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자음과모음 2024년 여름호(제61호)
눈을 보는 눈 ― 올라퍼 엘리아슨, 하마구치 류스케, 한유주를 경유하며
1.
메타비평은 편지다. 다만 수신자와 발신자가 서로의 정체를 알고 있는 편지와 다르게 이미 쓰인 비평들에 대한 메타비평은 일방적인 답장 쓰기가 될 수 있다. 이 답장이 다정한 인사가 될 수도 있고 불쾌한 침입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문장을 잇는 게 어느 때보다도 어렵다. 게다가 그저 메타비평을 쓰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 즉 어떤 담론 혹은 어떤 비평/가라는 대상이 정해져 있지 않은, 문자 그대로 메타비평을 쓴다는 것은 자유이면서 동시에 불안이다.
내가 등단할 즈음인 2010년대 후반은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와 겹친다. 당시 페미니즘―퀴어 평론가로 호명돼 활동하는 이들의 비평적 확신을 보며 내게 없는 것을 들여다본 적이 있다. 나는 ‘끔찍하게 재현된 것’을 불편해하면서도 재현과 재생산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하고 유보하거나 우회했다. 문학을 감상할 때 비위가 상하지 않았다는 건 현실로부터 독립된 문학이 있을 것이라는 환상에 지나치게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시대착오적임을 머리로만 알고 있었다. 동시대와 기민하게 연결되는 감각은 내게는 한계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렇지만 그뿐이었을까. 신체 감각의 한계가 비평적 무능의 유일한 원인이었을 리 없다.
등단 이후 가장 많이 쓴 글은 ‘리뷰’였다. 긴 호흡이 요구되는 본격적인 비평을 쓸 기회는 거의 없었다. 작품 선택권도 거의 보장받지 못한 채 문예지가 일차적으로 판단한 작품을 다시 판단하는 일이 이어졌다. 쓰고 싶은 글이 아닌 써야 하는 글이었다. ‘써야 하는 글’이라고 규정함으로써 흥미를 잃게 만든 건 전적으로 내 문제라고 생각했고 “갓 등단한 평론가로 하여금 갓 등단한 게 아닌 것처럼 능숙하게 처신하도록 만드는 암묵적인 분위기”1)가 내재된 소위 ‘주니어 비평가 시스템’의 문제를 당시에는 실감할 겨를이 없었다. 어느 새 비평은 감정적 결여가 동반된 일이 되어 있었다. 문학장 구조를 자연스레 내면화한 셈이다. 그렇다면 모든 건 구조적 문제 때문이었다고 말하면 그만일까. 협소한 지면이 제공되는 리뷰로는 비평가 자신이든 비평적 판단이든 제한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게 분명하지만 아직은 망설일 수밖에 없다.
2.
지금 문학장을 리뷰 비평 시대라고 규정한 소영현의 글은 ‘비평의 리뷰화’를 논할 때 자주 인용된다. 그의 진단을 살펴보면 이 머뭇거림은 해소될까. 그는 비평이 리뷰 형식으로 쓰이는 현상이 “비평 기능이 협소화된 단면”이 아니고 비평과 담론에 대한 출판계와 문학장의 시도, 요구, 관심이 적거나 거의 없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본다.2) 출판자본과 무관하지 않은 새로운 독자의 부상과 그 성격, 독자로 표상되는 “소비자성으로 가시화된 자본의 작동”3)을 파악하는 게 더 유효한 대안이 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인데, 특히 독자를 ‘여론’으로 바꾸어 사용하는 이은지의 비평을 참조하자면 독자는 “아주 사소한 계기로도 순식간에 급변”4)할 수 있다.
그렇지만 비평의 리뷰화는 비평가들의 목소리가 소환되고 축적되는 문학장의 축소 문제와 분명 멀지 않다. 최근 문학장에서 ‘대화’가 키워드로 떠오른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발생한 것이지만 비평가의 대화를 차이를 확인하기 위한 고통스럽고 불가피한 ‘불화’로만 이해하는 입장들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특히 비평적 대화가 이해 불가한 타자와의 대면으로 사유되는 방식5)은 모든 불안을 감내해야만 하는 주체를 재소환하는 일이 될 수 있다. 대화는 “미성숙을 교집합 삼아 서로 폐를 끼치고 받는 위험한 실천”6)이자 “다른 비평과 맞물리고, 서로를 할퀴어 변형하기도 하며 엉키어야”7)한다는 주장은 최근 비평적 대화가 ‘안전’과 ‘위험’이라는, 즉 누군가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와 오해를 무릅쓰고 더 얽혀야한다는 책임의 구도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실감케 한다. 나는 비평가의 감정을 겨냥하는 다툼의 구조가 아닌 차이에도 불구하고 함께 ‘바깥’을 응시하는 구조를 전제할 때 대화가 어떻게 지속성을 확보하는지 더 보고 싶다.
바깥을 응시하기 전에 도달하거나 회귀하는 게 불가능한 비평 현장의 선험적이고 이상적인 모델을 상정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 현장이 이전보다 무언가 결여되어 있다는 판단이 ‘좋았던 시절’로 흐르면서 무언가를 배제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지나간 시절이 소환되는 것은 우연인가.8) 그것이 ‘제도 비평’만을 위한 욕망인지 확신할 수 없지만 제도와 비―제도의 구분이 희미해지는 시기의 문학장과 미디어 플랫폼 두 곳에서의 쓰기 행위는 근본적으로 조건 속 글쓰기라는 점에서 예속적이며, 제도 비평이 비―제도 비평보다 특별히 더 나은 결과물을 생산한다고 확신하기 어렵다.
비평 그리고 그와 관계하는 문학의 지속성과 확장성의 측면에서 봐도 그렇다. 이럴 때 비평가의 자리, 특히 ‘젊은 비평가’의 자리는 제도와 비―제도를 오가며 수행됨으로써 비평 주체가 권위의 담지자로서 자리할 수 없음을 실감하고 “불안과 수치심”을 감내해야 하는 장소라는 발화9)에 주목해본다면 제도 비평과 책임 의식을 꾸짖는 일보다 제도 비평과 책임 의식을 소환하는 주체의 수상한 욕망이 무엇인지 따져보는 편이 옳고 그러나 하지 않는 편이 더 옳다.
3.
비판은 결국 수행과 동시에 자기 존재에 괄호를 치고 무해한 ‘나’를 내세울 위험이 있다. 비평에 대한 비판 대신 미술, 영화, 문학을 횡단해보려고 한다. 그 전에 잠깐 한국문학장의 비평적 상황으로 되돌아가보자면 비평가들은 결국 문학을 경유해 ‘좋은 삶’을 꿈꾸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문학과 비평/가에게 무언가가 요구되고 있고 이때 비판 개념이 중심에 놓인다. 비판 개념을 둘러싼 문학장의 두 가지 입장을 ‘과비판’과 ‘무비판’으로 나눈 비평10)에서 알 수 있듯 비판 개념을 둘러싼 비평의 구도는 더 비판할 것이냐 다르게 연결될 것이냐로 요약된다.
나의 몸이 조금 더 기울어지는 것은 ‘다르게 연결되기’의 감각이다. “동시대 모든 예술이 그렇듯 문학 역시 공간적으로 보기 좋게 배치”되어 있고 “같은 가치와 위계를 할당”11)받은 평평한 구조 속에 자리하고 있다면 예술의 큐레토리얼 작업을 통한 아카이브 구축과 수행이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될 수 없음에 동의한다.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부상한 이론 중 하나가 신유물론이다. 비인간의 행위 능력을 인간이 부여한다는 점에서 행위자와의 평등한 네트워크를 형성한다는 기획은 자칫 기만적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신유물론과 함께 근래 논의되고 있는 인류세와 정동 이론이 다르게 사유하는 길을 제공하고 있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특히 다른 주체성과 내면을 사유할 가능성이 열린다. “구멍 뚫린 신체 앞에서 개인의 깊이나 비밀을 담보하는 내면성을 읽어내는 일은 이전만큼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12) 비평은 언제나 그랬듯 해석 능력 문제다. 비인간 행위자 앞에 선 인간이 세계 구성의 객체 중 하나로서 존재한 적이 있었나. 행위자의 행위 능력과 행위자 간의 평평한 구조에만 가치를 뒀을 때 발생할 비정치성을 경계하면서 행위자 간의 관계성과 ‘감정’에 주목해보려 한다.
인간들이 한 장소에서 우연하게 연결되는 일, 그것도 예술 작품과 함께 관계를 유효하게 형성하는 사례를 설치미술가 올라퍼 엘리아슨Ólafur Elíasson의 <날씨 프로젝트Weather Project>(2003)에서 발견한다. 그는 모든 사물이 흑백이 되는 단색광으로 인공 태양을 만들어 영국 테이트 모던 미술관의 가장 큰 공간인 터바인 홀에 설치한다. 감상자들이 거대한 인공태양 아래에서 각자 다른 것을 경험하게 하고 수행하도록 둔다. 2003년 조지 부시의 영국 방문을 항의하기 위해 각자 바닥에 누워 몸으로 정치적 분노(“BUSH GO HOME!”)를 언어화하는 감상자들이 있는가하면 그 공간이 명상하는 기분을 갖게 해서 요가를 하는 감상자들도 있다. 감상자들은 단색광 아래에서 흑백 처리된 행위자가 되지만 똑같이 행동할 필요가 없는 ‘형상’으로서 솟아오른다.
올라퍼 엘리아슨은 감상자가 작품을 볼 때 작품도 감상자를 보고 있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미술사학자이자 비평가 핼 포스터Hal Foster는 올라퍼 엘리아슨을 포함한 미술사의 이러한 경향을 언급하면서 “이미지가 ‘힘’을 갖고 있다거나 행위자이고, 그림이 무언가를 ‘원하고’ 혹은 욕망한다”고 여기게끔 “현상학적 경험을 증진하는” 데에 목표를 둔 작업 방식을 비판한다. 신유물론적 경향이 물신주의fetishism로 흐를지도 모른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에게 사물성은 압도적으로 밀려오는 것이니 사물들로부터 예속되지 않기 위해 저항한다는 입장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는 비인간 행위자가 산출하는 정동과 연합alliance을 다소 납작하게 이해한 게 아닐까. 그리고 끝내 갸웃거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가 비판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면서도 지금은 그다음으로 나아가기에 나쁜 시기라고 유보하면서 ‘비판 이후’를 그리기에 곤혹스러워한다는 점이다.13)
신유물론이 가르쳐준 것은 겸허한 낙관이다. 우리는 인간이 아닐 수 없어서 객체로서의 사유는 부분적이고 유동적으로만 가능하다. 그렇게 사유하는 일이 사물성에 대한 투항으로 이해될 필요는 없다. 사물성의 긍정이 곧 역사적 주체와 그 힘의 폐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브뤼노 라투르처럼 말하면 세계는 선으로 구성되어 있고 행위자들은 서로 영향을 받는다. 손에 쥔 작은 거울을 앞으로 내민 채 걸으면 두 눈은 앞쪽의 세계와 거울에 비친 뒤쪽의 세계를 동시에 본다. 다가갈 미래와 지나온 과거 사이에 놓인 우리는 현재를 끝없이 갱신한다.
4.
그렇다면 선의 세계에서 형성되는 관계는 언제나 공생적일까. 예술이 하는 일을 더 살펴보자. 이번에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2024)가 그 대상이다. ‘듣기의 윤리’로 요약될 그의 영화에서 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내면성의 탐구는 거의 언제나 중요했다. 하지만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내면성이 그다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이 영화의 대화는 드러난 인간 언어를 파헤치는 방식이 아닌 행위자 간의 침묵을 읽어내는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카메라가 숲을 느리게 담아내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런데 카메라의 시선이 문제적이다. 숲을 걷는 인간이 하늘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초월한 무언가가, 즉 카메라 그 자체가 숲을 응시한다. 숲이 스스로 말하기를 기다린다는 듯이. 영화는 음악의 단절, 장면과 장면 사이의 단절을 통해 이 오프닝으로부터 달아난다.
마을의 심부름꾼으로 불리는 ‘타쿠미’(오미카 히토시)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알게 되는 것은 첫째, 그가 건망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그는 단 한 번도 돌봄 센터에 있는 딸 ‘하나’(니시카와 료)의 귀갓길에 함께하지 못한다. 둘째, 그는 글램핑장 개발 설명회에서 기업 관계자에게 ‘균형’을 깨트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개발을 무조건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자연을 지키는 일에 사실 무심하다. 숲에 담배꽁초를 함부로 버리고 땅 와사비를 캘 때 주저하지 않는다. 타쿠미는 무표정한 얼굴을 가진 채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하는 존재다. 그는 자주 인간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 영화는 산골 마을 주민과 마을에 글램핑장을 개발하려는 연예기획사 사이에 발생하는 갈등이 서사의 핵심처럼 보이게 하지만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연예기획사 직원들은 개발이 이미 부적절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자연과 마을에 대한 주민들의 올바름에 점점 감화되어 간다. 하지만 그러한 감화에도 불구하고 글램핑장 개발이 중단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글램핑장 개발 설명회 이후 다시 마을을 찾게 된 직원들, 특히 연예인 매니저를 했던 ‘타카하시’(코사카 류지)는 연예계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고 그 마을에 정착하기를 욕망한다. 하지만 타쿠미는 타카하시가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게 할 외지인이라는 믿음만은 결코 망각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사건은 하나의 실종이다. 타쿠미는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도 아이를 찾기 시작한다. 이때 타카하시도 타쿠미와 함께 마을 사람이 된 것처럼 수색을 돕는다. 두 사람은 숲 속에서 부상당한 사슴과 마주한 하나를 발견한다. 타카하시는 하나를 구하려고 발걸음을 옮기는데 타쿠미가 돌연 그의 목을 졸라 기절시킨다. 타쿠미는 쓰러진 하나를 들고 숲으로부터 벗어나고 깨어난 타카하시는 몇 걸음 걷다 다시 쓰러진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자연의 관점에서 인간을 볼 때 대체로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본다. 이 시선의 위상 관계는 피지배와 지배의 관계로 환원되지만 타카하시를 갑자기 죽이는 결말에 다다르면 자연과 인간이 겹쳐진 타쿠미라는 우리의 이해 범위를 넘어선 행위자에 의해 그 관계가 재정의된다. 그는 대체 무엇이고 어느 쪽에 서 있는가. 다시 말해 타쿠미는 자연인지 인간인지 알 수 없는 행위자로서 피지배와 지배의 이분법을 기묘하게 뛰어넘는다.
이 영화는 이렇듯 인간의 얼굴을 한 행위자가 의도를 가진 자연이 됐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줌으로써 온화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순진한 믿음을 부순다. 타쿠미는 딸을 지키려는 부성애의 소유자이면서 대자연Mother Nature의 대리자는 아니다. 형상의 모호함이 곧 영화의 모호함이 된다. 그런데 ‘인간 이후의 인간’을 상상하는 지금 시대에 그는 새로운 존재론 위에서 발생한 ‘다른 형상’처럼 보인다. 이 문제적 인물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제 쓰러진 하나와 함께 숲으로부터 달아나려는 움직임이 이 영화의 엔딩이다. 오프닝과 거의 동일한 풍경이다. 낮과 밤만 바뀌어 있을 뿐이다. 그는 지금 어디로 향하는가. 숲을 올려다보는 시선의 정체는 무엇인가. 초월적인 카메라일까 혹은 다른 주체성과 시간성을 꿈꾸는 타쿠미일까.
5.
우리는 지금 어디론가 가고 있다. 모르는 사이 만나고 작별하면서. 나는 이제 이 글을 천천히 마무리하려고 한다. 한 편의 소설 이야기를 하면서. 한유주의 「작별하는 각별한 사람들」14)의 ‘우리’로 명명된 서술자는 내포독자와 연결되어 있다. 동시에 서술자는 문장 단위에서 자신이 명명한 초점 화자들과 연결된 채 빈번하게 오고 간다.
이 소설은 새벽에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한 여행자 중 한 명인 ‘영은’을 주목하면서 시작된다. 영은이 우연히 마주하는 공항 사람들, 그들 각자가 겪은 일들은 말이 되어 곧 와해된다. 그 어디에도 교착되지 않은 채. 영은에 이어 소설의 시점은 ‘민재’에게 이동한다. 공항버스에 탄 영은의 뒷좌석에 민재가 앉아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모르는 사이다. 아니, 어쩌면 아는 사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소설의 관심사는 두 사람을 잇는 인연의 고리를 찾는 데에 있지 않다. “어쨌거나 그들은 같은 방향 버스를 타고 있”(296쪽)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초점 화자는 당산역에서 내린 민재가 영등포구청역 방향으로 걷다 들어간 김밥 가게에서 다시 한번 바뀐다. 이번에는 일을 곧 그만둘 ‘정숙’이 초점 화자가 된다. 정숙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진술하는 대신 “정숙이 1월의 새벽 공기를 맞으면서도 추위를 덜 느끼며 담배를 끝까지 피울 수 있도록 우리가 지켜봐주자”(299쪽)라는 서술자의 진술을 통해 이 소설은 정숙을 포함해 지나갔고 다가올 모든 행위자에 대해 최소한의 윤리적 개입만 한다.
정숙에서 ‘젬마’로 초점 화자가 바뀌면서 재현된 현실과 꿈이 문장 단위에서 한 곳으로 포개진다. 젬마는 짐작컨대 몽유병을 앓고 있고 악몽을 꾸면서 거리를 위험하게 돌아다니고 있다. 순찰 중이던 경찰에게 발견되기 전까지. 서술자의 위치가 재현된 현실과 꿈 모두에 발을 걸치고 있고 독자는 “젬마가 울고 있는 시간이 과거인지 미래인지 우리는 알 수 없”(302쪽)다는 문장과 마주한다. 덕분에 젬마가 왜 악몽을 꾸는지를 묻기보다 젬마의 슬픔이 그의 모든 삶에 걸쳐져 있었으리라 실감할 수 있게 된다. 이 소설은 이제 누군가가 뱉은 입김과, 지금도 어디선가 추락하고 있는 인간과, 일요일 오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는 손님을 바라보는 사철나무 화분까지, 즉 그것들의 ‘존재함’에 주목하며 모두 무사하기를 바란다.
어떤 소설은 인물의 표면적 말과 행동의 이면을 파헤치고 드러낸다. 하지만 그것이 세계를 해명하고 실감케 하는 유일한 해석법은 아니다. 영향 관계임을 드러내는 것, 즉 행위자들이 하나의 선으로 연결돼 있음을 드러내기. 그러나 소재주의에 머물지 않고 쓰고 지우며 반복되는 문장으로 세계의 표면을 만지기. 한유주의 소설이 글쓰기와 언어의 믿음을 철회하지 않고 의심보다 연결을 더 의식한다. 그럼으로써 텍스트의 안과 바깥에 존재하는 작가, 작품, 독자의 관계도 매끄럽게 형성된다. 이 매끄러움은 ‘죽음’이 주제로서 언제나 중요했던 한유주에게 필연적인 결과처럼 보인다. 죽음이 더 이상 죽지 않도록 해야 하므로. 죽음은 문체의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지연됨으로써 보존되고 행위자들의 안위는 텍스트 안팎의 구경꾼들이 증명한다.
누군가가 얼어가고, 누군가가 비틀거린다.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우리가 어떤 기대와 희망……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311쪽)
우리는 너무 서로 다른 존재인 데다 총체적 조직 단위를 상상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런 시대에 ‘함께 살아가기’를 어떤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을까. 세계가 잔인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예술은 거의 언제나 무언가를 한다. 지금 이 시대에 중요한 태도는 냉소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존재와 고통의 범주 넓히기에 기꺼이 동참하고 잔인성의 총량을 줄이는 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도나 해러웨이는 그물망처럼 복잡하게 얽힌 행위자들의 연결을 논하며 인류세를 넘어 쑬루세Chthulucene라는 시대 개념을 제안한다. 쑬루세의 개념으로 세계를 다시 보면 이전과는 다른 윤리에 대한 상상이 가능하다.
나는 미술·영화·문학을 횡단하면서 각자의 영역에서 예술이 이 시대와 어떻게 조응하는지 보고 싶었다. 나에게 비평은 예술과 함께 호흡하는 일에 가깝다. 인간만이 세계의 유일한 행위자가 아님을 직시하는 건 함께 살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다. 그것마저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우리는 영원히 인간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그러나 이전과는 다르게 연결된 채 바깥을 응시해야 한다. 주저하지 않아도 되는 건 놀랍게도 여전히 희망을 말할 때다.
- 1) 이은지, 「비평의 오물―물밑을 휘저으며」,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가을호, 79쪽.
- 2) 소영현, 「비평을 찾아서 : ‘K-’ 시대의 비평」, 『자음과모음』 2023년 여름호, 19쪽.
- 3) 소영현, 같은 글, 23쪽.
- 4) 이은지, 같은 글, 85-86쪽.
- 5) “진정한 의미의 대화는 언제나 만족스럽지 않을 것이다. 타자와 마주한다는 것은 내가 설득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며, 따라서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운 타자와 직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박동억, 「누구에게 말 건넬 것인가―동시대 문학론 비판」, 『자음과모음』 2023년 겨울호, 295쪽.)
- 6) 전기화, 「비평의 잔가지」, 『자음과모음』 2023년 여름호, 331쪽.
- 7) 성현아, 「비평(非平)한 비평(批評)―비평의 경량화에 대한 비판과 옹호」,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가을호, 39쪽.
- 8) 1990년대 이후 소설을 되짚은 황종연의 평론집 『명작 이후의 명작』(현대문학, 2022)에서 문학장의 “평가 비평의 게토화”(469쪽)를 우려하는 시선, 소영현이 ‘비평의 에세이화’를 언급하며 젊은 비평가들이 강조하는 ‘비평하는―나’가 “차이만을 가시화할 뿐 그 어떤 보편성도 전제하지도 않”는다면서 최근 비평 경향이 ‘역사적 조망의 부재’와 ‘책임감의 회피’로 읽히게끔 내버려두는 시선이 대표적이다.(소영현, 같은 글, 19-22쪽.)
- 9) 최가은, 「비평의 조건―예속과 애착」, 『자음과모음』 2023년 가을호, 316-318쪽.
- 10) 인아영, 「비평과 사랑―포스트 비평과 동시대 한국문학 비평의 논점들」, 『문학동네』 2023년 겨울호.
- 11) 이소, 「부재하거나 사라졌거나 영원한―역사와 사물의 큐레이터」, 『문장웹진』 2021년 4월호.
- 12) 강지희, 『파토스의 그림자』, 문학동네, 2022, 477쪽.
- 13) Hal Foster, Post-Critical, October Vol. 139, Winter 2012, pp. 7-8.
- 14) 한유주, 「작별하는 각별한 사람들」, 이미상 외, 『전자적 숲; 더 멀리 도망치기』, 문학과지성사, 2023년 11월. 이하 인용 시 본문에 쪽수만 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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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또 같이 열어가는 염려의 공간 ―2025년 봄의 시 “이름이 있지만 이름이 지워진 것들의 목록을 골똘히 떠올렸고” (이은규, 「귤락」, 『딩아돌하』 2025년 봄호) 황선희 2025년 봄은 정치에 대한 논의가 어느 때보다도 풍성한 계절이었다. 민의를 등진 기득권 카르텔이 우리 사회를 얼마나 속속들이 장악해 왔는지 매번 확인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위기의식이 나날이 팽창했다. 부풀 대로 부푼 담론의 장에서 광장이라는 공간을 의미화하려는 시도는 지금도 지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계간지들은 발 빠르게 ‘역사적 사건과 시, 그리고 지금’(『딩아돌하』), ‘내란, 광장정치’(『문화/과학』), ‘탄핵-일지’(『문학과사회 하이픈』), ‘K민주주의의 약진’(『창작과비평』), ‘12․3 내란일지’(『문학동네』) 등의 특집을 꾸리며, 광장정치의 한가운데에서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의 가치를 구체화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 계절의 시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었다. 광장정치가 현실의 중심에서 요동치는 가운데, 이 계절의 시들은 다시 열린 광장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더디고 조심스럽게, 말해지지 못했던 것들의 감정과 기억을 불러내고 있었다. ‘귤락’의 이름을 떠올리는 이은규의 시적 주체처럼, 이번 봄의 시들은 사라진 이름과 묻힌 말들, 소리 없는 침묵의 감정을 발굴하고 목록화하려는 시도를 보여 주었다. 특히 나희덕의 「광장의 재발견」과 진은영의 「광장」은 이와 같은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 두 편의 시는 단순한 정치적 입장 표명의 소산이 아니라 광장을 구성하는 감각의 지형과 그 속의 관계, 윤리를 되묻는 섬세한 언어의 실험이다. 4.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이 선포되던 날 TV 앞에서 밤을 꼬박 새우고 다음날 아침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만났다 다행히 계엄령은 몇 시간 만에 해제되었지만 모두들 충혈된 눈으로 두려움과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여의도로 달려갔다 인파를 헤치고 서둘러 깃발을 찾아가다가 도로 경계턱에 발을 헛디뎌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누워서 꼼짝도 못하는 내 몸을 경찰 두 명이 일으켜주었다 부축을 받으며 뒷골목에서 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통증과 오한이 심해진 나에게 경찰은 제복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건넸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핫팩이었다 아들보다도 어린 그의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여의도에서의 또다른 발견이었다 5. 정치는 길을 잃고 나는 발을 헛딛고 말과 입김은 무성하게 흩어졌지만 오래 잠들어 있던 여의도는 목소리들에 의해 깨어났다 공원은 다시 광장이 되었다 ―나희덕, 「광장의 재발견」(『문화/과학』 2025년 봄호) 1) 부분 월계수 잎 같은 여자들이었지 승리의 화관으로 엮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지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 모여들었지 ―진은영, 「광장」(『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나희덕의 시는 ‘여의도’의 공간적 변화를 사유하는 일로 시작한다. 과거 광장의 정치가 활발하게 일어나던 여의도는 시민공원으로 조성되며 비정치적 공간으로 탈바꿈했지만, 12‧3 계엄이라는 사건을 통해 다시 ‘광장’으로 재소환된다. 신작 시집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에 엮이기도 한 위의 시에서 시적 주체는 여의도의 장소성을 복원함으로써 광장이라는 물리적 장소가 시대적 맥락에 따라 어떻게 재의미화되는지 보여 준다. 그는 12‧3 계엄 이후 여의도를 찾았다가 “발을 헛디뎌 바닥에 나뒹굴고” 만다. 그런 그의 곁에 다가와 ‘나’를 일으켜준 건 다름 아닌 두 명의 경찰이었다. 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핫팩”을 건넨 경찰의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하다. 경찰이 건넨 온기는 광장에서 대립하고 있는 존재들 사이에 잠깐 열린 ‘틈’, 공동체적 감각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 광장에서 공원으로, 다시 광장으로 ‘재발견’된 여의도에서 시적 주체는 시민과 대치하고 있던 경찰 또한 이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또다른 발견’을 한다. 결국 이 시는 광장이 단지 단선적인 대립의 공간이나 정치적 목소리의 공간이 아니라, 말할 수 없었던 감정과 책임이 교차하는 장소로 다시 의미화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광장은 발을 헛디딘 ‘나’의 자리인 동시에 미안한 눈빛의 타자가 건넨 온기의 장소이기도 하다. 정치의 격랑 속에서 시는 감각의 정치, 윤리의 광장을 다시금 상상하고 있다. 진은영의 시는 여성의 존재와 연대를 ‘광장’이라는 장소에 다시 위치시킨다. “월계수 잎 같은 여자들이었지/승리의 화관으로 엮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지”라는 전반부에서 시는 ‘승리’와 영웅서사에서 배제된 여성들에 주목한다. 그들은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모여들었”지만, 완결된 공동체를 이루지 않는다. 이 느슨한 집합은 강고한 상징 체계에 포섭되지 않으면서도 공동의 장소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앞서 살펴본 나희덕의 시가 광장으로서의 여의도를 재맥락화하고 대치 속 ‘틈’과 ‘온기’를 발견했다면, 진은영의 이 시는 각기 다른 삶의 조건을 가진 존재들이 느슨하게 모여드는 연대의 장을 상상하게 한다. 시적 주체는 ‘화관으로 엮이지 못한 잎사귀들’이 모여드는 장소로 여성적 광장을 가리킨다. 그곳에는 “연대는 아름다운 침범”2)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 있다. 이때 광장은 전투나 외침의 장소라기보다는 잠정적이고 열려 있는 연대의 공간으로 다시 그려진다. 함께 잠을 자고 아이들을 기르고 함께 숲속에서 나무 열매들을 줍고 함께 사냥 하며 음식을 나눠 먹던 사람들이 따로 잠을 자고 따로 아이들을 기르고 따로 집을 짓고 숲과 강가에 경계선을 그었다 함께 도끼, 창, 칼을 만들던 사람들이 함께 총, 대포, 핵폭탄을 만들던 사람들이 따로 정복자가 되고 노예가 되고 따로 부유한 사람이 되고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함께 책을 읽고 사상을 발명하고 꿈을 꾸던 사람들이 따로 나라를 세우고 따로 혁명과 전쟁을 일으키고 따로 친구가 되고 적이 되었다 함께 나를 매혹시켰던 말들이 따로 나를 조롱하며 떠나갔듯이 그렇게 함께 그렇게 따로 세계는 낡아갔다 ―이경임, 「그렇게 함께 따로」(『문학인』 2025년 봄호) 이경임의 시는 광장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공동체의 기원과 해체, 연대의 형성과 파괴를 장구한 인류사적 스펙트럼 속에서 되묻는다는 점에서 앞선 시들과 공명한다. 시는 반복되는 구절 “함께”와 “따로”를 통해, 인류가 공유했던 감각의 원형에서 점점 분절되고 분열된 세계로 이행해 온 과정을 간결하면서도 묵직하게 서술한다. 첫 연에서 사람들은 “함께 잠을 자고 아이들을 기르고/함께 숲속에서 나무 열매들을 줍고/함께 사냥 하며 음식을 나눠 먹던” 존재들로 그려진다. 그러나 2연에서 시는 경계선을 긋고 “따로” 살게 된 공동체의 붕괴를 포착한다. 이와 같은 전환은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라기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감각을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에게 던지는 윤리적 질문이라 할 수 있다. “함께 도끼, 창, 칼을 만들던 사람들이/함께 총, 대포, 핵폭탄을 만들던 사람들이”라는 구절은 인간의 기술과 협력의 진보가 어떻게 파괴의 도구로 전도되어 왔는지를 드러낸다. 여기서 “함께”는 더 이상 긍정의 언어가 아니라, 공동의 폭력과 파괴를 가능케 한 이율배반적 형식으로 작용한다. 마지막 연 “그렇게 함께/그렇게 따로/세계는 낡아갔다”는 반복과 퇴행, 분열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겨진 감정적 유산을 응축하고 있다. 이 시는 지금의 정치적 현실뿐 아니라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의 감정 윤리와 공동체적 감각을 이야기하며 그것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운다. 인간이 ‘함께’라는 말 아래 어떻게 ‘따로’가 되었는지 되묻고, 그로 인해 낡아가는 세계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여 준다. 이로써 감정의 정치학을 역사적, 존재론적 차원으로까지 확장한다. 매년 11월이 돌아오면 페루 사람들은 죽은 자의 넋을 기린다 고인이 생전에 즐기던 음식을 장만하고 온 가족이 이틀간 죽은 자들과 함께 산다 산 자들은 아파트형 묘지를 찾아 꽃을 바치고 담배를 피워 악귀를 물리치고 브라스밴드에 맞춰 노래하고 춤춘다 매년 11월 초하루 페루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난다 한날한시에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방문한다 죽은 자의 사진이 없으면 죽은 자가 살아생전 살던 집을 찾지 못한대서 산 자가 죽은 자의 얼굴 사진을 고이 모신다 먼저 떠난 자와 나중에 따라갈 자가 같은 날 흥겨운 잔치를 벌이는 나라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페루 사람들의 애국가 제목은 이러하다 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 ―이문재, 「죽은 자의 날―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이문재의 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하는 축제를 통해 공동체의 가장 깊은 층위라 할 수 있는 정동과 기억의 공동체를 회복하고 있다. 특히 ‘함께’라는 말이 자연스러웠던 공동체적 감각이 ‘따로’로 분열되어 온 이경임의 시와 나란히 놓을 때, 이문재의 시는 또 다른 방향의 회복 서사를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시는 페루의 11월, ‘죽은 자의 날’을 배경으로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문화를 묘사한다. 영화 <코코>(2018)로도 잘 알려진 이 축제는 흥겨운 춤과 노래의 감각으로 구성된다. 위의 시에서 망자의 넋을 기리는 것은 “한날한시에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방문”하는 적극적 실천으로 의미화된다. 특히 “죽은 자의 사진이 없으면/죽은 자가 살아생전 살던 집을 찾지 못한대서”라는 구절은, 기억과 이미지, 감각의 윤리가 어떻게 공동체 구성에 실질적으로 작동하는지를 드러낸다. 마지막 연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페루 사람들의 애국가 제목은 이러하다/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는 시 전체의 윤리적 핵심을 밝힌다. ‘자유’는 더 이상 개인주의적 해방이나 정치적 권리의 언어가 아니라 타자, 그것도 이미 죽은 자의 존재조차 공동체 속에 포섭할 수 있는 연대의 감각으로 재정의된다. 그렇다면 이 시는 2025년 봄, 광장에서 실종된 감정의 언어와 윤리적 상상력을 되찾으려는 시적 실천으로도 읽힐 수 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같은 날 흥겨운 잔치’를 벌이는 나라의 이미지야말로, 기억의 연대, 감정의 공공성, 존재의 환대를 담보하는 미래의 광장을 예비하는 것이 아닐까. 한 달 동안 비워둔 내 방, 급히 잘라서 꽂아놓고 나온 구석의 파란 몬스테라가 유리 물병 속에서 잘 크고 있는지 걱정이다 지난번 쓴 시가 마지막 작품은 아닌지 끄적거리고 있는 이 시를 완성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어머니 칠십에 처음으로 집주인이 된 낡은 일층 빌라가 걱정이다 길 건너 천변이 보이고 가을 되면 불어난 냇물 소리가 들릴 거라고 좋아하셨는데 지구온난화가 초가속화되어 부모님 생전에 집이 물에 잠기면 어쩌지? 마요네즈 범벅의 감자샐러드를 좋아해서 걱정이다 달고 진한 카페라테를 좋아해서, 비건이 못 되어서, 국회의사당에 검은 헬기가 날아오던 그 밤이 안 끝날까봐, 역사가 건망증 환자일까봐서 걱정이다 오늘밤 별이 지는데 한 사람을 죽여달라고 기도했다 내가 정말 걱정이다 몬스테라잎과 고콜레스테롤 혈증과 내란과 두번째 대홍수의 날들에 천변 옆 낡은 빌라와 팔레스타인의 팔다리 없는 아이와, 숲을 따라 릴레이 선수처럼 달려가는 산불을 역사와 어머니의 심해져가는 건망증을 즐겨 쓰는 필기구의 단종 여부와 부활절 달걀들을 까맣게 칠하는 나의 증오심을 걱정하는 나여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그러니 나는 무수한 걱정, 무수한 불안, 무수한 죽음, 무수한 증오의 소유자다 그 밤의 일이, 두붓값 오르는 일이 일조지환인지 종신지우인지 분간 안 가는 걱정 속에서 단호한 비일관성과 일관성을 동시에 지닌 삶, 삶, 삶이여 슬픔이여 부드러운 두부와 맹목의 탱크여 나의 소유자다 ―진은영, 「걱정의 소유자」(『문학동네』 2025년 봄호) 진은영의 「걱정의 소유자」는 앞서 논의한 시들과 달리, 어떤 특정한 공동체적 장면이나 외부적 사건을 서사화하지 않는다. 대신 시적 주체는 “몬스테라잎과 고콜레스테롤 혈증과 내란과”라는 다종다양한 걱정의 목록을 나열하며 오늘날 주체 내부에 축적된 정동의 무게를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드러낸다. 여기서 ‘걱정’은 단지 사소한 불안의 나열이 아니라, 세계의 모순을 감각하는 자의 정서적 앎의 형식이다. 이 시에서 주목할 것은 시적 주체가 스스로를 “무수한 걱정,/무수한 불안,/무수한 죽음,/무수한 증오의 소유자”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시적 주체는 단일한 정체성이나 확고한 윤리적 기준이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감정들의 복합체로 존재한다. 나날의 무력감 속에서도 살아남은 감각은 바로 이러한 ‘걱정’이다. 그것은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몬스테라 잎처럼 작고 사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내란과 전쟁과 기후위기를 잇는 감정의 사슬을 만들어 낸다. 진은영의 시는 그래서 말미에 이르러 이중의 역설을 던진다. “단호한 비일관성과 일관성을 동시에 지닌/삶, 삶, 삶이여/슬픔이여/부드러운 두부와 맹목의 탱크여//나의 소유자다”. 삶과 슬픔, 부드러움과 파괴가 공존하는 이 정서는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단순한 개인적 고백이 아님을 보여 준다. 걱정의 감각이 곧 윤리이고 정치이며 이 세계를 살아가는 감정적 실존이라는 점에서, 이 시는 오늘의 시가 가닿을 수 있는 가장 내밀한 광장의 모습을 보여 준다.이로써 2025년 봄의 시들이 어떻게 저마다의 방식으로 시적 공간을 재구성하고 있는지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직접적인 구호나 선언이 아니라 정동과 감정, 회복과 연대, 슬픔과 불안의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광장의 내부화’이며, 이러한 시적 언어야말로 이 계절의 시가 갖는 윤리적 실천의 장이 된다. 살펴본 시들은 외치기보다 감각하고, 선동하기보다 기억하며, 하나의 목소리가 되기보다는 염려하며 서로 다른 말들의 숨결로 존재한다. 말해지지 못한 것을 끝내 붙잡고 부서진 감정 위에 느슨한 연대를 상상했던 이 시들은, 정동의 언어로 광장을 다시 열어젖혔다. 시가 도달한 가장 조용하고도 가장 정치적인 자리, 그곳에서 또다시 ‘함께’와 ‘따로’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1) 『문화/과학』 봄호에는 새로 시작한 꼭지 ‘옥상의 시선’에 나희덕과 진은영의 시가 두 편씩 묶였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지상과는 다른 높이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예술가의 이야기”(「121호를 내며―12‧3 내란 이후 광장정치의 부상하는 주체와 그 함의」, 『문화/과학』 2025년 봄호, 7쪽)를 담은 것인데, 첫 필자로 두 시인이 섭외되었다. 2) “현장에 나가서 활동가분들 만나면서 연대라는 것 자체가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좋은 의미로 침범을 하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최나현‧양소영‧김세희, 「연대는 아름다운 침범」, 『백날 지워봐라, 우리가 사라지나』, 오월의봄, 2025, 37쪽)
광장에서 만난 괴물과 춤출 때 * 이 글은 성해나의 소설집 『혼모노』(창비, 2025)와 단편 「인비인(人非人)」(『TOYBOX』 5호, 2020),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The 짧은 소설3: 괴담』, 민음사, 2020)을 주로 논하며,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문학동네, 2022), 장편 『두고 온 여름』(창비, 2023)을 함께 다룬다. 이하 인용시 본문에 쪽수만 밝힌다. 1. 갈라진 세계의 접촉면 너머로 미국의 인류학자 실라 미요시 야거는 『애국의 계보학』에서 한국이 근대국가 수립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 민족주의적 서사를 동원했는지 밝힌 바 있다. 그는 이 연구에서 특히 정치 담화, 문학, 역사 기념관 등이 활용하는 수사법에 주목하는데, 이때 흥미로운 점은 서로 다른 정치적 의제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상반된 이데올로기적 목적을 위해 동일한 수사법을 활용한다는 사실이다. 지금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도 그러한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1) 대통령 탄핵 정국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한편에는 대통령 파면 소식에 기뻐하는 범시민 ‘촛불집회’ 대열 속 사람들이, 다른 한편에는 윤석열의 대통령직 복귀를 위해 여전히 ‘태극기 집회’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때 두 종류의 집회는 ‘나라 망하는 꼴 두고 볼 수 없다’는 애국의 수사를 (각기 다른 정도로) 공유하고 있기도 했다.2) ‘태극기 집회’로 대표되는 보수 집회 역시 그 규모와 역사, 그리고 형식과 수사의 측면에서 민중의 형상이 아니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단순히 대통령을 탄핵하고 새로 선출하는 것만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 건 게으른 생각이다. 민주주의는 본래 끊임없이 지속하는 갈등을 필수 조건으로 삼는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하나의 공동체로 묶여 같은 대지를 공유하며 살아가야 한다면, 어느 한쪽을 무작정 배제하거나 축출할 수는 없다. 무조건적 반목을 넘어 무언가 다른 관점을 통해 이 사태를 볼 필요가 있으며, 문학은 이러한 맥락에서 또다시 중대한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때 성해나의 소설은 이분법의 세계를 뒤섞고 흐트러뜨리는 어떤 인물, 몸짓, 덩어리, 정동, 장면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보수적인 할아버지와 글로벌 우파 엄마의 갈등 사이에서 주관을 잃은 임신부(「잉태기」), 신기가 사라져 번아웃이 온 삼십 년 차 박수무당의 처절한 굿판(「혼모노」), 소서리 마을의 갈등과 지역 살리기 프로젝트를 감정적으로 해결하는 스타트업의 부장(「우호적 감정」), 생체 실험의 피해자가 낳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있는 생명 덩어리(「인비인(人非人)」), 한국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재미 교포 3세 예술가가 광화문광장 한복판의 태극기 집회 대열에 우연히 합류하는 순간(「스무드」) 등 성해나의 문학적 상상력은 분명 서로를 타자화하는 양분화된 세계를 기반으로 하지만, 무엇이 이 세계를 둘로 가르고 있는지, 어째서 둘로 갈라졌는지, 그러한 대립 구도가 얼마나 허구적이고 의심스러운 것인지 다시 고민하게 한다. 그리고 이는 한국문학의 성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근대성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으로 이어진다. 근대화가 지식과 계몽, 이성과 합리, 과학과 자본의 세계로 향하는 과정이라면, 성해나의 소설은 그 과정에서 억압되고 누락된 광기와 부정성이 어떤 형상으로 회귀하는지 드러낸다. 이는 비체의 현전을 통해 근대의 암(暗)을 보여주는 식으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성해나의 소설은 애초에 근대를 진보의 시간으로 상정하지 않으며, 그보다 더 실재적으로 근대성 자체의 파기에 닿고자 하는 순전한 열망을 보여준다. 라투르식으로 말하자면, 글로벌을 향하는 진보의 축과 로컬을 향하는 보수의 축이 형성하는 근대적 세계관의 좌표는 동일한 수사법과 논의 구조를 공유하기 때문에 기존의 좌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제3의 항을 향해야 하는데,3) 성해나의 소설은 미약한 진동일지라도 그러한 지향성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이는 성해나의 두번째 소설집 『혼모노』에서 두드러진다. 첫번째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에 수록된 소설들과 장편소설 『두고 온 여름』 등이 세대 간, 가족 간, 계급 간의 소통 불가능성과 단절을 중심으로 읽혀왔다면, 근작으로 올수록 소설에서 툭 튀어나오는 몸짓, 덩어리, 정동 들은 갈라진 세계 사이의 거친 접촉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경계를 무화하는 강렬함으로 작동한다. 어떻게 보면 이는 봉건적 사고관으로의 복고나 회귀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 시점에서는 그 또한 새롭다. 성해나의 소설은 그렇게 문학이 가지 못할 곳, 문학이 없을 것만 같은 곳을 향한다. 이 글은 그 행로에 추진력을 보태고자 한다. 2. 무(巫): 주술 아닌 춤 ‘무속(巫俗)’은 죽은 혼(魂)과 귀(鬼)를 산 사람과 이어주고 하늘과 신의 뜻으로 땅의 대소사를 해소하는 제의(ritual), 그리고 그것의 토대가 되는 주술적 세계관을 아울러 이른다. 「혼모노」는 이런 무속의 세계, 그중에서도 직업 무속인의 세계를 그린다. 이때, ‘직업 무속인’에 방점을 찍은 이유는, 소설의 서술자-주인공인 삼십 년 차 박수 ‘문수’가 처한 상황 때문이다. 원래 그가 모시던 신령은 ‘애기동자’부터 ‘할멈’까지 여럿이었으며, 그중에서도 할멈의 신묘한 능력은 그가 무당으로서 한창 ‘잘나갈’ 때 큰 역할을 했다. 그가 신통하다고 입소문이 나 돈을 제법 벌 수 있었던 것도, ‘황보’라는 국회의원의 전속 무속인이 된 것도, 무형문화재가 될 뻔한 것도 다 할멈 덕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가 모시던 신령은 다 떠나버렸으며, 심지어 할멈마저 그의 바로 앞집에 신당을 차린 ‘신애기’에게 가버렸다. ‘신발’이 다 떨어지고 ‘번아웃’이 온 그는 먹고살기가 어려워져 신문에 ‘오늘의 운세’ 따위의 칼럼을 기고하는, “니세모노(にせもの, 가짜, 선무당을 의미함)”나 할 법한 일을 해야 할 위기에 처한다. 이러한 세속화된 무속의 세계는 그다지 낯설거나 충격적이지 않다. 사람들은 진로 상담 창구로 신당을 찾아가거나, 하는 일이 잘 풀리길 바라며 고사를 지내기도 하고, 직업 무속인들이 방송에 출연해 연애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정치 세력이 무속신앙과 결탁하여 나랏일을 도모하는 모습 또한 흔히 접해왔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인들이 신앙과 미신이 아닌 과학적 원칙들에 의존하며 탈주술화된 근대 이후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믿음에 비추어볼 때 어딘가 이치에 맞지 않다. 그러니까 소설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광경은 근대라고 불리는 세계가 사실은 자연-문화 사이 수많은 하이브리드의 끝없는 증식으로 이루어진다는 라투르적 설명에 부합한다.4) 현재 한국에서 무속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논리와 완전히 결합하여 작동하는 비과학적인 혼합체인 것이다. 그런데 무속은 사실 본래부터 혼성적이었다. ‘무속’이 민속으로서 발견된 것은 일제 치하의 조선 국학자들에 의해서였다. 일제는 오래전부터 한반도에 있던 ‘무’가 조선인의 ‘얼’을 담고 있는 전근대적인 미신이라고 여겨 탄압했으며, 국학자들은 그에 대한 저항으로서 무속의 민족성을 발굴하게 되었다. 문학에서도 무속을 일종의 미학으로 삼아 일본의 것과 구별되는 ‘우리 민족’의 근대 예술 기치를 세우고자 하는 시도가 적지 않았다.5) 그러니까 무속은, 그것이 발견되었을 때부터 전근대성과 근대성을 동시에 가진 혼합체였으며, 현재에 이르러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아닌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더 끈끈하게 결속되었다. 성해나의 초기 작품 중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은 이러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서술자 ‘나’는 친일 조선인의 후손으로, 일본의 천황이 하사한 벚나무 책상이 어떻게 자신에게까지 상속되었는지 그 역사를 들려준다. 처음 그 책상을 받아 사용한 사람은 ‘나’의 조부 김아홍(일본식 이름은 히로타 마사히로)이다. 그는 열두 살 때 참가한 “‘야스쿠니신사 영령께 바치는 글’ 대회”(28쪽)에서 우등상을 수상하며 상품으로 이 책상을 받는다. 그러나 이 책상은 악취를 풀풀 풍기며 어딘가 불길한 기운을 뿜고, 그는 악취의 원인을 찾다가 키우던 고양이가 “책상과 벽 틈 사이”(29쪽)에 숨겨놓은 쥐의 대가리들을 발견하고 까무러친다. 그날 그가 본 것은 쥐의 대가리들만이 아니다. 책상 아랫면에 음각으로 새겨진 글귀 “미카라데타사비(みからでたさび)”6)(30쪽)는 마치 이 가족의 친일 행적을 단죄하듯이 일종의 주술, 저주로 작용한다. 이 저주는 특히 김아홍의 아들 김황보를 괴롭힌다. 황보가 낙마 사고를 당해 대학 입학이 어려워지자 김아홍은 몹시 불안해한다. 결국 1980년 사교육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남몰래 가정교사를 붙이지만, 책상의 저주 때문인지 황보는 극심한 기면증에 시달리다 언젠가부터는 배운 적도 없는 일본말을 방언처럼 중얼대는 등 마치 신병을 앓는 듯한 증세를 보인다. 이때 김아홍의 아버지 김정식은 어느 무당에게 들은 말이라며 “암고양이 호네(ほね)”(32쪽), 즉 고양이의 뼈를 갈아 마시면 기면증이 낫는다고 일러준다. 평소 샤머니즘을 불신하던 김아홍은 고양이 뼛가루를 만들긴 하지만 황보에게 먹이지 않고, 1981년 여권법이 시행되자 아들을 미국에 유학 보내는 것으로 상황을 해결한다. 책상의 저주를 풀기 위해 무속이 아니라 미국 유학으로 대응함으로써 신자유주의적 도약을 보여준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김정식-김아홍-김황보, 그리고 ‘나’의 시대로 올수록 집안의 부가 축적되고 막강해졌음을 보면, 결국 책상에 들린 민족주의적 저주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나’는 『친일인명사전』 출간 십 주년을 맞아 친일 인물의 후손을 인터뷰하고 싶다는 민족문제연구소 직원의 메일을 받지만, 어떤 답장이나 대응도 하지 않고 메일을 스팸 처리한다. ‘나’는 이 문제에 무심하다. 벚나무 책상의 향은 ‘나’를 잠들게 하거나 두렵게 하지 않고, 오히려 조상의 은덕과 옛 정취를 느끼게 한다. ‘나’는 그 책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교수-학자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써야 할 글을 쓴다. 언젠가 이 책상을 다시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줄 날을 고대하며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또 그 아들에게 책상을 물려줄 그날까지도 “내게는,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 일도”(36쪽)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쩌면 ‘미카라데타사비’보다 더 강력한 현시대의 주술적 염원일 것이다. 이렇듯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이 시대가 변함에 따라 이데올로기와 주술의 혼합체가 수행하는 역할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보여주었다면, 「혼모노」는 의심 없이 받아들인 신자유주의와 무속의 결속을 끊어내는 인상적인 장면을 선보인다. 근대의 반대 항에 전근대를 위치시키는 게 아니라 그러한 이분법을 뛰어넘는 몸짓 그 자체를 현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혼모노」의 결말부에서 박수무당 문수가 굿에 완전히 몰두하며 춤을 추는 장면은 중요하다. 이 서사의 주인공을 가르는 건 그것이다. 과장되게 눈을 까뒤집고 억지로 몸을 떨며 신접 흉내를 내는 것은 지금 내겐 무용한 짓이다. 자연스럽게 몸이 떨리고 눈이 뒤집힌다. 오금이 무지근하게 당겨온다.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황보가 경악하며 내 쪽을 보고 있다. (……) 구름도 다 사라진 땡볕 아래, 판수도 악사들도 점점 지쳐가는 와중에 기세가 누그러지지 않는 이는 오직 나뿐이다. 피범벅에 몰골도 흉하겠으나 시야가 환하고 입가엔 미소까지 드리워진다. 신령 근처에라도 가닿은 것처럼 몸이 가뿐하고 신명이 난다. 장단이 빨라질수록 나는 고조된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삼십 년 박수 인생에 이런 순간이 있었던가. 누구를 위해 살을 풀고 명을 비는 것은 이제 중요치 않다. 명예도, 젊음도, 시기도, 반목도, 진짜와 가짜까지도.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듯. 이제야 진짜 가짜가 된 듯.(152~153쪽) 문수의 기세에 눌린 것은 오히려 신애기다. 문수의 무목적적이고 실재적인 행위에 비하면 국회의원 황보의 세속적 성공을 기원하는 신애기의 굿은 너무나도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다. 그렇게 이 장면은 미신과 합리성이 뒤섞인 상징계적 질서에 균열을 내고, 그 세계의 인위적 구분까지도 모두 하찮게 만들어버린다. ‘巫(무)’라는 한자가 사람 두 명이 만나 춤을 추는 모습의 상형이라는 점에서, 소설의 마지막 대목이 보여주는 것은 무속―무당과 관련된 풍속―이 아니라 ‘무’ 그 자체다. 문수의 춤과 몸짓은 이분법적인 언어의 세계로부터 잠시나마 빠져나오는 소설 언어의 움직임이 된다. 3. 근대 괴물이 수태한 것 성해나의 소설은 상징계적 질서의 외연을 순간적으로 무화하는 춤과 몸짓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역사의 서사화를 통해 근대로의 이행 과정에서 비체화된 잡다한 것들이 어떤 형상으로 회귀하는지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특히 과학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며 은폐한 야만성이 괴물의 형상으로 산출되면서, 인간, 혹은 인간성이라고 믿었던 것에 균열이 생기는 지점을 주목해볼 만하다. 「인비인(人非人)」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람이라고도 사람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카타마리(かたまり, 덩어리)”(153쪽)가,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의 합리와 효율을 극대화한 고문 기계-건축물이 그 예시다. 이것들은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괴물’처럼 자신을 만든 창조주-아버지를 끝없이 추격한다. 「인비인(人非人)」은 실제 하얼빈에서 자행되었던 일제 731부대의 생체 실험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소설은 이 생체 실험에 조선인이 가담했었다는 가설을 제시하며, 그 조선인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그린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단지 생화학자가 되겠다는 입신출세의 꿈을 가지고 교토대학에 유학을 온 청년이었을 뿐이다. 야망과 의욕이 과다했던 그는 요시무라 교수에게 충성을 다했고, 그렇게 그의 하얼빈 출장에 동행해 생화학 실습을 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백이십 일간 중국인, 조선인 등의 ‘마루타’를 대상으로 한 온갖 생화학 바이러스 생체 실험을 돕는다. 최소한의 “모럴(moral)”(155쪽)은 겸비한 요시무라 교수 덕에 그는 이 실험에 최대한 소극적으로 가담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조선인 여자 피실험자의 비웃음에 분노와 모멸감을 느낀 그는, 직접 여자의 몸에 페스트균을 주사하게 되고, “여자는 그 밤, 카타마리를 수태하고 즉사”(156쪽)한다. 그는 카타마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카타마리는 참으로 곤란한 생명체였습니다. 치댄 밀가루를 둥글게 뭉쳐놓은 형태에, 눈도 귀도 없었습니다. 얼굴이라고 부를 만한 곳에 코와 입만 겨우 붙어 있었죠. 팔과 다리도 없고, 생식기조차 달려 있지 않아 자웅을 구분할 수도 없었습니다. 굳이 종을 나눠야 한다면, 척추가 있는 환형동물 정도로 분류할 수 있을까요. 온몸이 잿빛 털로 덮인 2.6kg의 굴곡 없는 덩어리. 그것이 탄생하던 밤, 요시무라 교수도 나도 공포와 절망에 휩싸여 실험실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죄(つみ)를 낳았군. 카타마리의 탯줄을 끊으며 교수는 중얼댔습니다.(같은 쪽) 근대과학이 수태한 죄-덩어리는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에서 고문 기계-건축물로 형상화된다. 소설은 박정희 군부독재 정권 시대를 배경으로 하며, 실제 지하철 남영역 바로 앞, 즉 갈월동 98번지에 위치한 남영동 대공분실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소설의 중심 인물인 여재화는 한국 근대건축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김수근(실제 남영동 대공분실의 건축가다), 김중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로, 군부 정권의 고문실로 사용된 ‘경동수련원’의 건축 총책임자이다. 하지만 소설 속 가설에 의하면 고문실 건축에 크게 관여한 인물은 따로 있다. 그는 여재화의 제자 구보승으로, 열정도 능력도 부족한 학생이었으나, 바로 그 점, 실험 정신이라고는 없이 합리성만 철저하게 따지는 성격 때문에 여재화에게 발탁되어 고문실 증축 사업에 합류하게 된다. 구보승은 건축물의 기능을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해 특유의 합리성을 발휘하여 더욱 잔혹한 고문실을 설계한다. 그는 하루에 단 십 분만 햇빛이 드는 좁은 수직 창을 설계하여 피조사자들이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느끼게끔 했으며, 경사가 급한 나선형 계단을 설계하여 피조사자들이 눈을 가린 채 이동할 때 극심한 공포를 느끼도록 했다. 이외에도 사람들이 서로 마주칠 수 없도록 엇갈리게 만든 취조실 출입문, 유공 흡음재를 쓰고 붉게 칠한 벽면과 물고문을 위한 욕조까지, 소설이 묘사하는 경동수련원의 내부 설계 구조는 실제 남영동 대공분실의 구조와 거의 동일한데, 소설에서 이 건물은 어떠한 악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근대가 신봉한 합리성의 극대화가 배태한 야만이다. 두 소설에서 독자는 근대의 합리주의가 수반하는 위험과 야만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다. 마루타 생체 실험, 남영동 대공분실은 물론, 아우슈비츠 학살과 히로시마 원폭 사태 또한 인간과 과학이 만들어낸 파괴적 재앙의 대표적인 사례다. 그런 사건들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근대화와 진보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 몇몇 학자들은 이성과 합리성을 갖춘 국가라면 핵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물론 최근에는 근대성이 전 지구적 식민화와 착취, 전쟁과 무기, 대규모 자연 파괴를 수반한다는 사실을 비판적으로 재고하는 추세이며, 이 연장선에서 성해나의 소설은 그 독특한 형식을 통해 근대성에 대한 의문을 밀어붙인다. 「인비인(人非人)」은 액자식 구성으로, 마루타 생체 실험에 가담한 조선인의 증언이 담긴 편지를 영화감독인 일인칭 서술자 ‘나’가 읽는 것이 외화, 그 편지에 쓰인 내용이 내화이다. 이때 조선인의 편지는 노스럽 프라이가 구분한 산문 픽션의 양식 중 하나인 고백(confession)7)의 일종이다. 조선인은 자신이 페스트균을 주사하여 피실험자가 낳게 된 카타마리를 결국 생매장해버린 죄를 고백한다. 그러나 기독교적 고백의 원형이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만한 죄를 스스로 드러내어 자신을 공공연한 심판의 대상으로 만드는 데에 목적을 둔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인물의 고백은 불온전하다. 그의 고백은 생체 실험에 가담한 경위를 정당화하고 있으며, 소극적으로 관여했다는 변명까지 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죽인 것은 카타마리 하나뿐이라며 살인 종범이라는 낙인에 대한 억울함도 토로하고 있다. 그가 하필 ‘나’에게 편지를 써서 죄를 고하는 이유는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서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다. ‘나’는 편지를 흥미롭게 읽지만 이내 “영화가 될 만한 것은 이것 말고도 차고 넘치니까”(163쪽)라고 생각하며 사무실 서랍에 넣어버린다. 이는 『프랑켄슈타인』8)과 비교해봐도 흥미롭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창조한 징그러운 피조물-괴물과 계속 대치한다. 괴물은 끊임없이 자신을 만든 과학자-아버지를 쫓아가지만 결국 빅터는 죽어버리고, 빅터의 죽음 이후 괴물 또한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최종적으로 북극 탐험 대장 월튼의 편지를 통해 전달된다. 프랑코 모레티의 분석에 따르면, 『프랑켄슈타인』은 서간문의 삽입과 겹겹의 액자식 구성을 통해 괴물이 자아내는 공포로부터 인물들과 독자를 멀어지게 만들며 그들이 안전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도록 한다.9) 반면 「인비인(人非人)」의 조선인은 자신을 ‘오야지(おやじ, 두목, 아버지)’라 부르는 카타마리를 직접 죽였으나, 그 행위에서 오는 공포와 죄의식은 깔끔히 축출되지 않고 카타마리가 삼킨 듀퐁 만년필로 인해 현재로 회귀한다. 그 만년필은 한때 그가 오야지라 불렀던 요시무라 교수가 그의 이름을 각인하여 선물해준 것으로, 생체 실험 피해자의 유골이 대거 발굴된 하얼빈 근린공원에서 출토된다. 그러니까 성해나의 소설에서 이 죄의 덩어리, 괴물의 형상은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 중 떨쳐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땅속에 썩지도 않은 채로 있다가 발굴되는 것이며, 아무리 죽여도 반복해서 재생산되어 우리 삶에 집요하게 들러붙는다. 따라서 고백의 실패는 필연적이다. 고백을 통해 죄를 용서받고 인간으로서 숭고를 되찾는 일은 더이상 불가능하다. 인간은 괴물을 타자화하여 탄생한 것이 아니다. 인간과 괴물은 하나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 카타마리가 그러하며, 카타마리의 오야지도, 그의 오야지도 그러하다. 이러한 전승 구도는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에서도 비슷하게 드러난다. 카타마리가 삼킨 만년필에 자신의 창조주-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듯이, 경동수련원 건물 또한 정초석에 설계자 ‘구보승’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는 구보승의 스승 여재화의 짓이었는데, 고문 기계-건물을 창조했다는 죄를 면하기 위해 구보승의 이름만 기록에 남긴 것이다. 그러나 삼인칭 서술자가 들려주는 가설에 의하면, 구보승이 오직 합리성에 기반한 잔인한 설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승 여재화의 덕이다. 그는 구보승이 젊은 청년으로서 야망을 가지고 합리성을 발휘하도록 부추겼으며, 무엇보다 ‘인간’을 먼저 생각하는 건축을 그에게 가르쳤다. 즉, 건물을 만든 것은 구보승이지만, 구보승을 만든 것은 여재화이다. 구보승은 여재화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고문실이 정녕 인간을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하냐는 스승의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는 인간을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201쪽) 성해나 소설이 내놓은 인간의 의미는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4. 주워섬긴 언어, 그리고 정동 재생산의 모티프가 눈에 띄는 또 한 편의 소설은 「잉태기」다. 표면적으로 생명을 잉태한 사람은 임신부 ‘서진’이지만, 소설은 서진의 엄마인 서술자-주인공 ‘나’와 그의 시부가 서진을 양육하는 방식을 두고 갈등을 겪는 모습을 보여주며 특권 상류층 집안 내의 재생산이라는 ‘잉태기’를 조명한다. ‘나’가 시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의 사이는 지금처럼 나쁘지 않았다. 또, ‘나’는 “클래식 애호가인 점,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를 좋아한다는 점, 보수당을 지지한다는 점, 입이 짧고 미식을 즐긴다는 점”(270쪽), 그리고 서진을 과보호하며 집착적인 애정을 표한다는 점 등 둘 사이의 공통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강한 주관과 고집, 인정 욕구는 ‘나’의 자식인 서진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점점 팽팽하게 대립한다. 이때 ‘나’의 시선에서 그려지는 시부의 양육 방식은 봉건적 질서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248쪽)을 전제로 한다. ‘나’가 서진을 임신했을 때, 시부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 없는 “께름칙한 금기”(254쪽)를 늘어놓으며 ‘나’의 식생활 하나하나에 간섭했고, 서진을 미국에서 낳으려고 했을 때에는 “충주 지씨 대손을 양키 만들 셈이냐며 매섭게 반대”(245쪽)하는 바람에 원정출산을 포기해야 했다. 서진의 이름 또한 성명학자에게 받아오는데, ‘나’는 “성명학은 일본에서 온 폐단이에요. 요즘 시대에 누가 그런 걸 믿어요?”(256쪽)라며 단칼에 거절한다. 한편, ‘나’의 양육 방식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며, 서진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미래지향적인 것들이다. “서진을 품은 열 달간 나는 아이의 장래를 차곡차곡 설계했다”(255쪽)고 말할 정도로, 서진의 삶에 주도면밀하게 관여한다. 실제로 ‘나’는 서진이 무용과 입시를 준비할 때 서진의 몸(체중과 체형 등)을 엄격하게 규율했다. 심지어 서진이 결혼할 상대를 알아본 뒤 일방적으로 혼약을 성사시켰으며 이제는 시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진의 미국 원정출산을 계획중이다. 이렇듯 시부와 ‘나’의 양육 방식은 표면적으로는 과거를 지향하느냐, 미래를 지향하느냐로 나뉘는 듯하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육친적 증여를 통해 자신들의 계급을 재생산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는 크지 않다. 이때 계급이나 이데올로기 재생산에 언어만큼 막강한 것이 없다는 점을 소설은 잘 알고 있다. 서진이 어렸을 때 ‘나’와 시부가 제일 처음 가르쳤던 말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나’는 이제 막 육 개월이 넘은 서진에게 ‘길’ ‘승’ ‘차’ ‘집’이라는 단어를 가르친다. 구개음을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하필 ‘길’ ‘승’ ‘차’ ‘집’이라는 점에서 그 상징성, 즉 욕망과 부를 세습하는 것의 암시임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서진이 가장 먼저 발음하는 단어는 ‘엄마’도 ‘길’ ‘승’ ‘차’ ‘집’도 아닌 ‘지지’다. 지지는 “할아버지를 뜻하는 일본어” “‘지씨 할아버지’의 준말”(251쪽)로, 시부가 서진에게 몰래 가르친 단어였다. 서진은 이렇듯 극단적으로 반목하는,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닮아 있는 두 사람의 언어가 만든 뒤죽박죽의 세계로 진입한다. 그래서인지 서진의 언어는 서진의 내면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고, 서진이 사는 상징계는 그의 언어적 ‘독립’, 혹은 주체화 이후의 세계처럼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서진은 성인이 되어서까지 여전히 할아버지를 ‘지지’라고 부르거나 엄마 앞에서 벗은 몸을 스스럼없이 보여주거나 성적인 말도 가감 없이 하는 등 유아적 단계에 머물러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물론 이는 서술자인 ‘나’의 시점에서 타자화된 서진의 모습이다. ‘나’는 딸이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임신까지 겪었음에도, 정서적 독립을 하지 않은 ‘아이’로 보인다. 그러니까 주인공과 시부가 공유하는 언어의 세계에서는 서진의 속마음, 내면의 목소리 같은 게 포착될 리 없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보자. 결국 ‘나’는 서진을 미국행 비행기에 태우기 위해 공항에 간다. 그러나 공항에 서진을 배웅하기 위해 따라온 시부가 서진의 미국행을 말리자 둘은 또다시 충돌한다. 사람들의 시선도 무시하고 큰 소리로 싸우던 도중 서진은 양수가 터져 바닥에 쓰러진다. 복아, 서진아, 어서 가자, 정신 차려, 여기서 나가자, 참을 수 있어, 네가 미쳤구나, 미친 건 당신이지, 네가 부모냐, 그럼 당신은, 여기서, 여긴 안 돼, 돼, 안 돼, 돼, 안 돼, 돼, 안 돼…… 괴성이 오간다. 오가고 오가다 끝에는 누구 것인지도 모르게 섞여버린다. 나의 목소리인지 시부의 목소리인지도 모르게. 우리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괌행 비행기 출국 알림 방송이 들려온다. 시부와 나 사이에서 서진은 무슨 말인가 한다. 연갈색 눈을 굴리며, 아주 작게, 기운이 다 빠진 소리로, 힘겹게.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다. 그리고 당신도.(297~298쪽, 강조는 인용자) 이 대목에서 서진의 목소리는 소거되어 있다. 아무도 서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심지어는 “당신도”. 이때 ‘당신’은 ‘나’가 자신의 시부를 지칭하는 단어지만, 왠지 독자를 호명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는 「혼모노」의 마지막 대목(“어떤가. 이제 당신도 알겠는가”, 154쪽)과 연결해 읽으면 더욱 그렇다. 목소리의 사라짐은 성해나의 다른 소설에서도 반복되어온 모티프다. 특히 장편 『두고 온 여름』에서 기하와 재하가 오랜만에 재회하여 대화하는 장면은 그 대표적인 예시다.10) 이 장면이 언어가 소통을 방해하는 도구가 되는 순간을 보여준다면, 「혼모노」와 「잉태기」에서는 목소리의 사라짐뿐만 아니라 목소리의 중첩(‘나’와 시부, 문수와 신애기, 할멈의 목소리 등)을 통해 말로 환원할 수 없는 정동적 충돌 속으로 독자들을 연루시킨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언어로 지은 세계와 그 세계에서 증식하는 하이브리드, 그 틈에서 은폐되는 목소리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창작자의 작품과 그의 도덕적 결함을 분리해서 볼 것인가, 라는 오랜 논제를 벗어난 독해가 가능해진다. 서술자-주인공 ‘나’는 영화감독 김곤의 열성적인 ‘덕후’다. 심지어는 김곤이 촬영장에서 아역 배우의 팔을 꼬집었다는 논란이 생긴 이후에도, 사람들 몰래 ‘길티 클럽’(김곤의 비밀 팬클럽) 활동을 하며 김곤을 사랑하는 데에 여념이 없다. 논란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김곤은 인간 윤리에 대한 철학적 주제로 예술영화를 만들고, 현장에서는 드물게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감독이었으며, 친환경적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윤리적 예술가로 정평이 나 있었다. 이러한 김곤의 특징은 스스로 취향과 ‘모럴’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대중의 전형성을 띠는 ‘나’와 반대된다. ‘나’는 김곤을 좋아하고부터 그와 고급한 예술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자세히 보면 김곤을 향한 끌림은 그의 예술론과 관계없이 다분히 정동적이다. 길티 클럽의 오프라인 만남에서도 김곤의 영화 구도를 논하며 현학적인 말을 늘어놓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그저 김곤이 왜 좋은지, 얼마나 좋은지에 관해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나’가 사람들의 언어를 주워섬긴다는 것이다. GV에 간 주인공은 김곤에게 길티 클럽 멤버들이 했던 말을 마치 자신이 생각해낸 것처럼 질문한다(“는 각 장마다 다른 화면비가 사용되었잖아요? 저는 그걸 통해 감독님이 말하고자 하는 게 인간의 가변성인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55쪽). 이는 ‘나’가 처음 김곤의 을 보면서 떠올렸다고 서술하는 생각들이 온전히 ‘나’의 언어와 생각이라고 볼 수 없는 근거가 된다. ‘나’는 “정의할 수 없는 울림과 충격”(21쪽)에 대해 강조하면서도, 영화의 서사와 캐릭터, 컷들과 대사에 대해 제법 분석적으로 서술한다. 이는 ‘나’가 영화를 서른두 번 관람했다는 언급과 커뮤니티와 인터뷰 기사를 통해 영화에 대한 정보를 섭렵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봤을 때, 과거 회상을 하며 사후적으로 덧붙여진 언어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 감상이나 지론이 아닌 주워들은 말들뿐이었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김곤, 그뿐이었다”(55쪽)라고 토로한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애정은 김곤이 GV에서 아역 배우의 이름을 언급하며 관객들에게 사과를 하는 순간, 허무해지고 만다. 그렇게 소설은 언어로 정돈된 정동과 그럼에도 고정되지 못하는 정동의 향방을 좇는다. 이쯤에서 ‘호랑이 만지기’에 주목해보자. 그로부터 몇 년 뒤, ‘나’는 남편과 함께 치앙마이로 여행을 가서 ‘타이거 킹덤’을 관람하게 된다. 비좁은 사육장과 호랑이에게서 풍기는 누린내는 불쾌하고, 이빨을 다 뽑은 호랑이를 만진다는 것이 ‘길티’하게 느껴지지만, 이 불쾌함은 호랑이의 등을 직접 만지는 순간 묘한 흥분과 쾌감으로 바뀌어 일렁인다. 언어적 세계의 공허한 ‘모럴’ 아래에는 이와 같은 ‘길티 플레저’가 있음을, 소설은 촉각적으로 일깨운다. 언어-상징의 세계가 만들어낸 법칙보다 우세한 것은 이제 정동 그 자체인 것이다. 5. 나선형 계단에서 구를 보며 정동은 어디로든 가며 어디에든 들러붙을 수 있다. 「스무드」는 이러한 정동적 마주침의 예측 불가능성을 잘 보여주는 문제작이다. 주인공 ‘듀이’는 재미 교포 3세이며 스스로를 철저히 미국인으로 정체화한다. 세계적인 현대미술 작가 ‘제프’의 방한에 매니저로서 동행한 그는 시종일관 한국 문화에 낯섦을 느낀다. 그러나 듀이는 우연한 계기로 광화문 한복판의 태극기 집회 대열에 합류하여 어쩌다보니 그 안의 사람들과의 연결되는 감각을 느낀다. 이는 양경언이 지적했듯, 극우 집회의 일원들의 삶을 조명하는 “나른한 온정주의”11)가 아니다. 몸짓, 덩어리, 정동, 그리고 그것들의 접촉이 가져오는 결과를 기존의 언어적 세계의 문법으로는 이해할 수 없음을, 성해나 소설이 꾸준히 짚어왔기 때문이다. 「스무드」에서 개연성을 무시하는 전개나 인물의 변덕 등은 분명 불편감을 주는 요철로 느껴진다. 그러나 만약 이 소설에서 이해할 수 없이 불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굴곡을 다 깎아낸다면, 그것은 제프의 작품처럼 인위적으로 매끄럽게 다듬은 ‘스무드’, 즉 커다란 구 모양의 덩어리가 될 뿐이다. 이 구 모형은 보는 이들, 즉 관객 혹은 독자에 의해 다시 의미를 덧입고 언어로써 설명될 테지만, 제프에 따르면 이 ‘스무드’라는 작품은 어떤 속뜻이나 의미, 언어적 부연이 필요 없는 그저 단순한 구의 형체다. 그러므로 매끄러운 의미 작용이란, 허구다. 이때 「스무드」라는 텍스트가 ‘스무드’의 상징을 어떤 식으로 서사화하는지 판단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혼모노’와 ‘벚나무 책상’, ‘카타마리’나 ‘구의 집’, 혹은 ‘지지’와 ‘호랑이 만지기’도 마찬가지다. 확실한 것은, 이것들은 독자로 하여금 의미 판단을 유보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특정한 방향으로 안내하지 않는 성해나의 소설을 읽는 행위는, 마치 나선형 계단 위에 눈을 가리고 선 죄수가 된 것처럼,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더욱 모르게 되는 경험이다. 그때 우리에게는 새로운 좌표계가 필요하며, 문학은 그 영점을 조정하고 지향 가능한 방향성을 재설정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성해나 소설에 나타나는 흥분, 그 혼란한 정동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1) 최근의 정치 국면에서 애국의 수사 못지않게 무속과 관련된 수사도 빈번하게 활용되고 있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첫 국민 담화에서 윤석열은 야당이 "광란의 칼춤"을 추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탄핵 촉구 집회 참여자에 의해 패러디되어 '광란의 칼춤 댄스 동호회'라는 이름의 깃발로 재탄생하는데, 이는 윤석열 정부의 무속신앙과의 결탁을 풍자하면서도 다시금 무속의 수사를 전유하는 방식이다. 이는 '살을 날린다' 같은 말이 정치 진영을 가리지 않고 남발되는 현상으로도 이어진다. 「'새벽형 불안성 새로 고침 단체'부터 '봄이여 오라'까지... 아카이브로 돌아본 탄핵 정국」, 『경향신문』, 2025. 4. 4. 2) 실제로 이태원 한남동에서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가 열렸을 때, 바로 옆에서 비슷하게 큰 규모로 탄핵 반대 집회가 열렸다. 이 두 집단 사이에서 대열이 섞이거나,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이에 당시 의경들은 이태원역 앞에서 사람들의 정치 견해에 따라 각각의 집회 대열로 합류하는 길을 알려주어야 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집단이 광장을 공유하고 대열이 섞이는 상황은 성해나 소설 「스무드」에서 주인공 듀이가 광화문의 태극기 집회에 우연히 합류하는 장면과 겹쳐진다. 3) 진보-보수의 기존 좌표계와 그로부터 벗어난 제3의 항으로의 지향에 관해서는 브뤼노 라투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신기후체제의 정치』, 박범순 옮김, 이음, 2021 참조. 4) 브뤼노 라투르,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홍철기 옮김, 갈무리, 2009. 5) 김은석, 「백석 시의 '무속성'과 식민지 무속론—백석 시의 '무속적 상상력' 재고」, 『국어문학』 48집, 2010, 115~137쪽; 소래섭, 「1920년대 국민문학론과 무속(巫俗)적 전통」, 『한국현대문학연구』 22집, 2007, 75~100쪽. 6) 일본 추리소설 『세 가지 악몽과 계단실의 여왕』(마스다 타다노리, 한겨레출판, 2019)의 역자 김은모의 후기에 따르면, '미카라데타사비(身から出た錆)'는 칼 자체에 녹이 생겨 도신(刀身)을 삭게 하는 현상에서 유래한 일본 속담으로, 자신이 저지른 악행의 결과 때문에 스스로 괴로워한다는 뜻, 즉 '자업자득'을 의미한다. 7) 노스럽 프라이, 「네번째 에세이: 수사 비평—장르의 이론」, 『비평의 해부』, 임철규 옮김, 한길사, 2000, 429~447쪽. 8)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1886년 초판본』, 구자언 옮김, 더스토리, 2018. 9) 프랑코 모레티, 『공포의 변증법』,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4, 19~32쪽. 10) "기계를 분해하고 짐을 나르는 소리 때문에 재하와 나는 고성에 가까울 정도로 목소리를 높여 대화를 나눠야 했다./…… 알았으면 …… 텐데 ……해요./뭐라고?/……하다고요./여기 정리되면 어디로 갈 거니?/네?/여기 정리되면 어디로 갈 거냐고?/네? ……인지 못 ……겠어요./우리는 그렇게 몇 마디를 주고받다가 알아들은 척 고개를 끄덕이거나 말없이 웃으며 대화를 마무리했다."(111~112쪽) 11) 양경언, 「진짜?—성해나 소설의 '나아감'에 대하여」, 『혼모노』 해설, 345쪽.
픽션의 용기와 멀리가는 퀴어―김병운론 여기 한 소설가가 있다. 2014년에 데뷔해 드물게 활동하는 동안 모(母/某)지는 사라져 버렸고 의도치 않게 퀴어 연애담을 다룬 에세이를 첫 책으로 출간한 뒤 ‘후련하게’ 매듭지은 장편소설로 조금씩 주목을 받기 시작해 퀴어 예술가의 자의식을 탐문하는 대표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한 소설가가. 곧 출간될 두 번째 소설집을 포함해 이 작가가 걸어온 여정은 짧지만 드라마틱해서 작가론의 대상으로 더없이 매력적으로 느껴지고, 당사자성과 허구의 글쓰기 사이에서 발생하는 특유의 팽팽한 긴장감은 비평적 분석의 욕망을 자극하는데, 작가가 스스로 이렇게 써버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날 우리가 그런 대화를 나눴던 까닭은 그즈음 우리가 삶과 작품을 연결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쨌든 쓰고는 있으나 아직 작품집을 내지 못한 소설가들이었고,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찾기 위해 나름대로 분투하는 중이었다. 우리는 진짜 해야 할 말이 있음에도 계속 돌려 말하고 있다는 자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이런 식의 커버링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얘기를 토로하듯 자주 나눴다. 그건 분명히 최근의 한국 문학장 안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1인칭 시점의 자전적 글쓰기를 의식한 대화이기도 했다. 제발 네 인생 이야기를 쓰라고, 너의 진짜 목소리를 들려 달라고 독려하는 듯한 어떤 분위기가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다.1) 소설가가 자신을 연료로 삼아 텍스트의 동력을 확보하는 사례는 낯선 것도 아니고 최근 한국 문학장에서 그것이 얼마나 열띤 논의를 생산해왔는지 재차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때로는 과감하고 독창적으로 퀴어 당사자성의 텍스트를 읽어내려는 그간의 시도를 참조해 이 작가의 작품들을 일별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작가론의 형태라면? 한 사람의 작가가 걸어온 길을 따라가면서 작품의 변화를 읽어내고 그가 지향하는 문학적 주제 의식을 탐구하면서 비평적 의미를 덧붙이는 작업이 작가론이라면, 그것이 김병운에게 가능할까? 2020년 이후 그가 쓴 작품 속에는 소설가 김병운의 작가 의식이 ‘직접적’으로 잔뜩 담겨 있고 이는 곧 김병운의 텍스트가 이미 김병운을 픽션이라는 구조 속에서 하나의 도구로 삼고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김병운은 작가가 아니라 이제 차라리 인물이 아닐까. 하지만 이것이 억측일 수밖에 없는 것은 소설 속에서 이미 허구의 장치를 작가가 충분히 마련해 두었기 때문이다. 정체성 서사에 천착하는 몇몇 퀴어 작가가 소설 ‘속’ 자신과 소설 ‘밖’의 자신을 끊임없이 연결시켜 픽션적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것과 달리 김병운은 소설과 현실을 곧바로 잇기보다 그 이음새를 수차례 매만지면서 ‘왜 나는 이렇게 쓸 수밖에 없는가’ 하고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창작의 윤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사적 전략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의 텍스트에 흩뿌려져 있는 온갖 김병운을 작가 자신과 관련짓는 순간 그는 손사래를 치며 작품을 밀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시에 이렇게 말할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이 ‘억측’만은 아니라고. ○ 김병운의 공식적인 데뷔작은 2014년 《작가세계》 신인상 당선작 「메르쿠」이다. 연금술의 망상에 빠져 집에서 키우던 개를 고양이로 바꾸려던 화자의 시도가 사실은 10년간 치매를 앓던 할머니를 살해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는 이 충격적인 이야기는 작가가 가진 서사성의 일단을 드러내는 측면이 있다. 작가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가 이른 시기에 장편의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퀴어 예술가의 자의식 사이에서 흥미진진한 서사의 줄기를 뽑아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점에 기인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김병운의 초기 단편들은 첫 소설집에 실리지 못한 채로 남아 있지만 그의 서사적 동력이 어떤 방식으로 확보되는지, 이후 본격적인 퀴어 서사의 문제의식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08년 제7회 대산대학문학상 시나리오 부문에서 「상흔록」이라는 작품으로 당선된 작가의 이력은 그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첫 번째 풍경이라는 점에서 이채롭다. 이 작품이 어린 세자와 노년의 영의정 사이에 ‘금지’된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또 시나리오라는 형식이라는 점에서 김병운의 지향을 엿볼 수 있는데, 이후 구체적으로 서술하겠지만 퀴어, 아이, 죽음 등 그의 문학적 키워드라 할 수 있을 소재가 이미 출현하고 있을뿐더러 ‘영화’라는 장르에 대한 작가의 특별한 애정도 포착된다. 김병운의 첫 장편이 배우라는 직업과 영화의 현장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음은 물론이고 이후 여러 작품에서 영화적 모티프, 나아가 ‘연기’하는 삶에 대해 쓰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의미 있는 ‘과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여러 차례 언급한 바 김병운은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관심에서 소설이라는 문학의 형식으로 ‘전환’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왜 “소설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을까.2) “나는 네가 나와는 확실히 다르다는 얘기를 한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날 따라하려고 하지 말라고, 나처럼 보이지도 않으면서 보이는 척하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면서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고. 다행히 제정신 멀쩡히 박혀서 태어났으니 그 정신 얻다 내다버린 것처럼 사는 짓은 하지 말라고.” 내가 할 말을 잃고 멍해진 사이, 엄마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나는 네가 날 원망하면서 사는 걸 원치 않았을 뿐이야. 그런데 너는 지금 내 탓을 하고 있구나. 그렇지? 왜 늘 너한테 하지 말라고만 하느냐고? 그렇다면 나는 너한테 묻고 싶구나. 왜 너는 내가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는 거지?”3) 죽음을 앞둔 엄마와 여자친구와의 결혼을 앞둔 아들이 보낸 마지막 시간을 다룬 이 소설은 ‘소설’이라는 형식 자체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 소설이 주는 자유로움을 만끽하기 위해 소설가가 되었던 엄마는 삶을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아들에게는 소설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겼다. 고등학교 때 쓴 소설이 엄마로부터 평가절하 당한 일은 ‘나’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고 ‘나’는 즉흥적으로 아들에게 살해당한 엄마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일종의 복수를 감행한다. 그리고 하필 그런 이야기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자전소설’이기 때문이지 않겠냐며 엄마를 곤혹스럽게 만드는데, 여기에 작가의 소설적 딜레마가 담겨 있다. 서사를 만들어내고자 할 때 가장 자유로운 형식으로서의 소설을 선택하는 것은 일견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 소설은 어떤 허구를 동원하더라도 작가 자신과 손쉽게 연결되는 일을 피하기 어렵다. 김병운이 자신이 가진 서사성을 영화라는 장르에서 소설 쪽으로 옮겨온 뒤 작가로서의 행보를 시작했다고 가정할 때 픽션이 가진 서사적 자유가 역설적으로 작가적 제약이나 한계로 작동한다는 사실은 곧바로 그에게 자각되었던 것 같다. ‘척’하는 장르로서의 소설이라는 인식은 결국 작가 자신에게 던지는 말이기도 해서 이후 그의 변화를 짐작하게 하는 면이 있다. 역시 소설집에 실리지 않은 초기작 「리처드 스콧 씨에게」를 참조하면 김병운에게 ‘시간’이라는 문제 역시 중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데뷔작과 동일하게 이 작품 역시 과거를 계속 복기하면서 현재의 타임라인을 적시하고 있는데, 2014년에 여자친구와의 혼인을 앞두고 있는 ‘나’는 유년 시절 동네에 거주했던 흑인 ‘리처드 스콧’ 씨를 우연히 마주쳤다는 생각에 빠진다. 오로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동네 전체를 긴장시켰던 그는 엄마와 모종의 관계를 맺는다. 누나와 ‘나’는 의심과 의혹 속에 엄마를 지켜보고 결국 엄마와 함께 손을 잡던 스콧 씨에게 ‘나’가 옥상에서 벽돌을 던짐으로써 파국은 시작된다. 그리고 “세 식구가 도망치듯 동네를 떠나”면서, 또 “그 일은 지금 이 순간부터 기억에서 지워버리라”는 엄마의 당부로 이 파국은 곧바로 마무리된다.4) 유년기의 트라우마가 여전히 자신을 지배한다는 것,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의 (절대적) 존재, 누나의 이해라는 구도는 이후 김병운 소설에서 반복되면서 시간의 흐름과 함께 다채로운 감각과 정서적 변화를 추동한다. 그리고 산문집 『아무튼, 방콕』(제철소, 2018)을 계기로 이러한 구도는 퀴어함과 본격적으로 결합한다. 『아무튼, 방콕』은 이례적으로 작가의 소설 단행본보다 먼저 발간된 에세이지만 김병운이라는 작가의 여정에서 매우 중요한 이정표이다. 아주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이 글은 방콕이라는 매력적인 공간을 소개하는, 여행기를 빙자(?)한 퀴어 연애담이라 칭할 수 있을 텐데 삶과 드라마, 생활과 여행의 경계에서 끝없이 고민하는 작가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다. 마사지숍에서 만난 어떤 아주머니는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고 자신의 나라가 싫다면서 “라이프 노노, 드라마 오케이, 라이프 노노, 트래블 오케이”라고 말한다.5)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벗어나 특별하고 흥미로운 에피소드로 소설을 써 보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고, 김병운 역시 ‘드라마’와 ‘트래블’에 매료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신은 “무엇이든 소설로 쓸 수 있는 사람은 또 아닌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는데,6) 이에 연인 H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네가 쓸 수 있는 소설은 뭔데? 나는 한 번 더 말문이 막힌다. 그건 말이지 하고 자신만만하게 일장연설을 늘어놓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럴 수 있었다면 처음부터 이렇게 쓰느니 마느니 하며 징징대지도 않았겠지. 그때 H가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리는가 싶더니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린다. 그건 쓰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거 아닌가. …응? 아직 쓴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냐고. ….7) 일단 써야 한다는 것, 써 보지 않고서는 그것이 소설이 될 수 있는지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이 작가가 도달한 결론인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픽션의 자유로움이란 그것을 쓰면서 망설이고 주저했던 흔적마저 픽션이 될 수 있으며 나아가 ‘나’를 감추고 새롭게 만들어 내면서가 아니라 ‘나’를 적극적으로 쓰면서 가능해질 수 있다는 의미임을 이 시기 김병운은 ‘재인식’하게 된 것이 아닐까.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민음사, 2020)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 “내가 쓰지 못하는 건 하고 싶은 말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용기가 없기 때문이라는 걸 인정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고백으로 이어진다.8) 이 소설을 승승장구하던 배우 ‘공상표’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커밍아웃을 감행하는 이야기라고 우선 요약해 두자. 동생의 갑작스러운 ‘게이’ 선언에 이를 만류하고 ‘수습’하려드는 누나와 엄마의 이야기가 1부를 구성한다. 친구나 동료였다면 기꺼이 지지하고 응원했을 일이 내 가족의 일이 될 때, 얼마나 많은 혼란과 곤혹스러움을 가져다주는지 소설은 ‘누나’의 시선을 통해 보여준다. 동시에 결코 아들을 떠나거나 잃을 수 없는 ‘엄마’의 집착 역시 적실하게 묘사된다. 문제는 이것이 지극한 ‘사랑’이라는 점이다. “주고 또 줘도 바닥나지를 않”는 그 ‘많은’ 사랑이 이들에게 있다.9) 대체로 이해와 사랑은 한 몸이지만 때때로 이해와 사랑은 별개일 수 있음을, 사랑하기에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기에 사랑할 수 없는 복잡한 관계가 소설 속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강은성(공상표)과 김영우의 사랑으로 이어진다. “서로를 완벽한 비밀로 만들기 위해 만전을 기하는 게 이 관계의 성립 조건이자 유지 방법이었”던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 속에서는 내밀한 과거와 경험을 모조리 공유하면서 관계를 키워나간다.10) 온전히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면서 강은성은 “‘진짜 나’는 숨기고 억누른 채 ‘꾸며진 나’로만 어떻게든 버텨 보려”는 노력이 자신의 연기마저 망쳐버리고 있다는 것을 곧 깨닫는다.11) 그리고 김영우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강은성은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로 작정한다. 시작은 언제나 희뿌옇고 자욱한 연기예요. 담배 연기라기엔 너무 축축하고 수증기라기엔 너무 건조한 정체불명의 연기가 시야를 가득 메우죠. 덕분에 저는 열심히 허공을 휘저으면서 조심조심 움직여요. 발길이 닿는 곳마다 빛이 감지되기는 하지만 조명의 위치가 발목께여서 앞은 잘 보이지 않거든요. 그저 간신히 발밑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의 밝기죠. 그래서 사람들의 면면을 살필 수 있게 되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해요. 제가 그곳의 어둠에 완전히 스며들어야 하니까요.12) 이태원 클럽에서 방화 사고로 사망한 김영우의 죽음 이후 강은성은 악몽에 시달린다. 가본 적도 없는 참사의 현장에 당도해서 사건에 휘말리다 순식간에 침묵 속으로 이동했다가 깨어나는 이 꿈은 그에게 여전히 자신은 ‘살아 있다’는 감각을 일깨운다. 죽은 자가 산 자와 다른 것은 ‘시간’이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사람들의 면면을 살필 수 있”는 “한참의 시간”이 제공되어서 어둠 속에서도 시선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은 산 자의 특권이다. 이렇게 살아남은 자가 영원히 시간을 박제해 둘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시간을 ‘쓰는’(use/write) 것이다. 강은성은 김영우가 완성했지만 자신에 의해 폐기되었던 영화, 즉 시간을 되살린다. 그가 쓴 시나리오의 신(scene) 안에서 김영우는 영원히 산다. 이 소설의 2부는 김영우에 대한 강은성의 인터뷰, 그리고 김영우를 연기한 공상표의 영화 <여름과 비밀과 가을>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부록’은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 소개로 채워져 있으며 마지막 작품이 바로 동명의 영화이다. 즉 소설의 후반부는 인터뷰,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등 비소설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전형적인 소설의 외피를 입고 있는 것이 1부임을 전제했을 때, 이 구성은 기묘한 (불)균형을 드러낸다. 가장 ‘현실적’이라고 볼 수 있을 커밍아웃 서사가 허구의 형태로, ‘판타지’에 가까운 로맨스가 비허구적인 형식으로 재현되고 있다는 것은 후자인 퀴어 서사에 요구되는 디테일과 개연성이 훨씬 강하다는 무의식적 발현이 아닐까. 다시 말해 여전히 김병운에게 이 서사의 ‘겹’은 불필요한 가면처럼 느껴졌을 듯하고, 그것이 첫 장편의 출간 직후 또 하나의 전기로 작동했을지 모른다. ○ 김병운의 첫 소설집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민음사, 2022)에는 첫 장편 이후 2년간 그가 쏟아낸 단편들이 뜨겁게 실려 있다. 여기 수록된 7편의 단편소설은 모두 다른 소설이지만 마치 한 시절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이것이 대체로 소설가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모든 소설이 망설이고 의심하면서도 끝내 한 발짝 더 내딛는 신중한 용기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퀴어 영화를 만드는 이성애자 감독에 대해 다소 불쾌하고 못마땅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게이 배우가 있다. 정체성에 관한 예민한 촉수를 세우고 앨라이의 허점과 무감각을 어떻게든 발견하려 드는 그에게 ‘안부현’ 씨의 사연은 다소 특별하다. 오래전 틀어진 흔한 친구 사이의 만남이라 여겼던 약속이 레즈비언 커플의 재회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나’는 자신의 태도를 되돌아본다. 그리고 자신을 캐스팅한 이성애자 감독에게 더 늦지 않게, 더 나은 쪽으로 갈 수 있도록 솔직한 생각을 전하리라 다짐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변화가 단지 안부현 씨가 성소수자라는 점에서 기인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내일은 오늘이 되었다”는13) ‘시간’에 대한 감각이다. 요컨대 스스로의 정체성을 깨닫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이나 그러한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물론 한 사람의 정체성은 누군가의 인정으로 승인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받아들임’은 마치 우리가 누군가의 연기를 보며 그 캐릭터에 공감하고 이입하는 것처럼 그것이 전달되어 이해되는 최소한의 물리적 시간을 뜻하는 것에 가깝다. 또한 타인의 용인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수용, 나아가 긍지를 가지게 되는 일은 시간의 힘으로 가능해진다. 김병운의 서사가 보여주는 시간에 대한 믿음은 단지 미래는 조금 더 나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 시간에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다가올 시간에 대한 긍정이라기보다 지나간 시간을 딛고 당도한 ‘지금’에 대한 확신이 김병운의 인물들을 ‘살아 있게’ 만든다. 함께 보냈던 시간이 헛되지 않았으므로 앞으로 보낼 시간도 분명한 의미를 가지리라는 이 믿음은 그러나, 죽음 앞에서 자주 흔들린다. 물은 문란해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불안해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무력해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슬퍼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화가 나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외로워서 죽은 게 아니다. 물은 게이여서 죽은 게 아니다.14) 김병운의 소설에서 ‘죽음’이 등장하지 않는 작품을 찾는 일은 의외로 어렵다. 초기작부터 근작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작품에 죽음이 등장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죽음으로 인해 소설이 시작된다. 「9월은 멀어진 사람을 위한 기도」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또 갑작스럽게 죽은 ‘물’에 대해 ‘나’는 성소수자의 자살이라는 ‘인과관계’를 끊어내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죽음을 “무결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자신의 의식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15) 죽음의 이유를 만들지 않으면 곧바로 편견과 혐오에 직면하는 퀴어 커뮤니티의 속성, 그리고 실제로 사회적 타살에 가까운 성소수자의 죽음 사이에서 ‘나’는 살아간다는 것의 가치를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나’는 H씨와 9월의 일기를 공유하는 행위를 통해 삶을 차분하게 회복하고 있는데, 어떤 규칙도 제약도 없이 그저 자신의 하루를 기록하고 그것을 공유할 뿐인 행위로 인해 살아감은 지속된다. 소설의 말미에 등장하는 이름 모를 화분의 메모―“살리고 있는 중. 가져가지 마세요.”―는 하나의 죽음이 기꺼이 삶의 회복으로 이어지는 순간을 적시하고 있다.16) 저기요, 광호 씨. 모든 사람이 광호 씨처럼 용감할 수는 없어요. 그래야 할 필요도 없고요. 그건 용기의 문제가 아니에요. 광호 씨가 내 말을 자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시간의 문제죠. 중요한 건 시간이에요.17) 열정적인 퀴어 운동가 ‘윤광호’와의 만남, 그리고 그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단편 「윤광호」에서 ‘나’는 왜 ‘이쪽’의 이야기를 쓰지 않냐는 ‘광호 씨’의 질문에 자신의 예술과 정체성은 상관이 없으며 ‘동성애 작가’로 낙인찍히기보다 더 넓은 예술을 하겠다고 단호하게 대답한다. 그런데 ‘광호 씨’는 결국 내가 쓰게 될 거라고, “시간”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 예상대로 결국 ‘나’는 퀴어 서사가 아니라면 굳이 써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작가가 되었고, ‘광호 씨’의 투병과 죽음은 뒤늦게 확인된다. 그러므로 ‘광호 씨’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을 미래에 대해 어떤 변화와 기대, 희망을 전망한 셈이다. ‘윤광호’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겠다. 1918년에 소설가 이광수는 어떻게 「윤광호」를 쓸 수 있었을까. 시간의 문제라고, 중요한 건 시간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 김병운이 첫 번째 소설집을 통과하며 도달한 지점은 ‘확신 없이 쓰기’라고 할 수 있다. 소설집의 표제작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은 고정되지 않는 정체성의 문제를 다루면서 그것에 대해 쓰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차별과 배제, 편견과 혐오가 걷힌, 그 누구도 불편해하거나 상처받는 일 없이,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것은 작가의 당사자성이나 서사의 진정성과는 관계없이 늘 실패하기 마련이다. 베란다와 발코니, 테라스를 일반적으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정체성의 스펙트럼은 명확하게 나눠지지 않고 다양하며, 또 변화해서 수시로 편견과 차별에 노출된다. ‘나’는 무성애자에 대한 무지와 무감각에 기반한 서술을 전작에 남겨 두었고, 이를 몹시 부끄러워하며 당사자에게 사과의 마음을 전한다. 이 성찰 끝에 작가가 도달하는 곳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면 좋겠어요. 우리에 대해 쓰면 좋겠어요”라는 말을 전해 듣는 순간이다.18) 하지만 그날에 대해 쓸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내 한계를 확인하고는 지운다. 어느 날은 내가 너무 투박한 나머지 우리를 흐릿하게 뭉개 놨다는 판단에 지우고, 어느 날은 내가 너무 성급한 나머지 우리를 매끄럽게 정리해 버린 것 같다는 생각에 지우며, 또 어느 날은 내가 쓴 것들이 모두 궁색한 자기변명 같다는 느낌에 지운다. 그리고 그렇게 지우고 또 지우다 보면 어김없이 어떤 대사를 마주한다. 끝내 지우지 못하는, 아니 모조리 지워도 속절없이 다시 쓰게 되는 그 대사를.19) 확신 없이 쓴다는 것은 곧 무수히 지운다는 것과 같다. 지웠던 흔적은 말끔하게 사라질 수 있겠지만 ‘나’의 말마따나 “끝내 지우지 못하는” 무언가가 남게 된다. 이것은 끊임없이 과거를 반추하는 행위와도 연결된다. 김병운이 돌고 돌아 다시 ‘엄마’의 이야기를 쓰는 것, 자신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자 ‘나’를 세상에 존재하게 한 대상으로서의 ‘엄마’를 탐구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는 것을 넘어 그 ‘이후’의 관계와 시간들로 서사를 확장해가는 것은 그가 “이것이 끝이라고 섣불리 단정하지 않고 내게는 다음이 있다는 사실을 낙관하는 것”을 다짐하는 장면과 겹쳐진다.20) 아마도 김병운은 ‘나’로 재현되는 퀴어 세대를 넘어 유년과 노년으로 이야기의 폭을 넓히려는 듯하다. 「11시부터 1시까지의 대구」가 전형적인 한국 가족, 친지 내에서 자신을 눈여겨보고 있는 조카뻘 세대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라면 두 번째 소설집에 실리게 될 몇몇 단편은 본격적으로 ‘미래’ 세대에 초점이 가 있다. 「크리스마스에 진심」은 연인과의 동거 생활을 정리하면서 집에 남겨진 피아노를 ‘용이’의 조카 ‘찬오’에게 넘겨주기로 한 일로 시작된다. 용이는 조카가 ‘이쪽’일 것 같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데, ‘나’로서는 그렇게 찬오를 “미래의 퀴어”로 상상하는 편이 “불온”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 아이를 남성성을 가진 이성애자로 전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우면서 여성적이어서 퀴어일지 모른다고 짐작하는 일은 왜 이토록 불편하게 받아들여지는지 ‘나’와 용이는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 급기야 찬오는 ‘나’의 집에 방문해 삼촌이 없을 때 이렇게 묻기까지 한다. “삼촌이 게이예요?” 제가 싫은 건요. 할머니가 걱정하는 거예요. 할머니가 그러는데요. 제가 삼촌 어렸을 때랑 비슷하대요. 그래? 네, 너무 비슷해서 깜짝깜짝 놀란대요. 할머니는 그게 싫으시대? 아니요, 그런 말은 안 했는데. 그냥 제가 알아요, 속상해한다는 걸. 그래서 말인데요. 아저씨가 저 대신 우리 삼촌이랑 많이 놀아줄 수 있을까요? 저도 안 놀 건 아닌데, 앞으로도 계속 놀 거긴 한데, 그래도 지금보다는 덜 놀아야 할 것 같아서요. ……21) 피아노를 치는 찬오의 영상을 ‘나’는 ‘엄마’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묻는다. 자신은 어떤 아이였냐고. 어른들의 이야기를 얌전히 앉아서 몇 시간이 들었다는 ‘나’의 과거는 꽤나 긴 시간을 건너 오늘에 이르렀고 아마도 멀지 않은 미래에 그들은 찬오에게 “너는 그런 아이였”다고 말해주게 될 것이다. 그러한 조우는 놀랍게도 이미 「세월은 우리에게 어울려」에 실현되어 있다. 성소수자였던 ‘장희’의 삼촌은 엄마에 의해 ‘감염인’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졌으나 사실 여전히 오래된 파트너와 함께 여생을 보내고 있었고 그 소식을 알게 된 ‘나’와 ‘장희’는 삼촌과 삼촌의 곁을 지키는 사람을 찾아 부산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삼촌과 화상으로 만나면서 어린 ‘장희’를 바라보던 삼촌의 마음을 천천히 확인하는 장면은 정확히 ‘찬오’을 보는 시선과 겹친다. 삼촌의 세대에서는 그 시선과 관심을 애써 밀쳐두고 끝내 어딘가에서 죽어버렸다고 치부해야 남은 가족이 삶을 감당할 수 있었지만 아마도 ‘나’의 세대는 그것과 다를 것이다. ‘장희’의 엄마도, 삼촌도 끝내 세상을 떠났지만 그 오랜 시간을 건너 작동되기 시작한 필름카메라처럼, 그리고 그 삼촌에게 꾸준히 장희의 소식을 알렸던 엄마의 마음처럼 과거는 시간을 돌려 미래로 향한다. 모교의 선생님을 우연히 만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교분」도 다음 세대의 퀴어를 다룬다. 성소수자 선생님의 지지로 학창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나’는 소설가가 된 뒤 학교의 초청 특강이 급작스럽게 취소된 일을 기억하고 있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사유로 그 일은 일어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제출된 독서감상문이 있었다. 꼭 자기 얘기 같았대. 네 소설을 읽는 동안만큼은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대. 다른 사람의 생각이 너무도 중요한 자신이 밉고, 그럼에도 다른 사람을 향한 기대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어려워서 속상하고. 아이고…… 추천해줘서 고맙다고 하는데 완전히 실패한 건 아니구나 싶더라고. 너도 알잖아. 뭔가 다른 친구들은…… 어디에나 있죠. 그래, 어디에나 있지.22) 이 소설이 최초 수록분에서 상당 부분 전향적으로 수정되었다는 사실은 언급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선생님’은 분명한 정체성을 갖게 되었고, 소설의 마지막에서 결국 인사를 나누게 되는 ‘1학년 3반 9번 김인경’ 역시 조금 더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마련되었다. 즉 퀴어인 선생님과 제자가 학교 현장에서 조우하게 되는 일이, 또 다음 세대의 퀴어와 마주하게 되는 일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를 묻지 않고, 일단은 ‘써본다’는 것, 결국 시간이 답을 주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김병운의 현재에 반영되어 있다. ○ 다음 세대의 퀴어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더불어 「봄에는 더 잘해줘」, 「오프닝 나이트」에 나타나는 특유의 다정함과 섬세함이 여전하지만 무엇보다 지금의 김병운에게 가장 특별한 것은 ‘아버지’에 관한 것으로 보인다. 몇몇 작품들에서 아버지는 생략되거나 다소 모호하게 그려졌던 것이 사실이고 김병운의 서사에서 엄마가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아버지의 자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런데 「만나고 나서 하는 생각」을 통해 재현되는 유년기의 기억과 아버지라는 존재는 작가의 새로운 서사적 동력으로 기능하는 듯하다. 아빠의 기일을 맞이한 ‘나’는 유년 시절 아빠의 장애와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광포한 밤들을 자주 보내야 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선천적 청각장애를 안고 있었지만 청인 사회에서 생활한 아빠는 농인과 청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괴롭고 외로운 나날을 보냈던 사람이었다. 집안의 권유로 일찌감치 엄마와 결혼했으며 행여나 장애를 물려주게 될까 한참 아이를 낳지 않으려 했던 아빠의 삶은 소수자의 위치에 서 있는 ‘나’로 하여금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다. 아빠를 향한 내 마음이 복잡해지는 게 싫어서 애써 외면했던 장면들이 있다. 미움의 순도를 높이고 피해자의 자리를 사수하기 위해서 불순물을 걸러내듯이 한쪽에 따로 덮어두었던 기억들이 있다. 내가 하는 말을 파악하기 위해 눈이 아닌 입으로 모이던 눈길과 조금 천천히 말해달라며 내 어깨를 지그시 누르던 손길. 비디오 가게에서 대여해온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나보다 더 즐겁게 감상하던 옆모습과 한 주간 쌓아둔 스포츠 신문을 주말 내내 꼼꼼히 정독하던 뒷모습. 마루에 앉아서 우두커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표정과 저기 저 새들은 어떻게 대화하는지 아느냐고 묻던 눈빛. 갱생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말갛고 환해졌던 안색과 이번에는 진짜라며 손가락을 걸고 금주를 다짐했던 미소. 애원하듯 꾹꾹 눌러썼던 내 모든 편지를 하나도 빠짐없이 모아두었던 상자와 필담노트에 아주 가끔씩 등장했던 글씨체. ‘못 들어서 미안해.’23) 아마도 김병운의 서사는 조금 더 먼 곳을 향하고 있는 듯하다. 자기고백적 퀴어 서사와 로맨스, 정체성 서사를 가로질러 퀴어 민족지를 적극적으로 구축하려는 작가의 지향은 삶의 시간들로 죽음을 건너가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시도의 출발은 사과하는 마음에 있다. 김병운의 소설에서 죽음이나 시간만큼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은 ‘미안하다’는 말이다. 고맙다고 말해야 할 여러 순간에도 김병운의 인물들은 ‘미안함’을 전한다. 그 미안함은 꽤 오랜 시간을 지나 당도한, 그러나 너무 늦지는 않은 말이다. 이 사과는 존재에 대한 부정이나 행위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에 관한 것이다. 김병운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했던 시간에 대해 쓰지는 않는다. 그저 그 시간들이 흘렀으므로 이제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순간 어쩌면 많은 것이 바뀔 수 있다고. 그리하여 우리는 더 멀리 갈 수 있다고, 김병운은 쓴다. 1) 「어떤 소설은 이렇게 끝나기도 한다」,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민음사, 2022, 256-7쪽. 2) 〈소설 부문 당선 소감〉, 《작가세계》, 2014년 겨울호, 80쪽. 3) 「남기는 말씀」, 《문장웹진》, 2017년 2월호. 4) 「리처드 스콧 씨에게」, 《대산문화》, 2015년 봄호, 160쪽. 5) 『아무튼, 방콕』, 제철소, 2018, 36쪽. 6) 위의 책, 85쪽. 7) 같은 쪽. 8) <작가의 말>,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 민음사, 2020, 286쪽. 9) 위의 책, 128-129쪽. 10) 위의 책, 155쪽. 11) 위의 책, 181쪽. 12) 위의 책, 240-241쪽. 13) 「한밤에 두고 온 것」,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민음사, 2022, 43쪽. 14) 「9월은 멀어진 사람을 위한 기도」, 위의 책, 205쪽. 15) 같은 쪽. 16) 위의 책, 209쪽. 17) 「윤광호」, 106쪽. 18)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위의 책, 84쪽. 19) 같은 쪽. 20) 「어떤 소설은 이렇게 끝나기도 한다」, 297쪽. 21) 「크리스마스에 진심」, 《웹진 비유》, 2022년 11월호. 22) 「교분」, 근작. 23) 「만나고 나서 하는 생각」, 《창작과비평》, 2024년 가을호, 132-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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