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현대비평 2024년 가을호(제20호)
절망을 영속하게 하는 낙관 — 김지연 「반려빚」(2023), 위수정 「몬스테라 키우기」(2022), 성해나「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2024)
1. 프레카리아트라는 정체성
현재 우리에게 가장 크게 체감되는 시대 감각은 불안정성이다. 소비와 유행의 트렌드가 변화하는 속도는 나날이 가속되고 있으며 개인의 정치 경제적인 계층의 이동 또한 그 어느 때보다 유연해지고 있다. 가령, 고용의 불안정성은 자주 노동의 유연성으로 환치되며 '불안정성'과 '유연성'은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와 그들의 이해 관계에 따라 동일한 사안에 서로 다른 맥락을 부여함과 동시에 개별 당사자들의 입장을 정당화 하는 데에 기여한다. 프레카리아트(precariat)는 이처럼 상호 모순되어 공존 불가능해 보이는 이중의 의미, '불안'과 '유연'이라는 단어 모두 함축한다. 프레카리아트는 영국의 경제학자 가이 스탠딩(Guy Standing)이 2012년부터 본격 사용한 용어로 불안정한 삶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저숙련 저임금 노동을 지속하는 계층을 의미하며 그는 이것이 전통적인 계급 구조의 바닥을 새롭게 뚫고 시대의 최하층에 위치하는 계급이라고 말한다.1) 한편, 우리에게 보다 친숙한 용례로서 프레카리아트는 통상적으로 비정규직 노동자와 비노동자를 뜻하기도 한다.
불안함, 위태로움 등을 뜻하는 'precarious'와 노동 계급을 뜻하는 'proletariat'가 합성된 '프레카리아트'는 특히 청년 세대의 주요한 계급적 정체성으로 자리한다.2) 불안함을 높은 유연성으로 생각한다면 언뜻 청년 세대는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 고도의 적응력을 발휘하며 행복을 추구할 수 있을 듯 하지만 그렇지 않다. 말하자면, 불안정성은 신자유주의 가속류 속에서 탁월하게 생존할 수 있는 미덕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적이다. 공적인 영역인 사회적인 성과(career)와 사적인 영역의 성취 중 하나인 사랑(연애, 결혼 등) 모두를 획득하는 것은 고사하고 둘 중 하나조차도 온전히 가지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 삶의 안정성과 일, 사랑 세 가지의 목표 그 어느 하나도 획득하기 어려운 트릴레마(trilemma)3)에 처한 프레카리아트는 그러한 불안정성을 자신의 생존 원리로 삼으면서 오히려 더 나은 안정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믿음을 포기한 체념의 자리를 적극 수용하고 그것을 삶의 주요한 태도로 실천한다. 안정성을 획득하기 위한 '노오력'을 해봤자 실패할 것이 분명한 국면 안에서 그들은 자신을 비관하고 냉소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현재'만을 자신의 것으로 남겨둔다.
예컨대, 끝없는 실패 속에서 무기력하게 머무르기 보다 경쟁 구도 자체로부터 이탈하는 임시적 유보를 전략적으로 채택하는 행위는 "어떤 자책이나 왜곡 없이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불안을 안정이라는 국면에 미달되는 양태로 여기지 않는 일"이자4) 그리하여 개인을 초과하는 불안이 자신의 욕망과 정체성을 파괴하지 않도록 적극 방어하는 행위다. 이 글에서 다루는 세 편의 단편 소설은 이러한 문제 의식을 다시 한 번 재검토 하며 더 나은 삶을 욕망하는 이들의 노력이 핍진하지만 한편으로 그것이 구조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한계 속에서 실행될 때 주체가 마주하게 되는 모순들을 상기하게 한다. 보다 여유로운 의식주의 향유와 더 나은 문화 윤리적 가치를 향유하고자 하는 실천을 지속하려는 몸짓 속에서 행하게 되는 전인격적 관계의 배신과 인식론적 기만 등은 신자유주의 한국의 청년 세대, 프레카리아트로 정체화 '된' 이들의 실존적인 위기와 그 세목들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의미심장하게 발견된다.
2. 갑을 관계로도 구속할 수 없는 관계의 불안정성—김지연 「반려빚」
송지현의 단편소설 「우리가 여름에 먹는 것」(『우리가 여름에 먹는 것』 문학동네, 2021)과 장류진의 「공모」(『연수』, 창비, 2023) 그리고 박상영의 연작 소설 『믿음에 대하여』(문학동네, 2022)과 더불어 이후에 발표된 다른 여러 소설 속에서도 그러한 청년 세대의 불안정성은 세계의 배경으로 공고히 자리하고 있다. 청년 프레카리아트의 불안정한 삶의 양태는 이제 시대 안에서 매우 '안정적'으로 안착하여 자연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특히, 물신주의 시대 속에서 사람과의 관계를 돈의 힘으로 조정해보려는 노력들이 그렇다. 가령, 김지연의 단편소설 「반려빚」(『2024 제1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4)에는 박상영의 주인공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안정적인 유지에 끝없이 실패하는 레즈비언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다만, 박상영의 게이들이 아파트를 매매하고 외제차를 무리 없이 구입할 정도의 경제력을 가진 중산층인 반면, 여러 일을 전전하며 어렵게 빚을 갚아 나가는 레즈비언 '정현'은 모아둔 자산이 거의 없는 이 시대의 전형적인 프레카리아트의 경제적 계층성에 보다 부합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애인 '서일'과 동거할 집을 마련하기 위해 대출한 전세 자금, 그리고 서일이 네일 숍을 차리기 위한 자금으로 빌려간 1억 6천만원과 정현은 그 어떤 존재자들의 관계보다도 강력한 '반려' 관계로 살아간다.
소설은 '반려'인의 개념을 혈연 가족보다 더 친밀한 존재, "자신의 치부도 다 내보일 수 있는 그런 사이"이자 "서로에게 영순위가 될 수 있는"5) 인생의 동반자로 정의한다. 빚이 어떻게 누군가의 반려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의아함은 소설의 정의를 다시 살펴보는 과정에서 이해된다. 빚은 누군가의 부끄러움이면서 동시에 (그것이 한시적이든 보다 긴 시간이든) 경제 활동을 포함한 여타의 모든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영순위'의 사안이 된다. 그가 언제, 어디에 있더라도 빚은 그를 따라다닌다.
빚이야말로 정현이 잘 돌보고 보살펴 임종에 이르는 순간까지 지켜보아야 할 그 무엇이었다. 빚 역시 앞으로 수년간은 정현의 옆자리를 떠나지 않고서 머무를 것이고, 정현이 죽었나 살았나 그 누구보다도 계속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다. 빚이야 말로 정현의 반려였다. (167쪽)
박상영의 소설은 중산층의 지위를 무리없이 누릴 만큼 많아도 사랑의 관계를 안정화하지 못하는 국면을 보여주면서 돈이 신적 지위를 점한 신자유주의의 자장 안에서도 그것만으로는 삶에서 중요한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다는 한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김지연의 소설에서 돈은 인물의 사랑 뿐만 아니라 삶 자체를 저당 잡는 '반려'인의 지위를 누리는 국면까지로 나아가면서 그 한계를 파쇄한다. 소설은 빚, 돈의 폭력적인 유형력을 '반려'(accompany)라는 부드러운 언어로 전환하여 그것이 지닌 파괴력과 공격성을 숨기지만 빚은 결코 정현에게 상호 돌봄이나 상호 안락을 제공하지 않는다. '반려빚'은 오히려 삶의 가장 큰 대타자로 들어서고 '반려'의 호혜성과 '빚'의 폭력성은 서로 상충하며 동시대 퀴어 청년의 실존적 위기를 폭로한다. 반려빚과 함께 밤산책을 나가게 되는 꿈 속 상황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목줄을 쥔 쪽이 정현이 아니라 빚이라는 점에서 더욱 심상치 않다.
그날 밤 꿈에 정현은 반려빚과 함께 산책을 나갔다. 목줄을 쥔 쪽이 반려빚이었던 것이 좀 다르긴 했지만 개와 산책하는 것도 이와 비슷하리라 생각했다. 정현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목이 말라 시원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싶어져 반려빚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카페에 잠깐 들를까? 반려빚은 정현이 꽤 가엽다는 듯이, 그러나 목줄을 쥔 자로서 단호해야만 한다는 듯이 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집에 커피믹스 있잖아. 정현은 카페 쪽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고 꽤 오래 낑낑거렸지만 별도리가 없었다. (...) 왜 원하는 것을 주장하지도 못했을까. 정현은 돈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고 말았다. 어떤 때는 그런 마음이 정현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한없이 작아지고 싶다는 마음이...... 부피도 질량도 거의 없다시피 한 아주 작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반려빚의 가장 아름다운 형태 역시 점점 작아지다가 완전히 사라지고 마는 것이듯 정현은 자신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꿈결에 생각했다. (167-168쪽)
정현에게 한 잔의 커피조차 허락하지 않는 정현의 반려빚은 일상의 모든 선택을 감시하고 검열한다. 이쯤되면 자신에게 부당한 빚만을 떠넘기고 떠난 전 애인 서일에게 원한을 가질 법도 한데 정현은 오히려 그녀를 변호한다. "서일도 전세 사기의 피해자였다." (169쪽) 어쨌거나 대출을 직접 신청한 것은 정현 자신이었고, 게다가 정현은 서일과의 관계의 불안정성을 함께 진 빚(명의는 정현의 것이었지만)을 통해 타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동성 커플의 법률혼이 인정되지 않는 한국의 상황 속에서 그들 관계의 효력을 빚이 지닌 구속력에 의존하려 했던 것이다. 연인 관계에서 파생되는 부채감을 정현이 자기 명의의 대출로 사랑을 증명하고자 하는 마음도 거기에 한 몫 한다. (“차용증을 썼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그때 정현은 서일을 백퍼센트 신뢰했기 때문에 그런 걸 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얼마만큼 믿고 있는지를 서일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기도 했다. 우리 사이에 이런 건 필요 없어." 169쪽)
요컨대 소설이 제시하는 '반려빚'은 실상 두 개다. 하나는 정현이 동거할 집과 서일의 네일 숍 마련을 위해 대출한 빚, 다른 하나는 정현이 서일과의 관계에서 늘 시달렸던 빚진 마음, 늘 더 미안한 쪽이 느끼는 감정의 빚이다. 말하자면 정현(乙)이 서일(甲)의 금융상의 신용을 대신함으로써 갑이 좀처럼 내어주지 않는 마음을 스스로의 채무로 환원하면서 둘 사이의 간격을 억지로 메우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격적인 대우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관계의 인위적인 조정은 금세 힘을 잃는다. 서일에 대한 자신의 신용 점수를 높이기 위해 실제 거래의 신용 점수를 희생하고 포기했던 정현은 그러나 도리어 자신이 그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되고 마는 심각한 불신의 상태에 도달한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고 내가 무얼 잘못했나 자책했으며 이제 앞으로 사람을 어떻게 믿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172쪽) 스스로에 대한 신용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현은 자신을 떠나 남자와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온 서일을 보면서 다시 서일에게 “호구 잡힌 채로, 목줄 맨 채로 살고 싶"(174쪽)다고 느낀다. 소설의 초반에서 제시되었던 반려의 개념—친밀감과 수치심, 그리고 삶의 최우선 순위라는 세 가지 조건에 의한 정의는 자신에게 돌아온 서일을 바라보며 모순적인 감정을 느끼는 정현의 진술로부터 재정의된다. 정현이 체현하는 '반려'의 얼굴은 거대한 구속력 안으로 포박되고 싶다는 욕망이다. 사법적인 효력과 정부의 인정을 받을 수 없는 동성 커플은 관계가 아무리 안정된 것처럼 보이고 오랜 시간을 함께 하더라도 항상적인 불안을 늘 감내해야만 한다. 두 사람의 결합이 사회라는 제3의 시선, 경제 정치적 물적 토대로부터 인정되지 않은 채 유지되는 관계라면 그것의 종료조차도 '종료'로 여겨지지 않는다. 애초에 '시작'과 그 과정적 유지가 유효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관계는 '끝'마저도 끝으로 의미화 되지 못한다.
퀴어 커플의 제도적 인정에 대한 요청은 사법 문화적 정상성을 획득하는 것이라기보다 그들이 영위하는 실질적인 삶의 실존을 다른 시민 주체들과 더불어 동등하게 보호받고자 함이다. 한 개인이 오롯이 자기 몫의 일상과 삶을 안정적으로 영위하기 어려운 이 시대에 반려는 아주 중요한 개념이 되지만 동시에 점점 성취하기 힘든 자질이 된다. 물론, 법적인 구속력이나 보호력만으로 건강한 반려 관계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이상적인 반려는 그 누구의 목에도 '목줄'을 매지 않은 무구속의 자유로운 상황 속에서 서로의 자발적인 의지와 욕망이 서로를 돌보는 데에 있다. 그렇다면 어쩌면 그 어떤 외적 보호 장치도 없는 퀴어 커플의 관계야 말로 극단적인 반려의 진정성과 실천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시일이 한참 지나서이긴 하나, 서일은 이혼 후 전 남편에게 받은 위자료로 정현에게 진 빚을 모두 갚고, 정현도 남은 전세대출보증금을 상환한다. 정현은 오랜 시간동안 반려하던 빚을 드디어 떠나 보내면서 서일에 대한 모든 미련 또한 변제한다. 돈을 빌린 후 잠적하고 어느 날 돌연 나타나 정현의 손을 붙잡고 “너는 나를 못 믿는댔지만, 나는 너를 믿어."(182쪽)라고 뻔뻔하게 말하던 서일로부터 정현은 드디어 놓여난다. 빚의 완전한 청산을 통해 서일과의 폭력적인 관계 또한 함께 끝낸 정현은 그날의 날짜를 구성하는 숫자들로 로또를 사기로 마음 먹지만 자신의 행운을 '돈'에 쏟아붓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대신,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 아낌없이 마음을 다 주겠다고 다짐한다. 이때 반려빚은 다시 한 번 정현의 꿈에 등장하고, 그것은 적반하장으로 정현에게 이제 그만 반려의 관계를 끝내자고 말한다.
반려빚은 정현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정현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 말이 가당치 않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있을 수 있는 꿈이라고 해도 그건 말이 안 됐다.
"우린 진작 헤어졌잖아."
반려빚은 잠시 정현의 말을 곰곰 생각해보는 듯했다.
"참, 그랬지." (188쪽)
빚을 모두 갚은 것은 다름 아닌 정현이고, 서일과의 헤어짐을 납득하고 새로운 사람을 사랑하겠노라 마음 먹은 것도 정현이다. 그런데 마치 그러한 헤어짐은 없었다는 듯 '빚'은 천연덕스럽게 정현에게 먼저 이별을 고하려 한다. 오랜 시간동안 정현의 삶을 구속하던 '빚'은 관계의 종료마저도 제가 갑(甲)으로서 실행하려 한다. 그러나 을(乙)의 지위를 벗어난 정현은 이를 강력히 거부하고 빚이 떠난 자리에 소금을 꺼내 팍팍 뿌린다. 정현은 이제 자신의 삶에 대하여 온전한 갑(甲)으로 거듭난다. 그러나 이 모든 고난, 경제적인 불안과 그로 인한 삶의 제약과 위축, 타인과의 안정적인 관계, 그리고 자기 신뢰를 스스로 잃지 않으려면 "열심히 셈하고 값을 따져"(188쪽)야 한다는 깨달음을 체득한 정현은 쉽게 새로운 사랑을 다시 시작할 수 없는 듯 보인다.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난관들은 우리를 성장시키기도 하지만, 자기 존재에 대한 소유권을 오롯이 보전하기 어려울 정도의 어려움은 우리를 소진시키고 깊은 두려움을 학습시키기 때문이다. “마침내 0이 된 기분"(188쪽)으로 겨우 홀가분해진 정현은 "그 이상을 바라는 것도 이상하게 무섭기만 해서 그저 0인 채로 오래 있고 싶"(188쪽)다고 말한다. 이 시대의 프레카리아트는 '0'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너무나 벅차다.
3. 배신의 합리화—위수정 「몬스테라 키우기」
인간은 삶 속에서 무수한 타자들과 비/의도적으로 연루되지만 각자도생이 삶의 전략이 되는 신자유주의 시대 속에서 그러한 연결은 삶의 든든한 기반이 되기보다 오히려 주체를 소진시키며 무력감 속으로 몰아넣는 방해물에 가깝고, 반려나 돌봄의 행위는 가장 작은 단위인 '나'로 수렴된다. 앞서 살펴 본 김지연 소설의 '반려빚'에서도 그러하듯 '빚'이 결국 '나'를 옥죄는 가장 강력한 대타자라면 그 또한 '나'의 일부이기에 '반려빚'은 결국 '나'의 죄책감과 연루되며 주체의 세계를 일인칭적 세계 속으로 닫아버리는 효과를 낳는다. 프레카리아트 주체들이 경험하는 경제적 곤란은 이렇듯 체념과 포기, 수용의 긍정으로 나아가기도 하지만 또는 그를 타개하고자 하는 새로운 노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재현의 노력이다. 부모로부터 상속/증여 받은 재산이 아닌 순수한 노동 소득만으로는 계층 상승은커녕 삶의 현재 조건을 유지하기도 어려운 상황 속에서 프레카리아트는 실질적으로 재화를 획득하여 소유하는 노력보다 다만 그것을 보유한 것처럼 보이길(passing) 바라면서 타인들에게 비춰질 자신의 모습을 열심히 편집한다.
가령, 어떤 이들은 무리해서 구입하는 명품과 경제적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차량 등 사치재의 소비를 통해 자신의 경제력을 과장하여 전시하며 타인이 인지하는 자신의 경제 문화적 계층성을 상승시키고자 한다. 편집된 자신의 모습은 자신이 실제로 누리고 있는 삶의 조건을 비약적으로 초과하고, 온라인 SNS 공간에서 비추어지는 '나'의 모습은 실제 현실의 '나'의 모습의 일부 보여주는 데에 그치지 않고 대체되기까지 한다. 위수정의 단편소설 「몬스테라 키우기」는 동시대 청년 세대들의 계급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며, 타인의 재력을 마치 자신의 것인 듯한 맥락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정체성을 훔치고 현실에서의 빈곤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인물이 등장한다.6)
유복한 가정 환경에서 발레를 전공했으나 미국 유학에 실패하고 마약에 손을 대는 바람에 재활원 신세를 졌던 '민희'는 어느 해안 도시의 방 네 개짜리 아파트에서 요양 중이다. 생계 유지를 위한 노동을 해본 적이 없는 딸을 그 누구보다 진심으로 챙기는 어머니의 관심은 민희에게 사랑이 아니라 귀찮은 구속일 뿐이다. 위태로운 딸을 혼자 내버려둘 수 없는 어머니는 입주 도우미를 구하려 하고 민희는 '돌봄 노동자'와 함께 사는 대신 '룸메이트'를 구하고자 하고 (“룸메이트 구해요. 성별 무관, 대학생, 휴학생 환영. 식사 제공, 청소를 잘 하지 못해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 260쪽) 그래서 지역 대학생인 한재순이 민희의 집으로 들어온다. 보육원 출신인 재순은 어렵게 대학에 진학하여 현재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며 월세를 충당한다. 특히 청소에 능한 그가 계약서에 적힌 사항들보다 훨신 많은 가사 노동을 분담하는 것에 대해 민희는 부채감을 느끼면서 동시에 친밀감을 느낀다. 왜소하고 마른 체격으로 다정한 남성성을 발휘하는 재순에게 민희는 성적 이끌림을 느끼고, 서로 점점 더 가까운 사이가 되면서 민희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느라 쪼들린다는 재순에게 월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고까지 말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민희는 재순의 제안으로 이파리 한 장에 백만 원을 훌쩍 넘는 고가의 식물인 몬스테라 알보를 들여오고 집안일과 마찬가지로 재순은 애지중지 식물을 키운다. (“재순 씨가 키워볼래요? (……) 제가 어떻게. (……) 나보다 훨씬 비싼 몸들인데......." 267쪽) 어느 날, 민희는 인스타그램에서 추천 계정으로 뜬 한 남자의 피드에 자신에 집에 있는 것과 똑같은 화분에 꽂혀 있는 몬스테라 알보를 보게 된다. 계정 속 남자는 "북유럽산 조명에 조예가 있"고 "자주 요리를 하는 미식가"(273쪽)였으며 어딘지 기시감이 드는 너른 거실의 소파에 앉아 여유를 즐긴다. 박재희라는 이름의 계정 주인은 사실 민희가 함께 지내고 있는 한재순이었던 것이다. SNS 속 박재희의 얼굴은 현실의 한재순의 빈곤한 모습과 확연히 다르다. ("박재희의 얼굴에는 그늘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눈은 초롱초롱했다. 그러나 한재순의 눈은 종종 멍했고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내려와 있었다." 274쪽) 민희는 한재순이 박재희라는 가짜 신분으로 민희의 집과 소유물, 그리고 부유한 생활을 마치 자신의 것인 것처럼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되지만 그녀는 재순을 추궁하지 않고 지켜본다.
재순과 함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엄마에게 민희는 그가 지역의 대학생이며, 실은 게이라고 둘러대면서7) 안타까운 처지의 사람을 도와주는 일이라고 엄마를 안심시킨다. 꾸준히 인스타그램 게시물을 업로드 하던 재순, 박재희는 급기야 사진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민희의 존재를 두고 “도우미 이모님"(277쪽) 이라고까지 표현한다. 현실은 자신이 민희의 집에서 청소와 각종 가나 노동을 하는 처지이지만 인스타그램에서는 그와 정반대로 고용주를 피고용인으로 격하하고 서로의 계급을 뒤바꿔 전시한다. 인스타그램을 이용해 민희의 정체성을 가로채고 자신의 손에는 없지만 타인의 눈에게는 분명 그의 것으로 여겨질 행복을 만끽한다. ("와, 제 인생 최고의 연말이네요." 280쪽) 너른 집과 몬스테라들, 민희의 어머니가 보낸 고급 선물들까지 모두 그의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러나 타인의 정체성을 도용하는 자의 죄책감만은 그의 것이 아니다. 민희가 그런 그의 만행을 지켜보기만 하고 개입하지 않는 것은 재순으로 인해, SNS 공간에서 전시된 친구들의 '좋은 삶'이 허구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을 그녀가 깨닫기 때문이다. (“민희는 그동안 보았던 친구들의 모습도 가짜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안도했다." 280쪽) 게다가 지방의 소도시에서 혼자 요양을 하는 민희에게 재순과의 관계는 그녀에게 큰 자극이 되어주었으므로 굳이 그를 제지할 필요가 없다. 자기보다 힘든 삶의 조건에 처한 이의 불행과 기만을 연민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며 그로부터 자신의 배타적인 우월성을 획득할 수도 있다.
민희는 재순의 월세를 면제해주고 그의 비밀을 모르는 척하면서 한 장에 백만 원이 넘는 몬스테라의 이파리를 잘라 물꽂이를 하게 해주는 남모를 관용을 베풀지만, 재순은 민희의 배려와 호의를 점점 당연하게 여긴다. 그는 민희가 준 몬스테라 이파리를 열심히 키워 장당, 60만원, 70만원, 95만원에 팔고 진심으로 행복해하지만, 재순이 민희의 집에서 떠나게 되는 사건 또한 바로 그 몬스테라 이파리 때문에 발생한다. 민희가 재순에게 농담으로 자신에게 판매 수수료를 50%쯤 줄 수 있냐고 묻자 그날 밤 재순, 박재희의 인스타그램에 이런 문장이 작성된다. "자본주의의 개년, 왜 사는 걸까." (281쪽) 크게 상처 받은 민희는 사람을 쉽게 믿지 말라던 어머니의 말을 떠올리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지만, 다시 접속한 인스타그램에는 해당 문장이 사라지고 다음과 같이 수정된 문장이 남아 있었다. (“자본주의의 개념, 왜 사는 걸까." 282쪽) 박재희는 이내 인스타그램을 비공개 계정으로 전환한다.
언제든지 실시간으로 수정할 수 있는 온라인에서의 발화는 원본이 유지될 수 없는 조건 하에서 행해진다. 마치 인스타그램의 박재희가 계정을 삭제하면 그의 집과 재산, 부유한 생활 환경이 모두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민희는 “어차피 박재희는 진짜가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며"(283쪽) 마음을 다스리려하지만, 그녀가 그에게 품었던 연민과 안도감은 심각한 불쾌감으로 변하고 이에 따라 그의 비밀을 알고 연민하던 우월한 주체로서 민희가 누리던 지위는 불안하게 흔들린다.
민희는 자신의 존재를 들킨 게 아닌가 순간 뜨끔했지만 생각해 보면 민희가 잘못한 일은 없었다. 말해버릴까. 넌 한재순이지 박재희가 아니지 않냐고, 여긴 네 집이 아니지 않냐고. 여기에 네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냐고, 너는 그저 식물 잎을 잘라서 파는 주제에...... 민희는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눈을 감았다. (...) 눈이 따가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284쪽)
서사는 여기까지만을 조명하고, 이후 재순은 민희의 집을 나온다. 몬스테라 잎들을 조심스럽게 봉투에 담아 손에 들고, 끝내 사과는 하지 않은 채로 집을 빠져나간다. (“재순은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몬스테라 물꽂이 한 것만 저 주시면 안될까요?" 285쪽) '자본주의의 개념' 사건 이후로 민희가 재순과 어떤 과정을 겪는지에 관해 소설은 보여주지 않지만, 재순의 조심스럽지만 한편으로 뻔뻔하게 비굴한 태도와 그의 사과 없었음을 떠올리는 민희의 회고를 통해 둘의 친밀감은 완전히 사라지고,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았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사람을 쉽게 믿어버린 자신에 대한 자책감만을 남겨둔 채, 민희는 다시 동거인을 구하는 글을 올린다. 이전에는 "청소를 잘 하지 못해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260쪽)을 구한다고 썼지만 이제는 그녀가 얻고자 하는 교환 가치만을 제시한다. (“도우미 구함. 주 3회 3시간, 청소 및 빨래. 40세 이상 여성." 285쪽)
민희는 김지연의 「반려빚」의 '정현'과 마찬가지로 사람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다. 가난해서 빚에 쪼들리는 처지의 사람도, 반대로 아주 부유해서 노동을 전혀 하지 않고 사람을 고용하기만 하는 사람도 모두 다를 바 없이 인격적 가치와 만남, 교류, 그리고 소통에 대한 가치를 상실하고 만다. 신자유주의의 물신 지배는 한 사람의 가치를 그가 지닌 문화 경제적 계급성의 물질적 가치만으로 환원하면서 그 폭력성을 드러낸다. 누군가와 가까이 지내는 일, '반려'의 관계를 맺고 함께 거주하는 일은 주체가 타자와 열린 세계에서 연루되는 상황이 아니라 주체가 타자가 지닌 물적 기표를 공유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직/간접적으로 소유하게 되는 양상으로 전환된다.
더불어 재순의 '절도'는 자신이 도달할 수 없는 욕망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노오력'의 일환이기에, 그리고 자신과 달리 아무런 '노오력' 없이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젊음을 무료하게 낭비하고 있는 민희의 기호들을 뺏는 것은 그에게 자의적으로 정당화된다. '자본주의의 개년'이 실제로 민희를 지칭하는 것이든 아니든, 그것이 수정된 '자본주의의 개념', 즉 돈은 돈으로부터 비롯한다는 자본주의의 근본 명제는 민희의 삶과 재순의 절도를 지시한다. 자본, 생산 수단이 없는 자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내다 팔 수밖에 없고, 그런 맥락에서 민희의 호의로 얻은 몬스테라 이파리는 재순이 (어떤 방법으로든) 획득한 생산 수단이기에 그가 이파리들을 물꽂이 하며 내다파는 것 또한 자본주의의 생산 원리에 그저 충실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재순이 민희를 전혀 인격적으로 대우하지 않았지만 그 또한 서로의 경제적 지위의 위계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므로 재순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끝까지 민희에게 사과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자본주의의 개년'인 셈이다.
위수정의 「몬스테라 키우기」와 김지연의 「반려빚」은 언뜻 서로 정반대의 계급성을 지닌 인물이라면 정반대의 세계를 경험하리라는 통상적인 예측을 파기하며, 재력의 정도와 무관하게 이 시대의 관계는 철저히 자본주의의 교환 가치로 환치된다는 점을 서늘하게 드러낸다. 각자도생은 시대의 황금률이 되어버렸다.
4.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계급성—성해나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
한편, 재순이 애지중지 키워 한 잎씩 내다팔던 몬스테라가 특이한 무늬와 색을 지닐수록 더욱 비싸게 팔리는 것처럼, ("식물은 돌연변이를 더 귀하게 쳐주는구나. 사람들은 참...... 이상하지." 283쪽) 괴상하고 이상한 외양에 더욱 더 높은 가치를 매기는 것처럼, 우리 시대는 이제 타인이 갖지 않는 '나'만의 고유한 개성과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강조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재순이 자신의 힘으로 획득하고 소유할 수 없는 높은 경제력과 자산을 실제로 얻기를 애쓰는 대신, 그것을 획득한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기표들을 배치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편집했던 것처럼 주체는 자신의 '다름'을 전시하고 과시할 수 있는 다양한 기표들을 열심히 수집한다. 기표가 함축하는 실질적인 기의가 진정으로 '나'의 것인지의 여부는 무관하다. 중요한 것은 '나'가 타인에게 어떠한 기표들을 통해 노출되는가 하는 것이다.
앞의 두 소설이 프레카리아트의 경제적 계급성을 둘러싼 갈등을 보여준다면 성해나의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는 그들이 획득하고자 하는 문화적 계급성과 그를 둘러싼 갈등을 첨예하게 보여준다.8) 「몬스테라 키우기」의 재순이 자신의 결핍을 타인의 기표를 훔쳐다 채웠던 것처럼, 프레카리아트의 경제적 빈곤은 문화적 기표들로 대리 보충 된다. 가령, 다수의 대중들이 모르는 예술 작품에 관하여 풍부한 지식을 뽐내고 소수의 사람들만이 향유하는 '엄선된' 고급 취향은 그들만의 정체성의 핵심을 이루며, 이들은 '돈은 없지만 지식과 취향이 남다른' 엘리트 의식을 형성한다. 높은 학력 자본과 지식, 그들이 추구하는 고도의 정치적 올바름에서 기인하는 그들의 태도와 행위는 그들에게 새로운 사회적 지위를 부여한다. 엘리자베스 커리드핼킷은 이들을 "야망계급(aspirational class)"이라고 부른다.
이 새로운, 지배적인 엘리트 문화집단을 아주 간단하게 야망계급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들의 상징적 지위는 간혹 물질적 재화를 통해 드러나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지식과 가치관을 보여주는 문화적 기표들—디너파티에서 신문 칼럼을 놓고 나누는 대화, 정치적 견해와 그린피스 지지를 나타내는 범퍼 스티커, 농민 직거래 시장에서 장보기 등—을 통해 드러난다. 이런 행동들과 기표들은 야망계급의 가치관을 함축하고 있으며, 그런 가치관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습득한 지식 또한 넌지시 드러내준다. (...) 이들은 크고 작은 온갖 선택을 할 때마다 자신이 사실에 근거해(유기농 식품, 모유 수유, 전기차 등의 장점에 관해) 올바르고 합당한 결정을 했다고 믿으면서 자신의 결정이 식견 있는 것이며 정당하다고 느끼고 싶어한다.9)
이전의 세계에서 경제적 물질적 부가 사회적 지위와 문화적 지위를 동시에 견인하는 기표였다면, 부가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지금의 세계에서 그들은 더 이상 경제적 지위가 사회적 문화적 지위를 대변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대신, 그들은 자신이 습득한 지식을 사용해 사회와 환경을 위해 노력하려 하고, 이 행위를 통해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체제를 이용하여 자신만의 배타적인 부를 늘리는 이들과 스스로를 구별짓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다른 이들과 달리 '더 나은 인간'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다. (“궁극적으로 야망계급의 성원들은 경제적 지위는 부차적인 것으로 둔 채 삶의 모든 측면에서 그들 나름대로 더 나은 인간이 되기를 야망한다." 43쪽-강조는 저자) 성해나의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는 이러한 야망계급의 성원들이 예술 작품의 윤리적인 재현을 둘러싸고 그들이 추구하는 정치적 올바름이 자신의 취향과 충돌할 때 발생하는 갈등을 전면화 한다.
소설의 '나'는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을 탄 영화감독 '김곤'의 팬으로 감독의 골수팬 스물여섯명이 활약하고 있는 팬클럽 "길티 플레져 클럽"(197쪽)에 들어간다. 이야기는 길티 클럽의 회원이 모여 2019 베를린국제영화제 시상식 생중계를 단체 관람하는 상황 속에서 전개된다. 야망계급의 경제적 지위는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을 띠거나 높지 않은 편인데 소설에서도 그러하다. "무려 네명이 영화과 재학생 혹은 졸업생이었고, 둘은 프리랜서 창작자, 나머지 한명은 주부"(204쪽)인 그들은 감독이 즐겨마신다는 “뒤셰스 드 부르고뉴”(203쪽) 와인을 나누어 마시고 그에 반해 카스나 하이트를 선호나는 '나'는 그들 속에서 모종의 거리감을 느낀다. ("그들은 모두 시네필 내지는 평론가 같았다." 204쪽) 예술 자본과 가까이 있는 그들은 일반인들은 좀처럼 접근할 수 없는 각종 지식과 정보의 격차를 만들며 '나'를 주눅들게 한다. 소설 속 공동체에서 실상 중요한 것은 지식의 유무, 앎의 객관적인 정도가 아니라 그를 경유해 형성되는 동질감, 동류 의식의 공유다. 이들의 공동체는 공통의 취향에 대한 자유로운 대화로 서로 연결되지만 한편으로 그러한 취향의 선택이 관계를 근본적으로 단절시키기도 한다.
소외감의 한가운데서 '나'는 '미지'가 비교적 많은 나이와 지방에서 상경한 사람이라는 비슷한 배경을 지닌 것으로 추정하며 내적 친밀감을 느끼고 다른 회원들로부터 느껴지는 굴욕감과 모욕 또한 해소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촬영 중 아동 배우 학대로 논란이 된 김곤의 작품을 좋아하는 '나'는 어떻게 '그런' 감독의 작품을 좋아할 수 있냐고 비난 받았던 자신의 경험을 미지를 통해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는 자신의 취향이 '올바르지 않고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불안한 '나'와 달리, '길티 클럽'의 회원들은 김곤이 윤리적인 인간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강화하려 애쓰고 그가 유기묘를 구출한 일화나 단역배우에게도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해주었다는 비화 등을 공유하며, 김곤에 대한 서로의 사랑을 합리화 하고 심리적 부담을 열심히 나눠 갖는다.
회원들의 열띤 대화 도중, 미지는 돌연 논란이 되었던 작품 「안타고니스트」의 촬영 중 발생한 '그 일'을 꺼내고 "눈물 연기를 못한다고 피멍 들 때까지 아이 팔뚝을 꼬집은 게 어떻게 실수로 포장"(219쪽) 될 수 있느냐며,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그것은 '실수'가 아니라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고 잘라 말한다. ("아이를 낳아보니까 알겠더라고요. 그게 실수가 될 수 없다는 걸. 끔직한 일이에요, 그건." 219쪽) '나'가 미지에게 품었던 기대와 정반대의 양상이 전개되면서 소설의 긴장감은 고조되고, 말없이 회원들 사이에 앉아있던 미지가 시상식 생중계 중에 진행되는 감독과의 전화연결을 손꼽아 기다렸던 이유가 바로 '그 일'에 대해 감독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어서였음이 밝혀진다. (“미안하지 않냐고 물어보고 싶었어요. 그 일이 없던 일이 될 순 없겠지만, 변할 수는 있으니까요." 220쪽) 그러나 회원들은 사실로 확정된 것도 아닌데 "어째서 무고한 사람을 죄인으로 모는지 이해할 수 없"(220쪽)으며 그것이야 말로 더 가혹한 일이라고 항변한다. 시종일관 미지를 향한 호의와 동류 의식을 느끼던 '나'는 미지에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우리는 믿어야"(220쪽) 되는 것 아니냐며 대항한다.
이후, 클럽 내부에서 내내 소외감을 느끼던 '나'가 미지에게 단호히 반박하자 회원들은 그녀의 편에 서서 공동체의 소속감을 공유하고, '나'는 그러한 동류 의식의 형성에 몹시 기뻐한다. 감독이 아동 폭력을 행사한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그가 했다는 보장도 없지만 하지 않았다는 보장 역시 없는 양가적인 상황일 텐데도, 그러한 불안 속에서 감독의 윤리성을 일방적으로 믿기로 선택한 '나'는 회원들의 공감과 지지 속에서 (실제 사실과 무관하게)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한다. "순간 고양감이 차올랐다. 내가 틀리지 않았구나." (222쪽) 사실 관계가 확인되지 않은 것이 여전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영화의 GV 행사에서 감독이 "피해자인 영현군에게도 진심으로 사죄"(225쪽)한다며 본인의 입으로 사실을 밝히고, '나'의 믿어 의심치 않았던 자신의 '올바름'과 윤리적인 취향은 시종일관 탁자 아래에 숨어 있던 '시한폭탄'이 터지듯, 그 자리에서 박살난다.10)
자신의 취향이 곧 자신의 정체성이 되는 '나'에게 그의 가장 큰 사랑이었던 영화 감독의 비윤리적인 행위는 '나'의 취향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것으로 변질시키고 '나'는 허탈한 마음으로 그 사랑을 포기(당)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 작품과 그것을 제작한 감독의 윤리적 자질이 곧 '나'의 윤리적 자질로 환치되는 국면 속에서 '나'는 더 이상 감독의 세계와 그의 작품을 예전처럼 자유롭게 향유하거나, 또는 자신의 취향으로 전시할 수 없다. 김곤은 GV 행사에서 피해자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후에도 아무 탈 없이 여전히 자신의 커리어를 성공적으로 지속시켜나가지만 '나'는 자신의 윤리성과 정치적 올바름, 나아가 정체성 자체를 오염시킨 그를 예전과 같은 마음으로 볼 수 없다. 이들에게 취향은 단지 문화 자본의 소비 행위가 아니라 열렬한 사랑의 수행과 마찬가지이기에 사건은 '나'의 취향과 그로 인한 문화적 정체성에 비가역적인 흔적을 남긴다.
소설의 결미에서 '나'는 팔 년을 사귄 남자친구인 길우와 임신한 상태로 치앙마이 여행을 떠나고 그곳에서 김곤의 인스타그램에서 보았던 호랑이 사육장에 간다. 호랑이를 만지는 관객이 위험하지 않도록 발톱과 송곳니를 모두 제거한 호랑이를 보는 순간, 그녀만 맡을 수 있는 악취가 코를 찌른다. 호랑이를 만져보라는 길우의 재촉에 계속 망설이던 '나'는 결국 사육사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호랑의 척추에 손을 얹고 기념 사진까지 촬영한다. 호랑이 '관광'을 모두 마치고나자 악취는 사라지고 그때 '나'는 악취의 정체가 무엇인지 불현듯 깨닫는다. '악취'는 소설의 제목이 지시하듯 '길티 플레저'—"죄의식을 동반한 저릿한 쾌감"(230쪽)으로, 윤리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요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사랑하고, 향유하는 데에서 오는 쾌락을 형상화 한다. (테이블 밑 시한폭탄'과 '호랑이', 그리고 '악취' 등 모호한 은유적 장치를 통해 서사를 구조적으로 전개하던 소설은 의미의 연관을 직접적으로 발설하지 않으면서도 교묘하게 병치시키며 독자에게 전달한다.) 그러나 '길티 플레저'는 결국 주체의 대타자, 강박적인 윤리성에 의해 튕겨져 나가고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영화는 "지독하고 뜨겁고 불온하며 그래서 더더욱 허무한, 어떤 모럴"(230쪽)로 재가 되어 불타 사라진다.
물질적 재화의 획득과 축적, 그로 인한 경제적 계층의 상승 가능성을 상실한 자리에서 프레카리아트는 욕망의 방향을 돌려 자신이 지적 문화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예술 자본을 욕망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 자본에 대한 생산 수단을 보유한 자가 아니기에 그들의 향유는 소비 행위로 국한되며, 결국 소설에서 제시하는 프레카리아트의 '향유'는 윤리적 소비로 귀결되고, 그 과정과 공유는 예술 작품과 그것의 생산자인 작가에 대한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논의가 아니라 창작자의 윤리적 정당성을 둘러싼 논쟁에 불과하게 되고 만다. 취향의 향유가 소비 행위인 동시에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실천으로도 재구성되는 이 시대의 현실에서 주체는 자주 딜레마에 빠져 '플레저'(쾌락)과 '길티'(죄의식) 사이에 마련된 자기 검열의 늪으로 점점 더 함몰된다.11)
성해나의 소설은 예술 작품의 생산과 소비의 현장에서 재구성되는 취향의 아비투스, 다른 이들과 자신을 구별짓고자 하는 주체의 행위의 세목을 낱낱이 보여주는 동시에, 예술에 대한 향유 주체의 담론이 단지 아비투스의 윤리성을 열렬히 검토하는 작업으로 환원되는 씁쓸한 국면을 보여준다. 다른 이들이 지니지 못한 자신만의 예술적 감식안을 자신이 지닌 문화 자본으로 여기면서 자신의 남다른 정체성을 과시하는 야망계급의 엘리트들은 작가의 윤리적이지 않은 행위를 두고 “이미 일어난 일은 없던 일이 될 수 없"(230쪽)다는 태도를 고수하며 그의 공개적인 사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 세계를 전면 거부한다. 논란 속에서 예술 창작의 생산과 소비에 관한 더 복잡한 고민 속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복잡한 갈등을 전면 회피하는 쪽을 택한다. '나'가 경험하는 '악취'는 소설의 의도대로라면 호랑이도 안 먹는 "썩은 고기"(194쪽)에 해당하는 김곤의 것이겠으나, 한편으로 이 '악취'는 엘리트적인 태도를 과시하며 고급 예술의 문화 기표들을 정체성에 한껏 장착하지만 실상 예술에서 발생하는 복잡한 고민과 성찰은 거부하는 고도로 '윤리적인' 주체들의 위선적인 태도를 겨냥하기도 한다.
*
'0'(김지연, 「반려빚」)점을 유지하는 것조차 너무나 버거운 시대에 '자본주의적 개념'(위수정, 「몬스테라 키우기」)을 십분 체화한 이들은 타인의 비윤리적인 행위에서 그 누구보다 심한 '악취'(성해나,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정작 자신이 사랑하던 모든 인간적인 것들로부터 소외되고 나아가 그러한 소외가 바로 자신의 주체적인 행위에서 비롯하고 있음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그러나 알아챈다 하더라도 이들이 택하는 삶의 전략은 최선의 것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최악을 피하기 위한 차악으로 고려된 것에 가까우므로 상황이 크게 나아지리라 낙관하기도 어렵다. 비정규직이지만 정규직 전환을 도모하지 않는, 말하자면 자신이 처한 계급성 바깥으로 나가고 싶지만 그것의 불가능성을 뼈저리게 실감하기에 그 욕망을 '긍정적'으로 체념하고 포기하는 프레카리아트는 강화된 개인의 소비자 정체성과 그러한 정체성의 자기 재현 주체로 거듭나면서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종류의 절망과 욕망을 적극 합리화하며 살아간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구조적인 한계를 돌파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 그들이 펼치는 전략, 절망을 '긍정'하는 나름의 생존 전략은 한편으로 계층 상승을 결코 허하지 않는 구조의 한계를 기꺼이 긍정하는 효과를 생산한다. 삶을 비관하지 않고자 절망을 긍정하려는 이들의 낙관은 절망을 영속하게 하는 역설을 낳기도 한다.
- 1) Standing, Guy. "The lirecariat: The New Dangerous Class" Work, Emliloyment &amli; Society 26, no.4 (August 2012): 690-692.
- 2) 최근 청년 프레카리아트 세대의 일과 사랑을 송지현, 장류진, 박상영의 소설들을 경유하여 분석한 글은 다음과 같다. 전승민, 「'요즘' 청년들의 트릴레마—최근 소설 속 '일'과 '사랑'에 관하여」, 『퀴어 (포)에티카』, 문학동네, 2024, 353-372쪽.
- 3) 세 가지 문제가 상호 영향을 미치며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어렵게 하는 삼각 딜레마를 뜻한다.
- 4) 전승민, 앞의 글, 372쪽.
- 5) 김지연, 「반려빚」, 『문학과사회』, 2023년 여름호, 166쪽.
- 6) 위수정, 「몬스테라 키우기」, 『문학의오늘』 2022년 겨울호, (단편집 『우리에게 없는 밤』, 문학과지성사, 2024 수록)
- 7) 이성애로 점철된 세계 속에서 게이의 섹슈얼리티는 여성에게 한없이 무해한 지표로 가닿는다. 이성애 여성과 게이의 남성성이 맺는 유대의 역학, 그로부터 생겨나는 안전지대는 저간의 한국 문학장에 있어서도 매우 유의미한 자질로 작동했다. 관련된 논의는 다음 글을 참조. 전승민, 「가장 음험한 가장─코드의 언어 경제로 보는 시와 소설 그리고 비평의 매트릭스」, 앞의 책, 218-231쪽.
- 8) 성해나,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 《창작과비평》, 2024년 봄호.
- 9) 엘리자베스 커리드핼킷, 『야망계급론』, 유강은 옮김, 오월의봄, 40-41쪽.
- 10) ‘나’의 불안이 회원들의지지 속에서 해소되는 것처럼 보이다가, 감독의 발언으로 다시 나타나며 강화되어 절정에 이르는 심리적인 변화 양상은 소설 속에서 서사 전개의 장치로 기능하는 “탁자 밑 시한폭탄”(212쪽)의 변주와 함께 진행된다. 가령, 이런 대목들이 그렇다. “마침 그들이 영화 속 무슨 장면을 언급하며 ‘탁자 밑 시한폭탄’에 관해 이야기할 때, 다급히 말을 얹었다. 탁자 밑 시한 폭탄. 그건 나도 얼핏 아는 개념이었으니까.” (212쪽) “그녀는 테이블 밑에 감추었던 폭탄을 굳이 꺼내 불을 붙였다. 머리가 굳었고, 입술이 말랐다.”(220쪽) “펑./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 터졌다. 매캐한 연기가 사방을 감싸듯 눈앞이 뿌얘졌다.” (225쪽)
- 11) 《문학동네》, 2024년 여름호 계간평, 371쪽. 소설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에 관한 전승민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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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 셰이밍 김나현, 「공중정원」(『현대문학』 2025년 1월호) 최다영 기후 생태 위기의 가속화나 아포칼립스 세계관 속 도피처로서의 주거 형태에 대한 다양한 상상력은 극단적인 계급 격차를 반영하며 꾸준히 재현되어왔다. 그렇다면 상큼하고 달콤한 거대 오렌지들이 곧 추락할 듯 위태롭게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미래는 어떤가? 과거 ‘나’와 동생 ‘수’의 과외 교사였던 ‘로이’는 늘 깨끗한 옷차림에 “민트향이 섞인 독특한 체취”로 동경과 짝사랑의 대상이 된다. 외모도 학업 능력도 더 뛰어나 “나의 업그레이드 버전 같”은 수는 대학 졸업 후 지역 언론사에 합격해 고향인 무산으로 돌아오는데, 로이가 자신의 고백을 거절하자 상심에 빠져 맹신하던 사이비 종교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 ‘나’와 엄마는 수를 결박하여 감금하지만, 몰래 집 밖으로 도망친 수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이른다. 자책감에 빠진 ‘나’는 직접 개조한 성인용 홀로그램 채팅 봇에 수의 일기와 SNS 기록을 입력해 홀로그램 수를 만들어낸다. 홀로그램 수는 “자신이 못 이룬 사랑을 나에게 미루”려는 듯 로이에게 고백할 것을 종용한다. 일 년 뒤 공중정원 5기 건설 현장 직원으로 다시 만난 로이는 여전히 청결하고 다정한 모습이다. 공중정원은 “주택을 갖춘 정원을 땅에서 들어 올려 하늘로 보”낸 것으로, 공중에 마련된 “부자들의 단독채”라 할 수 있다. 삼 년 전 “피부가 오렌지처럼 변하는” ‘오렌지 스킨’ 병이 발생하여 무산 지역의 오렌지가 폐기될 위험에 처하자 공중정원의 건설사는 지붕 재료가 되는 오렌지를 싸게 공급받기를 자처했고, “지역 상생”이라는 명목하에 공중정원을 짓는 프로젝트를 이어왔다. 그러나 일자리 창출과 절감을 둘러싼 지역 자치단체와 회사의 이해관계 속에서 정작 지역 청년들의 선택권은 제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던 중 로이가 오렌지 스킨에 걸리게 되고, 사측에서는 “개인의 부주의”라는 말로 책임을 무마하고자 한다. 늘 인기의 중심에 있던 로이는 공장 내에서 조롱과 경멸과 기피의 대상이 되고, 오직 ‘나’만이 수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로이의 곁에 남는다. 오렌지 냄새를 덮고자 나날이 민트 향을 덧입었을 로이에게서는 “민트와 강렬한 오렌지 향기”가 “위협”처럼 짙게 풍긴다. 그즈음 공중정원 한 채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대다수 노동자들은 “부정 타는 거라고” 적개심 가득한 목소리로 애꿎은 로이를 비난한다. 로이의 산재 때와는 달리 곧장 사과문을 발표하고 복구비용 전액을 보상하겠다는 사측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사전 입주 신청자들은 빠르게 빠져나간다. 이후 현장 인력 중에서 무상으로 공중정원에 삼 개월 동안 머물 거주자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난다. “평생 벌어도 결코 입주할 수 없을 공중정원에 살아볼 수 있는 기회지만” 사고가 있었던 호실이 안정화 테스트를 거치는 동안 그 안에서 목숨을 담보로 테스터가 되어야 함을 모두가 모르지 않는다. 유일한 신청자는 로이뿐이다. “공중정원에서는 더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속설에 기대 “더는 증상이 진행되진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은 것일 수도, 사람들의 멸시와 비참함으로부터 숨기 위해서일 수도, 죽기 전 마지막 호사를 누리고자 한 것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게 사측의 기만에 놀아나는 것이라 한들, 로이에게는 입주만이 유일한 돌파구인 셈이다. 이 소설이 그려내는 건 완전히 장악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타인의 마음에 대한 추적이다. “마음의 동기화”가 가능하리라고, 수의 마음을 다 안다고 자신했던 ‘나’는 자신의 예상이 번번이 빗나가버리는 지점에서, 어떤 내적 동기에 의해 각자의 선택이 이루어졌는지를 끊임없이 자문한다. 또한 각 인물들은 “예고된 추락”을 짐작하면서도 그것이 “영원히 지연되길 바라는” 것처럼 보이는데, 홀로그램 수가 ‘나’와 로이의 교제 성사에 집착하는 이유가 로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라는 게 드러나 자신이 비참해지는 걸 막기 위해서라는 점 또한 그렇다. 그러나 ‘나’가 수의 마음을 통제할 수 없었듯 수 또한 ‘나’의 마음을 통제할 수 없다. 과연 치료제가 개발될 때까지 로이의 병세는 지연될 수 있을까. 간절한 바람을 중단하지 않음으로써 끝내 “가닿게 될 기적”을 암시하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유독한 유기농 가족 양수빈, 「숲속에는 축복이」(『림: 숲속에는 축복이』, 열림원, 2025) 최다영 ‘안아키(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를 맹신하는 ‘나(예정)’의 부모는 ‘몸 공부’라는 명목하에 병원 진료를 거부하고 오로지 자연 치유에만 의존한다. 그러나 ‘나’가 급성 뇌수막염으로 한쪽 청력을 잃게 된 것을 계기로 안아키 육아는 중단된다. 열다섯 살 여름, 부모가 숲 난임 센터에 입소하면서 ‘나’는 이혼 후 딸 ‘예주’와 단둘이 사는 외삼촌(‘중호’) 집에 맡겨진다. 난임 센터에서 예비 부모들이 머무르게 될 ‘나무집’의 이름이 “모두 열매를 맺는 나무”에서 따온 것임을 알고 ‘나’는 매스꺼움을 느낀다. 센터는 배란촉진제, 인공수정, 시험관시술, 무통 주사, 등을 일절 거부하고 “자연의 섭리를 따라 완벽한 사랑의 결실을 맺는 것”을 목표로 내세운다. ‘나’는 부모가 안아키에 실패한 자기 대신 “약에 찌들지 않”은 “클린한” 아이를 원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불안해한다. 외삼촌네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사촌언니 예주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감시자” 역할을 하게 된다. 중호를 일부러 무시하고 그의 호의를 거부하는 예주의 모습은 무언의 항의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양육자에게 정서적으로 유기된 처지인 둘은 서로 알게 모르게 의지하게 되지만, ‘나’는 버림받지 않은 예주의 처지가 자기보다 낫다고 내심 생각한다. 그러나 예주에게는 의처증이 심했던 아빠의 윽박에 못 이긴 엄마가 자신의 왼팔을 찔러버린 기억, 그 소란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까맣게 잊혔던 기억이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다. 그러다 스파이 짓이 발각되어 예주에게마저 버려질 것이 두려워 울던 ‘나’는 곧이어 자신이 외삼촌네에 맡겨진 이유를 들키며 극도의 수치심을 느낀다. 뜻밖에도 예주는 ‘나’를 센터에 데려다주겠다고 말한다. 정서적 학대의 가해자로부터 멀어져 “존나 먼 곳”으로의 탈출을 꿈꾸는 예주에게 ‘나’의 사정이 일탈의 계기가 되어준 것이다. 그곳에서 ‘나’와 예주는 “흰색 옷을 입은 남녀 두 명”이 나타나 “흰 담요를 펼”치고 야외 섹스를 하는 것을 목격한다. 여자의 왼팔에는 흉터가 나 있다. 예주는 창백하게 질려 위액까지 모두 토해낸다. 이후, 상의도 없이 입소 기간 연장을 통보한 것이 무색하게 부모는 응애 진드기에 물려 조기 퇴소를 한다. 엄마의 팔에는 고름이 가득찬 돌기가 과일 열매처럼 오돌토돌하게 돋아나 참을 수 없는 가려움증을 유발하지만, “야생 진드기 또한 자연의 산물, ‘내추럴 본’”이라는 이유로 피해 보상을 받지 못한다. 몇 달간의 자연 치유 시도에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자 결국 엄마는 병원을 다니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사랑’ ‘자연’이라는 낭만화된 면죄부 아래 가해지는 가정폭력과 아동 학대 속에서 안전한 돌봄 환경이 절실한 두 미성년자에 주목한다. 중호를 두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 두둔하는 아빠의 모습은 외숙모와 예주가 겪었을 괴로움마저 은연중에 정당화하는 것이다. 또 제 동생인 중호를 편들며 외숙모를 헐뜯는 엄마의 모습은 혈연에 기반한 규범적 ‘가족’ 모델이 생산/제한하는 애증과 배제의 경계를 환기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중호는 ‘나’에게 보다 안정적인 정서적 지원을 제공해줌으로써 “아무도 나를 돌보러 오지 않을 거라는 학습된 절망감”을 완화시켜준 어른이기도 하다. 징그럽다거나 역겹다는 감각은 어떻게 학습되는 것일까. “축복”이라던 신성성이 혐오감으로 추락하며 낙차를 형성하듯, 상술에 지나지 않는 센터의 탈인위적 지침들은 도리어 ‘자연적’인 것의 인위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날것 그대로 전시되는 유성애의 그로테스크함을 부각한다. 또한 “팔꿈치 존나 까맣다”는 또래집단의 평가로 ‘나’에게 부여되었던 외양에 대한 수치심은 이후 부모의 유성생식에 대한 수치심으로 이어진다. 섹스에 대한 상상, 특히 젊지 않은 부모의 활발한 성애에 대한 연상이 ‘나’에게 수치심으로 내면화되는 건, 생애 주기나 장애 유무에 따라 규율되는 ‘적절한’ 성애적 실천에서 벗어나는 경우 부도덕하거나 유별난 사람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센터 후기마다 “당신들도 숲속에서 했나요?”라며 댓글을 다는 ‘나’의 모습은 수치심을 돌려주려는 수동공격성을 띤 행동이자 무언가를 향한 절박한 반격이 아닐까.
광장에서 만난 괴물과 춤출 때 * 이 글은 성해나의 소설집 『혼모노』(창비, 2025)와 단편 「인비인(人非人)」(『TOYBOX』 5호, 2020),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The 짧은 소설3: 괴담』, 민음사, 2020)을 주로 논하며,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문학동네, 2022), 장편 『두고 온 여름』(창비, 2023)을 함께 다룬다. 이하 인용시 본문에 쪽수만 밝힌다. 1. 갈라진 세계의 접촉면 너머로 미국의 인류학자 실라 미요시 야거는 『애국의 계보학』에서 한국이 근대국가 수립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 민족주의적 서사를 동원했는지 밝힌 바 있다. 그는 이 연구에서 특히 정치 담화, 문학, 역사 기념관 등이 활용하는 수사법에 주목하는데, 이때 흥미로운 점은 서로 다른 정치적 의제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상반된 이데올로기적 목적을 위해 동일한 수사법을 활용한다는 사실이다. 지금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도 그러한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1) 대통령 탄핵 정국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한편에는 대통령 파면 소식에 기뻐하는 범시민 ‘촛불집회’ 대열 속 사람들이, 다른 한편에는 윤석열의 대통령직 복귀를 위해 여전히 ‘태극기 집회’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때 두 종류의 집회는 ‘나라 망하는 꼴 두고 볼 수 없다’는 애국의 수사를 (각기 다른 정도로) 공유하고 있기도 했다.2) ‘태극기 집회’로 대표되는 보수 집회 역시 그 규모와 역사, 그리고 형식과 수사의 측면에서 민중의 형상이 아니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단순히 대통령을 탄핵하고 새로 선출하는 것만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 건 게으른 생각이다. 민주주의는 본래 끊임없이 지속하는 갈등을 필수 조건으로 삼는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하나의 공동체로 묶여 같은 대지를 공유하며 살아가야 한다면, 어느 한쪽을 무작정 배제하거나 축출할 수는 없다. 무조건적 반목을 넘어 무언가 다른 관점을 통해 이 사태를 볼 필요가 있으며, 문학은 이러한 맥락에서 또다시 중대한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때 성해나의 소설은 이분법의 세계를 뒤섞고 흐트러뜨리는 어떤 인물, 몸짓, 덩어리, 정동, 장면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보수적인 할아버지와 글로벌 우파 엄마의 갈등 사이에서 주관을 잃은 임신부(「잉태기」), 신기가 사라져 번아웃이 온 삼십 년 차 박수무당의 처절한 굿판(「혼모노」), 소서리 마을의 갈등과 지역 살리기 프로젝트를 감정적으로 해결하는 스타트업의 부장(「우호적 감정」), 생체 실험의 피해자가 낳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있는 생명 덩어리(「인비인(人非人)」), 한국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재미 교포 3세 예술가가 광화문광장 한복판의 태극기 집회 대열에 우연히 합류하는 순간(「스무드」) 등 성해나의 문학적 상상력은 분명 서로를 타자화하는 양분화된 세계를 기반으로 하지만, 무엇이 이 세계를 둘로 가르고 있는지, 어째서 둘로 갈라졌는지, 그러한 대립 구도가 얼마나 허구적이고 의심스러운 것인지 다시 고민하게 한다. 그리고 이는 한국문학의 성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근대성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으로 이어진다. 근대화가 지식과 계몽, 이성과 합리, 과학과 자본의 세계로 향하는 과정이라면, 성해나의 소설은 그 과정에서 억압되고 누락된 광기와 부정성이 어떤 형상으로 회귀하는지 드러낸다. 이는 비체의 현전을 통해 근대의 암(暗)을 보여주는 식으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성해나의 소설은 애초에 근대를 진보의 시간으로 상정하지 않으며, 그보다 더 실재적으로 근대성 자체의 파기에 닿고자 하는 순전한 열망을 보여준다. 라투르식으로 말하자면, 글로벌을 향하는 진보의 축과 로컬을 향하는 보수의 축이 형성하는 근대적 세계관의 좌표는 동일한 수사법과 논의 구조를 공유하기 때문에 기존의 좌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제3의 항을 향해야 하는데,3) 성해나의 소설은 미약한 진동일지라도 그러한 지향성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이는 성해나의 두번째 소설집 『혼모노』에서 두드러진다. 첫번째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에 수록된 소설들과 장편소설 『두고 온 여름』 등이 세대 간, 가족 간, 계급 간의 소통 불가능성과 단절을 중심으로 읽혀왔다면, 근작으로 올수록 소설에서 툭 튀어나오는 몸짓, 덩어리, 정동 들은 갈라진 세계 사이의 거친 접촉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경계를 무화하는 강렬함으로 작동한다. 어떻게 보면 이는 봉건적 사고관으로의 복고나 회귀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 시점에서는 그 또한 새롭다. 성해나의 소설은 그렇게 문학이 가지 못할 곳, 문학이 없을 것만 같은 곳을 향한다. 이 글은 그 행로에 추진력을 보태고자 한다. 2. 무(巫): 주술 아닌 춤 ‘무속(巫俗)’은 죽은 혼(魂)과 귀(鬼)를 산 사람과 이어주고 하늘과 신의 뜻으로 땅의 대소사를 해소하는 제의(ritual), 그리고 그것의 토대가 되는 주술적 세계관을 아울러 이른다. 「혼모노」는 이런 무속의 세계, 그중에서도 직업 무속인의 세계를 그린다. 이때, ‘직업 무속인’에 방점을 찍은 이유는, 소설의 서술자-주인공인 삼십 년 차 박수 ‘문수’가 처한 상황 때문이다. 원래 그가 모시던 신령은 ‘애기동자’부터 ‘할멈’까지 여럿이었으며, 그중에서도 할멈의 신묘한 능력은 그가 무당으로서 한창 ‘잘나갈’ 때 큰 역할을 했다. 그가 신통하다고 입소문이 나 돈을 제법 벌 수 있었던 것도, ‘황보’라는 국회의원의 전속 무속인이 된 것도, 무형문화재가 될 뻔한 것도 다 할멈 덕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가 모시던 신령은 다 떠나버렸으며, 심지어 할멈마저 그의 바로 앞집에 신당을 차린 ‘신애기’에게 가버렸다. ‘신발’이 다 떨어지고 ‘번아웃’이 온 그는 먹고살기가 어려워져 신문에 ‘오늘의 운세’ 따위의 칼럼을 기고하는, “니세모노(にせもの, 가짜, 선무당을 의미함)”나 할 법한 일을 해야 할 위기에 처한다. 이러한 세속화된 무속의 세계는 그다지 낯설거나 충격적이지 않다. 사람들은 진로 상담 창구로 신당을 찾아가거나, 하는 일이 잘 풀리길 바라며 고사를 지내기도 하고, 직업 무속인들이 방송에 출연해 연애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정치 세력이 무속신앙과 결탁하여 나랏일을 도모하는 모습 또한 흔히 접해왔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인들이 신앙과 미신이 아닌 과학적 원칙들에 의존하며 탈주술화된 근대 이후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믿음에 비추어볼 때 어딘가 이치에 맞지 않다. 그러니까 소설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광경은 근대라고 불리는 세계가 사실은 자연-문화 사이 수많은 하이브리드의 끝없는 증식으로 이루어진다는 라투르적 설명에 부합한다.4) 현재 한국에서 무속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논리와 완전히 결합하여 작동하는 비과학적인 혼합체인 것이다. 그런데 무속은 사실 본래부터 혼성적이었다. ‘무속’이 민속으로서 발견된 것은 일제 치하의 조선 국학자들에 의해서였다. 일제는 오래전부터 한반도에 있던 ‘무’가 조선인의 ‘얼’을 담고 있는 전근대적인 미신이라고 여겨 탄압했으며, 국학자들은 그에 대한 저항으로서 무속의 민족성을 발굴하게 되었다. 문학에서도 무속을 일종의 미학으로 삼아 일본의 것과 구별되는 ‘우리 민족’의 근대 예술 기치를 세우고자 하는 시도가 적지 않았다.5) 그러니까 무속은, 그것이 발견되었을 때부터 전근대성과 근대성을 동시에 가진 혼합체였으며, 현재에 이르러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아닌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더 끈끈하게 결속되었다. 성해나의 초기 작품 중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은 이러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서술자 ‘나’는 친일 조선인의 후손으로, 일본의 천황이 하사한 벚나무 책상이 어떻게 자신에게까지 상속되었는지 그 역사를 들려준다. 처음 그 책상을 받아 사용한 사람은 ‘나’의 조부 김아홍(일본식 이름은 히로타 마사히로)이다. 그는 열두 살 때 참가한 “‘야스쿠니신사 영령께 바치는 글’ 대회”(28쪽)에서 우등상을 수상하며 상품으로 이 책상을 받는다. 그러나 이 책상은 악취를 풀풀 풍기며 어딘가 불길한 기운을 뿜고, 그는 악취의 원인을 찾다가 키우던 고양이가 “책상과 벽 틈 사이”(29쪽)에 숨겨놓은 쥐의 대가리들을 발견하고 까무러친다. 그날 그가 본 것은 쥐의 대가리들만이 아니다. 책상 아랫면에 음각으로 새겨진 글귀 “미카라데타사비(みからでたさび)”6)(30쪽)는 마치 이 가족의 친일 행적을 단죄하듯이 일종의 주술, 저주로 작용한다. 이 저주는 특히 김아홍의 아들 김황보를 괴롭힌다. 황보가 낙마 사고를 당해 대학 입학이 어려워지자 김아홍은 몹시 불안해한다. 결국 1980년 사교육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남몰래 가정교사를 붙이지만, 책상의 저주 때문인지 황보는 극심한 기면증에 시달리다 언젠가부터는 배운 적도 없는 일본말을 방언처럼 중얼대는 등 마치 신병을 앓는 듯한 증세를 보인다. 이때 김아홍의 아버지 김정식은 어느 무당에게 들은 말이라며 “암고양이 호네(ほね)”(32쪽), 즉 고양이의 뼈를 갈아 마시면 기면증이 낫는다고 일러준다. 평소 샤머니즘을 불신하던 김아홍은 고양이 뼛가루를 만들긴 하지만 황보에게 먹이지 않고, 1981년 여권법이 시행되자 아들을 미국에 유학 보내는 것으로 상황을 해결한다. 책상의 저주를 풀기 위해 무속이 아니라 미국 유학으로 대응함으로써 신자유주의적 도약을 보여준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김정식-김아홍-김황보, 그리고 ‘나’의 시대로 올수록 집안의 부가 축적되고 막강해졌음을 보면, 결국 책상에 들린 민족주의적 저주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나’는 『친일인명사전』 출간 십 주년을 맞아 친일 인물의 후손을 인터뷰하고 싶다는 민족문제연구소 직원의 메일을 받지만, 어떤 답장이나 대응도 하지 않고 메일을 스팸 처리한다. ‘나’는 이 문제에 무심하다. 벚나무 책상의 향은 ‘나’를 잠들게 하거나 두렵게 하지 않고, 오히려 조상의 은덕과 옛 정취를 느끼게 한다. ‘나’는 그 책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교수-학자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써야 할 글을 쓴다. 언젠가 이 책상을 다시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줄 날을 고대하며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또 그 아들에게 책상을 물려줄 그날까지도 “내게는,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 일도”(36쪽)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쩌면 ‘미카라데타사비’보다 더 강력한 현시대의 주술적 염원일 것이다. 이렇듯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이 시대가 변함에 따라 이데올로기와 주술의 혼합체가 수행하는 역할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보여주었다면, 「혼모노」는 의심 없이 받아들인 신자유주의와 무속의 결속을 끊어내는 인상적인 장면을 선보인다. 근대의 반대 항에 전근대를 위치시키는 게 아니라 그러한 이분법을 뛰어넘는 몸짓 그 자체를 현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혼모노」의 결말부에서 박수무당 문수가 굿에 완전히 몰두하며 춤을 추는 장면은 중요하다. 이 서사의 주인공을 가르는 건 그것이다. 과장되게 눈을 까뒤집고 억지로 몸을 떨며 신접 흉내를 내는 것은 지금 내겐 무용한 짓이다. 자연스럽게 몸이 떨리고 눈이 뒤집힌다. 오금이 무지근하게 당겨온다.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황보가 경악하며 내 쪽을 보고 있다. (……) 구름도 다 사라진 땡볕 아래, 판수도 악사들도 점점 지쳐가는 와중에 기세가 누그러지지 않는 이는 오직 나뿐이다. 피범벅에 몰골도 흉하겠으나 시야가 환하고 입가엔 미소까지 드리워진다. 신령 근처에라도 가닿은 것처럼 몸이 가뿐하고 신명이 난다. 장단이 빨라질수록 나는 고조된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삼십 년 박수 인생에 이런 순간이 있었던가. 누구를 위해 살을 풀고 명을 비는 것은 이제 중요치 않다. 명예도, 젊음도, 시기도, 반목도, 진짜와 가짜까지도.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듯. 이제야 진짜 가짜가 된 듯.(152~153쪽) 문수의 기세에 눌린 것은 오히려 신애기다. 문수의 무목적적이고 실재적인 행위에 비하면 국회의원 황보의 세속적 성공을 기원하는 신애기의 굿은 너무나도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다. 그렇게 이 장면은 미신과 합리성이 뒤섞인 상징계적 질서에 균열을 내고, 그 세계의 인위적 구분까지도 모두 하찮게 만들어버린다. ‘巫(무)’라는 한자가 사람 두 명이 만나 춤을 추는 모습의 상형이라는 점에서, 소설의 마지막 대목이 보여주는 것은 무속―무당과 관련된 풍속―이 아니라 ‘무’ 그 자체다. 문수의 춤과 몸짓은 이분법적인 언어의 세계로부터 잠시나마 빠져나오는 소설 언어의 움직임이 된다. 3. 근대 괴물이 수태한 것 성해나의 소설은 상징계적 질서의 외연을 순간적으로 무화하는 춤과 몸짓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역사의 서사화를 통해 근대로의 이행 과정에서 비체화된 잡다한 것들이 어떤 형상으로 회귀하는지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특히 과학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며 은폐한 야만성이 괴물의 형상으로 산출되면서, 인간, 혹은 인간성이라고 믿었던 것에 균열이 생기는 지점을 주목해볼 만하다. 「인비인(人非人)」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람이라고도 사람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카타마리(かたまり, 덩어리)”(153쪽)가,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의 합리와 효율을 극대화한 고문 기계-건축물이 그 예시다. 이것들은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괴물’처럼 자신을 만든 창조주-아버지를 끝없이 추격한다. 「인비인(人非人)」은 실제 하얼빈에서 자행되었던 일제 731부대의 생체 실험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소설은 이 생체 실험에 조선인이 가담했었다는 가설을 제시하며, 그 조선인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그린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단지 생화학자가 되겠다는 입신출세의 꿈을 가지고 교토대학에 유학을 온 청년이었을 뿐이다. 야망과 의욕이 과다했던 그는 요시무라 교수에게 충성을 다했고, 그렇게 그의 하얼빈 출장에 동행해 생화학 실습을 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백이십 일간 중국인, 조선인 등의 ‘마루타’를 대상으로 한 온갖 생화학 바이러스 생체 실험을 돕는다. 최소한의 “모럴(moral)”(155쪽)은 겸비한 요시무라 교수 덕에 그는 이 실험에 최대한 소극적으로 가담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조선인 여자 피실험자의 비웃음에 분노와 모멸감을 느낀 그는, 직접 여자의 몸에 페스트균을 주사하게 되고, “여자는 그 밤, 카타마리를 수태하고 즉사”(156쪽)한다. 그는 카타마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카타마리는 참으로 곤란한 생명체였습니다. 치댄 밀가루를 둥글게 뭉쳐놓은 형태에, 눈도 귀도 없었습니다. 얼굴이라고 부를 만한 곳에 코와 입만 겨우 붙어 있었죠. 팔과 다리도 없고, 생식기조차 달려 있지 않아 자웅을 구분할 수도 없었습니다. 굳이 종을 나눠야 한다면, 척추가 있는 환형동물 정도로 분류할 수 있을까요. 온몸이 잿빛 털로 덮인 2.6kg의 굴곡 없는 덩어리. 그것이 탄생하던 밤, 요시무라 교수도 나도 공포와 절망에 휩싸여 실험실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죄(つみ)를 낳았군. 카타마리의 탯줄을 끊으며 교수는 중얼댔습니다.(같은 쪽) 근대과학이 수태한 죄-덩어리는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에서 고문 기계-건축물로 형상화된다. 소설은 박정희 군부독재 정권 시대를 배경으로 하며, 실제 지하철 남영역 바로 앞, 즉 갈월동 98번지에 위치한 남영동 대공분실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소설의 중심 인물인 여재화는 한국 근대건축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김수근(실제 남영동 대공분실의 건축가다), 김중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로, 군부 정권의 고문실로 사용된 ‘경동수련원’의 건축 총책임자이다. 하지만 소설 속 가설에 의하면 고문실 건축에 크게 관여한 인물은 따로 있다. 그는 여재화의 제자 구보승으로, 열정도 능력도 부족한 학생이었으나, 바로 그 점, 실험 정신이라고는 없이 합리성만 철저하게 따지는 성격 때문에 여재화에게 발탁되어 고문실 증축 사업에 합류하게 된다. 구보승은 건축물의 기능을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해 특유의 합리성을 발휘하여 더욱 잔혹한 고문실을 설계한다. 그는 하루에 단 십 분만 햇빛이 드는 좁은 수직 창을 설계하여 피조사자들이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느끼게끔 했으며, 경사가 급한 나선형 계단을 설계하여 피조사자들이 눈을 가린 채 이동할 때 극심한 공포를 느끼도록 했다. 이외에도 사람들이 서로 마주칠 수 없도록 엇갈리게 만든 취조실 출입문, 유공 흡음재를 쓰고 붉게 칠한 벽면과 물고문을 위한 욕조까지, 소설이 묘사하는 경동수련원의 내부 설계 구조는 실제 남영동 대공분실의 구조와 거의 동일한데, 소설에서 이 건물은 어떠한 악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근대가 신봉한 합리성의 극대화가 배태한 야만이다. 두 소설에서 독자는 근대의 합리주의가 수반하는 위험과 야만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다. 마루타 생체 실험, 남영동 대공분실은 물론, 아우슈비츠 학살과 히로시마 원폭 사태 또한 인간과 과학이 만들어낸 파괴적 재앙의 대표적인 사례다. 그런 사건들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근대화와 진보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 몇몇 학자들은 이성과 합리성을 갖춘 국가라면 핵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물론 최근에는 근대성이 전 지구적 식민화와 착취, 전쟁과 무기, 대규모 자연 파괴를 수반한다는 사실을 비판적으로 재고하는 추세이며, 이 연장선에서 성해나의 소설은 그 독특한 형식을 통해 근대성에 대한 의문을 밀어붙인다. 「인비인(人非人)」은 액자식 구성으로, 마루타 생체 실험에 가담한 조선인의 증언이 담긴 편지를 영화감독인 일인칭 서술자 ‘나’가 읽는 것이 외화, 그 편지에 쓰인 내용이 내화이다. 이때 조선인의 편지는 노스럽 프라이가 구분한 산문 픽션의 양식 중 하나인 고백(confession)7)의 일종이다. 조선인은 자신이 페스트균을 주사하여 피실험자가 낳게 된 카타마리를 결국 생매장해버린 죄를 고백한다. 그러나 기독교적 고백의 원형이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만한 죄를 스스로 드러내어 자신을 공공연한 심판의 대상으로 만드는 데에 목적을 둔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인물의 고백은 불온전하다. 그의 고백은 생체 실험에 가담한 경위를 정당화하고 있으며, 소극적으로 관여했다는 변명까지 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죽인 것은 카타마리 하나뿐이라며 살인 종범이라는 낙인에 대한 억울함도 토로하고 있다. 그가 하필 ‘나’에게 편지를 써서 죄를 고하는 이유는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서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다. ‘나’는 편지를 흥미롭게 읽지만 이내 “영화가 될 만한 것은 이것 말고도 차고 넘치니까”(163쪽)라고 생각하며 사무실 서랍에 넣어버린다. 이는 『프랑켄슈타인』8)과 비교해봐도 흥미롭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창조한 징그러운 피조물-괴물과 계속 대치한다. 괴물은 끊임없이 자신을 만든 과학자-아버지를 쫓아가지만 결국 빅터는 죽어버리고, 빅터의 죽음 이후 괴물 또한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최종적으로 북극 탐험 대장 월튼의 편지를 통해 전달된다. 프랑코 모레티의 분석에 따르면, 『프랑켄슈타인』은 서간문의 삽입과 겹겹의 액자식 구성을 통해 괴물이 자아내는 공포로부터 인물들과 독자를 멀어지게 만들며 그들이 안전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도록 한다.9) 반면 「인비인(人非人)」의 조선인은 자신을 ‘오야지(おやじ, 두목, 아버지)’라 부르는 카타마리를 직접 죽였으나, 그 행위에서 오는 공포와 죄의식은 깔끔히 축출되지 않고 카타마리가 삼킨 듀퐁 만년필로 인해 현재로 회귀한다. 그 만년필은 한때 그가 오야지라 불렀던 요시무라 교수가 그의 이름을 각인하여 선물해준 것으로, 생체 실험 피해자의 유골이 대거 발굴된 하얼빈 근린공원에서 출토된다. 그러니까 성해나의 소설에서 이 죄의 덩어리, 괴물의 형상은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 중 떨쳐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땅속에 썩지도 않은 채로 있다가 발굴되는 것이며, 아무리 죽여도 반복해서 재생산되어 우리 삶에 집요하게 들러붙는다. 따라서 고백의 실패는 필연적이다. 고백을 통해 죄를 용서받고 인간으로서 숭고를 되찾는 일은 더이상 불가능하다. 인간은 괴물을 타자화하여 탄생한 것이 아니다. 인간과 괴물은 하나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 카타마리가 그러하며, 카타마리의 오야지도, 그의 오야지도 그러하다. 이러한 전승 구도는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에서도 비슷하게 드러난다. 카타마리가 삼킨 만년필에 자신의 창조주-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듯이, 경동수련원 건물 또한 정초석에 설계자 ‘구보승’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는 구보승의 스승 여재화의 짓이었는데, 고문 기계-건물을 창조했다는 죄를 면하기 위해 구보승의 이름만 기록에 남긴 것이다. 그러나 삼인칭 서술자가 들려주는 가설에 의하면, 구보승이 오직 합리성에 기반한 잔인한 설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승 여재화의 덕이다. 그는 구보승이 젊은 청년으로서 야망을 가지고 합리성을 발휘하도록 부추겼으며, 무엇보다 ‘인간’을 먼저 생각하는 건축을 그에게 가르쳤다. 즉, 건물을 만든 것은 구보승이지만, 구보승을 만든 것은 여재화이다. 구보승은 여재화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고문실이 정녕 인간을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하냐는 스승의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는 인간을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201쪽) 성해나 소설이 내놓은 인간의 의미는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4. 주워섬긴 언어, 그리고 정동 재생산의 모티프가 눈에 띄는 또 한 편의 소설은 「잉태기」다. 표면적으로 생명을 잉태한 사람은 임신부 ‘서진’이지만, 소설은 서진의 엄마인 서술자-주인공 ‘나’와 그의 시부가 서진을 양육하는 방식을 두고 갈등을 겪는 모습을 보여주며 특권 상류층 집안 내의 재생산이라는 ‘잉태기’를 조명한다. ‘나’가 시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의 사이는 지금처럼 나쁘지 않았다. 또, ‘나’는 “클래식 애호가인 점,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를 좋아한다는 점, 보수당을 지지한다는 점, 입이 짧고 미식을 즐긴다는 점”(270쪽), 그리고 서진을 과보호하며 집착적인 애정을 표한다는 점 등 둘 사이의 공통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강한 주관과 고집, 인정 욕구는 ‘나’의 자식인 서진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점점 팽팽하게 대립한다. 이때 ‘나’의 시선에서 그려지는 시부의 양육 방식은 봉건적 질서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248쪽)을 전제로 한다. ‘나’가 서진을 임신했을 때, 시부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 없는 “께름칙한 금기”(254쪽)를 늘어놓으며 ‘나’의 식생활 하나하나에 간섭했고, 서진을 미국에서 낳으려고 했을 때에는 “충주 지씨 대손을 양키 만들 셈이냐며 매섭게 반대”(245쪽)하는 바람에 원정출산을 포기해야 했다. 서진의 이름 또한 성명학자에게 받아오는데, ‘나’는 “성명학은 일본에서 온 폐단이에요. 요즘 시대에 누가 그런 걸 믿어요?”(256쪽)라며 단칼에 거절한다. 한편, ‘나’의 양육 방식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며, 서진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미래지향적인 것들이다. “서진을 품은 열 달간 나는 아이의 장래를 차곡차곡 설계했다”(255쪽)고 말할 정도로, 서진의 삶에 주도면밀하게 관여한다. 실제로 ‘나’는 서진이 무용과 입시를 준비할 때 서진의 몸(체중과 체형 등)을 엄격하게 규율했다. 심지어 서진이 결혼할 상대를 알아본 뒤 일방적으로 혼약을 성사시켰으며 이제는 시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진의 미국 원정출산을 계획중이다. 이렇듯 시부와 ‘나’의 양육 방식은 표면적으로는 과거를 지향하느냐, 미래를 지향하느냐로 나뉘는 듯하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육친적 증여를 통해 자신들의 계급을 재생산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는 크지 않다. 이때 계급이나 이데올로기 재생산에 언어만큼 막강한 것이 없다는 점을 소설은 잘 알고 있다. 서진이 어렸을 때 ‘나’와 시부가 제일 처음 가르쳤던 말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나’는 이제 막 육 개월이 넘은 서진에게 ‘길’ ‘승’ ‘차’ ‘집’이라는 단어를 가르친다. 구개음을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하필 ‘길’ ‘승’ ‘차’ ‘집’이라는 점에서 그 상징성, 즉 욕망과 부를 세습하는 것의 암시임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서진이 가장 먼저 발음하는 단어는 ‘엄마’도 ‘길’ ‘승’ ‘차’ ‘집’도 아닌 ‘지지’다. 지지는 “할아버지를 뜻하는 일본어” “‘지씨 할아버지’의 준말”(251쪽)로, 시부가 서진에게 몰래 가르친 단어였다. 서진은 이렇듯 극단적으로 반목하는,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닮아 있는 두 사람의 언어가 만든 뒤죽박죽의 세계로 진입한다. 그래서인지 서진의 언어는 서진의 내면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고, 서진이 사는 상징계는 그의 언어적 ‘독립’, 혹은 주체화 이후의 세계처럼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서진은 성인이 되어서까지 여전히 할아버지를 ‘지지’라고 부르거나 엄마 앞에서 벗은 몸을 스스럼없이 보여주거나 성적인 말도 가감 없이 하는 등 유아적 단계에 머물러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물론 이는 서술자인 ‘나’의 시점에서 타자화된 서진의 모습이다. ‘나’는 딸이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임신까지 겪었음에도, 정서적 독립을 하지 않은 ‘아이’로 보인다. 그러니까 주인공과 시부가 공유하는 언어의 세계에서는 서진의 속마음, 내면의 목소리 같은 게 포착될 리 없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보자. 결국 ‘나’는 서진을 미국행 비행기에 태우기 위해 공항에 간다. 그러나 공항에 서진을 배웅하기 위해 따라온 시부가 서진의 미국행을 말리자 둘은 또다시 충돌한다. 사람들의 시선도 무시하고 큰 소리로 싸우던 도중 서진은 양수가 터져 바닥에 쓰러진다. 복아, 서진아, 어서 가자, 정신 차려, 여기서 나가자, 참을 수 있어, 네가 미쳤구나, 미친 건 당신이지, 네가 부모냐, 그럼 당신은, 여기서, 여긴 안 돼, 돼, 안 돼, 돼, 안 돼, 돼, 안 돼…… 괴성이 오간다. 오가고 오가다 끝에는 누구 것인지도 모르게 섞여버린다. 나의 목소리인지 시부의 목소리인지도 모르게. 우리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괌행 비행기 출국 알림 방송이 들려온다. 시부와 나 사이에서 서진은 무슨 말인가 한다. 연갈색 눈을 굴리며, 아주 작게, 기운이 다 빠진 소리로, 힘겹게.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다. 그리고 당신도.(297~298쪽, 강조는 인용자) 이 대목에서 서진의 목소리는 소거되어 있다. 아무도 서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심지어는 “당신도”. 이때 ‘당신’은 ‘나’가 자신의 시부를 지칭하는 단어지만, 왠지 독자를 호명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는 「혼모노」의 마지막 대목(“어떤가. 이제 당신도 알겠는가”, 154쪽)과 연결해 읽으면 더욱 그렇다. 목소리의 사라짐은 성해나의 다른 소설에서도 반복되어온 모티프다. 특히 장편 『두고 온 여름』에서 기하와 재하가 오랜만에 재회하여 대화하는 장면은 그 대표적인 예시다.10) 이 장면이 언어가 소통을 방해하는 도구가 되는 순간을 보여준다면, 「혼모노」와 「잉태기」에서는 목소리의 사라짐뿐만 아니라 목소리의 중첩(‘나’와 시부, 문수와 신애기, 할멈의 목소리 등)을 통해 말로 환원할 수 없는 정동적 충돌 속으로 독자들을 연루시킨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언어로 지은 세계와 그 세계에서 증식하는 하이브리드, 그 틈에서 은폐되는 목소리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창작자의 작품과 그의 도덕적 결함을 분리해서 볼 것인가, 라는 오랜 논제를 벗어난 독해가 가능해진다. 서술자-주인공 ‘나’는 영화감독 김곤의 열성적인 ‘덕후’다. 심지어는 김곤이 촬영장에서 아역 배우의 팔을 꼬집었다는 논란이 생긴 이후에도, 사람들 몰래 ‘길티 클럽’(김곤의 비밀 팬클럽) 활동을 하며 김곤을 사랑하는 데에 여념이 없다. 논란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김곤은 인간 윤리에 대한 철학적 주제로 예술영화를 만들고, 현장에서는 드물게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감독이었으며, 친환경적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윤리적 예술가로 정평이 나 있었다. 이러한 김곤의 특징은 스스로 취향과 ‘모럴’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대중의 전형성을 띠는 ‘나’와 반대된다. ‘나’는 김곤을 좋아하고부터 그와 고급한 예술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자세히 보면 김곤을 향한 끌림은 그의 예술론과 관계없이 다분히 정동적이다. 길티 클럽의 오프라인 만남에서도 김곤의 영화 구도를 논하며 현학적인 말을 늘어놓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그저 김곤이 왜 좋은지, 얼마나 좋은지에 관해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나’가 사람들의 언어를 주워섬긴다는 것이다. GV에 간 주인공은 김곤에게 길티 클럽 멤버들이 했던 말을 마치 자신이 생각해낸 것처럼 질문한다(“는 각 장마다 다른 화면비가 사용되었잖아요? 저는 그걸 통해 감독님이 말하고자 하는 게 인간의 가변성인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55쪽). 이는 ‘나’가 처음 김곤의 을 보면서 떠올렸다고 서술하는 생각들이 온전히 ‘나’의 언어와 생각이라고 볼 수 없는 근거가 된다. ‘나’는 “정의할 수 없는 울림과 충격”(21쪽)에 대해 강조하면서도, 영화의 서사와 캐릭터, 컷들과 대사에 대해 제법 분석적으로 서술한다. 이는 ‘나’가 영화를 서른두 번 관람했다는 언급과 커뮤니티와 인터뷰 기사를 통해 영화에 대한 정보를 섭렵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봤을 때, 과거 회상을 하며 사후적으로 덧붙여진 언어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 감상이나 지론이 아닌 주워들은 말들뿐이었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김곤, 그뿐이었다”(55쪽)라고 토로한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애정은 김곤이 GV에서 아역 배우의 이름을 언급하며 관객들에게 사과를 하는 순간, 허무해지고 만다. 그렇게 소설은 언어로 정돈된 정동과 그럼에도 고정되지 못하는 정동의 향방을 좇는다. 이쯤에서 ‘호랑이 만지기’에 주목해보자. 그로부터 몇 년 뒤, ‘나’는 남편과 함께 치앙마이로 여행을 가서 ‘타이거 킹덤’을 관람하게 된다. 비좁은 사육장과 호랑이에게서 풍기는 누린내는 불쾌하고, 이빨을 다 뽑은 호랑이를 만진다는 것이 ‘길티’하게 느껴지지만, 이 불쾌함은 호랑이의 등을 직접 만지는 순간 묘한 흥분과 쾌감으로 바뀌어 일렁인다. 언어적 세계의 공허한 ‘모럴’ 아래에는 이와 같은 ‘길티 플레저’가 있음을, 소설은 촉각적으로 일깨운다. 언어-상징의 세계가 만들어낸 법칙보다 우세한 것은 이제 정동 그 자체인 것이다. 5. 나선형 계단에서 구를 보며 정동은 어디로든 가며 어디에든 들러붙을 수 있다. 「스무드」는 이러한 정동적 마주침의 예측 불가능성을 잘 보여주는 문제작이다. 주인공 ‘듀이’는 재미 교포 3세이며 스스로를 철저히 미국인으로 정체화한다. 세계적인 현대미술 작가 ‘제프’의 방한에 매니저로서 동행한 그는 시종일관 한국 문화에 낯섦을 느낀다. 그러나 듀이는 우연한 계기로 광화문 한복판의 태극기 집회 대열에 합류하여 어쩌다보니 그 안의 사람들과의 연결되는 감각을 느낀다. 이는 양경언이 지적했듯, 극우 집회의 일원들의 삶을 조명하는 “나른한 온정주의”11)가 아니다. 몸짓, 덩어리, 정동, 그리고 그것들의 접촉이 가져오는 결과를 기존의 언어적 세계의 문법으로는 이해할 수 없음을, 성해나 소설이 꾸준히 짚어왔기 때문이다. 「스무드」에서 개연성을 무시하는 전개나 인물의 변덕 등은 분명 불편감을 주는 요철로 느껴진다. 그러나 만약 이 소설에서 이해할 수 없이 불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굴곡을 다 깎아낸다면, 그것은 제프의 작품처럼 인위적으로 매끄럽게 다듬은 ‘스무드’, 즉 커다란 구 모양의 덩어리가 될 뿐이다. 이 구 모형은 보는 이들, 즉 관객 혹은 독자에 의해 다시 의미를 덧입고 언어로써 설명될 테지만, 제프에 따르면 이 ‘스무드’라는 작품은 어떤 속뜻이나 의미, 언어적 부연이 필요 없는 그저 단순한 구의 형체다. 그러므로 매끄러운 의미 작용이란, 허구다. 이때 「스무드」라는 텍스트가 ‘스무드’의 상징을 어떤 식으로 서사화하는지 판단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혼모노’와 ‘벚나무 책상’, ‘카타마리’나 ‘구의 집’, 혹은 ‘지지’와 ‘호랑이 만지기’도 마찬가지다. 확실한 것은, 이것들은 독자로 하여금 의미 판단을 유보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특정한 방향으로 안내하지 않는 성해나의 소설을 읽는 행위는, 마치 나선형 계단 위에 눈을 가리고 선 죄수가 된 것처럼,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더욱 모르게 되는 경험이다. 그때 우리에게는 새로운 좌표계가 필요하며, 문학은 그 영점을 조정하고 지향 가능한 방향성을 재설정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성해나 소설에 나타나는 흥분, 그 혼란한 정동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1) 최근의 정치 국면에서 애국의 수사 못지않게 무속과 관련된 수사도 빈번하게 활용되고 있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첫 국민 담화에서 윤석열은 야당이 "광란의 칼춤"을 추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탄핵 촉구 집회 참여자에 의해 패러디되어 '광란의 칼춤 댄스 동호회'라는 이름의 깃발로 재탄생하는데, 이는 윤석열 정부의 무속신앙과의 결탁을 풍자하면서도 다시금 무속의 수사를 전유하는 방식이다. 이는 '살을 날린다' 같은 말이 정치 진영을 가리지 않고 남발되는 현상으로도 이어진다. 「'새벽형 불안성 새로 고침 단체'부터 '봄이여 오라'까지... 아카이브로 돌아본 탄핵 정국」, 『경향신문』, 2025. 4. 4. 2) 실제로 이태원 한남동에서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가 열렸을 때, 바로 옆에서 비슷하게 큰 규모로 탄핵 반대 집회가 열렸다. 이 두 집단 사이에서 대열이 섞이거나,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이에 당시 의경들은 이태원역 앞에서 사람들의 정치 견해에 따라 각각의 집회 대열로 합류하는 길을 알려주어야 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집단이 광장을 공유하고 대열이 섞이는 상황은 성해나 소설 「스무드」에서 주인공 듀이가 광화문의 태극기 집회에 우연히 합류하는 장면과 겹쳐진다. 3) 진보-보수의 기존 좌표계와 그로부터 벗어난 제3의 항으로의 지향에 관해서는 브뤼노 라투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신기후체제의 정치』, 박범순 옮김, 이음, 2021 참조. 4) 브뤼노 라투르,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홍철기 옮김, 갈무리, 2009. 5) 김은석, 「백석 시의 '무속성'과 식민지 무속론—백석 시의 '무속적 상상력' 재고」, 『국어문학』 48집, 2010, 115~137쪽; 소래섭, 「1920년대 국민문학론과 무속(巫俗)적 전통」, 『한국현대문학연구』 22집, 2007, 75~100쪽. 6) 일본 추리소설 『세 가지 악몽과 계단실의 여왕』(마스다 타다노리, 한겨레출판, 2019)의 역자 김은모의 후기에 따르면, '미카라데타사비(身から出た錆)'는 칼 자체에 녹이 생겨 도신(刀身)을 삭게 하는 현상에서 유래한 일본 속담으로, 자신이 저지른 악행의 결과 때문에 스스로 괴로워한다는 뜻, 즉 '자업자득'을 의미한다. 7) 노스럽 프라이, 「네번째 에세이: 수사 비평—장르의 이론」, 『비평의 해부』, 임철규 옮김, 한길사, 2000, 429~447쪽. 8)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1886년 초판본』, 구자언 옮김, 더스토리, 2018. 9) 프랑코 모레티, 『공포의 변증법』,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4, 19~32쪽. 10) "기계를 분해하고 짐을 나르는 소리 때문에 재하와 나는 고성에 가까울 정도로 목소리를 높여 대화를 나눠야 했다./…… 알았으면 …… 텐데 ……해요./뭐라고?/……하다고요./여기 정리되면 어디로 갈 거니?/네?/여기 정리되면 어디로 갈 거냐고?/네? ……인지 못 ……겠어요./우리는 그렇게 몇 마디를 주고받다가 알아들은 척 고개를 끄덕이거나 말없이 웃으며 대화를 마무리했다."(111~112쪽) 11) 양경언, 「진짜?—성해나 소설의 '나아감'에 대하여」, 『혼모노』 해설, 3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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