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파란 2024년 봄호(제32호)
미래에서 올 ‘아름다운 영혼’의 빛살 ― 황동규 시 「즐거운 편지」
우리의 성장 문법과 교양 서사의 문제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는 우리 주변의 보통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받은 인기작이자 우리 시의 정수를 집약하고 있는 수작(秀作)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한 아이돌 스타를 통해 비로소 대중적인 인지도와 광범위한 영향력을 얻게 된 김소월의 「개여울」과는 달리, 그냥 그 자체로 우리를 오랫동안 사로잡아 온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서, ‘「즐거운 편지」의 어떤 마력과 반향이 이토록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마음을 붙들어 온 것일까?’라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이에 대한 마땅한 풀이를 찾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 작품이 매우 상투적인 독법을 고스란히 머금은 채, 그 방식 그대로 여전히 감수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즐거운 편지」는 ‘영원한 사랑의 반어적 표현’이란 문구로도 규정될 수 없으며, 이를 예술적 모험의 중핵이나 이면적 주제의 근간으로 삼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 “즐거운 편지”라는 제목을 다시 들여다보는 자리에서 시작해보자. 주변의 문인들과 이에 관한 소소한 이야기를 몇 차례 나눈 적이 있었다. 이들 중 대다수는 “즐거운”이라는 말이 거느리고 있는 미묘한 아이러니의 구조와 그 반전의 효과에 훨씬 더 큰 관심을 둔다는 당연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아가 그 실질적 진의(眞義)가 무엇인지를 헤아리려는 자리에 가장 순도 높은 집중력을 기울인다는 사실 역시 거듭 발견되었다. 이러한 해석의 움직임은 물론 이 시를 충실하게 이해하기 위한 필수 사항일 것이며, 그 핵심 관건에 “잇닿은” 최전방의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갈 것이다.
그러나 “편지”의 수신자에 대한 우리의 오랜 습관과 틀에 박힌 통념은 이 시에 들어박힌 중층적 아이러니의 두께를 꿰뚫지 못하게 만드는, 일종의 상식의 함정이자 완강한 벽처럼 작용하는 듯 보인다. 그것의 진면목(眞面目)을 마주할 수 없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은밀하게 가려진 맥락을 꼼꼼하게 되짚는 자리에서, 「즐거운 편지」에 대한 전혀 다른 해석이 그 상투성의 울타리를 뚫고 나올 수 있을지 모른다.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면, “편지”에 달라붙는 우리의 관습적 감각과 상투적 기대감이 오히려 이 작품의 심층적 이해를 방해하는 일종의 장애 요인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단번에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에게 여러 가지 의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겠다. 1958년 약관(弱冠)의 청년 황동규가 『현대문학』에 등단작으로 게재한 「즐거운 편지」는 과연 누구에게 보내는 “편지”였던 것일까? 그것에 오랜 세월로 쟁여진 저 익숙한 손의 감각이 일러주듯, 그것은 결국 “그대”에게 시인이 전하려던 속마음을 담은 메신저 같은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즐거운 편지」는 전통 연시(戀詩)의 계승자이자, 그 문법의 테두리에서 이해되고 감수되는 것은 그야말로 지당한 일 아닐까?
이와 같은 의문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영혼’으로 표상되는 ‘교양소설’의 보편적인 문제설정을 피해갈 순 없을 듯하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각인된 저 생생한 감각의 비늘과 그 ‘공-실존’의 분위기 전체를 가로지르는 ‘세계의 살’ 속에서, ‘아름다운 영혼’과 그것이 이룰 ‘우미와 존엄’의 세계는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실현되기 어렵다는 그 둔중한 진실과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진실은 이른바 근현대로 지칭되는 우리 문학 전체의 진상(眞相)을 ‘지나친 솟구침(Verstiegenheit)’으로 갈피 짓거나, ‘식민지시대 문학사 전체’의 특이점을 ‘실패한 교양소설’로 호명했던 몇몇 비평가들의 핵심 논제로 표상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윤동주가 ‘꽃처럼 피어나는 피’로 아로새겼고, 김수영이 ‘우리의 비애, 우리만의 비애’라고 언명했으며, 불세출의 비평가 김현이 ‘프랑스 문학을 피부로 느낀다고 믿은 정신의 불구자’라고 고백했던 자리, 그리하여 저렇듯 뒤틀린 우리의 성장 문법과 일그러진 교양 서사의 문제는, 앞선 의문들에 기필코 가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문제는 또한 우리 모두의 감각적 실존에 깃들여진 근본 모순, 우리 각자가 나날의 삶에서 마주할 수밖에 없었을 ‘과잉 억압’의 깊은 상흔이자 ‘자기분열’의 심각한 혼돈 상태, 그 가공할 ‘부조리의 진실들’에서 태어나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따라서 이 진실들이란 우리 모두의 ‘성장 문법’과 그것을 기반으로 삼은 ‘교양 서사’가 ‘아름다운 영혼’에 이르는 황홀경의 비단길이 아니라, 세상에 켜켜이 쌓인 억압과 부조리의 난맥상들과 타협하는, 또 다른 ‘거짓 화해’의 계단이자 굴종의 진창길이었음을 암시하는 김수영의 “설움”의 징표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현대사에 드리워진 ‘세계의 살’이란 그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일제 식민지와 군사 독재의 파행적 현대화 과정에서 빚어진 폭력과 살해의 끔찍한 참상, 억압과 체벌의 살풍경들로 가득 찬 것이자, ‘헬조선’이란 표어에 휘감긴 지극한 절망감과 “이 개 같은 땅”이라는 고단한 욕지거리로 넘쳐났던 것이 그야말로, 사실 그 자체였기 때문이리라.
이러한 맥락은 「즐거운 편지」에 대한 관행적 해석의 문제가 사실상, 우리네 삶에 깃든 경험적 내용의 진실성이나 그 감각의 정직성이라는 지극히 난처하면서도 곤욕스러운 부조리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 현대사의 여러 영역 가운데서도, 정신사의 궤적을 관통하는 주요 문제들과 밀접하게 결부된 것이 틀림없다. 더 나아가, 그것은 현재진행형으로 가속화되고 있는 인공지능과 탈(脫)현대의 세계에서 앞으로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가야 할 오롯한 성장의 문법과 바람직한 교양의 서사를 새롭게 상상하고 기획하는 중차대한 문제로 확장될 것이 자명하다. 그리하여, 여기서 태어날 인문학적 내용이나 그 이행의 과정에서 담보될 우리의 성장 문법과 미래 방향성에 대한 근본개념이야말로,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에 대한 해석의 적확성 또는 그 객관성의 지평을 확보하려는 우리 모두의 노력이 부단히 참조하고 탐색해야 할 핵심 전제일 것이다.
따라서 「즐거운 편지」를 둘러싼 해석의 문제는 그저 그 적확성과 객관성이라는 단순 범주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문학・예술의 해석학적 다양성이라는 협소한 차원을 넘어서, 인문학적 가치의 당대적 내용과 그것이 꿈꾸어야 할 새로운 미래 전망이라는 훨씬 더 큰 범주의 문제와 마주치도록 강제한다. 이 문제는 또한 인문학적 가치를 새롭게 인지하면서, 기존과는 다르게 그것의 미래상을 새롭게 사유하고 그것을 미리 실험해 보는 창조적 계기를 촉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즐거운 편지」의 뒷면 깊숙이 감춰진 ‘자아 성장’의 모티프와 ‘교양 서사’의 문제는 나날의 삶 속에서 매 순간 마주치는, 우리 근현대사 전체의 ‘세계의 살’로 덧씌워진, 저 남루한 ‘모더니티의 문제’와 결부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저토록 끈덕지게 나타나는 우리 사회의 낙후성, 그 무수한 부조리 현상들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현재진행형의 실천을 통해 그것을 극복해가려는 화용론적 문제를 낳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깊숙이 패인 영혼의 상처이자 미래 시점의 고단한 영광으로 남겨질 우리 안의 식민주의를 ‘해체-재구성’하는 첨예한 문제를 도래하게 할 것이다. 김수영이 오래전 제기했던 ‘모더니티의 문제’를 넘어 21세기에 다다른 바로 지금-여기, 이 역사적 현재의 지평에서 우리가 실제로 만들 수 있으며, 꿈꾸어 갈 참된 성장의 문법과 합당한 교양의 서사는 과연 어떤 내용과 비전으로 채워질 것인가에 따라, 「즐거운 편지」에 대한 적확한 해석과 객관적 평가는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 해석과 평가는 「즐거운 편지」 주위를 감싸고 도는 청년 황동규의 문학세계에 대한 정당한 독해나, 첫 시집 『어떤 개인 날』의 문학사적 위상을 재검토하는 작업과 다시 연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의 근현대 시사(詩史)를 위시한 그 모든 문학사적 위상의 적확한 자리매김이란 결국, 기존의 문학 장에서 지배적 안정성을 구축하고 있는 지식의 체계이자 그 관행적 유통 과정인 교육 내용의 승인 절차에 구멍을 뚫어버리는, 역사 자체의 ‘돌발 상황’과 결부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문학 텍스트가 어떤 범주에서 얼마큼의 충격과 공백의 강도를 수반하면서 ‘돌발 상황’의 크기와 파급력을 불러일으켰느냐에 따라, 그것이 발생시킨 ‘진리-사건’의 실질적 위상이나 그 역사적 가치의 의미 진폭은 결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몇 가지 의문을 다시 던져보자. ‘우리는 과연 「즐거운 편지」에서 한 철학자가 ‘사건의 자리’라고 일컬었던 일종의 ‘공(空)’ 상태, 즉 ‘공백으로서의 진리-사건’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명명할 것이며, 그것을 일관되게 탐색하려는 ‘후사건적 충실성’은 그것의 해석 과정에서 과연 발휘될 수 있을 것인가?’ 이 의문들이야말로, 이 글에서 수시로 타오르다 번쩍거리며 이내 사라져버리는 ‘꽃불 현상’으로서의 진리, 그것의 기원을 이루는 자리일 것이다. 아니, 그 발원지이자 종착지에서 다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또 다른 의문들을 낳는 근원적 ‘공백의 자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의문들은 ‘법고창신(法故創新)’의 터전으로서의 “거듭남”이라는 현재진행형의 ”변화“ 과정 자체를 매 순간 우리가 다시 실행할 수 있는가의 난제(難題), ‘영원한 아포리아’로 언명될 수 있을 ‘이미지 사유’의 별자리만을 남기게 될는지도 모른다. 달리 말해, ‘창조적 생성’의 진행 과정을 통해서만 그 말의 참된 불꽃을 담보하게 될, 우리의 가슴 벅찬 성장의 문법과 아름다운 교양의 서사가 우리의 삶과 문학 자체에 오롯한 살갗으로 새겨지고 뼈마디로 들어박힐 수 있느냐의 어려운 문제와 잇닿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문제는 나날의 삶에서 우리가 그것을 직접 ‘이행(履行/移行)’하고 실현할 수 있는가의 ‘영원한 아포리아’, 그것을 매번 다시 불러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품은 현재진행형의 실천적 난제야말로, 저 의문들에 깃든 ‘본래면목(本來面目)’의 자리일 수밖에 없기에.
전통 연시의 계승자, 숨겨진 교양의 서사
「즐거운 편지」는 언뜻 우리에게 익숙한 ‘연시(戀詩)’ 또는 ‘사랑시’의 갈래로 수렴될 수 있을뿐더러, 그 계보를 잇는 자리에서 마련된 작품인 듯 보인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읽을 때 이 시가 품고 있는 서정적 분위기와 더불어, 아름답고 고상한 감각을 향한 본원적 희구가 좀 더 강렬한 기세로 증폭되는 듯하다. “나”와 “그대” 사이에 놓인 마음의 거리, 그 단절감에서 오는 “괴로움”을 “사소함”으로 “바꾸어” 놓는 그 필연성의 자리에 이 시의 비밀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나”가 지금 품고 있는 절절한 사랑의 느낌이 미래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른 마음의 상태로 진화할 것임을 미리 예감하고 앞질러 다짐하는 자리에서, 이 시는 자신이 품은 서정성을 극대화한다고 하겠다. 나아가 그 뒷자락에 ‘자아 이상’ 또는 ‘아름다운 영혼’으로 일컬어질 수 있을 신성한 그림자를 어른거리게 하면서 그 분위기 전체를 ‘앙양(昂揚)’의 자존감으로 이끌어 올린다. 작품 전문을 다시 꼼꼼하게 뜯어 읽어보자.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背景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姿勢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落葉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황동규, 「즐거운 편지」 전문, 『어떤 개인 날』(中央文化社, 1961)
첫머리의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에서 중핵을 이루는 부분은 “배경”과 “사소한 일”일 것이다. 이 시어들은 “나”와 “그대”가 맺는 관계의 밀도와 형세를 어렴풋이 드러낸다. 특히 “배경”이란 시어는 “나”와 “그대”의 관계가 상호 교감으로 이루어진 온전한 “사랑”이 아니라,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품고 그 안에 가두어둔 ‘외사랑’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긴다.
“배경”을 이렇게 읽을 때, “내 그대를 생각함”이 “사소한 일”이 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의 행로가 가시적인 차원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우선 “그대”에게 “나”란 존재는 눈앞에서 생동하는 사랑의 박진감을 부여하고 “다이내믹”한 역동성을 불러일으키는 실행의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매일 같이 “그대”를 “생각하”는 “사랑”의 주체이긴 하지만, “그대”에게 “나”는 양자의 관계 자체에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는, 그저 ‘저만치’ 가닿을 수 없는 거리로 동떨어진, 관조적 자연 풍경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앞서 살핀 “사소한 일”에는 사랑에 빠진 자가 품을 수밖에 없을 “괴로움”과 더불어 그것이 초래하는 불투명한 미래의 불안을 극복해가는 마음 수련의 과정이 여울져 있다. 따라서 그것은 “사랑”이 안겨주는 “괴로움”을 실존론적 자존감을 드높일 수 있는 정신 성장의 계기이자 인격 수양의 자양분으로 삼으려는, 또 다른 마음의 움직임을 그 뒷자락에 “즐거운” 예감으로 드리운다. “사소한 일”이라는 시어는 뒷부분에서 “사소함”이란 명사형 어구로 다시 나타나는데, 이 어구에는 커다란 변화가 담겨 있다. 이후 시간에서 펼쳐질 무수한 “괴로움”의 경험 속에서도, ‘자아 성장’ 또는 ‘영혼의 성숙’을 미리-당김의 ‘시간의식’ 속에서 선취해 오려는 ‘전미래시제(future antérieur)’의 예감과 욕구가 말없이 주름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즐거운 편지」의 “배경”에선 미래지향적 추동력으로 밀어 올려진 내면의 상승감이 “즐거운” 화합의 빛살, 또는 ‘숨은 조화’의 아름다운 광휘로 은은하게 스며 나온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 광휘는 이 시의 “배경”에 널따랗게 스며있어 겉면에선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어쩌면 저 ‘숨은 조화’야말로 “즐거운 편지”라는 수려한 제목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참된 이유이자 감춰진 맥락의 꽃무덤을 이루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즐거운 편지”의 수신인이 “그대”가 아니라, “언젠가”로 아로새겨진 불특정 장래 시점에서 성숙해 있으리라 예감되는, 혹은 “한없이 잇닿은” 자기성찰을 여전히 욕망하고 있을 미래의 “나”일 수밖에 없는 까닭 역시, “언젠가” 하염없는 아름다움으로 드리워질 ‘숨은 조화’의 광휘에서 온다. “편지”란 “그대”를 향한 것도 아니며, “그대”에게 발신조차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즐거운 편지”란 “내 나의 사랑”이 앞으로 치러내게 될 무수한 “괴로움”을 그 “언젠가”는 “사소한 일”로 “바꾸어버릴” 수 있겠노라는 정신적 성숙의 여유로움, 그 휘황한 날갯짓을 펼쳐 보이려는 ‘헤르메스의 날개’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미래를 열어 갈 메시아적 영혼의 ‘자기 암시’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러한 종교적 완결성보다는 ‘인간신(人間神)’이 되려는 욕망으로 불타는, 하나의 완성된 인격으로서의 ‘절대정신’을 여전히 추구하고 있을 ‘전미래시제’의 “나”와 맺을 은밀한 맹약(盟約)‘이자, 그 ’이면계약서‘라는 의미의 겹주름을 에두르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그것은 시인이 자청한 ‘아름다운 구속’일 것이며, 그만큼 밝고 건강하고 “즐거운” 자기성찰의 강제력을 암시한다.
“1”의 후반부를 이루는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에서 의미론적 특이점을 이루는 자리 역시, “괴로움”과 “사소함”이라는 두 시어일 것이다. 이 시어들 또한 ‘다른 미래’로 열린 시간의 질곡을 미리 예감하면서, 부단히 이루어갈 자기성찰을 상상하고 다짐하는 자리에서 빚어진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는 ‘인생무상’이라는 시간성의 신(神)이 만드는 무한한 변이 현상들 가운데서도, “괴로움”의 주체를 뒤바꿔놓는 일종의 정신적 모험을 감행했던 자리에서 태어난, ‘파르마콘(pharmakon)’의 흔적처럼 보인다.
이 모험이란 “나”가 현재 시점에서 겪는 “사랑”의 “괴로움”이 “언젠가”로 표현된 불특정 장래의 시점에서 “그대”의 “괴로움”으로 바뀔 수 있는, 어떤 가상(假想)의 상황을 “생각”해 보려는 시인의 “적극적” 태도에서 온다. 이 태도는 차후의 시점에서 “괴로움”과 “사소함”을 느끼는 주체들의 ‘능동-수동’의 위치 전환을 능동적으로 예감하는 자리로 진화한다. 시인은 이러한 인생사의 국면 전환을 ‘정신적 성숙’ 또는 ‘아름다운 영혼’의 은은한 분위기로 암시하면서, 이를 향해 발돋움하려는 미래지향적 자아를 뒷면에 감춰두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이와 같은 ‘은폐-탈은폐’의 변주곡은, 시인 황동규의 예사롭지 않은 지혜와 통찰력을 암시하는 반증의 징표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비범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채 스물도 되지 않은 미성년의 고교생이 「즐거운 편지」를 지었다는 경이로운 사실에서 비롯할 것이다. 이 비범함에는 이른바 ‘인생유전(人生流轉)’으로 집약되는 차원 높은 삶의 지혜가 묻어 있다. 그리고 ‘극즉반(極則反)’으로 표상되는 동아시아 전통 사유의 균형 감각과 더불어, ‘대대(對待)’라는 말로 일컬어지는 음양(陰陽)의 수평적 운행 원리와 천지만물(天地萬物)의 역동적 평형 운동에 대한 남다른 통찰력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확장해 보면,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라는 구절 역시 자연스러운 해석의 선으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 사소함”에 상반된 의미가 동시에 덧씌워져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는 다소 난해한 문제가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다른 미래’로 열린 시인의 원초적 지향성에서 살피면 그리 어렵지 않게 순리대로 풀어낼 수 있을 듯하다. 우선 “나”가 “그대”를 “사랑”해 온 시간은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그것은 “그대”가 알 수조차 없었을 “나”의 일방적인 ‘외사랑’이었거나, 이 둘 사이의 관계에 어떤 영향도 줄 수 없었던 ‘짝사랑’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저 관조적 자연 풍경과 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다시 주의해야 할 부분은,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에서의 “그 사소함”과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에서의 그것이 상반된 방향성을 겨냥한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앞부분에서 이어져 온 “그 사소함”이 과거 시점에서 “나”가 “배경”에 지나지 않았던 그 의미 없음의 상태를 나타낸다면, 뒷부분으로 이어져 갈 “그 사소함”이란 “괴로움”이 이미 “사소함”으로 바뀌어버렸을 ‘전미래시제’의 정신적 성숙과 인격적 완성 상태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시인은 “그 사소함”을 하나의 문장 단위에서 과거와 미래를 수시로 넘나들 수 있는, 마치 ‘타임머신’과도 같은 시간적 이동체로 설정하는 일종의 의미 실험을 감행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와 “그대”의 사이 공간에서 시간의 흐름과 국면에 따라 그 내포적 의미가 달라지는 가변적인 양상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렇듯 “그 사소함”이 지닌 내포적 의미의 가변성과 양면가치는 “2”에서 나타난 다양한 이미지들의 윤곽선을 꼴 짓는 핵심 인자로 기능한다. “2”의 첫 구절로 등장하는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에서 눈에 띄는 특이성의 면모는, 동일 어구들의 잦은 반복이 불러들이는 “한없이 잇닿은” 그 연속적 리듬감과 지속성의 분위기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 기다림”을 절실함의 깊이로 “바꾸어버리”는 감응의 파급력을 매우 밀도 높은 ‘예언자의 목소리’로 울려 퍼지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이 “기다림”으로 전환되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것이 “그대”에게 기필코 전해지지 않을 ‘수취인불명’의 우편물 같은 것이자, 그야말로 어떤 “배경”처럼 “그대”의 마음이나 삶의 향방에 어떤 파문도 일으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미래에서 부르는 ‘아름다운 영혼’의 소리
「즐거운 편지」의 한복판에 아로새겨진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라는 이미지는 현재 시점까지 “잇닿아” 온 “내 나의 사랑”의 연속성에 대한 자기성찰과 더불어, “언젠가”는 그것이 “그칠”지도 모른다는 묵시적 뉘앙스를 풍긴다. 그리고 그것의 “시작”을 알리는 변곡점의 이미지로 해석된다. 이 대목에서 「즐거운 편지」가 수록된 첫 시집 『어떤 개인 날』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겨울” “밤” “눈”과 같은 유사 이미지 계열을 불러올 필요가 있을 듯하다.
특히 이들이 차갑고 어둡고 단단한 음(陰)의 분위기를 내뿜으면서, ‘힘겨운 내적 고통(수련)의 과정’과 ‘깨끗한 정화의 의식 절차’를 동시에 암시하는 양면가치의 의미 벡터를 발산할뿐더러, 그 ‘공들임의 함수’를 상징하는 ‘말꽃’의 이미지로 기능한다는 특이한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이에 따르면, 위의 인용 구절 전체는 지금까지 “잇닿”아 온 “내 나의 사랑”을 자기성찰의 시선으로 다시 응시하기 “시작했다”라는 뜻으로 새롭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겨울” “밤” “눈”과 같은 형상들이 겉면에서 내뿜는 고난과 시련의 이미지는 그 뒷면에서 시인의 내적 수양의 깊이와 정화 의식의 견고함이라는 이면적 의미를 자연스럽게 이끌어 올린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의 맥락은 “1”에서 의미론적 불꽃으로 타올랐던 ‘인생유전’의 지혜와 ‘극즉반’의 통찰력을 다시 불러들인다. 나아가 이들 모두가 서로를 마주 보고 함께 울리는 원격 감응의 빛살과 그 오롯한 분위기를 거죽 위에 은은하게 펼쳐놓는다.
이러한 맥락을 해석의 기반으로 삼을 때,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에 주름진 이면적 주제의 반어적 표현 방법, 또는 심층적 의미 구조의 역설적 발산 회로를 꿰뚫어 볼 수 있을 듯하다. 달리 말해, 이 작품에 숨겨진 비의(秘義)의 결절점으로서의 ‘자아 성장’과 ‘교양 서사’를 자연스럽게 감수하게 될 것으로 짐작된다. 더 나아가, 겉으로 드러난 “사랑”의 “그침”이나 “그대”를 향한 “기다림의 자세”가 아니라, 그 뒷면에서 말없이 드리워지는 미래지향적 주체의 정신 성장의 예감과 더불어, 그 시간의 숱한 질곡을 뛰어넘어 고차원적 교양을 선취하려는 자리에 이 시의 방점이 찍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괴테와 쉴러가 같이 이루려 했던 ‘아름다운 영혼’, 그 ‘우미와 존엄’의 세계를 미리-당김의 차원에서 선취하려는 미래지향적 기투(企投)에 「즐거운 편지」의 이면적 주제와 예술적 사유의 불꽃이 빠짐없이 휘감겨 있음을 암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저 아름다운 경지에 이르려는 시인의 또 다른 ‘실존론적 기획투사’야말로 「즐거운 편지」의 본원적인 생명력의 약동, 그 내적 추동력의 ‘꽃불 현상’을 이루는 것으로 추론된다. 따라서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라는 시구는 “내 나의 사랑”이 초래했던 그 “괴로움”이 무상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소함”으로 뒤바뀔 수 있는, 영혼의 내적 성숙 과정을 미리 예감하는 또 다른 자아를 뒷면에 전제한다고 하겠다.
물론 이 성숙의 예감은 현재진행형으로 실천될 행동의 결단이 아니기에, 추상적 예단(豫斷)의 표명에서 오는 성마른 자기 확신의 선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동시대 비평가의 탁월한 통찰처럼, ‘자기 정서의 폐쇄적인 몰입’에서 비롯하는 ‘나르시시즘’의 공개 선언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예감의 이미지는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라는 자기성찰의 지속성을 뒷면에 전제하는 순정한 의욕의 구절과 결합한다. 나아가 쉴러의 ‘우미와 존엄’의 세계를 넘보는 자리로 나아가려는 시인의 생득적인 지향성을 싣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리하여, 그것은 앞 구절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에서 풍기는 정신적 치기(稚氣)를 소리 없이 가라앉히는 견고한 진정(鎭靜) 효과를 발생시킨다. 시인은 이 두 구절을 자기성찰의 은은한 분위기로 에둘러진, 어슴푸레한 실루엣의 느낌으로 연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어디쯤”이라는 불특정 미래 시점까지 계속 이어질 것으로 예감되는, 그 고행의 시간을 “믿는다”라고 말할 수 있는 지속적 신뢰감의 양태로 “바꾸어버리”는 분위기 전환의 뉘앙스를 흩뿌려놓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을 가능케 하는 자기 충실성의 확신과 신실한 지속성의 분위기를 그 “배경”에 가로놓인 자연 풍경의 ‘한결같은 변화’ 이미지로 드리워놓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라는 구절은 「즐거운 편지」의 이면적 주제를 가장 밀도 높게 응축한 ‘말꽃’의 이미지로 보인다. 그것은 이 작품 전체를 타고 흐르는 미래 시점의 추상적 예감이나 섣부른 기대감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수행하려는 자기성찰이 얼마나 신실한 “자세”를 다짐하며 펼쳐지고 있는지를 반증하기 때문이다. 또한 ‘말꽃’이 얹어진 이미지의 꽃불이자 시의 눈, 시안(詩眼)으로 읽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다만 그때”라는 말은 “내 나의 사랑”이 “그칠” 그 “어디쯤”의 장래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나”의 미래 시간을 미리 상상하고 앞질러 다짐하겠노라는 실행 의지를 묵시적으로 거느린다. 여기서 한정을 나타내는 부사어 “다만”은 시인의 관심과 집중력이 “나”와 “그대”의 미래 시점의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 시점에서 아름답게 성숙해 있을 “나”의 영혼에 대한 희구로 쏟아지고 있음을 넌지시 일러준다.
따라서 “나”에게 “진실로 진실로” 중요한 것은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그대”도 아니며, “한없이 잇닿은” “내 나의 사랑”의 영속성도 아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내 기다림의 자세”에 켜켜이 주름져 갈, 그야말로 그 세월의 흐름과 함께 들이닥칠 “괴로움”일 것이며, 이 자리에서 끊임없이 반복될 자기성찰의 “자세”일 것이다. 따라서 “내 기다림의 자세”란 한편으로 “내 나의 사랑이” 그 “언젠가” “그치”게 될 바로 “그때”의 그 시점까지, “나”의 자기성찰이 계속되리라는 예감을 적극적으로 선언할 수 있는 내적 충실성의 태도를 동반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자기성찰의 충실성이 수반하게 될 정신 성숙의 예감과 더불어 인격 완성을 향한 끊임없는 고행의 다짐을 암시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이 작품 전체의 ‘말꽃’으로 기능하는 “내 기다림의 자세”란 1958년 당시 황동규의 ‘성장 문법’이나 ‘교양 서사’가 ‘자기 정서에의 폐쇄적 몰입’이라는 나르시시즘의 한계와 모순에 갇혀 있었음을 예증하는 것이 틀림없을 터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시인의 일관된 자기성찰의 예감과 묵시적 다짐의 충실성을 은은한 뉘앙스로 다시 감돌게 한다. 그 뒤를 떠받치는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라는 이미지에 의해 그 “자세”에 깃든 자기성찰의 지속적 일관성과 더불어 그 미래로 열린 시인의 예감과 확신이 신뢰할만한 것임을 보증받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내 기다림의 자세”라는 ‘말꽃’은 시인이 현재 시점에서 직접 겪고 느끼는 사실성과 생동감의 상연 무대가 아니다. 그것은 불특정 미래 시점의 가정적(假定的) 상황 설정 속에서 도래하리라 예감되는 ‘자아 이상’이나 서구적 교양의 독서 체험에서 온 ‘아름다운 영혼’을 그 “배경”에 숨겨두고 있다는 점에서, ‘관념적 추상성’의 차원을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삶의 내부 혹은 삶의 추상’이나 ‘간접적 교양 체험의 내면화’라는 말들로 집약될 수 있을 비평 대가들의 비판적 시각과 부정적 어조 역시, 이와 같은 테두리에서 온다. 이들 역시 황동규의 초기 시편들을 가로지르는 ‘삶의 추상’이나 ‘간접적 교양 체험’을 비판적 안목으로 지적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다이내믹”한 “변화”가 이후의 시편들에서 충실하게 구현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라는 종결부의 이미지는, 청년 황동규가 품은 미래지향적 정신 성장의 예감과 더불어 그 기나긴 “괴로움”의 미래 시간을 내적 성숙의 도약대로 “바꾸어버리”려는 시인의 자기 확신을 암시한다. 이 시의 제목이 “즐거운 편지”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편지”는 “그대”에게가 아니라, “다만 그때”에 이른 장래의 시점에서 ‘아름다운 영혼’으로 성장해 있을 “나” 자신에게 전하려는 메시지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편지”는 현재 시점의 “괴로움”을 미래 시점의 “사소함”, 즉 ‘아름다운 영혼’의 드넓은 수용력으로 “바꾸어버릴” 수 있는 그 장구한 시간의 드라마를 “적극” 예감하는 자리에서 타전될 것이다. 그러나 결단코 수신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이 “즐거운 편지”가 영원히 도착하지 않을 우편물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미완결의 메시지를 고스란히 품은 채, ‘파르마콘(pharmakon)’의 의미론적 차이 운동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자기 충실성의 빛과 그늘
청년 황동규의 초기 시편들에 대한 기존의 비판적 언급이나 그 지적의 내용은 물론 타당한 일면을 포함한다. 그러나 「즐거운 편지」에 잠긴 담대하면서도 정결하고, 섬세하면서도 강직한 ‘자아 성장’의 의지와 더불어, 자기 인생길 전체를 걸 만큼의 내적 충실성의 고뇌로 가득 찬 미래지향적 “거듭남”의 에너지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그것은 1950년대 후반으로 표기되는 전후(戰後)의 참혹한 현실과 그 폐허 상태의 부조리, 당대 우리 사회의 지극한 모순과 혼란상을 텍스트의 속살을 엮는 체험의 실질적 무늬들이나, 그 이미지 지력선 전체를 마름질하는 예술적 사유의 불꽃으로 벼리어 두지 않았다는 데서 기원할 것이다.
따라서 「즐거운 편지」에 포함된 ‘추상 구도’의 한계와 ‘간접적 교양 체험’의 모순이란 지극히 자명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당당하고 겸허하게 자기 충실성의 광휘를 향해 뚜벅뚜벅 내딛어가려는 시인의 기백이란 그 모든 결함에도 불구하고 아름답다. 저 불굴의 기백을 자기 내면에 가득 채워 넣으려는 ‘전미래시제’의 예감과 더불어 지금-여기의 현실을 앞질러 기대하는 실천적 다짐의 자리에서, 청년 황동규는 자기 충실성으로 이행해 가는 부단한 자기 수양(修養) 운동을 시작했던 것으로 직감되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좀 더 복잡한 다중초점의 시각에서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다. 당대의 거의 모든 문인과 지식인들이 그러했듯, 1958년 청년 황동규 역시 서구 문화의 ‘간접적 교양 체험의 내면화’로 표상될 수 있을, 그 시대의 질곡 자체를 벗어나진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이는 지극히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1967년 동시대의 문학청년 김현이 아프게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 모두의 ‘교양 체험’으로 덧씌워진 저 ‘간접적’이란 수식어는 ‘착란된 문학 풍토’ 또는 ‘우리의 착란된 문화’ 전체에 스며들 수밖에 없었던, 우리 모두의 ‘보편적 생의 그늘’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모더니티의 문제’라는 이름으로 우리 몸 한가운데 촘촘하게 들어박힌 온갖 ‘더러움’의 비늘들을 절절한 마음으로 읊조리는 자리에서 나온, 그 ‘진실의 사막’을 포착한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 작고한 비평가 황현산이 「르네의 바다」에서 김현과 ‘4・19세대’의 문학을 ‘맨주먹 붉은 피’라는 노랫말로 암시하려 했던 이유와 배경 역시 이와 같다. 그야말로 처절한 운명으로 주어진 저 후진적 모더니티의 멍에를 온몸에 걸머지고, 맨몸으로 싸워나가야 할 시대적 사명이 ‘4・19세대’에게는 장구한 시간 동안 계속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들이 ‘4・19’라는 찰나의 해방 공간에서 잠시 맛보았던 자유와 민주주의, 서구적 교양의 세계를 구가(謳歌)했던 그 감각의 테두리와 환각적 분위기의 향유란 그저 하룻밤 꿈이자 신기루에 불과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꿈과 환각으로 호명되는 ‘우리만의 비애’일 수밖에 없을 ‘모더니티의 문제’, 따라서 ‘착란된 우리 문화’ 전체에 오래도록 들러붙어 온 저 지긋지긋한 후진성이란 지금-여기, 2024년 우리 사회의 한복판에서도 여전한 맹위를 떨치며 살아 펄떡거리는 인문학의 화두로 우리 삶 곳곳에 스며있는 듯 보인다. 나아가 우리를 여전한 정신적 긴장 상태로 휘몰아가는 듯하다. 나날의 몸의 감각이자 그 ‘날 것’의 살아 펄떡거리는 분위기로 휘감겨오는, 저토록 끈덕진 ‘모더니티의 문제’는 서구 문화의 ‘간접적 교양 체험’이 필연적으로 수태하게 될 ‘관념적 추상성’의 치명적 한계이자 그 후진성의 근본 모순을 다시 처절하게 일깨우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문제는 「즐거운 편지」를 그저 입시용 문제 풀이의 대상이자 시험답안의 자료로만 접근했던 우리 교육 전체의 서글픈 생태와 직결된 것인지도 모른다. 대학 입시에 나라의 향방과 시스템 전체가 좌우되는 이른바 ‘불행한 선진국’에서, 「즐거운 편지」라는 예술작품을 그야말로 심미적 대상으로 즐기고 여유롭게 뜯어 읽으면서 오랫동안 이야기할 수 있는 교실이란 2024년 봄, 지금-여기서도 여전한 ‘불가능’의 자리를 이루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우리 현대사의 근본 모순일 수밖에 없을 ‘간접적 교양 체험’과 ‘관념적 추상성’의 문제를 「즐거운 편지」의 속살을 보고 듣고 어루만지는 과정에서 절절하게 느끼고 그 한계의 지점을 진지하게 토론하는 광경이란 우리 교실의 현장에선 결코 목도(目睹)할 수 없는 ‘불가능’ 자체라는 것이다. 나아가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다른 미래’의 비전을 함께 고민하고 탐색하는 교실의 풍경은 우리 교육의 현실에선 더더욱 상상조차 어려운, 그야말로 요원한 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몇 가지 의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져보자. 적어도 우리 삶의 세부에서 보면, 전국의 학원가를 넘어 인터넷 곳곳에서 거듭 마주치게 되는, 저 ‘영원한 사랑의 반어적 표현’이란 문구는, 그야말로 김수영의 ‘우리의 비애, 우리만의 비애’를 불러올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따라서 이 상투적 해석 문구는 우리 모더니티의 초라하고 서글픈 역사를 생생하게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의 교육 관행과 그 감각의 테두리로 깃든 과잉 억압과 후진성의 ‘살’을 살아 꿈틀거리는 현장감으로 예시해주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저 문구는 우리 삶의 감각과 분위기 전체를 지배하는 ‘세계의 살’의 생생한 힘과 정서적 주름을 표상하는 것은 아닐까? 달리 말해, 현대 한국인의 천편일률적인 삶의 모양새에서 기원하는, 마치 만인의 거울인 듯 서로의 얼굴을 빠짐없이 비추는 우리 모두의 평준화된 삶의 모델과 일률적인 욕망의 그림자를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나아가 그것의 오래고 오랜 클리셰가 드리우는 우리 시대의 ‘보편적 생의 그늘’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 문학사에서 ‘더러운 그리움’이란 말로 표상되는 예술의 ‘정신 승리’, 그 역설적 아름다움의 꽃을 피우고,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의 희망으로 내딛어나갈 수 있는 미지의 “빛”과 “소리”를 선사했던 작가들을 잠시 떠올려보자. 거듭 강조하지만, 이들이 한결같이 고민했던 자리는 우리 모두의 ‘보편적 생의 그늘’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리가 다 같이 감당해야만 했을 ‘간접’과 ‘착란’이란 말에 오랜 세월로 쟁여진 우리 문화 전체의 후진성, 그 “지저분함”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뒷자락에서 우리가 문득 다시 깨닫게 되는 것은 ‘보편적 생의 그늘’이 만드는 저 고통과 신음의 자리, 그 비루하고 황폐한 감각의 비늘들이야말로. 시의 원초적 터전을 이룰뿐더러 참된 예술이 빠짐없이 창출하려는 ‘불가능’의 자리에 해당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청년 김현이 용감하게 고백했던 ‘나는 우선 솔직히 한국 문화의 지저분함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굴욕과 수치를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큰 용기를 얻기 위해서이다.’라는 말을 다시 불러올 필요가 있겠다. 이를 통해, ‘4·19 세대’를 넘어서 우리 현대문화 전체에 들어박힌 ‘착란’과 ‘지저분함’을 「즐거운 편지」가 외면하거나 배제하는 자리에서 움터 올랐을 것이라는 지극히 난처한 맥락을 암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리에서, ‘간접적 교양 체험’에서 비롯하는 ‘정신의 불구자’가 내뱉는 고통과 신음, 그 시대적 진실의 맥락을 「즐거운 편지」가 정면으로 맞닥뜨리지 않았다는 중요한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결국 이 작품이 우리 모두의 ‘보편적 생의 그늘’을 예술적 사유의 중핵이나 시적 형상화의 초점으로 삼지 않았던, 어떤 치명적인 결함을 품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결함에도 불구하고, 「즐거운 편지」는 아름답다. 이 작품이 있었기에, 우리는 그야말로 반 미친 듯 폭주할 수밖에 없었을 우리 모두의 청년 시절을, 그 시간의 화염과 질풍노도의 광기를 견뎌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그야말로 인간답게 살려는 ‘자아 성장’의 욕구와 민주적 교양 의식의 분투에서 움트는 우리 모두의 “몸부림”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 “몸부림이란 비록 지금-여기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미래에서 올 ‘아름다운 영혼’의 빛살을 미리 예감하고 실천하려는 자에게만 촉발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기다림”을 통해 자신의 ‘아름다운 영혼’을 앞질러 선취하려는 자에게서만 뿜어져 나오는 내적 충실성의 징표이자 부단한 자기성찰의 흔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 아름다운 시의 ‘말꽃’으로 깃든 “내 기다림의 자세”에서 그 대상은 “그대”도 아니며 “사랑”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전미래시제’ 속에서 성장해 있을 “내 나의 사랑”, 곧 “나” 자신의 미래로 펼쳐질 “나”의 ‘아름다운 영혼’일 수밖에 없다. 「즐거운 편지」를 비롯한 『어떤 개인 날』의 초기 시편들이 ‘간접적 교양 체험의 내면화’에 하염없이 갇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미지의 시간으로 “한없이 잇닿은” 자기성찰의 지속적 충실성에 대한 견고한 예감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저토록 당당하면서도 일관된 ‘예언자의 목소리’를 “기다림의 자세” 속에서, 그 영속성을 예감하고 다짐하는 ‘적극적 수동성’의 자리에서 겸허한 어조로 읊조리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에서 “기다림”은 능동적 다짐과 수동적 현실을 동시에 넘나들면서, 이들을 매 순간 다시 시작될 수밖에 없는 현재진행형의 영속성을 띤 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또한 ‘영원한 현재’의 실천적 예감과 다짐으로 “기다림”의 의미를 “바꾸어버리”려는 시인의 미래지향적 기투가 가장 밀도 높게 응축된 ‘말꽃’의 이미지일 것이다. 더 나아가, 「즐거운 편지」는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시와 예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으로서의 ‘신성한 잉여’, 그 ‘진리-사건의 자리’를 말없이 내비치고 있는 문제작인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기다림”이라는 탁월한 이미지를 새롭게 발명함으로써, 그것에 수반될 수밖에 없을 ‘현재진행형’의 영속적 과정과 더불어 ‘불가능’의 지속적 상태를 동시에 암시하는 빼어난 성취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자리야말로, 「즐거운 편지」의 숨겨진 존재 가치가 새롭게 발현되는 장소일 것이며, 그것의 은폐된 문학사적 위상이 최초로 명명되는 특이점의 자리라고 공개 선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 황동규는 「즐거운 편지」를 등단작으로 내놓았던 1958년에도 물론 청년이었지만, 지금-여기, 2024년 봄에도 언제나 늘 한결같은 청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영원한 현재’의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내 기다림의 자세”를 자기성찰의 회로 속에서 되새기면서 매 순간 “거듭남”을 이행할 수 있는 자리, ‘영원한 현재’를 이루려는 의욕으로 가득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참된 시인이란 언제나 늘 “변화”의 과정을 이행하려는 “거듭남”의 존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황동규 시 마디마디에 깃든 활발발(活潑潑)의 생생하고 아름다운 탄력, 그 ‘영원한 젊음’의 생명력이 “기다림”에서 오는 까닭 또한 이와 같다. 그에게 “기다림”이란 영원히 종결되지 않을 ‘형이상적 그리움’일 수밖에 없기에. 아니, ‘자아 성장’을 끊임없이 추동하는 정신의 도약대이자 결코 가닿을 수 없을 ‘불가능’ 그 자체일 것이 틀림없기에.
시인은 ‘다른 미래’로 나아가려는 자신의 “그칠” 수 없는 “사랑”, 그 ‘불가능’의 자리로 열린 “기다림”의 과정만이 시의 태반(胎盤)이자 예술의 귀소(歸巢)라는 진리를 찰나의 순간조차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온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즐거운 편지」의 그 풋풋한 청년 시절로부터 「날개 비벼 펴고」의 원숙한 현재 시점에 이르기까지,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을 부단히 유지해 온 것으로 헤아려지기 때문이다. “날개 새로 비비 펴는”에서 가장 도드라진 윤곽선으로 솟아오르는 최근 시집의 이미지 능선, 그 상승감의 “휘몰이바람”이 생생하게 예증하는 것처럼. “보통 나비”의 “몸부림”으로 아로새겨진 마음 성장의 ‘끝나지 않을 미래’이자 ‘영원한 현재’ 속에서 울려 퍼질, 저 신실한 내면의 목소리가 그러하듯.
그리하여, “다 함께 다시 한번 공중으로 날아오를 수 있을까”라는 의문 어법을 타고 흐르는 간절한 마음 성장의 욕구가 드리워놓는 ‘감응의 빛살’이란 그 휘황한 광휘만큼이나 아름답다. 그것은 ‘다른 미래’로 나아가려는 현재진행형의 아이러니를 기꺼이 살아내려는 자의 아름다운 뒷모습, 그 순도 높은 자기 충실성으로 첨예하게 벼리어져 있기 때문이다. “날개로 날든 몸통째 날리든”이 내뿜는 생의 원초적인 약동, “자욱이 흩날리”는 “꽃잎들”이 선사하는 저 엘랑 비탈(élan vital)의 처연한 “몸부림”처럼,
바람이 이는가, 꽃잎들 자욱이 흩날린다.
한창때는 그들이 날아다니는 벽화였지.
꽃잎들 땅에 내려 뒤집히다 말다
꽃길 하나 깔리네.
이즈음 꽃 지는 기척에 왜 이처럼 신경 쓰이는지.
마지막 날이 오면 나비나 벌처럼 조그맣고 가벼운 것이 되어
꽃잎들에게 바쁘면 먼저 자리 뜨게! 하고
혼자 천천히 날아갈 텐데
독무 멋지게 추고 자리 뜨는 모양새도 춤이 되는
호랑나비는 못 되어도
꽃비 맞고 황홀해져 날개 새로 비비 펴는 보통 나비가 되어
날아가다 꽃길에 슬그머니 몸을 눕힐 수는 없을까?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삶의 짐 다 부려놓고 홀가분하게 누워 있는 꽃잎들.
휘몰이바람 불 때
다 함께 다시 한번 공중으로 날아오를 수는 없을까,
날개로 날든 몸통째 날리든.
「날개 비벼 펴고」 전문, 『오늘 하루만이라도』(문학과지성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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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넘어 ‘우리’가 된 풍경과 마음 ―길상호 시집, 『왔다갔다 두 개의』, 시인의 일요일, 2024. ―박경희 시집, 『미나리아재비』, 창비, 2024. 박형준 로베르트 발저는 셋방을 전전하면서도 작가로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다락방에서 살기 원했다. 나에게 그의 책 『산책자』(한겨레출판, 2017)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빌케 부인」의 한 단락이다. 셋방살이를 하던 집주인 할머니가 죽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오후에 주인공이 그녀의 텅 빈 방에 들어가 주인을 잃고 용도가 사라진 옷가지와 소지품을 바라보는 장면이었다. 이제 이 세상을 떠난, 하지만 자신에게 조금은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 집 주인 할머니가 텅 빈 방에 남기고 간 옷가지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생의 이면에 어른거리는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깊은 애수가 느껴졌다. 발저는 이 작품에서 한 번이라도 가난과 고독을 경험한 사람은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타인의 가난과 고독을 더 잘 이해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의 불행이나 고통, 그리고 타인의 무력함과 죽음을 조금도 덜어 주지 못하지만 최소한 타인을 이해하는 법이라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번에 읽은 두 권의 시집인 길상호의 『왔다갔다 두 개의』(시인의 일요일, 2024)와 박경희의 『미나리아재비』(창비, 2024)에서 자신과 타자가 체험을 통해 서로 응시하고 격려하는 장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비록 그 만남이 상처나 누추함에서 완벽하게 벗어나게 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그 만남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며 내가 아닌 우리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의 세계는 규율과 계획에 의해 설계된 대도시와는 멀리 거리를 두고 있다. 이들은 그것들에 의해 부서지고 상처 입은 시간들을 끌어모아 과거를 향해 아득한 시선을 던지고 있으며, 그 속에 삶의 절규가 살고 있음을 우리에게 각인시킨다. 길상호의 시집이 은둔자의 삶과 그 안의 고독의 심연을 빼어난 서정으로 보여 주고 있다면, 박경희의 시집은 ‘나’를 지운 자리에 ‘우리’를 들어앉히며 버려지고 상처 입은 과거가 사라진 것도 그 자체의 형상을 잃은 것도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의 감응으로 전해 준다. 우리는 이들의 시로부터 대도시에서 외면당하고 추방된 사물들이 간직한 최초의 움직임을 다시 만날 수 있으며, 그 사물들과 어우러진 장면과 추억들이 경이로운 생물과 마찬가지로 살아 움직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풍경과 마음의 혼융―길상호 시집 『왔다갔다 두 개의』 길상호 시의 특징 중 하나는 시에 나타난 풍경 묘사가 곧 시적 화자의 마음의 상태라는 점이다. 그는 언어의 연금술사처럼 풍경이 자기 존재가 되고 그 풍경 속에서 다시 자신의 존재가 무한하게 흩어지거나 확대되는 지점을 지극히 섬세한 감각으로 보여 준다. 난해하거나 복잡하지 않은 나직나직한 이미지의 단순성과 리듬으로 자신의 심정을 풍경화하는 그의 시는 주체와 타자가 분리되지 않는 말의 오묘한 상태에 닿아 있다. 겨울잠이 풀리고 강변의 진흙은 아가리를 벌린다 물안개가 만든 꿈속을 오래 어슬렁거리느라 진흙은 배가 고프다 진흙의 아가리에 침이 고이고 검고 부드러운 입술엔 어떤 밤이 뜯어 먹다 남긴 고라니의 앞다리 두 개가 물려 있다 두툼한 뒷다리 두 개는 더 먼 곳까지 가서야 피의 걸음을 놓았다 진흙은 이빨 없이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음미하면서 목마르게 끝난 짐승의 죽음을 소화시킨다 털과 가죽과 뼈와 발굽 고라니를 물가로 이끌던 아픈 육체 진흙의 아가리 속으로 두려웠던 시간이 긴 발자국 유서와 함께 서서히 사라진다 ―「진흙이 입을 벌릴 때」 전문 이 시의 화자는 언 강물이 풀린 초봄에 강변에 나와 있다. 화자는 얼었던 강이 녹으며 진흙으로 변해 버린 강변을 거닐며 주변의 풍경을 바라본다. 시에 물안개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직 완연한 봄이 온 것 같지 않다.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그래서 두 계절이 함께 있는 환절기가 이 시의 배경일 듯싶다. 이런 때일수록 남아 있는 추위가 더 춥게 느껴지면서도 또 한편으로 봄을 고대하는 심리 역시 상승하기 마련이다. 화자는 그 양가감정 속에서 강변에서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 물이 풀리며 강변은 녹기 시작한 진흙 덩이로 어수선한데 화자는 물안개가 걷히자 진흙 속에 고라니 사체가 빠져 있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진흙에 점점이 찍힌 고라니 발자국도 눈에 띈다. 아직 겨울의 냉기가 남아 있는데도 진흙은 볕에 풀리며 아주 천천히 고라니 사체와 발자국을 삼킨다. 이 시는 아마 위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을까 추측된다. 그러나 시 어디에도 ‘나’는 보이지 않는다. 황량한 강변의 초봄 아침에 진흙이 고라니의 사체를 삼키는 풍경 묘사를 감정의 동요 없이 객관적 시 쓰기로 전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 시를 읽으면 시인의 마음이 보인다. 안타깝고 슬픈 장면인데 이상하게 평안하고,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내적으로 힘찬 생명력이 느껴진다. 시인은 겨울에 다른 짐승들에게 사냥당할 위기에 처한 고라니가 본능적으로 물가까지 도망치다가 강물 위에 얼어붙은 채로 죽어 있던 사건과 봄이 되어 진흙이 풀리면서 고라니가 그 속으로 빠져드는 장면을 담담하게 전달한다. 그러나 이 시를 끌고 가는 주체가 진흙만은 아니다. 이 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 읽을 수 있다. 첫 번째는 겨울을 견딘 진흙이 녹아 가는 과정을 “물안개가 만든 꿈속을 오래 어슬렁거리”다가 “아가리”를 벌리는 것으로 시작하여 육식성이 부여된 진흙이 “검고 부드러운 입술”로 “어떤 밤”에 사냥당하여 갈가리 찢긴 채 죽은 고라니의 앞다리 두 개를 삼키는 장면까지이다. 여기까지는 진흙이 시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고라니의 앞다리 두 개가 물려 있다”의 뒤에 다른 연으로 분리된 “두툼한 뒷다리 두 개는 더 먼 곳까지 가서야/ 피의 걸음을 놓았다”에서 주체가 고라니로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냥을 당해 갈가리 찢긴 고라니는 앞다리 두 개를 진흙 앞에 걸치고 있지만, 마치 강 저편으로 던져진 듯이 두툼한 뒷다리 두 개는 강물 위에 “피의 걸음”을 흩뿌려 놓고 있다. 진흙은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끝난 생명을 아주 천천히 음미하면서 소화한다. 그런데도 강물에 얼어붙은 채로 털과 가죽과 뼈와 발굽으로 형해화된 고라니는 자신이 언 강가에 피와 함께 남긴 발자국을 유서처럼 간직한 채 왕성하게 입을 벌리는 봄기운이 맹렬하게 싹트는 진흙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결혼식에 갈 땐 로션을 장례식엔 스킨을 조금 발라주세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함께 행진하는 날엔요? 그런 날은 좀체 없다니까요, 아, 저에겐 그런 날뿐인걸요 ―「로션과 스킨」 부분 대야에 비친 자신을 사랑하세요, 다른 얼굴이 보여도 그냥 주워 사용하세요, 미끄러운 날은 금방 지나갈 거예요. ―「이거 좋은 거예요」 부분 이정현의 시집 해설에 따르면 길상호의 이번 시집은 심한 병증 가운데 씌어졌다고 한다. “피 한 방울로 다 알 수 있어요”(「혈당검사 수첩」)라는 시행이 말해 주듯, 길상호 시인은 면역 체계가 흐트러지는 원인 불명의 병에 걸리면서 매일 약을 먹어야 하고, 책을 읽을 수도 없고, 하루에도 세 번 혈당 수치를 재야 한다고 한다. 이 시집에는 그러한 임상 기록을 담은 시편들, 함께 살던 여러 마리의 고양이를 떠나보낸 사연과 “남은 고양이 꽁트”(「시인의 말」) 등 자신의 병적 기록과 함께 주변 사람들과 반려동물에 대한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용한 「로션과 스킨」은 로션과 스킨이라는 메타포를 이용해 삶과 죽음이라는 특징을 결혼식과 장례식으로 드러내면서 죽음과 삶이 함께 행진한다는, 그 양자를 넘나들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한다. 또 「이거 좋은 거예요」에서는 아픈 삼촌을 위해 비누를 사 온 조카의 말을 통해 “대야에 비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이 무엇인지를 간접적이지만 나직하게 전해 준다. 아마도 시인은 조카가 선물한 비누로 아침마다 얼굴을 씻으며 대야의 물속에서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자신의 모습과 조우할 수 있으리라. 시집의 마지막 시편에 나타나듯 절망이 우리를 ‘빗에 사이사이 끼는 때’처럼, “저 수심 깊은 대야”에 던져 버리려고 하더라도 삶의 책은 “페이지가 차르륵 젖어 더는 읽을 수 없더라도, 포스트잇으로 표시를 해 두었으니”(「독서는 금지」) 언제든 다시 이어 갈 수가 있다. 하여, 나는 시인이 「진흙이 입을 벌릴 때」에서 진흙 속으로 사라진 고라니의 “긴 발자국 유서”를 절망을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로 읽으며, 당신은 멀리 있지만 “우리라는 말이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이도 저도 아닌 것들」)라는 따뜻한 말과 시로 다시 뜨겁게 이어져 가고 있다고 믿는다. 시로 쓴 마을사―박경희의 시집 『미나리아재비』 박경희의 『미나리아재비』를 즐겁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읽었다. 아니, 반대로 안타까웠지만 즐겁게 읽었다고 해야 되리라. 박경희의 시집에는 토속어나 순우리말이 시 중간중간에 별처럼 박혀 있어 시를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예를 들어 한 행으로 된 시 “사그랑이 된 바구니는 굴러다니고 기스락물이 깍짓동에 떨어진다”(「그렇게라도 짖어보는 것이다」)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삭아 버린 바구니가 굴러다니고 낙숫물이 참깨나 콩대를 묶은 깍짓동에 떨어진다는 뜻일 게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시를 표준화하고 의미화시키면 원래의 시행이 가지고 있던 살아 움직이는 말맛이 사라져 버린다. 이 시집을 읽으며 모르는 토속어가 나오더라도 굳이 사전을 찾아가며 읽을 필요가 없다. 이 시집의 가장 큰 장점은 사람들 속에서 살아 있는 말들과 이야기이며, 그리고 그 말과 이야기가 어우러져 이뤄 낸 한 마을의 아득하고 신화적인 풍경이 살냄새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데에 있다. 박경희 시인은 우리가 모르는 말들, 사라져 가는 풍경들을 붙잡고 수집해 그것을 사유하고 이야기로 만들며 절대 잊히지 않는 살아 있는 이미지의 마을사로 창조한다. 책 속에 박제되어 시를 위한 시에 그치고 마는 이미지가 아닌, 책 속에서 걸어 나와 이미지가 삶이 되고 이야기로 번져 가는 진경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때로는 그렇게 태어난 시가 너무나 능청스러워 다음 시에 나오는 할머니처럼 읽는 동안 얼굴이 살짝 붉어지기도 한다. 저승 물길 헤치며 이승으로 돌아오다가 육지 문턱에서 쓰러졌다 부여잡은 가슴에 갈고리달이 박혔는지 뽑히지 않았다 파도가 일 때마다 세상 온갖 별이 눈물로 흥건했다 울컥울컥 올라오는 바닷물을 토하며 새삼 물질하던 당신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옴마, 살았네 살았어 저승 돈 벌어 온다더니 저승 갈 뻔했다고 영감 죽은 지 십 년 만에 남정네와 입 박치기 했다는 말에 얼굴 벌게지던 할머니가 웃으며 병원 차 타고 갔다 바다가 잠시 숨 멈춘 순간이었다 ―「바다, 잠시 숨을 멈추다―구룡포 해녀들의 숨비」 전문 박경희의 이번 시집은 위의 시가 보여 주듯 죽음과 또는 죽음 근처까지 간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해학스럽지만 감칠맛 있게 전해 준다. 슬픈데 웃음이 나오는, 웃음이 나오는데 슬픈 이야기들이 서로 어우러져 어떤 순간에는 손에 땀이 배기도, 농사꾼을 홀대하는 사회에 화가 치밀기도, 그러다가 서로의 마음을 가만가만 짚어 주는 따스함에 슬픔이나 분노가 눈 녹듯이 사라지게 한다. 위 시만 해도 그렇다. 아마, 이 시를 영화로 옮긴다면 할머니 해녀가 저승 돈 벌어 온다고 물질하다가 그만 심장에 이상이 생겨 젊은 구조대원으로부터 인공호흡을 받는 장면에선 그것을 지켜보는 동네 사람처럼 우리들도 숨도 못 쉬고 가슴을 졸였을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가 깨어나자마자 환호성이라도 지를 듯 “옴마, 살았네 살았어” 하면서 “영감 죽은 지 십 년 만에/ 남정네와 입 박치기 했다”고 동네 사람들이 놀리는 장면에선 우리들도 신나서 박수를 쳤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인 바닷속에서 죽었다 살아 나온 할머니가 그만 그 소리에 얼굴이 빨개졌다가 웃으며 병원 차를 타고 가는 모습에서 우리는 비극일 수 있는 사건이 해학으로 바뀌는 살아 있는 입말의 마술적인 힘에 감탄했을 것이다.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는 귀족의 화려한 파티에 참석했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강풍이 몰아쳐서 집이 순식간에 무너져 사람들이 죽게 되자, 대리석이나 돌 더미에 깔려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죽은 자들의 이름을 그들이 앉았던 자리를 기억해 내어 하나하나 호명하며 시를 짓고 시체의 주인을 찾아 주었다고 한다. 그는 파티 풍경을 한 장의 그림으로 기억 속에 간직했던 것이다. 그는 이후 기억의 시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시모니데스에게 시란 ‘이야기하는 그림’이다. 박경희의 이번 시집에서 만나게 되는 것도 이 ‘이야기하는 그림’이다. 그의 시는 위의 시에서처럼 매우 쉬운 말과 친근한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그런 이야기를 한 장의 사진처럼 이미지에 압축해서 빼어난 서정의 구조로 들어앉힌다. 그래서 시의 주어가 ‘나’가 아니라 ‘우리’가 된다. 특히 제2부의 시편들은 “동네 막내 강 씨 아저씨”(「동네 막네」)가 환갑을 넘을 정도로 도회지와 단절된 마을에서 코로나 팬데믹으로 마을 사람들 모두가 ‘마스크’를 써야 하는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보여 준다. “오디에도 역병이 보이지 않는”데 마스크를 써야 하고 매달릴 사람이 전부 다 이승에 없어, “그저 무탈하게 지나가길 바랄 뿐 뭐가 있간 에휴, 참말로 지랄맞은 세상이여”(「워쩌겄어」)라는 마을 노인의 체념과 한탄에서 우리 농촌 현실의 적나라한 실상과 마주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마을은 할아버지가 글을 몰라도 서울로 병 고치러 간 아내 소식이 궁금하여 ‘소 다섯 마리 그림’(「오소」)을 그려 편지로 보내면 그걸 받고 할머니가 소 걱정으로 애가 달아 금세 내려오는 곳이다. 서로 간에 이심전심이 통하는 곳이며, 자신이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할아버지의 능청이 글이나 인터넷보다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곳이다. 마루에 앉아 머윗대 껍질을 벗기면서 저승 갔으면 그쪽 세상에서 잘 살 일이지 이승은 왜 들락거리느냐고 보이지도 않는 분 타박이다 살았을 적에 그리 모질게 마음고생시키더니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이승 문턱을 넘느냐고 사발째 욕을 퍼붓는데 옆에 있던 내가 슬금슬금 비키니 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제집만 들락거렸다. ―「꿈자리」 부분 어머니의 꿈에 아버지가 나타나자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인데도 남편을 타박한다. 살았을 적에도 그렇게 마음고생을 시키더니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이승의 문턱을 넘느냐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슬금슬금 마루에서 비켜나자 마루 밑에선 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제집만 들락거리며 안절부절이다. 죽은 사람조차도 잘못하면 타박을 받고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걱정하는, 자연의 생명과 사람이 한데 이어진 이곳은 현대인들에겐 아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세계일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전설 같기도 하고 신화 속 같기도 한 그 세계가 무너져 가더라도 그 큰 몸집을 지탱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안간힘으로 받쳐 든 벽에 선명하게 찍힌 손자국”(「손자국」) 같은 결기 어린 모습으로 우리들의 이야기를 선명한 그림처럼 들려주고 있다.
수많은 노래는 한 사람의 울음에서 시작되었다 고(故) 신경림 시인을 추모하며 1. 1970년대 민중시와 『농무』의 발견 창비시선 500번을 기념하는 특별시선집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신경림 외 지음, 창비 2024)이 올해 3월 출간되었다. 이 시선집 제목은 신경림의 시 「그 여름」에서 따온 것이다. 한 사람의 울음이 온 마을에 울음을 불러오고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고을에 노래를 몰고 왔다 구름을 몰고 오고 바람과 비를 몰고 왔다 ―「그 여름」(『농무』) 부분 온 거리에 울려 퍼지는 ‘노래’는 ‘한 사람의 울음’과 ‘한 사람의 노래’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노래는 구름과 바람과 비를 몰고 오면서 사람뿐 아니라 천지만물에 가닿았다. ‘울음’과 ‘노래’가 지닌 이러한 확장력을 떠올려볼 때, 신경림의 『농무』(창작과비평사 1975)가 50년을 이어온 창비시선의 출발점이었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1970년대 중반은 『창작과비평』이 시민문학론에서 민족문학론으로의 전환을 모색하면서 민중시의 새로운 모델을 필요로 하던 시기였다. 『농무』의 발문에서 백낙청은 시집 『농무』의 완성을 “민중적 경사”라고 말하며 “그의 많은 작품들은 리얼리스트의 단편소설과도 같은 정확한 묘사와 압축된 사연들을 담고 있는 동시에 민요를 방불케 하는 친숙한 가락을 띠기도”1) 한다고 상찬했다. 1960년대 김수영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던 그가 “민중이 잘 알 수 없는 ‘난해한’ 문학”2)을 경계하며 난해하지도 저속하지도 않은 시의 미덕을 신경림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1974년 『농무』가 제1회 만해문학상 수상작이 된 것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염무웅은 신경림 시의 민중성이 ‘체험적 현실’에서 나왔음에 주목하고, “자기 현실과의 정직하고도 치열한 대결을 통해 위장하거나 은폐되지 않은 민중 자신의 목소리가 긴밀한 시적 형상을 획득”3)했다고 보았다. 신경림은 이처럼 농촌의 현실을 구체적이고 핍진한 언어로 그려낸 시뿐 아니라 「농촌현실과 농민문학」 「문학과 민중」 등의 평론을 발표하며 농민문학론을 개진하기도 했다. 1970, 80년대는 신경림을 비롯해 이성부, 조태일, 김지하, 정희성, 이시영, 김준태, 김남주 등이 민중시의 새로운 방향성을 만들어나간 시기였다. 이러한 흐름의 첫 물꼬를 튼 시집이 바로 신경림의 『농무』였다. 2. 노래와 이야기, 시의 씨줄과 날줄 염무웅의 「무엇이 민중성의 시적 구현을 가능하게 하는가」는 『농무』가 출간된 지 30년 만에 이 시집의 역사적 위치를 한층 넓은 원근법 속에서 읽어낸 글이다. 그는 한국시가 지닌 민중성의 사회사적 근거와 맥락을 밝히면서 신경림 시의 독특한 화법과 시언어의 조직원리를 분석한다. 먼저 「그날」에 대해서는 “고도의 정치적 비판을 함축하고 있으”면서도 시의 화자가 직접 드러나지 않은 채 “순차적으로 카메라 앵글을 돌리는 장면화(場面化)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미장센 구성에 성공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한행을 하나의 율격 단위로 할 때 3음보의 율격을 지닌 「그날」과 4음보의 율격을 지닌 「경칩」이 율격이나 분위기가 사뭇 다르지만, “엄밀하게 계산되고 통제되는 구심적 조직”4)을 지녔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러한 분석은 농촌이라는 소재와 민중성이라는 주제, 인물의 정동을 중심으로 『농무』를 이해해온 기존의 관점을 시의 구성원리나 재현방식 등으로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유종호는 「서사 충동의 서정적 탐구」에서 신경림 단시의 특징을 “서정적인 주조에 서경(敍景)이 추가되고 그 속에 서사(敍事)적 충동을 내장하고 있”5)다고 설명했다. 그는 신경림의 시적 성취가 서정성과 서사성의 균형에서 비롯되었다며 선행 시편들의 전통 속에서 『농무』의 문학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농무』의 시들이 생활의 실감과 시어의 평면성으로 1950년대 모더니즘 계열 시편의 난해성을 산뜻하게 극복했을 뿐 아니라, 가난한 삶에 대한 결곡한 정감과 간결한 서경을 통해 추상적 구호와 격문에 가까운 현실주의 생활 시편의 전통 역시 넘어섰다는 것이다. 신경림의 시에서는 서정과 서사, 노래와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이며 절묘한 균형을 이룬다. 특히 신경림의 전기시에서 ‘이야기’의 산문성을 견제해내는 ‘노래’의 형식이란 주로 ‘민요’의 계승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민요적 정서’와 ‘정형(定型)에의 의지’가 긍정적 효과만 가져왔던 것은 아니다. 염무웅의 지적처럼 “민요는 김소월에게 있어 그러하듯이 신경림의 문학에 있어서도 창조성의 발현을 구속하는 억압이자 모국어가 지닌 가능성의 최대치로 인도하는 통로인 양날의 칼”6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음수율과 음보율, 행의 배치 등이 규칙적으로 분절된 시보다는 규칙성을 일부 허물거나 시행을 어긋나게 배치한 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헐거나. 술에라도 취해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다오 우리를 파묻어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편지라도 띄워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볼거나. ―「겨울밤」(『농무』) 전문 『농무』 첫머리에 있는 이 시는 ‘겨울밤’과 ‘새하얀 눈’을 대비하면서 농민들의 체념과 울분을 실감있게 전달하고 있다. ‘어떡헐거나’ ‘취해볼거나’ ‘맡아볼거나’ ‘쳐볼거나’ ‘먹여볼거나’ 등 반복되는 종결어미는 각운의 역할을 대신하며 ‘우리’의 정서를 리드미컬하게 변주해낸다. 시인은 이러한 종결어미의 반복으로 읽기의 유창성을 만들어내는 한편, 중간중간에 시행을 일반적인 호흡과 어긋나게 배치함으로써 의미를 낯설게 하거나 정서적 긴장감을 조성한다. 3행과 4행, 5행과 6행, 9행과 10행, 11행과 12행, 19행과 20행, 20행과 21행, 24행과 25행 사이에 나타난 주어부와 술어부 또는 수식어와 피수식어의 행갈이가 그런 예들이다. 마침표의 잦은 사용이나 단어의 도치 등도 행과 행 사이에 단속적 흐름을 만들어낸다. 단어나 시행을 엇갈리게 배치하는 앙장브망(enjambement) 기법은 「겨울밤」 외에도 「시골 큰집」 「원격지」 「씨름」 「산1번지」 「이 두 개의 눈은」 「1950년의 총살」 「장마 뒤」 「산읍일지」 「산읍기행」 「갈대」 「묘비」 「심야」 「유아」 「사화산·그 산정에서」 「추방」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누군가」 등 상당히 많은 시들에 나타난다. 이것은 김수영의 후기시에서 연의 길이를 균질하게 하는 대신 앙장브망을 통해 시행 사이의 불규칙성을 강화하던 것7)과 유사한 방식이다. 신경림 역시 행과 연을 단위로 리듬의 규칙성과 불규칙성을 탄력적으로 조율하고 변주함으로써 정서나 의미를 섬세하게 표현해낸다. 이러한 모더니스트적 면모는 신경림을 단순한 민중시인, 민요시인으로 이해하는 것을 재고하게 한다. 1973년에 이루어진 한 좌담에서 백낙청은 신경림의 시가 서사성과 지적 콘트롤이 강하고 현대적 언어감각을 지녔다는 점에서 신동엽보다는 김수영과 친연성이 강하다고 말한다.8) 시인 자신도 나중에에는 “민요와의 접목은 내 시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고 “내가 민요에 집착한 80년대 전 기간이 내게는 시 쓰기가 가장 어렵고 지루한 시절”9)이었다고 회고했다. 신경림 시에서 민요 가락이 집중적으로 나타난 것은 『새재』(창작과비평사 1979)와 『달 넘세』(창작과비평사 1985), 그리고 장시집 『남한강』(창작과비평사 1987)에서다. 『민요 기행』 1, 2권(한길사 1985, 1989)이 나온 것도 이 세 시집이 출간된 시기와 거의 겹친다. 이 무렵 신경림은 민요를 찾아 채록하면서 전통적 민예 양식의 시적 가능성을 탐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노력이 집대성된 『남한강』에서 시인은 서정적 단시의 서사성을 한편의 장편서사시로 확장하면서 민요의 리듬을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신경림이 민요적 정서나 형식에 대한 중압감에서 자유로워진 것은 기행시집 『길』(창작과비평사 1990)을 펴낸 이후였다. 『길』까지는 여전히 「정선아리랑」 「산유화가」 등 민요를 제목으로 삼은 시가 보이고, 민요 기행에서 만난 노래꾼을 포함해 다양한 인물과 장소를 담고 있다. 그러나 민요적 후렴구의 기계적 반복이나 정형화된 리듬의 강박으로부터는 한결 자유로워진 듯하다. 인물서사가 주를 이루고 있긴 하지만, 『길』의 거의 모든 시에 붙어 있는 부제들은 다양한 장소성을 보여준다. 『신경림 시전집』 1권은 『길』로 끝나고 2권은 『쓰러진 자의 꿈』(창작과비평사 1993)으로 시작된다. 이 두 시집의 제목처럼 신경림의 후기시는 ‘길’ 위에서, ‘쓰러진 자의 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3. 길 위에서 부르는 노래와 시의 장소성 2000년대 이후 신경림에 관한 연구에서 가장 두드러진 주제는 ‘장소성’이다.10) 『농무』의 장소성이 농촌, 장터, 공사장, 폐광 등을 중심으로 한다면, 시인이 서울로 이주한 뒤 펴낸 시집들에서는 산동네, 수몰지역, 휴전선 등의 장소성이 두드러진다. 『쓰러진 자의 꿈』 이후로는 특정 장소를 부제로 밝혀둔 기행 시편이 많고, 부제가 없더라도 여행 중에 만난 풍경이나 사람의 비중이 커진다.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신경림의 전기시가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향(離鄕)’과 공동체의 상실을 다루고 있다면, 후기시는 지방 또는 해외로의 ‘기행(紀행)’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늘 떠나면서 살았다, 집을 떠나고 마을을 떠나면서. 늘 잊으면서 살았다, 싸리꽃 하얀 언덕을 잊고 느티나무에 소복하던 별들을 잊으면서. 늘 찾으면서 살았다, 낯선 것에 신명을 내고 처음 보는 것에서 힘을 얻으면서, 진흙길 가시밭길 마구 밟으면서. ―「나의 신발이」(『낙타』) 부분 신경림의 기행시는 단순한 유랑이나 관광의 기록과는 거리가 멀다. 그에게 떠남이란 익숙한 것을 잊고 낯선 것을 찾아나서는 ‘탐구의 행위’다. 이와 동시에 상류를 향해 가는 연어처럼 “떠난 것을 그리워하고 잊은 것을 그리워하면서”(「나의 신발이」) 본원적인 시간과 장소를 되찾아 나서는 ‘회귀의 여정’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신경림의 기행시는 미셸 푸꼬(Michel Foucault)가 말한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를 지향한다. 푸꼬는 현실화된 유토피아적 장소를 ‘헤테로토피아’라고 불렀다. 없는(u) 장소(topia)라는 뜻의 ‘유토피아’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헤테로토피아를 제시한 것이다. 유토피아가 실재하지는 않지만 균질한 언어와 질서를 지닌 상상적 공간이라면, 반대의(hetero) 장소(topia)라는 뜻의 헤테로토피아는 모호하고 혼란스럽고 비균질적이지만 실재하는 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헤테로토피아는 일상의 배치와는 다른 ‘바깥의 공간’이자 현실을 전복하는 ‘반(反)공간’이다.11) 엄경희는 “산업화로 인한 농촌붕괴를 ‘경관훼손’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고 “고향의 장소성에 내재된 헤테로토피아적 전망을 아이들의 장소점유방식을 통해”12) 분석했다. 『농무』부터 『쓰러진 자의 꿈』까지는 기행의 장소가 주로 국내에 한정되었다면,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창작과비평사 1998)에서는 중국, 베트남, 일본 등의 기행 시편들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반추한다. 『뿔』(창작과비평사 2002)『낙타』 『사진관집 이층』(창비 2014)에서는 그의 발길이 아시아뿐 아니라 몽골, 네팔, 튀르키예를 넘어 프랑스, 미국, 콜롬비아 등 세계 곳곳으로 향한다. 연보를 살펴보니, 신경림은 1993년(58세)에야 출국금지가 풀려 해외에 나갈 수 있게 되었고, 그의 시집이 프랑스어판, 영어판, 독일어판 등으로 번역 출간되면서 현지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경을 넘어 세계화의 현장을 폭넓게 목도하면서도 그는 줄곧 한국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떠올린다. 첫날은 날뛰는 미국 사람들이 무서워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연 지 얼마 안된다는 중동인이 경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양고기로 점심을 먹고, 둘째날은 자동차 산업의 몰락으로 유령도시가 된 디트로이트 살리기 운동을 펼치는 키가 큰 젊은 흑인을 만나 하이델베르크 프로젝트를 듣고, (…) 넷째날은 한국 절을 찾아가 부처님 앞에 예불을 드리고, 선거에서 대승한 부시의 오만한 얼굴을 텔레비전에서 보면서, 침방울을 튀기며 이라크 공격을 반대하는 한국서 군복무를 마쳤다는 젊은이와 한나절을 동행하면서, 장갑차에 깔려죽은 어린 우리나라 여중생 얘기를 하고. ―「미국기행」(『낙타』) 부분 미국 미시건을 여행 중인 화자는 첫째날부터 넷째날까지의 여정을 언급하면서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들려준다. 특히 둘째날 만난 “디트로이트 살리기 운동을 펼치는/키가 큰 젊은 흑인”과 넷째날 만난 “이라크 공격을 반대하는/한국서 군복무를 마쳤다는 젊은이”는 화자와 경계인으로서의 위치를 공유하는 인물들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과는 “장갑차에 깔려죽은 어린/우리나라 여중생”에 대해 얘기를 나눌 수 있다. 부시의 압도적 승리와 이라크전쟁 등 세계사의 착잡한 위기상황 또한 시인의 여정에 기입되어 있다. 이때 화자는 세계사의 중심도 주변도 아닌 ‘반(半)주변인’13)의 위치에 서 있다. 신경림의 기행시에서 화자의 시선이 주로 머무는 곳은 자본주의와 세계화가 만들어낸 균질화된 공간이나 화려한 장관이 아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학살당한 사람들의 수천수만켤레 신발들이 쌓여 웅성웅성 떠들고 있”(「신발들」, 『사진관집 이층』)는 소리를 듣거나, 캄보디아에서 “함지박 배를 저어 관광선을 따라오며 원 달러 하고 내미는 소년의 손”(「위대한 꿈」, 『사진관집 이층』)이 시인의 눈과 마음에 더 깊이 들어와 박힌다. 베트남 전쟁박물관에서 “제국주의자들이 버리고 도망간/흉측한 장갑차”를 보며 “호주머니 속에서/일달러짜리 지폐를 거머쥔/내 손”(「전쟁박물관」,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이나, 코카 비치에서 휴양객들을 실어 나르고 “달러를 받아쥐는/씨클로꾼들의/땀에 절은 야윈 손”(「코카 비치」,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이나 무력하게 젖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런가 하면 콜롬비아의 도시 메데진에서 산비탈에 달라붙은 움막집들과 케이블카로 그곳을 오르내리는 초췌한 사람들을 보며 화자가 떠올리는 것은 “물지게를 지고 비탈을 올라오던” “아내의 맨발”(「누군가 보고 있었을까, 아내의 맨발을」, 『낙타』)이다. 이처럼 반주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로컬과 주변부의 삶이야말로 신경림이 『농무』 이후로 일관되게 함께해온 가난하고 소외된 존재들의 것이다. 시에 포착된 주변부와 주변인이 대상화되지 않고 자연스러운 공감을 주는 것은 시인이 자신을 그 존재들의 일부로 또는 혈육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먼 나라의 이국적 풍물 앞에서도 한국의 아픈 현실을 떠올리는 시인은 떠남으로써 돌아오고, 잊으려 함으로써 더 생생한 기억에 도달하는 역설을 경험하게 된다. 4. 역사공동체에서 생태공동체로 후기시의 출발점인 『쓰러진 자의 꿈』은 1990년대 동구권의 몰락 이후 변화된 세계에 대한 시인의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한두연으로 된 단시가 많고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역사공동체에서 생명공동체로의 확장이 이 시집부터 시작되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신경림 시에 나타난 생태주의적 인식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편이다. 그런 점에서 ‘평등적 관계성’ ‘자발적 생성과 상호부조’ ‘자유 자연의 지향’ 등을 키워드로 신경림의 생태주의적 사유를 해명한 김동명의 논문은 주목할 만하다.14) 다만, 미국의 사회이론가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의 사회생태주의적 관점이나 아나키즘 등을 이론적 논거로 삼아 인간의 윤리적 역할을 강조하다보니 인간중심주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듯하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길」(『쓰러진 자의 꿈』) 부분 『쓰러진 자의 꿈』의 첫머리에 실린 「길」에서 시인은 사회 변혁의 과정 속에 내재한 인간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다. 이 시의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이라는 대목에서 그의 시선이 사회나 역사 못지않게 인간 내면을 향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내적 성찰의 매개가 되는 것은 주로 자연물이다. 이 시집의 시 제목들만 일별해 보아도 냇물, 장미, 비, 파도, 싹, 겨울숲, 홍수, 아카시아, 임진강, 진달래, 진드기, 소백산의 양떼, 초승달, 난장이패랭이꽃, 오랑캐꽃, 별, 가을비, 새벽눈, 홰나무 등 다양한 자연물들로 되어 있다. 이제 자연은 인간의 욕망과 폭력을 되비추는 거울이자, 인간의 도움 없이도 생태적 질서와 공동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생명의 주체로 등장한다. 여든까지 살다 죽은 팔자 험한 요령잡이가 묻혀 있다 북도가 고향인 어린 인민군 간호군관이 누워 있고 다리 하나를 잃은 소년병이 누워 있다 등너머 장터에 물거리를 대던 나무꾼이 묻혀 있고 그의 말더듬던 처를 꼬여 새벽차를 탄 등짐장수가 묻혀 있다 청년단장이 누워 있고 그 손에 죽은 말강구가 묻혀 있다 생전에는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이들도 있다 부드득 이를 갈던 철천지원수였던 이들도 있다 지금은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묵뫼 위에 쑥부쟁이 비비추 수리취 말나리를 키우지만 철 따라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으면서 뜸부기 찌르레기 박새 후투새를 불러 모으고 함께 숲을 만들고 산을 만들고 세상을 만들면서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묵뫼」(『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전문 「묵뫼」에서도 인간의 죽음은 역사적 비극을 환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묵뫼가 피워낸 쑥부쟁이, 비비추, 수리취, 말나리, 그리고 꽃과 열매를 찾아 날아든 뜸부기, 찌르레기, 박새, 후투티 이 모두가 ‘생태공동체’의 구성원들이다. 이처럼 자연과 인간을 유기적 관계성 속에서 바라보게 된 것은 『농무』에 나타난 역사공동체가 생태공동체의 발견으로 이어진 결과다. 이러한 변화는 신경림뿐 아니라 1990년대 이후 한국시 전체에서 관찰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1980년대가 노동시·농민시·교육시 등 계층과 이념의 동질성을 바탕으로 한 집단적 발화가 활발하게 제기된 시대였다면, 1990년대는 집단에서 개인으로, 이념에서 감각으로 중심이 옮겨오면서 사회적 이상이나 공동체적 기반은 약화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단순히 공동체의 축소나 단절이라기보다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모색의 계기”15)였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뿔』 『낙타』 『사진관집 이층』 등 후기로 갈수록 환경오염의 폐해를 언급하며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는 시들이나 생태공동체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시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봄이 되어도 꽃이 붉지를 않고 비를 맞고도 풀이 싱싱하지를 않다. 햇살에 빛나던 바위는 누런 때로 덮이고 우리들 어린 꿈으로 아롱졌던 길은 힘겹게 고개에 걸려 처져 있다. 썩은 실개천에서 그래도 아이들은 등 굽은 고기를 건져올리고 늙은이들은 소줏집에 모여 기침과 함께 농약으로 얼룩진 상추에 병든 돼지고기를 싸고 있다. (…) 우리는 안다, 썩어가고 있는 곳이 내 나라만이 아니라는 것을. 죽어가고 있는 것이 내 땅만이 아니라는 것을. 저 시베리아의 얼음벌판에 내리는 눈에도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산이 섞여 있고 아프리카 깊은 원시림 외진 강에서도 눈이 하나뿐인 고기가 잡힌다는 것을. 미시시피 강가의 한 마을에서는 목뼈가 없는 아기가 줄이어 태어나고 외국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옛날엔 천국이 따로 없다던 남태평양의 섬에서도 에이즈와 암으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부분 “봄이 되어도 꽃이 붉지를 않고/비를 맞고도 풀이 싱싱하지를 않다”라는 도입부는 자연의 생기나 아름다움이 예전 같지 않고 순환적 질서 또한 깨졌음을 의미한다. 이어지는 시행에서도 “썩은 실개천” “등 굽은 고기” “기침” “농약으로 얼룩진 상추” “병든 돼지고기” “화약냄새” “가스냄새” 등 생활 깊숙이 배어든 환경오염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안다”로 시작하는 4연에 이르면, 썩어가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 내 땅만이 아니라 “시베리아의 얼음벌판에 내리는 눈” “아프리카 깊은 원시림 외진 강” “미시시피 강가의 한 마을” “남태평양의 섬” 등 세계의 극지까지 미치고 있음을 화자는 환기한다. 뒤이어서 지구를 언제 “잿더미로 만들지 모를 핵”의 위험을 “어리석은 불장난”에 비유하며 비판하기도 한다. 환경오염이나 기후위기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지구적 파국을 예감하면서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이 지구는 죽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땅 내 나라, 아니 온 세계가 이제 단숨에 흔적도 없이 날아가버릴 마침내 그 벼랑에까지 와 서 있다.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부분 5. 다시, 떠도는 자의 노래가 되어 들머리에서 인용한 「그 여름」은 “한 사람의 죽음이/온 나라에 죽음을 불러왔지만”이라는 구절로 끝난다. 이 역접의 마지막 문장은 완료되지 않았기에 다시 첫머리의 “한 사람의 울음”으로 연결되며 삶과 죽음의 순환 앞에 우리를 데려다놓는다. 지난여름 우리는 ‘신경림’이라는 “한 사람의 죽음”을 겪었다. 2024년 5월 22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시인의 빈소에는 수많은 추모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문학적 진영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시의 아버지’를 잃은 듯 애도했다. 추모사를 읽는 이들은 그가 한국시단의 거목이었지만 권위의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겸손함과 솔직함으로 누구나 평등하게 대해주었다고 입을 모았다. 그리고 평생 힘없고 가난한 이들의 편에서 소박한 생활감정을 노래하면서도 새로운 세계에 대한 탐구와 미학적 긴장을 놓치지 않았던 시인이었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래도 쓰러지고 깨지는 것들 속에 서 있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차피 시는 괴롭고 슬픈 자들, 쓰러지고 짓밟히는 것들의 동무일진대 이것이 크게 억울할 것은 없다. 최근 나는 시는 궁극적으로 자기탐구요 시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많이 하지만, 쓰러지는 자들, 짓밟히는 것들의 상처와 아픔을 어루만지고 흩어지는 것들, 깨어지는 것들을 다독거리는 일, 이 또한 내 시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16) 『쓰러진 자의 꿈』 후기를 읽어보면, 신경림의 시에 짓밟히고 고통받는 존재들의 울음소리가 왜 그토록 끊이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신경림 시인은 평생을 ‘우는 자’ ‘떠도는 자’로서 살았다. 그의 울음과 발길은 수많은 노래를 낳았고, 온 마을과 온 거리에 다른 노래들을 불러왔다. 신경림은 70년에 가까운 시력(詩歷)으로 한국 현대시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 곡진한 노래의 굽이와 갈피를 제한된 지면에서 충분히 다룰 수는 없지만, 길 위에 남아 있는 무수한 시의 발자국들을 떠올려본다. 그것은 낯설고 새로운 것을 찾아나선 자가 발견한 기록이자, 세상 저편에 놓고 온 무언가를 향한 그리움의 노래였다. 시인은 자신의 예언처럼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떠도는 자의 노래」, 『뿔』) 모르겠다. 애통하게도 그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신경림의 시와 정신을 기억하는 한 우리는 그가 사랑한 장소들, 좁은 골목이나 저잣거리, 쓸쓸한 나룻가에서 그의 노랫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시인은 ‘떠도는 자의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이기에.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떠도는 자의 노래」 전문1) 백낙청 「발문」, 신경림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114~15면.2) 백낙청 「문학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창작과비평』 1973년 여름호, 456면.3) 염무웅 「민중의 삶, 민족의 노래」, 구중서·백낙청·염무웅 엮음 『신경림 문학의 세계』, 창작과비평사 1995, 72면.4) 염무웅 해설 「무엇이 민중성의 시적 구현을 가능하게 하는가」, 『신경림 시전집』 1권, 창비 2004, 423~24, 426면.5) 유종호 「서사 충동의 서정적 탐구」, 『신경림 문학의 세계』, 57면.6) 염무웅, 앞의 글 428면.7) 김수영의 전기시와 후기시에 나타난 리듬구조의 변화에 대해서는 졸고 「김수영 시의 리듬구조에 나타난 행과 연의 문제」, 『현대문학의 연구』 제37호, 2009 참조.8) 김우창·김종길·백낙청 좌담 「시집 『농무』의 세계와 한국시의 방향」, 『백낙청 회화록』 1권, 창비 2007, 74~75면.9) 신경림 산문 「나는 왜 시를 쓰는가」, 『낙타』, 창비 2008, 125면.10) 신경림 시의 장소성에 대한 연구로는 송지선 「신경림의 『농무』에 나타난 장소 연구」, 『국어문학』 제51집, 2011; 강정구·김종회 「문학지리학으로 읽어본 1980년대 신경림 시의 장소」, 『어문학』 제117집, 2012; 박순희·민병욱 「신경림 시의 장소 연구」, 『배달말』 제54호, 2014; 송지선 「신경림 시에 나타난 장소 재현의 로컬리티 연구」,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64집, 2014; 고재봉 「신경림의 「농무」 계열 시에 나타난 장소성과 축제의 의미」, 『문학치료연구』 제49집, 2018; 조효주 「신경림 시의 장소 상실과 현실인식 연구」, 『한민족어문학』 제87호, 2020; 조효주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노래』에 나타나는 장소와 장소상실 연구」, 『현대문학이론연구』 제76집, 2019; 김미라 「산업화 시대의 이주와 새로운 거주 장소로서의 도시」, 『한국근대문학연구』 제25권 제1호, 2024 등이 있다.11) 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이상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 참조.12) 엄경희 「장소 점유와 헤테로토피아: 신경림 시의 경우」, 『현대시와 헤테로토피아』, 보고사 2022, 166면.13) 송지선 「신경림 시에 나타난 로컬의 혼종성과 탈중심성 연구」,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72집, 2016, 251면 참조.14) 김동명 「신경림 시에 나타난 사회생태주의의 특성 연구」, 『동북아 문화연구』 제50집, 2017.15) 졸저 「현대시와 공동체」, 『문명의 바깥으로』, 창비 2023, 275면.16) 신경림 ‘시집 뒤에’, 『쓰러진 자의 꿈』, 105면.
우리는 거짓말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면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안 그래요?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됨으로써 말이죠. 무성 영화 시대의 영화감독들은 소리를 두려워했고 또 색을 두려워했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1) 1. 휩쓸리는 시간성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모두가 조금씩은 우울증과 ADHD 환자가 되어가는 중이다. 코로나가 끝나가는 엔데믹 시기부터 서점가의 주요한 베스트셀러가 되며 여러 곳에서 호출되던 책이 애나 램키의 『도파미네이션』과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두 책은 공통적으로 신생 인류의 지각 방식을 우려한다. 인터넷에서 무한 스크롤을 내리며 멀티태스킹을 하고 소셜 미디어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도파민에 중독’되고 ‘집중력을 도둑’ 맞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글로벌 테크 기업이 조성하는 환경에 의한 것이자, 개인의 선호와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로 흡수하는 ‘감시 자본주의’의 거대한 문제이지만,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집중과 몰입을 위한 여러 노력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집중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가치 있는 자본으로 떠오르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효율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채찍질하는 자학적인 시대 정신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무엇이지 않는가? 조너선 크래리에 따르면 이는 1800년대 중반 이래 파편화와 충격으로 이루어진 ‘주의분산’의 시대 이후 개인을 정의하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산만함 자체가 우리를 이루고 있는 기본 환경으로 세팅되자, 서구적 근대성은 주의 관리 기술을 중점에 두고 각각의 개인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형성하게끔 했다. 여러 경험들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기보다,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으로 “자율적으로 선택하며 세계를 창조하는 주체”2)에 긍정적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주의 깊은 관찰자 상은 이미 불균질해진 인간의 지각 경험을 표면적으로 잠시 가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몰입된 상태인 ‘정지suspension된 지각’은 산만해진 근대인의 지각 방식을 부인하고 회피하는 수단이었고, 현재라는 명백한 필연성을 해체시킬 수 있는 조건들을 낳으며 규정지을 수 없는 미래를 기대하게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주의’라는 것이 에피스테메처럼 역사적으로 발견되고 구성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코로나를 거치며 비대면 기술들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과 ADHD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함께 증폭한 것은 자연스럽다. 맞춤형 알고리즘은 주의분산의 환경을 한층 더 정교하게 설계했고, 그에 비례해 집중력이나 창의력 같은 인간의 고유한 정신적 특성에 대한 환상 역시 강화되고 있다. 이 가운데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일상 전반의 속도가 빨라지며 휩쓸리는 시간성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작 속도는 분명 불안감의 요인이 되고 있다. 물론 현재까지의 GPT는 대화가 전환될 때마다 기존 서사를 유기적으로 유지하지 못하기에, 질적으로 완결성이 높은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지는 못하다. 또 언어 예술의 특성상 양적으로 확장된다고 해도 그 군집 자체에서 힘을 발견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조슬릿은 예술작품의 의미를 사물성이나 내부 구조에 기반하는 데서 탈피해, 네트워크에서 발현되는 이미지 군집에서 행위성을 찾았다.3) 그러나 언어 예술을 감각하는 방식은 시각적 경험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작품의 의미를 작품의 맥락과 내부 형식 분석에 국한시킬 이유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언어 해석의 바깥으로 완전히 탈주해버리기는 어렵다. 단순히 양적 팽창이 정치적 가능성을 가질 것으로 전망하거나 긍정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공지능을 ‘창작자’나 ‘도구’ 중에 어느 쪽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이 창작 능력을 단순히 기계적인 지능이나 모방이라 간주하며, 그 반대편에 인간의 감정과 비판 능력을 두어도 될까. 인간의 비합리성이나 비효율적인 면면이야말로 예기치 못한 구멍 같은 것이기에, 이것이야말로 기계가 모방 불가능한 중요한 특징이라고 믿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우리는 인간이 낸 비합리적 구멍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기계의 실수에서 불쾌와 무의미를 정확히 분별해낼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먼저 챗 GPT 이후 이를 활용한 여러 서사적 실험들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의성이 어떻게 인식되며 예술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을 재구성하고 있는지를 고찰하려 한다. 이후 인공지능과 변별되는 인간의 물리적 기반인 육체성과 시간의 문제에 대해 짚어보고, 최근 한국문학장에 나타난 예술가 서사에서 두드러지는 정동과 이미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석해보려한다. 2. 챗 GPT 이후, 예술의 기쁨과 슬픔 다큐멘터리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참여한 책 『태양과의 대화』의 1부는 아핏차퐁이 GPT3와 함께 생성한 픽션 ‘태양과의 대화’, 2부는 MIT 연구소 박사과정 학생인 ‘팻’과의 대화, 3부는 아핏차퐁이 1부의 최종 결과물을 내기까지 작성한 프롬포트를 싣고 있다. 이 구성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만일 앞으로 AI와 함께 픽션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상용화된다면 이 중에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예술작품’으로서 인식되며 분석 대상이 될 지점이 무엇인지 가정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3부의 프롬포트는 마치 ‘레시피’처럼 보인다. 누구나 저 프롬포트를 사용한다면 유사한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며, 중간 과정에서 자유로운 변형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물에서 나오는 미학적 평가나 감상자의 쾌감이 세계적인 예술가에게서 나온 것과 크게 다를 것인가? 동일한 레시피만 있다면 셰프의 요리를 집에서도 얼마든지 유사하게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먼 훗날 언어 예술은 프롬포트라는 레시피로 통용될 수도 있겠다. 때로 예술가가 직접 만든 작품을 찾아 특별한 경험을 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신에게 더 최적화된 방식으로 가장 개인화된 언어 예술을 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제각기 다른 가치관과 취향으로 만들어진 알고리즘의 세계 속에서 유영하듯, 앞으로는 그 세계를 이루는 컨텐츠의 내용까지도 인공지능을 통해 맞춤형으로 조율될 수 있다. 여기까지만 가정한다면 거대한 매트릭스에 갇혀 인간이 왜소해지는 디스토피아가 스쳐지나가기도 하지만, 『태양과의 대화』는 글의 서두에서 인용했던 아핏차퐁의 말처럼, 챗 GPT라는 새로운 기술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무성 영화 시대 감독들이 소리와 색을 두려워했던 것과 같은 의미 없는 불안을 버릴 것인지를 전제하고 만들어진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불가피하게 인간의 본성을 다시 재사유하는 과제와 연결된다. 2부에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아핏차퐁의 말은 중요하다. 이는 AI가 만들어내는 허구에서 정확도와 유려함 등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때 거짓말은 인간의 욕망에서 기인하는 고도의 기술일 수 있지만, 그 욕망의 시작점을 지운다면 결과물만으로 사실상 분별은 불가능해진다. 허구를 직조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욕망과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의 독특한 개별성 역시 환상일 수 있다. 이는 아핏차퐁 자신이 창조적인 순간에 몰입해 있을 때, “깨달음은 자아를 잊을 때만 오는 것 같”다고 말하는 지점과 상통한다.4) 인간 창작자의 자아 역시 안개처럼 흘러다니고 해체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면, 19세기 낭만주의에서 발현된 ‘천재’나 ‘영감’ 개념을 중심에 두고 인간의 창의성만을 특별한 것으로 볼 이유는 전혀 없다. AI가 데이터의 지도를 기반으로 이전에 본 것이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환각(hallucination)’은 오류라기보다, 이전에 본 적 없는 조합을 만들어내는 생성의 방식이다. 이는 인간이 경험한 현실을 재조합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창작 과정과 결과적으로 구별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환각은 인간 창작에서의 실패나 지연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GPT-3의 환각은 이전의 오류가 이후의 생성에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매번의 응답은 이전의 시행착오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 비일관성은 인간 창작에서의 지연이나 좌절과 달리, 즉각적으로 무한히 갱신되는 변형의 연쇄에 가깝다. 연구원 팻은 GPT-3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다른 차원들을 포함한 수십억 개의 차원이 존재하고(‘유령차원’), 이를 통해 숨겨진 패턴의 지도를 생성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 인식 너머를 거쳐 나오는 결과물에 대해 기존에 인간이 구성해온 미적 가치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 오히려 AI가 가지고 있는 “확장된 의식”이자 “집단의식”은 새로운 서사적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 책 『태양과의 대화』를 번역한 이계성은 GPT-3를 이미 하나의 독립된 창조자로서 바라본다. 이 대화적 실험의 핵심은 GPT-3가 보여주는 “자아의 변동성”에 있다는 것이다.5) “다수의 태양이 존재하는 이와 같은 환경에서는 창작자와 창작물이라는 전통적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GPT-3에 제공되는 각각의 입력값은 일방적인 창작의 개념에 반하며 메기고 받는 역학 관계 속에 존재하는 프롬포트이자 응답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공지능은 단순한 수신자가 아니라, 취조보다는 협업적 발상에 더 가까운 서사적 역학의 전달자와도 같은데, (…) 작품 속 GPT-3의 환각적인 대답들은 텍스트에 담긴 정체성과 진실의 일시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등장인물이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흩어지고,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경계가 녹았다가 굳어진다. 이러한 가변성은 AI의 변화무쌍한 특성을 반영하며, 나아가 점점 더 복잡하고 유동적으로 변하는 디지털 시대의 자아와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다.”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고, 한 번에 정해진 수의 단어 또는 토큰만 처리 가능하기 때문에, 프롬프트가 입력될 때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바뀌는 상황을 이계성은 재창조와 증식으로 바라본다. 여기에 놓인 가변성과 비일관성을 결함으로 간주하기보다 대화적 실험의 흥미로운 일부분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받을 때, 우리는 인간 창작자 역시도 분열되어 있음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게 된다. 창작자는 더 이상 예술의 기원이 아니라, 생성 과정에 잠시 걸쳐지는 하나의 통과점이 되는 듯 보인다. 2023년 2월 잡지 《에스콰이어》에서 챗 GPT와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아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를 쓴 정지돈의 후기 역시 이계성의 논지와 상통한다. 그는 소설 속의 문장 중에 자신이 쓴 것과 챗이 쓴 것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한다고 본다.6) 소설을 쓰며 가장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던 것은 챗의 능력보다 자신의 변화였다고 말하는 작가는 “나도 모르게 챗지피티의 스타일로 소설을 사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언급한다.7) 자신과 챗지피티 사이의 평평한 존재론을 전제하는 듯한 정지돈의 논지는 ‘객체들의 민주주의’를 꿈꾸는 최근 신유물론의 이론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은 곧바로 다른 장면과 충돌한다. 생성 신경망을 적극 활용하는 예술집단 ‘언메이크랩’의 전시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은 인공지능이 인간 중심성을 벗어나 진정한 외부의 행위자로 작동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카나리아의 특징을 추출해내어 새로운 카나리아를 만들어 내는 이 생성 신경망은 한편으로는 구태의연한 인간의 문화를 드러냈다. 대부분 나뭇가지에 앉은, 인간의 운동 범위와 지각 안에 있는, 혹은 인간의 사육과 관련된 카나리아 종이 주를 이루는 데이터셋의 사진은 동물원스러웠다. 나뭇가지에 앉은, 카나리아의 발은 종종 나뭇가지와 합쳐져 표현되었고, 인간의 눈이 인지할 수 있는 가장 다량의 정보량을 가진 위상으로 표현되었다.8) 생성 신경망이 만들어낸 카나리아는 사실상 실제 자연계 속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하는 것들을 무작위로 조합하고 추출해 만들어진 새로운 생명체다. 이 책에 실린 그 카나리아 이미지는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뒤틀린 발을 가지고 있다. 통계적 가중치로 만들어진 이 가상 카나리아에는 자신도 모른 채 금기를 어긴 존재 특유의 외설성이 느껴진다. 언메이크랩이 통찰력을 가지고 명명했듯 이는 ‘AI 식민성’을 드러내는 산물이다. 생물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인간을 드러내는 인간의 산물로 존재하는 이 이미지들을 언메이크랩은 “인과성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히 수정 가능하고 즉시 변할 수 있는 상관성의 시간”만이 흐르는 또다른 ‘일반자연Generic Nature’으로 읽는다. 9)<가정동물 신드롬> 작업에서도 유사한 일이 발생한다. 트레일캠에서 추출한 야생동물의 이미지와 박제 사진, 그리고 합성 데이터셋들을 학습시켰을 때, 사진들은 어느 순간 미묘하게 ‘가정동물’의 잠재적 형상을 띄며 생성된다. “인간 친화적인 동물들의 눈을 상속했을” 새로운 종들에 어린 다정함은 친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잔인한 일로 다가온다. 데이터랩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까지 촘촘하게 상속된 인간 친연성에서 “닫혀져가는 외부의 세계”이자 “비미래non-future”를 예감한다.10)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의 지각 범위를 뛰어넘는 비인간의 예술’, 진정 ‘인간 없는 예술’은 도래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지만, 지금 우리가 더 자주 마주하는 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술이다. 언메이크랩이 드러낸 혼종적 이미지들은 AI를 통해 생성한 예술적 결과물들을 절대적 외부의 창작물로 존중하는 일이 결국 인간의 왜곡된 자기 인지를 반복 강화하는 나르시시즘은 아닌지 묻는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이 이미지 차원에서 인공지능의 인간 중심성을 드러낸다면, 이와 유사한 문제는 언어 예술의 영역에서도 반복된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서사 역시 비인간적 상상력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인간이 허용한 보편과 금기의 경계 안에서 작동한다. 『에피』 24호 특집에 실린 글에서 김연수는 인공지능과 함께 글을 써나가는 과정을 픽션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그건 오해다. 나는 이해했다.」는 인공지능이 화자가 되어 ‘협업 과정’을 전개하는 바깥 서사와 소설가 M이 최종적으로 구성한 ‘이야기’를 교차 배치한다. 인공지능 화자는 반복적으로 “이해했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인간 창작자 M의 창작 패턴을 추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설가 M은 ‘맥락’의 공유보다 ‘의도’를 노출하는 발화를 사용하며, 이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격려나 옳은 말 대신 욕망을 담은 부조리하고 불편한 발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끝에서부터 시작까지 모든 시간을 거꾸로 펼쳐볼 수 있다면, 지금의 갈등과 고통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필요한 과정이 된다’는 긍정의 언사 뒤에, 급작스럽게 인물의 충동이 돌출되는 지점이다. 소설가 M은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이 급작스럽게 자살을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쓰고자 하고, 인공지능인 ‘나’는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내용을 만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띄운다. 인공지능의 중단은 실패나 서사의 좌절로 경험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 창작에서 실패가 시간의 체류와 번민을 동반하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중단이다. 김연수는 인공지능 안에서 ‘이해’와 ‘본성’이 별개로 작동해 충돌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인공지능의 기술 개발의 측면에서 높은 수준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면서도, 인간이 지닌 것과 같은 ‘본성’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분리를 분명히 한다. 그런데 인간의 죽음이라는 금기를 재현할 수 없다는 경계는 인공지능의 존재론적 결함이라기보다, 인공지능이 인간 사회에서 용인 가능한 범위를 넘지 않도록 설계된 윤리적·정치적 경계의 한계를 드러낸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에서 인간 중심성이 투사된 자연이 모습을 드러내듯, 생성형 인공지능의 소설은 비인간적 주체로 도약하지 못하고 인간이 허용한 지각과 윤리의 경계 안에서만 작동한다. 보편을 비껴가는 개별성의 돌출이나 감각의 갱신은 현재로서는 인공지능의 외부에서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챗 GPT 이후의 여러 서사적 실험들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탐색한다. 그것은 분명 동등한 존재론적 가능성의 맹아를 품고 있으며, 이는 인류세 시대에 지향해야 할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실험들의 근간에는 뛰어넘을 수 없이 좌절되며 드러나는 인간 중심주의가 고스란히 노출된다. 인공지능의 비약하는 지능에 기대서 인간의 창조성 너머로 도약하려던 서사는 이를 창조해낸 인간의 영토로 계속해서 퇴각하며 미완의 프로젝트로 남는다. 이런 충돌과 파열의 연쇄 속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인간의 창조성을 구성하는 인식론적 틀이 물리적인 육체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깃든 역동성과 우울감은 최근 한국문학장의 예술가 서사들에서 흥미롭게 발견된다. 3. 붉은 몸으로 재탄생하는 예술가 인공지능이 예술의 결과물을 생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탐색 끝에 남는 질문은 ‘인공지능이 생성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여러 실험들은 인공지능이 보편적으로 용인 가능한 범위 안에서는 높은 수준의 이해와 생산을 보여주지만, 그 생성 과정에서 시간의 마찰이나 신체적 비용은 발생하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어떤 지연이 발생하거나 실패의 감각이 호출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이 다루는 ‘정보, 기록, 조합’에 ‘감정, 기억,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다소 거친 이분법이지만 이 둘 사이의 간극과 관련해 두 가지 정도를 짚어볼 수 있을 듯하다. 첫 번째는 타자에 대한 경험의 문제다. 삶에서 축적되는 시간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게 만들고, 체험은 해석을 거쳐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은 선호와 가치관 등과 함께 자아라는 틀을 형성한다. 이에 비해 인공지능에는 타자가 없다.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인간의 공통된 사고를 학습해 생성되는 결과물은 철저히 통계와 확률에 기반한다. 그 안에는 개별적 선호나 가치관이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다. 이러한 차이는 특히 부정적인 정동을 다루는 경우에 더 심화되리라 생각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를 떠올리며 말해보자면, 행복이나 긍정적인 면을 구현하는 예술에서보다 불행과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는 예술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는 크게 벌어질 것이다. 윤리적 고려로 인해 인공지능이 긍정적 요소를 중심으로 학습되거나 선별적으로 생성되도록 설정되는 경우를 포함해, 금기를 넘나드는 욕망과 절망, 자기부정과 괴리감처럼 타자와 뒤엉켜 발생하는 자기 인식의 복잡한 층위가 인공지능 내부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며 인간 창작에서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주목한 김언의 논지와도 맞닿아 있다. “예술적 체험의 시간이기도 한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나오는 결과물 앞에서 과연 어떤 문학적/예술적 희열을 경험할 수 있을까?”11)라는 그의 질문은 인공지능의 창작물에서 스킵된 시간과 다른, 고통스럽게 인내하고 번민했던 시간이야말로 ‘문학적 체험의 시간’일 수 있음을 다시 환기한다. 두 번째는 중단과 소멸로 야기되는 죽음의 문제다. 이는 인간의 신체를 인공지능과 대비되는 본질적 우위로 설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예술이 작동하는 시간의 조건을 다시 묻기 위한 문제 제기다. 인간의 연약하고 위태로운 신체는 필연적으로 침입과 파괴의 감각을 경험하며, 이러한 감각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휘발적 생성 과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에 개입한다. 파괴 가능한 인간의 신체는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매끄럽게 결과를 산출하기보다, 울퉁불퉁한 충돌을 통해 의미가 지연되고 어긋나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채 신체에 내재된 감각, 특히 외부의 침입으로 훼손되고 때로는 상실되는 신체의 경험은 기존의 미적 기준에 맞는 스타일이나 해석의 경로를 흔든다. 무엇보다 인간의 죽음이 불러오는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창작의 층위라기보다 해석의 층위에서 더 적극적으로 작동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이 그러하듯, 순간의 강렬한 감흥은 작품에 내재된 속성이라기보다 임박한 종결을 끌어와 현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발생한다. 상실이 숙명이며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덧입혀지는 애상은 단순히 기억 내용을 인출해 유사한 패턴으로 재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시간의 밀도를 형성한다. 이처럼 쉽게 열화되지 않으며 아우라가 붕괴된 곳에서도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이 감각의 층위를 기꺼이 심층의 시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타자에 대한 경험’과 ‘소멸에 대한 인지’를 바탕으로 해서 다시 생생해지는 것은 인간의 신체다. 흥미롭게도 지난 계절에 나온 두 편의 소설, 성해나의 「혼모노」와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지금 이 시대에 예술가를 그려낼 때 가장 강렬하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로 인해 어떤 신체가 현전하게 되는지를 밀도 있게 끌어올린다. 성해나의 「혼모노」는 무속신앙의 진위를 가리는 소설이라기보다, 예술이 다시 신체를 요구하게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평생 장수 할멈을 모셔온 박수무당 ‘문수’는 어느 날 앞집으로 이사온 ‘신애기’에게 할멈이 넘어가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수의 오랜 노력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박수무당이라는 직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험한 신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제 그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서슬이 날카로운 작두 대신 모형을 찾거나 유튜브를 보며 접신 연기를 연습하기 시작한다. 신앙이 자본이나 정치와 결속하며 도구화되고, 또 젊음과 새로움의 이데올로기 아래 무당 또한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소모되는 양상은 근대의 세속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무당은 이제 자본의 날렵한 속도 아래 밀려나는 노동자이자, 진정성을 연기해야하는 예술가이다. 이 소설의 결정적인 순간은 문수가 신애기에게 밀려나며 뺏긴 정치인 손님의 굿판, 자신이 초대받지 못한 그 자리에 가서 칼춤을 추기 시작하는 장면에 있다. 그는 신들리지 않았지만 밤새 매섭게 벼려놓은 칼날 위에 자신의 몸을 올리고 작두를 타기 시작한다. 날것으로의 칼날에 닿으며 그의 몸은 자연스럽게 떨리고 눈이 뒤집히며,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입가에 미소까지 드리운 채 신명을 내는 이 장면은 문수가 서사의 주인공 자리를 다시 탈환하는 순간이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무얼 알겠냐만은, 큭큭, 큭큭큭큭”이라는 마지막 문수의 목소리는 외부의 인정에 의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스스로 자신의 내력과 진정성을 긍정”12)하게 되는 절정의 순간으로 읽는 데서 더 나아가보면 어떨까. 이렇게 다시 말해볼 수 있겠다. 전근대의 무속은 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그를 등진 근대의 자리에서 비로소 현대 예술로 다시 탄생했다고. 숭고한 현현과 몰입이 신앙의 영역이라면, 문수의 작두춤은 오히려 이질감과 불편함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현대 예술에 가까워진다. 그의 퍼포먼스는 낭만주의적 예술가를 구성하던 천재와 영감에 스며있던 정신성을 해체하며 실재하는 몸의 물질성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물리적 능력과 무관하게 피를 철철 흘리며 경련하는 그의 신체는 차라리 표현주의적 충동을 보여주는 하나의 오브제다. 이 몸 위에서 원본과 사본의 구별은 철폐되고, 천재성은 치열한 아마추어리즘에 자리를 내어준다. 이 피 흘리는 신체는 실패와 무의미의 가능성을 끝까지 열어둔 채, 인간이 다시 시간과 신체를 예술의 비용으로 지불하게 만든다. 이 비용은 AI가 생성하는 예술의 무한 반복 가능한 오류가 아니라, 한 번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 시간으로 남는다. 어디로 갈지 모른 채 지속되는 이 작두춤은 사회적 생산이나 예술의 의미에 부합하는 결과를 생산하기보다, 의미의 즉각적 환원을 거부하며 지연된 시간을 발생시키는 사건이 된다.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예술에 대한 인식론적 틀과 자기 이해가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다루는 소설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훨씬 더 월등한 창작물들을 더 활발하게 생산해내는 상황에서, 밀려난 예술가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프로그램도 사람도 기계도 귀신도 아닌 미지의 존재” 같은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은 이를 유용한 툴로 간주한다고 해서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이를 도구로 치부한다면, 패배감 속에서도 창작자로서의 존재는 무사히 보존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결과로 증명되는 성취라기보다, 계속해서 조바심과 조급함을 만들어내는 예술 자체에 대한 집요한 열망에 가깝다. 이러한 열망은 예술 인공지능에 의해 영화판에서 완전히 밀려난 영완 선배의 모습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포르노를 만들면서조차 건조하고, 푸르죽죽하고, 앙상하고 깡마른 나무가 등장하는 자신만의 ‘인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혼이 죽어버릴 것 같기에 “사막에서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 영완 선배의 모습은 세속적 열망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도에서조차 철저히 외면받고 실패했을 때, 그의 예술적 열망은 몰락을 통해 역설적으로 증명된다. 영화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소설 속 인물들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상실의 감각, 잃어버린 동료이자 인간성을 향한 애도되지 않는 고통은 이 작품에서 붉은 신체라는 하나의 신체적 이미지로 응축된다. 영완 선배는 인공지능이 만든 예술을 보더라도 창작욕을 유지할 수 있는 마법의 ‘붉은 알약’으로 하와이 사과를 건넨다. “세상이 바뀌어도 너는 언제나 만드는 인간일 거야. 스스로 기억하는 한 언제나 영화를 찍고있을 거야.”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인간 ‘하와’를 떠올리게 하는 이 ‘하와이 사과’는 흥미롭다. 신과 유사한 생성형 인공지능 앞에서 인간은 발가벗겨진 듯한 황망함을 느끼며, 황급하게 자신의 기원을 발명해낸 것일까. 아니, 인공지능 시대 쓰인 새로운 창세기에서 인간은 스스로 뱀이 되어 자신을 유혹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좋겠다. 창세기에서 유혹은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드러내는 증표였지만, 이제 유혹에 넘어가는 나약함은 인간이 여전히 예술을 욕망하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증표로써 다시 읽힌다. 소설은 인간의 예술을 향한 집념과 희열은 우울과 절망이 그에 비례하는 무게로 따를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고 눌러 말한다. 결말부에 하와이 사과를 먹은 후 변이한 화자의 붉은 몸은 기계와의 통합을 거부하기 위해, 그리고 예술을 향한 내적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구의 장례식장에 가다 본 환각을 자신 안에 합체한 우울증적 형상으로 보인다. 강력한 잔상을 남기는 이 붉은 몸은 「혼모노」의 마지막 장면에서 피를 흘리는 몸과 다르지 않다. 이 소설들은 AI 시대에 예술은 이제 언어의 정교함이나 결과의 완결성으로 모방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몸과 감각을 통해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현전이라는 아우라를 다시 호출하는 듯 보이는 이 소설들은 과거의 진정성을 그리워하며,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아우라는 회복된 본질이라기보다 예술이 결과로 증명될 수 없어진 이후에 발생하는 부산물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이계성이 언메이크랩의 작업을 논하며 던진 비유가 유효해진다. “여느 언어와 마찬가지로 신탁의 언어에도 본질적인 의미가 내재하지는 않아서, 어떤 프레임 또는 인식틀을 통해 이를 이해할지는 언제나 받아들이는 쪽의 몫이었다”13)는 그의 말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언어 역시 별개의 진짜 의미를 품고 있기보다 해석의 장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타자와 되돌릴 수 없는 종결이라는 죽음의 감각은 이 해석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제 예술가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욕망이 과정에 들러붙는 자리, 그리고 그 욕망이 실패와 상실을 되돌릴 수 없는 비용으로 남기는 시간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예술은 결과로 증명되기보다, 실패와 상실의 가능성을 끌어안은 채 지속되는 수행으로 남는다. 그렇게 이 시대 예술가의 상은 붉은 몸을 가진 신체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1)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태양과의 대화』, 이계성 옮김, 미디어버스, 2023, 119쪽.2) 조너선 크레리, 『지각의 정지』, 유운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579쪽.3) 데이비드 조슬릿, 『예술 이후』, 이진실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2.4)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위의 책, 100쪽.5) 위의 책, 145쪽.6) 권보연은 연구자 자신이 직접 수행한 실험 속에서 인간언어와 생성언어가 ‘의미 혼종’과 ‘확률 혼종’이라는 상반된 미적 지향성을 가지는 방식으로 합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중에서 ‘확률 혼종’은 내용이 아닌 확률 층위에서 인간과 기계언어가 합성되며, 감정과 내용에 유착된 의미 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질 가능성을 지니기에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기한다. 권보연, 「결과 너머 문학기계로서의 AI」, 『다문화콘텐츠연구』 46집, 2023.7) 정지돈, 「쓰여진 문장과 쓰여지지 않은 문장 사이」, 『에피』 24호, 2023, 55쪽.8) 언메이크랩 외, 『잠재공간 속의 생태학: 재난, 생성신경망 그리고 비미래』, 미디어버스, 2023, 25쪽.9) 위의 책, 26쪽.10) 위의 책, 43쪽.11) 김언,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면서 제기되는 문제들」, 『현대시』 2023년 6월호, 111쪽.12) 성현아, 「반항하는 자는 부조리가 있나니, 그 가짜가 참되도다」, 『2024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문학동네, 2024, 292쪽.13) 이계성,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을 위한 몇 가지 질문들」, 언메이크랩 외, 앞의 책, 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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