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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파란 | 2024년 여름호(제33호)

“지평선”의 아름다움 ― 『中庸』으로 김수영 읽기

이찬 문학평론

200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했다. 저서 현대 한국문학의 지도와 성좌들(2009), 20세기 후반 한국 현대시론의 계보(2010), 김동리 문학의 반근대주의(2011), 한국 현대시론의 담론과 계보학(2011)을 출간했고, 문학평론집 헤르메스의 문장들(2012), 시/몸의 향연(2019), 감응의 빛살(2021), 사건들의 예지(2022), 문화평론집 신성한 잉여(2022)를 썼다. 2012년 제7회 김달진문학상 젊은비평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고려대학교 문화창의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시와 영화와 비평이 더불어 감응할 수 있는 융합과 통섭의 공간을 모색하고 있으며, 다양한 철학적 사유와 예술적 이미지를 가로지를 수 있는 새로운 글쓰기 스타일을 실험하고 있다.

양극의 긴장대극의 사유


  김수영 시론의 중핵을 구성하는 시여, 침을 뱉어라양극의 긴장이나 <죽음과 사랑>의 대극은 시의 본수(本髓)에서 등장하는 대극이란 말은 ’(中和, 中庸, 中正, 中道, 時中, 得中, 中孚)의 사유와 세계관이 그의 텍스트 전체를 가로지르는 핵심 단자(單子)임을 시사한다. 서로 맞수를 이루는 것들끼리의 균형과 조화, 곧 상호 대립적인 것들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기울어지지 않으며 어느 한쪽이 지나치게 크거나 모자라지 않는 역동적 균형의 상태, 또는 숨은 조화를 이루려는 강유상추(剛柔相推)의 평형 운동으로 을 풀이할 수 있다면, 그의 시와 산문에서 시중(時中)’의 사유와 수행론이 텍스트 전체의 그물을 짜고 엮고 비트는 예술적 사유의 불꽃으로 자리할 수밖에 없는 이유와 배경을 좀 더 섬세하게 간파할 수 있을 듯하다.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를 열었던 2000년을 전후로 김수영의 시와 산문을 이른바 전통과의 관련 아래서 탐구하는 논의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2024년 한복판에 이른 작금의 시점에서 이 유형의 논의들 역시 김수영 연구사의 주요 흐름을 이루었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김수영 텍스트 겉면으로 드러난 다양한 서구 지식과 담론에도 불구하고, 그 뒷면에는 동아시아 고전과 전통적 사유 맥락이 은근한 저력으로 자리하고 있을뿐더러 그의 걸작들을 꼴 짓는 영감의 원천이자 포에지의 구심력으로 기능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의 근거를 명시하는 성과를 낳았다. 따라서 이들로 인해 김수영 연구사는 거시적 패러다임 차원에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노라고 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동아시아 고전과 전통적 사유에 대한 이해가 김수영 문학의 심층적 탐구에 있어 필요충분조건을 이룰 수밖에 없는 그 필연적 당위성이 명징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가령 김수영의 등단 초기작인 공자의 생활난바로 보마라는 시어는 그의 실존적 태도와 윤리적 자의식이 우리의 오랜 전통으로 자리한 시중(時中)’의 사유, 또는 중용(中庸)’의 세계관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음을 넌지시 암시한다. 마찬가지로 김수영의 시 텍스트에서 줄기차게 활용된 설움” “긍지” “자유” “생활같은 이미지들 역시 이와 같은 테두리에서 탐구되어야만 적확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듯하다. 또한 그가 중용신독(愼獨)’에 입각한 진중한 자기성찰의 태도와 더불어, “생활뮤즈일자(一字)”대열을 이룰 수 있는 그 실천적 기반으로서의 시중(時中)’의 윤리학을 일관되게 견지하려 했던 숨겨진 맥락 역시 가시적인 표면 위로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대대(對待): “순환의 원리를 위하여

 

  음양(陰陽)의 이원 대립적 사유 체계에서 나타나는 대대(對待)’는 동아시아 사상과 그 전일적 세계관의 원초적 바탕을 이루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것은 우선 서로 대립하는 동시에 서로 끌어당기는 관계이자, 상호 대립과 상호 의존이 동시적 트임을 만드는 관계로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그것은 유가(儒家)의 수신(修身) 원리인 의 윤리학과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하겠다. 상호 대극의 관계를 이루는 음과 양 가운데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편향되지 않은 상태를 ’()이라고 일컬을 수 있으며, 양자는 대립하는 동시에 보완하는 관계를 이룬다는 상보성의 원리 역시 이와 같은 범주로 수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음양으로 표상되는 상호 대립적 현상이나 상반자(相反者)의 다양한 계열들은 상호 적대적인 투쟁의 관계만을 표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서로 대립하는 동시에 보완하는 상반상성’(相反相成)의 관계를 맺는다, 나아가 무수한 상대자(相對者)가 맺는 대극의 현상들이 순환의 원리를 이루면서, 결국 역동적 균형의 궁극적 조화로 귀결될 것이라고 예감하는 것이 바로 ()’의 관념이자 사유 체계라고 분명하게 매듭지을 수 있을 것이다.


너무나 잘 아는/순환의 원리를 위하여/나는 피로하였고/또 나는/영원히 피로할 것이기에/구태여 옛날을 돌아보지 않아도/설움과 아름다움을 대신하여있는 나의 긍지/오늘은 필경 긍지의 날인가보다//내가 살기 위하여/몇 개의 번개 같은 환상이 필요하다 하더라도/꿈은 교훈/청춘 물 구름/피로들이 몇 배의 아름다움을 가()하여 있을 때도/나의 원천과 더불어/나의 최종점은 긍지/파도처럼 요동하여/소리도 없고/비처럼 퍼부어/젖지 않는 것//그리하여/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그러할 때면은 나의 몸은 항상/한치를 더 자라는 꽃이 아니더냐/오늘은 필경 여러 가지를 합한 긍지의 날인가 보다/암만 불러도 싫지 않은 긍지의 날인가 보다/모든 설움이 합쳐지고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긍지의 날인가 보다/이것이 나의 날/내가 자라는 날인가보다

 

- 김수영, 긍지의 날전문


  「긍지의 날을 오롯이 감수하기 위해서는 핵심 어구로 자리한 순환의 원리를 위하여를 적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나아가 이 시구의 배경을 이루는 동아시아 고전 및 전통적 사유 맥락에 대한 철학적 통찰이 필수적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1926(6) 이웃에 사는 고광호의 아버지가 문을 연 계명서당에 다니며 천자문과 동몽선습 등을 읽다.”(최하림김수영 평전)라는 역사전기적 탐구 기록에 비추어 보면, “너무나 잘 아는이라는 시어는 순환의 원리를 위하여를 이끌어오면서, 동아시아 고전과 전통적 사유가 김수영의 자의식을 규정했던 핵심 요인이었음을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순환의 원리이자 대극을 이루는 것은 설움긍지이다. 이렇듯 상반된 감응(感應)의 상태가 순환의 원리를 구성한다는 독특한 시적 발상은, 김수영이 유년기부터 체득하고 있었을 동아시아 고전과 그것을 관통하는 ()’의 사유에서 비롯하는 것이 자명해 보인다.

  「긍지의 날은 나날의 삶에서 우리가 겪는 설움긍지라는 상반된 감응 현상과 순환의 원리속에서 이른바 대대관계의 역동적 순환의 원리”, 곧 상보적 대극운동을 표현한다. 달리 말해, 이 시는 설움긍지가 동시에 이루는 상반된 마음결의 흐름과 심상의 대립 형세를 다채로운 이미지의 변주로 소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긍지의 날은 무수한 내면적 진통과 희로애락의 리듬 전체를 순환의 원리로 귀결짓는 텍스트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설움긍지순환의 원리로 감수하고 통찰한다는 것은, 이들을 대립물의 갈등과 투쟁 관계로 도식화할 수 없다는 시인의 인식론적 전제를 포함한다. 이는 시인이 설움긍지를 대립물의 상반성이 내포할 수 있는 적대적 투쟁 관계나 상호 배척의 모순관계, 곧 양립 불가능성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았다는 이면적 진의를 품은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긍지의 날설움긍지변증법적 지양’(die dialektische Aufhebung)의 과정을 통과하면서, 좀 더 높은 질적 차원의 진보를 이루거나 정신적 발전 상태를 이룬 제3의 통일체를 생산한다는 변증법적 담론을 내장하지 않는다. 달리 말해, “설움긍지는 서구 변증법에서 전제되는 대립물의 투쟁과 통일에 따른 양질 상호 전화의 법칙을 구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자는 서로가 원인이자 결과로 작용하기에, 상호 보완적 관계를 이룰 수밖에 없으며, 동아시아 고전의 사상적 핵심을 집약하고 있는 대대 관계와 그 운동 과정을 표상한다고 하겠다.

  이렇듯 설움긍지대대관계로 사유했기에, 시인은 모든 설움이 합쳐지고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긍지의 날인가 보다라는 상식의 범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지극히 모순적인 대극의 언술 구조와 더불어 양면 가치의 이미지를 축조할 수 있었을 것이다. 통상적인 용법에서 긍지란 자기 긍정의 시간적 단련 과정을 통과해 온 사람의 자기 확신을 함축한다. 또한 설움과 같은 자기 부정의 감정이나 심리적 요소들을 극복하거나 지양한 것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긍지에 이미 도달한 주체가 다시 설움으로 돌아가는을 발설하는 것은 다소 의아스럽고 복잡미묘한 뉘앙스를 띨 수밖에 없다.

  “파도처럼 요동하여/소리도 없고/비처럼 퍼부어/젖지 않는 것//그리하여/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에서 볼 수 있듯, 김수영은 지극한 역설과 이율배반의 상황에서 오히려 설움긍지가 맺는 순환의 원리를 직감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 상황에서 참된 자기 성장의 드라마가 번쩍하듯 도래하는 어떤 황홀경의 순간을 체감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파도처럼 요동하는 것은 물론 소리을 수 없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비처럼 퍼부어젖지 않는 것은 일상의 차원에선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게다가 피로긍지는 직접적인 인과율로 연결될 수 있는 인접 요소들일 수 없다.

  하지만 그리하여/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그러할 때면은 나의 몸은 항상/한치를 더 자라는 꽃이 아니더냐라는 저 아름다운 이미지들의 에는 피로를 겪고 이겨낸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자기 긍정의 환희와 더불어 자기 충실성의 확신이 만들어갈, 그 앙양(昂揚)의 미래를 통해서만 열리는 예지(叡智)의 황홀(恍惚)이 깃들어 있다. 따라서 온갖 피로와 난관들을 돌파한 극기(克己)의 경험을 통해서만, “긍지가 솟아날 수 있겠노라는 미묘한 뉘앙스가 감돌고 있음을 문득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극단적이고 이율배반적인 양면성의 공존을 김수영은 몇몇 산문에서 대극또는 양극의 긴장이란 말로 호명했던 셈이다.

  이렇듯 상반된 두 얼굴을 집약하고 있는 이미지가 바로 순환의 원리를 위하여일 것이다. “내가 살기 위하여/몇 개의 번개 같은 환상이 필요하다 하더라도/꿈은 교훈/청춘 물 구름/피로들이 몇 배의 아름다움을 가()하여 있을 때도/나의 원천과 더불어/나의 최종점은 긍지라는 이미지들의 흐름 역시, “대극양극의 긴장에 깃든 모순적 양면성의 공존이라는 테두리에서 풀이되어야만 한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내가 살기 위하여/몇 개의 번개 같은 환상이 필요하다 하더라도는 나날의 삶이 매번 안겨주는 온갖 설움피로요동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넘어서 긍지라는 자기 긍정의 확신 상태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순간적 희망과 찰나의 환희를 상호 조명하는 암시의 빛으로 비춘다.

  이 희망과 환희란 몇 개의 번개 같은짧은 한순간만을 머물다 사라지는 것이기에 환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 “내가 살기 위하여라는 고양된 삶을 꿈꾸고 더 나은 인격을 소망하는 시인의 몸부림 속에선 그야말로 필수 요건일 수밖에 없다. “꿈은 교훈/청춘 물 구름/피로들이 몇 배의 아름다움을 가()하여 있을 때도라는 난해한 구절 역시, 이와 같은 테두리에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구절은 오랜 시간의 경과가 자연스럽게 이루는 인생만사(人生萬事)의 변화 과정, 또는 극즉반(極則反)’으로 표상되는 천지만물(天地萬物)대극원리에 대한 첨예한 통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 등장하는 易 窮則變 變則通 通則久(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성백효 역주周易傳義 下)라는 표현에 비추어 보면, 긍지의 날의 저 난해한 구절 역시 대립적인 동시에 상보적인 대극운동을 암시하는 형상들이 분명해 보인다. “이란 지금-여기 없는 부재의 존재가 미래의 지평 위에 도래하길 소망하는 자리에서 태어나는 것이며, “교훈역시 과거의 시간 속에서 축적되어 온 경험이나 판단이 다가올 미래 시간을 위한 지침이나 좌표로 자리매김하는 현상을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훈이 형성하는 대극의 이미지란 장구한 시간성의 차원에서 살피면, 보이지 않는 연락(連絡) 관계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일뿐더러 상보적 대립 관계를 표상하는 것으로 다시 새롭게 정립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양자가 맺는 대극의 요소들이란 변하면 통한다라는 변즉통(變則通)’의 역학 관계로 집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미래 시간으로 던져진 이란 그 실현 여부와는 관계없이 오랜 시간의 경과를 거치면서 과거 시간에서 이어져 온 정신적 궤적들이 선사하는 교훈으로 전변할 수 있을 것이다. “청춘이란 것 또한 시간의 도도한 흐름 앞에선 물 구름처럼 허망하고 무상한 삶의 한 과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시인은 이렇듯 극점에 다다른 부정적 국면 속에서도, 도리어 긍지라는 자기 긍정의 최종점을 능동적으로 예감한다. 나아가 이와 정반대의 상황, 곧 무수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움터났을 긍지의 순간에는 오히려 모든 설움이 합쳐지고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이라는 부정성의 원천을 찾아온다. 따라서 피로들이 몇 배의 아름다움을 가()하여 있을 때도라는 지극한 모순과 역설의 형상들이란 시인의 체화된 대대(對待)’ 사유와 세계관에서 기원하는 지극히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모든 설움이 합쳐지고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이란 시구는 김수영이 시작(詩作) 초기부터 간직하고 있었던 중용의 사유와 세계관에서 비롯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특히 중용 15장의 君子之道 辟如行遠必自邇 辟如登高必自卑(군자의 도는 비유하면 먼 곳에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 데로부터 하며, 높은 곳에 오르려면 반드시 낮은 데로부터 함과 같다.)’(성백효 역주大學中庸 集註: 이후 주석 같은 책)라는 구절과 밀접한 관련을 이루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 구절은 우선 중용을 관류하는 실천적 원근법(遠近法)’을 표상하는 것으로 읽힌다. 또한 멂과 가까움, 높음과 낮음으로 빗대어진 ()’의 수준과 위계라는 것이 명명백백하게 구분되거나 차별화될 수 있는 고정된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오히려 수신(修身)의 끊임없는 내재적 과정에서 생성되는 가변적 흐름임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듯 보인다. 나아가 중용이란 텍스트가 품은 일상성 찬가를 예증하는 탁월한 사례 가운데 하나일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긍지의 날에서 피로들로 형상화된 가깝고() 낮은()’ 일상의 우여곡절들이 몇 배의 아름다움으로 표현된 멀고도() 높은()’ 당위적 가치의 세계와 더불어, “()하여 있을 때도라는 상호 전환의 통합 관계를 이루게 되는 까닭 역시 중용의 수신(修身) 원리에 이미 주름져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피로들이 몇 배의 아름다움을 가()하여 있을 때도라는 시구는 내재적 과정으로서의 ()’의 수행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나날의 삶이 초래하는 무수한 우여곡절 속에서 이루어지는 현재진행형으로서의 수신(修身)’ 원리, 중용()’를 우회적으로 표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내재적 과정으로서 나날의 실천 원리이자 현재진행형으로서의 ()’의 수행이란 중용(章句) 1장에 나타난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란 것은 須臾(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떠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다.)’라는 구절을 통해 가장 명징하게 표상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구절은 자신을 성찰하면서 자기 실존의 참된 가치를 인식하는 과정을 의미하며, ‘가 자신에게서 잠시의 순간조차 떨어지지 않는 상태, 그야말로 수준 높은 자기실현과 함께 자기완성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수행 과정의 지속성을 집약적으로 나타낸다. 따라서 그것은 나날의 삶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내재적 과정으로서의 의 수행, 나날의 부단한 의 실천 과정을 묵시적으로 강조한다.

  「사령(死靈)나의 영()”이나, 바뀌어진 지평선에서 나타나는 생활뮤즈라는 대극의 이미지들 역시, 동일 범주에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중용를 일관되게 실천할 수 있는 나날의 기반으로서의 신독(愼獨)’의 충실성과 더불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달라지면서 매번 다시 정립되어야 할 시중(時中)’의 실천 지평을 암시하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긍지의 날마무리 부분에서 등장하는 모든 설움이 합쳐지고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긍지의 날인가 보다/이것이 나의 날/내가 자라는 날인가보다라는 이미지 역시, 단순한 정신 성장이나 교양 서사의 차원에서 파악될 수 없다. 오히려 한층 더 깊은 해석의 안목과 근본적 차원의 통찰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긍지의 날의 결구(結句)로 자리한 내가 자라는 날인가보다는 인격 연마나 내면 성숙 같은 상투 어구로 수렴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교양의 심화나 정신의 발전 등으로 표상되는 진보주의 시간관이나 낙관적 미래 전망이라는 개념 범주로도 해명될 수 없다. 나아가 이 모두를 총합한 계몽주의 세계관으로도 귀속되지 않는다. 시인은 분명 설움을 지양한 상태를 긍지라는 심상으로 아로새기지 않기 때문이다. 긍지의 날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부정적 상황과 난처한 국면을 긍지의 날로 되새기는 자리에서 단순한 내면 성장과 상투적 교양 서사의 낙관적 드라마를 멀찌감치 벗어난다. 그리고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자기 탁월성의 근거를 확보한다. 이 시편은 우리가 인생길 곳곳에서 수시로 맞닥뜨리는 무수한 우여곡절과 희로애락의 현란한 엇갈림에 대한 현묘한 통찰과 더불어, 그것으로 수수하게 빛나는 담박한 예지(叡智)를 선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긍지설움을 빠짐없이 제거하거나 완전히 초월한 상태일 수 없다. 도리어 설움이라는 대극의 상반자(相反者)를 늘 전제하는 것일뿐더러, ‘역동적 균형으로 표상되는 순환의 원리를 통해서만 생성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긍지의 날의 이미지를 이루는 설움긍지란 대립하는 동시에 보완하는 대대(對待) 관계와 그 역동적 운동 과정 전체를 집약한다. 나아가 김충렬 교수가 제안했던 대립(對立)’이 아닌 대립(待立)’(모택동의 모순론과 실천론 비판)으로 이루어진 존재들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이 시편의 마무리를 장식하는 내가 자라는 날인가 보다역시, “긍지가 상보적 대립(待立)의 존재인 설움을 전제한다는 대대(對待)’의 관계, 그 역동적 순환의 원리온몸으로 다시 깨닫게 된 ”, 그 순간의 존재론적 환희를 표현한다.


신독(愼獨): 자기성찰의 원리와 실천적 원근법

 

...... 활자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벗이여/그대의 말을 고개 숙이고 듣는 것이/그대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마음에 들지 않아라//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아라/이 황혼도 저 돌벽 아래 잡초도/담장의 푸른 페인트빛도/저 고요함도 이 고요함도//그대의 정의도 우리들의 섬세도/행동이 죽음에서 나오는/이 욕된 교외에서는/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아라//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간간이/자유를 말하는데/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 사령(死靈)전문

 

  「사령(死靈)은 중용(章句) 1장에 나타난 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숨겨진 곳)보다 드러남이 없으며 (작은 일)보다 나타남이 없으니, 그러므로 君子는 그 홀로를 삼가는 것이다.)’라는 구절을 통해, 좀 더 내밀한 차원에서 감수될 수 있을 듯하다. 이 시편은 신독(愼獨)’의 구체적 감각과 당면한 수행의 어려움을 역설 어법으로 소묘한 것으로 보인다. ‘신독은 고독이지만 폐쇄가 아닌 개방이다.’(김용옥중용: 인간의 맛)라는 한 철학자의 말에 집약된 것처럼, 그것은 우선 남이 보지 않는 데서 계신(戒愼)하고 공구(恐懼)하는 것으로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나날의 우여곡절들 속에서도 중용()’를 쉼 없이 홀로 닦고 또 닦는 절차탁마(切磋琢磨)의 과정에 빗대어질 수 있겠다.

  「사령에서 형상화된 나의 영이란 신독의 수행 과정으로서의 ”, 라는 주체를 성찰하고 심화하는 부단한 실천 과정을 암시하는 시어가 분명하다. 또한 의 유한성과 불충분 속에서도 ’()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중용의 실천 지평을 그 심부의 곡절들을 어렴풋이 비추는 등불처럼 걸쳐놓는다. 1연의 활자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는 세계의 무수한 문자 문명과 더불어, 그것으로 이루어진 인류의 지식과 담론이 새롭게 해석되고 발명되는 창조적 지평을 암시한다. 마찬가지로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이를 실천하지 못하는 자신의 나태와 무능을 자책하는 이미지로 해석된다. 따라서 활자라는 하나의 작은 형상이 인류의 문명과 지식 전체를 대리-표상하는 제유(提喩)의 형상으로 기능한다면, 그것의 목적어와 서술부를 이루는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는 기왕의 통념적 지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해석과 미지의 담론이 탄생하는 획기적 발명과 새로운 창안의 순간을 포착한 이미지일 것이 자명하다. 마찬가지로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자유로 표상되는 새로운 진리와 창조적 담론의 진화 과정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힐문(詰問)이자 자괴감을 표현하는 형상으로 읽힌다.

  2연에 나타난 벗이여/그대의 말을 고개 숙이고 듣는 것이/그대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마음에 들지 않아라라는 구절이나, 3연의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아라/이 황혼도 저 돌벽 아래 잡초도/담장의 푸른 페인트빛도/저 고요함도 이 고요함도같은 형상들은 섬세하고 정밀한 독해를 요구한다. 여기서 라는 화자는 언뜻 그대라는 다른 인칭의 주체를 호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시인의 분신이거나 자신의 불만족스러운 마음 상태에 고스란히 감응할 수 있는 만인(萬人)을 암시하는 이미지로 읽을 때 좀 더 풍요로운 해석이 제시될 수 있을 듯하다.

  이와 같은 맥락은 그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으며 비슷한 느낌의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만인의 불만족 상태, 또는 우리가 모두 한결같이 느끼는 일상의 비루함과 불완전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자리에 2-3연 형상들의 궁극적 전언과 의미화의 중핵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시인은 그대의 또 다른 분신으로 설정하면서, 그 모든 인칭의 개별적 한계와 유한성을 넘어서 만인의 불만족스러운 감응 상태를 암시하는 이미지로 활용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중용(中庸)’의 덕이 발아하는 신독(愼獨)’의 개별성과 보편성을 두루 포괄하는 웅숭깊은 철학적 사유를 개진했을뿐더러, 이에 대한 운산(運算)”을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는 섬세한 예술적 방법을 기획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독은 우선 나 자신에게 부여된 천명을 혼자서 진중하게 실천하는 것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중용(章句) 33장에 등장하는 故君子之道 闇然而日章 小人之道 的然而日亡.(군자의 도는 은은하나 날로 드러나고, 소인의 도는 선명하나 날로 없어지는 것이다)’라는 구절처럼, ‘의도적으로 드러내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발현되어 징험되기 마련’(이동환 역해중용)인 광범위한 차원의 보편성을 품은 것이기도 하다. ‘신독이란 만인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성의 차원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기에, 만인이 감응할 수 있는 보편적인 공감대와 더불어 나날의 삶에서 실천되는 그 수행 과정의 범용성(凡庸性)과 지속성을 포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 실천적 수행의 효과나 영향력의 차원에서 보편성의 얼굴을 띠고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라 하겠다.

  「사령4연에 등장하는 그대의 정의도 우리들의 섬세도/행동이 죽음에서 나오는/이 욕된 교외에서는/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아라같은 형상들 역시 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대우리라는 인칭의 개별성이나 시점의 제한성이라는 작고 좁은 테두리에 갇히지 않는다. 오히려 만인의 감응 상태를 환기하려는 행간의 울림과 여백의 뉘앙스를 드리운다. 이에 따라 4연의 그대우리라는 대명사에 포함된 제한된 시선이나 한정된 차원이라는 의미의 테두리는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오히려 행동이 죽음에서 나오는비루하고 부조리한 이 욕된 교외우리가 다 같이 발 딛고 서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냉혹한 느낌으로 현시한다. 나아가 만인이 빠짐없이 그것에 휘둘리고 있는 보편적 감응 상태를 섬세한 행간의 울림으로 표현한다. 그 뒤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아라가 품고 있는 시간적 지속성으로서의 감응의 보편적인 영향력 또한 이와 같다. 이 구절 역시 감응의 보편성이라는 일관된 문제설정을 통해서만 온전한 해석의 지평에서 충실하게 풀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5연의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간간이/자유를 말하는데/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4연까지 지속되던 만인의 보편적 감응 상태나 시간적 보편화의 문제에서 시인 자신의 신독이라는 당면한 개인적 실천의 문제로 그 범주와 초점을 급반전시키는 이미지로 해석된다. 달리 말해, 사령의 도입부 1연은 시인 개인의 신독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시작되며, 종결부를 이루는 5연은 이를 다시 반복하면서 변형하는 끝맺음의 구조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해, 사령의 도입부와 종결부를 제외한 2-4연은 개인의 신독을 넘어선 만인의 보편적 감응 상태를 생생하게 표출하려는 한결같은 형상들로 채워져 있음을 암시한다.

  이렇듯 1연은 개인적 차원의 힐문(詰問)에 가까운 감탄 어구에서 시작하고, 중간부인 2-4연에선 만인의 느낌으로 확장되었다가, 마지막 5연에선 시인 개인의 당면한 실천의 문제로 되돌아오는 정교한 구조적 짜임새에서 사령의 묘미(妙味)와 은은한 미감의 뉘앙스가 스며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러한 측면은 온몸으로 체득된 김수영의 의 사유와 그 실천의 지평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시인 자신의 자책감에서 출발하여 만인의 상황들로 두루 퍼져나갔다가 다시 시인 자신의 당면한 실천의 문제로 되돌아오는, 이 작품의 전체 구조와 이미지의 짜임새는 중용의 수신 과정에서 강조되는 실천적 원근법과 밀접하게 연동되는 것으로 추론되기 때문이다.

  「사령의 구조적 짜임새는 특히 君子之道 辟如行遠必自邇 辟如登高必自卑(군자의 도는 비유하면 먼 곳에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 데로부터 하며, 높은 곳에 오르려면 반드시 낮은 데로부터 함과 같다.)’라는 중용(章句) 15장의 한 구절과 긴밀한 유비 관계를 이루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먼 곳()’가까운 데()’, ‘높은 곳()’낮은 데()’라는 중용의 비유적 대립 구도와 사령에서 형상화된 활자/나의 영”, “그대/우리들”. “그대/나의 영이라는 이원 대립적 이미지 계열은 상호 유비(類比)의 그물을 형성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이해된다. 게다가 양자는 대립 쌍들의 고정불변하는 정지 상태나 평행선이 아니라, 끊임없이 상호 전환할 수 있는 변화 가능성과 활발한 변동의 움직임을 그 무수한 여백의 공간에 이미 감춰두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결국 사령의 전체 구조와 이미지의 짜임새는 중용 텍스트 곳곳에 깃든 역설적 언술 구조와 실천적 원근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동시에 변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사령의 예술적 특이성과 탁월성의 근거가 마련된다고 하겠다. 이 시편의 1연과 5연을 비교해보면, “활자그대로 바뀌고 우스워라라는 시어가 5연에서 추가로 제시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을 제외하면, 양자는 똑같은 구절로 이루어져 있음을 쉽게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측면들은 단순한 반복을 의미하지 않을뿐더러 동일 의미구조의 재생산으로도 확대되지 않는다. 시인은 활자로 비유된 인류의 원대한 지식과 담론들에서 신독(愼獨)’의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대라는 말로 빗대어진 주변의 낮고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신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자신의 부끄러움과 보잘것없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령1연과 5연도 신독의 또 다른 실천적 원근법을 구현하는 구조적 짜임새로 이루어져 있다 하겠으나, 여기서는 시중(時中)’으로 일컬어지는 중용의 근본적인 실천 원리와 더불어 시인의 완강한 실존적 자의식이 그 바탕을 가로지르고 있는 것으로 유추된다. 5연에서 느닷없이 등장하는 우스워라라는 시어는 언뜻 한쪽으로 기울어진 편향적인 가치를 조롱하는 비판의 수사학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 매번 다시 새롭게 펼쳐지는 무수한 상황들과 그 관계망의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을 ’()의 구체적 면모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이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시인의 윤리적 자책감과 더불어 부끄러움의 미학을 암시적으로 표현한다. 이렇듯 무수한 이원 대립 구도의 중첩을 통해, “나의 영으로 표현된 신독의 필요성을 암묵적으로 강조하면서 시인이 자신을 질타하는 심상을 아로새길 수 있었던 것 역시, “온몸으로 체화되어 있었던 시중(時中)’의 지평에서 비롯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사령의 겉면에는 시중의 윤리학을 명시하는 형상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바탕에는 매번의 상황마다 달라지고 움직이는 ()’, 곧 시중(時中)의 윤리학이 완강한 기준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 윤리학은 그때그때()의 상황이나 국면 변화에 따라 쉴새 없이 달라지는 최선()을 고집하는 것’(誠之者 擇善而固執之者也)으로 요약될 수 있으며, 또한 나날의 무수한 삶의 마디에서 최적의 언어와 최선의 행위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그 노력의 과정 자체를 일컫기 때문일 것이다. 사령이 자조(自嘲)와 부끄러움으로 가득한 의문형의 어사들을 활용하여 역설 어법으로 건네려는 전언(傳言) 역시, ‘시중을 충실하게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는 시인의 자책이자 반성일 것이다. 달리 말해, 저 의문형의 어사들에는 시인이 행하는 자기성찰의 견고한 지속성이 말없이 스며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매번의 상황마다 달라지고 움직이는 ()’의 실천 원리, 시중의 윤리학을 자신의 온몸으로 이행(履行)”하려는 실존적 싸움을 잠시도 멈추지 않았던 김수영의 삶과 문학의 지향점을 묵시적으로 반증한다.

  따라서 김수영은 이 싸움이 동반하는 긴장을 통해서만 자신의 시와 삶이 모두 한결같이 위대의 소재”(나의 가족)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예감을 선취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시중이란 중용(章句) 25장의 고시조지의야(故時措之宜也)’라는 구절에 담긴 속뜻, ‘그러므로 때때로, 상황에 따라서 행함에 의(), 적합하면 된다라는 문장으로 집약될 수 있을 것이다.(우응순친절한 중용 강의) 이는 결국 시중이 각각의 상황과 시간의 마디들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변화와 더불어 그것에 따라 달라지는 마땅함()을 매번 다시 살피고 수행해야 한다는 맥락을 함축한다.

  앞서 살핀 것처럼, 사령(死靈)의 자책과 힐문으로 에둘러진 의문형의 시구들이나 시인 자신의 부끄러움과 보잘것없음을 성찰하려는 진의(眞義)를 품은 감탄 어구들은 그 이면에 가로놓인 시중의 윤리학을 우회적으로 표현한다. 이들은 시인이 나날의 실천 원리로 추구하는 시중을 충실하게 이행(履行)”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과 성찰의 자리에서 비롯하는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령을 위시한 김수영의 여러 시편에서 줄기차게 나타나는 시각성의 이미지 또는 진리의 윤리학으로 표상되는 그의 실존적 자의식의 문제를 적확하게 감수하기 위해서는중용을 위시한 동아시아 고전에서 유래하는 신독’, ‘시중’, ‘권도같은 자기성찰과 관련된 어휘들에 대한 충실한 이해가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시중(時中): 역동적 균형의 아름다움

 

  「바뀌어진 지평선은 김수영의 문학세계의 기저를 이루는 ’()의 사유와 더불어 신독으로 언명될 수 있을 실존적 삶의 태도가 시중(時中)’의 윤리학으로 진화하는 그 필연성의 궤적이 생생하게 드러난 작품이라 여겨진다. 그것은 상당히 긴 분량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마디마디를 이루는 작은 이미지 매듭은 시의 예술적 특이점으로 규정되어 온 의미의 압축성과 리듬의 암시성을 탁월하게 구현한다. 이러한 예술적 특이점과 미학적 자질을 갖출 수 있었던 까닭 역시, 이 시편 전체를 휘감고 있는 대극의 사유 방식, 또는 양극의 긴장에 대한 섬세하고 통찰력에서 비롯하는 것이리라.

  특히 맨 마지막 대목에서 등장하는 오늘의 우울(憂鬱)을 위하여/오늘의 경박(輕薄)을 위하여라는 구절을 눈여겨보라. 이 구절은 김수영의 산문 모더니티의 문제에 나타난 우리의 비애, 우리만의 비애에 대한 살뜰한 실감을 통해서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을 듯하다. 이 구절은 앞 구절들에서 이어져 온 통사론적 맥락에서 살피면 지극한 역설을 내포한 아이러니의 수사학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비애, 우리만의 비애로 표상되는 한국 모더니티의 후진성이라는 다른 문제의 차원에서 보면, 지극히 당연한 표현일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맥락은 우울경박이 발산하는 부정적인 뉘앙스에도 불구하고, 그가 우리만의 비애로 얼룩진 모더니티의 낙후된 수준과 후진적 형성의 과정을 정면으로 마주 보고, 그것과 사랑하는 싸움’(김인환문학과 문학사상)을 지속할 수밖에 없었던 그 내밀한 속사정을 헤아릴 수 있게 한다.

  이처럼 오늘날의 우리의 현대적인 시인의 긍지는 앞섰다는 것이 아니라 뒤떨어졌다는 것을 의식하는 데 있다라고 말했던 김수영의 이상한 역설은 우리 모두에게 드리워질 수밖에 없었을 우울경박을 회피하거나 배제하는 자리에선 결코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다. 김수영이 말하는 긍지란 우리 모두의 후진적 모더니티에 깃든 우울경박온몸으로 부둥켜안고, 그야말로 사랑하는 싸움을 부단히 수행하는 바로 그 사람에게만 도래하는 중용의 미덕일 것이며, 이를 끝끝내 관철하려는 시중의 아름다움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김수영이 말하는 지평선이란 시중의 수미일관한 실천 과정이 내뿜을 수밖에 없을 만인의 가슴 벅찬 교감 상태이자, 그 펄떡거리는 감응 현장의 전율과 드넓은 유대감을 타고 흐르는 보편성의 리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맥락 전체를 가장 생생하게 증언하는 시작품이 바뀌어진 지평선일 것이며, 마지막을 장식하는 오늘의 우울(憂鬱)을 위하여/오늘의 경박(輕薄)을 위하여는 이 글의 원초적 터전을 이루는 문질빈빈’(文質彬彬)의 작은 무늬이자 예술적 사유의 정수를 응축한 한 조각의 단자(單子)일 것이 틀림없다. 지상에 존재할 그 모든 문질빈빈의 글쓰기가 그러하듯, “우울경박이라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의 형상들 또한 숨은 조화를 끝끝내 희구하는 아름다운 자리, “모두 다 같이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에서 휘날려오는 것일 수밖에 없기에.

 

뮤즈여/시인이 시를 따라가기에는 싫증이 났단다/고갱, 녹턴 그리고/물새//모두 다 같이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뮤즈는 조금쯤 걸음을 멈추고/서정시인은 조금만 더 속보로 가라/그러면 대열은 일자(一字)가 된다//사과와 수첩과 담배와 같이/인간들이 걸어간다/뮤즈여/앞장을 서지 마라/그리고 너의 노래의 음계(音階)를 조금만/낮추어라/오늘의 우울(憂鬱)을 위하여/오늘의 경박(輕薄)을 위하여

 

바뀌어진 지평선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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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 간-절기, 밤을 불러내는 주문의 시간 ― 2025년 봄, 환절의 시편들

간-절기, 밤을 불러내는 주문의 시간 ― 2025년 봄, 환절의 시편들 최 진 석 1. 밤의 주문 간절기(間節期). 계절과 계절 사이의 이행기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계절이 바뀌는 시기를 지칭하기에 환절기라고도 부르며, 매운 더위의 여름과 날 선 추위의 겨울로 넘어가기 위해 준비하는 여유로운 시절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봄가을이 점점 짧아지다 못해 거의 사라지고 여름과 겨울만 남아버린 요즈음, 예전과 같이 계절 사이를 지나는 여유로움을 맛보기는 힘든 게 사실이다. 여유는 체감의 영역에 달린 일이기에 달력을 넘기며 알아채는 숫자의 이월보다 먼저 몸이 느껴야 하는 것이지만, 바쁜 일상에 파묻혀 살다 보면 어느새 여름과 겨울로 넘어가 버리는 탓이다. 끝났나 싶으면 다시 찾아오는 3월의 꽃샘추위가 유난스러웠고, 4월에도 눈을 뿌리며 그만큼 겨울과 여름 사이의 간극을 길게 늘여 놓은 올해의 간절기는 우리를 기이한 느낌으로 인도한다. 나로서는 이를 봄이 왔는지 안 왔는지가 아니라, 밤이 오는지 오지 않는지에 관한 물음으로 돌려 부르고 싶다. 전자는 단순한 계절의 변화를 담는 문제지만, 후자는 어제와는 다른 오늘을 긍정하고 오늘과는 달라질 내일을 맞아들이는 사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른다는 말은 이 밤이 깔아놓는 순간의 포석들을 건너 저 아침을 난생처음으로 만날 때 생겨나는 차이의 감각 아닌가? 어제의 피곤을 안고 오늘을 살 수 없듯, 오늘의 고민을 풀지 못한 채 내일을 시작할 수는 없다. 내일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필연코 밤의 시간을 지나야 한다. 밤은 하루를 정리하고 쏟아내는 과정이다. 낮 동안 쌓인 온갖 피로를 씻고, 사람과 사람 그리고 사물과 사물 사이에서 누적된 갖가지 문제들을 해소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밤은 신체에 대해서는 망각의 수면을, 정신에 대해서는 신경의 안정과 정신의 이완을 선사한다. 동시에 밤은 절단과 단절, 변화의 시작점이 된다. 눈뜨면 다른 세계가 열리고 다른 자신을 발견하는 계기도 역시 밤을 통해서이다. 블랑쇼가 밤을 “미래로의 부름”이라 말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터. 저 미래는 낮과 밤의 기계적 순환에서 오는 순차적 시간이 아니라 순전한 밤의 노동 속에 도래하는 미-래이다. 그렇다, 밤이 주체다. 지난 수 개월간 우리는 그 밤을 기다렸다. 망연히 쉴 수 없는 밤, 부지런한 이행의 노고를 통해 움직이는 밤, 그럼에도 무엇이 변화했는지 알아챌 수 없는 부동의 밤. 그럼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내일을 불러내고 낯선 자신과 낯선 세계를 창안하는 밤. 지금은 일단 그 밤을 그저 밤이라 불러보기로 하자. 사회와 역사, 공동체의 변전을 통해 이름하는 자리는 따로 마련될 것이다. 그러니 저 밤을 기약하고 인도하며 견인하는 시간의 노동, 이를테면 시라 불리는 주문에 귀를 기울여 보자. 2. 원본 없는 사건 밤이 오지 않는다 분명 문밖은 어두운데 손목시계가 자정을 가리키는데 밤이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처음엔 밤이 사라진 줄 알았다 저녁이 밤의 정면을 무시한 줄 알았다 한낮이 심야를 점령한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밤이 나를 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문을 두드렸는데도 그렇게 창문 밖에서 서성거렸는데도 어둠을 데리고 잠과 꿈의 손을 잡고 그토록 신호를 보냈는데도 아침저녁이 오전 오후가 다 밤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그토록 귀띔해주었는데도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24시간 밤의 외부였던 것이다 뒤늦게 깨닫고 돌아보거니와 눈뜨자마자 밤부터 찾아야 했던 것이다 아침부터 밤을 챙겨 나가야 했던 것이다 - 이문재, 「밤이 부족하다」 전문 (『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12시간 낮의 시간을 보낸다고 절로 밤이 오지는 않는다. 아니, 밤은 올 것이다. 어둡고 캄캄한, 하루의 일과가 중단되고 긴 잠만을 남겨두는 시간표의 여백이. 하지만 그 시간은 소진된 오늘을 간신히 벌충하는 충전의 순간일 뿐, 새로운 무엇을 만들지는 않는다. “문밖은 어두운데” “손목시계가 자정을 가리키는데” 잠들지 못한 우리를 여전히 서성대도록 만들며 기다리게 하는 저 밤은 그와 다른 것이다. 그런 밤은 절로 찾아들지 않는다. 온종일 욕망하고 기다리며 다가들 때, 간절히 원하고 갈구할 때야 비로소 자신을 드러낸다. 아침부터 한낮, 오후와 석양까지의 모든 시간이 밤을 위한 준비가 되지 않는다면 저 밤은 끝내 오지 않으리라. 그러니 “아침저녁이 오전 오후가 다/밤의 또 다른 얼굴”임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밤은 그저 낮의 반대말이요 시계 바늘이 이동할 때마다 다가왔다가 어느새 사라지고 마는 지루한 순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매양 똑같기만 한 어둠의 상태 그 자체로. 지구의 자전이 일으키는 자연 현상으로서 밤은 늘 똑같아 보이지만, 지난 날과 오늘을 구별하고, 오늘과 다가올 날을 갈라내는 사건의 시간은 단 한 번, 지금-여기라는 밤의 시공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원본 없는 밤”으로서, 이전에도 이후에도 다시 없을 낯선 시작의 출현에 값한다. 언젠가 이런 밤을 살았던 적 있는데 그 밤은 영영 지나버린 것 같아 아무래도 오늘은 원본이 없는 밤이네 당신은 오늘 당신의 뒷모습에 대해 들었지 당신을 험담하는 동료들로부터 흐릿하거나 너무 가까운 시선들로부터 그건 진짜 내가 아니야! 진짜 나를 봐! 몸에 덮인 외투를 결점을 곡해를 걷어내도 당신은 진짜 당신을 보여줄 수 없고 사람들의 속마음은 수장고에 숨겨놓은 모나리자처럼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지 […] 초고를 지워버린 소설에서 그때에는 있지만 지금은 사라진, 더는 똑같은 묘사란 불가능한 시절과 풍경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밤에 - 조온윤, 「원본 없는 밤」 부분 (『서정시학』 2025년 봄호) 삶이 통과하는 모든 밤이 단 하나도 똑같지 않다는 깨달음은 마주하는 모든 밤을 “원본 없는 밤”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지금 도래한 밤은 과거의 그 어느 때도 있지 않았고, 미래의 어느 시점에도 동일하지 않을 밤, 전적으로 낯선 생성의 순간들이라 불러도 좋을 터. “초고를 지워버린 소설”처럼 매 순간의 이야기가 다만 처음 만난 봄처럼 새롭게 펼쳐지는 서사라 말해도 과장은 아닐 법하다. 외양과 모양새는 언젠가 엇비슷하게 존재했을지라도, 지금-여기를 환하게 비추며 만들어지는 낯익지만 또한 낯선 광경들로서. 이야기는 이미 수천 년 전의 이야기 별빛은 이미 수만 년 전의 별빛 일찍이 부스러졌을지 모를 세계로부터 소멸로부터 도망쳐 온 복본으로서의 빛 - 조온윤, 「원본 없는 밤」 부분 (『서정시학』 2025년 봄호) 3. ambulo ergo sum 아마도 봄은 그와 같은 낯설고도 낯익은 빛의 광경 속에 형상화되는 사건일 게다. 하지만 사전 속 단어처럼 단 하나로 지칭되는 봄은 없다. 그저 매번의 봄, 서로 다른 봄을 향해 이행하는 봄들이 있을 뿐이다. 겨울과 여름이라는 계절의 이름 사이, 그 어딘가에 자리한 시간의 흐름으로서의 봄. 지속되는 겨울을 절단하고, 어떤 밤의 생성 속에 틈입하기 시작한 낯선 순간으로서의 봄. 당연하게도, 이 같은 시간은 순전한 자연 현상을 가리키지 않는다. 항상 다르고 낯선 무수한 밤을 건너던, 의미의 사건을 바라던 수많은 욕망과 용기, 행동이 낳은 저 시간의 이행을 보라. 새로 이사 온 집 뜰에는 키 큰 목련 한 그루 옛 애인처럼 나를 반겼네 […] 아, 아린 너 아니라면 어찌 견디리 꽃을 기다리는 내 마음에도 눈보라 치고 봄날을 기다리 저 광장에도 밤새 눈이 내려 하늘에서 내린 면사포를 쓴 천사 같은 어린 소녀들 눈꽃 같네, 눈에 아리네 아, 아린 기다림은 또 얼마나 황홀한 고통이던가 - 김경윤, 「겨울 목련나무 아래서」 부분 (『문학들』 2025년 봄호) 낯선 곳에 정착한 화자는 언제부터인가 거기 있었을 “키 큰 목련 한 그루”가 오래된 연인처럼 여겨진다. 풍경도 분위기도 익숙지 않은 그곳에서 의지할 것은 단지 자연물인 목련 하나. 하지만 그것 없이 겨울 한파를 버티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 목련 한 그루를 버티도록 해주는 아린 곧 싹눈의 껍질은, 따라서 화자의 벗이자 동지이며 마음의 거처가 될 수밖에. 그와 마찬가지로 세찬 계절을 건너도록 도와주는 것은 “하늘에서 내린 면사포를 쓴/천사 같은 어린 소녀들”이다. 마치 아린 없이 내가 없었듯, 그들이 없었다면 “저 광장에도” “봄날”은 도래하지 않을 터이니. 그러니 우리는 결코 가만히 앉아 이 날을 기다리지 않았다. 간절기, 즉 계절의 사이는 절로 채워지지 않는다. 밤을 새워 내리는 눈을 온몸으로 맞으며 버티던 누군가, 스스로 “눈꽃”이 되어 이 지상을 녹이지 않았더라면 절대 이루어지지 않았을 계절의 이행을 기억하자. 어쩌면 밤은 그들이 온전히 지켜내고 녹여낸 생성의 순간들로 가득 차, 낯선 아침으로 우리 앞에 도달한 미-래의 현전일 테니. 하루에 한번쯤은 나서는 그의 산책길은 발끝부터 시작되는 생각의 근육 키우기다. 유아차를 미는 고샅길의 노인을 만나면 잠시 안아드리며 세월을 질문하고 망초꽃 들길을 걷다가 훅 끼치는 두엄 냄새를 맡고는 대지의 권력에 끌린다. 사람이기에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 걸으면서 길을 잃기도 하지만 걸으면서 자갈이 아삭거리는 강길을 찾고 강물에서 쏘가리를 건지는 사람과 웃는다. […] 이래저래 늦게 돌아오는 길, 다른 사람들로부터 좀 멀리 떨어져 있기에 별의 길은 자전거로 잠깐이면 가는 곳쯤이나 될까, 생각을 이내 고원한 데로 몰기도 하는데, 날마다 그 길이와 풍광이 다르고 막다른 절역에선 환한 돌장미의 시도 만나는 길, 다만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걷는 게 생명이라면 길마다에서 사라진 발자국도 찾아보고 길에서 만나는 왕오색나비와도 한통속으로 그는 걸을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기에. - 고재종, 「걷는 사람」 부분 (『창작과비평』 2025년 봄호) 사유하는 자로서 근대의 주체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고 선언했다면, 우리 시대의 그는 다만 ‘나는 걷는다. 그러므로 존재한다(ambulo ergo sum)’라고 되뇔 따름이다. 이를 주체의 퇴락이나 축소, 소멸로 부르진 말자. 거꾸로 그것은 이 세계를 살아내는 그, 예전의 데카르트적 주체가 이제 더 이상 자신이 이 세계를 관장하는 주인이 아님을 인정하고 물러서기 위한 몸짓일 뿐이다. 나로 인해 이 세계가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외부, 이를테면 저 밤이 이 세계를 다른 곳으로, 낯선 시간으로 밀어 넣는 주체임을 알았으니까. “대지의 권력”이란 그 같은 인간 너머, 주체 바깥의 주체가 놓인 광대한 생성을 가리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우리는,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시 강조하건대, 밤은 저절로 도래하지 않는다. 변화의 시간, 생성의 사건, 어제와 오늘을 가르고 오늘과 내일을 절단하여 낯선 세계로 이월시키는 저 밤은 욕망과 용기, 행동을 통해 인간과 우리, 나를 통과할 것이다. 소란스럽게 열띤 행진만큼이나 홀로 나서는 산책마저도 저 밤을 위한 걸음걸음이 되어 도래할 밤을 촉진할 테니, 이것이 지금-여기의 존재가 처한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은 아닐까? 때로 “걸으면서 길을 잃기도” 하고, 때로 길을 잃으며 걷기도 하겠지만, “이래저래 늦게 돌아오는 길” 안에 모든 밤이 있을 것이다. 그런 밤들을 모조리 통과하고서야 비로소 미-래는 지금-여기와 겹쳐질 게다. 따라서 인간은, 우리는, 나는 “걸을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기에.” * 누군가는 잠들고 다른 누군가는 여태 잠들지 못한 이 시간, 그러나 아직 밤은 오지 않았다. 아니, 지금은 밤이다. 다만 어제와 다르지 않고, 내일도 똑같고야 말 추상적인 밤일 뿐이다. 정체된 채 흐르지 않고, 누구의 산책길도 준비하지 못한 상태로 그저 주저앉아 있을 따름인 시간. 그럼에도 시간은 흐르고, 밤은 촉진되리라. 낯설고 또 다른 밤을 향하여. 그러니 지금은 계절의 사이를 마냥 기다리지 않고, 바라보아야 할 때. 주의 깊게 머리를 숙인 채, 눈을 질끈 감고서 저 밤의 도래를 직시해야 할 시간이다. 간-절기(看-節期). 욕망하지 않고서, 용기를 갖지 않고서, 행동하지 않고서 생겨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봄을 여름으로 옮기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며, 익숙하던 세계를 낯선 세계로 돌려놓을 환절의 운동은 기어코 저 밤이 이루어낼 테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주문을 외워야 한다. 예감해야 하며, 때로 믿기도 해야 할 테다. 그렇게 밤은 올 것이라고. 지금-여기에 구멍을 뚫어 현재를 함몰시키고 어딘가의 낯선 시공으로 뱉어내리라고. 그것이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미-래의 권력이라고. 간-절기, 혹은 시적 주문의 시간을 통해. 누가 피어나려는 꽃나무를 막을까, 누가, 온 세상에 차례로 번지는 색색의 봄을, 누가 쫓아다니며 막을까, 누가, 동시에 펼쳐지는 우산을 접을까, 누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비를 막을까, 누가, 기울어지는 나무를, 세울까, 누가 무너지는 세상의, 얼굴을, 닦을까 - 박연준, 「새된 소리」 부분 (『문학동네』 2025년 봄호)

계간 파란 최진석 간절기생성산책미래이행사건 2025
이찬 ‘時中’, ‘다른 미래’로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 ― 김수영 시 「바뀌어진 지평선」

時中, ‘다른 미래’로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 - 김수영 시 「바뀌어진 지평선」 읽기 1 2024년 여름 『계간 파란』 통권 33호 ‘문질빈빈(文質彬彬)’ 항목에서 제시된 「“지평선”의 아름다움」에서 이미 암시했듯, 김수영의 「바뀌어진 지평선」은 『주역』과 『중용』으로 표상되는 동아시아 고전의 영향 관계라는 문제틀의 테두리에서 이해되고 감수되어야만 한다. 이 시편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오래된 미래’로 자리할 수밖에 없을 ‘중용’의 사유와 ‘시중’의 윤리학이라는 방법론과 의제의 초점화를 통해서만 적확하게 풀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시와 산문 텍스트의 상관성을 심층적으로 탐사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 고전의 충실한 이해 및 참조가 필수 불가결의 조건을 이룬다고 하겠다. 김수영의 초기작 「공자(孔子)의 생활난」에서부터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유발한 도피 행각과 귀가 이후의 실존적 격투가 고스란히 배어든 “신귀거래(新歸去來)” 연작, 그리고 말년에 창작된 「미역국」이나 「사랑의 변주곡」에 이르기까지, 그의 무수한 시편들에선 동아시아 고전의 수용 및 변용의 맥락이 일관된 지속의 흐름으로 나타난다. 김수영의 시에서 동아시아 고전의 이름이 거죽 위로 솟아오른 텍스트로는 「술과 어린 고양이」, 「중용(中庸)에 대하여」 등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너도 취하고 나도 취하는 中庸의 술잔” “여기에 있는 것은 中庸이 아니다” 같은 구절들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바이다. 「시여, 침을 뱉어라」, 「<죽음과 사랑>의 對極은 시의 本髓」 같은 산문 텍스트에서 활용된 “양극의 긴장” “대극” 같은 용어들 역시. 동아시아 문명사의 주축을 이루는 ‘주역 철학사’에서 부단히 제시되었던 ‘대대(對待)’ ‘순환(循環)’ 같은 어휘들을 수용・변형한 것이다. 김수영 시 곳곳에서 나타나는 “설움”과 “긍지”, “생활”과 “자유” 같은 대립적 심상들이 상호 보완적인 “대극”의 지력선을 이루는 것처럼, “대극”과 “양극의 긴장”으로 표상되는 산문 텍스트의 핵심 원리 역시, ‘중용’의 사유와 ‘시중’의 윤리학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 시인은 『중용』의 ‘신독(愼獨)’으로 대변되는 근본적 ‘자기성찰’을 수미일관한 실존적 태도로 “이행(履行)”하려 했을뿐더러, “생활”과 “뮤즈”가 “일자(一字)”의 “대열”을 이룰 수 있는 실천의 기반으로서 ‘시중(時中)’의 윤리학을 끊임없이 견지하려 했으며 이를 당대의 “서정시인”에게 간곡한 목소리로 권고했기 때문이다. ‘시중(時中)’이란 말은 『중용』 제2장에서 등장하는 ‘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反>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君子가 中庸을 함은 君子이면서 때에 맞게 하기 때문이요, 小人이 中庸에 반대함은 小人이면서 忌憚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구절들을 통해, 그 어휘적 관련 맥락과 구체적 의미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관한 주희(朱熹)의 주석으로 나타난 ‘君子之所以爲中庸者 以其有君子之德 而又能隨時以處中也.(君子가 中庸을 하는 까닭은 君子의 德이 있고 또 능히 때에 따라 中에 처하기 때문이요)’라는 구절은 동아시아 문화에서 ‘시중’이 인격 수양의 정점을 표상하는 것으로 설정되었던 맥락을 좀 더 생생하게 감득할 수 있게 한다. 결국 ‘시중(時中)’이란 ‘고시조지의야(故時措之宜也)’라는 말에 담긴 실질적 의미, ‘그러므로 때때로, 상황에 따라서 행함에 의(宜), 적합하면 된다’(우응순, 『친절한 중용 강의』)라는 표현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각각의 상황과 시간의 구체적 마디들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변화와 더불어 그것에 따라 달라지는 마땅함(宜)을 매번 다시 살피고 수행해야 한다는 숨겨진 맥락을 명료하게 풀이해주기 때문이다. 김수영 시에서 부단히 등장하는 부끄러움의 형상들이나 보잘것없음을 반성하는 자기성찰적 시구들은 한결같이 ‘시중’의 윤리학을 우회적으로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김수영의 여러 시작품에서 줄기차게 나타나는 ‘시각성’의 이미지들 역시 좀 더 심층적인 차원의 논의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중용』을 위시한 동아시아 고전에서 유래하는 ‘신독(愼獨)’ ‘권도(權度)’ 등과 같은 성찰성과 관련된 어휘들과 더불어 ‘중용’ 및 ‘시중’의 사유 맥락에 대한 섬세한 이해 및 본격적 탐구가 필수 불가결하다. 2 뮤즈여 용서하라 생활을 하여 나가기 위하여는 요만한 경박성이 필요하단다 시간의 표면에 물방울을 풍기어 가며 오늘을 울지 않으려고 너를 잊고 살아야 하는 까닭에 로날드 콜맨의 신작품(新作品)을 눈여겨 살펴보며 피우기 싫은 담배를 피워본다 어느 매춘부(賣春婦)의 생활(生活)같이 다소곳한 분위기 안에서 오늘이 봄인지도 모르고 그래도 날개돋친 마음을 위하여 너와 같이 걸어간다 흐린 봄철 어느 오후의 무거운 일기(日氣)처럼 그만한 우울이 또한 필요하다 세상을 속지 않고 걸어가기 위하여 나는 담배를 끄고 누구에게든지 신경질(神經質)을 피우고 싶다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한 생활이 비겁(卑怯)하다고 경멸(輕蔑)하지 말아라 뮤즈여 나는 공리적인 인간이 아니다 내가 괴로워하기보다도 남이 괴로워하는 양을 보기 위하여서도 나에게는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한 것이다 지혜의 왕자처럼 눈 하나 까딱하지 아니하고 도사리고 앉아서 나의 원죄와 회한을 생각하기 전에 너의 생리부터 해부하여 보아야겠다 뮤즈여 클라크 케이블 그리고 너절한 대중잡지 타락한 오늘을 위하여서는 내가 ‘오늘’보다 더 깊이 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웃을까 보아 나는 적당히 넥타이를 고쳐매고 앉아있다 뮤즈여 너는 어제까지의 나의 노력(勞力) 오늘은 나의 지평선(地平線)이 바뀌어졌다 물은 물이고 불은 불일 것이지만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과 내일의 차이를 정시하기 위하여 하다못해 이와 같이 타락한 신문기자의 탈을 쓰고 살고 있단다 솔직한 고백을 싫어하는 뮤즈여 투기(妬忌)와 경쟁과 살인과 간음과 사기에 대하여서는 너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리라 적당(適當)한 음모(陰謀)는 세상의 것이다 이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하여 나에게는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하다 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 아슬아슬하게/세상에 배를 대고 날아가는 정신(精神)이여 너무나 가벼워서 내 자신이 스스로 무서워지는 놀라운 육체여 배반이여 모험이여 간악이여 간지러운 육체여 표면에 살아라 뮤즈여 너의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 그러면 아름다움은 어제부터 출발하고 나의 육체는 오늘부터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콜맨, 게이블, 레이트, 디보스, 매리지, 하우스펠 에어리어 ―(영국인(英國人)들은 호스피탈 에어리어?) 뮤즈여 시인이 시를 따라가기에는 싫증이 났단다 고갱, 녹턴 그리고 물새 모두 다 같이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 뮤즈는 조금쯤 걸음을 멈추고 서정시인은 조금만 더 속보로 가라 그러면 대열은 일자(一字)가 된다 사과와 수첩과 담배와 같이 인간들이 걸어간다 뮤즈여 앞장을 서지 마라 그리고 너의 노래의 음계(音階)를 조금만 낮추어라 오늘의 우울(憂鬱)을 위하여 오늘의 경박(輕薄)을 위하여 - 「바뀌어진 지평선」 전문 3 「바뀌어진 지평선」은 김수영의 시와 산문 텍스트를 넘어서 그의 실존적 태도와 세계관의 중핵을 구성하는 ‘중(中)’의 사유와 ‘시중(時中)’의 윤리학을 바탕으로 삼는다. 이 시는 상당히 긴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시라는 예술 장르의 본질적 특성으로 규정되어 온 의미의 압축성과 리듬의 암시성을 충실하게 확보한다. 이와 같은 예술적 특이점과 미학적 자질이 온전하게 작품 내부에 응축될 수 있었던 이유와 배경 역시, 김수영 특유의 “대극”의 사유 방식 또는 “양극의 긴장”에 대한 그의 첨예한 통찰력에서 비롯하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1연에 나타난 “뮤즈”와 “생활”이란 이미지는 명시적인 차원에서 이 작품 전체를 가로지르는 “대극”의 의미 계열을 구축한다. 양자의 사이 공간에 들어박힌 “요만한 경박성이 필요하다”라는 시구와 “오늘을 울지 않으려고 너를 잊고 살아야 하는 까닭에”라는 시간적 심상은 “대극”이 반복・변형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오늘”이란 “생활”에서 파생된 것이며, “너”는 “뮤즈”를 대명사로 바꾸어놓은 대체 심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활”에서 “오늘”로 이어지는 이미지의 매듭이 나날의 범속한 생활이 만드는 온갖 우여곡절들을 암시한다면, “뮤즈”와 “너”가 함께 이루는 연속적인 이미지 지력선은 시인의 포에지(poesie), 곧 시인의 예술적 이상으로 이루어진 예술혼을 표상한다. 나아가 시작(詩作)의 ‘내재적 과정’에서 체감하게 되는 ‘신독(愼獨)’의 실천적 태도와 ‘시중’의 윤리학의 절실한 자각을 함축한다. 그렇다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요만한 경박성이 필요하다”라는 구절은 위에서 풀이한 맥락에 부합하지 않는 이질적 측면 또는 상반된 계기를 품고 있다는 의심이 생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 「바뀌어진 지평선」을 중용의 관점과 문제틀로 해석하려는 시도 자체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지점에서 「긍지의 날」에서 상반된 위상을 차지하는 “설움”과 “긍지”라는 심상을 “너무나 잘 아는 순환의 원리”로 통합시키는 “대극”의 사유 원리를 다시 되짚어 볼 필요가 있겠다. 이는 「사랑」에서 등장하는 “변치 않는”과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이라는 시구의 상반성, 그리고 「사랑의 변주곡」에 아로새겨진 “위대한 사랑의 도시”와 “개미”라는 대극적 이미지 구성원리에서도 또렷한 되풀이의 모양새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만한 경박성”이란 작은 무늬는 ‘극즉반(極則反)’으로 표상되는 동아시아 전통의 ‘이상적 질서’, 곧 ‘중용’의 사유 및 실천 원리이자 ‘대대(對待)’라는 말로 집약되는 ‘역동적 균형(dynamic balance)’, 또는 ‘상보성(complementarity)’의 관점에서 감수되고 해석되어야만 한다. 「바뀌어진 지평선」이 품은 사유의 보석이란 어쩌면 정반대 상황에 놓인 사태들을 “대극”의 원리로 포괄하면서, 이들을 그저 대립하는 것만이 아닌 상호 보완하는 것이라고 사유했던 지점에서 최고 순도의 빛을 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요만한 경박성”이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덧씌워진 속물성이나 천박성을 껴안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의 위대의 소재(所在)”(「나의 가족」)를 예감하면서 “긍지”와 “사랑”으로 대변되는 상반된 “대극”의 차원으로 이끌어 올리려는 잠재적 포석을 품은 것이기도 하다. 그것에는 “모두 다 같이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을 예감하는 사유의 밀알과 더불어 명실상부한 내적 “성장”을 성취하려는 시인의 웅대한 미래 비전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아니, ‘다른 미래’를 향한 상상력의 비상(飛翔)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2연을 구성하는 “대극”의 짜임새는 “다소곳한 분위기”라는 정(靜)의 심상과 “날개돋친 마음을 위하여”라는 동(動)의 표현이 상반된 지력선을 구축하는 자리에서 양자의 이미지 계열을 한층 더 풍성하면서도 복합적인 일상의 다면성을 담을 수 있는 자리로 이끌어간다. 양자는 “어느 매춘부의 생활 같이”와 “오늘이 봄인지도 모르고”라는 상반된 이미지 지력선을 각각 계승한다. 따라서 그저 단순한 ‘정(靜)/동(動)’의 “대극” 현상으로 파악될 수 없다. 도리어 ‘정중동(靜中動)/동중정(動中靜)’으로 요약되는 역동적 상호 침투의 이미지 지력선을 구축한다. 나아가 중층적 “대극”의 무늬들을 2연 마디마디의 모서리로 틔워 올리면서 그야말로 풍요로운 이미지의 숲을 이루는 주요 동인으로 기능한다. 2연의 “다소곳한 분위기”와 “날개돋친 마음을 위하여”라는 심상들 역시, “어느 매춘부의 생활 같이”와 “오늘이 봄인지도 모르고”라는 구절들을 각각 잇따르는 것이기에, ‘정(靜)/동(動)’의 단순한 “대극” 현상으로 해석될 수 없다. 오히려 ‘정중동(靜中動)/동중정(動中靜)’으로 표현되는 상호 침투의 역동적 이미지를 구축하면서, 그야말로 다면적인 “대극”의 무늬들을 아로새긴다. 달리 말해, “어느 매춘부의 생활 같이”라는 심상이 “다소곳한 분위기”라는 고요한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격렬한 느낌을 함축하는 것이라면, “오늘이 봄인지도 모르고”라는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의 심상은 “날개돋친 마음을 위하여”라는 고양된 충만감으로 솟아오르는 역동적 개방성의 이미지와 “대극”을 이루면서 고립된 폐쇄성의 감각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3연에서는 “무거운 일기”와 “우울”이라는 형상이 둔중하면서도 정적인 이미지 지력선을 구축한다. 이와 상반되는 “걸어가기 위하여”와 “신경질을 피우고 싶다”라는 구절들은 예민하면서도 역동적인 이미지의 원환 운동을 표현한다. 4연에 나타난 “생활”->“비겁”->“나의 원죄와 회한”의 계열이 함축하는 세속적 “타락”이라는 의미 매듭과 더불어, “뮤즈”->“경멸”->“너의 생리”로 이어지는 형상의 연속선이 이루는 신성한 “지혜”라는 의미 계열 역시, 앞서 살핀 연과 같은 “대극”의 구도에서 발원한다. “생활”의 이미지 계열이 발산하는 ‘세속-현실-일상’이라는 하나의 “극”과 더불어, “뮤즈”라는 형상의 계열체로 수렴되는 ‘신성-이상-예술’이라는 또 다른 “극”이 함께 이루는 “힘”과 “긴장”의 미학이 생생한 느낌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렇듯 “생활/뮤즈”의 “대극”을 형상화하면서, 김수영은 나날을 살아가는 “온몸”에 “타락”과 “지혜”를 동시에 포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시편은 나날의 “생활” 속에서는 “뮤즈”로 표상되는 시의 예술혼이 끝끝내 견지하려 했을뿐더러 이와 “대극”을 이루는 “뮤즈” 속에서는 “생활”과의 공분모를 형상화하려 했던, 시인의 실존적 “싸움”을 주도 모티프로 삼는다. 달리 말해, 시인의 몸과 마음에서 수시로 엇갈리는 무수한 “대극” 운동이 「바뀌어진 지평선」을 구성하는 전체 이미지의 주도소(主導素)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5연과 6연에서도 이와 같은 “대극”의 이미지들은 수미일관한 연속선으로 구축되지만, 좀 더 본원적인 차원으로 진화한다. 곧 상호 모순에 가까운 ‘극단적 아이러니’의 어법과 구조를 새롭게 펼쳐놓는다. 특히 “타락한 오늘을 위하여서는/내가 ‘오늘’보다 더 깊이 떨어져야 할 것이다”(5연), “뮤즈여/너는 어제까지의 나의 세력/오늘은 나의 지평선(地平線)이 바뀌어졌다”(6연) 같은 대목들은 표면적인 통사 구조만을 보아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들의 적확한 해석은 “바뀌어진 지평선”이라는 제목에 내포된 그 복잡다단한 의미론적 계기와 극단적 아이러니 구조에 관한 섬세한 통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7연의 “하다못해 이와 같이 타락한 신문기자의/탈을 쓰고 살고 있단다”를 비롯하여, 8연에서 등장하는 “너무나 가벼워서 내 자신이/스스로 무서워지는 놀라운 육체여/배반이여 모험이여 간악이여 간지러운 육체여” 같은 구절들 역시 상호 “대극”의 이미지 계열을 구성한다. 전자(前者)가 바로 앞에 놓인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오늘과 내일의 차이를 정시하기 위하여”라는 구절에서 이어진 것임을 염두에 두면, “타락한”이라는 표현은 통상적인 의미와는 다른 맥락에서 활용되었음을 직감할 수 있다. 또한 “기자”의 직무상의 윤리가 매일매일 다르게 변해가는 세속의 풍습과 인심을 “정시”하는 자리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타락한”이라는 시어와는 결합할 수 없는 상반된 의미 지향성을 함축한다. 그리하여, 7연에서 도드라진 모양새로 등장하는 “타락한”은 기자”의 직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를 발산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불가피한 상태이자, “이 어지러운 세상”이 강제하는 온갖 “탈”, 곧 사회적 페르소나(persona)로 해석되는 것이 합당하다. 이처럼 「바뀌어진 지평선」에서 앞뒤로 연속된 시구들은 서로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어긋나는 모양새를 띤다. 이들은 “뮤즈”와 “생활”, 곧 ‘신성과 세속’, ‘이상과 현실’ ‘예술과 일상’ 등등의 상반 항들이 확고부동한 이분법의 구도로 나누어질 수 없다는, 시인의 ‘역동적 균형(dynamic balance)’의 사유를 묵시적으로 표현한다. 나아가 “바뀌어진 지평선”이라는 제목이 품은 그 형상의 진의(眞義)를 머금고 있는 것으로 추론된다. 가치 전도의 의미를 거느린 이 형상은, “뮤즈”와 “생활”이 서로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 아니라 오히려 수시로 넘나들 수 있는 상호 전환의 융합 관계에 놓여있다는 이면적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뀌어진 지평선”이란 끊임없이 변화하고 이동하는 ‘중(中)’의 시간적 궤적을 표상하는 형상인 동시에 ‘역동적 균형’의 운동 및 이행 과정을 지속하는 ‘시중(時中)’의 윤리학을 암시하는 이미지일 것이다. 8연의 “너무나 가벼워서 내 자신이/스스로 무서워지는 놀라운 육체여/배반이여 모험이여 간악이여 간지러운 육체여”라는 구절 역시, “바뀌어진 지평선”으로 빗대어진 ‘신성’과 ‘세속’ 사이에서 일어나는 가치의 상호 전환 과정 및 ‘역동적 균형’의 상호 이행 운동을 역설 어법으로 새긴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 구절 바로 앞에 놓인 “적당(適當)한 음모(陰謀)는 세상의 것이다/이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하여/나에게는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하다/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아슬아슬하게/세상에 배를 대고 날아가는 정신(精神)이여”와 더불어, 그 뒤를 잇는 “표면에 살아라/뮤즈여/너의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라는 이미지 매듭을 오랜 시간 동안 숙독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이들을 곰곰이 되살피면, “배반이여 모험이여 간악이여 간지러운 육체여”라는 구절은 비단 “타락한” 시인 자신에 대한 반성이나 풍자를 비유한 표현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저 구절은 언뜻 “가벼워서”, “배반”, “간악” 같은 시어들로 이어지면서 부정적인 느낌을 꼴 짓는 이미지의 핵심 매듭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의 앞뒤를 구성하는 이미지들이 정반대 의미 계열을 이룬다는 사실을 다시 되짚어 볼 필요가 있겠다. 이를 통해서만 “세상에 배를 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와 배경이 “생활”에 있을뿐더러 “경박성”이란 그것의 필수 요건일 수밖에 없지만, 그것의 “표면”을 딛고 “아슬아슬하게” “날아갈” 수 있는 “정신”을 다시 강조하고자 하는 시인의 은폐된 측면이 새롭게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이라는 적확한 은유가 암시하는 것처럼, 저 이미지들은 “세상에 배를 대고”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도 그 “물”에 빠져버리지 않고 그 “위를 날아갈” 수 있는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부단히 유지할 수 있는 실천의 벡터를 암시적 문법으로 개진한다. 이 실천의 원리를 ‘시중’의 윤리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한 철학자가 제시한 ‘인간의 모든 “중中”은 “시時” 속에 있다는 것이다. “시時”라는 것은 객관적・절대적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상황성을 말하는 것이다.’(김용옥, 『중용, 인간의 맛』)라는 언급은, 이 맥락 전체를 좀 더 명확한 철학적 범주로 정립할 수 있게 해준다. 4 이와 같은 ‘시중(時中)’의 사유 맥락은 8연 마지막 대목을 이루는 “표면에 살아라/뮤즈여/너의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 같은 형상들이나, 9연의 “너의 육체는/오늘부터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11연의 “뮤즈여/시인이 시의 뒤를 따라가기에는 싫증이 났단다” 같은 심상들로 변형되면서 점층적 확산의 의미구조를 형성한다. 시인이 “뮤즈”에게 “표면에 살아라”라고 말하면서, “너의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라고 말할 수 있는 까닭 역시, ‘중中이란 오직 적절한 시時를 만날 때만이 중으로써 완성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을 ‘시중’의 윤리학에서 기원한다. “표면”은 “생활”의 의미 계열로 수렴되며,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한다는 것은 “뮤즈”의 이상적 예술세계를 포기할 수 없는 시인의 자기 신념을 은은한 뉘앙스로 드러내는 역설 어법을 활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9연과 11연의 이미지 또한 위와 같은 해석의 범주에서 감수되는 것이 합당하다. “뮤즈”를 “아름다움”이 아니라 “육체”의 차원에서 호명하는 이미지 매듭(9연)이나, “시인”과 “시”를 “대극”의 차원으로 설정하면서 “뮤즈”와 “시”를 의미론적 연속체의 범주로 설정하는 구절(11연)은 「바뀌어진 지평선」에서 “생활”과 “뮤즈”가 완전히 다른 별개의 세계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이면적 의미를 함축한다. 이 구절들은 “생활”과 “뮤즈”를 끊임없는 상호 전환 및 상호 이행이라는 융합・횡단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던 김수영 특유의 ‘중(中)’의 사유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이 사유는 또한 ‘시중(時中)’의 윤리학이라는 실천 원리와 가치 지향성을 내포한다. 9연과 11연이 연속적인 의미 계열을 이루면서 개진하려는 바는, 각각의 상황과 국면에 따라 “생활”과 “뮤즈”가 맺을 수 있는 최선의 관계이자 최적의 방향성, 곧 매 순간 ‘시중(時中)’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궁극적 전언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생활”과 “뮤즈”가 12연에서 “모두 다 같이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을 이룰 수 있는 까닭은, 양자의 상호 이행 과정에서 매 순간 달라지는 ‘시중(時中)’의 위상과 내용을 신중하게 사유하고 충실하게 실천하려는 자리에서 비롯한다. 달리 말해, 시인은 매 상황의 변화에 따라 최적의 방향을 모색하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려는 실천의 ‘내재적 과정’, ‘시중(時中)’의 윤리학을 나날의 실존적 태도로 견지하려 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사과와 수첩과 담배와 같이/인간들이 걸어간다”라는 구절로 표상되는 세계의 모든 영역이 “일자(一字)”를 이루는 “지평선의 대열”을 구축할 수 있는 궁극적 화합의 미래 비전을 상상하고 선취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김수영이 「바뀌어진 지평선」의 마무리 대목에서 “뮤즈”에게 “조금쯤 걸음을 멈추고”(12연), “앞장을 서지 마라”(13연), “너의 노래의 음계를 조금만 낮추어라”(13연)라고 노래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점을 이룬다. 시인은 “생활”과 “뮤즈”의 “대극”이 함께 이루어가는 ‘상반상성(相反相成)’의 이행 과정을 섬세하고 풍요로운 이미지로 소묘함으로써, ‘세속/신성’, 현실/이상’, ‘예술/일상’이라는 대립 구도의 고정성을 부단히 해체-재구성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맥락을 동시대 시인과 예술가들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권유하려 했던 것으로 유추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뮤즈는 조금쯤 걸음을 멈추고/서정시인은 조금만 더 속보로 가라/그러면 대열은 일자(一字)가 된다”라는 대목은 “서정시인”으로 비유된 당대의 시인이나 예술가들이 모두 “모더니티”를 새롭게 구성할 수 있는 혁신의 주체로 거듭날 수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전언을 간곡한 명령 어법으로 권고하는 내용을 품는다. 이렇듯 “지평선의 대열”이 그야말로 “일자(一字)를 이루기 위해선, 우선 “콜맨, 게이블, 레이트, 디보스,/매리지/하우스펠 에어리어” 같은 어휘들로 표상되는 서구 기계산업문명의 선진성과 그 문화적 세련성을 무작정 동경하고 추종하는 자리에서 벗어나야만 했으리라. 나아가 이와 같은 서구의 문화적 특질을 “뮤즈” 곧 “시”의 이상적 본질이자 예술혼의 정수로 추구하거나 숭앙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대 서구의 문화는 우리의 “생활”과 엄청난 격차로 벌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바꾸어진 지평선」에서 시인이 우리 “모더니티”의 후진성이라는 사회・역사적 상황과 이에 대한 신중한 고민 및 극복의 비전을 여타의 “서정시인”과 예술가들에게 권고하려 했던 맥락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다. 이 권고에 깃든 속도의 담론과 비전이란 우리 사회 전체의 “모더니티” 수준과 밀도에 대한 시인의 근본적인 염려와 신중한 고민의 깊이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그것은 『중용』 제2장의 ‘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군자가 중용을 함은 군자이면서 때에 맞게 하기 때문이요, 소인이 중용에 반대로 함은 소인이면서 기탄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구절과 그대로 맞닿는다, 『중용』의 이 구절에 따르면, 군자의 ‘시중(時中)’은 소인의 ‘무기탄(無忌憚)’과 상반된 방향과 내용을 지니는 ‘기탄(忌憚)’, 곧 ‘거리낌’을 심사숙고하는 자리에서 생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리낌이란 신중함’이며, ‘거리낌은 인간에게 “거리”와 “여유”를 허락하는 것이기에 실수의 가능성을 줄인다’(김용옥, 『인간의 맛』)라는 깊은 안목의 풀이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거리낌은 겸손인 동시에 인간다움의 강함’일뿐더러, ‘시중(時中)’의 근거이자 그 실천적 이행의 원천으로 자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측면은 「바뀌어진 지평선」의 마지막 연에서 극단적 역설을 표현하는 반어법을 동반하면서, 우리 “모더니티”에 둔중하게 가라앉은 “우울”과 “경박”을 반추하도록 강제한다. 마지막 13연에서 “앞장을 서지 마라” “낮추어라” 같은 말들로 표현된 제한과 금지의 명령어들을 “뮤즈”에게 덧씌울 수밖에 없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이들은 김수영이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1950-60년대 한국 시단에서 “모더니티”의 첨단을 맹종(盲從)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지가 될 수 없음을 각별한 어조와 리듬으로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맥락을 여타의 시인들이나 예술가에게 권고하고 공유하려는 치열한 노력에서 비롯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13연은 두 매듭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사과와 수첩과 담배와 같이/인간들이 걸어간다/뮤즈여/앞장을 서지 마라/그리고 너의 노래의 음계(音階)를 조금만/낮추어라”라는 부분으로 매듭지어질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오늘의 우울(憂鬱)을 위하여/오늘의 경박(輕薄)을 위하여”라는 마지막 대목으로 분할될 수 있을 것이다. 전자(前者)는 “뮤즈”에게 모더니티와 아방가르드 풍조를 맹렬하게 추종하는 것만이 능사(能事)가 아님을 권고한다. 또한 우리가 나가야 할 최적의 선택지를 신중하게 고민하고 근본적으로 다시 성찰하기를 간곡하게 요청하는 뉘앙스를 풍긴다. 이 고민과 성찰의 자리가 바로 ‘시중(時中)’의 윤리학이 펼쳐지는 구체적 실천의 무대일 것이다. 이는 또한 후자(後者)의 지극한 역설로 이루어진 반어법을 낳는 토대에 해당한다. 따라서 「바뀌어진 지평선」의 “오늘의 우울(憂鬱)을 위하여/오늘의 경박(輕薄)을 위하여”라는 맨 마지막 무늬들은 김수영의 산문 「모더니티의 문제」를 비유적 차원에서 집약하는 구절 “우리의 비애, 우리만의 비애”에 대한 심층적인 통찰 없이는 충실하게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앞 구절과의 통사론적 맥락에서 보면 지극한 역설을 내포한 아이러니의 수사학일 터이지만, 한국 “모더니티”의 후진성이란 차원에서 보면, 지극히 당연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맥락은 “우울”과 “경박”이라는 시어가 발산하는 부정적인 뉘앙스에도 불구하고, 김수영이 우리 “모더니티”의 낙후된 수준과 후진적 형성 과정을 치열하게 사유하고 고민하면서, 그것과 ‘사랑하는 싸움’을 벌이려 했던 그 복잡다단한 속사정을 비교적 명징하게 포착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모더니티의 문제」에 나타난 “오늘날의 우리의 현대적인 시인의 긍지는 앞섰다는 것이 아니라 뒤떨어졌다는 것을 의식하는 데 있다.”라는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을 김수영의 “이상한 역설”이란 현대 한국인에게 드리워질 수밖에 없었을 “우울”과 “경박”을 회피하거나 배제하는 자리에서는 결코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다. 김수영이 말하는 “긍지”란 우리 모두의 “우울”과 “경박”을 껴안고 긍정할 수 있는 “사랑”의 실천 주체에게만 도래하는 것일뿐더러. 이른바 ‘중용’의 미덕에서 비롯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리하여, 김수영에게 “긍지”란 ‘시중’의 윤리학에 깃든 ‘실천적 원근법’과 ‘역동적 균형’의 부단한 “이행”에서 오는 것일 수밖에 없다. 나아가 우리 “모더니티”의 후진성에서 발원하는 “우울”과 “경박”을 정면으로 마주치려는 주체에게만 도래하는 것일 터이다. 아니, ‘다른 미래’를 열어가려는 수미일관한 실천의 자리, ‘시중(時中)’의 충실한 이행 과정을 통해서만 체화될 수 있을 것이 자명하다. 아랫자리에서 인용되는 작은 무늬들이 넌지시 말해주듯. 오오 환희(歡喜)여 미역국이여 미역국에 뜬 구름이여 구슬픈 조상(祖上)이여 가뭄의 백성이여 퇴계(退溪)든 정다산(丁茶山)이든 수염난 영감이든 복덕방(福德房) 사기꾼도 도적놈지주(地主)라도 좋으니 제발 순조로와라 자칭(自稱) 예술파시인(藝術派詩人)들이 아무리 우리의 능변(能辯)을 욕해도-이것이 환희(歡喜)인 걸 어떻게 하랴 인생(人生)도 인생(人生)의 부분도 통째 움직인다-우리는 그것을 결혼(結婚)의 소리라고 부른다 - - 「미역국」 부분 우리의 현대시의 밀도는 이 자각의 밀도이고, 이 밀도는 우리의 비애, 우리만의 비애를 가리켜준다. 이상학 역설 같지만 오늘날의 우리의 현대적인 시인의 긍지는 ‘앞섰다’는 것이 아니라 ‘뒤떨어졌다’는 것을 의식하는 데 있다. 그가 ‘앞섰다’면 이 ‘뒤떨어졌다’는 것을 확고하고 여유 있게 의식하는 점에서 ‘앞섰다’. 세계의 시 시장에 출품된 우리의 현대시가 뒤떨어졌다는 낙인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기 전에, 우리들에게는 우선 우리들의 현실에 정직할 수 있는 과단과 결의가 필요하다. - - 「모더니티의 문제」 부분

계간 파란 이찬 김수영바뀌어진 지평선중용시중신독역동적 균형상보성대극상반상성 2025
김주원 종이책 바깥의 문학

1. 한 통계에 따르면 종이책과 전자책, 오디오북을 포함한 성인의 연간 종합 독서량은 3.9권이다. 한국의 독서 인구가 매년 감소하고 있다고 하지만 2023년 기준 신간도서 발행 분포를 보면, 문학(20.1%)은 교육(20.9%) 다음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1) 독자층의 도서 구매 상황은 다르다. 교보문고의 집계에 따르면 2021년부터 2023년까지 소설과 시/에세이 부문의 판매 권수와 판매액 점유율은 점점 하락하는 추세이다.2) 도서 소비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교양 서적과 직업 관련 서적이라고 한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출판계가 전례 없는 특수를 누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문학이 독서 시장에서 유력한 장르인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문학을 떠받치고 있는 독서 시장이 위축되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문학을 읽고 경험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해졌다. 문학이 특정한 매체, 특정한 직업군의 영역이라는 생각을 걷어내면 문학은 어디에나 있다. 매일 접하는 인터넷과 SNS에 게시되는 문학 관련 정보들과 자기 표현 글쓰기에서 비평적 욕구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비평이 가장 활성화되는 곳은 문예지가 아니라 비공식적이고 비전문적인 장소들인지 모른다.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문학은 특별한 관심과 애정의 대상이 된다. 물론 그런 관심만으로 비평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발견한 책에 매혹된 독자들이 비평의 출발점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건 비평에만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그런 독자가 시인이 되고 소설가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직업 독자로서 비평가가 있지만 모든 문학 종사자들의 기본적인 정체성은 독자이다. 최근 생태 비평의 화두인 ‘얽힘’(Entanglement)은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만이 아니라 문학과 독자의 관계에도 필요한 상상력이다. 문학은 독자와 함께 만드는 세계이고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2. 강동호의 「새로움의 경제」(웹진 『비유』, 2025. 3-4)는 독자에 관한 글은 아니지만 문화경제학의 관점에서 문학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한다. ‘새로움’을 일종의 경제로 바라보는 이 글은 상품경제와 구별되는 문화경제에 주목한다. ‘새로움’은 동시대 문화 아카이브와 관련하여 작품이 지닌 가치를 측정하는 기호(화폐)로 “‘새로움의 경제’란 문화적 혁신을 독려하고 정당화하는 특수적 통화 체제”이다. 저자가 진단하고 있는 동시대 문화 현상은 새로움의 공급 과잉, 즉 새로움의 인플레이션인데 이는 시장과 자본주의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 글의 목적은 시장과 문화라는 ‘새로움’이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그 효과는 어떻게 다른지를 판별하는 것이다. 저자는 문학의 가치 역시 작품을 현실에서 사용하고 체험하는 독자들에 따라 무한히 달라질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그리하여 “‘작가-작품-독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독특하면서도 역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언어적 교환 행위를, 그리고 그러한 교환 원리가 현실 언어의 경제라는 광의의 체제와 구별되는 지점”과 “자본의 논리에 온전히 환원되지 않는 영역을 다시 발견”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통상의 사회경제적인 원리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문학을 살펴보겠다는 것은 문학의 자율성에 관한 탐구라 할 수 있다. 특히 작품의 가치를 생산하는 주체로서 독자와 ‘작가-작품-독자’ 사이에서 이뤄지는 독특하면서도 역동적인 교환 원리는 주목할 만하다. 강동호는 「새로움의 경제2(1)」(『문장웹진』, 2025. 4)에서도 유사한 논의를 펼치고 있는데 아직 ‘새로움의 경제’에 관한 가설이 있을 뿐 그 내용이 충분히 전개된 것 같지는 않다. 그의 글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문화경제 원리에 관한 여러 가정들과 개념이 아니라 그러한 논의로 검증 가능한 구체적인 사례나 예시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문화경제는 이론인 동시에 실물경제이다. 작품의 가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독자, 작품 생산과 수용 과정에서 일어나는 독특한 교환의 원리를 문학 현장의 사례로 논증하는 과정 없이 ‘새로움의 경제’를 설명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강동호의 글은 독자가 포함된 문학을 역동적인 경제 교환의 흐름으로 이해하려 하지만 그 새로움의 발생지, 현장의 실체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노태훈의 「한국문학의 현장」(『자음과모음』 2025년 봄호)은 한국문학의 현장을 생산과 유통, 수용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어 강동호의 글과 접점을 찾을 수 있다. 이 글에 따르면 한국문학의 생산은 ‘등단’과 ‘문학상’이라는 집단적 승인을 전제하고 있으며, 다른 예술 장르와 달리 문학의 유통은 수용의 현장과 분리되어 있다. 특히 문예지가 단행본으로 발간되기 전의 작품들을 게재하는 것은 상품으로서 문학을 예비하는 과정이며 그 점에서 문예지는 생산 현장에 가까울 수 있다. 그렇다면 수용의 단계는 어떤가. 문학의 현장은 결국 수용자인 독자에게 그 핵심이 달려 있다. 문학의 현장성이라는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작품이 읽히고 공유되는 순간이다. 작가와 작품 그리고 독자가 만나는 곳만을 현장이라 칭한다면 사실 그것은 아주 왜소해질 것이다. 여타의 모든 예술 장르와 마찬가지로 문학의 생산자는 작품의 유통과 수용에 있어 결국 철저하게 보호적인 존재로 남게 된다. 작가의 강연, 낭독회, 사인회 등이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문학의 현장이 될 수 없는 이유다. 문학에서 현장은 사후적 개념이 될 수밖에 없다. 문학의 수용 이후, 작품의 감상 이후에 현장이 만들어진다고 할 때 작가와 작품은 필요조건이 될 뿐, 현장의 주체는 오로지 독자의 행위에 달려 있다. 그런데 또 단순히 읽는 것만으로 현장성이 생겨나지는 않아서 이를테면 도서관을 두고 문학의 현장이라 명명하기는 다소 어렵다는 점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3) 노태훈의 글에서 독자는 중요한 존재지만 작가와 작품, 독자가 만나는 현장은 아직 현장으로서 불충분하다. 이 글은 도서관을 비롯해 문학작품을 향유하는 공간을 언급하면서도 문단 시스템을 벗어난 현장을 의미 있게 고려하지 않는다. 독자를 현장의 핵심에 두고 있으면서 독자와 현장 사이에는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발생한다. 이 보이지 않는 진입장벽을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이 글에서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현장’은 비평적 태도의 유무인 듯하다. “핵심은 문학작품을 읽고 나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고, 이는 의심의 여지 없이 ‘비평’”이며 문학의 현장이 고민할 것은 “인정이나 승인을 요구할 필요가 없는 비평적 태도, 즉 독자讀者/獨自적인 것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은 “전통과 관습을 비트는 방식으로, 아카이브라는 저항의 형태로, 즉흥적인 아마추어리즘”으로 나타나는 문학 현장이지만 그 주체가 문예지와 전문 독자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국문학의 생산과 유통, 수용은 변한 것보다 변하지 않은 것이 더 많아 보인다. 전문/비전문, 중심/주변의 경계는 여전히 뚜렷하다. 3. 한국 문학의 생산과 유통에서 등단과 문학상, 문예지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지만 동시에 문학 제도의 오래된 관성을 볼 수 있게 한다. 이 시스템에서 보면 한국문학은 ‘극소수’의 작가를 생산하고 연구하고 비평해 왔으며 ‘대다수’의 독자는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이러한 비대칭이 한국문학 연구에서 독자 연구가 희소한 이유이며 같은 이유에서 비평의 관심도 작가나 작품으로 향한다. 문학을 향유하는 현장에서 독자를 배제할수록 독자는 추상적인 집합명사로 취급될 확률이 크다. 이를테면 낭독회와 같은 문학 이벤트를 의미 있는 문학 현장으로, 작가와 독자 간의 수평적 연대의 실천으로 돌아보기란 아직 한국문학에서는 요원한 일이다. 황유원 시인은 최근 낭독회에 참여했던 경험을 놀랍고 반가웠다고 말한다. 직접 시를 읽어주는 독자들과 만나는 것은 다양한 목소리들이 겹치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에게 “낭독회는 여행지를 돌아다니는 시간이라기보다는 목소리들이 부유하는 시간”이며 서로 다양한 “목소리들이 구름처럼 희미하면서도 분명하게 시각화되는 시간”4)이었다. 아직 낭독회가 끝나지 않은 것 같다는 시인의 소감은 중의적이다. 낭독회는 일회적인 문학 이벤트지만 작가와 독자 사이에 형성되는 교감과 감응은 늘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시를 다른 사람이 낭송하는 것은 언제나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시가 나를 떠났다는 것과 떠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일이다. 독자에게로 시가 이동하는 현장을 목도하는 것이다. 이유는 굳이 따져보지 않았는데, 사실 나는 내 시를 낭송하는 것을 잘하지 못한다. 늘 거리 조준에 실패하고 마는 느낌이다. (중략) 참석하신 분들이 낭송해준 8편은 좋았다. 호흡과 리듬이 나와 달라서, 시에 첨가된 이질적인 분위기가 시를 새롭게 만들어주었다. 낭송이 끝나고 토크가 이어졌다 (중략) 나는 난감한 질문을 선호하고, 난감함 속에 생각이 촉발되는 울퉁불퉁한 흐름을 좋아하는 편이다. 나의 대답은 현장이라는 자리에서만 가능한 생산성에 힘입어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5) 낭독회는 작품이 독자에게 건네지는 시간이다. 낭독회는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만나고 말하고 새롭게 듣는 시간이다. 현장의 즉흥성은 다른 생각을 촉발시킨다. 낭독회는 서로 함께 참여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발신자가 수신자가 되고 생산자와 수용자의 자리바꿈도 일어난다. 이수명 시인이 말하는 “독자에게로 시가 이동하는 현장”, “현장이라는 자리에서만 가능한 생산성”은 문학의 현장이 상호적이고 역동적인 공간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생산성에 힙입어 나아가는 문학의 현장이 문예지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 문학의 현장을 생기 있게 하는 것은 기존의 제도가 아니라 ‘작가-작품-독자’의 연결을 만드는 이질적인 리듬과 시간이다. 낭독회를 기획한 이성주 평론가는 시민들과 문학 작품을 함께 읽을 때 종종 ‘요즘 문학’이 ‘그들만의 문학’이 아니냐는 말을 듣는다고 한다. 시민들은 동시대 문학 작품이 조금 어렵게 느껴지는데, 그것을 향유할 수 있는 집단이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응은 문학에 다가가고 싶은 마음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6)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낭독회에 관한 수많은 후기와 감상은 모두 그런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지금 문학 독자가 문학을 경험하는 방식은 그렇게 만들어지고 축적되고 있다. 크고 작은 낭독회와 강연, 독서 모임과 함께. 더 많은 작품이, 더 다양한 작가와 일반 독자들이 문학 현장에 참여하는 것은 한국 문학에 유익한 일이지만 이런 교류를 기획하는 것도 실행하는 것도 제한이 따른다. 문학을 경험하는 일은 한 사회의 문화와 제도와 연계되어 있다. 2024년도 『한국출판연감』에 따르면 한국의 독서량은 줄어드는 추세지만 책을 선택할 때 서점이나 도서관 등에서 책을 직접 본다고 응답한 비율(26.8%)은 제일 높았다. 인터넷과 SNS의 책 소개나 광고를 본다는 비율(21.2%)은 그 다음으로 높다.7) 그러나 문학 현장의 전망은 밝지 않다. 2023년 정부는 지역서점 예산을 전액 삭감했고 앞으로 서점 문화활동 지원 예산 역시 전무한 상황이기 때문이다.8) 코로나 상황의 종식 이후 다양한 도서 행사들이 활기를 되찾았지만 서점을 중심으로 한 도서 문화활동은 위기를 맞고 있다. 잡지 산업 역시 지속되는 경제 침체로 부정적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AI 기술과 디지털 시대라는 변환점을 준비하고 있다. 독자와의 상호작용을 어떻게 증진할 것인가는 앞으로의 발전에 중요한 기준이 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 변화가 현행하는 문학 생산과 유통 방식에 어떤 변화를 불러일으킬지는 아직 더 지켜볼 일이다. 핵심은 독자와의 상호 작용이다. 문학을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장소로 만들기 위한 고민은 더 필요하다. 5. 기존 문단의 시스템이 ‘배제’의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익숙하다. 한 좌담에서 육호수 시인은 최근의 SNS를 통한 문학의 확산이 등단 제도를 거친 ‘창작자’가 아니더라도 ‘향유자’로서 현대시에 대한 진입장벽과 문턱을 낮추는 데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면서 새로운 독자들이 한국 시에 유입되어야 한국 시도 활성화된다고 말한다.9) 김건영 시인은 SNS에서 매체의 홍보나 자본을 업지 못하면 아예 독자의 손에 닿지도 못한다는 현실을 지적하며 SNS의 과도한 상업주의 경계한다. 모든 현상에는 양면성이 있다. 김연덕 시인은 홍보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면 SNS가 시 쓰기나 운용 방식에서 개개인의 질서나 미감을 즐기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좀더 긍정적인 측면을 언급한다. 모두 일리 있는 발언들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지금 문학은 디지털 시대와 얽혀 있다. 한국의 독서 문화에서 종이책 선호도는 월등히 높지만 정보 습득 선호 경로는 포털 사이트와 유튜브, TV/라디오, SNS 순으로 나타났다.10)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 책을 선택할 때 정보를 얻는 방법에서는 서점이나 도서관 다음으로 SNS의 영향이 컸다. ‘종이책’과 ‘디지털 문화’의 공존 속에서 한국 문학에 필요한 것은 문예지의 쇄신만이 아니다. 한국 문학은 ‘종이책’ 바깥의 이야기를 더 할 수 있어야 한다. 위의 좌담에서 알 수 있듯 SNS는 창작자와 독자가 서로의 존재를 생생하게 마주하는 곳이다. 단순히 홍보를 목적으로 한 경우라도 SNS는 문학의 존재감을 알리는 편리한 수단이며 그 안에서 자기 표현의 매력과 홍보의 경계가 언제나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시와사상』(2025년 봄호)에 실린 「동시대 패러디스트의 밈적 욕망」(최다영)과 「사람이 사는 무인도-시와 패러디, 육호수와 고선경의 시를 중심으로」(하혁진)는 변화된 문학 환경에서 시가 어떻게 동시대의 문화와 교류하는지를 흥미롭게 설명한다. 인터넷 밈을 섞어놓은 ‘힙한’ 시가 그 자체로 또 다른 밈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내고, ‘싸이월드’의 ‘감성체’를 활용한 시는 학습을 요구하는 대신 비슷한 시대와 문화 감각을 지닌 독자를 초대한다. 이 글들은 현대시와 패러디의 관계를 다루고 있지만 동시대 독자에게 다가가는 시의 변화로 읽는 것이 유용하다. 디지털 시대의 파편화된 문화를 수용하는 시는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에는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 세대인 창작자와 독자의 관계가 먼저 존재한다. 말하자면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가 만드는 문학 현장이다. 이러한 시들은 시의 저변을 축소하기는커녕 더 독특한 취향의 세계로 들어가는 여러 개의 입구처럼 보인다. 보편성과 진지함, 엘리트주의와 전문 독자에 둘러싸인 시가 아니라 비록 소수의 지지를 받더라도 가벼움과 귀여움, 사랑스러움, 놀이와 유머로 충분하다는 믿음이 그 안에서 전파되는 중이다. 전문 독자에게 다소 부족했던 자질들, 문학 제도가 배제해 온 요소들이 새로운 호응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시가 밈이 되고, 문학이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mable)’한 감성의 재료가 되는 것은 더 이상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문학을 향유하는 시대적 현상이다. 누군가는 받아들이고 누군가는 거부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소통의 보편성이나 대중성이 아니라 다양하고 고유한 소통의 방식을 만드는 일은 이제 능동적인 문학 행위이다. 시가 자신의 독자를 스스로 불러 모으는 일도 그러하다. 그것은 시에 좋은 일이다. 매일 접하는 수많은 콘텐츠들 사이에서 문학이 잠시 눈길을 끌고 멈추는 순간이 되는 일, 문학이 독자에게 이동하는 울퉁불퉁하고 즉흥적인 현장이 되는 일은 문학의 다양성, 문학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에드거 앨런 포는 시의 목적이 불확실한 즐거움에 있다고 했다. 종이책 바깥에서도 시는 그 목적에 충실하다. 작지만 다양한 문학들의 난립과 행진 속에서 그 즐거움이 커진다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장소로서의 문학도 그리 먼 얘기는 아닐 것이다. 1) 대한출판문화협회, 「2024 출판시장 통계」, p.67.(https://www.kpa21.or.kr/kpa-data/report-resource/) 2) 대한출판문화협회, 『2024 한국출판연감』, 대한출판문화협회, 2024, p.154. 3) 노태훈, 「한국문학의 현장」, 『자음과모음』 2025.봄, p.27. 4) 황유원, 「아직도 집으로 돌아오는 중-소하서점 낭독회 후기」, 『포지션』, 2024.겨울호, p.248. 5) 이수명, 「소하의 밤」, 『모든 일들은 항상 우리가 없는 시간에 일어났고』, 소하서점 낭독회 자료집, 2024, pp.75-77. 6) 『모든 일들은 항상 우리가 없는 시간에 일어났고』, p.172. 7) 대한출판문화협회, 『2024 한국출판연감』, p.292. 8) 대한출판문화협회, 『2024 한국출판연감』, p.181. 9) 김건영·육호수·김연덕, 「이달의 시 현장점검-그 평론가는 이제 출판사 마케터 아냐?」, 『현대시』, 2025.3, p.53. 10) 대한출판문화협회 한국출판독서정책연구소, 「2023년 독서문화 통계」, p.17. ( https://www.kpa21.or.kr/kpa-data/report-re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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