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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포지션 | 2024년 여름호(제46호)

현상되지 않은 필름 ― 한영원 『코다크롬』(봄날의책, 2023)

하혁진 문학평론

문학평론가. 제20회 대산대학문학상 평론 부문을 수상했고, 계간 창작과비평 2022년 봄호를 통해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주요 평론으로 「감각의 질서와 그녀들의 환상통」, 「멸망 이후의 에피파니」 등이 있다.

  시인과 촌장의 세 번째 앨범인 《숲》(1988)에는 〈가시나무〉라는 제목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라는 유명한 노랫말로 시작되는 바로 그 노래다. 노래는 종, 피아노, 바람 소리로 이루어진 절제된 선율을 타고 흐르며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라는 노랫말로 이어진다. 이때 가사 속 ‘나’는 이미 ‘나’로 가득해 당신을 들이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고뇌하는 ‘나’다. “어쩔 수 없는 어둠”, “이길 수 없는 슬픔”을 가득 안고 사는 ‘나’의 내면은 가시나무가 무성한 숲이다. 그 숲은 소란스럽게 외롭다.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일까. 당신은 신일 수도, 연인일 수도, 못다 이룬 꿈일 수도, ‘또 다른 나’일 수도 있다. 이미 ‘나’로 가득한 ‘나’의 밖엔 미처 ‘나’가 되지 못한 ‘나’가 있다. 어떤 ‘나’는 ‘나’로부터 탈락된다. 깨지고, 부서지고, 닳은 채로 문밖에 머문다. 어쩌면 앞서 말한 어둠과 슬픔은 자신의 일부를 죽이고 나서야 비로소 ‘나’로서 발화할 수 있는, 존재하는 모든 ‘화자’들이 느끼는 근원적 비애가 아닐까. 한영원의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한영원은 “건너가면 네가 되어버리고 / 머무르면 내가 되어버리는” 존재의 경계를 덧칠하거나 지워나가며 그만의 독특한 애수를 만들어 낸다. 시인은 ‘나’와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개울이 작기에 건너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플래시 셔터 플래시」).


  한편 시에 있어 ‘나’와의 숨바꼭질, 술래잡기는 익숙한 놀이다. 수많은 ‘나(들)’이 언어의 놀이터를 뛰노는 모습은 그다지 새로운 풍경이 아니다. ‘나’라는 주체가 단일한 존재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존재들이 경합하며 머무르는 처소라는 사실은 적어도 시에서만큼은 낯설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시인의 개성이 드러나는 지점은 그가 만든 놀이의 규칙일 것이다. 한영원은 우선 ‘나(들)’의 이름을 부른다. 몸을 갖지 못한 ‘나(들)’에게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그들을 인식할 수 있고 감각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든다. 시집에 등장하는 ‘나(들)’의 이름은 유예, 한나, 애수, 잔느, 이세벨, 마치, 이치로 이치고, 람다, 이리 등인데, 그들은 주체의 호명에 의해 ‘나’가 아닌 ‘너’가 된다.


두꺼비집을 두 손으로 토닥여 덮었다
이건 수학자의 무덤일 수도 있겠다 네가 말했고
나는 안에 든 것이 궁금했다

삼월에는 처음 본 이름이 많았다
교실 외벽에는 신발 주머니를 걸어야 할 곳이 없었다
너네는 신발 주머니를 어디에 둬야 하는지 어떻게 알아

바다에 간 적도 없는데 몸에서 짠내가 났다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의 이름을 아는 척한다

프랑스에는 유명한 사람의 무덤이 있다더라
누구의 무덤인지도 모르면서 매년 수만 명이 찾는다던데

우리는 두꺼비집을 만들어 연신 두드리며
예수는 어서 나오라고 소리쳤다
누군가 그건 예수의 무덤이 아니라 말했지만

어디서 불어오는 미지근한 흙먼지 바람
이 풍광은 우리 영혼에 늘 있었던

너는 그것과 닮았을 것이다

고개를 자주 두리번거리는 사람
이름은 어떻게 태어나 나의 가죽을 쓰고 걸을까
죽음의 앞과 뒤에는 어떤 공식을 대입하는 게 나을까

내가 쓴 편지를 보여주는 너 때문에
내가 나였음을 믿을 수 없다

네가 쓴 편지를 보면
우리 과거를 믿을 수 없듯이

삼월의 무덤은 동그란 책처럼 보인다
너는 결코 혼자 집필되지 않는다

예수의 무덤일까
아니야 그건 두꺼비집이다

삼월에는 부르는 대로 이름이 생겨났다

-「부르바키」 전문


인용한 시의 화자는 ‘존재’보다 ‘이름’이 먼저라고 생각한다(“이름은 어떻게 태어나 나의 가죽을 쓰고 걸을까”). 예컨대 신발주머니가 놓일 곳은 이름표가 붙은 곳이다. 이름표가 없다면 “신발주머니를 어디에 둬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이렇듯 존재의 형식을 결정하는 이름은 존재의 집이고, 그런 점에서 “교실”과 “무덤”은 상반된 장소다. 교실은 “처음 본 이름이 많”은 공간, 즉 명명할 수 있는 존재들과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는 장소인 반면에, 무덤은 그 안에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지만 무언가를 무어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 없는 공간, 즉 상징계적 규칙과 질서로부터 버려진 장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에 든 것이 궁금”하다고 말하는 화자는 우선 그것들을 호명할 이름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것들이 “우리 영혼에 늘 있었던 존재”임을 깨닫는다. 미지의 존재에게 적극적으로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주체로 하여금 “내가 나였음을 믿을 수 없”게 한다. “결코 혼자 집필되지 않”는 책과 같은 무덤은 주체의 내면에 지어진 “두꺼비집”이기도 하다. ‘나’는 결코 단독으로 집필되지 않는다. 한영원의 시에서는 이름 없는 존재들을 부를수록 ‘나’ 안에 있는 ‘나(들)’도 함께 증식한다.


그런데 왜 하필 무덤일까. 왜 ‘나’가 되지 못한 ‘나(들)’은 무덤 속에 있을까. 그건 ‘나’가 ‘나(들)’을 ‘너’라고 부를 때, ‘나(들)’은 ‘나’가 되지 못한 ‘너’로 의미화되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말해 무덤 속의 ‘나(들)’은 교실 안의 ‘나’가 되지 못한 실패한 존재들이다. ‘나’가 ‘나(들)’을 통합하지 못한 “못다 한 완성”이라면 ‘너’가 된 ‘나(들)’은 애초에 시작조차 하지 못한 존재인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세계의 비밀을 말해 준 채”, “잔혹한 비밀을 예언한 채” 죽는다. “뚜껑도 연 적 없는 계시”(「아그라파」)였던 그들은 ‘나’의 호명과 함께 태어나고 그 즉시 죽는다. 시집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는 이러한 ‘호명의 딜레마’ 때문이다. 한영원의 시적 주체는 ‘나’라는 존재가 수많은 ‘나(들)’의 무덤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수만 마리의 생을 발아래 두었다는 이유로 나는 우울했다”(「약속 없는 세계」)). ‘나’가 잊힌 ‘나(들)’을 발견하는 일은 언제나 뒤늦을 수밖에 없고, 이미 늦어버린 지각생1)에게 슬픔은 선험적일 수밖에 없다. “몇 번째 세계를 반복하고 있는지 모른 채로” 호명과 상실을 반복하는 주체에게 “어떤 이유도 없”(「람다 세계」)는 슬픔은 미리 “녹음된 슬픔”(「자동 피아노」)처럼 벌써 주어져 있다.


그런데 「진세이 이치로」에 등장하는 이치고는 “한 번도 시작하지 않은” 인생, “다시 한 번이라고 / 외칠 수도 없는” 인생을 “오히려 뒤늦게 알아채서” 다행인 기회라고 인식한다. 무덤 안에 있는 ‘나(들)’은 ‘나’가 될 수 있었던(그러나 되지 못했던) 새로운 가능성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영원의 시에서 그러한 가능성은 과거의 시간, 즉 지나간 유년 시절 속에 있다. 앞에서 말했던 “연락 한 통 없이 나를 떠”(「선지자가 키우는 나」)난 선지자는 다름 아닌 유년 시절의 ‘나(들)’이다. 결국 한영원의 숨바꼭질, 술래잡기는 유년으로 소급한다. ‘나’가 되는 싸움에서 이기지 못한 ‘나’가 있는 과거로 방향을 조정한다. 시인은 단일한 ‘나’로의 매끈한 통합이 성장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한 성장이 진정한 ‘나’에 대해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한영원의 시적 주체는 수많은 ‘나(들)’을 누락하고 나서야 진입할 수 있는 어른의 세계를 동경하지 않기에, 그들은 “역방향에 앉”(「약속 없는 세계」)는다. 어른이 되기 위해 통과했던 문, “들어간 사람들은 나오지 않”는다는 문을 반대로 열어젖히며 “문의 저편”(「문의 저편」)으로 넘어간다.


피리 불면 선뜻 따라가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가는 곳이 떠나온 곳의 아류가 아니었으면 했다
그곳에서는 더 멀리 뛰고 더 멀리 날고
밥을 열아홉 끼 먹고 먹은 만큼 사랑해보고 싶었다
여기가 저기를 바라는 대체품이 아니었으면 했다
모험처럼 연애하고 싶었다
연애처럼 모험하고 싶었다
어느 날은 여유로이 풀밭에 누워
어쩌면 그린 듯한 하늘을 손으로 휘휘 젓고
동굴 속 숨겨둔 수많은 아이들을 모두 나의 것으로 삼고 싶었다
우리 사이에 수백 개의 연결고리를 갖고 싶었다
그러나 너희의 유년은
한 번에 한 가지만을 꺼낼 수 있는 입구가 좁은 통인 걸까
그 안에 신이 무엇을 넣었는지는 알 수 없고
내가 너무 어려서 무서워요
어린아이는 말했다
무서워하지 마 너는 커서 나의 연인이 된다
나는 천천히 너에게로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것을 나는 결정했다
왔니? 스스로 귀환하는 나의 참된 아이들아

-「하멜른의 아이들」 전문


  유년으로 소급하는 주체의 모습은 자발적으로 피리 부는 사나이를 쫓는 ‘나’의 이미지로 이어진다. 인용한 시의 화자는 “동굴 속 숨겨둔 수많은 아이들을 모두 나의 것으로 삼고 싶었다”고 말하며, 자신의 과거로 귀환한다. 주지했듯 “한 번에 한 가지만을 꺼낼 수 있는” 문, “입구가 좁은 통”을 통과한 성년은 모두가 자신의 일부를 동굴에 남겨둔 채 떠나온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가는 곳이 떠나온 곳의 아류가 아니”길 바라며, “여기가 저기를 바라는 대체품이 아니”길 바라며, 피리 부는 사나이를 “선뜻 따라” 과거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유년의 ‘나(들)’과 만나 연인이 된다.



  흥미로운 것은 미래에서 온 ‘나’와 과거에서 기다리던 ‘나(들)’의 관계다. ‘나’는 “내가 너무 어려서 무서워요”라고 말하는 아이에게 “무서워하지 마 너는 커서 나의 연인이 된다”고 달랜다. 미래의 ‘나’가 잊지 않고 “천천히 너에게로 걸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의 주체는 미래의 ‘나’고 대상은 과거의 ‘나(들)’인 것일까. 얼핏 그렇게 보이지만 결구의 화자가 아리송하다. “참된 아이들”을 부른다는 점에서 결구의 화자 역시 미래의 ‘나’인 것처럼 보이지만, 미래에서 과거로 “스스로 귀환”한 것도 미래의 ‘나’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결구의 목소리를 과거에서 미래를 기다린 ‘나(들)’의 목소리로도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나’가 되지 못한 ‘나(들)’이 모여 있는 어두운 동굴에서, 주체는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번 마주한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예언자이자 선지자이며, 과거이자 미래다.



빛의 미래에서 무엇을 보고 왔니
나를 보자 민은 물었다

왜 울어? 우리 그렇게 어두워?
민이 다시 물었다

나는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미래의 우리에게 진 거 같아

넘겨본 사진집은 계속해서 동일한 필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언젠가 그 필름이 단종되었을 때
사진가의 마지막을 생각했지만

길을 걷다가 본 잿빛 공터는
누군가에 의해 점유되고 있었다
우리는 점유되는 것과 점유되지 못한 것
둘 중 무엇을 질투할지 얘기하며

엊그제 강가에서 빛무리를 보았다
너울너울 흩어지는 빛은 아라베스크 무늬가 되었다가
그로테스크한 무늬가 되었다가
이내 아름다운 초록빛으로 흩어져버렸다

필름은 채도가 높고 쨍한 색 온 세상의 빛을 가져다 쓴 것만 같이

사진집의 사람들은 온통 젊거나 늙어 있다
너는 양면의 세계가 지속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종말을 다른 세계로의 입구라고 생각하는 너는

네 질투는 조금 더 선한 쪽으로
모두를 한꺼번에 사랑하기 위함인 듯하고

사진가의 사진은 미래가 없이도 지속될 거라고
우리의 사랑하는 마음은 믿어 의심치 않고

그것은 더 나은 방향입니다
빛의 미래에서 본 것은
가끔 진다고 해도 넘어지지 않는 세계의 배면

- 「코다크롬」 전문


   지금까지 살펴봤듯 한영원의 시는 “주광성이 있어 / 끊임없이 빛을 쫓는 / 패러독스 빛”(「서머타임 에이미」)처럼 진정한 ‘나’를 찾는 숨바꼭질, 술래잡기를 멈추지 않는다. 물론 모든 ‘나(들)’이 ‘빛’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용한 시의 ‘민’은 미래를 보고 온 ‘나’에게 ‘우리’의 미래가 어둡냐고 묻는데, ‘나’는 ‘민’에게 “우리는 미래의 우리에게 진 거” 같다고 답한다. 미래는 ‘우리’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 의해 점유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실패한 것일까. ‘민’과 ‘나’는 “점유되는 것과 점유되지 못한 것 / 둘 중 무엇을 질투할지 얘기”하는데, 힌트가 되는 것은 “너는 양면의 세계가 지속되기를 바라고 있다”는 구절이다. 다시 말해 현상된 사진 속 사람들은 “온통 젊거나 늙어 있”지만, 현상되지 않은 필름 속 ‘우리’는 젊지도 늙지도 않은 채 “세계의 배면”을 책임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진가의 사진”이 “미래가 없이도 지속”되듯이, 단종되어 버린 필름 속 ‘우리’도, 현상되지 않은 필름 속 ‘우리’도, “믿어 의심치 않”을 만큼의 “사랑”을 지켜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실패가 아니다.


  한영원의 시는 ‘나’의 빛과 어둠, 둘 중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는다. ‘나’는 ‘나(들)’을 끝없이 유예하는 한에서만 가능하지만, 유예된 ‘나(들)’은 현상되지 않은 필름으로서 거꾸로 ‘나’의 현재와 미래를 재구성한다. 그렇게 모든 ‘나(들)’은 ‘나’와의 숨바꼭질, 술래잡기 속에서 유일하고 영원하다. 아무래도 “이 현상은 끝나지 않는다”(「암실」).


  추천시 : 「하멜른의 아이들」, 「유예와 나」(68쪽), 「코다크롬」

  • 1)이번 시집에서 자신이 ‘지각생’이라고 느끼는 주체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완성하고 깨닫곤 한다”(「피카레스크」), “잔느는 먼저 도착해 있기로 했다 / 내가 늦은 셈이다 새학기부터”(「삼월」), “우리에게 지도를 그리라고 시킨 이는 이미 죽었다고 한다”(「시네라리아」) 등이 대표적인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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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포지션 이은란 정은기우리는 적이 되기 전까지만 사랑을 한다얼굴기호주체 2025
최다영 기계기담(機械奇談)

1. 머리 셋 달린 여우 기이한 짧은 이야기를 기담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여러 설화와 전래동화의 모티프를 차용하거나 기이한 요소를 적극 활용하는 정우신의 이번 신작시들은 언뜻 기담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1) 제주설화 삼두구미 본풀이의 모티프를 활용한 「삼두구미(三頭九尾)」는 이러한 신작시들의 입구가 되어주는 시처럼 보인다. ‘삼두구미’는 머리 셋에 꼬리가 아홉 개 달렸으며 시신을 파먹는 늙은 땅귀신 요괴를 가리킨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삼두구미는 가난한 나무꾼의 세 딸을 돈을 주고 데려와 사람 다리를 주면서 먹도록 하는데, 먹지 않고 거짓말을 한 첫째와 둘째는 그 사실을 들켜서 죽게 되지만, 막내는 다리를 불에 태운 뒤 그 가루를 보따리로 싸서 자신의 배에 묶어놔 위기를 모면한다. 이후 삼두구미의 아내가 된 막내는 달걀과 무쇠, 버드나무로 괴물을 퇴치한 후 그 시신을 가루로 만들어 바람에 날려 보낸다.2) 무엇보다 「삼두구미」에서 주목되는 건 이러한 삼인 분할의 모티프가 시의 형식과도 긴밀히 이어진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삼두구미의 머리가 셋으로 나뉘어 있듯, 발화자 ‘나’ 역시도 셋으로 분할되어 존재한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삼두구미가 삼킨 두 딸이 각각 머리 하나씩을 차지한 형태로 본래의 삼두구미와 합일되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설화 속에서는 첫째와 둘째가 백골만 남았을지언정, 그 혼이 삼두구미의 육신과 합쳐진 상태로 존재한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처럼 온전히 분리되지도 온전히 합일되지도 않은 채 존재 양태의 변모를 거듭하는 삼두구미의 형상은 발화 측면에도 반영되어 있다. 光. 나는 나를 찾다가 튀어나왔습니다. 滅. 나를 구하다가 죽었습니다. 歸. 나는 편리합니다. (…) 歸. 네모 방을 빙글빙글 돕니다. 光. 나만 네모 방을 돌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滅. 동그라미가 돌아갑니다. (…) 光. 나는 滅과 歸로 쏙 들어갔습니다. 滅. 나는 나를 말려놓고 공중제비를 돕니다. 歸. 입속의 꼬리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 삼두구미(三頭九尾) 중에서 각 행 앞에 붙은 한자들은 光(광), 滅(멸), 歸(귀)로서, 발화의 주인인 삼두구미의 세 머리를 지칭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인의 산문에 따르면 이 한자들은 각각 ‘발광’, ‘자살’, ‘귀의’를 의미하며, “비극의 삼각형”을 형성하는 꼭짓점이라 한다.3) 그렇다면 이 비극의 삼각형은 미쳐서 죽었다가 원점으로 돌아가 미쳐서 죽기를 다시 반복하는 일련의 순환을 표상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관련해 이들이 “네모 방을 빙글빙글” 도는 모습은 세 사람이 방의 각 꼭짓점에서 출발해 일정한 방향으로 도는 귀신 술래잡기를 연상케 하는데, 셋만으로는 게임을 끝낼 수 없다는 점도 이러한 무한 순환의 굴레를 암시한다. 한편 이처럼 각 행을 서로 다른 머리들의 교차하는 발화로 읽을 때, “빚이 무거워 나는 죽 늘어졌”다는 목소리에서 ‘빚’은 팔려가는 조건으로 받은 돈을 지시하므로, ‘滅’에 해당하는 목소리의 주인이 두 딸 중 하나일 것임을 알게 한다. 맨 마지막 연은 둔갑의 단계를 보여주는데 ‘光’이 ‘滅’ 속에 숨고 ‘滅’은 ‘歸’ 안에 숨게 되므로, “입속의 꼬리가 움직이”는 건 세 머리가 마트료시카처럼 합쳐진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이들은 아침이 되면 하나로 존재하다가 밤이 되면 합일체 속에서 차례로 튀어나와 셋으로 분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첫 연에서 “나는 나를 찾다가 튀어나왔”다는 그 장소는 바로 삼두구미 자신의 몸이라 할 수 있다. 또 “오늘도 아침이 왔”다는 언급에서 암시되듯, 이러한 루틴은 정확하게 설정된 기계처럼 끝을 모르고 계속 반복될 것이 예정되어 있다. 물론 복제, 클론, 리플리컨트 모티프와 순환의 질서는 정우신의 시 세계에서 빈번히 다뤄져왔다. 특별히 양순모는 정우신의 시에서 활용되는 반복 장치가 “고통과 폭력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반복이 아니라, 거듭 그것들로 회귀하기 위한 반복”4)임을 포착한 바 있다. 요컨대 정우신의 화자들은 불행에 중독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정우신의 시에서 미분 작용을 수행하는 존재들에 주목할 것을 청하는데, 정우신에게 “미분은 ‘입체’에서 다시금 ‘육체’로 재탄생하는 과정의 ‘조건’이자 동시에 그 ‘방법론’”5)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이를 미루어볼 때, 삼두구미로 대표되는 육체 분할의 반복 양상은 정우신의 시 세계를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다중적으로 존재하는 ‘나’에 대한 상상, 삼각형의 꼭짓점을 형성하고서 자동 반복되는 순환의 되풀이를 설정하는 구도는 다른 신작시에서도 적지 않게 발견되는 것 같다. 그런데 동일한 개체의 복제, 일정한 순환 피드백의 반복, 설정된 입력값에 기반해 출력물을 산출하는 성질은 무엇보다도 기계의 속성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세계를 기계기담이라 명명하고서 다른 시들을 더 따라가보자. 2. she knows it's too late as we're walking on by6) 「샐리」에서도 ‘샐리’의 리플리컨트들이라 할 수 있는 샐리2, 3, 4가 등장한다. 심지어 “지하로 내려”가는 동안 “층층이 샐리가 서 있다”는 언급을 통해 더 많은 복제 샐리들, n명의 샐리들이 같은 건물에 존재하고 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클론 모티프는 “손톱을 모은다”는 언급과 만나며 자연히 쥐둔갑 설화를 떠올리게 한다. 쥐가 손톱을 먹으면 손톱의 주인과 동일한 모습으로 둔갑한다는 해당 전래동화를 따라, 이 복제 샐리들은 샐리가 자신의 손톱을 통해 증식시킨 인물들이라 추정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의 세부 정황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약을 타러 지하로 내려간다”는 언급을 통해 극도로 통제된 병동이 배경인 건 아닐까 추정해볼 수 있을 뿐이다. 샐리는 매일 볼펜을 날카롭게 만드는 일에 몰두하는데, 샐리2가 그 볼펜을 빌려 교정기를 떼어내고는 떼어낸 교정기를 뒤꿈치에 찔러넣는다. 뒤꿈치를 찌르는 일만이 목적이었다면 날카로워진 볼펜으로 해도 되었겠지만, 반드시 뜯어낸 교정기여야만 했다는 점에서 교정기를 뒤꿈치에 밀어 넣는 행위가 중요한 목적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왜 이런 기행을 하는 것일까. 마지막 연에서 샐리가 손톱을 “아물어가는 곳마다/힘껏 밀어 넣는” 유사한 이미지를 통해 유추해보건대, 이 손톱 둔갑에는 기한이 있으며 기한이 다하면 살이 아물어버림과 동시에 둔갑 상태가 끝나버리는 것 같다. 그래서 샐리는 리플리컨트들의 수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정기적으로 손톱을 충전해주는 것이 아닐까. 그럴 경우 샐리2가 교정기를 뒤꿈치에 찔러넣는 이유는 아물지 않는 상태를 지속하려는 다른 방편으로도, 혹은 뒤꿈치가 아물지 않은 것처럼 보이도록 하여 손톱을 더 보충하지 않도록 유도하려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후자의 해석을 따른다면 이 리플리컨트는 왜 생을 지속하고 싶어하지 않는 걸까. 촘촘한 감시망과 통제를 견디며 갇혀 사는 삶, “I’m free to be whatever I/Whatever I choose”가 불가능한 일상에 일찍이 진절머리가 난 걸까. 그런가 하면 비상구에서 다른 샐리들을 기다리는 샐리의 모습은 탈옥을 계획하는 수감자를 연상케 하는 면이 있다. 어떤 방과 “다음 방”에서 “15분과 30분”간 이루어지는 일정한 루틴을 매일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샐리는 그보다 더한 “한 시간과 세 시간도 버틸 수 있다”고 말한다. 인내심 강한 샐리는 “샐리3과 샐리4가 계단에서 내려오기를” 언제까지나 기다리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말 그대로, “Sally can wait”. 그러나 기다릴 수 있는 것과 너무 늦어버린 것은 다르다. 시 전반에 드리운 디스토피아적 정조에 기대볼 때 샐리에게는 그러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만 같고, 어쩌면 샐리도 그걸 안다. 3. 버들치와 모자 한편 이러한 복제 모티프는 환유의 활용과 더불어 더욱 생동감 있는 시적 효과를 얻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버들치」를 들 수 있다. 이 시에서 ‘버들치’도 크게 세 갈래로 구분할 수 있는데, ①실제 어류로서 버들치를 지시하거나 ②사람의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비유하거나 ③그러한 마른 외양과 피로한 행색으로 인해 버들치에 빗대어지는 사람들을 환유적으로 지시한다. 손가락이라는 원관념의 활용도 두드러지는 가운데, 환유적 의미의 버들치와 보조관념으로서의 버들치가 다채롭게 교차되며 삼각형의 각 변을 오가는 것이다. 가령 “버들치는 렌즈를 닦는다”는 문장에서 버들치는 손가락이나 사람으로 읽을 수 있으며, “버들치는 검수원을 만나기 전 버들치를 먹는다”고 할 때 앞의 버들치는 사람을 의미하지만 뒤의 버들치는 조리된 생선을 의미한다. 특별히 사람으로서의 버들치는 “버들치와 대화한다”는 언급에서 암시되듯, 어느 개인의 독자적인 속성과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니라 고단한 일상을 겪는 여느 서민들을 일괄적으로 아우르는 것처럼 보인다. “십분마다 뛰쳐나가고 두 시간씩 이동”했다가 “종점에서 졸고” “물비린내 가득한 방으로 돌아”오는 피로한 출퇴근의 루틴은 이를 대표한다. 방에서 방으로 복귀하는 이러한 고단한 루틴을 ‘n번째 버들치’가 차례로 이어받으며 “이십 년”에 걸쳐 수행하는 모습은 각 인간의 고유한 개체성이 소거되고 루틴을 주인 삼아 루틴의 종속물로 전락하는, 마치 기계의 소모품과도 같은 현대 노동자들의 초상을 반영한다. 여기에는 하급 노동자 일반이 언제든 대체 가능한 것으로 치부되는 사회에서 서로는 서로의 리플리컨트나 다름없다는 의식이 내포되어 있다. 무형의 루틴이 지키고 영속해야 할 최우선순위로 자리하고 있는 가운데, 임시직 버들치로 소모되다 퇴장하는 이들은 “자신이 몇 번째인지 구분”할 수조차 없다. 그렇기에 버들치가 “상점 유리나 거울에 난 손자국을 보면 견디기 힘들”어지는 이유는 다른 버들치들의 존재를 상기하고 그들의 고통을 제 것처럼 느껴 공감하기 때문이다. 이십 년이 한여름의 댐처럼 단번에 쏟아질 때 버들치는 자신이 몇 번째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한강대교 펜스를 붙잡는 동안 손가락 사이로 버들치가 흘러나왔다 ― 「버들치」 중에서 이와 더불어 “한강대교 펜스를 붙잡는” 모습은 익숙한 재현 문법을 따라 죽음에 대한 지향을 연상하게 하는데, “손가락 사이로 버들치가 흘러나”오는 환상적인 결말은 그간 주어 자리에 놓여 있던 버들치 대신, 사람의 형태를 그려보게 한다. 내내 버들치가 손가락을 가진 것 같은 이미지를 그리도록 하다가 마지막 행에서는 사람의 손가락에서 버들치가 흘러나오도록 하여 전도된 이미지를 확보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략된 주어의 자리에는 자연히 사람이 놓이게 되면서 익명의 군중이나 노동 부품으로서의 ‘n번째 버들치’가 아니라 한 개인을 상상하도록 이끈다. 버들치가 된 인간을 버들치로만 남겨두지 않고자 하는 것이다. 한편 「버들치」에서처럼 환유의 대상으로 전도가 일어나는 양상은 「진」에서도 발견된다. 이 시는 ‘진’이 커다란 “모자를 쓰고” “어떤 얼굴을 기다”리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그의 루틴은 휴일마다 “오렌지 스웨터를 입고/에코백을 들고 외출”하는 것이다. 오렌지빛과 강렬한 태양빛의 색채적 유사성으로, 빛이 내리쬐는 모습은 “햇살의 소매가 흘러내”리는 것에 비유된다. 특별히 주목되는 건 모자를 쓰고 있던 진이 결말부에서는 “누군가의 머리 위에 얹”히며 모자가 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진이 쓰고 있던 모자는 진이 된다. 「삼두구미」에서 자신이 접촉한 사물의 일부가 되는 상상력이 나타났다면 여기서는 더 나아가 접촉한 사물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1연에서 “얼굴을 기다”리는 이유는 자기가 얹힐 머리를 찾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가방 안에 수북한 “주인 없는/머리카락” 다발 또한 모자와 함께 달라붙을 머리카락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4. 실종된 빛 앞서 이번 신작시의 주된 특징 중 하나로 삼각형의 꼭짓점을 주축으로 순환의 되풀이가 자동 반복되는 양상을 언급했는데, 「파동 일기」에서도 “나의 꼭짓점으로/모이는 어둠”이 거론된다. 구체적으로 여기서 ‘비극의 삼각형’은 빛과 어둠, 화자를 각각 세 꼭짓점에 두고서 이들의 관계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그간 정우신의 시에서 빛은 “어둠의 긴 머리카락을 뒤집어쓰고 개미를 주워 먹는”7) 것과 같이 포식을 즐기는 유생물, 특별히 “뱀처럼/별처럼 (…) 움직임을 따라 하며 우리를 조롱하”8)는 교활한 모습으로 자주 그려지곤 했다. 그러나 이번 신작시에서는 가시성을 중심으로 하여 빛과 어둠의 고유한 속성에 더욱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야가 점점 줄어든다 태양의 샌드백 모래사장에 빛을 줄줄 흘리고 한발 앞에 서 있던 빛이 안면에서 일렁인다 (…) 헛디디고 데이고 나의 꼭짓점으로 모이는 어둠 (…) 가스불 앞에 서면 이마 앞의 어둠이 부르르 떤다 ― 「파동 일기」 중에서 하강 이미지가 두드러지는 가운데, 「파동 일기」는 시력이 점차 악화되고 있는 화자에 의해 발화된다.‘일기’를 표방하고 있는 만큼, 이 시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日부터 土까지 이어지는 요일에 따른 분절이다. 각 요일에 해당하는 내용을 그날의 일기로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독특하게도 목요일에 해당하는 일기에는 木 대신 目이 ‘목’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는데, 이는 시각과 관련된 빛의 속성이 이 시에서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월요일에 그는 마치 “샌드백”이 찢어져 모래가 쏟아지는 것과 같이 강하게 내리쬐는 “태양”을 느낀다. 그는 “한발 앞에” 존재하는 빛을 그 온기와 일렁임으로 감각하지만 빛을 선명하게 바라볼 수는 없다. 또 그는 “벽에 머리를 박”기도 하고, 불을 켜려다 “반찬통”을 넘어뜨리기도 한다.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에게 “모든 활자”는 “재가 되어”간다. “헛디디고/데이”는 일은 그의 일상이 되며, 눈과 눈 사이에 형성되어야 할 한 소실점인 “꼭짓점”에는 빛의 상이 형성되는 대신 “어둠”이 모인다. 토요일에 그는 “가스불”바로 앞에서도 가스불의 외양을 보지 못하고 가스불에 무언가가 끓는 것을 눈앞의 어둠이 떨리는 것을 통해 감지한다. 일요일에 “안면에서 일렁”이던 것이 빛이었다면 이제는 어둠이 그 자리에서 일렁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실명에 가까워지는 일상은 일기라는 제목과 요일 표기에서 암시되듯이 되풀이되며 더욱 심화될 것임을 추정해볼 수 있다. 1) 근작시인 「전자 늑대」도 빨간 모자와 늑대 동화를 차용하고 있다. 2) 이러한 삼두구미 모티프는 정우신의 이전 시에서도 발견되는 것 같다. 복제인간 이미지를 주로 활용하는 그에게 자가복제적 키메라와 같은 형상의 삼두구미는 매력적인 소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이들에게 남은 다리를 나눠 줬어요. 어떤 끝이 뒤돌아 나를 탄생시켜요. 삭제하고 싶니. 너의 몸. 너의 의식. 이리로 오렴. 바깥으로 오렴. 여기에는 너의 불행들이 있다. 태워 주마.” 정우신, 「주술」, 『비금속 소년』, 파란, 2018. 3) 정우신, 「그것과 그것들」. 4) 양순모 해설, 「달리기, 비극적」 『미분과 달리기』, 파란, 2024, 128쪽. 5) 양순모, 같은 글, 132쪽. 6) Oasis, 중에서 7) 정우신, 「사제의 뜰」, 『비금속 소년』. 8) 정우신, 「네온사인」, 『홍콩 정원』, 현대문학, 2021.

포지션 최다영 정우신시집 2025
김수이 ‘나’를 벗어나려는 존재들의 모험

1. 비대한 자아와의 결별 스티브 테일러Steve Taylor에 의하면, 현재 인류사회에 넘쳐나는 광기와 폭력은 6천 년 전부터 진행된 인류의 ‘타락The Fall’이라는 사건의 산물이다. ‘타락’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자연/우주/공동체 및 자기 자신과도 분리된 자아ego가 폭발적으로 비대해진 데 따른 인류의 총체적인 퇴보를 뜻한다. 타락의 시대는 전쟁, 가부장제, 사회적 불평등을 특징으로 하는데, 테일러는 지난 6천 년간 “정신분열증과 같은 악몽의 시대”1)를 살아온 인류가 마침내 깨어나고 있다고 진단한다. 한 사람의 영적 각성은 곧 인류 의식의 진화이기에, 개개인의 깨어남(영적 수행)은 인류가 타락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 잃어버린 전체성을 회복하고 멸절의 위기를 극복할 현실적이면서도 근본적인 길이 된다는 것이다.2) 현대인의 영적 수행은 종교적인 것에 한정되지 않으며, 명상의 대중화 등을 통해 사회‧문화적으로 확산하고 있는 자아 해체와 의식 정화의 행위를 아우른다. 다시 말해, 6천 년간 지속된 ‘자아폭발Ego Explosion’과 ‘타락’의 인류 역사는 지금 종말을 향한 ‘붕괴’와 회복을 향한 ‘정화’의 갈림길에 있으며, 먼저 깨어난 사람들은 기형의 비대한 자아를 해체하면서 우주의 전체성 및 인류의 전일성을 다시 살아내고 있다.3) 테일러는 타락의 시대 속에서도 ‘타락 초월 시대’가 열렸으며, 그 근거로 기원전 1천 년경부터 다양한 영적 전통과 종교가 추구한 ‘자아인식의 초월’과 18세기 후반부터 문학이 촉발한 ‘새로운 공감의식의 확산’을 제시한다.4) 테일러의 거대서사를 다소 길게 언급하며 글을 시작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문학과 예술은 ‘타락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함께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의 세계를 기록하고 보존하고 애도해 온 인류 공통의 장소이며 장치에 속한다. 둘째, 2000년대 이후 우리 시에 활발하게 나타난 서정적 자아 ‘나’의 권위 해체, 정체성(‘얼굴’과 ‘이름’으로 주로 표상된)과 인칭들의 경계 해체 및 유동적 흐름, 인간과 비인간의 차등적 지위 해제 등은 ‘자아폭발’의 인류사적 사태에서 탈주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최근 우리시에서 시적 자아가 타자들 속으로 스며들고 흩어지며, 유령, 영혼, 천사, 좀비, 흡혈귀, 귀신, 신 등의 실체 없는 존재가 자아 혹은 주체(의 일부)를 대체하고, 언어화할 수 없는 침묵과 미묘한 기류들이 기록되는 현상 등은 시가 자아의 구축이 아니라 오히려 자아 이탈과 초월의 장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자아를 관찰하고 해체하는 과정은 ‘나’에 관해 계속 알아차림awareness을 행하는 명상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명상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가장 중요한 것을 해내는”5) 일로, 인류 역사에서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이 종교를 초월해 활용해 온 자기 수행의 방편이다. 김건영, 김선오, 나금숙의 신작 시집에는 사회․현실에 맞춰 형성되고 자동화된 자아인 ‘나ego’를 벗어나, 근원적인 자아인 ‘나self’를 향해 나아가려는 움직임이 깃들어 있다. 심리학자 다니엘 카너먼Daniel Kahneman의 분류에 따르면, 나ego는 끊임없이 이합집산하는 경험자아와 기억자아에, 나self는 늘 그대로 있는 배경자아에 속한다. “생각, 감정, 경험, 기억, 행위 등은 모두 경험자아와 기억자아가 일으키는 일종의 소음”으로, 이 모든 소음이 사라진 곳에서 “고요함”으로 떠오르는 배경자아는 “텅 비어 있고 고요하”며 “평온하고 온전하다”.6) 이 글의 초점은 세 시인의 새 시집에 담긴, 경험자아와 기억자아가 일으키는 분란 속에서 배경자아, 즉 텅 빈 본래의 자아를 탈환하기 위한 (무)의식적 노력을 살펴보는 데 있다. 1. ‘나’는 ‘귀신’이 되어가는 중 – 김건영 시집 『널』, 파란, 2024. 김건영의 두 번째 시집 『널』에는 ‘귀신’과 그 유사 존재들인 (잡)신, 괴물, 천사 등이 계속 출몰하며 ‘나’를 분해한다. “신 받드는 모험이 가득”(「혼자」)한 이 시집에서 ‘귀신’은 비(非)인간이라기보다는 인간의 한 유형이거나 가능태이며, 더 나아가 궁극의 모습을 의미한다. 압도적인 유머 감각과 비판의식을 지닌 김건영에게 ‘귀신’은 인간보다 더 인간의 본질에 걸맞은데, 귀신이야말로 오롯이 살아 있고 ‘삶’을 제대로 논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기 귀신이 살아 있다// (…) //산 사람들은 오답만을 적어내고 귀신들만 삶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아무는 섬/그리고 나선」). 즉 김건영의 ‘귀신’은 “산 사람들”을 대신해 ‘살아 있음’과 ‘사람’의 역할을 대신한다. 살아 있지만 죽은 인간인 ‘나’에게서 죽었는데 아픈, 죽어서도 계속 살아 있는 “남은 사람”을 모은 것이 김건영의 ‘귀신’이다. “살아 있지만 죽었고/죽었는데 아프다/내게 남은 사람을 다 줄게”(「동충하초」). 주체적인 선택을 통해 시인이 된 김건영이 “그의 실존을 걸고” “기어코 귀신으로 거듭난다”7)고 할 때, 김건영은 비인간이나 탈현실의 자리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사람’의 텅 빈 운동성 자체가 되어 현실 속에 어떻게든 자리를 잡는 중에 있다. 이 자리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실체가 없으며, 언어화할 수 없다. 없는, 무효의, 가치 없는, 제로의, 존재하지 않는, 특징이 없는 등을 뜻하는 ‘null’(「널」)은 이 ‘없(음으로써 있)는’ 자리를 지칭하고 소환하는 가장 덜 언어화된 언어다. 주문이나 암호에 가까운. 김건영의 ‘null’은 이 세계에 없는 형상으로 존재하는 극히 희박한 형태의 인간이자, 나 아닌 나 혹은 나 이상의 나로 살아가려는 ‘나’인 ‘귀신’의 언어를 표상한다. “현실로부터의 유리감과 유리처럼 투명한 언어 사이에 이격이 없”는 “이 시집은 귀신의 집이다.”(시집 ‘표4’ 중에서) 조강석은 김건영 시의 (비)현실성과 그 언어의 특징을 적확하게 짚어낸다. 김건영은 ‘null’을 ‘널’이라고 한글로도 쓴다. ‘널’은 null이자, ‘너’의 목적격인 ‘너를’의 준말로도 읽힌다. 이 시집 전체에 걸쳐 김건영이 집요하게 서술하는,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세계에서 형성된 나-인간을 분해해 나-귀신이 되려는 ‘나’에게 ‘null(없음, 무효)’은 ‘널(너를)’ 향한 지향성과 다른 것일 수 없다. 나를 해체하는 ‘나’는 ‘너’를 이미 포함하고 있으며, 계속 추구하는 중에 있다. 이 점에서 김건영이 여러 텍스트를 경유한 만화방창 스타일의 현란한 언어유희를 통해 교란하는 경계들은 현실의 부정성과 그로부터의 탈주의 가능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사유(思惟)와 사유(私有), 전세계(全世界)와 전세계(傳貰界), 제발과 개발, 잡놈과 job놈, 이미 지옥과 Image옥(獄), 김일성과 기밀성 등의 차이가 사라져가는 세계에서 ‘나’와 ‘너’는 각기 자신을 분해하거나 현실에 부정당함으로써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로 존재할 수 있고, 서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전철(轉轍)을 밟으며/우리는 서로 미지의 귀신이 된다”(「디지털 미지의 시티」). 김건영에게 귀신-되기는 “Image옥(獄)”(「짐(鴆) – Gym, 그리고 짐」)인 세계에 대한 “나의 무력시위(無力示威)”(「한국문학 망해라」)를, 그러니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한 시인이자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나’의 절망과 분노, 비판과 저항을 압축한다. “예언가와 애연가의 사이에서 언어를 빌어 언어로 빌어먹는 무전부주의자(無錢不注意者)”(「차용가」)이며, “모기지(Mortgage)가 길어 슬픈 짐승”(「득음에 이르는 계절」)인 ‘나’에게 ‘귀신’은 인간임을 부정당하며 제발 ‘사람’으로 살고 싶은 희망을 담아 개발한 최후의 존재 방식이다. “나의 장래 희망은 귀신입니다/시인은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으면 부모님의 등골을 빨아 최선을 다해 가난해지는 사람이야 도착증에 걸린 귀신이야”(「빛이 사라지면 너에게 갈게 – 빌리지」). “항복이 가득한 집 나는 귀신을 들이마시고 내뱉는다 사후 겸직은 안 되는 겁니까 나는 귀신으로 살고 싶습니다”(「사후의 뱀」). 이 희망과 “믿음으로 간신히 우리가 인간을 견딜” 때, 귀신은 “천사의 얼굴”(「믿음-리듬」)을 하고 나타나기도 한다. 김건영에게 귀신-되기는 ‘시-쓰기’의 동의어이기도 하다. 이 시집의 곳곳에서 들려오는, ‘나’를 지우고 부정하는 말들은 ‘나’의 축소가 아닌 확장적 해소를 향해 흐르는데, 김건영이 쓴 시 역시 마찬가지다. 가령, “내가 바라는 세계는 만신창이다”(「남의 금산」)라는 시구에서 만신창이는 ‘滿身瘡痍’보다는 수많은 (귀)신들이 모여 다른 세계를 꽃피우는 ‘萬神暢異’로 다가온다. 김건영은 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세계에서 형성된 ‘나’를 버리고 비움으로써 그곳에 ‘너’와 ‘우리’가 들어설 자리를 만든다. “이방(異邦)에서 나는 계속 혼자서 같이 있었다 이 방은 나보다 작고 우리보다 크다”(「키메라 루시다」). ‘나’가 ‘우리’보다 큰 현대사회의 현실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방(異邦)에서 수많은 ‘나’들이 “계속 혼자서 같이 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자아 해체의 존재론적 투쟁을 통해 현대사회에 대한 재구성의 열망을 피력하는 김건영의 시는 각자가 행하는 “탕진”(「Null」)에 가까운 ‘나’의 해체가 그 유일한 방법일 수 있음을 전파한다. 2. “자꾸 내가 되려”는 나, 자동화한 자아에서 벗어나기 - 김선오, 『싱코페이션』, 아시아, 2024. 김선오는 세 번째 시집 『싱코페이션』에서 ‘나’로 살아가는 일의 수고로움을 토로한다. 김선오게 ‘나’라는 자아는 삶의 흐름을 방해하는 성가신 장애물이나,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지는 않은 잉여로 인식된다. “나는 자꾸 내가 되려고 해서 번거로웠다”(동명의 시의 제목)라고 김선오는 고백하거니와, 이 시집 전반에 걸쳐 그는 거추장스러운 자아 ‘나’를 처리하기 위한 작업에 몰두한다. 김선오는 먼저 ‘나’의 실상을 깊이 들여다보는데, 그가 시집의 핵심 서술어로 삼은 ‘보다’는 단순한 응시보다는 고요한 마음으로 행하는 관조와 통찰의 성격을 띤다. 김선오의 ‘보다’는 ‘명상’의 행위를 직간접적으로 반영한다. 이 시집 전반에 감도는 고요와 침묵, 잔잔하고 느린 목소리로 이어지는 말들, 존재와 사물들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감지하는 장면들은 명상의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예컨대, 시 「나는 자꾸 내가 되려고 해서 번거로웠다」에서 ‘나’는 “숨을 느리게 쉬어야 오래 살 수 있어요.”라는 조언을 들으며 “숨 쉬는 법”을 연습하는데, 이는 자신의 들숨과 날숨을 끊임없이 알아차리는 호흡 명상을 차용한 것이다. “이렇게. 새를 펼쳐보기로 했다”라는 시의 첫 부분에서, ‘내’가 숨을 천천히 쉬면서 “펼쳐보”는 ‘새’는 ‘나’의 내면세계이자 그리로 들어가는 방편의 기능도 겸한다. 알다시피 ‘새’는 김선오의 이전 시집부터 등장한 인간과 동물의 논바이너리(non-binary) 캐릭터의 이름으로, ‘나’의 친밀한 타자와 다른 자아 및 내면세계 등을 함축한 다의적인 상징이다. 김선오는 ‘새’와 ‘나’가 “자신의 시체”를 지닌 존재임을 몇몇 시에서 반복해서 강조하는데, 이 ‘시체’가 ‘새’와 ‘나’가 내적 성찰을 통해 마주한 자아(의 일부)의 죽음/주검임은 말할 것이 없다. 시 「미학적 선택으로서의 경계」에서 김선오는 “새와 나”가 다르면서 같은 존재이며, 기존의 분류 체계에서 벗어난 복수성의 존재(‘They’라고 부를 수 있는)임을 명시한다. “새는 유령도 좀비도 아니었고 그냥 자기 시체를 갖고 있는 새”였고, ‘새’의 “시체는 저 자신이기도 하”며, ‘새’는 “새만의 무인도”에 “자신의 시체를 오백 구쯤 펼쳐놓았을지도 모른다”. 김선오는 사람들이 “새와 나”의 공동 명칭으로 부르는 ‘They’를, 생물학적 성의 논바이너리를 넘어 유령과 좀비, 인간과 비인간, 궁극적으로는 “삶과 죽음 사이의 논바이너리”로 규정한다. “살아 있는 몸과 죽어 있는 몸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은 ‘나’를 성찰하고 정화하려는 자아가 처한 곤경으로, 김선오에게 이는 가장 중요한 시적 과제를 이룬다. 명상의 과정을 매우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시도 있다. 시 「아주 조금의 숲」은 명상 속에서 떠오른 기억과 감각, 상상들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이 시는 “너는 눈을 감고 있다”라는 문장을 수십 번 반복하면서 ‘너’가 보는 것들을 찬찬히 묘사하다가, “너는 눈을 뜬다. 집은 고요하다.”라고 마무리함으로써 ‘너’의 행위가 명상임을 분명히 한다.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너는 네가 아직 너로 결정되기 이전의 만남들을 본다. (…)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너는 너의 가족들이 살아났다가 죽어가는 과정을 본다. (…)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너는 너의 과거와 너의 미래가 모두 이 숲에 속해 있음을 본다.” 탄생 이전과 소멸, 삶과 죽음, 과거와 미래 등이 분리 없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나무가 아닌) “숲”을 보는 ‘너’는 경험자아나 기억자아가 아닌 배경자아라고 할 수 있다. 김선오의 시에서 명상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며, 사물도 인간과 똑같이 명상을 한다. “나무가 의자와 마주한다/자신의 미래를 내려다보듯이// (…) //의자가 나무와 마주한다/자신의 기억을 올려다보듯이”(「밝은 언덕의 물병」). 이 시집에서 김선오는 ‘나’로부터 물러나 자신의 모든 기억과 죽음마저 또렷이 지켜보면서, 길이에 상관없이 거의 모든 시에 밀도 높은 고요가 흐르게 한다. 시집의 제목으로 쓰인, 센박과 여린박의 위치가 바뀌는 당김음을 뜻하는 ‘싱코페이션’은 눈에 보이는 현실과 보이지 않는 내면, 겉으로 드러나 활개치는 자아와 존재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자아의 위치를 계속 역전하는 김선오의 시-명상의 리듬이라고 할 수 있다. 자아의 실상을 바로보고자 하는 자, 명상을 하려는 자는 실은 삶의 고통에 하는 유한한 존재이다. 김선오의 새 시집은 헛된 삶의 고통에 허우적거리는 허구적 자아의 곤경을 이렇게 정리한다. “이게 아니면 달리 무슨 삶이 있겠어.” 이에 덧붙이는 말. “그곳에는 천사가, 한쪽 눈을 감은 천사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약하고 어수선한 삶」) “한쪽 눈을 감은 천사”는 텅 빈 고요 자체인 배경자아로 돌아가려는 김선오의 현 상황을 절묘하게 이미지화한다. 3. ‘나’를 덜어낸 만큼 사랑할 수 있어요 - 나금숙, 『사과나무 아래서 그대는 나를 깨웠네』, 천년의시작, 2024. 나금숙의 새 시집 『사과나무 아래서 그대는 나를 깨웠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영원한 사랑을 꿈꾸는 ‘나’의 ‘영혼’이다. 영혼을 만물의 본질로 보는 나금숙은 영적인 존재로서 살고 죽고 시를 쓰기를 소망한다. 인간은, 그중에서도 시인은 영(혼의 본)성을 잘 갈무리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현실화해야 할 아름다운 의무를 갖고 있다. 그런데 영적 진화를 추구하는 나금숙의 시가 개인의 영적 탐구나 종교적 테두리에 갇히지 않는 것은 그가 지닌 열린 영혼관에 기인한다. 나금숙이 보기에 ‘나’의 영혼은 ‘나’만의 것이 아니며, 영원한 시간과 무한한 우주 전체에 이미-내내 귀속되어 있는 전체성(의 조각)이다. 나금숙이 15년 만에 펴낸 세 번째 시집에 “어떤 시적 정신의 여정이 만들어 낸 드라마”8)가 내재하며, 죽음을 통과한 신성의 현현이 그 핵심이라는 탁월한 해석에 조금 부연할 필요가 여기서 생긴다. 나금숙 시에 드리워진 신성은 죽음과도 관련되어 있지만, 삶과 죽음을 끊임없이 겪고 내면화하며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을 본질로 하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현재진행형이자 영원한 것이며, 사랑하는 이들이 만나지 못해도 이별하는 것이 불가능한 무조건적 사랑이다. “만물이 서로를 밀고 당기는 이 순간”(생일), “더 이상 만나지 못해도 영원히 만나고 있는/호수의 시간”(「사랑 이후의 헤일로」), “육체가 없어도 남는 영혼”과 “사랑”(「자이르」)이 맞이하는 “모든 변신을 사랑하”(무거운 연기)는 ‘나’에게는 “내 사랑 알아보는 것이 생의 전부”(「우연을 담는 컵」)가 된다. 우주의 본성이 사랑이라면, 우주의 개체적 발현인 ‘영혼’의 본성 또한 ‘사랑’이다. 문제는 인류 역사와 인간들의 사회에서 지금처럼 ‘구성된 나’의 존재가 변질과 타락을 겪어온 데 있다. ‘나’ 자신과의 관계도 원만할 수 없다. “나는 아직 나를 사귀지 못했어”(「수선화에게」). 나금숙은 소수부족의 언어와 옛 원주민들의 삶, 야생의 벌판 같은 원시적 자연, 수천수만 년 전 인류의 삶의 장소들, 몇몇 여성과 아이들이 아직 간직하고 있는 ‘사랑의 우주’를 찾아다닌다. “내가 누구야 하고 그대를 부를 때마다 목젖 깊이 차오르는 최초의 감정,/임종 때 사람들이 서로 부르는 간절한 이름,/그 마음으로 천지에 가득한 최초의 감정”(「최초의 감정」). 가졌던 것을 잃어버렸으나 타락하지는 않은 시인은 존재의 열림과 자기의 회복을 강렬히 열망한다. “빛을 뿜고 싶어 안달하는 내 안의 발광체들에게/쉿! 조용히 하라고 했어요/ (…) /모든 나열과 정렬과 수렴과 조합이/뭉게구름처럼 겹쳐/누군가는 이 하지 축제에 오면/존재에 구멍이 뚫려요”(「도취에 대하여」). “어떻게 자신을 만나는가? 라는 질문”(「어떻게 그들은 자신들을 만났는가?」)에 아직 답하지 못하고 있지만. 나금숙이 ‘나’의 존재에 각인된 분리와 차별, 온갖 이념에서 해방되는 출구는 다시 ‘사랑’이다. 시 「장미 도둑」은 연인이 생긴 딸이 엄마에게서 받은 사랑의 “가장 고운 것”을 연인에게 나누어 주러 가는 일을 통해, ‘사랑’이 분리와 차이를 넘어 타자에게 어떻게 퍼져 나가는가를 고도의 미학적인 언어로 노래한다. 내 심장의 가장 고운 것을 우려다가 다른 이의 마음에 물들이러 가는 딸아이의 등을 바라보니, 긴 머리채가 흔들릴 때마다 묵직한 향기의 무게가 철렁 만져집니다. 딸아, 어떤 무거움도 생글생글한 미소로 매다는 법을 배우는 너의 각진 쇄골에 드리우는 생이 환하구나. 다른 이를 향하는 저 붉은 빛은 내가 저를 사랑하던 붉은 빛과 어찌어찌 비슷하여, 드높던 햇살이 잠잠히 졸아드는 해거름, 노을 속에 긴 머리채 흔들며 비탈을 내려가는 딸의 등 뒤로 반짝― 불이 켜집니다. 황홀합니다. - 「장미 도둑」 부분 어둡고 메마른 삶에 “반짝―” 등불을 켜 주는 것은 사랑이라고 나금숙은 황홀한 기쁨 속에 증언한다. 모든 존재가 소멸하고 변화한다는 사실은 각자가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모든 것임을, 사랑이 닿을 수 없는 장소나 존재란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뒷받침한다. 그러니 ‘나’는 이 광활한 우주에서 다른 존재로 계속 몸을 바꾸어갈 것이고, 그러면서 계속 사랑할 것이다. 나금숙은 ‘나’에게서 나를 덜어낸 만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나를 덜어낸 자리는 내 존재를 여는 구멍이 되고 모르는 이들에게 끝없이 전해질 사랑의 원천이 된다는 것을 기쁘게 깨닫게 한다. 말하자면, ‘자아폭발’의 뇌관을 제거할 비법은 사랑이라는 사실을, 또한 진실을. ‘장미 도둑’을 만나면 그가 켠 불을 훔쳐와 다시 누군가에게 나눌어줄 수밖에 없다는 것을. 1) 스티브 테일러, 우태영 옮김, 『자아폭발』, 서스테인, 2024, 9쪽. 2) 위의 책, 7~397쪽 참조. 3) 한편, 모든 인류가 타락했던 것은 아니다. 500년 전까지만 해도 지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던 원시인들, 즉 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아시아 등의 원주민들은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으며, 이들은 지금도 아주 작은 소수인종으로 남아 있다.(위의 책, 77~124쪽 참조) 4) 위의 책, 325~389쪽 참조. 5) 김주환, 『내면소통』, 인플루엔셜, 2023, 18쪽. 6) 카너먼에 의하면, 자아는 세 가지로 구성된다. 현재의 순간을 경험하는 ‘경험자아’, 경험한 일을 회상하면서 계속 재구성하는 ‘기억자아’, “인식의 주체이며 경험자아와 기억자아를 늘 알아차리는 존재”인 ‘배경자아’이다. - 위의 책, 17~18쪽 참조. 7) 김동진 해설, 「Null라와 시름 한 우리가 자고 니러 우짖더라도」, 김건영 시집 『널』, 파란, 2024, 145쪽. 8) 이성혁 해설, 「시, 죽음의 신성이 현현하는 장소」, 나금숙 시집 『사과나무 아래서 그대는 나를 깨웠네』, 천년의시작, 2024, 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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