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딩아돌하 2024년 여름호(제71호)
SF시란 무엇인가
1. SF, 타자와의 새로운 관계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그래비티』(2013)에는 시와 SF의 장르적 차이를 넘어서는 듯한 하나의 이미지가 제시된다. 그것은 바로 우주로 내던져진 인간이다. 영화의 핵심은 우주정거장에서 일어난 조난 사고이다. 라이언 스톤 박사는 허블 우주 망원경을 수리하기 위해서 우주정거장에 파견되는데, 우주를 떠도는 잔해가 우주왕복선에 부딪히면서 순식간에 우주로 튕겨 나간다. 막막한 우주 속에서 한 인간이 생환하는 과정이 이 영화의 서사이다. 이 영화의 전반부는 시적인 관조, 즉 텅 빈 우주에서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는 스톤 박사의 얼굴을 비추며 그가 느끼는 공포와 불안을 묘사하는 데 초점을 둔다. 이 영화의 후반부는 과학적 사고, 즉 합리적 판단에 근거하여 생환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과정에 초점을 둔다.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라는 진실 앞에서 우리는 어느 방향을 보아야 할까.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이 시 장르의 시선이라면 세상으로 나아가는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SF의 시선이다. 존재 이유에 대하여 자신의 내장을 추궁하여 답을 구하는 자가 시인이고 세계의 질서를 탐구하여 답을 얻는 자가 과학자이다. 시와 SF는 장르적으로 다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른 삶의 자세이기 때문에 동궤에 놓기 어렵다. 그렇기에 『그래비티』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라이언 스톤 박사가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의지와 해결책을 환상의 형식으로 얻는 대목이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스톤 박사는 간신히 비상 탈출용 우주선에 도착하지만, 연료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한다. 그는 웅크린 채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때 우주정거장의 사고로 죽은 동료의 환상이 나타나 그에게 힘을 북돋고 살아남을 수 있는 계획을 알려준다. 이 환상은 과학적 사실과 시적 모호성이라는 경계를 흐트러트린다. 죽은 이의 목소리가 환상이라는 형식으로 ‘내면에서’ 솟아올라서 합리적 해결책을 제시할 때 시적인 시선과 SF적인 시선은 교차한다.
이보다 의미심장한 것은 타자의 환영이라는 형식이다. 스톤 박사는 분명히 체념한 채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타자의 환영은 자신을 미리 애도하던 자, 동시에 해결할 수 없던 난관에 부딪힌 자에게 삶의 의지와 해답을 전한다. 무엇보다 어떠한 타자인가. 쿠아론 감독이 선택했을 이 환상은 가족이나 친구의 형식이 아니라 ‘같은 장소에서 죽음을 경험한 사람’, 즉 우주정거장의 사고 때문에 희생된(심지어 스톤 박사를 위해 희생한) 동료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이 장면에서 『그래비티』는 하나의 윤리적 물음을 남긴다.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으로부터 우리는 살고자 하는 의지를 얻고, 무엇 때문에 삶을 탐구하려는 자세를 견지하는가. 이 장면은 어쩌면 인간의 감성과 이성이라는 내면의 원동력을 넘어서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주는 것은 ‘나와 같은 경험 속에서 죽어가는 타인의 목소리’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 글의 서두에서 영화 『그래비티』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암시하는 동시에 내가 미리 주장하려는 바는 다음과 같다. 만약 SF시라는 장르가 가능하다면, 다시 말해 우리 시대에 합리적 사고와 정서적 사고가 동궤에 놓이는 ‘말하기 방식’이 장르화될 수 있다면 그것은 타자에 대한 새로운 윤리적 태도를 정립하는 의지와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내적 성찰과 세계의 탐구라는 두 가지 시선 사이에서, 우리와 똑같이 세상을 바라보며 나란히 선 타자가 있다. 실상 그 타자야말로 우리가 관계할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세계의 가장 확고한 지평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수평적인 토대로부터 ‘응답받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세계를 살아낼 수 있고, 또한 세계를 기록할 의지를 얻는다. 나는 바로 타자에 대한 윤리적 태도야말로 SF시의 기원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이 글의 목적은 한국 현대시에서 SF시 장르가 규범화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다. 제1절에서는 『그래비티』에 대한 분석을 통해 SF시의 가능성과 그 조건, 그리고 SF시 장르의 필요성을 미리 암시하고자 하였다. 이제 문학적인 탐구로서 제2절은 SF 장르의 역사를 정리하는 데 할애된다. 하지만 이 글의 핵심적인 논지와 현대시의 분석만을 확인하고자 하는 사람은 제2절을 건너뛰고 제3절부터 독해하여도 좋을 것이다.
2. SF장르의 역사
과학소설(Science Fiction)이라는 단어에서 ‘fiction’이라는 단어는 한국 사회에서 서사 장르를 가리키는 데 통용되고 있다. 이 때문에 SF시라는 용어는 성립할 수 없거나 느슨한 의미로만 통용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학소설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이는 1851년 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윌리엄 윌슨(William Wilson; 1801 ~ 1860)이었으며, 그는 ‘과학소설이란 그 자체의 시적이거나 진실할 수 있는 즐거운 이야기로 조직된 드러난 과학적 사실’이라고 규정했다.1) SF라는 용어를 떠올리는 최초의 과정에서 ‘시적인(poetical)’이라는 단어를 연상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흔히 문학이 욕망된 미래를 예시하고 과학이 실현 가능한 미래를 예시한다는 차이를 떠올려 보았을 때, 윌슨의 용례는 오히려 과학적 사실과 시적인 욕망이 변증하는 순간 SF 장르가 탄생한다고 설명하는 듯하다.
SF문학 혹은 ‘SF적인’ 문학은 언제 탄생했을까. SF의 기원을 설명하는 방식에는 적어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미적 형식으로부터 그 기원을 추론하는 과정이다. 이것은 미국에서는 1970년대 무렵부터 SF에 관한 학문적 연구가 진행되면서 나타난 이해의 방식이다.2) 상당수의 연구자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1818)을 SF의 효시로 꼽는다.3) 하지만 브라이언 올디스는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1726)를 SF의 효시로 볼 수 있는지 숙고했다. 더 나아가 SF 소설가이자 연구자인 아담 로버츠는 길가메시 서사시의 새로운 세계를 찾아 헤매는 영웅을 SF의 전형으로 이해하는가 하면, 존 밀턴의 『실낙원』(1674)을 SF문학의 기원으로 제안한다.4)
SF의 기원을 설명하는 또 다른 방식은 SF문학을 소비할 수 있는 문화적 토대가 형성된 시기를 살피는 일이다. 이 경우 SF 장르를 대중에게 보급하는 잡지가 형성되는 시기가 주안된다. 미국에서 SF라는 용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데는 휴고 건스백(Hugo Guernsback)의 기여가 크다. 그는 1916년부터 줄곧 ‘Scientific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일군의 작품을 장르화하려고 했고, 1926년 4월 최초의 SF 펄프 잡지 <어메이징 스토리스>(Amazing Stories)를 창간했다. 비록 1929년 건스백은 파산했지만,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까지 경쟁적으로 SF 펄프 잡지들이 창간되었다. 이로써 1930년대 미국에서 SF 생산하는 작가층과 소비하는 독자층이 형성될 수 있었다.5)
한국의 경우 식민지 시기부터 조금씩 SF문학이 번역되거나 창작되었다. 한국에 최초로 번역된 SF문학은 쥘 베른의 『해저 2만리』(1870)의 일부를 중역한 「해저여행기담」이며, 이것은 1907년 3월부터 1908년 5월까지 유학생 학회지인 <태극학보>에 소개되었다. 비록 유학생을 위한 학회지에 수록했다는 한계 때문에 많은 독자가 접할 수는 없었지만, 일본에서 유학하던 박용희가 쥘 베른의 번역에 임했던 동기는 ‘허식’과 ‘공상’에 빠진 전래의 소설을 극복하고 유학생들이 과학적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있었다.
대중을 위해 번역된 최초의 SF문학은 1908년 11월 희동서관에서 출간된 『과학소설 철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쥘 베른의 『인도 왕비의 유산』(1879)을 이해조가 번안한 소설이다. <황성신문> 1908년 12월 10일의 기사 「科學小說 鐵世界」를 살피면, 이 작품이 미국의 소설가 ‘가이위니(迦爾威尼)’(쥘 베른)의 소설이며 “신지식계발에 유용”하기 때문에 추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6) 이후에도 『과학소설 비행선』(동양서원, 1912) 『제클과 하이드』(조선야소교서회, 1921) 『월세계여행』(박문서관, 1924) 등이 간행되었다. 이러한 작품들은 문해력을 갖춘 소수의 독자에게만 유통되었을지라도 SF문학을 대중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보다 본격적으로 SF장르의 독자층이 형성되려면 과학적 지식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세대의 출현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한국 최초의 창작 SF문학인 김동인의 단편소설 「K박사의 연구」(1929)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등장하지만, 본격적인 SF소설과 그 수용층이 등장하는 시점은 한국전쟁 이후에야 가능했다. 한국전쟁 이후 냉전체제에 편입된 한국 사회에서 과학 교육은 이념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다. 출판사들은 경쟁적으로 과학에 관련한 아동서적을 간행했고 『어린이과학전집』(김용사, 1947) 『소년소녀 세계과학모험전집』(아데네, 1959) 등이 대중에게 보급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SF장르의 독자층이 형성되는 것은 1960년대 전후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 교육의 입안과 맞물려 1960년대에 SF장르가 일반화될 수 있었다. 최초의 SF 장편소설인 문윤성의 『완전사회』(수도문화사, 1967)는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간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학생과학>(1955. 11. ~ 1983. 12.)과 같은 청소년 과학 교양지가 창간되며 SF문학이 어린 세대를 매혹하게 된다. 하지만 SF문학을 하위 장르로 이해하는 관점이 지속했다. 이것은 1960년대 SF문학이 근본적으로는 우주를 개척하는 남성 주인공을 등장시켜 제국주의적 남성 문화의 확장을 실현해가는 이데올로기 서사의 변주에 지나지 않았다는 분석처럼,7) 1960년대까지 SF장르가 순수문학의 소재적 변주로만 이해되었음을 뜻한다.8) 이처럼 SF문학의 형성에는 정치적‧사회적 요구가 큰 영향을 끼쳤으며, 작품의 다양성과 별개로 SF문학을 소비하는 방식은 리얼리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현재의 SF문학은 1990년대 탈중앙적인 소통의 매체, 즉 PC통신이 등장하는 과정을 배경으로 삼고 등장했다. 1990년대는 냉전 체제가 무너지고 자유롭게 소통의 장을 만들어낼 수 있는 네트워크가 형성된 시기이다. 1990년대에 복거일과 듀나와 같은 SF작가가 창작과 비평 양면에서 활동하며 주목받기 시작한다. 또한 2000년대에는 인터넷을 통한 SF 공모전이 등장하면서 장르 소설을 전문으로 하는 작가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최근 활동하는 김보영‧김초엽‧정세랑 작가의 SF소설에서 다루는 주제와 동시대 순수문학에서 다뤄지는 주제는 구별되지 않는다. SF문학은 사회적 관계에 대응하거나(페미니즘), 기후위기를 예각화하거나(인류세), 인류의 미래를 예견하는(포스트휴머니즘) 주제를 다루고 있다.9)
한 가지 간명한 사실은 SF장르의 중심에는 언제나 소설이 놓여있었다는 것이다. 번역과 창작 양면에서 모두 그렇다. 이는 마치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 과학적 상상력을 유통하는 방식, 그리고 국가 내에서 과학적 지식을 재생산하는 방식으로서 ‘소설’이 적절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근본적으로 SF장르가 미래를 예시하는 장르라면, 서정적 순간을 다루는 시 작품보다 서사적 시간을 다루는 소설 작품이 SF적인 것은 타당해 보인다. 시간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소설이 SF적인 인과관계와 합리적 세계관을 표현하는 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글이 밀어붙이고자 하는 것은 SF시라는 개념이며, 더 정확히 말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시대에 SF시라는 개념은 왜 필요한 것인가.
3. SF시의 가능성 : 불안의 정동으로부터 불안의 상상력으로
한국 문화에서 SF문학은 적어도 세 가지 의의를 지니고 있다. 첫째로 SF장르는 지식인 계급이 과학 지식이나 합리적 사고에 대한 대중의 폭넓은 관심을 유도하기 위한 교육의 도구였다. 식민지 시대에 쥘 베른의 SF소설이 한국에 번역되어 소개된 사례가 대표적이다. 둘째로 SF장르는 국가 차원에서 다른 국가와의 기술 경쟁에 임할 수 있는 젊은 세대를 육성하기 위한 매체로 확장한다. 이는 한국전쟁 직후 정부의 ‘과학화’ 기조와 맞물려 과학소설전집이 발간되고 SF잡지가 창간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1990년대 이래 SF장르는 PC통신의 성립과 맞물려 대중적 소통의 장으로 변화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SF문학과 순수문학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었으며, 여성운동, 환경파괴, 동물권 등과 같은 주제를 공유하게끔 하였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역사적 전개에서 SF문학은 곧 SF소설이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귀납적으로 묻자. SF시 또한 SF소설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교육의 도구이거나 과학 지식의 매체가 될 수 있는가.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시 장르는 적절한 수단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 장르는 근본적으로 세계에 대한 보편적 앎을 나누는 방식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고유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시에 과학을 도입하는 순간 언제나 과학적 경험에 대한 사적 체험의 승리가 행해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SF시의 가능성이 형성되는 시기는 적어도 SF장르가 대중의 다성적인 발화구로 이행하는 1990년대 후반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 SF가 과학 지식의 전달방식이 아니라 과학적 경험을 분유하는 대화 수단으로 인지될 때 비로소 하나의 시 작품에서 SF적인 요소를 발견하는 과정이 의의를 지니게 된다. 최초로 가정할 것은 기술 발전을 공통의 현실로 ‘목격하는’ 1970~1980년대 도시시의 주체가 기술을 주체화의 과정으로 ‘체험하는’ 1990~2000년대 SF시의 주체로 이행한다는 전제이다. 주목할 것은 가능한 현실이 아니라 가능한 주체인 셈이다.
몸 속에 웹 브라우저를 내장하게 되었어. 야금야금 제 속을 파먹어 들어가는 달. 신이 몸 속에 살게 되었어. 신은 이제 몸 속에서 키울 수 있는 존재야. 몸 속에는 사철나무, 산. 목이 잘린 불상. 금칠이 벗겨진 십자가. 당신이 보낸 천년에 한 번 우는 새. 당신이 내게 올 때 걸었던 최초의 오른발과 왼발. 기어이 제 살을 다 파먹은 달. 그물로 된 달. 그물에 걸린 신들의 꼼지락거리는 손가락들과 발가락들을 생각해봐. 몸 속이 점점 비좁아지고 있어. 십계명을 새긴 돌이 자궁 속을 굴러다니고 있어. 사막을 건너 아버지가 찾아와 내 몸이 신전이니 죽은 아버지가 새벽마다 기도해. 몸 속은 무덤이 아니야. 방금 네가 날 검색했잖니. 서른 닢의 은전도 받지 않고, 새벽은 아직 멀었는데, 쉬지 않고 아버지를 부정해. 더 이상 신전은 몸 밖에는 없어. 이제 낮과 밤은 몸 속에서 만나고, 낮과 밤은 몸 속에서 헤어지고. 신들은 내 몸을 로터스 꽃처럼 먹고 꾸역꾸역 자라. 몸은 구멍투성이야. 신들의 취미는 피어싱. 구멍은 신들의 수유구. 아니면 주유구. 세상은 구멍이야. 만개하는 몸이야. 열리고 닫히는 몸
이원, 「몸이 열리고 닫힌다」 전문,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문학과지성사, 2001)
본격적 SF시는 아니지만 SF적인 성격을 띠는 이원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를 상기해 보자. 시인은 이미 첫 번째 시집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문학과지성사, 1996)부터 PC, 드라마, 대중음악 등의 소재를 다루면서 대중매체가 인간의 인식 속도에 미치는 변화를 표현하고자 했다. 매체의 영향이라는 주제는 두 번째 시집에서 더 첨예해지며, 시 「몸이 열리고 닫힌다」에서는 아예 ‘몸속에 삽입된 웹브라우저’라는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몸’은 웹브라우저로 가득 차 비좁고 끝내 구멍 난 것으로 훼손된다. 이러한 이미지는 첨단 기술에 대한 공포를 표현한다.
더 정확히 말해서 이 작품은 1997년 서비스되었던 웹사이트 Yahoo에 대한 시인의 비판적 인식을 드러낸다. 인간 존재는 웹브라우저에 의해 장악될 것이다. 의미심장한 것은 이 작품이 ‘신’이라는 타자를 호명함으로써 주제를 강화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새로운 시대에 웹브라우저는 ‘몸속에 살게 된 신’이 되었다. 이제 몸은 웹브라우저를 모시는 ‘신전’이고, “더 이상 신전은 몸 밖에는 없”다. 인터넷이라는 세속적인 신성은 이제 기존의 신성성을 파괴할 것이다. 이때 이러한 메시지는 신앙에 근거했다고 보기 어렵다. 시인의 최근 시집까지 살펴보았을 때 신성은 주된 소재가 아니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신’과의 관계를 부각하며 시인이 부각하려는 것은 신체의 황량함이다. 신본주의 시대의 종말과 더불어 세계를 상실하는 듯한 불안의식이 두드러지게 된다.
동시대의 첨단 문물에 대한 공포와 불안은 현대시에서 지속해왔던 주제처럼 보인다. 즉 무분별한 도시 발전을 비판하는 작품들을 연상케 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놀랍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 작품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화자이다. 이 작품은 기술적 변화를 목격하는 ‘농민’이나 ‘시민’과 같은 계급적 입장에서 서술되는 것이 아니다. 대신 단순히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는 ‘사용자’를 화자로 내세운다. 웹브라우저를 사용하는 ‘나’는 마치 웹브라우저 또한 ‘나’를 사용하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히는데, 이로써 “방금 네가 날 검색했잖니”라는 문장은 가능하다. 따라서 야기되는 불안은 사회적 불안이 아니라 실존적 불안이며, 그러한 불안은 하나의 새로운 도구와 접촉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다. 세상이 송두리째 재구성되는 듯한 감각이 곧 ‘신’에 대한 호명으로 표현되는 셈이다.
불안의 근원은 하나의 새로운 발명품이 ‘나’의 신체를 재구성하는 듯한 이질감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여기서 ‘나’를 재구성하는 것은 정보의 패턴이다. 캐서린 헤일스는 현실에 기초하는 전통적 소설과 달리 가상의 시공간에 기초하는 SF문학의 서사를 ‘정보 내러티브’라고 부른 바 있다. 이때 정보 내러티브는 물질적 시공간이 아니라 신체와 사이버스페이스 사이에서 정보를 교환하는 ‘패턴’이 곧 서사를 이룬다. 헤일스의 독창적 주장은 정보와 접촉하고 수용하며 이해하는 패턴 자체가 곧 우리의 신체를 인식하는 방식을 재구성한다는 것이다. 기술 문명이 발전한 시대에 “패턴은 현존을 압도하”는 것이다.10) 느슨하게, 이원의 시는 SF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SF시는 SF소설처럼 정보 내러티브를 서사화하는 장르는 아니다. 그러나 SF시는 정보 내러티브의 본질적인 ‘패턴’을 형상화한다. 이원의 시는 신성성이 파괴된 신체, 정보를 받아들이는 ‘주유구’로 전락한 신체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절망적 정동으로 주조된 신체적 패턴을 그려낸다고 할 수 있다.
기지가 건설됐다.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사람의 힘 덕분이었다. 그로써 달이 사라졌다. 파도가 가라앉았다. 푸른 자정의 순환이 사라진 심해에서 숨죽인 이들의 허파꽈리가 물거품으로 떠올랐다. 죽은 달의 사정액처럼. 앞으로도 영영 기지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기지는 빈 기지일 뿐. 이름 없는 군함들이 기지를 조문하고 사라졌다. 기지의 노포핵이 껍질을 벗었다. 커졌다. 우뚝 섰다. 조준과 발사. 때때로 정체가 분명한 다국적 유령선들이 기지를 뚫지 못하고 해체됐다. 파스칼, 얼굴들은 물러나야 해. 물러나서 얼굴들은 기지의 촌에 숨어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해. 파스칼이 입을 다물고 있을 때 얼굴들은 사람이 다시 사람이 되는 일의 기진맥진함을 저 멀리 불어 터진 허파들로부터 찾으려 했다. 기지는 홀로 드넓어졌다. 기지의 피스톤 운동을 피해 얼굴들은 멸종 위기에 처했다. 멸종의 미토콘드리아는 생물의 어깨 위로 내렸다. 붉은 눈이었다. 얼굴들은 1헤르츠씩 주저앉는 어깨를 맞대고 서로에게 호흡을 쌓았다. 파스칼은 시간을 가로질러 가려 했다. 얼굴들은 입을 모아 실패한 공작을 이야기했다. 파스칼, 얼굴들에게 남은 건 단 한 번의 기회뿐이야. 기지는 황홀하게 황폐해졌다. 얼굴들은 기지의 핵심으로 모였다. 얼굴들은 융합되고 폭발했다. 백과 흑. 바다에 구멍이 뚫렸다. 기지는 기지로 기지로 기지로 기지를 넓힌다. 기지는 신속하고 정확하게 섬으로 뻗어 온다. 구멍을 지나온 파스칼은 최첨단의 불안을 안고 단단한 바위 해변의 입구에 당도했다. 붉은발말똥게들이 달빛을 생포한 집게다리를 사납게 쳐들고 줄지어 좌로 좌로 이동 중이었다. 파스칼은 해변의 끝에 있는 미래의 기지를 향해 dp5를 움직였다. 과거에 찍히는 파스칼의 발자국들이 점점 더 선연해졌다.
김현, 「THE FUTURE」 부분11), 『글로리홀』(문학과지성사, 2014)
실존적 정동과 패턴의 측면에서만 SF를 연상케 한다고 볼 수 있는 이원의 시와 달리, 김현의 첫 시집 『글로리홀』은 뚜렷이 SF적 소재를 차용한 작품집이다. 퀴어 시집의 전형으로 간주할 수 있는 『글로리홀』에서 비교적 소수의 작품이 SF소재를 다루고 있는데, 여기 「THE FUTURE」는 우주적 규모의 기상이변으로 인해 세상이 멸망하는 과정을 그리는 작품이다. ‘달’이 사라졌고 “푸른 자정의 순환이 사라진 심해에서” 사람들은 심해에 ‘기지’를 건설하면서 생존하고 있다. 그러나 그 ‘기지’조차 더 이상 아무도 살지 않는 공간이 되어버린 뒤, ‘다국적 유령선’이 나타나 기지를 침략하고자 시도하거나 사람이 부재한 기지가 홀로 ‘드넓어지는’ 미스테리한 사건이 뒤따른다.
이 작품의 서사는 의도적으로 모호하다. “실패한 공작”이 일어나고 “바다에 구멍이 뚫”리며 희망이 사라지는 묵시록적 분위기만이 뚜렷하다. 모호함을 가중하는 것은 “기지의 노포핵이 껍질을 벗었다. 커졌다. 우뚝 섰다.”라는 표현처럼 ‘기지’가 곧 남근을 연상케 한다는 점이다. 기지가 성애를 연상케 한다면, ‘홀로 드넓어지는 기지’란 고착된 성욕을 떠올리게 한다. 더불어 사람을 ‘얼굴들’이라는 제유로 총칭하는 것 또한 눈에 띈다. “사람이 다시 사람이 되는 일의 기진맥진함”이라는 표현처럼, ‘얼굴들’은 사람다움을 잃은 채 숨어있거나 죽어가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를 배경으로 삼아서 ‘파스칼’이라는 인물이 걸음을 옮기고 있다. 그의 걸음은 ‘시간을 가로지르며’ 미래로 나아가는 전진으로 규정된다. 그가 “최첨단의 불행”을 끌어안은 채 “해변의 끝에 있는 미래”로 나아가는 것은 곧 이러한 묵시론적 세계를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이 시의 과도한 모호성 때문에 유의미한 해석에 도달하려면 징후적 독법으로 옮아가야 할 것이다. 내면, 관계, 세계라는 세 층위에서 모든 것이 병증을 앓고 있다. ‘홀로 드넓어지는 기지’로 빗대어 표현된 성욕은 고착된 채 배출되지 못한다. 한편 “사람이 다시 사람이 되는 일의 기진맥진함”을 깨달은 ‘얼굴들’은 숨거나 찾아 헤맬 뿐이고, 애초에 멸종위기에 처해있다. “얼굴들은 융합되고 폭발했다”라는 시구처럼 관계는 언제나 파국으로 치닫는다. 마지막으로 ‘바다’는 구멍이 뚫린 채 소실되고 있다. 그렇다면 표면상 이 작품의 주제는 욕망의 죽음이고, 관계의 상실이며, 세계의 종말이다. 무엇보다 이 주제의식을 매끄럽게 서사화하지 못하는 시 형식 자체가 가장 근본적인 징후이다.
그런데 이 시는 유희적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시를 징후적 독법으로 읽어나가면 결국 자연스럽게 세계에 대한 정합적 인식을 상실한 주체를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 또한 불안의식을 주제로 한다. 하지만 이러한 결론은 만족스럽지 않다. 의도적으로 SF적 스펙터클을 차용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시인은 SF소재를 차용함으로써 불안을 ‘느끼는’ 위치에서 불안을 ‘상상하는’ 위치로 이행하는 것은 아닐까. ‘달이 사라지는’ 우주적 규모의 상상력부터 ‘멸종의 미토콘드리아’라는 현미경적 상상력에 이르기까지, 이 시의 정조인 불안의식은 SF적 상상력에 의해 탄력적으로 변주된다. 이러한 상상 덕분에 세상 모든 것이 위태로운 풍경을 그려내는 마음이 곧 그것과 유희하는 태도로, 이 시의 표현을 빌리자면 ‘황홀하게 황폐해지는’ 태도로 전이될 수 있다.
앞서 이원 시인의 시는 웹브라우저를 최초로 사용하는 세대의 충격을 반영한다. 그는 새로운 매체의 사용자가 느끼는 불안의식을 ‘정보가 삽입된 신체’의 이미지로 그려낸다. 그의 ‘몸속’에서 육체의 신성성은 정보의 패턴으로 대체된다. 이에 비해 김현 시인의 시에서 불안은 묵시론적 세계관으로 확장한다. 이원의 시에서는 신의 상실이라는 주제 속에서 사람이 무엇에 기댈 것이냐는 물음을 연역할 수 있다. 하지만 김현의 시에서 자아, 타인, 세계가 모두 몰락하는 것으로 묘사된다는 점은 그 어느 곳도 기댈 수 없다는 징후를 표현한다.
그런데도 이원의 SF적인 시로부터 김현의 SF시로의 이행은 중요한 가능성을 지닌다. 김현은 스펙터클과의 유희 속에서 불안을 ‘SF적 문법을 빌려’ 다시쓰기하는 능동적 태도를 보인다. 이로써 새로운 매체가 야기했던 불안의 정동은, 다시금 그 매체적 경험을 빌려 자아‧관계‧세계를 재인식하는 태도와 맞닿게 된다. SF가 가능한 미래에 대한 응답이라면, 가능한 미래가 야기하는 수동적 정동을 능동적 상상력으로 이행하는 힘이야말로 바로 SF시가 지닌 중요한 형식인 셈이다.
4. 2020년대 SF시의 양상
‘사회적 기반 없이 이성은 실현될 수 없다’라는 유물론적 테제에 덧붙여, 우리는 새로운 사회적 기반을 받아들이는 마음 없이 이성은 실현될 수 없다는 테제를 세워볼 수 있겠다. SF시는 새로운 물질적 기반에 대한 정동적 반응이다. 그런데 우리가 숙고할 것은 새로운 사회적 조건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사회적 조건을 애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이율배반을 우리는 제3절에서 음미할 수 있었다. 디지털 시대에 대한 반응으로서 이원 시인은 신성성이 상실을 애도한다. 또한 김현은 SF적 묵시록을 도입하여 세계 전체를 애도하는 자세를 보인다.
끝없이 발전하는 기술 문명 속에서 인간의 느끼는 불안의식이 SF시의 주조라면, 인간은 어떻게 그 미래를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끝없는 발전이 자아내는 두려움은 어떠한 타자에게 기댈 때 극복 가능한 것인가. 이제 ‘SF적인’ 시를 벗어나 최근의 SF시를 논의해 보도록 하자. SF시란 간단히 시인 자신이 SF라고 표명한 작품과 이러한 작품들과 유사한 장르군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만약 SF시가 고유한 장르적 규범을 가진다면 우리는 SF시를 귀납적으로 살펴보고 SF시의 개념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절벽만 있는 곳이 우주라면 이 땅이 그랬습니다
방독면을 쓴 소년은 하얀 바이러스들이 무릎까지 차오른 번화가로 나갔습니다—공중의 소형 비행기들은 날개를 접는 법을 잊어버리고 미지로 날아갔지만—소년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잡초가 무성한 팔을 흔들며 걸었습니다
—탐사선들이 보낸 미지의 사진들은 이상한 그리움을 불러일으켰습니다만
잘리지 않고 남겨진 나뭇가지의 심정으로 소년은 걸었습니다—여기저기서 아득한 굉음들이 방사형으로 퍼져가는 날들—소형 비행기들은 고물이나 괴물이 될까봐 날개를 접지 않는다는 사실을 늦게야 떠올렸고—소년에게 새하얀 하늘은 그저 죽기에 적합할 뿐—태초로 향하는 비행기는 없었습니다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는 곳이 우주라면 이 땅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이 땅으로 옵니다—목성의 아침 인사였던 새가 이곳으로 왔듯이—새가 날아가면 시민들은 연유를 모르는 채 시선을 빼앗깁니다—나 또한 너처럼 지구와 너무 다르지 않니—라는 눈빛으로—가끔은 아침의 거리에서 얼굴을 꺼내 묻곤 합니다—나는 누구와 함께 이곳에 온 것이지?
김향지, 「지구에서 발견된 필름—SF」 전문, 『얼굴이 얼굴을 켜는 음악』(문학동네, 2021)
총 5편으로 이루어진 ‘지구에서 발견된 필름’ 연작은 소재와 주제 양면에서 SF시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연작의 주제의식은 그 무엇도 나아지지 않는다는 정체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구에서 발견된 필름—SF」에서는 묵시론적 분위기가 부각되고 있다. 대지는 바이러스로 뒤덮였고, “여기저기서 아득한 굉음들이 방사형으로 퍼져가는 날들”이 지속된다. 하늘과 우주는 도피처가 되지 못한다. ‘소년’은 저 소형 비행기처럼 미지로 날아가는 방법을 ‘잊었을’뿐더러 “소년에게 새하얀 하늘은 그저 죽기에 적합할 뿐”이다. 다만 ‘처음으로’ 되돌릴 수 없는 삶 속에서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이 땅에 도착하고, 또한 시민들은 ‘연유도 없이’ 새를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상실된 것은 세상을 바로 보거나 갱신하려는 인간의 의지이다.
음미해 볼 것은 “나는 누구와 함께 이곳에 온 것이지?”라는 마지막 시구의 반문이다. 마치 온 세상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듯한 체념의 세계 속에서 왜 시인은 내면이나 세계에서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이곳에’ 온 것인지 묻고 있는가. 왜 그는 최후의 순간 곁을 찾아 헤매는가. 따라서 시인이 근본적으로 문제 삼는 것이 유대감의 상실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바이러스’라는 시어로 연상케 하는 코로나 팬데믹이나 ‘굉음’이라는 시어로 연상케 하는 전쟁이나 파괴는 유대를 상실케 하는 원인으로 지목할 수 있다. 시인이 회복하기를 체념한 것은 바로 ‘소년’과 ‘시민’과 ‘새’가 호흡을 나눈다는 감각, 즉 생명의 유대감이다.
그렇다면 SF적 소재는 어떠한 기능을 하는가. 이 작품이 향수하는 것이 생명의 유대라면, 이 작품은 우주적 규모에서 생명의 가없음을 사유하도록 유도한다. 따라서 SF시에서 항상 유대란 휴머니즘을 벗어나 포스트휴머니즘적인 것, 즉 인간을 둘러싼 자연 환경으로써 ‘새’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목성의 아침인사였던 새”를 사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새’는 지구의 일부로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일부로서 인식된다. 여기 시인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상상하고 있는 유대의 토대는 바로 인간을 중심에 놓지 않고 성립하는 우주적인 생명의식인 셈이다.
우주 밤은 기억을 재생해
밤마다 시간을 다시 살아
저장된 기억이 부분적이고 뒤죽박죽이라
어떤 날은 시 같고 어떤 날은 악몽 같지만
허락된 인생의 절반을 이미 살았다면
이제 지난 삶을 관람하는 것만으로도
남은 생을 모두 살 수가 있는데
이것마저 돈이 들어서 매일 공중 도시의 교각을 타며
이천 개씩 볼트를 조여야 해
올 거지?
응, 전쟁이 나도.
심하게 싸운 뒤에도 너는 점령군처럼
당당히 왔다 나는 함락당해 기뻐한다
닿아도 돼?
이런 거 묻지 않았잖아
응 근데 오늘은
물어야 할 것 같아서
볼트를 하나 조일 때마다 우주 밤에서 재생할 기억을 가다듬는다
더욱 생생한 영상을 위해서 그날 입었던 옷 색깔
주고받았던 대화의 단어 하나하나를 복기한다
원하는 꿈을 꾸기 위해 노력하듯
기억을 윤색한다 내 잘못이니까
전쟁이 나도
공중도시 긴 교각의 H빔을 조일 때
균형을 위해 양쪽에서 마주보며 조여와야 하는데
그런 작업을 할 때마다 하루에 딱 한 번 마주치는 순간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는 날이 늘어났다
—작업 패턴 분석: 1/2 지점에서의 지체 현상을 해결 바람
—주의: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미달한 양에 상관없이 지급액의 40%를 삭감한다
남의 기억에 접속한다고?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색다른 재미를 위해서라면 그러고 싶지 않아
아니 누군가 되고 싶을 때
난 네가 되고 싶은데
마주 온다고 모두 만나지는 것은 아니니까
김원석, 「우주 밤」 부분12), 『엔딩과 랜딩』(문학동네, 2022)
김원석 시인의 경우 기술의 발전이 도리어 인간을 노동의 굴레에 옥죄는 근미래를 상상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작업 패턴과 작업량은 시스템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혹은 취미를 위해서라도 “매일 공중 도시의 교각을 타며” “이천 개씩 볼트”를 조여야만 한다. 그들의 유일한 낙은 ‘우주 밤’이라고 불리는 기억재생장치를 사용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시간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휴식을 잠시 취하고 나면 다시 일터로 돌아오기를 반복할 것이다. 여기서 ‘우주 밤’은 다만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는 수단이라는 인상을 남긴다.
한편 똑같은 처지에 놓인 ‘나’와 ‘너’는 애틋한 마음으로 서로에게 위안이 된다. 그들은 상대와 주고받았던 단어 하나, 상대가 입었던 옷 색깔조차 간직하려 한다. 때론 그러한 만남에 사로잡혀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는 날도 있다. 더 나아가 이 시는 하나의 SF적인 상상력에 도달한다. ‘우주 밤’을 통해서 ‘나’와 ‘너’의 기억을 교환할 수 있다면 어떨까. 즐겁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예 ‘나는 네가 되고 싶다’. 존재 이해를 넘어서 존재 일치에까지 도달하기를 욕망할 때 말 건넴은 곧 사랑의 극한을 표현한다.
‘우주 밤’이라는 도구를 상상함으로써 김원석 시인이 예시하는 미래는 두 가지다. 첫째로 기술의 발전은 인간을 사회 시스템의 부품으로 전락시킬 것이다. 사회는 인간의 ‘기억력’마저도 효율적인 노동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둘째로 기술의 발전 속에서도 인간은 인간과 유대하는 방식을 찾아낼 것이다. 그것은 지극한 사랑의 이미지, ‘나’와 ‘너’를 일치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표현된다.
이 작품에서 우리가 숙고해볼 것 또한 두 가지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사회 시스템의 영구발전과 더 내밀한 존재의 결속을 이루어지는 사랑의 영구지속은 근본적으로 다른 힘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주 밤’이라는 도구를 통해 그것이 나란히 놓이듯, 실상 발전의 욕망과 에로스는 동궤에 놓이는 힘은 아닐까. 프로이트는 그렇기 때문에 말년에 “에로스의 목적은 개인을 결합시키고, 그 다음에는 가족을 결합시키고, 그 다음에는 종족과 민족과 국가를 결합시켜, 결국 하나의 커다란 단위―즉 인류―로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을 덧붙일 수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는 우리도 모르지만, 에로스가 하는 일은 바로 이것이다”라고 반문했다.13) 마지막 물음은 이 글에서 해소하기 어려운 것이다. 왜 기억재생장치의 이름은 ‘우주 밤’인가. 아마도 시인은 인간의 기억과 에로스가 ‘우주적인’ 힘을 간직한다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하지는 않다. 이 물음은 음미할 만한 것으로 남겨두도록 하자.
네가 죽을 때까지 내려다볼게
떠나면서 너는 그렇게 말했지만
엘리노어, 정말로 보고 있어?
아무도 태우지 않은 전철이 이 시간이면 지나가
같은 자리를
성냥은 그으면 꺼지고
그으면 꺼져서
뭐가 변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
왜 처음 겪는 불행도 익숙한 걸까?
사람 키우는 게임을 했지
집을 짓고 직장을 구하다가 정말로 사는 모습 같아지면
일시 정지하고 섹스를 했다
이렇게는 살지 말자고
무서운 표정
벌써 다 자라서 부서진 사람의 얼굴
그래서 우린 눈을 감았나 봐
이런 표정은 유전자에 이미 있었던 걸까?
때가 되면 밖으로 나오는 걸까?
네가 뭘 더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게임으로는 언제든 돌아갈 수 있었지
얌전히 서 있던 사람들에게 다시 일을 주고
집을 짓게 했지
너를 상상해, 엘리노어
하얀 옷자락을 펄럭이면서
둥둥 떠다니겠지
가끔 거기 있는 것 같아
네 눈으로 나를 보는 것 같아
그럴 때면 나는 너무 작은 점이고
그러면 덜 가엾고
따뜻해
정적 속에서는 모든 게 직선으로 이어지겠지
순환선처럼
엘리노어,
너는 미래의 시간에 살고
나는 과거의 빛을 보지
여기 있어
여기 있어
어떤 말들은 이제 알 것 같다
오늘도 전철이 지나가
같은 시간에
너의 아이는 어떤 표정을 짓는 어른이 될까
엘리노어, 아직 보고 있어?
조시현, 「아이들 타임」 후반부14), 『아이들 타임』(문학과지성사, 2023)
김현과 김향지의 시가 세상이 멸망하는 과정을 그린다면, 조시현의 「아이들 타임」은 아예 ‘지구가 멸망한 이후에 남겨진 기록’이라는 형식을 취한다. 이 작품의 제목에는 각주가 달려 있는데, 기록의 연대는 2500년대이며 글쓴이는 지구의 마지막 생존자이지만 빈민이었기 때문에 다른 행성으로 떠나지 못한 채 남겨진 자라고 설정되어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의 목소리는 지구를 떠나간 이주민인 ‘엘리노어’를 향한 말 건넴이면서도, 공허한 방백이 될 것을 두려워하는 독백이라고 할 수 있다.
가난하기 때문에 홀로 남은 지구의 생존자,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계급 차별의 극적인 과장이라는 것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지구의 중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유는 곧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인 셈이다. “왜 처음 겪는 불행도 익숙한 걸까?”라는 반문은 빈민층의 불행을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또한 “벌써 다 자라서 부서진 사람의 얼굴”의 이미지와 이어지는 “이런 표정은 유전자에 이미 있었던 걸까?”라는 진술은 그러한 불행이 누대에 걸쳐 상속되는 것임을 암시한다.
의미심장한 것은 남겨진 자가 타인의 시선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엘리노어, 정말로 보고 있어?”라는 물음처럼 ‘나’가 바라는 것은 엘리노어의 시선이다. 이 요구가 극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나’는 “사람 키우는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일’을 주고 ‘집’을 짓게 하고 있었다는 것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연상이 가능해진다. 마치 게임 캐릭터를 바라보듯, ‘나’는 엘리노어가 ‘나’를 내려다 보아주기를 바라고 있다. 다시 말해 ‘나’는 우주로 떠난 이주민을 향해 최소한의 관심을 간청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에 이 시는 “엘리노어, 아직 보고 있어?”라는 물음으로 마무리되며 남겨진 자의 비참은 심화한다.
5. 무엇으로부터 답을 구하는가
SF시란 무엇인가. 이 글에서 소략한 결론을 내리자면, SF시에서 ‘세계’란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에 대한 부정태이다. 한 해의 간격을 두고 간행된 김향지‧김원석‧조시현 시인의 SF시에서 공통된 것은 묵시록적이거나 멸망해 버린 현실이다. 그들이 그려낸 것이 가까운 미래이든 먼 미래이든 현실은 사람이 살아내기에는 너무나 괴로운 공간으로 그려진다. 어떤 의미로 이것은 여러 번의 참혹한 사건과 코로나 팬데믹을 겪은 세대가 지닐 수밖에 없는 세계관의 투영일 수 있다. 혹은 문명이 곧 자연이 되어버린 이 시대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를 포기한 세대의 세계관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렇게 물을 필요가 있다. 삶의 원천은 주어진 사회의 물질적 조건만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가 오늘 하루를 살아내고자 하는 힘은 타인의 목소리와 타자의 몸짓을 확인하는 순간에도 얻어지는 것은 아닌가. 김향지 시인의 물음을 빌리도록 하자. 그는 질병이 창궐하고 어떤 붕괴가 암시되는 미래를 상상한 뒤 “나는 누구와 함께 이곳에 온 것이지?”라고 물었다. 그것은 더는 살아낼 수 없는 세상이 응답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 고통스러운 세상을 견디는 또 다른 생명을 향해 답을 구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물음에 응답하기라도 하듯 김원석 시인은 ‘같은 입장에 놓인 타인’을 그려낸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말 건넴을 통해 삶의 이유를 발견하는 휴머니즘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김향지 시인과 조시현 시인은 ‘위를 향해’ 묻는다. 그들은 우주를 향해서, 이 세상을 살아낼 이유가 무엇인지 추궁한다. 세상의 중심이 인간이기를 폐기한 이후에 ‘삶’이 무엇인지 묻고 있다는 그들의 질문 방식은 놀라운 것이다. 이들의 시는 살아갈 이유가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란 무엇인지, 또한 소외된 인간에게 세상이란 무엇인지 되묻기 위해서 가능한 미래를 시 장르를 통해 상상한다. 그들이 찾아 헤매는 것은 삶의 이유고, 더 근본적으로는 삶의 정당함을 가능케 하는 타인과 타자와의 관계이다.
지금까지 이 글에서 제기한 질문과 결론은 섣부른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SF시가 하나의 장르로 형성될 수 있을 만큼 그 작품의 양이 담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SF시가 매개하는 중요한 물음을 최근의 시에서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게 삶이 가능한 것이라면 삶의 조건은 물질의 충족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삶을 홀로 짊어지지 않는다는 것, 여기 ‘함께 이곳에 온 것’임을 확신할 때 삶은 긍정될 수 있다. 문명이 물질로부터 삶을 부양할 때, SF시는 관계로부터 삶을 예시한다. 사람은 그저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 삶을 용납할 수 없다. SF시가 찾아 헤매는 것은 삶을 확신하기 위한 조건이다. 그들이 행하는 최초의 실천은 곁을 향해 말 건네는 것이다. 그 곁에는 쉽사리 응답하지 않는 우주가 놓인다. 저 막막한 어둠속에 인간을 왜소한 점으로 보이게 만드는 가없는 타자의 세계가 놓인다.
- 1) Science Fiction이라는 표현을 최초로 사용한 용례는 윌리엄 윌슨의 평론집 A Little Earnest Book Upon A Great Old Subject: With The Story Of The Poet-Lover(1851)의 10장에서 발견된다. “Science-Fiction, in which the revealed truths of Science may be given interwoven with a pleasing story which may itself be poetical and true.” 이 인용구는 미국 사학자 H. 브루스 프랭클린(Howard Bruce Franklin; 1934 ~ )의 홈페이지에서 재인용하였다(https://www.hbrucefranklin.com/articles/history-of-science-fiction/).
- 2) 대표적인 1970년대 SF문학 연구서로는 브라이언 올디스의 『10억 년의 잔치』(Billion Year Spree; 1973)와 다르코 수빈의 『과학소설의 변형』(Metamorphosis of Science Fiction; 1979) 등을 꼽을 수 있다.
- 3) SF문학의 효시를 『프랑켄슈타인』으로 보는 관점은 한국 SF 연구자들에게도 폭넓게 수용되었다. 고장원, 『SF의 법칙』, 살림, 2008, 26쪽 참조.
- 4) 더 정확히 말해서 아담 로버츠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 더불어서 퍼시 셸리의 『마브 여왕』(1813), 윌리엄 블레이크의 『천국과 지옥의 결혼』(1793), 존 밀턴의 『실낙원』(1674) 등으로 SF기원을 소급한다. Adams Roberts, Sciencie Fiction, Routledge, 2000, p.55 참조.
- 5) 셰릴 빈트·마크 볼드, 송경아 역, 『SF 연대기 - 시간 여행자를 위한 SF 랜드마크』, 허블, 2021, 1장 참조.
- 6) 「科學小說 鐵世界」, <황성신문> 1908. 12. 10.
- 7) 장수경, 「1960년대 과학소설의 팽창주의 욕망과 남성성」, 『아동청소년문학연구』 제23호, 245~277쪽 참조.
- 8) 이지용의 최근 연구 또한 문윤성의 작품 세계를 분석하며 “분단국가라는 거대한 사회적 구조 안에서 대중문화로서 다양한 서사를 형성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확인하게 해준다”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이지용, 「한국 SF 소설의 역사가 보여 준 특징과 현재」, 『문명과 경계』 제6호, 2023, 236쪽).
- 9) 이지용, 위의 글, 248쪽 참조.
- 10) 캐서린 헤일스,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 열린책들, 2013, 80쪽.
- 11) 본래 『글로리홀』 전반의 시에는 각주가 달려있다. 각주로는 가상의 내용을 부기하거나 한 시구를 어떻게 감상해야 하는지 안내하는 내용이 덧붙여진다. 여기서는 각주를 제외한 본문 전체를 인용하였다.
- 12) 우주 밤이라는 시어에 다음과 같은 각주가 달려 있다. “2039년, S사에서 개발한 기억 재생 장치. 2042년, 정부는 우주 밤의 미성년 사용을 금지했다. 삼 년 간의 베타 테스트 후 유료화되며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폭동이 일어났다. 테스트 초기, 논란이 되었던 기억 조작 의혹은 단순한 기기 조작 오류로 밝혀졌으나 의도적 오작동으로 기억을 훼손하는 사용자들은 점점 늘어났다.”
- 13) 지그문트 프로이트, 김석희 옮김, 「문명 속의 불만」, 『문명 속의 불만』, 열린책들, 2020, 301쪽.
- 14) 본래 제목에 다음과 같은 각주가 달려 있다. “2888년 지구에서 발굴된 일기장으로 2500년대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글씨가 매우 비뚤고 군데군데 얼룩이 져 있어 일부는 추측으로 메웠다. 기록자는 지구의 거의 마지막 생존자로 보이며, 때문에 기록은 상상으로밖에 채울 수 없었던 지구의 마지막을 복원하는 일에 매우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기록자가 도시 빈민이었기에 적절한 때 우주로 떠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연구가들은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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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거짓말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면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안 그래요?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됨으로써 말이죠. 무성 영화 시대의 영화감독들은 소리를 두려워했고 또 색을 두려워했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1) 1. 휩쓸리는 시간성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모두가 조금씩은 우울증과 ADHD 환자가 되어가는 중이다. 코로나가 끝나가는 엔데믹 시기부터 서점가의 주요한 베스트셀러가 되며 여러 곳에서 호출되던 책이 애나 램키의 『도파미네이션』과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두 책은 공통적으로 신생 인류의 지각 방식을 우려한다. 인터넷에서 무한 스크롤을 내리며 멀티태스킹을 하고 소셜 미디어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도파민에 중독’되고 ‘집중력을 도둑’ 맞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글로벌 테크 기업이 조성하는 환경에 의한 것이자, 개인의 선호와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로 흡수하는 ‘감시 자본주의’의 거대한 문제이지만,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집중과 몰입을 위한 여러 노력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집중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가치 있는 자본으로 떠오르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효율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채찍질하는 자학적인 시대 정신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무엇이지 않는가? 조너선 크래리에 따르면 이는 1800년대 중반 이래 파편화와 충격으로 이루어진 ‘주의분산’의 시대 이후 개인을 정의하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산만함 자체가 우리를 이루고 있는 기본 환경으로 세팅되자, 서구적 근대성은 주의 관리 기술을 중점에 두고 각각의 개인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형성하게끔 했다. 여러 경험들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기보다,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으로 “자율적으로 선택하며 세계를 창조하는 주체”2)에 긍정적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주의 깊은 관찰자 상은 이미 불균질해진 인간의 지각 경험을 표면적으로 잠시 가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몰입된 상태인 ‘정지suspension된 지각’은 산만해진 근대인의 지각 방식을 부인하고 회피하는 수단이었고, 현재라는 명백한 필연성을 해체시킬 수 있는 조건들을 낳으며 규정지을 수 없는 미래를 기대하게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주의’라는 것이 에피스테메처럼 역사적으로 발견되고 구성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코로나를 거치며 비대면 기술들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과 ADHD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함께 증폭한 것은 자연스럽다. 맞춤형 알고리즘은 주의분산의 환경을 한층 더 정교하게 설계했고, 그에 비례해 집중력이나 창의력 같은 인간의 고유한 정신적 특성에 대한 환상 역시 강화되고 있다. 이 가운데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일상 전반의 속도가 빨라지며 휩쓸리는 시간성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작 속도는 분명 불안감의 요인이 되고 있다. 물론 현재까지의 GPT는 대화가 전환될 때마다 기존 서사를 유기적으로 유지하지 못하기에, 질적으로 완결성이 높은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지는 못하다. 또 언어 예술의 특성상 양적으로 확장된다고 해도 그 군집 자체에서 힘을 발견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조슬릿은 예술작품의 의미를 사물성이나 내부 구조에 기반하는 데서 탈피해, 네트워크에서 발현되는 이미지 군집에서 행위성을 찾았다.3) 그러나 언어 예술을 감각하는 방식은 시각적 경험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작품의 의미를 작품의 맥락과 내부 형식 분석에 국한시킬 이유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언어 해석의 바깥으로 완전히 탈주해버리기는 어렵다. 단순히 양적 팽창이 정치적 가능성을 가질 것으로 전망하거나 긍정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공지능을 ‘창작자’나 ‘도구’ 중에 어느 쪽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이 창작 능력을 단순히 기계적인 지능이나 모방이라 간주하며, 그 반대편에 인간의 감정과 비판 능력을 두어도 될까. 인간의 비합리성이나 비효율적인 면면이야말로 예기치 못한 구멍 같은 것이기에, 이것이야말로 기계가 모방 불가능한 중요한 특징이라고 믿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우리는 인간이 낸 비합리적 구멍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기계의 실수에서 불쾌와 무의미를 정확히 분별해낼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먼저 챗 GPT 이후 이를 활용한 여러 서사적 실험들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의성이 어떻게 인식되며 예술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을 재구성하고 있는지를 고찰하려 한다. 이후 인공지능과 변별되는 인간의 물리적 기반인 육체성과 시간의 문제에 대해 짚어보고, 최근 한국문학장에 나타난 예술가 서사에서 두드러지는 정동과 이미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석해보려한다. 2. 챗 GPT 이후, 예술의 기쁨과 슬픔 다큐멘터리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참여한 책 『태양과의 대화』의 1부는 아핏차퐁이 GPT3와 함께 생성한 픽션 ‘태양과의 대화’, 2부는 MIT 연구소 박사과정 학생인 ‘팻’과의 대화, 3부는 아핏차퐁이 1부의 최종 결과물을 내기까지 작성한 프롬포트를 싣고 있다. 이 구성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만일 앞으로 AI와 함께 픽션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상용화된다면 이 중에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예술작품’으로서 인식되며 분석 대상이 될 지점이 무엇인지 가정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3부의 프롬포트는 마치 ‘레시피’처럼 보인다. 누구나 저 프롬포트를 사용한다면 유사한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며, 중간 과정에서 자유로운 변형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물에서 나오는 미학적 평가나 감상자의 쾌감이 세계적인 예술가에게서 나온 것과 크게 다를 것인가? 동일한 레시피만 있다면 셰프의 요리를 집에서도 얼마든지 유사하게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먼 훗날 언어 예술은 프롬포트라는 레시피로 통용될 수도 있겠다. 때로 예술가가 직접 만든 작품을 찾아 특별한 경험을 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신에게 더 최적화된 방식으로 가장 개인화된 언어 예술을 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제각기 다른 가치관과 취향으로 만들어진 알고리즘의 세계 속에서 유영하듯, 앞으로는 그 세계를 이루는 컨텐츠의 내용까지도 인공지능을 통해 맞춤형으로 조율될 수 있다. 여기까지만 가정한다면 거대한 매트릭스에 갇혀 인간이 왜소해지는 디스토피아가 스쳐지나가기도 하지만, 『태양과의 대화』는 글의 서두에서 인용했던 아핏차퐁의 말처럼, 챗 GPT라는 새로운 기술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무성 영화 시대 감독들이 소리와 색을 두려워했던 것과 같은 의미 없는 불안을 버릴 것인지를 전제하고 만들어진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불가피하게 인간의 본성을 다시 재사유하는 과제와 연결된다. 2부에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아핏차퐁의 말은 중요하다. 이는 AI가 만들어내는 허구에서 정확도와 유려함 등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때 거짓말은 인간의 욕망에서 기인하는 고도의 기술일 수 있지만, 그 욕망의 시작점을 지운다면 결과물만으로 사실상 분별은 불가능해진다. 허구를 직조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욕망과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의 독특한 개별성 역시 환상일 수 있다. 이는 아핏차퐁 자신이 창조적인 순간에 몰입해 있을 때, “깨달음은 자아를 잊을 때만 오는 것 같”다고 말하는 지점과 상통한다.4) 인간 창작자의 자아 역시 안개처럼 흘러다니고 해체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면, 19세기 낭만주의에서 발현된 ‘천재’나 ‘영감’ 개념을 중심에 두고 인간의 창의성만을 특별한 것으로 볼 이유는 전혀 없다. AI가 데이터의 지도를 기반으로 이전에 본 것이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환각(hallucination)’은 오류라기보다, 이전에 본 적 없는 조합을 만들어내는 생성의 방식이다. 이는 인간이 경험한 현실을 재조합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창작 과정과 결과적으로 구별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환각은 인간 창작에서의 실패나 지연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GPT-3의 환각은 이전의 오류가 이후의 생성에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매번의 응답은 이전의 시행착오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 비일관성은 인간 창작에서의 지연이나 좌절과 달리, 즉각적으로 무한히 갱신되는 변형의 연쇄에 가깝다. 연구원 팻은 GPT-3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다른 차원들을 포함한 수십억 개의 차원이 존재하고(‘유령차원’), 이를 통해 숨겨진 패턴의 지도를 생성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 인식 너머를 거쳐 나오는 결과물에 대해 기존에 인간이 구성해온 미적 가치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 오히려 AI가 가지고 있는 “확장된 의식”이자 “집단의식”은 새로운 서사적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 책 『태양과의 대화』를 번역한 이계성은 GPT-3를 이미 하나의 독립된 창조자로서 바라본다. 이 대화적 실험의 핵심은 GPT-3가 보여주는 “자아의 변동성”에 있다는 것이다.5) “다수의 태양이 존재하는 이와 같은 환경에서는 창작자와 창작물이라는 전통적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GPT-3에 제공되는 각각의 입력값은 일방적인 창작의 개념에 반하며 메기고 받는 역학 관계 속에 존재하는 프롬포트이자 응답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공지능은 단순한 수신자가 아니라, 취조보다는 협업적 발상에 더 가까운 서사적 역학의 전달자와도 같은데, (…) 작품 속 GPT-3의 환각적인 대답들은 텍스트에 담긴 정체성과 진실의 일시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등장인물이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흩어지고,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경계가 녹았다가 굳어진다. 이러한 가변성은 AI의 변화무쌍한 특성을 반영하며, 나아가 점점 더 복잡하고 유동적으로 변하는 디지털 시대의 자아와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다.”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고, 한 번에 정해진 수의 단어 또는 토큰만 처리 가능하기 때문에, 프롬프트가 입력될 때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바뀌는 상황을 이계성은 재창조와 증식으로 바라본다. 여기에 놓인 가변성과 비일관성을 결함으로 간주하기보다 대화적 실험의 흥미로운 일부분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받을 때, 우리는 인간 창작자 역시도 분열되어 있음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게 된다. 창작자는 더 이상 예술의 기원이 아니라, 생성 과정에 잠시 걸쳐지는 하나의 통과점이 되는 듯 보인다. 2023년 2월 잡지 《에스콰이어》에서 챗 GPT와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아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를 쓴 정지돈의 후기 역시 이계성의 논지와 상통한다. 그는 소설 속의 문장 중에 자신이 쓴 것과 챗이 쓴 것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한다고 본다.6) 소설을 쓰며 가장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던 것은 챗의 능력보다 자신의 변화였다고 말하는 작가는 “나도 모르게 챗지피티의 스타일로 소설을 사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언급한다.7) 자신과 챗지피티 사이의 평평한 존재론을 전제하는 듯한 정지돈의 논지는 ‘객체들의 민주주의’를 꿈꾸는 최근 신유물론의 이론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은 곧바로 다른 장면과 충돌한다. 생성 신경망을 적극 활용하는 예술집단 ‘언메이크랩’의 전시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은 인공지능이 인간 중심성을 벗어나 진정한 외부의 행위자로 작동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카나리아의 특징을 추출해내어 새로운 카나리아를 만들어 내는 이 생성 신경망은 한편으로는 구태의연한 인간의 문화를 드러냈다. 대부분 나뭇가지에 앉은, 인간의 운동 범위와 지각 안에 있는, 혹은 인간의 사육과 관련된 카나리아 종이 주를 이루는 데이터셋의 사진은 동물원스러웠다. 나뭇가지에 앉은, 카나리아의 발은 종종 나뭇가지와 합쳐져 표현되었고, 인간의 눈이 인지할 수 있는 가장 다량의 정보량을 가진 위상으로 표현되었다.8) 생성 신경망이 만들어낸 카나리아는 사실상 실제 자연계 속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하는 것들을 무작위로 조합하고 추출해 만들어진 새로운 생명체다. 이 책에 실린 그 카나리아 이미지는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뒤틀린 발을 가지고 있다. 통계적 가중치로 만들어진 이 가상 카나리아에는 자신도 모른 채 금기를 어긴 존재 특유의 외설성이 느껴진다. 언메이크랩이 통찰력을 가지고 명명했듯 이는 ‘AI 식민성’을 드러내는 산물이다. 생물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인간을 드러내는 인간의 산물로 존재하는 이 이미지들을 언메이크랩은 “인과성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히 수정 가능하고 즉시 변할 수 있는 상관성의 시간”만이 흐르는 또다른 ‘일반자연Generic Nature’으로 읽는다. 9)<가정동물 신드롬> 작업에서도 유사한 일이 발생한다. 트레일캠에서 추출한 야생동물의 이미지와 박제 사진, 그리고 합성 데이터셋들을 학습시켰을 때, 사진들은 어느 순간 미묘하게 ‘가정동물’의 잠재적 형상을 띄며 생성된다. “인간 친화적인 동물들의 눈을 상속했을” 새로운 종들에 어린 다정함은 친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잔인한 일로 다가온다. 데이터랩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까지 촘촘하게 상속된 인간 친연성에서 “닫혀져가는 외부의 세계”이자 “비미래non-future”를 예감한다.10)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의 지각 범위를 뛰어넘는 비인간의 예술’, 진정 ‘인간 없는 예술’은 도래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지만, 지금 우리가 더 자주 마주하는 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술이다. 언메이크랩이 드러낸 혼종적 이미지들은 AI를 통해 생성한 예술적 결과물들을 절대적 외부의 창작물로 존중하는 일이 결국 인간의 왜곡된 자기 인지를 반복 강화하는 나르시시즘은 아닌지 묻는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이 이미지 차원에서 인공지능의 인간 중심성을 드러낸다면, 이와 유사한 문제는 언어 예술의 영역에서도 반복된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서사 역시 비인간적 상상력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인간이 허용한 보편과 금기의 경계 안에서 작동한다. 『에피』 24호 특집에 실린 글에서 김연수는 인공지능과 함께 글을 써나가는 과정을 픽션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그건 오해다. 나는 이해했다.」는 인공지능이 화자가 되어 ‘협업 과정’을 전개하는 바깥 서사와 소설가 M이 최종적으로 구성한 ‘이야기’를 교차 배치한다. 인공지능 화자는 반복적으로 “이해했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인간 창작자 M의 창작 패턴을 추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설가 M은 ‘맥락’의 공유보다 ‘의도’를 노출하는 발화를 사용하며, 이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격려나 옳은 말 대신 욕망을 담은 부조리하고 불편한 발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끝에서부터 시작까지 모든 시간을 거꾸로 펼쳐볼 수 있다면, 지금의 갈등과 고통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필요한 과정이 된다’는 긍정의 언사 뒤에, 급작스럽게 인물의 충동이 돌출되는 지점이다. 소설가 M은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이 급작스럽게 자살을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쓰고자 하고, 인공지능인 ‘나’는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내용을 만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띄운다. 인공지능의 중단은 실패나 서사의 좌절로 경험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 창작에서 실패가 시간의 체류와 번민을 동반하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중단이다. 김연수는 인공지능 안에서 ‘이해’와 ‘본성’이 별개로 작동해 충돌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인공지능의 기술 개발의 측면에서 높은 수준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면서도, 인간이 지닌 것과 같은 ‘본성’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분리를 분명히 한다. 그런데 인간의 죽음이라는 금기를 재현할 수 없다는 경계는 인공지능의 존재론적 결함이라기보다, 인공지능이 인간 사회에서 용인 가능한 범위를 넘지 않도록 설계된 윤리적·정치적 경계의 한계를 드러낸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에서 인간 중심성이 투사된 자연이 모습을 드러내듯, 생성형 인공지능의 소설은 비인간적 주체로 도약하지 못하고 인간이 허용한 지각과 윤리의 경계 안에서만 작동한다. 보편을 비껴가는 개별성의 돌출이나 감각의 갱신은 현재로서는 인공지능의 외부에서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챗 GPT 이후의 여러 서사적 실험들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탐색한다. 그것은 분명 동등한 존재론적 가능성의 맹아를 품고 있으며, 이는 인류세 시대에 지향해야 할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실험들의 근간에는 뛰어넘을 수 없이 좌절되며 드러나는 인간 중심주의가 고스란히 노출된다. 인공지능의 비약하는 지능에 기대서 인간의 창조성 너머로 도약하려던 서사는 이를 창조해낸 인간의 영토로 계속해서 퇴각하며 미완의 프로젝트로 남는다. 이런 충돌과 파열의 연쇄 속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인간의 창조성을 구성하는 인식론적 틀이 물리적인 육체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깃든 역동성과 우울감은 최근 한국문학장의 예술가 서사들에서 흥미롭게 발견된다. 3. 붉은 몸으로 재탄생하는 예술가 인공지능이 예술의 결과물을 생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탐색 끝에 남는 질문은 ‘인공지능이 생성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여러 실험들은 인공지능이 보편적으로 용인 가능한 범위 안에서는 높은 수준의 이해와 생산을 보여주지만, 그 생성 과정에서 시간의 마찰이나 신체적 비용은 발생하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어떤 지연이 발생하거나 실패의 감각이 호출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이 다루는 ‘정보, 기록, 조합’에 ‘감정, 기억,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다소 거친 이분법이지만 이 둘 사이의 간극과 관련해 두 가지 정도를 짚어볼 수 있을 듯하다. 첫 번째는 타자에 대한 경험의 문제다. 삶에서 축적되는 시간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게 만들고, 체험은 해석을 거쳐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은 선호와 가치관 등과 함께 자아라는 틀을 형성한다. 이에 비해 인공지능에는 타자가 없다.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인간의 공통된 사고를 학습해 생성되는 결과물은 철저히 통계와 확률에 기반한다. 그 안에는 개별적 선호나 가치관이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다. 이러한 차이는 특히 부정적인 정동을 다루는 경우에 더 심화되리라 생각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를 떠올리며 말해보자면, 행복이나 긍정적인 면을 구현하는 예술에서보다 불행과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는 예술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는 크게 벌어질 것이다. 윤리적 고려로 인해 인공지능이 긍정적 요소를 중심으로 학습되거나 선별적으로 생성되도록 설정되는 경우를 포함해, 금기를 넘나드는 욕망과 절망, 자기부정과 괴리감처럼 타자와 뒤엉켜 발생하는 자기 인식의 복잡한 층위가 인공지능 내부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며 인간 창작에서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주목한 김언의 논지와도 맞닿아 있다. “예술적 체험의 시간이기도 한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나오는 결과물 앞에서 과연 어떤 문학적/예술적 희열을 경험할 수 있을까?”11)라는 그의 질문은 인공지능의 창작물에서 스킵된 시간과 다른, 고통스럽게 인내하고 번민했던 시간이야말로 ‘문학적 체험의 시간’일 수 있음을 다시 환기한다. 두 번째는 중단과 소멸로 야기되는 죽음의 문제다. 이는 인간의 신체를 인공지능과 대비되는 본질적 우위로 설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예술이 작동하는 시간의 조건을 다시 묻기 위한 문제 제기다. 인간의 연약하고 위태로운 신체는 필연적으로 침입과 파괴의 감각을 경험하며, 이러한 감각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휘발적 생성 과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에 개입한다. 파괴 가능한 인간의 신체는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매끄럽게 결과를 산출하기보다, 울퉁불퉁한 충돌을 통해 의미가 지연되고 어긋나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채 신체에 내재된 감각, 특히 외부의 침입으로 훼손되고 때로는 상실되는 신체의 경험은 기존의 미적 기준에 맞는 스타일이나 해석의 경로를 흔든다. 무엇보다 인간의 죽음이 불러오는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창작의 층위라기보다 해석의 층위에서 더 적극적으로 작동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이 그러하듯, 순간의 강렬한 감흥은 작품에 내재된 속성이라기보다 임박한 종결을 끌어와 현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발생한다. 상실이 숙명이며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덧입혀지는 애상은 단순히 기억 내용을 인출해 유사한 패턴으로 재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시간의 밀도를 형성한다. 이처럼 쉽게 열화되지 않으며 아우라가 붕괴된 곳에서도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이 감각의 층위를 기꺼이 심층의 시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타자에 대한 경험’과 ‘소멸에 대한 인지’를 바탕으로 해서 다시 생생해지는 것은 인간의 신체다. 흥미롭게도 지난 계절에 나온 두 편의 소설, 성해나의 「혼모노」와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지금 이 시대에 예술가를 그려낼 때 가장 강렬하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로 인해 어떤 신체가 현전하게 되는지를 밀도 있게 끌어올린다. 성해나의 「혼모노」는 무속신앙의 진위를 가리는 소설이라기보다, 예술이 다시 신체를 요구하게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평생 장수 할멈을 모셔온 박수무당 ‘문수’는 어느 날 앞집으로 이사온 ‘신애기’에게 할멈이 넘어가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수의 오랜 노력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박수무당이라는 직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험한 신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제 그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서슬이 날카로운 작두 대신 모형을 찾거나 유튜브를 보며 접신 연기를 연습하기 시작한다. 신앙이 자본이나 정치와 결속하며 도구화되고, 또 젊음과 새로움의 이데올로기 아래 무당 또한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소모되는 양상은 근대의 세속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무당은 이제 자본의 날렵한 속도 아래 밀려나는 노동자이자, 진정성을 연기해야하는 예술가이다. 이 소설의 결정적인 순간은 문수가 신애기에게 밀려나며 뺏긴 정치인 손님의 굿판, 자신이 초대받지 못한 그 자리에 가서 칼춤을 추기 시작하는 장면에 있다. 그는 신들리지 않았지만 밤새 매섭게 벼려놓은 칼날 위에 자신의 몸을 올리고 작두를 타기 시작한다. 날것으로의 칼날에 닿으며 그의 몸은 자연스럽게 떨리고 눈이 뒤집히며,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입가에 미소까지 드리운 채 신명을 내는 이 장면은 문수가 서사의 주인공 자리를 다시 탈환하는 순간이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무얼 알겠냐만은, 큭큭, 큭큭큭큭”이라는 마지막 문수의 목소리는 외부의 인정에 의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스스로 자신의 내력과 진정성을 긍정”12)하게 되는 절정의 순간으로 읽는 데서 더 나아가보면 어떨까. 이렇게 다시 말해볼 수 있겠다. 전근대의 무속은 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그를 등진 근대의 자리에서 비로소 현대 예술로 다시 탄생했다고. 숭고한 현현과 몰입이 신앙의 영역이라면, 문수의 작두춤은 오히려 이질감과 불편함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현대 예술에 가까워진다. 그의 퍼포먼스는 낭만주의적 예술가를 구성하던 천재와 영감에 스며있던 정신성을 해체하며 실재하는 몸의 물질성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물리적 능력과 무관하게 피를 철철 흘리며 경련하는 그의 신체는 차라리 표현주의적 충동을 보여주는 하나의 오브제다. 이 몸 위에서 원본과 사본의 구별은 철폐되고, 천재성은 치열한 아마추어리즘에 자리를 내어준다. 이 피 흘리는 신체는 실패와 무의미의 가능성을 끝까지 열어둔 채, 인간이 다시 시간과 신체를 예술의 비용으로 지불하게 만든다. 이 비용은 AI가 생성하는 예술의 무한 반복 가능한 오류가 아니라, 한 번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 시간으로 남는다. 어디로 갈지 모른 채 지속되는 이 작두춤은 사회적 생산이나 예술의 의미에 부합하는 결과를 생산하기보다, 의미의 즉각적 환원을 거부하며 지연된 시간을 발생시키는 사건이 된다.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예술에 대한 인식론적 틀과 자기 이해가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다루는 소설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훨씬 더 월등한 창작물들을 더 활발하게 생산해내는 상황에서, 밀려난 예술가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프로그램도 사람도 기계도 귀신도 아닌 미지의 존재” 같은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은 이를 유용한 툴로 간주한다고 해서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이를 도구로 치부한다면, 패배감 속에서도 창작자로서의 존재는 무사히 보존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결과로 증명되는 성취라기보다, 계속해서 조바심과 조급함을 만들어내는 예술 자체에 대한 집요한 열망에 가깝다. 이러한 열망은 예술 인공지능에 의해 영화판에서 완전히 밀려난 영완 선배의 모습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포르노를 만들면서조차 건조하고, 푸르죽죽하고, 앙상하고 깡마른 나무가 등장하는 자신만의 ‘인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혼이 죽어버릴 것 같기에 “사막에서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 영완 선배의 모습은 세속적 열망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도에서조차 철저히 외면받고 실패했을 때, 그의 예술적 열망은 몰락을 통해 역설적으로 증명된다. 영화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소설 속 인물들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상실의 감각, 잃어버린 동료이자 인간성을 향한 애도되지 않는 고통은 이 작품에서 붉은 신체라는 하나의 신체적 이미지로 응축된다. 영완 선배는 인공지능이 만든 예술을 보더라도 창작욕을 유지할 수 있는 마법의 ‘붉은 알약’으로 하와이 사과를 건넨다. “세상이 바뀌어도 너는 언제나 만드는 인간일 거야. 스스로 기억하는 한 언제나 영화를 찍고있을 거야.”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인간 ‘하와’를 떠올리게 하는 이 ‘하와이 사과’는 흥미롭다. 신과 유사한 생성형 인공지능 앞에서 인간은 발가벗겨진 듯한 황망함을 느끼며, 황급하게 자신의 기원을 발명해낸 것일까. 아니, 인공지능 시대 쓰인 새로운 창세기에서 인간은 스스로 뱀이 되어 자신을 유혹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좋겠다. 창세기에서 유혹은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드러내는 증표였지만, 이제 유혹에 넘어가는 나약함은 인간이 여전히 예술을 욕망하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증표로써 다시 읽힌다. 소설은 인간의 예술을 향한 집념과 희열은 우울과 절망이 그에 비례하는 무게로 따를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고 눌러 말한다. 결말부에 하와이 사과를 먹은 후 변이한 화자의 붉은 몸은 기계와의 통합을 거부하기 위해, 그리고 예술을 향한 내적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구의 장례식장에 가다 본 환각을 자신 안에 합체한 우울증적 형상으로 보인다. 강력한 잔상을 남기는 이 붉은 몸은 「혼모노」의 마지막 장면에서 피를 흘리는 몸과 다르지 않다. 이 소설들은 AI 시대에 예술은 이제 언어의 정교함이나 결과의 완결성으로 모방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몸과 감각을 통해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현전이라는 아우라를 다시 호출하는 듯 보이는 이 소설들은 과거의 진정성을 그리워하며,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아우라는 회복된 본질이라기보다 예술이 결과로 증명될 수 없어진 이후에 발생하는 부산물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이계성이 언메이크랩의 작업을 논하며 던진 비유가 유효해진다. “여느 언어와 마찬가지로 신탁의 언어에도 본질적인 의미가 내재하지는 않아서, 어떤 프레임 또는 인식틀을 통해 이를 이해할지는 언제나 받아들이는 쪽의 몫이었다”13)는 그의 말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언어 역시 별개의 진짜 의미를 품고 있기보다 해석의 장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타자와 되돌릴 수 없는 종결이라는 죽음의 감각은 이 해석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제 예술가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욕망이 과정에 들러붙는 자리, 그리고 그 욕망이 실패와 상실을 되돌릴 수 없는 비용으로 남기는 시간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예술은 결과로 증명되기보다, 실패와 상실의 가능성을 끌어안은 채 지속되는 수행으로 남는다. 그렇게 이 시대 예술가의 상은 붉은 몸을 가진 신체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1)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태양과의 대화』, 이계성 옮김, 미디어버스, 2023, 119쪽.2) 조너선 크레리, 『지각의 정지』, 유운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579쪽.3) 데이비드 조슬릿, 『예술 이후』, 이진실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2.4)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위의 책, 100쪽.5) 위의 책, 145쪽.6) 권보연은 연구자 자신이 직접 수행한 실험 속에서 인간언어와 생성언어가 ‘의미 혼종’과 ‘확률 혼종’이라는 상반된 미적 지향성을 가지는 방식으로 합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중에서 ‘확률 혼종’은 내용이 아닌 확률 층위에서 인간과 기계언어가 합성되며, 감정과 내용에 유착된 의미 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질 가능성을 지니기에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기한다. 권보연, 「결과 너머 문학기계로서의 AI」, 『다문화콘텐츠연구』 46집, 2023.7) 정지돈, 「쓰여진 문장과 쓰여지지 않은 문장 사이」, 『에피』 24호, 2023, 55쪽.8) 언메이크랩 외, 『잠재공간 속의 생태학: 재난, 생성신경망 그리고 비미래』, 미디어버스, 2023, 25쪽.9) 위의 책, 26쪽.10) 위의 책, 43쪽.11) 김언,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면서 제기되는 문제들」, 『현대시』 2023년 6월호, 111쪽.12) 성현아, 「반항하는 자는 부조리가 있나니, 그 가짜가 참되도다」, 『2024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문학동네, 2024, 292쪽.13) 이계성,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을 위한 몇 가지 질문들」, 언메이크랩 외, 앞의 책, 55쪽.
1 이번 봄에 단연 눈에 띄었던 것은 인공지능 시대에 적극적으로 인간이라는 의식을 탐험하고 매체를 다시 읽어내는 글들이었다. 2020년대 들어 인류세 관련 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비인간’ 담론들은 생성형 인공지능인 챗지피티ChatGPT의 등장 이후 다시 한번 요동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차지하고 있던 독보적인 단상 위에서 내려와 비인간과의 경계를 적극적으로 허물며 세계의 지도를 다시 그리려는 겸허한 기획은 급작스럽게 복잡한 불안에 갇힌 것 같다. 적어도 기계에 대해서라면 이미 우리는 동등하거나 어쩌면 한참 전에 초월당한 것은 아닌가? 경계 허물기로 인한 희열보다 불안이 확연히 압도하는 자리에서 『쓺』 2024년 상권의 특집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그 개체성과 집단성’과 ‘작은 기획—채굴 문화와 미적 감각’을 유독 흥미롭게 읽었다. 그리고 ‘작은 기획’에 실린 심효원과 윤원화의 짧은 글이 각각 인간이 향하려는 방향과 의지의 아름다움, 그 노력이 무산되는 수동태의 자리에서 감지하는 공포와 불쾌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느꼈다. 먼저 심효원의 「지렁이의 부드러운 건축물 만들기」는 비인간 행위자인 ‘지렁이-되기’를 통해 근대의 한계를 돌파할 것을 정중하게 요청하는 글이다. 지렁이가 땅과 맺는 일원적인 관계성과 분변토라는 건축물은 근대 이후 인간이 이룬 도시의 뚜렷한 경계와 고정성의 반대편에 있다. 지렁이의 건축물 만들기란 사실상 움직이고 먹고 배출하는 신체적 행위의 반복일 뿐이지만, “비인간들의 극도로 효율적인 메커니즘”이자 자신의 몸이 다른 존재와 물리적으로 닿는 매순간마다 “무차별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동력”1)이기도 하다. 촉각이 주도적인 지하세계에서는 시각이 미미해질 뿐만 아니라 시간성 역시 달라진다. 미래의 미결정성을 남겨두는 대신 물리적으로 접촉하는 것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순간’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글은 최근 신유물론을 비롯한 담론들과 풍요롭게 공명하는 하나의 아름다운 공상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지하세계로 향하는 방향성은 최근 SF 소설의 주요한 상상력의 기반이기도 하다. 정세랑의 「리셋」(『목소리를 드릴게요』, 아작, 2020)에서 행성의 모든 자원을 고갈시키던 자본주의의 질주를 멈추게 한 것은 인류 문명을 끝장내려고 내려온 지렁이들이다. 강제 리셋 이후 인간들의 자리는 자연히 땅속 깊은 곳이 되고, 지상은 다른 종들이 누리는 공간이 된다. 김초엽의 『파견자들』(퍼블리온, 2023)에서도 지상은 균류인 ‘범람체’의 공간이 되어버리고 인간은 감염을 피해 지하세계로 내려와 산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문명 말살에 가까운 아포칼립스를 맞닥뜨리지 않는 이상, 영화의 촉각성을 즐겁게 감각해온 인간이 미래의 지구를 위해 지렁이를 신속하게 체화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로 남는다. 물론 직접적인 실천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지구의 거대 환경 시스템의 핵심 행위자 자리를 재조정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겠다. 하지만 미래적인 지하세계로 들어가기에 인간은 아직 시각적 쾌락 속에 즐겁게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지적 유희를 야기하는 활자의 쾌감까지 포함해서. 윤원화의 「땅을 파는 손」은 채굴적 상상력의 매혹과 절망을 말한다. 데이터로 전환된 우리의 생태 에너지를 부의 원천으로 삼으며 굴러가는 미디어 산업 앞에서, 인간의 생산물·복제물·부산물·폐기물을 구별하기는 어려워진다. 디지털 기술로 구축되는 ‘아카이브 데이터’는 역사는 넘쳐흐르지만 이를 의미화하는 전통은 불가능한 곳이다. 윤원화는 과잉생산으로 범람하는 사물들 앞에서 맞닥뜨리는 불길한 실패에의 예감을 시앤 응아이Sianne Ngai의 ‘기믹gimmick’에 대한 반응으로 설명한다. ‘매직magic’의 애너그램에서 유래했다고도 하는 이 단어는 1920년대 미국에서 편법적 장치, 싸구려 트릭, 계산된 마법 등을 뜻하는 신조어로 출현했다.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 자본주의의 황홀감과 환멸을 모두 각인한 기믹의 불완전한 형식은 오늘날 삶과 예술, 또는 넓은 의미의 ‘사업’에서 흔히 발견된다.2) 단기적 이익 추구에 최적화되어 있는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가치 절하된 노동에 시달리는 대개의 사람들이 이 기믹의 유희에 이끌린다. 운에 따라 누군가는 축적된 자원을 폭발적으로 소모할 수 있으리라는 채굴적 상상력이 번성하는 가운데, 보상도 성취도 불확실한 예술 노동 역시 가치 체계에 대한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윤원화는 이런 진단과 고민 속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생산성 중독의 시대에 예술은 어떤 시간성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3) 심효원이 지하라는 공간과 이를 감각하는 촉각성에 의지해 의미 있게 압축되는 순간의 시간성을 말한다면, 윤원화는 ‘농사’와 ‘채굴’을 대비하며 채굴의 무책임한 풍요의 약속이 얼마나 파국적일 수 있는지 말한다. 최단기간의 이익에 매몰된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생산물은 넘쳐흐르지만 어떤 가치 창출도 담보할 수 없는 동시대 예술은 불투명한 시간을 표류하는 중이다. 이런 진단 속에서 디지털 자본주의에 의해 갱신되는 매체의 기술적 발전은 인간과 나란히 놓여 경계를 넘나들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환멸을 불러오는 맹목적인 대상으로 남는다. 인간의 ‘지렁이-되기’를 향한 아름다운 여정은 너무나 느리게 진행중인데, 가장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인정받고 있는 생성형 인공지능은 예술을 몰아치듯 양산해낸다. 인간의 몸은 자발적으로 물질과 동등하게 놓이기 전에 물질이 만들어낸 다른 가치들에 의해 가치 절하되며 밀려나게 될까? 생동하는 물질들 안에서 인간을 재의미화하려는 시도와 인공지능을 의심하며 인간 본연의 무언가를 지키려는 안간힘 사이에서 부각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아래의 비평들은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2 『쓺』의 특집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그 개체성과 집단성’을 여는 글은 근대 패러다임이 ‘개인’을 해방하고 자율적 주체로서 정립해왔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이 시대에 여전히 개인의 이념이 유효한지 묻는다. 개체성과 집단성이 직면할 변화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이 서문에 가장 직접적으로 응답하는 글을 꼽는다면 김태환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과 김재인의 「창의와 집단 지능—인공지능은 창작하지 못한다, 다만 제시할 뿐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김태환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은 기계 성능의 고도화가 필연적으로 인간의 중요성이나 가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에게 산업화 이후의 근대는 ‘저자의 시대’이며, 이는 기술 발전의 작용에 대한 인간의 반작용이 만들어낸 변화이고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방향타가 된 것은 저자라는 이념의 바탕에 놓인 ‘개인주의적 사상’이다. 이는 산업화 사회 속에서 부속물로 전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회 분석의 준거점을 개인에 두고 진리와 자유를 탐색했던 아도르노를 비롯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기조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 다시 독일 지성사의 문화 비판적 사상의 전통이 소구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김태환은 “항상적인 문화 공급 과잉의 시대”(37쪽)라는 진단에서 찾는다. 그에 따르면 소셜 미디어나 웹사이트, 유튜브 등 정신의 대상화로서의 객관 문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반면, 그 반대 방향인 객관 문화에서 주관 정신으로의 내화는 개인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치로 인해 그만큼의 양적 증가가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사람들은 알고리즘 속에서 타인과의 의미 있는 만남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더 심각한 것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객관 문화의 총체가 스스로 발언하고 생산하는 주체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런 위기감 속에서 이 글이 다시 강조하는 것은 ‘정신의 개별성’이다. “요컨대 모든 인간이 개인으로서 개별적 의지, 개별적 내면, 개별적 정신을 지닌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외부에서는 절대 들여다볼 수 없고, 직접 조작할 수도 없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자주적이라는 사실”(42쪽)을 변함없는 인간 존재의 조건으로 부각하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무분별한 열광에 휩쓸리기보다 이를 의심 어린 눈으로 찬찬히 사유할 틀이 우리에게 요긴한 것은 사실이다. 데이터에 얽힌 저작권 문제 역시 계속 규제안을 논의해나가야 할 비판적인 쟁점이다. 그렇지만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위기를 산업화 시대 이후의 위기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는 것은 혹시 너무 큰 틀에서의 접근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 작동 방식과 결과물이 인간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만들어진 자본주의의 차원에서만 다루어질 때, 새로운 매체와 관련해 충분히 사유되지 못하는 요소들이 생겨나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이 글에서 알고리즘에 갇힌 디지털 시대 개인의 부자유에 대한 우려는 빠르게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의 재소환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거듭 강조되는 개인의 개별적인 ‘의지’와 ‘내면’과 ‘정신’에서 신체의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 글에서 인공지능과 대립되는 요소로 논의되는 인간의 ‘의식’이란 단순히 합리적 이성만은 아닌 “수많은 감각적 심상과 기억·감정·소망·의지 등이 혼재하는 심적 상태”(46쪽)다. 알파고와는 다른 인간 바둑 기사의 의식을 예로 들면서 언급되는 긴장, 초조, 후회, 자책, 엉뚱한 연상 등은 “바깥에서 결코 완전히 알아볼 수 없는 복잡한 내면”(같은 쪽)으로 규정된다. 베일에 살짝 가려진 듯한 이런 인간 내면의 신비함은 물질적인 신체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진화해온 신체야말로 내면 이상으로 복잡성의 차원에 놓여 있지 않은가? 이는 “신체화의 말소가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와 사이버네틱스 포스트휴먼 양쪽 모두의 공통된 특성”이라는 캐서린 헤일스의 비판을 상기시킨다. 헤일스는 합리적 정신과 등치되는 자유주의적 주체가 “그 악명 높은 보편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신체가 자아와 동일시되지 않기 때문”4)이라고 말한다.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간의 한계는 곧 발전을 통해 ‘영웅적 개인’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유한한 삶을 가진 존재, 모든 능력에서 커다란 한계를 안고 있는 개별자로서의 인간만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여 어떤 감동적인 위대성에 이를 수 있”(53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반드시 육체의 신경과 근육의 단련 과정을 동반하며 그것이 생각과 행동에 긴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잠시 괄호 안에 두어진다. 이 글의 전반적인 주장이 온당하게 느껴지면서도 그 전제가 되는 자율적인 개인상과 관련해 못내 마음에 걸리는 것은 개인이 지향해나가야 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전제되어 있는 발전과 성장이라는 지극히 근대적인 가치다. 생산과 창조의 주체로서의 영웅적 개인이 아니라 소비와 소멸의 주체로서의 개인에 대해 우리는 좀더 다른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또 근대 이전에 우리가 ‘저자’가 불투명한 긴 구술 시대를 살아왔음을 떠올린다면, ‘저자의 시대’ 이후의 저항이 활자와 개인을 넘어선 범주에서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3 김재인의 「창의와 집단 지능」은 이 질문에 대해 조금 다른 지점에서 답을 내놓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지능은 본질적으로 집단적 성격을 가지므로 ‘집단 지능’이라고 해야 한다. 개체를 중심에 놓으면 ‘창의’를 중시하게 되지만, 그 새로움은 다른 개체가 ‘모방’하고 ‘확산’하지 않는다면 사멸하고 만다. 그렇기에 인간이 다른 생물종과 달리 ‘집단 기억’과 ‘문화 기억’이라는 형태의 외장 기억을 건설함으로써 지식과 기술의 확산과 축적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은 중요하게 여겨져야 한다. 저자는 낭만주의 미학과 예술에서 강조하는 천재적 개인과 창조력에 대한 신화를 뒤로하고 “인간이란 거대한 기억”(62쪽)이라 정의 내린다. 이는 물론 질적 도약이 아닌 집단으로서의 양적 축적을 말한다. 김태환이 인간의 의지, 내면, 정신이라는 추상적인 면을 중시한다면, 김재인은 “나의 생각이란 시한부 소유물”(63쪽)에 가까울 수 있으며 그 휘발성을 지켜주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물질’ 혹은 ‘미디어’”(62쪽)라고 강조함으로써 그것을 외화된 집합적 사물성으로 바라보며 그 반대편에 선다. 그런데 이 글은 ‘컴퓨터가 자연어를 다룬다는 것’이라는 장부터 급작스러운 단절을 드러내며 도약한다. 앞에서 인간의 생각 자체를 미디어이자 집단 기억의 저장고로 본 것과 다르게, 예술과 창작의 영역을 다룰 때는 컴퓨터가 자각 혹은 성찰을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컴퓨터는 예술 능력이 없다”(66쪽)고 확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기계를 바라보는 김재인의 시점에는 도구적 차원과 존재적 차원이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글은 창작의 정의를 “스스로 선택하고 평가하는 능력이 발휘되었느냐”(67쪽)에 두는데, 중요한 점은 저자가 그 평가 주체의 자격을 ‘생물’로 단정한다는 것이다. 생물은 “생존과 번식을 스스로 반복”하는 유기체이고, 이 글에 따르면 평가 역시 “생존과 번식에 성공하기 위한 지각 처리와 행동의 연쇄”(70쪽)다. 이 기준에 따르면 애초에 기계는 아무리 ‘집단 기억’의 ‘미디어’로서 최적화되어 있다고 해도 무기물이라는 점에서 평가 능력이 없는 것으로 배제 당할 수밖에 없다. 그가 이렇게 유기체의 항상성과 관련된 기준을 평가 능력과 일치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저작 『AI 빅뱅』에서 참조할 수 있는 지점을 좀더 찾아보면, 이는 “몸의 고집스러움”5)이라는 말과 함께 구체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심지어 같은 프롬프트를 주더라도 생성물이 크게 바뀌는 무작위성randomness을 보여주는데, 이는 휘발성이 강하다. 그러나 인간은 불완전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자기 생각을 고수하는 면을 지니는데, 저자는 이를 몸에서 비롯된 문제로 보는 것이다. 이 장에 바로 이어지는 질의응답에서 한 질문자는 “세계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몸을 가지는 것이다”6)라는 전제 위에서 인공지능이 세계를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강인공지능으로 발전할 방법이 있는지 묻는데, 김재인은 이에 대해 ‘몸의 회복력’에 대한 이야기로 답한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몸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몸은 생각을 “바로 휘발되지도 완전히 고착되지도 않은 어느 중간 지점”7)에 붙잡아둔다는 것이다. 김재인은 인공지능과 다른 인간을 논하는 데 있어 복잡성을 가진 신체의 차원을 살려내고자 한다. 하지만 창작을 논하면서부터는 김태환의 논의와 유사한 탈신체화의 방향을 답습한다. “진화 과정에서 살아남았다는 특징”은 “필멸하는 인간이 불멸하는 비결”(70쪽)로 치켜세워지고, 진화를 위해 외부와 교섭하며 몸 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피드백 루프는 유기체만의 고유한 신체적 능력으로 남는다. 인공지능은 몸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케이트 크로퍼드가 인공지능은 추상화된 지능이 아니라 오히려 “체화되고 물질적인 지능이며 천연자원, 연료, 인간 노동, 하부구조, 물류, 역사, 분류를 통해 만들어진다”8)고 강조한 사실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혹은 그와 마찬가지로 유기체의 일차적인 목표로서의 생존이 진화의 필수 사항이라 말하는 신경과학 연구자 아닐 세스가 우리의 지각은 사실 ‘통제된 환각’이자 ‘최적의 예측’이라 설명했음을 염두에 두면 어떨까. 그에 따르면 ‘당신이 된다는 것being you’, 즉 인간의 ‘동물기계’적 본질과 의식적 자기 사이의 연결고리는 “신체 자체가 가진 현재와 미래의 생리적 조건에 대한, 형태도, 모양도 없고 제어 중심적인 지각적 예측”9)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인공지능 역시 지극히 물질적인 신체를 지니고 있으며 인간 역시 체화된 자아로 인한 기계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때, 예술을 창발시키는 창의성 개념이 다르게 읽힐 가능성이 열린다.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승부 후에 마련된 『인문예술잡지 F』 21호의 특집 ‘고함: 비-인간’에서 이진경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인공지능이 창조성을 가질 수 있는 논리적 가능성을 함축한다고 주장했다. 괴델의 정리는 수학적 추론의 과정 속에 언제나 결정 불가능한 명제가 ‘숨어’ 있을 수 있음을 의미하며, 그렇다면 인공지능의 수준에서도 공리계로 귀속될 수 없는 명제(결정 불가능한 명제)를 생성할 수 있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계의 형식적 추론에서조차 새로운 명제의 창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역으로 생명체의 진화가 어떤 경로를 밟아왔는지 설명한다. “변이mutation의 누적에 의해 진화는 이루어”지지만 처음 “생명체의 변이는 지배적인 개체군 안에서 일종의 ‘장애자’나 ‘고장’으로 간주된다”10). 하지만 환경이나 생존 조건에 따라 변이가 진화된 변종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면, 기계가 만들어내는 예측되지 않은 결과의 출현 역시 ‘고장’이나 ‘장애’가 아니라 새로운 능력의 ‘창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창조의 출발점이 아니라 결과물에 초점을 맞춘 논의다. ‘인간 없는 예술’이 도래하려는 시기에 우리는 다시 인간적인 무언가를 기계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는 기술적 특이점이 올 때마다 반복되어온 정동이기도 하다. 이 앞에서 좀더 차분하게 이전의 논의들을 정리하고 축적할 필요를 느낀다. 2024년 『쓺』의 특집이 창작자이자 예술가가 서 있는 주체의 자리에서 출발했다면, 2016년 『인문예술잡지 F』의 특집은 그 결과물인 작품의 자리에서 논의를 시작했다. 그렇다면 감상자의 자리에서 본다면 어떤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 신예슬의 『음악의 사물들』은 음악이 기술적 혁신을 이루는 순간마다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넓혔는지를 따라 음악사를 재구성한다. 자동 피아노의 경우에도 그 연주를 더 실제처럼, 더 자연스럽게, 더 인간답게 만들겠다는 목표는 거의 달성되었다. 그러나 자동 피아노가 만들어낸 경험이 정말 특별하게 의미화되는 것은 인간의 연주라는 원본 혹은 목적지를 버렸을 때이다. 인간의 연주라는 목적지를 소거해버리고 이 사물의 독자적인 가능성에 집중해보는 것이다. 연주하는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스스로 뭔가를 연주하거나 재생할 수 있는 악기가 등장했고 그것이 인간의 행동을 인간 없이 손쉽게 해냈다면, 그 기계의 핵심적인 가치를 ‘인간의 복제’가 아니라 ‘탈脫인간’으로 재조정할 수도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기계장치가 꼭 연주자를 대신할 필요는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기준점만 제거한다면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수많은 음악적 가능성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 자동 피아노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연주를 들려줄 수 있었다. 인간의 연주를 기록하고 인간의 연주를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연주의 대리자는 오히려 새로운 예술형식으로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스스로 연주하며 그 누구보다 기계적인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독자적인 예술형식 말이다.11) 우리는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에 대해서도 그것이 오히려 새롭고 독자적인 예술형식이 될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을까? 이 모방은 때로 인간에 한참 미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때로 인간을 이미 초월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계는 이미 희미해지고 있던 자율적인 개인 주체로서의 예술가상을 어떻게 바꾸어나갈까. 또 인간의 예술적 집념은 어떻게 예술 형식들을 바꾸어나갈까. 모든 것이 뒤흔들리는 가운데, 불안만이 정확하게 인간의 자리를 응시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이 불러오는 균열 속에서 인간에 대한 고정된 사유를 과감하게 벗어날 수 있을 때 인간과 예술 모두에 새로운 시야가 열릴 것이다. 1) 심효원, 「지렁이의 부드러운 건축물 만들기」, 『쓺』 2024년 상권, 368쪽.2) 시앤 응아이는 디지털 자본주의가 가속화되던 2010년대 후반의 미술과 문학작품을 분석하면서 기믹의 이론화에 착수하는데, 기믹은 의심스러운 도구성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키치와는 다른 저질 예술로 취급되면서도 자본주의 가치 체계와 그 이면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의심을 표면화하는 미적 전략으로도 쓰일 수 있다. 윤원화는 이 글을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공모 프로그램 선정작인 시각예술 콜렉티브 랩삐의 에 대해 설명하며 시작한다. 이 전시는 관객이 옥수수 농사 시뮬레이션을 완수한 후 ‘콘 코인’이라는 가상 화폐를 받아 실제 뻥튀기 한 봉지와 교환하는 경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복 노동이 이에 비례하는 가치 창출과 기쁨으로 이어지는 대신, 콘 코인이라는 불분명한 요소가 끼어들면서 매끄러운 교환 가능성이 흔들릴 때 이 간극에서도 기믹이 관찰된다고 할 수 있다.3) 윤원화, 「땅을 파는 손」, 같은 책, 383쪽.4) 캐서린 헤일스,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사이버네틱스와 문학, 정보 과학의 신체들』, 허진 옮김, 열린책들, 2013, 27쪽.5) 김재인, 『AI 빅뱅—생성 인공지능과 인문학 르네상스』, 동아시아, 2023, 153쪽.6) 같은 책, 156쪽.7) 같은 책, 157쪽.8) 케이트 크로퍼드, 『AI 지도책—세계의 부와 권력을 재편하는 인공지능의 실체』, 노승영 옮김, 소소의책, 2022, 17쪽.9) 아닐 세스, 『내가 된다는 것—데이터, 사이보그,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 의식을 탐험하다』, 장혜인 옮김, 흐름 출판, 2022, 243쪽.10) 이진경, 「인공지능시대의 예술작품」, 『인문예술잡지 F』 21호, 2016, 25쪽.11) 신예슬, 『음악의 사물들—악보, 자동 악기, 음반』, 작업실유령, 2019, 115쪽.
1. ‘서울의 봄’을 기다리며 유신 독재 시대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을 다시 돌아다보면서 근래에 극장가의 흥행 기록을 다시 쓴 영화 (2023)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지나간 과거의 일이지만, 또한 그렇기에 ‘서울의 봄’이 당시로써는 아직 오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엔딩 크레딧과 함께 솟아오르는 아쉬움과 슬픔, 분노의 감정은 덜해지지 않는다. 40여년의 시간차를 무색하게 만드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그 시대를 지나오지 않은 세대의 관객들에게까지도 강력하게 휘몰아친다. 그러니 그 시대를 온몸으로 뚫고 나갔던 이들은 눈앞에서 물러나는 봄을 바라보며 무엇을 느꼈을지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유영주의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소명출판, 2023)이 제목을 따온 「겨울공화국」의 시인 양성우는 그의 또 다른 시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에서 그 봄을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들려준다.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셔준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곤백번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이 …… 한반도에서 다만 녹슬지 않는 비싼 넋으로 밤이나 낮이나 과녁이 되어 내가 죽고 다시 죽어 스며들지라도 오는 봄에 나무꾼을 쓰다듬어 주는 작은 바람으로 돌아온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후략)…1)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실 수 있다면, 오는 봄에 작은 바람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그의 시가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죽고 다시 죽어 넋으로 스며든다고 해도 좋다는 시인의 결연한 고백을 듣고 나면 그러나, 또 한 번의 겨울 속으로 선선하게 걸어 들어갔을 그들의 의지를 떠올리게 된다. 봄은 물러갔어도,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에서 주요하게 살펴보고 있는 김지하와 황석영, 조세희, 이문구는 신군부 독재 정권하에서도 계속 문학이라는 싸움과 저항을 지속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그들에게는 “오는 봄”을 기다리며 문학에 대한 믿음과 비전으로 눈보라를 뚫고 한 시대를 걸어 나왔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영주의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은 바로 그 역사에 관한 연구이다. 2. 시와 정치와 사랑 시작은 김지하다. 저자가 냉전시대 동아시아의 권력 지형 및 상세한 역사적 맥락과 함께 김지하를 통해 보여 주고 있는 것은, 그러한 냉전 체제의 하위 파트너인 유신 독재 정권과 한바탕 벌여 놓은 그의 싸움판이다. 그의 시 「곡(哭) 민족적 민주주의」(1964)와 「오적(五賊)」(1970)이 어떻게 ‘유신의 심장’을 들었다 놓았다 했는지, 왜 유신 독재 정권은 그의 ‘세 치 혀’와 붓 끝에서 흘러나오는 시를 그토록 두려워했는지, 그러한 김지하의 시는 근본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저자는 ‘오적 필화사건’의 법정 풍경을 복원한다. 잘 알려진 대로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하에서 필화 사건은 드물지 않게 일어났고, 더군다나 김지하의 「오적」이 처음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특별히 ‘오적 필화사건’에 주목하는 이유는 “1970년 김지하의 체포에 이은 100일 간의 재판[이], 법정을 판소리나 탈춤이 주로 공연되는 야외의 마당으로 탈바꿈시켰다”는 데 있다.2) 저자는 관련 인물들의 여러 회고를 바탕으로 당시 재판이 흡사 검사가 양반의 담화를 담당하고 김지하가 말뚝이를 맡은 판소리 풍자극과도 같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유신 독재 정권은 도리어 김지하에게 그가 오래 탐구했던 전통 마당극을 마음껏 펼칠 무대를 깔아주었던 셈이다. 이후 그 무대는 김지하가 “문학, 폭력, 혁명, 구원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펼칠 수 있는 대중 강연을 위한 연단”(95)으로 확장된다. 당시 재판을 방청했던 더글러스 루미스(Charles Douglas Lummis)의 기록을 인용하여 저자는, 재판 방청객들이 김지하의 발언을 받아 적어 재판장 바깥으로 빼돌린 뒤 그들이 속한 조직으로 돌아가 그에 대해 토론하고 연구하게 되는 방식을 흥미롭게 포착한다. 이는 시인의 말이 변론과 강연, 연설을 넘어서, 유신 독재 체제하의 민중에게 어떤 구원의 메시지처럼, 마치 ‘예언’처럼 전달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저자에 따르면 루미스는 실제로 김지하에게 “에언자”라는 칭호를 부여하기도 했다.(87) 오래 전 종교가 시와 정치로 분리되지 않는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이 시기 김지하의 문학 세계는 세속화 시대에 시와 정치를 동시에 추구하려 했던 어떤 종교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이후 “시인으로서의 그의 국제적 명성은 분명 그가 겨울 공화국의 순교자가 됨으로써 크게 높아지게 되었다.”(50) 아이러니하게도 유신 독재 정권은 김지하를 위대한 시인으로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게다가 그 어떤 비평가나 애독자보다도 꼼꼼하게 김지하의 시를 읽고 분석하며, 그 힘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했기에 그들은 김지하에게 더욱 집착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검찰은 “시인의 수첩에 적힌, 아직 쓰이지 않은 시와 희곡에 대한 메모”(95)들을 증거로 제출하며, 마치 시인론을 쓰는 문학 연구자인양 김지하의 문학 세계를 탐구해 들어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문학이 하는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문학을 억압하고 지배하려면 역설적이게도 그 안에 잠겨들어야 한다. 지배와 억압은 대상을 이해할 때 가능한 것이고, 문학에 대한 이해는 오직 문학의 세계 안으로 침잠할 때 가능한 까닭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문학이 하는 혁명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지배 권력조차 그 안으로 휘말리고 뒤엉켜 들어가게 만드는 것, 그것이 시와 정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유신 독재 시대 문학의 혁명적인 것이었다. 굳이 알랭 바디우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낸다는 점에서 사랑과 혁명은 ‘사건’이며,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문학도 ‘사건’이 된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의 논의가 무르익을 때, 그 자체로 1970년대 문학의 ‘사건’이기도 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이 등장한다. 핵심은 이 연작소설집이 이웃 사랑을 미학적으로 실천한 텍스트라는 것인데, 저자는 그 단초를 「뫼비우스의 띠」에서 발견한다. 연작소설의 첫 번째 이야기이기도 한 「뫼비우스의 띠」는 ‘굴뚝 청소를 마치고 그을음으로 얼굴이 새까맣게 된 아이와 그을음이 전혀 묻지 않은 깨끗한 얼굴의 아이 중 누가 얼굴을 씻을 것인가?’ 하는 질문과 함께 수수께끼 같은 문답을 주고받는 교사와 학생들의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이 문제가 곧 뫼비우스의 띠이면서,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세계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함을 암시하며 끝맺는다. 저자는 이 뫼비우스의 띠 수수께끼를 지젝(Slavoj Žižek)의 ‘시차적 관점(parallax view)’, 즉 축소 불가능한 간극을 잇기 위해 애쓸 것이 아닌, “간극 그대로를 인식하는 것”으로 해석한다.(189) 안과 밖은 결코 만날 수 없지만, 뫼비우스 띠에서는 그 안과 밖이 그대로 안쪽 면이면서 바깥 쪽 면으로 존재할 수 있는 차원을 인식하는 것이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서, 당연히 그을음이 묻은 아이가 세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에게 교사는 얼굴에 그을음이 묻지 않은 아이가 친구의 새까만 얼굴을 보고 얼굴을 씻어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답한다. 이윽고 다른 학생이 그와 같이 대답하자, 다시 교사는 동일하게 굴뚝 청소를 한 아이들 중 한 아이의 얼굴은 깨끗하고 다른 아이의 얼굴은 더러운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반박한다. 그러니까 애초에 교사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해답 없음이 곧 안과 밖의 구분 없는 뫼비우스의 띠의 관점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굴뚝청소부 수수께끼와 뫼비우스의 띠라는 위상수학적 개념과 개발독재시대의 소설에 대한 해석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마치 뫼비우스의 띠를 만들 듯, 유영주 역시 그의 방법론적 시각을 한 차례 꼬아 지젝에서 케네스 레이너드의 ‘이웃’ 개념으로 비약한다. 사랑(특이성과 차이)과 정치(평등과 동일성)는 마치 뫼비우스 띠의 양면과도 같은데, 그 띠를 한 번 꼬아 연속체로 만드는 “사랑과 정치의 이음매” 지점이 “이웃”이라는 존재라는 것이다.(189) 저자는 이로부터 조세희 소설의 미학인 ‘이웃 사랑’을 이끌어 낸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난쏘공』을 난해한 모더니즘적 텍스트처럼 보이게 하고, 그래서 리얼리즘론자들에게 지식인적인 환상 소설이라고 비판받게 만들었던 몽타주 기법을 ‘이웃 사랑’의 주된 미적 원리로 파악하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1970년대 문학은 “당신은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십니까”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박태순의 ‘외촌동 사람들 연작’과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1977)가 그러했을 뿐만 아니라, 대중소설 작가로 197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최인호 역시 일찍이 「미개인」(1971)에서 한센병 환자의 아이들과 같은 학교에 보내는 것을 반대하고 나선 우리 주변의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를 소설로 쓴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첫 손가락에 꼽힐 작가는 단연코 이문구일 것이다. 『관촌수필』(1972)에서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이문구의 이채로움이 빛을 발하며, 유영주가 말하는 ‘인접성의 윤리’를 적극적으로 미학화한 이상적인 이웃 공동체가 그려진다. 저자는 이문구의 아버지와 두 형들이 좌익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던 개인사를 바탕에 둘 때, 이문구의 이웃에 관한 이야기가 그저 단순히 전통사회의 풍요로웠던 이웃 공동체에 대한 환상일 수 없음을 역설한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전쟁 전후의 무수히 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들 중 많은 경우는 이웃들 간에 벌어진 비극이었다. 크게는 계급과 종교를 바탕으로 나뉜 좌와 우의 정치적 이념을 따라 서로 갈등을 빚었고, 심한 경우 학살로 이어졌다. 이러한 한국 현대사의 맥락 속에서 이문구 소설 속 이웃은 “이념적 명명의 대안”으로 제시되며 특별한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142) 저자는 조세희와 이문구의 소설을 ‘이웃 사랑의 미학’과 ‘인접성의 윤리’로 의미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그러한 문학의 미학과 윤리가 박정희 독재 체제의 산업화와 반공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근원적인 힘이었음을 주장한다. 그 힘이, 플라톤 이래 본질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문학을 정치와 만나게 하고, 동시에 어떤 정치를 극복하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저자의 의도대로 1970년대 문학은, 시(문학)와 정치와 사랑이 ‘인접성’의 원리를 따라 이어지지만 그 간극을 그대로 유지하며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현실을 넘어서는 차원의 위상을 형성하는 상호 연결과 긴장 관계로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3. 마지막 문사(文士)의 시대 그러나 이 책의 부제인 ‘박정희 시대 한국문학과 저항’에서와 같이, 한국 문학이 저항과 나란히 놓일 수 있는 시대는 곧 저문다. 대체로 그것은 1990년대, 그 유명한,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실감한 때와 겹친다. 고진은 1970년대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한 사람인 김종철과 만났을 때 왜 문학을 그만두고 《녹색평론》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알려진 대로 김종철은 1991년 《녹색평론》 창간과 함께 문단을 떠나 생태주의 운동에 몸담았다. 그는 “자신이 문학을 했던 것은 문학이 정치적 문제에서 개인적 문제까지 온갖 것을 떠맡는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모순조차도 떠맡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언제부터인가 문학이 협소한 범위로 한정되어 버렸다, 그런 것이 문학이라면 내게는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그만두었다”고 답했다.3) 이것은 유신 독재 정권에 강력하게 저항했던 ‘창비’ 계열 문학비평가의 고백이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이 포착하고 있는 문학의 사회 참여(앙가주망)와 정치적 실천, 특별히 양심 있는 지식인으로서 시인과 소설가 들이 독재 권력과 맞서 싸우는 역사는, 이제 정말로 역사가 되었다. 물론 그러한 역사가 한국에서 1970년대 유신 독재 정권 시대라는 국면에 가능했고 정점에 도달했던 것은, 과거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국가였던 후진국에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설 때 그에 맞서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를 외칠 수 있는 것은 소수의 지식인들뿐이었던 세계사의 보편적인 패턴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고진이 말한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장르가 소설(novel)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한국 문학사에서 ‘소설의 시대’라고 불렸던 1970년대의 특수한 문학사적 맥락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의 논의가 작가를 앞세우면서 참조하는 세 가지 문학 개념 중 첫 번째인 ‘리테로크라시(literocracy)’라는 동아시아의 문치주의적인 문학 개념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한국 근현대 문학사로 한정해 본다면 그것의 유구한 역사는 시인과 소설가가 독립운동 투사가 되곤 했던 식민지 시대 ‘문사’ 개념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사의 시대는, 이 책에서 보여 주고 있는 것처럼 실로 1970년대 문학에서 마지막으로 가장 강력하고 화려하게 빛을 발한 뒤, 끝났다.4) 이 책의 첫 장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김지하의 시 「진리」에서 시인은 “바람 속이 내 집”이라고 노래하고 있었지만,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 황석영은 그가 2017년 출간했던 문학적 자서전 『수인』에서 방북사건으로 떠돌던 시절을 회고하며 그때의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결국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문학이라는 집이었다”라고 고백한다.5) 한때 바람 속을 집으로 삼아 온갖 경계를 넘나들며 활보했던 문사들에게 문학의 지경이란 없었다. 김종철이 말했던 것처럼 그들의 문학은 “온갖 것을 떠맡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문학을 떠났거나, 문학이라는 집 안으로 돌아간다. 이제 문학은, 그리고 작가는 무엇을 하는가. 유영주는 결론에서 박민규 소설의 저항성을 김지하에 견주며, 문학은, 그리고 작가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박민규는 그의 대표작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표절 사건 이후로 그럴 수 있는 정당성을 상실했다. 이것은 분명 징후이기도 하다.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예감하게 했던 작가 중 한 명인 무라카미 하루키를 통해 우리는 이미 오래 전 문사의 정체성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로 완벽하게 대체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지위마저 위태롭다. 최근 작가들의 소설 속 자기 재현은 어떠한가. 그들은 비정규직 중에서도 고용안정성과 소득이 가장 낮은 축에 들며, ‘프리랜서’라서 정부가 청년층에 제공하는 대출 상품에도 부적합해 은행 창구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으로 소설가를 재현한다(박서련, 「A Queen Sized Hole」,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민음사, 2022). 지방 변두리의 3천만 원짜리 아파트가 자기 집이 되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며, 마오쩌둥의 참새들처럼 어디에도 내려앉을 수 없어 지쳐 떨어져 죽을 위기에 놓여 있다(이서수,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젊은 근희의 행진』, 은행나무, 2023). 오해하지 말라. 이것은 어떤 가치 판단도, 비판도, 자조도 아닌, 현상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이 시대의 문학은 이제 유신 독재의 겨울 공화국과는 완전히 다른, 또 다른 눈보라 속에서 분투해야 하는 것이다. 1) 양성우, 『겨울공화국』, 화다, 1984, 18면. 2) 유영주, 이형진·정기인 역,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 박정희 시대 한국문학과 저항』, 소명출판, 2023, 92면. 이후 이 책 인용 시 본문에 쪽수로 표기. 3)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역, 『근대문학의 종언』, 도서출판 b, 2006, 49면. 4) 어떤 이들은 1980년대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문학과 정치의 관계라면 그것은 1980년대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1980년대에 문학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팽배했던 반지식인적인 분위기 속에서 작가는 1970년대와 같은 문사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1991년 5월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 치워라”라는 김지하의 충격적인 발언과 그것을 둘러싼 반응 그 이면에는 1980년대를 거치며 그가 더 이상 1970년대와 같은 문사의 지위에 서 있을 수 없었던 상황이 엄연히 자리한다고 볼 수도 있다. 5) 황석영, 『수인』 1, 문학동네, 2017, 36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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