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아동문학평론 2024년 겨울호(제193호)
서재환 동시 세계의 탐구
Ⅰ. 동시조 시인 서재환
서재환(1961∼ )은 시조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가 동시조로 활동 영역을 넓혀 아동문학에 둥지를 튼 동시조 시인이다. 그의 등단은 눈부시고 화려하였다. 샘터 시조상 당선(1986), 전국 만해백일장 전체 대상 수상(1987), 《동아일보》신춘문예 시조 당선(1988), 《시조문학》에도 추천 완료(1988), 《동아일보》신춘문예 동시 당선(1997) 등으로 이어졌다. 1986년부터 3년 동안 내리 문학상을 수상하였고, 《동아일보》 신춘문예 2관왕을 쟁취한 시인으로서 시조 장르에서 출발하여 동시조 장르로 완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서재환의 작품집으로는 제1동시집 『번갯불 한덩이 천둥 한덩이』(1999), 제2동시집 『만약에 말야』(2004), 제3동시집 『산이 옹알옹알』(2011), 제4동시집 『서재환 동시선집』(2015) 등 4권이다. 동시선집을 빼놓고 보면 2011년 이후 새로 발간된 작품집이 전혀 없는 과작의 동시조 시인임을 알 수 있다. 제1동시집에는 전체 80편 중 동시조가 40편이 수록되어 있고, 제2동시집에는 전체가 동시 60편으로 채워져 있으며, 제3동시집에는 전체가 동시조 52편으로 채워져 있다. 제14회 한국아동문학상, 제3회 우리나라 좋은 동시문학상도 수상하였으며, 2001년에는 초등학교 4학년 국어교과서에 동시 「주사 맞던 날」이 수록되어 그의 문학적 역량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서재환 동시문학에 대한 연구로는 평론, 해설, 인물론 등 몇 편이 있다. 작품 해설로는 이준관의 「자연의 아름다움을 참신한 비유로 표현한 시」(제2시집 『만약에 말야』, 2004), 윤삼현의 「울림과 깨움의 시학」(제3시집 『산이 옹알옹알』, 2011) 등이 있고, 평론으로는 이정석의 「동시조집‘산이 옹알옹알’에서 고요를 깨는 천둥소리를 듣다」(《어린이 책이야기》, 2012 여름호), 유순덕의 「동심에서 길을 찾는 ‘견자와 울림’의 미학」 등이 있다. 인물론으로는 윤삼현의 「반듯함, 꿋꿋함, 나긋나긋함의 시인」(《열린 아동문학》2012. 여름호) 등이 있다.
이들 연구에서 논의된 내용을 살펴보면 이준관은 제2동시집에 대하여 그의 동시에는 유난히 자연을 노래한 작품들이 많아 자연 사랑이 중심 주제라 할 수 있으며, 선명한 시각적 심상을 제시함으로써 시적 효과를 거두고 있어서 그의 동시는 눈에 보이듯 투명하다고 하였고, 윤삼현은 제3동시집 해설에서 그의 동시조에는 동심의 산울림을 통한 발견과 일깨움, 순수한 새의 지저귐을 통한 상쾌 발랄한 동심 구현, 자유로운 상상력을 통한 상큼한 동시의 맛 고조,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통한 상호 의존과 어울림 등 네 가지로 나누고 있다. 그리고 윤삼현은 서재환의 독특한 창작 태도에 대하여 “그는 소재에 맞게 분위기를 자신의 어법으로 육화시키는데 탁월한 솜씨를 지녔다. 남성적 톤으로 굵고 힘찬 정서를 동시조 그릇에 담아내는데 하나의 개성적 틀을 보여준 것과 별도로 어린 동심에게 존재하는 감각적 사물들을 대폭 눈높이를 맞춰 울림 있게 다룸으로써 나긋나긋함과 끈끈함의 시의 맛을 달큰하게 보여준다. 또한 유연한 탄력에 놀랍다.”고 하였다. 이정석은 서재환의 동시조를 고요나 정적(靜寂) 상태를 표현하는 정(靜), 역동적인 움직임을 표현하는 동(動), 정적과 움직임을 함께 표현하는 정중동(靜中動)의 세 가지 모습, 죽음에 대한 긍정적 수용 등으로 정리하였고, 유순덕은 동심의 등불에 비친 자연과 고향, 시적 성취와 견자의 미학, 묵정밭에 울린 정형의 울림 등 세 가지로 분석하였다. 지금까지의 여러 논의를 정리하자면 서재환의 동시나 동시조는 첫째 지대한 자연에 대한 관심과 사랑, 둘째 생태주의를 통한 인간과 자연의 공존. 셋째 죽음에 대한 긍정적 수용 등으로 크게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서재환의 문학적 행보를 살펴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였다. 도로의 싱크홀처럼 그에게 창작 공백의 긴 시간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2012년 《열린아동문학》여름호 특집 ‘이 계절에 심은 동시나무’에 동시 3편, 동시조 2편 발표를 마지막으로 2023년 작년까지 동시나 동시조 작품을 발표하지 않아 무려 12년 동안 대외적인 작품 발표나 문단 활동을 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존 발표 작품을 추려내서 발간한 2015년 동시선집인 제4동시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기간을 서재환의 문학적 침묵기 또는 창작 공백기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이 기간에 대하여 서재환은 주저주저 말을 아끼면서도 다만 발표 안한 동시조들 즉 서랍 안에 묻어둔 작품들이 꽤 있다고 덧붙였다. 개인적인 창작 활동은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서재환의 창작 공백기는 아마도 서재환의 동시 창작에 대한 완벽주의 추구 또는 문학적 염결성, 기질적인 결벽증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예를 들면 제3동시집 『산이 옹알옹알』을 발간할 때 출판 인쇄 중인데도 불구하고‘작품 일부가 성에 차지 않아 고쳐서 다시 찍어야겠다’고 작품 퇴고를 거듭하였고, 배포 직전의 동시조집 작품을 수정하여 해당 지면에 교정지를 붙이기도 하였다. 또한 초판본 여러 편의 작품을 수정 또는 개작하여 재판본에 게재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나는 과작이다. 작품을 써서 발표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매우 조심스럽고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작품 한 편을 내놓자면 그것이 온전히 내 분신이 될 때까지 붙들고 있다. 작품의 양적인 것과는 애당초 거리가 먼 사람인 것이다.(중략) 이처럼 나는 많은 동시를 써내기보다는 수고와 고통을 즐기려는 동시 쓰기를 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는 최상 최고를 지향하는 작가적 이상성에 나온 곳이다.
-서재환의 「나는 이렇게 동시를 쓴다」 일부(《열린아동문학》2012. 여름호)-
이런 점(=수정 또는 개작)은 곧 서재환 시인의 창작에 대한 치열함, 꼼꼼함, 연금술사적 세공과 분석력, 독자에 대한 책임성 등이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반영한다. 엄격한 시혼과 창작혼에 입각한 단호한 의지를 보면서 그동안 잊고 지낸 선비정신을 떠올리게 되었다. 나아가 서 시인에게 문학은 일종의 엄숙한 종교 제의와 같은 것임을 거듭 굳히게 되었다.
-윤삼현의 「반듯함, 꿋꿋함, 나긋나긋함의 시인」 일부(《열린아동문학》2012. 여름호)-
앞 글에는 서재환 그만의 독특한 완벽주의 창작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온전히 내 분신이 될 때까지 붙들고 있다’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최상 최고를 지향하는 작가적 이상성’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는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 될 때까지 퇴고와 수정을 거듭할 것이라는 자기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문학적 염결성을, 뒷글에서 윤삼현은 ‘일종의 엄숙한 종교 제의’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니까 서재환의 문학 창작 공백기는 애초 존재하지 않으며, 작품 수정기 또는 퇴고기라고 이름 붙여주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이 글은 먼저 서재환 동시문학의 시기별 변화 모습을 동시조 「해바라기」 세 편을 통해 살펴보고, 가장 중요한 특성 세 가지를 찾아 분석하였는데 뛰어난 감각적 상상력, 반생태적 행위 비판하기, 죽음에 대한 긍정적 수용 등으로 나누어 서술하고자 한다. 그리고 일부 글은 오래전에 발표한 내용을 수정 보완하여 실었음을 밝힌다.
Ⅱ. 「해바라기」를 통해 본 서재환 문학적 변화
서재환의 작품 중에는 재미있게도 동일한 제목을 가진 작품이 몇 편 있다. 동시조 「해바라기」이다. 그의 발표 작품 중 「해바라기」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작품 수는 연작시 7편을 포함하여 9편이나 된다. 『서재환 동시선집』에 실린 연작시 「해바라기」 7편 중 3편이 개작 수록되었음을 감안하면 「해바라기」 관련 작품은 총 12편으로 늘어난다. 여러 편의 「해바라기」 동시조를 읽어보면 발표 시기에 따라 서재환의 문학적 변화상을 살펴볼 수 있다. 미세 변화일지라도 그가 추구하려는 ‘작가적 이상성’의 한 단면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기에 발표한 「해바라기」(1999)과 창작 활동이 왕성하였던 시기의 「해바라기」(2011) 그리고 최근에 창작한 「해바라기」(2020) 세 편을 보면 작품 변화가 눈에 띄게 선명하다.
①너는 꽃대궁부터가/ 다른 꽃과는 다르다.//
키는 훤칠, 발은 솥뚜껑/ 다식판 같은 얼굴//
아무리/ 태양이 불타도/ 네 목을 꺾진 못한다.//
담장이 높다고 해도/ 네 앞을 가로막지 못한다.//
저희끼리 깔깔대는/ 자잘한 꽃들관 달리//
한바탕/ 나팔 소리를/ 찢어지게 불어제낀다.//
쓰러졌다 일어서면/ 더 높은 해바라기//
여름이 뜨거울수록/ 그림자는 더욱 굵고//
때리고/ 지나간 비에/ 푸른 바람 날개 단다.
-「해바라기」 전문(1999)-
②1. 등에 붙은/ 불개미 떼/ 간질간질 따끔! 따끔!//
온몸이/ 비틀어지는데/ 절로 꼬아지는데 굵다란/ 독수리 발톱으로/ 땅을 꽉- 쥐고 섰다. 2. 나팔꽃을/ 번쩍 들어/ 무동을 태워주자//
나도 한번!/ 나도 한번!/ 꽃밭이 난리 났어요.//
덩달아/ 꼬맹이 꽃들도/ 무동 태워 달래요.
-「해바라기 1~7」중에서(2011)-
③얼마나 기쁨이 커야/ 저리 환히 웃을까.//
얼마나 즐거워야/ 저리 함빡 웃을까.//
벌어진/ 눈 코 입이 다/ 큰 웃음판 되었다.
-「해바라기」 전문(2020)-
①「해바라기」, ②「해바라기」, ③「해바라기」 등은 해바라기의 다양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①은 세 수로 이루어진 연시조로 해바라기의 키, 발, 얼굴 등 해바라기의 겉모습, ②는 두 수로 이루어진 연시조로 해바라기 줄기에 붙어있는 벌레나 감고 오르는 나팔꽃 등 주변 사물과의 어울림, ③은 단시조로 해바라기의 기쁨, 즐거움을 찾아내는 표정 변화 등 해바라기의 심리적 감정 표현 등 서재환의 해바라기에 대한 관심이 ①해바리기 외양 탐색→②해바라기의 주변 환경과 어울림 탐색→③해바라기의 감정 파악 탐색 등 외부 모습에서 내부 심리 상태로 시적 관심 대상에 대한 그의 동심의 눈높이가 점차 확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①에서는 강인한 해바라기 겉모습을 동시조 세 수에 담고 있는데 첫째 수에서는 해바라기의 키, 발, 얼굴 등 겉모습을 그리면서 ‘네 목을 꺾진 못한다’고 불타는 태양과 대적할 것 같은 강렬한 해바라기의 인상을 표현하고 있고, 둘째 수에서는 담장을 훌쩍 뛰어넘는 해바라기의 ‘나팔소리’를 들려주고 있으며, 셋째 수에서는 뜨거운 여름철에도, 때리고 지나가는 폭우에도 더욱 굵게 자란다는 것이다. ②에서는 키가 큰 해바라기에 붙어서 활동하는 불개미 떼나 나팔꽃 덩굴 등 주변 동식물들에게 여러가지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슬기롭게 이겨내는 해바라기의 진짜 모습을 그리고 있다. ③에서는 해바라기의 둥근 얼굴 속에 담겨있는 기쁨과 즐거움을 찾아내고 있는데 종장 ‘벌어진/ 눈 코 입이 다/ 큰 웃음판이 되었다’에서 까맣게 익어가는 가을 해바라기의 환한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Ⅲ. 서재환 동시 세계의 탐구
1. 뛰어난 감각적 상상력
사전에는 상상력이란 경험하지 않은 현상이나 사물에 대해 머릿속으로 그려 보는 능력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상상하면서 그려 보는 새로운 세계는 매우 다양하고 독창적이며 기발하다. 생명이 없는 대상에게 생명과 감정을 부여하는, 유아기의 물활론적 사고도 인지발달 단계의 어린이다운 상상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작가들의 문학적 상상력도 작품의 수준, 작품의 독창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서재환의 경우 그의 동시 속에서 특히 의태어, 의성어 등의 상징부사나 여러가지 심상을 활용한 감각적 상상력에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작품 속에 사용한 상징부사는 매우 이질적으로 결합시킨 시어로서 참신하고 색다른 상상의 세계를 맛보게 한다. 그의 동시 중 감각적 상상력이 잘 나타난 작품으로는 「여름 한 때」, 「꽃눈은 절로 나오는 게 아니다」, 「밤이 오면」, 「한 마당」, 「골대」, 「산이 옹알옹알」, 「눈오는 날」, 「비명」, 「까치 소리」, 「딱따구리」, 「옥수수밭 」, 「목련 2」, 「여기서 끙 저기서 끙!」 등 꽤나 많다.
한겨울 빈 숲 속에/ 벚꽃이 휘날리듯//
아득히, 하늘 가득/ 은나비, 은나비 떼//
손들어/ 두 팔 흔들면/ 춤을 추며 몰려와요.//
오늘은 생일잔치/ 온 세상이 하얘요//
언덕은 케이크/ 잣나무는 푸른 촛불//
하늘도/ 함박눈 폭죽/ 펑! 펑! 마구 터트려요.
-「눈오는 날」 전문-
「눈오는 날」은 한겨울 빈 숲에 가득 내리는 함박눈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두 수짜리 연시조이다. 첫째 수는 벚꽃과 은나비 떼, 춤 등 주로 시각적 심상을 이용해 함박눈의 화려함을 표현하고 있고, 둘째 수는 생일잔치, 케이크, 촛불, 폭죽 등 시각적 심상과 청각적 심상 등을 활용해 함박눈 잔치를 시끄러운 축제 분위기로 고조시키고 있다. 이 작품의 화룡점정은 둘째 수 종장 ‘하늘도/ 함박눈 폭죽/ 펑! 펑! 마구 퍼뜨려요’이다. 원래 함박눈이란 바람을 타지 않고 비교적 정적이나 고요 속에 내리는 눈을 말한다. 그런데 이렇게 함박눈만 조용히 내리는 숲인데 ‘펑! 펑!’ 무슨 폭죽 소리인가. 놀랄만한 상상력이다. 함박눈과 폭죽은 매우 이질적인 시어 결합이다. 그래서 더욱 참신하게 다가온다. 폭죽은 펑펑 세차게 쏟아지는 함박눈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또 의태어 ‘펑펑’을 의성어 ‘펑! 펑!’으로 시어를 바꾸어 배치시키고 있는 것이다. 서재환의 뛰어난 감각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종장이다.
민들레꽃은 이상해요,/ 쪼그만 꽃인데요/
그냥 지나치면/ 삐악삐악 날 불러요/
가늘고/ 노란 발목이/ 아장아장 따라와요.//
아닌데, 민들레꽃인데,/ 발걸음을 멈추면/
저도 따라 멈추어요/ 병아리 소리 멈추어요/
발 떼면/ 또 삐약삐약/ 따라오며 날 불러요.
-「이상해요」 전문-
「이상해요」는 가슴에 남아있는 노란 민들레꽃의 강한 인상을 소리로 환치시켜 표현한 두 수짜리 연시조이다. ‘쪼그만 꽃’ 민들레가 시적화자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은 민들레꽃이 노란 병아리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삐악삐악’ 노란 병아리 소리는 시적화자 즉 서재환의 귀에 들리는 상상의 소리이고, 가슴으로 만들어낸 청각적 심상이라는 것이다. 독창적이고 감각적인 대단한 상상력이다. 이 작품의 특징은 시적화자가 상상력으로 들었던 병아리 소리를 직접 확인하고자 ‘멈추고 뒤돌아’ 봄으로써 서로 다른 문학적 풍경을 연출한다는 것이다.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면 병아리 소리를 들을 수 없는 풍경과 걸으면 다시 병아리 소리가 들리는 풍경이다. 기이한 풍경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도 「이상해요」이다. 아마도 민들레꽃에 대한 강한 인상이나 감동이 자연스럽게 ‘삐악삐악’ 같은 병아리 소리를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연못가 수풀 속에 물뱀 한 마리 숨어 있다
무심코 넓은 연잎에 올라앉은 참개구리
풀잎 위 잠자리 눈이 왕방울로 불거진다.//
벌써 알아차렸나, 물뱀이 움직인다.
표적을 향해 머리를 위아래로 또 좌우로…….
동작을 잠시 멈추고 숨고르기 하고 있다.//
수양버들 쓰르라미 보다못해 쓰을! 쓰을!
연못을 내려다보며 도망 신호 보내는데
개구리 멍텅구리는 일광욕에 빠져 있다.
-「여름 한 때」 전문-
「여름 한 때」는 세 수로 이루어진 연시조로서 연못 수풀 속에서 먹잇감을 기다리는 물뱀과 가까운 곳 연잎 위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참개구리 사이에 일어나는 팽팽한 긴장감, 이를 저지하려는 주위 동물들의 안타까움이 잘 나타난 작품이다. 첫째 수에서는 ‘풀잎 위 잠자리’의 ‘왕방울’처럼 커진 놀란 눈이 초점이고, 둘째 수에서는 참개구리를 향해 조용히 움직이는 ‘물뱀’이 초점이고, 마지막 수에서는 도망 신호를 보내는 ‘수양버들 쓰르라미’ 울음소리이다. 이 작품은 마치 화산 폭발 직전의 모습과 흡사한 장면이며, 자연 다큐멘터리의 극적 한 부분으로 느껴질 만큼 긴장감을 보이고 있다. 이 동시조에서도 감각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시어는 시각적 심상 ‘왕방울’의 잠자리와 청각적 심상 ‘쓰을! 쓰을!’ 쓰르라미 소리이다. 이 작품에서 주연인 물뱀과 참개구리보다는 조연인 잠자리와 쓰르라미가 더 중요한 역할하고 있다. 물론 이 조연들의 기본 역할은 참개구리가 잡아먹히지 않도록 하는 것이지만 소통의 불가능함에 오는 능력의 한계를 보여 줌으로써 시적 긴장감을 더욱 높여 주고 있다. 왕방울 눈을 보여주는 잠자리, 악을 쓰는 쓰르라미와 함께 멍텅구리 개구리는 생태계 약자에 대한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하면서도 작품의 분위기를 가볍고 유쾌하게 그리고 익살스럽게 유지시키고 있다. 특히 ‘쓰을! 쓰을!’은 청각적 심상인 쓰르라미 소리이지만 쓰윽 쓰윽 물 위에서 청개구리를 향해 다가오는 물뱀의 움직임을 유추할 수 있는 의태어이기도 하다.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 시어라고 할 수 있다.
2. 반생태적 행위 비판하기
서제환은 오래전부터 생태주의 관점에서 반생태적 행위를 비판하는 작품을 창작해 왔다. 필자는 「한국동시 백년의 생태의식 변화 고찰」(《신생》2022. 여름호)에서 생태주의는 사람과 모든 자연 생명체는 평등하며, 나나 타인에서 동식물종, 지구로 넓혀서 모두를 하나로 인식하는 생각이라 할 수 있으며, 지구 생태계가 부분과 전체, 개체와 환경이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유기적 통일체로 인식함을 말한다고 하였다. 사람도 자연계의 일부라는 인식과 함께 자연과 사람의 호혜주의 관계 또는 평등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초겨울로 접어드는 이때 이례적으로 북태평양에서 제21호 대형 태풍 콩레이가 발생하여 대만으로 접근하고(《디지털타임스》 2024.10.31.), 스페인 발렌시아 지역에서 8시간 동안 내린 비가 지난 20개월 치 강수량보다 더 많았다(《경향신문》 2024.10.31.)는 뉴스를 접했다. 그만큼 지구의 기후 위기가 점차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기후 위기는 인간들의 작디작은 반생태적 행위에서부터 출발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서재환의 작품 중 생태주의 관점이 드러난 것으로 「들판에서」, 「뒷산이 무너져요」, 「자배기 속의 풍경」, 「상수리알 줍다가」, 「쉬잇!」, 「산불」, 「하얀 눈물」, 「자투리 숲」, 「겨우살이 걱정」, 「미안한 일」, 「비명」 등 많이 있다.
골프장 들인다고/ 나무숲을 베어 내요//
갈 곳 잃은 텃새들이/ 산 아래로 몰려와요//
남겨 둔/ 자투리 숲이/ 갑자기 시끄러워요.//
손바닥만한 동산숲에/ 서로 터를 잡으려고//
할퀴고 콕, 콕 쪼고/ 깃털마저 뽑힌 새들//
피 흘린/ 까치 한 마리/ 풀숲에서 퍼덕여요.
―「자투리 숲」전문
「자투리 숲」은 골프장 건설로 파괴된 나무숲에서 일어나는 텃새들 간의 세력 다툼을 아프게 그리고 있는 생태 연시조이다. 첫째 수에서는 골프장 건설로 나무숲이 없어짐으로써 ‘남겨 둔/ 자투리 숲’으로 텃새들이 몰려드는 모습을 그리고 있고, 둘째 수에서는 ‘손바닥만한 동산숲’에서 벌어지는 텃새들 간 피 터지는 삶의 터 쟁탈전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에서 눈여겨볼 것은 골프장 건설로 인한 나무숲 벌채라는 일차적이고 표피적인 성격의 환경파괴 모습이 아니라 근본적이고 내면적인 생물 개체 간 먹이나 공간의 균형 파괴라는 점이다. ‘피 흘린/ 까치 한 마리’에 담겨진 자연 생태계의 비극을 심층적으로 바로 보자는 것이다. 이런 서재환의 생태주의 관점은 다른 동시인들의 작품에 발견되지 않는 매우 독창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해도 참 너무한다./
추석 무렵부터 알밤을 줍는다고/
며칠째 점령군처럼 온 산을 들쑤신다.//
떨어진 밤 줍는 것만으로 성이 안 찬 사람들은/
밤나무 가지를 흔들고 돌팔매질로 후려치고/
회오리 지나간 뒷자리 같다 산이 온통 어지럽다.//
얼마나 놀랐으면 다람쥐와 청설모가/
요즘엔 한 마리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 어디 깊은 데 숨어 겨울 걱정 하나 보다.
-「미안한 일」 전문-
「미안한 일」은 도를 넘어 알밤을 줍거나 따는 행위로 말미암아 다람쥐나 청설모 등 약한 산속 동물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인간의 이기적인 행동을 나무라는 세 수짜리 연시조이다. 첫째 수에서는 알밤을 줍기 위해 온 산을 뒤집고 다니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둘째 수에서는 밤을 따기 위해 가지를 흔들고 돌팔매질까지 온통 산을 어지럽히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셋째 수에서는 너무 놀라 숨어버린 다람쥐와 청설모의 생존과 관련된 먹이나 겨울나기 걱정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 알밤을 줍거나 돌팔매질로 밤을 따는 사람들의 관행적인 행위가 과연 환경파괴, 자연 생태계 교란 등으로 몰아붙일 수 있는가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 서재환은 사람 중심의 관점에서 다람쥐나 청설모라는 자연 중심의 관점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넌지시 제안하고 있다. 앞에서 자연과 사람의 호혜주의 관계 또는 평등주의 관계를 유지하는 생태주의를 강조하였는데 이 작품 셋째 수에 나타난 다람쥐와 청설모에 대한 겨우살이 걱정을 하는 시적화자의 태도를 평등주의 생태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제목도 「미안한 일」이라고 붙인 것이다. 시적화자의 관점이 사람 위주의 이기적 사고에서 벗어난 까닭이다. 이 작품에 사용된 시어 중 인간의 독선적인 부끄러운 행동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점령군, 회오리, 돌팔매질, 후려치고, 어지럽다’ 등을 들 수 있다.
보도 블록 틈 비집고/ 고개 내민 민들레꽃//
쿵! 쿵! 땅을 울리며/ 포크레인 덮쳐 오자//
샛노란/ 외마디 비명/ 기계 소리에 묻힌다.
-「비명」 전문-
「비명」은 반자연물의 대표인 폭력적인 포크레인이 연약한 민들레꽃을 일방적으로 무자비하게 깔아뭉개는 생명 파괴를 고발하는 생태 단시조이다. 앞에서 언급한 서재환의 감각적 상상력이 잘 나타난 또 하나의 작품이다. 이 작품의 초점은 인간 위주의 반생명적 포크레인 ‘쿵! 쿵!’ 소리와 자연 위주 민들레꽃의 살아있는 생명의 소리인 ‘외마디 비명’의 충돌에 있다. 기계 소리와 생명 소리의 대결은 달걀을 던져 바위를 깨뜨리기만큼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포크레인의 기계 소리보다 민들레꽃의 외마디 비명 소리에 관심을 더 많이 가질 수밖에 없다. 생명의 비명 소리는 사람의 가슴에 아프게 다가오기 때문에 더 크게 울릴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의 제목이 「비명」인 연유이기도 하다. 잠시 고개를 돌려 민들레꽃의 비명소리가 실제적으로 들리는가를 귀 기울여 보면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설치한 절묘한 문학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서재환의 호혜주의 생태관 또는 평등주의 생태관이라 할 수 있다.
3. 죽음에 대한 긍정적 수용
서재환은 제3동시집 『산이 옹알옹알』(2011)을 출간할 무렵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아픔을 겪었다. 이 동시집 서문에서 그는“어머님은 내가 시 쓰는 것을 무척 자랑스러워하셨으며, 내 시의 애독자이기도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시집 속 작품의 상당수는 어머님의 삶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나온 것들입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작품 속에는 어머니 대신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주로 등장한다. 절절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나 안타까운 마음을 할머니나 할아버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담고 있다. 그런 이유가 무엇일까. 그가 어머니 대신 할머니나 할아버지를 작품 속에 등장시킨 것은 어머니에 대한 지나친 감정 노출을 억제하고, 독자들이 수용할 수 있는 객관적, 보편적인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표현하기 위해서 아닐까. 또한 가족과 이웃의 죽음에 대한 무서움이나 공포보다는 긍정적인 시선이 잘 나타나 있다. 이 동시집에는 죽음에 대한 작품이 「누렁이」, 「산밭」, 「벌초」, 「겨울 뒷동산」, 「가을 벤치」 등 5편이 수록되어 있다. 초기부터 최근까지 그가 발표한 작품들 중에서 죽음에 관한 동시는 이 5편 외에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 그에게 어머니의 죽음이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알 수 있다.
우리 마을 어른들은/ 죽어서도 모여 사네//
경희네 할아버지/ 상철이네 할머니//
엊그제/ 새로 와 묻힌/ 영동이네 할아버지//
옹기종기 앉은 무덤/ 또 하나의 이웃 마을//
수군수군 도란도란/ 얘기 소리 들려오고//
오늘은/ 흰 눈을 덮고/ 달덩이처럼 환하네.
-「겨울 뒷동산」전문-
「겨울 뒷동산」는 마을 뒷동산 공동묘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 어른 무덤을 보고 생전처럼 정답게 지낼 것이라고 상상한 연시조이다. 첫째 수에서는 살아 계실 때도 모여 살던 마을 어른들이 죽어서도 공동묘지에 정답게 모여 살고 있는 모습, 둘째 수에서는 흰 눈 내리는 겨울 뒷동산 공동묘지의 환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에서 공동묘지가 무섭다는 인식보다는 오히려 친밀하고 정답게 살아가는 인간 세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눈이 덮인 추운 겨울 달빛 속 무덤의 모습이지만 오히려 웃고 떠들고 살아 숨쉬는 생명의 공간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시어는 의태어 ‘옹기종기’, ‘수군수군’, ‘도란도란’으로 이들 시어는 죽음의 공간 공동묘지를 생동적 분위기, 긍정적 분위기, 유쾌한 분위기로 전환시키고 있다. 무서움, 공포의 공동묘지에 대해 이웃 어른의 일상적 친근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죽음에 대한 확장된 인식과 죽음에 대한 긍정적 수용을 표현하고 있다.
살아생전 할아버지/ 머리 깎아 드리듯이//
아빠랑 삼촌이랑/ 잡초 깎아 드립니다//
억새풀/ 흩어진 쑥대밭/ 곱게 깎아 드립니다.//
쥐구멍 쑥부쟁이/ 다져 주고 뽑아내자//
할아버지 목소리가/ 바람결에 묻어옵니다//
―고맙다!/ 어, 시원하다!/ 쟁쟁하게 들려옵니다.
―「벌초」전문-
「벌초」는 돌아가신 할아버지 산소를 돌보면서 나누는 가족들의 단합과 사랑을 표현한 연시조이다. 이 작품의 시적화자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손주이다. 손주 눈에 비치는 할아버지 산소의 벌초 작업과 땀 흘리는 가족들을 통해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단단한 가족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 수에서는 잡초 등이 자라 쑥대밭 된 할아버지 산소를 아빠 삼촌 등 가족들이 벌초하고 돌보는 모습, 둘째 수에서는 산소 벌초를 끝내고 쥐구멍도 없앤 후에 가족끼리 모여 할아버지 이야기도 하면서 가족의 따뜻한 정을 나누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함께 모여 이야기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돋보인다. 종장‘-고맙다!/ 어, 시원하다’라는 시구는 후손들과 따뜻하게 의사소통하는 할아버지의 목소리로 가족 간의 사랑, 유대감과 고마움을 보여주고, 죽음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갖게 하고 있다.
할머니 돌아가신 뒤/ 혼자 맥이 풀려 있다.//
입을 다물고 며칠째/ 눈도 반만 뜨고 있다.//
불러도/ 꼬리만 한 번/ ‘까딱!’ 하고 엎드려 있다.//
눈치코치 없는 닭들/ 밥그릇을 다 비워도//
할머니가 남기고 간/ 빈 의자만 지키고 있다.//
닭들도/ 비워 둔 뜰도/ 본 둥 만 둥 하고 있다.
-「누렁이」전문-
「누렁이」는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정 때문에 활력을 잃어버린 채 엎드려 있는 누렁이를 표현하고 있는 연시조이다. 첫째 수에서는 진한 정을 나누던 할머니 죽음에 대한 누렁이의 의욕 상실을, 둘째 수에서는 천방지축으로 나대는 닭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누렁이의 진짜 슬픈 심정을 대조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서재환의 아픈 심정과 그리움을 누렁이를 통해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누렁이의 무기력한 모습은 이 작품 전체에 깔려 있다. ‘혼자 맥이 풀려’, ‘입을 다물고’, ‘눈도 반만 뜨고’, ‘꼬리만 한 번/ 까닥 하고 엎드려’, ‘빈 의자만 지키고’, ‘본 둥 만 둥’ 등 끝없는 자기 상실감, 존재 부정, 현실 부적응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런 누렁이와 대척점에 서 있는 ‘눈치코치 없는 닭들’은 약간 희극적이고, 무신경하고, 본능적인 식탐, 단새포적인 행동 등을 보여줌으로써 누렁이의 존재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고 있다.
Ⅳ. 또 다른 비상을 기다리며
서재환은 과작의 동시조 시인이다. 그래서인지 시기별로 발표되었던 작품들의 변화 양상을 찾아내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다만 동시조 「해바라기」 세 편을 통해 시기에 따른 서재환의 문학적 미세 변화상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의 동시문학의 중요한 특성 세 가지를 찾아 분석하였는데 뛰어난 감각적 상상력, 반생태적 행위 비판하기, 죽음에 대한 긍정적 수용 등으로 나누어 논의하였다.
앞 글에서는 그의 동시조 몇 편을 분석하였는데 마무리하면서 그의 동시 한 편을 읽어 보겠다.
눈이/ 내렸다가/ 녹고//
녹았다가/ 또 내리고//
하느님이/ 땅 위에서/ 시를 쓰나 보다.//
썼다가/ 지우고//
지웠다가/ 다시 쓰고//
하느님도/ 시를 쓸 때는/ 자꾸/ 고쳐 쓰나 보다.
-「시를 쓰나 보다」전문-
「시를 쓰나 보다」는 겨울철 내렸다가 그치고, 녹았다가 내리는 눈오는 날의 풍경을 하느님의 시 창작 행위로 바꾸어 상상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녹았다가/ 또 내리고’처럼 눈 내리는 모습을 문학작품 수정이나 퇴고의 과정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하느님도’에서 ‘도’라는 조사로 인하여 작품 퇴고를 수없이 수행하는 서재환 자신도 포함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궁극적으로 최상 최고를 지향하는 작가적 이상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비상을 꿈꾸는 서재환의 면벽 수행자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서재환 동시선집』(2015) 서문에서 간절히 외치고 있는 서재환의 기도를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나의 시들이여! 민들레 꽃씨처럼 바람 타고 멀리멀리 날아가 흩어져 이 땅의 동심 회복에 기여해 다오! 기여해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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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통의 상상력 “학살 이전, 고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1) 이것은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Primo Levi)의 문장이 아니다. 『소년이 온다』에 나오는 한강의 문장이다. 그 단호함이 너무 고통스럽고 너무나 처절하여 차라리 숭고하다. 또 “증언. 의미. 기억. 미래를 위해”(p. 166) 기록하거나 증언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이가 있다고 말한다. 어떻게 증언할 수 있느냐고 통절하게 절규한다. “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수십번 후벼들어왔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궁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킨 당신을 그들이 통합병원으로 데려가 수혈받게 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이년 동안 그 하혈이 계속되었다고, 혈전이 나팔관을 막아 영구히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pp. 166~167). 이렇게 증언할 수 없는 것을 증언하기, 그렇지만 끝내 증언할 수 없으므로 증언할 수 없는 고통까지 겹쳐서 역설적으로 극화하기, 한강의 고통스러운 숭고미는 필경 거기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물론 그것은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한강의 경우에만 특화된 수사학은 아니다. 많은 이가 아프니까, 고통스러우니까 쓴다고 한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상상력으로 넘어서기 위해, 상상력으로 고안한 대안 세계로 고통스러운 현실을 치유하기 위해 쓴다고 토로한다. 가령 아직 드러나지 않았던 감정을 창조했고, 인간의 깊숙한 내부에 숨겨져 있던 무의식을 표출시킨 작가 도스토옙스키도 그렇지 않았던가. 그는 인간의 고통과 욕망과 열정의 극한까지 추구하며 우주의 심연을 향해 다가갔다. 두루 알다시피 저물어가는 황혼의 잿빛 러시아의 하늘 아래서 가슴을 짓이기며 살았던 인물이었다. 영혼의 상처를 휘감고 도는 어둠의 정체를 그는 언제나 직시하고자 했다. 은총과 정의가 사라진 고통스러운 연옥, 그 불행과 절망의 황무지에서 전율해야 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분노에 찬 이반 카라마조프가 말하듯, 도스토옙스키의 대지는 그 심연의 핵심까지 고통의 눈물로 젖어 있는 형국이었다. 어디를 가도 어디를 보아도 타락의 나락으로 빠지는 죄 많은 인간의 처참한 몰골뿐이라고 했던 드미트리 카라마조프의 탄식에서도 세계의 고통에 대한 감각은 뚜렷하다. 이같이 타락하고 죄 많은 현실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영혼의 구원을 갈망한다. 고통의 심연에서 고통을 초극할 수 있는 참 지혜는 그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고통을 통해서만 진실로 사랑할 수 있다고 한 이는 이반 카라마조프였다. 어쩌면 우리는 도스토옙스키 문학 세계를 횡단하고 성찰하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괴로워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도스토옙스키에서 한강에 이르기까지 진정한 작가들은 대개 ‘고통의 향유’를 통한 미학적 실천을 통절하게 수행했다. 작가들만이 아니다. 고통이 바로 사유의 시작이라고 했던 철학자 레비나스, 예술을 ‘고통의 언어’라고 불렀던 아도르노, 예술적 쾌락원칙의 역승화를 낳게 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현실과 그 현실원칙의 강고함에 있다고 했던 마르쿠제, 이야기와 함께 경험되는 허구적 체험을 일러 절망 속에서 하는 희망의 체험이라고 논의한 폴 리쾨르, 소포클레스의 『필록테테스』에 나타나는 상처/고통과 신궁의 기예 사이의 역설에서 예술가의 존재론을 착안하여 상처와 고통을 통한 예술적 영광을 강조했던 미국의 비평가 에드먼드 윌슨 등등의 사유와 고민이 함께 만나는 자리이기도 했다. 어쩌면 ‘고통의 향유’란 가장 인간적인, 그리고 가장 고귀한 예술적 과정이 아닐까.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응시하면서, 문학의 이름으로, 고통을 향유하는 지독한 역설을 수행할 때, 문학은 자연스럽게 치유의 지평을 예비하며 비극의 숭고미의 어떤 극점을 알게 된다. “학살 이전, 고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라는 사실을 단호하게 추문화하며, 독자와 더불어 정녕 인간적인 심연의 질문을 열어나간다. 한강 문학의 바탕 의식은 그러하다. 2. 영매(靈媒) 작가와 고통의 법열(法悅) 고통의 순간은 널려 있겠지만, 가장 비극적인 장면은 아무래도 전쟁터나 홀로코스트 현장에서 두드러진다. 트로이전쟁을 다룬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때부터 그렇지 않았던가. 그러기에 많은 작가, 예술가들이 반전사상이나 반폭력에의 연대를 열정적으로 펼쳤다. 파블로 피카소도 그런 경우 아닌가. 이른바 피카소의 3대 반전 작품, 그러니까 <게르니카>(1937), <시체구덩이>(1946), <한국에서의 학살>(1951) 등만을 떠올려도 그렇지 않은가. 큐비즘의 방식으로 고통을 입체적으로 형상화했던 피카소처럼, 한강 역시 고통의 서사가 선형적으로 재현되기보다 입체적으로 포개어지며 고통의 심연으로 한없이 내려간다. 그러면서 매우 인상적인 장면을 전경화한다. 피카소가 여러 방향에서 본 이미지를 한 화면에 구성했듯이, 한강도 상호 시점이거나 복합 시점으로 깊은 고통을 응시하면서, 곡진한 시적 문체로 장면화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서둘러 답하자면 한없이 그윽한 영매(靈媒) 작가이기에 가능하다. 사람과 사람, 산 자와 죽은 이, 인간과 동물, 인간과 식물 사이에서 하염없이 고통받으며, 끊어진 영혼의 길을 이어주려는 감수성과 상상력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렇다.2) 그녀는 있는 이야기, 있었던 과거를 단지 그대로 재현하는 작가가 아니다. 있었던 사건에서 고통받은 이들의 차가운 손을 어루만지고, 이미 식어버린 영혼 안으로 스며들어 시리면서도 뜨거운 감각의 실존을 수행한다. 스며든 순간에 몰입하여 시나브로 엑스타시의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 법열(法悅)의 에너지와 감수성으로 말미암아, 한강이 스며든 어떤 인간이나 사물도 단지 홀로인 존재의 차원을 넘어선다.3)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게 되는, 더 나아가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더불어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 죽은 이도 새롭게 시선과 목소리를 지니게 되며, 가장 고통스럽고 속절없는 서발턴(subaltern) 혹은 벌거벗은 호모 사케르들의 눈물 속에서도 청량한 생명의 메시지를 얻게 된다. 무엇보다 고통의 심연을 길어 올리는 한강의 시적 문체는 중층적 가역반응의 결과이자 원인이다. 자아와 세계가 충돌하면서도 그 충돌한 세계를 엄청난 에너지로 끌어안는 자아의 감수성으로 인해, 그토록 이상한 가역반응의 결과로 빚어질 수 있었던 게 한강의 시적 문체이다. 다시 말해 문학적 정의의 이름으로 심판해야 마땅할 역사적 트라우마를 다루면서도 그 고통의 만화경을 모두 자기 안에서 끌어안고 ‘고통하기’에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역설적으로 아름다운 문체로 빛난다. 그런 시적 문체를 독자들이 읽으면, 독자 또한 새로운 가역반응을 일으킨다. 아름다운 문체에 이끌려 한강의 세계로 들어간 독자는 그 안에 들어있는 엄청난 고통의 항아리에서 슬픔의 숨결과 교감하면서 함께 고통을 나누려는 진실한 인문적 인간으로 거듭나는 가역반응의 대열에 동참하게 된다. 이것은 단순한 것일 수 없다. 서로의 외로운 영혼을 이어주는 현묘한 영매 작가의 창작과 소통 과정에서 매우 복합적으로 빚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강은 19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소설 「붉은 닻」(필명: 한강현)으로 당선되기 한 해 전인 1993년 계간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 「서울의 겨울」외 4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그 전에 연세대 4학년 때인 1992년 시 「편지」로 연세대 신문인 <연세춘추>가 주관한 연세문화상-윤동주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때 심사위원은 정현종 시인과 김사인 시인/평론가였다. 애도의 정념과 밀도가 어지간한 이 시에 대한 심사평도 인상적이다. 한강 시의 능숙함을 칭찬하는 과정에서 “굿판의 무당의 춤과 같은 휘몰이의 내적 열기를 발산하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독특하며, “그러한 불과 같은 열정의 덩어리”에 들어있는 풍부한 에너지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청 시절부터 이미 한강의 샤먼 시인, 영매 작가로서 에너지가 넉넉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면에서 1992년 심사위원들의 안목은 탁월했다. 샤먼 시인 한강의 곁에 있는 ‘나무’는 대개 “하늘과/ 나를 이어주”(「새벽에 들은 노래 2」)4)는 우주목(宇宙木, cosmic tree)이다. 『채식주의자』 『작별하지 않는다』 등 여러 작품에서 꿈 장면에 그런 우주 나무들이 모여 있는 신비로운 숲의 정경이 자못 긴장감을 형성한다. 그런 우주 숲에서 서사 속 캐릭터는 종종 엑스터시의 순간으로 입사한다. 가령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도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 숲에서 밀물에 떠밀려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죽음들의 풍경을 떠올리던 주인공은 갑자기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고 서술한다. “마치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과 같은 떨림”이었지만, 공포, 불안, 전율, 혹은 “돌연한 고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어떤 것에 휩싸인다. 그런 전율과도 같은 떨림의 순간을 고통스럽게 침례한 다음 “이가 부딪히도록 차가운 각성”5)에 이른다. 이런 떨림과 고통, 전율과 공포, 불안과 각성의 과정에 몰입하는 영매 작가의 에너지는 엄청나다. 마치 작두를 타는 무당의 열기를 방불케 한다. 그 순간 끊어졌던 여러 관계가 이어지고, 안 보였던 상처의 얼룩들이 보이고,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가 들린다. 가령 「거울 저편의 겨울 6―중력의 선」이라는 시는 아르헨티아를 방문한 샤먼 시인이 중력의 선을 따라 지구 반대편 한국의 풍경을 보는 이야기로 이루어진다. 남미 대륙 남부에 원래 살던 인디오들을 거의 절멸시키고 아르헨티나를 건설한 군인 “로카의 동상을 올려다보다가” “반대편의 학살을 생각”6)하는 “나”의 초상을 전경화한다. 그렇게 “난자하는/ 죽음의 직선들을 생각하는 나는” 거기에 몰입하여 1980년 5월 광주에서 죽어간 어리고 여린 영혼 ‘동호’의 눈이 되고 입이 되어준다. ‘80년 5월 광주’를 애도한 『소년이 온다』는 그렇게 우리에게 전해지고 세계문학사를 수놓게 된다. 1970년 광주에서 태어난 한강은, 불과 몇 달 전인 1980년 1월 서울로 이사했다고 한다. 만약 이사하지 않았더라면 작중 동호의 처지가 되지 않았다는 보장이 없었던 상황이었기에, 한강은 더욱 고통스러워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동호를 비롯해 가장 고통스럽게 죽어간 비통한 유령들을 애도하는 영매자가 되려 했던 것이 아닐까. 국가 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 이전에 가족사의 비애도 고려해 볼 수 있다. 『흰』에서 드러나는 너무나도 일찍 죽은 언니 이야기, 어머니가 스물세 살에 낳은 첫 딸의 이야기, 엄마가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7)이라며 간절히 발원했음에도 불구하고 허망하게 먼저 간 언니 이야기 말이다. 이 가족사는 들을 수 없었던 아이를 대신해 들어야 하고, 말할 수 없었던 아기를 대신해서 말해야 하고, 눈도 뜰 수조차 없었던 아기를 대신해 보아야 하는 고통스러운 영매 작가의 가족사적 배경을 성찰하게 하는 요인이다. 3. 여수(旅愁)의 심연에 갇힌 여수(女囚)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공표되던 2024년 10월 10일 저녁 나는 남도 여수에 있었다. 해묵은 어깨 통증을 치료하기 위해 그쪽 병원에 잠시 입원한 상태였다. 기대도 하고 기도도 했지만, 그럼에도 생각보다 너무 빨리 받게 된 선물을 받게 될 때 엉거주춤함 같은 느낌을 잠시 거쳐, 한강의 첫 소설집이 『여수의 사랑』(문학과지성사, 1995)이었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공교롭다는 생각을 이어갔다. 그리고 퇴원하여 돌아오던 12일 낮에는 우연히 여수엑스포역 앞 여수세계박람회장에서 열린 <잠들지 않는 남도의 세월―여순 10·19와 제주 4·3 미술 교류전> 을 관람하게 되었다. ‘탐미협과 여수민미협의 세 번째 만남’으로, 여수와 순천, 제주에서 무자(戊子)년(1948년)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증거하는 고통의 붓질이 참으로 어지간했다. 김영하의 <바다 위 희망의 빛>(2024, Arcylic on Canvas, 162.2×97cm)이나 박정근의 <바다, 엇갈림02>(2023, Pigment print, 100×70cm)은 강렬한 핏빛 바다의 파동과 심연을 응시한 그림이어서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고경화의 <존재의 시간, 어디에도 있는 어디에도 없는―종남마을>(2022, Arcylic on Canvas, 162.2×130.3cm)은 무너진 돌담과 뒤편의 대나무숲을 그린 작품인데, 그냥 보면 오래된 전원 풍경 같아 보이기도 했지만, 실은 1948년 11월 계엄령으로 인해 초토화되어 복구되지 못하고 잃어버린 마을이 된 종남마을 풍경이라는 것이었다. 무너진 돌담만이 과거의 어떤 흔적처럼 남아있는데 그곳에 살던 이들은 그 누구도 돌아오지 못했다는 안타까운 사연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그림들을 보며 나는 전시회 관계자들에게 이번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도 제주 이야기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면서 본문보다 제목이 더 긴 시 한 편을 떠올렸다. 「이천오년 오월 삽십일, 제주의 봄바다는 햇빛이 반. 물고기 비늘 같은 바람은 소금기를 힘차게 내 몸에 끼얹으며, 이제부터 네 삶은 덤이라고」라는 긴 제목의 시였는데, 직접 확인해볼 기회는 없었지만, 한강 작가 역시 화가 김영하의 핏빛 바다의 고통을 애도하기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게 아닐까, 그래서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8)라고 한 게 아니까, 여수와 순천, 광주와 제주의 트라우마를 함께 앓기 위해 늘 “텅빈 항아리가 되”는 자기 몸을 응시하고 그 안에서 울리는 “검은 물소리” “깊은 물소리”(「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 p. 36)에 귀 기울인 게 아닐까, 그러면서 샤먼 시인이자 영매 작가로 고통스러운 글쓰기를 수행한 게 아닐까…… 그런 상념들을 이어갔다. 매우 개성적인 숨결로 이채로운 말결을 파동처럼 빚어, 그윽하고 깊은 감동을 독자들에게 선사는 영매 작가 한강이 초기부터 다룬 인물들은 대체로 세상의 온갖 허물을 모아 앓는 자, 상처 깊은 자의 형상을 하고 있다. 상처의 심연으로 내려가서, 왜 현존재는 이토록 탈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왜 세상은 그토록 고통스럽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질문한다. 그 탐문은 대체로 여로에서 이루어지고, 여로의 현존은 깊은 여수(旅愁)의 심연에 갇힌 여수(女囚) 형상을 한 경우가 많다.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 시절부터 그러했다. 일찍이 대학 4학년 때 쓴 「편지」에서 “잃을 사랑조차 없었던 날들을 지나 여기까지, 눈물도 눈물겨움도 없는 날들 파도와 함께 쓸려가지 못한 목숨, 목숨들 뻘밭에 뒹굴고”라고 토로했던 한강은 『여수의 사랑』에서 희망이 소진된 상황을 견디는 고통의 흔적을 시리도록 아프게 점묘한다. 대부분 20대의 주인공들인데도 불구하고, 한강의 소설적 프리즘 안에서 그들은 이미 청춘이 아니다. 발랄하고 경쾌한 젊음의 풍속이나 세태와는 아랑곳없다. 그들은 고아처럼 버려졌거나 버려졌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정처 없이 떠돌이 삶을 살며, 신체적 통증과 정신적 질환에 시달리고, 또 때때로 살기도 전에 죽어간다. 또한 고독하고 우울하며 피로에 지쳐 있다. 그들에게 세계는 매우 혹독하기만 하다. 가령 「여수의 사랑」에서 바람은 “내 어깨를 혹독하게 후려”치고 “무겁게 가라앉은 잿빛 하늘은 눈부신 얼음 조각 같은 빗발들을 내 악문 입술을 향해 내리꽂았다.”9)라는 부분만 보더라도 그렇지 않은가. 그 같은 “잿빛 하늘” 아래 드리워진 길고 짙은 어둠의 그림자 속에서 그들은 “얼음 조각”에 피격당한 듯한 현존을 부정하고 신생을 낭만적으로 동경하고 열망한다. 영혼의 숨결을 잃어버린 세대의 고통스러운 초상이다. 잃어버린 세대의 현실을 성찰하는 한강이 탐색한 신화소의 하나는 ‘버려진 아이’라는 의미에서 기아(棄兒)의식이다. 모태로부터 분리되는 순간의 고통, 부모로부터 버려졌을 때의 아픔, 사회와 현실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당했다고 느낄 때의 우수 등이 피투성이 같이 던져진 피투성(被投性)의 존재로서의 인간 초상을 떠올리게 하지만, 신화적인 맥락에서는 역시 기아의식이라는 다발 안에 포괄되는 것들이다. 원초적 고향으로부터 분리를 경험할 때 모든 존재는 자기동일성을 상실한 채 고통스러운 방황을 거듭하게 마련이다. 이때 단원신화는 입사식이라는 통과제의를 거쳐 귀환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상실했던 자기동일성을 회복하는 이야기로 마무리되지만, 현대에 이르러 그것은 해체되었고, 신화는 좀처럼 완성될 줄 모른다. 신화의 해체 이후 인간의 삶은 고통의 흔적으로 점철된다. 그럴 때 인간의 여로는 곧 여수(旅愁)의 길이 된다. 귀환을 보장해주는 통과제의적인 성격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상실한 자기동일성의 회복은 그야말로 난망이다. 첫 소설집의 표제작 「여수의 사랑」은 이렇듯 희망이 봉인된 상황에서 펼쳐지는 현대의 소외된 신화 속에서의 기아의식을 웅숭깊게 형상화한 소설이다. 버림받은 아이는 육체적 심리적으로 늘 허기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기아(棄兒)와 기아(飢餓)는 가깝다. 여수가 고향인 주인공 정선은 다섯 살에 어머니를, 일곱 살에 아버지를 차례로 잃었다. 스물다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어머니의 죽음도 그렇지만 아버지의 죽음이 더 문제적이다. 아버지는 술에 젖은 역한 숨결로 여수 앞바다에서 동반 자살을 시도했다. 아버지와 동생이 죽은 그 사건에서 정선만 살아남았다. 아니 홀로 버려졌다. 이 고통은 트라우마의 극치에 값한다. 그로부터 참담한 여수(旅愁)의 나날은 계속된다. 위경련과 결벽증으로 시달리고 있는 그녀가 특히 후각 공포증 혹은 냄새 강박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정선에게 자흔의 출현은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비슷한 운명의 그림자를 안고 떠돌며 사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두 살 무렵 강보에 싸인 채 여수발 서울행 열차에 버려졌던 자흔은 이 버려짐의 트라우마 때문에 자기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한다. 아니 자기 길이 있을 수 있다는 희망마저 제대로 지녀 갖지 못한다. “어느 곳 하나 고향이 아니었어요. 모든 도시가 곧 떠나야 할 낯선 곳이었어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길을 잃은 기분이었어요.”(『여수의 사랑』, p. 41). 이와 같은 여수(旅愁)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속절없이 살아가는 자흔이고 보니, 주인공의 존재의 거울일 수밖에. 거울을 통해 자신의 상실한 모습을 확인하는 심정은 처연하다. 주인공 정선의 고통이 가중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던 중 자흔이 또다시 여수(麗水)인지 여수(旅愁)인지 모를 길을 떠난다. 그래서 정선도 여수(旅愁)의 여수(麗水) 여로를 택한다. 하지만 그 여로는 고통의 흔적 찾기 이상의 어떤 은총도 허락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 고통의 흔적들은 탈난 후각이나 위장 등 여러 육체적, 심리적 증상으로 소설 속에 아프게 새겨진다. 그것들은 해체되거나 유폐된 현대 신화의 파편들이다. 한강이 점묘하는 누추하고 비루한 현대의 신화들은 차라리 예전의 신화들을 추문화하면서 동시대적 고통의 심연을 비추고 생경하게 드러내는 탈신화적인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10) 그런 탈신화의 전략은 디아스포라 주제와 관련한 존재론적 성찰과 함께, 문학의 기본 역할 중의 하나가 버림받은 디아스포라의 운명과 고통에 대한 깊은 응시와 관련된다는 생각을 저작하게 한다. 이 또한 한강 문학 주제의 세계적 보편성과 관련된다. 4. “왜 그래”와 “괜찮아” 사이에서, 혹은 동물성에의 구토 고통의 심연을 향해 한없이 자맥질하는 한강의 ‘여수의 미학’은 되풀이 변형 생성된다. 두 번째 소설집인 『내 여자의 열매』(2000)는 물론 장편 『검은 사슴』(1998) 『그대의 차가운 손』(2002)을 거쳐, 연작소설 『채식주의자』(2007), 장편 『바람이 분다, 가라』(2010), 『희랍어 시간』(2011) 등 한강의 소설들은 대체로 비루한 현대의 탈/신화와 관련된다. 많은 인물이 여전히 누추하게 태어나고, 출생보다 더 비참하게 버려지거나 버림받았다고 느끼며 여수(旅愁)의 심연으로 젖어든다. 그와 같은 인간 실존의 고통은 국가 폭력의 문제와 연계되면서 더욱 극적으로 형상화되는데, 바로 『소년이 온다』(2014)와 『작별하지 않는다』(2021)의 세계가 그러하다. 존재의 근거를 박탈당한 채, 이 세상 어디에도 속할 곳이나 속할 집이 없고, “찾아갈 곳도 없었고 행복할 곳도” 없을 뿐만 아니라 “긴장어린 시선을 접고 안도할 곳도 없”11)는 한강의 인물들은 사느라고 안간힘을 쓰다가 자주 ‘구토’ 증세를 보인다.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에서 정선이나 자흔을 비롯한 여러 인물이 그랬거니와 『내 여자의 열매』에서 아내, 『그대의 차가운 손』의 L,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 이정희나 서인주 등 많은 인물이 고통스러운 구토의 박물지를 형성한다. 가령 「내 여자의 열매」에서 아내는 어릴 적부터 자유롭게 살다가 자유롭게 죽기를 꿈꾸었던 인물이다. 그런데 소망과는 달리 “보이지 않는 사슬과 묵직한 철구(鐵球)가 발과 다리를 움쭉달싹하지 못하”12)게 하는 일상의 억압에 가위눌려 살다가 심한 구토 증세를 보인다. 매일 몇 번씩 토할 때마다 “머리가…… 오른쪽 눈이 후벼 파는 것같이” 아프고 “어깨가 나무토막처럼 딱딱해지고 입에 단물이”(p. 222) 고인다고 그녀가 토로할 때, 우리는 그 고통의 심연으로 함께 내려가게 된다. 단지 바람이나 햇빛, 물 같은 자연적인 것만으로 살 수 있기를 꿈꾸었던 그녀는, 마침내 고통스러운 실존을 넘어 식물화의 경계로 나아간다. 출장을 갔다가 오랜만에 귀가한 남편은 식물로 변신하는 그녀를 목도한다. 베란다 쇠창살 쪽으로 무릎 꿇은 채 만세 부르듯 두 팔을 치켜올린 아내의 진초록빛 몸과 푸른 얼굴이 마치 상록활엽수의 잎처럼 반들반들했고, 머리카락 또한 싱그러운 들풀 줄기처럼 윤기가 흘렀다는 것이다. 동물적 육체를 넘어 식물화하려는 아내의 요구에 따라 남편은 물을 뿌려주는데, 그 순간, 아내의 몸은 “거대한 식물의 잎사귀처럼 파들거리며” 살아난다. 「내 여자의 열매」의 식물 변신담은 연작 『채식주의자』에서 좀 더 면밀한 실감을 얻게 된다. 『채식주의자』에서 영혜는 맹수의 눈에 시달리는 악몽을 꾼 다음에 전격적으로 채식주의를 선언한다. 짐승의 눈은 피의 형상으로 범벅이 된 채 파헤쳐진 두개골을 비추기도 하면서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동물적인 공격성과 폭력성, 죽음을 몰고 오는 세계 파국의 공포와 불안 같은 것들 때문에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다가 내린 결단이었다. 동물적 공격성으로 넘쳐나는 세상에서 그녀가 원하는 것은 식물적 평화였다. 그녀가 유일하게 옹호하는 젖가슴의 상징이 그런 면에서 주목된다. 젖가슴으로는 아무것도 해치거나 죽일 수 없으니 괜찮다고 했다. 한강의 언어 중에 ‘괜찮아’라는 말은 은근한 마력의 매력을 느끼게 한다. 「괜찮아」라는 시를 참조해 보자. 난지 두 달 된 아이가 저녁마다 울자 시적 자아는 “왜 그래”라는 말을 안타깝게 반복하면서 애태웠다. 그러다 문득 “괜찮아”라는 말로 바꾸어 위무했더니 며칠 뒤부터 아이의 저녁 울음이 그쳤다는 이야기다. “왜 그래”는 따지듯 걱정하는 목소리다. 반면 “괜찮아”는 공감하며 끌어안는 마음의 소리다. 진심으로 위로하며 치유를 기도하는 말이다.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13)을 들여다보며 “괜찮아”라며 달래줄 수 있는 마음, 그것이 바로 둥근 젖가슴의 마음이다. 그러나 세상은 사실 괜찮지 않다. 괜찮지 않기에 “괜찮아”라는 말이 괜찮게 다가오는 게 아닐까. 「내 여자의 열매」에서도 그랬듯이, 『채식주의자』에서 영혜 역시 자신에게 “괜찮아”라고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런 눈과 목소리가 없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헤아려 줄 마음의 눈을 구하기 어렵다. 연작의 첫 작품인 「채식주의자」의 시작 부분부터 그렇다. 서술자 남편은 아내는 특별하지도 않거니와 끌리는 매력도 없는 사람이었다고 적는다. 평범하고 무난한 성격이어서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결혼했다고 말한다. 남성 중심주의적인 생각을 드러낸 경우가 아닐 수 없다. 그녀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가부장권을 행사하려는 인물이다. 육식하지 않겠다는 딸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탕수육을 집어넣는 아버지의 폭력으로 인해 딸은 결국 칼로 손목을 긋는 자해를 하고 만다. 그런 아버지이니 딸의 꿈속에 개를 오토바이 뒤에 매달아 동네를 끌고 다니다가 잡는 악몽의 주체로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아버지만이 아니라 어머니도, 언니도, 다른 가족들도 대개 “괜찮아” 대신 “왜 그래” 쪽에 가까운 인물로 제시된다. 사정이 그러하다 보니 영혜의 악몽은 계속되고 섭생은 어려워지고 마음은 불안하고 몸은 야위어 간다. 몸도 마음도 상하고 다친 상태가 되자 둥근 젖가슴도 야위어 날카로워지는 형국이 된다. 무엇보다 숨쉬기조차 힘들 지경이 되고 만다. 물과 바람과 공기와 더불어 숨 쉬며 초록빛 나무가 되려 했던 그녀의 소망은, 그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계속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그녀의 둥근 가슴이 날카로워지는 것은 충분히 일리 있는 몸의 항의로 받아들여진다. 한강의 여성 인물들은 고통스러운 상처와 트라우마를 지닌 채 살지만, 타인이나 세상을 향한 동물적 공격성이나 이렇다 할 적의를 보이지는 않는다. 그 대신 식물로 변신하는 과정을 통해 평화의 바람을 일으키기를, 아니 평화의 바람을 일으키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평화로운 숨결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최소한 편하게 숨쉬며 살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럼에도 동물적 공격성으로 점철된 현실이나 사람살이의 상황은 그런 소망을 지닌 여성들로 하여금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게 혹은 질식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만약 세상이 생태학적 진실에 따라 조금이라도 평화로운 식물성의 기미를 보여주었더라면 『채식주의자』에서 영혜는 그토록 가혹한 악몽에 시달리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그녀가 간절하게 안간힘을 다해 숨을 쉬면서 세상을 쏘아보는 것은 그런 사정 때문이다. 이 연작에서 영혜는 세상의 변두리로 밀리다 못해 그 존재를 위한 최소한의 공간조차 혹은 뿌리내릴 한 뼘의 자리조차 마련하기 어려운 처지다. 그녀는 식물적 젖가슴으로 세상의 동물적 공격성에 대응했지만, 턱없이 유약할 따름이었다.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광기의 영역으로 금줄 쳐 놓은 정신병원에 갇히게 되는 운명 역시 그녀의 존재를 제한적이게 한다. 물론 그녀는 행하지 않고 말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부재하듯 존재하면서 성찰적 메시지를 제공하는 그늘의 존재이다. 그늘에서 제발 편하게 숨 쉬고 악몽 없이 잘 수 있는 삶이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드러낸다. 여러모로 에코페미니즘의 관점에서 해석 가능성을 풍부하게 열고 있는 연작이다. 책방을 운영하기도 하는 한강은 아버지 한승원 작가에게 종종 책을 보내며 편지를 전했다고 한다. 그중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이나 로빈 윌 키머러의 『이끼와 함께』, 메리 올리버의 『긴 호흡』 같은 책들이 눈길을 끈다. 한강 소설에서 왜 여성들이 동물성에 저항하며 식물이 되고자 하는지, 식물과 더불어 숨 쉬며 불안한 실존을 넘어 편안한 평화의 바람을 맞이하려 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책들이다. 아버지나 남편과는 달리, 이끼는 “괜찮아”라고 말해준다. 그런 이끼의 토닥거림이나 속삭임과 더불어 숨 쉴 수 있다면 시나브로 편안해지고 괜찮아지겠다. 5. 깊은 고통으로 지은 주문(呪文) 깊은 고통 속에서 한강의 인물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주 구토를 일으킨다. 편안하게 숨을 쉬지 못한 채 밤낮으로 악몽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펄펄 내리는 눈의 슬픔과 반짝이는 숲의 고통 속에서 깊은 밤의 고통은 한없이 깊어지기만 한다. 어떻게 개인적이고 가족적이며 역사적인 트라우마를 넘어, 편하게 숨 쉴 수 있는 지극한 사랑과 평화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어떻게 나날의 장례식을 넘어 즐거운 축제 마당으로 건너갈 수 있을까? 『소년이 온다』의 인상적인 대목을 우리는 기억한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남은 자들의 한없는 슬픔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당신을 위한 진정한 장례식은 매우 요긴하다. 당신과 나의 공동 애도를 위한 장례식을 위한 제문(祭文)은 때로 주문(呪文)처럼 통절하다. 한강 소설에서 고통스러운 악몽은 대개 그런 주문의 상형문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주문을 통해 먼저 간 당신의 눈이 되고 입이 되어 준다. 『소년이 온다』의 에필로그 부분을 보자. 그 도시의 열흘을 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운 린치를 당하던 사람이 힘을 다해 눈을 뜨는 순간이 떠오른다. 입안에 가득 찬 피와 이빨 조각들을 뱉으며,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올려 상대를 마주 보는 순간,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p. 213) 주문은 떠지지 않는 눈을 뜨게 하고, 깊은 고통의 순간을 대면하게 한다. 응어리진 것들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그 응어리의 상처들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소환하는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의 대조가 비애극의 심연을 깊게 한다. 주문은 이렇듯 깊은 슬픔의 호곡을 불러낸다. 그런 다음 당신을 위로하며 청원한다.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p. 213). 깊은 고통으로 지은 주문은 이런 애도 작업으로 깊어지며 승화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앞에서 논의한 것처럼 한강은 여리고 취약한 존재들, 정처 없이 방황하며 상처받은 사람들, 고통 속에서 속절없이 절명한 사람들을 위한 영혼의 비가(悲歌)를 시적인 문체로 가만가만 불러온 작가이다. 제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서발턴(subaltern)의 입이 되어주고 제 몫을 보장받지 못한 채 벌거벗은 호모 사케르들의 눈물을 씻어주려는 영혼의 매개자가 되려 했던 영매 작가이다. 역사적 사실이나 진실을 넘어 고통의 심연에서 지극한 인간적 진실을 고통스럽게 탐구한 작가이다. 한 마디로 숨 쉴 수 없는 존재들, 그 숨 막힌 존재들이 나름대로 숨 쉴 수 있도록 위로와 생명의 음표를 감각적 리듬에 실어 소통하고자 한 작가이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Primo Levi)는 죽음과 유령들의 세계와도 같았던 참혹한 홀로코스트의 현장에서 “이 저주받을 망령들아, 비통할지어다!”라고 했던 단테의 『신곡』 ‘지옥’ 편의 목소리를 떠올린다.14) 『신곡』의 세계를 떠올리며 가까스로 그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그는 자신의 기록 서사에서 “이것이 인간인가”라며 깊게 탄식했다. 한강의 여러 작품 또한 그런 탄식에서 비롯된다. 그 서사적 대상이 된 가부장적 질서로 인해 일그러진 여성 문제나 4.3이나 5.18 같은 역사적 트라우마의 이야기는 한강보다 한 세대 혹은 두 세대 선배 작가들의 문학적 축적으로 인해 심연으로 깊어져 새로운 감각적 실존을 할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녀는 있는 이야기, 있었던 과거를 단지 그대로 재현하는 작가가 아니다. 있었던 사건에서 고통받은 이들의 차가운 손을 어루만지고, 이미 식어버린 영혼 안으로 스며들어 시리면서도 뜨거운 감각의 실존을 수행한다. 스며든 순간에 몰입하여 시나브로 엑스터시의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 법열(法悅)의 에너지와 감수성으로 말미암아, 한강이 스며든 어떤 인간이나 사물도 단지 홀로인 존재의 차원을 넘어선다.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게 되는, 더 나아가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더불어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 그 결과 한국문학이라는 특수성을 넘어서 문학이란 보편성의 측면에서 호소력 짙은 작품으로 승화된다. 한강은 비교적 이른 나이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까지 쓰인 작품보다 앞으로 쓰일 작품이 더 많거나 깊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이제까지 한강은 역사적 트라우마에 몰입하는 감각의 밀도를 통해 문학적 치유의 새로운 스타일을 감각적으로 발견한 작가, 서사의 전개를 초월하여 서정의 몰입으로 심리적 사건을 웅숭깊게 다룬 작가, 그리고 기존의 서정적 소설과도 또 다르게, 『흰』과 같은 작품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서정과 서사가 잘 어우러지는 새로운 문학 장르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가로 문학사에 기록될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기대되는 것은 2024년 10월 이후의 한강 문학이다. 섣불리 예측하지는 말자.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기대의 주문처럼, 한강 문학의 새로운 장도를 응원하면 될 일이다. 거듭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한다. 1) 한강, 『소년이 온다』, 창비, 2014, p. 174. 2) 한강은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인 「빛과 실」에서 『소년이 온다』를 준비하던 무렵 골몰했던 두 질문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그 질문을 뒤집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고백한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영매 작가로서 한강의 핵심 특성을 가늠하게 하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3) 예컨대 『소년이 온다』에서 이런 대목을 보자. “어쩌면 한사람씩 오는 게 아닌지도 몰라. 수많은 사람들이 희미하게 번지고 서로 스며들면서, 가볍디가벼운 한 몸이 돼서 오는 건지도 몰라.”(p. 174). 이렇게 한 몸이 된 여럿의 영혼들을 맞아들이는 장면에서 영매 작가의 인상적인 특징의 단면을 확인하게 된다. 4)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 p. 24. 5)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2021, pp. 11~12. 6)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p. 106. 7) 한강, 『흰』, 문학동네, 2016/2018, p. 36. 8)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p. 38. 9) 한강, 『여수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95, p. 58. 10) 「여수의 사랑」 관련 논의는 졸고, 「진실의 숨결과 서사의 파동」(『애도의 심연』, 문학과지성사, 2018)의 일부를 수정한 부분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글의 2~4장은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 웹진 《더라이브러리》에 부분적으로 발표한 원고를 전면 개정한 것임. 11) 한강, 『그대의 차가운 손』, 문학과지성사, 2002, p. 51. 12) 한강, 『내 여자의 열매』, 창작과비평사, 2000, p. 225. 13)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p. 76. 14)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이현경 옮김, 돌베개, 2007, p. 25.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위의 인용문은 육조 혜능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변형한 것으로서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도입부 내레이션이다. 질문을 간파하고 있는 스승의 답변은 제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 테고, 그것은 물론 관객의 심금을 휘저었을 것이다. 파편화된 불안을 쓸어 담는 이 명쾌하고 즉각적인 해답의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찰나에 불과하다. 제자의 마음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 동요하는 그 마음의 원인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궁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궁리하고 싶지 있다. 바쁜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보여지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무용한 그 '느낌'이라는 것을 숙려할 만큼 한가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하려는 노력 끝에 불안은 우리 현대인의 매우 증상적인 형태로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의 고질병이다. 불안, 외로움, 확신 없음이라는 결핍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기로에 선다. 고독을 선택하거나, 의존을 선택하거나. 전자는 불안에 대한 직면이고, 후자는 불안에 대한 외면이다. 그러나 바쁜 우리는 언제나 후자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 없다. 세상에 고독한 것은 이제 고독, 그 하나다. 사용되지 않은 고독은 밀린 과제처럼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을 외면한 후폭풍은 그에 비례하는 불안의 성장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독하지 않으려는 것은 고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고독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소외감 등의 통각이라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감각은 직면하는 대상으로서의 그것이지 결코 정념의 주인이 아니다. 고독은 머무름의 상태가 아니라 나아감의 과정이다. 키에르케고어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고독이란 '자기-이해'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실존적 과정"1)이다. 직면과 견인의 과정으로서 '나'의 발본적 반성을 꾀는 고독은 많은 시간과 심리적 통증을 수반하는 힘겨운 비포장도로이지만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 길은 당신에 의해 아주 단단히 포장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은 이제 너무 쉬운 길이다. 허나 우리는 당장의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의존을 택한다. '불안-의존-불안-의존-……'의 악무한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이 악무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싸움이 혼자만 하는 싸움은 아니다. 우리가 고독하고자 할 때, 시는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 '불확실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시와 고독은 함께 간다. 유일무이한 개별자로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시를 보면서 우리는 '나'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비록 그 세계가 하잘것없을지라도 시는 당신과 함께 고독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투쟁의 이미지가 너무 닮아서 단번에 요체로 휘몰아 넣는 시가 있다. 2024년 계간지 가을호에 실린 시편들이 대개 그러했다. 그것들은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증상에 직핍하는 표정을 하고선 우리의 불안을 응시하고 있다. '응시하는 시'를 응시하는 우리는 홀연 고독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시는 그 자체로 기꺼이 고독의 과정이 된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불안을 응시-진단하는 시편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고독의 여정을 걸어보자. 미리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찌되었건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해 미리엄은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엄은 자신을 설명하는 식으로 늘어져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미리엄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한 미리엄은 바빴다 설명하느라 바빴고 대체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느라 바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낡아지고 늙어가고 쪼그라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해진다 불쌍한 미리엄 온종일 나를 기다리는 미리엄은 버럭버럭 화를냈다 화를 내는 미리엄이 순간 유효해 보였다 미리엄이 악다구니를 쓸 때에야 미리엄의 전체가 설명되고 빛난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고 어차피 미리엄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다음부터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하루종일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일갈할 수밖에 없었다 넌 네 삶이 없어? 하고 말콤은 미리엄이 키우는 개다 말콤은 미리엄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좋아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말콤은 미리엄을 좋아하고 불쌍해한다는 것이다 말콤은 수동적인 주인 미리엄이 충동적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거나 밥때를 놓쳐도 재촉하지 않는다 말콤 역시 미리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하루종일 너만 기다렸어 이 망할 기집애야 하지만 말콤의 생각에서 미리엄은 한없이 불쌍한 인간이므로 개 말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말콤은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 것 같았다 (……) 미움받지만 않게 해주세요 누구로부터를 말하는 것이냐 뭘 물어요 당연히 미리엄이죠 열두 마리의 개를 키운 경험이 있는 신이 말콤의 턱을 간지럽히며 말한다 아이고 불쌍한 새끼 계속해도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시는 나로 시작했지만 나로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무언가를 빠뜨리는 바람에 또 내가 나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내가 나오면 미리엄은 또 하루종일 나를 기다릴 테고 그랬다는 이유로 나에게 화를 낼 것이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말콤은 삶이란 게 정말 불쌍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신경쓰이지 않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것도 없다 나는 빨리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때마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제때 미리엄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러면 말콤과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산책하는 말콤은 정말 행복해 보일 것이다 나는이런 게 좋다 이런게 더 좋다 - 박참새, 「시작된 것」 부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넌 네 삶이 없어?" 당신이 이 문장에 머무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장이 애틋한 이유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목줄을 달아매고 누군가의 손에 그 줄을 쥐여주었던 경험,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가슴 아픈 그 불안의 경험이 위의 문장으로 하여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리엄은 현대인들의 불안 형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히는 '해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기다린다.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한 '자기-수치심'을 해명하고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자기-효능'을 타인으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고 수용받기 위해. 따라서 '나'(타인)가 오지 않으면 그는 그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거니와, 그 효능을 되찾을 수 없다. 고독이라는 일련의 자기-이해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자기규정을 의탁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 박탈시킨 그의 가치는 그러므로 '나'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미리엄-나'의 관계에서 미리엄의 위치는 '말콤-미리엄'에서의 말콤의 위치와 상응한다. 미리엄은 말콤의 주인으로, 말콤은 온종일 미리엄을 기다리고 미리엄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다. 말콤의 삶의 주인이 미리엄인 것처럼 미리엄의 삶의 주인은 '나'이다. 말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미리엄의 삶은 따라서 개 같은 삶이다. 그 삶은 (자기 의지에 의해)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자기 삶을 전시하고 그 삶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좋아요'와 팔로워 숫자 등)을 기대하면서 오직 그것을 위해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일상을 공유하고 실제적 자신의 모습, 즉 '실존적' 자기 모습을 방치한다. 타인의 반응이 내 삶의 양식을 결정하게 내버려둔다. 문제적인 것은 여기서 타인은 '내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증명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너무 쉽게 그들을 미워해 버리고, 반응이 긍정적이면 또 너무 쉽게 사랑해 버린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감정 속에서 지쳐버린 자아는 당장의 휴식을 위해 타자에의 의존을 택한다. 불안을 즉각적으로 해소해 주기 때문에 의존하지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은 그러므로 불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란 듯이 참혹해진다. 배시은의 시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우리의 강박증적인 내면 상태와 그 징후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그에 대해 시인이,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쓴 시를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아직 쓰지 않은 시를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싶다. 재빠르게 적으면 감쪽같을 거라고. 시간의 장난 같은 거라고.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 제목을 옮겨 적었다. 이상하다. 나라면 이런 제목을 짓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찍이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항상 그런 모양이라는 듯이. 나는 여행을 가지 않는 대신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으로 여행을 대신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여행 가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한다.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냥 있는다. 그냥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대신한다. 아무것도 깨닫지 않는 것이 깨달음을 대신한다. 이상하다. 나라면 여기서 연갈이를 하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시를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시는 이미 끝났다. 시를 옮겨 적는 일은 끝났다. 시를 쓰면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무언갈 만들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만들 수 있는 때는 너무 짧다. 생각을 하고. 단어와 문장 등을 떠올리거나 받아 적고. 고개를 움직이고. 책상에 앉고. 신체 부위의 기능을 사용해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희소하며 예상만큼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이 시는 알고 있다.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 배시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부분, 『창비』 2024년 가을호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 싶다"는 바람은 다시 말해 독자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소망이다. 그러나 옮겨 적은 시는 어쩐지 제목부터 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기로에 선다.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냐. 당신이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면 선택은 물론 전자일 것이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잃어가고 이윽고 모호한 정체성과 동시에 끊임없는 불안을 경험한다. 위의 시는 그것을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여행조차 갈 수 없고,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다. 여행을 가는 대신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뿐이다.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잘 쉬는 사람과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본인의 취향과 호오를 잘 아는 사람과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타인에게 삶의 목줄을 내어준 사람에게 휴식이란 그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불친절하다.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건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때때로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방어 기제로 드러난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실존적인 '나'의 상태이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회적인 '나'의 모습이다. 건강한 사람은 친절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사회적인 모습이 중요한 우리는 건강하지 않아도 건강한 '척' 친절하다. 이때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 싶은 일종의 방어 전략으로 쓰인다. 어쩌면 건강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사회적인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당신의 상태는 이제 아무도 진단할 수 없다. 허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심급의 기회일지 모른다. 시가 응시하고 있는 사실을 응시해 보자. 때로는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사실 시는 진단하거나 처방하지 않는다. 기꺼이 고독의 기회를 내어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삶을 응시하고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견고한 삶을 살고 싶을 우리에게 고독이라는 자기-이해 과정은 이제 건너뛸 수 없는 삶의 발달과업이다. 견고하다는 말은 빈틈없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빈틈 있음'마저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이다. 당신의 약점도 당신이다. 고독은 그러므로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들어 기꺼이 '나' 자신을 승인하게끔 한다. 신이인 「새」는 그것을 딱따구리에 비유하면서 약점이 받아 온 그간의 오해를 풀어낸다. 2017년 2월 3일 딱따구리를 데리고 있다. 이것은 내 약점이다. 딱따구리는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 사람의 머리통에도. 딱따구리는 내 머리 옆쪽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사고였다. 귀가 생겼다. 딱따구리가 어찌나 청명하게 나무문을 쪼고 다니는지가 다 들렸다. 난 비로소 듣는 사람이 됐다. 나의 방문은 말할 줄 몰랐다. 내가 듣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방문은 딱따구리를 통해 내게 말을 전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딱따구리가 부리를 사용하는 이유,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내가 가진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었으며, 딱따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 어쩌면 딱따구리는 도망간 게 아닐지도 몰라. 아예 내 안쪽으로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따구리가 느껴질 수는 없어. 이 느낌에 대해 나 여전히 말을 멈출 수 없어. 가장 깊숙한 곳에 너 잘 살아 있어. 집인 줄도 모르고 흔들렸던 집이 너를 선명하게 품고 있어. 구멍으로 볕과 공기가 들이닥쳐. 너 거기 있구나.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파여가며 안쪽이 하는 말을 받아쓸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쓰는 사람이 됐다. - 신이인, 「새」 부분, 『문학과 사회』 2024년 가을호 딱따구리는 약점에 대한 절묘한 표상이다. 그것은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약점이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이유로 약점이 될 수 없다. 인식의 층위에서 그가 뚫어낸 구멍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그 구멍이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없다. 눈, 코, 입, 그리고 귀라는 구멍이 당신의 약점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든' 존재하는 그 구멍이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딱따구리(약점)에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where'이 아니라, 'why'일 것이다. 딱따구리는 '왜' 구멍을 만드는가? 그것은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이다. 즉 딱따구리가 구멍을 내는 이유는 '너'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어쨌든 약점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너'가 존재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뚫은 구멍은 '너'가 즐겁지 않으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고 바로 약점이 된다. 그 순간에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 떼어내고 싶은 악성 종양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인다. 약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너'의 시선에 얽매여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why'를 던지는 순간, 시선은 '너'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지고 약점에 대한 오해는 곧 이해로 변모한다. 우리가 가진 약점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고독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창구일 수 있다. 구멍 없이 어떻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밖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말한다. 약점은 '나'를 이해하는 고독의 진입로가 되고, 이윽고 뚫린 길은 '너'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견고해진다.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다. 고독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황홀감이다. 고독이 거듭될수록 성장하는 고독'력'은 당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독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계절의 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 류호인, 「정신분석학: 존재에 대한 물음 : 실존적 불안과 자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소고」, 『현대정신분석』, 2024, 제26권 제1호.
1. '너'가 존재하는 한 '나'는 단속된다. 너는 나의 복장을 단속하고, 도덕성을 단속한다. 그리고 표정과 감정을 단속한다. 아니, 사실 너는 나를 단속하지 않는다. 다만 '너'의 시선을 의식하는 '나'의 불안과 내면의 유약함이 '나'를 단속한다. '너'의 시선 속에 사로잡혀 출현한 '나'는 그 시선에 대상화된다. 곧 자기 고유의 절대적인 자유는 균열을 일으킨다. 한편 '너'는 끊임없이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단속될 것이다. 타자에 의해 대상화되지 않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해야 한다. 개인의 실존적 차원에서,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고 자기효능을 되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각자 진정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와 그 시선의 억압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그것에 억압된 자신을 객관적으로 응시해야 한다. 응시는 똑바로 본다는 말이다. 똑바로 봐야지 똑바로 안다. 반성의 지평에서 출현한 시는 따라서 인간의 삶을 무엇보다 객관적으로 응시한다. 그리고 타자를 직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직시함으로서 삶의 오류를 발견하려는, 그런 시가 있다. 202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노이즈 캔슬링」과 함께 출현한 윤혜지는 첨단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삶에 기꺼이 구식(舊式)의 삶을 틈입시킨다. 이윽고 그것은 타자의 시선 아래 구식, 혹은 비극으로 취급될 우리 각자의 진실한 꿈과 그 미래를 구출한다. 그런 점에서 윤혜지의 시작(詩作)은 그 시선과의 투쟁의 시작(始作)일 것이다. 그 시선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그리하여 구식의 삶, 야생의 삶을 견인하기 위해, 시인은 먼저 그것을 응시한다. 그가 그려나간 궤적은 자기의 존재가 타자의 시선 아래 짓눌리고 밀려났던 경험을 면면히 보여준다. '나'의 침대가 아니라 "남의 침대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너무」)음을 고백하면서, "고개를 쳐들"고 다양성이 말살된 "하늘을 뒤덮은/보급형 드론들"(「언캐니」)을 똑바로 바라본다. 바야흐로 "내가 발을 갖고 있었구나 내 발로 나를/옮길 수 있"(「근사」)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인은 "해변에 가득한 돌을 골라"(「희고 흰 빛」)내듯, '타자의 시선'이 아니라, 온전히 '자기의 시선'으로 고유한 자기의 꿈과 그 정체성을 확보해 나간다. 지금 살펴볼 「사로잡힌 세계」에서 시인은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힌, 그 세계를 기꺼이 응시하면서 자신의 유약함을 진단한다.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 연인을 만들었어요 굴착기를 좋아하는 사람 병원 침대에 누워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자신이 부순 어떤 마을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 그것 참 쓸쓸하군요, 하며 웃다가 병이 깊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엔 저수지에 가라앉은 목각 인형을 건져 올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굴착기 끝에 닿은 인형의 마디마디가 부러져 나무 조각에 불과해져 버렸다고요 나도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어요 그냥 조그맣고 쪼글쪼글한 조약돌일 뿐이에요, 라고 하자 그는 달걀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내 어깨를 다독여주었습니다 뜨겁고 달고 부드러운 것을 먹이다 포기한 사이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는데도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아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 「사로잡힌 세계」 중에서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그는 병실의 적막이 두려운지, 병태의 실감이 두려운지,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연인을 만들"었지만 연인의 이야기로 무성한 통화 내용은 그의 "병이 깊어지"게 만들 뿐, 적막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하물며 연인의 이야기는 "그것 참 쓸쓸하"다. 전화하고 싶다는 말은 일방의 청취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쌍방의 '대화'를 하고 싶다는 말이다. '너'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얽히고설키면서 '우리'의 이야기가 탄생하는 것. 한편 일방적인 청취를 당하고 있던 '나'는 결국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다. 타자에 의탁해 상황을 모면하고 모종의 감정을 유예하려던 계략은 종국에 타자로 하여금 '나'를 "달걀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다루어야 하는 유약한 존재로 치부한다. 아직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몸은 회복되지 않았지만, 유약해진 '나'는 강력해진(타자에 자기를 의탁하면서 타자는 '나'보다 강력한 존재로 부상한다) 타자 앞에서 그저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다고 말한다. 시인의 세계는 그야말로 타자에 의해 "사로잡힌 세계"가 된다. '나'가 아니라,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면서 세계의 편위는 더욱 명백해진다. 이렇듯 윤혜지는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그 유약함을 직시한다. 이제 그는 그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를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 시작한다. 2.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었다 몸집이 작고 짧은 데님 바지를 입은 언니 요를 펴고 잠든 나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다른 이에게 물어보았다 얘는 언제쯤 깨어날까 냉장고에서 내 몫의 아이스크림을 꺼내 놓고 싶어서, 녹을 게 분명한데, 그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느껴져 꿈속에서도 좋았다 마음은 생생하고 그윽하고 선한 사람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문장이 적힌 책을 읽었다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입니다 그렇다면 언니도 하염없이 그림자구나 우리가 나무이고 지금 서성이는 저들이 드리워진 잎사귀인 것처럼 (…)언니가 흐느꼈고 우리들은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다 많은 것들이, 퍽 많은 것들이 나왔다 간혹 용서에 관한 이야기도 했지만 그 생각은 연약해서 곧 다른 걱정, 그러니까 관습적인 생각들로 덮어졌다 언니는 어른이었다 한 종류의 울음밖에 없는 인간 누군가 지친 문을 열고 음식을 내왔다 이것 좀 먹어봐 여름 야채를 가득 넣고 키슈를 구웠어 랩을 씌워둔 키슈는 오래되었고 길이 잘 들어 온순하다 이것을 만든 엄마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텐데, 저렇게 곯아떨어졌는데 키슈는 영문도 모르게 포실하구나 싶어 울었다 사실 선한 사람과 온전한 사람이 같지 않다는 이야기는 엄마의 맑은 탕이다 모두가 조금씩 떠먹고 떠난 자리에서 오가는 사람을 헤아려보는 사실 이 부분은 망친 시에서 오려온 것이다 상해버린 삶에서 시를 도려내듯 - 「그림자 언니」 중에서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라는 점에서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고, 재워주고 내가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가진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시인의 그림자, 곧 자신의 일부분이다. 꿈속의 나의 수고를 기꺼이 대신해 주려는 꿈속의 언니, 그러니까 시인의 그림자는 그러므로 '온전한 사람'보다는 '선한 사람'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마음이 불안할 때 특히 삼시세끼를 꼬박 잘 챙겨 먹고, 7시간 이상 숙면을 취하며, 1시간 이상 유산소 운동을 하는데, 그렇다고 누가 나를 선한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무거운 짐을 들고 있을 '너'를 위해 그 짐의 일부를 대신 들어주고, 사무실 바닥에 커피 쏟은 '너'의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헤아려 그것을 대신 닦아주고 있을, 그런 나를 두고 사람들은 선하다고 할 것이다. 기실 선한 사람은 타자로의 사려 깊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 온전한 사람은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잘 돌보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일, 선한 사람이 등장하는 그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는 시인의 모습을 미루어 볼 때, 그는 아마도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었나 보다. 여태 선한 사람으로 살았을 시인의 삶은 "랩을 씌워둔 키슈"처럼 "길이 잘 들어 온순하"고 누르면 푹하고 꺼질 것처럼 "포실하"다. 시인은 그 삶이 "상해버린 삶"이라고 말한다. 온전하지 못한 '그 삶'을 말하며 "울었다"는 그를 두고 혹자는 삶에 대한 후회라고 볼 수 있겠으나, 나는 이 울음이 이제라도 타자의 시선에 굴복하지 않는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에서 오는 벅차오름이라고 확신한다. 회피해버릴 수도 있을 '그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한 끝에 시인은 자기 삶의 방향성을, 진정한 자기 정체성을, 그렇게 확립한 것이다. 3. 타자에 의한, 타자를 위한, 타자로 인한 삶에서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시인의 노력은 다만 '자기 삶' 하나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삶으로 확장된다. 그는 타자로부터의 모든 인간의 자유를 꿈꾼다. 내가 아무리 '너'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 한들, '너'가 '나'의 시선을 의식해서 '너' 자신을 단속한다면 '나'는 또한 그 사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도 나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나'는 전연 자유로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맥락의 생활」은 그 사실을 기저에 두고 이 시대 아이들의 삶을 응시하면서 그것의 오류를 들추고 있다. 거대 쇼핑몰의 한 쪽에서 우리는 아이스링크의 인공 얼음을 지치는 우리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빙질이 훌륭하다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가 아니니까 금이 가도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 잊어버리고 우리는 남은 커피를 마시고 서로 좋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곳은 사랑이 넘치고 훈훈해서 금방이라도 아무나 커버릴 것 같다 (…)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로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이야기의 도입부를 잊어버렸다 (…) 너는 내 에피소드를 들어도 웃지 않는다 울어준다 - 「고맥락의 생활」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아이들의 삶에는 크게 두 가지 세계관이 있다고 말한다. 즉 거대 쇼핑몰 한 쪽의 "아이스링크"와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이다. 물론 위 시에 등장하는 "우리의 아이"가 살아가는 세계는 전자의 것이다. "빙질이 훌륭한" "인공 얼음"으로 만들어진 그곳에서 아이는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는 고민하지 않는다. 거대 쇼핑몰의 아이스링크는 이미 어른들에 의해 단단하게 건조(建造)된 안전한 얼음판일 테니, 아이는 어떤 중대한 고민 없이 그 위에 오를 것이다. 더구나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에는 언제든 아이의 불운을 쫓아줄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있다. 곧 나보다 강력한, 어른이라는 타자가 만들어 놓은 세계 위에서, 부모라는 타자의 시선 아래, 아이는 자기 주체성을 잃어간다. 한편, 후자의 "그 호수" 앞에서 아이는 생각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얼음판이 깨지면 죽을 것이고, 깨지지 않으면 살 것이다. 아이는 또 생각한다. 그 위험을 감수하고 얼음판 위에 오를 것이냐, 오직 살기 위해 다시 숲으로 돌아갈 것이냐.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떤 결정이든 그것은 아이의 독자적인 선택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이스링크"에서의 생활은 어떤 배경지식이 필요 없고 단순하게 관계에 의존하는 '고맥락의 생활'이다. 반면 "그 호수"에서의 생활은 가치 독립적이고, 자기 확신에 의한, 주체적인 '저맥락의 생활'이다. 시인은 이미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고맥락 문화의 오류를 응시하면서, "이야기를 들으면 울도록 만들어"진 보급형 로봇(「사랑과 공」)처럼 사라져가는 아이들의 주체성과 그 태도로 하여금 그들의 자유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통제되고 단속될 것을 염려한다. 이처럼 시인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속박되고 통제되고 있을 인간의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하면서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한다. 4. 그리고 시인은 말한다. 각자의 진정한 정체성 확립을 위해,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각자 "야생"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무덤 위는 미끄럼 타기 좋아 (…) 한 번도 온전하게 겹치지 않는 눈송이 눈송이 손가락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간다(…)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린다 여긴 잊어버려 이제 넌 오지 않을 거야 다른 것이 될 거야 (…) 가방을 부려 놓으면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랑하던 것들이 있고 이제 그것들은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인다 이렇게 시간이 가는 건가 봐 대답 대신 눈송이 - 「야생의 눈사람」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무덤 위에서 미끄럼 타던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상한다. 펄펄 내리는 눈송이를 "손바닥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가기도 하고,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리기도 한다. 시간이 가면서 유년의 기억들이 이제는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이는 지금, 그는 다시 한번 "대답 대신 눈송이"를 말한다. 온전한 사람으로 살고 싶을 그는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눈송이를 감각하던 그때, 그 야생의 시절이 그리운 것이다. 시에서 아홉 번이나 "눈송이"를 언급한 것은 야생의 꿈, 그러니까 자신이 진정으로 순수하게 좋아하는 일을 다시 한번 꿈꾸고 싶은 그 열망에의 외침일 테다. 그리고 타자의 시선과 현실에 굴복하지 않은 끝에, 우리 곁에 시인 윤혜지가 있다. 윤혜지의 시는 분명 우리를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제 그것을 동일화하고 내면화하는 능력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이 과연 무엇일지 마음을 솔직하게 진단하고 타자의 시선에 잠식당하는 진실한 꿈을 구출하자. 기실 그것은 '나'와 '너', 우리 모두의 자유를 보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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