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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시작 | 2024년 가을호(제89호)

이별의 긍정과 죽음과의 동행 ― 김경수 시집, 『이야기와 놀다』, 천년의시작, 2024./이명윤 시집, 『이것은 농담에 가깝습니다』, 걷는 사람, 2024.

이성혁 문학평론

2003년 <대한매일신문>(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평론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저서로는 불꽃과 트임, 불화의 상상력과 기억의 시학, 서정시와 실재, 미래의 시를 향하여, 모더니티에 대항하는 역린, 사랑은 왜 가능한가, 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시, 사건, 역사, 이상 시문학의 미적 근대성과 한국 근대문학의 자장들 등이 있다.


1

  김경수, 이명윤 두 분의 신작 시집을 읽으면서, 시인은 잘 말하는 사람 이전에 잘 듣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김경수의 신작 시집 『이야기와 놀다』의 첫 머리에 실린 시는 표제작 「이야기와 놀다」인데, 제목을 보면 짐작할 수 있듯이 삶에서 이야기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 말하는 시다. 하나 이 시는 타인에게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는 타자가 발하는 이야기를 잘 듣고 이에 충실하게 반응해야 한다. 그런데 김경수 시인의 ‘이야기’란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이야기와는 다른 면이 있다. 그는 사물을 포함한 세계의 존재자들과 이야기를 나눈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즉 저 하늘의 별과도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 다시 말해 별이 말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야 “이야기와 놀” 수 있다. 힌편, 이명윤 시인의 신작 시집 『이것은 농담에 가깝습니다』의 첫 머리 시는 「귀」다. 이 시는 죽음 직후에도 귀는 얼마 동안 “신기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죽음 이후에도 “저 홀로 남아 도둑고양이처럼 세상을 엿듣고 있”는 ‘귀’. 이 죽은 자의 ‘귀’에 대한 시를 시인이 시집 첫 머리에 실은 이유는, 이 ‘귀’처럼 죽음에 이르기까지도 세상일들을 엿듣는 일이 이번 시집에서 전개한 자신의 시작(詩作)의 핵심임을 독자에게 미리 알려주기 위함 아닐까 한다.


  그런데 김경수 시인이 주로 이야기를 듣는다면, 이명윤 시인은 온갖 세상의 소리들을 듣고자 한다. 이야기란 행위 주체가 있고 사건의 진행이 있다. 어떤 별이 이야기를 한다면, 그 별이 살아온 어떤 내력을 이야기한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명윤 시인이 듣는 건 어떤 소리다. 죽은 자를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 같은 것. 그래서 두 시인은 세계가 발하는 말을 잘 듣고자 하면서도, 듣고자 하는 태도라든지 들은 내용을 시화詩化하는 방식엔 차이가 있다. 이 차이가 두 시인의 시 세계에 고유성을 형성할 테다. 김경수 시인은 세계의 사물들이 말하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골똘하게 대상을 응시하고 그 대상에 대해 사유한다. 이명윤 시인은 어떤 시적 대상-사물만이 아니라 사태도 포함한-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 대상이 표출하는 소리를 포착하고 이 소리의 표출을 대상의 묘사를 통해 표현한다. 김경수 시인의 시는 세계와 대화적 관계를 가지면서도 말하는 방식은 잠언풍이다. 대상이 발하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해 사유해야 하고, 이 사유의 특유한 시적 진술이 그의 시의 스타일이다. 이명윤 시인은 주로 시적 대상의 행위를 마음을 담아 묘사하면서 그 묘사에 주관의 개입을 자제한다. 하지만 두 시인 모두 이 세계의 온갖 것들이 발화하는 말들을 들으려는 데에 시작의 출발선을 긋고 있다는 점에선 공통적이다. 그럼, 두 시집이 전해주는 말들이 무엇인지 시집을 구체적으로 읽어보자.


2

  「이야기가 꽃피어 난다」에서 김경수 시인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세상은 이야기로 뒤덮”여 있고 “이야기가 세상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한다. “이야기는 이야기를 낳고 이야기가 세상을 지배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사람살이에서 빚어진 것들만은 아니다. “나무들은 모국어로 된 이야기를 만들어 내며 가지에 꽃을 피웠다”니 말이다. 세계는 이야기를 발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의 존재자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는 문장의 형태로 전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시인은 시의 문장을 쓰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전해주는 “문장이 앉아 있는 나를”(「문장이 나를 쓴다」) 쓴다고 말한다. 시는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다. 가슴으로 쓰는 것도 아니다. “나의 머릿속은 비워져” 가고, “문장이 나를 바라보며 나를 그”리며 시는 이루어진다. 김경수 시인은 인간중심주의적인 창작관에서 벗어나 있다. 그래서 <시인의 말>에서 그는 이 시집에서 “포스트모던한 옷을 입은 서정이 내포된 새로운 시를 표현해” 보고자 했다고 말한 것이리라. 그런데 흥미롭게도 시인은 그렇게 써지는 문장을 ‘물고기 떼’라고 지칭한다.


글자들이 만든 문장은 물고기 떼이다.
마음이 물고기 떼를 끌고 가고
사람들은 물고기들의 유영遊泳을 보고 즐긴다.
문장들이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어떤 의미를 물고
혹은 어떤 지시를 찾아 물살을 헤치며 간다.
수면 가까이 올라와 입을 열고 닫으며 빛나는 은유를 표현하고
푸른 상상력이 모였다가 흩어진다.
문자는 없고 이미지만 있고
사람들은 이미지를 느끼며 논다.

- 「문장은 물고기」 전반부


  글자는 물고기이고 문장은 물고기 떼다. 이 물고기 떼를 몰고 가는 이는 독자의 마음이다. 독자들은 물고기의 유영과 함께 헤엄친다. 물고기처럼 “어떤 의미를 물”거나 “어떤 지시를 찾아 물살을 헤치며” 말이다. 이 물고기들과의 유영은 물고기들이 풍성하게 표현해내는 ‘빛나는 은유’와 ‘푸른 상상력’이 있기에 매력적이다. 여기서는 문장의 해독이 중요하지 않다. “문자는 없고 이미지만 있”다는 의미는 이와 관련된다. 글자들의 모임-물고기 떼-의 움직임-유영-이 표출하는 이미지의 흐름이 ‘이미지-리듬’을 독자가 수영하며 놀 때처럼 느끼도록 해준다. 이 리듬은 ‘시간’을 형성한다. 그래서 시인은 「가난한 시간」에서 “시간은 물고기이다”라고 정의내린 것일 터이다. 물고기의 유영이 리듬을 만들고 시간을 형성한다. 그리고 물고기를 “잡으면 미끄러져 달아나”듯이 시간 역시 붙잡을 수 없다. 이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슬픔이 김경수 시의 저변에 흐르는 서정을 이룬다. 그의 시적 유랑은 “날아간 시간을 찾으러 집 밖을 나”서면서 시작된다. 슬프게도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으나, 다시 말해 “시간은 항상 헤어질 준비가 되어 있”으나, “시간을 만나는 일은 아름다운 일”인 것이다. 시간과 만나는 ‘순간’은 있는 것, 그 순간은 곧 지나가버리지만, “순간에서 순간으로 걸어가는 행위가 더 중요”(「대화를 하다」)하다. 또한 시인에 따르면, 이 “순간 속에 있는 간절한 노래가 순간을 영원으로 만”(같은 시)들 수 있다. 그 순간을 영원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선, 노래가, 시가 요구된다.


  이렇듯 『이야기와 놀다』에는 시간에 대한 사색을 펼친 시들이 많다. 이야기는 시간 속에서 전개된다. 이 이야기가 노래가 될 때 지나가버리는 시간은 영원성을 획득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모두 시간의 물결에 휩쓸릴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꽃이 피어나고 지는 순간은 한순간”이듯 “미래도 너무 짧은 한순간”이어서, “시간의 몸통을 끝까지 잡고 있”(「꽃과 인생』)으려고 하지만 말이다. 「새벽 1시의 바닷가」에서의 “바다여, 파도여, 검은 하늘이여, 달이여”라며 “파도와 대화”하려는 화자의 외침은, “운명은 우리의 간절한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기에 터져 나오는 통절한 마음을 표출한다. 그렇게 시간의 흐름은 우리를 우리가 모르는 데로 데려가는데, 우리가 그래도 시간의 몸통을 붙잡는 길이 있긴 하다. 기억이다. 김경수 시인은 「기억은 아름답다」에서 “기억은 손에 잡히지 않는 노래이다”라고 말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노래는 손에 잡히지 않는 순간을 영원으로 승화시킨다. 그 노래의 승화는 기억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기억은 흐르는 시간의 힘에 의해 삶이 기화되는 것을 막아준다. 하여, 기억을 통해 삶은 헛된 것이 아닐 수 있게 된다. 같은 시에서 시인이 “기억함으로써 존엄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리라.


  하지만 뭇 생명들은 결국 목숨을 다하고 사라질 것이다.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김경수 시인은 생각한다. 죽음과 이별을 삶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어쩌면 이별이 영원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리고 삶 자체와 이별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별은 연쇄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별이 이별을 향해 손을 흔”(「이별도 아름다운 꽃이다」)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별의 연쇄적인 만남이란 바로 자연의 위대한 질서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별이 있어야 새로운 만남이 있고, 죽음이 있어야 새로운 탄생도 있다. 죽음과 죽음, 죽음과 삶은 깊은 연계를 맺고 있다(이 삶과 죽음의 연쇄를 통해 세계가 이어진다는 인식을 「따듯한 풍경」은 그야말로 따듯한 시선으로 아름답게 그려낸다). 하여, 시인은 “새가 눈을 감는 것과 꽃잎이 떨어지는 것은/자연 속에서 연결돼 있고/이별은 새로운 만남을 예정한다”(「이별도 아름다운 꽃이다」)고 말한다. 이렇게 이별을 긍정할 때, 삶이 끝나가는 석양을, “꽃이 피면 떨어지고/지는 해는 언제나처럼 산을 넘어가”(「석양에 물들다」)는 이 세계의 시간 질서를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러한 시간 질서를 긍정하면서 긴 시야에서 보면, “절망도 희망의 다른 얼굴에 지나지 않”으며 “슬픔도 기쁨 일상의 이면이었”(같은 시)음을 깨닫게 될 터이다. 또한, 그래서 “평범한 것이 제일 큰 행복이라는 것”도.


  그런데 “시간은 가고 사람들은 가”(같은 시)도 남는 것이 있다. 추억이다. 이 시집에서 가장 서정적인 시 중 한 편인 아래의 추억에 대한 사유를 담은 시는, 이 시집에서 보여주는 김경수 시인의 감성과 시적 사유를 보다 직접적으로, 종합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나는 하나의 이파리가 되어 허공을 떠다닌다.
저녁노을은 추억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오래된 책이다.
책장을 넘기면 먼 곳으로부터 북소리가 들린다.
하늘을 날아다니던 붉은 마차가 산을 넘어가자
죽음의 빛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본다.
결국 나는 허공을 떠도는 시간의 흔적이고
물방울인 내가 언젠가는 강으로 들어갈 것이다.
침묵의 아름다움이 슬픔의 방향이었고
시간은 그 슬픔을 데리고 떠나는 새로운 소식이었고
결코 백발이 되지 않는다.
이별과 이별은 만나서 새로운 시간을 만든다.
물을 마시던 다친 새가 하늘에서 떨어질 때
밤의 따뜻함이 그 종착역이었다.

- 「추억의 냄새」 후반부


  ‘해-붉은 마차’가 산을 넘어가며 나타나는 노을은 ‘밤-죽음’이 올 것임을 알려준다. 노을은 죽음의 빛인 것, 그 빛은 시인이 “언젠가는 강으로 들어갈” ‘물방울’ 같은, “허공을 떠도는 시간의 흔적”임을 말해준다. 그런데 노을은 아름답지 않은가. 죽음, 그 침묵은 아름다워서, 죽음이 가져올 슬픔의 방향은 아름다움을 향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죽음을 통해 “이별과 이별”이 만나면서 “새로운 시간”은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니 이별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도착할 ‘밤의 종착역’은 따듯한 곳일 테니까.


3

  1절에서 언급했듯이, 이명윤 시인은 귀의 역능을 믿는 시인이다. 죽음 직후에도 소리를 듣는 귀의 역능. 그는 잘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귀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이것은 농담에 가깝습니다』에서 그는 어떤 소리를 듣고 있는가. 배고파서 우는지, 새끼를 찾느라 우는지 고라니가 사람처럼 우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고라니가 우는 저녁」), “혁명은 심장에 있다”는 구절이 담긴 “시를 쓴 미얀마의 한 시인이” “장기가 모두 적출되고 심장이 사라진 채/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사라진 심장」)는 처참하고 슬픈 소식을 듣기도 한다. 시인의 귀에는 “몸이 아파” “울어도 소용없”을 외국인 노동자 ‘하셉’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열아홉 나이에 처형장 가”(「오빠들이 좋아 산동입니다」)야 했던 ‘여순사건 희생자’의 노래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세월호 참사에서 희생된 학생들의 엄마들이 식당에 모여 단체 사진을 보며 “여기 있네, 여기 있네”(「목련」)라며 자기 아이의 얼굴을 발견하는 엄마들의 목소리를 듣기도 한다. 이명윤 시인은 역사가 묻어버리거나 사회가 신경을 쓰지 않거나 세월이 잊은 이들의 삶이 내는 소리들을 듣고는 이들이 사는 삶을 찾아 그 단면을 묘사한다. 아직 리얼리즘은 죽을 수 없다는 듯이. 이 세상엔 여전히 아픈 사람들이 너무 많지만 세상은 이에 무심하기에, 시인은 자신이라도 아픈 이들이 내는 소리를 듣고 이들의 삶을 조명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테다.


  그런데 이 시집에서 집중 조명되는 시적 대상이 있다. 가난한 노인들이 그 대상이다. 독거노인(「독거노인이 사는 집」)이나 치매에 걸린 노인(「완벽한 계절」), 이 시대에 여전히 연탄을 보급 받으며 겨울을 나거나(「재래식 무기」) 복지과를 드나들어야 하는 노인(「복지과 가는 길」) 등이 이 시집에 등장한다. 한국 사회에서 노인들 중 많은 이들이 가장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가난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시인은 이들이 표출하는 소리-한국 사회에서 잘 듣고 있지 않는-를 듣고는 이들의 모습을 따듯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예를 들면, 「독거노인이 사는 집」에서는 “복지사가 내뱉은 한마디에” “느닷없이 울음을 터뜨”리는 할머니가 묘사된다. 그런데 시인은 이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이 할머니의 울음에 허름한 집에 있는 옛 사물들이 “노인을 향해 모여들어 펑펑, 서럽게 우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 시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려야 했던 할머니의 사정에 시인의 감성과 상상력을 가미하여 노인이 품고 있었던 슬픔을 증폭하여 드러낸 것이다. 시인이 조명하는 노인들은 긴 세월 힘겹게 살아온 후 남은 건 빈곤과 곤궁을 살고 있는 이들이다. 삶이 한없는 슬픔으로 마무리되고 있는 노인들. 살아갈 날이 많지 않은 이들에 대한 시인의 주목은, 그들을 감싸기 시작한 죽음을 그려내는 데로 시인을 이끌기도 한다.


갓길로 등 굽은 노인이 걸어오는데요
어떤 슬픔은 녹이 슬어
다시 펼 수가 없습니다
먼 곳에서부터 달라붙는 죽음을
쿡쿡 누르며 걸어오는 지팡이
둘이 오래된 친구처럼 다정합니다
서로의 그림자를 밟던 걸음이
개나리와 손잡고 피어나는 봄날
한 줄로 그어 놓은 공중의 길
당신은 버스 창가에 앉아
지상을 보고 있네요
풀숲 위로 손 하나가 날아오릅니다
손바닥을 접었다 펼칠 때마다
웃는 얼굴이 뭉텅뭉텅 지워집니다
손이 마치 지우개 같습니다
악수란 그런 것이겠지요

- 「나비」 후반부


  ‘상가 다녀오는 길’에 어떤 등 굽은 노인을 보면서, 시인은 그 노인에게 달라붙으려 하는 죽음”을 포착한다. 그 노인에게 슬픔은 오래 달라붙어 있어서 녹이 슨 정도다. 이 슬픔과 더불어 죽음도 노인에게 달라붙으려고 지하에서 올라오고 있는데, 노인은 겨우 지팡이로 그 죽음을 “쿡쿡 누르”고 있다. 지팡이만이 그의 ‘오래된 친구’인 것이다. 시인은 봄날 피어나는 개나리와 노인을 대조하면서 이승과 저승을 넘나든다는 ‘나비’를 생각한다. 새로 태어난 저 개나리가 도리어 노인이 저승으로 가는 길을 인도하는 노란 나비로 느껴졌던 것이겠다. 죽음에 대한 시인의 곡진한 마음은 「곡소리」에서도 보인다. 시인은 살아있는 자가 죽은 자에게 마지막으로 보내는 소리인 곡소리를 들으며 그 소리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곡소리를 하는 시간은 “미처 남기지 못했던 말들이/꽃잎처럼 화르르 흩날리는 시간”이며, 그 소리는 “울컥울컥 기억을 찢고 가파르게 쏟아지는 울음 줄기”다. 이러한 시편들을 보면, 이명윤 시인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드러나는 슬픔의 표현들에 대해 마음을 다해 공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게 죽음은 삶에서 제거되어야 할 무엇이 아니다. 산 자들의 세계는 죽음을 껴안고 죽음이 가져오는 슬픔을 온전히 받아 안아야 한다는 것, 그는 죽음으로 인한 슬픔으로 젖어든 세계를 자신의 시에 묘사하면서 그러한 과제를 수행한다. 나아가 그는 죽은 자의 목소리로 죽음 자체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함께 누워 있으니
비로소 운명이란 말이 완전해집니다

당신을 향한 모든 절망의 말들이 내게로 와
흰 눈처럼 쌓이는군요
나는 철없는 신부처럼 아름다운
죽음을 얻어 살아 있습니다

(중 략)

이것은 농담에 가깝습니다
나는 나로부터 멀리멀리 걸어가야 합니다
자꾸만 삶을 향해 흔들리는 나를 잊으려
당신을 따뜻하게 안습니다

그러니까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죽음이 슬픔을 우아하게 맞이하도록,

태도는 끝까지 엄숙하게,

- 「수의」 부분


  화자는 지금 방금 죽음을 맞이한 자로 보인다. 그가 말하는 “함께 누워 있”는 이인 ‘당신’은, “비로소 운명이란 말이 완전해”졌다는 그 다음 문장을 보면 죽음 자체라고 읽혀지기에. 살아 있을 때 죽음을 “향한 모든 절망의 말들이” 화자에게 “돌아와 흰 눈처럼 쌓”인다는 표현은 이제 절망의 끝인 죽음이 화자의 것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막 죽었고, 그리하여 첫날밤 신부가 신랑을 껴안는 것처럼 화자는 ‘당신-죽음’을 “따뜻하게 안”게 되었다. 죽음을 맞은 화자는 이제 삶으로부터, 즉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리멀리 걸어가야” 하며, “삶을 향해 흔들리는 나를 잊”기 위해서는 처녀 시절과 단절하듯이 ‘죽음-당신’을 안아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죽음은 삶의 편에서 보면 슬픈 일이긴 하지만 낙담할 일은 아니다. 죽음은 막 결혼한 신부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듯이 죽음의 삶이 새로이 시작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은 신부처럼 아름답기도 한 것, 하여 시인은 “죽음이 슬픔을 우아하게 맞이”해야 한다고 말한다. 시집 제목이기도 한 “이것은 농담에 가깝습니다”라는 문장은,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일어나는 죽음 이후의 사태를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말자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삶의 세계가 죽음과 함께 가듯이, “죽음을 얻어 살아 있”는 죽음의 세계도 삶과 함께 간다.


  이렇듯 이명윤 시인은 죽음과 삶의 경직된 경계선을 유연하게 바꾼다. 삶과 죽음 또는 존재와 무의 경계가 모호한 존재자가 있으니, 「눈사람」에 등장하는 ‘눈사람’이 그러한 존재자다. 눈사람은 “없는 사람”이다. “흰 눈이 내리고” “신이 나서” 우리가 만든 “없는 사람”, 눈사람. 이 “없는 사람”은 홀로 서서 노래를 부르면서 “얼굴과 심장이 흘러내리며 비로소” 우리를 향해 웃곤 했다고. 물론 이 눈사람은 “곧 마주칠 햇살에 금방 녹아 버릴 테”지만, 시인에 따르면 그럼으로써 “그렇게 없는 사람은/처음부터 세상에 없었던 사람으로/눈부시게 완성”된다. 이러한 눈사람은 어쩌면 삶의 본질을 말해주는 사람 아니겠는가. 우리의 삶 역시 결국 눈사람처럼 녹아 없어질 테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사라짐으로써 우리의 삶 역시 운명적으로 완성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완성 이후에 새로운 차원의 세계, 죽음 이후의 세계를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기 홀로 사라지며 노래 부르는 눈사람이야말로 삶의 본질을 본질 그대로 드러내며 사라지는 이라고 하겠다. 그 존재자는 “얼굴과 심장이 흘러내리며” 우리에게 말을 건다. 이 눈사람을 ‘시’라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 다시 말해 이명윤 시인이 쓰고자 하는 시는 저 삶의 본질을 드러내며 사라지는 눈사람과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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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소설은 어떤 패배를 예정하고 있다 Day 9200 서울 1 이것은 여행에 관한 기록이다. 하지만 인생에 여행 아닌 것이 존재할 수 있나? 2 이 글을 쓰고 있는 건 2024년 9월 6일 금요일이다. 그다음 문장을 쓰고 있는 건 10월 26일 토요일이다. 나는 몇 달째 여기까지만 쓰고 멈춰 있다. 쓰다가 말다가, 썼다가 지웠다가. 나는 이제 어떤 여행에 관해 쓰려는 참이다. - 「나이트 트레인」, 372-373쪽. 문지혁의 소설 「나이트 트레인」(『현대문학』, 2025.1.)은 ‘소설 쓰기의 소설화’라는 익숙한 서사 문법 위에서 시작된다. 소설은 허구적 세계를 구축하는 일이지만, 소설가 자신의 삶이라는 단단한 토양 없이는 온전히 생육할 수 없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자전적 삶을 되짚어 그로부터 허구의 세계를 이끌어내는 일은, 소설을 쓰는 이라면 누구나 거칠 수밖에 없는 통과의례이다. 소설 「나이트 트레인」 역시 자전적 성격이 매우 뚜렷한 작품이다. 아니, 그렇게 보인다. 98학번, 남자, 소설가. 고작 이 세 개의 이력만으로도 우리는 이 소설의 화자인 ‘나’가 소설가 문지혁 자신일 것이라고 바로 예측하고, 그대로 긍정해버린다. 그 결과 이 글은 한 남자가 오랜 기억으로부터 끄집어낸 ‘사실’과 그로부터 촉발된 ‘진실’에 대한 기록이라고 인지된다.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이다. 독자가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나’에게 너무나 빠르게 감정이입 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소설 쓰기의 소설화’는 대단히 전략적이다. 소설을 읽는 과정은 일종의 줄다리기 같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고자 하는 독자와 그러한 독자를 자기 세계 속에 끌어들이고자 하는 소설가. 그런데 ‘소설 쓰기’라는 과정이 노출되는 순간, 그 팽팽한 긴장은 이완된다. 지금 읽고 있는 소설이,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과정 그 자체임을 받아들이는 순간, 독자는 순식간에 무력해지기 때문이다. 고작 두 문장을 쓰는 데 무려 한 달 열흘의 시간을 허비했다고 말하는 이 소설 속의 화자는, 그것을 너무나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그는 한 단락을 넘기기 전에 이미 승기를 잡았다. 이 글을 쓰는 필자 역시 소설을 읽다 말고, 작가 문지혁의 이력부터 다시 확인해 봤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독자의 예정된 패배, 그것은 이 소설을 이끄는 첫 번째 전제가 된다. 소설 속의 ‘나’가 소설가 문지혁일 거라고 믿는 순간, 우리는 소설이 아닌 ‘나’의 솔직한 여행기(억)를 읽는다는 것에 저절로 동의하게 되는 것이다. 2. 세 겹의 시간, 그의 여행은 시작되지 않았다 「나이트 트레인」에 서술된 시간은 세 겹의 층위를 가진다. 첫째는 소설을 쓰기 시작해서 그것을 완성하기까지 소설가인 ‘나’의 시간, 바로 DAY 9200~9286의 시간이다. 두 번째는 여행기를 표방하는 이 소설의 실질적인 서술 시간인 1999년, 21일 간의 유럽 여행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그 여행 기간 동안 ‘나’가 썼던 소설 속의 시간이다. 이 세 겹의 시간은 이 소설을 액자 속에 들어 있는 또 다른 액자까지, 세 개의 서사적 층위를 이루며 이어진다. 이 세 개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동력은 ‘나’와 관련된 세 명의 ‘그녀’이다. 첫 번째 ‘그녀’는 전 여친 O. 그녀는 ‘나’가 이 여행을 시작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다.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그녀가 ‘나’에게 은반지를 선물하며 이별을 고한 것이 여행의 실질적 출발점이니 말이다. 그녀의 여행을 되짚어가는 과정은, 결국 그녀가 자신에게 이별을 고한 이유를 찾아내고자 함이다. 두 번째 ‘그녀’는 여행에서 만난 E. 같은 대학에 다니는 미대생 E는 ‘나’가 곤란에 처할 때마다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스스로 만든 고립에서 벗어나게 한다. 어쩌면 그녀야말로 ‘나’가 이 여행에서 방향을 잃지 않게 만들어주는 나침반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세 번째 ‘그녀’는 암스테르담에서 프라하로 넘어가는 나이트 트레인에서 만난 전수진. 그녀는 이 소설의 제목이 가진 의미를 환기하는 동시에, ‘나’가 이 소설을 쓰게 만든 결정적인 동력이다. 또한 이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이름으로 언급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는 그녀에게 더 주목하게 되는 효과를 야기한다. 사실 전수진은 ‘나’의 불안을 환기하는 존재였다. 그녀와 마주친 순간들은, 언제나 ‘나’가 가장 절망하는 때였기 때문이다. 수진을 처음 마주쳤던 야간 열차 안에서 ‘나’는 술 취한 독일인 프란츠에게 소매치기로 몰려 고초를 겪었다. 두 번째 만남 역시 유쾌하지 않았다. O에게 받은 은반지를 버리고자 탔던 빈의 대관람차에서, ‘나’는 관광객들의 사진을 찍어주다 기회를 놓치고 만다. 스스로를 위한 최종적 애도마저 실패하고 내렸을 때, 운명처럼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일종의 ‘흔들다리 효과’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혼자만의 이별 여행에서 가장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그래서 자신의 내면에 있던 불안에 분출되는 바로 그 순간. 수진이 그 자리에 있었다. ‘나’가 조금만 시선을 돌렸다면, 이 여행은 이별이 아닌 전수진과의 만남을 위한 것으로 전환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연은 운명이 되지 못했다. 그들의 여정은 잠시 교차되었지만, 일치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패키지 여행객인 '나'와 자유여행객인 전수진 사이의 우연은 거기서 끝났다. 떠난 기회를 되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O와의 이별도, 수진과의 새로운 만남도 완성하지 못한 채 남은 여행을 채운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소설쓰기’였다. ‘나’는 저도 모르게 전수진을 찾으며 자신의 습작을 이어나간다. 그리고 그것은 액자 안의 또 다른 액자로서, 세 겹의 시간적 층위를 이루며 서사를 완성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깨닫는다. 이별을 고하는 O에게 이유를 묻지 못했던 것도, 여정을 미뤄 자신과 하루를 더 여행하자는 수진의 권유를 거부했던 것도, 사실은 온전히 그의 선택이었음을. 그러므로 이별은 갑작스럽게 다가온 충격이 아니라, ‘나’ 자신도 이미 예감하고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던 필연적 결과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비행기 안에서 그는 ‘소설 쓰기’라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묵혀둔 이별 여행을 시작한다. 수와 진이 햄버거 가게에서 일어날 즈음, 한강 잠수교에서는 빗길에 미끄러진 승용차 한 대가 중앙선을 넘어 마주 오는 차를 들이받고 강으로 뛰어들었다. 모두 네 명이 숨졌고 여섯 대의 차가 부서졌으며 부근의 교통을 세 시간이나 마비시킨 대형 사고였다. 그러나 수와 진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고, 그것은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고 있는 그들의 옛 애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가 사랑했던 그는 학교 도서관에서 잘 읽히지 않는 책을 앞에 놓아둔 채 비 오는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고 있었고, 진이 사랑했던 그녀는 별러왔던 사랑니를 뽑고는 병원 정류장에서 우산을 든 채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 「나이트 트레인」, 443쪽. 3. 고잉 홈, 여행의 시작과 끝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1'로 번호 매겨진 서술이 시작되기 전, 서사에 집중하는 독자가 순간적으로 놓치기 쉬운 그 날짜. 바로 ‘DAY 9200 서울’ 말이다. 거기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 여행 아닌 것이 없다는 그의 말은, 그의 서사 전체가 하나의 여행기임을 보여주는 한편, 그의 여행이 이 소설을 쓰기 전까지 종료되지 않았음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25년 전 3주간의 여행을 기록하고 있음에도 그의 서사가 ‘DAY 9200’에서 시작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사실 이 소설은, 아직 끝나지 않은 여행을 현재진행형으로 업로드 하는 과정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나’는 무려 9200일 동안 지속된 여행기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소설의 첫 문장을 뒤집어 보자. 그는 자신의 소설이 “여행에 관한 기록”이라고 쓰면서 “인생에 여행이 아닌 것이 존재할 수 있나?”라는 질문을 덧붙였다. 그 답은 명확하다. 그의 소설은 여행에 관한 기록이 아니다. 여행 아닌 인생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여행기를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는, 이것이 여행인 동시에 그저 여행이라는 특별한 순간이나 장소에 국한할 수 없는 인생의 모든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지점이다.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소설의 끝, ‘DAY 9286 서울’이다. “그때 정말로 유럽 여행 왜 왔던 거야?” 아내는 씩 웃더니 내 팔에서 손을 뺀다. 그리고 아파트 입구를 향해 먼저 걷는다. 나는 동그란 가로등 불빛을 벗어나 그림자 속으로 멀어지는 E, 아니 은혜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뒤돌아 한 번 더 수거장으로 향한다. 반지를 버리고, 이 여행을 끝내기 위해. - 「나이트 트레인」, 451쪽. 25년 전에 시작되어 9286일 만에 마침표를 찍은 그의 여행, 그 종착점은 어디인가? 분리수거를 하며 아내와 함께 하는 일상, 바로 그곳이다. 거기에서 ‘나’는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는 스스로의 현재를 마주한다. 그것을 환기하는 것은 더 이상 E라는 이니셜로 호명되지 않는 그의 아내 은혜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깨닫는다. 오래전 시작된 그 여행의 진짜 목적, 그것은 바로 ‘고잉 홈’이었음을.

월간 현대문학 류수연 문지혁나이트트레인여행이별일상 2025
전철희 아름다운 이별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가 자주 언급했던 사례 하나. 어느 날 야외에서 우연히 두 사람이 만났다. 한 사람은 반가워서 시간이 있으면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상대방도 동의했다. 그 순간 갑자기 집의 지붕이 떨어져서 상대방은 죽었다. 그는 자기가 곧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저녁약속에 응한 셈이었다. 그는 이렇게 답해야했다. “나는 자네와 저녁식사를 하고 싶네. 하지만 나는 언제 죽을지 알 수 없군. 만약 내가 저녁까지 살아있다면 자네와 함께 식사를 하겠네.” 물론 이런 식으로 말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언제 어디서든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사실을 망각해야만 평안한 삶을 유지 가능하다. 갑작스러운 죽음의 확률이 너무 낮아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복권 1등에 당첨될 확률은 돌연사의 확률보다 높지 않다고 하는데, 인생역전을 꿈꾸며 복권을 구매하는 사람은 꽤 있지만 자신의 삶이 지금 당장이라도 끝날 수 있다는 인식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가 죽음을 망각하는 까닭은, 어쩌면 그런 망각을 통해서만 의미 있는 인생을 영위할 수 있으리라는 직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각각 자신의 목표를 세우고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존재이다. 가령 회사원들이 힘든 노동시간을 견뎌내는 것은, 월급을 받으면 자기가 원하는 물건을 구매하고 미래를 위한 저축을 할 수도 있으리라는 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월급을 받기도 전에 갑자기 교통사고라든가 무차별 칼부림 같은 사건이 생겨서 죽을 수 있다면 굳이 계획을 세워서 미래를 설계하고 사회생활을 이어나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허나 인간이 누구나 돌연사할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미래를 대비하지 않는다면 내가 살아남을 경우 생활을 이어갈 수 없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인간이 죽음의 가능성을 망각하게 된 것은 어쩌면 사회생활을위한 자위이자 자연스러운 ‘진화’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죽음이 대면하기 싫은 끔찍한 사건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종종 불연 듯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살다보면 타인의 죽음을 마주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죽음은 삶의 반대말이기도 하니 삶을 생각하다 보면 죽음에 대한 사유가 시작되기도 한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생각을 오래하면 인생이 허무해질 수 있으니 보통의 사람들은 다시금 죽음을 망각하려는 무의식을 갖는다. 문학은 우리가 마땅히 생각해봤고 생각해볼 만한 문제를 구체화시키는 창구이다. 죽음 또한 문학이 다루는 주제로 자주 차용된다. 이번에 김지녀 시인이 발표한 작품 「죽음의 방문」도 그런 경우로 볼 수 있다. 물 속에 잠긴 사람의 입에서 올라오는 공기방울처럼 퐁퐁, 퐁 만들어졌다 터지는 모양은 말이 아니었으므로 손짓 하나 하나에 힘이 들어갔다 동공이 커지고 모든 계절이 한 장면에 사로잡혔다 타이어의 공기가 서서히 빠져나가듯 결국 한쪽으로 기울어 멈추었을 때 고요는 막 살점이 떨어져 나간 직후 피조차 나오지 않는 푹 패인 자리 다 없어지고 치아만 남아 돌아 온 사람이 지킨 것을 아내와 딸의 제삿날이 같은 남편의 밤을 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며 배회하는 개처럼 컹컹 컹, 한참을 짖다 돌아선다는 것을 혼자 걸어가다 발을 헛딛어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죽을 뻔했네 갑자기 튀어 나온 말에 내 손을 잡아주지 않고 조용히 옆에서 보폭을 맞추며 나와 함께 걷고 있는 죽음에 대해 죽은 자들은 죽음을 말하지 않고 아파하지 않고 참혹은 아무 때나 초인종을 누르고 나를 방문했다 그때마다 아무도 없는 것처럼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들키지 않고 죽음처럼 나는 잘 웅크려 있다 아침인지 저녁인지 헷갈려 하며 일어난 날, 손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고 물에 젖은 것처럼 다시 잠들고 싶은 날에, 「죽음의 방문」 전문 작품의 전반부가 누군가의 죽음을 묘사한다면 후반부는 화자의 상념을 담아낸 작품이다. 전반부에서 죽어가는 사람은, 아마도 물에 빠져서 익사하는 것 같은데, 말을 뱉어낼 순 없는 상태로 여러 몸짓을 해보다가 결국 조금씩 힘을 잃어가게 된다. 과연 죽음이란 살아있던 사람이 말을 잃고 신체를 건사할 수 없게 되면서 정적만을 남기는 사건이기도 할 것이다. 살아 있을 때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활달하게 몸을 움직이며 주변의 사람들과 이런저런 관계를 맺기도 했을 사람이 죽음을 맞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나는 사후세계가 존재하는지의 여부라든가 죽음 이후 영혼이 가는 곳이 있는지의 문제를 모르겠지만, 어쨌든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타인의 죽음은 하나의 존재가 무(無)로 형질 전환되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앞서 인용한 작품은 그런 죽음의 광경을 그려내다가 중반부에 이면 화자는 갑자기 “나”의 경험을 고백하게 된다. 혼자 걷다가 넘어지고 “죽을 뻔했네”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이다. 누구나 살다보면 그와 같이 “죽을 뻔”한 경험을 한다. 정말 죽음의 위험성을 실감하는 상황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갑작스러운 신변의 위기는 생기기 마련이고, 그런 때면 한국인들은 “죽을 뻔했네”라는 말을 관용적으로 사용한다. 이런 표현이 사용된다는 것은 우리가 사망가능성을 불안하게 인식한다는 점을 암시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보통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생각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죽은 자들은 죽음을 말하지 않”는다.(더 정확히 말하면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런데 이 시편의 화자는 그 순간부터 자신이 죽음과 가까이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도 죽음을 기꺼이 환영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아마 타인의) 죽음을 떠올리고 참혹해지려는 마음이 생길 때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움츠린다. 역설적인 것은 그렇게 웅크려 있는 모습이 약간은 죽음에 가까워진 상태 같다는 점이다. 죽음을 회피하거나 망각하려는 시도는 무용한 것이고 모든 인간은 죽음의 근처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뜻일까? 다만 이 작품이 마냥 죽음의 편재성을 확인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것 같지는 않다. 앞서 언급했듯 죽음은 절대적인 무(無)를 뜻한다. 죽음은 인간이 세상에 부여했던 모든 의미를 파괴하는 블랙홀이다. 그래서 “나”와 죽음이 공존한다는 이 작품의 발상은 우울하고 섬뜩한 묵시록적 예감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무의미한 존재일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표상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물론 김지녀 시인의 작품이 늘상 이런 죽음과 무(無)에 대한 형이상학적 “깨달음”을 풀어낸다는 말은 아니다. 이 시인의 작품을 읽어왔다거나 이번 <신작소시집>을 본 독자들이라면, 그녀의 시를 특징짓는 것은 고적한 이미지 속에서 따뜻한 감성을 풀어내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죽음의 방문」에 관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것은, 이 작품이 다른 작품들의 돌올한 감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녁의 바다는 주인 아닌 사람을 밀쳐냅니다 호흡을 알기 때문이죠 우리는 노을에서 온 사람입니다 바다로 걸어들어가는 동안 무뎌지는 발자국은 시든 상추의 내면과 같아요 씹을 때 소리를 잘 들어보세요 우리는 상추에서 온 사람입니다 상추의 영혼은 열 시간이 넘도록 꿈을 꾸고 있습니다 호흡이 불규칙해서 바닥이 자주 들썩입니다 바닥에 입을 맞춥니다 바다와 같은 냄새가 나서 밀쳐냈습니다 나는 바닥에서 온 사람입니다 모래를 한 줌 잡았다 놓아줍니다 주인처럼 집을 나섰는데 집을 잃은 사람들이 조용히 모여 바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떤 소리를 내며 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노을로 번지느라 우리는 소리를 잃은 사람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 생각이 무거워서 당신의 의자에 좀 앉겠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사람」 전문 인용작의 제목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은 화자가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런데 작품을 찬찬히 읽어보면 사랑을 희구하는 연가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이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의 상태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에 가깝게 보인다. 작중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우리(나)”가 어떤 존재라는 반복적 언명이다. 화자는 자신이 노을이라고 했다가, “상추에서 온 사람”이라고 했다가, “바닥에서 온 사람”을 자처한다. 노을이 낮과 밤 사이(조금 낭만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개와 늑대의 시간”)에 아름답게 생겨났다가 휘발되는 것이라면, 상추는 아삭거리는 내면을 가지고 계속해서 ‘꿈’을 꾸는 상태에 있는 물상이고, “바닥에서 온 사람”이라는 말은 자신이 이내 흩어져버릴 모래 같은 존재임을 암시한다. 이런 표현들을 얽어놓음으로써 인용한 작품은 세상의 어딘가에서 고독한 꿈을 꾸는 개별적 존재를 형상화해낸다. 화자는 이런 이미지들을 병치한 후 자신이 노을로 번지는 존재이며 또한 “소리를 잃은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고백한다. 소리를 잃었다는 것은 타자와 관계를 맺을 방법이 없어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는 서글픈 표현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화자는 고독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노을, 상추, 모래는 애당초 혼자 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노을은 바다(지평선)와 하늘 사이의 이음새처럼 보이니까 하늘과 바다의 주변에 있는 것이며 공중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덮을 수 있다. 상추는 아마 언젠가 밭에서 자연의 일부로 자라났을 것이며, 바다의 모래 또한 혼자서 존재하진 않는다. 고독한 사람도 자기 자신이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이고 언젠가 만개할 것이라고 믿는다거나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이 언젠가 도래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다면 현재를 견뎌낼 힘이 생길 수 있을지 모른다. 요컨대 「죽음의 방문」이 “나”와 죽음(無)의 근접성을 다룬 시편이었다면,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은 “나”라는 존재가 허무하다는 인식을 기반으로 삼아 “기다림”의 자세를 형상화하고 있다. 두 발상이 무관한 것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상기했듯 죽음은 모든 것을 허무하게 만드는 사건이다. 앞서 언급한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경우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인간은 모든 일이 무의미하게 느낄 수 있다고 평했다. 인간은 각자의 욕망과 계획을 가지고 사는데,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면 굳이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없어진다. 어차피 죽을 것인데 우리가 하고 싶었던 일이라든가 하려던 일들을 구태여 실행으로 옮길 필요가 있겠는가?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교착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단단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종교인이었고 아마 그가 추구한 믿음은 신을 향한 것이었을 확률이 높다. 그런데 꼭 종교적인 믿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무언가에 대한 사랑과 믿음은 분명 인간을 더욱 강한 존재로 만들어준다. 가족, 친구, 연인 등을 사랑할 때 우리의 삶에는 활기가 생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나”의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다는 생각까지 할 지경에 이르렀다면, 그 사랑은 나의 내면을 충만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그렇게 충만한 상태로 살아가려고 할 때에만 인간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고 의미 있는 삶을 이룩할 수 있다고 했다. 삶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만 허무함을 벗어나기 위한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인식은 「아직 오지 않은 사람」에서도 변용되어 드러난다. 이 작품의 화자는 본래 고립감과 외로움을 호소하는 것 같았다. 그런 사유의 기반에는 삶의 허무성 내지는 고독함에 대한 성찰이 전제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후반부를 보면 “나”와 세계가 겹쳐지고, 마지막 행에서는 급기야 “당신”의 자리로 가고 싶다는 다짐을 표현하기에 이른다. “나”의 독자성을 확인하기 힘든 악조건 속에서 “당신”으로 표상되는 타자에 대한 사유로 넘어가는 감각... 이것은 물론 김지녀 시인 개인만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아니라고 생각된다. 너무나 오래 전에 나왔지만 지금까지 회자되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라든가 한용운의 『님의 침묵』 같은 시집만 봐도, 극한의 고독에 침윤한 화자가 끝내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를 겸허하게 드러낸다. 이렇듯 고독한 세계에서 사랑이 피어나는 사람의 내면을 현시하는 것이 서정시의 역할이라면, 김지녀의 작품은 그런 장르적 책무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는 평가 또한 가능할 것이다. 이번에 <기발표작>으로 소개된 작품 「행운목」과 「바라보는 화창」의 경우에도 내밀한 고독의 어투로 타자(세계)와의 관계를 추구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평할 수 있겠는데, 이 작품들의 인식과 정서에 대해서도 유사한 설명이 가능할 듯하다. 지금껏 이 글은 김지녀의 시에 대해서 다소 형이상학적인 분석을 시도해보려 했다. 이번 <신작소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에 한해서 이야기한다면 그런 독법이 적당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시 이 시인의 절묘한 감수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작품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화를 내고 울어버린 나만 덩그러니 남았던 적이 이별인지 모르고 이별 앞에서 계속 머뭇거렸던 적이 눈이 내리고, 사람들은 두더지처럼 머리만 내놓고 누구든 무릎에 앉길 바라며 앉았다 일어나 다시 앉았다 떠났던 적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흐르는 음악처럼 프레임 바깥으로 걸어나가 돌아오지 않는 주인공처럼 끝나도 일어나지 않고 앉아 있는 나에게 (중략) 눈이 내리고 사람들이 내 옆을 지나간다 먼저 떨어진 눈이거나 내 뒤에서 떨어지거나 나를 슬쩍 쳐다보는 듯한 눈이 평평한 바닥을 걷고 있어도 발 아래에서 끊긴 지층처럼 어긋났던 적이, 눈이 내리고, 나를 잃어버렸던 적이 (중략) 눈이 내리고 내리고 또 내리고 이 세계가 눈에 덮혀 누구의 발자국인지 모를 것들이 여기저기 어지럽고 너는 나보다 먼저 있었던 시간일지도 나에게 오지 않은 시간일지도 「무효와 침묵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고」 부분 존재론적 고찰을 담은 듯하면서 또한 “너”에 대한 마음을 드러낸 것으로 읽힐 소지가 있는 작품이다. 작중 세계에서는 눈이 내린다. 아마 구름으로부터 파생되었을 눈은 하늘을 부유하다가 바닥에 떨어지고, 밝히거나 녹으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어쩌면 사람들이 눈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그토록 연약하게 명멸하는 존재가 잠시 만들어내는 생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마찬가지로 꺼져가는 촛불이 타오르는 모습은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그런데 이 시의 화자가 지적하듯, 눈은 비록 단명할지언정 세상의 분위기를 바꾼다. 세상에 모종의 느낌을 풍기고 이내 사라져버리는 존재라니, 이것은 정확히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설명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간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하고 타인들과 관계를 맺으며 세계에 흔적을 남긴다. 소수의 위대한 사람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사람이 남기는 흔적은 매우 미약하다. 특히나 인간의 죽음 이후에는 그나마 그가 남겼던 흔적마저 빠르게 소멸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죽음이라는 사건이 도래한 이후의 이야기이다. 어쨌거나 살아있는 사람은 나름의 방식으로 세계와 조응한다. 마치 눈이 언젠가는 녹아버리고 사라질 것이라고 할지라도, 눈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고 그것이 잠시나마 세계에 자취를 남길 수 있는것과 같은 이치이다. ‘세계’라고 말하니까 조금 거창해 보이는데, 모든 인간은 각각의 세계를 갖고 있다. 우리가 세계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우리의 주변을 둘러싼 개별 사람들을 변화시킨다는 의미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사실 죽음이라는 사건을 상정하지 않는다고 치더라도 모든 인간관계는 시한부이다. 언제든 우발적인 조건과 상황에 따라 시작되지만 또 언제든 끝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하나의 관계가 시작되면 서로에 대해서 뭔가 의미 부여를 할 수 있다. 친구에게 “변치 않을 우정”을 맹세하는 사람이 있고, 연인이 생길 때마다 “영원할 사랑”을 약속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장기적으로 본다면 모든 관계는 언젠가 끝이 나게 된다. 인간 자체가 유한한 존재인데 인간끼리의 만남이 영속적이라는 기대는 무망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려 하고 여러 가지 추억을 쌓고는 헤어진다. 어쩌면 이것은 언젠가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힘껏 살아보려고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과 유사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죽음을 경험할 수 없지만(더 정확히 말하면 사후에 자신이 죽었던 경험에 대해 증언할 수 없지만) 살다 보면 이별은 경험할 수 있고 그 경험이 삶에 적잖은 내상을 남기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이별은 피할 수 있는 사건이다.(우리가 누군가를 만나고 마음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아픈 이별도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려 한다. 왜 그럴까? 단순히 헤어짐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믿음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또한 그것은 헤어짐의 아픔은 미래의 일이고 일단은 자신의 소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만남을 지속해보겠다는 무책임한 생각 때문도 않을 수 있다. 죽음은 경험이 될 수 없지만, 이별은 그것 자체로 아름다운 경험이 되어 준다. “아름다운 경험”이라는 것은 행복을 보장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아름답고 감동적이라고 생각하는 예술작품들은 대부분 불행하거나 뭔가가 부족한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모든 면에서 행복한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런 사람의 이야기를 소설이나 시로 쓴다면 무미건조할 것이다. 적당한 결여와 불행을 경험한 사람의 모습은 그러나 아름다운 감동을 줄 수 있다. 왕가위 감독의 로맨스 영화 같은 것을 본 사람이라면,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는 환희의 순간만큼이나 이별의 순간도 아름답게 그려질 수 있음을 익히 느꼈을 것이다. 또한 앞서 언급한 김소월과 한용운을 비롯한 많은 서정시인의 작품이라든가 요즘의 대중가요(발라드)를 경험해본 사람 또한, 이별의 순간이 아름다운 언어들을 직조해낼 수 있음을 알 것이다. 「무효와 침묵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고」는 그런 문제의식을 담은 것으로 보이는데, 과연 이 작품은 인연이 끝나는 순간을 암시하면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흐르는 음악”을 병치시켜 놓기도 했다. 이런 맥락을 전체적으로 살핀 이후에야 우리는 “무효와 침묵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는다는 제목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보통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한다. 그런데 김지녀 시인은 어쩌면 인간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릴 수 있는 죽음이라든가 하나의 만남을 종결시켜버리는 이별 같은 것을 현시하려는 것 같기도 하다. 이번에 발표된 작품들에서 알 수 있듯, 그는 거기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그 아름다움 자체를 통해 하나의 의미가 되고 있다. 무(無)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산출해낸다니, 그야말로 시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다.

계간 딩아돌하 전철희 김지녀이별죽음망각갈등 2025
기혁 동화同化와 견딤, 재현 불가능한 ‘자연미’를 드러내는 두 방식 : 서정화, 『3D 렌티큘러』(천년의시작, 2024) 임경숙, 『가시 많은 생이 맛있다』(천년의시작, 2024)

동화(同化)와 견딤, 재현 불가능한 ‘자연미’를 드러내는 두 방식 - 서정화 시집, 『3D 렌티큘러』, 천년의시작, 2024. - 임경숙 시집, 『가시 많은 생이 맛있다』, 천년의시작, 2024. 기혁  서정화의 『3D 렌티큘러』와 임경숙의 『가시 많은 생이 맛있다』를 읽고 ‘서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시의 본령’ 혹은 학술적으로 합의된 개념이라기보다 정서적 느낌에 가까울 것이다. 난해한 실험성, 자폐적 세계 인식에 따른 파편화와 산문화 경향의 반대편에 선 작품을 언급하기 위해선 진정성과 소통 가능성, 최소한의 리듬감 등을 동시에 충족하는 ‘가정된 일관성’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실험성이 강한 작품의 경우 그 형식에서 첨단의 사회성을 도출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는 반면, ‘서정시’ 혹은 ‘정통 서정시’ 등으로 분류된 작품은 대체로 형식보다 내용을 우선시함으로써 인간(자연)의 본성이나 보편성 등 원론적인 문제를 다룬다. 이는 형식과 내용, 형식과 사회의 불화를 해소된 것으로 간주하는 서정시의 독법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로 인해 개인적 경험과 감상에 머무른다거나, ‘지금, 여기’의 현실과는 거리감을 유지하는 시풍으로 인식되는 경향도 없지 않다. 다만 서정성이 강조된 작품이라 하더라도 내부적으론 ‘가정된 일관성’의 이탈과 유지가 반복적으로 교차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새로운 시적 형식이나 긴장감 있는 표현에 대한 도전 의식이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곧바로 비루한 삶의 슬픔이나 고통의 진정성만을 읽어 낸다면 서정성의 범위 내에서 작동하는 새로운 시도마저 평면화할 우려가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전통 장르인 시조의 형식을 갖춘 서정화의 『3D 렌티큘러』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여는 시로 배치된 「천수암 인생네컷」은 시집의 서문 격으로 ‘자연’이 상실된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접근하고자 하는지 전반적인 의도가 드러난다. 형형색색 태어나는 행리단길 간판들 영원 같은 전경으로 변하고 있을 전생 천 개의 보이지 않는 거룩한 눈 움직이는 손, 전망은 어딘지 신점 같은 면이 있지 문턱 낮은 입구로 통과하는 호기심들 이음매 빠진 시간 앞 네 개의 컷 네게로의 컷, 어둠의 눈 감기 위해 빛의 눈을 떠야 하는 운명도 바꿔 놓을 이미지로 변환하니 이상의 무한을 열어 환해지는 다른 세계 환생한 천수관음보살 수행같이 넓어지는 행렬과 행간 사이 세상과 말을 걸며 압축된 암호를 풀고 나를 올려놓는다 - 「천수암 인생네컷」 전문  인용한 시편의 1수 초장의 “행리단길”에는 ‘수원 행궁동은 점집 타운이었으나 점집이 나간 자리에 다양한 가게들이 입점되었다’는 각주가 붙어 있다. 신과 소통하던 무당이 사라진 자리에 상업적 논리에 따라 존립이 결정되는 ‘맛집’ 등이 들어섰을 저녁 풍경은 시의 창작 동기이자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의 풍경이기도 하다. 사설 조로 늘인 1수 중장에서 시인은 “행리단길”의 “전생”이라 할 수 있는 ‘점집 타운’의 풍경을 겹쳐 봄으로써 “형형색색”인 “간판”의 불빛과 사이사이의 어둠 너머로 “천수관음보살”의 “천 개의 보이지 않는 거룩한 눈”과 “움직이는 손”을 떠올린다. 과거세(過去世) 중생을 구원하던 “천수관음보살”은 신이자 범접할 수 없는 ‘자연’의 일부로서 과거 ‘점집 타운’의 무당을 매개로 공존할 수 있었으나, “인생네컷”을 찍는 방문객들의 “호기심” 앞에선 한낮 미신으로 간주될 뿐이다. ‘자연’에 동화될 수 있었던 마지막 매개체(“이음매”)인 무당이 사라진 시공간 속에서 본성의 박탈과 은폐를 인지하지 못한 계몽된 주체는 통제된 사회가 요구하는 “네 개의 컷”에 맞춰 동일한 셀카를 찍는다. 동시에 구속의 결과물인 “이미지”를 공유하고 재생산함으로써 모든 행위가 자신에게 되돌아오는(“네게로의 컷”) 순환 구조에 갇히고 만다.  여기서 시인은 문명을 비판하거나 도래하지 않는 과거를 추억하는 대신 모호한 전언을 남긴다. 1수 중장의 마지막 문장인 “어둠의 눈 감기 위해 빛의 눈을 떠야 하는 운명도 바꿔 놓을 이미지로 변환하니”에서 시인은 구속의 산물인 ‘셀카’(“이미지”)가 사실상 어둠과 빛의 예술인 사진 작품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점을 상기한다. “행리단길”의 야경 “이미지”에서 과거의 ‘점집 타운’과 “천수관음보살”을 겹쳐 보는 시적 화자(예술가)의 응시는 “이미지” 자체에서 도래한 것이 아니라 계몽 사회에 대한 반성적 태도로 인해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도르노가 언급한 바와 같이, 재현 불가능한 자연의 존재 방식인 ‘자연미’는 예술 작품 속에서 계몽에 대한 반성적 태도를 불러일으키면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자연을 모사한 사진은 그저 사진일 뿐 진정한 ‘자연미’를 담지 못한다. 바꿔 말하면 비록 ‘셀카’라 할지라도 어떻게 향유되느냐에 따라 부여할 만한 가치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천수관음보살”을 떠올리면서 시작된 시적 화자의 자각은 ‘숭고’로 이어진다. “천수관음보살”의 숭고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능력을 보여 주어서가 아니라 그러한 능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인간 스스로 “운명도 바꿔 놓을” 수 있도록 지배권을 내려놓음으로써 발현되는 것이다. 과거세 중생을 구원하는 “천수관음보살”이 미래 어느 시점에서 ‘지금, 여기’를 바라본다면, 구원이란 “이미지”에 의해 자신(의 자연)을 구속할 운명에 놓인 계몽된 주체가 “운명도 바꿔 놓을 이미지로 변환”할 수 있도록 방법을 일깨우는 일과 다르지 않다. 1수 종장의 “이상의 무한을 열어 환해지는 다른 세계”는 앞서 언급한 아도르노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것으로서, 가닿을 수 없는 ‘자연’과 계몽적 주체의 화해가 인공물인 예술 작품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기대와 믿음이 반영된 가상의 영역이다.  이어지는 2수에서 시인은 별다른 부연 없이 3장 전체를 할애해 예술가로서의 각오를 드러내고 있는데 1수에서 전개한 자각의 과정과 호응 관계를 이루려는 의도로 짐작된다. 예술가의 작업이란 결국 “행렬과 행간 사이” 침묵뿐인 “세상”(자연)과의 대화이며 자연의 “압축된 암호”(‘자연미’)는 작두를 탄 무당이 그러하듯 이성과 논리가 아닌 “나를 올려놓”고 대상과 동화됨으로써만 해독의 여지를 갖는다. 말도 되지 않는 말과 함께 언어의 들판을 횡단하면서 시 속에 한참 빠져 말무리 가까이에서 꿈을 꾸었다. 그러나 나의 시는 서툰 말만큼 아직도 미숙한 것임을 깨달았다. 끝없이 펼쳐진 언어의 광야, 그 속에서 말과 시를 구분할 때까지 한 그루 나무가 되고 싶었다. 언어의 뿌리를 내려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말의 나무. 그렇다. 나무의 무덤이 되길 바랐는지도 - 「시인의 말」 부분  하지만 시가 문자를 통해 ‘자연미’를 드러낼 수 있다는 기대와 믿음의 소산이라면 가상의 문제가 발생한다. ‘셀카’가 예술 사진으로 향유될 수 있는 가상의 영역에서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인용한 「시인의 말」에서 드러나듯이 문명 이전과 같은 완전한 동화는 “꿈”에서만 가능하다. 도구화된 일상어를 사용하는 한 “말과 시”를 구분해 내는 일조차 쉽지 않다. “나무가 되고 싶”다는 시인의 바람은 실패를 향한 수많은 시도 속에 잠재된 가능성이므로, “말의 나무” 역시 가상이 현실로 육박할 때의 ‘마법’처럼 휘발하면서 존재할 뿐이다. 그러한 마법의 무대 뒤편에는 무수한 실패로 쌓아 올린 “나무의 무덤”이 버티고 있다. 무력감에 빠질 법도 하지만 시인은 가상과 현실의 괴리를 은폐하는 대신 창작의 과정에 의미를 부여해 “무덤이 되길 바랐는지도” 모른다고 고백한다.  실제로 시집을 살펴보면 ‘불가능한 가능성’에 운명을 내맡긴 자의 허무는 보이지 않는다. AI, 생체공학 등 문명의 발달에 따른 상실된 인간 본성을 다루거나, 자연이 부재한 세계를 채우고 있는 남겨진 존재에 대한 여러 감정을 노출하며 현실을 직시한다. 표제작인 「3D 렌티큘러」를 비롯해 「수상한 푸드 스타일리스트」 「호모 라보란스 칸탄스」 「날아가는 침대처럼」 「Butter Book」 「영화 경로당」 「봄날」 등 시조 장르에서 익숙한 소재와 낯선 소재가 혼재되어 있다. 또한 텍스트의 자리에 특정 기호를 콜라주(collage) 하거나(「휴지통」), 여백의 구분을 회화적으로 활용하는(「평화 인쇄사」) 실험적인 형식도 눈에 띈다. 소재가 혼재된 만큼 다양한 어투를 구사하는데 과도한 비판이나 냉소, 관조나 회상에 스며드는 ‘잠언투’ 등은 절제되어 있다. 형식적인 면에선 대체로 시조의 3장 중 중장을 변형한 사설시조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통념상의 시조 장르와 달리 당사자로부터 한 발짝 떨어진 듯한 인상을 준다.  그렇다면 현실과 가상의 괴리에 대한 시인의 대응은 무엇일까? 열거한 특징에도 불구하고 개별 작품의 면면은 ‘서정성’의 범위 내에 있다. 정형시의 제약과 종장의 묘미를 살리는 시상 전개의 관습 등도 유지된다. 실험적인 작품에서조차 시조의 3장 형식은 흐트러지지 않는다. 이는 장르적 이탈이나 의도적인 실험이 ‘자연미’를 환기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 아니라는 인식을 내비친다. 중요한 것은 형식을 유지하거나 이탈하려는 예술적 행위가 인과적 논리를 언급할 만큼 경직될 때 계몽의 산물로 추락한다는 점이다. 현실과 가상의 괴리 앞에서 시인이 주목한 것이 바로 이 예술적 형식이다. 유리 벽에 안과 밖이 부풀어 올랐어요 눈부신 디테일의 볼륨은 투명해져요 세 개의 면이 돌출되는 입체감과 공간 사이 무한의 차원이 되어 새로운 길이 나더군요 보이는 세계와 불투명한 세계를 오가는 사이 루프탑이 솟아나고 시간은 파란색에서 초록색으로 편의점 간판처럼 변해 가도 노랗게 내 마음의 풍경은 은행나무가 되어 기다렸어요 투명 인간이 불투명한 인간들을 말하네요 재배열되는 건물 앞 피켓 들고 울분을 띠로 두른 사람들 농 성 사이 의문의 시간 뒤에 미래를 여는 이유를 416 생명안전공원은 노란 리본을 수놓았어요 사라진 그 아이들이 굳어 가는 걸 보았어요 청록색 밤의 감정이 착시를 일으켜요 거대한 벽의 사막처럼 추인되지 않는 일들 바다를 증명하려던 불투명한 그 세계가 위험에 노출되지 않게 회멸이 되지 않도록 오늘의 뒷면과 앞면을 이제 당신이 이어 주세요 - 「3D 렌티큘러」 전문  주로 장난감이나 각종 카드, 케이스의 장식으로 사용되는 “3D 렌티큘러”는 빛의 각도에 따라서 서로 다른 그림을 보여 준다. 예를 들어, 앉아 있는 사자의 모습이 정면이라면 보는 각도에 따라 포효하는 모습으로 변함으로써 평면 위에 입체감을 주게 된다. 그런데 “렌티큘러”의 작동 원리1)는 동굴벽화에서 발견될 만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벽화를 그리고 신을 호출하던 주술사(예술가)에게 “렌티큘러”의 원리는 눈속임이 아니라 ‘자연’에 동화되어 자연물의 영혼을 있는 그대로 옮기는 신성한 작업 중 하나였을 것이다. ‘자연미’를 재현하고자 하는 모든 예술가에게 그러한 작업은 이상적인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현대 예술가가 처한 상황은 녹록지 않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현대 예술가의 “3D 렌티큘러”는 실재로부터 소외되어 더 뛰어난 눈속임으로 전락할 운명에 놓인다. 앞서 열거한 “렌티큘러”의 쓰임새가 말해 주듯이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작은 유희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주술사의 작업 방식을 단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예술 형식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리 벽에 안과 밖이 부풀어” 오르고 “3D 렌티큘러”가 작동하는 순간만큼은 고대 주술사가 그러했듯 “세 개의 면이 돌출되는 입체감과 공간 사이 무한의 차원이 되어 새로운 길이 나”는 ‘마술’을 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인에게 그것은 종이에 적힌 시조가 입체의 ‘자연미’를 드러내는 순간과 겹친다. 천(天)·지(地)·인(人) 3장의 기본 형식은 ‘자연미’를 재현해 본 기억이 잠재된 형식이다. 비록 근대 이후 재발견된 ‘전통’으로서 ‘자연’과의 화해를 가정할 뿐이라고 해도, 고대 주술사가 그러하듯 진실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눈속임으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동화(同化)를 위한 움직임이다. “보이는 세계와 불투명한 세계를 오가”는 동화의 움직임이 없다면 제아무리 훌륭한 “렌티큘러”라 해도 입체를 보여 주지 못한다. “노랗게 내 마음의 풍경은 은행나무가 되어 기다렸”다는 기대와 믿음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고개를 돌려 가며 “투명 인간이 불투명한 인간들을 말”하는 현실의 이면을 함께 보아야만 한다. “재배열되는 건물 앞 피켓 들고 울분을 띠로 두른 사람들 농성 사이”에서 시선의 각도를 달리할 때 “의문의 시간 뒤에 미래를 여는 이유”를 물으며 비로소 ‘자연미’가 모습을 드러낸다. 일상의 시인은 세월호 희생자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겹쳐 봄으로써 계몽된 세계의 명령(‘조난 시 안내 방송에 따라 행동하라!’)이 ‘자연’을 정복하지도 인간을 구원하지도 못했던 사건을 상기한다. 수로의 특성을 분석하고, 침몰의 원인을 찾고, 재발 방지를 위한 기술을 모색하는 가운데 “의문(계몽)의 시간”은 모든 사고의 책임을 ‘자연’에 전가한다. 하지만 “청록색 밤의 감정이 착시를 일으”키게 할 뿐 “바다”도 희생된 아이들의 ‘자연’도 “증명”하지 못한다. 시인에게 ‘자연’과 계몽의 불화는 “거대한 벽의 사막처럼 추인되지 않는 일들”이므로, ‘자연미’ 역시 “불투명”하게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쯤에서 우리는 가상과 현실의 괴리에 대한 앞선 질문을 곱씹어 볼 수 있다. 시가 언어를 통해 ‘자연미’를 드러낼 수 있다는 시인의 기대와 믿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3장 형식의 훌륭한 “3D 렌티큘러” 장치를 지닌 것도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시인의 역할은 ‘불가능한 가능성’에 운명을 내맡기는 것도, ‘형식’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실험 정신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불투명한 그 세계가 위험에 노출되지 않게” 위장된 화해를 경계하는 데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자연’은 “바다”가 불타 버리듯 이내 성질을 뒤바꾸고 “회멸” 되어 버린다. 엄밀히 말해 시인은 현실과 “3D 렌티큘러”의 가상이 서로를 훼손하지 않고 공존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동화를 꿈꾼다. n개로 분절된 세계의 모습과 입체 사이에 위치하는 볼록렌즈처럼 “오늘의 뒷면(과거)과 앞면(미래)을” 조율하고 매개함으로써 계몽된 주체의 자발적인 동참을 호소하는 것이다. 모조품으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 “아르고스처럼 백 개의 눈을”(「수상한 푸드 스타일리스트」) 뜨고 “늦은 봄, 개의 목줄은(이) 아직도 팽팽”(「봄날」)해지는 이유를 찾는다면 그것은 곧 괴물이 되어 버린 계몽의 능력을 온전한 인간의 시선으로 되돌리려는 시도일 것이다. “백 개의 눈”으로 걸러 낸 생의 이유를 벼르고 별러 다시금 이유로 남겨 두려는 응시. 이것이 바로 서정화의 ‘서정’이자 동일자들의 세계에서 비동일자로서의 시인에게 주어진 동화의 임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살펴볼 임경숙의 시집 『가시 많은 생이 맛있다』는 별다른 부연이 필요 없을 만큼 삶의 진정성을 개진한 흔적이 역력하다. 연과 행의 구분에서도 낭독을 염두에 둔 듯 자연스럽다. 이것은 작품의 소통 가능성을 중요시한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시적 대상에 대한 책임 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고추전 골목”의 “가교리 언니”와 “태봉 할매”(「봄의 좌판」), “한낮에도 셔터가 내려진 문구점 신발 가게 옷 가게 레코드 가게”(「중동 골목 147」), “베트남 여인, 예쁜이 린이”(「공심채」), ‘공곶이 수목원’을 처음 일군 “아흔두 살 사내”(「공곶이 수선화」), 포로수용소의 “아버지”(「1953년 거제도」) 등등 구체화된 인물과 배경엔 아픈 전사(前事)가 깃들어 있다. 낡고 손때가 탄 사진첩을 꺼내듯 사연을 적어 내는 시인에게 그것은 단순한 소재 이상의 무게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산을 끼고 도는 북쪽은 응달이었다 산그림자에 가려져 햇살 한 점 간절하지만 바닥은 늘 보이지 않는 블랙 아이스가 깔려 있다 길은 좁아서 한번 접어들면 되돌아 나갈 수 없어 모든 그림자는 강물 쪽으로 기운다 위태로운 바퀴는 자주 경계선을 넘었다 어미는 아이 하나에 희망의 심지를 돋워 떨리는 손으로 등불을 켰지만 바람 잘 날 없는 그 방에선 자주 불을 꺼뜨렸다 길 없는 길로 접어든 순간부터 운전대는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가끔은 급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 날에는 가늘어진 손목에 과부하가 걸려서 떨리기도 했다 한동안 밖으로 폭주하던 아이가 이제는 골방으로 들어가 성장통이 끝난 저를 잠가 두고 어미의 언어를 냉동고에 넣었다 어미는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시린 손을 비빈다 - 「결빙 구간」 전문  인용한 시편 역시 불우한 환경을 살아온 모자(母子)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블랙 아이스”가 깔린 아슬아슬한 삶의 현장에서 시적 화자가 기댈 곳은 없다. “아이 하나에 희망”을 걸고 견뎌 보지만 “길 없는 길”처럼 막막한 일상은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브레이크”를 잡은 만큼 “아이”는 “밖으로 폭주”하다 마침내 자신을 “골방”에 가둬 버린다. 그토록 피하고자 애쓰던 “블랙 아이스”의 냉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어미의 언어”를 얼리고 “성장통이 끝난” 다 큰 “아이”의 마음까지 얼려 “어미의 언어를 냉동고에 넣”게 만든다.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시린 손을 비”비는 “어미”의 모습은 시린 손이 서러운 “어미”의 모습으로도, 참회의 합장을 대신한 것으로도 읽힐 수 있다.  그런데 ‘서정시’로서 손색이 없는 이 작품은 ‘시 쓰기’의 여정과도 겹쳐 읽을 수 있다. 시적 대상에 대한 책임 의식을 지닌 시인에게 시 쓰기란 “결빙 구간”을 지니듯 조심스럽고 “한번 접어들면 되돌아 나갈 수 없”는 성질일 테다. 착상 이후엔 시인의 의지대로 전개되는 듯했으나 물러나 보면 “모든 그림자는(가) 강물 쪽으로 기운” 것처럼 보인다. “강물”의 ‘자연미’와 ‘역사’는 손쉽게 재현되지 않는 것이어서, 형식과 관습의 “경계선을 넘”고 ‘길이 아닌 길’을 찾아 “브레이크를 밟”기도 한다. “그림자에 가려져 햇살 한 점 간절”한 그늘진 현실은 그곳이 어디든 “골방”처럼 주체를 고립시키고, 시인은 자식 같은 작품에 “희망의 심지를 돋워” 작은 “등불”을 “햇살” 삼아 고립된 현실을 견뎌 내고자 한다. 하지만 “브레이크”를 밟는 기교가 능숙해질수록 자판을 치는 “손목”이 상할 뿐 “강물”을 끼고 도는 ‘진실’은 멀어진다. 그렇게 “폭주”와 자폐의 “성장통이 끝난” 작품을 완성했으나 이제는 작품이 시인의 “언어”를 거부하는 난감한 사태가 발생한다. “아이”만을 생각하는 “어미의 언어”조차 그것이 ‘시를 위한 시’가 될 때 생기를 잃고서 “냉동고에” 쌓아 놓은 얼음덩어리가 되고 만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함부로 “문”을 두드리지 않는 시인의 자세에 있다. 시인은 “성장통이 끝난” 청소년을 인격체로서 대하듯이 작품 역시 하나의 ‘자연’으로서 존중한다.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시린 손을 비”비는 시적 화자의 행동은 변명이나 체념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세계의 폭력과 억압에 노출된 자들이 그러하듯 “문”이 열리는 순간을 믿고 견뎌 내는 것이다. 그러한 견딤이 추구하는 바는 언어적 소통이 아니라 삶을 견뎌 낸 자들과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자연미’의 재현을 가리킨다. 그때, 거기가 아니면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데 가장 아름다운 손님이 오실 때에는 만사를 제치고 버선발로 뛰쳐나가야 손이라도 만져 볼 수 있는 한순간 절정이라고 - 「꽃의 초대」 부분 도시에서 세상 소식 물고 오는 박 씨의 차 안이 궁금하다 마땅히 살 물건도 없으면서 외지 사람 쳐다보는 것이 마냥 좋다 …(중략)… 시속 삼십 킬로 이하, 저속의 신작로를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양손 가득 봉지 봉지 들려 있지만 그것이 꼭 필요했던 것인지 가물거린다 …(중략)… 바람 소리만 채우는 빈 밥그릇 몰고 다니는 구산댁 멍구도 낡은 트럭 지나가는 소리를 알아보고 덩달아 괜히 한번 짖어 보는 날이다 - 「노인 보호 지역」 부분  시집 전반에 걸쳐 세련된 도시의 모습보다는 시골 변두리의 풍경과 각종 자연물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인용한 시편들에서 보여지듯이 소재적인 측면을 차치하더라도 어딘지 낡은 시어가 동원되어 있고 시상의 전개에서도 단조로운 느낌을 준다. 그런데 시인이 재현하고자 하는 ‘자연미’는 “그때, 거기가 아니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곳에서 도래한다. 이는 소외되고 상처 입은 자들과 공감할 수 있는 ‘자연미’란 ‘지금, 여기’가 아닌 “그때, 거기”의 풍경에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버선발로 뛰쳐나가야/ 손이라도 만져 볼 수 있는/ 한순간의 절정”처럼 ‘지금, 여기’의 ‘양말’로는 대체 불가능한 공감의 눈높이가 선행되어야만 “손”으로 “꽃”을 만지는 합리적인 사유에서 벗어나 “꽃”이 먼저 “손”을 만지는 ‘한순간의 절정’이라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사물화되어 관리되는 현대 사회에서 계몽과 자연의 화해는 가상이겠지만, 지난날 우리는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난 소비를 할 수 있었다. 인용한 두 번째 시편에 드러나듯이 ‘판매자’와 ‘소비자’의 개념으론 설명할 수 없는 관계 맺기가 가능했고, 이심전심(以心傳心) “외지 사람 쳐다보는 것이 마냥 좋”은 감정을 언어 없이 소통해 본 경험도 있다. 그러한 진심은 “구산댁 멍구”에게까지 전달되는데 ‘자연’의 언어는 “괜히 한번 짖어 보는” 말 없는 개의 외침 속에서 보존되는 것이다.  따라서 비루한 농촌의 풍경이나 소외된 존재의 사연 등은 그것이 번화한 도시로부터 떨어졌기 때문에 ‘자연’의 진실에 가깝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임경숙의 이번 시집에서 그것은 공감의 조건으로 주어진 것이고, 말 없는 개의 외침이 그러하듯 시인은 ‘자연’이 아니라 ‘자연의 말 걸기’를 모방하기 때문이다. 목줄 풀린 “푸들”(‘자연’)이 수풀로 내달리는 대신 “노란 금지선”에 멈춰 선 낯선 풍경처럼(“급하게 누른 경적에도/ 푸들은 소리 나는 방향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노란 금지선에 멈춰 선다”, 「선을 지키다」) “푸들”의 ‘자연’은 우리의 합리성을 넘어서는 영역에서 의도치 않게 ‘자연미’를 드러내곤 한다.  대개의 서정시가 ‘일인칭 자기동일성의 원리’를 기본으로 ‘자연’을 전유해 왔다면, ‘자연미’는 대상을 전유하는 과정에서 뒤따르는 억압과 왜곡을 넘어서는 영역을 가정하는 한에서 재현을 기대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가정된 영역이 어떠한 형태로 표현되든 ‘비동일자’로서의 시선을 동반해야 한다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결빙 구간」의 “어미”와 “아이”의 관계처럼 동일성 내부에 존재하는 비동일성의 특질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시인이 주목하는 ‘가시’는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양립 가능성을 여는 시적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표제작에 해당하는 「가시 많은 생」에서 짐작되듯이 “가시”의 은유는 중의적인 성격을 지닌다. 작품에서 언급되는 생선의 경우 수압에 저항해 몸의 형체를 유지하고 장기를 보호하는 ‘뼈’를 뜻하기도 하고, 요리되거나 타자의 소유물인 상태에선 이물질인 “가시”로 표현되기도 한다. 식물의 경우 보호를 위해 진화한 잎사귀를 떠올릴 때 그것은 본체(本體)의 일부지만, 꽃과 열매만을 취하려는 외부적 입장에선 접근을 방해하는 이체(異體)로 간주 된다. 도마 위에 준치 몇 마리 어머니 칼질 소리가 칼칼하다 검푸른 살 속에 무수히 박힌 가시가 납작하게 혼절해 가는 동안 살이 많은 물고기도 많은데 하필이면 가시투성이를 골랐을까 물속을 헤엄쳐 다닐 때 찔려도 찔린 줄 몰랐던 가시들 썩어도 준치는 찬란한 맛이었다 잔가시마저 촘촘히 다져진 말캉말캉한 준치완자탕 목에 걸리는 게 없이 부드럽다 뜨거운 완자 몇 알 삼키다가 맛있는 생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가시가 박혀야 할까 내가 삼킨 가시는 몇 줌이나 될까 - 「가시 많은 생」 전문  살에 “가시”가 많은 생선인 “준치”는 대체로 “가시”를 발라 요리한다. 그러한 경우 발라낸 “가시”는 쓰레기로 취급된다. 하지만 “어머니 칼질”로 “잔가시마저 촘촘히 다져”지게 되면 버릴 것 없이 “준치”의 “가시”까지 온전하게 맛볼 수 있다. 그런데 “어머니”가 “하필이면 가시투성이를 골”라 “준치완자탕”을 끓인 정확한 이유가 드러나지 않는다. 경제적인 요인이나 음식에 대한 추억 등 추측은 가능하겠지만 선택의 근본적인 이유는 합리성 너머에 위치한다. “어머니”와 “준치” 사이의 비합리성을 공감의 형식으로 재현하려는 시인은 3연에서 “준치”의 본래 모습으로 화제를 전환한다. “물속을 헤엄쳐 다닐 때/ 찔려도 찔린 줄 몰랐던 가시”처럼 “가시”가 ‘뼈’로 인식될 때 “준치”는 크기와 맛으로 규정되는 세계를 벗어난다. 그러한 가상의 영역에서 시인은 생의 잔뼈가 지금처럼 굵지 않았던 “어머니”를 호출하는 것이다. “말캉말캉한 준치완자탕”처럼 “걸리는 게 없이 부드”러웠을 소녀의 ‘자연’과 “준치”의 ‘자연’이 서로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만난다. “하필이면 가시투성이를 골”라 “준치완자탕”을 끓이는 “어머니”의 사연은 언어가 아니라 “어머니 칼질 소리”를 통해서 비로소 전달된다. “찬란한 맛”이란 억압과 고통을 견뎌 낸 자가 자신을 닮은 자식에게 내미는 소통의 시도이고, “맛있”다는 시적 화자의 반응은 그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찬란”했던 ‘자연’을 경험한 자들과의 소통은 형체를 알 수 없게 갈린 “몇 줌”의 “가시”처럼 소멸한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관성적으로 “삼킨” 무수한 “가시”가 실은 뭉개 버린 ‘자연’의 말 걸기가 아니었을까 자문해 본다. 어쩌면 그것은 ‘자연’에 빚진 시의 부채이며, 끊임없이 시를 써야 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시인은 “어머니”와 “준치”가 공존하는 가상을 깨트리는 대신 현실 속 “뜨거운 완자 몇 알”만을 ‘자연’에 대한 시 쓰기로 전유한다. 이를 통해 동일자로서 포섭되지 않은 “어머니”의 ‘자연’은 또 다른 시편(「외면」)에서 다시금 말을 걸 수 있다. “준치완자탕”을 끓여 주던 다정한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는 것도, 병 수발에 지친 딸이 “어머니”처럼 생의 잔뼈가 굵어지는 것도, 그런 딸의 “하소연을 단칼에 베어 내듯/ 누가 그렇게 살랬니?”(「외면」) 매몰차게 대하는 것도 모두 ‘자연’의 말 걸기라고 할 수 있다.  시집 전반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상처 입은 여성과 노인, 삐뚤게 커 버린 청년들,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남편, 가해자이자 역사의 피해자로서 존재하는 아버지까지 이분법적 구도와 진부한 서술 방식, 후반부의 단정적인 감상 등 얼마간의 흠결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서로 다투지 아니하고// 산까치도 먹고/ 고라니도 먹고/ 밭 임자도 먹는”(「공평」) ‘자연미’를 재현하고자 하는 시인의 견딤은 나름의 의미가 있다. 이성과 합리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선 그러한 시작(詩作) 자체가 ‘가시’일 수 있는 것이다.  부족한 식견으로 아도르노의 변증법적 미학에 기대어 서정화의 『3D 렌티큘러』와 임경숙의 『가시 많은 생이 맛있다』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도르노를 경유하게 된 것은 ‘전통’과 ‘자연’에 대한 조지훈의 문장에서 큰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시인이 말한 바와 같이2) 시에 대한 사랑이 생성해 내는 자연이야말로 ‘서정’의 본령이 아닐까 생각한다. 서평에 어울리지 않게 해석에 치중한 것은 ‘서정’에 대한 선입견을 걸러 읽고 싶은 독자로서의 소망임을 고백한다. 한 가지 첨언하자면, 자연에 대한 공포가 고대 주술사로 하여금 미메시스를 통한 극복을 모색하도록 했다는 아도르노의 지적과 더불어 외부에 대한 불안이 추상 충동의 형식으로 나타난다는 주장3)도 인지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고대인뿐 아니라 비이성적인 탄핵 정국에 불안을 느끼는 ‘지금, 여기’의 독자들 역시 예술이 어떤 형식적 미학을 취하는가 하는 문제보다 불안과 공포의 극복을 위해 어떻게 추상과 미메시스를 오가며 ‘운동’했는가가 훨씬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만약 그러한 운동성이 서정의 전통에 잠재되어 있다면 ‘자연미’의 재현이란 존재론적 닮기를 넘어서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전통에 대한 긍정적 전망이 자유를 얻을 때, 우리는 “공기의 방식으로 어디든지 갈 수 있”(「물리적 그물코」)는 시조를 읽을 수 있고, “가끔은// 제 가시(시)에 찔려// 흠칫 놀라”(「양심」)는 서정 시인의 고백도 들을 수 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왜 시문학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지, 어째서 무수한 시편들이 경계를 넘나들고 있는지 ‘서정’의 본령을 둘러싼 질문을 좀 더 우리의 삶 쪽으로 밀어 주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1) 계단처럼 수직과 수평에서 보이는 면이 각각 다를 때, 두 장의 그림을 계단의 수만큼 n등분한 후 수직면과 수평면에 잘라 붙이고 계단의 위쪽 혹은 아래쪽으로 시선을 이동하면 각도에 따라 보이는 면이 달라짐으로써 입체감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을 계단이 아닌 평면에서 구현하기 위해 상이 확대되어 보이면서 관측하는 각도에 따라 표시하는 지점의 위치가 변하는 작은 볼록렌즈를 붙인 것이 오늘날의 렌티큘러다. 선사시대 동굴벽화에서도 벽면의 굴곡과 횃불이 비추는 방향을 활용한 원시 렌티큘러가 발견된다. 2) “참뜻의 전통은 언제나 자기 안에 숨어 있는 생명을 고심참담한 노력 속에서 창조적으로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생명(詩生命)의 비의(祕義)를 체득하려면 먼저 시를 사랑하는 데서 비롯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말로 말하면 시생명의 본질은 ‘시를 사랑하는 인생 속에 내재(內在)하여 생성(生成)하는 자연(自然)’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조지훈, 「시의 생명」, 『조지훈 전집 2: 시의 원리』(홍일식 외 편), 나남, 1998, 20쪽. 3) “감정이입의 자극은 인간과 외부 현상 사이의 완전무결한 신뢰 관계를 조건으로 하는 반면, 추상의 자극은 외부 현상들에 의해 유발된 인간의 내부가 매우 불안해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그것은 종교 영역에서 모든 상상을 초월하는 색조와도 관련된다.” 도라 바이에, 『추상예술』, 문고판, 1980, 21쪽(알랭 봉팡(김은정 옮김), 『추상미술』, 한길사, 2000, 15쪽. 재수록)

계간 시작 기혁 서정시시조현대시조자연자연미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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