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과사회 2024년 봄호(제145호)
뒤에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 : 안보윤, 『밤은 내가 가질게』(문학동네, 2023) _김혜진, 『축복을 비는 마음』(문학과지성사, 2023)
1.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들
어떤 사연들은 마주한 상태로는 결코 알아차릴 수 없다. 누군가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이만이 읽어낼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는 말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에드워드 양의 유작 <하나 그리고 둘>(2000)에는 카메라에 타인의 뒷모습을 담는 소년 ‘양양’이 등장한다. 결혼식에서부터 출발하여 할머니의 장례식을 끝으로 막을 내리는 이 영화는 여러 인물의 시점이 무수히 교차하고 어긋나는 일상을 정직하게 제시한다. 일평생 동안 눈앞에 있는 ‘절반의 진실’만을 보며 살아가는 인간의 삶에 대한 통찰과 더불어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주고, 알 수 없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 타인의 뒤에서 걷는 양양의 다정함은 우리에게 짙은 여운을 남긴다. 그런데 이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뒷모습처럼 완연히 이해할 수 없는 총체를 인식하고 숨겨진 영역을 보는 일이 나 아닌 타인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안보윤과 김혜진은 뷰파인더에 바싹 붙어 집요하게 이면을 좇는 이들이다. 타인과 나의 뒷모습에 무감해지지 않으려 부단히 애쓰고, 바깥의 것들에 골몰하는 둘의 소설은 누구도 관심 가지지 않거나 애써 감춰왔기에 드러나지 않았던 사회와 사람들의 이면을 지켜보는 시선에서 탄생한다. 이들의 작업은 보일 수 없었던 것, 들켜서는 안 되었던 무언가를 세상에 풀어놓으며 세계의 진실을 파헤쳐 분열시키고, 새로운 방식으로 미래를 쌓아 올린다. 그 경로를 함께 따라가보자.
2. 진심의 이면과 진실의 분화
안보윤의 『밤은 내가 가질게』의 일곱 단편은 서로 다른 진심들이 끊임없이 부딪히는 장과 같다. 그런데 경쟁의 기본 속성에 따라 누군가의 진심은 거부할 수 없는 만고불변의 진리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따라서 이 경합은 쉽게 ‘진실의 경쟁’으로 미끄러지고, 하나의 진심이 우위에 서게 될 때 여타의 것들은 축출되어 선택받지 못한 누군가의 마음은 쉽게 폐기 처분된다. 우리의 삶에 다양한 속삭임이 만성적으로 부족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처럼 막강한 ‘어떤 진심’에 기반한 이해는 곧장 상대를 재단하면서 앞에 선 이로 하여금 살아남기 위해 자아를 한없이 축소하게 만드는 폭력이 된다. 이에 맞서 안보윤은 마음들이 충돌하는 과정을 순화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가감 없이 보여주면서, 소거된 어떤 목소리들을 되살려놓는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밤은 내가 가질게』에는 내면을 발설하지 않는 방식으로 계속해서 움츠러들려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물론 고려되지 않는 진심과 주어지지 않은 발화의 권리에 의해 실현된 이들의 선택은 불가항력적인 힘과의 관계에 놓여 있다. 「완전한 사과」의 ‘나’는 “최선을 다해 생존하고 최선을 다해 쓸모없어지는 것이 나의 바람”(p. 41)이라고 말하며, 일종의 정물처럼 “가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 (…) 필사적으로 노력”(p. 66)한다. ‘나’가 이토록 희미한 존재가 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한 여성에게 폭력을 가해 다리와 태중의 아기, 강아지를 모두 잃게 만든 범죄를 저지른 오빠의 여동생이라는 데에 있다. 쏟아지는 비난 속에서 거처와 직장을 상실한 ‘나’는 아르바이트와 하교 도우미를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동시에 최후까지 소진되려 한다.
그러나 자신의 흔적을 지워 질타와 검열을 피하려는 시도는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드는 구조와 은밀하게 공모한다. 오빠의 편을 들며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금세 물살이 바뀔 거라고 태평한 소리만”(p. 57)하는 엄마, 괴롭힘을 당하는 동주를 위해 ‘나’를 하교 도우미로 고용하고 “눈에 띄는 다른 아이라면 얼마든지 또 있을 테니까”(p. 63) 관심이 옮겨 갈 때까지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동주 엄마’의 모습은 그간 ‘나’가 고수해온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타인의 사정을 방관하고, 표적이 바뀔 때까지 숨죽인 채 철저히 각자도생하려는 자세는 누군가를 사지로 몰아넣는 사회의 도식 자체를 바꾸지는 못한다. 오히려 구체적인 대상이 끊이지 않고 순환하도록 도우며 구조의 완력을 더욱 공고히 할 뿐이다.
그런데 동시에 ‘나’는 오빠가 훼손하여 “어떤 진심도 가닿을 수 없는 사라진 것들에 대한 생각”(p. 62)에서 쉽사리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나’는 자신을 피해자로 여기며 억울함에 몸서리를 치고 순리를 따르는 삶을 충실히 이행하다가도, “내가 그때 오빠의 정강이를 걷어찼더라면”(p. 70) 동생 ‘도윤’과 함께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면면히 세운다. 이러한 속내를 마주할 때 비로소 ‘나’가 가진 진짜 바람이 윤곽을 드러낸다. 무기력한 삶의 보이지 않는 면에 함께 생동하고 있던 “건강하고 힘찬 인간이 되고 싶다”(p. 67)는 소망이 뚜렷해지는 것이다. 이렇듯 “어떤 진심은 아무리 기를 쓰고 틀어막아도 새어나가고 만다”(p. 61). 고로 동주를 괴롭힌 아이 ‘승규’를 떠민 직후 “약자가 되지 않으려면 이렇게, 상대를 힘껏 내던지는 인간이 될 수밖에 없나?”라고 자조적으로 질문하는 ‘나’는 해답이 될 수 있는 ‘다른 인간’의 형상을 더불어 품고 있다. 고착된 진실에 반하는 인간을 꿈꾸는 ‘나’는 폭력이라는 선택지를 등지고 진심 어린 ‘완전한 사과’를 간청한다. “사과를 해, 승규야 제발”(p. 71)
“소란한 곳에 소란스럽지 않은 인간으로 멈춰 있을 때 나는 가장 안전하다”(p. 76)고 믿는 인물은 「애도의 방식」에도 등장한다. 「완전한 사과」와 관련 있는 인물로 보이는 ‘나’(동주)는 중학생 때 동급생 ‘승규’에게 학교폭력을 당한 피해자로, 낙사(落死)한 승규의 마지막과 관련한 비밀을 품고 있다. “공사가 중단된 폐건물에서 중학생 아이 둘이 놀다가 한 아이가 떨어져 죽었다”는 “있을 법한 사고”(p. 90)는 “누군가는 동조하고 누군가는 비난”(p. 92)하는 가벼운 소란과 소문에 의해 “거대한 혹”(p. 93)이 되어 ‘나’에게 달라붙는다. 책임 소재를 분명히 가리고 사건을 종결하기 위해 ‘나’의 엄마와 승규의 엄마는 진실을 말해달라고 요구하지만, 각각이 “원하는 진실”(p. 94)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기에 ‘나’는 그저 침묵한다.
그렇다면 ‘나’에게 진실이란 무엇일까. 그날의 진상은 평소와 같이 동전의 앞뒷면을 묻는 승규의 질문에 대답하는 동시에 이어질 폭력에 대해 “맞고 싶지 않다고 생각”(p. 101)한 ‘나’의 회피가 사고로 이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기억이 상상과 숱하게 혼재되는 상황에서 “수없이 승규를 붙들고 수없이 승규를 밀”친 것 역시도 “오롯이 진심”(p. 102)으로 한 ‘나’의 행위이기에 이는 현실에서의 진실과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진실이란 이처럼 본래 켜켜이 쌓인 진심들을 한데 뭉친 모양새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편의를 위해 단일한 서사를 만들려는 사람들과 달리, ‘나’는 침묵함으로써 분화된 진실을 그 자체로 조망한다.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단순한 구도의 재생산에 묵언으로 반대하는 ‘나’의 고찰과 거부는 “수직적 위계”를 성립시키는 “나의 관성”(p. 88)이야말로 가장 부끄러운 것이었다는 고백과 이어진다. 관성을 거스르는 일. 이는 가해를 방관하거나 자신을 탓하며 문제의 해결로부터 도망치는 자세가 아니라 폭력을 형성시키는 근원을 자세히 들여다보겠다는 의지와 맞닿아 있다.
이처럼 불의를 향한 맹렬한 비판과 가해자 만들기의 관습이 오히려 타인의 고통에 어떤 책임도 느끼지 않는 “정의롭고 무책임한 태도”(p. 64)일 수 있다는 매서운 통찰은 소설집 전반에서 솟아오른다. “매일을 견디는 것, 그저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 외에 어떤 일상이 있는지”(p. 38) 알지 못해 빤한 삶을 영위해온 인물들은 누군가의 생과 혼이 사그라드는 사건에 냉담하거나 무감해지려 애쓴다. 그러나 세계의 어두운 면을 직접 목도할 때, 잠들어 있던 의식을 세차게 강타하는 것은 참사에 자신의 관성이 연루되어 있으며 “그것이 내 얘기가 될 수도 있었다”(p. 162)는 사실이다. 따라서 안보윤의 인물들은 어떤 변화를 위한 결심에 앞서, 자신 또한 생존을 위해 편협하리만치 확고한 진심을 지켜왔음을 먼저 상기한다.
표제작인 「밤은 내가 가질게」에는 폭력적인 사회의 규율을 성실히 답습해온 과거에서 벗어나 다른 존재의 고통을 어루만지려는 조심스러운 손길이 담겨 있다. 어린이집 교사인 ‘나’는 “끝도 없이 사람을 믿”(p. 224)고 “다만 선한 사람, 언제까지고 선하기만 하려는 사람”(p. 233)인 언니 대신 책임을 져야 하는 생활에 염증이 난 상태다. ‘나’에게 세상의 공평함이란 한쪽이 “선을 가지면 저쪽이 악을 가”(p. 231)지는 형국이다. 불화와 반목 위에 세워진 이 구조에서 가족 중 거의 유일하게 현실의 사정들을 끊임없이 고려해야 하는 사람인 ‘나’는, 살아남기 위해 늘상 악인이 되어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를 자주 돌이켜본다. 실제로 ‘나’는 살기 위해 모든 책임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친다. 그는 학대당한 아동 ‘주승이’를 방치하기도 하고, “그걸 전부 책임질 수 있겠어?”(p. 240)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내뱉기도 한다.
그러나 “희망이 가장 두렵고 끈기가 가장 무서운,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는 걸 끝끝내 인정하려 들지 않는 선하고 한심한 언니”(p. 242)에게서 아둔할 정도로 끝없이 누군가를 믿고, 사랑하고, 포기하지 않는 진심이 끊이지 않고 퍼져 나올 때, ‘나’ 역시 “선이니 악이니 그런 것 말고 그저 평온하게 나란히 있을 수 있는 순간”을 계속해서 기다려왔다는 걸 어렴풋하게 느끼게 된다. “더 조용하고 더 조심스러운 속도와 각도를 찾아서 몇 번이고”(p. 252) 노력해보고 싶다는 따듯함은 “내가, 아직 상냥한 채로 남아 있어도 된다는” 사실을 증명해줄 “아무 의심 없이 대할 수 있는 존재”(p. 249)를 지키려는 용기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이 용기는 “연민이니 죄책감이니 그따위 헤픈 감정”(p. 244)을 멸시하고, “죄책감은 책임질 위치에 놓인 사람에게나 허락된 감정”(p. 227)이라고 읊조리며 책임을 방기해온 잘못을 바로 볼 때 더욱 강해진다.
따라서 ‘나’가 엄마에 이어 조부모에게서도 학대당한 주승이를 구하고 언니가 까맣고 병든 노견 ‘밤토리’에게 ‘토리’라는 새로운 이름을 선물하면서 “밤은 내가 가질게”(p. 251)라고 속삭일 때, 조각난 세계의 모서리는 점차 둥글어지고 굴곡은 완만해져 가는 듯하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괴롭히겠다는 일념으로 어떻게 그렇게까지 부지런해질 수 있었을까”(p. 240)를 곱씹게 되는 삶 속에서도 기꺼이 세계의 어두운 면을 껴안겠다는 이 목소리야말로 우리가 아주 오래도록 기다려온 무언가였다고 믿는다. 안보윤이 전하는 이 마음이 있기에, 오늘도 어두운 밤을 건너갈 용기를 낼 수 있다.
3. 희망(希望)과 기망(希望) 너머의 미래
현대 자본주의의 특성이 비생산적인 지대 추구적 형태의 불로소득 자본주의(rentier capitalism) 체제로 변화하는 양상은 주목을 요한다. 금융화를 필두로 상품의 생산이 아니라 자산의 소유를 기반으로 부를 축적하는 자산화의 전방위적인 확산은 자본주의의 본질을 이탈하는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동에서 크게 두 가지 유의미한 결론을 추려볼 수 있다. 먼저, 최근 신자유주의의 핵심 동력이 생산을 통한 새로운 부의 생성이 아니라 기존 부의 약탈적인 재분배에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자본이 창출할 것으로 예상되는 불확실한 미래의 수익을 위해 현재를 포함한 전 생애를 시장에 저당 잡히는 삶이 하나의 양식으로 자리 잡는다는 것이다.1) 자본은 여전히 자가적으로 가치를 증식할 수 있음을 증명하려 하지만, 생산에 기초하지 않은 분배는 실질적인 자본의 증대가 아니라 기존의 재화에서 다른 이의 이윤을 탈취할 때만 가능하기에 이는 허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자본은 존속을 위한 이 환상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 투자와 관련한 자율성의 신화와 미래 수익이라는 허울뿐인 희망을 줄기차게 부추긴다.
그중에서도 특히 집은 거처인 동시에 자산으로 기능하는 대표적인 자원으로서, 생존에 필수적인 일차재인 까닭에 어떤 재화보다도 자산화의 열망이 들끓는 각축장으로 기능한다. 이러한 관점은 최근 우리 사회에서 ‘내 집 마련’이라는 자가 소유의 꿈이 점점 반박할 수 없는 유일한 목표로 자리 잡는 현상을 날카롭게 꿰뚫는다. 비슷한 맥락에서 김혜진의 소설집 『축복을 비는 마음』은 집을 사고파는 행위가 기실 환상을 사고파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전언과 함께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위태로운 경쟁에 뛰어드는 인물들의 면모를 속속들이 내쏟는다. 신자유주의의 작동 기법을 찬찬히 해부하는 김혜진의 독법은 부자와 빈자에서 파생된 집의 소유주와 미소유주라는 낡은 이분법적 구도에만 얽매이지 않고, 신자유주의가 강권하는 미래의 형성 방식 자체를 곡진히 그리는 데 집중하기에 월등하다.
거기에는 “좋은 사람”의 조건은 “좋은 것들을 많이 가진 사람”(p. 15)이고, 집주인은 온갖 “수고를 감수할 필요가 없”(p. 162)는 위치라는 심상한 지식뿐만 아니라, “집주인이라고 하지만 나도 빚내서 겨우 그 집 샀어요”(p. 84)라는 난처한 토로가 함께 있다. 「목화맨션」은 목화맨션 101호의 집주인 ‘만옥’과 세입자 ‘순미’ 두 중년 여성이 집을 두고 맺는 관계의 복잡다단함을 묘사한다. 만옥은 통상 떠올리기 쉬운 집주인의 전형과는 거리가 멀다. 가망 없어 보이는 재개발과 악화일로를 걷는 남편의 건강, 집을 사느라 진 빚의 무게에 허덕이는 살림까지. 때문에 만옥의 경우는 비정규직 일자리를 전전하고 “이삿날인데 도와주는 사람도 하나 없이 혼자인 순미의 처지”(p. 81)와 견주어도 딱히 나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8년에 가까운 긴 계약 기간 동안 이사를 거들고, “일렁이는 마음을 단번에 진정시키는”(p. 86) 말을 건네며 가까워진 둘의 사이를 불시에 헤집어 놓은 건 여전히 집과 관련한 희망과 현실 사이에서 살기 위해 자기 이익을 도모해야만 하는 각자의 처지다. 재개발이 완전히 무산된 이후 집을 팔기로 한 만옥과 갑작스레 통보받은 선미는 “누가 더 불행한지 겨루는 사람처럼”(p. 101) 서로를 대한다.
이때 집은 마치 인물들의 살 만한 삶을 볼모로 삼은 듯 보인다. 그런데 그들이 간직한 어떤 희망이야말로 집이 숨통을 잡아채도록 하는 근원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김혜진은 집주인과 세입자를 가르고 누군가의 편을 들어주기보다, 이들 모두를 파국으로 치닫는 방향에 몰두하도록 떠미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가려내려 한다. 만옥이 끝까지 목화맨션을 포기하지 못하도록 물고 늘어진 건 “재개발이 확정되고, 공사가 시작되고, 계획한 일이 순조롭게 이뤄지기만 한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p. 89)이었다. 어딘가 비틀린 듯한 이 기이한 희망의 빛은 소설집 곳곳에 뻗어 있다. 모종의 께름칙한 느낌은 인물들이 “희망적인 확신으로, 의심할 수 없는 낙관으로” 살아가면서도, “짐작할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는 미래”를 동경하며 “순식간에 미래에 다다르지 않도록, 실수로라도 미래를 한꺼번에 엿보게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p.238) 더디게 움직인다는 데서 온다. 바로 여기서 이 희망이 불로소득 자본주의가 견인하는 기망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투자라는 이름의 투기로 집을 자산가치로만 바라보는 인물들은 나의 이익을 위해 누군가의 안정된 삶을 위협하고 위태롭게 할 수밖에 없는 구도 내에서 불안한 시소게임만을 영속할 뿐이다. “다만 넘어지지 않으려고, 어떻게든 중심을 잡으려고 사력을 다”해야만 하는 현실에서는 “생각을 더 이어나갈 수도,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도 없다.”(p. 203) 따라서 “위험을 떠안거나 누군가에게 위험을 떠넘기거나,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건 매한가지”(p. 120)인 삶의 지속이 바로 신자유주의가 직조한 희망의 맨얼굴이다.덧없는 희망을 꿈꾸며 집에 결박되는 이들은 「이남터미널」에도 등장한다. ‘남우빌라’의 이름을 따 ‘남우 사모님’으로 불리는 ‘나’를 비롯해 소설 속 인물들은 자신이 소유한 건물로 대변되는 삶을 산다. “주택의 가치를 알아보는 눈이 있었”던 사람(p. 112)인 ‘홍 사장’의 장례식에 모인 집주인들은 ‘청목주택’에 휘말려 결국 죽음을 맞이한 그를 두고 “그 집이 홍 사장을 말려 죽인 거야”(p. 110)라고 떠들면서도, 곧이어 “서로의 입에서 나오는 정보를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골똘하게 마주한 눈빛들”(p. 123)을 교환한다. 불가능한 자본주의의 환상은 미래를 향한 가망 없는 약속을 황홀하게 포장하기에 그 빛에 이끌린 “그들의 고대하는 미래엔 홍 사장의 실패담이 끼어들 여지가 없”(p. 125)다. “그들에게 홍 사장은 수많은 경우의 수 중 하나였고 피해야 할 좋지 못한 선례에 불과했다.”(p. 130) 하지만 그들이 체감하고 있으면서도 최종적으로 간과한 건 탈취에 기반한 구조가 파괴되지 않는 한 누구나 순식간에 홍 사장과 같은 말로를 걸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몸을 누일 수 있는 “집 하나를 갖겠다는 마음”(p. 131)은 욕망을 멈추지 못하도록 들쑤시는 사회에 의해 결국 “자라나고 자라나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물리칠 수 없는 그런 마음”이 되고 만다. “골칫덩이 오피스텔의 허울 좋은 주인”(p. 132)이 되어 불안에 떨면서도 ‘나’는 소설의 말미까지 “기회와 희망인 척 다정하게 손을 흔드는 무엇, 그러니까 홍 사장의 장례식에서 그녀가 틀림없이 버려야겠다고 결심한 무엇”(p. 135)을 끝내 놓지 못한다.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생활자원을 이윤 산출을 위한 수단으로 재개념화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생애를 남김없이 다 쏟게 만드는 부당한 이 체제를 자본주의는 자족적인 기업가 정신으로 은닉하려 들지만, 그 “실상은 불로소득을 특징으로 하는 지대주의로 타락이고, 비기업가적 합리성(non-entrepreneurial rationality), 투기꾼으로서 개인의 창조에 불과”2)하다. 이 구조 자체의 결함을 보지 못할 때 책임은 오롯이 개인들에게 전가된다. 이러한 현실을 다각도에서 보여주는 김혜진은, 정해진 미래를 상상하기만 하는 수동성에서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는 능동성으로 옮겨가는 중요한 이동 역시도 잊지 않고 담아 놓았다. 희망과 기망 너머에 있을 본 적 없는 미래 역시도 하나의 이면이 될 수 있다는 듯이.
표제작 「축복을 비는 마음」에서 청소업체의 파견 직원인 ‘인선’은 함께 작업하는 동료로 만난 ‘경옥’과 시간을 보내며 잃어버렸던 어떤 감정의 조각들을 되찾는다. 인선은 “모욕과 수치가 오가지 않는 평화로운 현장이 몸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걸 깨닫고 난 뒤”(p. 247) 부당함에 침묵하고 효율적으로 일을 마치는 것에만 열중해왔다. 반면에 첫 만남부터 “제멋대로인 사람”(p. 244)이라는 인상을 준 경옥은 일하는 내내 모든 걸 지나치게 따지며 도무지 현실에 순응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나 인선은 곧 알게 된다. 경옥의 지치지 않는 질문들이 “지금껏 자신이 당연하게 해왔던 일의 수고와 비용을 따져”(p. 253)보게 만든다는 걸. 또한 경옥은 인선의 실력을 진심으로 칭찬해주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간절히 바라왔으나 누구도 해주지 않았던 “다정한 말”(p. 252)을 건네준 경옥과의 관계는 “자연스럽다고 생각했고 당연하게 여겨왔던 이 일의 실체와 정체를 마주하는 것이 두려”(p. 258)워 불합리한 대우에 눈감아왔던 인선의 태도를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전 못 참아요. 진짜 못 참겠어요”(p. 265)라며 눈앞에 닥친 현실에 맞서는 경옥과 함께할 때, 인선은 “어떤 기분 좋은 상상들이 신기루처럼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p. 269)지는 경험을 한다. 이러한 상상은 엄두가 나지 않아 좌절할 수밖에 없는 구체적인 실상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기개를 불러들인다. 그리하여 인물들은 타인과 자신의 “축복을 비는 마음”(p. 270)으로 살아가게 된다. 자본주의의 이면과 거짓된 상에 갇혀 살아가는 이들의 속사정을 꼼꼼히 새겨 넣는 방식으로 세계를 조망한 김혜진은, 이 마음들을 고스란히 그러모아 미래를 다시 써 내려가며 소설의 공간을 닫는다. 그 문을 뒤로한 채 현실로 돌아온 우리 역시도 어쩌면 낯선 내일을 향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안보윤과 김혜진의 소설은 삭제된 뒷모습으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지어 올린다. 어쩌면 다소 섬뜩하고 절망적인 사태를 끝내 제거하지 않는 그들의 세계에서 총체적인 변모나 전복을 찾기란 짐짓 지난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면을 더듬는 이들의 손길에는 무엇보다도 진실과 미래를 각각의 결대로 펼쳐내는 정성스러운 수고가 깃들어 있다. 완결된 세계를 구축하는 완고한 구조를 헤집어 면면으로 흐트러트리는 이 노력들이 앞서 있지 않다면, 누군가의 뒷모습은 다시금 암흑 속에 남겨지게 될 것이다. 단순한 비판은 쉬울지 모른다. 소실된 것들의 사정을 세세히 살펴 복원하려는 노력에 비하면 말이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안보윤과 김혜진은 그래서 신중하다. 그러니 축소된 자신을 부풀릴 수 있는 사소한 계기를 빚고, 경쾌한 웃음으로 봄을 맞이하는 이들의 움직임이야말로 미약한 존재에게 가닿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식일지 모른다. 뒤에서부터, 작아진 것들로부터 시작하는 이들의 소설이 가진 힘은 바로 거기에 있다.
- 1) 김용창, 「자산기반 불평등 시대의 약탈적 축적 체제와 주거 불안의 일상화」, 『뉴래디컬리뷰』 2023년 봄호, 80-96쪽 참조.
- 2) 앞의 글, 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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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할 수 없는 균열 예측 불가능한 일들의 연속.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을 이렇게 표명한다면 분명 많은 이가 의문을 표할 것이다. 지난하지만 공감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문제들을 자주 다루는 작가들이니 말이다. 하지만 자신 있게 말해보건대 두 사람의 소설에는 독특한 사건들이 꽤나 자주 등장한다.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은 어딘가 금이 가고 삐걱대는 삶 앞에 속수무책으로 던져진 사람들로부터 시작한다. 특히 김지연의 인물들이 해괴한 일을 직접 나서서 ‘벌이는’ 사람들이라면, 안윤에게는 그러한 일을 마주한 뒤 이전과는 다른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두 사람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행위들은 어쩐지 무모하고 무용해 보인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의 효용을 장담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러한 움직임들은 아무거나 믿거나 믿어야 할 것을 믿는 일을 거부하고, 확신할 수 없지만 옳다고 느끼는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이들의 동작은 곧 일상의 균열을 마주하는 자세와도 같다. 사람들이 세계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필연적으로 자신의 결함을 확인하는 작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안온해 보이는 세계를 지적하려면 스스로의 불완전성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서 세계의 균열은 쉽게 발설할 수 없는 무언가다. 그렇다면 포기하는 수밖에 없을까.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들어 있다. 그러니 이상하고 유별난 인물들의 행보를 유심히 살펴보면, 잘 봉합된 듯 보였으나 결코 다 가릴 수 없었던 세계의 미세한 틈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2. 망측하긴 해도 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언뜻 보기에 『조금 망한 사랑』은 체념과 포기를 반복하는 망한 인생의 집합소 같다. 전세 사기, 금전 관계에 있던 친구와 애인의 배신, 실직과 구직난처럼 신자유주의와 투기 자본주의의 광풍에 베여 너절해진 인물들이 잇달아 등장한다. 그런데 『마음에 없는 소리』(문학동네, 2022)를 읽었던 이들이라면 세태를 첨예하게 부감하고 표현하는 적실함뿐만 아니라, 농담과 같은 특유의 가뿐함이 김지연 소설의 또 다른 활력이라는 걸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 테다. 이번에도 다소 무겁고 무기력해 보이는 사정들 틈에 유별난 광경들이 돋보인다. 이른바 김지연식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좋아하는 마음 없이」, p. 168)다. 몇 가지 사연만 잠시 나열해보자. 양육권을 포기했던 아이를 말 그대로 ‘좋아하는 마음도 없이’ 다시 키워볼 생각을 하면서 죽은 전남편의 가족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니는 여자(「좋아하는 마음 없이」). 빚만 잔뜩 남기고 떠난 전 여자친구에게 자꾸만 마음이 기우는 아이러니를 겪는 레즈비언(「반려빚」). 달밤에 무덤 사이를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고(「포기」) 출입이 금지된 저수지의 한가운데까지 기어코 노를 저어 도달했다는 일화(「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까지. 소설의 인물들은 왜 자꾸만 이상한 일을 벌일까. 김지연의 소설은 삶이 이미 망했으며 앞으로도 계속 망해 나가리라는 잔인한 현실 공식을 동력 삼는다. 그곳엔 “반려빚처럼, 있어서는 안 되는 것도 태연하게 있”(「반려빚」, p. 104)고 누군가는 “있는 놈들을 위해 아주 싼값의 육체노동에 부려지”(「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 p. 42)지만 이토록 불합리한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도 제도도 없”(「반려빚」, p. 96)다. 자본의 바깥을 떠올리는 일조차 돈의 힘에 기대야만 가능한 오늘날, 소설 안팎의 현실을 살피며 저항의 포기를 물었던 우리에게 김지연은 두 가지 대답을 내놓는다. 하나, 설명 혹은 주장하기. “소리 지르고 때려 부수는 것만이 화내는 방식인 건 아니잖아요.”(「좋아하는 마음 없이」, p. 151) 둘, 괴상망측한 행동들을 늘어놓기. 그런데 짐작과 달리 이때의 망측(罔測)은 망할 망(亡) 자를 쓰지 않는다. 그물[网]과 망함[亡]이라는 뜻이 더해진 한자[罔]는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어그러진 상태를 가리키면서도, 완전한 끝을 잠시 유예하는 힘을 발휘한다. 망측한 일은 낯부끄러울지언정 완전히 망하지는 않은 무언가다. 그런 일을 벌이는 사람 역시 조금 망그러졌을지라도 여전히 어딘가에, 누군가와 분명히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폐기된 존재를 망가진 상태로라도 끌어올리려는 작가의 수고로움이 와닿는다면, 다르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의 행위는 단순한 기행이 아니다. 그들은 차가운 현실이야말로 ‘진짜 해괴한 것’이라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다. 김지연이 말하는 포기는 더 이상 무엇도 ‘기대하지 않는 마음’에 가깝다. 그런데 인물들은 먹고살기에 급급해서가 아니라, 아무리 노력해도 망한 삶이 평범한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괴이한 공식을 꼼짝없이 따라야만 해서 포기한다. 그래서 「포기」에서 거듭되는 “아무 소용도 없는 일”(p. 19)은 자본에만 기를 쓰고 달려드는 평범한 세계를 조금이나마 문제 삼는 계기가 된다. ‘미선’과 그녀의 사촌 ‘호두’는 주변인들에게 돈을 빌리고 사라진 미선의 전 남자친구 ‘민재’를 찾아 헤매고 있다. 그런데 미선과 호두는 물론이고 민재를 찾는 이들은 대부분 돈을 돌려받으려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 궁금해서라기보다는 그저 민재가 잘 지내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의 행방을 살피고, 신고를 권하면 “그렇게까지?”(p. 16)라고 되묻는다. 그리고 막상 민재에게 정말로 닿을 것만 같은 순간엔 발을 뺀다. 민재는 돈을 가지고 도망쳤기에 평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특별한 사람이다. 돈을 빌려준 사람들 대부분이 그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민재는 같으면서도 다른 것들의 차이를 세세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설명은 “왠지 말이 안 되는 이유들도 납득하게 되는 순간”(p. 23)들을 만드는 힘이 있었고, 각자도생과 효율성을 제일로 섬기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받았던 도움은 민재의 이런 성격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니 민재는 자금난이라는 평범한 사정 때문에 결국 평범해져버린, “완전히 나쁜 사람”(p. 16)일 수만은 없는 사람이다. 이렇듯 아무리 애써도 포기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래서 어떤 그만둠은 포기 자체를 미루고, 돈만을 좇게 만드는 기존의 “미친 짓”(p. 12)을 중단하고 새로운 “미친 짓”(p. 28)을 가능케 한다. 술에 취한 호두와 미선은 한 남자의 도움으로 의릉에 들어가 “이상한 괴성”(p. 30)을 내지른다. 한 번쯤 누군가 불가능한 시간에 난립하는 걸 보고 싶었다던 남자 덕분에 “예상 밖의 방향”(p. 28)을 향해 내달릴 가능성이 반짝이며 움튼 순간이다. 망해버린 인간관계와 삶 속에서 건져 올려진 이 희한한 야행은 두 사람이 잃어버린 진짜 호두가 의릉에서 나무로 자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연결되면서 다시 한번 끝을 지연시킨다. 하지만 평범하게 살려면 불운을 껴안아야만 하는 현실에 낭만이 끼어들 자리는 협소하다. 결국 각서를 주고받은 뒤에도 또 한번 배신당한 호두는 민재와의 관계에서 “정말 원하지 않던 포기”(p. 37)를 하고, “나중으로 미루는 버릇”(p. 25) 때문에 민재와 만날 가능성마저 미룬 미선 역시 연결될 방법을 끝내 포기한다. 기존의 삶이 반복되면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을 더욱 희미하게 만드는 자본의 견고함을 김지연은 결코 만만히 생각하지 않는다. 「반려빚」에서 전세자금대출과 전 연인 ‘서일’이 남기고 간 빚을 갚는 ‘정현’의 삶은 숨 쉬듯이 “매 순간 돈에 대해 생각”(p. 76)해야만 하는 하루들로 빼곡하다.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관계 중 하나인 연인 사이를 지탱하기 위해서 돈이 “제법 중요한 요소”(p. 84)로 호출되고, 유일한 반려의 자리에는 빚이 올라앉은 정현의 세계를 보면, 「포기」에서 미세한 틈을 열어젖혔던 망측함이 결국 잇속 빠른 자본주의의 환상에 불과한 건 아닌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할 수 없는 것만 가득한 날들 속” 유일하게 “할 수 있어!”라고 외칠 수 있는 일이 전 연인의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는 일일 때,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을 만큼 망한 듯한 인생의 내력을 모조리 아는 이가 자신을 망하게 한 장본인뿐일 때, 서일과 다시금 함께 있고 싶은 “정신 나간 마음”(p. 89)이 고립과 단절로 내몰려 어쩔 수 없이 택하게 된 불모지처럼 보이기도 하는 탓이다. 그래서 김지연은 평균치의 삶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나선다.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가 탄생한 「좋아하는 마음 없이」의 ‘안지’는 이혼한 전 남편의 부고를 내연녀였던 ‘그녀’로부터 전해 듣는다. 이외에도 그녀는 전남편의 보험금 수혜자가 안지로 되어 있고, 이혼할 때 두고 온 아들 ‘성준’이 안지와 함께 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안지에게 전달한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묘한 구석이 있다. 벌을 받았다고 생각하느냐는 안지의 말에 “누가 벌을 주는데요?”(p. 142)라고 되묻고, 미안해할 겨를이 없을 만큼 행복했다고 묻지도 않은 말까지 술술 털어놓으며, 이제껏 키워온 성준은 누가 뭐래도 자기 아들이지만 양육비는 보태달라는 염치없음까지. 하지만 안지는 바로 이 뻔뻔함이야말로 전남편과 똑같은 “여자의 장점”(p. 154)이라고 생각한다. 안지가 보기에 전남편은 “집을 해올 형편”(p. 149)을 갖춘 “좋은 사람이”(p. 159)었지만 “좋아 죽을 것 같은 사람”(p. 161)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형적인 사람”(p. 137)으로 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어온 안지는 스스로가 “아주 평균적인 삶”(p. 139)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전남편과 이른 결혼을 했었다. 호불호를 쉽게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선택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안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전남편과 여자는 정확히 안지의 정반대편에 선 사람들이다. 솔직하고 당당하게 이혼을 요구하는 사람들.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솔직한 사람. 숨기느니 차라리 정면 돌파를 선택하는 사람. 그래서 뻔뻔할 수 있는 사람”(p. 158)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안지는 이들의 뻔뻔함을 겪고서 “조금 더 자기 자신에게 가까운 삶을 살게 되었”(p. 137)다고 믿는다. 무엇이 좋고 싫은지를 탐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안지의 가족들은 “좋아하는 마음 없이 함께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이고, 때문에 안지의 삶에는 “그 사람들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내렸던 선택들”(p. 163)이 수두룩하다. 반면에 현재의 안지는 좋아 죽을 것 같은 사람과 재혼하고, 싫어하는 게 무엇인지 알기 위해 이상한 대회들을 연다. 분명한 미래가 아니라, 잘 그려지지 않는 미래를 골똘히 떠올린다. 그래서 안지는 전남편과 그녀, 아이가 있는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세 사람이 함께 있는 사진”(p. 165)을 훔쳐 지갑에 넣고 다님으로써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의 명예의 전당에 오른다. 여자를 다시금 우연히 만난다면 되돌려주겠지만, 그때까지는 그들에 관해 거듭 생각하면서 무엇이 옳고 그른 삶인지 단정하지 않기 위해 끝을 한없이 지연시키면서 말이다. 전남편과 관련한 모든 일로부터 그저 멀어지고 싶었던 안지는, 그렇게 무엇도 기대하지 않고 연루되지 않음으로써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두고 보기를 택한다. 계산하고 판단한 “확신”을 따르기를 포기하고, 그들의 방식처럼 “선명하고 분명한 감정”(p. 161)이 있는 삶의 방식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선다. 해괴하고 이상한 것의 가능성은 「유자차를 마시고 나는 쓰네」에 이르러 더욱 커진다. 재개발이 예정되어 누구든지 마음껏 열매를 가져가라고 전달받은 ‘나’와 ‘삼촌’은 유자밭에서 유자를 따던 도중 땅에 묻힌 상자를 발견한다. 기대감을 안고 열어본 결과, 그곳에는 “알 수 없는 썩어 문드러진 쓰레기”(p. 271)만이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상자를 내동댕이쳤던 ‘나’는 서사의 마지막에 이르러 “어쩌면 영영 썩지 않는 것도 못할 짓이라는 생각”(p. 289)에 도달한다. 이러한 깨달음은 1년 전 사고로 세상을 떠난 ‘숙모’와 그의 아들 ‘민재 오빠’를 애도하는 ‘나’와 삼촌의 시간과 연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촌보다 열 살 많은 나이에 아이까지 있는 이혼녀였던 숙모의 세세한 사정과는 별개로, ‘나’는 매번 콤플렉스를 건드리는 말을 내뱉고 짝사랑 상대의 엄마인 그녀를 싫어해왔다. 하지만 무엇이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보였던 숙모가 췌장암으로 사망한 전남편을 떠올릴 때마다 사는 게 너무 달아서 미안함을 느끼는 모습을 목격한 뒤, ‘나’는 그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자신이 싫어하던 사람을 닮아버린 순간부터 그 사람을 싫어할 수 없게 되었다던 숙모의 말처럼, ‘나’ 역시 죽은 사람을 떠올리는 일이 마냥 괴롭게만 느껴지지는 않게 되면서 변하는 것, 썩는 것을 긍정하게 된다. 해괴해지지 않는 것은 없다. 오히려 왜곡과 변형을 거치면서 이전과 다른 상태 변화를 맞이하는 것이 더욱 유의미한 일일 수 있다. 밀봉하지 않아 썩어버린 자리에서 공벌레가 새롭게 자리를 틀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조금 망측하긴 해도 망하지 않은 인생. 김지연의 소설은 우리에게 그런 인생들의 가치와 가능성을 펼쳐준다. 3. 잃어버려야만 만날 수 있는 세계 『남겨진 이름들』(문학동네, 2022)과 『방어가 제철』(자음과모음, 2022)에서부터 주목받았듯이, 안윤 소설의 중핵에는 ‘상실’이 자리한다. 이에 조금 더 안윤스러운 특징을 부여해보자면, ‘원인을 알 수 없는 상실’이라 고쳐 부를 수 있겠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할 수 없이,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잃은 인물들이 겪는 상실은 기이하다. 의심 없이 정상이라 믿어왔던 체계가 뒤틀린 채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어짐이 꼭 불행해야만 할까. 균열을 되짚으면서 우리는 모자람에 몸서리칠 뿐만 아니라, 온전함을 “새로이 감각”(「틈」, p. 237)해볼 수도 있다. 사라진 이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일깨워준다면 어떨까. 이를테면 안온한 세계는 허상이고, 그것은 위태로운 누군가의 현실을 말끔히 소거해야만 가능하다는 것. 금이 간 세계의 틈새로 유실된 존재들이 있다는 것. 이를 마주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보편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실과 괴리를 좁힐 수 없는 인물들의 선택이 어쩐지 생소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하지만 그들의 결단 덕분에 기이한 감각들은 응달에 고여 있지 않고 변주된다. 안윤의 소설에서 기괴하고 낯선 기운이 세계를 다시 쓰는 역량으로 옮아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비밀을 알아차린 뒤 다른 삶을 향해 몸을 트는 인물은 우선 「핀홀Pinhole」에서 만나볼 수 있다. 직장 동료로 처음 만나 4년을 사귄 ‘보라’와 ‘승원’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다. 평탄해 보이던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떤 ‘비밀’이 드러나면서 전연 다른 국면을 맞게 된다. 제목처럼 소설에서는 바늘구멍처럼 아주 미세할지라도 분명한 틈을 내는 질문들이 등장한다. 첫번째, “비밀 하나씩 얘기할까”(pp. 55, 75, 88). 소설에서 총 세 번 등장하는 이 질문은 모두 보라로부터 나온다. 비밀은 수치스럽거나 비정상적인 치부들을 의미한다. 보라에게 딸들을 버리고 갔던 엄마와 새아버지, 이복 남동생이 있다는 복잡한 가정사 같은 것들. 보라는 비밀을 들추거나 캐묻지 않는 승원에게 편안함을 느낀다. 이렇듯 보라가 감추고 싶은 것, 감춰야만 하는 사실들을 응시하고 발화하는 인물이라면 승원은 비밀 앞에서 “짧은 침묵”(p. 56)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소설이 전개될수록 승원의 침묵은 배려가 아니라 자신의 비밀을 덮기 위한 자구책으로 드러난다. 보라는 어느 날 중증장애인 거주 시설의 실태를 고발하는 기자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경진’의 메시지를 통해 외동으로 자처해왔던 승원에게 마흔넷의 중증장애인 형 ‘정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경진은 부모가 강제로 입원시킨 시설에서 관계자들의 폭력으로 인해 사망한 걸로 보이는 정원의 사인을 밝히고 그의 삶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정원의 가족들로부터 무시당했다. 두번째 질문은 경진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승원씨를 얼마나 안다고 생각하세요?”(p. 61). 모든 것이 그렇게 돌연 생경해진다. “경험해본 적 없는 단란한 가정의 화기”(p. 72)는 “너무나도 깔끔하고 정연하게 통제된 느낌”(p. 73)을 주고, “앎의 정도를”(p. 66) 고려할 필요 없이 가까웠던 승원은 “엄연한 타인”(p. 53)으로 다가온다. 그중에서도 승원이 동그란 공 모양으로 뭉쳐놓은 양말이 보라에게 “집쥐가 ‘된 것’”(p. 53)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추방하려 아무리 애써도 계속해서 출몰하는 집쥐처럼, 정원의 존재는 여타의 삶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승원이 습관처럼 만드는 양말 뭉치가 어린 시절 정원과 가지고 놀던 장난감 공에서 비롯된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보라는 직감한다. 평범했던 양말 뭉치가 “집쥐로 보이기 시작한 그 늦은 오후 이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p. 54)다고. 보육원에서 지내던 어린 시절, 약을 먹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집쥐는 어디에서 누구와 살 수 있는 걸까”(p. 87)를 궁금해했던 보라의 의문은 정원의 생애를 접하면서 되살아난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지만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삶은 온통 투쟁이었다. 더딜지라도 꾸준히 삶을 기록하고, 장애인 스포츠인 보치아 선수가 되어 진지하게 공을 던져왔다. 죽고 싶을 때마다 “타 자 칠 때 총 쏜 다 생각”(p. 83)하며 쓴 시들, 시설에서 나가기 위해 새벽마다 컴퓨터실까지 기어가 적어 내려간 정원의 이야기는 “스스로 훼손을 인정할 수 없었던”(p. 71) 보라를 변화시킨다. 과거의 결함을 지우고 무결하고 단란한 가족으로 살고 싶었던 욕망을 외면하고, 승원 대신 정원의 기록물을 경진으로부터 건네받는다. 할머니에게 배운 바느질처럼 보라는 정원의 생애를 몇 번이나 곱씹은 후 그의 이야기들을 정성스럽게 잇대어 나간다. 그리하여 세 사람만이 담긴 가족 그림에서 “가는 연필 선으로 밑그림만 그려놓은 테두리뿐인 사람”(p. 61)이었던 정원을 “한 사람의 형상”(p. 88)으로 만들어낸다. 양말 공을 죽어가는 집쥐로 느끼던 낯선 감각은 그렇게 자신이 바라는 삶을 향해 공을 굴리는 정원의 의지를 헤아리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다시 첫번째. 보라는 승원에게 다시 한번 비밀 말하기를 제안한다. 경진을 만났다는 자신의 비밀을 먼저 밝히면서. 사실 안윤의 인물들이 내린 선택을 따라가다 보면 경진이 던진 이 질문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왜 이렇게까지 하세요?”(p. 85). 어째서,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걸까. 친숙함을 등지고 불가해한 누군가를 끌어안게 만드는 힘의 근원을 짐작하기 위해 표제작 「모린」을 살펴본다. 사고로 중도 실명한 시각장애인 ‘영은’은 잃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범하거나 무감하게 태어나서가 아니라 살면서 많은 것을 잃어봤기 때문이다. 실명 이후 영은은 다채로운 세상의 이미지들, 오래도록 자신의 곁을 지켜왔던 연인 ‘선주’를 비롯해 자신을 이루던 수많은 조각을 놓쳐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은은 여전히 처음부터 가져본 적 없는 삶보다는 여전히 나중에 잃는 삶을 선택하겠다고 말한다. 이는 “있음과 없음, 그 둘을 연결하는 잃음”을 통해 “주어지는 모든 세계를 빠짐없이 살아보”(p. 25)겠다는 다정한 결단이다. 어떤 것을 잃어본 사람은 그것의 소중함을 비롯해 어떻게 더 잘 잃을 수 있는지, 상실 이후에 무엇이 변화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 특히 자기 자신을 잃어보는 경험은 세계가 뒤바뀌는 사건이다. 하나의 세계는 곧 한 명의 사람과도 같다. 그리고 세계는 곧잘 무너지고 다시 서길 반복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한 사람’은 변치 않고 그대로 남아 있어서가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고 가기에 유일하다. 그런 의미에서 “유일한 사람은 죽어서도 죽지 않는다”(p. 9). 영은이 잃음을 두려워하기보다, 각각의 자신과 타인을 마음껏 사랑하는 일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이유다. 유일한 것들의 흔적을 덧입고서 모진 시간을 견뎌온 영은은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사실만이 유구하다는 걸 안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정상성이 비틀리는 감각이 일상처럼 자리 잡고 있다. 안윤이 굳게 믿는, 상실을 지나온 자의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영은의 질서”(p. 30)는 기존의 질서에서 멀어지거나 누군가를 잃는 일을 유독 겁내던 ‘미란’을 조금씩 변화시킨다. 자신을 제쳐둔 채 사회의 규율만을 엄격히 따르느라 영은을 사랑하는 마음마저 밀어내길 반복해온 미란은 영은의 곁에서 “한 사람이 자신을 넘어서 는 어떤 감정을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p. 44)을 경험한다. “죄다 망해버려서 다행”스럽게 찾아온 “그동안의 내가 다 망해버린 기분”(p. 41)은 여성과 여성의 사랑, 장애인의 삶처럼 분명히 있는 것들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세계의 문법을 무너뜨리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의 무수한 면면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든다. 이러한 세계에는 정상성이 비틀리는 감각이 일상처럼 스며들어 있다. “누군가가 이상한 말이나 행동을 하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게 저 사람이 말할 수 없는 사정이구나 하는”(p. 12). 세계는 곧 한 사람 그 자체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 바 있으니, 영은의 말처럼 기이한 낯섦은 이제 한층 더 애처롭게 감각된다. 기꺼이 열리고, 연결되고 싶을 만큼. 때로는 나 자신을 잃어버려야만 닿을 수 있는 누군가가, 무너져야만 만날 수 있는 세계가 있다. 상실과 결여를 메우지 않은 채로 살아가는 방법을 안윤의 소설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4. 실패 연습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은 현실이 감추려 해온 불합리성이라는 비밀을 고발하고, 이때 드러난 균열에 힘을 가해 기존의 제도와 체계에 일격을 가한다. 특히 주목해야 할 지점은 두 사람의 소설이 자신의 균열을 뼈아프게 직시해야만 들여다볼 수 있는 세계의 결함과 마주한 뒤, 그러한 생채기를 어떻게 매만질 수 있을지까지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지연은 잿더미 속에서도 아직 전소하지 않은 기대와 희망을 조심스럽게 건져 올린다. 그의 인물들은 자본 외부의 의지와 노력이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상황에서 한없이 작아져 있다가도 뜬금없이 괴상한 사안들 편에 서거나 망측한 일을 감행한다. 이때 강렬히 분출되는 어긋난 감각은 살 만한 삶을 간단없이 소거하는 자본의 법칙이야말로 진정으로 이상한 무언가임을 강렬히 느끼게 해준다. 안윤은 이유 없는 상실을 강제하는 현실에 짓눌리는 와중에도 잊힌 이들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잃어버려서는 안 될 자신의 고유한 속성을 부지하려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들은 세계의 결함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사건을 목도할 때 생기는 기이함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결단하기 위해 분연히 사건을 찾아 나서거나 세계가 무너지는 감각 아래에 자신을 놓아둔다. 그런데 이들 소설이 나아가고 있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인물들의 일격이 너무 쉽게 저지당하거나, 세계의 비밀을 목격한 이후에 결과적으로는 다시 자신의 결함으로 회귀하는 수축성을 보이는 측면이 두드러짐을 간과할 수 없다. 김지연의 소설에서처럼 잠깐 보인 희망이 오히려 지난한 현실을 조금 더 버틸 수 있게 하는 마취제로 작용하고, 안윤의 인물들이 억눌리고 배척당한 존재들의 고통을 자기 이해와 친밀한 사람과의 좁은 세계에 가둬두는 건 아닌지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의도와 달리 두 사람의 소설이 보여주는 건 균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재한 현실 아닌가. 이런 우려는 결함마저도 소비적 욕망과 충동에 포섭시켜 자기 발전의 재료로 삼는 자본주의의 영악한 힘이 가진 위험을 알기에 생겨나는 것이다. 하지만 장담컨대, 이런 의심을 향해 김지연과 안윤은 한층 더 이상하게 말하고, 행동하며, 선택하는 인물들을 다시금 내보일 것이다. 한 번의 실패는 억압의 기제에 영영 봉합되는 것이 아니라 더 잘 망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믿는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더 자주 서로에게 보여져야 한다고” “잘 살든 못 살든 그냥 살아 있는 게 목격이 되어야”(「긴 끝」, p. 122) 한다는 김지연에게 소설은 끝을 길게 늘어뜨려 무한히 연장하는 목격의 수단이다. “만약이라는 말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또,」, p. 174)는 걸 아는 안윤이 보기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로 허물어지는 일이야말로 세계가 연결되는 가장 첫걸음이기에 둘의 세계는 여정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될 것이다. 두 사람에게 실패란 기존의 견고한 세계가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 그래서 고정되어 있던 자신이 허물어지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집들은 이제 막 실패했다. 어쩐지 걱정되는 마음이 앞선다면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숙련이 뒤따르듯이, 이들은 지금의 연습을 거쳐 실패에 능숙해질 것이다.그러니 자주, 계속해서 더 잘 실패해보려는 두 사람의 힘을 믿는 마음으로 애정을 담아 덧붙여본다. 앞으로의 소설에서는 무너지고 재건된 세계가 어떤 다른 모습으로 솟아오를지, 기이한 인물들은 구체적으로 어디를 향해 걸어 나갈지 궁금하다고 말이다.
표면-상태-읽기 문학은 인간의 내면 또는 물질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하나의 관점이다. 하나 내면은 '내면'에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앞의 문장은 의미를 다르게 가진다. 내면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틀리고 비뚤어진 형태로 또는 속에 있는 그것과 다르지 않은 형태로 비죽이 튀어나오는 것임을, 우리는 이미 안다. '내면'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이 그것을 가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타인에게서 또한 그것을 '본다'. 그것이 '어디'에 있든 누구에게 있든 그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표면적인(보이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문학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을 표면을 읽는 일과 같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표면을 읽는 것이 내면을 읽는 일이 될 수 있을까? 아주 표면적인 방식으로 내면을 추측하게 만드는 시에서라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울지도 모른다. 최재원 시인의 『백합의 지옥』 중 "별늪"이라 이름 붙은 장에 수록된 시편들은 연결성을 가진다. 제목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상어 세계의 법칙에 적응하지 못하고 친구가 되어줄 누군가를 찾는 "부끄럼쟁이 상어 위스퍼"는 "제멋대로 올챙이 오페라"를 바다에서 만나고, 이 둘은 “배고픈 물뱀 나르샤"를 만나 함께 모험에 오른다. 자기 위로 쌓이는 모래를 떨어낼 생각도 없이 침잠했던 "심심한 넙치 누가바"가 이 무리에 합류하고, 이들은 “마그마라는 이름의 마그마"를 만나며, 이들과 함께 걸음 하는 마그마는 은하수라는 이름의 은하수를 만나 "별늪"이 된다. 그리고 이 시들의 여정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마그마와 은하수는 별들을 주고받으며 / 하나가 되었다 / 별늪엔 별꿀이 가득히 흘러서 누구도 / 배고프거나 심심하거나 외롭지 않았다 - 「별늪」 부분 요약건대 이 시는 위스퍼, 오페라, 나르샤, 누가바, 마그마, 은하수가 별늪이 되어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 내면은 어디에 있는가? 요약이 말해주지 않은 부연 설명과 수식의 말들을 들여다볼 때 그것을 찾을 수 있다. 상어 위스퍼는 동료 상어들이 "자신들과 함께 다니려면 사람의 다리 하나를 / 가져오라고 부추"(「부끄럼쟁이 상어 위스퍼」)긴 끝에 길을 나섰으나 끝내 그렇게 하지 못한 채 오페라를 만났다. 올챙이 오페라는 자신이 살 수 없는 바다에서 살고자 하다가 동료를 만났고, 오래 굶은 물뱀 나르샤는 오페라를 잡아먹으려다 위스퍼를 보고 숨었지만 이내 그들과 동료가 되기로 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무언가에 저항하거나 반(反)함에 따라 삶을 성취하고 있다. 이때 '반'은 '부정'에 방점이 찍히지 않고 주어진 것의 '바깥'에 찍힌다. 주어진 것에서 탈출하는 것, '하라고 시켜서 되는 것'의 바깥쪽에 위치한 수많은 가능성을 지향한다. 그렇다면 이 시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저항함으로써, 때때로 죽음을 감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워지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해석은 이 시의 표면인가, 이면인가? 문장이 지시하는 것을 읽어나갔을 뿐임에도 문장이 발설하지 않고 내포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헤아렸으므로 이면을 읽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표면을 읽은 것이라 할 수 있지 않나?...... 정답 없는 이 의문점에서 표면이냐 이면이냐 중 하나로 결론을 내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질문을 돌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살아가는 일이 '존재'가 아니라 '상태'로 지속된다는 사실이다. 즉 존재의 방식이나 형식(표면), 존재의 의미(이면)를 파악한다는 것은 어떠한 상태인가를 헤아림으로써 가능하다. 이처럼 최재원의 시는 표면으로 이면을 말한다. 대도시와 약간의 거리를 둔 업스테이트에 살면서 그야말로 '삶'과 자연의 의미를 갈구하는 듯하지만 지극히 탈자연적인 방식으로 시간과 공간 곳곳을 채우고 있는 두 사람이 등장하는 시 「업스테이트」 역시 지극히 표면적인 것을 묘사한다. 그러나 그 표면을 잘 살피면 삶을 주관하는 자와(퍼치를 낚음) 삶에 종속당하는 자(대도시적인 생활 관습으로부터 멀어지지 못함)의 위치가 거듭 전도되는 '상태'가 발견된다. 표면을 통해 상태를 보여주는 이 시를 지나, 비누 거품을 내어 손을 씻는 모든 과정과, 그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는 타인을 바라보며 관념적 상태변화를 묘사하는 「기브앤테이크」를 거쳐, 「비엔나소시지」에 도착해 이번에는 이런 물음을 꺼내본다. 분리 불가능한 표면과 이면 어디께를 휘저으며 의미를 찾아내는 일의 가장 흔한 방식은 어쩌면 '개인적으로 좋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과 같지 않은가? 그게 과연 '개인적'일 수 있는지 묻고, '좋음'이란 게 구체적으로 뭘 의미하는지 설명하는 순간 시라는 표면은 지극히 개인적인(내면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게다가 그것이 발설되면 내면은 더는 내면이 아니게 되는 데다 이 시에 대한 변형된 의사를 전달하는 것으로는 개인적인 이야기가 되지 않으니, 이 역시도 표면으로 내면을 드러내 보이는 상태에 관한 것이겠다. 그런 까닭에 이 시에 대한 '개인적으로 좋음'이라는 메모를 이런 식의 해석으로 풀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시는 비엔나소시지를 먹는 상황을 묘사한다. 물론 그사이에 끼어드는 세부적인 의견이나 수식된 말 등이 중요하다. 어떻게 먹어야 최상의 조화로움 속에서 비엔나소시지볶음을 먹을 수 있는가를 궁구하는 일련의 상황 사이에 그리움, 환멸, 어머니와 같은 정념들이 “꾸역꾸역” 끼어든다. 당근의 맛이라든가, 재료 익힘의 정도, 당근과 다른 재료와의 조합을 씹을 때의 맛, 감각, 만족도 같은 것은 꾸역꾸역 끼어드는 생각들의 맛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면 그건 무슨 맛인가. 그런데 한 번도 빼놓지 않고 / 양파와 당근을 썰어 넣는다는 것은 얼마나 착실한 / 일입니까 얼마나 / 열심한 일입니까 특히 / [......] / 꾸역꾸역 아침부터 국을 / 데우고 소시지를 볶고 찬 / 반찬 더운 반찬 김치를 / 각각 포일로 그 비좁은 / 도시락통을 지혜롭게도 / 기술적이게도 딱 / 3등분으로 나누어 / 나는 그런데 국물이 흐르면 / 화가 났습니다 당신에게는 / 아니고 국물에게 그리고 신부님의 / 고고하고도 자애로운 모습을 문득 / 떠올립니다 급할 것 하나 없이) - 「비엔나소시지」 부분 비엔나소시지를 반찬으로 싸는 사람이 그렇게 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에 무엇이 깃들어 있는지, 요컨대 이 재료들이 비엔나소시지 반찬이라는 지금의 상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화자는 생각한다. 비엔나소시지는 누군가 성실하고 착실하게 열심히 야채를 썰어 넣는 노고이고, 비좁은 도시락통을 현명하게 구획하는 지혜이고, 그 결과물이 의도치 않게 약간의 국물을 새어 나가게 만들 수도 있는 우연적 실수를 동반한다. 수많은 사랑에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비의지적 결과에 화가 난다고 화자는 말한다. 이 근사한 노고와 지혜와 사랑과 성실함이 흘린 약간의 국물을 두고 감사·만족·풍족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단지 국물 때문에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분노를 느끼는 이 어긋나는 감각은 이것을 먹는 사람에게 죄책감이나 환멸을 느끼게 만들고, 그러다가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는 이에게 자애를 구하고 싶어지게 만든다. 그래서 이 시는 이렇게 끝난다. “저에게 / 저에게 자애를 베푸소서 / (내가 갈 곳에는 비엔나 / 소시지와 같은 추잡한 / 것들이 없게 하소서 / 꾸역꾸역 살아 낸 것들 / 의 기억을 모두 잊게 하소서"(「비엔나소시지」)라고. 그러면 비엔나소시지 먹기라는 건 노고·노동·사랑·지혜, 그런 것들에 대한 생각, 이 모든 걸 배반할 만큼의 분노와 짜증과 혐오감 그리고 그것에 대해 용서받고 싶은 마음이다. 요컨대 최재원 시의 표면 읽기란 의미란 무엇이며 어떻게 발생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을 듣는 일이다. 최재원의 시는 인내심을 가지고 여러 차례 그것을 일러주고 있다. 자세한 표면을 보라고. 그리고 존재를 강구하지 말며 상태를 헤아리라고. 상태를 헤아리면 의미가 발생한다고. 죽음-상태-읽기 꼭두를 한 달 사이에 세 번이나 보았다. 한번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전시되고 있는 사진전에서, 다른 한번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다른 전시장으로 건너가며 스쳐 지나가듯 놓인 실물을, 마지막 한 번은 신미나의 시에서 “꼭두"라는 기호로 보았다. 꼭두를 세 번 보았지만 '꼭두'를 본 것이지 실제로 그것이 본래의 의미로서 작동하는 상태를 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꼭두는 전통적인 장사(將事) 문화에서 볼 수 있는 목각 인형이다. 망자를 '저편'으로 인도하고 수호하는 역할을 하며 상여의 곳곳에 놓인다. 말하자면 꼭두는 나무이고, 나무로 만들어진 인형이고, 죽음이고, 수호이고, 죽음의 길잡이다. 최근 세 번이나 보았지만 꼭두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나? 나는 사진으로 된 목각 인형을 보았고, 목각 인형 전시물을 보았고, 죽음에 대한 시를 읽었다. 사진전에서는 꼭두를 찍어 186.5×159센티미터 사이즈로 커다랗게 인쇄하여 세로로 세워두었고, 지나치듯 본 꼭두 인형은 '전시물'로서 전시장 한복판에 서 있었다. 꼭두의 모양새와 가장 닮지 않았지만 꼭두의 수행적 의미에 가장 가까운 것은 신미나가 쓴 「꼭두전」에 등장하는 “꼭두"라고 할 수 있겠는데, 장사를 지내는 시에서 “꼭두"가 망자를 이끌고 수호하는 존재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 "꼭두"는 문자의 나열과 문장의 직조로 펼쳐진 죽음으로 향하는 상상된 언어 속에서 등장했으므로 어쨌거나 상징적 기표의 상태로 간주되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꼭두를 세 번 봤지만 세 번 다 꼭두를 봤다고 할 수는 없고, 사진과 전시물과 죽음에 대한 상상의 현물로서 그것을 보았다. 보았다...... 한데 나는 무엇을 본 것일까? 앞서 최재원의 시를 읽으면서 개체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상태를 지속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상태의 지속은 항상성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불안정성과 유동성을 의미한다. 변함없는 상태처럼 보이기 위해서 개체는 변화하는 시간에 맞게 대응해야 하고 달라진 상태에 맞서 새로운 움직임(혹은 멈춤)을 추동해야 한다. 신미나의 시에서 여러 번 발견되는 '죽음'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죽음은 역시 삶의 중(中)이자 삶이 아닌 중의 중의 이동에서 감지된다. 죽음은 존재의 중지, 상태의 종료처럼 생각되곤 하지만 삶이 곧 존재가 아니듯 죽음 역시 비-존재가 아니라 삶이 아닌 상태다. 이로써 신미나의 시는 삶과 죽음을 상태, 즉 유동으로 간주하는 듯하다. 죽음이 존재라는 것에 불이 들어왔다가 나가는 그런 이분법적인 것이 아니라면, 삶을 소거하는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보고 이 질문에서 시작해보자. 삶이란 무엇인가? 즉, 죽음을 소거한 채로 죽음을 어떻게 말하는가? 언니들은 비밀이 많고 / 금요일엔 주름이 많은 치마를 입었지 / 블라우스 리본을 매고 / 흔들리는 구두를 신고 뾰족하게 웃었네 // 나도 따라가고 싶어 [......] // 넌 아직 어려 [......] // 주머니 속에는 시를 쓴 종이가 있는데 / 언니들을 슬프게 만드는 시가 있는데 / 여름휴가는 짧고 / 동생이 시를 써서 언니들은 기쁘다 말하고 / 시를 쓰면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 같아 // 언니들을 시로 써도 될까 / 사탕수수밭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을 / 미래, 미래, 미래로 물결쳐오는 문장들을 // 언니들은 풀었던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으며 / 머릿수건을 두른다 / 식판을 들고 밥과 국을 배급받는다 / 에나멜 구두는 금요일에만 꺼내 신을 것 // [......] // 뭔가 시작되려는데 / 그게 무엇인지 / 아무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지 / 아무도 - 「바람 주머니가 부풀 때」 부분 “아무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지"에 시의 핵심적 태도가 함축되어 있다. 아무도 일러주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 '뭔가'가 무엇인지. 그런데 이 표현 자체가 '그것'이 소거된 형태로 말해진 결론이다. “그게"로 표현되어 있는 '그것'의 정체를 어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일러줄 수 없다. 그래서 아무도 '나'에게 일러주지 않은 것이다. 이미 그 상태에 속해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일러줄 수 없는 것이 바로 삶인지라, '나'는 알고 싶었으나 아무도 일러주지 않아서 속수무책 빨려 들어가 있는 바로 이 '상태'에 그냥 놓인 채로 그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는 중이다(삶-인 중이다). 삶은 '무엇'이 아니기 때문에 '무어'라고 알려줄 수 없다. 삶은 존재하는 상태와 같이 유동하는 흐름 속에 놓여 있다. 시를 조금 더 세밀하게 살펴 이들이 어떤 흐름과 상태에 놓여 '그것'을 겪고 있는지를 따라가보자. 이 시에서 "언니들은 비밀이 많”은 존재다. '나'는 언니들을 따라가고 싶어 하지만 어리기 때문에 언니들의 비밀에 합류할 수 없다. 비밀이 많은 언니란 언젠가 될(또는 궁구하는, 희망하는) '나'의 미래이고, 그런 점에서 삶의 한 단면이다. 이 문장을 좀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삶이란 비밀을 지닌 미래'다. '나'는 언니들의 비밀에 합류하지 못한 대신 시를 쓰면서 비밀을 만든다. 시를 쓴다는 것은 비밀을 만드는 것이다. 시를 쓰는 일은 '나'를 몰래 나쁜 일을 하는 것 같은 비밀스러운 상태로 만든다. 비밀스러운 '나'의 미래인 언니들을 시로 쓴다는 건, 미래를 비밀스럽게 만들어 맞이하겠다는 것. '나'는 언니들의 비밀을 공유하지 않았지만 '비밀'이라는 미래를 만들어내고 있다(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이 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삶'이라는 말을 소거한 채 미래를 비밀스럽게 스스로 만들어 쫓는 것이 삶임을 보여준다. 이 시에 들어섰던 최초의 까닭은 삶을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규명하기 위함이었다. 이 시가 '그것'을 소거하면서 동시에 말하는 것과 같이,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다다르기 위한 방법 역시 마찬가지로 그것을 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죽음이 아닌 상태에 대해 말해도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때의 소거는 실제로 뭔가를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빠진 상태 그 자체로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이다. 찾았냐고 물었다 // 클로버는 잎이 세 장 / 드물게 네 장 / 초록의 이랑이 팬다 / 반복의 물결, 물결, 물결 // [......] 하나만 길게 잡아당기는 / 신의 놀이 / 토끼는 귀가 크고 / 코끼리는 코가 길다고 / 말하려다 / 코끼!라고 했는데 // 지구 바깥에 / 귀도 크고 / 코도 긴 / 진짜 코끼가 있을지도 몰라 // [ ] 토끼는 위험하면 / 뒷발을 구른다는데 // 코끼, 코끼, 코끼래! / 우리 중 누구도 /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 「풀」 부분 이 시의 현재에 있는 것은 풀이고, 어쩌면 있을 수도 있는 것은 위험을 감지하고 발을 구르는 토끼이며, 보다 희미한 가능성으로 있을 수도 있는 것은 '코끼'인데 이것은 사실상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없는가? 이 시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코끼다. 코끼는 토끼로부터 연상된 코끼리를 말하려다 튀어나온 것이고, 토끼는 클로버를 찾으려 풀밭을 샅샅이 뒤지다가 떠오른 모자 속에서 폴짝 뛰어나온 것이므로 그것은 풀밭에서 비롯된 어떤 상태로서 그 어떤 것보다도 커다란 존재감을 드러낸다. 여기서 벌어지는 소거는 “코끼”라는 표현 속에 압축되어 있다. 그것은 없음('리'의 소거)으로 하여금 있는 것이고(코끼), 상상 속의 토끼이자 코끼리를 온통 아우르는 관념의 상태다. '리'가 빠졌지만 '리'만 빠진 것이 아니고, '리'가 빠진 '코끼'로 하여금 없는 모든 것을 있게끔 만드는 것이 되었다. 뭔가를 빼고 말한다는 것은, 빼려고 했던 것을 포함한 모든 가능성을 지금의 상태로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뺀다는 것은 상태를 바꾼다는 것이고,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이전의 상태에서 놓여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때 신부가 되길 원했으나" 조선소에서 노동자로 살아가게 된 한 사람의 삶(이라는 상태)에 대해 시인은 이렇게 쓴 바 있다. 스토브 안에서 무연탄 더미가 / 조용히 스러질 때 / 그는 부드러운 재를 / 얼굴 위에 뿌리고 / 더러워진 몸을 머리끝까지 욕조에 담근다 / 숨을 참고 열을 세다가 / 마침내 뱉을 때 / 현실은 간신히 그를 따라왔다 // 그는 눈을 뭉쳐 / 눈사람을 만들어 물에 넣는다 / 순식간에 / 눈사람이 사라지는 모양을 본다 / 기분이 아니라 / 감정이 아니라 / 어떤 / 상태에서 풀려나는 것을 - 「북에서 온 사람」 부분 그는 그가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않은 상태에 있고 때때로 "섬망과 미혹 사이에서 / 그는 하마터면 / 자기 자신을 넘어갈 뻔"하기도 하지만, 그는 미혹되지 않고 그가 바랐던 것이 아닌 조선소 노동자의 상태로 되돌아온다. 그가 욕조에 몸을 담글 때, 그가 바랐던 것은 아니나 그에게 주어진 조선소 노동자라는 "현실은 간신히 그를 따라왔"(「북에서 온 사람」)는데 어쩐지 그는 지금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계속 바뀌어나가려고 하는 것 같다. 그는 눈사람을 물에 넣고 그것이 흩어지는 것을 본다. 이는 "어떤 / 상태에서 풀려나는 것"이라고 표현된다.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바뀌는 것이 곧 삶(죽음)이고, 그 전환의 순간에 시간의 흐름이 발생하며(무언가가 지나갔다, 무언가가 도래한다), 그러한 전환의 틈에 자각되는 것이 죽음(삶이 지나가고 있음)이다.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넘어가는 것을 소거의 형식으로 발화하는 것이 이 시집이 보여주는 성찰일진대, 그것을 요약해서 말하자면 “백장미의 창백"이다. 언뜻 백장미는 본래 창백한데, 백(白)이라는 색이 빨강으로 대표되는 '장미색'의 빠져나감이라 보는 한 그렇다. 그렇다면 백장미가 창백해지기 위해서는, 장미색이라는 일관된 상태에서 벗어난 장미의 색이 존재하며(또는 색의 장미가 존재하며) 그것이 색이 옅어지는 상태로 바뀌어가는 것이라는 상태의 전환에 대한 상상이 필요하다. 이때 동원되는 것은 장미의 색, 바래지는 색, 외부의 자극(풍화·비 등), 시간의 흐름...... 그런 무수한 상태의 변화 속에서 백장미는 창백해지고, 백장미의 창백이라는 소거된 말에 이르렀을 때 소거된 모든 시간은 모두 소환된다. 백장미 죽음에 가까워진 상태에서 백장미 삶의 이력을 함축하는 방식으로.
깨진 조각이 비추는 것1) 박지일, 『물보라』 최하연, 『보헤미아 유리』 내가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면 시인은 나를 던지는 사람이다. 인간은 한평생 던져지면서 파편화된 존재의 조각들을 주워 담는다. 시가 그 존재의 조각들이라면 시인은 먼저 깨져 본 사람이다. 어떤 시가 당신에게 온다면 그것은 당신이 찾던 존재의 한 조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모은 조각이 당신이 모은 조각과 다르지 않다면,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임에 틀림 없다. * 『물보라』의 깨진 조각은 존재의 움직임을 비추는 금속의 표면이다. 행위를 하지 않아도 그것은 움직임을 포착한다. 밥을 먹기 위해 손을 움직이거나, 입을 오물거려 씹거나 삼키는 행위 없이, 그러니까 동작하지 않는 행위를 하는 존재의 움직임을 담아낸다. 예컨대 「물보라」(15p)에서 시인에게 중요한 것은 "중단전은 하단전과 상단전 사이에 있다"는 것과 "접시는 벽과 문, 어둠과 빛 사이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에게는 이 사실이 중요하다. 아니, 시인은 이 사실을 중요하다고 믿는다. 아니, 중요하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모종의 대상에 대한 믿음은 믿지 않음에 다름 아니다. 그것이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이 믿음을 발명해내기 때문이다. 기실 불안하지 않으면 구태여 믿지 않아도 상관 없다. 쓴 것은 찢어버리면 그만이듯 믿음은 믿지 않으면 그만이다. "나의 쓰기와 저 배는 상관 없이 간다" 당신의 마음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이 믿음은 그러니까 나와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곧 '나를 믿는다'는 말은 '나를 믿고 싶다'는 말이다. '너를 믿는다'는 말은 '너를 믿고 싶다'는 말이다. 하물며 '하고 싶다'는 소망은 "너는 네게 주도권이 없"(「물보라」,p.137)을 때 발생한다. 주도권 있는 자는 무언가를 간절하게 소망하지 않는다. 영화 트로이에서 아킬레스가 했던 말을 곱씹어본다. 신이 인간을 질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죽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마지막 순간을 살기 때문이다. 삶은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다. 당신이 그 삶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생과 사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신과 같은 존재라면, 당신은 굳이 살고 싶지 않아도 된다. 굳이 죽고 싶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당신은 태어나고 싶을 때 태어나지 않았다. 즉 당신에게는 삶에 주도권이 없다. 그러므로 살아 있음은 그 자체로 살고 싶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물보라』의 깨진 조각으로부터 나는 살아 있음만으로 살고 싶다는 소망을 발견한다. 그리고 살고 싶다는 말은 "지긋지긋하게도 세상이 좋다"(「물보라」,p.17)는 말이었다. 느리다고 쓰면 느리게 나아가는 듯하고, 느리지 않다고 쓰면 느리지 않게 나아가는 듯한 시간. 나는 믿을 수 없다. 방향은 나를 바꾼다. 나의 쓰기와 저 배는 상관없이 간다. - 「물보라」(p.15) 부분 "느리게 쓰면 느리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느리게 나아가는 듯하고", "느리지 않다고 쓰면 느리지 않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느리지 않게 나아가는 듯한 시간"은 바로 우리가 그 삶의 주도권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삶은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에 감각될 수 있는 것이다. 믿음과 믿지 않음, 삶과 죽음, 그 사이에서의 '부딪침'. 그것이 물보라다. 물보라의 사전적 정의가 '물결이 바위 따위에 부딪쳐 사방으로 흩어지는 자잘한 물방울'이라면, 여기서 방점은 그러므로 자잘한 물방울이 아닌 '부딪쳐' '흩어지는' 데에 찍혀 있다. 흩어지는 것들은 참혹하게 아름답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은 흩어진다.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다. 연애는 물보라를 즐긴다. 물보라 물보라. 키스는 섞이는 혀를 잊었다. 머릿속에서 키스는 절단한다 섞이는 혀를 잊은 본인을. 키스와 키스는 멀어지면서 비로소 키스가 된다. 너는 나와 혀를 섞는구나. 나와 멀어지기 위해서. - 「물보라」(25p) 전문 한편 물보라는 물보라를 일으키기도 한다. "연애"는 당신이라는 물보라와 나라는 물보라가 부딪히면서 또 하나의 물보라를 일으키는 사건이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을 당신의 삶과 나의 삶이 부딪히면서 또 다른 삶을 일으킨다. 키스를 하면 혀가 부딪치고, 나란히 걸으면 손이 부딪친다. 키스는 혀들이 굴곡되어 부딪치고 섞이면서 타액이 서로의 몸으로 흩어지는 일이다. 그리고 이 '부딪침'은 기억을 생성한다. 기억은 발생하는 동시에 '왜곡'된 것이고, 다른 기억들과 '섞이는 것'이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흩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도, 나도, 키스도, 기억도 이 모든 게 다 물보라다. 따라서 연애란 물보라와 물보라가 부딪혀서 물보라를 일으키는 일이다. 물보라 없는 물은 고여 있는 물이다. 물이 순환되지 않을 때 그 자리에서 번식하는 박테리아가 물을 썩게 만든다. 물은 고여 있으면 썩는다. 물보라는 산소를 공급하고 물을 순환시키며 정화한다. 물이 고여 썩지 않게 하기 위해, 살아 있기 위해 우리는 그러므로 필사적으로 물보라를 일으켜야 한다. 박살나기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질 하고 달음박질 해야 한다. 시인에게 발버둥질은 시 쓰기이다. 시인은 그가 쓴 시에 주도권이 없다. 이미지는 정해진 그곳이 아니라 사방으로 튀어야만 한다. 시란 깨지고 박살난 그 기록들이 얽히면서, 그것과 독자 각자의 기억이 설키면서 발생하는 무수한 이미지의 사건이니까. 그러므로 시인은 자기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 날의 기억들을 부수고 날짜를 쪼개는 이 시집의 부록은 특히 그것을 여실히 드러낸다. 너는 그를 사랑하고 그는 네게 미안하다. 사랑해서 미안할 수는 있지만 미안해서 사랑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가 찾아오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네가 그를 찾아 헤매는 것이 순서가 맞다. 그것이 이치다. 한데 왜 그는 계속하여 네 앞에 설까? 네가 그의 앞에 가서 설 때, 그는 너를 상대하지 않는다. 그는 매번 너를 거절하고 내치고 지우려고 한다. 네게 미안하기는 한 걸까? 너는 그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사랑은 무엇이든 이겨 낼 수 있다고 한다. 너는 그 말을 그 무엇에게도 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읽는다. 모처럼 네가 마음속에서 그를 지워 냈을 때 너는 네게 미안해한다. - 「11月4日」 전문 하지만 거기 너는 없다. 너만 상대해 주지 않는 거울. 망할 놈의 거울. 초원에 선 울타리만을 보여 주는 거울. 거울은 엄마를 닮았다. 너는 엄마라는 단어를 처음 써 본다. 너는 거울로 도망한다. 거울은 너를 찾아 사방을 비춘다. 양의 걸음으로 울타리를 향해 너는 걷는다. 양처럼 밥을 먹고 양처럼 뿔을 간다. 그리고 양은 울보다. 울음소리를 들은 거울이 양을 비춘다. 너는 거울 바깥으로 도망한다. 염소가 울타리 안에서 바깥을 찾아 맴돈다. 염소는 울보다. 너는 염소에게 미안하고 양에게도 미안하다. 미안해서 눈물이 나고 마침 눈물이 나온 김에 울어 본다. 거울은 바깥과 안을 번갈아 비춘다. 안과 밖 모두를 비추는 거울,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는 거울. 망할 놈의 거울 - 「11月4.3日」 전문 첫 번째 인용시는 아마도 아직 사랑하는 '너'를 매번 "거절하고 내치고 지우려고 했던" '그'를 이제는 지워 낸 사람의 기록일 테다. 그리고 그 다음 인용시는 그 날의 풍경에 대한 감각의 재구성이다. "그를 지워 냈을 때" '너'가 "네게 미안"한 것은 '너'가 지워 낸 것이 '그'가 아니라 '그를 사랑한 너'이기 때문이다. '너'가 사랑했던 사람은 너 자신이었고, '너'는 그런 너의 모습을 지워서 "네게 미안"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너'와 "네게 미안"하고 "너를 거절하고 내치고 지우려고" 하는 '그'는 '거울' 같은 존재이다. '너'를 상대하지 않는 '그'가 '너'와 다르지 않다면 '너'는 "너만 상대해 주지 않는 거울"이다. 그것은 "너를 찾아 사방을 비추"지만 "너를 거절하고 내치고 지우려고" 하는 '그'. '너'는 그렇기 때문에 "거울 바깥으로 도망한다". '너'와 '그', 그리고 '너'를 지워 낸 '너'는 각자 그 자리에서 양처럼 염소처럼 울지만, 이미 '너'를 지워 냈기 때문에 "안과 밖 모두를 비추는 거울"은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는 거울"이 된다. 이처럼 기억은 흩어지면서 파편화 되지만 동시에 흩어진 다른 기억의 파편들과 섞이면서 감각적으로 재구성된다. 물보라가 일면서 사방으로 흩어지는 자잘한 물방울들이 부피와 빛깔이 다른 또 하나의 물보라를 일으키는 것이다. 자, 이제 세상에 물보라 아닌 것 없고 물보라 일으키지 않는 물보라 없다. 우리는 『물보라』라는 물보라가 일으킨 물보라다. 그의 시는 우리를 살게 하고, 우리는 그를 살게 한다. 당신이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했던 발버둥질과 달음박질, 그 숨 막히는 고투가 결국 나를 숨쉬게 한다. ('모르겠다'는 말은 사실 모르고 싶은 당신의 소망이 아니던가요?) * 『물보라』의 깨진 조각이 존재의 움직임을 비추는 금속의 표면이라면, 『보헤미아 유리』의 깨진 조각은 존재 그 너머의 풍경을 모으거나 분산시키는 렌즈에 가깝다. 폭우가 내리던 언젠가 고인을 떠올린 적이 있다. 그와 함께했던 풍경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벅차오르는 동시에 곧 씻겨져 내려 갈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폭우 이후에 뒤섞인 풍경은 곳곳에 그를 심어두었고, 어디에도 그는 없지만 어디에나 그가 있었다. 그 풍경의 파편들을 모으다 보면 언젠가 그를 만날 수 있을까? 시인은 존재의 기억을 무작위로 뒤섞고, 그것을 곳곳의 풍경에 심어두는 것으로 존재의 흔적을 보존한다. 양철 지붕 위로 비가 내린다 하얗게 낯선 도시의 장례식장 앞에서 시외버스를 기다리듯 톡 들판과 들판이 이어지는 꽃대의 어디쯤에서 먼저 온 버스에 올라 내릴 곳을 가늠하듯 톡톡 더러는 졸고 툭 누군가는 젤리 한 봉지를 쥐고 있다 처마의 맛 들판 끝에 기차역이 있고 창밖 풍경은 잎맥의 반대쪽으로 달린다 뿌리에서 멀어지면 꽃과 가까워지는 중이니 빗소리를 들으며 종점까지 가기로 한다 젤리를 깨문다 툭 마른 풀잎의 맛, 검은 리본의 맛 들춰보면 남은 물기가 조금은 있으리라 들춰야 보이는 곳들은 발 없는 것들의 무덤- 눅눅하고 달고 창백했다 고인의 얼굴은 잊었다 상주의 이름도 잊었다 양철 지붕 아래 하얀 장례식장을 짓고 긴 객차를 대절해 문상 와서는 홀로 남겨진 사람 꽃대 위로 거짓말처럼 비가 내렸고 들판을 가로질러 바람이 일자 양철 지붕 한 짝이 날아갔다 양초가 젖는 동안 나머지 지붕을 걷어내고 지붕을 걷는 동안 무릎을 접어 절을 올린다 오금이 축축하게 저려온다 툭툭 혓바늘이 솟아올랐지만 톡톡 양철 지붕이 빗방울을 때리듯이 나도옥잠화 하얀 꽃 안에 길고 검은 나비 한 마리가 앉았다가 일어선다 - 「흰꽃」 "양철 지붕 위로 비가 내리"는 이곳은 누군가의 장례식장이다. 빗소리가 유독 크고 선명하게 들려오는 이 쓸쓸한 풍경은 비가 그치고 소리가 멎으면, 아니 그보다 먼저 빈소를 벗어나면서 이내 잊힐 풍경이다. 존재'였던' 것들의 풍경은 이제 굳이 들추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들춰야 보이는 곳들"이 된다. 하지만 시인은 흔적을 곳곳에 심어두는 것으로 들추지 않아도 보이는 풍경으로 그것을 재구성한다. 예컨대 양철 지붕 위로 내리는 빗소리는 시인에 의해 누군가 고개를 '툭' 떨구고 졸고 있는 모습으로, 젤리를 '툭' 깨무는 모습으로, 혓바늘이 '톡톡' 솟아오르는 모습으로 치환된다. 말하자면 청각적 심상의 그것이 다양한 시각적 심상의 그것으로 곳곳에 분산 되면서 풍경은 파편화 되는 동시에 보존된다. 한편 어느날 문득 밟히는 "신발 속 모래 한 알"을 두고 "걸을 때마다 소식이 생긴 것 같아" "그냥 두었다"(「보헤미아 유리」)는 시구로 미루어보았을 때 시인은 풍경을 부수어서 재구성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어쨌든 풍경이란 감각하는 자에 의한 기억의 소산이라서, 그 자체로 이미 파편화 된 것이라면, 시인은 그것을 최대한 비슷하게 그 자국으로 남기는 사람이다. 존재가 남긴 자국은 그 존재를 온전히 표상할 수 없으나, 흐릿하게나마 형태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흔적이다. 그렇다면 자국을 남기는 가장 쉬운 방법은 깨무는 것이다. 깨물면 대개는 물린 자국이 생긴다. 예컨대 한 계절의 풍경을 기록하고 싶으면 그 계절을 이루는 것들을 깨물면 된다. 코너에는 재봉틀이 있다. 꿰맬 수 있는 명암과 꿰맬 수 없는 독경이 바람에 실려 밀려온다. 라일락을 깨물었다. 남천을 깨물었다. 나비의 엉덩이를 깨물었다. 모과나무의 그림자를 갉아먹으며 딱정벌레가 지나간다. 돌에게 돌을 던진 돌을 향해 개가 짖는다. - 「쉿」부분 여기서 깨무는 것은 무엇을 터뜨리는 것도 아프게 하는 것도 지워지게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흔적을 남기는 일이다. 내가 그 존재에 잠시 닿아 있었음을 그저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모과나무를 갉아먹는 것이 아니라 "모과나무의 그림자를 갉아 먹"어야 한다. 그리고 시인에게 있어서 깨무는 것은 시 쓰는 일과 다르지 않다. 하물며 깨물리는 것과 깨무는 것이 서로의 존재에 닿아야 하는 것이 깨물이라면 시인이 풍경을 깨물 때 그도 그것에 깨물린다. 그러므로 흔적을 남기는 일은 쌍방의 사건이다. 풍경을 곳곳에 분산하고 자국으로 남겨서 그 흔적을 보존하는 시인의 렌즈로 우리는 기억을 또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게 된다. 누구나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기억하고 싶은 어느 날이 있지만 흩어지는 기억을 어찌 할 줄을 몰라 망각하기를 택한다. 그러나 "식의 좌변이 망각이면 우변은 반드시 슬픔이 뒤따른다"(「쉬」). 비록 그 풍경이 슬플지라도 '기억되는 슬픔'은 다만 슬프지 않을 것이다. 덕분에 나는 그를 만나기 위한 풍경의 파편들을 조금 더 모은 것 같다. 그는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다. * 존재의 움직임을 비추는 『물보라』의 깨진 조각과, 풍경을 분산하거나 깨물어서 기억하려는 『보헤미아 유리』의 깨진 조각은 다른 듯 다르지 않다. 물보라가 일면서 사방으로 흩어지는 자잘한 물방울과 폭우 이후에 사방으로 떠내려가는 풍경은 모두 물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물론 전자는 존재의 움직임이고, 후자는 존재의 자국 흔적이다. 존재 자체로 불안한 우리는 평생토록 무엇인가에 부딪치고 깨지고 발버둥질 하며 살아간다. 그로 인해 일어나는 물보라의 자잘한 물방울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또 다른 물보라를 일으킨다. 물보라가 일면서 물은 순환하고 정화되며 생명력을 얻는다. 한편 삶에 폭우가 내린 이후 휩쓸린 풍경들은 곳곳에서 기억의 파편으로 발견된다. 또한 존재와 존재가 맞물리면서 생긴 자국은 너와 내가 살아 있다는 혹은 살아 있었다는 존재의 흔적이다. 깨무는 것과 깨물린 것은 서로의 존재를 증명한다. 결국 움직임도, 자국도 모두 삶에 대한 증명이고 살아 있음에 대한 방증이다. 중요한 것은 '존재'이다. 존재가 없으면 움직임도 자국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살아서, 살아 있음을 말해야 하는 것이다. * 내가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면 시인은 나를 던지는 사람이다. 인간은 한평생 던져지면서 파편화된 존재의 조각들을 주워 담는다. 시가 그 존재의 조각들이라면 시인은 먼저 깨져본 사람이다. 어떤 시가 당신에게 온다면 그것은 당신이 찾던 존재의 한 조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모은 조각이 당신이 모은 조각과 다르지 않다면,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임에 틀림 없다. 1) 「물보라」(2024) 에서 인용 시편이 「물보라」 연작시인 경우 쪽수만 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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