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들 2024년 겨울호(제78호)
정지돈 사태와 공론장의 쟁점들
1. 두 번째는 소극(笑劇)으로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 서두에서 세계사적 의미를 지닌 사건은 두 번 반복된다는 헤겔의 말을 인용한 뒤 헤겔이 덧붙이길 깜빡했던 중요한 진리를 상기시킨 바 있다. 그건 그 사건이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소극(笑劇)으로”1)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정지돈 사태는 4년 전 김봉곤 사태의 소극적 반복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번 사태에서 함부로 웃음을 터뜨릴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소극은 그래서 다시 한 편의 비극이다.
사태는 폭로인 김현지가 2024년 6월 23일 자신의 네이버 블로그에 <김현지, 김현지 되기>라는 글을 올리면서 시작되었다.2) 이 글에서 김현지는 정지돈이 『야간 경비원의 일기』(2019)와 『브레이브 뉴 휴먼』(2024) 두 작품에서 자신의 사생활을 허락 없이 소설화했다고 폭로했다. 폭로 이전 정지돈과 나눈 이메일을 참고하면 처음에 김현지는 『브레이브 뉴 휴먼』의 주인공 ‘권정현지’가 김현지를 참조한 인물이 아니라는 정지돈의 해명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채 『야간 경비원의 일기』에 대해서만 다음의 조치를 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① 사안에 대한 인정을 담은 공식 사과문 게재 ② 해당 도서에 관한 판매 중지 및 회수 ③ 김현지에 대한 영원한 비밀 유지. 정지돈은 끝내 그 요구 사항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을 전했고 이에 김현지는 사안을 공론화하는 길을 선택했다.
이후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번져 나갔다. 김현지가 『브레이브 뉴 휴먼』의 권정현지가 김현지인지 여부에 대한 판단을 사회에 맡기겠다고 밝힌 것이 결정적이었다. 『야간 경비원의 일기』에서 자신이 겪은 스토킹 피해가 동의 없이 소설화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던 김현지가 『브레이브 뉴 휴먼』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했을 때 큰 충격과 당혹감, 그리고 수치심을 느꼈을 것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김현지가 느낀 수치심과 그로 인한 고통을 인정하는 것과 정지돈이 『브레이브 뉴 휴먼』에서 김현지의 내밀한 사생활을 소설화했으며 심지어 거기에 ‘쓰리섬’을 비롯한 성적인 기호를 탑재함으로써 김현지를 성적으로 능욕했다는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정지돈의 첫 번째 입장문은 김현지의 폭로 이틀 뒤인 6월 25일에 발표되었다.3) 거기서 정지돈은 자신의 부주의로 인해 김현지에게 아픔을 주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야간 경비원의 일기』에 대해서는 판매 중단 조치를 취하겠으며 『브레이브 뉴 휴먼』에 대해서도 출판사와 협의해 가능한 조치를 모두 취하겠다고 밝혔다. 자신을 향한 거센 여론의 압박에 떠밀려 납작 엎드리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정지돈이 김현지의 폭로 내용을 모두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정지돈은 『브레이브 뉴 휴먼』의 등장인물 권정현지는 여성학자 ‘권김현영’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조합해 만든 이름일 뿐 옛 연인 김현지와는 무관하며 그 작품에서 결코 김현지의 삶을 쓰지 않았다는 주장을 고수했다.
정지돈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잦아들지 않았다. 『야간 경비원의 일기』는 판매 중지 되었으므로 『브레이브 뉴 휴먼』의 문제가 남았다. 김현지와 일군의 대중들은 정지돈의 해명을 무시한 채 “권정현지가 김현지가 아니라면 그 증거를 작가가 직접 책임 있게 제시하라.”고 요구했다. 폭로 사실에 대한 입증 책임을 진 김현지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객관적인 증거를 내놓지 않는 상황에서 입증 책임이 정지돈에게 떠넘겨지는 도착적인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정지돈을 <전여친 실명으로 ‘인공 자궁’ ‘쓰리섬’ ‘임신’ 판타지 소설 쓴 남자 작가>로 매도하는 글이 확산했다. 해당 도서에 대한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출판사 은행나무 역시 공격받았다. 하지만 『브레이브 뉴 휴먼』이 김현지의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작품이라면 그에 대한 인정과 후속 조치를 요구하는 거센 비난의 목소리야말로 객관적 사실과 실체적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탈진실적 난동에 불과할 터였다.
김현지는 최근에 낸 입장문 <중요한 건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에서도 『브레이브 뉴 휴먼』이 자신의 가족사와 개인사를 도용했다는 주장을 철회하지 않고 있다.4) 거기서 김현지는 정지돈이 『브레이브 뉴 휴먼』의 <작가의 말>에 쓴 다음과 같은 문장-“사실 가정은 지구에서 가장 많은 강간과 살인이 일어나는 장소다.”-을 인용하며 자신이 “유기 및 가정 폭력의 피해자”였음을 겹쳐 두고 있다. 자신이 가정 폭력의 피해자라는 걸 알고 있었던 정지돈이 가정 폭력에 대한 소설을 썼다는 사실이야말로 그가 자신의 삶을 소설의 재료로 활용했다는 걸 입증하는 유력한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김현지가 『브레이브 뉴 휴먼』의 인세를 자신의 이름으로 ‘가정 폭력 피해 구제 단체’에 기부하라는 황당한 요구를 했던 이유도 비로소 명확해진다. 김현지는 『브레이브 뉴 휴먼』이 가정 폭력에 관한 소설이며 자신이 입은 가정 폭력 피해 사실이 권정현지라는 인물을 통해 이 작품에 드러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김현지의 개인적인 믿음을 존중하는 것과 별개로 『브레이브 뉴 휴먼』은 가정 폭력에 관한 소설이 전혀 아니다. 작품 내에 가정 폭력을 직접적으로 서술하거나 암시하는 대목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정지돈은 <작가의 말>에서 가정 폭력을 언급했을까? 그 언급이 실린 전후 맥락을 살펴보면 그것은 가정 폭력 자체를 부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가족 제도에 내재한 구조적 폭력’을 드러내기 위해 다양한 사례를 나열한 것에 가깝다. 이때 가족은 사회적이고 생물학적인 재생산 장치(dispositif)로서 등장하며 거기에는 가정 폭력과는 다른 층위의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다. 정지돈이라면 4인 가족이 서울 강남의 자가 소유 아파트에서 화기애애하고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모습에서도 정상성의 관념을 재생산하는 인류 최후의 이데올로기 장치로서 가족 제도가 지닌 폭력적인 메커니즘을 읽어 낼 것이다. 이 작품에서 제도로서의 가족이 체현하고 있는 폭력성과 일반적인 가정 폭력이 구별되어야 하는 이유다. 정지돈은 가족 제도 자체의 폭력성을 대안적인 상상력을 통해 서사화하기 위해 “인공 자궁과 가족제도에 대한”5) 세 편의 소설을 썼다고 밝히고 있으며 『브레이브 뉴 휴먼』은 그 계열에 속한 하나의 작품이다. 정지돈의 이 작품에 가정 폭력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것은, 당연히 정지돈이 김현지의 개인사를 염두에 두고 이 작품을 쓰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그가 겨냥하는 가족 제도의 폭력성이 물리적인 가정 폭력으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지돈 자신은 소설적 기획을 부당하게 축소하는 결과를 낳기에 정지돈으로서는 적극적으로 피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렇듯 이 작품에는 실제의 가정 폭력 피해 사실을 굳이 작품 내에 들여올 아무런 서사적 동기가 존재하지 않으며 당연하게도 실제 가정 폭력 역시 재현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김현지가 『브레이브 뉴 휴먼』이 자신의 가족사를 도용했다는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굳이 자신이 겪은 가정 폭력 사실을 구체적으로 공개할 이유 또한 없는 셈이다. 김현지가 자신이 입은 실제 피해 경험을 아무리 상세하게 밝혀도 『브레이브 뉴 휴먼』이 가정 폭력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 아닌 한, 이 작품이 김현지의 가정 폭력 경험을 동의 없이 소설화했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2. 공론장은 존재했는가
정지돈 사태는 4년 전 김봉곤 사태의 소극적 반복이라고 적었지만 두 사건 사이에 차이가 없었던 건 아니다. 김봉곤 사태 때와 달리 이번에는 폭로인 김현지가 “광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선정적으로 소비되는 데에 그치는 일이 아니라 참여자들의 태도에 따라 미래로 나아가는 일이 될 수도 있다.”6)는 믿음을 드러내며 이 사안을 공론장에서 적극적으로 논의해 줄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김현지의 이와 같은 제안은 정지돈 사태의 초기 국면을 규정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이 제안을 통해 김현지의 폭로는 정지돈에 대한 사적 응징과 보복의 차원을 넘어 첨예한 문학적 쟁점을 논의할 수 있는 계기로 포장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소설가 천희란은 김현지가 “온라인상의 공론화를 개인의 피해 회복의 도구로만 유용하지 않고 논의의 장으로 연결하려 고심한 지점들을 목격”7)했기에 이 사태에 대한 아카이빙 프로젝트인 <횡단 : 제도의 안과 밖을 횡단하기>를 제안할 수 있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김현지의 제안에 응답하듯 이 사안을 두고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많은 의견이 제출되었다. 하지만 그 의견이 오갔던 공간을 공론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분명 거기에는 귀 기울여 들을 만한 목소리와 의견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차분하고 건설적인 목소리는 소수에 불과했으며 작가나 폭로자 개인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과 왜곡에 기초한 공격이 압도적이었다. 공론화는 다양한 견해를 지닌 참여자들이 집단 지성을 활용해 쟁점이 된 사안을 다층적으로 점검하고 이를 기반으로 중첩적인 합의에 도달하는 과정을 지향하며 이 과정에서 숙의와 토론은 판결과 처분을 위한 필수 선행 조건이다. 그런데 이번 사태에서 공론장은 그와 같은 차분한 숙의와 토의를 장려하는 열린 공간이 아니라 가짜 뉴스와 인신공격을 확대 재생산하고 그에 기댄 처분을 힘의 논리로 집행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알리바이로 기능했다.
가장 큰 이유는 마구 뒤섞여 있는 공론화의 쟁점을 차분하게 추릴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태의 초기에 제기된 쟁점 중에는 공론장에서 논의할 수 있는 쟁점과 그렇지 않은 쟁점이 혼재되어 있었다. 작품을 창작할 때 타인의 동의를 어느 선에서 구해야 하는가 혹은 타인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 재현은 그 자체로 비윤리적인가 혹은 이런 사태가 발생했을 때 작가와 출판사는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가를 둘러싼 쟁점은 공론장에서 논의해 볼 만한 주제였다. 반면 『브레이브 뉴 휴먼』의 주인공 권정현지를 김현지로 볼 수 있는지 여부는 공론장에서 논하기에 부적합한 주제였다.8) 아무리 훌륭한 공론장도 작가의 창작 의도를 사후적으로 확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편 작품에 대한 악의적인 왜곡에 기초해 벌어지는 작가에 대한 인신공격 및 출판사에 대한 절판 압력처럼 공론장에서 반드시 논의되었어야 할 사안이었으나 누락된 쟁점도 다수 존재했다. 그 결과 공론장은 정지돈을 <전 연인의 이름을 소설에 가져다 쓰고 그 인물을 성적으로 능욕한 리벤지 포르노범>으로 몰아가는 과정에 판을 깔아 주는 가련한 기표로 전락하고 말았다.
온라인 공론장이 민감한 쟁점을 차분하고 건설적으로 풀어가는 데 무기력하며 때로는 해악적이기까지 하다는 사실은 김봉곤 사태 때 드러난 것이기도 하다. 이번 정지돈 사태는 온라인 공론장이 그 사이에 더욱 심각하게 퇴행했음을 보여 준다. 물론 온라인 공론장을 적극적으로 요청하는 사람이 그동안 발언권을 독점해 왔던 내부의 전문가가 아니라 평범한 독자이자 시민이라는 점에서 온라인 공론장이 기존의 폐쇄적인 담론의 소통 구조를 넘어 새로운 담론장을 개척하고 있다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아즈마 히로키는 공론장에 관한 한 가장 극단적인 회의론자에 속한다. 그에 따르면 현대 사회에서 공론장 같은 것은 어디서도 가능하지 않다. 근대적 공론장을 구성하는 공공성에 대한 통일적 사유가 붕괴한 데다 천차만별인 대중들의 주관과 경험, 감성과 정동을 합리적 이성을 통해 제어하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이유로 인해 “현대 사회에서 숙의라는 이상은 성립하기 힘들”며 “시민들 모두가 자신이 공적인 존재임을 자각하여 함께 논의하고 정치의 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9)는 것이 아즈마의 주장이다. “‘공공적’ 토론 공간 없이 건전한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10)는 하버마스의 주장을 기각한 아즈마는 오히려 현대에는 공론장 없는 민주주의를 상상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즈마가 근대적 공론장을 대체할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했던 것은 트위터(지금의 X)였다.
아즈마 히로키에 따르면 트위터는 친밀한 소통 공간일 뿐만 아니라 유행하는 이슈가 폭발적으로 끼어드는 열린 공간이기도 하다. 숙의가 비교적 동질적인 이해를 갖춘 사람들 사이에서 폐쇄적으로 이루어지는 데 반해 다양한 트윗에 우발적으로 열려 있는 트위터는 대중들의 욕망과 무의식을 일종의 데이터베이스처럼 집적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금세 다른 말들에 섞여 용해되어 버리는 트윗의 ‘내용’이 아니다. 그보다는 트윗 무더기가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의 집적을 이룬다는 사실이 핵심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리트윗의 성격은 트위터 상에서 헛소문이나 중상모략이 퍼지기 쉽다는 것을 의미”11)한다며 그 폐해 또한 지적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파생 효과일 뿐 트위터 자체의 구조적 한계라고 보지는 않는다. 아니, 아즈마에게는 그 헛소문이나 중상모략조차 대중의 욕망과 무의식을 보여 주는 훌륭한 데이터베이스 자료일 수 있다.
트위터와 구글에 기대를 거는 아즈마 히로키의 논의는 종종 그가 온라인 공론장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한다는 식의 주장과 혼동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숙의와 민주적 토론에 기반한 공론장이라는 것 자체가 오늘날 더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아즈마의 주장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이런 판단은 오해에 불과하다. 아즈마 히로키가 트위터에 기대를 거는 건 거기서 무언가 ‘의미 있는 의견’이 생산되고 교류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다. 아즈마는 온라인에서 ‘의미 있는 의견’ 따위가 생산되고 교류되며 그로 인해 어떤 사안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다만 트위터처럼 엄청난 수의 대중들이 사고 활동과 언어 활동 데이터를 집적함으로써 거기에서 새로운 일반 의지 혹은 대중의 무의식적 욕망을 검출할 수 있는 가능성에 기대를 걸 뿐이다.
아즈마 히로키가 트위터에 걸었던 기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통용될 수 있을까? 아즈마의 책이 10년도 더 전에 나온 것이라는 걸 감안할 때, 그리고 그 사이에 진행된 정치적 부족주의와 양극화, 탈진실과 가짜 뉴스의 범람을 고려할 때 그 기대를 동일한 방식으로 견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즈마 히로키가 트위터에 기대를 걸었던 이유는 그 매체가 우발적이고 이질적인 타자와 세계에 근본적으로 개방적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트위터가 타자의 이질성이 마구 틈입하는 공간이 아니라 자아의 동일성을 공고하게 만드는 공간에 불과했다면 아즈마 히로키가 굳이 트위터에 기대를 걸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트위터는 다른 소셜네트워크 서비스와 마찬가지로 주체의 동일성을 더욱 강력하게 주조해 냄으로써 부족주의와 확증 편향을 강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 트위터를 비롯한 온라인 공론장이 약자와 소수자의 소통 창구이자 소중한 무기라는 식의 적극적인 평가가 관념적인 소리에 불과한 건 그 때문이다. 온라인 공론장에는 온갖 가짜 뉴스와 음모론, 정치적인 선동은 물론이고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각종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12) 나는 정지돈과 김현지 모두 그 온라인 공론장의 피해자였다고 생각한다. 김현지는 난데없이 과거 이력이 공개되면서 사안의 본질과는 무관하게 부당한 공격에 노출되었고 정지돈 역시 작품과 작가에 대한 악의적인 왜곡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김봉곤 사태와 정지돈 사태의 전개 과정을 되짚어 보면 오늘날 토론과 숙의에 기반한 공론장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기획이 되어 버렸다는 아즈마 히로키의 급진적인 선언에 어느 정도 마음이 기울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아즈마가 기대를 걸었던 트위터까지 탈진실 선동의 도구로 전락한 오늘날 현실에서 공론장의 규범적 이념을 포기한다는 것은 날로 위력을 더해 가는 탈진실의 공세에 무기력하게 굴복하는 결과로 귀결될 공산이 크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공론장의 불가능성을 체념하거나 냉소하기보다는 새롭게 정립해야 하는 공론장의 규범을 묻고 이를 현실화하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어떤 사태가 발생했을 때 공론장을 재빨리 선점하고자 하는 조급함 역시 탈진실의 역습 못지않게 우리가 마련하려는 공론장의 규범적 이상을 위협한다는 점을 거듭 새길 필요가 있다. 우리가 원하는 공론장은 개별 쟁점을 차분하게 준별함으로써 함께 논의할 사안을 구체화하여 제시하며 그 논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다양한 정보를 습득하고 교류함으로써 쟁점에 대한 나름의 견해를 세워 갈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재 마련된 사법 절차에 미달하는 처분을 공론의 이름으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법 절차의 회색지대까지 포괄하는 것이어야 한다.13)
3. 분노한 대중과 적대의 전선들
공론장의 규범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일이 중요한 까닭은 어차피 싸움을 피할 수 없는 세상이라면 잘 싸우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장정일은 “싸움이 매번 인격 모독, 야비한 언사와 조롱, 말꼬리 잡기 (…) 논점 이탈, 자기주장의 무한 반복으로 얼룩진다면 진흙탕에 뒹구는 개가 되기로 작정한 사람만이 싸움에 나설 것”이라고 말한 뒤 “경기의 규칙(fair play)이 없는 사회는 나쁜 싸움만 벌이면서 싸우는 사람만 싸우게 만들고 방관자를 양산한다.”14)고 덧붙인다. 이번 정지돈 사태도 많은 방관자를 양산했다. 하지만 그 방관자들을 단지 무책임하고 비겁한 존재로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오히려 문제는 그와 같은 방관자를 구조적으로 생산하는 현재 ‘공론장’의 왜곡된 실체에 있는 것이 아닐까? 과연 이따위 ‘공론장’에서 누가 기꺼이 “진흙탕에 뒹구는 개”가 되기를 자처하겠는가?
하지만 오늘날 공론장이 나쁜 싸움을 반복해서 상연하는 어설픈 가설무대에 불과해졌다고 비판하고 마는 것은 불충분하다. 우리는 한발 더 나아가 그와 같은 왜곡된 공론장을 형성하는 대중들의 정동을 어떻게 해석하고 판단할 것이냐를 물어야 한다. 오늘날 온라인 공론장이 익명성을 띤 다수 대중의 집합적 정념이 투여된 결과라고 할 때 그 대중들의 존재론과 정치학을 탐구하지 않고 이 문제를 덮어 버리는 것은 수박의 겉을 핥고 그 맛을 보았다고 착각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정지돈의 작품에 대한 악의적인 왜곡을 퍼뜨리고 작가를 파렴치한 성착취범으로 몰아 공격했던 사람들이 지녔던 정념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단지 허위 사실과 가짜 뉴스에 선동된 결과로 치부하면 그만일까? 하지만 이는 대중의 주체성을 지나치게 수동적으로 축소하는 일이 아닐까? 언뜻 비이성적인 난동처럼 보이는 대중들의 반응에서 우리는 어떤 정치적 욕망을 읽어 낼 수 있지 않을까?
기유정의 『식민지의 소란, 대중의 반란』(산처럼, 2024)은 이런 의문을 더욱 깊이 몰고 가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책이다. 식민지 시기에 발생했던 대중 폭력을 조명한 이 책에서 저자는 “사건 현장에서 즉각 다수가 된 이들이 스스로 어떤 것을 ‘죄’라고 판단하고 그 죄지은 대상을 응징”하던 “폭력”을 정치적으로 의미화하는 시도를 편다.15) 저자는 식민지 시기 당시 출몰했던 폭력적 대중을 ‘정치적 대중’으로 의미화하는데 이때 ‘정치적 대중’이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적’을 향해 돌을 집어 던지는 상황적인 판단, 즉, 결단으로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또 그렇게 사라지는 대중”16)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정지돈을 향해 돌을 집어 던지고 지금은 흩어진 그 대중 역시 동일한 결단에 의해 형성된 ‘정치적’ 대중의 한 양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는 그와 같은 ‘정치적’ 대중이 일으킨 소란과 폭력의 사례들로 빼곡하다. 먼저 종로소학교 폭동을 살펴보자. 1918년 8월, 종로소학교 운동장에 쌀을 사려고 몰려들었던 조선인 200여 명이 조선인 노파를 때려죽였다고 지목된 일제 순사를 집단 폭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하지만 이후 밝혀진 진상은 다음과 같았다. 사람들은 새벽부터 쌀을 사려고 기다렸으나 쌀은 오후 두 시경 모두 떨어지고 말았다. 경찰이 사람들을 향해 팔던 쌀이 모두 떨어졌으니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고 안내했고 이에 오래 기다렸으나 쌀을 구하지 못해 화가 났던 노파 김성녀가 순사에게 욕을 하며 달려들다 그만 인파에 밀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때 누군가가 경관이 무고한 노인을 때려죽였다고 소리치며 선동했고 이에 격분한 사람들은 지목된 순사를 집단 폭행했다. 며칠 후 노파 김성녀는 멀쩡히 살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났고 그녀가 순사에게 맞아 죽었다는 외침은 ‘가짜 뉴스’이자 몇몇 조선인들의 고의적인 선동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또 다른 사례도 있다. 1924년 5월 19일 밤 10시경, 당시 경성 종로통 부근 번화였던 우미관 앞에 모인 조선인들은 강하게 저항하는 조선인 사내를 파출소로 끌고 가려는 순사 두 명을 발견하게 된다. 무고한 조선인이 일본인 순사에 의해 강제로 파출소로 끌려가고 있다고 판단한 조선인 군중들은 그 즉시 일본 순사들을 에워쌌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 조선인은 음주운전 중 행인을 치어 다치게 했고 그걸 목격한 순사들이 그를 파출소로 끌고 가려 한 것이이었다. 하지만 당시 순사에게 끌려가며 소리치던 운전자의 모습을 보고 일본 순사가 조선인에게 부당한 폭력을 가한다고 단정한 조선인 군중들은 그 순사들을 집단 폭행했다.
책에는 등장하는 사건들의 공통점은 모두 대중들이 “그 자리에서 자신들이 생각한 정의와 도덕으로 직접 가해자 즉 적을 ‘심판’”17)했다는 데 있다. 기유정은 그 대중 폭력 안에 “지독한 ‘도덕주의’”18)가 내장되어 있다고 말한다. 대중이 집합적인 폭력을 통해 누군가를 응징하려 할 때 거기에는 단지 사적인 복수심이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정의와 대의, 윤리와 도덕의 차원이 개입한다는 점은 특별히 강조될 필요가 있다.19) 그렇다면 정지돈 사태 당시 정지돈을 공격한 대중들이 단지 근거 없는 ‘가짜 뉴스’에 현혹되어 정지돈에게 돌을 던졌다고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김현지의 폭로 내용은 대중들의 도덕 감정을 선명하게 건드렸고 대중들은 일종의 격발된 ‘도덕적 주체’로서 정지돈에 대한 응징에 나섰기 때문이다. 정지돈을 향한 공격에 ‘지독한 도덕주의’가 개입되어 있었다면 거기에 대고 사실 여부를 차분하게 확인하고 이성적으로 토론에 임하라는 공론장의 규범을 주문하는 것은 맥 빠지는 일에 불과하다. 당시 대중들은 차분한 이성적 토론의 가치를 몰각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여 적극적인 적대의 전선을 긋고 ‘정치적인’ 싸움에 나선 것이기 때문이다.
기유정의 책에 등장하는 적대의 양상은 다채롭다. 그것은 조선인 민중과 재조 중국인 민중 사이에 그어지기도 하고 조선인 양민과 조선인 백정 사이에 그어지기도 하며 그저 아랫마을과 윗마을 사이에 그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정지돈 사태 당시 나타났던 적대의 양상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적대이다. 이 사안은 언뜻 젠더 갈등과 무관해 보인다. 하지만 ‘남성 작가’와 ‘여성 피해자’의 대립 구도는 곧바로 이 사안을 젠더 갈등과 젠더 폭력의 관점에서 해석되도록 만들었다.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는 성명서를 통해 정지돈의 행위를 “성 착취”와 겹쳐 놓았고20) 많은 여성들 역시 정지돈이 전 연인에게 성적인 능욕을 가했다고 비난했다. 전 연인을 “성 착취”한 남자와 그로 인해 극심한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여자라는 구도는 남성이 여성에게 저지른 젠더 폭력의 맥락에서 윤리적인 분노를 이끌어 냈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조직된 여성들의 분노와 뒤이은 N번방 사건과 텔레그램 딥페이크 범죄에 대한 여성들의 공분 또한 이 사건과 정동적으로 강하게 결부되었다. 정지돈이 ‘리벤지 포르노’를 제작한 작가라거나 소설로 ‘딥페이크’ 범죄를 저질렀다는 식의 비난에서 우리는 그 사회적 범죄들에 대해 여성들이 지녔던 분노의 정동이 정지돈에 대한 분노로 연결되어 유입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젠더 폭력에 대한 정당한 분노가 정지돈에게 결착한 것은 왜곡과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사람들은 때로 사실 그 자체보다 자신이 이미 견지하고 있는 이분법적 적대의 전선을 강화해 주는 ‘대안적 사실’을 더욱 선호한다.
적대의 전선은 ‘문단’과 ‘독자’ 사이에도 그어졌다. 김현지는 9월 2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렇게 적었다. “우선 대부분의 문학은 현재, 독자와 소통하지 않는다. 독자만 문학과 소통한다. 문학은 정답이 없으므로 대화를 목적으로 하는 매체 예술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쌍방이 아니라 일방이었다. / 이 수직적이고 헌신만을 요구하며 피드백을 거절하는 의사소통 체계 때문에 그간 많은 독자들이 떠났다는 것을 매일 깨닫고 있다.”21) 김현지는 이번 사태를 문학(문단)과 독자 사이의 수직적인 위계가 드러난 사례로 의미화하고 있다. 실제로 정지돈 사태에서 ‘윤리적 독자’로 정체화 한 대중은 논란이 된 책을 펴낸 출판사의 SNS 계정에 항의 댓글을 달면서 출판사가 독자의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고 압력을 가했다. 김현지가 “수직적이고 헌신만을 요구하며 피드백을 거절하는 의사소통 체계”를 문제 삼은 것은 출판사 은행나무가 정지돈의 책에 대해 절판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겨냥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와 같은 출판사의 결정은 출판사의 “피드백을 거절하는 의사소통 체계” 때문이 아니라 김현지의 주장과 요구가 출판사 입장에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하지만 김현지의 주장이 ‘정치적’ 적대를 구성하는 일종의 수행적인 언설이라면 거기에 합리성의 기준을 들이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권력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문학-문단-작가와 권력을 박탈당한 독자라는 이분법적 적대의 구도는 그 자체로 ‘문단 권력에 대항하는 윤리적인 투쟁’이라는 정의감을 촉발하는 효과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태 당시에 대중들은 이 사안을 남성이 여성에게 가한 성폭력 프레임으로 규정하는 동시에 문단 권력과 그로부터 소외된 독자 사이의 적적대적 대립으로 구조화하였다. 그리고 그와 같은 적대를 구조화하는 순간 사태는 정치성을 획득하게 된다. 그렇다면 정지돈 사태에 출몰한 이 ‘정치적’ 대중들의 형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기유정은 식민지 시기 대중들의 폭동을 일제 식민 권력의 폭력에 맞선 대항적 폭력으로 규정하는 것도, 무지한 조선인이 거짓 선동에 휩쓸려 벌인 무의미한 해프닝으로 규정하는 것도 모두 불충분하다고 말한다. 그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이 아니라 그 양면성을 모두 체화하고 있는 모순되고 분열된 존재로 대중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기유정의 주장을 따른다면 우리는 정지돈을 공격한 대중을 젠더 폭력적이고 위계적인 권력이 작동하는 현실에 맞선 정당한 투쟁으로 규정하는 것도 김현지의 일방적인 주장에 휩쓸린 사람들의 반지성주의적 난동으로 규정하는 것 모두 불충분하며 당시의 독자 대중은 차라리 두 측면을 모두 지닌 야누스적 존재였다고 결론 내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결론은 다면적인 현상을 포용하는 장점이 있지만 ‘정치성’ 자체에 대한 판단을 유보함으로써 같은 사태가 재발하지 않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야 할 규범적 가치의 목록을 구체화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우리는 그 야누스적 양면성을 일방적으로 부인하거나 거기에 드러난 정치성을 발견하는 것을 넘어 그 정치성에 대한 비판에 근거해 새로운 행동 양식을 만들어 나가야 할 과제를 떠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 새로운 행동 양식은 어떻게 구체화 될 수 있을까? 어려운 질문이지만 나오미 클라인의 다음과 같은 말은 그 고민이 근거해야 할 하나의 태도를 잘 보여 준다.
침착은 불의에 마땅히 내야 할 화나 분노를 대체하지 않는다. 저 두 감정은 필요한 변화를 이끄는 강력한 동인이다. 그러나 침착은 집중의 사전 준비물이자 문제 해결 순서를 정하는 능력의 전제 조건이다. 충격이 정체성을 무너뜨린다면 침착은 우리를 되찾을 지반이 되어 준다. 버거 덕분에 나는 내가 침착성을 찾으려고 글을 쓴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변과 내면, 그리고 -희망사항인데- 독자의 마음에 있는 무질서를 길들이고자 하는 마음에서. 지면에 나오는 내용은 거의 언제나 괴로움을, 그리고 대부분 어지러움을 선사하지만 내 생각에 책은 결코 독자를 충격에 빠뜨리는 것을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독자를 충격에서 빠져나오게 해야 한다.22)
만연한 불의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분노와 항거는 정당하고 정의롭다. 그 분노와 항거는 사회적 약자와 피억압 계급이 압제자에게 맞서는 주요한 무기였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반대로 그 무기를 손에 쥔 자 들이라면 누구든 자신을 약자와 피억압자로 표상한다. 세계는 다양한 적대의 전선으로 분할되었고 모두가(심지어 미국 대통령 후보조차!) 자신이 겪은 박탈과 피해를 무기처럼 호소한다. 이 혼탁한 세계에서 우리의 분노와 항거는 즉각적인 행동 이전에 우리의 분노가 향하는 대상을 차분하게 식별할 수 있는 침착함을 요구한다. 하지만 즉각적인 행동의 요구가 빗발치는 오늘날, 그와 같은 차분함과 침착함을 장착하기란 쉽지 않다. 어쩌면 그 즉각적인 행동의 요구, 끊임없이 강제되는 속도에의 강박이야말로 우리가 맞닥뜨린 새로운 압제의 형상이 아닐까?
나오미 클라인이 주문하는 침착함에 입각한다면, 우리는 어떤 작품이 논란이 되었을 때 먼저 그 작품을 차분하고 꼼꼼하게 읽은 뒤 그 작품을 둘러싼 논란의 맥락들을 짚어 볼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는 우리가 신속하게 ‘정치적’ 대중으로 변이하는 것보다 그렇게 우리를 재빨리 ‘정치적’ 대중으로 변이시키려는 다양한 힘들에 맞서는 능력을 함양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최근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알리는 뉴스 기사에 달린 조직적인 댓글들을 보면 그와 같은 이분법적 적대의 문제점을 보다 명확하게 실감하게 된다. 한강의 수상 소식을 전하는 기사(특히 보수 언론 기사)에는 꼬박꼬박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는 “형부와 처제가 섹스하는 장면을 노골적으로 다루는 근친상간 포르노물”이며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는 “공산 폭동을 미화하고 북한 정권을 찬양하는 소설”이라는 터무니없는 비난 댓글로 도배된다. 이는 정지돈의 『브레이브 뉴 휴먼』이 “전 여친을 실명으로 등장시켜 쓰리섬 임신 판타지를 배출한 리벤지 포르노 소설”이라고 공격하던 ‘정치적’ 대중의 행태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들은 자신의 정치성을 드러내고 적대의 전선을 분명히 하는 일이 너무 중요해서 정작 작품 같은 것은 거들떠볼 시간이 없다. 대상 작품이 이미 그어진 적대의 전선을 활성화하는 데 어떠한 활용 가치가 있는지를 따질 뿐이다. 물론 이 역시 소설을 매개로 발현되는 오늘날 대중정치의 일면으로서 별도의 분석을 요하는 주제이다. 하지만 그 분석과 별개로 그런 ‘정치적’ 수행성이 오늘날 우리가 지향하는 규범이 되기는 어렵다는 점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한강의 작품을 왜곡하는 목소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고립되었다. 그런데 한강이 누린 그 행운을 비슷한 왜곡을 당하는 다른 작가들 역시 누릴 수 있을까? 그럴 행운을 누릴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논란이 된 작품을 즉각 폐기해 버리지 않고 그 작품에 대한 충분한 논의의 시간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출판사가 대중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즉각적으로 『브레이브 뉴 휴먼』을 판매 중지했다면 다른 사람들은 뒤늦게라도 문제가 된 책을 직접 읽고 판단할 기회를 잃게 되었을 것이며 정지돈이 뒤집어쓴 오명은 공식적으로 기정사실화 되었을 것이다. 출판사를 향해 즉각적인 조치를 요구하는 ‘정치적’ 독자의 행태가 동료 시민이 그 작품을 읽고 판단할 소중한 기회를 소비 주권을 활용해 삭제해 버리는 위험에 대해서도 우리는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4. 재현의 윤리에 관하여
마지막으로 ‘재현의 윤리’에 대해 간단하게 적고자 한다. 현재 ‘재현의 윤리’를 둘러싼 논의는 답보 상태에 있다. 당연한 일이다. ‘재현의 윤리’를 부르짖는 사람들은 언제나 ‘재현의 윤리’라는 수상쩍은 개념만을 정답처럼 소환할 뿐, 그 윤리를 구성하는 구체적인 규범을 좀처럼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재현의 윤리’는 언제나 텅 빈 기표로서만 작동한다. 그 텅 빈 내용을 채우려 드는 순간 그 기표가 가진 힘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만다는 걸 무의식중에 알아채 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김봉곤 사태와 창작의 쟁점들」에서 ‘재현의 윤리’에 관한 “어떤 규범이 제시된다 하더라도 그 규범은 작가들의 때론 뻔뻔하고 때론 기지 넘치는 실험에 의해 언제나 무화”될 수밖에 없기에 “그 규범과 원리는 언제나 미래의 창작 앞에 잠정적일 수밖에 없음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태도가 중요할 뿐”(244쪽) 어떤 규범을 선험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위험하고 무용한 일이라고 적었다. 이렇게 쓴 이유는 ‘재현의 윤리’를 입에 올리는 사람들이 과연 그것에 내재한 규범적 가치를 얼마나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많은 이들이 ‘재현의 윤리’와 ‘윤리적 재현’을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어떤 대상이나 사건, 인물을 윤리적으로 재현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수많은 작품들의 목록을 제출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다양한 작품들을 한데 모아 ‘재현의 윤리’에 관한 규범을 수립하면 되는 걸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 코, 귀, 입, 이마를 모아 놓는다고 해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이 탄생하는 것은 아니듯 ‘윤리적 재현’의 다양한 사례를 아무리 많이 모은다고 해도 ‘재현의 윤리’에 관한 포괄적 규범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윤리적 재현’과 ‘재현의 윤리’는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나 규범성의 차원에서 완전히 다른 층위에 속해 있다. ‘윤리적 재현’이 귀납적이라면 ‘재현의 윤리’는 연역적이다.
문학에서 그와 같은 연역적 규범을 수립하여 개별 작품의 윤리성을 판정하는 잣대로 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뿐더러 위험한 일이다. 그 규범이 작동하는 환경에서 창작을 시작하는 작가는 그 규범의 족쇄를 어떻게든 파훼함으로써 그 규범에 갇혀 있던 가능 영역을 해방시켜 나갈 것이고, 만약 그런 작가가 나타나지 않고 모두가 그 규범의 제약에 순응한다면 그 사회의 문학은 거들떠볼 필요도 없는 죽은 단어의 집적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주장하는 무의미와 위험에 동의할 수 없다면 직접 나서서 이제부터 작가들이 새롭게 준수해야 할 윤리적 규범의 항목을 만들어 보길 권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재현의 윤리’를 둘러싼 문학계의 논의가 답보 상태에 처해 있다면 그것은 오늘날 문학계의 윤리적 감수성이 낮아서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앞서 강조했다시피 그 규범의 수립이 무의미한 동시에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학적 재현에 있어 어떤 규범을 마련하는 일은 무의미하고 위험할 수는 있으되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소비에트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북한의 주체 문예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재현에 대한 규율과 규범을 역사적으로 수립했던 바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규범 없이도 노동소설을 읽고 장엄한 감동을 느낄 수 있으며 포괄적인 ‘재현의 윤리’ 규범 없이도 좋은 작품이 성취한 윤리적 재현의 경지를 온당하게 감지할 수 있다. 이때 불가능한 건 숙청과 처벌일 뿐이다.
‘윤리적 재현’이 문학적 감동과 예술적 성취에 관한 것이이라면 ‘재현의 윤리’는 규범을 위반한 작품들을 어떻게 숙청하고 처벌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숙청과 처벌을 위한 규범을 수립하는 데에 자신의 에너지를 쏟아부을 사람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입법하고 싶은 ‘재현의 윤리’ 규범이 있다면 솔직하게 열어 놓고 제시하면 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제시된 규범이 과연 우리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를 두고 토론할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인 규범을 제시하지는 않은 채 비슷한 사태가 반복될 때마다 습관적으로 ‘재현의 윤리’만을 부르짖는 것은 발생한 희비극적 사태로부터 자신의 윤리성을 벌충하려는 비겁한 행태에 불과하다.
단언컨대 이와 같은 사태는 계속해서 반복될 것이다. 어떤 작가도 오로지 고립된 자신의 경험과 사유만으로 창작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세계 안에 거주하며 이는 타인과 더불어 존재한다는 뜻이다. 어떤 작가도 자기와 연루된 수많은 존재와 삶의 우연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 내 언어 안에 타자의 언어가 섞이고 내 경험에 타인의 삶이 뒤얽힌다. 그 뒤얽힘이 더 많은 이야기의 가능성이 아니라 소멸의 함정처럼 존재하는 곳에서 언어는 빛을 잃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사태를 막을 수 있는 근본적인 해법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위험하고 무용하다.- 비슷한 사태가 또다시 반복되었을 때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논의를 펴 나갈 수 있는 침착함의 기술을 함께 길러 내는 일이다.
- 1)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칼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2권, 1997, 287쪽.
- 2) 김현지 블로그, 「[공지] <김현지, 김현지 되기>」, 작성자 사스미, 입력일 2024. 6. 23. https://blog.naver.com/pasilda/223488600534
- 3) 정지돈 블로그, 「현 상황에 대한 제 입장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작성자 jidon2024, 입력일 2024. 6. 25. https://m.blog.naver.com/jidon2024/223490507152
- 4) 김현지 블로그, 「<중요한 건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작성자 사스미, 입력일 2024. 10. 27. https://blog.naver.com/pasilda/223635690223
- 5) 정지돈, 『브레이브 뉴 휴먼』, 은행나무, 2024, 197쪽. 한편 정지돈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인공 자궁’을 정지돈이 전 연인에 대해 성적 능욕을 가했다는 근거로 삼았다. 악의적인 왜곡 이전에 유치하고 황당무계한 발상이다. ‘인공 자궁’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큐베이터’와 유사한 것이지 -‘인공 자궁’은 일종의 발달한 인큐베이터로서 인큐베이터에는 없는 양수와 탯줄을 연결할 수 있다.- 성적인 뉘앙스를 띠는 기호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공 신장’이나 ‘인공 안구’ 같은 인공적 보조물일 뿐이다. ‘인공 자궁’에 ‘자궁’이라는 단어가 들어갔다고 마치 여성 신체에 대한 능욕이자 폭력이라고 호들갑을 떠는 것은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큐베이터 장면이 여성 신체에 대한 성적 능욕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 6) 김현지 블로그, 「[공지] <김현지, 김현지 되기>」, 작성자 사스미, 입력일 2024. 6. 23.
- 7) 천희란, 「문학의 역사는 오늘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쓺』 19호, 2024년 하권, 157쪽.
- 8) 소설가 단요가 『브레이브 뉴 휴먼』에 관한 구체적인 작품 분석을 바탕으로 이 사태에 나름의 판단을 시도했다가 곧바로 철회한 사건은 이 사태가 ‘공론화’의 주제가 되기에 부적절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하나의 사례이다. 단요는 「<브레이브 뉴 휴먼>과 현실 지시의 문제」라는 글을 통해 김현지가 첫 폭로문에서 『야간 경비원의 일기』와 『브레이브 뉴 휴먼』의 공통점으로 거론한 근거를 비판적으로(비난이나 기각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검증했다가 많은 비난을 받고 이내 철회했다. (https://docs.google.com/document/d/1V0jSUAUzyAtozBmfcBiBesB8gmHh4dWMrqGkUBeEfpM/edit?tab=t.0)
자신의 분석을 철회하면서 단요는 “형식적인 논리들만으로는 해명될 수도 성립될 수도 없는 사태를 추상화된 논리로만 이해하려 했던 오만에 대해 반성하고 사죄합니다. 제가 죄송합니다.”라고 김현지에게 사과했다. (https://x.com/FruitWangler/status/1806314130816593976)
이 사과문에서 단요가 “형식적인 논리들만으로는 해명될 수도 성립될 수도 없는 사태”라고 적은 대목은 주목을 요한다. 애초에 논리적인 추론과 검증을 통해 해명될 수도, 성립될 수도 없는 사안이라면 그것을 공론화의 주제로 삼는 것은 부적절하기 때문이다. 공론장에서의 논의는 개방성과 투명성을 핵심으로 한다. 이는 공론장에 참여한 사람들이 객관적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은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물론 누구도 어떤 쟁점에 대해 완전한 정보를 소유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를 공론장의 규범적 이상으로 삼는 까닭은 논쟁적인 사안에 대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안의 성격을 판단할 수 있는 핵심적인 정보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면, 거기서 아무리 이성적인 논의를 거듭한다 하더라도 정보로부터 소외된 대중은 정보를 쥔 소수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현지와 정지돈의 입장문이 번갈아 나올 때마다 ‘공론장’의 분위기가 급변했다는 사실은 당시의 ‘공론장’이 정보의 비대칭과 불균형에 얼마나 오염되어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그때 공론은 공론이라기보다는 여론에 가까웠다. 공론과 달리 여론은 정보에 구애받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사안에 대해서도 의견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공론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단요의 경우처럼 작품에 대해 객관적이고 꼼꼼한 분석을 바탕으로 내린 판단조차 다양한 의견의 하나로 수용하지 못했던 당시의 공론장을 과연 공론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 10) 아즈마 히로키, 위의 책, 75쪽.
- 11) 아즈마 히로키, 위의 책, 235쪽.
- 12) 이는 오늘날 세계가 공통으로 마주한 심각한 문제이다. 나오미 클라인에 따르면 “온라인에서 거짓말과 음모론은 이제 득실대는 수준을 넘어서 공중보건과 어쩌면 대의민주주의의 존속 자체까지 위협하고 있다.”(나오미 클라인 지음, 『도플갱어 - 우파라는 거울 이미지를 마주한 미국 좌파의 딜레마』, 류진오 옮김, 글항아리, 2024, 151쪽)
- 13) 김봉곤 사태 당시 제출했던 의견을 다시 한번 반복한다. “문학계에서 발생한 문제들이 모두 법정에서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정치의 사법화’가 문제라면 ‘문학의 사법화’ 또한 문제적이다. 게다가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지 않은가. 하지만 이 말은 법적 판결과 별개로 윤리의 고유한 영역이 존재한다는 뜻이지 마련된 법적 절차를 임의로 생략해도 무방하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정치의 사법화’를 극복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이 사법이 보장한 절차에 미달하는 처분을 정치의 이름으로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사법적 판결로 포괄하지 못하는 영역을 정치의 기술로 감싸 안는 일이듯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드러난 것은 문학계에서는 그런 자율적이고 내재적인 절차의 영역이 없다는 것 아닌가. 김봉곤 사태와 관련한 처분 과정이 과연 사법 행정이 보장하고 있는 형식적 절차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 과정에서 어떤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는 게 아닐까. 그토록 오랫동안 윤리를 외쳐 왔음에도 최소한의 윤리(=법)가 보장하고 있는 절차에도 미치지 못하는 일방적인 속도전 끝에 한 작가를 지워 버리는 걸로 사태를 마름질하고 속 편하게 ‘비평정신의 회복’만 외치면 할 일 다한 걸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이 글을 쓴다.” (졸고, 「김봉곤 사태와 창작의 쟁점들」, 『갈라지는 욕망들』, 창비, 2024, 236~237쪽)
- 14) 장정일, 「싸움의 기술? ‘더 낫게 싸우라’」, 『시사인』 686호, 2020. 11. 12.
- 15) 기유정, 『식민지의 소란, 대중의 반란』, 산처럼, 2024, 8~9쪽.
- 16) 기유정, 앞의 책, 12쪽.
- 17) 기유정, 위의 책, 287쪽.
- 18) 기유정, 위의 책, 274쪽.
- 19) 나오미 클라인 역시 “음모론의 중심에는 정의라는 관능적인 판타지가 자리 잡고 있다.”고 지적한다. 나오미 클라인, 앞의 책, 386쪽.
- 20)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성명서 「한 사람의 삶은 그 어떤 위대한 예술작품보다도 존엄하다」, 2024. https://sfwuk.org/notice/?idx=83604075&bmode=view
- 21) 김현지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hyunji.kim.5454, 입력일 9월 22일.
- 22) 나오미 클라인, 앞의 책, 3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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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거짓말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면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안 그래요?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됨으로써 말이죠. 무성 영화 시대의 영화감독들은 소리를 두려워했고 또 색을 두려워했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1) 1. 휩쓸리는 시간성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모두가 조금씩은 우울증과 ADHD 환자가 되어가는 중이다. 코로나가 끝나가는 엔데믹 시기부터 서점가의 주요한 베스트셀러가 되며 여러 곳에서 호출되던 책이 애나 램키의 『도파미네이션』과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두 책은 공통적으로 신생 인류의 지각 방식을 우려한다. 인터넷에서 무한 스크롤을 내리며 멀티태스킹을 하고 소셜 미디어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도파민에 중독’되고 ‘집중력을 도둑’ 맞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글로벌 테크 기업이 조성하는 환경에 의한 것이자, 개인의 선호와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로 흡수하는 ‘감시 자본주의’의 거대한 문제이지만,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집중과 몰입을 위한 여러 노력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집중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가치 있는 자본으로 떠오르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효율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채찍질하는 자학적인 시대 정신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무엇이지 않는가? 조너선 크래리에 따르면 이는 1800년대 중반 이래 파편화와 충격으로 이루어진 ‘주의분산’의 시대 이후 개인을 정의하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산만함 자체가 우리를 이루고 있는 기본 환경으로 세팅되자, 서구적 근대성은 주의 관리 기술을 중점에 두고 각각의 개인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형성하게끔 했다. 여러 경험들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기보다,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으로 “자율적으로 선택하며 세계를 창조하는 주체”2)에 긍정적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주의 깊은 관찰자 상은 이미 불균질해진 인간의 지각 경험을 표면적으로 잠시 가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몰입된 상태인 ‘정지suspension된 지각’은 산만해진 근대인의 지각 방식을 부인하고 회피하는 수단이었고, 현재라는 명백한 필연성을 해체시킬 수 있는 조건들을 낳으며 규정지을 수 없는 미래를 기대하게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주의’라는 것이 에피스테메처럼 역사적으로 발견되고 구성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코로나를 거치며 비대면 기술들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과 ADHD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함께 증폭한 것은 자연스럽다. 맞춤형 알고리즘은 주의분산의 환경을 한층 더 정교하게 설계했고, 그에 비례해 집중력이나 창의력 같은 인간의 고유한 정신적 특성에 대한 환상 역시 강화되고 있다. 이 가운데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일상 전반의 속도가 빨라지며 휩쓸리는 시간성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작 속도는 분명 불안감의 요인이 되고 있다. 물론 현재까지의 GPT는 대화가 전환될 때마다 기존 서사를 유기적으로 유지하지 못하기에, 질적으로 완결성이 높은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지는 못하다. 또 언어 예술의 특성상 양적으로 확장된다고 해도 그 군집 자체에서 힘을 발견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조슬릿은 예술작품의 의미를 사물성이나 내부 구조에 기반하는 데서 탈피해, 네트워크에서 발현되는 이미지 군집에서 행위성을 찾았다.3) 그러나 언어 예술을 감각하는 방식은 시각적 경험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작품의 의미를 작품의 맥락과 내부 형식 분석에 국한시킬 이유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언어 해석의 바깥으로 완전히 탈주해버리기는 어렵다. 단순히 양적 팽창이 정치적 가능성을 가질 것으로 전망하거나 긍정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공지능을 ‘창작자’나 ‘도구’ 중에 어느 쪽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이 창작 능력을 단순히 기계적인 지능이나 모방이라 간주하며, 그 반대편에 인간의 감정과 비판 능력을 두어도 될까. 인간의 비합리성이나 비효율적인 면면이야말로 예기치 못한 구멍 같은 것이기에, 이것이야말로 기계가 모방 불가능한 중요한 특징이라고 믿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우리는 인간이 낸 비합리적 구멍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기계의 실수에서 불쾌와 무의미를 정확히 분별해낼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먼저 챗 GPT 이후 이를 활용한 여러 서사적 실험들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의성이 어떻게 인식되며 예술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을 재구성하고 있는지를 고찰하려 한다. 이후 인공지능과 변별되는 인간의 물리적 기반인 육체성과 시간의 문제에 대해 짚어보고, 최근 한국문학장에 나타난 예술가 서사에서 두드러지는 정동과 이미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석해보려한다. 2. 챗 GPT 이후, 예술의 기쁨과 슬픔 다큐멘터리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참여한 책 『태양과의 대화』의 1부는 아핏차퐁이 GPT3와 함께 생성한 픽션 ‘태양과의 대화’, 2부는 MIT 연구소 박사과정 학생인 ‘팻’과의 대화, 3부는 아핏차퐁이 1부의 최종 결과물을 내기까지 작성한 프롬포트를 싣고 있다. 이 구성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만일 앞으로 AI와 함께 픽션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상용화된다면 이 중에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예술작품’으로서 인식되며 분석 대상이 될 지점이 무엇인지 가정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3부의 프롬포트는 마치 ‘레시피’처럼 보인다. 누구나 저 프롬포트를 사용한다면 유사한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며, 중간 과정에서 자유로운 변형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물에서 나오는 미학적 평가나 감상자의 쾌감이 세계적인 예술가에게서 나온 것과 크게 다를 것인가? 동일한 레시피만 있다면 셰프의 요리를 집에서도 얼마든지 유사하게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먼 훗날 언어 예술은 프롬포트라는 레시피로 통용될 수도 있겠다. 때로 예술가가 직접 만든 작품을 찾아 특별한 경험을 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신에게 더 최적화된 방식으로 가장 개인화된 언어 예술을 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제각기 다른 가치관과 취향으로 만들어진 알고리즘의 세계 속에서 유영하듯, 앞으로는 그 세계를 이루는 컨텐츠의 내용까지도 인공지능을 통해 맞춤형으로 조율될 수 있다. 여기까지만 가정한다면 거대한 매트릭스에 갇혀 인간이 왜소해지는 디스토피아가 스쳐지나가기도 하지만, 『태양과의 대화』는 글의 서두에서 인용했던 아핏차퐁의 말처럼, 챗 GPT라는 새로운 기술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무성 영화 시대 감독들이 소리와 색을 두려워했던 것과 같은 의미 없는 불안을 버릴 것인지를 전제하고 만들어진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불가피하게 인간의 본성을 다시 재사유하는 과제와 연결된다. 2부에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아핏차퐁의 말은 중요하다. 이는 AI가 만들어내는 허구에서 정확도와 유려함 등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때 거짓말은 인간의 욕망에서 기인하는 고도의 기술일 수 있지만, 그 욕망의 시작점을 지운다면 결과물만으로 사실상 분별은 불가능해진다. 허구를 직조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욕망과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의 독특한 개별성 역시 환상일 수 있다. 이는 아핏차퐁 자신이 창조적인 순간에 몰입해 있을 때, “깨달음은 자아를 잊을 때만 오는 것 같”다고 말하는 지점과 상통한다.4) 인간 창작자의 자아 역시 안개처럼 흘러다니고 해체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면, 19세기 낭만주의에서 발현된 ‘천재’나 ‘영감’ 개념을 중심에 두고 인간의 창의성만을 특별한 것으로 볼 이유는 전혀 없다. AI가 데이터의 지도를 기반으로 이전에 본 것이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환각(hallucination)’은 오류라기보다, 이전에 본 적 없는 조합을 만들어내는 생성의 방식이다. 이는 인간이 경험한 현실을 재조합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창작 과정과 결과적으로 구별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환각은 인간 창작에서의 실패나 지연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GPT-3의 환각은 이전의 오류가 이후의 생성에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매번의 응답은 이전의 시행착오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 비일관성은 인간 창작에서의 지연이나 좌절과 달리, 즉각적으로 무한히 갱신되는 변형의 연쇄에 가깝다. 연구원 팻은 GPT-3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다른 차원들을 포함한 수십억 개의 차원이 존재하고(‘유령차원’), 이를 통해 숨겨진 패턴의 지도를 생성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 인식 너머를 거쳐 나오는 결과물에 대해 기존에 인간이 구성해온 미적 가치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 오히려 AI가 가지고 있는 “확장된 의식”이자 “집단의식”은 새로운 서사적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 책 『태양과의 대화』를 번역한 이계성은 GPT-3를 이미 하나의 독립된 창조자로서 바라본다. 이 대화적 실험의 핵심은 GPT-3가 보여주는 “자아의 변동성”에 있다는 것이다.5) “다수의 태양이 존재하는 이와 같은 환경에서는 창작자와 창작물이라는 전통적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GPT-3에 제공되는 각각의 입력값은 일방적인 창작의 개념에 반하며 메기고 받는 역학 관계 속에 존재하는 프롬포트이자 응답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공지능은 단순한 수신자가 아니라, 취조보다는 협업적 발상에 더 가까운 서사적 역학의 전달자와도 같은데, (…) 작품 속 GPT-3의 환각적인 대답들은 텍스트에 담긴 정체성과 진실의 일시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등장인물이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흩어지고,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경계가 녹았다가 굳어진다. 이러한 가변성은 AI의 변화무쌍한 특성을 반영하며, 나아가 점점 더 복잡하고 유동적으로 변하는 디지털 시대의 자아와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다.”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고, 한 번에 정해진 수의 단어 또는 토큰만 처리 가능하기 때문에, 프롬프트가 입력될 때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바뀌는 상황을 이계성은 재창조와 증식으로 바라본다. 여기에 놓인 가변성과 비일관성을 결함으로 간주하기보다 대화적 실험의 흥미로운 일부분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받을 때, 우리는 인간 창작자 역시도 분열되어 있음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게 된다. 창작자는 더 이상 예술의 기원이 아니라, 생성 과정에 잠시 걸쳐지는 하나의 통과점이 되는 듯 보인다. 2023년 2월 잡지 《에스콰이어》에서 챗 GPT와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아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를 쓴 정지돈의 후기 역시 이계성의 논지와 상통한다. 그는 소설 속의 문장 중에 자신이 쓴 것과 챗이 쓴 것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한다고 본다.6) 소설을 쓰며 가장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던 것은 챗의 능력보다 자신의 변화였다고 말하는 작가는 “나도 모르게 챗지피티의 스타일로 소설을 사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언급한다.7) 자신과 챗지피티 사이의 평평한 존재론을 전제하는 듯한 정지돈의 논지는 ‘객체들의 민주주의’를 꿈꾸는 최근 신유물론의 이론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은 곧바로 다른 장면과 충돌한다. 생성 신경망을 적극 활용하는 예술집단 ‘언메이크랩’의 전시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은 인공지능이 인간 중심성을 벗어나 진정한 외부의 행위자로 작동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카나리아의 특징을 추출해내어 새로운 카나리아를 만들어 내는 이 생성 신경망은 한편으로는 구태의연한 인간의 문화를 드러냈다. 대부분 나뭇가지에 앉은, 인간의 운동 범위와 지각 안에 있는, 혹은 인간의 사육과 관련된 카나리아 종이 주를 이루는 데이터셋의 사진은 동물원스러웠다. 나뭇가지에 앉은, 카나리아의 발은 종종 나뭇가지와 합쳐져 표현되었고, 인간의 눈이 인지할 수 있는 가장 다량의 정보량을 가진 위상으로 표현되었다.8) 생성 신경망이 만들어낸 카나리아는 사실상 실제 자연계 속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하는 것들을 무작위로 조합하고 추출해 만들어진 새로운 생명체다. 이 책에 실린 그 카나리아 이미지는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뒤틀린 발을 가지고 있다. 통계적 가중치로 만들어진 이 가상 카나리아에는 자신도 모른 채 금기를 어긴 존재 특유의 외설성이 느껴진다. 언메이크랩이 통찰력을 가지고 명명했듯 이는 ‘AI 식민성’을 드러내는 산물이다. 생물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인간을 드러내는 인간의 산물로 존재하는 이 이미지들을 언메이크랩은 “인과성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히 수정 가능하고 즉시 변할 수 있는 상관성의 시간”만이 흐르는 또다른 ‘일반자연Generic Nature’으로 읽는다. 9)<가정동물 신드롬> 작업에서도 유사한 일이 발생한다. 트레일캠에서 추출한 야생동물의 이미지와 박제 사진, 그리고 합성 데이터셋들을 학습시켰을 때, 사진들은 어느 순간 미묘하게 ‘가정동물’의 잠재적 형상을 띄며 생성된다. “인간 친화적인 동물들의 눈을 상속했을” 새로운 종들에 어린 다정함은 친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잔인한 일로 다가온다. 데이터랩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까지 촘촘하게 상속된 인간 친연성에서 “닫혀져가는 외부의 세계”이자 “비미래non-future”를 예감한다.10)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의 지각 범위를 뛰어넘는 비인간의 예술’, 진정 ‘인간 없는 예술’은 도래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지만, 지금 우리가 더 자주 마주하는 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술이다. 언메이크랩이 드러낸 혼종적 이미지들은 AI를 통해 생성한 예술적 결과물들을 절대적 외부의 창작물로 존중하는 일이 결국 인간의 왜곡된 자기 인지를 반복 강화하는 나르시시즘은 아닌지 묻는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이 이미지 차원에서 인공지능의 인간 중심성을 드러낸다면, 이와 유사한 문제는 언어 예술의 영역에서도 반복된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서사 역시 비인간적 상상력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인간이 허용한 보편과 금기의 경계 안에서 작동한다. 『에피』 24호 특집에 실린 글에서 김연수는 인공지능과 함께 글을 써나가는 과정을 픽션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그건 오해다. 나는 이해했다.」는 인공지능이 화자가 되어 ‘협업 과정’을 전개하는 바깥 서사와 소설가 M이 최종적으로 구성한 ‘이야기’를 교차 배치한다. 인공지능 화자는 반복적으로 “이해했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인간 창작자 M의 창작 패턴을 추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설가 M은 ‘맥락’의 공유보다 ‘의도’를 노출하는 발화를 사용하며, 이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격려나 옳은 말 대신 욕망을 담은 부조리하고 불편한 발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끝에서부터 시작까지 모든 시간을 거꾸로 펼쳐볼 수 있다면, 지금의 갈등과 고통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필요한 과정이 된다’는 긍정의 언사 뒤에, 급작스럽게 인물의 충동이 돌출되는 지점이다. 소설가 M은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이 급작스럽게 자살을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쓰고자 하고, 인공지능인 ‘나’는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내용을 만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띄운다. 인공지능의 중단은 실패나 서사의 좌절로 경험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 창작에서 실패가 시간의 체류와 번민을 동반하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중단이다. 김연수는 인공지능 안에서 ‘이해’와 ‘본성’이 별개로 작동해 충돌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인공지능의 기술 개발의 측면에서 높은 수준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면서도, 인간이 지닌 것과 같은 ‘본성’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분리를 분명히 한다. 그런데 인간의 죽음이라는 금기를 재현할 수 없다는 경계는 인공지능의 존재론적 결함이라기보다, 인공지능이 인간 사회에서 용인 가능한 범위를 넘지 않도록 설계된 윤리적·정치적 경계의 한계를 드러낸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에서 인간 중심성이 투사된 자연이 모습을 드러내듯, 생성형 인공지능의 소설은 비인간적 주체로 도약하지 못하고 인간이 허용한 지각과 윤리의 경계 안에서만 작동한다. 보편을 비껴가는 개별성의 돌출이나 감각의 갱신은 현재로서는 인공지능의 외부에서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챗 GPT 이후의 여러 서사적 실험들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탐색한다. 그것은 분명 동등한 존재론적 가능성의 맹아를 품고 있으며, 이는 인류세 시대에 지향해야 할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실험들의 근간에는 뛰어넘을 수 없이 좌절되며 드러나는 인간 중심주의가 고스란히 노출된다. 인공지능의 비약하는 지능에 기대서 인간의 창조성 너머로 도약하려던 서사는 이를 창조해낸 인간의 영토로 계속해서 퇴각하며 미완의 프로젝트로 남는다. 이런 충돌과 파열의 연쇄 속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인간의 창조성을 구성하는 인식론적 틀이 물리적인 육체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깃든 역동성과 우울감은 최근 한국문학장의 예술가 서사들에서 흥미롭게 발견된다. 3. 붉은 몸으로 재탄생하는 예술가 인공지능이 예술의 결과물을 생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탐색 끝에 남는 질문은 ‘인공지능이 생성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여러 실험들은 인공지능이 보편적으로 용인 가능한 범위 안에서는 높은 수준의 이해와 생산을 보여주지만, 그 생성 과정에서 시간의 마찰이나 신체적 비용은 발생하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어떤 지연이 발생하거나 실패의 감각이 호출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이 다루는 ‘정보, 기록, 조합’에 ‘감정, 기억,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다소 거친 이분법이지만 이 둘 사이의 간극과 관련해 두 가지 정도를 짚어볼 수 있을 듯하다. 첫 번째는 타자에 대한 경험의 문제다. 삶에서 축적되는 시간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게 만들고, 체험은 해석을 거쳐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은 선호와 가치관 등과 함께 자아라는 틀을 형성한다. 이에 비해 인공지능에는 타자가 없다.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인간의 공통된 사고를 학습해 생성되는 결과물은 철저히 통계와 확률에 기반한다. 그 안에는 개별적 선호나 가치관이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다. 이러한 차이는 특히 부정적인 정동을 다루는 경우에 더 심화되리라 생각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를 떠올리며 말해보자면, 행복이나 긍정적인 면을 구현하는 예술에서보다 불행과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는 예술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는 크게 벌어질 것이다. 윤리적 고려로 인해 인공지능이 긍정적 요소를 중심으로 학습되거나 선별적으로 생성되도록 설정되는 경우를 포함해, 금기를 넘나드는 욕망과 절망, 자기부정과 괴리감처럼 타자와 뒤엉켜 발생하는 자기 인식의 복잡한 층위가 인공지능 내부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며 인간 창작에서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주목한 김언의 논지와도 맞닿아 있다. “예술적 체험의 시간이기도 한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나오는 결과물 앞에서 과연 어떤 문학적/예술적 희열을 경험할 수 있을까?”11)라는 그의 질문은 인공지능의 창작물에서 스킵된 시간과 다른, 고통스럽게 인내하고 번민했던 시간이야말로 ‘문학적 체험의 시간’일 수 있음을 다시 환기한다. 두 번째는 중단과 소멸로 야기되는 죽음의 문제다. 이는 인간의 신체를 인공지능과 대비되는 본질적 우위로 설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예술이 작동하는 시간의 조건을 다시 묻기 위한 문제 제기다. 인간의 연약하고 위태로운 신체는 필연적으로 침입과 파괴의 감각을 경험하며, 이러한 감각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휘발적 생성 과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에 개입한다. 파괴 가능한 인간의 신체는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매끄럽게 결과를 산출하기보다, 울퉁불퉁한 충돌을 통해 의미가 지연되고 어긋나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채 신체에 내재된 감각, 특히 외부의 침입으로 훼손되고 때로는 상실되는 신체의 경험은 기존의 미적 기준에 맞는 스타일이나 해석의 경로를 흔든다. 무엇보다 인간의 죽음이 불러오는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창작의 층위라기보다 해석의 층위에서 더 적극적으로 작동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이 그러하듯, 순간의 강렬한 감흥은 작품에 내재된 속성이라기보다 임박한 종결을 끌어와 현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발생한다. 상실이 숙명이며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덧입혀지는 애상은 단순히 기억 내용을 인출해 유사한 패턴으로 재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시간의 밀도를 형성한다. 이처럼 쉽게 열화되지 않으며 아우라가 붕괴된 곳에서도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이 감각의 층위를 기꺼이 심층의 시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타자에 대한 경험’과 ‘소멸에 대한 인지’를 바탕으로 해서 다시 생생해지는 것은 인간의 신체다. 흥미롭게도 지난 계절에 나온 두 편의 소설, 성해나의 「혼모노」와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지금 이 시대에 예술가를 그려낼 때 가장 강렬하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로 인해 어떤 신체가 현전하게 되는지를 밀도 있게 끌어올린다. 성해나의 「혼모노」는 무속신앙의 진위를 가리는 소설이라기보다, 예술이 다시 신체를 요구하게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평생 장수 할멈을 모셔온 박수무당 ‘문수’는 어느 날 앞집으로 이사온 ‘신애기’에게 할멈이 넘어가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수의 오랜 노력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박수무당이라는 직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험한 신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제 그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서슬이 날카로운 작두 대신 모형을 찾거나 유튜브를 보며 접신 연기를 연습하기 시작한다. 신앙이 자본이나 정치와 결속하며 도구화되고, 또 젊음과 새로움의 이데올로기 아래 무당 또한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소모되는 양상은 근대의 세속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무당은 이제 자본의 날렵한 속도 아래 밀려나는 노동자이자, 진정성을 연기해야하는 예술가이다. 이 소설의 결정적인 순간은 문수가 신애기에게 밀려나며 뺏긴 정치인 손님의 굿판, 자신이 초대받지 못한 그 자리에 가서 칼춤을 추기 시작하는 장면에 있다. 그는 신들리지 않았지만 밤새 매섭게 벼려놓은 칼날 위에 자신의 몸을 올리고 작두를 타기 시작한다. 날것으로의 칼날에 닿으며 그의 몸은 자연스럽게 떨리고 눈이 뒤집히며,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입가에 미소까지 드리운 채 신명을 내는 이 장면은 문수가 서사의 주인공 자리를 다시 탈환하는 순간이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무얼 알겠냐만은, 큭큭, 큭큭큭큭”이라는 마지막 문수의 목소리는 외부의 인정에 의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스스로 자신의 내력과 진정성을 긍정”12)하게 되는 절정의 순간으로 읽는 데서 더 나아가보면 어떨까. 이렇게 다시 말해볼 수 있겠다. 전근대의 무속은 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그를 등진 근대의 자리에서 비로소 현대 예술로 다시 탄생했다고. 숭고한 현현과 몰입이 신앙의 영역이라면, 문수의 작두춤은 오히려 이질감과 불편함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현대 예술에 가까워진다. 그의 퍼포먼스는 낭만주의적 예술가를 구성하던 천재와 영감에 스며있던 정신성을 해체하며 실재하는 몸의 물질성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물리적 능력과 무관하게 피를 철철 흘리며 경련하는 그의 신체는 차라리 표현주의적 충동을 보여주는 하나의 오브제다. 이 몸 위에서 원본과 사본의 구별은 철폐되고, 천재성은 치열한 아마추어리즘에 자리를 내어준다. 이 피 흘리는 신체는 실패와 무의미의 가능성을 끝까지 열어둔 채, 인간이 다시 시간과 신체를 예술의 비용으로 지불하게 만든다. 이 비용은 AI가 생성하는 예술의 무한 반복 가능한 오류가 아니라, 한 번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 시간으로 남는다. 어디로 갈지 모른 채 지속되는 이 작두춤은 사회적 생산이나 예술의 의미에 부합하는 결과를 생산하기보다, 의미의 즉각적 환원을 거부하며 지연된 시간을 발생시키는 사건이 된다.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예술에 대한 인식론적 틀과 자기 이해가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다루는 소설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훨씬 더 월등한 창작물들을 더 활발하게 생산해내는 상황에서, 밀려난 예술가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프로그램도 사람도 기계도 귀신도 아닌 미지의 존재” 같은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은 이를 유용한 툴로 간주한다고 해서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이를 도구로 치부한다면, 패배감 속에서도 창작자로서의 존재는 무사히 보존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결과로 증명되는 성취라기보다, 계속해서 조바심과 조급함을 만들어내는 예술 자체에 대한 집요한 열망에 가깝다. 이러한 열망은 예술 인공지능에 의해 영화판에서 완전히 밀려난 영완 선배의 모습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포르노를 만들면서조차 건조하고, 푸르죽죽하고, 앙상하고 깡마른 나무가 등장하는 자신만의 ‘인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혼이 죽어버릴 것 같기에 “사막에서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 영완 선배의 모습은 세속적 열망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도에서조차 철저히 외면받고 실패했을 때, 그의 예술적 열망은 몰락을 통해 역설적으로 증명된다. 영화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소설 속 인물들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상실의 감각, 잃어버린 동료이자 인간성을 향한 애도되지 않는 고통은 이 작품에서 붉은 신체라는 하나의 신체적 이미지로 응축된다. 영완 선배는 인공지능이 만든 예술을 보더라도 창작욕을 유지할 수 있는 마법의 ‘붉은 알약’으로 하와이 사과를 건넨다. “세상이 바뀌어도 너는 언제나 만드는 인간일 거야. 스스로 기억하는 한 언제나 영화를 찍고있을 거야.”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인간 ‘하와’를 떠올리게 하는 이 ‘하와이 사과’는 흥미롭다. 신과 유사한 생성형 인공지능 앞에서 인간은 발가벗겨진 듯한 황망함을 느끼며, 황급하게 자신의 기원을 발명해낸 것일까. 아니, 인공지능 시대 쓰인 새로운 창세기에서 인간은 스스로 뱀이 되어 자신을 유혹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좋겠다. 창세기에서 유혹은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드러내는 증표였지만, 이제 유혹에 넘어가는 나약함은 인간이 여전히 예술을 욕망하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증표로써 다시 읽힌다. 소설은 인간의 예술을 향한 집념과 희열은 우울과 절망이 그에 비례하는 무게로 따를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고 눌러 말한다. 결말부에 하와이 사과를 먹은 후 변이한 화자의 붉은 몸은 기계와의 통합을 거부하기 위해, 그리고 예술을 향한 내적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구의 장례식장에 가다 본 환각을 자신 안에 합체한 우울증적 형상으로 보인다. 강력한 잔상을 남기는 이 붉은 몸은 「혼모노」의 마지막 장면에서 피를 흘리는 몸과 다르지 않다. 이 소설들은 AI 시대에 예술은 이제 언어의 정교함이나 결과의 완결성으로 모방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몸과 감각을 통해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현전이라는 아우라를 다시 호출하는 듯 보이는 이 소설들은 과거의 진정성을 그리워하며,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아우라는 회복된 본질이라기보다 예술이 결과로 증명될 수 없어진 이후에 발생하는 부산물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이계성이 언메이크랩의 작업을 논하며 던진 비유가 유효해진다. “여느 언어와 마찬가지로 신탁의 언어에도 본질적인 의미가 내재하지는 않아서, 어떤 프레임 또는 인식틀을 통해 이를 이해할지는 언제나 받아들이는 쪽의 몫이었다”13)는 그의 말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언어 역시 별개의 진짜 의미를 품고 있기보다 해석의 장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타자와 되돌릴 수 없는 종결이라는 죽음의 감각은 이 해석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제 예술가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욕망이 과정에 들러붙는 자리, 그리고 그 욕망이 실패와 상실을 되돌릴 수 없는 비용으로 남기는 시간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예술은 결과로 증명되기보다, 실패와 상실의 가능성을 끌어안은 채 지속되는 수행으로 남는다. 그렇게 이 시대 예술가의 상은 붉은 몸을 가진 신체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1)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태양과의 대화』, 이계성 옮김, 미디어버스, 2023, 119쪽.2) 조너선 크레리, 『지각의 정지』, 유운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579쪽.3) 데이비드 조슬릿, 『예술 이후』, 이진실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2.4)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위의 책, 100쪽.5) 위의 책, 145쪽.6) 권보연은 연구자 자신이 직접 수행한 실험 속에서 인간언어와 생성언어가 ‘의미 혼종’과 ‘확률 혼종’이라는 상반된 미적 지향성을 가지는 방식으로 합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중에서 ‘확률 혼종’은 내용이 아닌 확률 층위에서 인간과 기계언어가 합성되며, 감정과 내용에 유착된 의미 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질 가능성을 지니기에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기한다. 권보연, 「결과 너머 문학기계로서의 AI」, 『다문화콘텐츠연구』 46집, 2023.7) 정지돈, 「쓰여진 문장과 쓰여지지 않은 문장 사이」, 『에피』 24호, 2023, 55쪽.8) 언메이크랩 외, 『잠재공간 속의 생태학: 재난, 생성신경망 그리고 비미래』, 미디어버스, 2023, 25쪽.9) 위의 책, 26쪽.10) 위의 책, 43쪽.11) 김언,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면서 제기되는 문제들」, 『현대시』 2023년 6월호, 111쪽.12) 성현아, 「반항하는 자는 부조리가 있나니, 그 가짜가 참되도다」, 『2024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문학동네, 2024, 292쪽.13) 이계성,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을 위한 몇 가지 질문들」, 언메이크랩 외, 앞의 책, 55쪽.
1 이번 봄에 단연 눈에 띄었던 것은 인공지능 시대에 적극적으로 인간이라는 의식을 탐험하고 매체를 다시 읽어내는 글들이었다. 2020년대 들어 인류세 관련 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비인간’ 담론들은 생성형 인공지능인 챗지피티ChatGPT의 등장 이후 다시 한번 요동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차지하고 있던 독보적인 단상 위에서 내려와 비인간과의 경계를 적극적으로 허물며 세계의 지도를 다시 그리려는 겸허한 기획은 급작스럽게 복잡한 불안에 갇힌 것 같다. 적어도 기계에 대해서라면 이미 우리는 동등하거나 어쩌면 한참 전에 초월당한 것은 아닌가? 경계 허물기로 인한 희열보다 불안이 확연히 압도하는 자리에서 『쓺』 2024년 상권의 특집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그 개체성과 집단성’과 ‘작은 기획—채굴 문화와 미적 감각’을 유독 흥미롭게 읽었다. 그리고 ‘작은 기획’에 실린 심효원과 윤원화의 짧은 글이 각각 인간이 향하려는 방향과 의지의 아름다움, 그 노력이 무산되는 수동태의 자리에서 감지하는 공포와 불쾌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느꼈다. 먼저 심효원의 「지렁이의 부드러운 건축물 만들기」는 비인간 행위자인 ‘지렁이-되기’를 통해 근대의 한계를 돌파할 것을 정중하게 요청하는 글이다. 지렁이가 땅과 맺는 일원적인 관계성과 분변토라는 건축물은 근대 이후 인간이 이룬 도시의 뚜렷한 경계와 고정성의 반대편에 있다. 지렁이의 건축물 만들기란 사실상 움직이고 먹고 배출하는 신체적 행위의 반복일 뿐이지만, “비인간들의 극도로 효율적인 메커니즘”이자 자신의 몸이 다른 존재와 물리적으로 닿는 매순간마다 “무차별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동력”1)이기도 하다. 촉각이 주도적인 지하세계에서는 시각이 미미해질 뿐만 아니라 시간성 역시 달라진다. 미래의 미결정성을 남겨두는 대신 물리적으로 접촉하는 것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순간’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글은 최근 신유물론을 비롯한 담론들과 풍요롭게 공명하는 하나의 아름다운 공상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지하세계로 향하는 방향성은 최근 SF 소설의 주요한 상상력의 기반이기도 하다. 정세랑의 「리셋」(『목소리를 드릴게요』, 아작, 2020)에서 행성의 모든 자원을 고갈시키던 자본주의의 질주를 멈추게 한 것은 인류 문명을 끝장내려고 내려온 지렁이들이다. 강제 리셋 이후 인간들의 자리는 자연히 땅속 깊은 곳이 되고, 지상은 다른 종들이 누리는 공간이 된다. 김초엽의 『파견자들』(퍼블리온, 2023)에서도 지상은 균류인 ‘범람체’의 공간이 되어버리고 인간은 감염을 피해 지하세계로 내려와 산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문명 말살에 가까운 아포칼립스를 맞닥뜨리지 않는 이상, 영화의 촉각성을 즐겁게 감각해온 인간이 미래의 지구를 위해 지렁이를 신속하게 체화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로 남는다. 물론 직접적인 실천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지구의 거대 환경 시스템의 핵심 행위자 자리를 재조정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겠다. 하지만 미래적인 지하세계로 들어가기에 인간은 아직 시각적 쾌락 속에 즐겁게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지적 유희를 야기하는 활자의 쾌감까지 포함해서. 윤원화의 「땅을 파는 손」은 채굴적 상상력의 매혹과 절망을 말한다. 데이터로 전환된 우리의 생태 에너지를 부의 원천으로 삼으며 굴러가는 미디어 산업 앞에서, 인간의 생산물·복제물·부산물·폐기물을 구별하기는 어려워진다. 디지털 기술로 구축되는 ‘아카이브 데이터’는 역사는 넘쳐흐르지만 이를 의미화하는 전통은 불가능한 곳이다. 윤원화는 과잉생산으로 범람하는 사물들 앞에서 맞닥뜨리는 불길한 실패에의 예감을 시앤 응아이Sianne Ngai의 ‘기믹gimmick’에 대한 반응으로 설명한다. ‘매직magic’의 애너그램에서 유래했다고도 하는 이 단어는 1920년대 미국에서 편법적 장치, 싸구려 트릭, 계산된 마법 등을 뜻하는 신조어로 출현했다.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 자본주의의 황홀감과 환멸을 모두 각인한 기믹의 불완전한 형식은 오늘날 삶과 예술, 또는 넓은 의미의 ‘사업’에서 흔히 발견된다.2) 단기적 이익 추구에 최적화되어 있는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가치 절하된 노동에 시달리는 대개의 사람들이 이 기믹의 유희에 이끌린다. 운에 따라 누군가는 축적된 자원을 폭발적으로 소모할 수 있으리라는 채굴적 상상력이 번성하는 가운데, 보상도 성취도 불확실한 예술 노동 역시 가치 체계에 대한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윤원화는 이런 진단과 고민 속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생산성 중독의 시대에 예술은 어떤 시간성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3) 심효원이 지하라는 공간과 이를 감각하는 촉각성에 의지해 의미 있게 압축되는 순간의 시간성을 말한다면, 윤원화는 ‘농사’와 ‘채굴’을 대비하며 채굴의 무책임한 풍요의 약속이 얼마나 파국적일 수 있는지 말한다. 최단기간의 이익에 매몰된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생산물은 넘쳐흐르지만 어떤 가치 창출도 담보할 수 없는 동시대 예술은 불투명한 시간을 표류하는 중이다. 이런 진단 속에서 디지털 자본주의에 의해 갱신되는 매체의 기술적 발전은 인간과 나란히 놓여 경계를 넘나들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환멸을 불러오는 맹목적인 대상으로 남는다. 인간의 ‘지렁이-되기’를 향한 아름다운 여정은 너무나 느리게 진행중인데, 가장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인정받고 있는 생성형 인공지능은 예술을 몰아치듯 양산해낸다. 인간의 몸은 자발적으로 물질과 동등하게 놓이기 전에 물질이 만들어낸 다른 가치들에 의해 가치 절하되며 밀려나게 될까? 생동하는 물질들 안에서 인간을 재의미화하려는 시도와 인공지능을 의심하며 인간 본연의 무언가를 지키려는 안간힘 사이에서 부각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아래의 비평들은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2 『쓺』의 특집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그 개체성과 집단성’을 여는 글은 근대 패러다임이 ‘개인’을 해방하고 자율적 주체로서 정립해왔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이 시대에 여전히 개인의 이념이 유효한지 묻는다. 개체성과 집단성이 직면할 변화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이 서문에 가장 직접적으로 응답하는 글을 꼽는다면 김태환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과 김재인의 「창의와 집단 지능—인공지능은 창작하지 못한다, 다만 제시할 뿐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김태환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은 기계 성능의 고도화가 필연적으로 인간의 중요성이나 가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에게 산업화 이후의 근대는 ‘저자의 시대’이며, 이는 기술 발전의 작용에 대한 인간의 반작용이 만들어낸 변화이고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방향타가 된 것은 저자라는 이념의 바탕에 놓인 ‘개인주의적 사상’이다. 이는 산업화 사회 속에서 부속물로 전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회 분석의 준거점을 개인에 두고 진리와 자유를 탐색했던 아도르노를 비롯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기조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 다시 독일 지성사의 문화 비판적 사상의 전통이 소구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김태환은 “항상적인 문화 공급 과잉의 시대”(37쪽)라는 진단에서 찾는다. 그에 따르면 소셜 미디어나 웹사이트, 유튜브 등 정신의 대상화로서의 객관 문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반면, 그 반대 방향인 객관 문화에서 주관 정신으로의 내화는 개인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치로 인해 그만큼의 양적 증가가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사람들은 알고리즘 속에서 타인과의 의미 있는 만남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더 심각한 것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객관 문화의 총체가 스스로 발언하고 생산하는 주체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런 위기감 속에서 이 글이 다시 강조하는 것은 ‘정신의 개별성’이다. “요컨대 모든 인간이 개인으로서 개별적 의지, 개별적 내면, 개별적 정신을 지닌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외부에서는 절대 들여다볼 수 없고, 직접 조작할 수도 없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자주적이라는 사실”(42쪽)을 변함없는 인간 존재의 조건으로 부각하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무분별한 열광에 휩쓸리기보다 이를 의심 어린 눈으로 찬찬히 사유할 틀이 우리에게 요긴한 것은 사실이다. 데이터에 얽힌 저작권 문제 역시 계속 규제안을 논의해나가야 할 비판적인 쟁점이다. 그렇지만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위기를 산업화 시대 이후의 위기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는 것은 혹시 너무 큰 틀에서의 접근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 작동 방식과 결과물이 인간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만들어진 자본주의의 차원에서만 다루어질 때, 새로운 매체와 관련해 충분히 사유되지 못하는 요소들이 생겨나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이 글에서 알고리즘에 갇힌 디지털 시대 개인의 부자유에 대한 우려는 빠르게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의 재소환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거듭 강조되는 개인의 개별적인 ‘의지’와 ‘내면’과 ‘정신’에서 신체의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 글에서 인공지능과 대립되는 요소로 논의되는 인간의 ‘의식’이란 단순히 합리적 이성만은 아닌 “수많은 감각적 심상과 기억·감정·소망·의지 등이 혼재하는 심적 상태”(46쪽)다. 알파고와는 다른 인간 바둑 기사의 의식을 예로 들면서 언급되는 긴장, 초조, 후회, 자책, 엉뚱한 연상 등은 “바깥에서 결코 완전히 알아볼 수 없는 복잡한 내면”(같은 쪽)으로 규정된다. 베일에 살짝 가려진 듯한 이런 인간 내면의 신비함은 물질적인 신체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진화해온 신체야말로 내면 이상으로 복잡성의 차원에 놓여 있지 않은가? 이는 “신체화의 말소가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와 사이버네틱스 포스트휴먼 양쪽 모두의 공통된 특성”이라는 캐서린 헤일스의 비판을 상기시킨다. 헤일스는 합리적 정신과 등치되는 자유주의적 주체가 “그 악명 높은 보편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신체가 자아와 동일시되지 않기 때문”4)이라고 말한다.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간의 한계는 곧 발전을 통해 ‘영웅적 개인’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유한한 삶을 가진 존재, 모든 능력에서 커다란 한계를 안고 있는 개별자로서의 인간만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여 어떤 감동적인 위대성에 이를 수 있”(53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반드시 육체의 신경과 근육의 단련 과정을 동반하며 그것이 생각과 행동에 긴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잠시 괄호 안에 두어진다. 이 글의 전반적인 주장이 온당하게 느껴지면서도 그 전제가 되는 자율적인 개인상과 관련해 못내 마음에 걸리는 것은 개인이 지향해나가야 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전제되어 있는 발전과 성장이라는 지극히 근대적인 가치다. 생산과 창조의 주체로서의 영웅적 개인이 아니라 소비와 소멸의 주체로서의 개인에 대해 우리는 좀더 다른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또 근대 이전에 우리가 ‘저자’가 불투명한 긴 구술 시대를 살아왔음을 떠올린다면, ‘저자의 시대’ 이후의 저항이 활자와 개인을 넘어선 범주에서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3 김재인의 「창의와 집단 지능」은 이 질문에 대해 조금 다른 지점에서 답을 내놓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지능은 본질적으로 집단적 성격을 가지므로 ‘집단 지능’이라고 해야 한다. 개체를 중심에 놓으면 ‘창의’를 중시하게 되지만, 그 새로움은 다른 개체가 ‘모방’하고 ‘확산’하지 않는다면 사멸하고 만다. 그렇기에 인간이 다른 생물종과 달리 ‘집단 기억’과 ‘문화 기억’이라는 형태의 외장 기억을 건설함으로써 지식과 기술의 확산과 축적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은 중요하게 여겨져야 한다. 저자는 낭만주의 미학과 예술에서 강조하는 천재적 개인과 창조력에 대한 신화를 뒤로하고 “인간이란 거대한 기억”(62쪽)이라 정의 내린다. 이는 물론 질적 도약이 아닌 집단으로서의 양적 축적을 말한다. 김태환이 인간의 의지, 내면, 정신이라는 추상적인 면을 중시한다면, 김재인은 “나의 생각이란 시한부 소유물”(63쪽)에 가까울 수 있으며 그 휘발성을 지켜주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물질’ 혹은 ‘미디어’”(62쪽)라고 강조함으로써 그것을 외화된 집합적 사물성으로 바라보며 그 반대편에 선다. 그런데 이 글은 ‘컴퓨터가 자연어를 다룬다는 것’이라는 장부터 급작스러운 단절을 드러내며 도약한다. 앞에서 인간의 생각 자체를 미디어이자 집단 기억의 저장고로 본 것과 다르게, 예술과 창작의 영역을 다룰 때는 컴퓨터가 자각 혹은 성찰을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컴퓨터는 예술 능력이 없다”(66쪽)고 확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기계를 바라보는 김재인의 시점에는 도구적 차원과 존재적 차원이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글은 창작의 정의를 “스스로 선택하고 평가하는 능력이 발휘되었느냐”(67쪽)에 두는데, 중요한 점은 저자가 그 평가 주체의 자격을 ‘생물’로 단정한다는 것이다. 생물은 “생존과 번식을 스스로 반복”하는 유기체이고, 이 글에 따르면 평가 역시 “생존과 번식에 성공하기 위한 지각 처리와 행동의 연쇄”(70쪽)다. 이 기준에 따르면 애초에 기계는 아무리 ‘집단 기억’의 ‘미디어’로서 최적화되어 있다고 해도 무기물이라는 점에서 평가 능력이 없는 것으로 배제 당할 수밖에 없다. 그가 이렇게 유기체의 항상성과 관련된 기준을 평가 능력과 일치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저작 『AI 빅뱅』에서 참조할 수 있는 지점을 좀더 찾아보면, 이는 “몸의 고집스러움”5)이라는 말과 함께 구체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심지어 같은 프롬프트를 주더라도 생성물이 크게 바뀌는 무작위성randomness을 보여주는데, 이는 휘발성이 강하다. 그러나 인간은 불완전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자기 생각을 고수하는 면을 지니는데, 저자는 이를 몸에서 비롯된 문제로 보는 것이다. 이 장에 바로 이어지는 질의응답에서 한 질문자는 “세계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몸을 가지는 것이다”6)라는 전제 위에서 인공지능이 세계를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강인공지능으로 발전할 방법이 있는지 묻는데, 김재인은 이에 대해 ‘몸의 회복력’에 대한 이야기로 답한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몸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몸은 생각을 “바로 휘발되지도 완전히 고착되지도 않은 어느 중간 지점”7)에 붙잡아둔다는 것이다. 김재인은 인공지능과 다른 인간을 논하는 데 있어 복잡성을 가진 신체의 차원을 살려내고자 한다. 하지만 창작을 논하면서부터는 김태환의 논의와 유사한 탈신체화의 방향을 답습한다. “진화 과정에서 살아남았다는 특징”은 “필멸하는 인간이 불멸하는 비결”(70쪽)로 치켜세워지고, 진화를 위해 외부와 교섭하며 몸 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피드백 루프는 유기체만의 고유한 신체적 능력으로 남는다. 인공지능은 몸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케이트 크로퍼드가 인공지능은 추상화된 지능이 아니라 오히려 “체화되고 물질적인 지능이며 천연자원, 연료, 인간 노동, 하부구조, 물류, 역사, 분류를 통해 만들어진다”8)고 강조한 사실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혹은 그와 마찬가지로 유기체의 일차적인 목표로서의 생존이 진화의 필수 사항이라 말하는 신경과학 연구자 아닐 세스가 우리의 지각은 사실 ‘통제된 환각’이자 ‘최적의 예측’이라 설명했음을 염두에 두면 어떨까. 그에 따르면 ‘당신이 된다는 것being you’, 즉 인간의 ‘동물기계’적 본질과 의식적 자기 사이의 연결고리는 “신체 자체가 가진 현재와 미래의 생리적 조건에 대한, 형태도, 모양도 없고 제어 중심적인 지각적 예측”9)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인공지능 역시 지극히 물질적인 신체를 지니고 있으며 인간 역시 체화된 자아로 인한 기계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때, 예술을 창발시키는 창의성 개념이 다르게 읽힐 가능성이 열린다.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승부 후에 마련된 『인문예술잡지 F』 21호의 특집 ‘고함: 비-인간’에서 이진경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인공지능이 창조성을 가질 수 있는 논리적 가능성을 함축한다고 주장했다. 괴델의 정리는 수학적 추론의 과정 속에 언제나 결정 불가능한 명제가 ‘숨어’ 있을 수 있음을 의미하며, 그렇다면 인공지능의 수준에서도 공리계로 귀속될 수 없는 명제(결정 불가능한 명제)를 생성할 수 있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계의 형식적 추론에서조차 새로운 명제의 창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역으로 생명체의 진화가 어떤 경로를 밟아왔는지 설명한다. “변이mutation의 누적에 의해 진화는 이루어”지지만 처음 “생명체의 변이는 지배적인 개체군 안에서 일종의 ‘장애자’나 ‘고장’으로 간주된다”10). 하지만 환경이나 생존 조건에 따라 변이가 진화된 변종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면, 기계가 만들어내는 예측되지 않은 결과의 출현 역시 ‘고장’이나 ‘장애’가 아니라 새로운 능력의 ‘창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창조의 출발점이 아니라 결과물에 초점을 맞춘 논의다. ‘인간 없는 예술’이 도래하려는 시기에 우리는 다시 인간적인 무언가를 기계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는 기술적 특이점이 올 때마다 반복되어온 정동이기도 하다. 이 앞에서 좀더 차분하게 이전의 논의들을 정리하고 축적할 필요를 느낀다. 2024년 『쓺』의 특집이 창작자이자 예술가가 서 있는 주체의 자리에서 출발했다면, 2016년 『인문예술잡지 F』의 특집은 그 결과물인 작품의 자리에서 논의를 시작했다. 그렇다면 감상자의 자리에서 본다면 어떤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 신예슬의 『음악의 사물들』은 음악이 기술적 혁신을 이루는 순간마다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넓혔는지를 따라 음악사를 재구성한다. 자동 피아노의 경우에도 그 연주를 더 실제처럼, 더 자연스럽게, 더 인간답게 만들겠다는 목표는 거의 달성되었다. 그러나 자동 피아노가 만들어낸 경험이 정말 특별하게 의미화되는 것은 인간의 연주라는 원본 혹은 목적지를 버렸을 때이다. 인간의 연주라는 목적지를 소거해버리고 이 사물의 독자적인 가능성에 집중해보는 것이다. 연주하는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스스로 뭔가를 연주하거나 재생할 수 있는 악기가 등장했고 그것이 인간의 행동을 인간 없이 손쉽게 해냈다면, 그 기계의 핵심적인 가치를 ‘인간의 복제’가 아니라 ‘탈脫인간’으로 재조정할 수도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기계장치가 꼭 연주자를 대신할 필요는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기준점만 제거한다면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수많은 음악적 가능성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 자동 피아노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연주를 들려줄 수 있었다. 인간의 연주를 기록하고 인간의 연주를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연주의 대리자는 오히려 새로운 예술형식으로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스스로 연주하며 그 누구보다 기계적인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독자적인 예술형식 말이다.11) 우리는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에 대해서도 그것이 오히려 새롭고 독자적인 예술형식이 될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을까? 이 모방은 때로 인간에 한참 미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때로 인간을 이미 초월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계는 이미 희미해지고 있던 자율적인 개인 주체로서의 예술가상을 어떻게 바꾸어나갈까. 또 인간의 예술적 집념은 어떻게 예술 형식들을 바꾸어나갈까. 모든 것이 뒤흔들리는 가운데, 불안만이 정확하게 인간의 자리를 응시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이 불러오는 균열 속에서 인간에 대한 고정된 사유를 과감하게 벗어날 수 있을 때 인간과 예술 모두에 새로운 시야가 열릴 것이다. 1) 심효원, 「지렁이의 부드러운 건축물 만들기」, 『쓺』 2024년 상권, 368쪽.2) 시앤 응아이는 디지털 자본주의가 가속화되던 2010년대 후반의 미술과 문학작품을 분석하면서 기믹의 이론화에 착수하는데, 기믹은 의심스러운 도구성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키치와는 다른 저질 예술로 취급되면서도 자본주의 가치 체계와 그 이면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의심을 표면화하는 미적 전략으로도 쓰일 수 있다. 윤원화는 이 글을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공모 프로그램 선정작인 시각예술 콜렉티브 랩삐의 에 대해 설명하며 시작한다. 이 전시는 관객이 옥수수 농사 시뮬레이션을 완수한 후 ‘콘 코인’이라는 가상 화폐를 받아 실제 뻥튀기 한 봉지와 교환하는 경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복 노동이 이에 비례하는 가치 창출과 기쁨으로 이어지는 대신, 콘 코인이라는 불분명한 요소가 끼어들면서 매끄러운 교환 가능성이 흔들릴 때 이 간극에서도 기믹이 관찰된다고 할 수 있다.3) 윤원화, 「땅을 파는 손」, 같은 책, 383쪽.4) 캐서린 헤일스,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사이버네틱스와 문학, 정보 과학의 신체들』, 허진 옮김, 열린책들, 2013, 27쪽.5) 김재인, 『AI 빅뱅—생성 인공지능과 인문학 르네상스』, 동아시아, 2023, 153쪽.6) 같은 책, 156쪽.7) 같은 책, 157쪽.8) 케이트 크로퍼드, 『AI 지도책—세계의 부와 권력을 재편하는 인공지능의 실체』, 노승영 옮김, 소소의책, 2022, 17쪽.9) 아닐 세스, 『내가 된다는 것—데이터, 사이보그,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 의식을 탐험하다』, 장혜인 옮김, 흐름 출판, 2022, 243쪽.10) 이진경, 「인공지능시대의 예술작품」, 『인문예술잡지 F』 21호, 2016, 25쪽.11) 신예슬, 『음악의 사물들—악보, 자동 악기, 음반』, 작업실유령, 2019, 115쪽.
1. ‘서울의 봄’을 기다리며 유신 독재 시대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을 다시 돌아다보면서 근래에 극장가의 흥행 기록을 다시 쓴 영화 (2023)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지나간 과거의 일이지만, 또한 그렇기에 ‘서울의 봄’이 당시로써는 아직 오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엔딩 크레딧과 함께 솟아오르는 아쉬움과 슬픔, 분노의 감정은 덜해지지 않는다. 40여년의 시간차를 무색하게 만드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그 시대를 지나오지 않은 세대의 관객들에게까지도 강력하게 휘몰아친다. 그러니 그 시대를 온몸으로 뚫고 나갔던 이들은 눈앞에서 물러나는 봄을 바라보며 무엇을 느꼈을지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유영주의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소명출판, 2023)이 제목을 따온 「겨울공화국」의 시인 양성우는 그의 또 다른 시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에서 그 봄을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들려준다.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셔준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곤백번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이 …… 한반도에서 다만 녹슬지 않는 비싼 넋으로 밤이나 낮이나 과녁이 되어 내가 죽고 다시 죽어 스며들지라도 오는 봄에 나무꾼을 쓰다듬어 주는 작은 바람으로 돌아온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후략)…1)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실 수 있다면, 오는 봄에 작은 바람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그의 시가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죽고 다시 죽어 넋으로 스며든다고 해도 좋다는 시인의 결연한 고백을 듣고 나면 그러나, 또 한 번의 겨울 속으로 선선하게 걸어 들어갔을 그들의 의지를 떠올리게 된다. 봄은 물러갔어도,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에서 주요하게 살펴보고 있는 김지하와 황석영, 조세희, 이문구는 신군부 독재 정권하에서도 계속 문학이라는 싸움과 저항을 지속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그들에게는 “오는 봄”을 기다리며 문학에 대한 믿음과 비전으로 눈보라를 뚫고 한 시대를 걸어 나왔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영주의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은 바로 그 역사에 관한 연구이다. 2. 시와 정치와 사랑 시작은 김지하다. 저자가 냉전시대 동아시아의 권력 지형 및 상세한 역사적 맥락과 함께 김지하를 통해 보여 주고 있는 것은, 그러한 냉전 체제의 하위 파트너인 유신 독재 정권과 한바탕 벌여 놓은 그의 싸움판이다. 그의 시 「곡(哭) 민족적 민주주의」(1964)와 「오적(五賊)」(1970)이 어떻게 ‘유신의 심장’을 들었다 놓았다 했는지, 왜 유신 독재 정권은 그의 ‘세 치 혀’와 붓 끝에서 흘러나오는 시를 그토록 두려워했는지, 그러한 김지하의 시는 근본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저자는 ‘오적 필화사건’의 법정 풍경을 복원한다. 잘 알려진 대로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하에서 필화 사건은 드물지 않게 일어났고, 더군다나 김지하의 「오적」이 처음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특별히 ‘오적 필화사건’에 주목하는 이유는 “1970년 김지하의 체포에 이은 100일 간의 재판[이], 법정을 판소리나 탈춤이 주로 공연되는 야외의 마당으로 탈바꿈시켰다”는 데 있다.2) 저자는 관련 인물들의 여러 회고를 바탕으로 당시 재판이 흡사 검사가 양반의 담화를 담당하고 김지하가 말뚝이를 맡은 판소리 풍자극과도 같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유신 독재 정권은 도리어 김지하에게 그가 오래 탐구했던 전통 마당극을 마음껏 펼칠 무대를 깔아주었던 셈이다. 이후 그 무대는 김지하가 “문학, 폭력, 혁명, 구원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펼칠 수 있는 대중 강연을 위한 연단”(95)으로 확장된다. 당시 재판을 방청했던 더글러스 루미스(Charles Douglas Lummis)의 기록을 인용하여 저자는, 재판 방청객들이 김지하의 발언을 받아 적어 재판장 바깥으로 빼돌린 뒤 그들이 속한 조직으로 돌아가 그에 대해 토론하고 연구하게 되는 방식을 흥미롭게 포착한다. 이는 시인의 말이 변론과 강연, 연설을 넘어서, 유신 독재 체제하의 민중에게 어떤 구원의 메시지처럼, 마치 ‘예언’처럼 전달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저자에 따르면 루미스는 실제로 김지하에게 “에언자”라는 칭호를 부여하기도 했다.(87) 오래 전 종교가 시와 정치로 분리되지 않는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이 시기 김지하의 문학 세계는 세속화 시대에 시와 정치를 동시에 추구하려 했던 어떤 종교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이후 “시인으로서의 그의 국제적 명성은 분명 그가 겨울 공화국의 순교자가 됨으로써 크게 높아지게 되었다.”(50) 아이러니하게도 유신 독재 정권은 김지하를 위대한 시인으로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게다가 그 어떤 비평가나 애독자보다도 꼼꼼하게 김지하의 시를 읽고 분석하며, 그 힘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했기에 그들은 김지하에게 더욱 집착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검찰은 “시인의 수첩에 적힌, 아직 쓰이지 않은 시와 희곡에 대한 메모”(95)들을 증거로 제출하며, 마치 시인론을 쓰는 문학 연구자인양 김지하의 문학 세계를 탐구해 들어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문학이 하는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문학을 억압하고 지배하려면 역설적이게도 그 안에 잠겨들어야 한다. 지배와 억압은 대상을 이해할 때 가능한 것이고, 문학에 대한 이해는 오직 문학의 세계 안으로 침잠할 때 가능한 까닭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문학이 하는 혁명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지배 권력조차 그 안으로 휘말리고 뒤엉켜 들어가게 만드는 것, 그것이 시와 정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유신 독재 시대 문학의 혁명적인 것이었다. 굳이 알랭 바디우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낸다는 점에서 사랑과 혁명은 ‘사건’이며,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문학도 ‘사건’이 된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의 논의가 무르익을 때, 그 자체로 1970년대 문학의 ‘사건’이기도 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이 등장한다. 핵심은 이 연작소설집이 이웃 사랑을 미학적으로 실천한 텍스트라는 것인데, 저자는 그 단초를 「뫼비우스의 띠」에서 발견한다. 연작소설의 첫 번째 이야기이기도 한 「뫼비우스의 띠」는 ‘굴뚝 청소를 마치고 그을음으로 얼굴이 새까맣게 된 아이와 그을음이 전혀 묻지 않은 깨끗한 얼굴의 아이 중 누가 얼굴을 씻을 것인가?’ 하는 질문과 함께 수수께끼 같은 문답을 주고받는 교사와 학생들의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이 문제가 곧 뫼비우스의 띠이면서,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세계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함을 암시하며 끝맺는다. 저자는 이 뫼비우스의 띠 수수께끼를 지젝(Slavoj Žižek)의 ‘시차적 관점(parallax view)’, 즉 축소 불가능한 간극을 잇기 위해 애쓸 것이 아닌, “간극 그대로를 인식하는 것”으로 해석한다.(189) 안과 밖은 결코 만날 수 없지만, 뫼비우스 띠에서는 그 안과 밖이 그대로 안쪽 면이면서 바깥 쪽 면으로 존재할 수 있는 차원을 인식하는 것이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서, 당연히 그을음이 묻은 아이가 세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에게 교사는 얼굴에 그을음이 묻지 않은 아이가 친구의 새까만 얼굴을 보고 얼굴을 씻어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답한다. 이윽고 다른 학생이 그와 같이 대답하자, 다시 교사는 동일하게 굴뚝 청소를 한 아이들 중 한 아이의 얼굴은 깨끗하고 다른 아이의 얼굴은 더러운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반박한다. 그러니까 애초에 교사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해답 없음이 곧 안과 밖의 구분 없는 뫼비우스의 띠의 관점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굴뚝청소부 수수께끼와 뫼비우스의 띠라는 위상수학적 개념과 개발독재시대의 소설에 대한 해석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마치 뫼비우스의 띠를 만들 듯, 유영주 역시 그의 방법론적 시각을 한 차례 꼬아 지젝에서 케네스 레이너드의 ‘이웃’ 개념으로 비약한다. 사랑(특이성과 차이)과 정치(평등과 동일성)는 마치 뫼비우스 띠의 양면과도 같은데, 그 띠를 한 번 꼬아 연속체로 만드는 “사랑과 정치의 이음매” 지점이 “이웃”이라는 존재라는 것이다.(189) 저자는 이로부터 조세희 소설의 미학인 ‘이웃 사랑’을 이끌어 낸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난쏘공』을 난해한 모더니즘적 텍스트처럼 보이게 하고, 그래서 리얼리즘론자들에게 지식인적인 환상 소설이라고 비판받게 만들었던 몽타주 기법을 ‘이웃 사랑’의 주된 미적 원리로 파악하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1970년대 문학은 “당신은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십니까”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박태순의 ‘외촌동 사람들 연작’과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1977)가 그러했을 뿐만 아니라, 대중소설 작가로 197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최인호 역시 일찍이 「미개인」(1971)에서 한센병 환자의 아이들과 같은 학교에 보내는 것을 반대하고 나선 우리 주변의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를 소설로 쓴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첫 손가락에 꼽힐 작가는 단연코 이문구일 것이다. 『관촌수필』(1972)에서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이문구의 이채로움이 빛을 발하며, 유영주가 말하는 ‘인접성의 윤리’를 적극적으로 미학화한 이상적인 이웃 공동체가 그려진다. 저자는 이문구의 아버지와 두 형들이 좌익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던 개인사를 바탕에 둘 때, 이문구의 이웃에 관한 이야기가 그저 단순히 전통사회의 풍요로웠던 이웃 공동체에 대한 환상일 수 없음을 역설한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전쟁 전후의 무수히 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들 중 많은 경우는 이웃들 간에 벌어진 비극이었다. 크게는 계급과 종교를 바탕으로 나뉜 좌와 우의 정치적 이념을 따라 서로 갈등을 빚었고, 심한 경우 학살로 이어졌다. 이러한 한국 현대사의 맥락 속에서 이문구 소설 속 이웃은 “이념적 명명의 대안”으로 제시되며 특별한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142) 저자는 조세희와 이문구의 소설을 ‘이웃 사랑의 미학’과 ‘인접성의 윤리’로 의미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그러한 문학의 미학과 윤리가 박정희 독재 체제의 산업화와 반공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근원적인 힘이었음을 주장한다. 그 힘이, 플라톤 이래 본질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문학을 정치와 만나게 하고, 동시에 어떤 정치를 극복하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저자의 의도대로 1970년대 문학은, 시(문학)와 정치와 사랑이 ‘인접성’의 원리를 따라 이어지지만 그 간극을 그대로 유지하며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현실을 넘어서는 차원의 위상을 형성하는 상호 연결과 긴장 관계로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3. 마지막 문사(文士)의 시대 그러나 이 책의 부제인 ‘박정희 시대 한국문학과 저항’에서와 같이, 한국 문학이 저항과 나란히 놓일 수 있는 시대는 곧 저문다. 대체로 그것은 1990년대, 그 유명한,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실감한 때와 겹친다. 고진은 1970년대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한 사람인 김종철과 만났을 때 왜 문학을 그만두고 《녹색평론》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알려진 대로 김종철은 1991년 《녹색평론》 창간과 함께 문단을 떠나 생태주의 운동에 몸담았다. 그는 “자신이 문학을 했던 것은 문학이 정치적 문제에서 개인적 문제까지 온갖 것을 떠맡는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모순조차도 떠맡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언제부터인가 문학이 협소한 범위로 한정되어 버렸다, 그런 것이 문학이라면 내게는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그만두었다”고 답했다.3) 이것은 유신 독재 정권에 강력하게 저항했던 ‘창비’ 계열 문학비평가의 고백이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이 포착하고 있는 문학의 사회 참여(앙가주망)와 정치적 실천, 특별히 양심 있는 지식인으로서 시인과 소설가 들이 독재 권력과 맞서 싸우는 역사는, 이제 정말로 역사가 되었다. 물론 그러한 역사가 한국에서 1970년대 유신 독재 정권 시대라는 국면에 가능했고 정점에 도달했던 것은, 과거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국가였던 후진국에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설 때 그에 맞서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를 외칠 수 있는 것은 소수의 지식인들뿐이었던 세계사의 보편적인 패턴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고진이 말한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장르가 소설(novel)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한국 문학사에서 ‘소설의 시대’라고 불렸던 1970년대의 특수한 문학사적 맥락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의 논의가 작가를 앞세우면서 참조하는 세 가지 문학 개념 중 첫 번째인 ‘리테로크라시(literocracy)’라는 동아시아의 문치주의적인 문학 개념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한국 근현대 문학사로 한정해 본다면 그것의 유구한 역사는 시인과 소설가가 독립운동 투사가 되곤 했던 식민지 시대 ‘문사’ 개념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사의 시대는, 이 책에서 보여 주고 있는 것처럼 실로 1970년대 문학에서 마지막으로 가장 강력하고 화려하게 빛을 발한 뒤, 끝났다.4) 이 책의 첫 장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김지하의 시 「진리」에서 시인은 “바람 속이 내 집”이라고 노래하고 있었지만,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 황석영은 그가 2017년 출간했던 문학적 자서전 『수인』에서 방북사건으로 떠돌던 시절을 회고하며 그때의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결국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문학이라는 집이었다”라고 고백한다.5) 한때 바람 속을 집으로 삼아 온갖 경계를 넘나들며 활보했던 문사들에게 문학의 지경이란 없었다. 김종철이 말했던 것처럼 그들의 문학은 “온갖 것을 떠맡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문학을 떠났거나, 문학이라는 집 안으로 돌아간다. 이제 문학은, 그리고 작가는 무엇을 하는가. 유영주는 결론에서 박민규 소설의 저항성을 김지하에 견주며, 문학은, 그리고 작가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박민규는 그의 대표작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표절 사건 이후로 그럴 수 있는 정당성을 상실했다. 이것은 분명 징후이기도 하다.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예감하게 했던 작가 중 한 명인 무라카미 하루키를 통해 우리는 이미 오래 전 문사의 정체성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로 완벽하게 대체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지위마저 위태롭다. 최근 작가들의 소설 속 자기 재현은 어떠한가. 그들은 비정규직 중에서도 고용안정성과 소득이 가장 낮은 축에 들며, ‘프리랜서’라서 정부가 청년층에 제공하는 대출 상품에도 부적합해 은행 창구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으로 소설가를 재현한다(박서련, 「A Queen Sized Hole」,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민음사, 2022). 지방 변두리의 3천만 원짜리 아파트가 자기 집이 되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며, 마오쩌둥의 참새들처럼 어디에도 내려앉을 수 없어 지쳐 떨어져 죽을 위기에 놓여 있다(이서수,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젊은 근희의 행진』, 은행나무, 2023). 오해하지 말라. 이것은 어떤 가치 판단도, 비판도, 자조도 아닌, 현상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이 시대의 문학은 이제 유신 독재의 겨울 공화국과는 완전히 다른, 또 다른 눈보라 속에서 분투해야 하는 것이다. 1) 양성우, 『겨울공화국』, 화다, 1984, 18면. 2) 유영주, 이형진·정기인 역,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 박정희 시대 한국문학과 저항』, 소명출판, 2023, 92면. 이후 이 책 인용 시 본문에 쪽수로 표기. 3)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역, 『근대문학의 종언』, 도서출판 b, 2006, 49면. 4) 어떤 이들은 1980년대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문학과 정치의 관계라면 그것은 1980년대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1980년대에 문학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팽배했던 반지식인적인 분위기 속에서 작가는 1970년대와 같은 문사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1991년 5월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 치워라”라는 김지하의 충격적인 발언과 그것을 둘러싼 반응 그 이면에는 1980년대를 거치며 그가 더 이상 1970년대와 같은 문사의 지위에 서 있을 수 없었던 상황이 엄연히 자리한다고 볼 수도 있다. 5) 황석영, 『수인』 1, 문학동네, 2017, 36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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