “언어”를 거부하는 난감한 사태가 발생한다. “아이”만을 생각하는 “어미의 언어”조차 그것이 ‘시를 위한 시’가 될 때 생기를 잃고서 “냉동고에” 쌓아 놓은 얼음덩어리가 되고 만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함부로 “문”을 두드리지 않는 시인의 자세에 있다. 시인은 “성장통이 끝난” 청소년을 인격체로서 대하듯이 작품 역시 하나의 ‘자연’으로서 존중한다.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시린 손을 비”비는 시적 화자의 행동은 변명이나 체념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세계의 폭력과 억압에 노출된 자들이 그러하듯 “문”이 열리는 순간을 믿고 견뎌 내는 것이다. 그러한 견딤이 추구하는 바는 언어적 소통이 아니라 삶을 견뎌 낸 자들과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자연미’의 재현을 가리킨다. 그때, 거기가 아니면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데 가장 아름다운 손님이 오실 때에는 만사를 제치고 버선발로 뛰쳐나가야 손이라도 만져 볼 수 있는 한순간 절정이라고 - 「꽃의 초대」 부분 도시에서 세상 소식 물고 오는 박 씨의 차 안이 궁금하다 마땅히 살 물건도 없으면서 외지 사람 쳐다보는 것이 마냥 좋다 …(중략)… 시속 삼십 킬로 이하, 저속의 신작로를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양손 가득 봉지 봉지 들려 있지만 그것이 꼭 필요했던 것인지 가물거린다 …(중략)… 바람 소리만 채우는 빈 밥그릇 몰고 다니는 구산댁 멍구도 낡은 트럭 지나가는 소리를 알아보고 덩달아 괜히 한번 짖어 보는 날이다 - 「노인 보호 지역」 부분 시집 전반에 걸쳐 세련된 도시의 모습보다는 시골 변두리의 풍경과 각종 자연물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인용한 시편들에서 보여지듯이 소재적인 측면을 차치하더라도 어딘지 낡은 시어가 동원되어 있고 시상의 전개에서도 단조로운 느낌을 준다. 그런데 시인이 재현하고자 하는 ‘자연미’는 “그때, 거기가 아니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곳에서 도래한다. 이는 소외되고 상처 입은 자들과 공감할 수 있는 ‘자연미’란 ‘지금, 여기’가 아닌 “그때, 거기”의 풍경에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버선발로 뛰쳐나가야/ 손이라도 만져 볼 수 있는/ 한순간의 절정”처럼 ‘지금, 여기’의 ‘양말’로는 대체 불가능한 공감의 눈높이가 선행되어야만 “손”으로 “꽃”을 만지는 합리적인 사유에서 벗어나 “꽃”이 먼저 “손”을 만지는 ‘한순간의 절정’이라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사물화되어 관리되는 현대 사회에서 계몽과 자연의 화해는 가상이겠지만, 지난날 우리는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난 소비를 할 수 있었다. 인용한 두 번째 시편에 드러나듯이 ‘판매자’와 ‘소비자’의 개념으론 설명할 수 없는 관계 맺기가 가능했고, 이심전심(以心傳心) “외지 사람 쳐다보는 것이 마냥 좋”은 감정을 언어 없이 소통해 본 경험도 있다. 그러한 진심은 “구산댁 멍구”에게까지 전달되는데 ‘자연’의 언어는 “괜히 한번 짖어 보는” 말 없는 개의 외침 속에서 보존되는 것이다. 따라서 비루한 농촌의 풍경이나 소외된 존재의 사연 등은 그것이 번화한 도시로부터 떨어졌기 때문에 ‘자연’의 진실에 가깝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임경숙의 이번 시집에서 그것은 공감의 조건으로 주어진 것이고, 말 없는 개의 외침이 그러하듯 시인은 ‘자연’이 아니라 ‘자연의 말 걸기’를 모방하기 때문이다. 목줄 풀린 “푸들”(‘자연’)이 수풀로 내달리는 대신 “노란 금지선”에 멈춰 선 낯선 풍경처럼(“급하게 누른 경적에도/ 푸들은 소리 나는 방향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노란 금지선에 멈춰 선다”, 「선을 지키다」) “푸들”의 ‘자연’은 우리의 합리성을 넘어서는 영역에서 의도치 않게 ‘자연미’를 드러내곤 한다. 대개의 서정시가 ‘일인칭 자기동일성의 원리’를 기본으로 ‘자연’을 전유해 왔다면, ‘자연미’는 대상을 전유하는 과정에서 뒤따르는 억압과 왜곡을 넘어서는 영역을 가정하는 한에서 재현을 기대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가정된 영역이 어떠한 형태로 표현되든 ‘비동일자’로서의 시선을 동반해야 한다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결빙 구간」의 “어미”와 “아이”의 관계처럼 동일성 내부에 존재하는 비동일성의 특질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시인이 주목하는 ‘가시’는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양립 가능성을 여는 시적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표제작에 해당하는 「가시 많은 생」에서 짐작되듯이 “가시”의 은유는 중의적인 성격을 지닌다. 작품에서 언급되는 생선의 경우 수압에 저항해 몸의 형체를 유지하고 장기를 보호하는 ‘뼈’를 뜻하기도 하고, 요리되거나 타자의 소유물인 상태에선 이물질인 “가시”로 표현되기도 한다. 식물의 경우 보호를 위해 진화한 잎사귀를 떠올릴 때 그것은 본체(本體)의 일부지만, 꽃과 열매만을 취하려는 외부적 입장에선 접근을 방해하는 이체(異體)로 간주 된다. 도마 위에 준치 몇 마리 어머니 칼질 소리가 칼칼하다 검푸른 살 속에 무수히 박힌 가시가 납작하게 혼절해 가는 동안 살이 많은 물고기도 많은데 하필이면 가시투성이를 골랐을까 물속을 헤엄쳐 다닐 때 찔려도 찔린 줄 몰랐던 가시들 썩어도 준치는 찬란한 맛이었다 잔가시마저 촘촘히 다져진 말캉말캉한 준치완자탕 목에 걸리는 게 없이 부드럽다 뜨거운 완자 몇 알 삼키다가 맛있는 생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가시가 박혀야 할까 내가 삼킨 가시는 몇 줌이나 될까 - 「가시 많은 생」 전문 살에 “가시”가 많은 생선인 “준치”는 대체로 “가시”를 발라 요리한다. 그러한 경우 발라낸 “가시”는 쓰레기로 취급된다. 하지만 “어머니 칼질”로 “잔가시마저 촘촘히 다져”지게 되면 버릴 것 없이 “준치”의 “가시”까지 온전하게 맛볼 수 있다. 그런데 “어머니”가 “하필이면 가시투성이를 골”라 “준치완자탕”을 끓인 정확한 이유가 드러나지 않는다. 경제적인 요인이나 음식에 대한 추억 등 추측은 가능하겠지만 선택의 근본적인 이유는 합리성 너머에 위치한다. “어머니”와 “준치” 사이의 비합리성을 공감의 형식으로 재현하려는 시인은 3연에서 “준치”의 본래 모습으로 화제를 전환한다. “물속을 헤엄쳐 다닐 때/ 찔려도 찔린 줄 몰랐던 가시”처럼 “가시”가 ‘뼈’로 인식될 때 “준치”는 크기와 맛으로 규정되는 세계를 벗어난다. 그러한 가상의 영역에서 시인은 생의 잔뼈가 지금처럼 굵지 않았던 “어머니”를 호출하는 것이다. “말캉말캉한 준치완자탕”처럼 “걸리는 게 없이 부드”러웠을 소녀의 ‘자연’과 “준치”의 ‘자연’이 서로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만난다. “하필이면 가시투성이를 골”라 “준치완자탕”을 끓이는 “어머니”의 사연은 언어가 아니라 “어머니 칼질 소리”를 통해서 비로소 전달된다. “찬란한 맛”이란 억압과 고통을 견뎌 낸 자가 자신을 닮은 자식에게 내미는 소통의 시도이고, “맛있”다는 시적 화자의 반응은 그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찬란”했던 ‘자연’을 경험한 자들과의 소통은 형체를 알 수 없게 갈린 “몇 줌”의 “가시”처럼 소멸한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관성적으로 “삼킨” 무수한 “가시”가 실은 뭉개 버린 ‘자연’의 말 걸기가 아니었을까 자문해 본다. 어쩌면 그것은 ‘자연’에 빚진 시의 부채이며, 끊임없이 시를 써야 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시인은 “어머니”와 “준치”가 공존하는 가상을 깨트리는 대신 현실 속 “뜨거운 완자 몇 알”만을 ‘자연’에 대한 시 쓰기로 전유한다. 이를 통해 동일자로서 포섭되지 않은 “어머니”의 ‘자연’은 또 다른 시편(「외면」)에서 다시금 말을 걸 수 있다. “준치완자탕”을 끓여 주던 다정한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는 것도, 병 수발에 지친 딸이 “어머니”처럼 생의 잔뼈가 굵어지는 것도, 그런 딸의 “하소연을 단칼에 베어 내듯/ 누가 그렇게 살랬니?”(「외면」) 매몰차게 대하는 것도 모두 ‘자연’의 말 걸기라고 할 수 있다. 시집 전반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상처 입은 여성과 노인, 삐뚤게 커 버린 청년들,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남편, 가해자이자 역사의 피해자로서 존재하는 아버지까지 이분법적 구도와 진부한 서술 방식, 후반부의 단정적인 감상 등 얼마간의 흠결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서로 다투지 아니하고// 산까치도 먹고/ 고라니도 먹고/ 밭 임자도 먹는”(「공평」) ‘자연미’를 재현하고자 하는 시인의 견딤은 나름의 의미가 있다. 이성과 합리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선 그러한 시작(詩作) 자체가 ‘가시’일 수 있는 것이다. 부족한 식견으로 아도르노의 변증법적 미학에 기대어 서정화의 『3D 렌티큘러』와 임경숙의 『가시 많은 생이 맛있다』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도르노를 경유하게 된 것은 ‘전통’과 ‘자연’에 대한 조지훈의 문장에서 큰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시인이 말한 바와 같이2) 시에 대한 사랑이 생성해 내는 자연이야말로 ‘서정’의 본령이 아닐까 생각한다. 서평에 어울리지 않게 해석에 치중한 것은 ‘서정’에 대한 선입견을 걸러 읽고 싶은 독자로서의 소망임을 고백한다. 한 가지 첨언하자면, 자연에 대한 공포가 고대 주술사로 하여금 미메시스를 통한 극복을 모색하도록 했다는 아도르노의 지적과 더불어 외부에 대한 불안이 추상 충동의 형식으로 나타난다는 주장3)도 인지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고대인뿐 아니라 비이성적인 탄핵 정국에 불안을 느끼는 ‘지금, 여기’의 독자들 역시 예술이 어떤 형식적 미학을 취하는가 하는 문제보다 불안과 공포의 극복을 위해 어떻게 추상과 미메시스를 오가며 ‘운동’했는가가 훨씬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만약 그러한 운동성이 서정의 전통에 잠재되어 있다면 ‘자연미’의 재현이란 존재론적 닮기를 넘어서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전통에 대한 긍정적 전망이 자유를 얻을 때, 우리는 “공기의 방식으로 어디든지 갈 수 있”(「물리적 그물코」)는 시조를 읽을 수 있고, “가끔은// 제 가시(시)에 찔려// 흠칫 놀라”(「양심」)는 서정 시인의 고백도 들을 수 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왜 시문학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지, 어째서 무수한 시편들이 경계를 넘나들고 있는지 ‘서정’의 본령을 둘러싼 질문을 좀 더 우리의 삶 쪽으로 밀어 주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1) 계단처럼 수직과 수평에서 보이는 면이 각각 다를 때, 두 장의 그림을 계단의 수만큼 n등분한 후 수직면과 수평면에 잘라 붙이고 계단의 위쪽 혹은 아래쪽으로 시선을 이동하면 각도에 따라 보이는 면이 달라짐으로써 입체감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을 계단이 아닌 평면에서 구현하기 위해 상이 확대되어 보이면서 관측하는 각도에 따라 표시하는 지점의 위치가 변하는 작은 볼록렌즈를 붙인 것이 오늘날의 렌티큘러다. 선사시대 동굴벽화에서도 벽면의 굴곡과 횃불이 비추는 방향을 활용한 원시 렌티큘러가 발견된다. 2) “참뜻의 전통은 언제나 자기 안에 숨어 있는 생명을 고심참담한 노력 속에서 창조적으로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생명(詩生命)의 비의(祕義)를 체득하려면 먼저 시를 사랑하는 데서 비롯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말로 말하면 시생명의 본질은 ‘시를 사랑하는 인생 속에 내재(內在)하여 생성(生成)하는 자연(自然)’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조지훈, 「시의 생명」, 『조지훈 전집 2: 시의 원리』(홍일식 외 편), 나남, 1998, 20쪽. 3) “감정이입의 자극은 인간과 외부 현상 사이의 완전무결한 신뢰 관계를 조건으로 하는 반면, 추상의 자극은 외부 현상들에 의해 유발된 인간의 내부가 매우 불안해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그것은 종교 영역에서 모든 상상을 초월하는 색조와도 관련된다.” 도라 바이에, 『추상예술』, 문고판, 1980, 21쪽(알랭 봉팡(김은정 옮김), 『추상미술』, 한길사, 2000, 15쪽. 재수록)
결국, 쓰는 것이 모든 일의 제자리1) 유계영 오래되고 낡은 여관 서윤후는 끝을 본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음을 본다. 설명하자면,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은 일에 대하여 정말로 그렇게 한다. 내가 윤후에게 자주 놀라고 믿을 수 없어 하는 부분이다. 대체로 나는 안팎에 희망을 두지 않기 때문에 작심하는 일이 드물다. 설령 작심한다 해도 3일은커녕 3시간도 마음먹은 것을 지키지 못하는 작심삼일 유형의 표본이 나이고, 대체로 많은 사람들은 오십보백보라는 안일한 생각까지 한다. 그러나 윤후는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은 뒤 그렇게 한다. 그리하여 변모한다. 다음을 향해 나아간다. 김소연 시인은 윤후의 이런 점을 가리켜 나보다 훨씬 정확한 언어로 앞서 표현한 바 있다. 서윤후는 내가 오래 상상하며 기다려온 시인의 초상에 아주 근접한 사람이다(…) 원칙을 만들고 원칙을 지키며. 인간을 아끼는 마음에서 그렇게 하며. 유연하게. 자유롭게. 그리고 근본적이게….2) 그런데 고쳐 쥔 마음을 행동과 태도로 번지게 하여 부지런히 자기 갱신을 이루는 윤후를 떠올릴 때, 나는 숭고하기까지 한 존경심과 함께 슬픔에 빠진다. 내게 각인된 친구 서윤후의 몇 가지 장면들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시인 서윤후의 저작을 천천히 따라 읽어온 독자로서 다음으로 나아가려는 몸짓이 어떤 고요한 짓눌림을 동력으로 삼는지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이 고요한 짓눌림을 존재통이라고 부른다는 걸 최근에 알게 되었다. 가정으로부터, 사회로부터, 내면의 자기 자신을 포함하는 타자와의 관계로부터, 심지어 육체의 생명감으로부터, 고요히 짓눌린 감각. 다시 말해 존재통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관찰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걸 알기 때문에 윤후가 자기 자신을 향하여 세운 원칙들과 그것을 지켜나가며 이륙하는 생활이 활발해질수록 나는 좀 슬프기도 한 모양이다. 서윤후는 자신을 무너뜨리는 좌절이나 힘든 일에 대해 좀처럼 불평을 늘어놓는 일이 없어 내게 문책당하곤 했다. 나름대로 친하다고 믿는 사이이므로 짜증스러운 일부터 깊은 고민에 이르기까지 미주알고주알 늘어놓는 내가 밑진다고 느껴 심술을 부려보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으레 산다는 게 그렇다는 듯 노승처럼 허허실실로 웃곤 하는데 그런 태도가 나를 더 집요하도록 자극하긴 해도 늘 어른스럽게 보였다. 나한테 말해주기도 전에 용서하는 법이 어딨어? 따위의 말로 나의 경박함을 자인한 후, 요즘 윤후와의 대화는 생활의 귀여움과 사소한 재미를 나누는 방향으로 산뜻하게 옮겨갔다. 부정적인 판단에 근거한 가십거리를 늘어놓지 않겠다는 결심이 마땅한 상처를 계기로 수립되었겠거니. 윤후가 그러기로 한 것은 좀체 흔들리는 법이 없으므로 새로운 대화의 장으로 넘어가는 수밖에 없겠군.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세상에 부지런히 내어놓는 저작들을 따라 읽으며 몰랐던 그의 마음을 선명히 바라보게 되었다. 그가 느끼는 존재통은 친구와 키득거린 뒤 홀가분해지기에 알맞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한담의 형식과 문법에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내 마음은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에게 개방된 여관이 되었다. 여행을 하면서 내 마음을 여관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어떤 방에는 수년째 장기 투숙을 하는 친구가 살고, 어떤 방은 금방 왔다가 떠날 사람들이 쓴다. 공실. 방안을 쓸고 닦으며 빈방에 홀로 있는 내가, 이곳에 있었던 누군가를 떠올린다. 아프고 기억하고 싶지 않고 화도 난다. (…) 내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의 심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오면, 언제나 영업 정지 위기에 놓여 있는 마음에 관해 고민하게 된다. 마음에 관여하는 일. 그것이 나의 오래되고 낡은 여관, 여인숙 같은 것을 운영하고 지켜 가는 일이다.3) 그의 시집들을 톺으며 시인 서윤후의 시 세계에 따뜻한 표지를 세워주는 일은 이다음 이어지는 지면의 몫이겠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산문 세계를 말해보고 싶다. 시인에게 시 세계의 방위는 현실 너머다. 거칠거칠한 현실의 표면에 상처투성이 발을 심고서 탐스럽고 뽀얀 발꿈치 같은 달을 향하여 고개를 치켜드는 일이 시 쓰기다. 그렇다면 산문 세계는 현실의 표면에 넓게 드리워져 있다. 짐작건대 거칠거칠한 현실의 표면을 걷다가 문득 마주하는 삶의 싱싱함과 애틋함에 환한 눈길을 건네는 일이 산문 쓰기일 것이다. 투박한 가늠이겠지만 다섯 권의 산문집을 출간한 사실만으로도, 나는 그가 자신을 에워싼 현실에 대하여 얼마나 정성스러운 태도를 가진 사람인지 어림할 수 있다. 서윤후에게 현실의 중요한 영역으로써의 마음. 그는 그곳의 문을 언제나 개방해 두며 성업하기 위하여, 사람들과 밀접하기보다 스스로 내밀해지기를 택해왔다. 직접 만나 시간을 보내는 것만큼이나 훌쩍 떨어져 사람들을 추억하는 것 또한 새로운 만남이라 믿는 것이다. 윤후에게 산문 쓰기란 자신을 몰아세우는 괴로운 일들과 힘에 부치는 날들을 백지 위에 고백하는 것으로 마음이 허름해지지 않게 깨끗이 닦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실책을 정비하고 조약을 세우고 사랑의 순간들을 목록화하여 그것을 지켜내는 날들. 윤후는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은 것들을 정말로 그렇게 하며 마음의 내벽을 튼튼히 다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쓰기를 통해 변모한다. 다음을 향해 나아간다. 서윤후의 오래된 일상의 제의인 일기 쓰기, 나아가 산문 쓰기는 도약을 위해 움직임을 단련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내밀한 쓰기를 들여다볼 때 나까지도 희망에 들뜨는 것이다. 스스로와의 약속을 세우고 나 자신을 부축해 보고 싶은 마음이 불끈 생겨나기도 하는 것이다. 속마음을 터놓지 않는다고 삐죽거리던 나는 윤후의 산문을 읽으며 자주 부끄러웠다. 여행지에서 크게 다투고 격조한 두 청년이 서로의 시를 맞바꿔 읽으며 말없이 화해하는 별난 모습은, 내가 서윤후의 첫 산문집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장면 중 하나다. 문학을 읽을 때 내면세계에서 일어나는 물밑 소통, 바깥의 언어 질서와는 다른 방식의 깊은 소통,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준 장면이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훤히 드러나 부유하는 얇은 사실 속에서, 진실의 형체를 새로이 빚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문학이 실존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감각의 뒤안길에서 일렁임으로 머물러 있다.4) 그리고 첫 산문집의 소소한 에피소드가 8년 후 나온 최근작에 이르러 다른 밀도의 단단함으로 변모해 돌아올 때 시인 서윤후의 독자로서 나는 깊은 신뢰를 느낀다. 그의 언어가 어떻게 삶이 되어가는지 지켜보며 기꺼이 동참하게 만든다. 너의 알록달록 내게 적록 색약이 있다는 것은 병무청에서 신체검사를 할 때 알았다. (…) 그 이후로 나는 색깔에 민감해지기 시작했다. 색깔의 뚜렷한 구분에서 해방감을 느낄 때가 있었고, 알록달록한 색 조합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첫 시집에 실었던 시 <퀘벡>은 그때로부터 천천히 걸어 나온 사람의 이야기다.5) 서윤후가 처음 엮은 산문집은 여행에서의 사진과 산문을 엮은 책 『방과 후 지구』다. 돌이켜보면 나는 활자에 진입하기도 전에 압도되어 조금 주눅이 들었던 것 같다. 그가 찍은 사진들이 너무 예뻤기 때문이다. 형형색색 생기 있게 조화를 이루는 색감이 마치 회화 같았다. 이 여행 산문집에서 얻은 시각적 강렬함 때문인지 나는 한동안 윤후를 세련된 감각과 아기자기한 안목을 지닌 소년 정도로 라벨 붙여두는 경솔함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이후 출간된 산문집에서 그가 나와는 다른 색채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의 사진과 그의 취향으로 선택된 사물들이 왜 그렇게 화사한 채도를 가졌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한 사실이 그를 꼼짝 못 하도록 제약하는 일이 되기보다는 더 쨍한 감각을 향해 열리게 한다는 사실은 물론, 그가 느끼는 색채의 시야가 외려 그를 알록달록하게 비추고 있다는 것 역시, 새로 알게 된 것들이었다. 야간 자율 학습을 마치고 통학 버스 타러 가던 길에, 봉고차 한 대가 내 앞에 섰다. 내 시를 읽어주던 선생님이었다. 창문을 내리고는 내 시가 적힌 종이를 펄럭이며 내게 무슨 말을 했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시에 쓴 어떤 단어 대신에 이런 단어를 써보는 게 어떻겠냐는 말이었고, 나는 차 엔진 소리와 교문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의 목소리 때문에 알아듣진 못했으나 씩씩하고 큰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버스에 올라타 생각했다. 내게는 고마운 일이지만, 이게 차를 멈춰 세워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인가?6) 휴가철을 맞이하지 않아도 짬짬이 여행을 떠나는 윤후에게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이 물었을 것이다. 여행이 왜 좋으냐고. 일상을 벗어난 일탈 뭐 그런 것이냐고. 윤후는 내게 곰곰이 헤아려보려는 기색도 건너뛰고 새삼스럽다는 듯 말했다. 여행지에서도 일상을 사는 건 똑같아. 주방이 있는 숙소에서는 밥을 짓고, 그러기 위해선 시장에 가고, 세탁비누를 사 온 뒤에 빨래도 한다고. 물론 원고도 쓴다고. 이런 그를 두고 단지 성실하다 말해버리는 것은 너무 단순하고 손쉬우므로 제일 중요한 걸 놓치는 기분이다. 생활력이 강하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일상의 반복을 지키려는 이 순정한 태도를 그렇게만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윤후에게 일상의 반복은, 정주하다 때때로 떠나 후련해지는 방식이 아닐 것이다. 떠나며 옮겨가며 부유하며 때로는 돌아오며, 일상의 둘레를 키워가는 것. 서윤후가 지키는 일상의 반복은 다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까지를 마땅히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다행이라 여기는 것은, 윤후에게 시가 있다는 것. 봉고차를 세우고 적절한 낱말을 선물처럼 쥐여주고 간 그의 선생님처럼, 일상의 반복을 잠깐 멈춰 세우고 껌뻑 다른 곳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시가 있다는 것. 이게 일상을 멈춰 세워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인가? 되물을 겨를도 없이 그를 일상으로부터 들어 올리는 시가 있다는 것. 사방으로 둘레를 넓히는 수평의 전진과 생활로부터 튀어 오르는 수직의 비상 사이에 책상을 하나 놓고서. 서윤후는 생각하는 듯하다. 결국, 쓰는 것이 모든 일의 제자리라고. 나는 가끔 좋아하는 사람들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알 수 없는 슬픔에 사로잡혔다가 깊이 안심한 뒤 영문 모를 환희를 느끼곤 한다. 살아있는 존재에게 슬픔이나 고통 같은 것이라면 나름 공평하게 주어진다고 믿어서이다. 고창과 전주를 배경으로 한 윤후의 어린 시절도 이따금 상상해 본다. “아파서 아프다고 말하는 것이 돌봐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들릴까 봐, 슬퍼서 우는 것이 걱정 끼치는 것이 될까 봐 아랫입술을 꽉”7) 물고 있는 서현동 어린이를. 아는 것이 많아서 혀가 묶여버린 이 어린이가 진짜 모르겠는 시의 언어를 만나 다시 천진해지는 과정을. 시의 언어를 통해 어린이를 되찾은 것은 십대가 끝날 무렵의 일이었으니, 시간이 선형적이지 않다는 것을 서윤후는 일찌감치 알아버렸을 것이다. 쓰게 되었으니, 쓰기로 한다8) 대학 시절부터 친구 사이인 서윤후와 구현우, 그리고 이설빈과 나. 우리들은 ‘스물아홉 이서구’ 활동으로 만나 서로를 얄미워하고 용서하기를 거듭한 끝에 얼추 죽이 맞게 되었다. 우정과 무관심이 양립할 수 있다는 것에 신기해하며 드물게 만나는 동안, 시간은 뒤죽박죽 흘렀다. 우리들은 윤후의 고향이라는 이유만으로 전주에 여행 간 적이 두어 번 있는데, 모두 겨울의 일이다. 비교적 오래된 일이고 심각하게 형편없는 나의 기억력에도 첫 방문에서 윤후가 고른 숙소만큼은 생생하게 기억나는 걸 보니 그는 확실히 노련한 여행자다. 노란 장판과 붉은 나무 문틀이 정감 있지만 무척 낡은 구옥. 우리 머릿수에 비해 공간은 지나치게 넓었고, 가구랄 것 없이 썰렁했으나 지글지글한 방바닥은 참 좋았다. 그때 나는 내심 더 쾌적하고 그럴듯한 숙소를 바랐던 것 같기도 한데, 세련되고 편리하며 보기 좋은 숙소의 기억이 유독 앙상한 것을 생각한다면 윤후의 선택은 늘 나보다 옳고 재미있는 쪽으로 흐른다. 기억을 오래 다루어본 솜씨는 이렇게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여행에서 늦은 밤까지 취하도록 마시거나 게임을 하기는커녕, 큰 방 중앙에 옹기종기 모여 지렁이 젤리 따위를 한두 봉지 펼쳐놓고 이야기나 좀 나누다 제각각 흩어져 잠들었다. 그리고 작년 겨울. 두 번째로 방문한 네 사람의 전주는 어쩐지 윤후의 계획대로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멋진 경치의 공원을 보여주겠다며 데리고 간 공원이 하필 공사 중이었다. 덕진 공원은 광활한 호수 수면이 연꽃으로 가득 뒤덮이는 곳이라 했다. 호반을 뻗어나가는 다리 끝에는 마치 수면 위에 지어진 듯 한옥 도서관이 둥실둥실 떠 있고, 일대가 모두 생태공원으로 조성되어 겨울에도 울창한 곳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본 것은 물을 다 뺀 호수의 까만 흙바닥. 말라죽은 연꽃이 얼고 녹기를 반복하다 마침내 부러져 제멋대로 꺾인 줄기들.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촉루처럼 나뒹구는 연근들. 윤후를 제외한 우리는 신나게 웃었다. 일부러 시커먼 호수의 바닥이 보이는 자리로 가 사진도 마구 찍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윤후는 정말이지 서운한 눈치였다. 자신이 느낀 아름다움을 우리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는 듯이. 아냐, 이게 더 좋아. 계획대로 안 되는 게 훨씬 재미있지. 이럴 때 아니면 호수의 밑바닥을 언제 보겠어? 같은 위로에도 못내 아쉬워했다. 나는 그때의 표정을 아직 간직하고 있다. 우리의 흥을 망치지 않으려 애써 마음을 누르는 표정을. 계획성이 철저한 사람이 계획과 어긋난 상황에 드러내는 초조한 그것과 달리, 마음으로 깊게 침잠하는 다른 채널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윤후는 노련한 일상 여행자가 틀림없다. 그의 킨츠기 문법으로 다시 바라보게 될 이 순간을 고대하게 하므로. 실패와 실망의 무수한 훼손에도 그는 괜찮을 것이다. 쓰는 것이 모든 것의 제자리임을 아는 책상 앞의 시간을 신뢰하기 때문에. 인간이 자신의 상처를 돌보고 헤아리는 데 필요한 자기만의 도구가 있으리라고. 깨진 자리로부터 다시 깨지기 마련이겠지만, 깨진 것은 별 수 없다고 물러서지 않고 다시 깨진 자리로 도약하는 것이 아름다움의 문법이다.9) 1) 서윤후 산문집『방과 후 지구』(2016, 서랍의 날씨) 작가 소개에서 빌려옴. 2) 서윤후 산문집 『햇빛 세입자』(2019, 알마) 표4 김소연 시인의 추천사에서 빌려옴 3) 『방과 후 지구』, 「홈커밍데이」, 225-226p. 4) 서윤후 산문집 『쓰기 일기』(2024, 샘터), 「당신과 당신의 가장 문학적인 것」, 187p. 5) 『햇빛 세입자』, 「흑백 일기」, 194p. 6) 같은 책, 「겨울잠 주무시는 선생님」, 90p. 7) 『햇빛 세입자』, 「수직과 수평」, 33-34p. 8) 『쓰기 일기』, 「시가 쓰고 싶게」, 153p. 9) 『쓰기 일기』, 「킨츠기와 문학」, 12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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