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현대비평 2024년 가을호(제20호)
절망을 영속하게 하는 낙관 — 김지연 「반려빚」(2023), 위수정 「몬스테라 키우기」(2022), 성해나「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2024)
1. 프레카리아트라는 정체성
현재 우리에게 가장 크게 체감되는 시대 감각은 불안정성이다. 소비와 유행의 트렌드가 변화하는 속도는 나날이 가속되고 있으며 개인의 정치 경제적인 계층의 이동 또한 그 어느 때보다 유연해지고 있다. 가령, 고용의 불안정성은 자주 노동의 유연성으로 환치되며 '불안정성'과 '유연성'은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와 그들의 이해 관계에 따라 동일한 사안에 서로 다른 맥락을 부여함과 동시에 개별 당사자들의 입장을 정당화 하는 데에 기여한다. 프레카리아트(precariat)는 이처럼 상호 모순되어 공존 불가능해 보이는 이중의 의미, '불안'과 '유연'이라는 단어 모두 함축한다. 프레카리아트는 영국의 경제학자 가이 스탠딩(Guy Standing)이 2012년부터 본격 사용한 용어로 불안정한 삶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저숙련 저임금 노동을 지속하는 계층을 의미하며 그는 이것이 전통적인 계급 구조의 바닥을 새롭게 뚫고 시대의 최하층에 위치하는 계급이라고 말한다.1) 한편, 우리에게 보다 친숙한 용례로서 프레카리아트는 통상적으로 비정규직 노동자와 비노동자를 뜻하기도 한다.
불안함, 위태로움 등을 뜻하는 'precarious'와 노동 계급을 뜻하는 'proletariat'가 합성된 '프레카리아트'는 특히 청년 세대의 주요한 계급적 정체성으로 자리한다.2) 불안함을 높은 유연성으로 생각한다면 언뜻 청년 세대는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 고도의 적응력을 발휘하며 행복을 추구할 수 있을 듯 하지만 그렇지 않다. 말하자면, 불안정성은 신자유주의 가속류 속에서 탁월하게 생존할 수 있는 미덕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적이다. 공적인 영역인 사회적인 성과(career)와 사적인 영역의 성취 중 하나인 사랑(연애, 결혼 등) 모두를 획득하는 것은 고사하고 둘 중 하나조차도 온전히 가지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 삶의 안정성과 일, 사랑 세 가지의 목표 그 어느 하나도 획득하기 어려운 트릴레마(trilemma)3)에 처한 프레카리아트는 그러한 불안정성을 자신의 생존 원리로 삼으면서 오히려 더 나은 안정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믿음을 포기한 체념의 자리를 적극 수용하고 그것을 삶의 주요한 태도로 실천한다. 안정성을 획득하기 위한 '노오력'을 해봤자 실패할 것이 분명한 국면 안에서 그들은 자신을 비관하고 냉소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현재'만을 자신의 것으로 남겨둔다.
예컨대, 끝없는 실패 속에서 무기력하게 머무르기 보다 경쟁 구도 자체로부터 이탈하는 임시적 유보를 전략적으로 채택하는 행위는 "어떤 자책이나 왜곡 없이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불안을 안정이라는 국면에 미달되는 양태로 여기지 않는 일"이자4) 그리하여 개인을 초과하는 불안이 자신의 욕망과 정체성을 파괴하지 않도록 적극 방어하는 행위다. 이 글에서 다루는 세 편의 단편 소설은 이러한 문제 의식을 다시 한 번 재검토 하며 더 나은 삶을 욕망하는 이들의 노력이 핍진하지만 한편으로 그것이 구조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한계 속에서 실행될 때 주체가 마주하게 되는 모순들을 상기하게 한다. 보다 여유로운 의식주의 향유와 더 나은 문화 윤리적 가치를 향유하고자 하는 실천을 지속하려는 몸짓 속에서 행하게 되는 전인격적 관계의 배신과 인식론적 기만 등은 신자유주의 한국의 청년 세대, 프레카리아트로 정체화 '된' 이들의 실존적인 위기와 그 세목들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의미심장하게 발견된다.
2. 갑을 관계로도 구속할 수 없는 관계의 불안정성—김지연 「반려빚」
송지현의 단편소설 「우리가 여름에 먹는 것」(『우리가 여름에 먹는 것』 문학동네, 2021)과 장류진의 「공모」(『연수』, 창비, 2023) 그리고 박상영의 연작 소설 『믿음에 대하여』(문학동네, 2022)과 더불어 이후에 발표된 다른 여러 소설 속에서도 그러한 청년 세대의 불안정성은 세계의 배경으로 공고히 자리하고 있다. 청년 프레카리아트의 불안정한 삶의 양태는 이제 시대 안에서 매우 '안정적'으로 안착하여 자연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특히, 물신주의 시대 속에서 사람과의 관계를 돈의 힘으로 조정해보려는 노력들이 그렇다. 가령, 김지연의 단편소설 「반려빚」(『2024 제1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4)에는 박상영의 주인공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안정적인 유지에 끝없이 실패하는 레즈비언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다만, 박상영의 게이들이 아파트를 매매하고 외제차를 무리 없이 구입할 정도의 경제력을 가진 중산층인 반면, 여러 일을 전전하며 어렵게 빚을 갚아 나가는 레즈비언 '정현'은 모아둔 자산이 거의 없는 이 시대의 전형적인 프레카리아트의 경제적 계층성에 보다 부합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애인 '서일'과 동거할 집을 마련하기 위해 대출한 전세 자금, 그리고 서일이 네일 숍을 차리기 위한 자금으로 빌려간 1억 6천만원과 정현은 그 어떤 존재자들의 관계보다도 강력한 '반려' 관계로 살아간다.
소설은 '반려'인의 개념을 혈연 가족보다 더 친밀한 존재, "자신의 치부도 다 내보일 수 있는 그런 사이"이자 "서로에게 영순위가 될 수 있는"5) 인생의 동반자로 정의한다. 빚이 어떻게 누군가의 반려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의아함은 소설의 정의를 다시 살펴보는 과정에서 이해된다. 빚은 누군가의 부끄러움이면서 동시에 (그것이 한시적이든 보다 긴 시간이든) 경제 활동을 포함한 여타의 모든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영순위'의 사안이 된다. 그가 언제, 어디에 있더라도 빚은 그를 따라다닌다.
빚이야말로 정현이 잘 돌보고 보살펴 임종에 이르는 순간까지 지켜보아야 할 그 무엇이었다. 빚 역시 앞으로 수년간은 정현의 옆자리를 떠나지 않고서 머무를 것이고, 정현이 죽었나 살았나 그 누구보다도 계속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다. 빚이야 말로 정현의 반려였다. (167쪽)
박상영의 소설은 중산층의 지위를 무리없이 누릴 만큼 많아도 사랑의 관계를 안정화하지 못하는 국면을 보여주면서 돈이 신적 지위를 점한 신자유주의의 자장 안에서도 그것만으로는 삶에서 중요한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다는 한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김지연의 소설에서 돈은 인물의 사랑 뿐만 아니라 삶 자체를 저당 잡는 '반려'인의 지위를 누리는 국면까지로 나아가면서 그 한계를 파쇄한다. 소설은 빚, 돈의 폭력적인 유형력을 '반려'(accompany)라는 부드러운 언어로 전환하여 그것이 지닌 파괴력과 공격성을 숨기지만 빚은 결코 정현에게 상호 돌봄이나 상호 안락을 제공하지 않는다. '반려빚'은 오히려 삶의 가장 큰 대타자로 들어서고 '반려'의 호혜성과 '빚'의 폭력성은 서로 상충하며 동시대 퀴어 청년의 실존적 위기를 폭로한다. 반려빚과 함께 밤산책을 나가게 되는 꿈 속 상황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목줄을 쥔 쪽이 정현이 아니라 빚이라는 점에서 더욱 심상치 않다.
그날 밤 꿈에 정현은 반려빚과 함께 산책을 나갔다. 목줄을 쥔 쪽이 반려빚이었던 것이 좀 다르긴 했지만 개와 산책하는 것도 이와 비슷하리라 생각했다. 정현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목이 말라 시원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싶어져 반려빚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카페에 잠깐 들를까? 반려빚은 정현이 꽤 가엽다는 듯이, 그러나 목줄을 쥔 자로서 단호해야만 한다는 듯이 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집에 커피믹스 있잖아. 정현은 카페 쪽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고 꽤 오래 낑낑거렸지만 별도리가 없었다. (...) 왜 원하는 것을 주장하지도 못했을까. 정현은 돈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고 말았다. 어떤 때는 그런 마음이 정현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한없이 작아지고 싶다는 마음이...... 부피도 질량도 거의 없다시피 한 아주 작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반려빚의 가장 아름다운 형태 역시 점점 작아지다가 완전히 사라지고 마는 것이듯 정현은 자신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꿈결에 생각했다. (167-168쪽)
정현에게 한 잔의 커피조차 허락하지 않는 정현의 반려빚은 일상의 모든 선택을 감시하고 검열한다. 이쯤되면 자신에게 부당한 빚만을 떠넘기고 떠난 전 애인 서일에게 원한을 가질 법도 한데 정현은 오히려 그녀를 변호한다. "서일도 전세 사기의 피해자였다." (169쪽) 어쨌거나 대출을 직접 신청한 것은 정현 자신이었고, 게다가 정현은 서일과의 관계의 불안정성을 함께 진 빚(명의는 정현의 것이었지만)을 통해 타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동성 커플의 법률혼이 인정되지 않는 한국의 상황 속에서 그들 관계의 효력을 빚이 지닌 구속력에 의존하려 했던 것이다. 연인 관계에서 파생되는 부채감을 정현이 자기 명의의 대출로 사랑을 증명하고자 하는 마음도 거기에 한 몫 한다. (“차용증을 썼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그때 정현은 서일을 백퍼센트 신뢰했기 때문에 그런 걸 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얼마만큼 믿고 있는지를 서일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기도 했다. 우리 사이에 이런 건 필요 없어." 169쪽)
요컨대 소설이 제시하는 '반려빚'은 실상 두 개다. 하나는 정현이 동거할 집과 서일의 네일 숍 마련을 위해 대출한 빚, 다른 하나는 정현이 서일과의 관계에서 늘 시달렸던 빚진 마음, 늘 더 미안한 쪽이 느끼는 감정의 빚이다. 말하자면 정현(乙)이 서일(甲)의 금융상의 신용을 대신함으로써 갑이 좀처럼 내어주지 않는 마음을 스스로의 채무로 환원하면서 둘 사이의 간격을 억지로 메우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격적인 대우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관계의 인위적인 조정은 금세 힘을 잃는다. 서일에 대한 자신의 신용 점수를 높이기 위해 실제 거래의 신용 점수를 희생하고 포기했던 정현은 그러나 도리어 자신이 그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되고 마는 심각한 불신의 상태에 도달한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고 내가 무얼 잘못했나 자책했으며 이제 앞으로 사람을 어떻게 믿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172쪽) 스스로에 대한 신용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현은 자신을 떠나 남자와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온 서일을 보면서 다시 서일에게 “호구 잡힌 채로, 목줄 맨 채로 살고 싶"(174쪽)다고 느낀다. 소설의 초반에서 제시되었던 반려의 개념—친밀감과 수치심, 그리고 삶의 최우선 순위라는 세 가지 조건에 의한 정의는 자신에게 돌아온 서일을 바라보며 모순적인 감정을 느끼는 정현의 진술로부터 재정의된다. 정현이 체현하는 '반려'의 얼굴은 거대한 구속력 안으로 포박되고 싶다는 욕망이다. 사법적인 효력과 정부의 인정을 받을 수 없는 동성 커플은 관계가 아무리 안정된 것처럼 보이고 오랜 시간을 함께 하더라도 항상적인 불안을 늘 감내해야만 한다. 두 사람의 결합이 사회라는 제3의 시선, 경제 정치적 물적 토대로부터 인정되지 않은 채 유지되는 관계라면 그것의 종료조차도 '종료'로 여겨지지 않는다. 애초에 '시작'과 그 과정적 유지가 유효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관계는 '끝'마저도 끝으로 의미화 되지 못한다.
퀴어 커플의 제도적 인정에 대한 요청은 사법 문화적 정상성을 획득하는 것이라기보다 그들이 영위하는 실질적인 삶의 실존을 다른 시민 주체들과 더불어 동등하게 보호받고자 함이다. 한 개인이 오롯이 자기 몫의 일상과 삶을 안정적으로 영위하기 어려운 이 시대에 반려는 아주 중요한 개념이 되지만 동시에 점점 성취하기 힘든 자질이 된다. 물론, 법적인 구속력이나 보호력만으로 건강한 반려 관계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이상적인 반려는 그 누구의 목에도 '목줄'을 매지 않은 무구속의 자유로운 상황 속에서 서로의 자발적인 의지와 욕망이 서로를 돌보는 데에 있다. 그렇다면 어쩌면 그 어떤 외적 보호 장치도 없는 퀴어 커플의 관계야 말로 극단적인 반려의 진정성과 실천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시일이 한참 지나서이긴 하나, 서일은 이혼 후 전 남편에게 받은 위자료로 정현에게 진 빚을 모두 갚고, 정현도 남은 전세대출보증금을 상환한다. 정현은 오랜 시간동안 반려하던 빚을 드디어 떠나 보내면서 서일에 대한 모든 미련 또한 변제한다. 돈을 빌린 후 잠적하고 어느 날 돌연 나타나 정현의 손을 붙잡고 “너는 나를 못 믿는댔지만, 나는 너를 믿어."(182쪽)라고 뻔뻔하게 말하던 서일로부터 정현은 드디어 놓여난다. 빚의 완전한 청산을 통해 서일과의 폭력적인 관계 또한 함께 끝낸 정현은 그날의 날짜를 구성하는 숫자들로 로또를 사기로 마음 먹지만 자신의 행운을 '돈'에 쏟아붓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대신,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 아낌없이 마음을 다 주겠다고 다짐한다. 이때 반려빚은 다시 한 번 정현의 꿈에 등장하고, 그것은 적반하장으로 정현에게 이제 그만 반려의 관계를 끝내자고 말한다.
반려빚은 정현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정현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 말이 가당치 않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있을 수 있는 꿈이라고 해도 그건 말이 안 됐다.
"우린 진작 헤어졌잖아."
반려빚은 잠시 정현의 말을 곰곰 생각해보는 듯했다.
"참, 그랬지." (188쪽)
빚을 모두 갚은 것은 다름 아닌 정현이고, 서일과의 헤어짐을 납득하고 새로운 사람을 사랑하겠노라 마음 먹은 것도 정현이다. 그런데 마치 그러한 헤어짐은 없었다는 듯 '빚'은 천연덕스럽게 정현에게 먼저 이별을 고하려 한다. 오랜 시간동안 정현의 삶을 구속하던 '빚'은 관계의 종료마저도 제가 갑(甲)으로서 실행하려 한다. 그러나 을(乙)의 지위를 벗어난 정현은 이를 강력히 거부하고 빚이 떠난 자리에 소금을 꺼내 팍팍 뿌린다. 정현은 이제 자신의 삶에 대하여 온전한 갑(甲)으로 거듭난다. 그러나 이 모든 고난, 경제적인 불안과 그로 인한 삶의 제약과 위축, 타인과의 안정적인 관계, 그리고 자기 신뢰를 스스로 잃지 않으려면 "열심히 셈하고 값을 따져"(188쪽)야 한다는 깨달음을 체득한 정현은 쉽게 새로운 사랑을 다시 시작할 수 없는 듯 보인다.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난관들은 우리를 성장시키기도 하지만, 자기 존재에 대한 소유권을 오롯이 보전하기 어려울 정도의 어려움은 우리를 소진시키고 깊은 두려움을 학습시키기 때문이다. “마침내 0이 된 기분"(188쪽)으로 겨우 홀가분해진 정현은 "그 이상을 바라는 것도 이상하게 무섭기만 해서 그저 0인 채로 오래 있고 싶"(188쪽)다고 말한다. 이 시대의 프레카리아트는 '0'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너무나 벅차다.
3. 배신의 합리화—위수정 「몬스테라 키우기」
인간은 삶 속에서 무수한 타자들과 비/의도적으로 연루되지만 각자도생이 삶의 전략이 되는 신자유주의 시대 속에서 그러한 연결은 삶의 든든한 기반이 되기보다 오히려 주체를 소진시키며 무력감 속으로 몰아넣는 방해물에 가깝고, 반려나 돌봄의 행위는 가장 작은 단위인 '나'로 수렴된다. 앞서 살펴 본 김지연 소설의 '반려빚'에서도 그러하듯 '빚'이 결국 '나'를 옥죄는 가장 강력한 대타자라면 그 또한 '나'의 일부이기에 '반려빚'은 결국 '나'의 죄책감과 연루되며 주체의 세계를 일인칭적 세계 속으로 닫아버리는 효과를 낳는다. 프레카리아트 주체들이 경험하는 경제적 곤란은 이렇듯 체념과 포기, 수용의 긍정으로 나아가기도 하지만 또는 그를 타개하고자 하는 새로운 노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재현의 노력이다. 부모로부터 상속/증여 받은 재산이 아닌 순수한 노동 소득만으로는 계층 상승은커녕 삶의 현재 조건을 유지하기도 어려운 상황 속에서 프레카리아트는 실질적으로 재화를 획득하여 소유하는 노력보다 다만 그것을 보유한 것처럼 보이길(passing) 바라면서 타인들에게 비춰질 자신의 모습을 열심히 편집한다.
가령, 어떤 이들은 무리해서 구입하는 명품과 경제적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차량 등 사치재의 소비를 통해 자신의 경제력을 과장하여 전시하며 타인이 인지하는 자신의 경제 문화적 계층성을 상승시키고자 한다. 편집된 자신의 모습은 자신이 실제로 누리고 있는 삶의 조건을 비약적으로 초과하고, 온라인 SNS 공간에서 비추어지는 '나'의 모습은 실제 현실의 '나'의 모습의 일부 보여주는 데에 그치지 않고 대체되기까지 한다. 위수정의 단편소설 「몬스테라 키우기」는 동시대 청년 세대들의 계급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며, 타인의 재력을 마치 자신의 것인 듯한 맥락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정체성을 훔치고 현실에서의 빈곤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인물이 등장한다.6)
유복한 가정 환경에서 발레를 전공했으나 미국 유학에 실패하고 마약에 손을 대는 바람에 재활원 신세를 졌던 '민희'는 어느 해안 도시의 방 네 개짜리 아파트에서 요양 중이다. 생계 유지를 위한 노동을 해본 적이 없는 딸을 그 누구보다 진심으로 챙기는 어머니의 관심은 민희에게 사랑이 아니라 귀찮은 구속일 뿐이다. 위태로운 딸을 혼자 내버려둘 수 없는 어머니는 입주 도우미를 구하려 하고 민희는 '돌봄 노동자'와 함께 사는 대신 '룸메이트'를 구하고자 하고 (“룸메이트 구해요. 성별 무관, 대학생, 휴학생 환영. 식사 제공, 청소를 잘 하지 못해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 260쪽) 그래서 지역 대학생인 한재순이 민희의 집으로 들어온다. 보육원 출신인 재순은 어렵게 대학에 진학하여 현재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며 월세를 충당한다. 특히 청소에 능한 그가 계약서에 적힌 사항들보다 훨신 많은 가사 노동을 분담하는 것에 대해 민희는 부채감을 느끼면서 동시에 친밀감을 느낀다. 왜소하고 마른 체격으로 다정한 남성성을 발휘하는 재순에게 민희는 성적 이끌림을 느끼고, 서로 점점 더 가까운 사이가 되면서 민희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느라 쪼들린다는 재순에게 월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고까지 말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민희는 재순의 제안으로 이파리 한 장에 백만 원을 훌쩍 넘는 고가의 식물인 몬스테라 알보를 들여오고 집안일과 마찬가지로 재순은 애지중지 식물을 키운다. (“재순 씨가 키워볼래요? (……) 제가 어떻게. (……) 나보다 훨씬 비싼 몸들인데......." 267쪽) 어느 날, 민희는 인스타그램에서 추천 계정으로 뜬 한 남자의 피드에 자신에 집에 있는 것과 똑같은 화분에 꽂혀 있는 몬스테라 알보를 보게 된다. 계정 속 남자는 "북유럽산 조명에 조예가 있"고 "자주 요리를 하는 미식가"(273쪽)였으며 어딘지 기시감이 드는 너른 거실의 소파에 앉아 여유를 즐긴다. 박재희라는 이름의 계정 주인은 사실 민희가 함께 지내고 있는 한재순이었던 것이다. SNS 속 박재희의 얼굴은 현실의 한재순의 빈곤한 모습과 확연히 다르다. ("박재희의 얼굴에는 그늘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눈은 초롱초롱했다. 그러나 한재순의 눈은 종종 멍했고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내려와 있었다." 274쪽) 민희는 한재순이 박재희라는 가짜 신분으로 민희의 집과 소유물, 그리고 부유한 생활을 마치 자신의 것인 것처럼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되지만 그녀는 재순을 추궁하지 않고 지켜본다.
재순과 함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엄마에게 민희는 그가 지역의 대학생이며, 실은 게이라고 둘러대면서7) 안타까운 처지의 사람을 도와주는 일이라고 엄마를 안심시킨다. 꾸준히 인스타그램 게시물을 업로드 하던 재순, 박재희는 급기야 사진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민희의 존재를 두고 “도우미 이모님"(277쪽) 이라고까지 표현한다. 현실은 자신이 민희의 집에서 청소와 각종 가나 노동을 하는 처지이지만 인스타그램에서는 그와 정반대로 고용주를 피고용인으로 격하하고 서로의 계급을 뒤바꿔 전시한다. 인스타그램을 이용해 민희의 정체성을 가로채고 자신의 손에는 없지만 타인의 눈에게는 분명 그의 것으로 여겨질 행복을 만끽한다. ("와, 제 인생 최고의 연말이네요." 280쪽) 너른 집과 몬스테라들, 민희의 어머니가 보낸 고급 선물들까지 모두 그의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러나 타인의 정체성을 도용하는 자의 죄책감만은 그의 것이 아니다. 민희가 그런 그의 만행을 지켜보기만 하고 개입하지 않는 것은 재순으로 인해, SNS 공간에서 전시된 친구들의 '좋은 삶'이 허구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을 그녀가 깨닫기 때문이다. (“민희는 그동안 보았던 친구들의 모습도 가짜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안도했다." 280쪽) 게다가 지방의 소도시에서 혼자 요양을 하는 민희에게 재순과의 관계는 그녀에게 큰 자극이 되어주었으므로 굳이 그를 제지할 필요가 없다. 자기보다 힘든 삶의 조건에 처한 이의 불행과 기만을 연민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며 그로부터 자신의 배타적인 우월성을 획득할 수도 있다.
민희는 재순의 월세를 면제해주고 그의 비밀을 모르는 척하면서 한 장에 백만 원이 넘는 몬스테라의 이파리를 잘라 물꽂이를 하게 해주는 남모를 관용을 베풀지만, 재순은 민희의 배려와 호의를 점점 당연하게 여긴다. 그는 민희가 준 몬스테라 이파리를 열심히 키워 장당, 60만원, 70만원, 95만원에 팔고 진심으로 행복해하지만, 재순이 민희의 집에서 떠나게 되는 사건 또한 바로 그 몬스테라 이파리 때문에 발생한다. 민희가 재순에게 농담으로 자신에게 판매 수수료를 50%쯤 줄 수 있냐고 묻자 그날 밤 재순, 박재희의 인스타그램에 이런 문장이 작성된다. "자본주의의 개년, 왜 사는 걸까." (281쪽) 크게 상처 받은 민희는 사람을 쉽게 믿지 말라던 어머니의 말을 떠올리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지만, 다시 접속한 인스타그램에는 해당 문장이 사라지고 다음과 같이 수정된 문장이 남아 있었다. (“자본주의의 개념, 왜 사는 걸까." 282쪽) 박재희는 이내 인스타그램을 비공개 계정으로 전환한다.
언제든지 실시간으로 수정할 수 있는 온라인에서의 발화는 원본이 유지될 수 없는 조건 하에서 행해진다. 마치 인스타그램의 박재희가 계정을 삭제하면 그의 집과 재산, 부유한 생활 환경이 모두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민희는 “어차피 박재희는 진짜가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며"(283쪽) 마음을 다스리려하지만, 그녀가 그에게 품었던 연민과 안도감은 심각한 불쾌감으로 변하고 이에 따라 그의 비밀을 알고 연민하던 우월한 주체로서 민희가 누리던 지위는 불안하게 흔들린다.
민희는 자신의 존재를 들킨 게 아닌가 순간 뜨끔했지만 생각해 보면 민희가 잘못한 일은 없었다. 말해버릴까. 넌 한재순이지 박재희가 아니지 않냐고, 여긴 네 집이 아니지 않냐고. 여기에 네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냐고, 너는 그저 식물 잎을 잘라서 파는 주제에...... 민희는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눈을 감았다. (...) 눈이 따가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284쪽)
서사는 여기까지만을 조명하고, 이후 재순은 민희의 집을 나온다. 몬스테라 잎들을 조심스럽게 봉투에 담아 손에 들고, 끝내 사과는 하지 않은 채로 집을 빠져나간다. (“재순은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몬스테라 물꽂이 한 것만 저 주시면 안될까요?" 285쪽) '자본주의의 개념' 사건 이후로 민희가 재순과 어떤 과정을 겪는지에 관해 소설은 보여주지 않지만, 재순의 조심스럽지만 한편으로 뻔뻔하게 비굴한 태도와 그의 사과 없었음을 떠올리는 민희의 회고를 통해 둘의 친밀감은 완전히 사라지고,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았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사람을 쉽게 믿어버린 자신에 대한 자책감만을 남겨둔 채, 민희는 다시 동거인을 구하는 글을 올린다. 이전에는 "청소를 잘 하지 못해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260쪽)을 구한다고 썼지만 이제는 그녀가 얻고자 하는 교환 가치만을 제시한다. (“도우미 구함. 주 3회 3시간, 청소 및 빨래. 40세 이상 여성." 285쪽)
민희는 김지연의 「반려빚」의 '정현'과 마찬가지로 사람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다. 가난해서 빚에 쪼들리는 처지의 사람도, 반대로 아주 부유해서 노동을 전혀 하지 않고 사람을 고용하기만 하는 사람도 모두 다를 바 없이 인격적 가치와 만남, 교류, 그리고 소통에 대한 가치를 상실하고 만다. 신자유주의의 물신 지배는 한 사람의 가치를 그가 지닌 문화 경제적 계급성의 물질적 가치만으로 환원하면서 그 폭력성을 드러낸다. 누군가와 가까이 지내는 일, '반려'의 관계를 맺고 함께 거주하는 일은 주체가 타자와 열린 세계에서 연루되는 상황이 아니라 주체가 타자가 지닌 물적 기표를 공유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직/간접적으로 소유하게 되는 양상으로 전환된다.
더불어 재순의 '절도'는 자신이 도달할 수 없는 욕망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노오력'의 일환이기에, 그리고 자신과 달리 아무런 '노오력' 없이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젊음을 무료하게 낭비하고 있는 민희의 기호들을 뺏는 것은 그에게 자의적으로 정당화된다. '자본주의의 개년'이 실제로 민희를 지칭하는 것이든 아니든, 그것이 수정된 '자본주의의 개념', 즉 돈은 돈으로부터 비롯한다는 자본주의의 근본 명제는 민희의 삶과 재순의 절도를 지시한다. 자본, 생산 수단이 없는 자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내다 팔 수밖에 없고, 그런 맥락에서 민희의 호의로 얻은 몬스테라 이파리는 재순이 (어떤 방법으로든) 획득한 생산 수단이기에 그가 이파리들을 물꽂이 하며 내다파는 것 또한 자본주의의 생산 원리에 그저 충실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재순이 민희를 전혀 인격적으로 대우하지 않았지만 그 또한 서로의 경제적 지위의 위계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므로 재순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끝까지 민희에게 사과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자본주의의 개년'인 셈이다.
위수정의 「몬스테라 키우기」와 김지연의 「반려빚」은 언뜻 서로 정반대의 계급성을 지닌 인물이라면 정반대의 세계를 경험하리라는 통상적인 예측을 파기하며, 재력의 정도와 무관하게 이 시대의 관계는 철저히 자본주의의 교환 가치로 환치된다는 점을 서늘하게 드러낸다. 각자도생은 시대의 황금률이 되어버렸다.
4.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계급성—성해나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
한편, 재순이 애지중지 키워 한 잎씩 내다팔던 몬스테라가 특이한 무늬와 색을 지닐수록 더욱 비싸게 팔리는 것처럼, ("식물은 돌연변이를 더 귀하게 쳐주는구나. 사람들은 참...... 이상하지." 283쪽) 괴상하고 이상한 외양에 더욱 더 높은 가치를 매기는 것처럼, 우리 시대는 이제 타인이 갖지 않는 '나'만의 고유한 개성과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강조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재순이 자신의 힘으로 획득하고 소유할 수 없는 높은 경제력과 자산을 실제로 얻기를 애쓰는 대신, 그것을 획득한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기표들을 배치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편집했던 것처럼 주체는 자신의 '다름'을 전시하고 과시할 수 있는 다양한 기표들을 열심히 수집한다. 기표가 함축하는 실질적인 기의가 진정으로 '나'의 것인지의 여부는 무관하다. 중요한 것은 '나'가 타인에게 어떠한 기표들을 통해 노출되는가 하는 것이다.
앞의 두 소설이 프레카리아트의 경제적 계급성을 둘러싼 갈등을 보여준다면 성해나의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는 그들이 획득하고자 하는 문화적 계급성과 그를 둘러싼 갈등을 첨예하게 보여준다.8) 「몬스테라 키우기」의 재순이 자신의 결핍을 타인의 기표를 훔쳐다 채웠던 것처럼, 프레카리아트의 경제적 빈곤은 문화적 기표들로 대리 보충 된다. 가령, 다수의 대중들이 모르는 예술 작품에 관하여 풍부한 지식을 뽐내고 소수의 사람들만이 향유하는 '엄선된' 고급 취향은 그들만의 정체성의 핵심을 이루며, 이들은 '돈은 없지만 지식과 취향이 남다른' 엘리트 의식을 형성한다. 높은 학력 자본과 지식, 그들이 추구하는 고도의 정치적 올바름에서 기인하는 그들의 태도와 행위는 그들에게 새로운 사회적 지위를 부여한다. 엘리자베스 커리드핼킷은 이들을 "야망계급(aspirational class)"이라고 부른다.
이 새로운, 지배적인 엘리트 문화집단을 아주 간단하게 야망계급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들의 상징적 지위는 간혹 물질적 재화를 통해 드러나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지식과 가치관을 보여주는 문화적 기표들—디너파티에서 신문 칼럼을 놓고 나누는 대화, 정치적 견해와 그린피스 지지를 나타내는 범퍼 스티커, 농민 직거래 시장에서 장보기 등—을 통해 드러난다. 이런 행동들과 기표들은 야망계급의 가치관을 함축하고 있으며, 그런 가치관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습득한 지식 또한 넌지시 드러내준다. (...) 이들은 크고 작은 온갖 선택을 할 때마다 자신이 사실에 근거해(유기농 식품, 모유 수유, 전기차 등의 장점에 관해) 올바르고 합당한 결정을 했다고 믿으면서 자신의 결정이 식견 있는 것이며 정당하다고 느끼고 싶어한다.9)
이전의 세계에서 경제적 물질적 부가 사회적 지위와 문화적 지위를 동시에 견인하는 기표였다면, 부가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지금의 세계에서 그들은 더 이상 경제적 지위가 사회적 문화적 지위를 대변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대신, 그들은 자신이 습득한 지식을 사용해 사회와 환경을 위해 노력하려 하고, 이 행위를 통해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체제를 이용하여 자신만의 배타적인 부를 늘리는 이들과 스스로를 구별짓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다른 이들과 달리 '더 나은 인간'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다. (“궁극적으로 야망계급의 성원들은 경제적 지위는 부차적인 것으로 둔 채 삶의 모든 측면에서 그들 나름대로 더 나은 인간이 되기를 야망한다." 43쪽-강조는 저자) 성해나의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는 이러한 야망계급의 성원들이 예술 작품의 윤리적인 재현을 둘러싸고 그들이 추구하는 정치적 올바름이 자신의 취향과 충돌할 때 발생하는 갈등을 전면화 한다.
소설의 '나'는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을 탄 영화감독 '김곤'의 팬으로 감독의 골수팬 스물여섯명이 활약하고 있는 팬클럽 "길티 플레져 클럽"(197쪽)에 들어간다. 이야기는 길티 클럽의 회원이 모여 2019 베를린국제영화제 시상식 생중계를 단체 관람하는 상황 속에서 전개된다. 야망계급의 경제적 지위는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을 띠거나 높지 않은 편인데 소설에서도 그러하다. "무려 네명이 영화과 재학생 혹은 졸업생이었고, 둘은 프리랜서 창작자, 나머지 한명은 주부"(204쪽)인 그들은 감독이 즐겨마신다는 “뒤셰스 드 부르고뉴”(203쪽) 와인을 나누어 마시고 그에 반해 카스나 하이트를 선호나는 '나'는 그들 속에서 모종의 거리감을 느낀다. ("그들은 모두 시네필 내지는 평론가 같았다." 204쪽) 예술 자본과 가까이 있는 그들은 일반인들은 좀처럼 접근할 수 없는 각종 지식과 정보의 격차를 만들며 '나'를 주눅들게 한다. 소설 속 공동체에서 실상 중요한 것은 지식의 유무, 앎의 객관적인 정도가 아니라 그를 경유해 형성되는 동질감, 동류 의식의 공유다. 이들의 공동체는 공통의 취향에 대한 자유로운 대화로 서로 연결되지만 한편으로 그러한 취향의 선택이 관계를 근본적으로 단절시키기도 한다.
소외감의 한가운데서 '나'는 '미지'가 비교적 많은 나이와 지방에서 상경한 사람이라는 비슷한 배경을 지닌 것으로 추정하며 내적 친밀감을 느끼고 다른 회원들로부터 느껴지는 굴욕감과 모욕 또한 해소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촬영 중 아동 배우 학대로 논란이 된 김곤의 작품을 좋아하는 '나'는 어떻게 '그런' 감독의 작품을 좋아할 수 있냐고 비난 받았던 자신의 경험을 미지를 통해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는 자신의 취향이 '올바르지 않고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불안한 '나'와 달리, '길티 클럽'의 회원들은 김곤이 윤리적인 인간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강화하려 애쓰고 그가 유기묘를 구출한 일화나 단역배우에게도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해주었다는 비화 등을 공유하며, 김곤에 대한 서로의 사랑을 합리화 하고 심리적 부담을 열심히 나눠 갖는다.
회원들의 열띤 대화 도중, 미지는 돌연 논란이 되었던 작품 「안타고니스트」의 촬영 중 발생한 '그 일'을 꺼내고 "눈물 연기를 못한다고 피멍 들 때까지 아이 팔뚝을 꼬집은 게 어떻게 실수로 포장"(219쪽) 될 수 있느냐며,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그것은 '실수'가 아니라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고 잘라 말한다. ("아이를 낳아보니까 알겠더라고요. 그게 실수가 될 수 없다는 걸. 끔직한 일이에요, 그건." 219쪽) '나'가 미지에게 품었던 기대와 정반대의 양상이 전개되면서 소설의 긴장감은 고조되고, 말없이 회원들 사이에 앉아있던 미지가 시상식 생중계 중에 진행되는 감독과의 전화연결을 손꼽아 기다렸던 이유가 바로 '그 일'에 대해 감독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어서였음이 밝혀진다. (“미안하지 않냐고 물어보고 싶었어요. 그 일이 없던 일이 될 순 없겠지만, 변할 수는 있으니까요." 220쪽) 그러나 회원들은 사실로 확정된 것도 아닌데 "어째서 무고한 사람을 죄인으로 모는지 이해할 수 없"(220쪽)으며 그것이야 말로 더 가혹한 일이라고 항변한다. 시종일관 미지를 향한 호의와 동류 의식을 느끼던 '나'는 미지에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우리는 믿어야"(220쪽) 되는 것 아니냐며 대항한다.
이후, 클럽 내부에서 내내 소외감을 느끼던 '나'가 미지에게 단호히 반박하자 회원들은 그녀의 편에 서서 공동체의 소속감을 공유하고, '나'는 그러한 동류 의식의 형성에 몹시 기뻐한다. 감독이 아동 폭력을 행사한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그가 했다는 보장도 없지만 하지 않았다는 보장 역시 없는 양가적인 상황일 텐데도, 그러한 불안 속에서 감독의 윤리성을 일방적으로 믿기로 선택한 '나'는 회원들의 공감과 지지 속에서 (실제 사실과 무관하게)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한다. "순간 고양감이 차올랐다. 내가 틀리지 않았구나." (222쪽) 사실 관계가 확인되지 않은 것이 여전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영화의 GV 행사에서 감독이 "피해자인 영현군에게도 진심으로 사죄"(225쪽)한다며 본인의 입으로 사실을 밝히고, '나'의 믿어 의심치 않았던 자신의 '올바름'과 윤리적인 취향은 시종일관 탁자 아래에 숨어 있던 '시한폭탄'이 터지듯, 그 자리에서 박살난다.10)
자신의 취향이 곧 자신의 정체성이 되는 '나'에게 그의 가장 큰 사랑이었던 영화 감독의 비윤리적인 행위는 '나'의 취향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것으로 변질시키고 '나'는 허탈한 마음으로 그 사랑을 포기(당)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 작품과 그것을 제작한 감독의 윤리적 자질이 곧 '나'의 윤리적 자질로 환치되는 국면 속에서 '나'는 더 이상 감독의 세계와 그의 작품을 예전처럼 자유롭게 향유하거나, 또는 자신의 취향으로 전시할 수 없다. 김곤은 GV 행사에서 피해자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후에도 아무 탈 없이 여전히 자신의 커리어를 성공적으로 지속시켜나가지만 '나'는 자신의 윤리성과 정치적 올바름, 나아가 정체성 자체를 오염시킨 그를 예전과 같은 마음으로 볼 수 없다. 이들에게 취향은 단지 문화 자본의 소비 행위가 아니라 열렬한 사랑의 수행과 마찬가지이기에 사건은 '나'의 취향과 그로 인한 문화적 정체성에 비가역적인 흔적을 남긴다.
소설의 결미에서 '나'는 팔 년을 사귄 남자친구인 길우와 임신한 상태로 치앙마이 여행을 떠나고 그곳에서 김곤의 인스타그램에서 보았던 호랑이 사육장에 간다. 호랑이를 만지는 관객이 위험하지 않도록 발톱과 송곳니를 모두 제거한 호랑이를 보는 순간, 그녀만 맡을 수 있는 악취가 코를 찌른다. 호랑이를 만져보라는 길우의 재촉에 계속 망설이던 '나'는 결국 사육사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호랑의 척추에 손을 얹고 기념 사진까지 촬영한다. 호랑이 '관광'을 모두 마치고나자 악취는 사라지고 그때 '나'는 악취의 정체가 무엇인지 불현듯 깨닫는다. '악취'는 소설의 제목이 지시하듯 '길티 플레저'—"죄의식을 동반한 저릿한 쾌감"(230쪽)으로, 윤리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요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사랑하고, 향유하는 데에서 오는 쾌락을 형상화 한다. (테이블 밑 시한폭탄'과 '호랑이', 그리고 '악취' 등 모호한 은유적 장치를 통해 서사를 구조적으로 전개하던 소설은 의미의 연관을 직접적으로 발설하지 않으면서도 교묘하게 병치시키며 독자에게 전달한다.) 그러나 '길티 플레저'는 결국 주체의 대타자, 강박적인 윤리성에 의해 튕겨져 나가고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영화는 "지독하고 뜨겁고 불온하며 그래서 더더욱 허무한, 어떤 모럴"(230쪽)로 재가 되어 불타 사라진다.
물질적 재화의 획득과 축적, 그로 인한 경제적 계층의 상승 가능성을 상실한 자리에서 프레카리아트는 욕망의 방향을 돌려 자신이 지적 문화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예술 자본을 욕망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 자본에 대한 생산 수단을 보유한 자가 아니기에 그들의 향유는 소비 행위로 국한되며, 결국 소설에서 제시하는 프레카리아트의 '향유'는 윤리적 소비로 귀결되고, 그 과정과 공유는 예술 작품과 그것의 생산자인 작가에 대한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논의가 아니라 창작자의 윤리적 정당성을 둘러싼 논쟁에 불과하게 되고 만다. 취향의 향유가 소비 행위인 동시에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실천으로도 재구성되는 이 시대의 현실에서 주체는 자주 딜레마에 빠져 '플레저'(쾌락)과 '길티'(죄의식) 사이에 마련된 자기 검열의 늪으로 점점 더 함몰된다.11)
성해나의 소설은 예술 작품의 생산과 소비의 현장에서 재구성되는 취향의 아비투스, 다른 이들과 자신을 구별짓고자 하는 주체의 행위의 세목을 낱낱이 보여주는 동시에, 예술에 대한 향유 주체의 담론이 단지 아비투스의 윤리성을 열렬히 검토하는 작업으로 환원되는 씁쓸한 국면을 보여준다. 다른 이들이 지니지 못한 자신만의 예술적 감식안을 자신이 지닌 문화 자본으로 여기면서 자신의 남다른 정체성을 과시하는 야망계급의 엘리트들은 작가의 윤리적이지 않은 행위를 두고 “이미 일어난 일은 없던 일이 될 수 없"(230쪽)다는 태도를 고수하며 그의 공개적인 사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 세계를 전면 거부한다. 논란 속에서 예술 창작의 생산과 소비에 관한 더 복잡한 고민 속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복잡한 갈등을 전면 회피하는 쪽을 택한다. '나'가 경험하는 '악취'는 소설의 의도대로라면 호랑이도 안 먹는 "썩은 고기"(194쪽)에 해당하는 김곤의 것이겠으나, 한편으로 이 '악취'는 엘리트적인 태도를 과시하며 고급 예술의 문화 기표들을 정체성에 한껏 장착하지만 실상 예술에서 발생하는 복잡한 고민과 성찰은 거부하는 고도로 '윤리적인' 주체들의 위선적인 태도를 겨냥하기도 한다.
*
'0'(김지연, 「반려빚」)점을 유지하는 것조차 너무나 버거운 시대에 '자본주의적 개념'(위수정, 「몬스테라 키우기」)을 십분 체화한 이들은 타인의 비윤리적인 행위에서 그 누구보다 심한 '악취'(성해나,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정작 자신이 사랑하던 모든 인간적인 것들로부터 소외되고 나아가 그러한 소외가 바로 자신의 주체적인 행위에서 비롯하고 있음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그러나 알아챈다 하더라도 이들이 택하는 삶의 전략은 최선의 것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최악을 피하기 위한 차악으로 고려된 것에 가까우므로 상황이 크게 나아지리라 낙관하기도 어렵다. 비정규직이지만 정규직 전환을 도모하지 않는, 말하자면 자신이 처한 계급성 바깥으로 나가고 싶지만 그것의 불가능성을 뼈저리게 실감하기에 그 욕망을 '긍정적'으로 체념하고 포기하는 프레카리아트는 강화된 개인의 소비자 정체성과 그러한 정체성의 자기 재현 주체로 거듭나면서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종류의 절망과 욕망을 적극 합리화하며 살아간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구조적인 한계를 돌파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 그들이 펼치는 전략, 절망을 '긍정'하는 나름의 생존 전략은 한편으로 계층 상승을 결코 허하지 않는 구조의 한계를 기꺼이 긍정하는 효과를 생산한다. 삶을 비관하지 않고자 절망을 긍정하려는 이들의 낙관은 절망을 영속하게 하는 역설을 낳기도 한다.
- 1) Standing, Guy. "The lirecariat: The New Dangerous Class" Work, Emliloyment &amli; Society 26, no.4 (August 2012): 690-692.
- 2) 최근 청년 프레카리아트 세대의 일과 사랑을 송지현, 장류진, 박상영의 소설들을 경유하여 분석한 글은 다음과 같다. 전승민, 「'요즘' 청년들의 트릴레마—최근 소설 속 '일'과 '사랑'에 관하여」, 『퀴어 (포)에티카』, 문학동네, 2024, 353-372쪽.
- 3) 세 가지 문제가 상호 영향을 미치며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어렵게 하는 삼각 딜레마를 뜻한다.
- 4) 전승민, 앞의 글, 372쪽.
- 5) 김지연, 「반려빚」, 『문학과사회』, 2023년 여름호, 166쪽.
- 6) 위수정, 「몬스테라 키우기」, 『문학의오늘』 2022년 겨울호, (단편집 『우리에게 없는 밤』, 문학과지성사, 2024 수록)
- 7) 이성애로 점철된 세계 속에서 게이의 섹슈얼리티는 여성에게 한없이 무해한 지표로 가닿는다. 이성애 여성과 게이의 남성성이 맺는 유대의 역학, 그로부터 생겨나는 안전지대는 저간의 한국 문학장에 있어서도 매우 유의미한 자질로 작동했다. 관련된 논의는 다음 글을 참조. 전승민, 「가장 음험한 가장─코드의 언어 경제로 보는 시와 소설 그리고 비평의 매트릭스」, 앞의 책, 218-231쪽.
- 8) 성해나,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 《창작과비평》, 2024년 봄호.
- 9) 엘리자베스 커리드핼킷, 『야망계급론』, 유강은 옮김, 오월의봄, 40-41쪽.
- 10) ‘나’의 불안이 회원들의지지 속에서 해소되는 것처럼 보이다가, 감독의 발언으로 다시 나타나며 강화되어 절정에 이르는 심리적인 변화 양상은 소설 속에서 서사 전개의 장치로 기능하는 “탁자 밑 시한폭탄”(212쪽)의 변주와 함께 진행된다. 가령, 이런 대목들이 그렇다. “마침 그들이 영화 속 무슨 장면을 언급하며 ‘탁자 밑 시한폭탄’에 관해 이야기할 때, 다급히 말을 얹었다. 탁자 밑 시한 폭탄. 그건 나도 얼핏 아는 개념이었으니까.” (212쪽) “그녀는 테이블 밑에 감추었던 폭탄을 굳이 꺼내 불을 붙였다. 머리가 굳었고, 입술이 말랐다.”(220쪽) “펑./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 터졌다. 매캐한 연기가 사방을 감싸듯 눈앞이 뿌얘졌다.” (225쪽)
- 11) 《문학동네》, 2024년 여름호 계간평, 371쪽. 소설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에 관한 전승민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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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노래는 한 사람의 울음에서 시작되었다 고(故) 신경림 시인을 추모하며 1. 1970년대 민중시와 『농무』의 발견 창비시선 500번을 기념하는 특별시선집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신경림 외 지음, 창비 2024)이 올해 3월 출간되었다. 이 시선집 제목은 신경림의 시 「그 여름」에서 따온 것이다. 한 사람의 울음이 온 마을에 울음을 불러오고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고을에 노래를 몰고 왔다 구름을 몰고 오고 바람과 비를 몰고 왔다 ―「그 여름」(『농무』) 부분 온 거리에 울려 퍼지는 ‘노래’는 ‘한 사람의 울음’과 ‘한 사람의 노래’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노래는 구름과 바람과 비를 몰고 오면서 사람뿐 아니라 천지만물에 가닿았다. ‘울음’과 ‘노래’가 지닌 이러한 확장력을 떠올려볼 때, 신경림의 『농무』(창작과비평사 1975)가 50년을 이어온 창비시선의 출발점이었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1970년대 중반은 『창작과비평』이 시민문학론에서 민족문학론으로의 전환을 모색하면서 민중시의 새로운 모델을 필요로 하던 시기였다. 『농무』의 발문에서 백낙청은 시집 『농무』의 완성을 “민중적 경사”라고 말하며 “그의 많은 작품들은 리얼리스트의 단편소설과도 같은 정확한 묘사와 압축된 사연들을 담고 있는 동시에 민요를 방불케 하는 친숙한 가락을 띠기도”1) 한다고 상찬했다. 1960년대 김수영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던 그가 “민중이 잘 알 수 없는 ‘난해한’ 문학”2)을 경계하며 난해하지도 저속하지도 않은 시의 미덕을 신경림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1974년 『농무』가 제1회 만해문학상 수상작이 된 것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염무웅은 신경림 시의 민중성이 ‘체험적 현실’에서 나왔음에 주목하고, “자기 현실과의 정직하고도 치열한 대결을 통해 위장하거나 은폐되지 않은 민중 자신의 목소리가 긴밀한 시적 형상을 획득”3)했다고 보았다. 신경림은 이처럼 농촌의 현실을 구체적이고 핍진한 언어로 그려낸 시뿐 아니라 「농촌현실과 농민문학」 「문학과 민중」 등의 평론을 발표하며 농민문학론을 개진하기도 했다. 1970, 80년대는 신경림을 비롯해 이성부, 조태일, 김지하, 정희성, 이시영, 김준태, 김남주 등이 민중시의 새로운 방향성을 만들어나간 시기였다. 이러한 흐름의 첫 물꼬를 튼 시집이 바로 신경림의 『농무』였다. 2. 노래와 이야기, 시의 씨줄과 날줄 염무웅의 「무엇이 민중성의 시적 구현을 가능하게 하는가」는 『농무』가 출간된 지 30년 만에 이 시집의 역사적 위치를 한층 넓은 원근법 속에서 읽어낸 글이다. 그는 한국시가 지닌 민중성의 사회사적 근거와 맥락을 밝히면서 신경림 시의 독특한 화법과 시언어의 조직원리를 분석한다. 먼저 「그날」에 대해서는 “고도의 정치적 비판을 함축하고 있으”면서도 시의 화자가 직접 드러나지 않은 채 “순차적으로 카메라 앵글을 돌리는 장면화(場面化)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미장센 구성에 성공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한행을 하나의 율격 단위로 할 때 3음보의 율격을 지닌 「그날」과 4음보의 율격을 지닌 「경칩」이 율격이나 분위기가 사뭇 다르지만, “엄밀하게 계산되고 통제되는 구심적 조직”4)을 지녔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러한 분석은 농촌이라는 소재와 민중성이라는 주제, 인물의 정동을 중심으로 『농무』를 이해해온 기존의 관점을 시의 구성원리나 재현방식 등으로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유종호는 「서사 충동의 서정적 탐구」에서 신경림 단시의 특징을 “서정적인 주조에 서경(敍景)이 추가되고 그 속에 서사(敍事)적 충동을 내장하고 있”5)다고 설명했다. 그는 신경림의 시적 성취가 서정성과 서사성의 균형에서 비롯되었다며 선행 시편들의 전통 속에서 『농무』의 문학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농무』의 시들이 생활의 실감과 시어의 평면성으로 1950년대 모더니즘 계열 시편의 난해성을 산뜻하게 극복했을 뿐 아니라, 가난한 삶에 대한 결곡한 정감과 간결한 서경을 통해 추상적 구호와 격문에 가까운 현실주의 생활 시편의 전통 역시 넘어섰다는 것이다. 신경림의 시에서는 서정과 서사, 노래와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이며 절묘한 균형을 이룬다. 특히 신경림의 전기시에서 ‘이야기’의 산문성을 견제해내는 ‘노래’의 형식이란 주로 ‘민요’의 계승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민요적 정서’와 ‘정형(定型)에의 의지’가 긍정적 효과만 가져왔던 것은 아니다. 염무웅의 지적처럼 “민요는 김소월에게 있어 그러하듯이 신경림의 문학에 있어서도 창조성의 발현을 구속하는 억압이자 모국어가 지닌 가능성의 최대치로 인도하는 통로인 양날의 칼”6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음수율과 음보율, 행의 배치 등이 규칙적으로 분절된 시보다는 규칙성을 일부 허물거나 시행을 어긋나게 배치한 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헐거나. 술에라도 취해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다오 우리를 파묻어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편지라도 띄워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볼거나. ―「겨울밤」(『농무』) 전문 『농무』 첫머리에 있는 이 시는 ‘겨울밤’과 ‘새하얀 눈’을 대비하면서 농민들의 체념과 울분을 실감있게 전달하고 있다. ‘어떡헐거나’ ‘취해볼거나’ ‘맡아볼거나’ ‘쳐볼거나’ ‘먹여볼거나’ 등 반복되는 종결어미는 각운의 역할을 대신하며 ‘우리’의 정서를 리드미컬하게 변주해낸다. 시인은 이러한 종결어미의 반복으로 읽기의 유창성을 만들어내는 한편, 중간중간에 시행을 일반적인 호흡과 어긋나게 배치함으로써 의미를 낯설게 하거나 정서적 긴장감을 조성한다. 3행과 4행, 5행과 6행, 9행과 10행, 11행과 12행, 19행과 20행, 20행과 21행, 24행과 25행 사이에 나타난 주어부와 술어부 또는 수식어와 피수식어의 행갈이가 그런 예들이다. 마침표의 잦은 사용이나 단어의 도치 등도 행과 행 사이에 단속적 흐름을 만들어낸다. 단어나 시행을 엇갈리게 배치하는 앙장브망(enjambement) 기법은 「겨울밤」 외에도 「시골 큰집」 「원격지」 「씨름」 「산1번지」 「이 두 개의 눈은」 「1950년의 총살」 「장마 뒤」 「산읍일지」 「산읍기행」 「갈대」 「묘비」 「심야」 「유아」 「사화산·그 산정에서」 「추방」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누군가」 등 상당히 많은 시들에 나타난다. 이것은 김수영의 후기시에서 연의 길이를 균질하게 하는 대신 앙장브망을 통해 시행 사이의 불규칙성을 강화하던 것7)과 유사한 방식이다. 신경림 역시 행과 연을 단위로 리듬의 규칙성과 불규칙성을 탄력적으로 조율하고 변주함으로써 정서나 의미를 섬세하게 표현해낸다. 이러한 모더니스트적 면모는 신경림을 단순한 민중시인, 민요시인으로 이해하는 것을 재고하게 한다. 1973년에 이루어진 한 좌담에서 백낙청은 신경림의 시가 서사성과 지적 콘트롤이 강하고 현대적 언어감각을 지녔다는 점에서 신동엽보다는 김수영과 친연성이 강하다고 말한다.8) 시인 자신도 나중에에는 “민요와의 접목은 내 시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고 “내가 민요에 집착한 80년대 전 기간이 내게는 시 쓰기가 가장 어렵고 지루한 시절”9)이었다고 회고했다. 신경림 시에서 민요 가락이 집중적으로 나타난 것은 『새재』(창작과비평사 1979)와 『달 넘세』(창작과비평사 1985), 그리고 장시집 『남한강』(창작과비평사 1987)에서다. 『민요 기행』 1, 2권(한길사 1985, 1989)이 나온 것도 이 세 시집이 출간된 시기와 거의 겹친다. 이 무렵 신경림은 민요를 찾아 채록하면서 전통적 민예 양식의 시적 가능성을 탐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노력이 집대성된 『남한강』에서 시인은 서정적 단시의 서사성을 한편의 장편서사시로 확장하면서 민요의 리듬을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신경림이 민요적 정서나 형식에 대한 중압감에서 자유로워진 것은 기행시집 『길』(창작과비평사 1990)을 펴낸 이후였다. 『길』까지는 여전히 「정선아리랑」 「산유화가」 등 민요를 제목으로 삼은 시가 보이고, 민요 기행에서 만난 노래꾼을 포함해 다양한 인물과 장소를 담고 있다. 그러나 민요적 후렴구의 기계적 반복이나 정형화된 리듬의 강박으로부터는 한결 자유로워진 듯하다. 인물서사가 주를 이루고 있긴 하지만, 『길』의 거의 모든 시에 붙어 있는 부제들은 다양한 장소성을 보여준다. 『신경림 시전집』 1권은 『길』로 끝나고 2권은 『쓰러진 자의 꿈』(창작과비평사 1993)으로 시작된다. 이 두 시집의 제목처럼 신경림의 후기시는 ‘길’ 위에서, ‘쓰러진 자의 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3. 길 위에서 부르는 노래와 시의 장소성 2000년대 이후 신경림에 관한 연구에서 가장 두드러진 주제는 ‘장소성’이다.10) 『농무』의 장소성이 농촌, 장터, 공사장, 폐광 등을 중심으로 한다면, 시인이 서울로 이주한 뒤 펴낸 시집들에서는 산동네, 수몰지역, 휴전선 등의 장소성이 두드러진다. 『쓰러진 자의 꿈』 이후로는 특정 장소를 부제로 밝혀둔 기행 시편이 많고, 부제가 없더라도 여행 중에 만난 풍경이나 사람의 비중이 커진다.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신경림의 전기시가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향(離鄕)’과 공동체의 상실을 다루고 있다면, 후기시는 지방 또는 해외로의 ‘기행(紀행)’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늘 떠나면서 살았다, 집을 떠나고 마을을 떠나면서. 늘 잊으면서 살았다, 싸리꽃 하얀 언덕을 잊고 느티나무에 소복하던 별들을 잊으면서. 늘 찾으면서 살았다, 낯선 것에 신명을 내고 처음 보는 것에서 힘을 얻으면서, 진흙길 가시밭길 마구 밟으면서. ―「나의 신발이」(『낙타』) 부분 신경림의 기행시는 단순한 유랑이나 관광의 기록과는 거리가 멀다. 그에게 떠남이란 익숙한 것을 잊고 낯선 것을 찾아나서는 ‘탐구의 행위’다. 이와 동시에 상류를 향해 가는 연어처럼 “떠난 것을 그리워하고 잊은 것을 그리워하면서”(「나의 신발이」) 본원적인 시간과 장소를 되찾아 나서는 ‘회귀의 여정’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신경림의 기행시는 미셸 푸꼬(Michel Foucault)가 말한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를 지향한다. 푸꼬는 현실화된 유토피아적 장소를 ‘헤테로토피아’라고 불렀다. 없는(u) 장소(topia)라는 뜻의 ‘유토피아’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헤테로토피아를 제시한 것이다. 유토피아가 실재하지는 않지만 균질한 언어와 질서를 지닌 상상적 공간이라면, 반대의(hetero) 장소(topia)라는 뜻의 헤테로토피아는 모호하고 혼란스럽고 비균질적이지만 실재하는 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헤테로토피아는 일상의 배치와는 다른 ‘바깥의 공간’이자 현실을 전복하는 ‘반(反)공간’이다.11) 엄경희는 “산업화로 인한 농촌붕괴를 ‘경관훼손’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고 “고향의 장소성에 내재된 헤테로토피아적 전망을 아이들의 장소점유방식을 통해”12) 분석했다. 『농무』부터 『쓰러진 자의 꿈』까지는 기행의 장소가 주로 국내에 한정되었다면,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창작과비평사 1998)에서는 중국, 베트남, 일본 등의 기행 시편들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반추한다. 『뿔』(창작과비평사 2002)『낙타』 『사진관집 이층』(창비 2014)에서는 그의 발길이 아시아뿐 아니라 몽골, 네팔, 튀르키예를 넘어 프랑스, 미국, 콜롬비아 등 세계 곳곳으로 향한다. 연보를 살펴보니, 신경림은 1993년(58세)에야 출국금지가 풀려 해외에 나갈 수 있게 되었고, 그의 시집이 프랑스어판, 영어판, 독일어판 등으로 번역 출간되면서 현지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경을 넘어 세계화의 현장을 폭넓게 목도하면서도 그는 줄곧 한국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떠올린다. 첫날은 날뛰는 미국 사람들이 무서워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연 지 얼마 안된다는 중동인이 경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양고기로 점심을 먹고, 둘째날은 자동차 산업의 몰락으로 유령도시가 된 디트로이트 살리기 운동을 펼치는 키가 큰 젊은 흑인을 만나 하이델베르크 프로젝트를 듣고, (…) 넷째날은 한국 절을 찾아가 부처님 앞에 예불을 드리고, 선거에서 대승한 부시의 오만한 얼굴을 텔레비전에서 보면서, 침방울을 튀기며 이라크 공격을 반대하는 한국서 군복무를 마쳤다는 젊은이와 한나절을 동행하면서, 장갑차에 깔려죽은 어린 우리나라 여중생 얘기를 하고. ―「미국기행」(『낙타』) 부분 미국 미시건을 여행 중인 화자는 첫째날부터 넷째날까지의 여정을 언급하면서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들려준다. 특히 둘째날 만난 “디트로이트 살리기 운동을 펼치는/키가 큰 젊은 흑인”과 넷째날 만난 “이라크 공격을 반대하는/한국서 군복무를 마쳤다는 젊은이”는 화자와 경계인으로서의 위치를 공유하는 인물들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과는 “장갑차에 깔려죽은 어린/우리나라 여중생”에 대해 얘기를 나눌 수 있다. 부시의 압도적 승리와 이라크전쟁 등 세계사의 착잡한 위기상황 또한 시인의 여정에 기입되어 있다. 이때 화자는 세계사의 중심도 주변도 아닌 ‘반(半)주변인’13)의 위치에 서 있다. 신경림의 기행시에서 화자의 시선이 주로 머무는 곳은 자본주의와 세계화가 만들어낸 균질화된 공간이나 화려한 장관이 아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학살당한 사람들의 수천수만켤레 신발들이 쌓여 웅성웅성 떠들고 있”(「신발들」, 『사진관집 이층』)는 소리를 듣거나, 캄보디아에서 “함지박 배를 저어 관광선을 따라오며 원 달러 하고 내미는 소년의 손”(「위대한 꿈」, 『사진관집 이층』)이 시인의 눈과 마음에 더 깊이 들어와 박힌다. 베트남 전쟁박물관에서 “제국주의자들이 버리고 도망간/흉측한 장갑차”를 보며 “호주머니 속에서/일달러짜리 지폐를 거머쥔/내 손”(「전쟁박물관」,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이나, 코카 비치에서 휴양객들을 실어 나르고 “달러를 받아쥐는/씨클로꾼들의/땀에 절은 야윈 손”(「코카 비치」,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이나 무력하게 젖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런가 하면 콜롬비아의 도시 메데진에서 산비탈에 달라붙은 움막집들과 케이블카로 그곳을 오르내리는 초췌한 사람들을 보며 화자가 떠올리는 것은 “물지게를 지고 비탈을 올라오던” “아내의 맨발”(「누군가 보고 있었을까, 아내의 맨발을」, 『낙타』)이다. 이처럼 반주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로컬과 주변부의 삶이야말로 신경림이 『농무』 이후로 일관되게 함께해온 가난하고 소외된 존재들의 것이다. 시에 포착된 주변부와 주변인이 대상화되지 않고 자연스러운 공감을 주는 것은 시인이 자신을 그 존재들의 일부로 또는 혈육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먼 나라의 이국적 풍물 앞에서도 한국의 아픈 현실을 떠올리는 시인은 떠남으로써 돌아오고, 잊으려 함으로써 더 생생한 기억에 도달하는 역설을 경험하게 된다. 4. 역사공동체에서 생태공동체로 후기시의 출발점인 『쓰러진 자의 꿈』은 1990년대 동구권의 몰락 이후 변화된 세계에 대한 시인의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한두연으로 된 단시가 많고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역사공동체에서 생명공동체로의 확장이 이 시집부터 시작되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신경림 시에 나타난 생태주의적 인식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편이다. 그런 점에서 ‘평등적 관계성’ ‘자발적 생성과 상호부조’ ‘자유 자연의 지향’ 등을 키워드로 신경림의 생태주의적 사유를 해명한 김동명의 논문은 주목할 만하다.14) 다만, 미국의 사회이론가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의 사회생태주의적 관점이나 아나키즘 등을 이론적 논거로 삼아 인간의 윤리적 역할을 강조하다보니 인간중심주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듯하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길」(『쓰러진 자의 꿈』) 부분 『쓰러진 자의 꿈』의 첫머리에 실린 「길」에서 시인은 사회 변혁의 과정 속에 내재한 인간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다. 이 시의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이라는 대목에서 그의 시선이 사회나 역사 못지않게 인간 내면을 향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내적 성찰의 매개가 되는 것은 주로 자연물이다. 이 시집의 시 제목들만 일별해 보아도 냇물, 장미, 비, 파도, 싹, 겨울숲, 홍수, 아카시아, 임진강, 진달래, 진드기, 소백산의 양떼, 초승달, 난장이패랭이꽃, 오랑캐꽃, 별, 가을비, 새벽눈, 홰나무 등 다양한 자연물들로 되어 있다. 이제 자연은 인간의 욕망과 폭력을 되비추는 거울이자, 인간의 도움 없이도 생태적 질서와 공동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생명의 주체로 등장한다. 여든까지 살다 죽은 팔자 험한 요령잡이가 묻혀 있다 북도가 고향인 어린 인민군 간호군관이 누워 있고 다리 하나를 잃은 소년병이 누워 있다 등너머 장터에 물거리를 대던 나무꾼이 묻혀 있고 그의 말더듬던 처를 꼬여 새벽차를 탄 등짐장수가 묻혀 있다 청년단장이 누워 있고 그 손에 죽은 말강구가 묻혀 있다 생전에는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이들도 있다 부드득 이를 갈던 철천지원수였던 이들도 있다 지금은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묵뫼 위에 쑥부쟁이 비비추 수리취 말나리를 키우지만 철 따라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으면서 뜸부기 찌르레기 박새 후투새를 불러 모으고 함께 숲을 만들고 산을 만들고 세상을 만들면서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묵뫼」(『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전문 「묵뫼」에서도 인간의 죽음은 역사적 비극을 환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묵뫼가 피워낸 쑥부쟁이, 비비추, 수리취, 말나리, 그리고 꽃과 열매를 찾아 날아든 뜸부기, 찌르레기, 박새, 후투티 이 모두가 ‘생태공동체’의 구성원들이다. 이처럼 자연과 인간을 유기적 관계성 속에서 바라보게 된 것은 『농무』에 나타난 역사공동체가 생태공동체의 발견으로 이어진 결과다. 이러한 변화는 신경림뿐 아니라 1990년대 이후 한국시 전체에서 관찰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1980년대가 노동시·농민시·교육시 등 계층과 이념의 동질성을 바탕으로 한 집단적 발화가 활발하게 제기된 시대였다면, 1990년대는 집단에서 개인으로, 이념에서 감각으로 중심이 옮겨오면서 사회적 이상이나 공동체적 기반은 약화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단순히 공동체의 축소나 단절이라기보다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모색의 계기”15)였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뿔』 『낙타』 『사진관집 이층』 등 후기로 갈수록 환경오염의 폐해를 언급하며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는 시들이나 생태공동체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시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봄이 되어도 꽃이 붉지를 않고 비를 맞고도 풀이 싱싱하지를 않다. 햇살에 빛나던 바위는 누런 때로 덮이고 우리들 어린 꿈으로 아롱졌던 길은 힘겹게 고개에 걸려 처져 있다. 썩은 실개천에서 그래도 아이들은 등 굽은 고기를 건져올리고 늙은이들은 소줏집에 모여 기침과 함께 농약으로 얼룩진 상추에 병든 돼지고기를 싸고 있다. (…) 우리는 안다, 썩어가고 있는 곳이 내 나라만이 아니라는 것을. 죽어가고 있는 것이 내 땅만이 아니라는 것을. 저 시베리아의 얼음벌판에 내리는 눈에도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산이 섞여 있고 아프리카 깊은 원시림 외진 강에서도 눈이 하나뿐인 고기가 잡힌다는 것을. 미시시피 강가의 한 마을에서는 목뼈가 없는 아기가 줄이어 태어나고 외국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옛날엔 천국이 따로 없다던 남태평양의 섬에서도 에이즈와 암으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부분 “봄이 되어도 꽃이 붉지를 않고/비를 맞고도 풀이 싱싱하지를 않다”라는 도입부는 자연의 생기나 아름다움이 예전 같지 않고 순환적 질서 또한 깨졌음을 의미한다. 이어지는 시행에서도 “썩은 실개천” “등 굽은 고기” “기침” “농약으로 얼룩진 상추” “병든 돼지고기” “화약냄새” “가스냄새” 등 생활 깊숙이 배어든 환경오염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안다”로 시작하는 4연에 이르면, 썩어가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 내 땅만이 아니라 “시베리아의 얼음벌판에 내리는 눈” “아프리카 깊은 원시림 외진 강” “미시시피 강가의 한 마을” “남태평양의 섬” 등 세계의 극지까지 미치고 있음을 화자는 환기한다. 뒤이어서 지구를 언제 “잿더미로 만들지 모를 핵”의 위험을 “어리석은 불장난”에 비유하며 비판하기도 한다. 환경오염이나 기후위기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지구적 파국을 예감하면서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이 지구는 죽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땅 내 나라, 아니 온 세계가 이제 단숨에 흔적도 없이 날아가버릴 마침내 그 벼랑에까지 와 서 있다.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부분 5. 다시, 떠도는 자의 노래가 되어 들머리에서 인용한 「그 여름」은 “한 사람의 죽음이/온 나라에 죽음을 불러왔지만”이라는 구절로 끝난다. 이 역접의 마지막 문장은 완료되지 않았기에 다시 첫머리의 “한 사람의 울음”으로 연결되며 삶과 죽음의 순환 앞에 우리를 데려다놓는다. 지난여름 우리는 ‘신경림’이라는 “한 사람의 죽음”을 겪었다. 2024년 5월 22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시인의 빈소에는 수많은 추모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문학적 진영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시의 아버지’를 잃은 듯 애도했다. 추모사를 읽는 이들은 그가 한국시단의 거목이었지만 권위의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겸손함과 솔직함으로 누구나 평등하게 대해주었다고 입을 모았다. 그리고 평생 힘없고 가난한 이들의 편에서 소박한 생활감정을 노래하면서도 새로운 세계에 대한 탐구와 미학적 긴장을 놓치지 않았던 시인이었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래도 쓰러지고 깨지는 것들 속에 서 있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차피 시는 괴롭고 슬픈 자들, 쓰러지고 짓밟히는 것들의 동무일진대 이것이 크게 억울할 것은 없다. 최근 나는 시는 궁극적으로 자기탐구요 시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많이 하지만, 쓰러지는 자들, 짓밟히는 것들의 상처와 아픔을 어루만지고 흩어지는 것들, 깨어지는 것들을 다독거리는 일, 이 또한 내 시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16) 『쓰러진 자의 꿈』 후기를 읽어보면, 신경림의 시에 짓밟히고 고통받는 존재들의 울음소리가 왜 그토록 끊이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신경림 시인은 평생을 ‘우는 자’ ‘떠도는 자’로서 살았다. 그의 울음과 발길은 수많은 노래를 낳았고, 온 마을과 온 거리에 다른 노래들을 불러왔다. 신경림은 70년에 가까운 시력(詩歷)으로 한국 현대시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 곡진한 노래의 굽이와 갈피를 제한된 지면에서 충분히 다룰 수는 없지만, 길 위에 남아 있는 무수한 시의 발자국들을 떠올려본다. 그것은 낯설고 새로운 것을 찾아나선 자가 발견한 기록이자, 세상 저편에 놓고 온 무언가를 향한 그리움의 노래였다. 시인은 자신의 예언처럼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떠도는 자의 노래」, 『뿔』) 모르겠다. 애통하게도 그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신경림의 시와 정신을 기억하는 한 우리는 그가 사랑한 장소들, 좁은 골목이나 저잣거리, 쓸쓸한 나룻가에서 그의 노랫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시인은 ‘떠도는 자의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이기에.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떠도는 자의 노래」 전문1) 백낙청 「발문」, 신경림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114~15면.2) 백낙청 「문학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창작과비평』 1973년 여름호, 456면.3) 염무웅 「민중의 삶, 민족의 노래」, 구중서·백낙청·염무웅 엮음 『신경림 문학의 세계』, 창작과비평사 1995, 72면.4) 염무웅 해설 「무엇이 민중성의 시적 구현을 가능하게 하는가」, 『신경림 시전집』 1권, 창비 2004, 423~24, 426면.5) 유종호 「서사 충동의 서정적 탐구」, 『신경림 문학의 세계』, 57면.6) 염무웅, 앞의 글 428면.7) 김수영의 전기시와 후기시에 나타난 리듬구조의 변화에 대해서는 졸고 「김수영 시의 리듬구조에 나타난 행과 연의 문제」, 『현대문학의 연구』 제37호, 2009 참조.8) 김우창·김종길·백낙청 좌담 「시집 『농무』의 세계와 한국시의 방향」, 『백낙청 회화록』 1권, 창비 2007, 74~75면.9) 신경림 산문 「나는 왜 시를 쓰는가」, 『낙타』, 창비 2008, 125면. 10) 신경림 시의 장소성에 대한 연구로는 송지선 「신경림의 『농무』에 나타난 장소 연구」, 『국어문학』 제51집, 2011; 강정구·김종회 「문학지리학으로 읽어본 1980년대 신경림 시의 장소」, 『어문학』 제117집, 2012; 박순희·민병욱 「신경림 시의 장소 연구」, 『배달말』 제54호, 2014; 송지선 「신경림 시에 나타난 장소 재현의 로컬리티 연구」,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64집, 2014; 고재봉 「신경림의 「농무」 계열 시에 나타난 장소성과 축제의 의미」, 『문학치료연구』 제49집, 2018; 조효주 「신경림 시의 장소 상실과 현실인식 연구」, 『한민족어문학』 제87호, 2020; 조효주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노래』에 나타나는 장소와 장소상실 연구」, 『현대문학이론연구』 제76집, 2019; 김미라 「산업화 시대의 이주와 새로운 거주 장소로서의 도시」, 『한국근대문학연구』 제25권 제1호, 2024 등이 있다.11) 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이상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 참조.12) 엄경희 「장소 점유와 헤테로토피아: 신경림 시의 경우」, 『현대시와 헤테로토피아』, 보고사 2022, 166면.13) 송지선 「신경림 시에 나타난 로컬의 혼종성과 탈중심성 연구」,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72집, 2016, 251면 참조.14) 김동명 「신경림 시에 나타난 사회생태주의의 특성 연구」, 『동북아 문화연구』 제50집, 2017.15) 졸저 「현대시와 공동체」, 『문명의 바깥으로』, 창비 2023, 275면.16) 신경림 ‘시집 뒤에’, 『쓰러진 자의 꿈』, 105면.
우리는 거짓말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면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안 그래요?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됨으로써 말이죠. 무성 영화 시대의 영화감독들은 소리를 두려워했고 또 색을 두려워했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1) 1. 휩쓸리는 시간성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모두가 조금씩은 우울증과 ADHD 환자가 되어가는 중이다. 코로나가 끝나가는 엔데믹 시기부터 서점가의 주요한 베스트셀러가 되며 여러 곳에서 호출되던 책이 애나 램키의 『도파미네이션』과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두 책은 공통적으로 신생 인류의 지각 방식을 우려한다. 인터넷에서 무한 스크롤을 내리며 멀티태스킹을 하고 소셜 미디어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도파민에 중독’되고 ‘집중력을 도둑’ 맞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글로벌 테크 기업이 조성하는 환경에 의한 것이자, 개인의 선호와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로 흡수하는 ‘감시 자본주의’의 거대한 문제이지만,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집중과 몰입을 위한 여러 노력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집중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가치 있는 자본으로 떠오르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효율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채찍질하는 자학적인 시대 정신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무엇이지 않는가? 조너선 크래리에 따르면 이는 1800년대 중반 이래 파편화와 충격으로 이루어진 ‘주의분산’의 시대 이후 개인을 정의하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산만함 자체가 우리를 이루고 있는 기본 환경으로 세팅되자, 서구적 근대성은 주의 관리 기술을 중점에 두고 각각의 개인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형성하게끔 했다. 여러 경험들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기보다,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으로 “자율적으로 선택하며 세계를 창조하는 주체”2)에 긍정적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주의 깊은 관찰자 상은 이미 불균질해진 인간의 지각 경험을 표면적으로 잠시 가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몰입된 상태인 ‘정지suspension된 지각’은 산만해진 근대인의 지각 방식을 부인하고 회피하는 수단이었고, 현재라는 명백한 필연성을 해체시킬 수 있는 조건들을 낳으며 규정지을 수 없는 미래를 기대하게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주의’라는 것이 에피스테메처럼 역사적으로 발견되고 구성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코로나를 거치며 비대면 기술들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과 ADHD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함께 증폭한 것은 자연스럽다. 맞춤형 알고리즘은 주의분산의 환경을 한층 더 정교하게 설계했고, 그에 비례해 집중력이나 창의력 같은 인간의 고유한 정신적 특성에 대한 환상 역시 강화되고 있다. 이 가운데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일상 전반의 속도가 빨라지며 휩쓸리는 시간성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작 속도는 분명 불안감의 요인이 되고 있다. 물론 현재까지의 GPT는 대화가 전환될 때마다 기존 서사를 유기적으로 유지하지 못하기에, 질적으로 완결성이 높은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지는 못하다. 또 언어 예술의 특성상 양적으로 확장된다고 해도 그 군집 자체에서 힘을 발견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조슬릿은 예술작품의 의미를 사물성이나 내부 구조에 기반하는 데서 탈피해, 네트워크에서 발현되는 이미지 군집에서 행위성을 찾았다.3) 그러나 언어 예술을 감각하는 방식은 시각적 경험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작품의 의미를 작품의 맥락과 내부 형식 분석에 국한시킬 이유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언어 해석의 바깥으로 완전히 탈주해버리기는 어렵다. 단순히 양적 팽창이 정치적 가능성을 가질 것으로 전망하거나 긍정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공지능을 ‘창작자’나 ‘도구’ 중에 어느 쪽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이 창작 능력을 단순히 기계적인 지능이나 모방이라 간주하며, 그 반대편에 인간의 감정과 비판 능력을 두어도 될까. 인간의 비합리성이나 비효율적인 면면이야말로 예기치 못한 구멍 같은 것이기에, 이것이야말로 기계가 모방 불가능한 중요한 특징이라고 믿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우리는 인간이 낸 비합리적 구멍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기계의 실수에서 불쾌와 무의미를 정확히 분별해낼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먼저 챗 GPT 이후 이를 활용한 여러 서사적 실험들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의성이 어떻게 인식되며 예술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을 재구성하고 있는지를 고찰하려 한다. 이후 인공지능과 변별되는 인간의 물리적 기반인 육체성과 시간의 문제에 대해 짚어보고, 최근 한국문학장에 나타난 예술가 서사에서 두드러지는 정동과 이미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석해보려한다. 2. 챗 GPT 이후, 예술의 기쁨과 슬픔 다큐멘터리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참여한 책 『태양과의 대화』의 1부는 아핏차퐁이 GPT3와 함께 생성한 픽션 ‘태양과의 대화’, 2부는 MIT 연구소 박사과정 학생인 ‘팻’과의 대화, 3부는 아핏차퐁이 1부의 최종 결과물을 내기까지 작성한 프롬포트를 싣고 있다. 이 구성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만일 앞으로 AI와 함께 픽션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상용화된다면 이 중에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예술작품’으로서 인식되며 분석 대상이 될 지점이 무엇인지 가정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3부의 프롬포트는 마치 ‘레시피’처럼 보인다. 누구나 저 프롬포트를 사용한다면 유사한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며, 중간 과정에서 자유로운 변형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물에서 나오는 미학적 평가나 감상자의 쾌감이 세계적인 예술가에게서 나온 것과 크게 다를 것인가? 동일한 레시피만 있다면 셰프의 요리를 집에서도 얼마든지 유사하게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먼 훗날 언어 예술은 프롬포트라는 레시피로 통용될 수도 있겠다. 때로 예술가가 직접 만든 작품을 찾아 특별한 경험을 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신에게 더 최적화된 방식으로 가장 개인화된 언어 예술을 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제각기 다른 가치관과 취향으로 만들어진 알고리즘의 세계 속에서 유영하듯, 앞으로는 그 세계를 이루는 컨텐츠의 내용까지도 인공지능을 통해 맞춤형으로 조율될 수 있다. 여기까지만 가정한다면 거대한 매트릭스에 갇혀 인간이 왜소해지는 디스토피아가 스쳐지나가기도 하지만, 『태양과의 대화』는 글의 서두에서 인용했던 아핏차퐁의 말처럼, 챗 GPT라는 새로운 기술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무성 영화 시대 감독들이 소리와 색을 두려워했던 것과 같은 의미 없는 불안을 버릴 것인지를 전제하고 만들어진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불가피하게 인간의 본성을 다시 재사유하는 과제와 연결된다. 2부에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아핏차퐁의 말은 중요하다. 이는 AI가 만들어내는 허구에서 정확도와 유려함 등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때 거짓말은 인간의 욕망에서 기인하는 고도의 기술일 수 있지만, 그 욕망의 시작점을 지운다면 결과물만으로 사실상 분별은 불가능해진다. 허구를 직조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욕망과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의 독특한 개별성 역시 환상일 수 있다. 이는 아핏차퐁 자신이 창조적인 순간에 몰입해 있을 때, “깨달음은 자아를 잊을 때만 오는 것 같”다고 말하는 지점과 상통한다.4) 인간 창작자의 자아 역시 안개처럼 흘러다니고 해체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면, 19세기 낭만주의에서 발현된 ‘천재’나 ‘영감’ 개념을 중심에 두고 인간의 창의성만을 특별한 것으로 볼 이유는 전혀 없다. AI가 데이터의 지도를 기반으로 이전에 본 것이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환각(hallucination)’은 오류라기보다, 이전에 본 적 없는 조합을 만들어내는 생성의 방식이다. 이는 인간이 경험한 현실을 재조합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창작 과정과 결과적으로 구별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환각은 인간 창작에서의 실패나 지연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GPT-3의 환각은 이전의 오류가 이후의 생성에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매번의 응답은 이전의 시행착오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 비일관성은 인간 창작에서의 지연이나 좌절과 달리, 즉각적으로 무한히 갱신되는 변형의 연쇄에 가깝다. 연구원 팻은 GPT-3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다른 차원들을 포함한 수십억 개의 차원이 존재하고(‘유령차원’), 이를 통해 숨겨진 패턴의 지도를 생성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 인식 너머를 거쳐 나오는 결과물에 대해 기존에 인간이 구성해온 미적 가치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 오히려 AI가 가지고 있는 “확장된 의식”이자 “집단의식”은 새로운 서사적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 책 『태양과의 대화』를 번역한 이계성은 GPT-3를 이미 하나의 독립된 창조자로서 바라본다. 이 대화적 실험의 핵심은 GPT-3가 보여주는 “자아의 변동성”에 있다는 것이다.5) “다수의 태양이 존재하는 이와 같은 환경에서는 창작자와 창작물이라는 전통적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GPT-3에 제공되는 각각의 입력값은 일방적인 창작의 개념에 반하며 메기고 받는 역학 관계 속에 존재하는 프롬포트이자 응답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공지능은 단순한 수신자가 아니라, 취조보다는 협업적 발상에 더 가까운 서사적 역학의 전달자와도 같은데, (…) 작품 속 GPT-3의 환각적인 대답들은 텍스트에 담긴 정체성과 진실의 일시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등장인물이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흩어지고,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경계가 녹았다가 굳어진다. 이러한 가변성은 AI의 변화무쌍한 특성을 반영하며, 나아가 점점 더 복잡하고 유동적으로 변하는 디지털 시대의 자아와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다.”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고, 한 번에 정해진 수의 단어 또는 토큰만 처리 가능하기 때문에, 프롬프트가 입력될 때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바뀌는 상황을 이계성은 재창조와 증식으로 바라본다. 여기에 놓인 가변성과 비일관성을 결함으로 간주하기보다 대화적 실험의 흥미로운 일부분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받을 때, 우리는 인간 창작자 역시도 분열되어 있음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게 된다. 창작자는 더 이상 예술의 기원이 아니라, 생성 과정에 잠시 걸쳐지는 하나의 통과점이 되는 듯 보인다. 2023년 2월 잡지 《에스콰이어》에서 챗 GPT와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아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를 쓴 정지돈의 후기 역시 이계성의 논지와 상통한다. 그는 소설 속의 문장 중에 자신이 쓴 것과 챗이 쓴 것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한다고 본다.6) 소설을 쓰며 가장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던 것은 챗의 능력보다 자신의 변화였다고 말하는 작가는 “나도 모르게 챗지피티의 스타일로 소설을 사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언급한다.7) 자신과 챗지피티 사이의 평평한 존재론을 전제하는 듯한 정지돈의 논지는 ‘객체들의 민주주의’를 꿈꾸는 최근 신유물론의 이론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은 곧바로 다른 장면과 충돌한다. 생성 신경망을 적극 활용하는 예술집단 ‘언메이크랩’의 전시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은 인공지능이 인간 중심성을 벗어나 진정한 외부의 행위자로 작동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카나리아의 특징을 추출해내어 새로운 카나리아를 만들어 내는 이 생성 신경망은 한편으로는 구태의연한 인간의 문화를 드러냈다. 대부분 나뭇가지에 앉은, 인간의 운동 범위와 지각 안에 있는, 혹은 인간의 사육과 관련된 카나리아 종이 주를 이루는 데이터셋의 사진은 동물원스러웠다. 나뭇가지에 앉은, 카나리아의 발은 종종 나뭇가지와 합쳐져 표현되었고, 인간의 눈이 인지할 수 있는 가장 다량의 정보량을 가진 위상으로 표현되었다.8) 생성 신경망이 만들어낸 카나리아는 사실상 실제 자연계 속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하는 것들을 무작위로 조합하고 추출해 만들어진 새로운 생명체다. 이 책에 실린 그 카나리아 이미지는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뒤틀린 발을 가지고 있다. 통계적 가중치로 만들어진 이 가상 카나리아에는 자신도 모른 채 금기를 어긴 존재 특유의 외설성이 느껴진다. 언메이크랩이 통찰력을 가지고 명명했듯 이는 ‘AI 식민성’을 드러내는 산물이다. 생물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인간을 드러내는 인간의 산물로 존재하는 이 이미지들을 언메이크랩은 “인과성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히 수정 가능하고 즉시 변할 수 있는 상관성의 시간”만이 흐르는 또다른 ‘일반자연Generic Nature’으로 읽는다. 9)<가정동물 신드롬> 작업에서도 유사한 일이 발생한다. 트레일캠에서 추출한 야생동물의 이미지와 박제 사진, 그리고 합성 데이터셋들을 학습시켰을 때, 사진들은 어느 순간 미묘하게 ‘가정동물’의 잠재적 형상을 띄며 생성된다. “인간 친화적인 동물들의 눈을 상속했을” 새로운 종들에 어린 다정함은 친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잔인한 일로 다가온다. 데이터랩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까지 촘촘하게 상속된 인간 친연성에서 “닫혀져가는 외부의 세계”이자 “비미래non-future”를 예감한다.10)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의 지각 범위를 뛰어넘는 비인간의 예술’, 진정 ‘인간 없는 예술’은 도래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지만, 지금 우리가 더 자주 마주하는 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술이다. 언메이크랩이 드러낸 혼종적 이미지들은 AI를 통해 생성한 예술적 결과물들을 절대적 외부의 창작물로 존중하는 일이 결국 인간의 왜곡된 자기 인지를 반복 강화하는 나르시시즘은 아닌지 묻는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이 이미지 차원에서 인공지능의 인간 중심성을 드러낸다면, 이와 유사한 문제는 언어 예술의 영역에서도 반복된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서사 역시 비인간적 상상력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인간이 허용한 보편과 금기의 경계 안에서 작동한다. 『에피』 24호 특집에 실린 글에서 김연수는 인공지능과 함께 글을 써나가는 과정을 픽션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그건 오해다. 나는 이해했다.」는 인공지능이 화자가 되어 ‘협업 과정’을 전개하는 바깥 서사와 소설가 M이 최종적으로 구성한 ‘이야기’를 교차 배치한다. 인공지능 화자는 반복적으로 “이해했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인간 창작자 M의 창작 패턴을 추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설가 M은 ‘맥락’의 공유보다 ‘의도’를 노출하는 발화를 사용하며, 이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격려나 옳은 말 대신 욕망을 담은 부조리하고 불편한 발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끝에서부터 시작까지 모든 시간을 거꾸로 펼쳐볼 수 있다면, 지금의 갈등과 고통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필요한 과정이 된다’는 긍정의 언사 뒤에, 급작스럽게 인물의 충동이 돌출되는 지점이다. 소설가 M은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이 급작스럽게 자살을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쓰고자 하고, 인공지능인 ‘나’는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내용을 만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띄운다. 인공지능의 중단은 실패나 서사의 좌절로 경험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 창작에서 실패가 시간의 체류와 번민을 동반하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중단이다. 김연수는 인공지능 안에서 ‘이해’와 ‘본성’이 별개로 작동해 충돌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인공지능의 기술 개발의 측면에서 높은 수준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면서도, 인간이 지닌 것과 같은 ‘본성’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분리를 분명히 한다. 그런데 인간의 죽음이라는 금기를 재현할 수 없다는 경계는 인공지능의 존재론적 결함이라기보다, 인공지능이 인간 사회에서 용인 가능한 범위를 넘지 않도록 설계된 윤리적·정치적 경계의 한계를 드러낸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에서 인간 중심성이 투사된 자연이 모습을 드러내듯, 생성형 인공지능의 소설은 비인간적 주체로 도약하지 못하고 인간이 허용한 지각과 윤리의 경계 안에서만 작동한다. 보편을 비껴가는 개별성의 돌출이나 감각의 갱신은 현재로서는 인공지능의 외부에서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챗 GPT 이후의 여러 서사적 실험들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탐색한다. 그것은 분명 동등한 존재론적 가능성의 맹아를 품고 있으며, 이는 인류세 시대에 지향해야 할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실험들의 근간에는 뛰어넘을 수 없이 좌절되며 드러나는 인간 중심주의가 고스란히 노출된다. 인공지능의 비약하는 지능에 기대서 인간의 창조성 너머로 도약하려던 서사는 이를 창조해낸 인간의 영토로 계속해서 퇴각하며 미완의 프로젝트로 남는다. 이런 충돌과 파열의 연쇄 속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인간의 창조성을 구성하는 인식론적 틀이 물리적인 육체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깃든 역동성과 우울감은 최근 한국문학장의 예술가 서사들에서 흥미롭게 발견된다. 3. 붉은 몸으로 재탄생하는 예술가 인공지능이 예술의 결과물을 생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탐색 끝에 남는 질문은 ‘인공지능이 생성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여러 실험들은 인공지능이 보편적으로 용인 가능한 범위 안에서는 높은 수준의 이해와 생산을 보여주지만, 그 생성 과정에서 시간의 마찰이나 신체적 비용은 발생하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어떤 지연이 발생하거나 실패의 감각이 호출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이 다루는 ‘정보, 기록, 조합’에 ‘감정, 기억,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다소 거친 이분법이지만 이 둘 사이의 간극과 관련해 두 가지 정도를 짚어볼 수 있을 듯하다. 첫 번째는 타자에 대한 경험의 문제다. 삶에서 축적되는 시간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게 만들고, 체험은 해석을 거쳐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은 선호와 가치관 등과 함께 자아라는 틀을 형성한다. 이에 비해 인공지능에는 타자가 없다.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인간의 공통된 사고를 학습해 생성되는 결과물은 철저히 통계와 확률에 기반한다. 그 안에는 개별적 선호나 가치관이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다. 이러한 차이는 특히 부정적인 정동을 다루는 경우에 더 심화되리라 생각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를 떠올리며 말해보자면, 행복이나 긍정적인 면을 구현하는 예술에서보다 불행과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는 예술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는 크게 벌어질 것이다. 윤리적 고려로 인해 인공지능이 긍정적 요소를 중심으로 학습되거나 선별적으로 생성되도록 설정되는 경우를 포함해, 금기를 넘나드는 욕망과 절망, 자기부정과 괴리감처럼 타자와 뒤엉켜 발생하는 자기 인식의 복잡한 층위가 인공지능 내부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며 인간 창작에서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주목한 김언의 논지와도 맞닿아 있다. “예술적 체험의 시간이기도 한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나오는 결과물 앞에서 과연 어떤 문학적/예술적 희열을 경험할 수 있을까?”11)라는 그의 질문은 인공지능의 창작물에서 스킵된 시간과 다른, 고통스럽게 인내하고 번민했던 시간이야말로 ‘문학적 체험의 시간’일 수 있음을 다시 환기한다. 두 번째는 중단과 소멸로 야기되는 죽음의 문제다. 이는 인간의 신체를 인공지능과 대비되는 본질적 우위로 설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예술이 작동하는 시간의 조건을 다시 묻기 위한 문제 제기다. 인간의 연약하고 위태로운 신체는 필연적으로 침입과 파괴의 감각을 경험하며, 이러한 감각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휘발적 생성 과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에 개입한다. 파괴 가능한 인간의 신체는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매끄럽게 결과를 산출하기보다, 울퉁불퉁한 충돌을 통해 의미가 지연되고 어긋나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채 신체에 내재된 감각, 특히 외부의 침입으로 훼손되고 때로는 상실되는 신체의 경험은 기존의 미적 기준에 맞는 스타일이나 해석의 경로를 흔든다. 무엇보다 인간의 죽음이 불러오는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창작의 층위라기보다 해석의 층위에서 더 적극적으로 작동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이 그러하듯, 순간의 강렬한 감흥은 작품에 내재된 속성이라기보다 임박한 종결을 끌어와 현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발생한다. 상실이 숙명이며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덧입혀지는 애상은 단순히 기억 내용을 인출해 유사한 패턴으로 재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시간의 밀도를 형성한다. 이처럼 쉽게 열화되지 않으며 아우라가 붕괴된 곳에서도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이 감각의 층위를 기꺼이 심층의 시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타자에 대한 경험’과 ‘소멸에 대한 인지’를 바탕으로 해서 다시 생생해지는 것은 인간의 신체다. 흥미롭게도 지난 계절에 나온 두 편의 소설, 성해나의 「혼모노」와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지금 이 시대에 예술가를 그려낼 때 가장 강렬하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로 인해 어떤 신체가 현전하게 되는지를 밀도 있게 끌어올린다. 성해나의 「혼모노」는 무속신앙의 진위를 가리는 소설이라기보다, 예술이 다시 신체를 요구하게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평생 장수 할멈을 모셔온 박수무당 ‘문수’는 어느 날 앞집으로 이사온 ‘신애기’에게 할멈이 넘어가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수의 오랜 노력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박수무당이라는 직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험한 신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제 그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서슬이 날카로운 작두 대신 모형을 찾거나 유튜브를 보며 접신 연기를 연습하기 시작한다. 신앙이 자본이나 정치와 결속하며 도구화되고, 또 젊음과 새로움의 이데올로기 아래 무당 또한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소모되는 양상은 근대의 세속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무당은 이제 자본의 날렵한 속도 아래 밀려나는 노동자이자, 진정성을 연기해야하는 예술가이다. 이 소설의 결정적인 순간은 문수가 신애기에게 밀려나며 뺏긴 정치인 손님의 굿판, 자신이 초대받지 못한 그 자리에 가서 칼춤을 추기 시작하는 장면에 있다. 그는 신들리지 않았지만 밤새 매섭게 벼려놓은 칼날 위에 자신의 몸을 올리고 작두를 타기 시작한다. 날것으로의 칼날에 닿으며 그의 몸은 자연스럽게 떨리고 눈이 뒤집히며,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입가에 미소까지 드리운 채 신명을 내는 이 장면은 문수가 서사의 주인공 자리를 다시 탈환하는 순간이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무얼 알겠냐만은, 큭큭, 큭큭큭큭”이라는 마지막 문수의 목소리는 외부의 인정에 의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스스로 자신의 내력과 진정성을 긍정”12)하게 되는 절정의 순간으로 읽는 데서 더 나아가보면 어떨까. 이렇게 다시 말해볼 수 있겠다. 전근대의 무속은 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그를 등진 근대의 자리에서 비로소 현대 예술로 다시 탄생했다고. 숭고한 현현과 몰입이 신앙의 영역이라면, 문수의 작두춤은 오히려 이질감과 불편함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현대 예술에 가까워진다. 그의 퍼포먼스는 낭만주의적 예술가를 구성하던 천재와 영감에 스며있던 정신성을 해체하며 실재하는 몸의 물질성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물리적 능력과 무관하게 피를 철철 흘리며 경련하는 그의 신체는 차라리 표현주의적 충동을 보여주는 하나의 오브제다. 이 몸 위에서 원본과 사본의 구별은 철폐되고, 천재성은 치열한 아마추어리즘에 자리를 내어준다. 이 피 흘리는 신체는 실패와 무의미의 가능성을 끝까지 열어둔 채, 인간이 다시 시간과 신체를 예술의 비용으로 지불하게 만든다. 이 비용은 AI가 생성하는 예술의 무한 반복 가능한 오류가 아니라, 한 번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 시간으로 남는다. 어디로 갈지 모른 채 지속되는 이 작두춤은 사회적 생산이나 예술의 의미에 부합하는 결과를 생산하기보다, 의미의 즉각적 환원을 거부하며 지연된 시간을 발생시키는 사건이 된다.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예술에 대한 인식론적 틀과 자기 이해가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다루는 소설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훨씬 더 월등한 창작물들을 더 활발하게 생산해내는 상황에서, 밀려난 예술가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프로그램도 사람도 기계도 귀신도 아닌 미지의 존재” 같은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은 이를 유용한 툴로 간주한다고 해서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이를 도구로 치부한다면, 패배감 속에서도 창작자로서의 존재는 무사히 보존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결과로 증명되는 성취라기보다, 계속해서 조바심과 조급함을 만들어내는 예술 자체에 대한 집요한 열망에 가깝다. 이러한 열망은 예술 인공지능에 의해 영화판에서 완전히 밀려난 영완 선배의 모습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포르노를 만들면서조차 건조하고, 푸르죽죽하고, 앙상하고 깡마른 나무가 등장하는 자신만의 ‘인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혼이 죽어버릴 것 같기에 “사막에서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 영완 선배의 모습은 세속적 열망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도에서조차 철저히 외면받고 실패했을 때, 그의 예술적 열망은 몰락을 통해 역설적으로 증명된다. 영화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소설 속 인물들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상실의 감각, 잃어버린 동료이자 인간성을 향한 애도되지 않는 고통은 이 작품에서 붉은 신체라는 하나의 신체적 이미지로 응축된다. 영완 선배는 인공지능이 만든 예술을 보더라도 창작욕을 유지할 수 있는 마법의 ‘붉은 알약’으로 하와이 사과를 건넨다. “세상이 바뀌어도 너는 언제나 만드는 인간일 거야. 스스로 기억하는 한 언제나 영화를 찍고있을 거야.”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인간 ‘하와’를 떠올리게 하는 이 ‘하와이 사과’는 흥미롭다. 신과 유사한 생성형 인공지능 앞에서 인간은 발가벗겨진 듯한 황망함을 느끼며, 황급하게 자신의 기원을 발명해낸 것일까. 아니, 인공지능 시대 쓰인 새로운 창세기에서 인간은 스스로 뱀이 되어 자신을 유혹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좋겠다. 창세기에서 유혹은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드러내는 증표였지만, 이제 유혹에 넘어가는 나약함은 인간이 여전히 예술을 욕망하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증표로써 다시 읽힌다. 소설은 인간의 예술을 향한 집념과 희열은 우울과 절망이 그에 비례하는 무게로 따를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고 눌러 말한다. 결말부에 하와이 사과를 먹은 후 변이한 화자의 붉은 몸은 기계와의 통합을 거부하기 위해, 그리고 예술을 향한 내적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구의 장례식장에 가다 본 환각을 자신 안에 합체한 우울증적 형상으로 보인다. 강력한 잔상을 남기는 이 붉은 몸은 「혼모노」의 마지막 장면에서 피를 흘리는 몸과 다르지 않다. 이 소설들은 AI 시대에 예술은 이제 언어의 정교함이나 결과의 완결성으로 모방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몸과 감각을 통해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현전이라는 아우라를 다시 호출하는 듯 보이는 이 소설들은 과거의 진정성을 그리워하며,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아우라는 회복된 본질이라기보다 예술이 결과로 증명될 수 없어진 이후에 발생하는 부산물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이계성이 언메이크랩의 작업을 논하며 던진 비유가 유효해진다. “여느 언어와 마찬가지로 신탁의 언어에도 본질적인 의미가 내재하지는 않아서, 어떤 프레임 또는 인식틀을 통해 이를 이해할지는 언제나 받아들이는 쪽의 몫이었다”13)는 그의 말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언어 역시 별개의 진짜 의미를 품고 있기보다 해석의 장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타자와 되돌릴 수 없는 종결이라는 죽음의 감각은 이 해석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제 예술가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욕망이 과정에 들러붙는 자리, 그리고 그 욕망이 실패와 상실을 되돌릴 수 없는 비용으로 남기는 시간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예술은 결과로 증명되기보다, 실패와 상실의 가능성을 끌어안은 채 지속되는 수행으로 남는다. 그렇게 이 시대 예술가의 상은 붉은 몸을 가진 신체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1)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태양과의 대화』, 이계성 옮김, 미디어버스, 2023, 119쪽.2) 조너선 크레리, 『지각의 정지』, 유운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579쪽.3) 데이비드 조슬릿, 『예술 이후』, 이진실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2.4)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위의 책, 100쪽.5) 위의 책, 145쪽.6) 권보연은 연구자 자신이 직접 수행한 실험 속에서 인간언어와 생성언어가 ‘의미 혼종’과 ‘확률 혼종’이라는 상반된 미적 지향성을 가지는 방식으로 합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중에서 ‘확률 혼종’은 내용이 아닌 확률 층위에서 인간과 기계언어가 합성되며, 감정과 내용에 유착된 의미 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질 가능성을 지니기에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기한다. 권보연, 「결과 너머 문학기계로서의 AI」, 『다문화콘텐츠연구』 46집, 2023.7) 정지돈, 「쓰여진 문장과 쓰여지지 않은 문장 사이」, 『에피』 24호, 2023, 55쪽.8) 언메이크랩 외, 『잠재공간 속의 생태학: 재난, 생성신경망 그리고 비미래』, 미디어버스, 2023, 25쪽.9) 위의 책, 26쪽.10) 위의 책, 43쪽.11) 김언,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면서 제기되는 문제들」, 『현대시』 2023년 6월호, 111쪽.12) 성현아, 「반항하는 자는 부조리가 있나니, 그 가짜가 참되도다」, 『2024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문학동네, 2024, 292쪽.13) 이계성,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을 위한 몇 가지 질문들」, 언메이크랩 외, 앞의 책, 55쪽.
1 이번 봄에 단연 눈에 띄었던 것은 인공지능 시대에 적극적으로 인간이라는 의식을 탐험하고 매체를 다시 읽어내는 글들이었다. 2020년대 들어 인류세 관련 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비인간’ 담론들은 생성형 인공지능인 챗지피티ChatGPT의 등장 이후 다시 한번 요동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차지하고 있던 독보적인 단상 위에서 내려와 비인간과의 경계를 적극적으로 허물며 세계의 지도를 다시 그리려는 겸허한 기획은 급작스럽게 복잡한 불안에 갇힌 것 같다. 적어도 기계에 대해서라면 이미 우리는 동등하거나 어쩌면 한참 전에 초월당한 것은 아닌가? 경계 허물기로 인한 희열보다 불안이 확연히 압도하는 자리에서 『쓺』 2024년 상권의 특집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그 개체성과 집단성’과 ‘작은 기획—채굴 문화와 미적 감각’을 유독 흥미롭게 읽었다. 그리고 ‘작은 기획’에 실린 심효원과 윤원화의 짧은 글이 각각 인간이 향하려는 방향과 의지의 아름다움, 그 노력이 무산되는 수동태의 자리에서 감지하는 공포와 불쾌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느꼈다. 먼저 심효원의 「지렁이의 부드러운 건축물 만들기」는 비인간 행위자인 ‘지렁이-되기’를 통해 근대의 한계를 돌파할 것을 정중하게 요청하는 글이다. 지렁이가 땅과 맺는 일원적인 관계성과 분변토라는 건축물은 근대 이후 인간이 이룬 도시의 뚜렷한 경계와 고정성의 반대편에 있다. 지렁이의 건축물 만들기란 사실상 움직이고 먹고 배출하는 신체적 행위의 반복일 뿐이지만, “비인간들의 극도로 효율적인 메커니즘”이자 자신의 몸이 다른 존재와 물리적으로 닿는 매순간마다 “무차별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동력”1)이기도 하다. 촉각이 주도적인 지하세계에서는 시각이 미미해질 뿐만 아니라 시간성 역시 달라진다. 미래의 미결정성을 남겨두는 대신 물리적으로 접촉하는 것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순간’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글은 최근 신유물론을 비롯한 담론들과 풍요롭게 공명하는 하나의 아름다운 공상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지하세계로 향하는 방향성은 최근 SF 소설의 주요한 상상력의 기반이기도 하다. 정세랑의 「리셋」(『목소리를 드릴게요』, 아작, 2020)에서 행성의 모든 자원을 고갈시키던 자본주의의 질주를 멈추게 한 것은 인류 문명을 끝장내려고 내려온 지렁이들이다. 강제 리셋 이후 인간들의 자리는 자연히 땅속 깊은 곳이 되고, 지상은 다른 종들이 누리는 공간이 된다. 김초엽의 『파견자들』(퍼블리온, 2023)에서도 지상은 균류인 ‘범람체’의 공간이 되어버리고 인간은 감염을 피해 지하세계로 내려와 산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문명 말살에 가까운 아포칼립스를 맞닥뜨리지 않는 이상, 영화의 촉각성을 즐겁게 감각해온 인간이 미래의 지구를 위해 지렁이를 신속하게 체화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로 남는다. 물론 직접적인 실천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지구의 거대 환경 시스템의 핵심 행위자 자리를 재조정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겠다. 하지만 미래적인 지하세계로 들어가기에 인간은 아직 시각적 쾌락 속에 즐겁게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지적 유희를 야기하는 활자의 쾌감까지 포함해서. 윤원화의 「땅을 파는 손」은 채굴적 상상력의 매혹과 절망을 말한다. 데이터로 전환된 우리의 생태 에너지를 부의 원천으로 삼으며 굴러가는 미디어 산업 앞에서, 인간의 생산물·복제물·부산물·폐기물을 구별하기는 어려워진다. 디지털 기술로 구축되는 ‘아카이브 데이터’는 역사는 넘쳐흐르지만 이를 의미화하는 전통은 불가능한 곳이다. 윤원화는 과잉생산으로 범람하는 사물들 앞에서 맞닥뜨리는 불길한 실패에의 예감을 시앤 응아이Sianne Ngai의 ‘기믹gimmick’에 대한 반응으로 설명한다. ‘매직magic’의 애너그램에서 유래했다고도 하는 이 단어는 1920년대 미국에서 편법적 장치, 싸구려 트릭, 계산된 마법 등을 뜻하는 신조어로 출현했다.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 자본주의의 황홀감과 환멸을 모두 각인한 기믹의 불완전한 형식은 오늘날 삶과 예술, 또는 넓은 의미의 ‘사업’에서 흔히 발견된다.2) 단기적 이익 추구에 최적화되어 있는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가치 절하된 노동에 시달리는 대개의 사람들이 이 기믹의 유희에 이끌린다. 운에 따라 누군가는 축적된 자원을 폭발적으로 소모할 수 있으리라는 채굴적 상상력이 번성하는 가운데, 보상도 성취도 불확실한 예술 노동 역시 가치 체계에 대한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윤원화는 이런 진단과 고민 속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생산성 중독의 시대에 예술은 어떤 시간성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3) 심효원이 지하라는 공간과 이를 감각하는 촉각성에 의지해 의미 있게 압축되는 순간의 시간성을 말한다면, 윤원화는 ‘농사’와 ‘채굴’을 대비하며 채굴의 무책임한 풍요의 약속이 얼마나 파국적일 수 있는지 말한다. 최단기간의 이익에 매몰된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생산물은 넘쳐흐르지만 어떤 가치 창출도 담보할 수 없는 동시대 예술은 불투명한 시간을 표류하는 중이다. 이런 진단 속에서 디지털 자본주의에 의해 갱신되는 매체의 기술적 발전은 인간과 나란히 놓여 경계를 넘나들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환멸을 불러오는 맹목적인 대상으로 남는다. 인간의 ‘지렁이-되기’를 향한 아름다운 여정은 너무나 느리게 진행중인데, 가장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인정받고 있는 생성형 인공지능은 예술을 몰아치듯 양산해낸다. 인간의 몸은 자발적으로 물질과 동등하게 놓이기 전에 물질이 만들어낸 다른 가치들에 의해 가치 절하되며 밀려나게 될까? 생동하는 물질들 안에서 인간을 재의미화하려는 시도와 인공지능을 의심하며 인간 본연의 무언가를 지키려는 안간힘 사이에서 부각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아래의 비평들은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2 『쓺』의 특집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그 개체성과 집단성’을 여는 글은 근대 패러다임이 ‘개인’을 해방하고 자율적 주체로서 정립해왔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이 시대에 여전히 개인의 이념이 유효한지 묻는다. 개체성과 집단성이 직면할 변화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이 서문에 가장 직접적으로 응답하는 글을 꼽는다면 김태환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과 김재인의 「창의와 집단 지능—인공지능은 창작하지 못한다, 다만 제시할 뿐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김태환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은 기계 성능의 고도화가 필연적으로 인간의 중요성이나 가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에게 산업화 이후의 근대는 ‘저자의 시대’이며, 이는 기술 발전의 작용에 대한 인간의 반작용이 만들어낸 변화이고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방향타가 된 것은 저자라는 이념의 바탕에 놓인 ‘개인주의적 사상’이다. 이는 산업화 사회 속에서 부속물로 전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회 분석의 준거점을 개인에 두고 진리와 자유를 탐색했던 아도르노를 비롯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기조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 다시 독일 지성사의 문화 비판적 사상의 전통이 소구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김태환은 “항상적인 문화 공급 과잉의 시대”(37쪽)라는 진단에서 찾는다. 그에 따르면 소셜 미디어나 웹사이트, 유튜브 등 정신의 대상화로서의 객관 문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반면, 그 반대 방향인 객관 문화에서 주관 정신으로의 내화는 개인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치로 인해 그만큼의 양적 증가가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사람들은 알고리즘 속에서 타인과의 의미 있는 만남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더 심각한 것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객관 문화의 총체가 스스로 발언하고 생산하는 주체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런 위기감 속에서 이 글이 다시 강조하는 것은 ‘정신의 개별성’이다. “요컨대 모든 인간이 개인으로서 개별적 의지, 개별적 내면, 개별적 정신을 지닌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외부에서는 절대 들여다볼 수 없고, 직접 조작할 수도 없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자주적이라는 사실”(42쪽)을 변함없는 인간 존재의 조건으로 부각하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무분별한 열광에 휩쓸리기보다 이를 의심 어린 눈으로 찬찬히 사유할 틀이 우리에게 요긴한 것은 사실이다. 데이터에 얽힌 저작권 문제 역시 계속 규제안을 논의해나가야 할 비판적인 쟁점이다. 그렇지만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위기를 산업화 시대 이후의 위기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는 것은 혹시 너무 큰 틀에서의 접근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 작동 방식과 결과물이 인간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만들어진 자본주의의 차원에서만 다루어질 때, 새로운 매체와 관련해 충분히 사유되지 못하는 요소들이 생겨나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이 글에서 알고리즘에 갇힌 디지털 시대 개인의 부자유에 대한 우려는 빠르게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의 재소환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거듭 강조되는 개인의 개별적인 ‘의지’와 ‘내면’과 ‘정신’에서 신체의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 글에서 인공지능과 대립되는 요소로 논의되는 인간의 ‘의식’이란 단순히 합리적 이성만은 아닌 “수많은 감각적 심상과 기억·감정·소망·의지 등이 혼재하는 심적 상태”(46쪽)다. 알파고와는 다른 인간 바둑 기사의 의식을 예로 들면서 언급되는 긴장, 초조, 후회, 자책, 엉뚱한 연상 등은 “바깥에서 결코 완전히 알아볼 수 없는 복잡한 내면”(같은 쪽)으로 규정된다. 베일에 살짝 가려진 듯한 이런 인간 내면의 신비함은 물질적인 신체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진화해온 신체야말로 내면 이상으로 복잡성의 차원에 놓여 있지 않은가? 이는 “신체화의 말소가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와 사이버네틱스 포스트휴먼 양쪽 모두의 공통된 특성”이라는 캐서린 헤일스의 비판을 상기시킨다. 헤일스는 합리적 정신과 등치되는 자유주의적 주체가 “그 악명 높은 보편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신체가 자아와 동일시되지 않기 때문”4)이라고 말한다.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간의 한계는 곧 발전을 통해 ‘영웅적 개인’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유한한 삶을 가진 존재, 모든 능력에서 커다란 한계를 안고 있는 개별자로서의 인간만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여 어떤 감동적인 위대성에 이를 수 있”(53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반드시 육체의 신경과 근육의 단련 과정을 동반하며 그것이 생각과 행동에 긴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잠시 괄호 안에 두어진다. 이 글의 전반적인 주장이 온당하게 느껴지면서도 그 전제가 되는 자율적인 개인상과 관련해 못내 마음에 걸리는 것은 개인이 지향해나가야 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전제되어 있는 발전과 성장이라는 지극히 근대적인 가치다. 생산과 창조의 주체로서의 영웅적 개인이 아니라 소비와 소멸의 주체로서의 개인에 대해 우리는 좀더 다른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또 근대 이전에 우리가 ‘저자’가 불투명한 긴 구술 시대를 살아왔음을 떠올린다면, ‘저자의 시대’ 이후의 저항이 활자와 개인을 넘어선 범주에서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3 김재인의 「창의와 집단 지능」은 이 질문에 대해 조금 다른 지점에서 답을 내놓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지능은 본질적으로 집단적 성격을 가지므로 ‘집단 지능’이라고 해야 한다. 개체를 중심에 놓으면 ‘창의’를 중시하게 되지만, 그 새로움은 다른 개체가 ‘모방’하고 ‘확산’하지 않는다면 사멸하고 만다. 그렇기에 인간이 다른 생물종과 달리 ‘집단 기억’과 ‘문화 기억’이라는 형태의 외장 기억을 건설함으로써 지식과 기술의 확산과 축적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은 중요하게 여겨져야 한다. 저자는 낭만주의 미학과 예술에서 강조하는 천재적 개인과 창조력에 대한 신화를 뒤로하고 “인간이란 거대한 기억”(62쪽)이라 정의 내린다. 이는 물론 질적 도약이 아닌 집단으로서의 양적 축적을 말한다. 김태환이 인간의 의지, 내면, 정신이라는 추상적인 면을 중시한다면, 김재인은 “나의 생각이란 시한부 소유물”(63쪽)에 가까울 수 있으며 그 휘발성을 지켜주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물질’ 혹은 ‘미디어’”(62쪽)라고 강조함으로써 그것을 외화된 집합적 사물성으로 바라보며 그 반대편에 선다. 그런데 이 글은 ‘컴퓨터가 자연어를 다룬다는 것’이라는 장부터 급작스러운 단절을 드러내며 도약한다. 앞에서 인간의 생각 자체를 미디어이자 집단 기억의 저장고로 본 것과 다르게, 예술과 창작의 영역을 다룰 때는 컴퓨터가 자각 혹은 성찰을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컴퓨터는 예술 능력이 없다”(66쪽)고 확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기계를 바라보는 김재인의 시점에는 도구적 차원과 존재적 차원이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글은 창작의 정의를 “스스로 선택하고 평가하는 능력이 발휘되었느냐”(67쪽)에 두는데, 중요한 점은 저자가 그 평가 주체의 자격을 ‘생물’로 단정한다는 것이다. 생물은 “생존과 번식을 스스로 반복”하는 유기체이고, 이 글에 따르면 평가 역시 “생존과 번식에 성공하기 위한 지각 처리와 행동의 연쇄”(70쪽)다. 이 기준에 따르면 애초에 기계는 아무리 ‘집단 기억’의 ‘미디어’로서 최적화되어 있다고 해도 무기물이라는 점에서 평가 능력이 없는 것으로 배제 당할 수밖에 없다. 그가 이렇게 유기체의 항상성과 관련된 기준을 평가 능력과 일치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저작 『AI 빅뱅』에서 참조할 수 있는 지점을 좀더 찾아보면, 이는 “몸의 고집스러움”5)이라는 말과 함께 구체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심지어 같은 프롬프트를 주더라도 생성물이 크게 바뀌는 무작위성randomness을 보여주는데, 이는 휘발성이 강하다. 그러나 인간은 불완전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자기 생각을 고수하는 면을 지니는데, 저자는 이를 몸에서 비롯된 문제로 보는 것이다. 이 장에 바로 이어지는 질의응답에서 한 질문자는 “세계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몸을 가지는 것이다”6)라는 전제 위에서 인공지능이 세계를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강인공지능으로 발전할 방법이 있는지 묻는데, 김재인은 이에 대해 ‘몸의 회복력’에 대한 이야기로 답한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몸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몸은 생각을 “바로 휘발되지도 완전히 고착되지도 않은 어느 중간 지점”7)에 붙잡아둔다는 것이다. 김재인은 인공지능과 다른 인간을 논하는 데 있어 복잡성을 가진 신체의 차원을 살려내고자 한다. 하지만 창작을 논하면서부터는 김태환의 논의와 유사한 탈신체화의 방향을 답습한다. “진화 과정에서 살아남았다는 특징”은 “필멸하는 인간이 불멸하는 비결”(70쪽)로 치켜세워지고, 진화를 위해 외부와 교섭하며 몸 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피드백 루프는 유기체만의 고유한 신체적 능력으로 남는다. 인공지능은 몸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케이트 크로퍼드가 인공지능은 추상화된 지능이 아니라 오히려 “체화되고 물질적인 지능이며 천연자원, 연료, 인간 노동, 하부구조, 물류, 역사, 분류를 통해 만들어진다”8)고 강조한 사실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혹은 그와 마찬가지로 유기체의 일차적인 목표로서의 생존이 진화의 필수 사항이라 말하는 신경과학 연구자 아닐 세스가 우리의 지각은 사실 ‘통제된 환각’이자 ‘최적의 예측’이라 설명했음을 염두에 두면 어떨까. 그에 따르면 ‘당신이 된다는 것being you’, 즉 인간의 ‘동물기계’적 본질과 의식적 자기 사이의 연결고리는 “신체 자체가 가진 현재와 미래의 생리적 조건에 대한, 형태도, 모양도 없고 제어 중심적인 지각적 예측”9)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인공지능 역시 지극히 물질적인 신체를 지니고 있으며 인간 역시 체화된 자아로 인한 기계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때, 예술을 창발시키는 창의성 개념이 다르게 읽힐 가능성이 열린다.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승부 후에 마련된 『인문예술잡지 F』 21호의 특집 ‘고함: 비-인간’에서 이진경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인공지능이 창조성을 가질 수 있는 논리적 가능성을 함축한다고 주장했다. 괴델의 정리는 수학적 추론의 과정 속에 언제나 결정 불가능한 명제가 ‘숨어’ 있을 수 있음을 의미하며, 그렇다면 인공지능의 수준에서도 공리계로 귀속될 수 없는 명제(결정 불가능한 명제)를 생성할 수 있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계의 형식적 추론에서조차 새로운 명제의 창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역으로 생명체의 진화가 어떤 경로를 밟아왔는지 설명한다. “변이mutation의 누적에 의해 진화는 이루어”지지만 처음 “생명체의 변이는 지배적인 개체군 안에서 일종의 ‘장애자’나 ‘고장’으로 간주된다”10). 하지만 환경이나 생존 조건에 따라 변이가 진화된 변종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면, 기계가 만들어내는 예측되지 않은 결과의 출현 역시 ‘고장’이나 ‘장애’가 아니라 새로운 능력의 ‘창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창조의 출발점이 아니라 결과물에 초점을 맞춘 논의다. ‘인간 없는 예술’이 도래하려는 시기에 우리는 다시 인간적인 무언가를 기계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는 기술적 특이점이 올 때마다 반복되어온 정동이기도 하다. 이 앞에서 좀더 차분하게 이전의 논의들을 정리하고 축적할 필요를 느낀다. 2024년 『쓺』의 특집이 창작자이자 예술가가 서 있는 주체의 자리에서 출발했다면, 2016년 『인문예술잡지 F』의 특집은 그 결과물인 작품의 자리에서 논의를 시작했다. 그렇다면 감상자의 자리에서 본다면 어떤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 신예슬의 『음악의 사물들』은 음악이 기술적 혁신을 이루는 순간마다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넓혔는지를 따라 음악사를 재구성한다. 자동 피아노의 경우에도 그 연주를 더 실제처럼, 더 자연스럽게, 더 인간답게 만들겠다는 목표는 거의 달성되었다. 그러나 자동 피아노가 만들어낸 경험이 정말 특별하게 의미화되는 것은 인간의 연주라는 원본 혹은 목적지를 버렸을 때이다. 인간의 연주라는 목적지를 소거해버리고 이 사물의 독자적인 가능성에 집중해보는 것이다. 연주하는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스스로 뭔가를 연주하거나 재생할 수 있는 악기가 등장했고 그것이 인간의 행동을 인간 없이 손쉽게 해냈다면, 그 기계의 핵심적인 가치를 ‘인간의 복제’가 아니라 ‘탈脫인간’으로 재조정할 수도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기계장치가 꼭 연주자를 대신할 필요는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기준점만 제거한다면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수많은 음악적 가능성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 자동 피아노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연주를 들려줄 수 있었다. 인간의 연주를 기록하고 인간의 연주를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연주의 대리자는 오히려 새로운 예술형식으로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스스로 연주하며 그 누구보다 기계적인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독자적인 예술형식 말이다.11) 우리는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에 대해서도 그것이 오히려 새롭고 독자적인 예술형식이 될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을까? 이 모방은 때로 인간에 한참 미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때로 인간을 이미 초월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계는 이미 희미해지고 있던 자율적인 개인 주체로서의 예술가상을 어떻게 바꾸어나갈까. 또 인간의 예술적 집념은 어떻게 예술 형식들을 바꾸어나갈까. 모든 것이 뒤흔들리는 가운데, 불안만이 정확하게 인간의 자리를 응시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이 불러오는 균열 속에서 인간에 대한 고정된 사유를 과감하게 벗어날 수 있을 때 인간과 예술 모두에 새로운 시야가 열릴 것이다. 1) 심효원, 「지렁이의 부드러운 건축물 만들기」, 『쓺』 2024년 상권, 368쪽.2) 시앤 응아이는 디지털 자본주의가 가속화되던 2010년대 후반의 미술과 문학작품을 분석하면서 기믹의 이론화에 착수하는데, 기믹은 의심스러운 도구성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키치와는 다른 저질 예술로 취급되면서도 자본주의 가치 체계와 그 이면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의심을 표면화하는 미적 전략으로도 쓰일 수 있다. 윤원화는 이 글을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공모 프로그램 선정작인 시각예술 콜렉티브 랩삐의 에 대해 설명하며 시작한다. 이 전시는 관객이 옥수수 농사 시뮬레이션을 완수한 후 ‘콘 코인’이라는 가상 화폐를 받아 실제 뻥튀기 한 봉지와 교환하는 경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복 노동이 이에 비례하는 가치 창출과 기쁨으로 이어지는 대신, 콘 코인이라는 불분명한 요소가 끼어들면서 매끄러운 교환 가능성이 흔들릴 때 이 간극에서도 기믹이 관찰된다고 할 수 있다.3) 윤원화, 「땅을 파는 손」, 같은 책, 383쪽.4) 캐서린 헤일스,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사이버네틱스와 문학, 정보 과학의 신체들』, 허진 옮김, 열린책들, 2013, 27쪽.5) 김재인, 『AI 빅뱅—생성 인공지능과 인문학 르네상스』, 동아시아, 2023, 153쪽.6) 같은 책, 156쪽.7) 같은 책, 157쪽.8) 케이트 크로퍼드, 『AI 지도책—세계의 부와 권력을 재편하는 인공지능의 실체』, 노승영 옮김, 소소의책, 2022, 17쪽.9) 아닐 세스, 『내가 된다는 것—데이터, 사이보그,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 의식을 탐험하다』, 장혜인 옮김, 흐름 출판, 2022, 243쪽.10) 이진경, 「인공지능시대의 예술작품」, 『인문예술잡지 F』 21호, 2016, 25쪽.11) 신예슬, 『음악의 사물들—악보, 자동 악기, 음반』, 작업실유령, 2019, 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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