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들 2024년 봄호(제75호)
깊이와 넓이 ― 안윤과 성해나의 소설
특집 • 2020년대 젊은 작가들의 좌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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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20년대 젊은 작가들의 좌표’를 그려 달라는 청탁을 받고 작성되었지만 여기서는 단지 2020년대에 본격적으로 창작 활동을 시작한 작가 중 내가 인상 깊게 읽은 두 명의 소설가의 작품 세계를 독립적으로 분석하는 것에 그치고자 한다. 2020년대 들어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 여러 작가 중 안윤과 성해나를 비평 대상으로 선택한 이유는 두 작가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각각 소설의 깊이를 확보해 내고 소설의 넓이를 확장해 나가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1. 갇힌 존재들의 수직 운동 : 안윤의 소설
안윤 장편소설 『남겨진 이름들』은 ‘윤’이 라리사 니칼라예브나 이그나바타로부터 나지라 하미돕나가 유품으로 남긴 노트를 전달받은 경위를 설명하며 시작한다.1) 라리사는 윤이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에서 어학연수 받을 때 머물던 집의 주인이며 나지라 하미돕나는 라리사가 어린 시절부터 딸처럼 돌보던 여성이다. 윤이 비슈케크를 떠난 지 벌써 8년. 라리사는 왜 나지라가 남긴 유품을 그녀와 일면식도 없는 윤에게 보낸 걸까? 라리사는 동봉한 편지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이 기록을 모두 읽고 나서 윤, 너를 떠올렸다. 너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니까. 이야기는 살아가고, 어떻게든 우리 곁에 살아남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니.”(20~21쪽)
라리사의 메시지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이야기는 어떻게든 우리 곁에 살아남는다. 둘째, 하지만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어서 이를 위해서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 바로 당신이 필요하다. 라리사의 말처럼 어떤 이야기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이야기를 복음처럼 전파할 사도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왜 하필 윤이어야 할까. 윤이 라리사의 요청을 받아들여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지라의 노트를 번역하는 윤의 수고로운 작업에는 아무런 세속적 보상의 약속도 없으며 윤과 라리사는 어떠한 계약 관계로도 묶여 있지 않다. 그럼에도 윤은 라리사의 일방적인 요청을 받아들여 나지라의 노트를 “여덟 달에 걸쳐 더디게 읽고 사 년이 좀 넘는 기간 동안 한국어로 번역”(17쪽)해 낸다.
우리는 이 장면을 안윤이 제시하는 인상적인 소설론으로 읽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안윤에게 이야기는 인간의 삶과 더불어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에게 공속된 이야기의 존재 조건은 인간의 소멸과 함께 흩어질 위험에 처한 것이기도 하다. 소설가는 그렇게 흩어지는 무수한 이야기 안에 거주하면서 어떤 이야기는 이대로 사라지게 둘 수 없다는 생각에 무엇이라도 하지 않을 수 없어 펜을 쥐는 사람이다. 그로 인해 비로소 “한 사람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에게 온전히 전해지는” “기적에 가까운 일”(18쪽)이 발생하게 된다. 안윤에게 소설 쓰기란 그와 같은 작은 기적을 발생시키는 일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어딘가에 갇혀 자유롭지 못한 존재들이다. 교통사고를 당해 사지가 마비된 카탸는 좁은 방에 갇혀 있고 그런 카탸를 지켜보는 남편 쿠즈만은 무기력과 슬픔에 갇혀 있다. 나지라 역시 젊은 시절 사랑했던 남자의 아이를 사산하면서 절망에 갇혀 버렸던 적이 있다. 그들은 무언가를 상실했거나 상실해 가고 있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카탸는 자신의 육체를 통제할 능력을 상실했으며 쿠즈만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보낼 찬란한 날의 가능성을 상실했다. 라리사 아주머니는 아들 줴냐를 잃었고 조발성 알츠하이머에 걸린 나지라는 자신의 동일성을 보증할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 나지라는 상실의 고통을 간직한 채 “적요와 고독 속에 파묻혀 오롯이 혼자라고 확신하며 살아”(51쪽)가는 인물들을 응시하며 삶과 죽음, 지속과 견딤, 기억과 소멸에 관한 서늘하고 진중한 사유를 펼쳐 나간다.
그 인물들은 저마다의 감옥에 갇혀 있지만 제한된 자신의 반경 안에서 필사적으로 운동한다. 물론 갇힌 존재인 그들은 자유롭게 수평운동을 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의 운동은 유일하게 점유가 허용된 자신의 내면을 깊이 파고드는 수직 운동의 형태를 띤다. 나지라가 보여 주는 서늘하면서도 단단한 시선은 견고하게 갇혀 본 자만이 수행할 수 있는 수직 운동에 힘입은 것이다. 그녀는 비록 자유롭고 분주하게 바깥세상을 돌아다니는 사람처럼 넓고 멀리 보지 못하지만 대신 깊게 본다. 온몸이 마비된 카탸를 보며 “마비가 곧 시간의 정지라고”(45쪽) 경솔하게 판단하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달리 나지라는 살아 있는 신체는 그것이 여전히 살아 있는 한 유기체로서의 생장을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물론 그 생장은 눈부신 성장과 무관하며 차라리 나아질 기미가 없는 현실을 무한히 반복하는 “끝나지 않는 싸움”에 가깝다. 나지라는 그 지독한 싸움에서 “그들이 언젠가는 고통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희망” 혹은 “체념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 일상에 푸른 잎을 내보이는 희망”을 본다.(42쪽) 그 희망은 슬프고 처연한 것이지만 인간의 육체가 살아 숨 쉬고 있는 한 명백히 존재하여 없다고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희망에는 손쉬운 절망보다 지독한 면이 있다.
나지라는 자신이 카탸를 좁은 방에 가둬 두고 있다며 괴로워하는 쿠즈만을 보며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 각자가 끝끝내 서로에게 가닿을 수 없다면, 내가 타자가 되는 일이 결단코 가능하지 않다면, 우리는 모두 ‘갇힌’ 존재가 아닐까. 어쩌면 우리 각자가 이 세계에서 살아남고 견디는 방식은 타자를 향해 자신을 열어 보이는 방식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에 갇히는 것, 갇힌 채로 타자의 곁에서 기꺼이 또 한 번, 함께, 이중으로 갇히는 것이 아닐까.”(125쪽) 갇힌 존재는 실존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타자에게 닿을 수 없지만 사랑하는 존재와 함께 갇힘으로써 비로소 삶을 견딜 위안을 얻을 수 있다는 나지라의 깨달음은 자신의 한계에 정직하게 절망해 본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냉혹한 체념의 진실이 서려 있다.
하지만 자아를 가둔 실존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인간에게 남은 유일한 해방의 가능성은 죽음으로 완성될 자아의 소멸뿐이다. 나지라는 기억을 잃어 가는 와중에도 “다만 내가 나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공책을 펼쳐”(188쪽) 본다. 그것은 자신을 확인하는 동시에 자신의 감옥의 둘레를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녀는 자기 안에 갇힌 채 고립되어 소멸해갈 것이고 그녀의 기록만이 남아 그녀의 존재를 증명해 줄 것임을 예감한다. 이 대목에 이르면 왜 윤이 나지라의 기록을 번역하는 작업에 그토록 매달렸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녀의 번역-글쓰기는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고립과 소멸의 운명을 향한 실존적 저항의 실천이었던 셈이다.
「담담」의 주인공 혜재 역시 자기 안에 갇혀 타인에게 닿을 수 없다는 점에 절망하는 인물이다.2) 스물셋에 만나 서른넷에 헤어진 동성 연인 수윤과의 지독했던 사랑과 이별 이후 혜재는 “다소 뒤틀리고 미쳐 있는” 상태로 “자기혐오와 도파민, 엉망진창과 성과, 죄책감과 뻔뻔함”(168쪽)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맴돌게 된다. 혜재의 방황은 그녀가 수윤을 그토록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음에도 “끝내 수윤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169쪽)다는 자책으로부터 온다. 광고대행사에 다니는 혜재는 “관념과 단어를 모으고 분류하고 재배치해 대체 불가능한 적확한 표현을 발견하는”(168쪽) 일을 업으로 삼고 있지만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불가해한 일들에 관해서는 단 한 번도 적확한 표현을 찾은 적이 없었다.”(168쪽)고 토로한다. 그럴 때 혜재는 매우 투명한 사람이거나 혹은 투명함이라는 환상에 매혹된 사람처럼 보인다. 그녀는 자신의 내면이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 아니어서 거기서 발생하는 불가해한 일들을 적확하게 표현하는 언어가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고 “대체 불가능하고 적확한 단 하나의 무엇”(168쪽)을 찾아 방황한다.
그 “대체 불가능하고 적확한 단 하나의 무엇”은 자신을 타인과 구별시켜 주는 정체성의 표지라고 할 수 있다. 혜재는 바이섹슈얼이라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언제나 예민하게 의식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성정체성이 자신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대체 불가능하고 적확한 단 하나의 무엇”이라는 듯 본질화하기도 한다. 회사 대표인 현수의 강권으로 어쩔 수 없이 나간 소개팅에서 만난 은석에게 느닷없이 “저는 바이예요.”(170쪽)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 무의식적인 실수는 그러나 혜재가 자기 자신에 관한 가장 중요한 진실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여기고 있음을 드러낸다. 혜재는 은석이 “불쾌감을 억누르며 왜 이 자리에 나온다고 하셨어요?”(171쪽) 같은 책망의 말을 던지고 차갑게 돌아서거라 생각했지만 그의 반응은 혜재의 예상과 달랐다. 은석은 다만 조심스럽게 이렇게 되묻는다. “근데 혜재 씨한테는 그게 가장 중요한 정체성인가요?” 혜재는 은석의 질문을 받고 당혹감에 휩싸이게 되는데 이는 은석의 질문이 무례하게 느껴졌기 때문은 아니다.
혜재 씨, 저는 결혼을 했었잖아요.
네.
사실 이혼이 아니에요.
아니군요.
네. 보통 사별이라고 하죠.
은석이 뒷말을 잇지 않아 나는 괜스레 손끝으로 유리잔 표면을 매만졌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였다. 그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한동안 저한테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유가족이었어요. 여전히 중요한 정체성이고요. 근데 이제 ‘가장’이란 말은 빠지게 된 것 같아요. 육 년 걸렸네요. (172~173쪽)
술에 취한 은석의 고백을 들은 혜재는 성정체성과 유가족이라는 정체성은 같은 정체성이라는 어휘를 사용하지만 엄밀히 말해 다른 차원의 것이라고, 유가족이라는 정체성은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희석되고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정체성은 그런 노력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며 그렇게 빠져나오길 바라는 마음조차 일종의 폭력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 순간 혜재는 은석과 자신이 “어떤 관계로든 오래도록 알고 지내게 될 거라는 막연한 예감”(172쪽)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실제로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연인이 된다. 혜재는 어째서 그 순간 은석에게 마음을 열게 된 걸까.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경험한 은석에 대한 동정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은석이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상실의 고통에서 필사적으로 벗어나려는 사람이라는 것, 거스러미를 뜯어내듯 자신의 상실을 곱씹으며 그 안에 자족적으로 머물지 않고 자신을 가둔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용기를 지닌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지금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다름 아닌 그와 같은 용기라는 걸 혜재가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이다.
둘은 연인이 되었지만 혜재의 속마음은 여전히 복잡하다. 바이섹슈얼이라는 자신의 성정체성이 과거 연인들에게 어떤 의심과 비난의 빌미가 되었는지 알고 있는 혜재는 이성애자인 은석과 같은 방식으로 관계의 미래를 계획할 수 없다. 혜재는 은석이 바이섹슈얼인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과 자신이 이성애자인 은석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을 과연 은석에게 말로 풀어 설명할 수 있을지, 그리고 은석이 이해하는 바가 자신이 이해하는 바와 일치할지 확신하기 어렵다. 혜재의 불안과 염려는 “레즈비언인 수윤이 나를 받아들이는 것과 내가 수윤을 받아들이는 것의 차이”(174쪽)에서 비롯되었던 지난 사랑의 실패를 떠올리는 과정에서 더욱 증폭된다.
하지만 사랑은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거나 서로에게 온전히 닿을 때 발생하는 순도 100%의 충족감 없이도 가능할 수 있다는 점을, 혜재는 은석과 만나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조금씩 깨닫게 된다. 은석이 울산으로 발령받아 서울과 울산을 오가며 만남을 이어가던 혜재는 울산으로 내려가던 어느 날 수윤의 죽음을 전해 듣고 은석 앞에서 오열한다. 그렇지만 은석은 혜재에게 울음의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건 은석이 말하지 않아도 혜재의 마음을 모두 이해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때로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가만 안아 주는 것이 사랑의 최선일 수 있음을 은석이 알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온전히 알고 이해하고 가닿고 싶다는 투명한 열망은 상대에 대한 통제와 통치의 기제로 변모하기도 한다. 그러나 은석은 상대에 대한 투명한 앎과 순도 높은 일치의 정념을 혜재에게 함부로 투여하지 않는다. 혜재가 어느 순간 은석에게 자신을 “설명하거나 증명하려고 안달하지 않”으며 그녀 안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과 의심, 혼란을 상대에게 돌리지 않”(183쪽)게 된 것도 그와 같은 투명함의 미망에서 빠져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혜재가 투명함의 미망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면 은석은 죽은 아내와 딸의 세계로부터 빠져나와야 한다. 마침내 함께 살기로 결정한 혜재와 은석은 서울에서 함께 살 집을 고른 뒤 은석이 아내, 딸과 함께 7년 동안 살았고 그 이후로 은석 혼자 10년 동안 살았던 집으로 가서 함께 짐을 정리한다. “딸아이가 그려놓은 색색의 낙서, 아내와 장식장을 옮기다 생긴 강화마루의 흠집, 싱크대 상부 장 문짝 모서리의 갈리진 틈들”(182쪽)이 남아 있는 그 집을 떠나는 것은 아내와 딸이 “남기고 간 보이고 만져지는 흔적들이 모조리 사라지게 된다는 사실”을 뜻했으므로 은석은 아내와 딸이 죽고 나서도 그 집을 떠나지 못했다. 그러던 은석이 이제 혜재를 만나 그 집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짐을 정리하다가 가족앨범을 발견한 은석이 사진을 넘기며 소리 없이 우는 모습을 본 혜재는 이사를 마치면 은석과 함께 아내와 딸이 있는 용인의 추모 공원에 방문하자고 제안한다. 추모공원에 간 혜제는 그곳에서 “아무 말 없이 유리문을 연신 문지르다가” “울고 싶으면서 울고 싶지 않은 것”(185쪽) 같은 표정을 지으며 돌아서는 은석을 먼저 보내고 그곳에 남아 “그의 아내와 딸의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그리고 눈을 감고 마음 깊이, 죽은 은석의 아내와 딸을 향해 온 마음을 담아 인사와 안부를 건넨다.
혜재와 은석은 ‘온전히 자신 안에 갇혀 그렇게 갇힌 채로 타자 곁에서 기꺼이 또 한 번 갇히는’ 것에 머물지 않고 서로의 상실과 아픔을 딛고 자신의 굴레에서 조금씩 빠져나온다.
혜재 씨, 경험이라는 거 참 이상하지 않아요?
이상해요?
내가 경험한 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 같으면서도 어떨 땐 그 경험들 때문에 내가 갇혀 있는 느낌이 들잖아요.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싶고.
은석이 대청이 아름답고 탐스러운 솔방울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예전에요, 솔방울 같은 거 주울 일 이젠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장담했네요.
장담했죠.
그가 몇 걸음 앞서 걸어가 솔방울을 또 하나 주워 올렸다.
또 하겠죠. 앞으로도. 근데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184쪽)
경험은 한 인간의 실존을 사후적으로 구성하는 가장 강력한 요소지만 우리를 과거의 경로에 의존시키는 구속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하지만 혜재는 은석과의 사랑을 통해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자신을 개방해 낸다. “어쩌면 있어야 할 자리에 마땅히 있어야 할, 대체 불가능하고 적확한 단 하나의 무엇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184~185쪽) 모른다는 깨달음은 그 열림의 순간 도달하게 된 중요한 깨달음이다. 우리의 삶은 새롭게 닥쳐오는 시간 앞에 열려 있기에 우리 스스로를 “대체 불가능하고 적확한 단 하나의 무엇”으로 고정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실패하거나 스스로를 “단 하나의 무엇”이라는 허상에 가둬 두는 결과를 낳기 쉽다. 하지만 소설은 투명하고 적확한 무엇에 우리가 도달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에 의미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에게 말하지 않은 것들”(185쪽)을 헤아리고 짐작하는 마음 안에서 고유한 깊이를 획득해 내기에 뜻깊다.
2. 불안정한 존재들의 수평운동 : 성해나의 소설
아즈마 히로키는 관광을 “원래 갈 필요가 없는 장소에 기분에 따라 가서, 볼 필요가 없는 것을 보고, 만날 필요가 없는 사람을 만나는 행위”3)로 정의한 바 있다. 그렇다면 반드시 가야 할 필요가 없는 곳에 가서, 그곳에 가지 않았더라면 만나지 않았을 타자와의 마주침에 개방적인 성해나의 소설을 ‘관광객’의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관광’이라는 용어에 깃든 가벼움과 산뜻함 때문에 그 용어의 기능은 성해나 소설에 드러나는 만남의 우연한 성격을 강조하는 수사에 국한된다. 가령 「오즈」의 주인공은 하우스 셰어링에 참여하게 되면서 ‘오즈’라는 이름의 할머니를 만나게 되지만 그녀의 어머니가 도박 중독으로 인해 거액의 빚을 남긴 채 자살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굳이 “원래 갈 필요가 없는 장소”(셰어하우스)에 가서 “만날 필요가 없는 사람”(‘오즈’ 할머니)을 만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4) 성해나의 인물들이 원래 갈 필요가 없는 장소에 가서 만날 필요가 없는 사람을 만나는 건 변덕스런 기분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 가지 않을 수 없는 저마다의 복잡한 속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성해나는 우연한 상황에서 발생한 인물들의 마주침에서 이야기를 출발하는 걸 즐기지만 그 과정에서 대면하는 ‘타자의 타자성’을 무거운 실존적 얽힘 속에서 탐구하지 않는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타자를 대면하는 방식은 아즈마 히로키가 이론적 대타항으로 삼았던 실존주의적 타자론으로도, 그로부터 가뿐하게 이탈한 ‘관광론’으로도 온전히 설명되기 어렵다. 굳이 아즈마 히로키의 구분을 차용해 말하자면 성해나의 소설은 ‘무거운 타자’와 ‘관광객’의 어느 중간 어름에서 만남과 관계, 접촉과 이해의 국면을 탐색한다고 볼 수 있다.
성해나의 인물들은 대부분 현실의 어려움과 불확실한 미래에 짓눌려 있는 ‘프레카리아트’ 계열에 속해 있다. 그들은 자신이 처한 불안정한 유동성으로 인해 다양한 사람들과 마주하게 되지만 바로 그 불안정한 유동성 때문에 타자와 깊이 뒤얽히지 못한다. 타자와 깊이 연루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타자에게 정박시켜야 하는데 불안정하게 유동하는 인물들에게는 그와 같은 정서적, 물리적 투자가 허락되기 어려운 까닭이다. 그의 소설에서 자주 발견되는 ‘떠나는 자와 남은 자’ 모티프는 불안정한 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 오늘날 젊은 세대들이 취하는 회피적이면서도 방어적인 태도가 남기는 무의식적 상흔을 드러낸다는 차원에서 독해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떠나는 자와 남은 자’ 모티프를 구성하는 서사의 화소(話素)는 다음과 같다. 먼저 주인공과 독립된 채 존재하는 타자의 세계가 있다. 주인공은 우연한 계기에 그 타자의 세계와 접촉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여러 가지 이유로 타자의 세계에 정박하지 못하고 이내 그 세계로부터 도망쳐 나온다. 거기에는 타자와의 뒤얽힘이 야기하는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고자 하는 심리적 기제가 (무)의식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 결과 ‘떠난 자’에 해당하는 인물은 회한과 그리움, 죄책감이 뒤섞인 복잡한 마음으로 ‘남은 자’를 회억하게 된다.
그 모티프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작품이 「화양극장」이다. 주인공 ‘경’은 7년 전 임용고사에 연거푸 낙방한 뒤 고향 상주에 내려와 침잠의 시간을 보내던 중 “동네에 하나뿐인 단관 극장”(62쪽)에서 우연히 이목이라는 중년 여성을 만나 친분을 쌓게 된다. 영화를 매개로 한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서로에 관한 이야기로 번져 가고 경은 이목이 1970년대 후반 영화계에서 스턴트 배우로 활동했으며 그때 만나던 동성 연인이 부모의 압력을 이기지 못해 이목과 헤어진 후 어떤 남성과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까지 전해 듣게 된다.
그런데 이목과 경 사이에 옛 연인 연수의 존재가 개입되면서 낡은 극장을 매개로 한 두 사람의 정기적인 만남은 위기를 맞게 된다. 이목은 경에게 옛 연인이 동지에 입국한다는 소식을 알리며 함께 팥죽을 끓여 먹자고 제안하지만 그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목과 옛 연인 사이에 심상치 않은 불화와 다툼이 있었다는 정황이 암시되지만 경은 이목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는 물음조차 던지지 못한다. 위태로워 보이는 이목을 보며 경은 자신이 “이목씨의 곁을 지켜주어야 하지 않을까.”(82쪽) 잠시 고민하지만 “단지 극장에서 영화평 정도나 주고받는 사이”에 불과한 자신이 이목 씨와 옛 연인의 일에 끼어드는 것이 “다 참견이고 불필요한 관여인 것 같”(82쪽)다는 생각에 제풀에 돌아서고 만다.
이목과의 관계를 “단지 극장에서 영화평 정도나 주고받는 사이”로 과소 진술하는 경의 태도에서 어떤 심리적 방어기제를 감지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목은 경에게 자신의 성정체성과 자신이 살아온 내력은 물론이고 자신이 기거하는 집까지 모두 열어 보여 준 사람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둘의 관계는 “단지 극장에서 영화평 정도나 주고받는 사이”를 분명 넘어서 있다. 그럼에도 경은 어째서 이목과의 관계를 축소함으로써 부인하는 걸까. 그와 같은 방어기제는 무엇에 맞서 발동되는 것일까.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가면 사랑이 아닌 ‘러브’가 되고, ‘그거’가 되고 마는”(79쪽) 동성애에 대한 무의식적인 터부 때문일 수도 있다. 동성애에 대한 내면화 된 금기가 서사의 표면에 드러난 방어기제의 원인이라면 그 이면에는 경이 어떻게든 상주를 떠나 ‘남들처럼’ 살고 싶다는 무의식적 욕망이 하나의 원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목은 경에게 상주를 자신의 “마지막 정착지”(77쪽)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언뜻 비치지만 경에게 있어 상주는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삶을 살기 위해 벗어나야만 하는 공간일 뿐이다. 마지막 생의 정착지를 구하는 중년의 이목과 달리 청춘인 경은 아버지와 언니가 닦달하듯 ‘남들처럼’ 살기 위해서라도 상주를 떠나야만 한다. 이 ‘남들처럼’이라는 말에 이성애적 규범성이 전제되어 있음이 물론이다.
경과 이목의 관계는 화양극장이 문을 닫고 경이 몇 달 후 고향을 떠나면서 완전히 끊어지게 되는데 이를 통해 비로소 후일담의 서사적 필요 조건이 갖춰지게 된다. 후일담은 누군가를 떠나온 자가 여전히 그곳에 남은 자에 대해 지니는 죄책감에서 출발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후일담은 회억의 대상 없이 쓰일 수 없으며 그때 회억의 시선은 주체가 과거에 억압했던 모종의 정동과 결부된다. 그래서 다소간 감상적인 슬픔의 정조를 띠기 쉬운데 실제로 이 소설의 결말에는 이목의 마음을 뒤늦게 헤아리게 된 경의 슬픔이 감상적으로 부각되어 있다.
상주를 떠난 뒤 경은 다른 직업을 구해서 “자기 취향을 알아가고 생활을 정성껏 돌보는 사람 특유의 여유와 만족”(92쪽)을 누리며 ‘남들처럼’ 번듯한 삶을 영위하게 된다. 하지만 우연히 어느 극장 앞을 지나다 <어둠 속의 댄서>의 재개봉 포스터를 보게 되면서 ‘남들처럼’ 살기 위해 애쓰는 동안 잊고 있었던 과거가 귀환하게 된다. 그 영화는 경이 이목과 처음 만난 날, 낡은 극장의 화재 경보기가 오작동하면서 결말을 보지 못한 영화였다. 경은 그날 이목으로부터 그 영화의 결말을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경이 실제로 본 영화의 결말은 이목이 말해 준 것과 크게 다르다. 슬픈 영화의 뻔한 결말은 보기 싫다는 경을 위해 이목이 원작과는 다른 “밝은 결말을 이야기”해 주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경은 이목의 “목소리와 부드러운 미소”(95쪽)를 떠올리며 슬픔에 잠긴다.
그러나 경의 슬픔 속에서는 회억하는 자의 자리와 회억되는 대상의 자리가 강고하게 분리되어 있다. 경이 고백하듯 그녀는 이목의 얼굴을 떠올리면 “눈이고 코고 입이고 모든 것이 흐릿”(94쪽)해서 어쩌다 길에서 마주친다 해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경의 시선에서 회고되는 이목은 이토록 형상과 정체가 불분명한데도 그날 이후 경이 이목을 자꾸 떠올리는 게 되는 건 어째서일까. 그건 ‘남들처럼’ 살기 위해 버리고 떠나야 했던 자신의 한 시절에 대해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지니는 죄책감이 슬픔으로 가장한 채 거듭 귀환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한편 「언두」에서는 주인공 유수의 옛 연인 도호와 농인이었던 그의 할머니가 회억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유수는 틴더를 통해 도호와 만났는데 당시 유수에게는 “애쓰지 않아도 되는 관계, 마음에 들지 않을 땐 화면을 가볍게 밀어 거절할 수 있는 관계”(9~10쪽)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깊은 관계는 그만큼 서로의 비밀을 내밀하게 공유할 것을 요구하지만 서로의 비밀이 연루되는 순간 관계는 질척해지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런 관계를 맺지 않았더라면 피할 수 있었던 곤경에 처하기 쉽다. 가까운 친구에게 자신의 불행하고 이상한 가족사를 고백했지만 어느 순간 그 고백이 자신의 약점이 되어 버린 아픈 경험을 간직하고 있는 유수로서는 가볍고 일회적인 관계가 쾌락 이전에 안전의 문제로 다가왔을 법하다. 미래를 함께 설계하는 진지한 관계보다 “어차피 다시 볼 사이도 아닌데.”(20쪽)라는 생각으로 가볍게 임할 수 있는 관계를 더욱 편하게 느끼는 유수에게서 「화양극장」의 경에게 엿보였던 심리적 방어기제를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성해나의 다른 소설들처럼 이 작품에도 소통을 둘러싼 오해와 단절이 갈등의 핵심에 놓여 있다. 유수는 도호를 처음 만난 날 도호가 보여 주는 대화 매너에 매료된다. 유수가 보기에 도호는 “만나본 이들 중 가장 풍부하고 다채로운 표정을 지닌 사람”이었으며 자기의 말을 들을 때면 “고개를 주억이거나 안면 근육이나 입술을 미세하게 움직여 적극적으로 공감을 표”(11쪽)하는 사람이었다. 도호의 그런 매너는 농인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 것이지만 도호와 달리 수어를 할 줄 모르는 유수는 도호의 할머니와 소통할 수 없다. 처음에 유수를 매혹시킨 매너의 기원으로부터 정작 그녀는 소외되어 있는 것이다. 결말 부분에 유수가 목격한 할머니의 춤은 그 매혹의 기원에 서려 있는 불가해한 낯섬(uncanny)을 또렷하게 보여 준다.
상주(와 이목)을 떠났던 「화양극장」의 경처럼 유수 역시 도호(와 그의 할머니)를 떠난다. 도호의 세계가 가하는 ‘무거움’의 압력을 더는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무거워. 다 너무 무거워.” 50쪽) 그런데 이 소설에서 ‘떠나는’ 사람은 유수 말고 또 있다. 유수의 아버지 역시 가정을 버리고 떠난 사람이다. 유수는 떠난 아빠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엄마를 보며 그럴 바엔 엄마도 아빠를 버리고 떠나면 되지 않냐고 화를 내지만 엄마는 그렇게 누군가를 훌쩍 떠날 수 있을 정도로 비겁한 사람도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유수는 어떨까. 이 작품은 유수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집으로 돌아온 아빠와 싱거운 몇 마디 대화를 나눈 후 채널을 돌려 코미디 영화를 보며 함께 큭큭 웃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그 공모된 웃음은 유수 역시 아버지처럼 비겁한 사람의 자리에 기꺼이 서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여기서도 회억하는 자의 자리와 그 대상으로 존재하는 남은 자의 자리는 분할된 채 외따로 존재하고 있다. 「화양극장」의 결말에 드러난 감상적인 슬픔의 자리에 “아빠가 튀김용 젓가락을 깁스 안에 찔어넣을 때마다” 미미하게 풍기는 “악취”(53쪽)가 들어차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당춘」과 「괸당」에도 ‘떠난 자’와 ‘남은 자’ 사이의 구도가 전제되어 있다. 먼저 「괸당」을 살펴보자. 이 작품의 주인공인 보현은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제주를 방문하는 당숙의 먼 친척을 가이드하게 되었다며 그 자리에 동행해 줄 것을 요청받는다. 보현과 그의 아버지를 비롯해 제주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일가친척이 ‘남은 자’라면 당숙의 먼 친척인 ‘올레크 고’는 ‘떠난 자’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의 떠남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다(‘올레크 고’의 할아버지는 원래 월정리에서 농사를 짓던 농군이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연해주로 떠난 것으로 소개된다). 한편 당숙과 재혼했다는 이유만으로 문중의 사업을 이어받지 못하는 등의 차별에 시달리다 당숙이 죽자마자 제주를 떠난 보현의 당숙모 역시 ‘떠난 자’에 속한다. ‘올레크 고’와 ‘당숙모’는 모두 ‘떠난 자’에 속하지만 그들이 제주에 대해 지니는 감정은 상이하다. ‘올레크 고’에게 제주가 자신의 조상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소중한 삶의 터전이자 새로운 삶을 꿈꿀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라면 당숙모에게는 허울 좋은 가문의 위신만 내세우는 환멸의 공간일 뿐이다. ‘떠난 자’의 정체성이 복합적이다 보니 당숙이 생전에 보인 이중적인 면모가 폭로되는 장면에서 드러나듯 ‘남은 자’ 역시 단일하고 안정적인 정체성을 부여받지 못한다.
이 작품은 보현이라는 ‘남은 자’의 시선에서 ‘떠난 자’를 바라보는 구도를 취하고 있다. 보현은 당숙모의 떠남을 마음 깊이 이해하고 자신을 스스럼없이 조카라고 부르는 ‘올레크 고’를 보며 복잡한 마음에 잠기지만 작품의 결말에 이르러 여전히 ‘남은 자’와 ‘떠난 자’의 분할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보현은 한 방에 열두 명이 묶는 싸구려 게스트 하우스에 짐을 푸는 ‘올레크 고’에게 “괜찮으시다면 우리집에서 지내시겠냐고 청하려다”(169쪽) 관둔다. “하룻밤이면 몰라도 이틀은”(같은 면)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때 보현은 “이틀이 사흘 되고,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될 수도 있다고. 그건 나뿐 아니라 아버지에게도 괴로운 일일 거라고.”(같은 쪽) 생각하며 심리적 방어기제를 발동시킨다(알다시피 자기정당화는 가장 친숙한 심리적 방어기제에 속한다). 보현은 이런 말로 스스로를 설득한 뒤 “왜 우리는 누군가에겐 관대하면서도 누군가에겐 한없이 매정해질 수밖에 없는지”(171쪽) 묻는다. 그렇지만 ‘남은 자’와 ‘떠난 자’ 사이의 분할을 재공고화 하는 가운데서 알리바이처럼 발설되는 보현의 물음은 감상적인 자기합리화로부터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당춘」은 ‘떠난 자’와 ‘남은 자’ 사이의 연결 가능성을 상상하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모티프를 공유하는 작품들과 조금은 다른 결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물론 코로나 사태로 인해 “평생직장이라 여겼던 여행사에서” “경영 악화를 이유로 권고사직”(215쪽) 당한 채 백수 생활을 하고 있는 두루와 “간간이 배달 기사로 일하면 돈을”(216쪽) 벌고 있는 헌진은 모두 사회경제적으로 불안정한 프레카리아트 계열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대학 시절 품었던 연대의 이상으로부터 멀리 떠나왔지만 불안정한 그들의 처지가 역설적으로 예전에 품었던 그 이상의 곁으로 그들을 데려간다.
두루와 헌진은 마을 어른들에게 유튜브 영상 촬영 방법을 가르쳐주면 40만 원을 주겠다는 영식 삼촌의 제안을 받고 진천에 있는 괸돌마을로 향한다(영식 삼촌은 두루와 진헌이 아직 대학생일 때 참가한 농활에서 알게 된 마을공동체 활동가다). 하지만 인당 40만 원인 줄 알았던 페이는 총액 40만 원이었고 강좌에 참여한 노인들은 영상은커녕 스마트폰 작동도 힘겨울 만큼 ‘디지털 문맹’이라서 둘의 아르바이트는 시작부터 난항에 부딪히고 만다. 영식 삼촌은 불평불만 가득한 두루와 헌진을 달래기 위해 예의 장대하고 구체적인 마을 살리기 계획을 늘어놓지만 현실에 짓눌린 그들이 보기에 영식 삼촌은 그저 철없는 “몽상가”(219쪽)일 뿐이다.
이 소설은 소생의 희망보다 소멸의 위험으로 가득 찬 농촌의 현실을 ‘떠난 자’와 ‘남은 자’의 서로 다른 시선의 교차 속에서 입체적으로 재현해 낸다. 그 과정에서 영식 삼촌을 물정 모르는 몽상가로 치부해 온 두루와 헌진의 시선에도 미묘한 변화의 기미가 감지된다. 가령 헌진은 서울대를 나온 영식 삼촌을 향해 “삼촌 정도면 더 나은 곳에서 한자리 점하고 살 수도 있는데, 왜 이런 데서 되도 않는 일 벌이며 개고생하세요?”(256쪽)라며 빈정 섞인 힐난을 던지지만 영식 삼촌은 그 질문에 담긴 모난 마음에도 아랑곳없이 “지난 몇 년간 마을 사람들과 이뤄온 혁혁할 것도, 대단할 것도 없는 작당 모의를 하나하나 회고”(257쪽)한 뒤에 진심을 담아 이렇게 말한다. “삼촌은 여기가 좋아.” “좋아서, 더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어.”(258쪽)
영식 삼촌의 진심은 ‘떠난 자’의 눈에 “전에는 안 보이던 것들”을 “그제야 조금씩 보이”게 만드는 힘을 지닌다.(70쪽) 물론 영식 삼촌의 진심이 불안정한 미래에 짓눌린 두루와 헌진에게 얼만큼 든든한 “비빌 언덕”(234쪽)이 되어줄 수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당장의 생활이 빠듯한 ‘프레카리아트’ 청년에게 “느리지만 하나하나 일궈가는 즐거움”(257~258쪽)은 여전히 한가한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두루는 자신에게 “몸을 의지한 채 한 발 한 발” 겨우 움직이면서도 마을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 해조 할머니의 모습을 통해서, 그리고 오래 방치되어 냄새도 독하고 토성도 퍽퍽하던 밭을 모두가 달려들어 제법 쓸만한 땅으로 만들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성급하게 떠나온 세계에 여전히 희망을 품고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촬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온 두루는 영식 삼촌으로부터 약속된 수당과 단체 사진 한 장을 전달받는다. “누구 하나 제대로 찍히지 않은 사진”이었지만 “모두가 앵글에 들어가 있”(274쪽)는 그 사진은 ‘떠난 자’와 ‘남은 자’가 함께 모인 찰나의 순간을 담아내고 있다. 그 풍경은 길례 할머니가 ‘숙근’을 캐는 장면과 겹쳐 읽을 때 더욱 생동한다. 길례 할머니는 “잎사귀는 모조리 떨어지고 줄기도 시들었는데, 뿌리만은 땅 밑에서 생생히 월동”(266쪽)하고 있는 풀을 ‘숙근’이라 부른다고 일러주며 두루에게 이렇게 덧붙인다. “죽은 것처럼 봬도 이렇게 다 살아 있잖아.”(같은 쪽) 길례 할머니의 말은 마치 ‘떠난 자’의 회억이 빠지기 쉬운 함정을 경고하는 듯하다. ‘떠난 자’는 떠나온 시절과 장소, 사람을 다채로운 감정에 빠져 추억할 수 있지만 ‘남은 자’가 살아가는 바로 그 현실을 보지는 못한다. 그 현실을 바로보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이 떠나온 타자의 세계와 접속해야 한다. 소설의 결말에서 “해조 할머니가 보낸 링크에 접속”(274쪽)하는 두루의 행동은 이처럼 ‘떠난 자’와 ‘남은 자’ 사이의 연결(link) 가능성을 보여 준다.
성해나 소설이 앞으로 달성할 성취는 「괸당」의 결말 부분에 드러난 연결 (불)가능성을 어떻게 생동시킬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좋다. 그것은 단지 인간들 사이의 연결이 그 자체로 추구할 만한 문학적 선(善)이어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환경에 놓인 인물들이 만나고 엇갈리는 과정에서 서사적 핍진성이 확보되지 않을 때 「Ok, Boomer」에서 나타난 것 같은 노골적인 작위성이 연출되기 쉽기 때문이다. 성해나는 첫 소설집 ‘작가의 말’에서 “내가 겪어보지 못한 – 어쩌면 영영 겪지 못할 – 사랑과 생애를 상상과 짐작만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오래간 품을 들여 그것을 해나가고 싶다는 염원을 갖는다.”(424쪽)라고 적었다. 그의 말처럼 타자의 삶을 상상하고 그것을 한 편의 이야기로 만드는 것은 어렵고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그 위험을 회피하지 않고 “파고 파다보면”(424쪽) 그의 바람처럼 분명 한 인물에 다가설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독자는 그 인물과 연결되는 생생한 순간의 기쁨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 1) 이하 페이지는 안윤, 『남겨진 이름들』(문학동네, 2022)에서 인용.
- 2) 이하 인용문은 안윤, 「담담」, 『자음과모음』 2023년 겨울호에서 인용.
- 3) 아즈마 히로키, 『관광객의 철학』, 36쪽.
- 4) 성해나, 「오즈」, 『빛을 걷으면 빛』, 문학동네, 2022. (이하 언급되는 작품은 모두 이 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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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할 수 없는 균열 예측 불가능한 일들의 연속.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을 이렇게 표명한다면 분명 많은 이가 의문을 표할 것이다. 지난하지만 공감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문제들을 자주 다루는 작가들이니 말이다. 하지만 자신 있게 말해보건대 두 사람의 소설에는 독특한 사건들이 꽤나 자주 등장한다.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은 어딘가 금이 가고 삐걱대는 삶 앞에 속수무책으로 던져진 사람들로부터 시작한다. 특히 김지연의 인물들이 해괴한 일을 직접 나서서 ‘벌이는’ 사람들이라면, 안윤에게는 그러한 일을 마주한 뒤 이전과는 다른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두 사람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행위들은 어쩐지 무모하고 무용해 보인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의 효용을 장담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러한 움직임들은 아무거나 믿거나 믿어야 할 것을 믿는 일을 거부하고, 확신할 수 없지만 옳다고 느끼는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이들의 동작은 곧 일상의 균열을 마주하는 자세와도 같다. 사람들이 세계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필연적으로 자신의 결함을 확인하는 작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안온해 보이는 세계를 지적하려면 스스로의 불완전성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서 세계의 균열은 쉽게 발설할 수 없는 무언가다. 그렇다면 포기하는 수밖에 없을까.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들어 있다. 그러니 이상하고 유별난 인물들의 행보를 유심히 살펴보면, 잘 봉합된 듯 보였으나 결코 다 가릴 수 없었던 세계의 미세한 틈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2. 망측하긴 해도 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언뜻 보기에 『조금 망한 사랑』은 체념과 포기를 반복하는 망한 인생의 집합소 같다. 전세 사기, 금전 관계에 있던 친구와 애인의 배신, 실직과 구직난처럼 신자유주의와 투기 자본주의의 광풍에 베여 너절해진 인물들이 잇달아 등장한다. 그런데 『마음에 없는 소리』(문학동네, 2022)를 읽었던 이들이라면 세태를 첨예하게 부감하고 표현하는 적실함뿐만 아니라, 농담과 같은 특유의 가뿐함이 김지연 소설의 또 다른 활력이라는 걸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 테다. 이번에도 다소 무겁고 무기력해 보이는 사정들 틈에 유별난 광경들이 돋보인다. 이른바 김지연식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좋아하는 마음 없이」, p. 168)다. 몇 가지 사연만 잠시 나열해보자. 양육권을 포기했던 아이를 말 그대로 ‘좋아하는 마음도 없이’ 다시 키워볼 생각을 하면서 죽은 전남편의 가족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니는 여자(「좋아하는 마음 없이」). 빚만 잔뜩 남기고 떠난 전 여자친구에게 자꾸만 마음이 기우는 아이러니를 겪는 레즈비언(「반려빚」). 달밤에 무덤 사이를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고(「포기」) 출입이 금지된 저수지의 한가운데까지 기어코 노를 저어 도달했다는 일화(「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까지. 소설의 인물들은 왜 자꾸만 이상한 일을 벌일까. 김지연의 소설은 삶이 이미 망했으며 앞으로도 계속 망해 나가리라는 잔인한 현실 공식을 동력 삼는다. 그곳엔 “반려빚처럼, 있어서는 안 되는 것도 태연하게 있”(「반려빚」, p. 104)고 누군가는 “있는 놈들을 위해 아주 싼값의 육체노동에 부려지”(「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 p. 42)지만 이토록 불합리한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도 제도도 없”(「반려빚」, p. 96)다. 자본의 바깥을 떠올리는 일조차 돈의 힘에 기대야만 가능한 오늘날, 소설 안팎의 현실을 살피며 저항의 포기를 물었던 우리에게 김지연은 두 가지 대답을 내놓는다. 하나, 설명 혹은 주장하기. “소리 지르고 때려 부수는 것만이 화내는 방식인 건 아니잖아요.”(「좋아하는 마음 없이」, p. 151) 둘, 괴상망측한 행동들을 늘어놓기. 그런데 짐작과 달리 이때의 망측(罔測)은 망할 망(亡) 자를 쓰지 않는다. 그물[网]과 망함[亡]이라는 뜻이 더해진 한자[罔]는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어그러진 상태를 가리키면서도, 완전한 끝을 잠시 유예하는 힘을 발휘한다. 망측한 일은 낯부끄러울지언정 완전히 망하지는 않은 무언가다. 그런 일을 벌이는 사람 역시 조금 망그러졌을지라도 여전히 어딘가에, 누군가와 분명히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폐기된 존재를 망가진 상태로라도 끌어올리려는 작가의 수고로움이 와닿는다면, 다르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의 행위는 단순한 기행이 아니다. 그들은 차가운 현실이야말로 ‘진짜 해괴한 것’이라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다. 김지연이 말하는 포기는 더 이상 무엇도 ‘기대하지 않는 마음’에 가깝다. 그런데 인물들은 먹고살기에 급급해서가 아니라, 아무리 노력해도 망한 삶이 평범한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괴이한 공식을 꼼짝없이 따라야만 해서 포기한다. 그래서 「포기」에서 거듭되는 “아무 소용도 없는 일”(p. 19)은 자본에만 기를 쓰고 달려드는 평범한 세계를 조금이나마 문제 삼는 계기가 된다. ‘미선’과 그녀의 사촌 ‘호두’는 주변인들에게 돈을 빌리고 사라진 미선의 전 남자친구 ‘민재’를 찾아 헤매고 있다. 그런데 미선과 호두는 물론이고 민재를 찾는 이들은 대부분 돈을 돌려받으려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 궁금해서라기보다는 그저 민재가 잘 지내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의 행방을 살피고, 신고를 권하면 “그렇게까지?”(p. 16)라고 되묻는다. 그리고 막상 민재에게 정말로 닿을 것만 같은 순간엔 발을 뺀다. 민재는 돈을 가지고 도망쳤기에 평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특별한 사람이다. 돈을 빌려준 사람들 대부분이 그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민재는 같으면서도 다른 것들의 차이를 세세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설명은 “왠지 말이 안 되는 이유들도 납득하게 되는 순간”(p. 23)들을 만드는 힘이 있었고, 각자도생과 효율성을 제일로 섬기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받았던 도움은 민재의 이런 성격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니 민재는 자금난이라는 평범한 사정 때문에 결국 평범해져버린, “완전히 나쁜 사람”(p. 16)일 수만은 없는 사람이다. 이렇듯 아무리 애써도 포기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래서 어떤 그만둠은 포기 자체를 미루고, 돈만을 좇게 만드는 기존의 “미친 짓”(p. 12)을 중단하고 새로운 “미친 짓”(p. 28)을 가능케 한다. 술에 취한 호두와 미선은 한 남자의 도움으로 의릉에 들어가 “이상한 괴성”(p. 30)을 내지른다. 한 번쯤 누군가 불가능한 시간에 난립하는 걸 보고 싶었다던 남자 덕분에 “예상 밖의 방향”(p. 28)을 향해 내달릴 가능성이 반짝이며 움튼 순간이다. 망해버린 인간관계와 삶 속에서 건져 올려진 이 희한한 야행은 두 사람이 잃어버린 진짜 호두가 의릉에서 나무로 자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연결되면서 다시 한번 끝을 지연시킨다. 하지만 평범하게 살려면 불운을 껴안아야만 하는 현실에 낭만이 끼어들 자리는 협소하다. 결국 각서를 주고받은 뒤에도 또 한번 배신당한 호두는 민재와의 관계에서 “정말 원하지 않던 포기”(p. 37)를 하고, “나중으로 미루는 버릇”(p. 25) 때문에 민재와 만날 가능성마저 미룬 미선 역시 연결될 방법을 끝내 포기한다. 기존의 삶이 반복되면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을 더욱 희미하게 만드는 자본의 견고함을 김지연은 결코 만만히 생각하지 않는다. 「반려빚」에서 전세자금대출과 전 연인 ‘서일’이 남기고 간 빚을 갚는 ‘정현’의 삶은 숨 쉬듯이 “매 순간 돈에 대해 생각”(p. 76)해야만 하는 하루들로 빼곡하다.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관계 중 하나인 연인 사이를 지탱하기 위해서 돈이 “제법 중요한 요소”(p. 84)로 호출되고, 유일한 반려의 자리에는 빚이 올라앉은 정현의 세계를 보면, 「포기」에서 미세한 틈을 열어젖혔던 망측함이 결국 잇속 빠른 자본주의의 환상에 불과한 건 아닌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할 수 없는 것만 가득한 날들 속” 유일하게 “할 수 있어!”라고 외칠 수 있는 일이 전 연인의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는 일일 때,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을 만큼 망한 듯한 인생의 내력을 모조리 아는 이가 자신을 망하게 한 장본인뿐일 때, 서일과 다시금 함께 있고 싶은 “정신 나간 마음”(p. 89)이 고립과 단절로 내몰려 어쩔 수 없이 택하게 된 불모지처럼 보이기도 하는 탓이다. 그래서 김지연은 평균치의 삶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나선다.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가 탄생한 「좋아하는 마음 없이」의 ‘안지’는 이혼한 전 남편의 부고를 내연녀였던 ‘그녀’로부터 전해 듣는다. 이외에도 그녀는 전남편의 보험금 수혜자가 안지로 되어 있고, 이혼할 때 두고 온 아들 ‘성준’이 안지와 함께 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안지에게 전달한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묘한 구석이 있다. 벌을 받았다고 생각하느냐는 안지의 말에 “누가 벌을 주는데요?”(p. 142)라고 되묻고, 미안해할 겨를이 없을 만큼 행복했다고 묻지도 않은 말까지 술술 털어놓으며, 이제껏 키워온 성준은 누가 뭐래도 자기 아들이지만 양육비는 보태달라는 염치없음까지. 하지만 안지는 바로 이 뻔뻔함이야말로 전남편과 똑같은 “여자의 장점”(p. 154)이라고 생각한다. 안지가 보기에 전남편은 “집을 해올 형편”(p. 149)을 갖춘 “좋은 사람이”(p. 159)었지만 “좋아 죽을 것 같은 사람”(p. 161)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형적인 사람”(p. 137)으로 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어온 안지는 스스로가 “아주 평균적인 삶”(p. 139)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전남편과 이른 결혼을 했었다. 호불호를 쉽게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선택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안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전남편과 여자는 정확히 안지의 정반대편에 선 사람들이다. 솔직하고 당당하게 이혼을 요구하는 사람들.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솔직한 사람. 숨기느니 차라리 정면 돌파를 선택하는 사람. 그래서 뻔뻔할 수 있는 사람”(p. 158)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안지는 이들의 뻔뻔함을 겪고서 “조금 더 자기 자신에게 가까운 삶을 살게 되었”(p. 137)다고 믿는다. 무엇이 좋고 싫은지를 탐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안지의 가족들은 “좋아하는 마음 없이 함께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이고, 때문에 안지의 삶에는 “그 사람들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내렸던 선택들”(p. 163)이 수두룩하다. 반면에 현재의 안지는 좋아 죽을 것 같은 사람과 재혼하고, 싫어하는 게 무엇인지 알기 위해 이상한 대회들을 연다. 분명한 미래가 아니라, 잘 그려지지 않는 미래를 골똘히 떠올린다. 그래서 안지는 전남편과 그녀, 아이가 있는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세 사람이 함께 있는 사진”(p. 165)을 훔쳐 지갑에 넣고 다님으로써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의 명예의 전당에 오른다. 여자를 다시금 우연히 만난다면 되돌려주겠지만, 그때까지는 그들에 관해 거듭 생각하면서 무엇이 옳고 그른 삶인지 단정하지 않기 위해 끝을 한없이 지연시키면서 말이다. 전남편과 관련한 모든 일로부터 그저 멀어지고 싶었던 안지는, 그렇게 무엇도 기대하지 않고 연루되지 않음으로써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두고 보기를 택한다. 계산하고 판단한 “확신”을 따르기를 포기하고, 그들의 방식처럼 “선명하고 분명한 감정”(p. 161)이 있는 삶의 방식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선다. 해괴하고 이상한 것의 가능성은 「유자차를 마시고 나는 쓰네」에 이르러 더욱 커진다. 재개발이 예정되어 누구든지 마음껏 열매를 가져가라고 전달받은 ‘나’와 ‘삼촌’은 유자밭에서 유자를 따던 도중 땅에 묻힌 상자를 발견한다. 기대감을 안고 열어본 결과, 그곳에는 “알 수 없는 썩어 문드러진 쓰레기”(p. 271)만이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상자를 내동댕이쳤던 ‘나’는 서사의 마지막에 이르러 “어쩌면 영영 썩지 않는 것도 못할 짓이라는 생각”(p. 289)에 도달한다. 이러한 깨달음은 1년 전 사고로 세상을 떠난 ‘숙모’와 그의 아들 ‘민재 오빠’를 애도하는 ‘나’와 삼촌의 시간과 연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촌보다 열 살 많은 나이에 아이까지 있는 이혼녀였던 숙모의 세세한 사정과는 별개로, ‘나’는 매번 콤플렉스를 건드리는 말을 내뱉고 짝사랑 상대의 엄마인 그녀를 싫어해왔다. 하지만 무엇이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보였던 숙모가 췌장암으로 사망한 전남편을 떠올릴 때마다 사는 게 너무 달아서 미안함을 느끼는 모습을 목격한 뒤, ‘나’는 그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자신이 싫어하던 사람을 닮아버린 순간부터 그 사람을 싫어할 수 없게 되었다던 숙모의 말처럼, ‘나’ 역시 죽은 사람을 떠올리는 일이 마냥 괴롭게만 느껴지지는 않게 되면서 변하는 것, 썩는 것을 긍정하게 된다. 해괴해지지 않는 것은 없다. 오히려 왜곡과 변형을 거치면서 이전과 다른 상태 변화를 맞이하는 것이 더욱 유의미한 일일 수 있다. 밀봉하지 않아 썩어버린 자리에서 공벌레가 새롭게 자리를 틀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조금 망측하긴 해도 망하지 않은 인생. 김지연의 소설은 우리에게 그런 인생들의 가치와 가능성을 펼쳐준다. 3. 잃어버려야만 만날 수 있는 세계 『남겨진 이름들』(문학동네, 2022)과 『방어가 제철』(자음과모음, 2022)에서부터 주목받았듯이, 안윤 소설의 중핵에는 ‘상실’이 자리한다. 이에 조금 더 안윤스러운 특징을 부여해보자면, ‘원인을 알 수 없는 상실’이라 고쳐 부를 수 있겠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할 수 없이,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잃은 인물들이 겪는 상실은 기이하다. 의심 없이 정상이라 믿어왔던 체계가 뒤틀린 채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어짐이 꼭 불행해야만 할까. 균열을 되짚으면서 우리는 모자람에 몸서리칠 뿐만 아니라, 온전함을 “새로이 감각”(「틈」, p. 237)해볼 수도 있다. 사라진 이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일깨워준다면 어떨까. 이를테면 안온한 세계는 허상이고, 그것은 위태로운 누군가의 현실을 말끔히 소거해야만 가능하다는 것. 금이 간 세계의 틈새로 유실된 존재들이 있다는 것. 이를 마주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보편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실과 괴리를 좁힐 수 없는 인물들의 선택이 어쩐지 생소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하지만 그들의 결단 덕분에 기이한 감각들은 응달에 고여 있지 않고 변주된다. 안윤의 소설에서 기괴하고 낯선 기운이 세계를 다시 쓰는 역량으로 옮아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비밀을 알아차린 뒤 다른 삶을 향해 몸을 트는 인물은 우선 「핀홀Pinhole」에서 만나볼 수 있다. 직장 동료로 처음 만나 4년을 사귄 ‘보라’와 ‘승원’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다. 평탄해 보이던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떤 ‘비밀’이 드러나면서 전연 다른 국면을 맞게 된다. 제목처럼 소설에서는 바늘구멍처럼 아주 미세할지라도 분명한 틈을 내는 질문들이 등장한다. 첫번째, “비밀 하나씩 얘기할까”(pp. 55, 75, 88). 소설에서 총 세 번 등장하는 이 질문은 모두 보라로부터 나온다. 비밀은 수치스럽거나 비정상적인 치부들을 의미한다. 보라에게 딸들을 버리고 갔던 엄마와 새아버지, 이복 남동생이 있다는 복잡한 가정사 같은 것들. 보라는 비밀을 들추거나 캐묻지 않는 승원에게 편안함을 느낀다. 이렇듯 보라가 감추고 싶은 것, 감춰야만 하는 사실들을 응시하고 발화하는 인물이라면 승원은 비밀 앞에서 “짧은 침묵”(p. 56)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소설이 전개될수록 승원의 침묵은 배려가 아니라 자신의 비밀을 덮기 위한 자구책으로 드러난다. 보라는 어느 날 중증장애인 거주 시설의 실태를 고발하는 기자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경진’의 메시지를 통해 외동으로 자처해왔던 승원에게 마흔넷의 중증장애인 형 ‘정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경진은 부모가 강제로 입원시킨 시설에서 관계자들의 폭력으로 인해 사망한 걸로 보이는 정원의 사인을 밝히고 그의 삶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정원의 가족들로부터 무시당했다. 두번째 질문은 경진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승원씨를 얼마나 안다고 생각하세요?”(p. 61). 모든 것이 그렇게 돌연 생경해진다. “경험해본 적 없는 단란한 가정의 화기”(p. 72)는 “너무나도 깔끔하고 정연하게 통제된 느낌”(p. 73)을 주고, “앎의 정도를”(p. 66) 고려할 필요 없이 가까웠던 승원은 “엄연한 타인”(p. 53)으로 다가온다. 그중에서도 승원이 동그란 공 모양으로 뭉쳐놓은 양말이 보라에게 “집쥐가 ‘된 것’”(p. 53)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추방하려 아무리 애써도 계속해서 출몰하는 집쥐처럼, 정원의 존재는 여타의 삶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승원이 습관처럼 만드는 양말 뭉치가 어린 시절 정원과 가지고 놀던 장난감 공에서 비롯된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보라는 직감한다. 평범했던 양말 뭉치가 “집쥐로 보이기 시작한 그 늦은 오후 이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p. 54)다고. 보육원에서 지내던 어린 시절, 약을 먹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집쥐는 어디에서 누구와 살 수 있는 걸까”(p. 87)를 궁금해했던 보라의 의문은 정원의 생애를 접하면서 되살아난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지만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삶은 온통 투쟁이었다. 더딜지라도 꾸준히 삶을 기록하고, 장애인 스포츠인 보치아 선수가 되어 진지하게 공을 던져왔다. 죽고 싶을 때마다 “타 자 칠 때 총 쏜 다 생각”(p. 83)하며 쓴 시들, 시설에서 나가기 위해 새벽마다 컴퓨터실까지 기어가 적어 내려간 정원의 이야기는 “스스로 훼손을 인정할 수 없었던”(p. 71) 보라를 변화시킨다. 과거의 결함을 지우고 무결하고 단란한 가족으로 살고 싶었던 욕망을 외면하고, 승원 대신 정원의 기록물을 경진으로부터 건네받는다. 할머니에게 배운 바느질처럼 보라는 정원의 생애를 몇 번이나 곱씹은 후 그의 이야기들을 정성스럽게 잇대어 나간다. 그리하여 세 사람만이 담긴 가족 그림에서 “가는 연필 선으로 밑그림만 그려놓은 테두리뿐인 사람”(p. 61)이었던 정원을 “한 사람의 형상”(p. 88)으로 만들어낸다. 양말 공을 죽어가는 집쥐로 느끼던 낯선 감각은 그렇게 자신이 바라는 삶을 향해 공을 굴리는 정원의 의지를 헤아리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다시 첫번째. 보라는 승원에게 다시 한번 비밀 말하기를 제안한다. 경진을 만났다는 자신의 비밀을 먼저 밝히면서. 사실 안윤의 인물들이 내린 선택을 따라가다 보면 경진이 던진 이 질문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왜 이렇게까지 하세요?”(p. 85). 어째서,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걸까. 친숙함을 등지고 불가해한 누군가를 끌어안게 만드는 힘의 근원을 짐작하기 위해 표제작 「모린」을 살펴본다. 사고로 중도 실명한 시각장애인 ‘영은’은 잃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범하거나 무감하게 태어나서가 아니라 살면서 많은 것을 잃어봤기 때문이다. 실명 이후 영은은 다채로운 세상의 이미지들, 오래도록 자신의 곁을 지켜왔던 연인 ‘선주’를 비롯해 자신을 이루던 수많은 조각을 놓쳐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은은 여전히 처음부터 가져본 적 없는 삶보다는 여전히 나중에 잃는 삶을 선택하겠다고 말한다. 이는 “있음과 없음, 그 둘을 연결하는 잃음”을 통해 “주어지는 모든 세계를 빠짐없이 살아보”(p. 25)겠다는 다정한 결단이다. 어떤 것을 잃어본 사람은 그것의 소중함을 비롯해 어떻게 더 잘 잃을 수 있는지, 상실 이후에 무엇이 변화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 특히 자기 자신을 잃어보는 경험은 세계가 뒤바뀌는 사건이다. 하나의 세계는 곧 한 명의 사람과도 같다. 그리고 세계는 곧잘 무너지고 다시 서길 반복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한 사람’은 변치 않고 그대로 남아 있어서가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고 가기에 유일하다. 그런 의미에서 “유일한 사람은 죽어서도 죽지 않는다”(p. 9). 영은이 잃음을 두려워하기보다, 각각의 자신과 타인을 마음껏 사랑하는 일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이유다. 유일한 것들의 흔적을 덧입고서 모진 시간을 견뎌온 영은은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사실만이 유구하다는 걸 안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정상성이 비틀리는 감각이 일상처럼 자리 잡고 있다. 안윤이 굳게 믿는, 상실을 지나온 자의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영은의 질서”(p. 30)는 기존의 질서에서 멀어지거나 누군가를 잃는 일을 유독 겁내던 ‘미란’을 조금씩 변화시킨다. 자신을 제쳐둔 채 사회의 규율만을 엄격히 따르느라 영은을 사랑하는 마음마저 밀어내길 반복해온 미란은 영은의 곁에서 “한 사람이 자신을 넘어서 는 어떤 감정을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p. 44)을 경험한다. “죄다 망해버려서 다행”스럽게 찾아온 “그동안의 내가 다 망해버린 기분”(p. 41)은 여성과 여성의 사랑, 장애인의 삶처럼 분명히 있는 것들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세계의 문법을 무너뜨리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의 무수한 면면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든다. 이러한 세계에는 정상성이 비틀리는 감각이 일상처럼 스며들어 있다. “누군가가 이상한 말이나 행동을 하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게 저 사람이 말할 수 없는 사정이구나 하는”(p. 12). 세계는 곧 한 사람 그 자체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 바 있으니, 영은의 말처럼 기이한 낯섦은 이제 한층 더 애처롭게 감각된다. 기꺼이 열리고, 연결되고 싶을 만큼. 때로는 나 자신을 잃어버려야만 닿을 수 있는 누군가가, 무너져야만 만날 수 있는 세계가 있다. 상실과 결여를 메우지 않은 채로 살아가는 방법을 안윤의 소설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4. 실패 연습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은 현실이 감추려 해온 불합리성이라는 비밀을 고발하고, 이때 드러난 균열에 힘을 가해 기존의 제도와 체계에 일격을 가한다. 특히 주목해야 할 지점은 두 사람의 소설이 자신의 균열을 뼈아프게 직시해야만 들여다볼 수 있는 세계의 결함과 마주한 뒤, 그러한 생채기를 어떻게 매만질 수 있을지까지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지연은 잿더미 속에서도 아직 전소하지 않은 기대와 희망을 조심스럽게 건져 올린다. 그의 인물들은 자본 외부의 의지와 노력이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상황에서 한없이 작아져 있다가도 뜬금없이 괴상한 사안들 편에 서거나 망측한 일을 감행한다. 이때 강렬히 분출되는 어긋난 감각은 살 만한 삶을 간단없이 소거하는 자본의 법칙이야말로 진정으로 이상한 무언가임을 강렬히 느끼게 해준다. 안윤은 이유 없는 상실을 강제하는 현실에 짓눌리는 와중에도 잊힌 이들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잃어버려서는 안 될 자신의 고유한 속성을 부지하려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들은 세계의 결함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사건을 목도할 때 생기는 기이함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결단하기 위해 분연히 사건을 찾아 나서거나 세계가 무너지는 감각 아래에 자신을 놓아둔다. 그런데 이들 소설이 나아가고 있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인물들의 일격이 너무 쉽게 저지당하거나, 세계의 비밀을 목격한 이후에 결과적으로는 다시 자신의 결함으로 회귀하는 수축성을 보이는 측면이 두드러짐을 간과할 수 없다. 김지연의 소설에서처럼 잠깐 보인 희망이 오히려 지난한 현실을 조금 더 버틸 수 있게 하는 마취제로 작용하고, 안윤의 인물들이 억눌리고 배척당한 존재들의 고통을 자기 이해와 친밀한 사람과의 좁은 세계에 가둬두는 건 아닌지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의도와 달리 두 사람의 소설이 보여주는 건 균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재한 현실 아닌가. 이런 우려는 결함마저도 소비적 욕망과 충동에 포섭시켜 자기 발전의 재료로 삼는 자본주의의 영악한 힘이 가진 위험을 알기에 생겨나는 것이다. 하지만 장담컨대, 이런 의심을 향해 김지연과 안윤은 한층 더 이상하게 말하고, 행동하며, 선택하는 인물들을 다시금 내보일 것이다. 한 번의 실패는 억압의 기제에 영영 봉합되는 것이 아니라 더 잘 망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믿는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더 자주 서로에게 보여져야 한다고” “잘 살든 못 살든 그냥 살아 있는 게 목격이 되어야”(「긴 끝」, p. 122) 한다는 김지연에게 소설은 끝을 길게 늘어뜨려 무한히 연장하는 목격의 수단이다. “만약이라는 말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또,」, p. 174)는 걸 아는 안윤이 보기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로 허물어지는 일이야말로 세계가 연결되는 가장 첫걸음이기에 둘의 세계는 여정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될 것이다. 두 사람에게 실패란 기존의 견고한 세계가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 그래서 고정되어 있던 자신이 허물어지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집들은 이제 막 실패했다. 어쩐지 걱정되는 마음이 앞선다면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숙련이 뒤따르듯이, 이들은 지금의 연습을 거쳐 실패에 능숙해질 것이다.그러니 자주, 계속해서 더 잘 실패해보려는 두 사람의 힘을 믿는 마음으로 애정을 담아 덧붙여본다. 앞으로의 소설에서는 무너지고 재건된 세계가 어떤 다른 모습으로 솟아오를지, 기이한 인물들은 구체적으로 어디를 향해 걸어 나갈지 궁금하다고 말이다.
1. 상처받을 가능성 있음 Vulnerability 한 자리에 묶인 채로 일생을 살아가는 개는 어떻게 견딜 수 있는 걸까, 이사 온 뒤로 한 번도 갈지 않은 전구의 필라멘트는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까, 냉해를 입은 고목 나무는 좀 더 견뎌줄까, 추운 날의 전동휠체어 배터리는 그가 집에 다다를 때까지 견딜 수 있을까, 길고양이는 어디서 이 겨울을 견디는 중일까. 그리고 사람은 불행을 얼마나 견딜 수 있나. 겨울을 통과하며 우리는 모두 상처 입었다. 일상이 이토록 간단히 바스라질 수 있다는 사실, 그 취약성을 확인하며 새삼 ‘우리’라는 동그마한 단어를 떠올린 것은 한밤의 포고령과 아침의 참사 사이로 불쑥 머리를 내민 것이 이상스럽게도 타자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좀 더 쪼그라들고 부서진 세계의 항변인 듯 ‘나’의 이야기들이 쏟아지는 와중에 다시금 불거지는 타인의 얼굴이 어째서 또 이렇게 불의로 와야만 했을까. 애도란 지속된다는 면에서 성공적인 애도나 애도의 완성 같은 것은 없고 그래서 애도는 이루어지는 것, 그러는 중인 것, 그러기 위해 진입하는 것으로 표현함으로써 종결의 어감을 조금이라도 지우는 편이 애도가 필요한 이들을 위한 최소한의 조심성이라 여겨지지만, 그런 것을 논하기도 이전에 애도를 방해하는 께름칙한 인재들이 누적되는 가운데 밭게 맞닥뜨린 또 한 번의 사태와 사고는 생명과 존엄이라는 실존의 요구에 대해 얼마든지 상처받을(vulner=wound) 수 있음(ability)이라는 상처 가능성을 증명한다. 그건 곧 취약성이라 번역된다. 취약한 존재의 불안은 보편적 감각이지만 지나치면 우울이나 강박 같은 증상으로 확장된다. 불안이나 공포는 위협으로부터 생명을 보호하는 본능 발현의 기제이기도 하지만 초과한 불안감은 그 해소를 위해 자신만의 루틴을 만들어 안정을 되찾으려는 확인 이른바 강박행동에 몰두하도록 생명체를 몰아세운다. 강박행동이 강화되면 그 루틴을 지키느라 일상은 부서진다. 강박행동이라는 증상은 불안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희석하고자 하는 나름의 호르몬과 심리의 싸움이지만 그 행위를 들여다보면 ‘복기’라는 내용적 측면이 있다. 불과 찰나 전에 했던 행동에 대한 불신, 그 미덥지 못함은 수차례의 반복을 통해 불확신을 믿음 쪽으로 인지시키고 불안을 소거하려는 내용인 것이다. 불안의 강도를 조절하는 일은 꽤 중요하다. 그럼 뭘 해, 아무리 스스로 주의를 기울인다 한들 막을 수 없는 참혹함 앞에서 불안은 불길처럼 일어난다. 거기에 타인에 대한 죄책감과 사태에 대한 무력감은 불안을 한몫 더 부추긴다. 어떤 이들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래서 어떤 이야기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돌아간다더라도 전과는 다르다. 그런 면에서 돌아갈 곳이 없다. 우리에게 믿을만한 것은 무엇인가? 느닷없이 중단되어 버린 삶들에 대한 애도가 나의 삶을 전과 다른 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희열을 뜻하는 Ectasy는 ec-static, 즉 바깥에 놓인 상태로 어떤 정념으로 인해 자아가 제 바깥으로 이동한 상태를 가리킨다. 이를 추동하는 정념에는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성적인 정열의 순간 외에도 슬픔이나 분노 또한 자아를 벗어나 ‘자신의 옆에’ 있게 하는 beside oneself의 기제가 된다. 자아가 자아를 벗어나 곁에 놓인다는 말은 그래서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풀이되지만 더불어 이탈한 자아가 놓이는 곳이 혹시 상실한 타인 혹은 상실을 겪은 타인의 곁은 아닐까 싶어 손바닥으로 더듬거려보게 된다. 그가 없고 나는 남아 보내지 못할 때 자아는 나를 벗어나 그의 곁으로나마 가 있는 것은 아닐까? 죽음 이후, 상실 이후는 내가 그와 연결되어 있었음을 침통한 방식으로 부조한다. 그의 이름이야말로 나의 타자, 타인이다. 내가 있는 곳이 내가 아닐 때 타인은 더욱 요구된다. 내가 내 안에 있을 수 없을 때 타인은 부쩍 확인된다. 내가 거기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타자 앞에서, 타자로 인해서 허물어진다. 2. 어차피 망했어, 그렇지만 (민병훈, 『금속성』, 문학실험실, 2024, 12) 생의 기반이 믿을만하지 못하다는 불확실성의 조우 와중에 『금속성』은 그나마 쥐고 있는 것들을 좀 더 무너진 쪽으로 밀어붙인다. 이 소설은 어쩌면 ‘후(後)’에 시작되는 듯하다. 폐품을 해체, 조립, 교환한다는 작업장과 폐선을 개조한 집은 철조망을 배경으로 놓여있다. ‘조수야’하고 불리는 조수, 그가 데려온 개 팔콘과 함께 생활하는 ‘나’는 한때 박물관에서 일했다. 박물관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옛날 컴퓨터나 기상시스템을 전시해놓은 곳이다. 고물상을 연상케 하는 작업장에서는 녹슨 쇠냄새가 진동하고 바퀴마저 탈락한 의족을 달고 두 발로만 기는 개에게서는 학대와 유기의 흔적이 짙다. ‘조수야’로만 부를 따름이니 ‘너’는 성립하지 않을 거고, 20세기의 핵심 부품들이 전시된 박물관이란 무언가 한바탕 휩쓸고 간 뒤의 풍경, 그러니까 때는 이미 망한 뒤이지 싶다. 이 살풍경은 작위감은커녕 온통 기시감으로 넘실댄다. ‘나’는 어쩐지 자꾸 어딘가 아픈데, 곁에는 죽음이 허다하다. 어린 시절 기르던 개도,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친구들도, 기차광 마르코도 죽었다. 닭이나 개는 더 쉽게 더 많이 죽는다. 마을의 축사는 텅 비기 일쑤고, 방호복과 마스크를 착용한 무리는 피, 기름, 뼈의 이미지로 정체 모를 무언가의 흔적을 쫓는다. 개를 귀엽게 만들기 위해, 크고 맛 좋은 돼지나 닭의 고기를 얻기 위해 혹은 더 큰 수익을 위해 적당히 병들게 동물을 개량하는 일1), 그 후로 어떤 품종의 개들은 선천적 질병을 안고 태어나고 닭과 돼지는 바이러스에 취약한 채로 살다 먹히거나 생매장 되는 게 현실이다. 점프슈트를 입은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거기 있어 왔다. 의뢰인을 만나기 위해 찾아갔던 마을의 허름한 식당에서 사람들이 입가에 기름을 번들번들 묻혀가며 뜯고 있던 뼈에 붙은 고기는 무엇이었을까? 그 고기는 어떻게 죽은 동물의 살이었을까? ‘나’는 그마저도 동이 나 먹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그 고기가 무엇이었는지 끝까지 알지 못한다. ‘나’는 의뢰인들이 뭔가를 의뢰하면 출장을 가 처리하는데, 그 일이 무엇인지 독자는 알 수 없다. 모르기는 의뢰인도, 의뢰받은 ‘나’도 마찬가지다. 그저 짐작할 뿐. 모호함은 이 소설의 주요 상태이면서 ‘나’라는 존재의 불확실성을 부추기는 정동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일례로 잇몸 동상이라는 진단은 그런 ‘나’의 모호성과 포개져 전날 방문했던 치과에서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고 하고, 곤란한 상황은 의사가 ‘나’를 기억해내면서 근근이 모면 되는 식이다. 병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의사, 누런 가래를 소맷부리며 손님용 의자에 묻히고 약을 조제하는 약사를 비롯해 이 소설은 미심쩍은 낌새들로 가득 차 있다. 의뢰인은 ‘나’와 번번이 엇갈리고, 팔콘의 의족을 만들어준 기술자는 자신이 의뢰인이라고 하며, 꿈은 자주 꿈의 바깥으로 나와 텍스트를 흩트려 놓는다. 수치(數値)를 기록하는 조수가 읽어내는 게 왠지 수치(羞恥)로 읽히는 것이 그런 모호함의 체화가 수치(數値)로만 표면화되는 공무 앞에 존재를 옹색하게 만들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무엇을 하는지 모르면서 자신에게 부여된 일을 반복, 맹목적으로 하는 데서 오는 자괴감일 터이나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상태가 주는어쩔 수 없음이라는 수치심 말이다. 이 불투명한 서사에 제법 선명한 실체 하나는 송전탑이다. 송전탑의 위용은 마치 소설의 중앙부에 높다랗게 드리워진 거대한 금속성의 신처럼 읽힌다. 그 저류의 공통 기억 때문일성싶은데, 어떤 의뢰는 분명 송전탑 꼭대기에 아직 사람이 올라서 있는지 확인해달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번개가 스친 뒤 “물에 잠긴 채로, 영원히 녹슬지 않는 송전탑”(24쪽) 아래 뒤집힌 채 허연 배를 내밀고 둥둥 떠 오르는 개구리의 사체만이 의뢰에 대한 답처럼 보인다. 길은 자주 텅 비어 있지만 병원과 약국은 붐비는 곳,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거쳐 가고 난 뒤에는 피와 약품의 냄새가 진동하는 곳, 그런 즈음 사람들은 기름진 고기를 얼마든지 먹는 곳, 그곳은 우리의 삶과 얼마나 먼가? 어떤 의미에서는 망한 게 틀림없는, 이미 멀리 와버린 인류세가 제 흔적으로 닭뼈와 플라스틱 말고도 남길 것이 있다면 금속성일 수도 있겠다. 화석연료가 일종의 희생 구역을 필연적으로 요한다는 것을 대척점에 놓을 때 금속성은 조금 달리 이야기될 수 있으려나? ‘어떻게’의 문제가 전적으로 인간의 손에 달렸음을 박물관의 의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것을 신통치 않은 안마의자라고 생각하지만 한 세기 전에 만들어졌다는 그 의자가 내게는 왠지 고문용 전기의자로 읽힌다. ‘금속성’이라는 이 소설의 제목이 남은 시간에 대하여 일말의 가능성을 내포한다면 그것은 의사도 목수도 아닌 ‘기술자’가 팔콘에게 연결하는 의족에 있으리라 여겨지는 것이다. 송전탑과 함께 명징한 또 하나의 피사체가 바로 팔콘인데, 모든 이가 이름도 없이 그 고유성을 탈각한 채 살아가지만 팔콘에게는 이름이 있다(마르코는 이방인의 대명사쯤일 따름이고). 종국에 팔콘은 주기적으로 윤활유만 칠해주면 너끈한 새로운 의족과 금빛의 꼬리를 달게 된다. 팔콘은 매처럼 날 수 없지만 그는 애초 매가 아니었으니 척추의 연장일 유연하고 기다란 금빛 꼬리는 그에게 새로운 코어를 갖게 할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분명 상실된 팔콘의 육제성 앞에서 조수와 ‘나’에게 돌올하게 떠오르던 그에 대한 사랑과 책임 그리고 금속성-팔콘 사이의 ‘횡단’이었다. ‘나’도 이전에 감전 사고로 잠시 몸을 잃는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몸에 대해 고심했던 적은 그때가 유일하다”(97쪽)는 고백처럼 우리가 몸을 의식하는 순간은 몸이 손상되어 제 모습이나 기능을 상실한 때 아니면 타인을 마주할 때이다. 몸을 단장하는 것은 몸이 타인에게 노출됨을 전제하는 익숙한 매만짐이다. 그러니까 몸은 실추됨으로써 타자성을 일깨우는 자리이면서 타인과 연결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공적 차원에서의 몸은 우리의 취약성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면서 연결의 감각을 일깨우는 셈이다. 더이상의 증식과 확장을 멈춘 도시, 병든 사람과 동물 들, 목적이 불분명한 검문과 감시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 잃어가는 것, 잃을 것이 분명한 것의 후경이다. 어떤 면에서는 어차피 망한 게 분명한 이 마당에, 그럼에도 우리의 취약성은 ‘연결’에 대한 명분으로 작동할 수 있을까? 팔콘과 같은 존재가 오래 감수했던 타자성은 공생이라는 그런 가로지름을 통해 우리에게 가장 다정한 타인으로 돌아올 수도 있지 않을까. 3. 불행을 지우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라서 (김채원, 『서울 오아시스』, 문학과지성사, 2025, 1) 주디스 버틀러는 애도에 대해, 특히 ‘너’에 대한 애착이 ‘나’의 일부를 구성하는 관계에서라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너 없이 나는 누구로 존재하는가?” 상실 이후 비로소 융기하는 그 대상과의 연결성을 통해 애도에 더해 나는 자신에 대해서마저 이해 불능의 존재가 됨을 말하는 이 질문에 김채원의 『서울 오아시스』를 놓아본다.2) 그건 질문의 답으로 이 소설집이 놓인다기보다 차라리 소설에 대한 답이 저 질문인 듯 보인다는 뜻이다. 이 소설집은 죽음 뒤에 남겨진 사람들, 어머니, 친구, 딸이 죽거나 자신의 (실패한) 죽음 뒤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소묘한다. 등단작인 「현관은 수국 뒤에 있다」는 그 자체 애도와 애도 불가능 사이를 맴맴 도는 서사이지만 작품들은 대체로 그 불가능성 쪽에 무게중심을 놓는다. 이들의 애도는 어째서 불가능한가? 애도가 일정부분 공적 차원의 형식을 전제한다고 할 때, 가능한 애도는 공적 삶의 내부에 ‘존재함’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무연고자의 애도는 절차에서부터 가로막힌다. 그렇다면 이렇게 바꾸어 물을 수 있다. 애도가 가능한 삶이란 어떤 것인가? 여기서 끌고 갈 것은 그러한 삶의 경계와 그 경계의 밖에 놓이는 결락의 삶들이다. 이 소설집에 그 결락들이 있다. 자살하려 한 적도 있지만 학점을 따고 졸업도 하려고 마음먹던 그러나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채로 공원의 햇살 속을 걸어가던 「쓸 수 있는 대답」의 인물 유림의 부고에 교정시설에서 만난 친구들이 그의 짐을 정리하러 가는 여정인 「현관은 수국 뒤에 있다」에는 이 소설집이 ‘김채원스러운’ 것이게끔 하는 요소들이 촘촘히 엎드려 있다. 소설은 내내 길 위에 있다. 아이들은 누군가 예약해 놓은 우버 택시를 가로채 타고 길에 놓인 공유 자전거도 타고 땀을 흘리며 걷기도 하면서 그렇게 빙빙 돈다. 한편 저 현관 앞의 수국은 현관을 막아서고 있는데, 현관으로의 진입은 이들에게 요원하기만 해 보인다. 흰국화가 아닌 수국은 약속된 제의와는 조금은 동떨어져 놓여있는 듯하다. 수국이 불두화를 닮았음을 떠올린다면 이들의 ‘돎’이 어떤 생으로 거듭날 것인가 기대해봄직도 하지만 언제까지고 바깥에 놓인 이들의 궤도 진입은 가능한 걸까? 소설의 결말부에 다다라 피 터지게 맞는 사람의 모습을 멀거니 구경하는 것이나 시의 다음 구절을 태워버리는 아이의 모습은 각각 약화된 형태의 죽음과 제의라는 표상처럼 보인다. 유림의 동생에게서 걸려 온 언제 올 거냐는 전화는 애도의 시간마저도 지극히 빠듯하기만 하다는 듯한 재촉이니, 채 받아들이지도 못한 죽음이란 실재 앞에서 이들의 애도는 가능하기나 한 걸까? 김채원의 인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건 유기의 감각이다. 이들은 모두 ‘남겨진’ 존재로, 어쩐지 죔쇠가 필요해 보인다. 세계로부터 영 헐거워진 듯 상실 뒤에 남은 이들은, 퇴행하거나(「영원 없이」 「다섯 개의 오렌지 씨앗」), 갑자기 늙어버리고(「외출」), 소멸해 버림으로써(「현관은 수국 뒤에 있다」) 되레 유기감을 강화한다. 그런 면에서 이걸 ‘적극적인 유기’라고 말해도 된다면, 이들은 유기되기를 원치는 않았으나 이른바 ‘정상적’ 애도에 애초 실패함으로써 자신을 적극적으로 유기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특히 인물들의 이런 유기감은 작가의 서술 기법에 의해 더욱 핍진해진다. 약속된 문법의 파기라기보다는 마땅히 예견된 인식의 수순을 폐기하는 것에 가까운 서술은 울퉁불퉁한 의식과 순서를 뭉개고 빗겨나가는 대화(의 단절)를 수고스러우리만치 옮겨적는다. 그것은 의식의 내부와 외부 사이를 무람없이 넘나들고 때로는 의지적으로 중단하는 식인데, 상징계의 약속과 예단을 스스로 비켜가는 이런 방식은 모성의 부재, 혈육의 상실 즉 타인의 소멸이 자신의 육체 어디쯤을 소실한 것과 동일한 효과로써 증명되는 유기의 증상이랄 수 있겠다. 해서 대체로 말은 늦되고 정신은 종종 엉킨다. 번번이 코드화되지 않는 이들의 말, 얼키설키한 의식을 따라가다 보면 최소한의 일상조차 움켜쥐지 못하고 멀겋게 앓는 심로를 짐작게 된다. 타인에게 말을 거는 일이 도덕적 구속력으로 연결된다고 할 때 이러한 정상적 언어(이자 인식)의 순서 폐기란 어쩌면 외부와의 연결을 끊고 가장 근본적인 ‘나’, 지금은 상실한 타인이 알던 그때의 ‘나’로 남겠다는 올올한 선택은 아닐는지. 언어가 욕망의 잔여물이라면 이들은 스스로 생존이라는 최소한의 욕망조차 방기해 버린 것은 아닐는지. 해야 할 말조차 묵음 처리함으로써 통상의 질서가 포섭할 수 없는 쪽에서 애도의 다른 가능성을 열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생각해보게 되는 건, 인물들이 애초에 ‘바깥’에 놓여있었다는 점과 함께 어떤 ‘정상성’으로는 이 인물들의 곁에 결코 다다를 수 없을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서울 오아시스」의 가족들, 그러니까 정신병을 오래 앓은 엄마와 내게 “어떤 사람은 건강하지 않고도 오래 살 수 있다”(71쪽)고 알려준 실종된 외삼촌, 그런 가계의 불행을 견뎌내며 나쁜 일이 생기면 이사를 가버리는 이웃들과 달리 “나쁜 일이라고는 아무 일도 안 생겼으니까”(78쪽) 이사를 갈 필요는 없다며 독주를 들이켜는 할아버지의 사정 같은 것은 소위 정상성의 문법으로는 읽어내기 요원하다. 그렇다면 작가는 인물들에게 그렇게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어도 된다고, 정해진 애도의 기간이란 누구도 알 수 없으니 그렇게 생각을 흘려보내고 여기서 저기로 건너뛰고 괄호치고 흩어놓아도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상적인 삶에 대한 요구도(한 번도 그래본 적 없으므로), 애도의 기간을 설정해두는 것도(애도를 끝내고 정상적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뜻이므로) 이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로 성립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작가는 감히 예단하거나 넘겨짚기 불가한 그 ‘흐름’에 자리를 내어줌으로써 어쩌면 불행을 견디는 것이 삶의 전부인 이들을 그대로 놓아두기, 이들의 곁에 있어주기를 택한 것은 아닐지, 그들의 (기한을 가늠할 수 없는) 복기를 함께 반복하는 것, 그것이 김채원이 타인에게 말을 거는 법이 아닐지, 짐작해 본다. 4. 최악과 차악 (안보윤, 『세상 모든 곳의 전수미』, 현대문학, 2024, 10) 정상성이 통치의 수단이고 규범의 준거라고 할 때 삶의 많은 부분들이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공적 차원에 회부된다는 사실은 문득 새삼스럽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모종의 감각으로 자신을 통제한다. 불안에 대한 서두의 언급도 그런 차원이지만 감각은 생의 균형을 위해 끊임없이 작동한다. 그런데 이 감각의 균형이란 애초에 어떤 조건 안에서 작동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건 반드시 선한 쪽으로 움직이는가? 수미는 수영과 한 살 터울의 자매다. 언니라는 말 대신 ‘수미년’이 입에 붙을 만큼 수영에게 수미란 존재는 절대 악이다. 말간 얼굴로 어른을 제 손바닥 위에 놓고 조물락댈 수 있는 맹랑한 아이였던 수미는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여느 아이들처럼 떼를 쓰는 대신 폭력으로 표한다. 물건을 부수고 극단적으로 험한 말을 하는 어린 수미의 문제 행동 앞에 부모는 절절매며 더욱 그를 사랑으로만 품으려 한다. 그럴 때마다 자연스레 수영의 자리는 물려 진다. 순한 양처럼 굴지 않으면 안 된다. 집에 아픈 아이가 있거나 문제 행동을 하는 아이가 있으면 미연에 그런 말을 듣는다. 너까지 이러면 엄마 못산다고. 수영의 삶은 늘 견디는 것이었다. 수미 때문이기도 했지만 일터에서도 그랬다. “존중받고 싶어 하는 나를,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싶어 하는 나를 기를 쓰고 찍어 눌러야 했”(115쪽)던 것이다. 수미에게 제 삶을 도난당했다고 여기기에 죽음은 선수 치리라, 죽는 일만큼은 수미년을 앞지르리라는 수영의 결심으로 소설은 열리지만, 이번에도 수미가 한 발 날래다. 그 시각 전화 통화를 했고 일상적인 말들을 주고받았다는 알리바이를 위해 수영을 호출한 수미는 요양병원에 일하면서 노인들의 죽음에 협조하거나 죽음을 방치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수영이 일하게 된 노견 돌봄센터는 동물병원과 더불어 운영되며 24시간 의사가 상주하는 고급 호스피스 시설이다. ‘절박한 사람’만 고용하는 우 원장은 인간 기저의 이중적인 심리를 기민하게 자본화하여 자신의 부로 환원할 줄 아는 인물이다. 병든 동물을 끝까지 돌보고 싶지만 사정이 부치면 빠른 이별을 바랄지도 모르는 누군가의 심리 같은 것 말이다. 우 원장의 병원에서는 보호자의 발길이 뜸해지거나 보호자가 비용을 염려하는 때에 딱딱 맞춰 개들이 죽는다. 개의 가족, 보호자들은 내 품에서 아이를 보냈다는 사실에 위로 내지는 감동을 받지만 실은 적당한 때에 안락사를 감행함으로써 보호자의 부담을 덜고 자신의 수익 기반을 안정적으로 다지는 우 원장의 치밀한 계산이 만들어내는 마법의 순간이다. 빠른 유속의 이 소설은 그러나 곳곳에 감속 구간을 배치한다. 수미의 숱한 악행 가운데는 수영을 구제한 일도 있는데, 캠핑장 숲길에서 낯선 남자에게 니쁜 일을 당할 뻔한 수영을 구하고 수영이 남자에게 위해를 가한 것을 비밀에 부치고 덮어준 일, 수영이 급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자 모두가 보는 앞에서 수영의 뺨을 연달아 갈겨서 어쭙잖게 수영을 해코지하던 아이들을 질려버리게 만들어버린 일 같은 것들이다. 그러니까 ‘악’으로 보이는 수미의 기행들은 모두 자신의 주장을 드러내거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소통이자 장치로 나름의 정당성을 가지는 셈이고, 그 정당성은 전능감을 내면화한다. 그런 수미가 요양병원에서 노인들의 죽음에 동조한 것이다. 그래도 그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냐 답을 내릴 때쯤 자신을 피해자의 자리에만 위치시켰던 수영에게 질문은 날아든다. 종양에 대해 보고하는 것이 곧 태풍의 죽음을 당기는 일임을 모르지 않기에 손끝에 느껴지는 악성 종양을 외면한 수영의 마음은 피를 쏟으며 죽은 태풍의 병을 알고도 방치했다는 업무상 과실 혐의에 대치된다. 살 권리와 죽을 권리는 누가 어떻게 결정하는가? 오로지 자신만이 제 삶과 죽음의 주체라면 비루하고 고통받는 삶에 대한 결정이나 행위가 불가한 이에게 삶은, 죽음은 어떤 것이어야 하나? 이럴 때 어느 어떤 것이 더 폭력에 가까이 있는가? 수영은 끝내 제 삶을 구제하는 쪽으로 선회하지만 갇히고 묶여 연명하는 노인, 병들고 지친 채 온몸에 분변을 바르고 피를 쏟으며 간신히 생을 유지하는 동물에게 ‘보호자’는 생명의 결정권자와 동의어인가? 그들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조력해야 옳은가. 이를테면 이런 경우. 수영의 할머니에게 비녀는 자신의 처지를 대변하는 상징물이자 사회적 자아의 표상이기도 했고 정정한 날의 추억이 깃든 정서적이고 감각적 차원의 것이기도 했다. 그런 할머니의 쪽머리는 본인의 의사와 아무 관계도 없이 요양원 입소와 함께 싹둑 잘려 나간다. 관리의 편리와 비녀의 위험성 때문인데, 이럴 때 할머니의 권리가 공공의 안전 앞에 삭제되는 것이 마냥 옳기만 한 것이라면 인간은 병든 이후의 삶을 어떻게 견뎌내야 한단 말인가. 세상 모든 곳에는 전수미가 있다. 전수미는 전수미로만 있는 게 아니라 전수영의 일부, 전수영과의 모의, 전수영이 품고는 있던 것들의 투사이기도 하다. 사람은 어떤 악의를 없애거나 다스리며 산다. 악은 특별하지도 않고 누구나 조금씩 갖고 있다가 때로 불툭거리며 크기를 키워나가거나 차마 드러내지 못하고 일기장에 쓰기도 하는 것이다, 수영이 그런 것처럼. 악은 선이 아니므로 악에 대한 입장은 단호하게 정리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뒤집어 물을 때 선에 대해서라면 그 답이 쉽지 않을 것 같다. 어떤 것이 선인가? 어떤 돌봄과 보호는 악의 얼굴 쪽으로 좀 더 기운 것도 같다. 어떤 선은 최악은 아니지만 차악을 닮았을지도 모르겠다. 5. 들킬지도 몰라 불온함 (전지영, 『타운하우스』, 창비, 2024, 12) 안보윤의 폭력에 대한 감각이 물리적인 폭력에 겹쳐 배제와 그 권리에 대해 묻는 것이라면, 전지영의 소설은 관계와 구조 속에서 은폐되는 폭력 위에 설립한 삶 혹은 폭력 이후의 삶에 대해 말한다. 공간을 중요시 여긴다는 작가의 말처럼 그의 소설들은 독자가 위계의 구조라는 밑그림을 먼저 그려두도록 공간을 직조한다. 구조에 대한 이런 감각은 타자성을 더욱 벼리게 제시할만한 장소로 제공된다. 은폐한 진실이 언제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한 번도 그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지만 잇자국으로 드러나는 쥐(「쥐」), 태풍을 몰고 오는 섬의 돌풍과 낙뢰(「말의 눈」), 저수지의 음험함과 사격장의 총소리(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 안으로 들이쳤지만」), 어시장의 비린내와 척척한 물기(「맹점」), 물질적 풍요 뒤에 숨겨진 히스테리(「소리 소문 없이」)와 같은 오감을 건드리는 장치와 함께 안온한 생활이 언제 깨어질지 모른다는 긴박감을 몰아온다. 작가가 구체적으로 그려내는 공간에 더해 불안을 부추기는 효과들이 쥐락펴락하는 것은 불온한 진실의 맨얼굴이다. 자녀가 학교폭력의 피해자일 때 학교 측의 미온적 태도와 가해 학생들의 뻔뻔함에 상처 입고 딸과 함께 제주의 타운하우스로 이사한 수연 앞에 학교폭력은 또 한 번 전혀 다른 얼굴로 찾아온다. 피해자는 가해자의 구도로 삽시간에 전환되며 수연은 자신의 딸을 위해 증언을 요청하는 지희를 외면한다. 섬의 생리와 무관하게 지은 타운하우스의 지붕으로는 빗물이 흘러들어 집안에 차오르고 돌풍과 낙뢰에 전문기사도 손을 쓸 수가 없는 마당에 지희는 치마를 동여매고 지붕을 오르고, 이내 추락하고 만다. 지붕에서 내려오면 지희는 수연에게 증언을 강요할 거였다. 순간 수연이 바란 것은 이대로 지희가 깨어나지 않는 것. 전지영은 바로 이 순간을 잡아챈다. 인간이라는 수면 아래 잔잔하게 깔린 숱한 얼굴들 중 우리가 차마 밖으로 내놓지 못하는 표정과 감정, 그 부박함을 작가는 낚아올린다. 그런가 하면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 안으로 들이쳤지만」에는 사격장과 저수지라는 공간이 세워진다. 혜경과 윤석 부부는 데면데면하게 지낸 지 오랜데, 서로를 눈치껏 빗겨가려 애쓰는 중이다. 혜경은 남편의 무심함에 아들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죄책감을 투사해왔던 것이다. 사격장은 윤석이 공무원 재직 당시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치한 것이었는데 실종된 아들이 저수지가 범람하고 주검으로 발견될 때도 그는 사격장 건립 문제로 회의 중이었다. 윤석은 그 나름대로 사격장 건립을 추진한 시장을 원망해 그의 불행을 기도해가며 간신히 견뎌내는 중이다. 사격장의 총소리와 탄약 냄새는 집의 안팎을 둘러싸며 여전히 거기 있는 컴컴한 정주못과 함께 이 부부의 잠잠한 일상을 언제든 깨트릴 수 있을 것처럼 에워싼다. 그러다 시장이 실종되고 그가 저수지에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수사의 가닥이 잡히자 윤석은 갑작스레 무엇이 툭 끊어지는 기분을 느낀다. 용서할 수 없었던 건 바로 자기 자신일 테니까. 대타자의 소멸로 부부는 비로소 졸은 청국장에 밥을 비벼 먹고 커피를 채워주고 마시는 일상으로 조금씩 되돌아올 기미를 보인다. 사람은 때로 불행을 그런 식으로 견디기도 하는 모양이다. 부자 동네 청한동을 배경으로 높은 성벽 안에 거주하는 주민들과 청한동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하는 사람들을 대비시키는 「언캐니 밸리」에서 왜소증을 가진 크로키작가이자 택시 기사는 ‘당신’이 염산 테러를 당하자 의심을 사 경찰의 조사를 받는다. 그녀는 왜소증의 사내가 ‘기괴하다’고 표현했지만, 사내가 생각할 적에 여자를 의자에 앉혀놓고 몇 시간 동안 관찰한다는 노부부가 더 수상쩍고 기괴하다. 넘치도록 가진 노인들의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은 끝내 어떤 얼굴로 드러났을까? 140cm의 키로 높은 담벼락을 기어오르는 왜소증 사내를 줌아웃하는 결말은 그가 작아서가 아니라 그와 대비되는 담벼락만큼 쌓였을 집 내부에 들어찬 비밀의 크기 때문에 잔뜩 기괴해진다. 누가 누구에게 ‘언캐니’한가? 전지영의 소설들은 인간의 치졸을, 비열을, 낯 뜨거운 찌질함을 솥에서 푹 삶은 고깃덩이를 꺼내 도마 위에 부려놓듯 불쑥 꺼내놓는다. 썰어주면 잘만 먹을 거면서 징그럽다며 찌푸리지 말란 듯이 태연하게. 예술을 한다면서 돈과 재능 그 둘을 다 가지고 있거나 둘 중 어느 쪽이든 가진 이는 어떻게든 성공한다. 그런데 어느 쪽도 가지지 않았다면? 음해라도 해서 누군가를 망가뜨리고 싶은 마음은 「뼈와 살」, 「소리 소문 없이」에서 한 존재를 삭제해버리거나 없는 ‘진실’을 만들어내 ‘사실’로 만들고 만다 기어이. 그런 날조의 ‘사실’들은 인간의 작은 열등감에서 기인하고, 그건 자기 보호라는 엉성하고 얄팍한 난막에 감싸여 있다. 전지영은 그 막을 대차게 찢어서 눈앞에 들이대며 마주 보게 한다. 말의 검은 눈에 비친 것이 누구의 얼굴인지, 누구를 향한 원망인지, 진실은 어쩌면 처음부터 없는 것은 아니었는지, 불을 활활 질러서라도 거기에 쥐가 있는지 확인하라고. 그러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쥐의 잇자국과 소리와 낌새는 우리를 쫓아올 테니까. 6. 바늘은 구멍을 가로지른다 (안윤, 『모린』, 문학동네, 2024, 11) 관계나 사랑이 ‘나’를 읽는 터이듯, 타자의 감정 역시 나 없이는 성립 불가하다는 점에서 타인은 나의 필요충분이다. 안윤의 소설집은 나란히 양립하는 관계, 사랑이 비로소 시작되는 느리고 꼼꼼한 이야기들로 바느질되어 있다. 표제작 「모린」은 영은과 미란의 사랑을 그려낸다. 콜센터에서 일하는 미란은 감정적으로 늘 부대끼면서 낭독 봉사에서 만난 시각 장애인 영은과 찬찬한 사랑에 빠진다. 여기에 낭독용 텍스트인 요제프 코발스키의 산문 『보이지 않는 것들』가 나란히 놓인다. 후천적으로 시각을 잃고 피아노 조율사로 일하면서 평생을 독신으로 산 그는 피아노 줄과 밧줄을 엮은 끈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모린은 요제프가 사랑한 유일한 사람이었고 그의 생활은 하숙집 아들 조지가 도왔는데 산문집을 출간한 것도 조지였다. 이 텍스트는 세상 어딘가에 있는 실화를 초과하여 존재한다. 그래서 더욱 귀한 텍스트 『보이지 않는 것들』은 「모린」과 조밀히 넘나든다. 돌봄을 사랑으로 여겼다는 선주의 고백은 장애에 대한 배려가 어쩌면 영은의 정체성을 장애에 두는 선민이었음에 대한 후회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사랑이 꼭 옳지 않기만 할까? 요제프와 조지의 우정 역시 지극히 순수한 사랑의 형태일 수 있을 것인데, 마지막 순간에 조지를 위해 콘플레이크 상자를 찢어 “사랑하는 조지, 절대 들어오지 말고 경찰을 부르거라”(27쪽)고 힘겹게 쓴 요제프의 마음은 배려와 우정의 모양새를 한 따듯한 사랑일 것이다.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이전의 세계와 뚝 끊어짐을, 그리하여 넘어감을 통해 두 번째가 아닌 세 번째의 세계로 진입함을. 자신의 팔꿈치를 내어주고 미란을 믿겠다는, 영은의 팔꿈치를 가만히 쥐는 두 사람의 사랑은 비로소 시작되지만 어쩐지 오래 뜨듯할 것 같은 뭉근한 이 마음은 두 개의 선을 연결하여 제 삶을 끊어냄으로써 세 번째의 세계로 건너간 요제프의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에 대한 유일했던 태도와 겹치며 묵직하게 내려 앉는다. 「담담」은 내밀한 타인과의 단절을 겪은 이들이 한 번의 보챔도 없이 서서히 연결되며 다시 서로의 타인으로 구성되는 미덕을 보여준다. 소개팅 자리에서 자신의 양성애 성향을 고백하는 혜재에게 “그게 가장 중요한 정체성인가요?”(100쪽)라고 묻는 은석은 한동안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 유가족이었노라 고백한다. 그러고 보면 정체성을 지나치게 성적 취향을 기준으로 두기도 하는 듯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또 그렇지만도 않아서 은석의 경우와 같은 유가족, 장애를 가진 이들은 그 자체가 정체성이 되는데, 이런 정체화의 실체는 공통적으로 ‘정상성’의 범주에서 벗어남 그 특이성을 지목한다는 점에서 퍽 사려 깊지 못하다. 정체성은 내가 나를 규정하기보다 외부가 나를 어떻게 인식해야 할지 이름표를 붙여주는 몹시 성급하고 거친 방식인 셈이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은석과 혜재의 담담한 사랑의 맛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어려운 형태일지도. 스스로 자신의 한때와 이별하는 「하지」나 고모의 딸과 친구의 남편이 불륜이 되어버리자 가족과 친구 양쪽애서 떨어져나와 버린 「틈」은 깨어짐과 봉합이 따로 있지 않음을, 어리고 가난한 사랑의 미장센 「작은 눈덩이 하나」와 전세 사기로 죽음을 택한 남자친구의 기억에 겹치는 후배의 전세 사기에 마음을 쓰는 「또,」는 타인의 불행에 냉담하지 않으려는 안간힘으로 써 내려간 이야기다. 안윤의 소설은 하나같이 맞은편을 바라본다. 편편이 까물까물 아득하게 마음을 쓰다듬지만 「핀홀」은 단연 타인의 이름을 내 곁으로 당겨 부르고 함께 앓게 한다. 보라는 안정감을 주는 승원의 성격과 그 부모의 다정함이 부럽다. 그들의 일원이 되고 싶다고 여기는데 자신이 재혼가정에서 자랐음을 차마 고백하지 못해 괴롭다. 이들의 일상은 승원이 피하기만 하던 경진의 전화를 보라가 받으면서 조금씩 구멍을 보인다. 기자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경진은 중증장애인 시설에 거주하던 정원의 사망을 알려오는데, 정원은 승원의 형이고 삼십일 년간 시설을 전전하며 생활했다고 했다. 그는 시설에서 나가 독립하고 싶어 했지만 절차상 필수인 부모의 동의가 여의치 않자 장애인인권운동가와의 접촉을 통해 탈시설을 계획하던 중 낙상사고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승원과 부모의 안정감이 숨긴 비밀, 정원의 의사에도 불구하고 “거길 나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네가 살 곳은 거기라고”(81쪽) 탈시설을 반대한 부모님. 그들의 안정감의 비밀은 그것이었다. 구멍을 막고 처음부터 없었던 듯 태연하게 살아내는 것. 정원의 죽음이 석연치 않음에도 부모는 일을 키우고 싶지 않다며 끝내 부검을 반대하고 승원은 거기에 순하게 동조한다. 결국 정원의 인터뷰 영상과 그가 쓴 시는 보라가 인수하게 된다. 정원의 ‘말’을 인수한다는 것은, 가족에 의해 삭제되고 사회에서도 영영 지워질 뻔한 한 존재를 인수한 것이나 다름 없다. 보라의 할머니는 그런 말을 했다. “이쪽에 하나, 다른 쪽에 하나. 각각 구멍이 있어야 무엇이든 이을 수 있다고”(88쪽) 찢어진 것들을 이어 붙이려면 바느질을 해야 하고 바늘이 통과하려면 구멍이 필요하다. 안윤은 그런 사랑을 천천히 기워낸다. 안윤의 소설에서 사랑을 배운다. 그 가로지름의 다양한 단서와 모양들이 느리고 단단한 물결의 질감을 하고 이쪽으로 건너온다. 7. 봉합할 가능성 있음 마거릿 애트우드의 「흰 말」3)에는 흰 말이 등장한다. 술에 절어 사는 농장주로부터 방치되었던 흰 말은 다정한 부부의 지극한 돌봄을 받고 건강을 회복한다. 부부와 함께 삶을 지속하던 흰 말 글레이디스는 하룻 저녁 소동에 자극을 받고 농장을 뛰쳐나간다. 글레이디스는 제 힘껏 달리다 차에 치이고 만다. 글레이디스는 그렇게 죽었다. 그런데 그가 가장 행복했던 때는 언제였을까? 사람의 손길에 살을 찌우고 빗질을 받으며 때로 손님을 태우고 살던 때일까 아니면 힘껏 달리던 질주의 마지막 순간일까? 사랑은 무엇일까? 내가 견디기 위해서 하는 것인가, 그를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것인가? 또 보호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순치하여 발아래 묶어두는 것인가, 위험으로부터 차단하여 생명을 유지하게끔 하는 것인가? 우리의 감각은 타자의 존재를 재빨리 알아챈다. 마당에서 기르는 개에게는 되도록 줄을 길게 묶어주고 자주 쓰다듬어 주어야 한다. 한겨울에는 수돗물을 미리 받아두었다 찬 기를 식혀 햇살이 대지를 데울만한 때에 고목 나무에 뿌려주는 게 좋다. 전동휠체어가 길 위에서 느닷없이 멈춰서지 않으려면 배터리를 미리 충전해두어야 한다. 산책로 곳곳에 집을 만들어 비닐을 씌우고 헌옷가지를 깐 잠자리와 보온 주머니를 둘러싸 얼지 않을 물그릇을 마련해 주는 손길이 길고양이를 살리듯, 슬픔을 통과하는 중에는 등을 쓸어주는 염려가 필요하다. 아침에 나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고 며칠 전 메시지를 나눈 친구가 영영 돌아올 수 없다고 할 때, 또다시 과거의 끔찍한 장면이 반복돼 트라우마를 건드릴 때도 견딜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함께 겪고 있다는 단 하나의 사실에 기대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슬픔은 타자에 대한 감각 수용 반응의 일종이기도 하다. 들떠서 여행길에 오른 사람들과 사고의 순간을 내용으로 하는 초등학교 2학년 조카가 쓴 시의 마지막 구절은 “사람들은 아주 가만히 눈을 감았지”였다. 그는 시를 쓰는 동안 사람들의 감정을 헤아리고 죽음의 순간을 그려보았을 것이다. 그 순간이 그가 타인에게 몰입한 때, 타인이란 존재를 체현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때로 상실했지만 끝내 끊어내지 못한 것들로 나를 채워가기도 한다. 그것이 이른바 ‘우울증적 정체성’이겠지만, 나의 일부가 거기에 건너가 있다는 면에서 우울은 필요하기도 하다. 내가 나를 위해, 타인을 위해 애쓰는 순간 나의 타인들도 서로의 곁으로 건너와 주리라는 범박하고 느슨한 믿음이 어쩌면 우리의 취약성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하고 변치 않는 명제가 아닐까. 이 글을 함께 읽는 봄이 크게 달라지기야 하겠냐만 그럼에도 우리가 서로 구멍 사이를 가로질러 서서히 당겨지는 중이라면 어떨까. 내가 더딘 바느질의 한 땀을 뜨려 애쓸 때 나의 타인이 되어주길, 그렇게 봉합할 가능성을 우리는 서로 알아보길. 그렇게 우리 서로에게 가장 다정한 방식으로 무심한 타인이 되길. 1) 산업이 발견한 진짜 혁명은 병든 동물이 더 돈이 된다는 것이다. 천연의 동물들과 달리 인간이 개량한 동물은 항생제니 유기농이나 방목이니 해봤자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산업 동물’이다. 사람들은 그런 동물을 먹고 사는 셈이다. 조너선 사프란 모어,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송은주 옮김, 민음사, 2011, 146-150. 2) 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애도의 힘과 폭력』, 필로소피, 2018. 3) 마거릿 애트우드, 『도덕적 혼란』, 차은정 옮김, 민음사, 2020.
Ⅰ. 모멸과 폭력 - 김현주, 『메리골드』, 다인숲, 2024. 1. 김현주의 소설집 『메리골드』는 모멸과 폭력의 악순환이 만든 감정의 살풍경을 행간에 숨겨두고 있다. 소설의 화자들이 자행하는 타인에 대한 공격적 언어가 주는 당혹스러움과 예술로 포장된 인물들의 자기 방어기제는 소설 독해의 일차적 난관이다. 하지만 이는 김현주 소설의 성취점이기도 하다. 타인에게 모욕과 모멸감을 주는 방식으로 자기를 증명하는 인물들이 사실 과거 연약한 주체(버려지거나 유폐되거나 모멸의 대상이기도 했던)였다는 점은 당혹스럽지만, 이들의 방어기제가 연약한 타자에 대한 폭력적 형태로 노출될 때 의도치 않게 감추어진 상처가 드러나면서 해체된다는 점은 소설의 행간을 읽어내는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김현주의 소설들은 자기 방어에 능숙한 ‘믿을 수 없는 화자’들의 언어를 통해 히스테리적 증상의 원인을 타자에게 투사한다. 그리고 이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서사를 독해할 때 독자의 시선은 주체에게서 멀어지면서 타자에게로만 고착된다. 그러나 이 길을 역행하고 이중 잠금장치를 풀어내면서 행간에 감추어둔 감정의 풍경을 응시할 때, 우리는 김현주 소설의 입구에 서게 된다. 2. 오독을 유도하는 방어기제와 맥락을 무시한 채 배치된 언어들의 함정을 피하고 마주한 풍경에는 모욕과 모멸과 수치와 같은 감정들이 흥건하다. 때로는 피가 때로는 비겁함이 때로는 자기혐오가 때로는 눈물이 그 자리에서 축축하다. 가령, 「빛의 감옥」에서 직장 내 정치의 희생양이 된 원장의 무고함을 알고 있지만 자신의 생존을 위해 침묵을 선택한 ‘그녀’의 비겁함은 모멸감이라는 깊은 강을 건너야만 했다(“당신이 해고되지 않으려면 쉿, 이라고 음험하게 웃었다. 그때, 모멸감을 느꼈다.”). 애도보다 망각이 정규직의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타인의 죽음을 오래 애도하는 일은 어리석었다. 정상적으로 살려면 빨리 망각해야 했다”). 물론 정규직인 된 이후 ‘그녀’가 겪는 “불면증”과 “우울”과 “가슴 통증”은 모멸감이 남긴 흔적이겠지만, 일요일마다 작은 교회에서 행한 “참회의 기도”는 그것을 투명하게 세탁해주었다. 주식 리딩방을 운영하는 「꿀」의 주인공 ‘그녀’는 일확천금의 기회를 노리고 달려드는 회원들(“꿀단지 옆으로 기어드는 개미들”)을 경멸하고(“가난한데다가 멍청하기까지. 의심 많은 인간들… 구제불능이야.”), 돈을 빌리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가사도우미에게 약간의 돈을 적선함으로써 동정을 소비한다(“계좌번호 적어놓고 가. 삼백만원은 없어. 그 대신, 삼십만 원 그냥 줄게. 안 갚아도 돼. 가사도우미는 모멸감을 느꼈다.”). 정작 가족을 포함 누구와도 진정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채 소외된 듯 보이는 ‘그녀’는 우울증, 대인기피증, 편두통, 불안 등 신경증적 증상을 주식시장의 개미들과 하이에나들의 욕망을 잽싸게 포획하면서 치료한다(“그녀의 웃는 표정은 먹이를 낚아챈 한 마리 잔인한 맹수 같았다.”). ‘그녀’는 이빨 사이의 흥건한 피로 자신의 상처를 은폐할 줄 아는 주식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다. 약자에 대한 멸시와 모욕으로 가득 찬 이 소설의 행간에는 자기혐오와 불안이 감추어져 있다. 3. 「붉은, 행간」은 김현주의 소설집에서 모멸과 폭력의 역학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모멸감’은 “나의 존재 가치가 부정당하거나 격하될 때 갖게 되는 괴로운 감정”(김찬호, 『모멸감』, 문학과지성사, 2014, 61쪽. 이 글에 언급된 모멸감에 대한 사유들은 이 책에서 도움을 받았다.)이다. 이 정의에는 모욕-경멸-수치의 감정들이 내재되어 있다. ‘모욕’이 타인을 업신여겨 욕되게 하는 것이라면, ‘모욕감’은 타인에게 그러한 모욕을 받았다는 감정의 응어리다. 그리고 ‘모멸’에는 모욕과 ‘경멸’의 의미가 혼재되어 있다. 적나라한 공격을 드러내는 언행이 모욕이라면, 무심코 무시하거나 깔보는 태도는 경멸에 가깝다. 즉 경멸에는 적대적 의도가 분명하지 않을 수 있다. 무의식적으로 타인을 멸시하고 낮잡아 보는 일은 흔하다. 누군가를 직접 모욕하지 않는 방식으로 상대를 낮추고 자신의 우위를 확보하는 행위양식은 능력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의 포식성을 희석화하는 최소한의 도덕률일 것이다. 모멸은 이러한 가능성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누군가에게 수치심을 일으키는 “최악의 방아쇠”(김찬호;64)라고 할 수 있다. 「붉은, 행간」의 화자 ‘나’는 두 명의 남자(남편이자 작가인 ‘케이’, ‘나’의 정부이자 연극연출가인 ‘에스’)로부터 받은 모멸감을 그들의 작품을 모욕하는 방식으로 되돌려준다는 점에서 ‘최악의 방아쇠’의 희생자이자 피의자이다. 그녀는 페이지가 찢겨나간 <중독>을 바닥에서 집어 들더니 책 무덤 위에 펼친다. 책 속에 접시 위의 과일을 집어넣는다. 청포도와 방울토마토가 책 속으로, 책 바깥으로 쏟아진다. 그녀는 책들 위에 올라선 후, <중독>을 밟는다. 토마토와 청포도가 튀어 나가고 일부는 그녀의 발길질에 짓뭉개진다. 다시 책 위를 두 발로 힘껏 내리밟는다. 책 속은 젖어 얼룩 범벅이 된다. 과육은 책 속에서 으깨어지고 과즙은 행간으로 스며들 것이다. 짓밟고, 태워버리고 싶은 책이다. 소설 속 인물들도 과즙 범벅이 된다. 책을 모독하고 싶다. (「붉은, 행간」, 23쪽) 그녀는 <중독>을 짓밟으며 무대 위에서 빛난다. 신체의 굴곡이 드러나는 과감한 의상을 선택하면서 보다 파격적인 연기를 시도한다. 매회 무대 위에서 그녀는 에스를 다양한 부위별로 힘껏 물어뜯는다. 그때마다 에스는 신음을 내지른다. 고통과 쾌락을 오가는 에스의 야릇하게 일그러진 표정이 관객을 열광시킨다. 예상하지 못했던 기발한 반전이다. 그녀는 침착한 동작으로 에스의 목에 흐르는 피를 젖은 혀로 부드럽게 천천히 핥는다. 객석에서, 기립 박수가 터져 나온다. (「붉은, 행간」, 39쪽) 인용문의 <중독>은 남편 ‘케이’의 유작이다. 무명 소설가였던 남편의 작품은 ‘나’와 불륜 관계인 ‘에스’에 의해 불멸의 작품으로 포장된 채 연극 무대에서 상연된다. 그리고 ‘나’는 무대에 등장해 남편의 작품을 ‘모독’하는 퍼포먼스를 반복한다. 행위예술 특유의 난해함으로 승화되어버린 ‘나’의 행위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남편의 소설에서 묘사된 아내 ‘나’의 모습은 수동적이며 무기력했다. 실재의 ‘나’는 자유로운 새처럼 마음껏 자신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소설 속의 ‘나’는 “새장 속의 새”이며 “마리오네트 인형”으로 묘사되었다. 잠시 나가더라도 “새장 속으로 다시 들어올”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남편 케이에게 ‘나’는 그의 죽음과 함께 “순장된 영혼”일 뿐이었다. 남편 케이와 아내 ‘나’ 사이의 이 간극을 소설은 “틈”이라는 언어로 비유한다. (몇 개의 문장을 사례로 인용하면, “그녀의 불안과 케이의 애증으로 1502호는 땅 위에서 존재하지 않고 허공에 떠다니다가 어느 순간, 지상으로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격한 진동으로 실내의 벽, 틈은 무섭게 벌어졌다.”/ “발을 디딜 때마다 몸을 부풀린 틈이 그녀의 무게를 못 이겨 더 크게 벌어졌다.”/ “집요한 틈새는 끼익 소리를 내면서 엘리베이터 안까지 따라 들어왔다. 틈이 그녀의 몸을 마구 흔들었다.” 등) 이 ‘틈’은 남편 케이에게서 받은 ‘나’의 모멸감의 다른 표현이다. ‘틈’에는 1502호의 위장된 평화와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 “위태로운 행복이 노숙자 같은 불안을 데리고 침실까지 들어온 것”(20쪽)이라는 문장은 남편의 언어적 경멸과 아내의 존재가치에 대한 모욕으로 인해 ‘나’가 느낀 모멸감이 가장 정제된 표현일 것이다. 따라서 인용문에서 ‘나’가 남편의 유작인 <중독>에게 가한 행위들(찢고, 밟고, 책 속에 과일을 넣고 짓뭉개는 등의 행위)은 모멸에 대한 되갚음으로써의 ‘모독’이다. 이로써 ‘케이’의 소설 <중독>은 세 가지 층위의 모욕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자신의 작품이 타인에게 인정받는 승인 과정을 통해 자기존재감을 확장하는 것이 예술가의 삶이라고 할 때, 모욕은 이러난 자존감이 손상되는 순간일 것이다. 하지만 생전에 무명 작가였던 케이는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내 작품이 모호하다고 하는데 그건 인물의 내면이 강조되어 있기 때문이지. … 상징을 잘 이해해봐. 그리고 보이지 않는 행간을 읽어내면 좋겠어.”) 세상은 그의 언어 속 행간에 담긴 의미를 읽어내지 못했다. 이것이 첫 번째 모욕이다. 케이의 죽음 후 그의 소설 <중독>은 에스의 연출에 의해 본래의 의미 맥락에서 이탈된 채 연극 <중독>으로 포장되고 소비된다. 에스는 작가의 죽음을 작품에 중첩시킴으로써 소설 <중독>의 행간을 영원히 감추어버렸다. 이것이 두 번째 모욕이다. 그리고 연극 <중독>의 주연으로 캐스팅된 ‘나’는 소설 <중독>을 짓이기고 찢고 밟는 퍼포먼스를 통해 소설에 묘사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의미지점으로 이탈시킨다. 더불어 연극이 반복 상연되면서 ‘나’의 모독 행위는 지속적으로 강화된다. 이것이 세 번째 모욕이다. 이로써 케이의 소설 <중독>은 연극 <중독> 속에서 ‘나’의 예술적 행위의 승인 과정의 소품으로 전락하게 된다. 앞선 두 번째 인용문은 ‘나’의 행위가 연출가 에스의 의도를 완전히 역행하는 장면이다. ‘나’는 한때 ‘에스’와의 관계를 통해 모욕당한 자신의 존재감을 재승인받았다. 하지만 이후 이 둘의 관계에서도 ‘틈’이 발생한다. 남편 ‘케이’와 마찬가지로 ‘에스’ 또한 ‘나’를 자기 예술의 승인 과정에서 필요한 도구로 수단화한 것이다. 연극 <중독>에서 ‘에스’가 ‘나’를 흡혈하는 장면이 그 증거다. 따라서 앞선 두 번째 인용문에서 ‘나’는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존재에서 벗어나 ‘에스’를 물어뜯고 흡혈하는 주체가 됨으로써 ‘에스’가 행한 모욕을 되갚는 중이다. 소설의 제목인 「붉은, 행간」은 “에스의 목에 흐르는 피”를 천천히 핥는 ‘나’의 붉은 입술 속에서 비로소 그 의미를 완성한 셈이다. 이로써 연극 <중독>은 ‘나’의 작품이 된 것이다. 4. 이렇게 보면 김현주의 소설 「붉은, 행간」을 남성 예술가들에 의해 대상화된 여성 인물의 신체와 정신이 자기모멸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스스로를 예술의 주체로 자리매김하는 서사로 읽을 수도 있겠다. 자신에게 가해진 모욕과 모멸의 헤게모니 관계를 역전시키는 방식으로, 그러니까 모멸의 폭력을 그대로 되갚는 방식으로 자기혐오의 늪에서 빠져나온 이야기로 말이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모욕과 경멸에 노출되고 수치심과 분노가 꼬리를 물면서 일으키는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을 때, 주체와 폭력의 거리는 자못 가까워진다. ‘훼손된 자아(spoiled self)’(어빙 고프먼)의 폭력적 자기 증명. 문제는 이런 방식이 주체의 훼손된 자아를 모멸과 폭력의 악순환에 갇히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방식의 예술행위 또는 글쓰기가 자기모멸의 늪에 빠진 주체에게 썩은 동아줄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은 자못 위험해 보인다. 다행히 작가는 「메리골드」에서 이러한 폭력성의 늪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이를 스릴러의 양식으로 서사화함으로써 자기 응시를 수행하고 있다. 모멸감은 폭력의 필요조건일 수 있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모멸감의 해소 방식이 항상 폭력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다만 다음과 같은 경우는 예외일 수 있겠다. 그러니까 수치심을 필사적으로 감추고 싶거나, 낮아진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는 비폭력적 수단을 갖추고 있지 못하거나, 폭력적 충동을 제어해주는 정서적 역량이 결핍되어 있을 때, 모멸감을 느낀 ‘훼손된 자아’는 자신의 뒤틀린 모습을 타자에 투영하면서 폭력과 폭언을 통한 자기 증명에 매몰될 수 있다. 김현주의 「메리 골드」에 이러한 장면이 등장한다. 갤러리 관장이자 도예가인 화자 ‘나’가 자신의 건물에서 무상으로 ‘꽃 카페’를 운영하는 ‘그녀’에게 건네는 말들에는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훼손된 자아가 자신보다 더 연약한 존재를 통해 자기모멸감에서 벗어나려는 뒤틀린 폭력성이 도사리고 있다. (몇 개의 문장을 사례로 인용하면, “싸구려 꽃으로 격조 있는 갤러리를 망쳐놓다니, 발코니랑 계단에 유치한 저것들, 당장 다 걷어내요!”/ “이렇게 예술적 센스가 없다니!”/ “당신의 예술적 감각은 형편없어요. 그래서야 카페 운영을 제대로 잘하겠어?”/ “그녀의 원피스는 시장에서 값싼 무명천을 떠다가 만든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저급한 취향 때문에 화가 났다.” 등) 이혼과 경제적 어려움에 내몰린 ‘그녀’는 “무조건의 동정과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가여운 존재”(79쪽)였다. 자신의 건물 2층을 내어준 ‘무상임대차계약’은 호의적인 주체가 동정의 대상에게 베푸는 적선으로써 상대적 우월함을 전시하는 방법이었다. 문제는 우울해보였던 그녀의 삶이 메리골드처럼 화사해지면서부터다. 적막했던 갤러리는 그녀가 온 뒤로부터 오히려 활기를 띠기 시작하고(“메리골드 덕분에 행인들이 들어와 일층 전시실을 구경하고 카페로 올라가 차를 마시고 돌아가기도 했다.”), 반면 자신의 작품이 상대적으로 볼품없어 보이이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불안감에 휩싸인다(“쫓겨난 듯 한쪽 구석에 몰려 있는, 내 작품들은 이상하리만큼 볼품없어 보였다. 초록으로 뒤덮인 실내에서 박제동물처럼 생명력이 없었다. 나는 도자기의 미적 가치를 모르는 그녀를 더는 견디기 힘들었다.”). 자기가 업신여기던 사람에게서 오히려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자괴감과 자신의 예술이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수치심으로 인해 ‘나’는 모멸의 가해자가 되었다. ‘나’의 모욕적인 말들과 무상임대를 대가로 그녀를 자신의 조수처럼 부리며 멸시하는 장면들에는 자신과 그녀 사이의 위계를 명확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불안을 감추려는 하려는 의도가 명백했다. 여기에 ‘그녀’가 남편의 전처를 닮았다는 사실까지 더해지자 모멸과 폭력은 급격하게 가까워진다. 가령, 남편의 전처 사진을 칼로 긋는 장면(“환하게 웃는 신부의 얼굴을 나이프로 천천히 그었다. 후련했다.”)이나, 무기력한 대상이 자신에게 굴복했을 때의 쾌감을 묘사하는 장면(“그녀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쾌감이 내 몸에 전율처럼 흘렀다.”)에서 ‘나’가 느끼는 쾌감은 모멸과 폭력의 악순환이 생산하는 감정이다. 소설은 이러한 감정의 근원에 자신의 작품이 예술적 허영을 위한 싸구려 소비품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에서 느끼는 불안감(“내 작품들, 원가에 내놓는다고 홀대하지 마세요. 이거 최상급이야. 전부 팔렸으면 좋겠네.”)과 ‘나’가 과거 엄마에게 버림받은 적이 있다는 트라우마를 배치하고 있다. 마땅히 사랑을 주어야 할 존재에게서 버려졌다는 모욕과 자신의 존재가치가 무시당하고 있다는 수치가 ‘그녀’에 대한 분노로 착종된 것이다. 그러니까 “내 건물에서…어떻게 나보다 더 행복할 수 있어?”(100쪽)라는 말에는 자신을 버린 엄마가 행복하면 안 된다는 분노, 버림받은 자신이 행복질 수는 없다는 슬픔, 나보다 못한 위치의 누군가가 행복하다는 것은 불공정하다는 억울함의 감정들이 뒤섞인 증상인 셈이다. (한 번도 해소되지 못한 이러한 모독의 감정들은 「떠도는 영혼의 노래」와 「아무도 모른다」에서 각각 국가폭력과 면역 정치에 의해 잊혀진 죽음들과 연결되기도 한다.) 이 소설이 보여주는 모멸과 폭력의 악순환은 작품의 행간에 감추어진 죽음을 통해 스릴러로 서사화된다. ‘나’가 코엑스 전시 후 일주일 만에 돌아왔을 때 ‘그녀’가 사라진 사건을 주목해보자. 화자는 “그녀는 노란 메리골드를 뽑지도 않았고, 붉은 샐비어를 심지도 않았다.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내가 없는 동안, 갤러리를 비운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99쪽)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 화자의 진술은 믿을 수 없다. 이유는 소설의 말미에 아무렇지 않게 슬쩍 언급된 다음의 문장 때문이다. “나는 뒤틀린 손가락 관절을 조심스럽게 만지면서 그녀의 겁먹은 창백한 얼굴을 떠올렸다.”(100쪽) 그러니까 일주일 전 ‘그녀’는 ‘나’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의도적 기억상실은 2층 카페를 가득 채운 “사라지지 않는 소독 냄새”라는 무의식적 진술로만 확인된다. 따라서 소설 맨 앞에 배치된 평범한 문장(“이층 카페의 탁자보를 걷어내면서, 나는 그녀를 느꼈다. 표백제를 푼 물통에 누런 탁자보를 담그고 카페 내부에 소독약을 뿌렸다.”)은 ‘나’의 무의식이 남긴 사후적 증거에 해당한다. 5. 소설의 스릴러적 플롯이 잘 배치되고 있는지에 대한 아쉬움은 남는다. 하지만 「메리골드」는 분명 자신이 자행한 폭력의 기억마저 멸균하는 방식으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는 모멸적 폭력의 초라함, 모욕당한 자존감이 자기를 위협하는 외부 인자에 대해 보이는 면역학적 과잉 반응, 연약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모멸감의 극단에서 어떻게 역진화하면서 파괴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진단들이 내포되어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이러한 느낌은 (섣부른 판단일 수 있으나, 그리고 그랬으면 좋겠지만) 이번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겪는 모멸감의 근원에 오랜 시간 글쓰기로부터 멀어진 작가의 자기진단의 결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김현주 작가의 소설을 모멸감과 폭력의 역학관계로 독해하는 이 글의 시작점에는 「빅 블루」가 있었다. 이는 앞서 진술한 바 있는 말, 그러니까 ‘약자에 대한 멸시와 모욕으로 가득 찬 소설의 행간에는 자기혐오와 불안이 감추어져 있다’는 말과 연관된다. 「빅 블루」는 작품을 생산하지는 못하고 문화 소비에만 매몰된 채 문학이라는 질병에 침전된 화자의 모습을 자기혐오와 시대와의 불화라는 방식으로 응시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소설이 자꾸 “아주 오랫동안 소설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다”라는 <작가의 말>과 겹쳐 읽힌다. 또 김현주의 소설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연약한 존재들이 느끼는 자기혐오와 모멸감이 글쓰기로부터 멀어졌던 과거 자신의 모습을 투사한 것처럼도 보인다. 이러한 섣부른 짐작 때문에 나는 다음의 문장들이 아프게 읽혔다. 세헤라자데는 목숨을 잃지 않기 위해 천 일 동안 매일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야기를 만드는 밤, 고통의 밤은 어둠 속으로 녹아들고, 이야기가 완성되면 죽음의 공포는 사라진다. 불멸의 글쓰기, 나도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다. 하지만 점점 이야기를 만들지 않고, 아무 책도 읽고 싶지 않게 되었다. 현재는 멍 때리며 노는 인간, 쓰지 못하고 죽어가는 작가가 되었다.(「빅 블루」, 64쪽) 나는 어쩌면 <그랑블루>의 주인공처럼 깊이 잠수하는 병에 걸린 것일까. 빅 블루, 푸른 바닷속으로 책이 떠다니면서 작가가, 작가가 만든 주인공이, 작가가 썼던 문장들이 돌고래처럼 헤엄치거나 솟구쳐 오르는 것을 연상하면서 … 죽는다. 푸른 바다로 몸을 던진다. … 막막한 소설의 바다. … 바다 맨 밑으로 들어간다. 바다 속, 눈이 어두운 심해어처럼 가라앉아 있다가, 수영을 하지 않고 행복하게 익사한다. (「빅 블루」, 68쪽) 여기서 ‘나’는 가혹한 자기 심문 과정에서 스스로를 모멸의 대상으로 만들면서 깊고 푸른 어둠 한 가운데 있는 자신을 대상화한다. 문학이라는 ‘질병’에 갇힌 화자의 무기력은 예술가로서의 승인과정에서 경험한 어떤 모욕에 대한 자기 심문으로 읽혔다. 글을 쓰기 위해 국가 행정의 승인을 받아야만 하는 상황에서 느껴야 했던 모독은 그 감정의 아주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또 생산 없이 소비로만 이어지는 상황에서의 공허함은 한 인간의 자기 실격 보고서임과 동시에 자기모멸의 감정을 통과하기 직전의 가장 깊은 어둠에 대한 기록으로 읽혔다. 무엇보다 이 강도 높은 고해성사는 대단한 용기로 읽혔다는 점도 말해 둔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서툰 짐작 끝에 생기는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 왜 어떤 사람들의 자기증명 과정은 세계 전체와 싸우는 방식으로만 가능한지? 왜 어떤 사람들의 구조신호는 자기를 송두리째 부정하고 찢어야만 겨우 낮은 주파수나마 얻게 되는 것인지? 왜 우리는 때로 누군가를 모욕하고 모멸하면서 그것이 어쩌면 자기 고백일 수도 있는 가혹한 지점에 서야만 하는지? 그럴 때마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글을 마주해야만 하는 것은 아닌지? 그 누구 또한 오랫동안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었으나 오랫동안 글을 읽는 세계에서 유폐되었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공감 또는 응원이 될 수 있을까? 믿고 싶은 한 가지는 ‘사건의 지평선’을 빠져나온 힘이라면 무한한 우주 어디라도 이행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작가 김현주의 앞으로의 항해를 응원한다. Ⅱ. 차별과 환대 - 김성훈, 『길목의 무늬』, 문학들, 2024. 1. 김성훈의 소설집 『길목의 무늬』에는 버려진 아이들의 좌절과 상처가 가득하다. 하지만 그것이 미성숙한 자아의 패배적 자전서가가 아니라 스스로를 구원하는 이야기로 읽히는 이유는 버려진 아이들의 구조신호에 기꺼이 응답하는 인물들의 환대와 연대 때문이다. 김성훈의 소설은 제 몫을 부여받지 못한 채 경제와 사회의 셈법에서 뺄셈의 대상이 되는 존재들에 주목하고 있다. 경제발전의 뒷골목에서 하위주체로 명명되거나, 정당한 이름으로 호명되지 못하고 그늘진 외진 장소로 배치된 채 ‘비체’로 살아가는 인물들이 서사의 대상들이다. 2. 소설집의 표제작인 「길목의 무늬」의 배경인 목포의 ‘다순구미’ 마을은 이러한 인물들의 장소이다. “볕이 잘 들고 따뜻하다”는 의미와 달리 이곳은 “가난을 머리에 이고 지고 사는 동네”(34족)로서 지금은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된 폐허의 장소다. 그리고 이곳에서 태어난 화자 ‘나’는 이른바 ‘파시의 아이’였다. 바다에서 서는 장을 파시라고 한다. 나는 파시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서산동 유곽에서 버림받았다. 나를 낳은 어머니를 일컬어 누구는 임자도 여자라고 했고, 또 누구는 흑산도 각시라 했고, 더러는 산다이 색시라고도 했다. 동네 사람들의 절구질하는 입방아가 싫었다. (「길목의 무늬」, 37쪽) 그러니까 ‘나’는 바닷사람들의 욕망이 부딪는 장소에서 태어난 존재로서, 부모의 존재나 출생지조차 불분명하여 처음부터 사회적 성원권을 획득하지 못한 채로 이 세계에 내던져진 우연적 존재였던 셈이다. ‘파시’에서 몸을 팔던 어머니는 “어선이 입항하는 날, 나를 낳고, 기침하고, 다시 유곽으로 돌아오지 않았다.”(49쪽) 손님으로 만난 아버지에게 ‘나’를 맡김으로써 그녀는 장차 어린 아이가 겪어야 할 차별과 혐오를 벗기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어린 화자의 삶은 “태생의 천박함에 응시한 타인들의 시선”(37쪽)에 노출되었고, ‘다순구미’를 떠나 바깥 세계로 입문하려던 시도도 실패했다. 몸을 파는 어머니의 직업과 버려진 아이라는 주홍글씨는 ‘나’의 태생에서부터 새겨진 채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로 작동했다. 사회의 정상적 성원권을 획득하려던 시도는 모두 실패로 귀결된다. ‘나’의 친구이자 첫사랑이기도 한 ‘달순’은 주인공이 겪은 사회적 차별을 젠더의 측면에서 강화하고 보충하는 인물이다. 경제적으로 외부화된 마을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달순의 희망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좌절되고, 소규모 직장에서 경험한 남성들의 성희롱과 차별은 결국 ‘달순’의 자살이라는 비극을 야기한다. 소설의 말미에서 ‘나’가 ‘달순’의 기타를 가지고 비행기에 올라 타국으로 향하는 장면은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존재들의 바깥 세계로의 이행이라는 점에서 상징적 의미를 띤다. 여기까지만 보면 김성훈의 등단작품인 「길목의 무늬」는 버려진 아이들의 실패서사로 읽히면서 사회적 차별을 서사화한 소설로 읽힌다. 하지만 소설은 ‘나’를 기꺼이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인 ‘아버지’와 ‘달순 엄마’의 희생과 환대의 서사를 통해 소설을 패배주의와 우울에서 건져내고 있다. 양부라는 사실을 마을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머리 검은 짐승 거둬 키워도 잘만 산다는 것”(49쪽)을 동네사람들에게 증명해 보임으로써 ‘나’를 차별의 늪에서 건져냈다. 그는 어머니와의 짧은 만남과 약속을 기억하면서 “우짜든지 너랑 나는 잘 살아야 해.”(49쪽)라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달순 엄마’는 친모의 빈자리를 그 이상으로 대리보충한 ‘엄마’였다. 운동회고 소풍이면 내 도시락까지 싸줬던 달순 엄마였다. 그 품에 엄마의 젖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나는 이따금 아버지가 먼 바다로 나가 돌아오지 않는 밤이면 달순네 집에 들어가 그 좁은 방에 꾸역꾸역 발을 들이밀고, 유달산 자락에서 얻어온 도깨비바늘을 그 집 이불에 달라붙게 했다. (「길목의 무늬」, 39쪽) ‘달순 엄마’는 ‘나’의 인생을 묵묵히 지켜보며 응원해 준 사람이었다. 그녀는 ‘나’가 “휴학, 복학, 취업, 명예퇴직, 재입학” 등의 말들이 암시하는 거친 시간들을 통과하는 동안 그 “단어들이 빚어낸 내 세월을 흉금 없이”(39쪽)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달순네’는 ‘나’가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의 젖 냄새”가 배어있는 장소이면서 외로움과 자기비하에서 화자를 건져내 준 장소이기도 하다. 소설은 ‘나’의 출생에 얽힌 공백 위에 ‘아버지’와 ‘달순 엄마’의 무조건적 환대를 중첩시킴으로써 어린 인물을 차별과 혐오의 늪에서 구원했다. 무엇보다 이러한 환대의 힘은 ‘나’가 이후 ‘견습 선교사’가 되어 케냐로 떠날 수 있는 동력이 된다. 그리고 그곳은 국가폭력과 전쟁의 희생자들이 생산되는 장소, 달리 말해 자신과 같이 버려진 아이들이 있는 장소라는 점에서 상처를 극복한 인물이 자신이 받은 환대를 타자에게 되돌려준다는 의미를 지닌다. 소설은 ‘달순 엄마’에게 새로운 임무를 한 가지 더 부여하면서 서사의 의미를 확장한다. ‘달순 엄마’는 버려진 아이가 자기정체성을 확립해가는 과정을 돕는 조력자이면서, 비밀에 부쳐진 인물들의 과거를 현재로 재송신하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달순 엄마’는 과거 “일제 강점기 유곽촌이 있던 동네, 서산동, 그곳에서 산다이 색시들의 밥을 만들고, 빨래하며 품삯”(38쪽)을 벌었던 경험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의 친모와 함께 “식모 일을 하면서 만난 동갑내기 친구”(41쪽)이기도 했다. 이러한 소설의 설정은 ‘나’의 친모가 비워진 공백의 자리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장소성으로 확장되는 지점이다. 그러니까 「길목의 무늬」는 어머니의 실종으로 상징되는 공백의 장소에 과거 가난한 집안의 (맏)딸로 태어난 소녀들이 짊어졌던 희생의 무게와 그녀들이 거쳐 온 사회적 장소들을 기입한 것이다. 산업화 시대 속 도시로 이주한 여성 하위주체들의 삶을 상기할 때, 나’의 친모에 대한 서사적 누락과 죽음을 앞둔 ‘달순 엄마’의 쇠락한 신체는 그 시대 하위주체 여성들의 삶과 존재가 사회에 정상적으로 기입되기 어려웠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더불어 친모의 부재는 여성 하위주체들의 삶이 역사의 서술에서 누락되었다는 점을 의미하며, 재개발지역에 거주하는 ‘달순 엄마’의 현재성은 이들의 삶이 이후에도 여전히 사회적 외부로 배치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즉 김성훈의 소설 「길목의 무늬」는 ‘다순구미’와 같은 버려진 장소에 얽힌 인물들의 삶을 산업화 시대를 통과한 하위 주체들이 걸어 온 ‘길들의 무늬’로 재기입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은 ‘다순구미’라는 장소의 역설적 의미를 현재화하면서 목포의 특정 장소에 한국 사회의 역사성과 사회성을 덧입히는 작업을 수행하는 작품이다. 3. 산업화 시대의 첨병 공간이었던 여수와 마산을 배경으로 쓰인 「정오의 끝자리, 빛」과 「홍콩빠 이모」는 한국 사회의 반공주의와 레드콤플렉스에 포획된 인물들을 전면 배치하면서 한국 사회의 국가 폭력이 혐오의 대상을 낙인찍고 그들을 사회의 바깥으로 배제했던 폭력의 역사를 서사화하고 있다. 전자의 소설이 그 대표적 낙인의 서사라면 후자의 소설은 이를 연대의 차원에서 극복하고 있다. 「정오의 끝자리, 빛」의 한덕수는 그 출생부터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낙인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한덕수의 현재 시점에서 두 세대의 시간을 거슬러야 도착할 수 있는 지점이 가혹한 차별과 혐오의 시작점이다. 한덕수의 외할아버지는 여수읍의 한 국민학교에서 음악교사로 부임 중이었다. 그러다 1948년 10월 어느 날 그는 빨갱이의 부역자로 내몰려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되고, 이후 그의 가계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국가폭력의 구성적 외부로 배치되었다. “울 엄마가 그랬시야, 차라리 고아랑 놀아라, 빨갱이 자석하고 말 섞었다간 네 신세 조져분다고잉.” 학교에서 처음으로 친구라고 부르던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 아이를 기다리며 놀고 있었는데, 기다리던 아이의 입에서 ‘빨갱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빨갱이’라는 단어의 생김새를 알았다. 피 묻은 돌멩이라는 것을 말이다. 번갯불이 내 몸을 지지는 듯했다. 나는 엄마에게 그 사건을 말하지 못했다.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빨갱이’라는 뜻은 몰라도 그 단어는 무서웠다. ‘빨갱이’는 이후의 내 삶을 내 의지랑 상관없이 끌고 갔다. 땅의 중력처럼, 파도의 출렁거림처럼. 살아 있는 동안 내게 떠나지 않은 그림자처럼 나는 ‘빨갱이’랑 살았다. (「정오의 끝자리, 빛」, 61쪽) 인용문은 억울하게 이데올로기의 피해자가 된 한 인물의 후손들이 단지 핏줄이라는 이유로 친구와 사회로부터 차별화되고 혐오의 대상으로 낙인 찍혔는지를 보여준다. 오래 전의 낙인은 사건과 무관한 후손들의 삶을 비극으로 색칠했다. 차이 나는 대상에게 혐오와 배제의 스티그마(stigma)를 라벨링하는 일이 너무나도 당연하고 익숙했던 시간들이었다. 국가폭력이 생산한 어떤 오염물이 행여라도 주체의 내부로 침투할까 두려웠던 시절이었다. 한때나마 주체의 일부(가족이나 친족)였거나 아주 가까운 대상들(친구나 이웃)까지도 오염물로 치부하면서 주체의 바깥으로 뱉어내는 것이 생존의 기술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오염의 가능성이 있는 이웃을 타자화하고, 이념적 차이를 악으로 규정짓고 차이가 있는 타자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일이 국가의 동질성 유지를 위한 정의로 위장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던 시절이었다. 이런 점에 주목할 때 김성훈의 소설은 현재 시점에서 한 인물이 처한 사회적 의미를 역사적 시간을 소환하면서 계통 발생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이다. 여전히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낙인에서 자유롭지 못한 차별과 혐오의 시작점을 1948년의 여순사건으로 기점화함으로써 김성훈의 버려진 아이들의 성장 소설로 멈출 수도 있었던 자신의 작품 세계를 한국 사회의 차별적 구조가 생산된 발생지점까지 확장하고 있다. 한덕수의 어머니인 양순임의 탄생과정은 이러한 비극을 더욱 강화한다. 그녀의 출생은 외할아버지의 죽음에 기입된 국가폭력이 또 다른 폭력으로 너무나 쉽게 번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극화한다. 외증조할머니의 원망은 그날 1학년 1반 교실에 모인 마흔 명 가까운 사람들이 들었다. 하지만 마흔 명의 사람 중에 엄마를 제외하고, 외할머니의 넋두리를 제대로 들은 사람은 없었다. 생살여탈권을 보장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외할머니가 갓 태어난 엄마에게 모진 년, 제 아비를 잡아먹고 태어난 년이라는 소리는 엄마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엄마는 알지 못했다. 다만 엄마는 감각적으로 교실의 냉랭한 기운을 느꼈고, 당시의 운동장 흙처럼 울퉁불퉁하게 생긴 모진 말의 생김새를 봤다. (「정오의 끝자리, 빛」, 67~68쪽. 강조 인용자) 그러니까 한덕수의 어머니 양순임은 한덕수의 외할아버지가 빨갱이로 몰려 죽던 그날 그밤 그곳에서 태어났다. 양순임은 생사여탈권이 누군가의 말 한 마디에 의해 결정되기도 했던 그 잔인했던 폭력의 시간에, 모두가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숨죽이던 그 시간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모진 년, 제 아비를 잡아먹고 태어난 년”이라는 저주와 원망의 대상으로 낙인찍혔다. 아마도 그 순간 태어난 아이가 여자였기 때문에 더 가혹했을 외증조할머니의 저주의 언어는, 그 죽음의 사회적 역사적 의미를 미처 파악하지 못하는 외증조할머니를 비롯한 당대 민중들의 무지로 인해 죽음과 탄생의 엇갈리는 비극적 아이러니를 봉건주의적 가부장제의 관점에서만 해석됨으로써 정작 그 본질적 원인에 해당하는 국가폭력의 무차별성과 비인간성을 삭제하게 만들었다.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생존을 위해 유리하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렇게라도 해석하지 않고서는 그 죽음을 의미화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양순임은 태어난 순간 죽음의 냄새를 맡을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녀가 태어나는 그 순간 “처음 느낀 감각은 고립”(36쪽)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탄생 자체가 부정당한 양순임은 생의 처음부터 이데올로기와 가부장적 봉건주의가 생산한 두 층위의 주홍글씨에서 자유롭지 못한 저주받은 삶을 살아야 했던 셈이다. 4. 마산의 자유무역지구의 대폿집을 배경으로 쓰인 「홍콩빠 이모」는 「정오의 끝자리, 빛」이 보여주는 차별의 재생산을 반복한다. ‘홍콩빠’로 불리는 술집의 여주인 김명자가 느끼는 불안과 조바심을 통해 소설은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는 반공주의의 두려움을 보여준다. 한 번 오염물로 분류된 차별과 혐오의 대상은 그 주변까지 오염의 대상으로 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명자는 혹여라도 자신의 가족과 이웃이 낙인의 대상으로 라벨링되지나 않을까 무섭다. 그녀의 주변 인물들이 겪은 사실은 그녀의 이런 조바심이 기우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소설의 인물들이 대부분 대한민국의 현대사에 기록된 온갖 국가폭력의 피해자로 극화되기 때문이다. 가령 홍콩빠의 단골이자 1980년대 산업역군으로 호명되었던 ‘공순이들’이 YH사건을 경험하면서 언어와 생명력을 잃어버린 사실은 시작에 불과하다. 김명자의 가족들의 사정을 보면, 직업학교를 다니며 구두닦이 생활을 하던 김명자의 막내동생은 4·19 시절 목숨을 잃었다(“마산 앞 바다에 떠오른 김주열 군의 시신이 도립병원으로 옮겨졌을 때 동생은 시위대를 이끌다 산화했다.”, 87쪽). 김명자의 남편은 베트남전쟁의 용병으로 참전한 후 고장 난 신체와 정신으로 괴로워하다 자살했다. 대학생인 김명자의 아들은 유신정권의 폭력성과 불합리함을 알리기 위해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아마도 소설이 생략한 작품의 백스토리를 상상건대. 김명자 아들은 이후 부마항쟁과 5·18로 명명되는 한국현대사의 정치적 비극에서 피해자로 귀결될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그러나 김성훈 소설이 힘을 발휘하는 지점은 ‘홍콩빠’를 비롯한 마산자유무역지구 일대를 해방 공간으로 만드는 이곳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연대의 장면에 있다. 다음의 인용문은 김명자가 아들 또래의 노동자 ‘육손이’를 자기 자식처럼 여기면서 보호하고, 그가 국가 폭력의 희생제물로 전락하는 순간을 막아서는 장면이다. 저 멀리 호각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김명자의 가슴팍에는 비가 흠뻑 젖었고 바지단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런데도 김명자는 육손이가 길거리에서 몰매는 맞지 않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옴마야. 점마 일 내것다 아입니꺼.” 김명자는 육손이에게 허둥지둥 다가가 포대기 감싸듯 그를 끌어 안았다. 옷을 적신 비 때문에 서늘한 기운이 김명자의 품에 달려들었다. 그런데도 육손이의 입에서 흘리는 몸 냄새는 김명자의 얼굴에 닿아 체온을 데웠다. “불 끄입시더. 우리! 아, 저…우리 아, 얼굴 별빛에도 비추면 안 되입니더. 불 끄입시더. 이모들이요. 이 야, 어린 것 맨상부터 가리입시더. 퍼뜩 안 하고 뭐하십니꺼. 불 꺼!” 김명자는 기운을 뻗쳐 소리쳤다. 홍콩빠의 불빛이 하나, 둘 소등됐다. 이윽고 마산 시내 야경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홍콩빠 거리가 칠흑처럼 깜깜해졌다. 비에 젖은 사람들의 수선스러운 움직임이 육손이를 향해 동심원을 그리며 모여들었다. 하늘에서 구름에 가린 조약돌 같은 별이 바다에 떨어져 파문을 일으키는 것처럼 사람들은 스크럼을 짰다. (「홍콩빠 이모」, 100~101쪽) 마산자유무역지구의 화려한 야경을 칠흑으로 변신시키는 “불 꺼!”라는 외침은 경제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은폐되는 국가폭력을 일시 정지시켰다. 또 김명자를 비롯한 홍콩빠 사람들의 “스크럼”은 김성훈의 작업이 기입하려고 하는 무조건적 환대와 자기희생의 윤리를 상징한다. 따라서 이 장면은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면서 어두운 시대의 좌절을 이겨내는 강력한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 아마도 이 환대의 자리에 「길목의 무늬」에 등장한 ‘달순 엄마’와 ‘아버지’와 같은 사람들이 함께 있지 말라는 법이 없다.김성훈 소설집의 해설을 쓰고서 한 달 남짓의 시간이 흐른 후인 2024년 12월 어느 날 계엄 사태가 발생했다. 숨죽이며 상황의 흐름을 응시하던 그 몇 시간 동안 우리는 국회와 그 인근의 거리에서 계엄군을 몸으로 막아선 시민들을 보았다. 그들이 벌어준 30여 분의 시간이 한국사회를 수렁에서 건져냈다. 그들의 신체가 맞닿은 스크럼은 그날 그 시간 그 장소만이 아니라 1980년의 광주와 1987년의 시청 광장과도 맞닿아 있었다. 그 스크럼과 연대는 오랜 시간 동안 우리 사회가 지녔던 어느 도시에 대한 부채를 한꺼번에 갚아준 장면이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한강 작가의 질문이 증명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한국현대사를 소환하면서 2024년에 쓰인 김성훈의 소설들이 뒤늦은 첨언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또한 증명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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