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아동문학평론 2024년 가을호(제192호)
마음이 보내는 신호들
김동연 「참 많은 선생님」, 김현서 「수업이 시작되면」,
김개미 「거인이 쓰러졌다」, 윤나래 「풀 베는 날」, 김민하 「못의 마음」,
김현서 「하우」, 임미성 「마음을 먹는 방법」, 최춘해 「꼴찌의 생각」
밤하늘의 별과 친숙해지는 계절이다. 뜨거운 태양과 푸른 나무, 푸른 바다, 시원한 바람, 산과 들, 대자연의 모든 것이 성큼성큼 익어 가듯 아이들도 끝없이 쑥쑥 자랄 것만 같다. 더군다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커다란 쉼표, 여름방학까지 있으니 아이들에게 여름은 그야말로 자유의 계절이다. 마음껏 뛰놀고 상상하며 미래에 대한 꿈을 꾼다. 꿈, 꿈을 꾼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즐거운 일이다. 그렇다면 여름 피서는 무더위를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이 꿈을 꾸러 가는 것이리라.
자유롭다는 것은 자율과 가깝다. 스스로 체득해 나가는 자율적 환경은 아이들의 자존감을 높여 준다. 사람들 모두는 각자의 인생 지도를 갖고 태어나며, 그 지도는 환경의 영향에 의해 구체적으로 완성된다고 한다. 각자의 길에는 유전적인 길도 있지만 우박, 태풍, 비, 눈 등 환경적 영향에 따라 서로의 길은 달라지고 지나온 궤적 또한 다르게 된다.
통계에 따르면 지난 수십 년 간 전 세계적으로 매 10년마다 아이들의 평균 IQ가 5점 정도씩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이를 ‘플린 효과(Flynn effect)’라고 하는데, 환경 요인이 두뇌 발달에 영향을 미치는 대표적인 결과다.
환상 세계로의 경험도 마찬가지다. 정신분석 전문가들은 어린 시절 환상을 경험하는 것이 정신을 구성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준다고 말한다. 하지만 환상에 대한 경험이 늘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긴 여름밤의 꿈은 희망찬 미래로 향하지만 때로 두려움과 고통에 시달리는 악몽도 있기 때문이다.
꿈은 마음이 보내는 신호라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지혜는 자기 자신을 아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마음의 언어를 찾아가는 것은 결국 내면의 성장을 위해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 아니겠는가. 동시에는 마음이 보내는 소리를 듣는 귀가 있다. 그 귀를 열고 함께 들어보자.
경험에서 발현되는 상상
생물학자 토머스 헉슬리(Thomas Huxley)는 “자연에서 인간의 위치는 어디인가? 그리고 인간은 우주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나는 이것이 인간과 관련된 질문 중 가장 심오하면서도 흥미로운 질문”이라고 말했다. 스피노자는 “누구의 몸도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아직 규정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즉, 몸의 능력은 결코 하나의 몸으로만 규정되어 있지 않고 힘의 관계들 속에서 부추겨지고 그것들과 긴밀한 연관을 가진다는 것이다. 보고, 듣고, 만지며 몸으로 체득되는 경험적 지식은 어떤 지식보다 신뢰감을 준다. 이 신뢰감을 바탕으로 보다 더 넓은 세계를 상상하며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을 가능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꽃에게 배웠을 거야,/ 방긋 웃는 법을.//
아이들은/ 나비에게 배웠을 거야,/ 춤추는 법을.//
아이들은/ 새에게 배웠을 거야,/ 노래하는 법을.
아이들은/ 별들에게 배웠을 거야,/ 찡긋 윙크하는 법을.//
아아,/ 아이들은/ 오늘도 무언가를 배울 거야.//
물에게 바람에게 구름에게…….
- 김동연 「참 많은 선생님」 전문, 《시와 동화》 여름호
자연의 모든 행위는 인간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물과 바람과 구름들은 자연의 총체적인 대리인이다. 흐르고 움직이며 다양한 변화를 보여준다. 어른들의 눈에는 너무나 반복적이고 당연하여 그것이 커다란 바위처럼 굳어져 버렸지만 실상 이 당연한 것을 체험하지 않고는 어떠한 세계의 확장도 불가능하다.
아이들은 자연의 무궁한 변화 속에서 정동(Affect)을 발현한다. 이 울림들은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웃는 것이며, 나비가 날지 않고 춤추고, 새가 지저귀지 않고 노래한다. 규정된 행위에 멈추지 않고 확장된다. 스스로가 보고 느끼면서 발현하는 경험적 언어다.
한국의 부모들은 자녀 교육에 대해 호들갑스럽다. 하나에서 열까지 자신의 기준에 맞춰 아이들을 가르치고자 한다. 동물학자 마츠자와 테츠로 박사는 침팬지 행동 연구를 통해 교육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고 한다. 어미 침팬지에게 딱딱한 껍질을 깨어 열매를 먹게 하자, 어미가 방법을 체득하는 것을 지켜보던 새끼 침팬지는 어미가 먹이를 줄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어미가 열매를 깔 때마다 빼앗아 달아나는 행위를 반복한다. 새끼 침팬지의 행동은 지나칠 정도로 버릇이 없지만 어미 침팬지는 노여워하지 않고 관용을 베푼다. 새끼 침팬지의 행동은 성장하면서 변하는데,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어미의 열매를 먹지 않고 자신이 열매를 깨뜨리는 연습을 한다는 것이다. 태어난 지 일 년 반 정도면 연습 행동을 시작하고 서너 살 무렵에는 능숙하게 껍질을 깨뜨려 열매를 빼 먹는다고 한다. 새끼 침팬지의 이러한 행동 변화는 어미와 같은 것을 경험해 보고 싶은 학습 욕구를 보여 준다. 즉, 가르치지 않음으로서 교육하는 방법이다. 학습 욕구는 고등 생명체일수록 강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침팬지보다 고등 생명체인 인간의 잠재력은 말할 나위없다.
한국의 부모들은 아이들의 학습 욕구가 발현되도록 기다리지 않는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더 큰 돌로 해라, 심지어 이 열매가 이상하다는 등 도구의 선택에서부터 방법까지 일일이 가르치려고 할 것이다. 특히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사회적 관행들 속에서 아이들은 자신만의 방법을 얼마나 발견할 수 있을까? 인간은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뇌가 발달하고 보다 높은 지능을 가진 인간으로 성장한다. 이는 곧 창의력이나 지적 능력 향상과도 연결된다.
어디선가 짠!/ 생각이 나타나요//
내 주위를 빙빙 돌며/ 조잘조잘 나를 꼬드겨요//
분명 내 옆에 있었는데/ 어느새 운동장에서 나를 불러요//
내가 교실을 나가면/ 나 대신 토끼 인형이 앉아/ 색칠 놀이를 해요//
눈이 나쁜 선생님은 몰라요/ 칠판에 올챙이를 그리느라/
올챙이가 크면서 개구리가 된대요//
생각은 내 손을 잡고/ 당나귀처럼 달려요/
날개를 펼쳐 하늘을 날아요//
뭉게뭉게 하늘 당근밭에서/ 토끼 먹이를 구해 교실로 들어가면//
신나는 수업 시간은/ 벌써 끝나가지요//
- 김현서 「수업이 시작되면」 전문, 《동시 먹는 달팽이》 여름호
수업 시간에 앉아 상상의 나래를 펴는 아이의 모습이 그려진다. 아이는 스스로 밖으로 나간 것이 아니라 ‘생각’이란 것이 나타나서 “나를 꼬드겨” 운동장까지 불러낸 것이다. 게다가 “내가 교실을 나가면” ‘나’ 대신 나의 “토끼 인형이 앉아 색칠놀이”를 한다. ‘나’와 분리된 또 다른 ‘나’가 ‘생각’인 것이다. 색칠놀이를 하고, 올챙이가 커서 개구리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나’가 있고, “당나귀처럼 달”리고 “날개를 펼쳐 하늘을 날”기도 한 ‘나’가 있다. 교실 밖을 나간 ‘나’는 놀기만 한 것이 아니라 “토끼 먹이”까지 구해 온다. 시적 주체인 ‘나’는 학교라는 ‘실재’와 ‘상상’ 속에서 경험적 지식을 습득한 셈이다. 때때로 엉뚱한 상상은 무수한 경험이 되기도 할 것이다. 이 동시에서 눈여겨 볼 것은 “눈이 나쁜 선생님”이다. 이 선생님이야말로 아이의 자유로운 상상을 가능하게 한 장본인 아니겠는가.
마음의 어두운 그림자
세상에는 눈이 나쁜 선생님이 있는가 하면 눈을 부라리는 사람들도 있다. 세상은 아이들이 꿈꾸며 살기에 마냥 호락호락하지 않다.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콤플렉스’를 경험하고, 형제, 친구를 비롯하여 세상의 모든 관계들로부터 크고 작은 상처를 경험하며 자란다. 수많은 환상은 꿈이기도 하지만 좌절의 도피처이기도 하다.
거인이 쓰러지길 바랐다//
거인이 무슨 착한 일을 했는지/ 무슨 나쁜 짓을 했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거인이 누구를 사랑하는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어떤 꽃을 기르고/ 어떤 동물에게 먹이를 주는지/
알 필요가 없었다//
거인의 눈을 본 적 없으면서/ 거인의 목소리를 들은 적 없으면서/
거인이 쓰러지길 원했다//
산더미같이 많은 돌을 맞고/ 마침내 거인이 쓰러졌을 때/
고개를 돌려 언덕 너머를 보았다//
이마에 붙은 구름을 털며/ 새로운 거인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 김개미 「거인이 쓰러졌다」 전문, 《동시 먹는 달팽이》 여름호
거인은 누구일까? 화자는 누구이며 왜 거인이 쓰러지기를 바라는가? 그러면서도 새로운 거인을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두 가지 관점에서 이 거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시적 주체를 좌절하게 하는 ‘타자’이고 또 하나는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또 다른 ‘자아’이다. 전자는 폭력, 권력, 차별 등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고, 후자는 자신의 그림자일 것이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거인’이 살고 있다. 그러나 이 거대한 힘은 양가적이다. 강한 부정이면서도 긍정이다. 분노이면서 자존감이다.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꾸는 꿈이며 곧 깨어나야 할 잠자는 천재성이기도 할 것이다.
시적 주체는 거인이 쓰러진 순간 “고개를 돌려 언덕 너머를”본다. 어떠한 것이 종식되었을 때 발화하는 그 ‘너머’는 이전과 다른 세계다. 울림이며 움직임이다. 굳게 믿던 세계에 침잠해 있던 완고한 리듬 속에서 불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던 이러한 사건의 변화는 감정의 힘과 외부 관계들에 의해 부추겨진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주체인 ‘나’와 긴밀한 연관을 가질 수밖에 없다. 거인은 이제 다른 조건으로 나타나야 한다. 폭력이 아닌 사랑이며, 경직되지 않고 유연한 존재여야 한다. 이 변화는 “이마에 붙은 구름을 털며”로 확정된다.
동시의 다면성은 독자로 하여금 다양한 방향의 상상력을 유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그 언어는 언저리를 서성이며 많은 것을 욱여넣으려 하기 때문에 독자는 어렵게 느껴진다. 애매모호한 언어 폭식이 마치 시의 매뉴얼인 양 유도되어서는 곤란하다. 누가, 언제, 어디에서 발화했는지 굳이 조목조목 밝힐 필요는 없지만 동시에서조차 ‘거인’을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머리는 수박만 하고/ 엉덩이에 꾀가 달렸어/ 하우는//
아무한테도 알려 주지 않은/ 비밀이 열 개도 넘어//
낮에는 커튼 뒤에 혼자 앉아/ 오독오독 어둠을 씹다가//
밤에는/ 윤기 나는 꼬리를 살랑살랑/
길고 긴 밧줄처럼/ 내 몸을 칭칭 동여매//
나를 태우고/ 휙휙 하늘을 날다/ 아래로 아래로 곤두박질쳐//
으아아아악!//
비명 소리를 듣고/ 엄마가 달려오면//
하우는/ 이파리처럼 새파래져 파르르 떨다가/
슬금슬금 침대 밑으로 숨어 버리는//
하우는/ 내 꿈에만 나타나는/ 무서운 괴물//
- 김현서 「하우」 전문, 《동시마중》 7·8월호
「하우」에는 꿈속에 나타나는 괴물에 대한 구체성이 드러나 있다. “머리는 수박만 하고/ 엉덩이에 꾀가 달”린 ‘하우’라는 괴물은 열 개도 넘는 비밀을 갖고 있다. “낮에는 커튼 뒤에 혼자 앉아/ 오독오독 어둠을 씹다가” 밤에는 “내 몸을 칭칭 동여매” 하늘에서 “아래로 곤두박질쳐” 떨어지게 만든다.
아이들에게 악몽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는 일종의 죄의식이다. 아이는 본능적 충동으로 하지 말라고 하는 일을 저지르고, 큰 벌을 받게 될까 두려워하게 된다. 아직 초자아의 형성이 충분하지 않은 경우엔 더욱 그렇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강한 죄의식은 미약한 자아가 견뎌내기 힘든 공포로써, 이러한 심리적 압박은 자신이 사라져 버릴지 모른다는 소멸에 대한 공포다. “칭칭 동여매” “아래로 곤두박질 쳐” 떨어진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열 개도 넘는 비밀”도 그럴 것이다. 드러내지 못하는 이 비밀은 벌을 받을까 두려워 숨겨 둔 것일 가능성이 높다.
두려운 감정들이 제대로 해소되지 못하면 신경증에 걸리게 된다. 악몽에서 벗어나 건강한 일상에 안착하기 위해 엄마가 등장한다. 엄마는 아이들이 어두운 곳에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엄마의 사랑은 괴물 ‘하우’를 “이파리처럼 새파래져 파르르 떨”게 만들 정도로 강력하다. 흥미로운 것은 괴물 ‘하우’의 이미지다. “머리는 수박만 하고” “윤기 나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든다. “커튼 뒤”와 “침대 밑”을 들락거리는 ‘하우’는 화자의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상의 조합이다. 괴이함은 아주 흔하고 상식적인 것이 상식적이지 않을 때 만들어진다.
마음의 감각들
두려움과 공포, 행복감과 사랑의 마음은 어떤 모양일까? 마음의 감각들은 어느 때 어떤 느낌으로 생겨날까? 감정(정동)은 세상의 모든 사물들 속에 달라붙어 있는 울림들의 이행과 변이들 속에서 발견된다. 즉, 신체와 또 다른 신체(대상)가 만나면서 일으키는 감정이다. 이것은 대부분 물질들의 변화와 경이감이 서로 걸려 나타나는 감정의 고리 같은 것이다. 어떠한 감정은 세상의 경이를 경험하면 할수록 더 강해진다. 생명에 대한 동정심도 그 중 하나다. 아이들은 유아기 시절부터 물활론적 사고를 가지게 되는데 자라면서 점점 과학적 생명관으로 전환되지만 생명에 대한 이 동정심은 지속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아파트 풀 베는 날//
위이이이잉!//
칼날이 할퀴고 간 자리//
사람들은/ 푸른 냄새는 맡으면서/ 푸른 소리는 안 들리나 봐//
도와줘도와줘도와줘!/ 도와줘도와줘도와줘!//
아파트 단지에 사방으로/ 메아리치는데//
시퍼런 비명은 안 들리나 봐/ 시퍼런 냄새는 맡으면서//
- 윤나래, 「풀 베는 날」 전문, 《아동문학평론》 여름호
대자연의 모든 것이 쑥쑥 자라는 여름엔 아파트뿐만 아니라 온 사방에 풀들이 무성하다. 이름도 가지지 못했으면서 풀만큼 생존력이 강한 식물은 없을 것이다. 아파트 단지에는 시기에 따라 나뭇가지를 자르거나 풀을 벤다. 아파트 주민의 안전이나 조망권을 위한 부분도 있지만 대부분은 조경을 위한 것이다.
아이들에게 풀은 자연의 일부이지만 어른들은 식물에게도 가치평가를 한다. 유실수인지, 관상수인지, 그늘을 만들어 줄 것인지, 꽃을 피울 것인지에 따라 그들이 자라는 곳을 결정한다.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구조화되어 있고 위계질서가 있다.
시적 주체는 뭉텅뭉텅 풀들이 잘려나가면서 외치는 소리를 듣는다. 풀들도 쑥쑥 자라고 소리를 내며 몸을 흔드는 생명이기에 그들의 아우성을 외면한 채 베어 버리는 어른들이 야속하다. “푸른 냄새”가 절규로 인해 “시퍼런”으로 바뀌는 이 시각적 언어는 “도와줘”라는 비명으로 전환되면서 풀은 단순히 자연과 생명에 그치지 않고 사회와 권력으로까지 뻗어 나간다. 즉, 시적 주체의 생명의식은 풀을 베어야 하는 목적을 선행한다. 그러므로 아파트 풀베기는 나와 가장 가까운 장소에서 자행되는 살육이며 그것을 환기하지 못하는 어른들에 대한 안타까움일 것이다. 동심의 소멸과 풀의 잘림이 동일한 모양으로 자리하고 있다.
툭툭, 망치가 칠 때//
아프다고 엄살 부리며/ 얼른 등 구부리는 못이 있다//
살살 발끝만 넣고 힐끔 눈치 보다가/
수건 한 장만 걸어도 툭, 떨어지는 못이 있다//
꿋꿋이 참고 어깨까지 잘 박혀/ 뻐꾸기시계를 들어 주는 못이 있다//
꼭꼭 안 보이게 온몸 다 감춰/
누군가 쉴 나무 의자를 만드는 못이 있다//
다 마음먹은 대로//
- 김민하 「못의 마음」 전문, 《동시 먹는 달팽이》 여름호
못은 평생 벽에 박혀 무언가를 들고 있어야 한다. 이 고달픈 역할을 하지 않으면 벽에서 분리되어 고철이 될 수밖에 없다. 시적 주체는 못이 하고 있는 일이 못이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못에도 마음이, 의지가, 신념이 있다고 믿는 사고다. 미국의 변화심리학자 앤서니 라빈스는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다가올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며, 또한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즐거움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떤 행동이 즐거움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신념”1)이라고 했다.
즉, 우리는 현실에 의해 움직이는 게 아니라. 현실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다.
망치와 못은 일어날 고통에 대한 은유다. 제대로 박히지 않는 못은 망치질을 제대로 못한 것이 아니라 못이 엄살을 부리거나 눈치를 보기 때문이며, “꿋꿋이 참고 어깨까지 잘 박혀”서 자신의 몫을 다하고 있는 못은 두려움과 고통을 참고 이겨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어떤 못은 자신을 감추고 누군가를 위한 희생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떠한 일의 과정과 결과는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마음먹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피력한다. 이러한 역할 전환 방식은 못을 박는 사람이 철저히 배재되고 오로지 ‘못’이라는 ‘주체’에만 초점을 맞추어 ‘못’과 ‘마음’의 동일시를 이끌어 내고 있다.
위의 동시들은 마음의 감각을 다양한 방식으로 발화시키고 있는데, 그렇다면 마음의 맛은 어떨까? 동심의 무한한 상상력은 시각, 청각, 후각을 넘어서 미각에까지 이른다. 한번도 본 적 없고 먹어 본 적 없는 이 마음의 맛을 한번 살펴보자.
고소한 마음은 와삭와삭 깨물어 먹고/
기다리는 마음은 포크로 돌돌 말아 먹고//
말랑한 마음은 보들보들 굴려 먹고/
딱딱한 마음은 핥아 먹고 녹여 먹고//
심심한 마음은 맛소금 찍어 먹고/
걱정하는 마음은 주먹밥처럼 뭉쳐 먹고/
울고 싶은 마음은 잘 말려 숯불에 구워 먹고//
뜨거운 마음은 후아후아 조금씩 식혀 먹고/
차가운 마음은 오리조리 돌려 데워 먹지//
- 마음먹고 잘 좀 해 봐//
어떤 마음은 어떻게 먹을지 몰라/ 먹는 건지 못 먹는 건지 몰라/
뒤적뒤적 집었다가 놓았다가//
소스에 찍어 볼까/ 물에 말아 볼까/
기름에 튀겨 볼까/ 프라이팬 볶아 볼까
- 임미성 「마음을 먹는 방법」 전문, 《동시마중》 7·8월호
마음을 다양한 요리 과정을 통해 먹으니 참 맛나다. 마음이 요리하는 방법에 따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훌륭한 식재료가 되었다. 이제 어떤 방식으로 요리해 먹을지는 마음을 들고 있는 주체에 달렸다. “집었다가 놓았다가” 망설여지기도 하겠지, 어떻게 하면 더 맛있고 좋은 마음의 맛을 만들지 고민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마음먹고 마음을 만들어 보자는 이 기발한 상상은 마음에 대한 어떠한 이론보다 뛰어나다. 이런 마음이라면 실패도 좌절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우리도 마음먹고 잘 생각해 보자.
힘껏 달려도/ 모두가 나를 따라 넘긴다.//
내가 2등이었을 때는/ 1등 한 사람에게 위로가 되고/
내가 3등이었을 때는/ 1, 2등 두 사람에게 위로가 되었다//
내가 4등, 5등, 6등이었을 때는/
셋, 넷, 다섯, 위로받는 사람이 는다.//
꼴찌인 내가 있어/ 1등, 2등, 3등이 상을 받는다.//
- 최춘해 「꼴찌의 생각」 전문, 《열린아동문학》 여름호
“꼴찌인 내가 있어” 누군가가 “상을 받는다.” 내가 꼴찌가 되어 주니 얼마나 많은 친구들이 위로를 받고 행복해지는가. 마음을 먹으면 어떠한 생각도 좋은 생각이 된다. 괴물도 “파르르 떨”며(「하우」) 달아날 것이고, “쓰러지길 바라”는 ‘거인’(「거인이 쓰러졌다」)도 쓰러질 것이다. 평생 벽에 “잘 박혀”(「못의 마음」) 있어도 좋을 것이다. 아이들은 하늘을 보고 꿈을 꾸며, 스스로 마음을 먹고, 마음을 알아채고 세상의 모든 것에 따뜻한 마음을 건넨다.
동시가 어린이들에게 학습적인 것을 내포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동시를 왜 읽혀야 하는가, 동시를 왜 읽어야 하는가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동시를 읽힌다고 말할 때는 생물학적인 어른과 아이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일 가능성이 높고, 동시를 읽어야 하는 것은 동심을 찾아가는 일일 것이다. 어른들은 가치관의 눈이 자아를 향하고 있어서 자신도 모르게 보상심리가 작동하고, 결국 어린이들의 올바른 정서를 유도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마음이 가는 대로 보고 쓰는 일, 동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어른이 쓴 동시가 아이들의 마음에 정말 다가갔는지를 염려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마음이 움직였다면 아마 아이들의 마음도 움직였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아이였으니까 말이다.
- 1) 앤서니 라빈스, 조진형 역.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 씨앗을뿌리는사람, 2008, 105쪽.
추천 콘텐츠
따로 또 같이 열어가는 염려의 공간 ―2025년 봄의 시 “이름이 있지만 이름이 지워진 것들의 목록을 골똘히 떠올렸고” (이은규, 「귤락」, 『딩아돌하』 2025년 봄호) 황선희 2025년 봄은 정치에 대한 논의가 어느 때보다도 풍성한 계절이었다. 민의를 등진 기득권 카르텔이 우리 사회를 얼마나 속속들이 장악해 왔는지 매번 확인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위기의식이 나날이 팽창했다. 부풀 대로 부푼 담론의 장에서 광장이라는 공간을 의미화하려는 시도는 지금도 지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계간지들은 발 빠르게 ‘역사적 사건과 시, 그리고 지금’(『딩아돌하』), ‘내란, 광장정치’(『문화/과학』), ‘탄핵-일지’(『문학과사회 하이픈』), ‘K민주주의의 약진’(『창작과비평』), ‘12․3 내란일지’(『문학동네』) 등의 특집을 꾸리며, 광장정치의 한가운데에서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의 가치를 구체화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 계절의 시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었다. 광장정치가 현실의 중심에서 요동치는 가운데, 이 계절의 시들은 다시 열린 광장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더디고 조심스럽게, 말해지지 못했던 것들의 감정과 기억을 불러내고 있었다. ‘귤락’의 이름을 떠올리는 이은규의 시적 주체처럼, 이번 봄의 시들은 사라진 이름과 묻힌 말들, 소리 없는 침묵의 감정을 발굴하고 목록화하려는 시도를 보여 주었다. 특히 나희덕의 「광장의 재발견」과 진은영의 「광장」은 이와 같은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 두 편의 시는 단순한 정치적 입장 표명의 소산이 아니라 광장을 구성하는 감각의 지형과 그 속의 관계, 윤리를 되묻는 섬세한 언어의 실험이다. 4.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이 선포되던 날 TV 앞에서 밤을 꼬박 새우고 다음날 아침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만났다 다행히 계엄령은 몇 시간 만에 해제되었지만 모두들 충혈된 눈으로 두려움과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여의도로 달려갔다 인파를 헤치고 서둘러 깃발을 찾아가다가 도로 경계턱에 발을 헛디뎌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누워서 꼼짝도 못하는 내 몸을 경찰 두 명이 일으켜주었다 부축을 받으며 뒷골목에서 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통증과 오한이 심해진 나에게 경찰은 제복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건넸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핫팩이었다 아들보다도 어린 그의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여의도에서의 또다른 발견이었다 5. 정치는 길을 잃고 나는 발을 헛딛고 말과 입김은 무성하게 흩어졌지만 오래 잠들어 있던 여의도는 목소리들에 의해 깨어났다 공원은 다시 광장이 되었다 ―나희덕, 「광장의 재발견」(『문화/과학』 2025년 봄호) 1) 부분 월계수 잎 같은 여자들이었지 승리의 화관으로 엮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지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 모여들었지 ―진은영, 「광장」(『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나희덕의 시는 ‘여의도’의 공간적 변화를 사유하는 일로 시작한다. 과거 광장의 정치가 활발하게 일어나던 여의도는 시민공원으로 조성되며 비정치적 공간으로 탈바꿈했지만, 12‧3 계엄이라는 사건을 통해 다시 ‘광장’으로 재소환된다. 신작 시집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에 엮이기도 한 위의 시에서 시적 주체는 여의도의 장소성을 복원함으로써 광장이라는 물리적 장소가 시대적 맥락에 따라 어떻게 재의미화되는지 보여 준다. 그는 12‧3 계엄 이후 여의도를 찾았다가 “발을 헛디뎌 바닥에 나뒹굴고” 만다. 그런 그의 곁에 다가와 ‘나’를 일으켜준 건 다름 아닌 두 명의 경찰이었다. 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핫팩”을 건넨 경찰의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하다. 경찰이 건넨 온기는 광장에서 대립하고 있는 존재들 사이에 잠깐 열린 ‘틈’, 공동체적 감각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 광장에서 공원으로, 다시 광장으로 ‘재발견’된 여의도에서 시적 주체는 시민과 대치하고 있던 경찰 또한 이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또다른 발견’을 한다. 결국 이 시는 광장이 단지 단선적인 대립의 공간이나 정치적 목소리의 공간이 아니라, 말할 수 없었던 감정과 책임이 교차하는 장소로 다시 의미화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광장은 발을 헛디딘 ‘나’의 자리인 동시에 미안한 눈빛의 타자가 건넨 온기의 장소이기도 하다. 정치의 격랑 속에서 시는 감각의 정치, 윤리의 광장을 다시금 상상하고 있다. 진은영의 시는 여성의 존재와 연대를 ‘광장’이라는 장소에 다시 위치시킨다. “월계수 잎 같은 여자들이었지/승리의 화관으로 엮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지”라는 전반부에서 시는 ‘승리’와 영웅서사에서 배제된 여성들에 주목한다. 그들은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모여들었”지만, 완결된 공동체를 이루지 않는다. 이 느슨한 집합은 강고한 상징 체계에 포섭되지 않으면서도 공동의 장소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앞서 살펴본 나희덕의 시가 광장으로서의 여의도를 재맥락화하고 대치 속 ‘틈’과 ‘온기’를 발견했다면, 진은영의 이 시는 각기 다른 삶의 조건을 가진 존재들이 느슨하게 모여드는 연대의 장을 상상하게 한다. 시적 주체는 ‘화관으로 엮이지 못한 잎사귀들’이 모여드는 장소로 여성적 광장을 가리킨다. 그곳에는 “연대는 아름다운 침범”2)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 있다. 이때 광장은 전투나 외침의 장소라기보다는 잠정적이고 열려 있는 연대의 공간으로 다시 그려진다. 함께 잠을 자고 아이들을 기르고 함께 숲속에서 나무 열매들을 줍고 함께 사냥 하며 음식을 나눠 먹던 사람들이 따로 잠을 자고 따로 아이들을 기르고 따로 집을 짓고 숲과 강가에 경계선을 그었다 함께 도끼, 창, 칼을 만들던 사람들이 함께 총, 대포, 핵폭탄을 만들던 사람들이 따로 정복자가 되고 노예가 되고 따로 부유한 사람이 되고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함께 책을 읽고 사상을 발명하고 꿈을 꾸던 사람들이 따로 나라를 세우고 따로 혁명과 전쟁을 일으키고 따로 친구가 되고 적이 되었다 함께 나를 매혹시켰던 말들이 따로 나를 조롱하며 떠나갔듯이 그렇게 함께 그렇게 따로 세계는 낡아갔다 ―이경임, 「그렇게 함께 따로」(『문학인』 2025년 봄호) 이경임의 시는 광장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공동체의 기원과 해체, 연대의 형성과 파괴를 장구한 인류사적 스펙트럼 속에서 되묻는다는 점에서 앞선 시들과 공명한다. 시는 반복되는 구절 “함께”와 “따로”를 통해, 인류가 공유했던 감각의 원형에서 점점 분절되고 분열된 세계로 이행해 온 과정을 간결하면서도 묵직하게 서술한다. 첫 연에서 사람들은 “함께 잠을 자고 아이들을 기르고/함께 숲속에서 나무 열매들을 줍고/함께 사냥 하며 음식을 나눠 먹던” 존재들로 그려진다. 그러나 2연에서 시는 경계선을 긋고 “따로” 살게 된 공동체의 붕괴를 포착한다. 이와 같은 전환은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라기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감각을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에게 던지는 윤리적 질문이라 할 수 있다. “함께 도끼, 창, 칼을 만들던 사람들이/함께 총, 대포, 핵폭탄을 만들던 사람들이”라는 구절은 인간의 기술과 협력의 진보가 어떻게 파괴의 도구로 전도되어 왔는지를 드러낸다. 여기서 “함께”는 더 이상 긍정의 언어가 아니라, 공동의 폭력과 파괴를 가능케 한 이율배반적 형식으로 작용한다. 마지막 연 “그렇게 함께/그렇게 따로/세계는 낡아갔다”는 반복과 퇴행, 분열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겨진 감정적 유산을 응축하고 있다. 이 시는 지금의 정치적 현실뿐 아니라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의 감정 윤리와 공동체적 감각을 이야기하며 그것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운다. 인간이 ‘함께’라는 말 아래 어떻게 ‘따로’가 되었는지 되묻고, 그로 인해 낡아가는 세계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여 준다. 이로써 감정의 정치학을 역사적, 존재론적 차원으로까지 확장한다. 매년 11월이 돌아오면 페루 사람들은 죽은 자의 넋을 기린다 고인이 생전에 즐기던 음식을 장만하고 온 가족이 이틀간 죽은 자들과 함께 산다 산 자들은 아파트형 묘지를 찾아 꽃을 바치고 담배를 피워 악귀를 물리치고 브라스밴드에 맞춰 노래하고 춤춘다 매년 11월 초하루 페루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난다 한날한시에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방문한다 죽은 자의 사진이 없으면 죽은 자가 살아생전 살던 집을 찾지 못한대서 산 자가 죽은 자의 얼굴 사진을 고이 모신다 먼저 떠난 자와 나중에 따라갈 자가 같은 날 흥겨운 잔치를 벌이는 나라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페루 사람들의 애국가 제목은 이러하다 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 ―이문재, 「죽은 자의 날―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이문재의 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하는 축제를 통해 공동체의 가장 깊은 층위라 할 수 있는 정동과 기억의 공동체를 회복하고 있다. 특히 ‘함께’라는 말이 자연스러웠던 공동체적 감각이 ‘따로’로 분열되어 온 이경임의 시와 나란히 놓을 때, 이문재의 시는 또 다른 방향의 회복 서사를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시는 페루의 11월, ‘죽은 자의 날’을 배경으로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문화를 묘사한다. 영화 <코코>(2018)로도 잘 알려진 이 축제는 흥겨운 춤과 노래의 감각으로 구성된다. 위의 시에서 망자의 넋을 기리는 것은 “한날한시에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방문”하는 적극적 실천으로 의미화된다. 특히 “죽은 자의 사진이 없으면/죽은 자가 살아생전 살던 집을 찾지 못한대서”라는 구절은, 기억과 이미지, 감각의 윤리가 어떻게 공동체 구성에 실질적으로 작동하는지를 드러낸다. 마지막 연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페루 사람들의 애국가 제목은 이러하다/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는 시 전체의 윤리적 핵심을 밝힌다. ‘자유’는 더 이상 개인주의적 해방이나 정치적 권리의 언어가 아니라 타자, 그것도 이미 죽은 자의 존재조차 공동체 속에 포섭할 수 있는 연대의 감각으로 재정의된다. 그렇다면 이 시는 2025년 봄, 광장에서 실종된 감정의 언어와 윤리적 상상력을 되찾으려는 시적 실천으로도 읽힐 수 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같은 날 흥겨운 잔치’를 벌이는 나라의 이미지야말로, 기억의 연대, 감정의 공공성, 존재의 환대를 담보하는 미래의 광장을 예비하는 것이 아닐까. 한 달 동안 비워둔 내 방, 급히 잘라서 꽂아놓고 나온 구석의 파란 몬스테라가 유리 물병 속에서 잘 크고 있는지 걱정이다 지난번 쓴 시가 마지막 작품은 아닌지 끄적거리고 있는 이 시를 완성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어머니 칠십에 처음으로 집주인이 된 낡은 일층 빌라가 걱정이다 길 건너 천변이 보이고 가을 되면 불어난 냇물 소리가 들릴 거라고 좋아하셨는데 지구온난화가 초가속화되어 부모님 생전에 집이 물에 잠기면 어쩌지? 마요네즈 범벅의 감자샐러드를 좋아해서 걱정이다 달고 진한 카페라테를 좋아해서, 비건이 못 되어서, 국회의사당에 검은 헬기가 날아오던 그 밤이 안 끝날까봐, 역사가 건망증 환자일까봐서 걱정이다 오늘밤 별이 지는데 한 사람을 죽여달라고 기도했다 내가 정말 걱정이다 몬스테라잎과 고콜레스테롤 혈증과 내란과 두번째 대홍수의 날들에 천변 옆 낡은 빌라와 팔레스타인의 팔다리 없는 아이와, 숲을 따라 릴레이 선수처럼 달려가는 산불을 역사와 어머니의 심해져가는 건망증을 즐겨 쓰는 필기구의 단종 여부와 부활절 달걀들을 까맣게 칠하는 나의 증오심을 걱정하는 나여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그러니 나는 무수한 걱정, 무수한 불안, 무수한 죽음, 무수한 증오의 소유자다 그 밤의 일이, 두붓값 오르는 일이 일조지환인지 종신지우인지 분간 안 가는 걱정 속에서 단호한 비일관성과 일관성을 동시에 지닌 삶, 삶, 삶이여 슬픔이여 부드러운 두부와 맹목의 탱크여 나의 소유자다 ―진은영, 「걱정의 소유자」(『문학동네』 2025년 봄호) 진은영의 「걱정의 소유자」는 앞서 논의한 시들과 달리, 어떤 특정한 공동체적 장면이나 외부적 사건을 서사화하지 않는다. 대신 시적 주체는 “몬스테라잎과 고콜레스테롤 혈증과 내란과”라는 다종다양한 걱정의 목록을 나열하며 오늘날 주체 내부에 축적된 정동의 무게를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드러낸다. 여기서 ‘걱정’은 단지 사소한 불안의 나열이 아니라, 세계의 모순을 감각하는 자의 정서적 앎의 형식이다. 이 시에서 주목할 것은 시적 주체가 스스로를 “무수한 걱정,/무수한 불안,/무수한 죽음,/무수한 증오의 소유자”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시적 주체는 단일한 정체성이나 확고한 윤리적 기준이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감정들의 복합체로 존재한다. 나날의 무력감 속에서도 살아남은 감각은 바로 이러한 ‘걱정’이다. 그것은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몬스테라 잎처럼 작고 사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내란과 전쟁과 기후위기를 잇는 감정의 사슬을 만들어 낸다. 진은영의 시는 그래서 말미에 이르러 이중의 역설을 던진다. “단호한 비일관성과 일관성을 동시에 지닌/삶, 삶, 삶이여/슬픔이여/부드러운 두부와 맹목의 탱크여//나의 소유자다”. 삶과 슬픔, 부드러움과 파괴가 공존하는 이 정서는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단순한 개인적 고백이 아님을 보여 준다. 걱정의 감각이 곧 윤리이고 정치이며 이 세계를 살아가는 감정적 실존이라는 점에서, 이 시는 오늘의 시가 가닿을 수 있는 가장 내밀한 광장의 모습을 보여 준다.이로써 2025년 봄의 시들이 어떻게 저마다의 방식으로 시적 공간을 재구성하고 있는지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직접적인 구호나 선언이 아니라 정동과 감정, 회복과 연대, 슬픔과 불안의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광장의 내부화’이며, 이러한 시적 언어야말로 이 계절의 시가 갖는 윤리적 실천의 장이 된다. 살펴본 시들은 외치기보다 감각하고, 선동하기보다 기억하며, 하나의 목소리가 되기보다는 염려하며 서로 다른 말들의 숨결로 존재한다. 말해지지 못한 것을 끝내 붙잡고 부서진 감정 위에 느슨한 연대를 상상했던 이 시들은, 정동의 언어로 광장을 다시 열어젖혔다. 시가 도달한 가장 조용하고도 가장 정치적인 자리, 그곳에서 또다시 ‘함께’와 ‘따로’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1) 『문화/과학』 봄호에는 새로 시작한 꼭지 ‘옥상의 시선’에 나희덕과 진은영의 시가 두 편씩 묶였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지상과는 다른 높이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예술가의 이야기”(「121호를 내며―12‧3 내란 이후 광장정치의 부상하는 주체와 그 함의」, 『문화/과학』 2025년 봄호, 7쪽)를 담은 것인데, 첫 필자로 두 시인이 섭외되었다. 2) “현장에 나가서 활동가분들 만나면서 연대라는 것 자체가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좋은 의미로 침범을 하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최나현‧양소영‧김세희, 「연대는 아름다운 침범」, 『백날 지워봐라, 우리가 사라지나』, 오월의봄, 2025, 37쪽)
유령이 하는 일 윤성희, 『느리게 가는 마음』(창비, 2025) 정한아, 『3월의 마치』(문학동네, 2025) 1. 그리운 당신, 반가운 유령 어느 날, 죽은 사람의 혼령, 즉 유령을 마주쳤다고 상상해보자. 거울에 비치는 상은 하나인데 내 옆에 무언가 형체가 느껴진다면, 그가 멀뚱히 나를 지켜보고 있다면,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공포를 느낄 것이다. 유령은 왜 무서울까? 영(spirit, 靈)이나 영혼soul 등 비물질적인 정신을 아우르는 유령ghost은 물리적인 법칙과 자연적 질서로 설명 불가능한 초자연적 실재라는 점에서 두려운 낯섦uncanny을 자아내기 때문이다.1) 이러한 유령 형상은 문학의 계보 안에서 고전주의와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유행했던 호러/고딕소설의 장르적 관습으로 발견되며, 거슬러 올라가면 셰익스피어 『햄릿』의 유령에 그 기원이 있다. 그런데 만약 내가 마주한 유령이 얼마 전 여읜 나의 연인이라면 어떨까? 으스스하기만 할까? 아마 반가움과 그리움, 슬픔 등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히는 가운데, 유령에게 친근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uncanny’로 번역된 프로이트 용어, ‘unheimlich’라는 독일어 단어의 다의성은 이러한 유령의 양가적인 면모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unheimlich’는 ‘친숙한’이라는 뜻을 가진 ‘heimlich’의 반의어로 쓰이지만, 사실 ‘heimlich’의 여러 의미 중에는 ‘불가사의한’ ‘숨어 있는’ ‘위험한’ 등 ‘unheimlich’의 뜻과 같은 쓰임이 포함되어 있다.2) 따라서 섬뜩했던 유령이 친근한 존재로 반전되는 상황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윤성희와 정한아의 소설에는 친숙하고 반가운 유령이 있다. 소설의 인물들에게 한때 사랑하는 친구, 연인, 자식, 부모였던 유령은 반가운 존재이며 심지어 애틋하다. 라캉에 의하면, 유령의 출몰은 애도의 불충분함 때문이다.3) 그렇다면 소설에서 유령의 반복되는 출현은 인물들이 대상 상실의 흔적을 자아의 일부로 여전히 끌어안고 있음을 의미한다. 애도가 충분히 완수될 때 유령은 더는 나타나지 않는다지만, 막상 소설은 유령이 사라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소설은 애도를 완성하려 들지 않고, 애도가 실패하는 과정에서 기억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서사 자체로도 애도를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4) 반가운 유령에 대한 소설적 상상력은 현실을 재현하기보다 현실을 재구성한다. 그리하여 이 글은, 그러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유령을 반갑게 맞이해보고자 한다. 2. 기억–유령의 무덤 혹은 아카이브 윤성희의 소설집 『느리게 가는 마음』에는 생일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인물들은 생일을 맞아 소원을 빌고, 미역국을 먹고, 축하를 받는다. 또 어떤 인물들은 생일을 기념해 가출하고, 죽은 엄마가 생전에 갔던 술집에 가보고, 생일이 아님에도 생일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런데 이들 곁에는 생일만큼이나 죽음도 많다. 엄마의 죽음(「마법사들」 「타임캡슐」 「웃는 돌」 「해피 버스데이」 「여름엔 참외」), 아내와 친구의 죽음(「보통의 속도」), 딸의 죽음(「자장가」), 식당 주인 할머니의 죽음(「해피 버스데이」) 그리고 아프거나 다쳐서 죽음에 가까워지는 인물들(「여름엔 참외」)이 있다. 이들은 때로 삶과 죽음 사이에서 유령이 되거나(「자장가」), 유령과 대화한다(「해피 버스데이」 「마법사들」). 이렇듯 생일과 죽음의 반복은 이 소설집에 수록된 모든 소설이 공유하는 세계의 핵심 원리다. 이 때문인지, 어떤 소설에서는 죽었던 인물이 다른 소설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는 듯한 감각이 만들어진다. 수록작들이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한 편의 이야기처럼 보이는 이유는 단지 생일과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동명의 인물, 동명의 가게, 비슷한 일화나 특정 직업을 가진 인물이 여러 편의 소설에 걸쳐 반복적으로 그러나 변주되어 서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타임캡슐」에서 서술자가 전학 가기 전 학교의 친구였던 ‘지구’는 「자장가」에서 유령이 된 서술자의 유령 친구 ‘지구본’과 겹친다. 사실 지구본은 ‘김지구’와 ‘이본’의 명찰을 둘 다 가지고 있어, ‘지구’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서로 명찰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는 점은 의미 있다. 그렇게 지구는 죽고 나서도 ‘지구본’이 된다. 또 「타임캡슐」에서 ‘나’의 고모는 ‘인생이 자꾸 꼬여서 꽈배기나 꼬아야겠다’라는 생각에 ‘꽈배기 가게’를 차리는 반면, 「자장가」에 등장하는 ‘꽈배기분식’의 이모는 ‘인생이 꼬여서 그렇게 꼬인 것은 팔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꽈배기는 팔지 않는다. 「느리게 가는 마음」에서 ‘나’가 체육 선생님의 아버지로 추측하는 만물 트럭상이 「웃는 돌」에서 ‘나’의 삼촌이 거쳤던 수많은 직업 중 하나로 묘사되고 있으며, ‘나’와 삼촌이 하는 티셔츠 주문 제작 사업의 고객으로 보이는 인물들은 「보통의 속도」에서 ‘난 다이어트를 할 거야’ ‘대부분의 너는 멋져’라는 문구를 등판에 새긴 티셔츠를 입고 ‘정원’과 마주친다. 정원의 친구인 ‘나’는 외벽 페인트칠 일을 하며 구름 사진을 찍어 모으는 게 취미인데, 「해피 버스데이」에서 토크쇼에 출연하여 다른 인물에 의해 발견된다. 이때 소설에 다양하게 흩뿌려진 일화들이 상보적인 하나의 세계를 이루도록 하는 것은 ‘이야기’다. 이야기란, 인물들이 인물들에게 구술·구연하는 일화부터 각종 디지털 매체를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전달되는 일화까지 포함한다. 이 일화episode는 소설의 선형적인 서사 구성을 따라 삽입된다기보다 인물들의 회상과 대화를 통해 불시에 틈입하는데, 이러한 형식적 특성은 삽화식 구성이라 부름 직하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그 옆에 나란히 놓인 다른 이야기, 또 그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중심 없이 펼쳐지는 것이다. 삽화 속에서는 소설의 주변 인물들까지 역으로 중심인물이 된다. 예컨대 「웃는 돌」의 주인공은 분명 ‘나’지만, 할머니의 팔순 잔치에서 오가는 과거 이야기 속에서는 할머니가 주인공이 되고, 삼촌이 과거 직업 변천사를 들려줄 때는 그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식이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여러 일화가 전승되고 중첩되는 사태는 결국,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이 모여 서로 다 아는 사람이 되듯, 인물들이 같은 시대와 장소에서 같은 경험을 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인물들을 같거나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면, 소설은 이들의 집단 기억을 꾸리는 데에 일조한다. 문화적 기억의 다양한 형식을 세분화한 알라이다 아스만의 책 『기억의 공간』5)에 따르면 집단 기억이란 공동체가 공유하는 기억, 심지어는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기억이다. 현실에서 이러한 집단 기억의 대부분은 주요 역사적 사건과 관련하여 표면화된 기능 기억이지만, 소설이 활성화하고자 하는 기억은 무의식 저편에 맥락 없이 남아 있는 저장 기억에 가깝다. 망각된 기억을 끄집어내 서사로 펼쳐놓는 것이다. 특히 「마법사들」은 잊히고 버려진 공간에서 기억을 다시 구연한다. ‘나’와 성규는 가출한 뒤 나름대로 머물 곳을 찾기 위해 ‘성규네세탁소’라는 간판이 걸린 망한 가게에 들어간다. ‘나’는 그곳에서 3년 전 달력을 발견하고 제사와 생일 표시를 찾은 뒤, 오늘 날짜에 별표를 하고 ‘성규 생일’이라고 적는다. 이내 이들은 망한 곳에서는 자고 싶지 않다는 성규의 말에 영화관으로 몸을 옮긴다. 마지막 상영이 끝나고 어두워진 영화관에서 ‘나’와 성규는 ‘나’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스크린 앞에서 영화배우가 되어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관은 영화–기능 기억이 소등되고 저장 기억이 점등되는 공간이다. 「타임캡슐」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무수히 다양한 이야기의 가능성을 꺼내놓는다. 시골집 마당에 있는 창고를 철거하고 옆집의 담을 재구축하는 공사를 하던 중, 관 속에 들어 있는 아기 인형이 땅속에서 발굴되는 사건은 하나의 소동이 된다. 인형이 시체로 오인되어 신고까지 당하자, 사건은 뉴스에 보도된다. 이웃들은 물론 ‘나’, 친구 ‘진형’, 고모와 아빠까지 이 인형에 얽힌 사연–가설을 제시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에 대해 사유한다. 이후 ‘나’는 ‘어설픈 코난’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친구 진형과 함께 사흘에 한 번씩 금속탐지기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이 묻어두었으나 잊히고 만 타임캡슐을 발굴하고, 그곳에서 발견한 이야기를 영상으로 재구성하여 유튜브에 올린다. 저장 기억–타임캡슐의 이야기는 유튜브를 통해 현재 사람들의 삶에 당도하여 그들을 이어주는 역할까지 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고고학자처럼 거리에 즐비한 망한 가게를 들여다보고, 다종다양한 것들을 한데 모은 만물 트럭과 1년 후에 발신되는, 그래서 대개 잊히고 마는 느린 우체통의 우편물 더미를 뒤진다. 그렇게 발견된 죽은 기억들은 생생한 이야기로 소설책에 아카이빙된다. 이는 아스만이 말한 기록물 보관소의 역할과도 같다. 그러나 이 소설집은 물리적으로 제한된 공적 아카이브가 아니라, 층위가 뒤죽박죽 섞인 신변잡기, 미시사 등 기억 선별의 장에서 탈락한 것들이 모인 무덤과 비슷하다. 단락 나누기 없이 이어지고 분별없이 섞인 문장 스타일은 이를 형식적으로도 뒷받침한다. 그리하여 기억의 무덤, 쓰레기의 거대 아카이브에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기억, 중요한 기억과 중요하지 않은 기억, 기념된 기억과 망각된 기억이 함께 산다. 그 안을 떠도는 사람들의 삶은 죽음에 대한 상상력과 결부될 수밖에 없다. 아스만의 주장처럼, 몸도 기억 매체의 일종이라면 삶과 죽음의 길항에서 기억은 곧 유령이다. 「자장가」에서 죽어 유령이 된 ‘나’는 엄마의 꿈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기억 속에 잠재된 과거와 그것으로부터 재구성한 미래를 함께 겪고자 한다. 유령은 기억 속에서나마 살아 있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기억을 그러모으며 유령의 자취를 찾는다. 살아 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을 기억하는 방식을 갱신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새로이 구성하고 앞으로의 삶을 꾸린다. 이것이 윤성희 소설이 애도의 과정에 관여하는 방식이다. 3. 기이에서 경이로, 트라우마를 배격하는 유령 윤성희의 소설집이 공동체가 공유하는 한 권의 기억 아카이브였다면, 정한아의 장편소설 『3월의 마치』는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기억의 편린들이 어떻게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재구축하는지 보여준다. 주인공 ‘이마치’는 알츠하이머가 꽤 진행된 상태의 70세 노인이다. 그는 뇌의학 전문가의 정신병원에서 가상현실(VR) 프로그램을 통해 기억과 인지능력을 회복하는 치료를 10년째 받고 있다. 이 가상현실 프로그램 속 세계는 이마치의 기억과 현재 인지능력에 따라 매번 재구성되며, 인공지능으로 설계된 인물들은 이마치가 현실에서 제 기억을 되찾도록 돕는 기능을 한다. 되찾은 기억은 오래가지 않고 다시 사라져서 주기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이마치는 지난 삶을 기억하기 위해 치료를 지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소설 후반부에 가서야 명확하게 드러난다. 소설이 이마치의 시점에서 그가 인지하고 감각하는 정보에 한정하여 서술되는 탓에, 상황은 독자에게 정확히 설명되지 않고 꿈(혹은 가상현실)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소설은 이마치가 예순인 시점—자신의 딸 준영이 출산을 하고, 알츠하이머 발병 전 단계 진단을 받고, 배우 활동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시기—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라파트멍’이라는 아파트의 60층으로 이사했으며, 3개월 전부터 뇌의학자 ‘제제’를 만나 상담 중이라고 서술한다. 그러나 그가 가지는 의문—전날까지 55킬로그램이었던 몸무게가 하루 만에 59킬로그램까지 늘어날 수 있는 것일까?—은 독자로 하여금 소설 초반부에 드러난 서술을 곧이곧대로 믿기를 망설이게 만든다. 또한 이마치는 정신과 치료를 하게 된 계기로, 자신의 집에서 유령과 마주치던 언캐니한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독한 냄새, 부패의 냄새가 방안을 뒤덮었다. 이마치는 극심한 공포로 얼어붙었다. 침대맡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길고 뾰족한 얼굴을 가진 그것, 축 늘어진 몸으로 젖은 옷을 질질 끌고 다니는 그것, 손발이 썩어 흘러내리는 그것. 그것이 웃고 있었다”(pp. 33~34). 이러한 초자연적 현상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마치 스스로도 자신의 인지능력이 떨어져 일어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장 ‘누전’부터는 이마치가 라파트멍 옥상에 올라가 마흔세 살의 자신과 만나는 것을 시작으로 더욱 신비로운 일이 벌어진다. 라파트멍에서 예순 살의 이마치는 60층에, 마흔세 살의 이마치는 43층에, 스물다섯 살의 이마치는 25층에 살고 있다. 이마치는 기억의 집과 같은 이 건물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다. 초자연적인 일은 이뿐만이 아니다. 가령 장미가 없다고 말하면 곧장 장미 덩굴이 눈앞에 생기는 등 이마치의 말이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양 실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라파트멍의 가이드인 청년 ‘노아’는 이를 숨기려는 듯이 수상하게 행동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 현상은 환상적이라기보다 기이한 것에 가깝다. 환상적으로 보이는 이 사건들은 사실 이마치의 뇌 지도를 바탕으로 구축한 가상현실 세계 안이기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츠베탕 토도로프에 따르면, 환상적인 것the fantastic과 기이한 것the uncanny은 다르다. 초자연적 현상이 자연적 세계의 법칙으로 설명 가능하다면, 그 현상은 환상적인 것이 아니라 기이한 것이다. 환상적인 것의 주요 요건은 초자연적 세계로도 자연적 세계로도 단숨에 확정 지을 수 없는 망설임에 있기 때문이다.6) 그렇다면 소설은 이마치가 겪는 신비한 일(자기 자신의 과거 모습과 마주하고 대화하는 일)이 단지 뇌의학자에 의해 프로그램화된 가상현실 세계일 뿐이라고 일축하며 환상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일까? 그러할 경우, 이전에 집에서 보고 들었던 유령의 흔적 또한 알츠하이머 증상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소설은 어느 장면에서부터 어느 장면까지가 현실이고 프로그램인지, 혹은 환상이거나 망상인지 확정 짓기를 거부한다. 가상현실 치료 프로그램에서 완전히 깨어난 후, 이마치는 라파트멍이 자신이 사는 아파트가 아니라 VR에 나온 건물의 이름이자 입원실 병동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막상 이마치가 사는 곳은 ‘축복의 테라스’라는 아파트의 19층이다. 이러한 반전은, 앞서 서술된 예순 살의 이마치가 겪은 현실마저도 현재 이마치의 구멍 뚫린 기억과 함께 재구성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현실과 허구의 구분은 모호해지고, 유령을 보는 등의 초자연적 현상은 이마치의 인지능력 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이마치가 40층의 이마치를 만나 유령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 대목은 중요하다. 물냄새가 나는 유령, 그것은 알츠하이머의 망상이 아니었던가? 40층 여자는 매일 그것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유령은 아주 오랫동안 그녀의 삶에 출몰한 셈이었다. 이마치는 유령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떠올려보았다. 집을 떠나라고 했던 말, 이곳이 그녀의 집이 아니라고 했던 말. 알츠하이머가 아니라면 그녀의 망상은 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었단 말인가? 그녀는 어떻게 그것과 함께 살아왔단 말인가? (p. 171) 가상현실이나 알츠하이머가 만든 환영이 아니라면 “물냄새가 나는 유령”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마치는 서른아홉 살에 일곱 살이 된 둘째 정민을 잃어버린 트라우마적 경험이 있다. 정민의 실종 이후 이마치는 좌절했지만 여전히 정민을 되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60층의 이마치가 어린 준영을 통해 알게 되는, 정민을 찾던 중의 기억 한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다. 정민의 실종 신고 이후 언젠가 경찰서에서 시신을 찾았다는 연락이 와, 이마치는 준영을 데리고 강릉의 한 병원으로 간 적이 있다. 하얀 천을 걷어내고 마주한 시체의 얼굴과 냄새는 생각 이상으로 끔찍했으며, 이마치는 이 끔찍한 것은 자기 아들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병원 밖으로 도망쳐버린다. 그러니까 물냄새와 부패의 악취를 풍기며 이마치를 따라다니는 그 유령은 아들 정민이었던 것이다. 이마치는 이 기억을 까맣게 잊고서, 정민의 장례식도 제대로 치러주지 못한 채 아들이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렇다면 정민의 유령은 아들의 죽음을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이마치가 만들어낸 심리적 환영일까? 하지만 소설은 결말부 0장 ‘나의 마치’에서 유령–정민 입장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를 반박한다. ‘나’(정민)가 유령이 되어 이마치를 따라다니는 이유는 그가 죄책감을 느끼길 바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마치가 트라우마적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를 바란다. ‘나’는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기억을 되찾을 때마다 이마치는 증오를 한 겹씩 덧입는다. 그것은 삶에 대한 증오다. 그 누가 인생을 반복해서 복기하고 싶겠는가. 그것은 형벌이다. 아주 오랜 죗값이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죗값인가?”(pp. 277~78). 정민은 때로는 “바다를 사랑한 서퍼”가 되어 ‘괜찮다’는 말로 이마치에게 간접적인 용서를 건네고, 때로는 가상현실 프로그램 속 AI 가이드 “노아의 그림자”(p. 278)가 되어 기억을 복구하는 치료를 그만두라고 조언한다. 심지어는 일부러 프로그램에 오류를 일으키는데, 제제는 이를 두고 프로그램 기술이나 뇌과학으로도 설명 불가능한, 유령의 소행 같다고 한다. 이처럼 유령의 존재는 과학이나 심리학 같은 법칙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의 실재다. 즉 유령은 정신작용이나 알레고리가 아니라, 유령 그 자체다. 소설은 마침내 초자연적 현상, 유령이 실제로 나타나는 세계를 인정한다. 이는 토도로프식으로 설명하면, 환상 장르의 두 인접 장르 중 기이 장르the genre of uncanny에서 경이 장르the genre of marvelous로의 이동이다. 이 실재하는 유령은 기억 주체가 트라우마적 사건을 중심으로 기억하는 방식을 흐트러뜨린다. 트라우마를 기억하려는 힘과 기억하지 않으려는 힘의 긴장은 기억의 위계를 바꿔놓는다. 이마치에게 있어 엄마의 폭력과 언니의 죽음, 아들의 실종과 딸에게 행한 폭력, 남편 그리고 매니저 ‘K’와의 어그러진 관계 등 죄스럽고 아픈 기억은 이제 K, 즉 기석과 애틋하게 사랑을 나눈 기억, 딸 준영과 손녀 ‘아인’을 돌보았던 기억과 한데 뒤섞여 중심 없는 삶의 곡절이 된다. 이렇듯 정한아의 소설은 정신분석학적 맥락에서 주체가 유령을 상상하는 이유를 답습하지 않고, 유령을 상상하는 픽션이 구상하는 애도의 방식을 찾기 위해 이야기를 잇는다. 1) 프로이트에 따르면, uncanny(언캐니, 두려운 낯섦)는 무의식에 억압된 것이 변형되어 현재로 회귀하는 정신 작용과 관련이 있다. 이성과 합리가 지배하는 근대가 초자연적이고 비합리적인 현상을 억눌렀다면 그것은 유령 같은 형상으로 귀환한다 (지크문트 프로이트, 「두려운 낯설음」,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 정장진 옮김, 열린책들, 1996, pp. 400~52). 2) 같은 책, pp. 401~11. 3) Lacan, Jacques, “Desire and the Interpretation of Desire in Hamlet”, Yale French Studies No. 55/56, trans. James Hulbert, 1977, pp. 11~52(이미선, 「애도와 유령: 유령으로서의 문학」, 『비평과이론』 제24권 제1호, 2019, pp. 31~52에서 재인용). 4) 이는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 우울증melancholia에 가깝다. 그러나 주디스 버틀러를 비롯하여 사라 아메드 등 많은 페미니스트 연구자는 멜랑콜리아를 병리적으로 보는 프로이트의 초기 관점을 거부한다. 프로이트 또한 애도에 있어 대상과 자아의 우울증적 합체는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논의를 정정한 바 있다(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윤조원 옮김, 필로소픽, 2018; 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 감정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시우 옮김, 오월의봄, 2023, pp. 344~45 참조). 5) 변학수·채연숙 옮김, 그린비, 2011. 6) 츠베탕 토도로프, 『환상문학 서설』, 최애영 옮김, 필로소픽, 2022.
광장에서 만난 괴물과 춤출 때 * 이 글은 성해나의 소설집 『혼모노』(창비, 2025)와 단편 「인비인(人非人)」(『TOYBOX』 5호, 2020),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The 짧은 소설3: 괴담』, 민음사, 2020)을 주로 논하며,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문학동네, 2022), 장편 『두고 온 여름』(창비, 2023)을 함께 다룬다. 이하 인용시 본문에 쪽수만 밝힌다. 1. 갈라진 세계의 접촉면 너머로 미국의 인류학자 실라 미요시 야거는 『애국의 계보학』에서 한국이 근대국가 수립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 민족주의적 서사를 동원했는지 밝힌 바 있다. 그는 이 연구에서 특히 정치 담화, 문학, 역사 기념관 등이 활용하는 수사법에 주목하는데, 이때 흥미로운 점은 서로 다른 정치적 의제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상반된 이데올로기적 목적을 위해 동일한 수사법을 활용한다는 사실이다. 지금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도 그러한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1) 대통령 탄핵 정국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한편에는 대통령 파면 소식에 기뻐하는 범시민 ‘촛불집회’ 대열 속 사람들이, 다른 한편에는 윤석열의 대통령직 복귀를 위해 여전히 ‘태극기 집회’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때 두 종류의 집회는 ‘나라 망하는 꼴 두고 볼 수 없다’는 애국의 수사를 (각기 다른 정도로) 공유하고 있기도 했다.2) ‘태극기 집회’로 대표되는 보수 집회 역시 그 규모와 역사, 그리고 형식과 수사의 측면에서 민중의 형상이 아니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단순히 대통령을 탄핵하고 새로 선출하는 것만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 건 게으른 생각이다. 민주주의는 본래 끊임없이 지속하는 갈등을 필수 조건으로 삼는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하나의 공동체로 묶여 같은 대지를 공유하며 살아가야 한다면, 어느 한쪽을 무작정 배제하거나 축출할 수는 없다. 무조건적 반목을 넘어 무언가 다른 관점을 통해 이 사태를 볼 필요가 있으며, 문학은 이러한 맥락에서 또다시 중대한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때 성해나의 소설은 이분법의 세계를 뒤섞고 흐트러뜨리는 어떤 인물, 몸짓, 덩어리, 정동, 장면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보수적인 할아버지와 글로벌 우파 엄마의 갈등 사이에서 주관을 잃은 임신부(「잉태기」), 신기가 사라져 번아웃이 온 삼십 년 차 박수무당의 처절한 굿판(「혼모노」), 소서리 마을의 갈등과 지역 살리기 프로젝트를 감정적으로 해결하는 스타트업의 부장(「우호적 감정」), 생체 실험의 피해자가 낳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있는 생명 덩어리(「인비인(人非人)」), 한국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재미 교포 3세 예술가가 광화문광장 한복판의 태극기 집회 대열에 우연히 합류하는 순간(「스무드」) 등 성해나의 문학적 상상력은 분명 서로를 타자화하는 양분화된 세계를 기반으로 하지만, 무엇이 이 세계를 둘로 가르고 있는지, 어째서 둘로 갈라졌는지, 그러한 대립 구도가 얼마나 허구적이고 의심스러운 것인지 다시 고민하게 한다. 그리고 이는 한국문학의 성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근대성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으로 이어진다. 근대화가 지식과 계몽, 이성과 합리, 과학과 자본의 세계로 향하는 과정이라면, 성해나의 소설은 그 과정에서 억압되고 누락된 광기와 부정성이 어떤 형상으로 회귀하는지 드러낸다. 이는 비체의 현전을 통해 근대의 암(暗)을 보여주는 식으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성해나의 소설은 애초에 근대를 진보의 시간으로 상정하지 않으며, 그보다 더 실재적으로 근대성 자체의 파기에 닿고자 하는 순전한 열망을 보여준다. 라투르식으로 말하자면, 글로벌을 향하는 진보의 축과 로컬을 향하는 보수의 축이 형성하는 근대적 세계관의 좌표는 동일한 수사법과 논의 구조를 공유하기 때문에 기존의 좌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제3의 항을 향해야 하는데,3) 성해나의 소설은 미약한 진동일지라도 그러한 지향성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이는 성해나의 두번째 소설집 『혼모노』에서 두드러진다. 첫번째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에 수록된 소설들과 장편소설 『두고 온 여름』 등이 세대 간, 가족 간, 계급 간의 소통 불가능성과 단절을 중심으로 읽혀왔다면, 근작으로 올수록 소설에서 툭 튀어나오는 몸짓, 덩어리, 정동 들은 갈라진 세계 사이의 거친 접촉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경계를 무화하는 강렬함으로 작동한다. 어떻게 보면 이는 봉건적 사고관으로의 복고나 회귀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 시점에서는 그 또한 새롭다. 성해나의 소설은 그렇게 문학이 가지 못할 곳, 문학이 없을 것만 같은 곳을 향한다. 이 글은 그 행로에 추진력을 보태고자 한다. 2. 무(巫): 주술 아닌 춤 ‘무속(巫俗)’은 죽은 혼(魂)과 귀(鬼)를 산 사람과 이어주고 하늘과 신의 뜻으로 땅의 대소사를 해소하는 제의(ritual), 그리고 그것의 토대가 되는 주술적 세계관을 아울러 이른다. 「혼모노」는 이런 무속의 세계, 그중에서도 직업 무속인의 세계를 그린다. 이때, ‘직업 무속인’에 방점을 찍은 이유는, 소설의 서술자-주인공인 삼십 년 차 박수 ‘문수’가 처한 상황 때문이다. 원래 그가 모시던 신령은 ‘애기동자’부터 ‘할멈’까지 여럿이었으며, 그중에서도 할멈의 신묘한 능력은 그가 무당으로서 한창 ‘잘나갈’ 때 큰 역할을 했다. 그가 신통하다고 입소문이 나 돈을 제법 벌 수 있었던 것도, ‘황보’라는 국회의원의 전속 무속인이 된 것도, 무형문화재가 될 뻔한 것도 다 할멈 덕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가 모시던 신령은 다 떠나버렸으며, 심지어 할멈마저 그의 바로 앞집에 신당을 차린 ‘신애기’에게 가버렸다. ‘신발’이 다 떨어지고 ‘번아웃’이 온 그는 먹고살기가 어려워져 신문에 ‘오늘의 운세’ 따위의 칼럼을 기고하는, “니세모노(にせもの, 가짜, 선무당을 의미함)”나 할 법한 일을 해야 할 위기에 처한다. 이러한 세속화된 무속의 세계는 그다지 낯설거나 충격적이지 않다. 사람들은 진로 상담 창구로 신당을 찾아가거나, 하는 일이 잘 풀리길 바라며 고사를 지내기도 하고, 직업 무속인들이 방송에 출연해 연애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정치 세력이 무속신앙과 결탁하여 나랏일을 도모하는 모습 또한 흔히 접해왔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인들이 신앙과 미신이 아닌 과학적 원칙들에 의존하며 탈주술화된 근대 이후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믿음에 비추어볼 때 어딘가 이치에 맞지 않다. 그러니까 소설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광경은 근대라고 불리는 세계가 사실은 자연-문화 사이 수많은 하이브리드의 끝없는 증식으로 이루어진다는 라투르적 설명에 부합한다.4) 현재 한국에서 무속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논리와 완전히 결합하여 작동하는 비과학적인 혼합체인 것이다. 그런데 무속은 사실 본래부터 혼성적이었다. ‘무속’이 민속으로서 발견된 것은 일제 치하의 조선 국학자들에 의해서였다. 일제는 오래전부터 한반도에 있던 ‘무’가 조선인의 ‘얼’을 담고 있는 전근대적인 미신이라고 여겨 탄압했으며, 국학자들은 그에 대한 저항으로서 무속의 민족성을 발굴하게 되었다. 문학에서도 무속을 일종의 미학으로 삼아 일본의 것과 구별되는 ‘우리 민족’의 근대 예술 기치를 세우고자 하는 시도가 적지 않았다.5) 그러니까 무속은, 그것이 발견되었을 때부터 전근대성과 근대성을 동시에 가진 혼합체였으며, 현재에 이르러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아닌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더 끈끈하게 결속되었다. 성해나의 초기 작품 중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은 이러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서술자 ‘나’는 친일 조선인의 후손으로, 일본의 천황이 하사한 벚나무 책상이 어떻게 자신에게까지 상속되었는지 그 역사를 들려준다. 처음 그 책상을 받아 사용한 사람은 ‘나’의 조부 김아홍(일본식 이름은 히로타 마사히로)이다. 그는 열두 살 때 참가한 “‘야스쿠니신사 영령께 바치는 글’ 대회”(28쪽)에서 우등상을 수상하며 상품으로 이 책상을 받는다. 그러나 이 책상은 악취를 풀풀 풍기며 어딘가 불길한 기운을 뿜고, 그는 악취의 원인을 찾다가 키우던 고양이가 “책상과 벽 틈 사이”(29쪽)에 숨겨놓은 쥐의 대가리들을 발견하고 까무러친다. 그날 그가 본 것은 쥐의 대가리들만이 아니다. 책상 아랫면에 음각으로 새겨진 글귀 “미카라데타사비(みからでたさび)”6)(30쪽)는 마치 이 가족의 친일 행적을 단죄하듯이 일종의 주술, 저주로 작용한다. 이 저주는 특히 김아홍의 아들 김황보를 괴롭힌다. 황보가 낙마 사고를 당해 대학 입학이 어려워지자 김아홍은 몹시 불안해한다. 결국 1980년 사교육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남몰래 가정교사를 붙이지만, 책상의 저주 때문인지 황보는 극심한 기면증에 시달리다 언젠가부터는 배운 적도 없는 일본말을 방언처럼 중얼대는 등 마치 신병을 앓는 듯한 증세를 보인다. 이때 김아홍의 아버지 김정식은 어느 무당에게 들은 말이라며 “암고양이 호네(ほね)”(32쪽), 즉 고양이의 뼈를 갈아 마시면 기면증이 낫는다고 일러준다. 평소 샤머니즘을 불신하던 김아홍은 고양이 뼛가루를 만들긴 하지만 황보에게 먹이지 않고, 1981년 여권법이 시행되자 아들을 미국에 유학 보내는 것으로 상황을 해결한다. 책상의 저주를 풀기 위해 무속이 아니라 미국 유학으로 대응함으로써 신자유주의적 도약을 보여준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김정식-김아홍-김황보, 그리고 ‘나’의 시대로 올수록 집안의 부가 축적되고 막강해졌음을 보면, 결국 책상에 들린 민족주의적 저주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나’는 『친일인명사전』 출간 십 주년을 맞아 친일 인물의 후손을 인터뷰하고 싶다는 민족문제연구소 직원의 메일을 받지만, 어떤 답장이나 대응도 하지 않고 메일을 스팸 처리한다. ‘나’는 이 문제에 무심하다. 벚나무 책상의 향은 ‘나’를 잠들게 하거나 두렵게 하지 않고, 오히려 조상의 은덕과 옛 정취를 느끼게 한다. ‘나’는 그 책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교수-학자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써야 할 글을 쓴다. 언젠가 이 책상을 다시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줄 날을 고대하며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또 그 아들에게 책상을 물려줄 그날까지도 “내게는,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 일도”(36쪽)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쩌면 ‘미카라데타사비’보다 더 강력한 현시대의 주술적 염원일 것이다. 이렇듯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이 시대가 변함에 따라 이데올로기와 주술의 혼합체가 수행하는 역할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보여주었다면, 「혼모노」는 의심 없이 받아들인 신자유주의와 무속의 결속을 끊어내는 인상적인 장면을 선보인다. 근대의 반대 항에 전근대를 위치시키는 게 아니라 그러한 이분법을 뛰어넘는 몸짓 그 자체를 현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혼모노」의 결말부에서 박수무당 문수가 굿에 완전히 몰두하며 춤을 추는 장면은 중요하다. 이 서사의 주인공을 가르는 건 그것이다. 과장되게 눈을 까뒤집고 억지로 몸을 떨며 신접 흉내를 내는 것은 지금 내겐 무용한 짓이다. 자연스럽게 몸이 떨리고 눈이 뒤집힌다. 오금이 무지근하게 당겨온다.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황보가 경악하며 내 쪽을 보고 있다. (……) 구름도 다 사라진 땡볕 아래, 판수도 악사들도 점점 지쳐가는 와중에 기세가 누그러지지 않는 이는 오직 나뿐이다. 피범벅에 몰골도 흉하겠으나 시야가 환하고 입가엔 미소까지 드리워진다. 신령 근처에라도 가닿은 것처럼 몸이 가뿐하고 신명이 난다. 장단이 빨라질수록 나는 고조된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삼십 년 박수 인생에 이런 순간이 있었던가. 누구를 위해 살을 풀고 명을 비는 것은 이제 중요치 않다. 명예도, 젊음도, 시기도, 반목도, 진짜와 가짜까지도.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듯. 이제야 진짜 가짜가 된 듯.(152~153쪽) 문수의 기세에 눌린 것은 오히려 신애기다. 문수의 무목적적이고 실재적인 행위에 비하면 국회의원 황보의 세속적 성공을 기원하는 신애기의 굿은 너무나도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다. 그렇게 이 장면은 미신과 합리성이 뒤섞인 상징계적 질서에 균열을 내고, 그 세계의 인위적 구분까지도 모두 하찮게 만들어버린다. ‘巫(무)’라는 한자가 사람 두 명이 만나 춤을 추는 모습의 상형이라는 점에서, 소설의 마지막 대목이 보여주는 것은 무속―무당과 관련된 풍속―이 아니라 ‘무’ 그 자체다. 문수의 춤과 몸짓은 이분법적인 언어의 세계로부터 잠시나마 빠져나오는 소설 언어의 움직임이 된다. 3. 근대 괴물이 수태한 것 성해나의 소설은 상징계적 질서의 외연을 순간적으로 무화하는 춤과 몸짓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역사의 서사화를 통해 근대로의 이행 과정에서 비체화된 잡다한 것들이 어떤 형상으로 회귀하는지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특히 과학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며 은폐한 야만성이 괴물의 형상으로 산출되면서, 인간, 혹은 인간성이라고 믿었던 것에 균열이 생기는 지점을 주목해볼 만하다. 「인비인(人非人)」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람이라고도 사람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카타마리(かたまり, 덩어리)”(153쪽)가,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의 합리와 효율을 극대화한 고문 기계-건축물이 그 예시다. 이것들은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괴물’처럼 자신을 만든 창조주-아버지를 끝없이 추격한다. 「인비인(人非人)」은 실제 하얼빈에서 자행되었던 일제 731부대의 생체 실험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소설은 이 생체 실험에 조선인이 가담했었다는 가설을 제시하며, 그 조선인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그린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단지 생화학자가 되겠다는 입신출세의 꿈을 가지고 교토대학에 유학을 온 청년이었을 뿐이다. 야망과 의욕이 과다했던 그는 요시무라 교수에게 충성을 다했고, 그렇게 그의 하얼빈 출장에 동행해 생화학 실습을 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백이십 일간 중국인, 조선인 등의 ‘마루타’를 대상으로 한 온갖 생화학 바이러스 생체 실험을 돕는다. 최소한의 “모럴(moral)”(155쪽)은 겸비한 요시무라 교수 덕에 그는 이 실험에 최대한 소극적으로 가담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조선인 여자 피실험자의 비웃음에 분노와 모멸감을 느낀 그는, 직접 여자의 몸에 페스트균을 주사하게 되고, “여자는 그 밤, 카타마리를 수태하고 즉사”(156쪽)한다. 그는 카타마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카타마리는 참으로 곤란한 생명체였습니다. 치댄 밀가루를 둥글게 뭉쳐놓은 형태에, 눈도 귀도 없었습니다. 얼굴이라고 부를 만한 곳에 코와 입만 겨우 붙어 있었죠. 팔과 다리도 없고, 생식기조차 달려 있지 않아 자웅을 구분할 수도 없었습니다. 굳이 종을 나눠야 한다면, 척추가 있는 환형동물 정도로 분류할 수 있을까요. 온몸이 잿빛 털로 덮인 2.6kg의 굴곡 없는 덩어리. 그것이 탄생하던 밤, 요시무라 교수도 나도 공포와 절망에 휩싸여 실험실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죄(つみ)를 낳았군. 카타마리의 탯줄을 끊으며 교수는 중얼댔습니다.(같은 쪽) 근대과학이 수태한 죄-덩어리는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에서 고문 기계-건축물로 형상화된다. 소설은 박정희 군부독재 정권 시대를 배경으로 하며, 실제 지하철 남영역 바로 앞, 즉 갈월동 98번지에 위치한 남영동 대공분실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소설의 중심 인물인 여재화는 한국 근대건축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김수근(실제 남영동 대공분실의 건축가다), 김중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로, 군부 정권의 고문실로 사용된 ‘경동수련원’의 건축 총책임자이다. 하지만 소설 속 가설에 의하면 고문실 건축에 크게 관여한 인물은 따로 있다. 그는 여재화의 제자 구보승으로, 열정도 능력도 부족한 학생이었으나, 바로 그 점, 실험 정신이라고는 없이 합리성만 철저하게 따지는 성격 때문에 여재화에게 발탁되어 고문실 증축 사업에 합류하게 된다. 구보승은 건축물의 기능을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해 특유의 합리성을 발휘하여 더욱 잔혹한 고문실을 설계한다. 그는 하루에 단 십 분만 햇빛이 드는 좁은 수직 창을 설계하여 피조사자들이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느끼게끔 했으며, 경사가 급한 나선형 계단을 설계하여 피조사자들이 눈을 가린 채 이동할 때 극심한 공포를 느끼도록 했다. 이외에도 사람들이 서로 마주칠 수 없도록 엇갈리게 만든 취조실 출입문, 유공 흡음재를 쓰고 붉게 칠한 벽면과 물고문을 위한 욕조까지, 소설이 묘사하는 경동수련원의 내부 설계 구조는 실제 남영동 대공분실의 구조와 거의 동일한데, 소설에서 이 건물은 어떠한 악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근대가 신봉한 합리성의 극대화가 배태한 야만이다. 두 소설에서 독자는 근대의 합리주의가 수반하는 위험과 야만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다. 마루타 생체 실험, 남영동 대공분실은 물론, 아우슈비츠 학살과 히로시마 원폭 사태 또한 인간과 과학이 만들어낸 파괴적 재앙의 대표적인 사례다. 그런 사건들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근대화와 진보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 몇몇 학자들은 이성과 합리성을 갖춘 국가라면 핵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물론 최근에는 근대성이 전 지구적 식민화와 착취, 전쟁과 무기, 대규모 자연 파괴를 수반한다는 사실을 비판적으로 재고하는 추세이며, 이 연장선에서 성해나의 소설은 그 독특한 형식을 통해 근대성에 대한 의문을 밀어붙인다. 「인비인(人非人)」은 액자식 구성으로, 마루타 생체 실험에 가담한 조선인의 증언이 담긴 편지를 영화감독인 일인칭 서술자 ‘나’가 읽는 것이 외화, 그 편지에 쓰인 내용이 내화이다. 이때 조선인의 편지는 노스럽 프라이가 구분한 산문 픽션의 양식 중 하나인 고백(confession)7)의 일종이다. 조선인은 자신이 페스트균을 주사하여 피실험자가 낳게 된 카타마리를 결국 생매장해버린 죄를 고백한다. 그러나 기독교적 고백의 원형이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만한 죄를 스스로 드러내어 자신을 공공연한 심판의 대상으로 만드는 데에 목적을 둔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인물의 고백은 불온전하다. 그의 고백은 생체 실험에 가담한 경위를 정당화하고 있으며, 소극적으로 관여했다는 변명까지 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죽인 것은 카타마리 하나뿐이라며 살인 종범이라는 낙인에 대한 억울함도 토로하고 있다. 그가 하필 ‘나’에게 편지를 써서 죄를 고하는 이유는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서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다. ‘나’는 편지를 흥미롭게 읽지만 이내 “영화가 될 만한 것은 이것 말고도 차고 넘치니까”(163쪽)라고 생각하며 사무실 서랍에 넣어버린다. 이는 『프랑켄슈타인』8)과 비교해봐도 흥미롭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창조한 징그러운 피조물-괴물과 계속 대치한다. 괴물은 끊임없이 자신을 만든 과학자-아버지를 쫓아가지만 결국 빅터는 죽어버리고, 빅터의 죽음 이후 괴물 또한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최종적으로 북극 탐험 대장 월튼의 편지를 통해 전달된다. 프랑코 모레티의 분석에 따르면, 『프랑켄슈타인』은 서간문의 삽입과 겹겹의 액자식 구성을 통해 괴물이 자아내는 공포로부터 인물들과 독자를 멀어지게 만들며 그들이 안전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도록 한다.9) 반면 「인비인(人非人)」의 조선인은 자신을 ‘오야지(おやじ, 두목, 아버지)’라 부르는 카타마리를 직접 죽였으나, 그 행위에서 오는 공포와 죄의식은 깔끔히 축출되지 않고 카타마리가 삼킨 듀퐁 만년필로 인해 현재로 회귀한다. 그 만년필은 한때 그가 오야지라 불렀던 요시무라 교수가 그의 이름을 각인하여 선물해준 것으로, 생체 실험 피해자의 유골이 대거 발굴된 하얼빈 근린공원에서 출토된다. 그러니까 성해나의 소설에서 이 죄의 덩어리, 괴물의 형상은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 중 떨쳐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땅속에 썩지도 않은 채로 있다가 발굴되는 것이며, 아무리 죽여도 반복해서 재생산되어 우리 삶에 집요하게 들러붙는다. 따라서 고백의 실패는 필연적이다. 고백을 통해 죄를 용서받고 인간으로서 숭고를 되찾는 일은 더이상 불가능하다. 인간은 괴물을 타자화하여 탄생한 것이 아니다. 인간과 괴물은 하나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 카타마리가 그러하며, 카타마리의 오야지도, 그의 오야지도 그러하다. 이러한 전승 구도는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에서도 비슷하게 드러난다. 카타마리가 삼킨 만년필에 자신의 창조주-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듯이, 경동수련원 건물 또한 정초석에 설계자 ‘구보승’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는 구보승의 스승 여재화의 짓이었는데, 고문 기계-건물을 창조했다는 죄를 면하기 위해 구보승의 이름만 기록에 남긴 것이다. 그러나 삼인칭 서술자가 들려주는 가설에 의하면, 구보승이 오직 합리성에 기반한 잔인한 설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승 여재화의 덕이다. 그는 구보승이 젊은 청년으로서 야망을 가지고 합리성을 발휘하도록 부추겼으며, 무엇보다 ‘인간’을 먼저 생각하는 건축을 그에게 가르쳤다. 즉, 건물을 만든 것은 구보승이지만, 구보승을 만든 것은 여재화이다. 구보승은 여재화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고문실이 정녕 인간을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하냐는 스승의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는 인간을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201쪽) 성해나 소설이 내놓은 인간의 의미는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4. 주워섬긴 언어, 그리고 정동 재생산의 모티프가 눈에 띄는 또 한 편의 소설은 「잉태기」다. 표면적으로 생명을 잉태한 사람은 임신부 ‘서진’이지만, 소설은 서진의 엄마인 서술자-주인공 ‘나’와 그의 시부가 서진을 양육하는 방식을 두고 갈등을 겪는 모습을 보여주며 특권 상류층 집안 내의 재생산이라는 ‘잉태기’를 조명한다. ‘나’가 시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의 사이는 지금처럼 나쁘지 않았다. 또, ‘나’는 “클래식 애호가인 점,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를 좋아한다는 점, 보수당을 지지한다는 점, 입이 짧고 미식을 즐긴다는 점”(270쪽), 그리고 서진을 과보호하며 집착적인 애정을 표한다는 점 등 둘 사이의 공통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강한 주관과 고집, 인정 욕구는 ‘나’의 자식인 서진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점점 팽팽하게 대립한다. 이때 ‘나’의 시선에서 그려지는 시부의 양육 방식은 봉건적 질서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248쪽)을 전제로 한다. ‘나’가 서진을 임신했을 때, 시부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 없는 “께름칙한 금기”(254쪽)를 늘어놓으며 ‘나’의 식생활 하나하나에 간섭했고, 서진을 미국에서 낳으려고 했을 때에는 “충주 지씨 대손을 양키 만들 셈이냐며 매섭게 반대”(245쪽)하는 바람에 원정출산을 포기해야 했다. 서진의 이름 또한 성명학자에게 받아오는데, ‘나’는 “성명학은 일본에서 온 폐단이에요. 요즘 시대에 누가 그런 걸 믿어요?”(256쪽)라며 단칼에 거절한다. 한편, ‘나’의 양육 방식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며, 서진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미래지향적인 것들이다. “서진을 품은 열 달간 나는 아이의 장래를 차곡차곡 설계했다”(255쪽)고 말할 정도로, 서진의 삶에 주도면밀하게 관여한다. 실제로 ‘나’는 서진이 무용과 입시를 준비할 때 서진의 몸(체중과 체형 등)을 엄격하게 규율했다. 심지어 서진이 결혼할 상대를 알아본 뒤 일방적으로 혼약을 성사시켰으며 이제는 시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진의 미국 원정출산을 계획중이다. 이렇듯 시부와 ‘나’의 양육 방식은 표면적으로는 과거를 지향하느냐, 미래를 지향하느냐로 나뉘는 듯하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육친적 증여를 통해 자신들의 계급을 재생산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는 크지 않다. 이때 계급이나 이데올로기 재생산에 언어만큼 막강한 것이 없다는 점을 소설은 잘 알고 있다. 서진이 어렸을 때 ‘나’와 시부가 제일 처음 가르쳤던 말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나’는 이제 막 육 개월이 넘은 서진에게 ‘길’ ‘승’ ‘차’ ‘집’이라는 단어를 가르친다. 구개음을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하필 ‘길’ ‘승’ ‘차’ ‘집’이라는 점에서 그 상징성, 즉 욕망과 부를 세습하는 것의 암시임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서진이 가장 먼저 발음하는 단어는 ‘엄마’도 ‘길’ ‘승’ ‘차’ ‘집’도 아닌 ‘지지’다. 지지는 “할아버지를 뜻하는 일본어” “‘지씨 할아버지’의 준말”(251쪽)로, 시부가 서진에게 몰래 가르친 단어였다. 서진은 이렇듯 극단적으로 반목하는,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닮아 있는 두 사람의 언어가 만든 뒤죽박죽의 세계로 진입한다. 그래서인지 서진의 언어는 서진의 내면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고, 서진이 사는 상징계는 그의 언어적 ‘독립’, 혹은 주체화 이후의 세계처럼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서진은 성인이 되어서까지 여전히 할아버지를 ‘지지’라고 부르거나 엄마 앞에서 벗은 몸을 스스럼없이 보여주거나 성적인 말도 가감 없이 하는 등 유아적 단계에 머물러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물론 이는 서술자인 ‘나’의 시점에서 타자화된 서진의 모습이다. ‘나’는 딸이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임신까지 겪었음에도, 정서적 독립을 하지 않은 ‘아이’로 보인다. 그러니까 주인공과 시부가 공유하는 언어의 세계에서는 서진의 속마음, 내면의 목소리 같은 게 포착될 리 없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보자. 결국 ‘나’는 서진을 미국행 비행기에 태우기 위해 공항에 간다. 그러나 공항에 서진을 배웅하기 위해 따라온 시부가 서진의 미국행을 말리자 둘은 또다시 충돌한다. 사람들의 시선도 무시하고 큰 소리로 싸우던 도중 서진은 양수가 터져 바닥에 쓰러진다. 복아, 서진아, 어서 가자, 정신 차려, 여기서 나가자, 참을 수 있어, 네가 미쳤구나, 미친 건 당신이지, 네가 부모냐, 그럼 당신은, 여기서, 여긴 안 돼, 돼, 안 돼, 돼, 안 돼, 돼, 안 돼…… 괴성이 오간다. 오가고 오가다 끝에는 누구 것인지도 모르게 섞여버린다. 나의 목소리인지 시부의 목소리인지도 모르게. 우리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괌행 비행기 출국 알림 방송이 들려온다. 시부와 나 사이에서 서진은 무슨 말인가 한다. 연갈색 눈을 굴리며, 아주 작게, 기운이 다 빠진 소리로, 힘겹게.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다. 그리고 당신도.(297~298쪽, 강조는 인용자) 이 대목에서 서진의 목소리는 소거되어 있다. 아무도 서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심지어는 “당신도”. 이때 ‘당신’은 ‘나’가 자신의 시부를 지칭하는 단어지만, 왠지 독자를 호명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는 「혼모노」의 마지막 대목(“어떤가. 이제 당신도 알겠는가”, 154쪽)과 연결해 읽으면 더욱 그렇다. 목소리의 사라짐은 성해나의 다른 소설에서도 반복되어온 모티프다. 특히 장편 『두고 온 여름』에서 기하와 재하가 오랜만에 재회하여 대화하는 장면은 그 대표적인 예시다.10) 이 장면이 언어가 소통을 방해하는 도구가 되는 순간을 보여준다면, 「혼모노」와 「잉태기」에서는 목소리의 사라짐뿐만 아니라 목소리의 중첩(‘나’와 시부, 문수와 신애기, 할멈의 목소리 등)을 통해 말로 환원할 수 없는 정동적 충돌 속으로 독자들을 연루시킨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언어로 지은 세계와 그 세계에서 증식하는 하이브리드, 그 틈에서 은폐되는 목소리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창작자의 작품과 그의 도덕적 결함을 분리해서 볼 것인가, 라는 오랜 논제를 벗어난 독해가 가능해진다. 서술자-주인공 ‘나’는 영화감독 김곤의 열성적인 ‘덕후’다. 심지어는 김곤이 촬영장에서 아역 배우의 팔을 꼬집었다는 논란이 생긴 이후에도, 사람들 몰래 ‘길티 클럽’(김곤의 비밀 팬클럽) 활동을 하며 김곤을 사랑하는 데에 여념이 없다. 논란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김곤은 인간 윤리에 대한 철학적 주제로 예술영화를 만들고, 현장에서는 드물게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감독이었으며, 친환경적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윤리적 예술가로 정평이 나 있었다. 이러한 김곤의 특징은 스스로 취향과 ‘모럴’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대중의 전형성을 띠는 ‘나’와 반대된다. ‘나’는 김곤을 좋아하고부터 그와 고급한 예술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자세히 보면 김곤을 향한 끌림은 그의 예술론과 관계없이 다분히 정동적이다. 길티 클럽의 오프라인 만남에서도 김곤의 영화 구도를 논하며 현학적인 말을 늘어놓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그저 김곤이 왜 좋은지, 얼마나 좋은지에 관해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나’가 사람들의 언어를 주워섬긴다는 것이다. GV에 간 주인공은 김곤에게 길티 클럽 멤버들이 했던 말을 마치 자신이 생각해낸 것처럼 질문한다(“는 각 장마다 다른 화면비가 사용되었잖아요? 저는 그걸 통해 감독님이 말하고자 하는 게 인간의 가변성인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55쪽). 이는 ‘나’가 처음 김곤의 을 보면서 떠올렸다고 서술하는 생각들이 온전히 ‘나’의 언어와 생각이라고 볼 수 없는 근거가 된다. ‘나’는 “정의할 수 없는 울림과 충격”(21쪽)에 대해 강조하면서도, 영화의 서사와 캐릭터, 컷들과 대사에 대해 제법 분석적으로 서술한다. 이는 ‘나’가 영화를 서른두 번 관람했다는 언급과 커뮤니티와 인터뷰 기사를 통해 영화에 대한 정보를 섭렵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봤을 때, 과거 회상을 하며 사후적으로 덧붙여진 언어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 감상이나 지론이 아닌 주워들은 말들뿐이었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김곤, 그뿐이었다”(55쪽)라고 토로한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애정은 김곤이 GV에서 아역 배우의 이름을 언급하며 관객들에게 사과를 하는 순간, 허무해지고 만다. 그렇게 소설은 언어로 정돈된 정동과 그럼에도 고정되지 못하는 정동의 향방을 좇는다. 이쯤에서 ‘호랑이 만지기’에 주목해보자. 그로부터 몇 년 뒤, ‘나’는 남편과 함께 치앙마이로 여행을 가서 ‘타이거 킹덤’을 관람하게 된다. 비좁은 사육장과 호랑이에게서 풍기는 누린내는 불쾌하고, 이빨을 다 뽑은 호랑이를 만진다는 것이 ‘길티’하게 느껴지지만, 이 불쾌함은 호랑이의 등을 직접 만지는 순간 묘한 흥분과 쾌감으로 바뀌어 일렁인다. 언어적 세계의 공허한 ‘모럴’ 아래에는 이와 같은 ‘길티 플레저’가 있음을, 소설은 촉각적으로 일깨운다. 언어-상징의 세계가 만들어낸 법칙보다 우세한 것은 이제 정동 그 자체인 것이다. 5. 나선형 계단에서 구를 보며 정동은 어디로든 가며 어디에든 들러붙을 수 있다. 「스무드」는 이러한 정동적 마주침의 예측 불가능성을 잘 보여주는 문제작이다. 주인공 ‘듀이’는 재미 교포 3세이며 스스로를 철저히 미국인으로 정체화한다. 세계적인 현대미술 작가 ‘제프’의 방한에 매니저로서 동행한 그는 시종일관 한국 문화에 낯섦을 느낀다. 그러나 듀이는 우연한 계기로 광화문 한복판의 태극기 집회 대열에 합류하여 어쩌다보니 그 안의 사람들과의 연결되는 감각을 느낀다. 이는 양경언이 지적했듯, 극우 집회의 일원들의 삶을 조명하는 “나른한 온정주의”11)가 아니다. 몸짓, 덩어리, 정동, 그리고 그것들의 접촉이 가져오는 결과를 기존의 언어적 세계의 문법으로는 이해할 수 없음을, 성해나 소설이 꾸준히 짚어왔기 때문이다. 「스무드」에서 개연성을 무시하는 전개나 인물의 변덕 등은 분명 불편감을 주는 요철로 느껴진다. 그러나 만약 이 소설에서 이해할 수 없이 불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굴곡을 다 깎아낸다면, 그것은 제프의 작품처럼 인위적으로 매끄럽게 다듬은 ‘스무드’, 즉 커다란 구 모양의 덩어리가 될 뿐이다. 이 구 모형은 보는 이들, 즉 관객 혹은 독자에 의해 다시 의미를 덧입고 언어로써 설명될 테지만, 제프에 따르면 이 ‘스무드’라는 작품은 어떤 속뜻이나 의미, 언어적 부연이 필요 없는 그저 단순한 구의 형체다. 그러므로 매끄러운 의미 작용이란, 허구다. 이때 「스무드」라는 텍스트가 ‘스무드’의 상징을 어떤 식으로 서사화하는지 판단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혼모노’와 ‘벚나무 책상’, ‘카타마리’나 ‘구의 집’, 혹은 ‘지지’와 ‘호랑이 만지기’도 마찬가지다. 확실한 것은, 이것들은 독자로 하여금 의미 판단을 유보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특정한 방향으로 안내하지 않는 성해나의 소설을 읽는 행위는, 마치 나선형 계단 위에 눈을 가리고 선 죄수가 된 것처럼,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더욱 모르게 되는 경험이다. 그때 우리에게는 새로운 좌표계가 필요하며, 문학은 그 영점을 조정하고 지향 가능한 방향성을 재설정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성해나 소설에 나타나는 흥분, 그 혼란한 정동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1) 최근의 정치 국면에서 애국의 수사 못지않게 무속과 관련된 수사도 빈번하게 활용되고 있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첫 국민 담화에서 윤석열은 야당이 "광란의 칼춤"을 추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탄핵 촉구 집회 참여자에 의해 패러디되어 '광란의 칼춤 댄스 동호회'라는 이름의 깃발로 재탄생하는데, 이는 윤석열 정부의 무속신앙과의 결탁을 풍자하면서도 다시금 무속의 수사를 전유하는 방식이다. 이는 '살을 날린다' 같은 말이 정치 진영을 가리지 않고 남발되는 현상으로도 이어진다. 「'새벽형 불안성 새로 고침 단체'부터 '봄이여 오라'까지... 아카이브로 돌아본 탄핵 정국」, 『경향신문』, 2025. 4. 4. 2) 실제로 이태원 한남동에서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가 열렸을 때, 바로 옆에서 비슷하게 큰 규모로 탄핵 반대 집회가 열렸다. 이 두 집단 사이에서 대열이 섞이거나,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이에 당시 의경들은 이태원역 앞에서 사람들의 정치 견해에 따라 각각의 집회 대열로 합류하는 길을 알려주어야 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집단이 광장을 공유하고 대열이 섞이는 상황은 성해나 소설 「스무드」에서 주인공 듀이가 광화문의 태극기 집회에 우연히 합류하는 장면과 겹쳐진다. 3) 진보-보수의 기존 좌표계와 그로부터 벗어난 제3의 항으로의 지향에 관해서는 브뤼노 라투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신기후체제의 정치』, 박범순 옮김, 이음, 2021 참조. 4) 브뤼노 라투르,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홍철기 옮김, 갈무리, 2009. 5) 김은석, 「백석 시의 '무속성'과 식민지 무속론—백석 시의 '무속적 상상력' 재고」, 『국어문학』 48집, 2010, 115~137쪽; 소래섭, 「1920년대 국민문학론과 무속(巫俗)적 전통」, 『한국현대문학연구』 22집, 2007, 75~100쪽. 6) 일본 추리소설 『세 가지 악몽과 계단실의 여왕』(마스다 타다노리, 한겨레출판, 2019)의 역자 김은모의 후기에 따르면, '미카라데타사비(身から出た錆)'는 칼 자체에 녹이 생겨 도신(刀身)을 삭게 하는 현상에서 유래한 일본 속담으로, 자신이 저지른 악행의 결과 때문에 스스로 괴로워한다는 뜻, 즉 '자업자득'을 의미한다. 7) 노스럽 프라이, 「네번째 에세이: 수사 비평—장르의 이론」, 『비평의 해부』, 임철규 옮김, 한길사, 2000, 429~447쪽. 8)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1886년 초판본』, 구자언 옮김, 더스토리, 2018. 9) 프랑코 모레티, 『공포의 변증법』,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4, 19~32쪽. 10) "기계를 분해하고 짐을 나르는 소리 때문에 재하와 나는 고성에 가까울 정도로 목소리를 높여 대화를 나눠야 했다./…… 알았으면 …… 텐데 ……해요./뭐라고?/……하다고요./여기 정리되면 어디로 갈 거니?/네?/여기 정리되면 어디로 갈 거냐고?/네? ……인지 못 ……겠어요./우리는 그렇게 몇 마디를 주고받다가 알아들은 척 고개를 끄덕이거나 말없이 웃으며 대화를 마무리했다."(111~112쪽) 11) 양경언, 「진짜?—성해나 소설의 '나아감'에 대하여」, 『혼모노』 해설, 345쪽.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