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딩아돌하 2024년 여름호(제71호)
SF시란 무엇인가
1. SF, 타자와의 새로운 관계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그래비티』(2013)에는 시와 SF의 장르적 차이를 넘어서는 듯한 하나의 이미지가 제시된다. 그것은 바로 우주로 내던져진 인간이다. 영화의 핵심은 우주정거장에서 일어난 조난 사고이다. 라이언 스톤 박사는 허블 우주 망원경을 수리하기 위해서 우주정거장에 파견되는데, 우주를 떠도는 잔해가 우주왕복선에 부딪히면서 순식간에 우주로 튕겨 나간다. 막막한 우주 속에서 한 인간이 생환하는 과정이 이 영화의 서사이다. 이 영화의 전반부는 시적인 관조, 즉 텅 빈 우주에서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는 스톤 박사의 얼굴을 비추며 그가 느끼는 공포와 불안을 묘사하는 데 초점을 둔다. 이 영화의 후반부는 과학적 사고, 즉 합리적 판단에 근거하여 생환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과정에 초점을 둔다.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라는 진실 앞에서 우리는 어느 방향을 보아야 할까.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이 시 장르의 시선이라면 세상으로 나아가는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SF의 시선이다. 존재 이유에 대하여 자신의 내장을 추궁하여 답을 구하는 자가 시인이고 세계의 질서를 탐구하여 답을 얻는 자가 과학자이다. 시와 SF는 장르적으로 다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른 삶의 자세이기 때문에 동궤에 놓기 어렵다. 그렇기에 『그래비티』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라이언 스톤 박사가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의지와 해결책을 환상의 형식으로 얻는 대목이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스톤 박사는 간신히 비상 탈출용 우주선에 도착하지만, 연료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한다. 그는 웅크린 채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때 우주정거장의 사고로 죽은 동료의 환상이 나타나 그에게 힘을 북돋고 살아남을 수 있는 계획을 알려준다. 이 환상은 과학적 사실과 시적 모호성이라는 경계를 흐트러트린다. 죽은 이의 목소리가 환상이라는 형식으로 ‘내면에서’ 솟아올라서 합리적 해결책을 제시할 때 시적인 시선과 SF적인 시선은 교차한다.
이보다 의미심장한 것은 타자의 환영이라는 형식이다. 스톤 박사는 분명히 체념한 채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타자의 환영은 자신을 미리 애도하던 자, 동시에 해결할 수 없던 난관에 부딪힌 자에게 삶의 의지와 해답을 전한다. 무엇보다 어떠한 타자인가. 쿠아론 감독이 선택했을 이 환상은 가족이나 친구의 형식이 아니라 ‘같은 장소에서 죽음을 경험한 사람’, 즉 우주정거장의 사고 때문에 희생된(심지어 스톤 박사를 위해 희생한) 동료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이 장면에서 『그래비티』는 하나의 윤리적 물음을 남긴다.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으로부터 우리는 살고자 하는 의지를 얻고, 무엇 때문에 삶을 탐구하려는 자세를 견지하는가. 이 장면은 어쩌면 인간의 감성과 이성이라는 내면의 원동력을 넘어서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주는 것은 ‘나와 같은 경험 속에서 죽어가는 타인의 목소리’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 글의 서두에서 영화 『그래비티』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암시하는 동시에 내가 미리 주장하려는 바는 다음과 같다. 만약 SF시라는 장르가 가능하다면, 다시 말해 우리 시대에 합리적 사고와 정서적 사고가 동궤에 놓이는 ‘말하기 방식’이 장르화될 수 있다면 그것은 타자에 대한 새로운 윤리적 태도를 정립하는 의지와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내적 성찰과 세계의 탐구라는 두 가지 시선 사이에서, 우리와 똑같이 세상을 바라보며 나란히 선 타자가 있다. 실상 그 타자야말로 우리가 관계할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세계의 가장 확고한 지평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수평적인 토대로부터 ‘응답받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세계를 살아낼 수 있고, 또한 세계를 기록할 의지를 얻는다. 나는 바로 타자에 대한 윤리적 태도야말로 SF시의 기원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이 글의 목적은 한국 현대시에서 SF시 장르가 규범화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다. 제1절에서는 『그래비티』에 대한 분석을 통해 SF시의 가능성과 그 조건, 그리고 SF시 장르의 필요성을 미리 암시하고자 하였다. 이제 문학적인 탐구로서 제2절은 SF 장르의 역사를 정리하는 데 할애된다. 하지만 이 글의 핵심적인 논지와 현대시의 분석만을 확인하고자 하는 사람은 제2절을 건너뛰고 제3절부터 독해하여도 좋을 것이다.
2. SF장르의 역사
과학소설(Science Fiction)이라는 단어에서 ‘fiction’이라는 단어는 한국 사회에서 서사 장르를 가리키는 데 통용되고 있다. 이 때문에 SF시라는 용어는 성립할 수 없거나 느슨한 의미로만 통용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학소설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이는 1851년 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윌리엄 윌슨(William Wilson; 1801 ~ 1860)이었으며, 그는 ‘과학소설이란 그 자체의 시적이거나 진실할 수 있는 즐거운 이야기로 조직된 드러난 과학적 사실’이라고 규정했다.1) SF라는 용어를 떠올리는 최초의 과정에서 ‘시적인(poetical)’이라는 단어를 연상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흔히 문학이 욕망된 미래를 예시하고 과학이 실현 가능한 미래를 예시한다는 차이를 떠올려 보았을 때, 윌슨의 용례는 오히려 과학적 사실과 시적인 욕망이 변증하는 순간 SF 장르가 탄생한다고 설명하는 듯하다.
SF문학 혹은 ‘SF적인’ 문학은 언제 탄생했을까. SF의 기원을 설명하는 방식에는 적어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미적 형식으로부터 그 기원을 추론하는 과정이다. 이것은 미국에서는 1970년대 무렵부터 SF에 관한 학문적 연구가 진행되면서 나타난 이해의 방식이다.2) 상당수의 연구자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1818)을 SF의 효시로 꼽는다.3) 하지만 브라이언 올디스는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1726)를 SF의 효시로 볼 수 있는지 숙고했다. 더 나아가 SF 소설가이자 연구자인 아담 로버츠는 길가메시 서사시의 새로운 세계를 찾아 헤매는 영웅을 SF의 전형으로 이해하는가 하면, 존 밀턴의 『실낙원』(1674)을 SF문학의 기원으로 제안한다.4)
SF의 기원을 설명하는 또 다른 방식은 SF문학을 소비할 수 있는 문화적 토대가 형성된 시기를 살피는 일이다. 이 경우 SF 장르를 대중에게 보급하는 잡지가 형성되는 시기가 주안된다. 미국에서 SF라는 용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데는 휴고 건스백(Hugo Guernsback)의 기여가 크다. 그는 1916년부터 줄곧 ‘Scientific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일군의 작품을 장르화하려고 했고, 1926년 4월 최초의 SF 펄프 잡지 <어메이징 스토리스>(Amazing Stories)를 창간했다. 비록 1929년 건스백은 파산했지만,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까지 경쟁적으로 SF 펄프 잡지들이 창간되었다. 이로써 1930년대 미국에서 SF 생산하는 작가층과 소비하는 독자층이 형성될 수 있었다.5)
한국의 경우 식민지 시기부터 조금씩 SF문학이 번역되거나 창작되었다. 한국에 최초로 번역된 SF문학은 쥘 베른의 『해저 2만리』(1870)의 일부를 중역한 「해저여행기담」이며, 이것은 1907년 3월부터 1908년 5월까지 유학생 학회지인 <태극학보>에 소개되었다. 비록 유학생을 위한 학회지에 수록했다는 한계 때문에 많은 독자가 접할 수는 없었지만, 일본에서 유학하던 박용희가 쥘 베른의 번역에 임했던 동기는 ‘허식’과 ‘공상’에 빠진 전래의 소설을 극복하고 유학생들이 과학적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있었다.
대중을 위해 번역된 최초의 SF문학은 1908년 11월 희동서관에서 출간된 『과학소설 철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쥘 베른의 『인도 왕비의 유산』(1879)을 이해조가 번안한 소설이다. <황성신문> 1908년 12월 10일의 기사 「科學小說 鐵世界」를 살피면, 이 작품이 미국의 소설가 ‘가이위니(迦爾威尼)’(쥘 베른)의 소설이며 “신지식계발에 유용”하기 때문에 추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6) 이후에도 『과학소설 비행선』(동양서원, 1912) 『제클과 하이드』(조선야소교서회, 1921) 『월세계여행』(박문서관, 1924) 등이 간행되었다. 이러한 작품들은 문해력을 갖춘 소수의 독자에게만 유통되었을지라도 SF문학을 대중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보다 본격적으로 SF장르의 독자층이 형성되려면 과학적 지식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세대의 출현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한국 최초의 창작 SF문학인 김동인의 단편소설 「K박사의 연구」(1929)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등장하지만, 본격적인 SF소설과 그 수용층이 등장하는 시점은 한국전쟁 이후에야 가능했다. 한국전쟁 이후 냉전체제에 편입된 한국 사회에서 과학 교육은 이념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다. 출판사들은 경쟁적으로 과학에 관련한 아동서적을 간행했고 『어린이과학전집』(김용사, 1947) 『소년소녀 세계과학모험전집』(아데네, 1959) 등이 대중에게 보급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SF장르의 독자층이 형성되는 것은 1960년대 전후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 교육의 입안과 맞물려 1960년대에 SF장르가 일반화될 수 있었다. 최초의 SF 장편소설인 문윤성의 『완전사회』(수도문화사, 1967)는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간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학생과학>(1955. 11. ~ 1983. 12.)과 같은 청소년 과학 교양지가 창간되며 SF문학이 어린 세대를 매혹하게 된다. 하지만 SF문학을 하위 장르로 이해하는 관점이 지속했다. 이것은 1960년대 SF문학이 근본적으로는 우주를 개척하는 남성 주인공을 등장시켜 제국주의적 남성 문화의 확장을 실현해가는 이데올로기 서사의 변주에 지나지 않았다는 분석처럼,7) 1960년대까지 SF장르가 순수문학의 소재적 변주로만 이해되었음을 뜻한다.8) 이처럼 SF문학의 형성에는 정치적‧사회적 요구가 큰 영향을 끼쳤으며, 작품의 다양성과 별개로 SF문학을 소비하는 방식은 리얼리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현재의 SF문학은 1990년대 탈중앙적인 소통의 매체, 즉 PC통신이 등장하는 과정을 배경으로 삼고 등장했다. 1990년대는 냉전 체제가 무너지고 자유롭게 소통의 장을 만들어낼 수 있는 네트워크가 형성된 시기이다. 1990년대에 복거일과 듀나와 같은 SF작가가 창작과 비평 양면에서 활동하며 주목받기 시작한다. 또한 2000년대에는 인터넷을 통한 SF 공모전이 등장하면서 장르 소설을 전문으로 하는 작가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최근 활동하는 김보영‧김초엽‧정세랑 작가의 SF소설에서 다루는 주제와 동시대 순수문학에서 다뤄지는 주제는 구별되지 않는다. SF문학은 사회적 관계에 대응하거나(페미니즘), 기후위기를 예각화하거나(인류세), 인류의 미래를 예견하는(포스트휴머니즘) 주제를 다루고 있다.9)
한 가지 간명한 사실은 SF장르의 중심에는 언제나 소설이 놓여있었다는 것이다. 번역과 창작 양면에서 모두 그렇다. 이는 마치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 과학적 상상력을 유통하는 방식, 그리고 국가 내에서 과학적 지식을 재생산하는 방식으로서 ‘소설’이 적절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근본적으로 SF장르가 미래를 예시하는 장르라면, 서정적 순간을 다루는 시 작품보다 서사적 시간을 다루는 소설 작품이 SF적인 것은 타당해 보인다. 시간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소설이 SF적인 인과관계와 합리적 세계관을 표현하는 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글이 밀어붙이고자 하는 것은 SF시라는 개념이며, 더 정확히 말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시대에 SF시라는 개념은 왜 필요한 것인가.
3. SF시의 가능성 : 불안의 정동으로부터 불안의 상상력으로
한국 문화에서 SF문학은 적어도 세 가지 의의를 지니고 있다. 첫째로 SF장르는 지식인 계급이 과학 지식이나 합리적 사고에 대한 대중의 폭넓은 관심을 유도하기 위한 교육의 도구였다. 식민지 시대에 쥘 베른의 SF소설이 한국에 번역되어 소개된 사례가 대표적이다. 둘째로 SF장르는 국가 차원에서 다른 국가와의 기술 경쟁에 임할 수 있는 젊은 세대를 육성하기 위한 매체로 확장한다. 이는 한국전쟁 직후 정부의 ‘과학화’ 기조와 맞물려 과학소설전집이 발간되고 SF잡지가 창간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1990년대 이래 SF장르는 PC통신의 성립과 맞물려 대중적 소통의 장으로 변화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SF문학과 순수문학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었으며, 여성운동, 환경파괴, 동물권 등과 같은 주제를 공유하게끔 하였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역사적 전개에서 SF문학은 곧 SF소설이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귀납적으로 묻자. SF시 또한 SF소설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교육의 도구이거나 과학 지식의 매체가 될 수 있는가.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시 장르는 적절한 수단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 장르는 근본적으로 세계에 대한 보편적 앎을 나누는 방식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고유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시에 과학을 도입하는 순간 언제나 과학적 경험에 대한 사적 체험의 승리가 행해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SF시의 가능성이 형성되는 시기는 적어도 SF장르가 대중의 다성적인 발화구로 이행하는 1990년대 후반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 SF가 과학 지식의 전달방식이 아니라 과학적 경험을 분유하는 대화 수단으로 인지될 때 비로소 하나의 시 작품에서 SF적인 요소를 발견하는 과정이 의의를 지니게 된다. 최초로 가정할 것은 기술 발전을 공통의 현실로 ‘목격하는’ 1970~1980년대 도시시의 주체가 기술을 주체화의 과정으로 ‘체험하는’ 1990~2000년대 SF시의 주체로 이행한다는 전제이다. 주목할 것은 가능한 현실이 아니라 가능한 주체인 셈이다.
몸 속에 웹 브라우저를 내장하게 되었어. 야금야금 제 속을 파먹어 들어가는 달. 신이 몸 속에 살게 되었어. 신은 이제 몸 속에서 키울 수 있는 존재야. 몸 속에는 사철나무, 산. 목이 잘린 불상. 금칠이 벗겨진 십자가. 당신이 보낸 천년에 한 번 우는 새. 당신이 내게 올 때 걸었던 최초의 오른발과 왼발. 기어이 제 살을 다 파먹은 달. 그물로 된 달. 그물에 걸린 신들의 꼼지락거리는 손가락들과 발가락들을 생각해봐. 몸 속이 점점 비좁아지고 있어. 십계명을 새긴 돌이 자궁 속을 굴러다니고 있어. 사막을 건너 아버지가 찾아와 내 몸이 신전이니 죽은 아버지가 새벽마다 기도해. 몸 속은 무덤이 아니야. 방금 네가 날 검색했잖니. 서른 닢의 은전도 받지 않고, 새벽은 아직 멀었는데, 쉬지 않고 아버지를 부정해. 더 이상 신전은 몸 밖에는 없어. 이제 낮과 밤은 몸 속에서 만나고, 낮과 밤은 몸 속에서 헤어지고. 신들은 내 몸을 로터스 꽃처럼 먹고 꾸역꾸역 자라. 몸은 구멍투성이야. 신들의 취미는 피어싱. 구멍은 신들의 수유구. 아니면 주유구. 세상은 구멍이야. 만개하는 몸이야. 열리고 닫히는 몸
이원, 「몸이 열리고 닫힌다」 전문,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문학과지성사, 2001)
본격적 SF시는 아니지만 SF적인 성격을 띠는 이원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를 상기해 보자. 시인은 이미 첫 번째 시집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문학과지성사, 1996)부터 PC, 드라마, 대중음악 등의 소재를 다루면서 대중매체가 인간의 인식 속도에 미치는 변화를 표현하고자 했다. 매체의 영향이라는 주제는 두 번째 시집에서 더 첨예해지며, 시 「몸이 열리고 닫힌다」에서는 아예 ‘몸속에 삽입된 웹브라우저’라는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몸’은 웹브라우저로 가득 차 비좁고 끝내 구멍 난 것으로 훼손된다. 이러한 이미지는 첨단 기술에 대한 공포를 표현한다.
더 정확히 말해서 이 작품은 1997년 서비스되었던 웹사이트 Yahoo에 대한 시인의 비판적 인식을 드러낸다. 인간 존재는 웹브라우저에 의해 장악될 것이다. 의미심장한 것은 이 작품이 ‘신’이라는 타자를 호명함으로써 주제를 강화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새로운 시대에 웹브라우저는 ‘몸속에 살게 된 신’이 되었다. 이제 몸은 웹브라우저를 모시는 ‘신전’이고, “더 이상 신전은 몸 밖에는 없”다. 인터넷이라는 세속적인 신성은 이제 기존의 신성성을 파괴할 것이다. 이때 이러한 메시지는 신앙에 근거했다고 보기 어렵다. 시인의 최근 시집까지 살펴보았을 때 신성은 주된 소재가 아니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신’과의 관계를 부각하며 시인이 부각하려는 것은 신체의 황량함이다. 신본주의 시대의 종말과 더불어 세계를 상실하는 듯한 불안의식이 두드러지게 된다.
동시대의 첨단 문물에 대한 공포와 불안은 현대시에서 지속해왔던 주제처럼 보인다. 즉 무분별한 도시 발전을 비판하는 작품들을 연상케 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놀랍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 작품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화자이다. 이 작품은 기술적 변화를 목격하는 ‘농민’이나 ‘시민’과 같은 계급적 입장에서 서술되는 것이 아니다. 대신 단순히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는 ‘사용자’를 화자로 내세운다. 웹브라우저를 사용하는 ‘나’는 마치 웹브라우저 또한 ‘나’를 사용하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히는데, 이로써 “방금 네가 날 검색했잖니”라는 문장은 가능하다. 따라서 야기되는 불안은 사회적 불안이 아니라 실존적 불안이며, 그러한 불안은 하나의 새로운 도구와 접촉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다. 세상이 송두리째 재구성되는 듯한 감각이 곧 ‘신’에 대한 호명으로 표현되는 셈이다.
불안의 근원은 하나의 새로운 발명품이 ‘나’의 신체를 재구성하는 듯한 이질감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여기서 ‘나’를 재구성하는 것은 정보의 패턴이다. 캐서린 헤일스는 현실에 기초하는 전통적 소설과 달리 가상의 시공간에 기초하는 SF문학의 서사를 ‘정보 내러티브’라고 부른 바 있다. 이때 정보 내러티브는 물질적 시공간이 아니라 신체와 사이버스페이스 사이에서 정보를 교환하는 ‘패턴’이 곧 서사를 이룬다. 헤일스의 독창적 주장은 정보와 접촉하고 수용하며 이해하는 패턴 자체가 곧 우리의 신체를 인식하는 방식을 재구성한다는 것이다. 기술 문명이 발전한 시대에 “패턴은 현존을 압도하”는 것이다.10) 느슨하게, 이원의 시는 SF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SF시는 SF소설처럼 정보 내러티브를 서사화하는 장르는 아니다. 그러나 SF시는 정보 내러티브의 본질적인 ‘패턴’을 형상화한다. 이원의 시는 신성성이 파괴된 신체, 정보를 받아들이는 ‘주유구’로 전락한 신체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절망적 정동으로 주조된 신체적 패턴을 그려낸다고 할 수 있다.
기지가 건설됐다.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사람의 힘 덕분이었다. 그로써 달이 사라졌다. 파도가 가라앉았다. 푸른 자정의 순환이 사라진 심해에서 숨죽인 이들의 허파꽈리가 물거품으로 떠올랐다. 죽은 달의 사정액처럼. 앞으로도 영영 기지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기지는 빈 기지일 뿐. 이름 없는 군함들이 기지를 조문하고 사라졌다. 기지의 노포핵이 껍질을 벗었다. 커졌다. 우뚝 섰다. 조준과 발사. 때때로 정체가 분명한 다국적 유령선들이 기지를 뚫지 못하고 해체됐다. 파스칼, 얼굴들은 물러나야 해. 물러나서 얼굴들은 기지의 촌에 숨어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해. 파스칼이 입을 다물고 있을 때 얼굴들은 사람이 다시 사람이 되는 일의 기진맥진함을 저 멀리 불어 터진 허파들로부터 찾으려 했다. 기지는 홀로 드넓어졌다. 기지의 피스톤 운동을 피해 얼굴들은 멸종 위기에 처했다. 멸종의 미토콘드리아는 생물의 어깨 위로 내렸다. 붉은 눈이었다. 얼굴들은 1헤르츠씩 주저앉는 어깨를 맞대고 서로에게 호흡을 쌓았다. 파스칼은 시간을 가로질러 가려 했다. 얼굴들은 입을 모아 실패한 공작을 이야기했다. 파스칼, 얼굴들에게 남은 건 단 한 번의 기회뿐이야. 기지는 황홀하게 황폐해졌다. 얼굴들은 기지의 핵심으로 모였다. 얼굴들은 융합되고 폭발했다. 백과 흑. 바다에 구멍이 뚫렸다. 기지는 기지로 기지로 기지로 기지를 넓힌다. 기지는 신속하고 정확하게 섬으로 뻗어 온다. 구멍을 지나온 파스칼은 최첨단의 불안을 안고 단단한 바위 해변의 입구에 당도했다. 붉은발말똥게들이 달빛을 생포한 집게다리를 사납게 쳐들고 줄지어 좌로 좌로 이동 중이었다. 파스칼은 해변의 끝에 있는 미래의 기지를 향해 dp5를 움직였다. 과거에 찍히는 파스칼의 발자국들이 점점 더 선연해졌다.
김현, 「THE FUTURE」 부분11), 『글로리홀』(문학과지성사, 2014)
실존적 정동과 패턴의 측면에서만 SF를 연상케 한다고 볼 수 있는 이원의 시와 달리, 김현의 첫 시집 『글로리홀』은 뚜렷이 SF적 소재를 차용한 작품집이다. 퀴어 시집의 전형으로 간주할 수 있는 『글로리홀』에서 비교적 소수의 작품이 SF소재를 다루고 있는데, 여기 「THE FUTURE」는 우주적 규모의 기상이변으로 인해 세상이 멸망하는 과정을 그리는 작품이다. ‘달’이 사라졌고 “푸른 자정의 순환이 사라진 심해에서” 사람들은 심해에 ‘기지’를 건설하면서 생존하고 있다. 그러나 그 ‘기지’조차 더 이상 아무도 살지 않는 공간이 되어버린 뒤, ‘다국적 유령선’이 나타나 기지를 침략하고자 시도하거나 사람이 부재한 기지가 홀로 ‘드넓어지는’ 미스테리한 사건이 뒤따른다.
이 작품의 서사는 의도적으로 모호하다. “실패한 공작”이 일어나고 “바다에 구멍이 뚫”리며 희망이 사라지는 묵시록적 분위기만이 뚜렷하다. 모호함을 가중하는 것은 “기지의 노포핵이 껍질을 벗었다. 커졌다. 우뚝 섰다.”라는 표현처럼 ‘기지’가 곧 남근을 연상케 한다는 점이다. 기지가 성애를 연상케 한다면, ‘홀로 드넓어지는 기지’란 고착된 성욕을 떠올리게 한다. 더불어 사람을 ‘얼굴들’이라는 제유로 총칭하는 것 또한 눈에 띈다. “사람이 다시 사람이 되는 일의 기진맥진함”이라는 표현처럼, ‘얼굴들’은 사람다움을 잃은 채 숨어있거나 죽어가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를 배경으로 삼아서 ‘파스칼’이라는 인물이 걸음을 옮기고 있다. 그의 걸음은 ‘시간을 가로지르며’ 미래로 나아가는 전진으로 규정된다. 그가 “최첨단의 불행”을 끌어안은 채 “해변의 끝에 있는 미래”로 나아가는 것은 곧 이러한 묵시론적 세계를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이 시의 과도한 모호성 때문에 유의미한 해석에 도달하려면 징후적 독법으로 옮아가야 할 것이다. 내면, 관계, 세계라는 세 층위에서 모든 것이 병증을 앓고 있다. ‘홀로 드넓어지는 기지’로 빗대어 표현된 성욕은 고착된 채 배출되지 못한다. 한편 “사람이 다시 사람이 되는 일의 기진맥진함”을 깨달은 ‘얼굴들’은 숨거나 찾아 헤맬 뿐이고, 애초에 멸종위기에 처해있다. “얼굴들은 융합되고 폭발했다”라는 시구처럼 관계는 언제나 파국으로 치닫는다. 마지막으로 ‘바다’는 구멍이 뚫린 채 소실되고 있다. 그렇다면 표면상 이 작품의 주제는 욕망의 죽음이고, 관계의 상실이며, 세계의 종말이다. 무엇보다 이 주제의식을 매끄럽게 서사화하지 못하는 시 형식 자체가 가장 근본적인 징후이다.
그런데 이 시는 유희적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시를 징후적 독법으로 읽어나가면 결국 자연스럽게 세계에 대한 정합적 인식을 상실한 주체를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 또한 불안의식을 주제로 한다. 하지만 이러한 결론은 만족스럽지 않다. 의도적으로 SF적 스펙터클을 차용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시인은 SF소재를 차용함으로써 불안을 ‘느끼는’ 위치에서 불안을 ‘상상하는’ 위치로 이행하는 것은 아닐까. ‘달이 사라지는’ 우주적 규모의 상상력부터 ‘멸종의 미토콘드리아’라는 현미경적 상상력에 이르기까지, 이 시의 정조인 불안의식은 SF적 상상력에 의해 탄력적으로 변주된다. 이러한 상상 덕분에 세상 모든 것이 위태로운 풍경을 그려내는 마음이 곧 그것과 유희하는 태도로, 이 시의 표현을 빌리자면 ‘황홀하게 황폐해지는’ 태도로 전이될 수 있다.
앞서 이원 시인의 시는 웹브라우저를 최초로 사용하는 세대의 충격을 반영한다. 그는 새로운 매체의 사용자가 느끼는 불안의식을 ‘정보가 삽입된 신체’의 이미지로 그려낸다. 그의 ‘몸속’에서 육체의 신성성은 정보의 패턴으로 대체된다. 이에 비해 김현 시인의 시에서 불안은 묵시론적 세계관으로 확장한다. 이원의 시에서는 신의 상실이라는 주제 속에서 사람이 무엇에 기댈 것이냐는 물음을 연역할 수 있다. 하지만 김현의 시에서 자아, 타인, 세계가 모두 몰락하는 것으로 묘사된다는 점은 그 어느 곳도 기댈 수 없다는 징후를 표현한다.
그런데도 이원의 SF적인 시로부터 김현의 SF시로의 이행은 중요한 가능성을 지닌다. 김현은 스펙터클과의 유희 속에서 불안을 ‘SF적 문법을 빌려’ 다시쓰기하는 능동적 태도를 보인다. 이로써 새로운 매체가 야기했던 불안의 정동은, 다시금 그 매체적 경험을 빌려 자아‧관계‧세계를 재인식하는 태도와 맞닿게 된다. SF가 가능한 미래에 대한 응답이라면, 가능한 미래가 야기하는 수동적 정동을 능동적 상상력으로 이행하는 힘이야말로 바로 SF시가 지닌 중요한 형식인 셈이다.
4. 2020년대 SF시의 양상
‘사회적 기반 없이 이성은 실현될 수 없다’라는 유물론적 테제에 덧붙여, 우리는 새로운 사회적 기반을 받아들이는 마음 없이 이성은 실현될 수 없다는 테제를 세워볼 수 있겠다. SF시는 새로운 물질적 기반에 대한 정동적 반응이다. 그런데 우리가 숙고할 것은 새로운 사회적 조건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사회적 조건을 애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이율배반을 우리는 제3절에서 음미할 수 있었다. 디지털 시대에 대한 반응으로서 이원 시인은 신성성이 상실을 애도한다. 또한 김현은 SF적 묵시록을 도입하여 세계 전체를 애도하는 자세를 보인다.
끝없이 발전하는 기술 문명 속에서 인간의 느끼는 불안의식이 SF시의 주조라면, 인간은 어떻게 그 미래를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끝없는 발전이 자아내는 두려움은 어떠한 타자에게 기댈 때 극복 가능한 것인가. 이제 ‘SF적인’ 시를 벗어나 최근의 SF시를 논의해 보도록 하자. SF시란 간단히 시인 자신이 SF라고 표명한 작품과 이러한 작품들과 유사한 장르군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만약 SF시가 고유한 장르적 규범을 가진다면 우리는 SF시를 귀납적으로 살펴보고 SF시의 개념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절벽만 있는 곳이 우주라면 이 땅이 그랬습니다
방독면을 쓴 소년은 하얀 바이러스들이 무릎까지 차오른 번화가로 나갔습니다—공중의 소형 비행기들은 날개를 접는 법을 잊어버리고 미지로 날아갔지만—소년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잡초가 무성한 팔을 흔들며 걸었습니다
—탐사선들이 보낸 미지의 사진들은 이상한 그리움을 불러일으켰습니다만
잘리지 않고 남겨진 나뭇가지의 심정으로 소년은 걸었습니다—여기저기서 아득한 굉음들이 방사형으로 퍼져가는 날들—소형 비행기들은 고물이나 괴물이 될까봐 날개를 접지 않는다는 사실을 늦게야 떠올렸고—소년에게 새하얀 하늘은 그저 죽기에 적합할 뿐—태초로 향하는 비행기는 없었습니다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는 곳이 우주라면 이 땅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이 땅으로 옵니다—목성의 아침 인사였던 새가 이곳으로 왔듯이—새가 날아가면 시민들은 연유를 모르는 채 시선을 빼앗깁니다—나 또한 너처럼 지구와 너무 다르지 않니—라는 눈빛으로—가끔은 아침의 거리에서 얼굴을 꺼내 묻곤 합니다—나는 누구와 함께 이곳에 온 것이지?
김향지, 「지구에서 발견된 필름—SF」 전문, 『얼굴이 얼굴을 켜는 음악』(문학동네, 2021)
총 5편으로 이루어진 ‘지구에서 발견된 필름’ 연작은 소재와 주제 양면에서 SF시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연작의 주제의식은 그 무엇도 나아지지 않는다는 정체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구에서 발견된 필름—SF」에서는 묵시론적 분위기가 부각되고 있다. 대지는 바이러스로 뒤덮였고, “여기저기서 아득한 굉음들이 방사형으로 퍼져가는 날들”이 지속된다. 하늘과 우주는 도피처가 되지 못한다. ‘소년’은 저 소형 비행기처럼 미지로 날아가는 방법을 ‘잊었을’뿐더러 “소년에게 새하얀 하늘은 그저 죽기에 적합할 뿐”이다. 다만 ‘처음으로’ 되돌릴 수 없는 삶 속에서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이 땅에 도착하고, 또한 시민들은 ‘연유도 없이’ 새를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상실된 것은 세상을 바로 보거나 갱신하려는 인간의 의지이다.
음미해 볼 것은 “나는 누구와 함께 이곳에 온 것이지?”라는 마지막 시구의 반문이다. 마치 온 세상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듯한 체념의 세계 속에서 왜 시인은 내면이나 세계에서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이곳에’ 온 것인지 묻고 있는가. 왜 그는 최후의 순간 곁을 찾아 헤매는가. 따라서 시인이 근본적으로 문제 삼는 것이 유대감의 상실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바이러스’라는 시어로 연상케 하는 코로나 팬데믹이나 ‘굉음’이라는 시어로 연상케 하는 전쟁이나 파괴는 유대를 상실케 하는 원인으로 지목할 수 있다. 시인이 회복하기를 체념한 것은 바로 ‘소년’과 ‘시민’과 ‘새’가 호흡을 나눈다는 감각, 즉 생명의 유대감이다.
그렇다면 SF적 소재는 어떠한 기능을 하는가. 이 작품이 향수하는 것이 생명의 유대라면, 이 작품은 우주적 규모에서 생명의 가없음을 사유하도록 유도한다. 따라서 SF시에서 항상 유대란 휴머니즘을 벗어나 포스트휴머니즘적인 것, 즉 인간을 둘러싼 자연 환경으로써 ‘새’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목성의 아침인사였던 새”를 사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새’는 지구의 일부로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일부로서 인식된다. 여기 시인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상상하고 있는 유대의 토대는 바로 인간을 중심에 놓지 않고 성립하는 우주적인 생명의식인 셈이다.
우주 밤은 기억을 재생해
밤마다 시간을 다시 살아
저장된 기억이 부분적이고 뒤죽박죽이라
어떤 날은 시 같고 어떤 날은 악몽 같지만
허락된 인생의 절반을 이미 살았다면
이제 지난 삶을 관람하는 것만으로도
남은 생을 모두 살 수가 있는데
이것마저 돈이 들어서 매일 공중 도시의 교각을 타며
이천 개씩 볼트를 조여야 해
올 거지?
응, 전쟁이 나도.
심하게 싸운 뒤에도 너는 점령군처럼
당당히 왔다 나는 함락당해 기뻐한다
닿아도 돼?
이런 거 묻지 않았잖아
응 근데 오늘은
물어야 할 것 같아서
볼트를 하나 조일 때마다 우주 밤에서 재생할 기억을 가다듬는다
더욱 생생한 영상을 위해서 그날 입었던 옷 색깔
주고받았던 대화의 단어 하나하나를 복기한다
원하는 꿈을 꾸기 위해 노력하듯
기억을 윤색한다 내 잘못이니까
전쟁이 나도
공중도시 긴 교각의 H빔을 조일 때
균형을 위해 양쪽에서 마주보며 조여와야 하는데
그런 작업을 할 때마다 하루에 딱 한 번 마주치는 순간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는 날이 늘어났다
—작업 패턴 분석: 1/2 지점에서의 지체 현상을 해결 바람
—주의: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미달한 양에 상관없이 지급액의 40%를 삭감한다
남의 기억에 접속한다고?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색다른 재미를 위해서라면 그러고 싶지 않아
아니 누군가 되고 싶을 때
난 네가 되고 싶은데
마주 온다고 모두 만나지는 것은 아니니까
김원석, 「우주 밤」 부분12), 『엔딩과 랜딩』(문학동네, 2022)
김원석 시인의 경우 기술의 발전이 도리어 인간을 노동의 굴레에 옥죄는 근미래를 상상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작업 패턴과 작업량은 시스템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혹은 취미를 위해서라도 “매일 공중 도시의 교각을 타며” “이천 개씩 볼트”를 조여야만 한다. 그들의 유일한 낙은 ‘우주 밤’이라고 불리는 기억재생장치를 사용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시간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휴식을 잠시 취하고 나면 다시 일터로 돌아오기를 반복할 것이다. 여기서 ‘우주 밤’은 다만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는 수단이라는 인상을 남긴다.
한편 똑같은 처지에 놓인 ‘나’와 ‘너’는 애틋한 마음으로 서로에게 위안이 된다. 그들은 상대와 주고받았던 단어 하나, 상대가 입었던 옷 색깔조차 간직하려 한다. 때론 그러한 만남에 사로잡혀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는 날도 있다. 더 나아가 이 시는 하나의 SF적인 상상력에 도달한다. ‘우주 밤’을 통해서 ‘나’와 ‘너’의 기억을 교환할 수 있다면 어떨까. 즐겁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예 ‘나는 네가 되고 싶다’. 존재 이해를 넘어서 존재 일치에까지 도달하기를 욕망할 때 말 건넴은 곧 사랑의 극한을 표현한다.
‘우주 밤’이라는 도구를 상상함으로써 김원석 시인이 예시하는 미래는 두 가지다. 첫째로 기술의 발전은 인간을 사회 시스템의 부품으로 전락시킬 것이다. 사회는 인간의 ‘기억력’마저도 효율적인 노동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둘째로 기술의 발전 속에서도 인간은 인간과 유대하는 방식을 찾아낼 것이다. 그것은 지극한 사랑의 이미지, ‘나’와 ‘너’를 일치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표현된다.
이 작품에서 우리가 숙고해볼 것 또한 두 가지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사회 시스템의 영구발전과 더 내밀한 존재의 결속을 이루어지는 사랑의 영구지속은 근본적으로 다른 힘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주 밤’이라는 도구를 통해 그것이 나란히 놓이듯, 실상 발전의 욕망과 에로스는 동궤에 놓이는 힘은 아닐까. 프로이트는 그렇기 때문에 말년에 “에로스의 목적은 개인을 결합시키고, 그 다음에는 가족을 결합시키고, 그 다음에는 종족과 민족과 국가를 결합시켜, 결국 하나의 커다란 단위―즉 인류―로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을 덧붙일 수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는 우리도 모르지만, 에로스가 하는 일은 바로 이것이다”라고 반문했다.13) 마지막 물음은 이 글에서 해소하기 어려운 것이다. 왜 기억재생장치의 이름은 ‘우주 밤’인가. 아마도 시인은 인간의 기억과 에로스가 ‘우주적인’ 힘을 간직한다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하지는 않다. 이 물음은 음미할 만한 것으로 남겨두도록 하자.
네가 죽을 때까지 내려다볼게
떠나면서 너는 그렇게 말했지만
엘리노어, 정말로 보고 있어?
아무도 태우지 않은 전철이 이 시간이면 지나가
같은 자리를
성냥은 그으면 꺼지고
그으면 꺼져서
뭐가 변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
왜 처음 겪는 불행도 익숙한 걸까?
사람 키우는 게임을 했지
집을 짓고 직장을 구하다가 정말로 사는 모습 같아지면
일시 정지하고 섹스를 했다
이렇게는 살지 말자고
무서운 표정
벌써 다 자라서 부서진 사람의 얼굴
그래서 우린 눈을 감았나 봐
이런 표정은 유전자에 이미 있었던 걸까?
때가 되면 밖으로 나오는 걸까?
네가 뭘 더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게임으로는 언제든 돌아갈 수 있었지
얌전히 서 있던 사람들에게 다시 일을 주고
집을 짓게 했지
너를 상상해, 엘리노어
하얀 옷자락을 펄럭이면서
둥둥 떠다니겠지
가끔 거기 있는 것 같아
네 눈으로 나를 보는 것 같아
그럴 때면 나는 너무 작은 점이고
그러면 덜 가엾고
따뜻해
정적 속에서는 모든 게 직선으로 이어지겠지
순환선처럼
엘리노어,
너는 미래의 시간에 살고
나는 과거의 빛을 보지
여기 있어
여기 있어
어떤 말들은 이제 알 것 같다
오늘도 전철이 지나가
같은 시간에
너의 아이는 어떤 표정을 짓는 어른이 될까
엘리노어, 아직 보고 있어?
조시현, 「아이들 타임」 후반부14), 『아이들 타임』(문학과지성사, 2023)
김현과 김향지의 시가 세상이 멸망하는 과정을 그린다면, 조시현의 「아이들 타임」은 아예 ‘지구가 멸망한 이후에 남겨진 기록’이라는 형식을 취한다. 이 작품의 제목에는 각주가 달려 있는데, 기록의 연대는 2500년대이며 글쓴이는 지구의 마지막 생존자이지만 빈민이었기 때문에 다른 행성으로 떠나지 못한 채 남겨진 자라고 설정되어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의 목소리는 지구를 떠나간 이주민인 ‘엘리노어’를 향한 말 건넴이면서도, 공허한 방백이 될 것을 두려워하는 독백이라고 할 수 있다.
가난하기 때문에 홀로 남은 지구의 생존자,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계급 차별의 극적인 과장이라는 것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지구의 중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유는 곧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인 셈이다. “왜 처음 겪는 불행도 익숙한 걸까?”라는 반문은 빈민층의 불행을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또한 “벌써 다 자라서 부서진 사람의 얼굴”의 이미지와 이어지는 “이런 표정은 유전자에 이미 있었던 걸까?”라는 진술은 그러한 불행이 누대에 걸쳐 상속되는 것임을 암시한다.
의미심장한 것은 남겨진 자가 타인의 시선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엘리노어, 정말로 보고 있어?”라는 물음처럼 ‘나’가 바라는 것은 엘리노어의 시선이다. 이 요구가 극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나’는 “사람 키우는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일’을 주고 ‘집’을 짓게 하고 있었다는 것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연상이 가능해진다. 마치 게임 캐릭터를 바라보듯, ‘나’는 엘리노어가 ‘나’를 내려다 보아주기를 바라고 있다. 다시 말해 ‘나’는 우주로 떠난 이주민을 향해 최소한의 관심을 간청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에 이 시는 “엘리노어, 아직 보고 있어?”라는 물음으로 마무리되며 남겨진 자의 비참은 심화한다.
5. 무엇으로부터 답을 구하는가
SF시란 무엇인가. 이 글에서 소략한 결론을 내리자면, SF시에서 ‘세계’란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에 대한 부정태이다. 한 해의 간격을 두고 간행된 김향지‧김원석‧조시현 시인의 SF시에서 공통된 것은 묵시록적이거나 멸망해 버린 현실이다. 그들이 그려낸 것이 가까운 미래이든 먼 미래이든 현실은 사람이 살아내기에는 너무나 괴로운 공간으로 그려진다. 어떤 의미로 이것은 여러 번의 참혹한 사건과 코로나 팬데믹을 겪은 세대가 지닐 수밖에 없는 세계관의 투영일 수 있다. 혹은 문명이 곧 자연이 되어버린 이 시대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를 포기한 세대의 세계관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렇게 물을 필요가 있다. 삶의 원천은 주어진 사회의 물질적 조건만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가 오늘 하루를 살아내고자 하는 힘은 타인의 목소리와 타자의 몸짓을 확인하는 순간에도 얻어지는 것은 아닌가. 김향지 시인의 물음을 빌리도록 하자. 그는 질병이 창궐하고 어떤 붕괴가 암시되는 미래를 상상한 뒤 “나는 누구와 함께 이곳에 온 것이지?”라고 물었다. 그것은 더는 살아낼 수 없는 세상이 응답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 고통스러운 세상을 견디는 또 다른 생명을 향해 답을 구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물음에 응답하기라도 하듯 김원석 시인은 ‘같은 입장에 놓인 타인’을 그려낸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말 건넴을 통해 삶의 이유를 발견하는 휴머니즘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김향지 시인과 조시현 시인은 ‘위를 향해’ 묻는다. 그들은 우주를 향해서, 이 세상을 살아낼 이유가 무엇인지 추궁한다. 세상의 중심이 인간이기를 폐기한 이후에 ‘삶’이 무엇인지 묻고 있다는 그들의 질문 방식은 놀라운 것이다. 이들의 시는 살아갈 이유가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란 무엇인지, 또한 소외된 인간에게 세상이란 무엇인지 되묻기 위해서 가능한 미래를 시 장르를 통해 상상한다. 그들이 찾아 헤매는 것은 삶의 이유고, 더 근본적으로는 삶의 정당함을 가능케 하는 타인과 타자와의 관계이다.
지금까지 이 글에서 제기한 질문과 결론은 섣부른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SF시가 하나의 장르로 형성될 수 있을 만큼 그 작품의 양이 담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SF시가 매개하는 중요한 물음을 최근의 시에서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게 삶이 가능한 것이라면 삶의 조건은 물질의 충족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삶을 홀로 짊어지지 않는다는 것, 여기 ‘함께 이곳에 온 것’임을 확신할 때 삶은 긍정될 수 있다. 문명이 물질로부터 삶을 부양할 때, SF시는 관계로부터 삶을 예시한다. 사람은 그저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 삶을 용납할 수 없다. SF시가 찾아 헤매는 것은 삶을 확신하기 위한 조건이다. 그들이 행하는 최초의 실천은 곁을 향해 말 건네는 것이다. 그 곁에는 쉽사리 응답하지 않는 우주가 놓인다. 저 막막한 어둠속에 인간을 왜소한 점으로 보이게 만드는 가없는 타자의 세계가 놓인다.
- 1) Science Fiction이라는 표현을 최초로 사용한 용례는 윌리엄 윌슨의 평론집 A Little Earnest Book Upon A Great Old Subject: With The Story Of The Poet-Lover(1851)의 10장에서 발견된다. “Science-Fiction, in which the revealed truths of Science may be given interwoven with a pleasing story which may itself be poetical and true.” 이 인용구는 미국 사학자 H. 브루스 프랭클린(Howard Bruce Franklin; 1934 ~ )의 홈페이지에서 재인용하였다(https://www.hbrucefranklin.com/articles/history-of-science-fiction/).
- 2) 대표적인 1970년대 SF문학 연구서로는 브라이언 올디스의 『10억 년의 잔치』(Billion Year Spree; 1973)와 다르코 수빈의 『과학소설의 변형』(Metamorphosis of Science Fiction; 1979) 등을 꼽을 수 있다.
- 3) SF문학의 효시를 『프랑켄슈타인』으로 보는 관점은 한국 SF 연구자들에게도 폭넓게 수용되었다. 고장원, 『SF의 법칙』, 살림, 2008, 26쪽 참조.
- 4) 더 정확히 말해서 아담 로버츠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 더불어서 퍼시 셸리의 『마브 여왕』(1813), 윌리엄 블레이크의 『천국과 지옥의 결혼』(1793), 존 밀턴의 『실낙원』(1674) 등으로 SF기원을 소급한다. Adams Roberts, Sciencie Fiction, Routledge, 2000, p.55 참조.
- 5) 셰릴 빈트·마크 볼드, 송경아 역, 『SF 연대기 - 시간 여행자를 위한 SF 랜드마크』, 허블, 2021, 1장 참조.
- 6) 「科學小說 鐵世界」, <황성신문> 1908. 12. 10.
- 7) 장수경, 「1960년대 과학소설의 팽창주의 욕망과 남성성」, 『아동청소년문학연구』 제23호, 245~277쪽 참조.
- 8) 이지용의 최근 연구 또한 문윤성의 작품 세계를 분석하며 “분단국가라는 거대한 사회적 구조 안에서 대중문화로서 다양한 서사를 형성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확인하게 해준다”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이지용, 「한국 SF 소설의 역사가 보여 준 특징과 현재」, 『문명과 경계』 제6호, 2023, 236쪽).
- 9) 이지용, 위의 글, 248쪽 참조.
- 10) 캐서린 헤일스,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 열린책들, 2013, 80쪽.
- 11) 본래 『글로리홀』 전반의 시에는 각주가 달려있다. 각주로는 가상의 내용을 부기하거나 한 시구를 어떻게 감상해야 하는지 안내하는 내용이 덧붙여진다. 여기서는 각주를 제외한 본문 전체를 인용하였다.
- 12) 우주 밤이라는 시어에 다음과 같은 각주가 달려 있다. “2039년, S사에서 개발한 기억 재생 장치. 2042년, 정부는 우주 밤의 미성년 사용을 금지했다. 삼 년 간의 베타 테스트 후 유료화되며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폭동이 일어났다. 테스트 초기, 논란이 되었던 기억 조작 의혹은 단순한 기기 조작 오류로 밝혀졌으나 의도적 오작동으로 기억을 훼손하는 사용자들은 점점 늘어났다.”
- 13) 지그문트 프로이트, 김석희 옮김, 「문명 속의 불만」, 『문명 속의 불만』, 열린책들, 2020, 301쪽.
- 14) 본래 제목에 다음과 같은 각주가 달려 있다. “2888년 지구에서 발굴된 일기장으로 2500년대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글씨가 매우 비뚤고 군데군데 얼룩이 져 있어 일부는 추측으로 메웠다. 기록자는 지구의 거의 마지막 생존자로 보이며, 때문에 기록은 상상으로밖에 채울 수 없었던 지구의 마지막을 복원하는 일에 매우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기록자가 도시 빈민이었기에 적절한 때 우주로 떠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연구가들은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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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인 미래에 대하여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 2 1) 박동억 1. 미래 상실 현대시에는 미래를 그려낼 가능성이 남아있을까. 이것이 송현지 평론가의 <현대문학> 2025년 2월호 격월평을 읽으며 떠올렸던 질문이었고, 이 글의 저자 또한 그러한 물음 속에서 동시대의 시를 살핀 뒤 조심스럽게 해답을 구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송현지는 어떤 찬사나 비판도 유보한 채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이제 ‘미래’는 더 이상 내가 알던 멀고 추상적인 시간이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 바로 다음 시간. 현재와 ‘1인치 정도’ 다른 자리와 높이에 머무르는 시간.”2) 이는 우리 시대의 시에서 구체적 생활에 기대어 미래가 표현되고 있음을 해설하는 내용이지만 곱씹어볼수록 오히려 현대시가 내포한 문제를 암시하는 듯한 문장이기도 하다. 냉소적으로 읽는다면, 이것은 현대시에서 그려낸 ‘미래’가 자연재해나 사회의 변혁과는 거대한 사건과는 무관한 다락방에서 일어나는 사건, 아니면 고작 생활 반경의 ‘1인치 정도’ 둘레에서 일어나는 몽상에 지나지 않다는 진단처럼 들린다. 다시 묻자. 누군가는 사이보그와의 공존을 꿈꾸고 누군가는 화성 개척을 꿈꾸는 이 시대에 시인은 어떤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수천 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통찰했듯, 사람은 시간을 그 자체로 인식할 수 없고 단지 물질의 움직임으로부터 유추할 뿐이다. 한편 시인은 물질의 운동이 아닌 마음의 운동을 통해 세상을 통찰하는 길을 택한 자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지난 수백 년간 마음의 변혁을 꿈꾸며 때론 시대의 선구자를, 때론 사회의 혁명가를, 때론 세계의 카나리아를 자처해 왔다. 그러나 동시대의 시가 사람의 마음을 ‘1인치 정도’ 움직이는 데 그친다면, 우리는 차라리 이 시대의 시인은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즉 주어진 인간성의 파수자를 자처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미래에 대해 상상하기를 포기하는 자세가 아닐까. 어제처럼 직장에 출퇴근하고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들여다보다가 잠이 들기를 반복하는 것이 미래라면, 이제 더 이상 시인과 생활인의 삶을 구분할 수 없다면, 결국 시인은 수많은 현대인처럼 다 계획되어 있어서 이미 진부해져 버린 미래로 향해가는 셈이다. 더 이상 지평선 너머로 향하지 않는 두 눈이 있다. 매번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길을 산책한다. 그렇게 현대시는 미래 상실을 앓고 있다고 표현해야 할 것만 같다. 나는 해방 공간에 쓰인 정신과 생활의 거친 리듬을 읽는다. 혁명 후에 쓰인 자연의 성난 풍경 또한 읽는다. 그것은 나의 일. 그렇게 읽던 책을 덮으니 하루가 끝났다. 하루가 끝나도 뉴스는 멈추지 않고, 사람들은 광장에 모여 있고, 일렁이고, 나는 늙고, 다시 책 앞에 앉는다. 창을 열자 빛나는 칼을 삼킨 마술사처럼, 겨울이 쏟아져 들어왔다. 방안은 알 수 없는 백색 진동과 고요로 뒤섞인다. 창을 닫아도, 난폭하고 날카로운 겨울은 내게 바짝 붙어서 있다. 떤다. 이 책이 얼기 전에 나머지를 읽어야 한다. 손이 떤다. 다 읽어야지만, 이 긴 하루가 끝날 것이다. 떠올린다. 풀이 눕는다. 하지만 어떤 풀은 죽고, 어떤 풀은 흔들리고, 어떤 풀은 죽은지도 모르고 여전히 파랗게 일렁이겠지. 떤다. 수영. 나는 저 풀들을 넘어, 죽은 수영의 나이를 넘어, 자꾸만 죽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나이가 되었구나. 내 마음에 살아남은 이가 없는 나이가 되었구나 생각하고 떠올리는 사이, 겨울의 차고 희디흰 장막이 책을 덮는다. 그 위에 손을 올린다. 손이 굽는다. 생활이 나를 세차게 때리고, 모든 약속이 깨져버렸을 때도,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이 검은 물속에 잠겼을 때도 버리지 않았던 그 책위에 마음을 올린다. 마음도 굽는다. 수영. 달처럼 차고 날카로운 이것을 나는 읽을 수 있을까. 떤다. 굽은 마음과 손안에는 겨울이 숲을 무너트리는 그 시절의 소리만 가득하다. 그 시절, 몇몇 죽은 자들은 여전히 공장 여기저기를 배회하곤 했다. 김안, 「김수영 전집」 부분, <현대문학> 2025년 2월호 차라리 김안 시인은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그의 회고에는 불안과 가책에 깃들어 있다. ‘해방’과 ‘혁명’이라는 단어를 심장으로 삼았던 시대가 있다. 시인은 김수영 전집을 읽으며 “해방 공간에 쓰인 정신과 생활의 거친 리듬”을 떠올린다. 그러나 시인은 다음과 같은 사실 또한 확신하고 있다. 김수영의 뜨거운 정신은 이제 차가운 ‘책’으로 얼어붙고 말았다. 혁명의 시간은 이제 기록일 뿐이고, 자신 또한 저 광장이 아니라 이 방안에서 긴 하루를 견디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시인에게 이 세상의 계절은 “날카로운 겨울”일 수밖에 없다. 이때 겨울은 이젠 무색해진 과거를 뜻하고, 그 겨울을 칼날처럼 느끼는 시인의 마음은 수영의 정신을 온몸으로 살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가책을 암시한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에서 김수영 전집에 ‘손’을 올리는 행위는 하나의 제의에 가깝다. “그 책위에 마음을 올린다”라는 시구는 곧 김수영을 향한 추모, 그 혁명 정신이 돌보아야 했던 공장 노동자를 향한 추모, 마지막으로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던 시인의 능력을 향한 추모를 뜻한다. 추모는 현실의 맥락에서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향수이지만 마음의 맥락에서는 누군가 욕망했던 것을 뒤따라 욕망하는 실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서 진정으로 향수되는 것은 수영도, 공장 노동자도 아니라 그들의 각오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뜻을 품을 수 있었던 인간은 어디로 갔는가. 시인에게 시집을 펼치는 일이 제의와 같다는 말은 곧 추모가 마음을 보듬고 치유하는 데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 작품에서 마음은 ‘굽는다’. 죽은 자는 세상을 ‘배회한다’. 근본적으로 이 시에서 찾아헤매는 것은 마음을 빗겨놓는 우회로이다. 현재를 여실히 살아낼 수도 없고, 미래를 꿈꿀 수도 없는 시인에게 주어진 것은 오직 과거라는 우회로이다. 그것은 앞으로 살아내야 할 시간에 응답하는 김안 시인의 방식이다. 마음의 운동 혹은 변화가 곧 문학적인 시간의 본질이라면, 시적인 미래는 반드시 물리적인 미래를 전제하지 않는다. 김안 시인에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온다. 당신의 빛 바랜 욕망에 응답하려 할 때 사람은 아직 실현하지 못했던 삶의 방식을 재현한다. 2. 극복할 수 없는 것에 터 잡기 ‘시간은 변화’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테제를 조금 더 문학적 어휘로 옮긴다면 문학적 시간의 본질은 성숙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해 문학은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꿈꾸는 방식이다. 성숙의 실마리는 반드시 미지의 탐구로만 획득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잊었던 과거로부터 발굴될 수도 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현대시의 미래 상실은 곧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거나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방법을 잃은 자의 징후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섬세하게 분별할 것은 현재를 ‘벽’으로 느끼는 목소리와 현재에 자족한 자의 목소리는 근본적으로 상반된다는 사실이다. 김안 시인은 미래를 직설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현재에 안주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 없음에 대해서 말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미래를 소망하게끔 한다. 이제 동시대 문학과 문학적 시간에 대한 이해를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고자 한다. 문학적 시간에 대한 가장 단순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시간은 성숙(변화)이다. 그런데 생각해 볼 것은 이 세상에는 결코 바꿀 수 없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두 손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없듯 마음으로 이룰 수 있는 것 또한 한계가 있을 것이다. 떠올려 보면, 근대의 위대한 철학자들 또한 그들이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다는 신념보다 그 무엇인가는 절대 바꿀 수 없다는 절망을 깊이 사색했다. 흥미로운 것은 ‘어떤 것은 결코 바꿀 수 없다’라는 인식이 시대마다 달랐다는 점이다. 18세기 중엽 루소는 『에밀』을 집필하면서 자연은 절대 극복할 수 없으니 사람과 도구를 자연에 적응할 수 있게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20세기의 프로이트는 말년 동안 인류가 문명을 통해 자연을 극복했지만,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 고통스러울 정도로 타인과 더불어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난제로 여겼다. 루소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자연이었고, 프로이트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이웃이었다. 그렇다면 21세기의 우리에게 불변하는 사실은 무엇일까. 심심해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아. 그해 여름 우리는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함께 보고 넷플릭스를 온종일 틀어 놓았다. 창밖에서 사람들은 노잡이의 얼굴을 하고 가히 영웅적으로 걸어다녔다. 심심해서 창밖의 사람들에게 뛰어들 수도 있을 것 같지. 사무라이의 칼을 횡으로 쥐게 한 다음 전속력을 달려들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렇지만 살자. 우리는 잡놈처럼 계속 살자. 가정용 플라네타리움이 만들어내는 가짜 기호 속에서. 그해 여름 우리는 배달 음식을 주문하고 우리는 나란히 누워 죽고사는 이야기를 지속하였다. 이왕 죽을 거라면 뚱뚱해져서죽고 싶어. 피자 한 판을 겹쳐서 먹다가 코로 치즈를 질질 흘리면서. 이왕 태어날 거라면 결코 끝나지 않을 성대한 파티를 시작합니다. 주최자가 강단에 서서 연설을 시작할 때, 샹들리에가 되어 모두를 다치게 하고 싶어.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혀에 틀어박혀서……. 검은 양념이 묻은 나무 젓가락을 씹으며 네가 말한다. 삽십 초에 한 번씩 유성이 떨어지고 있다. 어째서 우리가 가진 건 절망조차 가짜일까. 위대한 화가의 삶과 죽음을 다룬 애니메이션이 상영 중이고. 살자. 우리는 잡놈처럼 계속 살자. 검은 물을 엎지른 수채화처럼. 그해 여름, 나는 망친 그림 속에 너를 두고 빠져나왔고 그림 속에서 너는 나를 그리는 중이다. 안 넘어진다. 가위바위보. 변혜지, 「럼펠스틸스킨」 전문, <현대시> 2025년 2월호 이 작품의 주조는 무엇인가. 작품 전반에서 분노와 장난기가 맴돈다는 것은 쉽게 감지할 수 있겠으나 더 깊게 자리하는 것이 세계에 대한 체념임을 읽어내야 한다. 분노에만 집중한다면 자칫 이 작품의 주제를 인간에 대한 혐오나 불신으로 오인할 수 있겠다. 분명 화자는 창밖의 사람에게 사무라이처럼 칼을 휘두르는 상상을 하고, 파티장의 샹들리에가 추락하듯 사람들을 다치게 만드는 상상도 한다. 여기에는 타인에 대한 냉소, 특히 인간을 장난감과 같은 대상으로 취급하는 냉소적 태도가 깃들어 있다. 한편 제목은 유희성을 강화하는데, 독일 전래동화에 등장하는 요정인 ‘럼펠스틸스킨’을 제목으로 택했지만, 내용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타당하지 않은 분노와 무의미한 유희성을 감지할 수 있는데, 그 두 정조의 뿌리에 놓인 것은 삶에 대한 체념으로 보인다. “살자. 우리는 잡놈처럼 계속 살자. 가정용 플라네타리움이 만들어내는 가짜 기호 속에서”라는 시구가 암시하는 바는 명백한데, 그것은 타인뿐만 아니라 ‘나의 삶’도 헛것이라는 인식이다. 내 생활은 가짜이고, 내 마음속 절망조차 가짜라는 진술 또한 뒤따른다. 결국 타자에 대한 공격성의 뿌리에는 바로 자기 부정이 놓인 셈이다. 근본적으로 부정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다. 이 시의 내용을 물음으로 바꿀 수 있겠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란, 무엇보다 인간의 삶이란 의미 있는 것일까. 나와 저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관계하든 이 세상은 무사하지 않을까. 내 존재가 행복하든 절망에 빠지든 창밖의 거리는 안녕하지 않을까. 자포자기하듯, 이 시의 화자는 우리가 ‘잡놈’에 지나지 않다고 단언한다. 그 이후 ‘나’와 타인을 아무렇게나 대한다. 이 작품의 주제는 부조리라고 할 수 있다. 부조리 문학에서 종종 등장하는 아무런 이유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주인공처럼, 변혜지 시인은 충동적으로 살인을 꿈꾸는 화자를 등장시킨다. 하지만 이 작품에 묘사되는 폭력성의 크기는 그 반대급부로서 얼마나 이 현실에 자신이 얽매여 있다고 느끼는지를 투영한다. 세계가 이상해진 지 오래되었다. 선후관계는 도미노 같다. 쫓다 보면 결국 무너지는, 언젠가는 깔려 죽게 될 그런 일. 책을 팔아 복숭아를 사 왔는데 껍질 새 초파리가 살고 있었다. 똑똑, 나가주면 안 되겠니. 나는 어리니 자신에게 양보하라고 지적받는다. 아직 후숙이 필요한 과정이구나. 이번 여름 복숭아는 노약자석과 비슷한 것 같다고 이해한다. 오늘의 공원은 겨울을 동경한다. 머리카락을 비질하는 미화원과 컷불을 뚫고 들어오는 빛들. 공사 중이죠? 저수지를 만들겠다고 해 흔쾌히 자릴 양보해주었다. 한 그루의 몫. 한 그루의 치아. 피스타치오 밭은 없나? 원하면 있다. 풍경은 성조기가 펄럭이는 곳으로, 줌인. 시간은 달밤, 연인들이 나무 밑에 모여 있다. 딱따구리 없이도 부서지는 캘리포니아의 숲. 거기 뭐해요? 행운이 쪼개지는 소리를 들으려고요. 겸사겸사 입도 맞추고요. 아, 예. 그럼 열심히 하십쇼. 열매 하나 으적으적 씹으며 걷는다. 행운은 텁텁한 맛이구나. 물드는 풀빛의 혀. 나는 키스할 상대 없이 필터에 입을 댄다. 여름의 공원은 저수지를 걸고 소송 중이다. 개들은 사람의 사정 따위는 알바가 아니고 저수지를 사랑한다. 우리에게는 분쟁이 있고 시간이 필요했다. 빨리 만들수록 더 많은 사람이 죽을 뿐이라는 협회의 말에 가능한 천천히 물을 붓겠다고 합의한다. 깨끗하게 청소한다. 저수지가 생긴 어느 미래를 향해 물을 붓고 붓고 또 붓다 보면, 도달하는 가능성에 언젠가 초파리도 죽게 될까? 이제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다. 엄시연, 「가드닝」 전문, <포지션> 2024년 겨울호 엄시연 시인의 시에서도 세계는 부조리한 것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그 어조는 지나치게 담담하고 그것은 어쩌면 마음을 쏟아낼 이유조차 상실한 것은 아닌지 반문하게 한다. 첫 행이 암시하듯 세상은 언제든지 사람을 ‘깔려 죽게’ 만들 수 있지만 그 원인이나 결과는 문제시되지 않는다. 불온한 조짐만이 암시될 뿐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움직이고, 무관하게 연인들은 서로 입을 맞추며 사랑을 확인하고 있다. 이 대비보다 의아한 것은 화자의 태도이다. ‘나’는 죽음의 불안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연인들의 사랑에 전염되지 않는다. 그저 이 모든 것을 적당히 거리를 둔 배경 취급하며 복숭아를 먹고, 저수지를 산책하며, 행운을 찾아 헤매면서 그저 생각에 잠길 뿐이다. 죽음을 필연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탈출구란 존재하는 것일까. 시인은 “도달하는 가능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실상 작품 안에서는 어떠한 희망도 암시되지 않는다. 사람이든 초파리에게든 암시되는 것은 죽음 뿐이다. 저수지와 차오르는 물의 모티프는 언뜻 기후 온난화와 홍수를 떠올리게 하는데, 더욱 중요한 것은 변혜지의 시와 엄시연의 시는 똑같이 구원을 바라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상도, 사람들도 아무래도 좋다는 듯 「가드닝」의 마지막은 “이제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다”라는 시구로 끝맺는다. 이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현대인의 무력함에 대한 여실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입 맞춤의 상대가 있어도 좋고 없으면 ‘필터’에 한다. 저수지를 놓고 소송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것은 ‘나’와 무관하다. 한 시대의 사색은 그 시대의 불변하는 사실에 터 잡는다. 자연을 극복할 수 없다는 믿음으로부터 루소의 교육론이, 반드시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인식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모색되었다. 마찬가지로 동시대의 시에서 극복할 수 없는 대상으로 감각되는 것은 세계 그 자체, 무엇보다 세계의 무의미성으로 판단된다. 「럼펠스틸스킨」에서 현실은 영상이나 그림 같은 것, “가정용 플라테타리움”이나 “검은 물을 엎지른 수채화” 등으로 비유된다. 이러한 비유는 세계가 누군가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지만, ‘나’는 이 세계에 새로운 붓질을 할 의지도 지니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가드닝」에서 세상은 언제든지 죽음을 초래할 수 있는 ‘이상한’ 공간이지만, ‘나’는 그곳에서 야기되는 죽음의 조짐을 방관할 뿐이다.이들의 시에 맴도는 부조리는 다음을 유추하게 한다. 이제 이 세상에서 인간은 무용하다. 내가 무엇을 하든 세상은 어제처럼 작동할 것이다. 우리는 ‘잡놈’으로 연명할 것이고 행복한 일상을 보내며 죽어갈 것이다. 이 예정된 미래에서 미래의 쓸모란 무엇일까. 이제 현대는 루소주의자의 사색을 지나, 프로이트주의자의 숙고로부터도 멀어지며, 차츰 인간 존재에 대한 냉소와 부정으로 옮아간다. 극복할 수 없는 것은 과거에는 도구나 사물로 취급했던 것, 우리의 일상을 이루는 사물의 체계이다. 인간조차 사물의 지배자가 아니라 이 윤택한 일상을 이루는 사물의 일부인 양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물 없이 사람은 살 수 없다는 것, 현대시는 이 절망에 터 잡아야 할 것이다. 선택지는 많지 않아 보인다. 변혜지와 엄시연의 시는 다음의 ‘도달하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새로운 인간은 사물이나 다름없이 행동하는 방식, 즉 자아를 사물화하는 방식으로 세상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 이 외에 또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는 것일까. 단숨에 답할 수는 없다. 다만 지금은 찾아 헤매야 하는 새벽이다. 1) 이 글은 <문학과지성사> 2024년 겨울호의 졸고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와 연속성을 지닌다. 2) 송현지, 「제자리 뛰며 나아가는 미래」, <현대문학> 2025년 2월호, 300쪽.
한때 행복의 지표로 회자 되며 최근까지도 세간의 주요 키워드로 꼽히던 소확행은 소비사회의 알리바이로 작동하기 시작하면서 변질된 모양새다. #소확행은 행복을 소비의 정도에 대비시켜 되레 과도한 물질적 욕망에 명분을 제공하는 식이다. 그렇게 해시태그를 단 이 단어는 비교와 경쟁을 추동하고 스몰럭셔리, 행복 강박의 다른 이름이 되어 소셜미디어에서 행복의 경쟁이라는 또 다른 피로를 누적한다. 이에 그 자리에 새롭게 떠오른 행복 담론을 한 매체는 아주 보통의 하루, ‘#아보하’로 제시한다.1) 아보하의 핵심은 무탈, 평온, 보통과 같은 평범하고 안온한 일상에 있다. 초고도 발전의 사회란 안전한 삶과 등가가 아니어서 길을 가다가 넘어지거나 다치는 정도가 아니라 길을 가다가 여행을 다녀오다가, 죽는다. 너무도 쉽게 반복되는 우연과 거듭되는 참사, 믿을 수 없는 역사의 회귀는 일상의 유지라는 문제를 기도하고 소망해야 하는 난제로 만든다. 행복까지는 이르지 않더라도 무탈하게 하루를 보낸 것만으로도 장하고 고맙다는 ‘아주 보통의 하루’는 논쟁적인 말일 수 있지만 순차적 인생 모형이라는 것이 죄 뒤틀어진 지금, 행복을 좇을 때는 행복하지 않다는 역설이 낳은 이 ‘추구미’에 우리는 해시태그를 달 수 있을까? 지금, 우리의 겨울을 함께 지나온 시집을 읽어본다. 1. 골디락스2) 생존법 (남현지,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 창비, 2024, 12.) 성격유형 지표에 따를 때 사고형(Thinking)을 일컫는 T형 타입은 감정형에 비해 사실에 관심을 두고 객관성을 중시하는 것으로 특징 지어진다. 현실적이라는 단어로 갈음되는 이 타입은 공감에 높은 가치를 두는 이상주의적 인간형 F(Feeling)로부터 ‘너 T야?’라는 말을 듣곤 한다. 남현지의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은 모종의 태도를 견지하는데, 이 시집을 읽고 있자면 화자를 향해서도 이 질문은 가능할 것 같다. 혹시, 너 T야? 그런데 저 물음은 수상쩍다. 그간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정동이 꽤나 들러붙어 있는 듯해서인데, 재난과 참사라는 상처에 쓰라림을 끼얹은 것은 정치적 입장과 재난을 둘러싼 부조리였고 애도를 불가능하게 몰아세운 이들에게 누군가 바란 것은 최소한의 공감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감하지 못하는(않는) 일에 대한 집단적 트라우마는 농담에 힐난의 어조를 들씌워 저 물음을 썩 개운치 못한 것으로 투사한다. 공감을 강요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올바르지도 않음에도 혹자는 공감 부재와 불능에 대해 일종의 반작용을 작동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너는 T형 타입이구나! 라는 말에는 공감에 대한 사회적 강박이 내재하고 개인의 윤리의식을 강제하는 측면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요구되는 정서에 반하는 커밍아웃은 제법 정당성을 가지게 된다. 매일 아침 기도는 드리지만 신을 사랑하라는 이들의 발화가 낯선 것은 (가족에게도) 사랑한다는 말 대신 인사말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고백 같은 것 말이다(“제가 사랑이 없습니다”, 「오늘 서울 날씨」). 사랑이 없다는 고백 뒤로는 생활의 후경이 일상과 함께 두루 그려진다. 산책로와 그 길을 따라 흐르는 하천과 뒷산, 빵집, 마트, 지하철역과 같은 동네 지형지물을 배경으로 이 시집의 화자는 ‘산다’. 시인의 주변을 살짝 옮겨보면, “산속 개구리의 주인이 있고/ 소비자가 있고” 들개는 “자주 훼손된 채로 발견”되며(「뒷산에서」), “호수는 잘 묶여 있”다. 묶여 있는 것은 호수뿐만이 아니라서 큰 개도 묶여 있는데, 화자는 그 점이 마음에 든다(“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내가 배가 부르다는 게/ 큰 개가 묶여 있다는 게”, 「호수공원」). 화자를 둘러싸고 있는 풍광은 이렇듯 이미 묶여 있는 것, 인간의 손을 탄 것, 다시 말해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채로 존재한다. 그래서 이런 질문은 자연이 되레 인공에 의해 그 의미의 자리가 탈각된 상태를 지칭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쐐기를 박는다. “전기 좋아해요?” 그리고 따라붙는 문장은 자답에 가깝다. “이제 그만/ 그걸 자연이라고 불러도 될까요?”(「빛의 생산」). 기존의 의미 체계가 이미 소실된 세계에서 자연(스러움)이란 거대한 인공호수와 나를 해칠 염려가 없도록 묶인 개가 있는 풍경이며, 종달새는 없을 수 있겠지만 전기 없는 미래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취향은 얼마든지 삭제 가능하고 ‘나’라는 존재는 필멸이며 그 시기는 언제든 가능한 이 세계에 대한 냉철한 인식은, 고통과 전기만을 재편된 세계의 질서에 의심 없이 남을 대상물로 지목한다. 그 모든 시간이 나의 선택이었다고 쓸쓸한 얼굴로 일기를 쓰고 있을 때도 휠체어에 앉아 피켓을 들고 있는 우주에서도 매일 아침 기도문을 외우는 내게도 마트와 감자칩이 있었고 어떤 세계에서는 문자가 비위생적인 것이 되어서 물건의 표기가 금지되었다 문자 없는 거리를 만들었다는 신도시를 바라보며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감자칩을 뜯었고 수백 번에 한 번은 투자에 성공했다 자신의 힘으로 노후를 준비하고 균형 잡힌 생활을 좋아했다 내가 바란다고 감자칩도 몇개만 먹을 수 있다면 괜찮은 간식이라고 이 무수한 우주에 계속해서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며 마트에서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쓰여 있다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 부분 자연은 인공적인 것을 거쳐 물질화된 것으로 그 정의를 다시 쓴다. 무언가를 바꾸어야 한다면 그 출발은 마트에 있을 것이라는 화자에게는 차라리 글로벌 유통과 거기에 매달린 지구 반대편의 노동과 부채, 불안정한 나의 노후에 관계되는 GMO 감자칩 한 봉지가 더 세계관에 밀착된 것이 아닐까? 그러니 건강과 질병은 마트에서 나의 선택으로 판가름 나는 것일 수도 있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에게 모든 선택의 자유를 내맡기지 않나. 친환경 무라벨이든 해석 불가의 외국어 상표든 문자의 제 기능이 소외되기는 매한가지인 상품 진열대 앞에서 문자가 물건에 부착되기에는 비위생적인 것이 된 것이라 해석하는 화자는 이 유니버스의 ‘적당히’ 건강한 소비자(식용 동물도 그렇지만 소비자 역시 적당히 병들고 적당히 건강해야 한다. 소비자는 식품뿐만이 아니라 약품도 소비해야 하기 때문이다)로서만 요구될 따름이다. 세계의 질서, 그 정의가 변하면 거기서 생존 내지는 의탁하는 존재들의 양태 또한 변해야 할 것인데, 변형된 질서와 정의의 불일치는 화자를 곤란하게 한다. 그래서 그는 학습을 통해 세계를 배우고 연습하려 하지만, 자연에는 없는 곡선을 연습하는 일이나(「곡선을 쓰지 않는 디자이너」) 원데이 클래스에 등록해 휴일을 배우려는 일은(「도시의 명소」) 늘 실패로 귀결된다. 변화는 한 인간이라는 개체의 리듬에도 적용되는데, “누가 아줌마하고 소리쳐 부르면/ 갑자기 아줌마로서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은 그래서 내력과 외력의 충돌이라는 소란 양상의 능동태가 된다. 그럴 때 화자는 발화와 협의된 적 없는 행동반응의 요구라는 부조리를 체현하는 중이다. 부조리는 도처에 있는데, “이웃집에서 애들을 조용히 시키라고 했지만/ 아이가 없다고 말해도 믿지 않는다면/ 우리 집에 있다는 그 아이들을 찾아 나서야”(「복도식으로」)하는 식이다. 사태란 우물쭈물하는 화자보다 먼저 근미래에 도달하고 그럴 때 이웃의 요구에 대한 화자의 다소 순진한 답은 오답 처리되고 만다. 먼저 도착한 발화가 정해놓은 답에 화자는 다다를 수 있을까? 나이를 먹는 일을 ‘자연스러움’이라고 할 때 미처 자라지 못한 마음은, 아직 수긍에 이르지 못한 심정은 삐걱댄다. 「꿈의 번영」에서 말하듯 세계란 때로 해결을 위해 문제를 만들기도 하니 말이다. 연결해서, “초월”이라는 식당에는 도무지 가능한 메뉴보다는 불가능한 메뉴가 많다. 때마침 뉴스에서는 비만과의 전쟁을 보도하고, 식당에서 밥을 먹는 행위는 곧 어떤 전쟁의 적이 되는 일로 전환된다. “왜 나는/ 혼자서 뚱뚱한가”(「자영업자들」)라는 질문을 읽기라도 한 듯, 식당 주인이 (다이어트에 효과가 있다고 여겨지는) 고대의 붉은 곡물을 판매하는 게 우리가 사는 세계, 일상이다. 이웃의 정원을 보면서도 내 눈길이 집요하게 향하는 곳은 ‘조화’일 뿐인데(「이웃의 정원」), 생화와 조화를 구별하지 못하는 상태가 어쩌면 더 ‘자연’스러운 것은 아닐까? 누군가에게는 조화가 더 눈길을 끌 수도 있지 않은가? 인공의 자연에 ‘자연스럽게’ 섞이고 엉키는 일보다 차라리 마트에서 감자칩을 적당히 사 먹는 편이 이치에 더 가까이 있다는 이 멀찍한 시선은 실은 조심스러움을 포함한다. 어쩌면 다소 미온적으로 보이는 이 태도야말로 그가 일상을 유지하는 생존전략은 아닐까, 적극적 수행도 폐기도 하지 않는 상태만이 ‘지금’을 가능하게 한 것은 아닐까 싶은 것이다. 환생을 거듭하며 우리는 우주의 먹이를 공급하고 있다고 깨달은 수행자가 있었다 오직 우주에서 삭제되는 것을 목표로 하세요 -「우리가 작고 어두운 것이었을 때」 부분 2. 무해함의 사정 (고선경,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 열림원, 2025, 01.) 반면 고선경의 화자는 지극히 F형 타입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시집은 무해함으로 가득하다. 귀여운 것이 무해하다는 이 트렌디함은 그러나 단지 귀여움으로만 소급되지 않는다. “대기만성보다는 만사형통/ 만사형통보다는 만사대길”을 바라고 “나에게는 아직 끝낼(끝내주는) 인생이 남아 있다”며 “내가 태어난 게 대길”(「신년운세」)이라고 믿는 문장의 저류는 전혀 자신감이 아니다. 그건 차라리 ‘지금’을 버티는 자신을 응원하는 안간힘에 가깝다. 남을 돕는 팔자라는 시인의 운세는 도움이 필요한 자는 자신의 시집을 사라는 기지로 변형되는데, 시에 일말의 구원이 있다는 믿음을 초과하여 흘러넘치는 것은 어쩌면 시를 사서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생존 신고와도 같아서 시집을 사는 이와 시인이 서로의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는 소통의 감각이다. 풍선껌만 한 세계, 그마저도 단물이 다 빠진 이 세계에서 자주 벗겨지는 양말을 닮은 미래란 매일 걷는 골목에서도 여행자의 기분을 느끼게 한다(「럭키슈퍼」). 이런 기분은 서울에 거주하지만 자신이 “외지인”(「남영」)인 까닭은 설령 빌런이 출현한다 해도 익숙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엄정함에 닿지 못하는 사실과 함께 화자가 소속감 부재, 이탈자의 감각을 느끼게끔 만든다. 어딘가에 온전히 속해 있지 않다는 기분은 화자(또는 시인)로 하여금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궁구하게 한다. 나는 차례를 기다리면서 시집을 뒤적인다. 해설에 적힌 말을 내 식대로 풀어 말하면 되지 않을까. 아니, 그건 마케팅의 언어와 다르다. 백화점 판매직에 종사한 적 있는 나는 어떤 말이 효과적으로 소비자를 현혹하는지 알고 있다. 내 앞의 시인이 “한 권쯤 책장에 비치해 두면 지성과 감성을 두루 갖춘 사람으로 보일 것이므로 여자를 꼬시기에 좋다.”고 말하는 것을 비웃는다. 그러다가 내 차례가 다가오면 나는 시집을 펼치고 말한다. “여기······ 딸기와 판다곰이라는 시가 수록돼 있는데요. 딸기랑 판다곰······ 참 귀엽죠? 귀여우니까······ 좋아하실 거예요. 어디에나 두루······ 잘 어울릴 거고요.” -「도전! 판매왕」 부분 살아남기 위해 화자는 시인들이 홈쇼핑에 나와 자신의 시집을 팔 수 있기를 소망한다. 팔린다는 소비시장의 논리라면 문학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소위 ‘잘 팔리는’ 일은 모든 예술에서도 중요하다. 예술과 예술가의 생존이라는 문제는 급기야 어차피 팔려야 한다면 잘 팔아보자는데 가닿는다. 여자를 꼬시는데 유용하다거나 문장의 밀도가 높다거나 하는 선배들의 시와는 다른 자신의 시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는 고심 끝에 귀엽고 두루 잘 어울리는 것이라 정의한다. 이 대책 없는 무해함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죽어서도 유망주가 되고 싶다>는 제목으로 묶인 시집의 2부는 어쩌면 무해함과 귀여움, 그리고 보통의 하루에 대한 소망에 닿는데 중요한 축으로 보인다. 이 시집의 코어에 들어앉은 것은 그러니까 친구의 죽음, 그가 “안 죽는다고 했는데 죽었다”(「팬레터-12월 31일」)는 사실이다. 어쩌면 생의 통과의례를 가족보다, 가족이 아니라서 더욱 긴밀하고 친밀하게 나누었을 다정한 또래의 죽음은 멈춘 채인 친구의 나이와 달리 꼬박꼬박 셈해지는 나의 생을 그와 다른 것으로 가르는 결정적 사건이다. 그러니까 죽어서도 유망주가 되고 싶다는 말은 무엇을 욕망하는 문장이 아니라 욕망의 유예를 소망하는 문장으로 읽을 수 있다. 무엇이 화자의 욕망을 성취의 이전으로 되돌리고 싶게 하는가? 너의 죽음이다. 차라리 유망주일 때 우리는 함께였다. 나의 삶이 타인의 죽음을 인수함으로써 이룩된다고 할 때, 화자의 삶은 더 이상 자신만의 것이지 않다. 죽은 너를 응원하는 나의 삶은 동시에 나를 조로하게 하고, 나의 삶과 너의 죽음은 이어져 너의 것이게끔 하며, 너의 삶은 나의 늙음을 재촉한다. 이런 뒤엉킴과 연결의 감각은 ‘뜨개질’을 빌려 표현되기도 하며(「털실로 뜬 시계」) 이 시집을 삶 쪽으로도 죽음 쪽으로도 당겨 놓는데 성공하게끔 한다. 너는 마당의 수돗가에서 손을 씻다가 내게 물 한 줌을 뿌렸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 물이 더 많았다 내일은 비가 내린대 예보를 무를 수는 없고 그것이 걱정되지 않았다 미래가 태어나려면 필요한 일들이었다 -「미래에 내리던 비에는 아무도 잠기지 않고」 부분 무해하고 귀여운 그렇지만 당돌한 어조들은 실은 그 아래 실패의 감각을 공유하고 이를 전유함으로써 가능한 전복적 의미로 가득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미래가 태어나려면 필요한 일들이 있다”라는 말은 심상하지 않다. 미래가 태어나려면 필요한 일들은 살아있는 일이겠지만 이 문장을 조금 변형해 ‘미래가 태어나려면 필요한 일들이었다’로 읽는다면 그건 누군가는 죽는 필멸의 운명에 대한 수긍이 된다. 오늘 나의 일상이 죽은 친구의 미래라는 이런 인식은 ‘열심’이나 ‘최고’를 강조했던 때 유행하던 격언을 닮아있지만 작금에 곁의 친구들이 느닷없이 죽거나 돌아오지 않는 일을 ‘흔히’ 겪은 세대의 죽음과 삶에 대한 다소 직관적인 감각이라 읽는다면 과도한 것일까? 생사에 대한 달라진 감각은 “나는 그저 내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랄 뿐”(「행복한 파괴자들」)인 이들이 아주 보통의 하루를 원하는 이유를 짐작게 하는데 결정적인 것이 아닐까. 그저 죽거나 죽을 많은 친구들의 이름을 주문처럼 가까이 당겨 부르며 “씨발······을 견딜 뿐”(「검은 고양이와 자객」)일지라도, 미래를 먼저 보고 온 듯한 저 과거형의 전언에는 누구도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순한 마음이 돌올하게 남는다. 3. 기대하지마, 배반할 거니까 (윤지양, 『기대 없는 토요일』, 민음사, 2024, 12.) 윤지양의 시집은, 기대하지 않는다. 이 시집은 어떤 기대를 파기한 것일까? 그리고 왜 기대하지 않을까? 김수영이라는 이름에 기대어볼 때 이 시집은 윤지양의 시가 기성의 것에 기대지 않고 어딘가를 찌르고 없는 것을 만들고 있어야 할 것을 지운다는 증거이기도 할 테다. 그래서일까? 이 시집은 시종일관 무척 냉랭하다. 그러나 그것이 사태에 대한 냉담을 뜻하지는 않아서 시집의 많은 것들은 실증이기보다 실증할 수 없음, “부정형으로 실현되는 소설”(「소설」)과 같은 문장과 사유를 표방한다. 어쩌면 나는 문장의 가능성만으로 쓰인 소설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 부정형 어미만으로 실현되는 소설을. 최대한의 심상을 떠올리고 그것을 부정하는 것을. 그것은 소설이기에 가능하다. 소설 속 진실은, 사실상 모두 허구가 아닌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그가 부럽고 질투가 난다. 뛰어난 것을 보면 으레 그러하듯. 나는 단지 시를 쓰는 시인이다. 그러나 시를 쓰지 않는다. 언제부터 쓰지 않게 되었는지 모른다. 누군가가 말했다.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대요. 소설 또한 쓰지 않는다. 연필을 들어, 가장자리에 금박을 입힌 메모지에 글자를 채워 넣지 않는다.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를 들으며 내 앞에 있는 전등을 하염없이 바라보지 않는다. 전등은 가끔씩 깜박이지 않는다. 위층에서 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소설」 부분 부정형으로 실현이 되는 소설은 실현되지 않는다. 그건 허구일테니까. 그러나 부정형으로 실현이 되는 소설은 「소설」이라는 시로 쓰인다. 시의 내용은 그러하지 않음을 단정하는 부정(否定)으로 연결되지만 이를 정해지지 않음의 부정(不定)으로 놓을 때 성립하는 듯도 하다. 이 시집을 관통하는 것이야말로 지어놓은 심상을, 알고 있는 형식을, 그 안에 담긴 모든 의미를 배반하는 부정(否定)과 부정(不定)이기 때문이다. “최대한의 심상을 떠올리고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대체로 잃어버린 것들을 호명하기에 알맞다. 그러니까 시간, 책(내용), 기억, 관계와 같은 비물질들, 쉽사리 의미화에 도달하지 않는 것을 호출하기에 적당하다. 이를테면 기억은 왜곡과 밀착되어 있다. 성글게 말해서 정확한 기억이란 불가능하다. 왜곡 가능성 자체를 포함하는 기억은 기억 주체에 ‘의해서’ 일어나는 작용인데, 이는 저장 과정에 이미 불순물을 포함한 채로 유입되고, 주체를 통과함으로써 변형되며, 시간을 경유하면서 유실된다. 그렇기에 기억을 불신 쪽으로 밀어붙이고 왜곡의 모양새를 살피는 일은 역으로 개인을 가장 그‘답게’ 알아낼 지표를 얻는 일일 수 있다. 「7월 9일 비는 미스트처럼」이란 제목을 기억에 기대 읽으면, 날짜는 틀릴 수 있고 비가 내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으며, 미스트처럼 흩뿌렸는지 옷이 젖을 만큼 제법 내렸는지도 불확실하다. 미스트의 자리에는 얼마든지 다른 비유물이 놓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날 바라본 것은 별 의미로 연결되지 않는 지하철 안의 사람들과 역사를 수리하는 인부들이다. 화자의 의문은 이런 것이다. “왜 이런 것들을 기억하고 싶은 걸까?” “바라본 것은 일이초의 순간이며 그보다 몇 백 배의 시간 동안 기억하는 데 열중해”야만 하는 이런 일을 말이다. 그렇다면 화자가 기억하고자 하는 일은 혹시 정보의 값어치라는 기준을 배반하는 작업이 아닐까?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것을 장기기억으로 저장하는 기억회로에 대한 배반 말이다. 어쩌면 7월 9일 미스트처럼 비가 뿌리던 날 내게 맺힌 기억들이 나와의 특별한 관계성을 획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만이 기억의 가능성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단 하나의 사실은 내가 기억한다는 것. 그래서일까? 역사를 나오며 바라본 인부들이 치우고, 세우고, 고치는 구조물은 마치 기억의 해체와 조립, 왜곡과 직조 가능성의 모형화로 가시화된다. 그런 기억에 대해 천착하면서도 시인일 이 시집의 화자가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그것은 바로 의미이다(“의미가 제일 무서워 그게 나를 평생 피했으면 좋겠어”, 「외면」). 의미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건 어쩐지 한 곳에 맺히는 것, 부정(不定)을 부정(否定)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누군가 치우고, 세우고, 고치길 거부하는 것 말이다. 한 곳에 부착되어 떨어지지 않을 때 어쩌면 그 의미는 죽어버리는 것일 테니까. 그래서 제목은 지워지고(「 」), 주석은 또 하나의 시가 되며(「경계 수칙」), 본문의 문장도 없이 홀홀한 주석이 탄생한다(「소원」). 이런 형식의 파괴는 때로 주석에 비해 내용을 하등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고, 형식은 내용과 자리를 바꾼다. 거기서 무엇을 달성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럴 때 형식과 의미는 다만 고민되는 중이다. 시를 쓰는 일이 시인의 내면 쪽에 방점을 찍어왔다는 점을 상기할 때, 시 쓰기가 몰래 바깥을 토해내는 일이라는 화자(「폭우」)는 시인의 사유를 대변한다. 비켜 가고 또 빗겨 가며 바깥을 제 내부에서 조립의 이전으로 분해하고 흩트리는 과정에 윤지양의 시가 쓰여지는 것은 아닐까 짐작하게 되는 대목이다. 그런가 하면 「Nguyễn Thế Hoàng」과 같은 시에서는 언어를 통해 형식과 의미에 대해 묻는다. 이 시는 번역을 통해 읽는 시, 편집된 시는 완전한 독해가 가능한가? 그렇다면 모국어로 쓰인 시는 또 완전한 독해가 가능한가? 와 같은 질문을 파생하면서도 시의 내용에 대해서도 묻게끔 한다. 이 시는 ‘윤지양’과 ‘Nguyễn Thế Hoàng’의 업무 메신저를 편집해 부분만 들여온 것이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가능해진다. 시는 무엇을 의미 삼는가? 또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애초에 시는 완전한 독해를 목표로 하는가? 그럴 때 윤지양의 시도들은 차라리 시가 만들어낼 수 있는 숱한 가능성을 찢어버림으로써, 놓치지 않고 모조리 해석하겠다는 욕구 대신 불가능의 인식과 만질 수 없다는 사실을 ‘만지는 중인’ 시의 본성을 일깨운다. 그럴 때 저 인부들의 직조 행위는 차라리 시적 태도일까? 그런 태도에 근간할 때 이 시집의 감정은 물성화되며(「유실물」, 「토요일」), 감정은 ‘안다’는 인지적 사실로만 성립하는(“너를 뺀 모든 걸 사랑한다는 걸 알아”, 「조지에게」) 낯선 것이 된다. 그리하여 냉랭하며 파괴적인 윤지양의 시가 배반하는 것은 차라리 신화가 아닌 일상, 시의 살아냄이라는 형식 자체는 아닐까? 기대라는 게 누군가 정해놓은 일정 높이의 허들을 넘는 일이라면, 이 시인에게 기대란 의미라는 약속의 틀에 처박히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의미로 가득 찬 일상과 시라는 세계에서 윤지양의 시는 기대하지 않는다. 얼음이 단단해지고 사무실에 앉아 있던 사람이 하품을 한다 모든 것이 침묵의 기억이라면 기억은 얼마나 녹을 수 있을까 걸어가는 사람들은 분홍색 자전거는 언제쯤 녹을 수 있을까 -「토요일」 어째서 아주 보통의 하루가 추구해야 할 미덕이 되었을까? 추구해야만 도달 가능한 보통의 일상은 시인에게도 퀘스트가 된다. 한 시인은 이제 “이 풍경 속에서 달리기 시작했다”(남현지, 시인의 말). 또 다른 시인의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으니 기다리라”(고선경, 「카푸치노 감정」)는 다짐은 자신을 향한 주문일 테다. 헤어지고 연인이 되었다 다시 덩어리가 되고 해봤자 창틀 안에서 돌뿐인(윤지양, 「비연인」) 이 관계 속에서 여러모로 뒤틀고 바꾸고 엮고 지우며 세계를 읽고 쓰는 일, 시 쓰기와 일상을 따로 놓지 않는 일은 자신을 고백하고 다독이며 배반하는 식으로 시작되었다. 아주 보통의 하루가 가능하다면, 설령 #아보하를 달 수 없는 날에도 시를 읽으며 서로의 생존을 확인하리라. 우리, 그러하기를 약속하기로. 그렇게 살아내기로. 1) 김난도 외, 『트렌드 코리아 2025-2025 대한민국 소비트렌드 전망』, 미래의 창, 2024. 2) 영국 전래동화의 주인공이기도 한 골디락스는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적당한 상태를 일컫는 관용어이다. 골디락스가 곰이 끓인 뜨거운 스프와 차가운 스프, 적당한 온도의 스프 중 적당한 온도의 스프를 고른 데서 유래했다.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가 자주 언급했던 사례 하나. 어느 날 야외에서 우연히 두 사람이 만났다. 한 사람은 반가워서 시간이 있으면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상대방도 동의했다. 그 순간 갑자기 집의 지붕이 떨어져서 상대방은 죽었다. 그는 자기가 곧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저녁약속에 응한 셈이었다. 그는 이렇게 답해야했다. “나는 자네와 저녁식사를 하고 싶네. 하지만 나는 언제 죽을지 알 수 없군. 만약 내가 저녁까지 살아있다면 자네와 함께 식사를 하겠네.” 물론 이런 식으로 말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언제 어디서든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사실을 망각해야만 평안한 삶을 유지 가능하다. 갑작스러운 죽음의 확률이 너무 낮아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복권 1등에 당첨될 확률은 돌연사의 확률보다 높지 않다고 하는데, 인생역전을 꿈꾸며 복권을 구매하는 사람은 꽤 있지만 자신의 삶이 지금 당장이라도 끝날 수 있다는 인식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가 죽음을 망각하는 까닭은, 어쩌면 그런 망각을 통해서만 의미 있는 인생을 영위할 수 있으리라는 직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각각 자신의 목표를 세우고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존재이다. 가령 회사원들이 힘든 노동시간을 견뎌내는 것은, 월급을 받으면 자기가 원하는 물건을 구매하고 미래를 위한 저축을 할 수도 있으리라는 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월급을 받기도 전에 갑자기 교통사고라든가 무차별 칼부림 같은 사건이 생겨서 죽을 수 있다면 굳이 계획을 세워서 미래를 설계하고 사회생활을 이어나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허나 인간이 누구나 돌연사할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미래를 대비하지 않는다면 내가 살아남을 경우 생활을 이어갈 수 없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인간이 죽음의 가능성을 망각하게 된 것은 어쩌면 사회생활을위한 자위이자 자연스러운 ‘진화’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죽음이 대면하기 싫은 끔찍한 사건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종종 불연 듯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살다보면 타인의 죽음을 마주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죽음은 삶의 반대말이기도 하니 삶을 생각하다 보면 죽음에 대한 사유가 시작되기도 한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생각을 오래하면 인생이 허무해질 수 있으니 보통의 사람들은 다시금 죽음을 망각하려는 무의식을 갖는다. 문학은 우리가 마땅히 생각해봤고 생각해볼 만한 문제를 구체화시키는 창구이다. 죽음 또한 문학이 다루는 주제로 자주 차용된다. 이번에 김지녀 시인이 발표한 작품 「죽음의 방문」도 그런 경우로 볼 수 있다. 물 속에 잠긴 사람의 입에서 올라오는 공기방울처럼 퐁퐁, 퐁 만들어졌다 터지는 모양은 말이 아니었으므로 손짓 하나 하나에 힘이 들어갔다 동공이 커지고 모든 계절이 한 장면에 사로잡혔다 타이어의 공기가 서서히 빠져나가듯 결국 한쪽으로 기울어 멈추었을 때 고요는 막 살점이 떨어져 나간 직후 피조차 나오지 않는 푹 패인 자리 다 없어지고 치아만 남아 돌아 온 사람이 지킨 것을 아내와 딸의 제삿날이 같은 남편의 밤을 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며 배회하는 개처럼 컹컹 컹, 한참을 짖다 돌아선다는 것을 혼자 걸어가다 발을 헛딛어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죽을 뻔했네 갑자기 튀어 나온 말에 내 손을 잡아주지 않고 조용히 옆에서 보폭을 맞추며 나와 함께 걷고 있는 죽음에 대해 죽은 자들은 죽음을 말하지 않고 아파하지 않고 참혹은 아무 때나 초인종을 누르고 나를 방문했다 그때마다 아무도 없는 것처럼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들키지 않고 죽음처럼 나는 잘 웅크려 있다 아침인지 저녁인지 헷갈려 하며 일어난 날, 손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고 물에 젖은 것처럼 다시 잠들고 싶은 날에, 「죽음의 방문」 전문 작품의 전반부가 누군가의 죽음을 묘사한다면 후반부는 화자의 상념을 담아낸 작품이다. 전반부에서 죽어가는 사람은, 아마도 물에 빠져서 익사하는 것 같은데, 말을 뱉어낼 순 없는 상태로 여러 몸짓을 해보다가 결국 조금씩 힘을 잃어가게 된다. 과연 죽음이란 살아있던 사람이 말을 잃고 신체를 건사할 수 없게 되면서 정적만을 남기는 사건이기도 할 것이다. 살아 있을 때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활달하게 몸을 움직이며 주변의 사람들과 이런저런 관계를 맺기도 했을 사람이 죽음을 맞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나는 사후세계가 존재하는지의 여부라든가 죽음 이후 영혼이 가는 곳이 있는지의 문제를 모르겠지만, 어쨌든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타인의 죽음은 하나의 존재가 무(無)로 형질 전환되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앞서 인용한 작품은 그런 죽음의 광경을 그려내다가 중반부에 이면 화자는 갑자기 “나”의 경험을 고백하게 된다. 혼자 걷다가 넘어지고 “죽을 뻔했네”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이다. 누구나 살다보면 그와 같이 “죽을 뻔”한 경험을 한다. 정말 죽음의 위험성을 실감하는 상황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갑작스러운 신변의 위기는 생기기 마련이고, 그런 때면 한국인들은 “죽을 뻔했네”라는 말을 관용적으로 사용한다. 이런 표현이 사용된다는 것은 우리가 사망가능성을 불안하게 인식한다는 점을 암시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보통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생각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죽은 자들은 죽음을 말하지 않”는다.(더 정확히 말하면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런데 이 시편의 화자는 그 순간부터 자신이 죽음과 가까이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도 죽음을 기꺼이 환영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아마 타인의) 죽음을 떠올리고 참혹해지려는 마음이 생길 때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움츠린다. 역설적인 것은 그렇게 웅크려 있는 모습이 약간은 죽음에 가까워진 상태 같다는 점이다. 죽음을 회피하거나 망각하려는 시도는 무용한 것이고 모든 인간은 죽음의 근처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뜻일까? 다만 이 작품이 마냥 죽음의 편재성을 확인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것 같지는 않다. 앞서 언급했듯 죽음은 절대적인 무(無)를 뜻한다. 죽음은 인간이 세상에 부여했던 모든 의미를 파괴하는 블랙홀이다. 그래서 “나”와 죽음이 공존한다는 이 작품의 발상은 우울하고 섬뜩한 묵시록적 예감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무의미한 존재일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표상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물론 김지녀 시인의 작품이 늘상 이런 죽음과 무(無)에 대한 형이상학적 “깨달음”을 풀어낸다는 말은 아니다. 이 시인의 작품을 읽어왔다거나 이번 <신작소시집>을 본 독자들이라면, 그녀의 시를 특징짓는 것은 고적한 이미지 속에서 따뜻한 감성을 풀어내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죽음의 방문」에 관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것은, 이 작품이 다른 작품들의 돌올한 감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녁의 바다는 주인 아닌 사람을 밀쳐냅니다 호흡을 알기 때문이죠 우리는 노을에서 온 사람입니다 바다로 걸어들어가는 동안 무뎌지는 발자국은 시든 상추의 내면과 같아요 씹을 때 소리를 잘 들어보세요 우리는 상추에서 온 사람입니다 상추의 영혼은 열 시간이 넘도록 꿈을 꾸고 있습니다 호흡이 불규칙해서 바닥이 자주 들썩입니다 바닥에 입을 맞춥니다 바다와 같은 냄새가 나서 밀쳐냈습니다 나는 바닥에서 온 사람입니다 모래를 한 줌 잡았다 놓아줍니다 주인처럼 집을 나섰는데 집을 잃은 사람들이 조용히 모여 바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떤 소리를 내며 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노을로 번지느라 우리는 소리를 잃은 사람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 생각이 무거워서 당신의 의자에 좀 앉겠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사람」 전문 인용작의 제목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은 화자가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런데 작품을 찬찬히 읽어보면 사랑을 희구하는 연가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이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의 상태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에 가깝게 보인다. 작중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우리(나)”가 어떤 존재라는 반복적 언명이다. 화자는 자신이 노을이라고 했다가, “상추에서 온 사람”이라고 했다가, “바닥에서 온 사람”을 자처한다. 노을이 낮과 밤 사이(조금 낭만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개와 늑대의 시간”)에 아름답게 생겨났다가 휘발되는 것이라면, 상추는 아삭거리는 내면을 가지고 계속해서 ‘꿈’을 꾸는 상태에 있는 물상이고, “바닥에서 온 사람”이라는 말은 자신이 이내 흩어져버릴 모래 같은 존재임을 암시한다. 이런 표현들을 얽어놓음으로써 인용한 작품은 세상의 어딘가에서 고독한 꿈을 꾸는 개별적 존재를 형상화해낸다. 화자는 이런 이미지들을 병치한 후 자신이 노을로 번지는 존재이며 또한 “소리를 잃은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고백한다. 소리를 잃었다는 것은 타자와 관계를 맺을 방법이 없어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는 서글픈 표현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화자는 고독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노을, 상추, 모래는 애당초 혼자 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노을은 바다(지평선)와 하늘 사이의 이음새처럼 보이니까 하늘과 바다의 주변에 있는 것이며 공중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덮을 수 있다. 상추는 아마 언젠가 밭에서 자연의 일부로 자라났을 것이며, 바다의 모래 또한 혼자서 존재하진 않는다. 고독한 사람도 자기 자신이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이고 언젠가 만개할 것이라고 믿는다거나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이 언젠가 도래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다면 현재를 견뎌낼 힘이 생길 수 있을지 모른다. 요컨대 「죽음의 방문」이 “나”와 죽음(無)의 근접성을 다룬 시편이었다면,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은 “나”라는 존재가 허무하다는 인식을 기반으로 삼아 “기다림”의 자세를 형상화하고 있다. 두 발상이 무관한 것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상기했듯 죽음은 모든 것을 허무하게 만드는 사건이다. 앞서 언급한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경우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인간은 모든 일이 무의미하게 느낄 수 있다고 평했다. 인간은 각자의 욕망과 계획을 가지고 사는데,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면 굳이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없어진다. 어차피 죽을 것인데 우리가 하고 싶었던 일이라든가 하려던 일들을 구태여 실행으로 옮길 필요가 있겠는가?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교착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단단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종교인이었고 아마 그가 추구한 믿음은 신을 향한 것이었을 확률이 높다. 그런데 꼭 종교적인 믿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무언가에 대한 사랑과 믿음은 분명 인간을 더욱 강한 존재로 만들어준다. 가족, 친구, 연인 등을 사랑할 때 우리의 삶에는 활기가 생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나”의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다는 생각까지 할 지경에 이르렀다면, 그 사랑은 나의 내면을 충만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그렇게 충만한 상태로 살아가려고 할 때에만 인간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고 의미 있는 삶을 이룩할 수 있다고 했다. 삶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만 허무함을 벗어나기 위한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인식은 「아직 오지 않은 사람」에서도 변용되어 드러난다. 이 작품의 화자는 본래 고립감과 외로움을 호소하는 것 같았다. 그런 사유의 기반에는 삶의 허무성 내지는 고독함에 대한 성찰이 전제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후반부를 보면 “나”와 세계가 겹쳐지고, 마지막 행에서는 급기야 “당신”의 자리로 가고 싶다는 다짐을 표현하기에 이른다. “나”의 독자성을 확인하기 힘든 악조건 속에서 “당신”으로 표상되는 타자에 대한 사유로 넘어가는 감각... 이것은 물론 김지녀 시인 개인만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아니라고 생각된다. 너무나 오래 전에 나왔지만 지금까지 회자되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라든가 한용운의 『님의 침묵』 같은 시집만 봐도, 극한의 고독에 침윤한 화자가 끝내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를 겸허하게 드러낸다. 이렇듯 고독한 세계에서 사랑이 피어나는 사람의 내면을 현시하는 것이 서정시의 역할이라면, 김지녀의 작품은 그런 장르적 책무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는 평가 또한 가능할 것이다. 이번에 <기발표작>으로 소개된 작품 「행운목」과 「바라보는 화창」의 경우에도 내밀한 고독의 어투로 타자(세계)와의 관계를 추구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평할 수 있겠는데, 이 작품들의 인식과 정서에 대해서도 유사한 설명이 가능할 듯하다. 지금껏 이 글은 김지녀의 시에 대해서 다소 형이상학적인 분석을 시도해보려 했다. 이번 <신작소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에 한해서 이야기한다면 그런 독법이 적당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시 이 시인의 절묘한 감수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작품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화를 내고 울어버린 나만 덩그러니 남았던 적이 이별인지 모르고 이별 앞에서 계속 머뭇거렸던 적이 눈이 내리고, 사람들은 두더지처럼 머리만 내놓고 누구든 무릎에 앉길 바라며 앉았다 일어나 다시 앉았다 떠났던 적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흐르는 음악처럼 프레임 바깥으로 걸어나가 돌아오지 않는 주인공처럼 끝나도 일어나지 않고 앉아 있는 나에게 (중략) 눈이 내리고 사람들이 내 옆을 지나간다 먼저 떨어진 눈이거나 내 뒤에서 떨어지거나 나를 슬쩍 쳐다보는 듯한 눈이 평평한 바닥을 걷고 있어도 발 아래에서 끊긴 지층처럼 어긋났던 적이, 눈이 내리고, 나를 잃어버렸던 적이 (중략) 눈이 내리고 내리고 또 내리고 이 세계가 눈에 덮혀 누구의 발자국인지 모를 것들이 여기저기 어지럽고 너는 나보다 먼저 있었던 시간일지도 나에게 오지 않은 시간일지도 「무효와 침묵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고」 부분 존재론적 고찰을 담은 듯하면서 또한 “너”에 대한 마음을 드러낸 것으로 읽힐 소지가 있는 작품이다. 작중 세계에서는 눈이 내린다. 아마 구름으로부터 파생되었을 눈은 하늘을 부유하다가 바닥에 떨어지고, 밝히거나 녹으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어쩌면 사람들이 눈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그토록 연약하게 명멸하는 존재가 잠시 만들어내는 생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마찬가지로 꺼져가는 촛불이 타오르는 모습은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그런데 이 시의 화자가 지적하듯, 눈은 비록 단명할지언정 세상의 분위기를 바꾼다. 세상에 모종의 느낌을 풍기고 이내 사라져버리는 존재라니, 이것은 정확히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설명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간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하고 타인들과 관계를 맺으며 세계에 흔적을 남긴다. 소수의 위대한 사람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사람이 남기는 흔적은 매우 미약하다. 특히나 인간의 죽음 이후에는 그나마 그가 남겼던 흔적마저 빠르게 소멸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죽음이라는 사건이 도래한 이후의 이야기이다. 어쨌거나 살아있는 사람은 나름의 방식으로 세계와 조응한다. 마치 눈이 언젠가는 녹아버리고 사라질 것이라고 할지라도, 눈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고 그것이 잠시나마 세계에 자취를 남길 수 있는것과 같은 이치이다. ‘세계’라고 말하니까 조금 거창해 보이는데, 모든 인간은 각각의 세계를 갖고 있다. 우리가 세계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우리의 주변을 둘러싼 개별 사람들을 변화시킨다는 의미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사실 죽음이라는 사건을 상정하지 않는다고 치더라도 모든 인간관계는 시한부이다. 언제든 우발적인 조건과 상황에 따라 시작되지만 또 언제든 끝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하나의 관계가 시작되면 서로에 대해서 뭔가 의미 부여를 할 수 있다. 친구에게 “변치 않을 우정”을 맹세하는 사람이 있고, 연인이 생길 때마다 “영원할 사랑”을 약속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장기적으로 본다면 모든 관계는 언젠가 끝이 나게 된다. 인간 자체가 유한한 존재인데 인간끼리의 만남이 영속적이라는 기대는 무망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려 하고 여러 가지 추억을 쌓고는 헤어진다. 어쩌면 이것은 언젠가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힘껏 살아보려고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과 유사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죽음을 경험할 수 없지만(더 정확히 말하면 사후에 자신이 죽었던 경험에 대해 증언할 수 없지만) 살다 보면 이별은 경험할 수 있고 그 경험이 삶에 적잖은 내상을 남기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이별은 피할 수 있는 사건이다.(우리가 누군가를 만나고 마음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아픈 이별도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려 한다. 왜 그럴까? 단순히 헤어짐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믿음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또한 그것은 헤어짐의 아픔은 미래의 일이고 일단은 자신의 소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만남을 지속해보겠다는 무책임한 생각 때문도 않을 수 있다. 죽음은 경험이 될 수 없지만, 이별은 그것 자체로 아름다운 경험이 되어 준다. “아름다운 경험”이라는 것은 행복을 보장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아름답고 감동적이라고 생각하는 예술작품들은 대부분 불행하거나 뭔가가 부족한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모든 면에서 행복한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런 사람의 이야기를 소설이나 시로 쓴다면 무미건조할 것이다. 적당한 결여와 불행을 경험한 사람의 모습은 그러나 아름다운 감동을 줄 수 있다. 왕가위 감독의 로맨스 영화 같은 것을 본 사람이라면,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는 환희의 순간만큼이나 이별의 순간도 아름답게 그려질 수 있음을 익히 느꼈을 것이다. 또한 앞서 언급한 김소월과 한용운을 비롯한 많은 서정시인의 작품이라든가 요즘의 대중가요(발라드)를 경험해본 사람 또한, 이별의 순간이 아름다운 언어들을 직조해낼 수 있음을 알 것이다. 「무효와 침묵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고」는 그런 문제의식을 담은 것으로 보이는데, 과연 이 작품은 인연이 끝나는 순간을 암시하면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흐르는 음악”을 병치시켜 놓기도 했다. 이런 맥락을 전체적으로 살핀 이후에야 우리는 “무효와 침묵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는다는 제목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보통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한다. 그런데 김지녀 시인은 어쩌면 인간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릴 수 있는 죽음이라든가 하나의 만남을 종결시켜버리는 이별 같은 것을 현시하려는 것 같기도 하다. 이번에 발표된 작품들에서 알 수 있듯, 그는 거기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그 아름다움 자체를 통해 하나의 의미가 되고 있다. 무(無)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산출해낸다니, 그야말로 시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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