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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아동문학평론 | 2024년 여름호(제191호)

한국 전래동화 연구가 손동인의 중⋅장편 동화 특성

이정석 문학평론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 1983년《소년중앙》 문학상에 동시 당선하고, 1996년 《무등일보》 신춘문예에 시 당선, 1997년 《아동문학평론》지 아동문학평론 신인상을 수상하여 등단하였다. -동시집 이정석 동시선집, 촛불이 파도를 타면 등 6권 발간하고, 아동문학평론집 생태주의 아동문학과 해학의 동심, 현대 동시의 특성과 기법, 동시문학의 깊이와 변화 등 3권을 발간하였다. -2009. 교육과정 초등학교 국어 읽기(6-1) 교과서에 동시 「어린이」가 실렸으며, 동시집 촛불이 파도를 타면이 2019년 아르코 문학나눔 우수도서로 선정되었다. -방정환문학상, 이재철아동문학평론상, 천상병 동심문학상, 전라남도 문화상(문학) 수상하였으며, <별밭> 문학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1. 펼치며

  손동인(1924~1992)은 경남 합천 출신으로 동화작가, 시인, 수필가, 소설가 등으로 활동한 문학가이면서 교육자, 학자이다. 평생 그가 쓴 작품으로 동화가 120여 편, 시가 80여 편, 수필이 370여 편, 소설이 90여 편 되었고, 한국 전래동화 연구 논문도 47편이나 남겼다.1)


  이 중에서 손동인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영역은 당연히 동화 창작과 전래동화 연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첫 출발은 시문학 분야로서, 1950년 《문예》지에 시 「누나의 무덤가에서」, 「산골의 봄」, 「별리」가 차례로 서정주, 김영랑, 모윤숙의 추천을 받아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뒤 1951년에는 소설 「5분 전」 등을, 수필 「청산서」 등을 발표하고, 1952년에는 ‘한국아동문고 현상 모집’에 동화 「잃어버린 누나」가 당선되어 드디어 동화 창작에 깊숙하게 첫발을 들여놓았다. 1957년에 첫동화집 『병아리 삼형제』, 1960년에 두 번째 동화집 『꽃수레』을 출간한 뒤 1968년 인천교대 교수로 부임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동화 창작과 전래동화 연구에 온 힘을 쏟았다. 동료 교수였던 문학평론가 문광영은 “그는 항상 동심 속에 살아왔다. 동료 교수나 학생들이 말하듯 훈훈하고 도량이 넓은 인간성 못지않게 어린이 세계를 잘 이해했고, 또 그들의 꿈과 이상이 무엇인지 잘 진단하였다”고 하면서 “70~80년대 20여 년의 대학 강단 생활에서 원숙미가 넘치는 창작활동은 물론 연구 업적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였다”고 정리하였다. 일제강점기에 훈도(訓導)라는 초등학교 교사로 출발하여 인천교대 교수까지 이어진 그의 교직 생활 속에서 동심의 DNA가 잘 발현된 영역이 바로 동화 창작과 전래동요 연구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를 아동 문학 작가로 자리매김 하게 하였는데, 교육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교육의 대상이며, 주체자인 아동에게 쏟는 열정이 문학작품으로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진정한 아동 사랑이, 시인으로 등단하여 성인문학으로 출발한 그를 아동 작가로 변신하게 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것은 그의 생활 혁명이요, 생의 전기(轉機)가 되었다.

-정화숙의 「손동인론」 중(14쪽)에서-


  창작동화 못지않게 그는 한평생 살아오면서 우리 고유의 전래동화 채집과 그 연구, 나아가 어린이를 위한 전래동화 독자의 저변 확대에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문광영의 「손동인 문학론」 중(645쪽)에서-


  정화숙의 글에서 그의 동화 창작은 ‘교육의 대상이며, 주체자인 아동에게 쏟는 열정’이 그 바탕이라고 하였고, 문광영의 글에서도 그가 심혈을 쏟은 한국 전래동화 연구도 ‘어린이를 위한 전래동화 독자의 저변 확대’에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정화숙이나 문광영처럼 손동인의 작가 정신 중‘진정한 아동 사랑’과 ‘어린이’를 애써 강조한 이들도 있지만 이재철처럼 ‘그는 처음부터 아동의 편에 서서 아동적 안목으로 아동을 파악하고, 그 바탕 위에서 아동문학을 구축하려 한 것이 아니라 다분히 성인적 위치에서 성인적 목적의식에 의하여 아동문학을 하려는 것이었다’고 손동인의 동화문학의 한계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이도 있었다.


  손동인 생전에 발간한 동화집으로는 『병아리 삼형제』(1957), 『꽃수레』(1960), 『버들강아지』(1980), 『하늘을 나는 코스모스』(1982), 『까치고동 목걸이』(1985), 『마음속의 꽃초롱』(1986), 『앙 누구하고 놀지』(1987), 『가장 귀한 커튼』(1987), 『언덕 너머 햇살이』(1989), 『하늘에 뜬 돌도끼』(1989),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1991), 『광화문의 노랑나비』(1991) 등 12권이다. 사후에는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학원출판사, 1994), 『풀안경』(금성출판사, 1999), 대표 동화선집 『은행잎 훈장』(지경사, 2002) 등이 간행되었다. 동화집 『꽃수레』로 제1회 부산시 아동문학상(1960), 논문 「한국 전래동화의 작중 사건고」로 제3회 이주홍 아동문학상(1983), 단편 동화 「옹달샘가의 지옥새」로 제6회 한국불교아동문학상(1988), 장편소설 「언덕 너머 햇살이」로 제24회 소천아동문학상(1990), 중편 동화 「하늘에 뜬 돌토끼」로 대한민국 문학상(1990) 등을 수상하였다.


  손동인에 대한 연구는 인간론을 비롯하여 전래동화, 창작동화, 수필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이루어져 있다. 석사 학위 논문으로는 정화숙의 「손동인론 -수필 작품에 나타난 의식 세계와 장르 확대와 실험을 중심으로」(인천교대, 2001), 오정희의 「손동인의 『병아리 삼형제』 연구」(경남대, 2013) 등 2편이고, 작품론으로는 장호의 「손동인론」(《횃불》 2월호, 1970), 이재철의 「손동인론」(『한국아동문학작가론』, 1988), 문광영의 「손동인 문학론」(『한국현대아동문학 작가・작품론』, 1991), 문광영의 「고 손동인의 문학적 삶과 동화세계」(《아동문학평론》65호, 1992 겨울호) 등이 있으며, 인간론으로는 김계곤의 「인간 손동인 上, 下」(《광장》1989. 3월호, 4월호) 등이 있다. 이 중 문광영의 「손동인 문학론」은 동화 영역과 단편소설 영역으로 나누어 각각 문학적 특성을 깊이 있고 알차게 분석한 점, 자료적 가치가 큰 손동인의 창작동화 목록까지 첨부한 점에서 특히 눈에 들어왔다.


  정화숙은 그의 석사 논문에서 중요한 수필 몇 편 속에 나타난 인간관 등 의식 세계 분석을 통해 시, 소설, 동화의 문학세계를 조망하였는데 손동인의 의식 세계를 아동과 순수세계에 대한 지향, 희망적 미래지향 의식 등 다섯 가지로 나누면서 인간 형성의 명제에서 동화가 지닌 교육적 효용성이나 정신적 효용을 매우 중요시한 것이 그의 문학세계에 대한 의식이라고 분석하고 손동인의 동화의 특성은 다분히 성인적(成人的)인 위치에서 성인적 목적의식이 반영된 동화, 대부분 아동의 외적, 표면적 일상생활에 초점을 둔 생활 동화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정리하고 있다. 또 오정희는 그의 석사 논문에서 첫동화집 『병아리 삼형제』의 26편 동화를 대상으로 어린이의 발달 특성과 인지 발달 단계를 고려하여 작품 속 인물 유형을 네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았는데 ①순수 동심으로 현실 세계의 인식을 깨닫는 어린이, ②주변 세계와의 갈등을 극복하는 어린이, ③설화적 상상을 통한 대행 경험하는 어린이, ④가족 해체 등 불행한 삶을 극복해 나가는 어린이 등으로 나누어 보았다. 장호는 「손동인론」에서 그의 동화 주인공의 유형을 우는 아이, 자라는 아이, 착한 아이로 요약하였다. 이재철은 그의 동화 특징으로 첫째 대부분 생활 동화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 둘째 의도적인 교화성이 드러난 점, 셋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의 개성이 단일하다는 점 등으로 분석하였다. 문광영은 손동인 동화 세계의 특성을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았는데 첫째 동화의 주인공은 하나 같이 불우한 어린이, 불행한 어린이로 일관하고 있으며 절망에 빠지지 않고 개척해 가는 감동적인 이야기로 그려져 있고, 둘째 자연에 대한 눈물이나 사랑, 감격, 기쁨으로 이어지는 따스한 인간애의 눈물로 점철되어 있어 감동을 주고 있으며, 셋째 대부분의 동화가 스토리 중심의 생활동화 형태를 취하고 있고 환상적인 세계보다는 현장성, 현실적 세계에 치중한 교훈적인 의도가 깔려있다고 분석하였다. 앞의 연구자들의 평가를 요약하면 손동인의 동화문학은 첫째 생활 동화 형태를 보이고, 둘째 자신의 불행을 극복해 가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고, 셋째 의도적인 교훈성을 지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소고에서는 한국 전래동요 연구가로서 손동인의 면모를 살펴보고, 중요한 5편의 중⋅장편을 대상으로 손동인의 동화문학의 특성을, 6.25 전쟁 등 중요한 사회적 역사적 배경, 상징적인 인물화 제시, 입체적 구성 방식 도입, 다양한 예화 및 비유담 삽입 등 네 가지로 나누어 자세하게 분석하고자 한다.


2. 한국 전래동요 연구가 손동인

  이재철은 손동인에 대하여 ‘전래동화연구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이 방면의 채집과 연구에 독보적 업적을 남겼다’고 높이 평가하였고, 문광영도 손동인을 칭하여 ‘한국 전래동화 연구의 효시이자 전래동화 연구의 신기원을 개척’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에게 이런 역사적인 평가를 안겨준 전래동화 연구서가 바로 『한국 전래동화 연구』(1984)이다. 그는 이 연구서에서 전래동화를 민간 설화의 분신이며 동심을 가진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라고 정의하고, 전래동화의 주제는 고대소설과 같이 권선징악의 도덕률과 인과응보의 인과율이라고 서술하였다. 이 연구서에서 눈에 띄는 것은 한국 전래동화 100편을 사건의 성격을 중심으로 분석한 내용이 나오는데, 총 사건이 5,838건으로 1편당 평균적으로 약 58건 사건이 발생하며, 사건의 성격을 비애, 괴이, 권세, 애정, 희락, 정의, 희망, 부정, 지식 등 11개로 분류하였다. 이 중에서 비애가 19.4%(1,132건) 1위를 차지해 일반적으로 한국 전래동화의 특성인 비극적 슬픔을 보여주는 작품이 많다는 점을 통계적으로 밝혀내기도 하였다.


  그는 1968년 인천교대 부임 직후 「한국 전래동화의 작중 등장물 성격고」(1969)을 비롯하여 「韓國 傳來童話의 作中 事件攷Ⅰ」(1970)~「韓國 傳來童話의 作中 事件攷 Ⅻ」(1983) 등 10여 편에서는 ①정신분석학적 견지, ②호랑이의 사건을 통한 성격 분석, ③작중 사건의 풍속, ④작중 사건의 배경, ⑤허언이나 기망 분석, ⑥위트나 유머 중심 등 다양한 주제로 한국 전래동요를 분석하였다. 또 경기도, 인천 지역 등을 학생들과 함께 팀을 이루어 발로 뛰면서 직접 전래동화를 채집하여 「광주군 도척면의 전래동화」(1985), 「파주군 문산읍 전래동화」(1987), 「남양주군 진접면의 전래동화 연구」(1989), 「시흥시 일대의 전래동화 분석 연구」(1990) 등까지 20년 넘게 혼신의 힘을 다해 전래동화를 학술적으로 정리하였다.


  전래동화 채집은 (인천교대 교수로) 부임하면서부터 매년 전국을 돌면서 특히 경기, 인천 지역 외진 곳을 학생들과 팀을 이루어 답사, 토박이 주민들을 직접 만나 발굴하였다. 그리고 소멸 위기에 있는 전래동화를 채집 정리하여 학술적으로 분석 고찰한 논문만도 47편에 달하는데, 바로 『한국전래동화연구』(1984)는 이를 집대성, 체계화한 것으로 한국 전래동화 연구의 효시이자 전래동화 연구의 신기원을 개척한 업적이라 평가된다.

-문광영의 「손동인 문학론」 중(645쪽)에서-


  손동인은 전래동화 채집 정리할 때 외부와 접촉이 없는 대대로 토박이들이 사는 곳을 대상으로 방언, 전래동화, 민요, 민속, 전설, 지명, 금기어 등 민속학, 국어학에 관련해 사료적 가치가 큰 분야를 포함해 연구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자료들을 모아 정리하여 어린이용 전래동화집 『민화와 전설』(1979), 『한국 전래동화』(1980), 특히 《창작과 비평사》에서 『한국전래동화집』(1980∼1982) 18권을 연차적으로 발간하였고, 『이상한 여우 수건』(1984)도 출간하였다.


  이렇게 그가 전래동화 연구에 집중하게 된 동기는 어디에서 연유가 되었을까. 첫째로 교사를 양성하는 것이 주된 임무인 교육대학 교수로서 교육자의 뜨거운 사명감이 당연히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고, 둘째는 ‘소박한 예술성’이 깔려있는 전래동화 속에 ‘어린이의 호기 본능’을 자극하는 많은 사건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손동인은 『한국 전래동화 연구』의 서문에서 전래동화의 성격, 전래동화와 어린이와의 관계 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전래동화는 동화문학이기에 그 속에는 소박하나마 예술성이 깔려있다. 그 예술성으로 미(美)까지 맛볼 수 있기 때문에, 어린이는 전래동화를 사랑하게 된다. 물을 것도 없이 예술의 본질은 미요, 미의 본질은 또한 쾌감이기 때문에, 사실의 나열인 역사보다도 이 쾌감으로 무늬를 놓은 전래동화를 더 즐기게 된다. (중략)
  전래동화에서 권선징악이나 교훈성을 어린이의 호기 본능과 직결된 많은 사건을 통하여 전개시키기 때문에, 변전(變轉)을 좋아하는 아동 심리와도 부합된다. 어린이들이 만화나 추리 동화. 모험 동화를 좋아하는 것도, 다양한 이 변전에 동반한 호기 본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손동인의 『한국 전래동화 연구』 서문 중에서-


  즉 ‘권선징악이나 교훈성’ 등 어린이들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는 교육의 합목적성이 전래동화에 충분히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가 한국 전래동화를 적극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전래동화의 사건 전개 속에서 ‘다양한 변전에 동반한 어린이의 호기 본능’ 때문에 전래동화를 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래동화를 예술적 ‘쾌감으로 무늬 놓은 동화’로 정의하고 어린이들이 그런 예술미를 맛보기 위해 전래동화를 더욱 즐기고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손동인이 20여 년 인천교대 재직 기간 내내 전래동화의 채집과 연구, 전래동화집 발간 등 동화 창작뿐만 아니라 전래동화 연구에 몰입한 것은 ‘변전이 동반된 쾌감으로 무늬 놓은 전래동화’ 때문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그래서 정화숙도 ‘성인적 목적의식에서 바라본 그의 동화 세계가 자연스럽게 권선징악과 교훈성 및 적중성이 짙은 옛날 이야기인 전래동화로 변모되는 것은 자연스런 변신’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재철도 ‘손동인 동화에서 등장인물은 현실의 복잡다단한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아동들의 여러 가지 미묘한 개성보다는 스토리의 전개에 필요한 개성만을 설정하고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다분히 그가 연구한 전래동화적인 등장인물의 성격과 유사하였다’고 지적하였다.


  전래동화의 큰 특징 중의 하나인 설화적 전개 경향은 1957년에 발간한 첫 동화집 『병아리 삼형제』에 실린 몇 편의 동화에 이미 나타나 있다. 오정희의 논문에서 언급한 ‘설화적 상상을 통한 대행 경험’이 그것인데, 「솔개와 황새」, 「올빼미와 꿀벌과」, 「병아리 삼형제」, 「도둑」 등 네 편의 동화는 초자연적인 사건 형태의 옛날이야기로서 교훈적 요소인 권선징악과 인과응보적인 주제와 유래담적 요소가 들어있다고 하였다.


3. 손동인 중⋅장편 동화의 특성 몇 가지

  손동인의 동화문학에 대한 여러 연구자료를 읽다 보면 그에 대하여 상당히 대조적인 평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문학평론가 문광영은 ‘손동인의 동화 세계는 교육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한 어린이들의 꿈과 용기, 애틋한 정서가 살아 숨쉬고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감동적으로 펼쳐지며, 가슴 뭉클한 카타르시스적 교감을 맛보게 하고, 섬세한 언어, 리듬감을 살란 세련된 문장 구사’라는 손동인만이 지닌 독특한 문체를 보여주고 있다고 극찬한 반면 문학평론가 이재철은 ‘작품의 의도적인 교화성(敎化性)으로 인하여 대부분의 작품이 정경의 디테일 묘사보다는 사건 중심의 구성에 치중하여 때로는 줄거리의 진행에만 급급하는 인상까지 받기도 하고, 아동들의 개성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경향이 짙으며, 그런 까닭으로 연령이나 성장도표현에 있어 더러 무리가 엿보인다’고 신랄하게 지적하였다. 분명히 그의 많은 동화는 한편으로‘슬프고도 아름다운 감동적인 이야기’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지나치게 ‘너무 의도적인 교화성’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평가는 손동인의 동화문학에 대한 상반된 평가라고 하기보다는 그의 동화가 가지는 감동성과 교화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양면적 가치 중 한 측면을 강조해 따로 언급한 것이 아닌가 한다. 동화집 『버들강아지』(1980)의 「책 끝에」에 쓴 글이나 동화집 『하늘에 뜬 돌도끼』(1989)의 머리말에 쓴 글을 보면 모두 그가 추구했던 동화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 수필집 『이 외나무 다리 난 우얄꼬』(1981)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동화는 어린이의 가슴에다 사랑과 꿈과 정의와 용기와 진실을 심어주는 좋은 길잡이입니다. 이 동화집이 여러분들의 가슴에다 이런 생명들을 심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동화집 『버들강아지』의 「책 끝에」 중(218쪽)에서-


  영국의 시인 워즈워드의 말처럼 어릴 때 얻은 감동이나 가르침은 늙어서도 결코 잊혀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므로 감동이나 가르침을 많이 주는 동화를 어릴 때 많이 듣거나 읽은 사람은 커서도 결코 어릴 때의 그 고운 마음씨를 잃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동화집 『하늘에 뜬 돌토끼』의 머리말 중(5쪽)에서-


  목자(牧者)는 피리를 불어 그들을 양달과 자양분이 넘치는 초원으로 인도해야 한다. 그런 초원의 하나에 문학의 꽃밭이 있다. 살벌하고 어두운 골목에서 헤매는 아동들을 화사한 꽃밭으로 인도하자. 문학은 위대한 설득력과 무한한 가능성과 고귀한 인생을 가르쳐 준다.

-수필집 『이 외나무 다리 난 우얄꼬』 중(49쪽)에서-


  손동인이 동화를 ‘사랑과 꿈과 정의와 용기와 진실을 심어주는 길잡이’라든지, ‘감동이나 가르침을 많이 주는 동화’라든지, ‘문학은 위대한 설득력과 무한한 가능성과 고귀한 인생을 가르쳐 준다’고 한 것을 보면 정의와 용기와 진실, 가르침, 설득력 등 동화의 효용성을 더 많이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화숙도 그의 논문에서 손동인은 어린이와 함께 생활하고 호흡하고 이해하고 싶은 심정에서 순수 문학보다는 교육적 효용면에서 동화를 썼다고 하였다.


  문학평론가 문광영의 「손동인 문학론」에 수록된 동화 목록(『한국현대아동문학 작가・작품론』, 672~676쪽)에 의하면 손동인은 생전에 단편 동화 115편 정도, 중편 동화 6편, 장편 동화 2편 등 총 120여 편의 동화를 창작 발표하였다. 손동인의 대표적인 단편으로는 1980년 그가 직접 언급한‘여러 동화 중에서 가려 뽑은 제3동화집’이라고 한 『버들강아지』에 실린 8편 중 단편 6편과, 사후 2002년에 간행된 손동인 대표 동화선집 『은행잎 훈장』에 실린 17편 등으로 「풀안경」, 「은행잎 훈장」, 「산골 아이들」, 「송아지는 무지개를 타고」, 「철둑길」, 「열 손가락 깨물어도」, 「박노인」, 「뻐꾹새」, 「빵을 먹는 줄장미」, 「사랑의 무지개 다리」 등 23편을 들 수 있다. 중편으로는 「남은 발자취」(1958, 이 작품은 1992년에 「사랑 끝에 오는 것」이라는 이름으로 재발표), 「엄마별 아기별」(1959), 「꽃수레」(1960), 「버들강아지」(1980), 「하늘에 뜬 돌토끼」(1987),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1991), 등 6편 정도이고, 장편으로는 《새벗》에 연재되었던 「언덕 너머 햇살이」(1984~1985),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1991) 등 2편이 있다. 그의 작품 발표 연도를 살펴보면 특히 중⋅장편 동화는 1980년 이후 왕성하게 창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손동인의 중편 3편과 장편 2편에 특히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중편 동화 6편 중에서 1960년대 이전에 창작한 「엄마별 아기별」 그리고 주인공 에스 강아지의 이야기로 주인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따라갔다가 길을 잃고 다른 집에서 살다가 고양이와 함께 사건을 벌이는 「사랑 끝에 오는 것」, 골목대장 준이 등 학교 개구쟁이들이 각종 악행을 벌이다가 착한 행동으로 마무리하는 「버들강아지」 등 평면적인 구성을 보인 3편을 제외하고, 나머지 중편 「꽃수레」, 「하늘에 뜬 돌토끼」,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 3편과 장편 「언덕 너머 햇살이」,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 등 2편 총 5편의 중⋅장편을 대상으로 손동인의 동화문학의 특성을 자세하게 분석하고자 한다.


  중편 「꽃수레」는 아버지가 죽고 의붓어머니 밑에서 고생하다가 이름과 얼굴을 전혀 친어머니를 찾아 직조공장, 과자공장 등을 뒤지다가 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하고 있는 친어머니와 극적으로 상봉하는 주인공 고아 석민의 이야기이고, 중편 「하늘에 뜬 돌토끼」는 6.25 전쟁 때 종군기자로 참여한 할아버지가 철원 전투 중 미처 피난가지 못해 죽은 세호라는 아이의 손에서 돌토끼를 수습하여 전쟁이 끝난 뒤 세호의 부모를 찾아 다녔으나 만나지 못하다가 1983년 KBS 남북 이산가족 찾기 때 세호를 찾는다는 사연을 발견하고는 주인공 손자 민이와 함께 연천에 내려가 세호의 늙은 부모에게 돌토끼를 전해준다는 이야기이며, 중편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은 쇠머리산 동굴에 혼자 사는 할아버지에게 6.25 전쟁 때 다리를 다친 이야기를 들은 주인공 지훈이는 할아버지가 주신 괴상한 그림을 받고는 그 그림을 완성하여 6.25 기념 미술 전람회 특선을 받았으나 친할아버지임을 밝히고 멀리 떠나는 쇠머리산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하염없이 우는 지훈이 이야기이다. 이 세 편의 중편 동화에서 「꽃수레」의 끝없는 고난의 주인공 고아 석민이, 「하늘에 뜬 돌토끼」의 6.25 전쟁 중 처참하게 죽은 세호,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의 풍비박산된 가정에서 온갖 수난을 당하는 주인공 지훈이 등을 통해 고난 극복의 교육적 효용성 측면에서 동화작가 손동인의 시각이 가장 잘 드러난 중요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장편 「언덕 너머 햇살이」는 고아원에 사는 장난꾸러기 주인공 성규는 친구 흥렬이네 집으로 입양되고 고아원장 한테 문둥병 친어머니 비밀을 알고 난 후 흥렬이 아버지까지 따로 나서서 소록도를 방문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성규도 인천, 부평 등 나환자촌을 뒤졌으나 만나지 못하다가 실제로는 남편 살인죄 누명을 쓰고 복역한 후 출소한 어머니를 고아원에서 상봉한다는 이야기이다. 장편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는 흥남 철수 때 어머니와 헤어져 전쟁고아가 된 주인공 세호가 부산 희망고아원을 거쳐 서울에서 결혼과 함께 대학교수로 재직하면서 KBS 남북 이산가족 찾기 일을 도와주러 간 손자를 통해 함흥초 교사였던 세호 아버지를 찾는 제자를 만나고 베이징에서 열리는 학술대회 참석하여 흥남에서 세호를 기다리며 살아온 반신불수의 어머니를 직접 상봉하지 못하고 아시안게임 북한 팀 닥터로 참석한 사촌 동생을 만나 북한 가족 소식을 듣는다는 이야기이다. 이 두 편의 장편 동화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언덕 너머 햇살이」의 온갖 고난 끝에 친어머니와 상봉하는 고아원에 사는 주인공 성규,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의 전쟁고아로 출발하여 대학교수로 성공하여 베이징에서 학술대회 발표자, 가족 상봉의 주인공이 된 세호 등도 중편처럼 고진감래의 교육적 효용성이 강조된 인물들이라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가. 6.25 전쟁 등 중요한 사회적, 역사적 배경


  손동인의 중⋅장편 동화 5편에는 먼저 등장인물의 삶의 형태를 선명하게 알 수 있는 사회적 배경이 드러나 있다. 문둥병(=한센병), 고아원(=보육원), 의붓어머니, 어머니 가출, 가정 폭력 등 6.25 전쟁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 사회가 안고 있던 사회적 문제나 가정 문제가 작품의 배경으로 포함되어 있다. 이런 사회적 배경 속에 등장하는 어린이는 결국 희망이 없는 현실, 빈곤한 처지, 고아로서의 외톨이, 차가운 사회적 인식 등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참 고아들을 보는 사람들의 눈이 너무나도 매정스럽습니다. 그리고 고아들을 아예 못된 아이들로만 보는 이 나쁜 버릇이, 어른들만이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옮아져 있다는 걸 난 오늘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언덕 너머 햇살이」 중(44쪽)에서-


  “흥, 오빠, 내가 고아라고 시부모가 결사반대하는 것 있지요? 그러니 어떻게 살아요? 고아인 것도 억울한데 고아 신분을 들고 나와 빌미를 삼으니, 그런 사람들의 괄시를 받아가며 산다는 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서 내가 이혼을 제기했어요. 내가 무슨 통뼈라고 그런 십자가를 져요?”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 중(82쪽)에서-


   「언덕 너머 햇살이」에서 주인공 고아 성규가 반 아이들에게 도둑으로 몰린 사실이나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에서 시부모의 결혼 결사 반대 앞에 이혼할 수밖에 없는 고아 출신 수희의 참담한 현실은 고아에 대한 무서운 사회적 편견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950~60년대 6.25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고아들 또는 보호자 없는 아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전국에 만들어진 어린이 복지시설 고아원은 1990년대 초반까지 고아들의 금품갈취, 절도, 폭력 등 범죄 같은 일탈 행위로 인해 부정적인 인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초기 작품인 「꽃수레」를 제외하고 4편 중․장편 동화에서는 6.25 전쟁이 매우 중요한 역사적인 배경으로 배치되어 있다. 「하늘에 뜬 돌토끼」에서는 6.25 전쟁 당시 전투 장면이 직접 그려져 있고,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에는 6.25 전쟁터 부상으로 절름발이가 된 지훈의 쇠머리산 친할아버지, 베트남 전쟁 참전 중 왼쪽 눈을 실명한 지훈 아빠가 등장하고, 「언덕 너머 햇살이」에는 6.25 전쟁 상이군인이 된 흥렬이 할아버지 이야기가 나오고,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에는 1951년 1.4 후퇴 전에 이루어진 흥남 철수 이야기가 나온다. 특히 「하늘에 뜬 돌토끼」와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과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 3편은 6.25 전쟁과 함께 1983년 KBS 이산가족 찾기가 배경으로 배치되어 있고, 마지막으로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에는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까지 현대 한국의 굵직한 역사적 배경이 차례로 포함되어 있다.


  그 봉우리 하나를 놓고 매우 큰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황새봉의 여기저기에 너무나 많은 포탄이 떨어져 흙과 돌이 날고 총알이 빗발처럼 퍼부어댔습니다. 온 산은 금방 불바다가 되었고, 매캐한 화약 냄새가 목구멍까지 기어들어 왔습니다. 눈도 따가워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습니다.
  이 바람에 박기자네 전우들이 하나둘씩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면서 죽어갔습니다. 박기자는 이렇게 큰 전투는 처음이었습니다.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고 소름이 끼치는, 참으로 무서운 전투였습니다.

-「하늘에 뜬 돌토끼」 중(163쪽)에서-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비로소 본격적인 전쟁 이야기로 접어들기 시작했다.(중략)
  “그 개성 근처의 어느 야트막한 고개에서 우리는 전투를 벌였어. 치열한 전투였지. 콩 볶듯이 기관총 소리가 나는가 하면, 박격포 터지는 소리가 나고, 간간이 터지는 대포 소리로 귀청이 떨어져 나가는 듯했단다. 이 바람에 이쪽저쪽 할 것 없이 돌멩이가 날고, 흙먼지가 날아 그야말로 눈을 뜰 수조차 없었지.”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 중(55쪽)에서-


  「하늘에 뜬 돌토끼」와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에는 치열했던 6.25 전쟁의 전투 장면이 등장한다. 「하늘에 뜬 돌토끼」에서는 빗발처럼 쏟아지는 포탄과 총알 속에서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국군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에서는 기관총 소리, 박격포 소리, 대포 소리 속에서 돌멩이와 흙먼지가 날아오르는 긴박한 전투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가 이 두 장면을 통해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결코 전투의 사실적인 모습이나 박진감 넘치는 전투의 모습이 아니다. 바로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에 뜬 돌토끼」에서는 주인공 민이의 할아버지가 피투성이인 채로 돌토끼를 손에 쥐고 죽어간 세호의 시신을 보여주고,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에서는 하늘을 노려보고 죽은 아이도 보여주고 있다.


  ①어머니가 화장실을 찾아 떠난 얼마 뒤였다. 부두에 정박해 있던 LST의 둔중한 뒷문이 열렸다. 문을 두 개였다. 두꺼운 철판이 부두에 걸쳐졌다. 이와 동시에 줄을 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배에 오르려고 큰 혼잡을 이루었다. 호루라기를 불며 질서를 유지하려고 군인들이 애를 써도 피난민들은 막무가내였다.(22쪽)
  ②그동안의 서울 생활 중 세호는 4.19와 5.16의 정치 파동을 겪고 이제 <한일협정> 체결의 해를 맞이했다. 거리에는 연일 학생들의 한일협정 반대 시위가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76쪽)
  ③그때 방송국에서는 벌써 한 달이 가깝도록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을 하고 있었다. 방송국 앞 광장과 벽에는 하얗게 사람 찾는 광고가 도배를 한 것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리고 헤어진 혈육을 만나기 위해, 그 광장을 헤매고 다니는 사람들로 대혼잡을 이루고 있었다.(92쪽)
  ④세호씨는 그날의 학술대회가 끝날 무렵 해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최을룡씨와 함께 아시안게임을 보러 갔다. 마침 그날은 북한과 이란의 축구 결승전이 있는 날이었다. 메인스타디움인 <공인 체육장>에는 태극기와 인공기가 서로 어울려서 꽃밭을 이루었고, 태산이 무너질 듯 남북이 합동 응원을 하고 있었다.(140쪽)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 중에서-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에는 1950년 6.25 전쟁부터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까지 40년간의 현대 한국 역사가 배경으로 포함되어 있다. ①1950년 12월 15일에서 12월 24일까지 열흘간 이루어진 흥남 철수 작전, ②1964년 6월 한일협정 반대 시위, ③1983년 KBS 이산가족찾기, ④1990년 9월 제11회 베이징 아시안게임 등에 따라 주인공 고아 세호는 흥남철수 때 어머니와 헤어져 부산 고아원에 있다가 서울로 올라와 결혼하고 대학교수로 성공하고, 늙은 어머니와 상봉하기 위해 베이징에 가지만 어머니의 병환으로 만나지 못하게 된다.


나. 상징적인 인물화 제시

  화가 심규섭은 「보편적 상징과 생태적 상징」(《통일뉴스》 2013.11.15)이라는 글에서 “세상의 모든 미술 작품은 시각적 상징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을 그리든, 풍경이나 동식물과 같은 자연물을 그리든 관계없이 미술의 소재는 모두 상징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아름다운 풍경화에도 화가가 표현하고 싶은 숨은 상징이 들어있다. 그래서 독자는 그림 작품 속에 녹아있는 깊은 의미를 찾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소설이나 동화에도 회화의 상징과 유사한, 앞으로 전개될 사건의 방향을 암시하는 의도적인 복선이 깔려있다. 복선이란 어떤 사건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미리 그 사건의 가능성을 암시해 두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손동인의 5편 중․장편 모든 동화에는 놀랍게도 괴이한 상징적인 인물화가 등장한다. 필연적인 사건의 암시 등 소설의 복선과 같은 역할을 하는 그림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유치한 인물화가 담고 있는 중요한 의미가 5편 중 딱 한 군데, 장편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에, 그것도 숨은 그림찾기처럼 슬쩍 제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정상적인 붓놀림으로 완성한 인물화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가 그리다 만 미완성 그림이다. 당연히 유치한 낙서 그림이다. 이상하게도 서로 다른 5편의 동화에 동일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 판박이처럼 닮은 그림이다. 그러나 전문 화가가 그린 인물화처럼 깊은 의미를 가진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석민이는 울고 있었습니다. 벽에는 아직도 석남이 그려 붙여논 그림이 그대로 붙어 있었습니다. 손발이 목에 붙고 이가 엉성성하고 3자를 붙인 듯한 두 귀를 갖고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꽃수레」 중(167쪽)에서-


  그 종이에는 이상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가 엉성하고 손과 다리가 턱 아래에 바로 붙어 목과 가슴과 배가 없는, 해골과 같은 이상한 그림이었다. 지훈이는 그 그림은 어린 꼬마가 그린 인물화라는 것을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중략) “그렇지. 이 그림은 6.25 전쟁 때에 어느 꼬마가 그린 그림이란다.”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 중(54쪽)에서-


  성규는 눈깔이 빠진 석이가 그린 그 그림을 보자 이상하게도 자기 고아원의 꼬마 아이 분이의 그림이 생각났습니다. 벽에다 그려 놓은, 다리가 목에 붙고 두 팔이 다리에 붙은 그림이었습니다.

-「언덕 너머 햇살이」 중(25~26쪽)에서-


  영규 아저씨는 그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빨이 엉성하고 팔과 다리가 턱 아래 바로 붙은 그림이었다. 그리고 그 그림 옆에 서투른 글씨로 비뚤비뚤 <엄마>라고 적혀 있었다.(중략) 그 그림은 틀림없이 죽은 이 아이가 그린 그림이요, 또한 핏자국을 보아 얼마 전의 전투에 희생이 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었다.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 중(74쪽)에서-


  「꽃수레」에는 석민의 어린 여동생 석남이가 그린 이상한 인물화 ‘손발이 목에 붙은 그림’이 등장한다.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에도 쇠머리산 할아버지가 지훈이에게 주신 괴이한 인물화 ‘목과 가슴과 배가 없는 해골 같은 그림’이 있다. 「언덕 너머 햇살이」에도 고아원 꼬마 분이가 그린 그림 ‘다리는 목에 붙고 팔은 다리에 붙은 그림’이 나온다. 그리고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에도 ‘이빨이 엉성하고 팔과 다리가 턱 아래 바로 붙은 그림’이 나온다. 그리고 그 유치한 그림은 곧 <엄마>임을 알려 주고 있다. 「하늘에 뜬 돌토끼」 등 3편에는 그림보다 더 직접적인 피범벅 아이의 시신이 등장한다.


  세호였습니다. 그 아이는 틀림없는 세호였습니다. 박기자는 얼른 다가가 세호를 안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세호는 멀거니 뜬 눈으로 박기자를 바라본 채 통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세호의 다리와 배는 이미 떨어져 나갔고, 그 일대의 잡초들은 피에 젖어 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늘에 뜬 돌토끼」 중(165쪽)에서-


  “꼬마 아이가요?”
  “그렇지. 그런데 말야, 그 아이는 한쪽 팔이 달아나고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단다. 그리고 두 눈은 하늘을 노려보고 죽어 있었어. 그리고……”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 중(56쪽)에서-


  영규 아저씨는 머리 끝이 쭈뼛했다. 예닐곱 살짜리 어린아이의 시체였다. 한쪽 팔은 떨어져 나갔고, 배도 총상을 입었는지 그 일대에 피가 흘러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두 눈은 치켜뜬 채 그때까지도 하늘을 노려보고 있었다. 참으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처참한 시신이었다.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 중(73쪽)에서-


  「하늘에 뜬 돌토끼」나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이나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에는 전쟁터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죽은 아이가 각각 등장한다. 「하늘에 뜬 돌토끼」에는 ‘다리와 배는 이미 떨어져 나간’ 피범벅인 세호의 시신이 나오고,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에는 ‘한쪽 팔이 달아나고 얼굴은 피투성이 두 눈은 하늘을 노려보고 있’는 아이의 시신이 나오며,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에는 ‘한쪽 팔은 떨어져 나갔고 배도 총상을 입었고 두 눈은 치켜뜬 채 하늘을 노려보고’ 죽은 ‘예닐곱 살짜리 어린아이의 시체’가 나온다. 모두 6.25 전쟁으로 인해 피투성인 채 비극적으로 죽은 아이들이다. 그런데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에는 전문 화가인 영규 아저씨가 그린 유치한 낙서 그림 같은 괴기스러운 인물화 한 점이 전시회 벽면에 걸리고, 많은 관람객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끄는 장면이 나온다. 왜 전문 화가가 유치한 낙서 그림을 그렸을까? 그것은 바로 어린 생명 유린의 잔혹한 전쟁에 대한 고발 때문이었다. 손동인의 중⋅장편 동화 5편에서 그림과 관련된 사건을 통합 정리해 보면 ①어린이들의 유치한 엄마 그림(전쟁 전)→②피범벅의 어린이 시신(전쟁 중)→③화가의 괴기스러운 인물화(전쟁 후)로 단계별 도식화할 수 있다. 결국 작가는 어린이들의 서투르고 유치한 그림 속에 내재된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평화로움이라는 깊은 상징성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의 다음 장면을 보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작가의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아저씨, 왜 하필이면 그 전쟁터에서 본 그 아이의 그림을 회상해 그리려고 그렇게도 애를 쓰셨어요?”
  “응. 세호야, 그건 내 자그마한 작가 정신이야, 그 그림을 완성함으로써 그 아이의 간절한 염원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하려는 의도였지. 동족 상잔의 비극과 민족통일의 염원이, 그 아이의 비참한 주검과 그 아이가 그린 어머니 그림을 통해 설득력 있게 전달되리라 믿고 있어.(중략) 그뿐만 아니라 그 아이의 시체를 묻어주지 못하고 서부 전선에서 후퇴한 뒤로 그 아이의 영혼을 달래는 길은 오직 이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저 그림을 그리려 애를 썼지.”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 중(76쪽)에서-


  아이가 그린 유치하고 괴상한 어머니의 그림을 통해 ‘동족 상잔의 비극과 민족 통일의 염원’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즉 작가는 ‘자그마한 작가 정신’으로서 첫째 잔혹한 6.25 전쟁의 실체를 고발하고, 둘째 민족 통일의 염원을 이루고, 셋째 죽은 아이의 영혼을 달래고 싶어서 상징적인 인물화를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 입체적 구성 방식 도입


  소설이나 동화에서의 입체적 구성은 역순행적 구성이라고 하는데 사건의 전개 방식을 자연스러운 시간의 순서에 따라 전개하지 않고 시간을 뒤바꾸어 진행하는 방식을 말한다. 「꽃수레」에서 석민이 아버지한테 쫓겨난 친어머니의 편지 이야기, 「하늘에 뜬 돌토끼」에서 6.25 전쟁 때 종군기자로 참전한 할아버지 이야기,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에서 6.25 전쟁에 참전하여 다리를 다친 지훈이 할아버지 이야기, 「언덕 너머 햇살이」에서 살인죄 누명으로 10여 년 복역한 성규 어머니 이야기,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에서 6.25 전쟁 중 흥남 철수 때 어머니와 헤어진 세호 이야기 등 과거의 사건이나 지나간 이야기를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건 사이에 끼워 넣고 있다. 주로 과거를 회상하는 현재-과거-현재 형태로 전개하고 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더 이상을 너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구나. 나는 10년 전에 그러니까 네가 아직 두 살 때였지만 너의 아버님께 쫓겨난 너를 낳은 친어머니란다.>
  10년 전에 너의 아버님께 쫓겨난 너를 낳은 친어머니…….
  석민이는 두 눈이 금방 똥그래지면서도 이 대목을 몇 번이고 눈으로 되훑어 읽었습니다. 이상한 노릇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일입니다.

-「꽃수레」 중(79~80쪽)에서-


  지훈이는 터질 듯이 콩닥거리는 가슴으로 할아버지의 편지를 다시 읽어 내려갔다. 그러는 사이에도 지훈이의 눈은 더 휘둥그래지며 몹시도 떨리고 있었다.(중략)
  -지훈아, 좀더 그때의 얘기를 적어 줄게. 내가 부상을 당해 전쟁터에서 돌아오니, 네 할미는 어린 네 어미와 고생고생하며 살고 있었어. 그러나 제대를 한 내가 취직도 못하고 상이군인이 되어 구걸이나 하자 네 할미는 참다못해 네 아비를 두고 그만 도망을 가 버렸어.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 중(118쪽)에서-


  「꽃수레」와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에서는 어머니나 할아버지가 직접 쓴 편지 형식을 이용해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두 동화의 주인공 석민과 지훈이는 전혀 알 수 없었던 편지 속에 기록된 과거의 사건에 큰 놀람과 함께 충격에 휩싸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꽃수레」 발단 부분에서 주인공 석민이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벌어진 사건을 친어머니 편지를 통해 알게 된 후 전개, 절정 부분까지 종횡무진 미친 듯이 친어머니를 찾아 나서게 된다.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에서 할아버지의 편지는 6.25 전쟁부터 현재까지 불행하게 지내왔던 가족의 내력을 소상히 밝히면서 지훈이의 자립을 위한 거액의 저금통장과 함께 멀리 떠날 수밖에 없는 할아버지의 아픔을 담고 있다. 이처럼 두 동화에 등장한 편지가 사건의 입체적 전개 과정에서 매우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민이의 할아버지 박창덕은 그때(=6.25 전쟁) 바로 이 종군기자였습니다. 그리하여 박기자는 부대를 따라 38선 근처의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그때 강원도 철원 근처에선 산봉우리 하나를 놓고 그것을 서로 빼앗고 지키느라, 많은 피를 흘리며 오래도록 싸우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늘에 뜬 돌토끼」 중(146~147쪽)에서-


  그러면 성규의 어머니는 어찌해서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런데 그 까닭을 밝히자면, 이야기는 성규가 이 세상에 갓 태어났던 옛날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언덕 너머 햇살이」 중(194쪽)에서-


  한편으로는 6.25 전쟁으로 인해 자신(=세호)의 넋이 여태 그늘에 잠겨 있었다고 원망하며 당시를 회상했다.(중략)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UN군과 국군은 흥남에 주둔할 수 없게 되어 해상을 통해 12월 16일부터 철수를 개시하게 되었다.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 중(15쪽)에서-


  「하늘에 뜬 돌토끼」, 「언덕 너머 햇살이」,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에서는 각기 다른 과거 회상 수법을 적용해 입체적 구성을 하고 있다. 「하늘에 뜬 돌토끼」에서는 주인공 민이에게 할아버지가 6.25 전쟁 때 종군기자로 참여한 과거 이야기를 직접 서술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고, 「언덕 너머 햇살이」에서는 작가가 3인칭 관찰자 입장으로 개입을 해서 성규의 어머니가 남편 살인죄 누명을 쓰고 복역하고 있는 전체 사건의 과정을 서술하고 있으며,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에서는 중학교 3학년인 주인공 고아 세호가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면서 어머니와 생이별하게 된 흥남 철수라는 아픈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라. 다양한 예화 및 비유담 삽입



  일반적으로 동화나 소설에서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이야기의 진행 속도를 조절한다. 독자들은 사건의 흐름에 따라서 재미를 느끼면서 작품에 몰입하게 된다. 이야기의 진행 속도가 작품의 완성도에 큰 영향을 주며 독자들의 평가도 달라진다. 사건의 완급 조절은 사건의 형태에 따라 달라지며, 그것은 작가의 역량에 해당한다. 살아있는 이야기가 되려면 사건의 흐름이 빠를수록 좋다. 그래야 소설이나 동화의 긴장감이 높아지고 생동감있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서사를 빨리 진행할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인물, 배경에 대한 설명이나 묘사는 사건 진행 속도에 비하여 풀어가는 설명 과정이 포함되어 있기에 전반적으로 속도가 느려 독자들이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다. 설명 기법은 독자들에게 인물이나 이야기에 대해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기에 매우 중요하다. 이 기법은 인물이나 사건 이해에 도움 되는 필수적인 정보라는 조건에 맞아야 효과적이라 할 수 있다.


  손동인의 동화 속에서 발견되는 특이한 한 가지는 예화나 비유담이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다. 어린이들의 교육적인 측면을 고려하면 동화 속에 등장하는 예화나 비유담은 필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예화나 비유담이 이야기의 진행 방향이나 사건의 흐름에서 앞의 설명 기법처럼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필수적인 정보라고 할 수 있을지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손동인의 동화에서 보여주는 ‘작품의 의도적인 교화성(敎化性)’이라는 이재철의 유효한 지적도 어쩌면 예화나 비유담을 많이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손동인의 5편 중․장편 동화에서 예화나 비유담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작품은 장편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새벽 3시 장례식 이야기, 중국 설화집 <설원>의 올빼미 이야기, 휴머스 중세 신화 이야기, 중국 한나라 고조 유방 고사, 고사성어 미생지신 이야기, 아르키메데스 유레카 이야기, 일본 모모타로 전래동화 이야기, 송시열과 정적 허목의 약방문 고사, 당뇨병 통계 이야기 등 9가지 이상의 예화나 비유담이 실려 있다. 중편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에는 동요 <가을이라 가을바람>, 동요 <우리의 소원> 등 2편, 낭패 고사 등 3가지가 배치되어 있다. 동요는 이 외에도 장편 「매화는 눈 속에서도 핀다」와 「언덕 너머 햇살이」에 최순애의 <오빠 생각>이 각각 실려 있다. 또한 전래동요는 중편 「하늘에 뜬 돌토끼」에 <달아달아 밝은 달아>와 함께 당나라 시인 이태백 고사가 실려 있다. 가요로는 중편 「하늘에 뜬 돌토끼」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그리웠던 삼십년 세월/ 의지할 곳 없는 이몸 서러워하며/ 그 얼마나 울었던가요~’로 전개된 설운도의 <잃어버린 삼십년>, 「언덕 너머 햇살이」에 인용된 정수라의 ‘하늘엔 조각구름 떠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있고/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이라는 <아, 대한민국> 등이 있다. 또 「언덕 너머 햇살이」에는 소록도 시인 한하운의 <파랑새>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가 소록도 통계 자료와 함께 실려 있다. 중편 「꽃수레」에는 주인공 석민이가 같은 반 삼덕이 아버지의 도움으로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에도 사건의 진행보다는 불국사 석가탑, 토함산 석굴암과 십일면관음보살상, 첨성대 등 여러 가지 역사적인 유물과 사적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다.


  “그렇지. 옛날에 ‘낭’이란 짐승이 있었는데, 몸뚱이가 왼쪽 반만 있었대. 그리고 ‘패’란 짐승도 있었는데, 패란 짐승은 몸뚱이가 오른쪽 반만을 가지고 있었대. 그러므로 낭과 패는 각기 혼자서는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늘 낭과 패가 함께 붙어야 한 놈 구실을 했대.” “참 괴상한 짐승들도 다 있군요.”
  “그런데 지훈아, 우리나라도 꼭 이 ‘낭’과 ‘패’와 같지. 남⋅북 중 어느 것이 낭이고, 패인지 물을 것도 없이 서로 붙어야만(통일이 되어야만) 잘 살 수 있지. 만약 서로 떨어지는 날이면 그야말로 낭패요, 대낭패란 말야.”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 중(59쪽)에서-


  오경탁 씨는 소록도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소록도는 처음엔 그 생김새가 사슴의 머리와 같다 해서 녹두도라 했으며, 면적은 4,909,064 평방 미터이고, 1916년부터 나환자 수용소가 됐다는 것, 현재 환자 수는 2,261명이며, 외국인 의료 봉사대로 오스트리아와 미국의 수녀가 5명이나 와 있다는 것, 치료는 다 나라에서 부담하며, 환자들은 모두가 종교를 믿어 장로회가 약 1,800여 명, 천주교가 약 500여 명, 원불교도가 약 20명이나 된다는 것, 그리고 오경탁 씨는 디디에스, 람포레인, 리팜피신 등의 최신 의약품을 쓰기 때문에 나병을 완전히 고칠 수 있어 90년대 초에는 환자가 거의 없어질 것이라고 자신있는 말을 했습니다.

-「언덕 너머 햇살이」 중(157쪽)에서-


   「소리나지 않는 외손뼉」에 들어 있는 ‘낭패 고사’와 「언덕 너머 햇살이」에 실려있는 ‘소록도 현황 자료’이다. 낭패 고사에서 남한과 북한의 관계를 떨어져 살면 안되는 이유를 ‘낭패’라는 동물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소록도 현황 자료는 소록도 병원 복지과 직원인 오경탁 씨가 흥렬이 아버지에게 소록도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인데 이 동화의 인물이나 사건 이해에 도움 되는 필수적인 정보라고 하기에는 어렵지 않나 싶다.


4. 덮으며


  손동인은 평생 동화 창작과 전래동화 연구에 몰두한 아동문학가이다. 시 80여 편, 수필 370여 편, 소설 90여 편을 발표하였지만 그의 진면목은 장편 2편을 포함하여 동화 120여 편, 한국 전래동화 연구 논문 47편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먼저 한국 전래동화 연구의 효시이자 전래동화 연구의 신기원을 개척한, 한국 전래동요 연구가로서 손동인의 면모를 살펴보았고, 그 다음은 중요한 5편의 중⋅장편을 대상으로 6.25 전쟁과 고아 등 중요한 사회적 역사적 배경 배치, 괴기스러운 상징적인 인물화 제시, 시간을 넘나드는 입체적 구성 방식 도입, 일본 모모타로 전래동화 등 다양한 예화 및 비유담 삽입 등 네 가지로 나누어 손동인의 동화문학의 특성을 분석하였다.


  아직 물들지 않은 동심(童心)이 우리 곁에 있음은 우정 다행한 일이다. 우리는 잃어버린 이 동심을 각자의 마음속에서 불러와야 한다.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마음속에도 동심은 잠재(潛在)되어 있는 법이다. 인간이 이런 상황일수록 돌아가야 할 인간다운 마음의 고향은 바로 이 동심이다.

-수필집 『이 외나무 다리 난 우얄꼬』 중(97쪽)에서-


  이처럼 손동인은 평생 ‘인간다운 마음의 고향은 바로 이 동심’이라고 여기고 동심이 가득한 동화 창작과 전래동화 연구에 매진하였던 것이다.(끝)

  • 1)문학평론가 문광영의 글 「손동인 문학론」에서 언급한 자료에 의하면 대부분의 시는 1956년 이전에 발표하였고, 소설은 대표적 단편소설 「인간경품」(1965), 「잉여설」(1957) 등이 있으며, 수필집으로는 『뛰어라 젊은 갈대들이여』(1979), 『이 외나무다리 난 우얄꼬』(198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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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다영 때에 따라 산다는 것, 그리고 ‘동시대 시’에 대한 단상 ― 허향숙 『오랜 미래에서 너를 만나고』(천년의 시작, 2024), 한명희 『스위스행 종이비행기』(여우난골, 2024)

동시대 가속류 시의 생산 조건과 가능성1) 1 유사하거나 상이한 시적 흐름들과의 관계 속에서 동시대 시의 지형도를 그리고자 하는 이 기획은, 언뜻 십여 년 전 제출되었던 어떤 요청을 떠올리게 한다. ‘미래파’의 열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을 무렵 일련의 무리 짓기 현상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었고, 그로 인해 시인들의 개별 작업에 대한 정밀한 조명과 각 각의 시적 의의를 해명하는 일이 중요하게 부상했던 것이다.2) 그렇다면 옹호에서든 비판에서든 최근 비평장에서 텍스트 분석의 ‘과도한 천착’이 종종 거론되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과거의 요청이 지난 십여 년 이상 성실히 이행되어온 방증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유의해야 할 것은 그때와 지금의 요청 모두 개별 시세계에 대한 적절한 가치 부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공통된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시적 경향을 인접시키거나 떼어놓고 보는 유형화 작업과, 각 시인들에 대한 구체적이고 정밀한 독해가 결코 대립하는 접근방식이라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이제는 동시대 여러 시적 흐름과의 관계성을 고려한 깊이 있는 독해의 필요성 또한 제기되고 있으며, 이러한 거시적인 연결의 좌표 위에서 개별적인 시세계에 대한 보다 마땅한 해명과 자리매김이 가능할 것이라는 인식이 공유되고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최근까지 축적된 주요 논의들을 다시 살핌으로써 그간 동시대 시를 읽는 독법이 어떠했는지를 점검하고, 함께 주목해야 할 시적 경향이 무엇인지 제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관련하여 2020년대 초를 전후하여 ‘나’의 중층성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공존하고 있음은 주목을 요한다. 주로 기성 시를 다루는 평문에서는 ‘나’의 중층성이 실제 시인과 내부 발화자의 거리를 좁혀 가상의 허위를 폭로하는 현실 대면 의지로서 긍정되는 한편,3) 신인 시 심사평에서는 지나친 메타적 중층화가 복수의 ‘나’들 간의 거리를 넓히며 현실 대면 의지의 부재를 드러내는 것으로 우려되어온 것이다.4) 그런데 여기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건, 전자의 경우 ‘메타시’의 일반적인 정의와 특별한 변별점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고,5) 후자의 경우 90년대에는 메타시가 현실 인식의 한 중요한 관점이자 방편으로 이해되었다는 점이다.6) 그런데 후자의 평가는 박상수가 황인찬과 송승언 등 기성 시인을 분석하면서도 동일하게 언급했던 내용이다. 따라서 기성 시와 신인 시 모두에서 유사한 작법 양식이 폭넓게 운용되고 있으며, 투고자들이 기성의 문법을 체화하여 학습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즉 메타적 인식의 중층화, 산문화를 적극 활용하는 시적 경향은 이미 작법 차원을 넘어 동시대 시단의 주류로서 그 자체를 목표로 하는 어느 정도 보수화된 규범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들만의 내적 형식과 조직화 원리에 기인하여 각자 자신의 시를 추동하는 방법론을 개발해나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시적 경향이 구체적으로 다뤄지거나 적절히 자리매김되지는 못한 것 같은데, 이는 그간 우리 시를 읽는 독법이 주로 시 장르 일반의 보편 가치와 의의, 효용, 그리고 주체의 태도와 관점에 다소 집중된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7) 이러한 관점들이 그간 거두어온 성취는 별개로 두더라도, 작법의 차원을 중점에 두었을 때 끌어올릴 만한 긍정적 가치는 분명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불화하는 복수적 일인칭에 관한 논의들은 분명 유효적절한 것이었으나, 그보다 더 활발한 현상으로 대두했던 (현실과 가상이 아니라) 가상의 중층적 겹침, 자기동일성의 자가 복제 양상은 상대적으로 조명받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입체적이지도 않고 문학적 진정성도 없는 시들, 각자의 유희에 집중하며 긍정성을 부여하여 길어올릴 만한 근거가 한정적인 시들, 그러나 분명히 활발하게 존재하는 시들을 어떻게 포착하고 호명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들은 유사한 작법 의도와 형식적 특성을 공유하는 시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 독자적인 특질이 더욱 잘 드러날 수 있지만, 그렇기에 그간 가시화되기 쉽지 않았거나 다른 측면만이 주로 논해졌던 건 아닐까. 그들만의 독특함을 잘 해명하기 위한 새로운 접근방식과 연결에 대한 고민 없이는, 기성 시인들에 의해 시의 모범 혹은 당위로 말해지는 덕목들과 투고자들의 시작 경향의 괴리가 나날이 커지는 현상 또한 적절히 읽어내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현상에 대한 판단을 우선 유보하고 그들의 작법 내부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구체적으로는 시가 조직화되는 방식과 원리에 주목할 것인데, 한 편의 텍스트가 어떠한 언어적 가공과 배치를 거쳐 시라는 장르적 호명을 위해 제출되는지, 즉 해당 시인들이 각자 어떠한 경향성과 패턴 속에서 시를 생산해내는지를 세부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편의상 이들을 ‘가속류’라고 칭할 것인데, 가속류의 일반적인 특징을 대표하는 몇몇 시적 흐름을 살펴보며 비교한 뒤 기저에 공통으로 흐르는 텍스트의 무의식을 통해 다른 연결점, 가능성과 징후들을 포착하고, 많은 특징을 공유하면서도 결정적으로 가속류와 어긋나는 상이한 사례들 또한 숙고하고자 한다. 일러두자면 가속류라는 명명 자체는 상찬도 멸칭도 아니다. 그저 하나의 도저한 현상이다. 2 가속류라는 명명은 “극도의 추상으로 응집되며 단선적 논리를 변주하면서 증식하는”8) 일군의 시적 경향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는 물론 가속주의와 관련된 여러 논의들, 특히 사이버네틱스9)의 속성에서 차용한 개념이지만,10) 가속주의와는 엄연히 변별된다. 여기서 가속이란 시구를 대량 증식하는 데 적합한 창작 방법론을 효율적으로 구축한 뒤 반복적인 연쇄에 적합하도록 자 동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자면 각자의 지배적인 작법을 기계적 효율성의 원리에 따라 자가 복제 장치로 특화하는 이들을 가속류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11) 이는 창작 주체의 사고 및 세계를 인지하는 방식이 기계나 인공지능의 데이터 집계, 처리, 산출 방식에 동기화되어 기계적 규율화로 추상화되고 단일화되는 무의식적 경향을 반영한다. 이러한 가속류는 일반적으로 기교와 수사, 비유와 가공보다는 객관적·사실적인 단문의 진술 활용이 두드러진다. 특정 패턴을 자동적으로 반복하기에 최적화된 이러한 미니멀리즘 양식은 동어반복과 변주, 메타적 중층화를 무한정 이어나갈 수 있다. “자신의 작동을 그 연쇄의 요건에 적응시켜야”12) 하는 기계공업의 과정과 마찬가지로, 각 문장은 연쇄의 규범을 따르며 서로의 존속을 상호 보완한다. 여기서 시는 치열한 지적 사유의 집약이 아니라 기계적 강박과 우연의 연쇄적·분산적 배치이다. “문장 하나를 쓴 뒤/그 문장을 변주해 나가면서/그저 나열”(배시은, 「모든 것을 하는 것」)이 집요하고도 주된 방법이다. 사전적 정의와 인용도 빈번하게 동원되며 그러한 객관적 문장들의 배치와 나열로 시적 효과가 의도된다. 항상성을 유지하려고 하듯 재귀적 무한 역행 루프와 순환적 인과관계 또한 자주 활용되며, 이때 시적 공간은 주로 컴퓨터 시뮬레이션과 같은 인터페이스를 구축하는데,13) 이러한 사이버스페이스 안에서 주체는 고유한 개체라기보다는 일종의 패턴처럼 사고하고 행위한다.14) 또 한정적인 언어의 가용 범위 내에서 ‘있다/없다’의 진술 구조가 자주 활용되는 가운데 돌연 끼어드는 판단 혹은 선언과 단발적 감정 표출에 의해 복합적 사고로의 이행은 빈번히 차단된다. 과거에 메타시가 내면 탐구를 위한 현대적 장치로 일컬어지던 것과 달리, 주로 익명을 지향하는 이들에게서는 ‘내면’을 탐구하고자 하는 의지나 욕망, 개성이나 감정 표현에 대한 욕구를 발견할 수 없다. 이러한 가속류는 언뜻 통찰의 깊이가 담기지 않은 기계의 발화와 유사해 보인다. 또한 이들이 자주 익명을 표방하거나 욕망, 주체성의 의지가 없으며 일원화에 대한 지향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시인의 본래 의도가 어떠했는지와 무관하게—이러한 작법이 기계적 효율성의 과정과 마찬가지로 “의인화된 사유 습관을 추방”15)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통합체로서의 개인이 아닌, 무수히 분할된 데이터이자 가분체16)로서 존재하는 동시대인들의 실존 감각과 빈번히 분절·재배치되는 사고 구조를 대변하는 시작 경향으로 보인다. 이처럼 주체의 정체성을 내세우지 않는 그들에게 주체라는 자리는 어떠한 인격체도 커스터마이즈하여 활성화를 거듭 반복할 수 있는 다회용 공용 장이 된다. 2022년 하반기에 출간된 배시은의 『소공포』는 이러한 가속류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들을 대표한다. 이 시집은 주로 현상적 진술로 이루어진 단문의 반복과 변주를 통해 가속의 원리를 명확히 보여주며, 사전의 한 구절을 옮긴 듯한 인용도 빈번히 동원된다(「참가시은계목」 「해상 물류」). 무엇보다 지배적으로 활용되는 것은 현상에 대한 단순 서술과 그 변주인데, “짐을 풀자/짐은 풀린다//(……)//중요한 것은 일어난 일이다 어디까지가 일어난 일인가 아는 것이다/일어날 일은 일어난 일이자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은 이미 일어난 일이다”(「칫솔」)와 같은, 반복과 증식을 위한 무의미한 문장 생성은 가속류의 자가 복제 양상을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도마는 하나면 된다.//웬만한 건 다 하나면 되듯이.//무언가가 내 몸을 통과해 나가고. 그것을 바람과 비슷한 것이라고 느끼지만 바람은 아니다.//먹다 뱉고.//먹다 뱉은 것을 먹는다. 먹고, 먹고, 먹고, 먹고, 먹고, 먹고, 먹고, 먹고, 먹고, 먹고//먹는다.//미래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최대한 많은 미래를 상상하는 것뿐이다. 많은 미래를 상상하면 미래는 그저 그것들 중 하나에 그친다.//잠시 생각했다.//나는 기후가 나의 전부라고 여긴다.//긴 기간에 걸쳐서/생각했다.//먹다 뱉고.//먹다 뱉은 것을 익월에 다시는/먹지 않는다. 나에게 그런 식의 자유는 주어진 적 없다.//나는 기후가 나의 전부라고 여긴다.//긴 기간에 걸친/생각은 어색한 구석이 있는데//그만큼 흠 잡을 데 없다.//이것을 이것으로 바꿔 주세요.//결정하면서.//도마는 하나면 된다./촛불이 하나면 충분함과 같다. ― 「익익월」 전문 인간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라고 어떤 인간이 썼다. 나는 이제/인간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라고 쓰지 않는다, 그냥 인간 생각을 잘 하지 않는다. 인간은…… 그냥 인간이네. 그냥 인간/인간 대신에 은점토 생각을 한다. 반질반질한. 역동성 있는. 아무것도 닮지 않은/한 인간과. 그 인간과 닮게 닮아 가는 인간. 인간에게 기대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인간. 그냥 인간. 은점토에 대해 평생 아무런 생각도 갖지 않는 인간. 그게 뭐였더라 — 「은점토」 중에서 위 시 또한 주제 문장의 반복과 변주, 천착한 단어의 동어반복을 중핵으로 가동되고 있으며, 지시 대상이 생략된 채 빈번히 동원되는 지시사가 지시의 모호성을 의도하는 한편으로 「소공포」(72쪽)에서 개별자들의 고유성이 융해되어 얼굴이 하나로 합쳐지듯 단일하고 유일한 것에 대한 중앙 집중화적 지향도 눈에 띈다. 철저한 익명의 개체로서 자신을 숨겨 일체화된 시스템 아래 귀속되고 몸은 그저 공유된 사고가 저장되거나 옮겨가는 매개로 활용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시는 얼핏 “기술자본이 꿈꾸는 세계”인 “오토피아”17)를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 ‘생각했다’고 말하지만 그 생각의 내용은 계속 부재 상태에 머무른다(「역소원」 「해상 물류」). 그런가 하면 「평균자유행정」에서 그려지는 독특한 NPC 주체는 게임 내부 환경에 대한 객관적 관찰이기도 하지만, 이미 현실이 곧 게임과 다름없는 지금 사회에서 “미리 정해진 특정한 경로를 따라가는 것밖에는 못하는 존재”18)인 가분체에 대한 통렬한 비유를 보여준다. 한편 김뉘연은 이러한 경향성을 더욱 극단으로 밀고 나가며 컴퓨터 프로그래밍 명령어의 발화를 전시한다. 이때 ‘시’는 놀이나 어떤 수행의 흔적, 우연적 배치의 잔해로 인식되며, 따라서 ‘시쓰기’ 자체가 ‘시’보다 우위에 선다. 독특한 배치와 조합에 의해 ‘시적’ 효과가 의도되는 가운데, 그러한 언어를 전유해보는 경험 자체가 중점에 놓이는 것이다. 계정에 접속해 드라이브를 연다. 왼쪽 상단의 ‘새로 만들기’를 누르고, ‘문서’ 오른쪽 끝에 위치한 기호에 마우스 커서를 올린다. ‘빈 문서’와 ‘템플릿’이 펼쳐진다. ‘빈 문서’를 누른다./‘제목 없는 문서’ 생성./생성된 페이지 왼쪽 상단에 위치 한 기호에 커서를 올린다. ‘문서 개요 표시’. 눌러 본다. ‘요약’과 ‘개요’가 펼쳐진다./(……)/적혀 있으면서 드러나지 않은 문장을 첫 행으로 삼는다./적혀 있으면 서 드러나 있기도 한 문장은 괄호로 묶어 뒤이은 행에 둔다.//여기에 문서 요약 입력./(문서에 추가한 제목이 여기 표시됩니다.) — 「범례 설명」(15쪽) 중에서 네 줄 띄고/계정에 띄고 접속해 띄고 드라이브를 띄고 연다 마침표 띄고 왼쪽 띄고 상단의 띄고 작은따옴표 열고 새로 띄고 만들기 작은따옴표 닫고를 띄고 누르고 쉼표 띄고 작은따옴표 열고 문서 작은따옴표 닫고 띄고 오른쪽 띄고 끝에 띄고 위치한 띄고 기호에 띄고 마우스 띄고 커서를 띄고 올린다 — 「범례 설명」(16~17쪽) 중에서 이러한 김뉘연의 시는 워드프로세서에서 문장을 입력하는 과정 자체를 지면에 그대로 옮겨 언어라는 사물 자체를 전시하고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물질적 감각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한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상이한 층위들의 언어가 위계 없이 수평적으로 전면화된다. 강보원에 따르면 이러한 김뉘연의 작업은 ‘나’를 제거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시적 주체의 범위를 확장하는 일이 되며, 무엇이든 들어갈 수 있는 대체 가능한 장소이지만 그 무엇도 독점적 지위를 점유할 수는 없는 장소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획득한다.19) 3 배시은이 가속류 일반의 기본 원리와 전형성을 대표한다면, 성다영은 그 심화된 양상으로서 독자적인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그가 구축한 자동 장치는 시를 무한히 늘려나가기에 최적화된 특정한 유형을 시사한다. 성다영은 빈번한 행갈이를 통해 주제적 측면에서 짧은 단위의 교체를 의도하고 일관된 주제로의 응집을 차단하려 한다. 성다영의 빈번한 동어반복 활용은 배시은과 마찬가지로 “사로잡혀서 반복”(「다중 슬픔」)하는 작법상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그러나 성다영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단문의 절합 원리에 있으며, 이는 무엇보다도 내적 논리의 구축에 대한 반감에 근간을 둔다. 타의에 의해 존재론적 승인이 좌우되거나 주관적으로 변용되는 것, 인위성을 적극 거부하고 불멸이 아닌 유한성이 인간존재의 조건임을 강조하는 성다영의 시는 시쓰기와 관련된 메타적 발화, 인간 예외주의와 인간 범주 내 위계의 문제를 포함한 사회문제 비판, 시간의 비가역성이라는 서로 다른 대주제, 관찰이나 건조한 감정 진술 등이 차례로 발언권을 넘겨받듯 한 편의 시 내에서 위계 없이 빈번히 교체되면서 전면화되는 방식을 주로 취한다.20) 그렇기에 낯선 문장들이 인과 없이 수시로 틈입하면서 가속적 몽타주의 우연적인 배치 효과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박제/동물의 가죽을 벗긴 다음 솜 따위를 넣어 살아 있을 때와 같은 모양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새롭지 않은 상상/인터넷 용어로 쓰일 때에는 타인의 실수나 잘못을 스크린샷 등으로 저장하는 것을 의미한다/카타 콜록의 수화에는 가정법이 없다/볼 수 없어도 추억할 수 있다/발이 없어도 춤을 출 수 있다/나는 자연과 상관없이 움직인다/여기에 뭔가 있어/누군가가 누군가의 상상 속에 갇힌다/오해하고 싶지 않아/그가 둘러본다/얼굴은 소유를 거부한다/나는 유기되었다/쓸모 있을지도 모르니 아직 버리지 말자//원근법/이미지가 갇혔다/나는 나에 갇혔다//예수는 겸손해서 남자로 태어났다//길에서 오줌을 싸듯 남자가 화를 낸다/나는 분노를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이것은 예술이 아니다//나는 창문을 찾아내 열고야 만다//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여라//창문이 없다/창문을 연다 ― 「행운은 여기까지」 중에서 태초에 은유가 있었다/평생에 나는 개연성이 없다/내 생각은 개연성이 없다/새롭게 떠오르는 생각이 없다/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은…/무언가를 말하려고 할 때…/과거형은 왠지 슬프게 들린다/여기, 이곳을 벗어날 방법이 없다/바깥을 상상하지 않는 태도는 성실하다/감정은 단순하다/나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동물이 고기로 태어나지 않듯이/나는 누구로 태어나지 않았다/나는 거의 틀리다/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당신은 누구십니까?/느슨한 언어/느슨한 상상/느슨한 시나리오/나는 나다/나는 사이에 있다/어딘가에 가입할 수 없다/이렇게 살아갈 수 없다/그러나 이것은 시다/나는 내가 쓰는 시보다 가치 있다/아직 편지가 도착하지 않았다 — 「두 번째 피부」 전문 이러한 파편적인 사유의 잘라 붙이기를 통해 형성되는 무작위적이고 불연속적인 조합은 당초에는 구심점이 없는 것이었지만 어느 정도는 예측 가능한 일련의 패턴을 형성하게 된다. 의미화의 통일을 차단하기 위해 유사성의 극단적인 배제가 시행되는 아래 역설적으로 사고 구획의 코드화된 패턴이 드러나는 것이다. 즉 완전히 다른 주제를 병치하는 성다영의 작업은 서로 다른 연상이 어떠한 직관의 회로를 거쳐 그의 시에서 반복적으로 코드화되는지를 보여준다. 한편, 마찬가지로 동어반복과 수사를 제거한 객관적 진술, 메타적 중층화를 주로 활용하는 시적 경향들은 언뜻 가속류와 상당히 유사한 특징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속류와 변별되는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단선적 논리의 증식이 아니라 중첩적 논리를 구축하여 시선의 다층화를 만들어내고 사고의 방향이 획일화되지 않도록 한다는 데 있다. 이들도 물론 데이터 백업 과 복구의 일상화 같은 기계 미디어 장치의 속성을 반영하지만, 무의식에 접목된 것과 작법의 방식으로 가공 방식을 차용하느냐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차라리 가속의 원리를 여러 겹으로 조작하여 모호성의 패턴을 늘리는 것과 유사한 결과를 낳는다. 가령 한재범은 ‘나’가 아닌 다른 ‘나’의 중첩 양상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한재범은 시간이나 공간의 격차를 두고 다층적인 차원들을 도입함으로써 시공간의 여러 층위를 혼재시키는데, 이는 시인의 시적 논리 확충과 그에 따른 시적 확장으로 이어진다. 예컨대 이상의 「절벽」을 패러디한 「커피는 검다」에서 활용되는 다층의 모호성은 해석의 다양성을 이끌어내며 지시 대상과 언어의 가능한 다의적 관계를 폭넓게 확장한다. 커피는 검다 안이 보이지 않는다 개미가 날아다닌다 보이지 않는다 개미는 검다 커피를 마신다 잠이 오지 않아서 창밖은 검다 잠긴 핸드폰 화면 속 ‘잘 자’라는 문자에 답하지 않는다 들여다보지 않는다 나는 자고 있으므로 — 「커피는 검다」 중에서 위 시에서 자고 있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관찰자 화자의 시선이 드리우는 가운데, 첫 두 문장은 검어서 커피의 안이 안 보이는 것으로도, 화자 A와 화자 B의 발화가 교차로 제시되고 있어서 방안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다. 검은색의 속성에 의해 커피와 밤과 잠이 연결되고 있으므로 “보이지 않는다”고 할 때 그 대상이 커피 안인지 방안인지 알 수 없다. 보거나 보지 못하는 화자로 볼 수 있는 또다른 근거는 이어지는 연들에서 “깨진 유리잔처럼 엎질러진 밤 커피가 마르지 않는다”와 “밤새 놓인 커피가 그대로였다”가, “오늘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와 “나는 종일 배가 부르다”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잘 자’라는 문자가 첫 연과 마지막 연에 제시되는 모습은 문자를 보낸 화자와 받은 화자의 모호성을 유도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을 분절된 시간의 비순차적 이어붙임으로 읽을 수도, 꿈속의 중첩적 서사로 읽을 수도 있다. 커피, 밤, 잠이 공유하는 검은색의 가시성과 어미의 혼란을 통해 논리적 중첩 양상을 구축한 것이다. 「기호와 기후」에서도 마찬가지로 빗소리의 불규칙한 리듬과 편안함이 연결되어 불규칙한 심박동의 불편함이 파생되고 불성실과 아픔이 연결된다. 그리고 ‘그’가 ‘그’이거나 ‘방’으로 중의적으로 해석됨에 따라 “스위치가 달렸으면 좋겠다고/생각했다”를 받는 게 ‘심장’이거나 ‘방’이 된다. 이처럼 한재범의 시에서 동어반복의 유희처럼 보이는 것들을 대개 환유의 의도된 논리를 따르며 누적된 언술들의 논리적 적층으로 인해 모호함과 중층성을 획득한다. 그리하여 의도적으로 입체감이 없는 평평한 사유를 통해 수평의 단선적 논리를 지향하는 가속류와는 변별된다. 4 가속류는 인터넷 플랫폼과 기계장치의 작동 방식에 익숙해져서 매 순간 가상 환경에 동기화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동시대 디지털화된 주체 경험의 리얼리티를 반영한다. 이들이 처음에 어떠한 의도로 자기만의 자동적 작법을 개발했는지와는 무관하게,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극도의 추상성과 단선적 논리로의 산발적 귀결, 현상을 관찰하는 단문의 서술과 사유의 생략 혹은 압축, 시공간의 비약은 가속의 원리에 적합하도록 동시대인들을 훈육하는 미디어 장치의 작동 원리와 결과적으로 흡사하다. 즉 가속류는 각 시인의 창작 매크로 장치라는 현상을 통해 읽은 텍스트의 무의식이므로, 창작자의 원래 의도나 수용자의 감상 지연 효과 등과는 엄연히 다른 차원에서 논해져야 한다. 이러한 가속류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 장르의 속성을 되묻는 ‘시적’인 것의 정의와 경계 확장, 총체성의 거부와 파편의 긍정, 시각성과 청각성을 지면에 들여오려는 시도, 기표 자체에 대한 매혹과 끌림, 낯선 감각의 들여다봄, 발화 기계의 실험을 경유한 다른 타자 되어보기 등. 어쩌면 가속류는 디지털 처리 과정에 의해 욕망이 매개되거나 변형되는 동시대 삶의 양식, 알고리즘 기반 메커니즘에 가장 걸맞은 시 스타일은 아닐까? 그런데 한편으로 앞서 언급한 내용이 가속류 일반에 일률적으로 적용 가능한 평가라는 점은 다소 비판점을 남긴다. 사이버네틱스에 대한 장피에르 뒤피의 평가와 마찬가지로, 인간에 대한 철저한 물화는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거나 인간중심주의를 극대화하는 데 모두 공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가속류의 ‘의의’는 해석 차원에서 부여되는 의의이지 시 자체가 내장한 속성으로 인해 도출되는 것은 아니므로, 같은 논리에 대한 정반대 해석에도 동일하게 무력할 수 있다. 의의로 일컬어지는 것과 같은 근거가 동시에 한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가속류 자체는 시대의 산물이자 징후로서 그 자체가 문제가 될 수는 없다. 그보다도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건, 무한한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는 가속류 자체의 어떠함보다는 특정한 경향성이 동시대 작법상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현상 자체이다. 서두에서 살펴봤듯 몇 년째 심사평에서는 현실에 대한 인식이나 개입의 의지가 축소되는 현상에 대한 유사한 고민과 유사한 평들이 제출되고 있다. 고민이 해를 거듭하며 심화되는 와중에도 그러한 시의 창작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음은 뭔가 중요한 문제가 간과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한다. 비단 가속류가 아니라도 특정한 경향이 우세화되고 있으며 다양한 형식과 스타일이 경합·견제되기보다는 다양성과 활발함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면, 진단의 전제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는 (보편이라 가정되는) 다른 시대의 외래 담론보다도, 문학이란 본래 무엇인가 묻고 해명하는 제각각의 정의보다도, 제도나 관행 등을 포함한 우리 문학사의 특수성 위에서 해명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그렇다면 추가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문제는 이것이다. 현실 대면에의 복권을 강조하기 전에, 현실 대면은 왜 요구되어야 하는지, ‘현실’이라 상정된 것이 각자에게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봐야 하지는 않을까. 이미 가상을 현실로 인식하는 지금 시대에서 ‘현실’이라 정의되는 것이 각자에게 무엇인지 어느 정도 합의가 필요할 것이다. 또 이러한 가속류는 어떠한 조건과 배경에서 동시대 시단의 주류적인 목소리가 되고 많은 시 독자와 투고자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을까. 가속류는 왜 많은 시 창작자들에게 즐거움과 해방감을 안겨주는 것일까.21) 또 가속류가 대변하는 새로운 시대감각은 앞으로 한국시의 풍경을 어떻게 변화시켜나갈까. 아주 많은 길을 내서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것과, 아무 길도 없어서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믿는 건 언뜻 유사해 보이나 실상 아주 다른지도 모른다. 향후를 기약하기로 한다. 1) 이 글에서 다루는 시집은 다음과 같으며 이후 인용시 시집 제목은 생략한다. 김뉘연, 『문서 없는 제목』(봄날의책, 2023), 배시은, 『소공포』(민음사, 2022), 성다영, 『스킨스카이』(봄날의책, 2022), 한재범, 『웃긴 게 뭔지 아세요』(창비, 2024) 2) 가령 조연정은 당시 비평가의 임무를 개별 시인들이 “‘미래파’라는 후광 또는 굴레를 떼어내고 홀로서기에 성공할 수 있도록” 그들을 “따로 불러 대화를 시도해보는 일”이라 말한다. 조연정, 「가까스로 가능한, 진실의 세계—‘미래파’의 두번째 시집에 대하여」(2009), 『만짐의 시간』, 문학동네, 2013, 215쪽. 이러한 필요성은 이듬해 작성된 글에서 더욱 구체화되는데, 그는 ‘미래파’의 출현 이후 새로운 감수성이 발견되고 독법이 확장된 것을 긍정하면서도 “미세하게 서로 다른 경향을 가진 시인들의 차별적 특징들이 하나의 이름 안에서 무화되거나, 같은 무리로 호명되지 못한 어떤 시인들은 제대로 읽히지 못하거나, 성숙한 실험의 난해함과 미숙한 실험의 난감함이 섬세히 구분되지 못했다는 반성이 많이 도출”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를 통해 당시 ‘미래파’라는 거대한 시대적 자장으로부터 개별 시세계를 구출해야 할 필요성이 여러 논자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조연정, 「‘나’라는 정념, ‘너’라는 추상—박희수와 주하림의 시를 읽으며」(2010), 같은 책, 305쪽. 3) 는 주로 조대한에 의해 전개되었는데, 그는 실제 작가의 목소리가 시 내부에 개입하여 중층적 레이어를 이루는 현상을 가리켜 2000년대에 극단으로 멀어졌던 두 일인칭이 2010년대에 다시 좁혀진 것이라 진단한다. 이처럼 그는 2000년대의 성취이자 이후 한계로 제기되었던 내용의 구도를 뒤집은 방식으로 동시대 시적 경향의 의의를 도출해내는데, 그렇기에 이를 자기동일성에 구획되는 양상이 아닌 일인칭의 무수한 수행으로 읽기를 강조한다. 조대한, 「1인칭의 역습, 그리고 시」,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9년 가을호; 「겹쳐진 세계에서 분투하는 시인들」, 『창작과비평』 2020년 여름호; 「‘나’의 응답— 2000년대 시를 경유한 1인칭의 진폭」, 『자음과모음』 2021년 봄호. 또 안지영에 따르면 이러한 ‘2010년대적 나’는 2000년대의 ‘혼종적 주체’들과는 달리 실제 시인과 완전히 단절되지도, 그렇다고 동일시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의의를 얻는다. 안지영, 「‘포스트-’로 말해질 수 없는 것들—2010 년대 시에 대한 문학사적 읽기연습」, 『현대비평』 2022년 가을호, 59~60쪽. 4) 최근 심사평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된 내용들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인용과 상호텍스트성의 두드러진 활용(황인찬, 「심사평」, 『문학과사회』 2021년 여름호, 367쪽), 세계로의 확장보다는 자기 인식의 되풀이(황인찬, 『문학과사회』 2022년 여름호, 361쪽), 현실과의 대면 부재(내 향화), 메타적 인식의 중층화에 기반한 장형화 및 관념성 과잉, 언어의 미니멀리즘(박상수, 「심사평」, 『문학동네』 2022년 가을호, 440쪽), “해체를 위한 해체”로 보이는 장르 해체의 가속화 경향(신해욱, 「심사평」, 『문학과사회』 2023년 여름호, 321쪽), 산문화, 무의미하고 비유기적인 이미지 더미의 나열(이병률, 「심사평」, 『문학동네』 2023년 가을호, 463쪽). 5) 이수명은 메타시를 “작품에 시인이라는 외부적 차원”이자 “현장성”을 도입하여 언어의 또다른 층위와 레이어를 상정하는 것이라 정의한다. 이수명, 「메타시는 없다」, 『시와세계』 2015년 겨울호, 20~21쪽. 90년대에는 이러한 ‘삼인칭’의 활용이 “자아 탐구의 구조적 장치”로서 주목되었음을 떠올려본다면, 문제는 더욱 간단하지 않다. 김준오는 90년대를 전후하여 삼인칭의 활용이 중요한 징후로 두드러짐을 지적하면서 그 대표 주자로 이승훈을 거론한다. 또한 그는 자기 자신을 “관찰이나 반성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분열된 두 자아 간의 비판적 거리가 유지되는 것을 현대시의 일반적인 양상이라 정의한다. 김준오, 「인칭의 의미론」(1995), 『현대시의 환유성과 메타성』, 살림, 1997, 173~174쪽, 182쪽. 6) 물론 전자는 현실과 가상의 접합, 후자는 가상의 중층화 경향을 가리킨다는 차이가 존재하지만, 시인의 전기적 정보를 알지 못하면 분간이 모호한 그러한 차이보다 두드러지는 건 두 경향 모두 동시대 가장 빈번한 메타 장치인 ‘행위하는 나를 관찰하는 나’ 구도 혹은 그 중첩 구도를 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중 레이어 장치에서의 메타적 발화는 어떠한 기준에 의해 현실과 맞붙어 있거나 떨어져 있는 것으로 판가름되는지 의문이 생기게 되는데, 어쩌면 이는 레이어의 활용보다도 주제나 소재 혹은 발화자의 태도에 귀속되는 건 아닌지 하는 추가적인 의문도 든다. 7) 창작자의 사회적 여건, 그가 속한 세대 일반의 특징을 분석하거나 담론적 수사를 동원하여 시의 사회적 의의와 효용을 열거하는 독법이 과도 해질수록 시와 시인의 역량은 은연중에 무력화된다. 전자의 경우는 시의 당위적 모델에 견주어 작품의 ‘결여’와 ‘증상’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의 무감으로 치우치기 쉬우며(따라서 당위적 모델에 대한 내부적 틀은 견고해진다) 후자의 경우는 시가 비평적 해석에 의탁할 수밖에 없게 되어 시보다 시를 치하하는 장식적 언어의 역할이 중요해진다(따라서 상업주의와의 공모도 긴밀해진다). 시가 해석과 별개로 존재하면서 독자적인 지위를 확보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시인의 의도된 배치와 구성에 따라 만들어진 개별 작품들의 고유한 역량, 시를 읽을 때 고려할 수 있는 다양한 관점들이 충분히 탐색되지 못한 채 빠르게 지배 담론의 분류 체계가 적용되는 것에 대한 경계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8) 투고자, 「비평 게임 설계하기—변혜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문학과지성사, 2023) 고선경, 『소다수와 샤워젤』(문학동네, 2023)」, 『문학과사회』 2024년 봄호. 9) 노버트 위너에 의해 창시된 사이버네틱스는 인지과학의 초석으로서 모든 행위자들에 기계의 지위를 부여하고 ‘마음’ 혹은 ‘생각’을 알고리즘에 의해 수행되는 물리법칙으로 설명하고자 한 시도이다. 당초 위너는 인간 정신의 통제와 기계의 인간화를 강조하여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의 극대화를 지향했지만 이후 1차, 2차를 거치며 사이버네틱스의 흐름은 반인본주의적 근거 또한 제공했다. 10) 가속주의는 자본주의의 대항운동으로서 자본주의를 가속화하기 위해 “소외하기, 탈코드화하기, 추상화하기의 경향을 가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물론 자본주의적 원리에 최적화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갱신된 가속주의’는 광신적 자본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산출함을 아는 것 위에서 전개된다. 로빈 맥케이, 아르멘 아바네시안, 「서론」, 『#가속하라—가속주의자 독본』, 로빈 맥케이, 아르멘 아바네시안 엮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3, 14~15쪽, 37쪽. 탈자본주의를 위한 탈코드화가 전환기 이전의 가속주의라면, 오늘날의 가속주의는 “사이버네틱과 디지털, 인터넷으로의 포섭”을 의도한다. 윤태균, 「가속에 관한 몇 가지 서술과 기호에서의 벡터」, 콜리그, 2022. 7. 8. 11) 물론 성다영의 「더 명복」과 「투명한 얼굴」이 다르듯이 한 시인이 매번 유사한 작법만을 반복하지는 않음을 유념해야 한다. 12) 소스타인 베블런, 「기계 과정, 그리고 영리 기업의 자연적 쇠퇴」(1904), 『#가속하라』, 103쪽. 13) 이를 적극 활용하는 시인으로 이유야와 변혜지를 들 수 있다. 이들은 가상화된 자아의 중층적 메타화를 활용하는 가운데 시공간의 압축과 확장 및 즉각적인 이동과 급전환으로 대표되는 가상공간의 원리를 시 내부에 구현한다. 이는 단순히 게임의 설정이나 그래픽을 차용하는 게 아니라 게임 플레이에서의 사고 과정이 창작 주체에게 체화된 양상, 즉 기계 인터페이스 경험이 시적 사유에 동기화된 양상의 반영이다. 그리하여 이유야에게는 스킬을 가동하듯 ‘그런데, 그러자’를 전후로 시공간의 빈번한 전환이 이루어지고 변혜지는 의미 단어가 큰 추상어들을 리셋과 재플레이를 위한 기능적 어휘로 사용한다. 이유야, 『일인조』, 파란, 2022; 변혜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문학과지성사, 2023. 14) 가령 김유림은 특정한 맵의 한정된 반경 내에서 이동하는 롤플레잉 게임 캐릭터 화자(와 그 화자의 외부 관찰 구도)를 자주 사용하는데, 이는 한정된 거리만을 이동하도록 설정된 배시은의 「평균자유행정」 속 NPC 화자나 성다영의 산책-관찰-생각 연속체 화자를 떠올리게 한다. 김유림, 『별세계』, 창비, 2022. 15) 소스타인 베블런, 같은 글, 106쪽. 16) 들뢰즈에 따르면 가분체란 디지털 환경에 의해 생산된 주체로서 “파열된 혹은 균열적인 방식으로 계속해서 스스로를 재시작하고 재조직하게 하는 자아 경험”을 뜻하며, 이때 “경로들은 매순간 ‘새로고침’된다”. 앨피 본, 『게임, 사랑, 정치—게임화된 애정, 관계, 감정, 일상 그리고 기술 사회 욕망혁명의 미래』, 박종주 옮김, 시대의창, 2023, 177쪽. 17) 같은 책, 56쪽. 18) 같은 책, 176쪽. 19) 강보원, 「타국에서 펼쳐 든 사전」, 『문서 없는 제목』 해설, 136~137쪽 20) 투고자, 「은유와 지상명령—『스킨스카이』(봄날의책, 2022)」, 『문학인』 2022년 겨울호, 222쪽. 21) 앞서 박상수가 심사평에서 중층적 메타 전략이 시가 저절로 진행되게 하여 편리하다고 언급한 것은 적은 수고로 시를 쓰기에 특화된 어떤 양식적 문법들이 폭넓게 공유되고 있음을 암시하는데, 바로 여기서 많은 투고자들이 이를 선호하는 또다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하나 가정해볼 수 있는 건 이런 것이다. 어쩌면 어떤 이들에게는 시를 쓰는 일보다도 (등단 여부를 떠나) ‘시인’으로의 진입과 공인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아닌가? 그럴 때 가속류와 같은 시쓰기는 시를 생산하는 데 무척 용이한 도구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경우 시인이라는 타이틀은 왜 매력적인 상징자본 혹은 안전장치가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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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다영 믿음의 내용을 인식하는 시 ― 박영기 시집 『흰 것』(파란, 2023)

믿음의 내용을 인식하는 시 ― 박영기 『흰 것』(파란, 2023) 줄리엣 아이비의 「we’re all eating each other」은 모두가 결국엔 죽어서 꽃의 일부가 되고, 후손들이 그 꿀을 모닝티에 넣어 마실 것이므로 결국 우리는 서로를 먹게 된다는, 생과 사의 타당한 순환에 관한 노래이다. 박영기의 시집 『흰 것』 또한 죽음의 장면에 오래 시선을 두고 있지만, 이는 다시 생으로 돌아가는 어떤 원리에 대한 사유로 이어지고 있어 깊고도 고요한 자연의 섭리에 대해 숙고할 계기를 마련해준다. 1 박영기의 시에서는 ‘있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빈번히 들린다.(「수국정원」, 「귀신의 무게」, 「백년골목」, 「배려」) 무엇이 있다는 걸까. 존재를 확언하는 목소리는 왜 이 시집에서 그토록 자주 발화되는 걸까. 어쩌면 이는 믿음일까. 무언가가 있다는 말을 통해 실상 강조되거나 수행되는 것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시에서 ‘있다’의 연쇄가 이어지는 와중에도 ‘없다’가 강박적으로 출몰하며 특이점을 형성하는 「미끄러지는 오리」를 먼저 살펴봄으로써 이에 대한 중요한 심증을 마련할 수 있을 듯하다. 오리가 호수에서 “자맥질하는” 모습이 그려지는 이 시에서 수면에 파문을 일으키는 오리의 능동적인 움직임은 “호수”가 “토하”거나 “수면이 게”우는 것으로 전도되어 제시된다. 그런데 이러한 풍경을 관찰하고 있는 화자의 눈에 ‘오리’는 읽어내야 할 것이지만 결코 읽을 수 없는 대상으로 그려진다. 오리가 자꾸만 수면 위를 미끄러지기 때문인데, 이때 반복되는 ‘없음’의 내용은 “읽을 수 없다”로서 ‘오리’가 통상적인 문맥을 어긋나는 시의 언어에 빗대어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오리 대신 ‘언어’를 기입하여 오리와 수면의 관계를 다시 읽어본다면, “오리 밖으로 미끄러지는 오리/오리는 오리를 더 미끄러져야/읽을 수 있다”라는 말은 언어의 지시성을 엇돌거나 자기 자신과의 어긋남을 통해서만 도달이 가능한 시 언어의 독특한 역설에 대한 비유로도 이해해볼 수 있다. 더 나아가 문학의 언어에 대한 박영기의 사유는 글쓰기에 대한 태도와 결의로도 표출된다. 그에게 “소설”은 “화구에서 막 꺼내/부서지기 직전/뜨거운” 흰 재의 속성을 닮은 “흰 것”으로 일컬어진다. 화자는 “죽어도” 희고 “검어도” 흰 이 잿더미를 보면서 “혀에 땀이 나도록 쓰고 또//쓸 것”을 다짐한다. 그가 “끝까지” 써야만 하는 당위는 “쓰지 않을 때/시간이 멈”추고 “계절이 사라”지기 때문인데(「흰 것」) 여기에는 무언가를 계속 써야만 슬픔의 시간에 고립되어 있는 것에서 벗어나 생을 지속할 수 있다는 믿음과 의지가 배어 있다. 소진되거나 명을 다하여 ‘흰 것’이 되어버린 어떠한 삶을 두고 그저 슬퍼하기만 하는 데 모든 기력을 쏟기보다는 가능한 한 계속해서 “말하기”를 실천해나갈 것에 대한 강조인 것이다. 이처럼 죽음은 이 시집에서 자주 다뤄지는 주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죽음을 다루는 시 중에서도 인간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동물의 발화는 특별히 주목을 요한다. 「우리가 돼지를 심고 있을 때」에서 깊게 판 “구덩이”에 돼지들이 생매장되는 장면은 고랑을 만들어 씨앗을 ‘심는’ 일처럼 비유된다.1) 이 섬뜩한 풍경은 돼지의 발화로 구체화되면서 인간 행위에 대한 엄중한 경고로도 읽힌다.(“오늘은 우리가 사라지지만 내일은 당신들이 끝장날 거요”) 「역할극」 또한 칼로 손질될 때부터 식탁 위에서 살과 뼈가 발라지는 모든 과정이 생선구이 화자의 입을 빌려 전개됨으로써 다른 존재의 피와 살과 뼈를 취하는 일에 대해 숙고하도록 이끈다. 피와 살과 뼈는 『흰 것』에서 생명의 근원이자 속성을 상징하며 자주 등장하는 시어이기도 하다. 심지어 감자를 살과 피가 흐르는 것처럼 감각하고(「접착테이프와 구운 감자」), 추상적인 생각까지도 물성을 지닌 것으로 묘사하는 건 이 시인이 살아 있는 상태에 대해 보다 역동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2) 더 나아가 이는 ‘있다’의 범위를 확장하여 가치 있는 생명으로 환산되지 않는 것들, 이미 소멸되어 물질적 존재가 없는 것들에게도 그렇지 않다고, 분명히 ‘있다’고 자리를 부여해주는 일이기도 하다. 2 한편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고 그 존재를 확언하는 일은 실상 ‘나’의 실존에 대한 확언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나’에게 있어 다른 존재자들은 ‘나’의 ‘있음’에서 말미암은 지각 능력에 의해 발견된 것이기 때문이다. 주문처럼 ‘있다’를 되뇌는 박영기의 화자들은 당연하게 존재하던 풍경들이 정말로 있는 것인지 어리둥절하게 되묻고 낯설게 감각함으로써 그러한 대상들을 발견하는 인식 주체 ‘나’에 대한 인식을 다시 수행한다. 끓는 해변이 있다. 숯불처럼 거꾸로 타는 태양이 있다. 뜨거운 자갈들이 있다. 지글지글 뱃살을 굽고 있다. 자갈 밑에 게거미가 있다. 지그시 누르는 오후 1시의 자갈돌이 있다. 꿈틀거림을 꾸욱 누르는 손바닥이 있다. 버티다 뚝 끊어지는 힘이 있다.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쾌감이 있다. 담뱃불처럼 게거미를 비벼 끄는 손가락이 있다. 태양을 비벼 끄는 검지가 있다. ― 「백년골목」 부분 위 시는 ‘있다’가 확언하는 서술의 대상에 대한 연상이 그 대상의 감각적 속성에 착안하여 시선을 옮겨가면서 시의 공간을 넓혀가는 양상을 보여준다. ‘끓는’ 것의 뜨거움에 대한 인식은 마찬가지로 뜨거움이라는 속성을 공유하는 “숯불”과 “태양”이 위치한 “해변”의 위쪽으로 시선을 이동시키고, 다시 하강과 상승, 줌인을 반복하며 해변에 ‘있는’ 풍경들을 차례로 조망한다. 뜨거운 속성에 기대어 담뱃불로 옮겨 간 태양은 “검지”가 “비벼 끄는” 것이 된다. 화자의 이동에 따라 여러 방향으로 확장되는 이 시의 공간은 1연의 해변 외 다양한 장소들로까지 시선의 침투를 이어받으며 다채롭게 존재하는 사물들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환기한다. 그런데 이렇게 발견한 ‘있음’의 나열은 ‘나’를 서술할 보어의 자리에 들어갈 목록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기준」에서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이어 ‘나는 ~입니다’라는 문장의 연쇄가 이어지는데, 이는 서술어를 ‘있다’로 대치할 경우 한자리에서부터 시선의 이동을 시작하여 풍경의 조감도를 넓혀가던 양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즉, ‘내’가 발견한 풍경이 곧 ‘내’가 되는 것이다. 이때 “나는 있다와 보이지 않는 모든 있다만큼 많은 있다가 기준입니다”라는 단언은 당장 가시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어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까지를 ‘있음’의 영역에 포함하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란히 연쇄되는 항목들이 지금 보고 있는 풍경과 지금은 절대 볼 수 없는 풍경이 맞붙어 구성되어 있음은 이를 강조하는 면이 있다. 3 그러나 가장 독특한 ‘되기’의 양상은 어떤 대상에 대한 집요한 마음이 죽음을 거쳐 자신을 그 대상의 일부로 변화시키는 모습에서 발견된다. 딱따구리 혀에 대한 최초의 정확한 묘사는 1575년 네덜란드 해부학자 폴 허르 코이터르에 의해 이루어졌다.(월터 아이작슨, 『레오나르도 다빈치』) 딱따구리의 혀는 부리 길이의 세 배 이상 늘어날 수 있다. 혀는 사용하지 않을 땐 두개골 안쪽으로 들어가는데, 연골 같은 구조의 혀는 턱을 지나 딱따구리의 머리를 휘감은 뒤 콧구멍으로 휘어져 내려온다. 긴 혀는 나무 안쪽의 유충을 파먹을 때 쓰인다. 더불어 뇌를 보호해 준다. 부리로 나무껍질을 반복적으로 쫄 때, 혀는 쿠션 역할을 하면서 뇌를 충격으로부터 보호한다. 딱따구리에 대한 궁금증이 한층 깊어진다. 딱따구리의 혀를 묘사하라: 먼저 딱따구리를 잡아야 한다. 먼저 딱따구리보다 빨리 날아야 한다. 차라리 딱따구리 먹이로 태어난다. 그보다 먼저 죽어야 태어날 수 있다. 딱따구리를 유인한다. 두통이 시작된다. 골이 띵하다. 1초에 스무 번 쫀다. 부리를 피해 골 깊숙이 들어간다. 묘사할 짬 없이 뇌를 공격당한다. 더 이상 물러서지 않는다. 뇌 주름으로 딱따구리 혀를 꽉 움켜쥔다. 혀끝에 뼈가 있다. 뭔가 더 있을 것 같다. 딱따구리 입속으로 들어간다. ― 「두통의 원인」 전문 화자는 딱따구리에 대한 묘사를 읽다가 딱따구리를 궁금해하고 딱따구리를 묘사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딱따구리를 잡아야 한다.” 화자가 읽던 딱따구리에 대한 ‘묘사’는 이제 화자가 묘사해야 하는 과업으로 바뀌고, 그러기 위해 화자는 “딱따구리 먹이로 태어”나고자 한다. “그[딱따구리]보다 먼저 죽어야 태어날 수 있다”는 화자의 진술은 딱따구리에게 먹혀 죽음을 경험함으로써 딱따구리 몸의 숙주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하여 벌레로 변신한 화자는 “두통”을 감수하면서까지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 곳으로 가서 딱따구리에게 쪼이고 먹히는데, 이때 “뇌를 공격당”하는 모습은 딱따구리가 나무를 쫄 때 겪는 고통과 언뜻 구별되지 않는다. 이후 딱따구리의 내부에 접근하는 데 성공한 벌레 화자는 딱따구리의 혀를 움켜쥠으로써 혀가 보호하고 있던 뇌를 탐닉하기 시작한다. 무언가에 대한 집요한 궁금증과 집착이 그 대상으로 하여금 자신을 죽이도록 유도하는 이러한 과정을 통과하여 대상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침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아무것도 아니던 무존재의 정체성에서 천천히 무언가가 되어가는 양상도 발견할 수 있다. “그 무엇도 아닌 것이다/그 무엇도 아닌데/그 무엇이 되어 가는 중이다//나는//이것, 저것, 그것이/느리게 되어 가고 있다”(「바람행성」). 그런데 어느 한 존재자가 “무엇으로” “이동”할 때의 모습은 껍질이나 옷을 탈피하는 이미지로 그려지곤 한다. “오늘의 수피를 벗는 나무/오늘의 살비듬을 털어 내는 사람/오늘 하루치의 고양이를 가죽 밖으로 밀어내는 고양이”에서 그려지듯이, 언뜻 변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매일 새로운 모습으로 탈피하는 것이 그 존재 자체의 변화처럼 그려지는 것이다. 이처럼 이 시 세계에서 무언가가 되었다가 다시 무존재로 돌아가는 일은 “무엇의 몸을 입었다가 입은 몸을 벗는” 행위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그 무엇도 아닌 게 되”는 일은 생명 있는 모든 존재자에게 필연적으로 거듭 발생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다시/그 무엇이 되기 위해 악착같이”라는 이 시의 마지막 문장은 이 시의 첫 문장인 “그 무엇도 아닌 것이다”로 돌아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무언가가 되기 위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일의 순환이 모든 존재자에게 살아 있는 내내 이어지는 것이라는, 삶에 대한 박영기 시인 특유의 섭리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더불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네 껍질은/네 살이고 네 피고 네 뼈다”(「접착테이프와 구운 감자」)라는 창조주의 언명과 같은 말이 가리키듯 이 시집에서 ‘껍질’이 가장 근본적인 생명의 근원으로 상정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삶이 ‘되기’와 ‘되기로부터의 탈피’의 연속이라면, 껍질 안의 알맹이가 또 다른 껍질을 겹겹이 입고 들어차 있는 양상이 생과 사의 원형임을 암시한다. “알맹이가 알맹이를 밀어 올”리는 상승의 장소이자 “까고 까도 껍데기뿐”인 하강의 장소로서 껍질의 적층 자체가 역방향의 대칭을 이루며 생사의 순환을 형성하는 것이다.(「기억의 오류」) 그렇기에 껍질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예감하는 것이 가능한 장소가 된다. 이렇듯 박영기의 『흰 것』은 분명히 소멸되면서도 소멸되지 않고 다른 생명의 이어짐을 예비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임을 일깨운다. 1) 흰 것』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돼지’는 주로 죽은 돼지로 그려진다. 「비너스」에서의 잠자는 돼지 또한 “시취”나 “송장파리” 등이 암시하듯 이미 죽었음을 알 수 있다. 2) 「서식지」에서 추상적인 것이 감각 가능한 물질의 형상을 입고 더 나아가 생물로까지 변화하는 양상을 볼 수 있다. “기도는 생각만으로도 은총이 비처럼 쏟아진다/샤워기에서 뼈가 훤히 보이는 물뱀들/나에게 다섯 번째 면사포를 씌운다”에서 “은총”은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과 결합하여 물성을 획득하는데, 이는 다시 여러 줄기로 나뉘어 쏟아지는 속성에 착안하여 “물뱀”에 비유된다. 이후 “물뱀”이자 “물줄기”인 것은 흰색과의 유사성으로 “국수”나 “흰떡”에 대한 연상으로 이어진다.

계간 파란 최다영 박영기시집평론비평리뷰파란 2024
최다영 비평 게임 설계하기 : 변혜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문학과지성사, 2023), 고선경 『샤워젤과 소다수』(문학동네, 2023)

비평 게임 설계하기 —변혜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고선경 『소다수와 샤워젤』1) 1. ‘시―쓰기’를 읽는 일은 무엇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취미를 묻는 질문에 어느 팀 스포츠를 말하면 ‘하는 것’과 ‘보는 것’ 중 무엇을 더 선호하느냐는 질문이 다시 돌아온다. 그때마다 (현장 관중이 아닌) 화면 너머로 경기를 보는 관람자만이 가지는 독자적인 즐거움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미리 주어진 정보와 90분 내내 새롭게 축적되는 정보 및 변수 들을 바탕으로 매초마다 변화하는 선수들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예측과 복기가 즉각적으로 입력된다. 경기가 완결된 이후의 복기 과정은 나만의 의미화에 따라 타임라인을 구성하게 한다. 나는 옵저버 나에 의해 재편된 경기를 읽는다. 물론 이는 경기에 직접 참가한 플레이어가 경기를 복기하면서 행위적 서사를 기입하는 경우와는 (일정 부분 겹친다 하더라도)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흘러간다. 이동휘는 C. 티 응우옌의 게임 행위성 이론에서 더 나아가 행위적 서사를 미적인 분투형 게임의 독자적인 특질로 제안한다. 그는 노엘 캐럴이 언급한 예술 작품 비평의 구성 요소 중 특별히 기술(description)에 집중하는데, 그에 따르면 장기적 행위자의 게임 감상이 미적으로 형성되고 공유되는 과정의 핵심은 감상 단계에서의 게임 경험 기술에 있으며 플레이를 기술하는 일은 반드시 서사로 이루어진다.2) 행위자가 자신의 게임 경험을 복기하는(review) 과정은 반드시 특정한 ‘환경’과 ‘제약’ 속에서의 ‘목표’ 추구라는 서사의 구조를 띠고,3) 플레이어이자 감상자인 자신을 ‘인물’이라는 구성 요소로 더함으로써 서사의 요건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동휘는 게임 플레이의 경험이 서사화의 경험과 다르지 않음을 강조하면서, 모든 게임 경험은 행위적 서사로 기술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행위적 서사를 통해 예술 경험을 기술하는 장르”4)는 게임이 유일한 걸까. 나는 감상을 통한 행위적 서사의 산출이 시집을 읽는 과정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 권의 기획으로 묶인 텍스트들의 언어 배치를 게임 디자인에 준하는 미적 인공물로 볼 수 있다면, 그리고 시집 읽기의 한 목표를 내적 체계의 구성으로 설정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이러한 작업은 각 행위자들이 지형지물을 활용해 서로 다른 시나리오를 생성하는 일로 이어지는데, 이때 독자의 수만큼이나 무수한 시나리오의 발생이 가능하다. 시집의 독자는 읽는 동시에 (놀이를) 쓴다.5) 물론 이는 단순히 시적 요소들의 미적 조화를 감상하는 것과는 변별된다. 내적 논리의 결여를 텍스트 외부의 상상력으로 메우거나 독자의 ‘참여’로 원 텍스트의 전개에 영향을 가하는 하이퍼 서사와도 전연 다른 차원의 감상이다. 시인의 ‘실제’ 의도를 파악하는 것과도 또한 무관하다. 오히려 쓰기 과정에서의 내적 필연성과 논리를 사후적으로 구성해보는 것에 가까운 이러한 작업을 통해 텍스트의 의도는 해석하거나 알아맞혀야 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창조하고 생성하는 것이 된다. 더 나아가 각자가 제시하는 텍스트의 개별성과 서로 다른 문학적 지향들이 만나 경합할 수 있다면, 해당 텍스트는 단일한 해석에 구획되지 않고 다층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텍스트를 재편해보는 즐거움은 내게 비평 쓰기를 촉발하게 한 중요한 심적 계기이기도 하다. 이처럼 시―쓰기를 재편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독자적인 미적 경험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독해의 제안은 시를 읽는 다양한 즐거움을 마련하는 데 기여하면서 비평의 역할을 확장하는 일과도 이어질 수 있다. 지금 비판은 넓은 의미로 분화되고 확장되면서 여러 생산적인 비평적 대화를 적극적으로 이끌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편의적으로 분절된 이분법적 준거에의 귀속을 경계하고, 같은 논의의 반복에 소요되는 에너지를 다른 방향으로 전환하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비판적 읽기의 역량과 그 즐거움을 깊이 탐구할 수 있도록 독해의 방식들을 다양화하는 것이 지금 비평이 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역할일 수 있다. 시를 읽는 방법들이 더 많이 제시되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미 어떠한 경향의 시집들은 독자적인 규칙과 세계관을 갖추고자 스스로를 디자인하기 때문이다. 게임을 비롯해 타 장르의 속성을 차용하던 것이 이전의 경향성이었다면, 요즘의 풍경은 시집 자체가 하나의 출입 가능한 가상 세계관이 되기를 의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창작 및 기획에서 목적이 되는 것은 ‘시’보다 ‘시 쓰기’ 자체라 할 수 있으므로, ‘시’를 목적에 두고 읽는 것보다 유효한 독해의 방법이 제시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기능적 장치로서의 ‘사랑’과 익명의 시 쓰기 이러한 생각은 『멸망법』을 읽으며 더욱 강화되었다. 『멸망법』의 시적 전략은 추상성과 비현실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개별 구체성을 적극적으로 소거하는 것에 집중된 것처럼 보인다. “온통 새하얀 벌판”(「팩맨」)이라는 장소가 대표하듯 이 표백된 세계에서 묘사와 디테일은 극도로 제한되고, 비의적 진술은 빈번히 등장한다. 또한 “가장 큰”(「플라스틱 아일랜드」), ‘모든’, “아주/먼/곳”(「여름에 꾼 꿈」), ‘마지막’, ‘영원히’ 등 최상급 수사와 의미화 개념이 큰 추상어가 거의 모든 시에 동원된다. ‘사람들’에 대한 묘사 또한 ‘아무도’, ‘누구나’, ‘누군가’ 등의 익명의 집단 군중으로 처리되는데, 이들은 얼굴 또한 부재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비현실감 주조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것은 아마 이 시집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아름다움’이라는 단어이다. 이 아름다움의 실체를 추정하기는 쉽지 않은 반면, 비현실성의 의도가 개입되는 대목에서 어김없이 ‘아름다운’이라는 관형어가 등장한다. ‘사랑’이 사용되는 용례도 마찬가지다. 시집 내 행위자들의 명분은 ‘사랑’이라는 추상으로 집약된다. 사랑은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자 “절대로 끝나지 않”(「세계법」)는 절대적인 가치로 제시되지만, 그러한 언명을 통해 사랑을 수식할 최상급 수사들을 불러내는 것 자체가 더 중요해 보인다. ‘사랑’이 마치 기능적 어휘처럼 쓰이는 것이다. 이처럼 『멸망법』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추상어들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는 그 단어 자체가 내포하리라 여겨지는 비의적 속성에 맡겨져 있다. 이 세계관에 익명의 누구든 새로 기입할 수 있도록 어휘 사용을 제한한 것인지, “굼뜬”(「테라포밍」) 창조주의 세계를 효과적으로 비유하기 위함인지, 「스카이다이빙」에서 화자의 고백처럼 상상력의 곤혹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경향성은 이미 동시대 시의 한 주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극도의 추상으로 응집되며 단선적 논리를 변주하면서 증식하는 경향이 강한 이러한 시들을 잠정적으로 ‘가속류’라고 칭하자. 그런데 이들에게 앞서 마련된 어떤 기준을 성급하게 적용하여 구획과 할당의 영역으로 곧장 넘어간다면 지금 시의 중요한 한 징후를 통해 유의미한 논의를 이끌어낼 여지는 축소되고 말 것이다. 고선경의 시가 암시하듯 이미 동시대인들은 “채널을 바꾸면”(「무대륙」) 리셋이 가능한 경험과 감각을 공유하면서 이전의 인간들과는 다른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 위치에서 보다 많은 대화를 가능케 할 생산적인 질문을 먼저 모색해보는 게 필요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선 판단을 유보하고 질문을 전환해보자. 이러한 시 쓰기는 왜 필요했으며 시인에게 어떤 유용을 주는가? 이를 통해 시인은 어떤 효과를 도모하고 있는가? 이러한 시 쓰기를 통해 발생했을 즐거움을 독자는 어떻게 자신의 것으로 전유할 수 있을까? 앞서 살펴봤듯, 한 권의 시집을 미적 인공물로 가정하고 독서 경험을 바탕으로 중층적 행위적 서사를 축조해보는 것이 시를 읽는 유의미한 즐거움으로 기능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부터 이어질 내용은 발생 가능한 무수한 시나리오 중 나의 시나리오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 ‘희재의 세계’를 보존하는 파수꾼 웹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이하 『전독시』)은 그 내부의 또 다른 웹소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하 「멸살법」)이 현실화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다. 이를 시집 제목으로 차용한 것에서부터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듯, 변혜지의 『멸망법』 또한 세계를 완성해야 할 의무를 지닌 창작 노동자 ‘신’의 시점과 그 신이 쓴 소설 내부 화자의 시점으로 구분된다. 구체적으로 ‘창’을 경계로 그 안과 밖이 구획되는데,6) 이때 창밖의 게임 아바타 ‘나’는 미리 입력된 행위를 매크로처럼 연기할 수밖에 없으므로 ‘나의 의지와 무관하였다’는 언급이 빈번히 등장한다. 그리고 아바타 화자는 다시 ‘문’의 안과 밖으로 구분되는데, 문안에는 “소분”(「테라포밍」)되어 비상용으로 보관된 복수의 ‘나’들이 존재하고, 문밖에서 실패하면 다시 문안으로 회귀한다.(「예쁜꼬마선충」) 또 『전독시』의 세계관이 그러하듯 『멸망법』에서도 게임의 회차가 반복되는데, 매 게임의 시연 장면이라 할 수 있는 ‘꿈속’을 감상하는 옵저버(observer)로서의 ‘나’ 또한 이 시집에 중층적 시선을 드리운다. 그 각각의 층위는 구분되지 않도록 의도되어 있지만, 엄밀히 각각 다른 층위에서 ‘나’의 시점들이 교차되며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신의 목표는 ‘이번에는’ “완벽한 엔딩”에 ‘성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전 생(시―게임)’에서 부족한 점을 보완하면 ‘너’가 “이번에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문제가 된다.(「손가락」)(「모자의 일」) 그리하여 사랑을 다시 쟁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시스템을 초기화”하고, 아바타인 ‘나’는 이미 “곤죽이” 된 상태이지만 “다시 태어”(「손가락」)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즉, 게임을 리셋하여 다시 시작할 기능적 구실을 ‘사랑’이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완성하였다”는 서술어로부터 시작되는 다음 인용 시는 이 세계관의 목적이 달성되어 이상적인 결말로서 사랑이 성사된 모습을 보여준다. 무릎을 굽혀 희재의 운동화를 벗기고 씻지 않은 몸을 침대에 눕힐 것이다. 축축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는 희재의 배를 토닥이며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 나는 밖으로 나갈 것이다. 잠시 후 누군가 깨어날 것이다. 깨어난 사람의 눈이 깜빡일 때마다 카메라 속의 풍경이 함께 명멸할 것이다. 어둑한 천장이 서서히 밝아질 것이다. 그러니까 어서 눈을 감아. 침 흘리기를 멈추지 못하는 파수꾼이 문 앞에 엎드려 있다. 나는 개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으려다 말고, 34평방미터의 세계를 잠근다. 그 속에서 희재는 내내 안전할 것이다. ―「마침내 희재를 위한 세계를」 부분 여기서 ‘나’는 희재가 잠들자 희재가 속해 있는 공간 자체를 닫고 그 앞을 파수꾼 개가 지키게 한다.7) 단언에 가까운 진술인 마지막 문장은 마냥 기능적 목적만 하는 것처럼 보이던 ‘사랑’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어느 정도 해명해준다. 『멸망법』에서 사랑은 사랑의 대상을 시선 안에 가두어서 보존하는 것이다. “놀이”와 “이지메”(「플라스틱 아일랜드」)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의, 다소 섬뜩하더라도 오직 한 명에게만 집중된 관심 말이다.(「희박하게 끓어오르는 물」, 「브릭하우스」) 이러한 “파수(把守)”(「세계법」)가 이 세계관에서는 ‘사랑’이자 ‘놀이’라 할 수 있다. 앞서 「멸살법」 차용의 연장에서, 『멸망법』은 이 시집의 독자일 무수한 ‘김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김독자’ 중 하나로서 『멸망법』을 읽고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어느 날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이 시집이 현실화될 일을 대비하기?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우리는 각자의 서사를 만들어보며 이 시집을 가지고 더 잘 ‘놀’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김독자’가 “디지털 사이보그”이면서 “크리에이터이자 스트리머”8)가 되었던 것처럼, 스스로 플레이를 연출하면서 독자가 새로운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게 되는 일이다. 4. 버블 기분 『소다수』의 두드러지는 특징은 엉뚱한 상상이 자주 끼어든다는 것이다. 고선경은 주로 어느 공간에서 바라보이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그곳에서 자유롭게 흐르는 단상이나 공상을 동시에 쓴다. 그리하여 단문의 묘사와 연상이 짧은 행 단위로 빈번히 교차 전환된다. 가령 “절반만 빛바랜 이파리/물웅덩이에 둥둥/컨버스는 역시 로우보다 하이//밟으면/이파리가 구겨지고 구름이 조각난다”(「진짜로 끝나버렸어 여름!」)는 짧은 단락에서 화자는 자신이 클로즈업한 장면과 그로 인해 촉발된 단상을 빠르게 옮겨간다. 그리고 수시로 틈입하는 상상은 주로 어디를 가고 싶다거나 뭐가 되고 싶다는 엉뚱한 ‘바람’에서 비롯된다. 음식이 나오기 전 연분홍색 다이얼 전화기를 빤히 쳐다봤어 나는 가끔 인테리어 소품이 되는 상상을 해 조용하고 신비한 (…) 케첩 묻은 앞치마를 두른 네 정체가 실은 스파이였으면 좋겠어 메론소다에 이상한 가루약을 넣었으면 (…) 음악이 배경이 될 수 있다면 생각도 배경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 속에서 생각을 스파게티처럼 포크로 돌돌 감는다 그리고 우리는 스파이답게 몰래 눈빛을 주고받지 짜이찌엔…… 워시환니 우리가 지금은 살아 있어서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 죽은 사람 노래를 다 듣네 생각은 불어서 포크 끝에서 툭툭 끊어진다 이렇게라도 살아 있으면 언젠가 다시 가볼 수 있을까 신주쿠 시먼딩 킷사텐…… 아이스크림이 천천히 가라앉는 메론소다의 기분 ―「메론소다와 나폴리탄」 부분 이때 ‘생각’이 파스타처럼 감아 먹을 수 있는 물성으로 제시되는 점이 흥미롭다. 또한 생각은 마실 수 있는 것으로 제시되기도 하고, 생각이 “너무도 시끄러”(「츠키에게는」)워서 현실의 청각을 방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화자와 항상 함께 있으면서 화자를 “쓰다듬”(「샤워젤과 소다수」)는 것 또한 생각이다. 그런가 하면 “메론소다의 기분”(「메론소다와 나폴리탄」)과 같이 ‘기분’이 감각적 이미지로 대신 제시되는 것 또한 『소다수』의 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체육대회가 끝난 다음날의 기분”(「여름 오후의 슬러시」)도 마찬가지인데, 이처럼 고선경은 경험한 감각 자체를 기분으로 치환하고자 한다. 감정을 이미지로 느낀다기보다, 기분이라는 것 자체가 그날의 이미지에 각인된 감정을 다시 반복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단지 바람만으로도 감각을 환기하는 일이 어렵지 않다.9) 한편 『멸망법』에서 기능적 역할을 겸하던 것이 ‘사랑’이라는 시어였다면, 『소다수』에서는 빗물이 끓는 이미지가 강박적으로 돌출하면서 이미지의 각운을 형성하는 양상을 눈여겨볼 만하다. 끓는 빗물이 유리창을 부술 듯이 때리며 몰아치거나, 빗속에 피워둔 향이 꺼지지 않거나, 불타는 나무 위로 비가 내리는 이미지 등은 모두 그 변주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불가능의 이미지들은 시부야 취향과 일상 ‘추구미’,10) ‘킹받는 밈’과 시시껄렁한 농담, 색색의 디저트, 향기와 맛으로 대표되는 감각 묘사 사이로 돌연 나타나 이 세계의 혈당을 적절히 낮추는 기능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고선경의 개인적 이미지는 「밝은 산책」에서 가장 분명히 드러나듯 자기 자신을 파괴해버리고 싶은 충동과 긴밀히 이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인지 『소다수』에 수록된 여러 시에서 죽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태도가 두드러진다. 고선경의 ‘개복치’ 화자들은 툭하면 죽고, 또 그 죽음을 희화화한다. “어디서든/간절하게 살고 싶진 않”(「파르코백화점이 보이는 시부야 카페에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두가 져버려서 아무도 지지 않는 게임을”(「수정과 세리」) 만들고자 하는 심적 동기는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이러한 모습은 “세계를 구할 영웅의 운명”(「무대륙」)이라는 일시적 행위성으로부터 일부러 이탈하여 ‘사냥’ 대신 다른 모험가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플레이어의 형상에서도 발견된다.11) 어쩌면 이는 고선경에게 ‘사랑’인 것과도 긴밀히 연동되는 태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변혜지에게 사랑이 멸균 지대를 만들어 대상을 보존하고 지켜보는 것이었다면 고선경에게 사랑은 뒤엉켜 정체가 불분명한 여러 기분의 갈래들을 섬세하게 “더 잘 구별해”(「사랑의 달인)」내는 능력인 동시에, 적극적으로 서로의 취향에 감염되어 뒤섞이고 싶은 마음이다.(「사이버 시옷시옷」) 이러한 양가성과 소통에의 지향을 필연적인 사랑의 속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 각자가 감상 활동을 통해 생성하게 될 서사화 과정 또한 그 사랑의 구체성을 직접 기술해보는 경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우리가 궁금한 건 더 재미있게 놀 방법”(「우주 달팽이 정거장」)일 뿐이다. 1) 이하 본문에서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은 『멸망법』으로, 수록작인 「누군가 또다시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절대 멸망하지 않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마침내 희재를 위한 세계를」, 「하늘과 땅 사이에 뭐가 있더라?」는 각각 「손가락」, 「멸망법」, 「세계법」, 「희재계」, 「하늘과 땅」으로, 『샤워젤과 소다수』의 경우 『소다수』로 표기한다. 2) 이동휘, 「게임, 서사, 감상―『게임: 행위성의 예술』의 이전과 이후」, 『문학동네』 2023년 여름호, p.106. 3) 같은 쪽. 4) 같은 글, p.107. 5) 이때 게임의 목표는 서사 창안이기 때문에 행위적 서사는 중층적으로 서술될 것이다. 표면적인 서사에서 ‘인물’의 위치에 놓이는 것은 시집의 독자이지만, 내부 서사에서는 ‘화자(들)’이 ‘인물’로 놓인다. 6) 한편 희재가 창조물이면서 ‘신’ 파트타임 근무를 하는 모습은 이 내부 세계가 또다시 창작자와 창조물들로 중층화되어 있음을 암시한다.(「Enter the World」) 이는 『전독시』가 ‘김독자’의 독자이면서 후원자인 ‘성좌’의 존재를 가정한 대표적인 ‘성좌물’임을 떠올리게 한다. 독자이자 크리에이터의 관찰 구도가 무한 소급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7) 이 시에서는 황인찬의 『희지의 세계』(민음사, 2015) 오마주가 두드러진다. 「오수」의 변주처럼 보일 수 있는 요인들을 적극 활용하는 「희재계」 외에도, 「하늘과 땅」에서 기다리라고 명령하기 위해 ‘생각’을 개로 만들어버리는 모습은 “그 아이를 개로 만들고 싶어서 나는 쓰기 시작했다”는 「오수」의 시구를 떠올리게 한다. 또 다른 시에서는 에반게리온의 세카이계 설정을 전면에 내세우기도 하는데, “여러 장르 요소들이 결합한 키메라”인 『전독시』와 마찬가지로, 변혜지의 시 또한 동시대 시의 주요 모티프와 “웹소설 상품미학의 우세종”을 적극 차용하여 ‘키메라-시’가 되기를 의도한 것처럼 보인다. 『전독시』에 대한 분석은 다음을 참고. 유인혁, 「사랑의 사이보그: 한국 웹소설에 나타난 디지털 사이보그와 친밀성 자본의 상상력」, 『현대비평』 2021년 가을호, pp. 65~66. 키메라의 목적은 유기체 형성으로 응집된다는 점에서 패스티시나 ‘접붙이기’와는 다르다. 『멸망법』은 가속류이면서 차용해온 조직들로 자체적인 세계관을 축조하는 ‘가속류-키메라’인 셈인데, 이는 뒤이어 살펴볼 고선경과는 변별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8) 유인혁, 같은 글, pp.70, 72. 9) “온천에 가고 싶다/한여름에 그렇게 말하니까 쪄 죽을 것 같은/더위가 입속까지 밀려들어오는구나 열대야/열대야니까/노상에서 과자 한 봉지 펼쳐놓고 캔맥주를 마신다”(「연장전」) 10) “내 파란 담뱃갑, 투명한 뿔테안경, 외국어가 적힌 티셔츠, 절간 냄새, 팥빙수 모양 핸드폰 고리, 처피 뱅, 빌어먹을”(「일요일 오전의 짜파게티」) 11) 시의 배경은 RPG 메이플스토리의 수중맵 아쿠아리움이다. 이 게임에서 사냥을 하지 않으면 경험치를 쌓지 못해 다음 레벨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같은 몬스터를 수천 마리씩 사냥하는 ‘노가다 퀘스트’를 완수해야 하지만, 이 플레이어 화자는 몬스터가 귀여워서 죽이지 못하고 고민에 빠진다. “이봐, 몬스터/너에게도 엄마가 있나?”(「몬스터의 유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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