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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파란 | 2024년 겨울호(제35호)

1961년 5월 16일: ‘樂夫天命’을 위한 ‘공-실존’의 몸부림 ― 도연명으로 김수영 읽기

이찬 문학평론

200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했다. 저서 현대 한국문학의 지도와 성좌들(2009), 20세기 후반 한국 현대시론의 계보(2010), 김동리 문학의 반근대주의(2011), 한국 현대시론의 담론과 계보학(2011)을 출간했고, 문학평론집 헤르메스의 문장들(2012), 시/몸의 향연(2019), 감응의 빛살(2021), 사건들의 예지(2022), 문화평론집 신성한 잉여(2022)를 썼다. 2012년 제7회 김달진문학상 젊은비평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고려대학교 문화창의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시와 영화와 비평이 더불어 감응할 수 있는 융합과 통섭의 공간을 모색하고 있으며, 다양한 철학적 사유와 예술적 이미지를 가로지를 수 있는 새로운 글쓰기 스타일을 실험하고 있다.

1

 

  김수영을 대상으로 삼았던 몇몇 문헌들에서 한결같이 강조해왔던 것처럼, 그의 신귀거래(新歸去來)” 연작은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와 접맥된 상호 유비(類比)의 맥락 속에서 읽어야만 한다. 그것의 예술적 특이점과 시인의 문학사적 위상이 수미일관한 차원에서 낱낱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양자의 촘촘한 대비를 통해서만 그가 일찌감치 성취하고 예견했던 한국시의 이상한 역설”, 곧 우리 모더니티를 여전히 에두르고 있는 뒤떨어진 현실과 그 추악한 진실의 이면들이 시인의 긍지로 되살아나는 기묘한 장면들이 고스란히목도(目睹)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시와 예술의 존재론적 불꽃으로 깃들일 수밖에 없을 극단적 아이러니를 꿰뚫을 수 있는 의미론적 지평 역시 이와 같은 테두리에서 생성된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저토록 오랜 시간의 풍화작용이나 역사적 전변의 우여곡절 속에서도 고전(古典)의 지위와 전통의 별자리를 구성하는 것들을 곰곰이 헤아려보라. 그것의 한가운데 여지없이 깃드는 이상적 질서를 떠올릴 수 있으리라. 아니, 청빈한 생의 표상이자 유가적 선비의 심미적 도상(圖像)으로 자리매김해 온 도연명의 생애와 작품들을 다시 뒤적여보라. 나아가 신귀거래라는 제목으로 김수영이 도연명을 수용하는 동시에 변용할 수밖에 없었던 그 혹독한 실존의 주름들과 예술적 영감의 여울들을 속속들이 헤집어보라. 어쩌면 이 자리에서, 우리의 문학과 예술이 세계 최고의 무대들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룬 것으로 거듭 공준을 받게 된, 오래된 미래의 예지적 통찰과 창조적 잠재력을 되찾아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김수영은 2의 춘추전국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위진남북조시대의 극심한 혼란기를 살았던 도연명의 삶과 문학을 수용하여 신귀거래연작을 지었다. 이 수용의 맥락은 비단 귀거래()라는 제목의 차원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포에지(poesie)’로 대변되는 시적 영혼의 정수이자 창조적 영감의 불꽃으로 간직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숙명 같은 것이 엿보인다. 그것에는 우리 현대사에 주름진 온갖 비극적 사건들과 처절한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가 생사(生死)를 넘나들며 마주칠 수밖에 없었을 지극한 공포심과 불안의식, 그리고 ‘516’으로 집약되는 정치적 격변의 시대 상황이 한데 어우러져 살아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시기에 의용군으로 강제 편입되는 가혹한 운명에 처하면서, “자유를 찾아”(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 목숨을 건 탈출을 두 차례나 감행하는 천신만고(千辛萬苦)의 끝에서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겨우 수용될 수 있었던 김수영의 파란만장한 생의 궤적을 뒤쫓아보라. 그리하여, ‘516’ 직후 소설가 김이석(金易錫)의 집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던, 그의 절박한 은둔의 자취를 당신 곁에서 살아 움직이는 현재진행형의 사건처럼 매만질 수 있는 자리로 들어가 보라. ‘516’이 일어난 지 일주일 뒤쯤 머리를 박박 깎은 채로 나타난’(최하림) 그의 실존 전체를 짓누르고 있었을, 지극한 공포심과 불안의식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으리라. 그가 직면할 수밖에 없었을 그 참담한 마음결이 지금-여기를 가로지르는 살갗의 육감처럼 느껴진다면, 당신은 이미 신귀거래연작을 여는 첫 시 여편네의 방에 와서- 新歸去來 1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으리라. 그리고 그것에 얼룩진 불안의식이 어떤 질감과 음영으로 이루어진 것인지를 무엇보다 생생한 살(la chair)의 깊이와 공-실존(co-existence)의 메아리 속에서 어루만지고 있을 터이다.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김수영의 지극한 퇴행 심리란 자연스러운 마음결의 움직임이자 실존의 귀결점일 수밖에 없음을 이미 터득하고 있을 것이기에.


2

 

여편네의 방에 와서 기거를 같이해도

나는 이렇듯 소년처럼 되었다

흥분해도 소년

계산해도 소년

애무해도 소년

어린놈 너야

네가 성을 내지 않게 해주마

네가 무어라 보채더라도

나는 너와 함께 성을 내지 않는 소년

바다의 물결 작년의 나무의 체취

그래 우리 이 성하(盛夏)

온갖 나무의 추억과

물의 체취라도

다해서

어린놈 너야

죽음이 오더라도

이제 성을 내지 않는 법을 배워주마

 

여편네의 방에 와서 기거를 같이해도

 

나는 점점 어린애

나는 점점 어린애

태양 아래의 단 하나의 어린애

죽음 아래의 단 하나의 어린애

언덕 아래의 단 하나의 어린애

애정 아래의 단 하나의 어린애

사유 아래의 단 하나의 어린애

간단(間斷) 아래의 단 하나의 어린애

()의 어린애

베개의 어린애

고민의 어린애

 

여편네의 방에 와서 기거를 같이해도

나는 점점 어린애

너를 더 사랑하고

오히려 너를 더 사랑하고

너는 내 눈을 알고

어린 놈도 내 눈을 안다

 

- 여편네의 방에 와서- 신귀거래 1전문

 

  인용 시에서 수시로 반복되는 소년”(5), “어린놈”(3), “어린애”(12) 같은 형상들을 보라. 표제어로 차용된 귀거래(歸去來)”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지극한 자아분열과 정신적 거세에 가까운 주체성의 망실(亡失) 상태를 직감할 수 있으리라. 특히 1연과 2연에서 거듭 나타나는 어린놈 너야‘516’ 직후 김수영의 존재 전체를 후려갈겼을지극한 불안감을 묵시적으로 역설한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을 당시의 정국(政局)에서, 자신의 운명전체를 타인들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었을 시인의 절박했던 실존 상황을 바로 눈앞에서 일어나는 실제 광경처럼 육박해 오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이석의 집이라면, 그리고 김이석의 부인인 박순녀라면 몇날 며칠이고 그를 숨겨줄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판단되어서였다.’(최하림)라는 역사전기적 탐구 기록에서 엿보이는 김수영의 실존 상황을 다시 면밀하게 되짚어 보아야만 한다. 이를 통해서만, ‘516’이 강제한 그의 은둔과 귀가의 행적이 어떤 실존적 계기와 역사적 배경에서 비롯한 것이며, 196163일로 마무리된 신귀거래연작의 서막 여편네의 방에 와서를 관통하는 퇴행 심리를 살뜰하게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자리에서, 자기 주체성의 중심마저 무너진 김수영의 위태로운 실존 상황과 극단적인 의존심을 바로 우리 자신의 그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생생한 감응(感應)의 순간, -실존의 무대가 번쩍하며 도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맥락들은 시인이 新歸去來이후에도 상당한 시간을 공포와 불안으로 시달렸을뿐더러, 그의 실존의 중심축이 무너지면서 지극한 퇴행 심리로 허우적거렸음을 묵시적으로 웅변한다. 나아가 시인 자신을 어린애로 호명하도록 강제했던 것이 결국은 극도의 자기분열에 다다른 실존적 위기 상황이었음을 직감케 한다. 따라서 신귀거래연작의 두 번째 시 격문(檄文)의 앞머리로 등장하는 마지막의 몸부림도는 그 처절한 상황에서 오는 시어일 수밖에 없으리라. 격문전체를 가로지르는 정화와 재생의 이미지 역시, 그의 몸부림이 간절하게 희구했을 평정심(平定心)을 집약적으로 표현한다. 김수영은 나날의 삶에서 내면의 화락(和樂) 상태를 되찾고 진짜 시인의 삶으로 귀착할 수 있기를 소망했을뿐더러, 다양한 시어들의 집요한 반복을 통해 이를 암묵적으로 개진하려 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의 몸부림도/마지막의 양복도/마지막의 신경질도/마지막의 다방도/기나긴 골목길의 순례도/<어깨>/허세도/방대한/방대한/방대한/모조품과/막대한/막대한/막대한/막대한/모방도/아아 그리고 저 도봉산보다도/더 큰 증오도/굴욕도/계집애 종아리에만/눈이 가던 치기(稚氣)/그밖의 무수한 잡동사니 잡념까지도/깨끗이 버리고/깨끗이 버리고/깨끗이 버리고/깨끗이 버리고/깨끗이 버리고/깨끗이 버리고/깨끗이 버리고/농부의 몸차림으로 갈아입고/석경을 보니/땅이 편편하고/집이 편편하고/하늘이 편편하고/물이 편편하고/앉아도 편편하고/서도 편편하고/누워도 편편하고/도회와 시골이 편편하고/시골과 도회가 편편하고/신문이 편편하고/시원하고/버스가 편편하고/시원하고/하수도가 편편하고/시원하고/펌프의 물이 시원하게 쏟아져 나온다고/어머니가 감탄하니 과연 시원하고/무엇보다도/내가 정말 시인이 됐으니 시원하고/인제 정말/진짜 시인이 될 수 있으니 시원하고/시원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되니/이건 진짜 시원하고/이 시원함은 진짜이고/자유다

 

- 김수영, 격문(檄文)- 신귀거래 2전문

 

  ‘516’ 직후 김수영의 실존적 맥락을 두루 살피면, 격문에 나타난 다양한 반복 어구들은 그 소릿값의 도드라진 반향에 힘입어 주술적인 후렴구와 같은 정화와 치유의 뉘앙스를 내뿜고 있음을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측면은 격문의 다양한 반복 어구들이 불러일으키는 주술적인 리듬감이 한국전쟁의 끔찍한 체험이 남긴 정신적 트라우마와 무수한 억압 기제들을 정화하고 해소하려는, 생존을 건 몸부림자체였음을 암시한다. 그것은 시인 자신을 치유하기 위한 정화의 의식(儀式)이자 주술적인 힘을 행사하는 말소리로 들어박혀 있기 때문이다. 마치 어떤 주문(呪文)처럼, 발화자의 꿈과 소망이 강렬하게 투사(投射)된 후렴 어구로 기능하기 때문이리라.

  이와 같은 주술성의 리듬은 생존 자체를 위협당했던 한국전쟁 시기의 정신적 외상을 극복하려는 시인의 필사적인 몸부림”, 그 치유의 과정이 격문의 창작 계기이자 그 내밀한 마음결의 속살임을 말없이 드러낸다. 또한 ‘516’ 직후 김수영이 마주할 수밖에 없었을 복잡미묘한 실존 상황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격문(檄文)”으로 결정될 수밖에 없었던 주요인일 것이다. 이에 따라 격문이란 말이 위급한 상황에서 사람들의 흥분을 일으키거나 집단적 참여를 고무하기 위하여 발송하는 글발이라는 의미로 활용되어 온 동아시아 전통의 역사적 맥락을 좀 더 섬세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김수영은 檄文이라는 한자어에 주름진 감각의 역사를 환기하면서, ‘516’ 직후 자기 실존의 급격한 전변의 상황과 내면적 추이를 공공(公共)의 차원에서 선언하려 했던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격문(檄文)- 신귀거래 2에서 우리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는 것은 마지막의”(4), “방대한”(3), “막대한”(4), “깨끗이 버리고”(7), “편편하고”(12), “시원하고(하게/하다고/)”(8) 같은 동일 어구들의 집요한 반복이다. 또한 어간(語幹)과는 관계없이, 이 작품의 음성적 미감과 뉘앙스, 그리고 정서적 분위기 전체를 자유다라는 마지막 행의 장쾌한 선언으로 수렴될 수 있도록 강제하는 힘이 어디서 오는지를 간파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시의 무수한 시어들 가운데서도, 이미 드러나 있으면서도 쉽사리 포착되지는 않는 “-“-같은 어미(語尾)들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라. 특히 이들의 집요한 반복이 불러들이는 의미론적 발산과 정서적 효과를 집중적으로 응시해보라. 나아가 자유다라는 해방의 감각에 도달하는 그 과정의 움직임 전체를 좀 더 면밀하게 더듬어보라.

  물론 저 어미(語尾)들은 어떤 대단한 의미 지향성을 품은 것도 아니며, 거창한 사유의 잠재력을 간직한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의 빈번한 되풀이에 담긴 연속적 진행과 점층적 확장의 뉘앙스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것의 몸체를 이루는 어간(語幹)의 지속적 반복과 함께 보이지 않는 공명의 겹주름을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이 시의 정서적 분위기와 의미론적 뉘앙스의 지속적인 상승 작용을 견인한다. 나아가 이 시 전체를 타고 흐르는 감응의 빛살은 천지만물(天地萬物)로 명명되는 세계의 모든 것들과 편편하고” “시원하게어우러질 수 있는 화락(和樂)의 상태로 나아가게 만든다. 이러한 측면은 “-“-라는 어미(語尾)가 김수영이 상상력의 차원에서나마 겨우겨우 품게 된 평정심(平定心), 곧 맨 끄트머리에 아로새겨진 자유다로 나아가기 위한 비가시적 촉매이자 해방의 도화선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말없이 암시한다. 이러한 평정심은 귀거래()에서 형상화된 낙부천명(樂夫天命)”의 이미지와 상호 유비의 닮은꼴을 구성할뿐더러, 도연명의 삶과 문학을 통해 시인 자신의 실존적 위기를 바닥까지 들여다보고 그 한계를 돌파하려 했던 그의 고단하고 혹독한 몸부림의 과정에서 얻어진 것이기에.


3

 

歸去來兮, 돌아왔도다!

田園將蕪胡不歸. 전원이 장차 거칠어지니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

旣自以心爲形役, 이미 스스로 마음이 몸의 부림을 당했으니

奚惆悵而獨悲. 어찌 한탄하고 홀로 슬프지 않으리.

悟已往之不諫, 지난날이야 어쩔 수 없음을 깨닫고

知來者之可追. 앞날은 좇을 수 있음을 안다네

實迷塗其未遠, 실로 길을 잃었어도 멀리 가지 않았으니

覺今是而昨非. 지금이 옳고 어제가 틀렸음을 깨달았다오.

舟遙遙以輕, 배는 흔들흔들 가볍게 바람에 날리고

風飄飄而吹衣. 바람은 나부껴 옷에 불어오네.

問征夫以前路, 나그네에게 앞길 물어 보고

恨晨光之熹微. 새벽빛 희미함을 한탄한다네.

乃瞻衡宇, 이에 집 대문과 처마 보이자

載欣載奔.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네.

僮僕歡迎, 머슴은 기쁘게 맞이하고

稚子候門. 어린아이들 대문에서 기다리는구나.

三徑就荒, 제 오솔길에 잡초가 무성해도

松菊猶存. 소나무 국화는 여전하기도 하여라.

携幼入室, 어린 놈 손잡고 방에 들어오니

有酒盈樽. 술은 항아리에 가득.

引壺觴以自酌, 술단지 끌어당겨 자작하고

眄庭柯以怡顔. 뜰의 나뭇가지 바라보며 웃음 짓는다

倚南窓以寄傲, 남창에 몸을 기대고 의기양양해 하니

審容膝之易安. 무릎 하나 들일 만한 집 그 얼마나 편안한가.

園日涉以成趣, 정원을 날마다 걸으며 운취를 이루니

門雖設而常關. 문이야 비록 달렸어도 늘 닫혀 있다네.

策扶老以流憩, 지팡이 짚고 가다 발길 멎는 대로 쉬고

時矯首而遐觀. 때때로 머리 치켜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네.

雲無心以出岫,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나오고

鳥倦飛而知還. 새는 날다 지치면 돌아올 줄 아네.

影翳翳以將入, 해는 어둑어둑 장차 들어가려는데

撫孤松而盤桓. 외로운 소나무 어루만지며 서성인다네.

歸去來兮, 돌아왔도다!

請息交以絶遊. 사귐을 쉬고 교유도 끊으리.

世與我而相違, 세상과 나 서로 어긋나니

復駕言兮焉求. 다시 수레를 타고 무엇을 구하리?

悅親戚之情話, 친척들과의 정다운 대화 기쁘고

樂琴書以消憂. 거문고와 책을 즐기며 시름을 없애네.

農人告余以春及, 농부가 내게 봄이 왔다고 이르면

將有事於西疇. 장차 서쪽 밭두둑에서 일을 하리.

或命巾車, 때로 휘장 친 수레를 타고

或棹孤舟. 때로 외로운 배를 노 저어,

旣窈窕以尋壑, 깊숙한 산골을 찾아들고

亦崎嶇而經丘. 험한 산길과 언덕을 지나리.

木欣欣以向榮, 나무는 즐거이 꽃 피우려 하고

泉涓涓而始流. 샘물은 졸졸 흘러 나가리.

善萬物之得時, 만물이 때를 얻음을 부러워하며

感吾生之行休. 내 삶이 장차 끝날 것에 느꺼워하네.

已矣乎, 그만 생각할지라!

寓形宇內復幾時. 몸을 우주에 부칠 때가 다시 얼마나 되려는가를.

曷不委心任去留, 어찌 마음에 맡겨 가고 머뭄을 놓아두지 않는가? 胡爲乎遑遑欲何之. 어이하여 분주한 모양으로 어딜 가려 하는가?

富貴非吾願, 부귀는 나의 소원 아니며

帝鄕不可期. 신선의 땅을 기약할 수 없도다.

懷良辰以孤往, 좋은 날씨 바라며 홀로 나아가

或植杖而耘. 지팡이 세워 둔 채 김을 매리라.

登東皐以舒嘯, 봄 언덕에 올라 휘파람 불고

臨淸流而賦詩. 맑은 물결 임하여 시도 지으리.

聊乘化以歸盡, 애오라지 조화를 따라 죽어 돌아가리니

樂夫天命復奚疑. 천명을 즐거워하거늘 다시 무얼 의심하리.

- 歸去來兮辭전문도연명 전집, 이성호 역, 문자향, 2001.

 

  도연명은 365년 동진(東晋)의 심양(潯陽) 시상(柴桑)에서 출생했으며, 56세 되던 4206송왕 유유(劉裕)가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송()으로’(이성호, 2001) 선포하면서 나라가 멸망하는 과정을 온몸으로 체험해야만 했던 인물이다. 이에 따라 역사적 대격변기가 파생시키는 지극한 모순과 생의 부조리를 온몸으로 겪을 수밖에 없었던 불우지사(不遇之士)의 전형으로 호명되어왔다고 하겠다. 이 맥락을 좀 더 깊은 차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수많은 군벌의 득세와 몰락, 그리고 끊임없는 모반과 찬탈에 따른 빈번한 왕조 교체와 역사적 대혼란기가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도, 문인으로서의 비범한 기개와 고결한 자의식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던 내밀한 실존의 계기들을 포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단서를 찾을 수 있는 귀거래()서문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余家貧, 耕植不足以自給. 幼稚盈室, 瓶無儲粟, 生生所資, 未見其術. 親故多勸餘為長吏, 脫然有懷, 求之靡途. 會有四方之事, 諸侯以惠愛為德, 家叔以餘貧苦, 遂見用於小邑. 于時風波未靜心憚遠役. 彭澤去家百里, 公田之利, 足以為酒, 故便求之, 及少日, 倦然有歸歟之情, 何則?質性自然, 非矯厲所得. 饑凍雖切, 違己交病, 嘗從人事, 皆口腹自役. 于是悵然慷慨, 深愧平生之志, 猶望一稔, 當斂裳宵逝. 尋程氏妹喪于武昌, 情在駿奔, 自免去職. 仲秋至冬, 在官八十餘日. 因事順心, 命篇曰 歸去來兮. 乙巳歲十一月也.(우리 집은 가난해 밭을 갈아도 자급할 수가 없다. 어린애들은 집에 가득하나 항아리에는 저장해 둔 곡식이 없어 생육하고 생활할 밑천을 마련한 방도를 알지 못하였다. 친구들은 내게 관리가 되라고 많이들 권하니 마음을 열어 뜻을 두기도 했지만 구할 방도가 없었다. 마침 사방지사(四方之事)가 있어 제후들이 은혜와 사랑을 덕으로 삼으니 숙부는 내가 가난해 고생한다며 드디어는 작은 고을에 기용되게 하였다. 당시 전란이 끝나지 않는데다 멀리서 벼슬살이하기를 마음에 꺼렸으나 팽택(彭澤)은 집에서 백 리 거리이고 공전(公田)의 이로움이 술을 담글 만했으므로 문득 그 자리를 구하였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 다 그만두고 돌아가고 싶은 뜻이 생기고 말았다. 왜 그러했던가? 성질이 진솔함을 좋아하니 억지로 될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굶주림과 추위가 비록 절박하지만 자기를 어김은 병이 되고 만다. 일찍이 인사를 따른 것은 다 구복(口腹)의 부림을 당한 것이다. 이에 슬프고 강개한 마음이 들었고 평소의 뜻에 부끄러웠다. 그런데도 오히려 일 년이나 있기를 바랐으니, 마땅히 의복을 싸 밤중에라도 떠나야만 했다. 머잖아 정씨에게 시집간 동생이 무창(武昌)에서 상을 당하니 급히 떠나버리고 싶은 마음에 스스로 사면하고 관직을 떠났다. 중추부터 입동에 이르기까지 관직에 있은 것이 80여일이다. 일에 인연하여 마음을 따른바, 글의 제목을 귀거래혜라 한다. 을사년 11.)”(歸去來兮辭 序도연명 전집, 2001)


  「귀거래()서문에는 중추부터 입동에 이르기까지 관직에 있은 것이 80 여일이다. 일로 인하여 마음을 따른바, 글의 제목을 귀거래혜라 한다. 을사년 11.(仲秋至冬, 在官八十餘日. 因事順心, 命篇曰 歸去來兮. 乙巳歲十一月也.)”라는 대목이 나타나 있다. 여기서 이 작품의 제목과 집필 시기, 도연명의 궁핍한 생활상과 진솔한 성정, 그리고 역사적 대혼란의 시대 상황에서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갈 수 없었던 그의 성정과 기질을 명료하게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굶주림과 추위가 비록 절박하지만 자기를 어김은 병이 되고 만다. 일찍이 인사를 따른 것은 다 구복(口腹)의 부림을 당한 것이다. 이에 슬프고 강개한 마음이 들었고 평소의 뜻에 부끄러웠다. 그런데도 오히려 일 년이나 있기를 바랐으니, 마땅히 의복을 싸 밤중에라도 떠나야만 했다.(質性自然, 非矯厲所得. 飢凍雖切, 違己交病, 嘗從人事, 皆口腹自役. 于是悵然慷慨, 深愧平生之志, 猶望一稔, 當斂裳宵逝)” 같은 구절들을 보라. 바로 이 자리에서,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저절로 그러한 자연의 도법(道法)처럼, 일종의 생체 리듬처럼 몸에 붙이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그의 운명선 전체를 실감할 수 있으리라.

  이와 같은 도연명의 천품(天稟)으로서의 기질을 염두에 두면, 귀거래()본문에 나타난 이미 스스로 마음이 몸의 부림을 당했으니(旣自以心爲形役)”라는 대목은 일찍이 인사를 따른 것은 다 구복(口腹)의 부림을 당한 것이다.”(嘗從人事, 皆口腹自役)라는 서문의 한 구절에서 온 것임을 이내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시인의 실존적 정황이 담긴 객관적 상관물로 기능하는 외로운 소나무”(孤松) “외로운 배”(孤舟) 등의 심상을 보라. 이들 역시 서문에 기록된 이에 슬프고 강개한 마음이 들었고 평소의 뜻에 부끄러웠다.”(于是悵然慷慨, 深愧平生之志,)라는 내밀한 심사(心事)에서 발원하는 것임을 선명한 느낌으로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문이야 비록 달렸어도 늘 닫혀 있다네”(門雖設而常關,) “사귐을 쉬고 교유도 끊으리. 세상과 나 서로 어긋나니, 다시 수레를 타고 무엇을 구하리?”(請息交以絶遊, 世與我而相違, 復駕言兮焉求,) 같은 본문의 구절들 역시, 그것의 서문에서 명시화된 도연명의 내밀한 심정이 문학적 이미지를 걸쳐 입은 것이라고 분명하게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귀거래()본문에도 세상의 탐욕으로 얼룩진 부귀영화의 운명선을 결코 추종할 수 없는 불우지사(不遇之士)의 성정과 심사가 명징한 이미지로 아로새겨져 있다. 그러나 그것의 서문에선 전혀 드러나지 않았던 생의 소박한 기쁨과 자연스러운 생활의 즐거움이 허허로운 리듬감에 실려 배어 나오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봄 언덕에 올라 휘파람 불고/맑은 물결 임하여 시도 지으리./애오라지 조화를 따라 죽어 돌아가리니/천명을 즐거워하거늘 다시 무얼 의심하리.(登東皐以舒嘯, 臨淸流而賦詩, 聊乘化以歸盡, 樂夫天命復奚疑,)” 같은 형상들을 보라. 이들은 한결같이 귀거래()서문에서 감응의 동심원을 이루며 울려 퍼지는 가난(余家貧)” “마음에 꺼림(心憚遠役)” “성질이 진솔함”(質性自然) “절박”(饑凍雖切) “슬프고 강개한 마음”(悵然慷慨) “부끄러움”(深愧平生之志) 등등의 암담하고 부정적인 느낌을 훌쩍 넘어서서, 소탈하면서도 자유로운 마음 상태를 노래하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심층적인 사상적 차원에서 보면, 천분으로서의 태생적 기질과 고단한 생의 행로를 기꺼이 즐기려는 자연명정론(自然命定論)‘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 대격변기의 불우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고고한 인품과 특출한 시재(詩才)로써 인생의 애환을 담박하면서도 깊이 있게 표현’(이성호)했던 도연명의 문학적 면모는 우리 문인과 지식인들에게 부단한 감응 현상을 일으키면서 장구한 시간 동안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면모들 역시, 앞서 살핀 테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김수영 역시 ‘516’에 따른 은둔과 귀가 이후 연달아 집필했던 9편의 시편들을 신귀거래라는 부제를 달아 하나의 매듭으로 묶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시습과 김창숙을 비롯한 우리의 무수한 선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김수영 역시 고려 중기 이인로(李仁老) 이후 정립된 화귀거래사(和歸去來辭)’라는 전통의 압력을 의식하면서 신거귀래연작을 창작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리하여, 격문의 끝자락에 나타난 자유다라는 평정심의 이미지야말로, 김수영과 도연명의 사이에서 형성되는 상호 유비 관계의 근본 바탕일뿐더러, “신귀거래연작의 내밀한 창작 계기이자 실존적 배경을 구성하는 핵심 인자를 이룬다고 하겠다. 귀거래()의 작은 무늬들과 이미지 전체의 움직임을 조율하는 정서적 집약체 역시, 맨 마지막 구절로 들어박힌 樂夫天命復奚疑(천명을 즐거워하거늘 다시 그 무엇을 의심하리)”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낙부천명(樂夫天命)”이란 표현은 도연명 자신의 천분(天分)과 나날의 고단한 생활을 기꺼이 즐기려는 자연명정론(自然命定論)’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달리 말해, 그것에는 안빈낙도(安貧樂道)’라는 말로 표상되는 비범한 절제력과 더불어, 부귀영화로부터 초연한 도연명의 태생적인 기질과 숙명 사상이라는 근본적인 지향성이 주름져 있다는 것이다.

  결국 자유다라는 시구는 김수영이 도연명이 읊조린 낙부천명”(樂夫天命)에 육박하는, 내면적 화평 상태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구체적 시공간의 엄청난 격차를 뛰어넘어, 두 인물이 한결같이 자신들의 작품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것은 만물이 때를 얻음을 부러워하며(善萬物之得時)”로 표상되는 세상의 화평 상태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태평성대(太平聖代)를 만나지 못한 불우지사(不遇之士)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천지만물(天地萬物)을 기꺼워하고 즐기려는 낙천(樂天)의 근본적 태도이기 때문일 것이다. 달리 말해, 도연명과 김수영은 그들이 살았던 당대의 모순 상황이나 그 시대적 질곡조차도 사랑하고 즐기려는 낙부천명의 태도를 일관되게 견지하려 했을뿐더러, 이를 주변의 사물들과 함께 이루는 만물 감응의 이미지로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상호 유비(類比)의 그물을 구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귀거래()의 마지막 행을 장식하는 천명을 즐거워하거늘 다시 무얼 의심하리.(樂夫天命復奚疑)”라는 구절과 격문- 신귀거래 2끝자락의 자유다라는 표현은 사실상 똑같은 뉘앙스와 의미의 바탕을 품는다. 세상만사가 어떤 부조리와 우여곡절에 휘둘린다고 하더라도, 이를 천명(天命)으로 여기며 살겠노라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기꺼움과 자부심이 양자의 심부를 휘감는 생의 불꽃으로 깃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격문의 마무리 대목에서 나타나는 무엇보다도/내가 정말 시인이 됐으니 시원하고/인제 정말/진짜 시인이 될 수 있으니 시원하고/시원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되니/이건 진짜 시원하고라는 구절들을 유심히 보라. 이들은 김수영이 도연명의 숙명 사상을 수용하면서도, “진짜 시인으로 자신을 호명할 수 있는 첨예한 자의식과 더불어 역사적 소명 의식을 그 뒷면에 숨겨두고 있었다는 또 다른 추론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어쩌면 양자의 차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새롭게 포착되고 호명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도연명의 귀거래()와 김수영의 격문사이에 가로놓인 차이는 김수영이 낙부천명(樂夫天命)” 상태에 전적으로 도달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염원하거나 추구하지 않고서는 ‘516’ 직후의 정치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좀 더 내밀한 실존의 맥락을 되짚어 보도록 강제한다. 격문진짜 시인이라는 형상에 깃든 김수영의 자의식과 소명 의식이란 신귀거래상황에서 자신이 맞닥뜨린 초조와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김수영은 도연명의 귀거래()에서 나타나는 은둔과 탈세간(脫世間)의 상태에 그대로 귀착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출사표(出師表)를 그 언젠간 결국 다시 내놓게 되리란 예감을 그 뒷면 깊숙이 감춰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격문의 끝에서 나타나는 자유다라는 평정심의 공적 선언에도 불구하고, 이후 집필된 신귀거래연작에서 다시 솟아오르는 불안의 심상을 꼼꼼히 되살펴야만 한다. 특히 누이그의 진혼가를 시적 오브제의 중핵으로 삼아 내밀한 억압 기제들을 남김없이 드러내면서, 이를 정화하려고 시도한 시편들이 신귀거래연작의 후속편으로 계속 나타난다는 사실에 좀 더 섬세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겠다. 이러한 시편들로는 伏中- 신귀거래 6, 누이야 장하고나!- 신귀거래 7을 예시할 수 있을 것이며, 술과 어린 고양이- 신귀거래 4에서는 시인의 불안감이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뒷면에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결국 술과 어린 고양이는 미묘한 양가감정이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말해 온 평정심과 불안감의 양극단 사이에서 시인의 마음이 재귀적 길항(拮抗) 운동을 거듭했음을 넌지시 암시한다. 그리고 이 작품은 시인의 실존 상황을 좀 더 내밀한 차원까지 추적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더 나아가, 이놈이 무엇이지?- 신귀거래 9는 김수영이 ‘516’이 강제한 생존의 위기감과 불안의식에서 벗어나, 자신과 세계를 풍자하면서도 안타까워하는 비판과 연민의 마음결을 동시에 품을 수 있을 만큼 내면적 여유를 회복했음을 말없이 일러준다. 이는 또한, “신귀거래아홉 번째 연작이자 마지막 시편인 이놈이 무엇이지?를 완성한 1961825일 즈음에 이르러서야, 그가 현실 풍자와 사회 비판으로 집약되는 진짜 시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었음을 묵시적으로 드러낸다. 따라서 신귀거래연작은 ‘516’ 직후 김수영을 엄습해왔을 실존적 불안감과 그가 희구하는 나날의 평정심 사이에서 끊임없이 몸부림쳤음을 암시하는 시편들일 것이 자명하다. 나아가 시인의 가장 내밀한 실존의 어둠과 그림자, 그리고 그 무수한 고통의 얼룩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실마리를 간직하고 있는 작품들로 읽힌다.


4

 

똘배가 개울가에 자라는/숲속에선/누이의 방도 장마가 가시면 익어가는가/허나/인생의 장미여/추녀 끝 물방울 소리가/아직도 메아리를 가지고 오지 못하는/8월의 밤에/너의 방은 너무 정돈되어 있더라/이런 밤에/나는 서울의 얼치기 양관(洋館) 속에서/골치를 앓는 여편네의 댓가지 백 속에/조약돌이 들어 있는/공간의 우연에 놀란다/누이야/너의 방은 언제나/너무나 정돈되어 있다/입을 다문 채/흰 실에 매어달려 있는 여주알의 곰보/창문 앞에/안치해 놓은/당호박/평면을 사랑하는/코스모스/역시 평면을 사랑하는/킴 노박의 사진과/국내 소설책들....../이런 것들이 정돈될 가치가 있는 것들인가/누이야/이런 것들이 정돈될 가치가 있는 것들인가

 

- 김수영, 누이의 방- 신귀거래 8전문

 

  「누이야 장하고나!에서 누이숭배할대상으로 형상화했던 김수영은 누이의 방에서는 1950-60년대를 풍미했던 미국 여배우 킴 노박의 사진으로 표상되는 누이의 속물적인 모습을 부정적인 어조와 뉘앙스로 그린다. 이와 같은 속물적 모양새는 비단 누이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서울의 얼치기 양관(洋館) 속에서/골치를 앓는 여편네의 댓가지 백 속에조약돌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시인이 여편네누이를 연달아 호명하면서, 이들의 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스케치하는 까닭을 세속적 현실에서 자신을 돋보이는 모양새로 치장하려는 여성들의 물신화된 심리와 그것의 외면적 장식을 구성하는 문화적 소품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이 소품들의 정돈된진열 행태 속에서도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해, 누이의 방에서는 물신주의의 부산물들이 가지런하게 배열된 공간에 작동하는, 그 속물적 습성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시인의 첨예한 안목과 비판적인 통찰력이 선명한 윤곽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편에서 등장하는 서울의 얼치기 양관” “여주알 곰보” “당호박” “코스모스” “킴 노박의 사진” “국내 소설책들같은 시구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자본주의 세계의 일상성이 빚어놓는 상품-사물들일 것이다. 또한 이들이 유발하는 물신주의 행태에 대한 비판적 뉘앙스가 담긴 이미지로도 기능한다. 나아가 이런 것들이 정돈될 가치가 있는 것들인가라는 부정적 어조의 시구들이 결말 부분에서 거듭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시인은 누이여편네로 대변되는 당대 여성들의 속물적인 면모에 대한 풍자적 시각을 품고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는 앞서 열거한 상품-사물 이미지에 깃든 겉치레로서의 교양과 일상인들의 허위의식을 비판적 시선과 풍자적 관점에서 응시하려 한 시인의 수미일관한 태도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가령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달나라의 장난) “자기의 나체를 더듬어보고 살펴볼 수 없는 시인처럼 비참한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구름의 파수병) 같은 시구들로 집약되는 김수영의 내밀한 실존적 태도와 태생적 기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좀 더 심층적인 안목과 충실한 탐색 과정이 필수 불가결하다. 누이의 방에서 형상화된 속물적 이미지들이란 비단 여편네누이로 대변되는 당대 여성의 속물적 취향과 일반적 기호(嗜好) 사항들을 풍자하기 위한 목적만으로 그 의미가 제한되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저 이미지들은 시인 자신의 속물성을 나날의 삶의 테두리를 함께 이루어가는 가족에게서 발견한다는 이면적 의미를 내포한다. 그리고 그 부끄러운 생활의 일면을 정직하게 발설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를 증식하면서 아이러니의 겹주름을 만든다. 이 시편에선 누이여편네의 속물적 면모와 물신주의적 습성을 일방적으로 비판하고 풍자하려는 지식인의 고압적 태도와 일방적 목소리가 울려 퍼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상인이든 지식인이든 관계없이, 현대인이라면 그 누구라도 자본주의 세계의 물신화 현상에 감염될 수 있음을 안타까운 심려의 어조로 읊조리고 있는 듯 보인다. 따라서 이 시편은 화자의 어조를 누이를 염려하는 오빠의 목소리로 설정하여 그 안타까운 심경을 담담하게 진술하는 자리에서, 일상생활에 밀착한 살아 움직이는 감각의 파장과 생동감을 오롯이 전달한다고 하겠다.

  따라서 결말 부분에서 나타나는 이런 것들이 정돈될 가치가 있는 것들인가라는 시구는 지식인/일상인의 대립으로 표상되는 고정적 위계화나 가치론적 대립 상태를 상정하지 않는다. 도리어 너의 방은 너무 정돈되어 있더라” “너의 방은 언제나/너무나 정돈되어 있다라는 이미지들과 상호 조명의 유비 관계를 구축한다.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 세계가 개개인들에게 부과하는 보이지 않는 일상적 차원의 물신화 현상을 포착한다. 나아가 이 현상의 지배적 흐름에 누이역시 물들거나 빠져들지도 모른다는 염려와 배려심이 마디마디의 작은 무늬들 사이에서 스며 나오게 만든다.

  이러한 섬세한 마음결은 또한, 김수영이 ‘516’이 가져다준 실존적 불안과 공포에 갇혀 자신의 문제에만 골몰하던 처지에서 벗어났음을 묵시적으로 웅변한다. 그것은 누이의 일상생활에 자리한 속물성과 물신주의의 폐해를 염려하고 근심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한 평정심을 회복했음을 암시하는 징표로 읽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516’ 이후로 실존적 불안의식에 끊임없이 시달렸을 김수영은 가장 내밀한 자기 억압 기제로 작용하는 가족을 다시 철저하게 반추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야말로 진짜 시인이 품어야 할 나날의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상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누이를 안타까운 염려의 마음과 풍자와 연민의 시선이 한데 뒤얽힌 좀 더 깊은 배려의 안목에서 누이를 타이르며 보듬을 수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곧 그만큼의 정신적 여유와 내면적 안정감을 되찾았음을 역설 어법을 활용하여 뒤집어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행을/안 한다/가지고 있는/이데올로기도 없다/밀모(密謀)/전혀 없다/담배마저 안 피우는/날이 올지도 모른다/그때에는/성급해지면 아무 데나 재를 떠는/이 우주의 폭력마저/없어질지도 모른다/정적(靜寂)이 필요 없다/그 이유를 말할 필요도 없다/낚시질도/안 간다/가장(假裝) 파티에/가본 일도 없다/하물며/중립사상연구소에는/그림자도 비친 일이 없다/뇌물은/물론 안 받았다/가지고 있는/시계도 없다/집에도/몸에도/그러니까/the reason why/you don’t get/a clock/or/a watch마저/말할 필요가 없다/집에도/몸에도/이놈이/무엇이지?”

 

이놈이 무엇이지?- 신귀거래 9전문

 

  「이놈이 무엇이지?- 신귀거래 9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유사한 의미를 지닌 어휘들의 집요하고 빈번한 반복이며 연속적 리듬감일 것이다. 따라서 표면적인 차원에서 여타 신귀거래시편들과의 단절과 차이보다는 오히려 연속성과 공분모가 눈에 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 거듭 되풀이되는 것은 다채로운 부정어(否定語)의 활용형들이며, 이들로 이루어진 각 문장의 서술어들이 기묘한 뉘앙스를 내뿜으면서, 특정한 의미망을 말없이 직조하게 되는 비가시적 효과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겠다. 이 부정어들의 반복이 틔워 올리는 서술부의 연속적 리듬감에 대한 촘촘한 분석을 통해서만, 이놈이 무엇이지?가 우리에게 건네려고 하는 궁극적 전언이 무엇인지를 좀 더 적확하게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편에서 활용된 부정어들을 차례대로 열거해보라. “안 한다” “없다” “전혀 없다” “올지도 모른다” “없어질지도 모른다” “필요 없다” “필요도 없다” “안 간다” “없다” “안 받았다” “없다” “don’t get” “필요가 없다등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들이 한결같이 부정어(否定語) 용언들로 이루어진 서술어임을 명료하게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격문에서 일곱 번이나 연달아 되풀이되는 깨끗이 버리고에 깃든 자기 억압의 해소와 정화라는 의미소를 상호 조명 관계 속에서 다시 들여다보게 만든다. 격문깨끗이 버리고‘516’ 이전에 시인이 품었던 온갖 부정적인 요소들을 일소해버리고 새롭게 시작한다는 속뜻을 내포했던 것처럼, 이 작품에서 선명한 형세로 나타나는 부정어의 다양한 변형들로 이루어진 서술부 역시, ‘516’이 가져다준 초조와 불안과 공포, 그 내면적 불안정 상태에서 벗어났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기성 사회의 모순과 허위와 부조리에 대한 풍자와 연민을 동시에 명시할 수 있을 만큼 시인의 실존 상황이 일상적 차원의 평정심을 회복했다는 이면적 의미를 함축한다.

  따라서 신귀거래연작의 마지막 시편 이놈이 무엇이지?에서 수미일관하게 활용된 부정어의 집요한 반복과 그것으로 이루어진 서술부 전체의 이미지는, 김수영이 ‘516’이 발생하기 이전의 내면 상태로 회복되었음을 묵시적으로 표현하는 비가시적 이정표로 기능한다. 시인은 우리 모두의 뒤떨어진 현실에서 생겨나는 온갖 모순과 부조리에 대해 풍자적인 시선과 근본적인 연민의 태도를 동시에 견지했을뿐더러, 이를 지속하는 자리에서 안 한다” “없다” “전혀 없다같은 다양한 부정어(否定語)들이 태어난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돋을새김 기법으로 나타난 부정어의 집요한 반복과 그것이 구축하는 서술부 전체의 연속적 리듬감은, 저 비루하고 오염된 사회 현실에 시인 자신이 물들거나 굴복하지 않았음을 역설 어법으로 강조한다. 나아가 그것을 비판적으로 풍자하면서도 동시에 안타까운 연민의 마음이 숨겨진 이른바 사랑하는 싸움’(김인환)으로 집약되는 김수영의 근본적인 태도, “진짜 시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되찾았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그리하여, 이놈이 무엇이지?의 서술부가 수미일관하게 보여주는 부정어의 집요한 반복과 이에 따른 연속성의 리듬 구축은 시인이 현실의 부정적인 측면들이나 부조리한 계기들과 연루되지 않았음을 공개 선언하는 담론 효과를 낳는다. 더불어 이들에 대한 풍자와 연민의 시선을 동시에 견지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달리 말해, 풍자의 명시적 선언과 연민의 묵시적 내포를 동시에 표현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516’이 가져다준 생존의 위기감과 불안의식, ‘한국전쟁시기에 겪었던 끔찍한 수난과 수용소 체험에서 비롯하는 무수한 자기 억압 기제에서 벗어나, “자유다라는 시어로 표상되는 자기 평정심(平正心)진짜 시인으로 표상되는 실존적 정체성을 나날의 삶에서 되찾았음을 암시한다. 곧 사회 비판적 시인이자 진보적 지식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충실하게 회복했음을 간접 화법을 통해 우회적으로 공표한다.


5

 

  “신귀거래연작 시편들에서 일관된 양상으로 나타나는 반복 어구들이나 주술적 리듬의 명시적 현현이란, 김수영이 ‘516’으로 인한 실존적 충격을 수습하고 내면적 평정심을 되찾으려는 혹독한 몸부림의 시간에서 발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온갖 부정어들의 집요한 되풀이를 기반으로 삼은 연속적 리듬감의 서술부 구축은, 시인 자신이 우리 사회의 무수한 모순과 부조리, 그리고 물신주의전혀관계가 없다라는 사실을 공공성의 차원에서 선언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 분명해 보인다. 나아가 현실의 부정적인 측면들을 우회적으로 풍자하려는 묵시적 뉘앙스를 품고 있는 것으로 추론된다. 결국 이놈의 무엇이지-신귀거래 9에서 소묘된 간접화된 풍자와 더불어 그 안감을 타고 흐르는 웅숭깊은 연민의 감각이야말로, 격문-신귀거래 2에서 등장하는 자유다라는 해방 선언과 직결되는 것이라 하겠다. 그것은 김수영이 ‘516’이라는 정치적 사건의 충격에서 온전히 벗어나, 시인으로서의 자기 위상과 실존적 정체성을 되찾았음을 다채로운 부정어들의 반복과 연속성의 리듬 창출이라는 지극한 역설 화법으로 뒤집어 전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들은 신귀거래연작을 곧바로 잇는 김수영의 또 다른 걸작 먼 곳에서부터를 그대로 관통한다. 이 작품을 가로지르는 것은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감통(感通)의 참다운 환희이자, ‘천지만물(天地萬物)’의 상호 교감으로 표상될 수 있을 보편주의의 광대무변한 광휘이기 때문이다. 좀 더 적확하게 말하자면, 기성 세계의 지배권과 상징적 질서에 구멍을 뚫어버리면서 도래하는 보편주의’(알랭 바디우)의 드넓으면서도 발본적인 사후 효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신귀거래연작을 곧바로 잇는 먼 곳에서부터의 만물 조응의 미감과 상호 교감의 전체 분위기를 오랫동안 다시 들여다보라. 마찬가지로 역사의 자정(自淨) 능력을 자기 원천으로 삼는 동시에 열린 사회의 공동체적 비전과 그 미래 역사의 다중적 체계에 대한 근원적인 신뢰감을 표출하려 한 아픈 몸이먼 곳에서부터의 뒤를 이을 수밖에 없었던 내밀한 속사정을 더듬어보라. 아마도 김수영 고유의 실존론적 기획투사와 예술적 창조력의 불꽃이 어디서 튕겨 오르는지를 섬세하게 통찰할 수 있을 것이다.

  “아픈 몸이/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온갖 식구와 온갖 친구와/온갖 들과 함께/들의 들과 함께/무한한 연습과 함께라는 소극적 수용력의 강인한 읊조림이 그러하듯. “함께라는 말의 연속적 되풀이가 드리우는 저토록 고단하면서도 드넓고, 끈덕지면서도 섬세한 사랑의 메아리가 그러하듯. 아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내 몸이 아프다에 주름진 -실존의 몸부림이 우리에게 펼치는 바로 그것처럼.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다시 몸이 아프다

 

조용한 봄에서부터

조용한 봄으로

다시 내 몸이 아프다

 

여자에게서부터

여자에게로

능금꽃으로부터

능금꽃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이 아프다

 

 

 

- 먼 곳에서부터전문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골목을 돌아서

베레는 썼지만

또 골목을 돌아서

신이 찢어지고

온몸에서 피는

빠르지도 더디지도 않게 흐르는데

또 골목을 돌아서

추위에 온몸이

돌같이 감각을 잃어도

또 골목을 돌아서

 

(......)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온갖 식구와 온갖 친구와

온갖 들과 함께

들의 들과 함께

무한한 연습과 함께

 

 

 

아픈 몸이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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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을 지나고 봄을 맞이할 때 반가움보다 피로가 앞서는 것은 지난 계절이 지나치게 소란했기 때문일까. 이별 뒤에는 긴 피곤함이 있다는 돌아간 철학자의 말1)을 곱씹는다. 시절의 시곗바늘에 정확히 때맞추어 걸음을 옮길 수 없을 때 환절기는 더욱 길어진다. 이것도 하나의 사태라면 사태다. 사건이 아니다. 한계는 아직 임박하지 않았다. 그런 탓에 피로는 늘상 현재형으로 찾아온다. 이불 위에 몸을 늘어뜨리고 눈을 깜빡이는 개는 피로를 모른다. 개를 바라보는 사람의 늘어진 의식만이 지난하다. 시가 스며드는 곳은 이런 장면들이다.  시란 본디 가장 느리게 도착하는 말들이고 우리의 감각과 인지가 이별 후의 인내를 감내하느라 버둥거릴 때 그것은 날카로운 하품처럼 정확하게 착지한다. 서사의 시간 속으로 전진하는 소설은 피로할 틈을 누리지 못하지만 시는 피로의 한가운데에서 한없이 늘어질 수 있다. 시는 제가 원하는 대로 머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무한에 가깝게 지연되는 시의 시간은 피로의 무시간적 현재와 꼭 닮아 있다. 어쩌면 시는 피로를 껴안을 수 있는 언어의 유일한 방식이다.2)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모든 부분을 피로로 적셔 버릴 때 우리는 세상과 대결하는 자가 아니라 다만 흘러가는 자로 사라진다. 세상의 예리하고 모난 각들은 녹아서 더 이상 우리를 찌르지 않는다. 일렁임에 구역질을 할지언정 우리는 더는 상처 입거나 피 흘리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누군가가 내게 피로란 본디 우리의 바깥이 아닌 내부에서 흐르는 것임을 잊어선 안 된다고 일러 주었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실존적 증상인 피로에 소진되지 않는 한 가지 역설적인 방법은 그것을 극복하거나 해결하려 하지 않고 냅다 사랑해 버리는 일이라고, 피로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온몸에 힘을 빼고 나를 관철하지 않는 방식으로 피로를 체현해 버리는 일이라고 말한 누군가가 있다. 그러자 그에 찬동하며 자신을 상처 낸 자의 빛으로 몸을 더욱 가까이 밀착하는 또 다른 누군가도 다가온다. 1. 사랑하는 방관자의 기록들: 이동욱, 『우리의 파안』 (문학동네, 2025)  시는 무엇 때문에 우리가 지쳤다고 알려 주지 않는다. 시라는 것이 세계에 응전하는 '나'의 목소리일 때 자신이 이미 패자라는 것을 납득한 이에게 이유의 구체들은 불필요하다. 시는 대신 이미 닫힌 문 너머로도 여전히 농구공이 튀겨지는 소리를 들려주거나(「폐회」) 어느 곳을 가더라도 이곳에 이미 와 본 적 있다는 기시감으로 새로움을 무마하고(「답사」) 종국에는 복도만큼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를 기지개처럼(「월량대표아적심」) 헛헛하게 개켜 볼 따름이다. 시는 무엇 때문에 피로하다는 분석이나 무엇에 관해 피로하다고 부연하지 않는다. 시는 그저 지쳐 있는 얼굴의 주름을 천천히 짚어 간다.  여기에는 그 어떤 극복의 의지나 미래를 향한 열망이 들어서지 않는다. 피로를 들여다보는 일은 그와 정반대의 작업이다. 사랑의 황홀함도 성장의 희열도 찰나의 현재에 머물다가 이내 과거의 영원 속으로 사라진다. 살아 있음이라는 단어를 차지하는 유일한 현재 시제는 피로의 것인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피로를 자주 언급하지 않는 것은 피로함을 욕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선택과 무관하게 현재를 비집고 들어서는 이 무한의 감각에 순종하고자 한다면 상황은 그때부터 조금 달라진다. 피로는 생의 관성을 폭력적으로 찢어 버릴 것이다. 미래에 저당 잡힌 역사가 된 과거도, 과거로의 수갑에 손이 묶인 미래도 모두 풀려날 것이다. 당신은 항구적인 현재로 지어진 피로의 담요 위에 비로소 몸을 누이고 그제야 은둔할 장소를 발견할 것이다("이제야 이별이다", 「배교의 에피파니」).  모더니스트들이 거리를 산책하며 금속성의 시간들이 녹아내리는 장면들3)을 시로 쓸 때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세계가 끝장날지도 모른다는 감각이었으나 인간 종이 사라져도 이 세상은 결코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는 이십일 세기의 시인에게 끝이란 그저 관념의 수사일 뿐이다. 오히려 세계는 끝을 반복하는 방식으로 제 몸을 영원히 유지한다. 끝마저도 완전히 끝장나 버린 시대의 개인은 자기 자신을 끝장내는 방법 외에는 진정 끝을 맞이할 방법이 없다. 다리 위에서 몸을 떨구고 싶은 욕망이 들어도(이것은 죽음 '충동'이 아니다. 신중한 화자가 긴 시간 동안 지체와 망설임을 번복하며 지켜 온 욕망일 것이다.) 그것은 택시 기사의 물음표에 의해 내쳐지고, 또 한 번 끝장내는 데에 실패한 '나'의 몫으로 남겨지는 건 치미는 구토감이다. 무엇이 나를 움직이는 걸까, 내일도 같은 날이겠지. 반복되는 것이 이렇게 편안한 마음을 주다니. 생활의 주기는 한 달에 맞춰진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 많은 주기들이 있다. 자명종과 전철, 점심, 회의, 저녁, 퇴근. 혹은 야근. 다시 전철, 혹은 택시. 동호대교를 건널 때 내가 느꼈던 것. 내비게이션에 찍힌 택시의 위치. 파란 것은 한강. 직선은 다리. 그 위로 지나가는 것은 나. 혹은 택시. 기사는 음악을 크게 틀고, 음악은 트로트, 혹은 찬송가. 주여 제발 이 다리를 무사히 건너게 해 주시옵소서. (중략) 오늘이 지나면 내일은 무사할까. 가끔은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를 만나면 자랑스럽게 웃으며 이 몸을 건네줄 수 있을까. 너는 참 쓰기 좋은 몸을 갖고 있구나. 누구에게도 피해 주고 싶지 않다는 것은 그의 거짓말이다. 동호대교에서 한남대교 쳐다보기. 하지만 너와 걸어서 건넜던 건 한남대교. 다리 위에 서면 항상 무언가를 떨어뜨리고 싶어진다. 뭐였어? 뭐겠어. 우리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가기 위해 다리를 건넌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다리의 중간은 기억에 없었지. 택시 기사는 말이 많았고 나는 이곳이 처음이라고 대답했다. 사거리에서 어디로 갈까요? 그러자 나는 갑자기 구토가 일었다. - 「친구의 장례식과 애인의 결혼식」 부분  일상의 세속적인 반복과 사물들은 '내' 몸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이질감이 엄습해 와도 요지부동이다. 그 몸을 다리 아래로 떨구고 싶어도 그것은 '나'의 소유가 아니므로 생각만이다. 빠져나갈 수 없는 생의 중력 앞에서 그는 또 어딘가로 방향을 정해서 기사에게 알려 주어야 하고 폐쇄 회로에 갇힌 그는 급기야 구토의 기미를 느끼고 입을 틀어막는다. 그의 하루를 짐작할 때 제목이 본문에 생략된 낮의 시간을 나지막이 일러 준다. 친구는 저곳으로 돌아가고 사랑하던 이도 다른 삶 속으로 들어간 하루. 장례식과 결혼식은 모두 떠남을 공표하는 의례들이다. 떠남의 연속을 마주하며 그는 삶의 과대한 대전제에 반문한다. 실상 우리에게 남는 것은 중간 지점이라는 기억이 아니라 출발점과 도착점뿐이지 않느냐고, 그래서 '나'는 다리의 중간에 '내' 몸을 떨굴 수가 없다고 항의해 보고 싶기도 하지만 무력하다. 그조차도 빌린 몸에서 비롯한 생각들이라면 그는 이 세계의 "자명종과 전철, 점심, 회의, 저녁, 퇴근. 혹은 야근"에 대하여 완전한 패배자다.  신에게 이 다리를 무사히 건너게 해 달라는 기도는 그러므로 진실한 읍소라기보다 이미 무사할 것을 알고 있는 자의 지쳐 버린 탄식이다. 근대의 산책자는 이 세계에서 바깥의 관찰자로 전락한다. 그의 발설은 작은 발버둥에 불과하다. 사이렌이 울어도 시간은 사전의 종이들이 빠르게 넘어가듯 휘몰아치거나 냄비 속 기포처럼 부글대지 않는다. 흠집 하나 없는 세계의 매끄러움은 완전하게 유지된다. 「신도시」의 빛나는 빌딩과 그 사이를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은 도시의 관성을 알맞게 완성하는 부품들이다("빌딩과 빌딩/많은 전선이 이동했다"). 빌딩과 빌딩 전선으로 연결된 콘크리트의 감정은 서로를 일관적으로 바라보겠지 연인들은 뜨거웠다 차츰 모른 척하겠지 소방차가 교차로를 통과하는 동안 오늘도 우리는 다만 무사하고 그게 네 가족이라 생각해 봐 너를 키운 게 가족이라고 단정 짓지 마 그것은 사이렌 소리를 따라 날아가는 비둘기 같은 것 마지막 남은 희망대출 같은 것 전철역에서 절하며 지지를 호소하는 정치인과 그 앞을 지나는 직장인에게 출근은 무엇보다 중요합니까 간과 쓸개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새로 생긴 진입로를 따라 차례로 들어서는 차들을 보고 있으면 어째서 당신의 가족은 오늘도 무사합니까 - 「신도시」 부분  시인의 감각은 격동하지 않고 그조차도 무사할 따름이다("그것은 사이렌 소리를 따라 날아가는 비둘기 같은 것"). 이곳의 유일한 변화 가능성이 인간 의식과 감각의 번뜩이는 칼날이라면 도시의 문명은 무엇이든 막아 내고 마는 거대한 방패다. 변혁의 단초는 그저 "마지막 남은 희망대출"일 뿐일 때, 신에게 탄식했던 그는 (신은 이미 우리를 완벽한 무사함 속으로 집어넣은 이후이므로) 또 한 번 작게 한탄할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우리는 어째서 이토록 무사한 것이냐고, 연인과 가족, 정치인과 직장인의 무사함은 그저 "차례로 들어서는 차들"일 뿐인데 이것이 정말 다일 뿐이냐고 말이다. 마지막 연의 비문은("보고 있으면" / "오늘도 무사합니까") 신의 도덕과 규범에 맞서 보려는 '나'의 사소한 어긋남이다.  이 시집은 세계와의 대결에서 이미 패한 자의 입지에서 쓰이고 있지만 저항이 전연 부재하는 것은 아니다. 시 쓰기란 결국 "타인의 필체 속에서 / 잠시 나를 죽은 혓바닥처럼 놓아 보는 것"이라 하더라도(「필적감정」) 그 빌린 손끝에서 흐르는 잉크로 '너'에 대한 사랑만큼은 한사코 주장하려고 한다. '나'라는 대상에 대한 자기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해도 '나'는 '너'라는 사랑에 관해 유치권을 주장할 수는 있지 않느냐고 항변한다("왜 / 이제 나를 당신의 미망인으로 부르면 안 되나", 「저 금목서를 당신의 미망인으로 부르면 안 되나」). '네'가 '나'를 떠나 사라졌다는 이별의 사실마저도 앗아 가려는 세계의 난폭함에 맞서 '네' 그림자 뒤에 이어진 것이 바로 다름 아닌 '나'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차피 이 세계의 중력이 "모든 거리가 한 호흡 안에 있게 한"다면(「영원의 스코프」) '너'와 '나' 또한 하나의 원 안에서 거주할 테다. 사랑은 그의 손목을 잡거나 입술을 맞대는 촉각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같은 시야 안에 속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감하게 성취된다. 그런 당신은 언제나 너무 오래 한곳에 머무는 습관이 있다 정해진 결말은 얼마나 안락한가 누군가 꽃다발을 건네며 인사한다면 그것은 배수구의 소용돌이치는 중심처럼 무언가 당신에게 다가가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 앉는다 - 「영원의 스코프」 부분  세탁소에 옷을 맡기러 가는 길은 '네'가 지나간 길이다("애인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수선」). '나'의 체취로 젖은 셔츠를 누군가에게 맡기러 가는 길에 '네'가 지나간 자취를 떠올리며 둘을 겹쳐 두면, 봄밤의 하얀 목련은 두 눈을 덮어 버린다. 사랑은 부재 속에서 충만하게 향기롭다. 이처럼 시종일관 타자들의 그림자와 사물 사이를 거니는 그는 완전히 고립된 자는 아니지만 세계의 가장 나중의 자리에서 모든 것의 뒷모습을 담아내므로 과연 은둔하는 자4)다.  그러나 은둔자는 그를 잠식한 피로를 떨쳐 낼 재간이 없으므로 그가 시편들을 통해 보고하는 생의 단편들은 정치적 실천이라기보다 현재화된 영원을 배회하는 자의 소진되지 못한 에너지가 흐르도록 내버려두는 방관의 산물에 가깝다. 그는 피리 부는 사나이가 아니라 사나이가 피리에서 손을 뗀 후에야 찾아드는 파동의 나머지를 훔치는 관객이다("연주가 끝나자 단원들이 악기에서 손을 뗀다 // 그제야 나는 음악이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식적(息笛)」). 은둔자는 어둠 속에서 이 도시를 재배치하거나 남몰래 구획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주인이 아니다. 그는 다만 숨어 있는 방관자다. 그가 방관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은둔하는 지경이다. 그가 기록하는 현실의 답보 상태는 '나'에게 명백히 승리할지언정 '나'를 지루하게 하지는 않으므로 삶의 피로는 그의 사랑이 '너'의 뒤를 쫓는 일을 멈추게 하지 못한다. 피로를 체현하는 삶은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먼 거리에서 '너'와 '내'가 하나의 그물에 함께 걸려 있음을, 희미하게 떨리는 그물코를 뒤늦게 감각하는 방식을 사랑이라 여길 수 있다면 사랑은 바로 그 피로함 때문에 세계와 마찬가지로 끝나지 않는다. 사랑은 피로 속에서 영원하다. 2. 탐미주의 도망자의 편린들: 김연덕, 『폭포 열기』(문학과지성사, 2024)  방관자가 도시의 어둠 속에서 사물들의 궤적을 따라 느리게 걸어갈 때, 그 한켠에는 빛의 사나움이 자신을 소진시키는 것이라는 걸 알아 가는 이가 있다. 원인 모를 수치가 자신을 장악했으나("종이 사이를 뚫고 이 안으로 들어왔지만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겠어", 「미지근한 폭포」) 그 사실을 보란 듯이 움켜쥐고 무거운 걸음을 떼는 이가 있다. 김연덕의 『폭포 열기』에는 빛과 대적하는 '나'들이 그것의 사나움과 폭력성을("돔에서 투과해 들어온 겨울의 각진 빛이 가만히 볼을 스쳤어 / 상처가 났어", 「구식 부끄러움」) 아름답게 증언하며 남몰래 폭포를 찾아가는 장면들이 산재한다.  그러나 이것이 도망의 궤적임을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은데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화자가 사물 하나하나에 들이치는 빛을 세심히 관찰하며 아주 느리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며(시편들에서 발견되는 장소들은 거의 하나의 공간으로부터 파생되는 인상을 준다) 그가 코를 박고 마음 속에서 관찰하는 사물들의 빛깔은 부정할 길 없이 아름다워서 당신은 폭포수처럼 흐르는 화려함에 넋을 잃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집을 끝까지 통과하고 나면 밀려드는 아늑하고 부드러운 피로감은 제 모습을 기어코 정직하게 드러낸다. 김연덕이 빛의 다채로운 조각들에 찔리면서도 당신의 손을 잡고 어딘가로 이끄는 건 염두에 둔 목적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동욱의 화자가 피로를 신체 내부에서 체현하는 방관자의 기록으로 시를 쓴다면 김연덕의 화자는 외부 세계의 사물들이 자신을 조각낼 폭력적인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것들의 집요한 추적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대상을 좇는 행위 속에 자신의 도주선을 남몰래 숨겨 두며 피로한 빛의 사나움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져 간다. 밀착하는 방식으로 최대한 멀어진다. 김연덕의 시 쓰기는 사물에 비현실적일 만큼 가까이 다가섬으로 세계의 폭력으로부터 몰래 도주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우선, 한 개의 형광등에서 시작해 보자. 도시의 빛은 방 한 칸에 매달린 형광등으로 달라붙고 화자는 독자의 귀 가까이로 다가와 빛이 선사하는 "현대적인 아픔"에 대해 속삭인다("그래요 나 그것 덕분에"). 어둠 속에서 고요히 흐르던 자연의 정동은 스위치 하나를 누르면 일순간 빛 속으로 모두 흡수되고 그의 말대로 이는 아픔에 관한 참으로 편안한 정리법이다. 수치심이 '나'의 민낯이라면 그것은 형광등이 밝아지기 전의 어둠 속에서만 생생하다. 나는 어둠 속에서 내가 나를 부끄러워하는 냄새를 맡을 수 있는데 버튼만 누르면 이 방을 조금 전과 다른 감정으로 채우는 전기가 들어온다는 사 실은 얼마나 새삼스럽고 간편하고 현대적인 아픔인가요 그래요 나 그것 덕분에 내 몸에 걸려 넘어지거나 모서리 날카로운 악취에 부딪치지 않을 수 있지만 낮 동안의 수치가 얼마나 정교한 무늬와 기울기 절단면을 얻었는지 손바닥에 올려놓고 가까이 들여다볼 수도 있겠지만 형광등을 켜는 것은 단지 한밤중에도 이 따뜻하고 복잡한 세공에 많은 시간이 필요해서입니다 (중략) 미세하게 다른 속도와 각도로 형광등 빛을 튕겨 내며 움직이던 수정의 소리 자신들을 견고하게 빛내는 소리가 났습니다 규칙적이었고 아주 조용했어요 - 「수정은 아름답고, 수정은 정확하고, 수정은 승리한다.」 부분  그는 "낮 동안의 수치"를 더듬어 볼 기회를 앗아 간 빛을 힐난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에 더욱 주의를 기울인다. 유리로 만든 진공관 안의 형광물질이 필라멘트 끝에서 튀겨지는 소리에 고막을 밀착한다. 이동욱의 '내'가 피로에 맞서지 않고 피로를 몸으로 살아 흘렀듯, 김연덕의 '나'는 빛의 손아귀에서 버둥대지 않고 도리어 빛을 향해 피부를 더욱 가까이 당겨 붙인다.  그곳에서 빛은 사물의 적대자다. 빛은 "삽으로 그것의 안을 파내고 / 쪼개"(「찬물처럼」) 관찰자의 지위를 점령하며 세계의 유일한 주체이자 절대자가 된다. 화자를 압도하는 그 시선의 힘에 대하여 화를 낼 만도 한데 그는 자신의 문장 안에 몸을 숨기고 빛의 사나운 뒤를 계속 좇을 따름이다. 간혹 빛에게 발각되려 할 때 그는 스스로 사물이 됨으로써 최선의 은닉을 감행하기도 한다. 나를 향해 있지는 않지만 이것을 만든 이의. 누군가의 세계를 향한 슬프고 기쁜 병들고 건강한 열망의 반복이 흘러드는 느낌이고 저 가벼운 선반에 잠시 올려 둔 채 때로는 먼지를 털어 주고 때로는 잊다가 다시 별 뜻 없이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은 따뜻하고 추상적인 느낌이기도 하다. 그리운 채 깨어 있는 이 느낌을 위해 나는 매번 나 자신을 어색하게 부푼 내 표정을 값으로 지불해 왔다. 물건의 선과 마무리가 아름답고 고유할수록 많은 시간과 힘을 요했으므로 가끔은, 트럭에서 품에서 떨어져 나와 스스로 곤두박질쳤다. - 「생활 속 폭포」 부분  그는 눈앞의 사물 속에서 그것을 만든 이의 "세계를 향한 슬프고 기쁜 / 병들고 / 건강한 / 열망의 반복이 흘러드는 느낌"을 찾아낸다. 사물이 자신을 향해 있지 않다는 진실 앞에서 그는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실은 그 역시도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물화시키며 살아 왔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고백을 마치자마자 곧장, 사물로부터 떨어져 나와 폭포 속으로 추락한다. 이는 빛에게 패배하듯 폭포에게 제 실존을 투항하고 마는 일이 아니다. 빛의 파장으로부터 완벽하게 숨어드는 일이다. 가장 완벽한 도망이야말로 완전히 사라지는 위장술로 성취된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어두운 폭포를 보게 될 것이다. 원하는 자리에서 원하는 속도로 삭아 가게 될 것이다. 거실과 선반과 빛이 절묘하게 맞물려 그림자가 거대하게 드리울 경우에는 마치 폭포가 물건을 삼켜 버린 것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충격을 이기지 못해 절망하고 멍해져 영영 사라져 버린 것으로 착각되겠지만 - 「생활 속 폭포」 부분  시집에 수록된 동명의 연작시 「gleaming/tiny area」는 제목 그대로 빛과 그것이 파생시킨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다5)(빛이 없다면 존재도 없다). 그중 하나의 시편은 "평범한 나무 밑에 / 산 채로 매장된 빛"이 있으며 더불어 그 나무에는 우아하게 숨은 분노도 함께 거주하고 있다고 누설한다("어떤 분노는 우아한 광대뼈 아래 아주 조용하게 살아가기도 한다", 56쪽). "세상에 분노하는 온도"로 첫 행을 시작하는 이 시편은 빛과 연루된 정동이 분노이며, 그것은 이 탐미주의자의 시 쓰기 속에 매장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재봉되었던 빛 안쪽은", 71쪽). 그는 빛의 사나움 앞에서 함께 칼을 들고 결투를 벌이는 일 대신 나무 아래 묻거나 실로 기워 버리고, 이는 최선의 공격이란 무릇 최선의 방어라는 평화적인 신념을 지닌 자만이 할 수 있는 행위다. 낮 동안 너무 많은 빛에, 밤 동안 너무 많은 형광등의 소리에 시달렸던 그는 세계와 정면으로 대적하기에는 이미 지쳐 있다. 세계를 영속시키면서 무한한 소진을 생산하는 힘의 근원이 곧 빛이라는 사실을("아침까지 눈을 뚫고 전속력으로 달려도 / 피곤한 빛으로 계속되는", 「드라이브 마이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므로 그는 그것과 함부로 맞서지 않는다. 더불어, "통째로 긁히거나 뭉개지기"에 이 세계는 너무 고상하다는 그의 말은 빛이 대상을 쪼개지만 동시에 그러한 파편들의 부서짐이 자아내는 아름다움 역시 존엄하다는 믿음이기도 하다. 그래서 김연덕의 '나'는 빛에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빛을 따라 움직이는 듯하다가 불현듯 폭포 속으로 몸을 던진다. 세찬 물줄기 아래의 어둠 안에는 숨어든 '내'가 있고 그런 '나'를 일갈하며 후려치는 다른 '나'들이 있다. 빛의 피로에 잠식된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빛이 매 순간 훔쳐 가던 수치심의 적나라한 회수라고 주장하는 피학의 목소리가 있다. 내 몸을 때리는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폭포 밖으로 바로 빠져나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나를 비난하던 내가 스스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던 조금 전까지 너무나 부드럽고 따뜻하던 그것은 나의 수치심 미친 듯이 신나서 나를 때리는 - 「따뜻한 폭포」 부분  피로한 자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막아서지 않는다. 그저 내버려둔다. 피로는 '나'의 몸을 그것에 오롯이 헌납하게 한다. 밝은 곳에서 쉬이 납득하기 어렵던 수치는 어둠의 안락함 속에서 껴안을 수 있는 것으로 변모하고 (그것이 '나'를 신나게 때린다 할지라도) 시종일관 사물의 휘광을 쫓던 화자는 그리하여 독자를 빛에서 어둠으로, 지상에서 폭포수 아래로 이끌고 간다. 낮이 생산자들의 시간이라면 밤은 피로 속에 곱게 누운 자들의 몫이다. 수치를 품을 수 있는 비밀스러운 시간이야말로 피로한 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간이다. 그 어떤 긍정이나 부인의 능동적 제스처도 불필요한, 그저 시작도 끝도 바닥도 위도 없는 물줄기의 연속처럼 그 안에 몸을 맡기고 드러눕는 장소. 그러나 이 탐미주의자는 산란하는 빛의 날카로운 끝이 조각내는 아름다움들을 모르지 않고, 다만 그 광채에 현혹되어 제 몸이 찢기는 줄도 모르고 낮의 시간을 살아 내던 이들의 손을 조용히 잡아끌고 폭포의 어둠 속으로 낙하할 따름이다.  외부에서도 내부에서도 시선의 대상이 되지 않음으로써 그는 주체이기를 자진해서 포기하고 그리하여 역설적으로 존재의 해방을 만끽한다. 피로를 사실이자 하나의 비유로서 그리고 비유로서의 피로를 다시 한번 현실의 감각으로 받아들이면서, 사실과 비유 양측의 생성이 이끄는 물줄기 아래로 그저 침잠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김연덕의 폭포는 관념의 비유인 것만은 아니며 자연주의자들이 찬미하는 대자연의 그것만도 아니다. 폭포는 빛의 세계에서 낡고 지친 자들이 몸을 이끌고 눕는 피로의 세계다. 순도 높은 분노와 수치심으로 세차게 이글거리는 안락의 세계다. 그렇다면 폭포가 아닌 곳들 또한 폭포가 된다. 가령, 우리가 가장 처음 만났던 형광등이 깜빡이는 방. 빛을 매장해 두었던 한 그루 나무는 방으로 들어와 '내' 수치심을 양분 삼아 눈부신 꽃 한 송이를 피워 낸다. 오래된 나무 한 그루의 기분만큼 보호받는 밤. 침대가 좁아진다. 작고 물컹한 열매가 떨어진다. 천장이 벽이 사각형이 살아 있는 어두운 땀이 백 년 전의 나와 함께 차게 식는다. 눈부신 꽃이 어둠 속에서 휘날리며 얼굴을 감쌀 때 당신은 끌어안을수록 슬퍼지는 사랑을 반드시 사랑하게 됩니다. - 「무르고 사적인 나의 방」 부분  이 꽃은 '내'가 언젠가 호텔방에서 본 거대한 흰 백합의 이미지와 겹쳐지는데(「나의 레리안」) 그가 꽃 앞에서 보았던 "적막하고 무서운 감정" 역시 누군가의 수치이자 분노이지만 그것은 '나'의 것처럼 폭포의 어둠 아래에서 아늑하게 향유한 것이 아닌 "제 몸을 마구잡이로 터뜨리는 그런 옛날의 빛" 앞에서 패배한 대가임을 알게 된다. 화자는 흰 백합을 보면서 꽃을 장식한 이의 삶을 앗아 간 빛의 난폭함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가 이내 아연해진다("그의 삶을 대신 죽여 준 아름다움은 어디 있었을까"). 말하자면 「나의 레리안」은 호텔에 잠시 머무른 '내'가 빛 앞에서 파열한 타인의 흔적을 애도하는 시다. 그렇다면 김연덕의 화자 역시도 이동욱의 '나'와 마찬가지로 은둔을 자처하나 세계로부터 고립된 처지는 아닌 셈이며 시집에 수록된 마지막 시편인 「이구아수폭포」의 후반부가 말해 주듯, 이 시집의 '나'들은 실상 빛의 폭력에 노출된 사물과 타자들을 구해 내려는 열기로 들떠 있는 것이다("생생한 폭력과 죽음에 지친 수많은 나들이 자포자기한 나들이 / 무척 활기차고 다정하고 아름다운 면도 있던 그런 나들이 살아남은 나들마저 죽이려는 지금").  피로는 차갑지 않다. 피로는 그 어느 것보다도 뜨겁다. 에너지의 흐름이 주체를 압도하고 제패하고도 남아서 세계 전체를 유동하는 상태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피로는 죽음의 가장 큰 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피로함 속에서 방관자가 되거나 도망자가 되어 삶을 지속할 수 있다. 환멸이나 분노가 자주 방문하겠지만 그러나 종말과 죽음만큼은 이곳을 침범할 수 없다. 그래서 김연덕의 '나'는 무수한 '너'인 '나'들에게 계속 폭포 아래를, 그러나 빛이 전혀 눈치챌 수 없게끔 빛의 조각들로 길어 올린 아름다운 조각들로 길을 위장하며 가리키는 것이다. "선명한 시야가 돌아올 때"까지만 그렇게 잠시 폭포의 어둠 속에 함께 머물러 있자고, 우리의 수치와 분노가 생생하게 쏟아져 내리는 이 아늑한 피로 속에 잠시만이라도, 고요히 숨어 있자고 말이다. 1) 김진영, 「사라짐」, 『이별의 푸가』, 한겨레출판, 2019, 77쪽. 2) 아래의 말들을 잠시 빌린다면 시는 또한 피로함 그 자체다. "시는 이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시는 고독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가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가, 아니다. 시는 사람에 대해서도 증오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시는 무엇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시는 무엇 자체다. 시는 고독 자체이고 결별 자체이며 또한 사랑 자체다." 김언, 「그 여름에서 여름까지 짧은 기록 몇 개 2」, 『시는 이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난다, 2019, 32쪽. 3) "이때 뚜우 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이상, 「날개」, 1936. 4) 시집의 해설을 쓴 오연경도 이동욱의 화자를 은둔자라고 말한다. "이동욱 시의 주체는 도시의 거리 한복판에서 간격을 만들어 내고 경계선을 재배치하는 '거리의 은둔자'라 부를 만하다." 오연경, 「은둔하는 삶의 정치성(해설)」, 이동욱, 『우리의 파안』, 문학동네, 2025, 109-110쪽. 5) "사실은 비유를, 비유는 사실을 배제하면서 또 자극한다. 한편으로 서로가 서로를 반사하면서 자신을 갱신한다. 사실의 폭발은 해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유의 밑거름으로 다시 돌아오며, 비유의 극점에서 발견되는 추상화된 현실은 그 자체 현실을 보는 또 다른 눈을 제공하는 것이다." 김언, 「시는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다」, 『시는 이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307쪽.

계간 파란 전승민 피로위로야근은둔폭포이동욱김연덕 2025
이찬 천의 얼굴로 일렁이는 “정든 유곽”의 빛다발 ― 이성복 『서시』

천의 얼굴로 일렁이는 “정든 유곽”의 빛다발 - 이성복의 「서시」 읽기 1 스물 언저리를 청춘의 열꽃으로 신음했던 사람이라면, 이성복 시집 『남해 금산』이 괴로움과 깨달음이 겹쳐 울리는 “물결무늬 자국”으로 번득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단번에 알아챌 수 있으리라.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오래 고통 받는 사람은」, 『남해 금산』)가 선명하게 일러주듯, 단 한 번이라도 남해의 바닷길을 에돌아 금산의 ‘해수관세음보살상’에 이르러 두 손 모아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보리암 앞으로 펼쳐진 다도해의 풍광과 ‘해조음(海潮音)’이 우리 모두에게 건넸을 저 깊고 깊은 삼매(三昧)의 소리를. 낙산사 홍련암, 강화 보문사와 더불어 남해 보리암이 ‘한국의 관음 3대 성지’로 자리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와 맥락을. 마치 숲을 이루듯 빽빽하게 늘어선 섬들의 행렬 사이로 어지러이 펄럭이는 무량한 풍파를 듣고 다시 또 듣는다는 ‘해수관음상’이 어떤 생의 모서리와 이야기의 곡절들로 여울져 있는지를. 나아가 세상의 거센 풍파와 오욕의 파고에서 벗어나려는 중생들의 현세 기복적 신앙이 종교화되는 과정에서 빚어진 ‘천수천안관세음보살’과 더불어,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등장하는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구제하려는 ‘서원(誓願)’, 그들의 갖가지 공포와 근심을 씻어주려는 수행자의 날빛으로 번득이는 것임을 헤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안목(眼目)을 품을 수만 있다면, 시집 『남해 금산』에서 쉴새 없이 어른거리는 정화와 치유, 기원과 구도라는 두 줄기 빛살을 정면에서 마주할 수 있으리라. ‘관세음보살’과 ‘해수관음상’에 담긴 두 갈래 마음이란, 말하기와 말, 능(能)과 소(所), 구제(救濟)와 기도(祈禱), 영원과 순간, 관음수행과 관음신앙 등등으로 열거될 수 있을 ‘화해적 이원성’이라는 좀 더 큰 테두리로 수렴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들은 한결같이, 되돌릴 수 없는 갈림길에서 둘로 쪼개지거나 나눠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어떤 확고부동한 실체처럼 한곳에 붙박일 수조차 없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저 이원성의 다양한 분신들은 비록 둘이라는 모양새를 띠고 나타나지만, 이미 하나의 ‘원통(圓通)’ 세계를 동시에 이루고 있는 것이기에. 그리하여, 미칠 듯한 생의 회한을 타고 들이치는 말소리의 미세한 잔영과 그 눅진한 존재의 파열음으로 뼈마디까지 스며드는 김소월의 가공할 신운(神韻)과 더불어, 이에 필적하는 이성복의 절제된 리듬-이미지의 긴 여운(餘韻)을 가만히 느껴보라. 나아가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서부터 깃들어 있던 ‘이원성의 세계’가 서로를 가로지르면서 일구는 낯선 교향악의 카니발, 그리고 그 뒷면에서 “소리 없이” 나투며 반짝거리는 ‘숨은 조화’의 윤슬을 묵묵히 들여다보라. 특히 “구부러진 것 얼어붙은 것 갈라터진 것 나가떨어진 것들/옆에서 한 번, 한 번만 보고 싶음과 만지고 싶음과 살 부비고 싶음”(「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 한참 동안 머물러 볼 필요가 있겠다. 이 구절은 『남해 금산』 첫머리에 수록된 「서시」와 더불어, 이후 펼쳐질 시집들의 운명선을 예고하고 있었던 핵심 단자(單子)이기 때문이다. 이성복의 첫 시집 맨 뒷자리를 이루는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는 “때 늦은 사랑”의 라멘트(lament), 그 절정의 곡조를 이룬다. 이 곡조의 먹먹한 운명선에서 말없이 일렁이는 여운의 리듬은 ‘서글픈 그물’처럼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다시 울린다. 이 시에 새겨진 ‘얼굴 없는 희망’은 애틋한 메아리로 휘돌아 나오면서 그 오랜 시간의 여울목을 현재진행형의 파문들로 되살려오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시인의 예술적 주도 동기와 사유의 정수가 겉면으로 드러난 매우 드문 사례를 이룬다. 또한 「서시」와 「남해 금산」을 필두로 시집 『남해 금산』의 무수한 협곡들을 넘실거리는 ‘화해적 이원성’의 역설적 미감과 ‘숨은 조화’를 오묘한 시간의 리듬으로 현시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라는 표제어에 얼룩진 고의적 시간 착오의 몸부림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라. 이 시는 “사랑”에 잠긴 무수한 대극(對極)의 상황을 단번에 가로질러,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원통’ 세계를 그 뒷면에 감춰두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관세음보살’에 주름진 두 갈래로 엇갈린 상반된 마음의 자취들을 되짚어보면, 양자는 결국 상대편의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뫼비우스의 안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상대방의 안쪽에 이미 들어박힌 바깥으로 전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생의 곳곳에 매복된 온갖 환란들을 회피하려는 우리 모두의 간절한 행복 충동으로 틔워 올려진 기복 신앙이나, 다른 생의 결핍과 고통을 함께 앓고 나누고 치유하려는 수행의 열망이란 결국 하나의 태반에서 자라난 쌍생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남해 금산』 뿐 아니라 이성복의 모든 시집을 관통하는 상반된 양면성을 강렬하게 응집하고 있는 “정든 유곽” 이미지를 다시 곰곰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그것은 우리 생의 더할 나위 없는 비루함과 가혹한 운명의 모서리를 돌아 나온 자리에서만 빚어질 수 있을 화룡점정(畵龍點睛)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시인의 고단한 예술적 사유 매듭과 ‘용맹정진(勇猛精進)’의 형상화 방법이 태어나는 자리를 가장 명료하게 집약한다. 그리하여, 저토록 과감하고 진득하면서도 한없이 허허로운 ‘이성복 사유의 축도(縮圖)’로 들어박힌다. 달리 말해, “정든 유곽”의 한복판엔 보들레르가 ‘영혼의 성스러운 매음(sainte prostitution de l'âme)’이라고 불렀으며, 불가에서 ‘상즉상입(相卽相入)’이라고 일컬어왔던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사유와 ‘회통(會通)’의 세계관이 보이지 않는 에테르처럼 “소리 없이” 스며있다는 것이다. 마치 희부연 안갯속 신기루처럼 ‘화해적 이원성’의 신비한 뒷자락을 얼비치면서 이내 사라져버린다고 말하는 것이 좀 더 적확하겠다. 2 스무 살의 문학도에게 「서시」는 그야말로 특출한 ‘연시(戀詩)’이자, 미래의 불안으로 내던져진 청춘의 송가(頌歌)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지금-여기, 오십을 훌쩍 넘긴 중늙은이들에게도 그 젊음이 간직했던 아스라한 “사랑”의 열병과 선득한 “치욕”의 모멸감을 동시에 떠오르게 만드는 또 다른 ‘공-실존’의 무대일 것이 틀림없다. 나아가 그 처참한 젊음의 빛살 아래 다시 열리는 회고조(懷古調)의 ‘사랑 노래’이자 감정의 고고학적 무대일 수밖에 없으리라. 이러한 견지에서 이성복의 두 번째 시집 『남해 금산』의 수미쌍관 별자리를 이루는 「서시」와 「남해 금산」의 ‘해조음’을 다시 느릿느릿 들어보라. 이 수려한 두 편의 시는 “그대 벗은 어깨 위를 타고 흘러 떨어지는 빛다발의 歡呼”(「라라를 위하여」,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섬세한 여백의 필치로 그린다. 나아가 “빛나는 못, 빛나는 신음소리”(「나는 식당 주인이」, 『남해 금산』)로 압축되는 우리 생의 ‘본원적 역설’과 그것으로 빼곡하게 에둘러진 ‘예술작품의 근원’을 새로운 리듬-이미지로 현시한다. 따라서 「서시」와 「남해 금산」은 “그토록 피해 다녔던 치욕이 뻑뻑한, 뻑뻑한 사랑이었”(「오래 고통 받는 사람은」, 『남해 금산』)노라고 읊조릴 수밖에 없을, 최고 순도의 시적 긴장을 내뿜는다. “소리 없이, 간단 없이/그대의 시야를 유린하는/아지랭이 ! 아지랭이 ! 아지랭이 !”(「치욕에 대하여」, 『남해 금산』)가 넌지시 일러주듯, 양자는 시집 『남해 금산』이 품은 ‘신성한 잉여’를 그 마디마디에 감춰두었노라고 말하는 것이 좋겠다. 이들의 사이 공간에선 본원적이라고 불러야만 마땅할, 역설적 존재 상황과 극단적 아이러니로 얼룩진 생이 그침 없는 승화(昇華) 운동이 말없이 솟아나기 때문이다. 좀 더 섬세하게 말하면, 승화의 “아지랭이”가 보이지 않는 여운을 거느린 채 쉴새 없이 들이치기 때문이리라. 이성복의 시와 산문이 서로를 횡단하면서 빚어놓는 리듬-이미지 곳곳에서, ‘화해적 이원성’의 카니발 또는 ‘극단적 아이러니’의 ‘대대(對待)’ 운동으로 풀이될 수 있을, ‘본원적 역설’의 무대가 열릴 수밖에 없는 이유와 맥락 역시,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해 온 바와 같다. 그리하여, 오십에 다시 읽는 「남해 금산」이란 어떤 빛깔과 모양새를 띠고 우리 앞으로 나타날 것인가? 그저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연시’의 한 자락으로 읽어 온 「서시」는 어떤 영혼의 갈망과 존재론적 신비를 ‘숨비소리’처럼 쓸어안고 있었던 것일까?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 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 「서시」 전문, 『남해 금산』 「서시」 1연 마지막 행에 배치된 “나는 정처 없습니다.”라는 이미지 매듭을 다시 면밀하게 뜯어볼 필요가 있겠다.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라는 첫 행의 무늬와 대위법적 구도를 형성한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간이식당”이 풍기는 비정상적 결핍과 예외적 허술함이란 뉘앙스를 읽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늦고 헐한 저녁”이라는 심상과 잇닿으면서 누추하고 비루한 생활의 감각을 전경화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비가시적 느낌의 잔영은 작품 전체의 해석 방향을 좌우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뒤에서 이어지는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가 발산하는 중의적 맥락과 연결해보면 긴요한 맥락이 감춰져 있음을 “문득”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에 서린 “어두운” 불안의 정서와 ‘두려운 낯섦’의 분위기는 다소 모호하면서도 양면적인 느낌의 여운을 끝자락까지 계속 드리우기 때문이리라.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라는 1연 3행의 이미지는 우선 “늦고 헐한” 삶의 테두리에 도사리고 있을 ‘예기치 못한 사건’과 ‘보이지 않는 위험’을 암시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뒷자리의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와 결부된 좀 더 내밀한 맥락에서 다시 읽어야만 할 것이다. 이 구절은 어떤 신비와 황홀경에 이르려는 순결한 마음결이 감당할 수밖에 없을, 보이지 않는 난관과 돌발 사태의 위험성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읽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 구절의 뒷면에선 미래의 불확정 상태로 열린 기도와 불안의 “목소리”가 겹겹의 메아리로 울린다. 이 숨겨진 맥락 역시 “사랑하는 사람”과 “당신”에 깃든 상징의 복합적인 의미 운동과 다채로운 스펙트럼에서 기원한다. 그리하여, 「서시」의 “사랑하는 사람”과 “당신”은 만해 시에서 지극한 부드러움으로 형상화된 “누구”와 “당신”에 비견되는 ‘감응의 빛살’을 선사한다. 따라서 이들은 광대한 보편주의의 광휘, 곧 ‘강산무진(江山無盡)’, 그 모든 생의 우여곡절 속에서 하염없이 빛나게 될 우리 안에 들어앉은 부처이자, 우리 모두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인지도 모른다. 간절한 “내 목소리”로 부르는 “당신”이란 결국, 우리 안의 ‘숨은 조화’이자 우리 모두의 “내 목소리” 안에 이미 깃들어 온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기 때문이다. 이 아름다운 ‘연시(戀詩)’가 말소리의 부드러운 훈기와 굳건한 미래 예감과 충실한 실천의 수행력을 드넓게 감쌀 수 있는 잠재력 역시 ‘본래면목’의 자리에서 온다. 더구나 “남해 금산” 보리암에서 ‘영원한 지금’으로 드리워질 ‘해조음’과 ‘이근원통(耳根圓通)’ 수행법을 떠올려보면, 「서시」가 이성복의 두 번째 시집 『남해 금산』의 맨 앞머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는 맥락을 즉각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맥락에는 “나는 정처 없습니다”라는 불확정성의 무늬가 만해의 “알 수 없어요”와 겹쳐 떨리면서 예술적 메아리로 퍼져나가는 감응 운동의 궤적과 “물결무늬 자국”이 숨겨져 있다. 그러하기에 “나는 정처 없습니다”라는 작은 무늬에 주름진 『남해 금산』 전체의 ‘사유 이미지’와 더불어 그 분광(分光)의 윤슬을 포착하는 것이 핵심 관건을 이룬다. 2연 첫머리에서 나타나는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나는 정처 없습니다”라는 반복의 리듬과 굴절된 이미지의 변형 역시,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에 이미 깃든 우리 모두의 ‘본래면목’을 되찾으려는 절절한 마음결과 부단한 기다림의 운명을 현시한다. 그것은 ‘영원한 지금’으로 지속될 현재진행형의 시간 속에서만 자기 생의 온전한 리듬을 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그대에게 가는 먼 길”을 타박타박 내딛어가는 시인-수행자의 ‘영원한 지금’이야말로,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에서 “번쩍이며 흘러내리는” 빛살이요 “잎잎이 춤추”는 우리 모두의 생명력이라는 것이다. 이 탁월한 반복의 신운(神韻)과 굴절된 이미지의 숲길은 「서시」의 “사방”으로 “흘러내린”다. 마치 경건한 씻김굿 한 가락처럼, 그것은 시집 『남해 금산』 곳곳에서 현현하는 정화와 치유의 모신(母神)으로 “소리 없이” 깃들기 때문이다. 이 시집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어머니”가 시인의 육친을 나타내는 동시에 “聖母聖月”의 광활하면서도 경건한 수용력을 표현하는 상징적 이미지의 한 매듭으로 기능하게 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노자가 선명하게 아로새긴 ‘현빈(玄牝)’의 ‘사유 이미지’와 『남해 금산』의 “어머니”는 곳곳에서 닮은꼴의 지력선을 구축하기 때문이다. 이 시집에서 정화와 치유와 구원의 미감이 돋을새김의 필치와 ‘원형 상징’에 육박하는 명징한 이미지들로 형상화되는 이유와 배경 역시 이와 같다. 따라서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어두워 가며 몸 뒤트는 풀밭,”이란 아름다운 무늬들은 “당신”이라는 ‘본래면목’에 이르는 “길”, 그 노정기(路程記)에 기록될 수밖에 없을 ‘성과 속’ ‘광명과 암흑’ ‘영광과 비참’ ‘거룩함과 비루함’ 등을 폭넓게 암시한다. 나아가 저 무수한 이원성의 분광(分光)들을 끊임없이 되비치는 ‘해조음’과 더불어, 그 한복판에서 겹쳐 울리는 “내 목소리”의 환희와 절망을 동시에 표현한다.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라는 아슴아슴한 무늬는 불가에서 오래도록 이어져 내려온 ‘천지여아동근(天地與我同根) 만물여아일체(萬物與我一體)’의 사유를 매혹적인 문채(文彩)로 빛나게 하는 깨달음의 징표일 것이다. 반면 “어두워 가며 몸 뒤트는 풀밭,”이란 이 깨달음이 마주할 수밖에 없을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의 난맥상을 함축한다. 곧 ‘이근원통’을 비롯한 그 모든 수행 과정이 수반할 수밖에 없을 무수한 고뇌와 내적 갈등과 ‘주화입마(走火入魔)’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이미지로 읽힌다. 어쩌면 이 상반된 무늬들의 돌발적 엇갈림과 지극한 절제의 향연에는 이성복 특유의 “정든 유곽”의 ‘사유 이미지’가 숨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이 이미지는 우리 생활세계의 훼손된 한 조각의 절단면, 그 처절한 “치욕”의 서사를 격렬하게 집약한다. 더불어 세상이 추구하는 상투적인 사랑의 척도를 넘어 훨씬 차원 높은 화합에 이르려는, 우리 모두의 꿈과 소망을 보이지 않는 뒷면에 담는다. 그것은 보들레르의 ‘영혼의 성스러운 매음’이 표상하는 것처럼, 타자와의 “완전한 화합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수행 과정의 극진한 충실성을 함유하기 때문이다. 가장 더러운 오물투성이의 현실에서 움트면서도 지극히 아름다운 신비의 빛을 뿜는 진주처럼, ‘진흙 속의 연꽃’에 비견될 수 있을 ‘극단적 아이러니’의 상호 침투와 그침 없는 횡단 운동을 강렬하게 응집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성복의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에는 보들레르가 ‘파리 풍경’의 우울한 단면들로 소묘했던 ‘잠에 떨어진 매춘부들,/추위에 떠는 가난한 이들,/고통받는 임신부들,/아무런 위안 없이 죽어가는 병자들’이 함께 숨 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들을 “송두리째 자기 자신으로 받아들여”, “이성적이거나 윤리적인 한계를 초월하는 화합”을 이루어가는, 그런 ‘형언할 수 없는 잔치(ineffable orgie)’가 그 뒷자락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잔치’를 불교식으로 덧붙이자면, ‘본래면목’에 다다른 ‘원통(圓通)’ 세계가 빛을 뿜는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본래면목’의 자리에서만, 부처가 선언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으로 우리 존재가 매 순간 다시 거듭나는, “당신”이라는 “집으로 가는 길”이 열릴 수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이 자리는 세상의 모든 일과 사람이 “내”가 될 수 있는 ‘본래면목’의 자리이며, 그 깨달음이 “사방으로 흘러내리는” 자리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 모두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그 ‘영원한 지금’의 시간이 매번 다시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자리일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내 목소리”에 이미 깃든 것이지만, “나”라는 ‘아상(我想)’의 테두리를 벗겨낸 ‘본래면목’으로서의 ‘아(我)’, ‘제법무아(諸法無我)’의 광휘가 “흘러내리”는 자리이자 ‘시방세계(十方世界)’의 삼라만상이 빠짐없이 존귀해지는 자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서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라는 이미지 역시, ‘대방광불(大方廣佛)’의 무량한 빛살, 그 “사랑”의 수행으로 겹겹이 아롱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서시」 마지막 행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키 큰 미루나무”와 “잎잎이”라는 탁 트인 초록의 무늬들을 “문득” 다시 떠올려볼 필요가 있겠다. 이들 역시 ‘큼과 작음’ ‘부처와 중생’ ‘신성과 세속’ ‘영원과 순간’ 같은 그 모든 이원성의 매듭을 가로지르는 ‘본래면목’의 보편주의를 표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본래면목’의 자리에서만 가능해지는 ‘무아(無我)’, 그리고 ‘시방세계(十方世界)’로 드넓게 열리는 ‘관음’의 위대한 수용력을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라. 나아가 “남해 금산 바닷가에” ‘영원한 지금’으로 철썩거릴 그 ‘해조음’을 오랫동안 귀 기울여 다시 들어보라. 그것만이 우리 모두의 “벗은 어깨 위로 흘러 떨어지는 빛다발의 歡呼”를 가능케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이근원통’ 수행 과정에서 매 순간 다시 열리게 될 보편주의 광휘를 도래케 할 것이 틀림없기에. 3 우리가 「서시」를 한결같이 ‘연시’의 테두리에서 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나는 정처 없습니다.”라는 절정의 압도적인 시구에서 온다. 그것이 발산하는 강인하면서도 절절한 마음결의 지속성에서 비롯한다. 이 시구는 저 마음결이 내딛어갈 수밖에 없었을 순결하면서도 굳건한 ‘기다림의 자세’, 그리고 그 운명선의 궤적을 ‘영원한 지금’이라는 현재진행형의 사태로 부단히 바꿔놓는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에서 기원하기 때문이다. 이 기다림의 운명선 또한, ‘영원한 지금’이라는 부단한 생명력의 트임으로 되살아나는 ‘말과 시간의 깊이’에서 온다. 나아가 매번의 순간마다 ‘회광반조(廻光返照)’를 거듭할 수 있는 순결한 마음과 지속성의 예감을 쓸어안는다. 사람의 말이 순결하면서도 드넓은 감응력의 파장을 뿜을 수 있는 것은 그것에 담긴 소망과 기도가 한없는 시간의 너비로 확장될뿐더러, 그 실패와 좌절의 예감에도 불구하고 온몸을 다한 기다림을 오래도록 지속하는 장면에서일 것이다. 따라서 “나는 정처 없습니다”라는 불확정 상태의 고뇌와 불안의 무늬는 그 뒤척임의 시간을 정면으로 수용하려는 순도 높은 “물결무늬 자국”을 감싼다. 나아가 우리 모두의 ‘본래면목’을 깨우치도록 강제하는 내적 계기의 촉발점과 자기 수행의 탄력성을 암시한다. 그리하여, 이 “무늬”는 우리 생의 어찌할 수 없는 역설적 존재 상황과 더불어 ‘본원적 아이러니’의 숙명으로 이끌어간다. 나아가 우리 모두를 부단한 자기 수행의 공간으로 내던지는 “집으로 가는 길”, 그 ‘혼자 가는 먼 집’을 쓸어안는다. ‘범속한 트임(profane Erleuchtung)’을 여는 한 비평가의 문장, ‘화엄을 찾는 나그네는 어떠한 상처에도 존재의 핵심을 개방하려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가 상기시키는 ‘영원한 지금’의 수행이 그러하듯. 어쩌면 시간의 풍화작용을 거스르는 오랜 ‘기다림의 자세’란 나날의 밥벌이와 물신의 쾌락에 도취한 생활인의 감각을 넘어선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랑 예찬’을 노래한 한 철학자가 말하듯,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존재 전체’를 뒤흔드는 ‘진리-사건’의 발생 터전이자 수행 과정일 것이 자명하다. 적어도 ‘공간과 세계와 시간이 사랑에 드리우는 장애물들을 부단하게, 또는 단호하게 극복해가는 그런 사랑’의 일관된 지속성의 견지에서 본다면, “나는 정처 없습니다.”라는 구절에 “소리 없이” 내려앉는 순결하면서도 굳건한 마음의 흔적이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순결한 마음의 자리에서 「서시」는 ‘연시’의 테두리를 뛰어넘는 ‘신성한 잉여’의 파장을 그 뒷자락에 걸쳐두고 있었던 듯 보인다. 달리 말해, 부단한 자기 성찰과 구도 수행의 터전으로 나아가는 탐색의 ‘노정기(路程記)’, 그 이면적 주제로의 ‘변신 모티프’를 보이지 않는 배경에 드리우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수려한 예술작품은 여전히 매력적인 ‘사랑 노래’일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읽힌다 해도 큰 문제는 없다. 그것은 소월과 만해가 함께 이룬 한국시의 가장 유력한 ‘연시’ 풍의 서정 미학, 부드러운 문채(文彩)와 ‘숨은 조화’의 절제된 리듬으로 아름답게 여울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의 여성적 어조와 역설적 미감의 분위기를 세련된 말소리의 어감과 정갈한 리듬, 그리고 균제(均齊)의 이미지로 새롭게 채색하면서, 동아시아 문화에서 ‘오래된 미래’로 이어져 온 ‘백비(白賁)’의 미학적 전통을 다시 해체-재구성하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서시」는 그 ‘현묘한 여성성(玄牝之門)’의 경건한 수용력을 “소리 없이” 일렁이게 함으로써, 우리 생의 도처(到處)에 감춰진 역설적 존재 상황과 극단적 아이러니의 심연을 수행의 차원으로 말없이 도약시킨다. 이 맥락은 비단 「서시」와 「남해 금산」뿐 아니라, 그 사이를 구성하는 무수한 시편들에서도 일관되게 발견된다. 곧 이성복의 시집 『남해 금산』에는 소월의 처연한 어조와 역설적 리듬의 자장(磁場)이 도드라진 형세와 윤곽선으로 펼쳐져 있지만, 만해가 성취한 구도(求道)의 상징적 리듬과 이미지의 후광이 ‘연시’ 풍의 어조와 분위기 아래 설핏한 기색으로 감춰져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집은 ‘백비(白賁)’의 ‘숨은 조화’를 우아(優雅)의 미감에 실린 잔잔한 윤슬처럼 빛나게 한다. 그리고 그 뒷자락엔 만해가 이룬 ‘연시’의 독보적인 성취, 경건하고 부드러운 구도 수행의 빛이 “소리 없이” 어른거린다. 그렇다. 만해가 자신의 구도 수행과 실천적 탐색의 과정을 ‘연시’ 풍의 부드러운 어조와 서정적 스타일로 노래했다면, 이성복의 『남해 금산』은 소월과 만해를 동시에 가로질러, “정든 유곽”으로 표상되는 생의 숙명적 폭력과 찢긴 실존의 “신음소리”, 그 통절한 절규와 시퍼렇게 날 선 ‘공-실존’의 아이러니를 정화하고 치유하고 구원하려는 기도의 이미지들을 아로새겼다. 달리 말해, “어머니” “성모성월” 등과 같은 ‘원형 상징’의 구체적 무늬들을 폭넓게 활용하여, ‘관음’으로 표상되는 위대한 수용력을 부드러운 어조와 균제미의 리듬-이미지로 형상화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집 『남해 금산』은 ‘한국의 관음 3대 성지’인 남해 보리암과 그 ‘해조음’이 생성하는 ‘이근원통(耳根圓通)’의 광휘를 뒷면에 “소리 없이” 드리움으로써, “정든 유곽”의 한 축을 이루는 폭력과 절망, 고통과 상처를 보듬고 어루만지는 강인한 수용력의 세계를 현시했노라고 말할 수 있겠다. 달리 말해, 이 시집은, ‘관음 성지’의 광휘로 그침 없이 나아가는 수행의 노정기(路程記)를 ‘오래된 미래’의 순결한 ‘사랑 노래’에 실어 우리에게 다시 들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맥락은 수행의 빛과 어둠을 새로운 미감으로 조율할 수 있는 말소리의 굴곡과 반복의 여운, 그리고 그 무늬들의 형세와 윤곽선, 행간의 깊이와 예술적 짜임새를 치열하게 탐구하고 모색했던 오랜 시간의 깊이와 충실한 수행의 자리에서 비롯하는 것이리라. 『남해 금산』의 마디마디에서 빛을 뿜는 강인한 수용력의 미감과 원초적 생명력의 리듬 역시, 시인의 ‘1차 프랑스 유학’ 직후 시점인 1985년부터 시작된 동아시아 문화에 관한 집중 탐구에서 기원한다. 이 맥락은 “어머니”라는 ‘현묘한 모성성(玄牝之門)’의 세계를 소월과 만해가 공존하는 절제된 어조와 여백의 리듬에 얹어, 그 무수한 심상들을 “잎잎이 춤추”게 하는 자리에서 비롯한다. 나아가 시인이 다시 새긴 한국시의 새로운 별자리가 『남해 금산』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 자리에선 소월과 만해가 아닌, 이 둘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절정의 ‘시운(詩韻)’으로 틔어 오르는 청신한 리듬-이미지가 흘러나올뿐더러, 동아시아 전통의 ‘백비(白賁)’ 미학이 새로운 의장(意匠)을 에두른 채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노자의 ‘현빈지문’과 불가의 ‘관세음보살’을 아우르면서 양자를 정화와 치유와 구원이라는 ‘현묘한 모성성’의 이미지로 동시에 여울지게 하는 자리에서, 『남해 금산』이 탄생했노라고 선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시집을 ‘법고창신(法古創新)’의 테두리에서 다시 면밀하게 뜯어 읽어야만 하는 이유와 맥락도 이 자리에서 온다. 이 자리에선 ‘현묘한 여성성’을 짜고 닦고 씻는 기막힌 어조와 극진한 절제의 리듬, 그리고 여백의 신비스러운 미감이 동시에 울려 나오기 때문이다. 4 표제 시편으로 돋아난 「남해 금산」 역시,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해 온 테두리에서 읽어야만 적확한 독법을 마련할 수 있을 듯하다. 어쩌면 「서시」와 「남해 금산」이 시집 『남해 금산』의 시작과 끝을 이루면서 서로 잇닿을 수밖에 없는 은폐된 맥락 역시, 이 테두리에 감춰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아가 이 비가시적 차원에 대한 ‘증상적 독해’란 그것을 흐릿한 암시의 문법으로 묘사하는 자리에서 좀 더 오롯한 진실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자리에서 이 작품의 가려진 신비가 강렬한 섬광처럼 도래하는 놀라운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 「남해 금산」 전문, 『남해 금산』 이미 오래전 우리는 이 시에 관한 압도적인 글 한 편을 기억에 새겼다. 그리고 “한 여자”가 “그 여자”로 변신하는 그 모진 생의 곡절과 절절한 이야기의 매듭 속에서,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 숲길에서 “문득” 귓전으로 스며들던 ‘삼매(三昧)’ 소리를 잠시 엿들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우리 마음결 한복판에 주름져 있었을 “해와 달”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은 설화적 신비와 황홀경에 휩싸였으리라. 이 신비의 빛은 나날의 삶을 이루는 범속한 시간의 테두리에서 잠시 날아올라, 우리 안에 이미 깃들어 온 ‘영원한 지금’의 시간으로 고양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지금-여기’로 주어지는 당면한 순간을 벗어나 저 아득한 설화의 시간으로 되살아나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삼매(三昧)의 순간적 광휘가 ‘영원한 지금’의 시간으로 매 순간 되살아나는 것에 비견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남해 금산」의 “한 여자”가 품은 설화는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잠기”는 “나 혼자”의 당면한 현재 상황으로 “돌 속에” 봉인된다. 그러나 이 설화는 봉인됨으로써, 오히려 ‘영원한 지금’으로 부단히 이어져갈 미래의 육체성을 얻는다. 이는 물론 역설이다. 그것도 본원적 차원의 역설일 수밖에 없으리라. 이 역설이 빚는 말과 시간의 운명이란 “삶이란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시인의 산문 한 조각에서 찾아질 수 있다. 그리고 그 “집”은 그 어디도 아닌 “돌 속에 묻혀 있었네”라는 시의 무늬에서 포착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이성복의 시와 산문을 일관되게 가로지르는 ‘본래면목(本來面目)’, 또는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자리에서만 발견될 수 있으리라. ‘영원한 천국’이란 ‘잃어버린 천국’일 수밖에 없으며, ‘태초의 낙원’이란 ‘실낙원’의 리듬을 타고 우리 생의 마디마디로 매 순간 다시 들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돌 속에 묻힌” “한 여자”와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간” 바로 “그 여자”는 둘이면서 하나이고, 둘도 아니며 하나도 아닌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존재일 것이다. 곧 ‘불일불이’의 ‘원통(圓通)’ 세계로 빛나는 ‘본래면목’으로서의 “나”일 것이 자명하다. 적어도 ‘영원한 지금’이라는 아나크로니즘(anachronism)의 황홀경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그 여자”는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남해 금산 보리암 곁에 우두커니 선 “돌”이자, 그 “돌 속에 들어간” “나”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리라. 마찬가지로 “그 여자”가 전한 “사랑” 노래는 “나도 돌 속에 들어가”도록 “끌어주었”던 “돌 속에 묻혀 있”었던 “한 여자”에게서 온 것이지만, “그 여자”의 “빛나는 신음소리”를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로 매 순간 바꿔놓는, 바로 “그” 자리에서만 설화적 시간의 영속성을 얻는다. 이 영속성은 우리 모두의 ‘본래면목’이 매 순간 다시 발견되는 자리,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쉼 없는 ‘노정기(路程記)’ 속에서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영원한 지금’이라는 모순 형용의 시간으로만 표현될 수 있을 ‘불가능’의 자리에서만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불가능’의 자리에서 보면,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간” “그 여자”는 그리 슬프거나 비극적인 존재일 리 없다. 오히려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으로 남겨질 수밖에 없는, 신비롭고 성스러운 존재일 것이다. 여기서 나타난 “떠나감”의 무늬는 ‘영원한 지금’이라는 현재진행형의 시제 속에서 “그 여자 사랑”을 끊임없이 다시 수행하게 만드는 근본 동력으로 자리하기 때문이다. 「남해 금산」의 “그 여자”를 시인의 산문 「집으로 가는 길」로 풀어보면, “여지껏 경험해보지 못한 경건한 느낌”을 주는 “당신”일 수밖에 없다. “한 여자”가 “그 여자”로 변신하는 순간, 그 뒷면으로 “소리 없이” 드리워지는 “당신”이란 “내가 찾아 헤매던 숨은 그림”이자, 우리 모두의 ‘본래면목’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당신”이란 존재는, 우리 안에서 같이 살아온 우리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일 수밖에 없기에. “나의 삶은 ‘당신’이라는 ‘집으로 가는 길’이다.”라는 산문 한 조각이 「남해 금산」의 “한 여자”와 “그 여자” 사이에서 그침 없이 넘실거리는 “사랑”의 변주곡으로 읽히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이 변주곡에 깃들일 수밖에 없을 온갖 “사랑” 이야기 또한, ‘오래된 미래’로 표상되는 무한한 시간의 동심원을 그리면서 끊임없이 번져나갈 수밖에 없으리라. 지금-여기,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언젠가 “문득” 깨닫게 될 것이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가 이별의 슬픔과 단독성의 비애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오히려 「서시」의 “어두워가며 몸 뒤트는 풀밭”과 겹쳐 떨리면서,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울려 퍼지는 원격 감응의 “빛다발”로 넘쳐흐르고 있음을. 그리하여, ‘영원한 지금’의 시간으로 매 순간 되살아나는 「남해 금산」의 “그 여자 사랑에”와 “돌 속에 들어간”, 그리고 “나”를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라. 이 무늬들이 ‘시방세계(十方世界)’의 오롯한 순간들로 매번 다시 열리는 영원한 “사랑”의 “길”을 표상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시인에게 “길”이란 결국 “집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집으로 가는 길”이란 “길”이 감내할 수밖에 없을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의 단독성, 시인 허수경에게 기대어 말하자면, ‘혼자 가는 먼 집’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내가 집을 발견하는 순간”, “삶의 길은 끊어진다.”라고 말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삶은 집이 아니라, ‘집으로 가는 길’이다.”라는 문장은 곧 “그대에게 가는 먼 길”, 그 ‘백척간두 진일보’의 단독성을 현시하려는 말일 수밖에 없기에. 만일 “나는 아직도 정면으로 ‘당신’의 얼굴을 마주 본 적이 없다. 언제나 ‘당신’은 어렴풋한 모습으로 내 앞에 있다.”라는 산문 한 조각에서 「서시」의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가 “소리 없이” 울리게 된다면, 우리는 이성복 시의 “물결무늬 자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작고 “헐한” 사립문 하나를 열게 된 셈이리라.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라는 단독성의 무늬는 우리 모두를 폐쇄적 실존의 가두리에 고립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에게서 “사랑”이 다시 시작되는 바로 그 순간, 그 깨달음의 단독성을 현시하려는 역설적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 혼자”의 반복은 우리 생의 존재론적 고독과 숙명적 비애감을 표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만인으로 뻗어나가는 “사랑”의 무한정한 힘조차 “나” 안에 있는 ‘본래면목’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 그 ‘단독성’의 자리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음을 현시한다. 이처럼 시인 이성복과 그의 텍스트에 대한 ‘증상적 독해’는 그 사이 공간들에 가로놓인 무수한 여백을 가로질러, 표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던 ‘본질적 절단면’을 새롭게 포착하는 ‘창조적 해석’의 장을 새롭게 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에 따르면,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는 “더는 싸울 수 없는 순간에/별은 내린다 더는 내릴 수 없는/순간에 별들은 내 몸에 달라붙는다”(「그대 위의 푸른 나뭇가지들」, 『남해 금산』) 같은 무늬들이 내뿜는 “빛다발의 歡呼”, 그렇게 아름다운 “별”들이 총총히 떠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것은 “奇蹟처럼 떠오를 푸른 잎사귀”(「밤은 넓고 드높아」, 『남해 금산』)이자, “모든 게 神祕”(「口話」,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일 수밖에 없을 “뒹구는 돌”의 탄력과 그 “神祕”가 머물다 갈 “길”을 보이지 않는 행간에 계속 숨겨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로부터 신비로 나아가는 것은 또한 신비로부터 현실로 되돌아오는 것을 암암리에 예비한다.”라는 시인의 보들레르 연구 한 대목은, “현실”과 “신비” 사이에서 부단히 일어나는 ‘화해적 이원성’의 역동적 순환 운동을 집약한다. 나아가 이 순환 운동을 예술적 모티프의 중핵으로 삼는 이성복 시의 ‘본질적 절단면’을 단 한 문장으로 응축한다. 시인의 예술적 사유를 전적으로 지탱하는 것은, 양극단의 에너지를 투쟁과 정복이 아닌 화해와 연대의 차원으로 수렴하려는 동아시아 전통의 ‘대대(對待)’ 원리이기 때문이다. 결국 ‘대대’라는 말은 양극단의 힘이나 사태들이 상호 대립적인 상황과 조건에 놓여 있으면서도, 상호 보완적인 작용과 운동으로 수렴되어가는 ‘천지만물(天地萬物)’의 역동적 삼투 운동과 그 현상 전체를 빠짐없이 함축할 수 있는 용어이기 때문이리라. 그리하여,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의 “모든 게 神祕였다 사랑의 힘 죽음의 힘 죽은 꽃의 힘/모든 게 神祕였다” 같은 무늬들을 보라. 이 무늬들이 적확하게 예시하듯, “神祕”란 우리 모두를 “죽지 않을 만큼 짓이기”며 다가오는 그 “龜甲같은 치욕”에서조차 “아지랭이”처럼 움터 오르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사랑의 힘”을 낳는 “죽은 꽃의 힘”이라는 ‘본원적 역설’의 존재로서 우리 마음결로 끊임없이 들이쳐오는 것이기에. 모든 게 神秘였다 길에서 오줌 누는 여자아이와 곱추 남자와 電子時計 모든 게 神秘였다 채찍 맞은 말이 길게 울었다 모든게 神秘였다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고, 그러나 죽지 않을 만큼 짓이겼다 모든 게 神秘였다 사랑의 힘 죽음의 힘 죽은 꽃의 힘 모든 게 神秘였다 삼백 육십 오일 駱駝는 타박거렸다 얼마나 멀리 가야 하나 얼마나 가까이 있어야 하는가 - 「口話」 부분,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결국 “神祕”란 “길에서 오줌 누는 여자아이와/곱추 남자와 電子時計”에서 나타나듯, 그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조차 분별심을 두지 않고 그 경계와 차별을 거두는 자리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게 神秘였다”라는 말이 참으로 가능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멀리 가야 하나 얼마나 가까이 있어야 하는가”라는 거리 감각의 분별심조차 “없는 것”으로 자리할 수 있어야만 한다. 시인은 “없는 것”의 자리를 우리가 감당하거나 “슬퍼할 수조차” “없지만” 매일같이 감당하기 위해 또한 수행할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을 “불가능(不可能)”이라는 역설 어법으로 일컬었던 것인지 모른다. ‘영원한 지금’으로 주어지는 매 순간의 수행 과정인 ‘본래면목’이란 ‘알 수 없어요’로 표상되는 “불가능(不可能)”을 수반할 수밖에 없기에. 「슬퍼할 수 없는 것」의 마지막 무늬, “슬퍼할 수 없는 것,/슬퍼할 수조차 없는 것”에서 “소리 없이” 일렁이는 ‘불가능’의 이미지가 그러하듯.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눈이 쌓여 있다는 것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가지 못하리라는 것 굳이 못 갈 것도 없지만 끝내 못 가리라는 것 나 없이 눈은 녹고 나 없이 봄은 오리라는 것 슬퍼할 수 없는 것, 슬퍼할 수조차 없는 것 - 「슬퍼할 수 없는 것」 전문, 『아, 입이 없는 것들』

계간 파란 이찬 이성복남해 금산관세음보살해수관음상서시연시백비현빈지문원통불일불이 2025
정과리 응시의 담장과 ‘멘토 콤플렉스’라는 장대

 지난 호에서 한국시가 생존에서 실존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응시'하는 주체를 빚어내는 과정을 보았다. 왜 응시하는 주체인가? 김수영이 갈파했듯이 '사물'을 똑바로 바라보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그 후손으로서의 우리 마음은 뿌듯할지 모르지만 무언가를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즉 어떻게 주체는 그런 응시의 능력을 갖게 된 것일까? 생존에서 실존으로 넘어가는 대목에서 번개처럼 그런 능력이 그의 몸 안으로 떨어진 것일까? 그러나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은 '사탄' 뿐이다. 모든 능력은 몸 안에서 자생적으로 솟아나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을 1945년의 해방과 1950년의 전쟁은 한국인의 무의식 속에 깊이 각인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엄혹성은 의식의 표면에서 자각되지 않기 일쑤였다. 그 사실을 직면한다는 것이 엄청난 고통을 가하기 때문이다.  이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새로 태어난 한국인이 실존의 단계에서 응시의 권능을 자신의 몸을 초과해서 선취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 가정이 타당하다면 그는 응시를 취득하기에 앞서 그가 넘어야 할 장벽이 있다는 가정 역시 성립한다. 그 장벽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그가 응시를 응시하는 순간, 그는 두 가지 강박관념에 사로잡힌다. 하나는 그가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그를 보고 있다는, 즉 타자가 그를 응시하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누구보다도 '주체'의 힘을 강조한 사르트르가 그 점에 예민하게 주목했던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부끄러움(la honte)은 그 일차적 구조 안에서 '누군가의 앞에 놓인 자'의 부끄러움이다. 나는 방금 모종의 서툴거나 천박한 제스처를 했다. 처음 이 제스처는 내게 붙어 있다. 나는 그것을 판단하지도 비난하지도 않는다. 단지 그것을 바라볼 뿐이다....(중략)... 문득 갑자기 나는 고개를 든다. 누군가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곧 이어서 내 제스처의 천박성을 깨닫는다. 나는 부끄러움을 느낀다....(중략)... 나는 내가 타자에게 드러난 정도로 나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타자의 출현 자체에 의해 나는 어떤 대상을 판단하듯이 나 자신을 판단하는 일에 서둘러야 한다는 처지에 놓인다. 왜냐하면 나는 타자에게 하나의 대상처럼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자에게 드러난 이 대상, 이것은 타자의 의식 속에서는 헛된 가상이 아니다. 이 이미지는 실로 타자에게 전가될 수 없고, 나를 변신시킬 수도 없다. 나에게 어떤 추함, 천박함의 표정을 입히는 나에 대한 나쁜 초상화 앞에서 그러하듯이 이 이미지 앞에서 나는 짜증과 분노를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골수까지 침범당하지는 않는다. 부끄러움, 그것은 본질적으로 재인식(reconnaisance)이다. 나는 타자가 나를 보기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재인식한다. 1)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나는 부끄러움을에 사로잡힌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나'는 그런 느낌을 갖게 된 것일까? 사르트르의 글의 문면에는 "서툴거나 천박한 제스처"가 원인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런데 이 제스처는 어떤 타자에게 한 행위이다. '타자에게'라는 방향성이 없다면 나의 제스처는 그저 무심할 뿐이다. 더 나아가 이 제스처가 '서툴거나 천박한' 형태로 제시되었다는 것은 타자를 '대상화'하는 마음의 태도를 노출한다. 철학자는 그 점을 교묘하게 표현한다. "내가 타자에게 하나의 대상처럼 나타났"던 것은 "내가 어떤 대상을 판단하는" 것처럼 행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내 눈앞의 어떤 '타자'를 '대상'처럼 판단함으로써 "서툴거나 천박한" 제스처를 행한 것이고, 그와 마찬가지로 거의 동시적으로 타자에 의해서 나의 모습이 '서툴거나 천박하다'고 비추어지리라는 것이다. 그때 나는 타자에 의해서 대상화된다.  사르트르가 이런 풀이를 한 배경에는 '나', 즉 하나의 주체가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 '존재결여'로서 자신을 인식한다는 '대자존재(être pour soi)'에 대한 그 특유의 정의가 깔려 있다. 존재가 자기 자신의 존재함을 인식할 때의 존재일 때, 즉 대자존재일 때 그는 존재결여로서 나타난다. 그 존재결여가 가상의 타자들에 의해서 '대상'의 존재로 그를 격하시킨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는 무화할 수도 있는 위협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신을 새로운 존재로 변신시키기 위한 실마리이다. 위 인용문의 마지막 두 문장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의미를 얻는다. "부끄러움, 그것은 본질적으로 재인식이다."  이러한 사르트르의 인식을 프로이트는 앞서서 파악한 바가 있다. 임상 실험 중에 환자가 자신을 오랜 시간 마주 본다는 점을 거북하게 여겼던2) 프로이트는 '응시'가 '시선'과 다르다는 점을 파악한다. 시선이 주체의 사안이라면, '응시'는 대상에 집착된 '시각적 충동'이며, 이 충동은 '오인'을 개입시킨다는 것이다3). 이러한 분리로부터 출발해 라캉은 이 대상, 즉 주체가 집요하게 바라보는 것이 '남근(phallus)'이라는 점을 간파하는데, 이를 '거세된 성'이 야기하는 "거세 공포에 대항하여 "시선의 석화(石化) 혹은 발기"라는 남근적 반응이 작동한 것으로 풀이한다. 요컨대 '응시'라는 시각적 충동은 "거세 사실을 감쪽같이 감추려는4)" 충동이다.  그렇다면 이 '남근'의 표상들은 스스로에게서 나온 것이 아닌, 타자에게서 나온 갖가지 환(幻)들로 채워진다. 주체는 이때부터 자신이 타자에 의해 포획되었음을 느낀다. "나는 한 곳만 줄곧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나의 실존 속에서, 나는 사방으로부터 바라보아지고 있다. 5)" 하지만 여기가 주체에게는 삶이 에너지를 얻는 계기이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서 주체는 타자로부터 빌려온 환상물들을 제것으로 삼으면서, 끊임없이 갈아치우는 모험을 전개하고 그로부터 자신의 갱신을 거듭 도모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주체가 '실존'하는 생생한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은 전쟁을 딛고 살아남은 한국인이 마침내 새로운 탄생을 개시했을 때의 상황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지난 호에서 말했듯 최초의 인간들이 응시를 첫 번째 행동 수칙으로 삼았던 이유와 효과가 방금 말한 과정을 그대로 품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들은 아무 능력도 재산도 가진 것이 없었다. 그것이 그들의 거세 상황이다. 그런데 그들은 사태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것은 물론 대상 세계의 진상을 파악하고 그것을 저의 운용 하에 두고자 하는 것인데, 실제로 그럴 수 있으려면 타자들에게서 '도구'와 '사용법'을 빌려와야만 해야 했기 때문이다.  별로 어려운 얘기가 아니다. 그런데 앞에서 왜 그리 복잡하게 설명했는가? 그래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거쳐야만 주체의 타자 의존의 주체성(실존성)을 납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에 대한 이해가 없는 채로 한국의 식자들은 고금을 통틀어 날마다 시시각각으로 불통의 주체성을 고집하는 데 전념하기 때문이다. 그 주체성의 환몽이야말로 스스로 알려 하지 않는, 즉 자발적으로 망각된, 사대주의에 불과한데 말이다.  1950년대의 김춘수·김수영·신동엽은, 존재의 이유가 지금, 이곳에 도래해야 한다는 믿음을 생존의 역학을 만든 박인환·전봉건·김종삼의 유산을 받아, 타자와의 뫼비우스적 거래를 통해서 실존의 버팀막을 마련했던 것이다. 그 거래의 최초의 생산물이 응시의 획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응시는 주체의 '전가의 보도'가 아니라 주체가 기댄 등받이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것은 장벽이기도 했다. 언젠가는 뛰어넘어야 할. 거기까지 가는 데에 또 얼마나 장구하고 복잡한 굴곡의 생애가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6) 1) Jean-Paul Sartre, 『존재와 무 L'être et le néant』, Paris: Gallimard, 1943, pp.259~260. 2) 이에 대한 정보는, Jean-Michel Hirt, '응시 Regard' 항목, in Alain de Mijolla (direc), 『Dictionnaire Internationale de la Psychanalyse (M-Z)』, Paris: Calmann-Lévy, 2002, pp. 1418~9에 근거함. 3) 프로이트, 「성적 탈선들」, 『성이론에 관한 세 개의 에세이』, in Sigmund Freud, 『Œuvres complètes - VI. 1901-1905: Trois essais sur la vie sexuelle, etc.』,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2006, pp. 90-91.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응시'는 '신체적 접촉'과 마찬가지로 "성적 목표를 고착시키는" 두드러진 행동이다. 또한 이 고착은 '성적 탈선'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시각적 충동(pulsion scopique)이 시각적 쾌락(plaisir scopique)으로 발전될 때, 그것은 '도착(perversion)'이 된다고 한다. 4) Jacques LACAN, 「시선과 응시의 분열 La schize de l'oeil et du regard」 in 『Le Séminaire XI: Les quatres concepts fondamentaux de la psychanalyse (1964)』, Seuil, 1973, p.74. 5) ibid., p.69. 6) 개인적인 사정으로 여기에서 멈춘다. 제목이 약속하는 글의 내용은 아직 반 이상이 더 남아 있다. 다음 호로 연기할까 했지만, 글쓰기의 지속성을 위해서 요만큼이라도 발표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하였다.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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