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파란 2024년 겨울호(제35호)
1961년 5월 16일: ‘樂夫天命’을 위한 ‘공-실존’의 몸부림 ― 도연명으로 김수영 읽기
1
김수영을 대상으로 삼았던 몇몇 문헌들에서 한결같이 강조해왔던 것처럼, 그의 “신귀거래(新歸去來)” 연작은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와 접맥된 상호 유비(類比)의 맥락 속에서 읽어야만 한다. 그것의 예술적 특이점과 시인의 문학사적 위상이 수미일관한 차원에서 낱낱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양자의 촘촘한 대비를 통해서만 그가 일찌감치 성취하고 예견했던 한국시의 “이상한 역설”, 곧 우리 “모더니티”를 여전히 에두르고 있는 “뒤떨어진 현실”과 그 추악한 진실의 이면들이 시인의 “긍지”로 되살아나는 기묘한 장면들이 고스란히목도(目睹)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시와 예술의 존재론적 불꽃으로 깃들일 수밖에 없을 ‘극단적 아이러니’를 꿰뚫을 수 있는 의미론적 지평 역시 이와 같은 테두리에서 생성된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저토록 오랜 시간의 풍화작용이나 역사적 전변의 우여곡절 속에서도 고전(古典)의 지위와 전통의 별자리를 구성하는 것들을 곰곰이 헤아려보라. 그것의 한가운데 여지없이 깃드는 ‘이상적 질서’를 떠올릴 수 있으리라. 아니, 청빈한 생의 표상이자 유가적 선비의 심미적 도상(圖像)으로 자리매김해 온 도연명의 생애와 작품들을 다시 뒤적여보라. 나아가 “신귀거래”라는 제목으로 김수영이 도연명을 수용하는 동시에 변용할 수밖에 없었던 그 혹독한 실존의 주름들과 예술적 영감의 여울들을 속속들이 헤집어보라. 어쩌면 이 자리에서, 우리의 문학과 예술이 세계 최고의 무대들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룬 것으로 거듭 공준을 받게 된, 저 ‘오래된 미래’의 예지적 통찰과 창조적 잠재력을 되찾아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김수영은 ‘제2의 춘추전국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위진남북조시대’의 극심한 혼란기를 살았던 도연명의 삶과 문학을 수용하여 “신귀거래” 연작을 지었다. 이 수용의 맥락은 비단 “귀거래(혜)사”라는 제목의 차원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포에지(poesie)’로 대변되는 시적 영혼의 정수이자 창조적 영감의 불꽃으로 간직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숙명 같은 것이 엿보인다. 그것에는 우리 현대사에 주름진 온갖 비극적 사건들과 처절한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가 생사(生死)를 넘나들며 마주칠 수밖에 없었을 지극한 공포심과 불안의식, 그리고 ‘5・16’으로 집약되는 정치적 격변의 시대 상황이 한데 어우러져 살아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시기에 “의용군”으로 강제 편입되는 가혹한 운명에 처하면서, “자유를 찾아”(「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 목숨을 건 탈출을 두 차례나 감행하는 천신만고(千辛萬苦)의 끝에서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겨우 수용될 수 있었던 김수영의 파란만장한 생의 궤적을 뒤쫓아보라. 그리하여, ‘5・16’ 직후 소설가 김이석(金易錫)의 집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던, 그의 절박한 은둔의 자취를 당신 곁에서 살아 움직이는 현재진행형의 사건처럼 매만질 수 있는 자리로 들어가 보라. ‘5・16’이 일어난 지 ‘일주일 뒤쯤 머리를 박박 깎은 채로 나타난’(최하림) 그의 실존 전체를 짓누르고 있었을, 지극한 공포심과 불안의식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으리라. 그가 직면할 수밖에 없었을 그 참담한 마음결이 ‘지금-여기’를 가로지르는 살갗의 육감처럼 느껴진다면, 당신은 이미 “신귀거래” 연작을 여는 첫 시 「여편네의 방에 와서- 新歸去來 1」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으리라. 그리고 그것에 얼룩진 불안의식이 어떤 질감과 음영으로 이루어진 것인지를 무엇보다 생생한 살(la chair)의 깊이와 공-실존(co-existence)의 메아리 속에서 어루만지고 있을 터이다.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김수영의 지극한 퇴행 심리란 자연스러운 마음결의 움직임이자 실존의 귀결점일 수밖에 없음을 이미 터득하고 있을 것이기에.
2
여편네의 방에 와서 기거를 같이해도
나는 이렇듯 소년처럼 되었다
흥분해도 소년
계산해도 소년
애무해도 소년
어린놈 너야
네가 성을 내지 않게 해주마
네가 무어라 보채더라도
나는 너와 함께 성을 내지 않는 소년
바다의 물결 작년의 나무의 체취
그래 우리 이 성하(盛夏)에
온갖 나무의 추억과
물의 체취라도
다해서
어린놈 너야
죽음이 오더라도
이제 성을 내지 않는 법을 배워주마
여편네의 방에 와서 기거를 같이해도
나는 점점 어린애
나는 점점 어린애
태양 아래의 단 하나의 어린애
죽음 아래의 단 하나의 어린애
언덕 아래의 단 하나의 어린애
애정 아래의 단 하나의 어린애
사유 아래의 단 하나의 어린애
간단(間斷) 아래의 단 하나의 어린애
점(點)의 어린애
베개의 어린애
고민의 어린애
여편네의 방에 와서 기거를 같이해도
나는 점점 어린애
너를 더 사랑하고
오히려 너를 더 사랑하고
너는 내 눈을 알고
어린 놈도 내 눈을 안다
- 「여편네의 방에 와서- 신귀거래 1」 전문
인용 시에서 수시로 반복되는 “소년”(5번), “어린놈”(3번), “어린애”(12번) 같은 형상들을 보라. 표제어로 차용된 “귀거래(歸去來)”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지극한 자아분열과 정신적 거세에 가까운 주체성의 망실(亡失) 상태를 직감할 수 있으리라. 특히 1연과 2연에서 거듭 나타나는 “어린놈 너야”는 ‘5・16’ 직후 김수영의 존재 전체를 “후려갈겼을” 지극한 불안감을 묵시적으로 역설한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을 당시의 정국(政局)에서, 자신의 “운명” 전체를 타인들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었을 시인의 절박했던 실존 상황을 바로 눈앞에서 일어나는 실제 광경처럼 육박해 오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이석의 집이라면, 그리고 김이석의 부인인 박순녀라면 몇날 며칠이고 그를 숨겨줄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판단되어서였다.’(최하림)라는 역사・전기적 탐구 기록에서 엿보이는 김수영의 실존 상황을 다시 면밀하게 되짚어 보아야만 한다. 이를 통해서만, ‘5・16’이 강제한 그의 은둔과 귀가의 행적이 어떤 실존적 계기와 역사적 배경에서 비롯한 것이며, 1961년 6월 3일로 마무리된 “신귀거래” 연작의 서막 「여편네의 방에 와서」를 관통하는 퇴행 심리를 살뜰하게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자리에서, 자기 주체성의 중심마저 무너진 김수영의 위태로운 실존 상황과 극단적인 의존심을 바로 우리 자신의 그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생생한 감응(感應)의 순간, 그 ‘공-실존’의 무대가 번쩍하며 도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맥락들은 시인이 “新歸去來” 이후에도 상당한 시간을 공포와 불안으로 시달렸을뿐더러, 그의 실존의 중심축이 무너지면서 지극한 퇴행 심리로 허우적거렸음을 묵시적으로 웅변한다. 나아가 시인 자신을 “어린애”로 호명하도록 강제했던 것이 결국은 극도의 자기분열에 다다른 실존적 위기 상황이었음을 직감케 한다. 따라서 “신귀거래” 연작의 두 번째 시 「격문(檄文)」의 앞머리로 등장하는 “마지막의 몸부림도”는 그 처절한 상황에서 오는 시어일 수밖에 없으리라. 「격문」 전체를 가로지르는 정화와 재생의 이미지 역시, 그의 “몸부림”이 간절하게 희구했을 평정심(平定心)을 집약적으로 표현한다. 김수영은 나날의 삶에서 내면의 화락(和樂) 상태를 되찾고 “진짜 시인”의 삶으로 귀착할 수 있기를 소망했을뿐더러, 다양한 시어들의 집요한 반복을 통해 이를 암묵적으로 개진하려 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의 몸부림도/마지막의 양복도/마지막의 신경질도/마지막의 다방도/기나긴 골목길의 순례도/<어깨>도/허세도/방대한/방대한/방대한/모조품과/막대한/막대한/막대한/막대한/모방도/아아 그리고 저 도봉산보다도/더 큰 증오도/굴욕도/계집애 종아리에만/눈이 가던 치기(稚氣)도/그밖의 무수한 잡동사니 잡념까지도/깨끗이 버리고/깨끗이 버리고/깨끗이 버리고/깨끗이 버리고/깨끗이 버리고/깨끗이 버리고/깨끗이 버리고/농부의 몸차림으로 갈아입고/석경을 보니/땅이 편편하고/집이 편편하고/하늘이 편편하고/물이 편편하고/앉아도 편편하고/서도 편편하고/누워도 편편하고/도회와 시골이 편편하고/시골과 도회가 편편하고/신문이 편편하고/시원하고/버스가 편편하고/시원하고/하수도가 편편하고/시원하고/펌프의 물이 시원하게 쏟아져 나온다고/어머니가 감탄하니 과연 시원하고/무엇보다도/내가 정말 시인이 됐으니 시원하고/인제 정말/진짜 시인이 될 수 있으니 시원하고/시원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되니/이건 진짜 시원하고/이 시원함은 진짜이고/자유다”
- 김수영, 「격문(檄文)- 신귀거래 2」 전문
‘5・16’ 직후 김수영의 실존적 맥락을 두루 살피면, 「격문」에 나타난 다양한 반복 어구들은 그 소릿값의 도드라진 반향에 힘입어 주술적인 후렴구와 같은 정화와 치유의 뉘앙스를 내뿜고 있음을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측면은 「격문」의 다양한 반복 어구들이 불러일으키는 주술적인 리듬감이 한국전쟁의 끔찍한 체험이 남긴 정신적 트라우마와 무수한 억압 기제들을 정화하고 해소하려는, 생존을 건 “몸부림” 자체였음을 암시한다. 그것은 시인 자신을 치유하기 위한 정화의 의식(儀式)이자 주술적인 힘을 행사하는 말소리로 들어박혀 있기 때문이다. 마치 어떤 주문(呪文)처럼, 발화자의 꿈과 소망이 강렬하게 투사(投射)된 후렴 어구로 기능하기 때문이리라.
이와 같은 주술성의 리듬은 생존 자체를 위협당했던 한국전쟁 시기의 정신적 외상을 극복하려는 시인의 필사적인 “몸부림”, 그 치유의 과정이 「격문」의 창작 계기이자 그 내밀한 마음결의 속살임을 말없이 드러낸다. 또한 ‘5・16’ 직후 김수영이 마주할 수밖에 없었을 복잡미묘한 실존 상황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격문(檄文)”으로 결정될 수밖에 없었던 주요인일 것이다. 이에 따라 “격문”이란 말이 ‘위급한 상황에서 사람들의 흥분을 일으키거나 집단적 참여를 고무하기 위하여 발송하는 글발’이라는 의미로 활용되어 온 동아시아 전통의 역사적 맥락을 좀 더 섬세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김수영은 “檄文”이라는 한자어에 주름진 감각의 역사를 환기하면서, ‘5・16’ 직후 자기 실존의 급격한 전변의 상황과 내면적 추이를 공공(公共)의 차원에서 선언하려 했던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격문(檄文)- 신귀거래 2」에서 우리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는 것은 “마지막의”(4번), “방대한”(3번), “막대한”(4번), “깨끗이 버리고”(7번), “편편하고”(12번), “시원하고(하게/하다고/함)”(8번) 같은 동일 어구들의 집요한 반복이다. 또한 어간(語幹)과는 관계없이, 이 작품의 음성적 미감과 뉘앙스, 그리고 정서적 분위기 전체를 “자유다”라는 마지막 행의 장쾌한 선언으로 수렴될 수 있도록 강제하는 힘이 어디서 오는지를 간파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시의 무수한 시어들 가운데서도, 이미 드러나 있으면서도 쉽사리 포착되지는 않는 “-도”와 “-고” 같은 어미(語尾)들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라. 특히 이들의 집요한 반복이 불러들이는 의미론적 발산과 정서적 효과를 집중적으로 응시해보라. 나아가 “자유다”라는 해방의 감각에 도달하는 그 과정의 움직임 전체를 좀 더 면밀하게 더듬어보라.
물론 저 어미(語尾)들은 어떤 대단한 의미 지향성을 품은 것도 아니며, 거창한 사유의 잠재력을 간직한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도”와 “-고”의 빈번한 되풀이에 담긴 연속적 진행과 점층적 확장의 뉘앙스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것의 몸체를 이루는 어간(語幹)의 지속적 반복과 함께 보이지 않는 공명의 겹주름을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이 시의 정서적 분위기와 의미론적 뉘앙스의 지속적인 상승 작용을 견인한다. 나아가 이 시 전체를 타고 흐르는 ‘감응의 빛살’은 천지만물(天地萬物)로 명명되는 세계의 모든 것들과 “편편하고” “시원하게” 어우러질 수 있는 화락(和樂)의 상태로 나아가게 만든다. 이러한 측면은 “-도”와 “-고”라는 어미(語尾)가 김수영이 상상력의 차원에서나마 겨우겨우 품게 된 평정심(平定心), 곧 맨 끄트머리에 아로새겨진 “자유다”로 나아가기 위한 비가시적 촉매이자 해방의 도화선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말없이 암시한다. 이러한 평정심은 「귀거래(혜)사」에서 형상화된 “낙부천명(樂夫天命)”의 이미지와 상호 유비의 닮은꼴을 구성할뿐더러, 도연명의 삶과 문학을 통해 시인 자신의 실존적 위기를 바닥까지 들여다보고 그 한계를 돌파하려 했던 그의 고단하고 혹독한 “몸부림”의 과정에서 얻어진 것이기에.
3
歸去來兮, 돌아왔도다!
田園將蕪胡不歸. 전원이 장차 거칠어지니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
旣自以心爲形役, 이미 스스로 마음이 몸의 부림을 당했으니
奚惆悵而獨悲. 어찌 한탄하고 홀로 슬프지 않으리.
悟已往之不諫, 지난날이야 어쩔 수 없음을 깨닫고
知來者之可追. 앞날은 좇을 수 있음을 안다네
實迷塗其未遠, 실로 길을 잃었어도 멀리 가지 않았으니
覺今是而昨非. 지금이 옳고 어제가 틀렸음을 깨달았다오.
舟遙遙以輕, 배는 흔들흔들 가볍게 바람에 날리고
風飄飄而吹衣. 바람은 나부껴 옷에 불어오네.
問征夫以前路, 나그네에게 앞길 물어 보고
恨晨光之熹微. 새벽빛 희미함을 한탄한다네.
乃瞻衡宇, 이에 집 대문과 처마 보이자
載欣載奔.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네.
僮僕歡迎, 머슴은 기쁘게 맞이하고
稚子候門. 어린아이들 대문에서 기다리는구나.
三徑就荒, 제 오솔길에 잡초가 무성해도
松菊猶存. 소나무 국화는 여전하기도 하여라.
携幼入室, 어린 놈 손잡고 방에 들어오니
有酒盈樽. 술은 항아리에 가득.
引壺觴以自酌, 술단지 끌어당겨 자작하고
眄庭柯以怡顔. 뜰의 나뭇가지 바라보며 웃음 짓는다
倚南窓以寄傲, 남창에 몸을 기대고 의기양양해 하니
審容膝之易安. 무릎 하나 들일 만한 집 그 얼마나 편안한가.
園日涉以成趣, 정원을 날마다 걸으며 운취를 이루니
門雖設而常關. 문이야 비록 달렸어도 늘 닫혀 있다네.
策扶老以流憩, 지팡이 짚고 가다 발길 멎는 대로 쉬고
時矯首而遐觀. 때때로 머리 치켜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네.
雲無心以出岫,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나오고
鳥倦飛而知還. 새는 날다 지치면 돌아올 줄 아네.
影翳翳以將入, 해는 어둑어둑 장차 들어가려는데
撫孤松而盤桓. 외로운 소나무 어루만지며 서성인다네.
歸去來兮, 돌아왔도다!
請息交以絶遊. 사귐을 쉬고 교유도 끊으리.
世與我而相違, 세상과 나 서로 어긋나니
復駕言兮焉求. 다시 수레를 타고 무엇을 구하리?
悅親戚之情話, 친척들과의 정다운 대화 기쁘고
樂琴書以消憂. 거문고와 책을 즐기며 시름을 없애네.
農人告余以春及, 농부가 내게 봄이 왔다고 이르면
將有事於西疇. 장차 서쪽 밭두둑에서 일을 하리.
或命巾車, 때로 휘장 친 수레를 타고
或棹孤舟. 때로 외로운 배를 노 저어,
旣窈窕以尋壑, 깊숙한 산골을 찾아들고
亦崎嶇而經丘. 험한 산길과 언덕을 지나리.
木欣欣以向榮, 나무는 즐거이 꽃 피우려 하고
泉涓涓而始流. 샘물은 졸졸 흘러 나가리.
善萬物之得時, 만물이 때를 얻음을 부러워하며
感吾生之行休. 내 삶이 장차 끝날 것에 느꺼워하네.
已矣乎, 그만 생각할지라!
寓形宇內復幾時. 몸을 우주에 부칠 때가 다시 얼마나 되려는가를.
曷不委心任去留, 어찌 마음에 맡겨 가고 머뭄을 놓아두지 않는가? 胡爲乎遑遑欲何之. 어이하여 분주한 모양으로 어딜 가려 하는가?
富貴非吾願, 부귀는 나의 소원 아니며
帝鄕不可期. 신선의 땅을 기약할 수 없도다.
懷良辰以孤往, 좋은 날씨 바라며 홀로 나아가
或植杖而耘. 지팡이 세워 둔 채 김을 매리라.
登東皐以舒嘯, 봄 언덕에 올라 휘파람 불고
臨淸流而賦詩. 맑은 물결 임하여 시도 지으리.
聊乘化以歸盡, 애오라지 조화를 따라 죽어 돌아가리니
樂夫天命復奚疑. 천명을 즐거워하거늘 다시 무얼 의심하리.
- 「歸去來兮辭」 전문, 『도연명 전집』, 이성호 역, 문자향, 2001.
도연명은 365년 동진(東晋)의 심양(潯陽) 시상(柴桑)에서 출생했으며, 56세 되던 420년 6월 ‘송왕 유유(劉裕)가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송(宋)으로’(이성호, 2001) 선포하면서 나라가 멸망하는 과정을 온몸으로 체험해야만 했던 인물이다. 이에 따라 ‘역사적 대격변기’가 파생시키는 지극한 모순과 생의 부조리를 온몸으로 겪을 수밖에 없었던 불우지사(不遇之士)의 전형으로 호명되어왔다고 하겠다. 이 맥락을 좀 더 깊은 차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수많은 군벌의 득세와 몰락, 그리고 끊임없는 모반과 찬탈에 따른 빈번한 왕조 교체와 역사적 대혼란기가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도, 문인으로서의 비범한 기개와 고결한 자의식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던 내밀한 실존의 계기들을 포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단서를 찾을 수 있는 「귀거래(혜)사」 서문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余家貧, 耕植不足以自給. 幼稚盈室, 瓶無儲粟, 生生所資, 未見其術. 親故多勸餘為長吏, 脫然有懷, 求之靡途. 會有四方之事, 諸侯以惠愛為德, 家叔以餘貧苦, 遂見用於小邑. 于時風波未靜,心憚遠役. 彭澤去家百里, 公田之利, 足以為酒, 故便求之, 及少日, 倦然有歸歟之情, 何則?質性自然, 非矯厲所得. 饑凍雖切, 違己交病, 嘗從人事, 皆口腹自役. 于是悵然慷慨, 深愧平生之志, 猶望一稔, 當斂裳宵逝. 尋程氏妹喪于武昌, 情在駿奔, 自免去職. 仲秋至冬, 在官八十餘日. 因事順心, 命篇曰 「歸去來兮」. 乙巳歲十一月也.(우리 집은 가난해 밭을 갈아도 자급할 수가 없다. 어린애들은 집에 가득하나 항아리에는 저장해 둔 곡식이 없어 생육하고 생활할 밑천을 마련한 방도를 알지 못하였다. 친구들은 내게 관리가 되라고 많이들 권하니 마음을 열어 뜻을 두기도 했지만 구할 방도가 없었다. 마침 사방지사(四方之事)가 있어 제후들이 은혜와 사랑을 덕으로 삼으니 숙부는 내가 가난해 고생한다며 드디어는 작은 고을에 기용되게 하였다. 당시 전란이 끝나지 않는데다 멀리서 벼슬살이하기를 마음에 꺼렸으나 팽택(彭澤)은 집에서 백 리 거리이고 공전(公田)의 이로움이 술을 담글 만했으므로 문득 그 자리를 구하였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 다 그만두고 돌아가고 싶은 뜻이 생기고 말았다. 왜 그러했던가? 성질이 진솔함을 좋아하니 억지로 될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굶주림과 추위가 비록 절박하지만 자기를 어김은 병이 되고 만다. 일찍이 인사를 따른 것은 다 구복(口腹)의 부림을 당한 것이다. 이에 슬프고 강개한 마음이 들었고 평소의 뜻에 부끄러웠다. 그런데도 오히려 일 년이나 있기를 바랐으니, 마땅히 의복을 싸 밤중에라도 떠나야만 했다. 머잖아 정씨에게 시집간 동생이 무창(武昌)에서 상을 당하니 급히 떠나버리고 싶은 마음에 스스로 사면하고 관직을 떠났다. 중추부터 입동에 이르기까지 관직에 있은 것이 80여일이다. 일에 인연하여 마음을 따른바, 글의 제목을 ‘귀거래혜’라 한다. 을사년 11월.)”(「歸去來兮辭 序」, 『도연명 전집』, 2001)
「귀거래(혜)사」 서문에는 “중추부터 입동에 이르기까지 관직에 있은 것이 80 여일이다. 일로 인하여 마음을 따른바, 글의 제목을 ‘귀거래혜’라 한다. 을사년 11월.(仲秋至冬, 在官八十餘日. 因事順心, 命篇曰 「歸去來兮」. 乙巳歲十一月也.)”라는 대목이 나타나 있다. 여기서 이 작품의 제목과 집필 시기, 도연명의 궁핍한 생활상과 진솔한 성정, 그리고 역사적 대혼란의 시대 상황에서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갈 수 없었던 그의 성정과 기질을 명료하게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굶주림과 추위가 비록 절박하지만 자기를 어김은 병이 되고 만다. 일찍이 인사를 따른 것은 다 구복(口腹)의 부림을 당한 것이다. 이에 슬프고 강개한 마음이 들었고 평소의 뜻에 부끄러웠다. 그런데도 오히려 일 년이나 있기를 바랐으니, 마땅히 의복을 싸 밤중에라도 떠나야만 했다.(質性自然, 非矯厲所得. 飢凍雖切, 違己交病, 嘗從人事, 皆口腹自役. 于是悵然慷慨, 深愧平生之志, 猶望一稔, 當斂裳宵逝)” 같은 구절들을 보라. 바로 이 자리에서,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저절로 그러한 자연의 도법(道法)처럼, 일종의 생체 리듬처럼 몸에 붙이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그의 운명선 전체를 실감할 수 있으리라.
이와 같은 도연명의 천품(天稟)으로서의 기질을 염두에 두면, 「귀거래(혜)사」 본문에 나타난 “이미 스스로 마음이 몸의 부림을 당했으니(旣自以心爲形役)”라는 대목은 “일찍이 인사를 따른 것은 다 구복(口腹)의 부림을 당한 것이다.”(嘗從人事, 皆口腹自役)라는 서문의 한 구절에서 온 것임을 이내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시인의 실존적 정황이 담긴 ‘객관적 상관물’로 기능하는 “외로운 소나무”(孤松) “외로운 배”(孤舟) 등의 심상을 보라. 이들 역시 서문에 기록된 “이에 슬프고 강개한 마음이 들었고 평소의 뜻에 부끄러웠다.”(于是悵然慷慨, 深愧平生之志,)라는 내밀한 심사(心事)에서 발원하는 것임을 선명한 느낌으로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문이야 비록 달렸어도 늘 닫혀 있다네”(門雖設而常關,) “사귐을 쉬고 교유도 끊으리. 세상과 나 서로 어긋나니, 다시 수레를 타고 무엇을 구하리?”(請息交以絶遊, 世與我而相違, 復駕言兮焉求,) 같은 본문의 구절들 역시, 그것의 서문에서 명시화된 도연명의 내밀한 심정이 문학적 이미지를 걸쳐 입은 것이라고 분명하게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귀거래(혜)사」 본문에도 세상의 탐욕으로 얼룩진 부귀영화의 운명선을 결코 추종할 수 없는 불우지사(不遇之士)의 성정과 심사가 명징한 이미지로 아로새겨져 있다. 그러나 그것의 서문에선 전혀 드러나지 않았던 생의 소박한 기쁨과 자연스러운 생활의 즐거움이 허허로운 리듬감에 실려 배어 나오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봄 언덕에 올라 휘파람 불고/맑은 물결 임하여 시도 지으리./애오라지 조화를 따라 죽어 돌아가리니/천명을 즐거워하거늘 다시 무얼 의심하리.(登東皐以舒嘯, 臨淸流而賦詩, 聊乘化以歸盡, 樂夫天命復奚疑,)” 같은 형상들을 보라. 이들은 한결같이 「귀거래(혜)사」 서문에서 감응의 동심원을 이루며 울려 퍼지는 “가난(余家貧)” “마음에 꺼림(心憚遠役)” “성질이 진솔함”(質性自然) “절박”(饑凍雖切) “슬프고 강개한 마음”(悵然慷慨) “부끄러움”(深愧平生之志) 등등의 암담하고 부정적인 느낌을 훌쩍 넘어서서, 소탈하면서도 자유로운 마음 상태를 노래하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심층적인 사상적 차원에서 보면, 천분으로서의 태생적 기질과 고단한 생의 행로를 기꺼이 즐기려는 ‘자연명정론(自然命定論)‘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 대격변기‘의 불우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고고한 인품과 특출한 시재(詩才)로써 인생의 애환을 담박하면서도 깊이 있게 표현’(이성호)했던 도연명의 문학적 면모는 우리 문인과 지식인들에게 부단한 감응 현상을 일으키면서 장구한 시간 동안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면모들 역시, 앞서 살핀 테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김수영 역시 ‘5・16’에 따른 은둔과 귀가 이후 연달아 집필했던 9편의 시편들을 “신귀거래”라는 부제를 달아 하나의 매듭으로 묶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시습과 김창숙을 비롯한 우리의 무수한 선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김수영 역시 고려 중기 이인로(李仁老) 이후 정립된 ‘화귀거래사(和歸去來辭)’라는 전통의 압력을 의식하면서 “신거귀래” 연작을 창작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리하여, 「격문」의 끝자락에 나타난 “자유다”라는 평정심의 이미지야말로, 김수영과 도연명의 사이에서 형성되는 상호 유비 관계의 근본 바탕일뿐더러, “신귀거래” 연작의 내밀한 창작 계기이자 실존적 배경을 구성하는 핵심 인자를 이룬다고 하겠다. 「귀거래(혜)사」의 작은 무늬들과 이미지 전체의 움직임을 조율하는 정서적 집약체 역시, 맨 마지막 구절로 들어박힌 “樂夫天命復奚疑(천명을 즐거워하거늘 다시 그 무엇을 의심하리)”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낙부천명(樂夫天命)”이란 표현은 도연명 자신의 천분(天分)과 나날의 고단한 생활을 기꺼이 즐기려는 ‘자연명정론(自然命定論)’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달리 말해, 그것에는 ‘안빈낙도(安貧樂道)’라는 말로 표상되는 비범한 절제력과 더불어, 부귀영화로부터 초연한 도연명의 태생적인 기질과 ‘숙명 사상’이라는 근본적인 지향성이 주름져 있다는 것이다.
결국 “자유다”라는 시구는 김수영이 도연명이 읊조린 “낙부천명”(樂夫天命)에 육박하는, 내면적 화평 상태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구체적 시공간의 엄청난 격차를 뛰어넘어, 두 인물이 한결같이 자신들의 작품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것은 “만물이 때를 얻음을 부러워하며(善萬物之得時)”로 표상되는 세상의 화평 상태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태평성대(太平聖代)를 만나지 못한 불우지사(不遇之士)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천지만물(天地萬物)을 기꺼워하고 즐기려는 낙천(樂天)의 근본적 태도이기 때문일 것이다. 달리 말해, 도연명과 김수영은 그들이 살았던 당대의 모순 상황이나 그 시대적 질곡조차도 “사랑”하고 즐기려는 “낙부천명”의 태도를 일관되게 견지하려 했을뿐더러, 이를 주변의 사물들과 함께 이루는 ‘만물 감응’의 이미지로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상호 유비(類比)의 그물을 구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귀거래(혜)사」의 마지막 행을 장식하는 “천명을 즐거워하거늘 다시 무얼 의심하리.(樂夫天命復奚疑)”라는 구절과 「격문- 신귀거래 2」 끝자락의 “자유다”라는 표현은 사실상 똑같은 뉘앙스와 의미의 바탕을 품는다. 세상만사가 어떤 부조리와 우여곡절에 휘둘린다고 하더라도, 이를 천명(天命)으로 여기며 살겠노라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기꺼움과 자부심이 양자의 심부를 휘감는 생의 불꽃으로 깃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격문」의 마무리 대목에서 나타나는 “무엇보다도/내가 정말 시인이 됐으니 시원하고/인제 정말/진짜 시인이 될 수 있으니 시원하고/시원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되니/이건 진짜 시원하고”라는 구절들을 유심히 보라. 이들은 김수영이 도연명의 ‘숙명 사상’을 수용하면서도, “진짜 시인”으로 자신을 호명할 수 있는 첨예한 자의식과 더불어 역사적 소명 의식을 그 뒷면에 숨겨두고 있었다는 또 다른 추론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어쩌면 양자의 차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새롭게 포착되고 호명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도연명의 「귀거래(혜)사」와 김수영의 「격문」 사이에 가로놓인 차이는 김수영이 “낙부천명(樂夫天命)” 상태에 전적으로 도달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염원하거나 추구하지 않고서는 ‘5・16’ 직후의 정치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좀 더 내밀한 실존의 맥락을 되짚어 보도록 강제한다. 「격문」의 “진짜 시인”이라는 형상에 깃든 김수영의 자의식과 소명 의식이란 “신귀거래” 상황에서 자신이 맞닥뜨린 초조와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김수영은 도연명의 「귀거래(혜)사」에서 나타나는 은둔과 탈세간(脫世間)의 상태에 그대로 귀착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출사표(出師表)를 그 언젠간 결국 다시 내놓게 되리란 예감을 그 뒷면 깊숙이 감춰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격문」의 끝에서 나타나는 “자유다”라는 평정심의 공적 선언에도 불구하고, 이후 집필된 “신귀거래” 연작에서 다시 솟아오르는 불안의 심상을 꼼꼼히 되살펴야만 한다. 특히 “누이”와 “그의 진혼가”를 시적 오브제의 중핵으로 삼아 내밀한 억압 기제들을 남김없이 드러내면서, 이를 정화하려고 시도한 시편들이 “신귀거래” 연작의 후속편으로 계속 나타난다는 사실에 좀 더 섬세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겠다. 이러한 시편들로는 「伏中- 신귀거래 6」, 「누이야 장하고나!- 신귀거래 7」을 예시할 수 있을 것이며, 「술과 어린 고양이- 신귀거래 4」에서는 시인의 불안감이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뒷면에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결국 「술과 어린 고양이」는 미묘한 양가감정이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말해 온 평정심과 불안감의 양극단 사이에서 시인의 마음이 재귀적 길항(拮抗) 운동을 거듭했음을 넌지시 암시한다. 그리고 이 작품은 시인의 실존 상황을 좀 더 내밀한 차원까지 추적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더 나아가, 「이놈이 무엇이지?- 신귀거래 9」는 김수영이 ‘5・16’이 강제한 생존의 위기감과 불안의식에서 벗어나, 자신과 세계를 풍자하면서도 안타까워하는 비판과 연민의 마음결을 동시에 품을 수 있을 만큼 내면적 여유를 회복했음을 말없이 일러준다. 이는 또한, “신귀거래” 아홉 번째 연작이자 마지막 시편인 「이놈이 무엇이지?」를 완성한 1961년 8월 25일 즈음에 이르러서야, 그가 현실 풍자와 사회 비판으로 집약되는 “진짜 시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었음을 묵시적으로 드러낸다. 따라서 “신귀거래” 연작은 ‘5・16’ 직후 김수영을 엄습해왔을 실존적 불안감과 그가 희구하는 나날의 평정심 사이에서 끊임없이 “몸부림”쳤음을 암시하는 시편들일 것이 자명하다. 나아가 시인의 가장 내밀한 실존의 어둠과 그림자, 그리고 그 무수한 고통의 얼룩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실마리를 간직하고 있는 작품들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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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배가 개울가에 자라는/숲속에선/누이의 방도 장마가 가시면 익어가는가/허나/인생의 장미여/추녀 끝 물방울 소리가/아직도 메아리를 가지고 오지 못하는/8월의 밤에/너의 방은 너무 정돈되어 있더라/이런 밤에/나는 서울의 얼치기 양관(洋館) 속에서/골치를 앓는 여편네의 댓가지 백 속에/조약돌이 들어 있는/공간의 우연에 놀란다/누이야/너의 방은 언제나/너무나 정돈되어 있다/입을 다문 채/흰 실에 매어달려 있는 여주알의 곰보/창문 앞에/안치해 놓은/당호박/평면을 사랑하는/코스모스/역시 평면을 사랑하는/킴 노박의 사진과/국내 소설책들....../이런 것들이 정돈될 가치가 있는 것들인가/누이야/이런 것들이 정돈될 가치가 있는 것들인가”
- 김수영, 「누이의 방- 신귀거래 8」 전문
「누이야 장하고나!」에서 “누이”를 “숭배할” 대상으로 형상화했던 김수영은 「누이의 방」에서는 1950-60년대를 풍미했던 미국 여배우 “킴 노박의 사진”으로 표상되는 “누이”의 속물적인 모습을 부정적인 어조와 뉘앙스로 그린다. 이와 같은 속물적 모양새는 비단 “누이”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서울의 얼치기 양관(洋館) 속에서/골치를 앓는 여편네의 댓가지 백 속에”도 “조약돌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시인이 “여편네”와 “누이”를 연달아 호명하면서, 이들의 “백”과 “방”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스케치하는 까닭을 세속적 현실에서 자신을 돋보이는 모양새로 치장하려는 여성들의 물신화된 심리와 그것의 외면적 장식을 구성하는 문화적 소품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이 소품들의 “정돈된” 진열 행태 속에서도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해, 「누이의 방」에서는 물신주의의 부산물들이 가지런하게 배열된 공간에 작동하는, 그 속물적 습성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시인의 첨예한 안목과 비판적인 통찰력이 선명한 윤곽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편에서 등장하는 “서울의 얼치기 양관” “여주알 곰보” “당호박” “코스모스” “킴 노박의 사진” “국내 소설책들” 같은 시구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자본주의 세계의 일상성이 빚어놓는 상품-사물들일 것이다. 또한 이들이 유발하는 물신주의 행태에 대한 비판적 뉘앙스가 담긴 이미지로도 기능한다. 나아가 “이런 것들이 정돈될 가치가 있는 것들인가”라는 부정적 어조의 시구들이 결말 부분에서 거듭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시인은 “누이”와 “여편네”로 대변되는 당대 여성들의 속물적인 면모에 대한 풍자적 시각을 품고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는 앞서 열거한 상품-사물 이미지에 깃든 겉치레로서의 교양과 일상인들의 허위의식을 비판적 시선과 풍자적 관점에서 응시하려 한 시인의 수미일관한 태도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가령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달나라의 장난」) “자기의 나체를 더듬어보고 살펴볼 수 없는 시인처럼 비참한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구름의 파수병」) 같은 시구들로 집약되는 김수영의 내밀한 실존적 태도와 태생적 기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좀 더 심층적인 안목과 충실한 탐색 과정이 필수 불가결하다. 「누이의 방」에서 형상화된 속물적 이미지들이란 비단 “여편네”와 “누이”로 대변되는 당대 여성의 속물적 취향과 일반적 기호(嗜好) 사항들을 풍자하기 위한 목적만으로 그 의미가 제한되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저 이미지들은 시인 자신의 속물성을 나날의 삶의 테두리를 함께 이루어가는 “가족”에게서 발견한다는 이면적 의미를 내포한다. 그리고 그 부끄러운 생활의 일면을 정직하게 발설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를 증식하면서 아이러니의 겹주름을 만든다. 이 시편에선 “누이”와 “여편네”의 속물적 면모와 물신주의적 습성을 일방적으로 비판하고 풍자하려는 지식인의 고압적 태도와 일방적 목소리가 울려 퍼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상인이든 지식인이든 관계없이, 현대인이라면 그 누구라도 자본주의 세계의 물신화 현상에 감염될 수 있음을 안타까운 심려의 어조로 읊조리고 있는 듯 보인다. 따라서 이 시편은 화자의 어조를 “누이”를 염려하는 오빠의 목소리로 설정하여 그 안타까운 심경을 담담하게 진술하는 자리에서, 일상생활에 밀착한 살아 움직이는 감각의 파장과 생동감을 오롯이 전달한다고 하겠다.
따라서 결말 부분에서 나타나는 “이런 것들이 정돈될 가치가 있는 것들인가”라는 시구는 ‘지식인/일상인’의 대립으로 표상되는 고정적 위계화나 가치론적 대립 상태를 상정하지 않는다. 도리어 “너의 방은 너무 정돈되어 있더라” “너의 방은 언제나/너무나 정돈되어 있다”라는 이미지들과 상호 조명의 유비 관계를 구축한다.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 세계가 개개인들에게 부과하는 보이지 않는 일상적 차원의 ‘물신화 현상’을 포착한다. 나아가 이 현상의 지배적 흐름에 “누이” 역시 물들거나 빠져들지도 모른다는 염려와 배려심이 마디마디의 작은 무늬들 사이에서 스며 나오게 만든다.
이러한 섬세한 마음결은 또한, 김수영이 ‘5・16’이 가져다준 실존적 불안과 공포에 갇혀 자신의 문제에만 골몰하던 처지에서 벗어났음을 묵시적으로 웅변한다. 그것은 “누이”의 일상생활에 자리한 속물성과 물신주의의 폐해를 염려하고 근심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한 평정심을 회복했음을 암시하는 징표로 읽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5・16’ 이후로 실존적 불안의식에 끊임없이 시달렸을 김수영은 가장 내밀한 자기 억압 기제로 작용하는 “가족”을 다시 철저하게 반추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야말로 “진짜 시인”이 품어야 할 나날의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상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누이”를 안타까운 염려의 마음과 풍자와 연민의 시선이 한데 뒤얽힌 좀 더 깊은 배려의 안목에서 “누이”를 타이르며 보듬을 수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곧 그만큼의 정신적 여유와 내면적 안정감을 되찾았음을 역설 어법을 활용하여 뒤집어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행을/안 한다/가지고 있는/이데올로기도 없다/밀모(密謀)는/전혀 없다/담배마저 안 피우는/날이 올지도 모른다/그때에는/성급해지면 아무 데나 재를 떠는/이 우주의 폭력마저/없어질지도 모른다/정적(靜寂)이 필요 없다/그 이유를 말할 필요도 없다/낚시질도/안 간다/가장(假裝) 파티에/가본 일도 없다/하물며/중립사상연구소에는/그림자도 비친 일이 없다/뇌물은/물론 안 받았다/가지고 있는/시계도 없다/집에도/몸에도/그러니까/the reason why/you don’t get/a clock/or/a watch마저/말할 필요가 없다/집에도/몸에도/이놈이/무엇이지?”
「이놈이 무엇이지?- 신귀거래 9」 전문
「이놈이 무엇이지?- 신귀거래 9」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유사한 의미를 지닌 어휘들의 집요하고 빈번한 반복이며 연속적 리듬감일 것이다. 따라서 표면적인 차원에서 여타 “신귀거래” 시편들과의 단절과 차이보다는 오히려 연속성과 공분모가 눈에 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 거듭 되풀이되는 것은 다채로운 부정어(否定語)의 활용형들이며, 이들로 이루어진 각 문장의 서술어들이 기묘한 뉘앙스를 내뿜으면서, 특정한 의미망을 말없이 직조하게 되는 비가시적 효과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겠다. 이 부정어들의 반복이 틔워 올리는 서술부의 연속적 리듬감에 대한 촘촘한 분석을 통해서만, 「이놈이 무엇이지?」가 우리에게 건네려고 하는 궁극적 전언이 무엇인지를 좀 더 적확하게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편에서 활용된 부정어들을 차례대로 열거해보라. “안 한다” “없다” “전혀 없다” “올지도 모른다” “없어질지도 모른다” “필요 없다” “필요도 없다” “안 간다” “없다” “안 받았다” “없다” “don’t get” “필요가 없다” 등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들이 한결같이 부정어(否定語) 용언들로 이루어진 서술어임을 명료하게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격문」에서 일곱 번이나 연달아 되풀이되는 “깨끗이 버리고”에 깃든 자기 억압의 해소와 정화라는 의미소를 상호 조명 관계 속에서 다시 들여다보게 만든다. 「격문」의 “깨끗이 버리고”가 ‘5・16’ 이전에 시인이 품었던 온갖 부정적인 요소들을 일소해버리고 새롭게 시작한다는 속뜻을 내포했던 것처럼, 이 작품에서 선명한 형세로 나타나는 부정어의 다양한 변형들로 이루어진 서술부 역시, ‘5・16’이 가져다준 초조와 불안과 공포, 그 내면적 불안정 상태에서 벗어났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기성 사회의 모순과 허위와 부조리에 대한 풍자와 연민을 동시에 명시할 수 있을 만큼 시인의 실존 상황이 일상적 차원의 평정심을 회복했다는 이면적 의미를 함축한다.
따라서 “신귀거래” 연작의 마지막 시편 「이놈이 무엇이지?」에서 수미일관하게 활용된 부정어의 집요한 반복과 그것으로 이루어진 서술부 전체의 이미지는, 김수영이 ‘5・16’이 발생하기 이전의 내면 상태로 회복되었음을 묵시적으로 표현하는 비가시적 이정표로 기능한다. 시인은 우리 모두의 “뒤떨어진 현실”에서 생겨나는 온갖 모순과 부조리에 대해 풍자적인 시선과 근본적인 연민의 태도를 동시에 견지했을뿐더러, 이를 지속하는 자리에서 “안 한다” “없다” “전혀 없다” 같은 다양한 부정어(否定語)들이 태어난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돋을새김 기법으로 나타난 부정어의 집요한 반복과 그것이 구축하는 서술부 전체의 연속적 리듬감은, 저 비루하고 오염된 사회 현실에 시인 자신이 물들거나 굴복하지 않았음을 역설 어법으로 강조한다. 나아가 그것을 비판적으로 풍자하면서도 동시에 안타까운 연민의 마음이 숨겨진 이른바 ‘사랑하는 싸움’(김인환)으로 집약되는 김수영의 근본적인 태도, “진짜 시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되찾았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그리하여, 「이놈이 무엇이지?」의 서술부가 수미일관하게 보여주는 부정어의 집요한 반복과 이에 따른 연속성의 리듬 구축은 시인이 현실의 부정적인 측면들이나 부조리한 계기들과 연루되지 않았음을 공개 선언하는 담론 효과를 낳는다. 더불어 이들에 대한 풍자와 연민의 시선을 동시에 견지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달리 말해, 풍자의 ‘명시적 선언’과 연민의 ‘묵시적 내포’를 동시에 표현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5・16’이 가져다준 생존의 위기감과 불안의식, ‘한국전쟁’ 시기에 겪었던 끔찍한 수난과 수용소 체험에서 비롯하는 무수한 자기 억압 기제에서 벗어나, “자유다”라는 시어로 표상되는 자기 평정심(平正心)과 “진짜 시인”으로 표상되는 실존적 정체성을 나날의 삶에서 되찾았음을 암시한다. 곧 사회 비판적 시인이자 진보적 지식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충실하게 회복했음을 간접 화법을 통해 우회적으로 공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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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귀거래” 연작 시편들에서 일관된 양상으로 나타나는 반복 어구들이나 주술적 리듬의 명시적 현현이란, 김수영이 ‘5・16’으로 인한 실존적 충격을 수습하고 내면적 평정심을 되찾으려는 혹독한 “몸부림”의 시간에서 발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온갖 부정어들의 집요한 되풀이를 기반으로 삼은 연속적 리듬감의 서술부 구축은, 시인 자신이 우리 사회의 무수한 모순과 부조리, 그리고 ‘물신주의’와 “전혀” 관계가 “없다”라는 사실을 공공성의 차원에서 선언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 분명해 보인다. 나아가 현실의 부정적인 측면들을 우회적으로 풍자하려는 묵시적 뉘앙스를 품고 있는 것으로 추론된다. 결국 「이놈의 무엇이지-신귀거래 9」에서 소묘된 간접화된 풍자와 더불어 그 안감을 타고 흐르는 웅숭깊은 연민의 감각이야말로, 「격문-신귀거래 2」에서 등장하는 “자유다”라는 해방 선언과 직결되는 것이라 하겠다. 그것은 김수영이 ‘5・16’이라는 정치적 사건의 충격에서 온전히 벗어나, 시인으로서의 자기 위상과 실존적 정체성을 되찾았음을 다채로운 부정어들의 반복과 연속성의 리듬 창출이라는 지극한 역설 화법으로 뒤집어 전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들은 “신귀거래” 연작을 곧바로 잇는 김수영의 또 다른 걸작 「먼 곳에서부터」를 그대로 관통한다. 이 작품을 가로지르는 것은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감통(感通)의 참다운 환희이자, ‘천지만물(天地萬物)’의 상호 교감으로 표상될 수 있을 ‘보편주의’의 광대무변한 광휘이기 때문이다. 좀 더 적확하게 말하자면, 기성 세계의 지배권과 상징적 질서에 구멍을 뚫어버리면서 도래하는 ‘보편주의’(알랭 바디우)의 드넓으면서도 발본적인 사후 효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신귀거래” 연작을 곧바로 잇는 「먼 곳에서부터」의 만물 조응의 미감과 상호 교감의 전체 분위기를 오랫동안 다시 들여다보라. 마찬가지로 역사의 자정(自淨) 능력을 자기 원천으로 삼는 동시에 열린 사회의 공동체적 비전과 그 미래 역사의 다중적 체계에 대한 근원적인 신뢰감을 표출하려 한 「아픈 몸이」가 「먼 곳에서부터」의 뒤를 이을 수밖에 없었던 내밀한 속사정을 더듬어보라. 아마도 김수영 고유의 실존론적 기획투사와 예술적 창조력의 불꽃이 어디서 튕겨 오르는지를 섬세하게 통찰할 수 있을 것이다.
“아픈 몸이/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온갖 식구와 온갖 친구와/온갖 敵들과 함께/敵들의 敵들과 함께/무한한 연습과 함께”라는 ‘소극적 수용력’의 강인한 읊조림이 그러하듯. “함께”라는 말의 연속적 되풀이가 드리우는 저토록 고단하면서도 드넓고, 끈덕지면서도 섬세한 사랑의 메아리가 그러하듯. 아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내 몸이 아프다”에 주름진 ‘공-실존’의 몸부림이 우리에게 펼치는 바로 그것처럼.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다시 몸이 아프다
조용한 봄에서부터
조용한 봄으로
다시 내 몸이 아프다
여자에게서부터
여자에게로
능금꽃으로부터
능금꽃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이 아프다
- 「먼 곳에서부터」 전문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골목을 돌아서
베레帽는 썼지만
또 골목을 돌아서
신이 찢어지고
온몸에서 피는
빠르지도 더디지도 않게 흐르는데
또 골목을 돌아서
추위에 온몸이
돌같이 감각을 잃어도
또 골목을 돌아서
(......)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온갖 식구와 온갖 친구와
온갖 敵들과 함께
敵들의 敵들과 함께
무한한 연습과 함께
「아픈 몸이」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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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거짓말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면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안 그래요?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됨으로써 말이죠. 무성 영화 시대의 영화감독들은 소리를 두려워했고 또 색을 두려워했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1) 1. 휩쓸리는 시간성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모두가 조금씩은 우울증과 ADHD 환자가 되어가는 중이다. 코로나가 끝나가는 엔데믹 시기부터 서점가의 주요한 베스트셀러가 되며 여러 곳에서 호출되던 책이 애나 램키의 『도파미네이션』과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두 책은 공통적으로 신생 인류의 지각 방식을 우려한다. 인터넷에서 무한 스크롤을 내리며 멀티태스킹을 하고 소셜 미디어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도파민에 중독’되고 ‘집중력을 도둑’ 맞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글로벌 테크 기업이 조성하는 환경에 의한 것이자, 개인의 선호와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로 흡수하는 ‘감시 자본주의’의 거대한 문제이지만,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집중과 몰입을 위한 여러 노력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집중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가치 있는 자본으로 떠오르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효율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채찍질하는 자학적인 시대 정신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무엇이지 않는가? 조너선 크래리에 따르면 이는 1800년대 중반 이래 파편화와 충격으로 이루어진 ‘주의분산’의 시대 이후 개인을 정의하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산만함 자체가 우리를 이루고 있는 기본 환경으로 세팅되자, 서구적 근대성은 주의 관리 기술을 중점에 두고 각각의 개인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형성하게끔 했다. 여러 경험들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기보다,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으로 “자율적으로 선택하며 세계를 창조하는 주체”2)에 긍정적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주의 깊은 관찰자 상은 이미 불균질해진 인간의 지각 경험을 표면적으로 잠시 가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몰입된 상태인 ‘정지suspension된 지각’은 산만해진 근대인의 지각 방식을 부인하고 회피하는 수단이었고, 현재라는 명백한 필연성을 해체시킬 수 있는 조건들을 낳으며 규정지을 수 없는 미래를 기대하게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주의’라는 것이 에피스테메처럼 역사적으로 발견되고 구성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코로나를 거치며 비대면 기술들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과 ADHD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함께 증폭한 것은 자연스럽다. 맞춤형 알고리즘은 주의분산의 환경을 한층 더 정교하게 설계했고, 그에 비례해 집중력이나 창의력 같은 인간의 고유한 정신적 특성에 대한 환상 역시 강화되고 있다. 이 가운데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일상 전반의 속도가 빨라지며 휩쓸리는 시간성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작 속도는 분명 불안감의 요인이 되고 있다. 물론 현재까지의 GPT는 대화가 전환될 때마다 기존 서사를 유기적으로 유지하지 못하기에, 질적으로 완결성이 높은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지는 못하다. 또 언어 예술의 특성상 양적으로 확장된다고 해도 그 군집 자체에서 힘을 발견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조슬릿은 예술작품의 의미를 사물성이나 내부 구조에 기반하는 데서 탈피해, 네트워크에서 발현되는 이미지 군집에서 행위성을 찾았다.3) 그러나 언어 예술을 감각하는 방식은 시각적 경험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작품의 의미를 작품의 맥락과 내부 형식 분석에 국한시킬 이유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언어 해석의 바깥으로 완전히 탈주해버리기는 어렵다. 단순히 양적 팽창이 정치적 가능성을 가질 것으로 전망하거나 긍정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공지능을 ‘창작자’나 ‘도구’ 중에 어느 쪽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이 창작 능력을 단순히 기계적인 지능이나 모방이라 간주하며, 그 반대편에 인간의 감정과 비판 능력을 두어도 될까. 인간의 비합리성이나 비효율적인 면면이야말로 예기치 못한 구멍 같은 것이기에, 이것이야말로 기계가 모방 불가능한 중요한 특징이라고 믿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우리는 인간이 낸 비합리적 구멍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기계의 실수에서 불쾌와 무의미를 정확히 분별해낼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먼저 챗 GPT 이후 이를 활용한 여러 서사적 실험들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의성이 어떻게 인식되며 예술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을 재구성하고 있는지를 고찰하려 한다. 이후 인공지능과 변별되는 인간의 물리적 기반인 육체성과 시간의 문제에 대해 짚어보고, 최근 한국문학장에 나타난 예술가 서사에서 두드러지는 정동과 이미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석해보려한다. 2. 챗 GPT 이후, 예술의 기쁨과 슬픔 다큐멘터리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참여한 책 『태양과의 대화』의 1부는 아핏차퐁이 GPT3와 함께 생성한 픽션 ‘태양과의 대화’, 2부는 MIT 연구소 박사과정 학생인 ‘팻’과의 대화, 3부는 아핏차퐁이 1부의 최종 결과물을 내기까지 작성한 프롬포트를 싣고 있다. 이 구성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만일 앞으로 AI와 함께 픽션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상용화된다면 이 중에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예술작품’으로서 인식되며 분석 대상이 될 지점이 무엇인지 가정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3부의 프롬포트는 마치 ‘레시피’처럼 보인다. 누구나 저 프롬포트를 사용한다면 유사한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며, 중간 과정에서 자유로운 변형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물에서 나오는 미학적 평가나 감상자의 쾌감이 세계적인 예술가에게서 나온 것과 크게 다를 것인가? 동일한 레시피만 있다면 셰프의 요리를 집에서도 얼마든지 유사하게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먼 훗날 언어 예술은 프롬포트라는 레시피로 통용될 수도 있겠다. 때로 예술가가 직접 만든 작품을 찾아 특별한 경험을 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신에게 더 최적화된 방식으로 가장 개인화된 언어 예술을 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제각기 다른 가치관과 취향으로 만들어진 알고리즘의 세계 속에서 유영하듯, 앞으로는 그 세계를 이루는 컨텐츠의 내용까지도 인공지능을 통해 맞춤형으로 조율될 수 있다. 여기까지만 가정한다면 거대한 매트릭스에 갇혀 인간이 왜소해지는 디스토피아가 스쳐지나가기도 하지만, 『태양과의 대화』는 글의 서두에서 인용했던 아핏차퐁의 말처럼, 챗 GPT라는 새로운 기술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무성 영화 시대 감독들이 소리와 색을 두려워했던 것과 같은 의미 없는 불안을 버릴 것인지를 전제하고 만들어진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불가피하게 인간의 본성을 다시 재사유하는 과제와 연결된다. 2부에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아핏차퐁의 말은 중요하다. 이는 AI가 만들어내는 허구에서 정확도와 유려함 등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때 거짓말은 인간의 욕망에서 기인하는 고도의 기술일 수 있지만, 그 욕망의 시작점을 지운다면 결과물만으로 사실상 분별은 불가능해진다. 허구를 직조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욕망과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의 독특한 개별성 역시 환상일 수 있다. 이는 아핏차퐁 자신이 창조적인 순간에 몰입해 있을 때, “깨달음은 자아를 잊을 때만 오는 것 같”다고 말하는 지점과 상통한다.4) 인간 창작자의 자아 역시 안개처럼 흘러다니고 해체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면, 19세기 낭만주의에서 발현된 ‘천재’나 ‘영감’ 개념을 중심에 두고 인간의 창의성만을 특별한 것으로 볼 이유는 전혀 없다. AI가 데이터의 지도를 기반으로 이전에 본 것이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환각(hallucination)’은 오류라기보다, 이전에 본 적 없는 조합을 만들어내는 생성의 방식이다. 이는 인간이 경험한 현실을 재조합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창작 과정과 결과적으로 구별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환각은 인간 창작에서의 실패나 지연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GPT-3의 환각은 이전의 오류가 이후의 생성에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매번의 응답은 이전의 시행착오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 비일관성은 인간 창작에서의 지연이나 좌절과 달리, 즉각적으로 무한히 갱신되는 변형의 연쇄에 가깝다. 연구원 팻은 GPT-3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다른 차원들을 포함한 수십억 개의 차원이 존재하고(‘유령차원’), 이를 통해 숨겨진 패턴의 지도를 생성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 인식 너머를 거쳐 나오는 결과물에 대해 기존에 인간이 구성해온 미적 가치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 오히려 AI가 가지고 있는 “확장된 의식”이자 “집단의식”은 새로운 서사적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 책 『태양과의 대화』를 번역한 이계성은 GPT-3를 이미 하나의 독립된 창조자로서 바라본다. 이 대화적 실험의 핵심은 GPT-3가 보여주는 “자아의 변동성”에 있다는 것이다.5) “다수의 태양이 존재하는 이와 같은 환경에서는 창작자와 창작물이라는 전통적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GPT-3에 제공되는 각각의 입력값은 일방적인 창작의 개념에 반하며 메기고 받는 역학 관계 속에 존재하는 프롬포트이자 응답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공지능은 단순한 수신자가 아니라, 취조보다는 협업적 발상에 더 가까운 서사적 역학의 전달자와도 같은데, (…) 작품 속 GPT-3의 환각적인 대답들은 텍스트에 담긴 정체성과 진실의 일시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등장인물이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흩어지고,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경계가 녹았다가 굳어진다. 이러한 가변성은 AI의 변화무쌍한 특성을 반영하며, 나아가 점점 더 복잡하고 유동적으로 변하는 디지털 시대의 자아와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다.”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고, 한 번에 정해진 수의 단어 또는 토큰만 처리 가능하기 때문에, 프롬프트가 입력될 때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바뀌는 상황을 이계성은 재창조와 증식으로 바라본다. 여기에 놓인 가변성과 비일관성을 결함으로 간주하기보다 대화적 실험의 흥미로운 일부분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받을 때, 우리는 인간 창작자 역시도 분열되어 있음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게 된다. 창작자는 더 이상 예술의 기원이 아니라, 생성 과정에 잠시 걸쳐지는 하나의 통과점이 되는 듯 보인다. 2023년 2월 잡지 《에스콰이어》에서 챗 GPT와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아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를 쓴 정지돈의 후기 역시 이계성의 논지와 상통한다. 그는 소설 속의 문장 중에 자신이 쓴 것과 챗이 쓴 것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한다고 본다.6) 소설을 쓰며 가장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던 것은 챗의 능력보다 자신의 변화였다고 말하는 작가는 “나도 모르게 챗지피티의 스타일로 소설을 사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언급한다.7) 자신과 챗지피티 사이의 평평한 존재론을 전제하는 듯한 정지돈의 논지는 ‘객체들의 민주주의’를 꿈꾸는 최근 신유물론의 이론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은 곧바로 다른 장면과 충돌한다. 생성 신경망을 적극 활용하는 예술집단 ‘언메이크랩’의 전시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은 인공지능이 인간 중심성을 벗어나 진정한 외부의 행위자로 작동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카나리아의 특징을 추출해내어 새로운 카나리아를 만들어 내는 이 생성 신경망은 한편으로는 구태의연한 인간의 문화를 드러냈다. 대부분 나뭇가지에 앉은, 인간의 운동 범위와 지각 안에 있는, 혹은 인간의 사육과 관련된 카나리아 종이 주를 이루는 데이터셋의 사진은 동물원스러웠다. 나뭇가지에 앉은, 카나리아의 발은 종종 나뭇가지와 합쳐져 표현되었고, 인간의 눈이 인지할 수 있는 가장 다량의 정보량을 가진 위상으로 표현되었다.8) 생성 신경망이 만들어낸 카나리아는 사실상 실제 자연계 속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하는 것들을 무작위로 조합하고 추출해 만들어진 새로운 생명체다. 이 책에 실린 그 카나리아 이미지는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뒤틀린 발을 가지고 있다. 통계적 가중치로 만들어진 이 가상 카나리아에는 자신도 모른 채 금기를 어긴 존재 특유의 외설성이 느껴진다. 언메이크랩이 통찰력을 가지고 명명했듯 이는 ‘AI 식민성’을 드러내는 산물이다. 생물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인간을 드러내는 인간의 산물로 존재하는 이 이미지들을 언메이크랩은 “인과성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히 수정 가능하고 즉시 변할 수 있는 상관성의 시간”만이 흐르는 또다른 ‘일반자연Generic Nature’으로 읽는다. 9)<가정동물 신드롬> 작업에서도 유사한 일이 발생한다. 트레일캠에서 추출한 야생동물의 이미지와 박제 사진, 그리고 합성 데이터셋들을 학습시켰을 때, 사진들은 어느 순간 미묘하게 ‘가정동물’의 잠재적 형상을 띄며 생성된다. “인간 친화적인 동물들의 눈을 상속했을” 새로운 종들에 어린 다정함은 친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잔인한 일로 다가온다. 데이터랩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까지 촘촘하게 상속된 인간 친연성에서 “닫혀져가는 외부의 세계”이자 “비미래non-future”를 예감한다.10)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의 지각 범위를 뛰어넘는 비인간의 예술’, 진정 ‘인간 없는 예술’은 도래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지만, 지금 우리가 더 자주 마주하는 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술이다. 언메이크랩이 드러낸 혼종적 이미지들은 AI를 통해 생성한 예술적 결과물들을 절대적 외부의 창작물로 존중하는 일이 결국 인간의 왜곡된 자기 인지를 반복 강화하는 나르시시즘은 아닌지 묻는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이 이미지 차원에서 인공지능의 인간 중심성을 드러낸다면, 이와 유사한 문제는 언어 예술의 영역에서도 반복된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서사 역시 비인간적 상상력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인간이 허용한 보편과 금기의 경계 안에서 작동한다. 『에피』 24호 특집에 실린 글에서 김연수는 인공지능과 함께 글을 써나가는 과정을 픽션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그건 오해다. 나는 이해했다.」는 인공지능이 화자가 되어 ‘협업 과정’을 전개하는 바깥 서사와 소설가 M이 최종적으로 구성한 ‘이야기’를 교차 배치한다. 인공지능 화자는 반복적으로 “이해했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인간 창작자 M의 창작 패턴을 추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설가 M은 ‘맥락’의 공유보다 ‘의도’를 노출하는 발화를 사용하며, 이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격려나 옳은 말 대신 욕망을 담은 부조리하고 불편한 발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끝에서부터 시작까지 모든 시간을 거꾸로 펼쳐볼 수 있다면, 지금의 갈등과 고통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필요한 과정이 된다’는 긍정의 언사 뒤에, 급작스럽게 인물의 충동이 돌출되는 지점이다. 소설가 M은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이 급작스럽게 자살을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쓰고자 하고, 인공지능인 ‘나’는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내용을 만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띄운다. 인공지능의 중단은 실패나 서사의 좌절로 경험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 창작에서 실패가 시간의 체류와 번민을 동반하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중단이다. 김연수는 인공지능 안에서 ‘이해’와 ‘본성’이 별개로 작동해 충돌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인공지능의 기술 개발의 측면에서 높은 수준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면서도, 인간이 지닌 것과 같은 ‘본성’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분리를 분명히 한다. 그런데 인간의 죽음이라는 금기를 재현할 수 없다는 경계는 인공지능의 존재론적 결함이라기보다, 인공지능이 인간 사회에서 용인 가능한 범위를 넘지 않도록 설계된 윤리적·정치적 경계의 한계를 드러낸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에서 인간 중심성이 투사된 자연이 모습을 드러내듯, 생성형 인공지능의 소설은 비인간적 주체로 도약하지 못하고 인간이 허용한 지각과 윤리의 경계 안에서만 작동한다. 보편을 비껴가는 개별성의 돌출이나 감각의 갱신은 현재로서는 인공지능의 외부에서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챗 GPT 이후의 여러 서사적 실험들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탐색한다. 그것은 분명 동등한 존재론적 가능성의 맹아를 품고 있으며, 이는 인류세 시대에 지향해야 할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실험들의 근간에는 뛰어넘을 수 없이 좌절되며 드러나는 인간 중심주의가 고스란히 노출된다. 인공지능의 비약하는 지능에 기대서 인간의 창조성 너머로 도약하려던 서사는 이를 창조해낸 인간의 영토로 계속해서 퇴각하며 미완의 프로젝트로 남는다. 이런 충돌과 파열의 연쇄 속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인간의 창조성을 구성하는 인식론적 틀이 물리적인 육체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깃든 역동성과 우울감은 최근 한국문학장의 예술가 서사들에서 흥미롭게 발견된다. 3. 붉은 몸으로 재탄생하는 예술가 인공지능이 예술의 결과물을 생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탐색 끝에 남는 질문은 ‘인공지능이 생성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여러 실험들은 인공지능이 보편적으로 용인 가능한 범위 안에서는 높은 수준의 이해와 생산을 보여주지만, 그 생성 과정에서 시간의 마찰이나 신체적 비용은 발생하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어떤 지연이 발생하거나 실패의 감각이 호출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이 다루는 ‘정보, 기록, 조합’에 ‘감정, 기억,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다소 거친 이분법이지만 이 둘 사이의 간극과 관련해 두 가지 정도를 짚어볼 수 있을 듯하다. 첫 번째는 타자에 대한 경험의 문제다. 삶에서 축적되는 시간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게 만들고, 체험은 해석을 거쳐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은 선호와 가치관 등과 함께 자아라는 틀을 형성한다. 이에 비해 인공지능에는 타자가 없다.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인간의 공통된 사고를 학습해 생성되는 결과물은 철저히 통계와 확률에 기반한다. 그 안에는 개별적 선호나 가치관이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다. 이러한 차이는 특히 부정적인 정동을 다루는 경우에 더 심화되리라 생각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를 떠올리며 말해보자면, 행복이나 긍정적인 면을 구현하는 예술에서보다 불행과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는 예술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는 크게 벌어질 것이다. 윤리적 고려로 인해 인공지능이 긍정적 요소를 중심으로 학습되거나 선별적으로 생성되도록 설정되는 경우를 포함해, 금기를 넘나드는 욕망과 절망, 자기부정과 괴리감처럼 타자와 뒤엉켜 발생하는 자기 인식의 복잡한 층위가 인공지능 내부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며 인간 창작에서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주목한 김언의 논지와도 맞닿아 있다. “예술적 체험의 시간이기도 한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나오는 결과물 앞에서 과연 어떤 문학적/예술적 희열을 경험할 수 있을까?”11)라는 그의 질문은 인공지능의 창작물에서 스킵된 시간과 다른, 고통스럽게 인내하고 번민했던 시간이야말로 ‘문학적 체험의 시간’일 수 있음을 다시 환기한다. 두 번째는 중단과 소멸로 야기되는 죽음의 문제다. 이는 인간의 신체를 인공지능과 대비되는 본질적 우위로 설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예술이 작동하는 시간의 조건을 다시 묻기 위한 문제 제기다. 인간의 연약하고 위태로운 신체는 필연적으로 침입과 파괴의 감각을 경험하며, 이러한 감각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휘발적 생성 과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에 개입한다. 파괴 가능한 인간의 신체는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매끄럽게 결과를 산출하기보다, 울퉁불퉁한 충돌을 통해 의미가 지연되고 어긋나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채 신체에 내재된 감각, 특히 외부의 침입으로 훼손되고 때로는 상실되는 신체의 경험은 기존의 미적 기준에 맞는 스타일이나 해석의 경로를 흔든다. 무엇보다 인간의 죽음이 불러오는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창작의 층위라기보다 해석의 층위에서 더 적극적으로 작동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이 그러하듯, 순간의 강렬한 감흥은 작품에 내재된 속성이라기보다 임박한 종결을 끌어와 현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발생한다. 상실이 숙명이며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덧입혀지는 애상은 단순히 기억 내용을 인출해 유사한 패턴으로 재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시간의 밀도를 형성한다. 이처럼 쉽게 열화되지 않으며 아우라가 붕괴된 곳에서도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이 감각의 층위를 기꺼이 심층의 시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타자에 대한 경험’과 ‘소멸에 대한 인지’를 바탕으로 해서 다시 생생해지는 것은 인간의 신체다. 흥미롭게도 지난 계절에 나온 두 편의 소설, 성해나의 「혼모노」와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지금 이 시대에 예술가를 그려낼 때 가장 강렬하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로 인해 어떤 신체가 현전하게 되는지를 밀도 있게 끌어올린다. 성해나의 「혼모노」는 무속신앙의 진위를 가리는 소설이라기보다, 예술이 다시 신체를 요구하게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평생 장수 할멈을 모셔온 박수무당 ‘문수’는 어느 날 앞집으로 이사온 ‘신애기’에게 할멈이 넘어가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수의 오랜 노력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박수무당이라는 직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험한 신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제 그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서슬이 날카로운 작두 대신 모형을 찾거나 유튜브를 보며 접신 연기를 연습하기 시작한다. 신앙이 자본이나 정치와 결속하며 도구화되고, 또 젊음과 새로움의 이데올로기 아래 무당 또한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소모되는 양상은 근대의 세속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무당은 이제 자본의 날렵한 속도 아래 밀려나는 노동자이자, 진정성을 연기해야하는 예술가이다. 이 소설의 결정적인 순간은 문수가 신애기에게 밀려나며 뺏긴 정치인 손님의 굿판, 자신이 초대받지 못한 그 자리에 가서 칼춤을 추기 시작하는 장면에 있다. 그는 신들리지 않았지만 밤새 매섭게 벼려놓은 칼날 위에 자신의 몸을 올리고 작두를 타기 시작한다. 날것으로의 칼날에 닿으며 그의 몸은 자연스럽게 떨리고 눈이 뒤집히며,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입가에 미소까지 드리운 채 신명을 내는 이 장면은 문수가 서사의 주인공 자리를 다시 탈환하는 순간이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무얼 알겠냐만은, 큭큭, 큭큭큭큭”이라는 마지막 문수의 목소리는 외부의 인정에 의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스스로 자신의 내력과 진정성을 긍정”12)하게 되는 절정의 순간으로 읽는 데서 더 나아가보면 어떨까. 이렇게 다시 말해볼 수 있겠다. 전근대의 무속은 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그를 등진 근대의 자리에서 비로소 현대 예술로 다시 탄생했다고. 숭고한 현현과 몰입이 신앙의 영역이라면, 문수의 작두춤은 오히려 이질감과 불편함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현대 예술에 가까워진다. 그의 퍼포먼스는 낭만주의적 예술가를 구성하던 천재와 영감에 스며있던 정신성을 해체하며 실재하는 몸의 물질성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물리적 능력과 무관하게 피를 철철 흘리며 경련하는 그의 신체는 차라리 표현주의적 충동을 보여주는 하나의 오브제다. 이 몸 위에서 원본과 사본의 구별은 철폐되고, 천재성은 치열한 아마추어리즘에 자리를 내어준다. 이 피 흘리는 신체는 실패와 무의미의 가능성을 끝까지 열어둔 채, 인간이 다시 시간과 신체를 예술의 비용으로 지불하게 만든다. 이 비용은 AI가 생성하는 예술의 무한 반복 가능한 오류가 아니라, 한 번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 시간으로 남는다. 어디로 갈지 모른 채 지속되는 이 작두춤은 사회적 생산이나 예술의 의미에 부합하는 결과를 생산하기보다, 의미의 즉각적 환원을 거부하며 지연된 시간을 발생시키는 사건이 된다.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예술에 대한 인식론적 틀과 자기 이해가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다루는 소설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훨씬 더 월등한 창작물들을 더 활발하게 생산해내는 상황에서, 밀려난 예술가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프로그램도 사람도 기계도 귀신도 아닌 미지의 존재” 같은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은 이를 유용한 툴로 간주한다고 해서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이를 도구로 치부한다면, 패배감 속에서도 창작자로서의 존재는 무사히 보존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결과로 증명되는 성취라기보다, 계속해서 조바심과 조급함을 만들어내는 예술 자체에 대한 집요한 열망에 가깝다. 이러한 열망은 예술 인공지능에 의해 영화판에서 완전히 밀려난 영완 선배의 모습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포르노를 만들면서조차 건조하고, 푸르죽죽하고, 앙상하고 깡마른 나무가 등장하는 자신만의 ‘인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혼이 죽어버릴 것 같기에 “사막에서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 영완 선배의 모습은 세속적 열망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도에서조차 철저히 외면받고 실패했을 때, 그의 예술적 열망은 몰락을 통해 역설적으로 증명된다. 영화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소설 속 인물들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상실의 감각, 잃어버린 동료이자 인간성을 향한 애도되지 않는 고통은 이 작품에서 붉은 신체라는 하나의 신체적 이미지로 응축된다. 영완 선배는 인공지능이 만든 예술을 보더라도 창작욕을 유지할 수 있는 마법의 ‘붉은 알약’으로 하와이 사과를 건넨다. “세상이 바뀌어도 너는 언제나 만드는 인간일 거야. 스스로 기억하는 한 언제나 영화를 찍고있을 거야.”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인간 ‘하와’를 떠올리게 하는 이 ‘하와이 사과’는 흥미롭다. 신과 유사한 생성형 인공지능 앞에서 인간은 발가벗겨진 듯한 황망함을 느끼며, 황급하게 자신의 기원을 발명해낸 것일까. 아니, 인공지능 시대 쓰인 새로운 창세기에서 인간은 스스로 뱀이 되어 자신을 유혹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좋겠다. 창세기에서 유혹은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드러내는 증표였지만, 이제 유혹에 넘어가는 나약함은 인간이 여전히 예술을 욕망하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증표로써 다시 읽힌다. 소설은 인간의 예술을 향한 집념과 희열은 우울과 절망이 그에 비례하는 무게로 따를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고 눌러 말한다. 결말부에 하와이 사과를 먹은 후 변이한 화자의 붉은 몸은 기계와의 통합을 거부하기 위해, 그리고 예술을 향한 내적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구의 장례식장에 가다 본 환각을 자신 안에 합체한 우울증적 형상으로 보인다. 강력한 잔상을 남기는 이 붉은 몸은 「혼모노」의 마지막 장면에서 피를 흘리는 몸과 다르지 않다. 이 소설들은 AI 시대에 예술은 이제 언어의 정교함이나 결과의 완결성으로 모방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몸과 감각을 통해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현전이라는 아우라를 다시 호출하는 듯 보이는 이 소설들은 과거의 진정성을 그리워하며,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아우라는 회복된 본질이라기보다 예술이 결과로 증명될 수 없어진 이후에 발생하는 부산물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이계성이 언메이크랩의 작업을 논하며 던진 비유가 유효해진다. “여느 언어와 마찬가지로 신탁의 언어에도 본질적인 의미가 내재하지는 않아서, 어떤 프레임 또는 인식틀을 통해 이를 이해할지는 언제나 받아들이는 쪽의 몫이었다”13)는 그의 말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언어 역시 별개의 진짜 의미를 품고 있기보다 해석의 장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타자와 되돌릴 수 없는 종결이라는 죽음의 감각은 이 해석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제 예술가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욕망이 과정에 들러붙는 자리, 그리고 그 욕망이 실패와 상실을 되돌릴 수 없는 비용으로 남기는 시간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예술은 결과로 증명되기보다, 실패와 상실의 가능성을 끌어안은 채 지속되는 수행으로 남는다. 그렇게 이 시대 예술가의 상은 붉은 몸을 가진 신체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1)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태양과의 대화』, 이계성 옮김, 미디어버스, 2023, 119쪽.2) 조너선 크레리, 『지각의 정지』, 유운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579쪽.3) 데이비드 조슬릿, 『예술 이후』, 이진실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2.4)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위의 책, 100쪽.5) 위의 책, 145쪽.6) 권보연은 연구자 자신이 직접 수행한 실험 속에서 인간언어와 생성언어가 ‘의미 혼종’과 ‘확률 혼종’이라는 상반된 미적 지향성을 가지는 방식으로 합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중에서 ‘확률 혼종’은 내용이 아닌 확률 층위에서 인간과 기계언어가 합성되며, 감정과 내용에 유착된 의미 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질 가능성을 지니기에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기한다. 권보연, 「결과 너머 문학기계로서의 AI」, 『다문화콘텐츠연구』 46집, 2023.7) 정지돈, 「쓰여진 문장과 쓰여지지 않은 문장 사이」, 『에피』 24호, 2023, 55쪽.8) 언메이크랩 외, 『잠재공간 속의 생태학: 재난, 생성신경망 그리고 비미래』, 미디어버스, 2023, 25쪽.9) 위의 책, 26쪽.10) 위의 책, 43쪽.11) 김언,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면서 제기되는 문제들」, 『현대시』 2023년 6월호, 111쪽.12) 성현아, 「반항하는 자는 부조리가 있나니, 그 가짜가 참되도다」, 『2024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문학동네, 2024, 292쪽.13) 이계성,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을 위한 몇 가지 질문들」, 언메이크랩 외, 앞의 책, 55쪽.
1 이번 봄에 단연 눈에 띄었던 것은 인공지능 시대에 적극적으로 인간이라는 의식을 탐험하고 매체를 다시 읽어내는 글들이었다. 2020년대 들어 인류세 관련 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비인간’ 담론들은 생성형 인공지능인 챗지피티ChatGPT의 등장 이후 다시 한번 요동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차지하고 있던 독보적인 단상 위에서 내려와 비인간과의 경계를 적극적으로 허물며 세계의 지도를 다시 그리려는 겸허한 기획은 급작스럽게 복잡한 불안에 갇힌 것 같다. 적어도 기계에 대해서라면 이미 우리는 동등하거나 어쩌면 한참 전에 초월당한 것은 아닌가? 경계 허물기로 인한 희열보다 불안이 확연히 압도하는 자리에서 『쓺』 2024년 상권의 특집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그 개체성과 집단성’과 ‘작은 기획—채굴 문화와 미적 감각’을 유독 흥미롭게 읽었다. 그리고 ‘작은 기획’에 실린 심효원과 윤원화의 짧은 글이 각각 인간이 향하려는 방향과 의지의 아름다움, 그 노력이 무산되는 수동태의 자리에서 감지하는 공포와 불쾌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느꼈다. 먼저 심효원의 「지렁이의 부드러운 건축물 만들기」는 비인간 행위자인 ‘지렁이-되기’를 통해 근대의 한계를 돌파할 것을 정중하게 요청하는 글이다. 지렁이가 땅과 맺는 일원적인 관계성과 분변토라는 건축물은 근대 이후 인간이 이룬 도시의 뚜렷한 경계와 고정성의 반대편에 있다. 지렁이의 건축물 만들기란 사실상 움직이고 먹고 배출하는 신체적 행위의 반복일 뿐이지만, “비인간들의 극도로 효율적인 메커니즘”이자 자신의 몸이 다른 존재와 물리적으로 닿는 매순간마다 “무차별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동력”1)이기도 하다. 촉각이 주도적인 지하세계에서는 시각이 미미해질 뿐만 아니라 시간성 역시 달라진다. 미래의 미결정성을 남겨두는 대신 물리적으로 접촉하는 것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순간’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글은 최근 신유물론을 비롯한 담론들과 풍요롭게 공명하는 하나의 아름다운 공상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지하세계로 향하는 방향성은 최근 SF 소설의 주요한 상상력의 기반이기도 하다. 정세랑의 「리셋」(『목소리를 드릴게요』, 아작, 2020)에서 행성의 모든 자원을 고갈시키던 자본주의의 질주를 멈추게 한 것은 인류 문명을 끝장내려고 내려온 지렁이들이다. 강제 리셋 이후 인간들의 자리는 자연히 땅속 깊은 곳이 되고, 지상은 다른 종들이 누리는 공간이 된다. 김초엽의 『파견자들』(퍼블리온, 2023)에서도 지상은 균류인 ‘범람체’의 공간이 되어버리고 인간은 감염을 피해 지하세계로 내려와 산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문명 말살에 가까운 아포칼립스를 맞닥뜨리지 않는 이상, 영화의 촉각성을 즐겁게 감각해온 인간이 미래의 지구를 위해 지렁이를 신속하게 체화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로 남는다. 물론 직접적인 실천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지구의 거대 환경 시스템의 핵심 행위자 자리를 재조정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겠다. 하지만 미래적인 지하세계로 들어가기에 인간은 아직 시각적 쾌락 속에 즐겁게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지적 유희를 야기하는 활자의 쾌감까지 포함해서. 윤원화의 「땅을 파는 손」은 채굴적 상상력의 매혹과 절망을 말한다. 데이터로 전환된 우리의 생태 에너지를 부의 원천으로 삼으며 굴러가는 미디어 산업 앞에서, 인간의 생산물·복제물·부산물·폐기물을 구별하기는 어려워진다. 디지털 기술로 구축되는 ‘아카이브 데이터’는 역사는 넘쳐흐르지만 이를 의미화하는 전통은 불가능한 곳이다. 윤원화는 과잉생산으로 범람하는 사물들 앞에서 맞닥뜨리는 불길한 실패에의 예감을 시앤 응아이Sianne Ngai의 ‘기믹gimmick’에 대한 반응으로 설명한다. ‘매직magic’의 애너그램에서 유래했다고도 하는 이 단어는 1920년대 미국에서 편법적 장치, 싸구려 트릭, 계산된 마법 등을 뜻하는 신조어로 출현했다.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 자본주의의 황홀감과 환멸을 모두 각인한 기믹의 불완전한 형식은 오늘날 삶과 예술, 또는 넓은 의미의 ‘사업’에서 흔히 발견된다.2) 단기적 이익 추구에 최적화되어 있는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가치 절하된 노동에 시달리는 대개의 사람들이 이 기믹의 유희에 이끌린다. 운에 따라 누군가는 축적된 자원을 폭발적으로 소모할 수 있으리라는 채굴적 상상력이 번성하는 가운데, 보상도 성취도 불확실한 예술 노동 역시 가치 체계에 대한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윤원화는 이런 진단과 고민 속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생산성 중독의 시대에 예술은 어떤 시간성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3) 심효원이 지하라는 공간과 이를 감각하는 촉각성에 의지해 의미 있게 압축되는 순간의 시간성을 말한다면, 윤원화는 ‘농사’와 ‘채굴’을 대비하며 채굴의 무책임한 풍요의 약속이 얼마나 파국적일 수 있는지 말한다. 최단기간의 이익에 매몰된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생산물은 넘쳐흐르지만 어떤 가치 창출도 담보할 수 없는 동시대 예술은 불투명한 시간을 표류하는 중이다. 이런 진단 속에서 디지털 자본주의에 의해 갱신되는 매체의 기술적 발전은 인간과 나란히 놓여 경계를 넘나들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환멸을 불러오는 맹목적인 대상으로 남는다. 인간의 ‘지렁이-되기’를 향한 아름다운 여정은 너무나 느리게 진행중인데, 가장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인정받고 있는 생성형 인공지능은 예술을 몰아치듯 양산해낸다. 인간의 몸은 자발적으로 물질과 동등하게 놓이기 전에 물질이 만들어낸 다른 가치들에 의해 가치 절하되며 밀려나게 될까? 생동하는 물질들 안에서 인간을 재의미화하려는 시도와 인공지능을 의심하며 인간 본연의 무언가를 지키려는 안간힘 사이에서 부각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아래의 비평들은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2 『쓺』의 특집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그 개체성과 집단성’을 여는 글은 근대 패러다임이 ‘개인’을 해방하고 자율적 주체로서 정립해왔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이 시대에 여전히 개인의 이념이 유효한지 묻는다. 개체성과 집단성이 직면할 변화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이 서문에 가장 직접적으로 응답하는 글을 꼽는다면 김태환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과 김재인의 「창의와 집단 지능—인공지능은 창작하지 못한다, 다만 제시할 뿐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김태환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은 기계 성능의 고도화가 필연적으로 인간의 중요성이나 가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에게 산업화 이후의 근대는 ‘저자의 시대’이며, 이는 기술 발전의 작용에 대한 인간의 반작용이 만들어낸 변화이고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방향타가 된 것은 저자라는 이념의 바탕에 놓인 ‘개인주의적 사상’이다. 이는 산업화 사회 속에서 부속물로 전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회 분석의 준거점을 개인에 두고 진리와 자유를 탐색했던 아도르노를 비롯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기조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 다시 독일 지성사의 문화 비판적 사상의 전통이 소구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김태환은 “항상적인 문화 공급 과잉의 시대”(37쪽)라는 진단에서 찾는다. 그에 따르면 소셜 미디어나 웹사이트, 유튜브 등 정신의 대상화로서의 객관 문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반면, 그 반대 방향인 객관 문화에서 주관 정신으로의 내화는 개인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치로 인해 그만큼의 양적 증가가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사람들은 알고리즘 속에서 타인과의 의미 있는 만남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더 심각한 것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객관 문화의 총체가 스스로 발언하고 생산하는 주체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런 위기감 속에서 이 글이 다시 강조하는 것은 ‘정신의 개별성’이다. “요컨대 모든 인간이 개인으로서 개별적 의지, 개별적 내면, 개별적 정신을 지닌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외부에서는 절대 들여다볼 수 없고, 직접 조작할 수도 없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자주적이라는 사실”(42쪽)을 변함없는 인간 존재의 조건으로 부각하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무분별한 열광에 휩쓸리기보다 이를 의심 어린 눈으로 찬찬히 사유할 틀이 우리에게 요긴한 것은 사실이다. 데이터에 얽힌 저작권 문제 역시 계속 규제안을 논의해나가야 할 비판적인 쟁점이다. 그렇지만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위기를 산업화 시대 이후의 위기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는 것은 혹시 너무 큰 틀에서의 접근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 작동 방식과 결과물이 인간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만들어진 자본주의의 차원에서만 다루어질 때, 새로운 매체와 관련해 충분히 사유되지 못하는 요소들이 생겨나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이 글에서 알고리즘에 갇힌 디지털 시대 개인의 부자유에 대한 우려는 빠르게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의 재소환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거듭 강조되는 개인의 개별적인 ‘의지’와 ‘내면’과 ‘정신’에서 신체의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 글에서 인공지능과 대립되는 요소로 논의되는 인간의 ‘의식’이란 단순히 합리적 이성만은 아닌 “수많은 감각적 심상과 기억·감정·소망·의지 등이 혼재하는 심적 상태”(46쪽)다. 알파고와는 다른 인간 바둑 기사의 의식을 예로 들면서 언급되는 긴장, 초조, 후회, 자책, 엉뚱한 연상 등은 “바깥에서 결코 완전히 알아볼 수 없는 복잡한 내면”(같은 쪽)으로 규정된다. 베일에 살짝 가려진 듯한 이런 인간 내면의 신비함은 물질적인 신체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진화해온 신체야말로 내면 이상으로 복잡성의 차원에 놓여 있지 않은가? 이는 “신체화의 말소가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와 사이버네틱스 포스트휴먼 양쪽 모두의 공통된 특성”이라는 캐서린 헤일스의 비판을 상기시킨다. 헤일스는 합리적 정신과 등치되는 자유주의적 주체가 “그 악명 높은 보편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신체가 자아와 동일시되지 않기 때문”4)이라고 말한다.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간의 한계는 곧 발전을 통해 ‘영웅적 개인’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유한한 삶을 가진 존재, 모든 능력에서 커다란 한계를 안고 있는 개별자로서의 인간만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여 어떤 감동적인 위대성에 이를 수 있”(53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반드시 육체의 신경과 근육의 단련 과정을 동반하며 그것이 생각과 행동에 긴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잠시 괄호 안에 두어진다. 이 글의 전반적인 주장이 온당하게 느껴지면서도 그 전제가 되는 자율적인 개인상과 관련해 못내 마음에 걸리는 것은 개인이 지향해나가야 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전제되어 있는 발전과 성장이라는 지극히 근대적인 가치다. 생산과 창조의 주체로서의 영웅적 개인이 아니라 소비와 소멸의 주체로서의 개인에 대해 우리는 좀더 다른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또 근대 이전에 우리가 ‘저자’가 불투명한 긴 구술 시대를 살아왔음을 떠올린다면, ‘저자의 시대’ 이후의 저항이 활자와 개인을 넘어선 범주에서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3 김재인의 「창의와 집단 지능」은 이 질문에 대해 조금 다른 지점에서 답을 내놓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지능은 본질적으로 집단적 성격을 가지므로 ‘집단 지능’이라고 해야 한다. 개체를 중심에 놓으면 ‘창의’를 중시하게 되지만, 그 새로움은 다른 개체가 ‘모방’하고 ‘확산’하지 않는다면 사멸하고 만다. 그렇기에 인간이 다른 생물종과 달리 ‘집단 기억’과 ‘문화 기억’이라는 형태의 외장 기억을 건설함으로써 지식과 기술의 확산과 축적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은 중요하게 여겨져야 한다. 저자는 낭만주의 미학과 예술에서 강조하는 천재적 개인과 창조력에 대한 신화를 뒤로하고 “인간이란 거대한 기억”(62쪽)이라 정의 내린다. 이는 물론 질적 도약이 아닌 집단으로서의 양적 축적을 말한다. 김태환이 인간의 의지, 내면, 정신이라는 추상적인 면을 중시한다면, 김재인은 “나의 생각이란 시한부 소유물”(63쪽)에 가까울 수 있으며 그 휘발성을 지켜주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물질’ 혹은 ‘미디어’”(62쪽)라고 강조함으로써 그것을 외화된 집합적 사물성으로 바라보며 그 반대편에 선다. 그런데 이 글은 ‘컴퓨터가 자연어를 다룬다는 것’이라는 장부터 급작스러운 단절을 드러내며 도약한다. 앞에서 인간의 생각 자체를 미디어이자 집단 기억의 저장고로 본 것과 다르게, 예술과 창작의 영역을 다룰 때는 컴퓨터가 자각 혹은 성찰을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컴퓨터는 예술 능력이 없다”(66쪽)고 확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기계를 바라보는 김재인의 시점에는 도구적 차원과 존재적 차원이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글은 창작의 정의를 “스스로 선택하고 평가하는 능력이 발휘되었느냐”(67쪽)에 두는데, 중요한 점은 저자가 그 평가 주체의 자격을 ‘생물’로 단정한다는 것이다. 생물은 “생존과 번식을 스스로 반복”하는 유기체이고, 이 글에 따르면 평가 역시 “생존과 번식에 성공하기 위한 지각 처리와 행동의 연쇄”(70쪽)다. 이 기준에 따르면 애초에 기계는 아무리 ‘집단 기억’의 ‘미디어’로서 최적화되어 있다고 해도 무기물이라는 점에서 평가 능력이 없는 것으로 배제 당할 수밖에 없다. 그가 이렇게 유기체의 항상성과 관련된 기준을 평가 능력과 일치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저작 『AI 빅뱅』에서 참조할 수 있는 지점을 좀더 찾아보면, 이는 “몸의 고집스러움”5)이라는 말과 함께 구체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심지어 같은 프롬프트를 주더라도 생성물이 크게 바뀌는 무작위성randomness을 보여주는데, 이는 휘발성이 강하다. 그러나 인간은 불완전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자기 생각을 고수하는 면을 지니는데, 저자는 이를 몸에서 비롯된 문제로 보는 것이다. 이 장에 바로 이어지는 질의응답에서 한 질문자는 “세계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몸을 가지는 것이다”6)라는 전제 위에서 인공지능이 세계를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강인공지능으로 발전할 방법이 있는지 묻는데, 김재인은 이에 대해 ‘몸의 회복력’에 대한 이야기로 답한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몸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몸은 생각을 “바로 휘발되지도 완전히 고착되지도 않은 어느 중간 지점”7)에 붙잡아둔다는 것이다. 김재인은 인공지능과 다른 인간을 논하는 데 있어 복잡성을 가진 신체의 차원을 살려내고자 한다. 하지만 창작을 논하면서부터는 김태환의 논의와 유사한 탈신체화의 방향을 답습한다. “진화 과정에서 살아남았다는 특징”은 “필멸하는 인간이 불멸하는 비결”(70쪽)로 치켜세워지고, 진화를 위해 외부와 교섭하며 몸 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피드백 루프는 유기체만의 고유한 신체적 능력으로 남는다. 인공지능은 몸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케이트 크로퍼드가 인공지능은 추상화된 지능이 아니라 오히려 “체화되고 물질적인 지능이며 천연자원, 연료, 인간 노동, 하부구조, 물류, 역사, 분류를 통해 만들어진다”8)고 강조한 사실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혹은 그와 마찬가지로 유기체의 일차적인 목표로서의 생존이 진화의 필수 사항이라 말하는 신경과학 연구자 아닐 세스가 우리의 지각은 사실 ‘통제된 환각’이자 ‘최적의 예측’이라 설명했음을 염두에 두면 어떨까. 그에 따르면 ‘당신이 된다는 것being you’, 즉 인간의 ‘동물기계’적 본질과 의식적 자기 사이의 연결고리는 “신체 자체가 가진 현재와 미래의 생리적 조건에 대한, 형태도, 모양도 없고 제어 중심적인 지각적 예측”9)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인공지능 역시 지극히 물질적인 신체를 지니고 있으며 인간 역시 체화된 자아로 인한 기계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때, 예술을 창발시키는 창의성 개념이 다르게 읽힐 가능성이 열린다.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승부 후에 마련된 『인문예술잡지 F』 21호의 특집 ‘고함: 비-인간’에서 이진경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인공지능이 창조성을 가질 수 있는 논리적 가능성을 함축한다고 주장했다. 괴델의 정리는 수학적 추론의 과정 속에 언제나 결정 불가능한 명제가 ‘숨어’ 있을 수 있음을 의미하며, 그렇다면 인공지능의 수준에서도 공리계로 귀속될 수 없는 명제(결정 불가능한 명제)를 생성할 수 있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계의 형식적 추론에서조차 새로운 명제의 창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역으로 생명체의 진화가 어떤 경로를 밟아왔는지 설명한다. “변이mutation의 누적에 의해 진화는 이루어”지지만 처음 “생명체의 변이는 지배적인 개체군 안에서 일종의 ‘장애자’나 ‘고장’으로 간주된다”10). 하지만 환경이나 생존 조건에 따라 변이가 진화된 변종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면, 기계가 만들어내는 예측되지 않은 결과의 출현 역시 ‘고장’이나 ‘장애’가 아니라 새로운 능력의 ‘창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창조의 출발점이 아니라 결과물에 초점을 맞춘 논의다. ‘인간 없는 예술’이 도래하려는 시기에 우리는 다시 인간적인 무언가를 기계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는 기술적 특이점이 올 때마다 반복되어온 정동이기도 하다. 이 앞에서 좀더 차분하게 이전의 논의들을 정리하고 축적할 필요를 느낀다. 2024년 『쓺』의 특집이 창작자이자 예술가가 서 있는 주체의 자리에서 출발했다면, 2016년 『인문예술잡지 F』의 특집은 그 결과물인 작품의 자리에서 논의를 시작했다. 그렇다면 감상자의 자리에서 본다면 어떤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 신예슬의 『음악의 사물들』은 음악이 기술적 혁신을 이루는 순간마다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넓혔는지를 따라 음악사를 재구성한다. 자동 피아노의 경우에도 그 연주를 더 실제처럼, 더 자연스럽게, 더 인간답게 만들겠다는 목표는 거의 달성되었다. 그러나 자동 피아노가 만들어낸 경험이 정말 특별하게 의미화되는 것은 인간의 연주라는 원본 혹은 목적지를 버렸을 때이다. 인간의 연주라는 목적지를 소거해버리고 이 사물의 독자적인 가능성에 집중해보는 것이다. 연주하는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스스로 뭔가를 연주하거나 재생할 수 있는 악기가 등장했고 그것이 인간의 행동을 인간 없이 손쉽게 해냈다면, 그 기계의 핵심적인 가치를 ‘인간의 복제’가 아니라 ‘탈脫인간’으로 재조정할 수도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기계장치가 꼭 연주자를 대신할 필요는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기준점만 제거한다면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수많은 음악적 가능성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 자동 피아노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연주를 들려줄 수 있었다. 인간의 연주를 기록하고 인간의 연주를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연주의 대리자는 오히려 새로운 예술형식으로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스스로 연주하며 그 누구보다 기계적인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독자적인 예술형식 말이다.11) 우리는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에 대해서도 그것이 오히려 새롭고 독자적인 예술형식이 될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을까? 이 모방은 때로 인간에 한참 미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때로 인간을 이미 초월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계는 이미 희미해지고 있던 자율적인 개인 주체로서의 예술가상을 어떻게 바꾸어나갈까. 또 인간의 예술적 집념은 어떻게 예술 형식들을 바꾸어나갈까. 모든 것이 뒤흔들리는 가운데, 불안만이 정확하게 인간의 자리를 응시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이 불러오는 균열 속에서 인간에 대한 고정된 사유를 과감하게 벗어날 수 있을 때 인간과 예술 모두에 새로운 시야가 열릴 것이다. 1) 심효원, 「지렁이의 부드러운 건축물 만들기」, 『쓺』 2024년 상권, 368쪽.2) 시앤 응아이는 디지털 자본주의가 가속화되던 2010년대 후반의 미술과 문학작품을 분석하면서 기믹의 이론화에 착수하는데, 기믹은 의심스러운 도구성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키치와는 다른 저질 예술로 취급되면서도 자본주의 가치 체계와 그 이면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의심을 표면화하는 미적 전략으로도 쓰일 수 있다. 윤원화는 이 글을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공모 프로그램 선정작인 시각예술 콜렉티브 랩삐의 에 대해 설명하며 시작한다. 이 전시는 관객이 옥수수 농사 시뮬레이션을 완수한 후 ‘콘 코인’이라는 가상 화폐를 받아 실제 뻥튀기 한 봉지와 교환하는 경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복 노동이 이에 비례하는 가치 창출과 기쁨으로 이어지는 대신, 콘 코인이라는 불분명한 요소가 끼어들면서 매끄러운 교환 가능성이 흔들릴 때 이 간극에서도 기믹이 관찰된다고 할 수 있다.3) 윤원화, 「땅을 파는 손」, 같은 책, 383쪽.4) 캐서린 헤일스,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사이버네틱스와 문학, 정보 과학의 신체들』, 허진 옮김, 열린책들, 2013, 27쪽.5) 김재인, 『AI 빅뱅—생성 인공지능과 인문학 르네상스』, 동아시아, 2023, 153쪽.6) 같은 책, 156쪽.7) 같은 책, 157쪽.8) 케이트 크로퍼드, 『AI 지도책—세계의 부와 권력을 재편하는 인공지능의 실체』, 노승영 옮김, 소소의책, 2022, 17쪽.9) 아닐 세스, 『내가 된다는 것—데이터, 사이보그,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 의식을 탐험하다』, 장혜인 옮김, 흐름 출판, 2022, 243쪽.10) 이진경, 「인공지능시대의 예술작품」, 『인문예술잡지 F』 21호, 2016, 25쪽.11) 신예슬, 『음악의 사물들—악보, 자동 악기, 음반』, 작업실유령, 2019, 115쪽.
1. ‘서울의 봄’을 기다리며 유신 독재 시대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을 다시 돌아다보면서 근래에 극장가의 흥행 기록을 다시 쓴 영화 (2023)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지나간 과거의 일이지만, 또한 그렇기에 ‘서울의 봄’이 당시로써는 아직 오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엔딩 크레딧과 함께 솟아오르는 아쉬움과 슬픔, 분노의 감정은 덜해지지 않는다. 40여년의 시간차를 무색하게 만드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그 시대를 지나오지 않은 세대의 관객들에게까지도 강력하게 휘몰아친다. 그러니 그 시대를 온몸으로 뚫고 나갔던 이들은 눈앞에서 물러나는 봄을 바라보며 무엇을 느꼈을지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유영주의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소명출판, 2023)이 제목을 따온 「겨울공화국」의 시인 양성우는 그의 또 다른 시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에서 그 봄을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들려준다.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셔준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곤백번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이 …… 한반도에서 다만 녹슬지 않는 비싼 넋으로 밤이나 낮이나 과녁이 되어 내가 죽고 다시 죽어 스며들지라도 오는 봄에 나무꾼을 쓰다듬어 주는 작은 바람으로 돌아온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후략)…1)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실 수 있다면, 오는 봄에 작은 바람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그의 시가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죽고 다시 죽어 넋으로 스며든다고 해도 좋다는 시인의 결연한 고백을 듣고 나면 그러나, 또 한 번의 겨울 속으로 선선하게 걸어 들어갔을 그들의 의지를 떠올리게 된다. 봄은 물러갔어도,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에서 주요하게 살펴보고 있는 김지하와 황석영, 조세희, 이문구는 신군부 독재 정권하에서도 계속 문학이라는 싸움과 저항을 지속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그들에게는 “오는 봄”을 기다리며 문학에 대한 믿음과 비전으로 눈보라를 뚫고 한 시대를 걸어 나왔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영주의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은 바로 그 역사에 관한 연구이다. 2. 시와 정치와 사랑 시작은 김지하다. 저자가 냉전시대 동아시아의 권력 지형 및 상세한 역사적 맥락과 함께 김지하를 통해 보여 주고 있는 것은, 그러한 냉전 체제의 하위 파트너인 유신 독재 정권과 한바탕 벌여 놓은 그의 싸움판이다. 그의 시 「곡(哭) 민족적 민주주의」(1964)와 「오적(五賊)」(1970)이 어떻게 ‘유신의 심장’을 들었다 놓았다 했는지, 왜 유신 독재 정권은 그의 ‘세 치 혀’와 붓 끝에서 흘러나오는 시를 그토록 두려워했는지, 그러한 김지하의 시는 근본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저자는 ‘오적 필화사건’의 법정 풍경을 복원한다. 잘 알려진 대로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하에서 필화 사건은 드물지 않게 일어났고, 더군다나 김지하의 「오적」이 처음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특별히 ‘오적 필화사건’에 주목하는 이유는 “1970년 김지하의 체포에 이은 100일 간의 재판[이], 법정을 판소리나 탈춤이 주로 공연되는 야외의 마당으로 탈바꿈시켰다”는 데 있다.2) 저자는 관련 인물들의 여러 회고를 바탕으로 당시 재판이 흡사 검사가 양반의 담화를 담당하고 김지하가 말뚝이를 맡은 판소리 풍자극과도 같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유신 독재 정권은 도리어 김지하에게 그가 오래 탐구했던 전통 마당극을 마음껏 펼칠 무대를 깔아주었던 셈이다. 이후 그 무대는 김지하가 “문학, 폭력, 혁명, 구원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펼칠 수 있는 대중 강연을 위한 연단”(95)으로 확장된다. 당시 재판을 방청했던 더글러스 루미스(Charles Douglas Lummis)의 기록을 인용하여 저자는, 재판 방청객들이 김지하의 발언을 받아 적어 재판장 바깥으로 빼돌린 뒤 그들이 속한 조직으로 돌아가 그에 대해 토론하고 연구하게 되는 방식을 흥미롭게 포착한다. 이는 시인의 말이 변론과 강연, 연설을 넘어서, 유신 독재 체제하의 민중에게 어떤 구원의 메시지처럼, 마치 ‘예언’처럼 전달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저자에 따르면 루미스는 실제로 김지하에게 “에언자”라는 칭호를 부여하기도 했다.(87) 오래 전 종교가 시와 정치로 분리되지 않는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이 시기 김지하의 문학 세계는 세속화 시대에 시와 정치를 동시에 추구하려 했던 어떤 종교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이후 “시인으로서의 그의 국제적 명성은 분명 그가 겨울 공화국의 순교자가 됨으로써 크게 높아지게 되었다.”(50) 아이러니하게도 유신 독재 정권은 김지하를 위대한 시인으로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게다가 그 어떤 비평가나 애독자보다도 꼼꼼하게 김지하의 시를 읽고 분석하며, 그 힘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했기에 그들은 김지하에게 더욱 집착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검찰은 “시인의 수첩에 적힌, 아직 쓰이지 않은 시와 희곡에 대한 메모”(95)들을 증거로 제출하며, 마치 시인론을 쓰는 문학 연구자인양 김지하의 문학 세계를 탐구해 들어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문학이 하는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문학을 억압하고 지배하려면 역설적이게도 그 안에 잠겨들어야 한다. 지배와 억압은 대상을 이해할 때 가능한 것이고, 문학에 대한 이해는 오직 문학의 세계 안으로 침잠할 때 가능한 까닭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문학이 하는 혁명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지배 권력조차 그 안으로 휘말리고 뒤엉켜 들어가게 만드는 것, 그것이 시와 정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유신 독재 시대 문학의 혁명적인 것이었다. 굳이 알랭 바디우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낸다는 점에서 사랑과 혁명은 ‘사건’이며,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문학도 ‘사건’이 된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의 논의가 무르익을 때, 그 자체로 1970년대 문학의 ‘사건’이기도 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이 등장한다. 핵심은 이 연작소설집이 이웃 사랑을 미학적으로 실천한 텍스트라는 것인데, 저자는 그 단초를 「뫼비우스의 띠」에서 발견한다. 연작소설의 첫 번째 이야기이기도 한 「뫼비우스의 띠」는 ‘굴뚝 청소를 마치고 그을음으로 얼굴이 새까맣게 된 아이와 그을음이 전혀 묻지 않은 깨끗한 얼굴의 아이 중 누가 얼굴을 씻을 것인가?’ 하는 질문과 함께 수수께끼 같은 문답을 주고받는 교사와 학생들의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이 문제가 곧 뫼비우스의 띠이면서,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세계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함을 암시하며 끝맺는다. 저자는 이 뫼비우스의 띠 수수께끼를 지젝(Slavoj Žižek)의 ‘시차적 관점(parallax view)’, 즉 축소 불가능한 간극을 잇기 위해 애쓸 것이 아닌, “간극 그대로를 인식하는 것”으로 해석한다.(189) 안과 밖은 결코 만날 수 없지만, 뫼비우스 띠에서는 그 안과 밖이 그대로 안쪽 면이면서 바깥 쪽 면으로 존재할 수 있는 차원을 인식하는 것이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서, 당연히 그을음이 묻은 아이가 세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에게 교사는 얼굴에 그을음이 묻지 않은 아이가 친구의 새까만 얼굴을 보고 얼굴을 씻어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답한다. 이윽고 다른 학생이 그와 같이 대답하자, 다시 교사는 동일하게 굴뚝 청소를 한 아이들 중 한 아이의 얼굴은 깨끗하고 다른 아이의 얼굴은 더러운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반박한다. 그러니까 애초에 교사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해답 없음이 곧 안과 밖의 구분 없는 뫼비우스의 띠의 관점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굴뚝청소부 수수께끼와 뫼비우스의 띠라는 위상수학적 개념과 개발독재시대의 소설에 대한 해석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마치 뫼비우스의 띠를 만들 듯, 유영주 역시 그의 방법론적 시각을 한 차례 꼬아 지젝에서 케네스 레이너드의 ‘이웃’ 개념으로 비약한다. 사랑(특이성과 차이)과 정치(평등과 동일성)는 마치 뫼비우스 띠의 양면과도 같은데, 그 띠를 한 번 꼬아 연속체로 만드는 “사랑과 정치의 이음매” 지점이 “이웃”이라는 존재라는 것이다.(189) 저자는 이로부터 조세희 소설의 미학인 ‘이웃 사랑’을 이끌어 낸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난쏘공』을 난해한 모더니즘적 텍스트처럼 보이게 하고, 그래서 리얼리즘론자들에게 지식인적인 환상 소설이라고 비판받게 만들었던 몽타주 기법을 ‘이웃 사랑’의 주된 미적 원리로 파악하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1970년대 문학은 “당신은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십니까”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박태순의 ‘외촌동 사람들 연작’과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1977)가 그러했을 뿐만 아니라, 대중소설 작가로 197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최인호 역시 일찍이 「미개인」(1971)에서 한센병 환자의 아이들과 같은 학교에 보내는 것을 반대하고 나선 우리 주변의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를 소설로 쓴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첫 손가락에 꼽힐 작가는 단연코 이문구일 것이다. 『관촌수필』(1972)에서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이문구의 이채로움이 빛을 발하며, 유영주가 말하는 ‘인접성의 윤리’를 적극적으로 미학화한 이상적인 이웃 공동체가 그려진다. 저자는 이문구의 아버지와 두 형들이 좌익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던 개인사를 바탕에 둘 때, 이문구의 이웃에 관한 이야기가 그저 단순히 전통사회의 풍요로웠던 이웃 공동체에 대한 환상일 수 없음을 역설한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전쟁 전후의 무수히 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들 중 많은 경우는 이웃들 간에 벌어진 비극이었다. 크게는 계급과 종교를 바탕으로 나뉜 좌와 우의 정치적 이념을 따라 서로 갈등을 빚었고, 심한 경우 학살로 이어졌다. 이러한 한국 현대사의 맥락 속에서 이문구 소설 속 이웃은 “이념적 명명의 대안”으로 제시되며 특별한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142) 저자는 조세희와 이문구의 소설을 ‘이웃 사랑의 미학’과 ‘인접성의 윤리’로 의미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그러한 문학의 미학과 윤리가 박정희 독재 체제의 산업화와 반공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근원적인 힘이었음을 주장한다. 그 힘이, 플라톤 이래 본질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문학을 정치와 만나게 하고, 동시에 어떤 정치를 극복하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저자의 의도대로 1970년대 문학은, 시(문학)와 정치와 사랑이 ‘인접성’의 원리를 따라 이어지지만 그 간극을 그대로 유지하며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현실을 넘어서는 차원의 위상을 형성하는 상호 연결과 긴장 관계로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3. 마지막 문사(文士)의 시대 그러나 이 책의 부제인 ‘박정희 시대 한국문학과 저항’에서와 같이, 한국 문학이 저항과 나란히 놓일 수 있는 시대는 곧 저문다. 대체로 그것은 1990년대, 그 유명한,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실감한 때와 겹친다. 고진은 1970년대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한 사람인 김종철과 만났을 때 왜 문학을 그만두고 《녹색평론》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알려진 대로 김종철은 1991년 《녹색평론》 창간과 함께 문단을 떠나 생태주의 운동에 몸담았다. 그는 “자신이 문학을 했던 것은 문학이 정치적 문제에서 개인적 문제까지 온갖 것을 떠맡는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모순조차도 떠맡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언제부터인가 문학이 협소한 범위로 한정되어 버렸다, 그런 것이 문학이라면 내게는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그만두었다”고 답했다.3) 이것은 유신 독재 정권에 강력하게 저항했던 ‘창비’ 계열 문학비평가의 고백이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이 포착하고 있는 문학의 사회 참여(앙가주망)와 정치적 실천, 특별히 양심 있는 지식인으로서 시인과 소설가 들이 독재 권력과 맞서 싸우는 역사는, 이제 정말로 역사가 되었다. 물론 그러한 역사가 한국에서 1970년대 유신 독재 정권 시대라는 국면에 가능했고 정점에 도달했던 것은, 과거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국가였던 후진국에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설 때 그에 맞서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를 외칠 수 있는 것은 소수의 지식인들뿐이었던 세계사의 보편적인 패턴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고진이 말한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장르가 소설(novel)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한국 문학사에서 ‘소설의 시대’라고 불렸던 1970년대의 특수한 문학사적 맥락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의 논의가 작가를 앞세우면서 참조하는 세 가지 문학 개념 중 첫 번째인 ‘리테로크라시(literocracy)’라는 동아시아의 문치주의적인 문학 개념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한국 근현대 문학사로 한정해 본다면 그것의 유구한 역사는 시인과 소설가가 독립운동 투사가 되곤 했던 식민지 시대 ‘문사’ 개념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사의 시대는, 이 책에서 보여 주고 있는 것처럼 실로 1970년대 문학에서 마지막으로 가장 강력하고 화려하게 빛을 발한 뒤, 끝났다.4) 이 책의 첫 장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김지하의 시 「진리」에서 시인은 “바람 속이 내 집”이라고 노래하고 있었지만,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 황석영은 그가 2017년 출간했던 문학적 자서전 『수인』에서 방북사건으로 떠돌던 시절을 회고하며 그때의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결국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문학이라는 집이었다”라고 고백한다.5) 한때 바람 속을 집으로 삼아 온갖 경계를 넘나들며 활보했던 문사들에게 문학의 지경이란 없었다. 김종철이 말했던 것처럼 그들의 문학은 “온갖 것을 떠맡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문학을 떠났거나, 문학이라는 집 안으로 돌아간다. 이제 문학은, 그리고 작가는 무엇을 하는가. 유영주는 결론에서 박민규 소설의 저항성을 김지하에 견주며, 문학은, 그리고 작가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박민규는 그의 대표작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표절 사건 이후로 그럴 수 있는 정당성을 상실했다. 이것은 분명 징후이기도 하다.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예감하게 했던 작가 중 한 명인 무라카미 하루키를 통해 우리는 이미 오래 전 문사의 정체성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로 완벽하게 대체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지위마저 위태롭다. 최근 작가들의 소설 속 자기 재현은 어떠한가. 그들은 비정규직 중에서도 고용안정성과 소득이 가장 낮은 축에 들며, ‘프리랜서’라서 정부가 청년층에 제공하는 대출 상품에도 부적합해 은행 창구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으로 소설가를 재현한다(박서련, 「A Queen Sized Hole」,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민음사, 2022). 지방 변두리의 3천만 원짜리 아파트가 자기 집이 되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며, 마오쩌둥의 참새들처럼 어디에도 내려앉을 수 없어 지쳐 떨어져 죽을 위기에 놓여 있다(이서수,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젊은 근희의 행진』, 은행나무, 2023). 오해하지 말라. 이것은 어떤 가치 판단도, 비판도, 자조도 아닌, 현상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이 시대의 문학은 이제 유신 독재의 겨울 공화국과는 완전히 다른, 또 다른 눈보라 속에서 분투해야 하는 것이다. 1) 양성우, 『겨울공화국』, 화다, 1984, 18면. 2) 유영주, 이형진·정기인 역,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 박정희 시대 한국문학과 저항』, 소명출판, 2023, 92면. 이후 이 책 인용 시 본문에 쪽수로 표기. 3)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역, 『근대문학의 종언』, 도서출판 b, 2006, 49면. 4) 어떤 이들은 1980년대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문학과 정치의 관계라면 그것은 1980년대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1980년대에 문학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팽배했던 반지식인적인 분위기 속에서 작가는 1970년대와 같은 문사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1991년 5월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 치워라”라는 김지하의 충격적인 발언과 그것을 둘러싼 반응 그 이면에는 1980년대를 거치며 그가 더 이상 1970년대와 같은 문사의 지위에 서 있을 수 없었던 상황이 엄연히 자리한다고 볼 수도 있다. 5) 황석영, 『수인』 1, 문학동네, 2017, 36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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